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0화 남북국시대
대진국(발해)과 통일신라
◎ 고구려를 계승한 해동성국海東聖國, 대진국大震國
대진국행정구역도 무역로 고구려 부흥운동도
* Daum Blog 인용
* 대진국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 1
1대 진국열황제 한기 7895년(AD. 698년) - 15대 애제 한기 8123년(AD. 926년),
15대 228년 간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 진국열황제부터 시작 15대)
역대 |
묘호 |
시호 |
연호 |
이름 |
1 |
세조 |
진국열황제 |
중광 |
대중상 |
2 |
태조 |
성무고황제 |
천통 |
대조영 |
3 |
광종 |
무황제 |
인안 |
무예 |
4 |
세종 |
광성문황제 |
대흥 |
흠무 |
5 |
원의 | |||
6 |
인종 |
성황제 |
중흥 |
화흥 |
7 |
목종 |
강황제 |
정력 |
숭린 |
8 |
의종 |
정황제 |
영덕 |
원유 |
9 |
강종 |
희황제 |
주작 |
언의 |
10 |
철종 |
간황제 |
태시 |
명충 |
11 |
성종 |
선황제 |
건흥 |
인수 |
12 |
장종 |
화황제 |
함화 |
이진 |
13 |
순종 |
안황제 |
대정 |
건황 |
14 |
명종 |
경황제 |
천복 |
현석 |
15 |
애제 |
청태 |
인선 |
* 대진국 역사연대표(중국사서와 일본사서) - 2
(대조영부터 시작 15대)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고(대조영) |
AD.699-719 |
고구려 유민, 말갈족 규합, 국호 진(발해) |
2대 |
무 |
719-737 |
일본 국교 문물 교환, 당 나라 공격 |
3대 |
문 |
737-793 |
용천부 천도, 관직제도 정비, 주자감 설치 |
4대 |
대원의 |
793-794 |
|
5대 |
성 |
794-795 |
연호 중흥, 상경 천도 |
6대 |
강 |
795-809 |
연호 정력, 일본 . 당 사신 왕래 문물교환 |
7대 |
정 |
809-812 |
연호 영덕 |
8대 |
희 |
812-817 |
연호 주작, 당 문물제도 수용 |
9대 |
간 |
817-818 |
연호 태시 |
10대 |
선 |
818-830 |
중국이 해동성국 칭함, 영토 확장 |
11대 |
대이진 |
830-858 |
연호 함화 |
12대 |
대건황 |
858-871 |
|
13대 |
대현석 |
871-894 |
|
14대 |
대위해 |
894-906 |
|
15대 |
대인찬 |
906-926 |
103개 성 모두 거란에 점령 멸망 |
* 대진국大震國역사는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사대주의事大主義와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에 의한 대한역사 깎기, 낮추기, 거짓으로 만들기의 본보기다. 중국은 대진국을 ‘발해’ 라고 낮추어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몰아세웠다. 일제는 아예 대한사에서 대진국역사를 잘라내 없애버렸다. 쥐뿔(주체)도 모르고 이를 받아들인 대한 일제 어용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대진국역사를 없애고 통일신라로 대한사를 세웠다. 한 술 더 떠서,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실증주의 역사학파로 일컫어지는 이들 일제 어용학자들은 신라통일을 자주통일, 민족통일, 국토통일의 위대한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신라통일은 땅 넓이로 보자면 옛 고조선 땅의 1/100이고 고구려와 대진국 땅 1/50의 좁혀지고 오그라든 통일이다. 더구나 고구려의 드넓은 땅을 당나라에 통째로 바친, 백제와 신라만의 ‘2국통일’ 이요 ‘동서통일’ 일 뿐이다. 통일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아래쪽 영토통일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강역과 고구려인을 감싸 안을 수 없어 당나라가 고구려의 땅에는 안동도호부, 백제에는 웅진도독부 그리고 신라에마저 계림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대한 강역 모두가 당나라의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신라는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 전쟁을 마다하지 않으며 웅진도독부와 계림도독부는 밀쳐냈으나 고구려는 당나라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안동도호부의 고구려 유민들이 안동도호부가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대걸중상과 대조영이 대진국을 세워 당나라는 고구려 경영의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으나 대한사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이 대한 영토의 가름이 된 빌미가 바로 신라통일이다.
* 신라통일 바로 앞서 중국의 정치 상황은 고구려 침공 실패로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백제의 상대등 부여성충과 연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경영하려는 꿈을 세우고 먼저 중원대륙을 치기로 합의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私事로움(대야성 성주였던 사위 김품석과 애지중지하였던 딸 고타소낭이 백제의 침공으로 전사함)을 잊고 3국은 백성을 모아 당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이긴 뒤에 인의仁義로 다스리자’. 때마침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쳐서 철천지한의 원수를 갚고자 신라의 사신으로 들어온 김춘추에게도 이렇게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직 개인적인 원수를 갚으려는데 몰두한 김춘추는 아무리 당나라가 어려운 시기라고는 하나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김춘추에게는 당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백제 타도가, 딸의 원수를 갚는 일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춘추는 연개소문이 죽령 이북의 옛 땅을 돌려주라는 터무니없는 조건에 얽매여 2년간이나 연금되었다. 김춘추가 이 조건을 자신의 능력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거절하였기 때문이었다. 김춘추의 억류 소식을 들은 김유신이 김춘추를 구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 남쪽 국경을 침략하자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풀려나온 데는 고구려 국상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었고, 거짓말로 죽령이북의 땅을 되돌려주겠다면서 옛 이야기 - 자라에게 속아 용궁에 간 ‘귀토설화龜兎說話(토끼와 자라)’ 의 고사故事를 선도해가 귀띔해주어 이를 응용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 살아나온 김춘추는 왜로 건너가 백제 침략연합을 꾀하였다. 왜나라는 이 때 전국시대로써 국정이 혼란하였으므로 거절당하자, 김춘추는 해상권을 장악한 고구려 몰래 당나라로 들어가 연개소문과 부여성충의 침략 계획을 일러바쳤다. 그렇잖아도 고구려 침입의 빌미를 찾고자 호시탐탐 노리던 당나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더구나 백제는 왕정말기의 내정문란으로 정치적 혼란이 자심했고, 고구려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연개소문이 죽은 뒤 동생 연정토와 대막리지 지위를 물려받은 장남 남생을 비롯한 세 아들의 권력쟁투로 역시 국정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김춘추의 고자질로 3국 정세를 살핀 당 태종은 나당연합을 성사시켰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알현할 때 당 태종의 환심을 사고자 구지 당나라의 옷을 입고 당 태종을 뵙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며 수행한 두 아들(장남 왕문과 둘째 아들)을 인질로 맡겼다. 더불어 당나라 정치제도와 복식을 따를 것을 약속하기도 한 철저한 굴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당 태종은 연합의 조건으로 승전 뒤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차지하고 백제 땅을 신라가 경영하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김춘추가 그렇게도 백제 타도에 연연한 이유를 ‘왕가王家의 사사私事로움’ 에서 보는 견해가 있다. 앞에서 말한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김춘추의 외교활동을 3국통일이라는 큰 뜻을 펴기 위한 원대한 계책이라고 추겨세웠지만 그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다. 대야성의 멸망과정에서 자살한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古妥素에 대한 원한으로 보는 시각이다. 연개소문과 대담에서 ‘사사私事로움울 잊고’ 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기록에 의하면 김춘추는 사위와 딸이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기둥에 의지해 종일토록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짐승이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했다’ 고 했다. 또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정도를 멸하지 못하랴’ 라고 식음을 전폐하고 원망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 요즘 진보적인 역사관을 지닌 학자들이 문헌과 고증을 통해 대한사, 특히 고대사를 재정립하여 잘못을 낱낱이 밝혀내고 수정 ․ 보완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중국이 ‘대진국’ 을 ‘발해’ 라고 부르는 것은 당 현종玄宗이, 진국의 황제라고 스스로 말하는 대조영을 대진국이 보낸 사신을 통해 좌해위원외대장군左駭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였고 통치하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아 홀한주도독都督을 보탰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진국은 건원칭제建元稱帝하였는데 당나라가 이를 깎아내려 발해로 불렀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발해로 불리웠다.
덧붙이면 일본이 섬나라라는 정신적 영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서 한국을 ‘반도半島’ 라는 지어낸 말로 부르게 하여 스스로 높이려는 뜻과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구지 ‘반도’ 라는 지명을 왜 만들어냈으며, 특정지역을 지리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어 조어造語를 했다면 왜 ‘반대륙半大陸’ 이라 하지 않고 하필 ‘반도’ 라고 하였겠는가? 지구는 대륙과 섬으로 구성되었지 반대륙이 없는 것처럼 반도는 없다. ‘통일신라’ 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한통일이랄 수 없는 일이어서 학계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후기신라’, ‘대신라’, ‘2국통일’, ‘동서통일’ 등 명칭이 이야기되고 있으나 아직 마땅치 않아 기존의 ‘통일신라시대’ 를, 일제가 빼버린 대진국역사를 복원하여 ‘남북국시대’ 로 정립하고 후기신라의 명칭은 ‘통일신라’로 부른다.
* 중국의 주은래주석은 기자 방담을 통해 고구려가 대한역사라 했고, 학자요 문필가인 임어당도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일을 비판했다. 당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추앙받는 이태백李太白(AD. 701 - 762년)도 시문집 ‘옥진총담玉塵叢談’ 에서 대진국을 고려(고구려)와 백제로 부르며 한민족의 독자적인 국가임을 말했다. 이태백은 말갈어를 잘 해서 대진국과 중국의 외교문서를 번역했다. 또한 이태백의 ‘혁만서嚇蠻書’에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대진국을 고려나 백제로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진국 건국의 주도세력은 말갈족으로 고대 한민족이다. 대진국이 건국되던 6 - 7세기 초 중국 지린성 등 동북지방에 7개의 말갈부족이 있었는데 한민족의 원류인 예맥계가 가장 강성했으며 대진국 건국의 중추세력이었다. 이들은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 대진국을 세웠으며 고구려의 유민을 흡수해서 중국 북방에 현재 대한의 7배나 되는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나라 이름에도 국國자를 넣어 자주국임을 과시했다. 한편 일본학자들도 대진국사를 중국역사로 보는데 부정적이다. 역사학자 쓰다 소기치는 ‘발해사고渤海史考’ 를 통해 대진국의 전신은 말갈 7개 부족으로 이 가운데 속말말갈이 주축이며 이들은 고구려와 당 문화를 수입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한 나라라고 주장하였다.(홍콩 넝런서원의 대한학과 김광석교수 대진국사 연구 논문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1991년 홍콩 위안둥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6. 9. 19일자 중앙일보)
* 본고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나, 이 글이 ‘한단고기의 태백일사(임승국)’ 를 참고하였는데 ‘태백일사의 대진국본기’ 에 기록된 일본기를 인용하여 대진국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덧붙인다.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으니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졸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 에 속했는데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고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나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가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 의 유민으로써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의 노예다. 왜인들은 이 때 산과 섬에 근거하여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들이 통상했다. 바다를 건너 천 여리에 대마국(대마도)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 쯤 된다.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 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사방 300여 리 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반여언의 옛 읍임
* 1949년 길림성 돈화현의 현성 근처 우정산 고분에서 한기 7989년(AD. 792년)에 죽은 대진국 4대 문황제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지墓誌가 나왔다. 대진국의 묘지로써 처음이다. 묘지에 일렀으되 ‘(공주가 죽자) 황상께서 조회를 폐하고 크게 슬퍼하사 음악 연주도 금하였다’ 라며 황제 호칭을 사용하였음을 적었다. 중국은 이제까지 대진국을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나 제후국 정도로 낮추고 대진국역사를 거짓으로 만들었는데 당나라와 대등 ․ 대립한 건원칭제의 나라라는 것이 알려졌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은 ‘태백일사’ 의 역사서로써의 사료적 가치를 정혜공주묘지가 입증하였다.
* 대진국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은 남부 시베리아 여러 종족이 형성한 복합적 국가로써 독자적인 역사를 지녔다고 본다. 신라는 중국처럼 발해라 하였고 낮춰서 ‘흉이凶夷’ 니 ‘말갈발해’라 하였으며 더 낫게 부르면 ‘북국北國’ 이라고 하기도 했다. 일본 승려 에닌(圓仁)이 한기 8036년(AD. 839년)에 지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에서는 신라인들이 8월(음력) 15일에 3일 동안 노래춤잔치를 벌이는데 이를 ‘발해전승기념행사’ 라고 하였다. 신라인들의 대진국관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1949년 발굴된 대진국 정혜공주묘는 대진국 4대 문황제 둘째 딸의
무덤으로,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한 일제 어용
실증사학계에 사료적 가치를 증명함. 앞에서부터 정혜공주묘지석,
묘지 안 벽화와 부장품 * Daum Blog 인용
◎ 대한역사에서 사라진 대진국(발해)의 역사
* ‘대진국’ 은 잊혀져서는 안 되는 한민족의 나라다. ‘발해’ 는 밖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고구려 유민들은 끝내 ‘고구려’ 라 하였다고 한다. 대진국은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청 나라 사람 김소발의 ‘발해국지장편’ 권 20에 대진국문자 20여 글자가 소개되어 전해지고 있다. ‘전자篆字도 아니고 예자隸字도 아닌’ 대진국의 독특한 문자(고조선의 가림토와 비슷함)다. 중국과 다른 자기들만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던 나라, 건원칭제하고 멸망한 고구려를 주체적으로 이은 나라, 전성기에는 고구려의 드넓은 영토 보다 더 넓은 강역을 경영한 나라, 이것이 대진국인들의 기상과 주체성이다. 국경을 맞댄 통일신라와는 일상적인 무역로는 열었으나 국가적인 외교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먼 동해 바다를 건너 왜국과는 여러 차례 국서를 나누었다. 고구려를 이었음을 스스로 말한 데서 보듯이 외세를 끌어들여 2국통일을 하였던 신라를 못마땅하게 보았고 고구려유민들로써 원한이 서렸으리라. 그래서 더욱 대한역사에서 발해역사는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발해지장국편’ 에는 대진국이 왜의 천황과 서로 나눈 문서가 권 18의 문징편을 거의 다 채우고 있어 활발했던 외국교역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 ‘조대기’ 에서, 개화(고구려 28대 보장왕의 연호, AD. 668년, 한기 7865년) 27년 9월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걸걸중상, 대조영의 아버지)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무리를 이끌고 영주에서 2000리(약 1000Km) 떨어진 하늘이 내린 땅 동모산에 이르러 머물렀다고 했다.
# 한기 7893년(AD. 696년) 늦가을, 서압록강변 고구려 진국장군 대중상(걸걸중상, 대조영의 아버지)의 진영, 대중상과 거란족 추장 이진충, 말갈족장 걸서비우가 고구려의 멸망을 한탄하며 울분을 토한다.
대중상 : (비통한 어조로) 고구려는 망했습니다. 싸움 한 번 하지 못하고 나라를 들어 당 나라에 바쳤습니다. 고구려 조의선인의 우두머리고 대막리지며 장군이었던 연개소문 장군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안에서 정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정권을 차지하려는 내 부 분열로,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당나라 30만 대군을 쳐부셨던 그 막강했 던 고구려가 변변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단 말입니까? 이 어찌 통분하지 않으리요! 대막리지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로 향 하는 신라군의 길잡이를 맡아 길을 안내하였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당 나라로 도망가서 당나라 벼슬을 얻고 당나라 군대의 선봉이 되어 고구려로 쳐들어 와 고구려를 지키려는 동생 남산, 남건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정권에 눈이 멀었다지만 어떻게 조국에 창칼을 들이미는 적대행위를 할 수 있으며 적의 나라 군사를 지휘하여 조국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 대로 두고만 보시렵니까?
추장 이진충 : 수천 년 이어오던 민족정신이 스러지고 고구려는 망했습니다만 통분은 갈 아 앉히고 냉정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아직 민심은 우리 편입니다. 백성들은 고 구려가 당나라에 귀속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영주부를 쳐서 발판을 삼고 군사를 정비하여 당나라를 몰아내고 다시 고구려를 일으킵시다.
걸서비우 족장 : 좋습니다. 저도 이미 모든 족장들에게 동원령을 내려두었습니다.
대중상 : 거사는 내일 밤 자정입니다. 족장께서는 동문과 서문을 맡아주시고, 추장께서는 북문을 맡아주시되 달아나는 군사는 쫓지 말고 항복한 군사는 거두십시오. 저는 남문 을 통해 관아를 습격하여 영주부를 탈취하겠습니다.
# 대중상이 주도한 혁명은 실패하였다. 대중상은 이진충과 걸사비우에게 훗날을 언약하고 천험의 요새인 동모산으로 물러났다. 이윽고 ‘후고구려’ 라 이름하고 격문을 돌리니 원근 많은 성들이 모여들었다. 대중상은 중광 32년 5월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라 하였다. 태자 대조영은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와서 제위에 올랐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사 10만을 모집하여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새롭게 하여 당 나라에게 대항하여 고구려 부흥을 맹세하였다. 대조영은 젊은 시절에 천하를 주유하였는데 이는 아버지 대중상(걸걸중상)의 극비명령이었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자 사라져버린 천부인 선기옥형을 찾는 일이었다. 고조선시대부터 전승되어온 선기옥형은 연개소문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할 때 사라져버렸다. 신궁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그 때 소도가 타서 재가 되어버렸는데 소도를 지키던 천지화랑과 신녀들이 모두 함께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대중상은 고구려를의 명맥을 이어가려면 무엇보다도 선기옥형을 찾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고구려 태조 주몽제 이래 고구려를 지켜왔던 선기옥형을 찾지 못한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후고구려를 세우는 원대한 그의 이상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 대조영을 시켜 고구려 강역을 샅샅이 뒤졌다. 대중상 뿐만 아니라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소정방으로부터 열강들이 모두 선기옥형을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선기옥형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선기옥형이 사라진 것은 비단 이 때뿐만이 아니었다. 대중상은 초조했다. 선기옥형을 물려받지 못하면 고구려를 재건한다는 그의 이상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1년여에 걸친 아들 대조영의 탐색에도 불구하고 선기옥형은 끝내 대중상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대중상은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선기옥형을 안치하겠다는 미련을 버리지는 않았다. 혁명에 실패하여 은거한 동모산에 제일 먼저 신궁을 짓고 소도를 설치했다. 비록 한인천제가 하늘로부터 전승한 원형을 안치하진 못했으나 주몽제가 모사한 선기옥형이 있었다.
*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써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다. 걸걸중상(대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자리를 잡았다. 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쳤다. (걸사)비우의 무리와 합쳐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얻었다’ 라고 기록했다.
* 대조영은, 당나라가 거란족 출신 이해고를 토벌대장으로 삼아 쳐들어오자 말갈(읍루)의 족장 걸사비우와 거란의 추장 이진충과 연합하여 당나라 장군 이해고의 군사를 천문령(흥경지방 영액성 부근, 청 태조 도읍지, 대진국 근거지)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에 기강을 새롭게 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국호를 ‘대진’ 으로 하였으며 연호는 ‘천통’, 국토는 6000리(3000Km)였다. 3대 무예황제 때 등주와 동래를 빼앗고 자사 위준을 죽인 일로 당 나라 왕 유기가 군사를 보냈으나 당나라는 크게 패하였고, 다시 당나라가 신라와 연맹하여 동남방의 여러 군을 급습하였으나 역시 크게 져서 그로부터 신라가 조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여러 성은 대진국이 차지하였다.
* 인안(3대 광종 무황제) 16년 한기7932년(AD. 735년)에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하니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5경, 60주, 1군, 38현을 편제하니 나라가 9000리(5000Km)였다. 동쪽은 연해주지역에서 아무르강까지, 서쪽은 요동지역, 남쪽은 대동강과 원산이남 그리고 북쪽은 송화강이북으로 흑수말갈까지 복속시켰다. 이는 전성기 고구려 보다 훨씬 넓은 영토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다. 이 해에 당나라, 신라, 거란, 왜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천하는 ‘해동성국’ 이라고 칭송하였다. 5곡은 풍성하고 4해는 안락하여 ‘대진 6덕의 노래’ 를 찬미하였다.
* 흠무(4대 광성문황제 이름, 묘지가 출토된 정혜공주의 아버지)가 즉위하여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의하고, 문사에게 명령하여 국사 125권을 편찬케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을 홍익하는 교화는 만방에 미쳤다.
* 대흥(4대 광성문황제 흠무의 연호) 45년 한기 7978년(AD. 781년) 치정의 절도사 이정기(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요동에 고구려를 계승한 제나라를 세움)가 당 나라 군사와 접전하자 황제가 장수를 보내 도왔다.
* 성종(11대) 선황제는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태조의 풍체가 있다 하였다.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7주를 두고 북은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과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 모란의 동쪽을 철리,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 장령의 동쪽을 장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에 있었다. 대개마의 남북에 자리잡고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대진국 인(도)장 대진국사 왜곡 안내판 중국 세계문화유산 등록 대진국영광탑
(당대발해유지) * Daum Blog 인용
◎ 대진국의 정치, 문화, 외교활동
* 한기 7924년(AD. 727년) 가을, 대진국의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외교가 시작되어 대진국은 35회, 일본은 13회 사신을 주고받는다. 국경을 한 당나라와 신라에 대비한 군사적 협력이 관건이었다. 한기 7954년(AD. 757년)에 왜가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대진국에 동맹을 요청했으나 대진국이 이를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결국 무산시켰다. 왜의 신라 침략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 대진국의 해상활동은 한기 7929년(AD. 732년) 9월, 당나라 북방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요 군사적 요충인 등주를 공격하여 쉽게 함락시킨 것으로 미루어 거대한 해상 군사조직과 무역활동 조직이 있었다고 가늠되는데 이는 옛 고구려의 해군조직이라고 판단한다.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진국이 당나라의 요충인 항구도시를 공격하여 쉽게 격파할 수 있는 군사적 정비, 특히 해군의 정비가 그렇게 빨리 갖춰질 수 없다는 판단이다. 또한 ‘당회요’, ‘책부원귀’, ‘요사’ 에 고구려의 기록이 8세기에서 10세기 초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비록 대진국에 복속되었으나 사실상 분권적 독립성을 유지한 고구려 해상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 3국사기는 대진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의 4부는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라고 했으며, 신라의 천장군지역으로부터 책성부까지 39개의 역(교통의 거점)이 있다. 주요도로 5개 가운데 신라도(길)가 있다. 이는 대진국이 신라와 교통하지 않았다는 역사 해석의 반증이다. ‘협계 태씨 족보’ 에 왜구가 신라 동해안을 침략하자 대진국 군대가 출동하여 격퇴시킨 기록이 있고 대진국 멸망기에 신라에 군사를 요청한 사실도 있다.
* 고려 태조는 대진국을 고려왕실과 혼인한 ‘친척의 나라’ 라고 했다. ‘자치통감’ 에 서역 승려 ‘말라’ 가 고려 태조에게 들은 내용을 중국 후진의 고조에게 전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 태조는 말라에게 대진국은 본래 친척의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 잡혀있으니 후진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여 대진국 왕을 구하고 옛 원한을 갚고자한다’ 고 했다.
* 중국과 러시아는 대진국역사를 소수민족사로 간주하고 있는데 ‘속일본기’ 권 10에는 대진국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 라고 하여 대진국이 고구려의 후계임을 말하였다.
* ‘발해’ 라는 명칭은 한기 7910년(AD. 713년) 대조영이 건국 초기 국력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외교적 관례로 당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조공의 예를 하자 당 현종이 대조영을 ‘좌해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이라는 벼슬을 내림으로써 나라 밖에서 발해라 불렀으며 안에서는 건원칭제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패망 뒤 고구려 왕족과 고구려에 협력한 말갈족 족장들을 강제로 영주에 이주시켰다. 대진국의 건국은 여기서 시작된다.
* 정치행정제도는 당의 행정체제를 모방하였는데 3성(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밑에 6부(충인의예지신부, 장관은 경)를 두었고 1대, 7사, 1원, 1감, 1국의 관료체제였다. 지방행정기구는 8 - 9세기경에 정비되었는데 5경(수도는 상경, 중동서남경) 아래 15부, 62주, 100여개 현(책임자 현승)의 체제였다.
* 군사제도는 ‘신당서 발해전’ 에 10위(좌우맹분위, 좌우웅위, 남좌우위, 북좌우위 등 대장군 장군 통솔)에 10만 군사를 두었고 전성기에는 20만 명의 군사였는데 지방군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유사시에 동원되는 촌락 단위의 예비군제도가 있었다.
* 사회경제제도로 남부는 농업을, 동부는 농어업이, 북부는 어업과 수렵과 목축업이 성했으며 이외에 수공업 형태의 방직, 도기제작과 국가경영의 중대사였던 철의 제련이 활발했고 읍루인들은 뛰어난 조선술을 발휘했다. 특히 저마(삼베)는 말갈족이 잘 다루어 고려인들에게 전수하여 발전하였다. 당나라와 143회, 왜와 34회의 바닷길 무역의 기록이 있다.
* 기층(일반)문화는 말갈문화가 중심이었고, 중앙아시아와 남부시베리아 문화(도기, 소그드 화폐, 경교 십자가), 고구려 문화(지붕 장식 막새기와의 연꽃잎 배치)가 공존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지배층문화는 고구려인의 문화로써 종교는 불교가 성행하였고 불상은 전불(구은 벽돌 불상)이 남아있다. 지배층에서는 도교가 성행하였는데 정혜공주 묘지에서 도교의 용어와 장자사상의 제도를 엿볼 수 있다. 묘제는 흙무덤(말갈 묘제)과 돌무덤(고구려 양식으로 석실봉토묘이며, 정혜공주묘), 벽돌무덤(당나라 묘제)이 두루 사용되었다. 산성 축조법은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고구려식 산성과 당나라식 평지성이 혼재되어 있다. 구당서, 신당서, 5대회요의 발해전 기록에 대진국인은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주축을 이룬다 하였고,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에도 구려유진(고구려 유민)과 물길잡류(속말말갈인)들이 세운 나라라고 했다.
* 당나라와는 한기 7902년(AD. 705년) 공식적으로 접촉하였고, 한기 7906년(AD. 709년)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대진국은 4번 천도했는데 첫 번째는 천보 년간에 구국에서 현주의 중경으로, 두 번째는 천보 말에 상경으로, 그리고 정원 때에 동경으로, 마지막은 5대 성왕 때 다시 상경으로 되돌아왔다. 성씨는 왕족은 대씨였고, 유력 성씨로 고, 장, 양, 보, 오, 이씨 등 62개였다. 평민은 성씨가 없고 두루 편호 또는 백성이라고 했으며 부곡(백정 등 천민)과 노비가 있었다. 대한의 대진국 기록은 ‘한단고기’ 의 ‘대진국본기’ 와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발해고’ 가 있을 뿐이다. 근대의 대진국연구는, 일본사학계는 고구려 계승과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인 문화로는 인식하나 독자적 문화형성을 인정 안하고, 중국 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지방봉건정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동북공정’ 을 추진하고 있으며, 러시아사학계는 남동부시베리아 여러 민족과 종족이 형성한 문화를 지닌 복합국가로 독자성은 인정한다.
◎ 대진국의 멸망
* 내분설
대진국의 멸망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자체의 내분설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요사(요나라 역사)에서 ‘이심, 민심의 배반’ 이라는 말이 거론되었고 요나라가 싸우지 않고 쉽게 복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내분을 뜻한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대진국 멸망 즈음에 반란이나 폭동이 없었다. 오히려 멸망 뒤 반요투쟁이 100여 년 간 치열하게 나타난다. 요 나라의 대부대에 3일 간 항거했던 부여부전투(성주 이하 전원 사망)와 항복한 뒤 다시 전개된 상경용천부전투, 장령부, 압록부,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 남해부, 철주민의 항쟁을 보면 내분설이 설득력이 없다.
* 백두산 화산 폭발설
1970년대 말,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헤이안시대의 주거지역을 발굴하다가 화산재가 두껍게 쌓인 지층이 발견되었는데 분석결과 백두산 화산재로 결론지었다. 일본 도쿄의 메트로폴리탄대학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백두산 화산 폭발과 그 환경적 영향’ 논문에서 백두산의 화산이 폭발하여 반경 수십 킬로가 초토화되었고 그 영향으로 대진국이, 마치 구약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 복합설
지배층의 권력 다툼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국정이 문란해지고 외교정책의 실패로 요나라가 그 틈을 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기습하자 방어 또는 대비하지 못한 정치적 군사적 실패가 원인이었다. 멸망 뒤 100여년 간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을 추정하여 대진국 멸망의 정설로 본다.
◎ 대진국 부흥운동
대진국 애제의 청태 26년, 한기 8123년(AD. 926년)봄 정월, 야율배(청 태조 야율아보기의 큰 아들)가 거란 건국 초에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대진국의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 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15대 228년 동안 고구려의 후계를 스스로 다짐하며 중원경영을 이상으로 건국했던 대진국은 패망했다. 야율아보기는 유목민을 모아 거란을 건국하고 중원경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위협세력을 복속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작전으로 서북의 돌궐, 토번과 동쪽의 대진국을 먼저 평정하려고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거란과 대진국은 한기8121년(AD. 924년) 이후 끊임없이 변방에서 대립하였다. 대진국 멸망 뒤 요(거란)의 태조가 ‘동단국(동쪽의 거란국)’ 을 세우고 ‘감로’ 라 개원하여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며 유화정책을 폈으나 대진국유민들은 요와 금나라에 흡수되었고 지속적으로 고구려로 망명했다. 요나라는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였다. 대진국 멸망 뒤 유민이 세운 ‘후발해’는 한기 8172년(AD. 975년)부터 군사작전을 개시하였고, 후당에 7회의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호소하였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대조영의 후손, 1029년 동경에서 대진국 복원의 난을 일으킴)은 태조 고황제의 17세(한단고기에는 7세손이라 하였으나 오기임)의 자손이다. 유수부마 소효원과 남양공주를 사로잡고 호부, 사한, 소운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흥)요’ 라 하고 ‘천경’ 이라 개원했다. 요나라를 치기 위해 고려에 5회의 사신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했으나 고려가 거절함으로써 숙원을 달성치 못했으며 이듬해 8월 요 나라에 패망했다. 요동의 유수 ‘수보’ 는 정치가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 11년 정월, 동경의 비장 대진국 사람 고영창이 유수에게 거짓으로 외군이 쳐들어왔으니 대비한다 하여 수보를 죽이니 모두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라 하고 ‘융기’라 개원하니 요동 50여주를 거느렸다. 이후 100년 동안 대진국 부흥운동은 계속되었다.
◎ 외세外勢를 빌은 동서東西통일, 2국통일 - 통일신라
동서통일신라강역도 9산선문山禪門 신라통일반란도叛亂圖
* Daum Blog 인용
* 통일신라 역사연대표
백제는 29대 무열왕 한기 7857년(AD. 660년),
고구려는 30대 문무왕 한기 7865년(AD. 668년)에 패망
1대 박혁거세 한기 7140년(BC. 57년) - 56대 경순왕 한기 8132년(AD. 935년),
56대 992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박혁거세 |
BC.57-AD.4 |
13세 등극 국호 서라벌, 수도 금성 |
2대 |
남해차차웅 |
AD. 4 - 24 |
석탈해 사위 정사 위임, 병선 왜구격퇴 |
3대 |
유리이사금 |
24 - 57 |
6부명 개정, 성씨 내림, 도솔가 창작 |
4대 |
탈해이사금 |
57 - 80 |
국호 계림 개정, 김알지 탄생 |
5대 |
파사이사금 |
80 - 112 |
월성구축 백성이주, 주변병합 국위선양 |
6대 |
지마이사금 |
112 - 134 |
백제 연합 말갈 격퇴 |
7대 |
일성이사금 |
134 - 154 |
농본정책 경지 개간, 백성 사치 금함 |
8대 |
아달라이사금 |
154 - 184 |
현 설치, 도로 개통 內治 |
9대 |
벌휴이사금 |
184 - 196 |
탈해왕의 손자 |
10대 |
나해이사금 |
196 - 230 |
벌휴왕의 손자 |
11대 |
조분이사금 |
230 - 247 |
벌휴왕의 손자 |
12대 |
첨해이사금 |
247 - 261 |
벌휴왕 손자, 조분왕 동생, 고구려 국교 |
13대 |
미추이사금 |
261 - 284 |
김씨 왕가의 시조 |
14대 |
유례이사금 |
284 - 298 |
조분왕 큰아들, 백제와 수교 |
15대 |
기림이사금 |
298 - 310 |
조분왕 둘째 아들, 국호 신라 개정 |
16대 |
흘해이사금 |
310 - 356 |
기림왕 후사 없어 군신 추대 등극 |
17대 |
내물마립간 |
356 - 402 |
중국 문물 수입 |
18대 |
실성마립간 |
402 - 417 |
백성 추대 등극, 내물왕 태자에게 피살 |
19대 |
눌지미립간 |
417 - 458 |
牛車法 제정, 고구려 묵호자 불교 전파 |
20대 |
자비마립간 |
458 - 479 |
고구려 백제 공격 나제동맹 맺음 |
21대 |
소지마립간 |
479 - 500 |
김씨 |
22대 |
지증 |
500 - 514 |
왕 칭호 사용, 이사부 우산국 점령 |
23대 |
법흥 |
514 - 540 |
율령 반포, 연호 건원, 이차돈 순교 |
24대 |
진흥 |
540 - 576 |
순수비, 이차돈 순교, 대가야 멸망 |
25대 |
진지 |
576 - 579 |
이름 사륜 |
26대 |
진평 |
579 - 632 |
이름 백정 |
27대 |
선덕여왕 |
632 - 647 |
진평왕 맏딸, 이름 덕만, 첨성대 건립 |
28대 |
진덕여왕 |
647 - 654 |
이름 승만 |
29대 |
무열 |
654 - 661 |
김춘추, 나당연합 외교, 백제 멸망 |
30대 |
문무 |
661 - 681 |
고구려 멸망, 동해 대왕암 수장 유언 |
31대 |
신문 |
681 - 691 |
만파식적 제작 |
32대 |
효소 |
691 - 702 |
설총 이두 정리 |
33대 |
성덕 |
702 - 737 |
혜초 왕5천축국전 저술 |
34대 |
효성 |
737 - 742 |
이름 승경, 성덕왕 둘째 아들 |
35대 |
경덕 |
742 - 765 |
김대성 불국사 창건 |
36대 |
혜공 |
765 - 780 |
여자 행세, 대공 ․ 김지정 난, 신종 주조 |
37대 |
선덕 |
780 - 785 |
혜공왕 죽임, 이름 양상, 내물왕 10세손 |
38대 |
원성 |
785 - 798 |
홍수로 먼저도착 즉위, 독서출신과설치 |
39대 |
소성 |
798 - 800 |
2년 만에 병사 왕위 쟁탈전 벌어짐 |
40대 |
애장 |
800 - 809 |
숙부 김언승 왕위찬탈 시해, 해인사창건 |
41대 |
헌덕 |
809 - 826 |
친당정책, 패강 300리 장성 축조 |
42대 |
흥덕 |
826 - 836 |
완도 청해진 설치 장보고 관리 |
43대 |
희강 |
836 - 838 |
3촌 균정 척살 왕위계승, 김명의 난 자살 |
44대 |
민애 |
838 - 839 |
희강왕 추대 상대등, 왕 자살 뒤 등극 |
45대 |
신무 |
839 |
민애왕 살해 왕위 등극, 이홍 저주로 죽음 |
46대 |
문성 |
839 - 857 |
신무왕 태자, 장보고 반란, 염장 피살 |
47대 |
헌안 |
857 - 861 |
왕족 응렴 사위 삼아 왕위 계승 |
48대 |
경문 |
861 - 875 |
이름 응렴 |
49대 |
헌강 |
875 - 886 |
처용무 유행, 사치 환락 |
50대 |
정강 |
886 - 887 |
경문왕의 둘째아들, 진성여왕 오빠, 병사 |
51대 |
진성여왕 |
887 - 897 |
이름은 만, 淫行, 兵制 퇴폐, 나라 혼란 |
52대 |
효공 |
897 - 912 |
궁예와 견훤에게 영토 빼앗김, 정사혼란 |
53대 |
신덕 |
913 - 917 |
후사 없어 백성 추대 등극 |
54대 |
경명 |
917 - 924 |
신덕왕의 태자, 후당에 구원 요청 실패 |
55대 |
경애 |
924 - 927 |
포석정 백제 침공 제사 협의 중 자살 |
56대 |
경순 |
927 - 935 |
견훤 추대, 왕건에 항복, 경주事審官 餘生 |
* 대한역사는 신라의 통일을 위대한 역사로 적는다. 자주통일, 민족통일, 국토통일이라고 하여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은 창조적 통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대한역사 말살정책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입장이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로 국경을 이웃하여 끊임없이 화해와 전쟁을 반복하였다. 구지 영토 확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권의 문제였으므로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북쪽에는 힘 센 고구려가 버티고 있어서 나갈 길이 막혀있었으므로 백제와 신라는 동서로 국경을 마주한 나라끼리의 어쩔 수 없는 대결을 벌였다. 나라 밖의 영토 - 중국 동해안과 일본 전역의 영토 넓힘도, 이러한 영토 넓힘의 뜻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의 중국 요동지방과 동북부지역 그리고 일본 북부지방 경영은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으로, 백제는 중국의 요동과 일본의 동부지역, 신라가 중국 서남부지역과 일본의 서부지역을 경영한 것은 해외 진출을 꾀했던 영토 확보다. 특히 뒷날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는 백제 정복의 야심을 가졌으나 나라의 힘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이웃 나라에 동맹을 호소한다.
김춘추는 사신으로 한기 7824년(AD. 627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았으나 연개소문은 일찍이 중원(중국) 경영의 야심을 키워왔으므로 오히려 김춘추를 설득하려고 한다.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私事로움을 잊고 3국은 백성을 모아 당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이긴 뒤에 인의仁義로 다스리자’ 고 했다. 그러면서 옛 고구려 영토였으나 진흥왕대 이래 신라의 영토였던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연개소문은 김춘추가 맘대로 할 수 없는 조건을 말하여 김춘추가 집착하고 있는 백제 침공을 그만두게 하고 큰 이상에 동참하기를 바란 것이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의 조건을 ‘신하로써는 결정할 수 없다’ 고 거절했다. 연개소문은 이미 중원 경영의 이상을 백제의 상좌평 부여성충과는 합의에 이르렀으므로 신라가 동의하면 중원 도모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수나라를 이어받은 바로 뒤였고 더구나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여 나라의 기틀이 확립되지 못한 체 혼란스러웠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2년간 잡아두었는데 김춘추는 탈출을 꾀하기 위해 고구려 재상 선도해에게 뇌물을 바쳤다. 김춘추의 뇌물을 먹은 선도해는 귀토설화龜兎說話(용궁에 간 토끼와 자라)를 이용할 것을 사주하여,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고 거짓 약속을 했다. 때맞춰 김춘추를 구하려는 김유신이 국경 남쪽을 침략하자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 고구려에서 풀려나자말자 김춘추는 한기 7844년(AD. 647년) 왜倭로 건너가 백제 침공을 모의한다. 본래 왜는 백제에 우호적이었고 신라와는 적대적이었는데 왜국은 한기 7842년(AD. 645년) 타이카개신(대화개신大化改新) 즉 나카노오에(중대형中大兄) 왕자가 왜 왕가王家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던 백제계 호족豪族 소가노아루카(소아입록蘇我入鹿)를 죽이는 ‘태극전太極殿의 정변政變’ 을 일으켰다. 김춘추는 왜의 반백제계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백제 정벌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계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 딴판으로 혼란한 일본정국의 수습이 시급하였던 나카노오에의 거절로 실패하자, 진덕여왕 2년 한기 7845년(AD. 648년) 두 아들 - 문왕文汪과 둘째를 대동하고 당나라로 건너가 나당연합을 성사한다. 점령 뒤 백제를 신라가 갖는 대신 고구려를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조건이었다. 3국사기 신라본기 문무대왕조에는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내가 양 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신라에게 주어 길이 평안하게 하려 한다’ 는 영토 나눔에 대한 당 태종의 일방적인 선언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비문에서 보듯이 백제와 신라를 정벌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마음만 먹었다면 쉽게 합병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왜구의 침략에서 구원할 뿐이었는데 신라는 오직 백제 타도를 끈질기게 추구하였다.
* 김춘추의 백제 정벌을 ‘왕가王家의 사사私事로움에 집착’ 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설득하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눈을 더 크게 떠 중원을 경영하자라고 한 말은, 백제가 대야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자 김춘추의 사위 대야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古妥素가 자살한 원한을 사사로움이라고 말한 것이다. 백제의 의자왕은 즉위 다음 해에 한기 7839년(AD. 642년) 7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 미후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다음 달에는 당항성을 치는 것처럼 위장하고 윤충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가 자살했다. 화랑세기는 김춘추가 고타소를 매우 사랑했는데 딸이 죽자 ‘기둥에 의지해 종일토록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짐승이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했다’ 고 기록했다. 또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정도를 멸하지 못하랴’ 라고 원망하고 한탄했다 한다.
* 강역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라의 통일은 고조선시대의 드넓은 강역의 1/100, 고구려시대와 대진국시대의 1/50 정도다. 신라통일은 대동강 이남의 통일이다. 대륙 고구려를 중국에 고스란히 넘겨준 것이다. 그것 보다 더 통탄할 일은 신라통일부터 대한의 강역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한정된 일이다.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통일신라를 ‘대신라’ 또는 ‘후기신라’ 로 논의하며 ‘2국통일’ 또는 ‘동서통일’ 로 규정한다.
* ‘예맥濊貊은 중국민족’ 한민족 조상까지 왜곡(2006. 9. 1 중앙일보)
중국사학자 왕원광(王元光, 윈난대, 서남변강소수민족연구센터연구원)은 2005년 펴낸 ‘중국민족발전사’ 에서 ‘예맥족도 중국민족’ 이라고 주장했다. 예맥족의 일부는 나중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대한민족의 직계 조상이다. 왕원광은, 중국사에서 지금까지 자기들이 정설로 주장한 옛 만주지역 안 예맥, 숙신, 동호계열 가운데 숙신과 동호만 중국민족으로 간주했던 역사를 한 발 더 나아가 예맥족도 중국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부여족 가운데 대부분은 고구려, 대진국, 거란, 여진, 한족으로 융합되었고 일부만이 고구려를 거쳐 대한으로 들어가 오늘날의 한민족이 되었다’ (위 책 314쪽)라고 했다. 헤이룽장대학의 왕젠중 교수도 2004년 편찬한 ‘동북지구식생활사’ 에서 ‘부여는 중국 동북지구에서 가장 먼저 문명시대를 연 소수민족정권’ 이라고 하여 부여를 중국변방정권으로 간주했다. 중국의 주요논문, 특히 고대사와 관련된 논문은 국무원문화부와 국가신문출판총서의 허가나 묵인없이는 출판이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 학자의 주장은 학자 개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중국 당국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본다.
*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역사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2004년 8월 23일 한 ․ 중 양 국이 합의문을 작성했는데
(1, 2항) 한 ․ 중 양 국은 역사문제로 한 ․ 중 우호관계의 손상을 방지하고 동반자적 발전에 노력한다.
(3항) 고구려사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정치문제화를 막는다.
(4항) 중국이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대한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한다.
(5항) 양측은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고 합의하여 두 차례의 학술교류가 있었다.
* 중국은 1996년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고구려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동북공정을 시작했고, 2002년 2월 동북공정을 본격 출범하여 대한이 강력히 반발했으며 요즘에는 대진국(발해)사를 넘보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고조선사를 찬탈하려는 야욕이다. 대한은 2006년 5월 동북아역사재단특별법을 국회에서 발의했으나 다른 정쟁으로 13개월만에 늑장 통과시켰으며 8월에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확대 출범하였다.
금관총금관 단석산 신선사마애불 외세 침략도 수로왕비
* Daum Blog 인용 허황옥릉
# 한기 7857년(AD. 660년)의 초여름,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 백제군 진영은 계백장군이 5000의 결사대를 높고 험한 산을 배경으로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신라는 김유신장군이 앞장서서 백제군을 단숨에 휘몰아치려는 작전을 펴 5만 군사를 3대로 나누어 백제 진영을 세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그러나 5000 대 5만의 대결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백제군의 완강한 저지선을 뚫지 못하고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네 번, 이로 인해 신라는 군사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침통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 신라의 김유신장군 진영, 김유신장군이 병사들의 진영을 순시한다. 병사들 피로와 지친 모습으로 삼삼오오(셋, 넷, 다섯 사람씩) 앉아 있거나 누워있다. 네 번의 패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이 많았고 부상당한 병사들 또한 치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울부짖고 신음하는 처참한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묵묵히 진영을 돌아보던 김유신장군, 막사로 들어와 힘없이 의자에 앉는다.
우장군 김흠춘 : (비장한 목소리로) 반굴을 불러오라!
반굴 : (무장을 한 채 아버지 앞에 서서) 부르셨습니까?
우장군 김흠춘 : 전황을 타개할 뾰쪽한 수가 없다. 네가 나서거라!
반굴 :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김유신장군 : (칼로 마루를 치며) 다 소용없소. 이미 네 번이나 실패하지 않았소! 이 싸움은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구료.
우장군 김흠춘 : 아닙니다. 지금 이를 타개하지 못하면 전쟁이 어렵게 되고, 기벌포에서 기 다리는 소정방과 기약한 날짜를 지키지 못하면 소정방은 이를 빌미삼아 또 무슨 조건을 꺼낼지 모릅니다. 오늘 중으로 계백의 군사를 쳐부수지 못하면 전쟁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김유신장군 : 소정방은 우리가 적의 앞머리를 꺾으면 뒤늦게 병력의 손실없이 끼어들어 과 실만 주우려는 속셈이요. 모르는 바 아니지만 방법이 없어 답답하오. 섣부른 작전은 오 히려 백제군의 사기를 북돋울 뿐.
우장군 김흠춘 : (다시 아들 반굴을 돌아보며) 화랑으로써 기개를 보여라!
반굴 : 명령대로 충성하겠습니다.
# 반굴은 막사를 나와서 결사대를 조직한다. 화랑과 낭도를 중심으로 100여명의 기마결사대를 편성하여 백제군 진영으로 쳐들어간다. 김유신장군과 우장군 김흠춘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신라군의 돌격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백제진영에서 역시 100여명의 기마결사대가 마주쳐온다. 양 진영의 중간에서 마주친 양 결사대가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인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자 신라 기병대는 전멸하였고 승리한 백제군들이 자기 편 부상자와 사상자를 수습하면서 신라군의 부상자들은 가차없이 살해한다. 이를 지켜보는 김흠춘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신라군 병사들이 숨죽여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다.
김유신장군 : (비통한 목소리로 김흠춘장군을 나무란다. 김흠춘장군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다.) 부질없는 희생은 오히려 우리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하지 않 았던가!
좌장군 김품일 : 그렇지 않습니다. 군사의 사기를 살려내는 다른 묘책이 없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며) 관창을 불러라!
관창 : (아버지 김품일장군 앞에 서며) 부르셨습니까?
좌장군 김품일 : 보았느냐, 반굴의 죽음을!
관창 : 예! 장군! 분부만 내리십시오.
좌장군 김품일 : 필마단기로 적진을 무찔러라!
관창 : (엎드려 절을 올리며) 만수무강하소서!
# 관창은 막사를 나오자말자 말을 몰아 백제군 진지로 달려나간다. 신라군 병사들이 숨을 죽이며 보고 있다. 백제군 진영에서는 필마단기(혼자)로 달려오는 장수를 보자 부장 한 사람이 마주 달려 나온다. 두 사람은 양 진영 중간 지점에서 칼과 칼로 승부를 겨룬다. 칼과 칼이 부딛쳐 불꽃이 튄다. 그러나 몇 합, 백제군 부장의 칼이 크게 번득이는가싶더니 신라군 장수가 말에서 떨어져 뒹군다. 백제군 장수가 땅에 떨어져 늘어진 신라군 장수를 가볍게 움켜쥐고 백제군 진영으로 달려간다. 백제군에서 큰 함성이 황산벌을 울린다.
# 백제군 진영
부장 : (말에서 내리며 계백장군 앞에 잡아온 신라군 장수를 내팽개친다.) 다녀왔습니다.
계백장군 : 수고했소, 포로의 투구를 벗겨라! (부장이 나가 포로의 투구를 벗긴다. 앳된 소 년의 얼굴이 나온다. 아니, 저 건! 둘러선 장수들이 모두 어이없는 탄성을 지른다. 계백 장군 자리에 앉으며) 아니, 어린애잖소. 성명을 말해 보아라!
관창 : 본관은 김유신대장군의 우장군 김품일장군의 아들 화랑 관창이다. 포로로 잡힌 부끄 러움을 참기 힘들구나.
계백장군 : 나이는 몇이냐?
관창 : 열여섯이다.
계백장군 : 열여섯이라면 … (고개를 젓는다. 언뜻 머리 속에 스치는 기억에 몸서리친다.)
부장 : (계백장군을 돌아보며) 어찌 할까요?
계백장군 : (안타까운 듯) 어린애잖소, 말에 묶어 돌려보내시오!
# 신라군 진영, 말에 꽁꽁 묶인 관창이 돌아오자 병사들이 마중하여 결박을 풀고 그를 김유신 장군의 막사로 데리고간다.
좌장군 김품일 : (관창이 들어서자) 살아서 돌아오려고 했더냐!
관창 : (아버지 앞에 엎드려) 죽기로 싸웠으나 힘이 부쳤습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관창, 다 시 돌아나가서 곧 바로 무기를 바꿔들고 말에 오른다. 막사를 향해 경례를 하고 백제 진영으로 달려간다.)
# 백제 진영, 또 장수가 나와 맞는다.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신라군의 장수를 잡아간다.
계백장군 : 포로의 투구를 벗겨라! (계백장군, 깜짝 놀라며) 너는 아까 잡혀왔던 소년장수가 아니냐?
관창 : 그렇다. 본관은 신라의 화랑이다. 죽을지언정 항복하지도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계백장군 : 안타까운 일이다,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한다.) 목을 치되 정중하게 시신을 모셔 돌려보내라!
부장 : 장군! 신라의 간사한 꾀입니다. 고육지계(자기 살을 베는 아픔으로 우리 편 사기를 올리는 꾀)입니다.
계백장군 : 알고 있다. 소년장군의 죽음을 명예롭게 하라! (눈을 지그시 감는다.)
# 계백장군의 회상, 황산벌 출전의 날 새벽 계백장군의 집. 계백장군, 뜰을 거닐고 있다. 한참 뒤에 인기척이 나더니 장군의 부인이 다가선다. 두 사람 마주 보고 선다. 계백장군의 충혈된 눈을 한참 동안 마주 보고 있던 부인이 조용히 되돌아선다. 한참 동안 더 뜰을 거닐던 계백장군 동이 터오는 새벽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고는 방안으로 들어가 완전 무장을 하고 마당으로 나온다. 부인이 두 아들과 딸을 데리고 마당 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다. 계백장군 처연한 얼굴로 부인과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칼을 뽑아 들고 다가선다. 핏발이 선 눈에 불꽃이 일어난다.
# 반굴과 관창의 죽음으로 전장의 분위기는 거꾸로된다. 신라군은 분기탱천憤氣撐天(사나운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하여 성난 파도와 같이 백제군을 밀어부쳤다. 중과부적(월등하게 수가 많음)인 처지에 신라군의 사기가 되살아났으므로 제아무리 결사대라 할지라도 백제군은 계백 장군 이하 전군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백제의 싸울아비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5000 결사대는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백제도 패망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관창은 급찬으로 추증(죽은 다음에 벼슬을 높여줌)되었다.
창녕 진흥왕척경비 수로왕비릉 물고기무늬와 수로왕비 허황옥
* Daum Blog 인용 인도 남부 아유타국 물고기무늬 파사석탑비각
* 계백장군에 대한 기록은 3국사기에는 없고 ‘대동지지’ 에 ‘계백의 이름은 승이요 백제 왕가와 같은 성씨다’ 라는 기록이 있어 계백은 왕가로써 ‘부여씨’ 로 추정한다. 백제 16관등의
둘째 서열인 달솔이었다. 달솔은 흑치상지 등과 같이 부여받은 신진귀족의 최고 관등이다. 의자왕은 내부혁신을 하기 위해 계백, 흑치상지들 신진귀족을 등용하여 보수귀족을 견제했다. 계백장군의 아버지는 병관이며 좌평(국방장관)이었다. 계백장군은 의자왕과 동갑으로 문무를 함께 익혔는데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이 사냥대회를 열었을 때 두 사람은 활솜씨가 엇비슷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어느 해 사냥에서 태자(의자왕)가 꿩 3마리, 노루 1마리, 토끼 4마리를 잡았고, 계백은 꿩 2마리, 노루 2마리, 토끼 3마리와 맷돼지 2마리를 잡아 계백이 이겼으나 두 사람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서로 격려했다. 의자왕은 뒤에 ‘해동증자’ 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효도하고 무예도 뛰어났다. 늘 중국의 요동과 일본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백제의 청년들은 나이가 17, 8세에 차면 절에 들어가 의무적으로 부처님 말씀을 새기고 무예를 익혔다. 계백은 수덕사에서 수행하였다.
* 백제의 결사대 5000은 ‘싸울아비(무절武絶)’ 다. 계백은 백제 싸울아비의 우두머리였다. 싸울아비의 시작은 고조선의 천지화랑과 선배(선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 마다 나라의 사냥대회를 열어 가장 우수한 사냥꾼을 뽑아 선배로 상을 내리고 선배가 되면 국가에서 먹고 입고 사는 것을 책임졌다. 평상시에는 국가의 공공사업에 동원되었고 국가가 어려움을 당하면 조직을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가 국가방위를 책임졌다. 전쟁에 나서면 져서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싸울아비에게는 ‘8선도정신’ 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칼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쓴다.
② 전쟁에 나가면 최후의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③ 의로운 일에만 칼을 사용하며 함부로 죽이는 일은 안 한다.
④ 도전을 받았을 때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칼을 써야 하며
일단 칼을 들었으면 후회 없는 승패를 가려야 한다.
⑤ 적을 뒤에서 치지 않는다.
⑥ 칼을 들지 않는 자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
⑦ 칼을 내 몸과 같이 아낀다.
⑧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는 스스로 할복하여 그 명예를 지킨다.
* 신라에는 ‘화랑’이 있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화랑이 있었기에 지탱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화랑으로 뽑히면 글과 무예를 익히고 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가꾸었다. 화랑은 낭도들을 거느렸는데 수백 수천을 거느린 화랑도 있었다. 신라의 화랑제도는 인재 등용의 관문이었고 특히 골품제도가 엄격한 사회에서 평민이 발탁되는 유일한 신분 상승의 등용문이었다. 소문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화랑세기(김대문 지음)’ 필사본(역사학자 남당 박창화 1889 - 1962, 일본 궁내성도서관에 사서로 재직시 베낌 주장)이 발견되어 진위眞僞가 문제가 된 일이 있다. 한기 7797년(AD. 600년)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경북 청도 인근의 가슬사에 있을 때 화랑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서 평생 지닐 계명을 지어달라고 했다. 원광법사는 ‘불교에는 보살 10계가 있지만 그대들은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므로 세속 5계를 준다’ 하며 내린 화랑도의 계율이 ‘세속 5계’ 다.
① 임금은 충성으로 섬기고(사군이충事君以忠),
② 어버이에게는 효도를 다 하고(사친이효事親以孝),
③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교우유신交友有信),
④ 전쟁에서는 물러서지 말며(임전무퇴臨戰無退),
⑤ 죽임은 가려서 해야 한다(살생유택殺生有擇).
◎ 고구려의 멸망과 ‘선비’
* 당나라는 한기 7857년(660년) 7월 13일 13만 대군을 휘몰아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장안에서 출병한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기벌포에 상륙하여 신라 5만 군사와 합세 단숨에 백제를 함락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고구려를 협공한다. 고구려는 대전했으나 당의 장수 이적에게 크게 패한다. 다시 2개월 뒤에 당군은 설필하력이 4만4000 보강병력을 인솔하고 평양성에 도착하여 이적과 합류하여 1개월 간 평양성을 포위한다. 또 4월에는 이들 군사를 총체적으로 재편하여 35군단으로 편성한다. (수나라가 1백1십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24개 군단이었음을 감안하면 공격군은 20만이 훨씬 넘었으리라 짐작한다.) 이에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남산에게 항복문서를 주어 항복하려 했으나 둘째 남건이 성문을 닫아걸고 강력히 저항한다. 그러나 남산의 가장 신임했던 부하 신성이 이적과 내통하여 스스로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고구려 보장왕은 자살에 실패한 남산과 수령 98명을 대동하고 백기를 들고 항복한다. 한기 7865년(AD. 668년) 12월 당나라는 대대적으로 항복의식을 거행하고 보장왕에게 사평태상백완외동정을, 남산에게는 사재소경, 신성은 은청광록대부, 남생은 우위대장군에 임명하여 회유하였고 남건은 검증으로 유배한다. 곧 당 고종은 5부, 16성, 69만호였던 고구려 행정체제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개정하고 평양에 안동도독부를 설치했으나 통치에는 실패했다. 고구려 유민들이 크게 저항운동을 전개했고 복속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어 대중상의 대진국으로 고구려는 다시 계승되었다.
* 고구려는 강력한 통치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한기 7862년(AD. 665년) 사망하자 내분이 일어났다. 동생 연정토와 연개소문의 세 아들 - 남생, 남건, 남산 간의 권력 다툼이었는데 이는 연개소문의 강력한 통치에 짓눌려 있었던 호족들이 억눌렸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권쟁탈이었다. 이러한 내부상황에서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직면한 고구려는 대비책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잃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권력투쟁에서 불리해지자 한기 7866년(AD. 669년) 9월 당나라로 망명하여 벼슬을 얻고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군의 앞장을 선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12개 성읍 3543명의 백성들을 끌고 신라에 투항하여 역시 고구려정벌군의 안내를 맡는다.
*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 뒤 지도층을 당나라에 인질로 잡아갔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고선지장군과 이정기장군이다. 고선지장군은 중국의 서역 개척에 큰 공헌을 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정기장군은 고구려가 망한 98년 뒤 산동지방에 유민왕국을 세워 55년 간 통치했다. 장군은 본래 산동지역 15주 치청절도사였는데 한기 7952년(AD.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상관이요 이모의 아들, 이종사촌이었으나 고구려 유민들을 학대한 후희일을 척살하고 ‘치청국’ 을 건설하였다. 치청국은 한기 7962년(AD. 765년)에 건국하여 한기 8016년(AD. 819년) 까지 55년 간 군사강국으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이정기장군이 49세에 한창 당 정벌을 준비하던 중 등창으로 죽었고, 이어 아들 이납이 등극하여 국호를 ‘제’ 라 하였다. 제나라는 양자강 하류의 물류교통의 이점을 확보하여 당나라 장안의 물자보급을 끊었으므로 장안주민들이 1년 동안 굶주림에 시달렸다. 당 덕종은 제나라의 세력에 밀려 수도를 장안에서 서북쪽 봉천으로 도망가다싶이 옮겼다. 3대는 이사고로 이납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양주를 점령하였다. 4대에 이사고의 이복동생 이사도가 즉위하여 낙양과 화음을 공략하였다. 한기 8016년(AD. 819년) 도지병마사 유오(중국계)가 이사도와 아들을 암살함으로써 제나라는 망했다. 당 조정은 3일 동안이나 잔치를 열어 제나라의 멸망을 축하했으며 고구려계 장수 1200명을 학살했다. 전거典據는 ‘신 ․ 구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구’, ‘태평어람’ 이다.
* 학살된 장수 대부분이 ‘조의’ 였다. 고구려는 조의라는 무사집단을 국가에서 길렀다. 고조선의 천지화랑에서 비롯한 국가무사다. 조의는 국가행사인 사냥대회에서 가장 우수한 사냥꾼을 가려 ‘선배’ 로 임명하고 국가에서 의식주를 책임졌다. 온달장군이 그 한 예다. 선배는 평화시에는 공공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국가 위기에는 수하조직을 모아 출전하여 패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선배 3만명의 우두머리였다. 유명한 안시성전투에서 앞장서 수나라 113만 대군을 물리친 ‘승군’이 조의였다.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승군으로 오해한 것이다.
남산골 수막새 단양 진흥왕적성비 영일 냉수리비 임신서기석
도깨비형상기와 * Daum Blog 인용 壬申誓記石
◎ 통일신라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
* 골품제도骨品制度
왕위를 이어가는 성골聖骨은 인물이 고갈되었고, 지도층이었던 진골眞骨은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되었으므로 통일신라 말기에는 골품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신귀족세력이 등장하였다. 호족豪族들이 지방의 행정과 군사력, 재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왕권이 약화되어 왕권을 복원하려는 의도였다. 기존권위를 부정하는 국토의 지방중심 재편을 주장하고 풍수지리설로 사상적 배경을 삼아 진골 16등급을 폐지하고 반귀족적 6두품을 신설하여 정치적으로 신귀족과 결합하였는데 그 배경은 유교정치이념의 정착이었다.
* 중앙정치조직과 지방행정조직
신문왕 때 공장부와 예작부를 설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으므로 집사부와 시중의 위상이 높았다. 왕권화 과정에서 유교정치를 이념으로 도입했는데 귀족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학에 견식이 뛰어난 6두품 집단이 국왕과 손을 잡고 귀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지방행정조직은 신문왕 때 9주 5소경의 지방행정제도 완성했는데 9주를 편성하여 민족융합책으로 관리를 골고루 등용하였다. 호족의 발호를 제어하기 위하여 상수리제도라는 인질제도를 실시하였다. 천민을 위한 향부곡제도를 설치했다.
* 군사조직
지방군은 10정으로 9주에 1정씩 배치하였고 수도방위군이 있었다. 중앙군은 9서당으로 편제하고 신라, 백제, 고구려인을 혼합 편성하여 민족융합을 꾀하였다. 중앙군당은 9서당으로 유민을 참여시켰는데 이는 견제와 회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 토지제도와 경제체제
귀족녹읍(토지에 대한 조세공납과 노동력 수취권을 귀족에 위임하는 제도)을 폐지하고 관료전(조세와 공물 수취권만 부여하는 제도)을 지급하였다. 융성의 절정기였던 성덕왕은 정전과 민전제도를 설치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함으로써 귀족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경덕왕 때 귀족들의 반발로 다시 녹읍을 부활했다. 이는 왕권의 약화를 뜻한다. 경제체제는 귀족중심으로 귀족들이 식읍과 녹읍 그리고 목장을 소유했다. ‘신라장적(경덕왕 755년의 기록을 1933년 일본에서 발견)’ 을 만들어 노동력과 생산력을 철저히 관리하였는데 정창원(청주 부근) 4개촌의 생산력을 3년 마다 기록했다. 촌주가 작성하였으며 내용은 인구를 연령별, 남녀별 6등급으로 나누고, 호수는 9등급으로 분류했다. 전답, 노비수, 뽕나무, 잣나무, 우마의 수를 기록한 문서다.
* 문화, 종교, 예술
독서3품과讀書三品科를 계획하여 대물림의 관료체제를 개선함으로써 왕권강화를 시도했으나 진골의 반대로 실시하지 못했다. 자주적 한문학을 개발하였으며 김대문과 6두품 출신의 최치원 같은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종교는 불교로써 5교(교종敎宗)는 주로 중앙귀족의 신앙으로 이를 통해 조형미술 발달을 가져왔으며 전통과 권위의식을 강조했다. 9산(선종禪宗)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목적으로 지방호족들이 선호했으며 교종에 대항하는 신앙이었다. 화엄종은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부석사에서 개설했다. 화엄사상을 주체로 하였으며 전제왕권 확립에 기여했다. 원효대사는 법성종을 창시하여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주체화하였고 불교사상의 체계화에 기여했다. 또 그는 종파 간 융합을 시도했으며 대중화를 꿈꾸며 정토사상을 추구했다. 예술은 안압지 축조에서 보듯이 조경예술이 뛰어났으며 조화된 자연미를 추구했다.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금동약사여래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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