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열국시대列國時代
8화 백제百濟 문화제국文化帝國
백제제국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초기 4국 강역도
전성기 강역도 3국사기 천문현상 추적 (고구려, 백제, 신라, 당)
중국 안의 3국 추정도 * Daum Blog 인용
◎ 백제 역사연대표
* 우태(구태, 비류)백제
1대 우태 - 5대 여영(연대, 역사 기록 없음)
역대 |
왕명 |
역사 개요 |
1대 |
우태 |
기록 없음 |
2대 |
기록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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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
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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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
여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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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
여영 |
* 온조백제
1대 온조 한기 7179년(BC. 18년) - 31대 의자왕 한기 7857년(AD. 660년),
31대 678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온조 |
BC.18-AD.29 |
위례성 건국, 한산 천도, 마한 병합 |
2대 |
다루 |
AD. 29 - 77 |
농사 장려, 말갈 격퇴, 낙랑군 멸망 |
3대 |
기루 |
77 - 128 |
다루왕 장자 |
4대 |
개루 |
128 - 166 |
북한산성 축성 |
5대 |
초고 |
166 - 214 |
신라 침략, 적현성 ․ 사도성 축조 |
6대 |
구수 |
214 - 234 |
가뭄과 홍수 대비 둑 축조 농사 장려 |
7대 |
사반 |
234 |
나이 어려 폐위 |
8대 |
고이 |
234 - 286 |
관제 제정, 중앙집권 강화 국가 기반 |
9대 |
책계 |
286 - 298 |
고이왕자 |
10대 |
분서 |
298 - 304 |
낙랑군 서현 점령, 낙랑 자객 피살 |
11대 |
비류 |
304 - 344 |
민심 파악 선정 |
12대 |
설 |
344 - 346 |
분서왕 장자 |
13대 |
근초고 |
346 - 375 |
마한 ․ 대방 병합 평양 점령, 사기 편찬 |
14대 |
근구수 |
375 - 384 |
일본 국교 문물 보급 공헌 |
15대 |
침류 |
384 - 385 |
불법 시행, 한산 절 창건 |
16대 |
진사 |
385 - 392 |
한강 이북 수복 광개토왕과 전쟁 병사 |
17대 |
아신 |
392 - 405 |
고구려 정쟁 패함, 일본 국교 태자 볼모 |
18대 |
전지 |
405 - 420 |
아신왕의 아들 |
19대 |
구이신 |
420 - 427 |
전지왕 장자 |
20대 |
비유 |
427 - 454 |
송나라․신라 화친 |
21대 |
개로 |
454 - 475 |
고구려 장수왕 피습 피살 |
22대 |
문주 |
475 - 477 |
웅진(공주) 천도, 병관좌평 해구가 살해 |
23대 |
삼근 |
477 - 479 |
해구를 진로에게 토평케 함 |
24대 |
동성 |
479 - 501 |
신라 혼인 동맹, 고구려 전쟁 |
25대 |
무령 |
501 - 523 |
국정 안정, 쌍현성 축조 외침 대비 |
26대 |
성 |
523 - 554 |
사비 천도 국호 남부여, 신라 공격 전사 |
27대 |
위덕 |
554 - 598 |
중국 화친, 고구려 대비, 신라 공격 |
28대 |
혜 |
598 - 599 |
위덕왕 아들 |
29대 |
법 |
599 - 600 |
불교 신봉 살생 금지, 왕흥사 창건 |
30대 |
무 |
600 - 641 |
당나라 화친, 일본에 불교․문물 전파 |
31대 |
의자 |
641 - 660 |
신라 공격 영토 확장, 당나라 압송 병사 |
* 고주몽은 재위 때 일찍이 말하기를‘만약 적자嫡子(큰아들, 장자長子)인 유리(고주몽이 방랑하던 시절 혼인한 예씨부인禮氏婦人에게서 난 아들, 주몽이 떠난 뒤 예씨부인은 유리가 장성할 때까지 출생의 비밀을 말하지 않다가 주몽이 떠날 때 남긴 반半 조각 칼 징표를 주며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 하고 고구려로 주몽을 찾아가도록 함)가 오거든 마땅히 봉封하여 태자太子(다음 임금 계승 왕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 고주몽의 두 번째 부인, 계루부족장 연타발의 공주, 고주몽과 혼인하기 전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 온조를 낳았음)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己卯년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 ․ 번番(진번, 요녕성 해안가)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여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莊園을 두고 부富를 쌓아 몇 만금萬金(큰 부자富者)이러니 원근遠近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者들이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산해관 남쪽)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半 1000리里(500리, 250Km)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帝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돌궐의 천자天子 칭호稱號, 여왕)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壬寅 한기 7178년(BC.19년)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馬黎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臣 등等이 듣기로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될 때입니다.’ 라고 했다. 온조가‘좋다’고 승낙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만에 한산漢山에 이르러서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烏干 등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생각컨대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 곳은 천험의 지리地利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으로 정할만한 곳입니다. 여기 보다 더 다른 곳을 찾지마시옵소서.’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마침내 하남의 위지성慰支城(하남 위례성尉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十濟라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십제가 융성했을 때 백 사람이 건너왔다는 뜻의 뒤에 지은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왔다. (임승국의 한단고기)
◎ 우태(벼슬 이름, 혹은 구태)백제와 온조백제, 백제의 건국과 웅대한 강역
* 3국사기(김부식)와 3국유사(일연)에서는 백제 건국역사를 두 나라로 기록한다. 우태(비류)백제와 온조백제다. 그런데 건국시조에 대하여 3국사기와 3국유사 그리고 중국, 일본사서의 기록이 다르다. 그 하나가 정설로 이어오는 주몽 시조설인데, 비류와 온조가 망명 남하하여 비류는 만주지방에 우태백제를 건국하고 온조는 한강지역에 온조백제를 건국했다는 기록이다. 비류와 온조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 계루부 지방호족 연타발의 공주 소서노와 우태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우태가 죽고 과부가 되었던 소서노와 주몽이 혼인동맹을 하여 의부가 되었다. 그러나 동부여에서 유랑할 때 혼인한 본부인 예씨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유리를 태자로 삼았기 때문에 왕통에 따른 정변의 조짐이 일어나 소서노는 정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고 유리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망명하였다고 한다. 그 둘째 시조설은 이 기록대로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후손이라면 망명을 하였다 하더라도 나라를 세우고는 당연히 성을 ‘고’ 씨로 써야하나 백제의 왕들은 한결같이 성을 ‘부여’ 씨로 썼다.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 고 밝히고 있고, 중국사서들 또한 백제가 부여계 우태(구태)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시대에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요 장수였던 고진은 변경을 노략질하는 위만의 잔당을 평정한 공로로 고구려후가 되었는데 주몽의 증조부다. 고진의 손자가 옥저후 고모수(불리지)며 하백녀 유화부인과 사이에서 고주몽이 태어났다. (해모수, 고진, 고모수, 고주몽의 성씨를 해씨, 고씨, 부여씨로 가르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음) 3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는 성왕 16년, 한기 7735년(AD. 538년)에 도읍을 웅진(공주지방)에서 사비(부여지방)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 로 바꾸었다. 백제왕들은 즉위를 하면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동명묘(여기서는 북부여 시조 해모수, 동명왕이라는 칭호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뜻이며 해모수 외에 북부여 고두막왕, 고주몽이 동명왕의 칭호를 사용했음)에 제사를 지냈다. 만주지역의 비류백제는 중국 동북부의 세력이 강한 전연의 압박과 동쪽 고구려의 복속정책으로 국가 존망이 위태로워지자 남하하여 한 뿌리였던 온조백제와 통합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중흥을 이뤄 13대 근초고왕 한기 7543년(AD. 346년)을 기점으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세력을 떨쳤다.
* 만주지역 비류백제의 한강 정착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는데 서울의 석촌동 백제고분의 기단식 적석총은 북방민족의 묘제로써 한강지역 고유의 묘제와는 판이한 양식이다. 이러한 북방식 묘제가 4세기 후반 한강지역에 느닷없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비류백제의 남하를 고증한다. 또 이때부터 백제는 북방 유목국가의 직제인 좌우현왕제를 도입하고 북방민족 돌궐의 천자 칭호 어라하, 건길지 같은 왕호를 사용했다. 비류백제가 남하한 4세기 중반 이후 만주지역 (우태)백제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는 것도 이를 뒷바침한다. 또 백제는 담로제를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시행하였는데 담로제는 왕족이나 귀족을 분봉왕으로 임명하여 지방을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군주제로써 유목국가의 정치제도다.
* 대한에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한 백제는 대한의 서남부 해안을 장악하고 중국대륙의 동남부와 일본의 동남부에 강력한 통치권을 형성한다. 수서에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함께 살고 중국인들도 섞여있다’ 라고 기록하여 백제인들의 해외무역이 왕성하였음을 입증한다. 아울러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부남(캄보디아)의 재물과 노비 2명을 왜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백제의 사인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 무역을 시도한 곤륜(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의 통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한기 7751년(AD.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 ‘탑등(Tapen)’ 이라는 물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양모로 짠 페르시아 직물로 백제의 해외무역이 동남아시아를 재패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백제의 해외 외교활동을 보여주는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된 ‘양직공도’ 는 남북조시대 한족이 세운 남조의 하나인 양나라(AD. 502년 - 556년) 원제(AD. 552년 - 554년) 재위 때 조공사신의 모습을 태수 소역(AD. 505년 - 554년)이 그린 궁중행사그림이다. 백제 성왕(AD. 523년 - 554년) 때인데 사신들 옆에 7행 160자로 기록한 설명문에 백제의 22담로제와 반파(고령가야), 탁(창원), 다라(합천), 전라(경산), 신라, 지미, 마련, 상사문(전북 임실), 하침라(전남 강진)의 백제속국 9개국의 이름을 열거하여 진 나라 말기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고, 백제가 요서지방과 진평을 차지했다고 해설하였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양직공도 보다 100년 뒤인 7세기 초 당 태종 재위 때 궁중행사에 참석한 3국(고구려, 백제, 신라)과 왜, 파사(페르시아) 등 중국 주변 32국의 사신도를 당시 화가 염립본이 비단에 그린 왕회도에도 같은 복색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 송서 백제조에 ‘백제국은 본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천여 리(500Km)에 있다’ 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건광 원년조에 ‘가을에 궁(왕자나 장군 추정)이 마한(백제)과 예맥(만주지역)의 군사 수 천기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백제를 대한 강역에 한정하는 대한사처럼 만약 여기에 나오는 백제가 대한의 백제라면 대한의 백제는 북방 경계에 고구려가 있는데 고구려 북쪽의 예맥과 어떻게 연합군을 편성할 수 있었겠는가? 또 송서는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였는데 진평군 진평현이다’ 라고 기록했으며 양서에서는 ‘백제는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여 백제군을 두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송서와 양서 백제전에 ‘백제는 뒤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 나라(한기 7462년, AD. 265 - 316)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 역시 진평, 요서의 2군을 점거, 소유했다’ 고 기록하였다.
* 남제서에는 백제의 중국 안 식민지 명칭과 통치자의 관직명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는데 중요한 7군은 중국 동북쪽 고구려 경계와 만리장성으로부터 양자강까지 북방에서부터 차례로 대방군, 낙랑군, 광양군, 조선성, 청주군, 성양군, 광능군이다. 또한 남제서 권 58의 백제전에는 북위의 군대와 백제의 전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북위는 양자강 이북의 중국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북부의 고구려와 접경한 나라다. 대한의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하려면 고구려를 건너뛰어야 함으로 백제는 양자강지역과 요동에 있어야 한다. 3국사기에는 동성왕(백제 24대 왕, AD. 479년 - 501년) 10년에 북위가 침범했으나 백제군에게 패퇴하였다고 하였으며, 자치통감에서도 영명 6년(AD. 488년)에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말 최치원이 상대사시중장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병사가 100만 명이나 되어 오월(중국의 오나라 월나라)을 침략하여 복속하였다고 적었다. 신당서,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중국의 월나라, 주나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 고구려왕들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왕위 계승을 하였을 때는 반드시 동명묘(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설치된 만주의 한인지방까지 먼 길을 가서 참배하였다. 백제도 동명사당을 지어 왕위 계승을 고지하고 참배하였다. 한기 7924년(AD. 727년)에 대진국(발해)의 무왕이 왜에 보낸 외교문서에 ‘대진국은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역사와 문화, 풍습)을 가지고 있다’ 고 했다.
*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백제의 근구수왕이 한기 7572년(AD.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는 단 한 번 침략하였으나 바다를 건너 중국대륙을 여러 번 공략하여 선비 모용씨의 연나라와 부씨의 진나라를 정벌하고 지금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성을 식민지로 삼았다고 했다. 정약용도 백제가 3국(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라고 했다.
* 4세기 이후 중국대륙은 남조와 북조로 나뉘는데 백제가 남조에 파견한 사신들의 직명이 서하태수(산서성 분양현), 광양태수(북경 서남), 조선태수(하북성 노룡현), 광릉태수(강소성 양주시), 청하태수(하북성 청하현), 대방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하남성 비양현)으로 중국 동남부지역을 대표한다.
* 백제 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흑치상치(AD. 630년 - 639년)는 백제의 장군이며 신흥귀족인데, 1929년 10월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된 허난성 낙양 북망산의 묘에서 흑치상치의 묘석이 발굴되었다. 1960년 대만학자들의 해석 결과 흑치씨는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는 본래 동남아시아지역의 여러 섬을 가리키며 대표적인 섬들이 필립핀이라고 밝혔다. 백제가 필립핀에 해상 실크로드의 거점을 형성하고 부여씨의 귀족에게 흑치씨를 하사하여 필립핀의 분봉왕으로 임명했다는 해석이다. 이는 자치통감의 백제기록을 입증한 사료인바 이병도 등 일제식민사학자들과 일본학자들은 자치통감에서 백제가 요동을 다스렸다는 기록을 고구려의 오기일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1920년 숭산 부근 낙양의 북망산에서 묘지석이 출토되었는데 묘지의 주인공이 백제 의자왕의 왕자 부여융이었다. 부여 융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자 흑치상치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사람얼굴기와 반가사유부처상 봉래산향로 구리거울
* Daum Blog 인용
* 부여성충의 뛰어난 전략과 백제의 영토 개척(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저, 박기봉 역)
부여성충은 백제의 왕족으로써 어릴 때부터 지모가 뛰어났다. 일찍이 예濊가 처들어오자 주위 사람들을 모아 산성에서 지켰는데 예의 장수가 사자를 보내
‘여러분들의 나라를 위한 충절을 흠모하여 사소한 음식을 보낸다’
하고는 궤짝 하나를 보내왔다. 주위의 사람들이 궤를 열어보자고 하였으나 성충은 한 마디로 거절하고 불태웠다. 궤 안에는 벌과 땅벌이 있었다. 다음에 또 장수가 궤를 또 보내왔다. 산성 사람들이 불태우자고 하였는데, 성충이 열어보았더니 화약과 염초가 들어 있었다.
세 번째로 궤를 보내왔는데 성충이 이를 톱으로 켰더니 칼을 품은 병사가 들어 있었다. 이 때가 한기 7842년(AD. 645년) 무왕이 죽고 의자왕이 즉위한 해였는데 왕이 이를 듣고 성충을 불렀다.
‘짐이 부덕하면서 대위를 이어 무거운 짐을 감당하지 못할까 하던중, 신라와 백제가 철천 지원수가 되어 이는 짐이 더욱 염려하는 바다. 옛적에 월왕 구천이 범려를 얻어 10년 간 생취(인구를 늘리고 재물을 쌓아)하고 10년 간 교육하여 오를 멸망시켰으니 군이 범려가 되어 짐을 도와서 구천으로 만들어줌이 어떤가?’
성충이 말했다.
‘구천은, 오왕 부차가 교만하고 오만하여 월에 대한 염려를 잊고 있었기 때문에 20년 간 생취하고 교육하여 오를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 는 신라의 침입이 그칠 날이 없으므로 전쟁의 승패가 순간에 달려있고 국가의 흥망이 조석 간에 결판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한가하게 20년 간 생취하고 교육할 틈이 있 겠습니까? 그런데 고구려는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반역의 뜻을 품고 있으므로 멀지 않아 내란이 있을 터인즉 한참 동안은 나라 밖을 경영 못할 것이니 아직 우리가 근심할 바가 못 됩니다. 그러나 신라는 본래 소국으로써 진흥왕 이래 갑자기 강국이 되어 우리나라와 원수 가 되었고 근래에 와서는 더욱 심합니다. 신라의 내성사신 김용춘이 선대왕과 혈전을 벌이 다가 죽었고 그 아들 김춘추가 늘 우리나라 틈을 엿보았으나 다만 선대왕의 영무하심이 두 려워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이제 선대왕께서 돌아가셨으므로 저들은 대왕을 군사에 밝지 못한 소년으로 판단하여 틀림없이, 또 국상을 기회로 머지않아 쳐들어올 것이니 이에 대한 반격을 미리 구상해야 할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신라가 쳐들어오면 어디로 들어오겠는가?’
성충이 대답하여 말했다.
‘선대왕께서 선열성(청풍) 이서以西, 가잠성(괴산) 이동以東을 차지하자 신라가 이를 원통 하게 여긴지 오래니 반드시 가잠성을 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가잠성 수비를 더 늘리는 게 어떤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가잠성주 계백은 지모와 용맹을 겸비하여 비록 신라가 전국의 병사를 다 모아 오더라도 쉽게 빼앗지 못할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신라가 정예병으로 가잠성을 공격 하면 우리는 가잠성을 구한다는 소문을 내고 다른 곳은 공격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왕이 물었다.
‘어느 곳이 좋겠느냐?’
성충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대야주(합천, 대량, 하래) 도독 김품석이 김춘추의 사위됨을 믿고 부하와 성민을 학대하며 사치를 일삼아서 원망이 가득함으로 또한 우리가 국산 중임으로 수비가 허술할 것입니다. 대야성이 위태롭더라도 가잠성의 병사를 돌리지 못할 것이므로 대야성을 빼앗고 승세를 타 나아간다면 쉽게 신라를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성충을 상좌평에 임명하였다.
한기 7939년(AD. 642년) 3월에 신라가 김유신장군으로 정예병 3만명을 거느려 가잠성을 공격하자 계백이 성을 의지하여 응전하여 여러 달 동안에 신라가 많은 손실을 입었다.
7월에 의자왕이 정예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가잠성을 구한다고 소문내고 대야성의 미후성을 포위하였다. 대야주는 관할하는 성이 40여 개였다. 김춘추는 대야주에 속한 고타현을 딸 소낭에게 식읍으로 주고 김품석과 혼인하여 대야 도독으로 삼아 성주로 임명하여 40여 성을 총괄하였다. 김품석은 김춘추의 권세를 믿고 포악한 행세를 했는데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막료 김일이 백제군과 내통하였다. 의자왕이 부여윤충(성충의 아우)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공격하였는데 김일이 창고에 불을 질러 군량을 불태워버렸으므로 민심이 흉흉하여 싸울 뜻이 없었으므로 품석이 막료 서천으로 화의를 청했다.
‘우리 부처가 살 길을 터주면 성을 내주겠다.’
윤충이 부하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저희가 살기 위하여 백성을 버린 장수에게 어찌 살려주겠는가 했으나 간계를 써서 회유하고, 복병으로 모두 격살하였다. 의자왕이 공을 세운 장졸을 상찬하고 백성을 위무하니 본레 임나가야에 속했던 백성들이 귀속을 환영했다.
의자왕이 대야주 40여 성을 함락한지 얼마 뒤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고 고구려 전권을 잡았다. 의자왕이 성충에게 물었다.
‘연개소문이 신하로써 그 왕을 살해하였는데도 고구려 전국이 다 복종하고 그 죄를 묻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고구려가 여러 번 중국과 싸움에 진지 수백 년 만에 근세에는 강대하여 그 세력이 요동 요서에까지 미치고 해상까지 장악했으며, 영양왕 때는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으므로 국위가 크게 향상되었는데도, 영류왕(고건무)은 중국과 화친하고자 하였으므로 연개소문 의 북진정책은 뜻을 이루기 어려웠다. 그래서 백성들의 환영을 얻은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우면 어느 나라가 이기겠는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당나라가 비록 토지가 넓고 백성들도 고구려 보다 많으나, 연개소문의 병법전략은 이세민 이 따라올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승리는 고구려에게 있을 것입니다.’
의자왕이 물었다.
‘이세민은 네 나라의 군웅을 토벌하여 통일 황제가 되었고, 연개소문은 전쟁 경험이 일천 한데 어찌 이세민 보다 전략이 낫다고 하는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신이 일찍이 고구려에서 연씨가의 귀 소년 연개소문을 만나 본 바 생김새가 장대하고, 의 기가 호방하여 담론하다가 병법을 문답한 적이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벼슬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하루 아침에 수백명의 대신과 호족들을 죽이고, 패수(대동강)전투에서 수나라 수군을 대파한 용장 건무왕을 쳐 대권을 잡았으니 이는 이 세민이 따라올 수 없는 일입니다.’
왕이 물었다.
‘고구려가 당을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연개소문이 10년 전에 대권을 잡았다면, 그가 주장한대로 혼란기 의 당은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벌써 20년 전에 통일을 이루었고, 치국 의 수완도 정밀하여 만약 이기더라도 백성들이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아직 국내의 기반도 튼튼치 못합니다. 흥망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왕이 말했다.
‘대야성을 토평했으나 신라를 복속하지 못했는데 고구려나 당이 서로 싸워 누가 이기든지 남침을 해올 것인데 북쪽과 동쪽의 신라를 견제할 수 있겠는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고구려와 당은 서로 대립할 것인데 그러자면 백제와 신라가 화친하여야 남쪽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점을 연개소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 어느 한 나라와 화친을 하고 백제와 신라가 견제하는 전략을 세우고서야 당을 칠 수 있을 것입니 다. 신라는 백제의 적수가 되지 못하므로 유리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입니다.’
성충이 고구려와 동맹조약이 성사되어 가는 판에 결정이 늦어지고 있었는데 신라의 사신 김춘추가 훼방을 놓아서였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신라가 동맹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다음에 당을 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신라와 백제는 견제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보고 오직 당을 치려는 원대한 계획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김춘추에게
‘구원(대야성의 함락 때 전사한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낭)을 모두 잊고 세 나라가 연합 하여 당을 치면 당은 정권쟁탈의 혼란기이고 야만인이기에 오히려 쉽다.’
고 종용했다. 그 때 성충이 글로써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중국이 고구려를 칠 때면 매 번 군량의 운반을 수로로 하였는데 이의 실패로 패전하였습 니다. 수나라가 그 거울입니다. 이제 고구려가 백제를 경원하여 백제가 당과 연합하면 당은 육로로 침략하고 바다로 군사와 군량을 지원하여 백제에 주둔하면서 남으로부터 고 구려를 협공할 것이니 견디기 어렵습니다. 신라는 동해이므로 당과 수운의 편리가 백제만 못할뿐더러 신라가 일찍이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치다가 백제를 속이고 죽령 밖 고현 안 쪽 10개 군을 점령하여 배반하였던 일은 공께서도 아시는 바 지금 신라가 동맹을 맺을지라도 언제 배반하여 돌아설지는 가늠키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은 성충의 전략을 듣고는 김춘추를 연금해버렸다. 김춘추는 귀토설화의 고사를 들어 거짓으로 고구려왕에게 글을 올렸다.
‘욱리하 일대의 땅을 고구려에 바치겠습니다.’
그런 다음, 선도해에게 뇌물을 써서 도망쳤다. 마침 김유신이 김춘추를 구하려고 병력을 동원하였기에 고구려 병사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곧 왜로 건너가 지원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왜의 국내 사정이 복잡하여 실패하고, 이어 당 나라로 건너가서 두 아들, 법민과 인문을 인질로 맡기고 지원을 얻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고, 이어 고구려를 쳤다.
몽촌토성 고구려 홀한성 송산리고분떼 부소산성터
(소서노와 고구려 건국 발원지) * Daum Blog 인용
* 동서전쟁同婿戰爭
한기 7800년(AD. 6세기) 후반. 백제 위덕왕의 증손자 서동은 매우 준수하여 3국에 이름이 알려졌고, 신라 진평왕의 둘째 공주 선화 또한 미색으로 이름이 났다. 진평왕은 따만 셋이었는데 매양
‘신라의 왕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선화의 아비 된 것이 자랑이다.’고 말했다.
백제의 위덕왕도 선화의 소식을 듣고 탐냈으며 왕자 서동 또한 선화를 한 번 보고자 하였다. 두 나라 왕의 바램이 이렇다면 혼사가 가능했겠지만 신라는 누대로 박, 석, 김 세 성이 혼인하여 아들이나 사위에서 연장자로 왕위를 물려왔기 때문에 세 성받이의 딸들은 다른 성씨로 출가를 할 수 없었다.(신라 소지왕이 백제의 동성대왕에게 딸을 주었다 하고, 법흥왕이 밈나가라의 가실왕에게 누이를 시집 보냈다고 하지만 사실은 친딸이나 친누이가 아니라 6부 귀골의 여자였다.) 백제는 왕가의 혼인에 신라처럼 엄격한 규제가 없었는데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을 죽인 자가 진평왕의 아버지 진흥대왕이고 진흥대왕은 성왕의 사위였다. 이 때문에 서동왕자의 여자는 목씨, 국씨 등 백제 8대성의 여자거나 다른 민간 성씨녀가 될지언정 전대의 원수인 진흥대왕의 공주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번 선화공주를 흠모하게 된 서동은 백제궁을 몰래 탈출하여 신라 땅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 행세를 하며 신라 왕가가 출입하는 절의 큰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서동이 법연을 기회로 선화와 만나자 두 사람은 천생배필天生配匹로써 눈이 맞았다. 그러나 혼인이 어렵다는 것을 서로 아는지라 노래를 지어 널리 유포시켰는데 설화자료가 약간씩 차이가 있다.
선화공주님은/ 남그스기 얼어두고/ 맛동방을/ 밤에 몰 안고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숨겨둔 서동 서방님을 밤이면 안고 가다. 3국유사 무왕편, 4구 체 향가)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본래는 왼(온)통이었지만/ 반쪽은 떼어서 서동에 게 주고/ 반쪽은 남기어 자기가 가졌으나/ 상사병에 앓고 있네/ 서동아 어서 오소서/ 어서 오소서/ 염통을 도로 주시어/ 선화공주님을 살리소서.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저, 박기봉 역)
* 서동(맛동)은 훗날 백제 무왕이다. 총각시절 마(산 감자)를 캐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신라의 선화공주를 탐내 서라벌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마(맛동과 마를 연관시켜 해석한 것은 오류)를 주고 노래를 지어 은근히 전파시켰다. 차츰 노래가 퍼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은 공주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공주는 억울할 뿐. 공주의 해명을 듣지 못한 왕이 노래가 사실인 것으로 오해하여 공주를 내쫓자 서동은 이를 구해 아내로 삼았다.
(2009년, 분묘 발굴에서 묘지가 발굴되었는데 선화공주가 백제 귀족의 며느리임이 밝혀짐, 서동요는 백제 멸방 뒤 백제 유민들의 전설로 인식함)
* 노래가 널리 퍼지자 선화공주는 진평왕에게 자백하였고 서동은 백제로 돌아가 증조부 위덕왕에게 사실을 말하여 죽기로 간청하니 결혼을 허락하여 양 왕실이 사돈을 맺었다.
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몇 해, 신라에는 왕위 계승을 할 왕자가 없었다. 진평왕은 딸만 셋이었는데 첫째 공주는 출가하였으니 둘째 선화공주의 남편 무왕이 왕위 계승권자였다. 이 때 백제는 부여, 진眞, 국國, 해解, 연燕, 목木, 백苩, 협劦의 8대가가 있었으나 부여씨가 정권을 장악하였고, 신라는 박朴, 석昔, 김씨가 있었으나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였다. 진평왕과 위덕왕은 백제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계승하는 일을 잠정적으로 승인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 진평왕의 셋째 공주 문명의 남편 김용춘이었다. 순리대로라면 자기에게로 와야할 왕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용춘은 진평왕을 설득하여 첫째 공주로써 출가 여승이었던 덕만을 선덕여왕으로 세우고 자기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백제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니 김용춘은 내성사신과 대장군을 겸하여 동서지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백제계 칸무천황 사쓰시마 심수관가 일본문화전파도 백화정과 고란사
초대 심당길 도예 * Daum Blog 인용
* 백제는 대한 서남부의 곡창지대 그리고 황해와 중국해의 해상교통요지를 차지하여 중국 동남부와 일본 서남부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강역을 해외거점으로 확보함으로써 강대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 동북부와 시베리아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와 영토전쟁을 벌인 막강한 군사대국이었으며, 한편 활발한 해외영토 개척과 무역을 통해 받아들인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백제 특성의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킨 찬란한 문화제국이었다. 이로써 백제문화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그러나 강대하고 찬란한 제국으로써는 의심스러울 만큼 싸움다운 싸움이나 저항도 없이 멸망하였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라 하더라도 계백의 황산벌전투 외에 이렇다 할 전쟁 기록이나 저항이 보이지 않는다. 멸망 뒤 부흥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라통일이 된 뒤 사적이 철저하게 말살되고 소멸되었으며 백제역사연구에 대한 역사학계의 의지가 미흡하여 묻혀진 왕국으로 전설처럼 남아있다가 요즘에야 진보적 역사학자들이 중국과 일본의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백제문화를 조명하고 있어 기대됨
* 사쓰시마의 심수관가沈壽官家 도예陶藝는 일본에서는 말 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 도예와 함께 세계 도예의 양대 도예맥陶藝脈을 대표한다. 한기 8795년(AD. 1598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전투의 패전으로 사쓰마의 번주藩主 시마스 요시히로에게 잡혀간 심수관가 초대初代 심당길沈當吉이 세운 도예다. 400년 전통을 이어온 심수관가는 현재 15대며 대대로 선군신을 모셔왔는데 메이지유신 뒤 백제의 전통을 단절시키려는 일본정부의 폐쇄 조치로 제사가 끊어졌으며 심수관가는 한국명예총영사관임
◎ 백제왕국의 흥망성쇄, 700년 유구한 역사
* 한성 도읍시대 (한기 7179년 - 7672년, 1대 온조왕 BC. 18년 - 21대 개로왕 AD. 475 년), 21대 493년 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패망한 백제의 역사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소멸되었는데 1916년 일제식민지시대 몽촌토성(일명 남성 또는 고려사의 고원성)이 발굴되었고 이어 풍납토성(북성)이 발굴되어 한성백제의 궁성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들어났다. 몽촌성과 풍납성은 반경 8km 안에 불암산성, 광장리산성, 이성산성, 삼성리산성 등 6성이 연계되어 궁성 방위의 체제를 간파할 수 있으며 웅위한 한강백제의 국력을 가늠할 수 있다. 고이왕(AD. 234년 - 286년) 때에 6좌평과 16관등의 직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었고 귀족연합이 국정을 책임졌다. 이어 걸출한 군주인 근초고왕(AD. 346년 - 375년)이 백제의 영토를 확장하여 백제 최대전성기를 이루었다. 개로왕(AD. 455년 - 475년)은 친위정변을 일으켜 귀족연합의 정치제도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도모하여 강력한 군주제를 시행하였다. 왕권 강화를 위해 개로왕은 한강의 큰 돌로 부왕 비유왕의 무덤을 웅장하게 증축하고 국고를 기우려 화려한 궁궐과 누각도 신축했다. 이 때 세습귀족 세력인 재증걸누, 고이만년은 왕권 강화에 반발하였으므로 거세하려고 하였는데 미리 알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개로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돌려주기를 청했으나 고구려는 거절했다. 이로 써 두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가 무너지고 전쟁으로 비화하였는데 배신한 두 신하가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한강 부근 전쟁터에서 개로왕과 맞섰다. 그러나 전황이 백제군에 불리하여 개로왕은 적군에게 포위되고 탈출할 길이 막히자 개로왕이 두 옛 신하에게 무릎을 꿇고 정리를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빌었으나 무참히 살해되었다. 개로왕이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준비없이 갑자기 웅진(공주)으로 천도를 한다. 한성시대의 백제문화는 가장 전성기였으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불타고 파괴되었으며 이후 의도적으로 훼손되어 사적이 남아있지 않다.
* 웅진 도읍시대 (한기 7672년 - 7735년, 22대 문주왕 AD. 475 - 26대 성왕 AD. 538년), 5대 63년 간
웅진은 개로왕의 전사로 급히 천도하였으므로 도읍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으나 차령정간(산맥)과 금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남쪽으로는 호남평야가 곡창을 이루어 물산이 풍부하고 서남해는 해외무역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백제부흥의 기반을 이루었다. 24대 동성왕(AD. 479년 - 501년)은 중국과 외교를 성공적으로 성사시켰고 무령왕(AD. 501-523)은 담로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1927년 발굴한 송산리 고분군과 1971년 발굴한 무령왕릉은 전축분(전 즉 벽돌을 구워서 쌓은 묘, 중국식 묘제, 북방은 석축묘며 남방은 토분임)인데 중국 남북조시대 강남지역 묘제와 동일형태로써 백제의 왕성한 대외외교활동을 엿볼 수 있는 사적이다.
* 사비 도읍시대 (한기 7735년 - 7857년, 26대 성왕 AD. 538 - 31대 의자왕 AD. 660년), 6대 122년 간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명을 남부여로 바꾸어 백제중흥을 도모하였다. 중앙통치조직을 16관등으로 정비하고 행정부서도 내부 12부, 외부 10부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또한 행정조직을 방 → 군 → 성으로 개선하여 중앙집권적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신라, 가야와 동맹을 맺어 한기 7748년(AD. 551년)에 이를 수복하였으나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가 수복한 한강유역을 한기 7750년(AD. 553년)에 점령하였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한기 7751년(AD. 554년) 태자 위덕왕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대패하였다. 수서 동이전에 위덕왕(AD. 554년 - 598년)대에서 사, 연, 협, 해, 진, 목, 국, 백씨로 대성 8족의 귀족연합이 국정을 통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지방호족들의 화백정치다. 무왕(AD. 600년 - 641년)은 호족의 견제를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고자 복신, 계백, 흑치상치들 걸출한 인물을 등용하여 신진귀족들로 정치를 쇄신하려고 천도를 계획하였다. 왕궁리에 행궁을 조성하고 미륵사를 짓고 내재석궁을 지어 천도의 의지를 보였으나 끝내 대성 8족을 비롯한 기존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뒤를 이어 등극한 의자왕은 3국사기에서 해동증자로 평가한다. 왕은 성왕의 전사가 신라의 배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매양 신라에 공세적 입장이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왜와 관계를 돈독히 하여 당과 연합한 신라와 대결구도를 만들었다. 이른바 ‘십자형 국제관계구도’ 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에 밀사로 잠입하여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한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백제의 상좌평 성충과 밀사 김춘추에게 제의한 중국대륙 정벌 연합전략이 김춘추의 당나라 잠입과 연합 제휴로 오히려 역공을 초래했다. 이 때 백제는 왕권통합이 되지 않아 국정이 문란해지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와 아들 남생 3형제의 정권다툼으로 내분이 일어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윽고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 정복의 자문역할을 했고, 남생은 당에 망명하여 고구려 침공의 선봉장이 되었다. 1993년 12월 부여읍 능산리 고분과 나성 사이에 있는 절터의 북쪽 공방터에서 발굴된 금동용봉 봉래산 향로는 7세기 백제 안정시대의 백제 조각예술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 백제왕국, 역사에서 묻혀져버린 역사
* 백제는 대한에서는 한강 이남의 곡창지대를 확보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중국 동남부와 일본 서남부에 식민지를 개설하였으며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해상무역로를 개척하여 서남해와 중국해의 교통요지를 근거로 해외무역이 활발하였으므로 국력이 강대하였다. 활발한 해외 진출로 한문 보급이 빨라 4세기 중엽 근초고왕(AD. 346년 - 375년) 때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했는데 이후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이 잇달아 간행되었다. 고구려가 한기 7797년(AD. 600년) 영양왕 11년에 유기 100권, 신집 5권을 펴냈고 신라가 한기 7742년(AD. 545년) 진흥왕 6년에야 비로소 국사를 편찬한 일에 비하면 200여년이 앞선다.
* 또한 백제 불교는 침류왕 원년 한기 7581년(AD. 384년) 즈음에 교리를 연구하는 학문불교가 성행하여 인도, 중국에 유학승려를 많이 보냈다. 백제후기에는 미륵신앙이 융성하였고, 무왕은 거대사찰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건축사 입장에서 미륵사 건축은 대규모 건축기술을 보유하지 못하면 엄두를 낼 수 없는 건축이다. 일본 법륭사 5층 목탑과 대마도 정림사 소장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정립사지 석탑은 돌과 목재를 자유자재로 이용한 기술로써 현대건축술에서도 찬탄의 대상이다. 신라가 황룡사를 건축하면서 백제인 아비지 초빙하였다는 일도 백제 건축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95년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한 백제대향로의 금세공술은 고식을 따른 섬세함이 비길 데 없다. 전북 김제 벽골제는 완벽하고 거대한 수리시설로써 수학측량학의 발달을 웅변하는 사적이다. 전북 태안 서산의 마애삼존불은 불교미술의 극치로 표현되고, 무왕 35년 한기 7831년(AD. 634년)때 건설한 궁남지는 인공으로 만든 왕궁정원의 전범이다. 1995년 10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 27대 창왕(위덕왕, 523 - 554)의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은 세기적 발견이라고 학계에서 찬탄한다. 1917년 12월에 전남 나주 신촌리 9호분 을호 옹관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AD. 5,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백제금관 형태로는 유일한 관모로써 신라금관의 직선적 형태와 달리 옛 형태를 따르고 있어 학술적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재다.
* 왕인은 아직기의 후임이다. 왕인 이전에 아직기가 근초고왕의 지시로 일본에 건너가서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는데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게 되자 일본 응신천황이 아라타와케를 보내 학자와 서적을 청했다. 그래서 왕인(32세 때)은 근구수왕의 손자 진손왕과 함께 논어 10권과 천자문, 5경박사(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 경서학자), 재봉녀(옷 마름질 장인), 직공(베 짜는 장인), 야공(칠 장인), 양주자(술 제조공), 도공(그릇 장인), 안공(가죽 마름질 장인), 화원(화가), 금공(귀금속 장인), 의사 등 기술자와 함께 초빙되어 일본의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오오사카 히라카타시 등판에 있으며 1938년 5월 일본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왕인박사 이후에도 학자의 초빙은 그치지 않아 무령왕 때 고안무, 단양이와 성왕 때 왕유귀가 초빙학자다.
* 1996년 10월 허난성 숭산 소림사 관광버스에 ‘백제’ 라고 표시판이 쓰인 버스가 있었다. 아직도 중국에 백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3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사람을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강을 따라 둑을 쌓아 사성 동쪽에서 숭산 북쪽까지 닿았다’ 고 했다.
* KBS 방송팀이 역사학자들과 함께 베트남 인접지역인 광서성 장족자치구 일대를 탐방했는데 백제향이라는 이름의 마을에서 맷돌, 외다리방아, 서낭당을 발견했다. 장족자치구 창호현 사람들의 생활풍습은 마한의 생활과 같다. 정월대보름과 단오절이 최대 명절이고 그들의 3현춤은 3국지 동이전의 기록 마한의 강강술래와 같다.
* ‘팥 문화권’ 은 세계에서 대한을 위시하여 일본과 장족자치구 밖에 없다.
* 중앙일보 탐사팀이 운남성 호도현 나시족을 탐방하였는데 우리 민족 고유의 지게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 사서에 백제의 가구수를 76만호로 기록하였는데 백제 패망 뒤 760년이 지난 조선시대 초기의 백제권(경기, 충청, 전라 3도) 가구수는 6만호였다. 백제의 중국대륙과 일본 경략설의 입증이다.
* 하남위례성이라는 지명이 하북위례성을 전제로 한 설정이라면 하북위례성은 건국도읍지이며 하남위례성은 천도도읍지다. 하남위례성이 한성 즉 서울지역인데 1994년에 벌인 ‘서울 정도 600년 행사’ 는 백제의 한성시대 500년을 우리 스스로 축소 왜곡한 몰역사적 사업이다. 서울 정도定都는 2000년이고, 서울은 한기 7961년(BC. 18년) 한성백제 이래 도읍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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