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12화 조선시대
◎ 성리학性理學의 나라, 조선朝鮮
조선 전도全圖 불후不朽의 명작名作
* Daum Blog 인용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조선 역사연대표
1대 태조 한기 8589년(AD. 1392년) - 17대 순종 한기 9107년(AD. 1910년),
27대 518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태조 |
AD.1392-1398 |
이성계, 위화도 회군, 왕조 건국 |
2대 |
정종 |
1398-1400 |
사병私兵 3군부 편입, 이방원에게 선위 |
3대 |
태종 |
1400-1418 |
왕자의 난, 창업 기반 구축 |
4대 |
세종 |
1418-1450 |
집현전 훈민정음, 측우기, 4군 6진 3포 |
5대 |
문종 |
1450-1452 |
유교적 이상정치, 문화 발전 |
6대 |
단종 |
1452-1455 |
숙부 수양대군 선위, 영월 유배 노산군 |
7대 |
세조 |
1455-1468 |
왕권 확립, 경국대전 집필, 관제 개혁 |
8대 |
예종 |
1468-1469 |
경국대전 완성 |
9대 |
성종 |
1469-1494 |
승유억불, 문물제도 완비, 인재 등용 |
10대 |
연산군 |
1494-1506 |
무오 ․ 갑자 ․ 병인사화, 중종반정 폐위 |
11대 |
중종 |
1506-1544 |
조광조 혁신정치 실패, 기묘 ․ 신사사화 |
12대 |
인종 |
1544-1545 |
현량과 부활 |
13대 |
명종 |
1545-1567 |
을사 ․ 정미 ․ 을유사화, 을묘왜변 |
14대 |
선조 |
1567-1608 |
당쟁, 임진왜란 |
15대 |
광해군 |
1608-1623 |
명 ․ 후금 양면정책, 인조반정 폐위 |
16대 |
인조 |
1623-1649 |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
17대 |
효종 |
1649-1659 |
청나라 볼모 8년, 북벌정책 추진 |
18대 |
현종 |
1659-1674 |
남 ․ 서인 당쟁, 선기옥형, 금속활자 |
19대 |
숙종 |
1674-1720 |
남 ․ 서인 당쟁 기사사화, 백두산정계비 |
20대 |
경종 |
1720-1724 |
신임사화 당쟁 절정 |
21대 |
영조 |
1724-1776 |
탕평책, 균역법, 신문고, 사도세자 비극 |
22대 |
정조 |
1776-1800 |
탕평책, 규장각, 새 활자, 실학 황금시대 |
23대 |
순조 |
1800-1834 |
안동김씨 세도, 천주교 탄압, 홍경래 난 |
24대 |
헌종 |
1834-1849 |
천주교 탄압 기해사옥, 안동김씨 세도 |
25대 |
철종 |
1849-1863 |
안동김씨 세도정치, 진주민란 |
26대 |
고종 |
1863-1907 |
대한제국, 동학혁명, 대원군, 열강 각축 |
27대 |
순종 |
1907-1910 |
35년 간 치욕의 일제식민지시대 |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고려 말기는 동북아 정세가 요동을 치는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일어나 원나라를 치고 명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 북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친원 ․ 친명세력으로 대립하였는데 명 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한기 8585년(AD. 1388년) 쌍성총관부 관할로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의 직속령으로 한다는 일방적 통고를 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최영 장군은 이참에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드디어 우왕 14년 최영장군은 8도도통사로써 좌군도통사 조민수장군, 우군도도통사 이성계장군을 거느리고 요동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이성계장군은 ‘4불가론不可論’ 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첫째,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과도기라 하나 고려의 군사로 대국 명나라를 친다는 것 은 불가하다
둘째, 한창 농사철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에 지장을 주고
셋째, 원정을 틈타 왜적倭敵이 침입한다면 그 또한 어려움이며
넷째, 장마철이라 주무기인 활의 아교가 녹을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최영장군은 이성계장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병했다. 마지못해 출병한 이성계장군은 압록강 안 위화도에서 장마를 피해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내 회군하여 최영 등 반대파를 제거하였으며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웠다가 다시 공양왕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였고 왕은 허수아비였다. 결국 이성계는 조준과 정도전 등의 추대로 고려왕국을 종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왕사 무학 초상화 몽골 추장 징기스 칸의
* Daum Blog 인용 손자 쿠빌라이 칸
# 이성계와 무학대사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무학대사는 1353년 공민왕 때 원나라 연도에 수행 차 갔다. 연도에는 인도인으로써 가섭존자의 108대 후계자였던 스님 지공이 있었는데 무학대사는 나옹선사와 함께 지공스님에게 수학했다.
1881년 고종 18년 승려 우송이 쓴 회룡사중창기에는 1398년 태조 7년 함흥에서 한양으로 가던 중 이성계가 왕사 무학대사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그 때 무학대사는 1394년 정도전의 미움과 시기를 받아 회룡사 토굴에 은거하였는데 태조가 방문하자 절을 중창하고 임금이 돌아갔다는 뜻의 회룡사라고 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1250년 원나라 몽골에 투항하여 다루가치(지방관, 총독) 벼슬을 하고 옷치킨가家로써 고려계 몽골 군벌가문이 되었다. 조부 이춘은 보안테무르, 큰아버지는 타스부카, 아버지 이자춘은 울루였다. 가문은 고려의 북벌을 돕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왕조를 감시하는 2중적 태도를 지녔는데 원나라가 고려의 발흥을 제지하기 위하여 고려군 감축을 도모하자 고려가 국방력이 쇠약해짐을 틈타 가문의 군대를 강군으로 양성하였다.
나옹선사가 무학대사와 함께 길을 걷다가 좋은 산소자리를 발견하고 이야기 하는 것을 이성계의 청지기가 듣고 이성계에게 전하여 이성계가 나옹선사에게 산소자리를 천거해주기를 바랬으나 나옹선사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찾아 산소자리를 물었고 무학대사가 점지한 곳, 왕이 나온다는 길지에 아버지의 묘를 썼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인연은, 서산대사의 글에 우왕 10년(1384년) 무학대사가 함경도 설봉산 석왕사 토굴에 은거하였을 때 근처를 지나던 이성계가 한 꿈을 얻어 이를 해몽하려고 하였다. 주위에 물으니 한 노파가 영험타하여 찾았으나 노파는 없고 딸이 100냥을 주면 해몽하겠다 하여 주었더니 개꿈이라고 하였다. 뒤늦게 돌아온 노파가 꿈 이야기를 듣고는 손사래를 치며 100냥을 돌려주고는 자기는 그 꿈을 해몽하기 어려우므로 동내 뒷산 토굴에 은거하는 8만대장경을 통째로 외우는 얼굴 새카만 중을 찾아가라 일렀다. 이성계가 토굴을 찾았으나 중은 가부좌를 틀어 묵상하는 자세로 이성계가 몇 번이나 절을 했는데도 눈도 뜨지 않았다. 냉대에 노한 이성계가 칼을 빼들고 목을 치겠다고 엄포를 놓자 중이 비로소 꿈 이야기를 허락했다.
‘간밤의 꿈에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서까래 셋을 짊어지고 나왔다. 닭이 울고 꽃이 떨어지 고 있었다.’
‘등에 서까래 셋을 졌으니 임금이 될 꿈이라. 닭이 울면 새 날이 오고, 꽃이 떨어지니 열매 를 맺으리라.’
김일훈의 신의원초에 있는 이야기인데 얼굴 까만 중이 훗날 조선의 왕사가 된 무학대사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 꿈을 해몽한 무학을 찾았다. 경기, 황해, 평안감사를 동원하였으니 무학은 행방이 묘연하였는데 수소문 3년 째 곡산(전남 곡성) 고달산 초막에 은거하는 무학대사를 찾아냈다. 신하를 보냈으나 오지 않자 왕이 가서 무학대사를 맞아들여 왕사로 삼았다. 칭호는 대조계종大曹溪宗 종사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변지무애辯智無碍 부종수교扶宗樹敎 홍리보제弘利普濟 도대선사都大禪師 묘엄존자妙嚴尊者다.
또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파적기가 전해내려오는 바, 어느 날 태조가 입궁한 무학대사와 마주 앉았는데 태조가 장난삼아 슬며시 농담 방담을 주문했다. 그러자고 했다. 태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학대사가 얼굴이 까맸으므로 얼굴에 빗댄 농담이었다.
‘대사는 오늘 보니 마치 돼지를 닮았구료.’
무학대사가 정색을 하며
‘폐하께서는 마치 부처님 같사옵니다.’
‘아니, 대사. 나는 농담을 하자고 대사를 돼지라고 했는데 부처님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요.’
‘농담이옵니다.’
‘무슨 농담이 그렇소. 흥이 다 깨지지 않았소 그려.’
‘폐하,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이옵니다.’
* 태조 이성계는 북방 강역의 평정뿐만 아니라 왜구를 물리쳐 크게 공을 세운 적이 있었다. 전남 보성 득량의 칼바위전설에 이성계의 동굴 수련 이야기가 전해온다. 거대한 바위가 칼날을 하늘로 치켜든 형상의 칼바위 아래 사방 10여미터의 동굴이 있는데 이성계가 산천을 주유하면서 몇 달 동안 머물렀다는 전설이다.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 전국 방방곡곡의 명산 30여 곳을 모두 순례하였다. 산신의 계시를 받겠다는 명목이었으나 그 가슴 속에는 왕건 태조가 도선국사로부터 인수한 선기옥형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려 말 고려의 신궁에서 선기옥형이 사라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비밀이었다. 선기옥형은 고려 24대 원종 때 고려의 신궁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 해에 청 태종의 남한산성 정복으로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다. 왕이 청 태종에게 3 ․ 6대례의 예로써 항복을 하였는데, 3 ․ 6대례는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 할 때마다 머리를 두 번씩 굽히는 고조선시대 이래의 큰 절 예법이었다. 왕이 대례를 하는데 머리를 깊이 굽히지 않는다고 청 태종이 질책하여 왕은 언 땅에 이마를 찍어 휴혈이 낭자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왕의 이름에 ‘충성할 충忠 자’를 쓰게 된다. 몽골에 충성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에 전후하여 선기옥형이 사라졌다. 선기옥형이 사라졌다는 것은 고려가 국운이 다 했다는 예언이기도 했다. 야심에 찬 그리고 국제정세에 누구보다 능한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증거다. 꿈의 해몽이나 지공스님이나 나옹화상, 무학대사의 전설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대한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자 마침 기회가 왔다. 최영장군의 북벌정책이었다. 4대불가론은 이성계의 모화사상을 대변한다. 위화도 회군은 빌미였다. 이성계는 고려 말기의 국정의 문란과 혼란을 간파하고 고려의 쇄락을 예견했다. 함경도 호족으로써 사병을 주축으로 강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적 관계에 있었던 최영장군과는 다른 복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국제정세를 구실로 삼아 4대불가론을 설파하며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회군을 단행하자 이성계는 반대파인, 그러나 국정의 대세를 쥔 최영장군 일파를 전광석화 같이 제거했다. 혼란과 실정으로 국운이 스러져가는 고려는 500년 왕업이 비참하고 허망하게 무너졌다.
이성계는 창업 이후 끈질기게 선기옥형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태종 때 개경의 한 농부가 대동강변에서 발견한 고려의 ‘천상분야열차각석’ 을 바치자 이를 근거로 선기옥형을 제작했다. 그 이후 여러 번 선기옥형을 제작하였는데 지금 대한에 비치된 3개는 조선 중기 때 제작한 선기옥형이다.
◎ 선기옥형璿璣玉衡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재승)
* 천부경의 사상을 담고 있고, 그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용도用道 - 구조에 집약集約되어 있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질서를 본받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있다. 즉 위(천문天文)를 보고 아래(지리地理)를 보며 다음에 자신(인간人間)을 보고 행行하라는 것이다. 형이하학적 용도로써는 천지운행天地運行의 원리를 담고 있는 수리적이치를 바탕으로 7정政(일월日月 +금목수화토성星)과 28숙宿의 운행을 관측하고 4계절 24절기의 기상변동을 예측한다. 이로써 국가적 공공사업이나 사회적 변동을 대비하는 기능을 하였다. 수행이 뛰어나 심안이 계발된 사람이 운용하였으나 이는 천기天機로써 매우 신중하였다. ‘선기는 천체를 관측하다는 뜻이고 옥형은 옥으로 만든 저울을 뜻’한다. 후세에 혼천의渾天儀라고 하였다.
* 선기옥형은 중국의 서경書經 제 1편 우서虞書 제 2장 순전舜傳에 처음 나온다. 순舜 임금이 요堯 임금으로부터 종묘에서 첫째 달 첫째 날 제위를 선양받고 맨 처음 한 일이 선기옥형을 살펴 7정政(해, 달, 금목수화토성)을 바로 잡았다. 그런 다음 하느님(상제上帝)께 제사를 올리고 하늘과 땅과 4시時에 제사지냈으며 산천과 여러 신들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4000년 전 요순시대에 선기옥형이 존재했다면 그 기원은 약 1만년 전 한배검께서 주재주로써 천부경의 진리를 밝혀준 개천의 시대로 본다. 그 후 선군시대로 전승되어온 선기옥형이 요순을 통하여 중국민족에게 전파된 것이다.
*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요순堯舜시대에 이미 선기옥형이 존재했다. 기원은 1만년 전 한배검(대황조)께서 주재주(主宰主, ●)로 천부경의 진리를 밝힌 개천開天의 시대다. 그 뒤 천부의 이치가 원방각(圓方角, ⊗)으로 표현되었던 천부인天符印시대, 복희伏羲임금시대를 거치며 약 5000년 전 지금과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고 본다. 그 뒤 선군시대로 전승되어 요순을 통하여 중국민족에게 전파된 것이다. 현재 중국에 2, 3종이 남아있고, 한국에는 경북 도산서원에 퇴계 이황이 제작한 목제 혼천의와 창경궁의 동재 소형 혼천의가 남아있으며 세계 유일의 기계 추동장치를 응용한 선기옥형이 - 조선시대 현종 10년, 한기 8866년(AD. 1669년) 10월 4일 관상감 천문교수 송이영이 제작 -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중국에서는 고대시대의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說에 기초하여 관측기구를 만들었는데 선기옥형, 혼의기渾儀器, 혼의로 부른다. 한기 7093년(BC. 104년)에 역법曆法을 개량하였는데 관측기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 대한에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고조선시대의 원형(천부인天符印)을 열국시대 고구려에서 복원하여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 의상조儀象條’ 에 세종의 명으로 정초鄭招와 정인지鄭麟趾 등이 고전을 연구하고 이천李天과 장영실蔣英實이 공역工役을 감독하여 한기 8635년(AD. 1438년) 세종 20년에 혼상渾象, 혼의渾儀 등을 비롯한 여러 천문의기天文儀器를 만들었다. 혼천의는 원元나라의 학자 오징吳澄이 쓴 찬언纂言에 기재된 바에 따라 칠목漆木으로 만들었고 다시 구리를 부어 만들었다. 한기 8745년(AD. 1548년) 명종 3년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혼천의를 만들어 홍문관弘文館에 두었다. 한기 8798년(AD. 1601년) 선조 34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에게 명하여 혼천의를 만들었다. 한기 8854년(AD. 1657년) 효종 8년에는 최유지崔攸之가, 한기8866년(AD. 1669년) 현종 10년에는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潁이 각각 혼천의를 만들었다. 이는 물을 이용하는 수격식水擊式이었는데 송이영이 만든 것은 자명종自鳴鐘의 원리를 응용하여 추錘의 운동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국보 제 230호로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영국의 과학자 일행들이 탐방하였을 때 단장이었던 니덤이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에 모형을 진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혼천의에는 지평선, 자오선, 적도, 회귀선, 극권極圈, 황도黃道 등이 포함되어 있고 두 추의 운동에 의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여러 개의 톱니바퀴로 연결되어 있으며 6합의合儀, 3진의辰儀, 4유의의 3부분과 이것들을 밑에서 받치는 용주龍柱, 별운鱉雲, 십자수준十字水準으로 되어 있다. 한기 8884년(AD. 1687년) 숙종 13년 이민철이 현종대에 만든 것을 중수했으며 한기 8901년(AD. 1704년)에는 안중태安重泰, 이시화李時華 등이 다시 만들었고, 한기 8929년(AD. 1732년) 영조 8년에 안중태가 다시 고쳤다.
* 조선시대에서는 권근의 감독 하에 고구려 ‘천상도天象圖’ 를 바탕으로 새로운 천상도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가 한기 8592년(AD. 1395년)이었다. 약 1000년 만에 새 천상도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지구의 자전축은 72년마다 1도씩 이동하며 춘분점春分點과 추분점秋分點이 변하게 된다. 이 이동을 세차운동歲差運動이라고 한다. 1000년이면 세차가 14도 정도 변했으므로 이 변화를 반영해 조선 초기에 새 천상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업데이트된 천상도였다.
조선이 권근과 같은 일급 학자를 동원해 새 천상도를 만드는 데 특별히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개국이 하늘의 뜻이었음을 정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것은 쿠데타가 아니라 하늘의 명을 받은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이 천상도였다. 이때 하늘이란 '인격적인 상제' 가 아니라 천문(天文), 즉 별자리를 지칭한다. 천상도는 일종의 왕권천수도王權天授圖였던 셈이다. (Daum Blog, 미주학당 조용헌)
* 조선시대 필사본 천문도‘건상열차분야지도乾象列次分野之圖’는‘건’이‘천’과 같은 뜻이므로 국내 최고 천문도인 국보 228호 천상분야열차지도각석天上分野列次之圖刻石과 닮았는데 더 제작연대가 빠르다. 고려사에‘탁월한 천문학자 오윤부(? - 1305년)가 일찍이 스스로 천문을 그려 바쳤더니 일자日者(천문학자)가 다 취取하여 이를 본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천문도는 고려 때 천문도를 참고하여 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천상도를 제작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시간과 계절을 알기 위해서였다. 옛날에는 요즘과 같은 손목시계나 달력이 없었으므로 시간과 계절을 알기 위해 하늘의 별을 봐야 했다. 초저녁과 새벽에 어느 별이 떠오르는지를 보고 농사짓는 시기를 파악했다. 천상도에는 이처럼 다양한 의미가 숨은 그림처럼 들어 있다.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재승).
* 조선은 억불승유정책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여 이를 정치이념으로 사회가 안정되었다. 성리학은 선비사상과 부덕으로 발현되었으며, 충효사상은 국가 왕권주의와 부권사회의 기반이었다. 안정된 시대로써 학문이 진흥되었고 정치는 발전하였으며, 고려말기에 민란으로 표출되었던 백성과 노비의 위상도 제한적이었지만 신장되었다. 밖으로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었었으나 어려운 가운데서 이를 타개하였으며 승병, 민병들이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민중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안에서도 당쟁의 소용돌이가 여러 번의 사화를 일으켜 국가와 사회에 파장을 불러 일으켰으나 이는 격동기의 정치치적 현상으로 정치 발전의 새로운 창조적 생성의 과정이었다. 정치적 담론이 무성한 일을 남인, 서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로 나뉘어져 4색 당파가 논쟁과 투쟁으로 국가질서를 문란케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역사 해석은 재고해야 한다. 지나친 경쟁의식이 뒤에 사화를 일으키는 부정적 붕당으로 변질되었지만 정치는 담론과 대화 그리고 타협의 생성이요 창조가 아니겠는가? 이를 부정적으로만 ‘싸움으로 날을 세운’, ‘당파와 개인의 정치권력을 위한’, ‘내분으로 4색 당파로 찢기고 나뉘어진’ 의 시각은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에 의한 한민족 깍아내리기와 역사 왜곡이요 역사 거짓으로 만들어내기의 산물이다. 조선시대 역사는 시대적 진실과 이상 그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이상주의 국가 건설 보다는 현실 정치)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후세에서 지나온 역사를 고찰하는 태도는 시대적 진실을 역사를 통해 이해하고 미래지향적 역사관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
성리학의 일반적인 사회의식은 ‘선비사상과 부덕婦德’으로 요약된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 는 선비정신은 고조선 천지화랑정신의 학문분야의 계승이다. 열국시대를 거치면서 쇠퇴하여 무예부문이 퇴조하고 문약文弱(글에 치중함으로써 신체 단련에 소홀함)에 흐르게 되었으나 선비정신은 조선시대를 관류하는 강건하고 투철한 지성인의 이상이었다. 부덕은 자유로와서 문란해진 사회기강을 세우는 방편이었다. 부덕이 여성을 억압하고 지나치게 절제를 강요하였으나 외유내강外柔內剛(자신을 다스리는데 강함과 부드러움을 조절함)의 정신은 조선시대 가정으로부터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3강5륜三綱五倫과 7거지악七去之惡은 대표적인 관습이다.
* 3강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을 다 하고),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버지를 받드는 일은 자식의 도리며)
부부유강夫爲婦綱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아내의 의무다)
* 5륜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는 의리로 맺어지고)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은 피를 나눔이며)
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 사이에는 서로 역할이 다르고)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는 위아래 질서가 있고)
붕우유신朋友有信 (벗을 사귀는 데는 믿음으로 한다)
* 칠거지악 - 대대례기大戴禮記의 본명편本命編에 있는데 7출지악七出之惡이라고도 하며 3종지도三從之道(어려서는 아버지를 받들고, 시집을 가면 남편을 뜻을 쫓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하는 여자의 인습)는 여성의 사회적 멍에였는데 일곱가지 죄를 지으면 쫓아낼 수 있다는 사회적 계약, 더불어 3불거三不去 - 조강지처糟糠之妻(좁쌀과 조를 먹고 살았던 어렵게 같이 살아온 아내)를 쫓아내서는 안 되는 대안이 있었는데
첫째,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돌아갈 친정이 없거나
둘째, 시부모의 3년 상喪을 같이 치렀거나
셋째, 시집 올 때는 시집이 가난했는데 온 뒤에 부유해진 경우에는 쫓아내지 못했다.
① 불순구고不順舅姑 (시부모 순종하지 않음)
② 무자無子 (아들을 낳지 못함)
③ 음행淫行 (음란함)
④ 질투嫉妬 (남자들은 첩을 둘 수 있었고 기생제도를 만들었음)
⑤ 악질惡疾 (고칠 수 없는 병)
⑥ 구설口舌 (말이 헤품)
⑦ 도절盜竊 (도둑질)
* 훈민정음 원본 서문
國之語音(국지어음이) 異乎中國(이호중국하야), 與文字(여문자로) 不相流通(불상유통할새), 故(고로) 愚民(우민이) 有所欲言(유소욕언하여도), 而終不得伸其情者(이종부득신기정자) 多矣(다의라). 予(여), 一爲此憫然(일위차민연하야) 新制二十八字(신제이십팔자하노니), 欲使人人(욕사인인으로) 易習(이습하야) 便於日用耳(편어일용이니라)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못 배운 백성들이 제 뜻을 전달하고자 해도 그 뜻을 바로 기록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많으니라. 이를 안타까이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게 하여 날로 사용함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 조선 세종시대 창제한 훈민정음은 고조선 선군시대 가림다加臨多(가림토土)와 같은데 가림다는 선군 37세 가륵 2년 한기 5016년(BC. 2181년) 기록에,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고대의 상형문자)이 있다고 해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다’ 라고 하였다. 대한 고대문자, 한글 자모와 똑 같아 한글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몇 년 전 일본에서 발굴된 구리거울에도 가림다와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단고기의 가림다 중국 산동성 한태시桓太市 출토 가림다 조각품
* Daum Blog 한류 인용 탄소 측정 BC. 1850년 경 추정
*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지식인과 정치가 포섭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렸으나 고려의 신하들은 끝내 거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두문동 사건과 정몽주가 대표적인 사례다. 방원은 정몽주를 설득하려고 ‘하여가’ 를 불러 의중을 살폈으나 포은은 ‘단심가’ 로 화답하여 단호하게 회유를 물리쳤다.
방원의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을 누리리라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사6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
사6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항 6명의 충절로써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다. 세종대왕은 아들 문종의 병약함을 걱정했고 만약의 경우 나이어린 손자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 종실宗室의 안위를 염려했다. 그래서 붕어崩御(죽음)하기 전에 중신重臣들을 불러 고명顧命(임금이 죽기 전에 신하들에게 뒷일을 부탁함)을 내렸다. 문종은 세종대왕 말년부터 정사를 처리하였는데 일의 처리가 명확하였다. 그러나 염려한대로 재위 2년 만에 요절夭折(일찍 죽음)하고 나이 어린 단종이 12세로 등극하자 김종서와 황보인 등 중신들이 국가대소사를 관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황표정치黃標政治’ 다. 황표정치는 인물을 천거할 때 3배수를 추천하는데 어린 단종이 식별하기 쉽게 천거薦擧(추천)할 사람 이름에 노란 표식을 붙여 장계狀啓(추천서)를 올렸다. 단종은 노란 표만 보고 낙점落點(임명)을 했다. 신권臣權이 왕권王權을 능가한 상황에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아들로 뛰어난 자질을 지녔는데 왕권을 회복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계유정란癸酉靖亂(계유년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으로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뜻있는 신하들과 유생들이 왕위 찬탈에 반발했다.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환영연에서 운검雲劒(임금 호위무사)으로 뽑힌 무장武將들이 때를 보아 세조를 베고 단종을 복위復位(다시 왕으로 추대)하려는 비밀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모사謀士 한명회가 이를 눈치채고 갑자기 환영연에서 운검을 폐지하는 바람에 거사일을 연기했는데, 위험을 느낀 김질의 고발로 모의는 좌절되었고 모의 주도세력은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부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성삼문은 국문鞠問(심문)을 당하면서 세조를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했다. 세조가 내린 봉록(월급)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곳간에 쌓아두었다. 능지처참陵遲處斬(네 팔과 다리를 네 마리의 소나 말에 묶어 각기 네 방면으로 채찍질을 하여 사지四肢를 찢어죽이는 형벌)을 당하면서 절명시絶命詩(죽으면서 짓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북소리 둥둥 갈 길을 재촉하는데
서녘 하늘에 해는 저무는구나
황천皇天(하늘나라)에는 주막이 없다는데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잘꼬
백두산정계비 청구도 정문부 장군상과 북관대첩비
* Daum Blog 인용
가문家門(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뿔뿔이 흩어져 망함)를 당할 것을 예상한 신숙주의 부인은 미리 목을 매달아 죽었으나 신숙주는 변절하여 영화를 누렸다. 사회에서는 빨리 상하는 녹두나물에 신숙주의 이름을 붙여 ‘숙주나물’ 로 풍자諷刺(비꼬며 비웃음)하였다.
생6신은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인데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草野(산과 들, 시골)에 묻혀 살았다. 김시습이 신숙주의 집을 찾아와서 친구가 죽었노라고 상복을 입고 곡을 한 예화가 전한다.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국가와 왕에 대한 충절과 신념을 웅변한다.
* 거북선은 조선시대 초기에 만든 귀선龜船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장군이 전쟁을 대비하여 무장을 정비할 때 돌격선으로 사용하고자 귀선을 재정비했다. 임진왜란 때 실전에서는 3척이 활동하였고 철갑선으로써 공격선의 역할은 막강하였으나 해전의 주체는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이 전쟁의 주체가 된 데는 판옥선의 크기와 바닥의 구조다. 판옥선을 개발하여 전함으로 투입한 것이 이순신장군 해전 승리의 큰 요인이다. 중국과 일본의 전함은 바닥이 앞 뒤로 뾰쪽하여 침몰의 위험이 적고 깊은 물에서는 운용이 좋으나 기동성이 떨어졌다. 우리나라처럼 해안이 긴 해변에서는 움직임이 어려웠다. 우리나라 전함, 판옥선은 배 바닥이 편평하여 해안선이 길고 개펄이 많은 얕은 물에서도 자유자재로 운행이 쉬웠고 깊은 물에서도 진로를 바꾸기가 쉬웠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전함은 탑승 인원이 2, 300명이었기 때문에 운용이 더디고 무거운데 비해 이순신장군의 판옥선은 4, 50명의 날렵한 작은 배로 바다를 마치 물살을 타는 고기처럼 운용할 수 있었다.
* 임진왜란 3대첩(큰 싸움)은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그리고 김시민장군의 진주대첩을 말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3대첩은 정문부장군의 길주대첩을 보태 4대첩이 되어야 한다.
*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반환(2005. 10월, 러 ․ 일전쟁 때 탈취 반출하여 100년만의 반환)으로 알려진 정문부장군의 함경도 길주대첩 등 6대첩은 위 3대첩에 못지않는 임진왜란의 중요한 싸움이었고 승전이었다. 정문부장군은 문관으로 낮은 벼슬이었는데 의병에 의해 창의군대장으로 추천되는 문무 겸전의 학자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를 기반으로 의병의 선두에 서서, 먼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에 파견된 임해군과 선화군을 왜적에게 넘긴 역적을 주살하고 싸우는 곳곳마다 왜적을 박멸하였는데 함경도지방을 노략질하였던 왜군의 가장 강한 철포군단, 왜병 최고의 대장으로 일컫어지는 가또 기요사마(가등청정加藤淸正)의 2만2000명의 왜군을 불과 3000여명의 의병으로 쳐부수어 왜군의 북진(당나라 정벌)을 저지하고 결국은 패퇴케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정문부장군은 정권으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는데 이는 낮은 벼슬(정 6품)로 의병을 이끌었던 정치적인 문제와 관군이 패퇴를 거듭했던 당시에 의병으로써 승전한 일 그리고 인조 2년 일어난 박홍구 역모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무고로 풀려났으나 결국은 효종 대의 출중한 장수였던 남이장군처럼 한 편의 시가 도화선이 되어 시화詩禍로 국(고)문사했다. 북관대첩비는 함경도민들이 장군의 공적을 기려 백성들의 성금으로 숙종 35년 한기 9006년(AD. 1709년) 길주에 세웠는데 일제식민지시대 전리품으로 탈취한 왜군이 천황에게 진상하였고 야스쿠니신사에 버려져 있었다.
세종대왕상 사6신 성삼문상 신숙주상 청 태조 누르하치
* Daum Blog 인용 (한국의 형제국)
◎ 조선의 창업, 왕자의 난
* 방원은 성격이 호탕하고 위엄이 있었다. 무인기질은 아버지 이성계를 닮았다고들 했다. 한편 침착하고 냉정한 판단력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고려의 옛 지도층을 회유하고 설득하는 일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역성혁명이었으므로 우선 사회 지도층의 회유가 선결 문제였으나 충의가 절대가치였던 고려의 충실한 신하들은 역성혁명을 거부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 학자, 정치가들이 죽었다. 방원이 ‘하여가’ 로 마음을 떠보았으나 ‘단심가’ 로 대꾸하였던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척살한 것도 방원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둘째 부인에게서 난 방석을 애지중지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방원은 세자 방석과 그 형제를 제거하고 형(정종)을 형식적으로 보위에 추대하였다가 2년 뒤에 3대 태종으로 등극하였다. 창업 보다는 수성이 더 어렵다고 했던가? 태종은 수성의 길을 닦았다. 창업공신들이 대부분 도태되었다. 외척들도 뿌리를 잘라버렸다. 왕가의 혈족들도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세종이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태종의 셋째 충녕대군이었다. 양녕은 세자였으나 스스로 물러나 주유천하를 하였고 둘째 효령에게도 입산을 권유하여 효령은 스님이 되었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으면 부처님의 제자인데 무엇이 부러우랴’, 효령이 남긴 말이다.
* 세종은 태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얼마나 학문을 좋아했던지 눈이 짓물러 눈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능한 선비들을 길러내고 ‘훈민정음’ 을 창제하였다. 측우기 등 과학기기를 발명했고 4군, 6진, 3포를 개척했다. 그러나 아들 문종은, 세종이 병으로 시달렸던 말기에 세자로 정사를 유능하게 보좌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2년을 넘기지 못했고 12세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이 주축이 되어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척결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왕권의 확립이라는 명분과 정권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 수양대군은 태조와 태종의 기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신권에 대한 왕권의 대립이었다. 김종서, 황보인 등 수많은 신하들이 주살되었다. 이른바 ‘왕자의 난’ 이다. 단종은 보위 3년 만에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된 다음 비명횡사했다.
사6신과 생6신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학사회의 가치이념이었다. 조카를 밀어내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했다.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조선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0대 연산군 때 무오사화, 갑자사화, 병인사화가 있었고, 11대 중종은 기묘사화, 신사사화 그리고 13대 명종은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또 19대 숙종은 남인과 서인 각축의 기사사화, 20대 경종은 신임사화를 겪었다. 그러나 크고 넓게 보면 이들은 정치구도의 변화였을 뿐이고 나라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내외치의 안정 그리고 강력한 왕권 아래 파벌정권의 쟁탈은 외교정세를 살피지 못했다. 군비를 소홀히 하여 외침에 대비하지 못하고 주변국가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이룩한 다음 대륙 진출을 획책하고 있었다.
◎ 조광조, 개혁을 꿈꾸다
* 조선 11대 중종 때 학자요 정치가로써 도학정치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하였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사사(賜死, 왕의 사약을 받고 죽음)되었다. 조선 개국공신 온의 5대 손이며 아버지는 감찰 원강이다. 17세 때 어천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귀양살이 중이던 김굉필에게 학문을 베웠고 청년학자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한기 8707년(AD. 1510년) 사마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대학의 경륜을 역설하는 도학정치, 철인정치를 주장하는 대자성 유승조의 영향을 받았다. 한기 8712년(AD. 1515년) 관직에 나갔고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욕이 있었다. 37세에 대사헌의 자리에 올라 정치제도 개혁에 앞장섰다가 38세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전남 화순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왕도정치를 펴고 도학을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씨향약’ 을 간행하여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복리의 증진을 꾀했다.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반정공신의 훈작 삭탈을 요청했다. 특히 훈작 삭탈은 훈구파의 반발을 샀다. 이이, 이황 등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사림은 정신적 주체로 받들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한 학자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100년 뒤의 율곡 이이는 ‘其進有階기진유계 其變有漸기변유점, 일을 추진하는 데는 밟아야 할 단계가 있고, 그 상황을 바꿔나가는 데는 점진성이 있어야 한다’ 며 젊은 나이에 경세의 뜻을 다 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출중한 경세가를 애도했다.
조선 초 건조된 거북배를 한산대첩도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장군이 전투함으로 개조 * Daum Blog 인용
◎ 임진왜란,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
* 동아시아의 조선, 중국, 일본은 14세기에 새로운 국가와 정권이 등장하여 2세기 동안 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명나라가 동요하고 이웃한 여러 나라들이 자주적인 독립을 지향하는 경향으로 동아시아 정세는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명나라는 환관이 실권을 장악하고 지방의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하여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은 다이묘들이 무역을 통한 상권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하고 오다 노부시게정권이 통일을 강화하였다. 또한 일본은 포르투갈인들이 총을 보급하여 총포부대로 새로운 전투대형을 편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여 한기 8787년(AD. 1590년)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 뒤 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하였으나 다이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하급 무사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더욱이 삼포왜란, 영파의 난으로 명나라, 조선과 무역이 폐쇄되자 국내 안정을 위하고 국제교역을 타개하기 위하여 대륙진출을 통한 <체제변혁전쟁>을 획책하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1세기 동안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이루었으나 15세기 말부터 훈척(공신, 왕족)과 사림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연달아 사화가 발생하였고 선조 즉위 전후에 사림정치가 확립되었지만 혁신세력들은 보수파들이 꾀한 모의에 의해 정파정치로 변질되었다. 특히 군민일치의 개병제도가 붕괴되어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왔으며 선각자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도 정파 간의 이해로 무산되었다.
* 도요토미는 한기 8784년(AD. 1587년) 중국 침략을 위해 쓰시마 도주 소(종의조)에게 조선 침략방안을 논의했다. 소는 조선과 우호선린을 건의했으므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조선조정이 거절하자 다시 한기 8785년(AD. 1588년) 10월과 다음 해 6월 소는 승려 겐소와 같이 내한하여 다시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마지못해 조선에서는 한기 8787년(AD. 1590년) 3월 황윤길과 김성일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이듬 해 1월 귀국한 두 사람은 당파의 정략에 따라 상반된 의견을 보고했으므로 전쟁 발발 논의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그 해 4월 다시 겐소가 1년 뒤에 ‘명나라에 가는 길을 빌리겠다’ 고 통고하자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통보하고 대비를 하였으나 조정의 대부분은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에 민폐만 일으킨다는 정세론으로 적극적인 대비는 없었다. 군기도 문란했다.
도요토미정권은 한기 8788년(AD. 1591년)부터 조선 침략을 준비하여 군대를 재편하고 15만 8700명의 육군을 9대로 편성하였다. 한기 8789년(AD.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 1만8700명이 700여척의 병선으로 쓰시마항을 출발하여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전사했고 부산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동래부사 송상현도 전사하고 18일 가토의 후속부대가 부산에, 구로다의 제 3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이후 4 - 9번대의 후속부대가 상륙하여 수군병력 약 9000명과 합해 침략 병력은 20만이었다. 왜군은 세 길로 나뉘어 서울로 진격했는데 관군은 변변히 전투다운 전투도 치루지 못하고 패퇴를 거듭했다. 선조와 세자 광해군이 평양으로 피난했다. 선조의 피난 행렬에 돌을 던지는 백성들이 있었다. 난을 막지도 못했고 백성들을 남겨두고 피난을 가는 임금과 조정에 대한 불만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성난 백성들이 두 왕자를 잡아서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 역시 임금과 조정의 무능에 대한 불만이었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18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조정은 명에 원병을 청한다. 6월 평양이 함락되고 왕은 의주로 떠났다. 전쟁 2개월 만에 전국이 왜군에게 떨어진 것이다.
* 왜의 수군은 남해와 황해를 돌아 육군에게 물자를 조달하면서 수로로 북상하여 육군과 합세하는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였다. 조선수군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 장군,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 장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 전라우군 수군절도사 이억기장군이었다. 특히 이순신장군은 조정의 안일한 전쟁 논의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예상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식량을 비축하며 무장을 준비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돌격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조선 초기에 만들었던 귀선(거북배)을 개량하여 월등한 성능을 가진 철갑공격선을 건조했다. 4월 왜군은 경상도 좌우수영군을 쉽게 물리치고 저항 없이 전라도로 진격하였다. 5월 전라좌수영군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7척 도합 86척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6일 동안에 적선 40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5월과 6월에 이억기장군이 경상우수영과 합세하여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적선 70여척을 침몰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사천전투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했다. 왜군은 전 수군을 집결하여 조선수군을 격파하기로 하고 구키, 도토, 가토 등이 합세하여 6월 말 부산포에 진을 쳤다. 7월 이순신장군은 이억기장군의 함대와 합세하여 55척의 전선으로 견내량에 정박 중이던 와키사카 함대 73척을 공격하였는데 견내량이 물길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의 민첩성이 떨어져서 작전 수행이 원활치 못하자 이순신장군은 적을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학이 날개를 편 모습)으로 포위 공격하여 적선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포획하였다. ‘한산도대첩’ 이다. 이 전투로 남해의 재해권을 조선수군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남서해를 돌아 북상하는 육군에게 물자를 보급하고 합세하려던 왜군의 전략이 좌절되었고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뒷날 도요토미는 곡창 전라도를 재패하지 못한 것이 전쟁의 패인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침공에 전략적 중점을 둔다. 재해권 장악은 패퇴를 거듭하였던 관군과 지방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고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 해전에서 승리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경상도의 홍의장군 곽재우, 김면, 정인홍, 권응수. 전라도의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유팽로. 충청도의 조헌과 700의사. 경기도에서는 홍계남, 우성전. 황해도는 이정암. 함경도의 정문부, 정현룡, 오응태. 평안도의 조호익, 양산숙 그리고 의승군으로 묘향산의 휴정(서산대사)은 수천 명의 제자들로 승군을 조직하고 사찰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했는데 관동에서 유정(송운대사), 해서에서 의엄, 호남에서 처영, 충청도의 영규 등이 제자들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한기 8790년(AD. 1593년) 전국의 의병은 2만2600여 명으로 관군의 1/4 수준이었다.
* 한기 8789년(AD.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의 진주성전투는 김해 주둔의 왜군이 전라도 침공의 요지인 진주를 점령하기 위해 3만의 병력으로 공격한 전투다. 수성군 8600명과 곽재우, 최경회, 이달의 의병들이 성 밖에서 협응하여 6일 간의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을 마련하려던 왜군의 책략을 무산시켰다. 한편 조선조정의 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왜군의 최종목표가 명나라 침공이었으므로 자위책 차원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 선발대 랴오양 부총병 조승훈이 5000명으로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였으므로 이여송을 동정제독으로 삼아 4만3000을 파견했다. 한기 8790년(AD. 1593년) 1월 명군은 조선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 후 명군은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다가 벽제관에서 패하고 평안도로 후퇴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장군 의병부대가 가토군을 섬멸하였다. 이 때 우키다가 3만의 군사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는데 삼도절제사 권율장군은 백성과 합세하여 여러 번의 공방 끝에 이를 물리쳐 왜군이 서울 이북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 이다.
5륜행실도 훈민정음 학익진 조선백자
* Daum Blog 인용
* 전쟁이 장기화되고 소강상태에 이르자 왜군은 철수를 보장받기 위해 고니시의 강화 제의가 있었는데 명나라도 심의경을 보내 강화를 협상했다. 도요토미는 강화의 조건으로 명나라의 황녀를 왜왕의 후비로 보낼 것, 왜와 무역을 재개하고, 조선 8도 중 남부 4도를 왜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패전한 나라로써는 무리한 요구였다. 이에 명나라는 도요토미를 왜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책서를 보냈는데 도요토미가 크게 분노하고 정유재란을 획책했다.
강화가 결렬되자 한기 8784년(AD. 1597년) 선조 30년 1월 왜는 14만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두 번째 침략했고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를 총독, 양호를 경리조선군무, 총병관 마귀를 제독으로 5만5000명의 원군을 파견했다. 이미 조선은 재란을 예상하고 대비하였으므로 왜군은 북상하지 못하고 고니시군은 전라도 순천, 가토군은 경상도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순신장군이 왜군의 첩자에 의한 무고와 출동 명령을 보류하였다는 서인의 모함으로 파직을 당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장군이 파직되었다는 것을 안 왜군은 부산에 상륙하였고, 다시 재해권을 확보하여 원균의 조선수군은 6월 안골포전투, 7월 웅포전투, 칠천도전투에서 대패하였다. 8월 초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장군은, 수군이 전멸했으므로 전쟁을 육상으로 끌어들여 육지에서 합류하라는 조정의 지시를 반대하고 해상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병선이 있나이다’ 라는 장계를 올린 뒤 남은 전함 12척을 이끌고 명량(전남 진도)에서 지형을 이용한 전략으로 왜군의 전함 300여척을 대파했다. 이 승리로 왜군의 수륙병진전략은 수포로 돌아갔고 다시 조선이 재해권을 잡았다. 한기 8785년(AD.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조선군은 육지에서 명군 마귀, 유정, 동일원과 합세하여 물러서는 왜군을 추적했으나 명군 유정이 왜군의 뇌물을 받고 추적을 지연시켜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이순신장군은 명군 진린과 연합하여 퇴각하는 왜의 수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에서 왜 전함 300여척과 교전을 하여 200여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순신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지금은 싸움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는 유언을 남겼을 뿐이다. 노량해전으로 7년 동안 전라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노략질 당한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전란 뒤 임금 선조가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도 없었다(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라고 한 말은 이순신장군의 전라도 사수 전략의 탁월한 전술적 경륜을 웅변한다.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해전은 세계전쟁사에서 4대해전의 살라미스해전, 칼레해전, 트라팔가해전의 가장 윗자리에 선다. 러 ․ 일전쟁 때 러시아 무적함대를 대한해협에서 격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노 헤이하치로 제독은 승리를 축하하는 찬사를 겸양하며 ‘나를 넬슨에게 비교하는 것은 용납되지만 이순신장군에게는 비교하지 말라’ 고 했다. 일본에서도 이순신장군은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 임진왜란은 16세기 말 동아시아 3국이 참가한 국제전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왜는 도요토미정권이 붕괴되고 바쿠후정권이 등장했다. 바쿠후정권은 도요토미의 팽창정책을 철회하고 조선에 유화정책을 폈다. 전쟁 중 약탈한 문화재와 포로로 잡아간 우수한 학자와 장인들이 왜의 문화 발전을 촉진했다. 명나라는 국력이 소모되어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만주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칸에 즉위하고 후금을 세워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후진족이었던 왜와 여진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패자였던 명나라와 조선은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 호란, 다시 전쟁으로
조선시대 15대 왕 광해군은 명나라와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을 포괄하는 양면정책을 폈다. 누루하치가 10만의 원정군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조선에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양면정책을 펴고 있었으므로 강홍립에게 1만 명의 군사를 맡기면서 정세를 판단하여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강홍립은 조 ․ 명연합군이 심하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에 투항했다. 누루하치는 국제정세를 인정하였으므로 광해군시대는 후금과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집권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의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후금을 괴롭혔다. 누루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중원경영의 야심을 품고 명나라를 치기 전에 배후에서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먼저 공략해야 했다. 마침 ‘이괄의 난’ 이 실패하여 망명한 잔당들이 조선군사 정보를 알려주고 조선 침공을 부채질하자 한기 8824년(AD. 1627년) 인조 5년 후금은 3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압록강을 건너 침공했다. 명나라와 관계를 청산한다는 맹약을 위반하여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이었다. 정묘호란이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진격한 침략군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발생하자 원래 목표가 명나라 정벌임을 구실로 강화를 요청했다. 3월에 열린 강화의 조건은 ‘형제의 나라’ 맹약,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명나라와 잠정적으로 교류를 지속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후금은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한기 8829년(AD. 1632년)에는 형제의 맹서를 군신의 맹서로 고칠 것과 금 100냥, 은 1000냥, 직물 1만2000필, 말 3000필, 병사 3만 명을 요구했다. 이에 격분한 조정에서는 후금의 사신 접견마저 거부하고 죽일 것을 주청하였다. 그리고 8도에 전쟁유시를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를 정복하여 국호를 청나라로 개정한 후금은 한기 8833년(AD. 1636년) 인조 14년 12월 다시 신하의 맹서를 강요하였으나 조선이 듣지 않자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청 태종은 청, 몽골, 중국 한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명나라의 조선 지원을 막기 위해 랴오허에 별군을 배치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봉림대군 등 일부가 먼저 강화로 피난하고 뒤 이어 따라 들어가려고 했던 인조는 청군이 압박해오자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칩거했다. 인조는 1만3000여 명의 군사로 성을 사수하고 8도에 교서를 보내 근왕군을 모집했다. 그러나 관군과 의병은 성 밖에서 패전하여 흩어졌고 군량마저 부족했다. 전투는 소강상태였으나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조정은 혹한 속에서 식량이 떨어져 위기였다. 명나라는 수천 명의 원병을 지원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가고 말았다. 청군은 병력 12만을 결집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세자를 비롯한 2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견디다 못한 조정에서는 성문을 열고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거행하였다. 인조가 청 태종 앞에 3배9고두의 예를 하였다. 세 번 절을 하는데 한 번 절을 할 때 마다 3번씩 이마를 땅에 대는 ‘황제의 예, 고조선의 삼육구배三六九拜 또는 삼육대례三六大禮’ 였다. 절하는 이마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지 않다고 해서 언 땅에 이마를 수십 번 부딛쳤으므로 이마에서 선혈이 낭자했다고 전한다. 군신의 맹서, 인종의 장자 소헌세자와 봉림대군, 귀족의 자제들 수십 명의 인질, 명나라 연호 사용 금지와 국교 단절, 명나라 정벌 때 원정군 파견, 통혼, 성 개축과 신축 금지 등을 강요받았다. 청 태종의 승리를 기념하는 ‘삼전도비’ 가 그 날의 처참함을 새겨 말없이 남아있다. 청군이 물러간 뒤 공물과 사대는 형식적으로 하였고 명나라 공격 때 출병한 임경업장군은 군량미를 일부러 수장시키고 군선을 파괴한 다음 몰래 명나라에 전황을 알렸으므로 뒤에 이를 알게 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리고 오히려 숭명배청사상이 활발해졌다. 다음 즉위한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잡혀가 8년 간 인질이 되었던 봉림대군이다. 효종은 등극하자 북벌의 강한 의지로 조정을 전시체제로 운영하였다. 이완대장을 앞에 내세워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허생전의 허생은 이완대장에게 북벌을 하려거든 지금부터 10년 간 칼을 녹혀 괭이를 만들고 창을 두드려 호미를 만들라고 말한다. 효종은 원대한 이상을 발현하지 못하고 장년의 나이에 요절했다.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동학東學농민혁명
임진왜란민화 임진왜란의병도 임진왜란침략도
* Daum Blog 인용
* 압록강과 두만강 위쪽 백두산 너머 그리고 시베리아와 만주 남쪽에는 슈하이樹海라고 불리는 한국영토의 30배 정도 되는 밀림이 있다. 여기에는 한국인, 만주인, 중국인, 러시아인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고리드인라는 종족이 있다. 고리드인은 수렵족인데 그들의 개는 고리드개로써 한국의 풍산개, 만주개, 러시아의 허스킨, 일본 토착인 아이누개와 함께 동북아의 사냥개로 이름이 높다. 고리드개 한 마리는 사슴을 잡고, 두 마리면 맷돼지를 잡을 수 있으며, 세 마리면 곰을 잡고, 다섯 마리는 호랑이도 잡는다. 세계의 사냥개들 중에서 호랑이를 잡는 개는 고리드개 뿐이다. 동북아 사냥개들의 조상이 고리드개라는 학설이 있다. 고리드개를 기르는 고리드인들의 이름에 고조선시대의 작은 성읍국가들과 고려의 이름이 묻어난다.
경국대전 조광조 전남화순 정약용 목민심서 조선백자
귀양살이 유적 * Daum Blog 인용
◎ 영조의 탕탕평평책蕩蕩平平策, 또 다시 노소시벽老少時僻 할 것인가?
* 붕당朋黨은 한기 8772년(AD. 1575년) 선조 8년 이조의 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동인)과 심의겸(서인)의 반목에서 시작되었다. 전랑직은 정 5품으로써 직위는 낮으나 인사권을 행사하는 직책으로 인사를 국왕이나 판서가 하지 않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여 공의에 부쳐 선발하였으므로 관료들의 대립이 불가피하였다. 동인은 서인에 대한 강온 양론으로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3색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 뒤에 화의를 주장했던 유성룡이 실각하자 남인이 몰락하였다. 북인은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광해군을 옹립하여 폭정이 계속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득세하였으나 남인도 제 2세력으로써 숙종 때까지 100여 년 간 대립하였다. 서인집권은 현종대까지 지속되었는데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예학논의가 벌어졌는데 당론으로 전환되어 정치적 운명을 걸었으나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복상문제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남인의 횡포가 자심하자 송시열이 다시 등용되었으나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영조는 탕평책을 내세워 정쟁이 완화되었으나 남인의 소론이 시파 벽파로 분파되고 카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신서교파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시 ․ 벽파의 카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 뿐만 아니라 남인의 대부분인 실학자를 말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7세기 중엽까지는 정치이념과 학연에 따라 상대세력과 공존공도를 추구하는 정치 활성화와 상호 비판 견제의 기능을 발휘하였으므로 원리가 확고하여 정국이 안정되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는 정권 획득에 집착한 논쟁이 학벌, 문벌, 지방의식까지 연결되어 국가 사회 발전에 폐해가 되었더니 이어 생존을 건 사화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사림세력이 붕당정치를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은 향촌사회의 사원과 향약이며 경제적 토대는 사원에 할당된 농장이었다.
* 숙종은 재위 말년에 탕평책을 도입하였으나 불완전했다. 영조는 불편부당의 본격적인 탕평책을 시행하여 당파의 행위는 무조건 축출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기 8925년(AD. 1728년) 영조 4년 소론과 남인이 연좌된 ‘이인좌의 난’ 에 노론이 중용되어 노론천하가 되었다. 노론 소론의 분쟁은 사도세자의 폐위에 이르렀고 노론의 시파 벽파는 치열한 당쟁을 일으켰다. 정조는 사도세자인 아버지에 동정적인 시파를 중용했다.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세도정치라는 파행적인 정치형태가 등장한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헌종, 철종대까지 지속되었다가 대원군정권에서 막을 내리나 곧 다시 명성황후가 주도하는 풍양조씨의 세도가 시작된다.
◎ 천주교의 순교殉敎
당시 지도층은 천주교를 동양윤리의 이단異端으로 몰아 온갖 박해迫害를 자행하였는데 한기 8998년(AD. 1801년) 박해의 직접적인 배경은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었다. 5가작통법(다섯 집을 묶어 서로 고발하는 호적제도)로 천주교도를 적발하였고 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초대 교회 건설 신도들이 대부분 순교했다. 한기 9028년(AD. 1831년) 9월 정약종의 아들이 로마 교황청에 호소하여 서울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한기 9036년(AD. 1839년) 기해사옥은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박해에 이은 풍양조씨 세도정권에서 자행된 박해다. 조선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8043년(AD. 1846년) 병오박해로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대원군이 집권하여 6년 동안에 8000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정권 싸움에 희생되었다.
◎ 민란民亂, 동학농민혁명
* 홍경래의 난 은 조선시대 23대 순조 11년 한기 9008년(AD. 1811년) 12월부터 순조 12년 4월까지 5개월 간 일어난 조선시대 최대의 난이다. 조선시대 주요산업인 농업은 17 - 18세기에 들어 농사기술의 향상과 토지겸병으로 광작운동이 일어나 경영형 부농층이 형성된다. 그러나 극소수의 부농층에 비해 대다수의 농민들은 유리민이 되어 광산 노동자나 도시 빈민층이 되었다. 상공업에서도 수공업자가 전업화되고 대외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종식되고 안동김씨세도가 횡행하여 3정의 문란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 우군직, 김사용, 김창시, 이서충이 정감록을 이념으로 부농, 서민지주층, 개인상인층의 재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결집했다. 특히 홍경래가 살았던 서북지방은 구조적 수탈과 서북민의 차별화정책이 공동 피해의식으로 나타나 한기 9005년(AD. 1808년) 순조 7년 농민이 봉기하자 평안도의 다양한 계층이 결집했다. 삽시간에 1000여 명의 봉기군을 수습하여 10여 일만에 청천강 이북의 10여개 지역을 점령하고 평안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봉기군은 곧 수천 명이 되었고 농민군의 성격으로 기세를 떨쳤으나 경군, 향군, 민병토벌대와 4개월 공방전 끝에 패퇴했다. 농민군이 크게 떨치지 못한 원인은 지휘부에서 부농 상인층과 소농, 빈농, 유민 노동자의 상호 대립적 성격을 융화시키지 못하였고, 서북인의 차별 대우 시정,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척결, 정도령의 출현을 통한 이상 등 이념과 정략의 한계 때문에 관군의 반격으로 대패하여 정주성에 칩거하였으나 200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수습되었다.
6. 25 이전에는 일본인 학자 오다 등이 당쟁사적 관점에서 서북인의 푸대접, 개인적 정권
기도라는 해석을 했으나 1960년대 이후 정체성 비판의 일환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규정한다.
두만강의 중국과 중국 화동사범대학 동학농민군 철화백자
조선 국경 표지판 출판 당나라 지도 * Daum Blog 인용
* 진주민란 은 철종 13년 한기 9059년(AD. 1862년) 2월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봉기다. 경상도에서 단성현의 농민들이 일어난 것을 필두로 18개 지역에서 봉기가 있었다. 전라도에서는 3월에 시작되어 익산 등 40여 곳에서 일어섰는데 이는 전라도의 전 지역이다. 충청도에서는 5월에 회덕 등지에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진주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탐관오리들의 불법 수탈 방편인 도결과 환보문제였다. 이는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자행된 관료 수탈의 전형이었다. 진주민란의 시발지는 진주읍 서남쪽 유곡동인데 유곡동리회에서 모의했다. 세도정권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을 약속하였으므로 곧 자진 해체되었으나 이는 임기응변의 기만책이었다. 그래서 근본적인 대책으로 토지제도의 개혁으로부터 사회의 제도개혁이 요구되었으며 봉기는 잠재했다.
# 고종 31년 한기 9091년(AD. 1894년) 갑오경장의 정변이 일어났고 동학혁명이 꿈틀거리던 해 초봄, 서울 장안의 중인中人마을에 큰 잔치가 벌어졌다. 상업으로 거부가 된 집안에서 가문이 좋은 양반사위를 맞는 날이었다. 돈과 신분을 결합시키는 정략혼인이었는데 양쪽 집안에서는 그 걸 과시하기 위해 천 평 가까운 마당에 수십 개의 차일이 둘러서고 수백 명의 손님들이 끊일 사이 없이 드나들었다. 잔치에는 소가 3 마리, 돼지가 10 마리, 닭은 50 마리를 잡았다는 소문이었다. 열 말 들이 술독이 쉴 새 없이 비워졌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 키가 여섯 자가 넘는 건장한 사내가 대문에 들어섰다.
“무성이다!”
잔치판이 술렁거리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서울 장안 백정白丁(소나 돼지를 전문적으로 잡는 일) 두목 무성이었다. 무성無姓이란 성씨를 모른다는 뜻이다. 무성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는데 그가 걸어오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경비를 위해 나온 포졸들과 일당을 받은 장돌뱅이들이 달려왔으나 나타난 사람이 무성이란 걸 보고는 슬슬 피했다. 무성은 무표정이었으며 눈이 얼음처럼 차가왔다. 그는 힘이 장사였다. 그가 씨름판에 나서면 한다하는 장사들도 모두 설설 긴다고 했다. 그는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다. 소를 잡을 때 사용하는 날이 시퍼런 칼이었는데 필요하면 사람도 잡는다는 소문이었다.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노비법이 폐지되고 있었다. 그를 건드리면 장안의 수천 명 백정들이 들고 일어선다. 단결력이 강한 그들은 불도 물도 모른다. 경호원들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을 막고 있었으나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늙은 집사가 나섰다.
“자네가 웬일이가? 볼 일이 있다면 은밀하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
“거지처럼 뒷문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입니까? 백정은 거지가 아니외다.”
“볼 일이 뭔가?”
“이 천한 놈은 친척을 뵈러왔소이다.”
실수였다. 가축 도살은 백정들의 생업이었다. 돈을 좀 아끼려고 집안 종들을 시킨 것이 말썽이었다. 백정들의 정보망은 정확하고 빨랐다.
“종들이 모르고 한 일일세.”
“천만에, 종들이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법. 혹 집사 어르신이 우리네 친척이요? 아니 면, 이 집 주인이든지.”
“예끼, 이 사람!”
집사는 무성이 요구한대로 소 한 마리 값을 물어주었다. 그 이상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만 다행이었다.
무성이 잔칫집에서 한 건 올리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멀리 전라도에서 손님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성의 집은 대지가 200여 평이나 되고 사랑채, 안채는 물론 행랑채까지 있었다. 백정들은 일반 서민들과 떨어져 자기들 끼리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사회에서는 천대를 받고 있었으나 생활이 궁핍하지 않았다. 전라도에서 온 손님들은 별당에 모셨다.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비밀 방이었다. 손님들은 두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형님 아우로 지내는 전라도 백정두목 곰보였고 다른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곰보는 그를 박주사로 존대를 했는데 건장한 체구에 눈이 날카롭고 상투를 틀었다. 무성은 뭔가를 짐작하고 긴장했다. 동학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 같았는데 무성의 짐작은 옳았다. 손님은 조용조용하게 말했고 무성은 듣기만 했다. 박주사는 동학 수령 전봉준장군의 최측근이었다. 동지규합 책임자였다. 백정들은 포섭해야할 대상이었다. 박주사는 이미 전라도 백정들을 혁명에 끌어들였다. 박주사는 신분을 밝히거나 혁명에 동참해달라고 직접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혁명은 반역이었으며 중죄였다. 잔인한 불고지죄도 있었다. 박주사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그저 조용하게 말했다. 양반댁에서도 구경하기 어려운 값비싼 소주가 나왔고 부잣집 못지않은 좋은 안주가 나왔다.
“기왕 오셨으니 며칠 머물다 가시지요.”
백정사회에도 장로들이 있었으므로 상의를 해보겠다는 뜻이라고 곰보가 설명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고지죄不告知罪를 면하기 위해 고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백정사회에는 그들만의 불문율不文律이 있었다. 배신은 없었다. 그래도 박주사는 품속에 지니고 다니는 6혈포穴砲(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어놓았다. 박주사 일행은 사흘 동안 머물렀다. 무성은 그저 모든 일은 자기에게 맡기라고만 얘기했다.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면 협조하겠다는 암시였다. 백정들이 뭉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만일의 경우 책임을 자기 혼자 지겠다는 의도였다. 무성은 떠나는 박주사를 마을 입구에 까지 따라 나와 작별했다. 작별 인사 외에는 말이 없었다.
박주사는 그 길로 함경도로 향했다. 관군을 돕는 일본군들은 조총鳥銃을 가지고 있어 그들과 겨루려면 화승포火繩砲를 가진 포수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포수들도 단결력이 강했고 소외된 집단이었다. 박주사는 함흥에 도착하여 어느 주막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종달이라는 포수를 만났다. 종달은 5년 전에 주인집에서 도망친 노비奴婢(종)였다. 열여섯 된 누이가 밤에 주인 양반의 침실로 끌려가는 것을 봤고, 질투에 미친 안주인에게 매를 맞고 죽었다. 탈출을 도와준 것이 박주사였다. 종달을 만나 하루 종일 산길을 가다가 해가 져서 동굴을 찾아 밤을 새는데 밤중에 범이 으르렁거렸다.
“여기서부터는 범의 영토입니다.”
“자네 주인은 혁명군에게 잡혀 처형되었어.”
그 혁명군을 박주사가 지휘했었다. 혁명군에게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으나 악독한 종달의 주인은, 박주사가 말릴 새도 없이 원수를 갚으려는 농민군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었고 주인 보다 더 악랄하다는 안주인은 마당에 끌려나와 옷을 벗긴 체 난도질을 당했다. 종달이 일어나 박주사에게 넙죽 절을 했다. 눈에 눈물이 어려 있었다. 이튿날도 종일 산을 탔는데 밤중에 종달은 박주사를 동굴에 남겨두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가 잠시 뒤 돌아왔다. 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뒤를 미행하는 염탐꾼을 처치했습니다.”
관아에서는 염탐꾼을 사방에 풀어놓았다. 농민반란의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따라붙은 염탐꾼은 주막에서부터 미행했었던 것 같았다. 시신을 늑대길에 던져놓았으므로 다음 날에는 뼈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개마고원은 그런 산이었다. 개마고원에는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톱니처럼 이어져 있었고 그런 첩첩 산중에는 관아의 힘이 미치지 못했으며 그 곳을 지배하는 사람은 축지縮地장군(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축지법을 쓰는 포수마을 두령頭領)이었다.
“여기에는 양반도 없고 상민이나 천민도 없소이다. 모두 같은 사람이지요.”
축지장군은 반백半白의 머리칼을 짧게 깍은 깡마른 체구였다.
“군수인가 뭔가가 범 껍질을 바치라고 하지만 어림도 없지요. 우리는 이렇게 사는 산 사람 입니다. 평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우리는 우리대로 삽니다.”
“관리나 양반들이 착취를 한다면 힘으로 때려 부숴야지, 왜 착취를 당하고 있는 거요?”
“평지에서 살지 못하게 되면 이리 오시오. 우리와 함께 삽시다.”
박주사는 사흘 동안 포수마을에 머물면서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박주사가 떠나는 날 축지장군은 종달을 데려가라고 했다. 포수마을로 오는 길을 종달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축지장군의 이러한 배려는 몇 달 뒤에 동학지도부에게 대단히 중요한 암시가 될 줄은 그 때는 몰랐다. (사냥꾼의 이야기, 광주일보사)
전봉준 압송과 황토현 전봉준상 동학군 제단 동학교도 비밀장소
농민혁명 그림 * Daum Blog 인용 병풍바위(흰색)
* 19세기 후반 조선 봉건사회는 농업생산력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이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었다. 한기 9057년대(AD. 1860년)부터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나 정부는 봉건지배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을 간과하고 현상적인 조세제도의 부분적 개선을 통해 무마하려고 하였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일본제국과 불평등 무역구조에서 소수의 지주, 부농, 상인들의 고리대금과 수탈로 대다수 농민들은 몰락의 강도가 심해졌다. 호남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의 봉건적 수탈이 자심했고 유형원의 학통을 잇는 부안의 동림서원과 강진으로 유배되었던 정약용의 실학적 진보주의가 형성되고 있었다. 동학은 몰락 양반 최재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개벽을 통한 만민평등을 이념으로 삼았다. 대규모 조직이 필요했던 농민운동은 동학을 근거로 했다. 한기 9091년(AD. 1894년) 1월 일어난 고부민란이 동기였다. 고부민란은 부당한 세금을 수탈하여 착복한 군수 조병갑을 징계하자 일단 해산했다. 전봉준 장군은 무장에서 3월 초 손화중 김개남과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표방한 창의문을 발표하고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였다.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척결하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을 전국에 배포했다. 백산에서 대오를 정비한 동학군은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물리친 뒤 정부가 파견한 홍계훈을 장성에서 격파했고 이어 진주성을 점령했다. 정부는 4월에 청나라와 일본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는데 농민군이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여 5월에 화약이 체결되었고 농민군은 진주성을 양도했다. 그러나 화약이 실행되지 않자 전봉준 장군은 전라도 53주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작업을 착수했다.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가 연계 봉기하였다. 한기 9091년(AD. 1894년) 6월 정부의 요청으로 입국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 ․ 일전쟁을 도발하였으며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봉건체제의 개혁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이 내정을 간섭하고 농민군 토벌에 나섰으므로 농민군이 재봉기했다. 전봉준 장군은 동도창의소를 만들어 항일투쟁을 촉구했다. 1차 봉기에 반대했던 최시형의 북접도 연합했다. 공주의 20일 간 공방전에서 동학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논산으로 밀렸으며 패전했다. 금구, 태인 전투에서 핵심지도부가 총 집결한 가운데 마지막 결전을 벌였으나 역시 패퇴하여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렸다. 이후 산발적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으나 괴멸되었고 농민군은 초토화되었다.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을 기치를 내걸고 일어난 동학혁명은 봉건지배층과 농민층의 근대화노선의 충돌이었다. 영세한 농민들이 소품생산자로 자립 발전할 수 있는 농민의 토지 소유, 탐관오리 제거, 민씨정권의 봉건적 폐단 시정, 봉건제도 폐지, 친일정권 타도를 외치며 들불처럼 일어난 민족운동은 많은 희생을 내고 패퇴하였으나 농민을 각성시키고 대중투쟁세력을 강화한 불길이 되어 이후 한국 정치사회의 영원히 꺼지지 않은 불씨로 되살아났다.
동학농민혁명이 정권교체의 혁명으로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애초에 부정부패 척결을 목표로 탐관오리의 응징 차원에서 발생하여 정권교체의 적극적 정치적 이념과 주체가 없었고, 국민적 봉기로 힘을 모으기 위해 저변확대에 치중하다보니 시기를 놓쳤다. 청군과 일본군 그리고 관군의 화력이 우수하다고 하나 전국적인 봉기로 거대한 군단을 이룰 수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므로 정략적 전략이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정권을 타도하고 농민을 위한 진보적정권이 수립될 수 있었는데 한국역사에서 민중혁명의 기회는 물거품이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AD. 1628년), 프랑스의 시민혁명(AD. 1789년) 그리고 일본의 명치유신(AD. 1837년)과 같은 반열의 정치혁명이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세계열강의 각축장화 되었던 국제적인 정세가 크게 작용했지만 민족적으로 동학혁명의 실패는 근대화의 시기를 잃고 이후 수많은 질곡을 겪어야 하는 운명적인 시련이었다. 근대대한사에서 잇달아 일어난 소요와 사태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 의한 역사적 필연이었을 것이다. 전봉준장군이 사형을 당하고 지도부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조선민중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이렇게 노래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나무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르다
전남 장성군 전남 장성 복원된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일지매
홍길동 캐릭터 홍길동 생가 계란도술 겨루기 * Daum Blog 인용
◎ 조선의 기인열전奇人列傳
조선시대의‘선비’는 고조선의‘선뵈’에서 유래했다. 고조선에서는 가을 사냥대회를 열어 수확물이 가장 많은 사람을 선보이고 선뵈라 불렀다. 뒤에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했는데, 선뵈로 뽑힌 사람이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무궁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 하였다.
천지화랑은 열국시대 고구려에서는 조의皁衣로 불렸다. 백제의 무절武絶이나 신라의 화랑花郞도 같은 뜻이다. 최치원이‘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라고 했는데 이 또한 유불선儒佛禪을 아우르는 천지화랑의 수련과정이었다. 고구려의 조의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띠를 둘러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의는 사냥대회에서 뽑히면 나라에서 의식주를 책임졌다. 오직 문무文武 수련에 몰두했으며 국토 순례도 수련의 과정이었다. 조의는 평상시에는 문무를 수련하였으나 국가가 주도하는 국책사업 - 길을 닦는다거나 성을 축조하는 일에 동원되었고, 일단 유사시에는 신크마리라고 불리웠던 조의의 우두머리가 수하부대원을 동원하여 나라를 지켰다. 조의는 전쟁에 나가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으며 전쟁에 패하면 살아서는 돌아오는 일을 부끄러이 여겨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고조선과 고구려와 열국들이 나라를 수호하고 국토의 강역을 넓힌데 이들의 역량이 원천이었다. 세계 전사상 3대 위대한 정복자의 하나로 꼽히는 흉노 일파 훈족의 아틸라나 돌궐족의 일파였던 오스만 투르크의 예니체리도 천지화랑과 같은 조직체의 군대다. 이들이 머리를 깎아 스님처럼 보였으므로 승군僧軍이나 재가화상在家和尙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또한 귀족이 아닌 일반인이나 천민 신분으로 벼슬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어서 인재 등용문이었다.
고려 말부터 천지화랑의 정신과 조직이 쇠퇴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천지화랑이 선비로 고착되었는데 무武를 천시하고 문文을 숭상하는 풍조가 형성되어 천지화랑정신은 문무文武 양반兩班 중 문반文班으로 고착되었다. 그래서 천지화랑은 사라지고 선비만 남았다. 선비는 문반을 뜻한다.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을 표현하는‘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는 말에는 천지화랑의 기개가 들어 있다. 이렇게 문약文弱에 흐르면서 천지화랑은 사라졌다. 그러나 천지화랑의 후예後裔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고조선이 멸망하자 선기옥형을 받들고 은둔한 것처럼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따라 그들은 깊은 산속이나 절로 들어갔다. 그리고 연연한 명맥을 이어왔는데 그 명맥은 1945년 해방조국에서 요인 암살을 자행했던 백백단으로 조직적으로 이어졌으나 그 이후에는 완전히 소멸하고 다만 아직도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련하는 이들이 몇몇 남아있다고 본다. 그들은 문무겸전文武兼全으로 선기옥형을 통해 천기를 살펴 우주원리 안에서 순리를 쫓아 살면서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지켰다.
고조선의 천지화랑들이 고조선이 멸망하자 선기옥형을 감추고 입산하였다가 고주몽이 고구려를 창업하자 백두선인 - 고주몽은 백두선인을 고조선의 마지막 천왕 고열가로 믿는다. 백두선인은 고주몽에게 선기옥형을 전수하고 천지화랑들이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고구려 700여년 간 천지화랑은 조의가 되어 고구려가 옛 고조선의 강역을 회복하는 다물多勿을 이루었으며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정권 찬탈 뒤 조의는 다시 선기옥형과 함께 사라졌다. 그 뒤 선기옥향은 도선국사 - 왕건은 도선국사를 백두선인으로 알고 있다, 도선국사로부터 왕업을 전수한 왕건은 선기옥형을 물려받아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창업했다. 그러나 고려는 선기옥형을 전승했지만 천지화랑을 몰려받지 못했다. 천지화랑이나 조의가 없었던 고려는 강역이 축소되었고 외세의 알력과 내부의 반란에 시달렸다. 정중부의 난은 문반과 무반의 갈등에서 무반의 국권 찬탈로 무반이 일어서는 계기였다. 그러나 국정 쇄신을 기치로 일어선 무반은 문반의 병폐를 그대로 답습했다. 끝내는 중국의 청나라에게 정복되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고려와 형제의 나라였다. 그래서 나라의 명맥은 유지되었다. 뒤이어 일어난 조선은 선기옥형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천지화랑도 사라졌다. 태종 때 농부가 고려시대의 천상분야열차지도각석을 대동강변에서 주어 태종임금에게 바치자 이 우주도로 선기옥형을 대신했다. 조선시대부터 천지화랑과 조의는 명맥이 사라지고 선비만 남았는데 조선시대의 선비는 학자를 뜻했다. 문무겸전의 정신은 사라지고 문예만 남았기에 문약으로 흘렀다. 조선시대에 양반이 있었는데 문반이 정국을 주도하였고, 무반은 문반의 문지기에 불과했다. 천지화랑들은 구심점을 잃고 자존감도 없어졌으므로 자연히 깊은 산속에 은둔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이 속세에서 이르는 화적이나 의적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기도 했으나 대부분 천지화랑과 조의들은 때를 기다리며 수련과 수행에 정진했다. 그러나 나라는 오래토록 그들을 불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 유사시에는 의병으로 승병으로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는 또 다시 은둔해버렸다. 조선중기에 선기옥형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비들이 선기옥형을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시대 고주몽이 소서노와 열국에 기증한 모사품에 불과했다. 기인열전의 기록은 천지화랑과 조의의 기록이다.
* 홍길동洪吉童
홍길동의 저자 허균은 허엽의 아들로써 서얼庶孼이 아니고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이었는데 이복 형들의 차별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반항적 기질이 있었다. 이복 형 허성은 문장이 출중하여 중국 사신으로 활약했고, 문장과 그림에 천부적 재질을 발휘한 허난설헌은 허균의 동복 누이다. 허엽은 서경덕 문하의 문장가요 학자였다. 허균은 출사를 하였으나 불교에 심취하거나 기인 기질로 늘 관직을 박탈당했다. 1615년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 책임자로써 천추사로 2회 파견되었는데 명나라 문헌의 조선의 종묘사 기록 오류를 발견하여 바로 잡음으로써 광해군으로부터‘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처럼 빛난다’라는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허균은 혁명을 꿈꾸었다. 서얼 차별, 신분계급 타파, 붕당 혁파가 혁명의 기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혁명 기밀이 누설되고 이이첨의 진압군에게 체포되어 능지처참(팔다리 등 4지를 4방으로 향한 말이나 소에 묶어 채찍질하여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였다.
홍길동은 연산군 6년, 가평과 홍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화적火賊이다. 허균은 홍길동과 명종 때 의적 임꺽정, 선조 29년 7월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종실 서얼로써 충청도 홍산에서 활약했던 이몽학 등을 조합하여 홍길동전을 썼다.
극중의 홍길동은 홍판서의 첩 초란에게서 태어난다. 자라면서 호형호제呼兄呼弟를 하지 못하고 차별을 받았기에 반항아다. 더구나 큰어머니의 질시가 압박해오자 어머니는 홍길동에게 가출할 것을 권유한다. 홍길동은 유랑하다가 스승을 만나 도술 - 도교사상의 둔갑술, 축지법, 분신술, 승운법을 익히고 동지들을 모아 활빈당을 결성한다. 가난한 백성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축적한 재물을 빼앗아 백성들을 규휼한다. 국왕은 홍길동을 잡기 위해 관군을 풀었으나 도술을 익힌 홍길동을 잡을 수가 없었다. 도술을 부리는 그는 조선 8도를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출몰하여 도저히 포박할 수가 없다. 또 8도 관아가 같은 날 한 시에 습격당한다. 그러자 홍길동의 아버지 홍판서를 위협해서 홍길동을 회유한다. 홍길동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활빈당과 함께 이상향을 찾아 나라를 떠난다. 남경을 거쳐 율도국에 이르러 산수가 수려하고 땅이 기름졌으므로 스스로 왕이 되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아버지의 부음을 받아 귀국하여 3년상을 치루고 다시 율도국으로 떠난다. 율도국은 홍길동전 연구학자들에 의해 오끼나와로 추정된다. 오끼나와에 홍길동전괴 비슷한 전설이 있고, 홍씨 가문이 있다.
* 남사고南師古
조선 중기의 학자요 도사道士. 역학, 참위讖緯, 천문, 관상, 복서卜書의 비결에 뛰어났다. 본관은 양양, 호는 격암.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년)의 동서분당과 1592년의 임진왜란을 예언했다. 풍수지리에 능해 전란을 피할 10승지지勝之地를 천거했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년) 울진의 향사鄕祠에 제향. 한역(주역)을 연구하여 천문지리에 통달하였다. 그의 예언은 동시대 동서 예언가로써 노스트라무스의 예언과 일치하는데 노스트라무스가‘구원의 거룩한 무리가 동방에서 출현한다’고 한 것과 남사고의 격암유록에서‘천하의 문명이 간방艮方(동북방)에서 시작하니(天下文明始於艮) 동방예의지국 조선 땅 호남 전라도에 천지의 도가 통한 무극無極의 도道라 고 했다.
*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피란처避亂處, 10승지지勝之地
정감록鄭鑑錄,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責,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공통되는 장소는 다음과 같다.
영월의 정동正東 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 동북쪽,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雲峯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무주茂朱의 무풍茂風 북동쪽 등이다. 이중에서 위치를 현재의 지명으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는 곳은 운봉의 동점촌, 무풍의 북동쪽, 부안의 호암, 가야산의 만수동이다. 한편 영월 정동 쪽 상류는 오늘날의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풍기의 금계촌은 영주군 풍기읍의 금계동, 욕금동, 삼가동 일대.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는 말 그대로 공주군 유구면과 마곡면을 각각 흐르고 있는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의 지역, 예천 금당동 동북쪽은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의 금당실金塘室지역, 보은의 증항 근처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인 시루봉 아래 안부鞍部지역, 안동의 화곡은 봉화군 내성면지역, 단양의 영춘은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부근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남한에 편중되어 있고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접근하기 힘든 오지이다. 이런 곳이 선호된 것은 전통사회에서 전쟁이나 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이 취할 수 있는 방도란 난리가 미치지 않을 만한 곳으로 피난하여 보신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십승지에 대한 열망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6 · 25전쟁 때에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십승지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피란 보신의 소극성은 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이상세계를 대망하는 적극성과 연결되어 있다.
* 전우치全禹治
전남 담양의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도술소설 주인공. 중종 때 도술과 시에 능함. 그러나 반역을 도모한 죄로 처형당함. 조야집요朝野輯要, 대동야승大東野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수록됨. 개성에 신비한 도술을 부리는 기인이 살았는데 재주가 출중하였으나 재물을 탐하지도 않고 벼슬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적이 출몰항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피폐로와지자 천상선관天上仙官으로 변신하고 왕을 찾아가 옥황상제의 명령이라며 황금들보를 만들라고 한다. 그는 이 황금들보를 외국에 팔아 쌀 수 만 섬을 장만하여 백성을 규휼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뒤늦게 전우치에게 속은 것을 안 왕이 잡아다가 국문하자‘나의 죄를 다스릴 정신이 있으면 백성을 다스리라’고 충고했다. 왕이 이를 깨닫고 방면하였다. 그러나 곧 역적의 누명을 쓰고 처형의 위기에 몰리자 죽기 전에 한 가지 소청이 있다며 그림을 한 장 그리게 해달라고 했다. 왕이 허락하자 그는 붓을 들고 산수화 한 폭을 그린 뒤 마지막으로 나귀 한 마리를 그려서는 이 나귀를 타고 홀연히 그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뒤 서화담(서경덕)의 도술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화담을 찾아가 도술을 겨누고는 자신 보다 한 수 위임을 자인하여 제자가 되어 태백산에 들어가 수도했다.
* 서산대사(휴정)과 사명당(유정)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구한 의병장이다. 사명당이 서산대사와 도술을 겨루는 일화가 전해온다.
사명당은 나름대로 도술을 터득하여 당대 일인자로 행세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산대사의 명성을 들었다. 그래서 자웅을 겨루고자 서산대사가 머물고 있는 금강산 유점사를 찾아갔다. 서산대사가 중노미를 불렀다.
‘얘야, 손님이 오시고 있으니 동구 밖으로 마중해라. 가다가 개울이 거꾸로 흘거든 손님이 가까이 왔다는 걸 알아라.’
중노미는 대답은 하였으나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왜냐면 대사는 아침부터 대웅전에서 염불을 하였고 밖에 나간적도 또 누가 손님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심쩍었으나 산문 밖을 나섰는데 아니나 다를까 개울물이 거꾸로 흐르지 않은가. 놀래서 어쩔줄 몰라 엉거주춤 서있는데 스님 한 분이 개울길을 타고 올라온다.
‘얘야, 네 스승이 마중가라더냐?’
‘그렇습니다만 스님께서는 뉘시온지?’
‘차차 알게 되겠지. 헛헛, 헌데 내가 졌구나.’
스님은 모를 소리를 하면서 앞장 서서 걷는다.
절에 다다르자마자 사명당이 하늘로 손을 쭉 뻗치더니 날아가는 새를 잡아 손아귀에 넣고는 마침 마중나오는 서산대사에게 묻는다.
‘대사님, 이 새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서산대사는 사명당의 물음을 간파했다. 살았다면 손을 쥐어 죽일 것이고 죽었다면 손바닥을 펴 날려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서산대사는 내기에서는 어차피 지게되었으므로 새라도 살리기 위해 새가 죽었습니다 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사명당은 손을 펴서 새를 날려버렸다. 그러고는‘또 내가 졌다.’라고 했다. 두 번째 승부, 서산대사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마중을 나오던 자세 그대로 한 발은 문지방을 넘어 밖에 또 한 발은 방안에 걸치고서 물었다.
‘스님, 제가 이제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방안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이 또한 답이 없는 질문이다. 무승부다. 그런데 또 사명당은 자기가 졌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방안에 좌정하고는 사명당이 여기에 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서산대사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말을 마친 사명당이 바랑에서 사발 두 개와 바늘 한 쌈지를 꺼내서는 양 쪽 사발에 나누어 담고는 시장하실테니 드시란다. 두 번째 승부다. 그러면서 사명당은 젓가락으로 접시의 바늘을 마치 국수처럼 훌훌 들어마신다. 서산대사도 마지못한 체하며 바늘국수를 먹었다. 다 먹은 서산대사가
‘바늘국수라 소화가 안 될테니 다시 게워내시지요.’
‘한 번 목구멍으로 넘어간 국수를 어찌 다시 게워낼 수 있겠습니까?’
사명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산대사는 먹은 바늘국수를 다시 바늘 그대로 접시에 토해낸다. 또 사명당이 졌다. 세 번째 마지막 관문이다. 사명당이 바랑에서 달걀 100여개를 꺼내더니 방바닥에 모로 세우고는 허공에다가 쌓아올린다. 달걀이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어디 봐라, 이 번에는 내가 이겼지? 사명당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럼, 제가 해볼까요? 서산대사가 역시 달걀 100여개를 담아가지고 오더니 일어서서는 천정에서부터 거꾸로 이어내려온다. 이 무슨 조화냐! 달걀을 방바닥에서부터 쌓아올리는 것도 최고의 도술인데 천정에서부터 거꾸로 내려쌓다니! 사명당은 서산대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명당은 곧바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금강산에서 수련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승병을 모아 왜적을 물리쳤다.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전쟁중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구해야 한다는 논의가 벌어졌으나 아무도 선뜻 사신으로 나서지않았다. 왜냐하면 왜적들이 조선의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사명당이 사신을 자청했다. 왜 막부에서는 휴전 사신이 온다는 전언을 듣고 만반의 대비를 했다. 포로 송환은 절대불가라는 합의를 해놓고 조선의 사신을 기다렸다. 사명당이 왜국에 도착하자 왜인들은 수백 개의 병풍을 길 양쪽에 세워놓고 사명당을 맞았다. 그러고는 짐짓 모른 체 하면서 오시는 길에 병풍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사명당이 보았다고 하자 왜인들은 자기들의 글솜씨를 과시할 겸 병풍에 쓰인 글 중 좋은 글귀가 있었는가고 되물었다. 사명당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왜인들이 기뻐하며 글귀를 알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사명당은 그렇다 라며 몇 자 글귀를 읊었다. 그러면서 나머지 글귀도 들어볼텐가 하고는 병풍의 글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외어버렸다. 왜인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 조선에서는 이런 정도야 3척동자도 할 수 있다.’
사명당의 말에 왜왕은 까물어칠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애초에 사신을 골탕먹이려든 생각과 달리 사명당을 국빈으로 최상급 대접을 한다면서 특별한 숙소에 모셨다. 왜왕은 사명당 같은 사람이 조선에 있으면 저희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사명당을 무쇠로 지은 집에 안내하고는 밖에서 고리를 걸어 문을 잠그고 4방의 아궁이에 불을 때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무쇠로 된 방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미덥지 않았던지 한 식경이나 더 불을 지피던 왜인들이 다음 날, 아무리 도사라지만 이젠 불에 타 가루도 남지 않았겠지 라며 사명당의 방문을 열었다.
‘어이 춰 에취, 아 이사람들아 날 얼어죽일 셈인가?’
사명당은 수염에 허연 얼음을 달고 나오며 덜덜 떨었다. 방안에도 천정에서 고드름이 줄줄이 달려있었다. 천정 한가운데‘얼음 빙氷 자’가 붙어있었다. 왜인들이 모두 제 스스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두려움에 몸이 사시나무 떨 듯 했다. 왜왕은 사명당의 도술을 자신이 확인하고는 사명당이 요구한대로 포로 5000여명을 돌려주었으며 돌아가는 길까지 모든 편의를 다했다.
* 토정 이지함
본관은 한산. 호는 토정. 시호는 문강. 토정비결土亭秘訣 지음. 거의 평생을 마포강변 토굴에서 살았으므로 호를 토정이라함. 고려말 선비요 학자 목은 이색의 6대손. 현령 이치의 아들. 북인 영수 이산해의 숙부. 서경덕 문하에서 경사자전 경사자전 통달.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 해박함. 1573년 포천 현감, 바다와 육지 개발 국부론 상소, 다음 해 사퇴. 1578년 아산 현감, 걸인청 설치 서민과 걸인 생업기술 교육. 박순, 이이(율곡), 성혼과 교유. 조식은 도연명에 비유. 김계휘가‘토정이 어떤 사람이냐?’ 묻자, 이율곡은‘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 1713년 이조판서 추증, 아산 인산서원과 보은 화암서원에 제향
토정 이지함선생(1517년~ 1578년)은 조선 중종 12년(1517년) 정축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형백馨伯. 형중馨仲. 호號는 토정土亭. 수선水仙,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며 한산이씨韓山李氏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이다.
부친은 수원水原 판관判官을 지낸 이치李穉=稚이며 어머니 광산김씨의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외가인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장성한 뒤에는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 28세 연상)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혹인기사或人記事에, 토정선생은 당당한 몸집과 훤칠한 키에 둥글넓적한 얼굴, 화경같이 번쩍이는 눈, 때로는 한꺼번에 두 말이나 서 말의 밥을 거뜬히 먹어치우는 식욕, 그러나 며칠을 굶고도 시장해 보이는 기색도 없이 하루 수백 리의 길을 다녔다. 길을 가다가도 아무데서나 주저앉아 지팡이를 팔에 끼고 웅크리고 앉은 채 잠이 들면 산천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코를 골아댔다. 누덕누덕 해어진 홑옷 단벌을 사시장철 걸치고 다니면서 손에는 참대 지팡이가 떠날 줄 몰랐고, 머리에는 낡아빠진 패랭이가 얹혀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공부하기 위하여 팔도강산을 떠돌아다니던 시절의 선생의 모습으로, 권세가 쩡쩡 울리는 당대의 벼슬아치 사랑에서건, 만석꾼을 자랑하는 부잣집 대청에서건 짚신을 벗어던지고 땟자국이 흐르는 홑옷 자락을 펄럭이며 앉으면, 곁에 사람이라고는 없는 듯 말이며 몸짓이 어찌 보면 방자스럽고, 어떻게 보면 뭇 닭의 한 마리 학처럼 우뚝하고 당당해 보였다. 토정선생은 밖에 걸치고 있는 것을 벗어던지면 당대의 선비 가운데서 빠질 것이 없는 분이었다.
재물이란 많으면 많을 수 록 재앙이 따르는 법이라며 가난을 재미삼아 한평생 청담[淸淡], 무욕無慾, 청빈淸貧하게 살며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면서도 박학博學과 다식多識을 자랑하지 않았고 벼슬아치를 탐내지도 않았으며 어디에도 붙박이어 얽매이지 않았다. 범인凡人을 뛰어넘는 기지奇智와 기행奇行으로 일관한 토정선생土亭先生은 먼 훗날을 미리 훤히 내다본 예언가豫言家, 서민철인庶民哲人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과 경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은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선구자였으며, 만년의 짧은 관리생활에서는 백성편에 서서 구세제민救世濟民한 청백리淸白吏였다.
토정선생이 공부하던 시절 경기도 파주군 광릉의 농장에서 공부를 할 때 하인을 시켜 집에 가서 등잔기름을 더 가져오게 했다. 장인인 모산수毛山守가 글공부에 너무 열중하는 사위가 탈이 날까 걱정돼 기름을 주지 않으니 토정선생은 도끼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소나무 관솔을 찍어와 불을 밝히고 꼿꼿이 앉아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하여 1년 동안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통달通達하였다.
하루는 형을 보고 말하기를
‘처가를 살펴보니, 길吉한 기운이 없으니 오래지 않아 무슨 화禍가 있을 것 같은데 오래 그 집에 있다가는 나까지도 화를 입을 염려가 있습니다.’
하고는, 데릴사위로 들어간 그 집에서 처자를 데리고 떠나왔다.
과연 그 다음 해에 어떤 일로 화를 입어서 온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 그 형도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신기하게 여겼다.
선생의 초립동 시절의 이야기다.
그의 장인은 정종定宗의 증손인 모산수毛山守 이성랑李星琅이라는 분이었다. 데릴사위가 되어 초례한 다음날 엄동설한 몹시 추운 때였었는데, 처가에서 새 옷을 한 벌 해주었더니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져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밤늦게 서야 벌벌 떨면서 들어오는데 보니까 아침에 입고 나간 도포가 없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볼일이 있어서 홍제원弘濟院까지 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다릿목에서 거지 아이 셋이 떨고 있기에 세 조각으로 잘라서 세 아이에게 입히고 왔다는 사연이었다.
토정선생은 한때 토실 생활을 했었지만 그것조차 귀찮다고 생각했던지 팽개쳐 버리고 나중에는 큰 뜻을 품고 팔도강산을 두루 살펴 보려고 길을 떠났는데 역시 해어진 옷과 신에다가 쇠鐵로 갓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그렇게 차리고 과객질을 다니다가 이따금 갓을 벗어 솥鼎으로 썼다니 기괴하지 아니한가? 그런 기괴한 생활을 그의 말대로 사람이란 제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는 법인데 나 자신은 이런 것을 즐긴다 라고 한 신념에서 나온 것일 게다.
선생은 그렇게 빈궁할 정도로 청빈하게 지냈지만, 마음만 먹으면 돈 만드는 재간 또는 비상했다. 바다를 좋아하여 조그마한 쪽배를 타고 먼 바다까지 자주 나갔으며 세 차례나 제주도를 왕래하였는데, 다른 배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쪽배의 네 귀퉁이에 커다란 박을 달아
손수 노를 저어 제주까지 가고 오고하는 데에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항해하다가 섬에 들어가서 버려져 있던 처녀지를 개척하여 곡식도 심고, 백성에게 장사하는 방법도 가르치며 여러 가지로 물산物産을 장려했다. 그때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은 섬이 많이 있을 때라 거기다가 박과 콩을 심어 두었더니, 거름을 안 주어도 잘 되어서 가을에는 많은 박을 따게 되었다. 그것으로 바가지 만들어 팔아 많은 곡식을 장만하고, 그것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의 처자는 여전히 배를 곯았으며 집안은 항상 가난했다.
선생은 가문도 좋았거니와, 재질이 비상하고 도학道學과 문장이 탁월하여 경전經典에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 병서兵書, 음양술서陰陽術書등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인격과 사상, 식견이 또한 고상하여 평생에 기행 이적이 많으니 세상 사람이 이인異人 또는 기인奇人이라고 말하였다.
황강黃剛 김계휘(金繼輝 1562~1582, 21세 연하)가 이율곡에게 묻기를
‘형중馨仲이 제갈량諸葛亮에 비해 어떠하냐?’
‘토정은 직용 할 인재는 아니나, 물질에 비하면 기화이초奇花異草요, 진금기수珍禽奇獸와 같아서 놓고 구경이나 할 것이지 포백숙율布帛菽栗같이 긴요한 것은 못된다.’
토정선생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내가 콩이나 조가 못 된다면, 도토리나 밤은 될 것이니, 어찌 전연 쓸 곳이 없으랴.’
고 말하였다.
그 한 가지의 자타自他 비평한 것만 보아도 당시의 사람들이 제갈공명에 견줄 만큼 학문이나 지혜가 상식을 벗어날 만큼 놀라왔던 것이 틀림없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문제의 인물로 부각되었으며, 토정 자신도 자부심이 만만치 아니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을 토정 선생은 곧 잘 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은 주자학朱子學 외에는 행세 못하던 시절이라 선생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율곡까지도 그를 기화이초나 진금기수에 비하고 말았으니 어찌 애석치 않으랴. 그 때에 그가 일부러 광객狂客 행세를 하며 세상을 비웃은 것 또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율곡이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을 토정선생께 권한 일 있었다. 토정선생은 욕심이 많아서 잘 안 된다 하여 서로 웃었던 일까지 있던 사이였다. 이따금 토정선생은 연하인 율곡의 집에 놀러갔었는데, 율곡의 집에는 같은 뜻을 가진 당대의 명사들이 자주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 때 율곡은 대간大諫으로 있었는데 국가대사를 의논하기도 하고 비판도 하다가 임금께서 청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 일이 있었다. 그에 동조한 선비들은 병을 핑계 삼아 율곡이 벼슬을 물러나는 것이 옳다는 공론으로 기울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토정선생이 별안간 코웃음을 크게 치면서 옛날 성인聖人이란 형식과 체면 덩어리라, 잔뜩 후폐後弊만 남겨놓고 말았군한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 멍하니 있는데, 주인인 율곡이 또 무슨 기담이 계시오하니, 그 제서야 빙그레 웃으면서 공자는 병이라 일컬어 유비儒非를 보지 않았고, 맹자는 제선왕齊宣王이 부를 때 병이 들었다고 가지 않았는데 후세에 소위 선비라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병이 있다는 핑계로 그것을 본받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병이 들었다고 핑계하는 것은 게으른 종놈의 행습行習이지 어찌 선비로서 할 짓이란 말인가! 맹자도 그러했는데 우리가 그러기로서 무엇이 나쁘겠는가 하겠지만 공맹자는 무슨 심술로 후세 사람들에게 이따위 더러운 형식을 시범했단 말인가! 하니 모두 함께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을 못하고 말았다.
토정집土亭輯에 사람은 누구나 안으로는 신령스럽고 굳세기를 원하며, 밖으로는 부귀를 원한다. 귀하기란 벼슬을 안 하는 것보다 더 귀함이 없고, 부富하기란 욕심내지 않음보다 더 부함이 없고, 굳세기란 다투지 않음보다 더 굳셈이 없고, 신령스럽기는 알지 않음보다 더 신령스러움이 없다. 재물이란 흉한 물건이 아니나, 나라의 재앙이 재물에서 많이 생기고, 권세 또한 흉한 물건이 아니나 벼슬아치의 재앙은 권세에서 많이 생기고, 보배를 지니는 것이 흉한 물건은 아니나 필부의 재앙은 보배를 지니는 데서 많이 생기고, 나를 알아준다는 것이 나쁜 일 아니나 선비의 재앙이 나를 알아주는 데서 많이 생긴다.고 하였다. 노자老子나 장[莊子의 글을 읽는 듯이 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선생이 일생을 통하여 스승으로 모셨거나 가까이 사귀어온 분들로는 서화담徐花潭, 이율곡李栗谷, 이백사, 성우계 와 같은 학자들이었고 제자 가운데서 가장 사랑을 받은 사람도 조중봉 같은 분들이 있음을 보아 역시 노장老莊보다 공맹孔孟의 학문에 근본적으로 뿌리박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도학파道學派 문장으로도 당대에 명망이 높았지만, 기행이적奇行異蹟으로 더욱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 때 한강漢江 하류이던 동막東幕 근처에서 살았는데 한강가의 진흙을 이겨서 손수 높이가 십여 척이나 되는 토실土室을 한증막汗蒸幕처럼 만들어서 낮에는 지붕 위에서 놀고 밤이면 방안으로 들어가서 잠을 자곤 하였다. 그 집을 토정土亭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의 별호를 토정이라 불게 되었고, 선생이 살던 동리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토정리(지금의 마포로타리 서쪽)라고 붙여졌다.
이 한강가의 토정에서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선생은 그 토정에서 한강물의 변동을 보고 훗날 제주濟州를 왕래하는 물길을 보는 연습을 하였던 것이다.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토정선생은 배 젓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바다에서 노는데, 한 노인이 배를 저으며 천천히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토정은 그 노인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빨리 배를 저어 뒤를 쫓아갔으나, 하루 종일 있는 힘을 다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토정선생이 지쳤을 때 그제 서야 노인이 돌아보고 웃으면서 배 젓는 솜씨가 겨우 그 정도로군, 배를 젓는 법을 가르쳐주지.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해보게. 광풍이 노한 파도를 몰아와서 땅을 휩쓸고, 하늘을 들먹거리는 비바람과 천둥번개를 몰고 올지라도 재난을 당하지 않고 눈 깜짝하는 사이에 천리를 갈 수 있게 될 걸세라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선생은 바다의 물줄기를 보는 영안靈眼이 트이게 되었다고 한다.
토정선생의 시詩 가운데
만리행장쌍각건 萬里行裝雙脚健 만 리 길을 떠도는 행장과 두 다리가 튼튼하니
백년신세일표경百年身世一瓢輕 백 년의 인생길이 표주박같이 가볍구나
하는 구절이 있는데, 선생의 일생을 그대로 나타낸 시 구절이다. 행장과 두 다리가 튼튼하면 어디를 간들 무엇이 두려우며 인생이 허무하니 무엇을 연연戀戀하랴는 것이 아닌가.
토정선생의 조카인 아계鵞溪 이산해李山海는 조선시대 당파 최대 파벌이었던 북인의 영수다. 조카는 평소에 숙부인 토정을 평소에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하루는 선생이 아계더러 뱃놀이를 가자고 하였다. 아계는 싫다할 수가 없어서 따라가게 되었다. 토정선생은 서강에서 손수 노를 저어서 한강하구로 나갔다. 때는 음력 7월이라 약간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밤이었다. 합수를 벗어나서 선생은 돛을 올리더니 힘을 내어 노를 젓기 시작하였다.
배는 茫茫大海망망대해를 쏜살같이 달더니 어떤 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다. 아계鵝溪는 숙부의 노 젓는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어
‘여기가 어딥니까?
천천히 배를 저으며 토정선생이
‘양자강[楊子江] 일세.’
아계는 크게 놀랐다. 글로만 보던 양자강을 실제로 온 것이었다. 배는 다시 달려서 어떤 호수로 접어들었다. 아계가
‘여기는 호수가 아닙니까?’
‘동정호洞庭湖지!’
갈대밭 사이로 잠시 거슬러 올라가더니
‘여기에 올라가세!’
하며 배를 대는데 아계가 쳐다보니 큼직한 누각이 달빛에 보인다. 가까이 가서 현판을 보니 악양루岳陽樓라고 써 있지 않는가! 아계는 더욱 놀라게 되었다. 토정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가세!’하였다. 그리고는
‘꼭 하나 선물할 것이 있네.’하고는 천천히 배를 저었다.
어느 조그마한, 대나무가 무성한 섬에 배를 대더니
‘저 대나무를 붓만한 굵기로 석 자만 꺾어오게.’했다. 아계가 꺾어오니
‘이 대가 소상반죽蘇上班竹일세! 집안에 들어가게 되거든 한 자 길이로 다듬어 언제나 소 중하게 간직하게. 훗날 꼭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걸세!’하였다.
어느 때와는 달리 이렇게 엄숙하게 말씀하시고는 다시 돛을 올려 배를 쏜살같이 저어 망망대해에 나오더니 동북쪽으로 뱃머리를 잡았다. 한참 후에 어느 섬에, 섬이라기보다는 조그마한 돌무더기를 향해
‘저기 잠시 올라가 조심석照心石을 보고 가겠나!’하였다.
아계는 조심석이란 말을 난생 처음 듣기에
‘조심석이란 어떤 돌입니까!’하고 물었다.
‘조심석이란 마음을 비춰 보는 돌일세. 그 앞에 서면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네. 마음 공부의 정도에 따라 염통의 그림자가 보이는데 혹은 흐리기도 하고 혹은 진하게 검게 보 이기도 한다네. 진한 사람은 아직 공부가 모자라는 것일세. 그래서 조심석이라 한다네.’ 하였다.
미끄러운 바위를 겨우 기어올라 정상 가까이에 이르니 이상한 빛이 은은히 나고 있는 흰색의 자연석이 있었다. 과연 두 개의 형상이 비치는데 아계가 숙부의 것을 보니 염통이 좀 흐리게 보이는데 자기의 것은 새까맣게 보였다. 선 자리를 바꾸어서 보아도 여전히 자기의 것은 검다. 큰소리로
‘어떤 원리에서 이런 일이 있습니까!’물으니
‘이런 것이 있네. 이제 보았으니 돌아가세.’하였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또 쏜살같이 배를 저어가더니 눈 익은 한강 하구에 이르러서야 천천히 노를 저었다. 마포 나루에 닿아 하늘을 쳐다보니 묘시에 가까웠다. 즉 아침 5시 경이었다. 이런 일이 있는 후에 아계는 숙부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였으며 더욱 공부에 힘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 가지고 온 소상반죽蘇上班竹이 훗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의 고집을 꺾는데 한몫을 한 것은 토정선생이 돌아가신 뒤의 일이다.
또 한 번은 한 친구와 함께 마포(麻浦, 삼개)나루에서 배를 타고 나가 한 섬에 정박하였다. 그 섬은 험준한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었다. 토정선생이 친구를 돌아보고 하는 말이
‘여기서 잠깐 쉬고 있게. 내 잠깐 산속에 들어갔다가 올 것이네.’하고는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친구는 그의 기행을 아는지라 몰래 뒤를 밟아보니 10여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듯이 험한 절벽 위에 서너 명의 미녀가 있어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보고 있으려니까, 토정이 껑충 뛰어 절벽 우로 오르더니 무엇인가 그 미녀들과 환소歡笑하더니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친구는 어쩔 수 없이 돌아와서 맑게 갠 하늘만 쳐다보면서 배 안에 누워 있었다. 이윽고 토정선생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섭섭히 생각하지는 말게. 그럴 일이 있네.’하였다.
친구가 갔던 곳을 물어도 토정선생은 그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배를 돌려 돌아왔으나 끝내 그가 만났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토정선생께서 아산고을 살이 할 때, 많은 사람이 해일로 죽은 일이 있었는데, 자오상충子午相沖으로 자일子日 오시午時에 해일이 일어난다고 미리 경고를 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토정선생은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만사 제쳐놓고 어디든지 찾아가 만났는데, 남명南溟 조식曹植과의 만남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토정선생이 남루한 옷을 입고 대삿갓에 지팡이를 짚고 남명을 찾아가니, 하인이 안으로 들어가 행색이 이러저러한 사람이 왔다고 알렸다. 전해들은 남명이 뜰아래까지 쫓아내려가 반겨 맞으며 극진히 대접하니, 토정선생이 ‘존장께서 어찌 한낱 야인野人에 불과한 저를 이토록 후대厚待하십니까?’
‘범상치 않은 풍도風度를 보고도 내 어찌 성명聲名을 떨치는 토정선생을 몰라 보리요.’ 하였다. 남명은 토정선생보다 16년 연상이어서 존장으로 존경했지만 남명 또한 토정선생의 인품을 존중하여 격의 없는 벗으로 예우禮遇했다.
벼슬하기를 싫다는 선생을 억지로 끌어내다시 하여 만력萬曆 계유癸酉(1573년), 탁월한 행적으로 벼슬을 내린다는 핑계로 6품직六品職을 제수하여 포천 현감을 시켰다. 친구들의 권고에 못 이겨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그다운 관리 노릇을 하였다. 포천 고을에 처음 도임하는 날, 그 날도 여전히 짚신 베옷 헤어진 갓으로 부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저녁상을 차려 들여온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토정 원님은 먹을 것이 없다며 수저도 들지 않고 도로 물리쳤다. 그 날 저녁 새로 부임한 원님의 도임상이랍시고 그 고을에서 나는 갖은 진미를 갖춘 굉장한 저녁상을 다시 그 보다 훨씬 더 잘 차려서 올렸더니 그래도 여전히 거들 떠 보지도 않고 도로 물리쳤다. 아전들은 죄송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뜰 아래 엎드렸다. 그 중 말주변께나 있는 아전이
‘저희 고을은 한양과 달라서 이 이상은 도저히 더 차릴 수가 없사오니 그저 용서하여 주옵 소서.’라고 빌었다.
그는 그제 서야 온화한 낯을 하고
‘나를 새로 온 관장이랍시고 손님 대접하여 그렇게 하였겠지만, 나는 내어온 그런 음식을 여태 먹어본 일이 없어서 그랬다. 우리나라의 지금 형편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굶고 있 는데 조그마한 고을에 관장이랍시고 어찌 그런 큰 상을 받아 목에 넘어갈 것 같으랴. 그 상은 나를 욕보이는 짓일세. 나는 잡곡밥과 나물국이면 그만이다. 이 후로는 그런 음식은 결코 먹지 않을게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국 한 그릇 밥 한 그릇으로 상도 받치지 않고 태연히 식사를 마쳤다. 오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말렸으나 토정 선생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토정선생이 아산현감[牙山縣監]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만들고자 한 것이 걸인청乞人廳이었다. 그러나 아전들은 저마다 반대를 하고 나섰다.
‘사또! 거지새끼들을 모조리 쓸어다가 아산 바깥으로 내쫓아버리면 되지 않겠아옵니까? 가 난구제는 나라도 못 감당한다는데 무슨 수로 걸인청이란 걸 만들어 아산고을을 거랑뱅이 소굴로 만들려 하시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어허, 고얀지고!’
토정선생이 아전들을 꾸짖으며,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따뜻이 보살피는 게 수령守令의 책무가 아니드냐? 걸인청을 세우려 는 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여 양민良民으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도 집 과 땅을 가져 잘살게 만들려함이니라. 그렇게 되면 아산고을은 걸인도 가난뱅이도 없는 살기 좋은 고을이 될 것이다.’
‘너희들이 건물이 없다느니, 재물이 없다느니 한다마는, 건물은 세미稅米창고를 비워서 수 리하면 될 것이고, 재물은 한 해 동안 만 먹여주면 자립할 방도가 마련될 것이니라.’
걸인청이 만들어지자 고을안의 걸인들을 모두 수용했는데, 그냥 먹고 놀린 게 아니라 일 시켰다. 느리고 약한 자는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으며, 힘 있는 자는 땅을 개간하고 고기잡이를 하며 또 손재주가 있는 자는 도구를 만들며 공업에 종사토록 하여 일하며 살아가라는 교훈을 심어주었다.(걸인청은 지금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424-3 목조건물로 남아 있음.)
이조실록李朝實錄 선조 6년(1573년) 6월 계축癸丑에 제수除授 6품직六品職의 기록이 있고, 7월 갑신甲申에 이지함李之菡, 호號 토정土亭이 형 지번之蕃의 병으로 서울에 들러 6품직六品職을 받았으나 귀를 씻고 곧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태천기笞泉記에 토정선생의 둘째아들 산휘山輝도 아버지를 닮아 지음知音의 기재奇才였다. 열자列子에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는데 그 신묘神妙한 소리를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만이 알아들었다. 그러던 친구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제 내 거문고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하고 거문고 줄을 모두 끊어버리고 다시는 손대지 않았다는 고사故事서 지음知音이란 말이 유래[由來]되었다.
어느 날 토정선생을 찾아온 사람이 휘호를 간청하자 토정선생이 거문고를 뜯으니 산휘山輝가 듣고
‘대인大人, 아버지께서 노중연魯仲連을 생각하고 계시누나.’하였으며
토정선생이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병으로 구토를 자주했다. 하루는 토정선생이, 구리로 만든 대야를 치자 아들 산휘가 듣고 나서 말하기를
‘그 소리가 심[甚]히 조화[調化]를 이루었구나! 대인께서 곧 편안함을 얻을 것이로다.’
하고 밖으로 나가 손으로 가슴을 치고 발로 땅을 구르며 슬퍼했다. 그로부터 토정선생은 일어나지 못 했다.
토정선생이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아전 하나가 어찌나 흉물스럽게 백성의 등을 치는지 한번은
‘너 같은 놈은 늙었으나 마음은 못난 버릇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린애 대접을 할 수 밖에 없다.’
하곤 아전의 갓을 벗기고 흰머리를 총각머리로 땋아 내리도록 하고 벼루를 들려 통인通人처럼 종일 세워두었다. 그 아전은 그러한 부끄러운 벌을 받고는 속으로 항상 앙심을 먹고 있었다. 한 평생을 못된 짓을 예사로 생각하고 살아온 늙은 아전이, 그 전 상관은 그렇게 꾸짖지도 않았고, 많은 고을 사람들도 그 아전 앞에서는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토정 원님만이 그렇게 벌을 내리니 속으로 분이 났던 것이다. 토정선생은 언제나 지네의 생즙을 하루 한 그릇씩 마시고 제독하려고 약 사발을 떼면서 바로 날밤을 씹는 버릇이 있었다. 하루는 약을 마신 뒤 날밤을 딱 깨물고 보니 밤이 아니라 밤과 꼭 같이 깎아 다듬은 버드나무 조각이었다. 토정선생은 아fot 사람을 다그쳐 밤을 씹으면 될 일이였으나 내 운명이 여기까지인것을 어찌 더 미련이 있겠느냐며 무참히도 돌아가셨다고 전해온다. 그 때가 선조 11년[1609] 7월 17일이었다.(이율곡은 토정선생이 이질에 걸려서 돌아 가셨다고 했음)
이율곡이 토정선생을 제사하는 글,
나무들이 빽빽이 늘어섰는데, 그 사이에 큰 나무가 우뚝 솟아있듯, 풀들이 띄엄띄엄 나 있는데, 어떤 신령한 한 포기 풀이 빼어나 이삭을 맺었으니 이상하도다. 공을 또한 수산水山이라 호號한다 하였으며, 조중봉은 스승으로 섬겼을 뿐 아니라, 토정선생이 세상을 떠난 다음 임금께 상소하여 돌아가신 분에게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려주기로 청하였다.
그 글 가운데, 선생은 청백淸白하기로 천고에 둘도 없다고 하였으며, 그 어른의 학문이나 행실은 실로 동방의 이윤伊尹이요 백이伯夷라 하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집에는,
'토정선생은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았는데 퇴계가 그의 기풍을 높이 여겨 벗으로 삼았다.
일찍이 아산의 현감이 되어 간사한 관리를 엄하게 단속하다가 문득 어느 날 갑자기 죽음 을 당하였다. 그 사람들은 그가 독살 당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토정은 남을 알고 기미를 알아 뜻과 기운이 신과 같았으니 그런 흉측한 일을 응당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토정선생은 죽기 전에 자기가 묻힐 자리를 미리 정해 놓은 보령군 주포면 고정리 사당골 국수봉 기슭에 묻히었다. 그런데 훗날 증손자 되는 이가 감사를 지내면서 당시 유명하다는 지관地官의 말을 듣고 이장移葬을 하려고 했다. 묘墓를 파다보니 안에서 빗돌이 하나 나왔다. 그 빗돌에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불초손이 이 묘를 파고 개봉축改封築하리라.' 고 적혀 있었다. 그제서야 후손은 깨달은 바가 있어 이장을 멈추고 선생의 묘 밑에다가 조그맣게 자기 묘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봉집龜峯集에 송구봉(宋龜峯, 1534~1599년)이 이율곡에게 보낸 글 가운데 토정의 아들이 시묘侍墓하던 중 호식虎食을 당한 사실을 알리고, 옛날에는 호랑이를 길들여 복종하게 한 효자도 있었는데, 요새는 범이 묘를 지키는 자식을 잡아먹다니 하고 애도하고 있다.
명신록名臣錄에는 조부모를 장사지낼 때에 장례 모실 산을 보니 자손들 중에 두 재상이 나오게 되어있고 막내는 불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이 스스로 그 재앙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인지 후에 이산해(李山海, 1538~1609년)와 이산보(李山甫, 1539~ 1594년)는 과연 벼슬이 일품一品이 되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11년 (1609년) 5월 을묘乙卯에 이조吏曹에서 아산현감 이지함에게 알맞은 직책을 받기를 청하나 답하기를 어진 자를 쓰는 것이 백성을 위함이라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하며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그 이튿날의 기록에는 아산현감 이지함이 폐단을 진정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였으나 그 내용에 관한 기록이 없다. 계啓에 답하기를 너의 생각이 옳다 하였다 한다.
그리고 12년(1610) 2월 계유癸酉에 충청도 도사都事의 서장書狀에 아산 현감 이지함이 상소를 올렸으나 상부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죽었다하였고 이어서 정원政院에 장계狀啓가 들어 왔다. 계에 이지함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적었으며 높은 재능과 식견이 있어 언변과 행실로 사람의 귀와 눈을 감동시켰고, 집에서는 효성과 우정이 두터웠으며, 백성을 진심으로 생각하였고 죽기 전에 상소문을 보니 지극히 간절하게 백성을 측은히 생각하여 공손한 글로써 가히 세상 일을 처리하는데 호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선조 27년(1625) 2월에 임금께서 지함의 적자가 몇이냐 물으니 장자는 산두山斗인데 전염병으로 죽고, 그 아들 즉 손자 거인據仁이 지금 살고 있으며, 차자 산휘山輝는 범에 물려 죽었으며, 그 다음의 산룡山龍은 12살에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라고 이덕형李德馨, 1561~1613년)이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월영도月影圖 이지함 원저原著, 백동기白冬基 편역編譯 명문당明文堂 인용)
특히 참고사항으로
토정선생께서 아산 고을살이 할 때 많은 사람이 해일로 죽은 일이 있었는데, 자오상충子午相沖으로 자일子日 오시午時에 해일이 일어난다고 미리 경고를 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격암유록 예언서에서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소래산蘇萊山일대와 시화호와 남양만 그리고 아산만 일대에 해일海溢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피해가 있었던 곳이다. 일본 오키나와열도에는 해일海溢로 떠내려간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원문原文
救援枋舟 구원방주 높이 떴네.
風浪波濤洶洶 풍랑파도 흉흉하나
山岳波濤 산악파도 두려워라
* 임꺽정
조선 중기의 의적義賊.
16세기 중반 몰락농민과 백정 · 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진다. 일명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居叱正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생활했다. 뜻을 같이하는 비슷한 처지의 농민 수십 명과 그 가족으로 집단을 이루어 황해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시작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웠던 그는 1559년경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이 지역의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 이들이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다. 또한 서울, 평양 간 도로와 그 밖의 주요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 공물, 진상물 등을 탈취했다. 이와 함께 관군의 방비와 토벌의 허점을 교묘히 찌르며 세를 확장하면서,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고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 지배층이 여러 차례 관군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이를 번번이 물리치고 1559년에는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李億根마저 잡아죽였다. 1560년 가을에는 봉산, 개성을 거점으로 서울까지 진출했으나, 같은 해 11월 참모인 서림徐林이 체포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정부는 서림에게서 활동의 계획과 비밀을 알아내고 선전관 정수익鄭受益과 봉산, 평산의 관군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했으나 뛰어난 전투력과 농민, 이서吏胥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당시 이서와 농민의 도움은 임꺽정의 부대가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되어 출몰을 예측할 수 없어 잡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1561년에 들어 황해도, 경기도 북부, 평안도, 강원도지역에 출몰하여 활동했으나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어져 형인 가도치加都致가 체포되는 등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부터 도망하던 중 마침내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다.
임꺽정의 의적활동은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일환이며 그 집약점이었다. 이 시기 농민의 저항은, 당시의 사관史官이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질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서 지배층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치열하고 오랜 활동은 정부 지배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위기의식을 심어주었으며, 피지배층 일반에게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민중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그 뒤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로 그려지기도 했다.
* 일지매
정의로운 소년 일지매가 약한 자를 돕는 도둑이 되기까지의 일화逸話 ‘오늘밤도 넌 매화 한 가지만 그리고 있었구나. 오늘부터 너를 일지매라고 불러야겠다.’ 그러나 소년은 어머니의 말에는 대꾸도 아니 하고 그림 그리던 붓을 천천히 놓고 어머니의 얼굴을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아버지는 도둑질 가셨지?’ 하고 씹어 뱉듯이 중얼거린다. 일지매는 도둑질하는 아버지가 창피해서 동무들이 '도둑놈의 아들' 이라고 놀려도 묵묵히 참아낸다. 그렇게 쌓였던 울분들은, 부모와 할아버지가 탐관오리들에게 억울하게 농터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당함으로 돌변해 앞길을 결정하는 힘이 된다. 그 뒤 우연히 만난 일휴대사에게 좀도둑이 아니라 세상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운다. 대사를 만나기 전에 벌써 양반들을 골려주는 재미를 알고, 또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소년 일지매는 이 만남을 계기로 7년간 일휴대사 밑에서 수양을 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큰 사람으로 성장한다. 일휴대사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교만하지 말고 참을성을 기르는 것. 이 가르침 덕분에 일지매는 백성들의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일지매를 사칭하는 가짜 일지매와 일지매를 잡기 위해 키가 6척만 넘으면 모두 잡아들인 포도대장 장유식 등 이외에도 교훈적이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 김삿갓
김삿갓 1807년 ~ 1863년(순조 7년 - 철종 14년). 그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그렇다면 김병연 그가 왜 김삿갓을 자처하고 한평생을 방랑했는가? 1826년(순조 32년)에 김병연은 백일장을 보게 되었다. 백일장이란 초야草野에서 학문을 닦고 있는 무명유생無名儒生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단위로 글짓기대회를 하는 일종의 지방과거와 같은 것이다. 이 때 김병연의 나이는 갓 스물. 자字는 성심性深이요, 호號는 난고蘭皐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에 이미 4서3경四書三經을 통달 하였다. 게다가 시재詩才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 오고 있었던 그는 고금의 시서詩書와 사서史書를 닥치는 대로 섭렵涉獵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었던 것이다.
삿갓 하나를 쓰고 주유천하를 일삼으며 가난하게 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작물을 쓸 줄 알았던 시인이었고, 세상을 바로 볼 줄 알았던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치르는 과거에 합격한 이후에 방랑길에 올랐다. 그가 합격한 과거시험의 문제는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에 저항하다가 죽은 정가산과 항복한 김익순의 행동에 대해서 쓰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정가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김익순의 비굴한 처사를 질타하는 글을 써서 당당히 장원을 한 것이다.
그러나 본시 글공부만 좋아했을 뿐이지 공명심이나 출세욕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던 김병연이 이날 백일장을 보러 온 것은 홀어머니 이씨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늘날의 공무원고시와 같았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詩題는 다음과 같았다.
논정가산충절사論鄭嘉山忠節死 탄김익순죄통우천嘆金益淳罪通于天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
이 시제는‘홍경래의 난’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홍경래가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 신미년辛未年 12월 홍경래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고 자칭해 가면서 반란군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대는 가산嘉山, 박천搏川을 함락 시키면서 서울로 남진南進하였고, 다른 1대는 서북西北으로 진격하여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천宣川 등을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 석권席捲해버렸다. 그 통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가산 군수 정 시는 문관文官이면서도 그러했건만,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 김익순金益淳은 국가 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武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을 해버렸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시키고 나자, 김익순을 역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참형에 처해버렸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시제로 나오자 김병연은 평소부터 반란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가산 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이라고 존경해 왔던 반면에, 김익순을 백 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고 있었다. 비겁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김익순이란 놈을 백일장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마침 잘 만났다. 오늘은 나의 필봉을 마음껏 휘둘러 비겁하기 짝 없는 네 놈을 뼈도 못 추리게 탄핵彈劾하리라.
하지만, 김익순은 다름아닌 김삿갓의 할아버지였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여 숨어산 부모는 모든 사실을 숨기고 살아 왔으며, 장원이 됨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밝혀 진 것이다. 할아버지를 천하에 비굴한 인간으로 묘사해 장원이 된 자신… 그리고 조상을 잘 못 만난 죄로 인하여 출세의 길이 막혀 버린 시대의 현실 앞에 김병연은 노모, 아내, 자식도 있었지만, 모두 버려두고 방랑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런 삶은 그가 죽기 직전에 쓴 '난고평생시' 에 잘 나타나 있다.
새도 짐승도 제 집이 있는데/ 나는 한평생 혼자서 씁쓸히 떠 돌았네/ 미투리 대지팡이로 천리길을 걸었고/ 구름따라 머문 온갖 곳이 집이었다/ 사람을 탓하랴, 하늘을 원망하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내 마음만 아플 뿐이네 (중략)
강산 따라 구경한 대문은 천만 호에 이르렀고/ 가진 싯귀는 많았지만 행장은 언제나 빈 주머니뿐/ 부러울 것 없는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나서/ 후하고 야박한 세상의 온갖 인심을 맛 보았네/ 기구한 팔자라 천대만 받다보니/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어졌구나/ 가도 오도 못하고 서 있지도 못하며/ 하염없는 나날을 나그네로 떠돌았을 뿐이네.
또 그는 '삿갓'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는데, 그에 대해서는 다음의 시에 그대로 표현이 되어 있다.
떠돌던 나에게 삿갓은 가벼운 배와 같았고/ 우연히 한번 쓴 것이 사십 평생을 지냈구나/ 목동이 소 뜯길 때 폭양을 피해 쓰던 것이고/ 늙은 어부가 백구와 더불어 고기 잡을 때 쓰던 것이었다/ 술이 취한 나는 벗어 꽃피는 나무에 걸었고/ 흥이 거나하면 들고 다락에 올라 달구경을 하였지/ 속인의 의관이야 모두 겉치레지만/ 나의 삿갓이야 모진 풍우에도 끄떡없는 고마운 의관이지.
그는 방랑 중 전라도 화순에 갔을 때 길에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쓰러졌다.그런 그를 한선비가 업어다 집으로 데려갔는데, 며칠 후에 몸이 좀 낫자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다시 그 선비를 찾아와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저 등잔불 좀 꺼 주시오.’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그가 죽은 후에는 전국에 김삿갓을 모방하는 많은 방랑객들이 있었고, 물론 모두 가짜 기인奇人들이었다.
* 장길산張吉山
조선 숙종 때의 도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 장길산에 관한 기사가 짧게 언급되어 있으나 생사 년도나 다른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장길산 관련 기사는 2개다. 하나는 1962년 평안도 양덕현에서 장길산을 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그 고을 현감을 좌천시켰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1697년 이익화, 장영우 등의 반역 모의와 관련되어 이들이 장길산과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된 부분이다. 특히 1697년의 실록 기사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국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 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 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초사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은밀히 신칙申飭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 뢰도록 하라.’
실록은 장길산이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였고 일부 반역에도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홍길동, 임꺽정과 달리 장길산의 체포 기사가 실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장길산은 체포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효종 때, 노비의 몸에서 태어난 장길산은 태어나자 어머니를 잃고 광대 장충의 도움을 받아 재인才人마을에서 성장한다. 그는 역사 이갑송, 송도 상단의 행수 박대근, 구월산 화적 마감동 등과 사귀고, 창기였다가 버려진 묘옥과 정분을 맺는다. 장길산은 해주 간상배 신복동을 징벌하려다 붙잡혀 사형을 언도받지만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옥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운부대사의 가르침을 받는다. 숙종 10년, 대 기근이 발생하자 장길산은 관아와 부호를 털어 기미구휼에 힘쓰며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하려고 하지만 그는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정묘년 4월, 백성의 구제에 뜻을 가진 장길산의 활빈도, 운부대사의 승병, 해서의 무례, 근기지방의 미륵교도들이 구월산에 모인다. 이들은 언진산에 터를 잡고 관군과 맞설 자금을 조달하지만 고달근의 밀고로 최형기의 급습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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