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7/22화 : 조선시대 1/2>
성리학性理學의 나라, 조선朝鮮
(삽화 : 충효정신, 선비사상과 부덕婦德)
조선전도全圖 불후不朽의 명작名作
* 그림, Daum Blog 인용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나오는 사람과 참고자료 : 방원의 왕자의 난, 단종(노산군)과 사 . 생 6신, 세종대왕, 조광조의 개혁, 임진왜란 . 정유재란과 이순신장군, 정묘 . 병자호란과 삼전도비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고려 말기는 동북아 정세가 요동을 치는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일어나 원 나라를 치고 명 나라를 세웠다. 원 나라는 북쪽으로 쫓겨 북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친원 . 친명세력으로 대립하였는데 명 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한기 8585년(AD. 1388년) 쌍성총관부 관할로 철령 이북의 땅을 명 나라의 직속령으로 한다는 일방적 통고를 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최영 장군은 이참에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드디어 우왕 14년 최영 장군은 8도도통사로써 좌군도통사 조민수 장군, 우군도도통사 이성계 장군을 거느리고 요동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이성계 장군은 <4불가론不可論>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첫째, 원 나라와 명 나라가 교체되는 과도기라 하나 고려의 군사로 대국 명 나라를 친다는 것은 불가하다. 둘째, 한창 농사철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에 지장을 주고. 셋째, 원정을 틈타 왜적倭敵이 침입한다면 그 또한 어려움이며. 넷째, 장마철이라 주무기인 활의 아교가 녹을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최영 장군은 반대를 무릅쓰고 거병했다. 마지못해 출병한 이성계 장군은 압록강 안 위화도에서 장마를 피해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내 회군하여 최영 등 반대파를 제거하였으며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웠다가 다시 공양왕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였고 왕은 허수아비였다. 결국 이성계는 조준과 정도전 등의 추대로 고려왕국을 종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음
* 조선은 억불승유정책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여 이를 정치이념으로 사회가 안정되었다. 성리학은 선비사상과 부덕으로 발현되었으며, 충효사상은 국가 왕권주의와 부권사회의 기반이었다. 안정된 시대로써 학문이 진흥되었고 정치는 발전하였으며, 고려말기에 민란으로 표출되었던 백성과 노비의 위상도 제한적이었지만 신장되었다. 밖으로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었었으나 어려운 가운데서 이를 타개하였으며 승병, 민병들이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민중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안에서도 당쟁의 소용돌이가 여러 번의 사화를 일으켜 국가와 사회에 파장을 불러 일으켰으나 이는 격동기의 정치치적 현상으로 정치 발전의 새로운 창조적 생성의 과정이었다. 정치적 담론이 무성한 일을 남인, 서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로 나뉘어져 4색 당파가 논쟁과 투쟁으로 국가질서를 문란케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역사 해석은 재고해야 한다. 지나친 경쟁의식이 뒤에 사화를 일으키는 부정적 붕당으로 변질되었지만 정치는 담론과 대화 그리고 타협의 생성이요 창조가 아니겠는가? 이를 부정적으로만 <싸움으로 날을 세운>, <당파와 개인의 정치권력을 위한>, <내분으로 4색 당파로 찢기고 나뉘어진>의 시각은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에 의한 한민족 깍아내리기와 역사 왜곡이요 역사 거짓으로 만들어내기의 산물이다. 조선시대 역사는 시대적 진실과 이상 그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이상주의 국가 건설 보다는 현실 정치)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후세에서 지나온 역사를 고찰하는 태도는 시대적 진실을 역사를 통해 이해하고 미래지향적 역사관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
성리학의 일반적인 사회의식은 <선비사상과 부덕婦德>으로 요약된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는 선비정신은 고조선 천지화랑정신의 계승이다. 열국시대를 거치면서 바뀌고 변해서 무예가 퇴조하고 문약文弱(글에 치중함으로써 신체 단련에 소홀함)에 흐르게 되었으나 선비정신은 조선시대를 관류하는 강건하고 투철한 지성인의 이상이었다. 부덕은 자유로와서 문란해진 사회질서를 세우는 방편이었다. 부덕이 여성을 억압하고 지나치게 절제를 강요하였으나 외유내강外柔內剛(자신을 다스리는데 강함과 부드러움을 조절함)의 정신은 조선시대 가정으로부터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3강5륜三綱五倫과 7거지악七去之惡은 대표적인 관습임
* 3강 -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을 다 하고),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버지를 받드는 일은 자식의 도리며)
부부유강夫爲婦綱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아내의 의무다)
* 5륜 -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는 의리로 맺어지고)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은 피를 나눔이며)
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 사이에는 서로 역할이 다르고)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는 위아래 질서가 있고)
붕우유신朋友有信 (벗을 사귀는 데는 믿음으로 한다)
* 칠거지악 - 대대례기大戴禮記의 본명편本命編에 있는데 7출지악七出之惡이라고도 하며 3종지도三從之道(어려서는 아버지를 받들고, 시집을 가면 남편을 뜻을 쫓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하는 여자의 인습)는 여성의 사회적 멍에였는데 일곱 가지 죄를 지으면 쫓아낼 수 있다는 사회적 계약, 더불어 三不去 (쫓아내서는 안 되는)라는 대안이 있었는데 첫째,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돌아갈 친정이 없거나 둘째, 시부모의 3년 상喪을 같이 치렀거나 셋째, 시집 올 때는 시집이 가난했는데 온 뒤에 부유해진 경우에는 쫓아내지 못했다.
① 불순구고不順舅姑 (시부모 순종하지 않음)
② 무자無子 (아들을 낳지 못함)
③ 음행淫行 (음란함)
④ 질투嫉妬 (남자들은 첩을 둘 수 있었고 기생제도를 만들었음)
⑤ 악질惡疾 (고칠 수 없는 병)
⑥ 구설口舌 (말이 헤품)
⑦ 도절盜竊 (도둑질)
* 조선 세종시대 창제한 훈민정음은 고조선 선군시대 가림다加臨多(가림토土)와 같은데 가림다는 선군 37세 가륵 2년 한기 5016년(BC. 2181년) 기록에,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고대의 상형문자)이 있다고 해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다라고 하였다. 한국 고대문자, 한글 자모와 똑 같아 한글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몇 년 전 일본에서 발굴된 구리거울에도 가림다와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었음
한단고기의 가림다 중국 산동성 한태시桓太市 출토 가림다 조각품,
* 그림, Daum Blog 한류 인용 탄소 측정 BC. 1850년 경 추정
*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지식인과 정치가 포섭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렸으나 고려의 신하들은 끝내 거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두문동 사건과 정몽주가 대표적인 사례다. 방원은 정몽주를 설득하려고 <하여가>를 불러 의중을 살폈으나 포은은 <단심가>로 화답하여 단호하게 회유를 물리쳤다.
방원의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을 누리리라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사6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
사6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항 6명의 충절로써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다. 세종대왕은 아들 문종의 병약함을 걱정했고 만약의 경우 나이어린 손자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 종실宗室의 안위를 염려했다. 그래서 붕어崩御(죽음)하기 전에 중신重臣들을 불러 고명顧命(임금이 죽기 전에 신하들에게 뒷일을 부탁함)을 내렸다. 문종은 세종대왕 말년부터 정사를 처리하였는데 일의 처리가 명확하였다. 그러나 염려한대로 재위 2년 만에 요절夭折(일찍 죽음)하고 나이 어린 단종이 12세로 등극하자 김종서와 황보인 등 중신들이 국가대소사를 관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황표黃標정치>다. 황표정치는 인물을 천거할 때 3배수를 추천하는데 어린 단종이 식별하기 쉽게 천거薦擧(추천)할 사람 이름에 노란 표식을 붙여 장계狀啓(추천서)를 올렸다. 단종은 노란 표만 보고 낙점落點(임명)을 했다. 신권臣權이 왕권王權을 능가한 상황에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아들로 뛰어난 자질을 지녔는데 왕권을 회복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계유정란癸酉靖亂(계유년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으로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뜻있는 신하들과 유생들이 왕위 찬탈에 반발했다.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환영연에서 운검雲劒(임금 호위무사)으로 뽑힌 무장武將들이 때를 보아 세조를 베고 단종을 복위復位(다시 왕으로 추대)하려는 비밀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모사謀士 한명회가 이를 눈치채고 갑자기 환영연에서 운검을 폐지하는 바람에 거사일을 연기했는데, 위험을 느낀 김질의 고발로 모의는 좌절되었고 모의 주도세력은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부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성삼문은 국문鞠問(심문)을 당하면서 세조를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했으며 세조가 내린 봉록(월급)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곳간에 쌓아두었고 능지처참陵遲處斬(네 팔과 다리를 네 마리의 소나 말에 묶어 각기 네 방면으로 채찍질을 하여 사지四肢를 찢어죽이는 형벌)을 당하면서 절명시絶命詩(죽으면서 짓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북소리 둥둥 갈 길을 재촉하는데
서녘 하늘에 해는 저무는구나
황천皇天(하늘나라)에는 주막이 없다는데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잘꼬
가문家門(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뿔뿔이 흩어져 망함)를 당할 것을 예상한 신숙주의 부인은 미리 목을 매달아 죽었으나 신숙주는 변절하여 영화를 누렸다. 사회에서는 빨리 상하는 녹두나물에 신숙주의 이름을 붙여 <숙주나물>로 풍자諷刺(비꼬며 비웃음)하였다.
생6신은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인데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草野(산과 들, 시골)에 묻혀 살았다. 김시습이 신숙주의 집을 찾아와서 친구가 죽었노라고 상복을 입고 곡을 한 예화가 전한다.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국가와 왕에 대한 충절과 신념을 웅변함
* 거북선은 조선시대 초기에 만든 귀선龜船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장군이 전쟁을 대비하여 무장을 정비할 때 돌격선으로 사용하고자 귀선을 재정비했다. 실전에서는 3척이 활동하였고 철갑선으로써 공격선의 역할은 막강하였으나 해전의 주체는 판옥선이었다.
임진왜란 3대첩(큰 싸움)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그리고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을 말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3대첩은 정문부 장군의 길주대첩을 보태 4대첩이 되어야 한다.
북관대첩비의 반환(2005. 10월, 러 . 일전쟁 때 탈취 반출하여 100년만의 반환)으로 알려진 정문부 장군의 함경도 길주대첩 등 6대첩은 위 3대첩에 못지않는 임진왜란의 중요한 싸움이었고 승전이었다. 정문부 장군은 문관으로 낮은 벼슬이었는데 의병에 의해 창의군대장으로 추천되는 문무 겸전의 학자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를 기반으로 의병의 선두에 서서, 먼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에 파견된 임해군과 선화군을 왜적에게 넘긴 역적을 주살하고 싸우는 곳곳마다 왜적을 박멸하였는데 함경도지방을 노략질하였던 왜군의 가장 강한 철포군단, 왜병 최고의 대장으로 일컫어지는 가또 기요사마(가등청정加藤淸正)의 22,000명의 왜군을 불과 3,000여명의 의병으로 쳐부수어 왜군의 북진(당 나라 정벌)을 저지하고 결국은 패퇴케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정문부 장군은 정권으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는데 이는 낮은 벼슬(정 6품)로 의병을 이끌었던 정치적인 문제와 관군이 패퇴를 거듭했던 당시에 의병으로써 승전한 일 그리고 인조 2년 일어난 박홍구 역모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무고로 풀려났으나 결국은, 효종 대의 출중한 장수였던 남이 장군처럼 한 편의 시가 도화선이 되어 시화詩禍로 국(고)문사했다. 북관대첩비는 함경도민들이 장군의 공적을 기려 백성들의 성금으로 숙종 35년 한기 9006년(AD. 1709년) 길주에 세웠는데 일제식민지시대 러 . 일전쟁 승전 전리품으로 탈취한 일본군이 천황에게 진상하였고 야스쿠니신사에 버려져 있었음
백두산정계비 청구도 정문부 장군상과 북관대첩비
* 그림, Daum Blog 인용
* 조선 역사연대표
1대 태조 한기 8589년(AD. 1392년) - 17대 순종 한기 9107년(AD. 1910년),
27대 518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태조 |
AD.1392-1398 |
이성계, 위화도 회군, 왕조 건국 |
2대 |
정종 |
1398-1400 |
사병私兵 3군부 편입, 이방원에게 선위 |
3대 |
태종 |
1400-1418 |
왕자의 난, 창업 기반 구축 |
4대 |
세종 |
1418-1450 |
집현전 훈민정음, 측우기, 4군 6진 3포 |
5대 |
문종 |
1450-1452 |
유교적 이상정치, 문화 발전 |
6대 |
단종 |
1452-1455 |
숙부 수양대군 선위, 영월 유배 노산군 |
7대 |
세조 |
1455-1468 |
왕권 확립, 경국대전 집필, 관제 개혁 |
8대 |
예종 |
1468-1469 |
경국대전 완성 |
9대 |
성종 |
1469-1494 |
승유억불, 문물제도 완비, 인재 등용 |
10대 |
연산군 |
1494-1506 |
무오 . 갑자 . 병인사화, 중종반정 폐위 |
11대 |
중종 |
1506-1544 |
조광조 혁신정치 실패, 기묘 . 신사사화 |
12대 |
인종 |
1544-1545 |
현량과 부활 |
13대 |
명종 |
1545-1567 |
을사 . 정미 . 을유사화, 을묘왜변 |
14대 |
선조 |
1567-1608 |
당쟁, 임진왜란 |
15대 |
광해군 |
1608-1623 |
명 . 후금 양면정책, 인조반정 폐위 |
16대 |
인조 |
1623-1649 |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
17대 |
효종 |
1649-1659 |
청 나라 볼모 8년, 북벌정책 추진 |
18대 |
현종 |
1659-1674 |
남 . 서인 당쟁, 선기옥형, 금속활자 |
19대 |
숙종 |
1674-1720 |
남 . 서인 당쟁 기사사화, 백두산정계비 |
20대 |
경종 |
1720-1724 |
신임사화 당쟁 절정 |
21대 |
영조 |
1724-1776 |
탕평책, 균역법, 신문고, 사도세자 비극 |
22대 |
정조 |
1776-1800 |
탕평책, 규장각, 새 활자, 실학 황금시대 |
23대 |
순조 |
1800-1834 |
안동김씨 세도, 천주교 탄압, 홍경래 난 |
24대 |
헌종 |
1834-1849 |
천주교 탄압 기해사옥, 안동김씨 세도 |
25대 |
철종 |
1849-1863 |
안동김씨 세도정치, 진주민란 |
26대 |
고종 |
1863-1907 |
대한제국, 동학혁명, 대원군, 열강 각축 |
27대 |
순종 |
1907-1910 |
35년 간 치욕의 일제식민지시대 |
세종대왕상 사6신 성삼문상 신숙주상 청 태조 누르하치
* 그림, Daum Blog 인용 (한국의 형제국)
# 왕자의 난, 조선의 창업
* 방원은 성격이 호탕하고 위엄이 있었다. 무인기질은 아버지 이성계를 닮았다고들 했다. 한편 침착하고 냉정한 판단력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고려의 옛 지도층을 회유하고 설득하는 일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역성혁명이었으므로 우선 사회 지도층의 회유가 선결 문제였으나 충의가 절대가치였던 고려의 충실한 신하들은 역성혁명을 거부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 학자, 정치가들이 죽었다. 방원이 <하여가>로 마음을 떠보았으나 <단심가>로 대꾸하였던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척살한 것도 방원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둘째 부인에게서 난 방석을 애지중지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방원은 세자 방석과 그 형제를 제거하고 형(정종)을 형식적으로 보위에 추대하였다가 2년 뒤에 3대 태종으로 등극하였다. 창업 보다는 수성이 더 어렵다고 했던가? 태종은 수성의 길을 닦았다. 창업공신들이 대부분 도태되었다. 외척들도 뿌리를 잘라버렸다. 왕가의 혈족들도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세종이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태종의 셋째 충녕대군이었다. 양녕은 세자였으나 스스로 물러나 주유천하를 하였고 둘째 효령에게도 입산을 권유하여 효령은 스님이 되었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으면 부처님의 제자인데 무엇이 부러우랴>, 효령이 남긴 말이다.
* 세종은 태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얼마나 학문을 좋아했던지 눈이 짓물러 눈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능한 선비들을 길러내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측우기 등 과학기기를 발명했고 4군, 6진, 3포를 개척했다. 그러나 아들 문종은, 세종이 병으로 시달렸던 말기에 세자로 정사를 유능하게 보좌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2년을 넘기지 못했고 12세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이 주축이 되어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척결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왕권의 확립이라는 명분과 정권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 수양대군은 태조와 태종의 기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신권에 대한 왕권의 대립이었다. 김종서, 황보인 등 수많은 신하들이 주살되었다. 이른바 <왕자의 난>이다. 단종은 보위 3년 만에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된 다음 비명횡사했다.
사6신과 생6신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학사회의 가치이념이었다. 조카를 밀어내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했다.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조선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0대 연산군 때 무오사화, 갑자사화, 병인사화가 있었고, 11대 중종은 기묘사화, 신사사화 그리고 13대 명종은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또 19대 숙종은 남인과 서인 각축의 기사사화, 20대 경종은 신임사화를 겪었다. 그러나 크고 넓게 보면 이들은 정치구도의 변화였을 뿐이고 나라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내외치의 안정 그리고 강력한 왕권 아래 파벌정권의 쟁탈은 외교정세를 살피지 못했다. 군비를 소홀히 하여 외침에 대비하지 못하고 주변국가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이룩한 다음 대륙 진출을 획책하고 있었다.
# 조광조, 개혁을 꿈꾸다
* 11대 중종 때 학자요 정치가로써 도학정치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하였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사사(왕의 사약을 받고 죽음)되었다. 조선 개국공신 온의 5대 손이며 아버지는 감찰 원강이다. 17세 때 어천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귀양살이 중이던 김굉필에게 학문을 베웠고 청년학자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한기 8707년(AD. 1510년) 사마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대학의 경륜을 역설하는 도학정치, 철인정치를 주장하는 대자성 유승조의 영향을 받았다. 한기 8712년(AD. 1515년) 관직에 나갔고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욕이 있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왕도정치를 펴고 도학을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씨 향약>을 간행하여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복리의 증진을 꾀했다.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반정공신의 훈작 삭탈을 요청했다. 특히 훈작 삭탈은 훈구파의 반발을 샀다.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이, 이황 등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사림은 정신적 주체로 받들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한 학자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100년 뒤의 율곡 이이는 <변화는 점진적이고 개혁은 단계가 있는 법>이라며 급진개혁을 비판하고 출중한 선비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조선 초 건조된 거북선을 한산대첩도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 장군이 전투함으로 개조 * 그림, Daum Blog 인용
# 임진왜란,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
* 동아시아의 조선, 중국, 일본은 14세기에 새로운 국가와 정권이 등장하여 2세기 동안 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명 나라가 동요하고 이웃한 여러 나라들이 자주적인 독립을 지향하는 경향으로 동아시아 정세는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명 나라는 환관이 실권을 장악하고 지방의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하여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은 다이묘들이 무역을 통한 상권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하고 오다 노부시게정권이 통일을 강화하였다. 또한 일본은 포르투갈인들이 총을 보급하여 총포부대로 새로운 전투대형을 편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여 한기 8787년(AD. 1590년)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 뒤 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하였으나 다이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하급 무사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더욱이 삼포왜란, 영파의 난으로 명 나라, 조선과 무역이 폐쇄되자 국내 안정을 위하고 국제교역을 타개하기 위하여 대륙진출을 통한 <체제변혁전쟁>을 획책하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1세기 동안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이루었으나 15세기 말부터 훈척(공신, 왕족)과 사림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연달아 사화가 발생하였고 선조 즉위 전후에 사림정치가 확립되었지만 혁신세력들은 보수파들이 꾀한 모의에 의해 정파정치로 변질되었다. 특히 군민일치의 개병제도가 붕괴되어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왔으며 선각자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도 정파 간의 이해로 무산되었다.
* 도요토미는 한기 8784년(AD. 1587년) 중국 침략을 위해 쓰시마 도주 소(종의조)에게 조선 침략방안을 논의했다. 소는 조선과 우호선린을 건의했으므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조선조정이 거절하자 다시 한기 8785년(AD. 1588년) 10월과 다음 해 6월 소는 승려 겐소와 같이 내한하여 다시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마지못해 조선에서는 한기 8787년(AD. 1590년) 3월 황윤길과 김성일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이듬 해 1월 귀국한 두 사람은 당파의 정략에 따라 상반된 의견을 보고했으므로 전쟁 발발 논의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그 해 4월 다시 겐소가 1년 뒤에 <명 나라에 가는 길을 빌리겠다>고 통고하자 조정에서는 명 나라에 통보하고 대비를 하였으나 조정의 대부분은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에 민폐만 일으킨다는 정세론으로 적극적인 대비는 없었다. 군기도 문란했다.
도요토미정권은 한기 8788년(AD. 1591년)부터 조선 침략을 준비하여 군대를 재편하고 158,700명의 육군을 9대로 편성하였다. 한기 8789년(AD.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 18,700명이 700여척의 병선으로 쓰시마항을 출발하여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전사했고 부산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동래부사 송상현도 전사하고 18일 가토의 후속부대가 부산에, 구로다의 제 3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이후 4 - 9번대의 후속부대가 상륙하여 수군병력 약 9,000명과 합해 침략 병력은 200,000이었다. 왜군은 세 길로 나뉘어 서울로 진격했는데 관군은 변변히 전투다운 전투도 치루지 못하고 패퇴를 거듭했다. 선조와 세자 광해군이 평양으로 피난했다. 선조의 피난 행렬에 돌을 던지는 백성들이 있었다. 난을 막지도 못했고 백성들을 남겨두고 피난을 가는 임금과 조정에 대한 불만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성난 백성들이 두 왕자를 잡아서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 역시 임금과 조정의 무능에 대한 불만이었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18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조정은 명에 원병을 청한다. 6월 평양이 함락되고 왕은 의주로 떠났다. 전쟁 2개월 만에 전국이 왜군에게 떨어진 것이다.
* 왜의 수군은 남해와 황해를 돌아 육군에게 물자를 조달하면서 수로로 북상하여 육군과 합세하는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였다. 조선수군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 장군,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 장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 전라우군 수군절도사 이억기 장군이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안일한 전쟁 논의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예상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식량을 비축하며 무장을 준비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돌격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조선 초기에 만들었던 귀선(거북선)을 개량하여 월등한 성능을 가진 철갑공격선을 건조했다. 4월 왜군은 경상도 좌우수영군을 쉽게 물리치고 저항 없이 전라도로 진격하였다. 5월 전라좌수영군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7척 도합 86척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6일 동안에 적선 40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5월과 6월에 이억기 장군이 경상우수영과 합세하여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적선 70여척을 침몰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사천전투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했다. 왜군은 전 수군을 집결하여 조선수군을 격파하기로 하고 구키, 도토, 가토 등이 합세하여 6월 말 부산포에 진을 쳤다. 7월 이순신 장군은 이억기 장군의 함대와 합세하여 55척의 전선으로 견내량에 정박 중이던 와키사카 함대 73척을 공격하였는데 견내량이 물길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의 민첩성이 떨어져서 작전 수행이 원활치 못하자 이순신 장군은 적을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학이 날개를 편 모습)으로 포위 공격하여 적선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포획하였다. <한산도대첩>이다. 이 전투로 남해의 재해권을 조선수군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남서해를 돌아 북상하는 육군에게 물자를 보급하고 합세하려던 왜군의 전략이 좌절되었고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뒷날 도요토미는 곡창 전라도를 재패하지 못한 것이 전쟁의 패인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침공에 전략적 중점을 둔다. 재해권 장악은 패퇴를 거듭하였던 관군과 지방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고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 해전에서 승리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경상도의 홍의장군 곽재우, 김면, 정인홍, 권응수. 전라도의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유팽로. 충청도의 조헌과 700의사. 경기도에서는 홍계남, 우성전. 황해도는 이정암. 함경도의 정문부, 정현룡, 오응태. 평안도의 조호익, 양산숙 그리고 의승군으로 묘향산의 휴정(서산대사)은 수천 명의 제자들로 승군을 조직하고 사찰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했는데 관동에서 유정(송운대사), 해서에서 의엄, 호남에서 처영, 충청도의 영규 등이 제자들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한기 8790년(AD. 1593년) 전국의 의병은 22,600여 명으로 관군의 1/4 수준이었다.
* 한기 8789년(AD.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의 진주성전투는 김해 주둔의 왜군이 전라도 침공의 요지인 진주를 점령하기 위해 30,000의 병력으로 공격한 전투다. 수성군 8,600명과 곽재우, 최경회, 이달의 의병들이 성 밖에서 협응하여 6일 간의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을 마련하려던 왜군의 책략을 무산시켰다. 한편 조선조정의 요청을 받은 명 나라는 왜군의 최종목표가 명 나라 침공이었으므로 자위책 차원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 선발대 랴오양 부총병 조승훈이 5,000명으로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였으므로 이여송을 동정제독으로 삼아 43,000을 파견했다. 한기 8790년(AD. 1593년) 1월 명군은 조선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 후 명군은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다가 벽제관에서 패하고 평안도로 후퇴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 의병부대가 가토군을 섬멸하였다. 이 때 우키다가 30,000의 군사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는데 삼도절제사 권율 장군은 백성과 합세하여 여러 번의 공방 끝에 이를 물리쳐 왜군이 서울 이북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훈민정음 5륜행실도 임란 학익진 조선백자
* 그림, Daum Blog 인용
* 전쟁이 장기화되고 소강상태에 이르자 왜군은 철수를 보장받기 위해 고니시의 강화 제의가 있었는데 명 나라도 심의경을 보내 강화를 협상했다. 도요토미는 강화의 조건으로 명 나라의 황녀를 왜왕의 후비로 보낼 것, 왜와 무역을 재개하고, 조선 8도 중 남부 4도를 왜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패전한 나라로써는 무리한 요구였다. 이에 명 나라는 도요토미를 왜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책서를 보냈는데 도요토미가 크게 분노하고 정유재란을 획책했다.
강화가 결렬되자 한기 8784년(AD. 1597년) 선조 30년 1월 왜는 14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두 번째 침략했고 명 나라도 병부상서 형개를 총독, 양호를 경리조선군무, 총병관 마귀를 제독으로 55,000명의 원군을 파견했다. 이미 조선은 재란을 예상하고 대비하였으므로 왜군은 북상하지 못하고 고니시군은 전라도 순천, 가토군은 경상도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첩자에 의한 무고와 출동 명령을 보류하였다는 서인의 모함으로 파직을 당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었다는 것을 안 왜군은 부산에 상륙하였고, 다시 재해권을 확보하여 원균의 조선수군은 6월 안골포전투, 7월 웅포전투, 칠천도전투에서 대패하였다. 8월 초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 장군은, 수군이 전멸했으므로 전쟁을 육상으로 끌어들여 육지에서 합류하라는 조정의 지시를 반대하고 해상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병선이 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린 뒤 남은 전함 12척을 이끌고 명량(전남 진도)에서 지형을 이용한 전략으로 왜군의 전함 300여척을 대파했다. 이 승리로 왜군의 수륙병진전략은 수포로 돌아갔고 다시 조선이 재해권을 잡았다. 한기 8785년(AD.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조선군은 육지에서 명군 마귀, 유정, 동일원과 합세하여 물러서는 왜군을 추적했으나 명군 유정이 왜군의 뇌물을 받고 추적을 지연시켜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명군 진린과 연합하여 퇴각하는 왜의 수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에서 왜 전함 300여척과 교전을 하여 200여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지금은 싸움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 뿐이다. 노량해전으로 7년 동안 전라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노략질 당한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전란 뒤 임금 선조가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도 없었다(약무호남 시무국가)>라고 한 말은 이순신 장군의 전라도 사수 전략의 탁월한 전술적 경륜을 웅변한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해전은 세계전쟁사에서 4대해전의 살라미스해전, 칼레해전, 트라팔가해전의 가장 윗자리에 선다. 러 . 일전쟁 때 러시아 무적함대를 대한해협에서 격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노 헤이하치로 제독은 승리를 축하하는 찬사를 겸양하며 <나를 넬슨에게 비교하는 것은 용납되지만 이순신 장군에게는 비교하지 말라>고 했다. 일본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 이 전쟁은 16세기 말 동아시아 3국이 참가한 국제전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왜는 도요토미정권이 붕괴되고 바쿠후정권이 등장했다. 바쿠후정권은 도요토미의 팽창정책을 철회하고 조선에 유화정책을 폈다. 전쟁 중 약탈한 문화재와 포로로 잡아간 우수한 학자와 장인들이 왜의 문화 발전을 촉진했다. 명 나라는 국력이 소모되어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만주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칸에 즉위하고 후금을 세워 명 나라와 청 나라의 교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후진족이었던 왜와 여진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패자였던 명 나라와 조선은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 호란, 다시 전쟁으로
조선시대 15대 왕 광해군은 명 나라와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을 포괄하는 양면정책을 폈다. 누루하치가 100,000의 원정군을 일으키자 명 나라는 조선에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명 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양면정책을 펴고 있었으므로 강홍립에게 10,000명의 군사를 맡기면서 정세를 판단하여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강홍립은 조 . 명연합군이 심하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에 투항했다. 누루하치는 국제정세를 인정하였으므로 광해군시대는 후금과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집권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의 명 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후금을 괴롭혔다. 누루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중원경영의 야심을 품고 명 나라를 치기 전에 배후에서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먼저 공략해야 했다. 마침 <이괄의 난>이 실패하여 망명한 잔당들이 조선군사 정보를 알려주고 조선 침공을 부채질하자 한기 8824년(AD. 1627년) 인조 5년 후금은 30,0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압록강을 건너 침공했다. 명 나라와 관계를 청산한다는 맹약을 위반하여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이었다. 정묘호란이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진격한 침략군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발생하자 원래 목표가 명 나라 정벌임을 구실로 강화를 요청했다. 3월에 열린 강화의 조건은 <형제의 나라> 맹약,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명 나라와 잠정적으로 교류를 지속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후금은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한기 8829년(AD. 1632년)에는 형제의 맹서를 군신의 맹서로 고칠 것과 금 100냥, 은 1,000냥, 직물 12,000필, 말 3,000필, 병사 30,000명을 요구했다. 이에 격분한 조정에서는 후금의 사신 접견마저 거부하고 죽일 것을 주청하였다. 그리고 8도에 전쟁유시를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명 나라를 정복하여 국호를 청 나라로 개정한 후금은 한기 8833년(AD. 1636년) 인조 14년 12월 다시 신하의 맹서를 강요하였으나 조선이 듣지 않자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청 태종은 청, 몽골, 중국 한인으로 편성한 100,000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명 나라의 조선 지원을 막기 위해 랴오허에 별군을 배치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봉림대군 등 일부가 먼저 강화로 피난하고 뒤 이어 따라 들어가려고 했던 인조는 청군이 압박해오자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칩거했다. 인조는 13,000여 명의 군사로 성을 사수하고 8도에 교서를 보내 근왕군을 모집했다. 그러나 관군과 의병은 성 밖에서 패전하여 흩어졌고 군량마저 부족했다. 전투는 소강상태였으나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조정은 혹한 속에서 식량이 떨어져 위기였다. 명 나라는 수천 명의 원병을 지원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가고 말았다. 청군은 병력 120,000을 결집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세자를 비롯한 2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견디다 못한 조정에서는 성문을 열고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거행하였다. 인조가 청 태종 앞에 3배9고두의 예를 하였다. 세 번 절을 하는데 한 번 절을 할 때 마다 3번씩 이마를 땅에 대는 <황제의 예, 고조선의 삼육구배三六九拜 또는 삼육대례三六大禮>였다. 절하는 이마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지 않다고 해서 언 땅에 이마를 수십 번 부딛쳤으므로 이마에서 선혈이 낭자했다고 전한다. 군신의 맹서, 인종의 장자 소헌세자와 봉림대군, 귀족의 자제들 수십 명의 인질, 명 나라 연호 사용 금지와 국교 단절, 명 나라 정벌 때 원정군 파견, 통혼, 성 개축과 신축 금지 등을 강요받았다. 청 태종의 승리를 기념하는 <삼전도비>가 그 날의 처참함을 새겨 말없이 남아있다. 청군이 물러간 뒤 공물과 사대는 형식적으로 하였고 명 나라 공격 때 출병한 임경업 장군은 군량미를 일부러 수장시키고 군선을 파괴한 다음 몰래 명 나라에 전황을 알렸으므로 뒤에 이를 알게 된 청 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리고 오히려 숭명배청사상이 활발해졌다. 다음 즉위한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잡혀가 8년 간 인질이 되었던 봉림대군이다. 효종은 등극하자 북벌의 강한 의지로 조정을 전시체제로 운영하였다. 이완 대장을 앞에 내세워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허생전의 허생은 이완 대장에게 북벌을 하려거든 지금부터 10년 간 칼을 녹혀 괭이를 만들고 창을 두드려 호미를 만들라고 말한다. 효종은 원대한 이상을 발현하지 못하고 장년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8/22화 : 조선시대 2/2>
새야 새야 파랑새야, 동학東學농민혁명
(삽화 : 개화開化의 여명黎明)
임진왜란민화 임진왜란의병도 임진왜란침략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나오는 사람과 참고자료 (김왕석의 사냥꾼 이야기)
붕당과 탕평책, 천주교 박해,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동학농민혁명
* 압록강과 두만강 위쪽 백두산 너머 그리고 시베리아와 만주 남쪽에는 슈하이樹海라고 불리는 한국영토의 30배 정도 되는 밀림이 있다. 여기에는 한국인, 만주인, 중국인, 러시아인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고리드인라는 종족이 있다. 고리드인은 수렵족인데 그들의 개는 고리드개로써 한국의 풍산개, 만주개, 러시아의 허스킨, 일본 토착인 아이누개와 함께 동북아의 사냥개로 이름이 높다. 고리드개 한 마리는 사슴을 잡고, 두 마리면 맷돼지를 잡을 수 있으며, 세 마리면 곰을 잡고, 다섯 마리는 호랑이도 잡는다. 세계의 사냥개들 중에서 호랑이를 잡는 개는 고리드개 뿐이다. 동북아 사냥개들의 조상이 고리드개라는 학설이 있다. 고리드개를 기르는 고리드인들의 이름에 고조선시대의 작은 성읍국가들과 고려의 이름이 묻어남
* 조선 역사연대표
1대 태조 한기 8589년(AD. 1392년) - 17대 순종 한기 9107년(AD. 1910년),
27대 518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태조 |
AD.1392-1398 |
이성계, 위화도 회군, 왕조 건국 |
2대 |
정종 |
1398-1400 |
사병私兵 3군부 편입, 왕자의 난 |
3대 |
태종 |
1400-1418 |
창업 기반 구축 |
4대 |
세종 |
1418-1450 |
집현전 훈민정음, 측우기, 4군 6진 3포 |
5대 |
문종 |
1450-1452 |
유교적 이상정치, 문화 발전 |
6대 |
단종 |
1452-1455 |
숙부 수양대군 선위, 영월 유배 |
7대 |
세조 |
1455-1468 |
왕권 확립, 경국대전, 관제 개혁 |
8대 |
예종 |
1468-1469 |
경국대전 완성 |
9대 |
성종 |
1469-1494 |
승유억불, 문물제도 완비, 인재 등용 |
10대 |
연산군 |
1494-1506 |
무오 . 갑자 . 병인사화, 중종반정 폐위 |
11대 |
중종 |
1506-1544 |
조광조 혁신정치 실패, 기묘 . 신사사화 |
12대 |
인종 |
1544-1545 |
현량과 부활 |
13대 |
명종 |
1545-1567 |
을사 . 정미 . 을유사화, 을묘왜변 |
14대 |
선조 |
1567-1608 |
당쟁, 임진왜란 |
15대 |
광해군 |
1608-1623 |
명․후금 양면정책, 인조반정 폐위 |
16대 |
인조 |
1623-1649 |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
17대 |
효종 |
1649-1659 |
청 나라 볼모 8년, 북벌정책 추진 |
18대 |
현종 |
1659-1674 |
남 . 서인 당쟁, 선기옥형, 금속활자 |
19대 |
숙종 |
1674-1720 |
남 . 서인 당쟁 기사사화, 백두산정계비 |
20대 |
경종 |
1720-1724 |
신임사화 당쟁 절정 |
21대 |
영조 |
1724-1776 |
탕평책, 균역법, 신문고, 사도세자 비극 |
22대 |
정조 |
1776-1800 |
탕평책, 규장각, 새 활자, 실학 황금시대 |
23대 |
순조 |
1800-1834 |
안동김씨 세도, 천주교 탄압, 홍경래 난 |
24대 |
헌종 |
1834-1849 |
천주교 탄압 기해사옥, 안동김씨 세도 |
25대 |
철종 |
1849-1863 |
안동김씨 세도정치, 진주민란 |
26대 |
고종 |
1863-1907 |
대한제국, 동학혁명, 대원군, 열강 각축 |
27대 |
순종 |
1907-1910 |
35년 간 치욕의 일제시대 |
경국대전 조광조 전남화순 정약용 목민심서 조선백자
귀양살이 유적 * 그림, Daum Blog 인용
# 영조의 탕평책, 또 다시 노소시벽 할 것인가?
* 붕당은 한기 8772년(AD. 1575년) 선조 8년 이조의 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동인)과 심의겸(서인)의 반목에서 시작되었다. 전랑직은 정 5품으로써 직위는 낮으나 인사권을 행사하는 직책으로 인사를 국왕이나 판서가 하지 않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여 공의에 부쳐 선발하였으므로 관료들의 대립이 불가피하였다. 동인은 서인에 대한 강온 양론으로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3색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 뒤에 화의를 주장했던 유성룡이 실각하자 남인이 몰락하였다. 북인은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광해군을 옹립하여 폭정이 계속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득세하였으나 남인도 제 2세력으로써 숙종 때까지 100여 년 간 대립하였다. 서인집권은 현종대까지 지속되었는데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예학논의가 벌어졌는데 당론으로 전환되어 정치적 운명을 걸었으나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복상문제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남인의 횡포가 자심하자 송시열이 다시 등용되었으나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영조는 탕탕평평책을 내세워 정쟁이 완화되었으나 남인의 소론이 시파 벽파로 분파되고 카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신서교파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시 . 벽파의 카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 뿐만 아니라 남인의 대부분인 실학자를 말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7세기 중엽까지는 정치이념과 학연에 따라 상대세력과 공존공도를 추구하는 정치 활성화와 상호 비판 견제의 기능을 발휘하였으므로 원리가 확고하여 정국이 안정되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는 정권 획득에 집착한 논쟁이 학벌, 문벌, 지방의식까지 연결되어 국가 사회 발전에 폐해가 되었더니 이어 생존을 건 사화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사림세력이 붕당정치를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은 향촌사회의 사원과 향약이며 경제적 토대는 사원에 할당된 농장이었다.
* 숙종은 재위 말년에 탕평책을 도입하였으나 불완전했다. 영조는 불편부당의 본격적인 탕평책을 시행하여 당파의 행위는 무조건 축출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기 8925년(AD. 1728년) 영조 4년 소론과 남인이 연좌된 <이인좌의 난>에 노론이 중용되어 노론천하가 되었다. 노론 소론의 분쟁은 사도세자의 폐위에 이르렀고 노론의 시파 벽파는 치열한 당쟁을 일으켰다. 정조는 사도세자인 아버지에 동정적인 시파를 중용했다.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세도정치라는 파행적인 정치형태가 등장한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헌종, 철종대까지 지속되었다가 대원군정권에서 막을 내리나 곧 다시 명성황후가 주도하는 풍양조씨의 세도가 시작된다.
# 천주교의 순교
당시 지도층은 천주교를 동양윤리의 이단으로 몰아 온갖 박해를 자행하였는데 한기 8998년(AD. 1801년) 박해의 직접적인 배경은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었다. 5가작통법(다섯 집을 묶어 서로 고발하는 호적제도)로 천주교도를 적발하였고 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초대 교회 건설 신도들이 대부분 순교했다. 한기 9028년(AD. 1831년) 9월 정약종의 아들이 로마 교황청에 호소하여 서울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한기 9036년(AD. 1839년) 기해사옥은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박해에 이은 풍양조씨 세도정권에서 자행된 박해다. 조선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8043년(AD. 1846년) 병오박해로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대원군이 집권하여 6년 동안에 8,000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정권 싸움에 희생되었다.
# 민란, 동학농민혁명
* <홍경래의 난>은 조선시대 23대 순조 11년 한기 9008년(AD. 1811년) 12월부터 순조 12년 4월까지 5개월 간 일어난 조선시대 최대의 난이다. 조선시대 주요산업인 농업은 17 - 18세기에 들어 농사기술의 향상과 토지겸병으로 광작운동이 일어나 경영형 부농층이 형성된다. 그러나 극소수의 부농층에 비해 대다수의 농민들은 유리민이 되어 광산 노동자나 도시 빈민층이 되었다. 상공업에서도 수공업자가 전업화되고 대외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종식되고 안동김씨세도가 횡행하여 3정의 문란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 우군직, 김사용, 김창시, 이서충이 정감록을 이념으로 부농, 서민지주층, 개인상인층의 재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결집했다. 특히 홍경래가 살았던 서북지방은 구조적 수탈과 서북민의 차별화정책이 공동 피해의식으로 나타나 한기 9005년(AD. 1808년) 순조 7년 농민이 봉기하자 평안도의 다양한 계층이 결집했다. 삽시간에 1,000여 명의 봉기군을 수습하여 10여 일만에 청천강 이북의 10여개 지역을 점령하고 평안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봉기군은 곧 수천 명이 되었고 농민군의 성격으로 기세를 떨쳤으나 경군, 향군, 민병토벌대와 4개월 공방전 끝에 패퇴했다. 농민군이 크게 떨치지 못한 원인은 지휘부에서 부농 상인층과 소농, 빈농, 유민 노동자의 상호 대립적 성격을 융화시키지 못하였고, 서북인의 차별 대우 시정,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척결, 정도령의 출현을 통한 이상 등 이념과 정략의 한계 때문에 관군의 반격으로 대패하여 정주성에 칩거하였으나 2,00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수습되었다.
6. 25 이전에는 일본인 학자 오다 등이 당쟁사적 관점에서 서북인의 푸대접, 개인적 정권
기도라는 해석을 했으나 1960년대 이후 정체성 비판의 일환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규정한다.
두만강의 중국과 중국 화동사범대학 동학농민군 철화백자
조선 국경 표지판 출판 당 나라 지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진주민란>은 철종 13년 한기 9059년(AD. 1862년) 2월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봉기다. 경상도에서 단성현의 농민들이 일어난 것을 필두로 18개 지역에서 봉기가 있었다. 전라도에서는 3월에 시작되어 익산 등 40여 곳에서 일어섰는데 이는 전라도의 전 지역이다. 충청도에서는 5월에 회덕 등지에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진주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탐관오리들의 불법 수탈 방편인 도결과 환보문제였다. 이는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자행된 관료 수탈의 전형이었다. 진주민란의 시발지는 진주읍 서남쪽 유곡동인데 유곡동리회에서 모의했다. 세도정권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을 약속하였으므로 곧 자진 해체되었으나 이는 임기응변의 기만책이었다. 그래서 근본적인 대책으로 토지제도의 개혁으로부터 사회의 제도개혁이 요구되었으며 봉기는 잠재했다.
# 고종 31년 한기 9091년(AD. 1894년) 갑오경장의 정변이 일어났고 동학혁명이 꿈틀거리던 해 초봄, 서울 장안의 중인마을에 큰 잔치가 벌어졌다. 상업으로 거부가 된 집안에서 가문이 좋은 양반사위를 맞는 날이었다. 돈과 신분을 결합시키는 정략혼인이었는데 양쪽 집안에서는 그 걸 과시하기 위해 천 평 가까운 마당에 수십 개의 차일이 둘러서고 수백 명의 손님들이 끊일 사이 없이 드나들었다. 잔치에는 소가 3 마리, 돼지가 10 마리, 닭은 50 마리를 잡았다는 소문이었다. 열 말 들이 술독이 쉴 새 없이 비워졌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 키가 여섯 자가 넘는 건장한 사내가 대문에 들어섰다.
“무성이다!”
잔치판이 술렁거리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서울 장안 백정두목 무성이었다. 무성이란 성씨도 모른다는 뜻이다. 무성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는데 그가 걸어오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경비를 위해 나온 포졸들과 일당을 받은 장돌뱅이들이 달려왔으나 나타난 사람이 무성이란 걸 보고는 슬슬 피했다. 무성은 무표정이었으며 눈이 얼음처럼 차가왔다. 그는 힘이 장사였다. 그가 씨름판에 나서면 한다하는 장사들도 모두 설설 긴다고 했다. 그는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다. 소를 잡을 때 사용하는 날이 시퍼런 칼이었는데 필요하면 사람도 잡는다는 소문이었다.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노비법이 폐지되고 있었다. 그를 건드리면 장안의 수천 명 백정들이 들고 일어선다. 단결력이 강한 그들은 불도 물도 모른다. 경호원들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을 막고 있었으나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늙은 집사가 나섰다.
“자네가 웬일이가? 볼 일이 있다면 은밀하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
“거지처럼 뒷문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입니까? 백정은 거지가 아니외다.”
“볼 일이 뭔가?”
“이 천한 놈은 친척을 뵈러왔소이다.”
실수였다. 가축 도살은 백정들의 생업이었다. 돈을 좀 아끼려고 집안 종들을 시킨 것이 말썽이었다. 백정들의 정보망은 정확하고 빨랐다.
“종들이 모르고 한 일일세.”
“천만에, 종들이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법. 혹 집사 어르신이 우리네 친척이요? 아니면, 이 집 주인이든지.”
“예끼, 이 사람!”
집사는 무성이 요구한대로 소 한 마리 값을 물어주었다. 그 이상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만 다행이었다.
무성이 잔칫집에서 한 건 올리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멀리 전라도에서 손님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성의 집은 대지가 200여 평이나 되고 사랑채, 안채는 물론 행랑채까지 있었다. 백정들은 일반 서민들과 떨어져 자기들 끼리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사회에서는 천대를 받고 있었으나 생활이 궁핍하지 않았다. 전라도에서 온 손님들은 별당에 모셨다.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비밀 방이었다. 손님들은 두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형님 아우로 지내는 전라도 백정두목 곰보였고 다른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곰보는 그를 박주사로 존대를 했는데 건장한 체구에 눈이 날카롭고 상투를 틀었다. 무성은 뭔가를 짐작하고 긴장했다. 동학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 같았는데 무성의 짐작은 옳았다. 손님은 조용조용하게 말했고 무성은 듣기만 했다. 박 주사는 동학 수령 전봉준장군의 최측근이었다. 동지규합 책임자였다. 백정들은 포섭해야할 대상이었다. 박 주사는 이미 전라도 백정들을 혁명에 끌어들였다. 박 주사는 신분을 밝히거나 혁명에 동참해달라고 직접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혁명은 반역이었으며 중죄였다. 잔인한 불고지죄도 있었다. 박 주사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그저 조용하게 말했다. 양반댁에서도 구경하기 어려운 값비싼 소주가 나왔고 부잣집 못지않은 좋은 안주가 나왔다.
“기왕 오셨으니 며칠 머물다 가시지요.”
백정사회에도 장로들이 있었으므로 상의를 해보겠다는 뜻이라고 곰보가 설명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고지죄를 면하기 위해 고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백정사회에는 그들만의 불문율이 있었다. 배신은 없었다. 그래도 박 주사는 품속에 지니고 다니는 육혈포(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어놓았다. 박 주사 일행은 사흘 동안 머물렀다. 무성은 그저 모든 일은 자기에게 맡기라고만 얘기했다.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면 협조하겠다는 암시였다. 백정들이 뭉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만일의 경우 책임을 자기 혼자 지겠다는 의도였다. 무성은 떠나는 박 주사를 마을 입구에 까지 따라 나와 작별했다. 작별 인사 외에는 말이 없었다.
박 주사는 그 길로 함경도로 향했다. 관군을 돕는 일본군들은 조총을 가지고 있어 그들과 겨루려면 화승포를 가진 포수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포수들도 단결력이 강했고 소외된 집단이었다. 박 주사는 함흥에 도착하여 어느 주막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종달이라는 포수를 만났다. 종달은 5년 전에 주인집에서 도망친 노비였다. 열여섯 된 누이가 밤에 주인 양반의 침실로 끌려가는 것을 봤고, 질투에 미친 안주인에게 매를 맞고 죽었다. 탈출을 도와준 것이 박 주사였다. 종달을 만나 하루 종일 산길을 가다가 해가 져서 동굴을 찾아 밤을 새는데 밤중에 범이 으르렁거렸다.
“여기서부터는 범의 영토입니다.”
“자네 주인은 혁명군에게 잡혀 처형되었어.”
그 혁명군을 박 주사가 지휘했었다. 혁명군에게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으나 악독한 종달의 주인은, 박 주사가 말릴 새도 없이 원수를 갚으려는 농민군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었고 주인 보다 더 악랄하다는 안주인은 마당에 끌려나와 옷을 벗긴 체 난도질을 당했다. 종달이 일어나 박 주사에게 넙죽 절을 했다. 눈에 눈물이 어려 있었다. 이튿날도 종일 산을 탔는데 밤중에 종달은 박 주사를 동굴에 남겨두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가 잠시 뒤 돌아왔다. 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뒤를 미행하는 염탐꾼을 처치했습니다.”
관아에서는 염탐꾼을 사방에 풀어놓았다. 농민반란의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따라붙은 염탐꾼은 주막에서부터 미행했었던 것 같았다. 시신을 늑대길에 던져놓았으므로 다음 날에는 뼈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개마고원은 그런 산이었다. 개마고원에는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톱니처럼 이어져 있었고 그런 첩첩 산중에는 관아의 힘이 미치지 못했으며 그 곳을 지배하는 사람은 축지장군(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축지법을 쓰는 포수마을 두령)이었다.
“여기에는 양반도 없고 상민이나 천민도 없소이다. 모두 같은 사람이지요.”
축지장군은 반백의 머리칼을 짧게 깍은 깡마른 체구였다.
“군수인가 뭔가가 범 껍질을 바치라고 하지만 어림도 없지요. 우리는 이렇게 사는 산 사람입니다. 평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우리는 우리대로 삽니다.”
“관리나 양반들이 착취를 한다면 힘으로 때려 부숴야지, 왜 착취를 당하고 있는 거요?”
“평지에서 살지 못하게 되면 이리 오시오. 우리와 함께 삽시다.”
박 주사는 사흘 동안 포수마을에 머물면서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박 주사가 떠나는 날 축지장군은 종달을 데려 가라고 했다. 포수마을로 오는 길을 종달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축지장군의 이러한 배려는 몇 달 뒤에 동학지도부에게 대단히 중요한 암시가 될 줄은 그 때는 몰랐다.
전봉준 압송과 황토현 전봉준상 동학군 제단 동학교도 비밀모임
농민혁명 그림 * 그림, Daum Blog 인용 병풍바위(흰색)
* 19세기 후반 조선 봉건사회는 농업생산력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이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었다. 한기 9057년대(AD. 1860년)부터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나 정부는 봉건지배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을 간과하고 현상적인 조세제도의 부분적 개선을 통해 무마하려고 하였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일본제국과 불평등 무역구조에서 소수의 지주, 부농, 상인들의 고리대금과 수탈로 대다수 농민들은 몰락의 강도가 심해졌다. 호남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의 봉건적 수탈이 자심했고 유형원의 학통을 잇는 부안의 동림서원과 강진으로 유배되었던 정약용의 실학적 진보주의가 형성되고 있었다. 동학은 몰락 양반 최재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개벽을 통한 만민평등을 이념으로 삼았다. 대규모 조직이 필요했던 농민운동은 동학을 근거로 했다. 한기 9091년(AD. 1894년) 1월 일어난 고부민란이 동기였다. 고부민란은 부당한 세금을 수탈하여 착복한 군수 조병갑을 징계하자 일단 해산했다. 전봉준 장군은 무장에서 3월 초 손화중 김개남과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표방한 창의문을 발표하고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였다.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척결하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을 전국에 배포했다. 백산에서 대오를 정비한 동학군은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물리친 뒤 정부가 파견한 홍계훈을 장성에서 격파했고 이어 진주성을 점령했다. 정부는 4월에 청 나라와 일본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는데 농민군이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여 5월에 화약이 체결되었고 농민군은 진주성을 양도했다. 그러나 화약이 실행되지 않자 전봉준 장군은 전라도 53주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작업을 착수했다.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가 연계 봉기하였다. 한기 9091년(AD. 1894년) 6월 정부의 요청으로 입국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 . 일전쟁을 도발하였으며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봉건체제의 개혁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이 내정을 간섭하고 농민군 토벌에 나섰으므로 농민군이 재봉기했다. 전봉준 장군은 동도창의소를 만들어 항일투쟁을 촉구했다. 1차 봉기에 반대했던 최시형의 북접도 연합했다. 공주의 20일 간 공방전에서 동학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논산으로 밀렸으며 패전했다. 금구, 태인 전투에서 핵심지도부가 총 집결한 가운데 마지막 결전을 벌였으나 역시 패퇴하여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렸다. 이후 산발적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으나 괴멸되었고 농민군은 초토화되었다.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을 기치를 내걸고 일어난 동학혁명은 봉건지배층과 농민층의 근대화노선의 충돌이었다. 영세한 농민들이 소품생산자로 자립 발전할 수 있는 농민의 토지 소유, 탐관오리 제거, 민씨정권의 봉건적 폐단 시정, 봉건제도 폐지, 친일정권 타도를 외치며 들불처럼 일어난 민족운동은 많은 희생을 내고 패퇴하였으나 농민을 각성시키고 대중투쟁세력을 강화한 불길이 되어 이후 한국 정치사회의 영원히 꺼지지 않은 불씨로 되살아났다.
동학농민혁명이 정권교체의 혁명으로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애초에 부정부패 척결을 목표로 탐관오리의 응징 차원에서 발생하여 정권교체의 적극적 정치적 이념과 주체가 없었고, 국민적 봉기로 힘을 모으기 위해 저변확대에 치중하다보니 시기를 놓쳤다. 청군과 일본군 그리고 관군의 화력이 우수하다고 하나 전국적인 봉기로 거대한 군단을 이룰 수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므로 정략적 전략이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정권을 타도하고 농민을 위한 진보적정권이 수립될 수 있었는데 한국역사에서 민중혁명의 기회는 물거품이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AD. 1628년), 프랑스의 시민혁명(AD. 1789년) 그리고 일본의 명치유신(AD. 1837년)과 같은 반열의 정치혁명이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세계열강의 각축장화 되었던 국제적인 정세가 크게 작용했지만 민족적으로 동학혁명의 실패는 근대화의 시기를 잃고 이후 수많은 질곡을 겪어야 하는 운명적인 시련이었다. 근대한국사에서 잇달아 일어난 소요와 사태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 의한 역사적 필연이었을 것이다. 전봉준 장군이 사형을 당하고 지도부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조선민중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이렇게 노래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나무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르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9/22화 : 대한제국시대 (1/2)>
대한제국, 개혁과 개화 그리고 세계열강의 각축장
(삽화 : 황제의 나라, 열강의 각축장)
고종황제 행차 대원군의 경복궁 고종황제 일가
* 그림, Daum Blog 인용
* 나오는 사람과 참고자료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헤이그 밀사사건, 안중근의사
• 대한제국 역사연대표
* 조선시대 26대 고종(황제) 한기 9060년(AD. 1863년) - 27대 순종황제(이왕)
한기 9107년(AD. 1910년), 2대 47년 간
* 일본제국 식민지통치시대
한기 9107년(AD. 1910년) - 한기 9142년(AD. 1945년), 35년 간
역대 |
황제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조선26대 |
고종 (황제) |
AD. 1863년 -1907년 |
대원군과 명성황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헤이그 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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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
순종 황제 (이왕) |
AD. 1907년 -1910년 AD. 1910년 - 1945년 |
안중근 의사 의거, 한일합방과 일제 식민통치 35년, 상해임시정부, 3 . 1 독립선언, 청산리전투, 이봉창 의사 의거, 윤봉길 의사 의거,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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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대원군 척화비 명성황후 시해 칼 시해범 후손
(2006년 3월 야스쿠니신사 반환) 쿠시다신사 소장 사죄 방문
* 그림, Daum Blog 인용
#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 강화도령 철종이 30대로 요절하자 헌종의 모후 조씨는 대왕대비로써 비상대권을 잡아 한기 9060년(AD. 1863년) 흥선군의 둘째 아들 12살 명복을 조선 26대 왕으로 지명했다.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파란만장의 세월을 살았다. 안동김씨의 세도가 절정이었던 시대에 언제 무슨 일로 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파락호(술주정뱅이)로 세월을 낚았다. 겉과 속이 달랐다. 한 예로, 충청도를 여행하던 중 예산의 가야사에서 <탑을 세운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며 무덤을 쓰면 반드시 왕이 나올 자리라>는 말을 듣고는 재산을 팔아 10,000냥을 만들어 절을 옮기게 하고 남몰래 아버지 남연군묘를 이장했다. 파락호처럼 살면서 중인이나 상한의 교유의 폭도 넓었다. 철종의 장인 김문근을 위시하여 안동김씨의 김병학은 대제학, 김병국은 훈련대장, 김병기는 좌찬성으로 국정의 요직을 차지하여 3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했다. 벼슬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은 다반사였고 벼슬을 산 지방관리들의 수탈과 횡포는 백성들의 삶을 피폐롭게 만들었으며 불만도 쌓여갔다. 그 시대 3대에 걸친 안동김씨세도는 딸을 아들로만 바꾸지 못할 뿐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했다.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전광석화 같이 개혁을 단행했다. 안동김씨를 밀어내고, 당파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상민에게만 부과되었던 호포를 양반에게 부과했고, 붕당의 근원이었던 서원을 철폐했다.
개혁정책은 백성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양반과 유생의 반발을 샀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 재건과 국고를 채우기 위해 발행한 당백전은 유통경제의 혼란을 가져왔다. 국제문제에 어두웠던 그는 천주교를 탄압하여 외세가 간섭할 명분을 제공했고, 외국의 통상 요구를 묵살했다. 더구나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자 프랑스를 끌어들여 견제하려던 시도가 무산되었다. 천주교 탄압으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수천 명의 신도가 처형되었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하여 문화재(도이치 구텐베르크의 성서 보다 100여 년 앞선 금속활자본 직지심경 등 수천 점)를 약탈한 국제적인 사건이다. 5년 뒤에는 미군함 5척이 강화도에 정박했다. 신미양요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들을 물리쳤다. 이어 도이치 상인 옵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양이(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으면 곧 화의하는 것인데 화의를 주장함은 매국이다>라는 척화비를 세우고 외교를 철저히 배격하는 쇄국정책을 폈다. 천주교도의 탄압과 외국함대의 공격으로 민심이 동요하는 가운데 최익현이 탄핵상소를 올렸다. 대원군은 이를 통해 정세를 반전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고종이 이를 옹호하자 하야했다. 고종의 뒤에는 명성황후가 있었다.
* 명성황후는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 외척의 세도정치의 폐해에서 벗어나려는 대원군이 간택한 왕비였다. 손이 귀한 왕실에 왕자가 늦었다.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출생하여 궁중과 대원군의 사랑을 받는 가운데 황후의 왕자가 태어났으나 며칠 만에 죽었는데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준 산삼에 원인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후사를 보지 못한 황후는 권력에 집착했다. 황후와 대원군은 국제정세에 대한 시각차가 있었고 고종은 그 틈을 이용했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황후는 양오빠 민승호, 조대비 일족의 조영하, 안동김씨 문중,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과 대원군의 형 이최응을 포섭했다. 이 세력을 바탕으로 고종 10년 한기 9070년(AD. 1873년) 최익현이 대원군의 정책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렸다. 새로운 내각의 출범과 통상개화론자들의 등장으로 개화정책이 급류를 탔고 제도개혁도 잇달아 시행되었으나 갈등과 불협화음도 생겼다. 명성황후의 국고 남용이 국고 탕진을 가져왔다. 임오군란이 터졌다. 흥선대원군은 하야 8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먼저 황후의 국상을 발표했으나 황후는 충주로 도주하여 고종과 연락하고 청 나라의 이홍장에게 대원군의 납치를 종용했다. 대원군은 4년 간 청 나라에 억류되었다. 청 나라의 국정 간섭이 도를 넘자 급진개혁파들이 일본의 지원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의 3일천하>였다. 한기 9091년(AD.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대원군에게 재집권의 기회였다. 대원군은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켜 갑오경장을 단행하였지만 집권력이 떨어졌다. 일단 정계에서 물러난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손을 잡고 배일친러정책을 추진했다. 위협을 느낀 일본은 고종 32년 한기 9092년(AD. 1895년) 미우라 공사의 지휘로 낭인들을 모아 명성황후(44세)를 시해하였다. 을미사변이다. 대원군의 보복이었다. 이 만행에 열강이 항의하자 일본은 공사와 낭인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였고 대원군도 책임을 지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일제가 멸종시킨 일본 침몰 한국역사 말살 하르빈역 이토오
토종 삽살개 영화 포스터 * 그림, Daum Blog 인용
# 임오군란
한기 9079년(AD. 1882년) 6월 5일 선혜청 도봉소에서 13개월이 밀린 병사들의 월급을 지급하며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배급하자 우위영 소속 구 훈련도감 군병들이 관리를 구타하면서 일어났다. 이는 곧 민씨정권 세도에 대한 투쟁으로 진화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통문에 의해 동별영에 모인 병사들은 무기고를 열어 무장하고 포도청을 습격하여 관리 구타로 잡혀간 동료들을 구해내고 의금부를 탈취하여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경기감영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할 때쯤에는 하급군변과 빈민들이 가세하여 대집단이 되었다. 10일에는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와 김보현을 살해한 다음 민씨세도권력의 정점에 있는 명성황후를 찾기 위해 궁중을 샅샅이 수색했다. 반란을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이 병사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반란이 수습되자 일본과 청국은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하나부사 요시타다는 주모자 처벌, 피해 보상, 개항과 통상, 그리고 병력 주둔 등 8개항을 요구했다. 대원군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를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마산항에 주둔한 청국군에게 견제를 요청했다. 서울에 진입한 청국군은 오히려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는 한편 군대로 궁궐을 장악했다. 청국군의 이러한 태도에 격분한 군병과 시민들은 다시 일어나 청국군에 대항했다.
# 갑신정변
한기 9081년(AD. 1884년)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 종속관계를 청산하고자 개화파가 일으킨 국민주권을 지향한 정치개혁운동이다. 한국사에서 정치세력으로써 근대적 개혁문제를 제기한 것은 개화파가 처음이었다. 실학으로 북학사상을 계승한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를 중심으로 진보세력이 적극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을 핵심으로 정치세력화 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한기 9079년, AD. 1882년)을 계기로 민씨정권의 친청수구정책은 심화되었고 청국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들어냈다. 개화파는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 종속관계를 청산을 결의했다. 마침 베트남 문제로 청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청국이 패하자 청국이 느슨해진 틈을 이용하여 일본공사의 후원을 업고 한기 9081년(AD. 1884년) 12월 우정국낙성식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혁안 14조는 청국과 종속관계 청산, 문벌 폐지, 인민평등권 제정, 인재 등용, 지조법 개혁, 탐관오리 처벌, 환자미 면제, 세금의 호조 관할, 경찰제도 실시, 혜상공국의 혁파였다. 이러한 국왕의 정치혁신조서가 내려졌으나 이에 반발한 청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개화파들은 인천항에서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치변혁을 담당할 주체가 성숙되지 못하고 치밀하지 못한 계획으로 정권을 혁파하려는 의욕이 앞선 도전과 외세의 힘을 통해 자주정권을 창출하려는 배반적인 성향이 원인이었다.
* 갑신정변, 개화파의 3일천하 재조명
한기 9081년(AD. 1884년) 갑신정변은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급진개혁파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변혁>이 아니라 상한(일반 백성)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아래로부터 민중계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주체세력인 김옥균을 지도한 사람도 유대치와 오경석으로 중인계급이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서구이론을 적용하기 위한 부르쥬아혁명으로 오도했다. (박은숙, 서울시편찬위원회, 갑신정변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편, 2003년, 갑신정변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췌한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당의 핵심인사와 적극 참여자 77명을 추적한바, 의금부에서 심문을 당한 주도자 23명의 기록이 있는 <추안급국안>을 검토 분석했다. 그 가운데는 양반 10명, 중인 5명, 상한 39명, 미확인 23명이었는데 미확인은 상한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름을 들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한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분류는 상한, 군인, 겸종(양반가 심부름 평민), 상인, 내시, 궁녀가 망라되어 있다. 이들은 중간지휘자, 정보원, 행동대원, 심부름꾼으로 활동했는데 불고지죄의 엄격한 법치에서 고발하면 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고발한 사람이 없었으며, 친청파 민영익의 겸종까지 참가하였다. 심문에서 밝혀진 특별한 내용은, 능력에 의한 인재 발탁과 개화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가담 이유로 진술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완하는, 갑신정변의 14개조 정령에는 상한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 또 정변 뒤 상한이 정 3품 벼슬을 제수받은 일도 있다. 개화당은 거사 직후 전후좌우영 병사 2,000명 지휘권을 장악했으나 청군의 영향 아래 있었던 좌우영의 지휘자를 교체하지 않아 좌우영병사들의 지휘가 일사분란하지 못해 청군 1,500명의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근대적 부르쥬아 혁명, 유교적 질서 문벌세력 정권쟁탈전이라는 해석은 재조명해야 한다.
명성황후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전시 일제 조작
* 그림, Daum Blog 인용 2차대전 유물 점재현비
# 갑오개혁
한기 9091년(AD. 1894년) 7월 개화파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으로써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씨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텐진조약을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출병했다. 반란이 진압되자 조선정부는 양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는데 청국은 수용했으나 일본은 반대했다. 일본군은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을 복귀시켰다. 김홍집을 수반으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진행된 개혁정책은 210여 건에 이른다. 정부와 왕실의 분리, 국왕의 권한 축소, 과거제 폐지, 청국연호 폐지, 청국과 사대관계 일소, 신분제 철폐, 조혼 금지 등 봉건적 관습이 일신되었다. 화폐제도는 은본위제도로 일본화폐의 유통을 허용하였다. 2차개혁에서는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 홍범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으로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 공포하였다. 3차개혁은 태양력 채택, 소학교령 반포 등 140여 건이다. 그러나 단발령은 유생들의 봉기를 유발했고 아관파천 뒤 김홍집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갑오개혁은 끝났다. 갑오개혁은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한 내재적 개혁이며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질서에 조선이 편입되는 빌미를 제공한 양면성의 정변이었다.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근대화이념 성취를 달성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식민지화 길을 열었다.
# 헤이그밀사 사건
한기 9104년(AD. 1907년) 고종이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의정부 참판 이상설, 평리원검사 이준,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파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참석하여 세계만방에 조선의 일제 강압침탈을 호소하였으나 국제정세는 냉담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가 일본의 장교단을 이끌고 궁중에 들어와 고종을 협박하였으며 이토오는 고종의 폐위를 일본총리에게 건의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양위를 주청하고 궁궐에 연금했다.
# 한기 9106년(AD. 1909년) 10월,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중국의 하얼빈 역사, 정면에 <이토오 히로부미 통감각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일본헌병과 경찰들이 2중 3중으로 둘러서서 물 샐 틈 없는 경비를 하고 있었다. 기자완장을 차고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인이 경비 뒷줄에서 기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살피고 있었다. 육혈포를 품속에 감춘 안중근 의사였다. 몇 분 뒤 통감이 탄 특별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긴장한 얼굴로 경찰들의 저지선을 기웃거렸다. 이윽고 특별열차가 역 구내로 진입했다. 헌병들이 열차 앞에 도열하고 외투를 걸친 이토오 히로부미가 모자를 눌러 쓰며 열차의 승강구를 걸어 내려와 도열한 관리들을 열병하고 있었다. 이 때 경비 헌병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있던 안중근 의사가 헌병이 제지할 새도 없이 저지선을 뚫고 달려 나왔다. 어느 새 안중근 의사는 손에 육혈포(권총)를 겨누고 있었다.
“탕! 탕! 탕! 탕!”
연속적으로 네 발의 총성이 하얼빈 역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의 총성이 탕! 하고 또 울렸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안중근 의사는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3창했다. 그 때야 정신을 차린 일본헌병들과 경찰들이 안중근 의사에게 들이닥쳤다. 의사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권총을 버리고 태극기를 손에 든 체 헌병들에게 순순히 잡혔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권총 다섯 발을 가슴과 배에 맞고 즉사했다. 일본인들은 안중근 의사를 암살자로 처형하려고 했으나 의사는 끝끝내 한국의 역적을 죽인 애국자로 당당하게 재판에 섰다. 중국인들은 <10억 중국인들이 못한 일을 한 사람의 한국인 안중근 의사가 했다>고 놀라워했으며 한국인과 독립군에 대한 성원이 한결 활발해졌다. 그 해 3월 일본인들만의 재판으로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 개인 사정으로 20화 -22화를 이어 싣습니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20/22화 : 대한제국시대 (2/2)>
대한제국, 일제 식민지 35년과 독립운동
(삽화 :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의 처절한 독립투쟁)
백두산 천지 대한민국행정도 중국 백두산 성화채화
* 그림, Daum Blog 인용
* 나오는 사람과 참고자료
한일합방과 일제식민지시대, 상해임시정부, 2 . 8 일본 유학생 독립 선언과 3 . 1 독립선언, 청산리전투, 이봉창 의사 의거, 윤봉길 의사 의거,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
• 대한제국 역사연대표
* 조선시대 26대 고종(황제) 한기 9060년(AD. 1863년) - 27대 순종황제(이왕)
한기 9107년(AD. 1910년), 2대 47년 간
* 일본제국 식민통치 - 한기 9107년(AD. 1910년) - 한기 9142년(AD. 1945년),
35년 간
역대 |
황제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조선26대 |
고종 (황제) |
AD. 1863년 -1907년 |
대원군과 명성황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헤이그 밀사
|
27대 |
순종 황제 (이왕) |
AD. 1907년 -1910년 *AD. 1910년 - 1945년 |
안중근 의사 의거, 한일합방과 일제 식민통치 35년, 상해임시정부,
3 . 1 독립선언, 청산리전투, 이봉창 의사 의거, 윤봉길 의사 의거,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
|
조선청년 핵폭탄 평화공원 상해 임시정부 올림픽의 손기정
징병 독려 (나가사키) * 그림, Daum Blog 인용
# 한일합방조약과 일제식민지시대
* 한기 9107년(AD. 1910년) 8월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맺은 불평등조약이다.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중심이 되어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쳐 통과시켰다.
* 일제식민지시대는 19세기 후반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쟁탈전으로 탈 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이 외교관계를 거부한다는 명분을 들어 공식적으로 정한론을 제기하여 한기 9073년(AD.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무력 식민지정책, 한기 9091년(AD. 1894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데 이어 한일신협약과 기유약조로 대한제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한기 9106년(AD. 1909년) 대한제국 강제합병이 일본각의에서 결정되었고, 한기 9106년(AD.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빌미로 정한론이 가속화되었다. 한기 9107년(AD. 1910년) 한일합방조약(경술의 국치)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일본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35년 간 식민지배를 받았다.
제 1기 헌병경찰통치기(1910년 - 1919년)는 헌병경찰제도로 헌병이 일반 경찰행정을 담당하여 즉결처분권을 가졌는데 갑오개혁 때 폐지된 태형제도를 적용하였고, 신민회 105인 사건 등 단체를 해산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등록되지 않은 많은 토지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침탈당했다. 회사령, 산림령, 어업령, 광업령 등 조선의 경제적지배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제 2기는 문화통치기로 한기 9107년(AD. 1919년) 3월 거국적인 3 . 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의 통치정책이 급선회한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하고 회유정책으로 전환한다. 헌병경찰제도 폐지, 단체와 언론활동 허용, 초등교육 확대 등이 전개되었으나 민족지도자들의 분열도 이루어졌다.
제 3기 민족말살통치기(1931년 - 1945년)는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한국은 일본의 대륙 진출 전진기지로 기능을 담당했다. 경제적지배가 병참기지화정책으로 선회한다.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에 의거한 황국신민화정책이 실시된다. 황국신민의 서사 암기, 신사 참배, 일본어 사용, 창씨개명이 강요되었다.
광복군의 선서 정신대 참상 청산리전쟁 승전 패전 일본군
* 그림, Daum Blog 인용 퇴각
# 3 . 1 독립선언
* 한기 9116년(AD. 1919년)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다. 일본제국주의의 강탈에 신음하던 한국인은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3 . 1 독립선언서는 한기 9116년(AD. 1919년) 3월 폭압적인 일본의 무단정치에 항거하여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계 2명의 지도자들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뒤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전국적으로 독립선언문을 돌리고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 . 1 독립선언이 있기 전 한기 9116년(AD. 1919년) 2월 8일 일본제국의 한복판 도쿄에서 한국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다.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 한다.
3 . 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한기 9115년(AD. 1918년) 11월에 만주 노령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 한기 9116년(AD.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발표한 <2 . 8 독립선언서>, 셋째 한기 9116년(AD. 1919년) 서울의 <3 . 1 독립선언서>다. 2 . 8 독립선언서는 일본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었고 일본제국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어났으며 3 . 1운동의 발단에 지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데 의의가 크다. 동경 유학생들은 한말부터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학회지 <대한흥학보>를 발간하여 애국개화운동에 기여하였다. 한기 9109년(AD. 1912년) 조선유학생학우회에는 유학생 전원이 자동가입되었으며 <학지광>을 발간하여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직접적인 동기는 한기 9115년(AD. 1918년) 세계 1차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원칙 14조와 그 해 11월에 성립된 1차대전의 휴전조약이다. 한기 9115년(AD. 1918년) 12월 15일 자
* 유관순은 이화학당 재학생으로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의 예배가 끝난 뒤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고 4월 1일 만세시위를 하가로 결의하고 마을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고 수천 명의 군중을 결집하여 아오내장터에서 시위를 주동했다. 시위 중 부모가 피살되었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주동자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투쟁의 정당함을 주장하다가 의자를 던져 법정 소란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만세운동을 주창하여 더욱 심한 고문과 형벌로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사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한기 9116년(AD.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수립 . 선포되어 한기 9142년(AD. 1945년) 해방 환국할 때까지 일제의 한국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치했던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로 한기 9116년(AD. 1919년) 3 . 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4 중국 상하이), 대한국민의회정부(1919. 3 러시아령),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1919. 4 서울), 조선민국입시정부(1919. 4 서울), 신한민국임시정부(1919. 4 평안도), 한성임시정부(1919. 4 서울 인천), 동 3성(만주 일대)의 고려임시공화국 등 6개의 지역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으나 이 가운데 상하이, 러시아령, 서울의 3개 지역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헌법, 의회, 서고문, 정강, 강령을 갖추었고 나머지 정부는 전단적인 범주에 머물렀다.
*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다.
제 1기 상해시대(1919년 - 1932년)는 교통국과 연통제의 상설기구를 설치했다. 교통국은 군자금 모금, 정보수집, 정부의 지령전달, 인물포섭과 무기 수송전달을 했다. 연통제는 행정제도다.
제 2기는 이동시대(1932년 - 1940년)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빌미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자싱, 항저우, 쑤저우, 전장,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린, 치장 등 10여 지역으로 피난한 시기다.
제 3기 충칭시대(1940년 - 1945년)는 충칭에 정착한 시기로 광복군을 창설하고, 주미외교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하고, 3균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건국강령을 반포했으며, 강력한 통치이념과 독립전쟁을 천명했다. 세계 제 2차대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중국에 이어 12월 공식적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국민국가의 민주공화제적 전환의 민주정치사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었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었으며, 특히 임시정부는 좌우익을 통한 연립내각을 수립하여 민족통합을 실현하였다.
총독부 일장기 안중근의사 유관순열사 윤봉길의사 처형
내림 순국비 기념 그림 * 그림, Daum Blog 인용
# 청산리전투
한기 9117년(AD.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 동지대 소속 군사를 전멸시킨 대첩이다.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천수평 등 10여회의 승첩이다. 무기와 탄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하루 주먹밥 한 개로 독립군 2,000여 명이 일본군 5,000여 명을 대파했다.
# 이봉창의사 의거
한기 9129년(AD. 1932년) 1월 도쿄 사쿠라다몬 다리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품안에서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체포되어 순국했다.
# 한기 9129년(AD. 1932년) 4월 상해 홍구공원에서는 일본천황의 생일축하식이 거창하게 거행되었다. 홍구공원 폭탄투척거사 직전의 상해임시정부청사, 김구 주석의 사무실 겸 침실, 식당. 김구 주석과 윤봉길의사, 사무용 책상으로도 사용하는 식탁에 좌정하여 마주 앉아 있다. 식탁에는 오랜만에 보는 하얀 이팝과 소고기국 그리고 몇 가지 나물반찬이 차려져 있고 윤봉길 의사가 맛있게 밥을 먹는다. 김구 주석 앞에도 밥상이 차려져 있지만 주석은 숟가락을 든 체로 윤 의사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다.
윤봉길 의사 : (숟가락을 놓고 숭늉을 마시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잘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이팝으로 포식을 했군요. 이제 가야할 시간입니다. 선생님 건강하게 잘 지내십시오.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다가 돌아서며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김구 주석에게 드린다.) 선생님, 이제 제 시계는 쓸모가 없습니다. 제 것이 더 새 것이니 바꿔 찹시다. (김구 주석 망설이다가 손목시계를 풀어 서로 바꿔 찬다. 그리고 왈칵 윤 의사를 가슴에 안고 등을 쓸어내린다. 김구 주석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 상해 홍구공원 일본천황 생일축하연장, 일본인 차림의 윤봉길 의사가 어께에는 물병을 메고 손에는 도시락을 들었다. 일본헌병이 검문하지만 유창한 일본어를 구시하면서 일본인 행세를 하자 의심없이 들여보낸다. 잠시 뒤 군악대의 일본국가 연주로 의식이 시작되고 단상 위에는 상해에 주둔한 일본군 고위장성을 비롯한 영사관 직원들과 일본상인조합 대표 등 그리고 초청되어 참석한 중국 고위관리들이 포진하여 기미가요를 들으며 일장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 : (단상 앞으로 달려나가며 도시락폭탄을 단상으로 던진다. 그러나 불발, 다시 어깨에 맨 물병폭탄을 벗어 던진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단상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천 명의 관중들은 아비규환이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윤 의사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만세를 3창한 뒤 우왕좌왕하고 있는 일본헌병 앞으로 걸어가 두 손을 내민다.
헌병 : (눈을 희번덕거리며) 뭐야, 너는?
윤 의사 : (태연하게) 내가 폭탄을 던졌다. 체포하라!
헌병 : 미친 놈이구만, 저리 가라!
윤 의사 : 이 멍청한 놈아, 내가 폭탄을 던졌다니까!
헌병 : 돌았나?
윤 의사 : (웃으며) 날 체포하지 않으면 곧 후회할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스스로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김구 주석은 그 말을 전해 듣고는 통곡했다.
#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
한기 9133년(AD. 1936년) 8월 도이치의 베를린 올림픽경기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1등을 하고 남승룡 선수가 3등을 했는데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았으므로 동아일보는 2판부터 일장기를 지우고 발행하여 무기 정간되었고, 역시 일장기를 없애버린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은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하였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21/22화 : 대한민국시대>
해방 조국,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
(삽화 : 동족상잔의 이념 갈등과 남북전쟁)
휴전선 긋기 철마는 달리고싶다 2006년,
* 그림, Daum Blog 인용 55년 만에 열린 철길
* 나오는 사람과 참고자료
해방, 남북 분단, 이승만 독재정부, 6 . 25 남북전쟁, 4 . 19 학생의거, 5 . 16 군사 구테타와 군사독재정부, 12 . 12 사태, 5 . 18 광주민중항쟁, 김영삼 문민정부, 김대중 국민의 정부, 노무현 참여정부
* 대한민국 역사연표
초대 이승만 자유당정부 한기 9145년(AD. 1948년) 7월 -
현재 16대 노무현 참여정부 한기 9200년(AD. 2003년) 2월 출범
역대 |
대통령 |
재임 기간 |
역사 개요 |
초대 |
이승만 |
AD.1948.7-1952.8 |
해방, 남북 분단, 6 . 25 |
2대 |
= |
1952. 8 - 1956. 8 |
자유당 독재, 4사5입 개헌 |
3대 |
= |
1956. 8 - 1960. 4 |
4 . 19 학생의거 |
과도내각 |
허정 |
1960. 4 - 1960. 8 |
|
4대 |
윤보선 |
1960. 8 -1963. 12 |
5월의 봄 |
5대 |
박정희 |
1963. 12 -1967. 6 |
5 . 16 군사혁명 |
6대 |
= |
1967. 7 - 1971. 6 |
3선 개헌 |
7대 |
= |
1971. 6 -1972. 12 |
|
8대 |
= |
1972.12 -1978. 12 |
유신시대 |
9대 |
= |
1978.12 - 1979.10 |
|
10대 |
최규하 |
1979.12 - 1980. 8 |
12 . 12 사태 |
11대 |
전두환 |
1980. 8 - 1981. 2 |
5 . 18 광주민주화운동 |
12대 |
= |
1981. 2 - 1988. 2 |
통일주체국민회의 |
13대 |
노태우 |
1988. 2 - 1993. 2 |
6 . 29 선언 |
14대 |
김영삼 |
1993. 2 - 1998. 2 |
문민정부, 군사정부 담합 |
15대 |
김대중 |
1998. 2 - 2003. 2 |
국민의 정부, 반공과 용공 |
16대 |
노무현 |
2003. 2 - |
참여정부, 혁신과 보수 대립 |
해방 대한민국 해방기사 독립신문 임시정부 귀국 축하
* 그림, Daum Blog 인용
# 한기 9142년(AD.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미치노미야 히로히토의 항복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 . 영 . 소 . 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생각컨대 제국 신민의 강령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낙을 같이함은 황조황범의 유범으로써 짐의 권권복응하는바 전일에 미영 양국에 선언한 소이도 … 모름지기 거국일치 자손상전하여 굳게 신국의 불멸을 믿고 각자 책임이 중하고 갈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총력을 장래 건설에 쏟을 것이며 도의를 두텁게하고 지조를 튼튼케하여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도록 노력할지어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뜻을 받들라.”
* 일본에서만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었다. 조선통감부의 관리들은 책상을 치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고 거류민들도 동쪽으로 무릎을 꿇고 비통하게 울었다. 많은 거류민과 일손을 놓은 관리들이 저들의 신사를 찾아 넋을 잃고 합장을 했다. 대동아전쟁은 필승이라고 믿고 있었던 일본인들에게 패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야모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지휘 아래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일본군의 가미가제와 잠수함을 동원하여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 한기 9138년(AD.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아침이었다. <도라 도라 도라, 여기는 진주만>이 암호였다. 일요일을 디 데이로 잡은 것도, 이른 아침을 택한 것도, 그리고 워싱턴에서는 일본대사가 미국 국무부장관 면담을 신청한 것도 모두 기습을 하기 위한 기만 전략이었다. 미국 국무부장관은 찾아온 일본대사에게 협상 진행 중, 그것도 선전포고 없이 기습이란 국제도의에 어긋난다고 하며 면담을 거절했다. 일본대사는 진주만을 공격한 한 시간 뒤에 선전포고를 전달하려는 속셈이었다. 일본은 미국 전함이 몰려있는 진주만을 일거에 때려부순다면 미국이 일어설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일요일 아침 잠자고 있던 미국은 분노로 깨어났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은 12척의 함선, 전투기 188대, 2,400여 명의 군인들과 70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 피해를 입었다. 일본의 예상은 적중했다. 미국은 회복하기 어려운 결정적 피해를 입었다. 일본의 승승장구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본 국민은 진주만 기습에 환호작약했다. 천황폐하 만세! 소리가 일본 전역을 뒤흔들었고 군국주의자들이 앞장서서 대동아 경영이 시작되었노라고 거품을 물었다. 일본의 대륙 진출 의지는 한국의 열국시대 백제 멸망을 구실로 한국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획책 이래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부터 한일합방까지 이어졌다. 한일합방으로 수백 년 동안 잠재했던 대륙 진출 야욕의 전초기지 확보에 성공했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판단한 제국주의자들은 한기 9133년(AD. 1936년) 노구교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한기 9134년(AD. 1937년) 중국과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철강과 원유 수출을 제재했다. 일본이 1차적인 조치에도 중국 침략 의도를 포기하지 않아 미 . 영은 자국 안의 일본자산을 동결하고 파나마운하 통행을 억제했다. 한기 9138년(AD. 1941년) 헐 통지문을 최후의 통첩으로 받은 도조 히데키 일본수상은 중국 안의 일본군을 철수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륙 진출의 야욕을 버린 것이 아니라 대동아공영의 걸림돌이 되는 미국을 먼저 치기로 계획을 바꿨을 뿐이었다. 아인시타인은 핵이 전쟁의 수단이 되는 일을 우려했다. 노벨이 다이나마이트가 무기가 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처럼 핵이 세계평화에 이용되기를 염원했으나 미국은 이 전쟁을 빨리 종결시켜야 했다. 국력을 탕진을 막아야 했다. 한기 9142년(AD. 1945년) 8월 6일 B - 29 폭격기에 장착된 <리틀 보이(꼬마)>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도시 모든 주민 420,000명이 피폭되었고 160,000명(40%)이 죽었다. 한기 9142년(AD. 1945년) 8월 9일에는 고쿠라로 향하던 폭격기가 기상 악화로 회항하던 중 나가사키에 <팻맨(뚱뚱보)>을 투하했다. 도시 모든 주민 270,000명이 피폭되었고 230,000명(90%)이 죽었다. 일본은 경악했다.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무력이었다. 제국주의자들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미 패전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던 때였다. 일본은 국력이 바닥나있었고 전쟁자원이 동이나 송진(소나무액)을 비행기 연료로 가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비참하게 항복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욱일승천했던 기개가 떨리는 목소리로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 그대들 신민은 짐의 뜻을 받들라>.
서울시청 앞 영월무궁화 만주용정 반일의사릉 을사 5적
월드컵 응원 * 그림, Daum Blog 인용
* 안타깝게도 한국인들이 히로시마에서는 50,000여 명이 피폭되어 20,000여 명이 죽었고, 나가사카에서는 20,000여 명이 피폭되어 10,000여 명이 죽었으나 치료나 보상은커녕 잊혀진 존재, 잊혀진 게 아니라 없었던 존재로 나가사키의 위령탑에 등재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일본은 나가사키 중심에 <평화공원>을 조성해놓고 해 마다 평화시위를 벌인다. 전쟁을 발발했던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 평화를 호소하는 넌센스가 벌어지고 있다. 종전 뒤 평화헌법을 제정하여 세계평화를 교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그들은 일본총리의 야스쿠니신시 참배를 자행하고 있다. 야스쿠니에는 1급 전범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유사 이래 한국령이었던 독도를 러 . 일전쟁의 보상으로 강탈하였는데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려는 야욕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도이치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일제의 도조 히데키가 획책한 세계 제국주의화 야심은 세계 제 2차대전을 일으켜 또 한 번 지구촌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인민군 전차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개입 6 . 25 살육
서울 진입 * 그림, Daum Blog 인용 1 . 4후퇴 흥남부두
# 해방조국, 미국군과 소련군의 진주
* 한기 9142년(AD.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의 라디오 방송에 목이 메인 사람들이 또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봉건사회의 수탈과 압제에서 개화의 여명을 찾아 꿈틀거리던 역동적인 시국이 일본제국의 대륙 진출 전진기지의 전초가 되어 수탈과 압제는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하게 자행되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얼마만한 희생을 치루어야 했던가? 조선시대 후반기 봉건사회에서 백성은 깨어가는 민중이었으나 일제시대의 한국인은 노예로 전락했다. 학도병으로 끌려간 학생들은 일본군대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누이들은 정신대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 노무자로 끌려간 아버지들은 탄광노동자로 학대와 중노동에서 희생되었다. 한국이 일본제국 전쟁의 전초기지였고 한국의 생산물은 일본제국의 전쟁 물자 수급원이었다.
* 해방의 감격을 기쁨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어 입술을 깨무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독립투사들이었다. 한국을 광복하기 위한 전략이 수립되어 이미 중국에서 두 갈래로 한국을 향해 진격하던 독립군은 아연실색했다. 우리 힘으로 광복을 이룩해야 했다.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되는 계기였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시작된 한국에 공식적으로 입국하지 못했다. 이미 미국이 주도한 한기 9140년(AD. 1943년) 이집트의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한국의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그리고 남에는 미국군정이 북에는 소련군정이 설치되었다. 국내의 좌우익은 신탁과 반탁으로 갈라졌다. 이승만 한민당의 주도 아래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어 북한에도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상해 임시정부를 주관했던 김구 주석은 미군정이 개인자격 입국을 요구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입국하지 못했으나 남북협상을 주도하여 남북 분열을 막으려고 했지만 경교장에서 현역 군인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일본 반환 오대산사고 일송정 임정국무위원 홍범도, 김좌진,
조선왕조실록 * 그림, Daum Blog 인용 지청천 장군
#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독재정권
미국 정계에서 활동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정책을 수용했다. 미국은 세계 제 2차대전 뒤 재편되는 세계 정치질서의 양축으로 소련과 미국의 역할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소련과 양분했다. 미국은 남한의 복구를 지원했다. 소련군은 북한에 김일성정권을 세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정치세력, 친일파까지도 포용했다. 한국의 국부로써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정권욕과 독재권력을 일으켰다.
# 한기9147년(AD. 1950년) 6 . 25 남북전쟁이 터졌다. 이전 한기 9145년(AD. 1948년) 10월에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고 4 . 3 제주항쟁이 터졌다. 여순반란사건에서 연대장 박정희는 핵심 역할을 맡았는데 사건 진압 뒤 군대 안의 공산당 조직을 밀고하는 조건으로 살아남았다.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만주에서 활약한 일본 관동군의 장교였다. 남한의 정치적 상황과 미국 국무부장관 애치슨의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 애치슨라인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오판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소련과 중국의 허락을 받아 기습 침략을 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남한 보다 월등했었다.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국제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독자로선에 미국이 등을 돌려 애치슨라인(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으로 일본까지만 포함됨)을 상정했다. 변변한 탱크 한 대도 없었는데 북한은 소련제 탱크로 무장하고 있었다. 남한은 북침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또 전쟁 발발 뒤에 북한군이 열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정부는 한강 다리를 끊고 퇴각했으며, 한 달도 못되어 낙동강까지 밀어닥친 걸 보더라도 북침은 어불성설이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유엔군을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 북진하여 백두산 천지 물을 떠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으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개입하여 휴전이 성립되었다. 전쟁 등 실책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 실시하는 간접선거로는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발췌개헌안으로 직선제개헌을 하였다. 그 후 종신집권을 획책하여 4사5입 파동을 일으켰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 선생을 용공주의자로 처형했다. 여운형 선생은 암살되었다. 신익희 선생과 조병옥 선생은 대통령 선거 유세 중 급사했다. 이승만정권의 권력기반의 이데올러기는 반공과 반일이었다. 경찰, 군부, 청년단체가 정권 수호유지의 첨병역할을 했다. 자유당이 그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일제청산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제에 협력하고 독립투사를 박해하였던 사람들이 정부요직과 부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남한은 국가적 도덕적 정체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가치질서가 정당성을 잃고 있다. 북한은 일제부역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처리하였으며 전후 유럽에서도 뉘렌부르크 재판을 기준으로 사회에서까지 응징하고 처리한 반면 남한은 이에 실패하여 가치혼란을 겪고 있다. 전쟁 당사자인 일본은 평화헌법을 제정하였으나 전후 도이치처럼 역사적인 반성이나 사죄 없이 형식적이다. 3 . 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독재정권의 절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로써 위치에서 4 . 19 학생의거로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내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 한기 9157년(AD. 1960년) 4 . 19 학생혁명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부패한 정치세력에 맞서는 혁명주체세력이었다. 학생들은 통일지향적이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같은 구호가 민족통일 지향의 학생혁명의 기치였다. 허정내각, 장면정권은 과도기적 성격이었다.
3 . 1운동 5 . 18광주민중항쟁 간도동포 북한 평양
그림, Daum Blog 인용
# 박정희 군사정권
한기 9163년(AD. 1966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주축이 되어 군사구테타가 일어났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이 분출되었던 <5월의 봄>은 이렇게 스러졌다. 군사혁명은 5월의 봄을 국정의 혼란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30년 동안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한기 9169년(AD. 1972년) 개정 . 공포된 유신헌법에 의해 유신체제가 등장하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종신)집권화였다. 10월 유신은, 경제적으로는 무분별한 외자 도입과 수출진흥정책이로 인한 시설 과잉과 외채 상환의 압박으로 금융공황적 자금난으로 이어졌다. 사회적으로는 경제발전이 대자본 위주의 저곡가 저임금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 서민층의 생존권문제가 분출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닉슨 독트린을 계기로 아시아에서 미국이 후퇴하고 7 . 4 남북공동성명 등 국제적 긴장 완화와 반공체제의 이완, 정치적으로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전개되어 정권의 안위가 흔들리자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하려는 헌정 중단을 통한 장기집권계획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으로 군사독재체제를 강력한 집권력으로 유지하면서 민족의 자유를 짓밟고 나라의 민주를 말살한 독재자로 규정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보릿고개를 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조국의 근대화를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한다. 과거의 경력으로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 탄압의 행적이 있고, 여순반란사건에서 공산당원으로써 반란의 주모자 역할을 했는데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은 배신자로 규정한다. 인간적인 평가와 군인으로써의 평가 그리고 대통령으로 평가들이 혼합되어 관점을 달리하면서 엇갈리고 있다. <성공한 구테타를 혁명으로 간주한다>는 법률적인 결론은 시대적 필연이라는 전제를 상정하고 판단한 결과론이다.
# 전두환의 군사반란
한기 9176년(AD. 1979년) 12 . 12사태는 군대 안의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하극상에 의한 구테타로 규정된 사건이다. 10 . 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경호실장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한 뒤 최규하 과도정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장악을 위해 지휘 계통을 개편하였다.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은 시해사건 수사의 미진함과 군 인사의 부당함을 들어 대립하였다.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세력은 이후 철권통치를 하였으며 국회를 해산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선거했다. 이후 노태우 장군이 정권을 물려받았고 군사독재는 이어졌으나 국민의 힘으로 6 . 29 선언을 획득하여 군사독재는 형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12 . 12 사태는 1993년 초까지는 집권세력에 의해 정당화되었으나 김영삼 정부에서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의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하여 명백한 군사반란으로 규정하였으며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군사반란과 비자금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 광주민주화운동
한기 9177년(AD. 1980년) 5 . 18 광주민중항쟁은 전두환 장군이 신군부세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12 . 12 반란이 빌미가 되어 일어났다. 광주와 전남인들은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장군의 정치 일선 퇴진 그리고 김대중 선생의 석방을 요구했다.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의 책동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한기 9185년(AD. 1988년) 제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였다. 신군부세력이 한기 9177년(AD.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자 학생들이 반발하여 데모가 일어났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자행하면서 시민항쟁으로 이어졌다. 시민항쟁은 시민자치와 민주주의 공동체구현를 실천하였다. 5월 27일 새벽 25,000명의 군대를 투입한 <화려한 휴가>의 무력 진압으로 정부 발표 사망 191명(광주에서는 행방불명자 등 2,000여 명의 사망을 주장하고 있음), 부상 852명의 비극적인 막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 변화했고 국민들의 대미 인식 변화와 민족 해방, 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이후 광주는 범 세계적으로 평화와 자유의 민족운동 성지로 인식되었으며 망월동묘역은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5 . 18을 통한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의 선도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김영삼의 문민정부(한기 9190년, AD. 1993년 - 한기 9195년, AD. 1998년)
한국 민주화 투쟁사의 한 축이었던 김대중 선생과 김영삼 선생의 정치적 역할에서 탄생하였는데 문민정부는 군사독재정권의 담합으로 태어났다.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군사정권과 김대중 민주정부의 과도기적 성격이며 민주정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역할을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IMF라는 경제공황을 초래하여 경제적 후진국으로 퇴보하는 파란을 겪었다.
#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한기 9195년, AD. 1998년 - 한기 9200년, AD. 2003년)
김영삼정부의 IMF 불황을 타개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득 20,000달러시대를 10,000달러시대로 퇴보시킨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으나 IMF의 지원을 받아 국가 파산 위기에서 회생시켰다. 사회이념의 이슈는 반공과 용공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성사했으나 김일성 주석의 급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이루었다. 남북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평화통일과 민주화운동의 실천자로써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 노무현의 참여정부(한기 9200년, AD. 2003년 - 현재)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탄생하였다. 이른바 인터넷선거의 승리라고 한다. 사회이념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다. 개혁과 수구의 상호역할의 대립이다. 요즘에는 중도보수라는 뉴라이트가 등장해서 사회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양극화 문제와 남북통일, 6자회담의 과제 그리고 해결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 대학입시를 비롯한 교육문제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다. 개혁투쟁에 헌신했던 이른바 386세대와 일제시대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보수층과 갈등은 용공과 반공으로 변질되었다가 이제는 보혁갈등으로 한국사회를 왜곡시키고 있다. 이것이 군사독재정권에서 만들어낸 지역감정과 연계되고 이념도 사상도 정책마저도 아닌 지역감정이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다. 보혁갈등, 386세대. 진보와 혁신의 도도한 물결이 한국사를 관류한 한국인의 명제일진데 영호남의 지역을 담보로 하는 동서분열의 지역분할정치, 기득권 수호의 보수세력의 발호로 진보와 개혁이 기반을 정착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 기저에는 영호남인들의 근본적인 의식구조가 깔려있다. 영호남의 정치적 사회적 인식의 차이가 크다. 한 예로 종교 신도조사(2006. 5월 지역 총인구 대비 신자 비율 조사)에서 호남(광주, 전남, 전북)은 개신교가 23%(천주교는 10%, 불교 14% 내외)고, 영남(대구, 부산, 경남, 경북)은 불교가 38%(개신교는 10%, 천주교는 7% 내외)였다. 3권 분립, 검 . 경의 독립적 위치 확보, 과거사 청산, 교육 개혁, 양극화 해소, 복지정책, 남북통일이 이러한 지역(정치)적 갈등상황에서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더구나 그래 북한이 6자회담을 거부하고 미국과 양자회담을 요구하다가 실현되지 않고 경제적 제재를 하자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여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 Epilogue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22/22화 : 선기옥형 - 마무리>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찾아서
(삽화 : 선기옥형의 복원)
맥족 이동로 고려 농은 선기옥형 태양새 3족오
갑골문자 천부경 * 그림, Daum Blog 인용
* 나오는 사람과 참고자료
운곡선생, 변 처사, 강 처사, 동화스님, 하연스님, 청담선사,
# 2006년 6월 초 예년에 없었던 황사가 들이닥쳤다. 예년에는 봄철에 몇 번씩 겪는 연례행사였는 데, 올해는 평년처럼 넘어갔으므로 안심하고 있던 때 - 어느 때 보다 더 극심한 황사가 몰아닥쳤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이 희뿌연 먼지에 휩싸였다.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시민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더구나 봄철 나들이가 절정이었던 일요일이어서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기상대에서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라서 당황했고 기상대책임자가 방송으로 <기상대 관측의 한계, 갑작스러운 일기 변화 그리고 최신 장비 도입과 중국과 긴밀한 협조>를 내세우며 사과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상이변에 대한 자연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환경의 변화를 환경학자들을 내세워 결론을 맺고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열악한 장비의 한계로 몰아 최신 장비 구입이 시급하다는 타령이 기상대의 한계다. 기상대의 결론을 수용한다 해도 정확한 예보를 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앉아서 당하는 것을 서서 당하는 수준일 뿐.
# 전남 장성 고봉학술원 애일당, 운곡선생과 선기옥형 복원팀, 운곡선생의 강의가 끝나고 연못 주변의 정원에서 초청 인사 한담. 다섯 명의 수행자들 동석
* 그림, Daum Blog 인용 행정도시계획도
운곡선생 : 느닷없는 황사가 들이닥쳐 피해가 많았다지요?
변 처사 : 기상대가 혼이 났습니다. 마침 봄나들이 마지막 일요일이라 나들이 길에 나섰던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강 처사 : 병원에도 환자들이 평소의 네 배가 몰려들었답니다.
동화스님 : 원인은 중국의 동북부 사막인데 기상상태에 따라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미국 서부까지 피해를 입는다고 합니다.
하연스님 : 정부에서나 환경단체들이 중국정부와 연대해서 나무를 심어 사막화를 막으려는 시도를 합니다만 효과가 있을지 ….
운곡선생 : 나무 몇 그루 심어서 사막화가 막아지겠습니까? 나무를 심어 사막화를 막는다는 발상은 어쩌면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지요. 먼저 사막화가 되어가는 원인을 찾고 거기서 해결을 강구해야 합니다. 마치 논두렁에서 터진 물꼬를 막는다면서 터진 구멍만 찾아 헤매는 꼴입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서 농부가 논에서 김을 매고 있었는데 이웃 선비가 자기네 논의 물꼬를 보러왔다가 논둑에 구멍이 나 물이 새는 걸 보고는 물꼬를 막더랍니다. 헌데 터진 곳을 쫓아다니면서 막는 거라 막으면 터지고 또 막으면 터지는 게 아니겠어요? 보다 못한 농부가 선비에게 물었답니다. 선비님, 책에서는 물꼬를 어떻게 막으라던가요? 선비가 서슴없이 대답했답니다. 그야, 물꼬는 근원을 막으랬지요 라고 말 입니다. 지금 중국과 우리나라가 사막화에 대처하는 일이 이와 같잖습니까?
청담선사 : 노력은 가상합니다만 인간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하늘의 힘을 빌어야 원천적으로 해결이 될 것입니다.
변 처사 : 사막화나 지진 그리고 해일들이 지구촌의 재앙인 셈인데 어떤 사람들은 지구촌의 종말을 말합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쓰여 있구요.
하연스님 : 지구 자체가 전체적으로 파괴되는 일은 없겠지만 부분적으로 크게 재앙이 닥칠 위험이 있습니다. 지질학자들이 말하는 판구조론에 의한 대륙판의 충돌지역이 전설적인 아틀란티스대륙처럼 갈아 앉거나 히말라야처럼 치솟을 가능성 말입니다. 지구에서 몇 개의 대륙이 파괴되는 참변이지요.
기상위성 천상분야열차도 여름철 일기도 천체도
(조선시대) * 그림, Daum Blog 인용
강 처사 : 가상이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지구는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이 됩니다. 판의 충돌의 여파로 해일이 일어나고 수증기와 가스로 뒤덮인 지구는 곧 햇빛과 햇볕이 차단 되어서 새로운 빙하기로 접어들어 지구 전체가 꽁꽁 얼어붙을 수도 있으니까요. 스티븐 호킹 박사가 행성 개척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사를 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운곡선생 :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지구가 크게 파괴되어 인류가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되거나 빙하기가 닥쳐 온통 얼어붙는다면 유일한 생존방법은 다른 행성으로 옮겨가는 거지요. 그런데 이 또한 선비의 물꼬와 유사한 발상입니다. 옮기는 일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문화문명이라고, 개발과 발전이라고 자행되는 발전과 변화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를 줄이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일, 세재를 쓰지 않고 물로만 씻어도 98%가 씻어지는데 구지 세재를 사용하는 것은 습관적 타성이고, 1회용을 줄이는 일, 벽돌 건축이나 거대한 시설을 억제하는 일들이 그것입니다.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생산하여 남기지 않고, 아끼고 줄여서 절약하고, 공동으로 사용하고 서로 나누고, 끝없는 경쟁을 중단하는 일들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유엔이나 국제기구들의 역할이 활성화되어야 할 시대입니다. 그 것이 한국의 당면과제인 황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류가 현명하다면 황사로부터 시작되는 지구 황폐화를 직시하고 지구가 살아갈 길을 깨우쳐야 합니다. 괜한 기상대만 욕을 먹었습니다. 과학기재 덩어리인 기상대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기상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상 위성에 의존해서 데이터를 뽑아 분석하는 일이 고작입니다. 해, 바람, 구름, 비 그것으로 지구의 천체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자연현상은 태양계의 운행질서인데 인간이 개발한 몇 가지 자료로 천체 변화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데이터가 부적절해서 결론이 왜곡되겠지요. 과학기계 관측으로 불가능한 기상변화가 많습니다. 수시로 변화하는 자연현상을 어떻게 기계가 측정해낼 수 있겠습니까? 마치 인간의 두뇌조직을 측정할 수는 있지만 그 복합적인 기능 즉 연관관계를 그려낼 수 없는 것처럼 한정된 관측이 기상 오보를 부르고 기상대는 장비 탓을 하게 됩니다. 장비 탓이 아니지요.
아라라트산 방주 오로라 페루 나스카 유적 UFO
흔적 * 그림, Daum Blog 인용
강 처사 : 고대에서는 제정일치로써 지도자가 제사장을 맡아 우주질서를 파악해서 치세에 활용했습니다.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면서 더욱 정밀하게 전문화되었습니다.
운곡선생 : 서양에서는 신탁에 의지하고 동양에서는 심안을 활용하였습니다. 현대 서양학문 은 눈에 보이는 실증적 탐구를 주조로 현미경으로 분석하는 미시적인 과학에 의존하는데 동양은 동양 자체의 주체적사상을 잃어버리고 서양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만년을 이어 내려오던 한사상의 맥이 오늘에서 끊겼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많은 선비들 이 심안으로 보고 깨우치려고 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선비정신을 계승하였기에 문무를 겸비하였고 젊은 시절 수련을 통하여 <국유현묘지도>를 깨우친 분입니다.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이 말한 한국의 사상입니다. 현묘지도는 조선시대 동학에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오늘날에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조선시대는 선비사상을 왜곡시켜 문예에 치우쳐서 반 쪽 선비를 양성했는데 장군은 정통적인 선비로써 앞날을 예견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는 한국이 국체의 정통성을 잃고 정치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변방정권이 되어버린 불행한 시대였습니다. 고조선으로부터 한국의 정통성으로 보면 조선시대는 중국의 변방정권입니다. 후금의 청 태종이 남한산성의 고려 인조 임 금에게 삼전도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형제다, 같이 힘을 모아 한족의 명 나라를 치자. 몽골족은 우리의 정통적 형제입니다. 한족은 방계지요.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습니다. 장군의 난중일기는 죽음을 각오하고 비통한 어조로 외친 하늘에 대한 상소문 같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생애와 비슷합니다. 백성들의 고난을 짊어진 구세주였지요. 장군이 전사한 명량대첩은 십자가였구요. 장군 이후 오랜 기간 명맥이 끊겼던 선비는 동학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그러나 동학은 제세구민이라는 명분 때문에 완벽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지도자들이 주도해서 크게 희생을 치루고 실패하였습니다.
한단고기 원본 배달역사 신단실기 3국유사 이지함의 토정비결
(독립군 교재) * 그림, Daum Blog 인용
변 처사 : 동학 이후에는 선비의 맥이 완전히 끊어졌습니까?
운곡선생 : (웃으며) 여러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돌아보며) 청담선사께 여쭤보시지요.
청담선사 : 몇몇 분들이 남아 있으나 모두 세상에 나서기를 꺼려합니다. 깊이 침잠하여 수신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연스님 : 토정 이지함 선생의 정도령 출현 같은 때입니까?
강 처사 : 수메르 점토판 해석에서 말하는 3,600년 주기의 태양계 12번째 행성이 지구에 접근하는 시기가 1,400년 뒤입니다. 서기 3,400년께지요. 한기로는 10,597년입니다.
변 처사 : 너무 요원한 이야기 아닙니까? 일이백년도 아니고 1,400년이라면 ….
하연스님 : 인생 팔십이 찰라라면 백년도 천년도 찰라지요. 억겁도 찰라 아닌가요. 천년 세월이 흐른 뒤에 우리가 다시 만나 여기에 모여 있을 수도 있지요.
동화스님 :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가 선기옥형을 만들어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 것 입니까?
운곡선생 : 소명의식입니다. 국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반 조각이나마 유지되었던 선비정신 과 부덕이 사라지고 홍익인간이라거나 제세이화의 신념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블록화니 또 패권이니 하면서 일체화를 추구하는데 일체화는 패망의 길입니다. 다양화가 나아갈 길입니다. 세계는 다시 혼란에 들어섰습니다. 연대화의 모색이 그것입니다. 아시다싶이 블록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패권주의가 발단이지요. EU나 동남아국가연합이 한 예입니다. 그리고 세계평화 공존의 시대에 선민의식은 터부입니다만 소생은 한국인을 천부적으로 재질을 타고난 민족으로 상기시키려고 합니다. 흔히 유태인이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선도한다고 합니다. 노벨상의 40%를 유태인이 차지합니다. 그들에게도 선민의식이 있지요. 대단한 민족입니다. 2,000년을 유랑하면서도 민족정체성을 잃지 않고 나라를 다시 세운 민족입니다. 유태인은 인위적인 교육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물고기를 잡아주지 않고 잡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탈무드입니다. 그에 비해 한국인은 자질을 타고났습니다. 고조선시대로부터 이어온 민족 적 자질일 것입니다. 단지 그 자질을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지도자를 얻지 못했습니다. 타고난 천부적인 자질을 개발하고 계발할 지도자를 얻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고려인삼은 세계가 알아주는 영약입니다. 중국, 미국, 만주에도 인삼이 있습니다. 한 때 징코민이라는 약을 개발하려고 도이치에서 한국의 은행나무잎을 채취해간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은행나무의 원산지고 한국 보다 더 많은 은행나무가 있고 인건비가 절반도 되지 않은데 구지 한국산을 찾은 이유가 있습니다. 또 십여 년 전에 한국의 공중화장실에서 한국인의 오줌을 받아갔습니다. 미국의 인슐린 개발회 사입니다. 중국이 한국 배를 개발하려고 한국산 삽목을 가져다가 한국과 기후대가 같은 지역에서 가꾸었습니다. 엄청난 물량을 가꾸었는데 실패했습니다. 한국과 똑같은 자연상태에서 길렀는데도 품질이 한국산의 품질과 비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김치의 세계화를 독점하려고 기무치를 개발해서 세계시장에 내놓았으나 실패했습니다. 채소의 품질이 한국산의 감칠맛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도 한국산 채소 씨앗을 한국과 같은 기후대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인도의 타고르가 일찍이 한국을 동방의 빛이라고 한 일은 타고르가 고대역사를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토양 즉 자연생태계에서 자라는 산물이 우수하듯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우수하리란 것은 인류학적인 믿음입니다. 신토불이지요. 한국인은 조선시대 초에 거북선을 건조했고 한글을 창제했으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인쇄한 나라입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또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이미 고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일에 불과합니다. 고조선시대 문화문명의 복원이었습니다. 수메르의 신들이 7일 만에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구약성경의 여호와도 7일 만에 인간을 창조합니다. 수메르의 신들이 태양계 12번째 행성인 마르둑을 오르내리며 지구를 다스렸는데 고조선시대 한인천왕과 한웅천왕 그리고 부여의 해모수도 아침에는 하늘에서 내려와 백성을 돌보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신약성경의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수메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훈족, 터어키인, 중국의 묘족 그리고 인도지역의 한 종족도 한국인과 유사합니다. 남아메리카에도 한국인과 유사한 종족이 남아있습니다. 아프리카에도 있고요. 2002년 세계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터어키와 우리가 경기를 하고난 다음 어떤 광경이 벌어진 줄 아십니까? 터어키 선수들이 우리 선수들의 어깨를 얼싸안고 우리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좀 어리둥절했겠지요. 그리고 6 . 25 남북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여하여 맺은 혈맹이란 말이거니 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이 형제라고 한 것은 그들의 역사에서 배운 동족이란 뜻입니다. 중국 서부와 만주에는 이집트의 피라밑 같은 거대한 무덤들이 있는데 중국은 이를 발굴하다가 중단했습니다. 공개도 하지 않습니다. 발굴하다 보니 한족의 유물이 아니라 고조선의 유적이었습니다. 수메르인들도 지구라트라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만주의 장군총 같은 모양입니다. 대강 대강 말씀드리느라 체계가 없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은 한국사를 복원하고 옛 조상들의 가치관을 되새기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인류 멸망으로 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천기의 누설은 금기입니다. 선비로써 천기를 누설하고 요절한 이들이 많습니다. 고려의 한림랑 최응은 왕건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백제의 계백 장군은 나라를 구하는 명분 앞에 가족을 칼로 베고 자신도 장렬하게 산화하였습니다. 고구려에는 온달 장군이 있고, 신라의 관창과 반굴도 같은 맥락이고, 조선의 정도전, 남이 장군, 토정비결의 토정 이지함, 김덕령 장군, 홍의장군 곽재우,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녹두장군 전봉준이 모두 천기 누설로 자기를 희생한 분들입니다. 반면에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은 천명을 다 했습니다. 명분이 있다고 해도 천기의 누설은 삼가야 합니다. 오직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경지에 들어서야 합니다. 우주의 섭리는 하늘의 이치고 신의 몫입니다. 우리는 자연현상을 관찰해서 풍우를 다스리고 인간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일에 선기옥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역할에 충실하고 신의 영역은 섭리와 주재를 맡은 신이 하도록 우리는 준비하며 기다립시다. <교학대한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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