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기옥형璇璣玉衡을 찾아라
- 천기天機를 아는 자者 세계世界를 경영經營한다
- 차례 -
* Prologue
- 사라진 캐릭터Character
1부 고조선시대
1화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탁록전쟁복원도涿鹿戰爭復元圖
2화 배달의 나라
3화 신神들의 나라
4화 비단길Silk Road 귀향歸鄕길
2부 열국시대
5화 군웅할거群雄割據 백가쟁명百家爭鳴
6화 고구려제국
7화 천지화랑天指花郞의 후예後裔
8화 백제 문화제국
9화 신라 1000년의 영화榮華와 가야
3부 10화 남북국시대
4부 11화 고려시대와 후3국
5부 12화 조선시대
6부 13화 대한제국시대
7부 14화 대한민국시대
Epilogue
-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복원復元하는 사람들
2부 열국시대列國時代
5화 군웅할거群雄割據 백가쟁명百家爭鳴
(영웅들이 일어나 100여 개 나라 세움)
부여강역도(보라색) * Daum Blog 인용 북부여 동부여도
# 난변 해모수의 궁전, 해모수는 한편으로 선기옥형을 찾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신전Ziggurat을 아사달의 제단과 같은 규모로 신축하고 아울러 궁궐을 336칸으로 증축했다. 고조선의 47세 선군 고열가천왕을 강압으로 퇴위케하여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3301년,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1565년, 선군왕검의 선군조선시대 2095년 - 7000여 년 간 이어온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고조선 전국을 샅샅히 뒤졌으나 끝내 선기옥형은 찾지 못하고 붕어崩御(죽음)했다.
◎ 한단고기桓檀古記(임승국)의 해모수解慕漱 기록
북부여기北夫餘紀 상上(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지음)
* 휴애거사, 범장은 아호雅號. 일명 범세동范世東. 북부여기 상하권과 가섭원부여기가 현존하며 동방연원록東方緣源錄을 저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천부경天符經 주해서註解書를 쓴 것이 세상에 전傳함
* 선군시대 47세 선군 고열가 임술 57년(선군 고열가 선위禪位 1년 전), 한기 6958년(BC. 239년),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었다. 해모수는 몰래 수유須臾(수유후侯 기비箕丕)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上下의 운장雲障(하북성이나 요녕성 해안 추정)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稱하는 바라. 선제先帝 해모수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 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선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宮室을 난변蘭邊(몽고 내륙 서북지방 추정)에 쌓았다. 까마귀(3족오足烏, 세 발 검은 태양새, 태양의 흑점 상징, 후세 역사학자들이 오烏를 까마귀로 번역하였으나 오는 검다는 뜻도 있음, 서양의 Phenix불사조, 밝새, 불새. 고구려 각저총과 오회분 4호묘에 있음)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龍光의 칼을 차시며 5룡龍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從者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卽位하셨다.
계해癸亥 2년 한기 6959년(BC. 238년), 이 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烟戶의 법(호구조사戶口調査)을 제정하더니 5가加(고조선 천왕 추대 부족, 마馬 우牛 구狗 양羊 저猪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부여왕가계도家系圖 * Daum Blog 인용
* 북부여 역사연대표(한단고기, 임승국)
1대 해모수 한기 6958년(BC. 239년) - 6대 고무서 한기 7138년(BC. 59년),
6대 180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년 |
역사 개요 |
1대 |
해모수 |
45 |
BC. 239, 웅심산熊心山 개국(秦나라 始皇 BC. 246년) |
2대 |
모수리 |
25 |
194, 위만衛滿 침입(한漢나라 혜제惠帝 BC. 195년) |
3대 |
고해사 |
49 |
169, 낙랑왕 곡식 300섬 바침, 위만 정벌 관리 파견 |
4대 |
고(해)우루 |
34 |
120, 동명왕 위협 도성 천도, 가섭원(동)부여 개국 |
5대 |
고두막 |
49 |
108, 북부여 항복, 분능에서 고주몽 탄생 |
6대 |
고무서 |
2 |
59, 사위 고주몽 7대 왕위 계승, 부여인 반발 도피 |
* 동부여 역사연대표(한단고기, 임승국)
뒤에 북동부여 남동부여로 나누어짐(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1대 해부루 한기 7111년(BC. 86) - 3대 대소 한기 7219년(AD. 22년),
3대 108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해부루 |
BC. 86-47 |
북부여 위협 천도, 금와태자 책봉, 고주몽 피난 |
2대 |
금와 |
BC.47-AD.6 |
고구려에 특산물 바침, 유화부인 황태후 예로 장사 |
3대 |
대소 |
AD. 6-22 |
고구려 침략 전쟁 중 전사, 동생 도두왕都頭王 갈사국曷思國 건국, 고구려에 투항 동부여후 봉작 |
* 북부여 시조 선제 해모수 기사 8년, 선군시대 마지막 47세 선군 고열가 양위 6년 후, 한기 6965년(BC. 232년), 해모수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5가 족장들을 회유하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고 만백성의 추대로 선제가 되었다.
․ 경진 19년 한기 6976년(BC. 221년), 기비가 죽으니 아비의 뒤를 이어 아들 기준을 번조선 왕으로 봉하였다.
․ 병오 45년 한기 7002년(BC. 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이 망명을 요구했으나 선제께서는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번조선 왕 기준이 어리석게도 위만의 계략을 눈치 채지 못하고 위만에게 박사 칭호를 허락하여 상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封했다. 위만은 세력을 넓히더니 기준을 축출하고 번조선을 차지했다.
* 북부여 3세 선제 고해사 임신 원년 정월 한기 7028년(BC. 169년),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서 바쳤다. 이 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시조 해모수 병오년(한기 7002년, BC. 195년)의 겨울이었다.
* 북부여 4세 선제 고우루(해우루) 신유 원년 한기 7077년(BC. 120년), 고진(고주몽의 증조부, 고모수의 조부)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성책을 설치하여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고구려가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전 제후국)로 삼았다.
한 무제 병거兵車(싸움수레, 전차) * Daum Blog 인용
# 북부여 4세 선제 고우루 계유 13년 한기 7089년(BC. 108년), 위만의 번조선 우거의 성.
대신 합려하 : 전하, 한의 무제(유철)가 번조선을 치기 위하여 대대적인 군사 동원령을 하달 하였다는 보고가 변방에서 속속 들어오고 있나이다.
장수 성기 : 전하, 심려치마소서. 막강한 군사력이 철통 같이 대비하고 있습니다.
장수 최 : 무제의 군사가 많다고는 하나 멀리서 출정하여 한 달을 걸어야 우리 변경에 닿을 것이므로 그 때 피로하고 지친 적을 교란하고 기습하여 혼란에 빠뜨리는 계교를 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거왕 : 옳은 말이요. 먼 길에 지치고 시달린 적군을 치는 건 칼로 풀베기요. 복병을 배치 하여 요로마다 군사를 놓아 적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선발대를 막고 때로는 후진을 공격하여 혼란을 부추기시오. 단, 중군은 건드리지 마시오.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맞대적 하는 건 병가 불문율이니. 더불어, 필시 보급로가 멀 것이므로 보급로를 차단하는 교란 도 동시에 벌이시오.
# 그 날 밤 장수 최의 막사. 조선족 유민 고두막(뒤에 북부여 5대 천왕이 됨) 대장이 상좌에 앉고 조선족 장수 최를 필두로 장수 참, 장수 협, 장수 음들이 은밀하게 모였다.
장수 최 : 우거왕은 선대에 나라를 침탈하고 국권을 도둑질하여 백성을 고혈을 착취하였으 므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마침 한 무제가 침략해오므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한나라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우거를 쳐 없애고 다음 에 한나라와 일전을 벌인다면 옛 조선의 국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까지 절치부심 기회를 기다렸는데 이제 하늘이 내리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제장들의 의견은 어떠시오.
장수 참 : 우리 네 사람이 거느린 군사만으로 우거를 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 입니다. 동원할 군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장수 협 : 한나라는 우거가 목표고 결국 그들은 우거를 멸하면 물러갈 것입니다. 고토를 회복하는 일은 그 때 가서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장수 음 : 아니지요. 본인의 판단으로는 한 나라가 우거를 멸하면 반드시 저들의 통치를 공 고하게 구축하고 퇴각할 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한나라와 일전을 벌여야 하는데 우리는 작고 한나라는 크니 어렵습니다. 한 나라와 싸우기 보다는 우거와 싸우는 것이 쉬운 길 입니다. 여기 참석한 고두막 의병장께서 의병들이 봉기하도록 독려할 것입니다. 군세는 약하지만 번조선 유민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여러분 휘하의 군사들과 합세한다면 능히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수 최 : 그렇더라도 우거와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군세로 보아 우리가 불리합니다. 계 교를 쓰는 수밖에. 우거가 제거되면 우거의 군사는 일시 혼란을 일으키고 흩어질 것이 므로 그 때 4개 성문에서 일제히 봉화를 올려서 봉기하되 한나라가 쳐들어왔다고 선동 하시오. 세 분 장수는 혼란을 틈타 우리 거사에 반항하는 장수들을 먼저 베고 군사를 수습해주기 바라오. 혁명의 성공을 빕시다. (장수들, 팔뚝을 칼로 베어 술잔에 피를 흘 려 잔을 들어 마시고 맹세한다.)
* 북부여 4세 선제 고우루 계유 13년 한기 7089년(BC. 108년), 한의 무제(유철)가 우거를 멸하고 4군을 설치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위만의 변경 평나를 노략질하였다. 이에 고두막( 뒤에 북부여 5세 왕)이 의병을 일으켜 한 나라의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 때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한 무제는 전쟁에 패한 죄를 물어 육군사령관 순채와 해군사령관 양복, 무제의 사신 위산, 공손수 네 사람을 능지처참에 해당하는 기시형(陵遲處斬刑, 사지를 잘라내는 형벌)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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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um Blog 인용
* 북부여 4세 선제 고우루 갑오 34년 한기 7111년(BC. 86년) 10월, 동명왕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라고 했다. 왕이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선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사를 앞세워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이를 매우 어렵게 여겼다. 국상 아란불이 ‘통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5곡은 썩 잘 됩니다. 도읍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여 왕께서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 라고 한다. (이후 북부여에서 해부루의 동부여가 갈려나가고 북부여는 5세 선제 고두막, 6세 선제 고무서까지 2대가 더 지속됨, 7대 선제는 고주몽임)
* 동부여(가섭원부여) 시조 선제 해부루 임인 8년 한기 7118년(BC. 79년),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본명이 불리지며 고구려후 고진의 손자)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버렸다. 왕께서는 이를 이상히 여겨 궁전의 깊은 방에 가두었다. 그 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을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을 주몽이라고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 이라고 불렀다.) 동부여 2세 선제 금와는 아들 7명을 두었는데 고주몽이 금와왕의 신임을 받고 있으므로 태자 대소는 왕위를 빼앗길 수도 있다고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유화부인이 이를 눈치 채고 일러주었으므로 덕으로 사귄 친구 오이, 협보, 마리와 함께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분릉수)에 닿았는데 건널 수 없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추격병이 쫓으니 어찌하란 말인가?’ 하였더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건넌 뒤 곧 흩어지니 추격병은 되돌아갔다.
*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 계해 2년 한기 7139년(BC. 58년) 왕께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공주로써 사위를 삼았는데 즉위하니 나이 23세였다. 고구려의 시작이다.
◎ 해모수의 죽음(한단고기, 임승국)
* 병오丙午 45년 한기 7002년(BC. 195년), 연燕나라의 노관盧綰(한漢 고조高祖 유방과 죽마고우竹馬故友요 창업공신創業功臣, 유방이 죽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망명)이 한漢 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노관의 부장副將)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선제檀帝(해모수)께서는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선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왕番朝鮮王 기준箕準(고조선 3한관경제의 분봉왕, 고조선 말기에 5대代가 세습왕世襲王이 되었으므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허구虛構가 날조捏造됨)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博士로 모시고 상하上下 운장雲障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封해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서는 붕어崩御하시고 웅심산熊心山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니 태자太子인 모수리慕漱離가 즉위卽位하였다.
◎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 4군, 두 개의 3한
* 기자조선箕子朝鮮은 기자가 중국 은殷나라가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여(한단고기 3한관경본기 제 4 마한세가 하편, 수유의 사람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이라고 칭하였다) 번한의 땅 일부를 하사받아 제후諸侯로 봉해졌다. 기후는 번한 68세 수한왕 이후 번한왕이 되었는데 3한시대 번한세계世系에 기록된 기자왕은 69세 기후부터 74세 기준까지 6대고 기후 윗대는 번한의 왕이 아니라 왕검조선의 번한지역 수유족의 우두머리였다. 단재 신채호의 연구에 의하면 기자조선이란 역사연대는 기자의 후예後裔가 번조선의 제후가 되었다가 번조선 말기에 왕이 되었으므로 일본제국주의 사학자들이 ‘번한을 기자조선’ 이라는 가공의 왕조로 과장하였고 이를 일제식민사관을 추종한 한국학자들이 비판(연구)없이 수용한 오류임
* 위만조선衛滿朝鮮은 북부여 시조 해모수 병오 45년 한기 7002년(BC. 195년), 중국 연燕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그의 부장이었던 위만이 망명을 요구했으나 선제 해모수께서는 허락지 않았다. ‘번한세가 하편’ 에서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이 즉위했는데, 정미년 한기 7051년(BC. 146년)에 번조선 왕 기준이 받아들여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봉토로 주고 제후로 봉하였다. 위만은 주변 제후국을 포섭하고 세력을 넓히더니 한漢 나라가 쳐들어오니 보호해주겠다는 거짓말로 군사를 동원하여 기준을 속이고 반역하였는데 기준은 위만과 싸움에서 패하여 바다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조작한 ‘위만조선’ 의 실체임
* 한漢 4군郡은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 115권 조선열전列傳에 한漢의 무제武帝(유철劉徹)가 번한의 변경(평나平那)을 노략질하여 위만의 우거를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코자’ 사방으로 병력을 침투시켰다고 기록되었으나 무제의 군사가 우거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고 위만의 폭정에 반발한 번한의 유민 고두막 의병장(훗날 북부여 5세 왕)이 의병을 일으켜 조선족 장수 최가 우거를 죽이고 다시 반항하던 성기를 죽였다. 그래서 위만의 땅은 혁명의 주도자 참의 홰청, 협의 평주, 음의 추저, 최의 날양으로 분립했다.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의 4군은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의 원문에도 없는 도깨비 4군이다. 한 무제는 출병한 육군사령관 순채, 해군사령관 양복, 전쟁 독려를 위해 파견한 사신 위산과 공손수 네 사람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가장 가혹한 기시형棄市刑(사지를 따로따로 잘라 죽이는 형벌, 능지처참陵遲處斬)을 하였는데 패전한 나라가 어찌 고조선 번한의 고토故土에 4군을 설치할 수 있었겠는가?
* 춘추필법春秋筆法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 공자孔子가 ‘춘추’ 를 집필하면서 노魯 나라 왕이나 주周나라 천자天子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비유로 쓴 것이 후세에 은유의 문장기법이 되었다. 춘추필법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는데
․ 중국은 높이고 외국은 깍아내리고
․ 중국사는 상세히 외국사는 간단히 기술하며
․ 중국을 위해 수치를 숨기는 것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궁형宮刑(남자의 거세去勢)을 당한 것도 한 나라가 고조선과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기록했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역사서를 불태우고 수천 명의 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 또한 고조선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한다. 아울러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식으로 중화中華라고 스스로 부르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모두 중화사상에 견주어 오랑케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
◎ 두 개의 3한韓
* 3한의 역사 (임승국의 한단고기)
고조선 3한의 명칭은 선군 색불루(선군왕검시대 22대 선군왕검)에서 시작된다. 3한이란 분조관경의 뜻이 있으니 3조선이란 분권관경의 제도다. 진한(질한, 신한), 마한(말한, 막한, 모한), 번한(불한, 발한)이다. 한단고기의‘삼한관경 본기 제 4’에 한웅천왕이 태백산의 비서갑에서 제사지내는 모습을‘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면서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는 백검(지도자의 상징)으로 호위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백성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모를 공경하고, 처자는 보호 양육하고, 형제는 사랑하고, 노인은 존경하고, 어리석고 약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고 했다. 의약, 공장(기술), 축산, 농사, 측후(날씨), 예절, 문자의 법을 제정하여 강역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통치하고 교화하니 천하가 태평하였다. 한웅의 아들 신농(염제신농씨, 중국 건국 시조 3황 5제의 한 사람)은 약초를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고 교역을 장려하여 생활을 편하게 만들었다. 소전의 별고에 공손이 있었으나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로 유배하였는데 헌원(3황 5제의 한 사람 황제헌원씨, 중국 한족의 역사적 시조)의 무리는 그의 후손이다. 웅녀군의 후손으로 '여' 라는 이가 있었는데 단허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되고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특산물을 바치고 또는 귀화하였다. 460년이 지나 신인 '왕검' 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2인자)이 되었다. 섭정한지 24년에 웅씨의 왕이 전쟁에서 붕어하자 왕이 되어 9한을 통일하고 '선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하되‘앞으로는 백성들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天符라 할 것이니 천부란 만세의 강전(법전)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다’. 마침내 3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니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워‘조선’이라고 하였다. 선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여 3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들고 웅백다를 봉하여 막한이라고 하였다. 달지국(백아강)에 도읍하였다. 선군 색불루께서는 병신년 원년 정월 녹산(백악산 아사달)에서 즉위하고 5월에 제도를 개선하여 3한을 3조선이라고 하였다. 조선이란 관경(통치 지역)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이 진한이 되어 몸소 다스렸는데 강역은 옛날의 진한 영토였으며, 여원홍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하게 하고, 서우여로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선군의 관경’이라고 하고 진한, 번한, 막한을 통틀어 진국이라고 한다. 진조선은 중국 동북부 지역과 요하의 서쪽에 걸친 지금의 요서지방의 광대한 영토고, 막조선은 한반도 북부, 번조선은 북경 일대의 중국 동남부였다. 고구려와 고려의 3경제도, 백제와 흉노의 좌우현왕제도 3한관경제에서 비롯된 통치제도다.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를 평정하였다. 땅 넓이는 1만리(5000Km)에 이르렀다. 선군왕검은 제요도당(요 임금, BC. 2357년 - 2258년)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 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치우)천왕이우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켰다가 요 임금을 치도록 약속하니,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의지하여 나라를 양보하였다(양보한 것이 아니라 세력으로 쫒아냄, 중국 사마천의 사기 미화美化, 요순시대가 사기에서 말한 것처럼 태평성대가 아니었음, 개벽 실제상황, 안경전). 선군 색불루는 3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한단고기의 번한세가 하편’은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이 즉위했는데 정미년 한기 7051년(BC. 146년)에 떠돌이 도적 위만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바다로 돌아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선군왕검이 치우의 후손 치두남을 번한으로 임명하니 선군조선의 한 축으로써 번한의 치두남은 험독부를 세워 번한의 도읍으로 삼았다.
* 한국의 3한은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한 3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3국시대 이전 대한에 형성된 여러 부족의 통칭으로써 마한, 진한, 변한을 말한다. 마한은 54개국 연합체로 충청도 전라도에 자리잡았으며, 진한은 12개국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변한은 12개국으로 낙동강 유역 경상도를 차지하였다. 또한 중국의 사기 조선전과 한서 조선전에 의하면 BC. 2세기경 한반도 중남부지역은 진국 또는 중국으로 기록되었으며 진한과 3한이 모두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나라였다. 3한의 유래는 토착집단이라는 설과 고조선이 멸망하고 북방 이주민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으나 고증학적 자료를 토대로 북방민족 이주설이 정설이다. 이들 국가가 소국연맹체를 결성한 것은 철기가 보편화된 BC. 1세기(한기 7100년경) 이후다.
* 마한은 3한의 맹주로써 목지국과 백제 등 54개국 지역연합체를 이루었다. 총 호수는 10만이었으며 큰 나라는 1만호였고 작은 나라는 수 천호였다. 목지국은 진국의 중심 국가였고 왕을 진왕이라고 불렀으며 3한 초기에는 진왕의 세력이 진한과 변한까지 미쳤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 - 5만인데 큰 나라는 4 - 5000호였고 작은 나라는 6 - 700호였다. 국가는 정치를 맡은 군장과 천신을 제사지내는 천군을 두어 5월의 곡식 파종과 10월의 추수 때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차차 국가체제가 정립되어 BC. 2세기(한기 7100년경) 이후에는 정치적 지도자가 천군 보다 중요시되었다. 중국 사기에서는 BC. 2세기 한국의 국가를 <한> 또는 ‘마한’이라고 기록하였다. 3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철을 매개로 하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집단 간의 세력화가 심화되었다. 유력한 성읍과 혼인, 교역, 군사활동을 통해 지배력이 강화되고 통치기능이 전문화되면서 지배조직의 체계화도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소국연맹체가 대두된다. 변진의 미오야마국, 구야국들처럼 AD. 5, 6세기 무렵까지 독자적으로 존속한 소국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맹주국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체로 편제되었다. 2, 3세기경에는 경주 사로국을 중심으로 진한 소국연맹,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 마한의 목지국 중심의 소국연맹체로 통합되었다. 3한이다. 진번의 곁에 있었던 진국은 중국과 교역을 시도하였으나 고조선에 의하여 차단 된 일이 있었다. 기원 전후 시기에 한강 이남에서 진국으로 대표된 정치적 영향력에 대신하여 3한이 분립되었다. 변한, 진한인데 마한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 철기문명이 발전하면서 3한 사회의 세력판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3한의 소국들은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갖게 되었고 이들 간에 정복과 복속이 이루어졌다. 목지국도 약해졌다. 마한지역에서는 부여족의 일파로 부여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 집단이 중심이 되어 세운 백제국이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하였고 차차 강성해져서 목지국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에 원래의 마한의 세력은 전남지역으로 밀려났다. 신라는 사로국의 진한이 경주지역의 사로국 6부를 중심으로 정치조직을 갖추어서 맹주국이 되었다. 이들 정치연맹체는 AD. 3, 4세기에 일단락되어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백제의 마한과 사로국은 진한을 대표하였다. 이른바 3국시대다.
* 평양마한 - 한기 7003년(BC. 194년)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무리 수 천을 거느리고 평안도에 남하하여 지역의 기존 세력을 깨뜨리고 마한을 세웠다. (중국 후한서 한전)
* 홍성 금마마한 - 기준(1세 무강왕)이 죽자 상장군 탁(2세 강왕)의 인솔로 기자조선 유민들이 기존세력을 평정하고 마한을 세웠다. 홍성 금마에 도읍하고 진한과 변한을 제후로 거느렸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1세 무강왕(일명 애왕, 이름 기준, 한기 7003년, BC. 194년) - 2세 강왕(탁, BC. 193년) - 3세 안왕(함, BC. 190년) - 4세 혜왕(식, BC. 157년) - 5세 명왕(무, BC. 144년) - 6세 효왕(형, BC. 113년) - 7세 양왕(섭, BC. 73년) - 8세 원왕(훈, BC. 58년) - 9세 기왕(정, 한기 7165년, BC. 32년)이다. 3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홍성 금마마한의 기록은 혁거세 38년 한기 7177년(BC. 20년) 봄 2월 호공弧公(왜인倭人, 박을 타고 입국하여 호공이라고 함)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는데 마한왕은 호공을 꾸짖어‘진과 변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래에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사대의 예가 이럴 수 있소’라고 하였다. 혁거세 39년 한기 7178년(BC. 19)년에 마한왕이 죽었다. 신하들이‘(마한)왕이 지난 날 우리를 욕보였는데 지금 상喪을 당하였으니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왕은‘다른 사람의 재난을 기회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라며 따르지 않았다. 온조왕 24년 한기 7203년(AD. 6년)에 웅천에 책柵(나무기둥으로 만든 성벽)을 만드니 마한이 사자를 보내 책망하여‘왕이 당초 강을 건너왔을 적에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백리(50Km) 땅을 갈라주어 안정케 하였더니 은혜의 보답은 아니하고 성지城地를 만들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의리가 있다고 하겠는가’하니 왕이 부끄러워 책을 헐어버렸다. 온조왕 26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냥한다고 핑계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합병하였다. 4월에 복속을 거부하고 남아 저항한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여 백성들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망하였다.
* 익산 금마마한 - 온조백제의 공격으로 한기 7206년(AD. 9년)에 홍성 금마마한이 멸망하자 금강 이남의 전라도지방 소국들이 다시 뭉쳐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들고 홍성 금마마한왕의 후예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3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익산 금마마한을 왜 또는 왜국으로, 병사를 왜병과 왜인으로 기록하였다. 기존 학설은 이를 신라가 마한을 비하하여 왜라고 호칭하였다고 해석하였으나 요즘 고고학적 발굴로 전남 나주 고분군 발굴에서 한국 안의 왜의 실체를 규명하는 바 관심거리다. 익산 금마마한은 초고왕 40년 한기 7402년(AD. 205년) 7월에 남으로 이동한 남부여에게 정복되었다.
* 읍루는 부여의 동쪽 러시아 동남부지방에 있었으며 활과 화살이 명산물이다.‘옥저’는 함경도 해안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과 함흥지방 중심지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읍루와 부여가 국경이었으며 남쪽으로는 동예와 접경하였다. 함흥지방의‘동옥저’는 3세기 전반(한기 7400년경) 5000호의 소국이었는데 위만의 속국이 된 뒤 현도군 일부가 되었다가 낙랑군에 병합되었고 나중에는 고구려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복속 뒤에도 자치권을 허용하였다. 민며느리제도와 세골장이 풍습이 있었다. 두만강 부근에는‘북옥저’가 있었는데 읍루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한기 7482년(AD. 285년) 부여 선비족 모용씨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왕이 자살하고 중심세력이 피난하여 동부여를 세웠다.‘동부여’는 고구려의 지방민을 귀속시켰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였으나 백두대간을 경계로 하였으므로 지리적으로 교통이 불편하여 교역이 활발하지 못해 문화 발전이 늦었다. 누에를 치고 명주를 생산하였으며 삼베, 단궁과 활, 과하마, 반어피가 특산품이었다. 족외혼 풍습이 있었고 살인자는 사형으로 다스렸고 도둑이 없었다. 10월에는 제천행사로 무천이 있었다. 모(창)를 잘 쓰고 보병이 우세했다. 뒤에 고구려에 합병되었다.‘졸본’은 장백대간 골짜기 졸본지역에 있었는데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와 고구려를 건국했다.‘기자와 위만’은 압록강 하류와 요동,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에 걸쳐 있었다. 단, 기자와 위만은 원래 하나의 국가가 아니고 선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가 선군조선이 멸망한 뒤 선군조선의 명맥을 이었으나 북부여 해모수가 일어나자 제후국이 되었다. 이를 일제 어용사학자 이마니시(금서룡)가 일제식민지시대 한국 병탄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려고 조선사를 편찬하면서‘조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독립된 국가로 조작하였다.‘예와 맥’은 옥저의 남쪽 영동, 영서지방에 있었다.
* 고조선은 마지막 47세 선군 고열가의 유지諭旨로 화백제도和白制度인 5가加의 공화정을 6년 간 펴다가 해모수에 의해 북부여로 계승되었으나 고조선의 강역에서는 100여 개의 나라들이 일어나 성읍국가城邑國家를 형성한다. 씨족 부족국가, 지역국가로 형성된 나라들이다. 북부여를 위시하여 동부여(남동부여 북동부여), 졸본, 읍루, 옥저, 동옥저, 북옥저, 최씨낙랑국, 동예, 맥, 3한(마한, 변한, 진한), 가야들이 대표적이다. 한기 7100년경부터 7600년경까지(BC. 1세기 - AD. 5세기) 이 성읍국가들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면서 국가연맹체로 결성되어 국가의 기틀을 구축한다. 한국역사에는 두 개의 3한이 있는데 그 하나는 고조선의 단군왕검시대 ‘3한관경제’ 의 3한(진한, 번한, 막한)이고, 두 번째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유민들이 남으로 이주하여 세운 3한이다. 본고에서 정립하는 3한은 한국의 3한이지만 두 3한이 이름이 비슷하여 혼동의 소지가 있고, 두 3한의 관련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정립되지 않아 일반화되지 못하였기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의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정리함
* 한(순수한 우리 말. 桓, 汗, 韓은 빌어쓴 글자)은 나라 이름이 아니다. 만주나 몽고말로도 임금(칸, 징기스 칸, 고두막 한, 신라의 마립 간)이란 뜻이다. 고조선에는 진(신)한, 번(발, 불)한, 막한(말한, 일본서기의 모한이라고 함은 왜倭왕 무茂의 실수) 세 임금이 있는데 진한이 상황上皇이었다. ‘만주원류고’ 에서는 ‘한’ 을 나라 이름으로 저술한 ‘후한서’ 의 저자 ‘범엽’을 다음과 같이 질책한다. ‘당시 3국에는 3한이 있어 한 나라씩을 통치하였다. 사가史家들이 한에 군장君長의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음音이 같다는 것에 집착하여 오역한 일은 고증이 무능하였다는 결론이다’. 단재 신채호는 고조선의 3한을 신한, 번한, 막한이라고 가렸다. ‘한’ 은 본래는 왕의 칭호였으나 나라 이름으로도 두루 쓰였음
* 고조선의 3한은 국가통치방식이었던 3한관경제管境制의 진한辰韓, 번한番韓, 막한莫韓이며, 진한은 진조선眞朝鮮으로 선군왕검이 직접 통치하였고 수도는 송화강 유역 아사달이다. 강역은 압록강 이북에서 요하 동부로부터 만주까지였다. 번한은 번조선番朝鮮으로써 수도는 하북성이며 요하의 서쪽 하북, 하동, 산동, 산서, 강소에 이르는 중국대륙이었다. 막한은 막조선莫朝鮮으로 평양이 수도며 압록강 이남의 한국과 제주도, 대마도임
* 한국의 3한은 고조선이 멸망하고 3조선의 유민들 일부가 남하하여 한국 강역 안에 옛 고조선의 정신을 되살려 3한을 재건하였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을 참고하여 다시 이를 정리한 중국의 3국지三國誌 위지魏誌 동이전에 기록된 한국 안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말한다. 마한은 한강 유역과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자리잡은 54개국 연맹국가로써 총 10만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호 작은 나라 수천 호였다. 목지국目支國 또는 진국辰國의 진왕辰王이 맹주盟主로 군림하였고 초기에는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국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과 한서漢書 조선전에도 BC. 2세기 한국 중남부지역은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 3한이 진국에서 발전된 것으로 되어 있다. 진한辰韓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에 자리잡은 12개국 연맹국가로써 4 - 5만호였으며, 큰 나라는 4 - 5000호 작은 나라 6 - 700호였다. 변한弁韓은 낙동강 유역의 경상도에 자리잡은 12개국 연맹국가임
* 3한 중국설은 근래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한국의 3한(마한, 변한, 진한)이 한국강역과 중국의 동북지방이라는 학설이다. 3한을 계승한 3국(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설과 같은 맥락인데 한단고기(임승국)에서는 고조선 선군왕검시대가 멸망하고 상장군 탁이 유민을 이끌고 해로를 통하여 한국의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고조선의 3한을 계승하는 3한을 건국하였고 상장군 탁을 추대하여 진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단재 신채호도 같은 논리를 폈다. 그러나 근래 진보적인 학자들이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또 하나의 학설을 전개하였는 바 그림의 3한을 설정하고 있다.
◎ 마한馬韓 54개국(임승국의 한단고기)
원양국爰襄國, 변수국弁水國(변양수국弁襄水國), 상외국桑外國(상수국桑水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활국臣濆活國(신분첨국臣濆沾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高誕者國, 고리국高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목지국目支國), 자이모노국諮離牟盧國, 색위건국索謂乾國, 고난국高난國, 막노국 莫盧國, 비이국卑離國(막노비이국莫盧卑離國), 점이비국占離卑國(고비이국古離卑國), 신첩국臣疊國, 지침국支侵國, 구노국狗盧國, 지침지구노국支侵支狗盧國, 감해비이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이국국致離鞠國(고만치이국국 古滿致離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노국駟盧國, 내비이국內卑離 國, 감해국感奚國, 만노국萬盧國(벽노국辟盧國), 벽비이국壁卑離國(군비이국 群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구사조단국臼斯鳥旦國), 일이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우반국友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노국捷盧國(정노 국挺盧國), 모노비이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고납국古臘國(고즐국古櫛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이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이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원지국爰池國(해타국奚他國), 건마국乾馬國, 초이국楚離國
3한 강역도 * Daum Blog 인용 가야 강역도
◎ 가야의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야문화의 특질, 신경철)
학계에서는 가야의 성립을 토착설과 북방민족 이주설 두 갈래로 논란이 되었는데 근래 가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두고 북방민족 이주설이 설득력 있는 정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음
* 도질토기陶質土器의 사용 : 도질토기는 북방 토기로써 AD. 3세기 말 금관가야 중심부였던 낙동강 하류 김해와 부산지역 고분에서 출현하여 영남 각지에 산재한다.
* 순장殉葬 : 한국 토착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고 부여 등 유목민 습속인바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확인되었다.
* Ordos형 동복銅腹 : 북방 유목민의 청동솥인데 북부여 제작으로 추정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되었다.
* 무기武器의 훼손毁損 풍습 : AD. 3세기 말 무렵 추정, 김해 대성동 45호 고분에서 발굴된 대도大刀는 일부러 구부려 부장副葬함. 북방 유목민족 풍습이다.
* 갑주甲冑(갑옷)와 마구馬具 : 철제 갑옷과 투구, 기마용 마구는 북방 피혁 갑주문화인바 중국 동북방 선비족과 부여가 원류다.
* 묘제墓制 : AD. 3세기 영남에서 발굴된 묘제는 목곽묘로써 관묘제도와 다름. AD. 2세기 후반 추정, 양동리 162호묘에서 발굴되었다.
* 선행先行 분묘墳墓의 파괴 : 의도적으로 선행 묘를 파괴하는 행위는 앞 체제를 부정하는 유목민족의 풍습이다.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열국시대 한국의 왜倭 분국分國 경영사(임승국의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대진국본기’ 의 일본기를 인용하여 대진국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덧붙인다. 아울러 ‘3한과 가야시대’ 에서 말하는 ‘분국설’ 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으니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 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졸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 에 속했는데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고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나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가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 의 유민으로써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 의 노예다. 왜인들은 이 때 산과 섬에 근거하여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들이 통상했다. 바다를 건너 천 여리에 대마국(대마도)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 쯤 된다.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 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사방 300여 리 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반여언의 옛 읍임
◎ 임나(밈나)任那일본부설 (이경진, Daum Blog)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고대사에서 왜倭나라가 대한 남부지방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근대사에서는 일본이 한국, 만주, 중국을 침략한 사실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대동아건설이라는 거짓 구호를 내세워 호도하는 것이다.
일본역사교과서는 ‘한국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는데 대화大和정권이 임나라는 곳을 식민지로 삼아 임나일본부를 두었다. 대화정권에서 파견된 역인役人(관리)이 주재하여 군정軍政을 폈다’ 라고 고대일본의 대화정권이 대한의 남쪽에 식민지를 두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일본교과서의 역사부도에는 대한 남부지방이 가라(임나)로 그려져 있고 일본의 고대 신공왕후시대에 이곳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경영하였다고 조작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에는 여러 학자들의 학설이 있는데 대부분 일본학자들이 일본서기를 참고하여 대한경영설을 조작한 내용이 주류다. 이 학설들은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로 조작하였기 때문에 일본사학계에서 조차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국의 사기, 일본서기, 3국사기에서 대부분의 기록들이 임나는 대마도 일대를 말한다.
* 출선기관出先機關 즉 출장소설出張所說 : (1949년 천황주권국가를 표방한 칸마사토모, 쯔다소우키치, 이케우치히로시 등이 발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은 5세기의 역사를 기록한 웅략천황기雄略天皇紀에 단 한 차례 일본부의 기록이 있는데 일본부 장군들이 임나왕의 명에 의해 신라의 침공을 견제하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임나일본부의 대부분 기록은 6세기의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에 나온다. 그러나 흠명천황기의 기록은 일본부가 임나의 작은 나라 한지(우두머리)들과 신라를 물리치기 위한 작전회의 성격이 대부분이고 조세 징수나 군사 동원 등 정치적인 내용은 없으므로 국가 경영에 대한 내용은 전혀 기록이 없다.
* 기마騎馬민족설 : 출선기관설이 일본서기에서 조차 임나를 경영하였다는 일본부의 성격과 맞지 않으므로 정략적으로 조작한 학설이다. 동북아시아 계통의 기마민족이 만주에서 대한으로 이동하여 한동안 남한을 지배하다가 (마한)진왕의 자손이 4세기 초에 일본 북큐우수로 건너가 왜한倭韓 연합왕조를 건국하고, 숭신천황崇神天皇이 되었으며 5세기 초에는 그 자손인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북큐우수에서 키나이로 진출하여 야마토왕조를 창시한 뒤 일본열도를 통합하고 대한 남부지방을 경영하다가 7세기 중엽 임나 경영을 중단하였다는 학설이다.
* 왜倭 자치기관설 : 출선기관설의 수정론이다. 학문적으로 조작된 임나일본부설이 정설로 인정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분국설을 발표하여 반론을 제기하자 1970년대 이후 임나일본부설을 재수정하여 가야지역의 일본인들이 자치기관을 형성했다는 학설이다.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록에는 임나일본부가 외교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자치기관을 형성할만한 일본인의 대규모 정착 근거가 없다.
* 분국설分國說 : 1963년 북한의 김석형이 제기한 학설로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기본적인 발상이 역전환된 획기적인 학설이다. 선사시대 이래 3한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하여 가야인이 히로시마 동부와 오키야마지역에 임나국을 세우고, 서부에 백제계 분국, 동북쪽에 신라계 분국, 동쪽에는 고구려 분국을 세워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은 왜인들이 세운 대화정권과 대한인들이 세운 분국들과 각축 기록이다. 일본 동부의 대화정권은 5세기 중후반부터 서부 일본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가야계 분국이었던 임나국에 전략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임나일본부다.
* 백제사령부설 : 대한의 역사학자 천관우가 제기한 학설로 백제가 가야지역에 설치한 군사령부다. 이 학설은 일본서기나 3국사기와 전혀 다른 주장이다.
* 외교사절설 : 1970년대 스즈키야스타미, 우케다마사유키, 오쿠다쇼우, 키토우키요아키의 학설로써 그들의 저서 ‘고대왕국과 조선제국’ 에서는 6세기 전반 왜 왕권은 대한의 금속문물을 수입하는 대신 백제에 병사를 파견하고 무기를 공급하여 동맹 관계를 맺었다. 대화 왜가 임나에 파견한 사신들이 주둔하며 임나의 요청에 의하여 주둔군을 관장하였다.
◎ 일제의 조선역사 왜곡 ‘조선사편수회’ 와 대한역사 훼손
일본제국 식민지시대 일제는 대한에 관한 서적을 모두 수거하여 불태웠다. 역사서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복식사나 음식에 관한 서적에 이르기까지 불온서적이라는 오명을 씌워 걷어들였는데 수집한 문서가 조선총독부 관보에 51종 20여 만 권으로 기록되어 있다(광복 뒤 출간, 제헌국회사,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문정창). 이어 일제는 조선 병탄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사편수회’ 를 조직하여 조선사를 왜곡, 조작하였는데 이마니시(금서룡今西龍)를 비롯한 일제의 어용사학자들이 주도하였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사지침을 보면
첫째,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둘째, 전편全篇을 상고上古3한(선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3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조선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셋째,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史話, 사실史實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고 되어 있다. 편찬에 참여하고 왜곡과 조작에 참여한 이마니시의 충실한 추종자 한국사학자들이 내세운 실증사학의 실체다. 상고사는 한인의 한국시대와 한웅의 신시시대를 잘라내고 선군왕검부터 시작하였으며 선군왕검은 신화로 각색하였다. 고려사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은 속국으로 전락시키고, 조선사는 당쟁과 붕쟁으로 날을 새운 민족으로 폄하함으로써 역사적 우위에 일본사를 접목시켜 대한 병탄을 합리화하고 역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대한사에 대한 회의와 지도자들에 대한 모멸감을 지니도록 그래서 일본인의 우월감을 각인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역사문화정책은 대한인의 의식에 크게 영향을 미쳤음
* 흔히 대한고대사는 세계사의 봉건제도시대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서양의 중세 영주와 기사, 중국의 주나라 봉건제도, 일본의 에도시대(강호江戶시대) 성주와 다이묘(대명大名) 형성기가 유독 대한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인식하였는데 한국사의 열국시대의 성읍국가시대가 중세의 봉건시대임
◎ 가야 역사연대표
3국사기(사), 3국유사(유), 신증동국여지승람(승), 일본서기(일)의 관련 기사 요약. (괄호) 안은 약호
연대 |
역사 개요 |
AD.42 |
3월, 금관국 수로왕 가락국(금관국) 건국, 이진아시왕 대가야 건국(승) |
43년 |
금관국 수로왕 신답평에 도읍(유) |
44년 |
수로왕 궁궐 신축, 탈해 왕위 쟁탈 계림으로 쫓아냄(유) |
48년 |
아유타왕국 공주 허황옥 도착 혼인(사, 유), 9간 명칭 개정(유) |
77년 |
신라의 아찬 길문 공격 1천여 명 사로잡힘(사) |
87년 |
7월, 신라 파소왕 백제와 가야 침공대비 가소, 마두 성 쌓음(사) |
94년 |
2월, 가야 신라의 마두성 침공(사) |
96년 |
9월, 신라 남쪽 변경 공략(사) |
97년 |
정월, 신라의 파사왕 군사 동원 침략 계획, 사신 보내 사죄(사) |
102년 |
8월, 금관국 수로왕 신라의 요청 음즙벌국 실직곡국 영역 다툼 중재(사) |
106년 |
8월, 신라 파사왕 마두성주에게 가야 정벌 명함(사) |
115년 |
2월, 가야 신라 남쪽 변경 공격, 신라 지마왕 공격 물리침(사) |
116년 |
8월, 신라 정병 1만으로 가야 공격, 가뭄으로 신라군 물러남(사) |
189년 |
3월, 금관국 허황후 157세 사망(유) |
199년 |
3월, 금관국 수로왕 158세 사망, 세조 거등왕 즉위(유) |
201년 |
2월, 가야 신라에 화친 요청(사) |
209년 |
7월, 포상 8국 가야 공격, 신라 나해왕 8국 항복받아 구원(사) |
212년 |
3월, 가야 왕자 볼모로 신라에 보냄(사) |
253년 |
금관국 거등왕 사망, 마품왕 즉위(유) |
291년 |
금관국 마품왕 사망, 거질미왕 즉위(유) |
346년 |
금관국 거질미왕 사망, 이시품왕 즉위(유) |
400년 |
고구려 광개토왕 임나가라 종발성 침공 항복, 안라인 항거(광개토왕비) |
407년 |
금관국 이사품왕 사망, 좌지왕 즉위(유) |
421년 |
금관국 좌지왕 사망, 취희왕 즉위(유) |
451년 |
금관국 취희왕 사망, 질지왕 즉위(유) |
452년 |
금관국 허황후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 세움(유) |
481년 |
3월, 고구려 말갈 연합군 신라 미질부성 공격, 가야 백제 연합 구원(사) |
492년 |
금관국 질지왕 사망, 겸지왕 즉위(유) |
496년 |
2월, 가야 꼬리 다섯 자 흰 꿩 신라에 보냄(사) |
521년 |
금관국 겸지왕 사망, 구형왕 즉위(유) |
522년 |
3월, 대가야 이내왕 신라 이찬 비조부 딸 혼인 월광태자 탄생(사, 승) |
524년 |
9월, 가야국왕 신라 법흥왕 남쪽 국경순행 만남(사) |
532년 |
금관국왕 김구해 신라에 항복 진골 편입 본국 식읍(사, 유, 일) |
551년 |
3월, 신라 진흥왕 대가야 우륵 음악 연주(사, 일) |
552년 |
신라 진흥왕이 계고, 법지, 만덕을 우륵에게 음악 전수하게 함(사) |
554년 |
가량 백제와 연합 신라 관산성 공격 대패(사, 일) |
562년 |
가야 반란 신라 이사부 공격 멸망 대가야군 설치(사, 일) |
* 금관가야 역사연대표
1대 수로왕 한기 7239년(AD. 42년) - 10대 구형왕 한기 7729년(AD. 532년),
10대 490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수로 |
AD. 42 - 199 |
알에서 출생, 왕비 아유타국 허황옥 |
2대 |
거등 |
199 - 259 |
수로왕 아들, 어머니 허황옥 |
3대 |
마품 |
259 - 291 |
거등왕의 아들 |
4대 |
거질미 |
291 - 346 |
마품왕의 아들 |
5대 |
이시품 |
346 - 407 |
거질미왕의 아들 |
6대 |
좌지 |
407 - 421 |
왕비 용녀의 관리 등용 혼란 귀양 감 |
7대 |
취희 |
421 - 451 |
좌지왕의 아들 |
8대 |
질지 |
451 - 492 |
취희왕의 아들 |
9대 |
겸지 |
492 - 521 |
고이왕의 아들 |
10대 |
구형 |
521 - 532 |
신라 진흥왕 공격 영토 헌상 귀순 |
* 중국 3국지의 가야 12국명(4개국 이름 모름)
구야국狗邪國(김해), 안야국安邪國(함안), 반로국半路國(고령), 불사국 不斯國(창령), 독로국瀆盧國(거제),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밀양), 고순시국古淳是國(창원),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성)
* 3국유사의 가야 7국명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冠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 한단고기와 단재 신채호 그리고 기존 학자들이 설정한 대한 안의
3한과 근래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한과 중국의 3한
* 대한의 3한은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한 3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3국시대 이전 대한에 형성된 여러 부족의 통칭으로써 마한, 진한, 변한을 말한다. 마한은 54개국 연합체로 충청도 전라도에 자리잡았으며, 진한은 12개국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변한은 12개국으로 낙동강 유역 경상도를 차지하였다. 또한 중국의 사기 조선전과 한서 조선전에 의하면 BC. 2세기경 한반도 중남부지역은 진국 또는 중국으로 기록되었으며 진한과 3한이 모두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나라였다. 3한의 유래는 토착집단이라는 설과 고조선이 멸망하고 북방 이주민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으나 고증학적 자료를 토대로 북방민족 이주설이 정설이다. 이들 국가가 소국연맹체를 결성한 것은 철기가 보편화된 BC. 1세기(한기 7100년경) 이후다.
* 마한은 3한의 맹주로써 목지국과 백제 등 54개국 지역연합체를 이루었다. 총 호수는 10만이었으며 큰 나라는 1만호였고 작은 나라는 수 천호였다. 목지국은 진국의 중심 국가였고 왕을 진왕이라고 불렀으며 3한 초기에는 진왕의 세력이 진한과 변한까지 미쳤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 - 5만인데 큰 나라는 4 - 5000호였고 작은 나라는 6 - 700호였다. 국가는 정치를 맡은 군장과 천신을 제사지내는 천군을 두어 5월의 곡식 파종과 10월의 추수 때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차차 국가체제가 정립되어 BC. 2세기(한기 7100년경) 이후에는 정치적 지도자가 천군 보다 중요시되었다. 중국 사기에서는 BC. 2세기 한국의 국가를 ‘한’ 또는 ‘마한’ 이라고 기록하였다. 3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철을 매개로 하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집단 간의 세력화가 심화되었다. 유력한 성읍과 혼인, 교역, 군사활동을 통해 지배력이 강화되고 통치기능이 전문화되면서 지배조직의 체계화도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소국연맹체가 대두된다. 변진의 미오야마국, 구야국들처럼 AD. 5, 6세기 무렵까지 독자적으로 존속한 소국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맹주국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체로 편제되었다. 2, 3세기경에는 경주 사로국을 중심으로 진한 소국연맹,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 마한의 목지국 중심의 소국연맹체로 통합되었다. 3한이다. 진번의 곁에 있었던 진국은 중국과 교역을 시도하였으나 고조선에 의하여 차단 된 일이 있었다. 기원 전후 시기에 한강 이남에서 진국으로 대표된 정치적 영향력에 대신하여 3한이 분립되었다. 변한, 진한인데 마한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 철기문명이 발전하면서 3한 사회의 세력판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3한의 소국들은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갖게 되었고 이들 간에 정복과 복속이 이루어졌다. 목지국도 약해졌다. 마한지역에서는 부여족의 일파로 부여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 집단이 중심이 되어 세운 백제국이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하였고 차차 강성해져서 목지국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에 원래의 마한의 세력은 전남지역으로 밀려났다. 신라는 사로국의 진한이 경주지역의 사로국 6부를 중심으로 정치조직을 갖추어서 맹주국이 되었다. 이들 정치연맹체는 AD. 3, 4세기에 일단락되어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백제의 마한과 사로국은 진한을 대표하였다. 이른바 3국시대다.
가야유적 출토 곡옥 * Daum Blog 인용
◎ 가야의 역사 (김세기의 사라진 가야의 역사, 이영식의 가야사 개관, 김영심의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와 백제)
* 가야의 역사는 기원 전후 대한 남쪽의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한기 7750년경)에 한국 북쪽의 내륙에서 끝났다. 중국의 3국지, 3국사기, 일본서기 등 문헌에서는 대략 12개 나라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600여 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들과 동등하게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여 년 전이다. 3국유사는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의 서지리산(섬진강)까지로 본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 양산, 창녕지역과 섬진강 서쪽의 진안, 장수, 임실, 남원지역에서도 가야문화가 확인되고 있다. 가야의 어원은 ‘가라’ 에서 온 말인데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한다.
중국 3국지에는 3세기경(한기 7400년경)에 경남지방에 산재했던 12개의 가야국을 열거하는데 구야국, 안야국, 반로국, 불사국, 독로국, 난미리미동국, 고순시국, 고자미동국 등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금관가야, 아라가야의 ‘가야’ 란 말은 고려시대 3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라는 어휘를 붙여 지은 것이다. 3국유사는 가야 5, 6개국이 낙동강 서쪽에 있고, 이는 변한 소국들이 3세기 이후 가야가 되었다고 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 7국과 가라 10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 AD. 1 - 3세기에 낙동강 연안의 변한 소국들이 AD. 3세기(한기 7400년경) 이후 가야 또는 가라의 5, 6개 연맹체를 구성하여 3국시대에 공존하였다고 했다. 3국유사 가락국기 5장 가야조에 김해 금관가야, 함안 아라가야, 고령 대가야, 상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 성산가야(변진가야), 고성 소가야, 창녕 비화가야가 기록되어 있다.
* 임나는 일본서기에 많이 거론되었고 임나일본설을 정착시키려고 일본인들이 조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광개토왕비(한기 7597년, AD. 400년), 3국사기 강수전(한기 7800년경, AD. 7세기), 진경대사비(한기 8129년, AD. 932년)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고구려인들과 신라인들이 사용하였다. 임나는 ‘임의 나라, 주인의 나라’ 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다. 두 나라는 가야의 대표로 일본과 교역을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가야의 대명사로 쓰였다. 임나일본부는 왜왕이 가야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라는 학설이 정설이다.
* 한기 7597년(AD. 400년)에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로 가야를 공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가야의 역사는 전기가야 김해의 가락국과 후기가야 고령의 대가야로 나누어진다. 여러 가야국의 인구는 대개 3,000명에서 3500명 정도의 소규모였으나 김해의 구야국과 함안의 안야국은 2만명에서 2만5000명의 대국이었다. 3국사기와 3국유사에 기록된 ‘포상 8국의 난’ 은 사천, 고성, 칠원, 마산지역의 가야가 김해지역의 해상교통로를 빼앗기 위해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했던 전쟁이다. 한기 7729년(AD. 532년)에 가락국(김해), 한기 7757년(AD. 560년) 경에 안라국(함안), 한기 7759년(AD.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신라의 회유와 무력에 차례로 통합되어 지배세력의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대부분은 김유신처럼 신라에 귀속하여 진골 대우를 받았다.
* 김해 금관가야 : 변한 소국 구야국이 발전한 나라다. 6개 부족장들이 구지봉에서 제사를 지낼 때 6개 알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여섯 동자가 되었는데 큰 맏이가 ‘수로’로써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 철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과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중개무역 성행하였으므로 크게 번창하였다. 김해 양동리 고분 유적이 대표적이며 AD. 5세기 이후 가야국들의 주도권을 지닌 맹주였다. 한기 7729년(AD.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 함안의 아라가야 : 변진의 안야국이 발전하였다. 서부 경남지역 중심과 남해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AD. 3세기(한기 7400년경) 안야국을 중심으로 포상 8국이 연맹하여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였으며 신라와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여 국가연맹을 형성하고 주도하였다. 함안읍 말이산 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고성의 소가야 : 변진의 소국이었던 고자국이 발전하였다. 한국 남부지방의 여러 나라들과 일본의 교통로의 거점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 창녕의 비화가야 : 북서쪽에는 대가야와 접경하였고 남서로는 아라가야와 접경한 삼각지로써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신라가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낙동강유역으로 진출하였던 거점지역으로 신라에 복속된 뒤 진흥왕이 척경비를 세웠다. 창녕의 교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성주의 성산가야 : 벽진가야라고도 하며 성주읍내 성산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고령의 대가야 : 현재의 고령읍에 있었다. 중국의 3국지에서는 미오야마국이 발전하였다고 하였으나 변진의 반로국설이 정설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건국설화가 있으며, AD. 4세기(한기 7500년경)에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AD. 5세기(한기 7600년경)에는 철을 생산하여 교역함으로써 여러 가야국들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역하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합천, 함양, 거창, 산청지방을 복속하였고 소백산맥 넘어 남원, 운봉고원까지 평정하여 섬진강을 장악함으로써 하동까지 진출하여 거대한 영역국가로 발전하였다. 한기 7759년(AD. 562년) 신라 진흥왕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가야 금관 금관가야 가야 수레토기 가야 말馬꾸미개
시조 수로왕릉 * Daum Blog 인용
◎ 조선상고사(단재 신채호 저, 박기봉 역) 발췌자료
* 선기옥형(혼천의) : 북부여는 왕검 이후 그 자손들이 서로 그 간수해온 보물을 지켜서 태평함과 많은 인구의 부유함을 자랑하여(진서晉書 부여전) 볼만한 사료가 많았으나 모용외의 전란에 그 나라 이름과 함께 망실하였다.
* 고대사서 : 고구려는 동명성제, 대무신왕대에 사관이 조선상고부터 고구려 초엽까지 정치적 사실을 기록한 유기留記 100권이 있었는데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난리 때 빼앗겨버렸다. 선군왕검의 이름과 3한, 부여의 간략한 역사(略史)가 위서魏書에 모두 적혀잇는 것은 위 나라 사람들이 유기를 근거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백제 중엽에 고흥박사가 서기書記를 지었고 고구려 말엽에 이문진박사가 신집新集을 지었으며,
신라는 진흥대왕의 전성시대에 거칠부가 신라의 고사故事를 저술하여 3국이 다 한 세대의 전고典古를 비치하고 있었다. 이 외에 무명씨의 종교사 선사仙史, 위홍의 문학사 향가집, 김대문의 학술사인 고승전과 화랑세기가 있었으나 망실되었다.
고려에서는 무명씨의 3한고기, 해동고기, 3국사 등과 김부식의 3국사기, 일연의 3국유사가 있었으나 3국사기와 3국유사만 전한다. 그러나 이 두 사서는 북쪽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북진파와 압록강 이남에 안주하자는 유교도가 수백 년을 대치하였는데, 불자佛子 묘청이 화랑의 사사에다가 음양가의 미신을 보태 평양에서 거병하여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인 김부식에게 패하고, 김부식이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3국사기를 지었다. 그러므로 동북 양 부여를 모두 삭제하였고, 발해(대진국)를 빼버렸으며, 이두문과 한역을 구별할 줄 몰라서 한 사람이 여럿이 되고, 한 곳의 지명을 여러 곳으로 오기했으며, 국내 역사서와 외국서적을 취사선택하는데 흐려서 전후가 서로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역사적 가치가 없다. 고려가 몽고에 패하여 독립자존이 일체 금지되었고 기피되었기에 다른 모든 역사서와 고전은 폐기되었고 오직 3국사기와 3국유사만 남았다. 고려 당대의 사기는 고종 이전 나라가 강성하였을 때 기록은 모두 몽고가 두려워 깎아버렸고, 몽고에 복속되어 과장하거나 위작되었는데 이것들이 조선의 정인지가 찬술한 고려사의 기초가 되었다.
조선시대는 세종이 사책에 유의하였으나 태조와 태종이 최영의 북벌군에서 위화도 회군으로 혁명을 하였기에 권근, 정인지 등에 명하여 조선사략,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할 때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전의 실기로 역사를 세우지 못하고, 아첨과 문자(몽고는 대국, 조선은 소국으로 적는 역사 기록 방법)와 위조한 고사에 근거한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전대의 실록은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허락지 않고 규장각 안에 비장해두었다가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버렸다. 불경을 인쇄하고, 전쟁사 동국병감과 풍토사 동국여지승람은 공헌이다. 선조, 인조 이후에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한백겸의 동국지리설, 정약용의 강여고, 한진서의 지리서, 안정복의 동사강목이 있다. 유혜풍의 발해고, 이종휘의 수산집, 한치윤의 해동역사가 있다. 수서 2백권의 거질과 국조보감, 조야첨재, 조야집요, 연려실기술이 있다.
* 많은 고기古記에서 왕검王儉이 국선國仙의 시조始祖됨을 찾고, 고려사에서 조의선인皁衣仙人 등이 국선과 하나임을 찾으며, 고려사에서 이지백이‘화랑을 중흥시키고자’한 논쟁과 예종의 4선仙의 유적을 더욱 더 영예롭게 하라‘고 한 조서詔書와 의종의 ’국선들이 관리로 등용될 길을 더욱 넓게 열어라‘한 조서를 보면 고려 때까지 국선의 전통이 남아있었다.
* 고대 아시아 동부의 종족은 우랄어족인 조선족朝鮮族, 흉노匈奴족과 중국어족인 한漢족, 묘苗족, 요獠족 두 갈래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 선비鮮卑, 여진女眞, 몽고蒙古, 퉁그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突厥(新疆족), 헝거리, 터키, 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
* 인류의 발원지에 대해서는 파미르고원과 몽고사막 두 가지 (가)설이 있으나 우리 고어古語로써 참고하면 왕의 성씨姓氏를 해解(해모수)라고 한 것은 태양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며, 왕호를 불구래弗矩內라고 한 것은 태양의 빛을 취한 것이며, 천국天國을 한桓이라고 한 것은 그 광명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대개 조선족이 서방 파마르고원 또는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서 불함산不咸山(백두산)을 보고 명월明月이 출입하는 곳 - 광명의 신이 쉬고 잠자는 곳으로 알고 광명이란 뜻으로 후세에 조선朝鮮이라하였다. 조선은 이두자吏讀字로 조선朝鮮이라고 쓰게 되었다.
지산동 가야금관 가야 청동거울 지산동 가야고분군 가야 장신구
* Daum Blog 인용
* 고기古記, 고사기古事記 등을 참고하면 조선문화의 원시原始‘수두(소도蘇塗)’의 발원은 거의 다 송화강변의 하얼빈 부근에서며 하얼빈의 옛 이름은 부여다. 그러므로 송화강은 조선족이 최초에 그 뿌리를 내리고 정주를 시작한‘아리라’고, 하얼빈은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불’이며, 그 이외의 모든 부여, 부리 등은 연대를 따라서 차례로 개척된 야지野地 -‘불’이다.
* 중국의 고서古書 - 굴원의 초사楚史,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의 이 곳 저 곳에 선인왕검, 선배, 수두, 선인仙人, 선사仙史가 기록되어 있다.
* 대선군 왕검이 3신神 5제帝의 신설神說로써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에 의하여 인간 세상 일반제도를 정함에 있어 신한과 말한 ․ 불한의 세 한을 세워서 대단군의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이고, 말한과 불한은 좌우의 양 부왕副王으로써 신한을 보좌하는 사람이다.
* 대선군의 3경京은
그 하나는 하얼빈(부소갑, 비서갑, 아사달)
그 둘은 해성․ 개평으로써 고사에 5덕지, 5비지, 안지홀, 안시성이며
그 셋은 평양(백아강, 낙랑, 평원)이다.
* 한기 6300년, BC. 900년 경부터 그 후 대략 5 - 600년 동안은 대선군의 전성시대였다. 상고에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다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서 발해는 하나의 큰 호수였는데, 발해의‘해’도 그 음이‘불’이며, 또한‘불리지’가 줄어든 이름이다.
지금까지 각 사서에는 3조선의 분립이 빠져있을 뿐만아니라 3조선이란 명사까지도 선군, 기자, 위만의 세 왕대라고 잘못 이해하였다. 신 ․ 말 ․ 불 세 한은 이두문으로 진辰, 마馬, 변卞 3한이라고 기록한 것이고, 신 ․ 말 ․ 불 세 조선은 이두문으로 진眞, 막莫, 번番조선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 한韓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3한은 3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3대왕이며, 세 한의 강역은 신조선이 봉천성의 서북과 동북 즉 지금의 길림 흑룡 두 성과 연해주 남단이고, 도읍지는 아스라(하얼빈)며, 불조선은 요동반도며 도읍지는 아리티(개평현 동북의 안시 고허)고, 말조선의 강역은 압록강 이남이며 도읍지는 펴라(평양)다.
* 3조선의 사적史的 자료는 사기, 위략, 3국지인데 조선을 서술할 떼는 조선을 위하여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중국과 관계된 조선만 서술하였고 이 또한 성패와 시비를 전도하였다. 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적을 때는 조선인이 지은 본래의 명사를 그대로 쓰지 않고, 임의로 다른 이름을 지어 동부여를 불내예라 하고, 오열흘을 요동성이라고 한 필법이 많다. 조선이 특수한 문화를 지니고 특수하게 발전해왔음에도 문화 발달을 기자나 진의 유민들에게 돌리기 위하여 수많은 위증을 하였다.
* 한기 6900년, BC. 300년 경 신․ 말․ 불조선이 분립했는데
․ 신조선은 해解씨니 대선군 왕검의 자손이고
․ 불조선은 기箕씨니 기자의 자손
․ 말조선은 한韓씨니 선대先代를 알 수 없다.
왕부王符가 쓴 잠부론潛夫論에 한서 역시 그 성은 한씨인데 위만의 침벌을 받아서 바다 가운데(조선)로 옮겨가 살았다 하였는 바 한서韓西는 말조선의 족속이니 말조선은 성씨가 한씨인가 한다.
* 신조선이 북부여(도읍 아사달, 3국지에 현토군의 북쪽 1000리 하얼빈) 동부여(도읍지 갈사나, 훈춘), 남부여(동북부여 - 고구려 투항, 남동부여 - 함흥)로 나뉘었다.
*소서노는 (고)추모(고주몽)와 혼인하여 홀승골 산 위에 도읍을 세워 국호를‘가우리’라 하고 이두자로‘구려’라고 썼다. 가우리는 중경中京 또는 중국中國 뜻이 있다.
가야토기 * Daum Blog 인용
* 북부여 4세世 단제 고우루高于婁(해解우루)천왕, 한漢 나라의 유철劉徹(한漢 2대代 무제武帝)이 평나平那를 노략질하여 우거(고조선 변경邊境지방의 왕)를 멸망케하고 4군郡을 설치하려고 하였다. 이에 고두막高頭幕한汗(고조선 변경지방의 왕)이 의병義兵을 이끌어 한 나라를 격파하였다(뒤에 고두막한은 5세 단제檀帝가 되었다). 고두막한이 동명왕東明王이라 하고 고무서高無胥(뒤에 6세 단제, 소小해모수, 고구려 시조始祖 고주몽高朱蒙의 장인丈人)에게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인데 장차 이 곳에 도읍都邑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라고 핍박하여 단제는 이로 인해 병을 얻어 붕어崩御하고 동생 해부루解夫婁가 제위帝位를 이어받았다. 동명왕(고무서)은 해부루에게도 핍박을 하고 군대를 보내 위협하였으므로 군신君臣이 모두 어려웠다. 이 때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통하通河의 물 가 가섭원迦葉原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5곡穀은 썩 잘 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왕에게 권하여 마침내 도성都城을 옮겼다.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또는 동부여東夫餘다. 고조선은 북부여北夫餘와 동부여東夫餘, 남부여南夫餘 그리고 졸본卒本, 읍루邑婁, 옥저沃沮, 동옥저東沃沮, 북옥저北沃沮, 최씨낙랑국崔氏樂浪國, 동예東穢, 맥貊, (남南)3한韓(고조선의 3한관경제를 북3한이라고 한 데 대한 고조선 멸망 이후 한국과 만주, 중국의 요동지방遼東地方에서 건국한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 가야伽倻가 대표적이다. 진한辰韓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에 자리잡은 12개국 연맹국가, 변한弁韓은 낙동강 유역의 경상도에 자리잡은 12개국 연맹국가, 마한馬韓은 한강 유역과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자리잡은 54개국 연맹국가다. 이들이 모두 선기옥형의 존재를 알았고 정통성과 그 신성神性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동부여의 단제檀帝 해부루解夫婁는 선기옥형에 대한 염원이 절실하였으므로 2대 왕 금와金蛙 그리고 3대 왕 대소帶素까지도 선기옥형의 행방을 쫓아 사방을 누볐으나 끝내 선기옥형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이후 선기옥형은 전설처럼 구전口傳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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