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평화 사회체제개혁 자서전/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7~11/22화

북새 2006. 8. 3. 10:04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7/22화 : 2. 열국시대(1/6) - 부여>


 

                 5룡龍의 수레를 타고 하늘을 오르내린

                         천왕랑天王郞 해모수

                            (삽화 - 민중의 반란, 소멸된 역사)


          

                부여강역도(보라색)                                  북부여 동부여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임승국의 한단고기)


 * 북부여(졸본부여) 시조 해모수(동명왕), 선군시대 47세 선군 고열가, 재상 아려사마, 수유후 기비, 5가의 족장, 동부여 시조 해부루, 번조선의 의병장 고두막 대장, 혁명군 장수(최, 참, 협, 음), 한 무제와 대신들, 대신 합려하, 고주몽과 친구들, 유화부인, 동부여 2세 금와왕과 태자 대소


 * 기자箕子(조선)는 중국 은殷나라가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여(한단고기 3한관경본기 제 4 마한세가 하편, 수유의 사람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이라고 칭하였다) 번한의 땅 일부를 하사받아 제후諸侯로 봉해졌다. 기후는 번한 68세 수한왕 이후 번한왕이 되었는데 3한시대 번한세계世系에 기록된 기자왕은 69세 기후부터 74세 기준까지 6대고 기후 윗대는 번한의 왕이 아니라 왕검조선의 번한지역 수유족의 우두머리였다. 단재 신채호의 연구에 의하면 <기자조선>이란 역사연대는 기자의 후예後裔가 번조선의 제후가 되었다가 번조선 말기에 왕이 되었으므로 일본제국주의 사학자들이 <번한을 기자조선>이라는 가공의 왕조로 과장하였고 이를 일제식민사관을 추종한 한국학자들이 비판(연구)없이 수용한 오류임


 * 위만衛滿(조선)은 북부여 시조 해모수 병오 45년 한기 7002년(BC. 195년), 중국 연燕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그의 부장이었던 위만이 망명을 요구했으나 선제 해모수께서는 허락지 않았다. <번한세가 하편>에서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이 즉위했는데, 정미년 한기 7051년(BC. 146년)에 번조선 왕 기준이 위만을 받아들여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봉토로 주고 제후로 봉하였다. 위만은 주변 제후국을 포섭하고 세력을 넓히더니 한  나라가 쳐들어오니 보호해주겠다는 거짓말로 군사를 동원하여 기준을 속이고 반역하였는데 기준은 위만과 싸움에서 패하여 바다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조작한 <위만조선>의 실체임


 * 한漢 4군郡은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 115권 조선열전列傳에 한漢의 무제武帝(유철劉徹)가 번한의 변경(평나平那)을 노략질하여 위만의 우거를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코자> 사방으로 병력을 침투시켰다고 기록되었으나 무제의 군사가 우거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고 위만의 폭정에 반발한 번한의 유민 고두막 의병장(훗날 북부여 5세 왕)이 의병을 일으켜 조선족 장수 최가 우거를 죽이고 다시 반항하던 성기를 죽였다. 그래서 위만의 땅은 혁명의 주도자  참의 홰청, 협의 평주, 음의 추저, 최의 날양으로 분립했다.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의 4군은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의 원문에도 없는 도깨비 4군이다. 한 무제는 출병한 육군사령관 순채, 해군사령관 양복, 전쟁 독려를 위해 파견한 사신 위산과 공손수 네 사람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가장 가혹한 기시형棄市刑(사지를 따로따로 잘라 죽이는 형벌, 능지처참陵遲處斬)을 하였는데 패전한 나라가 어찌 고조선 번한의 고토故土에 4군을 설치할 수 있었겠는가?


 * 춘추필법春秋筆法 - 공자孔子가 <춘추>를 집필하면서 노 나라 왕이나 주 나라 천자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비유로 쓴 것이 후세에 은유의 문장기법이 되었다. 춘추필법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는데 중국은 높이고 외국은 깍아내리고, 중국사는 상세히 외국사는 간단히 기술하며, 중국을 위해 수치를 숨기는 것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궁형(남자의 거세去勢)을 당한 것도 한 나라가 고조선과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기록했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수십 만 권의 역사서를 불태우고 수천 명의 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 또한 고조선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한다. 아울러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식으로 중화中華라고 스스로 부르며 중국의 동쪽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모두 중화사상에 견주어 오랑케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


 * 중국의 <문화혁명>은 1966년 마오쩌둥이 300만 명이라는 아사자를 낸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딛고 권력을 정비하려고 일으킨 정치투쟁이었는데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당시 대약진운동을 비판한 국방장관은 해임되었고 경제건설을 주장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실각했다. <문혁>의 숨겨진 빌미는, 국방장관 해임을 애석해 하는 한 작가가 명나라 때 황제를 비판하다가 파직당한 하이루이라는 인물을 비유로 소설을 썼다. 이 작품을 읽은  마오는 격노하고 위원회를 만들어 조사했으나 정치적 의도가 없는 순수한 문학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문혁>이라는 정치혁명이 시작되었다. 중국은 1981년 발표한 <역사결의>에서 <문혁은 마오의 잘못된 정세판단과 린뱌오 일파와 4인방의 내란>으로 규정했다. 올 초 <빙점>이라는 주간지에 게재된 중산대학 위안웨이스 교수의 <중국의 역사교과서 기술이 중화문명을 일방적으로 예찬하면서 애국주의로 흘렀고, 중국의 배타주의 경향이나 외래문화의 영향 등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기 때문에 빙점은 정간되었다. 위안 교수는 <중국 당국이 역사에 관한 한 마오식의 강압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성토함 (중앙일보, 2006년 6월 15일 자 투데이 칼럼, 고쿠분 료세이 게이오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


 * 고구려 시조 고주몽을 동명성왕으로 높여 부르고 줄여 동명왕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동명왕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왕이며 고구려 고주몽의 동명성왕은 서거한 뒤 후대 왕이 시호諡號로 추증追贈하였다. 동명이라는 말은 훌륭한 지도자라는 보통명사로 쓰였다. 고대국가에서 부여국의 이름은 해모수의 북부여로부터 백제의 남부여까지 8개가 나옴


 * 부여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 북부여

    1대 해모수 한기 6958년(BC. 239년) - 6대 고무서 한기 7138년(BC. 59년),

    6대 180년 간


  역대

     왕명

  재위년

               역사 개요

   1대

    해모수

    45

   BC. 239, 웅심산熊心山 개국(秦나라 始皇 BC. 246년)

   2대

    모수리

    25

   194, 위만衛滿 침입(한漢나라 혜제惠帝 BC. 195년)

   3대

    고해사

    49

   169, 낙랑왕 곡식 300섬 바침, 위만 정벌 관리 파견

   4대

    고(해)우루

    34

   120, 동명왕 위협 도성 천도, 가섭원(동)부여 개국

   5대

    고두막

    49

   108, 북부여 항복, 분능에서 고주몽 탄생

   6대

    고무서

     2

   59, 사위 고주몽 왕위 계승, 부여인 반발 도피


 * 동부여

    1대 해부루 한기 7111년(BC. 86) - 3대 대소 한기 7219년(AD. 22년),

    3대 36년 108년 간

 

역대

   왕명

   재위 기간

             역사 개요

1대

  해부루

  BC. 86-47

   북부여 위협 천도, 금와태자 책봉, 고주몽 피난

 2대

  금와

 BC.47-AD.6

   고구려에 특산물 바침, 유화부인 황태후 예로 장사

 3대

  대소

  AD. 6-22

 

   고구려 침략 전쟁 중 전사, 동생 도두왕都頭王

   갈사국曷思國 건국, 고구려에 투항 동부여후 봉작

 

 

 

     

                         부여왕가계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선군시대 마지막 47세 선군 고열가 계해 58년 3월 한기 6959년(BC. 238년) 궁전, 제천행사를 마치고 재상들과 5가의 족장들이 옹립한 가운데 선군 침통한 표정으로 유고를 한다.


 * 선군 고열가 : 짐이 부덕하고 어질지 못하여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은 일이 많고 장수들은 저들의 용맹을 믿고 함부로 날뛰며 백성을 압제하니 나라 살림은 피폐롭고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지는도다. 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심에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 동안 국태민안하였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어 나라의 장래가 백척간두에 섰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들 5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 우가의 족장 : (재상과 5가의 족장들 일제히 엎드려 부복하여 아뢴다.) 폐하! 양위하신다는 말씀을 거두시옵소서. 나라가 피폐로와졌다 하오나 이는 소신들이 폐하를 보필하지 못한 죄 막중하옵고 백성을 평안치 못하게 함 또한 소신들의 잘못이오니 폐하의 덕화가 그릇됨이 아니옵니다. 양위의 말씀을 거두시고 오히려 저희들을 치죄하소서.

 * 구가의 족장 : 변경이 혼란하여 잠시 나라가 어지러웠사오나 이는 곧 회복될 일이 옵니다. 선위하신다는 말씀은 거두시고 열성조의 통치를 새롭게 하소서.

 * 재상 아려사마 : 폐하의 어짐과 덕화는 만방에 떨쳤으나 우매한 백성들이 알지 못하는 바 잠시 혼미하였더라도 곧 하늘의 보살핌이 돌아오리니 덕화를 이루어 영화를 누리소서.

 * 선군 고열가 : (눈물을 훔치며) 제신들의 충언은 한결같이 짐을 감동케 하는 바요. 허나 이제 국기를 보전하기 위해서 짐이 내린 결단이니 더 거론치 말고 시행토록 하시오. (재상 아려사마를 돌아보며) 크게 옥문을 열되 사형수 이하 모든 죄수를 방면하시오. (선군 고열가, 말씀을 마치고 퇴장한다. 재상 아려사마 선군의 옷깃을 부여잡고 통곡한다. 궐 안에 통곡소리 가득하다.)


  이튿날 마침내 선군 고열가,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여 신선이 되니 이에 5가의 족장들이 공화제로 나라 일을 다스리기를 6년이나 하였다.



                    

          중국 서차구 유적            송국리 동검           말허리띠 드리개     대성동 청동솥

                                                 * 그림, Daum Blog 인용



 # 선군시대 47세 선군 고열가 임술 57년, 선군 고열가 선위 1년 전, 한기 6958년(BC. 239년), 수유후 기비의 성. 해모수가 100여명의 장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유후 기비를 방문한다. 해모수는 5룡의 수레를 타고 태양새 깃털 모자를 썼으며 얼굴빛이 찬란하여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해모수를 맞이하는 수유후 기비, 눈 둘 곳을 모른다.


 * 수유후 기비 : (성문 앞에서 엎드려 해모수를 맞아들이며) 천왕랑께서 몸소 누추한 성을 찾아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 해모수 : (말에서 황급히 내려 수유후 기비의 양 손을 잡아 일으키며) 일어나시오. 과찬의 말씀이요, 이 몸이 웅심산에서 일어섰다고는 해도 여섯 자 몸조차 누일 곳 없는 사람이요.

 * 수유후 기비 : 겸양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천왕랑께서는 이미 따르는 백성과 병사들이 수십만이라고 알고 있사옵니다. (안내하며) 궁성으로 드시지요.

 * 해모수 : (상좌에 앉아 수유후와 제신들을 내려다 보며) 변경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이 휘하에 몰려들었을 뿐 통치라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오늘 수유후를 뵙기를 청한 바는 천하가 어지러우므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고 선군께서는 선위를 한 지 벌써 6년, 5가의 족장들이 나라를 다스린다고는 해도 온 나라 곳곳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여 나라는 우환이 거듭되고 백성들은 흩어지고 있습니다.

 * 수유후 기비 : 미약한 이 사람도 크게 걱정하고 염려하였으나 역시 힘이 미치지 못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는 바입니다.

 * 해모수 : 수유후가 도와주시면 옛 열성조의 권위를 되찾아 새로이 나라를 일으키려 합니다.

 * 수유후 기비 : 성인의 말씀을 어찌 쫓지 않으리요. 미약하나 지성으로 돕겠나이다.

 * 해모수 : 고맙소이다. 수유후를 번조선의 왕으로 책봉하겠소. 상하 운장을 맡아주시오. 상하 운장은 나라의 요충이니 방비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을 안돈해주기 바라오.


 # 선군시대 47세 선군 고열가 임술 57년, 선군 고열가 선위 1년 전, 한기 6958년(BC. 239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었다. 해모수는 몰래 수유(수유후 기비)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선제 해모수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 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선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태양새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5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 북부여 시조 선제 해모수 기사 8년, 선군시대 마지막 47세 선군 고열가 양위 6년 후, 한기 6965년(BC. 232년), 해모수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5가 족장들을 회유하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고 만백성의 추대로 선제가 되었다.


  경진 19년 한기 6976년(BC. 221년), 기비가 죽으니 아비의 뒤를 이어 아들 기준을 번조선 왕으로 봉하였다.


  병오 45년 한기 7002년(BC. 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이 망명을 요구했으나 선제께서는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번조선 왕 기준이 어리석게도 위만의 계략을 눈치 채지 못하고 위만에게 박사 칭호를 허락하여 상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했다. 위만은 세력을 넓히더니 기준을 축출하고 번조선을 차지했다.


 # 북부여 3세 선제 고해사 임신 원년 정월 한기 7028년(BC. 169년),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서 바쳤다. 이 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시조 해모수 병오년(한기 7002년, BC. 195년)의 겨울이었다.


 # 북부여 4세 선제 고우루(해우루) 신유 원년 한기 7077년(BC. 120년), 고진(고주몽의 증조부, 고모수의 조부)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성책을 설치하여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고구려가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전 제후국)로 삼았다.


   <북부여 4세 선제 고우루 계유 13년 한기 7089년(BC. 108년), 위만의 번조선 우거의 성>


 * 대신 합려하 : 전하, 한의 무제(유철)가 번조선을 치기 위하여 대대적인 군사 동원령을 하달하였다는 보고가 변방에서 속속 들어오고 있나이다.

 * 장수 성기 : 전하, 심려치마소서. 막강한 군사력이 철통 같이 대비하고 있습니다.

 * 장수 최 : 무제의 군사가 많다고는 하나 멀리서 출정하여 한 달을 걸어야 우리 변경에 닿을 것이므로 그 때 피로하고 지친 적을 교란하고 기습하여 혼란에 빠뜨리는 계교를 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우거왕 : 옳은 말이요. 먼 길에 지치고 시달린 적군을 치는 건 칼로 풀베기요. 복병을 배치하여 요로마다 군사를 놓아 적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선발대를 막고 때로는 후진을 공격하여 혼란을 부추기시오. 단, 중군은 건드리지 마시오.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맞대적하는 건 병가 불문율이니. 더불어, 필시 보급로가 멀 것이므로 보급로를 차단하는 교란도 동시에 벌이시오.


   <그 날 밤 장수 최의 막사. 조선족 유민 고두막(뒤에 북부여 5대왕이 됨) 대장이 상좌에 앉고 조선족 장수 최를 필두로 장수 참, 장수 협, 장수 음들이 은밀하게 모였다.>


 * 장수 최 : 우거왕은 선대에 나라를 침탈하고 국권을 도둑질하여 백성을 고혈을 착취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마침 한 무제가 침략해오므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한나라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우거를 쳐 없애고 다음에 한 나라와 일전을 벌인다면 옛 조선의 국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까지 절치부심 기회를 기다렸는데 이제 하늘이 내리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제장들의 의견은 어떠시오.

 * 장수 참 : 우리 네 사람이 거느린 군사만으로 우거를 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동원할 군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 장수 협 : 한 나라는 우거가 목표고 결국 그들은 우거를 멸하면 물러갈 것입니다. 고토를 회복하는 일은 그 때 가서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 장수 음 : 아니지요. 본인의 판단으로는 한 나라가 우거를 멸하면 반드시 저들의 통치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퇴각할 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한 나라와 일전을 벌여야 하는데 우리는 작고 한 나라는 크니 어렵습니다. 한 나라와 싸우기 보다는 우거와 싸우는 것이 쉬운 길입니다. 여기 참석한 고두막 의병장께서 의병들이 봉기하도록 독려할 것입니다. 군세는 약하지만 번조선 유민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여러분 휘하의 군사들과 합세한다면 능히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장수 최 : 그렇더라도 우거와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군세로 보아 우리가 불리합니다. 계교를 쓰는 수밖에. 우거가 제거되면 우거의 군사는 일시 혼란을 일으키고 흩어질 것이므로 그 때 4개 성문에서 일제히 봉화를 올려서 봉기하되 한나라가 쳐들어왔다고 선동하시오. 세 분 장수는 혼란을 틈타 우리 거사에 반항하는 장수들을 먼저 베고 군사를 수습해주기 바라오. 혁명의 성공을 빕시다. (장수들 팔뚝을 칼로 베어 술잔에 피를 흘려 잔을 들어 마시고 맹세한다.)



                               

                                    한 무제 병거(싸움수레, 전차)      * 그림, Daum Blog 인용



 # 한 나라 무제의 궁전


 * 한 무제 : (불같이 노해서) 우거는 자체 내 반란으로 죽었고 평나(우거의 성)는 무주공산이다. 내분으로 우거의 성은 오합지졸인데 육군사령관 순채와 해군사령관 양복은 벌써 출정한지 한 달 여, 뭘 꾸물대고 있다는 말인가?

 * 대신 위산 : 폐하, 진노를 거두시옵소서. 이미 우거가 죽었으니 진격만하면 성문이 저절로 열릴 것입니다. 우거가 붕괴되었기에 서두르지 않을 뿐이며, 수륙 300,000 대군을 이끌고 진격함으로 다소 지체된 듯하옵니다.

 * 한 무제 : 위산은 육군사령관 순채를 맡고 공손수는 해군사령관 양복에게 짐의 명을 전하라! 더 지체하면 전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책임을 물으리라!


 # 북부여 4세 선제 고우루 계유 13년 한기 7089년(BC. 108년), 한의 무제(유철)가 우거를 멸하고 4군을 설치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위만의 변경 평나를 노략질하였다. 이에 고두막( 뒤에 북부여 5세 왕)이 의병을 일으켜 한 나라의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 때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한  무제는 전쟁에 패한 죄를 물어 육군사령관 순채와 해군사령관 양복, 무제의 사신 위산, 공손수 네 사람을 능지처참에 해당하는 기시형(능지처참형)에 처했다.


   북부여 4세 선제 고우루 갑오 34년 한기 7111년(BC. 86년) 10월, 동명왕(고두막)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라고 했다. 왕이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선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사를 앞세워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이를 매우 어렵게 여겼다. 국상 아란불이 <통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5곡은 썩 잘 됩니다. 도읍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여 왕께서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라고 한다. (이후 북부여에서 해부루의 동부여가 갈려나가고 북부여는 5세 선제 고두막, 6세 선제 고무서까지 2대가 더 지속됨)


 # 동부여(가섭원부여) 시조 선제 해부루 임인 8년 한기 7118년(BC. 79년),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본명이 불리지며 고구려후 고진의 손자)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버렸다. 왕께서는 이를 이상히 여겨 궁전의 깊은 방에 가두었다. 그 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을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을 주몽이라고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다.)


  동부여 2세 선제 금와는 아들 7명을 두었는데 고주몽이 금와왕의 신임을 받고 있으므로 태자 대소는 왕위를 빼앗길 수도 있다고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유화부인이 이를 눈치 채고 일러주었으므로 덕으로 사귄 친구 오이, 협보, 마리와 함께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분릉수)에 닿았는데 건널 수 없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추격병이 쫓으니 어찌하란 말인가?> 하였더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건넌 뒤 곧 흩어지니 추격병은 되돌아갔다.


 #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 계해 2년 한기 7139년(BC. 58년) 왕께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공주로써 사위를 삼았는데 즉위하니 나이 23세였다. 고구려의 시작이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8/22화 : 2. 열국시대(2/6) - 3한과 가야>


                   성읍城邑국가 3한韓과 가야伽耶

                          (삽화 - 두 개의 3한, 임나일본부설,

                           가야인 토착설과 북방민족 이주설)



                   

                    한국의 3한 강역도                                  가야 강역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임승국의 한단고기)


 * 두 개의 3한韓


 * 고조선은 마지막 47세 선군 고열가의 유지諭旨로 화백제도和白制度인 5가의 공화정을 6년 간 펴다가 해모수에 의해 북부여로 계승되었으나 고조선의 강역에서는 100 여 개의 나라들이 일어나 성읍국가城邑國家를 형성한다. 씨족 부족국가, 지역국가로 형성된 나라들이다. 북부여를 위시하여 동부여, 졸본, 읍루, 옥저, 동옥저, 북옥저, 최씨낙랑국, 동예, 맥, 3한(마한, 변한, 진한), 가야들이 대표적이다. 한기 7100년경부터 7600년경까지(BC. 1세기 - AD. 5세기) 이 성읍국가들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면서 국가연맹체로 결성되어 국가의 기틀을 구축한다. 한국역사에는 두 개의 3한이 있는데 그 하나는 고조선의 선군왕검시대 <3한관경제>의 3한(진한, 번한, 막한)이고, 두 번째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유민들이 남으로 이주하여 세운 3한이다. 본고에서 정립하는 3한은 한국의 3한이지만 두 3한이 이름이 비슷하여 혼동의 소지가 있고, 두 3한의 관련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정립되지 않아 일반화되지 못하였기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의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정리함


 * 한(순수한 우리 말, 汗, 韓은 빌어쓴 글자)은 나라 이름이 아니다. 만주나 몽고말로도 임금(칸)이란 뜻이다. 고조선에는 진(신)한, 번(발, 불)한, 막한(말한, 일본서기의 모한이라고 함은 왜倭왕 무茂의 실수) 세 임금이 있는데 진한이 상황上皇이었다. <만주원류고>에서는 <한>을 나라 이름으로 저술한 <후한서>의 저자 <범엽>을 다음과 같이 질책한다. <당시 3국에는 3한이 있어 한 나라씩을 통치하였다. 사가史家들이 <한>에 군장君長의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음音이 같다는 것에 집착하여 오역한 일은 고증이 무능하였다는 결론이다>. 단재 신채호는 고조선의 3한을 신한, 번한, 막한이라고 가렸다. <한>은 본래는 왕의 칭호였으나 나라 이름으로도 두루 쓰였음


 * 고조선의 3한은 국가통치방식이었던 3한관경제管境制의 진한辰韓, 번한番韓, 막한莫韓이며, 진한은 진조선眞朝鮮으로 선군왕검이 직접 통치하였고 수도는 송화강 유역 아사달이다. 강역은 압록강 이북에서 요하 동부로부터 만주까지였다. 번한은 번조선番朝鮮으로써 수도는 하북성이며 요하의 서쪽 하북, 하동, 산동, 산서, 강소에 이르는 중국대륙이었다. 막한은 막조선莫朝鮮으로 평양이 수도며 압록강 이남의 한국과 제주도, 대마도임


 * 한국의 3한은 고조선이 멸망하고 3조선의 유민들 일부가 남하하여 한국 강역 안에 옛 고조선의 정신을 되살려 3한을 재건하였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을 참고하여 다시 이를 정리한 중국의 3국지三國誌 위지魏誌 동이전에 기록된 한국 안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말한다. 마한은 한강 유역과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자리잡은 54개국 연맹국가로써 총 100,000호였으며, 큰 나라는 10,000호 작은 나라 수천 호였다. 목지국目支國 또는 진국辰國의 진왕辰王이 맹주盟主로 군림하였고 초기에는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국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과 한서漢書 조선전에도 BC. 2세기 한국 중남부지역은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 3한이 진국에서 발전된 것으로 되어 있다. 진한辰韓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에 자리잡은 12개국 연맹국가로써 4 - 50,000호였으며, 큰 나라는  4 - 5,000호 작은 나라 6 - 700호였다. 변한弁韓은 낙동강 유역의 경상도에 자리잡은 12개국 연맹국가임



                     

            * 한단고기와 단재 신채호 그리고 기존 학자들이 설정한 한국 안의 3한과

               근래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한국과 중국의 3한



 * 3한 중국설은 근래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한국의 3한(마한, 변한, 진한)이 한국강역과 중국의 동북지방이라는 학설이다. 3한을 계승한 3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국설과 같은 맥락인데 한단고기(임승국)에서는 고조선 선군왕검시대가 멸망하고 상장군 탁이 유민을 이끌고 해로를 통하여 한국의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고조선의 3한을 계승하는 3한을 건국하였고 상장군 탁을 추대하여 진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단재 신채호도 같은 논리를 폈다. 그러나 근래 진보적인 학자들이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또 하나의 학설을 전개하였는 바  그림의 3한을 설정하고 있음


 * 가야의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야문화의 특질, 신경철)


  학계에서는 가야의 성립을 토착설과 북방민족 이주설 두 갈래로 논란이 되었는데 근래 가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두고 북방민족 이주설이 설득력 있는 정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음


 * 도질토기陶質土器의 사용 : 도질토기는 북방 토기로써 AD. 3세기 말 금관가야 중심부였던 낙동강 하류 김해와 부산지역 고분에서 출현하여 영남 각지에 산재한다.

 * 순장殉葬 : 한국 토착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고 부여 등 유목민 습속인바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확인되었다.

 * Ordos형 동복銅腹 : 북방 유목민의 청동솥인데 북부여 제작으로 추정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되었다.

 * 무기武器의 훼손毁損 풍습 : AD. 3세기 말 무렵 추정, 김해 대성동 45호 고분에서 발굴된 대도大刀는 일부러 구부려 부장副葬함. 북방 유목민족  풍습이다.

 * 갑주甲冑(갑옷)와 마구馬具 : 철제 갑옷과 투구, 기마용 마구는 북방 피혁 갑주문화인바 중국 동북방 선비족과 부여가 원류다. 

 * 묘제墓制 : AD. 3세기 영남에서 발굴된 묘제는 목곽묘로써 관묘제도와 다름. AD. 2세기 후반 추정, 양동리 162호묘에서 발굴되었다.

 * 선행先行 분묘墳墓의 파괴 : 의도적으로 선행 묘를 파괴하는 행위는 앞  체제를 부정하는 유목민족의 풍습이다.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열국시대 한국의 왜倭 분국分國 경영사(임승국의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대진국본기>의 일본기를 인용하여 대진국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덧붙인다. 아울러 <3한과 가야시대>에서 말하는 <분국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으니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졸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속했는데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고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나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가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의 유민으로써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의 노예다. 왜인들은 이 때 산과 섬에 근거하여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들이 통상했다. 바다를 건너 천 여리에 대마국(대마도)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 쯤 된다.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 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사방 300여 리 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반여언의 옛 읍임


  * 임나任那일본부설 (이경진, Daum 블로그)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고대사에서 왜倭 나라가 한국 남부지방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근대사에서는 일본이 한국, 만주, 중국을 침략한 사실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대동아건설이라는 거짓 구호를 내세워 호도하는 것이다.

  일본역사교과서는 <한국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는데 대화大和정권이 임나라는 곳을 식민지로 삼아 임나일본부를 두었다. 대화정권에서 파견된 역인役人(관리)이 주재하여 군정軍政을 폈다>라고 고대일본의 대화정권이 한국의 남쪽에 식민지를 두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일본교과서의 역사부도에는 한국 남부지방이 가라(임나)로 그려져 있고 일본의 고대 신공왕후시대에 이곳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경영하였다고 조작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에는 여러 학자들의 학설이 있는데 대부분 일본학자들이 일본서기를 참고하여 한국경영설을 조작한 내용이 주류다. 이 학설들은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로 조작하였기 때문에 일본사학계에서 조차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국의 사기, 일본서기, 3국사기에서 대부분의 기록들이 임나는 대마도 일대를 지칭한다.


 * 출선기관出先機關 즉 출장소설出張所說 : (1949년 천황주권국가를 표방한 칸마사토모, 쯔다소우키치, 이케우치히로시 등이 발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은 5세기의 역사를 기록한 웅략천황기雄略天皇紀에 단 한 차례 일본부의 기록이 있는데 일본부 장군들이 임나왕의 명에 의해 신라의 침공을 견제하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임나일본부의 대부분 기록은 6세기의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에 나온다. 그러나 흠명천황기의 기록은 일본부가 임나의 작은 나라 한지(우두머리)들과 신라를 물리치기 위한 작전회의 성격이 대부분이고 조세 징수나 군사 동원 등 정치적인 내용은 없으므로 국가 경영에 대한 내용은 전혀 기록이 없다.

 * 기마騎馬민족설 : 출선기관설이 일본서기에서 조차 임나를 경영하였다는 일본부의 성격과 맞지 않으므로 정략적으로 조작한 학설이다. 동북아시아 계통의 기마민족이 만주에서 한국으로 이동하여 한동안 남한을 지배하다가 (마한)진왕의 자손이 4세기 초에 일본 북큐우수로 건너가 왜한倭韓 연합왕조를 건국하고, 숭신천황崇神天皇이 되었으며 5세기 초에는 그 자손인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북큐우수에서 키나이로 진출하여 야마토왕조를 창시한 뒤 일본열도를 통합하고 한국 남부지방을 경영하다가 7세기 중엽 임나 경영을 중단하였다는 학설이다.

 * 왜倭 자치기관설 : 출선기관설의 수정론이다. 학문적으로 조작된 임나일본부설이 정설로 인정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분국설을 발표하여 반론을 제기하자 1970년대 이후 임나일본부설을 재수정하여 가야지역의 일본인들이 자치기관을 형성했다는 학설이다.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록에는 임나일본부가 외교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자치기관을 형성할만한 일본인의 대규모 정착 근거가 없다.

 * 분국설分國說 : 1963년 북한의 김석형이 제기한 학설로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기본적인 발상이 역전환된 획기적인 학설이다. 선사시대 이래 3한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하여 가야인이 히로시마 동부와 오키야마지역에 임나국을 세우고, 서부에 백제계 분국, 동북쪽에 신라계 분국, 동쪽에는 고구려 분국을 세워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은 왜인들이 세운 대화정권과 한국인들이 세운 분국들과 각축 기록이다. 일본 동부의 대화정권은 5세기 중후반부터 서부 일본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가야계 분국이었던 임나국에 전략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임나일본부다.

 * 백제사령부설 : 한국의 역사학자 천관우가 제기한 학설로 백제가 가야지역에 설치한 군사령부다. 이 학설은 일본서기나 3국사기와 전혀 다른 주장이다.

 * 외교사절설 : 1970년대 스즈키야스타미, 우케다마사유키, 오쿠다쇼우, 키토우키요아키의 학설로써 그들의 저서 <고대왕국과 조선제국>에서는 6세기 전반 왜 왕권은 한국의 금속문물을 수입하는 대신 백제에 병사를 파견하고 무기를 공급하여 동맹 관계를 맺었다. 대화 왜가 임나에 파견한 사신들이 주둔하며 임나의 요청에 의하여 주둔군을 관장하였다.


 * 일본제국 식민지시대 일제는 한국에 관한 서적을 모두 수거하여 불태웠다. 역사서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복식사나 음식에 관한 서적에 이르기까지 불온서적이라는 오명을 씌워 걷어들였는데 수집한 문서가 조선총독부 관보에 51종 20여 만 권으로 기록되어 있다(광복 뒤 출간, 제헌국회사,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문정창). 이어 일제는 조선 병탄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조선사를 왜곡, 조작하였는데 이마니시(금서룡今西龍)를 비롯한 일제의 어용사학자들이 주도하였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사지침을 보면, 첫째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둘째 전편全篇을 상고上古3한, 3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조선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셋째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史話, 사실史實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고 되어 있다. 편찬에 참여하고 왜곡과 조작에 참여한 이마니시의 충실한 추종자 한국사학자들이 내세운 실증사학의 실체다. 상고사는 한인의 한국시대와 한웅의 신시시대를 잘라내고 선군(단군)왕검부터 시작하였으며 선군왕검은 신화로 각색하였다. 고려사는 원 나라의 지배를 받은 속국으로 전락시키고, 조선사는 당쟁과 붕쟁으로 날을 새운 민족으로 폄하함으로써 역사적 우위에 일본사를 접목시켜 한국 병탄을 합리화하고 역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한국사에 대한 회의와 지도자들에 대한 모멸감을 지니도록 그래서 일본인의 우월감을 각인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역사문화정책은 한국인의 의식에 크게 영향을 미쳤음


 * 흔히 한국고대사는 세계사의 봉건제도시대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서양의 중세 영주와 기사, 중국의 주 나라 봉건제도, 일본의 에도시대(강호江戶시대) 성주와 다이묘(대명大名) 형성기가 유독 한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인식하였는데 한국사의 열국시대의 성읍국가시대가 중세의 봉건시대임


 * 마한 54개국(임승국의 한단고기)


  원양국爰襄國, 변수국弁水國(변양수국弁襄水國), 상외국桑外國(상수국桑水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활국臣濆活國(신분첨국臣濆沾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高誕者國, 고리국高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목지국目支國), 자이모노국諮離牟盧國, 색위건국索謂乾國, 고난국高난國, 막노국  莫盧國, 비이국卑離國(막노비이국莫盧卑離國), 점이비국占離卑國(고비이국古離卑國), 신첩국臣疊國, 지침국支侵國, 구노국狗盧國, 지침지구노국支侵支狗盧國, 감해비이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이국국致離鞠國(고만치이국국 古滿致離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노국駟盧國, 내비이국內卑離 國, 감해국感奚國, 만노국萬盧國(벽노국辟盧國), 벽비이국壁卑離國(군비이국 群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구사조단국臼斯鳥旦國), 일이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우반국友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노국捷盧國(정노 국挺盧國), 모노비이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고납국古臘國(고즐국  古櫛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이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이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사 국不斯濆邪國, 원지국爰池國(해타국奚他國), 건마국乾馬國, 초이국楚離國



                  

                           가야유적 출토 곡옥     * 그림, Daum Blog 인용



 * 선군조선의 3한韓세가世家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연대가 없는 연표는 자료 없음)


 * 진한세가 역사연대표(선군조선 역사연대 참조)


 * 마한세가 역사연대표

    1대 웅백다(년대 모름), 3대 불여래 한기 4968년(BC. 2229년) -

    35대 맹남 한기 6959   년(BC. 238),   35대 약 2000년 간

  

   역대

      왕명

                 역사 개요

   1대

    웅백다

    기록 없음

   2대

    노덕리

        =

   3대

    불여래

    BC. 2229 - 2180

   4대

    두라문

    기록 없음

   5대

    을불리

        =

   6대

   근우지

    2136 - 2107

   7대

   을우지

    기록 없음

   8대

   궁호

        =

   9대

   막연

    - 1939

  10대

   아화

    1939 - 1924

  11대

   사리

    1924 - 1806

  12대

   아리

    1806 - 1716

  13대

   갈지

    1716 - 1633

  14대

   을아

    1633 - 1550

  15대

   두막해

    1550 - 1496

  16대

   독로

    1496 - 1371

  17대

   아루

    1371 - 1287

  18대

   아라사

    1287 - 1285

  19대

   여원흥

    1285 - 1232

  20대

   아실

    기록 없음

  21대

   아도

        =

  22대

   아화지

    1091 - 1055

  23대

   아사지

    1055 - 934

  24대

   아리손

    기록 없음

  25대

   소이

        =

  26대

   사로

    - 754

  27대

   궁흘

    754 - 677

  28대

   동기

    기록 없음

  29대

   다도

    - 588

  30대

   사라

    588 - 509

  31대

   가섭라

    기록 없음

  32대

   가리

        =

  33대

   전내

        =

  34대

   진을례

    - 366

  35대

   맹남

    366 - 238


 * 번한세가 역사연대표

    1대 치두남(연대 모름) - 74대 기준 한기 7003년(BC. 194년),

    74대 약 2100년 간


   역대

      왕명

              역사 개요

    1대

    치두남

    기록 없음

    2대

    낭사

    - BC. 2251

    3대

    물길

    BC. 2251 - 2238

    4대

    애친

    2238 - 2187

    5대

    도무

    2187 -

    6대

    호갑

    - 2098

    7대

    오라

    2098 - 2072

    8대

    이조

    2072 - 2015

    9대

    거세

    2015 - 1975

   10대

    자오사

    1975 - 1960

   11대

    산신

    1960 - 1946

   12대

    이전

    1946 - 1893

   13대

    백전

    1893 - 1844

   14대

    중전

    1844 - 1826

   15대

    소전

    1826 - 1770

   16대

    사엄

    1770 - 1727

   17대

    서한

    1727 -

   18대

    물가

    - 1664

   19대

    막진

    1664 - 1600

   20대

    진단

    1600 - 1554

   21대

    감정

    1554 - 1518

   22대

    소물

    기록 없음

   23대

    사두막

        =

   24대

    갑비

        =

   25대

    오립루

    - 1411

   26대

    서시

    기록 없음

   27대

    안시

    - 1393

   28대

    해모라

    1393 - 1352

   29대

    소정

    1352 - 1333

   30대

    서우여

    1333 - 1285

   31대

    아락

    1285 - 1225

   32대

    솔귀

    1225 - 1224

   33대

    임나

    1224 - 1184

   34대

    노단

    1184 - 1105

   35대

    마밀

    1105 - 1092

   36대

    노불

    1092 - 1074

   37대

    을나

    1074 - 1054

   38대

    마휴

    1054 - 1014

   39대

    등나

    1014 - 1012

   40대

    해수

    1012 - 983

   41대

    오루문

    983 - 966

   42대

    누사

    966 - 954

   43대

    이벌

    954 - 926

   44대

    아륵

    926 - 900

   45대

    마휴(마목)

    900 - 836

   46대

    다두

    836 - 785

   47대

    내이

    785 - 752

   48대

    차음

    752 - 746

   49대

    불리

    746 - 736

   50대

    여을

    736 - 707

   51대

    엄루

    707 - 703

   52대

    감위

    703

   53대

    술리

    703 - 673

   54대

    아갑

    663 - 648 (53대와 54대 사이의 비어있는 10년 기록 없음)

   55대

    고태

    648

   56대

    소태이

    648 - 634

   57대

    마건

    634 - 616

   58대

    천한

    616 - 605

   59대

    노물

    605 - 595

   60대

    도을

    595 - 520

   61대

    술휴

    520 - 505

   62대

    사량

    505 - 471

   63대

    지한

    471 - 453

   64대

    인한

    453 - 438

   65대

    서위

    438 - 400

   66대

    가색

    400 - 375

   67대

    해인

    375 - 341

   68대

    수한

    341 - 340

   69대

    기후

    340 - 323

   70대

    기욱

    323 - 315

   71대

    기석

    315 - 290

   72대

    기윤

    290 - 251

   73대

    기비

    251 - 232

   74대

    기준

    221 - 194 (73대와 74대의 비어있는 11년 기록 없음)


 

 * 가야 역사연대표

 * 3국사기(사), 3국유사(유), 신증동국여지승람(승), 일본서기(일)의 관련 기사 요약. (괄호) 안은 약호


   연대

                 역사 개요

  AD.42

    3월, 금관국 수로왕 가락국(금관국) 건국, 이진아시왕 대가야 건국(승)

   43년

    금관국 수로왕 신답평에 도읍(유)

   44년

    수로왕 궁궐 신축, 탈해 왕위 쟁탈 계림으로 쫓아냄(유)

   48년

    아유타왕국 공주 허황옥 도착 혼인(사, 유), 9간 명칭 개정(유)

   77년

    신라의 아찬 길문 공격 1천여 명 사로잡힘(사)

   87년

    7월, 신라 파소왕 백제와 가야 침공대비 가소, 마두 성 쌓음(사)

   94년

    2월, 가야 신라의 마두성 침공(사)

   96년

    9월, 신라 남쪽 변경 공략(사)

   97년

    정월, 신라의 파사왕 군사 동원 침략 계획, 사신 보내 사죄(사)

  102년

    8월, 금관국 수로왕 신라의 요청 음즙벌국 실직곡국 영역 다툼 중재(사)

  106년

    8월, 신라 파사왕 마두성주에게 가야 정벌 명함(사)

  115년

    2월, 가야 신라 남쪽 변경 공격, 신라 지마왕 공격 물리침(사)

  116년

    8월, 신라 정병 1만으로 가야 공격, 가뭄으로 신라군 물러남(사)

  189년

    3월, 금관국 허황후 157세 사망(유)

  199년

    3월, 금관국 수로왕 158세 사망, 세조 거등왕 즉위(유)

  201년

    2월, 가야 신라에 화친 요청(사)

  209년

    7월, 포상 8국 가야 공격, 신라 나해왕 8국 항복받아 구원(사)

  212년

    3월, 가야 왕자 볼모로 신라에 보냄(사)

  253년

    금관국 거등왕 사망, 마품왕 즉위(유)

  291년

    금관국 마품왕 사망, 거질미왕 즉위(유)

  346년

    금관국 거질미왕 사망, 이시품왕 즉위(유)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 임나가라 종발성 침공 항복, 안라인 항거(광개토왕비)

  407년

    금관국 이사품왕 사망, 좌지왕 즉위(유)

  421년

    금관국 좌지왕 사망, 취희왕 즉위(유)

  451년

    금관국 취희왕 사망, 질지왕 즉위(유)

  452년

    금관국 허황후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 세움(유)

  481년

    3월, 고구려 말갈 연합군 신라 미질부성 공격, 가야 백제 연합 구원(사)

  492년

    금관국 질지왕 사망, 겸지왕 즉위(유)

  496년

    2월, 가야 꼬리 다섯 자 흰 꿩 신라에 보냄(사)

  521년

    금관국 겸지왕 사망, 구형왕 즉위(유)

  522년

    3월, 대가야 이내왕 신라 이찬 비조부 딸 혼인 월광태자 탄생(사, 승)

  524년

    9월, 가야국왕 신라 법흥왕 남쪽 국경순행 만남(사)

  532년

    금관국왕 김구해 신라에 항복 진골 편입 본국 식읍(사, 유, 일) 

  551년

    3월, 신라 진흥왕 대가야 우륵 음악 연주(사, 일)

  552년

    신라 진흥왕이 계고, 법지, 만덕을 우륵에게 음악 전수하게 함(사)

  554년

    가량 백제와 연합 신라 관산성 공격 대패(사, 일)

  562년

    가야 반란 신라 이사부 공격 멸망 대가야군 설치(사, 일)


 * 금관가야 역사연대표

    1대 수로왕 한기 7239년(AD. 42년) - 10대 구형왕 한기 7729년(AD. 532년),

    10대  490년 간


   역대

     왕명

        재위 기간

                   역사 개요

   1대

    수로

   AD. 42 - 199

    알에서 출생, 아유타국(인도)공주 허황옥

   2대

    거등

        199 - 259

    수로왕 아들, 어머니 허황옥

   3대

    마품

        259 - 291

    거등왕의 아들

   4대

    거질미

        291 - 346

    마품왕의 아들

   5대

    이시품

       346 - 407

    거질미왕의 아들

   6대

    좌지

       407 - 421

    왕비 용녀의 관리 등용 혼란 귀양 감

   7대

    취희

       421 - 451

    좌지왕의 아들

   8대

    질지

       451 - 492

    취희왕의 아들

   9대

    겸지

       492 - 521

    고이왕의 아들

   10대

    구형

       521 - 532

    신라 진흥왕 공격 영토 헌상 귀순


 * 중국 3국지의 가야 12국명(4개국 이름 모름)

   구야국狗邪國(김해), 안야국安邪國(함안), 반로국半路國(고령), 불사국 不斯國(창령), 독로국瀆盧國(거제),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밀양), 고순시국古淳是國(창원),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성)


 * 3국유사의 가야 7국명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冠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가야 금관                 금관가야                     가야 수레토기   가야 말馬꾸미개

                                      시조 수로왕릉                   * 그림, Daum Blog 인용


 

 


 # 3한의 역사 (임승국의 한단고기)


 * 고조선 3한의 명칭은 선군 색불루(선군왕검시대 22대 선군왕검)에서 시작된다. 3한이란 분조관경의 뜻이 있으니 3조선이란 분권관경의 제도다. 진한(질한, 신한), 마한(말한, 막한, 모한), 번한(불한, 발한)이다. 한단고기의 <삼한관경 본기 제 4>에 한웅천왕이 태백산의 비서갑에서 제사지내는 모습을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면서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는 백검(지도자의 상징)으로 호위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백성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모를 공경하고, 처자는 보호 양육하고, 형제는 사랑하고, 노인은 존경하고, 어리석고 약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의약, 공장(기술), 축산, 농사, 측후(날씨), 예절, 문자의 법을 제정하여 강역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통치하고 교화하니 천하가 태평하였다. 한웅의 아들 신농(염제신농씨, 중국 건국 시조 3황 5제의 한 사람)은 약초를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고 교역을 장려하여 생활을 편하게 만들었다. 소전의 별고에 공손이 있었으나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로 유배하였는데 헌원(3황 5제의 한 사람 황제헌원씨, 중국 한족의 역사적 시조)의 무리는 그의 후손이다. 웅녀군의 후손으로 <여>라는 이가 있었는데 단허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되고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특산물을 바치고 또는 귀화하였다. 460년이 지나 신인 <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2인자)이 되었다. 섭정한지 24년에 웅씨의 왕이 전쟁에서 붕어하자 왕이 되어 9한을 통일하고 <선군(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하되 <앞으로는 백성들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라 할 것이니 천부란 만세의 강전(법전)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다>. 마침내 3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니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워 <조선>이라고 하였다. 선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여 3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들고 웅백다를 봉하여 막한이라고 하였다. 달지국(백아강)에 도읍하였다. 선군 색불루께서는 병신년 원년 정월 녹산(백악산 아사달)에서 즉위하고 5월에 제도를 개선하여 3한을 3조선이라고 하였다. 조선이란 관경(통치 지역)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이 진한이 되어 몸소 다스렸는데 강역은 옛날의 진한 영토였으며, 여원홍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하게 하고, 서우여로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선군의 관경>이라고 하고 진한, 번한, 막한을 통틀어 진국이라고 한다. 진조선은 중국 동북부 지역과 요하의 서쪽에 걸친 지금의 요서지방의 광대한 영토고, 막조선은 한반도 북부, 번조선은 북경 일대의 중국 동남부였다. 고구려와 고려의 3경제도, 백제와 흉노의 좌우현왕제도 3한관경제에서 비롯된 통치제도다.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를 평정하였다. 땅 넓이는 10,000리(5,000Km)에 이르렀다. 선군왕검은 제요도당(요 임금, BC. 2357년 - 2258년)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 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치우)천왕은 <우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켰다가 요 임금을 치도록 약속하니,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의지하여 나라를 양보하였다(양보한 것이 아니라 세력으로 쫒아남, 중국 사마천의 사기 미화, 요순시대가 사기에서 말한 것처럼 태평성대가 아니었음, 개벽 실제상황, 안경전). 선군 색불루는 3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한단고기의 번한세가 하편>은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이 즉위했는데 정미년 한기 7051년(BC. 146년)에 떠돌이 도적 위만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바다로 돌아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선군왕검이 치우의 후손 치두남을 번한으로 임명하니 선군조선의 한 축으로써 번한의 치두남은 험독부를 세워 번한의 도읍으로 삼았다.



                          

      지산동 가야금관     가야 청동거울   지산동 가야고분군       가야 장신구    

                                                                         * 그림, Daum Blog 인용



  * 한국의 3한은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한 3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3국시대 이전 한국에 형성된 여러 부족의 통칭으로써 마한, 진한, 변한을 말한다. 마한은 54개국 연합체로 충청도 전라도에 자리잡았으며, 진한은 12개국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변한은 12개국으로 낙동강 유역 경상도를 차지하였다. 또한 중국의 사기 조선전과 한서 조선전에 의하면 BC. 2세기경 한반도 중남부지역은 진국 또는 중국으로 기록되었으며 진한과 3한이 모두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나라였다. 3한의 유래는 토착집단이라는 설과 고조선이 멸망하고 북방 이주민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으나 고증학적 자료를 토대로 북방민족 이주설이 정설이다. 이들 국가가 소국연맹체를 결성한 것은 철기가 보편화된 BC. 1세기(한기 7100년경) 이후다.


  마한은 3한의 맹주로써 목지국과 백제 등 54개국 지역연합체를 이루었다. 총 호수는 100,000이었으며 큰 나라는 10,000호였고 작은 나라는 수 천호였다. 목지국은 진국의 중심 국가였고 왕을 진왕이라고 불렀으며 3한 초기에는 진왕의 세력이 진한과 변한까지 미쳤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 - 50,000인데 큰 나라는 4 - 5,000호였고 작은 나라는 6 - 700호였다. 국가는 정치를 맡은 군장과 천신을 제사지내는 천군을 두어 5월의 곡식 파종과 10월의 추수 때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차차 국가체제가 정립되어 BC. 2세기(한기 7100년경) 이후에는 정치적 지도자가 천군 보다 중요시되었다. 중국 사기에서는 BC. 2세기 한국의 국가를 <한> 또는 <마한>이라고 기록하였다. 3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철을 매개로 하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집단 간의 세력화가 심화되었다. 유력한 성읍과 혼인, 교역, 군사활동을 통해 지배력이 강화되고 통치기능이 전문화되면서 지배조직의 체계화도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소국연맹체가 대두된다. 변진의 미오야마국, 구야국들처럼 AD. 5, 6세기 무렵까지 독자적으로 존속한 소국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맹주국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체로 편제되었다. 2, 3세기경에는 경주 사로국을 중심으로 진한 소국연맹,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 마한의 목지국 중심의 소국연맹체로 통합되었다. 3한이다. 진번의 곁에 있었던 진국은 중국과 교역을 시도하였으나 고조선에 의하여 차단 된 일이 있었다. 기원 전후 시기에 한강 이남에서 진국으로 대표된 정치적 영향력에 대신하여 3한이 분립되었다. 변한, 진한인데 마한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철기문명이 발전하면서 3한 사회의 세력판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3한의 소국들은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갖게 되었고 이들 간에 정복과 복속이 이루어졌다. 목지국도 약해졌다. 마한지역에서는 부여족의 일파로 부여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 집단이 중심이 되어 세운 백제국이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하였고 차차 강성해져서 목지국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에 원래의 마한의 세력은 전남지역으로 밀려났다. 신라는 사로국의 진한이 경주지역의 사로국 6부를 중심으로 정치조직을 갖추어서 맹주국이 되었다. 이들 정치연맹체는 AD. 3, 4세기에 일단락되어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백제의 마한과 사로국은 진한을 대표하였다. 이른바 3국시대다.


 * 평양마한 - 한기 7003년(BC. 194년)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무리 수 천을 거느리고 평안도에 남하하여 지역의 기존 세력을 깨뜨리고 마한을 세웠다. (중국 후한서 한전)

 * 홍성 금마마한 - 기준(1세 무강왕)이 죽자 상장군 탁(2세 강왕)의 인솔로 기자조선 유민들이 기존세력을 평정하고 마한을 세웠다. 홍성 금마에 도읍하고 진한과 변한을 제후로 거느렸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1세 무강왕(일명 애왕, 이름 기준, 한기 7003년, BC. 194년) - 2세 강왕(탁, BC. 193년) - 3세 안왕(함, BC. 190년) - 4세 혜왕(식, BC. 157년) - 5세 명왕(무, BC. 144년) - 6세 효왕(형, BC. 113년) - 7세 양왕(섭, BC. 73년) - 8세 원왕(훈, BC. 58년) - 9세 기왕(정, 한기 7165년, BC. 32년)이다. 3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홍성 금마마한의 기록은 혁거세 38년 한기 7177년(BC. 20년) 봄 2월 호공(왜인, 박을 타고 입국하여 호공이라고 함)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는데 마한왕은 호공을 꾸짖어 <진과 변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래에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사대의 예가 이럴 수 있소>라고 하였다. 혁거세 39년 한기 7178년(BC. 19)년에 마한왕이 죽었다. 신하들이 <(마한)왕이 지난 날 우리를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왕은 <다른 사람의 재난을 기회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라며 따르지 않았다. 온조왕 24년 한기 7203년(AD. 6년)에 웅천에 책(성책)을 만드니 마한이 사자를 보내 책망하여 <왕이 당초 강을 건너왔을 적에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백리(50Km) 땅을 갈라주어 안정케 하였더니 은혜의 보답은 아니하고 성지를 만들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의리가 있다고 하겠는가> 하니 왕이 부끄러워 책을 헐어버렸다. 온조왕 26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냥한다고 핑계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합병하였다. 4월에 복속을 거부하고 남아 저항한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여 백성들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망하였다.

 * 익산 금마마한 - 온조백제의 공격으로 한기 7206년(AD. 9년)에 홍성 금마마한이 멸망하자 금강 이남의 전라도지방 소국들이 다시 뭉쳐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들고 홍성 금마마한왕의 후예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3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익산 금마마한을 왜 또는 왜국으로, 병사를 왜병과 왜인으로 기록하였다. 기존 학설은 이를 신라가 마한을 비하하여 왜라고 호칭하였다고 해석하였으나 요즘 고고학적 발굴로 전남 나주 고분군 발굴에서 한국 안의 왜의 실체를 규명하는 바 관심거리다. 익산 금마마한은 초고왕 40년 한기 7402년(AD. 205년) 7월에 남으로 이동한 남부여에게 정복되었다.


 * <읍루>는 부여의 동쪽 러시아 동남부지방에 있었으며 활과 화살이 명산물이다. <옥저>는 함경도 해안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과 함흥지방 중심지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읍루와 부여가 국경이었으며 남쪽으로는 동예와 접경하였다. 함흥지방의 <동옥저>는 3세기 전반(한기 7400년경) 5,000호의 소국이었는데 위만의 속국이 된 뒤 현도군 일부가 되었다가 낙랑군에 병합되었고 나중에는 고구려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복속 뒤에도 자치권을 허용하였다. 민며느리제도와 세골장이 풍습이 있었다. 두만강 부근에는 <북옥저>가 있었는데 읍루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한기 7482년(AD. 285년) 부여 선비족 모용씨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왕이 자살하고 중심세력이 피난하여 동부여를 세웠다. <동부여>는 고구려의 지방민을 귀속시켰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였으나 백두대간을 경계로 하였으므로 지리적으로 교통이 불편하여 교역이 활발하지 못해 문화 발전이 늦었다. 누에를 치고 명주를 생산하였으며 삼베, 단궁과 활, 과하마, 반어피가 특산품이었다. 족외혼 풍습이 있었고 살인자는 사형으로 다스렸고 도둑이 없었다. 10월에는 제천행사로 무천이 있었다. 모(창)를 잘 쓰고 보병이 우세했다. 뒤에 고구려에 합병되었다. <졸본>은 장백대간 골짜기 졸본지역에 있었는데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와 고구려를 건국했다. <기자와 위만>은 압록강 하류와 요동,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에 걸쳐 있었다. 단, 기자와 위만은 원래 하나의 국가가 아니고 선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가 선군조선이 멸망한 뒤 선군조선의 명맥을 이었으나 북부여 해모수가 일어나자 제후국이 되었다. 이를 일제 어용사학자 이마니시(금서룡)가 일제식민지시대 한국 병탄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려고 조선사를 편찬하면서 <조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독립된 국가로 조작하였다. <예와 맥>은 옥저의 남쪽 영동, 영서지방에 있었다.



           

                                  가야토기         * 그림, Daum Blog 인용



 # 가야의 역사 (김세기의 사라진 가야의 역사, 이영식의 가야사 개관, 김영심의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와 백제)


 * 가야의 역사는 기원 전후 한국 남쪽의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한기 7750년경)에 한국 북쪽의 내륙에서 끝났다. 중국의 3국지, 3국사기, 일본서기 등 문헌에서는 대략 12개 나라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600여 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들과 동등하게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여 년 전이다. 3국유사는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의 서지리산(섬진강)까지로 본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 양산, 창녕지역과 섬진강 서쪽의 진안, 장수, 임실, 남원지역에서도 가야문화가 확인되고 있다. 가야의 어원은 <가라>에서 온 말인데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한다.

  중국 3국지에는 3세기경(한기 7400년경)에 경남지방에 산재했던 12개의 가야국을 열거하는데 구야국, 안야국, 반로국, 불사국, 독로국, 난미리미동국, 고순시국, 고자미동국 등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금관가야, 아라가야의 <가야>란 말은 고려시대 3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라는 어휘를 붙여 지은 것이다. 3국유사는 가야 5, 6개국이 낙동강 서쪽에 있고, 이는 변한 소국들이 3세기 이후 가야가 되었다고 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 7국과 가라 10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 AD. 1 - 3세기에 낙동강 연안의 변한 소국들이 AD. 3세기(한기 7400년경) 이후 가야 또는 가라의 5, 6개 연맹체를 구성하여 3국시대에 공존하였다고 했다. 3국유사 가락국기 5장 가야조에 김해 금관가야, 함안 아라가야, 고령 대가야, 상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 성산가야(변진가야), 고성 소가야, 창녕 비화가야가 기록되어 있다.


 * 임나는 일본서기에 많이 거론되었고 임나일본설을 정착시키려고 일본인들이 조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광개토왕비(한기 7597년, AD. 400년), 3국사기 강수전(한기 7800년경, AD. 7세기), 진경대사비(한기 8129년, AD. 932년)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고구려인들과 신라인들이 사용하였다. 임나는 <임의 나라, 주인의 나라>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다. 두 나라는 가야의 대표로 일본과 교역을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가야의 대명사로 쓰였다. 임나일본부는 왜왕이 가야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라는 학설이 정설이다.


 * 한기 7597년(AD. 400년)에 광개토왕이 50,000의 군대로 가야를 공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가야의 역사는 전기가야 김해의 가락국과 후기가야 고령의 대가야로 나누어진다. 여러 가야국의 인구는 대개 3,000명에서 3,500명 정도의 소규모였으나 김해의 구야국과 함안의 안야국은 20,000명에서 25,000명의 대국이었다. 3국사기와 3국유사에 기록된 <포상 8국의 난>은 사천, 고성, 칠원, 마산지역의 가야가 김해지역의 해상교통로를 빼앗기 위해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했던 전쟁이다. 한기 7729년(AD. 532년)에 가락국(김해), 한기 7757년(AD. 560년) 경에 안라국(함안), 한기 7759년(AD.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신라의 회유와 무력에 차례로 통합되어 지배세력의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대부분은 김유신처럼 신라에 귀속하여 진골 대우를 받았다.


 * 김해 금관가야 : 변한 소국 구야국이 발전한 나라다. 6개 부족장들이 구지봉에서 제사를 지낼 때 6개 알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여섯 동자가 되었는데 큰 맏이가 <수로>로써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 철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과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중개무역 성행하였으므로 크게 번창하였다. 김해 양동리 고분 유적이 대표적이며 AD. 5세기 이후 가야국들의 주도권을 지닌 맹주였다. 한기 7729년(AD.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 함안의 아라가야 : 변진의 안야국이 발전하였다. 서부 경남지역 중심과 남해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AD. 3세기(한기 7400년경) 안야국을 중심으로 포상 8국이 연맹하여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였으며 신라와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여 국가연맹을 형성하고 주도하였다. 함안읍 말이산 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고성의 소가야 : 변진의 소국이었던 고자국이 발전하였다. 한국 남부지방의 여러 나라들과 일본의 교통로의 거점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 창녕의 비화가야 : 북서쪽에는 대가야와 접경하였고 남서로는 아라가야와 접경한 삼각지로써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신라가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낙동강유역으로 진출하였던 거점지역으로 신라에 복속된 뒤 진흥왕이 척경비를 세웠다. 창녕의 교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성주의 성산가야 : 벽진가야라고도 하며 성주읍내 성산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고령의 대가야 : 현재의 고령읍에 있었다. 중국의 3국지에서는 미오야마국이 발전하였다고 하였으나 변진의 반로국설이 정설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건국설화가 있으며, AD. 4세기(한기 7500년경)에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AD. 5세기(한기 7600년경)에는 철을 생산하여 교역함으로써 여러 가야국들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역하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합천, 함양, 거창, 산청지방을 복속하였고 소백산맥 넘어 남원, 운봉고원까지 평정하여 섬진강을 장악함으로써 하동까지 진출하여 거대한 영역국가로 발전하였다. 한기 7759년(AD. 562년) 신라 진흥왕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9/22화 : 2. 열국시대(3/6) - 고구려(1/2)>


               동북아의 패권覇權, 고구려 영웅열전列傳

                               (삽화 - 고구려의 영웅들)


                               

       고구려제국 강역도    광개토대왕상         무용총 수렵도        만주 집안현

                               * 위 그림, Daum Blog 인용                       광개토대왕비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 (임승국의 한단고기)

   동명성제東明聖帝 고주몽高朱蒙,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재상宰相 을파소乙巴素, 광개토경호태열제廣開土境好太列帝(영락대왕永樂大王, 묘호廟號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책성에 태조무열제(6대왕) 기공비紀功碑가 있다. 동압록의 황성(국내성)에 광개토경대훈적 大勳績의 비碑가 있다. 안주 청천강변에 을지문덕의 석상石像이 있다.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평양 모란봉의 중간 기슭에 동천제東川帝(북부여 시조 해모수, 동명왕)의 조천석朝天石(동명왕이 기린마를 타고 승천한 곳)이 있다. 삭주 거문산의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무덤이 있다.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음


 * 고구려 요서遼西 12성 - 태조(6대왕) 융무 3년 한기 7253년, 요서에 10성城을 쌓고 이로써 한漢의 10성에 대비케 했다. 안시는 개평의 동북쪽 70리(35Km)에,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풍성은 안시의 서쪽 100리에,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융무 5년 봄 한기 7255년 정월에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음 (* 10리는 약 5Km)


 *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의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하는데 우리식으로 풀이하면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 연구과제>다. 중국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개년계획(예산 24억원)으로 수립한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변강사지연구중심 주관 역사프로젝트다. 이는 한국이 통일되었을 때 영토 분쟁은 없애려는 사전 정지작업 또는 북한을 중국에 편입하려는 의도 정도로 간과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한국사의 고구려와 대진국(발해)역사를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편입하는 일이 첫 단계요 궁극적으로는 고조선시대 한국고대사를 찬탈하려는 의도로 판단한다. 중국은 한족漢族의 역사적 시조를 황제헌원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고조선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치우천왕을 3조당祖堂(중국 호남성湖南省의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 치우천왕蚩尤天王을 모시는 사당祠堂)에 중국인들의 역사적 시조와 함께 배향配享한다. (한국은 2004년 3월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발족하였으며, 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재편함)

 

  한국의 고조선시대에는 아시아대륙과 동유럽의 광대한 대륙이 강역이었고 고구려시대와 대진국시대에는 동북아시아 대부분이 영토였다. 그러나 신라의 동서東西통일은 한국의 강역이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되는 결정적 계기였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요동과 만주의 동남북부와 압록강 이남의 강역으로 한정되었더니 일본제국 식민지시대에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으로 고착되었으며 그나마 6・25남북전쟁을 겪고나서는 백두산마저 중국에 55%를 할애하였다. 이렇게 광활한 대륙의 강역을 잃고 한국에 정착한 한민족은 고대역사 유적이 대부분 중국과 서남아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아시아대륙과 동북러시아 영토에 있다. 이런 까닭으로 역사 고증考證의 학문적 접근이 통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 자의적으로 한국고대사 유적을 발굴, 해석하고 자국의 역사에 편입하는 일은 통탄할 일이다. 유적 찬탈과 연계하여 중국은 체계적인 역사 찬탈 의도를 들어내어 고구려유적을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중국유산으로 등록하고 있으며 6 ・25남북전쟁 참전을 빌미로 북한이 할애한 중국 쪽 백두산 45%를 대대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고 동계 아시안게임 개최지로 다듬고 있으며 심지어 백두산 광천수까지 상품화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나 대진국 그리고 고조선의 유적은 물론이고 중국 동북부 관광까지도 한국인의 접근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한 무제와 사마천의 사기史記 훼절로부터 만주의 거대한 고대 피라미트 떼의 발굴 중단 등 중국의 의도는 영토 분쟁의 빌미를 넘어 궁극적으로 한국고대사 고조선의 역사를 찬탈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역사를 자의적으로 찬탈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왜곡, 조작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면 몇 시대가 걸리는데 그 동안 겪어야할 수난과 간난을 어찌 겪어야 할 것인가?

  한편 일본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 조작한 조선사와 일본서기 등 고대역사서를 바탕으로 <일본역사교과서>를 통해 역사 조작을 끊임없이 획책하고 있다. 세계제2차대전(대동아전쟁)을 미화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서기의 자의적 해석과 조선사 왜곡, 조작은 정치적 의도 아래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한국인의 역사의식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사학계는 일본어용사학자들의 학문적 추종자였으므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조선역사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증사학>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에서 일제어용사학자들의 앵무새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한국사학계에서 역사학의 태두로 일컫어지는 이병도(학파)는 일제어용사학의 조선사 편수에 직접 참여하여 조선사를 왜곡, 조작, 폄하하는데 동조했을 뿐만아니라 이를 청년교육에 활용함으로써 일제어용사학의 의식화를 선도했다. 뒤늦게, 만년의 이병도는 조선일보의 특별기고 (이병도, 1966년 10월 9일 자 조선일보)에서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라며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이어내려온 단군제사를 일제가 조선사 신화화 일환으로 없애버렸다고 고백하였으나 어찌 이로써 역사 왜곡의 허물을 가릴 수 있겠는가?

  더불어 세계 여러 나라의 한국(사) 인식은 어떤가? 영토의 넓고 좁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 인식은 학문적으로는 매우 미미하고 사회사적으로도 일천하다. 근래 88서울올림픽과 2002세계월드컵 그리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면서도 한국 자체를 알지 못하는 일 뿐만 아니라 교과서에서 한국을 다루는 나라들도 중국이나 일본의 변방 정도로 다루고 있어 한심하다. 요즘 대두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분쟁>이나 세계지리학회의 <동해, 한국해, 일본해> 표기에서 들어나듯이 한국의 세계적 위상을 높여야 할 것이다.

  덧붙여 한국사연구는 고대사서의 의도적인 폐기(진시황의 분서갱유, 사마천의 사기와 중국의 역사서 의도적 조작, 김부식의 3국사기 저술 뒤 서운관 고대사서 폐기, 조선시대 수거 폐기, 조선시대 말기 서양의 약탈, 일제시대 수거 폐기, 해방 뒤 국외 반출)로 사료가 없어 한국사를 정립하는데 중국의 사서나 일본의 사서를 참고해야 하는 애로가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이 폐기하고 소각했다는 한국고대사서들 (화랑세기 필사본의 박창화 증언 일본 궁내도서관 장서, 프랑스 박물관 강화사고 전적, 미국 하버드대학교 비공개도서 한국고대서적, 서울대학교 도서관, 숙명여대 도서관)이 요즘 들어나고 있다. 극비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은 한국고대사적들을 찾아내는 일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필수의무교과로 교육하는 일은 한국사교육의 두 번째 일이다.

 

 동북공정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2006. 9. 11일 자 중앙일보에 의하면 <북한 고구려고분군 세계유산등재대책> 문화재청 내부문서는 2003. 12. 24일 문화부장관 주재로 문화재청장과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록을 정리한 것이다. 이 회의에서 중국의 동북공정 의도를 7가지로 분석했다. 동북지역에서 조선민족의식 말살과 한국과 연계활동 차단, 조선족 민족운동의 타 소수민족 전파 경계, 다민족 통일국가론 확립, 한국학자 방문 증가 역사적 연고의식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 한민족 역사 연고권 불식 민족의식 고취 예방, 연고의식 바탕 북한주민의 대량 이입 예방, 한국역사학자의 영토문제화 차단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중국의 궁극적 목표는 한국이 방치하고 있는 고조선역사의 찬탈이다.

  고구려사 전공자 모임인 고구려연구회가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주제로 연 학술토론회 (2006. 9. 13일 자 중앙일보)에서, 첫째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문제는 고구려가 존속했던 705년 동안 중국에서는 35개 국가가 이합집산했는데, 그 가운데 70%인 24개 국가가 50년을 지탱하지 못한 나라들이다. 200년을 넘긴 나라는 한 나라, 당 나라 2국가 뿐이다. 게다가 35개 국가의 절반 가량은 중국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북방민족이 지배했다. 중국의 주장대로 고구려와 대진국이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면 지방정권은 705년 간 태평성대를 누리고 중앙정부는 수없이 존망을 반복했다는 우스꽝스러운 논리가 성립한다고 했다. 둘째 중국이 주장하는 조공과 책봉의 문제는 중국도 남송의 고종은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에 스스로 신하의 나라라고 자처하며 조공했고, 후진의 고조도 거란의 태종에게 스스로 자신을 <아들 황제>라고 표현했다. 셋째, 국경문제는 양국 사이에 국경조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 고구려 역사연대표

    1대 동명왕 한기 7160년(BC. 37년) - 28대 보장왕 한기 7865년(AD. 668년),

    28대  705년 간


역대

  왕명

   재위 기간

           역사 개요

  1대

  동명성제

  BC.37-19, 多勿

  高鄒牟, 압록강 변 졸본천 고구려 건국

  2대

  유리

  BC.19-AD.18  

  국내성 천도, 한나라 고구려현 탈취

  3대

  대무신

  AD. 18 - 44

  동부여 개마국 병합, 낙랑군 징벌

  4대

  민중

    44 - 48

  대무신왕 동생, 태자 어려 대신 즉위

  5대

  모본

    48 - 53

  정사 문란, 신하 두노에게 피살

  6대

  국조

    53 - 146

  영토 확장, 중앙집권체제 구축

  7대

  차대

    146 - 165

  학정 횡포 신대왕이 살해

  8대

  신대

    165 - 179

  산속 은거 차대왕 시해 뒤 추대 등극

  9대

  고국천

    179 - 197

  빈민 구제 진대법 시행

 10대

  산상

    197 - 229

  고국천왕 동생, 후사 없어 등극

 11대

  동천

    229 - 247

  신라와 화친

 12대

  중천

    247 - 270

  동천왕의 아들

 13대

  서천

    270 - 292

  이름 약로 또는 약우

 14대

  봉상

    292 - 300

  연나라 침입 격퇴, 국상 창조리 폐위 자살

 15대

  미천

    300 - 330

  현도군 공격, 낙랑군 점령

 16대

  고국원

    330 - 371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 전투 전사

 17대

  소수림

    371 - 384

  중국 전진 순도 불상 경문 수입

 18대

  고국양

    384 - 391

  요동과 백제 정벌

 19대

  광개토

    391 - 413

  고구려 전성시대, 영토 확장, 불교 신봉

 20대

  장수

    413 - 490

  남하정책, 백제 한성, 신라 7성 함락

 21대

  문자명

    490 - 519

  부여 점령, 신라 백제 공격 영토 확장

 22대

  안장

    519 - 531

  백제와 2회 전쟁

 23대

  안원

    531 - 545

  양나라, 동위 수교

 24대

  양원

    545 - 559

  돌궐 침입 격퇴, 백제 신라 침입 받음

 25대

  평원

    559 - 590

  중국 진, 수, 북제와 수교

 26대

  영양

    590 - 618

  수 문제 30만, 양제 113만 을지문덕 격퇴

 27대

  영류

    618 - 641

  포로 송환, 도교 수입, 연개소문이 살해

 28대

  보장

    641 - 668

  연개소문 추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



                      

          고조선시대부터 이어내려오는 전통의식, 차례로 솟대(소두, 소도蘇塗), 신목神木

          베는 의식, 신목행렬과 마을의 웅상雄常(당산나무)  *그림, Daum Blog 인용                 



 # 고주몽 동명성제


 *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시작된다. <조대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 임술 원년 한기 6958년(BC. 239년) 4월 초 여드렛날, 진시황 정의 8년에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서 추대되었고 곧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북부여의 시조다. 태양새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5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500여명이었는데 아침에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에 올랐다.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하고 도적이 없었다.


 * 고리국의 왕(고구려후)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그 손자는 옥저후 고모수(일명 불리지)다. 모두 도적 위만의 토벌에 공을 세워 봉작을 받았다. 고모수가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나들이 나온 하백녀 유화부인을 만나 유혹하더니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강제로 자기 멋대로 하여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꾸짖고 구석방에 가두었다. 해부루(동부여 시조, 북부여 5세 선제 고두막의 동생,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동명왕의 강요에 못 이겨 가섭원으로 쫓겨가 한기 7111년 BC. 86년 동부여 세움)께서 이를 듣고 이상하게 여겨 수레에 태우고 궁전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었다. 유화부인은 한기 6998년(BC. 199년, 한나라 왕 소제의 원봉 2년) 5월 5일에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으므로 고주몽이라고 했다. 동부여 3세 금와왕에게는 아들 7명이 있었는데 태자 대소가 고주몽이 인물이 출중하고 금와왕이 사랑함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유화부인이 이를 눈치 채어 일러주었으므로 고주몽은 덕으로 사귄 친구 마리, 오이, 협보와 함께 도망쳤다. 엄리대수(분릉수)에 이르러 깊은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인데 추격병이 쫓으니 어찌하란 말인가?>라고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무사히 건너고 곧 흩어지니 추격병을 모면했다. 이후 천하를 주유하다가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의 관직인 말지기를 얻었다. 왕이 아들이 없었음으로 주몽의 범상치 않음을 보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아 대통을 잇게 하여 즉위하였는데 그 때 나이 23세였다. 고구려의 시조로 1대 동명성왕이다. 연호는 다물, 한기 7100년(BC. 97년) 등극하여 한기 7178년(BC. 19년)까지 78년 간 재위했다.

 

  * 한단고기(임승국)의 고주몽 기록은 <북부여기 하편> 5세 선제 고두막(동명왕, 조선족 장수 4명과 의병을 일으켜 위만의 우거성을 회복함, 고리국에서 일어나 북부여를 승계함) 임인 30년, 한기 7118년(BC. 79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릉에서 태어났다, 해설에서 고주몽은 고구려의 시조, 한기 7139년(BC. 58년)에 고구려를 세웠다, 고진(고구려후)의 손자인 옥저후 고모수(불리지)의 아들이다, 고진의 증손자, <3국사기>와 <3국유사>에는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 있다. 어머니는 하백(부족)녀 유화다, 본부인은 예씨(2대 유리왕의 어머니)며 동부여 금와왕의 태자 대소와 정권 다툼 때문에 북부여로 남하하였고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의 사위가 되었으며 북부여를 승계하였다. 계루부족 군장 연타발의 공주 소서노를 부인으로 삼아 비류와 온조 형제를 두었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왕자인데 사냥을 나갔다가 최씨 낙랑국왕을 사냥터에서 만났다. 낙랑국왕은 호동왕자가 고구려 왕자라는 것을 알고 왕성에 초대하였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를 본 순간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낙랑왕은 은밀하게 두 사람을 혼인시켰다. 며칠을 낙랑궁에서 보내고 돌아가며 호동왕자는 철석같은 맹세를 하였다. 돌아가서 부왕께 말씀드려 정식으로 혼인을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왕자는 부왕께 낙랑공주와 혼인을 허락받으려고 벼르었으나 호동왕자를 질투하는 대무신왕의 두 번째 왕후의 간계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두 번째 왕후는 호동왕자의 의지가 너무도 굳건하다는 것을 알고 대무신왕께 모략을 제시하였다. 낙랑에는 신비한 북이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는 기미가 있으면 스스로 울렸기 때문에 자명고라고 했다.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파괴하면 결혼을 허락하라는 간계였다. 호동왕자는 망서렸으나 사랑 때문에 공주에게 자명고를 파괴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공주는 아연실색하고 고민을 했으나 역시 사랑하는 왕자와 함께 살기 위해 아버지를 배반하고 자명고를 칼로 찢어버렸다. 자명고가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고구려는 낙랑국에 쳐들어갔다. 고구려군이 성 밖에 몰려와서야 허둥지둥한 낙랑국은 자명고를 점검하고 자명고를 공주가 파괴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주가 위급하게 되자 이를 간파한 호동왕자가 공주를 구하려고 온 힘을 기우려 낙랑성을 공격하였으나 낙랑성의 항복을 받았을 때 공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호동왕자는 참소한 왕비를 고발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며 의붓어머니라지만 어찌 어머니를 고발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는 불효를 저지르랴 하며 끝내 시름시름 앓다 공주를 따라 세상을 떴다.


 # 국상 을파소


  고구려 9대 고국천왕 13년 한기 7388년(AD. 191년), 외척인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가 권세를 남용하여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함이 하늘을 찔렀다. 왕은 국정을 쇄신키 위하여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미리 알고 모반을 일으켰다. 모반은 가까스로 평정하였으나 권문세가의 권력이 워낙 뿌리 깊어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고구려 고국천왕 13년 한기 7388년(AD. 191년), 왕의 궁전>


 * 고국천왕 : 모반은 평정되었으나 반란으로 나라와 백성들이 안정되지 않아 국정이 크게 위태로우니 4부(동서남북부)는 난국을 타개할 어진이를 천거하라!

 * 대신 안류 : 서부 압록곡의 을파소를 추천하나이다. 2세 유리왕 때 국상 을소의 손자로써 능히 난국을 수습할만한 인걸인줄 압니다.

 * 고국천왕 : 소문은 듣고 있노라. 그를 중외대부 벼슬을 내리고 작위로 우태를 삼노라.

 * 대신 안류 : (왕 앞에 부복하여) 황공하오나 폐하, 을파소는 국정을 책임질 수 있어야 출사할 것입니다. 재고하소서.

 * 고국천왕 : (잠시 생각한 뒤) 짐이 가벼웠노라. 국상으로 격상하여 국왕에 버금가는 예로써 초빙하라.

 * 대신 초초아 : (비양거리는 투로) 아니되옵니다, 마마. 을소의 손자라 하나 어찌 어제까지의 농사꾼을 국상 자리에 앉히려 하십니까. 우리 조정에 이다지도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 대신 두모려 : (동조를 구하는 어조로) 불가합니다. 대신들 가운데서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도 넘치옵니다. 한낱 백면서생을 국상의 자리에 앉힌다면 백성들이 웃을 것이옵고 귀족과 관리들이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 고국천왕 : (불 같이 노하여) 교서를 내리라! 오늘 이후 짐이 임명한 을파소에 대하여 출신을 왈가왈부하거나 국상의 명을 소홀히 하는 자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관직을 삭탈하리라!


 # 을파소는 국정의 혼란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정교를 밝히고 상벌을 엄격하게 했다. 한기 7391년(AD. 194년)에 진대법을 실시하여 3 - 7월에 호구의 차이에 따라 나라의 곡식을 빌려주고 10월에 갚았다. 또한 나이 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이라고 하였다. 교화를 관장함을 <참전>이라 하였으니 무리들을 선택하여 계를 지키고 천신을 섬기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음)>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을 위하여 몸을 바친다. 일찍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신시이화의 세상은 백성들의 지혜가 열림에 따라서 날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만세에 걸쳐서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는 이유가 된다. 때문에 참전에 계가 있으니 신의 계시에 따라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제사)에 율이 있으니 하늘을 대신하여 공을 행한다. 모두가 스스로 마음을 써서 힘을 모아 뒤에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 <참전계경>은 선생이 일찍이 백운산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를 얻었으니 참전계경이라 한다. <하늘이 열렸을 때 위대한 분은 위에 계시사 인간의 360여 일을 주재하였다. 그 강령에 8조가 있으니 성, 신, 애, 제, 화, 복, 보, 응이라 한다. 성은 충심이 발하는 곳으로써 진실에서 나오는 정성을 관장하는 곳이라 6체과 47용이 있고, 신은 천리의 필합으로써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라 5단 35부가 있다. 애는 자비심의 자연으로 어짐의 본질이다. 6범과 43위가 있다. 제는 덕의 겸선으로써 도가 잘 미치는 것이라 4규 32모가 있다. 화는 악이 부르는 것이다. 6조 42목이 있다. 복은 착함으로 얻는 기쁨이다. 6문 45호가 있다. 보는 천신이 하는 것으로 악인에게 보하는데 있어서는 화로써 하고 선인에게 보하는데 있어서는 복으로써 한다. 6계와 30급이 있다. 응이란 악은 악보를 받고 선은 선보를 받음이라. 6과 39형이 있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없으나 척강(하늘에 올랐다 내렸다 함)하여 두루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 같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사람이 계를 받음이라.> <신시이화의 세상은 8훈으로써 경(씨줄)을 삼고, 5사를 위(날줄)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하였으니 참전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전계에 의해 더욱더 스스로에 힘쓸지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로 될까 보냐?>라고 말했다. 산상왕 때까지 2대에 걸쳐 국상을 역임하고 산상왕 7년 한기 7400년(AD. 203년) 가을 8월에 돌아가시니 온 나라 백성들이 통곡하였다.



                        

           고구려 유적지도        북한 동명성왕      몽골알타이서낭당   고구려 유적 분포도

                                              (고주몽)릉                * 그림, Daum Blog 인용



 # 광개토경호태열제(영락대왕, 묘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 이름은 담덕, 소수림왕의 손자며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한기 7583년(AD. 386년) 13세에 태자가 되었고, 한기 7588년 신묘년(AD. 391년) 18세로 고구려 제 19대왕에 즉위하였다. 연호는 영락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불교를 받아들여 실시한 안정의 기반에서 고조선 이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국토를 정복한 왕으로 평가한다. 살아서는 영락대왕이었고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사해 안에서는 모두 열제라 불렀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군진에 나아갈 때 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의 노래(어아가)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수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3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천악을 사용하였다.


 * 담덕이 태자가 되었을 무렵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 신라와 대치하였고, 서쪽으로는 후연, 북쪽으로는 동부여 그리고 동쪽에는 읍루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어 고립무원의 형세였다. 반면 고구려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구태백제는 한기 7401년(AD. 204년) 10월 대방고지(황해도)에서 개국하여 한기 7402년(AD. 205년)에 온조백제와 마한연맹을 정복하였고 한기 7402년 - 7405년(AD. 205 - 208년)에 대마도, 일본열도, 가야국 대부분을 복속하였으며 한기 7510년 - 7511년(AD. 313 - 314년)에 모용씨(연왕)와 동맹을 맺고 요서에 진출하여 유성(조양)과 북평(정주)에 백제군을 개설하고, 서진이 망한 한기 7513년(AD. 316년)에는 중국 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두었으며 한기 7568년(AD. 371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 광개토왕이 등극하기 전 태자 담덕시절에 구태(비류)백제를 침공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구태백제는 이웃한 온조백제와 한 뿌리임을 내세워 유대깊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어 침공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이에 담덕은 원대한 전략을 세웠다. 먼저 북쪽의 위협인 후연에 조공을 하여 후연을 포섭한 뒤 후연 국경에 배치한 군사를 빼내서 백제 침략에 동원하였다. 다음에는 온조백제를 침공하는 양 하면서 못 이긴 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온조백제가 고구려를 물리쳤다는 자만심을 갖게하였고 이로 인해 구태백제까지 없신여겨 강화도의 구태백제 수군을 몰아냄으로써 서해안 방면이 무방비 상황이 되었다. 또한 보기병 위주였던 군제를 개편하여 수군을 대폭 강화하였다. 그 당시 구태백제는 물론 중국, 왜까지도 소함(20 - 30명 승선) 위주였던 전함을 대형화(70 - 100명 승선)하였다. 이렇게 철저한 전략을 세워 즉위하자말자 구태백제, 온조백제 그리고 신라까지 차례로 복속시킴으로써 먼저 남쪽을 평정하였다. 다음에는 고구려에 조공하는 신라를 노략질하였다는 명분을 세워 임나가야(대마도)와 일본열도 왜까지 동쪽을 모두 복속시켰다. 이어서 서쪽의 후연을 치기 위하여 먼저 북쪽의 거란을 귀속시켜 배후를 평정한 뒤 후연을 공략하였다. 이윽고 4해를 평정하고나서 중국 중앙부에 있는 북위를 공략함으로써 동북아 통일의 원대한 계획을 눈앞에 두었는데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39세로 붕어하였다. 광개토왕의 권역은 남으로 백제와 신라 그리고 제주도, 동으로는 대마도와 일본열도, 북으로는 거란 그리고 서로는 후연까지 방대한 통치권을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기상으로 보면 왕의 이상대로 북위를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고 고구려는 세계 역사상 동북아 통일의 대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 광개토왕은 한기 7571년(AD. 374년) 출생, 7583년(AD. 386년) 13세 태자 책봉, 7588년(AD. 391년) 신묘년 영락 원년 18세 고구려 19대 왕 즉위.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이병도 선군신화       태양새 3족오   초기 3국시대 4국 위치도   

    3국사기천문현상 추적 / 특별기고(조선일보)                         (고구려, 백제, 신라, 당)

     중국 안의 3국 추정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한기 7588년(AD. 391년) 영락 원년 등극한 해에 평양에 9개 사찰 창건 내치 안정. 성동격서작전으로 신라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백제 북변 석현 등 10개 성 획득. 겨울 10월, 왕의 반간계에 속아 자만한 온조백제가 구태백제 수군을 몰아내버려 텅빈 강화도를 아무 저항없이 경유, 한강을 통하여 온조백제 수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관문 지킴이 관미성을 병사 수만 명으로 일곱 방향에서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 수도 보급로 차단에 온조백제 자멸 항복. 온조백제의 수도는 점령 하지 않고 항복만 받고 체제 유지시키고 돌아감. 곧 북쪽의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포로 500명을 잡아왔는데 이는 후연을 치기 위한 정지작업인 셈. (일본서기 응신천황기 3년 조에 온조백제 진사왕이 구태백제를 배신하여 10월에 온조백제가 고구려에 항복하였으므로 왜가 11월에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장군을 보내 진사왕의 책임을 묻자 신하들이 왕을 죽여 사죄했으므로 아신왕 세우고 돌아왔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왜의 국력과 외교활동을 살펴 조작으로 추정함)


 * 영락 3년 한기 7590년 - 7592년(AD. 393 - AD. 395년) 백제가 다시 배신하여 한강 유역 을 침략하자 백제 정벌. 거란 비려 토벌 3부족 700부락 함락. 북풍 등 요동 일원 정복.


 * 영락 6년 한기 7593년(AD. 396년) 구태백제가 왜와 밀통하여 국경을 침범하자 수군 수만 명으로 금강 하류에 상륙하여 백제 대산한성과 아단성을 치고, 보기병은 아리수(한강)를 건너 도성(충청도지방)을 공격하여 수도를 점령하였는데 한강 유역 58성 700촌이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졌다. 백제왕은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왕은 제주도까지 점령함으로써 백제와 왜의 해상통로 차단하고 왕의 동생과 대신 10여명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개선하였다. 이 때 구태백제의 지배층들이 대부분 왜로 피신


 * 영락 8년 무술년 한기 7595년(AD. 398년) 신라 복속, 영락 9년 기해년 백잔(백제의 비하)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남쪽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왜인들이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를 파괴하니>라고 구원을 청했다. 왕이 보기병 50,000을 보내어 왜를 물리치고 추격하니 적병 몰살. 내친김에 임나가라(대마도)를 정복하고 일본열도로부터 왜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백제, 신라, 가야, 왜, 임나가 조공했다. 북부여는 전쟁 없이 귀복하였고 백신(연해주 숙신), 토욕(선비족 모용외 일파로 현재 감숙성 청해성 토욕혼에 위치)을 쳐서 300명을 포로


 * 영락 10년 한기 7597년(AD. 400년) 신라를 침범한 왜구 격퇴, 임나가야(대마도) 등 일본열도의 왜를 모두 복속함, 안라 등 가야 여러 나라 복속함, 중국 동해안 요서 백제 분국 복속함, 후연의 유주자사 13군 태수(평남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기슭 고분벽화, 13군은 범양, 어양, 연군, 상곡, 대군, 광녕, 북평, 요서, 창려, 요동, 현도, 낙랑, 대방군)를 복속하였는데 귀복시 유주자사 진의 역할 컸으므로 13군 75현을 유주자사 진이 다스림, 이 때문에 후연과 동맹 파탄


 * 영락 12년 한기 7599년(AD. 402년) 후연과 전쟁 대비하기 위하여 백제 요서분국과 후연의 유주 등 13개 군을 먼저 회유하여 복속함으로써 후연은 동쪽으로 고구려, 서쪽은 유주 등 13개군, 남쪽에는 백제의 요서분국에 포위됨. 그런 다음 비로소 대준하 유역 후연의 숙군성을 공략하니 평주자사 모용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함으로써 포위망을 압축하여 쉽게 점령


 * 영락 14년 한기 7601년(AD. 404년) 후연의 연군 정벌, 황해도 연안 대방군에서 왜와 백제 연합군 격파


 * 영락 15년 한기 7602년(AD. 405 - AD. 406년) 후연군 격퇴, 영락 16년 2월에 궁궐 중축 수리


 * 영락 19년 한기 7606년(AD. 409년) 보기병 50,000을 보내니 마침내 후연이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여 조선족 고운을 왕으로 세워 북연이라 하고 복속함, 백제 사구성 등 6성 획득, 평양 동쪽에 독산 등 6개 성을 건축하여 평양 주민 이주


 * 영락 20년 한기 7607년(AD. 410년) 동부여 연해주 일원 정복, 길림 등 북부여 수사 파견 통치, 동부여 추모왕 속민이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아 정벌


 * 영락 22년 한기 7609년(AD. 412년) 중국 중원이 혼란하여 정벌의 적기였으므로 북위를 정벌하여 사해를 평정하고자 군세를 일으켜 준비하던 중 39세 붕어, 한기 7611년(AD. 414년) 아들 장수왕 3년에 대왕비 건립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0/22화 : 2. 열국시대(4/6) - 고구려(2/2)>


               검은 꽃이 흰 깃 화살에 맞아 떨어질 줄은

                               (삽화 - 영웅들의 활약상)



                     

              고구려제국 캐릭터             멸망한 고구려 출신             고구려 전성기

           * 그림, Daum Blog 인용 / 고선지 장군 서역 정벌도           강역 확장도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


 * 운곡雲谷선생, 조의선인皁衣仙人 을밀乙密, 살수대첩撒水大捷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 장군


 * 조의선인은 고조선 한인천왕의 한국시대桓國時代 천지화랑天指花郞으로부터 비롯된다. 역사적으로 10000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무예인武藝人이다. 검은 비단 옷을 입어 조의皁衣 즉 검은 옷이며 선인은 선도仙道의 선仙이다. 신라 말 최치원이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라 했는데 이는 조의선인을 말한다. 천지화랑은 기技와 덕德과 예禮를 갖춘 비범한 인물로써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무궁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 했다. 천지화는 소도蘇塗 즉 신을 모신 신성한 구역에 심었던 나라의 꽃이다. 조선시대 우리의 정신적 가치목표였던 선비정신(남자)과 부덕婦德(여자)의 선비정신도 조의선인에서 비롯되었음


 * 책성에 태조무열제(6대왕) 기공비紀功碑가 있다. 동압록의 황성(국내성)에 광개토경대훈적의 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변에 을지문덕의 석상石像이 있다.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평양 모란봉의 중간 기슭에 동천제東川帝(북부여 시조 해모수, 동명왕)의 조천석朝天石(동명왕이 기린마를 타고 승천한 곳)이 있다. 삭주 거문산의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무덤이 있다.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음


 * 고구려 요서 12성 - 태조(6대왕) 융무 3년 한기 7253년, 요서遼西에 10성城을 쌓고 이로써 한漢의 10성에 대비케 했다. 안시는 개평의 동북쪽 70리(35Km)에,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풍성은 안시의 서쪽 100리에,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융무 5년 봄 한기 7255년 정월에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음 (* 10리는 약 5Km)


 *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수 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詩


  여수장우중문시與隨將于仲文詩(번역은 본문에)

  신책구천문神策究天文 묘산궁지리妙算窮地理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무용총 수렵도              민족성산 백두산천지의 봄        무용총 춤과 노래 그림

                                                                         * 그림, Daum Blog 인용



 * 고구려 역사연대표

    1대 동명왕 한기 7160년(BC. 37년) - 28대 보장왕 7865년(AD. 668년),

    28대  705년 간

  

역대

  왕명

   재위 기간

        역사 개요

  1대

  동명성

  BC. 37-19

  압록강 변 졸본천 고구려 건국

  2대

  유리

  BC. 19-AD. 18  

  국내성 천도, 한나라 고구려현 탈취

  3대

  대무신

  AD. 18 - 44

  동부여 개마국 병합, 낙랑군 징벌

  4대

  민중

    44 - 48

  대무신왕 동생, 태자 어려 대신 즉위

  5대

  모본

    48 - 53

  정사 문란, 신하 두노에게 피살

  6대

  국조

    53 - 146

  영토 확장, 중앙집권체제 구축

  7대

  차대

    146 - 165

  학정 횡포 신대왕이 살해

  8대

  신대

    165 - 179

  산속 은거 차대왕 시해 뒤 추대 등극

  9대

  고국천

    179 - 197

  빈민 구제 진대법 시행

 10대

  산상

    197 - 229

  고국천왕 동생, 후사 없어 등극

 11대

  동천

    229 - 247

  신라와 화친

 12대

  중천

    247 - 270

  동천왕의 아들

 13대

  서천

    270 - 292

  이름 약로 또는 약우

 14대

  봉상

    292 - 300

  연나라 침입 격퇴, 국상 창조리 폐위 자살

 15대

  미천

    300 - 330

  현도군 공격, 낙랑군 점령

 16대

  고국원

    330 - 371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 전투 전사

 17대

  소수림

    371 - 384

  중국 전진 순도 불상 경문 수입

 18대

  고국양

    384 - 391

  요동과 백제 정벌

 19대

  광개토

    391 - 413

  고구려 전성시대, 영토 확장, 불교 신봉

 20대

  장수

    413 - 490

  남하정책, 백제 한성, 신라 7성 함락

 21대

  문자명

    490 - 519

  부여 점령, 신라 백제 공격 영토 확장

 22대

  안장

    519 - 531

  백제와 2회 전쟁

 23대

  안원

    531 - 545

  양나라, 동위 수교

 24대

  양원

    545 - 559

  돌궐 침입 격퇴, 백제 신라 침입 받음

 25대

  평원

    559 - 590

  중국 진, 수, 북제와 수교

 26대

  영양

    590 - 618

  수 문제 30만, 양제 113만 을지문덕 격퇴

 27대

  영류

    618 - 641

  포로 송환, 도교 수입, 연개소문이 살해

 28대

  보장

    641 - 668

  연개소문 추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



                      

      지린성 산성 옛무덤           홀한성             지린성 국내성 유적      라오닝 연주산성

                                                                                   * 그림, Daum Blog 인용



 # 전남 장성군 고봉학술원 애일당, 운곡선생이 선기옥형 제작을 위한 수행자 강의, 조의선인과 한국무예 그리고 선기옥형의 연관성에 대한 강의요약


 # 조의선인 을밀과 한국 무예 그리고 선기옥형의 해석


 * 우리나라의 무예는 고조선의 천지화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은 손자병법과 18기 또는 24기예가 있고 일본은 사무라이 무사도가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국기로써 활을 드는데 동이족이란 말의 <이>는 큰 활을 뜻하며 주몽이라는 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주몽은 일곱 살 때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이었다. 머리에 이고 가는 물동이를 백 보 뒤에서 활로 쏘아 구멍을 뚫고 곧 이어 솜을 두른 화살로 그 구멍을 다시 맞혀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으며, 이고 가는 사람도 물동이가 깨진 것을 몰랐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무기는 창이고 일본은 칼이다.


 * 조의선인은 고조선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천지화랑의 후예다. 기와 덕과 예를 겸비한 소년들을 가려 천지화랑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이 외출할 때 머리에 천지화(무궁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 불렀다. 천지화는 수두(소도) 즉 신성한 구역에 심은 나라꽃이다. 천지화랑은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여 고구려의 조의선인으로 맥을 이었고 백제에서는 싸울아비(무절, 일본의 사무라이)가 되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이라고 하였다. 고조선 한웅천왕시대의 대재상 발귀리, 자부선인, 선군시대의 몇몇 선군들과 부여의 대조영 그리고 고구려의 을파소, 명림답부, 연개소문과 그의 아들 남생이 선인이었는데 남생은 총명하여 9살에 선인이 되었다. 고대에서 근세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대부분이 조의 출신인 바 우리 전통문화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지니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온달 장군, 을지문덕, 양만춘도 조의의 후예다. 백제의 계백과 신라의 김유신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성계를 비롯하여 무학대사, 정도전, 홍윤성, 조광조와 율곡, 퇴계, 저 유명한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 관상감에서 선기옥형을 제작한 송이영,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덕령 의병장들이 그 후예다. 근세에는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이 조의로써 승마와 사격에 뛰어났으며 김좌진 장군 또한 조의인 바 동서양 병법에 통달하였다. 청산리 전투에서는 격전 중에 살며시 물러나 양쪽에서 공격해오던 일본군이 저희들 끼리 싸워 많은 전사자를 냈다. 권율 장군도 조의로써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흔히 문관으로 알고 있으나 검술에 뛰어나고 병법에 밝았으며 한기 8789년(1592년) 임진왜란 행주대첩 때 남원에서 1천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배고개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의 왜군 정예부대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진을 지휘하던 동복현감 황진이 격전 중에 전사하여 1진이 무너지자 2진에 있던 권율 장군이 벽력같이 호령을 하며 의기소침한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 때 장군은 물러서는 병사들의 벙거지에 칼끝으로 표시를 해두었다가 가차없이 처단했다.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지도력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 조의의 문하였다.


 * 애초에는 조의선인을 <선배 또는 선비>라고 불렀는데 선배라는 말은 고구려의 10월 제천 행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다(선뵈)는 데서 유래하였고 선인은 선배의 이두식 표기다. 사냥, 가무, 무예 등 여러 가지 경연에서 탁월한 사람을 선배로 불렀고 발탁된 이들은 나라에서 급료를 받고 무예와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전시에는 자치부대를 조직하여 정예군으로 싸웠다. 선배는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 나라는 승군으로 착각하였다. 신라의 화랑은 원화라는 여성에서 비롯했다. 원화는 외모가 출중하고 가무와 학문에 뛰어난 여성을 가려 귀감으로 삼았는데, 뒤에 좋은 가문의 청년들 중에서 외모가 반듯하고 덕행이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았으므로 선배는 남성적이었다.


 * 조의선인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것은 당나라 대군이 침략한 안시성 전투였다. 당 태종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하고 군세를 총집결하여 안시성을 맹렬히 공략하였다.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도 실패하자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려고 안시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던 중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이 허물어졌다. 위기에 직면한 고구려군 진영에서 결사대가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토산을 점령하여버렸다. <검은 옷을 입은 1백 명의 용사가 달려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내어 쫓고 토산을 차지해버렸다>라고 기록했는데 이 용사들이 조의선인이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0,000여 명이었고 그 우두머리는 연개소문이었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유년의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와 정신적 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교육을 통하여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육성하였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형성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판단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하였다.


 * 고구려 제 22대 안장왕 때 조의선인으로 선발된 을밀(고구려 2대 유리왕 때 재상 을소의 후손, 고구려 10대 산상왕 때 재상 을파소는 을소의 손자, 평양의 을밀대는 을밀선인이 세움)의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여 명이 <참전의 계>를 익히고 <다물방지가>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은 되물린다는 뜻이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고주몽)의 연호인데 <선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조의라는 말이 6대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진국사(발해사)에서 선인을 사정병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서는 선비는 싸움에 당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고 했다.


 * 선배는 본래 신수두(소도, 천제 천신을 모신 대신단이 있는 가장 신성한 숲인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마니산 참성단이 이에 해당한다. 소도는 신수두의 대신단을 본받아 각 지방에 만든 신단으로써 마을의 당집과 당산나무 - 신목 즉 웅상은 그 유물이다.)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6대 태조왕 때 3월과 10월 대제에 사람을 모아 칼춤을 추고 활쏘기, 깨금질, 택견(일명 수박, 송도에서 창안되었는데 중국에서는 권법으로 전수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유도로 발전했다)과 얼음물에서 물싸움 등 격기와 가무를 연출하여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우열을 판정했다. 여기에 대수렵을 벌여 그 사냥물을 더하여 종합 승리자를 <선배>라 하고 국가에서 녹을 주어 양성했다. 온달 장군이 그 한 사례다. 선배가 되면 편대로 나뉘어 숙식을 함께하며 고전을 공부하고 학예를 익히고 산수를 유람하고 성곽을 쌓고 도로를 닦으며 군중에게 강습을 하기도 하는데 오로지 일신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선배들 가운데서 학문과 기예가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 스승으로 섬기며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고, 일반 선배는 머리를 깍고 조백을 허리에 둘렀다. 스승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를 신크마리(두대형, 태대형)라 일컫고 그 다음을 마리(대형), 맨 아래는 소형이라고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어 참전하되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고구려의 직위는 골품제로써 미천한 사람은 높은 지위에 오를 수가 없었으나 오직 선배는 귀천이 없고, 학문과 기예의 높고 낮음으로 지위를 얻었으므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을지문덕 장군      을지문덕장군상       연개소문 장군      중국 뤄양(낙양) 

               살수대첩도                                      당 태종 전쟁도     연개소문가묘

                                                                         * 그림, Daum Blog 인용



 # 을지문덕


 * 고구려 26대 영양왕 때 평양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입산수도하다가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3월 16일이면 마리산에서 공물하며 경배하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자치통감에는 위지문덕으로 적었다.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에서는 그의 가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명장전에서는 평양 석다산 사람이다라고 했다. 영양왕 홍무 23년 한기 7809년(AD. 612년) 수나라 양제가 군사 130만 명을 동원하여 대규모 침공을 했는데 우중문, 우문술을 지휘부로 별동대를 조직하여 해군과 함께 30만 5천명의 군세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을지문덕 장군은 패주하는 척 하면서 침략군을 평양성 가까이 진격하게 하여 지치게 만든 다음 전의를 잃고 후퇴의 구실을 찾는 수나라의 진영을 찾아 항복하는 체 하면서 군세를 파악하였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며 묘한 꾀는 지리를 꿰뚫는구나. 싸움 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줄 알아서 그만둠이 어떠리>란 시를 우중문에게 보낸 건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이야기다. 수양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퇴각작전과 회유책을 쓰면서 침략군을 유인해놓고 살수(청천강)를 건너는 침략군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전멸시킴으로써 불과 2,700여명만 살아서 돌아갔다. 살수의 물길을 쇠가죽으로 막았다가 패잔병들이 강을 건너자 일시에 터 수장시킨 전법과 국지전(게릴라전)으로 대군을 괴롭힌 고사작전은 동서고금의 전범이 되었다. 이 싸움의 주력부대가 조의 20,000이다. 살수대첩의 패배로 수나라는 국운이 기울어 패망했다. 을지문덕 장군은 승승장구하여 현도로부터 태원(산서성 성청 소재지) 또 다른 쪽은 낙랑으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정복한 건안, 건창, 백암, 창려는 안시성에 편입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는 여기성에 편입했다.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성에 편입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성에 편입했다. 이로써 강병이 백만이 되었으므로 군세는 더욱  커지고 국토는 동북아를 아우렀다. 문충공 조준(고려시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살수의 백상루에 올라 축배하고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푸르고 허하고나

   수 나라 병사 백만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 때 얘기 듣나니

   장부의 한 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 연개소문


 * 일명 개금이라고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인데 천남생(연개소문의 큰아들)묘지의 기록으로 아버지는 태조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이니 모두 막리지 벼슬을 역임했다. 26대 영양왕 홍무 14년(한기 7801년) 5월 10일 태어났다. 성씨는 중국의 기록으로는 천, 전이라 했는데 연의 중국어 발음이다. 그의 시조는 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천, 전, 연씨로 거론된다. (일설에는 3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중국 왕의 성씨에  <천>씨가 있었으므로 <연>씨로 개명했다고도 한다.) 일본서기는 이리가수미라고 기록했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 했다. 혼란 속에서도 작은 것을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어 땅을 날줄로 삼고 하늘을 씨줄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써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나다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도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 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때는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일세의 쾌걸인저! 물속을 헤쳐가며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뛰어도 피로한줄 몰랐다. 무리들이 우러르며 창해의 용신이 몸을 나타내심이다 라고 추앙했다.


 * 고구려 26대 영양왕 홍무 9년 한기 7796년, 서부대인 막리지 연태조(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반란을 일으킨 등주(산동성 모평현)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수나라 영주자사)을 척살하였다. 이 때 백제가 병력으로 제, 노, 오, 월 나라를 평정한 뒤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명치(고구려 문자왕 연호) 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여 진흥치 못하매 권익이 모두 성조(고구려 영양왕)로 돌아왔다.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 나라를 돕고자 막리지 연태조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막리지는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 차례 진정하였으나 영류왕(27대, 이름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모든 정책이 폐기되었다. 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노자의 인물상을 구하여 백성들에게 도덕경을 청강시키고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리 장성을 쌓게 하였다.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노자의 도덕경이 진취적인 민족정신을 저해한다고 보고, 장성 축성은 동북아 재패의 이상을 지닌 민족적 강역을 축소 한정하는 패배주의임을 들어 중지시키고자 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연개소문의 병사를 빼앗고 변방으로 축출하여 장성 감독을 명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를 미리 알고 <어찌 몸이 죽고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하며 부장들을 회유하여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 구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하니 빨리 제거하라!>고 부장들에게 명령했다. 영양왕은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으로 가서 조서를 내려 대신들을 모으려고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이 없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붕어하였다.


 * 연개소문은 27대 영양제를 내어 쫓고 <고장>을 맞아들여 28대 보장제로 삼았다. 연개소문은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성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3홀을 전으로 하며 조의에 율이 있게 하여 국방에 힘을 쏟아 완전하였다. 백제의 상좌평 성충과 의를 세우고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로움을 잊고 3국은 백성을 모아 당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전승 뒤에 인의로 다스리자> 재삼 권유하였으나 종내 듣지 않으니 애처럽고 가석할 일이었다. 연개소문이 죽고 동생 연정토와 그 아들들이 정권을 물려받았으나 권력 다툼으로 내분이 일었다.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 정복의 자문 역할을 하였고, 막리지를 이어받은 큰아들 남생은 당에 투항하여 고구려 침공의 선봉장이 되니 700여년 고구려의 부침이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 때를 이용하여 김춘추는 당나라와 밀통하고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쳤으며 이어 고구려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통일은 당 나라를 끌어들인 외세의 야합이며 대동강 이북 고구려의 강역을 당 나라에 내어주고 고작 백제의 고토만을 합병한 동서통일로써 3국통일은 언어도단이며, 고조선시대의 강역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전성기 때 강역의 100분의 일이 되지 못하였으니 고작 대동강 이남의 강토를 차지한 강역의 축소라 이를 어찌 통일이라고 말 할 수 있으랴. 이리하여 동북아 패권의 웅대한 고구려의 이상은 사라지고 요동, 요서, 양자강 이북으로부터 북위에 이르는 중원의 땅 그리고 만주와 몽골, 연해주의 광대한 민족의 강역을 잃었다.



                 

        평양 을밀대         천지화(무궁화)           온달산성              중국 동북, 서남, 서북,     

      (을밀선인 건축)                 * 그림, Daum Blog 인용                하상주단대공정도



 #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


 * 연개소문 집권의 반대파였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여의 공략에도 실패하자 양만춘 장군을 달래고 설득하여 그 지위를 보장하고 타협하였다. 양만춘 장군은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고 송준길의 동춘당선생 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기록이 있는데 용기와 소신의 인물이었다고 기록했다.


 * 한기 7742년(645년) 보장왕 4년 당 태종의 침략에 요동지역의 개모성과 비사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요동성과 백암성도 함락되었다. 당군은 다음 목표를 놓고 이견이 있었는데 이세적이 주장한 안시성 선제공격이 채택되었다. 안시성이 위태롭자 고구려는 15만 군대로 구출작전을 폈으나 안시성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양만춘 장군은 고립무원이 되었으나 안시성은 성 안 남녀노소 백성들까지 총동원한 50,000의 병력으로 당군 50만의 60일에 걸친 총공격에도 강력히 저항하였다. 결국 당군은 추위와 군량 부족으로 철군하였는데 철군하는 날 양만춘 장군이 성벽에 올라 당태종에게 송별의 예를 하자 당 태종은 안시성의 전의를 찬탄하여 비단 100필을 주었다. 안시성 싸움에서 물러선 당 나라는 이 전쟁 패배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패망했다. 뒤에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멸망 뒤 끝까지 저항한 고구려 11성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되어 있다. 유림관은 산서성 경현의 동북에 있는 관문으로써 훗날 목은 이색이 유림관을 지나며 <정관음>을 지었는데  당태종이 양만춘 장군의 백우전에 눈알이 빠졌다고 읊었다.


   고구려 쯤 주머니에 든 물건일 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큰소리치더니

   어찌 알았으리요

   검은 꽃(눈알)이 흰 깃 화살(백우전)에 맞아 떨어질 줄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1/22화 : 2. 열국시대(5/6) - 백제>


               역사에 묻혀버린 웅대하고 찬란한 백제왕국

                              (삽화 : 역사에 묻혀버린 역사)



                               

               백제제국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초기 4국 강역도

           전성기 강역도            3국사기 천문현상 추적      (고구려, 백제, 신라, 당)

                                        중국 안의 3국 추정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


 * 백제는 한국 서남부의 곡창지대 그리고 황해와 중국해의 해상교통요지를 차지하여 중국 동남부와 일본 서남부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강역을 해외거점으로 확보함으로써 강대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 동북부와 시베리아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와 영토전쟁을 벌인 막강한 군사대국이었으며, 한편 활발한 해외영토 개척과 무역을 통해 받아들인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백제 특성의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킨 찬란한 문화제국이었다. 이로써 백제문화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그러나 강대하고 찬란한 제국으로써는 의심스러울 만큼 싸움다운 싸움이나 저항도 없이 멸망하였다. 신라와 당 나라의 연합군이라 하더라도 계백의 황산벌전투 외에 이렇다 할 전쟁 기록이나 저항이 보이지 않는다. 의자왕과 왕자가 분전한 약간의 기록이 보일 뿐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해동증자>라 칭송을 받았다. 왕자시절에는 국중 사냥대회에서 계백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무예도 탁월했다. 말년에 혼탁하여 성충의 충언을 듣지 않아 성충은 죽으면서 탄원했다. 적이 오거든 육지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막고 바다는 기벌포를 지키라고 했다. 끝내 신라와 당 나라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의자왕은 감옥의 흥수에게 대비책을 묻는다. 흥수는 성충과 마찬가지로 탄현과 백강을 지키라고 했으나 신하들의 의견이 엇갈려 계백 장군의 결사 항전에도 패망하고말았다. 멸망 뒤 부흥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라통일이 된 뒤 사적이 철저하게 말살되고 소멸되었으며 백제역사연구에 대한 역사학계의 의지가 미흡하여 묻혀진 왕국으로 전설처럼 남아있다가 요즘에야 진보적 역사학자들이 중국과 일본의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백제문화를 조명하고 있어 기대됨


 * 소서노와 고주몽 그리고 비류, 온조(임승국의 한단고기, 차배옥덕 한국여성문화연구원장 Daum Blog 논문 인용)

 한단고기(임승국)의 고주몽 기록은 <북부여기 하편> 5세 선제 고두막(동명왕, 조선족 장수 4명과 의병을 일으켜 위만의 우거성을 회복함, 의병활동 뒤 북부여 5세 선제 등극, 고리국에서 일어나 북부여를 승계함) 임인 30년, 한기 7118년(BC. 79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릉에서 태어났다. 한단고기 해설에서, 고주몽은 고구려의 시조, 한기 7139년(BC. 58년)에 고구려를 세웠다. <3국사기>와 <3국유사>에는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 있다. <한단고기>에서는 고주몽의 가계를,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동생이었으며 장군이었고 위만의 잔당을 평정한 공로로 고구려후가 되었던 고진의 손자 옥저후 고모수(일명 불리지)와 하백(부족)녀 유화부인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한다. 옥저후 고모수의 아들이며 고구려후 고진의 증손자다.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유랑하던 시절 혼인한 부인은 예씨(고구려 2대 유리왕의 어머니)며, 북부여로 남하하여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의 사위가 됨으로써 북부여를 승계하였다.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 형제를 두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를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고구려 건국과 구태백제와 온조백제 건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여걸로 표현했으며 여성의 행적기록에 인색한 3국사기에도 등장한다. 소서노는 계루부부족  군장 연타발의 공주로써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일으킨 여걸이었으며,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국모다. 소서노는 백제를 건국하고 고구려의 주몽에게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는데 주몽은 소서노에게 어라하於羅瑕(북방민족 돌궐의 천자天子 칭호)라는 책호冊號를 주었다. 고구려 홀한성은 소서노의 활동 근거지로써 고구려 건국의 발원지다. 근래 충북 음성의 조각공원에 소서노의 동상이 건립되었음


 * 서동요薯童謠

 

   선화공주님은

   남그스기

   얼어두고

   마동방을 밤에 몰 안고가다

  (향가鄕歌 4구체句體, 선화공주가 밤에 남 몰래 서동을 만난다.)


  서동(마동)은 훗날 백제 무왕이다. 총각시절 마(산 감자)를 캐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신라의 선화공주를 탐내 서라벌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마를 주고 노래를 지어 은근히 전파시켰다. 차츰 노래가 퍼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은 공주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공주는 억울할 뿐. 공주의 해명을 듣지 못한 왕이 노래가 사실인 것으로 오해하여 공주를 내쫓자 서동은 이를 구해 아내로 삼았음


 * 사쓰시마의 심수관가沈壽官家 도예陶藝는 일본에서는 말 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 도예와 함께 세계 도예의 양대 도예맥을 대표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전투의 패전으로 사쓰마의 번주藩主 시마스 요시히로에게 잡혀간 심수관가 초대初代 심당길沈當吉이 세운 도예다. 400년 전통을 이어온 심수관가는 현재 15대며 대대로 선(단)군신을 모셔왔는데 메이지유신 뒤 백제의 전통을 단절시키려는 일본정부의 폐쇄 조치로 제사가 끊어졌으며 심수관가는 한국명예총영사관임


 • 백제 역사연대표


 * 구태(비류)백제

    1대 구태 - 5대 여영(연대, 역사 기록 없음)


  역대

    왕명

  역사 개요

  1대

    구태

  기록 없음

  2대

    기록 없음   

 

  3대

    여구

 

  4대

    여휘

 

  5대

    여영

 



 * 온조백제

    1대 온조 한기 7179년(BC. 18년) - 31대 의자왕 한기 7857년(AD. 660년),

    31대  678년 간


역대

   왕명

    재위기간

          역사 개요

  1대

  온조

  BC.18-AD.29

  위례성 건국, 한산 천도, 마한 병합

  2대

  다루

  AD. 29 - 77

  농사 장려, 말갈 격퇴, 낙랑군 멸망

  3대

  기루

    77 - 128

  다루왕 장자

  4대

  개루

    128 - 166

  북한산성 축성

  5대

  초고

    166 - 214

  신라 침략, 적현성 ․ 사도성 축조

  6대

  구수

    214 - 234

  가뭄과 홍수 대비 둑 축조 농사 장려

  7대

  사반

           234

  나이 어려 폐위

  8대

  고이

    234 - 286

  관제 제정, 중앙집권 강화 국가 기반

  9대

  책계

    286 - 298

  고이왕자

  10대

  분서

    298 - 304

  낙랑군 서현 점령, 낙랑 자객 피살

  11대

  비류

    304 - 344

  민심 파악 선정

  12대

  설

    344 - 346

  분서왕 장자

  13대

  근초고

    346 - 375

  마한 ․ 대방 병합 평양 점령, 사기 편찬

  14대

  근구수

    375 - 384

  일본 국교 문물 보급 공헌

  15대

  침류

    384 - 385

  불법 시행, 한산 절 창건

  16대

  진사

    385 - 392

  한강 이북 수복 광개토왕과 전쟁 병사

  17대

  아신

    392 - 405

  고구려 정쟁 패함, 일본 국교 태자 볼모

  18대

  전지

    405 - 420

  아신왕의 아들

  19대

  구이신

    420 - 427

  전지왕 장자

  20대

  비유

    427 - 454

  송 나라와 신라 화친

  21대

  개로

    454 - 475

  고구려 장수왕 피습 피살

  22대

  문주

    475 - 477

  웅진(공주) 천도, 병관좌평 해구가 살해

  23대

  삼근

    477 - 479

  해구를 진로에게 토평케 함

  24대

  동성

    479 - 501

  신라 혼인 동맹, 고구려 전쟁

  25대

  무령

    501 - 523

  국정 안정, 쌍현성 축조 외침 대비

  26대

  성

    523 - 554

  사비 천도 국호 남부여, 신라 공격 전사

  27대

  위덕

    554 - 598

  중국 화친, 고구려 대비, 신라 공격

  28대

  혜

    598 - 599

  위덕왕 아들

  29대

  법

    599 - 600

  불교 신봉 살생 금지, 왕흥사 창건

  30대

  무

    600 - 641

  당나라 화친, 일본에 불교 . 문물 전파

  31대

  의자

    641 - 660

  신라 공격 영토 확장, 당나라 압송 병사



                             

             사람얼굴기와     반가사유부처상      봉래산향로             구리거울

                                                                    * 그림, Daum Blog 인용



 # 구태백제와 온조백제, 백제의 건국과 웅대한 강역


 * 3국사기(김부식)와 3국유사(일연)에서는 백제 건국역사를 두 나라로 기록한다. 구태(비류)백제와 온조백제다. 그런데 건국시조에 대하여 3국사기와 3국유사 그리고 중국, 일본사서의 기록이 다르다. 그 하나가 정설로 이어오는 고주몽 시조설인데, 고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망명 남하하여 비류는 만주지방에 구태백제를 건국하고 온조는 한강지역에 온조백제를 건국했다는 기록이다. 비류와 온조는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 계루부 지방호족 연타발의 공주 소서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주몽이 동부여에서 유랑할 때 혼인한 본부인 예씨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유리를 태자로 삼았기 때문에 왕통에 따른 정변의 조짐이 일어나 정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고 망명하였다고 한다. 그 둘째 시조설은 이 기록대로 비류와 온조가 고주몽의 후손이라면 망명을 하였다 하더라도 나라를 세우고는 당연히 성을 <고씨>로 써야하나 백제의 왕들은 한결같이 성을 <부여씨>로 썼다.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고, 중국사서들 또한 백제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시대에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요 장수였던 고진은 변경을 노략질하는 위만의 잔당을 평정한 공로로 고구려후가 되었는데 고주몽의 증조부다. 고진의 손자가 옥저후 고모수(불리지)며 하백녀 유화부인과 사이에서 고주몽이 태어났다. (해모수, 고진, 고모수, 고주몽의 성씨를 해씨, 고씨, 부여씨로 가르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3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는 성왕 16년, 한기 7735년(AD. 538년)에 도읍을 웅진(공주지방)에서 사비(부여지방)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 백제왕들은 즉위를 하면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동명묘(여기서는 북부여 시조 해모수, 동명왕이라는 칭호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뜻이며 해모수 외에 북부여 고두막왕, 고주몽이 동명왕의 칭호를 사용했음)에 제사를 지냈다. 만주지역의 비류백제는 중국 동북부의 세력이 강한 전연의 압박과 동쪽 고구려의 복속정책으로 국가 존망이 위태로워지자 남하하여 한 뿌리였던 온조백제와 통합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중흥을 이뤄 13대 근초고왕 한기 7543년(AD. 346년)을 기점으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세력을 떨쳤다.


 * 만주지역 비류백제의 한강 정착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는데 서울의 석촌동 백제고분의 기단식 적석총은 북방민족의 묘제로써 한강지역 고유의 묘제와는 판이한 양식이다. 이러한 북방식 묘제가 4세기 후반 한강지역에 느닷없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비류백제의 남하를 고증한다. 또 이때부터 백제는 북방 유목국가의 직제인 좌우현왕제를 도입하고 북방민족 돌궐의 천자 칭호 어라하, 건길지 같은 왕호를 사용했다. 비류백제가 남하한 4세기 중반 이후 만주지역 (구태)백제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는 것도 이를 뒷바침한다. 또 백제는 담로제를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시행하였는데 담로제는 왕족이나 귀족을 분봉왕으로 임명하여 지방을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군주제로써 유목국가의 정치제도다.


 * 한국에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한 백제는 한반도의 서남부 해안을 장악하고 중국대륙의 동남부와 일본의 서남부에 강력한 통치권을 형성한다. <수서>에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함께 살고 중국인들도 섞여있다>라고 기록하여 백제인들의 해외무역이 왕성하였음을 입증한다. 아울러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부남(캄보디아)의 재물과 노비 2명을 왜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백제의 사인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 무역을 시도한 곤륜(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의 통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한기 7751년(AD.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 <탑등(Tapen)>이라는 물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양모로 짠 페르시아 직물로 백제의 해외무역이 동남아시아를 재패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백제의 해외 외교활동을 보여주는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된 <양직공도>는 남북조시대 한족이 세운 남조의 하나인 양 나라(AD. 502년 - 556년) 원제(AD. 552년 - 554년) 재위 때 조공사신의 모습을 태수 소역(AD. 505년 - 554년)이 그린 궁중행사그림이다. 백제 성왕(AD. 523년 - 554년) 때인데 사신들 옆에 7행 160자로 기록한 설명문에 <백제의 22담로제와 반파(고령가야), 탁(창원), 다라(합천), 전라(경산), 신라, 지미, 마련, 상사문(전북 임실), 하침라(전남 강진)의 백제속국 9개국의 이름을 열거하여 진 나라 말기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고, 백제가 요서지방과 진평을 차지했다>고 해설하였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양직공도 보다 100년 뒤인 7세기 초 당 태종 재위 때 궁중행사에 참석한 3국(고구려, 백제, 신라)과 왜, 파사(페르시아) 등 중국 주변 32국의 사신도를 당시 화가 염립본이 비단에 그린 <왕회도>에도 같은 복색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몽촌토성              고구려 홀한성         송산리고분떼            부소산성터

                               (소서노와 고구려 건국 발원지)      * 그림, Daum Blog 인용

 


 * <송서 백제조>에 <백제국은 본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500Km)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건광 원년조>에 <가을에 궁(왕자나 장군 추정)이 마한(백제)과 예맥(만주지역)의 군사 수 천기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백제를 한국 강역에 한정하는 한국사처럼 만약 여기에 나오는 백제가 한국의 백제라면 한국의 백제는 북방 경계에 고구려가 있는데 고구려 북쪽의 예맥과 어떻게 연합군을 편성할 수 있었겠는가? 또 <송서>는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였는데 진평군 진평현이다>라고 기록했으며 <양서>에서는 <백제는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여 백제군을 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송서>와 <양서 백제전>에 <백제는 뒤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 나라(한기 7462년, AD. 265 - 316)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 역시 진평, 요서의 2군을 점거, 소유했다>고 기록하였다.


 * <남제서>에는 백제의 중국 안 식민지 명칭과 통치자의 관직명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는데 중요한 7군은 중국 동북쪽 고구려 경계와 만리장성으로부터 양자강까지 북방에서부터 차례로 대방군, 낙랑군, 광양군, 조선성, 청주군, 성양군, 광능군이다. 또한 <남제서 권 58의 백제전>에는 북위의 군대와 백제의 전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북위는 양자강 이북의 중국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북부의 고구려와 접경한 나라다. 한국의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하려면 고구려를 건너뛰어야 함으로 백제는 양자강지역과 요동에 있어야 한다. <3국사기>에는 동성왕(백제 24대 왕, AD. 479년 - 501년) 10년에 북위가 침범했으나 백제군에게 패퇴하였다고 하였으며, <자치통감>에서도 영명 6년(AD. 488년)에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말 최치원이 <상대사시중장>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병사가 1백만 명이나 되어 오월(중국의 오 나라 월 나라)을 침략하여 복속하였다고 적었다. <신당서>,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중국의 월 나라, 주 나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 고구려왕들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왕위 계승을 하였을 때는 반드시 동명묘(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설치된 만주의 한인지방까지 먼 길을 가서 참배하였다. 백제도 동명사당을 지어 왕위 계승을 고지하고 참배하였다. 한기 7924년(AD. 727년)에 대진국(발해)의 무왕이 왜에 보낸 외교문서에 <대진국은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역사와 문화, 풍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백제의 근구수왕이 한기 7572년(AD.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는 단 한 번 침략하였으나 바다를 건너 중국대륙을 여러 번 공략하여 선비 모용씨의 연 나라와 부씨의 진 나라를 정벌하고 지금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성을 식민지로 삼았다고 했다. 정약용도 백제가 3국(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라고 했다.

 * 4세기 이후 중국대륙은 남조와 북조로 나뉘는데 백제가 남조에 파견한 사신들의 직명이 서하태수(산서성 분양현), 광양태수(북경 서남), 조선태수(하북성 노룡현), 광릉태수(강소성 양주시), 청하태수(하북성 청하현), 대방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하남성 비양현)으로 중국 동남부지역을 대표한다.


 * 백제 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흑치상치(AD. 630년 - 639년)는 백제의 장군이며 신흥귀족인데, 1929년 10월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된 허난성 낙양 북망산의 묘에서 흑치상치의 묘석이 발굴되었다. 1960년 대만학자들의 해석 결과 흑치씨는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는 본래 동남아시아지역의 여러 섬을 가리키며 대표적인 섬들이 필립핀이라고 밝혔다. 백제가 필립핀에 해상 실크로드의 거점을 형성하고 부여씨의 귀족에게 흑치씨를 하사하여 필립핀의 분봉왕으로 임명했다는 해석이다. 이는 <자치통감>의 백제기록을 입증한 사료인바 이병도 등 일제식민사학자들과 일본학자들은 <자치통감>에서 백제가 요동을 다스렸다는 기록을 고구려의 오기일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1920년 숭산 부근 낙양의 북망산에서 묘지석이 출토되었는데 묘지의 주인공이 백제 의자왕의 왕자 <부여융>이었다. 부여융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자 흑치상치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 백제왕국의 흥망성쇄, 700년 유구한 역사


 • 한성 도읍시대 (한기 7179년 - 7672년, 1대 온조왕 BC. 18년 - 21대 개로왕 AD. 475  년),

     21대 493년 간


   신라와 당 나라의 연합군에 패망한 백제의 역사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소멸되었는데 1916년 일제식민지시대 몽촌토성(일명 남성 또는 고려사의 고원성)이 발굴되었고 이어 풍납토성(북성)이 발굴되어 한성백제의 궁성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들어났다. 몽촌성과 풍납성은 반경 8km 안에 불암산성, 광장리산성, 이성산성, 삼성리산성 등 6성이 연계되어 궁성 방위의 체제를 간파할 수 있으며 웅위한 한강백제의 국력을 가늠할 수 있다. 고이왕(AD. 234년 - 286년) 때에 6좌평과 16관등의 직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었고 귀족연합이 국정을 책임졌다. 이어 걸출한 군주인 근초고왕(AD. 346년 - 375년)이 백제의 영토를 확장하여 백제 최대전성기를 이루었다. 개로왕(AD. 455년 - 475년)은 친위정변을 일으켜 귀족연합의 정치제도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도모하여 강력한 군주제를 시행하였다. 왕권 강화를 위해 개로왕은 한강의 큰 돌로 부왕 비유왕의 무덤을 웅장하게 증축하고 국고를 기우려 화려한 궁궐과 누각도 신축했다. 이 때 세습귀족 세력인 재증걸누, 고이만년은 왕권  강화에 반발하였으므로 거세하려고 하였는데 미리 알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개로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돌려주기를 청했으나 고구려는 거절했다. 이로 써 두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가 무너지고 전쟁으로 비화하였는데 배신한 두 신하가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한강 부근 전쟁터에서 개로왕과 맞섰다. 그러나 전황이 백제군에 불리하여 개로왕은 적군에게 포위되고 탈출할 길이 막히자 개로왕이 두 옛 신하에게 무릎을 꿇고 정리를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빌었으나 무참히 살해되었다. 개로왕이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준비없이 갑자기 웅진(공주)으로 천도를 한다. 한성시대의 백제문화는 가장 전성기였으나 신라와 당 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불타고 파괴되었으며 이후 의도적으로 훼손되어 사적이 남아있지 않다.


 • 웅진 도읍시대 (한기 7672년 - 7735년,  22대 문주왕 AD. 475 - 26대 성왕 AD. 538년),

     5대 63년 간


   웅진은 개로왕의 전사로 급히 천도하였으므로 도읍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으나 차령정간(산맥)과 금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남쪽으로는 호남평야가 곡창을 이루어 물산이 풍부하고 서남해는 해외무역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백제부흥의 기반을 이루었다. 24대 동성왕(AD. 479년 - 501년)은 중국과 외교를 성공적으로 성사시켰고 무령왕(AD. 501-523)은 담로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1927년 발굴한 송산리 고분군과 1971년 발굴한 무령왕릉은 전축분(전 즉 벽돌을 구워서 쌓은 묘, 중국식 묘제, 북방은 석축묘며 남방은 토분임)인데 중국 남북조시대 강남지역 묘제와 동일형태로써 백제의 왕성한 대외외교활동을 엿볼 수 있는 사적이다.


 • 사비 도읍시대 (한기 7735년 - 7857년,  26대 성왕 AD. 538 - 31대 의자왕 AD. 660년),

     6대 122년 간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명을 <남부여>로 바꾸어 백제중흥을 도모하였다. 중앙통치조직을 16관등으로 정비하고 행정부서도 내부 12부, 외부 10부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또한 행정조직을 방 → 군 → 성으로 개선하여 중앙집권적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신라, 가야와 동맹을 맺어 한기 7748년(AD. 551년)에 이를 수복하였으나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가 수복한 한강유역을 한기 7750년(AD. 553년)에 점령하였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한기 7751년(AD. 554년) 태자 위덕왕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대패하였다. <수서 동이전>에 위덕왕(AD. 554년 - 598년)대에서 사, 연, 협, 해, 진, 목, 국, 백씨로 대성 8족의 귀족연합이 국정을 통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지방호족들의 화백정치다. 무왕(AD. 600년 - 641년)은 호족의 견제를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고자 복신, 계백, 흑치상치들 걸출한 인물을 등용하여 신진귀족들로 정치를 쇄신하려고 천도를 계획하였다. 왕궁리에 행궁을 조성하고 미륵사를 짓고 내재석궁을 지어 천도의 의지를 보였으나 끝내 대성 8족을 비롯한 기존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뒤를 이어 등극한 의자왕은 3국사기에서 해동증자로 평가한다. 왕은 성왕의 전사가 신라의 배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매양 신라에 공세적 입장이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왜와 관계를 돈독히 하여 당과 연합한 신라와 대결구도를 만들었다. 이른바 <십자형 국제관계구도>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신라의 김춘추가 당 나라에 밀사로 잠입하여 당 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한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백제의 상좌평 성충과 밀사 김춘추에게 제의한 중국대륙 정벌 연합전략이 김춘추의 당 나라 잠입과 연합 제휴로 오히려 역공을 초래했다. 이 때 백제는 왕권통합이 되지 않아 국정이 문란해지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와 아들 남생 3형제의 정권다툼으로 내분이 일어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윽고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 정복의 자문역할을 했고, 남생은 당에 망명하여 고구려 침공의 선봉장이 되었다. 1993년 12월 부여읍 능산리 고분과 나성 사이에 있는 절터의 북쪽 공방터에서 발굴된 <금동용봉 봉래산 향로>는 7세기 백제 안정시대의 백제 조각예술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계 칸무천황      사쓰시마 심수관가      일본문화전파도         백화정과 고란사    

                                       초대 심당길 도예                   * 그림, Daum Blog 인용

 

 

 # 백제왕국, 역사에서 묻혀져버린 역사


 * 백제는 한국에서는 한강 이남의 곡창지대를 확보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중국 동남부와 일본 서남부에 식민지를 개설하였으며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해상무역로를 개척하여 서남해와 중국해의 교통요지를 근거로 해외무역이 활발하였으므로 국력이 강대하였다. 활발한 해외 진출로 한문 보급이 빨라 4세기 중엽 근초고왕(AD. 346년 - 375년) 때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했는데 이후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이 잇달아 간행되었다. 고구려가 한기 7797년(AD. 600년) 영양왕 11년에 <유기 100권>, <신집 5권>을 펴냈고 신라가 한기 7742년(AD. 545년) 진흥왕 6년에야 비로소 <국사>를 편찬한 일에 비하면 200여년이 앞선다.


 * 또한 백제 불교는 침류왕 원년 한기 7581년(AD. 384년) 즈음에 교리를 연구하는 학문불교가 성행하여 인도, 중국에 유학승려를 많이 보냈다. 백제후기에는 미륵신앙이 융성하였고, 무왕은 거대사찰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건축사 입장에서 미륵사 건축은 대규모 건축기술을 보유하지 못하면 엄두를 낼 수 없는 건축이다. 일본 법륭사 5층 목탑과 대마도 정림사 소장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정립사지 석탑은 돌과 목재를 자유자재로 이용한 기술로써 현대건축술에서도 찬탄의 대상이다. 신라가 황룡사를 건축하면서 백제인 아비지 초빙하였다는 일도 백제 건축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95년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한 <백제대향로>의 금세공술은 고식을 따른 섬세함이 비길 데 없다.  전북 김제 벽골제는 완벽하고 거대한 수리시설로써 수학측량학의 발달을 웅변하는 사적이다. 전북 태안 서산의 마애삼존불은 불교미술의 극치로 표현되고, 무왕 35년 한기 7831년(AD. 634년)때 건설한 궁남지는 인공으로 만든 왕궁정원의 전범이다. 1995년 10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 27대 창왕(위덕왕, 523 - 554)의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은 세기적 발견이라고 학계에서 찬탄한다. 1917년 12월에 전남 나주 신촌리 9호분 을호 옹관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AD. 5,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백제금관 형태로는 유일한 관모로써 신라금관의 직선적 형태와 달리 옛 형태를 따르고 있어 학술적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재다.


 * 왕인은 아직기의 후임이다. 왕인 이전에 아직기가 근초고왕의 지시로 일본에 건너가서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는데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게 되자 일본 응신천황이 아라타와케를 보내 학자와 서적을 청했다. 그래서 왕인(32세 때)은 근구수왕의 손자 진손왕과 함께 논어 10권과 천자문, 5경박사(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 경서학자), 재봉녀(옷 마름질 장인), 직공(베 짜는 장인), 야공(칠 장인), 양주자(술 제조공), 도공(그릇 장인), 안공(가죽 마름질 장인), 화원(화가), 금공(귀금속 장인), 의사 등 기술자와 함께 초빙되어 일본의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오오사카 히라카타시 등판에 있으며 1938년 5월 일본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왕인박사 이후에도 학자의 초빙은 그치지 않아 무령왕 때 고안무, 단양이와 성왕 때 왕유귀가 초빙학자다.


 * 1996년 10월 허난성 숭산 소림사 관광버스에 <백제>라고 표시판이 쓰인 버스가 있었다. 아직도 중국에 백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3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사람을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강을 따라 둑을 쌓아 사성 동쪽에서 숭산 북쪽까지 닿았다>고 했다.

 * KBS 방송팀이 역사학자들과 함께 베트남 인접지역인 광서성 장족자치구 일대를 탐방했는데 <백제향>이라는 이름의 마을에서 맷돌, 외다리방아, 서낭당을 발견했다. 장족자치구 창호현 사람들의 생활풍습은 마한의 생활과 같다. 정월대보름과 단오절이 최대 명절이고 그들의 3현춤은 3국지 동이전의 기록 마한의 강강술래와 같다.

 * <팥 문화권>은 세계에서 한국을 위시하여 일본과 장족자치구 밖에 없다.

 * 중앙일보 탐사팀이 운남성 호도현 나시족을 탐방하였는데 우리 민족 고유의 <지게>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 <사서>에 백제의 가구수를 760,000호로 기록하였는데 백제 패망 뒤 760년이 지난 조선시대 초기의 백제권(경기, 충청, 전라 3도) 가구수는 60,000호였다. 백제의 중국대륙과 일본 경략설의 입증이다.

 * 하남위례성이라는 지명이 하북위례성을 전제로 한 설정이라면 하북위례성은 건국도읍지이며 하남위례성은 천도도읍지다. 하남위례성이 한성 즉 서울지역인데 1994년에 벌인 <서울 정도 600년 행사>는 백제의 한성시대 500년을 우리 스스로 축소 왜곡한 몰역사적 사업이다. 서울 정도는 2000년이고, 서울은 한기 7961년(BC. 18년) 한성백제 이래 도읍지다.

 

 

 

 

                   

                 *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2/22화 : 2. 열국시대(6/6) - 신라>는

                  시대별로 탑재한 뜻에 따라 이어 게재하여야 하나 원고량이

                  많아 계속 탑재가 어려워서 세번째 새 Blog를 개설하여 탑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