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전 100선>
. 신동아新東亞 1969년 1월호 별책부록別冊附錄, 동아일보사 간刊, 이천만 윤색潤色
* <001 화담집花潭集 --- 050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지성인 필독도서(3/ 5) <한국고전 100선> - 1 탑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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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인 필독도서 <세계를 움직인 책 100권>, <사냥꾼이야기 (1 - 15권)>, <한국의 고전 100선>, 범당의 저서 (80여 권) 등 <범당서재> 탑재 글을 읽으려면 Daum Blog <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이천만의 시> <아라한우학>
<범당서재>에서 <분류전체보기>
한국韓國의 고전古典 100선選
(윤색자潤索者 서문序文, 신동아新東亞 편집자編輯者 머리말, 목차目次, 본문)
1. 윤색자 서문
* 동아일보의 시사時事월간지 신동아가 <한국韓國의 고전古典 100선選> 을 선정하였으며, 이를 사계斯界 전문가 100인이 번역하여 다이제스트 Digest로 만들어 1969년 1월호 신동아 별책부록으로 증정贈呈함
* 다이제스트 되었으므로 입문서入門書이며, 개관槪觀을 알고 텍스트 text (원본原本) 를 읽어야 명확하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음 (작가 그림, 책명, 저작연대著作年代, 번역자飜譯者, 다이제스트 Digest는 해설이며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을 읽어야 함, 해설 끝에 주석註釋을 게재함, 원문이 한자어와 전문용어로 되어, 한자어는 병기倂記 또는 풀어쓰고 줄이고, 전문용어는 풀이하여 주석으로 보완함)
* 한국의 고전 100선은 한자가 많아 독서의 이해를 도울만한 어휘 이외는 한자를 병기倂記하지 않았으며, 고어체古語體 문투文套와 한자어, 고유명칭, 특히 이름은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필독도서를 골라 읽고, 연구 외 참고가 되는 책은 일별하기를 권장함
* 손자 아라한과 아나율의 지성적 교양서로 윤색潤索하여 블로그 (Daum Blog 이천만의 시詩, 이천만의 교학대한사敎學大韓史, 아라한 우학于學) 에 탑재搭載함, 윤색을 하기에는 방대한 내용과 고전古典의 인용引用, 특히 한자상용구, 한자이름을 찾느라고 자전字典, 옥편玉篇과 인터넷자료를 이용하였으나, 실험용돋보기를 사용하면서도 눈이 아프고 시력視力이 흐려져 애를 먹었으며,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며 어렵게 윤색했으므로 한이와 율이가 필독하기를 기대함
*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의 유래由來
장자 (莊子 B. C 369 - B. C 289?) 제 33편 <천하天下> 7절節, 장자는 친구 혜시惠施 (B. C 370? - B. C 309?) 와 논쟁論爭을 언급言及하며 그의 박식博識함을 설명하는 가운데, 혜시의 장서藏書가 수레 다섯 분량이라고 말했던 것을, 두보杜甫 (712 - 770년, 당대唐代 이백李白과 쌍벽雙璧을 이룬 시인詩人 두보(杜甫) 가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라는 명감明鑑으로 삼아 전해지고 있음
. 사람은 평생 다섯 수레의 책 - 3,000권을 필독必讀하여야 한다는 의미. 20세 - 50세, 30년 간 1년 100권, 매월 10권, 매주 2권 독파讀破, 아카데미아 Academia 에서 플라톤 Platon,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e 와 공자학당學堂의 공자는 제자를 가르치기 전 무지를 깨우쳤다. 무지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것이다. 특히 작가지망생은 어휘력이 기본이므로 한글사전을 외우는 것이 작가의 왕도王道
* 조선시대에는 서당書堂에서 4서5경 (4서 -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 5경 -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이 중 대학과 중용은 예기에서 독립되어 별책이 된 것임) 을 읽음으로써 훌륭한 선비가 되었음
*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라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위대한 역사서를 썼는데, 그는 궁형宮刑 (거세去勢) 을 당한 치욕恥辱을 감내堪耐하며 <독서만권讀書萬卷 여만리행旅萬里行 -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여행을 함으로써 사기를 저술할 수 있었다> 라는 명언名言을 남겼음, 등용문登龍門의 귀감龜鑑임
* 독서백편기의자현讀書百遍其義自見 - 동우董遇는 후한 말 사람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에 열중하여 황문시랑黃門侍廊 벼슬에 올라 헌제獻帝의 글공부 상대가 되었다. 한 때는 승상이었던 조조의 의심을 받아 한직閒職으로 쫓겨난 적도 있었지만,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에는 시중侍中, 대사농大司農 등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는 <노자老> 와
<좌전左傳> 에 주석註釋을 달았는데, 특히 좌전에 대한 그의 주석은 당나라 시대까지 폭넓게 읽혔다고 함. 동우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글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음. 하지만 그는 선뜻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마땅히 먼저 백 번을 읽어야 한다.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고 말했음. (人有從學者인유종학자, 遇不肯敎而云우불긍교이운, 必當先讀百遍필당선독백편, 言讀書百遍其義自見언독서백편기의자현, 삼국지三國志 · 위서魏書, 왕숙전王肅傳)
* 조문도 석사가의 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道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
*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책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 지성인의 고등정신기능 - 이해력, 판단력, 분석력, 평가력, 창의력, 분별력, 통합력 (종합력, 통섭력) 은 (대학) 교육으로 육성 미흡未洽, 독서로만 가능, 교육 - 지식적 전문인 (지식, 지식인) 양성, 독서 - 교양적 지성인 (지혜, 교양인) 양성,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2. ‘월간 신동아’ 편집자의 머리말
민족중흥을 위한 주체성의 확립과 전통의 계발啓發을 위하여 조선祖先들의 정신 유산을 발굴, 전승하는 문제는 오늘날 하나의 시대적인 과업으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범국민적인 작업은 각계의 몰이해와 역부족으로 아직도 본격화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자가 전래된 이래 우리 조선들의 정신으로 쓰여진 서책만도 기 만 권에 달할 것이다. 이 중에서 100권을 고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목書目 결정에 있어서는 편의상便宜上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1876년) 을 하한으로 하고, 각계 전문가 100인에게 추천을 의뢰하여 중지衆智를 모았다. 추천기준은 각 분야에서 국내외에 큰 영향을 주고 한국문화의 체계를 대체로 파악케 하는 책에 중점을 두도록 편집자의 의견을 미리 제시하였다.
대개 집계된 점수點數에 의거하였지만 편집자의 재량裁量에 따른 경우도 있다. ‘사변록思辨錄’ ‘하곡집霞谷集’ 등은 점수대로 하자면 빠졌을 것이나 유학사상儒學史上 이채異彩로운 책이기에 넣었고, ‘심청전沈淸傳’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은 각 분야별 비중比重을 감안勘案하여 부득히 뺐다. 100선에 들지 못 한 것은 권말卷末에 서목書目을 실었다.
* <사족蛇足, 윤색자> 우리나라 이름은 <대한민국> 이다. 약칭은 <대한> 이다. <한민족의 나라> 다. <한국> 은 이름은 물론 약칭이 아니다. 대 (大, 큰) + 한 (밝고 환한, 가득찬, 하나 즉 으뜸, 한韓은 한자표기로 차용借用), 애국가의 <대한 사람>, <대한민국 만세>, <대한제국> 의 <대한> 이다. 중국의 대명, 대청, 대영제국, 대일본국과 같은 명칭이다. 더구나 <한반도> 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국권강탈의 소산이어서 일제 잔재 청산으로써 없애야 한다. 아울러 <KOREA> 도 <COREA> 로 바꿔야 한다. KORAEA는 일제강점기 때 영문표기상 알파벹 순으로 <C>OREA가 <J>apan 앞에 오는 것을 회피하려고 일제가 바꾼 명칭이다. 그래서 본서에서 <한국> 을 <대한> 으로 고쳐 썼다. (Daum Blog <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참조)
3. 목차
<사상편思想篇>
<유학儒學>
001 화담집花潭集 (1489 – 1546년) 서경덕徐敬德 (金敬琢)
002 논사단칠정서論四端七情書 (1501 – 1570년) 퇴계退溪 이황李滉 (李相殷)
003 율곡전서栗谷全書 (1536 – 1584년) 이이李珥 (金敬琢)
004 사서사변록四書思辨錄 (1703년) 박세당朴世堂 (李丙燾)
005 하곡집霞谷集 (1649 – 1736년) 정제두鄭齊斗 (柳承國)
006 남당집南塘集 (1682 – 1752년) 한원진韓元震 (洪震杓)
007 녹문집鹿門集 (1711 – 1788년) 임성주任聖周 (柳正東)
008 노사집蘆沙集 (1798 – 1876년) 기정진奇正鎭 (辛鎬烈)
009 화서집華西集 (1792 – 1868년) 이항로李恒老 (閔泰植)
010 기측체의氣測體義 (1836년) 최한기崔漢綺 (朴鍾鴻)
011 한주집寒洲集 (1818 – 1885년) 이진상李震相 (柳正基)
<불교佛敎>
012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676년) 원측圓測 (金東華)
013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658년) 원효元曉 (李箕永)
014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662년) 의상義湘 (李箕永)
015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1090년) 의천義天 (閔泳奎)
016 수심결修心訣 (1200년) 지눌知訥 (朴性焙)
017 선문염송禪門拈頌 (1226년) 혜심慧諶 (崔惠學)
018 선가귀감禪家龜鑑 (1595년) 휴정休靜 (洪庭植)
019 백파집白坡集 (1770 – 1855년) 백파白坡 긍선亘璇 (安在準)
<기타其他>
020 정감록鄭鑑錄 (李敦寧)
021 벽위편闢衛編 (1785년) 이만채李晩采 (金良善)
022 동경대전東經大全 (1880년) 최제우崔濟愚 (白世明)
<역사편歷史編>
023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900년 경頃) 혜초慧超 (元義範)
02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김부식金富軾 (李弘植)
025 삼국유사三國遺事 (1285년 경) 석釋 일연一然 (閔泳珪)
026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1215년) 각훈覺訓 (安啓賢)
027 고려사高麗史 (1451년)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金哲埈)
028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申奭鎬)
029 징비록懲毖錄 (1600년 경) 유성룡柳成龍 (崔永禧)
030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795년) 이순신李舜臣 (李殷相)
031 대동야승大東野乘 (李相玉)
032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806년) 이긍익李肯翊 (柳洪烈)
033 동사강목東史綱目 (1790년) 안정복安鼎福 (李佑成)
034 발해고渤海考 (1784년) 유득공柳得恭 (李龍範)
035 해동역사海東繹史 (1823년) 한치윤韓致奫 (金成俊)
036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1852년 경) 김정희金正喜 (任昌淳)
<사회편社會篇>
<정치政治, 법률法律, 경제經濟, 외교外交>
037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1394년) 정도전鄭道傳 (孫寶基)
038 대전회통大典會通 (1865년) 조두순趙斗淳 (尹炳奭)
039 성학집요聖學輯要 (1575년) 이이李珥 (黃元九)
040 반계수록磻溪隧錄 (1670년) 유형원柳馨遠 (趙璣濬)
041 통문관지通文館志 (1714년 경) 김길남金桔南 부자父子 (金奎聲)
042 담헌서湛軒書 (1731 – 1783년) 홍대용洪大容 (千寬宇)
043 추관지秋官志 (1781년) 박일원朴一源 (金聲均)
044 증보무원록增補無寃錄 (1796년) 구윤명具允明 구택규具宅奎 (金斗鐘)
045 탁지지度支志 (1798년) 박일원朴一源 (韓㳓欣)
046 북학의北學議 (1778년) 박제가朴齊家 (李成茂)
047 만기요람萬機要覽 (1808년) 심상규沈象奎 서영보徐榮輔 (鄭奭鐘)
048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년) 정약용丁若鏞 (洪以燮)
<의전儀典, 민속民俗>
049 사례편람四禮便覽 (1680 – 1776년) 이재李縡 (金奎聲)
050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1474년) 성종명편成宗命編 (金和鎭)
<지리地理, 지도地圖>
051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530년) 중종명찬中宗命撰 (車文燮)
052 동국지도東國地圖 (1780년대) 정상기鄭尙驥 (李丙燾)
053 택리지擇里志 (1750년 경) 이중환李重煥 (盧道陽)
054 청구도靑丘圖 (1861년) 김정호金正浩 (李丙燾)
<언어言語>
055 훈민정음訓民正音 (1444년) 세종어제世宗御製 (李崇寧)
056 동국정운東國正韻 (1448년) 세종명찬世宗命撰 (南廣祐)
057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1750년) 신경준申景濬 (姜信沆)
058 노걸대老乞大 (1765년) (李基文)
059 언문지諺文志 (1824년) 유희柳僖 (金允經)
<병학兵學>
060 제승방략制勝方略 (1588년) 이일李鎰 (許善道)
061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790년) 정조명찬正祖命撰 (李炯錫)
<자연편自然篇>
062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1433년) 세종명찬世宗命撰 (申佶求)
063 의방유취醫方類聚 (1445년) 세종명찬世宗命撰 (李善宙)
064 동의보감東醫寶鑑 (1610년) 허준許浚 (金斗鐘)
065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1894년) 이제마李濟馬 (李善宙)
066 농가집성農家集成 (1655년) 신속申洬 (梁熙錫)
067 산림경제山林經濟 (1610년 경) 홍만선洪萬選 (劉元東)
068 자산어보玆山魚譜 (1815년) 정약전丁若銓 (鄭文基)
069 서운관지書雲觀志 (1818년) 성주진成周眞 (全相運)
070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1835년 경) 서유구徐有榘 (姜萬吉)
<문학文學, 예술편藝術篇>
<한자학漢字學>
071 계원필경桂苑筆耕 (918년) 최치원崔致遠 (梁柱東)
072 익재집益齋集 (1287 – 1367년) 이제현李齊賢 (申鎬烈)
073 점필제집佔畢齊集 (1431 – 1492년) 김종직金宗直 (閔丙秀)
074 눌제집訥劑集 (1474 – 1530년) 박상朴祥 (車柱環)
075 월사집月沙集 (1564 – 1635년) 이정구李廷龜 (金春東)
076 계곡집谿谷集 (1583 – 1638년) 장유張維 (車柱環)
077 택당집澤堂集 (1587 – 1647년) 이식李植 (權五諄)
078 농암집聾巖集 (1651 – 1708년) 김창협金昌協 (閔丙秀)
079 열하일기熱河日記 (1780년) 박지원朴趾源 (李家源)
080 연천집淵泉集 (1774 – 1842년) 홍석주洪奭周 (洪震杓)
081 자하시집紫霞詩集 (1907년) 신위申緯 (李丙燾)
082 동문선東文選 (1478년) 서거정徐居正 (金奎聲)
<국문학國文學>
083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445년) 정인지鄭麟趾 등 (許雄)
084 월인석보月印釋譜 (1459년) 수양대군首陽大君 (許雄)
085 금오신화金鰲新話 (1465년 경) 김시습金時習 (鄭炳昱)
086 송강가사松江歌辭 (1747년) 정철鄭澈 (朴晟義)
087 고산유고孤山遺稿 (1587 – 1671년) 윤선도尹善道 (李能雨)
088 홍길동전洪吉童傳 (1610 – 1620년 경) 허균許筠 (鄭註東)
089 춘향전春香傳 (金東旭)
090 흥부전興夫傳 (張德順)
091 청구영언靑丘永言 (1728년) 김천택金天澤 (金根洙)
092 구운몽九雲夢 (1688년 경) 김만중金萬重 (李明九)
093 한중록閑中錄 (1795년) 혜경궁 홍씨 惠慶宮洪氏 (金用淑)
<음악音樂>
094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년) 성현成俔 (李惠求)
<유서류類書類>
096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1789년) 권문해權文海 (李鉉淙)
097 지봉유설芝峯類說 (1614년) 이수광李睟光 (韓永愚)
098 성호사설星湖僿說 (1723년 경) 이익李瀷 (金龍德)
099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782년) 이만운李萬運 (劉鳳榮)
100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1810년대) 이규경李圭景 (李鉉淙)
* 한국 근대주요론저 개관 韓國近代主要論著槪觀
- 병자수호조약 丙子修好條約에서 1910년까지, 홍이섭洪以燮
한국韓國의 고전古典 100선選 - 1, (001 화담집花潭集 - 050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001 화담집花潭集 (1489 – 1546년) 서경덕徐敬德
조선조 이전의 고려는 문화면에서 유儒, 불佛, 도道 3교 및 음양오행陰陽五行 (주, 1) 과 도참圖讖 (주, 2) 또는 샤머니즘의 다원적 문화였다. 그것이 제 1 발생기 (태조 – 정종) 와 제 2 성장기 (문종 – 예종) 에는 잘 화합되었지만 제 3 쇠퇴기 (인종 – 원종) 와 제 4 멸망기 (충렬왕 – 공양왕) 에는 위로 임금을 비롯하여 아래는 민간에 이르기까지, 도참설과 샤머니즘에 미혹되어 문화적 균형이 깨어지고, 사회적 지도이념을 잃어버려 고려사회는 마침내 무너질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를 당하여 중국 송대宋代의 신 유학을 수입하여, 국운을 만회하려는 학파가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정몽주 일파와 같은 유학자들이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신 유학사상을 끌어들여 신흥국가의 이념을 삼았다. 이리하여 건국 후 약 30년 경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서는 단원적單元的인 유교문화의 꽃을 피웠다.
화담은 이러한 시대적배경을 타고 조선조 성종 20년 (1489년)에 송경 (개성) 에서 나서, 동 명종 원년 (1546년) 까지 약 60년 동안 생존했다. 그러므로 화담은 성종 때에는 동 20년부터 25년까지 약 5년 동안 살았고, 연산군 때에는 동 원년에서 11년까지 약 10년 동안 살았고, 중종 때에는 원년에서 39년까지 약 40년 동안 살았고, 인종과 명종 때에는 전후 합하여 2년 간 살았다.
이것을 다시 화담이 생장한 연령과 비교 대조하면, 성종 때에는 1세 – 7세까지다. 유년기의 화담은 두뇌가 명석하였고, 성격이 과감하였고, 의지가 굳셌고, 마음이 정직하였다. 언제든지 경건한 태도로 덕이 높고, 지식이 풍부한 어른의 말씀을 잘 신청信聽하였다.
연산군 때는 7세 – 18세까지다. 소년기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송경에 있는 중국 고대역사학의 ‘서전書傳’ 을 강의하는 스승을 찾아 강의를 들었다. ‘기삼백편’ 에서 스승의 강의를 사양하여 말하기를 ‘이 것은 이 세상에서는 알 사람이 적다’ 고 했다. 소년 화담이 이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사색한지 15일 동안 마침내 그 어려운 뜻을 깨달았다. 이 때 화담은 혼자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이 지은 책을 배워서만 아는 것이 아니요, 생각한 뒤에 아는 것이라.’ 깨달았다.
중종 때는 18세 – 57세까지다. 18세 되던 해에 유학의 사서 ‘대학’ 을 읽다가 ‘치지격물致知格物 (지식을 극진히 하여 물 자체에 도달한다)’ 에 장에 이르러 아주 감격하여, ‘학문을 하는 데는 먼저 격물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고 하였다. 그날부터 화담은 천지만물의 명칭을 써서 서재 벽 위에 붙여놓고 날마다 궁리격물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이런 학문적 방법으로 화담은 약 3년 동안 연구를 하여 20세에 이르러서는 ‘나는 20세가 되어서야 한 번 저지른 과오를 두 번 범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21세 되던 해에는 매일 서재에 혼자 단정히 앉아 사색생활을 너무 한 나머지, 밥맛도 잃고 잠을 자지도 못 했다. 이렇게 3년 동안 공부를 하는 동안에 병을 얻은 적도 있었다.
31세 때, 종종 14년에 조정에서 과거제도를 설치하여 120인을 선발하였는데 수석을 했다. 34세 여름에는 속리산과 지리산을 탐방하며 기행문과 시를 지었다. 43세에는 모친의 명으로 과거를 보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 때 시험관이었던 조수언이 ‘서경덕이 장원급제를 했다’ 고 했다. 중종 39년 선생이 56세 때 나라에서 후능참봉을 맡겼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이 해 3월에 선생은 숙환을 앓았다.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옛 성현들의 말은 선유先儒들이 이미 다 주석해놓았으니 그 이상 내가 덧붙여 말 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들이 채 설파하지 못 한 것만저서로 남기겠다. 지금 내 병이 이렇게 위독하니 나의 학설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바로 원리기설과 이기설과 태허설과 귀신사생설 등 4편을 썼다.
인종과 명종 때에는 선생이 58세였다. 인종 원년 중종이 승하하였을 적에 선생이 대상복제大喪服制는 쇠쇄법衰碎法을 쓰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다.
명종 원년 58세 되던 해 7월 7일에 선생은 화담으로 나아가 목욕하고 서재로 돌아와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에 제자가 ‘선생님,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선생은 ‘죽고 사는 이치를 내가 이미 알고 있은지 오래다. 마음이 편안할 뿐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화담집은 4권이다. 1권 - 부賦, 시詩. 2권 – 소疏, 書, 잡저雜著, 서序, 명銘. 3권 – 부록으로 연보年譜, 비명碑銘, 유사遺事. 4권 – 부록으로 제문祭文, 향축享祝, 찬가讚歌 등 제편諸篇과 문인명文人銘이다. 이 가운데서 학술적가치가 있는 것으로는 잡저에 실려있는 원리기설原理氣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및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이다.
. 학적계통學的系統 – 화담의 학적계통은 조선왕조를 풍미風靡하였던 정주학程朱學이 아니요, 노장老莊의 색채가 농후한 송대宋代의 주렴계, 소강절 및 자오거의 철학사상을 지양, 화합하여 전인미발前人未發의 새로운 기일원론氣一元論의 학설을 창조하였다.
. 우주관 – 우주공간에 충만한 하나의 원기原氣를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삼았다. 기는 우리말로 기운이요, 물리학적 술어로 에네르기다. 이런 의미에서 화담선생은 참다운 과학적 철학가였다. 그가 말하는 태허는 곧 우주다. 이 기는 우주에 가득차 있다. 그렇다고 기와 태허가 별개의 두 현상이 아니다. 기가 곧 태허요, 태허는 곧 기다. 기는 우주의 질량이므로 만일 기가 없어지면 우주는 곧 파멸된다. 이것은 마치 아인슈타인이 ‘우주구조에 대하여, 우주구면의 반경은 우주의 전 질량과 비례하기 때문에 질량이 영零이 되면 반경도 따라서 영이 된다. 우주의 물질과 이것을 담아놓은 공간도 다 소실되고, 또 커지기도 한다’ 는 말과 꼭같은 우주관이다. 화담은 말하기를 ‘이것은 주렴계와 장모거와 소강절이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한 자도 써내지 못 한 경지’ 라고 크게 자부한 이론이다.
. 현상계現象界 - 우주본체계에서 적연부동寂然不動하고 있던 일기一氣는 어떻게 현상계로 내려와서 만물을 움직여 생성하게 하는가? 화담은 이에 대하여 ‘일기는 저 스스로 그를 포함한다. 2는 무엇이냐? 그것은 음기와 양기요, 동動과 정靜이다’ 라고 했다. 일기는 우주공간에서 적연부동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플라톤의 이른바 순수형상인 이데아와 같은 존재가 아니요, 발發하려 하나 아직 발하지 않고, 동動하려 하나 아직 동하지 않은 상태에 놓여있는 순수동작이다. 순수동작이므로 우리는 감각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화담은 ‘역전격사易傳擊辭’ 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느끼어 마침내 통한다 (감이축통感而逐通)’ 고 했다. 여기서 소극적인 음기와 적극적인 양기가 생겨 서로 밀고 당기는 힘으로 천하만물을 생성발전케 한다.
. 理氣說 - 중국의 정주학파程朱學派 (주, 3) 와 조선시대의 퇴계학파는 이理와 기氣를 둘로 나누어 결코 일물一物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화담은 ‘기 밖에 이가 없다. 이는 기의 주재主宰다. 주재는 밖에서 기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요, 기의 움직임이 그러한 까덝에 정당성을 가리키어 이것을 주재라 한다. 이는 기보다 선행할 수 없다. 기는 본래 무시無始한 것이니, 이도 본래 무시한 것이다. 만일 이가 기보다 선행한다고 하면 이것은 기가 유有한 것이다’ 고 했다. 화담은 이렇게 이를 기 속에 포함시켜 둘로 보지 않았다. 이것은 화담이 장모거의 기와 주자朱子의 이를 지양통일하여 일원적으로 본 것이다. 이야말로 조선인의 틱월한 창조력을 자랑할만한 것이다.
.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 - 화담은 또 우주공간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은 있지만 그 기 자체는 소멸하지 않는다 했다. 기가 한 데로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물건이 소멸한다. 비유하면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다시 물로 환원하는 것과 같다. 화담은 또 말하기를 ‘일편향촉一片香燭의 기氣라도 그것이 눈 앞에 흩어지는 것을 보지만 그 남은 기운 (기) 는 마침내 흩어지지 않는다’ 고 했다. 이것은 마치 물리학에서, 하나의 촛불이 연소작용을 할 때 그것이 타서 없어지지만 거기서 나오는 모든 에네르기는, 즉 위치에네르기와 열에네르기와 광에네르기 등등의 총화는, 불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다고 하는 이론과 같다. 이런 것을 물리학에서는 에네르기 항존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화담의 일기장존설은 에네르기 항존설과 동일하다고 할 것이다.
끝으로 화담의 인격과 학설이 후세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자. 지면 관계로 몇몇 사람만 소개한다.
. 퇴계 - 일찍이 말하기를 ‘황극경세수해皇極經世數解’ 는 처사 화담의 저작이다. ‘듣건데 이 사람은 다른 주석한 책을 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연구하여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것은 하나의 기록할 일이다’ 라고 하였다.
. 율곡 –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은 확실히 화단의 학설에서 영향을 받았다. 바꾸어 말하면 율곡은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화담의 기일원론을 지양 통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곡은 이와 기는 1이면서 2요, 2이면서 1일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율곡은 성혼 우계에게 또 말하기를 ‘화담의 이와 기가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묘처妙處에 이르러서는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다른 사람들이 책만 보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그러므로 화담의 이기설은 옛 성현들이 다 전하지 못 한 묘처라고 생각하였다’ 고 하였다.
. 성혼 우계牛溪 – 송도 천마산으로 놀러갔다가 화담선생 묘전墓前에 배알拜謁하고 말하기를 ‘청풍과 같은 기상이 탁월하여 후세를 감격케하고, 인심을 숙청淑淸하게 한다’ 고 하였다.
. 이항복 – 임금께 드리는 ‘종사문묘의從祀文廟議’ 에서 ‘신은 들으니, 서경덕은 총명한 자질로 학문은 황무지를 개척하였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이치를 사색하여 다 체득했습니다. 한 걸음에 도학道學을 성취한 사람으로써 당대 호걸의 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근래 유신儒臣들이 경덕은 제 스스로 도道를 체득한 재질이 있어 이황과 서로 견줄만 하다고 하니다. 그들은 화담을 극히 추존追尊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기氣가 담일청허湛一淸虛하다는 론論은 일기장존설에서 나온 말이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끝으로 화담의 후계 제자로써 그 당시에 지평 벼슬을 한 민순과 영의정 박순과 경상도 관찰사 허엽과 함경도 관찰사 박민헌과 현감 이지함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과 생원 홍인후, 문학관 박지화, 종성령 구, 부윤 남언경, 완산인 최력, 군수 김혜손, 생원 마희경, 고령인 신역申湙, 사옹원직장 박여헌, 군수 차식, 서인庶人 이균, 황원과 부사府使 김한걸, 우의정 정지연, 교리 강문우, 척암惕菴 김근공, 사제 장하순 등 20여 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 가운데서 몇몇 사람을 선정하여 화담선생과 학적관계를 말하겠다.
허엽은 화담선생이 병석에 누워있을 때 저술한 원리기原理氣 등 4편을 보존했다. 박민헌은 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찬정撰定하였다. 이지함은 묘령妙齡 때부터 선생에게 역학을 배웠다. 화담은 일찍이 말하기를 ‘공公은 나의 스승이요, 나의 벗이 아니다’
고까지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후에 율곡과도 도우道友로 지냈다. 최력은 항상 ‘근사록近思錄’ 과 ‘성리대전性理大全’ 을 애독하였다. 처음에 선생께 수업할 때 시를 지은 일이 있다. ‘밤새도록 달(月)을 쳐다봄은 경치를 좋아해서가 아니요, 종일토록 낚시를 드리우고 있음은 물고기에 뜻이 있음이 아니다’ 고 했다. 선생은 이 시를 읽고 감탄하여 ‘이것은 참으로 도체道體를 읊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화담선생과 기생 황진이와 에피소드. 당시 송도에 3절絶이 있었는데, 화담, 황진이, 박연폭포다. 황진이가 말하기를 ‘지족선사知足禪師는 30년 동안 면벽面壁하여 불도佛道에 정진했지만 내 유혹에 넘어가 공功이 가석可惜하게 되어버렸지만 화담선생은 여러 해 동안 유혹에도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참으로 성인聖人이시로다’ 라고 감복했다.
(주, 1) 음양오행설 - 음양와 오행을 강조하는 학설. 음양과 오행은 독립적으로 발전했으나, 전국시대 중엽 하나의 사상으로 통합되었다. B. C 3세기 전반부터 음양을 두 가지 기로 설명했으며, B. C 4세기 초부터 오행의 개념이 나타났다. 그 후 오행은 음양과 결합하여 우주에 편재하고 충만한 5가지의 기氣로 간주되었다. 체계적인 음양오행설을 성립시킨 사람은 제나라의 추연이다. 그는 음양의 기와 오행에서 발생하는 덕의 소식이론으로 사물의 변화를 설명했다. 진한대의 음양오행설은 시령설로 발전되었다. 송대 철학자인 주돈이는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5행을 낳는다는 구도로 음양오행을 이해했으며, 이 내용은 성리학의 이기론 체계를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음 (백과사전)
(주, 2) 도참설圖讖說 - 도와 참은 거의 같은 뜻이다. 도는 도서圖書 · 도화圖畵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실과 실물에서 벗어나 추상적이고 함축적으로 미래의 일을 표시한 것이며, 참은 은밀한 말이나 문자로써 미래의 일을 예언 또는 암시하는 것이다. 뒷날 도참은 인간 생활의 길흉화복吉凶禍福 · 성쇠득실盛衰得失에 대한 징조 또는 예언이라는 뜻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도참이 본격화된 것은 신라 말, 고려 초 이후이며, 특히 고려시대에는 풍수風水가 성행했으므로 기록에 풍수와 연관된 도참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도참이 금지되었으나 정치적인 사변事變들과 관련되어 등장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풍수와 도참을 결합해 새로운 왕조의 출현을 예언한 도참서인 〈정감록〉이 널리 유행했다. 도참설은 논리적 구조나 합리적인 설명 없이 결과를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며, 흔히 정치적 변혁기나 혼란기에 성행하여 집권세력 또는 반 체제세력의 민심 회유수단이나 근거 제공의 기능을 했음 (백과사전)
(주, 3) 정주학파 - 이학파라고도 한다. 정호 · 정이가 창시하고 주희朱熹가 집대성했다. 정호 · 정이가 뤄양洛陽 사람이므로 그들의 학문을 낙학이라고도 하며, 주희가 일찍이 고정에서 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고정학파라고도 한다. 정주학파는 육구연 · 왕양명의 육왕학파와는 달리, <이> 를 우주만물의 본원이라고 인식하고, ‘덕성을 존중하고 학문을 논할 것’ 을 주장했으며 치지와 궁리를 강조했다. 주희는 육구연과 ‘태극’ 및 치학 방법에 대해 변론을 벌였으며, 영가학파 (섭적 등) · 영강학파 (진량 등) 와도 공리公理 · 옹폐王霸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송대 이후에는 정주의 이학이 오랫동안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음 (백과사전)
002 논사단칠정서論四端七情書 (1501 – 1570년) 퇴계退溪 이황李滉
퇴계 이황이 남긴 저술은 방대하다. 이 방대한 저술이 이루고 있는 것을 퇴계의 학문이라고 한다면, 그의 학문은 보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살필 수 있다. 철학, 문학, 역사학 또는 경제학이 입장에서도 살필 수가 있다. 이러한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학문은 철학이다. 퇴계가 일생 동안 온갖 정력을 다 하여 갈고 닦은 학문은 이른바 ‘도학道學’ 인데, 도학의 원리적 뒷받침을 하고 있는 ‘성리학性理學’ 이란 바로 유가儒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성리학자로써의 퇴계야말로, 그의 사상의 깊이로보나, 뒤에 미친 영향력으로 보나 단연 조선조의 성리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조선조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다 고려해 넣는다 해도 당시의 판도로써는 당당한 세계적 석학碩學이다. 확실히 그는 그때까지의 성리학을 총정리 집대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리학의 가장 깊은 심연深淵에서 독자적 길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조선조의 성리학계는 뚜렷한 학통 내지 학파를 가지게 되었고,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과도 다른 또 하나의 특색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성리학계도 퇴계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저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은 11권에 외집外集까지 곁들인 대작이다. 그는 여기서 주자학파의 학자들의 학설을 망라하여 요령있게 소개함으로써, 하나의 송계원명시대의 성리학사를 저술한 셈이다. 이것은 당시로써는 중국에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내용으로 유명한 중국 황정희의 ‘명유학안明儒學案’ ‘송원학안宋元學案’ 보다 약 100년이 앞섰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는 중국 성리학의 최고봉이자 퇴계가 사숙한 주회암의 학설을 주회암의 입장에서 자상하게 소개한 것이다. 이것은 일본에 의해 그곳에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이 두 저작으로서도 우리는 그가 그의 성리학의 궤도를 주자학의 계열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자학의 입장에서 그가 양명학설陽明學說 (주, 1) 을 변박辨駁한 것이 ‘전습록론변傳習錄論辨’ 이고, 서화담의 문인 연방 이구의 ‘심무체용설心無體用說’ 을 변박한 것이 ‘심무체용변心無體用辨’ 이다. 이 둘은 비교적 짧은 것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그의 사상세계의 진수眞髓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문제작이다.
‘계몽전의啓蒙傳疑’ 는 역학易學에 관한 그의 온축蘊蓄을 보이는 것인데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그들에 의해 번각飜刻간행되어 특히 산기파山崎派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사서석의四書釋義’ 와 ‘심경석의心經釋義’ 는 후학을 위해서 자구의 해석뿐 아니라 독법讀法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심경心經’ 은 그가 소중히 여기던 것이어서 ‘심경후론心經後論’ 을 남기고 있다. 노성老成한 그의 학문의 진수가 체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성학십도聖學十圖’ 와 ‘순자荀子’ 이다. 선정의 근본은 무엇보다도 군왕의 수덕修德에 있다고 믿었던 그였으므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을 성리학의 이론으로 군왕에게 가르쳐주어야 할 필요를 만년의 퇴계가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68세의 노 대가는 왕위에 오른지 겨우 2년째를 맞는 17세의 어린 왕 (선조) 에게 이 ‘십도’ 를 올리면서 병풍이나 첩자帖子를 만들어 항상 곁에 두고 익힐 것을 바라마지 않았다. 그의 이 ‘성학십도’ 는 일본에서는 물론 중국에서도 판각되어 널리 유포된 사실만으로도 그 진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疎’ 같은 것도 또한 저와 같은 충정과 의도에서 직접 소의 형식을 빌어 만들어진 좋은 예다. 일본에서는 ‘무진봉사戊辰封事’ 라는 이름으로 ‘성학십도’ 와 함께 합쳐서 한 책으로 간행되었다. ‘경연강의經筵講義’ 는 그의 박식을 직접 임금 앞에서 들어낸 것인데 그 중의 ‘서명고증강의西銘考證講義’ 는 일본에서 간행되어 산기암재山崎闇齊 같은 학자는 이를 격찬하여 높이 평가했다.
‘천명신도天命新圖’ 및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叙’ 는 본 논문에서 언급되겠거니와 전자는 추만秋巒 정지운의 ‘천명도’ 를 그와 함께 개정한 것이고, 후자는 그에 부속되는 저술이다. 이것도 일본인들에 의해 일본에서 ‘천명도설’ 이라는 이름으로 추만의 옛 저술들과 함께 간행 유포되었다.
그리고 그의 수많은 한시漢詩와 우리말로 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은 그의 사상이 생활화되어 실생활 속에서 빛을 보인 그의 사상과 인격의 편린片鱗들이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이상의 저술들은 그 어느 것도 퇴계의 학풍 내지 학문태도라든가 고심해서 추구한 근본문제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데 있어서는, 그의 서간문書簡文인 ‘서書’ 에 비할 수가 없다. 그의 ‘서’ 는 이야말로 용건이나 문안이나 일상의 주변잡사만을 적어보내는 오늘날의 단순한 편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퇴계의 ‘서’ 에 이러한 것들이 적혀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학우, 제자, 문인들과의 학문상의 문제를 질의응답한 것이 주로 되어있다.
우리는 그의 ‘서’ 를 통해서 그의 일상생활이나 사우師友관계를 알 수 있음은 물론, 그에게 중요한 또는 난제로 등장되었던 문제가 무엇이며, 타인을 통해서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 토론은 자칫 잘못하면 문제의 영역을 벗어나 감정의 대림으로 흐르기 쉬운 것인데도 그에게는 그렇지 않다. 자기의 생각이 틀렷다고 인정되면 언제나 누구에게든지 옳은 주장을 구했고, 옳다고 생각되는 자기의 의견을 남이 못 받아들일 때는 친절을 다 하여 소상히 이해시키고자 힘썼다.
‘자성록自省錄’ 은 이름 그대로 그가 자성의 자資로 삼고자 이러한 서 중에서 자신이 20편을 뽑아 모은 것이다. 이것이 후에 일본사람들에 의하여 번각飜刻유포되어 애독되었음은 그것이 저와 같은 그의 인품과 학덕을 여실히 나타내기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논사단칠정서論四端七情書’ 도 바로 이러한 ‘서’ 중의 하나다. 특히 ‘논사단칠정서’ 는 퇴계의 철학사상의 핵심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단적인 문서인 동시에 또한 후일 조선조 성리학의 모든 유파流派의 연원淵源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글이다.
‘논사단칠정서’ 는 ‘퇴계선생문집 (내집內集)’ 의 16권 – 17권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원칙상으로는 그 중의 제 1, 제 2, 제 3서만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의 부수된 것도 함께 뜻한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 - 1572년)선생문집’ 에는 ‘양兩 선생 사칠四七 이기理氣 왕복서往復書’ 라고 하여 퇴계의 글과 고봉의 글을 함께 모아놓았다. 이것은 퇴계가 고봉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하여 서신으로 왕복토론한 논변서다.
원래 사단칠정토론은 처음부터 퇴계와 고봉이 벌인 것이 아니다. 그 발단은 퇴계가 추만 정지운 (1509 – 1561년) 의 저著 ‘천명도설’ 을 개정한데서 비롯되었다.
퇴계는 서울에 올 때마다 서성문 안에서 우거寓居하기 20년이 되도록 그 이웃에 추만이라는 사람이 사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하르는 조카가 천명도를 얻어가지고 왔는데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뒤에야 저자가 바로 이웃에 사는 추만임을 알게되어 왕래를 하게 되었다. 마친 추만은 도설의 오류를 수정하고 있어서 퇴계에게 정정을 청하였다. 퇴계는 추만과 함께 도설의 정정을 시작햇다. 추만이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發하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發한다 (사단발어이四端發於理 칠정발어기七情發於氣)’ 라고 한 구절을 ‘사단은 이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 (사단이지발四端理之發 칠정기지발七情氣之發)’ 이라고 개정改訂하였다. 퇴계가 53세 (계축년 1553년) 되던 때의 일이다. 개정된 천명도설의 이 구절을 고봉이 보고 퇴계에게 질의를 함으로써 이른바 4단7정의 논변論辨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우선 ‘4단’ ‘7정’ ‘이’ ‘기’ 의 개념은
4단이란 맹자孟子가 말한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또는 공경恭敬), 시비是非’ 의 네 가지다. 맹자는 소위 본능적인 ‘식색지성食色之性’ 은 인간의 성性이라고 할 수 없다면서, ‘인의예지仁義禮智’ 라는 네 가지 성만이 인간의 성이라고 하였는데, 이 네 가지 성의 단서端緖로서의 정情이 바로 4단이다.
‘7정’ 이란 ‘예기禮記’ 에서 말 한 ‘희노애구오욕喜怒哀懼愛惡慾’ 의 일곱 가지 정을 뜻한다. 이것은 인간의 정을 총칭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이와 기는, 퇴계에 의하면, 사물상으로 볼 때 서로 떨어뜨려 논할 수 없는 것 (불가분不可分) 이다.
모든 효재孝在와 변화는 다 이기의 합合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구체적 사물은 이와 기의 합으로써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기는 결코 일물一物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들은 아래와 같이 구별되는 것들이다.
‘이’ 는 무형無形한 것으로써, 존재와 변화의 이유가 되는 것이며,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전자를 말 할 때, ‘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 라 하고, 후자를 말 할 때, ‘소당연지리所當然之理’ 라고 한다. 이 자체는 지선至善한 것이며, 인간에 있어서는 ‘본성本性’ 또는 이성理性으로 설명되는 경우도 있다.
‘기’ 는 有形한 것으로써 사물을 이루는 ‘자료資料’ 또는 사물의 ‘현상現象세계의 내용’ 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하면, 기란 ‘형이하形而下’ 의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는 육체적인 것, 본능적인 것을 뜻한다. 때문에 이것은 종종 ‘감정’ 이라고 설명되는 경우도 있다.
고봉의 첫 번 질문
‘4단과 7정은 다 정이고, 정은 하나의 사물이니 이기의 합이다. 어떻게 어떤 정은 이의 발이고, 어떤 정은 기의 발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이기는 실제상 불가분이라면서 어떻게 이만 발이라든가 기만 발을 말 할 수 있을까? ’
실은 퇴계 역시 처음 얼마간은 자기의 개정에 자신이 없었던 듯 하다. 고봉의 첫 질문을 받자, 그는 또 다시 ‘4단의 발은 순리이기 때문에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7정의 발은 기를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4단지발 순리고무불선順理故無不善 7정지발 겸기兼氣, 고유선악故有善惡)’ 고 개정했다.
석연한 답변을 얻지 못 한 고봉은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우선 4단과 7정은 별개의 것처럼 대거호언對擧互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4단은 7정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단은 7정 중에서 발하여 절節 (외부조건) 에 합당하게 들어맞는 것의 묘맥苗脉일 뿐이라’ 는 것이다. 또 이와 기를 보더라도 이것들 역시 나누어 말 할 수 없다고 한다. 도대체 이 밖에 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기 밖에 이가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이의 발이니 기의 발이란 말을 할 수 있느냐는 주장이다.
퇴계는 이 때 마침 ‘주자어류朱子語類’ 에 자기의 전번 개정설과 똑같은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전번 것에 자신을 얻고 그것이 결코 틀릴 것이 없다고 이번 것을 번복飜覆했다. 그리고 자기의 개정이 타당한 것임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4단이나 7정이나 정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정이 발할 때 이쪽이 주가 되어서 발한 것은 4단이라 하고, 기 쪽이 주가 되어서 발한 것은 7정이라고 퇴계는 보기 때문에 그 주 되는 것을 가르쳐 말하면 4단7정은 이발理發 기발氣發로써 대거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4단7정에 대한 이러한 분별은 마치 정에 있어서의 본연 기질의 분별과 같다고 그는 본다.
고봉은 자기 주장을 다시 강조한다. 4단7정은 다같은 정情이요, 정은 성性의 발한 것이다. 중용中庸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미발은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절節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하였는데, 미발한 것은 성이요, 그 발한 것은 정이니, 정의 선불선善不善은 발의 중절中節 부不중절에 있는 것이다. 4단은 발하여 중절한 것이라고 보면, 7정과 동실이명同實異名에 지나지 않는다. 동실이명인 이상 이의 발, 기의 발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퇴계는 4단과 7정의 발의 소종래所從來가 서로 다름을 강조한다. 4단은 성에서 발하고, 발어인의예지지성發於仁義禮智之性, 7정은 외물外物이 그 형체에 닿아 중中에서 동動하여 경境을 따라 나타난다 (외물촉기형外物觸其形 이동어중而動於中 연경이출언이緣境而出焉爾). 그랬다가 다시 4단도 물에 감하여 동함은 7정과 다름없다고 하면서도, 그렇지만 ‘4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요, 7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이를 타는 것 (사즉이발이기수지四則理發而氣隨之 칠즉기발이이승지이七則氣發而理乘之耳)’ 이라 하였다. 여기서 그는 마침내 자기의 주장을 또다시 개정한 것이다.
고봉이 이것을 보고 평하기를 ‘칠정에는 이기를 겸유했다고 하겠으나, 4단은 다만 이발만 있다는 뜻이 된다’ 고 했다. 그러나 퇴계는 더 이상 개정하지 않아 결국 이것이 최종 개정이 되었다. 고봉도 나중에는 4단7정의 후설後說과 총설總說을 지어 자기의 고찰이 미상未詳 미진未盡했음을 말하고, 아울러 4단7정을 각각 이의 발, 기의 발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퇴계의 주장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하여 6년 (1560 – 1566년) 에 걸친, 아니 천명도설을 개정한 때부터 친다면 무려 14년 (1553 – 1566년) 간에 걸친 토론은 끝을 맺은 셈이다.
토론이 시작되었을 무렵, 퇴계는 추만에게 고봉으로 말미암아 자설의 미비함을 깨달은 것이 하나 둘이 아니라면서, 고봉의 도움이 컸음을 고백한다. 고봉이 후설 총설을 지어보내자 그는 논의의 명쾌함을 고봉에게 직접 칭찬해마지 않았다.
누구나 퇴계의 논사단칠정서를 읽는 독자라면 이 서론에서 받는 감명은 문제를 파고드는 뛰어난 통찰력 또는 번뜩이는 재치보다도 편견없이 진지하게 문제를 다루려는 겸허한 태도와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는 뜨거운 열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순수한 학자적 양심이나 철저한 학구태도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4년 후 70세 되던 해 12월에 별세하였거니와, 그 해 10월에는 이 토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논개심통성정도서論改心統性情圖書’ 를 고봉에게 보내는가 하면, 11월에는 ‘격물설格物說’ 에 관한 것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에 관한 것을 역시 고봉에게 보내면서 자설自說의 오견誤見을 끊임없이 정정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돌아가기 수일 전 명이 이미 다 한 것을 감지한 그는 제자들을 불러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도 평소 자기의 ‘오설誤說과 오론誤論에 대하여 사과’ 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훗날 성인聖人의 개정이 있을 것을 말하기까지 하였다.
퇴계의 학문은 정精과 성誠으로써 쌓은 것이므로 비록 천재는 아니었다고 해도 그의 학문의 내용은 앞에서 보았듯이 당시 그 누구의 것에도 못지 않은 것이 되었다고 하겠다. 풍부한 학식과 고귀한 학덕을 겸비한 그에게서 훌륭한 제자가 쏟아져나오고, 퇴계라는 인물 및 그의 학문에 대한 연구가 뛰따라 생긴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고봉은 물론,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한강 정술, 월천 조목, 간재 이덕홍, 문봉 정유일, 금계 황준량, 사암 박순들이 퇴계의 제자다. 그의 지도를 직접받은 당시의 당당한 명유석학名儒碩學들이다. 그리고 성호 이익의 ‘이자수어李子粹語’, 대산 이상정의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훨씬 뒤에 그를 사숙한 후학들의 그의 학문에 대한 추앙으로써 나온 것들이다.
특히 ‘이퇴계서초 (10권 10책)’ 는 일본인 촌사옥수村士玉手 (1776년 몰歿) 의 편찬으로써 퇴계가 영향을 준 일본으로부터 퇴계가 받은 보상의 대표적인 예다.
원래 일본의 성리학은 임진왜란 이후에 성립되었다. 왜군은 난중에 조선에서 많은 경서와 문집을 가져갔으며, 수은 강항 (퇴계를 사숙한 우계牛溪 성혼의 문인) 같은 유수한 학자들을 포로로 데리고갔다. 그리하여 일본 유학의 이른바 3대 유종儒宗이라고 하는 등원성와藤原惺窩, 임라산林羅山, 산기암재山崎闇齋를 낳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중에 암재는 퇴계 저서 중의 중요한 것을 다 편렵한 학자다. 그는 특히 퇴계의 자성록과 주자서절요에 크게 감분感憤하여 마침내 성리학의 대가大家가 되었다.
그러나 이 논4단7정서에 있어서 제기된 문제들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많은 문제를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형이상적인, 따라서 작위作爲가 없는 이가 발한다는 것부터 쉰게 수긍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런 점에서 그 후에 율곡 (이이) 은 고봉의 설을 지지하면서 그것을 한층 발전시켜서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게 하는 것은 이 (발지자기야發之者氣也 소이발지자이야所以發之者理也)’ 라고 주장하여 ‘기발이승氣發理乘만이 옳다’ 고 하였다. 이에 토론의 불길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학계는 퇴계, 율곡의 2대학파로 나누어졌고, 주기파, 주리파라는 명칭이 생겼다. 퇴계의 고향이 영남이고, 고봉의 고향이 호남이므로 두 학파는 자연히 지연地緣의 영향을 받아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로써 호론湖論 낙론洛論의 대립이 있게 되었고, 또는 기호畿湖, 영남嶺南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거기에 당쟁의 영향까지 겹쳐, 남인은 영남파가 되고, 서인 중의 노론은 기호파가 되어 학문상의 대립이 때로는 심한 당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면서 조선조 말기까지 300년의 역사를 누비게 되었다.
(주, 1) 양명학 - ‘주자학’ 은 그 체계가 완비되어 있어 수양과 실천을 위주로 할 뿐 이론적인 독창성이 없었다. 명나라 초기 진헌장은 독서에 의한 자기수련법을 버리고 정좌를 통해 사색한 끝에 ‘심학心學의 원리’ 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헌장의 ‘심학’ 은 양명학의 선구가 되었으며, 심학은 왕수인에 의해 대성되었다. 왕수인은 ‘심心은 곧 이理이다. 천하에 심 외의 일一이 있고, 심 외의 이二가 있겠는가?’ 라는 주체적인 자각에서 ‘심즉리心卽理’ 가 정립되었다고 했다. 그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을 주장하고, 저양 이후 정좌定座를 가르쳤으며, 강우 이래로 비로소 ‘치양지致良知 (만인의 선천적, 보편적 마음의 본체인 양지良智를 실현하는 일)’ 3글자를 제시하여 본체本體를 바로 지적했다. 흔히 왕수인의 교敎가 3변變했다고 하는데, 이는 지행합일설 – 정좌 - 치양지설로의 변화를 말한다. 양명학은 ‘심즉리’ 로부터 출발하여 ‘지행합일설’ 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치양지설’ 에 의해 완성됨 (백과사전)
003 율곡전서栗谷全書 (1536 – 1584년) 이이李珥
역사는 민족 생명의 한 흐름이다. 그러므로 근세 조선 왕조사회도 하나의 유기체인만큼 발생, 성장, 쇠퇴, 사멸의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이 조선사회의 발생기 1352년 (고려 공민왕 – 1391년 폐왕 우), 성장기 1392년 (태조 – 1494년 성종), 쇠퇴기 1495년 (연산군 – 1724년 경종), 사멸기 1725년 (영조 – 1944년 민족해방 전년) 로 한다.
율곡의 활약은 바로 쇠퇴기에 속하는 1536년 (중종 31년) - 1584년 (선조 16년)까지 약 50년 동안이다. 이 때의 사회현상을 일별一瞥하면, 건국 초기는 고려사회와의 교체에 있어서 하나의 역성적易姓的 혁명에 불과하였으므로 모든 문물제도가 고려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근세조선의 성격이 완전히 규정되었다. 정치, 경제의 기구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특히 문화면에 있어서 더욱 현저하였다. 즉 고려의 다원적多元的문화가 유교의 단원單元문화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 반세기 후 연산군부터서는 쇠퇴에서 부패에 이르게 되었다. 위의 임금은 호사방종한 생활을 하였고, 조신朝臣 간에는 정권쟁집政權爭執이 있었고, 경제면 특히 토지제도가 문란하였고, 공세貢稅가 가혹하였고, 학계는 공리空理만 숭상하였다. 밖으로는 북호北胡와 남왜南倭가 발호하였으나 방어책이 없어 마침내는 임진왜란이란 고배를 마셨다.
율곡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연산군 집정 이후와 임진란 발생 이전 즉 사회가 패배기에서 장차 붕괴기로 들어갈 무렵에 출생하였다. 이때 율곡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행하였을까? 그는 학술에서는 공리 공상 대신에 실리 실정實情 실학 실사實事를 주장하였다. 정치에서는 정당파쟁派爭 대신에 보합조제책保合調製策을 썼고, 윤리적정치를 주장하였고, 용주庸主를 성군으로 만들려고 하였고, 군주주의 대신에 민본주의를 주장하였고, 신분적계급을 타파하여 광통얼사廣通孽仕를 내세웠다. 국방책에 있어서는 양병養兵 10만을 주장하였고, 경제에 있어서는 지방호족豪族의 토지침탈을 막기 위하여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하였다. 과연 율곡은 유교의 술어를 빌면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자격을 가진 철인哲人정치가라 말 할 수 있다.
. 전서典書내용 – 율곡의 문헌은 문집과 전서 두 종류가 있었다. 문집은 광해군 3년에 율곡의 문인 박여룡이 우계선생을 고문으로 하여 해주에서 출판하였고, 전서는 영조 20년에 문정공의 주선으로 율곡선생의 5대손 진오와 상의하여 편찬하였고, 그 후 활자로 약간본을 인쇄하였다. 모두 38권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1권은 사부시상辭賦詩上이요, 제 2권은 시하詩下요, 제 3권은 소답疎剳 1이요, 제 4권은 소답 2요, 제 5권은 소답 3이요, 제 6권은 소답 4요, 제 7권은 소답 5요, 제 8권은 계의啟議다. 제 9, 10, 11, 12권은 서書 1, 2, 3, 4다. 제 13권은 응제문應製文, 서序, 발跋, 시詩 등이요, 제 14권은 찬贊, 명銘, 제문祭文, 잡서雜書 1 등이다. 제 15권은 잡서 2요, 제 16권은 잡서 3이다. 제 17권은 신도비명神道碑銘, 묘갈명墓碣銘 등이요, 제 18권은 묘지명墓誌銘, 행장行狀 등이다. 제 19, 20, 21, 22, 23, 24, 25, 26권은 성학집요聖學輯要 1 – 8이요, 제 27권은 격몽요擊蒙要, 결제의초訣祭儀鈔 등이다. 제 28, 29, 30권까지는 경연일기經筵日記요, 제 31, 32권은 어록語錄이요, 제 33, 34, 35, 36, 37, 38권은 부록附錄이다. 이 가운데서 학술적가치가 있는 것은 서, 잡서, 성학집요, 격몽요결, 경연일기 등이다.
. 사상내용 – 여기서는 서書 가운데 있는, 율곡이 성成 우계牛溪 호원과 문답한 서신에 있는 일종의 논문 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만 다루기로 한다. 이 장장문을 여기에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극히 간략하게 해명한다.
우계는 율곡의 우주관에서 우주론의 근원인 태극을 주자와 같이 정결공활淨潔空濶한 이理의 세계로 보지 않고 음양혼일체陰陽混一體로 본 것과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과 인성계人性界에 있어서 4단7정일도설一途說도 다 인정하면서 율곡이 인심과 도심을 둘로 갈라서 논한 인심도심양변설兩邊說에 큰 의문을 품었다. 다시 말하면 4단을 7정 속에 포함시키면서 어째서 인심과 도심을 둘로 갈라서 말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심과 도심은 현대어로 자연본능과 도의심道義心을 이름이다.
율곡은 이에 대하여 인심은 이미 인심이니 도심일 수 없고, 도심은 이미 도심이니 인심일 수 없다. 4단을 포함한 7정이 외적外的 세계로 발發할 때에는 4단이 주主가 되고, 7정이 종從이 되면 그것이 바로 도심이요, 7정이 주가 되고 4단이 종이 되면 그것이 바로 인심이다. 비유하면 사람이 말을 타고 길을 걸을 때 사람이 주가 되고, 말은 다만 사람의 조종에 따라 걸으면 그것이 바로 도심과 같다. 이에 반하여 말이 주가 되어 사람의 조종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달려 진흙속으로 들어가고, 가시밭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인심과 같다. 그러나 말이 처음에는 사람의 조종에 따라 잘 걸어가다가도 중도에 제멋대로 달아나면 그 때에는 인심과 같다. 또 처음에 말이 제멋대로 달리다가도 중도에 사람의 조종에 따르면 그 때에는 도심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수양修養에 따라 도심이 인심, 인심이 도심으로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에 율곡의 인심도심양변설은 그의 4단7정설과 아무 논리적 모순도 없고 또 당착撞着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경성대학 교수 고교형씨는 조선지나문화의 연구에서 ‘율곡이 퇴계의 이발기발설을 부정한 것은 발發 자字의 의의를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요, 그 원리를 부정할 수는 없게 되었다’ 고 하였다. 이것은 율곡의 기발이승설을 이해 못 한데서 나온 말이다. 또 해방 후 우리나라 학자 가운데서도 율곡의 인심도심설은 논리적 모순을 범하였다고 하는 이도 있다. 이 역시 율곡의 인심도심설을 이해하지 못 한데서 나온 말이다. 율곡을 위하여 애석할만하다.
이제 또 율곡의 학설이 그의 후배 및 실학파에 미친 영향을 감추려보면
1. 성 호원은 율곡이 1584년 (선조 17년) 5월에 경성 대사동 우사寓舍에서 별세하였을 때 와서 곡哭하기를 ‘율곡은 도道에서 큰 근원을 통찰하였다. 그 분의 인심의 발은 두 근원이 없고, 이기理氣는 호발互發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은 다 실견實見하여 성誠을 얻었으니 산하간山河間의 기氣요, 삼대상三代上의 인물이다. 참으로 나의 스승님이었다. 하늘이 빨리 그 분을 빼앗아갔으니 이 세상에서는 유위有爲를 할 수 없다. 통탄할 일이다’ 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우계도 만년에 가서야 율곡의 인심도심양변설이 논리상 모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본다.
2. 송귀봉은 우계와 같이 율곡의 음양이 화합한 태극론과 기발이승설과 4단을 포함한 7정의 4단7정설을 다 인정하면서도 인심도심양변설에 대하여서는 끝내 의문을 풀지 못 하였다. 이것은 학문적경지가 우계에게 미치지 못 한 점이다. 그러므로 그는 ‘답 희원 서答希元書’ 에 ‘숙헌 (율곡) 이 2자者 (인심도심) 는 다 일사一事에서 발한다고 말한 것은 더우기 알 수 없다’ 고 하였다. 율곡이 인심과 도심이 다 한 가지 일에서 발한다고 말한 것은 인심과 도심이 각각 따로 떨어져있는 두 개의 점點이 아니요 일선상一線上에 놓여있는 점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인심과 도심은 4단을 포함한 일본一本의 정情이 흐를 때의 그 기복起伏에 불과한 것이다.
3. 김 사계는 어려서 구봉에게 4서,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고, 자라서는 율곡을 스승으로 섬겼다. 율곡의 태극, 이기, 47론 뿐만 아니라 인심도심설까지도 어느 정도 지지하였다. 이것은 사계가 구봉 보다 나은 점이다. 그러므로 그는 답서에서 ‘4단은 도심을 주로 하여 말하는 것이요, 7정은 도심과 인심을 겸하여 말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율곡이 인심이 도심으로도 되고 도심이 인심으로도 된다는데 대하여 ‘인심에서 발하여 도심이 된다는 것은 옳지만 도심에서 발하여 인심으로 된다는 것은 타당치 못 하는 듯 하다. 만일 도심이 인심으로 변한다면 바로 인욕人慾이 되기 때문이다’ 고 했다. 그러므로 사계는 율곡의 인심도심설에서 반은 믿고 반은 회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역시 사게도 인심과 도심을 동일한 선 위에 있는 것으로 보지 못 하고 따로 떨어져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4. 정수몽은 일찍이 구봉을 찾아본 일이 있고, 또 우계와 율곡의 문하에 출입한 일이 있었다. 그의 태극론, 심성론, 이기론에 있어서는 율곡을 능가할 정도지만 인심도심설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언급을 하지 않았다.
5. 신 독재는 율곡의 서녀庶女를 부실副室로 맞아 들였으므로 옹서지간翁婿之間이라 말 할 수 있다. 우암 (송시열) 과 같이 그의 부친 사계에게 수학하였다. 그의 저서는 많지 않으나 정 자용에게 보낸 편지와 ‘시강중용서侍講中庸書’ 가운데서 태극론과 인심도심설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왕과 문답한 인심도심설의 신 독재는 왕에게 ‘주자가 초년에는 인심을 사욕私慾으로 인정하였다가 만년에는 형기形氣(형체形體)에서 나온 것이다고 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사욕을 인심은 위태롭다는 위危 자字로 보면 사욕이 아니다’ 고 했다.
6. 동춘당은 이름이 준길이다. 우암과 같이 사계에게 수학하였고, 또 그의 아들 신 독재를 스승으로 섬겼다. 30세 때 율곡의 자경문自警文을 써서 벽 위에 걸고 바라보며 반성하였다. 정경식 경화에게 보낸 답서에 이르기를 ‘선사先師 (사계) 께서 항상 율곡의 설을 쫓았다. 우리 아우가 일찍이 그에게 묻기를 퇴계, 율곡의 이기설이 서로 같지 않으니 후학은 어느 것을 쫓아야 합니까?’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아마 율곡의 설이 옳을 것이다. 내 몸으로 체험해보면 가묘家廟에 들어갈 때와 같으니 마음이 엄숙해지는 것은 바로 존경심의 발현인데 엄숙해지는 것은 바로 기다 라고 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있다’ 고 했다. 이것을 보면 동춘도 역시 율곡을 사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7. 송 우암은 이름이 시열이다. 그의 부친이 일찍이 이르기를 ‘주자는 후 공자요, 율곡은 후 주자다. 그러므로 주자를 배우려 하는 사람은 마땅히 율곡에서 비롯해야 한다’ 고 했다. 그 후 우암은 사계 김장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배
척하고 율곡의 이기일운설을 지지했다.
이밖에 율곡의 제자로써 김장생, 조헌, 정엽을 비롯하여 모두 84인이 있다. 이 가운데는 율곡의 학술사상을 계승한 사람이 20여 명이 있고, 임진왜란 때 국가에 충성을 다 한 사람이 70여 명이다.
끝으로 말 할 것은 율곡의 학술사상이 그 후 우리나라 실학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점이다. 율곡은 본래 공리空理를 말하지 않고 실리를 말하였고, 공허한 학문을 말하지 않고 실용가치가 있는 실학을 말하였다. 이것은 다 그의 기를 떠나지 않는 이, 즉 기발이승설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몇몇 실학파의 학자를 들면
1. 김육은 실학파의 선구자다. 그는 옛 경사經史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병략, 복서卜筮, 율력律曆, 경제 등을 다 섭렵하지 않음이 없었고, 또 서양역법曆法의 지식도 풍부했다. 율곡의 성리학설에는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였다. 우리가 그의 ‘호서대동절목차湖西大同節目次’ 가운데서 율곡의 개공안改貢案과 혁폐법革弊法을 인용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3. 유 반계 (형원) 는 율곡과 같이 우주관에 있어서 기 안에 있는 이, 즉 실리를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성론에 있어서도 7정 안에 있는 4단과 인심 안에 있는 도道를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7정 밖에 있는 4단과 인심 밖에 있는 도심은 역시 다 공허하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실학에 입각한 우주관과 인생관이라 말 할 수 있다.
4. 홍대용은 청대 고증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그의 숙부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육비, 엄성, 반정균과 같은 학자들과 교유했다. 연경에서 돌아온 후 엄성에게 율곡의 ‘성학집요’ 를 추천하여 말하기를 ‘절실간도切實懇到함이 인군人君의 귀감龜鑑이 될 수 있고, 천하에 반포頒布하면 동방의 영광’ 이라고 하였다.
5. 박 연암 (지원) 은 16세 때 부숙婦叔이 권고로 학문에 분발하여 경經, 사史, 자子, 집集에서 천문지리, 병농전곡兵農錢穀이르기까지 연구했다. 그는 율곡의 기발이승설로 도를 설명하여 기가 아니면 이를 볼 수 없고, 기를 의義와 도에 배합하여 양養하면 호연浩然의 기가 된다고 했다.
6. 정 다산 (약용) 도 인간적으로는 퇴계를 사숙私塾하였고, 학술적으로는 율곡을 쫓았다. 그의 ‘자선묘지自選墓誌’ 에 의하면 ‘어느 날 이벽과 같이 내강중용內降中庸 80여조餘條를 강의할 때, 이벽은 퇴계의 이발기발설을 주장하였고, 다산은 이 문성공 이 (율곡) 의 논과 합치되어 왕의 칭찬을 받았다’ 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또 이발기발변에서 또 말하기를 ‘율곡을 그르게 여기고 퇴계의 이기를 취하면 혼란할 뿐이다’ 라고 했다.
이상을 보면 율곡의 학설은 참으로 실학의 연원淵源을 이루었다고 말 할 수 있다.
004 사서사변록四書思辨錄 (1703년) 박세당朴世堂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민족의 2대수난을 뼈저리게 겪은 이후, 학계, 사상계의 한 모퉁이에서도 새로운 반성과 자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즉 과거 우리 세계관이 너무도 좁고, 자아의식이 너무도 희박했고, 학문과 사상이 너무도 고루편파固陋偏頗하고, 사회의 모순이 너무도 많은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 나머지 그러한 고루, 편파한 학적 분위기를 벗어나 좀 더 넓은 시야와 자유로운 입장과 실제적인 태도에서 고전을 재 검토하고, 현실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실학파, 반 주자학파의 대두가 그것이니, 백호 윤휴, 서계 박세당은 당시 실학파, 반 주자학파의 2대 거벽巨擘이었다. 이 두 분은 연령의 차는 있으나 거의 동 시대의 사람으로 주자의 경의經義에 반기를 들고 자기류의 주설註說을 통하여 경전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정계, 학계에 큰 물의를 일으켜 마침내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烙印을 찍히게 되었다.
백호의 저술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중용주해中庸註解’ 인데, 불행히 오늘날 전해지지 않았으나 서계의 저술은 문제의 ‘사서사변록’ 을 위시하여 온전히 전하고 있다. 서계 박세당 (1629 – 1703년) 은 소론파의 거두인 박태보의 부친으로 일찍이 문관에 등제하고, 그 후 이조좌랑, 이조판서의 직職을 받았으나 관官에 오래 머물지 않고 매양 경교京郊에 퇴거하여 연구와 저술에 힘쓰는 한편, 문도門徒들에게 학學을 강講하였다.
서계의 저술 중에는 문집(서계) 외에 당시에 이단시하던 노자老子의 ‘도덕경주道德經註’ 와 장자莊子의 ‘남화경주南華經註’ 가 있고, 또 농서農書의 일종인 ‘색경穡經’ 도 있지만, 가장 물의를 일으킨 것이 ‘사변록’ 이었다.
사변록 뿐 아니라 그가 지은 고상故相 ‘이경석비문碑文’ 중에 우암 송시열을 풍자한 문구가 들어있다 하여, 이 두 가지의 문제로 반대파 (노론) 의 맹렬한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물의의 발단은, 숙종 29년 (1703년) 서계가 별세하기 직전에 노론파의 김창옹 (삼연三淵) 이 서계의 문인인 이덕수에게 글을 보내 서계의 사변록과 이경석비문을 비난하고, 이어 성균관 유생 양계적 등 180인으로 하여금 왕에게 상소를 하여, 서계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케 하였다. 그래서 숙종도 문제의 사변록과 비문을 친히 일람하고 노하여 서계의 관작을 삭탈하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사변록을 축조逐條비판케 한 후, 그 결론을 보아 문제의 비문과 함께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축조비판의 명을 받은 유신은 송시열의 문인인 권상유이니 상유는 또한 송시열의 고족高族인 권상하 (축암逐菴) 의 아우다. 그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만족치 못 할 뿐더러 가다가 실수할 염려도 있으므로 그의 친구요 석학인 김창엽 (농암農巖) 과 문의하여 ‘변파문辨破文’ 을 제진製進하였는데, 지금 권상유의 변문은 소실되었고 김창협의 문집 (농암집) 에 실려있다. 그 변문을 보면 대개 주자학적 입장에서 주자를 변호하는 동시에 서계의 설을 반박한 것이므로, 개중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도 많이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때 그 책자와 비문의 소각을 청하는 상소가 연달아 일어났으나,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아 사변록의 실사본實寫本과 전사본轉寫本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물의가 일어나고 있으매 서계의 문도측에서도 방관할 수 없어, 이원, 이익명 등이 전후 상소하여 스승의 입장을 변호하였으나, 워낙 반대파의 기세가 대단하여 사헌부지평 김재는 서계의 유배流配 (귀양) 를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왕명으로 서계를 전라도 옥과현 (전남 곡성군) 에 유배키로 결정하였던 바, 마침 사마직 이인엽이 서계의 연로年老, 질병과 고풍高風, 기절飢節 그리고 그의 아들 태순의 보절輔節 (숙종의 민씨 폐비사건에 극력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극형에 처함) 등을 들어 신구伸救의 소疎를 올림으로써 유배를 면했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서계는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때가 숙종 29년 4월이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실록이 이 해 이달에는 그의 죽음을 기록한 다음 사신史臣의 논평이 적혀있는데 – 세당 (서계) 이 소시에 국구國舅 김우명 (현종 비의 부) 가의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일어나 춤을 추었다 해서, 선비들이 그를 나쁘게 보아 전랑銓郞 (이조좌랑) 에 대한 추천을 가로막았고, 그 후 세당이 전랑의 배명拜命을 받았으나, 공의公議가 좋지 못 하였다는 것, 또 세당은 그 가로막은 논의가 송시열에서 나온줄로 의심하고 송시열을 몹시 원망하여,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전리田里로 퇴거하여 관계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는 것, 또 그 사람됨이 괴벽怪癖하여 고집이 세고, 일찍이 장자莊子를 주해註解한 까닭에 그가 부제학의 망에 올랐을 때, 민정중 (노론) 은 ‘어찌 이단異端학자로 하여금 경악經幄 (경연經筵) 에 처하게 하겠느냐’ 하여 그를 배척하였다는 것, 서울의 양반자제들이 과거문을 배우기 위하여 세당에게 가서, 업業을 청하면 세당은 사도師道로 자부自富하여 경전의 주해를 자기식로 고쳐 가르치기를 여러 해 동안 하였다는 것이다.
또 숙종 26년 8월에 서계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는 실록기사 밑에도 그에 대한 사신의 논평이 실려있거니와 – 즉 세당이 벼슬하던 소시로부터 서울 동쪽 교외 (수락산) 에 물러가 벼슬의 뜻을 끊고 후생을 교수하는 한편 4서를 주석하여 사변록이라 하였는데, 내용이 대개 주자의 그것과 이동異同이 있기 때문에 그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지목하고 있으나, 그러나 세당은 한갓 문사文辭 (문예文藝) 에 조예造詣가 깊었을 뿐이요, 족히 이단이라고 할 정도가 되지 못 한다고 하였다. 서계가 단지 문예방면에만 조예가 깊은 양으로 말한 것은 공정을 잃은 사평史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서계의 본령本領과 조예는 아무래도 경학에 더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사변록에 대하여 그 편저연대라든가 편차내용을 살펴보면, 저자는 처음에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순서로 4서에 관한 사변록을 완성하였는데, 대개 52세로부터 60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0년 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저자는 그 후 계속하여 상서尙書 (서경書經) 에 대한 사변록을 완료하고 시경詩經에 옮겨 저술하던 중, 65세에 병을 얻어 뜻과 같이 진섭震懾하지 못 하다가 소아小雅 채록편采綠篇에 이르러 붓을 멈추고 말았다 한다.
사변록은 모두 14책으로써, 일명 ‘통록通錄’ 이라고도 하거니와 그 내용 편차는
제 1책, 대학에 대한 사변록
제 2책, 중용에 대한 사변록
제 3책, 논어에 대한 사변록
제 4, 5책, 맹자에 대한 사변록
제 6 – 9책, 상서 (서경) 에 대한 사변록
제 10 – 14책, 시경에 대한 사변록으로, ‘주역周易’ 에는 손을 대지 못 한 미완성 서다.
방간坊間에 간혹 사변록의 전사본이 전하고 있으나, 대개 ‘4서사변록’ 혹은 그 중의 일부 사변록에 지나지 못 하고, 온전한 사본은 오직 서계의 후손인 박계양선생댁에 일부가 비장되어 있다. 해방 전년에 필자가 비로소 그것을 알고 박선생을 방문, 차람借覽을 간청한 끝에 그 문외불출門外不出의 비장서를 빌어다 중요한 부분을 초출抄出하였다.
해방 이래 각종 출판물이 쏟아져나옴에도 사변록만은 여전히 박선생댁에 심장深藏되어 일부의 복사본조차 없는 것을, 1966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종용하여 사변록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복사하였다. 또 마침 민족문화 추진위원회에서 고전 국역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4서사변록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복사 필름) 도 계획에 들어 국역이 되어 출판되었다.
사변록 중에 저자로써 가장 치력致力하고 또 당시 일반의 비난을 받았던 것은 중용中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4서에 관한 저술문자였다. 4사서의 주설註說로 장래의 권위를 가지고 정통시해오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자의 훈해訓解이었는데, 서계의 4서사변록에는 위에 누언屢言한 바와 같이 주자의 설을 비판한 동시에 자기식의 해석을 가한 것이 많았다. 특히 대학과 중용에 이르러서는 장구章句의 편차編次까지 고쳤다. 이 두 책은 원래 예기禮記 가운데서 발췌한 것으로, 대학의 내용 편차에 있어서는 그중에 궐문闕文 또는 선후가 바뀐 것이 있다 하여 선유중에도 그것을 갱정한 이가 있었지만, 서계는 대학뿐만 아니라 중용에 대해서도 서계대로의 고정考定을 가하였던 것이다.
왜 서계는 반 주자학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가? 서계는 당시 학자들의 학문하는 태도와 연구하는 방법을 비평하는 한편 자기의 그것을 피력하여 말하되, 지금의 경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모두가 비근卑近한 문제를 초월하여 심오한 문제에 대해서만 달리고 있으며, 또 거칠고 소략疏略한 것을 소홀히 보고 정비精備한 것만을 궁구窮究하려 하니, (그들의 생각이) 혼란에 빠져 아무것도 얻지 못 하게 되는 것은 도리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들은 비단 심원深遠함과 정비함을 얻자 못 할 뿐 아니라, 그 비근함과 조략粗略한 것은 우리가 연구하기도 쉽고 알기도 쉬운 것이다. 그 쉬운 문제에서부터 출발하여 차차 깊고 더 깊은 데로, 또 멀고 더 먼 데로, 정비하고 또 더 정비한 데로 들어가면, 마침내 그것을 극진極盡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그의 말을 요약하면, 학문하는 방법이 처음부터 고원난행高遠難行의 형이상학적 문제라든가, 연역적인 연구보다도 지극히 천근淺近한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심원정비한 경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귀납적 또는 향상적 방법론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겠다.
수사洙泗의 공맹학孔孟學이 원래 그러하여 일상생활에 절실한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거니와 공자가 일찍이 명命이니 성性이니 천도天道, 귀신 등 고원유심高遠幽深한 문제를 적게 다룬 것은 다 뜻이 있다고 서계는 말한다. 그래서 서계는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에 대한 주자의 해석에 격물이란 것은 물리物理 (군물軍物의 법칙) 의 극처極處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는 것이고, 치지는 우리 마음 가운데 아는 바가 다 하지 아니함이 없다는 것이고, 또 주자가 이리하여 일초一草 일목一木 일진一塵 (한 티끌) 의 미세한 데 이르기까지 살피지 아니함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는 해석을 내린 데 대하여 서계는 반대하였다. 즉 서계는 ‘대학은 초학입덕初學入德의 입문入門에 불과한 것인데, 여기에 대번에 행하기 어려운 도정道程을 말 할 리가 만무하다’ 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격물치지의 뜻은 학자가 일상생활 중에 일사일물一事一物에 따라 사물의 지닌 바 법칙을 살피어 그 법칙의 ‘정상正相’ ‘정체正體’ 대로 처응處應하면 의意에 발發하는 것도 따라 성실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만일 주자의 해석대로 사물의 이치가 이르지 아니함이 없고, 우리의 앎이 다 (진盡) 하지 아니함이 없다면 그것은 곧 성인聖人의 자리에 도달한 것으로 학문의 능사能事가 다 끝난 것이니, 초학자初學者의 교본敎本인 대학에서 어찌 그러한 취지로 말한 것일까보냐 하는 것이 서계가 공격한 요점이었다. 대개 유학의 수양차제次第가 지근至近한 것에서 지원至遠한 데로, 지비至卑한 것에서 지고至高한 데로 점진漸進하는 것을 그 방법으로 삼고있는 까닭이라고 하였다.
서계 당시의 학계를 돌아다보면 아직도 성리학 전성시대로써, 특히 호중湖中 학자 간에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인人과 물物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 문제 등을 가지고 질의가 시작되어 이른바 호낙시비湖洛是非의 전조前兆를 보이고 있을 때였다. 서계는 이러한 성리학적 형이상학적 관념론적 학문에 대하여 원래 큰 불만을 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학적 분위기에서 초탈超脫하여 오로지 경전에 즉卽하여 실實다운 실증적인 연구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여 공맹학의 본지本旨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학문적 태도였다. 이 점은 후일의 다산 정약용과 방불한 바가 있다고 하겠다. 다산 역시 성리학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공맹학에 직접하여 그 본지를 천명하는데 힘을 썼던 이였다.
요컨대 사변록, 특히 4서사변록을 통해 버ᅟᅩᆯ 때 서계의 학적태도는 될수록 주자류의 주관적인 성리학적 해석에서 초탈하여 경전에 즉 하여 실증적으로 공맹학의 본지를 밝히려고 하는데 있었다. 당론黨論이 효효한 당시의 사회에서 그러한 반 주자학적 이채異彩있는 저술을 하였다는 것은 그의 대담성을 말하는 것 보다도 그의 학문적 양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계의 4서사변록이 대한사상사, 특히 유학사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비중이 크다 아니할 수 없다.
005 하곡집霞谷集 (1649 – 1736년) 정제두鄭齊斗
조선조 초기 성종 때의 제도와 문화는 정비되고 꽃피어 이른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태평성대의 그늘 밑에서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의 불꽃이 움트고 있었다.
관리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최고의 목표로, 선비는 학문의 연찬 보다는 권력의 접근에 온 정력을 기울여 결국은 세력다툼의 비극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연산군 이후 정쟁政爭의 논제論題는 사회의 개선이나 국민생활의 향상이 아니었다. 상복喪服문제라든가, 세자책봉世子冊封과 같은 왕실의 규범에 관한 문제가 가장 많았다. 갈수록 치열해진 음모와 살육의 과류過流는 지극히 편협한 배타적태도로써 인습因襲과 명분名分에 얽매어 있었다.
이런 때 해동海東 양명학陽明學의 태두泰斗 정제두는 인조 27년 (1649년) 한성부 반곡방에서 진사進士 정창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고, 영조 12년 (1736년) 에 몰歿하였다. 그의 호는 하곡, 자는 사앙士佒으로 여말麗末 명유名儒 정몽주는 그의 11대조祖이다. 그는 당쟁의 추악상이 그 극을 이루었던 현종 숙종 년 간에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 동안 사대부士大夫의 자제로써 과거공부를 중심으로 하여 경사經史를 배웠다. 그리하여 20세 되던 현종 9년 (1668년)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급제及第하였다. 이와같이 장차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당쟁으로 혼란하고 인심이 흉흉하였다. 하곡은 24세 때 이러한 세상을 등지고 오직 도학道學에 전심하기로 다짐했다. 추악한 벼슬길을 단념하고 오직 진리를 탐구하여 인심을 바로잡고 허례허식虛禮虛飾을 타파하여 사회주의社會主義를 수립하고, 국가 민족의 올바른 터전을 마련할 기초를 닦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이런 결심은 90평생을 꿋꿋이 조금도 굽힘이 없이 지켰다.
또한 주자학이 당시 온 학문, 사상을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이념으로까지 등장케 될 때 하곡은 고고孤高히 양명학에 몰두하였다. 더구나 남인 학자 윤전尹鐫이 주자학설에 반대된다 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낙인烙印이 찍히고 경신庚申 대大 출척黜陟 때에 사약賜藥을 받았음에도 하곡은 계속 양명학을 주장하여 제 2의 윤전이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시대의 사상과 풍조에 반항하였던 것이다.
하곡 일생이 선배나 친구라 할지라도 그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 하고 반대파의 빗발치는 비난과 모함 속에서 평생을 마치게 된 것은 하곡 자신에게는 불행한 생애였으나, 그의 사색하는 태도가 진지眞摯하고 정밀靜謐하였을 뿐 아니라 남모르는 불후不朽의 업적을 남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양명학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명종, 선조 때인 듯 하다. 이 때 벌써 퇴계는 양명학을 배격하는 ‘전습록변傳習錄辨’ 을 지어 ‘양명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학설로써 주자의 종지宗旨에 어긋나고 공맹사상의 정통이 아니다’ 고 배척했다. 그 후 학자들은 거의 주자학의 학설을 따라 양명학을 이단異端으로 배척하였다. 여기에 하곡은 한 걸음 나아가 양명학을 대성한 학자로써 그 저술과 학문이 체계적이고, 이론이 정연하여 그 수준에 있어서 중국이나 일본 학자에게 못지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곡집을 보면 사우師友 간에 양명학을 논하는 서한書翰이 여러 편 있다. 특히 최석정, 박세채, 윤승, 민이승과의 편지 왕래에서 하곡사상의 일편을 알 수 있다. 하곡은 퇴계의 전승록변을 반박 변론하였을 뿐 아니라 때로는 율곡학설의 약점도 지적 논박하였다. ‘율곡학설은 태고하면서도 도리어 천박함을 면하지 못 한다. (율옹지설栗翁之說 무내태고이반천야無乃太高而反淺耶 – 여민언휘서與閔彦暉書)’ 라고 하였으나 기타의 후래後來 학자들이 하곡의 안중眼中에 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또 그는 주자학설을 반박하였고, 그의 저서 전편全篇을 통하여 정주程朱학설을 변척辨斥하고 있다.
하곡은 학문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하여 ‘남의 학설을 변론함에 있어서 먼저 그 입장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 근본요령을 파악하지 못 하고 어구에 얽매이거나 문자에 구애되어서는 그의 이론 전체가 들어나지 않고 가리어 보이지 않는 바가 많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찌 말귀를 알아듣는다고 하겠는가? 답答 명곡明谷 서書)’
이렇게 하곡은 학문하는 데 있어 언어 문장의 배후에 놓여있는 논리를 파악하며 문제의 핵심을 포촉하여 간명하게 논파하였다. 하곡이 박세채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 중 자기의 학설을 발휘한 요긴한 논지가 있다. 그 편지를 보면 공손한 태도와 인정이 문장에 넘쳐흐르며 선배에 대한 도리를 다 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학설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제두가 감히 스스로 미혹迷惑하여 양명陽明에게 아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일대 의심나는 곳이 있어서 풀리지 않고 … 마음이 비록 바른 것을 찾아 떠나고자 하나 마음에 얽혀있는 것을 풀고자 그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 한 번 같이 통렬히 토론하여 그 학설을 십분 설파하고 그 깊은 뜻을 분석하여 결판을 내고자 합니다. 제 마음 속에 진실로 할 말이 있습니다.
대체로 제두가 왕씨의 설을 항상 생각하는 이유가 행여나 이단을 구하고 사사로움을 이루고자 하는데 있다면 결단코 제거해버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길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마당에 일생을 그르치지나 않는가 하는 두려움이 마음 가운데 절실하여 이 석연치 않은 생각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오래도록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송나라 황근제는 말하기를 '도를 구하는 정신이 좋지마는 지나치면 이것이 참으로 깨달음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경우는 이와는 다릅니다. 슬프도다! 천하의 현철賢哲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것을 살필 수 있으리오. 엎드려 원컨대 문하門下를 너그러히 용납하소서.'
이와같이 하곡의 심정이 간곡하여 성인聖人의 학문의 정수精髓를 찾기 위하여 그 당시 생사로두生死路頭의 심각한 입장에서 일체의 사私를 버리고 진리를 구하는 태도는 참으로 철학하는 태도라 아니 할 수 없다.
왕학王學의 요지를 말하면 첫째, 심즉리心卽理, 둘째, 치량지설致良知說, 셋째, 친민론親民論, 넷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로 대별할 수 있다. 심즉리는 육상산도 이미 주창한 것이지만 나머지는 왕양명학설의 특징인 것이다. 그 중에도 치량지설이 가장 중요한 제 1의義다. 이에 대하여 하곡은 자득요해自得了解하여 스스로 일가견을 지니고 있음을 그의 저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사상의 대강을 예를 들어 보자면, 시즉리를 반대하는 정주학에서는 성즉리라 하여 성性에 관한 논란이 중심이 되었다. 하곡이 박세채에게 보낸 서한 속에 성리性理에 관한 질문이 들어있다는 것이요 또 원정原情을 말한 것은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나온 정이며 성이 선善한 고로 원정도 선이 됩니다. 그러므로 선은 옥설견우玉雪犬牛의 성을 선이라 함이 아닙니다. 즉 인성을 두고 한 말이 옳습니다. 그것은 또한 물성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닙니다. ‘중용中庸’ 의 천명지성天命之性에 있어서 정주程朱가 이 성을 주석하여 ‘통인물소득지리이언지通人物所得之理而言之’ 라 하였습니다. 즉 주역의 ‘조도변화朝道變化 각정성명各正性命’ 은 성性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 성은 우牛 (소) 는 경운耕耘, 마馬 (말) 는 달리는 것이 모두 성이 아님이 없다고 정주程朱는 말하였으니, 중용의 이른바 성이 과연 맹자의 이른바 성과 서로 이같이 다릅니까? 라고 하였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맹자의 성과 중용의 성이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주가 말하는 것은 인과 물을 다 들어 말한다면 맹자는 인성만을 말하였는데 논리적으로 정주가 확실히 부당,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주가 맹자의 성과 중용의 성을 같이 보지 않고, 맹자의 성선性善의 성은 인의예지의 인성만을 말하고, 중용의 성은 인성과 물성을 다 가리켜 공통으로 말하는 소득지리所得之理라 하고, 또 성이 선한 것 같이 이치가 모두 선하다고 본다면 하곡은 이에 대하여 모순된 일이라고 하였다.
성은 선이라 할 수 있지만 이치는 착하게 되는 이치도 잇고, 악하게 되는 이치도 있다. 선 자체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하지만 이치에는 선악이 있는 것이다. 소는 갈고 말은 달리는 것이 진실로 이른바 물리物理이다. 그러나 엣날 성현이 이른바 성리性理의 도리道理만은 아닌 듯 하다 하며, 소는 갈고 말은 타는 것이지만 때로는 소를 또한 타기도 하고, 말에 싣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도 또한 물 리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소가 갈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이 달지 않을 곳을 달릴 수도 있다. 이것을 성선의 이라고 하겠는가?
두 번째의 치량지에 대하여 최여하는 대학의 격물치지의 원문을 들어서 치지하면 그만이지 치량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하곡은 치량지의 양 자는 지의 개념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치지의 지가 지식의 지가 아니라 선천적 지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지에 대하여 이와같은 구별을 하지 못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이하 생략).
세 번째의 친민론에 있어서는 대학의 원문에 있는 이른바 삼강령三綱領이라고 하는 ‘명명덕明明德 친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 의 친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정주는 친민을 신민新民으로 고쳐서 읽는다. 그러나 육왕학에 있어서는 신민이 옳지 않고 원문대로 친민이 더욱 옳다고 했다. 민이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을 친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명덕과 친민은 체용體用관계로 보아 명덕은 체요, 친민은 용으로 보는 것이다. 나의 속에 있는 덕을 밝혀서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 친민이다. 나의 명덕을 밝혀서 천하 백성의 명덕을 밝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백성을 친애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신민의 신은 지성적인 면을 강조하고 잇지만 신민은 지성보다도 덕성과 의지를 힘께 작용하여 친하게 한다는 원문 그대로 보아 신민보다 친민이 옳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같은 해석이 부당하다면 그것은 양명의 잘못이라기 보다 성인이 경을 지어 말씀을 세운 성자聖者의 원문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원칙이 아닌가? (상설詳說 생략)
네 번째, 지행합일설에 있어서는 송유宋儒 주자학파는 지행이 합일함이 아니라, 지행이 호진互進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지행합일한다는 것이다. 즉 똑똑히 아는 것은 행동에 옮길 수 있고, 행동에 옮길 수 없는 지는 아직 미숙한 지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행동하는 내용이 그의 지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는 행동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결과로써 지행이 언제나 합일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행일치言行一致와 같이 생각하여서는 온당치 않은 것이다. 언행은 일치하기 어렵지만 사람은 아는 바 그 지혜를 가지고 행동해 나가는 것이다.
그의 저술은 그의 생존 당시는 물론이요 후세에 있어서도 세상에 너올 수 없어 그의 집안에 오랫동안 비장秘藏되었다. 일제 강점기 그 유고가 세상에 나왔지만 출판되지 못 했다. 그래서 일인 교수 고교형이 초고본草稿本을 필사하여 ‘하곡집’ 한 질을 경성대 도서관에 두거 간 것이 현재 남아있는 유일본이다. 모두 11책이다. 그 중 제 4책에는 ‘존언存言’ 상중하 3편이 있으니 이것은 ‘양명집陽明集’ 의 ‘전습록傳習錄’ 상중하 3편에 필적匹敵하는 그의 주저主著다. 제 1책은 소疎, 제 2, 3책은 서한집書翰集이다.
이 서한집은 그의 사우師友 간에 중요한 학술 논변에 관한 내용이다. 제 5책은 서록書錄으로 경서의 뜻을 단편으로 모아 그의 양명의 학설을 토대로 한 주해편註解篇이다. 제 6책은 대학설, 제 7책은 중용해, 제 8책은 맹자해, 제 9책은 경학집요, 시詩, 잡서등이다. 제 10책은 하곡의 연보年譜, 그 후편은 조정에 있었을 대 왕과 대회의 기록이다. 제 11책은 천문, 지리, 조석설潮汐說 등 과학에 관한 학설이다. 이 같은 대부분의 작품이 강화江華에 은거隱居할 때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까지 보아온대로 하곡은 은둔하면서 부름에 참여하였고, 신 문화의 기운이 감돌 때 값없는 전통의식에서 반기反旗를 들고 자의식의 강조를 내세웠다. 양명학의 깊이를 파면서 주위의 매도罵倒 고독을 오직 학문연찬으로 대신하였다. 주자학이 커다란 강물이었다면 하곡의 양명학은 그 물줄기를 잡아주는 시대적역할을 했다고 봄이 옳겠다. 소위 신 문화를 융섭融攝하는데 하곡은 그계기의 한 몫을 쥐었던 것이다.
006 남당집南塘集 (1682 – 1752년) 한원진韓元震
남당집을 선정한 편집자의 의도는 조선조 후기의 성리학계에 일대 논쟁점이 되었던 호낙시비湖洛是非를 중점적으로 취급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호낙논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바 있는 호론의 남당 한원진과 낙론의 위암 이간을 필두匹頭로 하여 그 양론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제제다사濟濟多士의 주장을 대강이나마 소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당의 소론에만 치우친 혐嫌이 없지 않아 그 형평을 지키지 못 한 아쉬움을 간략하게 나마 모두冒頭에서 적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호낙시비는 한 마디로 심성론에 있어 인물성동이同異문제를 두고, 인물의 성이 부동하다는 소론이 호론이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편이 낙론이다. 남당은 전자의 주창자요, 위암은 그 후자에 속한다. (편집자 주註)
한원진의 자字는 덕소德昭, 남당은 그의 아호雅號다. 본관은 청주, 영의정 한고경의 후손, 숙종 8년(1682년)에 출생하여 영조 27년(1752년)에 연세捐世하였다. 8세에 비로소 입학하였는데 글 읽는데 재주가 둔하였다가 드어 해 지난 뒤에 문리文理가 크게 진보되어 말만 들으면 예민하게 깨달았고 한 번 보면 바로 외워버렸다. 그의 부친이 놀러다니는 것을 금지하기 위하여 일과 이외에 백 여 줄을 가르쳐주고는 바로 외우라 하였는데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 한다. 또 여러 가지 서적 가운데에서 어린 아이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데를 지적하여 시험하였는데 통투通透하게 알지 못 한 데가 없었다. 이를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집을 일으킬 사람은 이 아이’ 라 하였다.
18세에 과거에 나가고자 하여 먼저 대학을 읽게 되는데, 세상에서 경서에 마음을 두는 자들이 그 뜻도 알지 못 하고 경서의 깊은 뜻을 알려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마음을 돌려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학문에서 탐색하여 궁구하는 공부가 이것에 있다’ 하고, 바로 거업擧業 (과거시험) 을 폐지하고 초연超然하게 성현聖賢되는 학문으로 자신이 기대를 가졌다. 공이 학문에 마음을 결정한 것도 실로 이에서 비롯되엇던 것이다. 공의 재주와 지혜가 초월하게 진전되었고 이해하는 것이 밝고 통투하여 깊이 역易, 시詩, 서書를 궁구하였으며,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 계몽啓蒙, 경세율려經世律呂 등 여러 문자에 있어서 애체礙滯될 것이 없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천문, 지리, 병가兵家, 산수算數도 선비로써 아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 제가諸家까지 범람汎濫하여 모두 강령綱領을 얻었으며 바로 황강黃江의 문하門下에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김 농암을 삼연三淵에서 뵈옵게 하였는 바, 농암이 이르기를 ‘그대가 총명은 풍족하지 아니다 할 수 없으나, 다만 발양되기가 너무 이르다’ 하였다.
숙종 정유 (1717년) 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에 제수되었고, 경종 신축 (1721년) 에 부솔이 되었으나 신임사화에 노론이 실세하자 남당도 사직하였다. 영조 초년에 경연관에 뽑혀 학문을 진강進講,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 뒤 맹자의 ‘신시군여구수臣視君如仇讐’ 를 인용,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 하여 삭직削職되었다. 그 뒤 김재도의 논구論救로 복직,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남당이 축암 권상하의 행장을 지으면서 총론에 이기설을 주장하면서 ‘주자가 가신 뒤로 우리 도는 동방으로 오게되었다. 그 전도하는 책임을 부하負荷한 이는 오직 율곡, 우암 두 선생이 가장 저명著名하다 (주자몰朱子歿 오도동의吾道東矣 기임전도지책자其任傳道之責者 유율곡우암惟栗谷尤菴 위최저운운爲最著云云)’ 하였다. 최저라는 말은 주자의 행장行狀에서 나온 말이다. 사계 김장생의 후손들이 사계가 전도하는 가운데 빠졌다고 떼를 지어 항의하였으나 조금도 돌보는 뜻이 없었고, 오히려 상소하여 죄로 따지기까지 하였다.
이와같이 그는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 기발이승일도설을 고수하였다. 한 남당은 권 축암의 고제高弟들인 강문입학사江門入學士 중에서도 위암 이간과 함께 그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심성론의 논쟁에 있어서는 이 위암의 주장에 반대인물의 성性이 부동不同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기호학파가 양분되어 남당의 주장을 지지하는 호론과 위암의 주장을 지지하는 낙론 사이 일대 논쟁이 불붙기 시작, 마침내 이 호낙시비는 조선왕조 후기의 성리학계에 큰 논쟁점이 되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인人, 견犬, 우牛의 성性이 동同하다는 것이 낙론洛論이며, 이異하다는 것이 호론湖論이다.
호낙학파가 분열된 경위는 그 연원 계보를 따진다면, 호낙논쟁의 쟁점인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문제에 대해서는 앞서 농암 김창협과 서계 박세당이 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바 있으므로 그 근원에서 보면 농암이 선구先驅가 되었다 할 것이며, 그것이 확대된 것은 역시 축암 권상하가 한 남당을 지지한데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남당과 위암은 다같이 서호西湖에 살았으나 남당의 설을 찬성하는 병계 윤봉구, 매봉 최징후 등은 호론이 되었으며, 위암의 설을 지지하는 도암 이재, 여호 박필주 등은 그들이 낙하에 살고있었으므로 낙론이 되었다. 삼연 김창흡과 관봉 현상벽도 이에 속한다.
호낙의 종지宗旨는 비록 여러 가지 별설이 있으나 주론은 맹자 고자장告子章의 인물성 동이의 논을 분석한 것이다.
처음 송시열이 주자가 서원빙에게 답하는 서간書簡을 농암에게 주어 그것으로 도암에게 전한 것인데 이것이 낙론의 종지였다. 그 서간에 이르기를 ‘말하는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동同하다 이異하다 하는 말은 이야말로 당연히 강습되어야 할 것이며, 또 그 상고詳考 평정評訂한 것이 정교하고 자상하여 여기에서 공부하는 마음이 쇠퇴하지 아니함을 보겠으니 다행한 일이다. 나의 들은 바로는 인과 물의 성이 그 근본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나 기품氣稟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정자가 말한 솔성率性이란 것은 인과 물을 겸허하여 말한 것’ 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람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물건도 다 그러하다는 것은 성의 동일한 점만 가지고 말한 것이니 사람이 천지의 정기正氣를 받았다는 것은 여러 물건들의 경우와는 다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다만 물은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없지마는 사람은 미루어 생각할줄을 안다는 것이니 이는 그 기품이 다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성을 논할 때 기를 논하지 아니하면 자상하게 갖출 수가 없는 것이요, 기를 논할 때 성을 논하지 아니하면 분명하지 못하나니 성과 기를 둘로 나누어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이 말을 잘 음미해보면 선생의 뜻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석씨釋氏 (석가모니) 의 말하는 것과 같으리요. 호씨지언胡氏知言에도 꼭 이와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성이란 것은 다만 이이니 아마도 이와같이 분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기질의 풍부한 것이 다름에 따라 흔히 가리운 바가 되어 밝힐 수가 없었을 따름이니라. 이에 있어서는 당초에 두 가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맹자의 말을 가지고 인정하는데 이르러서는 맹자의 말은 다만 사람되는 분의에 있어 도리를 말한 것이다. 자사子思 (공자의 수제자) 의 뜻도 그 근본은 인과 물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성동기이性同氣異라는 이 네 글자는 한량없는 도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니 시험삼아 생각하여 보라. 만약 여기에서 소결이 열리게 되면 성현의 말씀에 있어서 하나도 막히고 장애될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위암이 호학湖學과 의론이 불합되어 한 남당과 여러 번 편지하여 논변하면서 이르기를 ‘본연本然이란 것은 일원一原인 것이요, 기질氣質이란 이체異體를 말한 것이다. 천명오상天命五常이란 것은 모두 형기形氣를 초월하여 인과 물이 편전偏全의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본연지성本然之性이요, 만일 이체를 가지고 말하면 천명오상이란 것도 모두 기질에 따르는 것이니, 사람 뿐만 아니라 물건에도 편전이 있는 것이요, 성인과 범인의 사이에도 천 계단이나 만 계급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편偏이라 말하면 성명性命이 모두 편한 것이요, 전全이라 말하면 성명이 모두 전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르는 바 기질의 성이다.’ 하였다.
한 남당이 이르기를
‘태극太極에 더 보탤 것도 없고, 상대되는 것도 없는 것은 일원一原이므로 이理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일一에서 이二로, 오五로 나가게 되면 이것은 이체異體가 됨으로 이理도 같지 아니한 것이다. 태극太極의 이理가 음양陰陽을 타게 되면 건健하다 순純하다 하는 덕德이 되고, 오행五行을 타게 되면 오상五常의 덕이 되는 것인데, 말하는 형기形氣를 초월하여 이오二五가 된다 하면 이것은 건健과 음양이 없는 데서 갖춘 것이니 또한 허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솔성지위도率性之渭道라는 말은 이것이 인과 물을 통하여 말한 것이라 하면, 물이 이미 사람의 성과 동일하게 되었으니 또한 반드시 그를 따라서 사람과 동일한 도가 있은 뒤에라야 솔성이라 할 것이다. 이제 사람과 동일한 성은 있으면서, 사람과 동일한 도가 없다면 어디다 솔성이라 하겠는가? 솔성의 도가 같지 않다면 그 솔하려는 성도 원래부터 다르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밖에도 허다한 논변이 있으나 상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므로 필자의 소감을 들어본다.
태극에서 이二로 음양이 나왔다 한다. 거기서 오五로 금, 목, 수, 화, 토기 나오면서 각기 그의 전문분야를 가지고 하늘의 명하심에 순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금목수화토 오성을 제일 균적하게 갖추었기 때문에 가장 영귀하다고 하나 전문분야에 들어서는 견犬과 우牛의 능한 것을 따라가지 못 한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실험적으로 믿어질 것이다. 그러나 금이라 하여도 목수화토의 4성이 유여 부족으로 갖추어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에 수반하여 사람도 금성이 더 풍부하게 타고난 이도 있고, 목성이 좀 부족한 자도 있을 것이다. 이를 수도修道라는 교敎에서 균적하게 하는 것이 존귀하다는 제일 요소가 된다고 본다. 이에 반대로 균적한 천품天稟을 악으로 이용한다면 만물로써 따라올 수 없는 험경險境을 자아내는 것을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악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반면에 선으로만 규정지을 수 있는가가 자못 의문시되는 바이다.
필자가 어느 날 주자의 말씀에서 성선性善의 선은 인간에서 대거對擧하는 선악의 선이 아니란 말을 보았고, 정자의 말씀에서 악도 성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을 보았다. 그것은 악이 성이 아니라면 이치 밖에서 무슨 악이란 물건이 뛰어들 이치가 없다는 것이다.
맹자의 말씀에, 개, 소, 사람의 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전문분야에 치우친 것을 이름이니 개가 소가 될 수 없고, 소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사子思의 솔성率性이란 말은 오성 겸비의 전문적인 것을 말한 것이니 ‘인개가위요순人皆可謂堯舜’ 이라는 인人에 국한된 것을 의미한 것이다.
금목수화토 오성을 갖추지 않고는 한 개의 물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보면 낙론이 정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사람이 개, 소가 될 수 없는 것이요, 개, 소도 사람이 될 수 없는 현실로, 보면 호론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낙론은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동일하나 기질지성氣質之性은 다르다는 주론이며, 호론은 본연지성부터 다름으로 기질지성도 다르다는 주론이다.
본연지성이라함은 즉 이성인 도의심으로 대체할 수 있겠고, 기질지성이라함은 즉 혈육血肉의 요청에 의한 식색지심食色之心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비록 성인일지라도 식색지심이 없을 리거 없는 것인데, 이 식색지심에서 출발하는 기점이 될 것도 사실일 것이다. 처음에 혈육의 요청에서 도의道義의 요청으로 진전되었으리라고 믿는 바다.
수축獸畜은 혈육의 요청에서 국한되고 만 것이나 가령 거기서 더 진전이 될 관게만 부여되었더라면 도의의 길을 따를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도의심으로 진전할 가능성이 없음을 명백하게 본 한씨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고집하였던 것이다.
남당은 그 저술이 허다하지만, 그 중에서도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 는 우암 송시열이 착수한 것을 50년만에 완성한 유학사상의 거작巨作이 아닐 수 없다.
007 녹문집鹿門集 (1711 – 1788년) 임성주任聖周
녹문이라함은 임성주 (숙종 37년 – 정조 12년) 의 호다. 풍천임씨로 함흥판관 적의 아들로 태어나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고, 영조 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영조 26년 (1750년) 에는 세자 익위사 세마시직으로 승진을 했으나 형제를 잃고 모상을 당하는 불행이 겹쳐 관직을 물러나 공주 녹문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정조가 임금에 오르자 동궁보도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지방관으로 전출이 되자 다시 녹문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학문으로 보내게 되어 그의 제자와 인근 사람들이 녹문선생으로 불렀다. 그의 자는 중사仲思로 정조 12년 (1788년) 에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아우 임정주가 형의 글을 모아 녹문집을 편찬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로 보존되어있고,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1부, 하바드의 연경학회에 1부가 보관되어있다. 전 26권 13책으로 되어있어 1권 - 11권은 서간문, 12권 – 20권은 잡서, 21권은 제題, 발跋, 논論, 설說, 22권에는 명銘, 잠箴, 찬贊, 축문祝文, 제문祭文, 23권에는 제문 및 애사哀辭, 묘지명墓誌銘, 24권에는 묘지명, 표表, 갈碣, 25권에는 행장行狀 및 유사遺事, 공이公移, 26권은 시詩 85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도 직접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은 여러 문인 학우들과의 교환한 서신과 잡서와 논, 그리고 설편이다.
임성주의 생애는 숙종에서 정조시대로 정치의 집권욕을 중심으로 남서, 노소 붕당당쟁이 숙종의 근 50년 간을 풍미했고, 이 파란 많은 시국에서 녹문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당파싸움에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워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천명했다. 정조대와 더불어 이 양대는 근세후기에서 가장 특색이 있는 문예부흥적 기운이 짙어가던, 구 문화의 회복과 서래西來의 신 문화를 받아들이는 기초를 갖추어가는 시기다. 정치적으로는 정권장악을 위하여 추악한 당쟁이 되풀이되는 동안에 한편 사상계는, 유교정치에서 현인군자賢人君子를 등용하고 우자愚者와 소인小人을 멀리함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지선至善의 실현을 위해서나 유교의 진리에 비추어서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성군작당成群作黨하는 도구로 악용하는 사례를 만들어 정객政客들이 유교를 더럽히는데까지 타락되어갔다. 동서분당에서 비롯된 군자와 소인의 논란이 파쟁으로 화하였고, 상례喪禮에 있어서 복상服喪문제는 예송禮訟으로 확대되어 당쟁에 악용되었다. 처참한 사화를 겪고난 후에 유자儒者들은 과거科擧를 포기하고 안빈락도安貧樂道로 생애를 자적自適하는 기풍과 진리탐구로 의리를 천명하는 풍조를 자아낸 것이 피일시彼一時라면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 절정기를 지나 예학禮學을 중심으로 하는 학풍으로 전환되어 경전의 새로운 주석이 문제화되며 양명학이 들어오고 인물성동이 문제로 호론 낙론이 분열되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한편 정치에 오염되는 것이 또한 차일시此一時니 녹문으로써는 계승되어오는 전통적 당쟁의 정치풍토와 이기理氣의 철학적 문제를 비롯해서 예론禮論 인물성론이 고조되는 사상적 분위기 안에서 그의 학문은 성장되어갔다.
녹문집을 통해서 볼 때 그는 문학인이라기 보다는 아무래도 성리학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사상을 정확하게 살펴보려면 여러 시인묵객詩人墨客과 학우제현學友諸賢들과 사이에 오고간 서간문과 잡저雜著 (주로 4서3경에 대한 풀이를 자기 입장에서 해주었고, 특히 9, 10권 잡저에서는 심성心性, 정情 문제를 자세히 취급하고 있음) 그리고 논과 설에서 알아볼 수가 있다. 송학宋學이 우리나라에 전래해온 뒤로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이론의 연구가 심화되어 가는 가운데 자연히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퇴계, 율곡의 성리학이요, 예학, 호론, 낙론, 주리파主理派, 주기파主氣派, 절충파다.
서 화담이 기를 주로 한 기일원론을 주장한 후에 율곡이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비난하기 시작하니 학자들이 퇴율 각파의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퇴계를 추종하는 학자들은 이발설이 옳다 하여 율곡을 공박하는 나머지 주기파로 몰아대고, 율곡을 따르는 학도들은 퇴계학파를 주리파라고 하여 자파의 기를 중요시하는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심지어 심시기心是氣라고 하는데 이르러서는 주기론이라고까지 평을 받게 되었고, 송 우암은 율곡의 생각을 받아 마음의 허령虛靈은 분명히 기라고 하기에 이르른다. 남당은 마음이 이기를 겸한다는 설을 공격하여 성을 포함해서 말할 때는 마음은 이기를 겸한다고 해도 옳지만 성과 대립시켜서 말할 때에는 성을 이라고 하면서 마음을 이기의 합한 것이라고 한다면 2중의 이가 되어 옳지 못 하다고 주창하는 동시에 허령도 기라고 한다. 역시 허를 이라고 하고, 영을 이기라고 해서, 이를 2중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태도다. 이렇게 율곡, 우암, 남당은 일련의 주기파 형성의 과정을 보여주는 바 심즉기心卽氣는 더 나아가서 심과 성은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니 성즉기라고 하여 우주와 인심의 본체가 일기一氣라고 역설하는 임 녹문에 이르러서 기론은 그 절정에 도달한다.
이제 그의 논리를 간추려보면, 그는 태극을 원기라고 한다(만리만상야萬理萬象也 오상오행야五常五行也 건순양의야健順兩儀也 태극원기야太極元氣也 … 19권 2면). 우주는 피일지기披一之氣로 가득차 있고, 인심도 심일지기心一之氣가 아니면 달도達道가 행하여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천지비담일즉화육불성天地非湛一則化育不成 인심비담일즉달도불행人心非湛一則達道不行 … 13권 11면). 이기는 2물이 아니라 생의生意로 충만한 심일지기가 있을 따름이다 (기지본일이기氣之本一而己 … 19권 6면). 일반이 일리一理를 주장하는데 대해서 녹문은 일기一氣를 강조한다. 즉 일기 뿐인데 그것이 곧 심일지기라는 것이다 (천지생물사지天之生物使之 일본일본자불단이지一本一本者不但理之 일기역일야一氣亦一也 소위所謂 심일지기지본시야心一之氣之本是也 … 5권 3면). 그러면 이러한 기는 어떻게 운동하는 것일까? 생성론은 어떻게 설명되는 것일까? 막지연이연莫之然而然이라 즉자연지연卽自然之然이라고 (19권 1면) 형체形體의 동정소장動靜消長을 기가 일관한다고 하였고, 천지天地의 흡벽翕闢도 이것으로 설명하고, 기를 절대에까지 높인다 (기여형대이구기실즉형내포호기氣與形對而究其實則形乃包乎氣 기무대야氣無對也. 19권 1면). 유일자唯一者인 기와 잡다雜多의 만상萬象은 어떻게 관계지어지는가? 음양과 오행과 만물을 합해서 말하면 일원一原이요, 대덕大德이라 하고, 음양과 오행, 만물을 각각 말하면 만수萬殊라 하고, 소덕小德이라고 한다 (합合 음양陰陽 오행만물이五行萬物而 총언지즉總言之則 왈曰 일원一原 왈曰 대덕大德, 분分 음양陰陽 오행五行 만물이萬物而 각언지즉各言之則 왈曰 만수萬殊 왈曰 소덕小德. 19권 17면). 녹문도 이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理 자字의 뜻은 그에 있어서는 자연自然이라 (상사嘗思 이자지의理字之義 수須 자연自然 이자二字 내진乃盡 … 19권 2면) 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인이 말하는 도道라든가 이理라는 것도 당연처當然處를 말하는 것이요, 이 당연지즉當然之則은 자연으로부터 온다고 해서 이것이 다름 아닌 도道요, 이理라 (출어出於 자연이自然而 위爲 당연當然 지즉야之則也 즉차卽此 당연처當然處 성인우명지聖人又名之 왈曰 도道 왈曰 이理. 19권 3면) 고 하였다. 즉 자연이나 당연이라는 것도 따로이 지계地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로써 표언表言하는데 (기소위자연당연其所謂自然當然 자역비유지계者亦非有地界 기시취기상언지只是就氣上言之. 19권 3면)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 이는 어디까지나 기와 더불어 하는 이요, 초월적인 이는 아니다. 그는 또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의심하여 율곡의 이통기국理通器局을 비판한다. 주리主理의 입장에서 볼 때에 하는 말이요, 이지일理之一이 곧 기지일氣之一임을 모르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기일분수氣一分殊를 주장한다. (금인매이리일분수인작리동기今人每以理一分殊認作理同氣 수부지리지일즉부기지일이견언殊不知理之一卽父氣之一而見焉 … 이일분수주리이언理一分殊主理而言 분자역당촉리分字亦當燭理 약주기이언즉若主氣而言則 왈曰 기일분수역무불가의氣一分殊亦無不可矣. 19권 3면). 이처럼 태극도 기요, 운동도 기요, 일과 잡다의 관계도 기로써 해결해버린다. 그러면 인생론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사람은 천지태화天地太和의 기를 받고 태어나는 것이니 (인수천지태화지기운人受天地太和之氣云 … 26권 20면). 천인이 원래 기로 일관되어 있으며 (원래元來 담일관천인湛一貫天人 성대유행자시신盛大流行自是神 … 26권 8면). 성도 심도 기도 하나요, 다만 지적하는 바 여하에 따라서 다를 뿐이라고 (기야성야심야氣也性也心也 일야재소지여하이一也在所指如何耳 … 26권 8면) 한다. 선악도 기에 달려있어서 순리간기順理干氣는 선善이요 본체本體의 담일湛一에 사재渣滓가 섞인 바 되면 악정惡情이 나온다 (순선리승담일기純善理乘湛一氣 … 사재혹다용사이저란기본체지담일이악정출언渣滓惑多用事以沮亂其本體之湛一而惡情出焉 … 26권 11면) 는 것이다. 심성心性이 일一이며 기氣며, 선악이 기 여부에 달려있고, 인성의 선이란 기질氣質의 선인 까닭에, 기질 외의 다른 선성善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범聖凡이 원래 이理로 보아 동심同心 (이고성범동심운운理固聖凡之所同心云云 … 2건 3면) 이지만 사재渣滓에 섞이는 바 되어 차差가 생기게 되는 것이니 이 사재는 조위條爲의 공功으로 변화 청징淸澄케 할 수가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방법을 제시해준다.
무엇보다도 학學이 중요한 것이며, 학에 있어서는 우선 뜻을 굳게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희구심이 있어야 비로소 악을 함께 말할 수 있다 (유有 조문도朝聞道 석사가지지夕死可之志 연후然後 가이어학의可以語學矣 … 20권 2면) 고 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간단間斷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위학최기간단爲學最忌間斷 … 20권 2면) 는 것이다. 즉 노력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학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경敬이며 경은 따로이 기괴하고 이상한 별건물사別件物事가 아니라 항상 마음을 엄연嚴然하게 그리고 숙연肅然하게 갖고 상제上帝에 대하 듯 몸가짐을 함이라고 (학막선우경學莫先于敬 경비별건물사지敬非別件物事只 시차심엄연숙연是此心嚴然肅然 상약상제귀신임지재常若上帝鬼神臨之在 상질지재방시上質之在傍是 … 20권 2면) 하였고, 또 공부의 총합처總合處도 또한 경敬 일一 자字에 있다고 (공부총합工夫總合 우재경일자又在敬一字 … 3권 2면) 하였다. 나아가서도 정자의 말을 인용하여 무엇보다도 성선을 알아서 충신忠信으로 근본을 삼고 먼저 대자大者를 세우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잘 완미玩味해서 지반地盤을 든든히 해야 한다고 (정자程子 왈曰 지성선知性善 이충신위본시以忠信爲本是 선립기대자先立其大者 차어당완미此語當玩味 편유립각처便有立脚處 … 3권 2면)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 주기론을 극구 배격한 그는 기론자들에게 허다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동생인 임정주 (영조 3년, 1727 – 정조 20년, 1796년) 를 위시로 해서, 임노 (영조 3년, 1175 – 순조 28년, 1828년), 임헌회 (순조 11년, 1811 – 고종 13년 1876년) 들이 직간접으로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다. 정주는 한결같이 주기설을 주창하고, 인성에 있어서 본연과 기질을 구별함이 없이 성즉기性卽氣의 입장을 준수하여 녹문의 학설을 충실하게 계승했고, 임노는 녹문 문하에서 주기의 학을 쌓은 분이요, 명노 헌회로 말하면 홍 매산 (영조 52년, 1776 – 철종 3년, 1852년) 의 문인이기는 하나 침잠沈潛사색과 고도역천古道力踐으로 근독謹獨에 치력致力한 주기계열의 학자다. 변설辨說을 지어 심즉리心卽理를 반대배격하고 심시기心是氣의 지론持論을 폈으며, 매양 근사록近思錄과 정명도程明道의 지론을 빌려서 성즉기 기즉성을 논하기도 했다. 도역기道亦氣 기역도란 말은 녹문도 즐겨 인용한 것이지만 본래 정명도의 오랜 연구 끝에 득한 경지의 표현이다. 녹문학설을 계승한 사람뿐 아니라 반대하는 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이 바로 노주 오희상 (영조 39년, 1763 – 순조 33년, 1833년) 이다. 그는 퇴계 율곡의 양 학설을 어느 쪽도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중간 입장에서 절충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그러면서 비록 녹문의 주기론을 찬성하지는 아니 하나, 하나이면서 만萬이요, 만이면서 하나라고 하는 기일물설氣一物說에서 많은 자극을 받아 이기가 서로 떨어지지 아니 하는 묘합妙合의 진리를 주장한다. 동시에 주리와 주기의 어느 일방에도 편偏해서는 안 될 것을 강조함은 녹문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도 퇴계와 율곡의 절충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명증明證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일언자지리지일언야夫一原者指理之一而言 분수자지기지분이언分殊者指氣之分而言 일원비무기야一原非無氣也 개리지일이기역일야盖理之一而氣亦一也 분수비무리야分殊非無理也 개기지분이리역분야盖氣之分而理亦分也 … 왈리왈기특유도기지분曰理曰氣特有道氣之分 이대대위언以對待爲言 … 악가이편유행주집일이발일야惡可以偏有行主執一而發一也 … 노사집老沙集 7권 41면). 이렇게 생각할 때 이기설에 있어서 그는 기론에 소속하며 이기를 기일원론으로 통일한 학자요, 따라서 주기론자들에게 다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사실이요, 또한 그뿐만 아니라 주기론을 반대하는 절충파에게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008 노사집蘆沙集 (1798 – 1876년) 기정진奇正鎭
노사집은 호남 대유大儒 노사 기정진의 시문집이다. 자는 대중, 노사는 호, 본관은 행주. 부는 증 참판 재우다. 조선왕조 정조 22년 (1798년) 무오에 전라도 순창에서 출생하였다. 특이한 자질을 타고난 그는 겨우 말을 하게 되자 문학을 배울 수 잇었다. 7세에 마석磨石 (맷돌)을 두고 시를 짓기를 ‘하늘이 움직이고 땅이 고요한 이치를 나는 이 맷돌에서 보았다 (천동지정리天動地靜理 오포마석간吾抱磨石看) 라 하니 근원에서 이 소문을 듣고 마치 봉황이나 경성景星이 나타난 것처럼 생각하여 서로 먼저 보려고 앞을 다투었다. 노사는 성예聲譽를 너무 일찍 얻은 것을 걱정하여 남에게 재주를 내보이지 아니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성현의 학에 전심하고, 오직 성현으로 목표를 삼아 고요히 서실에 들어앉아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침식도 망각하며 이렇게 하기를 수십 년 간 계속하였다. 순조 신묘 (1831년) 에 34세로 진사시에 장원하고, 이듬해에 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봉직하지 아니하였으며, 40세에 유일遺逸로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 및 전설사별제에 제수되었던 바 그는 여러 번 국가의 은명恩命을 사양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드디어 그 직에 나아갔다. 겨우 6일이 지나자 당시의 재상이 밤에 사람을 보내 만나보기를 청하니 노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날이 밝아지자 곧 병 때문에 봉직을 못 하겠다는 장문狀文을 올렸다. 그 재상은 후회하고 수레를 재촉하여 사관에 가보앗으나 그는 이미 성 밖으로 떠난 후였다. 그 뒤로 평안도도사, 무장현감,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였다.
철종 임술년에 삼남 각지에서 민요民擾가 일어나 철종은 삼정三政 (전부田賦, 군적軍籍, 사곡社穀) 에 대한 개선의 방법을 듣기 위하여 민간으로부터 언책言責을 모집키로 하였다. 이 때 노사는 봉사奉事를 초草하여 사대부의 습속習俗이 올바르지 못 한 점을 먼저 지적하고, 그리고 조정朝庭의 공경公卿 및 방백方伯, 수령守令, 이속吏屬의 탐오貪汚한 버릇을 위시하여 과거科擧 사환仕宦에 분주 경쟁하는 폐단과 부호富豪들의 토지를 겸병兼竝하는 해독을 들어 통절히 비판하고, 그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길은 먼저 인군人君의 정직에 있다 하였으며, 군포軍布를 혁파革罷하고, 환곡還穀을 면제하고, 상평常平을 세우고, 민전民田을 제한할 것을 청하는 것 등이 그 중요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소疎를 올리기도 전에 봉사奉事의 말미末尾에 다는 말이 들리므로 노사는 초고草稿를 불살라버리게 하였으나 아들 만연이 사장私藏하였다.
고종 병인년에 양변洋變이 일어나자 소장疏狀을 통하여 조목별로 그 방비하는 대책을 올렸고, 그 해 7월에는 동부승지, 호조참의, 10월에는 호조참판, 공조참판에 승진하였으나 다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이 노사의 일생을 통한 출처出處의 대략이다.
노사는 생지生知의 자품資品을 지니어 사수師授를 경유하지 아니 하고 스스로 유학의 길을 알았으며, 도道는 6경에 구하여 얻지 못 한 것이 없고, 이理는 일심에 갖추어져 있었으며, 궁구하여 발명發明하지 못 한 바 없으며,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부터, 백가百家의 서적과 예악禮樂, 형정刑政, 병기兵機, 산수算數, 천문天文, 지리地理에 이르기까지 다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최익현 찬撰 신도비神道碑 참조). 특히 성명이기性命理氣의 설에 있어서는 그의 일생을 통한 학문 중 가장 치력致力한 것이요, 가장 정밀靜謐한 바로, 전현前賢의 미발처未發處를 발명發明함과 동시에 율곡을 비롯하여 300년 간 우리나라 유학계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신봉信奉하던 주기설主氣說을 반박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천하의 큰 변괴變怪가 세 가지니, 아내가 남편의 위치를 빼앗고, 신하가 임금의 위치를 빼앗고, 기가 이의 위치를 빼앗는 것이 그것이다 (천상대변유삼天上大變有三 처탈부위妻奪夫位 신탈군위臣奪君位 기탈이위氣奪理位 시야是也’ 라 하였다.
이와같이 노사는 주리설을 주장하였지마는 그러나 다른 주리파 학자들과 같이 이기를 2원元으로 대립시켜 생각하지 않고 일원적으로 기를 이 속에 포함되는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이것이 곧 주리파 중에서도 그 이채異彩를 발한 것이며, 그를 가리켜 유리론자唯理論者라고 하는 소이所以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화서 이항노, 한주 이진상과 더불어 외연巍然히 조선왕조 후기의 주리파를 대표하게 되었으며, 이른바 이학理學의 6대가大家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한주 이진상, 녹문 임성주, 노사 기정진) 속에 열列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와 기를 서로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이기를 일물一物로 생각한 것이다. 특히 그는 이 기 자를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에 분分 자를 사용하여 될 수 있는대로 기 자의 사용을 혐피嫌避하였다. 그리하여 인물성의 동이 문제로 격론을 벌인 바 있는 호낙 양론에 대해서도 양자 공히 옳지 못 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그가 저술한 ‘납원사의納源私議’ ‘외필猥筆’ 중에 자상하게 보이는 바, 그 대지大旨를 절록節錄하면
제가諸家가 인물의 성을 말한 것을 보면, 그 귀취歸趣는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가려진 바는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가려진 것이 동일하냐 하면, 이理와 분分이 서로 갈라진 데 있다. 어째서 이와 분이 서로 갈라졌느냐 하면, 제가의 의도를 살펴볼 때 한결같이 모두 ‘이理는 분分이 없는 물物’ 이라 하며 분은 기로 인하여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며 이는 형기形氣를 떠난 지국地局에서만이 하나가 되는 것이요, 분은 형기 속에 떨어짐으로부터 달라진다 하여, 이는 이대로 가고 분은 분대로 가서, 성명性命이 횡결橫決되고, 성명이 횡결되고서 성을 논하니 비로소 천하의 분열分裂이 되는 것이다. 나의 들은 바로는 분이란 것은 ‘이일理一’ 속의 세조리細條理요, 이와 분이 층절層節이 있을 수가 없다. 분이 이의 대對가 아니라 ‘분수分殊’ 라는 2자字가 바로 일一과 대가 되는 것이다. 이는 만수萬殊를 포함하였기 때문에 일이라 이르나니 그 실상은 일물임을 말한 것이요, 수殊는 참으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수’ 라 이르나니 다르다는 것은 특히 그 분한分限 뿐이다. 일구一句의 양어兩語 서로 기다려서 의義가 되는 것이요, 하나만 빠져도 안 된다. (하략下略)
또 그는 양陽이 동動하고 음陰이 정靜하는 것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명령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동하고 정하는 것이 기氣라면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이 이理다.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이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략下略) (양동음정陽動陰靜 일시천명사지연야一是天命使之然也 동자動者 정자기야靜者氣也 동지자정지자이야動之者靜之者理也 동지정지비사지연이하動之靜之非使之然理何)
또 그는 그의 ‘외필猥筆’ 에서 기氣가 이理에 순종하여 발發하는 것은 기의 발이 곧 이의 발이요, 이에 따라서 행行하는 것은 기의 행이 곧 이의 행이라, 이는 조작이 있거나 스스로 준동하는 것은 아니고, 그 발과 행이 분명히 기가 들어서 하는 것인데, 이발이니 이행이니 함은 어떤 것인가. 기의 발하고 행하는 것은 실은 이의 명령을 받기 때문이니 명령하는 자는 주主가 되고, 명령을 받는 자는 노예다. 수고는 노예가 하고 공功은 주가 차지하는 것은 천경지의天經地義다. (하략) 그는 또 심心을 논論함에 있어서는 역시 그러하였다. 심은 비록 기의 분내사分內事라 하지만 바로 갖춘 것은 성性이다. 심이 성을 갖추면 내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같고, 심을 성이 다 하지 못 하면 내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다르다. (하략) (논신역연論心亦然 심유기분사이心雖氣分事而 내소구乃所具 즉성야則性也 심구성心具性 오지심吾之心 여성인지심동與聖人之心同 심불능진성心不能盡性 오지심吾之心 여성인與聖人 지심이之心異) 라 하였다. 이 세상에서 보면 절취節取한 구절이 너무도 간략하여 원서原書의 정신을 십분 발휘하지 못 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 발단發端의 결론을 마져 들면
‘무릇 소언所言이 간혹 선현先賢의 어구語句에 간범干犯되어 극히 옳지 못 한 행동임을 알고 있으나, 전현前賢이 고심혈성苦心血誠을 다 하여 세교世敎를 세운 것은 도道라는 일一 자字 외에 다른 것은 없으며, 옛날의 이른바 도는 지금의 이理다. … 선현이 계신다면 질문하고 싶은 생각이나,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질문할 데는 후현後賢 밖에 없는데, 질문해서 나의 의심한 바가 망령妄靈이라면 다행이거니와 혹시 망령이 아니라면 동방의 이기설을 어찌하랴. 조 직교 (노사의 문인門人) 의 서간書簡으로 인하여 날카롭게 이 글을 써놓았으나, 황송한 생각이 들어 감히 직교에게 보내지 못 한다. 직교에게도 못 보내는 것을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내겠느냐. 그렇다면 뒤에 비록 어진이가 나온다 하더라도 누가 이것을 가지고 질문할 것인가. 여기서 또 한 번 큰 탄식을 아니 하지 못 하는 바다. (범차소원凡此所言 혹간범선현어구惑干犯先賢語句 극지불위極知不韙 절이전竊以前 성고심혈성聖苦心血誠 수세입교지지垂世立敎之旨 일도자지외一道字之外 무야無也, 고소위리古所謂理 금소위도야今所謂道也 … 전현상재前賢尙在 실유봉질지원實有奉質之願 이개불가득而旣不可得 즉소가질자則所可質者 후현이기後賢而己 질지이오소質之而吾所 의자疑者 망즉행의妄則幸矣 구혹불망苟惑不妄 나동방이기하奈東方理氣何 인조직교서因趙直敎書 예의사차銳意寫此 황공불감기직교惶恐不敢寄直敎 직교유불감기直敎猶不敢寄 황감괘타인안호況敢掛他人眼乎 연즉후수유현자출然則後雖有賢者出 유당봉이질자誰當奉以質者 우위지광연일교야又爲之曠然一敎也)
이상의 소론이 모두 종래의 이기학설과 배치되어 호낙湖洛 제현諸賢은 물론이요 멀리 율곡의 학설까지 부정되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학學에 대한 의론이 너무도 협애狹隘하여, 후학後學이 만약 전현前賢 성어成語에 일호一毫라도 간범干犯이 있다면 심지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낙인烙印까지 찍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가혹한 일이냐.
노사집은 노사가 별세한 후 두 차례 간행을 보았는데, 초간본은 총 22권 공共 11책으로 시詩, 소疎, 서書, 잡저雜著, 서序, 기記, 발跋, 잠箴, 사辭, 상량문上樑文, 축문祝文, 제문祭文, 묘표墓表, 행장行狀, 전傳, 유사遺事가 실려있고, 후간본은 총 40권 공 20책으로 그의 연보年譜, 행장行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첨가한 것이다. 이와같이 간행되어 그의 이기설이 세상에 알려지자 화양동(송 우암서원)을 중심한 전국의 유림儒林들이 봉기하여 그 폐간의 화禍가 거의 조석朝夕에 박두하였으나 요행히 시사時事의 변천變遷으로 그 화를 면했던 것이다.
노사의 학문은 호남 전역에 걸쳐 거의 가가시축家家尸祝의 정도이며, 급문及門한 선비들은 멀리 영남 일대에까지 미쳤다. 그 중에서도 고족高足으로 칭하는 이는 대곡 김석구, 예산 정재규, 일심 정의림 등인데, 모두 일시 문학 덕행이 뛰어났으며, 노사의 손자 우만 (세칭世稱 송사선생) 은 가학을 능히 이어받아 우뚝이 일방의 사표가 되었다. 영재 이건창은 노사집을 읽고 소감을
’공의 문장을 말한다면 논학이 제일이요, 서가 다음이요, 서, 기, 발이 또 그 다음이라, 그러나 의리에 통명하고 학문의 정숙함에 있어서는 어찌 동방 근세에 보기 드물 뿐만이겠느냐. 저 중국에서 찾아보아도 이에 짝할만한 이는 얻기 어렵다. (공지문장公之文章 논학제일論學第一 서차지書次之 기기발序記跋 우차지又次之 지약의리지통융至若義理之通融 학문지진공學問之眞工 기유동방근세소천유其惟東方近世所穿有 구지중주求之中州 선견기필鮮見其匹) 라 하였고, 또 문집의 권질卷帙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정精하지 못 한 점이 있으니, 34책 정도로 줄였으면 천하지보天下至寶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노사 기奇 공公의 고택故宅을 방문하고 그 손孫 송사와 오언晤言하라’ 는 시詩는
납량사의納凉私議 읽고 밤을 기울인 적 오래니
담대헌 (노사의 서실) 을 올라보자 눈이 다시 새롭구려
주변의 높은 산은 공경恭敬의 뜻 더 일고
성글은 대 울타리 가난이 흐르누나
도道에 든 그 정심精心은 전 어른도 못 당커니
가학家學을 이어받은 어진 손자 여기 있네
얻어보기 어려운 오늘을 한탄치만
돌아가면 아마도 이야기는 전진하리
과過 노사기공蘆沙奇公 고택故宅 여기소與其所 손孫 송사오언松沙晤言
납량권이경양구納凉券裏傾儴久 담대헌중랍목신澹對軒中臈目新
4면고산심기경四面高山諶起敬 일구소죽행불장빈一區疎竹行不藏貧
정심조도무전배精心造道無前輩 박학승가유후인樸學承家有後人
탄식이금난이정歎息而今難易靚 급귀응후화진진及歸應後話津津
그의 노사에 대한 존모尊慕가 더 할 수 없었음을 족히 짐작하겠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노사는 경세經世의 재才로 학문의 힘을 충양充養하였으나, 때가 이롭지 못하여 소온所蕰을 펴지 못 하고 산림山林에 퇴장하여 도道를 밝혀 이해를 불고하고, 득실도 원하지 않고 다만 ‘이理’ 의 한 글자를 제창하여, 태극, 음양의 조화로 하여금 아무런 주장이 없는 물건으로 전락되게 하지 않았고, 심心, 성性, 명덕明德으로 무릇 도리道理의 정미精微한 곳에 있어서는 다 전체가 통철洞徹하고, 대본大本이 소상燒想하여, 성현의 학을 떨어뜨리지 아니 하였으니, 후학에게 끼친 공이 이 보다 더 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학금學禁이 너무도 제한되어 그 거론탁설巨論卓說이 선생의 재세시在世時에 공포公布되지 못 하고, 문세問世하는 날에 있어서도 훼판분서毁板焚書를 자행하지 못 하여, 극성을 부렸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만약 자득自得의 공功이 허용되었던들 사학斯學의 발달이 더욱 찬란하여졌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창강 김택영의 ‘여與 조曺 중근仲謹 서書’ 에 ‘중국의 학사學士는 공맹孔孟을 제외하고는 종종 논박하는 것을 상사常事로 삼는다 (중국학사中國學士 자공맹이외自孔孟以外 종종탄박이위지상種種彈駁以爲之常)’ 라고 하였으니 이를 볼 때 더욱 감회가 깊을 따름이다. 아무튼 노사의 이 이기학설은 천양天壤과 병존竝存할 문학임을 다짐하여 마지 않는다.
009 화서집華西集 (1792 – 1868년) 이항로李恒老
화서 이항로는 유문儒門의 거장巨匠이며 절의節義를 숭상한 분이다. 이제 그 분이 처해있던 시대를 말하기 전에 먼저 유학의 성격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유학은 무엇보다도 인간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탐구하며, 영원한 생의 발전을 위하여 쉴 새 없이 노력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유학은 엄정한 이론이 있으며, 동시에 건전한 실천이 따라야 한다. 이에 투철한 분을 성인 철인이라 부르며 그들이 남긴 사상이나 행로를 경전에 담은 것이다. 우리 역사를 통하여 현인과 달사達士가 매우 많았었다. 화서도 그 중의 한 분이며 후일에 많은 영향을 남긴 뚜렷한 존재다.
화서는 조선조 정조 16년 (1792년) 에 양근에서 출생하였고, 고종 5년 (1868년) 에 몰歿하였다. 날적부터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 3세에 천자문을 익히고, 5세가 되어서는 점점 지혜가 밝아지고, 어른이 하는 일을 따르게 되었다. 9세에는 당시의 문학으로 이름난 화옥 신기녕, 설하 남기재, 백석 이정유, 화개 이정인 여러 분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간접으로 그 영향을 받게 되었고, 20세 이후에는 널리 옛 서적을 연구하는 한편 항상 ‘경전’ 을 주로 하여 지표를 삼았다. 이 동안에 선생의 문예가 숙성한 것을 알고 당시 재상이 자기의 자손들과 교유하며 지도하여 줄 것을 청한 일도 있었으나 화서는 단연코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뜻하는 바가 달랐을 뿐 아니라, 당시 권문세가權門勢家에 아부阿附하거나 식객 노릇을 하는 것이 젊은 협기에 싫었던 것이며, 항상 진리를 사랑하고 대의를 숭상하는 것이 그의 긍지였기 때문이다. 권문이나 세도에 아부함 없이 고고히 진리탐구에만 몰두하였다.
한편 화서가 살던 시대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바람이 맹렬히 불기 시작하였다. 1784년에 이승훈은 연경에서 서교西敎에 관한 서책을 가지고 돌아왔고, 1785년에는 ‘서학西學의 옥獄’ 이 일어났으며, 1788년에는 이경명이 상소하여 서학의 폐단을 말하였고, 또한 고서책古書冊을 불사른 일까지 있었다. 이후로 서학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하였다. 1797년에 영국의 탐험선이 동래의 용당포에 와서 위협을 주었고, 1851년에 프랑스 배가 제주도에 온 일이 있었다. 이와같이 외국의 배가 쉴 새 없이 왕래하는 중에 1866년에는 프랑스 배를 우리나라가 격퇴시켰는데 역사에서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 라 한다.
화서는 풍운이 어지러운 중에 세상을 떠났으니 곧 1868년이다. 화서는 원래 천품天稟이 밝고 행실이 매우 돈후敦厚하였다. 빈한貧寒한 사람들을 도웁기에 주저치 않았으며 향리鄕里를 위해서 여러 가지 애를 많이 썼다. 그러므로 화서는 언제나 기난하였고 그 청빈淸貧을 자적自適했다.
화서는 현실에 적극 참여를 한 학자이기에 그의 장狀, 소疎, 현실정책 등 모두가 화서문집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고 위의 것들을 자세히 소개함이 곧 화서집을 소개하는 것이다.
화서는 국가경제의 근본책으로 전지田地를 민중에게 균평하게 분배하되 가구의 다소에 따라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을 배당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되 자래自來로 지켜온 ‘한민각전법限民各田法’ 을 주장하였으며, 후일의 폐단을 미리 막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1. 고려의 제도 – 전지田地를 공법公法에 의하게 하는 것은 좋으나 그 폐단이 소작제小作制로 변하면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착취할 것이 두려운 것
2. 겸병兼竝의 폐단 – 조선조에 이르러서 전지田地를 민유民有로 한 것은 좋으나 그 폐단은 강호强豪의 독점이 두려운 것
3. 공법제公法制로 환원할 것 – 고려시대의 제도를 다시 사용하되 국가가 철저히 감독을 하여 탐관의 착취를 미리 막게 하고 민중본위로 경제의 토대를 세울 것
4. 사창私倉제도 (중출重出)
5. 향약鄕約 – 사회의 복지를 위하여 마련된 사회보장제도이며, 상부상조相扶相助하여 건전한 사회를 이룩하는 방법이다.
6. 병농합일兵農合一 – 국가는 경제와 국방을 동시에 중요시 하여야 한다.
보루堡壘를 구축하며 성벽을 견고하게 하고, 3면이 바다에 임하여 있는만큼 경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중국의 주周 시대의 제도에 따라서 주택을 두 곳(마을과 농경지가 있는 부근)에 설치하되 생활에 편리하고, 농경에 능률적인 것을 고려한다. 그리하여 추동秋冬에는 촌사村舍에 모여 가족이 살고, 춘하春夏에는 전사田舍에 이전하여 경작을 편하게 하는 것이니, 당초 중국 사람들이 먼 서방의 민족과 대치하여 적을 방비하던 다년 간의 경험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이상에 열기한 방법이 현대 안목으로 생각하면 신기한 묘안妙案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발상이었고, 국가를 염려하고 민생을 근심하는 화서의 고심苦心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1866(병인)년에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에 이르매 국가에서는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선생은 70 고령으로 병중이었지만은 결연히 일어났다.
‘내가 국은國恩을 받고 오늘에 이른 사람이라, 어찌 국난을 만나 편안히 있을 것이랴’ 하며 그 대함對衘에 부심腐心하였다.
영적洋敵은 강도江都에 침입하였다가 아군我軍에게 일단 격퇴를 당하였다. 그러나 적의 동향은 결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중국의 연경燕京에서 당한 양적들의 소행은 가증스럽게 성궐城闕을 불사르고 분탕焚蕩을 쳤다. 그 때의 군신君臣들은 사방으로 분산 도주하여 갈 바를 몰랐다. 이와같은 선례先例가 있었으며, 양적이 들어와서 분탕을 치면 무사할 리가 없다 하여, 일부에서는 강화講和를 청하자고 하고, 일부에서는, 우선 군왕君王이 먼저 남쪽으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이 때 좌상左相이었던 김병학은 화서를 등용하여 난국을 수습할 것을 청하여 임금이 이를 허락했다. 화서는 병이 위독하였지만 구국救國의 대열에 참가하여 부름에 응하였다. 학자의 신분으로 구국을 담당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으나 결사보국決死報國의 뜻을 굳게 하였고, 양적에 대항하여 일전할 것을 진소陳疏하였다.
1. 군왕 자신이 솔선하여 전의戰意를 굳게 하고 가벼히 강화하지 말 것
2. 민의를 진작시켜서 대중의 감투정신敢鬪精神을 고취시킬 것
3. 널리 언로言路를 열어서 국민의 여론을 통합하고, 국내에서 인망이 높은 사람을 등용하여 그 실력을 발휘시키게 하고, 특히 절의節義에 뛰어난 사람은 의여義旅 (민간 의병義兵) 를 규합糾合하여 관군과 서로 응원하여 적을 방비하게 할 것
4. 난시亂時에 토목土木의 역役을 정지시킬 것과 백성에게는 과분한 세금을 부과시키지 말 것
5. 신상필벌信賞必罰을 강조하여 만일 국경國境의 수비를 맡은 관원官員이 지키던 성城을 버리고 책임을 다 하지 못 하면 중형重刑을 내려 후폐後弊를 막을 것
6. 외화外貨 (양물洋物) 가 궁중이나 종척宗戚 간에서 사용되는 것은 사치심을 조장하는 것이니 이를 즉각 단절시킬 것
이상과 같은 진소가 국세를 만회하는데 어떠한 효과를 보인지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조야朝野에 누구나 수수호탄袖手浩歎만 하고 대책을 내놓지 못 하고 있을 때 ‘정문頂門의 일침一針’ 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으로 화서는 학문 사변思辨에 있어서 ‘태극지시일개생생지리太極只是一箇生生之理 (아언雅言 권 1)’ 라 하여 우주본체의 순연純然한 보편적원리를 정도正道로 삼으며, 인간의 본성을 주로 하여 잡다한 사상에 대응하되 감각적세계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항상 이성을 사랑하며 주체적인 경지에 서서 물질에 임하는 태도였다. 이에는 진실무위眞實無僞한 ‘성誠’ 의 의식과 정제整齊 엄숙嚴肅한 ‘경敬’ 의 심리작용이 반드시 따르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정신의 자세와 생활방법을 토대로 하여 교육이 가능하게 되었고, 절의節義의 풍도風度가 길이 남게 된 것이다. 저서는 송원宋元 ‘華東史合編綱目’ 60권, ‘華西雅言’ 12권, ‘문집’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문인어록門人語錄’ ‘주역석의周易釋義’ ‘벽사록변闢邪錄辨’ 등이 있다. 이 모든 편저서가 앞에서 말한 화서의 정신의 집대성이다.
화서는 주로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에 서 있는데 우주론에서는 이원론을 주창하였다. 즉 이기가 일물이라는 나羅 정암 일파의 ‘이기합일설’ 을 반대하고, ‘이기는 2물’ 이라는 것을 단정적으로 내세웠다. (주자 왈朱子曰 이기理氣 결시이물決是二物 차성현상전지결안야此聖賢相傳之決案也 나씨의지羅氏疑之 하고야何故也 개리일이기양蓋理一而氣兩 이무불선이理無不善而 기유선불선氣有善不善 일여양一與兩 선여불선善與不善 안득합이위일여安得合以爲一如 이여기고유상자시理與氣固有相資時 역유상항시亦有相抗時 상자시相資時 여인마수졸상항시如人馬帥卒相抗時 여묘유자적與苗莠子賊 인마수졸人馬帥卒 기시이물야己是二物也 묘수자적득이일물호苗莠子賊得爲一物乎 (화서 아언 권1 이기론)
주자朱子는 2물物이라 했고, 나씨羅氏는 1물이라 했다. 화서는 또 ‘이 이기는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니오 차등差等이 있다. 즉 이는 존尊하고 기는 비卑하며, 이는 명령하는 것이오 기는 명령을 받는 것이며, 이는 주인이요 기는 객客이다. 단,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逆이 되면 만사가 다스려져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이貳가 되면 만사가 난亂하여 천하가 위태할 것이다’ 고 했다 (이위주기위역理爲主氣爲役 즉리순기정則理純氣正 만사치이천하안의萬事治而天下安矣 기위주리위이氣爲主理爲貳 즉기강리온則氣强理穩 만사난이천하위의萬事亂而天下危矣. 화서 아언 권 1).
‘심설心說’ 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주리主理에 서 있으나 심心은 이기理氣를 겸兼한다는 것을 거부하지도 아니하여 ‘심즉리’ 의 설도 반대하고, 또 ‘심즉기’ 의 설도 반대하였다. ‘이理를 말하면 꼭 기氣가 붙고, 기를 말하면 꼭 이가 붙는다.’ 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심설心說에서 절충설을 주장한 듯 하나 주리론자의 입장을 잃지 않고 ‘이존기비理尊氣卑’ 를 철두철미徹頭徹尾 내세웠다.
다시 말해서 ‘이리단심以理斷心’ 인 것이다. 화서의 이것은 세상에서는 ‘심전주리心傳主理의 학學’ 이라고 한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호낙’ 양론에 대한 화서의 태도이다. 어느 쪽에도 편주偏主가 되지 않고, 때로는 호론에, 때로는 낙론으로 옳고 그름을 갈랐다.
즉 ‘단지기리單指其理 즉무부전則無不全 겸지기기兼指其氣 즉무불편則無不偏’ 이라 한 것이 낙론洛論이요, ‘인여물본시일리야人與物本是一理也 일기야一氣也 불시언동이기不啻言同而己 취중기불능무만수就中氣不能無萬殊 기기유뷰동氣旣有不同 즉시재기지리則時在氣之理 역수이부동亦隨而不同’ 이란 것이 호론湖論이다.
앞서도 그의 행장行狀을 밝힌대로 우국憂國과 저ᅟᅩᆫ왕찬이尊王撰夷의 대의를 평생을 통하여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창의호국倡義護國운동의 중심 인물이 많이 나왔다. 면암 최익현,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의암 유린석을 비롯하여 제제다사濟濟多士를 배출하였다. 신 문화가 밀려들면서 유학은 그 빛을 잃어가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력 앞에서 국난과 더불어 재래의 학문도 그 뿌리가 뒤틀리는 처지였다. 이 때에 화서의 학문적 공헌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승됨에 있었고, 또한 마지막 활짝 피었다 스러지는 꽃에 비유할 수 있다. 그의 제자들을 살펴봄으로 화서를 재 평가 하면, 중암 김평묵은 학문은 철저히 스승을 따랐고, 척양척왜斥洋斥倭에 앞장섰다. 그런 일로 귀양을 살았다. 성재 유중교는 중암과 같이 척양척왜에 앞장섰다. ‘태극도설대지太極圖說大指’ 등의 저서를 남겼고, 학문에 있어서는 하서의 주리설을 따랐으나, 만년에는 한韓 남당일파의 호론과 호응하여 ‘심즉기설’ 에 찬동하였다. 의암 유린석은 을미 민비閔妃 시해弑害사건 뒤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국론을 비등沸騰케 하였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후학 강론으로 그 명망이 높았다. 특히 면암 최익현은 학문으로써 빛날 뿐만 아니라, 한 말의 비색否塞한 국운을 바로잡기에 그의 스승의 유지遺志를 받들었다. 면암의 충절을 나타낸 매천 황현의 만장挽章 일절을 소개함으로 평가를 보탠다.
‘겨레의 울음소리는 3천리에 뻗쳐있고, 나라의 꽃은 한 의로운 배에 실렸도다 (항곡연호삼천리巷哭連互三千里 국화만재일고주國華滿載一孤舟).’
호서의 가르침, 면암, 성재, 의암, 중암 등의 충절과 학문은 한 말 유학의 최후 보루堡壘였으며 또한 충의의 종장終章이었다 할 것이다.
010 기측체의氣測體義 (1836년) 최한기崔漢綺
자를 운노, 호를 헤강 또는 패동이라고 하며, 순조 3년(1803년)에 태어났다. 그러니싸 신유년 (1801년) 천주교 박해로 권일신,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황사영, 정약종 등이 순교하고,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귀양을 간 지 2년 후에 출생한 것이다. 출생지는 분명치 않으나 젊은 때 서울에서 살았다.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를 제작한 김정호 (고산자) 와 더불어 절친한 사이여서 32세 때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靑丘圖’ 에 글을 썼고, 같은 해 두 사람이 협력하여 ‘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 를 대추나무에 새겨 찍어냈다. 그 때 최한기의 집이 서울 남촌 창동에 있어서 거기서 김정호가 손수 새긴 것이다 (이규경 저 오주연문五洲衍文 권 38, 만국경위지구도 변증설辨證說). 남촌 창동이라고 함은 지금의 남대문 안 시장 근처 미창동에 해당한다. 김정호는 본래 넉넉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던만큼 친구인 최한기의 집에 머물면서 공동작업을 했다.
김정호가 청구도를 완성한 것이 1834년인데, 그로부터 2년 후인 1836년에 최한기는 기측체의 9권 5책 (신기통神氣通 3권 2책, 추측록推測錄 6권 3책) 을 완성하였다. 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 를 완성, 교간한 것이 1861년인데, 그 보다 한 해 앞서 1860년에 최한기는 ‘인정人政’ 이라는 대저大著 25권 12책을 완성하였다. 최한기는 1879년 (고종 16년) 에 77세의 고령高齡으로 별세別世하였다. 이 해에 개화사상의 선봉 역할을 한 오경석도 별세했고, 그리고 안중근, 한용운, 권상노, 김창숙이 탄생했다. 국가적으로는 한말韓末의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시절이요, 특히 일본에 수신사修信使가 가고, 원산과 인천의 개항開港문제로 어수선하던 때였다. 또 천주교天主敎의 탄압이 심한 반면에 서구西歐의 새로운 문물에 경이의 눈을 뜨기 시작한 때다. 특히 실학계에 속하는 학자들 중에는 중국의 문헌을 통하여 서양의 실정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최한기가 그의 주저主著 ‘기측체의’를 완성하던 1836년이 바로 정 다산이 별세한 해다.
70세 때 그의 아들 병대가 고종의 시종侍從으로 있었으며, 72세 되던 해에는 최한기가 34세 때에 저술한 ‘강관론講官論’ 을 편찬했다. 최한기의 저술은 ‘명남루집明南樓集’ 이라고 하여 천 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라고 하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16종으로 80여 권에 불과하다. 농정農政, 수리水利, 수학, 천문, 지리,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지식과 창견創見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 철학적으로 참신하고 대담한 사상을 전개한 것은 34세에 지은 ‘신기통神氣通’ 과 ‘추측록推測錄’ 이다. 훌륭한 과학적인 사고방법을 이론적으로 다룬 책이다. 본래 유학자였던 최한기가 이러한 저술을 썼다는 것은 그의 탁월한 창의적 사색의 결정이 아닐 수 없거니와 후일의 연구를 따라 한국 철학사상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빛을 내개 될 것이다.
기측체의는 신기통과 추측록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책이다. 1836년 34세에 서문을 썼는데 추측록의 서문을 그 해 봄에, 신기통의 서문은 가을에 그리고 기측체의의 서문은 겨울에 썼다.
기측체의는 9권 5책으로 그 당시 중국 북경 정양문 내 동성근 인화당 장판藏板이다. 활자 호화판으로써 체제가 고상하다. 어떤 연고로 북경에서 간행되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아들 병대가 고종 시종이었던 관계로 국제문제가 미묘 복잡하여 내왕이 빈번하였던 정객政客을 통하여 주선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시에 이 책의 출판가치가 중국에서 인정된 증거다.
우선 신기통에서 신기라고 함은 지각知覺의 주체인 것이요, 신기의 경험이 곧 지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기가 그대로 지각일 수 없고, 지각이 그대로 신기일 수도 없다. 경험이 없으면 한갓 신기만이 있을 뿐이요, 경험이 있으면 신기가 스스로 지각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신이라고 말함은 기氣의 정화精華를 말함이요, 기라고 함은 정화로써의 신의 기본바탕을 말함이다. 밝음은 신에게서 생기고, 힘은 기에서 생기는 것인데, 오직 이 밝음과 힘으로부터 무한한 묘용妙用이 생긴다. 또 신이라고 하여 인격적인 신을 말함이 아니다. 이른바 상제上帝의 주재主宰니 하는 것은 신기의 발용發用하는 덕德을 말함이요, 마치 한 집안에 주인이 있고, 한 나라 안에 인군人君이 있듯이,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를 떠나서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천지 인물이 모두 하나의 신기의 조화인 것이요, 그 모든 것을 통섭統攝하여 조종하는 것이 신기다. 그리하여 최한기는 이러한 기에 관한 학문을 기학氣學이라 하여 기학으로써 천하의 학문을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에 있어서 신기는 내외內外를 매개媒介하는 문호門戶로써의 감각기관에 의하여 서로 통한다. 어린애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각은 감각기관에 의하여 밖의 것을 받아들여 경험함으로써 얻은 것이요, 나의 신기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각은 내외가 통하여 서로 융합함으로써 얻어지는만큼, 성불성成不成이 사람의 용력用力에 달린 것이요, 하늘이 처음부터 나의 속에 품부稟賦한 것이 아니다.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는 귀가 밝을 리 없고, 빛을 본 일이 없는 눈이 밝을 리 없다. 들은 일 없는 귀와 본 일 없는 눈을 총명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그 총명을 막아버림이요, 신기로 하여금 그 용력을 발휘하지 못 하게 된다.
바늘이나 송곳을 보고 찔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그 전에 스스로 찔리어보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찔려 아파하는 것을 보고 들어서 그런 것에 찔리면 아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요, 바늘이나 송곳 뿐만 아니라 가시도 피하려 한다. 경험에 앞서서 경험에 의거하지 않는 어떤 선천적인 지가 본래부터 따로 있어서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눈으로 본 것을 다시 귀로 듣는 것으로써 증험證驗하면 보는 바가 더욱 밝아지고, 귀로 들은 것을 눈으로 보는 것으로써 증험하면 듣는 바가 더욱 밝아진다. 그러나 그 때에 귀나 눈 자체가 더욱 밝아지는 것이 아니요, 신기가 더욱 밝아지는 것이니, 그것은 귀로 듣되 듣는 것은 신기요, 눈으로 보되 보는 것 또한 신기이기 때문이다. 즉 듣고 보는 일이 서로 다르기는 하나 보며 듣는 주체가 같은 하나의 신기이기 때문이다. 비단 보고 듣는 것에만 한한 것이 아니요, 코로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 맛 보며, 피부로 느끼는 데 있어서도 한 방법으로만 할 것이 아니요 서로 다른 기관을 통하여 증험함으로써 신기의 통달에 유익한 법이다. 감각적인 지각은 될 수 있는대로 여러 종류의 기관을 통하여 얻어질 때 서로 도움이 되어 보다 밝아질 수 있다는 것이니 이것을 주통周通이라 한다.
이목구비耳目口鼻는 그저 한갓된 이목구비일 수 없고, 신기가 통하는 통로로써의 이목구비인 것이다. 이목구비의 통하는 바를 무시하고 진리를 연구한다고 함은 허황된 짓이다. 감각적인 기관을 살려서 잘 쓸 줄 모르고 무시하는 데서 부질없는 괴상한 폐단이 생긴다. 최한기는 철저한 경험주의자다.
그리하여 최한기는 심기통 3권 중 제 1권에서 총론적인 체통體通을 논하고, 제 2권에서는 목통目通, 이耳통, 비鼻통, 구口통을, 제 3권에서는 생生통, 수手통, 족足통, 촉觸통 더 나아가 서로 증험하는 것으로 주周통을 여러모로 분석 서술하고 있다.
다음으로 추측록의 ‘추측’ 이라고 함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경험한 바를 기초로 하여 아직도 경험하지 못 할 것을 아는 방법을 의미한다. 지식을 넓히는 방법이다. 사물에 원근遠近, 선후先後, 현은顯隱이 있는 바, 대개는 가까운 것, 현재의 것, 나타난 것을 감관을 통하여 경험한 것을 기초로 하여, 즉 이것을 추推하여, 먼 것, 전일 또는 후일에 것을 측測한다. 추라함은 근거로 한다는 뜻이요, 측이라 함은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보아 무방하다. 옅은 것, 단순한 것, 쉬운 것을 측하여, 깊은 것, 복잡한 것, 힘든 것을 측한다고 하겠다. 추할만한 경험적인 단서도 없이 사려思慮 의혹疑惑만 가지고 측한다면 그 모두가 허망된 것이다. 그런데 이미 경험을 무시한 허망한 이론에 의하여 증명하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장이나 구변口辯의 재주로 꾸며대는 일도 있으나 이것은 한 때의 웃음거리 밖에 못 된다.
만일 추측하는 바가 없이 오직 견문見聞만으로는 편벽偏僻되고 잘못되기 쉽다. 그러므로 한갓 견문만 넓은 것은 부러울 것이 못 된다. 견문을 기초로 하여 추측까지 하였을 때 참된 얻음이 있게 되는 것이요, 이 때에는 비록 견문이 적다 하더라도 또한 두려울만한 것이다.
최한기는 나아가 추측을 하되 수학적으로 할 것을 주장한다. 신기를 단련하는 데는 수학을 익혀야 한다. 산수의 학은 기의 운동에 맞춤으로써 이가 그 속에 있는 것이요, 일가일멸一加一滅이 이가 아닌 것이 없다. 이치를 밝힘에 있어서 정밀하기 이에 지나는 것이 없어서 만일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있으면 대번에 탄로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수학을 배우게 하면 모든 분별이 가장 쉽게 되어 싸움을 방지할 수 있고, 흐려진 풍속도 밝아질 것이다.
그리하여 수학에 밝은 자는 천하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고 하여 최한기 스스로 수학연구에 힘을 기우려 37세에 ‘의상이수儀象理數’, 48세에는 ‘개산진벌皆算津筏’ 이라는 저술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수학적으로 추측한 것이라도 다시금 사물에 있어서 실지로 증험하여야 한다. 증험이 없는 추측은 허잡虛雜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증험한다고 하여 한 귀퉁이의 합合이나 한 때의 응應으로써 만족하여서는 안 된다. 여러 번 거듭하여 시험해보아야 한다.
인생으로써 천지를 본다면 추측이 무궁하지만, 천지로써 인생을 본다면 추측은 유한한 것이다. 유한한 추측을 가지고 무궁한 추측을 다 하는 것처럼 망상함은 잘못이다. 알 수 없는 것까지도 억지로 그럴사하게 꾸미는 것은 도리어 그 밝히는 바가 어두워지고 말이 많을수록 알 수 없게 된다. 참으로 추측을 잘 할 줄 아는 사람은 알 수 있는 것을 전정專精하게 밝히어 그 옳음을 다 하되 알 수 없는 것은 그 알 수 없음을 밝힌다. 알 수 없는 것까지 알았다고 하는 사람은 알 수 없는 그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알 수 있는 것조차 자세히 아지 못 할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할 때에 오히려 그 아는 바가 정치精緻함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최한기에 의하면 주공, 공자가 배세百世의 스승인 까닭은 그들의 존호尊號에 있는 게 아니요, 또는 용의容儀 신채身彩에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거처居處, 동작動作, 의복衣服, 궁실宮室이나 만난 바 때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古今을 참작하고 질문質文을 손익損益하여 그 도를 밝힌 점에 백세의 스승인 까닭이 있다. 국제國制 풍속이 고금의 의宜를 달리하고 역산曆算 물리物理가 후래後來에 더욱 밝아졌으니 주공, 공자의 통달한 대도를 배우는 자로써 어찌 그들의 유적遺跡이나 지키고 변통變通하는 바가 없어서 좋을 것인가. 법을 주공, 공자의 통달에 취하여 변혁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최한기는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실증적 과학적인 근대화와 관련시켜 새로운 태도로 발전시킴으로써 그 근본정신을 시대적으로 살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 섭취할 정신적 자세와 기본적인 철학이론을 천명하였다고 하겠다. 이른바 실학파의 학자들이 흔히 백과전서적百科全書的인 지식의 나열이나 지엽말단枝葉末端적인 형식의 모방을 하던 태도와는 달리 일관된 원리에 입각하여 자각적인 연구의 활로를 개척하려고 노력한 공은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단지 조선 말엽末葉의 국사다난國事多難한 가운데 최한기의 사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 하고 따라서 계승 발전되지 못 하였음이 한스럽기도 하지만, 한국의 정신적인 근대화가 보통 생각하는 이상으로 이미 긴급한 과제로써 원리적인 깊이에 있어서 다루어졌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우리의 관심을 이끄는 것은 최현기가 1867년, 그러니까 6세 때 말년에 지은 ‘성기운화星氣運化 (상하 2책 12권)’ 의 서문에서, 중국에서 간행된 후실칙의 ‘담천談天’ 이라는 책 속에 측험, 신기, 운하 등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이 담천은 함풍 8년 (1858년) 에 간행된 것이요, 최한기의 기측체의 (신기통, 추측록) 는 1836년에 저작된 것이다. 담천보다 22년이나 앞선 셈이다. 그리고 기측체의는 북경 인화당에서 간행되었은즉 후실칙이 혹은 최한기의 저술을 이미 읽어서 혹은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양자의 관계를 경솔하게 억측함은 삼가야 할 일이나, 장차의 문제거리임은 틀림없다. 하여간 최한기의 사상적 계보나 그의 국내외에 미친 영향 등을 밝힘으로써 창의와 학적 의의가 밝혀질 것이나, 이러한 연구는 후일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011 한주집寒洲集 (1818 – 1885년) 이진상李震相
우리 한국의 선유先儒의 문집은 대개가 시, 서, 잡저, 기, 발, 명, 잠, 찬, 축문, 제문, 비문, 묘표, 묘지명, 행장, 전 등이 기본체제로 되어있으니 그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 에서 본뜬 정형定型이다. 주자는 위대한 철학사상의 많은 저서가 있으나, 동유東儒는 진리를 구명究明하기 보다는 양반행세에 필요한 문예文藝 위주의 문집이다. 그러나 한주집은 철학사상의 부면部面이 있기 때문에 해제解題에 즐거움을 느꼈다.
한주집의 체제도 역시 일반적인 문집의 정형에 따라서 편성되었는데 그 중에 철학사상이 들어있는 것은 주로 변설辯說, 잡저편雜著篇이다. 그의 철학은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론에 있으니 그것은 결코 무용할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니라 실은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데 유익한 진리를 구명한 것이다. 원래 동양의 철학은 인생의 학이라, 인생을 떠난 형이상학形而上學이나 인식문제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도道는 인생에서 머지 않으니 인간이 도를 연구하는데 인생으로부터 멀리 한다면 그는 도가 아니다’ 고 공자는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성리학은 실천궁행하는 인간의 주체의식을 조성하는 철학이다. 즉 말하면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유도儒道철학은 바로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 주체의식을 세워서 수신제가修身齊家하여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는 이상理想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 이상, 지성보다는 실천이성 – 덕성을 우위로 한 것이 동양의 철학 – 유도儒道의 특징이다.
한주는 150년 전인 순조 18년 (1818년, 술인년戌寅年)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서 고종 24년 (1885년, 병술년) 향년 67세로 서거하였다. 휘諱는 진상, 자字는 여뢰, 본관本貫은 성산이다. 학통은 유정제 공公으로부터 전승하였고, 관위官位는 의금부도사였으나 부임치 않고 학문연구에만 일생을 정진하였다. 그러나 국가사회의 안위에는 무관심하고 은둔隱遁한 것이 아니라 구세救世의 대지大志를 가지고 당시의 국정을 논평해서 고식적姑息的 , 문구적文具的, 편사적偏私的인 3대 병病과 관방官方, 과거科擧, 부세賦稅, 군정軍政, 서리胥吏 등의 5대 폐弊를 열거해서 위정자爲政者에게 경고하였다. 또 ‘무충록畝忠錄’ 2권을 저작해서 국가제도의 실행조목을 규정하고 또한 ‘사에집요四禮輯要’ 9권을 편저해서 곤혼상제冠婚喪祭의 의례조목儀禮條目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한주집 25권 외에 춘추집전春秋集傳 10권, 이학종요理學綜要 10권을 편저하였으니 이상의 5종은 기간旣刊된 것이고 또 미간未刊된 서적도 4종이 있으니 구지록求志錄 23권은 4서, 3경, 3예禮 주장정주퇴周張程朱退 등의 제서諸書를 공부한 요의要義고, 변지록辨志錄 4권은 조 정암, 한 남당, 위암집, 녹문집 사칠변四七辨 등을 논변한 기요紀要며, 직자심결直字心訣 2권은 주장정소주周張程邵朱 등의 서에 있는 직자를 논고한 것이고, 천고심형千古心衡 2권은 통감通鑑, 강목綱目, 속續강목 등 서書에서 주요한 사건史件을 초출抄出해서 평정한 것이다. 그런데 문집 내에서 설편說篇에 심즉이설心卽理說, 명덕설明德說, 달도설達道說, 명설命說, 인물동이설人物同異說, 사칠경의설四七經緯說, 사칠원위설四七原委說 등과 잡저雜著에 성학도설性學圖說, 인도설仁圖說, 일원만수도一原萬殊圖, 주제도설主宰圖說, 심역동정도설心易動靜圖說 등등은 한주학설의 개요점槪要點으로써 더욱 전문적으로 들어간 것은 이학종요理學綜要다. 그의 84권의 수백만언數百萬言의 저서에 일관된 철학은 오직 심즉리心卽理인 것이다.
무릇 인人의 심心은 천天의 이理를 품수稟受한 것이니, 즉 ‘천명지성天命之性’ 이라 그것을 축언縮言하면 ‘심리心理’ ‘심즉리心卽理’ 라는 설說은 누구나 알 수 있는 평범한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또 인의 심에는 천의 기도 품수했으니, 그는 축언하면 ‘심기心氣’ ‘심즉기心卽氣’ 라는 설도 성립되는 것이다. 심心에 이理는 성性이고, 심에 기는 정情이니 이理는 진리眞理요, 기氣는 세력勢力이며, 성은 이성理性이고, 정은 기분이다. 그런데 성의 이는 내재한 핵심이고, 정의 기는 외재한 포피包皮이니, 정의 근원은 성이고, 성의 발현發顯은 정이다. 그런데 성은 이고 정은 기라 성과 정을 통칭한 심은 이와 기가 겸재兼在한 것이나, 한주는 그의 기는 무시하고 이만을 주창하여 성은 미발未發한 이고, 정은 기발旣發한 이라, 성이 발외發外해서 정이 되는 것은 오직 일리一理라 비하면, 주인이 외출하면 객인客人이나 그는 일인一人임과 같으니, 선정性情의 실상을 구하면 이발理發은 있으나 기발氣發은 없으니, 이는 기에만 의존하고, 기는 형形에만 본구本具한 것이다 (사칠원위설) 고 하였다.
‘인간의 生한 육체에는 기가 있고, 기가 정으로 작용하는데 이가 있으니, 이는 성으로 실재한 것이라. 그 본체의 방면으로 보아서 심즉리라고 한 것이다. 무릇 심은 일신一身의 주재主宰고, 성은 일심一心의 주재니, 이가 성과 정의 본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심의 진체묘용眞體妙用은 진실로 이니 오직 이라고만 말하면, 기는 심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심을 말하는데는 흔히 이기를 겸하지만은 대개 심의 주재는 이에 있고, 그의 운용運用은 기에 있으니 주재의 묘妙가 전승傳勝하면 기가 이에 순동順動해서 운용의 공功이 선저善著하지만은, 운용의 세勢가 중승重勝하면 기가 이를 엄배掩背해서 주재의 이가 불행不行되는 것이다 (주재도설)’. 그러니 심즉리의 설은 오직 심의 주재자인 이를 표준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신身의 주재자인 심心을 표준으로 한다면 유심론唯心論이 되는 것이나, 그의 심은 물物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그의 이는 기의 위에 있는 것이다. 결코 물을 부정한 심이나 기를 이탈한 이는 아닌 것이다.
최초에 심즉리설을 제창하기는 왕양명이나, 한주의 심즉리설은 그를 반대하였다. 양명은 ‘심이란 이니 천하에 어찌 심 외에 事나, 심 외에 物이 있을까’ 하고, 또 ‘우리 마음의 良知는 즉 天理니 우리의 양지만 致得하면 事事物物이 다 그의 理를 얻는 것이다’ 하고 또한 ‘양지는 하나이니, 그의 묘용으로써는 神이라 하고, 그의 流行으로써는 기라 하고, 그의 凝聚한 것로써는 情이라 하니 어찌 形象의 方面에서 구할 것이 있을까’ 고 하였으니 ‘양명의 소위 천리天理란 것은 理에서 보면 精氣神의 會合한 것이라, 심이란 것은 오직 形氣神의 知覺만 말하고, 性이란 것도 오직 정신의 작용만으로 말한 것이니, 그의 立言한 骨子는 오직 氣의 條理에 있으니 그러면 비록 말에는 백 번이나 理 字가 나와도 그는 또한 主氣의 學인 것이다 (이학종요 12권)’ 고 한주는 논박하였던 것이다.
그 심즉이설의 벽두劈頭에도 ‘고금인古今人이 논심論心한 것은 심즉리라고 함 보다 더 진선眞善한 것은 없고, 심즉기라고 함 보다 더 불선不善한 것은 없으나, 심즉기의 설은 근세의 유현儒賢에서 발생된 것인데 세상에서 이학에 종사하는 자가 많이 추종하는 것이다. 또한 심즉리라고 해도 양명배陽明輩의 설은 우리가 배척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는 난도亂道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한비자韓非子에 있는 ‘화씨지옥和氏之璧’ 으로써 비유하여 유현儒賢이 심心을 기氣라고 함은 옥玉을 석石이라고 함이고, 불가佛家에서 심心을 이理라고 함은, 석을 옥이라고 함과 같으니, 그의 양자兩者는 공共히 기氣만 보고 이理를 보지 못 한 데는 동일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심이 성과 다른 것은 정을 겸한 것이니, 정이란 기발한 성이다. 성과 정은 오직 일리一理니, 심이 이가 됨은 당연한 것이다. 다만 이에 기가 없는 것은 있지 않으니, 오직 이라고만 말하면 불비不備한 바가 있기 때문에, 성은 이라도 또한 기질氣質도 성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또 유 정제는 ‘심 미발할 때는 기가 아직 용사用事하지 않는 이理 뿐이니 어찌 악惡함이 있을까’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심체心體를 적지的指한 정론正論이라 내가 ‘논論에는 심즉리 보다 더 진선한 것은 없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의 이, 성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과 4단7정四端七情의 정情이다. 이것을 분석해보면 지智는 순수이성純粹理性이고, 의義는 실천이성實踐理性이며, 예禮는 사회규범社會規範이고, 인仁은 인생도리人生道理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맹자孟子는 인仁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는 시비지심是非之心 등이 나온다고 해석해서 그것을 4단端이라고 하였는데, 또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는 희노애락구애욕喜怒哀懼愛慾이란 7정情이 있으니 그 양자의 관계를 논변하는 것이 소위 4단7변四七辨이란 것이다. 4단7정은 다같은 정인데 왜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불합리한 것이므로 필자는 일찍이 변파辯破하였다 (유도사상체계儒道思想體系 유정기 저著).
그러나 선유先儒들은 사칠변四七辨이 하나의 학문사업이 되었기 때문에 한주도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사칠원위설, 사칠경위설 등을 저술하였다. 주자朱子에 의하면 4단은 도심道心에 속하니 이理의 소발所發이고, 7정은 인심人心에 속하니 기의 소발이라는 것이며, 퇴계에 의하면 4단은 이가 발하는데 기가 수隨한 것이고, 7정은 기가 발하는데 이가 승乘한 것이라고 했는데, 한주는 ‘이기는 호발互發한다. 그래도 그것은 각발各發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발현되는 것은 모두 다 기지만은 그것은 이에 근본하였으니 그에 내용은 모두가 이인 것이다’ 라고 하고서 ‘4단이 이를 주로 한다는 것은 일이 의리에 속한 것이 내감來感해서 심의 이가 의리상으로 따라서 발표하기 때문이고, 7정이 기를 주로 한다는 것은 일이 형기形氣에 속한 것이 내감해서 심의 이가 형기상으로 따라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사칠원위설이다.
그리고 또한 사칠경위설이라는 것은 4단은 목화금수木火金水의 기가 발하는 것이고, 7정은 5행五行의 상생相生 상극相克으로 설명한 것이니 그 설이 장長함으로 생략한다. 그러니 율곡은 ‘발하는 것은 기고, 발하게 하는 것은 이다’ 라고 하고, ‘4단은 4덕德이 직출直出하는 정이고, 7정은 그의 횡출橫出하는 정이다’ 라고 한 것과 반대되는 것이다. 이학종요 10권 22편 67조는 하나의 체계로 된 성리철학사전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선유설先儒說만을 편집한 것이 아니라 한주의 철학으로 평정評定한 것이니, 성리대전에 못지 않은 전적典籍이다. 그런데 그의 전체 요지要旨는 오직 심즉리설을 설명하기 위함이니,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한층 더 구현한 것이고, 퇴계의 이발설에서 일보 더 전진한 것이다. 이가 발한다는 것은 바로 성이 선善하다는 것이니 이발설은 바로 성선설에 불외不外한 동시에 심즉리설이 된 것이다.
한주의 심즉리설은 바로 심즉기설과 반대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의 자체가 보편화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더구나 수백 년 래로 뿌리박힌 4색당파色黨派도 있고 또한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병호시비屛虎是非도 있어서 장벽障壁이 중량重量하였기 때문이 그의 영향이 널리 파급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때는 유림儒林의 주도권을 쟁탈하는데 한주집이 희생물이 된 적도 있었다. 도산서원에서 실권을 잡으려는 야심분자野心分子가 퇴계의 학설을 가장 성실하게 숭봉崇奉한 한주를 퇴계의 학설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문집을 파판破板하려고 도회都會를 개최하였는데 활자본活字本이라 목판木板이 없었기 때문에 문집 일부를 갖다가 화형식火刑式을 했다. 그 이유는, 퇴계는 이기호발설을 주창하였는데 한주가 이발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니, 학문을 연구한다는 것은 오직 학설을 창조하는 것임을 모르는 한심한 일이다.
그의 제자는 수다하지만 허유 윤위하, 장덕영, 이덕후, 이두훈 등이 저명하나 특히 곽종석 – 면우俛宇는 당대의 석학자로써 그의 학설을 계승함에 족한 인물이었으니 문집이 63권이다. 그는 우국憂國의 충정衷情으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의 폐기廢棄 상소上疏도 하고, 만국평화회담에 독립호소문을 보내서 투옥된 일도 있다. 윤자 이승희 한계도 가학家學을 충분히 전승해서 문집이 20권이나 될 뿐 아니라 또한 중사략中史略 10권, 곡레집해曲禮集解, 예운집전禮運集典, 제자강집해弟子講集解, 정학류어正學類語, 학어류훈學語類訓 등의 저서가 있다.
수제首弟 면우와 윤자 한계가 위국진충爲國盡忠한 것은 물론 그의 영향일 것이니, 성리학은 결코 무용한 공리공론이 아니라 실은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진리다.
성학종요 서문序文 벽두劈頭에서도 ‘학문은 명리明理라는 것이고, 명리는 장차로 순리順理하려는 것이니, 학문이 순리해서 실행에 이르면 현자賢者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성리학은 인간을 만드는 철학이다. 그의 형이상적인 이론은 오직 형이하적인 실천으로써 구세안민救世安民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철학은 지도자의 학문이고, 생산자의 학문은 아니다. 비록 인간적인 면에서는 장점이 있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궁핍하니 이에 과학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리학에 대해서 실학파實學派가 발생했다. 그러나 성리학과 실학과는 결코 서로 대립 상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조補助해서 협조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방면에는 과학을 해야만 인간생활을 부족富足하게 할 수 있으나, 정신적인 방면에서 철학을 하지 않으면 인생의 사회를 화평하게 할 수 없다.
그런데 필자는 원래 성선설과 성악설을 반대하였으니 이발설 기발설의 대립도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한 현실의 세계에는 기발설 성악설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나, 당위當爲할 이상理想의 세계에서는 이발설 성선설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처럼 도덕과 윤리가 결여된 때에는 맹자의 성선설 · 한주의 이발설이 그 필요한 방도가 될 것이니 당위항 이상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족蛇足> 성선설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는 선한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는데 성장하면서 사회에서 악을 배워 악한 인간이 되기도 한다. 성악설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선과 악의 두 측면을 지니고 태어나 악이 발하면 악인의 행동을 하고, 선이 승하면 선인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는 선하다. 백지白紙로 태어난다. 그래서 교육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보라. 방글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라. 아이들의 마음 그 어디에 선과 악이 존재하는가? 맹자孟子 (성선설) 의 아이는 방글거리며 웃으면서 태어나고, 순자荀子 (성악설) 의 아이는 도둑이나 강도로 태어나는가?
<불교佛敎>
012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676년) 원측圓測
원측은 613년 생으로 696년까지 생존하였다. 중국의 문헌에 의하는 한 그의 상세한 전기傳記는 알 수 없다. 최치원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신라의 왕손王孫이다. 15세에 불교학을 전공하기 시작, 그 후 당나라에 건너가서 당시의 석학碩學인 법상, 승변에게 취학就學하였다. 원래 천자天資가 총명하였는지라 6개 국어에 통달하였으며, 학명이 태종 문제에게까지 알려져 제의 애호로 서명사西明寺에 주住하게 되니 세상이 모두 서명이라 불렀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그를 석가釋迦와 같이 존경하였다. 추공捶供 중 신라 신문왕은 누차 무후에게 원측의 환송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하니 스님의 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중국에 살고있었을 때는 성당기盛唐期로써 후한後漢 이래 양, 진, 수대를 거치는 동안 인디아 고승高僧들에 의해 많은 3장三藏이 번역되었다. 그러다가 당초唐初가 되자 중국인 현장은 여태까지의 삼장에 그 의미의 불분명한 점이 많음을 발견하고, 직접 입축구법入竺求法의 장지長指를 품고 인디아에 들어가 17년 간 불교연구를 하고, 수많은 삼장을 가져와 조야朝野의 대 환영을 받았다. 현장 이전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하고, 현장 후 번역을 신역이라 하니 신역이 올바르다는 의미다. 성당기의 중국 불교계는 생기발랄生氣潑剌하여 많은 신종新宗이 일었으니 구사俱舍, 법상法常, 정토淨土, 선禪 등 제종諸宗이다. 그 이전에도 구사 유식唯識도 연구되고, 또 섭론攝論 지론地論도 연구되었지만 현장역譯이 나온 후로는 모두 그에 의지하였으니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였다.
현장과 원측은 연령이 13세 차이다. 그런데 그 학통學統으로 보면 현장이 입축入竺 전에는 법상, 승변을 따랐다. 물론 동시 동문은 아니다. 법상은 열반학涅槃學을 전공하였고, 승변은 섭론 학자다. 섭론攝論은 유식학唯識學에 속하였지만 열반은 다르다. 그러나 현장이나 원측이 대성하였던 사상으로 양자가 다같이 유식론이 전공이었다. 진제삼장 등이 번역한 구 유식을 전공하다가 현장의 신 유식학설에 의해 미진한 내용을 해소했다. 그러나 원측은 현장과 동학이었고, 현장이 구법 귀국한 후에도 사상이 동일하였다. 현장과 원측이 다같은 유식학설에 대하여 학문적 의견을 직접 토론하였다는 근거는 없고 다만 현장의 역에 원측이 충실한 해석을 한다.
원측의 주저主著는 후세에 성립된 동엽전등목록에 의하면 반야바라말다심경소 1권, 인왕반야경소 3권, 해심밀경소 10권 (10권 결), 성유식론소 10권, 성유식론별안 3권, 20유식론소 2권, 백법론소 1권, 관소록논소 2권, 62견장 3권, 인명정리문논소 2권인데, 그 가운데서도 주저는 성유식론소 10권이다. 그러나 현품이 전래하지 않으므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소가 세상에 나오므로 그 당시 중국 유식학계에서 일대 파문을 일으켜 누대累代에 걸쳐서 당 유식학파와 신라 유식학파가 대립 상쟁하였다. 이와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문헌으로는 현장의 제자인 혜은사 기의 성유식론술기 40권과 기의 제자 혜소의 성유식론요의증 14권이 있다. 기는 술기에서 ‘유인有人의 설說’ 을 들어서 자기의 해석과 상이함을 논하고, 혜소는 그의 저술 서명사운, 원측운, 서명운에서 논박하였다. 기는 심하지 않으나, 혜소는 논박을 위한 논박으로 저술의 목적인 성유식론의 원문을 해석하는 본의를 망각하고, 원측의 소를 공격하는 것이 주가 되어있어 인격을 의심케 한다.
예를들면, 유식상의 대 주제는 거론하지 않고 지엽적인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타국의 유학자들도 무리함을 인정하여 원측의 무과無果함을 밝히고자 하였으니, 일본 나라奈良시대 유식학자 선주의 성유식론요의등증명기다. 이에 의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도 과장 논술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야심 배타는 무모한 일이므로 원측의 제자들이 묵과할 수 있었겠는가? 제자 신라인 도증이 성유식론요집 14권을 저작하여 대변하였으니 그 증거는 요의증에 요집의 문장을 인용하여 논파하고 있다. 이국異國에 고립되었던 신라 유식학파는 자연 쇠퇴하여 저서도 산일散逸하였다.
원측의 소의 내용을 말하기 전에 혜심밀경 내용을 밝혀야 소를 저술하게 된 소이所以를 알게된다. 본경의 번역이 4종이다. 원측이 소를 지은 것은 현장이 번역한 경에 대해서다. 그런데 경과 논은 그 체제상 다른 점이 있으니, 경은 블타佛陀의 설법집說法集으로써 교리敎理내용이 쉽고, 설화체說話體라 논리적이 아니다. 이에 비해 논은 이론적문제가 취급되어 논리적이라 이해하는데 용이하지 않다. 이 혜심밀경은 논평적 표현으로 되어 철학적 소양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혜심밀경은 5권 8품品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본론인 승이제상품 제 2에서 ‘일체一切 제법諸法의 본체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본체는 법성法性이니 진여眞如니 하여 우리 인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수양력修養力에 의하여 안으로 스스로 깨달아지는 묘리妙理로써, 우리의 후천적인 의식으로 분별하고, 사유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바와 같이 이로 보아 이 경의 극의極意는 승의제勝義諦 제第 1의제義諦 최고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 점은 불교의 다른 교설에도 공통되는 이념이다.
그 다음 심의식품心意識品 제 3에는 우리 인류, 모든 하등동물까지라도 전생前生의 최후 찰라에 죽어서 금생今生의 생명체로 옮겨오는 것이 사실인 바 이 때에는 무엇이 그 주체가 되어서 현생現生의 첫 출발을 보게되는 것인가, 이것을 심心이라 하여 이 심의 주체를 아뢰야식이라 한다. 이 식識으로부터 그 다음 연連해서 의意 (말라) 가 전개되고, 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식이 전개된다고 하니 이것이 심의 내용, 정신의 내용이다. 이 현상의 제법諸法은 이와같이 인생 각자의 마음이 전개됨에 따라서 자기의 육체가 전개되며, 또 객관적인 우주도 전개되는 것이라 한다.
전품前品과의 관계를 다시 말한다면, 이 우주만물의 본체는 일미평등一味平等하여 본연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같이 평등하고 원만 안전한 그 진리 그 자체가 어째서 불완전하고 차별적인 인생 각자의 우주로 변모하였다는 말인가? 그 변모한 근원과 과정을 말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이 품品의 요지要旨다. 인생 각자와 우주는 신神이 창조한 것도 아니요, 또 어떤 객관적인 원리가 있어, 그로부터 전개되는 것이, 아니 인생 각자의 자심自心이 근원이 되어 인생 각자가 부지불식不知不識 중에 창조한다는 것이다. 즉 전품은 우주만물의 본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요, 후품은 진리의 본체로부터 미혹迷惑 유전流轉하여 오는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그 다음 이렇게 해서 전개되는 현상 및 본체의 제법諸法을 주관적으로 판단 망집妄執하는 편계소집성遍計所執性, 그러나 객관적인 제 현상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한 것이므로 엄연한 존재이니 이것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한다. 이상은 현상을 주로 한 우주 인생관이다. 이와 비하여 본 체계는 이와 반대일 것으로 이것을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한다. 이러한 이치를 논하는 것이 일체법상품一切法相品 제 4의 요지要旨로써 이것을 삼종자성설三種自性說이라 한다. 이 삼자성은 요컨대 망집상의 유有, 의타기의 객관적 유, 본체本體로서의 유 등 모두 유에 입각한 것이다.
무자성품無自性品 제 5에서는 망집의 유는 그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상무성相無性이요, 의타기의 유도 실체가 없어 타력의 의해서 생긴 것이므로 셍무성生無性이며, 원성실성圓成實性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 한다. 그러니 실성의 공空한 면을 주로 하고 본 우주 인생관으로써 이를 삼종무성설三種無性說이라 한다. 제법諸法은 현실면에서 보면 유요, 실체면에서 보면 공하다. 그러면 유, 공 어느 것인 진眞인가? 그것은 유공 양면을 다 갖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중도中道라 한다.
그러면 본 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분별유가품分別瑜伽品 제 6에 우리 인간 현실의 근원은 오직 각자의 심식心識이다. 인생은 일체가 모두 유식소변현唯識所變現이라는 유식관唯識觀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의 본질 우주의 실태를 체득하라고 권설勸說하고 있는 것이 본경의 요지다.
원측설의 내용을 보면 소는 주해자註解者라는 의미로써 어떠한 소가疏家라도 본경 이외의 말을 해서는 소의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대체로 본경의 설과 틀려서는 안 된다. 경문經文만으로는 그 의미가 충분히 나타나있지 못 하므로 소가는 그것을 탐구 논명論明하는 것이다. 이 경의 소는 당나라 이래 신라의 원효, 경흥 기타 중국 여러 학자들의 저서가 있었던 모양이나 현전하는 것으로는 오직 원측 소疎 일종 뿐인 이 경설經說은 희귀하다.
그러면 대체로 이 경 전체를 어떻게 보고 또 어떠한 방법으로 해석했는가? 그 소 권 1에 4종의 방침을 취하고 있다. 1은 교흥제목敎興題目, 2는 변경종체辨經宗體, 3은 현소의위顯所依爲, 4는 의문정석依文正釋이다.
교흥제목이라 함은 이 경을 불타가 설한 순서, 변경종체라함은 이 경은 무엇으로써 1경의 체體를 삼고 또 그 목적을 하는 종취宗趣가 무엇인가. 현소의위라 함은 이 경에서는 우주만법의 의하는 바가 무엇인가, 의문정석이라 함은 이 경의 문문국文文句句의 의의를 일일이 해석하여 가는 것으로써, 소疎로써의 정당한 임무는 실로 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의 사상적 진수眞髓를 지적한 것은 변경종체에 있다. 그는 이에서 이 경의 체와 종취와의 2단段에 분分하여 논하고 있는 바 본경의 체體는 제경諸經의 의의와 다름이 없고, 그 종취에 대해서는
1은, 존망은진종存妄隱眞宗 즉 현상계 제법諸法은 현설現說하나 진여眞如는 이것을 숨겨서 현설하지 않는 것이니 소승小乘(불교)의 일류一流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주장이라 한다.
2는, 유망존진종遺妄存眞宗 즉 현상계現象界의 망법妄法은 이것을 제유除遺하고 진여만을 존치하는 파派로써 이것도 소승小乘의 일파一派인 경량부輕量部의 주장이라 한다.
3은, 진망구유종眞妄俱遺宗 즉 본체本體인 진여와 현상계의 만법萬法을 함께 제유해버리고 일주관一主觀 객관客觀 일체一切의 제법諸法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으로 이것은 용수龍樹의 계통에 속하는 청변淸辨의 학설이라는 것이다.
4는, 진망구존종眞妄俱存宗 즉 진제眞諦의 초장에 볼 때 본체는 유有인 것이요, 속제俗諦의 본지本旨에서 볼 때 현상계 제법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이므로 가유假有일망정 유有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또 상술上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약 그 본체면에서 본다면 제법은 모두 신성神性이 없는 것이므로 공空이다. 그러나 유와 공은 일물상一物上의 양면관兩面觀으로써 이것은 결코 분리하여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와같은 우주 인생관은 호봅론사護法論師를 주로 한 유식종唯識宗의 주장이라 한다. 이와같은 4종관種觀의 근천淺近한 사상으로부터 점차 깊은 사상으로의 순서를 보이는 것로써, 이 혜심밀경을 근본의 전거典據로 하고, 유식종을 창설한 호법의 사상이 가장 심오深奧하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또 한 거지 규준을 세운 것이 있으니 불교의 모든 사상을 3종種으로 분류한 것이다.
1은 약시변종約時辨宗, 이에 또 4제諦로써 위종爲宗하는 4아함阿含, 무상대승無相大乘, 2는 제부諸部의 반야경般若經으로써 무상위종無相爲宗. 3의 혜심밀경은 요의대승교了義大乘敎라 하여 이에 본 경의 위치를 최고 최후에 추대한다.
원측소의 현존본 – 이 소는 고려장경에는 없다. 일본 장경 중에도 축쇄대장경에도 없고, 대정장경에는 없으며, 만자卍字속장, 34찬 1집 제 4책에 수록되어 있는 바, 이에 제 10권 결缺로 다만 전 9권만이 현존한다. 그런데 최근 서장장경西藏藏經 중에 이 결한 10권이 완전히 전래한다. 일본의 모 학자가 이것을 다시 한역漢譯한 것은 필자도 소장하고는 있으나 아직 독파하지는 못 하였다. 그의 모든 저서의 특징은 문장이 매우 유려하고 논증이 넓으며, 논증은 이로理路가 정연하여 일목一目에 그가 대 문장가요, 대 학자였음을 직감한다. 단, 모든 사람들이 청독聽讀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유감이다.
013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658년) 원효元曉
송宋 고승전高僧傳에는 신라국 황룡사 사문沙門 원효전이 수록되어 있고, 그것이 현존 3권 금강삼매경론 판본 말미에 부록되어 있는데, 이 원효전은 다른 원효전과 달라 주로 금강삼매경이 어떠한 경위로 신라에 전달되기 되었으며, 그것을 원효는 무슨 동기로 어떻게 강석講釋했던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그 경위 설명은 다분히 설화적이어서 그 내용을 그대로 다 믿을 것이냐 어떻게 달리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지만 하여간 금강삼매경이 경전사상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을 암시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송 고승전에는, 왕후가 종기를 앓게 되었는데 아무리 좋은 의술을 다 해도 도무지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왕, 왕자, 신하들이 영험이 있다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다 찾아 기도를 드렸는데, 한 무당이 말하기를 ‘사람을 다른 나라로 보내 약을 구하게 하면 그 병이 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왕은 당나라에 가서 좋은 의술이 있는 자를 구하도록 사신을 해로海路로 보냈다. 그런데 출렁거리는 바닷물결 속에서 별안간 한 늙은이가 솟아나오더니 배 위로 올라와 왕의 사신을 맞아 바다 속 용궁으로 안내했다. 궁전은 장엄하고 화려했다. 용왕을 만나니 그 이름을 영해鈴海라고 한다고 했다. 용왕이 사신에게 ‘당신의 나라의 왕비는 바로 청제淸帝의 셋째 딸이다. 우리 궁중에 일찍부터 금강삼매경이란 경이 전해져오는데 시각始覺, 본각本覺, 이각二覺이 원만하게 열린 보살행菩薩行을 설명한 것이다. 이제 왕비의 병을 좋은 인연삼아, 이 경을 당신네 나라로 보내 유포流布케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약 30매 가량의 종이가 뒤섞여 겹쳐진 것을 가지고 와 사신에게 주면서 용왕은 ‘이 경을 바다를 건너서 가지고 가자면 혹시 좋지 않은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며 직접 칼을 가지고 와서 사신의 배를 가르고 장腸을 꺼내 뱃속에 경을 넣고 납지蠟紙로 감고 약을 바르니 갈라졌던 배가 전과 같이 되었다.
용왕이 말하기를 ‘대안성자大安聖者에게 부탁하여 차례로 순서를 맞춰 정리하고 책을 만들어 원효법사에게 청하여 소疎를 지어 강설講說하도록 하면 왕비의 병이 나을 것이다. 히말라야 산의 아가타란 명약의 힘도 이 보다 낫지 않다’ 하였다. 왕이 사신을 전송하니 해상으로 나와 다시 배에 타고 귀국하니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대안성자를 불러 가져온 금강삼매경의 흩어진 순서를 바로잡고 책을 만들었다. 대안은 보통사람이 아니어서 입고 다니는 옷이나 그 모양이 특이하였다. 서울의 길거리에서 구리로 만든 바라鉢鑼를 치며 ‘대안, 대안’ 하고 소리쳐 노래를 했기 때문에 대안성자라 불렀다.
왕이 대안에게 명을 하자 ‘대안은 경을 가지고 오시오. 나는 왕궁 울타리 안에 발을 들이지 않겠소’ 라고 했다. 그리하여 대안이 가지고온 경의 순서를 맞추고 8품品으로 하니, 그 문장이 모두 부처님의 뜻 그대로였다.
대안은 ‘이제는 원효에게 강설을 하게 하시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하였다. 이 경을 왕의 사신이 원효에게 가지고 갔을 때 원효는 그의 고향 상주에 있었는데, 원효가 사신을 보고 ‘이 경은 본각, 시각. 2각을 그 중심으로 하는 것이니 나에게 각승角乘 (물소가 끄는 수레) 을 준비해주시오. 그리고 책상을 그 두 각角 (뿔) 사이에 걸쳐놓고 그 위에다 필연筆硯을 마련해주시오’. 원효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경에 대한 소 5권을 그 우차牛車 위에서 지었다.
왕이 요청한 날이 임박해서 황룡사에서 강해講解를 시작하려 할 참에 박덕薄德한 무리가 이 새로 지은 소를 훔쳐갔으므로 원효가 하는 수 없이 왕에게 사뢰어 사흘을 연기하고 다시 소를 지어 3권으로 만들고 약소略疎라 했다.
왕신과 스님들, 그리고 일반 재속신도在俗信徒들이 구름같이 법당을 둘러싼 가운데서 원효는 위풍당당威風堂堂히 약소를 따라 금강삼매경의 강해를 시작하였다. 복잡하여 알기 어려운 곳을 질서정연秩序整然하게 풀이해가는 그 모습을 찬양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 듯 하였다. 원효는 또 가락 조로 ‘옛날 백 개의 석가래를 고를 때는 그 축에 낄 수가 없더니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 나 혼자 그 역할을 하는구나’ 하였다. 그 때 명성이 높았던 소위 큰 스님들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 하는 낯을 보이며 깊이 뉘우쳤다.
소에는 광廣, 약略 2본本이 있어 그것이 모두 다 본토 즉 신라에서는 유포되어왔으나 중국에는 다만 약본이 들어왔을 뿐이다. 후에 경經, 율律, 논論 삼장三藏을 번역할 때 이 약소를 논으로 개칭하였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을 논함에 있어 맨 처음에 자기 나름의 머리말 (서분序分) 을 두고, 그 안에서
1. 금강삼매경의 대의大意가 무엇이냐? (술述 대의大意)
2. 이 경의 종지宗旨의 대요大要는 어떠한가? (변辨 경종經宗)
3. 이 경의 제목의 뜻은 무엇인가? (석釋 제명題名)
4. 이 경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과문科文 해석解釋) 등에 관해 말했다.
이 서분에 의하여 먼저 금강삼매경의 구성에 관하여 보면, 이 경은 전체적으로 7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것을 2대분 할 수 있다. 즉 첫 6장 (품品) 과 마지막 1장 (품) 으로 구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 6품은 장마다 따로 관행觀行에 관한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반해서 마지막 일품은 총지품總持品이라고 하여 총괄적으로 의심나는 점을 없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6품은 1. 무상법품無相法品, 2. 무생행품無生行品, 3. 본각이품本覺利品, 4. 입실제품入實際品, 5. 진성공품眞性空品, 6. 여래장품如來藏品의 여섯인데, 이 여섯 문을 통해서 인식과 실천의 모든 기본문제가 다 다루어지고 있다.
원효는 이 논의 주제가 ‘일미一味’ ‘무소득지일미無所得之一味’ 라고 보고 있다. 그는 이 경의 종요宗要를 말하면서 ‘합이언지合而言之면 일미관一味觀으로 위요爲要요, 개이언지開而言之면 십중법문十重法門으로 위종爲宗이니라’ 하였다. 금강삼매경이 한편으로는 관행 즉 인식과 실천을,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법문 즉 이론과 강령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일미는 한낱 공허한 이론이나 행동강령이 아니라 완전한 인식이며 실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온전히 이룩된 마음의 평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일미의 뜻을 부연敷衍해준다.
자비롭기 그지없으신 님이
그 거침없으신 지혜로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는 까닭에
오직 한 가지 참뜻으로 말씀하시니
말씀마다 일미一味의 도道로써 하시고
끝내 소승小乘으로 하시지 않으셨나이다
하신 말씀의 뜻과 맛은
도무지 부실不實함이 없아오며
부처님의 지혜로우신 경지에 들어
결정된 자리이며 진실의 극치極致이오니
듣는이마다 세속의 굴레를 벗어
자유를 누리지 못 하는 이 없나이다.
한없이 많은 보살들이
중생을 모조리 제도하고자
그들을 위해 널리 물으시매
이제 법의 적멸寂滅한 모습을 알고
결정된 자리에 드나이다.
여래如來께서 슬기로운 방편方便으로
진실의 극치極致에 들게하시니
그 말씀이 모두 일승一乘 그대로이시며
하잘 것 없는 잡맛이 없아오며
마치 하루 저녁에 내린 비에 젖어
뭇 초목이 모두 생기를 더함과 같나이다.
제각기 타고난 성性이 다름에 일맞게
오직 한 맛 (일미一味) 의 진리의 비가
그 모든 것에 두루 충만히 비치니
저 봄비를 맞아
보제菩提의 싹이 솟아오름과 같나이다.
금강金剛의 맛 (금강미) 그 속에 들어
진실의 극치, 삼미三味를 증득證得하매
이제 의혹과 후회와 끊긴 결정된 곳에
오직 하나인 진리의 표시가 이룩되나이다.
그러면 관행觀行이란 무엇인가?
원효는 ‘관觀이란 횡론橫論으로써 경境 · 지智에 통함을 말하는 것이요, 행行이란 견망堅望으로써 그 인因과 과果에 걸쳐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런데 인 · 과의 과란 진여법신眞如法身과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등 4지智의 다섯가지 원만함을 말하는 것이요, 인이란 10신信, 10주住, 10행行, 10회향廻向, 10지地, 등각等覺의 여섯가지 수행이 다 갖추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경經 · 지智의 지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두 각을 말하는 것이요, 경境이란 진眞이다 속俗이다 하는 두 경계境界의 2원화가 사라진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원효는 실로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그 논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관은 횡적橫的인 것이요, 행은 종적縱的인 것이다. 횡적이라는 말을 우리는 수평적水平的이라고도 해석해볼 수가 있다. 그리고 종적이라는 말을 우리는 수직적垂直的이라고도 해석한다. 관은 논論하는 일과 관련이 있으며, 행은 망望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논하여 그것은 경 · 지를 통해야 하고, 망하여 그것은 그 인과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관이요 후자가 행이다.
이제 이것을 더 자유스럽게 우리 말로 옮겨가면, 관이란 보는 것이다. 인식하는 것이며 아는 것이다. 하는 것은 대상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 대상을 경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주체를 지라고 하는 것이다. 경이 객관이라면 지는 주관이다. 그런데 관의 극치는 그 주와 객이 유리대치流離代置된 것로써 제각기 그 자주성이 강조된 상태로 남아있는데 있지 않고, 그 이원적 독립성이 해소된 데에 있는 것이다. 통어경지通於境智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상태를 두고 한 말이다. 우리는 흔히 대상 즉 경을 진이다 속이다 하고 상대적 관념으로 지각하고, 인식하고 평가한다. 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속을 상대적으로 예견하고 있는 진이라면 참 진이 될 수 없는 것이며, 속이라고 비난하는 그 대상이라 할지라도 본각本覺의 눈으로 보면 조금도 비난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관 – 그것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다. 그렇다고 행 – 그것이 인식과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원효는 행을 6행비족行備足이라는 원인으로 말미암아 5법원만法圓滿이라는 결과를 이룩하는 희망이며 원망願望이며 노력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견망堅望인 것이다. 관이 정적인 자세를 표현한다면, 행은 동적인 생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보살菩薩이 부처의 경지로 가는 노력, 그것을 우리는 이 행이란 사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0신, 10왕, 10행 10회향, 10지, 등각의 수도修道6위位에 관해서는 이미 졸저拙著 원효사상 제 1권에서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보살수도菩薩修道의 계위階位이었으며, 하나의 과정이었고, 거기에는 엄연히 선후상하先後上下의 단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수직적이니 횡적이니 할 수 있는 것이다.
원효는 이어 십중법문十重法門으로 나뉘는 이 경의 골해骨骸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표시해주고 있다. 거기에 나오는 불교 전문술어는 상당히 독보적인 것들이어서, 다른 경전의 설명과는 다른 새로운 맛을 보이나 지금 여기에는 그 상세한 내용을 소개할 수가 없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의 선사禪史가 고려의 보조에게서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주장이 비로소 선가禪家의 어느 조사祖師에게서 비롯되기나 하는 듯이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보나, 실제로 선교일치의 관계에 대하여는 고오타마 붓다 자신이 분명히 밝힌 바이다. 흔히 원효를 선을 모르거나 그것을 경시한 불가佛家인 것처럼 말하는 소리를 듣지만 그처럼 중대한 오해는 없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확실히 교리敎理의 논리적 전개를 위주로 하고 있다기 보다는 문자와 자구를 매개로 하여 깊은 선정禪定을 요구하는 것이 그의 주안主眼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014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662년) 의상義湘
송나라 고승전에 의하면 의상의 속성俗姓은 박朴씨이며 신라 계림부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기英氣하고 자라는 과정에 구도자적 천성天性이 적연亦然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불교가 매우 융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법사와 같이 서유西遊를 하려고 당唐 주계州界까지 가서 큰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데 큰 비를 만나, 길가의 토감土龕 속에 들어가 일시 비를 피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움막이 아니라 옛 무덤이며, 해골이 뒹굴고 있었다. 하늘은 시커멓게 뒤덮이고 땅을 질퍽거려 하룻밤을 더 보냈는데, 귀신이 나타나 놀란 일이 있었다. 원효가 탄식을 하며
‘전날에는 무덤을 토굴이라고 생각하고 잤는데도 평안히 잘 수 있었고, 또 지난 밤에는 그곳을 피해 잤는데 귀신이 넘나드는 변을 당했다. 생각에 따라 갖가지 일이 생기고 생각을 없애니까 토글이니 무덤이니 하는 구별이 없어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가짐 하나 탓이다. 이 마음 외에 무슨 또 진리가 있으리요. 나는 당으로 가지 않겠다’ 한 것이 이때 일이다.
원효가 짐보따리를 메고 다시 돌아설 때 의상은 홀로 죽음을 무릅쓰고 유학의 길을 떠난다. 총장總章 2년에 상선商船을 빌어 타고 바다를 건너 등주 해안에 도달했다. 한 신도信徒 집에 머므르게 되었는데, 그 집에 아름다운 선묘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의상의 용모가 매우 뛰어남을 보고 가까이 하려고 했으나, 의상은 마음이 돌과 같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선묘는 의상의 굳은 의지를 보고 갑자기 도심을 일으켜 다음과 같이 대원大願을 발發한다.
‘생생세세生生世世에 화상和尙님께 귀명歸命하겠습니다. 대승大乘을 배워 익히고 대사大事를 성취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施主가 되어 스님께서 필요로 하는 생활자료를 바치겠나이다.’
의상은 그 후 장안 종남산에 있는 지엄삼장에게로 가 화엄경을 배웠다. 그때 그 동문에는 당나라의 유명한 법장 - 강장국사가 된 스님도 있었다. 공부를 끝내자 의상은 돌아가 전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그 신도의 집을 찾아 그 동안 제공해준 모든 편의에 사의를 표명한다. 선묘는 미리 의상을 위해 준비한 법복과 그밖의 물품을 가지고 의상이 떠나는 해안으로 간다. 그러나 의상의 배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녀는 주문을 외우며 ‘나의 본심은 법사를 공양하는 일이니 원하옵건데 이 의복함이 저 배에 닿기를’ 하고 물결 속에 의복함을 던진다. 때마침 질풍이 불더니 의복함을 새털처럼 멀리 떠나는 의상의 배에 닿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녀는 또 맹세하기를 ‘내 몸이 변해서 해룡海龍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래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그로해서 스님이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옵니다’ 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원력願力이 굽힐 수 없음을 알았는지 신이 감동하여 과연 용이 되었다. 용은 배를 부축하여 의상은 무사히 신라에 도착했다. 귀국한 후 의상은 백제의 고지故地로 혹은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대 화엄교는 복선福善한 땅을 택하여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때 선묘용은 그 뜻을 알고, 항상 의상을 따라다녔다. 용은 의상의 생각을 알고 허공虛空에 대 신변神變을 일으켜서 거석巨石이 되어 가람伽藍의 지붕 위에 떠있었다. 그 절의 스님들은 소승小乘을 신봉하는 무리였는데 이 이적異蹟을 보고 모조리 달아나버렸다. 의상은 겨울과 여름에 화엄경을 강했는데 부르지도 않아도 많은 대중이 모여들었다. 국왕이 이 소문을 듣고 전장田莊과 노복奴僕을 보내주려고 했으나 의상이 거절했다.
‘저희 법은 평둥하옵고, 고하귀천高下貴賤이 없소이다. 열반경에 팔불정재八不淨財의 이야기가 있아옵는데, 어찌 전장과 노복을 제 것으로 하겠나이까? 빈도貧道는 법계法界를 집으로 삼으며, 부지런히 갈아 열매 걷우기를 바라고 있아오며, 법신法身 혜명慧命이 이것으로 인하여 살고있나이다’ 하였다.
의상이 강講을 하면 나무마다 꽃이 피는 듯 하고, 선담禪談을 하면 결실이 맺히는 듯 하였다. 그에게는 지통, 표훈, 범체, 도신 등 제자가 있었다.
이것은 송 고승전에 기록된 의상의 전기이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해동海東 화엄華嚴 시조始祖 부석존자浮石尊者 찬讚 (원종문류圓宗文類 22), 등 다른 자료에는 사적事蹟에 관한 약간의 차이가 있어 몇 가지 확정해야 할 사실이 남아있기는 하나대체로 이 기사는 의상의 사람됨을 알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상의 출생연대는 620년 설과 625년 설이 있고, 그의 출가出家는 29세 때로 되어있으나 최근의 고증에 의하면 20세 출가가 타당하다. 그는 78세로 별세했다. 송 고승전의 입당연대총장總章 2년이라는 설은 지엄에게 사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연대가 지엄 몰歿 후 1, 2년에 해당하므로 이는 시정되어야 한다. 이 점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조명동 박사 저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 (134면)’ 을 참조하기 바란다.
. 학문 경향과 저서 – 의상이 입당하기 전에는 원효를 선배로 섬겨 존경했고, 보덕화상에게 열반경과 화엄경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의 입당기간은 전후 8년 간인데, 그 동안 화엄학을 지엄에게서 배운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의 스승 지엄에게는 ‘화엄경수현기’ ‘공목장’ ‘15요문답’ 등이 있는데, 의상이 이것을 직접 배운 것으로 추측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유명한 ‘법계도法界圖 (화엄일승법계도)’ 를 지어낸 것으로 생각한다. 또 송고승전에는 그가 당에 있을 때 남산 도선율사와 교유한 일도 있고, 의정의 세예법洗穢法이라는 것도 행했다고 하니 계율을 중심으로 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고 생각한다.
송고승전에는 그의 제자 이름이 수 명으로 국한되어 있지만 그에게는 열 명의 대 제자와 3천의 문도門徒가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의상은 십산에 머물며 전법을 했다고 전하는데, 십산은 중악 공산 미리사, 남악 지리산 화엄사, 북악 부석사, 강주 가야산 해인사, 능주 가야협 보현사, 계룡산 갑사, 삭주 화산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전주 모악산 국신사 (귀신사) 등이다.
의천이 지은 불서목록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에는 의상의 저서로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법계도法界圖’ 1권 (존存) 을 들고 있으나 현존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문제시 하는 ‘법계도’ 다. 그밖에 ‘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이라는 1편의 글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낙산사 창건시의 발원문으로 전해지는 간결한 명문名文이다.
의상대사의 법계도 (추후 삽입)
법계도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화엄일승법계도장章’ ‘화엄법계도’ ‘일승법계도’ ‘법계도장’ ‘법성도法性圖’ ‘해인도海印圖’ 라고도 불리는데, 의상이 고의로 저자명을 기입치 않아 혹은 그것을 당의 법장 찬撰이라고 하고, 현수 술述이라고 하는 등 많은 그릇된 말이 나돌았다. 이 법계도는 의상이 44세 때 당나라 지상사에 유학 중 (총장 원년 7월 15일) 에 화엄경의 종요宗要를 개시開示한 것으로 7언言 30구句 210자字의 게偈를 54각인도角印圖 모양으로 지은 것이다.
법계도를 해인도海印圖라고 하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삼매의 경지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이 해인삼매에 들면 세 가지 종류의 세간世間 (기세간器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즉 물질적 무기無機세계, 인간들의 세계, 정각正覺에 의한 지혜의 세계가 다 별안간 그 속에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것이 마치 삼라만상參羅萬像의 모든 모습이 바다 속에 들어나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의상은 그러한 해인삼매의 경지를 나타내는 뜻에서 이 해인도를 지었다.
의상은 이 법계도를 제자들 중 공부가 다 된 사람에게 그 각覺을 인정하는 뜻에서 수여했다. 그러므로 이 법계도는 그 자체로써 심오한 하나의 의미가 통하는 게 (법성계) 이지만, 직관直觀으로 밖에만 증득證得할 수가 없는 자증自證의 내용을 상징하는 표징表徵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렇다고 의상은 갑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낮은 근기根機의 사람에게 대한 배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법성계를 수문數門으로 나누어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이 문자나 개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無名의 진원眞源에도 되돌아가게끔 하기 위한 데에 있었다.
법계도法界圖를 구성하는 법성게法性偈를 도인圖印과 상관없이 문장화 하면
1.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2.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3.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록성不守自性隨綠成
4.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5.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6.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7.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8. 초발심시편정각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9.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10. 능인해인삼매중能人海印三昧中긴출여의불사의緊出如意不思議
11. 양보익생만허공兩寶益生滿虛空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12.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회식망상필부득回息妄想必不得
13.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14. 이타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15.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번호는 편의상 역자가 붙임)
법성게는 그림과 같은 모양으로 나열되어 가운데에 첫 법法 자와 끝 불佛 자가 같이 오게 배열되어 있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그 인의印意와 인상印相을 풀이한 설명이 붙은 의상의 글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제 45권 1887 – 1927페이지 상에서 16페이지까지 수록되어 있다. 의상은 첫째 인문상印文相, 둘째 자상字相, 셋째 문의文意를 밝혀간다.
첫째, 인문상은 이 인印에는 오직 하나의 길 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여래如來의 말씀이 오직 일음一音임을 표시하는 것이요, 이른바 선교방편善巧方便이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하나의 길에는 굴곡이 많은데 그것은 중생에게는 기機와 욕慾의 차差가 있어 이에 맞춰 삼승교三乘敎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 이 길 (즉 법계인法界印을 구성하는 법성게문장法性偈文章의 줄) 에는 시작과 끝이 없게 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삼세십방三世十方에 다 원융圓融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또 이 법성도가 사면사각四面四角으로 된 것은 사섭四攝 (보시布施, 이행利行, 수어受語, 동사同事) 과 사무량심四無量心 (자慈, 비悲, 희喜, 사捨) 을 나타내는 것으로 삼승三乘에 의해 일승一乘을 드러냄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
둘째, 자상字相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문장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것은 수행상에는 인因과 과果가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그 시작인 법法 자와 끝인 불佛 자를 중앙에 위치 지은 것은 이 인과因果의 양위兩位가 범부凡夫에게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여도 사실은 법성이란 집안의 진실한 덕德이며, 그것이 바로 중도中道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했다.
셋째, 문의文意를 풀이하면서 의상은 7언言 30구句의 법성게 전체를 크게 3대분하고, 18구까지는 자리행自利行을, 다음 4구는 타리행利他行, 그리고 그 다음 8구는 수행자가 어떤 방편을 쓸 것인가, 어떤 이익을 얻는가를 분별한 부분 (변辨수행자修行者방편方便급及득得이익利益) 이라고 한다. 이타행을 말하는 4구만을 음미해보라. 이 시대와의 관련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능인해인삼매중能人海印三昧中 긴출여의불사의緊出如意不思議
보익우생만허공寶益雨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해인삼매경에 들어있는 동안 여의如意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뜻이 풍성하네, 중생을 이롭게 하는 비가 하늘에 차니 저마다 그릇 나름으로 이익을 얻네.
우리는 이 210자의 짧은 법성게의 사상이 무슨 기상천외奇想天外의 것이라거나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이 안에 그 무수한 불교교리가 다 들어있다. 아니 그 사상이니 무수한 표현이 사실은 중대한 것은 아니다. 항상 돌고있는 진리의 수레바퀴, 마음의 정정情淨함이 이 글과 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게 된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015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1090년) 의천義天
북전北傳불교가 남긴 방대한 양의 전적典籍을 우리는 크게 정장正藏과 속장續藏, 두 가지로 나눈다. 정장은 인디아에서 찬술撰述된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三藏의 한역漢譯 대장경을 가리키며, 속장은 이들 정장에 대한 이쪽 학문승들의 연구를 내용으로 삼는다. 정장은 물론 불타의 설법을 그 속에 담고있기 때문에 불타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불탑이나 불상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존숭尊崇되어 마땅하겠지만, 신앙 대상으로써의 문제와는 달리,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이뤄놓은 학문상의 내용에 중점을 두고볼 때, 위에서 말한 정과 속의 관계는 완전히 그 위치를 바꿀 수밖에 없다. 속장이야말로 우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체 불교사에서 속장이 갖는 의미를 처음으로 밝혀준 이가 바로 고려 의천이다. 의천은 실로 이 속장의 수집과 편찬, 간행에 전 생애를 바쳤으며,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은 이렇게 해서 얻어진 귀중한 성과다.
신편제종고장총록 3권이 처음으로 엮어진 것은 1090년, 의천의 나이 37세 때다. 의천은 이미 그의 나이 19살 때 고금古今의 장소章疏를 수집하여 정장과 맞먹을 수 있는 속장의 완성을 기약하고 있었음을 그의 발원소發願疎 (대각국사大覺國師문집 14) 에서 발견하거니와 총록의 서문에서 그 동안 20년의 세월을 전심전력全心全力으로 이 사업에 기울여왔다는 것인 즉 실제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전기 발원소 보다 두어 해 앞선 16, 17세 소년의 나이로부터서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한 때 국금國禁을 어겨서까지 미복微服차림으로 송나라 입국을 감행했던 것도 그 저의底意가 속장 곧 ‘군전群典의 의탐擬探’ 에 있었음을 항주 처학아자리에 보낸 그의 ‘걸표乞表 (문집 5)’ 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2년에 걸친 송나라 체류에서 ‘제종교장諸宗敎藏 3천여 권’ 의 수확이 있었다는 사실도 의천은 그의 문집 (권 8) 에서 밝혔다. 귀국한 뒤로도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멀리 요遼나라와 일본으로 서신을 보내서 자료의 수집에 만전을 기했다.
이렇게 해서 엮어진 신편제종교장총람 수록의 제가諸家 장소章疏는 모두 1,085부, 4,858권의 방대한 양에 이른다. 실지로 의천이 입수한 제가의 장소는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보다 좀 더 많은 분량의 것이 되었을 것임을 상상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첫째로 이 총록에는 ‘보림전寶林傳’, ‘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 등 당연히 들어있어야 할 선가禪家의 저술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 이는 결코 의천의 수집이 이 방면에 미비한 점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송나라에 체류한 동안, 의천은 종본, 요원, 회련 등 운문종의 용상龍象들과도 왕래가 있었지만, 당시 중국의 선풍禪風을 보기를 한갓 교사지폐矯詐之弊로 개탄해 마지않던 의천의 선관禪觀이고 본즉, 소전所詮 의천의 견식見識이 이들의 책택冊擇을 거부했을 따름인 것이다. 의천은 또한 일본의 장소章疏를 일체 외면했으며 하나도 그의 총록에 올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학비정박學非精薄하고 억설臆說이 우다尤多’ 해서 고려 화엄승 균여나 담림의 장소들까지도 그 채택을 주저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던가 추측한다.
고려승僧의 저술로써는 체관諦觀의 사교의四敎儀가 올려있을 따름이다. 의천의 엄선벽嚴選癖을 가히 짐작할만 하되, 또한 여기엔 그의 종교관이 다분히 작용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천의 총록에 수록된 일천여 부 장소가 그 태반이 수당시대를 전후한 중국 학문승들의 업적으로 채워졌을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런 중에서 우리로써 기뻐해 마지않는 바는 신라 출신 학문승들의 장소가 전자에 버금해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일이다. 이들 장소자의 출신국이 총록에서는 밝혀있지 않으나 확실한 것만 골라 열기列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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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관諦觀 -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1권
오늘날 밝힐 수 있는 신라 학문승들의 저술이 위에서 보아온 바 의천의 총록에 수록된 것만으로 그 전부를 삼을 수는 물론 없다. 현장삼장玄奘三藏의 고족高足으로 알려진 신방神昉과 의영義榮, 역시 유식학을 전공한 지인, 영인, 대연 그리고 견등과 진승, 밀종사문, 불가사의 등 모두 쟁쟁한 신라 출신의 학문승들로써 그들의 학문의 내용은 물론, 장소章疏 자체가 오늘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 적지 않으나 의천의 조제調製도 궁금한 것의 하나다.
신라의 유산遺産이었으니 신라의 고토故土인 고려에서 탐색搜探되었을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도 같으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을 몇 가지 이유도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날 남아있는 신라 학문승들의 장소章疏가 대개 그들이 일본 아니면 중국에서 발견되고 신라의 고토에서 발견된 예가 오히려 적다는 사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중에 의천의 속장 간행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광전廣傳한 결과일 것임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며, 미상불 수당시대 중국의 장소나 요승遼僧들의 장소가 역수출되어 오늘날에 전해진 예를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 그 대부분이 의천의 총록이나 속장간행 이전의 고초본古鈔本에 연원淵源한 것이 많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여러 가지로 생각케하는 많은 문제들을 발견한다.
원측의 원저原著이자 서장어역西藏語譯으로된 ‘혜심밀경소’ 10권이 돈황燉煌에서 발견된 예는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내 자신 영경英京의 대영박물관에서 돈황사본을 섭렵涉獵하다가 신라 의적의 ‘보살계본소’ 3권을 펴들고 어지간히 흥분했던 경험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의천 이전의 시대에 속한 사본들이다. 체관의 천태사교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복각배인覆刻排印된 예만도 무려 80회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학술이 낳은 최고의 영예를 차지할 대 저술이라 하겠으나, 의천은 이것을 항주에서 천태산을 방문했을 때 입수했었을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1,085부 4,857권의 장소를 수집 선택해서 편찬한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은 필연적으로 속장의 간행을 약속한 것이었다. 의천 역시 그것이 궁극의 대원大願이었음을 몇 번인가 그의 문집에서 밝힌 바이지만, 총록의 편찬으로부터 그의 입적入寂에 이르기까지 불과 십 년의 세월은 이만한 대원을 성취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어주지 못 한 것 같다. 의천의 속장간행사업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보았던 것인가의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문제될 점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판開板의 증적證迹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모두 일백 부에 미치지 못 한 숫자이며, 그 중에서 오늘 현재 조선시대 세조世祖의 복간을 합쳐 실물이 전하는 예는 불과 21부 정도를 헤아릴 따름이다. 21부란 숫자는 극히 근자에 얻어진 성과를 합쳐서 얻어진 것이므로 앞으로 이 숫자는 좀 더 증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의천의 편찬사업으로써 원종문류圓宗文類 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 250권 역시 의천의 속장사업과 일환을 이룬 것이므로 마땅히 여기서 아울러 언급함이 있어야 할 것이었으나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의 초본으로써 현존한 가장 오랜 것은 일본 경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산사에 전장傳藏된 안원 2년 (1176년) 의 사본에 계系한 것이며, 역시 같은 절에 1645년의 초본이 전장되어있고, 그리고 1693년의 정판整板에 계系한 판본板本 수종數種이 일본에 전존傳存한다.
016 수심결修心訣 (1200년) 지눌知訥
신라의 불교를 이제 막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에 비유한다면 고려 불교는 활짝 만개한 꽃과 같았다. 상하上下가 불교일색인 고려 불교는 겉보기에는 분명히 황금시대를 맞이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고려의 불교는 신라시대와 같은 싱싱한 젊음이 없었으며,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박력이 없었다. 새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 보다는 이미 쌓아놓은 기반을 유지하고 행세하기에 바빴으며,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기 보다는 집권자들과 어울려 궁중宮中 출입하기에 여념이 없어보였다. 고려중엽의 큰 스님이었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은 이렇게 잘못 흘러가는 고려불교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분이다.
지눌 (1158 – 1210년) 은 당대 고승高僧이면서도 궁중 출입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머무는 것조차도 거부하였다. 지눌의 이상은 내적세계의 혁명에 있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같이 갈망하는 어떠한 호화로운 이상도 자기의 내적인 세계가 근본적인 의미에서 혁신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지눌의 신념이었다. 지눌은 이 신념을 가지고 일생을 줄기차게 노력함으로써 종교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본本’ 을 보여주었으며, 그를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지눌의 위대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높이 평가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체계적인 블교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의 이론은 한국불교 철학사상 어느 누구의 추종을 불허할이만큼 명쾌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이론은 결코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시비만을 되풀이하고 있던 시대적인 문제를 만인이 수긍할 수 있게 명쾌한 이론으로 풀이하였다.
지눌의 글은 또한 이론적으로 명쾌할 뿐만 아니라 추호의 거짓도 꾸밈도 없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자기의 체험을 통한 실질적인 사실만을 간절하게 호소하는 지눌의 정성어린 글은 언제나 독자의 마음에 큰 갈등을 불러일으켜주는 것이다. 지눌이 살았던 시대 고려불교의 문제점은 외적 타락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내적인 사상의 혼란에도 있었다.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대립이다.
원래 선종은 말 (언어) 이나 글 (문자) 을 대단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선승들은 언제나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개발하는 것만이 불제자의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말이나 글은 불성을 개발하는 참선參禪공부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롭다고 보는 것이 선종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선종의 주장은 교종의 비위脾胃를 크게 거슬렀다. 교종은 부처님의 말씀인 불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만이 가장 올바른 수도修道방법이라고 보아왔기 때문이다.
지눌은 선종의 스님으로써 평생을 참선에 몰두한 분이었지만 틈 있을 때마다 불경 읽는 것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선종의 주장과 교종의 주장이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지눌에 의하면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선이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이기 때문에 선과 교는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한다. 세상사람들이 선종이니 교종이니 하고 싸우는 것은 부처님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눌의 일생은 이 무의미한 싸움을 매듭짓는 노력의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눌을 가리켜 선교합일禪敎合一의 주창자主唱者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구현자具現者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눌의 십 여 권이 넘는 저술은 모두 이러한 자기의 근본적인 입장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수심결은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매우 평이平易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대표적인 명문으로 손꼽힌다.
수심결의 요점은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밝힘으로써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자는 데 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인간은 너나없이 모두 괴로워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반드시 한 번은 죽지 아니할 수 없는 부자유不自由하고 유한有限한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자유를 얻기 위해서 영원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고싶어 한다. 그러나 그 영원한 진리가 무엇인지 아무리 애를 써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이것이 중생들의 답답한 생태다.
지눌에 의하면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는 것이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한다면 물고기가 잡혀질 리 없다. 솥에 모래를 넣고 불을 때면 천만 년이 지나도 밥은 되지 않는다. 세상사람들의 진리를 찾는 투가 모두 이렇다는 것이다. 진리를 찾을 데 가서 찾아야지 없는 곳에 가서 찾으니 찾아질 리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인간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으며 회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인간 밖에서 찾아야 되는줄 안다. 그러나 잘못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눌은 이 점을 여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지눌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밖에 따로 부처 (불佛) 가 있고, 인간의 본성을 떠나서 따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도를 닦고 아무리 오래토록 애를 써도 절대로 진리를 깨달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 마음 (자심自心) 이 참 부처 (진불眞佛) 이며, 나의 본성 (자성自性) 이 참 진리 (진법眞法) 이라는 사상은 수심결을 일관한 지눌의 신념이다.
땅에 너머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듯이, 마음이 어두워서 어찌할줄 모르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깨쳐야 한다. 마음을 깨친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밖으로 해매는 눈길을 안으로 돌려 자기의 마음을 밝혀야 한다. 역사상에 재존在存했던 모든 성자聖者들은 누구나 마음이 밝아진 분들임을 알아야 한다고 지눌은 말하고 있다. 지눌은 이와같은 자기의 신념을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 스스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해답을 시도하고 있다.
첫째, 내 마음이 참부처 (자기진불自己眞佛) 이며, 내 본성이 참진리 (자성진법自性眞法) 라면 어찌하여 지금의 나는 이와같이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하여 지눌은 여러 가지 비유比喩와 고사故事를 인용하면서 풀이하고 있지만 그 요지要旨는 간단하다. ‘나는 어리석다’ 고 보는 그 생각에 억눌려 자기의 불성佛性을 확인하지 못할 뿐이므로 먼저 그 생각만 쉬면 된다고 한다. 밤낮 스스로 부처노릇을 하면서도 부처인줄 모르고 부처를 따로 찾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미迷’ 했다고 하고, 이런 사람들을 중생衆生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중생이 바로 부처이지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는 없는 것이다.
둘째, 자기가 바로 ‘부처’ 임을 깨달으면 부처로써의 영원한 면과 무한한 능력이 나타나야 할텐데 왜 오늘날 깨달았다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나타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지눌의 답변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우매한 중생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부처로써의 영원하고 무한한 면을 나타내려면 그것은 신통神通을 부리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부처의 세계에서는 신통을 부린다는 것이 지극히 지말적枝末的인 일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요망妖妄스럽고 괴상한 일에 속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에 가서 나무하고 우물에서 물 긷는 것이 모두 신통 아님이 없는데 이것 밖에서 따로 신통을 찾으니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를 찾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이 물음에 대한 또 하나의 답변은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 과 ‘실지로 그렇게 된다’ 는 것과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지눌의 사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면서 동시에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부처는 붕명히 모든 관념적인 제약을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 동안 너무나 오래토록 나쁜 습관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그 습관이 몸에 배어 일시에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익혀온 모든 습기習氣마저 완전히 녹이려면 깨달은 다음에도 꾸준히 닦아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체계를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 이라 한다.
셋째, 우리는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여기에는 딴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자기자신이 원래 ‘진리 덩어리’ 임을 확신하고 나 밖에서 ‘진리’ 를 구하는 마음만 쉬면 된다. 자기가 자기의 눈을 볼 수 없다하여 내 눈을 찾아 해맨다면 이는 분명히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 찾아 해매고있는 이 눈이 바로 자기의 눈인줄만 알면 찾을 생각은 없어진다. 이와같이 사람의 마음도 이를 찾으려 하고 깨달으려 하면 천만 년을 가도 찾아지지 않고 깨달아질 수 없는 것이다. 진리를 따로 찾으려 말고, 찾으려는 마음만 쉬어라. 그러면 진리는 제대로 들어난다. 불교공부란 다름 아닌 망령된 생각을 쉬는 공부에 불과하다. 구름만 걷히면 태양은 원래 있던 태양이니 있는 그대로 천지를 두루 비추는 법이다. 세상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구름을 걷을 생각은 아니하고 태양 생긴 모양만을 짐작하려고 애쓰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심결의 후반부에서 지눌은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짐작이 아니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말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전개하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사람의 마음이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이렇다할 고유한 본질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 그러니 일체를 다 알아보는 능력이 있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심결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를 밝힌 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정체가 밝혀져야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진다. 마음을 닦는 비결이라는 뜻을 가진 수심결은 분명히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보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 읽어보아야 할 명저다.
수심결을 비롯한 지눌의 저술들이 후세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무엇보다도 선종과 교종의 불붙는 싸움에 물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 종래엔 선종은 돈오頓悟를 주장하고, 교종은 점수漸修를 주장하여 심각하게 대립했다. ‘깨달았다’ 하면 닦을 필요가 없고, ‘닦는다’ 하면 아직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두 생각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지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 불제자로써는 돈오와 점수의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다고 하여, 그 싸움을 지양止揚해버렸다. 이리하여 종래에 언어와 문자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교종의 강사講師들로 하여금 마음을 밝히는 참선參禪공부를 하게 하였고, 마음만 밝히면 만사가 다 된다는 선사禪師들로 하여금 독단獨斷을 삼가고 바른 길을 걷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눌은 만년에 이를수록 화두선話頭禪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화두선은 돈오사상의 극치로써 불제자를 바로 삼매三昧로 이끌어 일시에 부처님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눌사상의 역사적 의의는 침체했던 선을 부흥시키는 데 있다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지눌의 선은 교종과 맞서는 선이 아니고, 교를 포괄하고 양자의 대립을 넘어선 것이라는 점이다.
지눌이 만년을 보낸 전남 순천의 송광사에는 지금도 지눌을 계승한 제자들의 찬란한 업적들이 문헌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나라의 스승 (국사)’ 으로 존경받는 고승들이 16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지눌의 사상은 그대로 이 나라의 정신적인 기둥 노릇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나라의 배불排佛정책으로 말미암아 선종의 법맥이 한 때 끊어졌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엽에 경허스님이 홀로 참선을 하다가 크게 깨쳐 그 밑에서 만공, 혜월, 한암 등의 쟁쟁한 신사神師들이 쏟아져나옴으로써 한국의 선종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의 선종 중흥조中興祖는 경허스님이라 말할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경허스님은 지눌의 수심결을 부처님 모시듯 했으며, 불상에 ‘마지 (불공佛供의 일종)’ 를 올리기보다는 수심결에 마지를 올렸다고 한다. 이로써 우리는 지눌의 사상이 오늘날까지 맥맥히 흘러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017 선문념송禪門拈頌 (1226년) 혜심慧諶
선문념송은 1226년 (고려 고종 13년) 혜심에 의해 집편集編된 불경이다. 혜심이 그의 제자 진훈 등과 함께 제가어록諸家語錄과 전등傳燈 (교법敎法의 스승이 제자에게 전한 내용) 을 체계, 정리하여 선가禪家의 오종론도悟宗論道를 위한 자료로 삼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의 화보 1125칙則을 모으고 년대별로 분류하여 놓은 방대한 책이다. 선문념송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선에 대한 설명이 앞서야 할 것 같다.
진정한 불타佛陀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 심역본무심心亦本無心’ 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말이나 글자나 분별심分別心 (생각) 을 일으켜서는 아니 되겠으므로 문자를 쓰지 않고 바로 그 마음을 가리켜나간다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문외문文外文’ ‘어외어語外語’ 로써 자타自他 구제救濟의 수단을 삼고 있다. 선禪이란 이 수단을 이루는 한 방법이다. 선은 정定, 정려靜慮, 기악棄惡, 사유수思惟修라고 번역한다.
첫째,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망상妄想을 일단 정지시킨다. 그리고나면 마음자리는 마치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아서 그 마음바닥이 들어난다. 이것을 샤마타奢摩陀라고 부른다.
둘째, 그 마음이 일단 이런 경지에 이르면 마음 안팍으로 받아들여졌던 사물事物과 상념想念이 무상無常을 깨닫게 되고, 또한 가치상실價値喪失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티끌 하나 없는 투명한 체성體性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삼마발제三摩拔提, 즉 대명경지大明鏡智라 한다.
셋째, 모든 잡념 망상이 정식停息되면 맑고 맑은 심체心體가 들어나서 변동이 없는 일정한 심태心態로 형型이 짜여지게 된다. 이와같이 형이 짜여진 심적상태가 계속 유지되면서 마음의 무게있는 안정이 이루어진다. 이 경우 외부 몸 자세도 안 마음 자세와 일치된 자세로 화하게 된다. 이런 외관적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참선參禪 · 좌선坐禪이라 일컫는다.
그래서 수선자修禪者를 위하여 일단 그 마음이 ‘선禪’ 경지에 이르렀을 때, 마음의 작용 (동요動搖 · 욕망) 을 쉬게 하고 따라서 선의 경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안公案 (활구, 화두話頭) 을 지팡이로 쓰게 하는 것이다.
이 지팡이란 이 법을 발견한 석가모니로부터 역대조사祖師들의 깨우친 경위나, 깨우친 후에 자기가 체험한 일들을 게偈로나 또는 장문長文으로 남겨둔 것을 가지고 후세에 전하였으며 그 역대조사와 존숙尊宿들도 선각자先覺者의 체험담과 가어家語에 의해서 많은 도움의 길잡이로 썼었다. 이러한 것을 모아 편찬한 것이 ‘종용록從容錄’ ‘벽암록碧巖錄’ ‘선문념송’ 이다.
위의 두 책은 송조宋朝의 것이나 선문념송은 고려조의 것으로 해동海東불교에 있어서는 선종에서 뿐만 아니라 불가에서는 필수도서로 그 지침을 삼았던 것이다.
혜심은 고려 명종 8년 (1178년) 에 태어났다. 처음 (신종 4년)에는 과거에 뜻을 두어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에 조계曹溪의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스승으로 스님이 되었다. 1208년 해동 조계종의 개조開祖인 보조普照가 법석法席을 주려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수년 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거듭하였다. 1210년 (신종 13년) 보조가 입적入寂하매 칙령勅令을 받고 법석을 이어받아 수선사修禪社에서 개당開堂하였다. 이후 대 선사가 되었고, ‘선문강요禪門綱要’ 와 ‘선문념송’ 의 편저를 남긴 체 1234년 (고종 31년) 에 입적入寂하였다.
혜심이 태어나기 전후해서 불교는 고려에서 그 융성이 가장 꽃을 피웠을 때다. 문종文宗의 아들 대각大覺 의천義天을 비롯하여 도생승통道生僧統, 총혜수좌聰惠首座, 원명국사圓明國師 등 왕자들이 속속 입산수도하여 귀족불교의 에포크를 그었고, 그로 하여 정치적 비호庇護 아래 호국의 지도이념으로까지 불교가 등장케 되었다.
대각이 왕실에 힘입어 천태종天台宗을 개조開祖했을 때 많은 문도門徒가 천태종으로 돌아갔음으로 해서 조계9산曹溪九山은 종세宗勢를 겨우 유지할 수밖에 없다가 보조국사 지눌 (1157 – 1210년) 이 대각의 교관겸수敎觀兼修에 대하여 정혜병수定慧倂修를 내걸고 조계종으로써 화엄교리를 융섭融攝하려 함에 있어서 조계구산을 갱신하는 느낌이었다.
이 종지宗旨의 대의大意는 즉 고래古來의 선 · 교 양종에 있어서 교종에서는 문자에만 오로지 집착하여 견성오도見性吾道를 소홀히 하는 데가 있고, 선가禪家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돈오자성頓悟自性’ 이란 것만 내세우고 수행에 힘쓰지 않음으로 이를 광명匡明함에는 교 · 선을 겸병兼倂하여 즉 자성을 돈오하는 한편, 화엄교리의 공부차제次第를 점수漸修하여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쌓인 무명無明을 씻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데에 있다.
이런 보조의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분이 혜심이다. 또한 당시는 특권계급의 비호로 말미암아 묘청妙淸 같은 승려는 정치에 깊숙이 간여 불교의 타락에 채찍질하였고, 무단정치武斷政治의 횡행은 불교가 소외되어가는 한 전조前兆였었다. 더욱이 근본불교에서 토속土俗의 미신迷信과 잘못 결합되어, 무격巫覡 · 음양陰陽 · 도참圖讖 · 잡술雜術로까지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보조의 정혜병수定慧倂修의 법통法統을 이어받는 혜심으로써 선림禪林을 세우고 승풍僧風을 확립함에 의롭고 벅찬 일이었음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래서 선사先師의 수심결修心訣, 진심직설眞心直說,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등을 문도門徒들에게 익히게 함과 아울러 선문염송을 펴냄으로써 해이解弛된 선풍禪風에 쐐기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말하기에는 한 마디로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선에 설명을 붙여보았지만 그것은 해제解題를 위한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비 전문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열거에 벗어날 수가 없다. 편자編者가 그 서문에서 ‘채집고화범採集古話凡 1125칙則과 병제사념송등어요록倂諸師拈頌等語要錄하여 성成30권이라고 밝히고 있고, 또한 제한제가어록第恨諸家語錄을 미득진람未得盡覽하여 공유유탈恐有遺脫이나 소미진자所未盡者는 갱대후현更待後賢하노라’ 라고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도, 선가에서 전해오던 제사諸師의 요체要諦가 만족할만큼 수록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선문념송과 성질을 같이하는 종용록과 벽암록을 살펴봄으로 이 책의 가치를 알게된다.
‘후용록後容錄’ 은 1223년 (송宋 가정嘉定 16년) 에 만송행수萬松行秀에 의해 엮어진 것으로 천동정각天童正覺의 송고백칙頌古百則에 시중示衆 · 착어着語 · 평창評唱을 더 한 통권 6권. ‘벽암록’ 은 1117년 (송 정화政和 7년) 원오극권圓悟克勤이 엮은 것으로 ‘경덕전승록景德傳燈錄’ 중 송고백칙과 송고에 수시 · 착어 · 평창을 덧붙인 통권 100권.
이 두 책은 모두 각각 백칙百則에 지나지 않고 그 방대함에 있어서도 30권에 훨씬 못 미치는 6권, 10권이다.
또 하나는 이 선문념송과 비견되는 중국의 경덕전등록이 있다. 이 책은 1006년 (송 함평 9년) 도원道源에 의해 엮어졌다. 통권 30권 954인의 어록語錄이 실려있고, 마지막 29권에는 찬讚 · 송頌 · 게偈 · 시詩, 30권에는 명銘 · 기記 · 잠가箴歌까지도 실려있다.
이 책은 선문념송과 그 분량은 비슷하나 20권, 30권이 그 내용상의 이질異質로 말미암아 선문념송에 미치지 못 한다. 이 중국의 세 저서가 연대로 보아서 모두 혜심 이전에 속한다. 그로해서 뚜렷한 고증考證을 댈 수는 없으나 경덕전등록과 벽암록을 참고한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경덕전등록과 벽암록의 것이 종용록從容錄의 것보다 훨씬 많이 선문념송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과 선문념송 제 30권에 벽암록의 편자인 원오극권의 어록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종용록은 편년대로 보아 선문념송 보다 불과 3년 앞 선 것으로 지금처럼 인쇄술과 교통이 발달되지 못 했던 당시로써는 혜심이 미쳐 종용록을 구해보지 못 했으리라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책의 내용상 순서는
제 1권, 2권 대각세존석가문불/ 3, 달마로부터 도신까지/ 4, 달마 5세 홍인으로부터 혜충국사까지/ 5, 길주 청원산 행사선사로부터 백장회해선사까지/ 6, 백장회해선사로부터 남천 보원선사까지/ 7, 남천 보원선사와 유쥬 반산 보적선사/ 8, 귀종사 지상선사로부터 농온거사까지/ 9, 단아산 천조선사로부터 대위산 영우선사까지/ 10, 대위산 영우선사로부터 조주 종심從諗선사까지/ 11, 조주 종심선사/ 12, 조주 종심선사/ 13, 장사 경련선사로부터 화정선저덕실사까지/ 14, 혜성선사로부터 앙산 통지선사/ 15, 앙산 통지선사로부터 임제 의현선사까지/ 16, 임제 의현산사러부터 경산 도흠선사까지/ 17, 덕산 선감宣鑒선사로부터 박산 양개선사까지/ 18. 유곡화상으로부터 위부 대각선사까지/ 19, 위부 흥화존장선사로부터 복주 설봉산 의존선사까지/ 20, 악주鄂州 엄두 금활金豁선사로부터 소주 영수 여민선사까지/ 21, 홍주 운거 도응선사로부터 명주 천산산 함계선사까지/ 22, 월주 건봉화상으로부터 월주 제기諸曁월산 사정 감진선사까지/ 23, 복주 현묘사비 종일선서로부터 소주 운문산 문언文偃선사까지/ 24, 운문雲門이 문승問僧/ 25, 복주 장도 혜능선사로부터 대원부상좌大原孚上座까지/ 26, 복주 고산신 안국晏國선사로부터 복주 와룡산 안국원 혜구선사까지/ 27, 익주 정중사 귀신歸信선사로부터 파초 계철선사까지/ 28, 정주 양산 록관선사로부터 여주 보응 성염선사까지/ 29, 정주 문수 응진화상으로부터 영주郢州 대양 산계선사까지/ 30, 홍주 황룡 혜남선사로부터 석유파자昔有婆子를 끝으로 한다.
이것을 총람總覽하면 불조佛祖 이래로 달마達摩와 그 법손法孫까지 북방北方불교의 정통대로 엮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고화古話 1,125칙則에서 329가지 선사의 어록을 더해 총 1,454가지로 되어있다. 그 중에서 26권째에 신라의 고승 박암화상, 대령선사, 운재선사 등 세 분의 어록을 수록하고 있다.
문장상의 형식은 줄기가 되는 본문이 있으면 그에 대한 후세의 조사祖師들의 염拈과 송頌이 붙여져있다.
가섭迦葉이 하루는 진흙을 밟으러 갈 적에 한 사미승沙彌僧이 묻기를
‘존자尊者는 어찌하여 스스로 그 일을 하십니까?’
가섭이 대답하되
‘내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서 이 일을 해줄 건고’
법안法眼은
‘내가 그 때를 보았더라면 <진흙 밟는 일> 그것을 끌고왔을텐데’ - 염拈
오조계五祖戒에는
‘가섭이 사미와 같이 도리道理를 주고받으니 좋을 뿐’ - 송頌
동산洞山 개价는
‘차를 마시지 않음이 어떨까? ’ - 송頌
이 책이 나온 뒤로 선문에서 뿐만 아니라 재가불도在家佛徒에까지 지침서가 되었고,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 의 교법敎法으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중요한 가치를 오늘날까지 남기고 있다. 또한 당시 문자를 사용한 인쇄술의 발달로 서적의 간행 보급이 활발함에 힘입어 이 선문념송은 멀리 송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또 몽고병의 잦은 입구入寇로 호국護國의 한 수단으로써의 고종 23년 (1236년) 에 대장경판의 재조再造에 착수할 때에 이 책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함호函號 일逸 암巖로 30권 전부가 판각板刻 수록되어 팔만대장경 중의 일부로 오늘까지 전해온 바 되었다. 이 책을 엮을 때와 대장경을 판각할 때는 불과 10년의 차이로써, 당대에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또 이 책의 해설로써는 ‘선문념송설화說話’ 와 ‘염송착병着柄’ 등이 있다. 앞의 책은 혜심의 제자 각운이 선문념송에서 절중折中한 말을 뽑아 줄이고, 자세히 설명을 붙여 주해한 30권의 책이요, 뒤의 것은 조선조 중 연담이 선문념송과 설화의 이해하기 어려운 곳을 주석하여놓은 3권의 책이다. 이후 1635년 (조선조 인조 14년) 전남 보성 대원사에서 개간開刊을 보았다.
아무튼 이 책은 고려 중, 후기의 사상체계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편자 자신이 밝힌대로 종문宗門학자가 ‘목마름에 마시고싶은 소망, 배 고플 때의 밥 생각’ 처럼 간절하였던 당시의 요청을 저버리지 않았던 공로는 오늘까지도 변함이 없다. 이것은 선문의 빈틈없는 요령과 정리 그 법맥을 찾아 체계를 세운 탓이며 또한 조계종의 개조開祖 지눌과 그 법석法席을 이어받은 혜심 두 조사의 오지奧旨와 역량으로 오늘날까지도 한국불교는 조계종이 그 정통을 지니고 있다.
018 선가귀감禪家龜鑑 (1595년) 휴정休靜
이 책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저술이다. 대사의 법휘法諱는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며, 호號는 청허淸虛인데, 묘향산에 오래 기거했으므로, 묘향산의 별명이 서산西山인 까닭으로 세간에서 흔히 서산대사로 일컫는다. 대사 스스로는 조계퇴은曹溪退隱, 조계노납曹溪老衲, 백화도인白華道人, 풍악산인楓岳山人, 두류산인頭流山人, 묘향산인妙香山人으로 자칭하였다. 그의 부친은 완산 최씨 세창이다. 1520년 3월 평안도 안주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 돌을 모아 절을 지었고,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기를 즐겼다고 한다. 자라매 기골氣骨이 빼어나고 공부하기를 즐기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심이 지극하여 향리鄕里에서 칭찬하였다. 불행히 9세에 모친을, 10세에 부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그 고을 원님이었던 이사증李思曾이 대사를 지극히 생각하였는데, 대사가 12세 때 성균관에 입학시켜 공부를 하도록 하였다. 대사는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공부하고 15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응하였으나 실패했다. 대사는 분발하여 친구들과 수업사受業師 박상 (눌재訥齋) 를 찾아 남유南遊를 떠났는데, 눌재가 친상親喪으로 말미암아 서울로 돌아간 뒤라 부득히 친구들과 남방의 산수를 탐방하기로 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여러 사암寺庵을 두루 찾았다. 그러던 중 쌍계사에서 경학經學의 대가大家 숭인장로崇仁長老를 만나 경륜經綸을 배우고, 그 뒤 18세 때 숭인장로의 추천으로 선백禪伯 부용芙蓉 영관선사靈觀禪師의 문하門下에 들어 참선參禪공부를 시작하여 정진精進을 계속하였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홀연히 느낀 바 있어 ‘홀문두우제창외忽聞杜宇啼窓外 만안춘산진고향萬眼春山盡故鄕’ 이라는 시를 짓고, 다음 날 숭인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영관선사를 법사法師로 하여 출가위승出家爲僧하니 그 때 나이 21세다. 그 뒤 대사는 여러 해 동안 명산대찰名山大刹을 편력遍歷하면서 도를 닦다가 어느 날 낮에 우는 닭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을 읊고 가랑잎에 써서 날렸다고 한다.
백발비심백 髮白非心白
고인증루설 古人曾漏洩
금청일성계 今聽一聲雞
장부능사필 丈夫能事畢
이것을 후세에 대사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한다.
대사는 33세 때 승과僧科에 급제及第하여 대선법계大選法階를 받고, 중덕中德, 대덕大德에 누진累進하여 36세 때에는 교종판사敎宗判事가 되고, 3개월 후에 선종禪宗판사가 되어 승직僧職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것은 출가의 본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1년 후 37세 때 판사의 자리를 사임하고, 표연飄然히 운수雲水의 석장錫杖을 짚으니 세속적인 명리승名利僧과 달리 그 지취志趣의 높음은 가히 짐작할만 하다. 그 뒤 풍악 지리 등 제산諸山을 출입하여 산수를 즐기고 선객禪客을 제접提接하였다.
대사가 어느 때 향로봉香爐峯에 올라 스스로 깨친 바 경계境界를 농현弄現한 바
만국도성여의질 萬國都城如蟻垤
천가호걸약해계 千家豪傑若酼雞
일창명월청허침 一窓明月淸虛枕
무한송풍운불제 無限松風韻不齊
선조 22년 (1589년) 에 정여립의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요승妖僧 무업이 위의 시는 불궤不軌의 뜻을 내포한 것이며 대사는 정여립과 관련이 있다고 무고誣告하여 한 때 투옥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대사의 시명詩名과 도예道藝로 말미암아 선조는 도리어 융숭한 대우를 하여 곧 풀어주었다.
1592년 임진壬辰의 난亂이 일어나 전세 불리하여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자, 대사는 향산香山으로부터 칼을 짚고 나아가 임금 앞에서, 전국 승려들 가운데 늙고 병든 사람은 지성으로 불전佛殿에 기도하고, 그 나머지는 죽기를 맹세하고 싸우겠다고 하였더니, 선조는 크게 기뻐하고 대사를 당산격堂山格인 팔도八道 십육종十六宗 도총섭都摠攝에 임명하였다. 대사는 팔도에 승병을 모집하니 그 수 5천 여에 이르렀다. 승군僧軍은 이르는 곳마다 크게 공을 세웠는데, 서울을 회복하고 임금이 환궁한 뒤에 대사는 늙은 몸으로 군사를 맡을 수 없으므로 뒷일을 사명四溟과 처영處英 두 제자에 맡기고 향산으로 돌아가기를 상계上啓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允許하고 대사에게 ‘국일도國一都 대선사大禪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부종수교扶宗樹敎 보제普濟 등계존자登階尊者’ 의 호號를 하사下賜하였다. 그 뒤로는 풍악, 두류, 묘향 등의 제산諸山을 왕래하며 소요자적逍遙自適 선객禪客을 제접提接하였는데, 따르는 제자가 언제나 천여 명이었다고 하니 그의 높은 도력道力으로 그 이름이 팔도八道에 풍미風靡하였음을 알겠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제자를 모아놓고 향香을 피우고 법法을 설說한 다음 자기의 진영眞影을 가져다 그 뒷등에
80년전거시아 八十年前渠是我
80년후아시거 八十年後我是渠
라는 자찬自贊을 쓰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천계만사량 千計萬思量
홍로일점설 紅爐一點雪
이우수상행 泥牛水上行
대지허공열 大地虛空裂
을 읊고 조용히 가부좌跏趺坐를 한 체 열반涅槃에 드니 나이 85요, 법랍法臘이 64夏하이었다. 화장火葬한 뒤에 영골靈骨과 사리舍利는 향산 안심사와 금강산 유점사에 모셨으며, 의발衣鉢 등 유물은 해남 대흥사에 모셨다.
그의 저술로는 ‘션교결禪敎訣’ ‘선교석禪敎釋’ ‘심법요초心法要抄’ ‘선가禪家귀감’ ‘도가귀감道家龜鑑’ ‘유가儒家귀감’ ‘운수단雲水壇’ 등이 있다.
<한 200년 동안 불법이 쇠잔衰殘하여 선교의 무리들이 각기 이견을 가지고 있다. 교를 주장하는 사람은 오직 찌꺼기에만 맛을 붙여 모래알만 셀 뿐 오교五敎의 위에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스스로 깨쳐들어가는 문이 있음을 알지 못 하고, 선만 주장하는 사람은 스스로 천진天眞된 것만 믿어서 닦고 깨치는 일에 힘쓰지 않고, 돈오頓悟한 뒤에 비로소 발심發心하여 만행萬行을 수습하는 뜻을 아지 못 하여 선과 교가 뒤섞여 모래와 금金을 구분하지 못 하게 되었다 …….
아! 위태롭구나, 도가 전하여지지 못 함이 어찌 이다지 심할까, 겨우 이을락 말락하여 마치 한 오리 머리카락으로 천 근 무게를 달아올리 듯 거의 땅에 떨어진 듯 하더니, 우리 스님께서 10년 동안 서산에 계시면서 소를 먹이는 틈틈에 50여의 경론과 어록을 보시다가 공부하는데 요긴하고 간절한 것이 있으면 기록하여놓으셨다 …….
그러나 모두 너무 미욱하여 법문이 높고 어려운 것을 탈을 잡으므로 이를 불쌍히여겨 구절마다 주해를 붙여서 해석하고 차례로 엮어놓았다 …….>
이 글은 대사의 사법제자嗣法제자 사명대사가 쓴 발문跋文의 한 부분인데 이 책 저술의 동기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당시의 불교계를 살펴보면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친 시대라고 할 수 있으니, 정령政令으로써 종파宗派는 폐합廢合되고, 사찰寺刹이 축소縮小되었으며, 승수僧數가 제한 되는 등 밖으로부터의 배척과 압박이 격심하였고, 안으로는 승려들이 스스로의 본분을 부각하고 수도를 등한히 함으로써 혜명慧命의 존속存續이 풍전등화격風前燈火格인 형편이었다. 대사는 이에 크게 느낀 바 있어 후학들의 교육이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라 단정하고 그들의 지침서로써 이를 저술한 것이다.
이 책은 그 내용을 대략 세 가지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으니, 첫째는 선과 교의 정의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학불자들이 모름지기 알고 지켜야 할 것에 관한 것이고, 셋째는 선종과 오가五家에 관한 설명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선과 교의 정의에 관한 구절을 간추려보면
‘삼처전심자三處傳心者 위선지爲禪旨 일대소설자一代所說者 위교문爲敎門’
‘선시불심禪是佛心 교시불어敎是佛語’
‘이무언以無言 지어무언자선야至於無言者禪也 이유언지以有言至 유언자교야有言者敎也’
‘심시선법心是禪法 어시교법語是敎法’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정의를 대단히 간명하게 내리고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기는 하나 직재건명直戴簡明하고 일도일법一道一法인 선과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고, 다도다법多道多法인 교의 구분을 명확하게 내린 어구들이다. 또한 대사는
‘실지어구칙失之於口則 념화미소拈花微笑 개시교적皆是敎迹 득지어심칙得之於心則 세간추언세어世間麁言細語 개시교외별전선지皆是敎外別傳禪旨’
라고 하고, 실지어구자와 득지어구자를 주해註解에서, 법은 이름도 없고 형상마져도 없는 것이므로, 말이나 마음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를 말로 표현한다면 벌써 마음의 자체인 심왕心王을 잃게 되어, 염화미소拈花微笑도 썩어버린 이야기가 될 것이며, 마침내는 사물死物에 불과할 것이며, 마음에서 얻은 이는 시중市中에 잡담이라도 훌륭한 설법이 될 뿐 아니라 여어鸒語마져도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깊은 뜻을 가리키는 법문法門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선을 우위優位에, 교를 열위劣位에 두는 대사의 선교관을 알 수 있으며,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의 화두話頭는 용궁龍宮의 장경藏經에도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모름지기 알고 지켜야 할 것에 실로 광범하고 자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 몇 가지만 간추려보기로 한다.
‘대저학자大抵學者 수참활구須參活句 막여사구莫參死句’
‘범번참공안상凡本參公案上 륵심주공부扐心做工夫 여계포란如雞抱卵 여묘포서如猫捕鼠 여기사식如飢思食 여갈사수如渴思水 여아억모如兒憶母 필유투철지기必有透徹之期’
‘원제도자願諸道者 심신자심深信自心 불자굴不自屈 불자고不自高’
‘대음수선帶淫修禪 여증사작반如蒸沙作飯 대살수선帶殺修禪 여색이규성如塞耳叫聲 대투수선帶偸修禪 여루치구만如漏巵求滿 대망수선帶妄修禪 여각분위향如刻糞爲香 종존다지縱存多智 개성마도皆成魔道’
대사는 선을 닦는 경우 그 방법으로써 간화실수看話實修를 권장하였으나 이로理路에 얽매어 지해知解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환기하면서 마음가짐에 털끝만큼의 간단間斷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백척간두수진보百尺竿頭須進步의 각오와 스스로의 마음을 믿고 불자굴 불자고의 정신적 자세를 견지堅持할 것을 역설力說하였으니 자심自心은 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인 것이므로 서이다. 자심불성自心是佛이니 스스로 굴屈할 수 없는 것이며, 자심시불은 일체중생一切衆生에 공통되는 일이므로 일체의 중생을 존중하기를 자기의 안정眼睛과 같이 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스스로가 교만驕慢을 부릴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선문禪門에서는 무애無碍의 도리를 소중히 다루는 나머지 자칫하면 방일放逸에 떨어지기 쉬움이 그 흠인데 대사는 이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계율戒律을 엄히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끝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먼저 종파宗派의 갈래부터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하고,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 등 5개종파의 전등과 종풍宗風을 약술하고 특히 임제종지臨濟宗旨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서산대사는 우리나라 불교사상 유래가 드문 위승偉僧이다. 명리名利와 안일安逸을 희구하지 않았으니 선종판사, 교종판사 등 세간적世間的인 영화를 헌 신짝처럼 버리고, 국가의 위급존망危急存亡의 때에 다다라서는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구국救國 근왕勤王에 앞장섰으며, 난亂의 평정平定에 큰 공을 세운 다음에도 다시 일의일발一衣一鉢 운수납자雲水衲子의 생활을 하였으니 가위可謂 출세간出世間의 진승眞僧이라 하겠다.
조선조시대에는 신라, 고려의 대代와는 달리 불교는 조정朝庭의 척불斥佛정책으로 말미암아 교세敎勢가 크게 위축萎縮되어 있었음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태종의 척불에 이어 세종은 7종을 선교禪敎 양종兩宗으로 강제 폐합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선조 초기까지는 네 가지 교파가 그대로 파포派布되고 있었으니, 선종파禪宗派를 비롯하여 밀교파密敎派, 정토파淨土派, 화엄華嚴, 법화法華 등 간경파看經派가 그것인데 그들은 서로 자파의 우위를 주장하고, 타파를 폄시貶視 상쟁相爭하였으니 그 중에도 교敎와 선禪 사이의 반목이 가장 심하였다.
이 때를 당하여 대사는 ‘선禪은 불심佛心이요 교敎는 불어佛語’ 라고 정의하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선을 주로 하여 교를 융섭融攝하려는 불교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사의 이 운동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사상이 그의 독창적인 것은 물론 아니고 원효대사의 통通불교사상과 보조선사의 선교겸수禪敎兼修,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원리를 계승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찍이 그 누구도 성취하지 못 한 불교통일의 위업偉業을 실질적으로 대성大成한 것은 대사이다.
그리하여 대사 이후의 우리나라 불교는 가위 ‘서산종西山宗’ 이라 일컬어 무방할 정도로 전국 승려의 거의 전부가 그의 법류法流에 속하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현실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대사가 주장한 종지宗旨와 종풍宗風은 그대로 한국불교의 종지요 종풍이라고 하여 무방하다. 이러한 점에서 대사의 저술 중 백미白眉인 ‘선가귀감’ 이 지니는 의미는 참으로 심중心中하다 하겠다. 이 책은 우리나라 불교도와 누구나가 배워야할 보전寶典이며, 교과서임은 물론이거니와 그 내용이 정밀靜謐하고 충실하여 일본, 중국 등 국외에까지도 널리 유포된 불서 중의 명저名著다.
019 백파집白坡集 (1770 – 1855년) 백파白坡 긍선亘璇
우리나라 불교는 조선왕조에 들어옴으로써 숭유척불崇儒斥佛이라는 국가정책에 따라 승려들이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자취를 감추고 군성郡城에 들어오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후일에 이것을 숭유척불의 극단적인 표본으로 예를 들고 있으나, 혹은 이것이 불교 본연의 자세요 취지일른지도 모른다. 숭유척불의 정책을 도리어 다른 면에서 추구하여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유척불정책은 조선왕조 초기까지만 하여도 극심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며, 중엽中葉까지 이르는 사이에는 그래도 수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배출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중에서 서산西山 휴정대사休靜大師는 임진국란壬辰國亂을 당하여 승려들의 귀추歸趨를 명백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침체된 불교를 진작振作 중흥中興시켰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서산 이후로는 서산의 업적에 필적할만한 분이 나타나지 않고 다만 법통法統과 의발衣鉢만이 가냘픈 실끈 같이 수수授受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치 못 할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편양鞭羊, 진묵震黙, 환성喚醒, 함월涵月 등 여러 선사들이 있기도 하지만 역사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근세에 와서는 묵암최눌默庵最訥과 연담유일蓮潭有一을 傑然한 선사로 손꼽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박학博學 홍사鴻詞와 詩揭 문장으로서도 이를 넉넉히 엿볼 수 있겠지만 불교의 궁극적인 계경界境이 이러한 외형外形문자에만 있는 것이 아닐진데 그들이 도달한 계경은 과연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하겠다.
이러한 가운데 백파 긍선이 일어나 정체기에 놓여있는 불교에 청신한 기풍을 주입시키고자 그의 오랜 체험과 학식으로써 많은 저작을 냈다. 백파선사는 한 동안 그의 초연超然한 종풍宗風과 탁월卓越한 식견識見이 일세一世를 진동함으로써 좌 백파, 우 침명이라는 말이 유포되었던 것처럼 그의 명성이 드높았다. 우선 백파선생의 생애와 그의 내력來歷을 보자.
백파는 호남湖南 무장 (전북 고창) 사람으로써 이씨가에 태어나 일찍이 양친을 잃고 12세에 선운사에서 축발祝髮하고 시헌노장時憲老丈으로부터 득도得度를 받았다. 早年에 출가한 분들이 대략 유년기의 불우不遇로 인하여 만년晩年에 대성大成을 이룬 것처럼 백파도 그 범주範疇를 벗어나지 않았다. 백파는 어려서부터 돈오頓悟스럽기 한이 없었고, 대경大經에 참여하여 그의 재명才名을 날렸다고 한다. 그는 평안도 초산에 있는 용문암에 안거安居하면서 심지心地가 크게 개통開通되었고, 지리산의 영원사로 옮겨 조사서래祖師西來의 종지宗旨를 설파상언雪坡尙彦으로부터 받은 다음 전북 순창에 있는 영구산 구암사에 주석駐錫하였다. 그는 또 백양산 운문암을 개당開堂하고, 강중講衆이 수백 명에 달하였다. 그는 다시 구암사로 의발衣鉢을 옮기고, 법우法宇를 중창重創한 다음 선겅법회禪講法會를 열었다. 국내 각처에서 운집雲集한 불자佛子들은 그의 명백통쾌明白痛快한 설법說法을 들음으로써 선문중흥禪門中興이라는 느낌을 방불케 하였다. 그는 그런 동안 원근처에 있는 사우師友들과 많은 서간書簡이 왕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을 비롯한 ‘선문수경禪文手鏡’ ‘법보단경요해法寶壇經要解’ ‘오종강요사기五宗綱要私記’ ‘선문염송사기禪門拈頌私記’ ‘금강팔해경金剛八解經’ ‘고봉선요사기高峰禪要私記’ ‘귀감집龜鑑集’ 등을 저술하였다. 이 외에도 ‘태고가석太古歌釋’ 과 ‘식지변설識智辨說’ 이라는 두 저서가 있고, 승려들 가운데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저작을 하였다. 이처럼 많은 저서 중에서도 ‘선문수경’ 은 그의 평생 정력을 기울인 것으로써 그의 실견득처實見得處를 문자화 한 것으로 보이나, 이 책은 그의 생전에도 많은 논쟁이 야기惹起되었고, 사후에도 허다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백파의 주장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박한 사람은 그와 동시대 초의草衣 의순意恂의 ‘사변만록四辨漫錄’ 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파는 율律과 선禪 그리고 화엄의 경지에도 상당한 득력得力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의 박학굉변博學宏辯과 화려한 팔치筆致는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유신儒臣들과 서한을 왕복하면서도 하등의 손색이 없었던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저主著 선문수경을 소개하기에 앞서 정혜결사문을 음미하여봄으로써 그가 선에 얼마나 저력著力을 하였고, 이에 대한 몸가짐과 각오한 바가 얼마만큼 비장悲壯하였던가를 엿볼 수 있다. 요지要旨를 보면 그는
제 1, ‘참학參學, 요재要在, 안목진정眼目眞正’ 을 벽두劈頭에 열거列擧하고 언어도단言語道斷과 심행멸처心行滅處를 정안正眼으로써, 이를 보면 일체一切가 정법淨法이요, 사안邪眼으로 보면 일체가 염법染法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제 2, ‘정변정안正辨正眼, 금생정신今生正信’ 으로써 교敎는 사구死句에 불과하고, 선禪은 활구活句임을 지적하면서, 정안의 소재를 밝히고
제 3, ‘어제방편於諸方便, 선정최요禪定最要’ 라 하여 식심識心이 제거되면 생사가 자절自絶하고, 진성眞性만이 스스로 나타나고 만 것이니 식심을 자멸自滅케 하는 수단은 오직 선정禪定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제 4, ‘락인공안畧引公案, 이시방양以示榜樣’ 은 사구오입死句悟入을 의리선義理禪이라 말하고, 활구오입活句悟入을 여래선如來禪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래선은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 라는 경지를 가르킨 것이다. 조사선祖師禪은 ‘약견재상若見諸相 비상非相이라도 즉 불견여래不見如來’ 라는 계경界境을 말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제 5, ‘선이적적先以寂寂 치어연려治於緣慮’ 는 삼세공적三世空寂을 완료完了하여야만 몽환삼매夢幻三昧를 거쳐 무념無念삼매와 십방제불조十方諸佛祖가 있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이며
제 6, ‘이성성以惺惺 체심참오切心參悟’ 는 무념공적無念空寂 중에도 현전일념現前一念을 격외格外인 활구活句에 참여케 하라는 것이다.
제 7, ‘초수정좌初雖靜坐 실통사의實通四儀’ 는 행行, 주住, 좌坐, 와臥의 순숙처純熟處를 말하는 것으로써, 정신단좌正身端坐와 조식調息 그리고 조신調身, 조심調心 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제 8, ‘요간염불料揀念佛, 결근수심結勤修心’ 은 심외心外에 정토淨土가 없음을 안다면 관행쌍조觀行雙照는 심불쌍망心佛雙忘으로 상통相通되고, 쌍망은 정定이요 쌍조는 혜慧를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제 9, ‘대변권실對辨權實, 체근수심切勤修心’ 은 심성이 본정本淨한 것이미 견성見性을 상승上乘으로 알진데 예불禮佛과 조상造像, 전경轉經 같은 것만 일삼지 말 것이며,
제 10, ‘탄세무상歎世無常, 체책명리切責名利’ 는 인간세락世樂의 장구長久치 못 함을 깨닫고 명리세계에 사로잡혀 일생을 허송치 말라는 것이다.
제 11, ‘근성이리勤成二利, 인시공덕引示功德’ 은 일념정심一念淨心이라야만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며
제 12, ‘약무정력若無定力, 난면윤회難免輪廻’ 는 안선정려安禪靜慮가 아니면 사후고혼死後孤魂을 면免치 못 하고, 윤회의 순환과정을 이탈離脫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생략)
제 17, ‘기신차법旣信此法, 결심구경決心究景’ 은 수도인修道人이 보고寶庫에 한 번 들어왔으면 결코 공수空手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산정山頂을 목표로 한 번 올라가기 시작하면 정상의 도달을 궁극적인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 18, ‘대변삼교對辨三敎 이현정리以顯正理’ 는 유儒, 불佛, 선仙 삼교三敎를 통찰하여 볼 때, 유교儒敎는 유有를 숭상한 끝에 제상諸相에 정체停滯되고, 도교道敎는 무無를 주로 삼지 않고 빈賓으로 삼기 때문에 단갱斷坑에 빠질 우려가 없지 않으나, 불교만은 불유불무不有不無, 쌍조쌍차雙照雙遮로써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진여眞如의 계경界景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백파선사는 도쇠道衰한 말엽末葉에 태어났겄만 그의 구도심은 대단하였던 것이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려는 기백氣魄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실견견득實見得處는 과연 어느 계경을 지향하고 있는지 하나의 숙제가 아닐 수 없겠다. 다만 ‘적어중자積於中者 발어외發於外’ 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의 정혜결사문과 선문수경에 나타난 이론과 논지는 다소나마 정밀을 결여한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교 재래在來의 전통에 사로잡혀 고식적姑息的인 영역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선문수경만 하여도 그가 주창한 의리선과 여래선 그리고 조사선을 그나름대로 해설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백파는 임제삼구臨濟三句로써 일대의 선교禪敎를 삼등분하였다. 그는 제 1구를 천득薦得케 되면 불조佛祖를 스승으로 삼을 수 있고, 제 2구를 천득케되면 인천人天을 스승으로 할 수 있겠으나, 제 3구는 자기 한 사람도 구제할 수 없음을 설파하였다. 따라서 제 1은 조사선, 제 2는 여래선, 그리고 제 3은 의리선을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는 6조대사祖大師 이후의 5가종풍家宗風을 규정지은 데 주저치 않았으며, 임제종을 제 1구인 조사선이라 하였고, 위앙僞仰, 법안法眼, 조동曹洞 3종은 제 2구인 여래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임제종이 6조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고 기타의 종파는 6조의 방전傍傳에 불과한 것임을 뜻한 것이리라. 백파집의 원문을 인용하여보면 대기대용大機大用과 살활양구殺活兩句를 제창한 백파는 ‘삼허전중三虛傳中 제일분좌第一分座 (진공眞空) 살인도殺人刀, 즉삼구중卽三句中 제 2구, 본분급향상本分及向上, 칙단전불변진여則但傳不變眞如, 유살무활고唯殺無活故, 청원득지靑原得之, 위6조방전야爲六祖傍傳也’ 라 하여, 6조의 고제高弟인 청원행사靑原行思는 살구殺句만이 있을 뿐 활구活句가 없음으로써 6조의 방전傍傳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파는 ‘제 2처염화處拈華 (묘유妙有) 활인검活人劍 즉卽제1구句, 기機 (살殺) 용用 (활活) 삼요급향상진공三要及向上眞空 (살활상암殺活雙暗) 묘유 (살활변명變明) 칙구족則具足살활 (삼요三要) 쌍명 (향상) 고남악득지위육조정전야故南岳得之爲六祖正傳也’ 라고 단정을 내리면서 남악 회양懷讓선사만이 육조의 전통을 이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름 아닌 그 나름의 대도大道에 대한 실견득처를 지칭한 것이리라. 청원행사는 진공에 그쳤을 뿐 묘유를 발휘치 못 하였으나 남악 회양은 진공과 함께 묘유를 체득함으로 변화불칙變化不側에 신톤자재神通自在한 법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임제종의 시조인 남악 회양을 찬양하고 추대하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겠지만 어떻든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이라도 필경은 육조 혜능 이후에 생긴 5가종풍의 우열을 다투는 수단으로써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백파는 이러한 3개선을 다시 한 번 강조코자 의리선을 가르켜 편계망정徧計妄情에 불과한 것이라고 후려갈겼고, 여래선은 의리선보다는 높은 계경을 배회徘徊한 것이나, 이것도 결국은 식정識情에 사로잡힘을 모면치 못 한 것이니 결국은 편계망정이라고 주장한 다음, 조사선만이 본분진여와 함께 원성실성인 대단원을 이룩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과연 백파가 분류한 것처럼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 등의 3개선이 타당한 논법일까, 이로부터 일대 논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논쟁은 불교도도 아닌 유가儒家와의 충돌로써 희대稀代의 장관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는 비록 유교의 세력가에서 생장하였지만 그의 재능과 소양은 한갓 공맹孔孟의 학문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불선 3교를 위시한 제자백가諸子百家도 섭렵涉獵하였으며 그의 경술문장經術文章은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했다.
완당은 두륜산 대흥사에 있던 초의草衣와도 교분交分을 맺는 한편 백파와도 수차에 걸친 장문의 논쟁을 전개하였으며, 백파의 논거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종래에 있었던 선가의 종풍을 일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백파와 완당은 이러한 논쟁을 계속하면서도 생전에는 한 번도 상면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완당은 백파가 입적入寂한 뒤에 백파의 묘비명墓碑銘을 몸소 찬술撰述하고 비문碑文도 썼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을 검토하기에 앞서 먼저 그 비명 내용을 보면 대략 그 논쟁의 줄거리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우리 동국에는 근래에 율사일종 (율종) 이 없었으나 오직 백파만이 이 말에 가당한 고로 율사란 이름을 붙이게 된다. 대기대용은 이것이 백파의 팔십 평생에 가장 용력勇力하였던 것이며, 혹은 기용과 살활양구를 지리支離한 것이고 천착穿鑿된 것이라고 말하나 이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범부凡夫를 대치對治한 것은 어느 곳이고 살활, 기용 아닌 것이 없다. 비록 팔만대장경일지라도 살활기용 이외에서 나온 법은 하나도 없는 것이니, 다만 세인世人들이 이 뜻을 모르고 망령스럽게 살활기용설로써 백파를 가리켜 구집拘執과 착상著想한 사람으로 삼는다면, 이것이 하루살이가 큰 수목을 흔든 격이다. 이 어찌 백파를 이해하는 데 족할 것이냐? 내가 일찍이 백파와 더불어 변론을 왕복하였던 것은 세인들이 망평妄評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대목은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있을 뿐이다. 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것을 세인들에게 설명하여 주어도 모두 이를 이해치 못 하고 있으니, 어찌하여 백파율사를 재기再起케 함으로써 한바탕 웃어볼 것인가. 이제 백파비명을 지으면서 만일 대기대용이라는 구를 대서특필大書特筆치 않는다면 백파의 비석다웁기에 부족할 것이다.’
백파의 문도인 설파와 백암들에게 이것을 서시書示하면서 과노果老 (완당의 만년晩年 호號) 는 다음과 같이 명銘을 기록한다.
‘가난하여 송곳 하나 꽂을 곳이 없으나 기운은 수미산須彌山을 누를 정도다.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부처님을 섬기는 것 같고, 가풍家風은 가장 진실하였다. 그 이름을 긍선亘璇이라고 하니 다시 더 말할 것이 없더라.’
완당은 이렇 듯 백파의 비문을 짓고 그와 가장 논란이 심하였던 살활, 기용 양구를 인용하면서 그의 업적을 찬양하였것만 끝내 선사禪師라는 말은 허락치 않고 율사律師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물론 완당은 또 백파의 평생용력처인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과 같은 학설도 근본적으로 무시하여버렸다. 선이면 선의 본래 취지인 ‘불립문자 견성성불’ 이라는 여덟 자에 그치는 것이지 장황스러운 논란이 있을 수 없다고 설파하였다. 여하튼 백파는 휴정 이후 요요적적寥寥寂寂하였던 불교계에 새로운 기운을 주입시키고자 무한한 노력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몸가짐과 정진처도 근엄하였다. ‘정혜결사문’ 을 비롯한 ‘선문수경’ 그리고 완당과의 사이에 왕복된 서간으로 구성된 ‘백파집’ 은 후세의 선가禪家들에게 크게 기여한 바가 있었던 것을 의심치 않는다.
020 정감록鄭鑑錄
정감록은 시대의 산물이다. 매혹魅惑과 신비神祕에 잠긴 난세亂世의 예언서豫言書요, 더러는 민중신앙으로까지 구사驅使되어, 마치 조국祖國 비운悲運의 대언서代言書처럼 비장秘藏되어 은밀히 전승되어 온 세칭 기서奇書다.
고려의 쇠망과 조선조의 흥망을 예시하려 하였고, 당시 절대 영원의 봉건왕권封建王權을 합리적인 철학적 예증例證을 빌려 부정, 변혁하려는 혁명정신의 이론으로, 부동하는 시세時勢를 새로운 가상假想의 왕국 정씨鄭氏조선의 건설로 몰고가려는 반역의 사상서이기도 하다.
이 땅에 수시로 변혁되려는 역사적 기운이 감돌 때면, 민중의 의식은 이미 그들의 전통신앙으로까지 되어버린 듯 한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 앞에 제법 설득력있는 매혹魅惑을 당하여온 많은 예증例證이 있다. 변혁하려는 시대적배경에 당하여서는 민심을 당혹하게 하고, 민족의 비운과 소외된 민중의 욕구불만을 담보하여, 새로운 역사와 그 역사에 대처하는 미래의 처방을 독단과 마력魔力있는 호소력으로 설계하여 준 미래의 준 미래의 예언서는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역사의 편에 서는 듯 한 호소력을 가진 이 같은 특이한 민중신앙民衆信仰으로까지 발전되어버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학學은 지난날의 민족의 역사적 비운의 시대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정감록이 갖는 비리성을 논하기 전에 어찌하여 이 같은 이론이 시대에 따라 범람氾濫할 수 있는가. 그 시대적 배경은 어떠하였는가. 그러나 정감록의 저자와 저작연대가 명확하지 않는, 그 연대기적 단서端緖는 합리적일 수가 없을 밖에 없다. 더러는 신라 말의 중 도선道詵으로, 고려 말의 무학無學, 또는 고려 초 정지상, 혹은 조선 초 정도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는가 하면 ‘일성록日省錄 (248권, 28장, 정조 11년 7월)’ 에서는 정조가 규장각제학 김종수에게 성정각에서 문답하는 중에 ‘이 글 (정감록) 은 반드시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중간에 원국元國의 무리가 지가방서地家方書와 요탄전설妖誕傳說 등을 섞어 모아서 지은 것’ 이라고 하고, 영조 이래 병신의 난, 무을의 반란 때에 요언妖言으로 인심人心을 소통疏通시키려는 간계자奸計者의 술작述作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이같이 정감록이 역사적인 변환기에 흥행되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될 수 있기에는 그 발자취는 다채롭고 멀다.
벌써, 삼국시대에도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으로 그 단서端緖가 트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서는 ‘탈해脫解는 … 학문에 정진하고 겸하여 지리도 알아, 양산 아래 자리잡은 호공瓠公의 집이 길지吉地로 생각되므로, 책략策略을 써서, 이를 손에 넣고, 그곳에서 살았다.’ 고 하니 지리설地理說까지 부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말엽의 중 도선의 ‘도선비기道詵祕記’ 에 이르러서 음양도참설陰陽道懺說, 음양순역설陰陽順逆說, 음양쇠왕설陰陽衰旺說, 음양비보설陰陽裨補說 등 음양지리설이 퍼졌다. 도선은 ‘지리의 변화에 따라 국가와 개인의 운명이 예언될 수 있고, 지리에는 순역順逆, 쇠왕衰旺이 있어 그 지리의 택하는 여하에 따라 행 불행, 쇠성衰盛이 있다. 그러나 그 역쇠逆衰는 인간이 지리를 잘 찾고 또 이를 비보裨補함에 따라서는 보안保安되어질 수 있다’ 고 했다.
기氣가 모으니 생기生氣, 기력氣力이 되고, 음양의 두 기가 발전하면 토목금화수土木金火水의 오행五行을, 오행은 삼라만상參羅萬像을 생성生成한다. 바로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이 중에서 자연발생의 모체母體를 토土로 잡는다. 지상의 생기 기력을 수용 비보할 때,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결정될 수도 있다. 주거住居, 묘지墓地, 도성都城의 지리적 자연조건은 음양지리설의 귀결점이 되었다.
이같은 도선의 지리설이 강조된 것이 고려 태조 왕건의 ‘건국建國10훈요訓要’ 에서다. 신라의 역쇠逆衰에 마땅히 새 고려왕조가 생성될 도선의 예언이 주효奏效한다. ‘고려사’ ‘오행지’ 에는 ‘하늘에는 오운五運 (오행의 운행법칙 - 필자筆者) 이 있고, 땅에는 오행이 있어 그 작용에 따라 인간의 생활은 만족을 얻는다. 이는 인간의 오성五性 (오장육부五臟六腑) 에 구비되어 다섯의 외형外形에 의하여 표현된다. 이를 잘 다스리면 길吉하고, 잘 다스리지 못 하면 흉凶하며, 길할 때에는 좋은 징조가 나타나고, 흉할 때는 나쁜 징조가 나타난다’ 고 하였으니, 하늘의 뜻에 순응順應하고 땅의 기운을 쫓아, 인간의 도덕적인 수양修養마져도 암시하는 음양오행설은 본래의 자연발전의 소박한 과학이법理法의 철학적인 해명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소박한 과학이론은 도덕, 사회, 정치문제와 종합되어 이는 종교적, 미신적인 신비주의神秘主義로 바뀐다.
고려말엽, 귀족의 압밥과 착취에 항거하면서 일어난 폭동의 기세에 중 묘청이 양합하여 ‘천지인삼정사의天地人三庭事宜’ 를 정지상의 ‘제팔성당문祭八聖堂文’ 과 함께 반포頒布하여 흔들리는 민심을 이단異端의 불교설로 매혹시키려 하였다. 묘청은 지력地力과 생기生氣를 신격화한다. 국내의 빼어난 여덟 명산名山에 팔성八聖을 두고, 그 중 최고 신을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菩薩이다. 이같은 소위 팔관八觀사상은 묘청으로 하여금 개국開國의 정기精氣를 얻어, 호국신護國神의 가호加護 아래 서경西京 땅에 대위국大爲國을 창립할 왕을 자처하였다. 중 도선 이후 민간신앙으로 되어가는 음양지리풍수설은 두루 불교 유교 도교와 민족 고유의 산신 숭배와 팔관사상마져를 포괄하는 시대적인 절충折衷사상으로 나타나면서, 부동不同하는 민중의 예기銳氣를 수렴收斂하려는 데로 활용된 것이다. 중앙집권력은 약화되며 국력은 쇠퇴되어 간다. 일반 민중은 봉건적 착취搾取에 휘감기어갔다. 거란 몽고의 침략이 겹치고, 내란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기존 지배 이데올러기인 불교사상은 무기력화된 데다가 더욱이 밖으로부터 밀려드는 과학지식은 새로운 이단설異端說을 자극하였다.
새로운 역사 형성에서의 격변의 와중渦中에서 무학은 이단異端의 불교사상을 창조한 시대인時代人이었다. 정도전은 조선조 건국의 불교이념의 창달자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원한으로 휘몰徽沒되었다. 원한과 회포懷抱의 술회述懷로 정감록을 저작하였단 말인가?
16세기의 조선조사회는, 토지겸병土地兼并,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과 부패의 격화, 농민은 착취와 압박에 신음한다. 백성을 토지를 잃고 기아饑饉과 빈곤의 도탄塗炭에서 가혹苛酷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리하여 봉건적인 탄압에 항거하여 폭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니 오연석, 임꺽정林巨正 등의 반기叛旗는 대표적이다.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 등으로 나라의 생산력은 파괴되고 백성의 생활은 극도로 영락零落하였다.
봉건국가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되니 왕실, 양반, 토호土豪들의 토지겸병은 확대되고, 지방양반, 토호들의 횡포는 백성의 생활을 부랑浮浪과 불안의 도가니로 휘몰아넣고 만 것이다. 영조 정조의 치정이 있으나 지배자 간의 당쟁도 격을 달하고, 다양한 민중의 봉기는 수다하게 일어난다.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 이인좌의 난, 홍국영, 송덕상의 난이나, 정여립과 정희량의 반기叛旗는 민심을 잡기에 타당하다. 이들이 한결같이 조선조 봉건왕권의 말세적末世的 조짐을 들고나온 것이다. 새로운 민간신앙을 잡고 일어서려는 의도에서 정씨왕조의 필연 도래성到來性을 민심 속에 심으려는 원국지도遠國志道의 소동인심지계騷動人心之計의 술작述作이 바로 정감록이라는 정조의 설은 그 동기動機에서 자못 타당하다.
정감록은 벽두劈頭에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천지는 음양이 먼저다’ 로부터 말문을 연 대화식의 글귀의 나열羅列이다. ‘산수의 법이 기이奇異하고’ ‘곤륜산崑崙山에서 온 맥脈이 백두산에 이르러, 그 원기元氣는 평양에 이르렀으나, 이미 평양은 천 년의 운수運數가 지났고, 이제 송악으로 옮아 5백년을 도읍都邑함직 하나 … 지기地氣가 쇠패衰敗하고 천운天運이 비색否塞하여 한양으로 옮으리라.’ ‘백두산에서 온 맥이 운수가 금강산으로 옮아 태백산 소백산에 이르렀다가, 산천의 기운이 뭉쳐 계룡산으로 들어가니, 이에 정씨가 8백년을 도읍할 땅이다. 후에는 가야산에 들어가니 조씨가 천 년을 도읍都邑할 땅이요, 전주는 범씨가 6백 년, 그 후 송악으로 다시 되돌아와 왕씨가 부흥할 것이다 …’ 분명, 음양이 기본임과, 산수의 법인 지리설과 또 지기地氣와 지력地力의 가변성可變性과 천운天運의 흥패興敗와 백두, 태백산의 주산主山임과, 더욱이 조선조의 폐쇄閉鎖로 계룡산의 팔백 년 정씨왕조의 예언 등은 전통신앙인 음양지리설의 계승이며, 당시 혼란과 소외疎外의 민중의식을 자극할 수 있었다.
삼각산 백운대에 올라서 정공鄭公은 ‘너의 자손 말년에 궁중의 과부寡婦가 자기 뜻대로 전결專決하니 어린 전하殿下가 손수 국사를 밀어 맡기게 되고, 나라 일은 장차 글러지고, 단신單身으로 의지할 데가 없고 …’, 천지지변天地之變이 속출續出하여 드디어 ‘대중화大中華, 소小중화가 함께 망한다’ 고 말세末世의 역쇠逆衰의 운運을 말한다.
심沁이 말하기를 ‘삼각산의 규봉窺峯이 되고, 백악이 주산主山이 되고, 한강이 허리띠가 되고, 계락산은 청룡靑龍이 되고, 안현이 백호白虎가 되며, 관악산이 안산安山이 되고, 목멱산이 남산이 되었구나’ 하니 정공은 ‘사방의 도적이 쳐들어오나, 두 번은 꼭 중흥할 것이다. 관악산이 안산이니 왕국이 세 번 불타 책이 탈 것이며, 위는 근심하고 아래는 흔들리고, 아전衙前이 태수太守를 죽이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은 영영 땅에 떨어질 것이다.’ 지기地氣의 맥脈을 보아 세상의 순역順逆을 도참圖讖하는 지리풍수설은 부랑浮浪의 민심 위에 비보裨補의 예언을 던지고 있다.
‘몸 보존할 땅이 열 곳이 있다.’
‘곡식종자는 삼풍三風, 삼풍三豊에서 구하고, 인종人種은 두 백산 (태백산, 소백산) 에서 구할 것이니, 이 열 곳은 병화兵禍가 미치지 못 하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 ’ 이같은 ‘십승지十勝地로 들어가는 사람은 그 때를 보아서 행하여야 할 것이다’ 하여 ‘후세 사람이 만일 지각知覺이 있다면, 먼저 십승지로 들어갈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으리라.’ 희망을 잃은 민중에게, 원한怨恨의 불운아不運兒들에게 미래를 제시하려 하였다. 새로운 낙토樂土를 찾아 해매이게 하였고, 빈궁貧窮과 가난의 현세現世를 새로운 내세來世로 대치代置시키려는 민간신앙의 기틀이 역력히 엿보인다고 하겠다.
정공은 ‘만일 말세가 되면, 아전이 태수를 죽이되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상하의 분별은 없어지고, 변變은 잇달아 일어나고, 필경에 임금은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와 외롭게 될 때에는 대대로 국록國祿을 먹는 신하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새로운 사회혁명이 기조基調를 풍기고, 현 지배층에 대한 노골적인 경고와 반역의 민심을 휘어잡을 수 있는 시대정신이 될 수도 있었다. 이어서 ‘말세末世의 재앙災殃’ 을 내가 자세히 말하겠다.
‘9년 동안의 큰 흉년에 백성이 나무껍질로 연명延命할 것이며, 4년 동안의 염병染病으로 人命의 반은 죽을 것이며, 사대부士大夫의 집은 인삼人蔘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 집은 이利를 탐貪하는 데에서 망할 것이다.’ 저주로운 표현이다. ‘계룡산 돌이 희어지고, 광막廣漠한 모랫벌이 30리, 또 남문은 다시 열리고, 너의 자손 말대末代에는 쥐 얼굴에 범 눈의 사람이 나고, 큰 흉년과 호환虎患과 … 백두산 북쪽에는 오랑케의 말이 울고, 평안도 황해도 사이에는 원한의 피가 하늘로 치솟을 것이다. 한강 남쪽 100리에는 사람이 어찌 살 것인가?’ 이같은 말세에 정공은 ‘계룡산 개국에 변 정승政丞과 배 장수將帥가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고, 방 성姓과 우 가哥가 수족手足 같이 될 것이며,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옛 양반들이 다시 옛날로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이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으면 그 자손을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깊이 감추어두면 좋을 것이다’ 고 하여 비보의 땅을 계룡산으로, 또 새로운 정씨왕조를 가장 이상국理想國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정공의 예언에는 미묘微妙함이 있었다. 후세 사람에게 매혹과 신비에 싸인 기서奇書로써 구구한 글 풀이의 함축含蓄의 가능성을 안고, 큰 영향을 번진 것은 오히려 이 책자가 갖는 비리성非理性에 있는지도 모른다. ‘ … 장씨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난리가 시작되는 경염庚炎에 있으니, 지각있는 자는 이때에 십승지로 가라.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고, 중간에 가는 자는 살고, 나중에 가는 자는 죽을 것이다’ 고 하였으니, 그 시기나 그 표현 등의 상징성은 비과학적인 역설逆說을 분비分泌게 할 수 있었다. 또 십승지의 구구한 표현들은 난세亂世에 부동하는 민중의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더욱이 특기할 영향으로는 동학혁명의 기조基調사상인 동학사상 속에 정감록의 영향이 깃들인 것이다. 우화체寓話體 서술형敍述形의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에 비쳐진 시운時運의 사상이나, 풍수지리관, 초인적超人的인 운명관에 따른 신생관新生觀, 구제관救濟觀 등의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 등은, 분명 정감록의 새로운 발전적인 변모였고, 또 ‘교훈가敎訓歌’ 속에 나타난 민중주의적인 성격 등은, 정감록의 ‘빈자貧者는 살고, 부자富者는 죽는다’ 는 것과의 공통점으로 맞닿았다.
지난날 조국의 비운이 한창일 때, 민심을 격동하였던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학學 속에는 줄곧 정감록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숱한 사이비종교似而非宗敎의 민중에의 접근이 정감록을 빌려왔던 사례들은 오늘날의 민중의식의 한 반영이다. 그러나 점차 새로운 조국광명의 합리적인 예시가 다가설 때 이같은 비리非理의 풍조는 사라져가기 마련이다.
이상에 인용한 글귀는 정감록 원본原本 내각본內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에 준準하였다. 세칭世稱의 정감록 서書에는 ‘동국 역대 기수본궁 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 등 무려 50여 종의 비결祕訣을 일관一貫하여 가칭假稱한다.
021 벽위편闢衛編 (1785년) 이만채李晩采
이 책은 조선시대 정조, 순조, 헌종 3대에 걸친 천주교박해에 관한 조야朝野의 문적文籍을 집록集錄한 것인데, 원본은 당시의 유학자 척암 이기경의 천집撰集으로 누대累代 개찬改撰되어오던 것을 4대손 이만채가 1931년에 다시 보정補整 편간編刊한 것이 바로 현행본 벽위편이다.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에서 보듯이 순암 안정복, 하빙 신후빙, 간옹 이헌경, 노암 홍낙안, 여설 육만건, 이재 육태석, 삼명 강준흠 등은 금대 이가환, 만천 이승훈, 이암 권일신, 복암 이기양, 다산 정약용 등의 소위 친서파親西派 남인南人 학자들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역천패륜逆天悖倫의 사교邪敎를 전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다는 이유를 표면에 내걸고, 혹평비난酷評非難하여 마침내 경향京鄕의 유생儒生들과 벽파僻派 관인官人들의 동조를 얻어 그들을 관가官家에서 축출逐出시키는데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항상 시파時派 남인학자들을 아끼고 비호庇護했던 영상 체제공과 정조가 죽자 이것을 시벽파의 당쟁으로 유도하여 피비린내나는 처참한 혈전을 일으켜 시파계 남인학자들을 전멸시켰다. 세칭 신유사옥이다. 본서의 원본은 정조 9년 (1785년) 에서 순조 원년 (1801년) 에 이르는 약 15년 간의 천주교박해의 전말顚末을 말해주는 조야朝野의 개사開寫, 상소上疏, 유림儒林 간의 통문通文, 신도信徒 사이의 서한書翰 등을 현행본 벽계편의 그것 보다 어떤 부분에서는 더 상세히 집록하였고, 북경에 보낸 진주문陳奏文의 답서答書인 회자回咨로 그 말미를 장식하였다. 이만채 편간의 현행본은 원본 벽위편에다가 천주교 동국 전래의 전말을 그 첫머리 (제 1장) 에, 신유년 사학죄인邪學罪人의 결안結案과 기해박해까지의 치사治邪전말을 뒷부분 (제 5장 후반 - 제 6장) 에 각각 첨가하였다. 이 책은 비록 천주교 반대파의 문안文案의 집록이기는 하나 천주교 반대 및 신앙의 이유를 아울러 알 수 있는데서, 최근에 발견된 이소전, 이벽 저 성교요지聖敎要旨, 경신회규庚申會規, 세례명부洗禮名簿 (1785 - 1800년) 등의 천주교도측 사료史料와 함께 한국천주교사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아울러서 당쟁사, 외교사의 연구자료를 겸한다. 그러나 편간자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상당한 탈락과 오자誤字가 있으며, 고의적인 삭제도 적지 않아 원본의 원의原意와 면모面貌를 상傷케 하였다. 비판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이용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상하上下 2책 7권의 석인본石印本인데 그 목록은
제 1책 상권 - 1권, 서교동래전말/ 2권, 을사년 (1785년) 에 추조秋曹에 적발된 천주교사건 (을사추조적발), 안순암 을사일기 정미년 반회班會에서 천주교서적 강론사건 (정미양회사건), 신해년 (1791년) 에 진산에서 일어난 사변 (신해진산지변)/ 3권, 여러 죄인을 처분한 것 (제죄인처분), 신해년 (1791년) 이후 치사정법治私定法한 것 (신해이후사정소장)
제 2책 하권 - 4권, 을, 병년 (1759 - 1796년) 이후 기록 (을병이후록), 양파兩派의 상소문 무기양년 (1798 - 1799년), 호서湖西지방 치사治私 (무기양년 호서지방치사), 경신년 (1800년) 에 사학이 더욱 성함/ 5권, 신유 (1801년) 의 치사한 것 (신유치사), 효원전의 고유문告由文,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 북경에 보낸 진주문陳奏文 (진문북경), 가정황제의 회자문回咨文, 제적결안諸敵結案, 완사영백서帛書/ 6권, 병인 (1806 - 1807년) 정묘 이후의 기록, 정해년 (1827년) 의 치사/ 7권, 기해년 (1839년) 의 치사,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 (삼도치사三道治邪, 척사론음斥邪論音, 해국도지海國圖志, 이만채의 발문
제 1권, 천주교의 전래를 중국의 정사正史와 야사野史에 있는 천주교에 대한 기사를 인용하여 그 근원을 밝힌 뒤에 ‘지봉유설芝峯類說’, 성호의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 순암의 ‘천학고天學考’, 간옹의 ‘천학문답天學問答’, 빈하의 ‘서학변書學辨’ 저명선학著名先學의 천주교 배척문排斥文을 그대로 옮겨서 천주교 배격의 근거와 권위權威를 삼았다 (서교동래전말西敎東來顚末). 제 2권, 정조 9년 (1785년) 봄에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총억 등 사대부 자제들이 한국천주교회를 창설하고, 서울 장례원 김법우 집에 모여서 도리道里를 강론하던 중 추조금리秋曹禁吏에 탄로되어 모두 잡혀갔으나, 형조판서 김하진은 그들의 신분이 높음을 보고 놀라서 모두 놓아주고, 중인中人 김범주만을 문초問招하여 처형하자, 태학동제생太學同弟生 이용서를 위시하여 이기경, 김원성 등 반서파反西派 남인 학자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통문通文을 발發하여 천주교 탄핵의 여론을 크게 일으켰다. 그런데 천주교를 신봉하던 친서파 남인 학자들은 거개 안 순암의 문제門弟들이었으므로 순암은 화禍가 미칠 것을 겁내 권철신, 이기양 등에게 일본의 천주교박해사건을 실례로 천당의 형락전에 세화世禍의 급박함을 경고하였으나, 천주교는 요원遼原의 불길처럼 일어나 먼 지방에까지 퍼졌다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정조 11년 (1789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등이 반인泮人 김석태 집에 모여서 천주교 도리를 강론하던 중 이기경이 우연히 그곳에 들려 동참하였고, 그는 그 뒤에 여러 번 이승훈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차독借讀하였다. 그런데 이기경과 홍락안은 같은 진사進士였으나, 승훈과 약용처럼 국왕國王 정조의 지우知友를 얻지 못 함을 항상 못마땅히 생각하여, 그들을 시기하였던 터였으므로 우의友誼를 배반하고 그들의 죄과를 조작 선포하였다 (정미반회사丁未班會事).
정조 15년 (1791년) 전라도 진산군에 살던 양반 윤지충이 그의 외종형 권상현과 함께 천주교를 믿고 조상祖上의 신주神主를 불살라버린 사실이 발각되지 홍락안, 이기경은 통문을 발하고, 상소계사上疏啓辭하는데 성공하였다 (신해진산지변辛亥珍山之變).
제 3권, 신해 진산의 변이 있은 뒤에 홍락안 등 반서파 학자들은 천주교를 무부무군의 사교邪敎라고 성토聲討하고, 이승훈, 권일신과 같은 천주교의 지도인물들에게 그 책임을 돌려 그들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마침내 권일신은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가던 도중 (1791년) 에 목숨을 잃었고, 손경원, 최인철, 정인혁 등 수십 명의 천주교인들은 형조刑曹에 잡혀 크게 곤욕을 당하였고, 최인길, 지황, 윤유일은 주문모 신부神父 영래사건으로 사형되었다 (신해 이후 사정소장辛亥以後邪正消長).
제 4권, 반서파 학자들은 이 때야말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을 처치해버릴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하여 부사직 박장설, 수찬 최헌중을 비롯하여 관학유생官學儒生들이 총 동원되어 상소를 올려 그들의 처형을 강청하였다. 정조는 그 때마다 정학正學운동이 선행되어야 할 것을 효유曉諭할 뿐 그들의 강청에 응치 않았으나, 나중에는 민심이 동요될 것을 염려하여 이가환은 재가불진在家不進을 이유삼아 충청목사로 제수除授하였고, 정약용은 불존정서체不尊正書體를 이유삼아 금정 찰방察訪을 제수하고, 이승훈은 명기등어공차名旣登於公車를 이유삼아 예산으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최헌중 등 반대파는 3인의 파직罷職 절도絶島 유배流配를 상소강청하여 그들의 완전 삼제芟除를 꾀하였다. 이에 심약心弱한 정약용은 배교背敎를 표시하는 상소문을 지어 올렸다 (을병 이후 록乙丙以後錄).
주문모신부의 행방을 널리 지방에까지 탐색하게됨에 호서의 천주교인들은 크게 참화慘禍를 입어 정조 22 - 23년 (1798 - 1799년) 에 걸쳐 100여 인의 형폐자刑斃者를 내었다 (무기 양년 호서 치사戊巳兩年湖西治邪). 그러나 정약종, 김건순, 강안숙 등 수십 명의 신자들이 결속하여 경신회라는 신앙단체를 만들고 결사전교決死傳敎하여 교세가 크게 일어났다 (경신 사학 유치庚申邪學愈熾).
제 5권, 정조 24년 (1800년) 에 매양 친서파 남인 학자들을 비호했던 정조가 승하昇遐하고, 그 어린 아들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니, 계季 증조모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25년 전에 그의 친정 오라버니 벽파僻派의 우두머리 김귀주가 시파時派에 몰려 흑산도로 귀양을 간 일을 늘 분하게 여겼던 터였으므로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 곧 시파 남인들을 내몰기 위하여 벽파와 손을 잡고 천주교박해를 크게 일으켰다. 사학을 금하는 교서를 내리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사용하여 최필공을 비롯하여 천주교인을 모조리 검거 투옥하였다. 마침내 이승훈, 이가환, 권철신, 황사영, 정약종, 김건순, 강완숙 등 저명한 남인학자들이 모두 참수당하였고, 주문모신부도 잡혀서 효수梟首되었으며, 시파 남인학자는 전멸되었다. 정권은 주문모신부가 중국인이므로 그 정법이 말썽이 될 것을 염려하여, 대제학 이만수로 그것을 명하는 주문奏文을 제진製進케하여 동지사 조윤대로 하여 전달케하였다 (신유치사辛酉治邪).
신유사옥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무릇 3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이승훈을 위시하여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斬首되었고, 정약용을 비롯하여 수많은 교도들이 유배되었다. 교도 황사영은 난을 피하여 충청도 제천군 배론이라는 천주교도들의 마을에 가서 토굴土窟 속에 숨어있으면서 북경北京 주교主敎에게 보내는 박해의 진상과 구출의 방법을 제시한 진정문을 길이 62Cm, 너비 38Cm 되는 흰 명주 비단 (1만 3천 여 자字) 에 썼다. 황서영백서帛書다. 그러나 백서는 미연에 발각되어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제적결안諸敵結案).
제 6권, 신유대박해가 지난 뒤 박해는 완전히 중지되었고, 순조 4년 (1804년) 에는 대왕대비가 물러났고, 그 다음 해에 별세했으므로 숨어서 겨우 목숨을 건진 교도들과 순교자殉敎者의 자녀들이 용인, 청송 등지 산간山間에 모여서 다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병자 이후 록 丙丁以後錄). 순조 27년 (1827년) 에 이르러서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지방에 전교傳敎운동이 왕성하여 신도가 크게 늘어남에, 정부는 또 다시 박해를 시작하여 전라도에서 140여 명의 신도가, 경상도에서도 많은 신도가 참수斬首, 태형笞刑, 유배되었다 (정해 삼도 치사 丁亥三道治邪).
제 7권, 정해년 (1827년) 의 박해가 지나간 뒤에 천주교는 또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재건의 기반이 잡히자, 宣敎師의 迎入운동이 일어났다. 순조 33년 (1833년) 에 정하상 등의 안내로 중국인 신부 유방제가 입국하였고, 헌종 1년 (1836년) 에는 모방 신부가, 동 3년 (1837년) 에는 샤스땅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서울에 와서 전교傳敎활동을 벌여 교회가 왕성하였다. 그러나 헌종 5년 (1839년) 에 이른바 기해대사옥己亥大邪獄이 일어나 위 3인의 선교사와 많은 교도가 살육되었다. 신유년 순고자 정약종의 아들 하상은 순교할 무렵에 우의정 이지연에게 천주교가 정도正道임을 밝힌 긴 글을 지어서 올렸다. 상재상서上宰相書다. 헌종은 척사론음斥邪論音을 발표하여 천주교 배척의 기치를 높였다 (을해乙亥치사).
이 책의 저자에 관하여는 그 발문에 ‘벽위편’ 은 황조皇祖 (고조高祖) 께서 친히 찬집撰集한 것인데, 뒤에 증조부와 조부와 선고先考 (돌아가신 부친父親) 께서 일이 일어날 때마다 계찬繼撰하였으며, 형들도 빠진 것을 보유補遺하였으니 다 그 때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여러 가지 풍상風霜을 겪어왔기 때문에 기록은 흐트러지고, 찢어지고, 흐려진 것이 태반殆半이다. ‘오래 되면 아주 잃어져서 영조의 척사숭정斥邪崇正의 일이 인몰湮沒되어 후세에 보지 못 하게 될까 두려워 형들과 더불어 간행을 꾀하고, 제상梯上에 즈음하여 구본舊本을 새로 베꼈으니, 황조 이래 14세의 수택手澤이 오히려 새롭다’ 라고 쓴 것을 보면 현행본은 황조 이기경에서부터 편간자 이만채에 이르기까지 무릇 5대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1930년 경에 이마니시 (금서룡今西龍) 박사와 야마구찌 (산구정지山口正之) 교수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이전에 동경대학도서관에 조선총서총사 (31종 50책 사본寫本) 라는 총서 가운데 제 48책으로부터 제 50책에 이르는 부분에 ‘벽위휘편闢衛彙編’ 3책이 들어있어 이만채의 벽위편과 동일 자료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견해를 발표한 바 있었고, 근년에 홍이섭 박사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용진 이만채의 조카 이희순의 집에서 사본寫本 벽위편 2종을 발견 조사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총시본 벽위편과 양수본 벽위편은 둘 다 현행 벽위편의 제 1권과 제 6, 7권이 들어있지 않다. 그것으로 보아서 이기경 자찬自撰의 벽위편은 을사추조乙巳秋曹 적발摘發사건에서 신해박해까지에 이르는 기간의 기록의 찬집撰集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홍이섭 박사의 양수본 벽위편과 현행 벽위편과의 추조대조표秋曹對照表에 의하면 제 1, 6, 7권이 없는 것은 물론 기타에 적지 않은 이동移動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뒤 4대에 걸쳐 세 자료를 더 가한 것이 사실이며, 또한 출간에 즈음하여 제 1권과 남은 6권의 원문에 상당한 보정補正을 가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양수본 (4권 4책) 은 그 원본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현행본과 다소 이동이 있다고 해서 원본을 달리 구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의 출간은 때에 편간자가 상당한 보정을 가한 것이 발문에 뚜렷이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다만 동경대학에 있는 총사본의 벽위편의 소스 Sorce가 양수본이었는지는 양자를 대조해보기 전에는 확언키 곤란하다. 불행하게도 조선총서총사 50책 (사본) 은 동경 진재震災 때 타버리고 그 목록이 이마시니 박사에게 있어, 원체 원문의 전적인 대조는 불가능이고 목록을 통한 대조조차도 지금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마니시 박사의 목록에 의하면 총사 제 44책으로부터 제 47책에 이르는 부분에 사학징의邪學懲義 4책이 들어있다. 해방 직후 필자가 사학징의 제 1, 2책을 발견하여 진장陳藏하고 있었으나, 6. 25사변에 크게 손상을 입어 지금은 판독 불능하다. 동 책은 신유사옥 때 추조관의 문안으로써 약 300명의 사학죄인 형심결안이 수록되어있다. 정법죄인질, 유배죄인질, 방면인질의 순서로 기록되었다.
이 사학징의의 찬집자가 역시 이기경이 아닐까 생각해왔으나, 이희순의 집에 그것의 원본이 없는 것과 현행 벽위편의 신유사학죄인결안이 사학징의의 그것보다 인수人數가 현저히 적음과 형심刑審의 지나친 소략疏略은 현행본의 결안은 혹은 소스를 다른 데서 취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양수에서 나온 벽위가闢衛歌는 필자의 견해로는 이기경의 원저原著가 확실하다고 본다. 그것은 그 때 이런 식의 노래가 많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기경의 단짝 김원성의 경세가警世歌라는 천주교 배척의 한글노래를 가지고 있고, 이총억, 정약전 등의 한글 십계명가十誡命歌, 이벽의 한글 천주공교가天主恭敎歌 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좋은 자료가 벽위편에 채록採錄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다. 한글을 천대賤待하였던 유학자의 버릇에서 그렇게 되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벽위편의 저자는 이기경을 비롯하여 이만채까지 5대에 미치는 여러 사람들이다. 5대의 가계는
정태 수형 - 순채 - 희순
이기경 - 정겸 - 덕진 - 수하 - 면채
여女 만채
1대代 2대 3대 4대 5대
이기경은 영조 32년 (1756년), 순조 19년 (1819년), 자는 휴길, 호는 소암痟菴, 본관은 전주, 지편 제현의 아들, 정조 1년 (1777년) 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정조 13년 (1789년) 에 식년式年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서 일하다가 강제문신講製文臣에 뽑힌 뒤 예조정랑을 지냈다. 이 때 이승훈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책을 얻어보고 도리어 승훈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정조 15년 (1791년) 에 진산사건이 일어났을 때 영의정 채제공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미온적微溫的인 태도를 격렬히 공격하다가 경원에 유배되었다. 정조 18년 (1794년) 에 방환放還, 이듬해 지평에 복직되었다. 그 뒤 이조좌랑을 지내고, 순조 4년 (1804년) 에 대비大妃의 재차 수렴垂簾정치를 반대하다가 단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왔으나 이남규의 탄핵을 받아 다시 운산에 유배되었다가 순조 9년 (1809년) 에 방면되었다.
022 동경대전東經大全 (1880년) 최제우崔濟愚
동경대전은 포덕문布德文과 논문학論文學 그리고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장不然其然章 등 이상 4편과 주문呪文 팔절八節 우음偶吟 등 각종 시구詩句들로 부록附錄을 곁들인 순 한문본으로써 한글로 된 용담유사龍潭遺詞와 자매姉妹編을 이루는 천도교의 경전이다.
원 저자 수운 최제우선생께서 이 책을 동경대전이라고 명명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천도교의 문헌들에 의하면 포덕문, 논학문은 1861년 (동학을 대각大覺한 다음 해) 작이고, 수덕문은 그 다음 해, 불연기연장은 1863년 작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들 4편과 부록들을 집성한 합본을 총칭해서 동경대전이라고 명명한 내력은 소상하지 않다.
본래 천도교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원 작자가 남겨놓은 것을 그대로 출판한 것이 아니다. 1864년 대구에서 저자 수운선생이 순교殉敎한 이후 이 책들은 모두 인멸회신湮滅灰燼되었다고 한다. 그 후 1880년 강원도 인제에서 최 해월선생의 기억을 더듬어 구송口誦하면서 복사각인複寫刻印한 것이 이 동경대전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책 가운데 이 최초의 간행본의 유무도 분명치 않았으나, 1890년 판 또는 연대 미상未詳의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관몰官沒문서 속에 끼어있는 책 등에는 성경대전聖經大典이라는 이름이 씌어져있다. 이러한 예로 미루어보면 동경대전은 의암 손병희선생 때에 지어진 명칭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음직한 일이겠다.
저자 수운선생의 사상적 계보系譜를 삼국사기에 적혀있는 최치원의 난랑비鸞郎碑서문에서 찾아보는 (유불선儒佛仙 3교의 영향) 예와 그의 가친 근암 공의 도학道學에서, 그리고 서학西學에 자극 또는 영향되었으리라는 설명마져 없지 않다. 여하간 단군신화 또는 민간신앙에서까지 그 영향을 견주어보는 것은 학구적 노력으로나 역사적 견지에서도 의당 있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이 책의 저작연대를 감안하여 그 시대적 배경을 소구疎究해본다면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7년) 을 치른 이후의 조선말엽의 사회적 상황을 살피는 일도 빠질 수 없겠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선 시기라면 명나라에 사대事大의 예禮를 갖추던 때를 지내고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는 근대적인 새로운 의식이 태동하던 때도 언급되지 않을 수 없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한 북학北學 또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이 싹트기 시작하여 1세기 동안에 걸쳐 신新 사조思潮를 창도唱導하여오던 시기라면 이른바 근대화의 노력도 없지 않을 때다. ‘유도불도儒道佛道 누累 천 년에 운運이 역시 다 했던가 (교훈가敎訓歌)’ 한 수운선생의 절규絶叫도 동학이고 실학파 학자들 머리에도 이미 부각浮刻된 이미지였으리라.
한편 이러한 신진기예新進氣銳의 젊은 학구學究들의 새로운 의식과는 반비례적反比例的인 수구적守舊的인 숭유사상崇儒思想이 더 한층 심화되어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허례허식虛禮虛飾과 반상귀천班常貴賤의 구별이 극심해져서 탐관오리貪官汚吏와 지방토호地方土豪의 행패行悖가 가중加重되었다. 실생활과 이용후생에 반대되는 학문으로 전락轉落된 느낌을 짙게 한 것이 조선조 말기의 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굶주리면서도 일하지 않는 선비의식이 나타난 것이다.
이와같은 신구사조新舊思潮의 갈등현상은 여기에서만 끊이지 않았다. 수운선생이 동학창도東學創道를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모진 가뭄에 의한 흉년이 드는가 하면, 홍수와 전염병의 유행 등 자연현상에서도 적지 않은 시련이 수반되게 된 즉 험악한 인심과 더불어 기아산상飢餓線上에서 해매는 창생蒼生의 울부짖음은 가위 도탄塗炭 중이라는 대명사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겹친 것이 집권계층의 횡포로부터 지방토호에 이르기까지 양민良民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極에 이르렀던 일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진주민란晋州民亂을 필두匹頭로 농민의 반란이 전국적인 규모로 번져간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은 농민들을 비롯한 일반서민들의 자각적自覺的 혁명의식革命意識에 의한 반항운동이 아니었다. 이 민란들은 몇 백 명이건 몇 천 명이건 일단 봉기蜂起되기만 하면 가혹苛酷한 보복報服을 당하고는 아무런 효험效驗도 거두지 못 한 채 평정平定되었다. 조선조 말기의 서민상庶民相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죽기 직전의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어떠한 종류의 반란이건 간에 동학혁명 이외의 반란은 그 많은 수에서도 다른 군읍郡邑에까지 조직적으로 번져간 예가 없었다. 이것이 무사상無思想 무혁명성無革命性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와같은 국내정세에 짝하여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해서 수운선생은 ‘서양사람들은 도와 덕을 이루어 그 조화가 미치지 않은 이 없다. 무력武力으로 쳐부술 때는 당하는 자 없다. 장차 중국이 망한다면 어찌 울타리 허물어지는 근심인들 없겠는가? (서양西洋 문인도성립덕급기조화文人道成立德及其造化 무사불성無事不成 공투간과攻鬪干戈 무인재전중국소멸無人在前中國消滅 개가무진지환야豈可無唇之患耶 - 논학문論學文)’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절박하게 느낀 듯 하다.
1840년에 일어난 중국의 아편전쟁阿片戰爭과 이 무렵 우리나라에도 양함洋艦이 자주 출몰한 일이 있었기에 국내적으로 인심이 매우 동요된 때인지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을 몸소 피부로 느낀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서구의 여러나라들이 각기 자기 세력의 신장伸張정책으로 널리 동방제국東方諸國에까지 통상通商을 곁들인 식민지 확장을 힘써온 소위 근대화과정의 일단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함지사지陷地死地 출생出生들아, 보국안민輔國安民 어찌할꼬 (근학가勤學歌)’ 한 절규는 이상의 절박한 현실을 몸소 당하는 우국지정憂國之情의 표현이라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실학사상가들이 남겨놓은 방대尨大한 문헌文獻에 비해 양으로는 족히 거론할 바 못 되는 수운선생 유저遺著의 특색을 보게된다. 한 발 물러선 입장에서 쓴 설명서형의 실학문헌에 비해 수운선생의 동경대전은 몸소 체현體現하는 절박한 표현들로 특징지우고 있다. 말하자면 수운선생 자신이 20년 고행苦行 끝에 순교殉敎의 경지에서 이룬 성서聖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매우 적은 분량으로 짜여서 있으나 여러 가지 시사성을 지니고 있다. 정선精選된 문장으로 짜여진 이 성서聖書는 너무도 간결하게 다듬어졌기에 쉬이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이 책의 본문 4편 중, 포덕문 528 자, 논학문 1,342 자, 수덕문 1,054 자, 불연기연장 527 자, 모두 3,450 자에 주문, 팔정, 우음 등 각종 시문으로 된 1,396 자의 부록을 합해서 4,846 자로 되어있다. 이같이 적은 자수의 책이면서도 난해難解한 대목도 적지 않아 해독하기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매우 주도면밀周到綿密한 방법을 모색했다고 볼 수 있다. 뭇 사람들에게 자기의 뜻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순 한글로 된 용담유사를 저술해서 이를 보완했다. 용담유사에서는 실로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인 언어를 구사驅使한 점과 또 비유比喩로써 우회둔사迂廻遁辭의 방법으로 동경대전의 난해성을 잘 풀어놓았다.
명실공히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자매편姉妹編이다. 그리고 동경대전 본문 4편 중에서 저자의 뜻을 개괄적으로 담고있는 장이 첫 번째의 포덕문과 논학문이다. ‘먼 옛날부터 봄 가을이 어김없이 갈아들고, 계절이 다름없이 돌아온다 (개자상고이래蓋自上古以來 춘추질대春秋秩代 사시성쇠四時盛衰 불천불역不遷不易)’ 이렇게 시작되는 이 책 속에 천도天道의 종법宗法을 설명한다. 먼저 포덕문에서 밝히는 선생의 역사관은
우로雨露의 은택恩澤 (자연에 대한 감사) 도 알지 못 하던
우부우민愚夫愚民의 상고上古시대를 설명하고
2. 경천명敬天命 순천리順天理하던 요순성세堯舜聖世의 중고中古시대를 흠탄경모欽歎敬慕한 다음
3. 천리천명天理天命을 순종하지 않고, 각자위심各自爲心하는 근세近世 즉 수운선생의 시대, 이상 3단계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수운선생의 시대를 불순도덕不順道德, 미지시운未知時運의 시대로 보았다. 여기서 새 시대를 전망하는 동학東學 즉 천도교天道敎의 출현은 역사적 사명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 역사적 사명은 수운선생의 자의가 아니고 상제上帝의 명교命敎에 의한 천명天命으로써, 너를 세상에 나게 하여 미지시운未知時運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서양 사람들은 전쟁할 때마다 이기니 천하가 모두 망하지 않겠는가’ 이 때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할 계책計策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 글을 잘 받아 그 가르침을 존중하라는 이상이 포교布敎의 개의槪意다.
논학문은 학문을 논한 글이다. 이 장에서 전술前述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과 ‘수심정기守心正氣’ 그리고 문답식問答式으로 된 주문해설呪文解說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어느 것을 물론하고 한울님을 지극하게 위하는 방법을 설명한 내용이다. 한울님을 위하는 자세라면 높은 인격의 경지를 의미하게 됨으로 결격缺格을 의미하는 태만怠慢을 경계警戒하는 말이 된다. ‘인의예지仁義禮智 선성지소교先聖之所敎 수심정기유아지갱정守心正氣惟我之更定 (수덕문)’ 글에서 이 수심정기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으려니와 주문呪文은 ‘지위천주지자至爲天主之字’ 라고 했다.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글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와고성지송주臥高聲之誦呪 아성도지태만我誠道之怠慢 (수덕문)’ 이라고 했듯이 주문을 읽을 때는 단정端正한 자세와 경건敬虔한 마음가짐으로 임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수덕문 역시 덕德을 닦는 글이다. 수도의 방법과 절차를 설명하는 것으로 전편全篇을 채웠다. 그러니 이 장章에서는 수운선생의 덕행德行과 제자들의 도성덕립道成德立을 찬미讚美한 것이 두드러진다. 포덕문과 논에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의식危機意識과 불순천리不順天理로 각자위심各自爲心하는 세태인심世態人心 등 비교적 자극적인 표현으로 중언부언重言復言 경계警戒한 반면 여기서는 수운선생 자신의 가문家門을 찬미讚美하고, 용담성지龍潭聖地를 예찬禮讚한 부드러운 문장이 특색이다. ‘혹문유언이惑聞流言而 수지修之 혹문유주이惑聞流呪而 송언誦言 개불비재豈不非哉’ 풍문風聞을 듣고 수도하거나 얻어들은 주문을 외우는 자 있다고 하니 어찌 올바른 수도가 되겠는가 하는 근심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희열喜悅 넘친 표현이 전편全篇에 흐르고 있다. ‘아름답다 우리 도道의 보람이여 (미재美哉 오도지행吾道之行), 붓을 들어 글을 쓰면 사람들은 왕희지의 필적인가 의심하고 (투필성자投筆成字 인역의人亦疑 앙희지적王羲之跡), 입을 열어 시구를 읊으니 누가 초부인줄 알랴 (개구창운開口唱韻 숙불복초부지전孰不服樵夫之前), 허물을 뉘우친 이 사람은 재벌의 부력을 탐내지 않는다 (참구사인懺咎斯人 욕불급석씨지자慾不及石氏之貲)’ 이렇게 노래한 수덕문의 끝절에도 ‘공경恭敬과 정성을 다 하여 가르치는 말이니 어기지 말라 (경이성지敬而誠之 무위훈사無違訓辭)’ 의 주의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불연기연장不然其然章에 있어서는 우주만유宇宙萬有는 그 생성과정에서 두 가지의 상반된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만물은 분산고립分散孤立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일체一體이며, 고정불변固定不變이 아니라 부단히 성장발전成長發展하는 것으로써 한울님에 의해서 기연其然의 통일원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책에 표현된 한울님의 관념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포덕문에서는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이 순간에 어떤 신비로운 말씀이 문득 귀에 들려왔다. 놀라운 생각에 일어나서 물은 즉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고 부른다> 고 했고, 논학문에서는 <내 마음 (천심天心) 이 곧 네 마음 (인심人心) >’ 이라고 한 대목이다. 전자는 한울님에 대한 인식방법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울님 즉 상제는 경외畏敬의 대상만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상제를 알아볼줄 모르느냐? 이 말씀은 가까이 하고 친밀한 마음으로 그러나 경외지심敬畏之心을 갖춘 자세로 한울님을 알아봐야 한다는 뜻이 된다. 이상의 설명이 한울님의 인식방법이라면, 후자는 한울님을 위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즉 ‘내 마음’ 이 곧 ‘네 마음’ 이 될 경우 한울님의 인식의 경지를 넘어선 상태다. 시천주侍天主의 입문入門이다. 이와같이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게 되는 상태를 자각自覺의 경지境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울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일 때 사람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이상 두 가지로 보여진 한울님의 관념은 이론적 취의取義에 불과한 논법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절대자인 한울님을 사람이 모실 수 있다는 적극적인 인격주의가 나오게 된다.
말하자면 이 책에 담겨져 있는 여러 가지의 방법들을 한 말로 간추려보면 인생격人生格 향상을 설명한 인간지상주의人間至上主義의 설법說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별무 타 도리 <성경신> 3자 別無他道理誠敬信三字 (좌잠座箴)’ 라는 가르침으로, 성실해라, 경건敬虔한 마음가짐을 잃지 말아라, 신의信義를 생명같이 지켜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모두 인간격의 위신威信을 잃지 말라는 교훈으로 요약된다. 자아自我에 대한 자각과 신념을 갖게 하는 너무도 절실한 문장력이 전편全篇에 흘러넘친다. 그리하여 저자 자신이 이에 의해 순교殉敎하고 뒤따른 수백 만 敎徒가 모두 순교의 정신으로 이를 체행體行했다고 할 수 있다.
<사족蛇足> - 동경대전은 고조선의 천부경의 '인내천사상 - 사람이 곧 하늘'> 을 이은 동학사상으로써, 서학 (천주학의 성경 - 하나님사상) 에 대비된 대한 (동양적) 의 유일한 경전임
023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900년 경頃) 혜초慧超
신라가 3국을 통일 한 뒤 신라사람으로써 입당入唐하는 사신使臣, 상인, 유학생, 구법승들이 많았고, 그 무렵 당에서는 천축天竺(인디아)로 가는 학승들이 많았다. 의정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서문에서 ‘그가 아는 50여 법사法師가 장안을 떠나 천축으로 갔지만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두서넛 밖에 안 된다’ 고 하였다 (거자수영 반백유자 근유기인 去者數盈半百留者僅有幾人). 그 때 신라사람으로써 천축에 간 사람은 대개 당승들과 동행이었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에 의하면, 신라사람으로써 천축에 간 사람은 아리야발마, 혜업, 현태, 현격, 혜륜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사람을 더하여 모두 7인이다.
아리야발마는 7세기 (정관년貞觀年, 중국년호) 에 장안을 떠나 인디아의 라지그리하 등 불적佛蹟을 참배한 후 나난다사寺에서 초사중경抄寫衆經하다가 병들어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 하고 70세에 열반涅槃했다. 혜업도 정관년 중에 서유西遊하여 부뚜하가야의 마하보드히사와 나란다사에 거주하면서 청독聽讀하다가 60세에 나란다사에서 열반했다. 현태는 인디아 말로 그 이름이 살바갸데와인데 7세기 (영휘년永徽年) 에 당으로부터 육로로 中인디아에 도착하여 부뜨하야가의 보리수菩提樹를 참배한 후 경륜經綸을 연구하여 당에 돌아왔으나 그 뒤 소식을 모른다. 현격은 정관년에 당승 현조법사와 같이 마하보드히사에 이르러 40여 세로 돌아오지 못 하고 열반했다. 혜륜은 인디아어로 이름이 쁘라갸발마인데 현조법사와 같이 인디아에 갔다가 이곳 저곳 인디아에서 주지 노릇을 하면서 40여 세까지 살았으나 그 뒤 소식을 모른다. 이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장안에서 해로海路로 인디아에 갔으나 모두 돌아오지 못 하고 열반涅槃했다.
백제百濟의 겸익은 6세기 초에 인디아에 가서 5년 동안 머물다가 많은 율부경전律部經典을 가지고 돌아와서 우리나라 율종律宗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혜초는 젊은 나이로 입당하여 8세기 초 (720년 경) 해로로 인디아에 가서 인디아 (5천축국) 뿐만 아니라, 인디아 주변의 여러나라를 여행하고 당의 서북변방 구자국龜玆國에 도착한 때가 727년 (개원開元 5년) 11월 상순上旬이었고 그 후 그는 계속 당에 머물렀는데 그의 생졸년生卒年, 입당 시기, 인디아로 출발한 시기 등을 정확하게 모른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현존하는 것은 없고, 다만 원본이 있었음을 고증할만한 역사적 문헌으로써 당대唐代의 혜겸이 지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권 100’ 과 1908년에 프랑스 사람 동양학자 펠리오 P. Peliot 가 돈황석굴敦煌石窟에서 발견한 사본寫本으로써 제명題名도 저자명著者名도 찢어져 없어진 잔간殘簡이 있을 뿐이다. 이 잔간은 9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일체경음의에는 혜초 왕오천축국전 3권이라는 제목과 혜초 왕오천축국전에 들어있는 낱말, 고유명사 등의 낱말풀이가 들어있을 뿐이다.
천축天竺이라는 말은, 대당서역기 권 2의 첫머리에서 현장법사는 그 어원語源에 대하여서는 이설異說이 많고, 천축을 그 전에는 신독身毒 혹은 현두賢豆라고 하였지만 지금의 정음正音대로 발언한다면 인디아라고 하였다. 본래 범어梵語에서 신두 sindhu 신독은 큰 강 혹은 바다를 뜻하며, 실제로는 현재의 인더스강과 그 유역을 신두라고 불렀고, 지금도 인디아의 국가에서 이 지방을 신두라고 부르고 있다. 신두를 페르시아 사람들은 힌두 hindu 현두로 발음하였고, 페르시아를 거쳐서 인디아에 온 옛 그리스 사람들은 신두나 현두를 인더스 Indus 인디아로 발음하고, 인더스라는 말에서 현대 영어의 인디아 India가 파생派生되었다 (Dr. B. L. Atreya : What is Hinduism - 세계힌두종교대회에서 발표 논문, 1965년, 뉴델리). 이렇다고 하면 신두라는 범어가 중국 한자로 신독, 현두, 천축, 인도 등으로 음역音譯되었음을 알 수 있다. 5천축이라고 함은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을 미루어, 동천축은 현재의 비하르지방과 구시나가로국을 포함한 우따르지방의 북반부北半部, 중천축은 스라와스띠를 포함한 우따르지방의 남반부와 마드햐지방의 북단北端, 남천축은 안드하르지방, 서천축은 라자스탄지방의 북부와 판잡지방의 남부, 그리고 북천축은 히마챨지방과 판잡의 북부를 가리킨다고 보면 대략 틀림이 없다.
혜초가 해로로 인디아에 상륙한 곳이 현존하는 기록에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여행순서로 보면 먼저 나형국裸形國과 평원지대를 거쳐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구시나가르에 도착하였는데, 구시나가르는 인디아의 남쪽 바다, 인도양 서쪽 바다, 아라비아해 동쪽바다, 뱅갈만 그 어느 바다에서도 가장 먼 우따르지방에서도 현재 네팔과 국경지대에 가까운 북쪽 끝이다. 혜초가 해로로 중국쪽에서 인디아에 갔다면 뱅갈만쪽으로 상륙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뱅갈만쪽에서 인디아에 들어서서 마하보드히사, 나지그리하, 베나레스, 나란다, 스라와스띠, 빠뜨나, 구시나가르 등 불적지佛蹟地를 순례하자면 지리적 조건 때문에 현재에도 불편하지만, 부득히 그런 순서가 되듯이, 먼저 마하보드히사寺, 라지그리하, 나란다를 한몫에 보고난 다음, 서쪽에 훨씬 떨어져있는 베나레스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동북쪽으로 와서 빠뜨나를 보고, 거기서부터 서북쪽의 스라와스띠로 갔다가, 다시 북상하여 구시나가르와 룸비니, 바나까빌라, 바스뚜까지 가면 거기서 일단 불적 순례는 끝나고, 거기서 중부 인디아로 오자면, 부득히 대략 같은 길로 빠뜨나를 거쳐서 베나레스까지 다시 돌아와서, 중부 인디아로 남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마하보드히사, 라지그리하, 나란다를 한몫에 보고, 곧장 북상하여 빠뜨나, 스라와스띠, 구시나가르, 룸비니바나, 까빌라바스뚜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같은 길로 일단 빠뜨나까지 왔다가, 거기서 서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베나레스에 들른 다음, 중부 인디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혜초의 현존하는 기행문에서는 동천축 이야기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라지그리하, 나란다, 빠뜨나, 스라와스띠 등 유명한 불적지로써 혜초가 반드시 가보았으리라고 생각되는 곳들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고, 동천축여행의 제일 마지막 목적지로 추정되는 베나레스와 마하보드히寺 이야기만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혜초는 뱅갈만쪽, 지금 서파키스탄의 간지스강 하류지역으로 인디아에 들어서서 서쪽으로 북상하면서 라지그리하, 나란다, 빠뜨나를 한몫에 보고, 계속 북상하면서 스라와스띠, 구시나가르, 룸비니바나, 까빌라바스뚜끼지 갔다가, 다시 동남으로 내려와서 베나레스에 들려서 거기서 마하보드히사에 갔다가, 다시 베나레스로 돌아와서부터는 기행문의 내용 그대로 지금의 알라바하드를 지나서 남하하여, 3개월만에 안드하르지방에 이르러 서북으로 북상하여, 라자사탄 북부지방에 2개월만에 이르고, 다시 북상하여 3개월만에 히미챨지방에 이르렀다. 그 다음 북상하여 카슈밀에 가서, 거기서부터 대략 지금의 동파키스탄, 이란 , 아프카니스탄으로 갔다가 동북으로 돌아서서 티베트, 몽고지방을 지나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구시나가르는 현재에도 거의 황무지荒蕪地이며, 임종臨終한 누운 불상佛像이 있는데, 혜초는 이 와불상臥佛像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대당서역기에도 와불상 이야기가 나온다. 다음 베나레스의 드하르마챠크라사寺 (달마작갈라승사達磨斫葛羅僧寺, 지금의 문드하꾸띠 비하라라고 하는데 초전법륜사初轉法輪寺라는 뜻) 에서 ‘위에 사자상獅子像이 있고, 그 당幢이 매우 아름답고 굵기가 다섯 아름드리나 되고, 그 문리文里가 가늘다 (상유사자上有獅子 피당극려彼幢極麗 오인합포五人合抱 문리세文里細)’ 라고 있는 것은 아쇼까왕이 세운 사자상이 그 꼭대기에 있는 석주石柱인 듯 하다. 이 사자상은 지금 인디아의 국장國章이며, 베나레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석주 밑통은 아직 본 자리에 남아있다.
다음 불교 아닌 다른 교도敎徒들이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르고 다닌다고 하는데 (외도불저 의복신상 도회 外道不著衣服身上塗灰) 현재에도 베나레스시市 아씨가街의 간지스강가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아주 홀랑 벗은 도인道人이 살고있는 것을 필자도 보았다. 역시 몸에는 재를 바른다. 인디아에 있는 나형외도裸形外道는 고금을 통하여 자이니즘의 공의파空衣派로 인정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들이 사어대대事於大大라고 왕오천축국전에 쓰여있음은 사어대인事於大人의 오사誤寫일 것이다. 대인은 자이니즘의 교조敎祖 마하아비이라 (marhavi – ra, 대웅大雄) 의 의역意譯이다. 그리고 마가다국 뿐만 아니라 오천축에 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가 모두 행해지고 (대소승구행大小乘俱行), 왕들은 모두 불교를 신봉하며, 감옥도 없고, 죄인을 때리는 법도 없고, 다만 벌금만을 받으며, 사냥하지 않으며, 도둑은 있으나 물건만을 빼앗을 뿐 사람을 상해하지 않고, 항상 더워서 녹음綠陰이 우거지고, 눈 서리가 오지 않고, 토기土器 냄비에 맴쌀밥을 지어 먹으며, 간장 없이 소금만 사용하며, 세금 없고 곡식으로 왕에게 바치며,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자는 적고, 부자는 아래옷 윗옷을 다 입고, 가난한 사람은 아래옷 한 조각만 입으며, 소젖을 짜 먹는다고 했는데, 이런 이야기는 인디아의 현재의 생활풍습에 견주어보아도 모두 사실이다. 한 말로 채식菜食주의, 무저항無抵抗주의, 불살생不殺生주의가 지배적 사상인 사회적 풍토를 의미한다.
왕이 마치 옛날 우리나라 원님 모양으로 백성들의 여러 가지 소송싸움을 가만히 앉아서 들으면서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성내지 않고, 차근차근 말로 타일러서 시비是非를 가려주면 백성들은 다시 두 말 하지 않고 왕의 말에 따른다고 하였는데 (왕청 불진 완완보운 여시여불시 피백성등 취왕일구어 위정불재신 王聽不日眞緩緩報云汝是汝不是彼百姓等取王一口語爲定不再言), 이는 인디아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논리적이고 말을 좋아하는 성질을 그냥 그대로 묘사描寫한 것이다. 인디아 논리학은 사실상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왕이나 수령首領들 부자들은 2층 3층 집을 짓고 지붕은 평탄平坦하게 만들고, 기타 백성들은 모두 우리나라 초가처럼 비가 잘 흘러내리도록 풀로 덮고 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코끼리, 말, 소가 많고, 금은金銀은 별로 나지 않고, 소젖만 마시며, 사람들이 착해서 도살屠殺할줄 모르며, 고기를 팔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뉴델리에서 쇠고기 통조림을 사려면 여간 찾아다니지 않고서는 못 산다 (토지인불다애 살국시점간 불견유도행 매육지처 土地人不多愛殺國市店間不見有屠行賣肉之處).
까빌라바스뚜의 부처님 나신 곳에서 무우수無憂樹를 보았다고 했는데 (무우수견재無憂樹見在), 무우수는 인디아에서 옛날부터 범어梵語로 씽샤빠 simsapa 혹은 아쇼까 asoka 라고 불러왔는데, 아쇼까를 무우왕無憂王이라고도 하듯이, 아쇼까나무를 중국 사람들이 무우수라고 한자로 음역音譯하였다. 아쇼까의 <아> 는 <무無> 를 뜻하고, <쇼까> 는 <슬픔> 혹은 <근심> 을 뜻한다. 아쇼까나무는 인디아의 전단향나무 등 다섯 가지 성수聖樹 가운데 하나이며, 3월이면 철쭉꽃 비슷한 새빨간 꽃이 피고 잎은 나중에 피는 큰 나무이며, 현재 베나레스 힌두 유니버시티 캠퍼스 안에도 많이 있다.
나가르주나 (용수龍樹) 의 이야기가 나오는 남천축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미루어보아 지금의 안드하르지방의 이야기이고, 콩이 나고 벼가 잘 되지 않으며, 은銀이 나며, 대식국大食國 (사라센) 의 침공을 자주 받는다는 서천축 이야기는 라자스탄지방의 이야기이고, 카슈밀에게 종종 피습을 당하며, ‘의산작성이주依山作城而住’ 한다는 북천축 이야기는 판잡북부와 히마챨지방의 이야기다.
오천축을 다 돌아다니면서도 술 취하여 서로 때리며 싸움을 하는 사람을 못 보았다고 했는데 (편력 오천축 불견유취인 상타지자 遍歷五天竺不見有醉人 相打之者) 필자도 약 2년 동안 인디아 각지를 여행하면서 술 취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부자들도 집안에서만 술을 마신다고 한다.
혜초는 오천축과 그 주변의 나라들을 여행하고 다시 당으로 돌아올 때까지 여러 곳에서 견문한 정치, 종교, 풍속 등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기록을 왕오천축국전에 남겼고, 그 사료로써의 가치는 이루 말 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펠리오는
‘1908년에 새로 발견된 이 여행기는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와 같은 문학적 가치도 없고,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같은 정밀精密한 서술도 없다 … 그의 문장은 평판平版스럽고 … 그의 서술은 절망적으로 간편하고 단조롭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동시대적 기록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8세기 전의 인디아제국에서 불교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 서북인디아, 아프카니스탄, 노령露領 투르키스탄 및 중국령 투르키스탄에 관해서는 그 이외의 기록에서 볼 수 없는 지식을 많이 제공해준다.’ (백성욱박사 송수頌壽기념 불교논문집 305면, 혜초왕오천축국전 연구사략硏究史略).
<사족> 신라의 삼국통일은 동서 2국통일 - 백제와 신라의 통일이다. 더구나 외세外勢 당나라의 힘을 빌어 병합한 통일이었으므로 자랑스러울 것 없는 역사임 (Daum Blog <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참조)
02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김부식金富軾
각各 본기本紀 고려 인종 23년 (1145년) 에 김부식 (1074 - 1151년) 에 의하여 찬진撰進된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의 정사체正史體로써 신라 통일시대까지 포함한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삼국유사와 더불어 현존 최고의 史書다. 내용은 대체로 신라를 위주로
첫째, 신라본기新羅本紀 12권,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10권, 백제본기百濟本紀 6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 도합 50권인데, 매권의 분량은 현존 최고의 목판본木版本인 중종 7년 (명明 정덕正德 7년, 1512년) 의 소위 정덕판으로 20장 내외 밖에 안 되어 구판舊版 장책裝冊으로 9책 또는 10책으로 되어있다. 이 책이 다룬 기간은 신라의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개국을 전한前漢의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B. C 57년) 으로 잡아서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9년 (935년) 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할 때까지 992년간으로 되어있으나, 삼국사기의 기년紀年문제는 별도로 생각하여야 할 문제이며, 신라와 백제의 선행先行된 삼한三韓사회시대나, 한漢의 군현郡縣시대가 다 삼국정립鼎立의 체계 속에 용해溶解되어버렸다. 하여간 신라의 개국을 선두로, 20년 후에 고구려 (B. C 37년), 다시 19년 후에 백제 (B. C 18년) 의 순서로 삼국이 각각 개국한 체계하에서 각국의 왕세계王世系에 따라서 각 본기는 기년체紀年體로 서술되어 있는데, 신라에서는 제 17대 내물왕 (356 - 401년), 백제에서는 제 12대 근초고왕 (346 - 374년), 고구려에서는 제 6대 태조왕 (B. C 82 - 후 145년) 대 이후는 각각 믿을 수 있는 역사시대로 들어가며, 그 이전은 기년紀年이나 기사記事에 대하여 믿기 어려운 부분으로 생각하여왔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이 책을 통하여 삼국의 시조始祖 개국전설開國傳說 - 신라의 박혁거세, 석탈해昔脫解, 김알지金閼智의 삼성시조三姓始祖, 고구려의 동명성왕東明聖王 (주몽朱蒙), 백제의 온조왕溫祚王 - 각국의 고대국가 형성과정, 그리고 삼국 간의 동맹 이반離叛을 통한 격렬한 쟁패爭霸의 양상, 나당연합羅唐聯合에 의한 신라의 삼국통일, 그리고 통일기에 있어서 중대 하대의 정치적 추이推移를 근간根幹으로 각국의 고전古傳, 고속古俗의 편린片鱗을 나타내고 있다.
김부식이 현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는 이미 백제, 고구려가 사직社稷을 잃은지 500년이 가까웠고, 그 후 신라통일기를 지나서 신라가 멸망한지도 200년이 넘은 시기인만큼 삼국에 관한 사서나 사료가 고의적으로 또는 자연적으로 인멸湮滅되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으니, 삼국사기가 우선 사료면에서 빈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도 이 때만 하여도 김부식이 이용할 수 있는 고전이 남아있었던 것은 삼국사기에 인용된 다음과 같은 서목書目으로 알 수 있다. 즉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신라본기新羅古記, 신라고기新羅古事,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郎世記, 계림잡전鷄林雜傳, 고승전高僧傳, 악본한산기樂本漢山記,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과 그의 문집 등이 인용된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서 삼국시대에 각각 국사 편찬이 있었음을 알고있으나 그 내용이나 소전所傳에 대하여서는 도무지 아는 바가 없으며, 오히려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에 망명, 귀화歸化한 자들의 의하여 저술된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기百濟紀, 백제신찬百濟新撰의 3종의 사서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인용되어 그 원문의 편린片鱗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본서에 인용한 사서로써는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를 비롯하여 진서晉書, 위서魏書,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북사南北史, 청서淸書, 당서唐書, 신당서新唐書, 통전通典, 책부원구冊府元龜, 자치통감資治通鑑, 가침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 영고등의 신라국기新羅國紀 (사실은 이정의 신라국기를 오인誤認) 등을 열거할 수 있으며, 특히 삼국통일 전후의 복잡한 수隋, 당唐과의 군사 외교적 기사記事에는 왕왕이 자치통감의 기사를 그대로 전용한 부분도 많다. 그리고 앞서서 김부식이 인용한 국내의 제諸 기록도 신라통일기를 통해서 전해온 것보다 오히려 고려초기에 들어서 만들어진 것도 상당히 있는 것 같다.
김부식은 인종시대에 국제적으로는 금金과의 복잡한 관계를 현실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난경難境에 부딪혔으며, 국내적으로는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는데, 묘청일파 같이 현실을 무시하고 자주적인 고유사상을 표방한 맹용猛勇을 가질 처지는 못 되었고, 그의 철저한 유학의 교양으로 사대적事大的인 사상을 강하게 지닌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 원래 고전古傳이 희소稀少한데다가 그 고전은 무굴蕪詘함이 많아서 그것을 역사기록으로 옮기기 어려운 점을 지적하고 있으니, 이것은 역시 김부식이 유학자로써 중국의 고교高交한 문화를 표준으로 삼는 견해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얼마 남지 않은 고전도 생략, 폐기廢棄된 것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그와같은 추측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앞선 구舊삼국사의 동명왕전설이 훨씬 자세하였다는 사실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고려 고종 시의 이규보에 의하여 지적된 바 있으며, 그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론에서 언급하고 있다.
. 연표年表 - 다시 삼국시기의 내용에 돌아가서 삼본기三本紀 다음에 연표 3권은 삼본기의 연대를 중국, 신라, 고구려, 백제의 순서로 대조표對照表를 제시하고 있다. 이 연표는 기계적인 대조표로써 별다른 설명이 없는 중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원년의 난에 ‘후차지진덕성골後此至眞德聖骨’ 이라 하였고, 진덕왕 말년 (8년) 난에 ‘종차사하진골從此巳下眞骨’ 이라고 하여 신라 3대代 구분과 왕통王統의 골품骨品과의 관계를 특기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의 3대 구분법과 다른 점을, 아울러 생각할 문제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통일 이후에서 중국측 연호와 연대의 변역變易에 부합되지 않은 경우를 언급한 설명의 기사가 약간 있다. 그리고 끝에 궁예, 견훤의 흥기興起와 멸망滅亡을 각 고구려, 백제란에 기입하고 있다. 전기체傳記體의 정사체正史體로써 중국의 정사에서는 사기史記 이래 연표 외에 제후표諸侯表, 공신표功臣表 등 여러 표가 마련되어 있으나 이 책은 연표 뿐이다.
. 잡지雜志 - 지志 9권은 잡지로 총괄하여, 제 1 제사祭祀, 악樂, 제 2 색판色版,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제 3 - 제 6 4권을 지리지地理志로, 제 7 - 9권을 직관지職官志로 삼고 있다.
이 지志는 대부분이 신라를 중심으로 그 통일기의 상태에 관해서 서술되고 있지마는 신라의 고유한 고전古傳도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신라의 제사에 관하여 제 2대 남해차차웅 3년에 시조묘始祖廟를 처음으로 세우고, 4시時 제祭를 올리게 하고, 친매親妹 아노를 주제主祭로 삼았다는데 고대사회에서 제주祭主는 청정淸淨한 처녀로 삼는다는 고속古俗의 모습을 전하며, 내을신궁奈乙神宮을 시조 탄강지誕降地에 창립하였다는데 내을은 태양의 별 계통어別系統語로써 날 (일日) 에서 온 것을 나타내며,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장소와 사성문제四城門祭 등은 모두 신라의 역사적 고속을 나타내는 풍부한 사료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 백제에 관해서는 양서梁書, 당서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등 중국 측 사서에 나타나는 기사로 그 고속을 말하고 있으니 양국에 관해서는 본기기사本紀紀事에 나타나고 있는 것 이외에 고유한 소전所傳이 없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 고유한 골품제도骨品制度가 관계색복官階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등 모든 백성생활에 규제를 한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직관지職官志에서는 직원령職員令이 주로 되어 각 관서官署와 직원 배정配定의 연혁沿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김부식에 의하여서는 각 관서의 체제나 연혁에 관해서 알 수 없는 점이 많아서, 그 대부분이 무질서하게 퇴적堆積된 단편적 사료로써 제시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는데, 그 중에 무관武官에 관해서 가장 풍부한 사료를 제공하여 이것을 통하여 신라의 군제軍制를 살필 수 있다. 즉 신라의 군단軍團의 기본적 명호名號로써 당幢이나 군단주둔지軍團駐屯地의 정停에서 특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신라국의 발전에 따른 각종 군단의 설치 - 6정停, 9서당誓幢, 10정, 수도방위首都防衛로써의 5기정畿停 등과 군단의 표징表徵을 금색襟色으로 구별하였음을 알리고 있다. 또 유관儒官으로써 중앙에국통 國統, 주州에 주통군州統郡에 군통群統이 배치되었는데 그것이 무관조武官條 말미末尾에 붙어있는 것은 군제軍制와 유관제儒官制가 어떠한 유기적有機的 관련이 있는 듯도 하다. 끝으로 외관조外官條에는 신라의 정복과정征服過程에 처음에는 신부지新附地에 군정관軍政官인 군주軍主를 두었고, 안정기에 들어서서 민정관民政官인 사仕 (사使) 대大 등으로 대체하였고, 정복지의 무마撫摩 안도安堵의 책策으로 주어진 외위外位와 신라 본령지本領地와의 경위京位와의 그리고 후에 고구려 백제 유민遺民에 대우한 방식에는 본국의 관위官位와 신라의 경위京位와의 차별적인 대조의 모습을 알리고 있다. 그 외에 지志 중에서 가장 귀중한 사료는 지리지地理志이며, 각 주州 군현郡縣의 고명古名과 경덕왕대에 한자로 고명과 연관을 지어서 개명한 것을 기록하여 연혁沿革을 알리고 있는데, 고지명古地名의 표현은 대체로 이두식吏讀式으로 하여서 고어古語와 이두吏讀의 연구에 풍부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김부식시대에 불명不明으로 된 지명을 한 무더기로 열거列擧한다.
. 열전列傳 - 권말卷末 열전 9권 중 3권은 신라통일에 있어서, 김춘추 태종무열왕과 더불어 통삼統三의 원훈元勳으로 신라통일기를 통해서 신라인의 위대한 존숭尊崇을 받았던 김유신전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여爾餘의 7권에는 삼국의 충효忠孝, 화랑花郞, 문인文人 혹은 반역叛逆의 인물 80명 (부록된 부자, 형제, 친우관계의 인물까지 포함) 중 고구려인은 12명, 백제인은 겨우 3명 뿐이며, 나머지 65명은 다 신라인으로 되어있는데 이 중에서도 유래由來된 사료를 살피면, 고구려인이나 백제인은 중국측 사료에서 서술한 것이 불소不少하니 순연純然이 고유한 사전史傳에 의한 것은 더욱 그 수효가 적어지는 것이다. 그 중에서 밀우密友, 뉴우紐友, 과달過達 등은 고유한 것으로 보인다. 열전의 편차編次를 본다면 그 중에 어느만큼의 분류가 있는 듯 한 것은 제 7권에는 신라의 화랑도 13명이 들어있고, 제 6권에는 강수, 최치원, 설총 등 신라의 유학자 문인이 모여있는데, 고승전이 없는 것은 김부식이 유학 지상주의자儒學至上主義者이기 때문으로 보며, 제 8에는 향덕向德, 성각聖覺, 일실혜一實兮, 물계자勿稽子, 백결선생百結先生, 김생金生, 효녀 여은, 설씨녀, 도미 (백제인) 등을 모았는데 대개 충신, 효자, 절조節操있는 인물 또는 기행奇行의 풍류객風流客들을 모아놓고, 끝으로 제 8, 9권에는 창조리, 개소문, 궁예, 견훤 등은 반역전叛逆傳으로 생각하여 배정한 것 같다. 하여튼 열전은 역시 독자적인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 구舊 삼국사와의 대비對比 - 앞서 잠깐 언급한 김부식 이전의 구舊 삼국사 또는 해동삼국사, 전前 삼국사는 다같은 김부식 이전의 삼국사의 존재를 말하는 것인데, 이규보의 동명왕 시詩의 분주分註로 설명한 동명왕본기의 모습을 삼국사기와 비교, 분석을 하여본다면 양자 간에는 몇몇 가지 점에서 그 특색의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이규보가 지적한 것은 ‘매우 기사記事를 약略하였다’ 고 한 것인데, 기사라는 것은 결국 ‘신이지적神異之迹’ 또는 ‘대이지사大異之事’ 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종류의 생략은 양자 간에 전권全卷을 통해서 행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합리주의적인 사관史觀을 가진 김부식은 유학의 그의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 중에서 ‘기고기문자其古記文字가 무굴蕪詘하고 사적事迹이 궐망闕亡함으로써 오후吾後의 선악善惡, 신자臣子의 충사忠邪, 업방邦業의 안위安危, 인민人民의 이란理亂이 다 발로發露하여 근계勤戒를 내릴 수 없다’ 고 하였으니, 그의 사관史觀은 교훈적역사를 지향하여 고유한 고전古傳은 많이 생략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부식의 사관은 전권에 긍亘하여 붙인 28조의 사론史論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두드러지게 유교적이고 중국 중심주의로 되어있다. 그리고 현 삼국사기는 신라 제일주의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구舊 삼국사가 대략 고려 초기에 편찬된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는 고려왕조와 남南고구려와의 계통系統관계가 강조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는데, 김부식시대에는 신라 경순왕과 왕씨왕조王氏王朝와의 사이의 혼인관계가 강조되어, 신라와의 건통健統이 새로이 주장 (경순왕 기말에 사론史論) 되어, 여기에 신라 위주의 새로운 체계로 삼국사기가 다시 구성된 것을 느끼게 한다. 요컨대 삼국사기가 편찬된 시대와 주재자主宰者 김부식의 정치적 위치 및 삼국사기의 기술 자체에서 새로운 편찬목표로
중국사료를 많이 채록採錄하고
유교적입장을 강조하였고
신라를 위주로 하였으며
고려왕실과 신라왕실과의 관계를 명시한 것으로 보는 설이 근
자에 나오고 있는데 대략 맞는 설이라 하겠다.
. 간본刊本 -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편찬 후 바로 의종 시에 간행한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고구려의 중천왕본기 12년조에 위장魏將 위지해尉遲楷의 이름 해 자가 장릉長陵 (인종) 의 휘諱와 같아서 ‘명범장릉휘名犯長陵諱’ 이라고 분주分註를 남기고 있는 것은 고려간본의 자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왕응린의 왕해玉海에 해동삼국사기를 순희 원년에 헌서獻書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니 이 때에 이미 삼국사기가 간행되어 송나라에 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처음의 서명書名은 해동삼국사기라고 한 것을 알 수 있고, 중종 7년 (정덕 7년, 1512년) 에 경주부사 이계복 등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것이 기존 최고판最古版으로 되어있다. 이후 조선왕조 후기에 들어서서 영조 중기 이후에 주활자鑄活字로 간행한 것이 있는데 이것도 많지 않다.
<사족蛇足 - 삼국사기는 대한의 유일한 정사이나 김부식의 사대사상에 의해 축소, 폄하, 왜곡되었음
(Daum Blog 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참조)
025 삼국유사三國遺事 (1285년 경) 석釋 일연一然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다. 삼국사기에 바친 김부식의 노력에 우리가 전폭적으로 만족하지 못 하는 뜻은, 기실其實 같은 시기에 역사를 다룬 일연의 삼국유사가 더 많은, 그리고 근원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데서 시작된다. 잃은 것과 얻은 것, 그것은 물론 양量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질質의 문제다. 삼국사기는 모두 50권이고, 삼국유사는 5권이 전부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삼국유사원본, 곧 정덕본正德本은 그 모습이 초라하고, 내용 역시 단장丹粧되지 못 했다. 흔히 일연과 유사遺事와 관계를 가리켜 일개 노老 선사禪師의 한사閑事요, 여업餘業이요, 그렇기 때문에 기期하지 않고서 얻어진 우연한 산물産物이었던 양 설명해버리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일연선사 80 평생의 정진精進이 이 한 책의 저작에 집주集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장부丈夫의 사업이란 그 행장行狀이 반드시 그렇게 야단스럽지 않은 법이다. 오히려 은근하고 조용하기를 항상 원한다. 또 그 고성告成이 역시 그렇다. 고려 체관諦觀이 지은 사교의四敎儀는 천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태고학天台敎學을 위한 무상無上의 지침이자, 하나의 정점을 기록한 위대한 고전이 되어 있지만, 아예 체관 생전에 발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유고遺稿 속에 아무도 모르게 감춰져있었던 것을 사우師友들의 손으로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 데서 시작된다. 유사의 저자가 일연이었다는 사실도 정덕본 마지막 권 첫머리에 우연하게 적힌 ‘가지산하인각사운운迦智山下麟角寺云云’ 의 이름이 발견된 때문이었으며, 만일 그것이 아니었던들 아마 정녕 우리는 영원히 그 관계를 모르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나마 일연의 뜻이 아니고, 뒷날 그의 제자 중의 어느 한 사람, 아마 정녕 혼구混丘의 파심婆心에서 그런 정도로나마 사승師僧의 이름을 적어둔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민책이 지은 일연의 비기碑記에는 그가 편저한 것이 무릇 100권이 넘는다는 것이었으나, 그 중에 어느 하나도 오늘에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일연의 행적行蹟과 문호門戶에 관하여 이제껏 일반에서 알려진 것 중에 시정되어야 할 점이 또한 적지 않다.
일연, 정확히 말해서 가지산하 보각국존 일연대선사普覺國尊一然大禪師는 고려 희종 2년 (1206년), 원효와 같은 고향 경상도 장산, 곧 지금의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불일보조佛日普照가 52세로 입적入寂 (1210년) 하기보다 앞서기 네 해이고, 보경사승형寶鏡寺承逈이 입적하기를 일연의 나이 17세 때이기는 하나, 무의자無衣子 혜심慧諶, 내제당內題堂 천책天頙, 진명혼원眞明混元, 그리고 일연보다 연하年下 원오천영圓悟天英, 복암충지宓庵冲止, 무극혼구無極混丘 등이 모두 같은 시기에 속한 인물들이고 본즉, 일연의 생애는 비록 몽고군의 침노로 한시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할망정, 대체로 고려 일대一代를 통해서 가장 많은 고승高僧들이 배출되었던 시기에 속해 있었다고 보아서 좋을 것 같다.
9살 나이로 소년 일연이 기탁寄託된 곳은 해양 무량사였다.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에서 삭발득도削髮得道해 있음은 장차 일연의 문호門戶를 규정함에 있어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 진전사야말로 신라 9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開祖 도의道儀가 40년 동안을 이 절에서 불출산문不出山門 한 채, 염거나 채증 같은 고족高足들이 차례로 이 절에서 사자상승師資相承한 유서由緖를 지닌 선찰禪刹이기 때문이다. 뒷날 일연스님의 이름 위에 얹혀진 이 가지산하운운의 참뜻을 회득會得하지 못 하고 그것이 마치 인각산麟角山 주산主山의 이름에서 온 것인 것처럼 오독誤讀하는 이가 많다. 가지산은 원래 전라도 장흥군 유치면에 있는 보림사 주산主山의 이름이다. 신라 구산선문의 개조의 하나인 도의가 이 보림사에서 처음으로 그 선문을 개척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유파流派를 가리켜 가지산문으로 불려졌고, 일연 역시 그가 득도한 사찰이 도의의 법통을 전승한 곳이었기 때문에 가지산하란 이름이 따르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등傳燈방법은 구산선문 각파에 공통된 것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뒷날 일연의 행적에서 밝혀진 바, 그가 주석住錫한 사찰들이 모두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지산파 문적門迹에 속한 것이었음은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설악산 진전사를 비롯하여 포당암과 운제산의 오어사, 비슬산의 홍인사와 운문산의 운문사, 그리고 개경의 선월사 등이 모두 그렇다.
22세 때 일연은 선불과選佛科에서 상상과上上科로 등제登第하고 이어 포산 곧 현풍 비슬산의 보당암에서 주석한다. 그리고 31세 때 고종 23년에 지리산 묘문암, 무주암을 전전轉轉하나, 이것은 당시 고려를 휩쓴 몽고군의 전화戰禍를 피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41세 되던 해에 당시 재상이었던 정안의 초빙招聘을 받고 그가 남해의 별업別業을 원찰願刹로 바꾸어 창건한 정림사에 진산晉山한다.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위계位陛를 받은 것은 일연의 나이 32세 때이고, 10년 뒤에 선사, 또 10년이 지나서 대선사로 가자加資된다. 이 해, 그러니까 일연이 54세 때 고종의 국상國喪이 있었다.
두 해 다음인 원종 2년에 남해의 대선사는 국왕의 소명召命을 받고 개경開京에 나타나 선월사에 주住한다. 이 때 일연이 ‘봉사목우화상逢嗣牧牛和尙’ 했다는 비기碑記의 글귀는 여러가지 의단疑團을 후학들에게 남겨주고 있다. 봉逢을 요遙로 바꾸어서 ‘멀리 목우화상의 법法을 사嗣하고’ 는 육당六堂 (최남선) 의 해석이고, 불교통사佛敎通史의 저자 상현거사尙玄居士는 숫째 ‘일연의 법맥法脈을 보조하普照下로 귀속歸屬시키지 않을 수 없다’ 고 주장한다. 모두 당치 않은 말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불교의 전모全貌를 파악하지 못 한 데서 저질러진 위대한 오판이었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즘에 와서 곧잘 개종改宗도 하고, 심상찮게 국적國籍을 옮기는 일이 우리 주위에서 잦아졌지만, 사자상승師資相承으로 얽혀진 법통의 전승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손쉬운 것이 아니다. 앞에서 ‘가지산하일연’ 의 경우, 당시 구산선문 각파 간에 지켜내려오던 전등傳燈의 불문율不文律이 어떠한 것이었던가에 대해서 약간의 언급이 있었거니와, 만일 이 때 참으로 일연이 ‘보조국사의 법맥을 사’ 한 것이었다면 이 보다 5년 뒤에 있을, 송광사 조계종 6세 법손法孫의 책전冊廛에서 일연을 제쳐놓고 그보다 연치年齒가 훨씬 아래인 감충지가 뽑혔을 리 만무하다. 일연이 80여 평생을 두고 가지산문의 법통을 지켜내려오고 있었음은 역시 위에서 말할 바와 같다. 그러므로 ‘봉逢 (요遙) 사嗣 목우화상’ 은 멀리 (요遙) 목우화상의 법맥을 사嗣했다는 뜻이 아니고, ‘목우화상의 사’ 를 만났다 (봉逢) 의 뜻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우화상의 사’ 라면 자진 원오국사慈眞圓悟國師라야 한다. 개경의 선원사에 주해 있었을 때다.
개경의 선월사에서 3년을 채우고 일연은 영일 운제산 오어사로 옮겨간다. 오어사 다음으로 일연이 주한 곳은 선산 인홍사다. 여기서 주하기를 11년만에 다시 주처를 운문산의 선사禪寺로 옮겨서 70 노년老年의 안주처安住處가 되어주기를 바랐으나, 충렬왕 7년 몽고군의 일본 원정 소동으로 왕가王駕를 따라 경주에서 한 해를 보낸다. 이듬해 일연의 나이 76세 때였다. 다시 한 번 충렬왕의 간곡한 소명召命으로 개경 광명사에서 왕실 상하의 극진한 귀의歸依를 입고, 또 그 이듬해 국존國尊의 봉책封冊을 보았으나, 노 선사의 마음은 끝내 편안하지 않았다. 3년째 되던 해 96세 노모老母가 하세下世했다는 기별이 닿자, 국왕도 남으로 돌아가려는 노사의 뜻을 막지 못 했다. 고향에서 그리 머지 않은 의흥, 곧 지금의 군위 남단 인각사에서 언소자약言笑自若하며 시적示寂에 드니 그의 나이 84세. 보각普覺은 나라에서 내려준 그의 익호謚號다.
민책의 비기에는 100권이 넘는다는 일연의 편저 중, 어록 2권과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그리고 조동오위曹洞五位 3권, 조국祖國 2권, 대의수지록大義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을 들고 있다. 이 중에 조정사원은 북송의 선승禪僧 목암선향의 저서로 8권본이 현재 통용되고 있는 터이므로 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기碑記의 찬자撰者는 일연이 그 만년晩年에 효자로 이름난 중국 진존숙의 고사故事를 사모한 나머지 스스로 당호堂號를 진존숙의 당호를 모방해서 목암睦庵으로 고쳤다는 것인즉, 아마 정녕 조정사원의 저자가 역시 목암이었음을 모르고서 저지른 것 같다. 결국 하기를 100여 권 되는 일연의 저술 착오였던 삼국유사를 제외하고 아무 것도 후세에 남음이 없다는 것이 되겠으나, 반수 가까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다. 선문념송사원 30편은 이제현이 지은 보감국사 혼구寶鑑國師混丘의 비문碑文에 혼구가 편저한 4종 서목書目 중의 하나로 나와있다. 삼국유사 현행본에는 무극無極의 보기補記로 된 부분이 몇 군데 나와있고, 유사의 유전遺傳이 다름 아닌 일연의 제자 무극혼구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었던 저간這間의 사정을 생각할 때 이 사원事苑의 30권 역시 유사와 동일한 경로를 밟았던 데서 결과된 선의의 착오가 아니었던가 추정된다. 사실에 있어 선문념송 30권과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이 해외 어떤 대학의 수장收藏에 들어있음을 알고있거니와, 두 부가 모두 고려 견명見明의 저자명을 뚜렷이 가지고 있음은 위에서 보아온 추리를 더욱 확실하게 뒷받침 해주는 것이 된다. 견명은 일연이 초년에 사용하던 또 하나의 이름이다.
고서古書 왕위군신도서요해王位君臣圖序要解 2권 1책과 제장법수諸藏法數 불분권不分券 1책은 일연의 편저로 기록된 조동오위曹洞五位 2권과 장승법수藏乘法數 7권 바로 그것이 아닌가. 조동왕위 2권 1책은 고려본의 복각본覆刻本임이 분명하다. 편저자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북송 도융의 설과 주자朱子 태극도太極圖에 대한 주자해朱子解, 경청鏡淸과 향산香山의 약석略釋, 그리고 미상인未詳人의 주해註解 등을 처처處處에 안배按配한 솜씨는 유사遺事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 이 요해본要解本은 중국이나 일본의 어떤 서목書目에서도 발견된 일이 없는 우리나라 선문禪門에서만 전하는 책이다.
삼국유사 5권의 내용은 왕력王曆과 기이紀異, 그리고 흥법興法과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의 9부로 과분科分되어 있다. 이중에는 흥법과 탑상, 의해, 신통, 감통, 그리고 피은, 효선 등의 과목은 중국의 양梁, 당唐, 송宋의 3조朝 고승전에서 이미 쓰여온 제목이고, 또 쓰일 수 있는 제목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연이 유사에 착수했을 때 중국의 고승전에서 보아온 바 선례를 표방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미상불 삼국유사 전편에서 흥법과 의해는 가장 잘 다듬어진 편장篇章들이며, 흥법 이하 효선에 이르기까지의 하반부는 그대로 삼국의 불교사로 보아도 좋다.
일연은 삼국의 고승전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의 것을 바랐던 것이다. 고조선을 편차篇次하고, 가락구기駕洛國記를 전재全載하고, 그리고 14수首의 적지 않은 수의 향가鄕歌를 본문 중에 수록 점철點綴해놓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사례다. 흥법 이하가 온통 불교사라는 것은 앞에서 말했거니와, 그들을 다루는 솜씨는 과도하다 하리만큼 강인强忍하게 모든 문제를 본지수적사상本地垂迹思想으로 귀결歸結시켜놓고 있다. 역시 일찍이 김부식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빛깔이다.
일연의 학문을 가리켜 비기는 말하기를 ’재열장경再閱藏經하고, 궁구재가장소窮究諸家章疏하고, 그리고 방섭유서傍涉儒書해서, 겸관백실兼貫百實했었다‘ 고 하였으나, 이것은 결코 익미지사謚美之辭가 아니다.
가능한 한의 모든 필요한 전고典故가 과부족없이 일연으로 해서 정복되었을 것은 유사의 내용을 아는 이로써 상상키 어려운 일이 아니려니와, 또한 우리 후학으로 하여금 놀라마지 않는 점은 그 철저한 실증벽實證癖이다. 신라에 관한 한의 기사에 한해서, 어느 것 하나 일연 손수 발로 찾아 걸어가서 몸으로 실험해본 나머지의 것 아님이 없다. 탑상편篇의 천룡사조條에서 저자는 최제안의 사서私書를 동사同寺에서 목관目觀하고, 의해편義解篇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서는 진양부 오도五道 안찰사, 각도各道 선교사원禪敎寺院 시 창연월 형지안始創年月形止案 그밖의 당사자들의 수고를 낱낱이 점검한다. 수용한 자료가 상반된 내용의 것일 때 양자를 援引함으로써 저자 자신의 경솔한 판단을 경계한다. 유사의 행문行文이 일견一見 단장丹粧되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대개 이러한 실증주의에서 오는 것이 많을 것이다. 일 자字 일 구句가 무심한 것 같으면서 인정人情의 기미機微란 어느 한 가닥도 놓치는 법이 없다.
신라 애장왕 때 경주 황룡사 정수라는 스님이 눈 (설雪) 깊은 어느 겨울날 밤, 삼랑사까지 일을 보러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천암사 담 모퉁이에서 걸인乞人 여자 하나가 갓낳은 어린 것을 안고 추위에 못 이겨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스님은 언 몸의 모녀를 자기 품 안에 안았다. 한참만에 모녀가 깨어나자 스님은 자기 옷을 벗어 모녀에게 덮어주고 벌거숭이 몸으로 황룡사로 달려갔다. 돗자리를 옷 대신 몸에 두르고 부들부들 떨며 밤을 세웠다.
미소를 금할 수 없는 정경이다. 웃음 뒤에 오는 것은 저도 모르게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일 것이다. 일연 노사老師는 삼국의 고사故事에서 이러한 세계의 발굴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026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1215년) 각훈覺訓
해동고승전이 세상에 알려지기는 이회광사가 성주 모 사찰에서 사본을 발견하므로써 비롯되었다. 그 후 이것이 조선광문회에 기증되자 점차 전사傳寫되어 그 사본을 얻어본 일본 사학자 흑판승미 박사에 의해 1927년에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 권 제 114 유방전총서遊方傳叢書 제 2에 수록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퍼졌다. 1927년에는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제 50권 사전부史傳部 (No. 2065) 에도 입장入藏케 되었는데, 한편 당시 퇴경 권상노사老師가 주관하고 있었던 불교사에서는 1927년에 일간지 불교의 특집호로써 제 37호를 펴내 육당六堂 (최남선) 이 붙인 헤제解題와 더불어 이 해동고승전을 실어 일반에게 공개했다. 근자 이런 희귀한 불교서책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장외잡록藏外襍錄을 계획했었던 동국대 불교사학연구실에서는 제 1집으로 1956년에 해동고승전, 그리고 제 2집으로 동사열전東師列傳을 간행한 바 있다.
본시 해동고승전은 부피가 컸을 것인데 발견 당시에는 그 첫머리 유통流通 일지일一之一인 권 1과 유통 일지이二인 권 2 뿐인 것으로, 신라 삼국통일 이전의 고승 30여 명의 전기를 모아 엮어놓았으니, 유통 일지 일 가운데는 순도, 의연, 담시, 마라난타, 아도, 묵호자, 원표, 법공, 법운이 실렸으며, 권 일지 이에는 각덕, 명관, 지명, 담육, 원광, 원안, 담안, 아리야발마, 혜업, 혜륜, 현격, 현조, 현유, 현대 등이 실려있다. 중국에서 찬성撰成된 고승전으로써는 이른바 삼조三朝고승전이라 하여 양 무제 때 혜교가 찬한 당고승전 일명 속고승전, 그리고 송 찬영이 찬한 속고승전 등 셋이 있는 바, 그 편차編次에 있어서는 모두 다 10과科로 나누기는 하였으나 그 과명은 다르다.
양 고승전 당 고승전 송 고승전
역경譯經 역易 경經
2. 의해義解 의義 해解
3. 신이神異 습習 선禪
4. 습선習禪 명明 율律
5. 명율明律 호護 법法
6. 망신亡身 감感 통通
7. 송경誦經 유遺 신身
8. 흥복興福 독讀 송誦
9. 경사經師 흥興 복福
10. 창도唱導 잡과성덕雜科聲德
그런데 해동고승전의 찬자 각훈이 서序에서 말하다싶이 이들 3조고승전의 분과에 있는 역경은 우리의 경우에 필요 없으므로, 그 과목을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3조고승전의 과목을 참작하여 유통 외 많은 과목을 두어 편차했을 것이나, 3조고승전처럼 10분과 했었는지 또한 과목이 대동소이大同小異 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혹 삼국불교문화사의 성격을 띠고도 있는 삼국유사의 편차가
왕력, 2. 기이, 3. 흥법, 4. 탑상, 5. 의해, 6. 신주, 7. 감통, 8.
피유, 9. 효선 등 9과로 되어있으므로 미루어 삼국유사처럼 중국의 3조고승전의 과목과는 다르게 독특한 과목으로 분과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우선 유통이라는 과목이 삼국고승전에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고승전이 찬撰되어지기는 신라 김대문의 고승전이 처음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했을 때만 해도 전해왔었으나, 그 후 언제 산일散逸되었는지, 지금은 전해오지 않음으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편 최근 고종 31년 (1894년) 에 시적示寂한 범혜사가 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 6권이 있으니, 그 1권에는 고려 말까지의 고승 20여 명이 실려있고, 제 2권 이하 끝의 제 6권까지 모두 조선 초에서 한말에 걸쳐 선사, 대사, 강백講伯 등 170여 명이 실려있다. 동사열전이 고승들의 사적事迹을 약술略述한 고승전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3조고승전과 같은 고승전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런 점으로 보아서는 삼국유사가 3조고승전의 체제에 가깝다. 어떻든 해동고승전은 동사열전과 삼국유사 등과 더불어 그리 흔하지 않은 우리나라 승전僧傳의 하나로, 나아가서는 불교사서로써 매우 귀한 자료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와같이 해동고승전이 찬성撰成되기는 고려 고종 2년 (1215년) 의 일이다. 그 서문에 ‘불입멸佛入滅 지금기해至今己亥 2,264년’ 이라는 것과 ‘자순도입구고려自順道入句高麗 지금至今 844년’ 이라고 한 것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종 23년 (1145년) 에 찬진撰進된 삼국유사 보다 70년 후의 일이었고, 또 충렬왕 때의 삼국유사에 앞서 70년이다. 삼국유사에는 해동고승전이 언급된 곳이 13개다. 특히 해동고승전이 고려 고종 때의 칙찬서勅撰書였음에도 주의할 것이다. 이미 중국에서는 고승의 사적을 비롯한 광범한 불교사인 고승전이 전후 3조朝에 걸쳐서 불가佛家의 손으로 세 책이 나오고 있었던 터이고, 셋째 번 송고승전의 찬자 찬영이 고려 출신이었다는 것은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도 불가에 의해서 이룩된 고승전을 마련하여야겠다는 배려가, 고종 또는 이에 앞선 강종이거나 희종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리라. 이때만 하더라도 아직 몽고의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던 때였으며, 더우기 수선결사修禪結社하여 참신한 독립의 선종禪宗을 창립함으로써 조계曹溪의 선풍禪風을 떨쳤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바로 희종 6년 (1210년) 에 시적示寂한 지 얼마 아니되었던 때였던만큼 새로운 조계종풍曹溪宗風이 날로 익어가고 있었다는 것에도 자극이 있었으리라고 믿어진다.
해동고승전 가운데 고득상 시사高得相詩史, 박인량 수이전朴寅亮殊異傳, 화랑세기花郎世記, 자장전慈藏傳, 최치원 찬 의상전崔致遠撰義湘傳, 삼국사기三國史記, 대당 서역 구법 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양 고승전梁高僧傳, 당 고승전唐高僧傳, 송 고승전宋高僧傳, 고기古記 등 적지 않은 전적典籍을 찬자撰者 각훈覺訓이 참고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법운法雲 즉 진흥왕 기사 가운데서 화랑기사 같은 것은 삼국사기 진흥왕본기 37조 기사를 거의 전문 그대로 옮겨놓다싶이 채철採綴하였다. 다음 글 가운데 X표를 친 것은 해동고승전에는 없으며, 또 O표를 친 것은 해동고승전에만 있는 것이고, 또한 ( ) 는 바로 그 윗 자와 달리 삼국사기에 있다는 표시 (본 윤색潤索에서는 구분 없이 밑줄로 표시함) 다.
‘37년 춘春 시봉원始奉原 (원源) 화花 위선랑爲仙郞 초군신병무이지인初君臣病無以知人 욕사류취군유慾使類聚群遊 이관기행의以觀其行義 연후然後 거이용지擧以用之 수산미녀이인遂簡美女二人 일왈남무一曰南無 (모毛) 일왈후정一曰後貞 취도삼백여인聚徒三百餘人 이녀쟁미상투二女爭娟相妬 준정인남무俊貞引南無 (모毛) 어사제於私弟 강권주지취强勸酒至醉 예이투하수이살지曳而投河水以殺之 준정복주도인실화이파산俊貞伏誅徒人失和而罷散 그후其後 選 (갱更) 취미모남자取美貌男子 전분장식지傳粉粧飾之 명봉위名奉爲 (이以) 화랑花郞 도중운집徒衆雲集 혹상마이도의或相磨以道義 혹상열이가락或相悅以歌樂 오娛 (유遊) 유遊 (오娛) 산수山水 무원부지無遠不至 인차지기인지사정因此知其人之邪正 택기선자擇其善者 천지어조薦之於朝.’
그 얼마나 삼국유사 가운데 화랑기사를 그대로 옮기다싶이 했는가는, 또 ‘당령호징신라국기운唐令狐澄新羅國記云 (왈曰) 택귀인자제지미자擇貴人子弟之美者 전분장식이봉지傳粉粧飾而奉之 명왈화랑名曰花郞 국인개존사이야國人皆尊事之也’ 로써도 능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신라국기의 저자인 고석을 착각하여 대중유사大中遺事의 저자인 영고등으로 잘못 해놓았던 김부식의 과오過誤를 그대로 해동고승전의 찬자 각훈이 답습踏襲하고 있다. 천축으로 유학갔었던 신라승 혜륜의 기사 역시 그 절반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이후 대당고승전) 가운데 것을 다음과 같이 채철採綴하였다. ‘자본국출가自本國出家 교심성경翹心聖境 (적迹) 흘讫 (범汎) 박이릉舶而凌 (능陵) 민월閩越 섭보이굴장안涉步而屈長安 한서비수寒暑備受 간위경진艱危罄盡 봉칙수현조법사奉勅隨玄照法師 서행이충시자西行而充侍者 비제가험飛梯架險 기지旣至 (지之) 서국西國 편레기遍禮奇 (성聖) 종蹤 우거암마라파寓居庵摩羅波 (발跋) 국國 신자사信者寺’
대당고승전에는 도합 56명의 유천축기사遊天竺記事가 실려있는 바 그 가운데 7명의 신라승과 1명의 고구려승이 끼어있다. 대당고승전에는 신라승 현태玄太라 했는데 해동고승전에는 현대玄大라 했으니 아마 점획이 탈확되었던가 태와 대는 혼용되므로 쓰여졌는지도 모른다. 다음 혜업惠業 기사記事에 있어 해동고승전에는 ‘청독정명경請讀淨明經 인험당본운운因檢唐本云云’ 이라고 한 데 대해 대당고승전에는 ‘구이청독久而聽讀 정인험당본운운淨因檢唐本云云’ 이라고 했다. 후자는 ‘정淨 즉卽 의정義淨 내가 당본唐本을 검색檢索하여 본즉’ 이라는 뜻이다. 이 대당고승전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 천수天授 3년 (692년) 에 의정義淨이 찬撰한 것이다. 여기 정淨을 각훈은 의정 자신의 이름인 것을 모르고 정에서 끊고보니 의미 불통인 까닭에 명明과 경經 두 자를 보補하여 정명경淨名經으로 한 것 같다. 정명경은 유마경維摩經과 동본이역同本異譯인 것이다. 또 대당고승전 가운데 신라승 현격에 관한 기사에 ‘여현조법사與玄照法師 정관연중貞觀年中 상수서지대각사相隨西至大覺寺’ 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얼른 보아서는 현격과 더불어 함께 대각사로 갔었던 현조가 신라승인 것 같이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각훈은 그의 해동고승전 현격조에서 ‘현조자玄照者 역신라지고사亦新羅之高士 여각동과與恪同科’ 라고, 현조를 신라승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신라승 현각과 함께 갔었다는 것만으로써 현조를 신라승으로 한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 해동고승전을 수록한 대일본불교전서도 이에 따랐음인지 난欄 외에 두주頭註를 붙이되 ‘신라승 팔인八人 입축入竺’ 이라고 신라승 1명을 추가하여 도합 8명으로 셈하는 동시에, ‘구법전求法傳 유운태주인唯云太州人 불이위신라인不以爲新羅人’ 라고까지 하고 있다. 사실 대당고승전에는 그 첫머리 56명 가운데 한 사람인 현조에 관한 기사가 있거니와 그는 태주太州 선장인仙掌人이다. 태주 선장은 현 협서성 화음현이거니와 이 현조 기사에 백보 양보하더라도 신라승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아무런 관련이 보이지 않는다. 해동고승전의 찬자 각훈 자신도 태주인으로 되어있는 현조를 신라인으로 생각했을른지 모르나 고려해볼 문제다. 혹 신라승이었던 승장이나 원칙처럼 오랜 동안 당승唐僧으로 전승傳承되어오다싶이 했었기 때문에 근자에 와서야 비로소 신라승이라는 것이 밝혀졌던 일도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이 현조도 그런 경우로 보려는 데에는 보다 구체적인 사적이나 사항이 있어야 할줄 믿는다. 해동고승전에는 이밖에 법운조에 흥륜사 낙성과 국사 편찬의 연대를 각각 진흥왕 7년과 8년에 두었으니, 이것은 삼국사기의 것보다 모두들 2년 뒤로 늦어져있다. 또 마라난타조에는 삼국사기에 제 15대로 되어있는 침류왕의 대수가 제 14대로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기노기운耆老記云 고구려시조주몽句高麗始祖朱蒙 취고려녀取高麗女 생이자生二子 왈曰 피류避流 은조恩祖 이인동지二人同志 남도지한산南徒至漢山 개국開國 금광주시야今廣州是也’ 라는 기사가 있는 바, 여기 기노기耆老記라는 것이 서목書目인지 또는 고노古老의 구전口傳을 말하는 것인지 분간키 어렵지만, 고구려가 구고려로 되어있고, 또한 비류와 온조가 피류와 은조로 되어있음은 그 名句와 음례音例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이렇듯 해동고승전에는 문제삼을 것이 적지 않지만, 특히 고구려에 온 순도 (화상和尙)와 아도 (화상) 의 국적문제라든지 또는 불멸佛滅 후後 연대라든가 신라불교전래전설 등등 한국불교사에서 다루어야 할 여러 문제를 풀 실마리가 될 중요한 기사가 적지 않다. 가령 신라 불교전래전설의 김대문 저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 삼국사기 기사와, 김용행이 찬한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에 의거한 삼국유사 가운데 기사와 둘을 의례 들지만, 내용이 서로 다른 두 기사와 달리 해동고승전에는 고기古記와 고득상 시사高得相詩史에 의거한 두 기사가 있다. 이에 의하면 살해당한 승僧 방정과 멸후비를 뒤이어서, 세 번째로 아도가 비로소 법흥왕 14년 (527년) 에 왔으며, 또 이 해에 불법佛法의 공인公認이 있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양사梁使 원표의 헌향獻香에 있었음을 알게되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사보다 훨씬 역사적인 구체성을 띠고 있다. 또 불기문제佛紀問題는 해동고승전이 찬성撰成되었던 고종 2년 (1215년) 은 불멸佛滅 후 2164년이라고 찬자 각훈 자신이 말하고 있으므로, 이로보면 1969년은 불멸 후 2908년이요, 여기에 78년을 가ᄉᆞᆫ加算해서 얻어진 2996년은 바로 ᄉᆞᆼ탄기년聖誕紀年이 되는 바 이 불탄佛誕 2996년은 현행기년과 일치한다. 따라서 현행기년은 각훈의 설說임을 알 것이다.
이와같이 여러 문제를 제시하는 해동고승전의 찬자 각훈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권수卷首에 ‘경북 오관산 영통사 주지住持 교학사자사문敎學賜紫沙門 이라는 ㅓ함署啣이 보임에서 그 법계法階의 높음과 유수한 학장學匠이었음을 알려준다. 찬술의 선명宣命을 받을만한 모든 자격을 갖춘이였다. 그러함에도 고려사에서는 그의 관한 행적기사가 없다. 오직 같은 시대의 교우交友였던 최자, 이인노, 이규보의 문집에서 약간 언급言及이 되어있다.
027 고려사高麗史 (1451년)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찬撰
고려시대 관계사료로써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파한집破閑集, 보한집補閑集,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익제집益齊集 등 약간의 문집과 금석문金石文만이 남고, 고려실록을 비롯한 일차 사료들이 거의 인멸湮滅된 오늘에는 기전체紀傳體의 고려사와 편년체編年體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고려사연구의 기본자료다. 문종 원년 (1451년) 8월에 간행된 김종서, 정인지 찬의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된 총 139권의 기전체로써 고려시대사로써는 가장 풍부하다. 문종 시 초간 이후 몇 차례 재간했고 1908년에는 일본에서 도사간행회본 3책으로 간행하여 널리 보급되었다.
돌아보건데 고려국사편찬은 고려시대에 시작되었으나 고려말에 정치적, 문화적 진통을 겪어 완본이 편찬된 일이 없고, 조선조에서도 태조 즉위년 (1392년) 10월 처음으로 정도전 등에 명하여 편찬케 한 뒤에도 태종, 세종에 걸쳐서 여러 차례 개수改修되어 문종 원년 (1451년) 고려사가 간행되기까지 60년이 걸린 난산難産이었다. 오늘날 고려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사관이 성립하기에는 조선조시대에 들어와서 60년과, 고려 충렬왕 때의 정가신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이 편찬된 뒤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약 100년을 가산하면 160년 간의 문화적인 진통을 겪었다. 그 진통이란 고려시대에 있어서의 고려의 자주정신이 원의 압력하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려말에서 격화된 사회 모순에서 오는 것이었다. 충렬왕시의 정가신 이후 여러 차례 전출前出의 사서를 수정함이 되풀이 되었으나, 완전한 정리가 불가능하였으니 당시의 정치세력이 왕파王派, 전前 왕파, 심양왕파瀋陽王派, 친원파親元派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일원적인 지배체제하에서 성립될 수 있는 체계있는 사서의 완성이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공민왕의 반원反元정치 이후 이제현이 기전체의 고려국사를 구상하여 백문보, 이달충과 더불어 편찬을 시작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 하였다. 이 때 이제현은 자기가 담당한 태조에서 숙종까지의 기紀를 끝냈으나 백, 이 양인은 초고 작성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허나 주의할 것은 이제현은 그 뒤 종실전宗室傳, 후비전后妃傳도 편찬하여 그 서문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현 고려사의 후비전 서序와 종실전 서의 골자가 되었다. 사학사상史學史上으로 볼 때 충선왕 때의 주자강목朱子綱目의 영향을 받은 듯 한 민지閔漬의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의 출현이나, 지금 말한 이제현의 기전체의 구상 같은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나, 강목체라는 체제의 새로운 틀이나, 문화 전반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욕 없이는 불가능한 기전체의 시도는, 당시의 새로운 경향의 싹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나, 줄곧 계속되는 정치 불안으로 제대로의 결과를 맺지 못 하고 조선조시대로 넘어갔다.
조선조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4년 (1396년) 정도전의 고려국사高麗國史의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조선조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고려말역사에 곡필曲筆을 하였으며, 사적私的으로는 정적政敵을 폄칭貶稱하였다. 그리고 사대적事大的 명분名分을 세운다 하여 고려의 자주적인 전통을 말하는 사실 및 용어들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자주적 사실의 삭제는 원元에 복속한 때부터 시작되어온 것이지만, 이 때에 와서는 한층 더 심화되었고, 원래 정도전의 고려국사는 37권으로 분량이 빈약한 것인데, 그러한 정치적 선전과 곡필이 가하여지매 사서로써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뒷날 세종이 이를 보고 불여무야不如無也라고 평한다. 이에 대한 수정은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고, 다음 세종 때 계속하여 유관, 변계량이 책임을 맡았으나 변계량은 주자강목에서 명분을 밝힌 것을 들어, 고려 원종 이전의 태조, 혜종, 정종 등 역대 왕의 묘호廟號를 참칭僭稱이라 하여 삭제하고, 고려실록에 나타난 태자太子를 세자世子로, 제칙制勅을 교敎로, 주秦을 계啓로 격하格下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때 세종은 마땅히 사실을 직서直書하여 후세인으로 하여금 알아 판단케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변계량을 파면하고, 대신 윤준을 임명하여 고려시대의 사실을 직서케하여 구교고려사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기사 탈락이 많아 다시 개수를 명하여, 신거, 권제, 안지 등으로 개수케하여, 세종 30년 간행했으니 이를 교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 했다. 그러나 이 고려사전문은 권제가 자기 조상의 불미가 나타나는 사실을 삭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청탁을 들어 개서한 수정 부정이 있었으므로, 권제 이하는 고신추탈告身追奪 등의 처벌을 받았다. 변계량의 사대적事大的인 사고방식이나 권제의 수정부정의 정신적 체질을 생각컨대, 고려왕권이 미약하였던 시기에서 소위 세신대족世臣大族의 체질을 아직 청산하지 못 한 데서 온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 31년 김종서, 정인지로 하여금 다시 재수再修를 명하였으며, 이때에 기전체로 편찬하기로 결정하고 최항, 박팽년, 신숙주, 유성원, 이극심은 열전列傳을 담당하고, 노숙동, 이석정, 김예몽, 이병, 윤기복, 윤자운은 세가世家와 지志, 연표年表를 담당하고, 김종서, 정인지, 허익, 김조, 이선제, 정창손, 신석조 등이 교열校閱을 맡아 문종 원년 8월에 완성하였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담당인물의 배치로보아 열전 편찬에 중점을 둔 것이 보이는 것은, 이 고려사에서의 인물 평가가 그 자손들이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으로써 참가함에, 자격고사資格考查하는 성격을 띠어 조선조 지배계급 신분에 형성과 그 성격에 영향을 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한 데서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사가 완성된 뒤 김종서, 허익이 단종 원년 (1454년)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박팽년, 유성원도 사육신死六臣으로 죽어 편찬자의 이름에서 빠지고, 그 뒤부터 고려사는 정인지의 찬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상과 같은 복잡한 경과를 거치면서 고려시대 문화를 정리하는 정신적 기준으로써의 고려사의 편찬을 완성한 것이나, 이 지난至難한 사업이 세종과 같은 영주英主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고려 전기前期에 있었던 편년통제編年統制와 그 뒤에 나온 예종조 홍관의 속續편년통제, 의종조 김관의의 편년통록編年通錄과 왕대종력王代宗曆 등을 참고하여 정가신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 등이 나온 뒤 이를 증수增修하는 것의 소산所産으로써 이제현의 사략史略이나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이 나왔으며, 이것을 대본臺本을 하여 정도전의 고려국사가 편찬되고, 그 뒤 고려사의 개수는 이 정도전의 것을 다시 대본으로 하여 진행되었으니, 여기에 고려실록高麗實錄과 각종 관찬官撰문서와 문집류, 비문碑文자료를 모으고 오대사五代史 이후의 송, 요, 금, 원사 등의 중국사서를 참조하여 김종서, 정인지의 고려사가 완성되었다. 이 고려사는 정비된 체제를 가지는 것이니, 이제 지志, 열전列傳을 중심으로 하여 고려사의 성격을 생각하고자 한다.
지志에는 천문天文, 역曆, 오행五行, 지리地理, 악樂, 여복輿服, 선거選擧, 백관百官, 식화食貨, 병病, 형법刑法 등 12지를 갖추었으니, 삼국사기가 제사祭祀, 악樂, 거복車服, 옥사獄事, 지리地理, 직관職官 등 6지志임에 불과한데, 고려사에 와서 12지志로 불어난 것은 그만큼 고려시대의 문화의 폭이 확대되고, 질質의 전환을 본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신라시대의 골품제도骨品制度를 폐기하고, 그 대신 당송관제唐宋官制를 모방한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를 성립시킴에서, 그리고 그것을 성립시킨 문화의 주파主派를 담당한 지배계급도, 지방호족적地方豪族的 생리生理에서 이탈한 문신文臣을 중심한 관료官僚로써, 질적質的 전환轉換을 일으킴에서 그러한 문화의 폭幅의 증대增大와 변화變化를 보았고, 이에 따라 세련洗練을 보게되어 이와같이 지志의 정비整備를 보게되었다. 그러나 이 지의 전부가 고려의 문화를, 이와같이 12분야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는, 각 분야에 있어서의 이해 체계가 제대로 성립되고, 그 체계에서 정리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제대로 정리되지 못 한 체 자료배열, 자료수집만으로써 형성한 것도 없지 않다. 이러한 것의 원인은 벌써 세종기에 와서는, 고려문화와 조선문화와의 전통적인 관계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갖기에는 곤란하였던 것 같다.
억불숭유抑佛崇儒라는 관념체계觀念體系의 커다란 변동으로 불교적성격, 유교적성격과 습합褶合되어 있는 고대유제면古代遺制面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요소 등에 대해서는 이해하기도 곤란하였고, 이해하려고 하는 의도도 없었다. 그리하여 불교를 번외番外시키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고려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석노지釋老志 같은 것은 설정設定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은, 지志를 넣는 기전체의 계획은 최종단계에 와서 김종서, 정인지가 편찬할 때 발의된 것으로, 자료의 수집, 정리에 충분한 체계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에도 있는 것 같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결함缺陷이 있으면서도 이 지의 편찬은 없어질뻔한 많은 자료를 후세에 남겨주어, 지를 중심으로 한 연구는 고려문화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고려는 국시國是가 북진주의北進主義였을 뿐만 아니라, 북방거란과 대립되어 침입을 수차 격퇴하였고, 그 결과로 거란, 송, 고려의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룸에서 국제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고려문화를 육성시키고,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일컫었다. 그리고 여진과의 충돌, 후기에 와서 元의 침입 등 외국과의 관계가 이와같이 복잡한 떼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전外國傳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사대적事大的 명분론名分論의 영향으로 그리되었을 것이나, 이러한 결함缺陷을 깨달은 것은 퍽 뒤의 일로써 효종, 현종조의 홍려화가 히찬국사彙纂國史를 편찬할 때에 비로소 외빈부록外賓附錄으로 거란, 여진, 일본의 외국전을 붙이게 되었다.
그 다음 50권의 열전은 삼국사기의 열전으로서는 비교가 안 되게 많은 양이고, 삼국사기에서는 열전을 명장名將, 현신賢臣, 문신충열文臣忠烈, 화랑花郞, 효자열녀孝子烈女, 반역叛逆 등으로 구분하여 편찬하기는 하였으나, 명목名目을 붙이지 않았는데, 고려사에서는 구분을 세분하여 후비전後妃傳, 실실전室室傳, 공주公主, 일번정신一般廷臣, 양리良吏, 충의忠義, 효우孝友, 열녀烈女, 방기方技, 환관宦者, 혹리酷吏, 폐행嬖幸, 간신奸臣, 반역叛逆 등의 명목을 붙였다. 열전의 편찬이 중시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부가 공정하였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예를 들건데 고려말의 우왕, 창왕을 신씨辛氏 (승僧 신돈의 자식)로 몰아 세가世家에 넣지 않고 반역전叛逆傳에 넣었고, 기타 고려말의 인물에 대해서는 당시의 정치 대립으로 인한 고의적인 곡필曲筆이 많다.
그러나 좀 더 소급遡及하여 생각하면 성종 또는 현종 이후부터 나타나는 문신 중심으로의 전통적인 편견偏見이 역대 인물 평가에 작용하였다는 점과, 귀족 연합 정치체제를 위협하는 독재력에 대해서는 항상 의식적인 혹평酷評이 가해지고, 또 성리학적 영향으로 인물평가의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점을 유의할 것이다. 그리고 열전의 자료수집이나 편찬에 있어서 족보관념族譜觀念의 영향을 받은 듯 하여 명신名臣의 자손들을 시대 차이를 불구하고 명신열전의 부전附傳으로 붙였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 인물의 이해는 본인의 열전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그 인물과 교섭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의 열전을 다 살피지 않으면 빠뜨리게 되는 주요한 기록을, 타인의 열전 서술에다 삽입揷入하고 있다. 당시의 지배세력이 족벌적族閥的인 파당적派黨的인 형성을 이루고 있음에서 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것과 같은 조선조 초기 사학자들의 유교관념 과잉過剩에서 오는 냉정함을 잃은 흥분과 포핍褒貶이 여러 곳에 보이나, 고려시대 문화와 아울러 조선조 초기 문화에 대한 비판안批判眼이 성립된 뒤에 나온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비교적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하며, 편견에서는 이탈하여 고려사는 동사강목과 비교 검토하면서 연구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고려사가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결함缺陷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자료가 인멸湮滅된 오늘날에 와서는, 고려사 연구의 근본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를 전폭적으로 정리하고 이해하려고 한, 고려사에 나타난 사관史觀은 한국사학사에서 획기적인 선線을 긋는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028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종류 - 실록은 임금을 단위로 하여 편찬한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써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양梁나라에서 시작한 것이다. 당서唐書 예문지에 의하면 양나라 사람 주흥사가 편찬한 양 황제실록 2권이 최초의 실록인 듯 하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임금마다 실록을 편찬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이며, 그 후 대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는데 중국 실록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명明실록과 청淸실록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임금이 돌아가면 반드시 그 임금의 실록을 편찬하여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서장書藏하였다. 고려왕조실록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의 실록 총 1893권 888책의 원본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이 비장備藏되어 있다.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진판으로 간행하여 국내 국외의 유명한 대힉과 도서관 및 연구소에 반포頒布하여 한국문화연구에 이바지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이 실록을 이조실록이라 하였으나 정당한 명칭이 아니므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영인影印할 때 조선시대의 국호國號와 국체國體에 의하여 조선왕조실록이라 했다. 조선 역대 각 왕의 재위연수와 실록의 권수, 책수 및 편찬연대를 표시하면
실록의 종류 재위년 권 책 편찬연대
태조실록 7 15 3 태종 13년
정종실록 2 6 1 세종 8년
태종실록 18 36 16 세종 13년
세종실록 33 163 67 단종 2년
문종실록 2 12 6 세조 1년
노산군일기 3 14 6 예종 1년
(단종실록)
세조실록 14 49 18 성종 2년
예종실록 1 8 3 성종 3년
성종실록 25 297 47 연산군 5년
연산군일기 12 36 17 중종 4년
중종실록 39 105 53 명종 5년
인종실록 1 2 2 명종 5년
명종실록 22 34 21 선조 4년
선조실록 41 221 116 광해군 8년
선조수정실록 41 42 8 효종 8년
광해군일기 15 187 64 인조 11년
(중초본)
광해군일기 15 187 40 인조 11년
(정초본)
인조실록 27 50 50 효종 4년
효종실록 11 21 22 현종 2년
현종실록 16 22 23 숙종 3년
현종개수실록 16 28 29 숙종 9년
숙종실록 47 65 73 영조 4년
경종실록 4 15 7 영조 8년
경종수정실록 4 5 3 정조 5년
영조실록 52 127 83 정조 5년
정조실록 24 54 56 순조 5년
순조실록 34 34 36 헌종 4년
헌종실록 15 16 9 철종 2년
철종실록 14 15 9 고종 2년
조선왕조실록은 그 전체가 일시에 편찬된 것이 아니요 대대로 편찬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시대는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日記라고 한 것은, 세 임금이 모두 폐위되어 왕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왕자의 칭호인 군으로 강봉되었으므로, 유교의 대의명분상 정당한 임금과 같이 실록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산군은 폐위된지 200여 년 후 숙종 때 복위復位하여 단종端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렸기 때문에 숙종 이후 노산군일기는 단종실록端宗實錄으로 개칭하였다. 폐위된 임금의 역사를 일기라 하였더라도 내용과 사료적 가치는 실록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또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 현종실록, 경종실록은 각각 두 종류다. 선조, 현종, 경종의 실록이 두 종류씩 있는 것은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인하여 수정 또는 개수하였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은 광해군시대에 북인北人 기자헌, 이보담 등이 편찬한 것인데, 임진왜란 이전의 기사는 사료의 인멸로 인하여 매우 간략하고, 그 이후의 기사는 분량이 많으나 내용이 조잡粗雜하여 역대 실록 중 가장 불충분하게 편찬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파 관계로 서인西人 이이, 성혼, 박순, 정철과 남인南人 유성룡 등에 대해서는 없었던 사실을 꾸며서 비방하고, 북인北人 이산해, 이보담, 정인홍 등은 성인聖人처럼 칭찬하였으며, 기타 곡필曲筆한 것이 많으므로 인조반정 후 서인이 정권을 잡게되자 수정을 하여 선조수정실록 42권을 편찬했다.
현종실록은 숙종 3년에 남인 허적, 권대운 등이 편찬한 것인데, 편찬 당시 왕명에 의하여 편찬을 서둘렀기 때문에 기사에 착람錯覽 소략疏略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예론禮論을 비롯한 당쟁 문제에 있어서 서인에 불리하게 기술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숙종 6년에 서인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단행하여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게 되자, 개수에 착수하여 현종개수실록 28권을 편찬하였다.
경종실록은 영조 8년에 소론少論 이집, 조문명 등이 편찬한 것인데 경종시대는 노소론의 당쟁이 절정에 달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와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난 때다. 소론이 경종실록을 편찬할 때 신임사화에 대한 시비를 노론에 불리하게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곡필한 것이 많으므로 노론은 이 실록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조 2년에 노론이 영조실록을 편찬할 때 경종수정실록 5권도 함께 편찬하였던 것이다. 광해군일기에 두 종류가 있는 것은 원고를 수정한 중초본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 실록은 어떻게 편찬한 것인가? 먼저 사관과 사초에 대하여 설명하면, 사관은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로써, 중국의 예를보면 황제시대黃帝時代로부터 천자天子의 좌우左右에 사관을 설치하여 좌사, 우사라 하였다. 좌사는 행동을 기록하고, 우사는 말을 기록한다. 주대朱代에 이르러 좌사 우사 이외에 태사, 소사, 내사, 내사, 각사 등을 두어 국내외 모든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제후諸侯의 나라에도 사관을 설치하였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사관을 설치하고 날마다 일어나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한漢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태사공 사마천이 이를 자료로 하여 중국 고대의 정사인 사기를 편찬하였으며, 그 이후 한 왕조가 멸망하면 반드시 사기와 같은 기전체의 역사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25사로써 중국의 정사다. 또 남북조 이후 각 왕조에서 한 임금이 돌아가면 반드시 그 임금의 실록을 편찬하여 정사 편찬의 자료로 삼았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건국 이래의 사실을 기록한 유기留記 100권이 있었고, 영양왕 때 대학박사 이문진으로 이것을 자료로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였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박사 고흥에게 서기書記를 편찬케 하였고, 신라는 진흥왕 때에 거칠부로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옛날부터 사관을 설치한 것 같다. 그러나 고대의 사관제도는 기록의 불비로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시대는 초기부터 사관을 설치하고 감수국사, 수국사, 동수국사, 수찬관 등의 사관을 두어 날마다 일어나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동시에 한 임금이 죽으면 임금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고려 말기 충렬왕 때에 이르러 왕명王命을 제진製進하는 문한서와 사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이라 하였다가, 충숙왕 때에 예문관, 춘추관 두 기관으로 나누어 예문관은 왕명王命을 지어 바치고, 춘추관은 시정時政을 기록하였는데 이 제도는 조선왕조에 계승되었다. 춘추관의 직제는 시대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조선시대의 직제職制를 보면 영춘추관사 (영사), 감춘추관사 (감사), 지춘추관사 (지사), 동지춘추관사 (동지사), 수찬관, 편수관, 기주관, 기사관으로 조직이되었는데 모두 다른 관청의 직원으로 겸임했다. 이제 경국대전에 의하여 춘추관의 직을 겸하는 관직은 다음과 같다 (춘추관겸직표와 역할 생략).
사관은 글 잘 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고, 문벌門閥이 좋지 못 해도 발탁拔擢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부터 사관을 선임하는 법을 엄하게 제정하여, 사관에 결원이 있으면 춘추관의 당상 (영, 동, 지관사, 수찬관) 이 6품 이하의 문신 중에서 경사經史와 무장務長을 시험하고 또 그 문벌門閥을 조사하여 흠이 없는 사람을 뽑아서 임명하였다. (중략)
오늘날 남아있는 史草를 보면, 대개 난필亂筆로 기록한 것인데 실록을 편찬할 때 이것을 정서淨書하여 바쳤다. 시정기時政記는 춘추관의 당직사관이 날마다 일어나는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춘추관에 보관하였다. 월 1 - 2권이다. 그리고 사관史官은 직필直筆하는 것이 임무이므로 사관의 사초와 춘추관의 시정기는 거짓이 없고 사실대로 기록했다. 악한 임금은 악한대로 간사한 사람은 간사한대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초는 극비極祕에 붙여 사관 외에는 여하한 사람도 보지 못 하였다. 만약 임금이 사초를 보면 필화사건筆禍事件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찍이 조선 태조가 자기의 사초를 보려고 하였으나 대신과 신하들의 반대로 보지 못 하였다. 연산군이 무오사화를 일으킬 때 문제의 김일손의 사초를 본 일이 있으나, 연산군도 여러 사람의 반대로 김일손의 사초 자체는 보지 못 하고 다만 문제되는 부분만 추출抽出하여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또 시정기와 사초의 내용을 누설하면 중죄에 처하는 법도 마련되었다. 그러므로 사관은 안심하고 사실대로 직필할 수 있었다.
. 편집방법 - 조선왕조에서 처음으로 실록을 편찬한 것은 태종 때 태조실록을 편찬한 것이다. 태조는 1392년 7월에 고려왕조를 전복顚覆하고 임금이 되어 7년 간 재위在位에 있다가, 1398년 9월에 퇴임하고 태종 8년 (1408년) 에 승하昇遐하였다. 이듬해 8월에 태종은 영춘추관사 (영의정) 하륜에게 명하여 태조실록을 편찬케 하였는데, 사관 송포宋褒 등이 두어 대代 지난 뒤에 편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표면적 이유는 태조시대의 사람들이 태조실록을 편찬하면 올바른 역사를 편찬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나, 실은 필화사건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반대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태조 2년에 정도전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고려말의 시관들에게 명하여 사초를 납입하게 하였는데, 모든 사관이 화를 두려워하여 태조와 권력자들의 사실을 많이 고쳐서 바쳤다. 그러나 오직 예문춘추관학사 이행은 고치지 아니하고 태조가 아무 죄도 없는 신우, 신창과 변안열을 죽였다는 것과, 윤소정이 이숭인의 재주를 시기하여 조준에게 고하여 죽였다는 것을 그대로 써서 바쳤기 때문에, 이행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귀양간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태조시대에 활동하던 사람이 태조실록을 편찬하면 사화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으므로, 두어 대 지나서 태조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은 뒤에 편찬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사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륜 등으로 태조실록을 편찬케 하였다. 다음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은 세종 1년 (1419년) 정종이 승하하고 동 4년 (1422년) 에 태종이 승하하였으므로, 동 5년 12월에 양대 실록을 편찬하기로 하였는데, 이 때에도 사관들이 두어 대 지난 뒤에 편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또한 듣지 아니하고, 이듬해 3월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세종 8년에 완성하였다. 의후 조선 역대 임금의 실록은 그 임금이 사망한 뒤에 편찬하게 되었다. (중략) 실록청의 명칭은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처음으로 보이나 기록의 미비인 듯 하다. (중략).
실록을 편찬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와 각사등록各司謄錄 (각 관청의 기록), 조보朝報 및 개인의 일기, 소초疎草, 문집, 야사野史도 참고하고, 후세에는 비변사등록과 일성록이 사용되었다 (중략). 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먼저 공고를 내 그 임금시대의 승지承旨, 주서注書 등 수찬관 이하의 춘추관직을 겸하였던 모든 사관에 대하여 기한을 정하고, 사초를 춘추관에 납입納入하게 하였다 (중략). 사초의 불납자에 대하여는 벌금을 받고 자손을 금고禁錮하는 것은 고려 때부터 내려왔던 법으로써, 후세의 실록을 편찬할 때에도 엄격히 시행하였으므로 사관도 대개 기한 내에 바쳤다 (중략). 이렇게 실록은 초초, 중초, 정초의 세 단계를 거쳐서 완성하는데 정초가 완성되면 인쇄하여 사고에 봉안하고, 실록의 기본자료로 사용한 춘추관시정기와 사초 및 초중정초는 모두 세초洗草하였다. 기밀機密의 누설漏泄을 방지함과 종이를 재생하기 위함이었는데, 광해군일기의 증초본이 세초를 면하고 남아있는 것은 이것을 편찬한 인조시대의 경제력이 부족하여 출판을 못 하고 여러 벌 필사하여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하였기 때문이다.
. 보관 - 조선 초기의 태조, 정종, 태종 3대실록은 처음에 각각 2부씩 등사謄寫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 1부는 고려시대로부터 실록을 보관한 충주사고에 비장하였다. 그런데 2부의 실록만 가지고서는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므로, 세종 27년 (1445년) 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신축하여 분장하였으며, 세종실록 이후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활자活字로 인쇄하여, 춘추관, 전주, 성주, 충주 4고庫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선조 25년 (1592년) 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춘추관, 충주, 성주의 실록은 모두 병화兵禍에 없어지고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았는데, 당시의 선비 안의, 손홍록이 특별히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안의, 손홍록의 전기傳記는 알 수 없으나, 전주 사람으로써 임진 6월에 왜적倭敵이 금산에 침입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 실록 804권과, 사史庫에 있는 서적 전부, 태조 영정影幀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서, 이듬해 7월에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수직守直하면서 수호守護하였다.
선조 26년 7월에 조정朝庭은 이관吏官을 내장산에 파견하여 실록을 해주로 옮기고, 그 후 해주에서 강화도, 강화도에서 다시 묘향산으로 옮겼다가 왜란이 평정된 뒤 국가의 재정이 궁핍하고 물자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실록 출판사업을 일으켜 선조 36년 (1603년) 7월부터 39년 (1609년) 3월까지 2년 9개월 동안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실록 2부를 다시 출판하였다. 교정본校訂本과 전주사고의 실록 원본을 합하여 5부를, 서울의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경북 봉화 태백산, 평북 안변 묘향산, 강원 평창 오대산과 같은 병화兵禍를 면할 수 있는 깊은 산중과 섬을 골라 사고를 건설하여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에는 신인본新印本, 마니산에는 전주실록,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봉안하였으며, 광해군 9년 (1617년) 에 선조실록을 편찬 출판한 후 다섯 사고에 봉안하였다 (중략).
1910년에 일제日帝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한 후 정족산실록 및 원 전주실록과 태백산실록은 규장각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지금 수도육군병원 자리에 있었던 종친부宗親府 건물에 보관하고, 적상산실록은 창덕궁 장서각藏書閣에 보관하고, 오대신실록은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갔는데 동경제대로 가져간 오대산본은, 1923년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가 일어났을 때 타버리고 남은 1,000책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있다. 총독부에 이관하였던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29년에 규장각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도서관 (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으로 이장하였다. 그리하여 8. 15 해방 때까지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서울대학교도서관에 있고, 적상산본이 창덕궁에 남아있었으나, 창덕궁 장서각에 있었던 적상산본은 해방 다음 해 도난사건이 발생하여 여러 권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1. 4후퇴 때 부산으로 소개하였는데 부산화재 때 없어졌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아있는 실록 원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뿐이다.
그런데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을 비교하면, 선조 이후 실록은 같으나 명종 이전의 실록은 그 규격이 다르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족산본은 본시 전주사고에 있었던 초기에 출판한 실록이요, 태백산본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때 다시 출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족산본에 의하여 임진왜란 이전에 출판한 실록의 형태를 알 수 있고, 또 이 중에는 우리나라 고古 활자活字 중 가장 아름다운 갑인자甲寅字 (위부인자衛夫人字) 로 출판한 것이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 활자연구상 또한 중요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법률, 산업, 외교, 군사와 기타 모든 문화를 연구하는데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 해방 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실록의 수요가 격증하므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 - 1958년 간에 888책의 방대한 실록을 48책 (국배판 양장본) 으로 영인影印하여, 국내의 각 대학과 도서관은 물론, 세계 각국의 주요대학 및 도서관에 배부하고, 또 실록의 총 색인索引 1책을 편찬 출판하였다.
029 징비록懲毖錄 (1600년 경) 유성룡柳成龍
징비록은 저자 유성룡이 몸소 겪은 바 임진壬辰, 정유왜란丁酉倭亂에 관하여 저술한 것으로 임진란과 당시 조선왕조사회에 관한 기본사료이며, 고전적문헌古典的文獻이다. 그뿐 아니라 그의 생생한 서술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는 많은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유성룡 (1542 - 1607년) 의 자는 이견, 호는 서애, 경상도 풍산인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에 사사私事하였으며 많은 현직現職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는 영의정으로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도체찰을 겸임하면서 난중에 국가 중요정책은 그를 통하여 시행되었다. 그러나 선조 31년 임진왜란이 끝나기 1개월 전에 정적政敵의 모함과 반격을 받아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고 하회 (경북 안동 하회) 로 낙향落鄕하여 후에 다시 직첩職牒을 받았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불우한 만년晩年에 그는 독서를 하며, 시문을 집성하고 문서를 정리하면서 저술에 힘썼는데 그 중에서도 징비록은 역작力作이다.
징비록의 찬술이 끝난 시기는 대략 낙향한지 3, 4년 후로 추측되며, 친필로 된 초본징비록은 지금 하회 종가宗家에 비장되어 있다. 그리고 약 30년 후 인조 5, 6년 경에 후손에 의하여 처음으로 징비록이 간행되어 세상에 유포되었다. 우리가 흔히 징비록이라고 하면 이 간행본을 말하나, 징비록으로는 초본징비록 간행본으로도 16권본과 2권본이 있어 징비록은 3종이다. 그 중 초본징비록이 가장 원천이다. 16권으로 된 간행징비록은, 권 1, 2 제목 없음 (초본징비록 잡록 제외), 권 3 근폭집芹曝集 (차劄, 계사啓辭), 권 4, 5 근폭집 (계사), 권 6 - 14 진사록辰巳錄 (장계狀啓), 권 15, 16 군문등록軍門謄錄 (문이文移), 난후잡록亂後雜錄 (초본징비록 중 잡록)
2권본은, 16권 보다 늦게 출간되었으리라 추측되며, 16권본의 권 1, 2와 권 16의 전후잡록만이 수록되어 있다. 초본징비록과 간행본을 대조하면 2권본은 대체로 초본과 같으나, 16권본은 앞에 든 내용과 같이 권 3 - 권 16은 초본에는 없는 내용이다.
16권본에 수록된 근폭집, 진사록, 군문등록은 유성룡의 자필로 된 같은 이름의 책이 지금도 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초본징비록과 다른 독립된 책이다. 유성룡이 생존시에 장차 징비록을 출간할 때는 16권과 같이 근폭집, 진사록, 군문등록을 포함시키려 했는지 또는 후세에 징비록을 간행할 때 편찬자가 이를 포함시킨 것인지 확실치 않다.
간행본의 서문에는 장계, 소疎, 차劄, 문이文移 등을 포함하여 징비록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초본의 서문 중 이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어져서 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본래의 징비록은 초본징비록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여간 후세의 간행본이나 번역본은 흔히 16권 간행본을 따르고 있다.
16권 간행본의 징비록 내용은 초본징비록과 근폭집, 진사록, 군문등록을 합하여 편찬한 것이나, 편찬시에 개정과 수록치 않은 것이 있어서 유성룡의 본래의 의도와는 달라진 느낌을 준다. 16권 간행본과 초본징비록 등 원본을 대조하면 많은 차이가 있다. 초본징비록은 임진왜란의 발단으로부터 시작하여 난중의 여러 사건을 서술하고, 잡록을 싣고 있는데, 그 서술방법은 한 사건씩 독립되어있으면서도 임진왜란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런데 간행본에서 어떤 사건은 아주 빼기도 하고 내용 배열을 고치거나 일부를 삭제하였다.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에 대하여는 초본에는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간행본에는 ‘대신들이 왕세자를 세워 인심을 수습하고자 청하니 임금이 이에 따르다’ 라고 하여 그 내용은 모두 삭제되었다. 이는 출간할 때의 당쟁과 집권당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리한 것은 삼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초본의 뒷부분의 잡록은 간행본의 16권 뒤에 실려있어서 초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군문등록의 원본은 유성룡이 4도체찰사로 있을 때의 계장, 문이를 년차에 따라 수록한 것이며, 근폭집의 원본은 그 이름이 뜻하듯이 계사와 차자劄子의 초草이며, 진사록의 원본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과 다음 해 진사년 간의 서장書狀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간행본의 군문등록에는 원본 군문등록 중의 문이만 실리고, 원본 군문등록의 계초는 근폭집, 장계는 진사록에 수록하고 있다. 이와같이 원본과는 서로 넘나들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사정을 아는데 중요한 부분이 많이 빠져있으며, 어떤 것은 제목만 내고 ‘본집本集을 보라’ 고 하여 내용이 없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간행본은 유성룡이 특히 힘을 들여 서술한 많은 부분이 후세의 사정에 의하여 빠지기도 하고, 정정이 되어 본연의 뜻과는 다른 점이 많음은 유감스럽다.
유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하게 된 동기와 원인을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란이 일어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그중 난 전의 일도 왕왕 기록한 것은 그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오호라! 임진의 화禍는 참혹하였도다. 협순浹旬 간에 삼도三道가 떨어지고, 팔도八道가 와해瓦解되어 임금이 파천播遷하였는데, 그리고도 오늘이 있음은 천운天運이다.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내가 지난 일을 징계하여 (징懲) 후환을 삼가 (비毖) 하노라> 하였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소이所以이다. <나 같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 하고, 기울어지는 형편을 붙들지 못 한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도 전원田園에서 살며 구차스럽게 생명을 이어나가고 있음은 이 어찌 임금님의 너그러우신 운전恩典이 아니겠는가. 걱정과 가슴 두근거림이 조금 진정되매, 지난날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惶悚하고 부끄럽기 몸둘 바가 없도다. 이에 한가로운 가운데 그 듣고 본 바, 임진년에서 무술년까지의 일을 대략 서술하여 이것이 얼마 가량 되고, 또한 장계, 소차疎劄, 문이 및 잡록을 그 뒤에 붙였는데, 비록 보잘 것은 없으나 역시 모두 당시의 일들이므로 없이 할 수 없는 것으로, 전원에 살며 삼가 힘써 충성하고자 하는 뜻으로, 또 어리석은 신하의 나라에 보답하지 못 한 죄를 나타내고자 하는 바이다 (징비록 서문)>
이 서문에서 밝혀지는 바와 같이 징비록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뚜렷한 저자의식에 의한 저술이다. 징비록의 징비도 지난 임진왜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수난을 되플이 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지은 명칭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중 국가의 중책을 맡아 직접 견문함과 자기가 다룬 공문서를 정리하는 등, 풍부한 사료와 지식으로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그러므로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종합적 저작이 되었다. 유성룡은 당파에서 동인, 남인에 속하였다. 그러나 징비록을 저술함에 있어서 당색을 떠나 객관적 입장에서 시대를 보았고,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평함에 있어서는, 그 경위나 행동의 서술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그도 당쟁 중에 인물이기는 하였으나, 관계를 떠나 낙향 후 징비록을 저술할 때는 대의를 생각하며 담담한 심경으로 저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심경을 ‘수 년 간이나 경영한 것이 다만 쓸데없는 빈 말이 되었구나. 지나간 것이 이와같으니 오는 것 또한 그러할 것이니, 한없는 세월에 志士의 감개만 더 할 뿐이다. 금년에 내가 눈 속에서 얼어죽는다면, 내년에 누가 큰 그릇에 떡국을 먹는다 할지라도 내가 알바가 아니로다 (군문등록의 후서後序).’ 유성룡은 임진왜란 중 자기가 관계한 문서를 정리하면서, 허탈감에 사로잡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그의 심경은 스스로 겪은 민족의 수난을 객관적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사안史眼을 갖게하였다. 그러므로 징비록은 난전亂前과 난중亂中의 일은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기록한다. 이 책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정朝庭에서는 왜倭의 동태動態를 걱정하여, 충청 전라 경상도에 명하여 병기兵器를 정비하고, 성城을 수축修築케하였다. 그러나 태평泰平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안팍이 편안에 젖어서 백성들은 노역勞役을 꺼려 원성怨聲이 거리에 자자하였다. 나의 어떤 친구는 글을 보내 <성을 쌓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니며, 고을 앞에 강이 있으니 왜倭가 어찌 날아서 건널 것인가. 공연히 성을 쌓느라고 백성을 괴롭히는가 라고 하였다. 만萬 리里나 되는 큰 바다로써도 왜를 막아내지 못 하였는데, 그 사람은 왜가 작은 냇물을 건너지 못 하리라 생각하였다. 그 당시 사람의 의론은 모두 이러하였다.> <임진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보내어 변방邊方의 군비軍備를 순시巡視케 하였는데, 점검한 것이란 겨우 활, 화살, 창 뿐이었다. 군읍郡邑에서는 문서의 기록만으로 법을 피하였다.> <17일 이른 아침에 왜군 침략의 급보急報가 처음으로 조정에 이르고, 얼마 안 되어서 부산 함락의 보報가 이르렀다. 순변사 이일이 서울에 있는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가고자, 병조兵曹의 병적兵籍을 가져다 보니 모두 훈련되지 않은 병정兵丁과 서리書吏, 유생儒生이 반수半數나 되었다. 임시 검열하니 유생은 관복冠服을 갖추고, 과거科擧 보는 시험지를 들고 있으며, 서리들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군사軍士로 뽑히는 것을 모면謀免하려는 자들로 뜰에 차 있었다> 이상은 임진왜란을 맞은 우리 백성들의 사기士氣 등 실정에 관한 사실이다. 또한 전투에 관하여도 냉혹하리만큼 전략적 비판을 하고 있다. 행주대첩과 진주성의 싸움에 대하여서도 징비록은 비판하고 있으며, 신립의 충주 패전敗戰은 조령鳥嶺의 험한 지세地勢를 이용하지 못 한 전략적 패배로써 슬픈 일이라고 평하고,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장수將帥가 군사軍士 쓸 줄을 모르면 그 나라를 정整에 주는 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후회한들 어찌하리요만은 후일의 경계가 되겠기로 상세히 기록하여 둔다’ 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의 여러 장수 중에서 이순신은 가장 훌륭한 전략가로써 찬양되고, 그를 추천한데서부터 주요 해전海戰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유성룡의 인물평이나 사건평은 그의 당색黨色이나 주관을 감안하여야 되겠지만, 그의 전투에 대한 전략적 평가는 한국전사연구를 하는데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저술이므로 주로 전투 경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실은 정치, 경제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저술이다. 난중의 특히, 식량문제와 명군明軍과의 정치 교섭은 상세하다. 난중의 군량과 식량 부족은 가장 심각한 문제로써 자기가 이의 해결책을 세워 백방 노력한 것이며, 명군과의 정치 교섭도 직접 담당하였다. 그리고 난중의 정치, 민정民情도 직접 체험하고 시찰한 것이기 때문에 생생한 기록이다. 기아飢餓와 백성의 비참한 사정 그리고 그 대책에 관한 기록은 여러 곳에 나오는데 ‘임금께 군량軍糧 나머지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자 하니 허락하다. 때에 왜적이 서울을 점거한지 벌써 2년, 전화戰禍를 입어 천 리가 쓸쓸하고, 백성은 농사를 짓지 못 해 아사餓死하는 자가 많았다. 성중城中에 남아있었던 백성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부축하고 이고 지고 하여 온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사총병 (명 나라 장수) 은 길가에서 어린애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군중軍中에서 기르고 있다. …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10분分에 쌀 1홉合을 섞어 물에 타서 먹였으나,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 생명을 건진 것이 얼마 되지 못 하였다. … 어느 날 밤에 큰 비가 내리는데 굶주린 백성이 내 주위에서 신음하는 슬픈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더니, 아침에 깨어보니 쓰러져 죽은 자가 심히 많더라. … 대저 서울에서 남쪽 끝까지 왜적이 가로 꿰뚫고 있었으며, 때는 4월인데 인민들은 모두 산과 골짜기에 피란하여 한 곳에도 보리를 심은 곳이 없었으니, 왜적이 수 개월이나 더 물러가지 않았더라면 우리 백성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이 내용은 난중의 비참한 민정民政의 기록이라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유성룡이 징비록을 저술함에 있어서, 현실을 직시하고 사실을 감추지 않으려고 한 그의 저술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에서 기록된 위정자爲政者의 일부 장수將帥의 무식 무능의 폭로에서는 해학諧謔을 느끼게까지 한다. 그러나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서문序文에 밝혀있듯이 이 비참하였던 전쟁을 올바르게 보고 반성하므로써,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야 된다는 역사철학이 근본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국가가 유지되는 것은 인심人心 뿐이다 (국가지소유지자 인심이기 國家之所維持者人心而己). 비록 위태롭고 곤란한 시기라도 인심이 굳게 뭉치면 국가는 편안하고, 인심이 떨어지고 흩어지면 국가는 위태롭다. 지나간 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 위정자는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하고, 오직 보신책保身策만 알고 순국殉國의 뜻이 없으니, 저 사방에 있는 장병에게 어찌 용기를 내어 적과 싸우라고 독려하며,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에게 어찌 안집安集하여 흩어지지 말라고 할 수 있는가.’ (근폭집 청정인심계淸淨人心啓) 라는 유성룡의 임금에게 올린 계啓는 그 정치철학의 근본이었다.
<사족蛇足> 유성룡의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겪고 그 참혹한 상황에 대한 반성문이며, 후세를 경계하기 위한 기록문이다. 임금으로부터 관료와 군사, 백성들의 무능이 참화를 당하게 한 원인이다. 그러나 당시 유성룡은 만인지상 일인지하萬人之上 一人之下라는 영의정에 있었다. 최고통치자다. 왜,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 하고, 싸움다운 싸움도 하지 못하고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전 인민이 파탄지경에 이르렀는가? 당파당쟁에 휩쓸려 국정을 소홀히 한 까닭이다. 거기에 유성룡은 영의정으로써 책임이 크다. 유성룡이 징비록을 남겨 후세를 경계하였으나, 300년 후 우리나라는 다시 왜적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가 된다. 일제는 우리를 당쟁으로 날을 세우는 민족이라고 했다. 정치가들의 행태는 2021년 현재도 진보 보수의 당쟁으로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030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795년) 이순신李舜臣
. 충무공과 관계기사의 수집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조선조 인종 원년 (1545년) 3월 (양력 4월) 서울 건천동 (현 을지로 4가, 충무로 4가 사이) 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요, 아버지는 정, 어머니 초계 변씨 4형제 중의 셋째이고, 부인은 상주 방씨다. 어려서는 가난하여 어머니의 고향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살았기 때문에 고향이 되었다. 자녀는 적자嫡子, 서자庶子 합하여 8남매를 두었다.
어려서는 유학儒學을 배워 학자의 소질을 보였으나 자라면서는 무예武藝를 닦아 28세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한 후, 북으로 나가 함경도의 여진족 오랑케를 평정하고, 남으로는 전라도에서 전라좌수사로써 국난을 대비했다.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는 48세, 전후 7년에 걸친 전쟁을 통하여 백전백승百戰百勝, 민족을 파탄破綻 속에서 구출하고, 최후의 전쟁에서 순국殉國하니, 선조 31년 (1598년) 음력 11월이요 향년 54세다.
순국 후 6년만에 조선조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의하여 1등공신等功臣으로 책정되었고, 45년 뒤 인조 21년 (1643년) 충무忠武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이래 수백 년을 통하여 공公의 유적지遺蹟地와 전승지戰勝地에 사당祠堂과 전공비戰功碑를 세워 공을 기념하고 경모敬慕한다.
그러나 충무공의 시문詩文과 전쟁기록을 비롯해서 공에 관계된 모든 기록글은 날이 갈수록 없어지고 흩어지기 쉬운데, 미쳐 집대성集大成하지 못 하였더니, 순국 후 200년 뒤 정조에 이르러 비로소 조정에 명령하여 충무공에 대한 기록과 기사를 수집하여 이충무공전서를 편찬, 간행케 되었다.
충무공전서는 충무공 자신의 시문과 저술을 비롯해서 공에 대한 행적과 역대 제왕帝王, 명현名賢들이 공을 숭상崇尙, 예찬禮讚한 시문詩文, 비석碑石 및 모든 문헌들에 실려있는 기사를 수집하여 집대성한 전문 14권 30만 자에 이르는 귀중한 서적이다.
. 충무공 자신의 저술
한산섬 시조時調 1수首, 한시漢詩 4수, 이원익, 유성룡 등에게 보낸 서간문 9편, 잡문 3편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진란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마지막 순국하던 전날까지 7년 동안의 일기와 임금께 올린 장계 71편 (초고草稿는 7편 더 있음) 은 귀중한 사료다.
. 역대 제왕의 글
선조宣祖가 충무공에게 내린 교서敎書 6편, 유서諭書 16편을 비롯해서, 뒷날 정조가 지은 충무공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윤음綸音 3편, 그리고 선조,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역대 제왕들의 사제문賜祭文 13편은 공의 공적에 대하여 역대 제왕들이 얼마만큼 감격했던지 알 수 있게 하는 문헌이다.
. 충무공의 일생 행적
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지은 충무공의 행적行錄과 최유해가 지은 충무공의 행장行狀과 이식이 지은 충무공의 익장謚狀 등은 충무공의 일생 행적을 연구하는데 기본적인 자료다.
. 비문碑文, 기문記文과 후인後人의 찬사讚辭
이항복이 지은 전라좌수영대첩비문을 비롯해서 각처 전승지에 세워진 비석들의 비문 7편 그리고 이항복의 충민사기를 비롯해서 각처 사당의 기문 17편과 후인들의 찬사, 제문祭文, 조시弔詩 등 36편이 실려있다.
. 각종 문헌의 충무공 관계기사
전서의 마지막에는 명사明史 및 명나라 여러 서적에 나오는 충무공 관계기사와 우리나라 국조보감國朝寶鑑, 선묘중흥지宣廟中興志 등을 비롯한 국내 서적 등 77종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충무공 관계기사들을 전부 발췌하여 실었으므로 충무공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크게 제공된다.
. 편찬 및 인쇄의 시기
이같은 내용으로 된 이충무공전서가 언제부터 편찬하기 시작되었으며, 또 인쇄는 언제 완료되었는가를 상고詳考하면
정조 16년 (1792년) 8월 실록에 ‘충무공이 끼친 사적事跡을 내각內殼에 명령하여 전서를 편찬 완성한 뒤, 활자活字로 인쇄하는대로 고금도 탄보묘誕報廟에 한 벌을 간직하고 인하여 제사祭祀하도록 했다. (정조실록 권 35)’
이 기사를 보면 충무공전서를 편찬하기 시작한 것은 정조 16년 8월 쯤에서 부터였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은 실로 임진란이 일어났던 해로부터 헤아려서 꼭 200년이 되는 해였다. 그리고 다시 3년 뒤인 19년 (1795년) 9월의 실록 기사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전서를 인쇄, 반포했다. 진작 내각에 명령하여, 이순신의 사적과 그의 끼친 원고를 거두어 모아 책을 만들게 했던 바, 이 때에 이르러 편찬해 올린 것이다. 위에서 하교下敎하시되 이것을 간행하는 것은, 첫째 충무공을 숭상하고, 둘째 공적에 보답하고, 셋째 무용武勇을 표창하고, 넷째 의열義烈을 빛내려는 뜻에서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편찬하는 동안에도 자주 물어보았거니와, 그것을 인쇄함에 있어서는 더욱더 특별한 조처를 취하는 것이 옳으므로, 이제 내탕금內帑金 (임금의 사재私財) 500냥과, 어영전御營錢 (어영청의 군부예산軍部豫算) 500냥을 내려주어 인쇄하는 비용에 보조하도록 했다. (정조실록 권 43)’
이 기사를 보면, 정조 16년 8월 쯤에서부터 전서 편찬이 시작되어 약 3년이 경과되어, 19년 9월에 인쇄, 반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정조의 특별한 열의熱意에 의해서 임금의 사재와 군부의 보조까지를 주어 인쇄가 왼료되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서의 맨 끝에 적힌 기사를 보면 전서를 인쇄하던 첫 무렵에 있어서는, 많은 부수를 인쇄한 것이 아니라 한정 출판이었던 것 같다.
첫째, 대궐 안의 소용所用과, 둘째, 다섯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할 것과, 셋째, 홍문관, 성균관 등에 비치할 것과, 넷째, 각처에 있는 충무공의 사당에 비치할 것과, 다섯째, 여러 중신重臣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출판되었다.
이렇게 전서가 출판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릇 1세기 반이 넘었거니와, 그 동안 5, 6종의 간행물이 나왔으며, 또 그 위에 15 - 16종의 간행물이 나왔고, 또 그 위에 1934년에는 충북 청주에서 충무공전사 속편續篇이라는 이름으로 본집이 권 14로 끝났기 때문에 권 15, 16이라는 형식으로, 전서에서는 보지 못 했던 글들을 덧붙여서 출판한 것까지 있음을 참고로 말해둔다. 그러나 다만 그 글들의 출처를 명확히 해놓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 전서의 편찬 인쇄에 간여했던 이들
앞에서 말한 바대로 충무공전서의 간행에서 누구보다도 정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정조의 열성이 아니었던들 전서의 집대성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인가.
정조 - 조선조 22대 임금으로 1752년에 나서 1777년에
26세로 즉위하여, 1801년에 재위 24년 간 보령寶齡 50세로 승하昇遐할 때까지, 특히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문무文武에 관한 많은 서적을 출판했으며, 자신도 대단한 문장가여서 홍제전서弘齊全書를 저술했다.
충무공의 구국대업을 귀감龜鑑삼고 세상에 공의 충의를 널리 권장한다는 목적 이외에도, 학문적인 일에서도 충무공에 대한 편찬사업을 추진했으며, 그런 열정에 의해 이 사업을 완성했다. 더욱이 정조는 역대 왕 중에서도 충무공에 대하여 각별한 특전特典을 베풀었으니 영의정으로 추증追贈한 것과 공의 묘소에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를 세운 일은 실로 왕의 공에 대한 열의를 증거한다.
그러나 이 전서의 완성을 보기까지에는 정조의 열성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편찬을 담당한 규장각 문신文臣 윤행임과 인쇄를 감독한 예문관의 검서관檢書官 유득공 두 분의 노력이 컸었던 것을 인정해야 한다.
2. 윤행임 - 자는 성보, 혼 석재, 본관 남원인데 영조 38년 (1762년) 에 나서 소년시대부터 저술이 많았다.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 정조의 특별한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정조의 저술도 자문諮問을 받았으므로 충무공전서를 그에게 위촉委囑하였다. 전서의 편찬을 담당했던 때의 나이는 弱冠이었고, 정조가 승하한 것이 9년 뒤였으므로 그의 나이는 40세 때다. 순조의 즉위 때 선왕先王의 충신으로 이조판서를 제수받았다가 모함을 당하여, 전라도 강진 신지도로 귀양가 사사賜死되었다. 신지도는 충무공의 최후의 진지陣地 고금도와 마주보는 섬인만큼 감개무량感慨無量했을 것이니 이를 어찌 우연이라고 하겠는가?
3. 유득공 - 전서의 인쇄를 감독한 유득공은 자가 해포요, 호 혜풍, 본관은 황해도 문화다. 영조 25년 (1749년) 에 나서 31세에 정조의 총애를 입어 규장각 검서檢書가 되어 박제가, 이덕무, 서리수 등과 함께 4검서라는 이름을 얻었던 이로써 전서의 인쇄 및 검열檢閱을 담당했으니 나이는 47세였다.
그러므로 이 전서는 170여 년 전에 정조의 어명御命을 받들어 윤행임 등 학자의 손으로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거니와, 그것이 임진란의 역사적연구나 충무공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더그나 임진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충무공 해전海戰의 승리요, 또 그것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어떤 것 보다도 충무공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亂中日記) 와 장계狀啓가, 가장 정확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인만큼 전서야말로 후세의 임진란연구에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한 서적이다. 다만 여기서 부언附言해둘 한 가지는, 전서의 공의 난중일기는 전서 중에서 핵심되는 부분이요, 충무공이 7년 간의 전쟁에서 매일 집필한 것이므로 가장 귀중한 기록이다. 그런데 공의 친필로 쓴 초고본草稿本 7책이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전해오고 있거니와, 초고본의 기사내용과 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난중일기의 기사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점을 주의하여야 한다. 물론 공의 일기인만큼 전서를 편찬할 적에도 그 초고를 가져다 인쇄를 했을 것인데, 왜 그같이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전서를 편찬한 이들의 과오過誤다. 공의 일기인만큼 잘잘못이나, 무엇을 썼든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고치거나 삭감削減하지말고 원문原文대로 인쇄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공의 일기를 임의任意대로 요약要約해서 인쇄했다는 것은 큰 오류誤謬다. 그러므로 전서의 기록이 모두 역사적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틀림없으나, 다만 그 중에서 난중일기만은 현충사에 보관되어있는 공의 친필 초고본과 대조할 필요가 있음을 일러두는 동시에, 그 대신 을미년乙未年의 일기는 초고본을 분실하였는데 전서에는 모두 실려있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충무공은 한갓 개선장군凱旋將軍으로써만이 아니라, 민족의 대 이상의 구현자具現者요, 인간으로써 대인격 완성자完成者요, 실로 거룩한 인물이란 점에서 역사적 성웅聖雄이며, 우리의 특별한 연구대상이 되는 분인만큼 그의 인간됨을 알기 위해서도 이 전서는 귀중한 문헌이다.
031 대동야승大東野乘
현존한 대동야승은 1909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간행한 13책이다. 이 보다 앞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別集 권 14의 야사류野史類 중에 대동야승이 있으나 편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에는 57종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이 모두 수록되어 야사가 망라網羅된 셈이다.
원래 야사는 당唐의 유지기의 사통史通 중 잡술雜術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는 이것을 편기偏紀, 소록小錄, 일사逸事, 소언琑言, 군서郡書, 가사家事, 별전別傳, 잡기雜記, 지리서地理書, 군읍부郡邑簿 등 10종류로 분류하였다. 우리나라의 야승도 대략 여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소록이나 일사, 소언, 잡기 등 적중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러한 작은 이야기는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소설小說이라 한다. 이는 지금의 소설이 아니라, 중국 한 이후 작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기전紀盷의 사고전서四庫全書 총목착요總目捉要에서 소설을 3파로 나누어, 잡사雜事를 저술하는 것, 이문異聞을 기록하는 것, 소언琑言을 모아놓은 것 등이라 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야사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 송宋과의 교통이 빈번해지면서 그들의 서적이 들어왔는데, 이러한 부문의 서적 가운데 태평광기太平廣記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은 귀신 이야기가 많아 진대晉代에 생긴 수신기搜神記가 있었다. 이러한 서적의 하나인 추양잡조酋陽雜爼, 용제수필容齊隨筆 (송宋의 홍매洪邁) 등도 들어왔는데, 이를 본 학자나 혹은 송원대의 필기류를 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것을 쓰기 시작한데서부터 야사 (소설) 가 나왔다.
고려 때 이인노의 파한집破閑集, 최자의 보한집補閑集,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 등이 우리나라 야사를 처음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고려 학자들의 뒤를 이은 조선의 학자들도 패설을 써 성현의 용제총화慵齊叢話다. 대동야승 중에 용제총화가 제일 먼저 실려있다.
대동야승에 있는 57종의 방대한 내용을 검토하면, 짧은 소언과 소사들이 많고 용제총화나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신의 유문소록諛聞琑錄, 어숙권의 패관잡기稗官雜記, 이육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심수경의 유한잡록遺閑雜錄, 청천한록聽天閑錄, 신흠의 상촌집설象村集說, 윤기현의 장빈호찬長貧胡撰, 박동량의 기제잡기寄齊雜記, 이정형의 동각잡기東閣雜記, 정홍명의 닐옹만필暱翁漫筆, 유성룡의 운암잡록雲岩雜錄, 윤국형의 문소만록聞韶漫錄, 갑진만록甲辰漫錄, 이기李曁의 송와잡설宋窩雜說, 권응인의 송계만록松溪漫錄, 이근수의 월정만필月汀漫筆, 윤두수의 오음집설梧陰集說, 이제신의 청강소어淸江琑語, 이덕동의 죽창한화竹窓閑話, 김시양의 자해필담紫海筆談,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읍계기문湆溪記聞 등으로써 개인의 일사逸事가 기록되어 있다.
또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것으로는, 중종 때 기묘사화로써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및 별집別集 등이 있는가 하면, 명종 때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기록한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선조 때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다룬 기축록己丑錄, 기축속록己丑續錄 등이 있고, 우성전의 계갑일록癸甲日錄, 계미기사癸未記事 등도 있다. 임진왜란을 적은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과 신령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誌, 광해군 때의 당파싸움한 기록으로는 광해조일기가 있다. 계해청예록癸亥請禮錄은 서인이 광해군을 내쫓은 기사로 실록의 초본과 같다. 박동량의 기제사초寄齊史草는 선조실록의 사초로써 정사正史 그대로다. 윤선거의 혼정록混定錄과 안방준의 묵제일기黙齊日記는 당파의 분열과 그들이 행한 일을 임정하게 썼다 하여 양서良書로 추천된다. 두 책은 분량이 많아 수만언數萬言이다. 이밖에 해동악부海東樂府,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는 분량이 적다.
여기에 나오는 여러 서적은 이긍익의 연료실기술에서 이용하는 기사본말체식記事本末體式으로 사건을 아는데 필요하다. 율곡의 석담일기石潭日記는 경연일기經筵日記로 율곡집에 남아있다.
대동야승 전체의 상세한 목록을 보면, 우선 용제총화는 10권 중에서 항목만 310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신래침학新來侵虐으로, 처음 관리官吏가 된 사람들에 대한 여러가지 놀리는 풍습이 적혀있다. 이는 당시의 습관으로 누구나 출사出仕할 때는 곤욕困辱을 치룬다. 이러한 일은 다른 서적에서도 나온다. 특히 성현은 문장이 샘 솟듯 나오고 천재로, 그의 아들 성세창은 상위相位 (재상宰相) 에 올랐으며, 성현의 삼 형제와 조카들 중에 글 잘 하는 이가 많아 성씨 가문의 일도 많이 기록하였다.
한편, 용제총화 권 5에 승려들의 비행非行, 선사禪師의 사요蛇妖 등의 이야기는 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쓴 듯 하고, 여성에 관하여 기녀妓女의 이야기, 또 음녀淫女 어우동於于同의 이야기는 거의 성현이 기록한 것으로써 자세히 적혀있다. 어우동은 너무 남성을 많이 사귀어 음란죄淫亂罪로 사형死刑을 당하였고, 수원 기녀는 객客 (손님) 을 거절하여 죄罪를 받은 일이 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 2권은 그 서문에서 송대의 구양수의 귀전록歸田錄과 같이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썼으며, 국노國老 (노인) 의 한담閑談을 많이 취하였다. 이러한 방법이 필기筆記나 잡기류雜記類로써 넉넉한 재상들이 은퇴한 후 일종의 희필戲筆처럼 남겼다.
내용 중에 송조宋朝 왕안석전에 대한 논란이 있다. 세종 때 송사宋史가 아직 오지 않아, 세종이 여러 차례 명明에게 요구하였다. 이 때 왕안석이 간신전奸臣傳에 들어가야 옳다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 유성원이 홀로 왕안석은 문장가이고 절의節義가 있는 사람이고, 신법新法을 만들어 간물奸物이라고 하지만 애국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과 같다하여 간신전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송사宋史가 들어와 확인한즉 유성원의 말이 옳았다. 이 때 서거정도 말석末席에 있었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의 안목과 중국인들의 안목이 얼마나 넓은 가를 이야기 하는 일막물一幕物이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최치원의 계원필경의 문장이나 시가 좋지 않다 하였고, 이 목은牧隱 (이숭인) 의 시는 격찬하였다. 이는 아마 최치원의 만당晩唐의 시풍詩風을 악평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반대로 고려의 정지상이 섬세한 만당의 풍을 찬양하고 있는데 모두 일가견一家見이다.
조신의 유문소록諛聞琑錄에서 폐비廢妃 윤씨尹氏와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가 야사체로 적혀있다. 또 어숙권의 패관잡기稗官雜記는 필자가 역관譯官이었던만큼 명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처음으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기록하였다. 이밖에 명대明代의 사실을 많이 논하였고, 두시杜詩의 오역誤譯까지도 논하고 있다. 명대明代의 이문吏文을 알았던만큼 중국학에 대한 조예造詣가 깊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차천락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는 그가 개성인인 만큼 개성 중심의 이야기가 많다. 화담花潭에 대한 이야기와 성종의 일화逸話가 많다. 그 중 성종이 30여 세로 조사早死한 원인은 주색酒色인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태평시대의 왕자의 유흥遊興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연산군의 호색好色이 나타난 것이리라.
이육의 청파극담靑坡劇談은 대동야승 권 6에서 겨우 56면 밖에 적혀있지 않다. 주로 소화小話로써 옹서翁婿가 도비盜婢한 사건과, 박효공이 서씨徐氏집 규수閨秀와 잘못 결혼한 사실 등이 실려있다. 이는 이 당시 결혼하는 풍속의 하나로 서로 앞을 다투다가 생기는 사실이라 하겠다. 이밖에 고려말기의 명인名人과 고려초기의 명인들의 일화가 많이 실려있다.
허봉許篈의 해동야언海東野言은 지금까지 남아있던 야사에서 일부분을 발췌拔萃했다. 특히 왕실 중심의 왕의 행적이 이채異彩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는 심심파적心心破寂으로 기록한 필기체로써 개인의 작은 일들을 적었으며, 심수경의 유한잡록遺閑雜錄에서는 기생妓生의 이야기가 많다. 심씨沈氏 자신이 80에 득남得男한 사람으로, 집의 비첩婢妾을 자유롭게 하던 당시의 풍속을 알 수 있다. 노인에 관한 일사는 풍부하다.
대략 임진란 이전의 고려의 유풍遺風대로 학자들의 일사를 기록한 야사가 많이 나온 것으로 보여지며, 임진란에 관한 난중잡록亂中雜錄과 재조번방부再造藩邦志가 있어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그 중에도 난중잡록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시대의 이야기와, 병자호란 이야기까지 일련의 난亂을 전부 기록하였다. 이것은 거의 정사正史로써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
박동량의 기제잡기寄齋雜記에서는 고려 때의 사실이 적혀있고, 조선초기의 사실들을 적기摘記하였다. 중종 때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꺽정林巨正의 이야기가 있는데, 직접 임꺽정의 난을 치른 박응천이 박동량의 숙부叔父였으므로 직접 관련성이 있다.
이정형의 동각잡기東閣雜記는 조선왕조의 역대왕의 일사逸事와 명인名人들의 일화逸話가 적혀있어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분량도 많고 사실을 직필直筆했다.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 에 대한 기록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윤국형의 항소만록聞韶漫錄에는 유연전柳淵傳이 있어 당시 사기사건詐欺事件이 상세하게 기재되어있다. 유연이 형 유유를 죽이고, 재산을 탐낸데서부터 시작이다. 그러나 실제는 유유가 광증狂症이 생겨 사방으로 걸개乞丐가 된 후 가짜 유유가 나타나 유연의 형을 쫓아내고, 재산을 강탈한 이야기다. 훗날 유유가 나타났을 때는 유연이 처형된 뒤다. 유유의 부인이 가짜 유유를 옹호擁護하는 등 사건이 얽혀있다.
이기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서도 유연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밖에 연산군 이후의 사회의 변화와 임진란 중에 일어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중에 욕辱의 유래에 대하여 연산군 말년과 중종 초기에 영광, 만경 등지에서 시작되어 각지로 퍼져나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금만 잘못이 있어 남을 욕할 때에는 처妻와 모母까지 욕을 하는 등 악습惡習이 이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권응인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는 중종 이후 재상宰相으로 오래살면서 부귀富貴가 겸兼한 사람을 열거列擧하고 있다. 송흠은 90여 세, 이현보는 89세, 송순은 92세, 오겸은 89세, 정사룡은 81세, 홍섬洪暹은 82세, 원혼은 92세까지 살았다. 그 중에서도 홍섬의 어머니 송씨는 정승의 딸로 정승에게 시집갔고, 다시 정승의 어머니가 되었으며 94세까지 살았다. 이러한 드문 일은 임진왜란 이전에 세상이 태평하였던 시대를 상기想起한다.
그리고 각 지방의 수령首領들이 떠날 때는 기념으로 기념비를 세운다. 소위 송덕비頌德碑로써 군읍郡邑에 여러 개가 연립連立되어 있다. 중종 때 낙촌駱村 박충원이 명明의 사신使臣을 대접하기 위하여 반접사로 나갔다. 이 때 파주에서부터 의주까지 각 고을에 공덕비가 난립亂立한 상태였다. 만일 명나라 사신이 수령의 선정비善政碑를 질문하면 대답할 길이 없다 하여 일시 전부 땅에 묻어두었다. 그러나 명사가 지나간 뒤에는 다시 세워 지금도 옛날 고을자리에는 군수郡守나 관찰사觀察使의 선정비가 남아있다.
그런가 하면 오겸이 남원부사로 있을 때 과만瓜滿이 되기 전에 비를 세운다고 돈을 거두었다. 이것을 안 오겸은 비를 가져오라 하여 거두에 하마下馬라는 글자를 새겨 향교鄕校 앞에 세웠다고 한다. 대개 선정비에 엉터리가 많은 것은 다 아는 일이다.
다만 한가한 사람들이 문집을 만들기 위하여 시나 문장을 지었을 뿐이지 잡필류는 많이 기록하지 않았다. 순종 때 무명씨無名氏의 해동야사海東野史 4책이 있으나, 거기에도 조선 초기 사람의 일사逸事가 많이 적혀있고, 효종 이후 영정조시대의 사실은 적다. 다만 대동기문大東奇聞에 일사들이 많이 수록되었으나, 이 중에는 진위眞僞가 불분명한 것이 많다.
이로 볼 때 대동야승 이후는 큰 총서叢書가 나오지 않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동야승이 가장 큰 책이다. 1909년 이후 출판 (조선고서간행회) 하기 시작하여 1911년에 19권이 완간되었다. 그 후 1947년 경에 제 1권 중 용제총화와 필원잡기만이 주해註解와 우리말로 번역되고, 원문까지 붙였다. 예정된 13권을 다 한다고 하였으나 1권 중도에서 그쳤다. 또 하나 근일 경희출판사가 13권을 6권으로 압축壓縮 출판한다고 하였으나 1권만 나왔다. 막대한 비용 때문에 용이容易치 않다. 졸저拙著 ‘한국의 역사’ 에서 연료실기술, 대동야승을 이용하여 엮어보았다. 이제 완전히 우리말로 번역하고 원문도 같이 보존하였으면 하고 바랜다.
032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806년) 이긍익李肯翊
조선조 정조시대의 학자 이긍익이 편찬한 조선조시대 야사野史의 총집서總集書다. 이긍익은 전주인으로써 영조 12년 (1736년) 에 출생하여 자字를 장경, 호號를 연려실이라 일컫었다. 그의 아버지인 이광사는 근세의 문장가, 명필가로 이름을 일세一世에 떨쳤는데, 그 아들의 서실벽書室壁에 연려실이라는 글자를 써붙여줌으로써 이것으로 호를 삼게되었다. 연려실이란, 일찍이 한대漢代의 유향이 옛글을 교정敎正하던 때에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 에 불을 붙여 비춰주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한 칭호稱號로써 이긍익은 항상 이 고사를 사모하며 이 책을 편찬하였다 한다.
이긍익의 집안은 소론에 속하여 있었는데, 큰할아버지 이진유가 영조 6년 (1730년) 에 이조판서를 지내다가 역모죄로 몰려 옥사獄死하였으므로, 그 조카이며 이긍익의 아버지 원교圓嶠 이광사도 그 화禍를 입어 함경도의 부령, 전라도의 신지도 등지로 귀양가 23년을 살다가, 정조 원년 (1777년) 에 귀양지 신지도에서 별세別世했다. 이에 따라 천성天性이 뛰어나고 글을 잘 한 이긍익은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숨어서 책을 엮는 일에 힘쓰다가 순조 6년 (1806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연료실기술이라는 59권의 방대尨大한 저술을 남겼는데, 이 책은 그가 일평생을 두고 편찬한 조선조시대 야사의 총서다. 그는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은 정력을 동일민족인 조선왕조의 야사를 총정리하는데 쏟아, 이 책을 편찬함으로써 펴지 못한 뜻을 길이 남기고자 하였다.
연려실기술의 첫머리에는 이 책을 편찬한 방침을 밝힌 연려실기 의례義例라는 글이 실려있는데 대요大要는 ‘우리 동방의 야사는 거질巨帙을 편성한 것이 많다. 그런데 대동야승大東野乘, 소대수언昭代粹言 같은 것은 여러 사람이 지은 책을 모으기만 했기 때문에 설부說郛와 같아서 산만散漫하여, 계통系統이 없고 중복된 기사가 많아 열람상고閱覽相考하기가 어렵고, 춘파일월록春坡日月錄, 조야첨재朝野僉載, 같은 것은 편년체를 썼으되 자료수집을 다 하지 않고, 빨리 책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상세한 곳은 지나치게 상세하고, 소루疏漏한데는 너무 소루하여 조리條里가 서지 아니하였으며, 청야만집靑野謾輯은 사실에는 상세하지 않고, 다른 문집에 있는 역사인물에 관한 논평을 많이 실었기 때문에, 그 끝만을 추껴들고 근본을 빠뜨린 것이 많다. 이제 내가 편찬한 연려실기술은 널리 여러 야사를 채집하여, 대략 기사본말체에 쫓아 자료를 얻는대로 분류, 기록하고 다음에 계속하여 보태넣기에 편하게 하였다. 내가 자료를 얻어보지 못 하여, 미쳐 기록에 넣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후일 보는 이가 자료를 얻는 대로 보충하여 완전한 글을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각조各條마다 인용서명引用書名을 밝혔으며, 말을 깎아 줄인 것은 많으나 내 의견을 붙여 논평하지 않았으며, ‘술述하기만 하고 작作하지 아니 한다’ 라는 공자孔子의 뜻에 따랐다. 동서당파東西黨派가 나뉜 뒤로 이편 저편의 기록에 헐뜯는 것, 칭찬한 것이 서로 반대되어 있는데, 기재자記載者가 한쪽에만 치우친 것이 많았다. 나는 모두 사실대로 수록하여 후의 현자賢者들이 각각 스스로 시비是非를 정하여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 책의 열성조列聖朝 말단末端에는 그 시대의 명신사적名臣事蹟 약간을 분부分附하였는데, 상신相臣과 문형文衡 (문신文臣) 은 현우賢愚를 불문不問하고 차례로 수록하였으며, 유현儒賢과 명신名臣은 문견聞見한대로 대입代入하여 감히 사의私意로 출척黜陟하지 않았으니, 그간에 있어서 박채다수博採多收하여 후의 입언자立言者가 고징考徵함에 비하고자 하였다. 다만 견문見聞이 미박未博하여 반드시 궐루闕漏한 것이 많음을 한恨하니 남자覽者는 용서하리라.
국조國朝의 예악禮樂, 형정刑政, 법제法制의 손익損益과 관직官職의 연혁沿革, 변방邊方의 사고事故는 이미 편년체編年體로 된 것이 아닌만큼, 그것들은 연월年月의 차례로 수록할 수 없고, 또 각 왕조에 분입分入하면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따로 그것들만 수록하여 전고별집典故別集이라 이름하였다. 전고에는 더러 신라, 고려의 구제舊制와 유속遺俗을 편수篇首에 약거略擧하였는데,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동방역사의 인혁因革을 알아 그 문질文質과 득실得失이 어떠하였던가를 고考하게 하고자 함일 뿐이다.
여기에 모은 여러 사람의 저술에서 선배先輩를 칭稱함에 혹은 호號로, 혹은 시諡로 혹은 자字로써 하였으되, 나는 그들의 구문舊文을 고쳐서 그 이름을 직서直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비록 이것이 야사라 할지라도 이미 한 벌의 문자文字를 성成할 것이니 마땅히 일정한 범례凡例가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처음 내가 차서此書를 만들 때에 친지자親知者가 권勸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번시煩示하지 말라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사람에게 알리지 않으려면 만들지 않음만 같지 못 하다’ 라 하였다. 내가 마침내 이 책의 편찬을 끝마침을 기다리지 못 하고, 사람이 보기를 원하면 보이고, 빌리기를 원하면 빌려주었다. 경술년 (정조 14년, 1790년) 에 풍악楓嶽 (금강산) 에 놀러가면서 전질全帙을 남에게 빌려주고 갔더니, 이곳 저곳에서 서로 빌려 보다가 어느 재상宰相이 서수書手 (필생筆生) 수십 명을 시켜 여러 벌을 전사傳寫하였다. 미정본未整本이 갑자기 옮겨 써져서 차례가 뒤섞이고, 명신名臣들 가운데 누락漏落된 이가 많아 전혀 조리條理가 서지 않고, 그대로는 세상에 전하지 못하겠으므로, 요즘 정본正本을 수정하기 시작하였는데, 몇 해 동안 안질眼疾을 앓아 눈이 어둡고, 정신이 피로하며, 같이 고증考證하여줄 동지同志도 없고, 또 글씨를 써줄 사람도 없으니, 실로 죽음이 갑자기 닥치면 마침내 미완성이 되고 말지 않을까 두렵다.
내가 13세 때 선군先君 (아버지) 을 모시고 자다가 꿈에 임금의 명을 받고 ‘초야草野에서 붓을 가졌노라 (초야찬필草野贊筆)’ 라는 글귀가 첨자籤子된 시詩를 지어 올린 일을 보았는데, 요즘에 와서 문득 생각하여보니 초야찬필이란 글귀가, 늙어서 궁窮하게 살면서 야사를 편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豫言이 어릴적에 꿈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이루어짐에 드디어 연려실기술이라 이름지었노라.
위에 적은 연려실기술의례의 글로써 이 책이 편술자가 일평생 동안에 걸쳐 기술한 것이었으며, 또 후인이 보완할 여유를 남겨둔 것이었으며, 1790년에는 벌써 타인에게 여러 벌이 베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아마도 이긍익이 그 아버지의 귀양터이었던 전남 완도 신지도에서 하세下世한 1777년 42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근 30년 동안에 걸쳐 편찬된 것 같다. 그가 이 책을 편찬하고 있었던 때는, 조선왕조의 문예부흥기文藝復興期라고 말하는 정조시대 (1776 - 1800년) 에 해당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실학實學이 한창 성행盛行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潮流의 영향을 받고,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은 이긍익은 조선조시대의 야사류를 힘 닿는 데까지 모두 읽고, 그것을 왕조별, 사항별로 정리하여 기사본말체의 연려실기술을 편찬하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을 편찬함에 있어서, 조금도 사의私意를 가필加筆하지 않고, 선인先人들의 기술記述을 그대로 옮겨 적었으며, 그 기사 끝에는 반드시 인용서명을 기입하고 있다. 그가 인용한 조선시대의 야사수록野史隨錄, 일기, 문집류는 400여 종을 헤아리니, 그가 얼마나 많은 야사류를 읽고, 그것을 채록採錄하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편찬된 연려실기술은 원집原集, 속집續集, 별집別集의 세 편으로 되어있다. 원집은 조선의 태조 때로부터 18대 왕 현종조에 이르기까지 282년 동안 (1392 - 1674년) 에 일어난 일들을 왕조별 사건별로 수록하고, 각 왕조기사와 끝에는 그 왕조의 상신相臣, 문형文衡 (문신文臣), 명신名臣의 전기傳記를 부기附記했다. 속집은 19대 왕 숙종조 47년 동안 (1674 - 1720년) 에 있었던 일을 원집의 형식대로 수록하였다. 별집은 조선시대의 관직을 비롯하여 전례典禮, 문예文藝, 천문, 지리, 변위邊圍, 역대고전歷代古典 등으로 편목篇目을 나누어 그 연혁沿革을 수록하고, 또한 인용서명引用書名을 附記했다. 말하자면 원집, 속집은 정치편이고, 별집은 문화편이다.
그런데 연려실기술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편술자 이긍익이 죽기 17년 전부터 여러 벌이 베껴졌고, 또 타인의 보충 가필이 기대되었으므로, 전사본傳寫本에 따라 각 편의 권수를 달리하고 있다. 그러한 전사본을 대본臺本으로 하여 일본통치시대에 두 가지의 연려실기술이 간행되었는데, 하나는 조성광문회인본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고서간행회인본이다. 최남선의 주도主導로 1911년부터 간행된 광문회인본은 원집 24권, 별집 10권 도합 34권으로 되어있고, 1913년부터 일본인들이 간행한 고서간행회인본은 원집 33권, 속집 7권, 별집 19권 도합 59권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전자前者의 원집에서는 태조로부터 제 16대 왕 인조까지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을 뿐이나, 후자後者는 태조로부터 18대 왕 현종까지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속집이 들어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고서간행회인본이 가장 완비完備된 전사본을 대본으로 하여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여기에 들어있는 속집의 기사에는 인용서목이 적혀있지 않고 전체를 통하여 와오訛誤가 많다. 이에 반하여 광문회인본은 최남선이 그 提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원편자 이긍익의 후손後孫 이범세로부터 받은, 이른바 원본을 대본으로 하고, 몇 가지의 다른 전사본을 대조하여 와오를 정정하였다고 하니, 비록 권수와 기사연대는 적으나, 기사에는 잘못 된 곳이 그리 없다고 볼 수 있다. 광문회인본의 대본이, 최남선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과연 이긍익이 친필한 원본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기에 5. 16 혁명 후 1965년 11월에 결성된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는 우리 고전 국역사업을 일으켜 광문회원본과 고소간행회인본을 종합하여, 후자의 와오를 고치는 한편, 전자의 미비한 부분을 보충하여, 그 첫 번째 사업으로 국역연려실기술을 1966년 10월부터 간행하게 되었다. 이 국역연려실기술은 고전국역총서 제 1집으로 간행되어 모두 12책으로 출판되었는데, 각 책의 후반에는 한자로 된 원문을 그대로 실어 연구자들에게 편의를 주고 있다. 이 국역연려실기술에는 조선왕조의 개조開祖인 태조로부터 시작하여, 당파싸움이 가장 격심하였던 숙종조까지 이르는 328년 (1392 - 1720년) 동안에 있었던 사건들의 경위와, 인물들의 전기와 제도문물의 연혁이 실려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러한 분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국민의 교양을 높이는데 읽어야 할 훌륭한 저술이다. 그러므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이 책을 우리 한글로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낸 것이다. 이에 앞서 윤백남 주관의 계유츨판사가 이 책의 일부를 국한문체로 번역하여, 1934년에 간행된 조선야사전집에 넣었음을 상기想起한다.
연려실기술은 이 책이 편찬되던 때까지에 이렇다 할만한 체계가 없었던, 조선시대의 모든 역사를 기사본말체라는 새롭고 진보된 체제로 정리하여 준 점에 있어서, 조선조시대의 야사의 金字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사본말체란 어떤 사건의 시말始末을 사건별로 기술하는 서술방법으로써, 흔히 학술지에 발표되는 논문의 형식을 말한다. 우리 삼국시대의 야사를 수록한 삼국유사도 기사본말체 사서다. 이밖에 역사서술의 형식에는 정사체正史體라고 하는 기전체紀傳體를 비롯하여 편년체編年體, 편년강목체編年綱目體, 전기체傳記體, 설화체說話體 등이 있다. 기전체란 삼국사기나 고려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대 제왕의 본기本紀, 표表 (연표年表), 지志 (제도制度), 열전列傳을 차례로 실린 형식의 사서史書를 말하는데, 본기의 기紀 자字와 열전의 전傳 자字를 따서 지은 말이다. 편년체란 동국통감이나 고려사절요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사상에 일어난 일들을 연월일 순으로 적은 사서를 말한다. 편년강목체는 주자朱子가 지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유래한 사체史體로써, 연대순年代順으로 엮되 강록綱錄을 세워 어떤 나라를 큰 줄거리 (강綱) 로 하여, 같은 시대에 있었던 다른 나라의 일을 작은 글씨 (목目) 로 적은 형식을 말한다. 전기체란 인물 중심의 사서를 말하며, 설화체란 옛 이야기로 엮은 사서를 말한다. 이러한 사체史體 가운데서 가장 학구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며 재미있는 것은 기사본말체이니 연려실기술이 이에 속한다.
033 동사강목東史綱目 (1790년) 안정복安鼎福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조선조 명종 때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의 주모자 이기의 말이다. 그가 많은 사류士類를 살해하고 간흉奸凶의 지목을 받으면서도 현실적 권세 영화로 자만하는 것을 보다 못 한 친지가 그를 찾아가 ‘후세 역사가들의 필주筆誅가 두렵지 않느냐?’ 고 했을 때, 그가 대답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역사책을 읽지 않으니까 후세 사필史筆의 어떠한 포폄褒貶도 관심둘 바 없다는 것이다.
여기 이기가 말한 동국통감은 우리나라 역사책을 대표로 들어 한 말이고, 하필 동국통감을 지적해서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우리나라 역사책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권 외에 놓여져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한심할 지경인가를 알려주는 일화逸話의 한 토막이다.
이것은 물론 당시 봉건지배층의 몰지각한 정치, 교육이념의 소치이거니와, 또한 역사를 직접 편찬한 역사가들의 책임도 크다. 삼국사기, 고려사 등 기전체 역사책을 위시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편년체 통사인 동국통감과 같은 것도, 대체로 사대주의적 사고방식 내지 중국중심주의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서술된 것이며, 우리민족 본위本位의 역사이기보다는 중국역사의 일부용一附庸처럼 되어 있어서, 국민적 애국심을 환기換氣시킬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진부陳腐한 봉건주의로 일률화一律化된 사론史論은 독자에게 아무런 매력을 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자연 국민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임진壬辰, 병자丙子 두 전란戰亂을 치른 뒤에 사정이 상당히 달라졌다. 봉건사회가 해체解體 과정에 들어서면서 지배층의 일각에서 위기의식이 움트고, 개혁을 요구하는 재야在野학자들의 새로운 의견이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영정조시기에 이르러 뚜렷한 역사현상으로 시대의 전면이 나타나게 되거니와, 특히 재야학자들의 비판적 정신과 실용, 실증주의의 창도唱導는, 조선조 후기의 학계에 참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동사강목은 이러한 시대 이러한 실학의 산물이다. 동사강목은 동국통감과 같은 편년체 통사通史에 속한다. 그러나 체제상으로 강綱과 목目을 설정하여, 서술의 효과를 거두었고, 내용상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적 계통을 세워, 종전의 역사책들의 결함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동사강목의 실학과 관계, 실학사상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하여 실학사상을 일별一瞥한다. 실학사상의 전개는 시기별, 유파별로 특징을 잡아볼 수 있다.
제 1기,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 성호학파. 이 시기에 있어서는 우선 종래의 학문태도를 비판하여 번소燔所한 예설禮說, 성리설의 비생산적 상태로부터 국가, 사회의 현실문제로 방향을 돌리는데 역점이 두어졌다. 유교의 경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경학이 목적이라기 보다 경세치용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되었다. 실학의 학문적 방향은 이 경세치용학파에 의하여 굳건히 정립되었다.
제 2기,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 연암학파. 이 시기에 이르면 신 학풍이 이미 사회에 침윤浸潤되고 있어서, 이 학파는 경세치용학파가 지니고 있던 사상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현실문제에 대해서도 더욱 예리한 시각과 구체적 이론을 가지게 된다. 경세치용학파가 근기近畿지방의 농촌토착적 환경에서 주로 토지제도 및 기타 제도상의 개혁을 주장했음에 대하여, 이 학파는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상업, 수공업의 유통 및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제 3기,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 추사학파. 이 시기에 와서 실학이 변하였다. ‘허虛를 숭상崇尙하는 나라에 실학이 통할 수 없다’ 라고 탄식한 최한기 (1803 - 1873년) 의 말과 같이 위의 두 학파가 그와같이 현실문제를 다루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탁상담론卓上談論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으로 경세치용학파는 체질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규범성과 이치에 대한 탐구성으로 하여, 그의 일부 에피고넨 (도이치어, Epigonen, 학문이나 사상, 예술 등에서 독창성이 없이 뛰어난 것의 모방만을 일삼는 사람) 들이 종교 (천주교) 의 신앙으로 흐르게 되는가 하면, 이용후생학파는 도시 서민적 생활, 의식, 기분에 접근하면서 소품小品, 패사적稗史的 문학예술의 세계로 들어간다. 원래 현실비판을 하던 실학파를 좋아할 리 없는 정부 권력은 경세치용학파에 대하여는 사교금압邪敎禁壓을 이유로 철처히 분제芬除 하였고, 이용후생학파에 대하여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명분 아래 강제로 억눌러버렸다. 이리하여 호된 서리를 맞은 실학은 제 3기에 이르러 현실에 대한 개혁의 정열과 비판정신을 거의 거세당하고, 오직 선행先行시기의 실증적 방법만을 계승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경서經書, 전고典故, 금석金石 등에 대한 고증학적考證學的 연구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 실사구시학파의 특색은 학문 그 자체가 목적이며, 엄격한 객관적 태도로써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자기의 정치, 사회적 이념을 염원에 두고, 주관적으로 고전을 인거引據, 해석하던 선행시기의 실학파들과는 매우 달랐다. 말하자면 학문을 위한 학문 - 근대적 과학연구태도를 부식扶植하는데 공적이 크다고 할 것이다.
동사강목은 실학의 제 1기인 경세치용학파의 학문적 달성 가운데서 가장 큰 업적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다. 동사강목은 경세치용학파의 사관史觀 및 사론史論을 집약적으로 담아놓았을 뿐 아니라, 개개의 사실의 성실한 고증考證은 제 3기의 실사구시학파의 선구先驅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저자 순암 안정복 (1712 - 1791년) 과 동사강목의 내용을 보면, 안정복의 가계는 당시 실세한 남인으로 기호畿湖 간에 전전하면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광주 안씨, 그의 유년시절은 당시 하급관리를 한 조부의 벼슬살이를 따라 여러 곳은 전전했고, 중년 이후에는 광주에 정착하여 일생을 마쳤다. 동사강목은 1756년 (영조 32년) 에 쓰기 시작하여 1758년 84세 때 초고를 완성하였다. (그 후 30년을 지나 그가 목천 현감으로 재직할 때 다시 초고草稿를 수정하고, 서문을 붙여서 최종적인 작업을 함) 이 역사적 노작이 광주의 한 초가에서 이루어졌다. 안정복이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학문에 일대전환一大轉換을 가져온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경세치용학파의 대종 성호 이익이 광주 (안상성촌) 에 살고 있어서 안정복은 무난하게 성호의 문하門下로 들어갈 수 있었고, 일생 동안 성호를 사사師事하면서 성호학의 중요한 계승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정복은 본래 주자朱子의 학설을 독실히 신봉하면서 오직 그것을 의한 실천궁행實踐躬行을 힘쓸 뿐이고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1746년 10월, 처음 안산에 가서 성호를 배알拜謁하고 가르침을 청할 때 주고받은 문답기 (함장록, 순암집 소수所收) 를 보면, 학적 태도에 있어서 시종 사제 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성호가 매양 지식을 강조하고 새로운 지견知見을 통한 학문의 향상을 존중하고 있음에 대하여, 안정복은 오직 선현先賢의 학설을 성실히 믿고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있다. 마지막 작별시에 성호는 안정복에게 지식을 말하고, 귀가 후에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고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성호학 자체가 보수성과 진보성의 양면을 가지고 있었거니와, 안정복의 이러한 인간 바탕은 그로하여금 성호 문하의 수다한 제자, 사숙자私淑者들 중에서 독특한 입장을 지키게 하였다. 사회개혁에 관한 의견이나 서양문화에 대한 수용태도에 있어서 많은 신진 후배들의 급진적 사상에 비하여, 안정복은 항상 노성지중老成持中의 보수적 견해를 가졌다. 다산 정약용과 같은 이를 성호좌파라고 한다면 안정복은 성호우파에 해당한다.
그러나 안정복은 성호의 경세치용학을 기본적으로 시인하고 그것을 이어받았다. 뿐 아니라 그의 사관 및 사론은 성호의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동사강목의 의례義例와 규모는 모두 성호와의 문난問難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성호의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은 안정복의 가장 큰 입론立論의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동사강목은 그 개종명의開宗明義로써 이 정통론을 먼저 취급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정통론은 중국 사가史家들이 중국 황제를 세계의 통치자로 생각하고, 역대歷代 교채交替하는 왕조王朝를 일관적 상속相續 계보系譜로 줄을 대어 정통正統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 기본 의도는 현재 자기의 소속 왕조의 정권을 합리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정통이란 아예 논의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동사강목은 그 범례凡例에 우리나라 세사歲史의 정통을 설정하고 단군檀君, 기자箕子, 마한馬韓, 신라 문무왕 (9년 이후), 고려 (태조 19년 이후) 를 정통으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중국 중심주의적 역사관에 대립하여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성을 살리려는 것일 뿐 아니라, 정통론에 의한 역사발전 주류의 계통화는 우리나라 역사학으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체계적 파악의 가능성을 제고提高했다.
동사강목은 무엇보다 먼저 동국통감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첫째, 동국통감에 단군조선, 기자조선 뒤에 위만조선을 붙여 삼조선으로 삼은 것은 부당하다. 위만은 참적僣賊이니까 위만 대신에 마한을 정통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둘째, 동국통감에 단군, 기자를 모두 외기外紀에 넣은 것은 부당한 일이다. 단군이 처음 나라를 열었고, 기자가 처음 문물을 흥기興起시켰는데, 비록 사실이 인몰湮沒되고 없다손 치더라도 어찌 전기잡서傳紀雜書의 것을 수록한 중국의 외기에 동질시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동사강목은 단군, 기자의 사실성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연대의 상한上限을 그만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 동사강목에 흐르고 있는 사상을 요약하면
첫째, 애국적 사상으로 외래 침략자를 격퇴한 역사적 사실들을, 특히 유의하여 서술하고, 충신과 명장들의 빛나는 활동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고구려의 대 수당전쟁과, 고려의 대 거란, 몽고전쟁 등에서 조국의 수호를 위한 민중의 분투와 을지문덕, 강감찬, 서희 등 뛰어난 인물들의 불멸不滅의 업적을 찬양하고, 우리 민족의 용감성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한편, 신라 통일 이후에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국방에 관심을 돌리지 않아 나라가 약하게 되었다고 통탄하였다. 고려 성종이 주군州郡의 병기兵器를 수납하여 농구農具로 개조한 사실을 들어, 외적의 침입에 무엇으로 방어할 것이냐고 비난한 것도 한 예다.
둘째, 애민적愛民的 사상으로 봉건국가의 대민시책對民施策이 착취搾取에만 치중置重하고, 백성의 생활을 돌보지 않은 것을 비평한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의 진대법賑貸法 시행施行에 관한 안설按設에 진賑은 좋지만 대貸는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대貸는 백성들에 대한 국가의 착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논파論破하였으며, 고려 광종 때의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에 관한 안설按設에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문종 때 억울하게 죽은 노비의 옥사獄死에 분격憤激하여 옥사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과 그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저자가 역사상의 사실을 통하여 저자 자신의 시대 현실을 비판했던 것이며, 그 비판의 관점은 곧 경세치용학적 견지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동사강목 본편 17개 권속에 한결같이 관류灌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본편 외에 동사강목의 가치를 한결 높여준 것은 그 마지막의 부권附卷이다. 부권에는 고이考異, 괴설변怪說辨, 잡설雜說, 지리고地理考 등의 4개 편목篇目이 들어있고, 각 편에는 다시 여러 개의 개별적 문제들 (133개의 사례事例) 이 취급되어 있다. 예를 들면 단군설화檀君說話, 갈문왕, 진흥왕정계비眞興王定界碑 등을 위시하여 역대 강역고疆域考, 분야고分野考 등에 이르기까지 성실한 고증考證을 가加한, 역사연구의 역작力作들이라 할 것이다.
동사강목이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써 그 후 실사구시학파의 선구가 되었다는 것은 앞서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근대 계몽기啓蒙期 (구한말舊韓末) 에 이르러 그 학문적, 사상적 영향은 더욱 저대著大하였다. 이 시기의 애국주의적 민족사학의 창건자 -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 제 선학先學의 학문적, 사상적 기반을 조성함에 있어서 동사강목이 제공한 원천적 역할은 더 할 수 없이 중요했던 것이다. 오늘 민족주체의식이 문제되는 때 이 동사강목은 고전古典으로써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준다.
034 발해고渤海考 (1784년) 유득공柳得恭
우리 학계에서 발해연구가 본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은 조선왕조의 정조 이후부터였다고 보아야 한다. 유득공의 발해고를 비롯하여 한치연의 해동역사海東繹史 (권 11) 와 한진의 해동역사속續 (권 9) 에 보이는 발해왕조의 세계世系와 강역疆域에 관한 사료 수집 및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수록된 발해고, 속발해고, 그리고 홍석주의 발해세가渤海世家, 서상우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 들은 모두 정조 이후 우리 선배 학자들이 발해사연구에 남긴 찬란한 업적들이다.
이들 여러 업적을 살펴보면 모두 제각기 특색을 지니고 있으나, 여기에 소개하는 유득공의 발해고는 모든 점에서 남다른 특색과 문제점을 지니고있는 서적이다.
유득공이 이 발해고를 탈고한 것은 정조 8년 윤潤 삼월이었다. 全 1권으로 되어있는 이 서적의 저작을 위하여 저자 자신이 밝힌 인용도서만 보아도, 신구新舊 양兩 당서唐書, 상대사上代史,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등의 중국 정사正史와 우리의 삼국사기, 고려사를 비롯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 동국통감東國通鑑, 통지通志,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문헌비고文獻備考,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청일통지淸一統志, 성경통지盛京通志, 전당시全唐詩 등의 부피 많은 한중 양국의 서적에서, 일본의 일본일사日本逸史, 속일본기續日本紀까지 24종을 참고하였다. 이 인용서목 중에는 보기드문 서적으로 손꼽히는 능적지의 만성통보萬姓統譜라던가, 또 발해왕실 대씨大氏의 자손으로써 고려에 내투來投하여 태씨太氏로 사성賜姓된 영순 태씨의 족보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당시로써는 사료 수집에 최선을 기하여 저술된 서적임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많은 자료를 구사하여 군고君考, 신고臣考, 지리고地理考, 직관고職官考, 의장고儀章考, 물산고物産考, 국서고國書考, 속국고屬國考, 9고考로 나누어, 발해왕국의 세계世系에서 정사正史의 열전列傳, 지리지地理志, 백관지百官志, 흥복지興服志, 식화지食貨志의 청지請志에 해당되는 부분과 언어言語에 이르기까지 체계있는 발해왕조사를 엮어 보려는 유득공의 노력이 뚜렷이 엿보인다.
만주의 동북에서 연해주 일부 및 한국 동북부에 자리잡아 해동海東의 성국盛國으로 200년 간의 번영된 국조國祚를 이어왔지만, 자신들의 손에서 이루어진 기록을 남기지 못 하였던 까닭에, 장건장의 발해국기 (3권) 같은 것까지도 길잡이로 하며 엮은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과 발해왕국을 쓰러뜨린 거란족 왕조의 정사인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및 열전 등에 보이는 조각나고 잘못된 점도 적지 않은 기록을 모아, 엮어나가야만 하였던 이 왕조의 역사를 이 정도나마 체계를 세워본 것은, 그 내용이야 어떻든, 우선 발해사 개척자로써의 유득공의 공로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국제학계에서도 불멸의 공적임에 틀림없다.
국내학계는 물론이었거니와, 아직 중국 일본에서도 그러한 시도가 있기 전에 발해서 전반을 체계 세워보려고 했던,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은 마땅히 학계에서 선각자로써 존경을 받아야 할만한 것이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발해고의 내용을 샅샅히 살펴보면, 역시 개척자이기에 겪어야 했던 실수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그 가장 뚜렷한 것이 군고君考, 지리지地理志 및 속국고屬國考라고 할 수 있다. 발해왕국의 왕계王系는 김민발이 당회요唐會要를 들춰 발해왕 대위계大瑋瑎의 재위 사실을 발견하여, 이를 현석왕과 말왕 연찬의 중간에 넣어 15대로 하기까지는, 보통 개국자開國子 대조영에서 말왕 연찬까지 14대로 잡아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발해고의 군고를 보면, 대조영에서 부父 진국공 (걸걸중상) 까지 왕계에 넣고 있으나, 대조영에서 말왕 연찬까지는 14대로 잡고 있다. 이러한 착오는 발해국 자신들이 엮은 사료가 없기에 부득히 당서에 보이는 세계만을 근거로 한데서 범한 착오였으나, 당회요唐會要까지 참고로 하였든들 피할 수 있는 실수였다.
이 군고에는 다시 말왕末王 연찬에서 국조國祚가 끊어진 후의 발해왕으로 흥요왕興遼王이라고 하며 대연림大延琳과, 오시성烏舍城 부투부 염부왕浮渝府 琰府王을 들어 그 업적을 설명한다. 흥요국興遼國은 발해 망국 후, 요遼의 동경東京 (현現 요왕遼王) 사리군상온舍利軍詳穩으로 있다고 불평을 품고, 성종 태평 9년 (고려 현종 20년) 에 발해 유민들을 모아 자립을 꾀하여, 약 1년 간에 걸친 반란정권을 수립하여, 그 영향이 고려에까지도 미치게 한 발해왕족 대연림의 집단이다. 또 오사烏舍는 올야兀惹의 와음訛音으로, 발해 망국 후 거란이 발해 고지故地에서 왕실거족王室巨族을 납거拉去하고 그 지역의 통치를 포기하다싶이 한 틈을 타, 발해 上京이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수립된 토민土民의 정치집단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흥요국이 발해 유민들을 모아 독립국가의 형태를 갖추어보려고 하였지마는, 결과적으로는 자국의 옛 땅도 아닌 遼 영토에서의 일시적인 반란집단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고, 또 올야兀惹만 하더라도 전全 발해영토로 보아서는 극히 좁은 지역에서 토민들이 세운 원시적 정치형태의 지방정권이며, 구舊 발해의 왕족이나 지배층을 구성했던 고구려계의 참여도 전연 알 수 없다. 이와같은 반란 또는 토착민土着民의 집단 형성을 발해왕조의 재조再造로 규정짓고, 그 수령들을 발해왕조의 군고君考에 넣어 왕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는 더 깊이 고려해야 할 문제다.
王系의 정통성을 가려내는 소위 정윤론正閏論에 남달리 신경을 쓰느 주자학朱子學의 교양敎養에서 생장生長한 유득공이 올야국의 수령首領까지 군고에 넣었다는 것은, 발해왕통의 단절을 아쉬어 하고 다소라도 더 연장시켜보려는 비원悲願에서였을 것이나, 그렇다고 하면 안정국安定國의 수령도 군고에 넣었더라면 차라리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즉 발해 망국 후 그 유예遺裔들을 이끌고 압록강유역에서 새 국가를 건설한 안정국은, 시대적으로 보아서 흥요국이나 올야에 앞섰을 뿐 아니라, 열만화시列萬華時에는 해상海上으로 북송北宋과 교왕交往하여 만만치 않은 국세를 보였던 까닭이다.
한편 발해사연구에서 언제나 가장 말썽이 되는 것은, 그 강역疆域과 지방 비정批正이었다. 당서唐書 발해전과 요사遼史 지리지의 부정확하고 조각난 기사를 모아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위치를 밝혀야 하는 까닭에, 누구라도 신설新說을 내놓을 열의만 있다면 쉽게 뛰어들만한 분야다.
이 발해고에서도 가장 엉성한 부분이 바로 지리고地理考다. 5경 16부의 위치를 숙신肅愼의 옛터, 읍루挹婁의 옛터 또는 월희越喜의 옛터라고 불합리하고 막연하게 적어놓은 신당서 발해전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 아니라, 5경의 위치도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해란하안海蘭河岸 서고성자西古城子 (돈화敦化 정남正南) 로 그 옛터를 학설이 굳어져가고 있는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를 평양에 비정하여놓고, 다시 또 돈화敦化 북北의 홀한주忽汗州에 비정하고 요사遼史의 평양이 잘못된 것이라는 설명을 붙이는 등, 일관성 없는 비정을 되풀이 하여, 독자들을 혼미昏迷에 몰아넣고 있다. 이밖에 다른 4경과 부주府州의 위치도 현재로 보아서는 거의 참고될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또 송사宋史 정안국을 깊이 고찰하지도 않고, 국망國亡 후 발해 유민들이 건국한 정안국을 속국屬國으로 규정지어, 촉국고屬國考에서 다룬 것도 부당하거니와, 다시 물산고物産考 같은 것은 신 당서新唐書 발해전의 몇 구절을 그대로 옮김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같이 그 인용서목의 다대多大와 목차目次의 짜임새와는 달리 지극히 엉성한 내용을 보이는 발해고에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국서고國書考를 두어 일본측 사료史料에서, 발해왕국이 일본에 송부送付한 국서國書 6통通을 뽑아 싣고있는 사실이다.
발해사의 연구에 있어서는 그 왕국의 주체세력이 어느 민족에 속하느냐는 문제는, 누차屢次 외국 학자들의 논쟁의 불씨가 되어왔다. 워낙 사료가 없는 까닭에 학설상의 논쟁을 일으키기에는 알맞은 문제였다. 말썽 많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일본의 백조고길이 발해왕국의 구성과 정권의 중심세력을 설명하여, 시조始祖 대조영을 비롯하여 그 왕조의 상류사회를 조직한 주축력이 고구려 유예遺裔이며, 피치계급被治階級은 말갈족인 것으로 단정하고, 발해왕국의 정체正體를 고구려 유민遺民이 말갈족을 이용하여 국가광복에 성공한 것이라는 추단推斷을 내놓아, 거의 정설화定說化 하게 된 논거論據가, 일본에 왕래來往한 사자使者가 대부분이 고구려 왕족명王族名 또는 한식명漢式名을 가진 자이며, 말갈 성姓이 아니었다는 점과, 아울러 바로 발해 국서國書에 고려 (고구려) 후예後裔임을 자랑하고, 고려왕을 자칭自稱하였으며, 또 일본의 답서答書도 고려국왕에 보내는 것으로 된 것이 예사例事인 까닭에서였다. 만약 유득공이 이러한 점을 의식하고 발해고에 그 국서를 실었다면 그 식견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우리 선배학자들이 발해사연구에 남긴 업적에는 중국측 사서史書의 그릇된 해석을 많이 시정是正하여, 중국의 발해사 대가大家 김민발로 하여금 그 업적은 조정걸의 대작大作, 동삼성여지도설東三省與地圖說에 겨눌 수 있는 정확한 것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국 학계에서도, 발해사연구의 이정표里程標로 되어있는 정약용의 발해고渤海考, 발해속고渤海續考를 가지고 있다. 또 해동역사속海東繹史續에 들어있는 발해왕국의 지명地名 고증考證만 하여도 그 정확성에 있어서는 유득공의 발해고를 능가凌駕한다.
이에도 유득공의 발해고가 최근 독서계에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결코 그 목차의 다면성多面性이나 또는 고증의 정확성에만 기대를 걸어보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도 오히려 우리 국사의 영역 확대를 기도企圖하는 일념에서, 누구보다 앞서 발해사를 국사의 일 분야로 다루려는, 유득공의 성의와 노력에 더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이라고 믿는다.
즉 유득공은 이 발해고의 서문에서 고려 국력國力의 부진不振이 발해사를 정리하지 못 하고 외면하였다고 전제하고, 고려조가 우리의 남조南朝인 신라, 백제, 고구려의 역사 삼국사기만 쓰고, 북조北朝인 발해까지 포함시킨 남북조국사南北朝國史를 쓰지 않았던 부당을 꾸짖으며, ‘대씨大氏 (발해왕실) 는 그 누구였던가, 즉 고구려인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땅은 어디인가, 고구려의 땅이었다’ 라고 하고, 고려왕조가 발해사를 정리하여 국사의 일부에 넣고, 요금遼金에게 옛 발해영토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며 수복시켰던들 ‘토문土們 (두만강) 이북以北과 압록 이서以西’ 를 빼앗기지 않아, 고려왕조가 약국자弱國者의 국운國運을 밟지 않았을 것이라는 요지要旨의 비분悲憤한 어조語調로 강조하고 있다.
정조 이후의 한국 학자 간에는, 어떠한 형태이든지 발해왕국을 국사에 넣어 다루는 학자는 유득공만이 아니다. 유득공의 외우畏友 한치연이 해동역사海東繹史 (권 11) 에서, 신라왕조와 고려왕조 중간에 발해왕조를 넣고, 그 숙부叔父의 유지遺旨를 이어 해동역사속海東繹史續을 지은 한진이 발해의 강역의 일부로 다루었던 것을 비롯하여, 정약용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발해왕국의 강역을 상세히 밝힌 것은, 모두 한국사의 내용을 명확히 하려는데 의도가 있다. 서상우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도 자신의 서문은 없지만, 저작의 진의는 이러한 국사관에 신념에서 저작되었다.
그러나 정면으로 발해왕국사를 한국사의 분야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굳은 주체의식에서 발해사를 체계 세운 것은 유득공의 발해사 밖에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발해세가渤海世家를 지은 홍석주의 서문에 ‘내가 보기에는 발해의 영토가 남南은 신라, 단군, 기자, 위만의 나라에 접하고, 또 고구려의 옛땅이 이에 많이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동국인東國人이 발해사를 능히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는 까닭에 이 글을 썼다고 하여, 한국사의 일부로 발해사를 보려는 관점에서 본다면, 초점焦點이 빗나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발해 인식에 있어서 엄청난 차가 있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정치적인 의도가 포함되어 있지마는, 고구려까지도 한국사의 체계에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함부로 논필을 휘둘렀던 관학官學 출신의 외국 학자도 있다. 우리 민족의 운명 공동의식에서 거리가 있고, 또 왕실과 지배계급을 제외한 대다수의 토민土民이 말갈족이었던 발해왕국의 역사를, 우리 한국사의 일부로 끌어오는 데에는 그 전제로 혈연적, 문화적 공동의 해명되어야 한다는 난難 문제가 남아있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영토 내에 있는 한 주먹의 흙까지도 왕의 것이 아닌 것은 없다는 당시의 국가관에서 본다면, 고구려족인 대조영이 고구려 옛 땅에서 고구려유민을 지배계급으로 하여 건설한 발해왕국은, 관점에 따라 한국사에 편입되어야 할 여건도 있었다. 미국의 독실篤實한 한국학연구가韓國學硏究家 핸슨이 외국 학자로써는 최초로, 유득공의 의견대로 북조北朝로써의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켜 설명한 것은, 비단 유득공의 공적에 그칠 것은 아니다. 발해고는 조선고서간행회본朝鮮古書刊行會本과 요해총서본遼海叢書本이 있다.
<사족蛇足> 발해가 아니라 대진국大震國/ 大振國이고,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나타냈으며, 왜 (일본) 와의 사신이 왕래하였는데, 국서에 대진국이라고 하였으며, 황제 칭호를 썼다. 고구려 고토故土를 대부분 관할한 대 제국帝國으로, 15대 200여 년 간 고구려의 국통國統을 이어온 해동성국海東盛國. 중국은 발해라고 요동반도의 지명을 국가명으로 사용하여 속국화 제후국화로 폄하貶下하고, 우리 사학자들은 아예 대진국역사를, 가야역사처럼 역사에서 없애버렸음 (Daum Blog 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참조)
035 해동역사海東繹史 (1823년) 한치윤韓致奫
해동역사는 조선조 후기의 실학자 한치윤이 지은 사승史乘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해동역사는 총 85권으로 이루어져, 원편原篇 70권은 한치윤이 편찬하고, 속편續篇 15권은 그의 종자從子 한진서가 저술하였다. 한치윤이 본서의 저술에 착수한 것은, 정조 말 혹은 순조 초로 짐작되며, 그는 10여 년 본서의 편집에 심혈을 기울여 원편 70권을 완성했으나, 끝을 맺지 못 한 채 순조 14년 (1814년) 세상을 떠나고, 종자 한진서가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순조 23년 (1823년) 속편 15권을 완성하게 되었다. 한진서가 가家의 유업을 계승하게 된 것은, 그가 어려서 가친家親 (치규, 호 이당) 을 여의고 숙부叔父로부터 문학과 도덕을 훈도訓導받고 그 기애奇愛를 받아 속편의 유탁遺託이 있었던 때문이다.
한치윤은 본本이 청주, 호號 옥유당으로 남인南人 출신이다. 영조 41년 (1765년) 한성에서 출생하여, 순조 14년 (1814년) 작고作故하기까지 50 평생을 오직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을 뿐, 대과大科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문文과 학學에만 전념하였다. 당시는 숙종 20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 노론老論이 집권하여 남인이 실세하고 있던 때로, 일련의 남인 학자들이 임관任官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힘쓰던 추세였다. 옥유당은 약관弱冠부터 문명文名이 출중出衆하였으며 정조 말 족형族兄 한치응의 입연入燕 행사에 수행하여 연경燕京에서 청淸의 선진문물을 직접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과 사상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사행使行은 교빙交聘 뿐만 아니라 문화교류의 기연機緣이 되고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로써, 이 번 연행이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던가는, 그가 연경에서 돌아오자 곧 해동역사의 찬술에 착수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불후不朽의 대작大作 해동역사는 이와같이 그의 학문과 사상이 원숙圓熟해갈 때 착수되고 완성을 보았다.
영정조시대에 실학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을 무렵, 종래의 이른바 왕실중심의 관료주의적 정사체제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옛것을 되찾아보려는 자아비판自我批判의 정신과 결부되어 몇 가지 훌륭한 사승史乘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니, 해동역사와 더불어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그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러나 해동역사는 청초淸初의 고증학적考證學的 사가史家인 마숙의 역사를 모방한 것 같은 느낌이 많다. 역사를 모방했다는 말은 기록에 보이지 않으나 서명書名 뿐만 아니라, 그 체제와 편찬방법이 유사類似한 것은 여실히 증명된다. 옥유당이 역사繹史를 언제 열독閱讀하였는지 모르지만, 역사繹史가 이덕무의 소개로 처음 무래貿來된 것은 정조 2년 (1778년) 이고, 이 책은 그 뒤에도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재래再來되었을 것이므로, 일찍이 독람讀覽할 기회가 있었을 것 같으며, 그는 마숙을 흠모欽慕하고 있었고, 입연入燕을 계기로 당시 유명한 역사의 사상체계를 고구考究하고, 이해를 깊이할 기회를 얻은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에서 깊은 계몽啓蒙을 받아 해동의 역사를 편찬할 의욕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동역사가 역사繹史의 모방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비록 체제와 편찬방법은 모방했을른지 모르지만 자기중심적인 입장과 사관史觀을 견지堅持하며 실증적으로 차근차근 온축蘊蓄을 기울이고 있는 태도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036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1852년 경) 김정희金正喜
이 책의 원명原名은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다. 예당禮堂은 김정희의 호號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 저자가 본 금석에 대한 논고論考라는 뜻이겠는데, 내용은 겨우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와 북한산 비봉에 있는 동 순수비, 2개를 판독判讀, 해설解說, 고증考證을 한 것이다. 아마 그밖에 그가 과안한 다른 금석에도 손을 대려 한 것이 미쳐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중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는가 고려된다. 진흥왕의 순수비는 현재는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진흥왕이 한강 이북으로 영토를 넓힌 뒤에 왕이 새로 개척한 지방을 순찰한 기념비다. 이 비 이외에도 단천 마운령에도 같은 내용의 비가 십여 년 전에 발견되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진흥왕 북순北巡의 사실과, 또한 삼국사기에 신라의 영토가 안변을 한계로 했다는 기록을 뒤엎고, 안변에서 200리 밖 단천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로써 매우 귀중한 사료다. 그런데 과안록의 저자는 벌써 100년 전에 고증학적인 형안炯眼으로 이 비에 대한 과학적인 논증을 했다. 함흥비는 당시에도 벌써 상부上部와 좌左의 일부가 깨어진 불완전한 것이었다. 지금은 단천비가 발견되어 그 파손된 부분을 보충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 불완전한 비문을 보고 저자는 첫째, 진흥은 역사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시호諡號가 아니며, 생존시에 사용한 칭호다. 둘째, 삼국사기는 진흥왕이 북순한 사실을 빠뜨렸고, 신라의 국경을 안변까지로 정한 오류를 범했다. 셋째, 연호年號를 사용했고, 짐朕, 제왕帝王 등을 사용한 것은 신라가 독립국으로써의 체제를 갖춘 것이라는 것을 밝혔으며, 비문碑文에 나온 신라의 지명地名, 관명官名, 인명人名 등을 분석하여, 이 비문의 사료적 가치를 고증하였다. 과연 통철한 관찰, 정확한 고증학적 지식이 아니면 이런 업적을 거둘 수 없다. 이 비에 대하여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해동집고록海東集古錄을 인용하여 비碑의 자수字數가 매행每行 35자라는 것을 밝히고, 또 단천에도 같은 비가 있다는 것을 명기明記한 것을 보면 집고록의 편자는 함흥비의 완전한 것을 본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단천비와 대조하여 그 확실성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단천을 보지 못 하였기 때문에 집고록의 내용이 억측이라는 것과, 단천비도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 것은, 자기의 소견所見을 과신過信한 나머지 속단速斷을 하여 실수를 저질렀다.
북한산비는 진흥왕 때 세운 이후로 아무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 없이 천여 년을 흘러왔다. 야사野史에 이 태조가 한양에 수도首都를 정할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都邑자리를 찾아해매다가 북한산에 이르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라는 비碑가 서 있었기 때문에 도로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어서, 막연히 이것을 무학이 보았던 비라고 안이하게 생각했을 뿐, 그 내용을 알아보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저자가 30세 되던 1816년 병자년丙子年에 김경연이라는 사람과 같이 승가사에 갔다가, 비봉에 올라가서 이 비를 보고 이끼 낀 위에 은은히 나타나는 글자의 형적形跡을 만져보다가, 비로소 탁본拓本을 시험하여 이것이 함흥비와 같은 계통의 것임을 확인하였다. 지금도 비봉에 가본 사람이면 다 볼 수 있지만, 비면碑面이 너무 마멸磨滅되어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저자는 처음 이것을 발견하고 ‘천이백년고적일조대명변파무학비조궤지설千二百年古蹟一朝大明辨破無學碑弔詭之說 금석지학유보어세내여시야金石之學有補於世乃如是也’ 라고 쾌재快哉를 절규絶叫하였다. 이 해에 마침 운석 조인영이 북경에 들어가서 중국의 금석학자 유희해와 친교親交를 맺고, 조선의 금석을 수집하기 위하여 탁본을 보내줄 것을 부탁받고 돌아왔다. 저자는 이듬해 다시 조인영과 함께 비봉에 올라가서 새로 탁본을 작성하여 유희해에게 보내주었다. 이것이 유의 편저인 해동금석원에 수록되어 북한산비의 내용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의 측면에는 ‘차신라진흥대왕순수지비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병자丙子 7월 김정희 김경연 내독來讀’ 이라고 해서楷書로 새겼고, 또 그 옆에 ‘정축丁丑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 동래同來 심정잔자審定殘字 68자字’ 를 예서隸書로 새겼다. 저자는 그 고증에서 비문 가운데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것이 있는 것을 보고, 삼국사기에 진흥왕 29년 폐廢 북한산주北漢山州, 치置 남천주南川州라는 기사를 들어서 이 비가 동왕 29년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고 단정한 일이 있다. 이 두 비의 고증은 과거의 학자가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것이 추사에 의하여 그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정희 (1786 - 1856년) 는 경주 김씨 판서判書 노경의 아들이다. 자字는 원춘, 호號는 예당禮堂 이외에 완당阮堂, 추사秋史, 시암詩庵, 과암果庵 등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다. 재주가 뛰어나 일찍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당시 중국에 다녀온 여러 선배 학자를 통하여 청조淸朝의 새로운 학풍에 접하였으며, 그들이 사들여온 책을 보아 당시 중국에서 새로 풍행風行하는 고증학考證學에 대한 지식을 수득修得하여 벌써 일가견一家見을 이루고 있었다. 24세 때 아버지 노경을 따라 북경에 갔다. 당시 청淸의 석학碩學 안원과 옹방강은 학문과 명망名望이 높으며 관위官位도 극품極品에 올랐으며, 사람이 접견하기를 어려워했는데 추사를 만나서 필담筆談으로 경전經典의 어의語義를 토론하게 되매, 추사는 자기가 지닌 포부를 숨김없이 토로吐露하여 그들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이랬으므로 노老 대가大家인 옹과 원은 이 조선조 청년 학자에게 크게 경도傾倒되어, 추사의 학문을 위하여 참고가 될 것이면 조금도 인색함이 없이 모두 제공하였다. 추사가 경학, 사학, 고증학, 서예, 금석 등에 이르기까지 해박該博한 견문見聞과 깊은 연구에 나아가게 된 것은 실로 이 북경여행에서 얻은 바가 컸다. 추사는 과거에 합격하여 규장각시제, 충청도 암행어사, 대사성,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다가, 사건에 걸려 청주로 귀양갔고, 8년만에 석방되었으나, 불과 2년 후 다시 다른 사건에 관련되어 북청으로 귀양갔다가 1년만에 귀환歸還하였다. 이렇게 불우不遇한 생애를 보내면서도 그는 시종 학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주로 경학經學에 있었으나, 특히 주역周易에 연구가 깊었고, 금석, 서지書誌, 문자학文字學에 정통精通하였으며, 그의 글씨는 고금古今의 비첩碑帖을 종합 연구하여 얻은 결정이므로, 그의 글씨에 대한 논평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 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그가 해박한 견문을 가진데 기인起因된 것이지만, 역시 서리犀利한 형안炯眼이 아니고서는 이에 도달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씨는 우리나라의 재래在來의 습기習氣인 속태俗態를 벗어나서, 스스로 독자적獨自的인 경지境地를 개척開拓하였다. 그의 문집에서 글씨를 논평한 것을 보면, 진한秦漢 이래의 전예篆隷는 물론,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비碑와 송宋 이래 여러 가지의 첩帖을 거의 빠짐없이 거의 다 과안過眼하였다. 해행偕行은 내경迺勁한 구양순의 서풍書風을 받아서, 그 교巧를 버리고 졸박拙朴한 운치韻致를 길렀으며, 예隷는 우아優雅한 동한예東漢隷를 취取하지 않고, 고고孤高한 서경예西京隷를 썼다. 이것은 그의 높은 성격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이 저서는 이 책 이외에는 따로 전하는 것이 없는데, 논고論考를 써놓고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면 곧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완당선생전집에 실린 것으로는 주역周易에 대한 논고 수 편과 음운학音韻學, 고증학考證學 등에 대한 것이 몇 편 있으므로 그의 학문하는 태도를 볼 수 있으나, 없어진 원고도 매우 많다.
한유가법설漢儒家法說,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에 나타난 그의 지론持論을 보면, 그는 한학漢學 곧 고증학考證學과 송학宋學 곧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융화론融和論을 주장하여, 당시 청대淸代의 한학가漢學家들이 송학을 배제하는 태도에 대하여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학문의 근거는 역시 논학論學을 통한 정확성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됨을 강조하였다. 이밖에 저론著論이나 왕복往復한 서한書翰 가운데는 글씨 및 그림의 감정鑑定과 논평이 대부분이었다. 세상에서는 추사의 글씨가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그를 명필名筆로만 알지 큰 학자인줄 아는 이가 적고, 또 글씨를 잘 쓴다는 것만 알지 서예書藝를 학문적으로 다룬 일인자라는 것을 아는 이는 적다. 그는 실학계 학자로써 최후를 장식한 대가大家다.
. 실학實學과 금석金石 - 청조淸朝에 들어와서 중국의 학풍이 일변하여 송원명대宋元明代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성리학에 대립하여, 한대漢代의 주석가注釋家의 학설을 다시 연구하여, 송유宋儒들의 독단적인 해석을 배척하고, 과거에 경전이라 하여 무조건 신봉하였던 것을, 과학적인 검증을 통하여 재검토를 하여, 신성시神聖時 되었던 성경聖經도 그 진위眞僞의 심판을 받게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송학에 대한 도전挑戰인 동시에 모든 학문이 과학적 분석을 거치지 않고는 정확성을 기할 수 없다는 점과, 또한 학문은 실제적인 문제에 도움을 주지 못 하고, 가공적架空的인 심성이기心性理氣를 논論하는 것은 인간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 한다는 태도를 밝혔다. 이것이 곧 한학가漢學家며 또 고증학자考證學者들의 새로운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정조英正祖 이후에 이 학풍이 들어와서 각계에 새로운 각성을 환기시켰는데, 금석학金石學은 곧 고증학考證學의 한 분야에 해당된다. 문헌文獻은 필사筆寫 또는 인쇄로 전해오는 것이기 때문에, 전사傳寫와 복각複刻이 거듭될수록 그 본래의 면목面目이 병개變改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금석에 조각된 것은 가장 정확성이 있는 것이며, 또 문헌에는 기록이 없는 것을 금석 유물이 이를 보충해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중국의 갑골문甲骨文과 종정鍾鼎 등에 나타난 문자는 역사에 기록된 자료를 확정시켜준 것도 있으며,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도 많이 있어서, 고대사古代史의 연구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이것이 문자의 변천과정과 서풍書風의 원류源流를 증명함에 있어서는 다시 거론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효종 때에 왕손王孫인 낭선군이 우리나라의 금석탁본金石拓本을 모아서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을 만들었고, 조금 앞서 창강 조속趙涑이 금속청완金石淸玩을 꾸민 적이 있으나, 수집에 그쳤을 뿐 이를 고증학적인 시도를 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모두 서예의 참고자료로써 모아들인데 불과했는데, 금석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여 과학적인 검토에 착수한 것은 추사의 과안록이 처음인 동시에 또 마지막이었다. 추사는 이 책 이외에도 경주 무장사비鍪藏寺碑 단편斷片에 대하여 왕희지의 집자비集字碑로써, 우리나라에서만 귀중할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왕희지의 글씨로써 가장 진귀품珍貴品에 속한다는 것을 말하였고, 그밖에 봉화 태자사의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 인각사의 일연선사비一然禪師碑 등에 대하여도 언급한 바 있는데, 아깝게도 완전한 종합적인 저서를 이루지 못 하고, 조인영과 함께 그 귀중한 자료를 모두 청인淸人 유희해에게 기증寄贈하여, 우리나라의 금석을 도리어 외국인 유씨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해동금석존교海東金石存巧의 두 책을 편저 간행케 하였음은 유감스럽다.
추사 이후에는 그의 문인으로 역관譯官이었던 역매亦梅 오경석이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이란 소小 책자를 만들었는데, 이 책은 금석의 목록을 수록하고, 고구려 성벽城壁 석각石刻 2종과 진흥왕 정계비定界碑 등 8종에 대하여, 원문原文을 기입하고 약간의 해설과, 중국 및 우리나라 학자들의 논평을 부기附記한 것이 있다. 오경석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의 저자 위창葦滄 오세창의 부친이다. 역매와 위창 부자父子는 한말韓末 금석학자이며, 서화書畫 감정鑑定의 대가大家로써 사계斯界에 공적功績이 현저顯著하다.
오늘에는 고구려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창녕의 진흥왕 척경비拓境碑를 위시爲始하여, 많은 미발견의 금석이 새로 발굴되었고, 이에 대한 고증도 여러 학자에 의하여 널리 진전되었으나, 150년 전의 사학斯學이 전연 개척되지 않았던 때, 심오深奧한 학문과 날카로운 과학적인 안목眼目으로 이루어진 금석과안록과 같은 역저力著는 사학斯學에 끼친 공로功勞가 크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추사는 저서는 많이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진지한 문학적 태도를 연구해야 할 것이며, 그의 글씨를 모방하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그의 서예 수련에 대하는 경건敬虔하고, 진실한 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고구려 신라 이래로 많은 금석은 그 동안 기록에 남아있는 것이 없어진 것도 있고, 모르던 것이 새로 발견된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직까지 과안록과 같은 체제의 종합적인 저서는 나온 적이 없다. 일본인 갈성미치의 조선금석교朝鮮金石攷가 있으나, 그것은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이 책은 사본寫本 1책으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현재 전존傳存 여부가 확실치 않다. 이밖에 국립도서관에도 1책이 있는데, 그 책에는 등전의 장서인藏書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 등전양책 교수가 원본을 필사筆寫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문全文이 21장에 불과한 소小 책자인데, 그 내용은 1933년에 간행된 완당선생전집 권1에, 진흥왕 이비교二碑巧의 제목으로 실려있는 것이 이 단행본인 금석과안록과 똑같다.
037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1394년) 정도전鄭道傳
정도전 (? - 1398년) 이 이 책을 끝낸 것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1392년, 2년 뒤 1394년이다. 원元나라가 무너지고 명明나라가 세워지는 큰 정치 변동이 중국에서 일어났을 때, 고려의 왕조정치도 기울고, 1388년의 위화도 회군回軍을 전환점으로 이성계의 권력이 뚜렷하게 세워졌다. 공민왕이 죽임을 당하고, 우왕 창왕이 이어서 세워졌으나, 걷잡을 수 없었고, 허수아비 구실을 막기 위하여 받들여진 공양왕이 선양禪讓하는 형식으로 왕권을 물려주자 이를 명분으로 조선왕조가 개국하였다.
고려는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 경제, 국방문제 등에 많은 곤란이 겹치고, 민생문제는 더욱 심각하여지고 있었다. 불교에서 오는 폐단은 신돈이 정권을 휘둘던 때부터 유가儒家의 반감을 사고, 나아가 불교 위주의 당시의 가치관을 유교 위주의 사회로 고치려는 의욕을 굳게 하였다. 조선조는 고려 말의 실책을 얻는데 힘써서 왕조를 세웠던 것이다.
이같이 세워진 왕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국가의 기본이 되는 헌장憲章 법전法典이었다. 척불론斥佛論의 이론 근거를 세웠던 정도전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다음에 가장 필요한 일로 유교국가의 기저基底가 되는 조선경국전 상하 2권을 만들게 된 것이다. 정도전이 당연히 써야 할 책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썼다는 이 책을 도승지都承旨 (비서실장) 한상경이 알고, 태조에게 말하여 1394년 5월 바치게 하였던 것인데, 태조는 기뻐하여 이를 금궤金櫃에 넣고, 비단, 말, 백금白金을 상賞으로 주었다.
이 책은 원나라에서 63년 전에 편찬되었던 경세대전經世大典이라는 책의 구성을 본따서 엮었으나, 6전 중에 형전刑典에 해당하는 헌전憲典에서는 명나라의 대명율大明律을 본딴 것이다. 이 책이 국가정치의 근본을 말하고, 조선왕조가 지켜나가야 할 전거典據의 줄거리가 되는 것은 원나라 것을 주로 하고, 형법에 관한 것은 잘 맞지 않는 원의 지정조격至正條格을 버리고 명의 대명율을 채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도전이 고려왕조를 부시는데는 척불斥佛의 이론을 제공하였고, 조선왕조를 세워서 정치의 궤도軌道를 마련하는 이론은 조선경국전으로 이바지한 것이다.
책은 1년 후에 나온 경제문감經濟文鑑과 아울러 조선왕조가 이후 50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데 기본이 되는 국헌國憲과 같은 중요한 책이 되어, 이후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왕조의 법전 편찬의 기초가 되었다.
조선경국전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기본구조를 설계하였다면, 그 보다 2년 늦게 지어진 경제문감은 1388년 이래에 제정되고, 구상되었던 정치제도를 엮은 것이다. 따라서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은 정도전이 조선왕조를 반석盤石 위에 세워놓은 공적功績이다.
이 책은 1397년 일단 그의 문집 삼봉집三峰集 안에 실려서 목판木版으로 출판되었으나, 그는 다음 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척살擲殺당하였다. 그 후 세조 때 (1464년) 안동에서 중형重刑되고, 빠졌던 부분이 성종 때 (1486년) 에 다시 출판되었다. 지금 전해지는 삼봉집은 정조 때 (1791년) 에 출판된 것에 의하지만, 일본에는 1486년에 출간된 판본이 남아있다.
조선경국전의 내용은
임금의 할 일로써, 정보위正寶位, 국호國號, 정국본定國本, 세시世示, 교서敎書로 나누고, 신하臣下의 일은 치전治典, 부전賦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工典의 총서叢書 6전典으로 구분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 정보위正寶位 - 이성계가 조선국왕에 오른 것은 천天과 인人의 뜻에 순응한 것이니,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인仁의 정신을 몸에 지니고, 사랑을 사람에게 베풀면 된다는 시행방침施政方針
. 국호國號 - 조선의 국호를 쓴 임금에 단군檀君, 기자箕子, 위만衛滿이 있지만, 기자를 정통正統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말한 것으로, 기자를 통하여 중국과 정통관계를 세우려고 함
. 정국본定國本 - 세자世子를 반드시 장자長子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태조가 즉위하자 동궁東宮 (세자)의 자리를 바로 잡았고, 세자의 스승을 두어 세자교육에 힘쓸 것
. 세시世示 - 선조 때부터 덕을 쌓아 태조에 이르러 하늘의 命이 내려 국가가 서고, 동궁이 바로 잡히고, 신하들이 작위爵位를 받아 왕실을 보호할 울타리가 굳건히 세워졌음
. 교서敎書 - 왕의 말이나 가르침이 중重하고 큰 것인데, 태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유사儒士를 좋아하고,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諸子를 읽고, 의리義理를 강의講義하여 밝히고, 고금古今의 성패成敗의 원인을 논論하여, 모든 사리事理를 자세하고 잘 알았으므로, 서울이나 지방에 덕德이 있는 말씀을 내렸는데, 글은 비록 문신文臣들이 지었다 하더라도, 뜻은 왕에게서 나왔으니, 이를 자세히 적어 엮어서 일대一代의 전거典據로 갖추어야 한다.
다음은 신하가 할 일로써
. 치전총서治典摠序 - 이전吏典에 해당한다.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재상宰相이 중요하며, 위로 임금을 군부君父와 같이 섬기고, 밑으로 백관百官을 통솔하여 정성을 다 하여 임금을 움직여야 한다. 이 치전의 밑에 7항을 두었다.
. 관제官制 - 관직官職을 나누어서 임무를 맡게 하는 것을 중앙과 지방의 관청을 들어 말한다.
. 재상년표宰相年表 - 참다운 임금이 있어야 재상이 도道를 행할 수 있고, 은혜恩惠가 밑에 미치게 되는데, 임금의 중요한 직분은 재상을 택하는데 있고, 재상은 여러 일을 맡아야 하는 것
. 입관入官 - 국가를 다스리는데 중요한 것은 사람을 쓰는 데 있어 과거科擧를 통해서 뽑는 것이 좋으나, 사장詞章으로 시험하면 내용이 없는 사람을 뽑을 우려가 있고, 경사經史로써 뽑으면 고루固陋하고 묵은 사람이 있을 걱정이 있는데, 태조는 인재人材를 기르는 뜻에서 성균향교成均鄕校를 세워서 교육에 힘썼으며, 그 실천의 모습을 밝히고 부론賦論, 대책對策을 시험쳐서 뽑게 하고, 그밖의 여러 분야의 시험을 설치하였으며, 관등官等도 정하여 국정國政을 도울 수 있게 하였으니 이를 법으로 삼아 행하게 할 것
. 보리補吏 - 관부官府의 역을 맡는 이를 양가良家 자제子弟 중에 그 집안 능력을 보아 뽑아서 쓰는 것인데, 율법律法, 문서文書, 산수算數에 능能한 사람 등을 쓰는 것을 말하고, 적임자를 얻는가의 여부는 각 관사官司의 능력에 있다는 것
. 군관軍官 - 군軍의 조직, 군관軍官의 임무
. 전곡錢穀 - 국가의 예산豫算이며, 민생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으로, 잘 관리하여 국가의 근본을 튼튼히 하여야 하는데, 매년 예측을 하여, 3년이면 1년분이 따로 쌓여 있어야 하며, 흉년이 오더라도 걱정이 없게 한다는 것
. 봉증승습封贈承襲 - 공功이 있는 신하에게 보수報酬를 후厚히 하여야 하는데 그 은혜恩惠가 조상祖上이나 자손子孫에까지 미치게 되어야 한다는 것
. 부전총서賦典摠序 - 호전戶典에 해당한다. 부賦는 민간民間에서 받아내는 국세國稅를 말하는 것으로, 군국軍國을 위하여 필요한 전곡錢穀이라고 하지만, 농상農商을 잘 다스려서 주군州郡에 대장臺章을 만들어 받아들이고, 이를 중앙에 수송하고, 소금, 철, 산장山場, 나루 등에서 세稅를 받아서 국가의 용도에 쓰게 하는 것으로 이의 경리經理는 곧 국國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
. 주군州郡 - 지방의 조직과 제도 및 군사軍事
. 판적版籍 - 인구人口의 많고 적은 것은 곧 국력에 비례하는 것이므로 민중民衆을 보호하고 과세課稅나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여, 나라가 부富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니, 호구戶口나 부역의 대장臺帳을 정확하게 관리하여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의 파악
. 경리經理 - 토지를 다스리는 것을 말하고, 한전限田, 균전均田, 영업전永業田, 역분전役分田, 공음전功蔭田, 등과전登科田, 군전軍田, 한인전閑人田 등을 말하고, 토지제도의 올바른 운영
. 농상農桑 - 농사를 권하여 나라의 태평을 누리게 하자는 것
. 부세賦稅, 조운漕運, 염법鹽法, 산장山場 수양水梁, 금은주옥동철金銀珠玉銅鐵, 공상세工商稅, 선세船稅 등에서는 국가의 세수稅收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으며,
. 상공上供 - 왕의 사고私庫에 대한 공상供上을 말하고, 역대의 왕의 사장私藏을 많이 공용公用으로 한 태조를 찬양함
. 국용國用, 군자軍資, 봉록俸祿, 의창義倉,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견면蠲免 - 세감점면稅減暫免에서는 국가의 지출에서 예산과 백성을 돕기 위한 책策
. 예전총서禮典摠序 - 국가로써 예禮를 갖추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행사의식行事儀式 : 세목細目은 조회朝會, 종묘宗廟, 사직社稷, 적전籍田, 풍운뇌우風雲雷雨, 문묘文廟, 제신사전諸神祀典, 연형燕亨 (연회宴會), 부서符瑞 (도장圖章), 여복輿服, 악樂, 역曆, 경연經筵 (임금에 대한 강의講義), 학교學校, 과거科擧, 거유일擧遺逸 (재야在野 선비 채용採用), 구언진서求言進書 (임금이 신하에게 진언進言 요구), 유사遺使 (중국 사신), 공신도형사비功臣圖形賜碑, 시諡, 정표旌表 (공신功臣에게 도형都衡, 비碑, 시호諡號, 표창表彰), 향음주鄕飮酒, 관례冠禮, 혼인婚姻, 상제喪制, 가묘家廟는 신하들이 지켜야 할 예의
. 정전총서政典摠書 - 병전兵典에 해당하며 군제軍制, 군기軍器, 교습敎習, 정점整點 (군비 정비 점검), 상벌賞罰, 숙위宿衛 (임금과 도성都城 지키는 것), 둔술屯戌 (지방의 국방), 공역功役, 존휼存恤 (군민軍民을 아끼고 힘을 기르게 하는 것), 마정馬政, 둔전屯田, 역전驛傳, 추라騶邏 (대신大臣을 따라다니는 군병軍兵이 아닌 졸도卒徒), 무렵畝獵 (사냥을 통해서 무술을 닦는 것)
. 헌전총서憲典摠序 - 형전刑典에 해당하며, 대명율大明律을 참고함
. 명례名例 - 정명正名 즉 명名에 맞게 하는 것, 오형五刑, 십악十惡, 팔의八議 등을 말하고, 직제職制, 공식公式, 호역戶役, 제례祭禮, 의제儀制, 궁위宮衛, 군정軍政, 관율關律, 구목廏牧, 우역郵驛 등의 군제에 관한 것과 盜賊에서 犯姦, 新犯까지 犯罪를 다스림을 다루고, 궁성宮城의 영조營造, 하천河川의 범람氾濫을 막고, 관개灌漑하는 등
. 공전총서工典摠序 - 공장工匠에 대한 관리와 궁원宮苑, 관부官府, 창고倉庫, 성곽城廓, 종묘宗廟, 교량橋梁의 수선修善, 신축新築과 병기관리兵器管理, 군기軍旗, 장막帳幕 등의 관리로부터 금옥석목金玉石木, 공피박攻皮搏, 식공植工의 제한制限
이같이 6전에 걸쳐 기본이 되는 정신과 전거典據를 마련하였으나, 경제문감經濟文鑑에서는 재상宰相, 대관臺官, 간관諫官, 위병衛兵, 감사監司, 주목州牧, 군태수郡太守, 현령縣令의 8개 항목을 나누고, 기구機構와 규모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이 두 책은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밝히고, 그 후 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본방향을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038 대전회통大典會通 (1865년) 조두순趙斗淳 등
대전회통은 고종 2년 (1615년) 에 편찬編纂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전으로 실무자의 편의便宜를 위하여 당시에 전래傳來되고 실용實用한 모든 법전을 나름대로 계통적으로 정리, 종합하고, 법전에는 들지 않았으나, 실용되는 새로운 조례條例를 첨보添補, 집대성集大成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율령律令이 있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나, 법규가 법전의 형식으로 편찬된 것은 제도 전반이 보다 유교주의적 중국체제로 변모變貌를 본 고려시대부터다. 고려말기에는 원元의 지정례격至正例格이라는 법규가 시행되고 기타 행정법규도 상당히 정리되었던 것 같으며, 한편 법전 편찬의 필요를 느끼고, 공양왕 4년 (1392년) 에 정몽주가 대명율大明律과 지정례격을 참작하여 신정율을 찬진撰進했으며, 또한 그 보다 약간 앞선 우왕시대禑王時代에는 주관육찬周官六翼이라는 관례집도 만들었던 것인데 모두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서는 정도전이 찬집撰集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에서 정식으로 편찬한 법전은 조준 등으로 하여 고려 우왕 14년 (1388년) 으로부터 조선 태조 6년 (1397년) 까지에 이르는 10여 년 간의 조례條例를 분류, 편찬하여 중외中外에 반포頒布케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이 최초다. 경제육전의 편찬에 뒤이어 태종 13년 (1413년) 에 다시 하륜 등에게 편찬케 한 경제육전속전續典 (세종 10년, 1428년), 이직 등이 편찬한 신속육전등록新續六典謄錄, 동 15년 (1433년) 황희가 편찬한 신찬新撰경제속육전 등의 법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여러 법전 역시 지금은 편단偏斷 이외에 내용 전부는 전해지지 못 한다.
이상에서 말한 법전, 등록謄錄 등은 내용상으로 볼 때 상호 중복 또는 복잡, 상위점이 있어 실제 적용에 있어서 집무자의 불편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세조 때부터는 이같은 전후의 법전, 등록과 고려 이래로 시행되었던 교지敎旨, 조례를 정리, 종합하여 조선왕조가 영원히 준수할 불변의 영전令典을 편찬하고자 했다. 세조 초년에 착수하여 성종 2년 (14871년) 에 완성한 경국대전이다. 그 후 이 대전은 성종 5년 (1474년) 과 동 16년 (1480년) 에 내용상 약간의 개정이 있었으나 조선조의 불변의 기본법전으로 시행되었다.
이같이 조선왕조는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고려로부터 태조를 거쳐 성종조에 이르는 약 100년 간에 발포發布, 시행된 전후의 여러 법전, 교지, 조례 및 관례慣例 등을 망라網羅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이야말로 소위 영세영전永世令典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편찬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끊임없이 분화分化 발전되어 복잡해져가는 조선조사회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규의 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서 성종 23년 (1492년) 에 경국대전속록續錄 6권 1책, 중종 38년 (1543년) 에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6권 1책, 선조 18년 (1586년) 에 사송류취詞訟類聚, 숙종 24년 (1698년) 에 수교집록受敎輯錄, 동 32년 (1708년) 에 전록통고典錄通考, 영조 22년 (1746년) 에 속대전續大典, 정조 10년 (1786년) 에 대전통편大全通編 등의 법전이 계속 편찬되었다.
대전통편은 경국대전 및 속대전을 통합하고, 다시 속대전 이후의 수교受敎, 조례를 보찬輔贊한 법전이다. 말하자면 선초鮮初의 경국대전을 잇는 제 2의 조선왕조의 법전이다. 그러나 실제로 법 운용에 있어서는 이들 법전의 내용만으로는 적용할 수 없는 불충분한 점이 생겼기 때문에, 다시 정조 11년 (1787년) 전율통보典律通補, 같은 때 백헌총요百憲摠要, 순조조에 만기요람萬機要覽 등 생활에 직접 자료인 재정財政의 운용運用에 관한 실정實情과 그 규정規定, 형刑의 원칙인 명율明律과 대전大典과의 관계조문關係條文 및 오례의五禮儀 각 지류志類 기타 법전과 관련이 있는 사항을 명시하는 여러 법규의 최요서摧要書가 나타났다.
한편 대전통편 간행 이후도 국내외의 정세는 크게 변동되어 정치 사회 경제 등 여러 면에서 과감한 개혁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철종 14년 (1863년) 에는 삼정리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전제田制, 군정軍政, 환곡還穀문제 등 삼정을 혁신코자 하였다. 이 때 전제가 되는 법령을 정비하고자 새로운 법전 편찬사업이 시작되었다. 즉 고종 2년 (1865년) 영의정 조두순, 좌의정 김병학 등이 왕명을 받고 대전통편 이후 약 80년 간의 수교受敎, 조례條例 및 현행 교지敎旨, 조례로써 법전에 재록載錄되지 않은 것을 정리하여 대전통편 각 조문 밑에 추보追補하고, 교서관校書館으로 하여 출판케 했던 것이니 대전회통이다. 이리하여 편찬 출판된 대전회통은 고종 2년에 곧 京中의 각 사司와 영營, 읍邑, 진鎭, 역驛에 분사分賜되었다.
대전회통의 원본은 대형大型 조선지朝鮮紙에 인쇄되었는데, 1면面은 10행行이고, 매행每行은 20자字이며, 할주割註는 2행으로 짜여있다. 그 후 대전회통은 고종 7년 (1870년) 에 보간補刊되었는데, 경상도 감영에서도 개판改版 인출印出되었다. 이것을 영남판嶺南版이라고 하는데, 경판京版에 비해 체소體小하다. 고종 23년 (1886년) 형조刑曹 소유所有의 대전회통이 손상損傷되어 경상도 감사에게 인출 상송上送할 것을 명命했으나, 판본板本이 소실燒失되어 인출이 불가능하다 하므로 개판 인출할 것을 명했다. 이로써 대전회통이 왕명에 의해 인출된 것은 경판 2회, 영남판 2회로 모두 4회가 확인되고, 그간에 그 외에도 인출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 후 대전회통은 융희 원년 (1907년) 8월에 민간인民間人 장수가 편집한 신구형사법규대전新舊刑事法規大全에 도합都合되어 가양장假洋裝으로 출판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조선고서간행회에서 대전회통을 양장 모두 1책으로 편집 출판했으며,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역시 양장 도합 1책으로 출판했다. 최근 1960년 4월에는 고려대학교 한국고전국역위원회에 의해서 한국고전국역총서 제 1집으로 국역國譯되었다.
대전회통은 그 원문 서序에서, 멀리는 주 관제도周官制度를 모방했으며, 가까이는 대병회전大明會典 6부部에 기준했다고 밝혔듯이, 체제상으로는 주로 중국법전을 따랐다. 역사적으로 보아 중국의 발달한 여러 가지 문물제도는 언제나 보다 후진後進한 한민족의 섭취攝取에 대상이 되어왔고, 따라서 한민족문화는 중국의 선진문물제도를 도입하여, 자체의 생리生理에 적합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대전회통의 체제가 중국법전을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대전회통의 편찬 권별은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 등 6전典으로 나누어 도합 6권 5책으로 되어있다. 또한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합하고, 속대전 이후의 수교, 조례를 찬집하여 각 조문 밑에 증보增補한 대전통편에서는 그 내용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경국대전은 원原 자字, 속대전은 속續 자, 증보조문增補條文은 증增 자를 각기 각 조문의 첫머리에 표기하고 있듯이, 대전통편을 증보하는 대전회통에서는 추보조문의 첫머리에 보補 자를 표기함으로써 추보조문임을 밝히고 있다.
대전회통 내용의 개략槪略을 열거列擧하면
. 이전吏典 (권 1) - 내명부內命婦, 외명부外命婦, 경관직京官職, 봉조하奉朝賀, 내시부內侍府, 잡직雜職, 외관직外官職, 사관직士官職, 경위직京衛前, 취재取材, 천거薦擧, 제과諸科, 제수除授, 한품서용限品敍用, 고신告身, 서경暑經, 정안政案, 해유解由, 포폄褒貶, 고과考課, 녹패祿牌, 차정差定, 체아遞兒, 노인직老人職, 추증追贈, 증시贈諡, 급가給假, 개명改名, 상피相避, 향리鄕史, 잡령雜令 등 31개 조목條目 규정規定
. 호전戶典 (권 2) - 경비經費, 호적戶籍, 양전量田, 적전록과藉田祿科, 제전諸田, 전택田宅, 급조가지給造家地, 무농務農, 잠실蠶室, 창고倉庫, 회계會計, 지공支供, 해유解由, 병선재량兵船載糧, 어염魚鹽, 외관공급外官供給, 수세收稅, 조전漕轉, 세공稅貢, 잡세雜稅, 국폐國幣, 장려獎勵, 비황備荒, 매매한買賣限, 징체徵債, 진헌進獻, 요부徭賦, 잡령雜令 등 29개 조목 규정
. 예전禮典 (권 3) - 제과諸科, 의장儀章, 생도生徒, 오복의주五服義註, 연형宴享, 조의朝儀, 사대事大, 치제致祭, 진폐陳弊, 봉사奉祀, 급가給假, 입후立後, 혼가婚家, 상장喪葬, 취재取才, 새보璽寶, 용인用印, 의첩依牒, 장문서藏文書, 장권獎勸, 반수頒水, 혜휼惠恤, 아속악雅俗樂, 선상選上, 도승度僧, 사사寺社, 참알參謁, 경외관영송京外官迎送, 경외관상견京外官相見, 경외관회자京外官會坐, 청대請臺, 잡령雜令, 문무관사품이상文武官四品以上 고신식告身式, 무누관오품이하文武官五品以下 고신식告身式, 당상관처堂上官妻 고신식告身式, 삼품이하처三品以下妻 고신식告身式, 홍폐식紅牌式, 백패식白牌式, 잡과백패식雜科白牌式, 녹패식祿牌式, 추증식追贈式, 향리면역사패식鄕吏免役賜牌式, 노비토전사패식奴婢土田賜牌式, 개본식啟本式, 개목식啟目式, 평관식平關式, 첩정식牒呈式, 첩식帖式, 이법출의첩식立法出依牒式, 기복출의첩식起復出依牒式, 해유이관식解由移關式, 해유첩정식解由牒呈式, 도첩식度牒式, 입안식立案式, 감합식勘合式, 호구식戶口式, 준호구식準戶口式 등 63개 조목 규정
. 병전兵典 (권 4) - 경관직京官職, 잡직雜職, 외관직外官職, 사관직士官職, 경위직京衛前, 반초伴俏, 외위직外衛前, 군관軍官, 역마驛馬, 초과草科, 시취試取, 번차도목番次都目, 군사급사軍士給仕, 제도병선諸道兵船, 무과武科, 고신告身, 포폄褒貶, 입직入直, 척간擲奸, 행순行巡, 개성기啓省記, 문개폐門開閉, 시위侍衛, 첩고疊鼓, 첩종疊鐘, 부신符信, 교열敎閱, 속위屬衛, 명부名簿, 번상番上, 유방留防, 급보給保, 성적成籍, 군사환속軍士還屬, 복호復戶, 면역免役, 급가給假, 구휼救恤, 성보城堡, 군기軍器, 병선兵船, 봉수烽燧, 구목廏牧, 적추積芻, 호선護船, 영송迎送, 노인路引, 역로驛路, 개화改火, 금화禁火, 잡류雜類, 용형用刑, 잡령雜令 등 53개 조목 규정
. 형전刑典 (권 5) - 용율用律, 결옥일한決獄日限, 수금囚禁, 추단推斷, 금형일禁刑日, 남형濫刑, 위조僞造, 휼수恤囚, 도망逃亡, 재백才白, 정단취丁團聚, 포도捕盜, 적도賊盜, 원악향리元惡鄕吏, 은전대용銀錢代用, 죄범준계罪犯準計, 고존장告尊長, 금제禁制, 허원許寃, 정송停訟, 천첩賤妾, 천처첩자녀賤妻妾子女, 공천公賤, 사천私賤, 천취비산賤娶婢産, 궐내각차비闕內各差備, 근수跟隨, 제사차諸司差 비노근수노정액備奴跟隨奴定額, 외노비外奴婢, 살옥殺獄, 검험檢驗, 간범姦犯, 사령赦令, 속량贖良, 보충대補充隊, 청리문기聽理文記, 잡령雜令, 태장도류속목笞杖徒流贖木, 결송해용지決訟該用紙 등 39개 조목 규정
. 공전工典 (권 6) - 교로橋路, 영선營繕, 도량형度量衡, 원우院宇, 주차舟車, 재식裁植, 철장鐵場, 자장紫場, 보물寶物, 경역사리京役吏, 잡령雜令, 공장工匠, 경공장京工匠, 외공장外工匠 등 14개 조목 규정
이상에 열거한 조항은 물론 어느 법 사상에 입각한 법 체계를 고려하여 분류된 것이 아니고, 주 관제周官制와 같이 관아별官衙別로 우선권을 나누고 그 관아의 사무를 분장分掌에 따라 각종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이는 대전회통뿐만 아니라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조시대의 모든 법전이 다 동일한 체제다. 중국측의 영향을 받아 6부 분류의 방법을 채용하고 있는 대전회통의 내용은, 오늘날의 법제에 의해 살펴보면 행정, 입법, 사법의 구별이 없이 혼돈되어 있고, 또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구분되지 않았다. 또한 일반 국민에 대한 포고布告, 관리官吏에게 내리는 훈유訓諭나 의례儀禮, 금제禁制도 모두 일괄해서 규정해놓았기 때문에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허다하다. 더구나 조종祖宗의 법은 신성불가변神性不可變이라는 관념에서 당시에 실제로 시행되지 않는 법 조문이나 또는 의미가 분명치 못 한 법 조항을 그대로 존치存置하거나, 또는 시행이 불가능한 법규를 단순히 대외적인 체면관계로 그대로 두는 등,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편 대전회퉁은 현대 법률사상에 의해 보면 일종의 행정법전으로써, 관리가 준수해야 할 각종의 규쥰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또한 대전회통은 대전통편을 보간補刊한 것이고, 대전통편은 경국대전 이하를 통편通編한 것이며, 또한 경국대전은 조선조 개국 이래 세조 말년까지의 교서, 조례와 고려 때부터 잔존한 판지判旨, 조례를 찬집한 것이므로 대전회통은 곧 조선조 모든 시기와 고려시대에 걸치는 방대한 법제사회사상의 연구자료가 된다.
대전회통은 편집체제상으로 보면 앞에 언급했듯이 중국 법제를 따랐으며, 사실상 우리나라 문물제도가 당, 송, 원 및 명의 의준依準함이 현저顯著했던 것에 비추어, 대전회통은 한국에 대한 중국문화 영향의 측면적 연구면에서도 귀중한 자료다. 뿐만 아니라 대전회통의 내용이 복잡한 것도 한편으로 보면, 이 법전의 내용이 포괄하는 시대 전반의 각종 제도와 습관 등을 이해, 파악하는데도 편리하고 흥미로운 점도 있다.
그러므로 조선조 여러 시기와 고려조의 일부 시기를 포괄하는 대전회통이 가지는 사료史料로써 비중은 매우 크다.
039 성학집요聖學輯要 (1575년) 이이李珥
이이 (호 율곡栗谷, 중종 31년 - 선조 17년, 1536 - 1584년) 는 당시의 사회를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세계로 개조하려고 노력하였다. 주자학이 고려 말에 전래되어, 2세기를 지나 조선조사회에서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이이의 선배 이황李滉 (1501 - 1570년) 에 의해서 주자학의 철학적인 경지는 도달되었지만, 이황은 주자학의 본질인 수양修養과 철학의 이원적인 학문관에 만족하였을 뿐, 이념적인 교시敎示를 사회에 적응하고자 기도企圖하지 않았다. 이황은 사관史觀보다는 은둔隱遁을 택했고, 자기완성을 위해서 사회 참여를 기피忌避했다. 그러나 이이는 이황에 비해서 처세관處世觀이 달랐다. 한 때의 정신적인 시련 (젊었을 때 출가出家하여 일시 불교에 귀의歸依한 일) 을 극복한 후, 주자학의 사변적思辨的이요 도학지상주의道學至上主義를 완성하자 그 이념적인 세계를 현실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이에 명종 19년 (29세) 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으로부터 벼슬길에 들어선 후, 내직으로는 예조 이조좌랑, 정언, 지평 … 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호병리 3조의 판서를 역임했고, 외직은 청주목사, 황해도 관찰사를 경력하는 동안, 부패한 국가사회의 광정匡正과 도탄塗炭에 빠진 민생의 구제를 위해서 갱신과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관장에서 물러나 율곡 (파주 이이의 묘소) 과 석담 (해주) 에 하야下野했을 때는 보다 밝은 사회의 경세經世를 위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익히고, 자기 공부를 하는 한편, 구름같이 모여든 후학들에게 유교적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원리와 주자학의 새 해석을 교수하였다.
그 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학교모범學校模範,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 시무6조始務六條 등을 저술하여 왕에게 바쳐 치국의 요체要諦를 설득하여, 그 시행을 요구했고,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작해서, 도학道學의 입문 요령을 지시해주었으며, 동료와 후학에게는 편지와 대담對談으로 도학의 지상至上 심오深奧한 철학의 면과 역행무실力行務實할 수 있는 지치정신至治精神의 방향을 논파論破했다. 한편 직접 지방민을 접할 수 있는 기회에는 민생과 교화敎化를 위하여 향약鄕約과 사창社創을 제정해서 한 지역적이나마 유교적 모범사회를 만들자 했고, 경연석상經筵席上에서는 옳고 바른 군주君主를 삼기 위해서 지성至誠으로 보도輔導했다. (경연일기經筵日記)
이이의 이와같은 생각과 실행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교화되지 못 한 유교도덕을 바로 펴고, 부패 퇴락頹落해진 관장官場을 정화淨化하며 불합리한 국가 사회의 시책을 개혁 갱신해서 유교 - 주자학에서 지향하는 3대 (하은주夏殷周) 의 이상적 국가, 사회, 인심人心으로 복고復古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론은 이이에 와서만 주장된 것은 아니다. 유교가 한국사회에 수용되고,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뜻있는 학자와 정치가에 의해서 이미 간헐적間歇的으로 주장되어왔지만 이전의 주장에 비해서 다방면인 분야 (민생, 재정, 국방, 의병, 사회) 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그 시정책을 입안했고 그 생각을 강경하게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이는 그 주장을 몸소 실행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당시 분파되기 시작한 당파黨派가 국가에 해독이 될 것을 착안하여 중립을 지키면서, 그 무마책撫摩策을 쓰다가 후세에 오해를 받았고, 청빈淸貧한 생활의 탓으로 돌아간 후 그 후손이 몸 담을 집 한 칸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면 이이의 주자학적인 현실론은 어디에서 기인起因했는가. 그것은 조선왕조의 유교주의적 국시國是를 바탕으로 한 주자학의 제대로의 이해와, 국조國朝 이후 승평昇平 속에서 침체沈滯되고 해이解弛된 정치 사회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아서, 안으로는 민생을 구제하고, 밖으로의 위기를 극복하자는데 있었다. 이이의 시대는 얼마 전의 정치적 혼돈混沌 (연산군조의 정권싸움과 감정 대립에서 오는 조정과 지방의 정치 사회 경제의 파탄破綻) 과 도량跳梁하기 시작한 북호남왜北胡南倭의 침구侵寇로 뜻있는 사람은 반성과 각성이 촉구되었고, 거기에다가 유교주의의 현실적인 적응력과 주자학의 이론적인 경지가 제대로 이해되고 실용할 수 있게 되자, 그 이념과 방도로써의 국가사회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 새 질서를 찾아서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하지는데 있었다. 주자학의 이념과 현실사회의 실제가 들어맞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유교주의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현실사회인 조선조시대의 입장을 떠난 이론에만 그치는 시행착오적試行錯誤的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사정에 알맞은 입안立案이다. 어떤 사람은 이이의 이상과 실천은 거리가 멀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어디까지나 희망적이요, 이상적 목표에 부족했을 뿐 그것이 곧 현실에 실행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현실을 개혁하고 갱신해가면서 점차로 이상향인 삼대지치三代至治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유교적인 복고의식復古意識 - 주의主義는 이이 뿐만 아니라, 유교의 정치관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조건에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성학집요는 13권 (33장) 7책으로 되어있다. 성학聖學이란 대성大聖 공자孔子의 학통學統을 이루고 있는 학學이란 뜻으로써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유교 유학이란 지칭이 유학을 신봉하지 않는 측에서의 호칭이고 보면, 성학 도학은 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그 학을 스스로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도 이런 뜻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다.
성학집요의 목차 (괄호 안의 설명은 역자 주註) 는
제 1편, 통설通說 단장單章 (권 1)
제 2편, 수기修己 (자기 공부, 자기 수양) 13장 (권 2 - 6). 총론수기 (총론), 입지立志 (학문에 뜻을 세움), 수렴收斂 (마음을 수습하여 정돈함), 궁리窮理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 성실誠實 (사물의 진리에 성실함), 교기질嬌氣質 (기질을 본연의 성性으로 변화함), 양기養氣 (본연의 정기精氣를 양성함), 정심正心 (마음을 바르게 함), 검신檢身 (몸을 가다듬음), 회덕량恢德量 (덕량을 바로잡음), 보덕輔德 (덕을 북돋움), 돈독敦篤 (독실篤實하고 끊임없이 일관함), 수기공효修己功效 (자기 수양의 결과와 효과)
제 3편, 정가正家 (가정을 다스림), 팔장八章 (권 7 - 8), 총론정가 (총론), 효경孝敬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함), 형내刑內 (아내와 집안을 바르게 다스림), 교자敎子 (자녀의 교육), 친친親親 (친척을 친하게 하고 서로 우애함), 근엄謹嚴 (부부, 가족, 친척, 신분의 분별과 차례를 엄하게 함), 절유節儒 (사치 낭비를 삼가고 절약함), 정가공효正家功效 (가정 다스림의 결과와 효과)
제 4편, 위정爲政 (나라 다스림의 정신과 방법) 10장 (권 9 - 11) 총론위정 (총론), 용현用賢 (인재를 등용함), 취선取善 (정당한 여론輿論으로 정치함), 직 시무識時務 (당면한 급한 일을 의식해서 실천함), 법 선왕法先王 (선왕의 좋은 정치를 모방함), 근 천계謹天戒 (하늘의 뜻을 따르고,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음), 입 기강立紀綱 (먼저 국가 사회의 기강질서를 세워야 함), 안민安民 (백성을 평안케 함), 명교明敎 (교육과 교화敎化를 밝혀서 실시함), 위정공효爲政功效 (나라 다스림의 결과와 효과)
제 5편, 성현 도통聖賢道統 (유교의 계통을 세움, 단장 권 13)
이는 이이가 선조 8년 (1575년) 음력 7월에 완성한 후 그 해 9월 임금께 바친 것이다. 이이의 나이 40세에 이르고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시절의 저술이다. 불혹不惑 (40세) 의 나이에 들어서서야 겨우 자기 사상의 주관이 확정되었다고 말한 공자孔子의 연륜年輪에 이이도 공자의 성학聖學을 집요輯要한 것이다.
성학집요는 유학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서 자기 완성을 이루고, 다시 가정 사회 국가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이념적인 지표指標를 간요簡要하게 편집한 것이다. 그 골격骨格은 유교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대학大學을 성리학의 입장에서 풀이한 것으로써는 정평있는 송대宋代 진서산 (덕수) 의 대학연의大學衍義로 삼고, 그 논리적 전개에 따라서 차례를 세우면서,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선현의 저술을 참고, 인용하여 고증考證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3代의 정치도 무난히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선조께 바치는 글 (차劄) 과 서序에서, 학자들이 기송記誦과 사장詞章에는 힘쓰지만 궁리窮理, 정심正心,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는 다 하지 못 하고 있다고 전제한 후, 대학大學에서 가르치는 정신 (8덕목德目) 을 성현聖賢의 교시校是와 맞대어 익히고, 실용하여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보람과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실實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 이를 관료는 물론 임금도 이 법식에 따라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이의 학學을 사변적思辨的인 형이상학形而上學과 실천적인 실용철학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고 하면, 이 성학집요의 내용은 그 윤리론과 정치론이 중심이 되어서 전개되는 실천철학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 - 주자학 자체가 그러하듯이 이이의 사상에서도 이 두 계열의 철학이 분리될 수 없이 서로 호융관계互融關係에 있고 보면, 성학집요의 전개과정에서도 그의 독특한 이기론理氣論, 심성론心性論,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 그 저변低邊에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도 이황과의 학술상의 대차적對遮的인 면을 찾을 수 있다.
이이가 성학집요를 선조께 바치면서 관료들에게 실천시킬 것은 물론 임금도 이 대학의 가르침을 실행해야 할 것이라고 하자, 선조는 이 책을 높이 평가해서 성현이 가르치는 좋은 사회를 이루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성학집요는 뜻있는 사람의 인정을 받았다. 이 책이 완성되기 전년 즉 선조 7년, 허봉許篈이 성절사행聖節使行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가던 길에 파주 율곡으로 이이를 찾았다. 이이는 身病으로 우부승지를 사퇴하고 율곡에 돌아와 성학집요의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허봉은 여기에서 원고의 내용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고 특히 입지立志를 논파論破한 장章을 보고, 말뜻이 가장 정밀靜謐하여 공부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결함을 바로 맞춘 것이라 하여 이를 전부 베껴갔다. 이 때 허봉이 배껴간 것이 그의 연행일기 하곡조천록 속에서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성학집요는 전술한 바와 같이 유학을 공부하고 이를 실행하는데 요긴한 경사經史의 요어要語와 학문 및 정사政事에 절요切要한 것이 망라網羅되어 있어서, 이이의 학통을 전승한 기호학파에서는 물론 학계를 달리한 학자들까지도 이 책을 높이 평가하고 이용하였다. 조선조시대 학계에서 손꼽히는 명저名著가 되어 널리 퍼졌다.
이에 영조 35년 (1759년) 에는 활자活字로 인행印行하기도 했다. 다시 순조 11년 (1811년) 에는 홍문관 교리 홍의영이 성학집요를 연역演繹해서 33찬贊을 제술製述하여 순조에게 을람乙覽 (임금이 글을 보는 것) 시킨 일도 있었다. 이를 성학집요찬이라고 하는 바 오늘날도 단책單冊인 이 책을 접해볼 수 있다. 성학집요는 단행본으로 유행하기도 했지만 율곡전서에 편입되기도 했다. 율곡전서 권 38 속에서는 권 19 - 26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경우는 단행본의 별책과 약간 다르게 되어있다.
전서全書 19, 진차進箚, 서序, 범례凡例, 먹록도目錄圖, 통설
通說
전서 20, 수기修己 - 입안立志, 수렴收斂, 궁리窮理
전서 21, 성실誠實, 교기矯氣, 양기養氣, 정심正心, 검신檢身
전서 22, 회덕恢德, 보덕輔德, 돈독敦篤, 수기공효修己功效
전서 23, 정가正家 - 효경孝敬, 형내刑內, 교자敎子, 친
친親親, 근엄謹嚴, 절검節儉, 정가공효正家功效
전서 24, 위정爲政 - 용현用賢
전서 25, 취선取善, 식 시무識時務, 법 선왕法先王, 근 천계勤
天戒, 입 기강立紀綱, 안민安民, 명교明敎, 위정공효爲政功效
전서 26, 성현 도통聖賢道統
아울러 율곡전서가 이전의 율곡문서를 보충해서 영조 20년 (1744년) 에 편성되었으니만큼 전서본의 성학집요도 이 해에 다시 편성되었고, 전서가 활자로 인쇄된 영조 25년 (1749년) 에 이도 인행印行되었다.
성학집요가 책에 따라서 이렇게 부분적으로는 출입出入이 있기는 하나 그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040 반계수록磻溪隧錄 (1670년) 유형원柳馨遠
반계수록은 우리나라의 실학實學의 창시자로 일컫어지는 유형원의 저작이다. 유형원은 생존시에 십수 종의 저술을 남겼으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이 수록 하나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유형원의 사상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저遺著다.
반계수록이 언제 저술되었는지는 책에 명시되지 않아 명확히 알 수 없고, 학자들 사이에 이설異說이 있다. 효종 3년 (1652년) 에 원고를 쓰기 시작하여, 현종 11년 (1670년) 에 완성하였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현종 원년 (1660년) 이후 현종 4년 (1664년)에 이르는 시기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추정은 그의 문장과 이 책에 수록된 내용과 그의 성장경력 및 시대적 배경에서 얻어진 결론이나 정설正說은 없다.
반계수록은 수득록지隨得錄之라고 하여 느끼는대로 적은 것이라고는 하나, 오늘날의 수필과는 다르며, 당시의 국가정책을 비판하고 구세제민救世濟民을 위한 강렬한 혁신책革新策을 제안한 것인만큼 사사로운 비망록備忘錄이 아니다. 그러나 이 서술은 그의 생존시에는 간행되지 못 하였으며 위정자들의 주의를 받지도 못 했다.
숙종 4년 (1678년) 에 그의 벗 배상유는 반계수록의 7개 항목의 개혁책을 들어 실시를 논한 바 있었으나, 국책國策에 반영되지 못 하였고, 숙종 20년 (1694년) 에는 노사요 등의 유생들이 상소문과 함께 반계수록의 사본寫本을 국왕에게 올렸으나 환심歡心을 받지 못 하였고, 그 후 영조 17년 (1741년) 에 승지 양득중에 의하여 진정進呈된 바 비로소 왕의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영조 45년 (1769년) 에 왕은 유신儒臣 홍계희에 명하여 이를 간행하게 하였으니, 이는 유형원이 별세한지 거의 1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다. 이 때 간행된 반계수록은 각처의 사고史庫에 분장分藏되었으니 이로 전하여졌다.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은 광해군 14년 (1622년) 정월에 서울 정릉동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父는 한림翰林의 검열檢閱을 지낸 류순柳憌이고, 모는 우참찬 이지완의 딸이다.
유형원의 자는 덕부요, 호는 반계이며, 본관은 문화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에 공을 세워 벼슬을 지낸 사대부가문이었으며, 가세가 넉넉하였다. 그는 사대부가문에서 태어났어도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평생을 독서와 저술로 보냈다. 그가 관계官界에 나서지 않은 것은 당시의 사회사정이 너무나 어지러워서 관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그의 성품이 벼슬보다는 초야草野에서 백성과 더불어 즐기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서민적인 기질의 탓이다. 일생을 촌부村夫와 더불어 어울리면서 독서와 저술에 정력을 다 하다가, 현종 14년 (1673년) 3월에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고, 그의 유해遺骸는 경기도 죽산 용천리 정배산에 있는 선영先塋에 안장安葬되었다.
학문에 힘쓰고 또 우번동에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었던 17세기 중엽은 사회 경제적으로 다기다단多岐多端한 시기였고, 또 사상적으로는 새로운 사조思潮가 움트기 시작한 때였다.
어렸을 때 훈도訓導를 받은 스승은 이원진과 김세련이다. 이원진은 외숙外叔으로 감사監司를 지낸 사람이요, 하멜의 표류漂流 당시에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재임하고 있었으므로, 서구西歐의 문명에 대해서는 당시로써는 밝은 편이었으나, 자신은 주자학에 집념하고 있었다. 김세렴은 고모부姑母夫로써 일본에 사신으로 왕래한 일도 있고, 청나라와의 국교에도 밝은 사람이었으나, 그도 전통적인 유학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 하였다. 이 두 스승은 유형원에게 사대부士大夫로써 교양을 길러주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유형원이 가묘제사家廟祭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주자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터득한 것은 이 두 스승의 훈도의 소산所産이다. 유형원의 저서 중에는 이기총론理氣叢論, 논학물리論學物理, 경문답經問答, 주자찬요朱子纂要 등이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유학교육의 결정結晶이다. 두 스승은 이와같이 전통적인 유학자였고, 그에 대한 훈육도 철두철미徹頭徹尾 유학교리에 바탕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이 두 스승은 당시로서는 외국문화에 접할 기회가 많았던 것이니, 그들과의 일상대화 속에서 새로운 외국문화에 대한 동경憧憬과 관심이 싹텄으리라는 것은 짐작된다.
유형원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적 기초는 그가 우번동에 있을 때 탐독耽讀한 청淸의 고증학考證學과 선조 이래 소개된 과학서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청대의 고증학은 송명대宋明代의 경학經學 해석에 있어서 실사고증을 위주한 학풍이었는데 그 후 대상을 넓혀서 역사학, 지리학, 문자학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방법론을 연경사신燕京使臣들의 왕래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며, 유형원을 비롯한 실학파 학자들의 학풍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또 서구의 과학지식은 중종 선조 이래 이적, 이수광 등과 그 후 우리나라로 건너온 서구인들에 의하여 소개된 것이며, 이것이 또한 청의 고증학과 더불어 실학자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전통적인 유학사상은 이미 매너리즘에 빠졌고, 임진왜란 이후 혼란된 사회의 구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하고 있던 때에, 이러한 신 사조는 사회혁신을 갈망하는 학도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형원의 저술로 알려진 동사강목조례여지지東史綱目條例輿地志, 역사동국가고歷史東國可攷, 서설서법書說書法, 지리군서地理群書 등은 청의 고증학연구에서 이어받은 신 학풍의 산물이다. 그러나 만년晩年의 저작으로 알려진 반계수록은 그가 자주 지방을 유람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특히 우번동에서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얻어진 구세제민론濟世救民論의 집대성이다.
유형원이 생존한 17세기 중엽은 임진 병자 양란을 겪은 뒤를 이은 혼란이 극에 달한 시대다. 양차의 전란으로 많은 인명은 살상되었, 이향離鄕하는 농민이 많아 농토農土는 황폐화荒廢化하였다. 임진란 직전의 선조 24년에는 국가의 토지대장에 등록된 전지田地가 151만 5,500결結이었고, 실전實田은 100만 9,700결이었으나, 임진란을 겪은 후의 광해군 3년에는 原帳에 등록된 전결田結은 54만 2,000결이고, 실전은 겨우 29만여 결에 불과했다. 또 전란戰亂을 겪는 동안 토지제도가 문란紊亂한 틈을 타서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의 토지겸병土地兼并은 더욱 심하여졌으며, 부렴賦斂을 과중히 하여 한편으로는 백성을 수탈收奪함이 우심尤甚하여진 반면에, 국고의 세곡稅穀은 줄어들어 재정이 파탄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는 삼수미三手米, 결전結錢 등 새로운 세목稅目을 만들어 농민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환곡제도還穀制度는 농민 수탈의 고리채高利債로 변하여 그 수량이 999만 석石에 달했고, 이에 대한 이자는 매년 70만 석이 되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관계官界는 더욱 부패하여 수회收賄가 성행하고, 향품냉족鄕品冷族들도 관리를 매구買溝하여 양반을 칭하며 신역身役을 피하고, 따라서 군역軍役도 피폐한 농민만이 전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실정을 보고 크게 뜻한 바 있어 반계수록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며, 여기에서 혁신적인 제세구민론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초야에 묻혀 사회질서 문란의 직접적인 피해자 농민과 더불어 그의 사상은 현실에 뿌리를 박고 출발할 수 있었다.
반계수록은 총 26권 13책 및 유고補遺로 되어있다. 편제編制는 전제田制, 교선제敎選制, 임관제任官制, 직관제職官制, 녹제祿制, 병제兵制의 6부문과 미완성인 보유補遺 군현제郡縣制 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편에는 교설敎說을 붙이고, 조선과 중국의 옛 문헌은 인거引據하면서 주장하는 논설의 이론적 배경을 삼았다.
전제田制의 정비 위에 국민의 부담과 국가의 재정을 논하고, 그 기초 위에 국방과 관제를 바로 세울 것을 주장한다.
‘비록 국가를 다스리기를 원하는 왕이 있어도, 만일 토지제도를 바로잡지 않으면 백성의 상업은 영구히 안정시키지 못 하고, 부세賦稅와 역역力役를 고르게 하지 못 하고, 군대를 정돈하지 못 하고, 송사訟事를 멈추지 못 하고, 형벌을 줄이지 못 하고, 뇌물賂物을 막지 못 하고, 풍속風俗을 도탑게 하지 못 할 것이니, 이와같이 하고서 어찌 능히 정치와 교육을 잘 해 나갈 자가 있으리오. 토지는 천하天下의 대본大本이니 큰 근본이 이미 바로서면, 일백제도一百制度가 따라서 하나도 바로서지 못함이 없고, 큰 근본이 이미 헝클어지면 일백제도가 따라서 하나도 바로 섬이 없는 까닭이다.’
이와같은 사상은 임진 병자 양란 이후 전제 문란으로 국가의 모든 일을 그르치고 있음을 직접 목격한 데서 얻어진 결론이다. 그리하여 그는 왕도지본王道之本은 전제를 바로잡는데 있다고 보고, 균전제均田制를 내용으로 하는 전제개혁안을 제창하였다. 전제개혁에서는 농민급전農民給田이 중심이 되고 있다. 즉 농민에게 매每 1인人에 1경頃의 토지를 주고, 이로써 농가의 생계를 도모하게 하는 동시에, 그 토지로 전세田稅를 받아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하며, 이 토지를 기반삼아 부역賦役, 병역兵役, 공물供物을 납부시킨다는 것이다. 1경의 토지를 갖는 농가 4호를 한 단위로 전佃이라 하고, 1전을 한 단위의 보保로 삼아 보로부터 1정丁의 병역부兵役夫를 징집徵集하자는 것이다.
또 농민에게 토지를 주는 동시에 관리들에게도 토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관리급전官吏給田은 종래의 과전科田과는 달라서 토지를 관리로 하여금 경작케 하는 것이며, 농민지에 대한 수조권收租權은 아니다. 관리는 분급分給된 토지를 가졸노비家卒奴婢를 시켜 경작케 하고, 관官에서 물러나도 이를 국가에 반납하지 않으므로 이 토지는 사유지다. 이것은 조선조 후기에 이미 사전私田의 사유지화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관리에게 주는 전지에 대해서는 역정役丁이나 병정兵丁을 징집徵集치 말라고 주장한다. 사부士夫는 선비를 기르니 병역, 부역을 면제할 것이며, 농민이 이 역을 부담하여야 하는 것은 신분과 계층이 구분되는 근본이라고 설명한다. 항상 농민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서민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는 하나, 신분계층身分階層의 구별은 엄연히 가려내고 있으니, 아직도 봉건질서封建秩序의 테두리를 깨뜨리고 나갈만한 혁신론자는 못 되었다.
유형원의 사상은 오히려 그를 뒤따른 후학에 의하여 전진하고 발전하였다. 뒤를 이은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은 유형원의 학통을 계승하고, 실학을 학파學派로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한 학자들이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이나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은 모두 반계수록에서와 한 가지로 당시 당면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건설적인 비판을 한 저작들이다. 정약용은 유형원 보다 1세기 뒤에 나타난 학자다. 그 사이에 실학의 사상도 많이 달라졌다. 제도는 침체沈滯되어 크게 변한 것은 없었으나, 사회생활 경제생활의 변천變遷과 더불어 이상理想은 이미 자라서 새로운 거센 사조를 이루었고, 서민계층도 그대로 억압만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와같은 시대사조의 변천과 더불어 이익, 박지원, 정약용, 박제가 등 일련의 실학자의 사회비판은 더욱 날카로와졌다.
지배층의 관리에 대한 급전을 주장하면서도 그들에게 병역 부역의 면제를 당연한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사회계층의 구분은 엄격히 지켜왔으나, 그 보다 1세기를 지난 후의 정약용은 선비를 반드시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사회계층으로 용인容認하지 않았다. 그는 ‘대체 선비란 어떤 인간들이기에 손과 발을 놀려두고 남의 땅과 재물을 삼키고 있는 것인가’ 라고 하면서 사대부의 무위도식無爲徒食을 가차없이 힐난詰難하였다.
유형원에서 정약용에 이르는 기간에 실학사상도 많은 변천을 보이고 있으나, 전통적 유학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한 유형원이 과감하게 신 사조를 받아들여, 현실을 직시하고 날카롭게 구폐舊弊를 분석 비판하고 참신한 개혁론을 제창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전통사상에서 근대사상에로의 전환기에 선도적 사명을 충분히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각 학문분야에서 혁신사상을 제창한 수많은 저작이 서술되었는데, 이러한 신 사조는 직접적이건 혹은 간접적이건 유형원의 반계수록에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반계수록은 실로 한국근대사연구의 길잡이가 되는 귀중한 사료다.
041 통문관지通文館志 (1714년 경) 김지남金栺南 부자父子
통문관지는 조선 숙종 때 사역원 역관譯官이었던 김지남과 그의 아들 김경문이 주체가 되어 찬수한 것이니, 주로 우리나라 조선왕조시대의 사역원을 중심으로 하여 사대事大, 교린交隣 등 외교에 관한 연혁, 행사, 제도 등을 서술한 서적으로 그 내용이 가장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있고, 또 그 사실이 정확, 상밀詳密하다는 정평을 받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이 완성되기는 숙종 40년 (1714년) 전후로 추정되는데, 통문서지의 권 7 인물편 김지남조에 의하면 ‘존와存窩 최석정 공이 공에게 통문관지를 찬술케 하였더니 공이 죽은 뒤에 이 책이 간행되었다’ 라고 실려있다.
본서의 서명書名을 통문관지라고 명명한 것은, 통문관은 고려시대 외교관을 양성키 위하여 한어漢語를 교습시키던 기관의 이름이었으니, 고려사 권 76 통문관조에 의하면 ‘충렬왕 2년 5월에 참문학사 김구의 건의에 따라서 통문관을 설치하고, 금내학관禁內學官으로서 7품 이하 40세 미만의 관원에 한어를 학습케 하다’ 라고 하였다. 그 후 조선조에 와서는 이 기관이 사역원으로 개칭되었으나, 통문관과 사역원은 그 내용이 동일한 것이므로 본서의 제명을 통문관지 (지志는 기록이라는 뜻) 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찬수가 완성된 후 간행에 이르기까지에는 수 삼 년이나 세월이 지나게 되었으니, 통문관지 권 8 서적편 통문관조에 의하면 ‘통문관지 3본은 강희 무자 (숙종 46년, 1720년) 에 한학관漢學官 이성방, 변정노와 청학관淸學官 남덕창이 현재梋財하여 주자로 인쇄 납본하다’ 라는 기사가 있다.
출판에 앞서 주 저자의 아들이며 본서 찬수의 일원인 김경문의 본서 서문에 의하면, 본서를 찬수한 동기와 요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서로 요연遼燕과 접하고, 남으로 일본과 인접하였고, 북으로 여진과 경계하여 옛날 고조선시대부터 신라, 고구려의 세대를 거쳐오면서 사명使命의 교통이 오가고 하여 끊칠줄 몰랐는데,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통문관이 있었고, 조선에 와서는 사역원을 두어 사대와 교린의 일을 장리掌理하여 왔으니 상하上下 수천 년 사이에 조빙朝聘과 응대로써 능히 당시의 국제 간의 난難 문제를 해결하였고, 후세의 외교적 법례法例를 남겨주었는데, 이것을 기록한 문헌이 부족하여 거개는 인멸湮滅되어 고증考證할 길이 없다. 이 때에 존와存窩 최 (석정) 상국相國이 사역원제거로 있으면서 이 점에 개연介然히 생각하여, 나의 대인大人 (지남) 이 본원의 전고典故에 익숙하다 하여 23의 동료들과 같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고사古事를 수집해서 통문관지를 마련케 하였다. 이 사역원에는 한어漢語, 몽고어蒙古語, 왜어倭語, 청어淸語 등 4학과가 있고, 34의 청廳과 600여의 요원要員을 가지고서 300여 년의 긴 역사를 지녔으나, 일찍이 기紀나 지志 따위의 문자로 마련된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입으로 전하고 귀로 들은 것을 가지고 서로 전해왔을 뿐이어서, 산만하기 비할 데 없으니, 도저히 고증考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역원에는 구청舊廳과 신청新廳이 있어서 그 규례規例가 서로 다르고 취급한 사례도 여러 갈래로 복잡하여, 가려내기가 힘든다. 그래서 국조國朝 이래로 각 사전史典 중에 있는 것과 여러 대가大家들의 전기傳記 중에서 채집하고, 또 직접 듣고 본 것을 참고로 하여 이글을 엮어낸 것이다’ 라고 하고 또 그는 계속하여 본서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를 ‘역대歷代의 외교관계의 연혁과 관제官制와 대소 제반의 장정章程과 법식法式을 참작 손익損益하고, 종합정리하여 유별類別로 규례規例를 만들어 일정한 제도를 마련하였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조빙시朝聘時 전도傳導하는 의식과 주선周旋 출납出納하는 절차와 형응享應과 예폐禮幣 증수贈酬하는 도수度數와 주자이첩奏咨移帖 등의 방식과 그 외에 수륙로정水陸路程의 원근편부遠近便否와 사절使節에게 주는 예단禮單의 사검奢儉 등은 물론 사대, 교린에 대한 모든 의식절차가 비재備載되지 아니함이 없고, 또 전임前任 인물로써 방가邦家에 공적이 들어난 자의 언행으로 후인이 관감觀感될 사항을 그 밑에 부속附篇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책을 펼치면 꿰어놓은 구슬을 드는 것처럼 역력히 한 눈에 들어오게 하였으니, 이 편찬이 완성되어 통문관지라 명명한 것이다.’
이상으로 본서의 편찬의 요인과 내용에 대한 개념을 알 수 있으나, 편차에 따라 부분별로 살펴보면
. 제 1권, 연혁편沿革篇 - 관제官制, 군직軍職, 외임배치外任配置, 원임관적原任官籍, 관청옥사官廳屋舍 등 연혁과 현황 설명
. 제 2권, 권장편勸獎篇 - 사역원관청司譯院官廳의 과거科擧, 취재取才, 고강考講, 보궐補闕, 포褒, 폄貶, 좌기절차坐起節次, 문장서식文章書式 상술詳述
. 제 3권, 사대편事大篇 (상上) - 본국에서 중국에 사절使節을 보내는 절차, 행사 일체, 무역貿易 개시開市방법, 빈주관행차賓奏官行次 절차
. 제 4권, 사대편 (하下) - 중국 칙사勅使의 영접, 연형宴享과 제반의식 유별類別 상술
. 제 5권, 교린편交隣篇 (상) - 일본 사절과 대마도인 접대 의식절차, 개시開市와 특별조약 사항 비재備載
. 제 6권, 교린편 (하) - 통신사 정원, 노자路資, 도서圖書, 서류, 예단禮單, 연형宴享, 노정路程, 의식儀式, 회답서찰回答書札과 예단의 규례規例
. 제 7권 인물편 - 사역원 내의 원임역관原任譯官 중에서 조선조 초기부터 본서 편찬시까지 외교상 특기할 공적이 있는 인물의 행적을 초선열기抄選列記하여 후래後來의 참고에 자資케 한 것
. 제 8권 고사故事, 솔속率屬, 집물什物, 서적 등 4편을 수재收載하였으니, 고사편에는 조선조 개국 이래 사역원 제조 등 고위 문관을 중심으로 각종 야사野史와 구비口碑로 전傳한 고사故事 등 특기할 사적事蹟을 연대 순으로 집록한 것이며, 다음 솔속편은 사역원의 서리胥吏, 고직庫直, 방직房直, 노비奴婢 등의 정수定數와 임역부서任役部署 등을 서술하였고, 집물편什物篇은 사역원 내의 물품목록이니, 인장제액印章題額 (현판懸板) 과 각종 외국어外國語 교재류敎材類 서적의 판본 등과 조판의 내력이 상술되어 있고, 서적편은 사역원의 비부備付된 기록과 도서목록이니 대개 외국어 교재류와 그 교재의 언해諺解, 각 관직별 선생안先生案 (직원명부職員名簿) 기타 기록류 등의 수량과 찬수간행의 연혁이 수재收載되어 있다.
. 제 9권, 기년편紀年篇 - 인조 14년 (1636년) 부터 숙종 46년 (1720년) 까지 사이의 사대교린상 중요사안을 연차별로 서술하여 외교사상 귀중한 자료를 일목료연一目瞭然하게 정리 수록한 것이다.
본서 편찬의 주체적 인물 김자남과 아들 경문은 숙종조 당시 사역원의 중진重鎭으로써 업적은 대단하다. 김지남의 자는 계적이요, 호는 광천, 본관은 잠성인岑城人이다. 천성이 관홍유화寬弘裕和하여 특히 이국인異國人을 회용懷容하는 군자君子의 풍범風範을 지니고 있었다. 숙종 8년 (1682년) 에 통신사 윤지완을 따라 일본에 가서 일본학자들과 창수唱酬하여 명성이 높았고, 그 후 10년이 지난 뒤 숙종 18년 (1692년) 에는 청국에 가서 염초熖焇 만드는 신 방법을 구득하여,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이란 책을 편저하여 중외中外에 간포刊布함으로써 화약제조의 신법을 시행케하였으며, 그 뒤에도 여러 번 연경에 가서 청의 중신重臣 송주, 목극등과 교제하여 대청관계의 허다한 난관을 극복하였다.
특히 숙종 38년 (1712년) 에 백(두)산 사경査境문제가 일어나자 왕의 특명으로 아들 경문과 함께 청국에 가서, 청국대표 목극등을 상대로 활약을 하여 난관을 극복하였다. 노후에는 통문관지 찬수의 대업을 완수한 것이 공적이다.
벼슬이 가선계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다섯 아들의 등과登科로 추은가계推恩加階의 영榮을 받았다. 아들 경문도 통문관지 찬수에 서문을 작성하였다. 서문序文 1절節에 ‘경문이 찬수 사역事役에 일하여 우안于頇이 많았다 해서 서문을 쓰라는 명을 받았다’ 라고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경문은 자가 수겸이니, 천성이 강직불요剛直不撓하여 아무리 강대국과 상대하여도 소신이 확고한 일이라면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관철하였다. 부친 김지남과 백두산 정계비定界時에 현지에 가서 청사淸使와 절충하는데 명창明暢한 응대와 정연한 조리로써 목사穆使의 고집을 만회挽回케 하는데 경문의 공이 지대하였다.
그 후에 부친처럼 여러 번 연경을 왕래하여 국사에 진췌盡瘁하였으며,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여 문사文詞가 창달暢達하였고, 벼슬이 자헌계 지중추에 이르렀으니, 별세別世한 뒤 중신들이 다 애석해 하였으며, 귀록 조현명은 탄식하기를 ‘국가에 큰 일이 있어도 이제부터 수행할 자가 없어졌다’ 고 했다.
통문관지는 창간 후 여러 차레에 걸쳐 속찬증보를 하여 중간하였으니, 제 1차 속찬續纂은 초간 후 약 60여 년이 지난 정조 2년 (1778년) 에 했다. 당시 속찬의 주역인 지중추 이담李湛의 증간서增刊序에 의하면 ‘통문관지가 된지 60여 년이 되어 그 사이 변한 사례가 있고, 관제官制와 권장勸獎의 연혁이 많으며 또 활자인본이 거의 없으므로, 제거提擧 백곡 이상국이 본지의 속찬에 착수하여 나도 그 일을 도왔더니, 그 사역을 나에게 맡기므로 1, 2 원료院僚들과 편찬 및 교수校讎를 하였다. 그 중에 전례典例가 달라진 것은 각기 본조本條 하下에 속續 자字를 붙여서 구분 게재하고, 또 속기년續紀年 1권을 첨가 보찬輔贊하였으니, 속찬 첨가한 것이 53조다’ 라고 하여 속찬의 경위를 밝혔으며, 이 때의 간행은 10권 4책의 목각판본이다. 통문권지 권 8에서 물편조속지物篇條續志에 의하면 ‘통문관지 목판은 건륭포술乾隆褒戌 (정조 2년) 년에 왜倭 학관學官 최창겸이 현재梋財하여 간판刊板하다.’ 라는 기사로 보아 이것도 초판과 같이 정부 간행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제 2차 속찬은, 헌종 8년 임진년 (1842년) 에 이르러 당상역관 이상적이 본지를 속찬하여 자비로 간판하였다 하여, 가자加資의 포영褒榮을 받은 사실이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중 헌종 8년 6월조에 실려있으며, 또 4차 속찬은 철종 7년 (1856년) 병진 5월에 역관 이야李埜 등에 의하여 완성되어 역시 가자의 은전恩典을 받은 것이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중 철종 7년 5월조에 있으므로 알 수 있다.
제 5차 속찬은 고종 18년 신사 (1881년) 에 시행하여, 목각본 12권 5책으로 중간한 것이고, 최종 제 6차 속찬은 고종 25년 무자 (1888년) 에 수행하여, 역시 목판본으로 6책으로 중간하였으니 이 5차, 6차의 중간 사실은 일본인 정간공작의 고해책보古解冊譜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본서의 속찬사업은 이로써 종속되었으나, 그 후 고종 광무 11년 (1901년) 에 경성진서간행회에서 양장洋裝 국판菊版 활자본 1책으로 번인飜印 출판하였는데, 본문은 고종 25년판 전문이 수재收載되고 말미末尾에 신유한의 해유록이 첨부되어 있으며, 일본인 폐원단의 후식後識이 부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의 간행은 1913년에 조선고서간행회본으로 국판 양장 1책이 조선군서대계 제 17집으로 나왔다.
또 최근본으로는 우리나라 광복의 전년 1944년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사료총간史料叢刊 제 21집으로 출판한 것인데, 이것은 서울대학교 소장 규장각도서를 태본台本으로, 건곤乾坤 2책 국판으로 한장본 체제漢裝本體制의 영인 축쇄본影印縮刷本이니 인쇄가 선명하고 장정이 아담한 미본美本이다.
이상과 같이 통문관지는 찬집 이후 여러 번 속찬증보를 거듭하여, 지난날 우리나라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 전모全貌를 정리 수록하여, 그 당시 국교에 관계하는 중신, 사절, 역관 등 실무진에서는 일상의 편람便覽이 되었고, 사서史書의 역할로 지대한 활용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 책이 우리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청국 일본에까지 유포되어 우리나라와 사절 관계가 개시되면, 그들 실무자의 좌우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는 보전寶典이 되었다 한다. 현재에도 일반 사학도에게는 말 할 것도 없고, 정치, 외교, 경제, 제도, 지리, 예술, 문화 등 극히 넓은 연구 영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고종 이후 최 근세의 기년속록紀年續錄 중에는 우리나라의 개화여명기開化黎明期를 당하여 구주歐洲 각국의 동점東漸과 중, 일, 노의 한국을 상대로 한 침략공작에 대해, 귀중한 사적자료가 연차별로 전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손으로 엮어진 이 시대의 사료로써 더 한층 소중한 사료가 아닌가 한다.
042 담헌서湛軒書 (1731 – 1783년) 홍대용洪大容
담헌서 7책은 담헌 홍대용 (영조 72년 - 정조 7년) 의 문집. 그의 사후 약 150년이 지난 1939년에 신조선사에서 발간되었다. 내용은 내집 또는 담헌서에
1. 사서문의四書問疑, 삼경문변三經問辨, 심성문心性問 (경학經學)
2. 임하경륜林下經綸 (정책론)
3. 의산문답毉山問答 (학문관, 자연관, 사회관, 국가관, 역사관 종합서술)
4. 계방일기桂坊日記 (정조의 세손世孫 때 보필일기輔弼日記)
5. 시詩, 서간書簡, 묘문墓文
외집外集 또는 담헌외서外書에
. 연기燕記, 건정필담乾淨筆談 (북경기행문)
. 항전척독杭傳尺讀 (북경 인물론) 등이 있다.
담헌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학자로 유명하다.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약 3세기, 갈릴레오로부터 약 2세기가 뒤지지만, 아시아의 한 구석에서도 ‘땅이 움직인다’ 고 갈파喝破한 것이 담헌이다. 연암의 열하일기熱河日記의 곡하필담鵠河筆談과 그가 지은 담헌의 묘지 (연암집) 에도 나타나 있지만, 담헌 자신도 그의 의산문답에 단편적이나마 그 학설을 소개하여, 지구가 지축地軸의 둘레를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자전自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설이 진실로 담헌의 독창獨創이라면 더 말 할 것도 없고, 반드시 독창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처음 보는 주장인 점에서 획기적인 것으로 일컬어오는데 이의가 없다.
지전설은 그의 과학 지식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산문답에 나오는 여러 대목들 - 지구설, 그 인증認證으로써의 일日, 월月, 지구의 인력引力에 대한 착안着眼, 태양계, 우주 (지구는 포함시키지 않음), 태양, 지구, 달의 크기의 비례比例, 바람, 구름, 비, 눈, 서리, 우박, 우레, 번개, 무지개, 무리 (휘暉) 등 자연계의 여러 현상, 기온, 주야晝夜의 시간 차, 조석潮汐 등등의 설명이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아도 인식 차가 없음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과학에 대한 그의 집착과 정열은 실로 놀랍다.
담헌은 서양식 방법을 참고하여 혼천의渾天儀라는 천문시계天文時計를 제작하였고, 북경에 가서 흠천감欽天監 (중국 국립천문대) 의 감정監丁으로 있던 유송령 Hallerstein, 부감副監 포우관 Gogeisl 두 도이치 사람을 만나 질의質疑도 하고 동, 서 두 천주당을 찾아가 천문시설天文施設을 참관參觀하였다. 천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수학은 독해수용讀解需用이라는 저서를 남겨, 여기에서 체적법體積法, 개방법開方法을 비롯하여 8선八線, 구고勾股 등 삼각법三角法도 서술하고 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매우 냉담하였고, 이해도 없었지만, 수학, 천문학 등 과학분야에 관해 서학西學은 그에게 경이驚異의 대상이었다. 담헌은 유포문답劉鮑問答 (유송령, 포우관) 에서 서양의 기술문명에 찬사를 보내면서 ‘지금 서양법은 수학을 기본으로 하고 기계를 이용하여 만형萬形, 만상萬象을 살펴서 천하天下의 원근遠近, 고저高低, 거세巨細, 경중輕重을 모두 눈 앞에 모아놓고, 손바닥에 그려보일만큼 되었으니, 이것은 한당漢唐과 같은 문명으로도 일찍이 있어보지 못 한 문명이라 하여 잘못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담헌은 이같이 과학의 지식에서 당대當代를 독보獨步하였지만 그 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과학에 대한 그의 태도다.
학문이라면 유학, 그것도 주자학에 국한되었고, 수학, 천문학, 의학 등 자연과학은 말기末技라 하여 신분상으로도 중인中人이라는 특수계층이 전담하는 부문으로 되어있었던 때였다. 당시 여당與黨인 노론老論의 당당한 가내家內 출신으로써 전통적인 유학에도 일가를 이룬 담헌이, 이러한 과학기술을 어찌 ‘말기라 이르리요.’ ‘정신의 극치極致다 (제라석당문祭羅石塘文)’ 라고 말한 투철한 신념을 가졌음을 보아, 우리는 그에게서 새로운 문명의 선구자先驅者로써의 인식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정신은 그로하여금 중국 및 우리나라 수천 년의 전통적인 세계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대하여도 대담한 비판을 가하게 했다. 담헌은 기氣, 화火, 수水, 토土 네 가지를 만물 생성의 원형으로 보고, 특히 기는 형이상학의 기라기 보다도, 물체로써의 기에 오히려 가까운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담헌은 이 네 원소元素로써 오행음양을 대신 설명하고 있으나, 그보다도 오행이라는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데 그 뜻이 있다. 오행이 부회附會 천착穿鑿되어 철학, 천문, 지리, 의학, 종교, 병법, 정치, 도덕 심지어 생활감정까지도 좌우하게 된 그 고질痼疾이 ‘아무 이치理致 없음’ 을 역설力說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담헌의 이와같은 설명은 인류의 생성, 발전에 대한 설명에도 일관된다. 먼저 생명의 기원起源은 수, 토가 안으로 작용하고, 일, 화가 밖으로 열을 가하여 원기元氣가 모이고 만물이 생겨나니, 식물은 땅에 돋아나는 털 같은 것이요, 동물은 땅에 모인 이 (슬蝨) 같은 것이다. 그 중에도 동굴洞窟처럼 습濕한 데서 기氣가 엉켜 형체形體를 일으키는 것이 기화氣化요, 남녀가 관계하여 태胎로 낳는 것이 형화形化다. 오랜 옛날에는 기화만이 있어 인人, 물物도 많지 않고, 무용無用 무욕無慾으로 살 수 있던 태화太和한 세상이었다. 그것이 中古로 되면서 형화가 시작되어, 인, 물이 많아지고 따라서 기갈飢渴을 면免하고 한서寒暑에 견디고자 하니, 비로소 제각기 사유事由를 알게되고, 서로 쟁탈을 벌이게 되었다. 인류는 집단생활의 범주範疇를 넓히며 계급階級과 국가를 형성시켜간다. 능력이 있고 욕심이 많은 자가 지배자가 되면서 약자는 노력을 바치고, 강자는 이득을 누리게 되고, 경계境界를 찢어서 이웃을 병탄倂呑함에 이르러 비로소 살상殺傷의 전쟁을 발생케 하였다. 이와같이 점차로 복잡해지는 집단생활 속에서 예의儀禮, 금기禁忌, 제제制裁 등이 제도화 되어간다. 사람의 정욕情慾은 어쩔 수 없는, 즉 혼인婚姻의 예禮를 갖추어 음란淫亂을 금禁해야 했고, 일정한 거처는 어쩔 수 없은 즉 남획濫獲 남벌濫伐을 금해야 했고, 베옷, 비단옷을 입는 것은 어쩔 수 없은 즉 노소老少 상하上下의 차별이라도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설명 가운데에는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아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또 이러한 설명이 모두 담헌에게서 시작된 것도 아니지만, 종교적 혹은 신화적神話的인 설명을 떠나, 과학적인 태도로 일관하려는 노력으로 시종한 것만은 역력히 살필 수 있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의 문화인류학적인 입장에서도 진진한 흥미를 느끼게 한다.
담헌은 그 조부가 대사간, 부친이 목사라는 당당한 명문의 출신으로, 당시 집권당인 노론계의 대표적인 학자에게서 학문을 닦았으나, 학문의 방향은 처음부터 세속世俗의 선비들과는 달라, 과학에도 뜻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계기가 있었다. 그가 35세 되었던 영조 41년 (1765년), 북경 유람遊覽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 해 겨울 북경에 가는 사신使臣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담헌의 숙부叔父가 지명되자, 담헌은 숙부의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는 명목으로 수행하게 되어, 그 해 11월 말에 북경에 도착, 이듬 해 2월 말까지 체류滯留하고 돌아왔다. 이 동안에 북학北學의 결의를 굳게하고, 여러 문물을 실지로 보게 된 것은 물론이었지만, 이 때 중국인 심우心友를 얻게 된 것도 그로써는 대단한 인연이었다.
북경의 유리창 시중市中에서 사행使行의 1인이 우연히 알게 된 엄성, 반정균과 그들의 선배先輩 육비 등 항주 출신의 거인擧人 (조선의 생원生員, 진사進士,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은 선비) 들은 북경 건정 (호동) 에 살고있는 선비들이다. 담헌은 필딤筆談을 통하여 이들과 접촉의 기회를 거듭할수록 우정友情이 돈독敦篤하여졌다. 이 필담의 기록이 건정필담乾淨筆談이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엄성이 복건지방에서 객사客死할 때, 그는 담헌이 보낸 편지를 가슴에 얹고, 담헌이 선사한 향묵香墨 (조선 먹) 의 향내를 맡으면서 운명殞命했다는 정도의 친우親友였다.
엄성과의 아름다운 우정은 그 뒤 엄성의 아들을 통해서 이어져가지만, 다른 친구들과의 서한書翰 왕래는 계속되었다. 담헌이 귀국한 후 별세別世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인편人便이 있을 때마다 오고 간 서한이 항전척독杭傳尺牘이다.
담헌은 44세 되던 영조 50년 (1775년) 에 음관蔭官으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선공관의 감역이라는 종 9품의 말직末職이다. 이어 세손世孫을 보필輔弼하는 익위사의 시직으로 약 2년, 세손 (정조) 이 23, 4세로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 전이고, 영조가 이미 노쇠老衰하여 세손이 승명대리承命代理라는 이름으로 섭정攝政을 하였던 시기다. 담헌이 아끼는 후배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이 그 신분상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즉위와 함께 등용되었던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담헌은 47세 때인 정조 원년에 사헌부의 감찰이 되고, 이어 태인 현감, 영천 (영주) 군수 등으로 전후 7년 여 간 외직外職에 있다가, 사직辭職하고 서울로 돌아온 그 해 풍질風疾로 세상을 떠났다. 53세의 나이다.
담헌은 실로 박학다재博學多才하였다. 그의 중국인 친구 반정균은 담헌기에서 평評하기를 ‘홍군은 박문강기博聞强記하여 보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다. 율역律曆, 전진戰陣의 법과 송학의 종지宗旨를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시문詩文으로부터 산수算數에 이르기까지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고 하였고, 그가 청나라 문사文士들과 담론談論한 것을 보아도 이 평이 과장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또 거금車琴 (거문고) 에 능하여 이 방면의 자신감을 피력한 적도 있다.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이른바 북학파 가운데서 연암은 담헌보다 6년 연하年下이나 학문을 토론하는 심우心友였고,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동년배로 친교를 맺었고, 특히 정조 초에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그 뛰어난 재질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모두 연암의 제자로써 담헌과 선후배로 상종相從하였다.
담헌은 북학파 가운데서도 年長인 선배일뿐더러, 북학의 토대가 되는 북경행도 가장 먼저였고, 따라서 그의 기행문인 담헌연기湛軒燕記에 실린 청나라 문명에 관한 태도는, 이들 북학파의 선구先驅다. 북학이라는 면에서 보면 담헌은, 그 뒤에 오는 적극적인 북학론자들, 가령 박제가의 북학의에 비하면, 그 주장이 뚜렷하지 못 한 것은 숨길 수 없다. 그것은 뒤의 북학파들이 담헌을 토대로 뛰어넘은만큼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다. 또 숭명배청열崇明排淸熱이 격렬하였던 당시 국내 지식층의 경향 속에서, 그래도 담헌만큼이나 청조문물淸朝文物의 사단취장捨短取長을 들고나선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주체의식이었다. 그가 북경에서 귀국하자 항청抗淸의 절조節操를 지키지 못 하는 한인문사漢人文士들과 교유交遊했다하여 비난을 들었다. 담헌은 이러한 공격에 대한 소극적인 방어를 통하여 그 입장을 견지堅持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지식층의 청인에 대한 악감정이 지나침을 지적하고, 나아가서는 청조淸朝도 중화中華로 볼 수 있다는, 당시로써는 대담한 주장도 서슴치 않았다. 여기에는 북학론의 전제인 배청사상排淸思想의 타파打破가 분명히 들어나있다.
그러나 그 근저根底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의견이 들어있음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곧 화華, 이夷의 구분의 지역상의 문제일 뿐이요, 화, 이가 차별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다. 담헌은 일찍이 항전척독杭傳尺牘에서 ‘순舜 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요,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사람이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있으랴’ 라고 말한 일도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의산문답에서 더욱 명확하게 발전 완성된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내외內外의 구분이 있겠는가. 저마다 제 사람을 친히 여기고, 제 임금을 높이고, 제 풍속風俗에 편안히 사는 것은 화나 이나 마찬가지다’ 라 하여, 화, 이 사이에 본질적인 구별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담헌은, 결론으로 ‘공자孔子는 주周나라 사람이요, … 춘추春秋는 주나라 사서史書이니, 내외를 엄히 나누는 것도 그럴 법한 일이다. 그러나 만일 공자가 바다를 건너와 … 이 역외域外에 주周의 도道를 일으켰다면, 그 내외의 분별分別과 존황양이尊皇攘夷의 대의大義로 보아 마땅히 역외춘추域外春秋를 지었을 것.’ 이라고 갈파喝破한 것이다.
여기에 모화慕華 또는 북학보다도 더 근본적인 중국관이 담헌에게 있음을 보는 것이요, 대명의리大明義理를 감히 의심치 못 하면 당시로써는 실로 혁명적인 자아自我의 각성覺醒을 보는 것이다.
그는 주자학이 학문의 정통임을 내세우면서도, 주자학에 적지 않은 불만을 토로吐露했다. 가까이는 경서經書의 주註가 미흡未洽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주자를 존숭하되 그 실질을 존중할줄 모르며, 학문의 자유가 너무나 억압되어 주자학 일색이 되어있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하면서, 학문이 관념의 공허한 유희遊戲로 타락墮落하는 폐단弊端에 대하여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치 않았으니, 이 역시 의산문답에서 가장 정채精彩를 발發한다. 은거隱居 독서讀書 30년을 보낸 동해거인東海居人 허자라는 사람이 북경까지 가서 학문을 토론해보았으나, 소득이 없어 돌아오는 길에 의산여산 (만주 금주 부근 명산) 에서 실옹實翁이라는 은자隱者를 만나 문답을 하는 가설假說로 시작되는 이 글에서는 ‘공자가 돌아가니 제자가 공자의 뜻을 어지럽히고, 주자가 돌아가니 제유諸儒가 주자의 뜻을 어지렵혀 그 업業만을 숭상할 뿐 그 진眞을 잊었고, 그 언言을 배울 뿐 그 의義를 잃었구나. 말로 정학正學을 일으킨다 하지만 실은 긍심矜心에서 나왔고, 말로 사설邪說을 배척한다 하지만, 실實은 승심勝心에서 나왔고, 구세救世하겠다는 그 인仁이란 권심權心에서 나왔고, 보신保身을 하겠다는 그 철哲이란 이심利心에서 나왔으니, 이 네 가지가 서로 얼려 진과 의는 날로 없어지고, 천하가 도도히 허虛로 달음질치고 있구나’ 라고 통탄痛嘆하면서 허에 빠져 실을 잃은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그러나 담헌은 이와같이 학문의 태도로 실을 찾는 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넘어서 학문의 내용에도 실을 찾아 애썼음을 볼 수 있다. ‘정심성의正心誠意가 학學, 행行의 체體라면, 개물성무開物成務는 학, 행의 용用이 아니겠는가. 율역律歷, 산수算數, 전곡錢穀, 갑병甲兵과 같은 것은 개물성무의 큰 단서端緖가 아니겠는가.’ 여인서與人書라 하여, 자신의 연구분야가 실학에 대한 근본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말하고 있다.
담헌을 양명학파陽明學派로 보는 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송대宋代에 전성全盛을 했던 주자학에 이어, 명대明代에는 양명학이 전성을 보였고, 양명학은 일본으로 건너가 뿌리를 내렸지만, 오직 조선조에서는 임란 전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주자학파들에 의하여 이단사설異端邪說로 몰려 처음부터 완전히 봉쇄되었다. 담헌은 중국문사들과 격론하는 중에도 양명학을 언급하면서도, 주자학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구절이 더러 보여, 그가 적어도 양명학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시사示唆한다.
한편 담헌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섭취하였지만, 서학西學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인 천주교에 대해서는 별다른 공감이 없었던 것 같고, 그 지식도 그다지 치밀緻密하지 못 했던 것 같다.
끝으로 담헌의 경세학經世學을 말하면, 그의 저서 임하경륜林下經綸은 단편短篇이지만, 그의 정책론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역작力作이다. 담헌은 평소에 율곡의 성학집요聖學輯要와 반계磻溪의 수록隨錄을 ‘경세 유용有用의 학學’ 이라고 했지만 (종형 담헌 선생 유사遺事), 임하경륜의 기본 구상은 반계수록과 마찬가지로 균전均田, 부병제도府兵制度를 토대로 농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재정과 국방의 기본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내용은 따로 소개하지 않기로 하고, 다만 반계수록에서 전혀 구상이 미치지 못 했던 몇 가지 중요한 독창獨創만을 지적한다. 첫째로 신분身分을 막론하고 모든 장정壯丁은 노동을 해야 하며, 양반이라도 노동을 하지 않고 유식遊食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재才, 학學이 있는 자는 중직重職에 임명하고 재, 학이 없는 자는 공경公卿의 자제子弟라도 천역賤役에 복무케 해야 한다. 셋째로 지방마다 면 단위까지 학교를 두어, 면내의 자제는 8세 이상이면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교육을 받게하고, 과거제科擧制 대신 공거제貢擧制로 하여, 하급교육기관에서 순차順次로 상급교육기관에 인물을 천거薦擧하되 관직도 추천에 의하여 임명할 것을 주장한다. 넷째로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공적인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하경륜은 봉건적 신분제 그 자체에 대해 이를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노동을 해야 하고, 모두 관직에 오를 수 있고, 모두 교육을 받고, 모두 공적인 발언을 할 수 있다고 하면, 이것은 자연히 봉건적 신분제를 타파打破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 실현 가능성 여부를 결정할 현실의 제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실로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개혁안이요, 시대를 선구先驅하는 대담한, 가히 혁명적인 구상임을 표방標榜한다. (21. 4/ 18 초고 완)
<사족蛇足> 정조의 개혁사상은 신분사회의 폐단을 절감한 상황에서 비롯되었고, 담헌 같은 개혁가가 있어, 서얼庶孼의 규장각 관헌 등용登用, 난전亂廛, 화성華城 건축 등 정책으로 발현發顯되었으며, 이는 담헌과 북학파의 실용정책으로 구현具顯되었다. 이 때 서구西歐 과학문명을 더욱 수입 발전시켰더라면 우리나라는 세계를 선도先導하는 국가가 되었으리라. 담헌의 정책은 가히 선구적先驅的이고 혁명적革命的이다. 그러나 주자학에 막혀 펼치지 못 하였고, 이후 미개상태未開狀態의 일본은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거치지 않고, 네델란드 등 직접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세계 선도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도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임진왜란, 일제강점 식민지, 남북분단 등 보수주의자들이 개혁을 방해하여 발전과 성장을 저해함
043 추관지秋官志 (1781년) 박일원朴一源
조선조 정조 5년에 편찬되었다. 연산군의 폭정 이후로 여러 차례 사화史禍가 일어났고, 당쟁마져 겹친 위에,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겪게 됨으로써 국가와 사회는 피폐疲弊로와졌고, 국민생활은 도탄塗炭에 빠져 전후戰後의 복구와 국민의 소생蘇生을 위해 제도 문물의 혁신이 시급히 요청되었고, 이에 따라 시대사조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갑자기 그 형세가 커지면서 영조정조시대英祖正祖時代를 맞았다.
영조, 정조 양대에는 탕평책蕩平策을 강력히 밀고나가, 민족 위축萎縮의 고질痼疾인 당쟁을 억압하여 정치의 혁신刷新을 꾀하는 한편, 학술과 문화 발전에 힘을 기우려 조선조의 문화부흥기를 도래한 것이다.
추관지가 이런 문화부흥의 시운時運을 타고 되어진 것이나, 추관지가 이루어진 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또 하나의 긴박하고도 직접적인 자극제가 있었다. 그것은 춘관지의 편찬이다.
춘관지는 예조禮曹에 관한 고전古典, 규식規式과 사목事目, 사례事例를 집대성集大成한 것으로 전에 예조랑관 이가환이 그의 숙부인 이맹휘를 시켜서, 조선조 건국 이래의 예조 소관 사례를 정리 편찬케 한 바 있었는데, 이 해 즉 정조 5년 7월에 왕명으로 이 사찬私撰을 토대로 하고, 증보 개찬케 하여, 춘관지를 만들게 하였다 (정조실록 5년 7월 정사조丁巳條). 이와같이 이맹휘의 사저私著가 토대가 되어, 왕명에 의한 춘관지가 나오게 되어 이에 자극을 받아 형조의 소관 사례집인 추관지가 편찬을 하게 된 것이다.
추관지는 정조 5년 (1781년) 10월에 당시 형조판서 김노진이 형조의 원외員外 박일원으로 하여금, 형조의 소관 사례를 모아 정리 편찬케하여 형조에 관한 장고掌古의 통기統紀로 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박일원이 이를 휘분彙分 유취類聚 즉 정리 분류하여 추관지를 사찬하게 되었던 것인데, 다음 해인 동 왕 6년 5월에 왕명에 의하여 증보가 되었고, 그 후 동 왕 15년 (1792년) 에는 여기에 다시 증보가 가해져서 춘관지와 쌍벽雙璧을 이루어 사본寫本으로 보존되었다.
김노진의 관향은 강릉이고, 영조 11년 (1735년) 에 출생하여 동 왕 33년 (1757년) 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판서에 올랐고, 정조 12년 (1788년) 에 세상을 떠났다. 형조판서 당시에 박일원을 시켜 추관지를 편찬케 한 외에도 편집당상을 겸임하여 국조보감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박일원의 관향은 반남이고, 벼슬은 음좌랑蔭佐郞으로 형조의 원외로써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김노진의 지시로 추관지를 편찬한 외에도 정조 11년 (1787년) 에는 호조의 소관所管 사례를 모은 탁지지度支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추관지의 원본은 증보본인 사본이 규장각본으로 보존되어 서울대학교에 수장되어 있고, 이 사본에는 금문원의 주인朱印이 찍혀있다. 1939년에 일제日帝의 중추원中樞院에서 이 사본에 의해 편집 교열校閱을 가해서 인출印出한 바 있다. 원본은 매每 면面이 10행行 24자字로 되어있고, 중추원 간행본의 속續 제자題字는 원본의 제자를 전사傳寫한 것이다.
내용은 당시의 형조아문刑曹衙門 청사廳舍의 모형과 배치를 그린 본아전도本衙全圖가 들어있고, 이에 이어 신축 양월 (정조 5년 7월) 이라고 날짜가 기입되어 있는, 당시의 형조판서 김노진의 서문과, 같은 날짜로 되어있는 편찬자 박일원의 소직小職이 있고, 다음에 범례凡例와 원편총목原編總目과 중보 추관지 범례가 실려있으며, 본문은 5편으로 분류되어있다.
김노진의 서문에 보면, ‘견본사장고見本司掌古, 호무통기浩無統紀, 매환어참고每患於參考, 혹실어존거야或失於遵據也’ 라고 형조의 호긴浩緊한 사안이 정리 수록된 것이 없어, 참고와 준거準據의 길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본지를 편찬하여서, 앞으로 장고掌古의 통기統紀로 삼는다 하여 편찬하게 된 동기動機와 취의趣意가 표시되어 있고, 또 ‘어시於是 속續 원외員外 박군朴君 일원一源, 찬撰 소위所謂 추관지秋官志’ 라고 형조의 원외인 박일원에게 부탁하여 추관지를 사찬케 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박일원의 소직小職에는 ‘대사구김공노진大司寇金公魯鎭 읍불망이왈揖不侫而曰 육관일야六官一也 춘관기유지春官旣有志 가이추관이독무호재可以秋官而獨無乎哉’ 라고 춘관지가 이미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 자극을 받아 추관지가 이루어지게 된 사유를 말하고 있다.
범례凡例에는 유집庾輯, 분류分類, 수록首錄, 연혁沿革, 산삭删削, 세년歲年, 성명姓名 및 증보增補의 8항을 수록하여, 본지의 내용이 조선조 건국 초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나, 인조 이전은 자료가 희귀하기 때문에 부득히 효종 이후 영조시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약고상금略古詳今을 免치 못 하게 된 데 대한 변해辯解와 편절編節의 분류와 내용의 순위, 그리고 전교傳敎의 자구字句도 실록 기재 예에 준하여, 종간從簡 산삭删削한 것과 연호年號도 다른 공문서와 같이 중국 연호를 쓰지 않고, 우리나라의 세년歲年을 사용했으며, 인명은 원칙적으로 성과 명을 갖추어 썼다는 것과, 정조 6년 5월에 박일원의 사찬인 추관지를 왕이 하람下覽하고 왕명에 의해 중보가 가해졌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언편총목原編總目에는 추관지 분류의 원리와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천도天道에 의한 작사법作史法 즉 천문설天文說에 의하여 천시天時 (추秋는 시時이므로 천시에 의한 것임) 의 24기氣를 따라 10간干, 2지至, 5운運, 4시時, 3원元의 이치에 쫓아서 분류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 1편 (수편首編) 은 관제官制, 직장職掌, 속사屬司, 이예吏隷, 관사館舍, 경용經用, 율령律令, 금조禁條, 노비奴婢, 잡의雜儀의 10항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10간에 따른 것이고, 제 2편 (군복부群覆部) 은 5운運에 의해 계복啓覆, 윤상倫常, 복수復讎, 음간奸淫, 심리審理의 5항으로 하였고, 제 3편 (고율부考律部) 은 4시時에 의해 제율除律, 정제定制, 속조續條, 잡범雜犯의 4항으로 되고, 제 4편 (장금부掌禁部) 은 3원元에 의해 법금法禁, 중장中章, 잡령雜令의 3항으로 하고, 제 5편 (장예부掌隷部) 은 2지至에 의해 공예公隷, 사예私隸의 2항으로 하였으므로 총 24항으로써 24기설氣說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본문 제 1편은 형조에 관한 관제官制, 직장職掌, 속사屬司, 이예吏隷, 관사館舍, 경용經用, 율령,律令 금조禁條, 노비奴婢, 잡의雜儀의 10항으로 되어있고, 이에 대한 규제사목規制事目 및 사례事例를 수록收錄했다.
관제官制에는 형조刑曹에 관한 기원起源, 역사歷史, 연혁沿革, 조직組織, 기구機構 및 사명使命 등이 기록되어 있고, 직장은 직무분장職務分掌의 체계體系로써 4사司 9방房 및 장무소掌務所로 나누어 각각 그 구성과 임무를 기술하였다. 속사屬司는 형조에 형속隸屬된 예하隸下 관서官署로써 율학청律學廳, 율관분차律官分差, 전옥서典獄署, 장예원掌隷院, 보민사保民司, 좌우포청左右捕廳, 좌우순청左右巡廳 등에 관한 기구와 임무 및 연혁 등에 대해 진술陳述하였고, 이예吏隷는 형조 소속의 하부직원下部職員인 서리書吏, 사령使令, 구종丘從, 노비奴婢, 군졸軍卒 등에 관해 규정하였다. 관사에는 형조 소관所管 청사廳舍에 관해 그 위치, 연혁, 구조, 규모, 장식裝飾 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고, 경용은 형조의 경리經理에 대한 기록으로써 수입, 지출, 직원봉록, 기타 경비 일체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율령에는 형조에 관계되는 일체의 법전法典, 법령法令과 죄형罪刑에 대해 그 연혁과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금조에는 당금當禁, 소금訴禁, 수금隨禁의 3종으로 나누어 개별적 금지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노비에는 사역노비使役奴婢 수數와 수공경외노비收貢京外奴婢 수數 및 노비속안奴婢續案 등이 기록되어 있고, 잡의에는 형조 관계의 각종 의식儀式과 서식書式 및 절차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제 2편 (상복부詳覆部) 에는 계복啓覆, 윤상倫常, 복수復讎, 음간奸淫, 심리審理의 5항으로 되고, 계복에는 검험檢驗, 동추同推, 심장訊杖의 3항을 부록附錄하고, 심리에는 흠휼欽恤이 부록되어 있다.
계복은 옥안수계獄案修啓에 대한 규식절차規式節次와 사목사안事目事案이 수록되어 있고, 검험, 동추, 심장은 범죄犯罪의 수사搜査, 검증檢證과 형구刑具에 관한 규제, 방법, 절차, 사안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윤상은 혈족血族, 인척姻戚과 상전노비上典奴婢 간의 범죄에 대한 각종 죄종罪種과 이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규식規式 그리고 옥안사례獄案事例가 수록되어 있고, 복수와 간음에는 각종 옥안사례를 수록하였다. 심리에는 태종 이래의 규식과 각종 옥안을 수록하고, 흠휼은 세종 이후의 규식과 사례를 수록하였다.
제 2편 (고율부考律部) 에는 제율除律, 정제定制, 속조續條, 잡범雜犯의 4항이 들어있어, 제율은 제형除刑, 금형禁刑 및 경형輕刑으로 나누었다. 제형은 특정형종特定刑種을 면제免除해주는 구별과 경우로써 이에 대한 규제와 사례가 기록되어 있고, 의부월족劓鼻刖足 (코 베고, 발뒤꿈치 깎는 형刑), 경외남형京外濫刑, 옥수현가獄囚懸枷의 세 가지이고, 경형은 연령, 품위品位, 내시內侍와 같은 특수층, 부녀婦女 기타 특별한 인물 등에 대한 것으로, 이에 대한 규제와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정제는 법금法禁의 대상이 되는 각종 금지사목과 이에 대한 처리방안을 기록한 것이고, 속조는 낭관郎官, 개좌開坐, 율관律官, 둔조추단屯曺推斷, 죄수罪囚, 도류徒流, 방사放赦, 과장科場, 절도竊盜, 남형濫刑, 사문용형私門用刑, 범분犯分, 범월犯越, 청송聽訟, 산송山訟, 상납上納, 군무軍務, 환상還上, 범적犯跡, 징채徵債, 전화錢貨, 은동銀銅, 삼화蔘貨, 상가商賈, 궁위宮衛, 성어城圉, 침조寢廟, 능원陵園, 제형祭享, 위판位版, 궁액宮掖, 보인寶印, 부패符牌, 제서制書, 성력星曆, 종고鍾鼓, 봉화烽火, 음악音樂, 전패殿牌, 우목郵牧, 궁방宮房, 관기官校에 관한 것으로 치죄기관治罪機關의 구성, 재판의 방법과 규칙, 법관, 법 적용, 구속조건拘束條件, 죄인罪囚에 대한 문초問招의 조건과 행형규제行刑規制 그리고 도형徒刑과 유형流刑 및 방사放赦에 관한 규제 등 치죄상治罪上 제반諸般 규제와 각종 죄형의 사목사례를 열거하였고, 잡범雜犯에서는 속조續條에 들지 않은 것으로 강상죄綱常罪, 구상毆傷, 무함誣陷, 가칭假稱, 투롱偸弄, 사위詐僞, 방화放火, 분산墳山과 신주神主에 대한 작변作變, 매매賣買, 모칭冒稱, 범간犯奸, 향민무단鄕民武斷, 노주간奴主間 범죄犯罪, 조세범租稅犯, 옥수獄囚에 대한 범죄 등 죄형罪刑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제 4편 (장금부掌禁部) 에는 법금法禁, 신장申章, 및 잡령雜令의 3항을 들고, 법금에는 법금法禁, 우마도살牛馬屠殺, 회음기마會飮騎馬, 지혜紙鞋, 난전亂廛, 고중高重, 무격巫覡 음사淫祀, 승니僧尼, 주금酒禁, 사학邪學의 금禁 등을 기록하고, 신장에는 용패用牌, 가사家舍, 사치奢侈, 친속親屬 간의 사송詞訟, 인금囚禁, 추치推治 등 제항諸項을 규정하였으며, 잡령雜令에는 고대능묘古代陵墓, 경산京山과 능침陵寢의 송산松山 및 철분자염鐵盆煑鹽 등에 대한 금양禁養, 원유苑囿, 절수折受, 조제朝制, 참외僭猥, 공시貢市, 문부文簿, 청속請囑, 익명투서괘방匿名投書掛榜, 잡희雜戲, 야금夜禁, 성선군成船軍에 관한 규제와 처벌의 규식 및 사례를 수록하였다.
제 5편 (장예부掌隷部) 은 노비에 관한 법규로 공예公隷와 사천私賤의 2항으로 나누었다. 공예는 노비에 대한 사정査正과 추쇄推刷, 노비 소생所生의 귀속歸屬, 노비의 수공收貢, 관비官婢 통간通奸, 관노비官奴婢의 면천免賤 등에 관한 규식과 사안事案이 수록되어 있고, 특히 각종 도감都監과 군역軍役 및 수복守僕, 별감別監, 나인內人의 선발에 대한 규식과 사안이 부록되어 있으며, 노비에 적설籍設한 사업도 부기附記되어 있다. 사천私賤에서는 노비의 분속문제分屬問題, 노비 매매賣買, 노비의 속량贖良, 노비의 속공屬公, 노주奴主의 노비 능학凌虐, 관권官權에 의한 노비 강제强制, 노주상송奴主相訟, 노비의 노주奴主 고발, 비부婢夫의 불손不遜, 노비작지奴婢作紙의 남징濫徵 등에 대한 규제와 사안이 실려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중국의 법률을 차용借用했다. 조선조시대에도 중국의 법률인 명율明律을 적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특수하고 고유한 사항은 명율에 들어있지 않고, 또 명율을 적용하여 처리하지 못 할 사안들이 있었으므로, 별도로 특별한 법을 만들어서 적용하였다. 태조 때 제정된 바 있는 경국원전 및 속전과, 태조 때 왕명을 제정하기 시작하여 세종 때 완성을 본, 정도전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비롯하여, 세조로부터 예종을 거쳐 성종에 이르러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그 뒤 성종과 중종 때 만들어진 전속록前續錄과 전속록의 대전속록大典續錄 그리고 선조 때 된 사성유취詞訟類聚와 청리지남聽理指南, 숙종 때 편찬된수교집록 受敎輯錄과 전록통고典錄通考, 영조 때의 속대전續大典, 정조의 어정흠휼전칙御定欽恤典則과 대전통편大全通編 및 고종 때의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특별한 법률이다.
우리나라에서 준용準用해온 명율을 비롯하여 특유법의 제정 등 법전은 정비되어 있었으나, 법法 운용運用에 대한 소관기구所關機構의 조직 구성이며, 규식規式방법과 처리사목事目이나 사안사례事案事例에 대한 기록 즉 수속절차를 규정한 법제라든가, 처리사안의 기록을 정리 집성集成한 것은 없었다. 따라서 형사행정의 참고나 지침자료가 결여되어 형정刑政의 완전한 운용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본지의 편찬이 요청되었다.
추관지는 이와같은 필요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조선조 초기 이래의 형조에 관한 제도, 조직, 기구, 연혁, 형정의 제반 규식 및 옥안의 심리와 처리에 관한 절차, 방법, 규식, 사목, 사례 등을 가능한 한 유루遺漏없이 널리 수집 정리하여 분류 수록한 것으로써 위의 제종법전諸種法典에 대하여 이것은 수속절차법 즉 소송법이고, 또한 판결사례집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옥안獄案처리의 선례先例와 지침指針으로써 효과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추관지에는 조선 초기 이래의 법식과 사례를 수록하였다고는 하나, 정조시대에 편찬된 것이고, 또 자료의 희귀稀貴 관계로 조선조 초기의 자료는 별로 보이지 않고, 주로 효종 이후 영정시대의 자료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추관지는 조선조 일대를 통한다기보다, 조선조 중기의 형사법의 연혁과 재판심리裁判審理의 실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현재 세상에 나돌고 있는 활판본活版本 추관지 (단권單券) 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39년 11월에 일제총독부 중추원에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규장각본으로 수장收藏되어 있는 중보사본重補寫本인 원본原本에 의하여 약간 편찬 교열校閱을 가加하여 인출引出해 낸 것으로, 이 원본에는 금문원擒文院이라는 주인朱印이 찍혀져 있다.
044 증보무원록增補無寃錄 (1796년) 구윤명具允明, 구택규具宅奎
우리나라에서 살상殺傷에 관한 형사재판에 의학적지식을 응용하게 된 것은 조선 제 4대 세종 때부터다. 세종 원년 (1419년) 에 형조의 주청奏請에 따라 검시문안檢屍文案을 작성할 때에는 무원록無冤錄의 규례規例에 따라 반드시 연월일을 밝혀 기입케 하였으며, 동 12년에는 상정소詳定所가 율학律學의 취재과목取才科目 중에 유학에는 무원록을 기입하였으며, 동 14년에는 중외관리中外官吏에게 검시를 시행할 때는 반드시 친히 임검臨檢케 하였다.
무원록은 검시의 규례를 채택한, 그 당시의 유일한 법의학적재판에 관한 의학지식을 응용한 검시제도가 실시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 17년에는 이과吏科나 율과律科의 취재에 무원록에 대한 검시의 격례格例를 갖추게 하였으며, 동 20년에는 무원록에 음주音注를 가加하여 신주新注무원록을 널리 반포頒布하고, 그 익년翌年에는 한성부에 명하여 검시의 장식狀式을 간행하여 그 판본을 각 도 각 관에게 모인模印 반포케 하고, 동 28년에는 검시의 법을 무원록의 검시의 규식에 의하여 형조에서 간판반포한 검시장식에 따라 장부를 만들어 명백히 기입케 하였다.
그러므로 인명치사人命致死에 관한 사건이 발생될 때에는, 그 시체가 있는 곳에서 검증을 행한 뒤에, 검시장식에 따라 사후 검안서를 만들어 재판을 실행케 하였다. 이러한 법의학적 지식을 형사재판에 이용케 한 것은 우리나라 형사법제상의 획기적인 발전이다.
그런데 세종 때 음주를 가하여 새로 새로 편성한 신주무원록은 원나라의 무종 지대 원년 (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 에 왕여가 송나라 때의 세원록洗冤錄, 평원록平寃錄 및 결안정식結案程式 등을 참작 편성한 무원록을 거의 원문 그대로 주해와 음훈音訓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왕여의 무원록은 법의학적 재판의 전문서로써, 송나라의 세원록이나 평원록에 비하여 가장 체제를 갖춘 학술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대표적 전문서다. 그러나 상권上卷은 주로 시체 검안에 관한 법규와 원나라의 원정 및 대덕년으로부터 연우 지원 간에 이르는 원조의 검험판례문이 수록되어 있고, 하권을 시상판별屍傷判別에 관한 사인死因들이 자세히 열거되어 있어, 근세의 법의학과 비슷한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상권에 수록된 사례문들을 실지 검진을 행하는 형관들이 사용하는 문례이지만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의 관습과 규례에 맞지 않은 것이 적지 않으며, 하권의 시상판별에 관한 사인의 형증形證에 있어서도 그 설명이 중첩重疊되는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그 후 청국의 강희년 간에 율례관에서 교정한 세원록이 발표됨으로 인하여, 종래 사용되어오던 왕여의 무원록의 검험에 관한 미비된 점을 증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우리의 관습과 실정에 맞지 않고 또한 검험의 형중에도 미비한 곳이 많은 신무원록을 다시 증산增删하여, 우리의 실정에 부합되고 검안서의 작성에도 편리한, 새로운 무원록을 다시 개수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그 일은 빨리 실현되지 못 하고, 영조 21년 (1745년) 에 우리 법전을 개수하여, 속대전을 편찬할 때 비로소 그 계획을 실현시켰다. 이러한 배경이 곧 증수무원록을 개수하게 된 동기다.
증수무원록은 영조 21년에 우리 법전인 속대전을 개편할 때에 구택규가 신주무원록의 미비한 점을 개찬하기 원하여, 당시 청국의 융희년 간에 윤례관에서 개정한 세원록과 평원록 및 미신편未信編 등 제서를 참작하여 증수무원록 상하편을 개수하였는데, 그 후 그의 아들 윤명이 다시 증책하여 증수무원록대전 상하 2권을 전문서로써 현대 법의학에 비하여 손색이 없는, 모든 부면이 자세히 관찰되어 있다. 특히 그 관찰이 형율관刑律官의 주관主觀을 피하고 형증刑證에 대한 객관성을 찾으려는데 노력을 기울인 것은 주목할만한 업적이다.
증수무원록은 신주무원록처럼 종래의 무원록의 지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고, 검험에 관한 많은 전문서를 널리 참작한 뒤에, 자체의 경험과 관할을 토대로 하여 살상에 대한 형사적재판의 실정에 알맞도록 새로 개편한 것이다. 이름은 증수무원록이나, 왕여의 무원록과는 그 체제나 내용이 많이 다르다. 조선의 시대적 상황에 알맞은 법의학적 재판의 전문서다.
조선시대에는 사법과 행정이 분리되지 않아 사법이 행정관의 주견에 좌우되었다. 인명치상에 관한 재판에서도 그 사건 자체에 대한 범인 및 증인의 심문과 진술에 따라 형율刑律을 맡은 행정관이 심판을 한다. 원래 사인死因을 규명하는 데에는 시체의 치명적 상해가 되는 부위를 엄밀히 관찰하여야 되며, 이런 실증적 관찰에는 법의학적 지식이 요청되는데, 이런 수속 절차가 갖추어지지 않은 살상의 형사재판에는 공정성을 기하기 어렵다.
그런데 증수무원록을 반포함으로 종래의 신주무언록의 미비된 점을 보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본서에 규정된 검시장식에 따라 우리의 실정에 알맞은 사체 검안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어, 우리의 법의학적 재판에 관한 지식이 확충되었으며, 인명치사에 관한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살상으로 인한 형사재판에는 단순히 범인이나 증인들의 심문 또 진술만으로서는 판결할 수 없고, 반드시 사인이 될만한 검증을 시체에서 실증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이리하여 본서는 검험을 담당하는 형율관들의 유일한 교과서로서 각 지방을 통하여 널리 사용되어, 갑오혁신甲午革新 이후 서구식西歐式 제도에 의한 재판소가 구성된 뒤까지도 본서를 채용採用하였다. 본서의 실용적 가치가 근대의 법의학서에 비하여 손색없이 채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고 본다.
다음은 우리의 신주무원록이 중국 및 일본에 미친 영향을 보면,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몽고제국의 정통인 원의 문화를 排斥하고, 송의 문화전통을 받들어왔으므로 살상검험의 재판에 원의 무원록을 이용하지 않고, 남송시대의 세원록을 채용하였다. 그러나 청조에 들어서 원의 무원록이 송의 세원록 보다 법의학의 전문서로서 학술적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우리나라로부터 신주무원록을 역수逆輸하였다. 이것은 중국에서는 왕여의 무원록이 이미 희귀稀貴하여 구하기 어려우므로 원간본을 거의 그대로 주각註脚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신주무원록을 수입한 것이다.
조선초본, 원원록이라는 무명으로써 청 선통 원년에 심가의 침벽루총서본으로 간행되었다. 그런데 본 무원록의 초본은 우리나라의 인본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본에서 전해진 신주무원록에 의한 초본이라는 것이 심가본의 무원록 서에 적혀있다. 이와같이 왕여의 무원록은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수입된 후, 다시 일본에 전하여지고, 일본으로부터 중국으로 역류逆流하였다.
다음은 일본과의 관계인데, 일본에서는 어느 때에 출판하였는지 간기刊記가 없으므로 그 시기를 확인할 수 없으나, 신주무원록을 그대로 복간復刻한 일본판 신주무원록이 있다. 그리고 일본 원문 원년 (영조 12년, 1736년) 에 하합신병위가 역술譯述한 무원록술 상하 2권이 있다. 본서는 신주무원록의 상권은 자기들의 형법에 합하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생략하고, 하권 중에서 소용所用에 적합지 않은 것은 삭제하고, 그 나머지를 역출譯出하여, 상하 2권으로 나누어 편성한 것인데, 본서에는 왕여의 원서原書 이외에 우리나라의 유의손 서序와 최만리의 발跋이 첨가되어 있다.
본 무원록술은 즉시 출판되지 못 하고, 그 후 33년을 지난 일본 명화 5년 (영조 44년), 정조 20년 (1759년) 에 간행되었다. 그리고 증수무언록언해는 원문의 간행에 앞서 정조 16년에 서유린이 간행하였다. 본 언해諺解가 본문에 앞서 간행된 것은 형율관들에게 검험에 관한 지식을 좀 더 빨리 정확하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언해의 간행으로 인해 알기 어려운 한서漢書를 사용하기 보다는 그 지식의 응용은 더욱 보편화되고 더욱 확실하여졌을 것이다.
증수무원록대전의 법의학적 지식의 가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논평하기 위하여 본서의 목록을 열거하면
<상권> 검복檢覆/ 검복총설總說
. 검식檢式 - 세엄법洗罨法, 사시변동四時變動, 백강시白僵屍, 괴란시壞爛屍, 검골檢骨, 개관검험開棺檢驗, 무빙검험시無憑檢驗屍, 면검免檢
. 시장식屍帳式 - 앙면仰面, 합면合面
. 관문식關門式
<하권> 조례條例
. 태상사胎上死
. 늑액사勒縊死 - 자액自縊, 자륵自勒, 피륵被勒, 가작자액假作自縊, 이시移屍
. 익수사溺水死 - 자액, 피액, 피살가살被殺假殺자액 (판전생사후辨生前死後)
. 구타사毆打死 - 피타被打, 사후가작타死後假作打
. 구치교상사口齒咬傷死
. 인상사刃傷死 - 자할, 피살被殺, 변생전사후, 시수이처屍首移處
. 호소사火燒死 - 인노병실화因老病失火, 피소被燒, 피살가작화소被殺假作火燒, 변생전사후
. 탕발사湯潑死
. 중독사中毒死 - 생전生前중독, 사후死後가작중독, 충蟲, 과실금석독果實金石毒, 서분초鼠糞草, 비상야갈砒礵野葛, 금잠분金簪糞, 주酒, 충蟲, 균심菌蕈, 파두巴豆, 수은水銀, 염호빙편鹽滈氷片
. 병충사病蟲死 - 병충기동구걸病蟲飢凍求乞, 사마중풍邪魔中風, 중암풍中暗風, 상한傷寒, 시기時氣, 중서中暑, 피침구被針灸, 고내병사辜內病死, 남자작과男子作過, 동사凍死, 기사飢死
. 전사질사攧死跌死
. 압사壓死 - 압색구비壓塞口鼻, 노인피도老人被搗, 은숙隱塾
. 칙하사鷘諕死/ 인마답사人馬踏死/ 차연사車碾死/ 뇌진사雷震死/ 주식취포사酒食醉飽死/ 호교사虎咬死/ 나구교상사癩狗咬傷死/ 사충상사蛇蟲傷死
. 잡록雜錄 - 주야지분晝夜之分, 적혈滴血, 검지檢地, 논인신골조論人身骨條
이상에 열거된 목차들을 살펴보면 원나라 왕여의 무원록을 거의 그대로 답습踏襲해온 신주무원록 보다는 그 내용이 만이 증신增新되었으며, 검험의 방법에 있어서도 우리의 실정에 맞는 조항들이 많이 보인다.
그 뿐 아니라 위의 목록에 의하여 시체검안의 대상이 되는 검사종류의 자료와 검안서식 절차에 대한 질서도 확립되었다. 그리고 시체 현상의 시기적 변화로부터 상해傷害, 늑일, 익수, 구타, 인상刃傷 및 화소사 등에 대한 자사, 피사 혹은 사전 사후의 가작 또는 중독사, 병환사, 농사, 기사, 이사, 압사 등에 이르기까지 법의학적 감정에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증수무원록은 법의학적 재판에 동도숭문당에서 간행되고, 그 후 일본 관정 11년 (정조 23년) 에 동도서진에서 재간되었으며, 또는 일본 가영 7년 (철종 5년) 에 3간되어, 일본판의 신주무원록과 함께 널리 유포되었다. 일본 강호시대江戶時代의 법의학적 재판에 관한 검험의 지식은 주로, 우리의 신주무원록을 역술한 무원록술에 의존되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같이 왕여의 무원록은 중국에서 일찍 망질亡帙되고, 우리 신주무원록이 일본에 건너가 그것이 중국으로 역류되어, 중국 및 일본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증수무원록의 활자인본과 동언해의 활자인본 또는 일본판 및 중국판의 무원록이 있다.
045 탁지지度支志 (1798년) 박일원朴一源
조선조 후기의 영조 정조시대는 안으로는 자아自我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조류潮流에서, 밖으로는 절정기에 오른 청조淸朝문화의 영향에서 정채精彩한 문운文運이 조야朝野 간에 울연鬱然히 일어난 시기다. 양대兩代의 우문右文정치가 그러한 신新 기축機軸을 마련하게 된 또 하나의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정조는 스스로 그 방대尨大한 홍제전서弘濟典書 (100책冊) 을 남길만큼 호학숭문好學崇文의 군주君主로써, 정조조에 왕명에 의하여 편찬, 간행된 서적만도 적지 않다. 그 중에는 주요관서의 제반 사례를 승제편록僧齋編錄하여 후일 고거考據의 자료로 삼으려는 목적에서 혹은 사찬私撰으로 혹은 왕지王志에 따라 여러 관서지官署志가 편찬되었다. 정조 3년의 남한지南漢志, 정조 5년의 춘관지春官志, 추관지秋官志, 정조 8년의 규장각지奎章閣志, 홍문관지弘文館志, 정조 9년의 태학지太學志 등은 성과다. 탁지지는 이같은 공사 편찬사업의 뒤를 이은 사업이다.
탁지지에 관해서는 홍제전서 (권 183) 군서표기群書標記 명찬命撰에서 그것이 춘관통고春官通考 장답어휘편章剳彙篇과 더불어 정조 12년 (1788년) 에 승명承命 편찬하고, 편차자는 탁지랑 박일원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또 여기서는 탁지지 22권 사본으로 되어있다. 탁지지라는 서명書名에 관해서는, 전기 표기에서 탁지는 옛날의 지관地官을 이름이요, 그 원류原流는 고대 중국에서 연원되었음을 말하고, 아국我國에서는 당송제唐宋制를 취방取傍하여, 판적版籍, 회계會計, 경비經費의 3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분장分掌케하되, 호조가 이를 총관總管케 하여, 이권기일利權歸一의 실實을 거두게 했음을 설명한 끝에, 책명을 지관지라 하지 않고, 탁지지라 한 이유를 밝혔다. 또한 본 탁지지 권수 범례에서도 서명 역의繹義에서 호조의 도용지비度用支費의 권고실權故實을 편록編錄한 것임을 명기明記하고 있다.
현재 탁지지는 홍제전서 표기標記에서 말 한 바, 정조 12년에 박일원이 승명편차承命編次한 바로 초고본草稿本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 우리는 정조실록 20년 7월에 신해조에서, 그간의 소식을 엿볼 수가 있다. 즉 술신년에 승명편찬된 박일원의 탁지지는 호조판서 이시수도 이를 得見한 바 없으며, 따라서 그것이 선사繕寫되어 호조에 비치돤 것 같지도 않으나, 정조는 박일원 소편所編의 탁지지가 박일원가家에 반드시 있을 것을 알고, 이를 선사하여 호조에 비치備置하도록 분부分付하였다는 것이다. 실제 춘관지 추관지 등 관서지도 당초에는 사찬私撰으로 엮어진 것이, 뒤에 왕지王旨에 의하여 증보 편찬되었거니와, 탁지지는 정조 12년에 박일원이 승명편찬하였으니, 그 증보 완성을 위하여 사가私家에 보장保藏되어온 듯 싶으며, 그것이 상람上覽에 공供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정조는 이같은 사유를 알고있어, 명찬 8년 후에 박일원가장家藏의 초고본을 1건 선사하여 호조에 비치토록 판서에게 명한 것이다. 그것이 언제 선사되어 호조에 비치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규장각 소장의 탁지지는 조선 백지白紙 (괘지罫紙) 에 묵서墨書로 정서精書한 필사본筆寫本으로 상술上述한 바로써, 아마도 정조 20년 왕지에 의하여 박일원 소편의 탁지지를 그대로 선사한 것임에 틀림없다.
승명편차자인 박일원에 관해서는 그가 형조판서 김노진의 지시에 따라 추관지를 편찬한 경험이 있었고, 이제 다시 탁지랑 (호조랑관) 으로 실무직에 역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이 높이 평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도 그의 소편所編인 추관지를 취견取見하고, ‘가위선편可謂善編’ 이라고 했고, 또 탁지지에 대하여서는 그 이상의 편찬을 후일에도 기대할 수 없다고 하리만큼 그가 탁지지 편찬에 가장 적임자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밖의 박일원의 경력이나 인품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탁지지의 편차編次 (총목차總目次) 는 크게 내편內篇, 외편外篇으로 2분하고, 내편 관제부官制部에서는 다시 호조戶曹, 속사屬司, 직장職掌, 이예吏隷, 늠록廩祿, 관사館舍, 잡의雜儀, 고적古蹟, 사례事例의 9목目으로 나누었고, 외편은 판적사版籍司, 회계사會計司, 경비사經費司의 3부部로 나누고 그 밑에 각기 판도版圖, 전제田制, 조전漕轉, 재용財用, 공헌貢獻의 5목, 창고倉庫, 조적糶糴, 해유解由의 3목 및 5예禮, 경용經用, 요록料錄, 황정荒政의 4목으로 나누고 있어, 총 21항목으로 구분되었다. 이와같은 편차編次, 분목分目의 원칙은 마치 추관지에서 천문설天文說에 의거하여 10간干, 2지至, 5운運, 4시時, 3원元에 따라 총 24항목으로 분목했음에 대하여, 탁지지는 지형설地形說에 의거한 것이다. 즉 탁지지 총목 서문에 관제 이하를 각기 9토土, 3양壤, 5악嶽, 4독瀆에 대비하여 총 21항목으로 편차하고, 그 뒤에 본서를 10권 (책) 으로 성책成冊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10책 21권으로 되어 있으나, 1항목 1권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홍제전서 상기 표기에 탁지지 22권으로 되어 있음은, 오기誤記가 아니면 혹은 선사繕寫 후에 개편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 위의 표기의 편차에서는 관제 밑에 호조가 빠져서 8목으로 되어, 본서의 총목 서문의 ‘도분위구토道分爲九土 관제지구목官制之九目 상지구토야象之九土也’ 운운에는 부합되지 않아, 이 역시 선사시에 개편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 바이다. 그밖에 이 책 총목과 다른 것은 회계사의 창고倉庫가 창름倉廩으로 되어있는 점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책 편차에 있어서 관제, 판적, 회계, 경비를 각기 지형설에 따라 분목하여 총 21항목으로 구분함에는, 실제 편차내용에 있어 무리가 수반되었던 것 같다. 본서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그 체제와 내용이 본서의 총목과도 완전히 일치되지 않는다.
먼저 제 1책은 총 103엽葉으로 범례 (2엽), 탁지지 총목 (2엽), 본아전도本衙全圖 (1엽) 에, 뒤이어 탁지지총요度支志總要로써 8도道, 3도都, 전민田民, 전곡錢穀, 총수總數 (6엽), 판적사版籍司 1년 봉하捧下 총요 (4엽), 잡물색雜物色 1년 봉하 총요 (2엽) 가 수록되어 있되, 범례, 탁지지총목, 탁지지총요의 엽수 순번이 각기 따로 매겨져있다. 여기에 이어서 권지 1 목록 (1엽) 이 수록되고, 다음부터 권지 일 관제부가 시작되어, 내편 관제부는 제 1책 제 1권으로 충당되었다. 제 2책 이하에서는 매 책 2권 내지 3권으로 되어있되, 권별로 엽수 순번이 매겨졌음에 대하여 권지 1에서만은 호조, 속사, 직장, 이예, 고록, 관사 (19엽), 잡의, 고적 (8엽), 사례 (각 방 식례式例 58엽) 등 기장記帳의 엽수 순번이 각기 따로 매겨져 있는 것이다. 즉 권지 2 이후의 권별 엽수 순번 기재방식은, 권지 1에서는 적혀져 있지 않다. 이것은 단적으로 체제상의 통일을 기하지 못 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1권의 평균 엽수는 43엽 (2권 이하) 으로, 권 16 (5예부禮部 빈례賓禮) 의 88엽이 최고로, 권 11 (공헌부貢獻部 노비) 의 1엽이 최하로 되어 있어, 권 1의 호조 - 관사와 잡의, 고적부분 그리고 사례부분은 내용상, 분량상으로도 분권하여 2권으로 편차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 뒤에 본서총목에서는 회계사에 ‘회계지삼목會計之三目 삼상찬야象三撰也’ 라 해서 창고倉庫, 조적糶糴, 해유解由의 3목으로 구분 편차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제 6책 권지 12 목록에서와 같이 회계사 밑에 창고부 (12엽), 해유부 (6엽) 만으로 되어 총목에서와 같이 조적부糶糴部가 설정되어 있지 않고, 다만 창고부 말미에 환모還耗 (식례式例 1엽, 사실事實 1엽, 비치미備置米 1엽) 조條로 극히 간단하게 첨기添記되어 있다. 이와같이 편차내용에 있어서나 그 체제에 있어 미비한 것을, 미쳐 그 편찬이 완성되지 못 했던 박일원의 초고본을 그대로 선사성책繕寫成冊한 데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므로 또 선사시에 개편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혹은 이로 말미암아 상술한 바와 같은 권수의 차질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탁지지 편찬의 목적은 이에 본서 범례 역의에서 본 바와 같이, 호조의 제반 사례, 고실故實을 편록하여 후세의 참고자료로 삼자는 것이었다. 상기 홍제전서의 표기에서도 본서 편찬의 기본이 된 자료는, 서리胥吏의 부서部署에 지나지 못 하여 되도록 광범하게 자료를 취택하여 족히 고거考據에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이제 본서의 내용에 관하여 면밀히 검토하면, 먼저 기재방식에 대해서는 본서 범례 수단조逐段條에서 각기 세細 항목에 대하여 ‘먼저 전교典敎를 수록한 것은 왕지王旨를 존중함이고, 다음에 절목節目을 수록하여 조례條例를 상세히 하고, 본미本尾에 사실을 수록하여 그 연위源委를 밝혔다’ 고 했듯이 대체로 전교, 절목, 사실의 순차로 축단, 서술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의 편찬 주지主旨가 호조의 사례를 등재謄載 편록編錄하는 데 있어, 호조의 사례 또는 식례, 이와 관련되는 제반 절목 등 여러 가지 격식, 규제와 호조의 현황, 소관 사무내용 등이 추가되고, 여기에 이들과 관련되는 전교를 수록하여, 역대 왕지의 소재를 밝히고, 또 사실 (고실故實) 을 본미에 첨기하여 그 원위를 밝혀두려는 것이다. 그러나 상기 범례 축단조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각 세항에 있어서 전교, 절목 (식례, 사례 등), 사실의 서술형식을 갖춘 항목을, 총 110여 조의 세 항목 중에서 대체로 30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권지 1의 관제부 전 항목에서나, 권지 2 판도부의 도리道里, 강역조疆域條 등에서와 같이, 전교나 사실이 한 건도 수록되지 않은 것이 있으며, 흔히는 그 중의 어느 하나가 결缺해있기도 하고, 또는 수차水車, 측우기조測雨器條 (권지 3), 자장紫場, 목장조牧場條 (권지 4) 등과 같이 다만 사실만이 기재되어 있는 것도 10여 조항에 이르고 있다.
다음에 각 항목에 수록했다는 전교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실제로 전교가 수록된 것은 총 110여 항목 중에서 41항목이며, 1항목에 있어서 조선왕조 역대 왕의 전교 중의 1건 내지 수 건이 적기되어 있다. 그리하여 선조조 이전의 전교는 소수이고 (태조 2건, 태종 1건, 세종 7건, 문종 1건, 세조 4건, 선조 2건), 영조 정조의 전교가 과반수를 차지한다. 역대 왕의 전교가 비교적 많이 (5건 이상) 수록된 항목으로는 권농勸農, 조전漕轉, 패선敗船, 전화錢貨, 어공御供, 공물供物, 길례吉禮, 흉례凶禮, 지칙支勅, 황정荒政, 발매發賣, 견감蠲減, 주혈賙血 등 제 조항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범례에서 명기한 바와 같이 ‘열성列聖의 전교는 만세萬歲의 장정章程으로 일자一字라도 이역移易하는 것은 부당하나, 실록 기재에서도 종간從簡하는 것임에 그 규規에 따라서 약가산절若加删節하여’ 수록한 것이다.
또한 각 항 말미에 수록된 사실도, 그 거의 전부가 조선왕조시대의 고실故實로써 그러한 중에서도 전교에 있어서와 같이, 선조조 이전의 것은 극히 영성零星하고, 흔히는 인조조 이전의 것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단 왕도王都, 강역조에서는 그 항목의 내용 성격상 고대 삼한시대로부터 간략히 기론起論되어 있고, 노비사실에서 기자箕子 8 교조敎條가, 과전조科田條에서 고려 문종조 전자과田紫科가 언급된 것은 수數 3의 특례特例에 불과하다.
위와같은 전교와 사실 등 이 책의 내용에서 시기의 하한선이 정종 11년에 이르고 있으며, 그 이후의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책이 정조 12년에 박일원이 편찬했다는 사실과도 부합符合되고, 또 그 뒤에 새로 증보된 흔적도 없음을 말하여주는 것이다.
이 책 편찬에 있어서 실제적인 편의가 배려되고, 실증적인 태도를 견지堅持하여 종래 인습적因襲的으로 의방依倣하던 기술상의 몇 가지 구폐舊弊를 일신一新한 바가 있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그러기에 본서 범례에서도 이를 명백히 했다. 그 첫째는 기년紀年에 관한 것으로 편자는 ‘춘추지서春秋之書에도 모두 노공기년魯公紀年을 썼고, 우리나라에서는 공사公私 서적書籍에 모두 중국의 연호를 썼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모조某條 모년某年을 상고上考하려면, 현의眩疑스러우므로, 삼가 춘추의 법을 준수하여 아조我朝의 편년編年으로 했다’ 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기년법은 추관지에서 사용된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입체적인 자아의식의 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음직하다. 다음에는 인물에 대한 관직과 성명에 관해서도, 종래에는 실록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죄인거관자罪人去官者는 성姓을 기록하지 않고, 또는 대신大臣, 도신道臣과 아울러 소속조所屬條의 판서判書의 성명은 해당 문부文簿에서는 흔히 기성記姓하지 않거나, 혹은 성만 쓰고 명은 기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이같은 일은 모두 징신고거徵信考據에 불편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본서에서는 관직명은 이름 밑에 세서細書로 밝혀두고, 성명에 대해서는 박고博考하여, 알 수 있는 자는 이를 매우고, 알 수 없는 자는 2자字를 고궐故闕하여 두어, 후인後人의 증보增補를 기다린다고 했다.
끝으로 본서의 내용을 이룬 전 항목에 대하여, 일일이 약해略解를 붙인다는 것은 지나치게 번잡하여, 이는 피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본서 매 책 권수에 권별 목록이 수록되어 있으나, 실제 내용에 들어서는 세대細大항목의 구별이 없이, 일률적으로 건별件別 제명題名에 2자字 격하格下 별행別行으로 구세濟世되어 있어, 전체적인 편차세목을 분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기술한 바와 같이 회계사 조적부糶糴部는 총목 21항목 중의 하나로 되어있으나, 실제 내용은 창고부에 첨기되어 있음과 같아서, 내용에 있어서의 제명이 총목, 권별목록과도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는다.
호조에 관계되는 중요한 문헌으로써, 영조 27년 (1751년) 의 탁지정례度支定例가 있고, 숙종조의 것으로 추정되는 탁지전부고度支田賦考 등이 있다. 전자는 정부 각 사司와 각 관官 소속의 제諸 방사房司에 진배進排되는 물종物種과 그 연간 진배 수량을 단정한 것이며, 후자는 정조조 이후 숙종조에 이르는 시기의 전결田結과 세수收稅 관계의 통계책이다. 이 책은 정조조의 호조의 실황 그 소관의 제반 사례를 직접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상기 탁지정례나 탁지전부고와 아울러 조선조 후기 사회경제사연구에 필수의 자료가 될 것이다.
046 북학의北學議 (1778년) 박제가朴齊家
북학의는 18세기 후반기의 대표적인 북학론자인 박제가 (1750 - 1805년) 의 저서다. 자는 재선, 수기 또는 차수라 하였고, 호는 초정, 위항도인, 또는 정선이라 하였다. 그는 1750년 (영조 26년) 11월에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庶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1세에 부친을 잃은 그는 홀어머니의 삯바느질로 묵동, 필동 등을 전전하면서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그러나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1776년에 건연집巾衍集이라는 4가시집家詩集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공저共著)을 펴내, 문명文名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승인 연암 박지원을 비롯하여 담헌 홍대용, 아정 이덕무, 영제 유득공, 강산 이서구, 13 이희경, 관헌 사상수 등의 북학론자들과 깊이 사귀어, 매일같이 시문詩文을 즐기고 실학을 토론하여 그들의 북학론을 발전시켰다. 북학론의 내용은 대강 청나라의 선진적인 물질문화를 받아들여 상공업을 장려하고,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 서얼자庶孼者이거나 몰락 양반이었기 때문에, 당시 시의時宜를 잃어가는 봉건체제에 대한 辛辣한 비판과 아울러 새롭고 진보적인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와같은 서류庶流 출신 북학론자들의 동향은 학문을 좋아하는 정조 (1752 - 1800년) 의 관심을 끌게되었다. 정조는 그의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777년 3월에는 서얼허통절목庶孽許通節目을 제정하여, 서얼 출신에게도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니라, 1779년에는 규장각에 검서관직을 신설하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리수 등의 서류 출신 학자들을 초대 4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검서관은 규장각의 각신閣臣을 도와 어제御製, 어필御筆과 일성록日省錄을 정리하고, 서적을 편찬, 교열校閱하는 일을 맡아보는 직위였다. 이로부터 전후 13년 간 그는 규장각의 내외직에 근무하면서 규장전운奎章全韻,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국조병감國朝兵鑑, 사기영선史記英選, 일성록日省錄 등 많은 서적을 편찬, 출판하는 한편 내각장서를 마음껏 읽어 식견을 넓히고, 국내 저명인사들과도 널리 사귈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1778년 3월에 사은사謝恩使 체제공을 따라 연행燕行한 것을 비롯하여, 1790년 5월과 10월, 1801년 2월에 전후 네 차례나 연행을 했다. 그는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청나라의 건륭乾隆문화를 대표할만한 기균, 이조원, 반정균, 이정원, 포자경 등의 석학碩學들과 교류하면서 발달된 청의 물질문화생활을 각 방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귀국한 즉시 그는 저 유명한 북학의를 지어 나라를 부강시키고, 가난을 구제하는 길을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필요한 선진적인 청의 기술과 도구를 배워서, 국가의 생산력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그는 실로 북학론의 선봉적先鋒的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박제가의 개혁사상은 1781년 정월에 올린 그의 병오소회丙午所懷와 1799년에 농서農書로 진상進上한 소진본북학의疎進本北學議를 통하여 왕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당시 존명사대尊命事大의 북벌론北伐論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노론계老論系 도학파道學派 통치자들의 대의명분大義名分論에 저척抵觸되는 까닭이었다. 이 때 언천군수로 있던 박지원도 농서로 과농소초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바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북학론자들의 문장이 당벽黨癖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을 받고, 드디어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상정화운동에 모두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정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도학파 통치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1792년에 박제가는 검서관직을 물러나 외직外職인 부여현감이 되었다가, 1799년에 춘당대春塘臺 무과武科 별시別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오위장을 거쳐 이듬 해 다시 영평현령으로 전임轉任되었다. 진북학의소眞北學議疎는 이 때 농관農官으로써 올린 것이다.
그 후 1800년 6월에 박제가 등을 비호庇護하던 정조가 서거逝去하자 그들에게는 위험이 닥쳤다. 1801년 (순조 원년) 9월에는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나 박제가와 친한 이가환, 정약용, 윤행임 등의 남인계 인사들이 제거되고, 때를 같이 하여 동남문 밖 흉서凶書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주모자는 임시발이란 자로써, 임시발은 박제가의 사돈査頓인 윤가기의 문객門客이요, 윤가기는 또 박제가와 친한 윤행임과 친한데다, 윤가기의 여종 갑금이 박제가도 이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진술한 까닭에 체포되어 함경도 경성부로 유배되었다.
그는 적소謫所에서 자제교육을 위한 경서연구로 여생을 보내다가, 2년 반만인 1805년 3월에 대비의 특명으로 풀려나와, 고향에 방환放還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박제가는 1805년 4월 4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일설에는 연암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쇼크를 받아 별세했다고도 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5대 손, 이관상의 서녀庶女와 결혼하여 슬하膝下에 장염 등 6남매가 있었는데, 계자季子 (작은 아들) 장복은 순조 때 유득공의 아들 본예, 본학과 함께 검서관이 되어 부업父業을 계승하였다.
북학의는 內外 2편으로 되어 있다.
내편에는 차선車船, 성벽城壁, 궁실宮室, 도로道路, 교량橋梁, 목축牧畜, 시가市價, 금철金鐵, 재목材木, 여복女服, 장희場戱, 어역語譯, 당보塘報, 궁실弓矢, 서화書畫 등 39항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 설명하고,
외편에는 전분田糞, 상桑, 농잠총론農蠶總論, 과거론科擧論, 관론官論, 녹제祿制, 재부론財賦論, 통장남通壯南, 절강상선의浙江商船議, 장론葬論, 병론兵論, 존주론尊周論 북학변北學辨, 응지진북학의소應旨進北學議疎 등 17항목의 논설을 수록하여, 농업기술의 개량과 국내상업, 외국무역의 이점利點을 설파說破하고 있다. 그는 북학의를 통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서는 선진적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18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는 임진, 병자란의 상처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생산력이 증가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일부 선진적인 지역에서는 상공업이 발달되어 갔다. 상품화폐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상업의 발달은 더욱 촉진되었으며, 경기, 충청, 전라, 서해안 일대에는 密무역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에서 자란 박제가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러한 국내외상업의 이점을 파악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업의 발달을 저해沮害하는 것이 무엇인가도 알고 있었다. 여기에 그는 불합리한 봉건적 신분사회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 새로운 가치관을 그는 상업에서 찾고자 하였다.
박제가는 상업이 발달하면 수공업과 농업이 따라서 발전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종래 주자학자들은 물론 일부 진보적 실학자들에 있어서까지도, 말업末業이라 하여 천시賤視하여 온 상업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종래의 학자들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천시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위험시 하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이러한 견해에 명백히 반대하고, 날로 이를 추구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걱정하였다. 이와같이 이윤추구를 정당화한 박제가의 견해야말로 근대적 가치관의 맹아萌芽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제가가 말하는 이윤利潤은 오늘날의 이윤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상업적 이윤을 말하는 것이다.
박제가는 먼저 사회적 분업分業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여기에 대하여는 이미 연암의 언급이 있었으나, 연암은 사넝공상士農工商 4민民 중에 사士의 우위優位를 주장하는데 반하여, 박제가는 상업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는 북학의에서
‘지금의 논자論者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근세近世에 백성들이 오로지 상리商利만을 숭상崇尙하는데 모든 백성을 귀농歸農시켜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상업은 4민의 하나요, 상업으로써 사농공 3자의 유무有無를 상통相通시키는 것이니, 10의 3이 되는 것만이 아니다. 어민漁民은 고기를 잡으면서 농사에 종사할 수 없고, 협민峽民은 나무하면서 농사에 종사할 수 없다. 이제 백성들이 농업에만 종사한다면 농민은 날로 더욱 곤궁해질 것이다 (내편內篇 시정市井).’
그는 또 상업을 발달시키는 길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시책으로 농공상업을 장려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놀고먹는 양반을 도태淘汰시켜 상업에 종사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急先務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유식자遊食者도 줄어들 뿐 아니라, 어지러운 당론黨論도 없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이 점을 그는 병오소회丙午所懷에서
‘대체로 놀고먹는 자는 나라의 큰 좀 (이) 인데 유식자遊食者는 날로 늘어가고, 사족士族은 날로 번성繁盛한다. 이런 무리들이 국중國中에 널리 퍼져있어서, 일개 벼슬아치가 모두 기미覊縻시킬 수 없으나, 반드시 대처할 술책術策이 있은 다음에야 부허浮虛한 언론이 일어나지 못 하고 나라의 정치가 잘 될 것이다. 신은 청컨대 무릇 수륙水陸으로 왕래하면서 장사하는 일을 모두 사족士族에게 맡겨 종사하도록 하되, 혹은 資裝을 빌려주고, 혹은 전포廛舖를 지어주고, 혹은 뚜렷한 자를 발탁拔擢함으로써 권장하여 <날로 이利를 추구> 하게 한다면 유식자의 수가 줄 것이며, 즐거이 직업에 종사하는 마음이 생겨, 호강豪强의 권세權勢를 약화弱化시키고, 또한 유식자를 전향轉向시키는 데에도 일조一助가 될 것이다.’
봉건적인 신분제도와 문벌門閥제도를 타파하는 것 뿐 아니라, 종래 미덕으로 여겨왔던 절검節儉사상도 배격排擊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쓸 줄 모르면 생산할 줄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면 백성이 날로 窮해진다 (시정市井)’ 고 말한 박제가는 상업과 농업, 수공업의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대체로 재물財物은 샘 (정井) 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 (만滿) 고 버려두면 말라버린다. 그러므로 비단옷을 입지 않으면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어 여공女工이 쇠퇴衰退하고, 쭈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技巧를 숭상하지 않으면 나라에 공장, 도야陶冶의 일이 없게 되어 기예技藝가 망하게 되며, 농사가 황폐해져서 그 법을 잃으며, 상리商利가 박薄하여 그 업業을 잃게 되면 4민이 모두 곤궁해져서 서로 구제할 수 없게 된다 (시정)’
상업이 발달되려면 또한 교통수단과 교통로가 발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는 차선車船의 개선 활용을 주장하였다. 용차론用車論은 16세기의 김육 이후로 여러 사람이 주장한 바 있었으나, 박제가는 중국에서 견문을 통하여 이것을 좀 더 과학적으로 연구 보급시킬 것까지 구상하였다. 교통이 발달되면 전국적인 시장市場이 형성되어 상품 유통이 활발해져서 물가物價의 평준화平準化가 이루어지고, 화폐貨幣의 유통도 촉진되며, 수입을 제한하고 수출을 장려하고, 상품규격을 통일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西歐 금세今世의 중금重金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금은金銀의 축적蓄積이 부국國富의 증진으로 생각하여, 은銀의 해외 유출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내편) 은, 서해안의 장연, 은율, 선천, 여산 등의 무역항을 개설하고, 밀密무역을 양성화시켜 산동지방과 절강, 광동, 교주, 복건 등 남중국의 물화物貨 집산지集散地와 무역을 통하고, 국력이 자라나면 무역 상대국을 확장시켜 일본, 안남, 유구 및 서양 제국과도 통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통通 강남江南 절강박의浙江博議). 통상通商활동에 필요한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를 사대부들에게 습득시킬 것과 중계무역中繼貿易의 이점利點까지도 아울러 역설力說하였다 (내편, 역譯)
생활의 개선과 외국무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상업적농업과 수공업을 통한,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 충분한 상품 생산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위하여 그는 강력한 국가적 후원 아래 발달된 청나라의 농업, 수공업기술과 도구를 받아들여, 한양 주변에 농업시험장과 철공소를 두어 새로운 농공업기술을 연구 보급하여야 하며, 역시 국가의 지원 아래 상품의 대량생산 (시장향市場向생산) 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론만이 아니고 그는 몸소 생활필수품의 제조기술과 영농방법을 직접 연구하였던 것이다.
위와같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우선 백성들의 고식적姑息的인 의식구조를 개조하고, 번거로운 습속習俗을 간소화簡素化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적인 주자학의 공리공론空理空談을 배격하고 풍수설, 지리도참설 따위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한편, 장례禮葬 산송山訟의 사회적 경제적 피해를 시정是正하기 위하여 공동묘제共同墓制를 제안하였다.
이상에서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논술한 국내상업 및 외국무역의 장려, 수입금지, 수출장려, 은의 해외 유출 금지, 물가의 평준화, 대량생산, 제품규격의 규제, 전국적 시장 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의 강화 등에 대한 견해는, 근대 서구의 중상주의의 경제사상과 경향이 같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빼어난 선구자先驅者的 개혁론이다.
<사족蛇足> 선각자先覺者가 있었는데도 근세 우리나라는 주자학파들이 나라를 통치하면서 실학을 배척하여 후진국으로 전락하였다. 공민왕, 소헌세자, 정조 등 개혁군주가 있었고, 정도전, 홍국영, 조광조, 김옥균 등 개혁파가 있었으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박제가를 능가하는 선각자는 없다. 또 조선조시대 정조를 개혁군주라고 하는데, 정조는 규장각을 개설하여, 서얼庶孼들을 등용하고, 난전亂廛 개설, 화성華城 신축 등 개혁적인 정책을 폈고, 1786년 1월에는 관 료 300여 명이 올린 병오소회丙午所懷를 펴냈지만, 박제가의 소회에 대해 ‘네가 진달進達한 여러 조목條目을 보고, 너의 식견識見과 뜻을 알 수 있었다.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알겠는데, 내게는 별 의미가 없어’ 라고 일축一蹴해버렸으며 (한겨레신문 2021. 4. 23. 강명관의 고금유사古今遺史 ‘휴지조각 북학의’ 인용引用) 박제가의 북학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일본은 1868년 시작한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개혁을 하여 지구촌 일등국가가 되었는데, 우리나라는 주자학을 신봉하는 보수 기득권세력의 준동으로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개혁을 가로막았던 보수는 병자호란, 임진왜란, 일제식민지로 전락顚落했고, 6. 25를 겪고, 분단分斷을 촉발促發하여 나라를 망치고 국민을 피폐疲弊롭게 하였다. 이는 오늘 현재 2021년 우리나라 정치의 보수의 행태와도 마찬가지다. 박제가의 개혁안은 200여 년이 지난 현재 읽어도 감동을 주는 획기적인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임 (21. 4/ 20 초고 완)
047 만기요람萬機要覽 (1808년) 심상규沈象奎, 서영보徐榮輔
만기요람은 문자 그대로 만기萬機를 친재親載하는 왕이 정무政務를 총람總覽할 때 옆에 놓고 참고하는 책이다. 순조 8년 (1808년) 왕명에 의하여 편국유사당상 심상규의 지휘로 호조판서 서영보 등과 함께 편찬하였다. 심상규는 당시 시무時務에 가장 밝은 분으로 장서가藏書家로도 유명하다.
이 당시 19세기 초엽은 봉건사회의 모순이 심화되고, 재정의 곤핍困乏으로 내란외침內亂外侵의 절박切迫한 위기가 사회적인 불안으로 대두된 시기이며, 조선조 개국 이래의 관료계급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양반兩班 상인常人의 구별이 차츰 희박해진 시기다. 과중한 조세租稅에 시달린 농민들은 농지를 버리고, 도시나 변방邊方의 금광金鑛의 노동자로 전락하고, 심지어 양반들도 술장사, 짐꾼, 쌀장수, 광목장사 등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여건 아래서 종래의 주자학적인 지도이념이나 도덕규범으로 백성들을 선도先導할 명분이 흐려졌다. 유교 자체의 내부에서는 점차 새로운 사상이 싹터 소위 실학사상이 대두하였으며, 외적外的으로는 중국을 거쳐 들어오기 시작한 천주교가 차츰 그 교세를 확장하였다. 1801년의 신유辛酉 대박해大迫害사건은 당시의 천주교가 하나의 세력으로까지 성장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안팍의 어지러운 상태에 직면한 조정은 피폐된 재정을 회복하고, 내란외침을 대비할 방안이 절실하게 되었다. 이 만기요람이 재용편財用篇 (6권) 과 군정편軍政篇 (5권) 으로 되어 있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재용편 - 공상供上, 각공各貢
. 공상 - 왕과 왕후, 그밖의 왕가의 매일, 매달, 매절기 및 생일 절목節目 등에 사용하는 의복과 음식 등, 약 230여 종을 선혜청과 호조에서 분담하여 공상하며 매 물종物種의 값, 전체 액수 기록
. 각공 - 선혜청 산하傘下의 57공貢과 진휼상평균역삼청賑恤常平均役三廳 산하의 17공을 통하여 각 관아官衙에 진배進排케하는 500여 종의 각종 공물 및 가공價貢을 기록
<재용편 1> 전결田結, 적전藉田, 연분年分, 수세收稅, 면세免稅, 조전漕轉, 요록料祿, 삼수미三手米, 무역巫稅, 장세匠稅, 삼포蔘布
. 전결 - 전제개혁의 개요와 역대 양전量田의 역사
. 연분 - 옛 법에는 정부에서 경차관을 각 도道에 보내서 재灾와 실實을 고검考檢, 호조에서 총수를 파악해서, 급재給灾 (재해를 입은 땅은 세를 면제받음) 하였는데, 영조 경진부터는 경차관을 파견치 않고, 매년 8월 호조에서 각 도에서 보고한 우택雨澤과 농사 형편을 참작해서 급제의 총수를 정하고, 사목事目을 만들어서 왕의 재가裁可를 받아, 비국備局에 통고通告, 비국에서 헌부憲府에 공문으로 각 도에 사목을 반포한다. 각 읍의 수령守令은 재灾와 실實을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읍에서 보고한 재결灾結을 모아 사목과 대조하여, 각 읍에 재결을 나누어준다. 그리고 연분성책年分成冊하여 호조에 보고한다.
. 수세 - 수조안收租案에 따라서 수세하는데, 서북세곡西北稅穀은 모두 본도本道에 두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 하게 하고, 영남嶺南의 하납읍의 전세田稅와 삼수미三手米는 왜료倭料와 공역역가公貿易價로 동래부에 윤납輪納. 5도道의 산군전세山郡田稅는 작목作木, 작포作布, 작전作錢 상납上納
. 면세 - 각양各樣의 능묘위전陵墓位田, 내수사 및 10궁宮 41방房의 유토有土와 무토無土, 각 아문衙門의 면세免稅 전답田畓, 각양 잡위雜位 전답田畓의 총수總數
. 조전 - 조세漕稅를 배에 실어 서울에 나르는 것은 조漕. 3남南에는 조창漕倉, 강의 상류에는 수참水站. 성당창聖堂倉, 군산창群山倉, 법성창法聖倉, 공진창貢津倉은 호조가 구관句管하고, 마산창馬山倉, 속창屬倉, 가산창駕山倉, 삼랑창三浪倉은 선혜청에서 구관. 이들 각 창의 소재처, 이의 건치년도建置年度, 소속所屬 선척수船隻數, 조항漕航이 경강京江에 도달한 후 양兩 창倉에 이송하기까지의 제반 절차. 당시 경강의 사석沙石 퇴적堆積으로 대선大船이 들어올 수 없게 된 까닭으로, 그믐 보름 물이 찰 때의 일수와 시각 등을 밝히고 있음
<재용편 2> 호조공물戶曹貢物, 대동작공大同作貢, 균역均役, 이획移劃, 해세海稅, 면세결免稅結, 군관포軍官布, 회록會錄, 조적糶糴
. 호조공물 -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해서 각기 원공元貢이 있는데 원공 외에 별도로 무득貿得하는 것을 무원공별무無元貢別貿라 하고, 원공이 부족하여 별무하는 것을 유有원공별무라 하며, 별무의 값은 호조에서 상하上下한다. 대개 각 사유司有원공별무, 각 사무司無원공별무, 전계廛契별무로 나눈다.
. 대동작공 - 토공土貢을 경사京司에 직납直納케 하던 것을 선조 술신년에 좌의정 이원익이 대동법을 병행하여 선혜청을 세웠다. 이를 숙종 정사년에는 해유解由에까지 시행하였다.
. 균역 - 영조 경오에 양역良役 1필疋 (본시 2필) 을 감減하고, 균역청을 두어 급대給代 (대신 채우는 일) 에 대한 것을 상확商確하게 하였다. 결미結米 (결전結錢), 이획移劃, 어염선세漁鹽船稅, 은여결隱餘結,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회록會錄으로써 얻어진 것을감필 減疋한 것에 충급充給하였는데 이를 균역이라함. 이 중에서 전 1결에서 수미收米 2두斗 또는 전錢 5전錢으로 하는 결미結米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당시의 유민流民의 항존恒存을 넣어 생각하면 파악이 곤란한 인신人身에서 토지로 군포軍布가 정착한 것을 뜻함
. 조적糶糴 - 환곡還穀에는 유留와 분分이 있으며, 유는 홍수와 가뭄 등에 대비하는 것이고, 분은 춘궁기에 빌려주어 곤란을 면하게 하는 것. 환곡에는 허록虛錄, 반작反作, 단대봉單代捧 같은 폐弊가 있음
<재용편 3> 전화錢貨, 금은동연金銀銅鉛, 노비공급대奴婢貢給代 호조 1년 경비, 호조 각장各掌 사례, 선혜청 1년 경용經用, 선혜청 사례, 균역청 사례, 상평청 사례, 진휼청 사례, 양향청糧餉廳, 배설排設, 내국어공삼內局御供蔘, 강게세삼江界稅蔘, 강계삼파蔘把
. 전화 - 효종 신묘 이후에 평안, 전라 감병영, 호조, 선혜청, 개성부, 어영청, 상평청, 총융청, 훈련도감 등에서 주전鑄錢케 하여 사용, 주로 흉년 등 재용이 곤란할 경우에 주전함. 전문錢文은 상평통보常平通寶라 하고, 1문중文重은 2전錢 5푼分. 100문이 1양兩, 10양이 1관貫임
. 금은동연 - 채금採金은 국초國初에는 없었던 일이나 후에 자산에 금전金田이 생겼으며, 정조 경자에 성천 금을 캐고, 갑인에는 수안 금을 캠. 순조 초에는 경기도, 평안, 전라, 황해, 함경, 강원 등 6도에 금맥金脉이 발견되었다. 은은 숙종대에 은점이 68읍, 영조 을미에는 성천 등 23개소, 순조 초년에는 수삼처數三處. 동은 취련법吹鍊法을 몰라 왜동倭銅을 쓰다, 정조 을사에 호조가 주전鑄錢할 때 안변의 영풍동을 씀. 연鉛은 은전에서 캠. 은은 호조에, 연은 각 군문軍門에 보냄
. 호조 1년 경비 - 영정순조 3대의 1년의 봉입捧入, 용하用下가 나왔으며 모두 상중하로 나뉘는데, 영조 경술년의 봉입미捧入米만도 12만 7천 8백 70석石, 전錢은 17만 7천 4백 2십 양兩, 정축년의 용하미用下米가 14만 8천 47석, 전 42만 16양.
. 선혜청 1년 경비 - 영정순조 3대의 1년의 봉입, 용하가 나와있으며, 영조 기묘년의 봉입미만도 19만 5천 1백 63석, 전 28만 8천 4백 33양, 용하미 18만 9백 5석, 전 32만 4천 2백 87양
. 균역청 사례 - 순조 정묘의 균역청 봉입 및 용하미, 전미田米, 태太, 목면木綿, 마포麻布, 전錢의 총수가 나와 있다. 봉입미 2만 9천 2백 62석, 전 51만 8천 2백 37양, 용하미 3만 4천 6백 63석, 전 37만 3천 8백 37양
. 상평청 사례 - 순조 정묘의 상평청의 봉입 및 용하, 봉입미 144석, 전 4,972냥, 용하미 506석, 전 3, 123냥
. 진휼청 사례 - 3남南 해서海西의 월과연환月課鉛丸과 화약火藥은 그례舊例로는 저치미儲置米를 각 읍에 획급劃給하여 바치게 하였는데, 현종 병오에 처음으로 경군문에서 만들어 보내고, 가미價米 마련은 이미 잉여剩餘가 있기 때문에 진자賑資에 보태기 위해서, 진청賑廳에 이속移屬케함. 후에는 혜청수조미惠廳收租米 가운데서 5영문營門과 군기사軍器寺에 이래상하移來上下하고 이들이 공인貢人에게 급가給價해서 만들게 하여 각 읍에 본송分送함
. 강계세삼 - 숙종 정해에 강계부로부터 공납하는 30근으로 정하여 상평삼常平蔘이라 하고, 부근 읍의 노비공목奴婢貢木을 강계부에 주고 삼을 바꾸어 위로 올려보내게 하였다. 후에 점점 적어져서 6斤이 됨
<재용편 4> 희생犧牲, 장빙藏氷, 형관반전享官盤纏, 권설도감權設都監, 각전各廛 (부향시附鄕市), 송정松政, 제언堤堰, 준천濬川, 주교舟橋, 황정荒政, 휼전恤典, 세폐歲幣, 방물方物, 지칙支勅, 연사燕使, 연행燕行8포包 (비포比包), 공용公用, 중강개시中江開市, 책문후시柵門後市, 북관개시北關開市, 공역公貿, 차왜예단差倭禮單, 단삼單蔘, 신삼신사信蔘信使
. 각전 -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유분전有分廛 37전, 무분전無分廛 37 이상이 있음, 향시鄕市는 1월月 6장場으로 1, 6, 2, 7, 3, 8, 4, 9, 5, 10일에 서며, 전국 1,061개의 장 중에서 큰 것은, 경기의 경주 사평장부터 15처處다.
. 황정 - 전라도의 임파에 있는 나리포창羅里浦倉은 제주濟州 3읍邑을 구제救濟하고, 경상도 연일에 있는 포항창浦項倉은 함경, 강원 2도道를, 함경도 덕원, 고원, 성풍 3처處에 있는 교제창交濟倉은 경상, 강원 양도兩道를 각각 구제하고, 경상도 사천, 충청도 비인에 있는 제민창濟民倉은 유원곡留元穀이 2만 석, 5분의 1모粍로 근읍近邑에 나누어 줌
. 세폐, 방물 - 중국에 세폐歲幣로 가져가는 물종物種은 14종이며, 동지冬至, 정조正朝, 성절聖節의 방물方物로는 15종
. 지칙 - 칙사勅行의 비용은 송도와 양서에 칙수전勅需錢을 두고 이를 방책放債하여 그 이자利子를 가지고 쓰게 함. 순조 병신의 한 번의 칙사 대접은 8만 8천 7냥
. 연사, 연행 8포, 비포 - 동지, 성절, 정조와 세폐를 일행으로 한 사행使行의 경비는, 개인당 인삼 80근으로 하였기 때문에, 8포包라 하고, 후에는 80근에 해당하는 피물皮物, 면포綿布, 해삼海蔘 등을 가지고 가기도 하였으며, 폐단弊端이 많이 생겨서, 영조 갑술에 비포절목比布節目을 정함
. 중강개시, 책문후시, 북관개시 - 중강개시는 2월, 8월 15일로 사상私商은 금禁하였으나, 비밀리秘密裏에 교역交易하기도 하였다. 이를 중강후시라함
. 공무, 차왜예단, 단삼 - 왜국사신倭國使臣이 가져오는 재화財貨는 상가商賈로 하여금 매매케 하였는데, 가져오는 물화物貨가 점점 많아져서 사화私貨를 전부 팔지 못 하게 되자, 왜인들이 원망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공역公貿하여 목면을 지급함. 이를 공목公木이라 하고, 공목의 절반을 미米로 바꾼 것을 공작미公作米라함. 왜가 바치는 물종은 진상進上과 공역公貿에서의 동銅, 서초각鼠椒角 등임. 차왜差倭에게 주는 예단으로는 인삼, 표피豹皮, 백면주白綿紬, 백저포白苧布, 백목선白木線, 황모필黃毛筆 등이며, 연례年例도 들어오는 사왜私倭와 대소의 별차왜別差倭에게 주는 예단삼禮單蔘은 단삼單蔘이라 함
<재용편 5> 환곡, 제창
. 환곡 - 순조 정묘의 8도道 4도都 환총還摠은 999만 5,597석, 각 도마다 호조戶曹 구관句管 회미會米, 균역청 구관 군작미軍作米, 상진청 구관 상진미常賑米, 비변사 구관 군향미軍餉米 등이 있으며, 환곡은 이외에도 여러 구관처가 있다.
<군정편 1> 5위, 호위청, 포도청, 경영진식京營陣式 형명제도刑名制度, 조점操點, 봉수烽燧, 역체驛遞, 순라巡邏, 비변사備邊司
. 5위衛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는 궁성宮城의 호위護衛 및 왕의 어좌御座 및 동가시動駕時의 호위를 담당, 5위를 총괄함, 위衛에는 5부部, 부에는 4통統이 있고, 위에는 위장衛將, 부에는 부장部將, 통에는 통장統將이 있으며, 여수旅帥, 대정隊正, 오장伍長이 있음. 서울과 8도道의 진관鎭管이 각위에 속함. 위장소衛將所에는 외소外所, 남소南所, 서소西所, 동소東所로 도성都城 4처處에 위치하여, 성내城內를 호위함. 각위에서 매일 1부部씩 차송差送함
. 포도청 - 좌우左右 포도청이 있고, 해적盜賊과 간세姦細한 무리를 잡는 일과 순라巡邏를 관장管掌하고, 좌우 포도청은 각각 서울을 동서東西 2분分하여 장악掌握함
. 봉수烽燧 - 평시平時에는 1거炬, 적敵이 나타나면 2거, 적이 국경國境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넘으면 4거, 적과 아군我軍이 접전接戰을 하면 5거, 서울 남산에는 각도와 연결되는 5개의 봉수가 있으며, 동쪽으로부터, 첫번째는 함경 강원 양도兩道에서 양주 아차산봉으로 오는 것이고, 둘째는 경상도에서 광주 천림봉으로, 셋째가 평안도에서 육로陸路로 모악 동봉東峯에, 넷째가 평안 황해 양도의 해로海路로 모악봉에, 다섯째가 충청, 전라 양도로부터 양주 개화산봉에 오는 것으로 모두 직봉直峰이 369봉, 간봉間峯이 274봉
. 역체驛遞 - 발참撥站, 비변사 등은 생략함
<군정편 2> 병조, 훈련도감
<군정편 3>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군정편 4> 관방關防, 해방海防, 주사舟師
<군정편 5> 육진개척六鎭開拓,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 폐廢 사군四郡 사실事實, 후주厚州 사실事實, 가조시말椵鳥始末
이들 군정편 2 - 5는 내용 목차만 소개함
조선 후반기는 우선 역사학도들에게 엄청난 양의 자료의 편람을 강요한다. 그만큼 자료의 원시림原始林이 우리를 압도壓倒하고도 남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의 수풀을 해쳐나가는데 요령과 핵심을 잡게 하는 것이 만기요람이다. 조선조 후기의 경제적인 제諸 변화의 정체正體를 간명하게, 포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재용편, 특히 경제사학도에게는 없을 수 없는 경전이라고 확언한다.
만기요람의 사본으로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所藏의 3개가 있다. 조선총독부도서지인之印 등이 찍혀있는 11권 짜리와, 조선총독부중추원에서 만든 만기요람 재용편, 군정편 2책이 있고, 집옥제集玉齊 등의 인印이 있는 11권 짜리가 있다.
048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년) 정약용丁若鏞
경세유표 (40권) 와 목민심서 (48권) 는 정약용 (호 여유당, 다산) 이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1817년 유표遺表의 저작에 손을 대었으나, 그것을 채 마치기 전에 심서心書의 저술로 옮겨 1818년에 완성한다. 이 두 가지의 연구는 그의 학學의 체계에 있어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중앙국가기구 개혁론으로써의 경세유표는 제도적인 축소 개편의 시론試論이지만, 국가경제의 기본과제 재정비를 기본과제로 하고 있으며, 이와 직결되는 지방행정 - 치민治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방관헌의 윤리적인 각성의 촉구와 농민경제의 정상화를 강조하는 목민심서는 구조적으로 하부의 기본적인 제 과제를 다룬다.
정약용 (1762 - 1836년) 은 영조 38년 임오에 출생하여, 정조, 순조를 거쳐 헌종 2년 병신에 75세로 별세別世한다. 바로 이 시기, 영조 임오에는 왕실에서 부자父子 상극相克의 비극悲劇이며, 사색편당四色偏黨을 재편再編하는 장헌세자 (시호諡號 사도세자思悼世子) 의 참사慘死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노론 중심의 벽파僻派 (세자를 모해謀害함) 와 남인 일파를 중심한 시파時派 (세자를 동정同情함) 로 양분兩分된다. 물론 여기서는 4색의 일부가 뒤섞인다. 여기 정쟁政爭을 격화시키는 또한 조건은, 서학西學의 수용受容 신봉信奉이다. 정조 (장헌세자의 아들) 재위在位 동안 카돌릭을 신봉하던 남인들은, 정조의 관용寬容으로 박해迫害를 모면謀免하였으나, 순조 원년 (1801년) 에 이르러 노론벽파와, 카돌릭 신봉을 반대하던 남인 공서파攻西派 (서학을 배격한 일파) 에 의하여 탄압彈壓, 학살虐殺이 있었다 (신유교란辛酉攪亂).
다산은 카돌릭을 신봉하던 시파 남인 즉 신서파信西派 (서학 신봉) 이었다. 또 이 때는 명청明淸에 이식移植되었던 르네상스시대의 서양 과학기술 (카도릭사상과 함께 서학이라 하였음) 이 전해오자 이에 수용受容하며, 다른 한편 명말청대明末淸代의 양명학陽明學派의 국가정치의 비판, 보다 합리적인 개혁론과 함께 고증考證的인 학풍學風을 받아들이어 학學 - 사상思想에 새로운 기풍氣風을 조성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疲弊, 교란紊亂한 정치 경제의 실제와 체제를 개혁 바로 잡자던, 일부 관료官僚학자들의 현실적인 정신을 발전시키고 있던 조선 근세의 사상적 조류潮流를 계승繼承하는 때였다.
숙종 (1675 - 1720년) 이후 발전하던 국내 상업자본의 발달은 곧 농촌경제를 침식浸蝕하였으니, 이 현상은 관료적 고리대高利貸를 촉진促進시키고, 관리의 협잡挾雜 부패를 조장하며, 곧 농민들의 생활을 극도의 빈곤으로 몰아넣었고, 국가재정의 문란 궁핍화窮乏化를 초래招來하였다. 여기서 유표와 심서는 국법의 존중, 백성을 위주로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경제론으로 제시된다.
경세유표는 방례초본邦禮草本이라고도 한다. 둘 다 국가정치를 바로잡는 안案이라는 뜻이다. 다산이 1808년 강진읍 변두리에서 다산서옥茶山書屋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동, 귤동) 으로 옮아가 일련의 유학경전의 체계적연구에 한 단락段落을 짓는 1817년 유표는 끝을 맺었다.
그 서문序文 (경세유표인) 에서, 1592년 (임진) 의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파괴, 피폐된 조선 봉건제의 개혁 재 정비에는 ‘군역軍役의 번거로움 (병역의무에 대한 재화財貨 대납代納에 따른 면역제免役制의 악용惡用 - 행정적 협잡)’, 국가재정의 격심한 궁핍화, 토지제도의 문란과 이에 따르는 조세租稅 증수增收가, 대체로 직접 생산자로 권력없는 전 농민에게 편중되어 생산력이 질식화에 이르고, 농민들이 피폐한데도 불구하고 농민층에서 세원稅源을 무제한無制限으로 검출檢出하게 되었다. 여기에 경제적인 조절책으로 국가행정기구의 개편, 관원수의 감소에서 찾아, 제도와 재정적 정비책으로써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고를 덜기 위하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실태를 ‘털끝 하나 病들지 않은 것이 없다 (개일모일발蓋一毛一髮 무비병이無非病耳)’ 하고, 주례적周禮的 제도와 그 이념을 조선의 정치현실에 적용하는데 있어, 역사적으로 재 검토하여 추리고 폐합廢合하여, 주례적 체제의 가변성可變性을 주장한다.
궁극의 지표는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두고
1. 중앙행정기구의 개편에서
(1) 한관限官 - 주례周禮에 보이는 전체 기구를 1/ 3로 삭감削減 축소
(2) 정관定官 - 품별品別의 간소화
(3) 교관敎官 - 관료의 교육, 훈련, 이를 통한 민중民衆의 교화敎化
(4) 천거薦擧 -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을 것
(5) 취인取人 - 관리 등용의 간소화, 법정 수의 제한
2. 행정 감독의 강화 - 고속법考續法을 확대 강화, 하급관리만 적용치 말고 영의정 이하 전체 관료에게 적용
3. 국가재정에 있어서는
(1) 관료에게 분배하는 토지는 문무文武를 같이 할 것
(2) 1/ 10세로 농민들은 전田 1/ 10을 공전公田으로 경작할 것
(3) 군포軍布의 폐지 (중점重點), 민역民役의 균등화
(4) 둔전법屯田法을 세워 군비와 국방력 정비
(5) 사창제社倉制의 정비, 환곡관리還穀管理에 따른 협잡挾雜을 제거 (강조强調)
(6) 통화通貨의 개주改鑄 경비經費, 북경 왕래에 소비되는 은銀이 국외國外로 흘러나가는 것 억제
(7) 향리鄕吏 수를 제한하고 세습世襲 금지
4. 이용감利用監을 두고 산업기술을 정책으로 북학지법北學之法 (북학론, 청에서 배운다) 등을 골자骨子로 제시한다.
그러나 초점焦點은 국가재정에 두고, 핵심문제로 토지, 조세제도租稅制度의 역사적 비판에서 개혁안을 이끌어냈다.
(1) 토지제도의 역사적 비판과 개혁론, 경세유표經世遺表 권 5 - 9 (지관수제地官修制 1 - 5), 전제田制 1, 경전론井田論 1 - 3, 전제 2 - 5, 관전별고官田別考, 보유補遺 (중국 토지제도사론史論), 전제田制 6 - 8, 방전의邦田議 (조선 토지제도사론), 전제 9 - 12, 정전의井田議 1 - 4 (다산의 전제개혁론), 전제별고 1, 결부고변結負考辨 (조선 결부제 비판), 제로양전고諸路量田考 (조선 각 도 토지조사론), 보무고步畝考, 방전시말方田始末, 전세별고田制別考 2 - 3, 어린도설魚鱗圖說 (조선 토지조사 기술론)
(2) 조세제도의 역사적 비판과 개혁론, 경세유표 권 10 - 14 (지관수제 6 - 10), 부공제賦貢制 1 - 6, 구부론九賦論, 관시지부關市之賦 (상업, 시장, 통행세론), 산택山澤지부 (임산林山, 광산, 어장, 염세론鹽稅論) (염, 다세茶稅), 구욕지정九役之征, 공부제賦貢制 6 잡세이시지제雜稅弛舍之制, 부공제 7 방부邦賦 (조선 조세제도사론史論, 공법貢法의 대동법大同法 실시론), 창름지저倉廩之儲 (사창社倉, 환곡의 본질과 폐단의 비판), 호적법戶籍法, 균역사목추이均役事目追議 1 - 2 해海, 주酒, 어魚, 염세鹽稅, 부附 고려高麗 염법론鹽法論, 선세船稅, 총론總論 (추의追議의 결론結論), 전선戰船 사용의使用議 (조운론漕運論)
여기서 말하는 토지제도 개혁론은 심서心書와 전론田論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의 11권에 결수結數와 인구 비례에 따른 분배, 소유한계의 규정, 분지分地 - 분배방법, 경영 소유 관계, 분배와 직분 관계, 조세공납, 토지와 병농 관계, 호포론戶布論 등으로 구성에서 규정되지만, 토지관리의 전담관청으로 경전사經田司를 두고 개혁을 실시하며, 목적은 양정量田에 있어 은루결隱漏結 (양전 때 가리고 뺀 것) 과 진황전陳荒田 (경작 안 하는 묵은 것) 을 밝혀서 국유화하고, 국가기관의 돈으로 사전私田을 사들여 공전화하여, 정전제井田制를 구축하려고 하며, 지배권력층의 사유私有 전지田地의 국유화는 혁명적개혁이므로, 군주君主의 영단英斷과 지배권력층의 분발奮發, 협찬協贊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르는 조세는 제도의 개혁, 정비와 간과看過된 조세의 체제를 갖추고, 대동법에서 오는 폐단을 비판하였다. 환곡의 관료적 고리대화高利貸化를 비판하고, 원래는 구황대책救荒對策을 위한 시설로, 또 군량미 저장의 본의가 변질되어 농민 수탈에 이용되는, 환상還上 (자子) 을 국가경제에 미치는 폐단이 막대함을 지적하고,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검토는 심서心書에서 전개시켰다.
목민심서, 경세유표의 저작을 중단하고 목민심서로 붓을 옮긴 다산은, 당시 수령守令 - 사목자司牧者 (지방 관헌) 가 백성을 보살피는 목牧의 정신을 잊고,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돌보지 않고, 자기들의 기득권만 추구한 데서 치민治民한 것은 목민牧民이 아니다. 목牧은 민民을 위해서 있지, 민이 목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수신修身과 치민이 조화되어야 한다 하며, 목관牧官 (수령) 의 윤리를 주장한다. 여기에 목민심서의 기틀이 있었지만, 다산은 심서에 선행하는 많은 논책論策을 남겼고, 1794년 정조의 어명御命으로 경기 암행어사로 연천방면의 순찰 때, 지방행정의 부패腐敗, 문란紊亂과 농민들의 곤궁困窮함을 직접 눈으로 보고 돌아와, 복명服命한 경기 암행어사론論 수령守令 장부계藏否啓와 또 그 별단別單이라든지, 특히 경기어사京圻御使 복명服命 후론後論 사소事疎에서 다시 농민 - 백성들을 생각하는 애끓는 마음에서 ‘이중민생以重民生 이존국법以尊國法 (백성을 중히 여기고, 나라의 법을 존중) 을 강조하였고, 다산은 또 헐벗고 굶주리는 농민들의 시달리는 모습을 봉지奉旨 염찰廉察 도到 적성촌積城村 사작舍作에서 ‘강호豪强의 횡폐橫弊’, ‘이리吏胥의 강제적인 징포徵布’ 를 말하며, 환상還上을 갚을 수 없어 대신 매를 맞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비참한 정경을 시로 읊고 있다. 그는 장편長篇의 기민시飢民詩에서, 굶주린 농민들을 어떻게 건질지를 노래하고, 서울을 떠나 농촌을 지나는 길에는, 반드시 농민들의 실정을 살폈다. 1797년 황해도 곡산도호부사로 갔을 때는 정조의 어명에 따라 응지론농정소應旨論農政疎 (1집 권 9) 에서 흥농책興農策으로
전제개혁, 농사기술과 농기구 개량, 수리관개水利灌溉시설
환상還上의 협잡挾雜을 바로잡아 잘 이용케하며, 부업副業을
장려獎勵 자급자족自給自足케 하여 농가 안정 도모
3. 과거에 합격한 정원 이외의 사람은 모두 농사에 종사케 할 것.
다산은 소년시절부터 그의 부친 정제원이 연천현감, 전라도 화순현감, 경상도 풍천군수, 한성서윤, 울산도호부사, 진주목사를 역임歷任할 때,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법과 몸가짐을 보고 배웠다. 이러한 견문과 경험을 선행先行한 학문의 바탕으로 하여 목민심서를 엮었다.
유표의 수령고속守令考績 9강綱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호예병형공전吏戶禮兵刑工典) 이 심서에서는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호예병형공전吏戶禮兵刑工典, 진황賑荒, 해관解官 등 12강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지방행정에서 수령이 수신, 치민에서 알아야 할 일, 행해야 할 일을 유표와 심서에서 같이 논의한다. 그러므로 그 분류에 출입出入이 있을 뿐이다. 심서는 국가재정의 기반이 되는 농민의 생산과 경제에 초점을 두고 있어, 전세제田稅制와 징포徵布문제를 중시하고, (1) 전론田論, (2) 유표遺表 지관수제地官修制의 전제田制의 개혁론은 심서心書 호전戶典 6조條 전정田政에 와서 토지관리론의 현실적인 체계화와 그 전개展開를 보게 된다.
수령직무守令職務 54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전정田政으로 보고, 양전量田에 있어 관료들이 진전陳田, 은결隱結이라 빙자憑藉하고 협잡挾雜함을 제거하되, 아래로 백성에게 해害가 없고 (하불해민下不害民), 위로 나라에 손損이 없어야 (상불손국上不損國) 한다 하며, 결부법結負法의 개혁은 그 자체가 불편하며, 또 토지는 토성土性이 바뀌는 것이므로, 양전量田에 유의하여 국가재정 확립을 기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전국이 한 때 양전을 하지 못 하였으므로 폐단이 많았으나, 양전을 통한 국가재정의 확립에서는 전액田額의 위축萎縮 감소減少 - 탈세전脫稅田의 확대를 방지하자는 것이다. 진전陳田관리에는, (1) 농민들이 다시 갈아먹게 하며, 세稅를 무겁게 하지 말며, (2) 상경전常耕田 (경작耕作하는 전토田土) 을 진전陳田이라고 속임 (위진僞陳) 을 밝히고, 합리적인 관리방안으로 어린도봅魚鱗圖法을 쓰고자 한다. 개혁의 결론은 전론田論에서 지었다.
다산에게 조세관리는 농민과 국가의 중간에서 이루어지는 협잡을 제거하지는 방향에서 개혁을 논한다. 앞서 유표遺表는 전세田稅 (방전의邦田議) 와 공부貢賦 (방부고邦賦考에서 대동법 논의) 의 역사적 비판을 통하여, 조선 조세제도사史 내지 조선 조세 사상사적인데서 개혁을 주장하고, 실천적인 논의는 심서에서 전개한다. 우선 실지 조사에 허위일 수 있다고 지적하며, 중앙과 권력층에서는 은결隱結, 누결漏決이 확대되어 가는 것을 알아도, 실제의 행정적인 처리는 지방 말단에 맡기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그것에 대한 금지책은 강구 실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앙의 권력층과 결탁한 현지의 수령, 이서吏胥들의 협잡이 방임되는 상태에서 농민의 피해, 궁핍, 국가의 패망이 이서의 손에서 올 것이라고, 다산은 안타까이 생각하였다.
그는 유배流配의 고장 당진현의 전결잡세田結雜稅, 그 부가세附加稅를 법전法典에서 규정하는 기본적인 전田 한 결結의 세稅와 대조하여, 법정法定 이외의 세를 일체 횡령이라고 지적하며, 반드시 개혁하여 백성을 구제해야겠다 (의혁제宜革除 이해민독以解民毒 불가숙시이불구야不可熟視而弗救也) 한다. 이러한 개혁을 방치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한다.
겸兼하여 시정책是正策의 하나로 공물貢物 제한을 들고, 국가경비의 절약과 함께 협잡의 바탕이 된 대동법의 모순矛盾 확대擴大를 지적하며, 농민들을 이러한 멍애에서 풀어줄 조건으로, (1) 재전징세災田徵稅를 바로잡아 밝힐 일, (2) 이속吏屬 횡렴橫斂의 방지, (3) 국가제정을 위주로 하는 데서 왕세王稅는 전주田主가 부담하는 것이지만, 남북의 관습에 따라 조절, (4) 징수는 부유층에서 먼저 걷고, 문서에 따른 관리를 정확히 할 것과, 관료적 고리대高利貸로 악용惡用되는 환곡還穀관리는 본원적本源的인데 환원할 일로 들었다. 환국의 협잡을 심서에서는 8란亂, 독립된 환향의還餉議에서는 7조條로 분석하며, 다시 수령의 협잡 6종과, 이서의 협잡 12종으로 세분 논증하였다. 이러한 협잡 제거는 제도적인 개혁, 법으로의 구속拘束을 기본으로 하지만, 국가재정의 정비, 관료들의 절약과 청백淸白사상에 따른 윤리적 제약과 함께, 관리의 합리화 (문서관리의 정확성) 에서 찾고자 하였다.
다산학이 유교주의적 이념에 근거함은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자학적이냐, 그것을 배격하였느냐, 어떠한 다른 데에 기반을 옮겼느냐, 하면 꼭 그렇지 않았던 데에 사상적인 특성이 있다. 오늘에 와서 각자 보는 일면에서, 다산을 규정하려고 하는 어떤 범주範疇에서의 규정이 시도되고 있다. 오히려 이것은 다산을 협애狹隘한 테두리에 감금하는 결과 밖에는 안 될 것이다.
남인시파의 학자였으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퇴退, 율栗의 설說을 종합하려 한 데에 그의 정신적인 본령本領이 있었다. 파벌적派閥的인 데서 떠나려고 한 데에서 그의 국가정치의 정열이 집중되었다. 유표와 심서가 그의 경학經學이해에 기틀을 두었으며, 이 두 책의 사상적 기본이론은 원리로써 도인導引되는 각 경전의 대목에서 명시된 바, 예론禮論에 있어 후대의 번질煩瓆한 의례儀禮를 원시적始原的인 고봅古法으로 돌리려고 한 데서 본다든지, 4색분파에 따라 조선조의 학자들이 혈연과 결탁된 분파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를 못 한 學의 태도를, 다산은 유표나 심서의 사상적 구축에서 파괴하고, 자기가 긴緊하게 여기는 생각은 필요한 데로 흡수했다. 다산에게 있어 학이 국가와 백성 (농민) 을 위한 것으로 구조화 되는데 있어, 원용援用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용하였다. 여기에서 표면화 할 수 없어 밝히지 못 한 정신적인 한 줄기는 카돌릭정신에서 찾고 있다. 유표와 심서에서 정치, 경제, 법의 제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자기 안전의 불합리, 불의不義에 대하여 비판하고, 통격痛擊하고 배제排除, 개혁하려는 정열과 정신은 앞서 그의 시문학詩文學에서 전개展開되었고, 이러한 문학정신은 특히 심서에서 재론再論되며, 정치경제론에서 확대, 심화深化된다. 그의 문학적 세계는 그의 사상체계에 있어서는 꺼지지 않는 정열의 불길로, 만년晩年의 유표와 심서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사상의 기틀이 된 것이다. 대체로 (1) 18세기 후반기 암행어사 때 본 농촌, (2) 19세기 전반기 유배지에서 농촌을 시詩로 읊었으며, 여기서 농민들의 국가권력, 이속吏屬에게 시달리는 궁핍窮乏, 곤경困境의 생활고生活苦를 그리고, 특히 관인官人, 이서吏胥의 횡폐橫弊를 지시指示하여, 조선조 말기 봉건제의 붕괴과정을 직시直視한다. 그는 문학에 대해서 대체로 정신기맥精神氣脈이 있어야 한다 하며, 당쟁에서 결과된 불의不義, 악惡을 통박痛駁한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는 직전까지 문제된 것은, 농민들의 고달픈 생生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끝내 걱정하고 있다. 유표遺表와 심서心書는 애민정신愛民精神의 소산所産이다.
다산 자신은 심서에서 생각한 개혁안이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애타게 기다렸음은, 자기가 숭배하던 한익상에 전傳하는 글에서, 심서를 끼고 돌아온지 3년이나 되었으나 같이 읽을 사람이 없다 하였음과, 묘지명墓誌銘에서, 만약 하늘이 이 뜻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불살라버려도 좋다고 탄식歎息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1883년 (고종 20년) 고종은 여유당전서를 전사傳寫하여 궁중에 비치하고, 1902년 목민심서 4책, 1907년 흠흠신서 4책을 간행함은 이 사회를 바로잡아 보려는 뜻에서였으나, 나라는 이미 쇄망衰亡의 경사傾斜에 놓여있었다.
049 사례편람四禮便覽 (1680 – 1776년) 이재李縡
4례편람 (이하 편람) 은 관冠, 혼昏 (婚), 상喪, 제祭 등 4례에 대하여 조선조 영조 때 도암 이제가 편저編著했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개국 이래로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에 의하여, 중국에서 전래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정한 예법禮法에 따라 내려왔는데, 이 편람도 그 근원을 주자가례에 근거했으나, 오랜 시일이 지나면서 학자의 학설이 여러 갈래로 분지分枝되었으므로, 저자는 조정調整 터ᅟᅩᆼ합統合하려고 엮은 것이다. 권두卷頭의 범례凡例에 의하면 ‘고금古今의 에서禮書가 소상한 것과 소략疎畧한 것이 같지 아니하나, 너무 세밀하면 번잡함에 흘러가고, 너무 소략하면 간결의 폐弊가 생긴다. 오직 주가례만은 고금을 통하여 쓸 수 있는 제도이니 마땅히 이대로 준용遵用할 것이나, 그 세절細切과 조목條目에 들어가면 여기에도 혹 소략한 것이 있으므로, 선유先儒들은 이 가례란 책이 미완성된 것으로 의심한 자가 있었다. 그래서 사계 김장생은 상례와 제례에 대하여 가례에 기본하고, 제가설諸家說을 참증參證하여,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지었으나 그도 구비具備되지는 못 하였으므로, 지금 그 비요備要의 예例에 의하여 가례家禮의 본문本文을 주로 하고, 고례古禮와 선유설先儒說을 참작參酌 고정考訂하여 궐약闕畧된 점을 보충하고, 또 관례와 혼례를 첨가하여, 이 글을 마련하였으니, 이것을 세상에 공포하려는 것이 아니고, 고람考覽하기 위하여, 건연巾衍에 두려는 것이다’ 하였다.
또 운곡 조인영이 이 책의 발문跋文에서 ‘주자가례를 뒤이어 예를 쓴 것은, 동국東國에서 상레비요喪禮備要가 가장 절요切要하므로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다 존봉尊奉하나, 가례에는 절節, 문文이 다 구비되지 못 하였고, 비요는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주로 하였을 뿐이므로, 이것으로 고금古今에 통通하여, 길함吉函에 다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암 이선생이 가례를 본강本綱으로 하고, 비요의 예에 모방하여 이 글을 쓰고, 거기에 관, 혼 2례를 더하여 길례吉禮와 선유先儒의 예설禮說을 가려서, 번잡함과 간략함을 참작하고, 이동異同을 고정固定하여 일부 예서禮書를 이루었으니, 이것을 4례편람이라고 이름한다’ 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이 책을 편저한 요인을 충분히 규지窺知할 수 있다.
저자 도암 이재는 우봉이씨로 자는 희경이니, 숙종 1년 (1680년) 에 나서 영조 22년 (1476년)에 별세했다. 약관弱冠 전후前後에 학예學藝가 완성完成하여 대소大小 복시覆試에 장원壯元하고,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형조참판, 한성부윤에 올랐으며, 경종 초년에는 예조참판, 강화유수, 함경감사에 제배除拜되었으며, 도승지, 대사헌, 이조참판에 연배連拜되었고, 영조 초년에는 홍문, 예문 양관兩館 대제학과 성균관, 동지경연사를 겸하였다가, 호, 공조참판을 지내고 자헌계瓷憲階 한성판윤, 공조판서, 의정부좌참찬에 올랐다. 그러나 그간 경종이 세자世子를 두지 못 하여 영조를 세제世弟로 冊封할 무렵에, 재의 중부仲父 이만성이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노론 4대신大臣 김창집 등과 협찬協贊하였다가, 반대당反對黨 김일관의 상언上言으로 임인옥사壬寅獄事가 일어나 만성이 옥중에서 죽으니, 재는 이를 예禮로써 염장斂葬하고, 강원도 인제 협중峽中에 은퇴隱退하여 경의經義와 예설禮說에 전심專心연구하여 정계에 나서지 않았다. 뒤에 만성의 관작官爵이 복원復元되고 재는 소疎를 올려 반대당을 토죄討罪하고, 군덕君德의 궐실闕失을 조진條陳하였으나, 영조는 당쟁의 화禍를 싫어하고, 탕평책蕩平策을 쓰려고 납청納聽하지 않음으로 재는 동지들과 이를 변척辨斥하여, 당시 노론의 종주宗主의 자리에 있었다. 별세한 뒤 영조 51년 (1775년) 에 문정文正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50권의 방대尨大한 문집과 어류초절語類抄節, 근사심원近思尋源, 오선생휘언五先生徽言, 검신록檢身錄, 우형서사륜구宙衡書社輪講 등 많은 저서가 4례편람과 같이 후세에 유전遺傳한다. 그는 일시 현관顯官에 진험進歇하였으나, 관직官職의 제명除命을 받을 때마다 사장辭章을 올려 난진역퇴難進易退의 절조節操를 보였으며, 전형적 주자학의 유자儒子로써 성리학과 에설禮說에 심오深奧한 조예造詣가 있는 실천적 학자다. 그러므로 이 4례편람의 편저에 있어서도 그 이론적 근기가 명철明哲하고, 편찬규모의 치밀緻密함이 장구상章句上에 약동躍動함을 볼 수 있다.
이 책의 권간券刊 차서次序를 보면, 제 1권은 관례冠禮, 제 2권은 혼례婚禮, 제 3권부터 7권까지는 상례喪禮, 8권은 제례祭禮다. 관례는 관冠과 계筓로 되어있으나 지금에는 관례, 계례 등은 시행이 사라져서 고례古禮로 도태淘汰되어버렸으므로 설명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남자가 20세가 되면 성인의식成人儀式으로 총각의 차림에서 상투常套를 짜고, 망건網巾을 두르고, 갓을 쓰고, 큰 창옷을 입어 장가 전이라 할지라도, 사회인이 되어 벼슬길에도 나가고, 사회적활동을 하게 된다. 이 성인의식이 곧 관례이니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또 계례는 여자의 성인의식으로 남자의 관례와 같은 것이니, 15세에 계례를 한다.
관례편 내용으로는, 첫째 적령適齡의 남자에게는 길일吉日을 택擇하여 사당祠堂에 고유告由하고, 빈賓을 징徵한다. 빈이란 지금의 주례역主禮役을 하는 자者이니, 예법禮法에 정통正統하고 덕망德望이 높은 자를 가려서 초빙招聘한다. 관冠, 심의深衣, 대대大帶 같은 성인이 입을 관복을 진설陳設하고, 초가례初加禮로 상투를 짜고, 망건과 갓을 올리며, 심의와 대대를 갖추고서, 시가축사始加祝辭를 빈賓이 읽는다. 다음은 재가례再加禮이니 모帽를 쓰고, 조삼皁衫과 혁대革帶의 장속裝束으로 차리고, 빈의 재가再加축사를 받는다. 다음은 삼가례三加禮로 복두幞頭와 난삼襴衫차림으로 3가加의 축사를 받은 다음, 초례醮禮라는 음주례飮酒禮가 있는데 역시 빈의 축사가 있으며, 빈이 관자冠者의 자字를 명命하여주고, 자사字辭를 지어주면 이로써 관례는 일단 끝난다. 성인이 된 관자는 사당에 나가서 선조신령先祖神靈에 견알見謁하고, 존장尊長 친지親知에 회례回禮하고, 피로연披露宴으로써 음주례飮酒禮를 한다. 이것이 성인의식의 관례의 대략이며, 계례도 관례와 유사한 예식이나 간단하다. 이것이 권 2의 내용이며, 권말에는 각종 도식圖式이 첨부되어 있다.
제 2권에는 혼례婚禮로써 지금도 도회지都會地 예식장禮式場에서 보는 구미풍歐美風의 신혼식新婚式을 제除하고는 대개 이 예법을 시행한다. 수재收載한 항목은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 등의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제 3 - 7권은 상례喪禮에 관한 것이니, 유교사회에서는 인간생활을 대체로 양생養生과 송사送死로 대별大別하고 있으므로, 죽은 뒤에 처리하는 예법은 사람이 나서, 크고, 죽을 때까지의 과정 행사와 그 비중을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이것이 유교의 근본윤리인 효에 대한 실천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이 상례에 관한 것이 다른 3례의 배倍 이상의 분량을 차지하는 所以이다.
조條 3권에는 초종初終 (절명絶命 후 절차) 과 상주喪主, 통부通訃 등에 관한 것이고, 다음은 습襲이니 시체를 목욕시키고, 새 옷을 입혀 영좌설치靈座設置하는 절차 등이며, 다음은 소렴小斂이니, 습을 끝낸 시신屍身에 금욕衾褥로 싸고 교포絞布로 결속結束하는 절차이며, 끝으로 대렴大斂이니 결속한 시신을 입관入棺하는 절차다. 권말에는 이상에 관련된 도식圖式이 첨부되어 있다.
제 4권은 상례의 계속으로 성복成服, 조弔 (조문弔問하는 절차), 문상聞喪 (외지外地에서 친상親喪의 통보를 들은 경위의 절차) 등이 실려있고, 권말에는 상복에 대한 도식이 첨부되어 있다. 특히 성복에 대하여 역대 예학자의 연구가 많고, 각各 가家의 쟁송爭訟이 분분紛紛하였던 것이니, 조선조 후기의 기해방례己亥邦禮와 같은 것도 민간례民間禮와는 구분이 있으나 쟁송의 예다.
제 5권은 첫째로 유장流葬이니 장지葬地 선정選定, 척광穿壙으로부터 매장埋葬 전까지의 준비절차이며, 다음은 천구遷柩이니 조조朝祖, 유존遺尊 등 발인發引 전까지의 절차이며, 다음은 발인이니 상가에서 산지까지 운구運柩절차이며, 다음은 급묘及墓이니 관구棺柩가 산에 도착하여 하관下棺, 증폐贈幣, 회격灰隔, 지석誌石, 제주題主, 성분成墳까지의 절차이며, 다음은 반곡反哭이니 장례를 마치고 본가本家로 돌아오는 절차다. 권말에는 도식이 첨부되고 특히 각종 척제尺制의 비교표가 도시圖示되어 있다.
제 6권은 상중喪中에 봉행奉行하는 제례祭禮이니, 첫째로 우제虞祭다. 우虞란 사자死者의 혼魂을 위안慰安한다는 뜻이니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까지 제사하는 것이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법法이므로 이에 대한 절차가 실려있다. 다음은 졸곡편卒哭篇이니 3우가 끝나면 졸곡제卒哭祭를 올리는 절차다. 다음은 부제袝祭이니 졸곡제 다음 날에는 망인亡人의 신주神主를 그 조위祖位의 신에 부제하는 절차다. 다음은 소상제小祥祭이니 상祥이란 선善이라는 뜻이라, 상주喪主가 이미 기년朞年을 지났으니, 상복喪服도 처음 보다는 변變해서 좋아져 (선善) 가는 시기라는 말이다. 이 소상제에는 복服을 변變하는 것과 제사의 절차가 실려있고, 다음은 대상제大祥祭이니 즉 제 2주기周朞의 제사祭祀와 변복變服하는 절차이며, 다음은 선제禪祭이니 대상 후 한 달이 지나면 3년상제 최후의 제사와 상복을 완전히 벗는 절차다. 선제가 끝나면 신주는 우선 묘로 가고, 지금까지 상주도 평상인과 같이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길제吉祭이니 상복喪朝를 완료한 뒤에 세대世代가 바뀌어진 것을 봉고奉告하고, 고조高祖 이하의 신주를 개제改題하며, 그 이상의 신위神位는 옮기거나 조매祧埋하는 절차가 실려있다. 권말에는 제찬祭饌 진설陳設 도식圖式이 첨부되어 있다. 이로써 통상적 상례는 일단 다 실은 것이나, 권 7의 상례, 권 5의 개장改葬은 일종 특례의 상례다. 개장은 원장지元葬地의 이변異變으로 체백體魄이 안온安穩치 못 할 경우에 이장移葬 또는 개장改葬하는 절차다. 우리나라에는 고래古來로 풍수설風水說에 혹惑하는 비속卑俗으로 개장하는 예가 많으나, 저자는 이것을 단호히 배격하였고, 다만 불가피한 경우에만 개장하는 절차를 서술한 것이다.
권 8은 제례祭禮이니, 첫째로 사당祠堂이라 하여, 사묘祠廟의 제도와 감실龕室, 제구祭具, 제전祭田, 제기祭器와 사묘祠廟에 대한 배알拜謁절차 등이다. 즉 효자자손은 그 부모 조상이 살아있으나 죽으나, 그 섬기는 효성은 차差가 없다는 유교이념으로, 사당祠堂에 대한 절차가 실려있다. 다음은 시제편時祭篇이니, 원래의 시제는 매년 중춘仲春에 길일吉日을 복택卜擇하여 올리는 가장 큰 제사다. 지금 성행하는 원조元朝, 추석秋夕의 다례茶禮와는 다른 것인데 지금은 폐례廢禮가 되고 있다. 다음은 이제禰祭이니 이禰란 돌아간 부모 위位를 이름이니, 이 이제는 계추季秋에 올리는 제사다. 다음은 기일제忌日祭이니 고조高祖 이하 각 위位의 망일亡日을 당當하여 추도追悼하는 제사이나, 특히 제사절차 이외에 기일에 있어서 근신치제勤愼致祭하는 세목細目이 상술詳述되어 있다. 다음은 묘제墓制이니, 조선祖先의 묘소墓所에서 올리는 제례절차다. 권말에는 사당, 제품진설祭品陳設 등 도식이 첨부되어 있다.
이상으로 4례편람의 내용을 개설槪說하였으나, 이 제례대로 시행하려면 관혼상제를 막론하고 상당한 경제력과 정신력이 병행되는 것인 바, 저자도 이 점에 특히 주의하여 예전은 이런 정칙定則으로 되어 있으나 각 개인의 물력物力 등을 고려하여 실정에 적합하게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저자는 이 책의 편저방법에 대하여, 특히 엄밀한 체제를 정하였으니, 즉 주자가례의 본문은 대자大字로 정서正書하고, 다른 예서例書에서 인용한 것은 소자小字로 쓰고, 가례 본주本註는 한 자씩 낮추어서 대자大字로 쓰고, 다른 글에서 인용한 주석註釋은 세자細字 쌍행雙行으로 썼으며, 또 다른 예설例說을 참고로 인용한 것은, 별행別行에 올려 2자字를 낮추어서 쌍행으로 쓰고, 저자의 의견은 안桉 자字를 머리에 붙여서 별행으로 3자 낮추어서 쌍행세자雙行細字로 실었다. 이와같은 저자의 의견인 예설이 관례에 11, 혼례에 6, 상례에 100, 제례에 19의 항목으로 부기附記되어 있다. 그의 편제상의 주도周到한 연구와 치밀緻密한 주의를 엿볼 수 있다. 다만 유감되는 것은 각권 도식 밑에 따로 예식해설과 별권으로 편람유회便覽類會라는 것을 만들어 붙였다 하는데, 이것이 뒤에 망일亡逸되어 전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4례편람의 간행은 저자의 생전에 이루어지지 못 하고, 건연巾衍에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저자의 손孫 이채 (호 화천) 가 다시 정교正校하여 정본正本의 원고를 마련하였고, 또 증손曾孫 광문
(호 소화) 이 헌종 10년 (1844년) 에 수원유수로 재임하면서, 정밀한 목판木板을 조성하여 처음 인출하였으니, 저자의 몰沒 후 약 100년의 세월이 지나서 증손의 손에 의하여 간포刊布되었다. 8권 4책의 한장본漢章本으로 세상에 유포된 책이다. 이 때의 인본印本이거나 또는 그 후 필요에 따라 증쇄增刷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에 이 판본으로 증쇄하려 하나 원판이 마모磨耗되어, 광무 4년 (1900년) 에 황필수, 지송욱이 4례편람을 정정증보訂正增補하여 증보 4례편람이란 이름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이 4례편람이 유포되기는 지금부터 백 수십 년에 불과하나, 조선조 말기에 있어 주로 기호畿湖지방을 중심으로 사대부 등 상층가정에는 거의 집집마다 소장하여, 책명 그대로 편람으로 이용되었으니, 원래 이 책의 연원淵源은 주자가례에 둔 것이므로, 주자학을 치국治國의 기본이념으로 삼아온 조선조에서는, 말기末期에 내려갈수록 이 예법이 일반사회의 생활과 동화同化되어 갔으므로, 이 책의 가치는 높았다. 생활의 현대화와 함께 이같은 의례儀禮의 이용도利用度는 점차로 감살減殺되는 추세趨勢를 보일 것이나, 이 책의 내용과 도식圖式 등은 우리나라 중세中世의 민속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복제服制에 대한 예例로써 친족親族관계의 법학 내지 봉건제도 하의 사회학적 연구자료로 높은 비중을 지니고 있다. 4례편람에 대한 연구논문은 발표된 것이 없다.
050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1474년) 성종 명 편成宗命編
국조5례의는 조선조 초에 관官, 민民의 모든 의식儀式 절차節次를 제정한 책이다. 고조선 이후 오랫동안 일종의 토템과 샤먼으로써 하늘이나 산천초목山川草木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고 제祭하는 것으로 의식에 대하였으니 일정한 준칙準則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과 문화교류가 잦았고, 더불어 불교 전래傳來로 고유固有의 것, 불교의 것, 주례周禮를 근간根幹으로 한 중국의 것 등이 혼용混用되어왔다. 그러나 정한 표준이 없이 그 때 그 때의 의식에 따라서 편의便宜대로 써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불교의 존숭尊崇이 전체 사회를 지배한 연유로, 우리 고유의 의식은 없어지고, 불교식 준행準行이 많았다. 중기 이후에는 송宋으로부터 유학사상이 들어옴으로써 차차 중국의 예식을 본땄고, 더구나 여말麗末에는 불교의 배척排斥과 유학의 발흥勃興, 유학자의 초출草出로 인하여 유교형식으로 쏠렸다.
조선조에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국가의 모든 예禮, 의식儀式이나 행사行事에 유교식을 적용하였다. 그것이 후세에 많은 폐단弊端을 낳았으나 당시로써는 기강紀綱과 질서를 바로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종이 법전이나 예식의 성문화成文化에 착수, 경국육전經濟六典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 이 이루어지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상정詳定되어 6전典 중의 예전에 부附하게 되었으나, 완성은 성종 때다. 세종이 개국 이래 제례祭禮작업의 뜻을 세워 당시 예조판서 허조 등을 시켜, 고금古今의 예서禮書, 홍무체제洪武體制 등을 참작參酌케 하고, 두씨杜氏의 통전通典을 모방하여, 5례의 편찬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완성을 보지 못 했고, 세조 때 강희맹의 손을 거쳤다. 그 뒤 성종 5년 (1474년) 에 신숙주, 정척 등이 완성하였다.
이 국조5례의의 편찬 경위, 내용 등은 이 책 편찬에 가장 많은 공헌貢獻을 한 강희맹의 5례의서를 살펴봄이 좋다.
세종이 예조판서 허조에게 모든 제사祭祀의 서례序例와 길례吉禮를 상정詳定하게 하면서, 더불어 집현전 유신儒臣들에게 5례의 의절儀節을 상정하게 하였다. 유신들이 두씨통전杜氏通典과 예의에 해당하는 모든 서적과, 중국 제사 (각 관청) 의 체제와 우리나라 전래의 속례俗禮를 참작하고, 손익損益하여 상정한 것을 세종에게 올려 제가制可되었다. 그러나 시행이 되기 전에 세종이 승하昇遐하였다.
그 뒤에 세조가 ‘그 조문條文이 오히려 호긴浩繁하고 앞뒤에 어긋난 것이 있으니 법을 삼을 수가 없다’ 하고 다시 조신朝臣에게 명命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수정본修正本) 을 분담하여 찬술하게 하였다. 동시에 세종 때 정한 6례의 의절도 다시 수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오례의五禮儀라고 하고, 전과 같이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부附하게 하라고, 신臣 희맹과 이조판서 성임에게 수정하게 하였다. 그러더니 탈고脫稿가 되기 전에 세조가 서거逝去하고, 예종은 재위가 1년 뿐이었다. 성종이 임금이 된 뒤에 선지先志를 추념追念하여 대전과 5례의가 완성되니, 고령부원군 신숙주가 총재摠裁로 신臣 희맹 이하 여러 유생이 찬정撰定한 것이다. 이 5례의와 경국대전은 성종 9년 (1474년) 에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5례는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를 말한다. 그 분류는 길례 49칙則, 가례 51칙, 빈례 6칙, 군례 7칙, 흉례 81칙이다.
그 뒤 영조 20년 (1744년) 에 5례의의 속편續篇이 간행되었으나, 그 분류도 원본에서 약간 첨부添附 삭멸削滅된 부분을 기록한 것 뿐이다. 그리고 빈례는 전대로 두고 수정을 하지 않았으며, 영조가 친서親序하였다. 또한 서례序例의 해설도 간행되고 사이 사이에 부도附圖를 삽입揷入하였다.
. 5례의는 8권 8책에 203칙으로 분류했다. 그 내용을 상고詳考하면 대개 국가 또는 왕가에서 시행하는 절차들이 주主가 되고, 일반민중의 것은 약간 수록되었을 뿐이다.
. 길례, 이 중에서 국가가 행하던 의식은
. 선농단先農壇 - 농사를 처음 짓게 하고 가르쳐준 신神에게 제祭하는 의식
. 선잠단先蠶壇 - 양잠養蠶을 처음 일러준 신에게 제사하는 의식
. 우단雩壇 - 그 해 비가 고르게 내려달라고 제하는 의식
. 한발旱魃 - 우단에서 양兩 사신師神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제하는 의식
또 우단에서 비를 빌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북교北郊 (신북동) 에서 산악山嶽과 강해江海를 바라보고, 그 신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제하는 의식. 산악 강해를 바라보고 제를 하여도 비가 내리지 아니하면, 산악이나 강해로 직접 나가 비를 내려달라고 제하는 의식. 장마로 농사에 해害가 크면 비를 개이게 해 달라고 서울 성문城門 (남대문) 신에게 제하는 의식과, 지방에서는 그 곳 성城 (南) 문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는 의식 등이다.
. 길례 - 맨 끝에 있는 대부大夫, 사士, 서인庶人의 4중월仲月 (3, 5, 8, 11월) 의 시제의時祭議를 보면, 증조曾祖 이하만 제祭하라 하였고, 기忌 (망亡) 일제日祭에도 증조까지만 제하라 하였다. 그러나 고조高祖 이하를 제하는 것이 수백 년 간의 관례慣例였던 당시에 이런 준칙準則은 이 책의 혁신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후 약 60년 전부터 4중월 시제는 거의 폐지되고, 기일제만 남았으나 고조 이하를 제하는 풍속은 그대로 남았다.
. 가례嘉禮 - 왕가王家에서 쓰던 의식의 많은 부분은 생략하기로 하고, 그 중의 양노연養老宴의 일부분을 소개하면
. 양노연은 매년 8월이면 한성부 (서울특별시) 에서 경내京內 80세 이상 노인을 조사하여, 예조로 보내면 예조에서 택일하여 잔치를 베푼다. 그 전날에 액정서掖庭署 (계하階下 시위관侍衛官) 에서 근정전인 북증北增에 남향南向하여 어좌御座 (임금의 자리) 를 시설하고, 향상香床 두 개를 전외殿外에 설치한다. 연회날이 되면 장악원에서 픙악할 것을 전정殿庭 근남近南에 북향北向하여 놓고, 협율랑協律郎 악사장樂師長이 채 (휘麾) 를 들고 서계상西階上 끝에 동향東向하여 열위列立하고, 전설사典設司 의식과儀式課에서 2품品 이상 자리는 전내殿內 동서東西에, 4품 이상은 전계상殿階上 동서東西에, 6품 이상은 남중계南中階에, 7품 이하는 계하階下 동서東西에, 서민庶民들은 7품 뒤로 지정한다. 좌우통례左右通禮 (의식과장儀式課長) 는 계상階上 동서東西에 서로 향向하여 서고, 찬의贊儀, 인의引儀 (의식관儀式官) 는 서게하西階下에 서고, 사옹원 관청 요리料理 일은 궁청宮廳 제조提調 (장長) 가 전내殿內에 주향酒亭을 시설하고, 사옹원관이 식탁食卓을 전외殿外에 놓고 기다린다. 북을 처음 울리면 노인들이 모두 제자리에 서 있고, 북을 두 번째 울리면 전하殿下 (임금) 가 익선관翼善冠에 용포龍袍로 시신侍臣의 호위護衛를 받으면서 어좌御座에 앉으면, 시신과 노인들이 일제히 4배拜를 한다. 그 때 풍악風樂을 낭자狼藉하게 울리면 사옹원 제조가 임금 수라水剌 (식사食事) 상床을 올리고, 집사자들이 노인들의 상을 버리고, 풍악이 그치면 내시內侍가 임금께 꽃을 올리고, 풍악이 다시 나오다가 그치면 집사자가 노인들에게 사화賜花를 나누어주고, 음식을 먹게 할 때 풍악이 또 나온다. 제조가 임금께 술잔을 올릴 때 노인들이 천세千歲 천세 천천세 주상전하主上殿下 천천세를 부르고,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춤을 춘다. 술은 5편遍만 들고, 노인들에게 청보靑袱을 두어 먹다가 남은 것을 싸게 한다. 집사자가 노인들의 식탁을 거두면, 노인들이 제자리로 가고, 찬의贊儀 국궁鞠躬 (무릎을 꿇는 것), 배拜 (절), 흥興 (일어서는 것) 을 네 번 불러서 노인들이 4배拜를 하게 한다. 노인들이 나갈 때 풍악이 울리고, 임금은 시신侍臣의 시위侍衛가 되어 편전便殿으로 간다.
. 중궁中宮 양노연의養老宴議, 그 앞에 한성부에서 80세 이상 부인婦人을 조사하여 예조로 보내면 예조에서 택일하여 왕비께 올리고, 왕비가 양노養老하는 의식도 임금의 양노연과 대강 같다.
이 양노연 절차를 기록하는 것은 지금 최고위最高位에서 매년 그 예例대로 하였으며, 고속古俗도 유지되고 인정이 될 것 같다.
. 문무관관의文武官冠儀는 관레식冠禮式이 폐지된지가 오래여서 생략함
. 종친宗親 문무관文武官 혼례婚禮는 4례편람과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함
. 빈례賓禮에 중국사절을 대접하는 절차는 복잡하여 생략하고, 인국隣國 일본, 유구琉球 등의 서書, 폐弊 받던 것만 말하면, 2일 전에 예조에서 직무받을 사람들을 선포하고, 액정서掖庭署에서 근정전 북벽北壁에 남향南向하여 어좌御座를 설치하고, 또 보일국새寶一國璽 놓을 상床을 좌전座前 근동近東에 놓아두고, 그날이 되면 장악원에서 악기를 전전殿前 근남近南에 북향北向하여 놓고, 협율랑이 채를 들고 서계상西階上에서 동향東向하여 서 있고, 전의典儀 (의식관儀式官) 가 전전殿前 동서東西에 시신侍臣의 자리를 하여놓는, 품등品等을 따라 각 자리를 하고, 사자使者의 자리를 서편西便에서 북향北向하여 놓는다. (중략中略) 임금이 나올 때 시위侍衛가 호위護衛한다. (중략) 임금이 어좌御座에 앉고 음악을 알리면, 찬의贊儀가 사자使者를 알리고, 들어와 통사通事가 시키는대로 4배拜를 한 뒤에 음악이 그치고, 전교관傳敎官이 서폐書幣를 받아 부복俯伏하고 어안御鞍에 올리고, 동문東門으로 나가서 사자를 데리고 들어온다. 사자가 부복하고, 모신 신하들도 부복하면, 전하殿下가 그 나라 국왕의 안부를 묻고, 또 사자가 수고하였다고 위로하면 사자와 부사副使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나간다. (이하 생략)
인국隣國 사절에게 사연賜宴하는 의儀와 예조에 접대하는 의는 생략함
. 군례軍禮는 임금이 친사親射 (활 쏘는 것) 과, 신하의 활 쏘는 것과, 열병閱兵하는 것과, 강무講武 (사냥) 하는 것과, 일식日食을 구求하는 식式과, 12월 대나례大儺禮 (사신邪神을 쫓는 의식) 의 6조條이나 모두 시대에 적합지 아니하므로 생략
. 흉례凶禮는 모두 왕가王家 상장喪葬하는 의식이라 지금에 적합지 아니하여 생략하고, 다만 본문에 임금이 선왕先王이나 왕비상王妃喪의 졸곡卒哭 뒤에는, 현관玄冠 오대烏帶로 시사視事한다는 조문條文을 선조 때 민순의 상소上疏로 백관白冠 포대布帶로 변경하는 것만 소개한다.
. 대부大夫, 사士, 서인庶人의 산의喪議는 4례편람과 대동소이하므로 설명할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부모상에 3년을 입는다고 한다. 실상은 장일葬日까지 밖에 탈상脫喪을 하지 못 하게 된 것은, 시대에 따라 변경이 된 것이다. 예전에 왕자王子가 7개월만에 장葬하는 것은 만 리 밖 제후帝候가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이요, 제후가 5개월만에 장한다는 것은 동맹국의 사절使節이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대부大夫 (고관高官) 가 3개월만에 장한다는 것은 외국에 출사出使한 각 관官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요, 사서인士庶人이 달을 지내어 장한다는 것은 친한 친구가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예전에는 4일만 되면 땅에 염殮을 하니 이것이 벌써 가매장假埋葬이고, 7개월이니 하는 것은 장사葬事하는 것이다. 지금은 3일장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으나, 3일장은 부자富者는 준비를 금방 할 수가 있으므로 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준비기간이 짧아 준비를 할 수 없어 바로 내다 묻는 3일장이나 화장火葬을 하지만, 중간 서민층은 준비기간이 4, 5일이므로 5, 7일장을 한다.
예전에는 친지상親知喪에 부의賻儀하는 것을 많이 보내면 포목대전布木代錢이라고 하고, 작으면 지촉대전紙燭代錢이라고 하였다. 일본식이다. 향빈香貧이니 향전香典이니 하는 것은 유식자有識者의 안목眼目에는 축문祝文의 유래由來는, 예전 생인生人이 망인亡人을 생존으로 대우하여 그 행사하는 것을 고告하는 것이라고 우리 문자가 없어 한문을 대용代用한 것이다.
옛 풍자諷刺에 ‘애써서 글을 받을 것이 없어 죽으면 다 알아들을 것인데’ 라는 속담俗談도 있다.
참고로 잠깐 언급한 바 있는 국조5례서례와 국조속5례의 및 영조 때 편찬한 국조속5례의보에 대하여 약술略述한다.
국조5례서례 (5권 2책) 는 세조 때, 세종이 조신朝臣에게 명命하여 찬정撰定케 한 바 있는, 제諸 제사祭祀 서례序例 및 5례의에 따라 5례의서례를 찬정케 하였으나, 탈고脫稿를 보기 전에 세조가 승하昇遐하였다. 예종과 성종이 그 유지遺志를 이어받아 신숙주, 강희맹, 정척 등에 명하여 이를 찬정케 하였는 바, 성종 5년에 이를 인쇄, 길가빈군흉吉嘉賓軍凶의 5례禮의 서례序例가 이룩된 것이다. 도설圖說이 첨부되었다.
국조속5례의 (5권 4책) 는 조선왕조 초기에 국조5례의가 찬정되었지만, 그러나 시세時勢의 추이推移에 따라 그 개폐改廢할 것이 많았으므로, 영조 20년에 예조에 명하여 이를 편찬케 한 것이다. 권 중에 군데군데 도설을 넣어 편람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국조속5례의보 (2권 1책) 는 영조 20년에 예조에 명하여 5례의 속편을 찬집한 바 있으나, 국왕 27년에 세손世孫의 장복章服을 제정함에 자資코자 다시 신면 등에 명하여 이 책을 편찬케 하였다. 길례, 가례 양편을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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