평등평화 사회체제개혁 자서전/대한역사 SF픽션 <선기옥형을 찾아라>

6부 13화 대한제국

북새 2009. 10. 13. 05:02

 

6부 13화 대한제국

 

       

              고종황제 행차                   대원군의 경복궁              고종황제 일가

                                                                          * Daum Blog 인용

 

◎ 대한제국, 개혁과 개화 그리고 세계열강의 각축장

 

• 대한제국 역사연대표

* 조선시대 26대 고종(황제) 한기 9060년(AD. 1863년) - 27대 순종황제(이왕)

한기 9107년(AD. 1910년), 2대 47년 간

* 일본제국 식민지통치시대

한기 9107년(AD. 1910년) - 한기 9142년(AD. 1945년), 35년 간

 

 

     역대

    황제명

    재위기간

                역사 개요

  조선26대

    고종

   (황제)

    AD. 1863년

          -1907년

      대원군과 명성황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헤이그 밀사

     27대

    순종

    황제

    (이왕)

    AD. 1907년

        -1910년

    AD. 1910년

       - 1945년

       안중근 의사 의거, 한일합방과 일제

       식민통치 35년, 상해임시정부,

        3 ․ 1 독립선언, 청산리전투,

        이봉창 의사 의거, 윤봉길 의사 의거,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

 

         

             북관대첩비            대원군 척화비           명성황후 시해 칼            시해범 후손

      (2006년 3월 야스쿠니신사 반환)                     쿠시다신사 소장             사죄 방문

                                                                                        * Daum Blog 인용

 

◎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 강화도령 철종이 30대로 요절하자 헌종의 모후 조씨는 대왕대비로써 비상대권을 잡아 한기 9060년(AD. 1863년) 흥선군의 둘째 아들 12살 명복을 조선 26대 왕으로 지명했다.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파란만장의 세월을 살았다. 안동김씨의 세도가 절정이었던 시대에 언제 무슨 일로 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파락호(술주정뱅이)로 세월을 낚았다. 겉과 속이 달랐다. 한 예로, 충청도를 여행하던 중 예산의 가야사에서 ‘탑을 세운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며 무덤을 쓰면 반드시 왕이 나올 자리라’ 는 말을 듣고는 재산을 팔아 1만냥을 만들어 절을 옮기게 하고 남몰래 아버지 남연군묘를 이장했다. 파락호처럼 살면서 중인이나 상한의 교유의 폭도 넓었다. 철종의 장인 김문근을 위시하여 안동김씨의 김병학은 대제학, 김병국은 훈련대장, 김병기는 좌찬성으로 국정의 요직을 차지하여 3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했다. 벼슬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은 다반사였고 벼슬을 산 지방관리들의 수탈과 횡포는 백성들의 삶을 피폐롭게 만들었으며 불만도 쌓여갔다. 그 시대 3대에 걸친 안동김씨세도는 딸을 아들로만 바꾸지 못할 뿐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했다.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전광석화 같이 개혁을 단행했다. 안동김씨를 밀어내고, 당파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상민에게만 부과되었던 호포를 양반에게 부과했고, 붕당의 근원이었던 서원을 철폐했다.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 전국 주요 고을에 세웠다.

 

 서양 오랑케가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해인데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흥선대원군, 이름은 이하응李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구球며, 아들이 조선 제 26대 왕 고종이다.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백성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양반과 유생의 반발을 샀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 재건과 국고를 채우기 위해 발행한 당백전은 유통경제의 혼란을 가져왔다. 국제문제에 어두웠던 그는 천주교를 탄압하여 외세가 간섭할 명분을 제공했고, 외국의 통상 요구를 묵살했다. 더구나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자 프랑스를 끌어들여 견제하려던 시도가 무산되었다. 천주교 탄압으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수천 명의 신도가 처형되었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하여 문화재(도이치 구텐베르크의 성서 보다 100여 년 앞선 금속활자본 직지심경 등 수천 점)를 약탈한 국제적인 사건이다. 5년 뒤에는 미군함 5척이 강화도에 정박했다. 신미양요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들을 물리쳤다. 이어 도이치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양이洋夷(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으면 곧 화의하는 것인데 화의를 주장함은 매국이다’ 라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외교를 철저히 배격하는 쇄국정책을 폈다. 천주교도의 탄압과 외국함대의 공격으로 민심이 동요하는 가운데 최익현이 탄핵상소를 올렸다. 대원군은 이를 통해 정세를 반전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고종이 이를 옹호하자 하야했다. 고종의 뒤에는 명성황후가 있었다.

 

                             명성황후                    쿠시다신사 소장                    사죄 방문

                                                            명성황후 시해 칼                   시해범 후손

   

* 명성황후는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 외척의 세도정치의 폐해에서 벗어나려는 대원군이 간택한 왕비였다. 손이 귀한 왕실에 왕자가 늦었다.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출생하여 궁중과 대원군의 사랑을 받는 가운데 황후의 왕자가 태어났으나 며칠 만에 죽었는데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준 산삼에 원인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후사를 보지 못한 황후는 권력에 집착했다. 황후와 대원군은 국제정세에 대한 시각차가 있었고 고종은 그 틈을 이용했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황후는 양養오빠 민승호, 조대비 일족의 조영하, 안동김씨 문중,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과 대원군의 형 이최응을 포섭했다. 이 세력을 바탕으로 고종 10년 한기 9070년(AD. 1873년) 최익현이 대원군의 정책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렸다. 새로운 내각의 출범과 통상개화론자들의 등장으로 개화정책이 급류를 탔고 제도개혁도 잇달아 시행되었으나 갈등과 불협화음도 생겼다. 명성황후의 국고 남용이 국고 탕진을 가져왔다. 임오군란이 터졌다. 흥선대원군은 하야 8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먼저 황후의 국상을 발표했으나 황후는 충주로 도주하여 고종과 연락하고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대원군의 납치를 종용했다. 대원군은 4년 간 청 나라에 억류되었다. 청나라의 국정 간섭이 도를 넘자 급진개혁파들이 일본의 지원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의 3일천하’ 였다. 한기 9091년(AD.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대원군에게 재집권의 기회였다. 대원군은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켜 갑오경장을 단행하였지만 집권력이 떨어졌다. 일단 정계에서 물러난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손을 잡고 배일친러정책을 추진했다. 위협을 느낀 일본은 고종 32년 한기 9092년(AD. 1895년) 미우라 공사의 지휘로 낭인들을 모아 명성황후(44세)를 시해하였다. 을미사변이다. 대원군의 보복이었다. 이 만행에 열강이 항의하자 일본은 공사와 낭인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였고 대원군도 책임을 지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일제가 멸종시킨            일본 침몰                한국역사 말살            하르빈역 이토오

                  토종 삽살개            영화 포스터                                        * Daum Blog 인용

 

◎ 임오군란

한기 9079년(AD. 1882년) 6월 5일 선혜청 도봉소에서 13개월이 밀린 병사들의 월급을 지급하며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배급하자 우위영 소속 구 훈련도감 군병들이 관리를 구타하면서 일어났다. 이는 곧 민씨정권 세도에 대한 투쟁으로 진화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통문에 의해 동별영에 모인 병사들은 무기고를 열어 무장하고 포도청을 습격하여 관리 구타로 잡혀간 동료들을 구해내고 의금부를 탈취하여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경기감영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할 때쯤에는 하급군변과 빈민들이 가세하여 대집단이 되었다. 10일에는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와 김보현을 살해한 다음 민씨세도권력의 정점에 있는 명성황후를 찾기 위해 궁중을 샅샅이 수색했다. 반란을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이 병사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반란이 수습되자 일본과 청국은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하나부사 요시타다는 주모자 처벌, 피해 보상, 개항과 통상, 그리고 병력 주둔 등 8개항을 요구했다. 대원군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를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마산항에 주둔한 청국군에게 견제를 요청했다. 서울에 진입한 청국군은 오히려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는 한편 군대로 궁궐을 장악했다. 청국군의 이러한 태도에 격분한 군병과 시민들은 다시 일어나 청국군에 대항했다.

 

◎ 갑신정변

한기 9081년(AD. 1884년)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 종속관계를 청산하고자 개화파가 일으킨 국민주권을 지향한 정치개혁운동이다. 한국사에서 정치세력으로써 근대적 개혁문제를 제기한 것은 개화파가 처음이었다. 실학으로 북학사상을 계승한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를 중심으로 진보세력이 적극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을 핵심으로 정치세력화 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한기 9079년, AD. 1882년)을 계기로 민씨정권의 친청수구정책은 심화되었고 청국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들어냈다. 개화파는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 종속관계를 청산을 결의했다. 마침 베트남 문제로 청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청국이 패하자 청국이 느슨해진 틈을 이용하여 일본공사의 후원을 업고 한기 9081년(AD. 1884년) 12월 우정국낙성식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혁안 14조는 청국과 종속관계 청산, 문벌 폐지, 인민평등권 제정, 인재 등용, 지조법 개혁, 탐관오리 처벌, 환자미 면제, 세금의 호조 관할, 경찰제도 실시, 혜상공국의 혁파였다. 이러한 국왕의 정치혁신조서가 내려졌으나 이에 반발한 청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개화파들은 인천항에서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치변혁을 담당할 주체가 성숙되지 못하고 치밀하지 못한 계획으로 정권을 혁파하려는 의욕이 앞선 도전과 외세의 힘을 통해 자주정권을 창출하려는 배반적인 성향이 원인이었다.

 

* 갑신정변, 개화파의 3일천하 재조명

한기 9081년(AD. 1884년) 갑신정변은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급진개혁파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변혁’ 이 아니라 상한常漢(일반 백성, 상놈)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아래로부터 민중계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주체세력인 김옥균을 지도한 사람도 유대치와 오경석으로 중인계급이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서구이론을 적용하기 위한 부르쥬아혁명으로 오도했다. (박은숙, 서울시편찬위원회, 갑신정변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편, 2003년, 갑신정변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췌)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당의 핵심인사와 적극 참여자 77명을 추적한바, 의금부에서 심문을 당한 주도자 23명의 기록이 있는 ‘추안급국안’ 을 검토 분석했다. 그 가운데는 양반兩班 10명, 중인中人 5명, 상한常漢(평민, 백성, 상놈) 39명, 미확인 23명이었는데 미확인은 상한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름을 들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한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분류는 상한, 군인, 겸종(양반가 심부름 평민), 상인, 내시, 궁녀가 망라되어 있다. 이들은 중간지휘자, 정보원, 행동대원, 심부름꾼으로 활동했는데 불고지죄의 엄격한 법치에서 고발하면 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고발한 사람이 없었으며, 친청파 민영익의 겸종까지 참가하였다. 심문에서 밝혀진 특별한 내용은, 능력에 의한 인재 발탁과 개화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가담 이유로 진술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완하는, 갑신정변의 14개조 정령에는 상한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 또 정변 뒤 상한이 정 3품 벼슬을 제수받은 일도 있다. 개화당은 거사 직후 전후좌우영 병사 2000명 지휘권을 장악했으나 청군의 영향 아래 있었던 좌우영의 지휘자를 교체하지 않아 좌우영병사들의 지휘가 일사분란하지 못해 청군 1500명의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근대적 부르쥬아 혁명, 유교적 질서 문벌세력 정권쟁탈전이라는 해석은 재조명해야 한다.

 

                      명성황후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전시            일제 조작

                               * Daum Blog 인용                         2차대전 유물             점재현비

 

◎ 갑오개혁

한기 9091년(AD. 1894년) 7월 개화파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으로써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씨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텐진조약을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출병했다. 반란이 진압되자 조선정부는 양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는데 청국은 수용했으나 일본은 반대했다. 일본군은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을 복귀시켰다. 김홍집을 수반으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진행된 개혁정책은 210여 건에 이른다. 정부와 왕실의 분리, 국왕의 권한 축소, 과거제 폐지, 청국연호 폐지, 청국과 사대관계 일소, 신분제 철폐, 조혼 금지 등 봉건적 관습이 일신되었다. 화폐제도는 은본위제도로 일본화폐의 유통을 허용하였다. 2차개혁에서는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 홍범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으로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 공포하였다. 3차개혁은 태양력 채택, 소학교령 반포 등 140여 건이다. 그러나 단발령은 유생들의 봉기를 유발했고 아관파천 뒤 김홍집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갑오개혁은 끝났다. 갑오개혁은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한 내재적 개혁이며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질서에 조선이 편입되는 빌미를 제공한 양면성의 정변이었다.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근대화이념 성취를 달성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식민지화 길을 열었다.

 

◎ 헤이그밀사 사건

한기 9104년(AD. 1907년) 고종이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의정부 참판 이상설, 평리원검사 이준,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파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참석하여 세계만방에 조선의 일제 강압침탈을 호소하였으나 국제정세는 냉담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가 일본의 장교단을 이끌고 궁중에 들어와 고종을 협박하였으며 이토오는 고종의 폐위를 일본총리에게 건의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양위를 주청하고 궁궐에 연금했다.

 

                                                안중근의사             안중근의사 순국비

 

# 한기 9106년(AD. 1909년) 10월,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중국의 하얼빈 역사, 정면에 ‘이토오 히로부미 통감각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일본헌병과 경찰들이 2중 3중으로 둘러서서 물 샐 틈 없는 경비를 하고 있었다. 기자완장을 차고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인이 경비 뒷줄에서 기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살피고 있었다. 육혈포를 품속에 감춘 안중근의사였다. 몇 분 뒤 통감이 탄 특별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있었다. 안중근의사는 긴장한 얼굴로 경찰들의 저지선을 기웃거렸다. 이윽고 특별열차가 역 구내로 진입했다. 헌병들이 열차 앞에 도열하고 외투를 걸친 이토오 히로부미가 모자를 눌러 쓰며 열차의 승강구를 걸어 내려와 도열한 관리들을 열병하고 있었다. 이 때 경비 헌병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있던 안중근의사가 헌병이 제지할 새도 없이 저지선을 뚫고 달려 나왔다. 어느 새 안중근의사는 손에 육혈포(권총)를 겨누고 있었다.

“탕! 탕! 탕! 탕!”

연속적으로 네 발의 총성이 하얼빈 역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의 총성이 탕! 하고 또 울렸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안중근 의사는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3창했다. 그 때야 정신을 차린 일본헌병들과 경찰들이 안중근 의사에게 들이닥쳤다. 의사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권총을 버리고 태극기를 손에 든 체 헌병들에게 순순히 잡혔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권총 다섯 발을 가슴과 배에 맞고 즉사했다. 일본인들은 안중근 의사를 암살자로 처형하려고 했으나 의사는 끝끝내 한국의 역적을 죽인 애국자로 당당하게 재판에 섰다. 중국인들은 <10억 중국인들이 못한 일을 한 사람의 한국인 안중근 의사가 했다>고 놀라워했으며 한국인과 독립군에 대한 성원이 한결 활발해졌다. 그 해 3월 일본인들만의 재판으로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 대한제국,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35년과 독립운동

 

                      백두산 천지                         대한민국행정도                중국 백두산 성화채화

                                                                                                  * Daum Blog 인용

 

* 을사조약과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

 

 한일의정서 체결, 1904년, 이토 히로부미, 일본공사관/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년, 조선지도감독권/ 을사조약 체결 뒤 경운궁 중명전을 나서는 대신들/을사조약 반대 경운궁 앞 민중

 

                                          민영환 혈죽血竹,  한일합방 을사조약 뒤 자결, 민족에게 드리는 글 유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는 대한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 시대 중 하나로, 대한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 놓였던 시기다. 다른 명칭으로는 일제시대日帝時代, 일제암흑기日帝暗黑期, 일본통치시대日本統治時代, 일정 시대日政時代, 일본식민지시대日本植民地時代, 왜정시대倭政時代, 대 일본전쟁기對日本戰爭期,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국권피탈기國權被奪期 등으로도 부른다. 현재 일본에서는 대한병합大韓併合, 일한합방日韓合邦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일본의 대한 지배정책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헌병경찰통치기(무단통치기, 1910년 ~ 1919년), 민족분열기(문화통치기, 1919년 ~ 1931년), 민족말살통치기(1931년 ~ 1945년)로 각각 지칭한다.

일본의 우파적 사학자들과, 식민지 근대화혜택론을 주장하는 일부 대한 사학자들은 일제 강점기 전반기에는 일본이 대한의 근대화를 도왔다고 주장하는 반면, 대한의 사학계에서는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萌芽論에 의거, 이러한 근대화정책이 개항 이전과 이후 자생적으로 성장했던 대한 안의 민족자본을 말살한 바탕 위에서 일본의 경제개발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일본의 영속적인 대한 지배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일본이 대한에서 철도 건설 등을 한 이유는 식민지를 근대화하려는 게 아닌, 식민지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19세기 후반, 전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의 일환으로 탈脫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 측에서 일본과 외교관계 수립을 거부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공식적으로 정한론을 제기한 이래 메이지 천황시대의 과두정부는 일본 국내에 대륙 침략을 위한 소위 정한론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 일전쟁과 1905년의 러․ 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엄연한 독립국인 대한제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 일동맹과 가쓰라 - 태프트 밀약 등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하였으며, 1905년의 무력을 동반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한 데 이어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으로 대한제국의 배타적 권리를 차례차례 강제로 박탈하였다(이 시기의 자세한 역사는 대한제국이나 개화기 등을 참조).

• 1909년 7월에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 병합이 일본내각에서 결정되었고, 1909년 10월 26일에 이에 분노한 대한인 민족주의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고, 이를 기회로 일본 내에서 대륙 침략을 위장한 소위 정한론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대한제국 강제 병합의 추진이 가속화되었다.

•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대한에서는 경술국치라고도 한다)이 맺어지면서 5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소위 천황 직속의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5년까지 35년간의 고통 어린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일제통치의 시대별 전개

일제식민지시대는 19세기 후반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쟁탈전으로 탈 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이 외교관계를 거부한다는 명분을 들어 공식적으로 정한론을 제기하여 한기 9073년(AD.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무력 식민지정책, 한기 9091년(AD. 1894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데 이어 한일신협약과 기유약조로 대한제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한기 9106년(AD. 1909년) 대한제국 강제합병이 일본각의에서 결정되었고, 한기 9106년(AD.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빌미로 정한론이 가속화되었다. 한기 9107년(AD. 1910년) 한일합방조약(경술의 국치)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일본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35년 간 식민지배를 받았다.

 

․ 헌병경찰통치기(무단통치기, 1910년 ~ 1919년)

‘헌병경찰 통치기’라는 명칭은 1910년 9월에 창설된 헌병경찰제도에서 나왔다. 즉 헌병이 일반 경찰행정까지 담당하면서,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즉결처분권 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조선총독은 일본군 현역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고,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과 군대통솔권까지 장악하였다. 일본은 2만여 명의 헌병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대한 전국에 배치하여 무단식민통치를 자행하였다. 이 당시 통치의 강압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태형령으로, 갑오개혁 때 폐지된 태형을 조선인에게만 적용하여 처벌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조선인의 각종 단체가 해산당하였다. 1911년 신민회를 해산시킨 105인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1912년부터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면서 기한부신고제로 시행, 이를 잘 알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를 침탈하였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마을이나 문중의 토지, 왕실의 토지 등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겼다. 침탈된 토지는 일본 이민들에게 싼 값에 팔렸고 이 때에 고래의 소작권개념이 무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대한에서 이뤄진 최초의 실질적 근대 토지소유개념을 도입한 정책이나, 광무개혁시기에 이뤄진 양전사업이나 지계의 발급이 일본 측의 방해로 실패했다는 것을 되돌아보건대 그 실질적 의도는 토지의 침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의 허가에 의해서만 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는 회사령이나, 산림령과 임야조사령, 어업령, 광업령 등으로 대한의 경제적 지배권은 대부분 일본에 넘어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익이 대한에 진출한 일본 재벌이나 조선인 지주층의 회사에 투자되면서 대한의 경제적 개발을 촉진시켰다고 볼 수는 있으나, 민족자본의 성장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와중에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함에 따라 1919년 3월 1일 3· 1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으로 평화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적극적으로 탄압하여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하나로 일치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의 통치정책 방향 또한 급선회하게 되었다.

 

․ 민족분열통치기(문화통치기, 1920년 ~ 1931년)

3· 1운동에 의해 일본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통치에서 회유적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일부 단체활동과 언론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교육과 기술교육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조선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간악하고 교활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대한에서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경찰제' 를 도입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문화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조선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학문과 기술교육만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 안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개량주의로 분화하여, 민족성개조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자치운동(참정권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한편으로 이 당시에는 일본의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산미증식계획이 수립되어 대한의 미곡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 높아져 대한의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다.

 

․ 민족말살통치기(1932년 ~ 1945년)

1930년대에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대한을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의 병참기지로 삼고, 이에 따라 일본의 경제적 지배정책도 병참기지화정책으로 선회한다. 이어 1940년대에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을 취하고, 인적· 물적자원 수탈에 광분하였다.

조선인들을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민족말살통치가 진행되어,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에 의거한 황국신민화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황국신민의 서사의 암기와 신사 참배 그리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학교의 한글교육은 중단되었고,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며,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는 폐교되거나 강제 개명당했다. 특히 일본은 강제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장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한편,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하여 군수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쟁이 차츰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대한인의 해외 단파방송 청취를 엄중히 단속하였지만 경성방송국의 직원이 독립운동 차원에서 미국의 소리 한국어방송을 들은 것이 일본 경찰에 의해 들켜 수많은 방송인들이 옥고를 치른 단파방송 밀청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과 함께 대한이 해방되면서 일제시대는 종결되어 대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 대한독립운동의 전개

이 시기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었다.

 

. 구국운동기

• 계몽운동, 의병전쟁으로 전개

• 1910년대 - 민족 전열 정비

• 국내, 국외로 나뉘어 독립운동 기지 건설

• 3․ 1운동 참여 - 거족적 국립운동

• 1920년대 - 민족 총력 항쟁

•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중국과 연합하여 항일연합군으로 대항

• 우파와 좌파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 대두

• 1930년대 - 해외 독립군, 전열 재정비

• 1938년 이후 - 독립전쟁기

• 전반적인 독립전쟁 체계를 갖추었다.

 

*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 학살사건

• 제암리 학살사건(1919)

• 간도참변(1920)

• 관동대학살(1923)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이 있으나 구체적 자료를 소멸하고 은폐시켰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광복군의 선서             정신대 참상              청산리전쟁 승전         패전 일본군

                                           * Daum Blog 인용                                      퇴각

 

 

․ 3 ․ 1독립선언

한기 9116년(AD. 1919년)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다. 일본제국주의의 강탈에 신음하던 한국인은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3 ․ 1독립선언서는 한기 9116년(AD. 1919년) 3월 폭압적인 일본의 무단정치에 항거하여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계 2명의 지도자들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뒤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전국적으로 독립선언문을 돌리고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 ․ 1독립선언이 있기 전 한기 9116년(AD. 1919년) 2월 8일 일본제국의 한복판 도쿄에서 한국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다. ‘조선청년독립선언’ 이라고 한다.

3 ․ 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한기 9115년(AD. 1918년) 11월에 만주 노령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 한기 9116년(AD.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발표한 ‘2 ․ 8독립선언서’, 셋째 한기 9116년(AD. 1919년) 서울의 ‘3 ․ 1독립선언서’ 다. 2 ․ 8독립선언서는 일본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었고 일본제국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어났으며 3 ․ 1운동의 발단에 지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데 의의가 크다. 동경 유학생들은 한말부터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학회지 ‘대한흥학보’ 를 발간하여 애국개화운동에 기여하였다. 한기 9109년(AD. 1912년) 조선유학생학우회에는 유학생 전원이 자동가입되었으며 ‘학지광學之光’ 을 발간하여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 기미독립선언문(원문)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의 政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 天(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며, 全人類(전 인류) 共存 同生權(공존 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 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유사이래) 累千年(누천 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전)의 障애(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奇緣(기연)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파탈하려하면 장래의 협위를 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소잔)을 興奮伸張(흥분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급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하고, 人類通性(인류통성)과 時代良心(시대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 수호 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서, 我(아) 祖宗世業(조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락(탁락)한 民族心理(민족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辯(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기미(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한 政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한 兩國倂合(양국병합)의 結果(결과)가,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과 統計數字上(통계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원)히 和同(화동)할 수 없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심조)하는 今來實積(금래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하는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동양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여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하는 不安(불안),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평화), 人類幸福(인류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 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일시)의 勢(세)라 하면 和風暖陽(화풍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일시)의 勢(세)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오인) 아모 주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 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滋(자)에 奪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만휘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복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 着手(착수)가 곳 成功(성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公約三章(공약 3장)-.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여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 기미독립선언문(번역문) 우리 조선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똑똑히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 만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 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를 두루 펴 밝히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 박은 세계 개조의 큰 움직임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움이니, 이는 하늘의 분명한 명령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니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 년이 지났는지라, 우리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이며, 겨레의 존엄과 영예가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력으로써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떨쳐 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위협을 없이 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체모가 도리어 짓눌려 시든 것을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올바르게 가꾸어 나가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이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길이 누리도록 이끌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고,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무기로써 지켜 도와주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얻고자 하매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랴?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죄주려 하지 아니 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물려 온 터전을 식민지로 보고, 우리 문화 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우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의리 적음을 꾸짖으려 하지 아니하노라. 우리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을 갖지 못하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가릴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로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한 때의 감정으로써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심에 희생된,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그릇된 상태를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바른 길, 큰 으뜸으로 돌아오게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의 요구로서 나온 것이 아닌 두 나라의 병합의 결과가 마침내 한때의 위압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지금까지의 실적을 보라! 용감하고 밝고 과감한 결단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이해와 한 뜻에 바탕한 우호적인 새 판국을 열어 나가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울분과 원한이 쌓인 2천만 국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동양의 안전과 위태를 좌우하는 굴대인 4억 중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의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지지하는 자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리요? 아아! 새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온 세기에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의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도다. 새 봄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도다. 얼어붙은 얼음과 찬 눈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이 저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때를 맞고, 세계 변화의 물결을 탄 우리는 아무 머뭇거릴 것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온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온누리에 민족의 정화를 맺게할 것이로다. 우리가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은밀히 우리를 지키며, 전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나니, 시작이 곧 성공이라, 다만 저 앞의 빛으로 힘차게 나아갈 따름이로다.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셋,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조선청년         핵폭탄 평화공원             상해 임시정부        올림픽의 손기정

                      징병 독려           (나가사키)                                      * Daum Blog 인용

 

*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직접적인 동기는 한기 9115년(AD. 1918년) 세계 1차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원칙 14조와 그 해 11월에 성립된 1차대전의 휴전조약이다. 한기 9115년(AD. 1918년) 12월 15일 자 ‘Japan Advertizer(일본 신호에서 영국인이 발간한 영자지)의 한국인 독립을 주장’ 제하의 기사에서 미국의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기사와 12월 18일 자 ‘약소민족들의 발언권 인정 요구’ 기사에서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의 2차 연례총회가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 보도였다. 강황회의에 한국대표가 포함된 사실도 실었다. 학생회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2 ․ 8 독립선언서’ 를 발표했다. 한일합병조약의 폐기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민족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만국평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할 것이며,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영원한 혈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다. 선언서는 3 ․ 1 독립선언서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이광수의 선언서를 최남선이 평화적으로 유연하게 다듬었다.

 

* 유관순은 이화학당 재학생으로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의 예배가 끝난 뒤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고 4월 1일 만세시위를 하가로 결의하고 마을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고 수천 명의 군중을 결집하여 아오내장터에서 시위를 주동했다. 시위 중 부모가 피살되었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주동자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투쟁의 정당함을 주장하다가 의자를 던져 법정 소란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만세운동을 주창하여 더욱 심한 고문과 형벌로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사했다.

 

                     

                         총독부 일장기              안중근의사                유관순열사

                             내림                        순국비                      기념 그림      * Daum Blog 인용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한기 9116년(AD.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수립․ 선포되어 한기 9142년(AD. 1945년) 해방 환국할 때까지 일제의 한국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치했던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로 한기 9116년(AD. 1919년) 3 ․ 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1919년 4월 중국 상하이), 대한국민의회정부(1919년 3월 러시아령),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1919년 4월 서울), 조선민국입시정부(1919년 4월 서울), 신한민국임시정부(1919년 4월 평안도), 한성임시정부(1919년 4월 서울 인천), 동東 3성省(만주 일대)의 고려임시공화국 등 6개의 지역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으나 이 가운데 상하이, 러시아령, 서울의 3개 지역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헌법, 의회, 서고문, 정강, 강령을 갖추었고 나머지 정부는 전단적인 범주에 머물렀다.

 

*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다.

 

․ 제 1기 상해시대(1919년 - 1932년)는 교통국과 연통제의 상설기구를 설치했다. 교통국은 군자금 모금, 정보수집, 정부의 지령전달, 인물포섭과 무기 수송전달을 했다. 연통제는 행정제도다.

 

․ 제 2기는 이동시대(1932년 - 1940년)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빌미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자싱, 항저우, 쑤저우, 전장,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린, 치장 등 10여 지역으로 피난한 시기다.

 

․ 제 3기 충칭시대(1940년 - 1945년)는 충칭에 정착한 시기로 광복군을 창설하고, 주미외교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하고, 3균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건국강령을 반포했으며, 강력한 통치이념과 독립전쟁을 천명했다. 세계 제 2차대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중국에 이어 12월 공식적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국민국가의 민주공화제적 전환의 민주정치사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었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었으며, 특히 임시정부는 좌우익을 통한 연립내각을 수립하여 민족통합을 실현하였다.

 

                                       청산리전투 기록화                          김좌진장군

 

* 청산리전투

한기 9117년(AD.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 동지대 소속 군사를 전멸시킨 대첩이다.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천수평 등 10여회의 승첩이다. 무기와 탄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하루 주먹밥 한 개로 독립군 2000여 명이 일본군 5000여 명을 대파했다.

 

<독립군가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나가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길 이 너와 나로다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나가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됨이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빛낼 이 너와 나로다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나가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이봉창의사 거사 전에 찍은 사진,                    1932년 단성사에서 대중가요 황성옛터를

       중국어판과 대한어판 도왜실기 합성사진          불러 나라 잃은 슬픔으로 공연장을 울음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바다로 만들었던 이애리수(이음전)

       배경식 지음(한겨레신문 2008. 10. 25)              2008년 98세로 생존 확인

 

* 이봉창의사 의거

한기 9129년(AD. 1932년) 1월 일본 육군 새 해 관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도꾜 사쿠라다몬 다리에서 히로히토 일본국왕 행렬 두 번째 마차를 향해 수류탄이 날아갔다. 이봉창의사가 던진 수류탄은 목표물을 정확히 맞혔고 폭탄은 요란하게 터졌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맨 앞 마차에 타고 있었다. 게다가 폭탄의 위력이 신통치 않아 몇 사람이 다치고 잠시 말들이 놀라 날뛰었을 뿐이다. 이봉창의사는 지니고 있었던 두 번째 폭탄을 던지지도 못했다. 폭탄을 던져 일본국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던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봉창의사는 히로히토의 얼굴을 익히지도 않았고 행렬의 코스도 사전에 탐지하지 않고 거사를 계획했다. 국왕 암살치고는 계획이 매우 허술했다. 이봉창의사의 거사는 실패했으나 자금난과 인재난으로 고충을 겪고있었던 상해임시정부에는 꺼져가던 불꽃이 다시 붙는 성과였다. 이봉창의사의 폭탄 투척사건을 보고는 세계가 놀랐다. 독립자금이 답지하고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김구선생은 ‘동경작안의 진상’ 에서 ‘이봉창의의사의 엄친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광대한 땅을 철도부속지라는 명목으로 왜적에게 강점당하고 … 사쿠라다몬 앞에서 폭탄이 폭발한 것을 본 이의사는 가슴에 품었던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백범일지, 도왜실기에 이봉창의사의 거사기록이 있다. 1994년 최서면의 노력으로 이의사의 옥중수기 ‘상신서’가 공개되고 재판기록이 알려지면서 요즘 뉴라이트가 펼치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근대화론’ 이 얼마나 관념적 허구인지 상세하게 들어난다.

 

                  백범 김구선생            윤봉길의사 연행            윤봉길의사          윤봉길의사 처형

 

* 김구선생, 1876년 8월 29일~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1940년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제6대, 8대, 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주석을 지냈다. 아호는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범(凡)’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의사義士 19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의거 연행 사진, 1932년 5월 1일 일본 아사히신문 보도. 연행인 윤봉길 본인 진위 논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김구선생의 도왜실기 사진과 같고, 1976년 부인 배용순, 동생 윤남의 증언 윤봉길 본인 확인

 

1948년 남북 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으며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선우진, 김구, 아들 김신(왼쪽),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를 찾은 김구 선생과 일행(가운데), 미군정기의 이승만, 하지 중장(왼쪽)

 

# 한기 9129년(AD. 1932년) 4월 상해 홍커우공원에서는 일본천황의 생일축하식이 거창하게 거행되었다. 홍구공원 폭탄투척거사 직전의 상해임시정부청사, 김구주석의 사무실 겸 침실, 식당. 김구주석과 윤봉길의사, 사무용 책상으로도 사용하는 식탁에 좌정하여 마주 앉아 있다. 식탁에는 오랜만에 보는 하얀 이팝과 소고기국 그리고 몇 가지 나물반찬이 차려져 있고 윤봉길의사가 맛있게 밥을 먹는다. 김구주석 앞에도 밥상이 차려져 있지만 주석은 숟가락을 든 체로 윤의사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다.

윤봉길의사 : (숟가락을 놓고 숭늉을 마시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잘 먹었습니다. 오 랜만에 이팝으로 포식을 했군요. 이제 가야할 시간입니다. 선생님 건강하게 잘 지내십 시오.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다가 돌아서며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김구주석 에게 드린다.) 선생님, 이제 제 시계는 쓸모가 없습니다. 제 것이 더 새 것이니 바꿔 찹 시다. (김구주석 망설이다가 손목시계를 풀어 서로 바꿔 찬다. 그리고 왈칵 윤봉길의사 를 가슴에 안고 등을 쓸어내린다. 김구주석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 상해 홍커우공원 일본천황 생일축하연장, 일본인 차림의 윤봉길의사가 어께에는 물병을 메고 손에는 도시락을 들었다. 일본헌병이 검문하지만 유창한 일본어를 구시하면서 일본인 행세를 하자 의심없이 들여보낸다. 잠시 뒤 군악대의 일본국가 연주로 의식이 시작되고 단상 위에는 상해에 주둔한 일본군 고위장성을 비롯한 영사관 직원들과 일본상인조합 대표 등 그리고 초청되어 참석한 중국 고위관리들이 포진하여 기미가요를 들으며 일장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었다.

 

윤봉길의사 : (단상 앞으로 달려나가며 도시락폭탄을 단상으로 던진다. 그러나 불발, 다시 어깨에 맨 물병폭탄을 벗어 던진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단상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 천 명의 관중들은 아비규환이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윤봉길 의사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만세를 3창한 뒤 우왕좌왕하고 있는 일본헌병 앞으로 걸어가 두 손을 내민다.

헌병 : (눈을 희번덕거리며) 뭐야, 너는?

윤봉길의사 : (태연하게) 내가 폭탄을 던졌다. 체포하라!

헌병 : 미친 놈이구만, 저리 가라!

윤봉길의사 : 이 멍청한 놈아, 내가 폭탄을 던졌다니까!

헌병 : 돌았나?

윤봉길의사 : (웃으며) 날 체포하지 않으면 곧 후회할 것이다.

윤봉길의사는 스스로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김구주석은 그 말을 전해 듣고는 통곡했다.

 

     

     베를린마라톤 시상대의 손기정선수, 우승자면서도 전혀 기쁜 표정이 없고 일장기를 꽃화분으로 가리고   있음. 일장기가 삭제된 동아일보 2판과 아사이신문 원본

 

 

*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

한기 9133년(AD. 1936년) 8월 도이치의 베를린 올림픽경기 마라톤에서 손기정선수가 1등을 하고 남승룡선수가 3등을 했는데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았으므로 동아일보는 2판부터 일장기를 지우고 발행하여 무기 정간되었고, 역시 일장기를 없애버린 손기정선수의 사진을 실은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