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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 여순반란 가족사 Documentery : 종교개혁

북새 2023. 1. 25. 15:57

우상 偶像

 

 

# 광주송정역 대합실

 

도깨비기자(필명筆名, 프리렌서Freelancer 사건기자)가 전남 여수시를 방문하기 위해 서울 용산역에서 KTX에 탑승하였다. 4시간 쯤 지난 후 광주송정리역에 닿아 전라선 완행열차로 갈아타려고, 대합실소파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진 송정리 전통시장거리를 관망觀望하고 있다.

 

도깨비기자가 송정리역을 와본 것은 광주에서 유학留學을 하였던 고등학교 2학년 봄소풍이다. 그때 송정리역 주변은 판자板子집들과 초가草家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판자집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붙어있어 화려한 매무새의 아가씨들이 앉아있었고, 줄을 지어 거리를 지나가는 고등학생 소풍행렬을 보고있었다. 학생들이 지나갈 때 손짓을 하는 아가씨들이 있어서, 인솔교사가 호루루기를 불어 호기심에 두리번거리는 학생들의 눈을 돌리려고 했던 기억이 생각난다.

 

대합실 통유리창 너머로 송정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넓은 도로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옛 홍등가紅燈街에는 송정전통시장이라는 아치 Arch형간판을 걸었다. 싸전, 어물전, 푸줏간, 푸성귀전들이 늘어섰었던 낮고 허술하던 초가草家점포들은 사라져버렸다. 전통시장은 이름뿐이고 아크릴Acrylic 건축자재로 지은 점포들은 화려한 초현대식이다.

 

 

# 여순사건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여순반란 73년만이다. (여순사건은 70여 년 동안 <여순반란>으로 불렀다. 2021년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여순사건>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사건 당시의 사회상을 적나라赤裸裸하게 표현하기 위해 <여순반란>으로 표기하며, 제주사건도 제주폭동으로, 6. 25한국전쟁은 민족동란으로 표기함)

 

도깨비기자의 부친은 여순반란 때 광주의 대학에 다녔다. 반란소식을 듣고 고향에 다니러왔었는데, 마을 운교교회 찬송가와 성경 소각燒却사건, 마을 앞 신작로新作路(국도國道)의 삐라살포撒布사건에 휩쓸려 남양지서에 끌려가 즉결처분 대상이 되었다. 처형 직전 면내 유지有志들의 탄원으로 처형은 면했으나, 구속 일 주일만에 남양지서 경찰의 모진 고문과 혹독한 구타로 의식을 잃고, 남양지서 앞 개울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었다. 부친이 구속된 후 매일 하루 세 번씩 십 리 길을 왕복하며 삼시 세끼 밥을 해 날랐던 할머니의 극진한 간호에 의해 살아났으나 평생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여순사건특별법 이전에 정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발족發足했다. 도깨비기자는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한 피해신청서를 접수시켰다. 그러나 부친이 희생자(사망자)가 아니고 피해자(생존자)여서 조사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해신청이 기각되었다.

 

 

# 희생자(사망자, 행방불명자)ㆍ유족신고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출, 인적사항 등 서류 기본사항 생략)

 

피해자 이종구는 여순반란 당시 광주 모 대학생이었는데,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고향 운교에 하향하였는데, 1948. 10. 20일 경 반란군이 고흥으로 진입하다가 마을의 교회 십자가를 목격하고 마을에 진입하여, 교회를 불태우려고 하자 이를 저지했으며, 반란군의 요구로 교회 강단의 설교용 성경과 찬송가를 내다주었다. 반란군은 성경과 찬송가를 불태운 뒤 물러갔다. 그후 국군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수복을 하는 과정에서 운교마을 입구 국도에 반란군을 찬양하는 불온不穩삐라Bill (광고지, 전단지)가 살포撒布되었는데, 남양지서에서 이를 수거하고 살포자를 색출한다면서 동네 청년들과 이종구를 남양지서 유치장에 감금하고 고문拷問과 문초問招를 하였다. 문초중 대부분의 청년들은 석방되었는데, 이종구는 지식인으로써 반란군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내주는 등 협조를 한 일이 있었으므로, 삐라살포자로 의심받아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였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이종구가 살포자라고 자백을 하자 처형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면내유지面內有志들이 탄원을 하였는데, 이종구는 면내 유일한 대학생으로써 전도유망前途有望한 청년이며, 독실篤實한 기독교신자이고, 방학이면 청년야학夜學을 개설하여 인근 5개면 청년교육을 하는 등 봉사를 하였다. 또한 삐라가 동네 안이나 집에 살포된 것이 아니라 동네와 300여 미터 떨어진 동네입구 국도변에 살포되었는데 가로수에 걸린 것들도 있었다. 이는 반란군이 차를 타고 신작로를 지나면서 뿌린 것이라 추정된다. 이에 이종구는 삐라살포와 무관하므로 선처를 해달라고 탄원을 하였다. 그러나 이종구는 이미 혹독한 고문과 구타로 숨이 끊어진 시체가 되어 지서 앞 개울에 버려졌는데, 날마다 밥을 이고 나르던 할머니가 발견하여 간신히 목숨은 부지했으나, 이로 인하여 이종구는 평생 정신분열증을 앓았고, 동네 제 1부자였던 가산家産은 파산하였으며, 10명의 자녀들은 중등교육도 받지 못 하고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신세로 전락顚落하였다. 부친은 홧병으로 중풍中風이 도져 돌아가셨으며, 아들 한 명은 병에 걸렸으나 치료도 받지 못 하고 요절夭折하였다. 이후 이종구는 정신분열증과 치매癡呆를 앓다가 2003. 11. 2578세로 별세하였음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가 일차적인 의무요 책임이다. 그런데 국가가 선량한 국민을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하여 반역자叛逆者를 덮어씌우고, 정신분열증병자로 만들어 평생 고통과 질곡桎梏 속에서 살게 하였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신고자는 피해자 이종구의 장남으로써 부친 이종구가 당한 국가공권력폭력으로 가정이 파탄破綻되고 평생 수모受侮와 질곡桎梏을 겪었다. 차라리 아나키스트Anarchists(무정부주의자)가 되기를 소망도 했다. 이러한 국가공권력 만행蠻行은 한 가족을 파멸로 만들었으며, 신고인의 일생을 송두리체 망쳤으며, 그 가족들이 겪은 간난과 질곡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크다. 철천지한徹天之恨이다. 이에 피해자 이종구의 신원伸冤과 명예회복을 청원하고, 국가폭력으로 파탄한 피해자 이종구가족에 대한 배보상을 청원함

 

 

#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피해신청서 보완진술 (1)

(인적사항 등 서류 기본사항 생략)

 

· 피해신고를 했으나 피해탐문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어 피해신고에 대한 보완내용을 진술함

 

피해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들었으나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수소문하던 중, 피해자 이종구와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고, 이종구가 청년야학을 개설하여 가르친 적이 있는 마을 주민 주갑동이 수필집을 발간했는데, 그 수필집에 <빼앗긴 인생>이란 항목으로 피해자 이종구(L = 이니셜Initial)에 대한 처참한 행적과 남양경찰서의 혹독한 고문 등이 수록되어 있어, 저자 주갑동의 허락을 받아 객관적자료로 제출함

 

<첨부자료>

 

· 피해자 이종구의 피해사실이 수록되어 있는 주갑동의 수필집 <콩고강 항해> 이종구 편(L = 피해자 이종구의 이니셜Initial), <빼앗긴 인생 P. 99 - 104> 발췌拔萃

 

<저서 제원諸元>

 

. 책명 : 콩고강 항해

. 저자 : 주갑동

. 출판사 : 수필과 비평사

. 출판일 : 2006. 4. 15

 

 

2022. 4. 19

진술인 이00

 

 

<참고자료 : 빼앗긴 인생>

 

평생의 억울함을 통음痛飮으로나마 달래보겠다는 심산인지 오늘도 L영감님은 소주병째 나팔을 불며 공옥진여사의 춤걸음으로 천방지天方地軸 장지葬地를 누빈다. 를 쓰고있는 일꾼들 틈에 끼어 건성으로 삽질을 해대다가 금방 팽개치고, 옹기종기 앉아있는 조문객弔問客들의 술자리마다 훌쩍 비집고 들어서며 우둔愚鈍한 말참견까지 하여 구박듣기가 일쑤다. 동네의 애경사愛敬事나 잔치 때마다 꾀제제한 옷매무새 그대로, 80이 가까운 연세답지 않게 물 마시듯 술욕심을 부리며, 후줄근하게 취해서 비척거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측은한 심정을 누를 수가 없다. 그리고 먼 옛날이 생각난다.

 

여순반란(1948)이 일어났던 이듬해, 여름철로 기억된다. 그때는 산속에서 암약하던 공비共匪들이 초저녁부터 원근 큰 산봉우리마다 자주 봉화烽火를 올려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했었다.

 

옛날 조선시대처럼 전국 요지要地의 고산준봉高山峻峯에 봉수대烽燧臺를 두어, 외세外勢의 침입이나 천재지변天災地變을 알리는 긴급 통신수단처럼, 체계적인 정보전달 효과는 얻지 못할 것이지만 우리 마을 뒷산에서도 사흘이 멀다하고, 밤이 되면 횃불이 오르고, 이어서 건너편 먼 산봉우리에서도 봉화가 따라올라 시골사람들의 간담肝膽을 서늘케했었다. 그만큼 공비들의 준동蠢動이 잦던 시절인데다 치안治安마져 허술하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바로 신작로변新作路邊(국도國道)에 살았던 우리집에서 이장님과 교회 집사님 두 분이 아버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들로 이야기를 나누고계셨다. 나는 무언기 심창치 않은 예감이 들어 사립문 밖 신작로에 나가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큰길 바닥에는 인쇄된 삐라(Bill, 광고지, 전단지傳單紙)들이 하얗게 뿌려져있고 가로수마다에 대형 인공기(人共旗, 북한국기)가 걸려있지 않은가. 철부지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내 생각에도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고 느껴졌다.

 

마루에 앉아서 의논을 모은 어른들은 해 뜨기 전에 치워야 한다고 나를 독촉하여, 친구 한 명과 동생을 데리고 길바닥에 질펀하게 널려있는 삐라들을 줍기 시작했다. 모두 김일성 찬양일색의 혁명적인 문구로 짐작되는, 다양한 종류의 삐라들을 허겁지겁 줍기에 여념이 없는 판인데, 하필이면 옆 동네에서 들에 나오는 사람들을 앞세운 순경 한 명이 다가오면서 고함을 치면서 삐라줍는 걸 그만두라고 했다.

 

너희 동네 빨갱이놈들이 밤 새 저질러놓고, 아침 늦게까지 보란 듯이 치우지도 않다가 이제야 줍는 척 하면 그냥 넘어갈줄 아느냐?’

고 고래고래 욕설을 해대며 가로수에 걸쳐져있는 인공기人共旗(북한 국기)들을 총대로 휘감아 걸어내리면서 우리집에 당도했다. 마당에서 엉거주춤 두려움에 떨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서있는 이장님과 두 집사님을 보더니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이 빨갱이들 잘들 모여있구나!’

하며, 마당구석에 세워둔 바지게 작대기를 들어 차례로 엉덩이를 갈겼다. 그렇잖아도 보릿고개로 굶주려, 명주바지를 입은 것처럼 후줄근한 하체에 맨 중의中衣 차림인데 그 작대기타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웠다.

 

제풀에 흥분한 그 순경은 바로 앞집에 사는 K청년을 끌어내어, 무조건 간밤 인공기와 삐라사건의 혐의자嫌疑者로 몰아붙이고 몽둥이로 두들겨팼다. 영문도 모른 체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매를 피하려 해도 막무가네, 나중엔 청년이 길바닥에 널부러져버렸다.

 

나는 이웃집의 형님처럼 따랐던 사람이 파김치처럼 얻어맞고 누워있는 것을 보고, 왜 이렇게 착하고 죄 없는 사람이 이유도 없이 초죽음이 되도록 맞아야 하는가 하는 분함을 삭일 수가 없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어이없게도 외부 공비들의 소행으로 애먼 우리동네가 쑥대밭이 되는 판이다.

 

순경은 온 마을주민들을 동각洞閣에 모이게 해놓고, 신작로에 살포撒布된 인공기와 삐라는 이 마을주민들의 짓이므로 응분의 중벌을 받게 될 것이라며, 애꿎은 청년들과 학생들을 골라내어 줄줄이 지서로 끌고갔다. 그때 젊은이들은 심한 구타로 머리가 터지고 허리뼈를 다치는 등 수난을 겪었다.

 

다음날부터 거의 집집마다 가택수색을 당했고, 책과 서류 나부랭이들은 모두 거두어갔다. 심지어는 어린 학생들의 공부방에서 잉크가 묻은 죽석竹席(장판)까지도 말아서 짊어지고 지서로 가야했다. 우리 집에는 작고作故하신 형님이 일본에서 학창시절에 쓰셨던 책과 성적표, 상장 등도 모두 압수당해 영영 찾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중죄인重罪人처럼 지서로 끌려갔던 청년 학생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인공기를 만들고 삐라를 인쇄하여 뿌렸느냐는 다그침으로 혹독한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굵은 생나무 몽둥이타작에 물고문으로 똥물까지 토하며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됐던 참상慘狀은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서 담 밖까지 들리는 황소 넘어지는 듯한 신음소리가 가족들의 간장을 녹였다. 그러나 아무리 주리를 트는 강요에도 쓰러질 때까지 버티었던 청년학생들 중에서, 며칠 동안 심한 고문을 견디다 못한 두 청년이 허위자백을 하고 말았다. 그 두 사람 때문에 우리 아버지까지 범행에 가담했다는 누명陋名을 쓰고 온 몸에 구렁이 감듯 검푸른 피멍이 들도록 맞고 풀려났지만, 똥물 장복長服의 효혐도 없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면치 못 하였다.

 

그때는 전국 각지에서 좌익左翼들의 할거割據가 국가안위를 흔들만큼 치안을 어지렵혔고, 지방에서는 폭도화한 공비들이 민가民家에 숨어들어 약탈을 자행하고, 불시에 지서와 관청을 습격하여,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들의 살상을 서슴치 않던 시대였기에, 수사기관이 피의자들을 심문하는 순경의 감정과 고충을 만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고문을 자백의 방편으로 삼는 행위는 무엇으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결국 허위자백을 했던 L씨와 H씨 두 청년은 사형死刑을 면치 못 할 처지가 되었지만, 면내 유지들의 탄원으로 무혐의가 입증되어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고문을 당해 입은 중상은 두 사람의 일생을 병신病身으로 만들고 말았다.

 

L영감님은 그 시절에 흔치 않던 대학생이었다. 주위에서 부러워할만큼 장래가 촉망되던 엘리트Ellite이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느 분야에서나 두각을 나타내고도 남을 아까운 인재人材였다. 그런데 그 후유증으로 저능아低能兒처럼 바보가 되어, 동정은커녕 아무에게나 놀림감이 된 체 살아온 그 분은, 어느새 안타깝게도 80을 바라보는 영감님이 되었고, L영감님은 오늘도 이웃집 초상初喪의 장지葬地에까지 따라나와서 슬퍼할줄도 모르고 덤벙대기만 한다.

 

이렇게 희생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체념해버릴 까닭도 없는 소중한 인생인데, 억울하게 미치광이가 되어 탄원이나 원망도 없이 생의 마지막문턱에 이르렀으니, 본인과 가족에게는 물론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애석할 뿐이다. 이런 사례가 비단 이분 뿐이었겠는가. 누가 이렇게 빼앗긴 인생을 보상해줄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고문에 의한 자백은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음에도, 무자비한 직권남용으로 공공연히 고문이 자행되었었다. 이런 돌이킬 수 없는 고문의 피해를, 혼란기의 시대적 핑계나 무식한 자들의 소행으로 치부하고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상처가 크고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법의 목적은 형벌보다 선행善行을 위하는 몫이 더 큰 것이다.

 

이제는 고문이라는 만행蠻行은 재연再演되지 않으리라는 소망으로 감히 L영감님의 아픈 과거에도 용서를 빌자.

 

 

도깨비기자는 이 글을 읽으면서 북받쳤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70여 년 동안 응어리진 설움이다. 그 동안, 이제는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는 부친을 원망한 어리석었던 마음이 슬픔으로 바뀌었다. 어린시절에는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받는 부친을 원망했었고, 커서는 미친짓을 하는 부친이 부끄러웠다. 부친은 미친짓을 하면서도 미친짓인줄도 모른다. 부친에게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피해신청서 보완진술 (2)

(인적사항 등 서류 기본사항 생략)

 

· 신고인이 제출한 여순반란 피해자 후유장애인 이종구에 대한 피해진술내용에 대하여 보증인의 보증서를 받는 과정에서 보완내용이 진술되었으므로 보완함

 

보증인 신00는 현 운교마을 이장里長으로써 여순반란 당시 출생하지 않았으나 성장하면서 어른들에게 들었던 내용과, 운교마을 주갑동(수필집에 이종구의 피해내용 수록, 여순반란 때 초등학교 3학년, 피해자 이종구와 10여 세, 이종구의 청년야학 수강, 어른들에게 들은 내용을 저술했음)이 저술한 수필집에 이종구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바

 

이종구의 피해에 대한 보완내용은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종구가 사는 운교마을 입구인 국도변에 불온不穩삐라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를 접수한 남양지서 순경이 운교마을 사람들을 탐문하였으나 증거를 발견하지 못 하자, 청년들을 몇 사람 연행하여 남양지서 유치장에 가두고 고문과 구타를 하며 취조를 하던 중, 대부분 다 혐의가 없어 풀려나고 당시 대학생으로 지식인이었던 피해자 이종구를 주범으로 지목하여 혹독한 고문과 문초를 계속하였다. 이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와 본 신청서에서 신청인이 진술한, 반란군이 교회 성경과 찬송가를 불태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유독 혼자만 극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지 않았나 추정된다. 결국 며칠째 당한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이기지 못한 피해자 이종구가 불온삐라를 제작하여 살포하였다고 자백을 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에 면내 유지들이 탄원을 하여 무죄판결이 되어 처형을 면하고 풀려났다.

 

면내 유지들과 마을사람들의 탄원내용은

 

인공기와 불온삐라가 마을이 아니라 마을로 들어가는 국도에 살포되었는데, 이는 마을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반란군과 폭도들이 차를 타고 마을 앞 국도를 지나면서 뿌렸기 때문에 삐라가 국도에 살포되었고, 인공기는 가로수에 걸려있었다. 마을에는 삐라를 인쇄할 기구도 없고, 불온삐라를 작성해야 할 아무 여건도 없다. 이종구가 반란군이나 폭도들과 연관된 증거도 없다. 또한 운교마을은 마을 앞으로 난 신작로(벌교와 고흥 간 국도)가 마을과 300여 미터 쯤 멀리 떨어져있는데, 마을사람들이 삐라와 관계되었다면 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 입구 도로에 뿌렸겠느냐? 피해자 이종구는 착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고, 오르간 반주자로써 돈독한 신심을 지닌 청년이었고, 대학방학 중에는 마을에 청년야학을 개설하여 근린 5개면 청년들을 가르쳤으며, 면내에서는 유일한 광주 모 대학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다.’ 라고 이종구의 삐라 관련 혐의를 부정하고 처형중지를 탄원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참고로 마을의 지형도를 살펴보면 운교마을은 벌교 고흥 간 국도변 왼편에 위치했는데, 마을이 10여 호씩 5개 반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국도와 가장 가까운 4반이 국도에서 300여 미터 쯤 떨어져 있고 (5반은 국도를 중심으로 오른편 바닷가에 위치함), 인공기와 삐라는 국도 왼편 운교 4반의 입구, 마을이 아니라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살포되었다. 그러나 4반도 국도와 300여 미터 떨어져 있으며, 4반에서 또 300미터 쯤에 3, 300미터에 2, 1반으로 각 반들이 10여 호씩 흩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사람이 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면 왜 마을 안이나 집안에 뿌리지 않고 국도에다 뿌렸겠느냐? 또 인공기는 가로수에 걸려있었고, 삐라는 국도에 뿌려져 있었다. 이종구는 삐라를 인쇄할 여건도 되지 않고 반란군과 연계도 없다.

 

이렇게 면내 유지들이 주장하여 이종구는 처형을 면하고 풀려났으나, 이미 혹독한 고문拷問과 구타毆打로 숨이 끊어져, 남양지서 앞 개울에 시체로 내다버린 이종구를 그의 모친이 수습하여 우마차牛馬車로 실어왔는데, 무녀독남無女獨男 3대독자 이종구는 모친의 필사적이고 헌신적인 간병看病으로 실날같은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이후 평생 정신분열증을 앓았으며, 마을의 제 1부자富者였던 이종구의 집안은 파산하였고, 10명의 자녀들은 학업은 고사하고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이종구의 부친은 홧병으로 중풍中風을 앓아 돌아가셨고, 차남도 병에 걸려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요절夭折하였다. 또한 자녀 2명이 이종구와 비슷한 유전적병세를 보이고 있어 생활이 비정상적이다.

 

이에 신고인은 애초에 조부모의 진술만 듣고 진술서를 작성하였는데, 보증을 해준 마을이장 신OO가 보완진술을 하였으므로 내용을 첨가합니다.

 

이종구는 무고하게 잡혀가 경찰의 혹독하고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로 평생 정신분열증을 앓았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본인은 물론 가족의 피해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엄중합니다. 어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가가 이런 횡포를 자행할 수 있습니까? 올해 만 79세인 신고자는 파탄된 집안과 형제자매를 건사하며 평생을 간난艱難과 질곡桎梏 속에서 살았습니다. 간난과 질곡 속에서 살아온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폭력에 대한 철천지한徹天之恨이 맺혀 있습니다. 이에 국가폭력을 규탄糾彈하며, 피해자 이종구의 본인과 가족에 대한 해원解冤을 요구하며, 명예를 회복시키고, 피해에 대한 보상배상을 요청합니다.

 

2022. 4. 19

진술인 이00

 

 

#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통지서

(인적사항 등 서류 기본사항 생략)

 

· 결정통지서는 피해자가 사망자가 아니라 상해자였으므로 조사대상이 아니라고 각하결정을 함

 

결정내용 : 각하결정

결정이유 : 귀하께서 신청하신 진실규명신청사건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194810 - 11. 부친 이종구가 남양면 중산리에서 여순반란 협조자라는 혐의를 받고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겪게 된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입니다.

· 참고인 조사결과 부친 이종구가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확인하였으나, 상해사건은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하 기본법) 2조 제 1항 제 3호에서 정한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에 포함되지 않아 진실규명 조사대상사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기본법 제 21조에 의거하여 사건을 각하결정하였습니다.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제 28조의 규정에 의하여 위와 같이 결정되었음을 통지합니다.

 

 

20106월 일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직인

 

 

# 그후, 2021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상해자까지 조사하는 재조사가 이루어져 다시 피해자신청서를 접수시켰는데, 그 와중渦中에서 <여순사건특별법>이 발효發效되었다. 도깨비기자는 전남 여수시청에 부친의 피해자신청서(이후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결정한 결정서와 진술인이 접수시킨 피해자신청서, 보완진술서 등 제반서류가 여순사건위원회로 이관되었음)를 접수시켰다. 그런 다음 여순반란의 현장을 탐사探査하려고, 서울 용산역에서 목포행 KTX를 타고 출발하여 광주송정리역에서 전라선 완행열차로 갈아타려고 기다리고 있다.

 

 

# 부친의 정신분열증에 의한 정신나간 행동 때문에 도깨비기자의 할아버지는 중풍中風을 얻어 3년 간 앓다가, 말 그대로 벽에 똥칠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대소변을 구별 못 하여 알몸으로 방에 감금된 체로 식사도 떠먹여야 했다. 모친이 3년 동안 그 수발을 다 하였다. 마을 제일 부자였던 가산家産은 일시에 파산하였다. 잔밥에 휩싸인 10남매는 식모살이, 공장노동자 등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신세로 전락하여 뿔뿔히 흩어졌고, 그 와중에서 도깨비기자의 손아랫동생이 병명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요절夭折하였다.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에서 진찰을 하였으나 병명을 몰랐다. 시름시름 앓았으므로 고향에 내려가서 요양을 하면 회복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보냈는데 3개월여만에 죽었다. 집안이 파산하였고 끼니를 걱정하는 판이라 서울로 가서 치료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다.

 

도깨비기자는 몰락한 집안의 장손長孫으로써 연로年老한 할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길거리에 내몰리지 않게 하기 위해 혼신을 다 하였으나 망해가는 집안을 붙잡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었다. 조부모가 평생동안 자수성가自手成家한 가산家産이 몰락沒落하는 건 하루아침이었다.

 

어린 10남매의 초중등학교생활과 뒷바라지, 중풍을 앓는 할아버지의 병수발, 아버지의 정신분열증, 연로한 할머니가 끼니를 거르지 않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수많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면서 마지막 한 뙈기 밭이라도, 할아버지의 유산遺産을 지키려는 안타까운 노력은 거친 세파世波 앞에서 무기력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이어 두 해 동안 가뭄이 들어 농사조차 짓지 못 하게 되자, 남은 논밭마저 헐값에 팔아 빚을 정리하는 처절한 간난과 질곡의 삶을 살았다.

 

할아버지에게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던 동네사람들은, 도깨비기자가 논밭을 팔 것을 예상하고 한 푼이라도 헐값에 사려고 갖가지 술수를 부렸다. 도깨비기자의 논밭을 대부분 산 2반의 현가玄哥는 장사치로 뼈가 굵은 토박이인데, 고흥 금산 나로도의 김(해우海羽) 고장에서, 김 양식업자들에게 돈놀이를 하여 재산을 모았다. 현가의 장삿돈이 대부분 할아버지의 돈이다.

 

할아버지는 돈을 골방 선반에 쌓아두고 살았다. 어느 해 겨울 새벽, 현가가 마루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할아버지에게 하소연 하는 걸 보았다. 현가의 큰아들이 급성맹장염에 걸렸는데 병원에 갈 돈이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선뜻 큰돈을 내어줘 현가의 아들은 택시를 불러타고 순천의 병원으로 가 수술을 하고 살아났다.

 

그런 현가는 도깨비기자가 할머니를 대동하고 산판山坂을 좀 사달라고 사정을 해도 고개를 흔들었다. 동네에서 자기밖에 살 사람이 없으므로 조금만 더 버티면 헐값으로 살 수 있다는 속셈이다. 보다 못한 현가의 큰아들이, 생명을 살려준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언을 해도 못본 체 했다. 두세 번 걸음을 하고 엎드려 빌 듯이 사정을 해서야 시세의 절반 쯤 깎아 팔았다.

 

도깨비기자의 산판은 모두 3개였고, 산에는 아름들이 소나무들이 있었으며, 현가가 산 산에는 아름들이 소나무가 30여 그루 있었다. 그 소나무 값만쳐도 쌀 열 가마니도 넘을 터에, 현가는 값을 후려칠대로 후려쳐서 쌀 다섯 가마니로 흥정을 했다.

 

도깨비기자가 얻어 쓴, 도깨비기자의 모친이 얻어쓴 빚의 이자는 장리長利. 쌀 한 가마니를 빌려서 1년이 지나면 이자 반 가마니가 붙어 다음 해에는 한 가마니 반이 되는 고리채高利債. 이자가 원금의 50%. 한두 가마니의 쌀빚은 이자가 별 부담되지 않은데, 쌀빚이 30가마니가 되어 1년이 지나면 원리금元利金45가마니가 되고, 그 다음 해에는 67가마니가 된다. 3년째에는 원리금이 100가마니로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불어나, 2 - 3년 빚을 묵히면 원리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현가는 고리채의 높은 이자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 한다는 걸 알고 도깨비기자의 재산을 거저먹으려고 했다.

 

도깨비기자의 할아버지는 명절이면 돼지 두 마리를 잡아 가난해서 명절빔을 못 하는 집에 나눴다. 씨돝은 따로 키우고 명절용 돼지를 길러서 명절 전날에 잡았다. 할머니는 푸짐하게 찰떡과 쑥떡을 해서 가난해서 떡도 못 하는 노인들이 있는 집에 돌렸다. 현가가 돈을 빌려준 댓가로 상납上納한 김도 나눴다. 어린시절 김을 먹는 집은 거의 없었다. 도깨비기자의 집에서도 특별한 날에만 김을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김을 굽기 전에 김을 펴놓고 들기름에 소금을 섞어 큰 붓으로 발랐다. 화롯불에 적사(철망鐵網)를 걸쳐놓고 김을 구웠다. 숟가락복판만한 구은 김을 가위로 잘라 식구들에게 서너 장씩 나눠주었다.

 

신축한 동각洞閣과 교회터도 희사했다. 그런데 막상 집안에 빚이 많아 논밭을 팔려고 내놓으니 서로 싸게 사려고 농간弄奸을 부렸다. 논밭은 팔려고 내놓으면 살만한 사람들이 담합談合도 했다. ‘이번 논은 얼마에 내놓았는데 얼마까지 깎아 사자라고 담합을 한다고 했다. 담합을 피해보려고 도깨비기자는 할머니와 함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었던 최씨를 찾아갔으나, 최씨는 우리 땅을 좀 사라는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부자가 되었지만 차마 머슴을 살았었던 옛 주인의 땅을 살 수 없었던 것이라고 짐작했다.

 

최씨는 이북以北사람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있었던 반공포로反共捕虜 석방 때 반공포로들을 각 마을에 분산 배정해서 침식寢食을 제공했다.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정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미국정부 몰래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했는데, 북한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고, 남한에 남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남북한 외 제 3국으로 간 사람도 많았다. 우리 마을에 배정된 포로들은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에 남겠다고 한 이북군인 포로들이다. 우리마을에 배정된 최씨와 이씨 두 사람을 할아버지가 머슴으로 삼았다. 매년 새경(연봉年俸, 5가마니)을 받았는데 할아버지가 쌀을 장리(고리채高利債)로 놔서 불렸다. 다섯 가마니 쌀은 5년이 지나자 한 몫 재산이 되었다. 최씨를 홀홀단신忽忽單身 피난온 이북처녀와 결혼시켜 우리집 뒤에 초막草幕같은 초가草家를 엮어 살게했다. 최씨부부는 등짐장수로 장똘뱅이가 되었는데 곧 자전거를 사고 이어 트럭을 샀다. 최씨부부는 강원도까지 다니며 장사를 했는데 마른오징어를 한 축(100마리)씩 사서 할아버지에게 선물했다. 오징어를 구경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오징어를 통째로 주머니에 가지고 다녔으므로 동무들은 오징어다리 하나라도 맛보려고 졸졸 따랐다.

 

최씨보다 좀 게으른 이씨는 이웃동네 과부寡婦딸에게 장가를 보냈다. 과부는 논밭이 먹고 살만 했고, 아들이 없어 이씨를 데릴사위로 삼았다. 두 사람 모두 장가를 들여 분가分家를 시켰는데 설 추석 명절이면 선물을 사들고, 아이들을 앞세우고 세배를 왔다. 할아버지를 친부모처럼 섬겼다. 그런 최씨가 논밭을 좀 사주라는 할머니의 말씀에 먼 산을 한참 쳐다보다가 완곡婉曲하게 거절했으나 형편이 급해 마을사람들이 원하는대로 값을 깎아서 팔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주막酒幕을 경영하며 알토란처럼 모아 쌓은 재산인데 빚이 이자를 감당하지 못 하게 늘어나자 <울며 겨자먹기>로 팔았다. 모으는 데는 평생이 걸렸으나 망하는 건 하루아침이었다.

 

 

# 쓰러져가는 집안의 기둥을 잡고 버텨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판에 느닷없는 동생의 죽음은 가산의 몰락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모태신앙母胎信仰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도깨비기자는 한겨울 새벽에 교회를 찾아서 <세상만물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과의 대화>를 간구懇求했다. 한겨울, 밤중보다 더 깜깜한 새벽에 얼음바닥처럼 차디찬 판자板子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있으면 온몸이 꽁꽁 얼어붙고 팔다리가 마비되어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근 한 달 동안 새벽마다 교회를 찾았다가 끝내 하나님과의 대화에 실패하자, 도깨비기자는 마을의 진산鎭山 - 고장에서 제일 높은 천봉산에 올랐다. 밤중보다 더 깜깜한 새벽에 천봉산정상에 오르는 길은 무서웠다. 눈발이 섞인 세찬 북풍이 나뭇가지를 휘감아돌며 우후후 후이후이귀신의 곡성哭聲처럼 울었다. 두려움 때문에 추위조차 느끼지 못 했다. 길조차 트이지 않은 나무와 숲을 헤치고 천봉산정상에 올라 몇 시간이고 명상瞑想에 잠겼다. 명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눈을 감고 세찬 바람을 피하여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보면 동이 트고 새벽녘 하늘에 한 점 하얀 빛이 비치며 남해 순천만의 일출日出이 시작되었다.

 

깜깜천지에서 까만 어둠과 하얗고 밝은 빛이 뒤엉켰다. 그러나 하얀 빛은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까만 어둠만 소용돌이쳤다. 그러다가 까만 어둠이 빛을 삼킨 구름처럼 한 줄기 빛을 들고 나타났다. 까만 구름의 가장자리에 하얀 빛이 불똥처럼 나탔다. 소용돌이치는 구름덩어리들이 엉키고 뒤섞였다. 마치 커다란 용들이 용틀임을 하는 것 같았다. 검은구름의 가장자리에서 새어나오는 한 줄기 빛이 바다의 검은 물결 위에도 반짝이는 은비늘을 만들었다. 바다가 용틀임처럼 꿈틀대기 시작했다. 은비늘과 검은 파도가 뒤엉켜 바다에서도 소용돌이가 시작되었다.

 

어둠과 빛이 뒤섞이더니 보고있는 순간에 하얀 빛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하얀 빛은 오색구름으로 바뀌었다. 검은 파도에도 은비늘이 떠올라 오색깁(헝겁)을 길게 펼친 것처럼 출렁거렸다. 오색깁은 물고기비늘처럼 나뉘어져 반짝거리다가 다시 오색깁이 되었다. 수많은 물고기가 비늘을 반짝이며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오색으로 뒤엉켜 용틀임을 하던 구름이 풀려나갔다. 그리고 수평선에 한 점 하얀 빛이 나타났다. 한 점 빛이 점점 커졌다. 빛이 밝아지자 구름은 소용돌이를 멈추고 바다도 잠잠해졌다. 하늘의 오색구름도 사라졌다. 바다의 하얀 비늘도 사라졌다. 하늘과 바다에 하얀 빛이 퍼져나갔다. 수평선의 하얀 빛이 순식간에 빛줄기가 되어 하늘과 바다에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다.

 

도깨비기자는 혼돈混沌과 생성生成이 소용돌이치는 일출에서 천지창조天地創造를 보았다. 찰라札剌인 것 같기도 하고 영겁永劫처럼 느껴지기도 한 남해 순천만의 일출을 보면서 도깨비기자는 모태母胎신앙을 버리고 탕자蕩子가 되었다.

 

 

# 여순반란은, 제주 4 · 3폭동(특별법 제정 이후 제주사건 명명命名)으로부터 시작되어, 여순반란 그리고 6 · 25민족동란(또는 6 · 25사변으로 불리워졌으나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으로 불리움)으로 이어지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과, 이후 70여 년 간 민족분단으로 이어지는 민족적 비극의 역사인데도 역사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독재정권시대에서 공산주의자는 빨갱이로 불리우면서 터부시(금기禁忌)되었는데, 근래 민주정권에서 재조명하면서 반란군이 사회주의자로 변신하고, 여순반란이 민중혁명으로 바뀌어 국가유공자로 둔갑遁甲했다.

 

여순반란은 사상과 이념의 갈등이다. 정치적 우상偶像이다. 북한은 소련이 주도한 공산주의로, 남한은 미국이 주도한 민주주의로 나뉘어 민족적 갈등이 야기惹起되었다. 소련은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종전이 되자 북한을 공산화하려고 북한에 진주進駐했다. 이에 남한을 공산주의화 하려는 남로당을 척결하기 위한 이승만정부의 정치적 결행에 의해 여순반란이 야기되었다. 여순반란을 획책한 남로당은, 남한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통일을 와해瓦解시키려고 했으므로 민족통일을 위하여 여순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전에 소련에 의한 북한 공산당정부를 수립했고, 남한의 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저지하여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여순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 여순반란 이전에 일어난 제주폭동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남한정부 수립에 대한 방해공작이었다. 이를 반란세력들은 민족분단을 막기 위한,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항쟁으로 위장僞裝한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남북분단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조선朝鮮 왕정王政시대를 거쳐 일제日帝 식민지시대를 살아온 민중들은 공산주의의 평등사상에 매료魅了되었다. 먹물 먹은 지식인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에 심취心醉했고, 폭정과 탄압에 시달렸던 민중들이 동조했다. 해방 전후 정국은 좌익左翼들이 훨씬 우세優勢했다.

 

 

# 김구선생은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두 번이나 북한을 방문했지만 김일성은 김구선생을 만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남한보다 한 발 더 빨리 북한은 공산당정권을 수립했다. 여순반란을 진압하지 못 했으면 남한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처럼 김일성 독재정권의 치하治下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북한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표방標榜한 중국과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을 보라. 북한은 븍한정권이 들어선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김일성의 유시諭示 <이팝(쌀밥)과 소고기국을 맘대로 먹을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지 못 하고 있다. 북한은 인민人民들이 굶주리고, 자유를 억업받고, 인권을 유린蹂躪당하는 지구촌 최악의 공산독재국가다.

 

 

# 도깨비기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부친이 정신분열증환자가 된 배경이 궁금했으나 여순반란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전남일보사(현 광주일보)에서 연재했던 <광복 30년 여수반란 편>이 유일했다. 그러나 광복 30년은 반란의 상황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지만, 반란 진압 후 군경에 의한 피해는 기록이 없다. 반란군은 경찰, 경찰가족이나 공무원, 우익인사를 검거하여 살해했으므로 대부분 선별적인 개인적인 처형이었다. 그러나 군경은 반란 진압 후 마을을 송두리째 불태우고 주민들은 남녀노소 관계없이 집단학살을 했다. 특히 외진 산간마을은 반란군, 폭도들에게 주민 단 한 명만 연루가 되어도 몰살을 했다. 그래서 반란군의 살해보다 군경의 학살이 2 5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군경의 학살은 기록이 없다. <제주 4 · 3폭동>은 조사가 마무리되어 보배상이 시작되고 있고, <여순반란><6 · 25민족동란의 피해><과거사정리를 위한 진실 · 화해위원회>가 조사를 하고 있으므로 군경의 참혹한 살상도 역사적사실이 확인되리라 기대한다.

 

 

# 도깨비기자는 경찰에 의한 피해로 인하여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되고, 가족들이 유리걸식遊離乞食하게 된 요인이 너무 한스러워서, 여순반란의 배경이 되었던 여수 순천을 찾아보려고, 서울에서 이른 아침에 KTX를 타고와, 여순반란 현장이었던 여수로 가는 전라선기차를 환승하려고 광주송정리역에서 기다리고 있다.

 

전라선열차는 칙칙폭폭열차다. 광주 유학시절의 석탄으로 물을 끓여서 증기를 뿜으며 왝왝! 거리며 달리지는 않지만 창밖 풍경이 온통 잿빛 화면畫面으로 스쳐지나가는 KTX에 비하면 아직도 칙칙폭폭열차다. 멀리 풍광이 느린 영화필름을 돌리는 것처럼 스쳐간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기차를 타면 광주역을 걸쳐 광주시내를 동서東西를 가로질러, 광주시의 남쪽 가장자리 남광주역에서 멈췄다가, 앵남역을 지나 능주 화순을 지나갔다. KTX가 건설되어 광주송정리역이 서울과 목포의 직선궤도로 연결된 뒤 남광주역이 사라졌고, 완행열차는 광주시를 우회하여 광주 외곽 효천역을 지나 앵남역으로 이어진다. 앵남역은 폐쇄되어 옛 건물만 댕그마니 남은 역이라 전라선열차도 멈추지 않고 통과한다. 창밖으로 이른 봄 농촌풍경이 느릿느릿 지나간다. 멀리 보이는 시골풍경이 한국화화첩畫帖을 펼쳐놓은 것 같다.

 

복사꽃밭이 나타났다. 화순군 능주다. 자라등같이 낮은 황토구릉이 끝없이 펼쳐지고, 낮은 구릉과 분홍색꽃밭이 연이어 지나간다. 연분홍 복사꽃밭이 보자기처럼 펼쳐져 있는 사이 군데군데 하얀 손수건같은 배꽃밭이 섞여있다. 학생시절 광주에 유학할 때 복사꽃에 홀려 언젠가 한 번 직접 가서 보겠다고 작정했으나 아직도 가보지 못 했다. 도깨비기자는 <꽃집>에서 어린시절을 살았다.

 

 

# 도깨비기자의 고향집에는 과일나무가 많았다. 집 앞 선산先山에는 감나무와 배나무과수원이 있었고, 감나무 밑에는 딸기밭, 딸기철이면 동생들보다 먼저 눈을 비비고 일어나 과수원으로 달렸다. 파란 잎 속에 숨어있는 빨간 딸기를 찾으려고 눈을 비비며 딸기줄기를 들췄다. 딸기는 성긴 줄기에 달린 잎 속에 숨어있었는데 겉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꼭지가 하얀 딸기도 약간 빨간 빛만 띠면 먹었다. 익은 딸기를 찾지 못 한 날은 하얀 딸기도 먹었다. 풋내가 났다.

 

거짓말 좀 보태면 문간에서 안방마루까지 반나절이나 걸린다는 집터는 시골학교 운동장만하다. 마당언덕을 따라 대문에서부터 과일나무가 집안을 빙 둘러쌌다. 대문간을 수문장守門將처럼 지키고 서있는 호두나무는 해거리를 했다. 파란 열매가 열렸는데 호두를 먹어본 기억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호두나무가 아니라 가래나무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호두나무 옆에 살구나무 - 꽃 색깔이 희부덕덕해서 별 볼 일 없는 살구나무는 꽃이 지면 콩알만한 파란 열매를 맺었다.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어느 날 노랗게 익은 살구가 주렁주렁 달린 걸 보고서야 살구나무에 올라가 살구를 따먹었다. 새콤달콤한 살구맛을 생각만해도 입에 군침이 돈다. 가죽나무는 멀대처럼 키가 크다. 살구나무나 호두나무가 옆으로 퍼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꼭대기에만 가지가 뻗고 새 순이 난다. 가죽나무 새 순이 나오면 머슴들이 긴 장대 끝에 낫을 묶어들고 대문지붕 위에 올라가 새 순을 꺾었다. 할머니는 가죽나무 순을 대쳐 찹쌀가루 풀을 발라 깨를 뿌려 말렸다. 석류는 잘 익어 벌어졌을 때 먹음직스러운 것 같으나 신맛이 많아 별로 탐탁치 않다. 무화과나무는 꺽어 아무 데나 꽂으면 자랐는데 울타리에 지천이어서 해마다 잘라낼만큼 많았다. 무화과는 벌레가 없는 대신 익으면 나나니벌이 끓었다. 나나니벌은 벌중에서는 호박벌 다음으로 크고 무서운 녀석이고, 쏘이면 대갈통이 벌어진다고 해서 무화과에 벌이 붙으면 근접을 못 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과일 중에서 무화과만큼 달콤한 과일은 없다. 과육果肉이 꽃술이라는 건 머리가 훨씬 커서야 알았다. 벌이 먼저 먹은 무화과는 먹을 것이 남아있었는데 새들이 쪼아버린 무화과는 손톱만큼도 남는 게 없었다.

 

뒤란에는 아름들이 참팽나무가 있어 팥알만한 노란 열매가 퍽 고소했는데 익기 전에는 시누대로 딱총을 만들어 총알로 사용했다. 참팽나무 옆에는 느티나무와 돌배나무가 나란히 서있고, 돌배나무에도 배가 열렸는데 곰보딱지 같은 모습에 떫고 시어서 먹지 못 했다. 그 옆으로 펼쳐진 시누대밭 속에는 쥐똥처럼 생긴 파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쥐똥나무와 거목인 모과나무 다섯 그루, 봄이면 참새부리처럼 생긴 분홍색 꽃이 피고 가을에는 목침덩이 같은 모과가 노랗게 익었다. 할아버지는 늦가을에 모과를 따서 작두로 잘라 볕에 널었다가 차로 달여먹었다. 감기에 효과가 있었다. 문간채를 개수改修하면서 모과나무로 기둥을 받쳤는데, 다듬지 않고 나무결을 살려서 세웠으므로 기둥을 보는 사람들마다 시세웠다. 시누대가지에는 참새보다 한 둘레 작은 비비새가 둥지를 틀고 파란 알을 대여섯 개씩 낳았다. 파란 바탕에 갈색 점박이 알이 신기해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미새들이 얼굴을 쪼아댈 듯 겁박劫迫을 했다. 시누대밭이 끝나고 이어진 참대밭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엄지손톱만큼 넓적한 파란색 쐐기가 대나무 잎에 붙어있어서 쏘이면 토돌토돌한 수포水泡가 생기고 가려움증으로 며칠씩 고생을 했다. 대나무밭 가장자리의 두 그루 유자나무에는 노란 유자가 주렁주렁 열렸으나 아무도 손대지 못 했다. 나무가 커서 사다리를 놓지 않으면 유자열매에 접근하지도 못 했을뿐더러 줄기에 길고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히 달려 있어서 머슴들만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딸 수 있었다. 겨울에는 유자나무가 추위에 얼지 않게 볏짚호배기를 덮어주었는데 참새들이 호배기 속에서 잠을 잤다. 겨울밤 사랑방에 모인 동네 머슴들이 참새털이를 했다. 참새는 초가지붕에 구멍을 뚫고 살았는데 호배기에서 자는 놈들은 뜻밖의 수난을 당했다. 유자나무 밑에서 갑자기 손전등 서너 개를 비춰대면 참새들이 밝은 빛에 눈을 뜨지 못 하고 우왕좌왕右往左往할 때, 장대로 호배기를 두드려서 기절한 참새들이 툭툭! 떨어지면 머슴들이 냉큼 주워담았다. 까만 눈망울을 깜박이는 참새를 만져보면 겁에 질려 심장이 콩당콩당 뛰는 게 안쓰러웠다. 머슴들은 사랑방부엌 쇠죽솥 아궁이에서 잔불을 끌어내 굵은 소금을 쳐서 구워먹었다. 고소하다고 먹어보라고 주었으나 까만 눈망울이 생각나서 먹지 못 했다. 노리끼한 냄새도 싫었다. 머리가 커서야 참새구이맛을 알아 포장마차에서 소주 안주삼아 먹었다.

 

청배나무는 앞마당 언덕에 있었다. 하얀 꽃이 피면 청초淸楚한 색깔이 고와서 한참씩 들여다보았다. 특히 비 오는 날 물방울을 머금은 배꽃은, 우수憂愁에 잠겨 이마를 찌푸린 미인상美人像과 닮았다. 배꽃이 지고 난 자리에 열린 주먹만한 청배가 익으면 단물이 많았다. 복숭아나무는 기억에 없다. 커서야 들은 바 복숭아나무는 집안에 심지 않는다고 했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무당巫堂이 귀신을 쫓는데 쓰이고, 연분홍 꽃 색깔이 도화색桃花色이라고 해서 집안에 들이지 않는다. 열매도 생긴 모양과 불그스름한 색조色調가 여성성과 연관이 된다. 또 하나 우리집에 없는 과일나무가 윗집 상숙이네 울타리에 있었다. 포도나무는 댓싸리 울타리를 타고 올라왔는데 파란 포도알이 까맣게 익으면 몰래 울타리에 올라가 한 송이 훔쳐먹으려다가 상숙이할아버지에게 들켜

 

네 이놈!’

 

호통을 듣고 줄행랑을 친 게 여러 번이다. 상숙이 할아버지는 포도가 익을 때 쯤 상습범이 온다는 걸 알고 양지바른 울타리 옆에 숨어서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외에 신씨네 대밭의 상수리나무는 도토리 상수리나무 도토리는 구슬치기용으로 아이들은 누구나 다 몇 개씩 가지고 있었는데, 탐나서 개구멍으로 들어가 줍다가 쫓겨나고, 샛골 옹달샘 옆 보리밭언덕의 앵두를 훔치러 갔다가 쫓긴 일도 연례행사다. 앵두는 보리가 익을 때 쯤 익는데, 잘 익은 빨간 앵두가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건 보면 가슴이 뛰었다. 때마다 쫓겨나면서도 빨갛고 투명한 열매의 유혹에 못 이겨, 보리밭고랑을 살살 엎드려 기어가 허리를 펴서 앵두에 손이 닿으려 할 찰라, 어디서 나타났는지 밭 임자가 달려오면서 외치는 호통소리가 들리면 냅다 튀는 게 상수上手. 나중에 보리밭이 망가졌다고 변상辨償을 하라고 할아버지에게 하소연하면

 

, 이 사람아! 애기들이 장난 좀 한 걸 가지고 ……

 

할아버지는 애들 장난이라고 눙치며 시큰둥했다. 할아버지는 기골氣骨이 장대壯大 하고 힘이 장사壯士이며, 또 마을부자라서 아무도 할아버지 말씀에 토를 달지 못 했다. 다음 해 앵두철이 되면 또 보리밭고랑을 기었다.

 

 

# 멀리 무논(물논)에서는 경운기 써래질이 한창이다. 코뚜레를 잡힌 황소가 무논에서 철벅거리며 써레를 끌던 써레질은 옛날 얘기다.

 

이랴! 이랴! 이리 서!’

 

농부의 채찍질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맴돈다. 그래도 아직 물을 잡히지 않은 논에 붉은 자운영을 심어 논심을 북돋우는 건 예전과 다르지 않아, 물을 잡지 않은 논에는 자운영꽃밭이 수놓은 손수건처럼 펼쳐져있다.

 

 

전라선열차에서 도깨비기자는 그 동안 수집한 여순반란자료와 여순사건특별법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았다. 여순사건특별법은 여순반란이 일어나고 74년만인 2020년 공포된 법이다. 몇 해 전에 <과거사 정리를 위한 진실화해위원회>가 발족되어 제주 4 · 3폭동, 여순반란, 6 · 25민족동란 등 국가공권력에 의한 피해를 조사했다. 도깨비기자가 여순반란에 관심을 가지고 탐색한 여순반란자료는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에서 연재, 간행한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이다.

 

 

# 여순반란 : 자료 - 1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194810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만에 전 지역을 수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제정과 강력한 숙군肅軍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여순사건의 배경은 그 주체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첫째, 국방경비대 제 14연대의 반란 배경

둘째, 여기에 호응했던 여수 순천지역의 동향動向이다.

 

우선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던 제 14연대의 반란 배경을 살펴보면

 

14연대는 1946215일 광주에서 편성된 제 4연대가 모체母體이며, 여기에는 여순반란의 주동자였던 김지회중위, 홍순석중위 등이 포진布陣하고 있었다. 김지회중위와 홍순석중위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생으로 이 기수는 80%가 넘는 인원이 사병士兵과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중에는 좌파적경향을 띠는 인물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는 당시의 간부幹部 모집주체였던 미군정美軍政이 인력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성향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점에서 기인起因하였다.

 

이후 제 4연대 제 1대대를 주축主軸으로 194854일 여수 신월리에서 제 14연대가 창설되었고, 창설요원 가운데에는 김지회중위, 홍순석중위와 같은 좌익계열장교 외에도, 지창수하사 등 여순반란을 직접 주도한 하사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창설과정에서 좌익계열 모병관募兵官들은 반이승만 계열, 좌익수배사범 등을 적극적으로 모병하였으며, 그 결과 연대에는 남로당의 세포조직이 침투하게 되었다.

 

또한, 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 가지고 있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감정도 봉기蜂起의 원인이 되었다.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병력으로 인식되어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이 같은 인식은 국군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1947년부터 제 14연대의 관할지역인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군경간의 물리적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하였으며,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되었다. 이는 제 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여수 순천지역의 정치적동향을 살펴보면, 해방 직후 이 지역은 우익계열의 우세 속에 좌우익간左右翼間의 공존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평온했던 이 지역의 분위기는 1948년 들어와 급변하는데, 이는 남한 단독선거 시행을 둘러싸고 우익과 좌익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빈발頻發하기 시작한 양측간의 충돌은 유혈流血사태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며, 투표소 습격, 경찰지서 습격행위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이 확정되고 남로당의 투쟁이 점차 급진 폭력화되면서, 이 지역의 단독정부반대 움직임은 대중적운동보다는 점차 소수인원에 의한 급진적투쟁의 형태로 변모되어 갔다.

 

14연대의 반란은 숙군肅軍의 위협과 연대의 제주도파병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지창수상사를 비롯한 연대내 남로당 하사관들의 급조된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19481015 - 16일 경 육군본부는 제주 4 · 3폭동 진압을 목적으로 제 14연대의 제주도 파병계획을 하달하였으며, 이는 연대내 남로당조직에도 전달되었다. 이때는 반이승만계열로 간주되던 전임 연대장 오동기중령이 상부에 의해 체포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숙군에 대한 불안감과 제주도파병에 대한 반발감이 겹치면서 연대의 남로당조직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謀議하였다.

 

1019일 오전 7, 육군본부로부터 제 14연대에 제주 4 · 3반란 진압을 위한 출항명령이 하달되자, 이날 저녁 장교들이 부재한 틈을 타 부대원들을 연병장에 소집시킨 지창수상사는, 연단演壇에서 <경찰을 타도하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하며 부대원들을 선동煽動하였다. 대부분의 사병들이 여기에 찬동하였고, 반대파는 즉각 사살射殺되었다. 지창수상사를 신임연대장으로 추대推戴한 반란군은 즉시 여수로 진격하였다. 이때 반란에 참여한 인원은 1,000 - 2,000여 명 정도로 추산推算된다.

 

사실상 무방비상태와 다름없던 여수는 쉽게 함락되었고, 반란군은 다시 병력의 대다수를 열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진격시켰다. 순천경찰은 이에 응전하였으나 패퇴하였고, 20일 오후 순천도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순천에 파견 나와 있었던 홍순석중위의 2개 중대와 광주 제 4연대 소속 진압군이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사기士氣가 높아진 반란군은 주변지역으로 공격을 속행하였으며, 그 결과 22일에는 전남 동부지역의 6개 군 - 여수, 순천, 보성 벌교, 고흥, 광양, 구례 곡성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여수 순천지역에서는 반란군의 점령에 호응하여 지역의 좌익계열 인사들을 주축으로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일부 학생들이 반란군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 지역의 좌익 지하조직은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남로당은 급격하게 진전되는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경찰에 의한 고문 등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던 좌익청년들은 지역의 우익인사, 경찰관과 그 가족을 보복살해하였으며, 인민위원회에 의해 경찰서장 등의 우익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우익인사들에 대한 보복 숙청 외에도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식량배급 등을 실행했다.

 

14연대의 반란소식이 상부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20일에 개최된 미군사고문단美軍事顧問團 수뇌부首腦部회의에서는 광주에 <반란군토벌討伐 전투사령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진압군지휘는 육군총참모장 송호성준장이 맡았고,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1025, 정부에 의해 여수 순천지역에 계엄령戒嚴令이 발효發效되었고, 반란군과 진압군 간의 첫 교전交戰이 순천시 서면 학구리에서 벌어졌다. 여기에서 승기勝機를 잡은 진압군은 그대로 순천으로 진격하였으며, 하루가 넘는 교전 끝에, 23일에는 순천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주력은 순천에서 도주하였으며, 진압군에 대항한 것은 잔여병력殘餘兵力과 무장武裝한 시민들이었다. 이후 진압군은 기세氣勢를 몰아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收復하였다.

 

1024,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송호성준장이 이끄는 여수공략부대는 여수시 미평동 일대에서 반란군의 기습을 받고 후퇴하였다. 여수공략전이 잠시 소강상태小康狀態에 빠진 사이 지창수상사가 이끄는 반란군은 광양 백운산과 벌교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작전 속행을 요구하는 이승만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은 1025일부터 재차 탈환작전에 나섰다. 장갑차,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4개대대의 병력과 항공기, 경비정이 동원된 포위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반란군의 주력主力이 빠져나간 여수에는 극소수의 반란군과 무장한 일부 민간인만이 대항할 뿐이었다. 이틀간에 걸친 시가전市街戰 끝에 여수는 1027일 완전히 진압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로써 여순반란은 종결되었다.

 

진압군의 반란군 진압과정에서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초기 진압작전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군경은 강경한 작전을 구사驅使하였으며, 민가民家에 대한 철저한 수색을 통해 반란군 협력자를 모두 색출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민간인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또한 반란진압 이후에도 가담자加擔者들에 대한 처벌이 비공개 군법회의를 통해 계속되었다. 반란군과 진압군이 대치對峙한 상황에서 밤에는 반란군이 설치고, 낮에는 진압군이 주둔駐屯하는 상황이 생겼는데, 밤에 반란군이 마을에 들어와 식량을 강탈하고 총뿌리를 앞세워 협력을 강요했으므로, 민간인은 살기 위해 반란군에게 밥을 해주고 양식을 강탈당했는데, 이들이 모두 동조자同調者로 처형되었고, 그 가족 친척들까지 연루連累되어 처형되었다. 산간마을에서는 반란군에게 식량을 강탈당하고, 운반해주었다고 동조자로 몰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을 전체가 몰살당하는 일도 흔했다.

 

제주도는 진압과정에서 초토화작전焦土化作戰을 전개하여 중산간마을 100여 개가 불타고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초토화작전에서 해안마을로 피신한 주민들은 가족 중 한 사람만 사라져도 반란군가족으로 지명되어 몰살당했다. 대표적인 거창주민 학살사건은 마을 세 개를 불태웠으며, 주민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아 군인과 경찰가족을 방면放免한 뒤, 남녀노소 불문 전 주민 어린이 359, 장년 300여 명, 60세 이상 노인 60여 명 모두를 몰살했다.

 

한편,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間歇的인 교전을 벌이는 등 게릴라(빨치산)로 활동하였다. 이에 국군은 이듬해까지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중위, 홍순석중위, 지창수상사 등을 사살射殺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활동은 1950년 초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인명피해도 끊이지 않았다. 반란군에게 입은 피해보다도 진압군과 경찰에 의한 무도한 민간인 피해가 2 - 5배 많았다.

 

1948101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졌던 여순반란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를 남겼다. 피해에 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확인되며, 대략 2,000 - 5,00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재산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소실燒失2,000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여순반란은 정부차원에서 정치적 위기감을 갖게 했고, 결과적으로는 이승만대통령의 철권鐵拳통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여순반란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비난하며, 반란주동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던 좌파계열에 대한 공세攻勢에 나섰다. 이에 더하여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한 반이승만 계열의 우파도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공격받았다. 이범석국무총리는 사건 직후 <극우極右의 정객政客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結託하여 반란을 기도企圖하였다>고 주장하며 김구선생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국회에서도 위기감을 느껴 <국가보안법>1948121일에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이승만대통령의 권력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아울러 정부의 위기감은 군대의 좌파左派세력을 색출하고자 하는 숙군사업의 강화로 이어졌고, 그 결과 5%가량의 장병들이 군대를 떠났다.

결론적으로

 

. 여수 제 14연대 2,000여 명의 반란군들은 여수와 순천을 일거에 점령하고

.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군 만세!

. 이승만정권 타도와 대한민국 분쇄分碎

. 주한미군 철거(철수)

. 군인과 경찰 타도打倒

. 스스로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할 것

등을 주장하는 성명서聲名書를 발표하고 여수와 순천 곳곳에 인공기人共旗(북한 깃 발)를 게양했다.

남로당 골수분자骨髓分子들이 주동이 된 제 14연대 반란군은 먼저 연대장교 21명 처형을 신호탄으로 하여, 합세한 지역 좌익친공분자들과 함께 귀중품 약탈, 부녀자 강간, 기물 파손, 방화 등을 했고, 군경과 그 가족과 우익 반공인사들에게 총살, 목을 매어 죽이는 교살絞殺, 돌과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타살打殺, 불에 태워 죽이는 소살燒殺, 총검에 의한 사살射殺, 두개골 관통 총살(여수 경찰서장 고인수), 차량으로 깔아뭉개는 역살轢殺, 여자들에게는 음부陰部 저격狙擊 총살(여수경찰서 여경 국말래), 나체裸體로 길거리 일주一周시킨 후 타살打殺(여경 정현자), 모래구덩이에 파묻고 죽창竹槍을 이용한 살해, 쇠꼬챙이로 찌르고 살가죽을 벗기는 살해 등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蠻行 - 다양한 학살虐殺을 자행했다.

학살당한 사람 중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총경에 대한 총살은 글로 묘사描寫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다. 그를 새끼올가미로 목을 묶어 지프에 매달고 시내에 끌고 다녔고, 죽을 때까지 구타毆打했으며, 눈알을 뽑고, 돌로 머리와 다리를 내리쳐서 불구不具를 만들었다. 반란폭도들은 양계원서장을 전봇대에 매달아 총살한 뒤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총살 집행 전 <조선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군 만세!> <대한민국 분쇄粉碎!> <주한미군 철거(철수)!>와 함께 <나는 순천군민의 고혈膏血을 빨아먹은 서장이요!>라고 외치게 하고, 만일 연속해서 외치지 않을 때에는 주위의 청년학생들로 하여금 죽창竹槍으로 찌르게 했다.

반란군들은 여수경찰서소속 여경 3명을 붙잡아 한 명은 발가벗긴 채 차마 눈뜨고 볼 수도 없는 - 음부陰部에 총탄을 쏘아 죽이고, 또 한 명은 총알이 아깝다면서 죽창으로 음부를 찔러 죽였다. 세 번째 여경도 출근길에 칼과 죽창으로 전신全身을 난자亂刺한 후 학살하는 등 천인공로할 만행은 끝이 없었다.

 

# 여순반란 : 자료 - 2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여순반란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81019일 여수에 주둔한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소속 육군 14연대 2,000여 명이, 제주 4 · 3폭동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 여수 순천 등을 점령하면서 일어났다.

지창수상사(인사계), 김지회중위 등 14연대 내부 남로당 골수분자骨髓分子 40여 명이 주동이 된 반란군은 지역 좌익세력과 함께, <제주도 출동 반대!> <대한민국 분쇄!> <미군 즉시 철퇴(철수)!>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만세!> 등의 구호口號를 외치고, 이같은 내용이 적힌 성명서를 여수읍내 곳곳에 붙였다. 경찰관과 기관장, 우익청년단원, 지역유지 등을 여수경찰서 뒤뜰에서 집단사살했다. 정부는 군대를 파견派遣해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지창수상사, 김지회중위 등은 1019일 밤 8, 제주도에서 준동蠢動하는 남로당 소속 공비토벌共匪討伐을 하려고 제주도로 가기 위해 14연대 일부 병력이 승선乘船을 준비하던 중, 제주출동을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연대聯隊를 장악하고 삽시간에 여수를 점령했다.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위한 <여순사건특별법>2021629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이 특별법은 공포 후 6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된다.

하지만 진압과정에서 일어난 무고한 피해주민들에 대한 보상補償, 여순반란진압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실시되는 것이란 주장은, 일부 정치인과 시민단체 관계자를 포함한 종북좌파들의 황당한 궤변詭辯에 불과하다. 여순반란은 국군내부에 있던 남로당(남조선노동당) 당원 지창수상사 등이 제주 4 · 3폭동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 여수지역을 장악하고,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인민재판하여 처형한 사건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명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 반대하고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조선노동당을 위한 활동이었다.

현대사의 비극적인 이 사건은 종래 <여순반란> <여순폭동> 등으로 불렸다. 정규군이 정부의 공식명령을 거부하고 총을 거꾸로 든 전형적반란이기 때문이다. 진압군에 쫓겨 지리산에 들어간 14연대 반란군은 빨치산투쟁을 벌이다 6 · 25전쟁 때 군경軍警에 의해 소탕掃蕩됐다. 그런데, 지금 전국 고교 10곳 중 8곳은 <14연대반란><무장봉기武裝蜂起> 또는 <봉기>로 가르치는 한국사교과서로 수업중이다. 문재인정부 4년째인 2020년에 새로 바뀐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 8종 중 7종이 <14연대반란><무장봉기>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역사교수 출신의 정경희 국회의원(국민의힘)의원실과 조선일보가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 채택현황을 조사했더니, 2020년 한국사교과서를 새로 선정한 전국 고등학교 1893개 중 1527(80. 7%)의 교과서가 <14연대반란><무장봉기(또는 봉기)>로 서술敍述했다. 고교생 4명 중 1명꼴로 가장 많이 배우는 미래엔교과서(25. 3%)<부대내의 좌익세력은 제주도출동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봉기하여 여수와 순천지역을 장악하였다>고 썼다. 금성 · 동아 · 해냄 · 지학사 · 씨마스 등 6종 모두 <반란> 대신 <무장봉기>로 기술했고, 천재교육은 <봉기>로 썼다. 비상교육 1종만 <군대내 좌익세력이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을 일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봉기>라는 표현을 피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총부리를 겨눈 여수 14연대의 행위를 <봉기>로 쓰는 게 적절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5 · 16이나 12 · 12군사쿠테타를 교과서에서 군부軍部<무장봉기>를 했다고 쓰면 어떻게 될까? 현행 한국사교과서는 5 · 1612 · 12사태를 <군사정변軍事政變> <군사쿠데타Coup d’Etat> <군사반란>으로 쓴다.

노무현정부 때 만들어진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라며 <무장봉기>가 아니라 <반란>이라고 명기明記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노무현정부 때 펴낸 <6 · 25전쟁사><여순반란><14연대의 반란사건>이라고 못 박았다.

반란군들이 노린 학살의 주요타킷Target은 평소 군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경찰들이었다. 다음 날인 1020일 오전 11, 반란군들은 여수읍사무소 앞에서 정복차림의 여수경찰서 고인수서장을 발견, 고문拷問하고 학살虐殺했다. 이어서 경찰서에 구금拘禁하였던 경찰관 9명을 건물벽에 세워 놓고 차로 들이받아 역살轢殺하였다. 하루종일 폭도들이 여수읍 여기저기에서 경찰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살인극이 벌어졌다.

 

처참하게 학살된 경찰관 중에는 3명의 여경女警이 포함되어 있었다. 계급이 제일 높은 국막래경사는 아기가 있는 24세의 유부녀다. 반란이 일어난 다음 날, 출근하려고 집을 나섰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 아기와 함께 있었는데, 반란군들은 그녀의 집으로 찾아와서 포승줄로 묶어 체포해갔다. 그녀는 읍사무소에 끌려가서 발가벗겨지고, 구타를 포함한 가혹한 린치(Lynch 사형私刑)를 당하다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 음부陰部에 총탄 두 발을 맞고 즉사했다.

 

같은 여수경찰서 소속 여경 정헌자순경도 집에 있다가 붙잡혀 잔인하게 학살됐다. 폭도들은 정순경의 옷을 갈기갈기 찢고 목에 쇠사슬을 매어가지고, 시내를 한 시간 가량 끌고 다니며 말할 수 없는 수모受侮를 겪게하고는, 다시 경찰서로 데리고와서 죽창으로 음부를 찔러죽였다. 결혼한 두 여경은 죽창과 칼로 전신을 난자亂刺당해 피투성이가 되자 차라리 죽여달라고 계속 절규絶叫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세 번째로 학살당한 여경은 박정은순경이었다. 밤새 난동이 일어났지만 집이 멀리 떨어져 있어 연유를 알 수 없었던 그녀는, 아침이 되자 경찰서로 출근하다가 얼굴을 아는 부역자附逆者에게 들켜, 거리에서 죽창 등으로 난자당한 뒤 바로 총살됐다. 3명의 여경은 주로 청소년 선도善導업무를 담당해 반란군들이나 폭도들이 트집잡을 일이 없는데도 무참히 학살虐殺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진압될 때까지 군경과 그 가족과 우익인사들에 대하여, 반란군과 동조한 남로당세력의 만행과 학살유형은 끔찍하고도 다양多樣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 1 (1967)>, 송효순의 <붉은 대학살(1979)>, 사사키 하루타카의 <한국전韓國戰 비사祕史() 건군建軍과 시련試鍊(1977)>, 4회에 걸쳐 <현대공론>에 연재된 유종관의 <빨치산을 낳게 한 여수, 14연대 반란사건(1989)>, 그리고 박윤식의 <여수 14연대 반란(2011)> 등에서는 반란군과 좌익세력의 학살유형을 소상하게 기록, 묘사하고 있다.

특히 박윤식은 이들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은 마치 <귀축鬼畜(아귀餓鬼와 축생畜生)의 소행>이라고 해도 부족할 것이라고 분노에 치를 떤다. 귀축이란 아귀와 축생을 아울러 이르는 불교용어로, 잔인하고 반인간적인 행위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얼마든지 저지르는 짐승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란군과 민간 좌익동조자들은 귀중품 약탈, 부녀자 강간, 기물 파손, 방화 등을 했고, 군경과 그 가족과 우익 반공인사들에게 총살, 목졸라 죽이는 교살, 돌과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타살, 불에 태워죽이는 소살, 총검에 의한 살해, 두개골 관통(貫通, 여수경찰서장 고인수), 차량으로 역살, 음부 저격 총살(여순경 국말래), 나체로 옷 벗기고 길거리 일주시킨 후 타살(여순경 정현자), 모래구덩이에 파묻고 죽창으로 타살, 살껍질을 벗기고, 꼬챙이로 찌르는 살해 등 다양한 학살방법을 사용했다.

(박윤식, 여수 14연대 반란, 여수순천 사건, 2011, pp. 42 - 64)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총경에 대한 학살과정은 글로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다. 목에 새끼줄을 묶어 차로 끌고 다녔고, 죽을 때까지 구타했으며, 눈알을 뽑고, 돌로 머리와 다리를 내려쳤다. 반란폭도들은 서장을 전봇대에 매달아 총살한 뒤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순천경찰서 감찰서장 한운경감찰관도 총살 후 콜타르를 몸에 부어 불태워졌다.

여순반란의 주동자는 남로당의 연대조직책인 지창수상사다.

당시 남로당원은 아래와 같은 경로를 통해 군내부에 침투하게 됐다. 광복光復 후 공산당은 좌익의 무장력으로 조직된 <국군준비대>를 장차 <인민공화국>의 정규군으로 전환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19451113일 미군정청내 <국방사령부>가 설치되고, 1946115일 동 사령부 예하豫下<국방경비대>가 창설됐다. 이에 따라 미군정청은 1946121일 자로 모든 사설私設군사단체를 해산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국군준비대>는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남로당에서는 국방경비대에 대한 침투공작을 시작했다. 당시 경비대는 모병시 신원조회身元照會 등 신원조사를 통한 사상검증이 없었으므로 좌익청년들은 얼마든지 군대에 잠입潛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비대의 사병들은 대부분 빈농貧農출신으로 광복후 득세한 좌익투쟁에 가담했던 세력이 많았다. 또한 이들은 소도시나 농촌에서 좌익활동 또는 범법행위를 하다가 경찰에서 추적당하게 되면 경비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일단 입대하면 경찰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당시 경비대의 사병들은 일반적으로 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남로당은 1차적인 공격대상을 경찰에 두고, 경비대원들과 반목대립反目對立을 조성해 폭력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려 했다. 남로당에서는 군장교에 대한 침투공작은 주로 사관학교내에 이미 침투했거나, 포섭된 조직망을 통해서 남로당이 추천한 자를 무조건 입교시키는 경우와, 이미 임관된 장교에게 지인, 학연, 혈연, 지연 등의 인간관계를 이용해 포섭했다.

여순반란을 일으킨 제 14연대는 194854일 광주주둔 제 4연대에서 차출된 기간요원 50명으로, 전남 여수읍 신월리(일본해군 항공기지航空基地)에서 창설됐으며, 광주의 제 4여단에 예속隸屬되어 있었다. 초대 연대장에는 이영순(일본군 해군중위 출신) 소령이 보임補任됐다. 사건 당시 연대장은 107일 보임한 박승훈중령(일본육사 제 26기 출신)이었다. (육군본부, 창군전사, 육군인쇄공창, 1980, p. 373)

연대창설 당시 상황은, 1개월 전에 제주도에서 4 · 3폭동이 일어났고, 5 · 10선거 반대투쟁이 도처에서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남로당의 침투공작은 기성旣成연대보다 훨씬 용이했다. 이에 따라 남로당군부 적화赤化특별공작 최고책임자인 이재복의 지령指令으로, 14연대 인사계 지창수상사가 주동이 되고, 동 연대 김지회중위(육사 3, 대전차포 중대장), 홍순석중위(육사 3, 순천주둔부대 중대장)가 반란과 함께 지휘관으로서 행동하기로 모의했던 것이다.

 

19481019, 14연대는 1개 대대가 제주도 공비토벌共匪討伐작전 증원增員 차 출동하기 위해 여수항에서 승선乘船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는 출동대대의 환송을 겸한 회식이 장교식당에서 개최됐다. 지창수상사 일당은 이때에 거사하기로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뒤로 미루었다.

7시경 회식이 끝나고 연대장 이하 참모들은 다시 여수항에 나가 승선작업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출항 예정시간은 이날 밤 12시였다. 연대인사계 지창수상사는 김지회중위와 다시 모의한 끝에 부대 출발 직전에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14연대 제 1대대는 식사 후 출동준비를 하고 있었고, 잔류殘留부대인 제 2대대는 제 1대대의 출동준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지창수상사는 연대 좌익세포細胞 40여 명에게 사전계획대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게 지시하고, 8시에 비상나팔을 불어 출동대대병력을 연병장에 집결시 켜놓고, 아래와 같은 허위사실을 유포하면서 반란에 가담하도록 선동煽動했다. (육군본부, 공비연혁, p. 203)

 

. 지금, 경찰이 우리에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打倒하자

.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제주도출동을 반대한다

.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룩하자

. 지금, 북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하여 38도선을 넘어 남진南進중에 있다

. 우리는 북상北上하는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한다.

지창수상사의 선동에 하사관 3명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지창수상사 일당이 이들을 즉석에서 사살하자 연병장은 순식간에 공포분위기에 휩싸이고, 비상나팔에 의해 영문도 모르는 채 집합한 출동병력은 겁을 먹고 맹종盲從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창수상사는

 

탄약고를 이미 점령해 놓았으니 각자 탄약고에 가서 실탄을 최대한 휴대하라!’

장교들을 모조리 사살하라!’ 고 선동했다.

이리하여 연대병력을 반란으로 이끄는데 성공한 지창수상사는 자신이 해방군의 연대장임을 선언하고, 여기서 그들이 계획한 대로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등의 반란군 지휘체계로 편성했다.

 

편성이 끝나자 부대내에 잠적한 장교들을 색출索出하여 대부분 사살하고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장교들은 창고 안에 우선 구금拘禁시켰다. 반란행위임을 직감한 장교들은 피신했지만, 그렇지 않고 진압하러 나오다가 반란군에게 발견된 장교들은 거의 사살되었는데, 그 수는 대대장 3, 연대정보과 작전주임 1, 중위 2, 소위 13명 등 도합 21명에 달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1>, 1967, pp. 454 455)

 

14 연대장은 반란상황을 보고 받고 먼저 부연대장 이희권소령을 들여보낸 뒤, 환송차歡送次 여수에 온 제 5여단 참모장 오덕준중령과 함께 연대에 들어가던 중, 총성이 사방에서 나고 반란군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이에 연대장은 사태수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여단참모장과 함께 해군경비정을 타고 피신해 목포를 경유, 광주의 제 5여단본부로 들어갔다. 오덕준중령은 서울의 육군본부로 가서 진상을 보고했다. (육군본부, 공비연혁, p. 203)

 

반란주동자들은, 생각보다 쉽게 반란이 성공하자 연대 부근에서 반란군과 합류하기 위해 미리 대기중이던 여수지구 남로당 핵심분자 23명과 합세했다. 이어 반란군 2,000여 명은 지창수상사의 지휘하에 모든 차량을 동원해 여수읍내로 진출했으며, 먼저 봉산지서를 습격한 후 20일 새벽 1시경부터 시내 도처到處에서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200여 명의 여수경찰병력은 2,000여 명의 반란군 앞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여 기세등등해진 반란군은 여수읍내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때 시내에서는 좌익단체와 학생단체 600여 명이 <조선인민공화국 만세!><인민해방군 만세!>를 외치면서 반란군을 환영했다. 학생들의 반란군 가담은 좌익계열 교사들의 선동에 의해서다. 교사들중에는 좌익계열교사가 태반이었다. 반란군은 무기와 탄약을 학생들에게도 분배하고, 좌익단체의 선도先導20일 오전 9시에는 각 관공서와 은행 등 주요공공기관을 점령했다. 읍내에서는 여수경찰서가 전소全燒되고, 거리에 인민대회의 포스터Poster가 나붙었으며, <인공기>가 여수읍내에 휘날렸다. 시민들은 인공기를 들고 중앙동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시가지에는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兵士위원회>의 이름으로

 

· 제주도 출동 절대 반대!

· 미군도 소련군을 본받아 즉시 철퇴(철수)하라!

· 인민공화국 수립 만세!

등을 담은 성명서가 발표됐다

남로당 여수읍당위원회에서도 재빨리 읍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읍사무소 자리에 보안서를 설치하고, 10시경부터 경찰과 우익인사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한편, 여수를 완전장악한 반란군의 주력은 1020일 오전 930분 경 여수에서 열차편을 이용 순천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 순천에 주둔중인 제 14연대 예하隸下 2개 중대는 홍순석중위 지휘하에 여수에서 오는 반란군의 주력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여수의 군반란정보를 입수한 순천경찰서는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여수와 광양으로 연결되는 도로 길목에 경찰 1개 소대를 배치하고, 장대다리에 경찰주력을 배치하여 반란군의 순천진입을 저지할 태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조치도 반란군의 압도적인 세력 앞에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게다가 광주에서 급거 출동한 제 4연대의 1개 중대는 순천교와 순천역에 배치돼 있었으나, 중대내 좌익계 하사관들이, 중대장과 반란을 반대하는 일부 사병을 사살한 뒤 반란군과 합류함으로써 반란군의 세력은 확장일로擴張一路였다.

 

이날 오후 5시 경, 반란군은 순천시가지를 완전점령하고 좌익분자들과 중고등학생을 선동해 무장武裝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반동분자를 색출하게 하여 500여 명을 인민재판이란 미명 아래 학살했다. 특히 순천지역 일대에서는 경찰관 400여 명이 반란군 진압작전을 펼치던 중에 전사戰死하거나 반란군에 의해 학살됐다.

이렇게 반란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게 되자 민심은 동요되고, 무지한 주민들은 실제로 공산정권이 출현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으며, 반란군의 선동과 강압으로 이들에게 가담하는 자가 속출하여 무장폭도들의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순천에서 세력을 확장한 반란군은 3개부대로 재편성하여, 1,000여 명으로 편성된 주력은 북쪽의 학구, 구례방면으로, 1개 부대는 동쪽의 광양방면으로, 1개 부대는 서남쪽의 벌교, 보성방면으로 분진分進하면서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했다.

 

한편,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반란군의 일부는 지방 좌익세력과 합류, 인공기를 게 양하고, 순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인민행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우익인사들

을 즉결처형하거나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400여 명을 살해했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구판舊版 1>, 1967, p. 458)

여수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좌익세력은 20일 오후 3시 경 중앙동광장에서 인민대회를 열고 약 4,000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용기를 비롯한 5명의 의장議長이 대회를 진행하도록 했다. 이 대회에서 좌익단체인 노동조합대표, 농민조합대표, 여성동맹대표, 청년대표의 <인민공화국 수호守護!>를 외치는 연설이 있었고

 

.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 대한민국의 분쇄粉碎를 맹세한다

. 남한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掃蕩한다

5개 항의 결정서(결의문)를 채택했다.

이러한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한 인민대회는 막을 내리고 인민대회에 모였던 시민들은 곧이어 군중시위에 들어갔다. 좌익군중들은 여수읍사무소를 비롯한 각 기관들을 접수함으로써, 하루 만에 여수읍은 좌익세력에 의한 인공치하人共治下가 되었다.

한편, 비합법적으로 지하地下에서 활동하던 <민족애국청년단>, <민주여성동맹>, <합동노동조합>, <교원노동조합>, <철도노동조합> 등이 나타나 제각기 간판을 내걸었다.

 

1021, 여수읍내 좌익분자들은 반란군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제외한 한국민주당,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등의 간부와 단원들을 반역자로 적발, 체포했다. 반란군과 좌익분자들은 이날 인민재판을 개최하고, 제일 먼저 여수경찰서장 고인수를 비롯한 사찰계직원 10여 명을 처형한 것을 필두匹頭로 수십 명을 처형했다. 여수경찰서 소속 여경 3명도 이때 처형됐다. 그리고 이들은 <여수일보>를 접수하고 <여수인민보>라는 좌익신문을 발간했다. 이들의 우익세력에 대한 인민재판은 계속돼 처형된 사람이 400여 명을 넘었다.

정부에서는 여수순천지구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021일 광주에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송호성육군준장을 임명, 2여단과 제 5여단을 통합지휘하게 하는 한편, 1021일에는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戒嚴令을 선포했다. 반란군토벌에 동원된 병력은 5개 연대 10개 대대였으며, 1개 비행대와 함정艦艇이 이를 지원했다. 이 전투사령부의 토벌작전으로 1023일 반란군의 주력은 순천에서 토벌부대에 쫓겨 구례방면으로 이동하여 백운산으로 입산했고, 광양방면의 반란군도 백운산으로 일단 입산한 뒤 지리산으로 이동했다.

도주한 반란군들은 여순반란을 계기로 남조선빨치산(파르티잔 Partizan, 빨갱이, 조선인민유격대朝鮮人民遊擊隊)의 효시嚆矢가 됐다. 이 빨치산들은 나중 6 · 25동란動亂을 겪으면서 북한인민군과 합세함으로써 국가 전복자顚覆者 - 공산빨갱이들이 됐다.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는 반란이 발생한 지 5일 만인 25일 순천, 벌교, 보성, 광양을 탈환했으며, 여수지역은 27일에야 치안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여순반란은 9일만에 완전히 진압되고, 그 후부터는 지리산, 백운산 등지로 입산 도주한 반란군에 대한 토벌작전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여순반란 민간인 희생자수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사 (1)><군경전사자 61, 부상 군경 119, 실종 군인 4, 사살된 반란군 363, 포로 2,116(선동 좌익민간인 650명 포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민간인 희생은 반란군에게 학살당한 양민 1,200여 명, 반란군에 부상한 양민良民 1,150여 명, 행방불명자 3,500여 명, 이재민罹災民 98,0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송효순의 <붉은 대학살(갑자문화사, 1979)>에서는 <반란군에 의해 학살당한 양민은 1,134, 행방불명자가 818명이었으며, 사살된 반란군이 392, 포로 1,512>이라고 기록해 엄청난 편차偏差가 있다. 일부학자들은 반란군에 희생된 군경과 우익인사 등 인명피해는 약 500여 명인 반면, 진압군에 의한 피해는 약 10,000여 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거사 진실 · 화해위원회>가 조사를 마무리했으므로 정확한 통계가 밝혀질 것이다. 반란군은 대부분 개별처형을 했으나 군경은 집단처형을 했으므로 희생자가 몇 배 많을 것으로 추정推定한다.

 

 

# 여순반란 : 자료 - 3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깊은 가을, 1948. 10. 19, 국군경비대 제 14연대가 주둔駐屯한 여수읍 신월리, 930분 정각 소등燒燈 그리고 정적靜寂, 10시 경부터 이슬비가 내렸다. 제주도 출동명령을 받은 1대대 장병들은 완전무장한 채로 막사에 들어누웠다.

 

이 무렵, 연대본부 옆 연대근무중대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 10시 정각 한 발의 총성이 적막寂寞을 깨웠다. 동시에 연대본부 위병소의 비상나팔이 요란스럽게 울려퍼졌다.

 

1대대본부에서 차출差出을 기다리던 1대대 작전관 겸 통신장교 전용인소위가 황급히 막사에서 뛰어나왔다. 비상나팔이 울리자 여기저기 막사에서 불이 켜졌다. 무장을 한 장병들이 중대본부 앞으로 모여들었다. 김지회중위와 지창수상사가 모의한 반란이 각본脚本대로 진행되었다.

 

1대대부관 김정덕소위가 연대근무중대 앞을 지나는데 사병들이 달려들더니 무조건 구타를 했다. 같이 지나가던 조병모소위가 사병들을 제지하며

 

사병이 장교를 구타해!’

, 이 새끼!’

 

사병이 총검으로 조병모소위의 배를 찔러 총검이 등을 뚫고 나왔다. 이틈을 틈타 김정덕소위가 1대대본부 쪽으로 도망치자 총으로 저격狙擊했다. 세 번째 총성이다. 대대본부 앞에 서성거렸던 전용인소위는 달려오는 사람이 김정덕소위임을 확인하고는 놀랐다. 반란군들이 총을 난사亂射하며 김정덕소위를 쫓아왔다. 전용인소위가 대대본부에서 기관단총을 들고나왔다. 반란군들은 쓰러져있는 김정덕소위를 그대로 두고 연대무기고와 탄약고로 달려갔다. 무기고와 탄약고는 일본해군이 산허리를 터널처럼 뚫고 콘크리트로 세워, 입구에 철조망을 치고 보초를 세웠는데 뛰어든 반란군들은 보초를 사살하고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했다.

 

5중대 주번사관 박윤민소위는 비상나팔과 총소리에 놀라 주번사령에게 비상문의를 하기 위해 연대본부로 달려갔다. 탄약고 앞에까지 갔을 때 반란군이 물었다.

 

누구냐?’

주번사관이다.’

쏴라!’

명령이 떨어지자 박윤민소위는 무참하게 사살되었다.

 

한편, 14연대 종합연병장

조명등照明燈이 켜지자 연대가 대낮같이 밝아졌다. 곧 장병들이 연병장에 집합 완료했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나고, 뒷산에서는 신호탄이 날고있어 영문을 모르는 장병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신호탄은 미리 짜여진 각본에 의해 연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장병들은 반란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반란군 총책임자 지창수상사가 사열대査閱臺 위에 올라가 연설을 시작했다.

 

전우戰友 여러분! 지금 경찰이 14연대를 포위하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총소리와 신호탄을 보십시오. 경찰에 맞서 우리를 지킵시다. 우리가 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제주도에 출동해야 합니까? 출동을 반대합시다!’

옳소! 옳소!’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잇달았다. 각본대로 병사들 사이에 숨어든 반란군들이 선동하는 소리다.

 

여러분! 지금 북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 · 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주도에 출동하여 민족상잔을 하려는 반동장교를 모조리 소탕하고 북상하여 북한 인민해방군에 합류합시다!’

또 군중 속에서 옳소! 옳소! 함성이 일어났다. 그때 세 명의 하사관들이 달려나가며 고함을 쳤다.

 

안 된다. 지창수, 너 빨갱이구나! 여러분, 우리는 엄연한 국군입니다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란군들이 세 명의 하사관들에게 총탄세례를 퍼부었다. 지창수상사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하사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 반동을 하면 저렇게 됩니다. 탄약고와 무기고를 점령했으니 총과 실탄을 휴대하고 경찰을 타도합시다!’

 

반란군들의 선동에 영문도 모르는 군인들이 탄약고로 달려갔다.

 

장전되지 않은 기관단총을 든 제 1대대 작전관 전용인소위는 대대장 김일영대위를 찾았다. 제주도 출동대대장 김일영대위는 잠을 자다가 비상나팔소리에 깨어 일어나는 중이었다.

 

대대장님, 김대위님!’

 

노크도 없이 뛰어든 전용인소위는 당황하여 어쩔줄 몰랐다.

 

뭐야? 왜 이렇게 소란하지?’

반란입니다. 반란!’

뭐라고! 반란?’

 

김일용대위가 말문이 막혔다. 전용인소위로부터 간략한 보고를 듣고 김일용대위가 명령했다.

 

전소위! 내가 나가 수습을 할테니 자네는 빨리 연대장님께 보고해!’

 

당시 연대장 박승훈중령은 제 5여단에서 내려온 참모장 오덕준중령 그리고 부연대장 이희권소령과 함께 여수부두에서 하역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14연대에서 읍사무소하고 통화를 연결하는 전화는 연대본부밖에 없어서 전소위가 연대본부로 달려갔으나 이미 반란군이 전화선을 끊어버렸기 때문에 전화통화를 하지 못 했다.

 

한편 1대대장 김일용대위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종합연병장으로 달려갔다. 연병장 입구에서

 

누구냐?’

대대장이다.’

이 새끼, 반동이구나!’

, 1대대장이란 말야!’

 

순간, ! ! 총성이 울렸고 김일용대위는 쓰러졌다.

 

무기고에서 탄약을 약탈한 반란군들은 연대 내 건물을 샅샅히 뒤져서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장교는 불문곡직不問曲直 사살했다. 1대대장 김일용대위에 이어 2대대장 김순철대위, 3대대장 이봉규대위와 정보주임 김래수중위 등 20여 명의 장교가 사살당했다.

 

연대본부에서 여수읍과 통화를 하지 못한 전용인소위는 바로 통신소로 달려갔다. 당시 14연대에는 광주 5여단과 교신할 수 있는 소형무전기가 있었다. 기관단총을 든 전용인소위가 통신소로 뛰어들자 하사관들이 놀랐다.

 

빨리, 광주 5여단을 불러라!’

 

그러나 통신이 되지 않았다. 교신시간이 늦어 통신병들이 잠들어버렸던 것이다. 전용인소위가 무전기를 빼앗아들고 직접 교신을 시도했으나 교신이 되지 않았다. 전용인소위는 암호를 따질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SOS를 발신했다.

 

여수 14연대 반란! 시급함, 지원 바람!’

 

전국 어디서나 듣고 지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데서도 응답이 없었다. 이미 밤이 깊었기 때문에 모두 잠들어버린 것이다.

 

이 무렵 여수항부두에 나가있던 연대장 박승훈중령 일행은 연대반란은 꿈에도 모르고 시계를 보며 출동부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지칠 무렵 질주해오는 차량에서 수송관이 내렸다.

 

어찌 된 일이야?’

연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반란, 반란입니다!’

 

연대장과 부연대장이 새파랗게 질렸다.

 

연대장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부연대장 이희권소령은 정보주임 이래수중위를 대동하고 연대로 향했다. 탄약고 부근에서 수하誰何를 당했는데, 부연대장이라고 말하자 곧 총탄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정보주임 이래수중위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총탄을 피한 이희권소령은 포복을 하여 연대본부로 기어들어가 방송을 켰다.

 

나는 부연대장이다. 불순분자不純分子의 선동에 넘어가지 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대한민국에 충성한 군인들은 빨리 연대본부 앞으로 모여라!’

 

그러나 반도叛徒들이 마음을 돌릴 리 없었다. 반도가 아닌 군인들도 총뿌리를 들이대고 있는 반군叛軍이 두려워서 움직일 수 없었다. 진압은커녕 오히려 반군들이 연대본부를 향해 집중사격을 했다. 위협을 느낀 부연대장 이희권소령은 찝차를 타고 여수읍 헌병파견대로 향했다.

 

한편, 여수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은 해군 LST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신월리 연대 앞 바다에 도착했다. LST가 신호탄을 쏘며 서치라이트Search light를 비추자 종합연병장에서 반군을 지휘하는 지창수상사가 외쳤다.

 

반동군인과 경찰이 쳐들어온다. 사격하라!’

 

총성이 콩볶듯 쏟아졌다. 집중사격을 받은 LST가 물러섰다. 지창수상사가 선동했다.

 

반동군인들이 퇴각했다. 우리가 승리했다.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여수로 가자!’

 

지창수상사를 앞세운 반란군들이 여수읍으로 몰려갔다.

 

반란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다가 집중사격을 받고 물러난 부연대장 이희권소령은 여수의 군기대 파견대로 뛰어들었다.

 

뭣들 하는 거야! 빨리 순천을 불러!’

 

순천에는 철도보호를 위해 14연대 2개 중대가 파견되어 있었다. 중대장은 홍순석중위다.

 

, 홍순석중위입니다.’

홍중위야? 난 부연대장인데 큰일이 터졌네, 연대 내 빨갱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어!’

아니! 반란이란 말입니까?’

홍중위, 중대를 여수로 출동시켜!’

 

그러나 뜻밖의 엉뚱한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못 갑니다!’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안 간단 말이요!’

이놈, 명령을 거역하면 총살이다!’

 

부연대장 이희권소령이 전화통에 대고 호통을 쳤지만 홍순석중위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홍순석중위는 김지회중위, 지창수상사와 같은 공산당이었다.

 

여수 14연대에서 살아남은 장교는 불과 수 명이었다. 전용인소위는 사태가 불리함을 직감하고 장교계급장을 떼고, 가죽혁대도 벗어던지고, 작업복에 헬메트Helmet를 썼다. 전용인소위가 반란군을 피해 다니며 부대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느닷없이 옆구리에 총을 대며

 

누구냐?’

 

반란군이 수하誰何를 했다.

 

나는 김일병이요.’

 

임기응변臨機應變을 했다.

 

날 따라와!’

 

전용인소위가 연병장으로 끌려갔다. 총을 맞고 기절한 김정덕소위와 군의관 임중근중위가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때 해군 LST가 조명을 비추며 선무방송宣撫放送을 하자 반란군이 LST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그 틈을 타서 세 장교는 도주했다. 탄약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반란군이 여수읍을 향해 진격했다.

 

14연대의 반란소식을 연락받은 여수경찰서는 밤 10시 경 비상소집을 하달했다. 경찰서장 고인수경감을 비롯한 총무과장 정홍수경위 등 간부진은 서장실에서 긴급사태 대책회의를 했다. 비상사태 선포 후 150여 명의 경찰이 집결했다. 봉산지서 부근을 1차 저지선으로 반란군과 대치對峙했다. 총무과장 정홍수경위가 지휘했다. 무모했다. 숫자에서도 화력에서도 상대가 되지 못 했다. 반란군은 봉산지서, 충무지서를 휩쓸고 여수경찰서로 몰려들었다. 고인수서장이 경찰청에 보고하였으나 <경찰서 절대사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병력이, 경찰은 150여 명, 무기는 칼빈소총으로 무장했다. 반란군은 2,000여 명의 병력이고, M1소총과 박격포를 가지고 있었다.

 

새벽 330, 여수경찰서는 <경찰서사수 명령!>에 따라 사수 끝에 대부분 경찰이 살상당하고 서장과 간부 서너 명은 경찰서 뒷산으로 피신했다. 반란군이 경찰서에 진입하여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된 20여 명의 죄수들이 풀려나고 그들의 손에 총이 들려졌다. 경찰서에는 불을 질렀다. 그리고 경찰과 우익인사 검거에 들어갔다. 좌익계열 교사들의 선동으로 <신탁통치信託統治 찬성!>을 부르짖던 학생들이 가담했다. 대부분 여수수산학교와 여수여중생들이었다. 학생들에게도 무기가 지급되었다. 경찰서가 불타고 있을 때 민가에 피신하고 있었던 고인수경찰서장은 스스로 집을 나서 경찰서를 향했다. 여수읍사무소 앞에서 학생들이 고인수서장에게 총을 겨눴다. 경감계급장을 단 서장의 제복制服을 보고 학생들이 멈칫거렸다. 여수읍사무소 국기게양대에는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여수읍사무소 앞에 있던 반란군 두 명이 달려왔다.

 

이거, 개새끼 아냐?’

나는 경찰서장이다!’

반란군의 눈에 독기毒氣가 서렸다. 총대로 고인수서장을 내려쳤다. 그리고 짓밟았다. 광장을 오가던 군인들이 몰려왔다.

 

이거, 개두목 아냐? 죽이지 말라! 필요한 놈이다.’

 

반란군 하사관이 말렸다. 여수읍사무소 2층 회의실에는 100여 명의 우익인사들이 끌려와 있었다. 경찰은 보이는대로 즉결처분했는데 끌려온 경찰도 몇 명 있었으나 얼굴을 짓이겨버려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반란군에게 검거된 여경 국막례경사는 자기집 마루 밑에 숨어있다가 잡혔다. 한복韓服을 입어 신분이 탄로나지 않았으나, 여수읍사무소에 끌려오자 경찰신분이 노출되었다. 국막례경사를 여수경찰서 뒤 상무관으로 끌고가서 옷을 벗겼다. 반란군 두 명이 양쪽에서 붙잡고 꼼짝 못 하게 하면서 착검한 총으로 옷을 하나씩 하나씩 찢어 벗겼다. 처음에는 살려달라! 고 애원했지만 발가벗기는 반란군의 만행에 분노하여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놈들, 너희는 부모형제도 없느냐?’

이년, 꽤 악종惡種인데.’

 

국막례경사는 결국 알몸이 되었다.

 

이년을 멋지게 죽이자!’

 

국막례경사는 반항을 할 수도 없는 가사상태假死狀態였다. 구타당한 상처도 문제였지만 군중 앞에 벌거벗은 몸을 들어낸 수치심이 그녀를 혼절昏絶하게 만들었다. 반란군이 총을 들고 희죽거리며 알몸의 국막례경사에 다가가서 음부陰部에 총을 들이댔다. 총을 발사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며 쏟아졌다. 당시 그녀의 나이 스물 넷.

 

한편 여수읍사무소에 끌려간 고인수서장은 하루종일 갖은 문초問招같지도 않은 문초를 당했다. 횡설수설橫說竪說의 문초였다. 반란군은 고인수서장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지도자급이 만류했다. 고인수서장의 인품人品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고인수서장은 불타버린 경찰서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반란군지도자들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은 반란군 암살대장 서종현이 반발했다. 서종현이 부하들에게 고인수서장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서종현은 <유달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고 일본도日本刀를 허리에 차고다니며 즉결처형을 했다. 일본도로 목을 쳐 죽였다. 여수경찰서 후정後庭으로 끌려간 고인수서장에게 처음에는 오른팔에 총을 쐈다. 다음에는 왼팔에 쐈다.

 

이놈들, 어서 죽여라! 경찰서가 불타고,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 나만 살아서 무엇하랴, 그러나 한 가지 소원이 있다.’

뭐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게 해달라!’

 

고인수서장은 피투성이가 된 양팔을 들어 <대한민국 만세!> 3을 부른 뒤에 총살되었다.

 

1026, 여수는 완전히 반란군이 장악하였다. 경찰관과 그 가족 그리고 우익인사를 색출하는 한편 인민위원회를 조직을 했다. 오후 3, 여수읍 중앙동 로터리광장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웅성거렸다. 동회洞會를 소집하여 각 가정에서 한 명씩 차출差出했다. 얼마 후 이용기가 강단에 올랐다. 유목윤동무를 소개했다.

 

오늘 여수 순천에는 인민해방군이 상륙하여 점령하고 북상중에 있습니다. 또 이북의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하고 있어 남조선해방은 목전에 다다랐습니다.’

 

군중은 침묵했으나 의아스러운 분위기가 퍼졌다.

 

여러분,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했기 때문에 오늘 아침 대통령 이승만은 일본으로 도망쳤습니다. 총궐기하여 남조선해방에 앞장섭시다!’

 

(이승만대통령은 1019일 일본에 있는 극동사령부 사령관 맥아더(MacArthur Manila)장군의 초청을 받아 도일渡日했음)

 

그 때 반란군과 좌익세력 그리고 학생들이 <인민공화국 만세!><인민해방군 만세!>를 불렀다. 이용기, 박채영, 송욱, 유목윤, 문성휘, 김귀영 등이 인민위원회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몇몇 인사의 연설이 끝나고 시가행진을 했다. <방송청취는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布告가 붙었다. 선동삐라가 붙었다. 주로 학생들을 동원했다.

 

국막례경사가 처형되고, 고인수서장이 살해되면서, <나는 죽지만 더 이상 시민을 살해하지 말라!>는 유언遺言을 남겼는데도 경찰관과 우익인사 색출, 살해는 계속되었다.

 

정운자순경이 붙잡혀 상무관으로 끌려왔다. 그녀의 나이 스물 셋, 정운자순경을 발가벗겨놓고 반란군들은 서로 살해쟁탈전을 벌였다.

 

요것도 멋있게 죽이는 게 어때?’

헌데, 총알이 아깝지 않아?’

 

죽창을 든 반란군이 정운자순경 앞에 섰다. 죽창으로 음부를 찔렀다. 주위에 둘러서있던 반란군과 폭도들도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돌렸다.

 

반란군들은 여수일대의 해안도로를 봉쇄했다. 20일 오전 부산 - 여수 정기여객선 태완호가 반란이 일어난줄 모르고 여수항에 도착했다. 반란군들이 민간인들은 남아있고, 경찰관과 군인이 있으면 먼저 나오라고 했다. 반란이 일어난줄 모르는 여수경찰서 수사과 정형채형사는 부산에 출장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다. 반란군들이 권총과 수갑을 회수하고 신분증을 확인했다.

 

개새끼가 틀림없어, 해치워!’

 

정형체형사는 자기가 소지한 수갑이 채워져 총살당했다. 정보과 박찬호순경은 중앙동 낙원식당에 피신하여 거지로 변장하고 탈출하다가 한재고개에서 반란군에게 붙잡혔다. 반란군은 현장에서 처형하지 않고 충무동파출소 앞에 끌고와서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혀와 눈알이 튀어나왔다.

 

좌익계열의 학생들이 총과 죽창을 들고 가택수색을 했다. 혈안이 되어 우익인사를 찾았다. 여학생들은 치마속에 권총을 감추고 있었다. 열여섯, 열일곱의 어린학생들에게 어찌 이렇게 잔인한 품성이 있었을까?

 

사찰주임 박모경위는 친구의 집 다락에 대피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박경위를 당부했다. 박경위가 잡혀가면 어머니와 부모인연을 끊겠다고 했다. 그 집의 아들들이 좌익에 가담해서 들락거렸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부탁을 지켜 박경위는 목숨을 부지했다.

 

1020, 진남관 뒷골목에서 회계주임 지창균경위를 검거한 반란군은 새끼줄로 묶어 여수읍사무소에 끌고가 고문을 했다. 그리고 새끼줄로 목을 묶어 지프에 매달고 시내를 끌고다니다가 총살했다. 지창균경위는 총살할 것도 없이 이미 시체가 되어있었다. 반란으로 순직한 여수경찰서 내 경찰은 고인수서장을 비롯하여 모두 74명이다. 전체의 절반이다. 폭도는 1023일 오후 3, 여수읍 대판동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첫 인민재판이 열어

 

여러분, 인민의 피를 빨아먹은 000는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합니다. 어떻습니까?’

옳소! 옳소!’

 

군중 속에서 환성이 터지면

 

‘000는 사형에 처합니다!’

 

대기하고 있던 사수射手 2명이 총살을 집행한다.

 

이놈도 사형에 처합시다!’

 

천일고무공장 사장 김영준은 어부로 변장을 하고 피난하려다가 신월리 앞 가막만에서 배를 돌려 되돌아왔다. 400여 명 직원의 공장을 운영하던, 광주의 현준호와 함께 호남 제 1의 갑부甲富였다.

 

가족과 직원들이 다 죽는 판에 나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하면 뭐 하나?’

라며 되돌아왔다가 반도叛徒에게 검거되어 인재판대 위에 섰다. 장황한 반역죄가 열거되고 사형집행을 묻자, 의외에도 군중들이

 

살려라!’

라고 외쳤다.

 

그이는 총살하지 마시오. 죽이기 아까운 인물이요!’

 

군중들이 동요動搖했다. 반도들은 김영준사장을 재판대에서 끌어내리고, 총살당한 시체를 방공호로 옮기는 작업을 시켰다. 방공호의 시체는 콜타르Coal Tar를 뿌려 불에 태웠으므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 가족이 시체를 찾지 못했다.

 

노동자총연맹 여수지구위원장이자 전국 항만노조 조직위원인 김창업은, 6세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6살에 친척을 따라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고, 일제의 탄압에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밀려다녔다. 11살 때 도꾜거리를 거지처럼 방황하다가 일본인 음악교수의 눈에 띄어 교수의 집에서 심부름과 청소를 했는데, 성실한 성품이었므로 교수가 추천推薦하여 명문名門 메구로 야간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다. 해방이 되자 가족을 데리고 귀국하였는데, 노동조합 결성에 앞장서면서 좌익계열과 싸웠다. 사형대에 선 그가 마지막 부탁을 했다.

 

재판관, 마지막 부탁이 있소!’

뭐냐, 말해봐!’

내가 배운 건 음악이요. 여수시민 앞에서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싶소!’

 

김창업은 봉선화노래를 불렀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듣는 군중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2절이 계속되었다. 울음이 섞여있었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로하니

낙화落花로다 늙었도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장내가 울음바다가 되었다. 봉선화 앞에는 우익도 좌익도 없었다.

 

재판장, 한 곡 더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를 불렀다. 포은 정몽주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서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하다가,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조선 태종)의 철퇴鐵槌를 맞아 순절殉節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回諭하려고 <하여가何如歌>를 불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대답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조선 태종 이방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포은 정몽주)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肅然해졌다.

 

죽여라!’

 

김창업이 가슴을 내밀었다. 이때, 흐느끼던 재판장 유목윤이 손을 들어 처형을 제지했다. 그런데 사수射手들은 그걸 처형하라는 신호로 알고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여순반란 동안 봉선화노래는 일본제국 식민지시대 때보다 더 유행流行했다. 사형장에 선 우익인사들은 처형 직전 의례히 봉선화노래를 불렀다.

 

<여순반란><제주 4 · 3폭동>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6 · 25민족동란>과 연계連繫되어있다.

 

 

# 제주 4 · 3폭동暴動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1948 4 3일 남로당중앙당과 남로당 전남도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남한을 북한에 수립된 김일성 공산주의정권의 통치영역에 포함하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 반란으로서, 1957 4 2일 마지막 인민유격대원을 체포하여 사건을 완전히 종결할 때까지 9년 간 반란을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도민道民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다.

 

· 1948 4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고 무장반란을   일으켜 1,756명을 살해했음

· 1948 5 · 10 제헌의원선거 때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유일하게 북제주  2 선거구선거를 파탄내어 대한민국건국을 방해했음

· 1948 5 · 10선거 때 선거인등록율 91. 7%, 투표율 95. 5%로 국민 절대 다수의 참여와 지지로, 1948 8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정부에 대하여 8  7개월 17일 간 항적抗敵했음

· 제주 4 · 3폭동주동자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박헌영의 지령指令에 따라 살인, 방화테러로 지하地下선거를 실시하고, 52,350명분의 투표지를 가지고 월북 越北하여 북한정권수립에 앞장섰음

· 1948 10 · 19여순반란 직후인 10 24일 제 2대 인민해방군 사령관 이덕구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宣傳布告를 하며 항적抗敵

· 김달삼은 1949 8월 북한 강동정치학원 출신자 300명으로 구성된 3병단 兵團을 이끌고 태백산지구에 남파南派되어 대한민국 전복顚覆 획책했음

· 제주 4 · 3폭동주동자 김달삼,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이정숙, 문등용은 월 북하여 북한 1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어 북한정권수립에 앞장섰음

· 6 · 25민족동란 직후 국운國運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처했을 때 남로당 제주 도당은 각 읍면별로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하여 빨치산과 합세, 공세를 강 화하고북한인민군 상륙 후 그들과 함께 대한민국 전복을 획책했음

· 제주 4 · 3폭동주동자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조몽구 등은 6 · 25민족동란 때 북한인민군과  남침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하였음 

· 제주 4 · 3폭동발발의 주체는 남로당이고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의 후계체 後繼體이며 남로당강령은 마르크스 · 레닌사상에 입각한 공산주의체제 국가 건설을 목표로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건국 이후에도 계속 항적하였음

·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원들은 인공기를 곳곳에 게양하였으며김일성 장군 만세!  부르며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음

· 1998 11 23일 김대중대통령은 미국 CNN방송의 <문답問答 아시아프로 그램Program>에 출연하여 <제주 4 · 3폭동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 다>고 전 세계에 천명闡明하였음

· 남로당 제주도당 대정면 당위원장 이운방은 4 · 3폭동주동자는 빨갱이로 봐 야 한다고 하며최종목적은 공산주의니까그들의 우선 목적은 통일조국건 설이라는 증언을 하였음

· 제주도 민전문화부장으로 1947 3 · 1기념투쟁을 진두지휘한 김봉현이 일 본으로 도피해서 김민주와 함께 쓴 책에서도 3회나 제주 4 · 3폭동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創建을 위한 투쟁이라고 명기明記

 

 

# 1919년 거족적擧族的3 · 1독립운동으로 국권회복國權回復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일제의 탄압은 가혹苛酷해졌다. 이때 백성들의 마음을 강하게 유혹한 것이 바로 볼셰비키Bolshevik에 의한 폭력혁명이 성공한 이후로서, 전 세계적으로 공산화의 물결이 급속히 확산되는 때였다.


공산당은 소비에트Soviet정부의 후원 아래 공산화를 목적으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이런 배경으로 공산주의는 애국지사愛國志士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파급되었고, 이를 선두에서 지휘했던 자가 박헌영이다. 공산당조직은 3 · 1운동이 있은 지 6년 만인 1925417,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박헌영, 김재봉, 윤병덕, 김약수 등 20여 명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 38선으로 분단된 조국

194586일과 9일에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뜨리자, 소련은 만주에 있는 일본군을 점령하고 곧이어 한반도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미국은 38선을 그어, 38선 이북은 소련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 38선 이남은 미국이 항복을 받기로 결정했다.


· 박헌영의 등장과 조선인민공화국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갈림길에서 혼란과 무질서에 휩싸였고, 숨어있던 공산주의자, 해외海外에서 돌아온 좌익세력들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45817,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세워졌는데, 이는 당시 가장 큰 정치단체였다. 이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흡수하여 96<조선인민공화국>을 급조해 창건했다.


하지만 194510월 말부터 있었던 <위조지폐사건>은 당시 급속도로 번져가던 조선공산당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조선공산당에 의한 위조지폐 발행사실이 탄로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38도선 부근의 이북 해주로 월북했고, 남한에 있는 공산당원들과 프락치фракция(도당徒黨, 당파黨派)를 조종操縱하여 대대적인 폭동을 계속 일으켰다. 그 전초전前哨戰이 바로 1946<대구 10 · 1폭동>이다.

 

 

# 대구 10 · 1폭동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1946년 대구 10 · 1폭동이 있기 전부터 우리나라 식량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당시에는 미군정이 쌀을 모아 균등하게 배급하는 <쌀 배급제>가 실시되었는데, 쌀값의 폭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반미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남로당은 민중들을 선동하여 반미시위를 일으키며 박헌영의 위조지폐사건을 덮으려 했다.


1946101, 대구역에 수천 명의 노동자가 모여 반미시위를 벌였다. 경찰 150여 명이 경계를 서고 있는 상황에서, 대구역 조선노동조합 대구지역평의회 사무실 2층에서 갑자기 <경찰, 저 놈들 죽여라!>는 고함과 함께 경찰에게 돌을 던졌다. 깜짝 놀란 경찰은 2층의 노동자들을 향하여 사격했고, 당시 연탄공장에서 근무하던 황말용이 경찰의 사격으로 죽었다.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대구 전역으로 퍼졌고, 이 일로 좌파간부들은 102일 노동자들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102일 오전 9, 대구 의과대학생 네 명이 병원에서 콜레라로 죽은 시체 4구에 시트Seat를 덮고, <어제 대구역에서 경찰에 의해 죽은 시체>라는 거짓말로 학생들을 선동했고, 오전 10시 반 경 대구경찰서에 도착했다. 공산당 도당책임자 장적우가 경찰이 먼저 무장해제하면 군중을 해산시키겠다고 대구경찰서장 이성옥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말을 믿은 이성옥서장은 경찰들에게 무장해제를 명했으나, 시위대들은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여 대구경찰서를 장악했다.

조선공산당 시위대들은 50 - 100여 명씩 조를 짜서 탈취한 자동차로 경북 22개 군청과 경찰서를 점령했다. 대구시내는 폭도로 변한 군중이 경찰의 몸을 칼과 도끼로 난자하며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대구에서의 10 · 1폭동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은 각 지방당부에 <호응呼應 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指令을 내려, 폭동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었으며 갖은 난동과 만행이 저질러졌다.

대구 10 · 1폭동으로 경찰 38, 공무원 163, 민간인 73명이 사망하였고, 부상 1000여 명, 776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대구 10 · 1폭동은 겨우 진압되었지만, 시위주동자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野山隊>를 만들었다.


1946828일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남한에서도 19461123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출범했다. 남과 북에 두 개의 공산당이 창당된 것이다. 김일성은 194826<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헌법을 채택하고 지폐紙幣를 발행하며, 사실상 북한쪽에서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했다.

 

 

# 제주 4 · 3폭동의 제주도 상황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제주도는 육지인 목포로부터 141. 6km, 부산으로부터는 286. 5km 정도 떨어져 있다. 진압이 어렵다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해방직후부터 친북좌파들의 활동이 극렬히 전개되었다. 해방이후 제주도에는 1945129일 좌익계인사들만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가 창립되었고, 19461123일에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당시 제주도 마을사람 거의가 사상이나 이념도 모르고 남로당에 가입했으며, 헌병대, 정보기관, 경찰관 등을 제외하고는 온통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세상이었다. 미군정이 있기는 했으나, 해방직후에 결성된 <제주도 인민위원회>1947년의 3 · 1발포까지 사실상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자치행정기구였고, 그 배후에는 남로당이 있었다.

19473 · 1절행사는 찬탁(贊託, 신탁통치信託統治 찬성)과 반탁, 좌와 우의 격돌장이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충돌이 일어났다. 제주도에는 우익이 약하여 아예 좌익과 다툴 힘이 없었고, 결국 경찰과 대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 3 · 1절 기념투쟁에 참가한 인원은 25,000여 명이며, 그중 좌익단체 소속만 17,000여 명이었다. 남로당 지지 청년들은 <미군정은 물러가라!>, <친일파를 처단하라!> 등을 외치며 군중을 선동하며 거리로 쏟아져나갔다. 긴박한 상황인데 골목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5 - 6살 난 어린이가 기마騎馬경찰관 임영관경위의 말에 부딪혔고, 좌익청년들과 사람들이 임영관경위를 끌어내리려는 소동이 벌어졌다. 미군정의 허락을 받은 경찰이 총을 쏘자 군중은 삽시간에 도주했고, 이 불행한 사태로 타살된 경찰관 한 명을 포함해 7명이 죽고 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남로당은 경찰관이 위급한 상황에서 정당방위正當防衛로 일으킨 순간의 실수와 돌발적인 상황을 부풀렸고, 마치 상부에서 의도적으로 발포명령을 내린 것처럼 꾸며서, 시민들에게 경찰에 대한 악감정을 갖도록 선동하였다.

 

결국 제주남로당은 3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빌미로, 1947310일부터 북구청을 제외한 제주도 모든 행정기관, 학교, 회사, 은행, 교통, 통신기관과 민간기업 등 156개 단체, 41,211명이 참가한 <제주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미군정에서는 발포사건의 장본인 이문규순경을 파면하고, 제주군정장관, 제주도지사, 제주검찰청장, 제주경찰 감찰청장등에게 책임을 물어 해임함으로써, 19474월 말 제주도 총파업사건은 수습되었다.

19482,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남한만의 단독선거일이 1948510일로 확정되었다.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던 박헌영은 합법적인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고, 지령을 내려 2 · 7폭동과 4 · 3폭동을 일으켰다. 194827, 남로당은 당원 30만 명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2 · 7폭동을 일으켰다. 다리가 폭파되고 운수, 전신, 전화의 파업이 일어났고, 남한의 행정기관들이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울과 각 지방에서는 <민주학생연맹>의 지휘 아래 일부 학생들이 동맹휴학同盟休學에 들어갔고, 농민과 노동자들이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제주도에서도 27일 새벽을 기하여 일제히 경찰을 습격하여 많은 살상과 방화를 하였다. 소위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된 이들은 소총과 수류탄, 일본도, 죽창으로 무장하여 경찰관을 생매장生埋葬하고, 경찰지서장을 살해하며 폭도화되었다. 2 · 7폭동은 약 2주 간 지속되었고, 폭도들은 한라산 전역에 전투기지를 구축하고 제주 4 · 3폭동까지 이어나갔다.

제주 4 · 3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194843일 새벽 2시부터 제주도 12개 지서를 일제히 습격하여 경찰, 공무원, 그 가족 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시작된 무장武裝폭동이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선량한 제주시민을 선동하여 북조선 건국선거에 참여하게 하고, 대한민국에는 선전포고와 살상, 방화, 약탈을 자행하며 <인공기 게양>, <김일성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7년간이나 대한민국에 항적하였다.무고한 양민의 희생에 대한 원인과 책임은 공산당에 있다.

 

공산주의이념에 물든 폭도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良民이 희생되었던 것은 공산반란군이 게릴라Guerilla을 펼치면서 양민을 끌어들여 희생을 유도하였기 때문이다. 군경입장에서는 피아彼我를 구분하기 어려운 불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경진압을 하였던 것이며, 이로 인한 희생에 대해 군경의 위법성 또는 책임은 인정될 수 없다. 무고한 희생자 없이 무장내란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진압의 결과 2년 후 6 · 25남침이라는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건졌다는 점에서, 진압군의 책임은 면책되고 희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폭동과 내란의 주범인 남로당에 있다. 정부는 북한군과 남한좌익들이 128,000여 명의 남한양민을 학살한 역사부터 진상규명하여 처벌하고 배상을 물어야 한다. 제주 4 · 3폭동이 남로당의 무장폭동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김대중대통령도 인정하였다.

 

제주 4 · 3폭동보고서는 제주 4 · 3사태의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제주 4 · 3폭동특별법의 제 1차적 목적은 진상규명이었다. 그러나 제주 4 · 3폭동보고서를 작성한 자들은 제주 4 · 3의 진실을 감추었다. 폭동을 봉기蜂起, 폭도를 희생자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폭도의 만행을 감추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주 4 · 3폭동보고서는 남로당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일으킨 내란內亂이었음을 규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공권력에 의한 양민희생과 희생자 명예회복만을 부각浮刻함으로써 제주 4 · 3폭동사태가 공산반란이었다는 역사적진실을 은폐隱蔽 · 왜곡歪曲하였다.

 

194843, 좌익폭도들은 남한 단독선거 반대, 북한선거 지지를 천명하였고, 19481024일에는 2대 폭도사령관 이덕구가 대한민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는데,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들을 빼버렸다. 심지어 폭도들이 군경복장을 하고 마을을 여러 차례 습격, 살인, 방화를 자행하여 이를 군경에게 뒤집어씌웠다. 이런 왜곡의 결과로, 제주 4 · 3평화기념관에는 남로당의 만행에 대한 전시물은 찾아볼 수 없고, 이승만정권이 양민을 학살한 것처럼 전시하고 있다. 공비토벌을 학살로 규정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무시한 채 군경을 죽인 2,500여 명의 살인폭도를 희생자로 결정하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

 

폭동이고 반란인 사건은 국가가 보상하고 기념할 사건이 아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은 국민화합적 차원에서 필요하다. 제주 4 · 3폭동의 가해자는 공산폭도共産暴徒이며, 따라서 4 · 3사태의 무고한 희생자는 원칙적으로 공산폭도와 그 유족遺族에게 배상을 청구해야 옳다. 국가는 무고한 피해자에 대해서만 보상하는 것이지 폭도까지 보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해자측이 역사적진실을 통해 잘못을 인정한다면 국민화합차원에서 배상책임을 감면減免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국가가 폭동과 반란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추념追念하거나 보상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므로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때, 자유민주주의자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을 순회하며자유민주주의로 건국을 해야 하고, 남한만이라도 자유선거를 통해 정부 를 수립하여 대한민국을 세워야 한다고 순회연설 국민계몽啓蒙을 했다.

(전북 정읍 발언)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한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으나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 등 소수인사들은 반대하였다이들 의견을 따랐다면 우리는 공산화 되었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탄생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을 비교해보라.

 

남한은 19485 · 10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건국을 위하여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결국 북한에는 김일성이 공산주의 괴뢰정권傀儡政權을 만들었고(1946), 남한에는 이승만에 의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건국(1948. 8. 15)되어 유엔은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남한의 대한민국건국을 막으려고 1946년부터 전국적으로 9월 총파업, 대구폭동, 제주 4 · 3폭동, 여순반란 등등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파업과 폭동과 테러를 일으킨다.

 

제주 4 · 3폭동 당시인 194922연대 특공대장병들이 무장대武裝隊로 가장假裝했다. 당시 토벌에 나선 군인들이 무장대로 변장變裝해 주민들의 사상을 검열檢閱한 사실이 확인됐다.

 

원래 제주도는, 1921년도 일본 유학생이며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던 김영식이라는 자에 의해 제주도공산당을 일찍부터 결성하였다제주도는 지역의 고립성과 문맹율文盲率이 높은 특성으로 80% 이상이 공산주의에 쉽게 현혹眩惑되었고남로당조직이 광범위하게 퍼져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를 경계하는 치안조직 경찰에 뜻하지 않게 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19473 · 1절 기념행사에 출동한 제주경찰 기마대의 말의 눈을 누군가 찔러 말이 놀래 근처에 있던 어린애에게 부상을 입히게 되었고, 경찰의 사과 후에도 일련의 군중이 의도적으로 경찰서로 몰려가고, 이것을 경찰에 대한 공격으로 오인誤認한 경찰이 발포,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이후 제주도 남로당은 <5 · 10선거반대>, <대한민국 건국반대>,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 만세!> 를 주창하며 파업과 시위와 테러를 지속적으로 감행敢行했다.

 

194843일 새벽 2- 4시 사이에 제주남로당 무장유격대가 제주도내 경찰서 12곳을 습격하여 경찰과 경찰가족, 선거관계자, 우익주민 27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다수의 경찰가족을 산으로 납치拉致하였다. 주동자는 대구에서 대구폭동에 가담하고 제주도에 은밀히 잠입한 김달삼이다결국 남로당의 공격과 방해로 5 · 10선거에서 제주도 3개 투표소 중 2개소가 무효투표로 처리되었다.

 

19488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으나, 전국적인 공산주의 세력의 파업과 시위와 테러는 계속 자행되어 정부적차원에서 일종의 특단의 조치가 내려지게 됐다.

 

이승만대통령 특단조치의 요약은

 

· 자유대한으로 전향轉向하라

· 아니면 재산을 정리해서 북한으로 가라

· 그렇치 않으면 소탕掃蕩하겠다

 

전국적으로 약 9만여 명이 재산을 정리해서 북한으로 갔고서울대교수의 50%가 북한으로 갔다생계와 특수목적의 전향하지 않은 공산사회주의자들은 식량이 풍부한 호남지역의 지리산월악산 그리고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과 제주 한라산 등으로 숨어 들어가 후일 6 · 25사변시 빨치산의 원천지源泉地가 되었다. 제주도 빨치산은 1957년이 되어서야 겨우 소탕되었다. 제주도에는 19481121일 계엄령戒嚴令이 선포되고, 조직적인 남로당 무장유격대 약 350여 명의 소탕작전이 시작된다. 상당수의 볼모로 잡힌 주민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남로당유격대는 한라산 위에 있고한라산 중산간에는 민간인이 거주하여, 남로당이 한라산 중간에서 보급을 받고 활동함으로 소탕에 어려움이 있었고, 남로당이 산중 거주주민으로 위장활동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심지어 한 집안에서 형은 볼모로 잡힌 빨치산, 동생은 경찰로 근무할 정도였다 하니 혼란이 말이 아니었다.

 

이후 한라산 중산간의 민간인 분산작전이 실시되어 해안가 5km 이내로 이주하도록 조치하고남아있는 민간인은 남로당폭도로 간주, 살육이 자행되는 사태가 벌어졌다이 과정에서 무고한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이 기간 중 민간인 14,000여 명과 군경토벌대 1,700여 명이 전사, 사망하였다. 소탕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김달삼을 비롯한 많은 공산당지도자 간부들은 이미 북한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19496월 제주남로당 총사령관 이덕구가 체포되었고, 남로당폭도들의 증언에 의하면남로당은 몇 개월 내에 인민공화국을 건설한다고 독려督勵하였다고 한다.

 

북한은 194910월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다음 해 19506 · 25일에 즉시 기습남침을 단행하였다.

 

1948년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국한 것은 한 마디로 기적이었다. 만약 그 당시 이승만대통령에 의한 자유민주주의국가 건국이 실패했다면 남한은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되었을 것이다오늘 현재의 북한과 남한을 비교해보라.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0,000여 명 해외 귀환국민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猖獗, 극심한 흉년凶年 등으로 겹친 악재惡材와 미곡米穀정책의 실패, 일제日帝경찰의 군정軍政경찰로의 변신變身, 군정관리의 모리謀利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31, 3 · 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 · 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民官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强攻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수뇌부軍政首腦部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지원志願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檢束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여 명이 구금拘禁되었다. 서북청년회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194843일 새벽 2.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산간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여 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중지,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수립 촉구促求 등을 슬로건Slogan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북청년회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 9연대의 김익렬중령은 경찰 · 서북청년회와 도민道民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대가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歸順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放火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決裂되고, 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 20연대장 브라운Broun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 · 10선거를 추진했다.

 

510,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 · 10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 · 10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挑戰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정부는 10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1017일 제 9연대장 송요찬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暴徒輩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布告文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疏開令으로 이어졌고,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이주됐다.

 

11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지대는 초토화焦土化의 참상慘狀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疏開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焦土化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宣撫를 병용倂用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歸順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赦免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下山했고, 19495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6월 무장대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潰滅되었다. 그러나 6 · 25민족동란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가입자, 요시찰자要視察者, 입산자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제주 4 · 3폭동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1954921,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3 · 1절 발포사건과 1948년 제주 4 · 3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 · 3폭동은 7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제주 4 · 3폭동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1월에 <제주 4 · 3특별법(제주 4 · 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公布되고, 이에 따라 828<제주 4 · 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 4 ·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이 공식사과를 했으며, 이후 4 · 3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제주 4 · 3폭동의 인명피해는 25,000 - 30,000여 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여 동이 소각燒却되었다. 제주 4 · 3폭동 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遺族 31,255명이 결정됐다.

 

제주 4 · 3폭동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제주 4 · 3특별법공포 이후 제주 4 · 3폭동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反目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相生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1<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제주 4 · 3폭동은 좌편향 민족사관民族史觀의 학자들에 의해 태생적胎生的원인과 배경을 은폐하고 군경에 의한 무차별 주민학살사건으로만 편향偏向, 왜곡歪曲 기록되고 있다역사는 좌우 등 사상과 이념을 공정하고 공평한 평가에 의해 기록되어야 한다. 우익정권에서 제주폭동, 여순반란, 대구폭동 등 사건은 정권에 따라 관점觀點이 달라졌다.

 

 

# 여수역광장

 

전라선열차에서 내린 도깨비기자가 택시를 타고 여수 14연대 주둔지 신월리로 향한다.

 

도깨비기자 : 신월리로 갑시다.

택시기사 : (뜨광하게 백밀러로 넘겨다보며) 신월리요?

도개비기자 : (택시가 출발하자) 기사님, 혹 여순반란 아세요?

택시기사 : , 들어서 조금 …….

도깨비기자 : 여수 14연대는?

택시기사 : 모릅니다.

도깨비기자 : 여수 14연대가 반란사건 주모자입니다. 14연대가 신월리에 주둔했 습니다. 근래 여순사건특별법이 발효되었고, 작고作故하신 부친이 여순사건과 연관이 있어서 피해자신청서를 제출했는데 한 번 현장을 보려고 가는거요.

택시기사 : 많이 변했을걸요.

 

 

# 여수 신월리

 

도깨비기자 택시를 내린다. 브로크로 지은 단층집들이 스레트지붕을 이고 조갑지처럼 붙어있는 좁고 구불어진 골목입구, 브로크벽에 시멘트를 바른 담장도 길바닥도 다 시멘트다. 어떤 집 담장은 브로크 위에 씨멘트로 미장美粧을 하고, 다른 집은 브로크벽돌만 쌓아 올려놓아 구멍이 숭숭 들어난 날담장이고, 더러는 붉은 벽돌과 브로크벽돌이 반반 섞여있고, 옛 돌담장에 담쟁이넝쿨이 뻗어 있는 등 담장전시장 같다. 스레트지붕, 기와지붕, 양철지붕, 옥상에 빨래줄이 처진 브로크 2층집들 제각각이다. 마을이 경사진 산비탈 언덕이라 신월리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수시청 신월리자료(여수시청 신월리 연혁지沿革誌 발췌 인용)에 의하면 신월리는 동양물구미신근 등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마을로 여수에서는 동정과 서정 다음가는 큰 마을이었다.

 

앞에는 잔잔한 바다를 끼고 뒤에는 청산이 감싸고 있으며 주위는 바둑판 같은 옥토沃土에 둘려싸여, 주민들은 반농반어半農半漁로 꽤 유족한 생활을 해 옛날에는 봉산동, 국동 일대사람들이 신월리덕으로 먹고산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다그런데 무릉도원武陵桃源 같던 이 평화경平和境에 갑자기 모진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쳤다.

 

1942 8월 경, 앞바다가 U자형으로 천연요새要塞를 이루고 있는 가막만의 신월리지형을 이용해 일본해군비행장을 만들고, 미평역에서 이 비행장까지 철도를 놓기 위해서 신근물구미봉양마을 철거한다이 비행장공사는 일본토목회사들이 맡아 했는데, 인부人夫는 이 고장을 비롯 전남 동부 6군에서 끌려온 근로보국대들이 2개월씩 교대로 와서 일해, 해방이 될 무렵 거의 90% 가까운 공정工程 때 일본이 항복을 하였고 공사가 중단된 체 빈 막사들만 남아있었다.

 

1948 54, 신월리는 다시 군용지軍用地로 편입돼, 안영길대위 이하 1개대대 병력의 14연대를 창설, 이영순소령이 연대장이 되었다가김익렬중령, 오동기소령을 거쳐 박승훈중령이 연대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481019, 제주 4 · 3폭동 진압 제주출병을 거부하면서 여순반란이 일어났다여순반란 후 1950725일 군대가 완전철수하고, 한때 텅텅 비어있던 이곳에 1952 1231일 제 15 육군병원이 설치되어, 전방에서 내려온 부상자들을 수용했다가, 1953727일 철수하였고, 육군병원 철수로 공백상태에 있던 이곳은, 1962 626일 뜻밖에도 보건사회부 결핵환자자활촌으로 지정돼, 전국 결핵환자의 총본산總本山이 됐는데, 이들이 여수시내 음식점이나 목욕탕 등에 출입하는 바람에 말썽이 되었다가, 1976220일 보건사회부에서 환자들에게 생활보조금을 지급하여 자유분산시켰다. 그리고 1976723일 한국화약 제 2공장이 들어서 가동稼動중이다.

 

신월리 주변은 70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완전히 바뀌어 비행장이나 14연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신월리 14연대 주둔지는 구봉산자락이 가막만으로 뻗어내려오는 완만한 U자형 항구고 항구 내해內海가 가막만이다. 항구와 비행장의 천혜의 조건이라 일본제국군대가 비행장을 개설하려고 주민을 강제철거하고, 중고등학생을 동원하여 비행장을 만들었다. 화양면, 화정면과 돌산이 가막만을 바깥 성곽城廓처럼 2중으로 에워싸고 있어 천연의 요새要塞. U자항구의 중심지점에 여수시청과 여수항이 있다. 여수항은 가막만으로 왼편에 화양면과 화정면이 방파제防波堤처럼 들러있고, 오른편에는 돌산읍이 감싸고 있어 천혜天惠의 항구다.

 

여순반란의 흔적을 보려는 노력은 허사다. 이미 70여 년이 지났으므로 사람도 건물도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당시 20여 세의 젊은이들도 이미 90세가 넘었으므로 증언자도 찾을 길이 없다. 국방경비대가 여순반란을 진압을 하면서 가막만에 군함을 배치하고 함포로 반란을 제지하려다가 집중사격을 받아 실패하고 쫓겨났다. 화력火力이 열세劣勢였다. 그런 흔적도 찾을 길이 없다. 어선 몇 척이 떠있는 가막만을 내려다보며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시내로 나왔다. 가막만을 가로질러 돌산으로 가는 관광선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 신월리 구멍가게 마트

 

도깨비기자 : (주인에게 말을 붙이려고) 음료수 한 병 주세요.

마트주인 : 냉장고 열고 찾아 드세요.

도깨비기자 :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찾아 들고) 어르신은 여수 사신지 오래되었나요?

마트주인 : 선대先代때부터 3대째입니다.

도깨비기자 : 여순반란은 아세요?

마트주인 :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요즘 방송에서 여순사건 피해자신청서를 받 는다고 해서 좀 알려졌지만, 저희들에게는 직접 피해가 없어 별관심 없습니 다.

도깨비기자 : 이웃에 여순반란을 아는 분이 있을까요?

마트주인 : 글쎄요. 직접 피해자라면 몰라도, 주변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없 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시지 않았을까요?

 

 

# 향일암向日庵

 

아랫길로 내려가면 해안에 너럭바위가 툭 튀어나온 절벽이 있다. 여순사건 때 반란군이 처형지로 활용했고, 진압군이 반란 가담자를 집단처형한 곳이다. 진압군은 철사로 양손을 묶고 굴비엮듯 대여섯 명씩 묶어 절벽 위에 세워놓고 집단총살을 했다. 희생자들은 한 사람이 총에 맞으면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누가 얼마나 죽었는지 자료가 없다. 반란군은 여수시내에서 죽은 희생자들을 트럭에 실어와 버렸다고도 한다. 1020일부터 색출된 경찰과 그 가족들, 공무원, 우익인사들이 검거되는대로 총살되거나 살해되었다. 죽창으로도 살해했다. 몽둥이로 패서 죽였다. 착검을 한 총으로 찔러 죽이거나 몸을 난자亂刺했다. 애초의 명분은 경찰이 국군경비대를 홀대忽待하고 부하 부리듯 한 보복이라고 했다. 우익인사들은 잡히는대로 인민재판조차도 없이 살해했다. 인민의 고혈膏血을 빨아먹은 기생충이라고 불렀다. 그 사람들의 형해形骸가 너럭바위 밑에 작은 산처럼 쌓였다. 지금은 말 없는 영혼들만 파도에 쓸려 넘실거린다. 좌익과 우익의 주검이 합장合葬되어 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무참히 살해된 영혼의 처절한 울음소리처럼 울부짖는다.

 

도깨비기자가 시간 가는줄 모르고 너럭바위에서 파도소리를 듣고 있다. 좌익은 뭐고 우익은 뭔가. 이념과 사상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살상의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신념이 인간의 목숨보다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해가 한 뼘 쯤 남았을 때 일어나 너럭바위 맞은편의 향일암을 찾았다.

 

향일암은 200912,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대웅전, 종각, 종무소 등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는데 3년여만에 복원復元되었다. 새해 일출관광의 명소名所. 일출이 아니더라도 향일암 앞에 남해가 펼쳐져있어 경관이 수려秀麗하다.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 가두리양식장이 띄엄띄엄 보이고 그 사이를 작은 발동선發動船들이 물살을 헤치며 달린다.

 

등촉대燈燭臺에 촛불 한 등을 켜고, 부처님이 좌정한 대웅전에 도깨비기자도 앉았다. 절에 들어서면 마음이 포근하다. 모태신앙의 교회에서 자랐는데 절을 더 좋아한다. 하나님과 소통에 실패한 것도 이유이지만, <누구나 깨달으면 다 부처님>이라는 불교의 원리에 더 공감하는 까닭이다.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느님이다>. 모태신앙 기독교의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를 독선獨善으로 이해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독선이 사회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신을 사람이 만들었다고, 모든 신은 다 우상偶像이라고 믿고 있는 상황에서 부처님을 만들어 불단佛壇에 모시고 엎드려 경배하는 절이 좋을 리 없지만 기독교보다는 더 친근감이 든다.

 

 

# 여수시청 공보관실

 

도깨비기자가 여순사건 피해자신청 접수현황을 보고 있다. 400여 건이 접수되어있다.

 

담당관 : (서류철을 덮으며) 뭐 더 도와드릴 일은? 여순사건 취재를 한다고요? 여수 시내 지리地理는 좀 아시는가요?

도깨비기자 : 초행初行입니다.

담당관 : 안내를 해드릴까요? 전문해설사가 있습니다. (뒷자리를 돌아다보고 직원을 가 리키며) 이 분은 기자신데 여순사건 유적지遺蹟地를 취재하신데, 안내할 수 있 겠는가?

도깨비기자 : (다가온 해설사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해설사 : (시청현관에서) 가시죠. 어디를 보고싶습니까?

도깨비기자 : 여순사건 유적지라면 어디든지 …….

 

 

# 여수여중 교문

 

도깨비기자와 해설사가 여수여중 교문에서 택시를 내린다.

여수여중 여학생들이 반란에 많이 참여했다. 좌익계열 교사들의 사주使嗾를 받았다. 여수여중 운동장은 반란군들이 시민을 모아놓고 우익 좌익을 가려내 처형했는데 시민들의 바지를 벗기고 반란군들이 입었던 검정팬티를 입은 사람은 무조건 자기편으로 분류했다.

 

 

# 여수경찰서

 

반란군들이 14연대에서 무기고武器庫를 탈취하여 무장을 하고 맨 먼저 공격했던 여수경찰서. 경찰서는 옮겨가고 터만 남았다. 시내관광을 하듯 여기저기 경찰서 주변을 돌았다.

 

 

# 진남관鎭南館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수군水軍을 조련한 진남관에서 시내를 조망眺望하면서 머리속에 맴도는 반란의 흔적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아무 것도 없다. 모두 사라져버려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역사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하나같이 사라져버렸다. 여순반란은 민족사적으로, 특히 전남 동부 6군에서는 엄청난 사건인데 흔적들이 하나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도깨비기자는 여순반란을 반추反芻하려는 것도 아니고, 여순반란이 여순지역에 끼친 영향을 찾아보려고 한 것인데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해설사 : 가보실만한 데가 딱 한 군데 더 있습니다. 만덕동에 여순사건 희 생자 위령비慰靈碑가 있습니다. 망마경기장에 여순사건 유족회遺族會 사무실 도 마련했고, 여순사건 기념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추진하고 있습 니다. 유족회 사무실로 갈까요?

도깨비기자 : 아닙니다. 위령비에 가보겠습니다.

 

 

# 여순사건 위령비慰靈碑

 

위령비 앞에 도깨비기자와 안내인이 묵념默念을 하고 있다.

 

해설사 : 2년 전에 유족회가 세운 것입니다. 여순사건특별법 발효를 위해서 유족 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먼저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도깨비기자 : 다행입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 하고 갈 뻔 했는데, 위령비도 없었 다면 헛걸음질할뻔 했습니다.

해설사 : 여수시내가 현장이었기 때문에, 7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 개발이 되 어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초가집이나 단층집이었던 살림집은 2, 3층집으로 바뀌었고, 공공건물도 모두 헐고 새로 지었습니다. 목격한 시민들 이 살아있다고 해도 찾기 어려울뿐 아니라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후손後孫들 이라도 만나시려면, 시청에 제출된 피해신청서를 참고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도깨비기자 : 피해당사자도 아니고 후손들을 만나봐야 제가 알고있는 내용일 것 입니다. 피해신청서를 열람하면 피해내용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과거사 진 실 · 화해위원회>에서 조사가 끝나면 보고서를 열람하여 피해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화해위원회는 1차로 사망자조사를 끝내고 2차 상해자조사를 시작 했습니다. 사망피해자보다 더 큰 희생은 없습니다만, 상해자도 사망자보다 후 유증이 더 큰 사례도 많을 것입니다. 제 경우처럼 후손들이 피해에서 벗어나 지 못 하는 사례도 많을 것입니다.

해설사 : 당시의 피해도 피해지만 후유증이 더 크군요. 하기야, 우리 외가外家도 외할아버지 3부자父子의 희생 때문에 정신적인 풍비박산風飛雹散을 겪고 있습 니다. 2세대 우리도 그 악몽惡夢에서 헤어나지 못 합니다.

도깨비기자 : 전쟁은 인류가 겪은 최악의 범죄입니다. 전쟁보다 더 참혹한 죄악은 없습니다. 사람을 짐승처럼 죽고 죽이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버립니다. 폐허 가 되지요. 동족상잔의 6. 25 폐해를 알지요? 한국전쟁이 제주폭동, 여순반란 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나폴레옹, 징키스칸을 영웅으로 추앙합 니다. 가까이는 베트남전쟁 그리고 지금 우리는 우크라이나전쟁을 보고있습 니다. 그 참상을 알고계시지요? 어떤 이유로도 무슨 이유로도 전쟁은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세계 제 2차대전에서 희생된 인명은 공식적으로 5,646만 명 입니다. 피해가 가장 큰 소련은 비공식적으로는 1,800만 명이지만 비공식집 계로는 인구의 10%2,500만이 희생되었습니다. 더구나 여순반란 같은 동 족상잔의 참극은 인간이 인간으로써 존엄을 파기한 행위입니다. 사상, 이념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 아닙니까? 내가 잘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인다? 공산주의가 어떻네 민주주의가 옳다면서 서로 죽이는 전쟁은 인간이 벌인 최악의 범죄입니다.

 

 

# 해거름이 되어서 해설사를 따라 돌산대교 아래 횟집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바다를 향해 투명透明비닐로 지은 횟집들이 줄을 지어 들어서 있다. 잠시 바다를 보고있는 사이에 돌산대교에 조명照明이 켜지기 시작했다. 거북선에 조명이 켜지자 실물크기 거북선이 바다 위로 떠올랐다. 거북선에도 임진왜란의 역사는 없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호령소리도 없고, 수군水軍병사들의 함성喊聲도 없다. 그냥 형해形骸만 죽은 거북이껍질처럼 덩그마니 떠있다.

 

돌산대교의 조명을 받아 밤바다에도 조명이 드리워졌다. 무지개보다 더 화려한 오색불빛이 명멸明滅하면서 검푸른 바다 위로 반딧불같은 빛이 떠오른다. 화려한 색깔로 단장한 아치형 돌산대교가 하늘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별빛도 달빛도 조명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해설사 : 근래 명소名所가 된 곳입니다. 생선회가 유명합니다. 혹 장대회 들어보셨 습니까?

도깨비기자 : 장대? 장대가 무슨 고기죠?

해설사 : 도시에서는 서대라고도 하는데 요즘이 제철이지요.

 

서대회와 소주를 놓고 도깨비기자와 안내인이 대작對酌을 하고 있다.

 

도깨비기자 : (서대회를 한 점 들며) 맛이 참 부드러운데.

해설사 : (도깨비기자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단순한 취재가 아닌 것 같은데 이유를 물 어봐도 되겠습니까?

도깨비기자 : 집안 일입니다. 부친이 피해를 당했습니다. 여순반란과는 아무 관계 도 없었는데, 반란이 집압되고나서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평생 정신신분열 증을 앓았고,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되어 가족들이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신 세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또 그 후유증으로 조부는 홧병에 걸려 중풍을 3년 동안 앓다가 돌아가셨고, 손아랫 동생을 잃었는데 병원도 가지 못했습니다. 조부모, 부친 그리고 나 3대에 걸쳐 간난艱難과 질곡桎梏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았습니다. 세상이 그리 만만하던가요. 평생 한이 맺혔습니다. 철천지한徹天 之恨입니다. 국가가 선량한 국민에게 가한 폭행. 74년만이지만 이제사 국가 는 여순사건특별법을 발효하여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합니다. 당사자는 죽어 버렸고, 그 가족들은 일생동안 피해를 물려받아 하소연은커녕 입도 벌이지 못 하고 죽은듯이 살아왔는데. 여수시청에서 피해자신청을 받고 있어, 신청서 를 제출하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좀 풀릴까 하여 반란사건의 현장을 보고 그 배경을 알아보려고 하는데, 오늘 본것처럼 역사적현장이 다 사라져버렸습 니다. 미로迷路를 해매는 것처럼 더 답답합니다.

해설사 : 사건현장이 시내라서 모두 사라져버린거죠. 개발이 되었으니까요. 개발 이 역사를 지워버립니다. 길은 파헤쳐서 더 넓게 만들고 아스팔트로 포장하 고, 건물은 헐고 높게 올립니다. 모든 것들이 개발이라는 부르도자의 힘에 의 해 철거되고 뭉개져버립니다. 역사조차도 지워버립니다.

도깨비기자 : 여수시청의 자료도 빈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규명이 되지 않은 탓입니다. 인명피해만도 엄청난데 정확한 피해 숫자도 모릅니다. 10,000명인지 20,000명인지도 모릅니다. 더러는 50,000명이라고도 합니다.

해설사 : 여순반란은 폭동으로 규정되어 이승만정권에서는 터부시되었습니다. 피해신청을 보면 피해증거를 제시하지 못 합니다. 피해자 본인들은 다 돌 아가셨고 후손들이 피해자신청을 하는데, 그것도 조부나 부친 등 입으로 전 해들은 내용들입니다.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역대정권에서 터부시 Taboo(금기禁忌) 되어서 증언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3대를 반란군이나 빨 치산, 빨갱이 후손으로 핍박과 멸시를 당하며 살았으니까요.

도깨비기자 : 저는 우리 집안의 장남으로 파산해버린 집안의 치다꺼리로 일생을 살았고,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부친의 폭압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부친은 평상시에는 정신이 멀쩡하다가도 느닷없이 폭행을 일삼고, 특히 날씨 가 꾸무럭거리거나 비가 오면 광인狂人이 되어 날뛰었습니다. 식구들이 온갖 수모受侮를 겪었지요. 동네사람들도 손가락질하며 피하고요. 미치광이 집안이 라고 홀대忽待를 당했습니다. 부친의 광기狂氣는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습 니다. 조부 생존시에는 조부도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걸 보고 자란 내가 어땠 겠습니까?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았다면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술을 좋아합니다. 술을 마시면 잠재潛在한 울분鬱憤이 터져나와 폭발하기도 하고.

해설사 : 여수는 생소生疏한가 보지요?

도깨비기자 : 고흥 태생이라 순천, 여수는 가깝지만 와본 적이 없습니다. 순천 여수에는 고흥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외지外地라면 광주지요. 고흥에서 벌교를 거쳐 광주로 갑니다. 순천, 여수에는 올 일이 없었습니다. 고흥은 광주생활 권입니다. 고흥읍내가 고흥반도 끄트머리에 있어 군청소재지 고흥읍에 가본 적도 없습니다.

해설사 : 여순반란은 빨갱이로 터부시되었고, 지역적 편향성이 있어 잊혀진 역사 고 …….

도깨비기자 : 너무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습니다. 국가에서도 그렇고 피해를 입은 개인적으로도 빨갱이라는 오명汚名때문에 아무도 들어내놓고 말하지 못했고 요. 저도 역사적 관점에서 추적追跡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 일생의 간난과 질 곡의 한을 이렇게나마 풀어보려는 것입니다. 제 일생은 여순반란으로 망가 지고 흐트러져버렸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독립군투사들의 후손들이 거

지가 되어 사회 밑바닥에서 살아온 것처럼, 제 일생이 처음부터 왜곡歪曲되어 버렸습니다. 풍족하게 보냈던 어린시절이 순식간에 망가져버렸음니까요. 독립 투사 후손들은 명분名分이나 있습니다. 제 부친의 피해는 명분도 없습니다. 누명陋名을 쓰고 경찰에게 당한 폭거이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라는 등 의 사회적 역사적 명분도 없는, 독립군처럼 일제 군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 은 것도 아니고, 국가권력에 의한 횡포였기 때문에 하소연할 데가 없었습니 다. 거기에다 장손으로 가족을 책임지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는 제 일생이 없었습니다. 간난과 질곡의 일생이었습니다. 제 삶이 없었습니다. 제 삶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게 한이 되었습니다. 술을 폭음하는 버릇 이 생겼습니다. 취하면 조금 삐딱해집니다. 시비是非가 될만한 말에 민감하게 과잉대응을 합니다. 싸움이 벌어지지요.

해설사 : (술병을 들었다 내려놓으며) 술을 더 시킬까요?

도깨비기자 : 폭음버릇이 있다니까 실수를 할까봐 염려됩니까? 점잖은 아가씨에 게, 설마 한풀이를 하겠습니까? 여수에게 한풀이를 하겠습니까? 14연대도 없 잖습니까? 폭도들도 없고요. 한풀이를 할 대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여순반란 역사처럼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소연은커녕 하다못해 그 당시 건물이나 나 무라도 있다면 붙잡고 울고싶은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 여순반란 순천지역 상황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여순반란이 일어나자 순천은 여수경찰서로부터 통보를 받고 여수에 경찰병력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여수경찰서장이 순천방어를 조언助言했다. 여수가 곧 무너지리라는 걸 간파看破한 처절悽絶한 조언이었다. 여수경찰은 150여 명이고 반란군은 2,000여 명인데다가 좌익계열 민간인들이 합세하여 반란군폭도는 5,000여 명이 넘었다. 그리고 시민들이 더 가세하고 있었다. 경찰은 칼빈소총으로 무장하였는데, 반란군은 M1소총과 기관총과 박격포를 가지고 있었다.

 

1020, 반란군은 통학열차를 징집徵集하여 국방경비대 2,000여 명을 싣고 여수에서 순천으로 향했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순천역은 점령당했다. 김희주철도국장과 직원들은 순천시내로 피신했고, 철도경찰 일부는 반란군에 합세했다. 반란군들에게 붙잡힌 경찰과 우익인사들은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반란군지도자 김지회중위는 백마白馬를 타고 시내를 활보했다. 순천에 파견된 14연대의 2개중대는 반란군과 합세했다. 파견중대장 홍순석중위는 반란에 반대한 장교와 하사관을 모두 즉결처분했다. 반란군들이 순천시를 완전하게 포위했다. 죽두봉과 봉화산으로부터 풍덕천변을 포함하여 물 샐 틈 없이 포위했다.

 

한편, 경찰서로 되돌아온 한운경감찰관은 양규원서장과 긴급대책을 서둘렀다. 경찰청을 비롯하여 광양, 구례, 곡성, 보성, 고흥경찰서에서 지원병력이 도착하고 있었다. 반란군들이 죽두봉을 점령하자 한운경감찰관과 양규원서장이 발을 굴렀다. 이들은 철도를 차단해 반란군들의 주력부대를 꺾고, 유리한 고지인 죽두봉을 교두보橋頭堡로 삼기로 작전을 세운 바 있다. 광양삼거리에 바리케이트Barricade를 친 1개소대 병력은 반란군들에 비해 턱없이 화력이 부족해서 싸움다운 싸움을 하지 못 하고 전멸했다. M1소총과 기관단총, 박격포를 가진 반란군들에게 카빈Carbine소총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경찰의 1인당 탄환은 고작 15발씩이 든 탄창 2개씩이었다. 또 반란군들은 2,000여 명이고 경찰은 고작 150여 명이다. 진압차 출동한 광주 4연대 9중대도 같은 동료끼리 싸울 수 없다고 방관하다가 반란군과 합세했다. 반란군은 경찰서를 점령하려고 일제사격을 했다. 이때 흰 깃발을 든 2명의 미군이 총격전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시가전市街戰에 뛰어들어 싸움을 말리는 미국인은 순천 주둔 14연대 미군고문관顧問官이었다. 그러나 사격전이 멈출 리 없다. 그들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통역관 유창남상사가 나섰다. 그는 학생때부터 좌익이었는데 수배대상이 되자 경비대에 들어가 미군의 통역을 맡았다.

 

동무들, 쏘지 말아!’

 

유창남상사가 두 미군의 앞에 서서 사격을 막아 미군들은 살아났다. 그 후 국군 진압부대가 반란군을 토벌討伐하자 지창남상사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사형판결이 내려지고 총살이 언도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군고문관들이 은인恩人을 구출하기 위해 처형장으로 달려갔다. 우창남상사는 총살 직전에 미군고문관들에 의해 살아났다.

 

1020,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경찰서에는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민기가 게양되었다. 그리고 경찰은 잡히는대로 즉결처분했다.

 

반란군이 순천역에 도착한 1020일 아침, 순천남국민학교와 순천사범학교는

<다음 연락이 있을 때까지 임시휴교 조치함>

이란 공고문이 붙었다. 그 외 학교는 모두 등교했다. 둘째시간에 총소리가 났다. 훈련이겠지 했는데 오전 11시 군인들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우리는 인민해방군이다.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조선을 해방시키려고 남하南下하고 있으니 동조同調하라!’

반란군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선동을 했다. 느닷없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리다. 학생들은 하교했다. 그러자 민족애국청년단 소속 좌익학생들이

 

인민공화국 만세!’

를 부르고, 좌익계열 교사들이 앞장서서 학생조직을 이끌었다. 반란군이 무기를 지급했다. 학생들은 학생복차림으로 경찰과 우익인사 색출에 동원되었다. 처형현장에서는 학생들이 서로 총살을 하겠다고 다투었다.

 

매산중학교 학생과장 박형렬교사는 동외동 친지집에 숨어있다가 학생들이 가담해서 스승들까지 처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장한 각오를 하고 거리로 나왔다. 얼마 전까지 농업학교 학생과장이었던 박형렬교사는, 좌익학생들의 스트라이크 Strike가 빈번하게 일어나 이를 막으려는 매산중학이, 농업학교에서 매산중학의 학생과장으로 스카웃Scout하였다. 법원 앞에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雲集하여 있었다. 농업학교, 사범학교, 순천중학교, 매산중학교 학생들이었다. 박형렬교사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학생들을 회유懷柔하려고 했다.

 

너희들이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건 좋다.’

평소에 좌익학생들에게 엄중했었으나 상황이 불리하여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살상을 해서는 안 된다. 더욱 스승을 색출하여 죽이는 일은 안 된다. 너희들이 좋은 나라를 세운다고 하더라도 스승을 살상하면 크게 후회할 것이다.’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대단한 용기였다. 매산중학생들이 박형렬교사를 처형하자고 했으나 농업학교 제자들이 말렸다.

 

박형렬교사는 동외동에 숨었다가 다시 시내로 나와 호남은행지점에 이르니 학생 300여 명이 모여있었다. 경찰과 우익인사의 총살이 집행되고 있었다. 10명씩 묶어 벽에 세우고 처형했다. 눈물겨운 광경을 보고있는데 총을 든 매산중학 학생 두 명이 박형렬교사를 알아보고 본부로 연행했다. 대동청년당 사무실에 끌려가니 속칭 <빨치산대장>으로 불리우는 오만봉이 우익인사들을 무릎을 꿀려놓고 문초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좌익학생들을 탄압彈壓한 선생입니다.’

반란군이 박형렬교사에게 무릎을 꿇어라고 했으나 박형렬교사는

 

나는 학생들을 가르친 죄 밖에 없다.’

고 말하며 무릎을 꿇지 않았다. 취조하던 빨치산대장 오만봉이

 

왜 끌려왔는지 아느냐?’

고 물었다.

박형렬교사가, 학생과장으로 학생들을 좀 엄하게 지도한 일 때문에 학생들이 반감反感을 가지고 보복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박형렬교사는 10명의 고학생苦學生을 자기 집에서 숙식宿食시키며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취조과정에 농업학교 제자들이 들어와 박형렬교사를 보더니 대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선생님은 올림픽 국가대표선수라죠? 앞으로 인민공화국 축구계를 위해 수고해주십시오.’

라고 하며 빨치산대장 오만봉이 풀어주었다. 때마침 농업학교 제자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총살당했을 것이다.

 

경찰관 총지휘자 8관구 경찰청 보안과장 한경록총경은 최후까지 경찰서에 남아있다가 경찰서가 반란군에게 점령당하자 변소로 뛰어들었다. 순찰을 도는 반란군을 피하려고 똥물을 뒤집어쓰고 숨어있었다. 밤이 되어 간신히 탈출하여 3일 동안 밭에서 무를 캐먹으며 화순 동복지서에 닿았다.

 

순천경찰서 보안과장 김관식경위는 하수구下水溝에 들어가 성동국민학교까지 기어가 살아남았다.

 

순천경찰서장 양규원경감은 경찰서 뒤 광순여관 마루 밑에 숨었다. 길게 숨어있을 데가 아니었다. 탈출하려고 한복韓服으로 변장變裝하고 동외동시장 입구까지 빠져나왔는데 반란군들에게 들켰다. 실명失明한 오른쪽 의안義眼을 감추려고 쓴 검정색 안경때문에 신분이 탄로났다.

 

양규원서장이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300여 명의 우익인사들이 끌려와 있었다. 양규원서장은 경찰서 부하였던 김종국순경에게 취조取調를 당했다. 김종국순경이 좌익인줄 까맣게 몰랐다. 정오에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인민의 고혈膏血을 빨아먹은 악질분자惡質分子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폭도는 양규원서장을 지프Jeep 꽁무니에 매달아 순천시내를 끌고다녔다. 길에 널린 돌맹이들에 의해 양규원서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몇 시간째 끌려다니다가 경찰서부근에 이르자 아주머니 한 분이 통곡痛哭을 하며 양규원서장에게 달려들었다. 양규원서장댁 식모였다.

 

아주머니, 우리 재현이를 잘 부탁합니다.’

양규원서장은 아들 재현이를 부탁했다. 양규원서장은 유언遺言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는데, 반란군들은 의식이 없는 양규원서장을 전신주에 묶어 총살을 하고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재현이는 교장이 보호하여 살아남았다.

 

시내에 사람시체가 가득했다. 개들이 시체를 뜯어먹고 광견병狂犬病에 걸려 눈알이 벌겋게 충혈充血되어 돌아다녔다.

 

순천여중 학생들이 반도叛徒들에게 부역附逆한 것은 음악교사 오경심의 영향이 크다. 오경심은 유명한 소프라노Soprano 가수歌手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오경심은 숙명여대 음악과 출신이다. 오경심은 석 달 전에 순천 갑부甲富 아들 박만교와 선암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박만교는 열렬한 좌익이었다.

 

국군진압부대가 순천농업학교에 진주한 1021, 학생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김지회상사를 비롯한 반란군이 철수를 하면서 경찰서유치장에 가둔 400여 명의 우익인사들을 사살射殺하려고 한다는 정보였다. 정보를 입수한 부연대장 백인엽소령은 부관副官에게 자기 지프에 기관총을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군대가 출동하려면 시간을 놓치리라 예견하고 직접 지프를 타고 경찰서로 돌진했다. 이미 반란군들이 유치장에 무차별 난사亂射를 자행恣行하고 있었다. 백인엽소령의 기관총이 불을 뿜자 반란군들은 진압부대가 쳐들어온줄 알고 도망쳤다. 백인엽소령의 재빠른 조치로 유치장에 갇힌 400여 명 중 반란군들에게 100여 명이 죽고 300여 명의 우익인사들이 목숨을 건졌다.

 

 

# 순천역광장

 

해설사 : 아침식사는 하셨습니까? 모텔까지는 제가 모셔다드렸었는데 …….

도깨비기자 : (고개를 주억거리며) 실례가 많았습니다. 역시 폭음暴飮을 했습니다.

해설사 : 어디를 먼저 갈까요?

 

 

# 순천매산고등학교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목사의 장남 손동인이 다녔던 학교, 교정에서 학교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순천매산고등학교는 19193,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경영하는 성경을 가르치는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고라복R. T. Coit 선교사宣敎師를 설립자 겸 초대교장으로 하여 사립私立 은성재단을 설립하였고, 19103, 미국 선교사 변요한, 고라복목사가 순천시 금곡동 사숙私塾에서 개교하여, 1911년 순천시 매곡동 신축교사로 이전하였다.

 

 

# 순천경찰서

 

경찰서는 옮겨가버렸고 4층건물이 들어서 있다. 주변도 몰라보게 바뀌었다. 경찰서를 사수하기 위하여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열세劣勢로 함락陷落되었고 경찰들은 대부분 희생되었다.

 

 

# 장대다리

 

장대다리 난간에 서서 순천시내 한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동천東川을 보고 있다. 14연대 반란군들이 여수에서 통학열차를 탈취하여 순천으로 들어왔었다. 순천역에서 내린 그들은 장대다리를 거쳐 순천시내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미리 이를 대비한 순천경찰서 경찰들이 장대다리 좌우에 포진하여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카빈소총을 든 150여 명의 경찰로는 2,000여 명의, M1총으로 무장하고 기관총을 가진 반란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찰들이 밀리고 반란군은 시내를 점령했다. 경찰 대부분이 희생하였다.

 

 

# 죽두봉

 

정자亭子와 활터만 있었던 죽두봉에 팔마비八馬碑가 서있고, 조경造景이 잘 되어있다. 순천경찰은 여수경찰에게서 반란군이 통학열차를 탈취하여 순천으로 진격했다는 연락을 받고, 죽두봉을 저지선으로 반란군과 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으나 병력과 화력이 우수한 반란군에게 패퇴하였다. 대부분의 경찰이 희생되었다.

 

팔마비八馬碑는 순천부사順天府使의 미담美談이 전해져내려오며 순천시민의 귀감龜鑑이고 자부심이다. 순천 조곡동 외곽삼거리 노변에 파묻혀 있었던 비석을 재현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승평은 순천의 옛 지명) 에서 생긴 일이다. 승평(승주의 옛 지명)부사府使 최석이 임기가 차서 비서랑으로 발령받아 당시 수도인 개경으로 환경還京하게 되었다. 갈려가는 태수太守에게는 이삿짐을 운반하는 말 일곱 마리를 선사하는 것이 당시 풍속이라, 최석에게도 말을 몰고 와서 그중에 좋은 말을 고르라고 청하였다. 한데 최석은 서울까지 갈 수 있는 말이면 충분하니 구태여 고를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역민들의 청을 매정하게 거절할 수 없는 일, 결국 말 일곱 마리를 이용해 이삿짐을 싣고 개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곧바로 말 여덟 마리를 순천으로 되돌려보냈다. 최석은 말 일곱 마리를 가져갔으나 여덟 마리가 된 사연을 이렇게 적어보냈다.

 

새끼말 한 마리는 내가 서울로 이사온 후 새끼를 밴 어미말이 낳은 말로 어미를 따라 같이 돌려보내노라.’

하였다. 이에 순천부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를 세우고, 그 비를 팔마비라했다.

 

 

안내인 : 순천팔마종합운동장에 여순항쟁탑이 있습니다.

도깨비기자 : 항쟁탑을 둘러보고 다시 여수로 가야겠습니다. 애양원을 찾아가 손양원목사 3부자父子의 순교에 대해 생각할 게 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이란 손양원목사 3부자의 이야기를 읽어보셨습니까?

안내인 : , 외가外家에서는 외할아버지와 두 삼촌의 순교를 입에 올리지 않으려 고 했습니다. 여수시청자료에서 읽었습니다.

 

 

# 손양원목사 두 아들의 순교殉敎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폭도들이 순천으로 밀어닥친 19481020일 아침. 반란을 전혀 예기치 못 한 순천시내 학생들은 등교준비를 했다. 승주교회 양집사댁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自炊를 하던, 손양원목사의 장남 - 순천사범 6학년 학생 손동인은 24살의 늦깍이 학생이라 동급생들이 <늙은 학생>이라고 불렀다. 부친 손양원목사가 나병癩病(한센Replocy)환자들을 돌보느라고 어렵게 살아왔는지라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동생 동신이도 19살인데 순천중학교 2학년이었다. 장녀 동희는 매산중학교 2학년이고, 3남 동장과 2녀 동임이는 국민학교 재학생이었다. 그날에는 부엌살림을 맡아 한 동임이가 여수 애양원에 다니러가고, 동신이가 설거지를 하는데, 등교한 형 동인이 되돌아왔다.

 

웬일이야, 동인이?’

집주인 양집사가 물었다.

 

서울에 가는 교회손님을 배웅하러 순천역에 나갔더니 열차손님은 하나도 없고, 군인들이 가득 타고왔어요. 군인과 경찰이 총싸움을 벌이는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동인이가 되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국민학교 다니는 동장, 동임이가 돌아왔다. 총소리가 콩 튀듯 요란하다. 동인은 어린 동장에게 여수 애양원으로 가라고 했다. 걸어서가야 하나 어린애를 붙잡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한편, 소방서를 본부로 삼은 민족애국청년단 사무실에는 50여 명의 좌익학생들이 M1소총으로 무장하고 우익인사와 전국학생총연맹 학생들 색출을 모의했다. 동별洞別 책임자를 두고 철저하게 색출을 지시했다. 그리고 특별히 <늙은 학생> 동인이와 동신이 검거를 지시했다. 좌익학생들이 동인이 형제가 살고있는 양집사집을 포위하자 동인이 나왔는데 평소에 잘 아는 학생에게 동인이 말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가?’

이 자식, 너 친미파親美派가 아니냐?’

이 사람들아, 나는 친미파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야!’

시끄럽다. 예수쟁이야!’

학생이 개머리판으로 동인의 어깨를 쳤다.

 

좌익학생들이 동인이를 친미파라고 한 것은 고모가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이었고, 동인은 미국유학을 염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 전 동인, 동희와 같이 중앙동 수예점手藝店 앞을 지나다가 미군美軍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을 발견했다. 수예점에 물건을 사러온 미군이 실수로 수예점 유리창을 깨뜨렸는데, 변상辨償해줄 돈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으나, 언어소통이 되지 않아 해결이 되지 않자, 동인이가 서투른 영어로 통역을 해서 간신히 해결한 일이 있었고, 그 후 미군과 친해져서 영어회화를 배웠다. 그게 좌익학생들의 눈총을 받았다.

 

동인 동신 형제는 좌익학생들에게 그네들의 본부인 소방서 민애청으로 끌려갔다. 민애청학생들이 형제에게 예수를 버리고 동참하라고 했으나 형제가 들을 리 없었다.

 

처형해!’

동인이 끌려나갔다. 동신이가 애원哀願을 했다.

 

형은 우리집 가장家長이다. 대신 나를 죽여라!’

동인은 총살당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동신이도 학생 폭도들에게 처형되었다. 두 형제의 시신屍身은 양집사가 거두어 가매장假埋葬했다가, 애양원교회 신도信徒 1,100여 명이 통곡하는 가운데 1027일 여수 애양원에 매장埋葬되었다.

 

한편 반란 진압 후, 학련학생들에게 동인, 동신형제를 총살한 두 명의 민애청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안정수와 이동필은 끝까지 자기들은 처형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했으나 두 학생은 사형판결을 받고 죽두봉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이 무렵, 손양원목사로부터 <두 사형수를 살려라!>는 하명下命을 받은 장녀 동희가 승주교회 나덕환목사를 찾아가 부친의 뜻을 전했지만 두 사형수는 이미 사형장으로 끌려간 뒤였다. 또 한편으로는 안정수의 부친이 아들을 살려고 순천 학련위원장 성동욱을 찾아갔다. 성동욱은 평소에 아는 처지였으므로, 아들 정수가 동인 동신의 처형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니 한 번 더 조사를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처음에는 성동욱이 난처해했으나, 하도 간절히 애원하는 바람에 특별조사부대장 이영규소령에게 두 사형수는 조사가 미진하니 한 번 더 조사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이미 30분 전에 사형장으로 끌려갔으므로 이미 처형이 끝났을 수도 있다고 하였는데, 사형장에 가보니 이동필은 이미 처형되었고 안정수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직전에 풀려난 안정수는 다시 취조를 받았으나 끝내 가담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했다. 손양원목사의 부탁을 받은 나덕환목사가 안정수를 만나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물었으나 안정수의 대답은 한결같아 자기는 처형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했다.

 

좋다. 너는 동인 동신 형제를 처형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말할 게 없다. 손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구해주라고 했는데 너는 가담하지도 않았다니 관련자가 아니구나.’

 

나목사가 돌아서자 안정수가 나덕환목사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동인 형제 처형에 가담했다고 실토했다. 총살을 집행할 때 5명이 연사連射를 했기 때문에 자기 총에 맞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처형 뒤 민애청학생의 명령에 의해 확인사살을 했다고 했다. 살고싶어 부인했다가 살고싶어 실토한 것이다. 자백을 받은 나목사가 대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손양원목사의 소망을 들어달라고 사정을 했으나 학련학생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손양원목사의 간절한 소망과 나덕환목사의 끈질긴 설득에 안정수는 처형을 면하고 살아났다. 그리고 며칠 후 손양원목사가 순천을 찾아와 나덕환목사의 집에서 안정수를 만났다.

 

안정수의 부친이 손양원목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안정수의 부친은 정수 외에 아들이 몇 명 더 있으므로 그들 중에서 골라 양자養子를 삼으라고 권유했지만 손양원목사는 안정수를 양자로 삼았다. 안정수의 부친은 손양원목사의 장녀 동희를 자기집에 데려가겠다고 했으나 손양원목사가 거부했다. 안정수의 부친은 자기 집에 동희 또래의 딸이 있고, 자기 가족이 예수를 믿으려면 동희가 필요하다고 해서 끝내 허락했으나, 동희가 오빠를 둘이나 죽인 사람의 집에 들어가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반발했다. 그러나 끝까지 안정수의 부친이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승낙해서 원수怨讐의 두 집안에 화해의 인정이 싹텄다. 동희는 5개월 가량 안정수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결국 못 견디고 가출했다.

 

안정수는 손양원목사의 주선으로 부산 고등성결학교에 특례입학하였는데, 을 바꾸어 손정수란 이름으로 학업을 계속했으나 성적이 부진하여 1년 후 자퇴했다. 그 후 안정수는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나 서울에서 사업을 했고, 손양원목사는 1950625일 민족동란이 터져, 729일 인민군이 여수를 짓밟아왔기 때문에 잠시 피신하였다가, 교회와 나병환우癩病患友들을 지켜야 한다면서 다시 애양원으로 되돌아와서 나환자들과 같이 생활했는데, 인민군은 부역附逆을 거부한 애양원에는 쌀 배급을 중지했으며, 애양원으로 돌아온 손양원목사는 913일 북한 인민군人民軍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인민군은 손양원목사에게 부역을 강요했지만 끝내 거부하였다. 국군國軍의 탈환작전奪還作戰이 시작된 928일 인민군은 여수에서 구금한 우익인사 200여 명을 끌고 도주하다가, 석양夕陽무렵 여천군 미평지서 앞 과수원으로 끌고가 무차별 학살을 했다. 그때 손양원목사도 순교殉敎했다. 손양원목사가 순교한 후 안정수는 손양원목사 가족과도 인연이 끊어졌으며 변절變節했다.

 

 

# 사랑의 원자탄原子彈 - 손양원목사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산돌 손양원목사(1902 - 1950)는 주기철목사(1897 - 1944)와 함께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직자이다. 사람들은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나환자들을 목회牧會하면서 봉사의 삶을 산 그를 <성자聖者>라고 불렀다. 또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아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을 실천한 그의 행적을 두고 <사랑의 원자탄>이라고도 부른다. 원자탄은 핵폭탄核爆彈이다. 이렇듯이 손양원목사에게는 가족중심주의를 뛰어넘는 인간애가 있었고, 자녀 =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點綴된 한국사회를 치유治癒하는 사표師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손양원목사는 190263일 경남 함안군 칠원읍에서 손종일과 김은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19년 부친이 3 · 1운동에 가담한 일로 투옥投獄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마산 창신중학교에 편입했다. 이때 맥크레이(J. F. L. Macrae,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洗禮를 받은 그는, 1921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스가모중학교에서 공부했다. 유학시절 동양선교회의 노방전도路傍傳導에 큰 감명을 받고, 이바다시 성결교회에 출석하던 중 나카타주치목사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중생체험重生體驗을 하였다.

 

21살 때인 1923년 말 귀국하여 부모가 정해 준 정양순과 결혼하고,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학업을 마쳤다. 졸업하자 곧장 귀국하였으며, 이어 진주 경남성경학원에서 신학神學을 공부하면서 부산 감만동 나병원懶病院 상애원교회에 근무하였다. 이때 오스트렐리아Australia 출신 매켄지Noble Mackenzie 선교사의 헌신적인 섬김을 보고, 동족同族으로서 나환자들을 돌봐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32년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교재敎材로 사경회査經會를 인도引導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단異端으로 몰리면서 사임辭任하였다.

 

1935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수학하고 19383월 졸업한 후, 부산지방 순회전도사巡廻傳道師로 김해, 양산, 함안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9715일 전남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애양원교회 목회자牧會者로 부임赴任했다. <애양원>1909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소속으로 광주 제중원원장이던 윌슨R. M. wilson10여 명의 나병환자를 수용하고, 기부자寄附者의 이름을 딴 <비더울프Bidder Wolf 나환자수용소>라고 불렀는데, 1925년 지역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여수 앞 바다의 한적閑寂한 섬인 신풍으로 옮기게 되었다. 1936년에 이름을 지금의 애양원으로 고쳤다.

 

193937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애양원교회 목회자로 부임한 손양원은 전 여생을 세상에서 버림받은 약 1,100여 명의 환자들을 돌보는 <영혼의 목자牧者>로 헌신했다. 한국사(특히 한국교회사)에는 그와 같은 작위적作爲的인 역사인식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손양원목사의 위대함은 그가 남긴 삶의 자취만으로도 충분하다.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라는 글에는 나환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연민憐憫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을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衷心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애양원에 남겨진 손양원목사의 일화逸話는 수없이 많다. 그는 나병환자들의 희망이었고 기댈 언덕이었다. 아무리 중한 나병환자도 얼굴을 만지고 안아주면서 기도를 하였다. 병실이 더러울 때는 손수 방바닥을 맨손으로 치우고, 고름과 핏덩어리가 된 환자들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맞대고 울면서 기도하고 대화했으며, 그 자리에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 심지어는 고름이 잘 빠지지 않는 나환자의 환부患部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내야만 했다고 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성자聖者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양원에게는 목사의 직함職銜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경남노회 부산지방 사찰회의 여러 교회들을 순회巡廻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문에 목사안수牧師按手도 거부되었다.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무교회주의자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신사참배를 앞장서서 반대하던 사람에게 목사안수按手를 줄 경우 일본제국주의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손양원이 1939년 애양원교회에 부임할 때도 목사가 아닌 조사助師신분이었다. 그러나 애양원교회의 김응규목사 후임자를 물색중이던 원가리Kelly J. Unger 선교사는 손양원을 목회자로 청빙請聘하면서 당회장권을 위임하고 목사로 호칭했다. 당시 원가리선교사는 그가 속한 순천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장로회長老會를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안수를 받지 못하는 손양원을 목사로 인정한 것이다.

 

애양원교회 부임 후에도 손양원목사는 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하게 거부하다가 1940925일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광주형무소를 거쳐 청주보호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1945817일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주님 고대가苦待歌>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디어냈다. <주님 고대가>1절 가사이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하신 예수님

,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손양원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5년의 옥고獄苦를 치룬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이처럼 손양원목사에게는 신사참배 거부가 신앙적인 결단이지만, 역사가들은 항일민족운동으로 보는 이유이다. 해방으로 출옥한 손양원목사는 다시 애양원교회로 돌아왔으며, 경남노회는 그에게 목사안수를 주지 않은 것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하고 1946년에 목사안수를 허락하였다.

 

한편, 손양원목사가 체포되자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서 부산 범일동의 판자촌으로 옮겨갔다. 학령기 자녀들은 학교를 포기한 채 노동을 해야 했으며, 큰딸 동희와 넷째아들 동장은 구포에 있는 애린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살았다. 이 때문에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은 해방이 된 후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녔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에 24살의 동인은 순천사범학교 6학년(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19살의 동신은 순천중학교 2학년이었다.

 

1027일 애양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 손양원목사는 <9가지의 감사문感謝文>을 읽었다. 첫 번째 감사가 자기와 같은 죄인의 혈통血統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을 순교자殉敎者로 바칠 수 있는 축복을 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너무나 유명한 <사랑의 원자탄>의 실화實話이다.

 

두 아들의 죽음소식을 접한 손양원목사는 크게 상심하였지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로 다짐하였다. 손양원목사는 구명救命운동을 통해 두 아들을 죽인 안정수를 석방시켰고, 그를 양자養子로 삼아 입적入籍하였다.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앉았던 식탁食卓에 그들을 죽인 안정수을 앉히고 조반朝飯을 먹을 때, 내 입안에는 밥이 아니라 모래알이 삼켜진 듯 했다.’

라고 고백한 손양원목사의 인간적인 고뇌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손양원목사가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답사答辭를 한 마지막 3가지 감사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원수怨讐를 회개悔改시켜, 양자 삼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아들의 순교殉敎가 열매맺어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니 감사하고, 역경逆境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 주시니 감사하다.’

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백범 김구는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

이라며 감동하였다.

 

손양원목사 일가一家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 · 25전쟁이 일어나자 주위 사람들은 손목사에게 피난을 갈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하였다. 교회도 지켜야 하지만, 병이 들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나환자들을 두고 혼자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상에 피난처가 어디 있는가! 피난처는 오직 주님품뿐이다.’

며 피난을 거절했다. 그는

 

나마저 도망가면 누가 나환자들의 벗이 되겠느냐?’

고 반문하고 피하지 않았는데, 727일 여수가 북한군의 수중手中에 넘어갔다. 애양원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지내던 손목사는 공산당원에게 끌려갔고, 928일 밤 순천으로 피랍被拉되어가던 중 여수 미평동의 과수원에서 총살당했다. 이로써 손양원목사는 48년 간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두 아들을 따라 순교자의 길을 갔다. 손목사가 죽임을 당하고 보름이 지난 1013일에, 고려고등성경학교장 오정덕목사의 집례執禮와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목사의 설교로 장례식이 엄숙하게 치러졌다. 그가 양자로 삼은 안정수가 상주喪主의 자리를 지켰다.

 

이어 1029일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손양원목사의 추모追慕예배가 열렸을 때, 설교자인 박형룡목사는

 

손양원목사는 위대한 경건인敬虔人이요, 전도자요, 신앙의 용사勇士, 나환자의 친구요, 원수를 사랑한 자요, 성자이다.’

라고 칭송稱頌했다.

 

손양원목사의 거룩하고 위대한 삶을 안용환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함축적含蓄的으로 표현했다. 1995년 대한민국정부는 5년 동안의 옥고獄苦를 치른 손양원목사의 행적을 기려 독립유공자로 선정하고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追敍하였다.

 

 

# 2021년 대한민국은 계층階層, 세대간, 지역간의 대립으로 극심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시행을 앞둔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은 또 다른 갈등의 불씨이다.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일본도日本刀를 휘두르며 좌익혐의자들의 목을 치고 다녔던 식인食人호랑이 김종원을 위시한 진압군들과, 복수심에 눈이 뒤집힌 경찰들이 저지른 민간인학살은 잔인함의 극치極致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때 국가폭력으로부터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을 가려내서 보상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꼭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정확한 성격규명糾明이다.

여순사건의 본질本質, 14연대 안의 남로당당원들이 제주도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출동명령을 거부한 군사반란이다.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가 없어서 봉기했다.’ 는 변호辯護로 성격을 호도糊塗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둘째, 정확한 사실규명이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과 경찰에게 학살된 양민良民<반란>을 도모하지 않았지만, <항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경찰과 가족, 우익인사들에게 학살을 가한 것은 좌익반란군과 폭도였고, 진압 후 학살은 복수심에 이성理性을 잃은 군경軍警이었다. 반란군의 학살보다 군경학살이 훨씬 많다. 반란군은 개별처형이었지만, 군경은 집단학살이었다.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주민들을 몰살했다. 균형감있는 진상조사가 필수적인 이유이다.

 

셋째, 분명한 방향설정이다.

이미 오래전에 국가가 판정한 사건을 진보정권이 재조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특별법을 제정하려면 분명한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여순반란의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통해 사회통합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여순사건특별법>은 손양원목사의 용서와 화해정신에 기초해야 한다. 손목사의 원수사랑은 살인자 안정수에게 새 삶을 선사했고, 양자 안정수의 아들 안경선은 목사가 되어, 아프리카 브룬디의 한센병환우들을 돕기 위한 NGO <사랑 브리지Bridge>를 통한 사랑의 걸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순천출신의 작가가 쓴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었고, <운동권의 교과서>로 불리는 이 책을 통해 재평가되는 수순을 밟았다. 그 결과 선과 악이 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는 혼란을 겪고 있다. 지난 시기 역사의 아픔은 치유治癒하되, 역사적교훈은 잊지 않는 슬기로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형석박사, 전 총신대 역사신학교수, 대한민국 역사문화연구원원장)

 

 

# 여순반란이나 제주도폭동의 과정에서 반란군의 만행蠻行은 처참悽慘하였다. 동족同族 - 형제자매, 부자간의 살육殺戮이었다. 6. 25전쟁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시발점始發點이다.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질러진,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더구나 이념이나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양민들이 난리에 휩쓸려 무고하게 죽었다. 남북한은 한 민족이 아니었던가. 부모요 형제간에 이처럼 처참한 살육殺戮이 행사된 것은 세계전쟁사에도 유래가 없다. 반란군의 만행도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패행悖行이었지만, 반란이 수복收復된 후 군경軍警이 저지른 패행悖行 - 한 마을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몰살하거나, 동굴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에게 연기를 피워 몰살하고, 사람들을 굴비처럼 묶어 바다에 수장하는 등 군경은 집단학살을 하였으므로 반란군보다 더 처참했다. 희생자 수도 반란군의 2- 5배에 이른다. 인간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동족 - 부모형제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반란군의 만행은 일부 기록이 남아있으나 군경이 저지른 패행은 역사적기록조차 없다. <과거사 정리를 위한 진실 · 화해위원회>가 조사를 하고 있으므로 정확한 피해가 들어날라 생각한다. 화해위는 1차 사망피해자 조사를 끝내고, 2차 상해피해자를 조사하고 있다. 제주폭동은 조사를 마무리 했고, 여순반란은 조사를 시작했으며, 6. 25동란 때 군경에 의한 민간학살도 조사하고 있다.

 

 

# 여순반란 - 전남 벌교의 상황

(전남일보 광복 30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순사건)’ 발췌拔萃, 윤색潤索)

 

19481020일 새벽 4시 벌교경찰서에서는 때아닌 비상벨이 울렸다. 비상소집명령이 떨어져 직원들이 경찰서로 모여들었다.

 

여수경찰서의 연락에 의하면, 어제 밤 여수 국군경비대 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여수경찰이 반란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으나, 역부족으로 여수가 함락되었고 반란군은 순천으로 올라오고 있으므로, 우리는 순천으로 출동하여 순천경찰을 지원해주기 바란다.’

 

벌교경찰서장 김흥권경감의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벌교 경찰병력 30여 명은 트럭에 분승分乘하여 순천시내 장대다리에 진을 쳤으나, 여수에서 통학열차로 몰려온 2,000여 명의 반란군과 폭도들이 순천역에 쏟아져내리자 병력에서나 화기火器에서 역부족인 벌교경찰병력은 전멸全滅했다. 그리고 이후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벌교는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부용교는 처형장이 되어 수많은 우익인사들이 처형되었다. 부용교 밑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악취惡臭가 진동振動하여 사람들은 부용교를 피해서 멀리 돌아서 다녔다. 개들이 시체屍體를 뜯어먹고 광견병狂犬病에 걸려 시뻘건 눈동자를 번뜩이며 읍내를 돌아다녔으므로 시민들이 인민위원회에 진정을 해서 개들을 포획捕獲하였다.

 

 

# 여순반란 - 전남 고흥高興의 상황

 

반란군과 폭도들이 고흥에 들어온 것은 1022일이다. 이날 새벽 순천에서 국군진압부대에 쫓겨 벌교에 온 반란군은 벌교에 남아 살육의 분탕질을 치고, 일부는 보성으로, 일부는 고흥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이미 반란군의 습격을 통지받은 고흥경찰과 우익인사들은 대부분 팔영산으로 숨어버렸고, 인근 산속이나 외진 곳으로 피했다.

 

고흥길은 외길이다. 벌교에서 뱅골재(뱀 골짜기)를 넘어 동강, 남양, 과역을 거쳐 고흥까지는 신작로(新作路, 국도國道) 60릿길. 반란군들이 동강을 거쳐 자문더리(침교沈橋, 잠긴 다리), 숯개(탄포炭浦, 숯을 실어나르는 포구)를 넘고 구름다리(운교雲橋, 두리실)를 지나다가 멀리 선 십자가를 봤다. 운교교회다.

 

운교교회는 상량上樑에 소화 昭和 13년이라고 설립년도가 일제연호日帝年號로 쓰여있다. 인근 면에는 교회가 없어 남양면과 동강면, 대서면, 과역면 더러는 50릿길을 걸어 운대면고 보성 조성리에서도 신도信徒들이 찾아왔다. 운교교회는 순천에 파견된 감리교 선교단에서 관할管轄하며, 순천에 거주하는 보이엘Boyel 등 외국인 목사가 지프에 선물을 싣고 찾아왔다. 구호품救護品 헌옷이나 레이션박스Ration Box를 싣고와 나눠주었고, 크리스마스Christmas 때에는 금종이 은종이로 그려진 크리스마스 카드Christmas Card를 선물로 받았으므로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크리스마스 카드에서는 양냄새가 났으나 카드가 워낙 신기神奇하고, 반짝거리는 금종이나 은종이는 이 세상 물건이 아닌 것처럼 신비神祕하였으므로 아이들에게는 선망羨望의 대상이었다. 운교교회에는 목사가 없었고 박집사와 신집사 두 분이 교회를 운영했다.

 

 

# 반란군이 고흥을 향하다가 십자가를 보고 구름다리마을에 들어왔다. 반란군은 교회 종탑에 걸린 종을 치며 공포空砲를 난사亂射했다. 마을사람들은 공포에 무서워서 모였다. 반란군이 교회의 지도자를 찾았으나 교회를 주도한 두 집사는 낌새를 알아채고 피신을 해버렸다. 공산당은 종교를 배척하였으므로 잡히면 죽는다고 알고 있었다.

 

 

#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도깨비기자의 부친 이종구가 반란소식을 듣고 고향에 왔다. 부친은 독실篤實한 기독교신자였고, 방학이면 교회에 야간 청년학교를 개설했다. 교회에 성가대聖歌隊를 조직하고 오르간Organ 반주伴奏를 했다. 독학獨學으로 익힌 오르간연주이지만 실력이 탁월卓越했다. 찬송가의 4부악보를 자유자제로 연주했는데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4연주는 심금心琴을 울렸다. 수채화水彩畵 그림도 수준급이고, 퉁소연주, 키타연주 등 악기연주 실력은 아마튜어Amature를 넘었다. 특히 퉁소를 잘 불었다. 옥퉁소가 두 개 있었는데 가을밤에 부는 퉁소소리는 온 마을에 퍼져나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집안은 마을의 제 1부자富者였으므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언제나 팥죽, 삶은 감자와 호박꽂이 시루떡을 먹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네사람들의 모임장소가 되었다. 사랑방에는 상머슴 두 명이 거처했는데 동네 머슴들의 사랑방이었다. 도깨비기자의 할아버지는 동각洞閣과 교회터를 희사喜捨하고,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 특별히 명절에 쓰려고 돼지를 길렀으며, 잘 기른 중톳(돼지)을 잡아 떡과 함께 동내 노인들에게 돌렸다. 그런 집안의 3 무녀독남無女獨男 부친은 면내에서 유일한 대학생이고 촉망囑望받는 청년이었다.

 

구름다리마을에 들어온 반란군이 종소리 총소리에 모여든 마을사람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교회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도깨비기자의 부친이 총대를 막아서며 교회에 불을 지르려는 반란군을 막아섰다. 반란군들이 총대로 어깨를 치고, 착검着劍한 총검銃劍으로 배를 찌르는 시늉을 했다.

 

네가 교회 책임자냐?’

아니요, 신도입니다.’

비켜라, 죽지 않으려면 비켜라!’

우리 교회는 오래전에 세워졌고, 인근 지역에 한 곳뿐인 교회요. 불태워서는 안 됩니다.’

 

부친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싱갱이가 벌어지자 반란군 책임자가 나섰다. 교회를 불태우는 대신 성경과 찬송가를 가져오라고 했다. 총부리를 앞세운 반란군들의 요구에 부친은 교회 강단講壇에 비치된 설교용 성경과 찬송가를 가져다주었고, 반란군은 성경과 찬송가를 불태우고 돌아갔다. 반란군이 돌아가자 교회지도자 두 집사가 나타나 성경과 찬송가를 불태우게 한 부친에게 배신자背信者라는 누명陋名을 씌웠다. 성스러운 성경과 찬송가가 불태워졌으므로 신도들 대부분도 동조했다.

 

 

# 그런대로 겉으로는 잠잠하던 마을에 예상치 않았던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이 진압되고나서 순경巡警이 운교마을에 들어와 마을 청년들과 도깨비기자의 부친을 잡아갔다. 국군이 진주進駐하고 반란군들이 팔영산 등으로 입산한 즈음 마을 앞 신작로新作路(국도國道) 가로수에 인공기人共旗가 걸리고 김일성 찬양 삐라가 뿌려졌다. 남양지서에서 순경이 나와 마을사람들은 동각洞閣에 모아놓고 삐라 실포자撒布者를 색출索出하려고 했다. 용의자容疑者 색출이 여의치 않자 순경이 무조건 마을청년들을 연행했다. 취조과정에서 마을의 누군가가 성경과 찬송가를 불태운 일을 반란군에게 밀고密告했다. 순경은 부친을 주범主犯으로 몰았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마을 앞 도로에 뿌려진 삐라는, 마을에서 300여 미터가 떨어져 있었고, 또 인공기는 가로수에 걸려 있었으므로 차를 타고 가면서 뿌린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을의 누군가가 만들어 뿌렸다면 마을 안에 뿌리지 않고 왜 마을과 멀리 떨어진 국도에 뿌렸겠는가?

 

남양지서 순경은 마을청년들에게 무차별 구타毆打를 했다. 양손과 양발을 묶어 세워놓고 몽둥이질을 했다. 청년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되었고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었다. 특히 부친에게는 더 가혹苛酷한 테러Terror를 했다. 유치장에 가두고 매일 불러내 고문拷問과 구타를 했다. 통나무로 판 쇠구시(소 여물통)에 양손 양다리를 묶어 세우고 몽둥이로 구타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야말로 정신을 가누지 못 했다. 할머니는 삼시세끼 더운 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하루에 세 번씩 십릿길을 날랐다. 할아버지는 부친을 구제해줄 면내 유지들을 찾아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그러나 반란군 동조자로 엮일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유치장 사흘만에 부친은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다. 잡혀간 마을청년들도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모두 방면放免되었고 부친만 처형이 결정되었다. 혹독한 고문과 구타에 못 이긴 부친이 허위자백虛僞自白을 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반란군에게 내줘 불태운 성경과 찬송가였다. 반란군에게 동조나 협조증거였다. 처형이 결정되었다.

 

아들을, 삼대독자를 살려달라!’

는 할아버지의 끈질긴 호소에 남양면 유지들이 나서서 무고誣告임을 탄원歎願했다.

 

신작로에 뿌려진 삐라는 마을사람들의 행위가 아니라는 정황을 증거로 구명救命을 했다. 또 청년야학 등 활동을 방면의 방편으로 내세웠다. 교회 성가대활동도 피력했다. 면내 한 사람뿐인 대학생으로 전도유망前途有望한 청년이며, 마을 교회지도자들도 도망쳐버려 불태워질 뻔한 교회를 살려낸 일도 덧붙였다. 그러나 교회지도자 두 집사執事는 물론이고 마을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부친이 구금된지 1주일이 지난 정오 때, 할머니가 점심밥을 날라갔는데 부친이 유치장에 없었다. 순경이 멀리 지서 앞 냇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처형은 면했지만 부친은 숨이 끊어진 시체로 냇가에 버려져있었다. 즉결처분을 하지 않은 것은 처참한 고문과 구타를 했어도 증거를 발견하지 못 했기 때문이고, 정황증거라는 인공기人共旗와 불온不穩삐라 살포현장이 마을 앞에서 300m나 떨어진 국도였으며, 대부분의 삐라가 가로수에 걸려있었다는 것은 반란군들이 차를 타고 가면서 살포했다는 증거라는 면내 유지有志들의 탄원이 효력이 있었다. 당시 진압군은 반란군에 동조한 부역자는 즉결처분했다. 할머니가 가까스로 우마차牛馬車를 빌려 산송장을 싣고왔는데, 집에 돌아온 부친은 실날같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되살아났다.

 

조부모의 간병看病으로 부친은 목숨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버렸다. 특히 날씨가 궂으면 무차별폭행을 했다. 늘 술에 취해있었다. 거지행색으로 떠돌며 마을사람들의 질시嫉視 아래 <미치광이>로 여생餘生을 살았다. 이로 인해 할아버지는 울화병鬱火病이 도져 중풍中風으로 3년여를 앓다가 별세別世했고, 마을 제일부자였던 가산은 몰락하여 10명의 자녀들은 학업은 고사하고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신세가 되었다. 정신분열증 유전遺傳으로 자녀 중 아들 하나와 딸이 부친과 비슷한 정신상태를 보였다. 또 아들 한 명은 병을 얻었는데 변변히 치료조차 하지 못하고 요절夭折했다. 변변한 치료 한 번 받지 못 하고 요절한 동생의 죽음이 도깨비기자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신에 대한 회의懷疑를 남겼다. 도깨비기자는 여순반란의 지워져버린 역사를 복원復元하고, 부친의 굴곡진 생애, 간난과 질곡의 가족사를 신원伸冤하려고 한다. 국가폭력에 의해 정신분열증을 앓았고 미치광이로 일생을 살아야 했던 부친의 간난과 질곡의 생애는 이념과 사상탓인가? 시대탓인가? 왜 한 개인이 이다지도 참혹한 생애를 살았어야 했는가? 부친의 가혹한 인생으로 가족들이 겪은 잔혹한 가족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원죄原罪인가, 업보業報인가, 사주팔자四柱八字인가, 운명인가?

 

 

# 할머니의 비나리

 

부친의 병수발을 하면서 할머니는 비나리를 시작했다. 무녀독남 3대독자의 생명을 온전히 살리려고 1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비나리를 했다. 장독대에 황토를 깔고, 작수발을 세우고, 정화수井華水를 길어다 작수발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굽혀 손바닥을 비비며 빌었다. 부친의 생명의 힘은 끊질겼다. 실날같았던 호흡이 돌아오고 끊어졌었던 생명이 되살아났다. 할머니는 그날부터 샛골 옹달샘에서 새벽물 - 정화수를 길었다.

 

새벽녘인데 눈이 뜨였다. 차디찬 물방울이 보슬비처럼 얼굴에 내렸다. 촛고지 등잔燈盞 앞에 할머니가 앉아서 머리칼을 빗고 있었다. 할머니의 긴 머리칼이 풀어져내려 방바닥에 닿아있었다. 속옷차림의 할머니는 머리채의 중간을 잡고 얼기빗과 참빗을 번갈아 쓰며 머리칼을 빗었다. 찬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할머니 머리칼의 빗질에서 찬 물방울이 얼굴에 떨어져내렸다. 그날 새벽 처음으로 할머니의 비나리를 지켜보았다.

 

꼭두새벽, 닭이 울기도 전에 할머니는 샛골 옹달샘물을 길렀다. 어머니나 부엌데기가 있었어도 꼭 손수 물을 길렀다. 샛골 옹달샘은 치자나무거리에 있는, 손바닥만한 작은 샘이다.

 

치자나무거리 옹달샘에는 옛적부터 귀 달린 뱀장어가 살았다. 뱀장어를 본 사람은 많지 않았고 소문뿐이었다. 아이들이 호기심에 뱀장어를 보려고 옹달샘 주변에서 서성거렸으나 뱀장어는 사람 그림자가 비치면 돌틈에 들어가 잘 나오지 않았는데, 우리는 우물에 우리 그림자가 비치지 않게 목을 움츠리고 숨고 숨을 죽이고 기다려서 옹달샘 돌 틈에서 나온 귀달린 뱀장어를 확인했다. 몸통에 비해 큰 지느러미가 머리 양쪽에 달려있었다. 귀 달린 뱀장어를 확인하고 우리는 귀신鬼神을 본 것처럼 두려워서 옹달샘 근처에도 가지 못 했다. 그렇지 않아도 치자나무거리에는 채왈(차일遮日)귀신이 있어서 밤에는 어른들도 피해다녔다.

 

할머니가 새벽에 길어온 물은 아무도 손대지 않은 - 부정不淨을 타지 않은 옹달샘 첫 샘물이라야 한다. 할머니는 한겨울 꼭두새벽에 일어나 얼음을 깨고 길어온 얼음짱보다 더 찬물로 머리를 감고, 참빗 얼레빗으로 빚어 말리고, 하얀 백자白磁사발에 정화수를 채워 장독대 작수발 위에 얹어놓고, 안산安山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양 손바닥을 비비며 기원을 했다. 장독대에는 붉은 황토를 깔고, 작수발 - 끝이 세 가지로 난 나뭇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곱게 다듬어서 거꾸로 황토에 세웠다. 할머니의 중얼거리는 비나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비나리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보라가 쳐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빌었다. 해가 천방산마루에 올라 맞은편 안산마루를 비출 때까지 수천 수만 번 허리를 굽히고 양 손바닥을 비비며 기원했다.

 

 

# 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소화(召和, 일제 강점기 일왕日王 연호年號) 1310월이다. 교회상량上樑에 쓰여져있다. 근동近洞 5개면(남양, 동강, 대서, 과역, 운대면)에는 우리교회 하나뿐이었다. 교회와 동각터는 할아버지가 희사喜捨했다.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신자信者. 교회에 안 다니는 아이가 별로 없었다.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옥동이, 꺼꾸리와 수돌이들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에 다녔다. 크리스마스가 들어있는 12월 일요일에는 옥동이들도 나왔다.

 

크리스마스에는 순천에서 보이엘목사가 지프를 타고와 구호품과 레이션박스 그리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나눠준다. 구호품은 대개 옷인데 집이 가난해서 홑옷만 걸치고 떠는 헐벗은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더러 값비싼 외투는 팔아서 교회경비로 충당했다. 쌀 반 가마니를 주고 산 부친의 물개털외투는 무거워서 들고있기도 불편했지만, 입고 있으면 금방 땀이 났다. 그러나 우리집 가운댓방 옷장에 걸린 외투를 호기심에서 한 번, 딱 한 번 입어봤는데 고리고리하고 노리끼한 양냄새가 흉해서 한 번 입어보고는 다시 입지 않았다. 쌀 닷 말을 주고 물개털외투를 살 수 있는 집은 우리집뿐이다.

 

레이션박스는 고루 나눴다. 서양된장이라는 버터, 금박지金箔紙에 담긴 까만 액상液狀커피는 아무도 먹으려고 하지 않아 부친이 독차지했다. 레이션박스는 누구나 탐냈지만 실상 먹을 게 별로 없었다. 입맛에 맞지 않아 곰팡이가 피거나 대부분 버렸다. 과자에서도 서양냄새가 나서 비위가 약한 아이들은 먹지 않았다. 아이들은 금박金箔 은박銀箔 크리스마스 카드에 눈독을 들였다. 서양냄새가 나기는 해도 금빛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카드는 아이들이 처음 보는 예수님의 선물이다. 녹색 호랑이가시나무에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고, 은빛 뿔이 돋은 사슴이 황금마차를 끌고, 금빛종과 싼타할아버지가 새겨진 카드는 아이들에게 일생일대의 선물이다. 금빛종 안에는 방울이 달려있어 방울을 흔들면 땡그랑! 정말 종소리가 날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목사님이 말하는 천당보다도 카드가 훨씬 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이 카드를 통해 아이들에게 세상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었다. 면내에서 제일 높은 천방산을 넘고 얕은 산을 세 개나 더 넘어 다녔던 국민학교에서는 우리 카드가 선망羨望의 대상이었다. 생전에 카드를 구경도 못 한 아이들은 카드를 보고는 보물처럼 생각했다. 그때 한참 인기가 있었던 딱지나 구슬 그리고 노란 대장별이 10개나 그려진 그림카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아예 교환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십 리도 넘는 산길을 걸어 카드를 얻으려고 오는 아이들조차 생겼다.

 

우리집에서 딱 세 분 - 할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온 동네사람들이 다 교회에 나가거나 나가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우리집 어른들만 교회를 거부했다. 부흥회復興會가 열리면 할아버지는 집사님들의 권유에 못 이겨 교회 맨 앞자리에 갓을 쓰고 두루마기차림으로 장죽長竹을 물고 앉아있기는 했으나 그때 뿐. 할머니는 부흥회도 외면했다. 아예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어머니는 14명의 대가족 - 상머슴 두 사람, 중노미, 부엌데기와 하루 종일 밥하고, 반찬 담고, 빨래하느라고 교회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 했다. 어린시절의 기억에 어머니는 밥, 빨래, 김장 담그는 기억 뿐.

 

그래도, 일요일 아침이면 할머니는 이슬이 마르기 전에 그날 핀 백합송이에서 가장 좋은 - 싱싱하고 반 쯤 핀 이슬 머금은 백합송이를 골라 가위로 잘라 주었고, 교회강단의 꽃병에 꽂는 것은 언제나 장손長孫의 몫이다. 우리집과 교회는, 우리집 뒤편 장독대 옆 뒷밭 - 모란과 작약밭의 돌배나무와 커다란 참팽나무 옆 싸릿문으로 터져있었다. 우리집에는 꽃이 지천이어서, 모란과 작약은 아예 뒷밭에 약용藥用으로 경작을 하였고, 장독대 담장에는 찔레꽃, 담장 밑에는 봉숭아, 맨드라미, 꽈리. 상사화. 창포, 촉두화 등등 꽃집으로 불리웠는데, 특히 하얀 백합은 담장 어디를 파도 구근球根이 나왔다. 대개 백합은 꽃대 한 개에 꽃이 한 송이씩 피었는데 묵은 구근에서는 백합꽃 아홉 송이가 맺힌 것도 있었다. 백합이 한창일 때는 온 동네는 물론 마을어귀 신작로에까지 향기가 퍼졌다.

 

할머니는 일요일이면 빳빳하게 풀을 먹여서 데루로 다린 옷을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장롱에서 꺼내 입히고, 5원짜리 빨간 새 지폐를 허리에 찬 복주머니에 간수하였다가 일요일 교회 때 연보돈으로 주었다. 동생들은 1원짜리다. 교회에서는 어른들 예배 보기 전에 아이들만 예배를 보았는데, <돌아갑시다 돌아갑시다. 재미있는 시간이 벌써 끝났네 ……> 폐회閉會노래가 시작되면 연보집사님이 잠자리채라고 불리우는 연보주머니를 들고 아이들 사이를 돌았다. 연보돈을 내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고작 두세 명, 오히려 눈을 감고있다는 것을 틈타 꺼꾸리는 빈 주먹을 집어넣었다가 연보돈을 훔치다가 들켜 경을 치기도 했다. 성공한 날은 희희덕거리며 주먹에 쥔 연보돈을 자랑했다. 우리도 덩달아 좋아했다.

 

부친이 질색을 하는데도 우리집에서는 잠은더리 무당巫堂을 불러 푸닥거리를 했다. 부친은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오르간 반주伴奏를 맡았다. 부친의 오르간반주는 파이프오르간 연주같았다. 부친은 여름성경학교 교장도 맡았다. 그래도 할머니의 푸닥거리를 만류挽留할 엄두를 못 했다. 할머니의 권위權威는 우리집에서 할아버지보다 더 셌다. 푸닥거리가 시작되면 우리 교회파는 밖으로 피신避身을 하는 게 고작이다. 교회에서 무당이나 점쟁이는 미신迷信이고 사탄Satan이나 마귀魔鬼라고 가르쳤다.

 

반면에 굿판이 시작되면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당에 차일遮日을 두 개 쳐놓고 동네 아주머니들을 받아들였다. 상숙이할머니와 정금이어머니는 할머니 옆에서 할머니 수발隨發을 들었다. 굿판을 벌이는 전날 돼지를 잡고 떡을 쳤기 때문에 떡과 과일과 고기를 얻어먹으려고 아이들도 모여들었다. 남자어른은 동각지기 옥동이아버지와 상여喪輿나갈 때 상여소리를 매기는 상여소리꾼 김씨가 심부름도 하고 돼지고기를 써느라고 굿판에 끼였다.

 

할머니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두 머슴에게 쌀가마니를 지우고, 중노미에게는 떡과 부침개 등 음식을 들리고 팔영산 능가사에 다녀왔다. 팔영산 능가사는 우리집에서 60릿길이다. 5학년 땐가 할아버지의 허락받아 할머니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다리가 붓고 태악이 나서 다녀온 뒤 사나흘 동안 꼼짝도 못 했다. 새벽에 나서서 아침 때 과역을 지났는데 능가사가 있는 점암에 가까워지자 해가 기울었다. 점암은 할머니의 친정이다. 뵌 적은 없지만 할머니의 친정은 김해김씨 동네이고, 진외가, 그러니까 할머니의 부친은 고흥감영監營의 무반武班이었다. 증조부曾祖父가 무반이었으므로 두 집안이 혼사婚事를 치췄다고 족보族譜에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무반의 피를 받아서 장골壯骨이었다. 호주가好酒家라서 외출에서 귀가하는 때면 사장거리에서부터 온 동네가 쩡쩡 울리도록 장손의 이름을 불렀다. 장손더러 마중을 나오라는 부름이다.

 

도깨비기자는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는 할머니의 치마꼬리에 붙어살았다. 눈만 뜨면 할머니의 치마꼬리를 졸졸 따라다녔다. 할머니가 안방으로 가면 안방으로 따라가고, 대청으로 가면 대청으로 따라갔다. 한번은 할머니가 대청 막걸리독에서 용수를 걷어내고 막걸리 맛을 본 다음 장손에게도 한 모금 주었는데, 두어 모금 얻어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렸다가 할머니만 조부에게 핀찬을 맞았다. 할머니를 따라다니면서 겨울홍시도 먹었다. 할머니는 가을에 군청감으로 불리우는 대봉을 쌀독에 갈무리했는데 겨울이면 홍시가 되었다. 붉은 껍질이 반지처럼 얇아져서 입을 대고 쭉! 빨면 물처럼 빨려들어왔다. 겨울홍시 맛은 어른이 되면서 더욱 간절하다. 그래서 대봉을 사다가 홍시로 만들어 냉장고에 얼려두고 먹었는데 어린시절에 할머니가 동생들 몰래 주었던 홍시 맛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팔영산 아래 김해김씨촌 양반 무가댁武家宅에서 시집을 왔다. 증조부曾祖父도 무인武人이었다. 품이 넉넉하고 양반티가 났다. 여름철이면 모시적삼을 차려 입고 부채를 들고 살았다. 나들이 때는 깟신(맞춤 가죽신)도 신었다. 팔영산 아래 산골 출신인데도 생선을 좋아해서 장손은 할머니의 입맛을 내림받았다. 유둔장날이면 모친은 쌀 너덧 되를 이고 해가 뜨기 전에 장에 가서 싱싱한 생선을 사왔다. 장남에게 줄 신문지에 돌돌 말아부친 엿도 장바구니에 들어있었다. 모친이 한나절도 되기 전에 장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장손에게 텃밭에서 무잎을 따오라고 했다. 목화밭에 등성듬성 뿌려놓은 무는 무성하게 자라 잎줄기에 가시가 있어 따기가 어려웠다. 그 무잎을 쌈싸먹는 할머니와 겸상兼床을 하였어도 무잎쌈만은 엄두를 내지 못 했다. 그런데 웬걸 머리가 커서야 무잎쌈맛을 알게되었다. 쌈을 좋아하는데 상추나 배추잎쌈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겨울에는 큰방 샛문 아래 식혜단지를 놓아두었다. 눈을 비비고 나자마자 한 그릇 들이키는 얼린 식혜 맛은 지금도 입에 군침이 돈다.

 

할머니의 부처 시주공양施主供養을 따라가서 팔영산을 처음 보았는데, 말로만 듣고 처음 본 팔영산의 여덟 개 봉우리는 정신을 압도壓倒했다. 팔영산은 중국황제가 세수를 하는데 세수대야에 그림자가 비춰 중국황제가 영산靈山이므로 찾아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전설이 있다. 우뚝 솟은 여덟 개의 봉우리 하나 하나가 면내에서 제일 높은 우리마을 천봉산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처음 본 능가사의 절집 규모와 거대한 종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특히 절 문간에 창과 칼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사천왕四天王은 등골이 써늘했다. 오금이 저렸다. 팔영산은 송팔영장군의 전설傳說이 있다.

 

송팔영장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남해로 밀려들었던 왜군倭軍을 쳐부순 명장名將이다. 말을 타고 팔영산을 평지平地 걷듯 뛰어다녔다. 송팔영장군이 청년시절 팔영산에서 말 달리기 훈련을 할 때 사람들이 내기를 걸었다. 송팔영장군의 말이 화살보다 더 빠르다는 소문을 확인하려고 했다. 송팔영장군이 말을 타고 흥양(고흥)다리에서 활에 화살을 먹였다. 팔영산 첫째 봉우리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과 동시에 말이 울면서 땅을 박차고 달렸다. 달리는 게 아니라 날아갔다. 송팔영장군이 팔영산 봉우리에 닿아 화살을 찾았으나 없었다. 화가 나서 말의 목을 칼로쳤다. 말의 울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귓가에 화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고 화살이 바위에 꽂혔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남해를 노략질하고, 곡창穀倉인 전남지방을 점령해서 군량을 확보하려고 고흥 상륙을 시도했으나, 송팔영장군이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능가사에서 훈련시킨 의병義兵에 쫓겨 상륙을 하지 못 했고, 군량 확보에 실패한 왜군은 고흥을 피해 진도로 진출하여 상륙을 시도했다가 진도 울돌목에서, 충무공에게 대패하여 결국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종식終熄을 했다. 충무공은 고흥을 피해 진도로 상륙하려는 왜군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군함 130여 척을 진도 울돌목에서 모두 수장水葬시켰다. 진도의 울돌목은 밀물과 썰물 때 물살이 매우 심하여 소용돌이가 일어났으므로 어선은 울돌목을 지나다니지 못 했다. 명량鳴梁이라는 말이 <울음을 우는 바다>라는 뜻이다. 물살이 세서 흘러가는 바닷물이 울음소리처럼 들끓었다. 충무공이 울돌목에 천착穿鑿했다. 충무공은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왜군을 끌어들이고, 쇠줄로 울돌목을 가로막아 왜군의 군함 130여 척을 모조리 전복顚覆시켜 수장水葬해버렸다. 울돌목의 물살에 밀린 왜군의 군함은 돌아설 틈도 없었고 물러설 수도 없어 빠른 물살에 빨려들어 전멸全滅했다. 화살 한 개 쏘지 않고 칼 한 번도 휘두르지 않고 승리한 세계해전사의 전설적 승전보勝戰譜.

 

당곡의 점집은 할머니의 단골이다. 또 부엌에는 조왕신竈王神이 살고, 안방 윗목 천정에는 성주대감星主大監이 산다. 할머니는 마루방에 들어설 때도 늘 두 손을 합장合掌한다. 추석이나 설 명절名節 때는 마루방에 촛불을 켠다. 소마구와 부엌에도 촛불을 켠다. 제삿날에는 온갖 음식을 한다. 나무 제기祭器를 먼지 한 점 없이 반들거리게 닦아 젯상祭床을 차린다. 우리 형제들은 자다가 선잠에서 깨어나서 눈을 비비며 조상祖上들께 절을 올린다. 제사 다음 날 아침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편 멍석에 앉아 제사음식을 먹는다.

 

할아버지는 우리 형제자매를 위해 집앞 텃밭의 1/ 3에 사탕수수를 심었다. 농지가 없어 가난한 사람들은 점심을 굶다싶이한 시절 감히 엄두를 내지 못 할 일이다. 사탕수수가 자라면 우리는 사탕수수밭 안에 똬리를 틀고, 사탕수수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입술이 부르틀 때까지 단물을 빨아먹었다. 또 할아버지는 유둔 5일장 국화빵장사에게 수소문하여 아예 국화빵틀을 장만해서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밀가루에 사카린Saccharin을 넣은 빵을 구웠다. 빵을 만드는 밀가루를 조달하기 위해 밭 서너 마지기를 떼어 밀을 심었다. 밀을 여덟 가마니씩 수확한다는 말에는 사람들이 눈을 꿈벅였다. 할아버지는 무녀독남 3대독자에게서 퍼진 손자 10남매를 위해 부친을 손이 벌족閥族- 9남매를 둔 유둔 배씨裵氏네로 혼인시켜 손자 10남매를 보았다. 부친과 모친은 을축생(乙丑生, 소띠) 동갑同甲내기였고, 18살에 결혼하여 19살에 덜컹 장손長孫을 보았다. 그래서 장손 이름을 <천만天滿>이라고 지었다. 한자의 뜻은 다르지만 <천만 뜻밖의 경사慶事>라는 의미다.

 

 

도깨비기자 : 부친의 억울한 삶과 가족의 생계에 일생을 보낸 제게는 한이 맺혀 있습니다. 부친, 사회, 국가 공권력에 대한 증오憎惡랄까요? 증오라는 표현이 적절 치는 않습니다만, 하여튼 내 일생을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살게한 아픔 같은 것입니다.

해설사 :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개인적인 일생을 포기하고 일생을 다 바쳤다는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도깨비기자 : 그래서 여순반란에 집착하는 것인데, 여순반란은 흔적조차 없습니 다. 없었던 일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허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해설사 : 반란의 흔적이 남았다드라도 거기에서 찾을 건 무엇입니까? 여순반란의 역사적 규명을 부친의 개인사와 가족사에 연관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을까요?

도깨비기자 : 이런 와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고, 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도했고, 천봉산에서 일출을 보고는 모태신앙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나 신을 우상이라고 버렸으면서도 끊임없이 신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었습니다.

 

 

# 천당과 지옥, 극락과 연옥을 믿지 않는 도깨비기자에게 사람의 생애生涯는 동물의 한살이인데, 식물의 한살이처럼 <>로 이어지는 한살이인데 업보業報는 무엇이며 원죄原罪란 무슨 가당치 않은 말인가?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는, 세상만물世上萬物을 주관主管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의 삶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인가? , 운명, 사주팔자, 풍수, 천당 지옥, 극락 연옥, 특히 내세, 기원, 윤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돕는다? 하늘로 돌아가 별이 되었다? 어떤 하늘이 무슨 하늘이 사람의 생애를 돕나?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은 자연순리自然順理일 뿐입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말은 자연순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종교는 이 말을 신으로, 신의 뜻으로, 신의 행사行使로 와전訛傳시켰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무위자연無爲自然.

 

 

# 동인 동신형제가 폭도들에게 처형당하자 그들이 기거했던 집주인 양집사가 시신尸身을 가매장假埋葬했다가 여수 애양원에 안치했다. 애양원 식구 1,100여 명이 울며 애도하는 장례식이었다. 이후 1년만에 발발한 6 · 25 북한군 남침 열흘 후 여수까지 밀고내려운 인민군에게 손양원목사가 잡혀 끌려가다가 여수 미평면 과수원에서 총살당해 애양원 묘지에 합장合葬했다.

 

손양원목사는 6 · 25가 터지자 몸을 피했다가 애양원으로 되돌아왔다. 나환자를 버리고 갈 수 없어서 되돌아왔다. 마치 베드로가 로마를 피해 아피아Apia가도街道로 떠나다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네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말씀을 듣고 로마로 되돌아와 십자가게 거꾸로 못 박힌 것처럼, 손양원목사는 환우와 교회를 버리고 피한 자신을 자책自責하며, 인민군 치하의 애양원으로 되돌아와 인민군에게 협조하라는 강요를 거부하다가 순교했다. 인민군은 협조를 하지 않은 애양원에는 양곡糧穀을 분배하지 않아 애양원식구들이 굶주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순교한 손양원목사의 시신은 애양원 사람들의 통곡 속에 동인 동신 두 자녀와 합장合葬했다. 손양원목사의 순교를 기록한 책 <사랑의 원자탄>을 도깨비기자는 어린시절 - 국민학교 5학년 때 부친의 서가書架에서 읽었다. 서가에는 일본어책이 수백 권 있었고, 증조부曾祖父의 한적漢籍도 쌓여있었다. 정비석의 <돌배개>, 존 번얀John Bunyan<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도 국민학교 5학년 때 읽었다. 두 자녀를 총살한 사람을 사형 직전에 처형대에서 구하고, 양자를 삼아 교육을 하는 사건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털어도 유래由來가 없을 것이다.

 

 

# 동생의 죽음

 

손아래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요절夭折했다. 한참 살림이 거덜나가는 판이었는데, 병원에 데려가도 병명도 몰랐다. 시름시름 앓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거니 하고 요양을 보내는 셈치고 시골로 보냈는데 두 달만에 죽었다.

 

‘00 사망

급전急電을 받고 한없이 울었다. 밤새도록 울고 날이 밝자마자 남광주역에서 첫기차로 고향으로 갔다. 기차에서도 벌교에서 내려 탄 버스에서도 울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벌써 장례를 치렀다. 동생은 선산先山 발치에 작은 봉분封墳으로 누워있었다.

 

그 후, 몇 달을 슬픔과 고통속에서 보내고, 동생의 죽음에 대해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나님을 찾았다. 작은 가슴으로는 풀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물음 때문에 교회에 갔다.

 

꼭두새벽에 시골교회의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과의 대화를 갈구했다. 조부가 돌아가셨을 때는 죽음에 관심이 없었다. 조부는 부친이 경찰의 고문과 구타 피해로 정신분열증을 앓아 평생 미친놈 취급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홧병으로 중풍이 도져, 3년 동안 그야말로 벽에 똥칠하는 삶을 살다가셨지만 그다지 애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이 치료 한 번 받지 못 하고 요절하자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懷疑가 생겼다. 부친의 삶과 동생의 죽음이 겹쳐, 삶과 죽음 그리고 신에 대한 회의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를 찾았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밤중보다 더 새카만 겨울새벽, 한두 시간 교회의 차디찬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있으면 다리에 감각이 없어졌다. 칠흑漆黑같은 어둠과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冷氣에 묻혀 호흡마져 얼어붙는 겨울 새벽이었다.

 

빛을 내려주소서!’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말씀을 찾았다. 한 마디의 하나님의 말씀을 애원哀願하며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몸은 감각이 없고, 생각조차 사라지고 기원祈願만 또렸하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萬物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신약성경, 요한복음 115)

 

 

그런데, 이상하게 동생과 생활한 기억이 별로 없다. 10여 년을 한 집에서 한 솥 밥을 먹고 살았는데 동생이 떠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같이 살았다는 흔적이 없다. 어린시절 그 때 동생은 어디 있었을까? 동생의 기억이 없다. 부모님과 함께 간 바다에도 따라오지 않았다. 두 살 터울이었는데 같이 어울린 기억이 없다. 아버지의 성화로 새벽 성경을 읽다가, 아버지 눈을 피해 성경의 위아랫줄의 글자가 나란한 <같은 글자찾기 놀이>, 지리부도地理附圖에서 아주 큰 글자나 아주 작은 글자찾기를 한 기억이 전부다. 지금 동생은 선산先山자락 발치에 동그마니 무덤으로 누워있다. 동생의 얼굴 이마 한복판에 동그라미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부처님의 이마에 새겨진 보석처럼 콩알만한 동그라미가 새겨져있었다.

 

어린시절에 마을 뒷산 천방산에서 살다싶이 했지만 바다는 시야에 없었다. 어쩌다 부친의 짱뚱이낚시를 따라가거나, 어머니를 따라 고동을 잡으러 몇 번 갔을 뿐이다. 시간이 나면 천방산과 옥녀봉을 뛰어다녔다. 사두실고개를 넘어 맷돌바위까지 싸돌아다니며 타박솔 안 맷새둥지에서 파란 바탕에 옅은 고동색 점이 박힌 맷새알을 꺼내 먹고, 소나무잎에 벌이 깔려놓은 하얀 좁쌀알 같은 벌꿀을 핥고, 작년에 자란 소나무가지의 껍질을 벗겨 송쿠를 먹느라고 천방지축天方地軸 산을 돌아다녔다. 입술을 파랗게 물들이며 진달래꽃을 먹었다. 절골에서는 개울에서 가재를 잡고, 딱주도 캤다. 그래도 옥녀봉자락 집채만한 고인돌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옥녀봉에서 흘러내린 너덜겅에는 까치독사毒蛇가 산다. 까만 몸통에 하얀 점이 박힌 까치독사에게 물리면 약이 없다고 어른들도 너덜겅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마을 뒷산 천방산에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남해 득량만이 펼쳐지고, 왼쪽에는 남해 순천만이 펼쳐진다. 고향 운교는 고흥반도의 복주머니 형상을 한, 삼면이 바다인 반도半島. 짤쑥한 복주머니 허리부분이 우리마을 구름다리이고, 동쪽의 순천만과 서쪽의 득량만의 가장 최단거리에 위치한다. 그래서 고향 뒷산 천봉산 정상에 오르면 동쪽의 순천만과 서쪽의 득량만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바닷물이 썰물이 되면 득량만에 떠있는 쇠섬(우도牛島), 구렁섬이 들어난다. 천봉산마루에서는 득량만의 오봉산 칼바위와 고흥 끝자락의 용둥이목이 멀리 아스라히 떠있다. 용둥이목을 막아버리면 득량만은 고흥반도 열 배 쯤 되는 육지가 된다. 용둥이목을 막아 육지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짱짱한 날씨가 갑자기 돌변하여 용둥이목에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면 냅다 뛰어도 집에 닿기도 전에 후두둑! 후두둑! 비를 몰아온다. 용둥이목의 이무기가 투정을 부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천 년이 지나도 승천昇天하지 못 해 성깔을 부린다고 했다. 비가 잦아져 보슬비로 변한 뒤에는 무지개가 선다. 용둥이목은 고흥 땅 끄트머리자락과 득량만 오봉산 칼바위자락이 마주한다. 칼바위는 오봉산 정상 바로 아래 칼처럼 생긴 바위이고, 칼바위 밑 석굴石窟은 조선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씨왕조李氏王朝를 세우려고, 산천기도山川祈禱를 하려 전국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아다닐 때 기도한 굴이 다. 무지개는 대개 용둥이목에 질러서 득량만 칼바위에 걸친다. 쌍무지개를 지른 적도 있다. 쌍무지개는 한 개는 구렁섬에서 숯개에 걸친다. 쌍무지개가 뜨면 무슨 경사慶事가 난 양 아이들은 깡충깡충 뛴다. 어른들도 일을 하다가 허리를 펴고 하늘을 쳐다본다. 아이들은 무지개를 지른 숯개쪽으로 쫓아가기도 했다. 무지개 지른 곳은 물이 바글바글 끓는다고 하는데 호기심에서다. 그러나, 멀리서 보기에는 무지개 지른 곳이 가까운 곳 같았으나, 달려가면 금방 닿을 것 같은 무지개 지른 터는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가면 달려간만큼 또 멀리 있었다.

 

구름다리마을은, 주봉主峯 천봉산을 비롯하여 다섯 개의 산줄기가 마치 오른손 손바닥을 펼친 것 같은 형국形局이다. 어른들은 한자漢字 물자勿字 형국形局이라고 했다. 그 다섯 개의 손가락 끝부분에 10여 호씩의 작은 마을이 다섯 개 있다. 오른손 손바닥을 쫙 펴서 펼치면 가운데 손가락이 천봉산마루고, 엄지손가락이 1반의 사두실고개, 검지는 2반의 맷돌바위 - 맷돌바위에는 남매男妹 비련悲戀의 전설이 있다.

 

나무를 하러 갔었던 남매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를 맞았는데 비를 피하려고 맷돌바위 밑에 피신避身을 했다. 맷돌바위는 집채만한 크고 넓은 바위 두 개가 마치 바위가 바위를 등에 업은 것처럼 포개져 있다. 비를 흠뻑 맞은 남매는 비를 피하려고 맷돌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동생을 오빠가 꼭 껴안았다. 남매는 다음 날 나뭇꾼에게 껴안고 죽은 시체屍體로 발견되었다.

 

가운데 손가락에 해당되는 천봉산자락 끝에 도깨비기자의 집이 있다. 교회와 동각도 있다. 다섯 개로 나뉜 마을의 중심지다.

 

우리집 마당에는 천방산의 뿌리인 너럭바위가 뻗쳐내려와 거북이형상으로 누워있다. 무명지에 해당하는 넷째 손가락 자락에는 우리 선산先山과 과수원이 있고, 다섯째의 새끼손가락이 4반이 있는 옥녀봉玉女峰이다. 옥녀봉자락에는 저수지가 있고 옥녀봉자락과 저수지 경계境界에 집채만한 고인돌이 있다. 옥녀봉정상에는 역마驛馬를 길렀던 목장牧場이 있고, 목장의 샘물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굴인데 노인들이 용둥이목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명주실 다섯 꾸러미를 풀어도 끝이 없다고 한다. 돌을 던져봐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옥녀봉굴이 용둥이목으로 뚫려 있다고 하는 말이 맞는 말이다. 굴은 용둥이목에 사는 이무기의 집이다.

 

옥녀봉자락은 정상부근부터 돌무더기가 저수지로 흘러내려 만든 너덜겅이다. 옥녀봉정상의 울창鬱蒼한 소나무숲 한가운데가 밭이랑을 만든 것처럼 너덜겅으로 나뉘어져 있다. 정상에서부터 흘러내린 길고 넓은 돌무더기 너덜겅은 멀리서 보면 까치독사 형상이다. 너덜겅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 어른들도 들어가지 않는다. 너덜겅에는 까치독사가 산다고 소문이 나있어 아무도 들어가본 적이 없다. 천방지축 천방산을 뛰어다녔던 우리도 옥녀봉 근처 너덜겅에는 아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이 큰 우리들의 골목대장 철웅이도 너덜겅에는 감히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옥녀봉 너덜겅 끝자락과 저수지가 맞닿은 언덕에 집채만한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너덜겅 끝자락과 저수지 경계에 있었으므로 아이들은 주저주저 하면서도 고인돌 위에 올라가 물에 젖은 옷을 널고 젖은 몸을 말리기는 했다.

 

저수지는 여름철에는 미역을 감고 겨울에는 썰매놀이터다. 여자애들조차도 저수지 한 귀퉁이에서 속옷을 걸치고 목욕을 했다. 그런 아이들 틈에도 천봉산에도 저수지에도 동생은 없었다.

 

옥녀봉에는 홀아비와 과부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과부가 홀아비가 있는 산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몸부림친 흔적이 너덜겅이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돌투성이 산을 오르려고 몸부림친 터에 돌들이 으깨져 너덜겅이 되었다. 옥녀봉자락은 새끼손가락처럼 가늘고 길게 뻗어내려 박쟁이고개를 지나 바다와 뭍을 가늠짓는 웃보터를 만들었고 진등(긴 등)은 바닷가에서 멈췄다.

 

옥녀봉줄기 새끼손가락 끝이 진등의 5반이고 바다와 마을의 경계다. 진등의 중간 쯤에 웃보터가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웃보터를 거쳐 바다에 간다. 웃보터에는 집이 몇 채 있어서 바다에 가는 사람들의 정거장이다. 웃보터 오른편에는 숯개(탄포炭浦), 사두실고개를 넘으면 잠은더리(침교沈橋, 잠긴 다리), 간척지 논들이 손바닥처럼 펼쳐진 해변을 돌아 한나절 길에는 배더리(주교舟橋, 배다리). 배더리 앞 망주봉 아래 대섬(죽도竹島)이 외가外家. 대섬에 있는 외가는 외할아버지의 왕국王國이었다. 대섬과 딸린 섬이 모두 외할아버지의 소유다. 외할아버지는 별명別名이 외불이인데 우리 할아버지처럼 팔등신八等身에 거구巨軀. 나중에 커서야 외불이가 짝 불알(고환睾丸)이라는 걸 알고서 외불이라는 말을 들으면 좀 챙피했다. 대섬은 간척干拓한 논도 있고, 밭도 많았다. 대섬이 있는 유둔만 주변 어로권漁撈權도 외할아버지가 독점獨占했다. 외삼촌 5형제는 외가의 큰 집에 살면서 고기를 잡아 거간(居間, 중간 상인)에게 넘겼다. 때로는 주낙에 청둥오리가 걸려있었다. 청둥오리의 깃털은 오색찬란하다. 갯장어가 걸리면 외할아버지가 화롯불에 적사를 올려놓고 구웠다.

 

외가에는 외사촌 동갑내기 꽃예가 있었다. 대개는 어머니가 잘못을 저질러 할머니가 쫓아내면 울면서 외가에 갔는데 늘 동행했다. 커서 생각해보니 친정으로 쫓겨나는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할아버지가 일부러 장손을 동행을 시킨거라고 생각된다. 대섬 외가에 가려면 썰물에는 바지를 벗고, 고무신을 양손에 들고 뻘밭을 가로지르고, 밀물 때는 외삼촌이 노질하는 작은 목선木船을 탔다. 외가는 외삼촌들이 다섯 명이었고 모두 뱃사람인데, 배가 대여섯 척 있었다. 물때를 잘 맞춰야 허리까지 빠지는 뻘밭을 지나는 고생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뻘밭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 수렁이 있는 곳은 멀리 돌아가고, 썰물에 갱(바다속의 개울)을 따라가면 찰박거리며 각씨고동을 줍기도 했다.

 

대섬에는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꽃이 지천이었다. 우리집에도 꽃이 많아 동네사람들은 꽃집이라고 불렀는데, 겨울에 피는 동백꽃은 대섬에서 처음 보았다. 동백꽃은 진홍색 꽃잎과 진노랑 암술이 대비가 되어 색조色調에 매료魅了되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커서야 진홍색과 진노랑이 어울린 조화調和가 요염妖艶한 색깔이라는 걸 알아챘다. 익은 복숭아의 생김새와 진홍색 모란(목단牧丹)에서 배어나오는 도화살桃花煞은 금기禁忌. 유교사상에 집착하는 어른들 눈에는 거슬렸던 모양이다.

 

대섬 외가에는 동갑내기 이종사촌 꽃예가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장녀인 어머니의 손 위 오빠, 큰 외숙外叔의 장녀, 이종사촌이다. 꽃예가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실에 꿰어서 꽃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면 볼에 홍조紅潮가 떴다. 새빨간 진홍색꽃잎과 샛노란 진노랑 꽃술이 어울어진 동백꽃 그리고 홍조로 붉어진 꽃예를 그때부터 좋아했다.

 

동생의 무덤가에 앉아 해거름이 될 때까지 용둥이목 바다를 보고 있었다. 구렁섬 발치로 밀물이 몰려들었다. 보고있는 사이에 바다는 뻘밭 위로 떠올랐다. 해는 용둥이목에 걸려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주춤거리고 있었다.

 

 

# 여수 애양원

 

도깨비기자가 손양원목사와 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비殉敎碑 앞에서 묵념默念자세로 서 있다. 발자국소리에 눈을 들어보니 해설사가 다가온다.

 

도깨비기자 : 또 뵙네요. 언제 오셨습니까?

해설사 : 여기가 제 집입니다. 애양원교회 관사館舍에서 삽니다. (도깨비기자가 놀란 눈으로 해설사를 바라본다.) 놀라워할 것 없습니다. 실은 저는 손양원목사님의 큰 딸 동희의 딸입니다. 손목사님이 외할아버지고, 동인, 동신은 외삼촌이지 요.

도깨비기자 : (놀란 표정으로) , . 그랬었군요. 큰딸 동희의 이야기는 광복 30 년 에서 읽었습니다. 여순반란 당시 반란군이 순천시를 장악하고 동인, 동신 형 제가 순교당하자, 손목사님의 아이들을 돌보던 양집사가 동인, 동신형제의 순 교를 알리기 위해 큰딸 동희를 여수 애양원으로 보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희는 순천에서 여수까지 울면서 혼자 걸어가서 오빠들의 순교를 부모님과 교회 신도들에게 전합니다.

해설사 : 들어가시죠. 차 한 잔 하십시오.

 

 

# 애양원교회 관사 응접실

 

도깨비기자와 안내인이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있다.

 

도깨비기자 : <사랑의 원자탄>을 잘 아시겠네요.

해설사 :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눈가에 물기가 돈다.)

도깨비기자 :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었습니다. 무슨 책인지 모르고 읽 었고, 무슨 의미인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부친의 서가에서 읽을만한 책 을 무턱대고 읽던 때였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은 책이 아니고 얇은 팜프렛이 랄까. 어린시절 나는 독서광이었요. 그때 존 번얀의 천로역정과 이광수의 돌 베게도 읽었습니다. 매일 새벽이면 부친의 명령에 따라 성경을 3장씩 읽던 시절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아침밥을 굶어야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읽었 지만 신약성경은 3번 정도, 구약성경을 한 번 읽었습니다. 여름방학 때 교회 에 여름성경학교가 개설되면 부친이 학교장을 맡아 오르간반주로 동요童謠를 가르쳤습니다. 어린이 성경학교의 하이라이트Hilight는 성경암송대회聖經暗誦 大會입니다. 나는 요한복음을 외워 가죽표지로 장정裝幀한 고급성경책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여름성경학교에서 가르칠 동요는 우리집 감나무그늘에 대 나무평상平床을 펴고 고구마로 새긴 음표音標를 한지韓紙에 먹물로 찍어 만들 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읽은 사랑의 원자탄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취 재取材를 위해 뒤진 자료에서 사랑의 원자탄을 발견하고 다시 읽었습니다. …… 그러나,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어떻습니까? 손 양원목사의 행적行蹟, 그 중에서도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폭도暴徒 안정수를 양자養子로 삼아 가족으로 삼고 학교에 보내 가르치는 일을 이해하시겠습니 까?

해설사 : 모친은 오빠를 총살한 안정수의 양자입적과 가족입양을 거부했습 니다. 그러다가 안정수부친의, 가족이 모두 기독교신자가 되고싶다는 간청에 가까스로 안정수네 집에 들어가 살다가 결국 적응하지 못 하고 5개월만에 안 정수네 집에서 나옵니다. 갈등葛藤이 컸겠지요. 안정수부친이 우리가 기독교신 자가 될 수 있게 동희를 우리집으로 보내달라, 우리집에도 동희 또래의 딸이 있으니 함께 살면서 전도傳導를 해달라고 해서 손양원목사가 제 모친 동희를 설득했지만 결국 오래 지탱하지 못 하고 튀쳐나온 것입니다. 외할아버지 손 양원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따랐지만 모친은 <원수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도깨비기자 : 나는 모태신앙인입니다. 우리마을 교회는 일제강점기시대日帝 强占期시대 설립되었습니다. 교회 상량上樑<소화昭和 13>이라고 일제연 호日帝年號가 씌어있습니다. 인근지역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운교교회는 순 천의 미국인 선교사宣敎師가 관리했습니다. 부친은 대학생이었고, 방학이면 청 년야학靑年夜學을 열었습니다. 인근 마을에서 청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청년 들은 10, 20리를 밤에 걸어왔다가 수업을 마치고 밤길을 걸어 돌아갔습니 다. 더러는 우리집에서 하숙을 하는 청년들도 있었고, 동네에 방을 얻어 자취 自炊를 하는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부친은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伴奏者고 성가 대聖歌隊를 만들어 지휘했습니다. 부친의 오르간반주는 독학獨學이었는데 능숙 能熟했고, 찬송가의 4부연주를 하면 웅장한 연주가 심금心琴을 울렸습니다. 우 리 형제자매는 모태신앙母胎信仰으로써 교회를 다녔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도 손양원목사의 사랑의 원자탄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해설사 : 부친이 선각자先覺者이셨군요.

도깨비기자 : 모태신앙의 믿음에서 한 가지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고등 학교에 다니던 동생의 죽음입니다. 광주에 개원한 최신병원 진찰에서 병명病名을 몰랐고, 시름시름 앓다가 요절夭折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신에 대한 회의 懷疑를 가진 계기입니다. 교회에 다니지요?

해설사 : 우리집안도 태생적 신앙인입니다. 외할아버지와 모친의 영향을 받았습니 다. 그러다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순교를 겪고 신앙심이 더욱 공고鞏固해 졌지요.

도깨비기자 : 저와는 반대로군요. 저는 동생을 잃고 동생의 죽음이 큰 충격이었던 만큼 신앙심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모태신앙의 절대적신앙에서 <신이란 뭐냐?> <신이 있나?>라는 근본적인 회의적시각이 시작되었습니다.

 

 

# 오후 늦게 <동생 사망> 급전急電을 받았습니다. 기차나 버스시간이 끊낀 저녁때였습니다. 두 살 터울의 동생은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렸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졸업 때 교육감상을 탔고, 통신표에 전 과목 <>를 맞아 입시지원서를 보고 접수담당자가 놀란 일도 있습니다. 그림을 잘 그려서 미술부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몸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광주에 신설된 최고 최신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으나 병명을 몰랐습니다. 동생과 방을 얻어 자취를 했는데 어쩔 수 없어 요양차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요양을 하면 낫겠거니 생각한 것입니다. 허나 고향에서도 증세가 심해지자 모친이 시골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석달여 앓다가 요절夭折했습니다. 간병看病을 한 조모님 말로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전보를 받고 밤새 내내 울었습니다. 남광주역에서 새벽 첫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내내 울었습니다. 고향에 가니 이미 장례를 치러버렸습니다. 제가 보면 속상할 것이라고 장례를 치러버린 것입니다. 제가 대면對面한 첫 죽음이었습니다. 중풍에 시달리는 조부와 조모님도 생존했고,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부친도 살아있었는데 아우가 먼저 간 것입니다. 아우가 돌아간 날이 41일입니다. 하필 만우절萬愚節이었지요. 세상사람들이 모두 이웃을 놀려먹고 웃는 날이지만, 나는 만우절날 웃지 못 합니다. 매년 만우절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틀어놓고, 향로香爐에 향을 사릅니다.

 

아우의 무덤을 찾아가는 4월 보리밭은 보릿대가 바람에 눕고 일어서고, 푸른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얼마나 울었든지 눈물도 말라버렸습니다. 아우는 산산先山 발치에 누워있었습니다. 요양차 고향으로 보내버린 걸 후회했습니다. 어린시절이라 생각이 짧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최신 최고병원만 알았지 종합병원 진찰을 몰랐습니다. 최신 최고병원에서 모른다니까 요양으로 치료가 되겠거니 하고 방심放心을 한 것입니다. 집안이 거덜이 난 형편이라 어수선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와 어머니가 계시니 요양이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허나 지금 같았다면 아무리 형편이 어려웠어도, 논밭을 팔아서라도 서울로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철이 없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동생의 묘 옆에 웅크리고 있다가 용둥이목에 해가 걸리자 광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말라버린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쏟아졌습니다. 과 죽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삶과 죽음이 가슴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모태신앙이 의식意識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해마다 동생의 기일忌日, 41일 만우절이 되면 아우를 기념하려고 촛불을 밝히고, 독경讀經도 합니다. 모태신앙의 신자가 왜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불교에 의존하였을까요? 교회는 부활을 말하지만 죽은 혼을 달래는 의식이 없습니다. 몇 해 전에는 장성 백양사 주지스님을 만나 차를 대접받았는데, 아우 얘기를 하다가 지금이라도 천도제薦導祭를 지내는 게 좋겠다고 해서 천도제를 지냈습니다. 추석과 설날에는 4대조代祖부터 아우까지 차례를 지냅니다. 이제는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은 없다라고 하지만 조상신祖上神들이 명절에 밥도 한 끼 못 얻어먹고 구걸하고 다닐까싶어, 걸신乞神이 될까싶어, 다른 집 신령神靈들은 걸게 얻어먹는데 요절夭折한 원혼冤魂이 구천九天을 해매지 않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 동생을 잃고나서야 동생과 추억거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습니다. 고작 두 살 터울 형제간인데 왜 추억이 하나도 없나? 앨범을 뒤졌더니 고등학교 때 자취하면서 알았던 친구들하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나왔습니다. 동생의 이마에는 부처님처럼 콩알만한 동그라미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왜 동생과의 추억이 없을까? 새벽에 성경을 읽다가 싫증이나면 성경구절의 위아래줄의 같은 글자찾기를 했던 기억, 지도에서 글자찾기와 여름철 사랑방에서 기거하면서 모기 퇴치를 한다고 당시에 유명했던 인피레스Inpress(파리약)를 몸에 발랐다가 호흡곤란을 일으켜 닦아주었던 기억 뿐, 한 집에서 밥 먹고 기거하며, 초등학교 6년을 같이 시오리 산길을 걸어다녔는데 기억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

 

동생을 잃고난 후 겨울방학 때, 교회를 찾았습니다. 겨울 캄캄한 새벽에 교회에 가서 찬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간청하였습니다. 두세 시간 앉아있으면 다리가 마비됩니다. 온몸에 감각이 없습니다, 몸이 얼어서 일어서지도 못 합니다. 때로는 묵상默想의 삼매경三昧境에 빠져 서너 시간씩 앉아있었습니다. 한 달 쯤 기도祈禱를 하다가 묵묵부답黙黙不答에 하나님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천봉산에 올랐습니다. 우리 면에서 가장 높은 우리 마을 진산鎭山입니다. 겨울새벽에 천봉산을 오르면 캄캄한 어둠에 눈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소리는 귀신의 울부짖음처럼 산의 적막을 찢습니다. 더듬거리며 산 정상에 올라 남해 순천만을 봅니다. 사위四圍가 어둠뿐입니다. 바다도 깜깜합니다. 파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고있는 사이에 어둠이 가시면서 파도가 일렁이며 바다가 희무끄레한 뱃살을 들어납니다. 마치 고기가 몸을 뒤집어 배를 뒤집는 것 같습니다. 아무 빛도 없는데 파도의 뱃살이 하얗게 반짝입니다. 천봉산정상에서는 남해 순천만과 남해 득량만 양쪽이 다 보입니다. 고향마을 운교가 고흥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고, 주머니처럼 생긴 고흥반도의 허리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살갗을 면도날로 오려내는 것 같은 찬 바람을 피하려고 외투 속에 목을 움츠리고 서너 시간 앉았있다가, 바람소리가 잦아들고 주위가 고즈넉해져서 고개를 들었더니 바다가 꿈틀거렸습니다. 파도가 커지고 파도의 하얀 뱃살이 반짝거렸습니다. 수많은 고기떼가 수면 위로 튀어오르며 배를 뒤집었습니다. 점차 주변이 밝아졌습니다. 그러자 바다는 더욱 검게 변했습니다. 검은 파도 속에서 하얀 뱃살을 들어낸 고기떼가 소용돌이쳤습니다. 바다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같았습니다. 순식간에 날이 밝아오고 끓는 파도의 소용돌이가 커지며 하얀 빛이 바다에 퍼져나갔습니다. 검푸른 바다가 하얀색으로 바뀌어 출렁거렸습니다. 곧 수평선에서부터 하늘이 트였습니다. 한 줄기 하얀 빛이 반짝이더니 하늘 한가운데서 일직선으로 하얀 빛이 나타났습니다. 하얀 빛이 하늘로 퍼져나갔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모두 하얀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늘의 하얀 빛 사이에 오색빛이 나타나 하늘로 퍼져나갔습니다. 하늘의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순식간에 하늘과 바다가 소용돌이로 변했습니다. 오색구름과 하얀파도가 엉켜 폭풍처럼 휘몰아쳤습니다. 소용돌이를 보는 내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몸이 폭풍에 휘말려 돌았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뒤엉켜 소용돌이쳤습니다. 수평선에 곧 한 점 하얀 빛이 나타났습니다. 보고있는 사이에 빛이 부풀어 오르더니 점점 커졌습니다. 순식간에 쟁반만하게 커져서는 수평선 위로 불쑥 올라왔습니다. 오색깁을 펼쳐놓은 듯 소용돌이치던 하늘이 하얀 빛으로 변해갔습니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에서 해가 둥실 떠올랐습니다. 하얀 바다는 다시 검은 빛 작은 물결로 변해서 출렁거렸습니다.

 

 

도깨비기자 : 내 어린시절의 신은 신이란 말에도 어울리지 않은, 믿음도 아닌 생

활 그 자체였습니다. 일요일이면 학교에 가는 것처럼 교회 나가고, 찬송가 부르고, 설교듣고, 성경을 읽는 생활이었습니다. 내가 모태신앙이라고 했고, 온 집안이 신앙심을 가진 것 같지만 실상 교회를 다니는 건 부친과 우리 형제자매들뿐이었 습니다. 신에 대한 회의가 있으면 안 된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벽기도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고, 천봉산에서 일출을 본 후 나는 천지창조天地創造를 보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신이 사람을 만든 게 아니라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고 확신하고 탕자蕩子가 되었습니다.

 

 

# 원시신앙에서 당산堂山나무가 숭배의 대상이었고, 태양, , 별들이 신이었으며, 바위, 호랑이, 곰과 천둥, 벼락도 신이었습니다. 조상도 돌아가시면 신이 되었습니다. 지구촌 지역마다 다른 부족들이 살고 부족들은 수많은 자신들의 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족, 기족, 개인별로 수많은 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신성神性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불식拂拭시킬 수는 없습니다. 유일신唯一神을 주장하는 교회는 포기했지만 <만물에 불성佛性이 있다> <누구나 다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불성을 주장하는 불교는 남아있었고, 노자老子의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을 받아들였습니다. 현대종교는 우상偶像입니다.

 

출애급기出埃及記에서 모세가 이집트에서 풀려나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돌에 새긴 십계명十誡命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없는 사이에 사람들은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였습니다. 황금송아지는 우상偶像입니다. 십계명은 우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를 짓고, 일요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는 십자가를 걸었습니다. 예수가 못박혀있는 십자가는 우상입니다. 황금송아지처럼 우상입니다. 불경을 가르치고, 읽고, 배우고, 좌선坐禪을 하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정진精進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불단佛壇에 부처님을 안치하고 3천배를 드리는 것은 우상입니다. 어리석고 약한 인간의 신관神觀은 유지하더라도 천당이니 지옥, 극락과 연옥 특히 부활, 윤회 등 내세관은 인간을 호도糊塗하는 거짓입니다. 법률용어로는 사기詐欺입니다. 불경의 극락과 연옥은 산스크리티어Sanskriti를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만들어낸 허구虛構입니다. 기독교의 천당과 지옥도 후세에 만들어낸 허상虛像입니다. 윤회와 부활도 거짓말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구원한다는 불교의 아미타불阿彌陀佛3,000년이 지나도 오지 않고, 기독교의 예수 재림再臨의 부활復活2,000년이 지나도 감감소식입니다. 사찰寺刹과 교회를 없애지는 못 해도, 종교를 없애지 못 해도 내세관來世觀은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흙으로 빚고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창조론은 없애야 합니다. 종교가 거짓말로 인류를 호도하여 인간생활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 좋은 예가 티베트인입니다. 불교가 중국에서 배척을 받아 티베트로 피신을 했는데, 티베트인들은 윤회를 믿고 현실을 비참하게 삽니다.

 

티베트인은 일생에 한 번은 성지순례聖地巡禮를 하는 것이 평생소망인데, 부처님을 모신 절이 있는 라싸까지 2,000Km를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며 갑니다. 6개월을 걸어 라싸에 도착하면 절 앞에서 부처님에게 10만배를 절합니다. 내세를 믿고 현세의 고통을 감내堪耐하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까? 현세에서는 고통스럽게 살더라도 내세에서는 왕으로 태어나 잘 살 수 있다면 현세의 고통은 참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승려僧侶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묵언默言을 하거나, 달마조사達摩祖師처럼 면벽面壁 9년을 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차돈, 김대건신부처럼 순교殉敎를 하거나, 손가락을 태우는 공양供養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상이나 이념 때문에 목숨을 포기한다는 생각은 인권의 가장 기본입니다. 여순반란은 사상이나 이념 때문에, 우상偶像 때문에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 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가치있는 사상이나 이념은 없습니다.

 

중세中世의 십자군전쟁, 면죄부免罪符, 마녀魔女사냥 등 종교는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고 부정적인 일들을 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종교의 갈등으로 인해 전쟁이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죽어갑니다. 이념이나 사상, 종교가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은 사라져야 합니다. 내세가 있고, 환생을 할 수 있다면 순교도 이해됩니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보면 분신공양焚身供養을 합니다. 이슬람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겠다고 들어갔다가 참수斬首를 당한 청년도 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포피包皮(할례 때 잘라낸 살껍질)라는 해괴망칙한 것을 서로 빼앗아가고 숨기면서 추앙합니다. 성물聖物이라면서 신도들은 그 포피를 보관한 상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포피는 유태인들이 하는 할례割禮 때 잘라낸 남자생식기生殖器 귀두龜頭의 살껍질입니다. 중세中世의 기사騎士들은 성배聖杯를 찾는다고 일생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열반涅槃했을 때 남긴 치아齒牙를 성물聖物로 여기고 탑을 지어 보관하며 추앙합니다. 사리탑舍利塔을 세우고 사리함을 모셔놓고 부처님 모시 듯 기도를 합니다. 신도들은 그 탑 앞에서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빌며 기원을 합니다. <땅끝까지 기독교가 전파되는 날이 이 지구촌이 천당이 되는 날>이라고 믿는 맹신도盲信徒의 참상慘狀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무속과 무당을 이단異端시하며 미신, 사이비종교라고 배척합니다. 구약성경은 유태민족猶太民族의 역사서입니다. 그런데 그걸 성경聖經이라 이름을 붙여놓고 다른 나라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 모시 듯 합니다. 아프리카의 케냐사람도 한국사람도 신주神主단지 모시 듯 합니다. 먼 나라 남의 민족역사서를 마치 신성한 자기네 족보族譜처럼 신성시神聖視합니다.

 

 

해설사 : 확신이 없다고 하면서 종교를 문화로 대체代替해야 한다는 이유는 무엇 입니까?

도깨비기자 : 백양사 주지스님의 말을 듣고 천도제薦導祭를 올렸습니다. 추석과 설 명절에는 3대조代祖까지 차례를 모십니다. 우리 조상만 명절에 물밥 한 숟가 락도 못 얻어 먹고 구천九天을 해매는가 하는 자격지심自激之心에서 추석과 설 에 차례를 지냅니 다. 그리고 운명과 초자연현상超自然現象에 대한 풀지 못 하 는 회의懷疑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해설사 :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입니까?

도깨비기자 : 신은 없다. 신은 우상이다. 종교는 허상이다. 몇 년 전 보수단체집 회에서 종교단체의 회장이라는 어떤 목사가 하나님, 너 까불지 마. 하나님 너 까불면 나한테 죽어!’ 라고 했을 때 불경不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임종시 한 신도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묻자, 자기 가슴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면서도 추기경은 미사Missa를 드릴 때는 가슴에 십 자가를 그으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외었습니다.

해설사 : 노자의 무위자연설을 주장하고, 동학의 인내천사상으로 신과 종교를 대

代替할 수 있겠습니까?

도깨비기자 : 신과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라 없애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바꿔야합 니다. 종교개혁이지요. 중세中世 서양에서 면죄부免罪符를 팔고, 마녀魔女사냥을 할 때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의 기치旗幟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신을 믿어도 좋습니다. 기복신앙祈福信仰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상화해서는 안 됩니다. 창조론은 도태淘汰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쳐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천당과 지옥은 없습니다. 극락과 연옥도 없습니다. 윤회 와 부활도 없습니다. 고조선古朝鮮의 천부경이 우리민족의 종교입니다. 동학東 學의 원리原理이며 천도교天道敎의 이상理想니다. 그러나 천부경도 동학에서 는 이념이나 사상으로 건전하였으나 천도교화 하면서 교주敎主를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천부경의 교리는 인내천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입니다.

 

 

# 천부경天符經

(한얼교 민족성전民族聖典 신정일申正一 법통法統의 저작著作 발췌, 윤색潤索)

 

일시무一始無 이며 시일始一 하여

석삼극析三極 하나 무진본無盡本이니

천일 하나天一一이며

지일 둘地一二이며

인일 셋人一三이며

일적십거一積十鉅

무궤화삼無匱化三하니

 

하나는 없음에서 시작이 되고

시작은 하나이나 쪼개면 셋이며

그 근본은 다 함이 없나니

하늘 하나는 곧 첫째이며

땅 하나는 둘째이며

사람 하나는 셋째이며

하나에서 모이여 큰 열로 되나

끝없는 큰 것도 셋으로 다 화하느니라

 

천이삼天二三이요

지이삼地二三이요

인이삼人二三이니라

대삼합大三合으로써

육생六生이요

칠팔구운七八九運하나

삼사성환三四成環이니

오칠일묘연五七一妙衍으로

 

하늘이 둘로써 셋이며

땅이 둘로써 셋이며

사람이 들로써 셋이나니

큰 셋이 합하여 여섯을 놓아

칠팔구로 움직여

셋과 넷으로 이루어 돌아오니

오칠일로 묘연하니라

 

만왕만래萬往萬來하나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이니라

 

만 번 가고 만 번 와서

쓰기는 변하나 근본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본심본태양本心本太陽이요

앙명인昻明人하여

인중천지人中天地하니

일종무一終無이며

종일終一하느니라

 

근본 마음이 곧 태양이니

우럴어 사람을 밝게하며

사람 가운데 하늘과 땅이 있느니라

하나는 없음에 돌아가나

끝나서 하나이니라

 

 

· 본문과 해설

 

일시무一始無

하나()는 없음()에서 시작하니, 하나라는 것은 곧 하나가 아니며, 없음 또한 없음이 아니며, 시작은 곧 시작이 아닌 바이니라

 

시일석삼극始一析三極

시작은 하나이나 쪼개면 셋이나니, 하나는 곧 셋이며, 셋은 곧 하나이니라

 

무진본無盡本

없음()은 다 하고, 다 하여도 뿌리()가 되나니, 모든 만물의 원인이며, 다 함이 없는 무진(無盡)의 근본(根本)이니라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

() 은 하나로써 일 ()이며, ()는 하나로써 이()이며, ()은 하나로써 삼()이니, · · (天地人)이 그 실()은 하나이며, 곧 셋이 됨을 더욱 밝히니라

 

일적십거一積十鉅 무궤화삼無匱化三

하나에서 모여 열이 되나, 하나는 곧 삼()인고로

()은 곧 삼십(三十)이 되느니라

없음의 궤()함은 곧 다시 삼()에 돌아가니, 삼은 모든 변화의 근본이니라, 나아가 삼십(三十)이 곧 천 · · (天地人) 근본 변화의 법칙이니라

 

천이삼天二三 지이삼地二三 인이삼人二三

천일이 있으며, 천이가 있으며, 천삼이 있으며, 지일이 있으며, 지이가 있으며, 지삼이 있나니, 그러므로 천즉삼이요, 지즉삼이며, 인즉삼이니라

천일은 양천(陽天)이요, 천이는 음천(陰天)이요, 천삼은 중천(中天)이니, 지와 인도 그와 같음이니라

 

대삼합大三合 육생六生

모든 것이 셋으로 조립(組立)하여 합()하되, 기본 여섯으로 생하나니, 여섯은 천삼과 지삼으로써, 천지삼삼(天地三三)으로 하여, 만물과 인간이 생하는 바니, 부동(不動)의 기()이요, 불변(不變)의 원천(原泉)이므로 육()에서 생()함이 하느니라

 

칠팔구운七八九運

육에서 생하되 성장하나니, 그 법칙은 일, , 삼이므로, 육에서 일을 더하니 칠이요, 육에 이를 더하니 팔이요, 육에 삼을 더하니 구이니라

육에서 일어나 칠, , 구로 움직여 나아가며, 다섯 번 반복하여 움직여 십적궤화삼되어 삼십에 마침이니라

 

삼사성환三四成環 오칠일묘연五七一妙衍

삼을 이룬 천 · · (天地人)이 네 번 거듭되어 이루려는 바가 돌아가 마쳐지고, 다시 다섯 번 거듭되는 때 칠이 되어 일로 돌아가 묘연해지느니라

육에서 한 번 이룬 바가 십이에서 굳혀지고, 십오에서 머물며, 십육에서 다시 일로 시작되며, 생기운을 얻느니라

 

만왕만래萬往萬來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만 번 가고 만 번 와서 쓰기는 변하나 근본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그야말로 바다 파도의 물방울이 만 번 일었다 만 번 없어져도 바다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 할 것이다

 

본심본태양本心本太陽

이 일()이 사람에 있어서는 본래의 마음인 동시에 성품이며, 우주에 있어서는 근본의 태양이니라

태양이 우주의 한가운데 있어, 밝게 광명을 비추어, 우주 안의 모든 것이 그 빛으로 환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의 본 마음자리가 바로 미묘하고 말할 수 없는 부동본의 자리이고, 바로 일()인 광식체(光識體)인 것이니라

 

앙명인昻明人 인중천지人中天地

태양 즉 본심이 사람 가운데에서 밝아야 하늘과 땅을 하나로 하느니라

다시 말하여 천 · · (天地人)을 태양이자 마음의 하나로 다시 귀일(歸一)시키며, 하나에서 셋으로 나눈 바를 다시 거두어들였으되, 그 공()은 우주에 있어서는 태양에 있으며, 사람에 있어서는 마음에 있느니라

 

일종무一終無 종일終一

하나()는 없음에 돌아가나 끝나서 하나()이니라

이것은 본래 시()와 종()은 한뜻이며, 있음과 없음은 한뜻이니, 어디서 시작되든 돌아가는 자리는 곧 일()이고, 그 자리는 마쳤다 또는 마침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일()인 것임을 나타낸 것이니라.

 

 

도깨비기자 : 천부경은 자연순리를 말하고, 동학처럼 인내천을 주장합니다.

해설사 : 천도교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종교지요?

도깨비기자 : 천부경의 교리에 따라 인내천을 주장하며, 특히 서학 천주교에 대비하여 동학이라고 말한 종교입니다. 기독교와 불교를 생각하다가 동학 東學을 만났습니다.

 

 

# 동학은 서학西學 즉 기독교에 대비한 말로써 천부경을 경전으로 합니다. 천부경은 인내천人乃天을 표방標榜합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입니다. 성경의 하나님도, 자신의 모습을 유추類推하여 흙으로 빚고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이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인간이다>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세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시하면서 우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천부경은 우주생성의 순리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풀었습니다. 우주생성과 삶의 순리를 깨닫지 못 한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깨달음을 위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음양오행설은 우주순리를 말하는데, 순리대로 살아라는 뜻, 우주순리는 신이나 인간이 지배하거나 통제하거나 거스리지 못 합니다. 천부경은 천기를 설명한 민족경전입니다. 메시아든, 미륵彌勒부처든, 천부경의 인내천사상이든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민족의 한사상(= 밝은, 환한, , 하나)의 민족사상입니다. 사상도 이념도 종교화하면 우상이 됩니다. 북한이 공산주의를 표방標榜하다가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을 만들어 김일성을 신격화神格化하였습니다. 사상과 이념의 우상화입니다.

 

종교는 원시原始 인류의 동굴시대 - 짐승털을 입고 사냥하던 시대에 원시신앙으로 발생하여, 인공위성人工衛星으로 화성火星에 가는 21세기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천당 지옥, 그리고 <세상만물은 모두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극락 연옥煉獄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천당과 지옥을 상정想定해서 사람을 속입니다. 변화와 개혁을 해야 합니다. 종교는 문화입니다,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천부경은 민족경전으로 우주의 원리와 천지창조 그리고 천지인의 생성과 운행을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풀이한 내용으로써, 인내천사상의 요체要諦 - 사람이 곧 하늘, 사람이 하느님이다(동학東學, 천도교天道敎의 교리敎理)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부경이 교리敎理가 되고 동학교주가 신격화된 것은 기독교와 다름없는 우상화偶像化고 미신迷信이 되어버렸습니다. 불교도 누구나 다 - <세상만물이 불성佛性을 지녔으므로 깨달으면 모두 부처님이다>라고 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 후 석가모니와 부처님들을 신격화神格化한 것은 역시 우상화고 미신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우상화요 미신입니다. 사이비似而非종교가 따로 없습니다. 미신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형상화形象化하면 미신이 됩니다. 참종교와 사이비似而非종교가 따로 없다는 말입니다. 종교의 진리를 왜곡하고 형상화해서 인류를 호도합니다. 불교는 자비慈悲를 바탕으로 한 이념인데 절을 짓고 부처님을 안치安置하면 우상화 미신이 됩니다. 사랑을 주창하는 기독교가 교회를 건설하고 십자가를 세우고 예수상을 안치하면 우상화 미신이 됩니다. 우상화 미신의 폐해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만큼 큽니다. 인간에게는 자연현상을 극복할 수 없고, 마음과 몸이 약한만큼 절대자絶對者에게 의존하는 원초적原初的 심리현상이 있습니다. 본능입니다. 종교가 여기에서 태동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인류 창세기부터 인간을 호도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원천적인 종교는 인간의 정신과 역사를 지배했으므로 단절이 어렵습니다. 원천적이므로 단절할 수가 없습니다. 또 단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과학으로, 아폴로Apollo 11호가 달에 착륙하여 신의 영역이 추락했음에도 인간에게 신의 존재는 배제排除될 수 없습니다. 항아姮娥와 옥토끼신화가 사라졌어도, 신의 존재가 없음에도 신을 인간에게서 몰아낼 수가 없습니다. 종교로써의 신이 아니라 인류 인격수양의 가치로써 신은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의 약한 의지의 의탁依託으로써, 불공佛供을 드리고 삼천배를 하며,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며, 하늘을 우럴어 통한痛恨의 기원祈願을 하는, 하루 세 번 알라를 향해 무릎을 꿇는 종교는 사라져야 합니다. 종교가 사람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사람이 종교를 기호嗜好처럼, 축제祝祭처럼 즐기는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해설사 : 말씀은 알겠는데 그 게 가능할까요?

도깨비기자 : 또한 신과 종교, 죽음에 대하여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 백지설 白紙說,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등을 연관짓다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심취心趣되었습니다. 성선 성악은 틀렸습니다. 사람은 태어나 면서 백지상태입니다. 존 로크J. Locke의 백지설白紙說Tabula Rasa입니다. 세포 細胞가 자라서 사람이 되었는데, 세포에 어찌 성선 성악이 있겠습니까. 유전자 遺傳子 디엔에이DNA도 후천적요인입니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慈悲, 공 자의 인은 사람이 살아가야할 지표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를 숭상하거나 신 격화하면 옳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착하게 살아라> 하는 것과 같습 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 - 자연일뿐입니다. 창조론은 신앙의 대상을 신격화하 기 위한 거짓입니다.

해설사 : 진화론으로 인류의 탄생을 설명하지 못 하는 걸로 아는데요. 침팬지가 진화되어 인류가 탄생했다면, 왜 다른 종들은 진화되지 않았을까요? 새나 짐승 그리고 벌레들도 진화가 이루어졌어야 하지 않습니까?

도깨비기자 : 진화론이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진화과정이 단계적으로 들어나지 않 았습니다. 그러나 창조론이 허위라는 건 확실합니다. 신이 없으니까 신이 인 류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건 명백합니다. 우주의 탄생이 빅뱅BigBang이론으로 가정假定된다면, 인류의 탄생은 침팬지의 진화에서 돌연변이突然變異일 수도 있습니다. 빅뱅처럼말입니다. 그런면에서 노자의 도덕경은 진화에 대한 답변 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따르면, 는 만물을 생성, 변화하게 하는 근본원리이고, 은 도를 지키고 따르는 것입니다. 노자가 <도는 곧 자연自然>이라고 한데에서 <덕은 자연을 따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노자는 덕을 상덕上德과 하덕下德으로 구분하였으며, 상덕이 유지되는 상태를 <소박素朴>이라고 하였는데, 소박이란 어떤 꾸밈도 없는 존재 자체의 순수함을 뜻합니다. 노자철학의 원리는 상선약수上善若水 -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되 앞뒤를 다투지 않고 만물을 이롭게 한다와 무위자연無爲自然 - 자연의 순리로 요약됩니다.

 

 

# 우주宇宙 - 혼돈混沌과 생성生成

 

혼돈 에서 유가 생겨났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나타났습니다. 생성 - 암흑에서 빛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우주생성의 원리를 말합니다. 천부경의 논리입니다. 성경에서도 우주창세의 원리를 <>으로 설명합니다(요한복은 제 11). 현대과학으로 규명糾明한 우주는, 아무 것도 없는 혼돈에서 반짝하는 빛처럼, 애초에 설명할 수 없는 미세微細한 현상이 일어나 분열分裂하여 끝없이 팽창하는 중이며, 현대과학 - 천체망원경으로 보는 우주는 단위單位로써 은하계銀河界가 존재하는데, 우리 지구은하계는 - 수천억 개 은하계의 하나이고, 은하계의 수천억 개의 태양계의 하나이며, 그 태양계의 수천억 개의 별 중 하나입니다. 중세中世시대에는 태양계를 우주로 생각하고, 항성恒星인 지구, 금성, 화성 등을 근거로 우주를 설명했으며, 별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북두칠성, 북극성, 오리온자리, 전갈자리 그리고 혜성彗星 등 눈에 보이는 별을 단위로 우주를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별들 중 하나에 하늘나라가 있고 하나님이나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살았습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서는 우주는 마치 태풍颱風의 핵처럼, 커다란 소용돌이 같은 존재로 계속 팽창하고 있으며 무한대無限大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3차원에서 사는 인간의 인식이나 상상력으로 <끝이 없다>는 무한대논리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 안에 별들이 끝없이 생성되고, 은하계를 만들고, 불랙홀Black Hole(검은 구멍)이 있고, 수천억 개의 별로 형성된 수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습니다. 삼차원三次元(= 1차원, = 2차원, 공간空間, 입체立體 = 3차원, 시간時間 = 4차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4차원의 세계를 상정想定했으나 이론으로만 존재함, 5차원, 6차원 ……의 세계가 열릴 수도 있음>의 세계에서 살고있는 인간으로써, 무한의 팽창은 이해 밖의, 상상 밖의 세계입니다. 무한대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게는 무리입니다. 3차원에서 사는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도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 외 세계입니다. 우주의 자연현상은 8 작은 인간에게는, 140억 개의 두뇌頭腦세포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불가사의不可思議입니다. 여기에서 신이 등장합니다. 우주의 자연현상의 순리가 아니고 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간이 탄생하고부터 이어져왔습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신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합니다. 현대과학의 힘으로 신을 부정하지만 신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을 이념화 형상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의 섭리攝理를 인간이 상상하는 자연현상으로 이해하고 살아야 합니다.

 

고대古代의 신은 하늘, 태양, 달과 천둥, 우레, 번개와 높은 산, 거암거석巨巖巨石, 당산堂山나무 심지어는 호랑이(중국인 토템Totem 사상), (만주인 토템사상)도 신이었습니다. 단군신화에서 호랑이와 곰은 시조신始祖神입니다. 근대에서는 영웅도 신입니다. 삼국지의 관우, 충무공 이순신장군, 순절殉節한 기생 논개도 사당祠堂에 모셔졌습니다. 나폴레옹과 알렉산더도, 케이사르도 신격화神格化되었습니다. 조상祖上은 모두 신입니다. 그리스 로마신화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조왕신竈王神(부엌신)을 비롯하여 성주신星主神(대들보신), 삼신三神(출생신, 삼신할머니, 삼시랑) 등 수많은 신이 있고, 해신海神, 용왕신龍王神, 마마신, 보살신 그리고 처녀귀신, 몽달귀신, 채왈귀신 등 귀신도 많습니다. 도깨비도 있습니다. 숲속에는 요정妖精이 살고, 하늘나라에는 가브리엘 대천사大天使가 하나님 곁에서 보좌하고, 달에는 항아姮娥라는 선녀仙女가 삽니다. 세계 각국 각 민족마다 수많은 신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가족신, 자기의 신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수보다 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붙여 사주팔자, 관상, 풍수, 무당, 점쟁이도 있습니다. 신과 종교는 인류창세와 연륜이 같습니다. 특히 일본은 신이 많은 나라입니다. 신사神社에는 그들의 수많은 신 - 건국신建國神으로부터 조상신, 전쟁신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장군도 신사에 모셔져 있습니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도 신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만물에 불성이 있는 것처럼 세상만물이 신입니다.

 

신이란 개념 자체가 원시적입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미지의 세계가 과학적으로 발현發顯되고 있는데, 종교는 아직도 네안델타르인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화성火星에 인공위성이 착륙하는 세상에, 종교는 토굴土窟속에서 짐승털을 몸에 걸치고 사냥하며 살았던 원시시대나 현대 첨단과학문명의 시대에서나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어느 별에 계신지도 모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여 하늘을 우럴어 기원祈願하고,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합장合掌을 합니다. 은 하늘이 내렸고, 전쟁도 하늘의 뜻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 별이 됩니다. 사람을 제물祭物로 바치는 풍습은 사라졌으나, 제단에 제물을 올리고 절을 하는 습속習俗- 짐승털을 걸치고 다녔던 원시시대나 인공위성이 화성을 탐사하는 지금이나 그대로입니다.

 

 

도깨비기자 : 신과 여자를 생각하다가 연관된 운명론과 몇 개의 영적靈的인 체험 을 했습니다. 탕자蕩子가 되었어도 신과 귀신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습니다. 초자연현상超自然現象을 신의 섭리攝理로 생각했습니다.

해설사 : 영적인 체험이라면 무당이나 점쟁이 혹은 퇴마사退魔師 그리고 잠재능력 을 불러내서 이전 기억을 재생하거나 시간여행을 하는 최면술催眠術이야기입 니까?

도깨비기자 : 나중에 생각하니 동물적육감 같은 체험도 연관이 되고 ……. 운명이 라는 말은 어떤 사태에 대한 말일 뿐이고. 그걸 신이나 미신에 연관시키는 건 나중에 생각하니 허상虛像이었습니다.

 

 

# 운명運命과 사주팔자四柱八字 - 초자연현상 (1)

 

탈레반Taleban이 뉴욕New York City 110층 쌍둥이빌딩을 비행기로 자폭自爆했습니다. 3,000여 명이 희생되었는데 모두 같은 사주팔자, 한 날 한 시에 죽는다는 운명을 타고났을까요? 세월호는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는 학생 400여 명을 수장水葬했습니다. 그 꽃 같은 아이들이, 생때같은 아이들이 왜 한 날 한 시에 죽었어야 했는가요? 이것도 전지전능全知全能 한 신의 뜻입니까? 신의 장난입니까? 신의 놀음입니까? 그리스신화에서도 신들은 짓궂은 장난을 합니다.

 

기독교는 천당과 지옥을, 불교는 극락과 연옥을, 도교道敎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암시暗示합니다. 티베트Tibet에는 샹그릴라Shangri - La가 있고, 토마스 모어 Thomas More, St.는 유토피아Utopia를 희구希求했습니다. 중국인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Messiah 구원자救援者, 해방자解放者)2,000년이 넘어가도 감감소식이고, 부활復活도 휴거携擧도 없습니다. 108번뇌煩惱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미륵彌勒부처는 3,000년이 지나도 오실 징조徵兆도 없습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가 1224일 자정子正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啓示錄에 계시되었다고 하여 초미焦眉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신도들은 흰옷을 입고, 손뼉을 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하늘로 승천昇天할 자정子正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온 국민과 언론사 등의 집중취재에도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다미선교회는 스스로 해체를 선포하였습니다. 미륵부처는 3,000년이 지났는데 극락세상은 아직도 꿈입니다. 이집트인들은 환생還生을 믿고 미이라Mummy를 만들었는데 3,000여 년 간 환생한 왕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석가모니 부처, 마호메트는 모두 우상입니다. 초월超越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선각자先覺者이거나 선지자先知者였을 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불교는 석가를 신격화하여 세상을 호도하는 사이비종교와 다름이 없습니다. 내세를 믿는 티베트, 미얀마사람들은 현세를 비참하게 삽니다. 못 먹고 헐벗고 짐승처럼 삽니다. 그래도 내세를 믿고 행복합니다. 이 생은 어렵고 고통 속에서 살지만 다음 생에서는 훌륭한 사람으로 태어나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지구촌 행복지수 1위입니다. 혹세무민惑世誣民입니다. 미신이라고 하는 토속신앙과 무엇이 다른가요? 어디까지가 미신이고 무엇이 우상인가요? 종교가 기원祈願을 하는 것은 인정합니다. 기복신앙祈福信仰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本性입니다. 그러나 내세, 천당, 윤회는 호도糊塗입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희귀병稀貴病에 걸려 신음呻吟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원죄原罪입니까 불교의 업보業報입니까? 나쁜 사람이 천벌天罰을 받는다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천형天刑이라는 한센Leprosy병에 걸린 환자는 살면서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살이 썩어서 문드러져 나가는 벌을 받는 것입니까? 한하운 시인詩人<전라도길>이라는 시에서, 걷다보면 발가락이 한 개 떨어져나가고, 잠자고 일어나 머리를 빗다보면 손가락이 하나 없어졌다고 읊었습니다. 젊은시절 <황토길>이라는 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문둥이들이 많았습니다. 얼굴을 헝겊으로 싸매고 다니며 구걸求乞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서 피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문둥병이 옮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흥 소록도에 한센병환자를 집단수용하고는 구걸하는 문둥이들이 사라졌습니다. 문둥이라는 말은 살이 문드러져 코나 귀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루 세 번씩 메카Mecca를 향해 절을 하는, 대단한 종교력을 가진 중동의 이슬람Islam의 탈레반Taleban, 110층 세계무역센터를 여객기로 들이받아 3,000여 명을 희생시켰습니다. <알라Allah의 뜻>이라면서 전쟁을 일으켜 살상을 일삼고, 테러Terror를 자행하고, 자살폭탄으로 사람들을 살상하고, 하루도 전쟁과 분쟁을 멈추지 않습니다. 아예 이슬람의 교본敎本인 코란Koran, Qur'an<한 손에 코란 한 손에는 칼>을 강령綱領으로 이미지Image화 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전쟁을 추구합니다. 전쟁은 인류가 벌이는 일에서 가장 추악한 행위입니다. 미얀마Myanma에서는 군사쿠테타로 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여,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총칼로 살상합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유엔UN, 세계경찰국가 미국도 나서지 않습니다. 교황敎皇이 직접 나서서 미얀마 민중의 앞장에서면 무고한 민중들이 살상을 면할텐데,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을 외치는 교황은 바티칸에 들어앉아 하나님께 기도만 올리고 있습니다. 종교는 세계평화 인간행복을 외치지만 중세의 십자군전쟁, 마녀魔女사냥, 면죄부 판매 등 많은 사악邪惡한 일을 저지르고, 현대에서는 끊임없이 영토분쟁, 사상이념투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파괴하고, 인성을 피폐롭게 합니다. 메시아Mesia, 미륵彌勒부처를 표방하며, 내세, 윤회를 외치면서 현실을 피폐롭게 호도합니다. 종교가, 신이 인류를 구원하는가요?

 

 

# - 초자연현상 (2)

 

국민학교 5학년 때 쯤, 마을 앞산이 해거름 어둠으로 덮여지고 있었는데 멀리 선산先山자락의 커다란 소나무 옆에 하얀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샘골 치자나무거리에 채왈(차일遮日)귀신이 산다고 해가 지면 얼씬거리지도 못 할 때였습니다. 채왈귀신은 어둠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채왈로 몸을 깜싸서 잡아갑니다.

 

여름철 해거름에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느닷없이 쟁반만한 붉은 불덩어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습니다. 할머니가 옷을 데릴 때 사용하는 데루 닮았습니다. 깜짝 놀라 할머니에게 소리쳤더니 뒤늦게 나온 할머니가 혼불이라고 했습니다. 며칠 안으로 동네 누군가 죽을 거라고도 했습니다. 혼불은 죽을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머리는 오렌지색인데 쟁반만 하고, 푸르스름한 짧은 꼬리가 달린 혼불은 하늘을 가로질러 선산 옆 산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더니 스물스믈 사라졌습니다. 혼불이 떨어진 곳은 명당明堂이라고 합니다.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여름, 숙직宿直 차례가 되어 저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직 해가 남았으므로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오겠다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침 어머니가 들일을 나가버려서 기다리다가 늦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되돌아가려는 때는 이미 어둠이 앞산을 가리운 때였고, 이슬비까지 내렸습니다. 근무지까지는 낮은 산을 세 개나 넘어가야 합니다. 저수지를 지나 절골로 들어서서 산을 하나 올라 산 정상에 섰는데, 멀리 갈 길 앞에 쟁반만한 불덩어리가 보였습니다. 국민학생 때부터 넘나들었던 산길이어서 별 두려움 없이 넘었는데, 불덩어리를 보는 순간 머리끝이 쭈뼛하게 서고 등골이 서늘해지며 몸이 굳어버렸습니다. 순간적으로, 집으로 되돌아가느냐 그냥 앞으로 가느냐를 판단했는데, 집으로 되돌아가기가 더 두려워서 가기로 작정하고 냅다 뛰었습니다. 앞길은 작은 산을 두 개 더 넘어야 했습니다. 오솔길에는 어린시절 학교에 다닐 때 겪었던 북소리가 나는 쌍묘雙墓도 있고 낮은 산이라더라도 산을 3개나 넘어야 합니다. 너무 방심했던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그저 앞만 보고 냅다 뛰었습니다. 갈수록 불덩어리는 점점 더 커졌습니다. 함지박만하게 커진 불덩어리가 좌우로 움찔거리고 있었습니다. 하필 불덩어리가 움직이는 곳은 예전에 공동묘지였습니다. 근래 묘지를 밭으로 개간開墾한 곳입니다. 애초에 불덩어리는 길 복판에 있는 것 같았는데 가까이 가면서 보니 길 아래 공동묘지였습니다. 그냥 숨도 쉬지 않고 뛰었습니다. 숙직실에 들어서니 숙직 교대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급사아이가 놀랐습니다. 몸은 감각이 없고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아마 얼굴은 사색死色이었을 것입니다. 공동묘지를 개간하였기 때문에 인골人骨의 인 성분이 뭉쳐서 인불덩어리를 만든 것인데, 도깨비불로 알고 놀랐던 것이나 설사 도깨비불이라고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 돌담 무너지는 소리 - 초자연현상 (3)

 

외지外地로 전출轉出되어 보성 득량 근무 때, 과수원집에 방을 한 칸 얻어 잠을 잤습니다. 하숙집도 없어서 밥은 주막에서 먹고 과수원집에서는 잠만 잤지요. 주막이라 술손님을 맞느라 저녁밥은 늘 늦었습니다. 과수원집은 마을과 꽤 떨어진 곳이라 늦은 저녁을 먹고 돌아오면 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촛불을 켜고 살았는데, 난방暖房은 연탄아궁이었습니다. 가끔 연탄불 때를 맞추지 못 해 밤중에 연탄을 갈아야 할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자정이 가까웠을 시간에 촛불을 들고 나가 연탄을 갈려고 하는데 부엌에 세워놓은 촛불이 휙! 하고 스치는 바람에 꺼져버렸습니다. 등골이 써늘하고 무서움증이 엄습掩襲했습니다. 연탄을 가는둥 마는둥 두꺼비집도 덮지 못 하고 방으로 뛰쳐들어와버렸습니다.

 

과수원집에서 사는 동안 클래식Classic 음악에 심취했습니다. 베토벤Beethoven 이나 모차르트Mozart도 들었지만 특히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신세계新世界New World>를 이해하려고 밤새 축음기蓄音機를 틀었습니다. 몇 달 간 계속 신세계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초저녁에 음판을 틀면 새벽까지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깜깜한 밤중인데 봉창문封窓門 뒷 돌담이 와그르르! 와그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비바람도 없는데? 하고 생각은 했지만 음악에 심취해서 잊어버렸는데, 아침에 우연히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뒤편 돌담에 가보았는데 돌담은 돌 하나 무너지지 않고 멀쩡했습니다. 주인아저씨를 불러내 어젯밤 일을 말했더니 아저씨는, 비가 오려거나 날씨가 꿈틀거리면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고 웃었습니다. 집터가 옛 도살장屠殺場이어서 그런다고 했습니다. 과수원집에서는 오래 살지 못 하고 방을 옮겼습니다.

 

 

# 도깨비 - 초자연현상 (4)

 

신안 임자도의 이흑암리는 도서벽지島嶼僻地입니다. 앞 바다가 신안보물선이 가라앉아 있는 곳이어서 늘 하얀 감시선이 닻을 내리고 주둔駐屯했습니다. 발령을 받았을 때는 보물선이 알려져 아무나 도자기를 건져내지 못 했지만, 학부형 한 사람은 몰래 머구리를 고용해서 보물을 건져올리고 있었습니다. 보물을 건져 팔아 이층집을 짓고, 신형 오토바이를 사서 스피커를 달아 크게 틀고 다녔으므로 이름이 꽤 알려졌습니다. 목포의 다방 아가씨를 첩으로 삼아 동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머구리에게 주는 일당日當이 아까워서 직접 잠수복潛水服을 입고 보물을 건져내다가, 배가 오는 걸 감시선으로 착각한 동료가 머구리 공기주입을 멈추고 달아나버려서 물속에서 폐가 터져 죽었습니다. 이흑암리 사람들은 몇 년 전까지도 그물에 도자기가 올라오면 바다에 던져버리거나, 집에 가져와 개밥그릇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소문에 임자도 사람들은 집에 보물 몇 개씩은 감추고 있을 거라고 합니다.

 

임자도 이흑암리 관사館舍는 밭 한쪽에 지어진 브로크집이었고 밭에는 갓 지은 봉분封墳이 있었습니다. 꺼림칙했지만 직장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있어 관사에서 살았습니다. 관사라 해봐야 브로크벽돌로 비바람만 들이치지 않게 지은 날림집입니다. 아궁이에 솔가지를 태워 난방을 하는데 구들이 얇아 딱 밤중에 한 번씩은 군불을 때야 했습니다. 군불을 때려고 부엌으로 갔는데 성냥불을 켜자 요상한 바람이 휙! 스치면 성냥불이 꺼져버렸습니다. 몇 번이고 계속 성냥을 켜면 불이 꺼졌습니다. 군불을 때는 걸 포기하고 찬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잤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지 얼마지 않은 때,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놀라 깨어났습니다. 방안에 연기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서 살았습니다. 구들이 얇은 방에 군불을 너무 많이 넣어 비닐장판이 누렇게 타서 흐믈흐믈 녹아내렸습니다. 숨이 막혀 문을 박차고 나와 한참 정신을 차린 담에야 물을 가져와 방안에 들이부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깬 것은 꿈이었습니다. 꿈에 시커먼 털이 숭숭난 도깨비 같은 것이 목을 졸랐습니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 숨이 막혀 뿌리치고 깨어난 것이 꿈이었고 목숨을 살렸습니다. 도깨비는 마당 앞 무덤과 관계가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때는 미쳐 생각지 못 했는데, 무덤에 술 한 잔 올렸어야 하는데 무심했다고 후회합니다.

 

 

해설사 : 그런 체험을 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깨비기자 : 신비한 일이라 신의 섭리攝理라고 생각할 수 밖에요.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성인聖人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게도 하나같이 신비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초자연현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자연현상일 뿐입니다. 인간 은 잃어버린 동물적 육감六感입니다.

 

 

# 석가모니釋迦牟尼는 태어나자 말자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외치며 일곱 걸음을 걸었다고 합니다. <깨달으면 다 부처님이다> <만물에 불성이 있다>라는 불교의 논리와 배치背馳됩니다. 이슬람의 마호메트도 <유일신唯一神 알라>를 숭앙합니다. 세상 모든 종교가 교주敎主를 신으로 받들면서 다른 종교는 배척排斥합니다. 우상화입니다. 나 외에는 모두 미신迷信이요 이단異端입니다. 그리고 종교갈등은 전쟁과 테러로 지구촌의 공존과 평화를 깨뜨리고, 인류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예수가 말한 <사랑>이나 석가모니가 바라던 <자비慈悲>가 사라지고, 공자가 주창한 <>도 왜곡歪曲되었습니다. 정치철학(생활철학)을 신격화했습니다. 마호메트Muhammad<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을 들고 알라를 외칩니다. 인간의 우상화가 지구촌의 종교를 지배합니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천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뜻이므로 세상 종교에서 가장 현실적인 이념인데, 그것이 사람(교주敎主)으로 들어가면 우상화가 됩니다.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트,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 박중빈이 모두 우상화되었습니다. 인내천을 표방하는 동학 천도교는 우상화되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사상, 이념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우상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도 미신도 귀신도 없습니다. 삼라만상參羅萬像이 우주의 순리順理로 살아갑니다. 천부경을 민족경전이라고 합니다. 신격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구촌에서 자기 경전을 가진 민족은 많지 않습니다. 유태인의 성경, 이슬람의 코란, 중국 공자의 유학儒學 등입니다. 공자의 유학은 정치철학입니다. 유학이 유교화 되면서 우상이 되었습니다. 천부경도 그 하나입니다. 이념과 사상으로 품고 살아야 합니다. 천부경이 동학이념으로 숭상되면 진리이나, 교주로 탈바꿈하면 우상이 됩니다. 종교화되면서 우상이 됩니다.

 

 

# 종교는 이 지구상에서 진화進化되지 않은 유일한 문명입니다. 마치 갈라파고스섬 Galápagos Islands의 이구아나Agua처럼 진화를 피하고 살아남아 원시시대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진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종교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신을 배제排除할 수도 없습니다. 나약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신은 인류창조 때부터 발상發想입니다. 그리고 인간세상은 신이 주관해왔습니다. 미신이라고 말하는 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종교는 믿든, 버리든, 바꾸든, 놔두고 집단적인 종교는 변화해야 합니다. 종교의 집단화, 패권화覇權化를 제어制御해야 합니다. 종교를 개인적인 인격수양의 대상으로, 신앙 혹은 이념이나 사상으로 한정해야 합니다. 수양기구로써 개인 인격도야人格陶冶의 수단으로 삼고, 기구祈求, 소원성취, 기원 등 기복신앙祈福信仰에서 배제되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신은 불가사의不可思議, 본능을 초월超越하고, 포기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폐단을 제어하기 위해서 종교의 변화와 진화를 도모해야 합니다. 인류생성과 같이 한 기복신앙이라 신과 종교의 폐기廢棄는 불가능합니다. 인성人性의 원천에 불가사의한 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이 자연 앞에 너무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라고 말하는 신 외에 사이비似而非라거나 민속, 무속巫俗이라는 민간신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성주신을 비롯해서 조왕신부터 삼신, 조상신 등 수천 수만의 신이 있습니다. 특히 신을 좋아하는 일본은 신의 나라입니다. 그들의 신사에는 수많은 신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집집마다 가족신단家族神壇이 있습니다. 바다에 나가는 어부의 아내는 신전에 가서 공물供物을 바치고 손뼉을 칩니다. 바닷가의 바위에도 금줄을 두르고 합장을 하며 손뼉을 칩니다. 원초적으로 인간에게 생명처럼 기생寄生하는 신과 종교를 어떻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먼저인지 신이 먼저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신과 인간은 밀착密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과 종교의 독선화獨善化, 집단화, 패권화覇權化는 막아야 합니다. 개인참배나 축제같은 의식儀式으로 즐기며 생활화로 전환하여, 개인적인 수양과 인격도야 또는 삶을 즐기는 수단, 축제의 장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초월적超越的인 형상 즉 우상으로 섬기지 않아야 합니다. 신이 인간을, 지구촌을 지배하면 미신이 됩니다. 사이비종교가 됩니다. 종교의 변화와 진화가 요청됩니다. 신은 없습니다. 기복신앙과 기원은 인류생활에 피해를 입힙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다는 말도, 별이 되었다는 말도 호도糊塗입니다. 우리 장례葬禮<별세別世>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났다는 표현입니다. 죽음에 대한 우리 표현에 별세를 비롯하여, 하세下世, 죽음, 사망, 서거逝去, 작고作故, 영면永眠, 절명絶命, 승하昇遐, 선종善終, 승천昇天, 열반涅槃, 타계他界, , 운명殞命 등 수십여 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신과 연계되지 않았습니다. 신과 연계는 부차적副次的입니다.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라고 합니다. 죽음 + 하늘나라인데 죽음으로 끝나야 할 일을 하늘나라라는 허상을 만들었습니다. 종교는 문화입니다,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수천 년 간 인류를 지배해온 종교를 축출逐出할 수 없습니다. 정적요인正的要因보다도 부적否的요인이 더 많다고 해도 인위적人爲的으로 축출逐出되지도 않습니다. 고대古代에는 제정일치祭政一致에 의해 통치자統治者는 하늘의 계시啓示를 받은 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신입니다. 중세에는 제정帝政 분리가 일어나 종교는 제왕帝王의 종속화從屬化되었습니다. 근대종교는 정치에서 도외시度外視되었습니다. 이렇게 종교가 변천變遷되어온 이유는 종교의 폐해가 컸기 때문입니다. 현대로 접어들어서 종교는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종교의 자유에 힘입어 권력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기복祈福신앙화 되어 인류에게 폐해가 큽니다. 종교는 문화입니다. 21세기에 발전하지 않은, 진화되지 못한 유일한 문명입니다. 종교는 우상화를 없애고, 기복신앙을 축출하고, 천당과 지옥 그리고 부활이나 윤회 등 내세관來世觀을 없애야 합니다. 교과서의 창조론은 기독교 세력화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집단화 패권화를 막아야 합니다. 거대한 교회를 지어 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없애고, 하루에 세 번 메카를 향해 <알라!>를 외치는 의식儀式을 버려야 합니다. 종교가 집단화되면서 종교전쟁이 유발되고, 종교는 권력화되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일본정치에 개입을 하고, 신천지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민중을 사주하여 부를 축적하고 거대한 종교왕국을 건설합니다. 불교처럼 개인적인 참배參拜제도를 도입해서, 인류의 구원이 아니라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민족의 민족보다 더 많은 신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달나라에 가고, 화성에 인공위성을 띄우는 21세기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외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에서 환생還生하여 또는 부활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망상妄想을 주입注入시켜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윤회나 부활은 식물의 한살이처럼 씨를 남겨 다음 세대로 재 탄생 - 부활하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창조론을 삭제해야 합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천지창조그림은 신화神話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예언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주는 축복이지 신이 내린 축복이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 게 아니라 마음의 평안의 얻습니다. <순천자흥順天者興 역천자망逆天者亡>은 순리順理를 말한 것이지, 마음의 평안을 말한 것이지 물성적物性的으로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악행惡行을 하면 삼대까지 벌을 받고 선행을 하면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가설假說도 허상虛像입니다. 종교는 문화다.

 

 

# 예지몽叡智夢 - 초자연현상 (5)

 

온 산이 철쭉밭처럼 벌겋게 물들인 꿈을 꾸었습니다. 한겨울에 무슨 꽃? 출근했는데, 공군연습기가 마을 앞 존재산에 추락하여 조종사 시신屍身이 나뭇가지에 널려있어서 군대軍隊를 동원하여 수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토요일은 <자유학습의 날>이어서 현장학습을 나갔습니다. 전날 밤 꿈을 꾸었는데 단청丹靑이 보였습니다. 조회朝會 때 현장학습 장소를 협의하였는데 읍내 향교鄕校가 선정되었습니다. 향교에 가보니 단청이 되어 있었습니다.

 

상복喪服을 입고 고리짝을 인 여인들 셋이 버스에서 내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출근하다가 꿈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대들보가 무너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약 한 달 뒤 병역兵役문제로 사표辭表를 썼습니다.

 

꿈에 여자, 특히 가까웠던 여자가 보이는 날은 땡을 칩니다. 가까웠던 여자가 나타나면 조심을 합니다. 더구나 그녀가 웃어버리면 그날은 외출도 삼가고 모든 일을 중단합니다.

 

40대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조마조마하지만 유쾌하게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양손을 날개삼아 하늘을 높이 날았습니다.

 

또 신발을 잃어버리거나 벌거벗은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해몽으로 보면 뭔가 욕구불만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판단합니다.

 

직장상사上司가 보이는 꿈은 대부분 실패의 꿈입니다. 충고와 자숙自肅으로 받아들입니다.

 

광주MBC 창작가요제 가사歌詞응모에서, 아이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주제로 가사를 썼는데 2등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소식을 듣기 사흘 전 꿈에 금화金貨 두 개를 얻었는데, 한 개가 반 쯤 스스르 녹아버렸습니다. 다음 날 수상소식을 들었고 수상시에는 상금에서 세금을 공제하고 주었습니다.

 

이런 꿈들을 예언적이라고 믿었고, 신과 연결하였는데 육감六感 같은 현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문화문명으로 육감을 잃었습니다. 철새는 철에 따라 수만 리 장정長征을 합니다. 연어는 나침판羅針板 없이 대양大洋을 거쳐 태어난 모천母川으로 회귀回歸합니다. 회귀가 아니라 모천이 관건關鍵입니다.

 

 

# 댕갱이 - 초자연현상 (6)

 

댕갱이(동경東京이라고 한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류誤謬이고, 일본 도꾜와 혼동 우려. 꼬리가 댕강 잘려나간 것처럼 뭉툭하다고 붙여진 이름)는 토종개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강아지를 좋아해서 시골장에서, 이를테면 똥개를 사왔습니다. 이 녀석을 부엌에 두었더니 아궁이 고래를 타고 들어가 방구들을 뜯어낼뻔 했습니다. 일꾼을 불러 장판을 걷어내고 있었는데 부엌에서 워리! 워리! 하며 개를 불러내고 있었던 아이가 개가 나왔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어른들은, 개가 좁은 고래구멍로 들어갔으니 몸을 돌리지 못 해 나오지 못 할거라고 했습니다. 겨울이라 추워서 부엌에 두었는데 아마 추워서 기어들어갔을 것입니다. 그 후 잘 커서 새끼를 낳았고, 아내가 생선을 삶아 먹인 터라 새끼를 낳으면 마을 사람들이 탐냈습니다.

 

당시에는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는데, 퇴근하면 의례히 동료들과 어울려 술집 순례가 버릇이고 밤이 어숙해서야 귀가를 했습니다. 어느 날 늦은 밤, 그 날 따라 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 술 취한 눈에도 앞에 뭔가 어른거렸습니다. 꼭 귀신에 홀린 것 같아 겁이 났는데 가까이 온 걸 보니 댕갱이었습니다. 집에서 1Km도 넘는 거리인데 어떻게 주인이 오는 걸 알았을까? 더구나 칠흑漆黑같은 장대비 속에서 주인의 냄새를 어떻게 맡았을까? 그날부터 댕갱이는 매일 하루도 빼지 않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산골벽지僻地로 전근轉勤이 되어, 읍내에서 외진 산골벽지로 이사를 했는데, 댕갱이를 이삿짐트럭에 태워 60리 산길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도 트럭 짐칸 가운데 개집을 넣고 문을 잠궜습니다. 개집 밖에는 살림살이로 울타리처럼 둘러쳐 이삿짐을 실었습니다. 헌데 이 녀석이 이사온 며칠 후부터 출근 후에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웃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출근만 하면 곧바로 달려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퇴근 직전에야 돌아왔습니다. 온몸이 땀에 젖었고 지쳐서 밥도 먹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는 댕갱이가 죽겠다고 생각해서 목걸이를 채워 기둥에 묶었습니다. 그런데 쇠줄목걸이를 끊고 외출했습니다. 이웃들은 댕갱이가 논밭은 무시하고 산도 개의치 않고 일직선으로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방향이 이사 전의 읍내방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 했더니, 매일 댕갱이녀석이 옛 관사에 온다고 했습니다. 관사에는 분양한 댕갱이새끼가 있었습니다. 택시를 빌려서 데려오기도 하고, 한참 씨름을 하다가 이러다가는 댕갱이를 죽이겠다 싶어서 새끼가 있는 집에 보내버렸습니다. 60리 산길로 이사짐 트럭에 실려왔는데 어떻게 옛집을 찾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러고보니 댕갱이는 예전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가끔 짬이나면 이웃마을 처가妻家에 다녀왔는데, 댕갱이녀석이 따라오려고 안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버스에 개를 태워주지 않아 억지로 때어놓고 왔는데, 짧으면 2 3, 길면 1주일도 넘게 처가에 머물다가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리면 마을 입구에서 댕갱이가 꼬리를 치며 우리 식구를 맞았습니다. 그럴 때 꼬리는 바람개비처럼 돌았습니다. 그런데 이웃의 말이 우리가 집을 떠난 날부터 매일 일정한 시간이면 댕갱이가 도로변에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버스길까지는 2Km 쯤 떨어져있고, 굽이굽이 산기슭과 논밭을 지나가는 꼬부랑길이라 집에서는 버스길이 보이지도 않는데 댕갱이는 우리 가족이 오는 걸 어떻게 예상하고 기다렸을까요? 댕갱이의 예감력은 철새들이 대륙을 넘나들고, 연어가 태평양을 건너 모천母川을 찾아가는 것보다 더 신비神祕합니다.

 

 

# 불가사의不可思議 (1) - 나스카 라인Naska Line (나스카 지상화地上畵)


남아메리카Amerika 페루Peru 안데스Andes고원高原에는 나스카라인Naska Line이 있습니다. 나스카 지상화입니다. 비행기가 없었던 시대에서는 몰랐는데 비행기가 발명되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야 그림을 찾아냈습니다. 거미, 원숭이, 새와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100여 개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의 한 변1Km가 넘어 적어도 150여 미터 상공에서가 아니면 그림의 모양을 알 수 없습니다. 2,000여 년 전에 어떻게 그런 그릴 수 있었을까요?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렸을까요?

 

 

# 불가사의不可思議 (2) - 유 에프 오 UFO

 

유에프오UFO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항공우주국에서도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케네스 아놀드Kenneth Arnold와 비행접시Flying Saucer - 1947624, 미국 워싱턴주 레이니어 국립공원 상공을 비행하고 있던 케네스 아놀드는 9대의 이상한 비행물체를 목격함

 

로즈웰 유에프오UFO 소동 - 194778로즈웰 데일리 레코드지에 비행접시가 로즈웰 근교의 한 목장에 추락했고, 그 잔해를 미 공군이 회수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됨

 

프랑스 방데Vendėe지구의 유에프오UFO - 1954914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50마일 정도 떨어진 방데지구에서 대여섯 마을 주민 수백 명에 의해 대낮에 유에프오UFO가 목격됨

 

소코로 사건 - 19644월 말, 과속차량을 쫓던 경찰 로니 자모라Lonnie Zamora 뉴멕시코주 소코로마을 외곽의 고속도로에서 땅에 착륙해 있는 유에프오UFO를 목격함

 

육군 헬기를 끌어올린 유에프오UFO - 19731018일 밤11시 경, 미 육군 소속 헬기가 운행 도중 유에프오UFO와 거의 충돌할 뻔했던 사건이 있었음

 

한국에 나타난 유에프오UFO - 1973 충청남도 보령군의 한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선생님과 절대다수의 어린이들에 의해 유에프오UFO가 목격됨

 

여객기를 쫓아온 유에프오UFO - 1984 티리시Tilisi를 출발해 탈린Tallin으로 가던 에어로플로트Aeroflot 8352기편 제트여객기가 민스크에서 120Km 떨어진 곳에서 유에프오UFO의 추격을 받았다는 기사가 1985130일 타스통신을 통해서 보도됨

 

요격기邀擊機를 따돌린 삼각형 유에프오UFO - 1990330일 밤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유에프오UFO 목격자 수십 명이 경찰본부에 알려옴

 

유에프오UFO5,000년 전 찬란하게 번성繁盛했던 수메르Sumer역사(메소포타미아문명 이전 문명, 고조선의 한웅시대 12제후국諸侯國) 점토판粘土板에도 그려져 있으며, 우주복을 입은 사람도 있습니다. 로케트Rocket와 잠수함그림도 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3,600년 주기週期로 지구궤도에 진입하는 니비루Nibiru위성衛星에서 외계인外界人들이 로케트를 타고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또 이들은 노동력이 부족하였으므로 구리와 납 등을 점토와 섞어 노동자勞動者를 만듭니다. 이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태양계의 수천 억 개의 별, 수천 억 개의 태양계 그리고 무한대의 우주 - 이 드넓은 우주에 지구처럼 생물이 존재하는 별은 있습니다.

 

 

해설사 : 댕갱이가 옛집을 찾아갈 수 있었던 건 동물에게 있는 육감같은 것 아 닐까요? 그러나 외출한 가족이 언제 어디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이 올 버스길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육감을 넘어선 신비神祕입니다.

도깨비기자 : 연어가 모천을 찾아 태평양을 건너는 일과 같습니다. 철새들도 수만 리를 날아갑니다. 자기장磁氣場을 이용한다고도 하고, 태양의 고도高度를 이용한다고도 하는데 그들만이 가진 감각입니다. 인간은 문명화되면서 잃어 버린 육감입니다.

해설사 : 그런 현상을 신과 연관지어도 되는 겁니까?

도깨비기자 : 글쎄요. 예지몽叡智夢이나 동물들의 육감 그리고 초자연적인 현상들 을 신과 연관짓는 일은 탕자가 된 지금 혼란스럽지만, 그런 현상을 직감直感 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화를 좀 더 탐색해보려고 합니다.

해설사 : 몇 년 전에 유리겔러Uri Geller라는 사람이 티비TV에서 초능력超能力을 실연實演한 일이 있었습니다.

도깨비기자 : 눈앞에 쇠숟가락을 놓고 응시凝視한 것만으로 숟가락이 구부러졌습 니다. 전국적으로 자기집에서 숟가락을 눈앞에 놓고 실험을 했는데 그 숟가 락들도 모두 구부러졌습니다. 고장난 시계가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씨앗을 싹 트게 하기도 했습니다. 염력念力이나 텔레파시Tellepathy라고 했지만 재판에서 마술魔術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술이 어떻게 전국 가정에서도 실연이 되었는지는 불명不明합니다.

해설사 : 더 신비한 일도 있습니다. 최면술催眠術입니다. 최면술에 걸린 피실험자 는 배운 적이 없는 라틴어Latin를 말하거나 글로 쓰고, 300여 년 전에 살았던 고장을 상세하게 그림으로 묘사描寫하기도 합니다.

도깨비기자 : 요즘에는 심리학자들이 연구방법으로 사용하고, 경찰의 수사搜査에 서도 최면술을 이용합니다.

해설사 : 세계 각국마다 서로 다른 신화가 있고, 민족들마다 신화를 가지고 있 습니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요?

도깨비기자 : 신은 없다, 우상이다라는 건 확신합니다. 그러나 초자연현상이라고 하는 것들이 남습니다. 내세관을 믿는 이집트, 티베트를 돌아보고,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신들을 가진 나라 일본을 보고싶습니다. 그쪽 사람들을 만나 내 세관이 어떤지, 신은 어떤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집트, 인디아도 보고싶 습니다.

해설사 : 그들의 내세관은 옛날 일이고 지금은 과학이 발달된 시대이니 그들의 신관神觀도 좀 변하지 않았을까요?

도깨비기자 : 그리고 부수적附隨的으로 사회상에서 결혼관을 살펴볼까 합니다.

해설사 : , 신을 탐색하다가 결혼관은?

도깨비기자 : 신을 탐구하다보니 창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신이 창조를 하 지 않았다면 창조의 주관자가 누구냐 하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시스틴성당 Sistine Chapel 천정天井에 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천지창조天地創造를 아시지요? 그래서 여성관이나 결혼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설사 :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에 의혹이 있습니까?

도깨비기자 : 아닙니다. 다양한 결혼제도를 인정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더 큰 이유는 모계사회母系社會입니다. 모성母性과 창조가 연계되어 있습니다. 신의 창조가 아니라 여성성의 창조라는 말입니다. 캐도릭Catholic에서는 예수 보다 성모聖母 마리아를 추앙推仰합니다. 예수상 대신에 성모 마리아상을 안 치하고 있습니다. 인간창조의 주체主體는 하나님이 아니라 여성입니다. 결혼제 도, 가족제도 그리고 신화를 탐색하고자 합니다.

 

 

# 알라스카Alaska 에스키모Eskimo는 여자 공유제共有制입니다. 일본의 아이누Ainur도 공유제입니다. 모두 사철 얼음나라인 극지極地에서 사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방문한 손님에게 아내나 누이 등 여자를 제공합니다. 몽골Mongolia 유목민遊牧民은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입니다. 여자 한 명을 형제들이 공유共有합니다. 1년에 6개월 가량 유목遊牧을 하며 떠도는 속성상 집과 가족을 지키는 형제 한 명을 남겨둡니다. 유목생활에서 돌아오면 형제가 한 여자를 공유하고, 낳은 자식들은 특정인의 자식이 아닙니다. 구지 특정지을 수도 없습니다. 징기스칸Genghis Khan은 다른 부족에게 납치된 아내 부르테가 아이를 낳자 자기 아들로 키웁니다. 아랍Arab에는 할렘Harlem이 있습니다. 아랍인들은 능력이 있으면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많은 아내를 거느려도 됩니다. 사자는 프라우드Proud라는 가족단위가 있는데 수컷 한 마리가 암컷 대여섯 마리를 거느립니다. 이는 여성성 비하卑下가 아니라 생존법칙입니다. 식물도 우성인자優性因子만 받아들입니다. 열성인자劣性因子가 들어오려고 하면 씨방문을 닫아버립니다. 호랑이는 초겨울이 생식기生殖期인데, 400Km의 영역을 가진 수컷 호랑이들이 암컷이 사는 곳으로 모여들고, 치열熾熱한 싸움 끝에 한 마리만 암컷을 차지합니다.

 

프랑스는 동거同居제도가 일반적입니다. 동성애同性愛도 있습니다. 성전환性轉換도 금기禁忌가 아닙니다. 미얀마Myanmar는 성전환性轉換여성이 많습니다. 몇 년 전 미얀마여행 때 캬바레Cabaret에서 춤추는 무희舞姬들 대부분이 성전환여성이라는데 놀랐습니다. 진짜 여성보다도 더 가짜여성이 여성다웠습니다.

 

신이 창조주가 아니라면 여성이 창조자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Feminism이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Maria를 신격화합니다. 예수는 성령聖靈으로 태어났으므로 현대생물학적으로 말하면 무성생식無性生殖입니다. 천주교는 주기도문主祈禱文 대신 성모경聖母經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제우스Zeus는 황금비로 변하여 다나에Danae와 사랑을 하여 페르세우스Perseus를 낳습니다. 페르세우스는 보기만 해도 돌로 변하는 아홉 마리 뱀 머리카락을 가진 메두사Medusa의 목을 잘랐습니다.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대종사는 어머니가 개울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잉태孕胎하였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탄생신화에 아버지가 없습니다. 신라新羅 시조始祖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고, 제주도 고부량高夫梁씨 조상祖上은 삼성혈三姓穴이라는 땅속구멍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남성지배 남성우위의 사회제도에서 사회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합니다. 모계사회母系社會로 되돌아가면 어떨까요? 아마조네스Amazones가 있었고, 아프리카Africa 어느 부족에게는 암야제暗夜祭라는 풍습도 있습니다. 남성사회가 권위와 권력의 횡포를 낳았습니다. 인류 최대의 비극 전쟁도 남성사회의 소산所産입니다. 남성성의 끊임없는 욕망이 인류사회를 피폐롭게 합니다. 영토, 종교, 사상과 이념의 갈등은 남성성의 전쟁이 되어 인류의 평화를 파괴합니다.

 

# 나폴레옹, 알렉산더, 징키스칸은 영웅입니다만 전쟁의 화신化身입니다. 전쟁에서 죽어간 생명을 생각해보십시오. 세계 1, 2차대전에서도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1차대전의 희생자는 약 400여 만 명이고, 2차대전의 희생자는 민간인과 군인 등 약 5,500여 만 명입니다.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Best seller 삼국지에서는 싸움마다 몇 십만 몇 백만이 죽습니다.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병졸兵卒을 죽인 여포와 관우, 장비는 영웅이 됩니다. 히틀러는 600만의 유태인을 가스실에서 처형했습니다.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에게는 영웅이란 칭호가 주어지고 훈장勳章도 줍니다. 한 생애 살아보겠다고 태어난 생명인데, 막 피어난 꽃 같은 청년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종교를 위해서, 사상과 이념을 위해서 전장으로 내몰려 총알받이로 죽습니다. 전쟁을 획책한 늙은 지도자들은 죽은 젊은 병사들에게 훈장을 하사下賜하고 영웅으로 추겨세우며, 휘황찬란한 샨데리아Sanderia 아래서 잔에 샴페인Sampegne을 따루며, 전쟁승리의 축배祝杯를 들면서 <위대한 나라를 위하여!>라고 건배乾杯를 합니다. 이들은 모두 남성사회의 남성성 남성상입니다.

 

인류의 시원始原은 모계사회母系社會였습니다. 남성성의 힘에 지배되어서 평화와 행복이 파괴되었습니다. 여성성의 모계사회에서는 국가적전쟁과 사회적갈등이 원천적으로 제어制御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모성母性과 창조성에 바탕을 둔다면 신에 대한 갈등도 없습니다.

 

 

# 암야제暗夜制 (사냥꾼 이야기, 전남일보사 간, 김왕석 역, 발췌 윤색)

 

브라질 아마존의 본류本流유역에 사는 위이드르족은여자를 아이 출산도구出産道具로 알고있는 브라질 원주민들 사이에서 유일한 여성우대優待 종족이다쓰루마이족처럼 여성은 어두운 동굴에서 밖에 나가지도 못 하고 살다가 죽어야 하고여자는 약탈掠奪의 대상이며때로는 선물膳物이 된다또 어느 종족은 여자가 13세가 되면 어떤 남자가 구애求愛를 해도 받아주어야 하고여자가 생식生殖능력이 없어지면 죽이거나 유기遺棄를 한다브라운박사는 유일하게 여자를 우대하는 위이드르족에 관심을 가졌다위이드르마을 방문 제안자는 인류학자인 케렌박사였지만늙은 추酋長은 남자지만 추장을 보좌補佐하는 5명의 참모參謀들 중 3명이 여자였다여자참모는 마을을 방문한 백인들에게 미국여자들이 남편을 다그치는 것과 똑같이 물었다.

어느 곳에 사는 누구며 뭘 하러 왔느냐?’

센티의 설명도 믿지 않고 까다로운 조건을 붙였다며칠 동안이지만 여기서 살기 위해서는 마을의 풍속과 규율을 지켜야 하고우선 마을사람들처럼 옷을 벗어야 한다고 했다벌거숭이로 생활하는 누드Nuge마을에서 옷을 입는다는 게 비정상이었지만 브라운박사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 조건은 거부했다. 여자참모들이 <옷을 벗지 못 하는 건 나쁜 병이 있는 증거>라고 했다몇 년 전에 이웃마을에 소금장수가 왔었는데 마을여자에게 나쁜 병을 전염시켰다고 했다브라운박사가 타협을 했다추장의 신체검사를 받기로 한 것이다신체검사에서는 전원 합격을 했으나 입회를 하겠다고 하는 여자참모들 때문에 소란騷亂이 일어났다추장의 결단으로 입주入住가 허락되었으나 여자참모들의 적의敵意에 찬 눈초리는 브라운박사 일행을 날카롭게 주시注視하고 있었다여자 우위의 마을에 백인들이 들어와 그 관례慣例가 깨질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마을에는 남자들이 없었다사냥이나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것이다남아있는 몇몇 남자들도 부지런히 일을 했다요리도 남자들이 했다여자들은 뭘 할까아이들하고 놀거나 마을일을 했다

가사재판제도家事裁判制度가 있는데 판사나 서기가 모두 여자였다게으른 남편사내구실을 못 하는 남편마누리를 박해迫害하는 남편을 심판한다마침 재판이 있어 방청했다원고는 여자고 피고는 남편이었다재판장은 추장이었으나 실질적인 판결은 여자참모들이 맡았다고소내용은 <남편이 일주일 동안 자기를 내버려두었다고 진술했다남편은 술만 마시고 만취滿醉 되어 잠만 잤으며, 술에 취하지 않은 날도 모른체 했다>고 주장했다남편이 <서로 모른체 한 것은 피차彼此일반이었다>고 항변했으나부인이 <자기는 몇 번이나 요구를 했으나 남편이 거절했다>고 답변했다여자판사가 남편을 꾸짖었다, <거짓말을 하면 혀를 묶어버리겠다>. 남편이 놀라 추장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으나 추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남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두 번 쯤 마누라에게 요구를 받았으나 몸이 불편해서 응하지 못 했다>고 자백했다재판은 계속되었는데 여판사와 피고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몸이 나빴다고 했는데 어떻게 나빴느냐?’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고 …….’

머리가 아픈 것 하고 부인을 내버려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머리뿐만 아니라 힘이 없어 남자구실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거짓말 말아그렇다면 검사를 해보자.’

아니, 지금은 모두 나았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마누라를 무시하지 않겠느냐?’

!’

앞으로 다시 마누리가 제소하면 넌 처벌을 받을테니 조심하라!’

!’

 

남편은 집행유예執行猶豫로 풀려났으나 이 재판은 사형死刑부터 벌금형까지 있었고 사형이 언도言渡되면 즉시 집행했다사람을 죽이면 사형물건을 훔치면 5배 배상과 손가락 절단윗사람이나 동료부부간에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거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벌금형 - 짐승껍질 몇 장물고기 몇 마리염소나 돼지 몇 마리를 마을에 바친다무서운 재판이었으며 실권을 여자들이 가지고 있으므로 남자들은 꼼짝 못 했다가끔은 추장이 조정調整을 해서 완화緩和시키는 절충折衷은 했다.

위이드로는 고구마가 주식主食이었다잡초지를 불태워 고구마를 심고 지력地力이 소진消盡되면 마을을 옮긴다부식副食으로는 강에서 메기나 피후루다라는 잉어의 일종을 잡는다피후루다는 1m에서 큰 것은 2m 정도인데 비늘 한 개가 구두주걱으로 쓸 정도다피후루다는 소금을 쳐서 말렸는데, 고기를 잡는 것부터 말려서 보관하는 것까지 모두 남자들의 몫이었고 여자들은 그저 갖다준 밥상을 받았다여자들이 하는 유일한 일은 가끔 약초藥草를 캐는 일이었는데한치라는 약초는 강장제强壯劑스테미너Steminer가 부족한 남자들에게 달여먹인다여자가 임신을 하면 남자들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다임신기의 여자는 신경질이 되고 봉사에 소홀했다가는 바로 재판에 걸린다그래서 마을에서 부인이 임신한 남편은 공동작업에서 제외하여 부인의 시중에 전념하도록 했다그런 위이드로에서도 남자들에게 숨통이 트이는 일은 있다한 달에 한 번 암야제가 있다

암야제는 캄캄한 그믐밤에 열린다어둠속에서 살인과 도둑질 외에 어떤 일을 해도 된다가장 자유로운 일은 성행위性行爲그날 밤에는 처녀든 유부녀든 맘대로 놀아나는 난교亂攪파티다여자들은 이 암야제가 남자들을 위한 풍습이라고 했으나 남녀에게 다 좋은 축제다

백인들이 암야제에 참여했다암야제는 대낮부터 시작되었다낮 동안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마당 중앙에 무대를 세워 춤을 추었다여자들은 늘 벌거숭이였으나 그날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야자잎섬유纖維로 짠 치마 같은 걸 걸치고진주귀걸이를 하고조개껍질 목걸이로 치장했다여자들이 앞다투어 무대로 올라가 춤을 추었다프랑스French 캉캉Cancan춤 같았는데, No 브레지어Brassiere No 팬티Pants였으므로 여자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릴 때 백인들은 모두 외면外面을 했다춤추는 여자나 박수를 치는 남자들의 눈빛이 번들거렸으며 그건 강한 유혹이었다어둠속 암야제에서 자기가 선택받으려는 유혹이었다브라운박사는 무대에 여자판사가 끼어있는 걸 보고 놀랐다그 근엄謹嚴했던 여자가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춤을 추고있었다. 30대 중반의 여판사는 노골적으로 젊은 청년을 노리고 있었다그 젊은 청년은 박사가 보기에도 준수俊秀한 모습이었다마치 그리스Greece의 조각彫刻 같았다여판사는 일부러 청년의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고 다리를 들어올렸다그 청년에게는 모여드는 여자들이 많았다특히 키가 큰 처녀가 여판사에게 적대敵對의 눈길을 보이며 청년 주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건 심상치 않은데 ……)

케렌박사가 걱정했다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백인들도 천막으로 들어갔고 케렌박사도 잠시 눈을 붙였는데 밖의 노래소리에 눈을 떴다남녀합창이다.

이젠 밤이다어둠이다모든 것이 안 보인다없어졌다도 안 보이고 없어졌다이젠 우리들의 나라다다같이 놀아보자이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대로 놀아보자그러나 조심해라악마가 있어어둠속엔 언제나 악마가 있어우린 악마하고는 놀 수가 없어악마만 조심하고 재미나게 놀자.”

150여 명의 코러스가 끝나면 마을의 모든 불이 꺼지고 암흑천지 자유로운 나라가 된다별빛조차 없는 암흑의 밤이었으나 광장은 야릇한 열기熱氣에 휩싸여있었다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였다몸들이 부딪혔다케렌박사의 손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서로 손을 잡아 누구인가를 확인했다휘파람소리도 들렸다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다남은 사람들이 초조하게 돌아다녔다케렌박사를 보호하는 센티의 손목이 잡혔다여자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있는 것 같았다강한 힘에 끌려 센티는 숲속으로 끌려갔다

히바치어(백인白人이다)!’

센티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는데 여자가 몇 마디 말을 하자 다른 여자들이 가세하여 센티를 공격했다센티가 끌려가자 케렌박사가 불안하여 천막으로 돌아가는데 여자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여판사의 목소리다청년을 두고 다투는 것 같았다죠지George와 브라운Brown박사博士가 케렌Ceren박사의 말을 듣고 웃었다그들도 숲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했다숲속은 수십 쌍의 난행亂行 장소라 서너 발도 내딛기가 어려웠다브라운박사는 강력한 남자의 품에 안겨 비명을 질렀다그놈은 동성애자였으며 난폭했다죠지가 턱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 구해냈다한참 후에 돌아온 센티Senti는 세 명의 여자들에게 집중공격을 당했다중년여자들은 파트너Partner를 구하지 못 해 센티에게 집단적으로 달라붙었다

밤새 암야제가 계속되었다아침에 여기저기서 나타난 사람들은 약간 피로 한 것 같았다여판사도 시치미를 떼고 천막에서 나왔고 뒤에 청년이 따라나왔다노련老鍊한 여판사가 처녀에게 승리한 것이다

모계사회母系社會였다부부 사이에 남자아기가 태어나도 모계에 속한다남자가 성인成人이 되면 집을 떠나 집단합숙소에 들어가 결혼할 때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못 한다남자는 결혼하면 여자의 집에 사위로 들어간다그래서 아가씨들에게 고분고분해야 한다아가씨를 얻지 못 하면 평생 집단합숙소에서 홀애비로 살아야 한다다행히 총각이 아가씨에게 선택되었을 때도 허다한 난관難關이 있다아가씨 어머니의 승락을 받아야한다선물을 갖고 처가妻家를 방문한다집단합숙소에서 땀 흘려 준비한 마른고기감자가루 등을 선물하는데 선물이 마땅치 않으면 거부당했다.

선물은 적지만 집에 들어와 부지런히 일해 보충을 하겠습니다따님뿐만 아니라 어머님께도 봉사를 하겠으니 나의 청을 허락해주십시오.”

이런 방법의 청혼은 평생 남자들이 머리를 들지 못 하는 이유다암야제에서는 예외고결혼 후에도 남자들의 수난受難은 계속된다사위라는 지위와 머슴의 지위를 같이 얻는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낮에는 처갓집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하고 밤에는 마누라에게 봉사를 한다낮의 일이 고되어서 밤에 봉사를 소홀히했다가는 가정재판소가 기다리고 있다그렇다면 남자들은 불행한가대부분의 남자들은 처가에서 환영받고 특히 장모의 사위사랑은 극진했다센티는 그 원인을 암야제에서 사위가 장모를 선택한데서 찾았다장모도 여자라 암야제에서 사위와 눈이 맞는 것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이 마을의 중년부인에게는 성적性的불만이 전혀 없다과부寡婦에게도 그렇다늙은 남편이 있는 부인도 성적불만은 없다그 증거로 딸과 사위 사이에 벌어지는 부부싸움에 장모는 언제나 사위편을 든다가정재판소에서도 사위에게 유리有利한 증언證言을 한다.

여성상위女性上位도 이쯤 되면 나쁜 것은 아니구만나쁜 것은 미국과 같은 여성상위란말야

 

공처가恐妻家 케렌박사의 결론                                                                           (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