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2/22화 : 2. 열국시대(6/6) - 신라>
천년왕국 신라
(삽화 - 신라 천년의 문화)
전성기강역도 동서통일강역과 왜 정벌도(붉은색)
나당전쟁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나오는 사람과 참고자료
* 신라는 성읍국가로써 경주평야에 자리잡은 진한 12개국의 작은 나라들 가운데 제일 작은 한 부족국가였다. 그러나 차차 주변 국가를 정복하여 한기 7600년 경(AD. 5세기)에는 국가 형태를 갖추었고 한기 7850년 경(AD. 7세기 중반)에는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서쪽의 접경 백제와 북쪽의 접경 고구려가 강대하여 국가의 안위가 늘 불안하였다. 신라는 이를 선린근교善隣近郊의 외교정책으로 지탱하다가 백제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당 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함으로써 동서통일東西統一을 하였다. 통일 뒤 당 나라가 한국 경영의 야심으로 설치한 백제의 웅진도독부, 고구려의 안동도호부, 신라의 계림도독부를 쫓아내 당 나라 세력마저 제거함으로써 자주적인 한국 통일의 명분을 세웠다. 동서통일의 바탕에는 가야세력의 김유신이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김춘추의 외교가 남달랐던 데 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몰래 들어가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견제해줄 것을 요청하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당 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私事로움을 잊고 3국은 백성을 모아 당 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전승 뒤에 인의仁義로 다스리자>며 당 나라를 정복할 것을 제안한다. 그 때 중국은 고구려 정복에 실패한 수 양제가 실각하여 그 후유증으로 수 나라가 망하고 당 나라가 일어서는 혼란기였으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힘을 합하면 중원을 경영할 수 있다는 이상을 말한 것이다. 이미 백제는 상대등 성충이 동의하였으므로 신라가 합세한다면 중원정복의 이상이 실현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 일의 불가함을 내세워 동조하지 않았으므로 연개소문에게 2년간 잡혀있었다. 김춘추는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고, 고구려가 요청한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거짓말(토끼와 자라의 용궁 우화 인용)과 김춘추를 구하려는 김유신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략하자 김춘추를 놓아주었다. 고구려에서 풀려나오자말자 김춘추는 왜로 건너가 연합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하자 다시 당 나라로 몰래 들어가 정벌 뒤 백제 땅만을 신라에 넘겨준다는 당 태종의 약속을 받고, 스스로 아들 왕문을 인질로 맡기고서 당 나라와 연합을 이뤄낸다. 동서통일 뒤 당 나라가 한국을 통째로 삼킬려는 의도를 없앴지만 이는 대동강 이남의 2국통일 또는 백제 합병의 동서통일로써 고조선과 고구려의 광활한 강역 1/100도 못되는 축소통일이었다. 이후 한민족은 동북아의 넓은 대륙을 잃고 웅지를 펴지 못하였으니 신라의 동서통일은 한국역사에서 대륙한국을 잃어버린 가장 애석한 일이었음
* 신라시대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는 사서史書의 기록에 책의 이름만 있을 뿐 사라져버렸는데 1989년 남당 박창화가 필사筆寫한 발췌본拔萃本이 등장하여 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진위眞僞논쟁이 치열하였다. 박창화는 필경사로 일본 궁내성도서관에 근무하였는데 이 때 도서관에 비치된 화랑세기를 몰래 필사한 것으로, 약간의 문제점은 있으나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다.
일제가 강점기 초에 한국사를 말살하기 위하여 한국사를 비롯한 고서적과 고문서를 낱낱이 수거하여 폐기하거나 소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38년 6월에 발행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를 보면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에 서적 4,950종을 수거하였고, 1910년 11월부터 12월 2개월에만 고서적과 고문서 51종 20만여 권을 수거하였다고 기록했다. 또 일본 사학자며 평론가였던 하라타 사카에루(原田 榮)는 저서 <역사와 현대, 1981년 발행>에서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顧問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가 대마도에 조선사료 탐사를 갔는데(대마도에 조선사료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조선고문서류 66,469매와 고기록류 3,576책 그리고 고지도 34매를 은폐하거나 분서(불태움)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의 고서 수거에는 역사서에서부터 복식사服飾史나 음식사飮食史는 물론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까지 한국에 대한 기록이면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어 일제가 얼마나 치밀하게 의도적으로 한국기록을 말살하였는지 그 역사 훼손이 가증스럽다. 그러나 남당 박창화의 증언처럼 일제는 한국고서적이나 문서를 모두 폐기하지는 않았다. 극비의 금기구역인 일본 궁내성도서관에는 수만 권의 한국서적이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화랑세기는 한국고대사인 3국사기 보다 460여 년 앞선 기록임
* <교학한국사>를 <교학대한사>로 바꾼 배경은 Daum Blog의 ID Ram2Dam의 <한국이라는 국호를 철폐하라>에 따른 것이다. 요약하면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나라 이름에 혼란이 있었다. 일제는 <한국>이라고 했고, 정부에서는
<대한>이라고 했으며, 국민들은 <조선>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894년 체결된 <잠정조약>에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의 내정개혁을 희망하고 .....>라고 하여 우리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이전에 이미 <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우리가 흔히 준말로 알고 있는 <한국>을 <대한> 보다 먼저 사용하여 앞뒤가 거꾸로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명칭은 일제가 대한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1893년 임나고任那考를 편찬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일제는 우리가 선포한 <대한제국>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1894년 조약부터 1910년 합병조약까지 <한국>이라는 명칭을 조작하여 사용하였고, 외국과 일본의 조약에서도 이를 사용하였다.
대한신민회의 취지문, 충정공 민영환의 유서, 의병장 채응원의 창의문, 안중근 의사의 거사기도 모두 <대한>이라고 호칭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합병한 일제는 <대한>이라는 국호를 없애기 위하여 <황성>도 같이 없앴다. 1904년 창간한 영국인 배설의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을 떼어버렸고 <황성신문>의 제호도 바꿨다.
1974년 국어국문학회에서 편찬한 국어사전에 <한국>이라는 낱말이 없었는데 1989년 개정된 한글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을 적용한 국어사전에는 <대한>을 <대한제국>의 준말, <한국>을 <대한민국>의 준말로 규정했다.
<대한>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집與猶堂集과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다.
* 마의태자는 경순왕 김부(견훤이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왕으로 세움)의 왕자 김일이다. 강원도 인제의 김부리 혹은 김부대왕리는 경순왕이나 마의태자와 연관이 있는 마을이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이 고려 왕건의 위세에 눌려 천년왕국 신라를 스스로 들어 바치려고 하자 피를 토하며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자의 자리를 벗어던져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오빠를 좋아했던 동생 덕주공주가 따라왔다. 마의태자는 세상을 버리려고 하였으므로 공주를 말렸으나 공주는 뜻을 굽히지 않아 두 남매는 거친 삼베(마의)로 옷을 해 입고 열매와 풀뿌리를 캐어 먹었으며 바위 틈과 짐승굴에서 잠을 자는 감추어진 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덕주사는 덕주공주가 세웠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후기 역사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후손이 여진으로 들어가 금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금 나라가 신라의 후예라는 기록은 정설이다. 송 나라 사람이 금 나라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기록한 <송막기문松漠紀聞>에 금 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이라고 적었다. 청淸 황실의 역사서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신라 왕의 성씨를 따라 나라 이름을 금이라고 한다>고 했다. 금 나라 역사서인 <금사金史>에는 왕의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했는데 풀이하면 <신라를 사랑하고 늘 마음에 새겨라>는 뜻이다. 또 <시조는 함보(법명, 이름은 김행 또는 김준)인데 60세가 넘어서 망명하였다. 형 아고보홀은 고려에 남았다>고 했다. 김준은 의자왕 김부의 손자고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다. 조선 숙종대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3형제인데 혼자 여진으로 망명하여 금 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함
*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발표가 활발하다. 중국은 고구려와 대진국 (발해)를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조작하여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한다. 또한 제주도 남쪽 한국의 관측시설이 설치된 이어도 (제주도 어부들이 죽으면 간다는 이상향으로 이어도 사나라는 민속노래가 전함)를 분쟁지역화 하려고 하고, 일본은 독도를 다께시마 라며 일본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미나 발표의 요지要旨는, 이러한 상황에서 <금金, 청淸 나라를 한국사에 편입해야 한다 (2006. 9. 14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고구려연구회 세미나)>, <중국의 동북공정 연구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에서 <한漢 . 당唐 나라 이후 중국 한족은 만주를 완전히 지배한 적이 없다>며 이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대진국 등 한민족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중국의 지방정권 역사로 편입하려는 악의적인 시도에 대응하는 한국고대사 바로 세우기 문제 제기다. <한국역사교과서는 중화中華사상에 물든 사대주의사관으로 만주지역에서 성립된 요遼, 금金, 원元, 청淸 나라를 모두 중국역사로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 당 이후 중국 본토(중원中原)에 들어선 송宋 나라와 명明 나라가 북방민족인 금과 청에 각각 정복당했고 당 나라 멸망 이후 1949년 공산중국이 건국될 때까지 1,000여년 간 한족이 만주지역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 이런 사관에 따라 중국과 역사 갈등을 겪은 몽골은 흉노 - 선비 - 유연 - 돌궐 - 위구르에 이어 요와 원을 자국역사로 편입했다. 금 나라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마의태자의 자손이며, 청 나라는 병자호란 때 청 태조가 형제국이라고 국가의 뿌리를 인정한 바 있다. 금 나라와 청 나라는 한민족역사다. 중국의 역사 왜곡을 정치적 차원으로 본다면 중앙정부는 35개 국가가 부침을 했는데 지방정권이 700년의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역설이 성립되고, 중국이 확보한 현재의 시점에서 영토문제, 속지국가주의라면 고대국가는 영토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대에서는 영웅천하였으므로 뛰어난 지도자가 떨쳐일어나 무리를 규합하여 국가를 건설하고 영토를 넓혀 국가를 이루었다가 패망하기를 반복하였다. 중국도 고구려 700여년 동안에 35개 국가가 평균 15년의 부침을 하였지 않은가? 현대의 국경 같이 인공위성으로 측도하여 선을 긋는 명확한 영토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시대의 영토개념을 고대에 적용하려는 의도는 넌센스가 아닌가?
* 사로斯盧(신라가 국가형태를 갖추기 전의 성읍시대 이름)의 시왕始王(시조)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왕실)夫餘帝室의 딸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뱄으므로 눈수嫩水(만주 흑룡강)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거기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奈乙村에 닿았다. 여기에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사람이 있어 소식을 듣고 집에 데려다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여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居世干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동만주 길림성 부근 추정)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이라고도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중략)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예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는 3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가 또 갈려서 3가라加羅가 되었다. 소위 가라란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중략) 영락(고구려 광개토대왕 연호)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광개토대왕)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함 (임승국의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 무영탑無影塔은 석가탑의 별명인데 불국사를 완성한 김대성은 절 안에 두 개의 탑을 짓고자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석수장이를 초빙한다. 아사달이다. 아사달이 신라로 초빙되어 다보탑을 짓고 석가탑을 쌓는 동안 오랫동안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 아사녀가 신라로 아사달을 찾아온다. 그러나 탑을 짓는데 여자를 만나는 것은 금기라며 만나지 못하게 하면서, 구지 보고싶으면 달이 밝은 날 밤 불국사 앞 영지影池에 탑과 탑을 짓는 아사달의 그림자가 뜨므로 그림자로나마 남편을 보라고 귀띰을 해준다. 아사녀는 영지에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으나 웬일인지 다보탑만 보일 뿐 석가탑은 보이지 않아, 달이 밝은 밤마다 영지를 헤매던 그녀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영지에 빠져 죽고만다. 탑을 완성하고 나와 뒤늦게 아사녀가 죽은 일을 안 아사달도 영지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
* 처용랑과 망해사
49대 헌강왕이 개운포(울주)에 놀러갔다가 돌아는 길에 바닷가에서 잠시 쉬는데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덮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점성관은 용왕이 변괴를 일으켰으니 좋은 일을 하면 풀어지리라고 했다. 왕이 이 자리에 절을 지어라고 명령하자 곧 날씨가 맑아지며 용왕이 아들 일곱명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왕이 돌아가려고 하자 용왕의 아들 처용이 따라나섰으므로 데리고 와서 예쁜 여인을 가려 아내로 삼아 혼인시켰다. 처용은 밤 마다 서라벌 거리에서 춤을 추었는데 청춘남녀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어느 날 처용이 춤을 추고 놀다가 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처용의 아내를 탐낸 역신疫神이 처용의 아내와 함께 있었다. 이를 본 처용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서블 발기다래 밤들이노니다가 (서울 달 밝은 밤에 밤 새워 놀다가)
들어사 자리보곤 가라리 네히어라 (돌아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라)
둘은 내해엇고 둘은 뉘해언고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해다마른 아사날 엇디흐릿고 (본래 내 것이었다마는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노래를 들은 역신이 감동하여 절하고 이후 처용의 모습을 그려붙인 집에는 역신이 침범하지 않으리라 약속하였다. 대문이나 외벽에 처용의 형상을 그려붙이는 풍습이 생겼음
경주 석탈해왕릉 석탈해왕 인도 허황옥왕비릉 허황옥왕비
Colla왕국 추적도 인도 물고기상 파사석탑
*그림, Daum Blog 인용
• 신라 역사연대표
* 3국사기(고려 김부식) : 상대上代(1대 박혁거세 - 28대 진덕여왕),
중대中代(29대 무열왕 - 36대 혜공왕), 하대下代(37대 선덕여왕 - 56대 경순왕)
* 3국유사(고려 스님 일연) : 상고기上古期(1대 박혁거세 - 22대 지증왕),
중고기中古期(23대 법흥왕 - 38대 진덕여왕), 하대下代(39대 소성왕 - 56대 경순왕)
1대 박혁거세 한기 7140년(BC. 57년) - 56대 경순왕 한기 8132년(AD. 935년),
56대 992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박혁거세 |
BC.57-AD.4 |
13세 등극 국호 서라벌, 수도 금성 |
2대 |
남해차차웅 |
AD. 4 - 24 |
석탈해 사위 정사 위임, 병선 왜구 격퇴 |
3대 |
유리이사금 |
24 - 57 |
6부명 개정, 성씨 내림, 도솔가 창작 |
4대 |
탈해이사금 |
57 - 80 |
국호 계림 개정, 김알지 탄생 |
5대 |
파사이사금 |
80 - 112 |
월성 구축 백성 이주, 주변 병합 국위 선양 |
6대 |
지마이사금 |
112 - 134 |
백제 연합 말갈 격퇴 |
7대 |
일성이사금 |
134 - 154 |
농본정책 경지 개간, 백성 사치 금함 |
8대 |
아달라이사금 |
154 - 184 |
현 설치, 도로 개통 내치 힘씀 |
9대 |
벌휴이사금 |
184 - 196 |
탈해왕의 손자 |
10대 |
나해이사금 |
196 - 230 |
벌휴왕의 손자 |
11대 |
조분이사금 |
230 - 247 |
벌휴왕의 손자 |
12대 |
첨해이사금 |
247 - 261 |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 동생, 고구려 국교 |
13대 |
미추이사금 |
261 - 284 |
김씨 왕가의 시조 |
14대 |
유례이사금 |
284 - 298 |
조분왕 큰아들, 백제와 수교 |
15대 |
기림이사금 |
298 - 310 |
조분왕 둘째 아들, 국호 신라 개정 |
16대 |
흘해이사금 |
310 - 356 |
기림왕 후사 없어 군신 추대 등극 |
17대 |
내물마립간 |
356 - 402 |
중국 문물 수입 |
18대 |
실성마립간 |
402 - 417 |
백성 추대 등극, 내물왕 태자에게 피살 |
19대 |
눌지미립간 |
417 - 458 |
牛車法 제정, 고구려 묵호자 불교 전파 |
20대 |
자비마립간 |
458 - 479 |
고구려 백제 공격 나제동맹 맺음 |
21대 |
소지마립간 |
479 - 500 |
김씨 |
22대 |
지증 |
500 - 514 |
왕 칭호 사용, 이사부 우산국 점령 |
23대 |
법흥 |
514 - 540 |
율령 반포, 연호 건원, 이차돈 순교 |
24대 |
진흥 |
540 - 576 |
순수비, 이차돈 순교, 대가야 멸망 |
25대 |
진지 |
576 - 579 |
이름 사륜 |
26대 |
진평 |
579 - 632 |
이름 백정 |
27대 |
선덕여왕 |
632 - 647 |
진평왕 맏딸, 이름 덕만, 첨성대 건립 |
28대 |
진덕여왕 |
647 - 654 |
이름 승만 |
29대 |
무열 |
654 - 661 |
김춘추, 나당연합 외교, 백제 멸망 |
30대 |
문무 |
661 - 681 |
고구려 멸망, 동해 대왕암 수장 유언 |
31대 |
신문 |
681 - 691 |
만파식적 제작 |
32대 |
효소 |
691 - 702 |
설총의 이두 정리 |
33대 |
성덕 |
702 - 737 |
혜초 왕5천축국전 저술 |
34대 |
효성 |
737 - 742 |
이름 승경, 성덕왕 둘째 아들 |
35대 |
경덕 |
742 - 765 |
김대성 불국사 창건 |
36대 |
혜공 |
765 - 780 |
여자 행세, 대공・김지정 난, 신종 주조 |
37대 |
선덕 |
780 - 785 |
혜공왕 죽임, 이름 양상, 내물왕 10세 손 |
38대 |
원성 |
785 - 798 |
홍수로 먼저 도착 즉위, 독서출신과 설치 |
39대 |
소성 |
798 - 800 |
2년 만에 병사 왕위 쟁탈전 벌어짐 |
40대 |
애장 |
800 - 809 |
숙부 김언승 왕위 찬탈 시해, 해인사 창건 |
41대 |
헌덕 |
809 - 826 |
친당정책, 패강 300리 장성 축조 |
42대 |
흥덕 |
826 - 836 |
완도 청해진 설치 장보고 관리 |
43대 |
희강 |
836 - 838 |
3촌 균정 척살 왕위 계승, 김명 난 자살 |
44대 |
민애 |
838 - 839 |
희강왕 추대 상대등, 왕 자살 뒤 등극 |
45대 |
신무 |
839 |
민애왕 죽이고 왕위 등극, 이홍의 저주 死 |
46대 |
문성 |
839 - 857 |
신무왕 태자, 장보고 반란, 염장에게 피살 |
47대 |
헌안 |
857 - 861 |
후사 없어 왕족 응렴 사위 삼아 왕위 계승 |
48대 |
경문 |
861 - 875 |
이름 응렴 |
49대 |
헌강 |
875 - 886 |
처용무 유행, 사치 환락 |
50대 |
정강 |
886 - 887 |
경문왕의 둘째 아들, 진성여왕 오빠, 병사 |
51대 |
진성여왕 |
887 - 897 |
이름은 만, 淫行, 兵制 퇴폐, 나라 혼란 |
52대 |
효공 |
897 - 912 |
궁예와 견훤에게 영토 빼앗김, 정사 혼란 |
53대 |
신덕 |
913 - 917 |
후사 없어 백성 추대 등극 |
54대 |
경명 |
917 - 924 |
신덕왕의 태자, 후당에 구원 요청 실패 |
55대 |
경애 |
924 - 927 |
후백제 침공, 포석정 天祭 중 자살 |
56대 |
경순 |
927 - 935 |
견훤 추대, 왕건에 항복, 경주 事審官 餘生 |
나정 남당 박창화 일본 궁내성도서관 계림
박혁거세 탄생설화 화랑세기필사본 김알지 탄생설화
(2006년 8월, 건축물 구조대로 판명됨) * 그림, Daum Blog 인용
# 신라왕국, 1000년의 역사
• 성읍국가 연맹시대
한기 7140년 - 7711년(1대 박혁거세 BC. 57년 - 22대 지증왕 AD. 514년), 571년 간
* <신라>라는 국호는 6세기 초 지증왕 때 지정되었는데 그 전에는 사로, 사라, 서나, 서라, 서벌로 불리었다. 이는 <새로운 나라>, <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고대사회에서 성역으로 섬겼던 <수풀>의 뜻이 있다. 신라는 고대국가들처럼 성읍국가(부족국가)로 시작되었다. 성읍국가로써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를 잡은 급량, 사량, 본피, 한지, 습비, 사로 등 6개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경주는 신라 1000년의 도읍지다. 한 고을이 천년을 이어 도읍지로 역사를 이어온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경주는 본래 <새 벌>, <서나벌>, <서라벌>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서울>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가 한기 7140년(BC. 57년)에 경주평야에 세운 나라로써 건국 당시에는 6개 부족을 바탕으로 형성된 진한 12개국 중 하나로 가장 작은 나라였다. (박)혁거세는 급량 출신으로 거서간이 되었는데 사량 출신의 (김)알영과 혼인하였다. 이는 6부족에서 가장 강대한 두 부족이 연합함을 뜻한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인도 Cholla 왕국 도래설과 수로왕비 허황옥의 아유타국 도래설)으로부터 진출한 새로운 세력 (석)탈해부족에게 복속된다. 탈해부족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혁거세부족을 제압했는데 탈해가 죽자 해체된다. 이후 신라는 부족연합 또는 군사정벌로 성읍국가를 통합하여 연맹국가가 되었으나 성읍국가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으므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신라가 비록 종주국 역할을 하였다고는 하나 영향력이 없어 성읍국가들은 신라 수도 금성으로 쳐들어오는가 하면 토착세력들 가운데는 중국의 군현과 내통하는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한기 7500년 경(AD. 4세기 초) 고구려가 중국 동남부의 군현을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와 백제 양 대 세력이 한국 중부지역에서 대립하자 한기 7550년 경(AD. 4세기 중엽) 낙동강 유역의 성읍국가들이 신라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대 연맹국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를 고증하는 것이 지도자의 호칭이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은 권력 통합의 의미가 아니었는데 내물마립간(AD. 356년 - 402년) 때부터 쓰기 시작한 마립간(으뜸가는 지배자)은 권력자로써 권위를 부여한 명칭이다. 이 시대부터 왕권이 확립되고 왕위를 대대로 물려받는다.
* 3대 유리이사금 때 불리운 <도솔가>는 가악(음악)의 시초며, 경주 일대 6부를 정리하고 성씨를 하사하였고 17관등제를 정비했다. 5대 파사이사금 때는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군비를 강화하여 서쪽 백제를 견제하고 남쪽의 가야에 대비하여 마루성을 쌓았고 서울에는 궁성인 월성을 새로 지었다. 16대 홀해이사금 때는 벽골지(김제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의 혁신을 이루었다. 19대 눌지마립간은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견제하기도 했다.
경주 첨성대 북한산 토함산석굴암 석가탑(무영탑)
진흥왕순수비 * 그림, Daum Blog 인용
• 신라왕국시대
한기 7711년 - 7977년(23대 법흥왕AD. 514년 - 36대 혜공왕 AD. 780년), 266년 간
* 김씨 왕가의 세습으로 한기 7650년 경(5세기 중반) 이후에는 왕위 부자 상속제도가 확립된다. 내물마립간 때 한기 7574년(AD. 377년)과 한기 7579년(AD. 382년) 두 차례 고구려의 협조를 얻어 중국 북조의 전진에 사신을 보냈는데 한기 7579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는 전진의 국왕 부견이 <경이 말한 해동의 사정이 전과 같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고 묻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나라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이 지금 해동은 달라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신라왕국의 3건국을 말한 것이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원조를 받았는데 광개토대왕비문에 한기 7537년(AD. 340년)에 50,000명의 고구려 기병과 보병이 신라 국경지대에 출병하여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와 위의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멀리 낙동강 중부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를 빌미로 신라 조정의 왕위 계승을 간섭하는 등 신라의 자주력을 침해하였다. 고구려가 한기 7624년(AD. 427년)에 도읍을 통구에서 평양으로 남하하자 신라는 위협을 느껴 한기 7630년(AD. 433년)에 적대적 관계였던 백제와 혼인동맹을 맺어 대처한다. 한기 7672년(AD.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무력으로 점령하자 신라와 백제는 다시 혼인동맹으로 유대를 강화했으며 많은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했다.
* 한편 이 시기에 신라는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기 위하여 개혁적인 통치를 단행하였다. 왕족과 귀족의 혈연에 의한 6부를 개선하기 위해 한기 7666년(AD. 469년)에 경주지역 구분을 새로이 하였으며, 한기 7684년(AD. 487년)에는 우편소 설치하고, 한기 7687년(AD. 490년) 도읍지에 시장을 개설하여 물류유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경제활동을 조장했다. 한기 7600년 경(AD. 5세기)에는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적 정치형태를 구축하였다. 이는 황남대총 등 국력을 기우린 사업을 펼친 것으로 증명된다. 지증왕(AD. 500 - 514년)은 김씨 왕실의 종묘인 신궁을 신축했으며, 이로써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통치체제가 완성기에 접어들었다. 정치안정을 위하여 귀족세력과 타협을 도모한 것이다. 이후 법흥왕의 개혁적통치로 왕권은 안정되었고 농사를 장려하고 우경제(농사에 소를 이용)를 시행하여 농업발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또 중국의 정치제도를 수입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지도자 성격의 마립간 대신 강력한 통치를 상징하는 중국 왕호인 왕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한기 7702년(AD. 505년)에는 지방행정제도를 주군제도로 확립하였으며, 한기 7699년(AD. 502년)과 한기 7705년(AD. 508년)에는 중국 북조의 북위와 외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기 7579년(AD. 382년) 이래 120년 동안 단절되었던 외교의 복원이었다.
* 법흥왕(AD. 514년 - 540년)은 한기 7717년(AD.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공복을 17관등으로 정비하였으며, 골품제도의 중요규정을 개정하여 진골 귀족회의에서 상대등 선출을 제도화하였다. 국가체제를 법제화, 조직화한 것이다. 아울러 불교를 공인하여 사회적 기반을 확립함으로써 통일을 위한 사상적 발판 구축하였다. 한기 7733년(AD. 536년)에는 <건원>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과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위치를 확보함으로써 자신감을 들어냈다. 진흥왕(AD. 540년 - 576년)에는 국가체제를 재정비함으로써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미 법흥왕 때 합병한 김해의 금관가야를 비롯하여 함안의 아라가야, 창령의 비화가야, 합천의 다라가야를 병합하였다. 한기 7759년(AD. 562년)에는 이사부 장군이 고령의 대가야를 쳐서 정복하였는데 이 때 화랑 사다함의 공적이 컸다. 이로써 신라는 낙동강유역을 통합하였고, 이어 진흥왕의 한강유역 정복, 진흥왕(AD. 550년)의 백제의 도살성(천안, 증평 추정) 함락, 고구려의 금현성(전의 추정) 정복 등 차례로 접경 주변을 복속시켰다. 이듬해에는 연호를 <개국>으로 개정하였으며, 백제의 성왕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한강유역 침략하였으나 신라는 오히려 한강의 상류인 죽령 이북의 고현(철령)과 죽령 이남의 10군을 점령하고, 2년 뒤 한기 7750년(AD.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한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한강유역을 확보했다. 한기 7751년(AD. 554년)에 동맹 위반으로 분격한 백제 성왕이 군사를 몰아 쳐들어왔으나 이를 관산성(옥천)에서 맞아 오히려 성왕이 전사하고 백제의 30,000 대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강유역은 평야지대로써 물산이 풍부하고, 중국과 해양교통로로써 이후 통일외교정책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후 신라는 점점 강대해져 함흥평야까지 점령하였고, 진흥왕은 창령과 북한산의 황초령과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우고 단양에는 적성비를 세웠다. 한기 7757년대(AD. 560년) 신라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 그러나 이후 한기 7757년(AD. 560년)과 한기 7857년(AD. 660년) 100년 동안에 국토 회복을 노리는 백제, 고구려와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났다. 진평왕(AD. 579년 - 632년) 후반기부터 두 나라의 침략이 본격화되었으며, 선덕여왕(AD. 632년 - 647년) 때는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워졌다. 한기 7739년(AD. 642년)에는 당항성(남양)이 함락 직전의 위기를 겪었고, 낙동강 방면의 제 1선 기지인 대야성(협천)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신라는 서부 국경선인 합천에서 낙동강 동쪽의 경산지방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후 신라는 당 나라와 외교강화를 도모하였으나 당 나라는 여왕의 나라라고 업신여김으로써 신라의 내분을 조장하였고 이는 끊이지 않은 반란으로 점화되었다. 그러나 명신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이 있어 이를 수습하여 평정하였고, 김춘추는 선덕여왕이 퇴위하자 진덕여왕(AD. 647년 - 654년)을 옹립함으로써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김춘추는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하여 신라 수호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통일전쟁의 대전환을 모색하였다. 결국 태종무열왕은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등극한 문무왕(AD. 661년 - 681년)이 고구려를 정복함으로써 신라는 통일의 숙원을 달성한다. 이어 옛 고구려 땅과 백제를 경영하려고 도호부를 설치한 당 나라를 쫓아내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통일의 의지를 확립한다.
천마총금관 분황사탑 남산마애불 울주 천전리각석
* 그림, Daum Blog 인용 (고조선의 참글이나 대진국의 문자 추정)
• 내란시대, 분열과 자멸
한기 7977년 - 8132년(37대 선덕왕 AD. 780년 - 56대 경순왕 AD. 935년), 155년 간
* 전제왕권은 강력한 국가체제로 신라의 강역을 넓히고 외교를 전개하는데는 유리했으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갈등을 수반했다. 황금기였던 경덕왕(AD. 742년 - 765년) 때는 폐지된 진골귀족들의 녹읍이 한기 7954년(AD. 757년)에 부활되었다. 또한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하기 위하여 관청과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하는 한화정책을 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 즉위한 혜공왕(AD. 765년 - 780년) 때는 친왕파와 반왕파의 여섯 차례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런 연유로 경덕왕 말년부터 제작한 성덕대왕 신종은 한기 7968년(AD. 771년) 말에야 완성되었다. 특히 한기 7965년(AD. 768년)에 일어난 귀족 <대공의 반란>은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반왕파들이 득세하여 왕권을 쥐기도 했다. 끊임없는 내분에 휩싸인 신라는 지방호족들 간의 정권쟁탈이 날로 심해졌다. 9세기 초 애장왕(AD. 800년 - 809년) 때는 숙부가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율령을 개정하고 5묘제도를 확립하는 등 왕권강화에 힘을 썼다. 그러나 소외된 귀족들의 반란이 그칠 새 없었고 이 틈을 타 지방호족들은 세력을 확장했다. 청해진을 근거로 한 장보고가 한 예다. 그 뒤 경문왕(AD. 861년 - 875년)과 헌강왕(AD. 875년 - 886년)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개혁정치를 하였으나 왕권을 정립하지는 못했고 진성여왕이 즉위한 시기에는 내란과 분열이 극에 달했다. 설상가상(엎친 데 덮친)으로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조세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농민반란의 명분이 되었고, 이를 오랫동안 수습하지 못하여 50여년의 내란이 지속됨으로써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끝내 한기 8124년(AD. 927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시기는 견훤과 궁예가 필사적인 전쟁에 휘말려 있었으므로 신라는 서로 다투는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이름만을 유지했다. 한기 8115년(AD. 918년) 궁예를 쓰러뜨린 뒤 즉위한 왕건은 신라에 유화(달래고 어르는)정책을 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고려가 강건해지자 경순왕은 국운이 더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한기 8132년(AD. 935년) 11월 스스로 천년사직(나라)을 들어 고려에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여 경주 사심관으로 남은 생애를 보낸다.
마의태자 덕주공주 이차돈순교비 불국사다보탑 봉화군 북지리
월악산 성계계곡 금강산 백율사 마애여래좌상
* 그림, Daum Blog 인용
# 신라의 정치, 문화, 사회제도
• 골품제도
* 신라가 고대국가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귀족 상호 간의 위계질서 확립을 정비한 사회제도로써 성골과 진골 그리고 6두품에서 1두품까지 8개의 신분위계다.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 왕으로 선택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하였다. 진골도 왕족이었으나 왕으로 선택되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다가 성골이 없어지자 김춘추부터 왕위에 올라 신라 멸망 때까지 진골이 왕위를 이었다. 뒤에 새로운 김씨라 하여 가야의 왕족, 왕비족, 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안성 등은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영화를 누렸다. 골품제도는 성골이 사라진 뒤에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과 일반 백성들로 정리된다. 후기 신라에서는 이 골품제도로 갈등이 깊어져 반신라세력이 형성된다. 정치적 출세는 물론 같은 신분끼리의 결혼, 가옥의 크기, 옷의 색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제약과 특권은 왕권이 강성할 때는 중앙집권의 수단이었으나 국론의 분열과 갈등의 요인으로써 국운쇠망의 요인이 되었다. 골품제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아니고 고조선시대에서도 지방호족인 5가의 부족장들이 정치를 분담하여 행사하였는데 계급사회의 형성은 정치적인 권력 나눔에서 비롯되었다.
• 화백제도
* 호족들의 연합 정치제도로써 그 기원은 연맹시대의 <정사당> 혹은 <남당>이라는 제도에서 시작하였다. 이 제도가 활성화된 때는 화백회의장으로 상대등직이 설치된 뒤다.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불교의 공인 같은 국가 중대사를 전원 합의에 의해 결정했다. 그러나 통일시기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집사부가 설치되자 실권을 잃었다. 고조선시대에 화백회의(공화제)가 있었고 신라의 화백제도와 다름이 없다.
• 화랑제도
* 신라시대 국가에서 인재발굴의 의도로 장려한 청소년 수련단체인데 화랑이라는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말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고조선의 천지화랑에서 조의(선인)들이 바깥에 나갈 때 머리에 천지화(무궁화)를 꽂았으므로 비롯된 말이다. 화판, 선랑, 국선, 풍월주로도 불렀다. 단체정신에 집착한 교육적, 군사적, 사교적, 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력신장에 필요한 군사와 행정 지도자의 양성기관이었다. 또한 골품제사회에서 일반 백성들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었으므로 벼슬과 관직에 대한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도 있었다. 화랑 초기의 원화 남모와 준정은 여성으로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렸는데 무리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춘 낭도들은 인재로 뽑혀 출세하였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가 심하여 준정이 남모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뒤 원화는 남성으로 바뀌었고 역할도 달라졌다. 한기 7759년(AD. 562년)의 대가야 정벌 때 화랑 사다함의 공적이 널리 알려졌는데 초대화랑은 설원랑이다. 경덕왕 때 충담사의 10구체 향가 <찬기파랑가>는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찬미한 노래로써 화랑정신이 쇠퇴해가는 시대은유적 노래다. 화랑의 조직구성은 화랑 한 명에 승려 약간 명이 있고 많은 낭도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3년 의무기간 동안 단체수련을 하였다. 연령은 15세 - 18세며 명승지와 국토를 돌아다니며 애국심을 기르고 도의를 닦았다. 고조선시대에 천지화랑이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으로 백제에서는 싸울아비(일본으로 전파되어 사무라이가 됨, 싸울아비와 사무라이의 연관은 언어적으로 무리라는 주장이 있음), 신라에서는 화랑으로 계승되었다. 찬기파랑가, 화랑세기, 세석, 세속5계 등 관련 유적이 있다.
• 불교
* 신라의 불교는 정치 사회적으로 국가경영에 크게 영향력을 미쳤다. 지도자들이 불교를 통해 사회통합과 사상적 일체를 이루려는 노력을 기우렸기 때문이다. 동서통일에도 불교는 사회통합의 역할이 컸다.
* 제 1기 - 불교 도입기로 한기 7724년(AD. 527년) 눌지왕 때 아도화상으로부터 받아들였는데 고구려(한기 7569년, AD. 372년), 백제(한기 7581년, AD. 384년) 보다 150여년 뒤졌다. 법흥왕 때 이차돈은 22세의 나이로 법흥왕의 근신이었는데 왕이 불교에 심취한 반면 신하들은 불교의 전래를 우려하고 배척하였다. 왕권이 신권을 제어하지 못하는 정치적 상황이었으므로 이차돈은 불교의 진흥을 위한 법흥왕의 의지를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한다.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절개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입니다>라며 불법을 위하여 자신의 한 목숨을 희생할 것을 간언하였다. 왕은 천경림에 절을 지으면서 이차돈이 왕명을 도용하여 불사를 일으켰다고 소문을 내자 신하들이 이차돈을 처형해야 한다고 일어났다. 이차돈은 형장에서 <내가 죽으면 기이한 일이 일어나리라> 예언했는데 목을 치자 흰 피가 솟구쳤다고 한다.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왕실이 돈독한 신자가 되었고 왕이 곧 부처라는 왕권, 국가통치의 기본이 확립되었다. 경주 백율사는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순교비가 있다. 순교비에는 요동치는 땅과 처형되어 구르는 목 그리고 목이 없이 단정히 꿇어앉은 이차돈의 상이 새겨져 있다. 불교식 왕명을 가진 왕은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다.
* 제 2기 - 불교가 정착한 단계로 7개 사성전(사천왕사, 봉성사, 감은사, 봉덕사, 봉은사, 영묘사, 영흥사)을 국찰로써 건립하고 국가 차원에서 융성한 불교는 사회사상으로 정착되었다. 공적인 승인을 받아 국가가 불교 흥륭의 기반이었으나 민간 개인적인 수행자로 노힐부득, 달달박박, 광덕, 엄장들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유가계와 화엄계 불교가 양립하였다. 신앙적으로는 아미타신앙과 미륵신앙, 관음신앙이 공존했다.
* 제 3기 - 불교의 개혁기로 선종이 유입되어 불교의 일대 변화가 이루어졌으나 기존의 화엄종과 법상종도 왕실과 지배층에서 융성하였다. 신라 말에 국가가 혼란하자 신인종이 재등장하여 미륵사상 대두되었다. 후고구려를 복위한 궁에는 미륵부처의 환생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3/22화 : 3. 남북국시대 (1/3) - 대진국(발해)>
고구려를 계승한 해동성국海東聖國, 대진국大震國
(삽화 - 대중상의 혁명)
대진국행정구역도 무역로 부흥운동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참고자료(임승국의 한단고기)
* 대진국大震國역사는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사대주의事大主義와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에 의한 대한역사 깎기, 낮추기, 거짓으로 만들기의 본보기다. 중국은 대진국을 <발해>라고 낮추어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몰아세웠고, 일제는 아예 대한사에서 대진국역사를 잘라내 없애버렸다. 쥐뿔(주체)도 모르고 이를 받아들인 한국 역사학자들은 대진국역사를 없애고 통일신라로 한국사를 세웠으며, 신라통일을 자주통일, 민족통일, 국토통일의 위대한 역사라고 말하는 데 신라통일은 땅 넓이로 보자면 옛 고조선 땅의 1/100이고 고구려와 대진국 땅의 1/50 좁혀진 통일이다. 더구나 고구려의 드넓은 땅을 당 나라에 통째로 바친 백제와 신라만의 <2국통일>이요 <동서통일>이다. 통일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아래쪽 영토통일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강역과 고구려인을 감싸 안을 수 없어 당 나라가 고구려의 땅에는 안동도호부, 백제에는 웅진도독부 그리고 신라에마저 계림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당 나라의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신라는 동맹국이었던 당 나라와 전쟁을 마다하지 않으며 웅진도독부와 계림도독부는 밀쳐냈으나 고구려는 당 나라로 넘어갔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들이 안동도호부가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고 대진국을 세워 당 나라는 고구려 경영의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으나 대한사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이 한국 땅의 가름이 된 빌미가 바로 신라통일임
* 신라통일 바로 앞의 중국은 고구려 침공 실패로 수 나라가 망하고 당 나라가 일어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백제의 상대등 성충과 고조선의 옛 땅을 경영하려는 꿈을 세우고 먼저 중원대륙을 빼앗기로 뜻을 모았다. <당 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私事로움을 잊고 3국은 백성을 모아 당 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이긴 뒤에 인의仁義로 다스리자>. 때마침 고구려에 신라의 사신으로 들어온 김춘추에게도 이를 의논하였으나 김춘추는 아무리 당 나라가 어려운 시기라고는 하나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김춘추에게는 당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백제 타도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개소문에게 잡혀 2년간이나 억류되었다. 때마침 김춘추를 구하려는 김유신이 고구려 남쪽 국경을 침략하자 고구려는 김유신을 풀어주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풀려나온 데는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었고, 거짓말로 죽령이북의 땅을 되돌려주겠다면서 옛 이야기, 자라에게 속아 용궁에 간 <토끼와 자라>의 고사故事를 응용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 살아나온 김춘추는 왜로 건너가 백제 침략연합을 꾀하였다. 왜에서도 실패하자 김춘추는 당 나라로 몰래 들어가 연개소문과 성충의 침략 계획을 일러바쳤으며, 신라말기의 내정문란과 연개소문이 죽은 뒤 고구려의 권력쟁투를 기회로 나당연합을 성사시켰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알현할 때 구지 당 나라의 옷을 입고 당 태종을 뵙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당 나라의 신하로써 당 태종을 만난다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아들 왕문을 인질로 맡겼다. 당 태종은 연합을 승낙하면서 연합의 조건으로 고구려 땅은 당 나라가 차지하고 백제 땅을 신라가 경영하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김춘추가 그렇게도 백제 타도에 연연한 이유를 <왕가王家의 사사私事로움>에서 보는 견해도 있다. 김춘추의 외교활동이 3국통일의 큰 뜻을 앞세웠지만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다. 대야성의 멸망과정에서 자살한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古妥素에 대한 원한으로 보는 시각이다. 연개소문과 대담에서 <사사私事로움울 잊고>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기록에 의하면 김춘추는 사위와 딸이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기둥에 의지해 종일토록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짐승이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정도를 멸하지 못하랴>라고 한탄했다 함
* 요즘 진보적인 역사관을 지닌 학자들이 문헌과 고증을 통해 대한사, 특히 고대사를 재정립하여 잘못이 낱낱이 밝혀지고 수정 . 보완되는 일은 바람직하다. 중국이 <대진국>을 <발해>라고 부르는 것은 당 현종玄宗이 진국의 황제로 스스로 말하는 대조영을 대진국이 보낸 사신을 통해 좌해위원외대장군左駭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였고 통치하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아 홀한주도독都督을 보탰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진국은 건원칭제建元稱帝하였는데 당 나라가 발해로 불렀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발해로 불리웠다.
덧붙이면 일본이 섬나라라는 정신적 영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서 한국을 <반도半島>라는 지어낸 말로 부르게 하여 스스로 높이려는 뜻과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구지 <반도>라는 지명을 왜 만들어냈으며, 특정지역을 지리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어 조어造語를 했다면 왜 <반대륙半大陸>이라 하지 않고 하필 <반도>라고 하였겠는가? 지구는 대륙과 섬으로 구성되었지 반대륙이 없는 것처럼 반도는 없다.
<통일신라>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통일이랄 수 없는 일이어서 학계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후기신라>, <대신라>, <2국통일>, <동서통일> 등 명칭이 이야기되고 있으나 아직 마땅치 않아 대한사에서 사라져버린 대진국사를 찾아내 기존의 통일신라시대를 <남북국시대>로 바로 세우고 신라의 명칭은 <통일신라>로 부름
* 중국의 주은래 주석은 기자 방담을 통해 고구려가 한국역사라는 뜻을 말했고, 학자요 문필가인 임어당도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일을 비판했다.
당 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추앙받는 이태백李太白 (AD. 701 - 762년)도 시문집 <옥진총담玉塵叢談>에서 대진국을 고려(고구려)와 백제로 부르며 한민족의 독자적인 국가임을 말했다. 이백은 말갈어를 잘 해서 대진국과 중국의 외교문서를 번역했다. 또한 이백의 <혁만서嚇蠻書>에 당시 당 나라 사람들이 대진국을 고려나 백제로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진국 건국의 주도세력은 말갈족으로 고대 한민족이며 대진국이 건국되던 6 - 7세기 초 중국 지린성 등 동북지방에 7개의 말갈부족이 있었는데 한민족의 원류인 예맥계가 가장 강성했으며 대진국 건국의 중추세력이었다. 이들은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 대진국을 세웠으며 고구려의 유민을 흡수해서 중국 북방에 현재 한국의 7배나 되는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나라 이름에도 국國자를 넣어 자주국임을 과시했다. 한편 일본학자들도 대진국사를 중국역사로 보는데 부정적이다. 역사학자 쓰다 소기치는 <발해사고渤海史考>를 통해 대진국의 전신은 말갈 7개 부족으로 이 가운데 속말말갈이 주축이며 이들은 고구려와 당 문화를 수입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한 나라라고 주장함 (홍콩 넝런서원의 한국학과 김광석 교수 대진국사 연구 논문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1991년 홍콩 위안둥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6. 9. 19일자 중앙일보)
* 대한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나, 이 글이 <한단고기의 태백일사(임승국)>를 참고하였는데 <태백일사의 대진국본기>에 기록된 <일본기>를 인용하여 대진국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덧붙인다.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으니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졸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속했는데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고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나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가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의 유민으로써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의 노예다. 왜인들은 이 때 산과 섬에 근거하여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들이 통상했다. 바다를 건너 천 여리에 대마국(대마도)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 쯤 된다.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 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사방 300여 리 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반여언의 옛 읍임
* 1949년 길림성 돈화현의 현성 근처 우정산 고분에서 한기 7989년(AD. 792년)에 죽은 대진국 문황제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지가 나왔다. 대진국의 묘지로써 처음이다. 묘지에 일렀으되
<(공주가 죽자) 황상께서 조회를 폐하고 크게 슬퍼하사 음악 연주도 금하였다>라며 <황제 호칭>을 사용하였음을 적었다. 중국은 이제까지 대진국을 당 나라의 지방정권이나 제후국 정도로 낮추고 거짓으로 만들었는데 당 나라와 대등 . 대립한 건원칭제의 나라라는 것이 알려졌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은 <태백일사>의 역사서로써의 사료적 가치를 정혜공주묘지가 입증하였음
* 대진국에 대한 소련의 입장은 남부 시베리아 여러 종족이 형성한 복합적 국가로써 독자적인 역사를 지녔다고 본다. 신라는 중국처럼 발해라 하였고 낮춰서 <흉이凶夷>니 <말갈발해>라 하였으며 낫게 부르면 <북국北國>이라고 하기도 했다. 일본 승려 에닌(원인圓仁)이 한기 8036년(AD. 839년)에 지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는 신라인들이 8월(음력) 15일에 3일 동안 노래춤잔치를 벌이는데 이를 <발해전승기념행사>라고 하였다. 신라인들의 대진국관을 엿볼 수 있는 기록임
1949년 발굴된 대진국 정혜공주묘는 문황제의 둘째 딸의 무덤으로,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한 일제 추종 실증사학계에 사료적 가치를
증명함. 정혜공주묘지석, 벽화, 부장품 * 그림, Daum Blog 인용
* 대진국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 1
8 1대 진국열황제 한기 7895년(AD. 698년) - 15대 애제 한기 8123년(AD. 926년),
15대 228년 간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 진국열황제부터 시작 15대)
역대 |
묘호 |
시호 |
연호 |
이름 |
1 |
세조 |
진국열황제 |
중광 |
대중상 |
2 |
태조 |
성무고황제 |
천통 |
조영 |
3 |
광종 |
무황제 |
인안 |
무예 |
4 |
세종 |
광성문황제 |
대흥 |
흠무 |
5 |
|
|
|
원의 |
6 |
인종 |
성황제 |
중흥 |
화흥 |
7 |
목종 |
강황제 |
정력 |
숭린 |
8 |
의종 |
정황제 |
영덕 |
원유 |
9 |
강종 |
희황제 |
주작 |
언의 |
10 |
철종 |
간황제 |
태시 |
명충 |
11 |
성종 |
선황제 |
건흥 |
인수 |
12 |
장종 |
화황제 |
함화 |
이진 |
13 |
순종 |
안황제 |
대정 |
건황 |
14 |
명종 |
경황제 |
천복 |
현석 |
15 |
|
애제 |
청태 |
인선 |
* 대진국 역사연대표(중국사서와 일본사서) - 2
(대조영부터 시작 15대)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고 |
AD.699-719 |
고구려 유민, 말갈족 규합, 국호 진(발해) |
2대 |
무 |
719-737 |
일본 국교 문물 교환, 당 나라 공격 |
3대 |
문 |
737-793 |
용천부 천도, 관직제도 정비, 주자감 설치 |
4대 |
대원의 |
793-794 |
|
5대 |
성 |
794-795 |
연호 중흥, 상경 천도 |
6대 |
강 |
795-809 |
연호 정력, 일본 . 당 사신 왕래 문물교환 |
7대 |
정 |
809-812 |
연호 영덕 |
8대 |
희 |
812-817 |
연호 주작, 당 문물제도 수용 |
9대 |
간 |
817-818 |
연호 태시 |
10대 |
선 |
818-830 |
중국이 해동성국 칭함, 영토 확장 |
11대 |
대이진 |
830-858 |
연호 함화 |
12대 |
대건황 |
858-871 |
|
13대 |
대현석 |
871-894 |
|
14대 |
대위해 |
894-906 |
|
15대 |
대인찬 |
906-926 |
103개 성 모두 거란에 점령 멸망 |
대진국 유물, 구리불상과 불상과 석등 * 그림, Daum Blog 인용
# 대한역사에서 사라진 대진국(발해)의 역사
* <대진국>은 잊혀져서는 안 되는 대한민족의 나라다. <발해>는 밖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고구려 유민들은 끝내 <고구려>라 하였다고 한다. 대진국은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청 나라 사람 김소발의 <발해국지장편> 권 20에 대진국문자 20여 글자가 소개되어 전해지고 있다. <전자도 아니고 예자도 아닌> 대진국의 독특한 문자다. 중국과 다른 자기들만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던 나라, 건원칭제하고 멸망한 고구려를 주체적으로 이은 나라, 전성기에는 고구려의 드넓은 영토 보다 더 넓은 강역을 경영한 나라, 이것이 대진국인들의 기상과 주체성이다. 국경을 맞댄 통일신라와는 일상적인 무역로는 열었으나 국가적인 외교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먼 동해 바다를 건너 왜국과는 여러 차례 국서를 나누었다. 고구려를 이었음을 스스로 말한 데서 보듯이 외세를 끌어들여 3국통일을 하였던 신라를 못마땅하게 보았고 고구려유민들로써 원한이 서렸으리라. 그래서 더욱 대한역사에서 발해역사는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발해지장국편>에는 대진국과 왜의 천황과 서로 나눈 문서가 권 18의 문징편을 거의 다 채우고 있어 활발했던 외국교역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 <조대기>에서, 개화(고구려 28대 보장왕의 연호, AD. 668년, 한기 7865년) 27년 9월 나당연합군의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걸걸중상, 대조영의 아버지)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무리를 이끌고 영주에서 2,000리(약 1,000Km) 떨어진 천험의 요새인 동모산에 이르러 머물렀다.
# 한기 7893년(AD. 696년) 늦가을, 서압록강변 고구려 진국장군 대중상(걸걸중상, 대조영의 아버지)의 진영, 대중상과 거란족 추장 이진충, 말갈족장 걸서비우가 고구려의 멸망을 한탄하며 울분을 토한다.
* 대중상 : (비통한 어조로) 고구려는 망했습니다. 싸움 한 번 하지 못하고 나라를 들어 당나라에 바쳤습니다. 고구려 조의선인의 우두머리고 대막리지며 장군이었던 연개소문 장군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안에서 정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정권을 차지하려는 내부 분열로, 수 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당 나라 30만 대군을 쳐부셨던 그 막강했던 고구려가 변변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단 말입니까? 이 어찌 통분하지 않으리요. 대막리지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로 향하는 신라군의 자문을 맡아 길을 안내하였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당 나라로 도망가서 당 나라 벼슬을 얻고 당 나라 군대의 선봉이 되어 고구려로 쳐들어와 고구려를 지키려는 동생 남산, 남건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정권에 눈이 멀었다지만 어떻게 조국에 창칼을 들이미는 적대행위를 할 수 있으며 적의 나라 군사를 지휘하여 조국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대로 두고 보시렵니까?
* 이진충 : 수천 년 이어오던 민족정신이 스러지고 고구려는 망했습니다만 통분은 갈아 앉히고 냉정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아직 민심은 우리 편입니다. 백성들은 고구려가 당 나라에 귀속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영주부를 쳐서 발판을 삼고 군사를 정비하여 당 나라를 몰아내고 다시 고구려를 일으킵시다.
* 걸서비우 : 좋습니다. 저도 이미 모든 족장들에게 동원령을 내려두었습니다.
* 대중상 : 거사는 내일 밤 자정입니다. 족장께서는 동문과 서문을 맡아주시고, 추장께서는 북문을 맡아주시되 달아나는 군사는 쫓지 말고 항복한 군사는 거두십시오. 저는 남문을 통해 관아를 습격하여 영주부를 탈취하겠습니다.
대중상이 주도한 혁명은 실패하였다. 대중상은 이진충과 걸사비우에게 훗날을 언약하고 천험의 요새인 동모산으로 물러났다. 이윽고 <후고구려>라 이름하고 격문을 돌리니 원근 많은 성들이 모여들었다. 대중상은 중광 32년 5월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라 하였다. 태자 <대조영>은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와서 제위에 올랐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사 100,000을 모집하여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새롭게 하여 당 나라에게 대항하여 고구려 부흥을 맹세하였다.
3
*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써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다. 걸걸중상(대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자리를 잡았다. 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쳤다. (걸사)비우의 무리와 합쳐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얻었다>라고 기록했다.
* 대조영은, 당 나라가 거란족 출신 이해고를 토벌대장으로 삼아 쳐들어오자 말갈(읍루)의 족장 걸사비우와 거란의 추장 이진충과 연합하여 당 나라 장군 이해고의 군사를 천문령(흥경지방 영액성 부근, 청 태조 도읍지, 대진국 근거지)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에 기강을 새롭게 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국호를 <대진>으로 하였으며 연호는 <천통>, 국토는 6,000리(3,000Km)였다. 3대 무예황제 때 등주와 동래를 빼앗고 자사 위준을 죽인 일로 당 나라 왕 유기가 군사를 보냈으나 당 나라는 크게 패하였고, 다시 당 나라가 신라와 연맹하여 동남방의 여러 군을 급습하였으나 역시 크게 져서 그로부터 신라가 조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여러 성은 대진국이 차지하였다.
* 인안(3대 광종 무황제) 16년 한기7932년(AD. 735년)에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9하니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5경, 60주, 1군, 38현을 편제하니 나라가 9,000리(5,000Km)였다. 동쪽은 연해주지역에서 아무르강까지, 서쪽은 요동지역, 남쪽은 대동강과 원산이남 그리고 북쪽은 송화강이북으로 흑수말갈까지 복속시켰다. 이는 전성기 고구려 보다 훨씬 넓은 영토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다. 이 해에 당 나라, 신라, 거란, 왜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천하는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하였다. 5곡은 풍성하고 4해는 안락하여 <대진 6덕의 노래>를 찬미하였다.
* 흠무(4대 광성문황제)가 즉위하여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의하고, 문사에게 명령하여 국사 125권을 편찬케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을 홍익하는 교화는 만방에 미쳤다.
* 대흥(4대 광성문황제 흠무의 연호) 45년 한기 7978년(AD. 781년) 치정의 절도사 이정기(고구려 유민으로 당 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요동에 고구려를 계승한 제 나라를 세움)가 당 나라 군사와 접전하자 황제가 장수를 보내 도왔다.
* 성종(11대) 선황제는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태조의 풍체가 있다 하였다.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7주를 두고 북은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과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 모란의 동쪽을 철리,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 장령의 동쪽을 장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에 있었다. 대개마의 남북에 자리잡고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인(도)장 대진국사 왜곡 안내판 중국 세계문화유산 등록 영광탑
(당대발해유지) * 그림, Daum Blog 인용
# 대진국의 정치, 문화, 외교활동
* 한기 7924년(AD. 727년) 가을, 대진국의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외교가 시작되어 대진국은 35회, 일본은 13회 사신을 주고받는다. 국경을 한 당 나라와 신라에 대비한 군사적 협력이 관건이었다. 한기 7954년(AD. 757년)에 왜가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대진국에 동맹을 요청했으나 대진국이 이를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결국 무산시켰다. 왜의 신라 침략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 대진국의 해상활동은 한기 7929년(AD. 732년) 9월, 당 나라 북방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요 군사적 요충인 등주를 공격하여 쉽게 함락시킨 것으로 미루어 거대한 해상 군사조직과 무역활동 조직이 있었다고 가늠되는데 이는 옛 고구려의 해군조직이라고 판단한다.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진국이 당 나라의 요충인 항구도시를 공격하여 쉽게 격파할 수 있는 군사적 정비, 특히 해군의 정비가 그렇게 빨리 갖춰질 수 없다는 판단이다. 또한 <당회요>, <책부원귀>, <요사>에 고구려의 기록이 8세기에서 10세기 초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비록 대진국에 복속되었으나 사실상 분권적 독립성을 유지한 고구려 해상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 3국사기는 대진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의 4부는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라고 했으며, 신라의 천장군지역으로부터 책성부까지 39개의 역(교통의 거점)이 있다. 주요도로 5개 가운데 신라도(길)가 있다. 이는 대진국이 신라와 교통하지 않았다는 역사 해석의 반증이다. <협계 태씨 족보>에 왜구가 신라 동해안을 침략하자 대진국 군대가 출동하여 격퇴시킨 기록이 있고 대진국 멸망기에 신라에 군사 요청한 사실도 있다.
* 고려 태조는 대진국을 고려왕실과 혼인한 <친척의 나라>라고 했다. <자치통감>에 서역 승려 <말라>가 고려 태조에게 들은 내용을 중국 후진의 고조에게 전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 태조는 말라에게 대진국은 본래 친척의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 잡혀있으니 후진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여 대진국 왕을 구하고 옛 원한을 갚고자한다>고 했다.
* 중국과 러시아는 대진국역사를 소수민족사로 간주하고 있는데 <속일본기> 권 10에는 대진국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라고 하여 대진국이 고구려의 후계임을 말하였다.
* <발해>라는 명칭은 한기 7910년(AD. 713년) 대조영이 당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조공의 예를 하자 당 현종이 대조영을 <좌해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이라는 벼슬을 내림으로써 나라 밖에서 발해라 불렀으며 안에서는 건원칭제하였다. 당 나라는 고구려 패망 뒤 고구려 왕족과 고구려에 협력한 말갈족 족장들을 강제로 영주에 이주시켰다. 대진국의 건국은 여기서 시작된다.
* 정치 행정제도는 당의 행정체제를 모방하였는데 3성(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밑에 6부(충인의예지신부, 장관은 경)를 두었고 1대, 7사, 1원, 1감, 1국의 관료체제였다. 지방행정기구는 8 - 9세기경에 정비되었는데 5경(수도는 상경, 중동서남경) 아래 15부, 62주, 100여개 현(책임자 현승)의 체제였다.
* 군사제도는 <신당서 발해전>에 10위(좌우맹분위, 좌우웅위, 남좌우위, 북좌우위 등 대장군 장군 통솔)에 100,000 군사를 두었고 전성기에는 200,000명의 군사였는데 지방군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유사시에 동원되는 촌락 단위의 예비군제도가 있었다.
* 사회경제제도로 남부는 농업을, 동부는 농어업이, 북부는 어업과 수렵과 목축업이 성했으며 이외에 수공업 형태의 방직, 도기제작과 국가경영의 중대사였던 철의 제련이 활발했고 읍루인들은 뛰어난 조선술을 발휘했다. 특히 저마(삼베)는 말갈족이 잘 다루어 고려인들에게 전수하여 발전하였다. 당 나라와 143회, 왜와 34회의 바닷길 무역의 기록이 있다.
* 기층(일반)문화는 말갈문화가 중심이었고, 중앙아시아와 남부시베리아 문화(도기, 소그드 화폐, 경교 십자가), 고구려 문화(지붕 장식 막새기와의 연꽃잎 배치)가 공존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지배층문화는 고구려인의 문화로써 종교는 불교가 성행하였고 불상은 전불(구은 벽돌 불상)이 남아있다. 지배층에서는 도교가 성행하였는데 정혜공주 묘지에서 도교의 용어와 장자사상의 제도를 엿볼 수 있다. 묘제는 흙무덤(말갈 묘제)과 돌무덤(고구려 양식으로 석실봉토묘이며, 정혜공주묘), 벽돌무덤(당나라 묘제)이 두루 사용되었다. 산성 축조법은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고구려식 산성과 당 나라식 평지성이 혼재되어 있다. <구당서>, <신당서>, <5대회요의 발해전> 기록에 대진국인은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주축을 이룬다 하였고,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도 구려유진(고구려 유민)과 물길잡류(속말말갈인)들이 세운 나라라고 했다.
* 당 나라와는 한기 7902년(AD. 705년) 공식적으로 접촉하였고, 한기 7906년(AD. 709년)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대진국은 4번 천도했는데 첫 번째는 천보 년간에 구국에서 현주의 중경으로, 두 번째는 천보 말에 상경으로, 그리고 정원 때에 동경으로, 마지막은 5대 성왕 때 다시 상경으로 되돌아왔다. 성씨로 왕족은 대씨였고, 유력 성씨로 고, 장, 양, 보, 오, 이씨 등 62개였다. 평민은 성씨가 없고 두루 편호 또는 백성이라고 했으며 부곡(백정 등 천민)과 노비가 있었다. 한국의 대진국 기록은 <한단고기>의 <대진국본기>와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발해고>가 있을 뿐이다.
근대의 대진국연구는, 일본사학계는 고구려 계승과 당 나라 문물을 받아들인 문화로는 인식하나 독자적 문화형성을 인정 안하고, 중국 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지방봉건정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러시아사학계는 남동부시베리아 여러 민족과 종족이 형성한 문화를 지닌 복합국가로 독자성은 인정한다.
# 대진국의 멸망
* 내분설
대진국의 멸망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자체의 내분설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요사(요 나라 역사)에서 <이심, 민심의 배반>이라는 말이 거론되었고 요 나라가 싸우지 않고 쉽게 복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내분을 뜻한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대진국 멸망 즈음에 반란이나 폭동이 없었다. 오히려 멸망 뒤 반요투쟁이 100여 년 간 치열하게 나타난다. 요 나라의 대부대에 3일 간 항거했던 부여부전투(성주 이하 전원 사망)와 항복한 뒤 다시 전개된 상경용천부 전투, 장령부, 압록부,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 남해부주민의 항쟁을 보면 내분설이 설득력이 없다.
* 백두산 화산 폭발설
1970년대 말,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헤이안시대의 주거지역을 발굴하다가 화산재가 두껍게 쌓인 지층이 발견되었는데 분석결과 백두산 화산재로 결론지었다. 일본 도쿄의 메트로폴리탄대학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백두산 화산 폭발과 그 환경적 영향> 논문에서 백두산의 화산이 폭발하여 반경 수십 킬로가 초토화되었고 그 영향으로 대진국이, 마치 구약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 복합설
지배층의 권력 다툼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국정이 문란해지고 외교정책의 실패로 요 나라가 그 틈을 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기습하자 방어 또는 대비하지 못한 정치적 군사적 실패가 원인이었다. 멸망 뒤 100여년 간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을 추정하여 대진국 멸망의 정설로 본다.
# 대진국 부흥운동
* 대진국 애제의 청태 26년, 한기 8123년(AD. 926년) 봄 정월, 야율배(청 태조 야율아보기의 큰아들)가 거란 건국 초에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대진국의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 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15대 228년 동안 고구려의 후계를 스스로 다짐하며 중원경영을 이상으로 건국했던 대진국은 패망했다. 야율아보기는 유목민을 모아 거란을 건국하고 중원경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위협세력을 복속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작전으로 서북의 돌궐, 토번과 동쪽의 대진국을 먼저 평정하려고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거란과 대진국은 한기8121년(AD. 924년) 이후 끊임없이 변방에서 대립하였다. 대진국 멸망 뒤 요(거란)의 태조가 <동단국(동쪽의 거란국)>을 세우고 <감로>라 개원하여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며 유화정책을 폈으나 대진국유민들은 요와 금 나라에 흡수되었고 지속적으로 고구려로 망명했다. 요 나라는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였다. 대진국 멸망 뒤 유민이 세운 <후발해>는 한기 8172년(AD. 975년)부터 군사작전을 개시하였고, 후당에 7회의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호소하였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대조영의 후손, 1029년 동경에서 대진국 복원의 난을 일으킴)은 태조 고황제의 17세(한단고기에는 7세손이라 하였으나 오기임)의 자손이다. 유수부마 소효원과 남양공주를 사로잡고 호부, 사한, 소운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흥)요>라 하고 <천경>이라 개원했다. 요 나라를 치기 위해 고려에 5회의 사신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했으나 고려가 거절함으로써 숙원을 달성치 못했으며 이듬해 8월 요 나라에 패망했다. 요동의 유수 <수보>는 정치가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 11년 정월, 동경의 비장 대진국 사람 고영창이 유수에게 거짓으로 외군이 쳐들어왔으니 대비한다 하여 수보를 죽이니 모두 요 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라 하고 <융기>라 개원하니 요동 50여주를 거느렸다. 이후 100년 동안 대진국 부흥운동은 계속되었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4/22화 : 3. 남북국시대 (2/3) - 통일신라>
외세外勢를 빌은 동서東西통일, 통일신라
(삽화 : 황산벌 전쟁)
통일신라강역도 9산선문山禪門 반란도叛亂圖
* 그림, Daum Blog 인용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
백제의 계백 장군과 싸울아비(무절武絶),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 화랑, 고구려의 선배(조의선인, 선비)와 남생, 연정토,
* 대한역사는 신라의 통일을 위대한 역사로 적는다. 자주통일, 민족통일, 국토통일이라고 하여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은 창조적 통일이라고 말한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로 국경을 이웃하여 끊임없이 화해와 전쟁을 반복하였다. 구지 영토 확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권의 문제였으므로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북쪽에는 힘 센 고구려가 버티고 있어서 나갈 길이 막혀있었으므로 백제와 신라는 동서로 국경을 마주한 나라끼리의 어쩔 수 없는 대결을 벌였다. 나라 밖의 영토 넓힘도 이러한 영토 넓힘의 뜻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의 중국 요동지방과 동북부지역 그리고 일본 북부지방 경영은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으로, 백제는 중국의 요동과 일본의 서부지역, 신라가 중국 서부지역과 일본의 동부지역을 경영한 것은 해외 진출을 꾀했던 영토 확보다. 특히 뒷날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는 백제 정복의 야심을 가졌으나 나라의 힘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이웃 나라에 동맹을 호소한다.
김춘추는 사신으로 한기 7824년(AD. 627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았으나 연개소문은 일찍이 중원(중국) 경영의 야심을 키워왔으므로 오히려 김춘추를 설득하려고 한다. <당 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私事로움을 잊고 3국은 백성을 모아 당 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이긴 뒤에 인의仁義로 다스리자>고 했다. 그러면서 옛 고구려 영토였으나 진흥왕대 이래 신라의 영토였던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연개소문은 김춘추가 맘대로 할 수 없는 조건을 말하여 김춘추가 집착하고 있는 백제 침공을 그만두게 하고 큰 이상에 동참하기를 바란 것이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의 조건을 <신하로써는 결정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연개소문은 이미 중원 경영의 이상을 백제의 성충과는 합의에 이르렀으므로 신라가 동의하면 중원 도모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당시 당 나라는 수 나라를 이어받은 바로 뒤였고 더구나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여 나라의 기틀이 확립되지 못한 체 혼란스러웠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2년간 잡아두었는데 우화寓話(용궁에 간 토끼와 자라)의 꾀를 써서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고,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고 거짓 약속을 했다. 때맞춰 김춘추를 구하려는 김유신이 국경 남쪽을 침략하자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음
* 고구려에서 풀려나자말자 김춘추는 한기 7844년(AD. 647년) 왜倭로 건너가 백제 침공을 모의한다. 본래 왜는 백제에 우호적이었고 신라와는 적대적이었는데 왜국은 한기 7842년(AD. 645년) 타이카개신(대화개신大化改新) 즉 나카노오에(중대형中大兄) 왕자가 왜 왕가王家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던 백제계 호족豪族 소가노아루카(소아입록蘇我入鹿)를 죽이는 <태극전太極殿의 정변政變>을 일으켰다. 김춘추는 왜의 반백제계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백제 정벌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계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 딴판으로 혼란한 일본정국의 수습이 시급하였던 나카노오에의 거절로 실패하자, 진덕여왕 2년 한기 7845년(AD. 648년) 아들 문왕文汪을 인질로 삼아 당 나라로 건너가 나당연합을 성사한다. 점령 뒤 백제를 신라가 갖는 대신 고구려를 당 나라에게 넘겨준 것이다. 3국사기 신라본기 문무대왕조에는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신라에게 주어 길이 평안하게 하려 한다>는 영토 나눔에 대한 당 태종의 일방적인 선언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보듯이 백제와 신라를 정벌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마음만 먹었다면 쉽게 합병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왜구의 침략에서 구원할 뿐이었는데 신라는 오직 백제 타도를 끈질기게 추구함
* 김춘추의 백제 정벌을 <왕가王家의 사사私事로움에 집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설득하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눈을 더 크게 떠 중원을 경영하자라고 한 말은, 백제가 대야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자 김춘추의 사위 대야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古妥素가 자살한 원한을 사사로움이라고 말한 것이다. 백제의 의자왕은 즉위 다음 해에 한기 7839년(AD. 642년) 7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 미후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다음 달에는 당항성을 치는 것처럼 위장하고 윤충 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가 자살했다. 화랑세기는 김춘추가 고타소를 매우 사랑했는데 딸이 죽자 <기둥에 의지해 종일토록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짐승이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정도를 멸하지 못하랴>라고 한탄했다 한다.
강역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라의 통일은 고조선시대의 드넓은 강역의 1/100, 고구려시대와 대진국시대의 1/50 정도다. 신라통일은 대동강 이남의 통일이다. 대륙 고구려를 중국에 고스란히 넘겨준 것이다. 그것 보다 더 통탄할 일은 신라통일부터 한국의 강역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한정된 일이다.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통일신라를 <대신라> 또는 <후기신라>로 논의하며 <2국통일> 또는 <동서통일>로 규정함
* <예맥은 중국민족> 한민족 조상까지 왜곡(거짓꾸밈)> (2006. 9. 1 중앙일보)
중국사학자 왕원광(王元光, 윈난대, 서남변강소수민족연구센터연구원)은 2005년 펴낸 <중국민족발전사>에서 <예맥족濊貊族도 중국민족>이라고 주장했다. 예맥족의 일부는 나중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한국민족의 직계 조상이다. 왕원광은 옛 만주지역 안 예맥, 숙신, 동호계열 가운데 숙신과 동호만 중국민족으로 간주했으나 예맥족도 중국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부여족 가운데 대부분은 고구려, 대진국, 거란, 여진, 한족으로 융합되었고 일부만이 고구려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가 오늘날의 한민족이 되었다 (위 책 314쪽)라고 했다. 헤이룽장대학의 왕젠중 교수도 2004년 편찬한 <동북지구식생활사>에서 <부여는 중국 동북지구에서 가장 먼저 문명시대를 연 소수민족정권>이라고 하여 부여를 중국변방정권으로 간주했다. 중국의 주요논문, 특히 고대사와 관련된 논문은 국무원문화부와 국가신문출판총서의 허가나 묵인없이는 출판이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 학자의 주장은 학자 개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중국 당국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본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역사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2004년 8월 23일 합의문을 작성했는데 (1, 2항) 한 . 중 양국이 역사문제로 한 . 중 우호관계의 손상을 방지하고 동반자적 발전에 노력한다. (3항) 고구려사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정치문제화를 막는다. (4항) 중국이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한다. (5항) 양측은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의하여 두 차례의 학술교류가 있었다.
중국은 1996년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고구려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동북공정을 시작했고, 2002년 2월 동북공정을 본격 출범하여 한국이 강력히 반발했으며 요즘에는 대진국(발해)사를 넘보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고조선사를 찬탈하려는 야욕이다. 한국은 2006년 5월 동북아역사재단특별법을 국회에서 발의했으나 다른 정쟁으로 13개월만에 늑장 통과시켰으며 8월에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확대 출범하였음
금관총금관 단석산 신선사마애불 외세 침략도 수로왕비
* 그림, Daum Blog 인용 허황옥릉
* 통일신라 역사연대표
백제는 29대 무열왕 한기 7857년(AD. 660년),
고구려는 30대 문무왕 한기 7865년(AD. 668년)에 패망
1대 박혁거세 한기 7140년(BC. 57년) - 56대 경순왕 한기 8132년(AD. 935년),
56대 992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박혁거세 |
BC.57-AD.4 |
13세 등극 국호 서라벌, 수도 금성 |
2대 |
남해차차웅 |
AD. 4 - 24 |
석탈해 사위 정사 위임, 병선 왜구격퇴 |
3대 |
유리이사금 |
24 - 57 |
6부명 개정, 성씨 내림, 도솔가 창작 |
4대 |
탈해이사금 |
57 - 80 |
국호 계림 개정, 김알지 탄생 |
5대 |
파사이사금 |
80 - 112 |
월성구축 백성이주, 주변병합 국위선양 |
6대 |
지마이사금 |
112 - 134 |
백제 연합 말갈 격퇴 |
7대 |
일성이사금 |
134 - 154 |
농본정책 경지 개간, 백성 사치 금함 |
8대 |
아달라이사금 |
154 - 184 |
현 설치, 도로 개통 내치 힘씀 |
9대 |
벌휴이사금 |
184 - 196 |
탈해왕의 손자 |
10대 |
나해이사금 |
196 - 230 |
벌휴왕의 손자 |
11대 |
조분이사금 |
230 - 247 |
벌휴왕의 손자 |
12대 |
첨해이사금 |
247 - 261 |
벌휴왕 손자, 조분왕 동생, 고구려 국교 |
13대 |
미추이사금 |
261 - 284 |
김씨 왕가의 시조 |
14대 |
유례이사금 |
284 - 298 |
조분왕 큰아들, 백제와 수교 |
15대 |
기림이사금 |
298 - 310 |
조분왕 둘째 아들, 국호 신라 개정 |
16대 |
흘해이사금 |
310 - 356 |
기림왕 후사 없어 군신 추대 등극 |
17대 |
내물마립간 |
356 - 402 |
중국 문물 수입 |
18대 |
실성마립간 |
402 - 417 |
백성 추대 등극, 내물왕 태자에게 피살 |
19대 |
눌지미립간 |
417 - 458 |
牛車法 제정, 고구려 묵호자 불교 전파 |
20대 |
자비마립간 |
458 - 479 |
고구려 백제 공격 나제동맹 맺음 |
21대 |
소지마립간 |
479 - 500 |
김씨 |
22대 |
지증 |
500 - 514 |
왕 칭호 사용, 이사부 우산국 점령 |
23대 |
법흥 |
514 - 540 |
율령 반포, 연호 건원, 이차돈 순교 |
24대 |
진흥 |
540 - 576 |
순수비, 이차돈 순교, 대가야 멸망 |
25대 |
진지 |
576 - 579 |
이름 사륜 |
26대 |
진평 |
579 - 632 |
이름 백정 |
27대 |
선덕여왕 |
632 - 647 |
진평왕 맏딸, 이름 덕만, 첨성대 건립 |
28대 |
진덕여왕 |
647 - 654 |
이름 승만 |
29대 |
무열 |
654 - 661 |
김춘추, 나당연합 외교, 백제 멸망 |
30대 |
문무 |
661 - 681 |
고구려 멸망, 동해 대왕암 수장 유언 |
31대 |
신문 |
681 - 691 |
만파식적 제작 |
32대 |
효소 |
691 - 702 |
설총의 이두 정리 |
33대 |
성덕 |
702 - 737 |
혜초 왕5천축국전 저술 |
34대 |
효성 |
737 - 742 |
이름 승경, 성덕왕 둘째 아들 |
35대 |
경덕 |
742 - 765 |
김대성 불국사 창건 |
36대 |
혜공 |
765 - 780 |
여자 행세, 대공․김지정 난, 신종 주조 |
37대 |
선덕 |
780 - 785 |
혜공왕 죽임, 이름 양상, 내물왕10세손 |
38대 |
원성 |
785 - 798 |
홍수로 먼저도착 즉위, 독서출신과설치 |
39대 |
소성 |
798 - 800 |
2년 만에 병사 왕위 쟁탈전 벌어짐 |
40대 |
애장 |
800 - 809 |
숙부 김언승 왕위찬탈 시해, 해인사창건 |
41대 |
헌덕 |
809 - 826 |
친당정책, 패강 300리 장성 축조 |
42대 |
흥덕 |
826 - 836 |
완도 청해진 설치 장보고 관리 |
43대 |
희강 |
836 - 838 |
3촌 균정 척살 왕위계승, 김명의난 자살 |
44대 |
민애 |
838 - 839 |
희강왕 추대 상대등, 왕 자살 뒤 등극 |
45대 |
신무 |
839 |
민애왕살해 왕위등극, 이홍 저주로죽음 |
46대 |
문성 |
839 - 857 |
신무왕 태자, 장보고 반란, 염장 피살 |
47대 |
헌안 |
857 - 861 |
왕족 응렴 사위 삼아 왕위 계승 |
48대 |
경문 |
861 - 875 |
이름 응렴 |
49대 |
헌강 |
875 - 886 |
처용무 유행, 사치 환락 |
50대 |
정강 |
886 - 887 |
경문왕의 둘째아들, 진성여왕 오빠, 병사 |
51대 |
진성여왕 |
887 - 897 |
이름은 만, 淫行, 兵制 퇴폐, 나라 혼란 |
52대 |
효공 |
897 - 912 |
궁예와 견훤에게 영토 빼앗김, 정사혼란 |
53대 |
신덕 |
913 - 917 |
후사 없어 백성 추대 등극 |
54대 |
경명 |
917 - 924 |
신덕왕의 태자, 후당에 구원 요청 실패 |
55대 |
경애 |
924 - 927 |
포석정 백제 침공 제사 협의 중 자살 |
56대 |
경순 |
927 - 935 |
견훤추대, 왕건에 항복, 경주事審官 餘生 |
* 한기 7857년(AD. 660년)의 초여름,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 백제군 진영은 계백 장군이 5,000의 결사대를 높고 험한 산을 배경으로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신라는 김유신 장군이 앞장서서 백제군을 단숨에 휘몰아치려는 작전을 펴 50,000 군사를 3대로 나누어 백제 진영을 세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그러나 5,000 대 50,000의 대결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백제군의 완강한 저지선을 뚫지 못하고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네 번, 이로 인해 신라는 군사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침통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진영, 김유신 장군이 병사들의 진영을 순시한다. 병사들 피로와 지친 모습으로 삼삼오오(셋, 넷, 다섯 사람씩) 앉아 있거나 누워있다. 네 번의 패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이 많았고 부상당한 병사들 또한 치료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히 울부짓고 신음하는 처참한 모습이다. 묵묵히 진영을 돌아보던 김유신 장군이 막사로 들어와 힘없이 의자에 앉는다.
* 우장군 김흠춘 : (비장한 목소리로) 반굴을 불러오라!
* 반굴 : (무장을 한 채 아버지 앞에 서서) 부르셨습니까?
* 우장군 김흠춘 : 전황을 타개할 뾰쪽한 수가 없다. 네가 나서거라!
* 반굴 :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 김유신 장군 : (칼로 마루를 치며) 다 소용없소. 이미 네 번이나 실패하지 않았소! 이 싸움은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구료.
* 우장군 김흠춘 : 아닙니다. 지금 이를 타개하지 못하면 전쟁이 어렵게 되고, 기벌포에서 기다리는 소정방과 기약한 날짜를 지키지 못하면 소정방은 이를 빌미삼아 또 무슨 조건을 꺼낼지 모릅니다. 오늘 중으로 계백의 군사를 쳐부수지 못하면 전쟁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 김유신 장군 : 소정방은 우리가 적의 앞머리를 꺾으면 뒤늦게 병력의 손실없이 끼어들어 과실만 주우려는 속셈이요. 모르는 바 아니지만 방법이 없어 답답하오. 섣부른 작전은 오히려 백제군의 사기를 북돋울 뿐.
* 우장군 김흠춘 : (다시 아들 반굴을 돌아보며) 화랑으로써 기개를 보여라!
* 반굴 : 명령대로 충성하겠습니다.
반굴은 막사를 나와서 결사대를 조직한다. 화랑과 낭도를 중심으로 100여명의 기마결사대를 편성하여 백제군 진영으로 쳐들어간다. 김유신 장군과 우장군 김흠춘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신라군의 돌격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백제진영에서 역시 100여명의 기마결사대가 마주쳐온다. 양 진영의 중간에서 마주친 양 결사대가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인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자 신라 기병대는 전멸하였고 승리한 백제군들이 자기 편 부상자와 사상자를 수습하면서 신라군의 부상자들은 가차없이 살해한다. 이를 지켜보는 김흠춘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신라군 병사들이 숨죽여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다.
* 김유신 장군 : (비통한 목소리로 김흠춘 장군을 나무란다. 김흠춘 장군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다.) 부질없는 희생은 오히려 우리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하지 않았던가!
* 좌장군 김품일 : 그렇지 않습니다. 군사의 사기를 살려내는 다른 묘책이 없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며) 관창을 불러라!
* 관창 : (아버지 김품일 장군 앞에 서며) 부르셨습니까?
* 좌장군 김품일 : 보았느냐, 반굴의 죽음을!
* 관창 : 분부만 내리십시오.
* 좌장군 김품일 : 단신으로 가라!
* 관창 : (엎드려 절을 올리며) 만수무강하소서!
관창은 막사를 나오자말자 말을 몰아 백제군 진지로 달려나간다. 신라군 병사들이 숨을 죽이며 보고 있다. 백제군 진영에서는 필마단기(혼자)로 달려오는 장수를 보자 부장 한 사람이 마주 달려 나온다. 두 사람은 양 진영 중간 지점에서 칼과 칼로 승부를 겨룬다. 칼과 칼이 부딛쳐 불꽃이 튄다. 그러나 몇 합, 백제군 부장의 칼이 크게 번득이는가싶더니 신라군 장수가 말에서 떨어져 뒹군다. 백제군 장수가 땅에 떨어져 늘어진 신라군 장수를 가볍게 움켜쥐고 백제군 진영으로 달려간다. 백제군에서 큰 함성이 황산벌을 울린다.
# 백제군 진영
* 부장 : (말에서 내리며 계백 장군 앞에 잡아온 신라군 장수를 내팽개친다.) 다녀왔습니다.
* 계백 장군 : 수고했소, 포로의 투구를 벗겨라! (부장이 나가 포로의 투구를 벗긴다. 앳된 소년의 얼굴이 나온다. 아니, 저 건! 둘러선 장수들이 모두 어이없는 탄성을 지른다. 계백 장군 자리에 앉으며) 아니, 어린애잖소. 성명을 말해 보아라!
* 관창 : 본관은 김유신 대장군의 우장군 김품일 장군의 아들 화랑 관창이다. 포로로 잡힌 부끄러움을 참기 힘들구나.
* 계백 장군 : 나이는 몇이냐?
* 관창 : 열여섯이다.
* 계백 장군 : 열여섯이라면 … (고개를 젓는다. 언뜻 머리 속에 스치는 기억에 몸서리친다.)
* 부장 : (계백장군을 돌아보며) 어찌 할까요?
* 계백 장군 : (안타까운 듯) 어린애잖소, 말에 묶어 돌려보내시오.
# 신라군 진영, 말에 꽁꽁 묶인 관창이 돌아오자 병사들이 마중하여 결박을 풀고 그를 김유신 장군의 막사로 데리고간다.
* 좌장군 김품일 : (관창이 들어서자) 살아서 돌아오려고 했더냐!
* 관창 : (아버지 앞에 엎드려) 죽기로 싸웠으나 힘이 부쳤습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관창, 다시 돌아나가서 곧 바로 무기를 바꿔들고 말에 오른다. 막사를 향해 경례를 하고 백제 진영으로 달려간다.)
#. 백제 진영, 또 장수가 나와 맞는다.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신라군의 장수를 잡아간다.
* 계백 장군 : 포로의 투구를 벗겨라! (계백장군, 깜짝 놀라며) 너는 아까 잡혀왔던 소년장수가 아니냐?
* 관창 : 그렇다. 본관은 신라의 화랑이다. 죽을지언정 항복하지도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 계백 장군 : 안타까운 일이다,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한다.) 목을 치되 정중하게 시신을 모셔 돌려보내라!
* 부장 : 장군! 신라의 간사한 꾀입니다. 고육지계(자기 살을 베는 아픔으로 우리 편 사기를 올리는 꾀)입니다.
* 계백 장군 : 알고 있다. 소년장군의 죽음을 명예롭게 하라! (눈을 지그시 감는다.)
# 계백 장군의 회상, 황산벌 출전의 날 새벽 계백 장군의 집. 계백 장군, 뜰을 거닐고 있다. 한참 뒤에 인기척이 나더니 장군의 부인이 다가선다. 두 사람 마주 보고 선다. 계백 장군의 충혈된 눈을 한참 동안 마주 보고 있던 부인이 조용히 되돌아선다. 한참 동안 더 뜰을 거닐던 계백 장군 동이 터오는 새벽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고는 방안으로 들어가 완전 무장을 하고 마당으로 나온다. 부인이 두 아들과 딸을 데리고 마당 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다. 계백 장군 처연한 얼굴로 부인과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칼을 뽑아 들고 다가선다. 핏발이 선 눈에 불꽃이 일어난다.
* 반굴과 관창의 죽음으로 전장의 분위기는 거꾸로된다. 신라군은 분기탱천(사나운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하여 성난 파도와 같이 백제군을 밀어부쳤다. 중과부적(월등하게 수가 많음)인 처지에 신라군의 사기가 되살아났으므로 제아무리 결사대라 할지라도 백제군은 계백 장군 이하 전군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백제의 싸울아비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5,000 결사대는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백제도 패망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관창은 급찬으로 추증(죽은 다음에 벼슬을 높여줌)되었다.
창녕 진흥왕척경비 수로왕비릉 물고기무늬와 수로왕비 허황옥
* 그림, Daum Blog 인용 인도 남부 아유타국 물고기무늬 파사석탑비각
* 계백 장군에 대한 기록은 3국사기에는 없고 <대동지지>에 <계백의 이름은 승이요 백제 왕가와 같은 성씨다>라는 기록이 있어 계백은 왕가로써 <부여씨>로 추정한다. 백제 16관등의 둘째 서열인 달솔이었다. 달솔은 흑치상지 등과 같이 부여받은 신진 귀족의 최고 관등이다. 의자왕은 내부혁신을 하기 위해 계백, 흑치상지들 신진귀족을 등용하여 보수귀족을 견제했다. 계백 장군의 아버지는 병관이며 좌평(국방장관)이었다. 계백 장군은 의자왕과 동갑으로 문무를 함께 익혔는데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이 사냥대회를 열었을 때 두 사람은 활솜씨가 엇비슷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어느 해 사냥에서 태자(의자왕)가 꿩 3마리, 노루 1마리, 토끼 4마리를 잡았고, 계백은 꿩 2마리, 노루 2마리, 토끼 3마리와 맷돼지 2마리를 잡아 계백이 이겼으나 두 사람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서로 격려했다. 의자왕은 뒤에 <해동증자>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효도하고 무예도 뛰어났다. 늘 중국의 요동과 일본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백제의 청년들은 나이가 17, 8세에 차면 절에 들어가 의무적으로 부처님 말씀을 새기고 무예를 익혔다. 계백은 수덕사에서 수행하였다.
* 백제의 결사대 5,000은 <싸울아비(무절)>다. 계백은 백제 싸울아비의 우두머리였다. 싸울아비의 시작은 고조선의 <천지화랑>과 <선배(선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 마다 나라의 사냥대회를 열어 가장 우수한 사냥꾼을 뽑아 선배로 상을 내리고 선배가 되면 국가에서 먹고 입고 사는 것을 책임졌다. 평상시에는 국가의 공공사업에 동원되었고 국가가 어려움을 당하면 조직을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가 국가 방위를 책임졌다. 전쟁에 나서면 져서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싸울아비에게는 <8선도정신>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칼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쓴다.
② 전쟁에 나가면 최후의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③ 의로운 일에만 칼을 사용하며 함부로 죽이는 일은 안 한다.
④ 도전을 받았을 때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칼을 써야 하며
일단 칼을 들었으면 후회 없는 승패를 가려야 한다.
⑤ 적을 뒤에서 치지 않는다.
⑥ 칼을 들지 않는 자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
⑦ 칼을 내 몸과 같이 아낀다.
⑧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는 스스로 할복하여 그 명예를 지킨다.
* 신라에는 <화랑>이 있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화랑이 있었기에 지탱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화랑으로 뽑히면 글과 무예를 익히고 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가꾸었다. 화랑은 낭도들을 거느렸는데 수백 수천을 거느린 화랑도 있었다. 신라의 화랑제도는 인재 등용의 관문이었고 특히 골품제도가 엄격한 사회에서 평민이 발탁되는 유일한 신분 상승의 등용문이었다. 소문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화랑세기(김대문 지음)> 필사본(역사학자 남당 박창화 1889 - 1962, 일본 궁내성도서관에 사서로 재직시 베낌 주장)이 발견되어 참거짓가 문제가 된 일이 있다. 한기 7797년(AD. 600년) 원광법사가 수 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경북 청도 인근의 가슬사에 있을 때 화랑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서 평생 지닐 계명을 지어달라고 했다. 원광법사는 <불교에는 보살 10계가 있지만 그대들은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므로 세속 5계를 준다>하며 내린 화랑도의 계율이 <세속 5계>다.
① 임금은 충성으로 섬기고(사군이충),
② 어버이에게는 효도를 다 하고(사친이효),
③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교우유신),
④ 전쟁에서는 물러서지 말며(임전무퇴),
⑤ 죽임은 가려서 해야 한다(살생유택).
# 고구려의 멸망과 <선비>
* 당 나라는 한기 7857년(660년) 7월 13일 130,000 대군을 휘몰아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장안에서 출병한다. 당 나라 장군 소정방이 기벌포에 상륙하여 신라 50,000 군사와 합세 단숨에 백제를 함락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고구려를 협공한다. 고구려는 대전했으나 당의 장수 이적에게 크게 패한다. 다시 2개월 뒤에 당군은 설필하력이 44,000 보강병력을 인솔하고 평양성에 도착하여 이적과 합류하여 1개월 간 평양성을 포위한다. 또 4월에는 이들 군사를 총체적으로 재편하여 35군단으로 편성한다. (수 나라가 1,130,000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24개 군단이었음을 감안하면 공격군은 200,000이 훨씬 넘었으리라 짐작한다.) 이에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남산에게 항복문서를 주어 항복하려 했으나 둘째 남건이 성문을 닫아걸고 강력히 저항한다. 그러나 남산의 가장 신임했던 부하 신성이 이적과 내통하여 스스로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고구려 보장왕은 자살에 실패한 남산과 수령 98명을 대동하고 백기를 들고 항복한다. 한기 7865년(AD. 668년) 12월 당 나라는 대대적으로 항복의식을 거행하고 보장왕에게 사평태상백완외동정을, 남산에게는 사재소경, 신성은 은청광록대부, 남생은 우위대장군에 임명하여 회유하였고 남건은 검증으로 유배한다. 곧 당 고종은 5부, 16성, 690,000호였던 고구려 체제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개정하고 평양에 안동도독부를 설치했으나 통치에는 실패했다. 고구려 유민들이 크게 저항운동을 전개했고 복속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어 대중상의 대진국으로 고구려는 다시 계승되었다.
* 고구려는 강력한 통치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한기 7862년(AD. 665년) 사망하자 내분이 일어났다. 동생 연정토와 연개소문의 세 아들 간의 권력 다툼이었는데 이는 연개소문의 강력한 통치에 짓눌려 있었던 호족들이 억눌렸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권쟁탈이었다. 이러한 내부상황에서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직면한 고구려는 대비책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잃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한기 7866년(AD. 669년) 9월 당 나라로 망명하여 벼슬을 얻고 당 나라의 고구려 정벌군의 앞장을 선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12개 성읍 3,543명의 백성들을 끌고 신라에 투항하여 역시 고구려정벌군의 안내를 맡는다.
* 당 나라는 고구려 멸망 뒤 지도층을 당 나라에 인질로 잡아갔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고선지 장군과 이정기 장군이다. 고선지 장군은 중국의 서역 개척에 큰 공헌을 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정기 장군은 고구려가 망한 98년 뒤 산동지방에 유민왕국을 세워 55년 간 통치했다. 장군은 본래 산동지역 15주 치청절도사였는데 한기 7952년(AD.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상관이요 이모의 아들이었던 후희일을 척살하고 <치청국>을 건설하였다. 치청국은 한기 7962년(AD. 765년)에 건국하여 한기 8016년(AD. 819년) 까지 55년 간 군사강국으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이정기 장군이 49세에 한창 당 정벌을 준비하던 중 등창으로 죽었고, 이어 아들 이납이 등극하여 국호를 <제>라 하였다. 제 나라는 양자강 하류의 물류교통의 이점을 확보하여 당 나라 장안의 물자보급을 끊었으므로 장안주민들이 1년 동안 굶주림에 시달렸다. 당 덕종은 제 나라의 세력에 밀려 수도를 장안에서 서북쪽 봉천으로 도망가다싶이 옮겼다. 3대는 이사고로 이납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양주를 점령하였다. 4대에 이사고의 이복동생 이사도가 즉위하여 낙양과 화음을 공략하였다. 한기 8016년(AD. 819년) 도지병마사 유오(중국계)가 이사도와 아들을 암살함으로써 제 나라는 망했다. 당 조정은 3일 동안이나 잔치를 열어 제 나라의 멸망을 축하했으며 고구려계 장수 1,200명을 학살했다. 전거는 <신 ․ 구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구>, <태평어람>이다.
* 학살된 장수 대부분이 <조의>였다. 고구려는 조의라는 무사집단을 국가에서 길렀다. 고조선의 천지화랑에서 비롯한 국가무사다. 조의는 국가행사인 사냥대회에서 가장 우수한 사냥꾼을 가려 <선배>로 임명하고 국가에서 의식주를 책임졌다. 온달장군이 그 한 예다. 선배는 평화시에는 공공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국가 위기에는 수하조직을 모아 출전하여 패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선배 30,000명의 우두머리였다. 유명한 안시성전투에서 앞장서 수 나라 113만 대군을 물리친 <승군>이 <조의>였다.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승군으로 오해한 것이다.
남산골 수막새 단양 진흥왕적성비 영일 냉수리비 임신서기석
도깨비형상기와 * 그림, Daum Blog 인용 (맹세기록)
# 통일신라의 정치, 사회, 문화
* 골품제도
왕위를 이어가는 성골은 인물이 고갈되었고, 지도층이었던 진골은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되었으므로 통일신라 말기에는 골품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신귀족세력이 등장하였는데 호족들이 지방의 행정과 군사력, 재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왕권이 약화되어 왕권을 복원하려는 의도였다. 기존권위를 부정하는 국토의 지방중심 재편을 주장하고 풍수지리설로 사상적 배경을 삼아 진골 16등급을 폐지하고 반귀족적 6두품을 신설하여 정치적으로 신귀족과 결합하였는데 그 배경은 유교정치이념의 정착이었다.
* 중앙정치조직과 지방행정조직
신문왕 때 공장부와 예작부를 설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으므로 집사부와 시중의 위상이 높았다. 왕권화과정에서 유교정치를 이념으로 도입했는데 귀족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학에 견식이 뛰어난 6두품 집단이 국왕과 손을 잡고 귀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지방행정조직은 신문왕 때 9주 5소경의 지방행정제도 완성했는데 9주를 편성하여 민족융합책으로 관리를 골고루 등용하였으며, 호족의 발호를 제어하기 위하여 상수리제도라는 인질제도를 실시하였다. 천민을 위한 향부곡제도를 설치했다.
* 군사조직
지방군은 10정으로 9주에 1정씩 배치하였고 수도방위군이 있었다. 중앙군은 9서당으로 편제하고 신라, 백제, 고구려인을 혼합 편성하여 민족융합을 꾀하였다. 중앙군당은 9서당으로 유민을 참여시켰는데 이는 견제와 회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 토지제도와 경제체제
귀족녹읍(토지에 대한 조세공납과 노동력 수취권을 귀족에 위임하는 제도)을 폐지하고 관료전(조세와 공물 수취권만 부여하는 제도)을 지급하였다. 융성의 절정기였던 성덕왕은 정전과 민전제도를 설치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함으로써 귀족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경덕왕 때 귀족들의 반발로 다시 녹읍을 부활했다. 이는 왕권의 약화를 뜻한다. 경제체제는 귀족중심으로 귀족들이 식읍과 녹읍 그리고 목장을 소유했다. <신라장적(경덕왕 755년의 기록을 1933년 일본에서 발견)>을 만들어 노동력과 생산력을 철저히 관리하였는데 정창원(청주 부근) 4개촌의 생산력을 3년 마다 기록했다. 촌주가 작성하였으며 내용은 인구를 연령별, 남녀별 6등급으로 나누고, 호수는 9등급으로 분류했다. 전답, 노비수, 뽕나무, 잣나무, 우마의 수를 기록한 문서다.
* 문화, 종교, 예술
독서삼품과를 계획하여 대물림의 관료체제를 개선함으로써 왕권강화를 시도했으나 진골의 반대로 실시하지 못했다. 자주적 한문학을 개발하였으며 김대문과 6두품 출신의 최치원 같은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종교는 불교로써 5교(교종)는 주로 중앙귀족의 신앙으로 이를 통해 조형미술 발달을 가져왔으며 전통과 권위의식을 강조했다. 9산(선종)은 견성오도를 목적으로 지방호족들이 선호했으며 교종에 대항하는 신앙이었다. 화엄종은 의상이 당 나라에서 돌아와 부석사에서 개설했다. 화엄사상을 주체로 하였으며 전제왕권 확립에 기여했다. 원효대사는 법성종을 창시하여 화쟁사상을 주체화하였고 불교사상의 체계화에 기여했다. 또 그는 종파 간 융합을 시도했으며 대중화를 꿈꾸며 정토사상을 추구했다. 예술은 안압지 축조에서 보듯이 조경예술이 뛰어났으며 조화된 자연미를 추구했다.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금동약사여래상이 있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5/22화 : 3. 남북국시대 (3/3) - 후 3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묘상苗床의 각축角逐, 후後 3국國
(삽화 : 미륵彌勒신앙과 풍수지리)
* 그림, Daum Blog 인용
* 나오는 사람과 참고자료 - 견훤(진훤), 궁예, 왕건, 경순왕, 도선국사
* 후 3국은 대한역사의 과도기다. 역사학자는 이런 시대를 <묘상苗床의 시기>라고 하기도 한다. 한 나라 또는 한 시대가 스러지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묘판에서 싹이 트는 시대라는 뜻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그 유민들은 강력한 저항운동을 벌인다. 고구려를 이어받은 대조영의 대진국,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가 일어난다. 신라왕조 말기에는 국정이 문란하여 통치력을 잃었으므로 사방에서 도적들이 횡행하고 사회가 혼란하였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 부흥의 명분을 세워 영웅들이 일어선다.
이 시대의 특징은 우리 고유의 신앙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활발하게 정치적으로 발현되는 일이다. 왕조가 멸망하자 현실적인 사회의 구심점이나 이상이 사라졌으므로 사회는 미륵신앙과 풍수지리의 등 신앙으로 염원을 승화한다. 이에 도참설은 왕조말기의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는 명분 아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또 새로운 하나의 정치적 기반을 일궈낸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부처라고 했다. 신앙은 대물린 가난과 왕실을 비롯한 관리들의 횡포 그리고 착취에 시달린 백성과 민중의 바램을 등에 업고 이상국가 실현을 꾀함
* 견훤의 탄생과 왕건과 도선국사의 이야기는 설화說話다. 특히 도선국사는 나이 들어 전남 광양의 옥룡사에서 거의 두문불출杜門不出(문 밖을 나가지 않음)하였고, 도선국사의 스승이었다는 중국의 일행스님은 당 나라 중기中期의 스님으로 도선국사의 출생 100여 년 전에 입적入寂(돌아가심)하였으므로 도선국사를 직접 지도하기는 불가능하다. 또 왕건이 태어난 해가 한기 8074년(AD. 877년)이므로 왕건이 16세 때 도선국사가 스승이 되어 가르쳤다는 한기 8090년(AD. 893년)은 도선국사가 입적하기 불과 4년 전이다. 게다가 스님은 한기 8093년(AD. 866년)에 지리산 자락 옥룡사에서 산문山門(불경강의)을 열고 입적할 때까지 산문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음
* 후 3국 역사연대표
년도 |
후백제 |
후고구려 |
통일신라 |
*AD. 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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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 상주 가은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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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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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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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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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선, 왕륭에게 명년에 3한 통일 인물 출현 예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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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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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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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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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자개, 상주 장악, 장군 호칭, 수군 견훤 독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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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원종, 애노의 난 |
* 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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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죽주 도둑 기훤 투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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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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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 무진주 (전남 광주) 장악 |
* 궁예, 북원(원주) 양길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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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3 |
왕 호칭 |
* 도선, 왕건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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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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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 시무10조 진상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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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명주(강릉)에서 장군 호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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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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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륭 왕건 부자 귀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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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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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성여왕 선위 |
* 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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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송악성 천도, 팔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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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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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길, 궁예 공격 대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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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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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 면직 해인사 은둔 |
* 9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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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 완산 도읍, (후)백제 건국 |
* 궁예 경기 남부 충북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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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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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금성군 남쪽 10여개 성 공격, 대야성 공격 실패 |
* 궁예 왕 호칭, 후고구려 건국, 영주 부석사 신라왕 화상 칼로 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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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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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백관 설치, 국호 마진, 연호 무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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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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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비오듯 쏟아짐 |
* 90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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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철원 천도 연호 성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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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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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에서 혜성 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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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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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왕건 해군대장 나주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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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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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국호 태봉, 연호 수덕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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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공왕 정사문란, 대신 후궁 척살 |
*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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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왕건 파진찬 겸 시중 임명, 수군 통솔 좌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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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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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역모죄, 한림랑 최응 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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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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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부인과 두 아들 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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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6.8 |
*신라의 대야성 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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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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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명왕 즉위 |
* 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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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왕 추대, 궁예 변복 도망, 백성에게 잡혀 살해, 왕건 국호 고려 연호 천수, 아자개 귀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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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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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송악 천도, 관제 정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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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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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 야율아보기, 대진국 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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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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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국 장군신덕 등 500인 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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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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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당에 사신 조공, |
* 9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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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국 멸망 |
왕건 경명왕 붕어 |
* 9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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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신라 왕경 침 입 경애왕 자살 경순왕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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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 사신 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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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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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동쪽 연해 10여성 항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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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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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신라 왕도 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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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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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국 세자 대광현, 백성 수만 명과 귀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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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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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검 형제 금강 척살, 견훤 금산사 유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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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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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 나주 탈출 투항, 상부 남궁 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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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순왕 투항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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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 신검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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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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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순왕 백관과 투항, 신라 멸망 |
* 9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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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검 항복, 후백제 멸망 |
* 일선군(경북 선산)에서 신검과 전투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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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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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국 박승 등 3,000명귀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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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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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요십조 대광 박술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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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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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붕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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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백화정과 평양 대동문 고조선의 3족오 일본 교토 정교사
고란사 * 그림, Daum Blog 인용 백제 아미타 8대보살도
# 후백제 견훤(진훤)의 출생설화
* 옛날 광주(광역시)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다. 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용모가 곱고 자태가 뛰어났으며 행실이 바르고 단정했다. 딸이 성숙한 나이에 접어들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밤이면 전혀 모르는 사내가 딸의 침실로 찾아드는 일이었다. 용모가 빼어나게 준수하고 보랏빛 옷을 잘 차려 입은 사내는 날마다 밤에 찾아왔다. 그리고 새벽이면 사라졌다. 딸은 이러한 일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으나 사내를 거절하지 못했다. 너무나 준수하고 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많은 날들이 계속되자 딸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에게 고민을 이야기 하고 신분을 밝혀주면 부모에게 말씀드려서 혼인을 하겠다고 했으나 여전히 사내는 이렇다 저렇다 단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만나면서 지금까지 전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딸은 사내에게 자기는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내를 따르겠다는 약속을 하고 남몰래 저지르는 이러한 일이 계속될 수 없음을 몇 번이나 정성들여 말했다. 딸의 간곡한 호소에도 사내는 묵묵부답(말이 없음)이었다. 딸은 마음을 졸이다가 병이 되었다. 딸의 행동이 예전 같지 않고 날이 갈수록 병색이 짙어가는 딸의 정황을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가 딸에게 캐물었으나 딸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가, 어디가 아픈 거냐?”
“아니예요.”
“어디 아픈 데가 있거든 얘기하려무나. 얼굴빛도 좋지 않고 …. ”
“실은 …. ”
딸은 끝까지 비밀을 혼자 지키려고 했으나 자기 힘으로는 풀 길도 없고 언제까지 감출 수도 없는 일이라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처음과 끝)을 말씀드렸다. 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귀신의 조화란 말인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아버지가 딸에게 일렀다.
“오늘 밤에는 몰래 바늘에 실을 꿰어 옷섶에 꽂아두거라.”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사내가 잠든 사이에 옷깃에 바늘을 꽂았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와 딸은 실이 풀려가는 길을 따라갔다. 실은 꼬불꼬불 골목길을 지나 어느 집 담장 밑으로 들어갔다. 담장 밑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실이 그 구멍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구멍을 파 보았더니 깊은 구멍 속에 커다란 자주색 지렁이가 몸에 바늘이 꽂힌 체 죽어 있었다. 처녀는 열 달 뒤에 아들을 낳았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다.
견훤은,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아자개가 군사를 일으켜 난을 수습하고 장군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무진주(전남 광주)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나주지방 수군의 비장(고을 수령 다음의 제 2인자)이었던 아들 견훤이 아자개의 기반을 토대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 후 견훤은 신라와 전쟁에서 승승장구(싸울 때마다 이김)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고 백제를 계승한 <후백제>라 이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되어 통치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금강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결정하자 첫째 부인의 장자인 신검이 반발하여 양검, 용검 형제와 함께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전북)에 가두었다. 견훤은 3개월 뒤 딸과 사위와 더불어 서해안으로 탈출하였는데 은밀히 견훤의 탈출을 도운 고려는 상부(아버지)의 지위를 주고 남궁을 견훤의 살림집으로 내주었으며 양주를 식읍(다스리는 땅)으로 주어 부족함이 없이 살도록 배려하였다. 신검은 이후에 신라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으나 아버지 견훤과 왕건이 앞장 선 일선군(선산)싸움에서 무참하게 진 뒤 고려에 항복하였다.
# 후고구려 궁예의 출생설화
* 궁예는 신라 왕가의 후궁에서 태어난 왕자였다. 신라 말기에 정국이 매우 혼란스러워 정권싸움이 자심하였으므로 궁예는 정쟁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갔는데 탈출할 때 알려져 쫒기다가 성벽에서 내던져졌다. 그러나 밑에서 받는 사람의 실수로 왼쪽 눈이 찔려 애꾸가 되었다. 궁예는 궁중에서 도망한 다음 절에서 이름 없는 불목하니(부엌에서 불을 지피는 머슴)로 자랐다. 선배와 동료들에게 온갖 시달림을 당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매우 반항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절의 법도와 스님의 계율을 지켜 수도하는 것 보다는 칼 쓰기, 활쏘기를 즐기고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 무술을 익히며 스님으로써는 망나니에 가까웠다. 그래서 스승에게도 늘 꾸중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이 궁예를 불렀다.
“궁예야, 너는 아무래도 산을 내려가는 것이 옳을듯하구나.”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아니다. 네 잘못을 꾸중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은 너에게 네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마.”
스승은 뜻밖의 비밀을 들려주었다. 궁예가 신라왕의 왕자라는 것과 궁예가 궁중에서 탈출할 때 일어난 사건을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궁예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절을 내려와 죽주의 도둑무리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의심이 많고 애꾸인 궁예를 푸대접하였으므로 다시 산을 나와 북원(원주)의 양길의 무리에 합세하였다. 양길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궁예는 이어 부두목이 되었다. 궁예는 예사 도둑이 아니었다. 궁예는 자기를 축출한 신라왕가를 토벌하여 왕자의 지위를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상을 지닌 궁예는 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므로 뜻을 세워 일어서자말자 곧장 3,500명의 대 부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궁예는 북원(원주)에서 명주(강릉)로 쳐들어가 기반을 잡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불렀다.
궁예는 민심을 얻었으므로 백성들이 따르고 지방 호족들과 좋은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송악의 왕륭과 왕건 부자가 귀순한 일은 궁예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왕륭은 궁예에게 귀순하며 왕건을 중요하게 쓰도록 권유했고 왕건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궁예의 뜻에 보답했다. 그러나 나라의 힘이 굳건해지고 나라의 밑받침이 쌓이는 시기에 궁예는 의심이 많아지고 주위를 믿지 못하는 성격이 나타났다. 왕후 강씨를 의심하여 불에 달군 쇠부지깽이로 국문(심문)하여 죽였으며 이어 강씨와 자기의 소생인 두 왕자도 죽였다. 신하들도 분별없이 죽이고 물리쳤으므로 불안한 신하들이 전전긍긍(어쩔 줄 몰라)하였다. 자신을 미륵의 화신이라 스스로 추대하고 부처님이 되었으며 불경을 지어 반포하였다. 관심법을 자행하여 사람의 속셈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호언하며 무수한 사람들이 쫓겨나거나 죽었다. 승려 석총은 당대의 고승이었는데 궁예가 지은 불경을 쓰레기라고 비판했다가 궁예가 내리친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왕건도 몇 차례 위기를 넘겼는데 반역을 도모한 혐의로 불려와 사경에 처했을 때 한림랑 최응이 임기응변으로 구해 가까스로 연명한 일도 있었고 몇 번이나 좌천되고 추천되는 반복을 거듭했다. 신하들은 불안에 떨고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이에 마군장군 신숭겸, 홍유, 복사귀, 배현경들이 모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혁명을 모의했다. 그러나 왕건은 사양했다. 왕건의 집으로 찾아온 그들은 동석한 왕건의 부인에게 술안주로 하게 텃밭의 오이를 가져다달라고 자리를 피하게 하고 왕건에게 혁명세력의 추대를 승락할 것을 모두가 무릎을 꿇어 간청했다. 그래도 왕건은 군왕과 신하의 의리를 들어 거절했다. 이를 미리 간파하고 옆방에서 엿듣고 있었던 부인이 왕건의 갑옷을 가지고 와서 왕건에게 입혔다. 비로소 왕건이 승낙하고 혁명은 성공하여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궁예는 모반의 소식을 듣자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왕건이 그럴 리 없다고 반신반의하였으나 결국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왕의 옷을 벗고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궁성을 탈출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맞아죽었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뒤 영주 부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신라왕의 화상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분을 참지 못하여 화상을 칼로 내려쳤다고 한다. 신라에 대한 반감이었다.
# 고려 왕건의 출생과 도선국사 설화
*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개성의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림을 차렸다. 어느 날 도선국사가 왕륭의 집 앞을 지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허, 기장(쌀, 보리, 콩, 조와 더불어 5곡의 하나)을 심을 터에 어찌 삼(삼베의 원료)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한씨가 남편에게 전했고 왕륭은 도선국사를 쫓아가 동구 밖에서 만났다. 공손히 예를 올려 삼가 뵈옵기를 청하니 도선국사가 왕륭에게 말했다.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이치)에 부합하여 이 집에서 명년에 슬기로운 인물이 태어나리니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봉투를 만들어 겉에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3한을 통일할 주인 대원군자를 당신에게 드리노라>라고 써주었다. 왕륭은 도선국사를 모셔가려고 몇 번이나 머물기를 간청하였으나 도선국사는 곧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기다리라고 하며 떠났다. 왕륭은 봉투를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도선국사가 말한 대로 집을 지었더니 예언대로 다음 해에 왕건이 태어났고 스님은 약속대로 왕건이 16세 되던 해에 다시 찾아와 2년 동안 왕건의 스승이 되어 가르쳤다.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그 어머니가 빨래를 하다가 시냇물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낳았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시조다. 전국 방방곡곡에 도선국사의 전설이 흩어져있다. 도참설의 창시자 중국 당 나라 일행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조선시대 초 무학대사가 조선의 새 궁궐터를 물색하던 중 한양(서울)의 삼각산에 올랐는데 <무학, 여기에 잘못 오르다>라는 도선국사의 비기(비밀로 전해 내려온 비석)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무학대사가 삼각산 만경대(국망봉)에 올랐을 때 궁궐터를 왕십리 부근에 잡으려고 했는데 정확한 자리가 마땅치 않아 머리를 싸매고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던 때, 어느 날 소를 타고 가는 한 노인과 마주쳤다. 무심코 지나치는데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이 놈 소야, 미련하기가 무학이 같은 놈이로고. 왜 바른 길을 두고 굽은 길로 가느냐!>고 소를 채찍질했다. 눈이 번쩍 뜨인 무학대사는 노인에게 정중하게 가르침을 빌었고 노인은 여기서 10리를 더 가라고 했다 한다. 노인은 무학대사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도선국사의 현신(나타남)이었으며, 서울의 왕십리는 여기서 생겨났다.
고구려는 한국사 풍수지리 비조鼻祖 도선국사와 풍수지리개념도, 지구촌
주은래(오른쪽) 방담 풍수의 한국 위치 * 그림, Daum Blog 인용
# 통일신라의 멸망
* 말기로 내려오면서 통일신라는 골품제도가 문란해지고 왕위쟁탈이 자심하여 중앙집권력, 왕권이 약화되었다. 김현창은 헌덕왕 14년 한기 8019년(AD. 822년) 난을 일으켜 <장안국>을 건국하고 연호를 정운이라고 했다. 36대 혜공왕 때는 <대공의 난>이 있었고, 지방세력들이 성장하여 호족세력으로 대두되었다. 그 예로 나주에서는 해상세력이 대두했고 군소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국가정신은 약화되고 화랑도는 개인주의가 팽배하였으며 사치와 향락풍조가 만연하였다. 농민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진성여왕 때는 농민들이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 한기 8084년(AD. 887년)부터 진성여왕의 문란한 생활, 대야주의 은자거인 사건, 상주의 원종와 애노의 난, 평주의 대호족 박지윤 가문 궁예에게 귀순, 왕륭 왕건 부자 귀순, 최치원 면직, 견훤의 후백제 건국, 공주장군 홍기 궁예에게 귀순, 별이 비오듯이 떨어짐, 강주 장군 윤응 궁예 귀순, 명주 장군 김순식 귀순, 진보성주 홍술 귀순, 견훤이 신라 왕경에 침입 경애왕 자살 경순왕 보위에 올림, 동쪽 110여성 항복 등 끊임없는 내우외한과 후백제의 침공으로 통일신라는 국운의 쇄락을 막을 길이 없어 환란 때마다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드디어 한기 8132년(AD. 935년) 10월, 경순왕이 김봉휴를 보내 고려에 투항을 상의했다가 그 해 11월 백관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왕건은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고 딸 낙랑공주를 주었으며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 잡간 억렴의 딸과 혼인했다.
# 미륵신앙과 풍수지리 그리고 선기옥형
* 미륵신앙은 백성들의 현실지향 이상국가의 염원이다. 미륵부처님의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특히 세기말이나 국가 쇠망기에 집권자의 힘이 쇠퇴하고 지도층의 생활이 퇴폐적이고 부패가 만연되어 사회상이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현실을 도피하려는 미래지향적 이상이 두드러진다. 고대의 지도자들은 신화적 인물이었으나 근세의 지도자는 영향력이 큰 인간이었으므로 신화로 각색할 수도 없었고 부처라든지 미륵임을 구체적으로 말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궁예는 오랫동안 절에서 터득한 경륜으로 스스로 산 부처가 되었다. 법회를 열고 불경을 집필하며 국가통치체제의 기치를 불교적 이상국가로 내걸었다. 아들들의 이름도 보살로 지었다. 관심법(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일)이라는 심리적세계를 끌어들여 통치를 신격화하려고 했다. 이런 일은 종교에서는 가능하지만 국가경영자로써는 합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는 왕조말기의 행태로 부패와 부조리가 발호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륵신앙과 풍수지리설 등 이상주의가 널리 퍼졌다.
도선국사는 풍수지리의 비조(시조)다. 중국의 일행 스님에게 사사(배움)를 했다고 하나 역사연대로 봐서는 믿기 어렵고 그 사상적 후계를 이었다고 본다. 도선국사는 한국 방방곡곡에 도참설을 심어 오늘날까지도 도선국사의 행적이 여기저기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기론에 의하면 우주 삼라만상이 우주의 운행질서의 이치로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그리며 돌아가는데 자연 안의 하나인 인간도 우주질서의 운행에 따라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래서 사주팔자나 풍수지리가 인간의 삶에 대입된다. 여기에 미륵신앙이 개입한다.
* 이와 같은 민속신앙적 토대에서 혼천의라고 하는 선기옥형은 이상주의적 과학의 산물이다. 우주천체를 선기옥형으로 모사하여 만들어놓고 있지만 천체운행의 요체는 심안, 마음이었다. 모사해놓은 선기옥형이 오히려 상징적이었던 것이다. 요즘 경주의 첨성대가 실제 천문관측대가 아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견해가 있다. 10미터 남짓한 단을 쌓고 천문을 관찰하는 일은 과학적 의미가 없다. 높이 올라가 하늘을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면 더 높은 구릉지대나 산이 있었지 않은가? 마니산의 참성단은 산 정상의 제단이다. 하늘과 소통하는 장소는 대부분 산 정상이었다. 첨성대는 평지제단이었을 것이다. 첨성대는 선기옥형을 설치하여 천체 운행을 관찰하고 하늘에 제사도 지내는 천체운행 관측의 제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혼천의는 천체운행의 원리를 본떠서 만든 천문관측기로써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여 생활과 직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망원경이 없었던 시대에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일은 누적된 기록과 천체 변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주술적이거나 초인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심안의 세계와 결부하여 판단하는 일이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이 일을 대개 신관이 맡았는데 고려시대에서는 서운관, 조선시대에서는 관상감의 관리들이 맡았다. 선기옥형(혼천의)은 한국에 세 개가 남아있다. 이를 계승하여 복원하려는 이들이 있다. 10,000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천지화랑(선비)의 후예들이다. 단순한 선기옥형 실체의 복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을 영적인 세계, 정신계발이다.
3신할미, 탄생설화 3신각 비파형 동검과 유물 청 나라 서태후
생명의 꽃 * 그림, Daum Blog 인용 (조선인설)
# 전남 장성의 고봉학술원 애일당, 선기옥형을 복원하려는 수도자들에게 하는 운곡선생의 정기강의
(전략) 한 예를 들어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자신의 출생이 신라의 왕자였다는 것을 안 뒤에 삶이 달라집니다. 망나니생활에서 벗어나 웅대한 이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산 부처로, 미륵의 환생으로 이상국가의 실현을 펼치려고 했습니다. 제정분리시대에서 정치적 판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궁예는 국가를 창업할 수 있는 자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를 꿰뚫어 본 사람이 한림랑 최응입니다. 최응은 소년천재로 약관에 발탁되어 궁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궁예는 최응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습니다. 궁 안에서 살게 하고 국가 크고 작은 일로부터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모두 최응에게 물어서 결정하였습니다. 최응이 발탁되었을 때 그는 궁예의 이상국가 실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최응은 몇 번이나 벗어나려고 했지만 궁예에게 매인 인연의 사슬은 너무 질겨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응이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왕건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왕건도 궁예에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결정적인 고비는 왕건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참소(고발)였습니다. 최응이 이를 먼저 눈치채고 왕건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고지식한 왕건은 최응의 충고를 듣지 않고 궁예에게 붙들려왔습니다. 궁예는 관심법을 들먹이며 왕건의 반역을 다그쳤습니다.
* 궁예 : (불 같이 격노하여 석장을 궁궐 바닥에 내리치며) 내 그대를 형제로 부르며 내 몸처럼 신임했거늘 반역을 꾀하다니 ….
* 왕건 : 폐하! 신은 결코 반역을 한 일이 없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 궁예 : (석장을 왕건의 머리 위에 내리칠 듯이 들이대며) 짐이 관심법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 왕건 : (엎드려 마루에 이마를 찧으며) 폐하! 어찌 신이 폐하에게 반역을 도모하리까? 폐하! 제 아비를 상기하소서!
* 궁예 : (한층 누구러지며) 네 아비 왕륭이 내 목숨을 구해준 일은 잊지 않는다. 그러나 네 배반은 용서할 수 없다.
* 왕건 : 폐하! 목숨을 버리라면 버리겠나이다. 그러나 신의 결백은 믿어주시옵소서.
* 궁예 : 그래도 이 놈이! 내 관심법을 우습게 보누만.
* 한림랑 최응 : (곁에 부복하여 있다가 들고 있던 서책을 왕건의 발 앞에 떨뜨린다. 서책을 줍는 척 하며 왕건에게 눈짓을 하며) 장군, 폐하의 관심법은 신통미묘합니다. 자복하시지요. 이미 폐하께서 다 알고 말씀하시는 것이니 …. 자복하고 목숨을 비십시오.
* 왕건 : (최응을 한 번 쳐다보고 작심한 듯 그러나 난감한 표정으로) 폐하! 죽을 죄를 졌습니다. 반역을 꾀했나이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궁예는 왕건이 자복하자 자신의 신통한 관심법에 깊이 빠져들어 자만심이 더욱 커지고 자칫 죽을뻔한 왕건은 최응의 기지로 살아났습니다. 한림랑 최응은 선비였습니다. 선기옥형으로 천문을 통달하여 천리를 꿰뚫고 있어 왕건의 고려 건국을 예견하고 있었으나 궁예에게 의탁한 몸이었고 궁예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으므로 끝까지 인연을 버리지 못하였지요. 그래서 결국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추대되자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왕건이 백방으로 그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 최응은 궁예의 비극적인 삶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궁예의 부름에 따라나섰고 왕건을 살려냈으나 궁예도 버리지 않고 한 시대를 마무리 한 것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예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선기옥형의 설계도가 완성되었으니 재료를 마름질 하는 일이 시작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6/22화 : 고려시대>
격동하는 사회, 고려
(삽화 :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반란)
고구려 계승 고려의 전성기 강역과 여진정벌도
중국 동북부, 왜 통치 강역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나오는 사람과 참고자료
* 고려는 고려인삼과 고려청자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청자의 신비한 색조는 맑은 하늘빛 비취색이다. 오늘날도 재현하기 어려운 이 빛깔을 고려 백성, 그러니까 민중의 염원이 서린 빛깔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유난히 민란이 많았다. 고려역사를 민란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천민들까지도 반란을 일으켰다. 말하는 짐승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섰던 것임
* Corea(꼬레아)는 고려시대 이후 불리운 한국 이름이다. 유럽권이나 스페인어권에서 사용했던 고려의 이름이 한국의 범세계적인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를 물려받은 Korea가 대한민국의 공식명칭인데 젊은이들은 Corea를 고집한다. Korea가 일제시대의 잔재殘滓로써 한국명을 영어 알파벧 C(Corea)로 시작하면 일본의 J(Japan)가 뒤에 오기 때문에 일본제국 식민지통치 때 일부러 K(Korea)로 시작하는 명칭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대한민국의 호칭은 Corea였는데 언제부턴가 Korea로 바뀌었다. 국호를 함부로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젊은이들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면 일제청산과 민족정기 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 덧붙여 <한국>이라는 명칭은 일본제국이 임나고를 조작하면서 만들어냈다.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의 준말이라고 여겨지나 <한국>은 준말일 수 없다. <한>은 순수한 우리 말의 <한>인데 한자를 빌어 쓰면서 <한韓, 桓>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대大한>은 중국이 사용하는 <대청국大淸國>이나 <대당국大唐國> 같은 문법적 맥락이다. 해방 이전까지는 <대한>을 사용하였다 (Daum의 블로그 ram2dam 인용). 애국가의 <대한사람>이나 <대한독립만세!>를 보면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호를 논의하여 투표로 결정했다. 그러나 준말을 <한국>으로 공식화하지는 않았으니 고려해야 한다.
* 신라 천년은 역사의 일어남과 스러짐에 의한 왕조의 멸망이라고 보더라도 궁예의 한 장군에 불과했던 왕건이 일어서고, 웅대한 이상을 품고 백제의 옛 땅을 거의 장악하여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늘을 찌를 듯 한 기상)의 기세로 3한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었던 견훤은 국가 건설의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당대에 몰락한다. 이는 역사적 필연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건국자로써 제왕적 기반의 문제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 3국은 왕건의 고려 건국을 위한 역사적 과도기였고 묘상苗床(새싹을 키우는 못자리)의 시기였다. 왕건은 자중지란自中之亂(안에서 스스로 무너짐)으로 무너져 내린 견훤의 후백제를 일산(선산)전투의 승리로 복속시키고 신라마저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스스로 항복 귀순하여 왕도王道가 열린다. 그러나 왕권이 취약하여 왕가와 귀족 그리고 유력한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혼인동맹을 하였는데 후궁이 무려 29명이었고 왕자들이 25명 공주가 9명이었다. 또한 지도층의 규합만으로 창업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추스르려고 민심을 다독이는 정책을 같이 편다. 후백제는 아자개를 앞장세워 전쟁으로 합병했으나 신라는 스스로 귀순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민심을 얻으려고 스스로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수많은 내부의 반란을 겪었음
공민왕의 김은진 화백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상 루벤스의
천산대렵도 인삼 그림 * 그림, Daum Blog 인용 개성상인
* 고려역사연대표
1대 태조 한기 8115년(AD. 918년) - 36대 공양왕 한기 8589년(AD. 1392년),
34대 473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주요역사 |
1대 |
태조 |
AD. 918-943 |
궁예 의탁, 장군들의 혁명 왕건 왕권 획득 |
2대 |
혜종 |
943-945 |
태조의 장자 |
3대 |
정종 |
945-949 |
왕규의 난 평정, 불교 숭상, 서경 천도 계획 |
4대 |
광종 |
949-975 |
노비안검법, 과거제, 공복제도 실시 |
5대 |
경종 |
975-981 |
전시과(관리 안정의 새로운 토지제도) 제정 |
6대 |
성종 |
981-997 |
유교 수용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
7대 |
목종 |
997-1009 |
전시과 개정, 학문 장려, 강조에게 피살 |
8대 |
현종 |
1009-1031 |
강조 옹립, 거란 침입 혼란 강화, 문화 발전 |
9대 |
덕종 |
1031-1034 |
거란 대비 천리장성 축조, 국사 편찬 완성 |
10대 |
정종 |
1034-1046 |
천리장성 축조, 적자 상속 적서 구별 법제화 |
11대 |
문종 |
1046-1083 |
율령 관제 병제 완비, 학문 열성 서예 능함 |
12대 |
순종 |
1083 |
문종 장자, 즉위 해 사망 |
13대 |
선종 |
1083-1094 |
동생 대각국사 의천, 문화 융성기 |
14대 |
헌종 |
1094-1095 |
이자의의 난 평정, 병으로 숙부 양위 |
15대 |
숙종 |
1095-1105 |
해동통보 주조 화폐제도, 황금시대 전개 |
16대 |
예종 |
1105-1122 |
학교 설립 학문 진흥 |
17대 |
인종 |
1122-1146 |
이자겸과 묘청의 난, 김부식 3국사기 편찬 |
18대 |
의종 |
1146-1170 |
정중부의 난 폐위 |
19대 |
명종 |
1170-1197 |
정중부 추대 등극, 최충헌 폐위 |
20대 |
신종 |
1197-1204 |
최충헌 옹립 등극 |
21대 |
희종 |
1204-1211 |
최충헌 제거 실패 폐위 |
22대 |
강종 |
1211-1213 |
최충헌 추대 등극 |
23대 |
고종 |
1213-1259 |
몽고 침입 강화도 천도, 8만대장경 간행 |
24대 |
원종 |
1259-1274 |
삼전도 굴욕, 임연․3별초 난 |
25대 |
충렬왕 |
1274-1308 |
원에 굴복, 왕명 충 자, 왕비 원 제국공주 |
26대 |
충선왕 |
1308-1313 |
등극 10년 만에 원나라에서 국정, 학문 교류 |
27대 |
충숙왕 |
1313-1330 |
정사 염증 양위, 2년 만에 복위 |
28대 |
충혜왕 |
1330-1344 |
정사 혼란, 원 나라 귀양 가던 중 병사 |
29대 |
충목왕 |
1344-1348 |
원 나라 볼모, 모 덕녕공주 섭정 |
30대 |
충정왕 |
1348-1351 |
외척 발호 정치 문란, 왜구 침입 |
31대 |
공민왕 |
1351-1374 |
원나라 배척 기씨 제거, 국토 수복, 노국공주 |
32대 |
우왕 |
1374-1388 |
10세 즉위, 위화도 회군 이성계 폐위 |
33대 |
창왕 |
1388-1389 |
이성계 세움, 1년 만에 강화도 축출, 시해 |
34대 |
공양왕 |
1389-1392 |
이성계 세움, 실권 탈취 폐위, 고려 멸망 |
직지심경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고려청자
1377년 인쇄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 그림, Daum Blog 인용
# 고려, 반란과 민란의 역사
• 요 나라(거란)의 침입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역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대진국 애왕 16년 한기 8119년(AD. 922년)에 요 나라를 건국하였고, 한기 8123년(AD. 926년) 요 나라의 침략으로 대진국은 멸망하였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 옛 땅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다. 대진국 유민을 같은 민족이라며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요 나라는, 남으로 경계를 한 고려의 북진정책과 동쪽으로 국경인 중국 송 나라와 고려의 돈독한 외교적 관계 그리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과 연합 등 요 나라에게는 국경을 맞댄 세 방면의 국제적 고립과 위협이었다. 그래서 요 나라(성종 12년, AD. 993년)는 먼저 정안국을 쳐서 복속하고 고려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압록강 유역에 3개 성을 쌓았다. 그리고 고려의 친송정책에 위협을 느낀 요 나라가 한기 8190년(AD. 993년), 한기 8207년(AD. 1010년), 한기 8215년(AD. 1018년) 고려 현종 9년에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 1차 침입 - 한기 8190년(AD. 993년) 10월에 요 나라 소손녕이 고려의 박양유 장군, 서희 장군과 맞부딛쳤는데 고려는 봉산군을 빼앗기자 청화사를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다. 소손녕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라는 할지론을 요구했다. 조정의 중의는 할지론을 선택하였으나 서희 장군과 이지백이 항전을 주장함으로 화의가 결렬되어 소손녕이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서희 장군의 담판을 받아들였다. 소손녕은 서희 장군에게 <고려는 본래 신라에서 일어났는데 어찌하여 고구려 땅을 침식하는가 라며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고, 그리고 송 나라와는 외교를 하면서 이웃 나라인 요 나라는 왜 소외시키는가?> 하고 추궁했다. 서희 장군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요 나라의 동경도 옛 고구려의 영토이므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맞대응 했다. 요 나라가 세 번째로 트집을 잡은 압록강 유역 방위에 대해 <압록강 유역에 성을 구축한 것은 고려와 요 나라 사이에 여진이 있어 이를 견제를 하자는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유명한 <서희 장군의 담판>이다. 이렇게 담판하여 압록강 280여리 개척에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송 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요 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고려는 은밀히 송 나라와 교류를 계속하였고 강동 6주도 돌려주지 않았다.
* 2차 침입 - 한기 8207년(AD. 1010년) 고려 현종 1년에 요 나라 성종이 직접 400,000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는데 고려 안에서 일어난 <강조의 반란>을 빌미로 삼았다. 그러나 실상은 송 나라와 교류를 차단시키고 강동 6주를 회복하려는 속셈이었다.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전남)로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요 나라는 병참선이 차단되자 화친을 요청했다. 현종은 친조를 약속하고 화친을 맺었는데 퇴각하는 요 나라 군사는 고려의 귀주성 군사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 이후에도 고려는 친조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여전히 송 나라와 교친하였으므로 요 나라는 3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 3차 침입 - 유명한 <귀주대첩>으로써 한기 8215년(AD. 1018년) 12월 요 나라 소배압이 100,000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고려는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로 삼고 부원수에는 강민첨 장군을 임명하여 200,000 군사로 대비하였다. 소배압은 몇 번의 실패로 퇴각하다가 귀주성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대패, 살아서 돌아간 적은 수천에 불과했다.
* 여진 정벌
새로 일어난 동여진 완안부족의 우야소가 한기 8300년(AD. 1103년) 고려 숙종 8년에 함흥 부근까지 영역을 넓혀 주둔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 밖에까지 쳐들어왔다. 문하시랑 평장사 임간 장군을 보내 평정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추밀원사 동북면 행영 병마도통 윤관 장군을 여진 정벌에 투여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임기응변으로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윤관 장군은 패인이 여진의 기마병에 있었다고 보아 별무반을 신설하여 기마 특수부대를 창설하였다. 한기 8304년(AD. 1107년) 여진의 동태를 감시하던 변방의 보고를 받고 원수 윤관 장군과 부원수 오연총 장군이 170,000 대군을 출병, 크게 이겨 9성을 쌓았다. 그러나 뒤에 요 나라 서쪽과 국경인 여진이 자국의 방위를 역설하며 9성을 되돌려달라고 하여 화평을 위해 되돌려주었다. 이는 뒷날 아골타가 금 나라 (신라 경순왕의 태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후예)를 세워 중원을 평정하는 바탕이 되었다.
해동통보 고려청자 * 그림, Daum Blog 인용
• 몽고전쟁
최씨정권이 확립되었을 때부터 고려는 몽고의 압박을 받았다. 몽고족은 금 나라의 세력권에 있었는데 13세기 걸출한 영웅 테무친이 부족을 통일하고 한기 8403년(AD. 1206년) 칸(한, 황제)에 즉위하였다. 징기스칸이다. 징기스칸은 금 나라 (여진의 아골타 건국)를 침략하고 요 나라 (거란의 야율아보기 건국)를 공격하였으며, 징기스칸에게 밀려난 요 나라는 고려의 국경 강동성에 은거하였다.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강동성의 요 나라를 공격하여 요 나라는 패망하였는데 몽고는 이를 빌미로 과다한 공물을 요청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화전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전쟁론이 우세하였다. 때마침, 한기 8422년(AD. 1225년) 몽고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저고여가 돌아가다가 압록강 부근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고는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공했다.
* 1차 침입 - 한기 8428년(AD. 1231년) 몽고 장군 살리타가 북쪽 경계의 여러 성을 함락하고 개경을 포위하였다. 고려는 귀주에서 박서 장군이 분골쇄신 (뼈가 부서지고 몸이 으스러짐)하였으나 수도가 포위되자 화의를 요청했다. 몽고는 서북면에 다루가치 (몽고군 주둔지)를 설치하고 물러났다. 이후 몽고가 더욱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자 막리지 최우는 항전을 결심하고 한기 8429년(AD.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몽 결전에 들어갔다. 몽고군이 기마병 위주기 때문에 물에 약하다는 전술적 천도였다.
* 2차 침입 - 몽고는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하였으나 살리타가 처인성 싸움에서 김준후 장군에게 사살되어 철군했다. 그 이후에도 몽고군은 한기 8456년(AD. 1259년) 고려 고종 46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했다. 그러나 강력한 반몽정책을 표방한 최씨정권이 강화도를 근거지로 끈질긴 항쟁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위기에는 산성과 섬으로 물러서고 한편으로는 집단으로 농사를 지으며 침략군에 대항하는 전술을 활용하였으므로 몽고군은 강화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최씨정권이 붕괴되어 항몽전은 변화를 초래하였으나 또 다시 정권의 부침이 계속되면서 강화와 항몽전이 번갈아 일어났다. 한기8467년(AD. 1270년) 몽고의 세력을 업은 국왕이 개경으로 환도를 하였고 무신정권도 끝났다.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3별초는 배중손 장군을 필두로 진도에서 항몽전을 펴다가 제주도로 옮겼으나 한기 8470년(AD. 1273년) 진압되었다.
* 합단의 침입
한기8487년 (AD. 1290년) 고려 충렬왕 16년 원 나라의 합단이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동북지방을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고려와 원 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압하였다.
* 홍건적의 침입
홍건적은 중국 직례지에서 일어나 한 때 기세를 떨쳤으나 원 나라 군대에 쫓겨 만주로 들어왔다. 랴오양을 점거한 홍건족 장군 모거경이 40,000의 무리를 이끌고 한기 8556년(AD. 1359년) 고려 공민왕 8년에 침범하였다. 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서경(평양)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편장 이방실, 안주만호 안우가 이끄는 고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서경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궤멸되어 남은 병사 30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도망갔다. 그 뒤 홍건적은 수군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침범하였고, 공민왕 10년 한기 8558년 (AD. 1361년) 10월에 100,000 병력으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다시 고려에 침입하였다. 공민왕은 남으로 피난하고 도지휘사 이방실, 상원수 안우가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개경이 함락되었다. 한기 8559년 (AD. 1362년) 1월 총병관 정세운이 이방실 원수들과 개경을 수복하고 평정하였다. 개경을 수복할 때 동북면 상만호 이성계가 홍건적의 괴수 사유, 관선생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웠다. 홍건적은 패망하여 물러갔으나 막대한 타격을 입은 고려의 국운도 기우러졌다.
* 왕규의 반란
혜종 임종 직전, 한기 8142년(AD. 945년)에 일어난 조작적 반란이다. 서경 장군 왕식렴이 대광 왕규가 반란을 모의한다고 하며 개경에 난입하여 왕규와 300여명의 추종 세력을 참살한 사건이다. 정종이 왕식렴의 군대를 동원하여 정적을 거세하고 왕권을 찬탈한 구테타였다.
* 이자겸의 난
이자겸은 고려 전기 최고 문벌 귀족이고 예종의 외할아버지로써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왕위 찬탈을 모의하였다는 죄로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보와 그 세력을 처형하였다. 지방 출신 신진관료세력의 발흥을 제거하는 정치적 책동이었다. 이자겸은 인종에게 두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고 마침내는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러나 동지였던 척춘경과 반목하여 축출되었고 전기 귀족사회가 몰락하는 발단이 되었다.
* 묘청의 난
연이은 반란으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어지러운 때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개혁 정치세력과 묘청이 임금의 총애를 업고 권력의 전면에 떠올랐다. 고려는 국시를 북진정책에 두었고 북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경은 북진정책의 전진기지였다. 묘청은 도참설과 풍수지리를 내세워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더불어 정치, 교육 등 내정의 유신과 칭제건원을 진행하고 여진의 금 나라를 정벌코자 했다. 반면 김부식을 비롯한 개성의 중앙세력은 보수적이어서 충돌이 불가피했다. 뜻이 좌절되자 묘청은 한기 8331년(AD. 1134년) 서경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켰다. 국호를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고 했으며 군대는 <천견충의군>이라고 했다. 개혁세력을 지원하던 임금이 등을 돌리고 김부식이 대원수로 임명되어 진압을 했는데, 반란군에서 내분이 일어나 묘청이 죽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11세기 잉글랜드의 코벤트리 레오프릭성주 고다이버 부인(16세)상, 가혹한 세금을
감면해주라는 부인의 탄원에 성주가 반 농담으로 발가벗고 말을 타고 성 안을
한 바퀴 돈다면 감면해주겠다고 하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연히 실행함, 주민들은
모두 커틴을 내리고 문을 잠궜다고 함. 동시대 고려 백성들의 사회상 대비.
이어 김부식상, 보각국사 일연상, 해인사의 대장경판 * 그림, Daum Blog 인용
* 무신정변
무신의 반란으로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는 한기 8367년(AD. 1170년) 무너졌다. 무신정권의 성립은 귀족사회의 정치권력 독점과 토지 소유의 특권적 지위가 극심한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권력과 영지를 놓고 귀족들 간에 항쟁이 전개되었는데 특히 기성 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 신진관료들의 도전이 치열했다. 문반들의 권력다툼에 무반은 소외되고 천대를 받았다. 무반은 귀족의 호위병 역할이 고작이었다. 무반은 요 나라와 여진의 전쟁을 통해 세력을 축적하고 한기8273년(AD. 1076년)의 전시과, 한기 8306년(AD. 1109년) 무학재 설치로 기반이 강화되었다. 고려의 군사제도는 일반 농민으로 충당되었는데 귀족들의 농민 착취가 심하였고 온갖 잡역에 시달렸으므로 농민 출신 무반들이 직접 상관인 무인들의 불만에 동조하였다. 한기 8367년(AD. 1170년) 태평호문 (글을 좋아함)의 군주 의종이 문신들과 보현원에 놀러갔을 때 이를 호위한 무신 정중부, 이의방, 이고들이 구테타를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페한 뒤 왕의 동생 명종을 옹립하여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무신정권은 한기 8467년(AD. 1270년) 원종 11년 임연 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100년 간 지속되었다. 무신정치는 무인들의 집합체인 중방 (무신의 협의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기 8368년 (AD. 1171년) 이의방이 이고를 주살, 한기 8371년 (AD. 1174년) 정중부가 이의방 제거, 한기 8376년 (AD. 1179년) 정중부도 경대승에게 참살, 한기 8380년 (AD. 1183년)에는 이의민이 집권하였으나 그 역시 한기 8393년 (AD. 1196년) 최충헌에게 숙청되었다. 최충헌은 전제정치로 무신정권의 안정을 찾아 최우, 최항, 최의에 이르는 4대 62년 간 최씨정권이 지속되었다. 최충헌은 명종을 폐하고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을 마음대로 세우는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한기 8455년 (AD. 1258년) 고려 고종 45년 김릉, 임연이 최의를 제거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졌다. 무신정권이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은 몽고의 무신정권에 대한 압력이었고 국왕도 왕권회복을 위해 몽고와 결합하였다. 한기 8467년 (AD. 1270년) 몽고의 옹호를 받은 국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천도를 명하였으나 임유무가 이를 듣지 않자 홍문규, 송성례들이 임유무를 죽였다. 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100여년에 걸친 무신정권은 끝났다.
* 농민, 천민(개인노비 만적)의 난
무신정권은 농민의 수탈이 과중하여 농민생활은 더 곤궁하였으므로 무신 상호간의 정권다툼으로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농민들이 봉기했다. 무신정권기의 민란은 명종과 신종대의 30년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무신정권의 형성기와 최충헌의 독재정치가 자리잡기 전의 시기로 지방통제력이 약한 시기다. 한기 8369년 (AD. 1172년) 명종 2년 서북계의 창주, 성주, 철주 주민이 수령의 탐학 (욕심 많고 괴롭힘)과 가렴주구 (약탈 수준의 빼앗음)에 반발하여 일어났고, 한기 8371년 (AD.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 때에는 농민들이 참여하였다. 한기 8373년 (AD. 1176년) 명종 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난을 일으켰다. 농민이 주체였으나 천민집단의 특수행정구역인 <소>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농민반란에 부곡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복합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기 8379년 (AD. 1182년) 명종 12년 충청도 관성 (옥천)과 부성 (서산)에서 수령의 탐학에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전주에서는 군인과 관노 (관청의 노예)가 반란을 일으켰다. 한기 8390년 (AD. 1193년) 명종 23년에는 경상도일대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김사미는 청도 (운문)에서, 효심은 초전 (울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로 연합하여 경상도일대에 확장되었으나 밀성 (밀양)에서 정부군에 밀려 7,000여 명이 죽고 진압되었다. 한기 8396년 (AD. 1199년) 신종 2년에는 명주 (강릉)에서 민란이 일어나 동경 (경주)민란과 합세하였다. 이듬해 진주에서 공사노비의 반란이 일어났고, 협천 (합천)에서는 부곡민 (천민)의 반란이 일어나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는데 농민도 가담하였다. 경상도 일대의 민란은 한기 8399년 (AD. 1202년) 신종 5년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민란으로 확대되었다. 반란의 기치로 신라의 부흥을 내걸었는데 최충헌의 토벌로 평정되었다. 한기 8395년 (AD. 1198년) 개인노비 만적이 개경 북산에 공사노비를 모아 <무신란 뒤 공경대부(높은 벼슬아치)가 천민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우리들도 최충헌과 우리의 주인들을 죽이고 천민에서 해방되면 공경장상(높은 벼슬아치)이 될 수 있다>고 선동하였으나 모의 첫날 인원이 많이 모이지 않아 다음 날로 기약을 했는데 내부의 밀고자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정권은 농민을 감싸고 권농에 치중하여 토지를 돌려주었으며 세금을 줄였다. 이들 민란은 귀족중심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새로운 사회체제로 변하는 원동력이 되어 고려사회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 김보당과 조위총의 난
정중부의 난이 발생한지 3년 뒤 명종 3년 한기 8370년 (AD. 1173년)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일으킨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난이다. 김보당은 전통적으로 문벌귀족 가문이었는데 무신정권에 참여하였다가 소신과 기대가 사라지자 의종 이래 문란해진 정권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정중부와 이의방의 제거와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거병하여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안북도호부에서 붙들려 개경으로 이송된 뒤 죽었고 의종도 이의민에게 살해되어 3개월 만에 무산되었다.
명종 4년에는 서경 유수 조위총이 정중부와 이의민의 토벌을 목적으로 거병하였다. 민란의 성격을 띠었으나 무신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북벌정책 강화도 초지진 강화도 척경입비도
효종 영릉 * 그림, Daum Blog 인용 갑곶돈대(포대)
# 고려의 멸망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밖에서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그리고 원 나라와 명 나라의 교체기의 대외관계 변동이 멸망의 원인이었다. 왜구는 대마도와 일본 근해연안에 본거지를 두고 고종 때부터 연해에 출몰하였는데 충정왕 때는 강화도까지 약탈을 당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 때문에 바다의 물자 운반 길이 끊겨 중앙정부의 재정에 타격이 오고 농민들도 수탈에 핍박을 당하였다. 일본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일본정부도 통제를 하지 못했다. 고려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왜구 토벌에 나섰는데 최무선은 한기 8574년 (AD. 1377년)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포를 제작하였다. 공민왕 때는 홍건적이 원 나라의 반격을 받아 서경을 침입하였다. 홍건적이 두 번째 침입한 한기 8558년 (AD. 1361년)에는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다. 동북아정세가 요동을 치는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일어나 원 나라를 치고 명 나라를 세웠다. 원 나라는 북쪽으로 쫓겨 북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조정은 친원 친명세력으로 대립하였는데 명 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1388년 쌍성총관부 관할로 철령 이북의 땅을 명 나라의 직속령으로 한다는 일방적 통고를 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최영은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드디어 우왕 14년 최영 장군은 8도도통사로써 좌군도통사 조민수 장군, 우군도도통사 이성계 장군을 거느리고 요동정벌에 나선다. 이 때 이성계 장군은 <4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첫째, 원 나라와 명 나라가 교체되는 과도기라 하나 고려의 군사로 대국 명 나라를 친다는 것은 불가하다. 둘째, 한창 농사철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에 지장을 주고. 셋째, 원정을 틈타 왜적이 침입한다면 도성이 위험하며. 넷째, 장마철이라 주무기인 활의 아교가 녹을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논지였다. 그러나 최영 장군은 반대를 무릅쓰고 거병했다. 마지못해 출병한 이성계 장군은 압록강 안 위화도에서 장마를 피해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내 회군하여 최영 등 반대파를 제거하였으며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웠다가 다시 공양왕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였고 왕은 허수아비였다. 결국 이성계는 조준과 정도전 등의 추대로 고려왕국을 종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 18화(조선시대) - 22화(선기옥형, 교학대한사 마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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