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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 필독도서 (1/5)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 1>

북새 2020. 11. 2. 14:35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  1>

 

*  <001 베다  ---   050 나의 투쟁> 

* 051권부터는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  권 2>  로 넘어감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신동아新東亞’ 19681월호 별책부록別冊附錄, 동아일보사 간이천만 윤색潤索

 

* 지성인 필독도서  <세계를 움직인 책 100권>,  <사냥꾼이야기 (1 - 15권)>,  <한국의 고전 100선>,  범당의 저서 (80여 권) 등 탑재 글을 읽으려면 Daum Blog <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이천만의 시> <아라한우학> <범당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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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색자潤索者 서문序文, 신동아新東亞 편집자編輯者 서문, 목차目次, 본문)

 

1.  윤색자潤索者의 서문序文

 

* 동아일보의 시사時事월간지 신동아가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을 선정하였으며, 이를 사계斯界 전문가 100인이 번역하여 다이제스트Digest로 만들어 19681월호 신동아 별책부록으로 증정贈呈하였음. 인생관 내지 세계관의 바탕이 되었거나 변화를 초래한 책, 인지認知의 계발啓發과 학문의 발달에 이바지한 책, 사회변동과 정치적 발전에 직접 자극刺戟이 된 책으로서 고전古典으로부터 현대문학까지를 대상對象으로 함

*  다이제스트 되었으므로 입문서入門書이며개관槪觀을 알고 텍스트 text  (원본原本를 읽어야 명확하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음  (작가 그림책명저작연대著作年代번역자飜譯者다이제스트 Digest는 해설이며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을 읽어야 함해설 끝에 주석註釋을 게재함원문이 한자어와 전문용어로 되어한자어는 병기倂記 또는 풀어쓰고 줄이고전문용어는 풀이하여 주석으로 보완함)

*  한국의 고전 100선은 한자가 많아 독서의 이해를 도울만한 어휘 이외는 한자를 병기倂記하지 않았으며고어체古語體 문투文套와 한자어고유명칭특히 이름은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필독도서를 골라 읽고연구 외 참고가 되는 책은 일별하기를 권장함

*  손자 아라한과 아나율의 지성적 교양서로 윤색潤索하여 블로그  (Daum Blog 이천만의 시이천만의 교학대한사敎學大韓史아라한 우학于學에 탑재搭載윤색을 하기에는 방대한 내용과 고전古典의 인용引用특히 한자상용구한자이름을 찾느라고 자전字典옥편玉篇과 인터넷자료를 이용하였으나실험용돋보기를 사용하면서도 눈이 아프고 시력視力이 흐려져 애를 먹었으며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며 어렵게 윤색했으므로 한이와 율이가 필독하기를 기대함

*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의 유래由來

장자 (莊子 B. C 369 - B. C 289?)  33  <천하天下> 7장자는 친구 혜시惠施  (B. C 370?  -  B. C 309?) 와 논쟁論爭을 언급言及하며 그의 박식博識함을 설명하는 가운데혜시의 장서藏書가 수레 다섯 분량이라고 말했던 것을두보杜甫  (712 - 770당대唐代 이백李白과 쌍벽雙璧을 이룬 시인詩人 두보(杜甫가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라는 명감明鑑으로 삼아 전해지고 있음

.  사람은 평생 다섯 수레의 책  -  3,000권을 필독必讀하여야 한다는 의미. 20 - 50, 30년 간 1 100매월 10매주 2권 독파讀破아카데미아 Academia 에서 플라톤 Platon,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e 와 공자학당學堂의 공자는 제자를 가르치기 전 무지를 깨우쳤다. 무지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것이다

*  조선시대에는 서당書堂에서 45  (4 - 논어論語대학大學중용中庸맹자孟子. 5 -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예기禮記춘추春秋이 중 대학과 중용은 예기에서 독립되어 별책이 된 것임을 읽음으로써 훌륭한 선비가 되었음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라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위대한 역사서를 썼는데그는 궁형宮刑 (거세去勢을 당한 치욕恥辱을 감내堪耐하며  <독서만권讀書萬卷 여만리행旅萬里行  -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여행을 함으로써 사기를 저술할 수 있었다라는 명언名言을 남겼음등용문登龍門의 귀감龜鑑

.    특히 작가지망생은 어휘력이 기본이므로 한글사전을 외우는 것이 작가의 왕도王道, 창의력은 독서에서 나오고, 여행은 창의력의 원천

*  독서백편기의자현讀書百遍其義自見  -  동우董遇는 후한 말 사람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에 열중하여 황문시랑黃門侍廊 벼슬에 올라 헌제獻帝의 글공부 상대가 되었다한 때는 승상이었던 조조의 의심을 받아 한직閒職으로 쫓겨난 적도 있었지만나라 명제明帝 때에는 시중侍中대사농大司農 등의 벼슬에까지 올랐다그는  <노자老子  <좌전左傳에 주석註釋을 달았는데특히 좌전에 대한 그의 주석은 당나라 시대까지 폭넓게 읽혔다고 함동우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글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음하지만 그는 선뜻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마땅히 먼저 백 번을 읽어야 한다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고 말했음. (人有從學者인유종학자遇不肯敎而云우불긍교이운必當先讀百遍필당선독백편言讀書百遍其義自見언독서백편기의자현삼국지三國志 · 위서魏書왕숙전王肅傳)

*  조문도 석사가의 朝聞道 夕死可矣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

*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의사義士

*  온고지신溫故知新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책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  지성인의 고등정신기능 - 이해력판단력분석력평가력창의력분별력, 객관성, 통합력 (종합력, 통섭력)   (대학)  교육으로 육성 미흡未洽독서로만 가능교육  -  지식적 전문인  (지식, 지식인)  양성, 독서  -  교양적 지성인  (지혜, 교양인) 양성,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  <사족蛇足, 윤색자> 우리나라 이름은  <대한민국>  이다약칭은  <대한>  이다.  <한민족의 나라>  .  <한국>  은 이름은 물론 약칭이 아니다  (, ) +   (밝고 환한가득찬하나 즉 으뜸은 한자표기로 차용借用), 애국가의  <대한 사람>,  <대한민국 만세>,  <대한제국>    <대한>  이다중국의 대명대청대영제국대일본국과 같은 명칭이다더구나  <한반도>  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국권강탈의 소산이어서 일제 잔재 청산으로써 없애야 한다아울러  <KOREA>    <COREA>  로 바꿔야 한다. KORAEA는 일제강점기 때 영문표기상 알파벹 순으로 <C>OREA <J>apan 앞에 오는 것을 회피하려고 일제가 바꾼 명칭이다그래서 본서에서  <한국>    <대한>  으로 고쳐 썼다.                   (Daum Blog 이천만의 교학대한사 참조)

 

2.  ‘신동아新東亞’  편집자編輯者의 서문序文

 

인류의 문명이 있은 이래 책이 휘두른 위대한 영향은 활자시대活字時代에서 전기시대電氣時代로 옮아가고 있다는 오늘날도 여전히 축적蓄積되어가고 있다. 그 문명의 산더미 속에서 100권을 선택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권말卷末에 참고로 붙인 명저목록名著目錄에서도 보듯이 흔히 이런 종류의 선에는 미리 한계를 두는 경우가 많다.

부록附錄, 그러나 가능한 모든 시대와 문화권文化圈과 분야分野를 망라網羅하기로 했다. ‘세계를 움직인의 기준基準

 

1) 인생관人生觀 내지 세계관世界觀의 바탕이 되었거나 그것의 변혁變革초래招來한 책

2) 인지認知의 계발啓發과 학문의 발달에 이바지한 책

3) 사회 변동과 정치적 발전에 직접 자극刺戟이 된 책의 세 가지로 정하고

 

다음 100명의 전문가들에게 추천推薦을 의뢰依賴했다.

 

집계集計한 결과 문학작품이 많은 것은 위의 기준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일 것이다. 대개는 집계대로이지만 편집자가 결정을 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이슬람권과 인디아의 대저大著들은 집계대로 하면 누락漏落될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저작들이 모두 각 분야마다에 압도적壓倒的인 영향력을 끼친 것이 사실이지만 한 권의 책이라는 점에 유의했다. 추천된 책으로 100선에 들지 못 한 것은 권말에 서목書目만 적어두었다.

 

3. 목차目次

 

<사상思想>

 

001   베다 Veda  (B. C. 1200?  -  A. D 500년 경頃),  (李箕永

002  대장경大藏經 Tripitaka  (B. C. 1200년 이래 2500여 년 동안 성장 발전삼장三藏  (李箕永

003  논어論語  (2500년 경),  공자孔子  (安炳周)

004  대화록對話綠 Protagoras dialogues, 플라톤 Platon  (趙要翰)

005  장자莊子, 장주莊周  (車柱環)

006  성서聖書 The Bible  (50  -  100년 경),  安炳茂

007  고백告白 Confessiones  (400년 경),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林明芳

008  코란 Holy Qur'an  (640  -  60년 경),  (柳正烈) 

009  사서집주四書集註, 주희朱熹  (1252년)  安炳周

010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  (1266  -  1273년 경),  아퀴나스 Saint Thomas Aquinas  (金奎榮

011  그리스도교강요敎綱要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  칼빈 Jean Calvin  (金觀錫) 

012  수상록隨想錄 Les Essais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  (1580)  孫宇聲

013  방법서설方法叙說 Discours de la methode  (1637),  데카르트 Rene Descartes  (金奎榮

014  팡세 Pensées, 파스칼 Blaiss Pascal  (1670)  (李桓)

015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  칸트 Immanuel Kant  (金亨錫

016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 Phänomenologie des Geistes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807)  (李碩潤

017  철학적단편후서哲學的斷片後書 (1846), 키에르 케고르 Søren Aabye Kierkegaard  (安秉煜

018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1883  -  1884),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崔東熙)

019   시간과 자유 Essai sur les domness immediates de la conscience  (1889),  베르그송 Henri Bergson  (鄭錫海

020  꿈의 해석解釋 Die Traumdeutung  (1900),  프로이트 Sigmund Freud  (鄭良殷)

021  순수현상학純粹現象學과 현상학적現象學的 철학시론哲學試論

       Ideen Zu Einer Reinen Phanomenologie Und Phanomenologischen Philosophie

      훗설 Edmund Husserl  (1913  -  1952)  (韓筌淑)

022  논리철학논교論理哲學論巧 Tractatus Logico  -  Philosophicus  (1922),  비트겐슈타인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李漢祚)

023  상징형식象徵形式의 철학 Philosophie der Symbolischen Formen  (1923  -  1929), 캇시러 Ernst Cassirer (崔明官

024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25),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申一澈)

025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  (1927),  하이데커 Martin Heidegger  (安相鎭)

 

<역사歷史, 지리地理>

 

026  역사歷史 Historiai  (B. C  429년 경), 헤로도토스 Herodotos  (趙義卨)

027  사기史記  (B. C 104), 사마천司馬遷,  (李相殷

028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646),  현장玄奘  (金庠基)

029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The Description of the World  (1298),  마르코 폴로 Marco Polo  (鄭雲龍)

030  여행기旅行記, 아랍어: ابن بطوطة, 리흘라 Rihla  (1355  -  1356), 이븐 바투타 Ibn Battutah  (朴魯植

031  세계사世界史 Universal History  (1375  -  1378), 이븐 할둔 Ibn Khaldun  (閔錫泓)

032  로마제국쇠망사帝國衰亡史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  -  1788),

      기본 Edward Gibbon  (梁秉佑

03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an  (1860)

      부르크하르트 Jacob (Christopher) Burckhardt  (吉玄謨

034  금엽지金葉枝 The Golden Bough  (1911  -  1915), 프레이저 Sir James George Frazer  (柳宗鎬

035  역사歷史의 연구 A Study of History  (1934  -  1954),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  (李普衍)

 

<사회社會>

 

036  군주론君主論 Il principe  (1513),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金河龍)

037  유토피아 Utopia  (1556),  모어 Sanctus Thomas Morus  (金鎭萬)

038  리바이어던 Leviathan  (1651),  홉스 Thomas Hobbes  (金悳)

039  통치론統治論 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90),  로크 John Locke  (崔榮)

040  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1748),  몽테스큐 Charles Louis de Secondat Montesquieu  (玄勝鍾)

041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Du contrat socia  (1762),  루소 Jean Jacques Rousseau  (金桂洙

042  국부론國富論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  (1776),

       스미스 Adam Smith  (林鍾哲

043  인구론人口論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1798),  말사스 Thomas Robert Malthus  (李海英

044  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 Manifesto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  마르크스 Marx  엥겔스 Engels (朴東雲

045  자유론自由論 On Liberty  (1859)John Stuart Mill  (李克燦)

046  자본론資本論 Das Kapital  (1867  -  1894)마르크스 Marx Karl  (金定台)

047  제국주의론帝國主義論 Imperializm, kak vysshaya stadiyn kapitalizma  (1917), 레닌Vladimir Ilich Ulyanov (梁好民

048  경제經濟와 사회 Wirtschaft und Gesellshaft  (1921),  웨버 Max Weber  (黃山德)

049  삼민주의三民主義  (1924)손문孫文  (金俊燁

050  나의 투쟁鬪爭 Mein Kampf  (1925  -  1927)히틀러 Adolf Hitler  (李基遠)

051  이데올러기 Ideologie와 유토피아 Utopia  (1929),  만하임 Karl Mannheim  (高永復)

052  고용雇傭 이자利子 및 화폐貨幣의 일반이론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1936)

      케인즈 John Maynard Keynes  (金斗熙)

 

<자연과학自然科學>

 

053  천체天體의 회전回轉에 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徐龍化

054  혈액순환血液循環의 원리 原理 Exercitatio anati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  (1628),

       하비 William Harvey  (金在灌)

055  자연철학의 수학적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1687)뉴톤 Sir Issac Newton  (朴益洙

056  의 기원 基源 On the Origin of Species  (1859),  다윈 Darwin, Charles Robert  (李敏載)

057  곤충기昆蟲記 Souvenirs entomologiques  (1879  -  1910),  파브르 Fabre, Jean Henri  (朴萬奎

058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 Das Relativitätsprinzip  (1913),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尹世元

059  조건반사條件反射 Conditioned Reflexes  (1924),  파블로프 Ivan Petrovich Pavlov  (李基寧)

060  양자론量子論의 물리적기초物理的基礎 Die physikalischen Prinzipien der Quantentheorie  (1930),

       하이젠버그 Werner Heisenberg  (朴惠一)

 

<문학文學 예술藝術>

 

061  일리아드 Illias 오디세이 Odysseia호메로스 Homeros  (趙宇鉉)

062  우화寓話 Fables이솝 Aesop  (洪思重

063  라마야나 Rãmãyana  (B. C. 500  -  300년 경),  (李箕永)

064  오이디프스왕Oidipus tyrannos  (B. C 430  -  420년 경소포클레스 Sophocles  (吳華燮

065  시학詩學 Peri poietikes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 C 400년 경)  (孫明鉉)

066  영웅전英雄傳 Bioi paralleroi  (105  -  115년 경플루타크 Plutarchos  (洪思重

067  아라비안 나이트 Arabian Nights  (850년 경)  (安東林)

068  두공부집杜工部集  (1039)두보杜甫  (李丙疇

069  이태백문집李太白文集  (1080)이백李白  (金宗吉)

070  신곡神曲 Ladivina commedia  (1304  -  1321),  단테 Alighieri Dante  (林明芳

071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1321  -  1323년 경),  나관중羅貫中  (成樂熏)

072  햄리트 Hamlet  (1601)세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呂石基)

073  돈 키호테 Don Quixote  (1604)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尹泰鉉)

074  실락원失樂園 Paradise Lost  (1667)밀튼 John Milton  (柳玲)

075  파우스트 Faust  (1808  -  1832)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郭福祿)

076  괴기담怪奇Tales of the Grotesques and Arabesques  (1830),  포우 Edgar Allan Poe  (李佳炯

077  과 흑Le rouge et le noir  (1839)스탕달 Stendhal  (洪承五)

078  인간극人間劇 La commédie humaine  (1842),  발자크 Honoré de Balzac  (李鎭求

079  서정민요집抒情民謠集 Lylical Ballads  (1850),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李昌培)

080  백경白鯨 Moby Dick  (1851)멜빌 Herman Melville  (梁秉鐸)

081  풀잎 Leaves of Grass  (1855)휘트만 Walt Whitman  (金容權)

082  와 벌Prestuplenie i nakazanie  (1856),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  (金鶴秀)

083  Les fleurs du mal  (1857)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河東勲)

084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1862)  빅토르 위고 Victor  -  Marie Hugo  (方坤)

085  전쟁과 평화  (1864  -  1869),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金鶴秀)

086  교양敎養과 무질서無秩序 Culture and Anarchy  (1875),  아놀드 Matthew Arnold  (金鎭萬)

087  인형人形의 집 Et dukkehjem  (1879)입센 Henrik Johan Ibsen  (李根三)

088  허클베리 핀의 모험冒險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  트웨인 Mark Twain  (金容權)

089  배덕자背德者 L'immoraliste  (1902)지드 André Gide  (朴玉茁)

090  율리시즈 Ulysses  (1922)조이스 James Joyce  (羅英均)

091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  (1922),  엘리어트 Thomas Stearns Eliot  (金禹昌)

092  두이노의 비가悲歌 Duineser Elegien  (1923),  릴케 Rainer Maria Rilke  (具翼星)

093  의 산Der Zauberberg  (1924)토마스 만 Thomas Mann  (李東昇)

094  Das Schloss  (1926)카프카 Franz Kafka  (李御寧)

095   채털리 부인의 사랑 Lady Chatterley's Lover  (1928),  로렌스 David Herbert Lawrence  (鄭炳祖)

096  인간조건人間條件 La condition humaine  (1933),  말르로 André Malraux  (河東勲)

097  구토嘔吐 La Nausée  (1938)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吳鉉堣)

098  이방인異邦人 L’Etranger  (1942)까뮤 Albert Camus  (李彙榮)

099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  (1952),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  (金秉哲)

100  의사醫師 지바고 Doktor Zhivago  (1957),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vich Pasternak  (李東鉉)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  1

(001  베다 Veda  -  050  나의 투쟁鬪爭 Mein Kampf)

 

 

 001  베다 Veda (B.C 1200? - A.D 1500년 경)

 

VedaB.C 1500년 경을 중심으로 India의 서북부 판잡Punjab지방에 침입한 아리안Aryan 의 종교 - 브라만Brahman의 근본성전根本聖典이다.

Veda란 이름 밑에는 다음과 같은 네 부류部類의 문헌文獻들이 포함된다.

. 산히타아(본집本集) - 만트라Mantra 즉 찬가讚歌, 가사歌詞, 제사祭詞, 주법용찬가呪法用讚歌를 포함하는 기본적부분

. 브라후마나(범서梵書) - 본집에 따라오는 것으로 제사의 설명을 위주로 하는 산문散文

. 아아라냐카(삼림서森林書) - 삼림森林속에서 전수傳授될 비의秘義, 비법秘法을 실은 문헌

. 우파니샤드(오의서奧義書) - 우주만상宇宙萬象의 일원一元을 말하는 철학적 문헌으로써 다의 마지막부분을 형성하는 까닭에 베다안타(베다의 결미結尾, 베다의 극치極致)라고도 불린다.

인디아의 전승傳承에 의하면 네 부분은 인간의 저작著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고대古代의 성현聖賢들이 영감靈感으로써 마음의 귀로 들은 계시啓示라고 간주看做되어 천계天啓문학(Shruti, 하늘의 계시문학)이라고 총괄總括한다.

베다는 본질적으로 종교문헌이며 애초부터 제사祭祀와 관련되어 발달된 것이다. 베다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종류가 있다.

. 리그 베다(Rig Veda) - 신을 모셔오려고 읊는 호트리제관祭官의 관계

. 사마 베다(Sama veda) - 제사 중에 찬가를 곡조曲調에 맞춰 노래하는 우드가트리제관의 관계

. 야주르 베다(Yajur - veda) - 제사를 지내는데 필요한 실무를 담당하는 아드바르유제관의 관계

. 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 - 위의 세 가지 베다와는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본래 주법呪法에 관한 것이었으나 나중에 제사 전반을 총 관리하는 브라흐만제관의 관계

일반적으로 베다라고 하면 그 기본부분인 본집만을 가리키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파니샤드에까지 이르는 전체 문헌이 다 포함된다. 베다문헌의 구성은 종파宗派의 발달로 인하여 더욱 복잡화되었다. 종파마다 별개의 베다를 편찬했으므로 종류가 많아졌다. 현존하는 리그베다본집은 한 가지이나 이에 대한 브라흐마나 이하 다른 문헌에는 각각 두 가지씩이 전해온다.

사마베다본집에는 세 가지 아타르바베다본집, 야주르베다본집에는 각각 두 가지가 있다. 야주르베다는 백야주르와 흑야주르의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만트라만 모은 것을 백, 만트라(불교나 힌두교에서 기도 또는 명상 때 외우는 주문 또는 주술呪術)와 산문散文의 서명誓命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흑이라고 부른다.

이상으로 넓은 의미의 베다가 얼마나 대규모의 문헌군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여기에다가 베다에 딸린 많은 보조문헌(특히 제식祭式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간추린 수드라류) 주석서류註釋書類를 보태면 일대 총서叢書, 대규모 저작물)가 된다.

그러나 베다는 어디까지나 제사祭祀에 관한 기술記述이 근본이며 결코 사실史實의 기록이나 철학, 윤리의 기록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문학적가치로 말하더라도 각 부분마다 현저한 차이가 있다. 주요한 문헌들의 성립에도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 성립은 대략 B.C 1200년경부터 A.D 500년까지로 추정된다. 그동안 브라만교문화의 중심은 서북인디아에서 북인디아의 중앙부 간지스강유역으로 옮겨왔으니 성립환경과 성립장소에도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우리는 베다문학을 구성하는 전체의 상세한 해명을 할 수 없으므로 그 중 리그베다, 아타르바베다, 브라흐마나, 우파니샤드에 관한 개별적 설명을 하기로 한다. 현재 유포되는 리그베다본집은 야카라파에서 내려오는 경전으로 10권으로 나뉘어있으며 1028의 찬가가 수록되어있다. 2권에서 제 7권까지는 고대의 제관祭官들이 대대로 읊어온 시들을 모은 것으로 이 책의 중핵中核을 이룬다. 1권과 제 8권은 중핵부에 추가된 부분으로써 제 9권은 소마신에게 바친 찬가를 포함하는 특수한 성격이며, 10권은 최신작이다. 이 책은 베다문학 중 가장 오래된 책(B.C 1200 - A.D 1300)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책으로 판잡에 침입한 아리안인의 종교, 신화神話, 생활습관을 알게 하는 근본자료다. 당시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다신교적多神敎的이지만 그러면서도 다수의 신들은 차례를 바꿔가며 최상급의 찬미讚美를 받는다. 신들 중에는 기초를 이루는 자연현상을 명시明示하는 것이 있고, 추상적抽象的인 개념槪念이 신격화神格化된 것이라고 볼만한 것도 있다. 신들에 대한 일반적 찬가 외에 철학적사색思索이 깃든 찬가도 있다. 훌륭한 찬가로 신들의 환심을 얻고 그 결과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생각이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각 신격神格에 바쳐진 찬가의 수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인드라신에게는 약 250찬가, 아그니신에게는 약 200찬가다. 그러나 인드라 못지않게 중요한 바르나신에게 바친 찬가는 근소僅少하며, 그 반려伴侶인 미트라신에게는 단 한 개가 있을 뿐이다.

리그베다의 언어는 베다어의 최고층最高層에 속하는 것으로 지극히 난해難解하다. 표현이 솔직하지 않으며 비유比喩, 과장誇張, 암시暗示, 생략省略이 뒤섞여 있고, 매우 기발奇拔한 표현으로 사람들의 의표意表에 나서기를 좋아한 경향이 엿보인다.

현재 유포流布되고 있는 아타르바베다본집은 샤우나카파 소전所傳으로 20권으로 나뉘고 731개의 찬가가 수록되어있다. 주법용呪法用찬가가 그 중심이다.

1권으로부터 제 7권까지 수록된 짧은 노래가 가장 그 모습을 잘 드러내고 제 8권에서 제 12권에 실린 장가長歌도 그러한 경향을 나타낸다. 다른 권들은 그 제목이 붙어 내용은 제목대로다. 예컨대 제 14권은 결혼의식에 필요한 시구詩句, 19권은 장례식에 필요한 시구다. 19권과 제 20권은 후세의 추가다.

아타르바베다의 특색은 중심부분이 민간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다는 점에서도 들어난다.

브라흐마나문헌은 B.C 800년경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간지스강 평원의 브라마니즘의 교권敎權이 확정되고, 복잡한 제사체계가 완성되었을 무렵의 소산所産이다. 본래 제식祭式에 관한 설명을 목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찬가, 제사祭祀의 의의, 용도用道, 제식祭式의 순서, 방법, 그 기원基源과 비의秘義를 밝히고 있다. 이 문헌에 문학적요소를 기대할 수는 없으나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설명이지만 신화神話, 전설傳說, 고담古談이 삽입揷入되어 있다.

브라흐마나의 내용은 제식의 규칙을 설명하는 부분(의궤儀軌)과 그 의의, 유래를 설명하는 부분(석의釋義)으로 나뉜다. 흥미있는 신화, 전설, 철학, 사상은 이 후자에 포함된다. 제식의 종류는 매우 많고 그 조직, 규칙도 매우 복잡해서 옛날에는 제사는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빌며, 그 은총을 받는 것이었으나, 브라흐마나시대에는 신들을 강제하는 독자적인 힘을 가진 메카니즘mechanism이 되고, 사제가 교만의 극에 달해 스스로 신이라고 자칭하기에 이르렀다. 신들은 인간의 이상상理想像에 불과했고, 그들도 일찍이 제사를 행해 그로 인해 승천昇天하여 지금과 같이 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제식의 주 목적은 제주祭主인 왕후귀인王侯貴人이 사후死後 승천하여 신들처럼 불사不死가 되는 데에 있다. 물론 현세적인 가지가지의 원망성취도 그 안에 포함되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욕망이 성취된 내세來世에 있어서 다시는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 염원이다.

Upanisad는 넓은 의미의 Vedanta라고 불린다. 오랜 기간에 걸쳐 차례로 성립한 총수總數 200에 가까운 산문散文 또는 운문韻文으로 된 책을 총칭한다. Upanisad의 말 뜻에 관해서는 고래古來근접近接, 근좌近坐의 뜻으로 풀어 사제司祭 간의 근접, 비의秘義, 전달을 의미하는 것인 양 해석해왔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브라흐마나 이래로 여러 문헌에서 대조對照, 대질화對質化의 뜻으로 쓰였고, 또 의미상으로도네가 그것이다 tat tvam asi’ 하는 대우주大宇宙와 소우주의 대조, 결합結合관계란 Upanisad철학 본 취지와 일치하므로 이 말의 뜻을 <마법적동일화魔法的同一化>로 해석하기도 한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Upanisad란 이름의 책이 나타나왔고, 그 수는 108에 이르고있으나 그 중 13만을 VedaUpanisad로 하여 다른 것과 구별한다. 13개의 Upanisad를 문체별로 구별하여 적기摘記하면 다음과 같다.

. 산문散文 Upanisad : 브리하다아랴나카, 차안도오갸, 카오쉬이타키, 아이타레에야, 타이티리이야, 케에나

. 운문韻文 Upanisad : 이이샤이, 카타, 슈베에타아, 슈바타라, 문다카

. 산문 Upanisad : 프라슈나, 마안두우캬, 마이트리

Upanisad들의 연대는 B.C 600년경부터 A.D 200년경까지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Upanisad의 중심사상은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근본원리를 탐구하는 데 있다. 하나이며 일체一切, 상대를 떠나 비교할 바 없고, 언설言說과 사려思慮를 절한 불립문자不立文字(, 1)의 경지境地, 불멸불변한 우주적 개인적 궁극원리를 완전한 일치를 통해 발견하는 이 원리는 Upanisad철학의 장관壯觀이다.

인디아에 있어서는 철학과 종교 사이에 명확한 한계가 없다. Upanisad에 있어서도 이상은 해탈解脫(, 2)에 있다. (, 3) 즉 선악의 행위의 과보果報(업보業報)에 따라 신, 인간, 벌레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를 취하며 생의 고통을 되풀이한다는 교의는 가장 오래된 Upanisad에 나타난 이후 인디아의 종교 윤리의 근간이 되었다. 요컨대 천상계天上界의 행복이라 할지라도 유한有限하다. (, 브라만Brahman) (, 다트만)의 진성眞性을 깨달음으로써 업의 격속(묶임)을 떠나 윤회전생輪廻轉生(, 4)에서 벗어나, 범아일여를 실현시키는 것이 이상이며 해탈이다.

저자는 철인이며 명상가瞑想家며 또한 시인이다. Upanisad 안에는 순수한 철리 이외의 신비적인 공상, 통속신앙通俗信仰의 표현 등이 없지 않다. 따라서 논리적 일관성을 구하는 자로써는 실망하게 된다. 또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Upanisad에는 후세의 샹캬철학(, 5), 요가(, 6)과 공통되는 요소가 늘어나고 또 본래 중성中性이었던 근본원리를 신격화되는 경향이 강하게 되며, Hindu교와 관련이 현저하게 된다. Veda문헌들 중에서 가장 일찍이 Europe의 학계에 소개된 것은 Upanisad이다. France의 앙크틸 듀페롱은 1801 - 1802년 간에 50편의 Upanisad를 페르시아어로부터 라틴어로 옮겨 출판했다. 이것을 페르시아 이름을 따 우프네가트Oupnekhat라고 했다. 도이치의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읽고내 삶과 죽음의 위로慰勞라고 격상激賞하였다. 근대 인디아의 종교 사회의 순화純化운동에 있어서도 Upanisad의 사상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라흐마 사마쥬(브라우마협회協會)의 창시자創始者 람 모한 라아이(1772 - 1833)은 자기주장의 중심사상을 여기에서 찾아 Upanisad 연구의 기운을 촉진促進시켰다.

끝으로 우리는 보리하다라냐카 Upanisad 5절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독자의 음미吟味를 바라기로 한다. 이 구절은 선인仙人 야아지냐발캬가 그의 아내의 물음에 대답하여 불사不死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상대가 있을 때, 거기에서 하나는 다른 것을 보고, 거기에서 하나는 그 다른 냄새를 맡고, 거기에서 하나는 그 다른 것을 맛보고, 거기에서 하나는 그 다른 것에 말하고, 거기에서 하나는 그 다른 것으로부터 듣고, 거기에서 하나는 그 다른 것에 접촉하고, 거기에서 하나는 그 다른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일체가 아아트만이 되었을 때, 거기에서 그는 무엇으로써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거기에서 그는 무엇으로써 무엇에 접촉할 수 있을까? 거기에서 그는 무엇으로써 무엇을 인식할 수 잇을까? 그것으로써 일체一切(우주)를 인식하는 바로 그 것, 그것을 무엇으로써 인식할 수 있을까? 이 아아트만은 오직비야非也 비야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불가착不可捉이다. 왜냐하면 그는 포착捕捉되어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는 불가괴不可壞. 왜냐하면 그는 파괴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는 속박束縛되지 않고 동요動搖하지 않으며, 훼손毁損되지 않는다. ! 인식자認識者(순수인식의 주체主體)를 무엇으로써 인식할 수 있을까? 그대는 이미 이와 같이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마이트레에이여! , 불사不死란 실로 이와 같은 것이니라.’

 

. <주석註釋 1>  불립문자는 선의 종지終止를 표현하는 어구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 가운데 일구로서 일반적으로 교외별전의 일구와 함께 언급된다.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은 언설과 문자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언설과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다.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자재하게 활용하는 선의 입장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선종禪宗에서는 교학敎學에서 경론經論의 문자와 교설敎說만을 주된 것으로 삼아서 연구하고 강조하는 것은 불교의 진정한 정신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정법正法은 단순한 문자와 경교經敎에 의거하지 않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승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체험을 중시하여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종지를 주장한다.)

. <2>  해탈, 인간의 영혼이 윤회samsara의 속박bandha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이 일단 육체 속에 들어간 뒤에는 해탈을 이루는 완전함이나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윤회를 계속한다. 해탈을 추구하거나 얻는 방법은 학파마다 서로 다르지만 대부분의 학파가 해탈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간주한다.

. <3>  karma, 업보설은 이생에서의 삶이 전생에서 행한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인도인들의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사상은 불교와 자이나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디아인들은 업보설을 당연한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서, 업은 몸으로만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입과 생각으로도 짓게 되는 것으로 보아 신업·구업·의업이란 3업의 개념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업은 선업과 악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특정행위, 즉 업이 산출한 도덕적 힘은 보존되어 다음 삶에서 그의 계급과 본성·기질·성격 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업의 법칙으로 현세에서 나타나는 생명체 사이의 불평등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과거의 업은 다음 생 뿐 아니라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저승에 있는 기간 동안 행복할 것인가 불행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 <4>  윤회輪廻, 생명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것으로 이를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한다. 육도 중 첫째는 지옥도地獄道로서 가장 고통이 심한 세상이다. 지옥에 태어난 이들은 심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둘째는 아귀도餓鬼道이다. 지옥보다는 육체적인 고통을 덜 받으나 반면에 굶주림의 고통을 심하게 받는다. 셋째는 축생도畜生道로서, 네 발 달린 짐승을 비롯하여 새·고기·벌레·뱀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넷째는 아수라도阿修羅道이다. 노여움이 가득 찬 세상으로서, 남의 잘못을 철저하게 따지고 들추고 규탄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 다섯째는 인간이 사는 인도人道이고, 여섯째는 행복이 두루 갖추어진 하늘 세계의 천도天道이다. 곧 인간은 현세에서 저지른 업에 따라 죽은 뒤에 다시 여섯 세계 중의 한 곳에서 내세를 누리며, 다시 그 내세에 사는 동안 저지른 업에 따라 내내세에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윤회의 여섯 세상에는 절대적인 영원이란 없다.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면 지옥에서 다시 인간도로, 천국에서 아귀도로 몸을 바꾸어서 태어난다. 곧 육도의 세계에서 유한의 생을 번갈아 유지한다는 것이 불교의 윤회관임

. <5>  상캬 Shankha, 샹캬철학은 인도의 6파 중 하나로 인간의 경험적인 존재상황을 '' 라고 보고 이 '' 에서 해방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무신론적 이원론인 샹캬는 우주의 근원적 두 실재를 뿌르샤와, 쁘라끄리티로 제시하고, 우리의 생성을 이둘의 원초적 접촉으로 인한 전변으로 설명하고 있다. 샹캬에 따르면 뿌르샤는 모든 속박과 제약에서 자유로운 순수의식 또는 중성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로 정적이고 행동하지 않는 관조자 이며 변화 하지 않는다. 반면에 쁘라끄리키는 물질세계를 존재하게 만드는 질료적 원리로서 관조자 이다. 이 쁘라끄리티는 3구나로 이루어져 있는데

- Sattva 쾌활하고 밝아 즐거움을 주는 작용을 한다.

- Rajas 자극적이고 활동적이어서 행위를 야기하는 작용을 한다.

- Tamas 무겁고 감싸는 성질이 있어 무관심을 가져오고 행위를 억제시키는 작용을 함

. <6>  요가 yoga, 요가는 명상과 호흡, 스트레칭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심신 수련 방법을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yuj’(결합하다)에서 시작해서 ‘yoga’가 되었으며, 요가의 모든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마음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가는 맺음을 말하며 음역하면 유가가 되고 의역하면 상응한다는 뜻이 된다. Patanjali가 지은 요가 수트라(yoga sutra)의 제12절에서는 요가란 마음의 작용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조절하고 마음의 움직임을 억제하여 인간 본래의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상태를 요가라고 한다. 요가는 종교가 아니고, 마음··정신의 융화와 경험의 방법론이다. 요가는 정신적인 도구상자이고 육체적인 건강과 안녕임) 돌아가는 상태를 요가라고 한다. 요가는 종교가 아니고, 마음··정신의 융화와 경험의 방법론이다. 요가는 정신적인 도구상자이고 육체적인 건강과 안녕임

 

002  대장경 大藏經 Tripitaka (B. C. 1200년 이래 2500여 년 동안 성장 발전), 삼장 三藏 

 

불교의 경전이나 논서論書를 모은 총서叢書를 대장경이라고 한다. 이에는 크게 나누어 세 가지 부류의 문헌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를 삼장三藏이라고 부른다.

2500년 이상의 긴 기간에 걸쳐 불교는 발달해왔으므로 경전의 내용은 단순치 않다. 가장 오래된 것은 파알리어(속어俗語의 일종으로 구송口誦되다가 그후 파알리어로 정착)로 된 삼장이다. 원시불교성전으로써 불타佛陀가 가르친 교훈敎訓(경전經典)과 계율戒律(율장律藏) 및 이 교법敎法에 관한 제자들의 연구(논장論藏)를 포함하고 있다.

논장은 부파部派불교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가장 후대의 것이지만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은 보다 더 일찍 성립되었다. 파알리어삼장에는 대승大乘(, 1)경전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티베트대장경은 티베트어로 번역된 대장경을 말한다. 7세기경에 번역이 시작되어 9세기에 대부분 역출譯出되고, 그후에도 번역이 계속되어 티베트대장경이 성립되었다. 인디아에서 불교가 소멸된 까닭에 인디아 후기불교의 문헌은 티베트역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많다. 그러한 의미에서 티베트대장경은 불교연구의 귀중한 보고寶庫. 특히 티베트어역은 충실한 직역直譯이므로 티베트역으로부터 산스크리트원전原典을 복원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산스크리트원전이 상실된 경론의 연구에는 티베트역이 불가결不可缺의 자료가 된다. 티베트대장경은 13세기 이후 수차례에 걸쳐 목판木版으로 출판되었다. 최근 일본에서 북경판北京版 티베트대장경을 사진판寫眞版으로 인쇄하여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대장경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것은 한역漢譯대장경이다. 이는 중국어로 번역한 삼장에다가 중국인, 신라인 등의 저작을 포함하여 편집한 것으로 대승大乘 소승小乘의 문헌을 다 포함하고 있으며, 분량도 가장 많다. 불교연구의 제1자료다. 우리나라 해인사 소장의 팔만대장경은 가장 정확한 한역漢譯대장경본이다. 삼장의 한역은 서기 2세기부터 약 천 년 동안에 걸쳐 번역된 것이며 보존이 잘 되어있고, 중국인의 불교 수용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파알리어삼장은 현재 동남아 여러 불교국가에서 전거典據로 중시하며 불멸후佛滅後 각 부파部派들에서 받들어온 것이다.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

1. 율장律藏

(1) 경분별經分別(계율의 본문을 분별하여 해설)

대분별大分別(남자 수행승修行僧의 계율)

비구니比丘尼분별(여자 수행승의 계율)

(2) 건도부健度部(교단의 제도규정, 기타)

대품大品(10)

소품小品(12)

(3) 부록附錄(19)

2. 경장經藏

(1) 장부長部(불타佛陀나 제자들의 언행言行을 모은 긴 경전 34경의 집성集成)

(2) 중부中部(길지도 짧지도 않은 경전 152)

(3) 상응부相應部(짧은 2875경을 내용별로 집성)

(4) 증지부增支部(짧은 2198경을 교법敎法의 수대로 집경集經)

(5) 소품小品(4부의 누락된 것 15, 이 중에는 법구경法句經, 본생경本生經 등 불교 최고의 유명한 성전聖典이 적지 않게 들어있음)

3. 논장論藏(77)

파알리어3은 인디아 및 동남아 불교사상 오랜 세월에 걸쳐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초부터 서양인들이 이를 연구하게 된 이후의 일이다.

티베트대장경의 내용은 크게 나누면 칸주르(감수이甘殊爾), 단주르(단수이丹殊爾)의 둘이다. 전자는 불설부佛說部, 후자는 논소부論疏部. 파알리어삼장과 비교하면 율장이 불설부로써 전자에 들어 두 개로 나눠지는 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칸주르에는 율, 반야般若, 화엄華嚴, 보적寶積, 제경諸經, 비밀秘密6부가 들어있고, 탄주르에는 증송證頌, 비밀秘密, 반야般若, 중관中觀, 경소經疏, 유식唯識, 구사俱舍, , 불전佛傳, 서한書翰, 인명因明, 성명聲明, 의명醫明, 공교명工巧明, 의 제부諸部가 들어있다. 티베트대장경은 원전原典에 대한 충실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9세기에는 기본역어譯語집으로써 마하아비읏트파티(번역명의집飜譯名議集)라는 책이 성립되어 역어의 정리, 통일이 이루어지고, 역서목록도 만들어져 13세기에 이르러 드디어 대장경의 편집이 이루어지고, 목판본木版本이 나오게 되었다. 주요판본으로는 나르탕본(13세기, 15세기, 17세기, 18세기), 데르게본(18세기) 등이 있다.

티베트대장경의 특색은

. 한역漢譯과 공통되는 경론經論551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문헌 중 3,000부 이상이 밀교密敎 관계

. 한역이 의역意譯인데 비해 티베트역은 축어역縮語譯

. 이역본異譯本을 남기지 않고 차례로 개역改譯하고 구역舊譯을 버렸고

. 원칙적으로 티베트인의 저작을 대장경에 넣지 않았다

대장경이란 말은 중국에서 생긴 말이다. 6경전과 중국인 찬술撰述의 문헌 등을 포함시키게 되었을 때 3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적당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불교경전이 최초로 번역된 것은 안세고(安世高 A.D 148- 180)는 후한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역경승譯經僧의 도래渡來 이후다. 역경이 진척됨에 따라 여러 가지 목록이 작성되었다. 대장경은 처음에 필사筆寫로 전해지다가 송대宋代(송조宋朝, 960~ 1279년은 중국의 옛 왕조) 이후 목판본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송판宋版(5,000여 권), 고려高麗, 원나라, 명나라판 등이 나타났다.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개판開版이 시도되었는데 매번 그 저본底本(기본)이 된 것은 고려판본이다. 현재 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대정大正(일본 연호年號)신수新修대장경(1924 - 1934)인데 이것 역시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모두 100권의 이 대장경은 인디아 및 중국찬술부 55, 일본찬술부 29, 돈황敦煌사본寫本 1, 도상부圖像部 12, 목록 3권으로 나뉘어있다. 최초의 55권의 내용은 아함부含部, 본연부本緣部, 반야부般若部, 법화부法華部, 화엄부華嚴部, 보적부寶積部, 열반부涅槃部, 대집부大集部, 경집부經集部, 밀교부密敎部, 율부律部, 석경론부釋經論部, 비담부毗曇部, 중관부中觀部, 유가부瑜伽部, 논집부論集部, 경소부經疏部, 율소부律疏部, 논소부論疏部, 제종부諸宗部, 사전부史傳部, 사휘부事彙部, 외교부外敎部, 목록부目錄部.

이러한 배열은 경전의 역사적발전의 순서를 고려해서 내용별로 분류한 것이다. 인디아 및 중국 찬술부에 들어있는 불전佛典의 총수는 2,184종에 달한다. 그 중 중요한 대승경론에 관해 간단히 해설한다.

반야부의 중요경전은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이라고 불리는 600권의 대문헌이 있다. 이 경은 반야부경전이 집대성集大成된 총서다. 반야경으로써 보다 적은 분량으로 중요한 것은 대품大品반야경(30권 또는 40), 소품小品반야경(10), 그리고 금강경, 반야심경 등이 있는데, 대품반야는 25,000으로 구성되어있고, 소품반야는 8,000송으로 구성되어있다. 모두 산스크리트어(, 2)원본原本의 번역이다. 금강경은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 일본 등지에서 중요시된 것으로 수백 종의 주석서가 나올 정도로 크게 유행한 것이며, 반야심경을 반야사상의 중심 골자骨子로 요약하여 독송讀誦이 편리하게 만든 것이다.

법화부의 중심은 법화경(7권 내지 8)이다. 묘법연화경, 정법화경이라고도 번역되었다. 고대 인디아에는 서기전부터 비구교국比丘敎國과는 따로 재가在家의 보살菩薩을 중심으로 보살국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 진보적인 신앙심이 강한 나라가 나타나 서기전부터 신경전결집新經典結集이라는 교문학운동을 일으켰다. 그 하나로 서북인디아에서 결집된 것 중 하나가 법화경이다. 산스크리트어원본이 현존하며, 한역漢譯도 여섯 가지나 되었는데, 현존하는 것은 셋뿐이다. 우리 국역을 비롯해 위구르어(, 3), 사하어(, 4), 몽고어역, 만주어역, 일어역 등이 나왔고, 19세기에는 프랑스어역, 영어역이 나왔다. 이 경의 중심사상은

. 불신상주佛身常住(불타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언제나 살아계신다는 주장)

. 13(붓다의 여러 가지 가르침은 모두 한 가지로 귀일歸一한다는 주장,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의 3은 대중이라는 1승에 귀착歸着한다는 취지)

등이다. 나라의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538 - 597)는 법화3대부大部라고 불리는 세 가지 주석서(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文句, 마하지관止觀)을 내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법화경(대방광불大方廣佛화엄경)에는 60권본과 80권본이 있어, 60화엄경(타발多羅譯), 80화엄경()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경은 처음부터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성립되었다가 나중에 집대성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집대성의 시기는 4세기경이 아닌가 추정한다. 장소는 중앙아시아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여러 장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은 십지품十地品(독립경전으로써는 십지경)이며, 그 성립년대는 1세기에서 2세기라고 추정한다. 현재 남아있는 산스크리트어원전은 십지품과 입법계품入法界品이다.

이 경의 내용은 붓다가 성도成道한 그 대각大覺의 내용을 그냥 그대로 vyaud表明한 것이라고 한다. 60화엄에 의하면 7834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78회는 설법說法의 장소와 회좌會座의 수를 말한다. 설법이 진행됨에 따라 회좌의 장소도 점차 상승하고 있다. 설법의 내용에는 사체四諦와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이 중심이 되어있다.

보적부寶積部에는 대보적경(49120)이 중심인데 대보적경은 49개의 독립경전류가 집대성된 것이다. 보적이란 말은 법보法寶의 집적集積이라는 뜻이다. 보적경을 구성하는 각 단독경單獨經들은 각각 독자적인 색채色彩를 가지고있고, 일관된 특색은 없다.

열반부의 중심경전은 대반大般열반경이다. 한역漢譯에 두 가지가 있는데 40권본을 북본北本열반, 36권본을 남본南本열반이라고 한다. 열반경의 소론所論

. 불신상주佛身常住(의 본체本體는 법성法性, 법신法身에 있으며, 법성, 법신은 상주常住라는 것, 반야경 이래 대승大乘불교의 불신론佛身論을 철저히 함)

. 일체중생슬유불성一切衆生有佛性(불성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음을 강조)

. 대집부大集部는 대집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붓다가 시방十方의 불 보살을 모아놓고 대승의 진리를 설한 것으로 공사상에 밀교적密敎的요소가 농후濃厚하게 들어있다.

경집부經集部에는 미륵육부경彌勒六部經, 유마경維摩經 등 유명한 경을 비롯한 다수의 경들이 포함되어있다. 유마경은 반야경에 뒤이어 나타난 초기 대승경 중에서도 오래된 것 중의 하나다. 비말라키일티라는 거사居士가 여러 보살들에게 설법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교리상으로는 반야심경이 중심이며 아울러 대승보살의 실천도實踐道를 격양擊攘하고, 한편 재가신자在家信者의 종교적덕목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경집부에 들어있는 다른 경들 중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경전의 이름을 열거하면

. 금광명경金光明經 - 아시아에 널리 분포되고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었다. 한역漢譯에 다섯 가지가 있다. 불교의 호국적護國的성격이 강조되어 중국에서는 역대歷代 군왕君王들이 소중히 여겼다.

. 악가경 - 랑카아바타아라 수우트라의 음역音譯, 범본梵本이 현존한다. 여래장如來藏과 아얄라야식의 사상을 결합시켜 후대의 기신론起信論사상의 선구先驅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해심밀경解深密經 - 경의 성립은 A.D 300년 전후로 추정한다. 중기中期대승경전에 속한다. 유식唯識유가학파의 근본전거典據. 이 경을 토대로 섭대승론, 성유식론成唯識論이 성립,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중국인 영인令因의 소와 신라의 원측圓測, 원효元曉, 경흥의 소가 유명하다.

 

. <1>  만인의 구제를 내세우는 불교의 한 종파. 한국·중국·일본·티베트에 널리 전파되어 있다. 1세기 무렵 붓다의 가르침을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불교에서 소승불교에 대비해 보살사상을 강조하는 불교운동. 대승大乘이란큰 수레를 뜻하는 범어 마하야나Mahāyāna의 한역어로 소승小乘, 즉 히나야나Hinayāna에 맞서는 말

. <2>  산스크리트어 संस्कृता, saṃskṛtā 또는 범어梵語는 인디아의 고전어古典語, 힌두교 대승불교 자이나교 경전의 언어이자 수많은 인디아 아리아 諸語의 고급 어휘의 근간을 구성하는 언어

. <3>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아시아 내륙지방의 민족. 예전에 중국에서는 회흘回紇·회골回鶻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은 중국 북서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러시아연방의 중앙아시아지역에 살고 있음

. <4>  야쿠트어 또는 사하어는 투르크어족에 속한 언어다. 사하공화국에서 363,000명이 쓴다. 사용자가 야쿠트인이다. 야쿠트어는 쇼르어, 투바어, 돌간어와 함께 북동투르크어족에 속해있다. 핀란드어, 헝가리어, 터키어, 사하어는 모음조화가 있음

 

003  논어 論語 (2500년 경), 공자 孔子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학자, B. C 551 - B. C 479)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中尼이다. 나라 출신으로, 육경六經을 정리하고 인, , 효제孝悌, 충서忠恕 등 윤리도덕을 가르쳤다. 유학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지며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 7권이 있음)

유학儒學의 교조敎祖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言行錄인 논어論語(학이學而 - 요왈堯曰 20) 내용 소개에 앞서 공자가 살았던 시대를 살펴본다.

B. C 722년에 시작되어 481년으로 끝나는 242년간을 중국사에서는 춘추春秋시대라고 일컫는다. 춘추라는 시대의 칭호稱號는 공자가 그의 조국祖國인 노나라의 공식기록을 근거로 편찬하였다고 하는춘추라는 책속에 포함되어있는 시대를 의미하는데서 생겼다. 이 시기에 주왕조周王朝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제후국諸侯國들이 명목상으로만 주왕조를 받들고, 실질적으로는 서로 실력으로 타 제후를 굴복시키려는 패권覇權의 다툼이 치열熾烈하였다. 이것이 전국戰國시대로 넘어오면 주왕조의 권위는 회복할 길이 영영 없어지고 제후들도 이제는 제멋대로 왕을 참칭僭稱하기에 이르렀다. 논어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공자가 목견目見한 노나라의 정치적질서의 문란紊亂도 그 실례의 하나이거니와 분립된 각 제후국의 안에서도 내란內亂이 자주 일어나 제후의 실권은 점점 제후국 내의 유력한 귀족의 집안에 빼앗기게 되고, 더 나아가 그 귀족의 가신家臣의 손에 넘어가는 하극상下剋上의 불상사不祥事가 속출續出하였다. 이러한 무정부적 혼란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공자는 노나라의 연대기年代記에 붙여서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臣下와 어버이에게 불효하는 자식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들의 행위를 드러나게 기록하여 필주(筆誅, 붓으로 죽임)를 하였으니 이것이 곧 춘추의 편찬이다. 춘추의 저자가 공자라는 데에는 많은 이의異意가 있기는 하지만, 맹자孟子(공자의 정통유학을 계승 발전시켜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일컫음)공자성춘추孔子成春秋, 이난신적자구而亂臣賊子懼즉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는 기록(등문공장구하騰文公章句下)이 있는데 이러한 하극상의 난신적자에 대한 격렬한 노여움은 곧 논어에도 발로發露되어있으며, 공자의 정치사상은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 형성되었다. 혈연血緣주의적인 유대紐帶로 결합된 주왕조의 씨족氏族국가연합이 토지사유私有의 기초 위에 성립한 정치적 영토국가로 분열되어가는 과정에서 야기惹起된 사회질서의 파괴는 사회질서 확립의 욕구와 아울러 인간존재에 대한 관념觀念의 반성을 당시의 사상계思想界에 요구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최초로 정리된 사상을 가진 사람이 곧 공자였다.

공자의 성은 공, 이름은 구이고, 는 중니中尼이다. 공자의는 경칭敬稱이다. 춘추시대 후기 주영왕 20년에 태어나 경왕 41년에 74세로 몰하였다. 공자의 사적事蹟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世家에 기록되어있다. 사기의 공자세가는 공자의 전기傳記 중 가장 신뢰받는 기록이나 몇 가지 의문이 있어 후세 학자의 논란이 된다. 공자의 조상祖上은 송나라로부터 망명亡命하여온 망명귀족이라고 하여 공자가 귀족계급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나, 계보系譜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으며, 가령 정확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이미 공자의 대에 와서는 귀족계급으로부터 탈락脫落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공자는 몰락沒落 귀족출신이다. 그는 무인武人 공흘孔紇을 아버지로 안씨의 딸 징재徵在를 어머니로 하여 2남으로 태어났다.

논어 위정爲政편에는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吾而志于學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이립三十而立 30세에는 학문의 세계를 알았으며, 사십불혹四十而不惑 40살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50세에는 천리天理를 알고,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60세에는 하는 일이 순리대로 되었으며, 칠십이종신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70이 되자 마음 먹은대로 해도 법도法道에 어긋나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의하면 15세부터 30세까지는 수련기修練期였고, 30세가 되어 비로소 사회에 진출한 것 같다. 그런데 맹자(萬章章句下)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처음에는 노나라의 하급관리下級官吏(위리委吏 - 회계를 맡은 관리, 승전乘田 - 소와 양을 맡은 관리)였다. 차차 인정을 받았고, 자신도 지조志操와 견식見識4, 50대에 확립되어 사기史記에 의하면 중도中都의 재(읍장邑長)가 되고 사공司空(토지 민사民事를 관장하는 벼슬)이 되고, 52세에는 대사구大司寇(법무장관)으로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의 상고적尙古的인 이상理想주의는 노골적인 권력주의에 의해 용납되지 않아 56세 때부터는 노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위, , , , , 의 제후諸侯들에게 유세遊說(주유천하周遊天下)하기를 14, 결국 정치의 희망을 잃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뜻을 얻지 못하고 도를 행할 자리를 잃은 체 방황하고 전전輾轉하는 공자의 모습은 누연상가지구然如喪家之狗 즉 상가의 개(공자가어, 인서편因誓篇)의 인상을 주었다고 풍자諷刺하고, 한편 의읍儀邑의 봉인封人에게는 하늘이 내린 거리를 누비는 목탁木鐸(논어 팔일편八佾篇)으로 비치기도 했다.

공자의 노나라는 지금 산동성이 작은 나라이지만 주왕조의 기초를 확립한 최초의 대 정치가인 주공의 아들 백금伯禽이 제후로 책봉된 나라이므로 주공 이래의 문화적전통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공자는 주공을 깊이 존숭尊崇하였다.‘심의甚矣라 오쇠야吾衰也, 구의久矣라 오불복몽견주공吾不復夢見周公이로다(논어 술이편述而篇)’라고 한 공자의 탄식은 그가 평생 주공을 경모敬慕하였으며 더욱이 젊어서는 꿈결에도 주공을 잊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생각컨대 공자의 생애의 사업은 주공이 제정한 주초周初의 예악禮樂을 재흥再興하여 주공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었다. 제나라가 잘 변해야 노나라처럼 되고, 노나라는 일변하면 도에 이를 것이라고까지 공자가 말(논어 옹야편雍也篇)한 노나라도 주왕조가 종주宗主의 권위를 가진 씨족국연가합이 토지사유의 기초 위에 성립한 정치적 영토국가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야기된 사회질서의 파괴현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사회질서의 파괴와 계급서열의 문란이 혹심하였던 위(노위지정魯衛之政이 형제라, 논어 자로편子路篇)나라와 다를 것이 없을 정도로 변한 노나라에 대한 공자의 실망은 대단하였다. 논어 팔일편八佾篇 첫머리의 몇 장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공자는 하극상의 정치질서 파괴와 실권을 장악한 귀족계급의 참월僭越된 제례祭禮의식의 자행에 대한 격렬한 노여움을 토로하였다. 주공周公(성은 희, 이름은 단. : B.C 1111년경 - 255, 초기에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공자는 그를 후세의 중국 황제들과 대신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로 격찬)에서 이상을 찾은 공자의 상고적인 이상주의는 사회질서 확립에 그의 욕구와 표현이다.

논어의 술이편述而篇에는 공자의 상고적인 발언이 많이 보인다. 공자는술이부작述而不作하며 신이호고信而好古하였다. 옛것을 조술祖述하되 경망輕妄되이 창작하는 것을 삼갔다.‘자왈子曰, 아비생이지지자我非生而知之者, 호고민이구지자야好古敏而求之者也라든가,‘자소아언子所雅言, 시서집례개아언야詩書執禮皆雅言也등도 술이편에 보이는 글이다. 공자가 숭상한 예()는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말하여 시(시경詩經)과 서(서경書經)의 고전古典의 이념과 그 고전을 생활화하고, 규제화한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전의 세계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숭상崇尙하는 것으로부터 나아가 그 고전의 세계의 창조자인 주공의 위대한 인격을 경모하기에 이르렀다. 논어의 곳곳에서 우리는 공자와 제자의 문답속에 이 시 서의 두 고전이 인용되고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고주의자 공자는 그의 정치사상에서도 금세今世의 혼란을 미워하면서 명분名分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명正名사상을 제기提起하였다.‘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치를 하려는데 선생님께서는 무엇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까?’라는 제자 자로子路의 질문에 공자는반드시 명분名分을 바로잡겠다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인저(논어 자로편)하였으며, 정치의 요체要諦에 대한 제나라 경공景公의 질문에는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논어 안연편顔淵篇, 안회顔回)의 여덟 글자로 대답하였다. 곧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臣下는 신하의 도리道理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논어에 보이는 공자사상의 토픽topic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이다. 주왕실의 권위가 동요되고 사회의 신분질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인간존재의 관념에 대한 반성문제가 제기되는데공자의 인은 이에 대한 해답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비록 저녁에 죽어도 좋다(조문도朝聞道 석사가의夕死可矣, 논어 이인里仁篇)고 공자는 말하였다. 공자의 도덕철학의 도(용지즉행用之卽行) 또는 덕(사지즉장舍之卽藏)의 구체적 형식적 규준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그 정신적 내용의 개념이이다. 인의 정신은 곧 인간애의 정신이요, 인간성의 이해와 존중의 정신이다. 제자 번지樊遲가 인에 대하여 질문하였더니,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번지문인樊遲聞仁, 자왈子曰 애인愛人, 논어 안연편). 공자 이전에는 은혜나 온정 정도의 뜻이었던이란 글자가 공자에 이르러 인간애의 정신으로 그 개념이 규정되었다.

이란 글자는 인과 이의 합성어다. 이것은 글자 자체에도 사회적존재로써의 인간에 대한 암시暗示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어에서 공자는미관중微管仲, 오기피발좌임의吾其被髮左袵矣, 헌문편憲問篇관중이 아니었던들 우리들은 머리를 헤치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될뻔하였다고 했다. 맹자에 이르러서는 그렇게도 거척拒斥된 패도覇道주의자 관중, 또 공자 자신도 그릇이 적다든가 검약儉約하지 않다든가, 예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폄훼貶毁(논어 팔일편八佾篇) 관중임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그 개인의 인격의 불충분을 무릅쓰고 그 사회적공로를 높이 평가하였으니 이는 곧 공자가 사회적존재로써의 인간을 자각自覺한 데 연유緣由한 것이다.

공자가 제자 증삼曾參(증자曾子)에게오도吾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고 하였다. 증자는 그렇습니다라는 뜻으로하고 대답하였는데 옆에서 같이 들은 다른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공자가 자리를 뜬 뒤 다른 제자들이 증자에게하위야何謂也잇고(무슨 말이냐)?’하고 묻자 증자가 선생님의 일관지도는과 서일뿐이라고 풀이하여 주었으니(부자지도夫子之道 충서이사의忠恕而巳矣 - 논어 이인편里仁篇). 증자가 해석한 이 충서忠恕의 도야말로 공자의 인의 정신 인의 도의 요점이다. 의 주자朱子는 이에 주석註釋하여은 진기盡己, 는 추기推己를 말한다고 하였다. 진기는 곧 자기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니 이것은 수기修己하는 것이요, 추기는 곧 나를 미루어 타인에게 추진하는 것이니 이것은 급인及人, 치인治人하는 것이다. 추기급인推己及人하고 치인하는데 있어서의 어진사람(인자仁者)의 적극적인 도리를 공자는내가 서고 남도 세우는 것(인자기욕입이입인仁者己欲立而立人, 기욕달이달인己欲達而達人 - 논어 옹야편雍也篇)으로 설명하였고, 소극적인 도리로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 논어 안연편, 위영공편衛靈公篇) 하였다. 공자는 또한 인의 정신에 입각하여 덕치德治주의의 인정仁政을 역설하면서 정치와 도덕의 합치를 주장하고 정치의 윤리화倫理化를 기도企圖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 나타나있다. 논어에는 이밖에도 중국 최초의 학문에 대한 자각자自覺者로써의 공자의 면목을 보여주는 학이장學而章(논어 20편의 벽두劈頭 학이편의 첫 장)이 있고, 유덕자有德者로써의 군자君子의 개념의 확립이 있고, 공자의 일상생활의 기록이 있고, 향당편鄕黨篇, 에 처하는 인생의 지혜라 할 수 있는 처생處生철학의 격언格言이 많다. 논어의 성립에 대하여는 몇 갈래의 제자계통의 기록이 전국戰國시대 말기末期에 정리되었으며 현재의 형태로 된 것은 전한前漢의 중기中期쯤이었을 것이라는 설을 소개하는데 그친다. 공자사상 가운데의 정신적인 면은 인과 덕을 고구考究하는 내용존중파인 제자 증삼을 거쳐 자사()子思子(공자의 손자), 자사자에서 맹자(성선설性善說)로 계승되어 인간의 주관에 신뢰를 두는 주관적 윤리학으로 발전하였으며, 형식과 규제를 따지는 면은라는 형식을 존중하는 제자 자유子遊, 자하子夏 등의 흐름이 순자荀子(성악설性惡說)에 계승되어 인간의 주관主觀을 불신不信하고 예로써 교정矯正하여야 된다는 객관적 윤리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상고적인 이상주의는 비록 당시의 노골적인 권력주의에 의하여 채용採用되지 않았으나 그의 수훈垂訓을 존숭尊崇하는 유가자류儒家者類는 선진先秦의 구류九類중 수위首位를 차지하였으며, 더욱이 한 무제武帝 때 유교의 이상주의가 정치권력에 의하여 채택되면서부터 그 후 2,000여 년에 걸쳐 동양도덕의 근원이 되어 막대한 영향을 끼쳐온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그리고 논어에는 현현이색賢賢易色(학이편)이라는 자하의 말이 보이는데 이것은 미색美色을 좋아하는 심정을 바꾸어 그만큼 어진사람을 존경한다는 말이다. 동진東晋 때 망의 방에서 낮잠을 자느라고 축객逐客한 꼴이 된 은형주殷荊州가 자기를 심방尋訪했던 원현桓玄에게 변명하면서당신이 온줄 알았다면 내가 어찌 현현이색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다는 에피소드episode가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보이는데 이것은 논어의 한 구절이 미친 후세에의 영향의 일편一片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회사후소繪事後素란 공자의 말(팔일편)에서 영향을 받아 후세 사람들이그림 그리는 것을 멋부려후소라고 표현하는 등 이러한 예는 일일히 매거枚擧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004  대화록對話綠 Protagoras dialogues, 플라톤 Platon

 

19세기 중엽中葉, 미국의 철학자 랄프 월도 에머슨은 뉴욕과 런던이라는 광적狂的집단을 구제하는 방법으로대표적인 위인偉人들을 닮아야 한다고 제언提言하면서 그는 맨처음으로 플라톤을 들었다. 플라톤의 대화록은 우리의 눈에 좋은 점안약點眼藥이 될 것이라 한다. 플라톤은 철학이요, 철학은 플라톤이다. 색슨족도 로마족도 플라톤의 범주範疇에 어떤 이념理念도 첨가添加하지 않았기 때문에플라톤은 인류의 영광인 동시에 인류의 치욕恥辱이다라고 에머슨은 기술記述하였다. 인간의 불행은 본질을 보지 못 하고, 피상적인 관찰을 하는데 있다. 막다른 골목에 가서 사람들은 엉거주춤 하다가 되돌아서고 만다. 그러나 철학은 사유思惟의 막다른 길에서본모습의 길을 마련하다. 이 본모습의 길을 트게 한 사람이 플라톤이다.‘우리는 감각의 사슬에 얽매어 있지만 플라톤은 우리를 동굴 밖의 세계로 인도하여 본모습으로 영적靈的 눈을 뜨게 한다.’(폴리테이아 Poliiteiā - 플라톤의 국가론 515 - 516 참조)

플라톤은 사상에 있어서 개념규정槪念規定과 사물의 본질을 규명糾明하였다. 즉 어떤 것이 선하다든가, 혹은 무엇이 아름답다고 하기 전에, 선이란 무엇이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더듬어 그 선과 미의 본(Idea 플라톤철학, 이상적인 원형原型)과 꼴(Edidos :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와 거의 같음. 형상形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론으로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는 본질적 특징)을 마련하였다. 플라톤은 감각적인 사물들의 이 초감각적인 본과 꼴에 대한 앎이참된 앎(Euisteme)’이라고 한다. 서양철학은 이 주춧돌 위에 세워진 건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알프렛 화이트헤드(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서양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일련의 각주脚註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상적경향은이념적인 것보다는현실적인 것을 추구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나 실증되지 않은 것은 무의미하다는 논리적 실증주의나, 효용성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실용주의나, 관념의 뿌리는 물질이라는 변증법적辨證法的 유물론唯物論이 다 본질 보다는 실제적인 것 내지 감각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다. 한데 곰곰이 생각하면 본질 없는 실존이나 개념 없는 낱개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물론 감각적인 인식이사실의 문제로써 중요하기는 하나 그것이 성립하는 근거로서의권리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현실을 보는 눈을 피해서 본질규명이나 이상설정이 나온 것이 아니고, 반대로 더욱 효율적인 현실파악과 그 개조를 위해 나온 것을 알아야 하고, 계급 없는 이상사회의 건립이라는 목표도 실은 그것이 물질에서가 아니라본 따오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을 명심銘心하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현대의 고민은 플라톤적인 사고의 기준과 이상을 상실喪失한데 기인基因한 것 같다.

플라톤의 대화록은 인간사상이 언제나 돌아가는 고향이요 영원히 새로운 사상의 샘이다. 사고의 기준을 상실한 현대의 사상은 항시 플라톤의 지표指標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얻어야 할 것이 아닌가?

플라톤이 아테나이에서 출생한 것은 B.C 427, 그러니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시작된지 4년 후의 일이고, 훌륭한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세상을 떠난지 2년 후의 일이라, 빛났던 아테나이의 역사가 낙조落照로 기울어졌던 때다. 더구나 펠로폰네소스전쟁은 27년 간 계속되었으며 플라톤은 젊은시절을 거의 전란戰亂속에서 지냈다. 그는 후에그리스는 병들었고, 내란內亂으로 들끓고 있다(폴리테이아 407)고 한탄恨歎하였다.

그는 이름높은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형의 친구가 그들 형제를 치하致賀하여아리스톤의 아들들, 훌륭한 남자의 신적神的 혈통血統이여! (폴리테이아 368)라고 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재혼하여 계부繼父 밑에서 자랐다. 그의 외숙外叔이 소크라테스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조국방위祖國防衛를 서약誓約하는 식(Ephebos)이 있은 열여덟 살 이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10년 가까이, 즉 소크라테스가 B.C 399년에 아테나이 민주파에 의하여 사형당하기까지 가르침을 받았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을우리들이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다(파이돈 118,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소위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 이 작품부터라고 하며, 이는 영혼의 불사론不死論)라고 표현했는데 그가 다른 죄목罪目도 아닌 불경건죄不敬虔罪로 사형이 선언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사형이 집행될 때 병석에 누워있었다(파이돈 59). 원래 그는 정치계에 투신할 셈이었다. 7서한書翰에서 그는나는 젊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독립하여 성인成人이 되자마자 곧 국민의 공사公事에 종사하기로 생각하였다(324).’고 나중에 회고回顧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공사에 종사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그의 스승의 정신을 후세에게 전하여 정의를 모르는 국가나 개인은 그것으로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것을 보여주어 제생濟生의 길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위하여 살았고,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 의하여 살아났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이후, 그는 그의 긴 여정旅程에 올랐다. 그는 처음 그의 동료들과 메가라에 망명했고,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피타고라스학파(디오게네스 57)에 접하였다. 이 기간에 초기의 작품이 기록되었다. 변명辨明(소크라테스의 법정法廷에서의 연설), 크리톤(법의 존엄尊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 이온(참된 시인과 참된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덕론德論에 대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결), 라케스(용기의 본질), 리시스(우정과 애정에 대하여), 카르미테스(소크라테스의 덕론德論 안에서의 사려思慮), 에위티프론(경건敬虔의 본질). 이상의 작품들은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그대로 밟고있는 초기의 작품들이다. 플라톤은 28세에 아테나이를 떠나 40세에 돌아왔다. 그 오랜 여정旅程의 후반기에 다음의 저작들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골기아스(소피스트적 수사학의 극복), 메논(상기설想起說과 덕론), 에위티데모스(소피스트적인 궤변詭辯의 아이러니), 히피아스(기술技術에 대하여), 크라릴로스(소피스트와 언어적 탐구에 대한 반박反駁), 히피아스(자체에 대하여), 메네크세노스(풍자諷刺에 대하여). 이 작품들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의 가르침과 그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아테나이 민주정치를 소크라테스와 날카롭게 대립시키면서 그의 이데아론은 전개하기 시작한다.

플라톤은 이탈리아와 시케리아에 머무는 동안 절제節制없는 그들의 생활을 한탄하던 중 젊은 벗 티온의 권유로 시케리아의 참주僭主(tyrannos 고대 그리스에서는 불법적으로 권력을 잡거나 불법적인 권력을 계승받은 왕) 디오니소스의 초대에 응하였으나, 그의 과두寡頭정치에 대한 비난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 노예로 팔렸다가 그의 저작을 접한 한 키레네사람에 의하여 자유의 몸이 되어 간신히 아테나이로 귀국(디오게네스 19 - 20)하였다.

아테나이에 돌아온 플라톤은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교외郊外의 숲속에 오랫동안 구상했던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이 시기가 플라톤의 원숙기圓熟期이다. 이 때의 작품으로는 심포시온(철학적욕구로써의 에로스 찬미讚美), 파이돈(의 불사不死에 대하여), 폴리테이아 2- 10(이상국가에 대하여), 파이드로스(이데아 교설敎說과 영혼의 3三分에 대하여)가 있다.

그의 중심사상인 이데아론이 이 작품들 속에 꽃피어있다. 아카데메이아학원에서 강의는 문답問答형식과 때로는 향연饗宴, 강술講述이었다. 작품화되지 않았던 플라톤의 강의에 대한 시비是非가 요즘 학계의 논쟁거리로 되어있다. 가이자(플라톤의 기록되지 않은 교설敎說, 1963) 참조參照. 여하튼 플라톤의 이 학원은 529년 유스티니아우스 황제皇帝의 폐쇄령閉鎖令이 내리기까지 약 900년 계속되어 서양 대학의 비조鼻祖(처음)로써 널리 알려져있다. 이전에 플라톤을 초청하여 화를 입혔던 디온이 B.C 367년 사람을 보내 그의 이상국가실현을 위하여 다시 시케리아에 내왕할 것을 간청하였다. 망설이던 플라톤이 방문했다. 그러나 1년 후 정변政變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귀국했다.

플라톤의 만년晩年의 저작은 테아이테토스(지식의 본질), 파르메니데스(개물個物의 이데아 분유分有), 피스테스(소피스트의 본질), 피레보스(의 반대로써의 선의 이데아), 티마이오스(세계 창활創活), 크리티아스(역사철학의 단편斷片), 노모이(법의 국가), 에피노미스(천문학天文學)이다. 이 만년의 작품들에는 이데아론의 형이상학적인 추가追加가 후퇴되고, 감각적인 자연과학과 실제적인 국가생활이 기록되어있다.

B.C 374년 플라톤은 84세로 몰하였다. 디오게네스는 결혼식의 축연祝宴에서 몰하였다 하고, 키케로는 글을 쓰던 중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카토 5 - 18).

플라톤은 그의 대화록 34(소크라테스의 변명과 서간집書簡集은 제외)를 대화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이 물음과 답에서 발전되는 문답법(Dialekitike)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교도술敎導術이었다. 당하는 사람은 말을 적게 그러나 정확히 하는 것이 요구되는데 이 방식은 약간의 위험성이 없지 않으나 오류誤謬를 지적하고 물음의 방향을 지시하는데 도움이 된다. 여하튼 플라톤은 그의 대화록에서 자신의 이름을 단 세 번 밖에 기입記入하지 않고, 그의 스승에 집중시키면서 경쾌輕快한 유모어와 미묘微妙한 아이러니를 섞어가면서 문답식으로 그의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타고난 문필文筆의 재주로 산문과 시와 경계선을 유동流動하면서 우리에게 난해難解한 문제들까지도 거침없이 펼쳐보인다.

대화록 전부를 소개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주옥편珠玉篇인 폴리테이아만을 지면紙面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더듬어보자. 이 대화록은 철학, 윤리교육, 정치, 예술 등의 여러 문제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마치 하나의 교향악交響樂을 이루고있는 작품이다. 장 자크 루소가세계에 있어서 인간교육에 관한 최대의 논문이라고 평한 작품이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친구 그라우콘과 같이 벤티스 여신제女神祭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길에서 폴레마르코스를 만나 그의 권고로 그의 부친 케팔로스댁을 방문 그곳에서 손님들과 합석合席한다. 이 노부老父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를 대환영하면서 유익한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희망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중한 태도로 긴 인생행로를 걸어온 그 노옹老翁께 그의 경험을 들려달라고 청한다. 케팔로스는 노령老齡이란 실제 젊은사람들이 즐겨하는 연애나 식욕食慾을 포기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정욕情慾에서 벗어나 자유와 행복이 있음을 설명한다. 여기에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시작되어 행복과 정의와의 관계가 논의된다. 정의는 사적私的 입장에서 보다는 공적公的 입장에서 다루어야 하니 국가란 무엇이고, 가장 좋은 국가는 어떤 것인가가 이야기 된다.

국가는 분업分業에서 이루어지는데 영양營養에 종사하는 자, 수호자守護者와 통치자가 그 분업에 의한 세 계급階級이다. 각자는 다 자기 자신의 천분天分에 맞는 직업에 종사한다. 이 세 계급들은 절제와 용기와 지혜라는 그 계급에 상응相應하는 덕을 갖추고 있는데 그 각 덕이 건전성을 유지하려면 여기에 정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여러 덕이 완전히 조화를 이룰 때 정의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이상국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428).‘만일 모든 폴리스에서 철학자들이 왕이 된다든가 혹은 오늘날의 이른바 왕들이 참되게 철학을 한다면, 다시 말하면 정치적권력과 철학이 합치合致하고 어느 한 편에 치우쳐나가는 것을 저지沮止 못 한다면 인류에게 화를 멈추지는 못 하게 될 것이다(473). 이것이 말썽 많은 철인왕哲人王을 제창提唱하는 구절이다. 물론 그가 그린 꿈은 실제 현실화되지 못 했다. 그의 제안의 정신은 정치란 깊은 사려思慮(Phronesis)에서 나와야 하고 생에 대한 사려없는 자는 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데 있다. 플라톤의 폴리테이아에 있어서의 본뜻은 정의있는 국가의 수립에 있었다. 플라톤의 지도이념은 얼마든지 악용惡用될 수 있다. 그러나 악용된 점을 지적하여야지 악용된 이념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튼 지난 2,000년 동안 찬사든 비난이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서적書籍은 성서聖書 외 이 폴리테이아가 아니겠는가?

 

005  장자莊子, 장주莊周   

 

장주는 중국 전국戰國시대의 대 사상가인 동시에 가장 뛰어난 문장가다. 장주를 높여 장자라고 불렀고, 그와 그 학파의 글을 모은 책을 역시 장자라고 한다. 장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편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한대漢代에 내려와서 52편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다가 진 곽상郭象(312 )이 장자주를 쓸 때 책절冊節 통합해서 내편內篇, 외편外篇, 잡편雜篇으로 3대분大分하여 33편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이 지금 전해지는 단편적인 글로써 여러 가지 책에 산견散見된다. 현종玄宗(713 - 755년 재위在位) 때 장자를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호칭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그 명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지금 전해지는 장자의 편목篇目을 정리하면

. 내편內篇 -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인간세人間世, 덕충부德充符, 대종사大宗師, 응제왕應帝王(7)

. 외편外篇 - 병무駢拇, 마제馬蹄, ?去篋, 재유在宥, 천지天地, 천도天道, 천운天運, 각의刻意, 선성繕性, 추수秋水, 지락至樂, 달생達生, 산수山木, 전자방田子方, 지북유知北遊(15)

. 잡편雜篇 - 경상초庚桑楚, 서무귀徐無鬼, 즉양則陽, 외물外物, 우언寓言, 양왕讓王, 도척盜跖, 설검說劍, 어부漁父, 열어구列禦寇, 천하天下(11)

일반적으로 내 7편의 글은 장자가 직접 쓴 것이고, 26편의 문장은 그의 학파學派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어왔으며, 잡편에도 장자가 쓴 것으로 생각되는 신운神韻(신 내린)이 훈탕勲蕩(대단한)하는 글이 적지 않게 섞여있다. 그러므로 지금에 와서는 장자 33편 중에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장자가 직접 쓴 글인가를 확연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도가道家사상의 계보를 가지고 말한다면 장자는 유가儒家의 종주宗主인 공자와 동시대의 선배로 알려져있는 노자老子의 사상을 계승繼承을 천명闡明하고 또 거기에 새로운 해석과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선양宣揚하였다. 장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에 입각하여 인간정신의 철저한 해방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소요유逍遙遊의 경지境地가 그렇다.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무대無待,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 등으로 표현되는, 인간정신에 구속拘束을 가져오는 모든 것에서 초탈超脫(벗어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지닌 장자는 세속적인 권력, 부귀, 명예 등등을 비판하고 원시原始로의 복귀復歸를 찬양하는 태도를 취했다. 말하자면 지성인의 원시에의 향수鄕愁라고 볼 수 있다. 장자는 유묵儒墨 등 도가道家와 대척적對蹠的(반대편)인 위치에서 세력을 펴고있던 여러 사상에 대해 고답적高踏的(높은)인 자세를 취하면서 혹렬酷烈한 비판을 했다. 도가에 있어서 노자와 장자의 관계는 어느 점 유가에 있어서의 공자와 맹자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리고 장자와 맹자는 서로 접촉을 가졌었다고 할만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같은 시기의 사상계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다. 맹자는 유가사상의 대변자였고, 장자는 슬기롭고 낭만성이 짙은 도가의 사도使徒(제자)였다. 장자가 처해있던 시대는 위, , , , , 일곱 나라 즉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천하를 분할分轄하여 왕자로 군림하는 것을 최종의 목표로 삼고 각방各方으로 각축전角逐戰을 전개하고 있던 극도로 혼란한 판국을 이룬 때였다. 사상의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사상가들이 멋대로 자가설自家說을 내걸고 타설他說을 공박攻駁하며 제후諸侯들에게 유세遊說하고 다니던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쟁명爭鳴하던 시대였다. 장자는 백가가 쟁명하는 판국을 비판하면서도 맹자의 경우같이 제후를 설득하여 정치에 종사할 기회를 가져보려고 하는 일을 도리어 타기唾棄(도외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사기열전史記列傳에 의하면 장자는 송의 몽 출신으로 양혜왕惠王(B.C 370 - 335), 선왕宣王(B.C 342 - 324)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이 두 왕은 맹자가 그들에게 왕도王道정치를 권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몽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 (장자)는 한 때 몽의 역내域內에 있던 귀족의 장원莊園인 칠원漆園의 관리책임자로 있었다. 그는 세상에 있는 글 치고 보지 않은 글이 없다고 할만큼 해박該博한 지식을 가졌고, 온갖 사물에 대한 이해가 철저한데다가 글도 잘 썼다. 유가儒家 묵자墨子 같은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을 비판 공박攻駁하는 글을 써내도 언제나 기상천외奇想天外의 각도角度에서 변설辨說이 전개되어 그것을 반박反駁해낼만한 학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능변가能辯家로 이름난 혜시와 자주 논쟁을 벌여 혜시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으나 혜시에 대해서만은 자기의 논쟁 상대로써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있었음을 시인했다. 혜시와의 논쟁을 회고回顧한 장자의 운척성풍運斥成風의 비유는 유명하다(서무귀편徐無鬼篇). 혜시는 그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혜시의 눌변訥辯(서툴게 더듬거리는 말솜씨)을 무시하면서도 혜시의 변론법辯論法을 정리하여 혜시편을 단독으로 썼다. 지금 전해지는 33편본의 장자에는 혜시편의 글이 천하편 끝에 수록되어있다. 혜시가 양의 재상宰相으로 있을 때 장자가 혜시를 만나러갔다. 어떤 사람이 혜시에게장자가 온 것은 당신을 밀어내고 자기가 재상을 하려는 것이요.’라고 일러주자, 혜시는 겁이 나서 3주야晝夜(밤낮)에 걸려 국내를 두루 수색했으나 찾아내지 못 했다. 장자는 그제서야 제 발로 걸어가서 혜시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남방南方에 완추鵷鶵(의 일종)라는 새가 있는데 그대는 모를 것이요. 이 새가 남해를 떠나서 북해로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죽실竹實(대나무열매)이 아니면 먹지 않고, 예천醴泉(단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소. 그런데 부엉이가 썩은 쥐를 얻어가지고 완추가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고(썩은 쥐를 빼앗아가려는줄 알고) ! 하고 놀라는 소리를 질렀소. 이제 그대는 그대의 양나라를 가지고서 날 보고 헉! 하고 소리치려는 거요?(추수편秋水篇)이렇게 장자는 혜시가 양 나라의 재상이 된 것을 부엉이기 썩은 쥐를 얻은 것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심한 빈곤에서 살았으나 명리名利에는 담담하였고 의기義氣는 헌앙軒昻하였다. 그래서 왕공대인王公大人들이 그를 홀홀忽忽히 다루지 못 했다. 한번은 초 위왕威王이 장자가 현능賢能하다는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시켜 후한 폐백幣帛을 보내고 그를 맞아 재상자리를 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장자는 웃으면서 초나라 사자에게당신이 나에게 가지고온 천금千金(일금은 황금 한 근) 큰 이익이고, 나한테 주겠다는 경상卿相은 높은 지위이기는 하오. 그러나 그대는 천제天祭에 희생으로 쓰는 소를 못 보았소? 여러 해 동안 먹여 길러가지고는 아롱진 수를 놓은 옷을 입혀서 희생으로 대묘大廟에 들여보내오. 이런 때가 되어서는 그 소는 새끼돼지가 되어서라도 목숨을 건져보려고 원한다 한들 어찌 그렇게 되어질 수 있겠소? 그대는 썩 가버리고 나를 더럽히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놀며 혼자서 기분좋게 살지 나라 가진 사람에게 매어살지는 않겠소. 평생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마음 통쾌하게 지내겠소이다(사기열전 63, 추수편에는 거북의 비유로 같은 뜻을 나타낸 글이 있음).’

당시의 주요한 사상가를 비판 소개한 글이 수록되어 있는 천하편에는 장자의 사상과 문장이 끄트머리에 소개되어 있다. 장자는 천하가 혼탁하여 더불어 점잖케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액언厄言(종잡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중언重言(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말)을 내세워 진실하다고 믿어지게 하고, 우언寓言을 써서 뜻을 넓게 풀어낸다. 그는 홀로 천지의 정신과 왕래하면서도 온갖 사물에 대해 오만傲慢하게 나타나지 않고, 시비是非를 따지지 않고, 세속世俗과 함께 살아간다. 그의 글은 진기珍奇하나 부드럽고, 군색窘塞하지 않아 나쁠 게 없고, 그의 문사文辭는 허실虛實이 일정하지 않으나 익살스러운 것이 볼만하다. 위로는 조물주와 함께 노닐고, 아래로는 사생死生을 초월超越하고, 처음과 끝이 없이 사는 사람을 벗으로 삼는다(천하편). 장자는 탁월卓越한 천재성, 초인적超人的인 상상력, 고매高邁한 인격, 그리고 낭만적인 감정을 지녔던 사람으로, 그가 붓을 잡으면 글이 전후의 이치가 전도顚倒해 있는 듯 나오고, 예측을 허락지 않은 기묘奇妙한 곡절曲折이 생겨나 마침내는 독특한 문체文體를 이룩해놓았다. 이러한 그의 문체는 그의 동시대에는 물론이요, 지금에 이르는 2천여 년 동안에도 그것을 흉내낼만한 문장가나 시인이 나오지 못 했을 정도로 특이하다. 그의 글에는 갖가지의 변론방법이 씌여져 있기는 하나 문장의 기세氣勢가 종횡무진縱橫無盡하게 발휘되어있고, 수사修辭가 화려하여 지루한 느낌을 주는 점이 조금도 없다. 그는 글을 쓰는데 있어 아무런 법칙에 구애됨이 없이 풍부한 어휘語彙를 구사驅使하여 도장倒裝 중첩重疊하는 어구語句와 괴이怪異 기묘奇妙한 글자와 익살을 섞고 교묘한 우언寓言을 짜넣어, 그의 글은 유래없이 생동하고, 유래없이 신기神奇하고, 유래없이 힘차게 되었다. 묵자墨子는 지나치게 논리를 따져서 글이 답답하고, 맹자는 지칠줄 모르고 늘어놓는 통에 글에 깊은 맛이 적다. 장자의 글은 이러한 폐단弊端이 거의 없다. 물론 우리가 어쩌다 장자원문을 굉장히 난해難解 난독難讀함을 느끼게 되지만 주석註釋을 참고하여 글자의 뜻과 글의 대의大義를 이해한 후에 반복해서 읽어보면 은연중에 경이驚異와 희열喜悅을 느끼게 된다.

중언重言은 이름난 제왕帝王이나 성인聖人이 한 말로 꾸며서 표명表明하고 싶은 생각을 설명해내는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말이라고 해야 소중히 여기고 믿으려들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쓴다. 공자와 노자의 대화는 물론이고 공자와 강도단의 두목인 도척盜跖(중국 춘추 시대의 큰 도적) 과의 대화도 있고, 황제黃帝와 요순堯舜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장자에는 은자隱者를 비롯하여 화가, 악공樂工, 목수, 농부, 어부, 백정, 불구자 등등 일반 지식인들이 별로 주의하지 않는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일세一世의 사표師表로 숭앙崇仰되거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들 앞에서 고답적高踏的인 자세를 취하고 도도滔滔하게 변설辨說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동물과 인간과의 대화, 동물 상호간의 대화, 동물과 무생물과의 대화도 천연스럽게 다루어져있다.

소요유의 첫머리에 나오는 곤의 우언은 그 비유의 기발함에서 뿐 아니라 문장의 기세가 좋은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북쪽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대체 몇 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그것이 변화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은 대체 몇 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불끈하고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걸려있는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그 바람을 타고 남쪽바다로 옮겨간다. 남쪽바다는 하늘의 못()이다.’

공자는 특히 많이 나오고 노자와의 대화도 몇 차례 나온다. 천운편天運篇의 예를 들어보면, 공자는 노담老耼 즉 노자를 만나서 인의人義를 말했다.

겨를 뿌려 눈을 어지러뜨리면 천지와 사방이 그 위치를 바꾼다. 모기와 등애에게 물리면 밤새 잠을 못 잔다. 인의仁義는 참혹慘酷하여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니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그 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대는 천하로 하여금 그 소박함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고, 그대도 풍속에 따라 움직여 덕을 잡고 살 것이지 또 무엇하러 우뚝하니 나서서 마치 치는 북을 짊어지고 도망간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 같이 인의를 내걸고나서는가? 따오기는 매일 목욕을 안 해도 희고, 까마귀는 검정물을 들이지 않아도 검다. 검고 흰것의 소박함이란 따질 게 못 된다. 명예의 외관外觀은 넓힐 게 못 된다. 샘물이 말라 물고기들이 땅바닥에 같이 있게 되면 서로 습한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서로 물거품으로 적셔주는데 그것을 강물이나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사는니만 못 한 것이다.’

공자가 노담을 만나보고 돌아와서는 사흘 동안 말을 안 했다. 제자가선생님께서 노담을 만나보셨는데 앞으로 어떻게 그를 다루기로 하셨습니까?’하고 묻자나는 이제야 정말로 용을 보았다. 내가 너와 노나라에 있을 적에는 사람의 마음 쓰는 것이 날으는 기러기 같은 자는 활로 그것을 쏘았고, 사슴 같은 자는 개를 놓아 그것을 쫓아가게 했고, 물고기 같은 자는 낚시줄을 던졌다. 그런데 용은 합치면 형체形體를 이루고, 흩어지면 아롱진 무늬를 이룬다. 그리고 구름을 타고 음양陰陽의 기운을 먹고 산다. 나는 입이 벌어진 체 다물지 못 했는데 내게 또 무슨 노담을 다뤄낼 길이 있었겠느냐?’

 

006  성서 聖書 The Bible (50 - 100년 경)

 

성서는 구약舊約(예수 그리스도가 나기 전의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계시 등이 담긴 경전)과 신약新約(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하느님 사이의 새 계약을 소개하고 해석, 그리스도교에서만 성경으로 인정됨)으로 구성되었는데 문서로써 수집에 착수하여 오늘날의 체제를 갖추기까지는 6 - 700년의 기간이 걸렸다. 그 형성이 히브리 Heberites, (셈족에 속하는 고대민족. 유대인의 조상. 역사학자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12명의 아들 - 아브라함·이삭 등의 자손으로서 B.C 2,000년대 말 가나안 -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함) 민족사와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배경은 일정한 시기가 아니라 민족사와 같이 한다.

히브리민적이 역사에 나타난 것은 B.C 2,000년경이지만 민족사로 신빙信憑할만한 사적史籍B.C 1,200년경 모세Moses (시나이산에서 계약의식을 통해 십계명을 공포해 이스라엘이라는 종교공동체를 창설했고, 이 계약의 조문들을 해석해 이스라엘의 종교적, 세속적전통을 확립, 유대교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자 랍비 - 교육자로서 추앙받음)라는 인물이 지휘한 이집트에서의 집단탈출(구약의 출애급Egypt)에서부터다. 그들의 목표는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되었다는 가나안Canaan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포함하는 지역이나, 요르단강 서쪽 땅, 또는 아크레 북쪽으로부터 해안을 따라 있는 좁고 긴 땅을 가리킴, 이스라엘 백성이 B.C 2,000년경 가나안땅을 차지했는데, 성서에서는 가나안을 하느님이 이스라엘백성에게 주겠다고 약속함)이다. 이 땅은비옥肥沃한 초승달지대로써 저들은젓과 꿀이 흐르는 지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저들은 도중에서 다른 민족과 충돌, 배회徘徊 등으로 탈출한 세대世代는 광야廣野배회 40여년에서 죽고, 다음 세대에서 비로소 가나안땅 원주민들과 치열한 전쟁을 거쳐 정착한다. 그 후 다윗왕국(B.C 1,000- 961)의 번영시기가 있었고, B.C 922년부터 남북조南北朝의 분열分裂시기를 거쳐 앗시리아(티그리스강 위쪽에 작은 나라)에 점령되어 지도층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후 신흥대국 바빌론Babylon, (B.C 2,000년대초기부터 1,000년대초기까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수도였고, B.C 7세기와 6세기에는 신바빌로니아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8떨어진 유프라테스강변에 위치함)에 점령될 때(B.C 589 - 539)까지 세 차례에 지도층, 기술자 등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종교의 중심이었던 성전聖殿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기에도 저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회상하여 기술記述하고 종교를 심화深化했으며 종교교육을 목적한 회당會堂을 창설하여 종교적 민족사를 전승傳承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점령하는 계기로 포로에서 석방되어 귀국한 상황에서는 초라했으나 깊은 민족의식과 각성覺醒이라는 깨달음을 안고 돌아와서 우선 성전건축에 착수하고 포로시대에 형성된모세오경五經, (유대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책, 구약성경, 구약성경은 모세오경, 토라를 비롯해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음)을 민족의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평화는 없었고 잇달아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점령으로 250여 년 그리스의 예속隸屬시대(헬레니즘시대)가 왔고, 뒤이어 시리아, 이집트 등의 연속적인 침공으로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신앙의 자유를 위해 사투死鬪를 했으며, 종교로 민족을 결속結束했다. B.C 142년에 마카비아족이 당시 점령세력인 시리아와 싸워서 70여 년 간 독립시대를 누렸으나, B.C 63년 로마의 점령으로 재기再起할 수 없는 나라 없는 처참한 민족사시대에 돌입했다. 이러한 수난의 역사 속에서 저들의 책 구약이 형성되었다.

예수가 태어난 시기는 로마가 70여 년 간 점령한 시기다. 헬라문화가 침투되었고, 종교지도층은 로마세력에 아부阿附 또는 무관심상태에 머물고, 종교도 생동성 없는 율법律法주의로 전락했으며, 이러한 사태에 분개해서 평신도平信徒운동으로 성과를 거둔 바리새인들도 공로功勞의식으로 늙어갔다. 그러나 민중은 옛날 화려했었던 다윗왕조시대와 상응되는 메시아왕국을 열망했기 때문에 외적外敵 로마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민족봉기蜂起를 꾀하다가 처참한 피를 흘렸다. 이런 때에 예수가 나타나서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으나 민족의 기대와는 어긋난 것이었으며, 종교지도자들의 질투에서 같은 민족의 고소에 의해 로마정부의 법으로 처형되었다. 예수를 추종한 무리는 예수의 죽음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고, 그는 죽었으나 다시 살아난 메시아Messiah (성경에서 메시아는 믿는 이들이 기다려 온 대망의 구세주, 그리스도교에서는 메시아라는 말을 오로지 예수님께만 적용)라는 주장으로 세계에 퍼져나갔다. 신약은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성서내용은 구약, 신약으로 구분한다. 구약은 39권인데 율법, 역사, 예언서와 그 외 문서로 형성되었다. 문학적으로 보면 시가詩歌, 사문詞文, 산문, 소설 등 다채로운데 시가는 유명한 시편詩篇을 위시한 종교적환희와 애가哀歌이고, 사문은 격언, 지혜문학, 축복, 예언법 등이고, 산문은 율법, 기도, 설교형식으로 구성되고, 소설은 창작적인 것과 역사문학으로 구분된다. 초점은 야훼(Yahweh, 여호아, 신이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이 야훼라고 알려주고 이 이름으로 자기를 부르라고 계시啓示)라는 민족신인데 점차적으로 우주의 유일신이라고 믿게된 하나님이다. 그들의 신은 그리스나 동양에서 볼 수 있는 사변思辨에서 얻은 신이 아니라 민족사에서 경험한 신이다. 구약은 사실상 출 애급(이집트)기에서 출발한다. 야훼가 유대민족을 이집트의 솨사슬에서 해방시켜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복지로 인도引導했다는 것을 심포니(교향곡交響曲, symphony)의 주 멜로디처럼 반복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선민選民으로 택했으며, 이 민족을 중심으로 한 메시아적 세계왕국의 때가 온다는 것을 민족의 노래와 기도로 삼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초에 시작되었으며, 정착한 가나안땅은 저들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인의 조상) 때부터 약속된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 신념을 입증하기 위해 소급遡及해 쓴 책이 창세기다.

그러나 저들의 신념과 달리 민족사는 수난의 연속이었으며, 암운暗雲이 개는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이 신앙을 굽히지 않고, 수난이거나 잠시의 평화이거나 신념이 하나로 칠전팔기七顚八起의 민족사를 꾸몄다. 악랄惡辣한 현실과 불타는 미래의 동경憧憬의 틈바구니에서 울음, 웃음, 감사, 원망, 기도, 찬양, 책망 들로 민족을 이끌어갔는데 그 결정이 바로 구약이다. 이러한 민족의 마음의 과정은 시편詩篇에서 볼 수 있다.‘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 잊으셨나이까?’‘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하는 시는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여호와는 나의 목자牧者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찬양과 신앙으로 변하는 것은 실례다.

구약은 한 민족의 피어린 애환哀歡이기도 하나 동시에 그 민족사를 종교적인 역사관에 의해서 거듭 재해석함으로써 자기를 어떤 경우에서도 상실하지 않는 한 산 표본標本이다. 그 안에는 추잡한 악과 고귀한 선이 있으며, 허위와 진실이 있고, 불륜과 순결, 절망과 환희의 개가凱歌가 있어 인간사의 진상眞相을 리얼하게 공개했는가 하면 인생, 예술, 문학, 철학, 종교가 뒤섞여 마치 인생의 모든 문제의 제기提起와 그 해답의 전시장 같은 느낌을 준다. 종교적신앙과 미래에 대한 불굴의 신념으로 모든 소재를 꿰매어 체계있는 한 책을 형성했다. 이 책이 오늘날 같은 최종적인 경전으로 결정된 것은 1세기 말인데 그것이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직후였다는 것은 그 민족을 이끄는 길을 성전중심에서 이 책으로 옮겼음을 시사示唆한다.

신약은 27권으로 기독교가 구약과 함께 묶어놓았으나 그 자체는 새 기원基源에서 출발한 독립된 것이다. 그것을 갈라 구약, 신약이라고 한 것은 구약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낡은 약속의 글인데 대해서 신약은 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이다. 신약의 처음 5권은 역사서, 그 외는 편지, 마지막 묵시록黙示錄으로 되어있다. 첫 다섯 권 중 네 권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글이다. 전기적傳記的인 것이 아니라 예수를 증거하는 고백적인 문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예수의 생애를 네 사람이 썼다. 그 중의 처음 세 권 마테, 마가, 누가는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하는데 자료로 보나 순서로 보나 원칙적으로 공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자료라도 해석은 다르다. 그 중 가장 오랜 문서가 마가인데 그 저자는 예수의 수난을 보도報道하는 일에 초점焦點을 두어 그 의미를 해석한데 비해, 마테는 마가의 순서를 따르면서도 따로 수집된 예수의 어록語錄을 많이 첨부하여 예수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윤리문제에 치중한다. 누가는 위의 두 자료를 대체로 따르나 예수 출현의 의미를 일반역사의 관련에서 해석한다. 이에 대해서 요한은 한두 가지 자료 외에는 전혀 다른 자료로 예수의 역사 보다 그 의미를 해석 전개하는데 집중한다.

예수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공통점은 예수는 수난을 통해서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으로써의 구원救援의 길을 열어놓는 구세주救世主라는 것이다. 예수는 낡은 질서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미래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의 내용도 일반윤리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으로써의 미래를 기다리는 무리에게 준 삶의 자세다. 마태복음 5장에 수록된 어록은 전부 이러한 것으로 내용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기독교 안과 밖을 막론하고 큰 영향을 끼쳤다. 사도행전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다음 그를 메시아Messiah, (성경에서 메시아는 믿는 이들이 기다려 온 대망의 구세주)로 믿는 신도들이 어떤 박해에서 어떻게 싸우면서 예수를 증거했으며 유대의 폐쇄적인 철문을 열고 세계 진출을 어떻게 했는지를 서술하고 있어 그때 세계제국인 로마에 돌입突入한 것을 보도報道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 다음은 편지들인데 대부분이 기독교에 반기反旗를 들었다가 회심回心하여 이론으로나 행동으로 기독교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울의 편지다. 그는 그 시대를 지배하던 헬레니즘을 충분히 구사하면서 그 시대의 말로써 기독교이론을 전개한다. 그의 글은 책을 위한 글이 아니라 여러 곳에 세워진 기독교 공통체에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사변思辨의 유희遊戱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를 눈앞에 보면서 그것을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가르친 것이다. 그의 편지에서는 로마제국의 모습이 엿보이며 헬라(성경에서 그리스를 이르는 말) 신비神秘종교, 스토아철학Stoicism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함. 헬레니즘철학을 대표한 스토아철학은 현실의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방편을 내놓았음)이 보이며 유대의 전통과 그것과의 대결, 유대 배타排他주의와 세계주의와 대결이 보인다. 그가 이런 시대적 사상권 안에서 줄곧 주장한 것은 예수의 출현이야말로 이 역사의 종결을 짓고 다른 차원의 미래의 문을 열어젖힌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주장을 주변 여러가지 세계관이나 종교와 대결하면서 기독교신학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가 집중한 것은 그리스도론과 신앙인데 그의 모든 이론의 절정은 결국 사랑에 귀결된다.

내가 사랑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내가 예언豫言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로 시작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로 끝나는 사랑의 찬가는 이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사랑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한 것은 짤막한 세 편의 요한편지이며 요한복음도 결국 거기로 돌아갔다.

마지막에 수록된 묵시록은 신화적神話的으로 표현되어 우리나라에서 많이 오용되고 있으나 실상은 신화적표현을 구사驅使, 기독교도가 당할 박해迫害를 예고한 것으로 당시의 정치형세를 심볼리칼Simbolycal(상징象徵)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저자는 일면 최후심판의 준엄俊嚴한 모습을 그려 위협威脅하는가 하면, 다른 면으로는 영원한 복지福祉를 화려하게 스케치sketch, (전통적인 스케치는 전체적인 도안圖案과 구성構成, 배치配置, 전반적인 느낌을 나타내는 데 역점力點, 여기서는 말한다는 뜻)하고 있는데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임박臨迫한 박해迫害시대에 그리스도교회가 신앙에 굳게 설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신약은 50년경에서 100년경 사이에 쓰여진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쫓는 한 공동체와 오직 신앙 하나만으로 세계를 정복한 생생한 증거물이다.

성서가 미친 영향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것이다. 그것이 서구西歐문명에 미친 영향을 말하기보다 서구문명은 기독교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성서의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은 사상일지라도 아니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성서에 의한 기독교사상을 목전目前에 둔 반발反撥 또는 묵살黙殺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誇言이 아닐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반기독교적 마르크시즘Marxism, (인류의 역사는 생산관계의 모순矛盾에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proletariat -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산업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으로 발전하며 결국 사회주의의 형태로 옮아간다고 주장, 19세기 중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확립된 철학, 경제, 정치적 사상체계)까지도 성서의 역사관의 반발적인 도용盜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는 하모니harmony (조화調和)를 위주로 하는 헬레니즘 바탕에 의지적 파라독시칼paradoxical (역설적逆說的으로, 그것을 역설적으로 바꾸는 것은 변증법辨證法)한 성서의 사상을 만나서 그 둘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동적動的인 역사를 형성했다. 동양에도 헬레니즘적인 바탕을 갖고 있으나 헤브라이즘적이 것이 없기 때문에 정(고요함)을 기점起點으로 하는 성쇠盛衰의 조용한 과거過去를 지녔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을 잘못 이해하므로써 안타깝게도 오용誤用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묵시록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그 다음 우리의 역사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 <사족蛇足역자는 모태신앙의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고, 글에 눈이 뜨이자 말자 새벽이면 신약성경 석 장을 읽어야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부친의 강요로 촛고지불 밑에서 읽은 신약성경이 아마 3- 5회 정도, 요한복음은 통째로 외워 여름성경학교 암송대회에서 1등상으로 가죽표지의 성경책을 탔고, 지금도 <태초에 말씀이 >라는 첫머리를 기억한다.‘태정태세 문단세 하며 조선왕보를 암기하 듯마태 마가 누가 요한 ’‘창세기 출애급기 하며 성경의 목록도 외웠다. 창세기라는 뜻은 몰랐다. 후에 스스로 구약은 한 번 정도 읽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유대인족보族譜>와 특히 난해한 요한계시록이 기억에 남는다. 성경독서에서 독서에 취미가 붙어 집안에 있는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큰방 선반에는 증조부曾祖父의 한적漢籍, 부친의 방에는 일본어서적이 많았는데, 돌베개(정비석 소설), 천로역정(John Bunyan)도 초등학교 때 읽었다. 그리고 5일장의 좌판坐板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철 지난 월간지 <학원>을 구입했다. 대학시절 남독濫讀, 탐독耽讀의 시대를 거쳐왔으므로,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를 지성인의 기반으로 권장한다. 새삼스럽게 부친의 기억이 새롭다. 교회의 여름성경학교 교장으로, 고구마를 깎아 음표音標를 만들어 한지韓紙에 먹물로 찍어 찬송가악보를 만들었다. 부친은 옥퉁소, 키타 그리고 독학으로 터득한 오르간연주에 능통能通했다. 찬송가의 4부합주를 연주하면 그 웅장하고 경외스러운 연주에 예배가 경건해졌다. 여름밤, 박덩이가 똬리를 타고앉은 초가지붕 위로 달이 오를 즈음 청아淸雅한 그 옥퉁소소리, 꽃병그림, 달아 노피곰 도다샤 의 정읍사 붓글씨, 대학을 다니다가 여순반란 때 귀향하여 교회를 지키다가,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해 시체로 버려졌는데, 이후 3대 무녀독남이었던 부친은 조보모의 헌신적인 간호로 기사회생起死回生했으나 평생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며, 독서와 교회의 성가대지휘와 반주伴奏로 살았다. 반달, 꽃밭에서, 넓고 넓은 오막살이의 클레멘타인, 찬송가 '참 아름다워라'를 부친에게 배웠다.

 

007  고백告白 Confessiones (400년 경아우구스티누스 St. Aurelius Augustinus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양모良母, 악모惡母가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로마시대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생모生母 모니카와 네로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같이 양극兩極을 대표하는 것은 드물다. 아그리피나는 남편 클라우디오황제(41 - 54)의 연약한 성격을 악이용, 그녀의 자식 네로를 조속히 황위에 올리기 위하여 클라우이오황제를 암살하고, 소원대로 네로를 황제로 만들었으나 사필귀정事必歸正, 아그리피나는 자식 네로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로마역사의 추한 모습을 그려낸 악녀, 악모다.

반대로 모니카는 한 어머니가 자식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좋은 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방랑하고 무질서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 할 때 그를 로마로 보내 새로운 정신세계를 발견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 모니카였으며, 그가 33세 때(387)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주교主敎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도 모니카의 자식에 대한 배려와 감화의 발로다. 아우구스티누의 일생에서 모니카가 차지한 위치는 그의고백13권 중 9권까지가 어머니 모니카에 대한 것임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24년에 오늘날 알제리아에 해당하는 누미디아주의 타가스테에서 이교도異敎徒 부친과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 모친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날 때부터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대립적인 환경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그의 세계관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고, 그 내적인 갈등은 그가 387년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를 참다운 그리스도의 신봉자信奉者로 만드는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학문적인 초석礎石을 구축構築하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가 그리스도교 신봉자에 이르기까지 편력遍歷은 자서전고백에 잘 설명한다. 고백에 의하면 370- 18세 때 부친의 의사에 따라 카르타고에 법률과 수사학修辭學을 공부하러가 남다른 우수한 성적을 보였으나 대도시의 유혹에 흔들려 방탕한 생활을 경험했다. 주로 라틴고전을 연구하여 특히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에서 지식에 대한 사랑을 지각하여 부귀와 영광을 저버리고 진리의 탐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바로의 고전서(Antiquitalunutlibri 41)에서 광대한 지식을 얻었는 바, 그의 신국론神國論에서 많은 인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전敎典도 연구하였으며, 특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고 성서를 탐독하였으나 문체의 간소簡素와 철학적내용에 탐익探益함에 실망하고, 때마침 북아프리카에서 선악 2원론을 내세우는 그리스도교의 이단 마니교에 철학적인 공감을 느껴 374년부터 9년 간 마니교신도가 되는 등 정신적 방랑은 그칠줄 몰랐다. 그러나 384년 밀라노에 수사학교교사로 초빙되어 이탈리아로 간 것이 그에게는 참다운 그리스도교 신봉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주교主敎에게서 깊은 인격적 감화를 받고 그의 설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권위에 대한 새로운 감명을 찾았다. 거기에 신플라톤파의 비형체적非形體的인 것에 대한 지견知見과 바울서간書簡에 넘쳐흐르는 종교적감동에서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고 그때까지 해결하지 못 했던 지적 번민煩悶에서 해방되고, 드디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결심을 하여, 387년에 암브로시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의 성인聖人으로써의 일생의 후반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생활의 시작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으로 일시적인 좌절을 겪었으나 그는 불굴의 의지로 위기를 극복하여, 388년 고향에 돌아와 자기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가까운 친구와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본인의 의사에 어긋나게도 히포의 사제직司祭職, 다시 396년에 주교직에 임명되어, 340년 히포가 반달교의 포위 3개월만에 열병에 걸려 사망할 때까지 34년 간 주교직을 지켰으며, 그리스도 교권과 사상 확립에 전력을 기우렸다. 그이 저작활동은 광범위하였으며 대표적인 고백告白, 신국론神國論, 독화집讀話集,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시대적으로 세계적 대전환기大轉換期에 해당되며, 정치적으로 정신적으로 위기의 절정에 도달한 시기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천년평화가 무너지고, 야만인의 침입은 로마사회를 거의 무정부상태로 전락시키므로써 로마의 영광은 물론 위대한 로마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질서 - 문화, 경제를 파괴하고 그리스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유럽문화의 중대한 존폐의 위기에 봉착했다.

원래 유럽은 지리적인 또는 인종적인 통일체가 아니며, 유럽을 형성한 것은 로마의 군사적인 통일과 로마문화의 이식移植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점을 생각할 때, 로마의 정치적, 군사적 후퇴로 유발된 로마사회의 위기는 유럽 전체의 위기였다. 이 위기는 정치의 부재不在, 경제활동의 중단, 창작활동의 질식窒息으로 구체화하였으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퇴폐한 로마인에게서도, 침입한 야만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다만 유일한 가능성은, 미비하나 조직을 가진 정신적인 집합체인 그리스도교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었으며, 이 그리스도교는 무너진 로마질서를 대치代置시키는 시대세력으로 유럽 역사선상에 출현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300년이라는 오랜 박해迫害와 시달림 때문에 충분히 조직화된 세력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 한 상태였으며, 더욱이 정신적인 지주인 교리면에서 수많은 이단론異端論의 속출로 강력한 통일체를 이루지 못 해 로마질서를 계승할만한 실력자로까지는 성장 못 하였다. 이러한 극한상태에서 시대세력으로써의 그리스도교의 외적 내적인 성장은 유럽문화의 생사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였으며,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시간에 아우구스티누스를 규범으로 그 일생을 보내게 된다. 과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위기 해소에 어느 정도 공헌하였느냐는 아직도 그의 철학과 사상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교리가 되어있다는 것으로 볼 때 짐작이 갈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자며 철학자일 뿐 아니라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형성된 공간을 매우는 시대세력으로써의 그리스도교의 결정적인 힘을 가하여주는 역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카르타고인의 정열과 그리스인의 정신과 로마인의 의지와 보편성으로 극심한 내적인 편력遍歷을 경험하면서 개인적 종교적인, 동시에 시대적인 제 문제에 도전하여 유럽문화의 생명을 지속시키는데 성공한 위대한 인간이다.

그는 인간의 원죄原罪와 신의 은총의 교살絞殺로써 교회의 신앙에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으며, 모든 이단설異端說을 극복하는데 성공하여 그리스도교회의 정신적인 통일을 가져옴으로써, 로마제국에 대치할 수 있는 즉 고대와 중세를 연결시키는 교량역할을 짊어지게 된 교회의 개념적 형성자이며, 심지어는 정치적 여러 관념을 지배하는 위치로 교회를 발전시켰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고백은 전 13권 중 제 1- 9권까지가 주로 자서전적인 부분인데, 여기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를 말하고, 10권은 사교司敎로써의 자기반성을, 11 - 13권은 창세기創世記 앞부분의 뜻을 구명究明하며, 자기의 종교적 입장을 천명闡明한다.

. 1, 맨처음, 신을 찬미하고,‘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며 영원한 평안을 찾고 유년기, 소년기에 저지른 죄를 뉘우친다.

. 2, 청년기에 들어서 방종한 생활에 젖었던 것을 통탄한다.

. 3, 카르타고 유학, 뛰어난 성적을 올리나 도시의 유혹에 빠져 연극에 열중하고 불순한 연애관계를 맺었으나 나중에 당시 유행한 마니교에 빠진다.

. 4, 9년 간 마니교에 사로잡힌 채 점성술占星術도 믿었으나, 자기에게 마니교를 권유했던 친구가 죽기 직전 회심回心한 것을 보고마음이 움직인다.

. 5, 마니교에 실망을 느끼고 어머니의 허락도 없이 로마로 가 다시 밀라노의 사제司祭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사교邪敎에 들어간다.

. 6, 카톨릭의 신앙을 이해하게 되어 생활태도를 개선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옛날의 죄악으로 빠져들어 끊임없이 죽음의 심판에 사로잡힌 생활을 한다.

. 7, 마니교에서는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신을 현체적現體的인 것이라 생각하고 자유의지가 죄의 근원임을 깨달았음에도 카톨릭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지 못 한다. 그러나 성서聖書 특히 바울서간書簡을 읽고 의혹이 일소된다.

. 8, 이미 지적으로는 해결을 얻었음에도 낡은 습관에 사로잡혀 좀처럼 결심하지 못 하고 있다가 차례로 신변에 나타나는 새로운 생의 모험을 보고 낡은 의지와 새로운 의지와의 투쟁이 최고조에 달한다. 드디어 밀라노의 정원에서손에 들고 읽으라.’는 어린애의 노래소리를 하늘의 목소리로 듣고 성서를 읽으면서 회심한다.

. 9, 교직에서 물러나 밀라노 교외 캇시키아쿰 산장山莊에 한거閑居하며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어머니와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가려다가 티베리스강가에서 사별死別한다. 여기서 어머니의 젖과 함께 흡수한 신앙이 새로운 인간으로 형성시켜주었음을 감동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과거의 생활에 대한 고백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 10, 집필 당시 사교司敎로써 자기반성인데, 우선 신과 정복淨福의 생활을 찾아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이상적인 것으로 상승上昇의 길을 더듬고 있다. 특히 기억력에 대해 세밀한 분석을 하여 그 본성을 구명하고, 다음에는 유혹을 육의 욕, 눈의 욕, 이 세상의 교만驕慢, 세 가지로 갈라 준엄한 자기반성을 한다.

. 11 - 13, 창세기 앞부분에 대한 해석인데, 흔히들 생각하듯 부록附錄이 아니라 자기의 종교적입장을 밝힌 것이며, 더구나 그것이 마니교도들이 즐겨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창조에 대한 설명형식을 취했다는 점이 특히 뜻깊은 것이다. 11권은 천지창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의문을 물리치고 현대철학에서도 주목받고있는 세밀한 시간론을 전개한다. 흔히 외적물체의 운동에 따라 생각되는 시간을, 의식의 내적사실로 환원시키려 한다. 12권은 맨처음 창조된 천지란 무엇을 뜻하는가 밝힌다. 13권은 천지창조의 기사를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그속에서 신이 교회에서 구원과 성화聖化를 위해 하는 일의 상징을 인정하며 신으로부터 영원한 휴식을 찾으면서 고백한다.

이상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으로 더듬어본고백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코 평탄하게 신의 품으로 돌아간 사람이 아니다. 세속인이 흔히 겪는 생활 이상으로 저속한 생활, 방황, 고뇌를 거쳐 피투성이가 되어 영원한 세계로 이어진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간 사람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고백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본태적本態的인 인간으로부터 영적靈的인 인간으로 재생하는 것을 신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신에 대한 감사와 찬미 속에서 말하는의롭고도 선한 신을 찬미하는 책이며 영혼의 책이다.

따라서 이고백은 그리스도교적 중세中世는 말할 것도 없고, 근세近世에 와서도 영혼에 대한 내적 생활문제에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008  코란 Holy Qur'an (640 - 660년 경)

 

코란은 이슬람교(610년 무함마드 Muhammad가 창시한 종교. 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 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 Allah의 가르침)의 경전經典이요, 이슬람사회의 통치와 지배의 원리요, 법의 근원이다. 코란은 아랍사회에 횡행한 잡다한 원시종교 다신교多神敎의 우상숭배偶像崇拜를 하나의 유일신唯一神의 종교로 통일하고, 아랍사회의 부족간의 투쟁과 약탈을 일삼는 아랍민족사회의 질서확립과 법의 통치를 구현하게 한 생활지침서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은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들을법도 문자文字도 소유하지 못 한 인간 야수野獸라고 했으며, 조셉 켈교수는부족간의 투쟁은 단일국가체제를 저해沮害하여 각 부족은 상호간 살인과 약탈을 정당한 것으로 자행한다.’고 당시 사회상을 논평했다. 이와같이 6세기경까지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아랍인들의 생활과 문화는 미개인으로써 원시공동사회형태였다.

570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메카에서 쿠레이슈부족部族 바니하심가 혈통으로 모하메드가 탄생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종족투쟁과 분쟁으로 불안한 사회상태와 무지로 인한 처참한 생활상 그리고 도덕률도 없는 사회환경에서 모하메드가 성장했으며, 그는 잡다한 우상숭배에서 문화의 침체沈滯를 인식했다. 이러한 사회의 모습과 혼란 속에서 새로운 법의 질서와 복지福祉를 염원하게 되었으며, 각 부족의 통일과 단합을 갈구渴求했다. 모하메드가 40세 되던 해 천사天使 가브리엘로부터 계시啓示를 받고 이스람교의 단일신單一神 종교 창도唱導의 사명을 받았다. 코란이다. 코란은 새로운 통치를 확립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종교, 정치,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메카방언方言 아랍어로 집대성한 경전經典이요 법전法典이요 규범률規範律이다.

코란의 편찬시기는 이설異說이 많으나 모하메드의 생존시에 일부가 기록되었고, 그가 사망한 후 이슬람사회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써 모하메드의 후계자後繼者, 알라신의 대행자代行者의 지위에 있는 제 1대 칼리프 Caliph 아브 바크르에서 시작하여 3대 칼리프 오스만시대에 완성, 집대성되었다.

코란이란 어휘는 암송한다는 의미로 알라신의 대사도大使徒 모하메드가 알라신으로부터 계시啓示를 받은 메시지를 기록한 내용이다. 알라신의 사도使徒 모하메드는 지고신至高神(The Messige of the Most High)의 메시지를 계시받아 널리 포교布敎했으며, 메시지는 심오深奧한 영적靈的진리로 우주만물의 해결책이며, 인간이 회의와 공포에서 허덕일 때 구제해주며,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 생존할 수 있는 법도를 가르쳐주며, 인간공동사회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성실하고 선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규범이다. 또한 이 메시지는 영적으로 계시를 통해 모하메드에게 전달된 것으로 모하메드가 어떤 경우나 여하한 장소에서라도 그가 필요할 때는 항상 계시되었고, 그는 그 메시지를 음률音律에 맞추어 암송했고, 메시지는 능력의 지혜로 기록되었으며, 심령깊이 세겨졌다. 이 메시지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전수되고 거룩한 성체聖體가 완성됨에 따라 메시지는 널리 일반공중公衆의 기도와 독서를 위해 재정리되었으니 이슬람경전 코란이다.

코란의 내용을 분류하면

. 알라신의 유일신과 창조주

. 인간 창조에 대한 신의 목적

. 신의 계시를 통한 메시지

. 사도使徒의 사명과 제자의 본분

. 인간의 법도와 윤리

. 내세관

으로 규정한다.

코란의 내용은 기독교의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과 일치하는 것이 많다. 모하메드가 20세의 청년으로 큐레이슈부족部族의 대상隊商을 따라 시리아지방을 여행했을 때 유대교와 기독교와 접했다. 유대교의 유대민족 선민選民사상, 기독교의 인간 예수의 신자神者 - 하나님의 아들을 의심하고 반대했다. 그는알라는 유일신唯一神이고 영겁불멸永劫不滅이며 무자무친無子無親이고 알라신에 비견比肩할 분은 없도다 (코란 1121 - 4).라고 설파說破했다. 인간은 평등으로써 옛날의 사도나 선지자先知者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규정하고 예수도 사도로, 인간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알라신을 믿는다. 우리에게 계시되는 메시지가 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과 야곱에게 계시되었고, 모세도 예수도 계시받은 것은 알라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들은 사도다 (코란 384).모하메드야말로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 이전에 계시받은 바 있는 예언자와 성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실천하도록 보내신 최후의 예언자요 사도라고 한다.‘너는 진실로 사도 중의 하나로다 (코란 364).’‘그들 중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고 그에게 복종하는도다 (코란 385).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어떠한 것이나 그에게 복종하여야 하느니라. 이 모두가 그 분에게서 나왔느니라 (코란 383).’‘인류여, 너희를 창조한 수호신守護神인 너희 주를 찬양하라. 너희가 정의를 밝히 알 수 있는 것도 주로부터 왔노라 (코란 221).’‘우주만물을 창조한 그 분이 인간을 창조하였느니라. 알라신의 창조를 거슬릴 자는 아무도 없느니라. 이것이 참다운 진리의 종교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이 오묘奧妙한 진리를 깨닫지 못 하고 있도다 (코란 2030).

이슬람교가 온 인류만인의 어떤 공동사회나 단체에도 적용되는 만인의 종교임을 선언한다.‘알라신의 수호자가 파송派送되지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느니라 (코란 3524).따라서 이슬람교야말로 참된 종교라고 말한다.‘진실로 알라신과 함께하는 종교는 이슬람(Al - Islam)이다 (코란 319).

신자信者들에 대한 의무로써는

첫째, 알라신에 대한 의무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셋째, 타인에 대한 의무를 규정한다.

알라신에 대하여 알라 외에는 숭배할 신이 없다.‘모하메드는 알라신의 사도다.’라는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라일라하 일랄다 무함마둔 라술루 라.’라고 하는 칼리마(신앙고백)를 하여야 한다. 매일 때를 정해놓고 기도를 해야 하며, 모든 타인에게 자선慈善을 베풀어야 하며, 라마단 Ramadan이라는 금식禁食을 해야 한다. 1년에 한 번씩 메카에 있는 카바신전神殿을 순례巡禮해야 한다. (, 하디스Hadith는 모하메드의 생활교훈을 기록한 책, 코란 2183, 4103, 1328, 2945)

또한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탐욕을 갖지말고, 불법적인 수단으로 재물을 얻지말며, 고리대금을 금하고 있다 (코란 429, 2275). 만민이 평등하다는 형제론을 말한다.‘, 인류여! 너희들이 서로 밝히 알 수 있도록 한 남성으로 한 여성으로 창조하고, 또한 한 민족과 종족으로 창조하였느니라 (코란 4913).’모슬렘교도들의 생활은 오직 알라신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코란 3162).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세관에 대해서는 코란에서도 천국과 지옥을 규정한다.

이렇게 살펴볼 때 코란의 내용은 기독교의 성경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상통하는 내용이다. 코란은 아랍민족이 아브라함의 직계자손이라고 주장하며 이스마엘이 조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장사葬事한 지 사흘만에부활한 것은 부정한다.

코란의 구성은 주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코란 전체는 내용의 분량이 일정하지 않은 114개의 수라 sūrah, sura (이슬람의 성서인 코란의 장. 코란에는 114개의 수라가 있는데 수라의 길이는 몇 쪽에서부터 몇 단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함. 각 수라는 마호메트가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내용을 하나 이상 포함하고 있음)로 정리되어 있다. 수라는 각각 번호가 붙어있고, 연속적인 번호는 수라의 제목 앞에 붙어있다. 대체로 이 번호는 모슬렘작자作者들이 받아들여놓은 연대순年代順이다. 각 수라는 아야트 Aayt로 구성된다. 수라는 아랍어로 번역하면 장이다. 의미는 계단을 말한다. 수라는 알라신의 계시를 통해 나타난 것으로 모하메드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정리한 것이다. 길고 짧은 것도 있으나 조리條理는 일정하다. 아야트는 기호 Sign이며 수라의 각 시행詩行을 말한다. 계시의 각 시행의 내용은 알라신의 지혜와 선의 표시(God’s Wisdom and goodness)로 만물을 창조한 신의 오묘한 솜씨와 역사를 운행運行케하는 섭리攝理의 표시다. 아야트도 시행이 길고 짧아서 일정치 않으나 아야트가 코란의 정확한 단위다. 아야트는 리듬과 운률韻律에 의해 결정된다.

코란이 종교적으로 미친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사회문화적, 경제적 여러 이슬람권에 미친 영향은 크다. 코란의 이슬람경전으로써의 가치는 물론 이슬람사회의 문화의 척도尺度인 최고의 문헌文獻이다. 코란은 아랍어문자의 표준의 척도尺度, 아랍어휘語彙나 문법文法의 근간根幹이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이나 문학가들은 성경과 더불어 코란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랍문화의 골격骨格이 코란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코란은 사회질서 확립과 법의 지배를 위한 정치의 원리요, 법의 원천이다. 이슬람사회의 이슬람법은 코란이다.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법이론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칼리프제도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알라신의 절대권력의 수권설授權說에 따라 이스람교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리된다. 이슬람사회의 지배와 통치의 권력이 칼리프에 대한 절대군주냐, 선거제에 의한 민주적이냐에 따라 파가 분리되고 이슬람권의 보수와 진보를 나타낸다. 따라서 사회제도나 정치조직에서 폐쇄적인 요소가 많다. 경제적인면에서도 진취적이지 못 하고, 답보적踏步的인 사상을 볼 수 있다. 코란은 이슬람권의 후진성을 나타내며, 침체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현재 이슬람교도가 세계인구의 1/ 7에 해당하는 3대종교로 성장해왔다는 것은 코란의 힘이다. 이슬람권은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북부아프리카와 동남아일대까지 세력을 떨치고 있으며 세계의 이슬람교도는 증가하고 있다.

 

009  사서집주四書集註 (1252), 주희朱熹 (주자朱子)

 

공자학파의 경전을 통해 공자의 수훈垂訓 수기치인修己治人사상과 교리敎理를 연구하는 중국의 경학經學이 크게 세 번 변하였다 하여 경학연구가들은 경학삼변설이 있다. 한학漢學, 송학宋學, 청학淸學이다. 한학은 훈고訓古의 학, 송학은 성리性理의 학, 청학은 고증학考證學으로 일컫어진다.

사서의 편집과 명명命名은 송학 즉 성리학의 집대성자集大成者 주자朱子에서 시작된 것인데 사서집주의 해설에 앞서 송학이 일어난 원인을 살펴보자. 송학이 어떤 시대적 변천을 거쳐 어떤 조건에서 발흥勃興하였는가하는 문제는 중국의 문화와 정치를 담당한 신분계층이 당송唐宋간에 크게 변한 것과 관계가 있다. 사가史家들은 중국의 사회, 정치, 문화는 당의 안록산의 란(755 - 763)을 계기로 당말로부터 5대를 거쳐 송초에 이르는 동안에 일대 변모를 했다. 당의 정치를 좌우하던 문벌門閥귀족은 몰락하고, 이에 대신하여 각 지방의 무인층武人層이 권력을 쥐고, 이윽고 송대에 이르러서는 신흥지주新興地主를 기반으로 관료계급이 일어나 관료를 지주로 하는 관료독재의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되었다. 균전均田제도의 붕괴는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가 되고, 그에 따라 상공업이 일어나 부유한 상공민이 대지주가 되어 상공민이나 지주의 계층은 귀족세력을 대신하였다. 송왕조는 신흥계층의 세력을 이용하여 관리등용의 국가고시인 과거科擧의 문호門戶를 확대하여 군벌軍閥을 해체하고 문관文官을 중용하였다. 송의 진종眞宗에게는 서중자유황금옥書中自有黃金屋(책 속에 황금과 좋은 집이 있음)이니, 서중유녀안여옥書中有女顔如玉(책 속에 정숙한 부인이 있음)의 글귀가 들어있는 근학문勤學文이 유명하고 송대에서 학문이 장려되고, 조정은 문치文治정책을 폈다. 지주 = 상공민 = 독서인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관계가 성립되어 이 계층에서 관리가 선발되고,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지주支柱가 되었다. 당말 5대에 발명된 인쇄 출판의 기술도 송대에서 발전되었다. 이와같이 문화의 담당자와 지배계층의 변동 그리고 사회경제의 여러 변혁은 지식과 학문의 진보를 촉진하고, 사상의 혁신을 촉구했다.

또한 요나 금과 같은 이민족국가의 중압을 받았던 송 왕조는 북송 말에 가서는 황제가 북으로 납치되고, 왕실이 남천南遷하기에 이르렀으며, 송 왕조의 한민족과 이민족과의 대결을 통한 국제적 긴장과정에서 민족적자각과 외물外物에 대한 대항의식이 싹튼 것은 당연하다. 이런 가운데 한 민족전통의 유교경전에 대한 의의깊은 회고回顧가 이루어지면서 유학의 혁신이라 볼 수 있는 송학이 일어난다.

한편 정신사적 고찰을 통해, 한대漢代 이후 노장학老莊學이 성행하던 때는 유가儒家의 학문과 도가道家의 학문이 혼효混淆현상을 일으켰으니, 의 왕필이나 하안 등은 이러한 혼효속에 도와 유의 경전을 주석하였으며, 유교의 경전으로 5경속에 드는 예기禮記의 일부에 한대의 노장사상이 혼입된 예는 학자들에 의해 지적된다. 또한 불교는 육조六朝시대 중국에서 세력을 차지했고, 당대에도 성행하였다. 불골표佛骨表를 지어 불교 배척을 한 한유韓愈의 원도原道(도를 논하는 글)에는위공자자爲孔子者, 습문기설習問其說, 악기탄탄이자소야樂其誕而自小也라는 대목이 있는데, 한퇴지(한유)가 당시 공자학자들까지 그들(씨의 학이나, 씨의 학)의 언설을 귀에 익혀 황탄荒誕한 학설을 즐기고 공자의 학을 과소평가하는 것을 비평한 것이다. 공자학의 처세훈處世訓이나 치세철학의 철학적 평판성이 불교나 노장학의 언설보다 철학적 심오성의 면에서 열세를 보인 까닭에, 위공자자 즉 공자학을 한다는 자들까지도 외가外家의 언설에 더 귀 기울이기를 즐겨하였던 것 같다. 이렇게 성행한 노장학이나 불교, 특히 불교의 영향은 송대에도 여전하여 한편으로는 유가의 대항적정신을 자극하면서, 송학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송대의 성리학, 즉 심오한 철학적이론으로 재해석하여 철학적 심오성의 면에서 노씨나 불씨에 대한 열세를 만회한 새로운 유학의 형식을 보게 된 것이다.

성리학에 의거한 사서의 재해석으로 나타난 것이 사서집주다. 사서집주는 주자의 저술, 대학장구 1, 논어집주 10, 맹자집주 7, 중용장구 1권이 주자학을 존숭하는 유자孺子, 특히 조선조 이래의 유학자들에 의하여 총서叢書로 불리운다.

사서란 무엇인가?

사서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총칭이다. 사서의 편집과 명명은 주자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을 영갑令甲(정령政令)에 기록한 것은 원나라 때부터다. 사서 중 논어와 맹자는 단행본이었으나. 대학과 중용은 단행본이 아니며, 둘 다 예기 중의 일편이다. 대학을 예기에서 추출하여 단행單行한 것은 송의 사마광의 대학광의大學廣義를 효시嚆矢, 중용을 예기에서 뽑아 표장表章한 것은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 소재所載의 중용설中庸說에서 싹이 움텄고, 남조南朝 유송劉宋 때의 대옹戴顒의 중용전中庸傳이 있다.

논어는 고래로 경서의 열에 끼었으나, 대학이나 중용도 예기 속의 일편으로 예기가 경서이므로 자동적으로 경서에 끼었으나 맹자는 그렇지 못 하여, 당 이전에 있어서는 순자와 마찬가지로 제자류諸子類 가운데 유가부儒家部에 소속되는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 한퇴지에 의하여 중시된 바, 송의 신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경서의 열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와같이 대학, 중용,

자의 표장表章이 반드시 정주程朱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경서로써 사서의 지위가 굳어진 것은 정명도 정이천의 논어와 아울러 대학, 중용, 맹자를 존숭하고, 주자가 이에 장구章句(대학 중용장구)와 집주集註(논어 맹자집주)를 지어 사서로 하여 이를 유교의 본경本經으로 하여 비롯되었다.

주자朱子는 사서의 순서를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으로 하고 말하기를 먼저 대학을 읽어 그 규모를 정하고, 다음에 논어를 읽어 그 근본을 정하고, 다음에 맹자를 읽어 그 발기發起를 보고, 다음에 중용을 읽어 고인古人의 미묘微妙를 구한다.’하였다.

대학의 명칭은 편수篇首의 대학지도大學之道란 말에서 땄고, 소아小兒의 학을 소학이라고 하는데 대칭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로 시작해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로 끝나는 대인大人의 학이라는 뜻을 가진 대학의 정신내용을 설명한다. 작자는 불명不明, 정현鄭玄의 예기禮記 에는 작자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자사子思의 저작이라는 설이 있고, 정명도는 공자의 유서遺書라 하고, 주자는 대학을 경 1장과 전 10장으로 나누어 경은 공자의 뜻을 그의 제자 증자가 저술하고, 전은 증자의 뜻을 그 문인들이 저술한 것이라 하는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논어는 공자와 공문孔門제자의 언행록言行錄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논어자論語者, 공자응접제자시인孔子應接弟子時人, 급제자상여언及弟子相與言, 이접문어부자지어야而接問於夫子之語也, 당시제자각유소기當時弟子角有所記, 부자기졸夫子旣卒, 문인상여집이론찬門人相與輯而論纂, 고위논어故謂論語라 하였으니 논어란 명칭은 여러 제자들이 논의선정論議選定하였다는데서 유래되었다.

맹자의 명칭은 작자의 이름이다. 순자荀子의 책이 순자, 장자의 저서가 장자로 불리우는 것과 같다. 사기의 맹순열전에도술중니지의述仲尼之意 작맹자7作孟子七篇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맹자의 자저自著가 아니라 문인門人에 의하여 저작되었다는 이설(당의 한유, 임진사 등)이 있다.

중용의 명칭은 篇中에 중용이라는 말이 있는데 기인한다. 주자는 중을 불편불기不偏不倚라 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불급不及)없는 것()을 평상平常이라 풀이하였는데, 중용지도는 곧 성인의 도를 의미한 것으로 본다. 중용의 작자는 공자의 손자(이름 인할 밍, 자사子思)로 일컬어진다. 사기 공자세가世家상곤어송嘗困於宋 작중용作中庸 이것도 이설이 있다’. 사서를 주석한 것은 주자에서 시작되었다 하나 사서의 하나하나에 주석을 한 책자는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신유학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의 근거에 새로 해석한 주자의 경전해석은 많은 창견創見과 발명發明을 보여주어, 고래古來의 주석과 구별하여 신주新註라 하고 이에 한당漢唐의 주소註疏는 고주古註라 한다.

송학을 일으킨 사람은 송학사자宋學四者(, , , )의 필두匹頭인 주렴계周濂溪이고, 더 소급하여 송학의 선하先河로 범중엄范仲淹, 구양수歐陽修를 들 수 있으나, 특색을 발휘하고 사서의 인연이 더욱 깊은 사람은 이정자二程子 (두 사람의 정씨)와 정이천程伊川의 철학을 발전시켜 송학을 집대성한 주자다.

이정자는 정명도, 정이천 형제다. 송의 하남 개봉 사람이다. 필생의 노력을 기울여 사서집주를 완성한 주자는 강서성 사람이다. 초년에는 노불老佛에 출입하였으나 과거에 합격하여 24세로 지방관에 임관되었다. 학문은 정자삼전程子三傳의 문인 이정평李庭平에 사사師事하여 정신적 영향을 받았고, 장남헌張南軒에게도 감오感悟한 바 있었다. 학자, 교육자로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고주古註에서는 단순한 인생의 추이상推移相의 파악, 탄식으로 해석된 공자의 천상지탄川上之嘆(논어집주 자공편)에 보이는 주자나 정자의 해석에서는 공자가 우주를 동적으로 감득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주자는 이를 태극주太極柱로 세운 우주론을 확립하고, 윤리설로는 자기완성의 착수로 궁리를 내세운 합리주의적 주지주의적 사상체계를 완성하였다.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이에 근거한 도덕심에 따를 것을 사명으로 한 이상주의에서는 인간의 순수하고 청고淸高한 마음이 강조된다. 인간의 정과 욕은 엄격히 억제되고 거척拒斥되는 금욕주의적 엄격주의(Rigorism)로 발전하여, 주자학이 후세에 끼친 영향 특히 성리학이 곧 조선조의 국학이다싶이 한 우리나라에 끼친 막대한 영향 엄격주의의 공과는 강하였다. 2(요순堯舜) 3(의 우왕禹王, 의 탕왕湯王, 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 이어 주공 - 공자 - 맹자로부터 송대로 이어지는 유교의 도통계보道通系譜는 주자학에서 확립되어, 선성先聖의 권위는 더욱 헌장憲章되었으며, 주자학의 위세도 막중하게 되었다. 조선조에는 경전해석에서 주자에 대한 이설은 불가하여 윤백호는 사문난적斯文亂賊(글을 잘못 해석한 사기꾼)으로 몰리고 죽음이 강요되었다. 논어집주의 기혹계주자其惑繼周者, 수백세가지야雖百世可知也(위정편)에 대한 주자의 해석은, 공자의 진리의 - 만세불역萬世不易을 설명하려 한 것이거니와 후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나, 강유위康有爲가 이미 공자사상과는 다른 공상적 사회주의 - 강유위는 심지어 부부관계, 혈족적 이기주의의 파생派生요인이기 때문에 영속永續을 금지하고, 2, 3년마다 바꿔야 한다고 했다를 공자사상에 입각하여 제창한 까닭이, 다른 중요한 이유와 함께 이런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맹자집주의 중요한 특색은 혁명을 시인하는 듯한 맹자의 사상을역성혁명易姓革命의 실질적인 부정否定으로 확고히 이론화한 것을 들 수 있는데, 영향이 막대하다. 정다산丁茶山(丁若鏞)의 탕론湯論은 이러한 주자의 해석으로부터 탈피脫皮이다.

 

010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 (1266 - 1273년 경) 아퀴나스 Saint Thomas Aquinas

 

13세기는 중세기의 그리스도교문화가 융성한 시기다. 문화중심지 파리를 비롯하여 옥스퍼드와 쾰른에 대학이 창설된 것도 13세기다. 그리고 철학사적으로 보아도 토마스 아퀴나스(1225 - 1274)의 출현으로 말마암아 스콜라철학(중세中世 유럽의 그리스도교학교에서 가르친 철학으로 스콜라는 라틴어로 '학교'라는 뜻, 스콜라철학의 특징은 철학의 목표인 '획득 가능한 진리 전체'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을 포함시킨 것, 데카르트·로크·스피노자·라이프니츠 등 근세 고전철학자들이 스콜라철학의 영향의 전성기를 이룬 때도 13세기임)의 전성기를 이룬 때도 13세기였다.

토마스철학은 오랜 역사적전통의 영향을 받고 세워졌다. 그의 저술은 고대사상과 중세기후반의 사상의 조류가 합류하는 시대에 나왔다. 13세기에는 그리스철학의 라틴어번역과 아랍 및 유대철학 속에 남아있는 그리스사상의 전통이 그리스도교사상과 서로 교류하였다.

토마스는 그 당시의 모든 학설 즉 플라톤철학, 아리스토텔레스철학, 헬레니즘, 아랍철학, 유대사상, 이교異敎사상을 그리스도교에 의거하여 종합을 이루어야 했다. 토마스는 이런 사상들의 원천을 파악하고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저술은 한갓된 절충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전통의 힘을 입은 새로운 종합이다.

토마스는 나폴리 근처의 로카세카성의 아퀴노의 영주領主 란돌프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에 도밍고회 수도원에 들어가서 일벨투스 마그누스의 지도로 철학, 신학을 연구했다. 1256년부터 파리, 나폴리, 로마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저술에 전념하여 대작을 완성했다. 1274년에 교황의 초빙을 받아 리옹의 제 2 공의회에 가던 도중 병사病死했다.

토마스는 스콜라철학을 형식과 내용을 갖추어 대성한 중세 최고의 종합적인 체계가다. 그의 스승 알벨토스가 기대한 사업을 계승하여 철학, 신학의 원리적 체계화의 대업을 성취했다.

신학대전은 전 3권인데

. 1, 119개의 문제 - , 창조, 천사, 사람에 관한 논문

. 2, 114개의 문제, 습관 규율에 관한 논문, 2부의 첫째부분에서 1장은 형이상학적 본체론적 집중, 2장은 윤리적인 문제, 2부의 둘째부분은 189개의 문제, 3부는 90개의 문제, 규율, 윤리적 선, 교리 및 그리스도론의 문제를 다룬다.

1부의 권두卷頭의 첫째문제는 10개의 항목인데, 자연과 교리 또는 신학의 범위에 대한 정의이며, 인간이 철학 이상의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물으면서 시작한다. 성서가 신에 의한 영감으로 씌어졌기에 철학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토마스의 논점이 철학 이외의 지식이 유용함을 알려준다. 인간의 구성원을 위하여 성서의 지식이 필요하다. 성서는 구원의 약속을 주는데 순수한 철학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이루어지는데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진리는 신에 의해서 즉 계시를 통해서 알려진다. 계시된 지식이 철학과 더불어 과학 즉 체계적인 지식일 수 있는가? 과학은 주로 신을 다루며 피조물被造物에 대해서는 똑같은 배려를 베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갓된 지식이 아닌 지혜는 거룩한 것들의 지식이며, 신학은 지혜라는 호칭을 받기에 합당하다. 원리는 직접 신에 의해 계시되고, 과학에서는 모든 것이 신의 견지에서 다루어진다고 언명하는 토마스의 유명한 이론은 은총의 수락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 철학의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취소되지 않으면서 은총은 철학만으로써는 알 수 없는 것을 더 첨가할 뿐이다.

토마스는 신의 존재를 다섯 가지 방법으로 논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운동, 둘째는 동인動因의 본성, 셋째는 가능성 필요성, 넷째는 사물이 갖는 완전성의 단계, 다섯째는 우주의 질서에서 이끌어가는 논증이다. 다섯 가지 논증에서 주목할만한 공통된 논법은

첫째, 추리의 무한소급遡及은 무의미하므로 이성은 마지막 정지점停止點이 필요한 원리에 머문다.

둘째, 마지막 정지점은 그 자체가 설명될 문제성에 있을 수 없기에 반드시 그 밖에 있어야 하며 류가 달라야 한다.

셋째, 갖가지 경우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은 하나의 원리요 신 자신은 아니다. 원리들은 유일한 신의 존재에 여러모로 온전히 부합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 논증의 뒤를 이어 토마스는 신의 기본적속성 즉 단순성, 무한성 및 완전성을 설명한 다음에 신의 삼위일체개념의 삼위를 분석하는 일로 넘어간다.

신의 완전성은 절대적이나 유한한 사물들은 그 현실상태에 비례하여 완전성을 지닌다고 토마스는 생각한다. 신은 모든 것의 근원이므로 피조물들의 완전성이 모두 이미 신 안에도 선재先在한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의 다양성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지만 만물의 유일한 근원으로서의 신 속에서는 그의 단순성을 조금도 상하는 일 없이 하나로써 선재한다. 신은 또한 완전성과 단순성이 그렇듯이 선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것은 그것이 현실로 있는 한 실제적으로 좋은 것이기에 신은 온전히 순수한 현실로써 온전히 좋은(전선全善) 것이다.

자연계에 어디에나 신이 편재遍在한다는 문제에 관해서는, 신은 모든 것 안에 그것들의 실재 능력, 작용의 근원으로써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신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인 신은 전혀 불변이며 반대로 모든 사물은 변한다. 만물은 질적인 한 가능성을 지녔기에 현실대로 향하는 움직임이 생성의 운동으로 나타나지만 신에게는 계속도 시간도 없고, 다만 언제나 동시적同時的인 현존現存만이 있다. 신의 단순성은 질료적質料的이 아님과 순수 현실을 뜻하기에 그 단순성이 더 나아가서 다만 하나의 신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장한다. 물론 그런 본성의 신은 우리 인간의 지성에게는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런 예지적叡智的존재는 무한한 것이기에 유한한 지성을 넘어서는 까닭이다. 그러나 온전한 현실인 신은 그 자신으로써는 스스로를 완전히 아는 것이다. 은총을 받은 자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신의 본질을 본다. 그러나 창조된 지성은 신의 은총으로써 그 자신과 창조된 지성을 연결하여 하나의 예지적인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신의 본질을 완전히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연적인 지성은 거룩한 은총의 도움을 받아야만 신의 신성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보다 더 내적인 겸손을 지닌 자는 보다 더 신을 정확히 볼 것이며, 보다 더 행복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축복받은 지복직관至福直觀에 관한 토마스의 설명이 있다. 신만이 홀로 그 자신을 이해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 지상에서 신의 이해를 달성한 지성은 커다란 하늘의 복이 내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토마스에 있어서 신앙은 지식이다. 우리는 자연적 이성에 의해서보다도 은총에 의해서 더욱 정확한 신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개념은 넓은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신이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것은 신앙에 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신앙을 하나의 지식형태로 만든 것은 그만치 비그리스도인이 갖는 것보다 더 완전한 이해를 우리가 갖는다는 주장을 그리스도교도가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토마스가 밝힌 이성과 신앙의 상호보완을 알 수 있다.

1부는 처음에 나오는 13개의 문제에서 사람이 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고찰한다. 신성의 입장에서 본 세계를 고찰한다. 신은 어떻게 그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가를 묻는다. 신은 일체를 단지 그 자신을 통해서만 알며, 외부의 대상에 의지하는 일 없이 안다. 신의 지성과 대상은 같다. 신의 지식은 추리적이 아니며 동시적이고, 언제나 완전한 실재實在. 신의 전지全知가 그의 전능과 완전히 일치함을 말하는 것이며, 자연계를 창조한 신의 역할로 보아 사실이다. 신의 지식은 있는 그대로 사물의 원인이다. 신은 일찍이 있지 않았던, 혹은 있지 않은, 또 혹은 있지 않은 어떤 사물까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가 안다는 의미에서다. 신은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미래의 우연한 사물도 안다. 신에게만은 그 이해가 영원하기에 시간을 초월해있는 신에게만은 그런 것까지도 확실한 것이다. 신의 본성의 한 부분으로써 의지가 있으나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 말미암아 움직인다. 신은 필연코 그 자신의 선을 원하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복을 필연코 원하는 것과 같다. 신은 그가 아는 것은 무엇이나 필연적으로 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나 필연적으로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신의 의지는 그가 의지한 바에 있어서는 항상 합리적이다.

그러면 악이란 어떻게 된 것인가?

신은 우리로 말하면 악을 행하게끔 의지하지도 않고, 악이 행해지지도 않게끔 의지하지도 않지만 악이 행해지게끔 허용하기를 의지한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 기조基調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다. 우리 인간의 의지는 반드시 필연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은 아니며, 다만 지성에 예속되어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의 문제로 넘어가서 문제는 신의 섭리와 선견을 부인하지 않고 사람의 의지에 충분한 인과율因果律의 능력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신이 사람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강제로 움직이지 않고 간접적으로 또 인간의 본질에 아무런 상해도 입히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인에게 공통되는 일정하게 주어진 마지막 한 가지 고정된 목적이 있다. 사람은 필연코 그 마지막 목적을 위하여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요구해야만 한다. 사람의 행복은 궁극적으로 재물이나 명예, 명성 혹은 권력에 있지 않다. 요구된 목적이 행복하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목적이 육신의 이익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창조된 선은 그 어느 것이나 인간의 최후 목적일 수 없다. 최후의 그리고 완전한 행복은 신의 본체를 보는 것, 지복직관至福直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주 방대尨大한 거작巨作 신학대전은 9년 간 심혈을 기우려 3권으로 나왔으나 아쉽게도 미완未完으로 끝났다. 1273. 12. 6, 바로 그가 돌아가기 전 3개월 전인 이날에 토마스는 신비神秘체험을 했다. 그 후에는 다시 펜을 들 의욕을 상실했다. 평생 보고싶어했던 그 분()을 보았다.

토마스가 완성하지 못 한 부분은 그의 피페르느의 레지날도(Reginaldo de Piperno)에 의해서 보충 완결되었다. 99개의 문제를 다룬 이 부분은 보유補遺(Supplementum)로 불려진다.

아무튼 신학대전은 중세 스콜라의 숨마라는 저술형식 중에서도 모범적인 것으로 그 방대한 양은 광범위한 문제의식, 참신한 이상과 방법론, 충실한 논의내용에서 오는 것이다. 신학대전을 통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당대에 명성을 떨쳤고,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생명을 갖고 있다.

 

011   그리스도교강요敎綱要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  칼빈 Jean Calvin

 

군대에 정규군과 비정규군이 있듯이 신학자에도 정규 신학자와 비정규 신학자가 있다.’ 칼 바르트란 신학자가 칼빈과 루터를 비교하며 한 말인데, 그의 풀이에 의하면 칼빈은 정규적인 교의敎義학자라는 이유를 몇 가지 열거했다.

칼빈사상은 조직적이고 체계가 정연하며, 하나의 완성된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교해 루터는 반대현상이고 개방적이다. 칼빈의 사상체계는 정규적인 학문체계를 갖추어서 프로테스탄트(청교도淸敎徒)신학의 주축을 이루었다. 칼빈의 그리스도교강요(이후 강요)는 현대에도 프로테스탄트신학의 고전으로 간주되며 신학의 요체要諦.

칼빈은 1509년 피카르디의 노용서 태어났다. 1523 - 1528년까지 파리에서 공부하고, 아버지의 종용慫慂으로 오를레앙과 뷔르기스에서 법학을 연구했다. 아버지의 별세를 계기로 파리에 돌아와서 고전과 히브리어를 전공하고 보수적인 종교사상에 항거하는 인본주의사상을 받았다. 1533년 돌발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종교개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전통적인 카돌릭신학의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사상을 전하면서 자기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1534년 앙굴렘에서강요의 저술에 착수하고 1536년 바젤에서 완성했다. 그 후 가필하여 수정, 보충을 거듭했지만 근본주제는 변화가 없었다. 강요에서 그는 과거의 카톨릭신앙과의 완전히 결별했다. 로마법왕의 권위와 교회, 여러 전통을 등지고 기독교신앙의 유일한 척도尺度는 신구약성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갑작스런 회심回心을 경험한 칼빈은 고전문학 대신 신학新學에 정열을 쏟았다. 신구약성서는 강요를 저술하는데 문장의 패턴을 이루어주었다. 성서의 문구를 인용할 뿐만 아니라 스타일에 있어서도 성서의 문체를 본땄다. 그는 평생 초대 교부들의 저서를 탐독했다. 어거스틴, 암브로스, 크리소스톰의 작품을 읽었다.

칼빈의 문체는 퍽 고상하고 프랑스어 구사는 독창적이다. 강요가 유럽의 언어형성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요, 칼빈의 강요와 라벨레의 산문은 프랑스문학에서 모범적이었다. 1541년 프랑스어판을 일컫는 말이다. 그의 문체는 명백, 정밀, 위엄, 간결함을 갖추고 있다. 문장은 산문체의 전형典型이다.

강요의 원본에는 세 가지 판본이 있다. 1617년 제네바판은 국판 7- 제일 크고 완전한 판본은 개혁자전집(Corpus Reformarornm) 전질 중에 29 - 87권까지 수록되어있다. 가장 훌륭한 라틴어판은 바르트와 니젤이 편집한 칼빈선집 중 3 - 5권에 실려있다.

강요에는 세 가지 역본譯本이 있다. 영역英譯1561년에 노르톤이 번역한 것이고, 1813년에 알렌이 번역했다. 세 번째로 베베리지의 역본이 있다. 1539년판은 라틴어판이며 1541년판은 프랑스어판이다.

칼빈은 법학을 전공하여 저술에서 정연하게 이론을 전개하여 합리적인 사고에 젖은 휴메니티를 설득하는 힘을 가졌다. 그러나 제네바에서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1538년 칼빈은 기욤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追放당했다. 파렐은 칼빈이 종교개혁에 헌신하도록 설득한 인물이다. 칼빈은 파렐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3년 간 생활하였다. 주로 설교와 저술에 열중했던 칼빈은 1541년에 제네바에 복귀했다. 엄격한 교회법에 정부행정의 개혁에 착수했다. 생활전반에 걸쳐 근면, 절약, 저축을 장려하고, 엄격한 신앙훈련을 시행하였다. 제네바의 헌법과 법률도 개정했다. 그가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것은 아나바프티스였으며, 그밖에도 루터파와 성찬론聖餐論을 중심으로 의견을 달리했다. 반대파 미카엘 셀베리우스를 화형火刑에 처했다. 제네바 도심에 가까운 샤노안로 11번지는 칼빈이 평생 지낸 집이다. 여기에서 비교적 단순한 생활을 했다. 로마의 추기경樞機卿이 제네바를 지나가던 중에 칼빈을 예방하고 상상 외로 검소하고 평민적인 생활에 놀랐다는 얘기가 있다. 여기서 그는 쉴 새 없이 저술과 목회牧會에 전념했다. 친구들의 권유로 결혼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540. 8월에 이델레트 뒤 부르라는 과부寡婦와 결혼했다. 재혼녀인 여인과 결혼이었으나 칼빈은 행복했다.

칼빈은 소시민층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사상을 받아들였다. 상업생산을 장려하면서 낭비와 탐욕을 엄금했다. 자본주의적인 번영의 정신은 칼빈주의적인 사상의 뒷받침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자본주의 형성에 칼빈주의가 끼친 영향은 막중했으며 이에 대한 학문적연구로 대단히 광범하다. 후의 영국의 청교도혁명도 칼빈사상에서 자극을 받았다.

칼빈의 강요는 1536년 초판 간행되었다. 수정과 보충을 거쳐서 완성된 것은 1559년이다. 종교개혁은 근본사상을 조직적으로 서술한 것으로써 탁월한 작품이다.

이 강요를 대별하면 신지식과 인간지식을 둘로 갈라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존재가 신의 존재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참된 자기의 모습을 알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타락상 부패, 불행, 무지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 인해서 신의 절대적인 권능과 지혜, 그리고 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自我인식도 반드시 신의 완전한 본성에 대한 깊은 생활이 앞서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신적인 존재를 인증한다는 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신적인 존재를 찾는 소질을 타고나기 때문에 다만 성신聖神이 내면적으로 입증해주는 성서의 말씀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참된 신 인식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강요에서 거듭 신의 주권主權을 강조한다. 신의 3권사상이 결국 예정론까지 발전되어서 모든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신의 주권과 그의 예정 안에서 이루어져 나간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데, 두 가지 주장은 하나의 역설적인 성격을 내포한다. 인간은 자신의 타락상도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서만 알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강요의 둘째 테마다. 잃어버린 인간성 휴매니티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잇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속죄사상이 없이는 창조자로써의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담의 타락은 인간의 참모습을 잃게 하였고,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가져야 할 지혜, , 신성한 것, 진리를 상상할 뿐만 아니라 자손을 위해서도 죄의 흔적을 남겨놓게 된다고 한다.

인간의 타락이 아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칼빈은 어느 정도 인간성의 죄악에 대한 숙명론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으리만큼 철저하다. 인간의 죄가 인간의 자아숭배나 인간의 신격화에까지 이르게 되면 죄악의 현실성이 더 뚜렷해진다. 이것은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을 노예의 처지에 몰아넣게 된다. 인간을 속박하는 질고疾苦와 멍애를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신의 은총에 의지하는 일이다. 은총에 의해서만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칼빈은 강요에서 주장하였다. 칼빈의 강요는 신학의 체계의 범위를 넘어서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의 기초다. 영국, 미국 퓨리탄정신(청교도淸敎徒 Puritans는 서방교회의 '교황중심주의'의 핵심인 '제도중심주의'로부터 영국국교회의 순결purity'복음중심주의'를 추구하며 16세기에서 17세기에 활동한 개신교도)이 발생했고, 서구의 자본주의사상과 문화 전반에 걸쳐 윤리적인 기반을 형성했다. 칼빈주의와 유럽의 자본주의행정과 관계에 대한 타우니의 주장은 파문波紋을 일으켰다. 흔히 칼빈주의신학이라면 칼빈의 강요에 집약된 사상을 말한다. 칼빈주의는 루터교와는 성찬聖餐문제로 갈라졌다. 같은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도 루터교와 개혁교회로 나누어지는데 칼빈주의는 개혁교회다. 칼빈주의가 제네바에서는 교회가 다스리는 국가행정을 실시했으나, 루터교는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사상을 수정하는 학자들 중에는 야콥스, 아르미뉴스가 있어 칼빈주의를 수정하고서 온건한 주장을 했기 때문에 감리교와 침례교 일부에서도 아르미뉴스신학을 지지한다.

칼빈사상은 유럽 전체에 걸쳐서 카톨릭교와 루터교를 상대로 긴장관계를 유지했고,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칼빈주의는 퓨리탄정신을 고취하였다. 퓨리탄정신이 수정된 것이 미국의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퍼진 요나단, 에드워드의 칼빈주의신학이다.

한국은 미국선교사의 선교로 칼빈주의, 특히 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형성된 뉴잉글랜드 칼빈주의사상이 영향을 끼쳤다. 맑스웨버가 말한대로 현재적이며 금욕적인 성격이고, 퓨리탄정신과 한국 고래의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상반되는 점도 있었지만 실생활윤리면에서는 비슷한 점도 많다. 칼빈주의는 보수주의 별명처럼 전해지나 칼빈의 사상체계 중에서 도이치와 스위스를 중심으로 학문의 뿌리를 내린 신 전통주의 신학도 있다. 칼 바르트, 브르너 같은 신학자의 위기신학은 칼빈주의를 퓨리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최근 미국의 웨스터민스터에서 발행한 고전총서 제 20권과 21권에 영역판이 실려있다. 맥 네일 Jhon T. McNeill 이 편집한 책으로 현대적문체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도 칼빈연구회에서 원본을 토대로 번역하고 있다.

칼빈의 그리스도교강요는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구속자救贖者 하나님

.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 양식樣式

.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는 외적外的인 방식이다.

 

012  수상록隨想錄 Les Essais (1580),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

 

몽테뉴는 16세기 후기 문예부흥 말기에 등장해서 위대한 인류문화의 정수精髓를 집약한 작가다. 문예부흥은 이탈리아에서 14세기 말에 시작하여 단테, 페트라르카, 탓소 같은 시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 등 위대한 에술가를 배출함으로써 고대 그리스를 근대에 재현시키 듯 인류문화의 절정을 이룬 시대이며, 인간이 자유분방한 정력을 지니고 세계를 자기대로 살아간 시대이고,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에 최성기를 이루었다. 인간적 정력의 집적集積11세기 말에 시작하여 12, 13세기에 이르는 200년에 걸친 십자군전역戰役의 기도企圖에서 점차 인간의 흐름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며, 교통의 중심지인 이탈리아에 왕성한 경제발전을 이룸으로써 찬란한 꽃을 피웠다. 프랑스는 영국과 100년전쟁을 끝맺어 봉건封建제도가 강화되고, 왕정을 확립하여 15, 16세기 프랑스왕들은 영토상속분쟁을 일으키며 이탈리아를 원정遠征했다. 프랑스는 무변武辨의 국가요, 이탈리아가 문약화文弱化되었던 것은 로마의 무술학교의 생도의 대부분이 프랑스청년이었다는 몽테뉴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왕들은 이탈리아 원정에서 얻은 소득이 없었으나, 찬란한 문화에 현혹眩惑되어 문학, 예술의 수입에 골몰하여 건축가, 조각가, 화가, 학자들을 초빙하여 16세기 프랑스를 문예부흥기로 만들었다. 르와르강가의 수많은 아름다운 성관城館들은 모두 이 시대에 건축된 것이고, 화성畵聖 레오나르드 다빈치도 프랑스에 와서 죽었다. 이탈리아 문예부흥은 조형造形예술에서 빛나고, 프랑스의 문예부흥은 문학에서 광채를 발휘하여 16세기 전반은 라블레, 후반은 몽테뉴가 이를 대표하였고, 프랑스 시가詩歌의 형태를 결정한 플레이아드운동(프랑스의 고전주의, 고전주의 문학의 출발, 롱사아르 Ronsard 1524 - 1585. 플레이아드Pleiade 운동)이 일어났다.

몽테뉴는 1533년에 페리고르지방 몽테뉴성에서 출생하였다. 선조대대로 이 성에서 살아왔다고 말하지만 증조부가 어물과 소금장사로 자산을 이루어 성을 사들였고, 조부도 가업을 이어받아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부친이 기사騎士수업을 마치고 왕의 이탈리아원정에 종군함으로써 귀족이 되었다. 부친은 몽테뉴를 학자로 만들려고, 학자들의 멘토를 받아 말을 배우기 전에 프랑스어를 하지 못 하는 도이치학자를 초빙하여 라틴어로 양육하였다. 몽테뉴는 라틴어를 고전어古典語가 아니라 사용하는 말로 배워 학문연구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중학에 들어가서는 고전을 탐독하였으며 툴르즈에 가서 법학을 공부하였으며, 고향의 페리괴외 지방재판소 법관으로 근무하다가 보르도재판소로 전근하여 10여 년 간 근무하였다. 이후 부친이 작고하여 재산을 상속받아 독서와 저작에 몰두한다. 세속적인 야심을 갖지 않은 바는 아니나 행정에 능력이 없는 인물도 아니다. 법의 직무가 인간의 행위를 아무리 세밀하게 분류하여 행위에 맞게 판정을 한다고 해도 인간행위는 무한수이므로 정의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을뿐더러 조항에 구속되어 부정의를 행하는 법의 한계에 부딛쳤다. 그 후 큰어머니의 재신까지 상속하여 관리를 부인에게 일임하고 독서, 저술로 살았다. 저술을 의도하지 않고 흥미있는 일, 기문奇聞을 기록하다가 자기방식의 사상으로 성숙하여 심오深奧한 인생철학으로 원숙되었다. 담석증치료차 1581 - 1582년에 스위스, 도이치, 이탈리아로 오랜 여정에 올랐고, 로마에 체류 중 보르도시장에 피선되어 귀국한다. 재선 후 행정을 사임하고 독서와 저술로 만년晩年을 보냈다.

몽테뉴의 시대를 태평세월로 알아서는 잘못이다. 백년전쟁이 끝나고 왕권이 확고히 선 뒤에는 이탈리아 원정이 잦았고, 16세기에 들어서는 자유심사自由審査정신의 발전이 교회제도 자체의 검토에까지 번져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 내란으로 번져 16세기 후반이 어지러웠다. 몽테뉴는 구교와 신교 사이에 끼어서 곤란한 처지였으나 세력에 따라 기울어지는 일은 없었고, 자기 입장을 고수하고 문인으로써 안일安逸을 탐하였다고 하지만 보르도시의 주둔군 반란을 무마하였고, 거성居城에서 방랑기사단放浪騎士團의 습격을 받았을 때, 파리여행 도중 기사들에게 사로잡혔을 때, 의연한 자세를 지킨 사례로 보면 무반가문武班家門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강인强忍과 박력迫力은 문예부흥기의 특질이다. 사상으로도 확고한 태도를 지켰다. 자유사상을 품으면서 카돌릭을 고수하고, 신구 양파에 친교를 맺으며, 나바르왕으로 신교파의 수령首領이었다가 카돌릭으로 개종하여 프랑스왕이 된 앙리 4세와는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 앙리왕은 몽테뉴성을 두 번 방문하고, 왕의 등극 시 초청을 받았으나 숙환宿患으로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지 못 했다. 그는 159259세로 세상을 떴다.

자아自我는 프랑스에서는 점잖치 못 하다고 하여 꺼렸다. 그러나 몽테뉴는 무슨 일을 말하든 자기를 결부시켜 생각한다. 중세기 카돌릭교리의 엄격한 정신통제에서 살아오다가, 문예부흥의 조류潮流에 풀려서 인간본성을 찾아가는 몽테뉴는, 이 사조思潮의 총결집을 매듭하는 위치에서 스토아사상의 의연한 자세를 취하다가 회의懷疑를 품는다. 16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라블레는 인간을 모든 사회적제약에서 풀어놓고, 그 본성대로 살아가게 하면 가장 올바른 길을 잡아 가리라는 낙관론을 품었다. 사회적 제약의 타당성을 믿지 않고 인간본성을 믿었다. 몽테뉴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하는 짓이 어느 편도 옳게 보이지 않았으므로 인간성 자체도 믿지 못 한다. 그래서 그의 수상록 제 1권에서는 로마의 카토의 생애를 규범으로 정신의 견직성堅直性을 강조하고 모든 육체적고통을 무시하는 스토익학파의 극기사상을 품고있다가, 고전작가들의 상반되는 사상을 섭렵하여감에 따라, 모든 의견이 반박되는 바에는 옳은 의견은 하나도 없다는 철저한 회의에 빠진다. 그의 부친의 부탁을 받고 한 스페인 신학자의 저서를 번역, 출판한 다음 레이몽 스봉의 변소辨疏라는 제목으로 자기가 품은 회의懷疑사상을 전개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자처하지만 인간이 동물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고 하며, 인간에 대한 동물의 장점을 늘어놓고, 그리스철학자 퓌론의 학설을 본받아서 사람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 못 했다고 하며, 유명한 표어크 쎄 쥬(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내놓는다. 사람은 아무것도 확언할 능력이 없으므로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확언하는 것도 옳지 못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나는 무엇을 알고있는지, 모르는지?’의 중간에서 멈춰버리는 자세다.

2권에 수록된 레이멍 스봉의 변소장辨疏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권을 이룰 수 있는 장편으로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고 간주되었으나, 사상발전의 한 도정道程에 불과하였으며, 그는 사상의 원숙圓熟에 따라 극기克己주의에서 회의懷疑주의를 거쳐 마지막에는 쾌락주의에 이른다. 신앙의 관점에서 인간은 확실한 진리를 파악할 능력이 없으므로, 신교도들이 아무리 새 해석을 내려보아도 모순에 찬 논법에 불과한 것이니, 사람은 주제넘게 사회의 제도나 신념을 개혁할 의도를 버리고, 관습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신앙을 지키려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고, 각 국민은 각기 전래의 종교를 지켜 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는 카톨릭을 지키노라 공언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봐르왕 기타 신교도들과 친교를 맺는데 구애拘碍를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모든 일을 양식에 맡겨서 판단할 일이며, 고통은 가능한 한 피할 일이로되, 그 때문에 인간이 가져볼 수 있는 쾌락을 무작정 배제할 것이 아니고, 고통을 가져오지 않는 한 인생의 재미는 보아가도록 권하고, 골상骨相에 의한 예언이나 기적 등을 그 자신이 그 사실 여부를 세밀히 검토하여 보고는 신빙할 것이 못 됨을 말함으로써, 은연중 인간은 이성理性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음을 알려준다. 편안한 삶의 길을 찾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는 외적생활과 내면생활을 엄격히 구별한다. 새 사상의 고집으로 사회에 대혼란을 일으켜서 인간을 참담한 경지에 빠지게 하는 개혁운동을 금기함으로 사회생활에서는 보수주의를 엄수하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그의 자아에 전적인 자유를 보유하며 다음에 꽃 피워날 모든 새 사상의 앞날을 예시하고 있다.

몽테뉴는 현대사상의 개발에 지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시의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반포頒布, 애독되어 세익스피어에 이미 그 사상의 영향을 엿볼 수 있고,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철학은 그의 회의주의에서 양식良識 치중置重의 낙관론으로 넘어간 자국을 그대로 더듬고 있고, 그의 자신은 교육경험과 아동교육에 관한 문장으로 룻소 교육사상의 선구先驅를 이루며, 그가 비록 보수주의적 태도로 자신의 귀족지위에 긍지를 보이고 있으나, 귀족과 농민을 비교하여 전자의 우월을 인정치 않고 오히려 후자의 인생에 체념한 순박한 항심恒心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찬양하는 태도는 후세의 평등사상에 문을 열어주고 있다. 그는 고문拷問을 비난하고 법 집행의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스페인인들의 중남미개척 때의 원주민들에 대한 만행蠻行을 규탄하는 등 그의 인간애는 작품의 도처에 스며난다. 그의 작품은 한 사상의 체계를 세울 논문을 생각나는대로 묘사描寫하며, 모든 사건의 경험과 지식을 그의 적나라한 자아에 비추어, 그의 자아를 밝혀내며 인간성의 본질의 원천을 뚫음으로써 후세의 모든 위대한 사상들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묘상苗床을 차려놓았다.

 

013  방법서설方法叙說 Discours de la methode (1637),  데카르트 Rene Descartes

 

때는 바야흐로 중세 후반기를 통하여 권위로써 전승되어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물리학)과 논리학에 대해서 반발과 개혁을 유발한 16세기에서 17세기로 접어드는 무렵이다. 자연학영역에는 관찰과 실험과 수학적증명을 연구방법으로 채택한 근대 자연과학의 창시자들로 쟁쟁한 코페르니쿠스, 케풀러, 갈릴레오가 나왔고, 논리학분야에는 우상론偶像論(이도라론,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 F. Bacon은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의 올바른 판단을 막는 장애요인으로 선입관과 편견을 들었는데, 베이컨은 이런 선입관이나 편견을 우상이라고 정의)과 귀납법歸納法을 새로운 방법론으로 제시한 프란시스 베이컨과, 해석기하학을 창안하고 수학적방법을 철학에 도입한 르네 데카르트가 나왔다. 전자는 근세의 영국경험론의 주창자가 되었고, 후자는 대륙합리론의 창시자가 되었다.‘지식은 힘이라고 외친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맞서서새로운 오르가론을 내놓았고,‘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깨달은 데카르트는 획기적인 저서방법서설을 저술했다.

데카르트가 1637년에 방법서설의 초판을 내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깊은 사색과 날카로운 회의懷疑가 있었다. 1596년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스콜라철학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학업을 마치기 전부터 대학에서 배우는 기성적旣成的인 학문에 싫증을 느껴 교문을 나서기 전에 그때까지 들은 모든 지식을 다 비워버리고, 이제부터는 이 세상이라는 책과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것 외에 아무런 학문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졸업 후 데카르트의 명제命題는 단 하나확실한 것이었다.‘무엇 하나 의심할 여지없는 것이 없지 않느냐?’이 회의에서 해매기 8, 1617년에는 견습사관으로 폴란드군에 가담하고, 2년 후에는 파르츠전쟁에 종군했다. 여가에 수학을 연구하였으나, 1619년 겨울에 울름부근에서 야영을 하던 밤중에 홀로 깨어앉아서 장작불을 쬐며 사색에 잠겨있다가 홀연 깨달은 것이 전기한 명제다. 군무를 떠난 후 여행을 하고, 파리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가 1629년에 홀란드에 가서 철학연구에 몰두했다. 주요한 저술은 20년간에 걸쳐 홀란드에 머물던 때 저술했고, 1649년 스웨덴여왕의 초빙을 받아 스톡홀름에 갔었으나 이듬해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방법서설은 서론과 제 1- 6부로 나뉘어졌는데, 전반부는 데카르트 자신의 진지한 사색과정을 전기적傳記的인 설화조說話調로 쓴 것과 주로 방법을 명백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4부에는 그 후에 나온 제 1철학(형이상학形而上學) 성찰省察의 개요가 간추려져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으로부터 잘못된 것이나 근거가 없는 판단을 근절하기 위해서 쓴 것이기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실상 우리의 지성에 대한 진지한 요구야말로방법서설의 유일한 본의本意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회의의 방법을 진지하게 시도했고, 둘째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신과 영혼에 대한 전제前提까지 추궁해가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서술에 의하면, 대학시절에 진리와 관련된 공부에서 얻은 단 하나의 소득은 수학에서 받은 기쁨, 즉 증명할 수 있는 정확성과 명백함이었다. 그는 이렇게 확고한 기초 위에 좀 더 높은 정도의 학문이 세워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란 것이다. 그의 생애의 전환기가 왔다.

20대의 젊은시절에, 데카르트는 방정식方程式을 구상함으로써 기하학幾何學과 대수학代數學이 단일 학문으로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놀라운 발견을 계기로 하여 그는 좀 더 기초적인 진리에 자신의 지성의 능력을 통찰하도록 힘썼다. 그후부터 그는 오류의 근원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해 숙고하면서 확실한 진리가 아닌 신념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신중한 시도를 했다. 진리를 찾기 위하여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지성능력의 방법을 위한 확실한 규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수학자 데카르트는 기하학의 증명방법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우리의 사고 속에는 한 개의 진리로부터 다른 진리를 연역演繹해내는 필요한 원리가 간직되어있다. 이 원리가 데카르트를 열중하게 한 것이다. 그로하여금 굳은 신념을 갖게 한 것은 새로운 통찰력이나 이지력理智力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통찰하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성理性이라는 자연적인 빛으로 비추어주는 진리를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원리를 정하는 일이다.

데카르트는 기하학이 사용하는 연역적방법을 내세운다. 연역법의 대담한 해석자다. 재래의 아리스토테레스의 논리학의 추론식推論式을 비판한다. 삼단론법三段論法의 결점은 이미 알고있는 사물에 대해서는 추리에 도움을 주지만, 아직 모르는 것은 연구하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연역적이다. 전통적인 논리에는 외면하고, 독자적인 논리의 방식을 기하학에서 찾아내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최초의 단순한 진리로부터 시발하여, 최초의 진리에 포함되었던 제 2차 진리로, 다음에는 제 3차 진리로, 더 나아가서 제 4차의 진리로 일보일보 나아가는 연쇄적인 추론을 통찰한 것이다.

데카르트트 통찰한 방법의 원리를 편의상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의심할 수 있는 데까지 의심한 뒤에 명백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면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라.

둘째, 복잡한 문제는 단순한 것으로 분류하라.

셋째, 사상은 가장 단순한 것부터 가장 복잡한 것의 순서로 배열하라.

넷째, 추리의 연쇄連鎖에 틈이나 그릇된 연결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추리의 연쇄를 다시 반복하라.

이러한 원리가 엄격하게 시행된다면 누구나 명확하지 않은 사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성찰에 나오는 신과 영혼에 대한 문제는 방법서설에서는 어느 정도로 다루어진 것인가?

데카르트가 말하는 영혼은 생각하는 것을 본바탕으로 하는 실체를 뜻한다.외적으로 느끼는 모든 의식의 세계는 확실치 않은 것이므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성으로 추리하는 것까지도 의미하고 있으나 감성적인 기능과는 온전히 류를 달리하는 독자적인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라고 그가 말 할 때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명백한 모든 우연성이 사필귀정격事必歸正格으로 그리로 돌아가는정해진 필연성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그의 형이상학적 고찰이 그의 방법에 못지않게 생각된다.

확실한 것을 찾고자 어쩔 수 없는 회의 속에서 해매고 있었을 때 그가 견지한 방법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을만큼 명백한 것, 아주 자명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 더 분석할 수도 없는 단순한 것, 스스로 증명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가 중요시한 모든 신념은 과신이거나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각, 지각의 불확실성은 말 할 것도 없고, 꿈과 생시의 의식의 분간조차도 의심하였고, 심지어는 2 + 3 = 5가 된다는 수학적인 명제의 판단에 대해서까지도 데카르트는 심술궂게 악의에 찬 기만하는 신령神靈이 자기 마음속에 그릇된 생각을 넣어줄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그렇지만자기의 신념이 잘못 되었고, 그 자신이 기만당하여 의심하는 행위를 벗어나지 못 한다 할지라도, 의심하는 그 자체는 존재하기에 만일 그가 사고를 한다면, 생각하는 존재로써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그의 의심을 풀어주었다. 그리하여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가장 확실한 진리의 표현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다루는 마당에 가서는 데카르트는 회의하는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시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완전한 관념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불완전한 존재완전한 존재란 관념의 원인 - 유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결국 그런 관념은완전무결한 존재자즉 신 자신에 의해서 그의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한 것이다. 이 논증의 근저에는 인과관계의 필연성과 자명성이 존재되어있고, 또 관념과 존재 사이에도 엄밀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 예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에 가서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어떠한 생각이나 확신도 형이상학적 확실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명백하고 분명한 관념은 진리다라고 하는 이 명백한 원리까지도 신의 완전성과 존재 위에 그 확실성의 근거를 두고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의 권두卷頭에는 서론에 앞서이성을 바로 인도하고 여러 학문 속에 있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라는 부제副題가 붙어있다. 그가 의도한 데카르트의 영향력은 그의 생전, 사후를 통하여 17세기를 풍미風靡하였다. 그 시대에서 과학적인 계몽을 받은 지식인들은 대개 자기가 데카르트의 학도임을 자랑으로 여겼다. 데카르트가 명성을 떨치게 된 주요원인은, 그가 과학의 혁신을 옹호하는 사상가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의 인식론과 형이상학도 뒤이어 나온 합리주의철학의 발전을 위하여 여러 모로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수학적방법을 철학에서 채택하였다는 점과 형이상학의 문제인 실제를 정의하고 세 가지로 분류해놓은 점에서 숙제를 남긴 탓이다. 즉 정신과 신체의 관계의 문제를 논의의 중심이 되게 한 사실이다.‘수학적 방법진리의 기준에 찬동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를 저술함으로써 초기에는 데카르트의 학도임을 자인하였으나,‘실체의 정의에서는 데카르트를 반박하고, 정신과 물체가 실체라는 분류를 부인하고 나아가서는 심신관계의 상호작용설까지도 물리쳤다.

또한 이 문제에 관해서는 홀란드에서 기회원인설機會原因說을 주장한 제자 헐링크스를 낳았으나,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근대철학의 논의의 불씨를 붙인 셈이다.

이를테면 인간기계론을 쓴 라 메트리는 물질과 운동만이 참된 실제라는 유물론唯物論을 내세웠는가 하면, 미적분학微積分學을 창안한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실체의 정의를 정적靜的이라고 비평하고, 무수히 많은 동적動的인 단자單子를 생각하여 의식만이 실재하고 물질은 가상假想이라는 유심론唯心論으로써 대치對峙하였다.

그러나 근대철학에 미친 데카르트의 영향 가운데 가장 깊은 것은 많은 사상가로 하여금 인식론적 탐구는 자아自我로부터, 즉 자아의 내면적의 의식의 상태와 자아의 주관적인 심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014  팡세 Pensées (1670), 파스칼 Blaiss Pascal

 

파스칼(1623 - 1662)이 죽은지 이미 3세기가 지났고, 팡세만큼 널리 읽혀진 고전도 드물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사상가와 그 작품은 마치 바다 위의 빙산氷山(1/ 10만 노출)과 같은 것으로 우리의 탐구와 이해는 흔히 표면에 노출된 일각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세계는 시대 및 사조思潮의 흐름에 따라 뜻하지 않는 빛을 발하며 변모變貌하기까지 한다. 파스칼의 경우가 그렇다. 그의 변모는 시대의 운명을 반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가 망각과 몰이해 속에 저버림을 받은 것은 합리주의적 경향의 18세기 계몽啓蒙철학시대와 일치하고, 그후 기나 긴 연옥煉獄 끝에 인간의 심정 속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 낭만주의자들에 의해서다. 그후 20세기에 접어들어 인간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회의懷疑가 짙어감에 따라 파스칼에 대한 관심이 놀랍도록 고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파스칼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3세기에 걸친 방황과 정신적모험의 심화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내면적요청을 뒷받침하는 학문적연구가 병행되었는데, 이 두 요소의 결합은 필연 파스칼의 새로운 이해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팡세(명상록)라고 불리는 고전은 파스칼 사후 유고遺稿를 정리, 편찬하여 유고 중에 발견된 종교 및 기타문제들에 대한 파스칼의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1669년에 발간되어 비롯했다. 파스칼의 유고가 1,000여의 무질서한 단장短章의 형태로 남겼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단장들의 분류, 구성에 있어, 그리고 그 사상의 이해에서 얼마나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팡세에 대한 학문적연구는 주로 텍스트 및 구성에 문제에 집중되었으며, 최근 뚜르뇌르 및 라퓨마에 의하여 우리는 파스칼이 의도하였고, 실제로 분류를 착수하였던 그대로의 텍스트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관련하여 팡세에 얽힌 가장 보편적인 오해는, 팡세를 마치 파스칼 자신의 내적 생의 고백, 내밀內密의 수기手記, 명상록으로 대하려는 경향은 물론, 이 단편들 가운데 보다 친밀하고 내면적인 그의 모습, 사상의 보다 개성적인 움직임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병약한 몸으로 자리에 누은 체 섬광閃光처럼 스쳐가는 영감靈感을 적어가는 파스칼을 상상하는 것은 분명히 낭만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것은 팡세가 결코 즉흥적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더 없이 엄밀한 논리와 구성에 따라 준비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파스칼은 이미 1647년 최초의 회심回心후 기독교변증론辨證論을 생각하였으나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1658년에 이르러서고, 구상은 대략 윤곽이 잡혀 그 해 11월에는 폴 르와얄에서 두 시간에 걸쳐 공개하였다. 덧붙여 밝혀둘 것은 파스칼 자신이 수기 일부를 특이한 구성방법에 따라 분류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폴 르와얄 강의를 준비를 위하여). 결국 라퓨마는 이를 성공적으로 입증하였고, 파스칼에 의한 27편의 분류에 따라 새로운 편찬을 시도했다.

새로운 구성에 따른 변증론은 2부로 나뉘어져있다. 1부는 신 없는 인간의 비참悲慘, 2부는 신 있는 인간의 축복, 1부에서는 인간이 타락하였음을, 2부에서는 인간을 이 타락에서 구할 구속자救贖者가 있음을 밝힌다(29). 전반에서는 인간성 그 자체에 대한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 1 사조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현상학은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즉 가능한 한 개념적 전제를 벗어던지고 그 현상을 충실히 기술하려는 시도)적인 고찰에 의해 비참, 모순, 절망을 밝힘으로써 구성원의 필연성을 입증하고, 후반에서는 성서에 의해서 즉 역사를 통해 나타난 기독교의 진실을 증명한다.

이래서 먼저 폭 넓고 심오한 인간학이 전개된다. 이 점 파스칼은 소진消盡될 수 없는 무한한 보고寶庫를 남겨주었다. 인간의 심층에 새로운 조명을 비추고있는 이른바 인간현상학 - 인간의 사고, 감정, 행동, 사회, 정치 . 이 모든 것의 그의 분석을 통하여 기이한 변모를 일으키며, 관습, 자기 기만, 타협, 도피 등의 장막에 가리웠던 현실은 자신의 수치스런 진실을 들어낸다. 평민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무식한 기와장이에서 지성의 왕자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 사냥, 당구 등 단순한 오락에서 진리의 탐구에 이르기까지, 인간 현실의 온갖 양상은 파스칼의 시선이 스쳐감에 따라 저항없이 새로운 원리 안에 편입되는 듯이 보인다.

팡세의 후반은 결론지어진 초월성超越性에 대한 논증으로 채워진다. 즉 인간의 내면적 검토에서 요청된 신의 개입이 과연진실의 것임을 사실에 입각하여 (성서에 나타난 역사적사실) 증명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의 영속성, 예언과 기적에 의한 예수의 증명, 그의 내적 위대에 의한 신성성의 증명의 순서로 전개된다. 그러나 초월성을 두고 인간은 심각한 당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초월한 신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겠는가? 신을 향한 인간의 모험이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비약飛躍이라면 인간의 합리성의 요청은 어떻게 되며, 결국 이성을 짓밟고 일어서야만 하는가? 파스칼이 외면할 수 없었던 최후의 문제는 이러한 것이었다. 그는 한계의 의식으로 이를 극복한다.‘이성의 최후의 한 걸음은 자신을 초월한 무한한 사물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373).’이 한계의 의식에서 비로소 복종이 문제될 수 있다. 즉 이성은 자아비판에 의해 스스로 무력을 의식하기에 이르고, 이제 복종하는데 자발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이성의 부인否認, 이 보다 더 이성에 합당한 것은 없다(355).’

인간의 모순에 대한 검증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에 대한 합리적 해결의 시도를 거쳐 마침 초월성의 개입을 가정假定해야할 필연성과 마주치며(1), 이에 따르는 이성의 문제를 검토한 끝에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초월성의 논증(2)으로 끝맺는 팡세는 인간에서 신에 이르는 극적인 역정歷程의 증언이라 말 할 수 있다. 이제 이 간단한 개관을 통하여 몇 가지 결론을 맺어보자.

첫째, 파스칼의 인간관은 철저히 성서적인을 지적할 수 있다. 최초로 그는 인간 현실을 비참과 위대, 어둠과 빛의 양면으로 관찰하고 모순의 원리를 설명한다. 이것은 마치 인간을 상반된 요소의 양립으로 보는 그리스적 이원론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이원론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평면적 범주範疇 안에서가 아니라 인간과 신이라는 수직적인 관련 하에서의 이원론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곧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초월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의 인식 및 완성에 있어서 신의 간섭을 요청하는 파스칼에게 인간의 역사는 곧 신의 역사이며, 그의 팡세는 그 인간극人間劇과 신극과의 교착膠着 그 자체다. 이와같은 인간관이 파스칼에게 어떤 비판의 기회를 제공하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다. 이 비판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그 시대의 요청이다. 르네상스 이후 자유검토檢討의 권리를 되찾은 이성은 1세기에 걸친 갖가지 모험과 시련 끝에 차츰 두 개의 상이한 형태로 굳어져갔다. 한편 몽테뉴적인 회의懷疑 및 에피큐로스Epicouros, (소박한 즐거움, 우정, 은둔 등에 관한 윤리철학의 창시자로서, 에피쿠로스학파를 낳았다. 그는 철학의 목적을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데 두고 평정과 평화, 공포로부터의 자유, 고통 없는 삶을 역설함) 무리가 있고, 또 한편에 데카르트적인 합리 및 스토아의 무리가 있다. 파스칼은 이 양극이 맞닿은 위치에서 이들을 동시에 부감付勘하며, 이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미래에 대하여 예언자적인 배수진을 치고 있는 듯 보인다. 합리사상은 잠시 기독교와 합류하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학을 이루고, 회의의 무리는 구지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자는 신의 의지에 인간 이성을 대치시킬 준비를 갖추었고, 후자는 냉소와 부정으로 종교에 대하게 될 것이다. 이들을 뒤이은 18세기(어떤 면에서 이 양자의 상승작용의 시대)가 이와같은 위구危懼를 얼마나 정당화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파스칼의 기독교변증론은 한결 극적인 성격을 갖춘다.

그러나 파스칼은 이 모든 정신적 모험, 기독교의 변론을 엮어나가는 데 결코 독단적인 신학적입장에 서지 않는다. 그는 영원히 인간의 벗이요, 인간의 계층을 떠나지 않는다. 비록 초월적인 진리까지 올라갔지만 그는 인간의 현실로 되돌아와 대지 위에 그리고 진흙 속에 발을 디디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여기에 팡세의 한계가 있다. 아니, 차라리 위대하다고 하자. 아마도 그에게는 루터, 어거스틴에 있어서와 같이 회심으로 이끌어가는 한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차단된 양극兩極 - 인간과 신 사이에 인간의 언어로 다리를 놓았으며, 신앙과 구원을 먼 신비의 세계에서 인간의 범주로 끌어내렸다. 결국 전 인류를 향해 넓게 그물을 쳤으며, 보편적언어로 만인을 향해 호소한 것이다. 여기 팡세의 위대한 공헌이 있다. 서구에서 기도교가 산 생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파스칼과 같은 사상가에 힘입은 바 크다. 물론 그 밑바닥에는 기독교 자체의 위대함이 있다. 그러나 그 위대함은 전달자와 번역자를 필요로 한다.

17세기의 파스칼, 그는 종교적 가치가 무너지는 시대 한 복판에서 번역자로써 역할을 다 한 것이다.

 

. <1> 현상학現象學 사조思潮20세기 초에 시작됨. 현상학은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즉 가능한 한 개념적 전제를 벗어던지고 그 현상을 충실히 기술하려는 시도를 의미함. 실증주의와 전통적 경험론과 비교해서 현상학은 경험의 실증적자료를 무조건 존중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이 자료를 감각경험에 제한하지 않고 관계·가치 등 비감각적·범주적자료도 직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인 한 허용한다는 점에서 다름. 현상학은 보편자普遍者를 거부하지 않음. 현상론과 달리 현상학은 현상과 실재를 엄격하게 구분하며, 현상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좁은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음. 경험을 포기하더라도 개념적추론을 강조하는 합리론과 달리 현상학은 개념과 모든 선천적 주장이 직관에 기초하고 직관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주장함

 

* <사족蛇足> 대학시절 도서관의 책을 모두 독파하겠다고 호기를 부리며 강의시간에 대리대답을 부탁하고, 아리랑동산 벤치에 누워 남독濫讀하던 때 팡세를 들고 끙끙대다가 서너 장을 읽고는 포기했고,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교사 초년시절 다시 팡세를 꺼내들었으나 읽지 못 했다. 어려워서, 이해를 하지 못 해서 갈증은 여전한데 흥미를 잃었다. 그러다 유사類似장티프스에 걸려 입원했을 때 팡세를 쓴 약 먹듯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015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  칸트 Immanuel Kant

 

1781년은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약 반세기에 걸친 도이치관념론의 발단의 해이기 때문이다. 그 해에 칸트는 거의 20여 년에 걸친 연구 끝에 역사의 기념탑이라고 볼 수 있는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다. 그 뒤를 이어 실천이성비판을 1788년에, 판단력비판을 1790년에 출간했다. 흔히 칸트의 3비판서라고 부르는 유명한 저서다. 순수이성비판(이하 순수)이 이론철학 인식론에 속하는 것이라면다른 두 책은 윤리와 미학즉 도덕과 예술을 철학적으로 취급한 획기적인 저서다. 이 책은 칸트의 주저작일 뿐만 아니라 그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철학은 이식, 윤리, 예술 그리고 종교(칸트는 1793년에 종교철학 출판)의 네 가지 과제를 가져야 하는 듯 생각되외왔을 정도다.

순수는 이렇게 중요한 책이기는 하나 그것이 철학의 고전인만큼 대단히 어려운 책이다. 아마 그 당시에서도 철학계의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 했던 것 같다. 그 난해성 때문에 칸트는 프롤레고메니라는 해설을 겸한 보충서를 추가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 책 역시 쉽지 않다.

순수는 칸트 자신에 의해서 세 번 수정판이 나왔을 정도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고, 또 정밀하게 내용에 비판된 저서다. 이 책이 출판되었을 당시의 대학들을 종교와 학문면에서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문교당국은 적지 않은 회의를 품게 되었다. 순수는 결국 무신론적인 반기독교적 저서가 아닌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대학에서 쫓겨날 것이며, 그 책은 학교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시대적 환경이었다. 어쨌든 칸트는 재판에서 신의 문제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말하게 되었으며, 3판에 이르는 동안에 수정을 했다. 아직도 학자에 따라서는 자신이 수정한 것이기 때문에 3판을 옳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나, 초판을 가장 값있게 보는 학자들도 있다. 쇼펜하우어는 초판이 칸트 자신의 뜻이고, 뒤의 것들은 종교적 분위기와 압력에 의한 개정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오늘 칸트의 순수를 읽는 사람들 모두가 3판의 내용이 함께 실려진 책을 만난다. 비교를 전제하고 출판되기 때문이다 (많은 개정이나 중대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칸트와 더불어 이 책이 그렇게까지 비중을 차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내용이다. 이 책이 지니고있는 역사적 가치다. 칸트 이전까지는 철학의 흐름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데카르트에서 라이프니츠를 거쳐, 크리스찬 볼프에 이르는 대륙의 합리론이 그 하나고, 일찍 베이컨으로부터 시작하여 토마스 홉스, 존 로크, 데이비드 흄에 이르는 영국 경험론이 또 하나의 주류다. 이러한 영국위 사상이 프랑스로 흘러들어 프랑스에서는 소위 백과전서시대와 더불어 계몽주의사상이 유럽 전체와 호흡을 같이 했다.

칸트는 대륙인이다. 합리론의 계통을 이었다. 그러나 흄의 비판적이며회의적인 저서를 잡한 칸트는 대륙의 합리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이성의 무제약적인 절대성을 주장한 나머지 심한 독단론에 빠져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말을 빌린다면 비로소 독단의 꿈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과정과 입장에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동시에 받아들여 자신의 철학을 형성한 셈이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적 사조에도 관심과 연구를 했다.

이러한 철학사조들을 묶어 오랜 연구와 면학을 거듭한 유산으로써의 저서가 순수였다면 그 역사적 입장과 의미가 중대하다. 이 책의 특색은 고대 서양철학이나 중세기의 철학에서 방법론方法論 methodology(, 1)이 없는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 2)을 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나 베이컨에 의하여 새로운 방법론 중심에 철학이 탄생하기 전에는 모든 철학이 형이상학적 내용에 비판없이 뛰어들었다. 근대에서는 방법론으로써의 인식론(, 3)이 비중을 더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성격의 저서가 바로 칸트의 순수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 책에서 자기는 참다운 형이상학의 기초를 위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강조한다. 그만큼 이 책은 방법과 인식을 중심삼는 철학의 기초적 입론立論이다. 과거의 철학적 흐름에 비한다면 과학적성격을 띄고잇다. 신 칸트학파들이 헤겔의 형이상학을 반대하고, 칸트에게 되돌아가자고 한 이유 중 하나는 칸트의 비판과 과학적성격 때문이다. 칸트의 저서가 세계철학사의 줄거리를 묶어 새로운 과제와 방향으로 전개시켜주었다고 보아 과장을 아닐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어떤 내용의 책인가? 순수의 해설, 연구, 비판은 수없이 많다. 대학마다 강독을 하고있으며, 철학자들은 모두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듀란트(철학사론의 저자)은 영국의 사상가 스펜서를 가리켜 칸트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자다운 면을 잃고있다고 말했다. 칸트와 무관한 철학자는 없으며, 칸트와 관련을 맺는다면 바로 이 순수를 뜻한다.

그러나 순수는 퍽 어렵다. 특히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내용을 소개한다는 것은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설명하는 것만큼 어렵다. 칸트는,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잇으며, 어떻게 인식이 이루어지며, 또 어떻게, 얻어진 지식이 찬이 될 수 잇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순수를 썼다. 인식의 가능성과 과정, 그리고 그 한계와 찬에의 타당성을 찾아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리들이 이성의 힘만 빌리면 , 또 그 이성이 합리적으로 사고만 한다면 어떤 지시기이라도 가능하며 또 모든 것은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믿어왔다. 합리론자들의 견해가 그렇다. 영국 경험론자들의 생각을 빌린다면 우리들의 인식에는 한계가 잇으며, 감각을 통해 주어진 최초의 지식의 재료가 몇 가지의 심리적과정을 밟아 완전한 지식으로 바뀌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법칙과 확실치 못한 내용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모르겠으나 그것이 일단 완전한 지식 진리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많은 의문과 불완전한 점을 지니게 된다. 그들이 특히 지식 발생의 심리학과정을 따졌을 때는 그 어려움이 더하게 된다.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수학, 기하학의 타당성을 극히 좁은 분야에 머물뿐이며, 거기에도 의심의 여지는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몇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과거의 형이상학자들이 주장했던 존재 그 자체, 소위 존재자들의 배후에 있는 실체 같은 것은 인식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물자체(Ding an sich)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사물의 현상일 뿐, 물자체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다시 칸트가 지적한 것은 과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주관과 객관, 의식과 그 대상을 대립시켜 놓았을 때 중요한 것은 존재한 사물로써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깨닫는 다면 그것이 곧 진리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칸트는 있는 사물을 그대로 느끼고, 감각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감각 경험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를 따라 달라지는. 확실한 무엇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참다운 지식이나 진리랄 오히려 주어진 사물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며 그것들이 어떤 인식과정을 밟아 지식과 진리가 되는가를 밝힘에 있다. 칸트는 주어진 객관 대상 보다는 우리들에게 본래부터 주어져있는 주관으로써의 이성이 더 귀하다고 본 것이다. 주관이성의 능력과 그 한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과정, 이성의 인식적작용을 고찰하여 밝힐 수 있다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스스로 풀릴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인식의 중심을 객관대상으로부터 주관이성으로 돌린 것이다. 이 일이 철학사에서는 중요한 변화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철학에 있어서코페르니쿠스 전환轉換이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칸트의 강한 주장이며, 그의 책 전체를 통하여 먼저 인정받아야 할 내용이다. 그러면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지만 사물로부터 주어진 인식의 새로운 현상은 어떻게 되는가? 칸트는 그것을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뀌어지는 경험의 내용이라고 보았다. 그대로는 완전한 지식이 못 되며 진리의 타당성을 차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은 다시 시간과 공간의 형성과 법칙을 다루는 감성(Aesthetick)의 영역과 역할을 겪어야 한다. 그에 의하면 공간이나 시간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법칙이기 때문에 누구도 자의로 변질시키거나 바꿀 수 없는 인식의 처음 기틀이다. 이렇게 공시간의 과장을 지나 이미 현상이나 경험계를 떠난 인식의 순수한 작용은 다시 그 결과를 오성의 위치로 옮겨준다.

오성은 비로소 경험을 통하여 주어진 내용을 선천적으로 주어진 사고작용을 밟아 판단의 과정을 겪는다. 판단이란 명제를 통하여 확실한 경험과 지식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오성의 중요한 직책이다. 그러나 판단은 또 만인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판단의 원칙이 있다. 칸트는 그것을 열둘로 나눈다. 소위 카테고리라고 부르는 범주가 여기에 속한다. 칸트가어떻게 선험적인 종합판단은 가능한가?’함을 가장 핵심되는 과제로 보는 것은 현상이나 경험을 통하여 내용은 얻되 그 내용에는 구애됨이 없는 판단의 선험적 격식을 중요시 하는 까닭이다. 또 칸트는 분석판단은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킬 수 없기 때문에 종합판단만이 지식의 확장, 새로운 진리에의 길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오성悟性은 이미 넓은 의미의 이성의 작용을 포함하고 있으나, 이성의 추리와 사유작용은 마침내 우리들이 뜻하는 보편적이면서도 타당성있는 진리를 만들어주며 참 지식으로 이끌어준다고 주장한다.

그가 순수라는 어휘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발단되나 진리는 경험을 가능케 하면서도 그것을 참으로 이끄는 선험적인 작용에 있다고 본 때문이다. 또 비판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인식의 주체인 이성은 그 자체가 스스로의 능력의 한계 과정을 비판적인 태도에서 밝혀야 함이다.

이러한 칸트의 주관적 이성의 비판적태도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오늘도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러한 태도는 철학의 여러 분야에서 높임을 받고 있다.

피히테가 이 저서로 출발하여 그 내용을 넘어섰고, 쉘링, 헤겐이 그 뒤를 계승하여 세계 철학사상 가장 뜻깊은 독일관념론을 만들었다. 신 칸트학파를 비롯한 오늘의 많은 철학자들도 이러한 칸트의 방법과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거의 200년에 가까운 역사를 통하여 연구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온 또 하나의 고전인 셈이다.

 

. <1>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 인간의 인식의 기원·본질·한계 등을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방법이라는 용어는 철학과 개별 과학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쓰이는데 이때 방법이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어느 정도 확실한 절차를 뜻함. 한편 방법론이라는 용어는 철학이나 여러 과학에 공통적으로 관련된 논의에만 제한되어 쓰이며 방법론이란 방법을 대상으로 삼는 분야를 가리킴. 그러므로 방법론은 개별적 방법론과 같지 않고, 이 방법들의 메타이론 metatheory - 이론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이다. 모든 연구분야의 이론들은 메타이론을 공유 - 이라 할 수 있음

. <2> 형이상학은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광범한 주제를 다룸.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정신의 대상이 되는 추상적 실재 - 형상의 존재와 성격임. 형이상학자들은 형상과 관념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연세계, 시간과 공간의 의미, 신의 존재와 본성 등을 해석함. 최초의 형이상학자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은 현상과 실재實在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식함. 플라톤은 감각세계의 가변적可變的이고 기만적欺瞞的인 실재를 거부하고 불변하는 참된 이데아의 세계를 선호함.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質料가 자신 속에 잠재된 이상적 형상形象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가정假定했고, 토마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도교 사상을 결합함. 데카르트는 물질영역과 정신영역을 서로 독립적인 영역이라고 규정했으며, 칸트는 지각의 중요성을 입증함

. <3>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슨 권리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 인간의 탐구대상이 인간이라면 인식론은 그 탐구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임. 앎이란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깥 세계를 알고 이해해야 함. 오늘날의 문명과 과학의 발달은 바로 인간의 세계이해를 반영하는 것임.눈부신 과학의 성취로 때로 인간은 세계에 관한 진리를 손에 쥔 것 같은 느낌을 갖기도 하지만, 인간은 또한 언제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이는 과학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음.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 자신의 인식능력을 탐구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됨. 곧 인식론은 지식에 관한 지식을 목표로 하고 있음.

형이상학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경험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형이상학적 탐구의 많은 부분들은 초월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포기되었고, 철학적 분석의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음. 그러나 최근 세계의 일반적 구조와 그 궁극적 실재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상학은 그것에 대한 앎의 문제를 다루는 인식론자들에게 주요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음.

지식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심리학과 인식론 사이에 구분이 없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심리학은 철학적방법을 거부하고 경험과학으로서 자리잡았음. 그러나 여전히 두 분야는 서로에게 유용한 부분들이 많음. 인식론자의 개념분석은 인지에 대한 심리학자의 탐구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인식론자는 숫자, 운동, 외부 대상들에 대한 어린아이들의 초기 인지형성이나 인간의 지각 경험, 기억, 무의식 등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음.

심리철학은 비교적 최근에 대략적으로나마 자신의 영역을 갖게 된 분야임. 심리철학은 인식론의 문제보다는 심신, 자아, 정신활동의 다양한 측면(예를 들면 의지·욕구·자기기만·느낌 등)에 관한 문제들에 집중하고 있음. 이를 위해 심리철학은 인식론과 심리학에서의 연구 결과들에 익숙해 있어야 하며, 또 인식론자는 심리철학의 연구 결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

논리학은 인식론과는 언뜻 보기에는 별 연관이 없어 보임. 그러나 논리학자들은 논리적 법칙들의 궁극적 근거나 상호 배타적 논리체계들의 양립 가능성 문제 등에 직면해 인식론적인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식론자는 인간을 규정짓는 이성적·논리적 사유의 본성을 설명해야 함. 또한 인식론적분석에 논리학은 유용한 도구가 되며, '인식논리'와 같은 영역에서는 인간의 인지현상을 논리적으로 형식화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음

 

016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정신현상학(이하 현상학)18061013, 예나전투戰鬪 전야前夜에 완성되었다고 하는, 극적인 전설을 지니고 있다. 당시 방베르크에 와있었던 나폴레옹황제는 마침내 프로이센과 결렬을 선언하고 랑느장군 휘하麾下의 정예군을 투입, 헤겔(1770 - 1831)이 살고있었던 예나대학가를 점령, 그날 오후에 입성하였다. 그 때 헤겔은 도이치제국에 군림한 프랑스혁명의 사자使者를 가리켜마상馬上의 세계정신이라고 경탄하면서 바야흐로 세계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 감개에 넘쳐 전쟁의 불안과 동요에 휩싸인 하숙서재下宿書齋에서 출판사와 계약기간이 박두한 정신현상학의 마지막부분을 탈고했다.

프랑스혁명은 헤겔의 사상형성에 전환점이 되었다. 계몽주의적 급진적 자유주의자로써 출발한 청년시절의 헤겔은 프랑스혁명에서 그가 그리던 사상적 자유사회의 실현을 꿈꾸고, 주관주의적 이신론理神論의 입장에서 기성적인 기독교를 대신할 새로운 종교의 확립을 제창하는 등, 도이치의 자유운동, 사회개혁운동의 선봉先鋒에 섰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의 결과는자기 파괴적인자유의 해방이요, 진정한 자유의 실현이 아니라 새로운 전제專制정치의 확립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주의사상의 붕괴와 새로운 공포시대의 도래를 경험한 헤겔은 혁명가의 이상을 버리고 순수정신으로 도피하여 종래의 주관주의적 태도를 반성하고, 개인의 주관적자유와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적 필연과의 모순을 소위사랑에 의한 운명(현실)과의 화해라는 종교적, 역사철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시인함으로써 현실의 여러 모순을 보다 변증법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설정했다. 이러한 그의 근본적인 입장의 최초의 자각적自覺的표현이 다름 아닌 현상학이다. 슈트트가르트 태생의 철학자는 튜빙겐대학 신학부 동창인 쉐링의 영향 하에서 피히테의 주관적관념론을 객관적 관념론으로 전회轉回시키는데 동조, 협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에 예나에서 강단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쉐링의 비합리적 신비주의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체계를 준비하여 현상학,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을 포함하는 교과서의 집필을 계획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변思辨철학(대상을 감각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순수 사유규정에 따라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대립적 규정들의 동일성으로 인식하려는 철학의 전체를 포괄하는 철학사류) 교과서의 출판계획은 그로부터 10여 년, 1817년 철학체계(Enzykl-opadie)가 나옴으로써 실현을 보게 된 셈이지만 제 1부 정신현상학의 출판은 독자적으로 변증법의 기초를 확립하여, 당시의 낭만주의적 심정을 비롯한 근대 서구사상과 현실의 일체를 논리화, 이념화함으로써 객관적 관념론을 더욱 철저히 하고, 소위 도이치관념론을 완성허여 도이치철학계에 군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1807년 현상학이 세상에 나온 것은 나폴레옹의 예나점령에 잇달은 예나대학의 폐쇄로 헤겔이 이미 예나를 떠난 후의 일이다.

현상학은 철학사상 가장 난해한 저작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거니와 특히 그 서문은 극히 난삽難澁한 문장으로 전 저작의 결론을 전망하면서 학일반의 이념을 밝히거나, 당시 낭만주의 신학의 미망迷妄과 쉐링의 동일철학의 독단을 통매痛罵하면서 그에 대한 헤겔 자신의 입장의 독립을 선언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철학적지식은 변증법적구조를 가진 유기적, 전체적진리의 체계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학적學的체계로써의 전체적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정신의 그의 최저단계인 일상적 감정적의식에서 출발하여 최고의 자각적단계인 절대지絶對知에 이르기까지 여러의식의 형태를 그 내면적 필연적 진로를 따라 가면서 관찰, 서술하는 것이 곧 현상학의 주제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철학적정신의 편력사遍歷史요 교화사敎化史라 하겠다.

그런데 원래 의식의 본성은와 대상과의 대립對立에 있으며, 대립의 양 계기契機가 통일되는데 의식은 성립한다. 그리하여 헤겔은 이 양 계기의 대립하는 상황을의식의 형태라고 하며, 또 양 계기가 통일되는 운동을의식의 경험이라고 하거니와 그에 의하면 그와같은 양자의 대립적계기의 통일은 일반적으로 정신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에 대하여 대립하는 대상, 타재他在가 되며, 이 타재를 다시 지양하고 자기 자신에게 반성, 복귀復歸하는 운동 - 자기 소외와 자기내반성自己內反省의 운동 즉 변증법적운동에서 성립한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헤겔의 현상학은 결국 그러한의식의 형태의식의 경험에 의해서 서술하는의식의 경험의 학으로써 체계의 제 1부에 해당되는 것이며, 또한 그와같은 의식의 여러 단계에 있어서 성립하는의식의 실제성을 검사, 음미하는 인식론 - 그러나 언제나 의식, 인륜, 도덕, 종교 등 구체적인 대상을 논구論究한다는 점에서 일반적 추상적 인식론과는 다르다 - 곧 체계에의 예비문豫備門인 것이다. 헤겔은 이러한의식의 경험이 최초의 감각적확신에서 지각知覺에로, 지각에서 오성悟性으로, 그리고 다시 오성에서 자기의식을 거쳐 이성理性으로 어떻게 진전되는가를 설명한다. 이러한 경험의 진전을 규정하는 요인은 어떤 외적 간섭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의식의 형태의 내적 필연적 동요動搖에 있었다. 그리하여 의식과 그 대상,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대상의 객관성은 필경 주체에 기인되는 것이요, 의식이 감각과 지각에 있어서 포착하는현실적인 것이란 객관적 여러 요소로 환원할 수 없는 일반자一般者 - 성질, 사물, , 법칙 등이라고 하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대상은 주체의 지적활동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주체에 귀속되는 것이라고 함을 보여주는 것이요, 따라서 선험적 관념론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인만큼, 헤겔에 의하면 자기의식은 현실적인 세계가 자기의 자유로운 현실임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자기의식의 변증법적운동은 그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써의생명에서 출발하여,‘독립적 의식비독립적 의식의 관계로써,‘주인과 노예의 관계, 그리고 스토아주의와 회의주의를 거쳐 자기 분열하는불행한 의식에 이르거니와 이러한자기의식은 자기 자신의 분열에서 다시금 전체적 통일로 복귀하여이성으로써의 의식형태로 고양된다. 그리고 이이성은 세계가 이론이성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고 함을 자각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현실적인 세계가 이성의 자유로운 객관화적 현실임을 실천으로 확증함으로써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자기의 실제성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 단순한 인식론적활동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 사이의 역사적 투쟁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헤겔은감각적 확신에서이성에 이르는자기의식의 인식론적과정을 속박에서 자유로의 인류의 역사적과정으로 전환시켜 철학상 기본개념의 역사적성격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제야 명백하게 지식의 내재적 진전에서 나타나는의식의 여러 상태즉 객관적인 역사적 현실로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적 자기의식의 본체를인륜적 정신에서 찾고, 그 역사적 변증법적인 전개를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로마의 법적국가, 중세기 기독교적세계, 그리고 계몽주의 및 프랑스혁명의 시대, 칸트적인 도덕의 세계, 그리고 낭만주의시대로의 발전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프랑스혁명은 국가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반항하는 개인들에 의해서 수행된 것인 한, 개인의 진정한 자유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 완전한 자유의 실현은 프랑스혁명에서 도이치관념론의 시대로의, 바꾸어 말하면 역사적현실의 영역에서 정신의 내면적영역으로 추이推移에 의해서만 달성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정신적영역이 곧 칸트의 윤리적관념론이 발견한도덕성즉 자기 자신의 자율적의지가 내리는 보편적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무제약적의무의 세계이거니와, 그러나 정신은 여기에도 안주하지 못 하고 의무의 명령과 행복의 욕구 사이의 모순을양심’,‘아름다운 혼에 있어서 지양止揚하여 종교에 이르러 직접 자기 자신을 직관하게 된다. 그처럼 종교의 내용은 스스로 정신임을 자각한 정신으로써의절대적 정신이지만,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직도절대적 정신은 절대성의 계기에 있어서 표상表象될뿐이다. 따라서 절대적정신은 이제야 일체의 대상성을 극복하고, 그 자신의 절대적자각에 귀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절대적 정신은 자기 자신을의식의 형태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형태 즉개념의 형태에서 파악하는절재지의 단계에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이절대지에 있어서 의식경험의 변증법적운동은 끝나고, 비로소 순수개념의 자기운동체계로써의 형이상학적(논리학)의 지반地盤이 확보되는 것이다.

현상학은 결국 철학적지식의 발달사임과 동시에 인류사회의 역사적발달사이다. 개체의 정신형성사임과 동시에 역사적정신의 발전사다. 거기에는 심리학, 인식론, 논리학, 역사철학, 예술론, 도덕론, 종교론과 그밖의 정신생활의 모든 분야가, 인류가 자유의 긴 여로를 통해서 축적해온 모든 경험이 헤겔의 변증법과 추상적 마력에 의하여 혼연히 혼합, 발효되어있다. 그것은 인간정신의 계몽학적질서를 서술한 정신의신통기神統記로 최저의 감각에서부터 최고의절대지에 이르기까지의 전 정신의 단계를 기록한 철학적 신곡神曲이다.

흔히 헤겔의 철학은 근대사상 내지 철학의 총결산이라고도 하고, 또 그의 변증법적사유는 근대적 철학사상의 정점이라고도 하는만큼, 현상학의 중심 문제를 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하이데커는 현상학을 근대적주관의 형이상학이라고 하고, 루카치는자기 소외를 그 중심문제라고 보는가 하면, 그것을계몽啓蒙의 분석에서 찾거나, 기독교적 계시종교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철학의 총 결산인 이상, 근대의 모든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근대를 초월하자면 먼저 헤겔을 초월해야 할 것이다. 현대의 실존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인 키에르케고르와 포이엘 바하가 무엇보다도 헤겔에 비판적으로 대결함으로써 그들의 시대와 대결하고자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변증법이 실존적 개인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보아 역설逆說변증법을 주장하였으며, 포이엘바하는 헤겔철학의 신학적사변성을 혐오하여 현실적문제를 인간학적으로 고찰할 것을 제창하였다. 마르크스는 현상학의 비판적연구를 통하여 자기 이론의 기초개념에 도달하였다. 그는 주인과 노예에 관한 헤겔의 논의를 이용하여 노동의 소외를 기술하면서, 헤겔의 노동의 본성에 관한 통찰에서 이 저작의 위대함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최근에는 많은 헤겔 연구가들이 신의 죽음, 악무한惡無限의 배격排擊, 도덕성의 입장에 대한 비판, 운명애運命愛 등 많은 문제에서 니체가 헤겔과 친근한 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처럼 현대의 유력한 철학은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헤겔철학, 특히 그의 현상학에 포함된 여러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것은 이 저작이 모든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하등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을른지 모른다. 이 저작에 있어서는 절대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동요動搖되고 부정否定되는가 하면, 또 모든 것이 긍정되고 안정과 조화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지가 종국적인 결론인 것도 물론 아니다.

 

017  철학적단편후서 哲學的斷片後書 Afsluttendeuridenskabering efters krift til de philosopiske smulur (1846)

       키에르 케고르 Søren Aabye Kierkegaard

 

덴마크의 고독한 천재적 사색가 키에르케고르(이하 케고르)는 실존의 발견자로써 서양철학사상에서 불멸의 위치에 있다. 케고르에서부터 실존주의 철학이 시작된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실존의 구조와 질을 밝히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케고르는 실존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그 구조를 철학적으로 파헤치는 동시에 주체적진리를 강조하고, 실존적사고를 역설하고, 실존변증법(역설逆說변증법)을 주장하고, 실존의 3단계(향락을 진리로 하는 미적실존과, 의무를 원리로 하는 윤리적실존과, 신앙을 원리로 하는 종교적실존)를 설명하여 현재의 실존주의철학의 사상작기초를 마련하였다. 실존철학의 창시자다.

먼저, 케고르의 인간과 생애를 스케치한다.

케고르는 181356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의 부유한 모직물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성실한 기독교인이다. 부친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그의 연인戀人인 레기네 올센과 약혼했다가 1년 후 파혼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초기의 저술은 파혼의 문제를 다룬다. 레기네 올센과 사랑과 파혼이 그의 사상과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주체적 사상가다. 그의 저술은 예리하고 심각한 자기성찰, 자기검토, 자기분석의 기록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문제로 삼은 철학자다.

1846해적海賊이라는 악덕惡德 신문이 그를 야유揶揄하고, 조롱嘲弄하는 글과 풍자화諷刺畵를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그 신문과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 사건은 그의 생애에 중요한 전기가 되어, 그는 저작가로써 사명을 자각하게 되고, 사회에 대한 비판과 경종警鐘의 글을 썼다. 그는 그 시대 대중의 행진곡에 발걸음을 맞출 수 없는 시대의 예외자로써 고독한 단독자單獨者의 길을 걸었다. 인생의 예외자例外者로써 사색과 체험이 그의 철학의 내적 심각성과 철학적 깊이를 주었다. 그는 종교성과 내면성과 우수성을 지닌 주체적 철학자다.

어떻게 하면 사람은 진정한 기독자가 될 수 있는가?’이것이 그의 철학의 중요한 관심사다. 그의 여러 저술은 이 문제에 대한 구명究明이라고 할 수 있다. 18541, 덴마크 국립교회의 뮨스터감독監督의 장례식에서 마르텐센교수가 뮨스터를진리의 증인證人이라고 예찬하였다. 케고르는순간瞬間이라는 팜플레트에 뮨스터감독은 과연진리의 증인이었던가?’라는 글을 발표하여 국립교회에 도전했다. 그와 국립교회의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이 논쟁에서 기력氣力을 쇄진灑塵하였고, 18591110일 거리에서 졸도卒倒하여 다음날 병원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43년의 생애는 고독한 인생의 예외자의 길이었다. 그는 성실한 주체적 사상가로써 심각한 내적체험과 외적투쟁을 겪었다. 그의 성격은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일면 웃고 다른 면에서는 우는 모순을 지녔다.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지닌 내적갈등이 그의 저서와 사상에 반영된다. 자기의 철학적 신념대로 산 철학자다.

그는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위시하여,‘반복’,‘불안의 개념’,‘공포와 전율’,‘인생행로의 여러 단계’,‘철학적 단편’,‘철학적 단편후서’,‘죽음에 이르는 병’,‘기독교의 훈련’,‘교훈적 설교집등 수십권을 저술했다.

그의 문장은, 특히 초기의 문장은 화려한 문학적 스타일이다. 그러나 철학적단편 이후의 문장은 논리적, 사변적, 분석적이다. 그의 여러 저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846년에 저술한 철학적단편후서(이후 후서). 이 책은 그의 사상의 최고봉이다. 케고르의 실존사상의 핵심원리가 집약되고, 종합된 명저名著. 1844년에 철학적단편을 저술했다. 인간 교사로써 소소크라테스는 인간에게 내재하는 진리를 상기시키는 산파적 교사다. 소크라테스와 신의 아들 예수를 대비한다. 그리스적 진리관에 의하면, 진리는 상기想起Anamnes. 그러므로 변증법적 대화에 의해서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하는 진리를 상기시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과업課業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인간은 비 진리다.’인간은 죄 속에 있으면서 죄를 자각하지 못 하며,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죄와 진리의 자각에는 외부에서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해후邂逅(만남)가 필요하다. 여기서 신앙의 문제가 생긴다. 철학적단편은 후서에서 전개될 여러 가지 중요한 개념과 문제를 제시하여 후서를 완성했다. 이 책의 원제목은철학적 단편에 대한 종결적 비학문적인 후서(Afsluttendeuridenskabering efters krift til de philosopiske smulur, 영역 Cone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the P hilosophical Fragments)라는 책명이다. 약칭 철학적단편후서 또는 그냥 후서로 칭한다. 케고르는 헤겔처럼 철학의 체계를 세우지 않는다. 케고르는 자기의 사상은 헤겔적인 정통철학의 이성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철학적단편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므로, 자기의 저술을 철학적단편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케고르는 후서에서사람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기독자가 될 수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서 주체성과 주체적진리를 강조한다. 실존이란 무엇이냐? 실존은 인간의 현실 존재를 의미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하나하나의 단독자單獨者를 의미한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의 실존으로써 남과 대체 대용할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의 개성적 인격의 존재다. 실존은 인간의 현실존재라는 점에서 하나의 Sein(사실 존재, 도이치어)적 개념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존은 인간의 진실존재를 의미한다. 실존은 인간의 현실존재인 동시에 진리존재다. 참된 자기, 진실한 자아, 본래적인 자기가 실존이다. 실존은 하나의 Sollen(마땅히 그래야 하거나, 마땅히 그렇게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요구되는 것, 도이치어)적인 규범적개념이다. 우리는 참된 자아 즉 본래적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할터인데, 거짓된 자아, 비 본래적 자기로 전락한 삶을 산다. 실존은 우리가 도달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하나의 이상이요, 규범이요, 목표다.

실존하는 자에게는 실존이 최고의 관심이다.’

인간은 생존하고 있지만 실존하고 있지는 않다.’

현대인들은 지식의 과잉過剩에 팔려서 실존을 잊어버리고, 내면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실존적으로 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설명한다.

후서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기독교를 객관적문제로 삼는 것을 논하고, 2부에서는 주체적문제로써 다룬다. 2부가 후서의 근본이상을 이룬다. 케고르는주체성의 진리다라는 새로운 실존적명제를 제시하고사람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기독자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를 구명한다. 그것을 다루기 위해서 헤겔철학의 체계적사변의 추상성抽象性을 비판하고, 헤겔주의의 극복을 시도한다.

헤겔은 객관적 사상가요 케고르는 주체적 사상가다. 헤겔의 사고는 객관적사고요, 추상적사고요, 순수純粹사고다. 케고르는 헤겔에 반대하여 실존적사고, 구체적사고, 주체적사고를 강조한다. 전자는 인간의 주체성을 문제로 삼지 않는 사고다. 나를 망각하고 자아를 무시한 사고다.‘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 헤겔의 관념론의 체계에서는 나의 실존과 자아의 주체성과 논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실존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실존이요, 자아요, 주체성이요, 윤리다. 케고르의 실존적, 주체적, 구체적사고는를 문제로 삼고,‘의 주체성과 윤리를 중요시 한다. 후서는 이렇게 말한다.

객관적사고의 길은 주체를 떠나서 객관적인 진리(수학, 형이상학 여러 가지 종류의 역사적 지식)에로 향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주체 자신이 어떻게 실존하느냐 하는 것은 주체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헤겔의 철학에는 논리의 체계는 있어도 존재의 체계는 없다.’

헤겔은 사고하고, 사고하고, 또 사고하였다. 마침내 인간인 것을 그만두고 순수사고가 될 때까지.’

주체적사고는 주체성 그 자체로 향한다. 내면성의 방향을 취한다. 이 내면화에 의해서 진리를 반성하려고 한다.’

추상적사고란 무엇이냐? 그것은 사고자가 존재하지 않는 사고다. 그것은 사고 이외의 모든 것을 도외시한다.’

구체적사고란 무엇이냐? 그것은 사고자가 존재하는 사고다. 사고되는 특정의, 개개의 어떤 존재자가 존재하는 사고다.’

헤겔은진리는 객관성이다. 객관성이 진리다.’라고 말 하는데 대해서 케고르는진리는 주체성이다. 주체성이 진리다.’라고 주장한다. 케고르는 주체적진리를 강조한다.

주체적진리란 무엇이냐?‘나에게 있어서 진리인 것.’‘그것을 위해서 내가 살고 또 죽을 수도 있는 그러한 진리가 나의 주체적진리다. 그것은 나를 위한 진리요, 나의 진리다. 내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힘을 주고 , 구제救濟, 해탈解脫의 빛을 주고, 내게 행동원리를 제시하고, 내게 기쁨과 의의와 보람을 주는 진리, 그것이 나의 주체적진리다. 케고르가 객관적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객관적진리에 대한 주관적진리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역설한다. 특히 종교의 진리, 기독교의 신앙의 진리는 주체적 진리개념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 케고르는주체성 내면성의 진리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구명한다. 케고르에 의하면, 기독교는 정신이요, 정신은 내면성이요, 내면성은 주체성이요, 주체성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정열(파토스)이요, 자기 자신의 영원한 행복에 대하여서 무한한 관심을 기울이는 정열이다. 주체적이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부과된 최고의 과제다. 윤리가 실존의 최고의 관심이다. 인간이 하나의 행동적 윤리적주체로써 신 앞에서 홀로 단독자로 서는 이것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미미한 사건일지 모르지만 윤리적으로 볼 때에는 무한히 중요하다.

신앙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주체의 파토스적pathos, (격정, 열정, 노여움 따위의 일시적인 정념情念의 작용)인 모험이요, 선택이요, 결단이요, 도박賭博이요, 정열이다. 신앙은 객관적으로는 불확실하다. 신은 객관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내면성의 무한한 정열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불확실한 것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모험 내지 도박에서 신앙이 성립한다. 신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서 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사실, 영원히 시간 속에 출현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주체적진리는 객관적으로는 하나의 역설이다. 이 역설을 주체적결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실존적의지의 결단이다. 신앙은 이성의 이해를 초월한다. 케고르는 후서를 통해서 진정한 기독자가 되는 길을 밝히려고 했다. 홀로 신 앞에 서는 신앙적실존, 이것이 케고르 실존철학의 최후의 결론이다. 철학후서의 골자骨子.

그의 실존사상은 위기危機신학과 현대적 실존철학과 문학사조에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실존주의철학은 현대철학의 주류를 형성한다. 하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방향을 걷고(야스퍼스, 마르셀), 또 하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방향을 걷는다(하이데커, 사르트르), 인간의 실존적구조를 철학적으로 깊이 파헤친 실존주의사상은 앞으로도 현대사상의 여러 영역에서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018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1883),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

 

니체의 사상배경은 19세기 유럽사회 그 자체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에 파급된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19세기 중엽의 유럽사회는 전면적 변화의 시기였다. 경제는 말 할 것도 없고, 정치, 사회의 전반에 걸쳐 산업자본국가의 패권覇權이 확립되었다. 이른바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이 그 정점에 이르렀고, 유럽의 근대 시민사회체제가 정비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시민철학의 체계도 정리, 집성集成되어 도이치의 헤겔, 프랑스의 콩트, 영국의 스펜서 등의 철학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의 이러한 발전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밝은 면 및 어두운 면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예컨대 산업혁명이 가져온 근대적공장은 많은 노동자들을 낳아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 커졌다. 또 고도의 근대적인 공업생산은 빈부貧富의 차를 크게 하여 유산자有産者와 무산자의 대립을 만들었다. 순환적循環的인 공황恐慌과 이에 따르는 실업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또 세분화된 노동을 수동적으로, 기계적으로 해야 하는 대중의 매마른 생활양식生活樣式에서 오는 폐해도 커졌다. 이리하여 근대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새 사회의 설계가 시대적과제로 나타났다. 영국 및 프랑스의 사회주의사상이나 도이치의 공산주의사상은 이러한 새 사회의 설계도라고 볼 수 있다.

니체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은 근대 시민사회의 어두운면이 더욱 커져간 시기다. 유럽 각국의 대자본은 국내에서 여러 가지 독점단체를 만들어 국내의 시장을 독점하고, 국내정치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들은 더 나아가 세계시장의 패권을 잡으려고 경쟁과 전쟁을 일삼았다. 이리하여 전쟁과 독재정치가 위협하는 험악한 시대 - 이른바 제국주의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와같이 유럽의 근대시민사회가 자유주의로부터 제국주의시대로 넘어간 것이 1880년대라고 볼 수 있으므로 니체는 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목격目擊했다.

이 무렵 도이치 사정은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복잡했다. 중세 이래로 국토의 분열상태가 계속되어 전 도이치는 산업혁명도 - 영국과는 말 할 것도 없고, 프랑스보다 20년이나 뒤떨어져 1830년대에야 비로소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공장이 서고, 도이치 상인들도 세계무역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국토의 분열이 불편하고 불리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또 힘을 쌓아온 시민층은 전제정치를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자유와 통일은 도이치 시민층의 요구가 되었다. 그러나 나라 안팎의 복잡한 사정으로 이 요구는 쉽게 실현되지 못 하고 19세기 후반에 비스마르크를 정점으로 하는 프로이센국가의힘에의 의지에 의하여 도이치통일이 완성된다. 이렇게 탄생된 도이치제국은 민주적이 아니라 전제적이었고, 비스마르크의 무단적武斷的 정책은 도이치인의 마음속에 깃들어있었던힘의 숭배를 더욱 조장했다. 통일에 의해 도이치의 자본주의는 급속히 발전하여 도이치는 유럽의 강국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계략이 숨어있었던 보불전쟁(普佛戰爭, 187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계 여러 나라와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 1870 - 1871)에 니체도 지원하여 종군하였으나 그 뒤로부터 니체는 신흥자본주의국가 도이치를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당시의 도이치문화를 지배하는 정신 자체를 부정하였다.

니체는 1844년에 작센 주에 있는 뢰켄이라는 곳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프로이센의 왕과 알게되어 우정에 의해 일찍 뢰켄의 목사가 된 니체의 부친은 24세의 아름다운 부인과 5세의 어린 장남을 남겨놓고 세상을 떴다. 니체는 어려서부터 고독을 즐겨 꽃과 책과 음악에 몰두했다. 10세에 시를 쓰고, 작곡을 했다. 14세에 장학금을 얻어 나움브르크에 있는 포르타학교에 입학하고, 20세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문헌학文獻學의 대가大家 리츨의 지도 밑에서 문헌학을 연구했다. 리츨교수가 이프니치대학으로 옮아갔으므로 니체도 그를 따라 문헌학을 연구했다. 라이프찌히에 있는 3년 동안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리스정신과 의지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인격과 바그너의 음악예술이었다. 니체가 25세 되는 1869년에니체는 천재다. 그가 바라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다.’는 찬사로써 리츨교수의 추천을 받아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 종군하였으나 전염병에 감염되어 제대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는 안질眼疾과 신경증으로 고통받았다. 1872년 처음 저서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die)이 나왔다. 1876년에는 건강 때문에 교직을 쉬었다. 건강은 악화되었고, 1879년에 퇴직했다. 이때부터 그는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방랑하면서 고독한 문필생활을 했다. 남국南國의 겨울, 산국山國의 여름을 찾고, 산으로부터 바다로, 바다로부터 산으로 방랑하는 동안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준비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니체의 가장 독특한 저서인데, 그는 처음의 세 편을 각각 10일 동안에 완성했다. 영감이 내린 듯 쉽게 그리고 격류激流처럼 빨리 썼다. 그러나 마지막 제 4편은 몇 달이나 걸렸다. 이 짜라투스트라 이후의 저서는 여기에 들어있는 사상을 주석註釋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는 짜라투스트라가 예술적형식으로 묘사한 근본사상을, 보다 완전한 이론적 산문으로 서술하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준비했다. 그러나 1889년에는 정신착란精神錯亂에 빠진 체 다시 회복하지 못 해 누이동생의 간호를 받다가 1900년 세상을 등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준비하던 저서는 누이동생과 조수의 힘으로 1906년에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로 출판되었다. 완성과는 거리가 먼 자료 즉 노트와 아포리즘 Aphorism (명언名言, 격언格言, 잠언箴言, 금언金言 등 교훈을 주는 말 또는 사물의 핵심과 이치를 표현한 문장, 그리스어로정의를 뜻하는 단어에서 명칭 유래)을 편집한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짜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니체의 가장 독특한 저서다. 주인공의 이름은 페르시아의 고대종교인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를 본 딴 이름이다. 이름에서도 유럽문화에 대한 니체의 반감과 아울러 동방東方의 사상, 생활, 잠언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사상상으로는 짜라투스트라와 조로아스터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짜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유일한 벗이고 니체 자신이다. 늘 외로웠던 니체는 그만큼 깊은 우정과 충실한 벗을 동경憧憬하였다. 짜라투스트라는 니체에 있어서손님들 가운데 가장 반가운 손님이다.

니체는 그의 수기手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하나의 몸으로 예술가, 성자聖者 및 철학자가 되는 것, 이것이 나의 참된 목적이다.’ 짜라투스트라도 이러한 세 가지를 겸비兼備한 인물로써 바로 니체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연 그는나는 마땅히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 나 자신을 짜라투스트라라고 부른다.’라고 했다.

니체는 생활의 각 시기에 훌륭한 벗들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때마다 깊은 우정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가장 완전하다고 믿었던 벗들도 결국 같이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가장 이상적인 벗으로써 짜라투스트라를 그려냈다.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니체의 가장 깊은 내적 경험 즉 우정, 사상, 환희, 환멸, 고민의 역사가 이야기되며, 그의 가장 높은 희망과 목적이 그려진다.

짜라투스트라는 서사시敍事詩라고 할 수 있다. 운문韻文의 형식은 아니지만 시적 산문을 통해 언어의 음악과 시적 특성이 넘쳐흐른다.

짜라투스트라는 4부로 되어있는데, 1부에는 머리말이 앞세워져 있다. 줄거리는 - 짜라투스트라는 30세 때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들어간다. 10년 동안 홀로 산중에서 그의 정신과 고독을 즐긴 뒤에, 어느 날 아침 문득 그동안 성숙된 새로운 가르침을 인간에게 계시하기로 결심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아직도 낡은 신을 믿으면서 숨어 사는 늙은이를 만나 이야기 하다가신이 죽었다라는 것을 모르고있는 늙은이와 작별한다. 헛된 믿음이나마 그 늙은이에게서 마지막 믿음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다. 짜라투스트라가 숲이 있는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장터에는 줄타기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민중이 모여있었다. 그는 이 민중들에게 초인超人을 말했으나 아무도 이해하지 못 했다. 그동안에 줄타기가 시작되어 줄 타는 사람이 줄 한가운데 왔을 때, 다른 사람이 뒤따라와 앞선 사람을 재촉하고 꾸짖다가 앞선 사람을 뛰어넘었다. 앞선 사람은 떨어져 죽고, 민중들이 흩어졌다. 짜라투스트라만 남아있다가 시체를 묻어주기 위해 숲으로 향했다. 숲속에 집을 짓고 살고있는 늙은이에게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했다가죽은 사람과 똑같이 나누어 먹으라는 말에 격분激憤하여 음식을 뿌리친다. 그는 드디어 죽은 벗이 아니라 창조력이 있는 산 벗을 찾아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 순간 독수리와 뱀이 다가왔다. 그는 뱀처럼 영리하고, 독수리처럼 긍지矜持를 가진 행동을 할 것을 다짐했다.

1부에서는 짜라투스트라의 설교가 전개된다. 그는 창조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며, 그는 어떠한 괴로움이나 고통도 자신의 향상을 위한 계기로 전환해야 한다고도 역설했다. 짜라투스트라는 가르침을 씨를 뿌려 놓은 뒤에 그의 제자들과 작별하고 홀로 있기를 결심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의 설교를 맹목적으로 믿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타이르고 그들을 작별했다.‘너희들이 모두 나를 부정했을 때에 비로소 나는 너희들 옆으로 돌아올 것이다.’이 동안의 설교내용은 초인과 가치전도顚倒로 요약된다.

2부에서는 제자들을 오해의 타락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길을 떠난다. 그는 그의 글을 통해 그의 설교가 적대자들로부터 완전히 오해되어 있다는 것을 직각直覺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주의적 평등사상이나 민중의 군중본능을 선동하는 혁명가의 정체를 파헤쳤다. 여기서도 그의 설교의 마지막 비밀인 영원회귀의 사상을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새 이유를 찾았다.

3부에서는 인류의 자기초극超克에 모범으로써 초인을 위해 짜라투스트라가 자기를 초극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의 이상이 풍겨주는 공포를 초극하고 절대적인 생활긍정을 위해 노력했다. 드디어이것이 삶이었던가? 그렇다면 자, 한 번 더!’라고 외침으로써 초인의 생활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기회를 타서 그는 드디어 영원회귀의 사상을 포고布告했다.

4부에서는 미래가 풍부한 새로운 귀족이 창조되어야 하는 이유를 밝히려고 했다. 짜라투스트라도 어느 새 늙은이가 되어 그의 지혜는 더욱 더 성숙되었다. 그는 보다 고귀한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산중을 찾아 해맨다. 그는 보다 고귀한 사람을 찾아 홀로 산중을 뒤졌으나 결국 아무도 만나지 못 하고, 자기 자신만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는 고목枯木에 기대어 낮잠을 잤다. 영원회귀의 사상이 짜라투스트라의 영혼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제 보다 고귀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同情도 초극할 수 있었다. 그는 아침 태양을 향해, 오라! 오라! , 크나큰 대낮이여!’라고 외쳤다.

4부는 겨우 7권만을 자비로 출판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 때 니체의 주변이 얼마나 쓸쓸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20세기의 철학이나 문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019  시간과 자유 Essai sur les domness immediates de la conscience (1889), 베르그송 Henri Bergson

 

앙리 베르그송은 189510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태계의 폴랜드인으로 프랑스에 이주했다. 모친은 영국으로 가 살았으나 그는 어려서부터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다. 1868년부터 1878년까지 콩도르세 고등학교에서 고전과 수학을 공부하고, 1877년에는 수학경쟁시험에 입상하여 그 논문이 수학년감에 발표되었다. 1876년부터 1881년까지 고등사범 문과를 선택하고 교수시험에 합격된 후 1888년까지 5년 간 지방의 고등학교에서 재직하며 박사논문을 제출하여 1889년에 파리대학 학위심사를 통과하였다. 그 논문이 시간과 자유.

1888년에는 파리에 돌아와앙리 4세 고등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했다. 1900년에는콜레즈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하여 1901년에 학술원회원에 뽑히고, 1914년까지 재직하였다. 1918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스(한림원翰林院)의 불사자(不死者, Immortel)로 피선되었다. 세계 1차대전 중에는 프랑스 미국의 친선을 위한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였으며, 종전 후에는 국제연맹이‘12인 지적知的협력위원회를 창립했을 때 1925년까지 위원장을 역임하고, 그 후 신병으로 고생하다가 1941년 파리에 별세했다.

베르그송의 사색활동은 주로 4개 저서에 발표되어 있는데, 첫 저작시간과 자유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요, 가장 독창적인 그의 인식론이다. 책의 제목이 프랑스어로는의식의 직접 여건에 관한 시론試論(1889)인데, 영역시英譯時 베르그송의 제언에 따라시간과 자유 의지로 표제表題를 고쳤다.‘물질과 기억(1986)은 그의 심리학이요,‘창조적 진화(1907)는 생물학 기초 위에 선 그의 형이상학이며,‘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은 그의 윤리학이고, 종교철학을 포함하고 있다. 베르그송은 그 시대의 가장 심각한 요구에 응하여 참으로 새로운 철학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했다.

그의 문장은 명석明晳하고 예술적인 표현이며, 인상 깊은 비유比喩로 사람을 설득하는 힘을 지녔다. 그는 1927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베르그송이 첫 저작을 낼 시기에는 과학적 실증주의가 유행했다. 처음에는 진화론적 실증주의가 과학지식을 최고가치의 표준으로 삼아 사회적, 도덕적현상까지도 과학적형식으로 특수한 철학을 조직하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너무 철저한 주지주의 경향이었다.

이 실증과학적 종합의 편협偏狹한 주장과 기계관機械觀의 이론은 그 때의 철학을 일시적으로 지배한 듯 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항이 점점 노골화되어, 드디어 새로운 철학이 발생하게 되었다. 인간적인 모든 현상은 다른 모든 실제의 현상에 대하여는 이질적이요 특수한 것임을 실증론도 시인하게 되고, 기계론도 자연과학의 범위 안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과학자들이 과거 300년 간 발견한 물리학적 수학적 우주의 대 법칙을 철학자 부트루는 우연적偶然的성질이라 하였고, 과학자 포앙카레는 편의적便宜的인 성질의 것에 불과하다고 결론하였다. 실증주의와 관념론에 반대하는 경향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철학의 특색은 데카르트의나는 생각한다의 심리학적 해석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즉 우리가 자기 속에 혹은 의식의 특유한 활동 속에 참으로 직접적인 직관을 철학 일체의 최초의 유일한 여건으로 인용認容하는 것이다.멘 되 비랑이 이 방법을 깊이 연구하였다. 데카르트는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였는데, 비랑은 이에 대하여 나는 의욕意慾하고 나는 활동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라고 말하였다. 비랑의 이 자기 내적 친밀감에서 유래하는 유심론唯心論의 전통은 라베송과 라셀리에를 통하여 베르그송에게 충실히 유지되고 있다.

베르그송은 이시론試論에서 서양사상상 중요문제의 하나인자유를 다루되 시간론에 의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1장에서는심리적상태의 강도强度에 대하여’, 2장에서는의식상태의 다양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이고, 여기서, 한 의식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아가는 과정을 논하고 물리적시간과는 다른, 진정한 지속持續(druee)을 구명究明하였다. 3장에서는 의식상태의 조직이라 하여 자유론을 전개하였다.

과학적기계론의 근본과정은 질을 양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감각이 우리에게 인식시키려 하는 질의 변화 혹은 질의 차이를 분명한 양으로 대응하게 할 수 있다고 과학자는 예상하고 있다.‘의식의 모든 상태, 감각과 감정과 격정과 노력은 증대하든지 감소하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할 뿐 아니라, 한 감각은같은 성질의 다른 감각보다도 23강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리하여 양과 질,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이강도의 개념 속에 혼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철봉鐵棒을 휘는 노력은 침을 휘는 노력의 몇 십 곱이라 한다. 이빨을 뽑는 아픔은 털을 뽑는 아픔 보다 백배나 더 아프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느끼는 것으로 보면 이빨을 뽑는 아픔과 털을 뽑는 아픔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요, 양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침과 철봉의 노력의 경우에도 우리는 직접 노력의 느낌이 비교된다기보다도 침과 철봉을 공간에 투사投射하여 비교하는 것일 것이다. 애정이 강하다든지 동정이 적다 말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양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애정은 하나하나 독자獨自의 성질을 갖고 있어서, 서로 합친다든지 감한다든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의 대소를 논하려면 그것들을 서로 덧겹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질적인 것을 공간 사이에 의하여 양적인 것으로 생각게 한다. 양적인 입장에서 모든 현상을 외부에서 측정하려는 자연과학자는 모든 질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현상을 순수한 그대로 파악하려면 심리학자는 이 양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의 내적 현실은 공간적인 것도 아니거니와 수도 아니요, 그 반대로 사실적으로 지속하는 것이다. 심적 현실은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성분들은 분명하게 구별되지 못 하도록 서로 침투되어 합쳐있다. 연상聯想심리학이 말하듯이 우리 감각들은 서로 떨어져있는 것으로써 외부에서 서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융합融合하여 나의 개성적 색채色彩를 띠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들을 때처럼 음과 음이 서로 융합하여 산 조직을 이루어 지속하면서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융합하여,‘현재는 과거를 등에 지고, 또 미래를 품고있어순수한 유동流動과 침투浸透가 합쳐져있다. 이것이 순수지속持續이다. 베르그송은 순수지속을 정의하기를순수지속이란 것은 질적인 변화의 계속 뿐이요 그 변화는 서로 배여있고, 서로 침입하여, 명확한 윤곽을 갖지 않고, 서로 외적인 관계에 선 경향이 아니라, 와는 적은 유사類似도 보이지 않는, 순수한 이질적인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리라하였다.

공간의 복사複寫에 불과한 동질적인 시간은 구체적 지속에서 구별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것은 베르그송철학의 중요한 개념이다.‘우리는 두 종류의 다른 실제를 분별한다. 그 하나는 이질적인 감성적인 성질의 실재實在, 다른 하나는 동질적인 실재, 즉 공간이다사람은 운동도 공간 안에서 생긴다 말한다.‘참말로 운동체의 계속적 위치는 공간 안에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운동체가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옮아가는 동작은 공간적이 아니요, 지속의 안에 있다. 그리하여 의식적인 관찰자에 대해서만 실제성을 갖고 있다.’ 요컨대운동 속에는 두 요소가 분별된다. 즉 경과된 공간과, 공간을 경과하는 동작과, 계기적 위치와 위치의 종합이다.’한편은 흘러간 시간이요, 다른 편은 흐르고 있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흘러간 시간은, 실은 공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운동궤도軌道가 선으로 표시되는 것도 그것이 이미 공간화 된 까닭이요, 흐르는 시간은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진정한 시간 즉 지속은 참으로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옮아가며 변해가므로 그 사이에 단절斷切이 낄 수 없는 부분들의 서로 침투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연상설聯想說은 심리적사실을 서로 떨어진, 구별된, 공간화된 요소들의 집합集合으로 생각한다. 연상설의 잘못은 동작動作의 질적 요소를 처음부터 제거하여버리고, 정신의 내부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현상 대신에 인공적인 재구성을 바꾸어놓는다. 심지어 경험적 심리상태들을 병렬竝列하여 자아自我로 보고 있다. 이런 표면의 자아 밑에 공간적병렬이 아닌, 인격 전체가 구현되는 깊은 자아가 있다. 아무리 제한없이 심적상태를 늘어놓더라도 그것은 필경 환영幻影의 자아요, 공간에 투사된 자기의 그림자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마치 연못의 수면에 뜬 마른 잎사귀 같이우리 자체의 표면에 부동不動하는 것이 의식상태이다. 우리의 참 자아는 이런 의식상태를 초월超越하여 참으로 지속하고, 참으로 생활하고,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해가면서, 이미 얻은 인상印象이 서로 쌓이고, 융합되어 자기 독특한 색채를 띠고, 특수한 품격을 갖춘, 참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자기 본래의 자태를 실현하면서, 창조적으로 진전하는 지속이 생생한 자아요, 앞으로 되어질 미래가 열려있는 자아는자유라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위와 같은 철학적원리를 갖고 그는 현대철학의 중요한 이론인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해결한다기보다 그 문제를 없애버리려 한다. 생명의 질적 연속인 참자아는 순수지속으로서 본래부터 과학의 여건은 될 수 없다. 주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의지활동을 분기점分岐點에 있어서의 방향의 선택으로 이해하려는 점에 있다. 자유 문제에 대한 모든 오해는 베르그송에 의하면자유에로의 해방을 공간 안에서 생기는 진동振動과 같이 생각하는데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행위行爲하는 이가 이 방향으로 갈까, 저 방향으로 갈까 하는 선택의 자유는 피상적이요, 실제하는 것은 생생히 살아있는 자기이므로, 그 자기의 자유로운 행위는 스스로 해방되어 진전하여 가는 것이다. 요컨대우리 행위가 우리의 전 인격에서 흘러나오고, 전 인격을 행위가 표명할 때그리고 동시에 그 행위가 인격을 확충하여 인격을 완성할 때에 우리는 자유인 것이다. 관념론자가 생각하듯이 자아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요, 고정된 것도 아니다.‘자유는 유동적流動的 진행이므로 자아와 능동 그것은 산 참 실제와 마찬가지로, 부단不斷의 생성生成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해가고 있다.’남의 인격에 대하여 판단하듯이 그처럼 충분히 남의 미래의 행동을 예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같은 원인에서 같은 결과가 난다고 하는 논리적 필연 관계, 즉 결정론은 인생현상에는 적용의 문이 막혔다. 구체적자아와 자아가 수행하는 동작과의 관계를 자유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관계는 자유이므로 우리는 이를 정의할 수 없다.

베르그송은 위에서 본대로 내적자아와 외적자아를 구분하였다. 전자는 내적, 계기적契機的, 시간적이요, 후자는 양적, 병렬적, 공간적이다. 외적자아는 일상적자아요,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 실제를 구하는 이는 일상적자아를 내버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단번에 실제의 한복판에 뛰어들어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내적인 자아, 자유로운 참 자아를 붙잡으려면 극도의 긴장이 필요하다. 생동하는 자아는 내감內感하는 길 밖에 없다. 대상과 합일하여, 스스로 대상 그것이 되어, 대상 안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직관直觀(Intuition) 이요, 그리하여 직관은 공감共感이다.

베르그송은 이 시론試論에서 구체적, 현실적인 자아의 실존實存을 드러냈고, 표면적인 자아에서 본래적인 자아를 구별하였다. 그 내적자아는 생성의 과정에서 이루어져가고 있어서, 그 본질이 자유임을 갈파하였다. 자아를 고정固定한 인식기능, 즉 이성理性으로 보는 칸트의 관념론을 극복한 것이다. 실로 베르그송은 현대 새 정신의 한 개척자다.

 

020  꿈의 해석解釋 Die Traumdeutung (1900), 프로이트 Sigmund Freud

 

1900년대에 발표된 프로이트의꿈의 해석(이하 해석)은 그의 이론을 발표한 역정歷程에서 볼 때 초기 사상의 종합이다. 그의 정신분석학이 갖는 인간 심리에 관한 심오深奧한 이론체계는 대부분 그 후에 발견했지만, 그렇다고 해석이 갖는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심리학적 이론이해석의 사상과 자료를 기초로 했고, 그 후의 업적은 다만 학문적인 체계를 세우는데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 저서가 그의 사상적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미 프로이트의 무의식無意識의 이론, 욕구 내지 동기動機의 이론,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중요개념인 억압, 저항, 1차적과정 및 2차적과정 등은 이 저서 속에 들어있다.

그가 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소년시절부터였다고 하지만 학문적인 대상으로써의 꿈을 연구하고, 사색하게 된 것은 신경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동안에 얻은 경험에서였다.

프로이트는 처음 비엔나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의학 중에서도 그의 흥미를 근 것이 생리학生理學이었다. 당시 신경계통에 관한 새로운 이론과 지식이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생리학도로써의 프로이트도 자연 신경생리학에 관심을 갖고 그 방면의 공부를 하였다. 그 후 임상臨床에 옮겨지게 되자 신경정신과를 전공하게 된 것은 그의 신경생리에 대한 관심에 미루어 당연한 일이었다.

초기에는 중추中樞신경계통의 기질적질환氣質的疾患을 주로 연구했지만 신경과에는 기질적인 변화가 없는 정신병환자들도 많이 왔으므로 그들도 치료해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 신경과질환에 관한 치료방법이 발달하지 못 했다. 다만 프랑스에서 메스머의 전통을 이어받은 최면催眠치료법만이 유명했다. 당시 비엔나에서는 신경과가 등한시 되고 있어, 이 방면의 의학이 유망했고, 또 그의 학문적인 관심도 이 의학분야에 부합되었으므로 그는 신경과의 전문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프랑스에 가야만 했다. 그는 1885년에 파리로 가서 그 당시 유명한 정신의학자 샤르코 밑에서 1년 간 최면치료훈련을 받았다.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30세 되던 1886년 신경과 전문의로써 개업하여 최면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치료는 그가 기대했던 만큼 성공을 하지 못 했다. 정신병의 원인이 되었던 환자의 경험을 최면에 의하여 찾아내면 일시적으로는 병 증세가 없어졌지만 얼마 안 가서 재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자라 해서 모두 최면에 걸리는 것은 아니었다. 치료자로써 프로이트가 해결해야만 했던 문제는, 어떻게 병의 재발을 막을 수 있으며, 또 최면에 걸리지 않는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느냐 하는 것을 해결하는 일었다. 그는 다시 결심하고 최면치료를 했지만 당시 파리의 샤르코일파一派와는 이론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있는, 프랑스의 낭시라는 곳에 있는 일단一團의 신경정신과 의사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자 각성시覺醒時에는 자신이 알지 못 했던 병 증세의 원인이 되는 여러 가지 경험을 최면상태에서 생각해내는 것을 보고 대단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 최면술은 환자의 무의식세계를 알게 하고, 그러므로써 이해할 수 없던 각성시행동의 무의식 속의 숨은 동기를 찾아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시간이 후에 그의 무의식적인 동기에 관한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프랑스 방문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에서 프로이트의 최면치료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 했다. 이러던 차에 그의 동료였던 브로이어란 사람이 히스테리환자를 치료하는데 정신적정화법淨化法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그 방법에 흥미를 가졌다. 이 방법은 최면상태에서 병 증세의 원인이 되는 경험적사실만을 생각해내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경험을 했을 때 환자가 느꼈던 감정을 생각해내서 그 감정을 전부 말해버리게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마음속에 뭉쳐있었던 감정의 덩어리를 말해버림으로써 마음속에서 깨끗이 씼어버린다는 의미에서 마음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화법은 치료효과는 상당히 좋았지만 한 가지 난점難點이 있었다. 환자가 자기의 정서적경험을 말로써 정화하는 경우 그 정서가 치료자인 의사에게 옮겨가는 현상이다. 이것을 전문술어述語로는전이轉移라 한다. 환자의 이루지 못 한 애정을 정화하면 치료자인 의사에게 그 애정을 전이한다. 의사로써는 환자의 이런 애정의 호소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브로이어는 이 전이현상을 치료할 수 없어 그 후 정화법을 그만두게 되었다. 최면치료가 만족할만 하지 못 했고, 또 정화법이 전이를 수반하는 약점이 있으므로 프로이트는 정신질환자의 치료에 최면방법 이외의 타당한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최면이 잊어버린 경험을 빨리 생각해내는데 도움이 되지만 최면이 아니라도 적당한 방법만 사용한다면 환자를 치료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상기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환자를 침상에 눕히고 신체의 긴장을 풀게하고 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이나 전부 말하게 하였다. 이 방법이 유명한자유연상법이다.

환자의 되풀이 되는 자유연상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최면법이나 정화법에 못지않는 병 증세의 원인적인 경험이나 정서를 찾을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자유연상 속에 흔히 지난 밤 또는 최근에 꾸었던 꿈의 내용이 나타나고 또 같은 종류의 꿈의 내용이 되풀이해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꿈이 연상 속에 남아있다는 것은 꿈과 관련된 어떤 사실이 마음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꿈은 한 갓 헛된 현상이 아니라 환자의 심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짐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만약 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마치 최면상태에서 병 증세의 원인적경험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을 찾을 수도 있으리라 짐작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꿈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된 사실적배경이었다. 그는 꿈에 관한 연구문헌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에도 체계적인 연구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없었다. 다만 예언적가치와 신의 계시의 통로로써의 꿈에 관한 일화적逸話的인 서술 정도를 찾을 수 있었다. 꿈이 환자의 심리적내용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리라 확신했지만, 그러나 환자가 자유연상에서 생각해낸 내용만으로써는 직접적인 어떤 병 증세와 관련이 된 것을 찾아낼 수 없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각성시에 생각해낼 수 있는 꿈의 내용의 배후에 숨어있는 꿈의 내용이 있다고 추리했다. 그리하여 후자를 잠재몽潛在夢이라고 하고, 전자를 현시몽現時夢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바로 그의 정신분석학의 심리학적이론이 출발한다. 즉 잠재몽이 어떻게 현시몽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허다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잠재몽이 왜 그대로 현시몽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잠재몽이 차지하고 있는 심리적영역이 무엇이며, 잠재몽의 작용이나 지배원리가 무엇인가? 잠재몽이 현시몽으로 나타날 때 어떤 위장僞裝을 해야 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또 위장을 어떻게 하는가? 등등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하여야만 꿈의 의미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곧 그의 정신분석학의 이론이었고,‘꿈의 해석의 이론이었다. 이 이론들은 그가 1938년 나치스의 유대인 추방에 쫓겨서 영국에 건너가 그 다음 해에 죽을 때까지 몇 차례의 변천變遷은 하였지만, 그의 사상적 출발은꿈의 해석속에 이미 여물어있었다. 따라서꿈의 해석은 프로이트의 대표작이고, 세기의 거작巨作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잠재내용은 욕망이고, 따라서 꿈이란 이 욕구를 수행遂行하는 작용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잠재몽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이고, 원리에 지배되는 1차적인 욕구과정이다.

이런 욕구는 어릴 때의 정서적경험과 의식의 세계에서 억압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욕구는 충족되기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루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각해내서도 안 된다. 따라서 그런 욕구는 무의식속에 억압되지만 무의식속에서는 충족시키려는 힘으로 작용한다. 잠을 자면 의식세계가 일시 중단되므로 이 욕망의 힘이 고개를 들게되고, 그것이 꿈에 나타난다. 그러나 잠을 자고 있더라도, 무의식적인 욕구를 막는 심리적작용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서는 안 되는 욕망이 고개를들면 불안해진다. 이렇게 되면 잠을 깨고말것이다. 이 불안을 없이하고 잠을 계속하려면 억압된 욕망이 위장을 해야 한다. 이 위장된 욕망이 현시몽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꿈은 잠을 보호하기 위해 상징적이고 위장된 내용으로 나타나는 욕구충족이다. 프로이트의꿈의 해석은 억압된 욕망이 현시몽으로 나타날 때 어떻게 위장되느냐 하는 기제機制의 신비神秘를 벗겨버리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꿈의 해석이 갖는 프로이트사상에서의 의의와 그 내용의 약간을 전개하였다. 그러면 그의 이런 사상을 산출産出하게 한 배경의 사조思潮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당시 과학적사상의 대두擡頭에서 나타난 과학적결정론을 들 수 잇을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 밑에서 발전했던 자유의지설에 대항하여 과학적인 입장에서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정신현상을 포함하는 모든 현상은 인과적因果的인 결정원인을 갖는다는 사상이다. 인간의 심리현상도 자유의지에서가 아니라 그 원인적이 조건이 있다는 생각이다. 프로이트가 신경생리학을 공격했으므로 인간의 정신현상에 관한 신경계통의 관련성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그런 현상도 신경생리학의 발달에 따라 원인이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어떤면에서는 유추類推의 명수名手였던 것 같다. 신경계통의 생리에서 마음을 유추했고, 최면상태에서 꿈의 세계를 유추했고, 또 꿈의 해석에서 정상인의 각성시의 심리를 유추했다. 이렇게 과학적결정론의 입장에 선 프로이트는 환자들의 증세의 원인이 있고, 이것이 무의식속에 있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무의식속의 동기動機를 찾아낸다면 인간의 정신현상의 그 어떤 것도 원인없이 나타나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이런 사상이 그의 무의식적동기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킨 시대적사조의 배경이었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생리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렸던에너지 불변의 이론이었다. 신경에너지는 신경원神經元을 단위로 하여 타당한 자극에 따라 방출放出하게 되면 신경흥분을 일으킨다. 이 신경흥분을 일으키는 에너지는 신경원에 비축되어있어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어진 에너지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영원히 남아있다는 생각이다. 프로이트의 억압된 욕구가 심리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적당한 시기에는 다시 나타나 작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써 무의식상태에 저장되어 있다는 생각은 이런 사상적인 배경에서 생겼다. 아마 억압된 욕구를 에너지로 유추하지 못 하고 또 그것이 마음속에 저장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 했으면 그의꿈의 해석이나 정신분석학은 이루어지지 못 했을 것이다.

꿈의 해석과 그의 정신분석학이 심리학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커서 여기에서 그것을 전부 해설할 여유는 없다. 그 당시 전통적인 사상은 주로 지각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찰츠부르크학파에서 약간 취급이 되었지만 인간의 심리현상의 중요영역을 차지하는 동기나 정서에 관한 연구는 프로이트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영향이 위대함은 보링의금후 3세기는 프로이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서는 심리학사를 쓸 수 없다라는 말에서 충분히 표현되었다.

 

* <사족蛇足> 대학시절 꿈의 해석은 대단한 인기가 있는 책이어서 대강 한 번 읽었으나 별 흥미를 갖지 못 했는데, 교사 초년시절 몇 번의 예지몽을 꾸고 일기에 적기 시작했다. 꿈을 꾸고 그날 일어난 일을 붉은 색으로 기록했는데 점쟁이사주를 타고났나 했을 정도로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에 대한 대화를 시도하다가 신을 버린 후의 일이다. 제수祭需를 이고 버스에서 내리는 꿈을 꾸었는데 다음날 출근길에 똑같은 현상을 보았고, 겨울에 산에 붉은 꽃이 활짝 핀 광경을 보았는데 다음날 출근하니 어제밤에 학교 앞산에 공군연습기가 추락하여 시신이 나뭇가지에 널려 군인과 경찰들이 수습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꿈에 단청丹靑을 보았는데 학교에서 현장학습을 향교鄕校로 나갔고, 방송국의 동요가사童謠歌詞에 응모를 했는데 수상 3일 전 금화金貨 두 개를 얻는 꿈을 꾸었고, 하나가 1/ 3 쯤 녹아내리는 꿈을 꾸고는 응모작이 2등에 당선되었다는 통보를 받았고, 시상식에서 세금을 떼고 상금을 받았다. 초등학교시절의 혼불, 도살장 돌담 무너지는 소리, 새카만 털이 숭숭한 도깨비 같은 것이 목을 조르는 꿈을 깨고는 장판이 타며 연기가 방안 차오르는 위기를 모면했다. 물고기를 잡는 꿈을 꾸면 비가 오고, 한참 동안 불이 난 꿈(이상理想 실현 과정 해몽)을 꾸더니, 하늘을 나는 꿈(이상 실현 과정 해몽), 요즘에는 구두를 잃어버리는 꿈(실패)을 꾼다. 가깝게 사귀었던 여자가 나타나면 모든 일에 삼가하고, 웃으면 그 날은 외출을 삼간다. 꿈과 이상한 현상들이 신을 버린 탕자蕩子80이 된 지금까지 방황하게 한다.

 

021  순수현상학純粹現象學과 현상학적現象學的 철학시론哲學試論 Ideen Zu Einer Reinen Phanomenologie Und               Phanomenologischen Philosophie (1913 - 1952), 훗설 Edmund Husserl

 

1859년에 당시 오스트리아령인 프로스니쯔의 어느 유대인계 가정에서 태어난 훗설이 대학을 마칠 때(1882)의 학위논문은 수학에 관한 것이었다. 수학자일 뻔 했던 훗설을 철학으로 전향轉向시킨 것은 그가 그 후(1884 - 1886)에 사사私師했던 브렌타노의 강의였다. 철학도 수학처럼 엄밀한 학일 수 있으며, ‘철학은 직관直觀에 있어서의 원천에 그 진리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확신을 그 강의에서 얻은 것이다. 이것은 현상학의 두 이념으로 굳혀졌다. 하나는 보편학 - 1철학으로써의 현상학의 확립이요, 다른 하나는 사태事態, 자체에로라는 현상학의 기본태도이다. 이것은 도이치 - 오스트리아학파가 훗설에 미친 두 줄기 영향이기도 하다. 한쪽으로는 그 학조學祖인 볼차노의 명제목체설命題目體說, 또 마이노의 대학론 등 사상이 훗설을 당시의 심리주의, 상대주의와 싸우는 객관주의로 이끌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브렌타노의 지향성指向性개념에 따르는 심리분석이 베르그송, 제임스, 딜타이 등의 의식영역에 관한 새로운 연구와 더불어 훗설의 치밀하고도 정교한 의식분석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이 두 면 즉 그 자체에서 타당한 대상영역과 이에 대응하는 의식영역과는 서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적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수나 논리는 아무리 그 자체에서 타당한 선천적 진리의 왕국이라 할지라도 모두 의식의 대상형성적용對象形成作用에 의해서 형성된 것임을 면할 수 없다. 모든 대상적진리의 근원은 이것을 의식하는 주관적 체험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이 현상학이 처음부터 취했던 근본태도였다. 그러나 훗설이 할레대학의 사강사로 있는 동안(1887 - 1901)에는 이 방향은 기술적심리학을 벗어나지 못 했다. 이 선현상학시대의 총 결산인논리연구1(1900)과 제 2(1901)은 출판되자말자 학계에서 많은 주목을 끌었지만, 또 아주 예리한 비판도 받아, 훗설은 그 후 자기 입장에 관해서 깊이 반성, 고민을 하고, 특히 칸트를 연구하고, 딜타이와 교통交通도 시작하는 등 애쓴 결과 선험적 입지立志에 도달하였다. 이리하여 선험적先驗的 환원還元으로써의 현상학의 환원의 사상을 완성하고 순수의식의 지향적분석을 꾀한 것이 그가 괴팅겐대학을 떠나서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정교수로 옮아가는 1913년에 나온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시론(이후 시론)이다. 훗설의 현상학시대는 보통 이때까지를 제 1, 다음에 데카르트적 성찰(1931)까지를 제 2, 그리고 그의 최후의 저작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1936)’ 을 3기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사이 그는 1928년에 교수직을 은퇴하고 끝없는 연구를 계속하다가 193879세로 그 일생을 마쳤다.

그의 최후의 저서위기危機에는 선험적先驗的 관념론으로써의 현상학의 개념과 반드시 부합하지 않는생활계生活界라는 새로운 개념이 전개되어, 종전의 현상학관에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여기에 그의 후기사상을 기초로 현상학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려는 움직임이 주로 2차대전 동안에도 벨기에의 루맹을 중심으로, 종전 후에는 도이치 안에서도 대두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시론은 그 제 1순수현상학개론이다. (2, 3부는 종전 후에 발간됨). 그 제 1편에서는 훗설이 초기부터 강조해온 바, 현상학은 사실학이 아니라 본질학이라는 점이 거듭 주장된다. 대상을 형성하는 의식체험의 분석이란 곧 심리학을 말하지만 그러나 현상학적 심리학은 심적사실을 인과적因果的으로 기술하는 경험심리학이 아니라, 심적현상의 선천적 본질을 기술하는 선천적 심리학이다. 대상면에 수나 논리와 같은 선천적진리의 왕국이 있다면,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에도 누가, 어디서, 언제 인식하더라도 바로 그것을 진리의 인식이게 하는 본질적구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은 본질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실을 개별적우연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이것을 본질적 필연성과의 관계에서 보고있는 것이다. 개별적사실을 그 일반성에서 파악하는 것이 소위 본질직관이요, 이것은 본질적대상을 원본적으로, 구신적具身的 자체성自體性에서 보여주는 자발적인 작용이다. 현상학이 처음부터 거기에로 육박하고자 했던 직관에 있어서의 원천이란 바로 이와같은 본질직관에서 주어지는 세계다. 그러나 이 본질직관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자유변사自由變史에 의한 형상적形相的 환원還元)은 제 2기의성찰省察에서 비로소 상론詳論된다.

2편에서는 현상적방법의 완전한 체계가 전개된다. 그것은 우선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적태도의 고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태도에서 우리는 언제나통일된 유일한 세계의 존재를 전제前提하고 있다. 가령 우리 지각은 단순히 대상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외계外界에 존재한다는 존재정립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지각이 착각이나 환각임이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존재연구를 수반하는 다른 지각에 의해서 대치될 뿐, 세계의 통일성, 유일성, 존재성이 동요되거나 의심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세계는 또 나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주관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이와같이 나와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속하는 유일하고도 통일된 시공적時空的세계가 언제나 우리 앞에 이미 놓여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것을자연적태도의 일반정립定立이라고 한다. 우리의 존재, 이론적활동 및 모든 실증과학은 이 세계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자연적태도에서 우리의 의식을 초월하여 대상이 존재함을 확신한다면 이러한 초월적대상의 형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존재확신은 어디에 근거를 갖는가? 이것을 밝히고자 주관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현상학의 태도이다. 현상학은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부단히 외계에로 향하고 있는 시선을 주관의 의식작용으로 돌린다. 그러기 위해서 현상학은 저 세계에 관한 일반정립을 배제排除하고’ , ‘괄호括弧치고’, ‘그 작용을 무력하게하여, 소위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한다. 이것이 현상학적 환원이다. 이때 초월적인 세계가 배제된다고 해서 세계의 존재가 부정된다거나 의심된다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고 또 우리는 세계의 관한 경험을 한다. 다만 우리의 관심을 이렇게 경험하는 주관작용에 돌려서 그 경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피자는 것뿐이다. 이런 반성의 눈에 비치는 것은 의식된 대상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을 하는 것은 주관이다. 주관은 분열하여 자연적태도에서 경험하는 주관과, 이것을 반성하는 고차원적인 주관으로 나뉘며, 대상은 모두 의식에 내재하는 대상이 된다. 이리하여 모든 것은 저 고차적인 현상적주관에 의해서 형성된 형성물로써 의식에 내재화內在化된다. 초월자超越者의 배제排除는 그러한 자연적대상이나 세계, 또 그 위에 세워진 모든 실증과학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더 확장되어 모든 초월적본질, 즉 플라톤식 이데(idea)와 이런 이데에 관한 소위 형상적形相的학문(순수수학, 순수심리학 등등)도 배제된다. 그리하여 남는 것이 현상학적 잔여로써의 순수의식이다.

3편에서는 이 순수의식의 일반적구조가 해명된다. 환원을 거듭하여 도달한 순수의식은 거기에서 모든 초월적대상이 형성되는 선험적영역이다. 그것은 신칸트학파에서와 같이 논리적요령이나 원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순수 주관의 노에시스작용(형성작용)이 질료質料를 소재로 하여 대상(노에마)을 형성하는 체험대體驗帶이다. 이 영역이 현상학의 고유한 현상학적영역이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의식의 흐름이다. 외계대상의 지각과는 달리 순수의식에서의 파악은 음영陰影을 수반隨伴하지 않는다. 체험은 자기를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 표시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기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체험에서 모든 대상이 형성되므로 이 체험은 절대적존재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 순수의식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이리하여 현상학은 그 권리를 자기 스스로의 속에 갖는 절대적 관념론이 된다. (‘시론속에서 훗설은 자기의 현상학을 관념론, 또는 절대적 관념론이라고 부르지 않고 있지만 - 그것은 성찰省察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 그러나 의식을 절대적의식이라고는 하고 있다.)

4편은 순수의식 속에서의 대상對象형성작용이 전적으로 이성理性의 필연적법칙에 따름을 밝힌다. 노에시스, 노에마라는 술어述語가 누우스(이성)와 같은 어원語源을 가진다는 것을 상기想起하면 저 순수의식의 체험은 모두 이성적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존재란 의식속에서 원본적原本的으로 또 완전하게 파악 가능한 대상이요, 이것은 본질상 이성적으로 동기動機지어진 것이라야 한다. 현상학은 처음부터 역사주의, 상대주의와 싸워온 철저한 합리주의였다. 그것은 근세 합리주의도 초극超克한 합리주의라고 한다. 시론試論을 거쳐성찰’,‘위기에서 현상학은 철저히 합리주의적인 절대적 관념론이 된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은 현상학의 관념론적인면 뿐이다. 우리는 절대적의식으로써의 순수의식속에 노에시스의 작용을 받는 질료가 있음을 보았다. 이 질료는 어디서부터 누구 의해서 어떻게 의식속에 주어진 것인가? 그것은 분명히 절대적관념으로써의 현상학에는 이질적異質的인 것이다. 또 환원을 거듭하여 모든 인식의 궁극적원천을 찾아서 순수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현상학이위기에서는 소박하고 상대적인 생활계를 들춘다. 물론 생활계는 그것을 거쳐서 선험적의식에로 들어갈 중간역中間役으로 다루어지지만, 훗설 사후에 발간된경험과 판단등에서와 같이 인식의 최후 근원이 감각적경험이나 생활속에서 찾아지기도 한다. 이것은 유고遺稿가 연구됨에 따라서 더욱 분명히 나타났다.

유태인의 피를 이은 훗설은 나치스정당政黨이 집권하자 여러 가지로 활동을 제약받았고, 그 사후에는 그의 저서가 도이치 안에서는 모두 금서禁書가 되었다. 다행히 벨기에의 젊은 현상학도에 의해서 장서藏書가 수많은 수고와 더불어 루벵에 간신히 옮겨져서 훗설의 문고文庫가 설립되어 대전大戰 중에도 훗설의 연구가 지속되었다. 또 그 유고는 정리되어 파리와 미국의 버팔로에 사진판寫眞版으로 보관되어 거기서도 연구가 계속되었다. 도이치에서 다시 훗설이 연구된 것은 종전 후에 프라이부르크와 쾰른에 훗설문고가 설립되면서부터다. 그런데 이들 각지에서 연구가 활기를 띤 것은 훗설의 후기에 나타난 사상, 저 절대적 관념론과는 반드시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요소들을 발견함으로써였다. 가령 1950년부터 루벵을 중심으로 훗설전집全集, 관련된 수고手稿도 수록하면서 발간되기 시작했는데, 그 제 4, 5권은 시론의 제 2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1924 - 1925년에 강의된 것이다. 이 강의에서 훗설은 대상형성에 있어서의 신체의 역할을 훌륭히 분석하고 있다. 순수의식속에 남아있는 저 질료가 주어지는 것은 바로 이 신체를 통한 감각에 의해서다. 생활계란 구체적인 이 신체가 살고있는 세계이다.

우리는 훗설의 제자弟子 하이데커의 존재와 시간이 현상학적 존재론의 해석학적解釋學的 방법임을 알고있으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현상학적 존재론의 시도試圖라는 부제副題를 가지고 있음을 안다. 과연 훗설의 순수주관은 한갓 논리적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의식의 흐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만으로 충족한 다른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위기危機이다. 그렇지 않고 인간을세계 내 존재로 보는 하이데커의 입장이 현상학적방법 위에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사르트르의 무이無二의 친구였다가 정치적이유로 절교한 메를로 퐁티는 젊어서 죽었지만 훗설의 후기사상을 이어받아 신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문화의 건설을 시도하였다. 1963년 멕시코에서 열렸던 제 13회 국제철학회의는 현상학의 심포지움을 열고 생활계의 개념을 테마로 하였다. 요새는 미국에서도 현상학 및 실존철학협회가 1962년에 창립되어 매년 회합을 가진다. 새로 주목된 신체나 감각과 본래의 선험적현상학은 그 종합을 기다리고 있다.

 

022  논리철학논교論理哲學論巧 Tractatus Logico - Philosophicus (1922)

       비트겐슈타인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현대에 와서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인정되고 또 논리실증주의의 운동에 크게 영향을 끼친 비트겐슈타인(1889 - 1951)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영국 맨체스터에서 공학을 공부하였고, 캐임브리지대학에서는 러셀에 사사師事했다. 1차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 항가리군의 장교로 종군하고,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1939- 1947년까지 무어의 후임으로 캐임브리지대학 교수를 지냈다. 소개하는 논리철학논교1922년에 발표한 것으로, 2기로 구분되는 그의 생애에서 전기를 대표한다.

논리철학논교에서 전개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의 기초가 되는 개념들은 요소명제要素命題, 진리함수眞理函數 및 논리적회화繪畵의 개념들이다. 그의 언어이론의 중요한 제 결론은 그 개념들의 해명에 입각하고 있다.

요소명제는 사태의 기술記述이다. 사태란 대상들의 연계형태다. 대상이란 절대 단순적개체個體. 단순적이므로 그것은 분할分割될 수 없고, 따라서 영원하다. 대상들은 세계의 실체들 - 원질原質들이다.

단순적대상들의 결합으로써의 사태는 복합적이다. 그러나 한 사태인 한 그 보다 더 단순한 상황에 환원될 수는 없다. 한 사태를 대상들에 분할하면, 그것은 이미 사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태를 원자적原子的이라고 한다. 원자적인 사태들이 모였을 때, 분자적分子的상황이 성립한다.

사태에 대응하는 것이 요소명제, 이를테면‘AB 위에 있다는 진술陳述과 같은 것이다. ‘AB 위에 있고, CD 위에 있다는 분자적상황에 대응하는 것이 분자적명제 즉‘AB 위에 있고, CD 위에 있다는 진술과 같은 것이다. 사태가 대상들의 결합임에 대해, 요소명제는 이름들의 결합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이 지각적대상이 아닌만큼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것이 아니라, 절대단순적인 대상들을 명명命名함에 쓰일 단순부호符號들을 가리킨다. 여기 한 이상적언어가 상정想定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사태들은 또한 전제하는 것들과 다만 가능적임에 그치는것들로 분류된다. 전자를 가리켜 사실事實이라 한다. 따라서 사실을 기술하는 요소명제와 가능적인 사태로 기술하는 요소명제가 구분된다.

현실적사태들 및 가능적사태들을 포함시켜 실제實際라 하고, 전자만 포함하는 것을 세계世界라 한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다. 모든 대상들이 주어질 때 모든 가능적사태들이 또한 주어지나 세계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상들의 무수히 많은 연계가능성들 중에서 현실적인 사태들의 체계만이 세계다. 현실적 또는 존재적이라는 규정성規定性은 적극성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더욱 한정된다. 세계는 적극적사실들만을 포함한다. 이를테면이 종이는 굳지 않는다는 부정적사실은 실제에 속하지만 세계의 일부는 아니다.

그 점을 언어에 관련시켜 표현하면, 부정명제는 요소명제가 아니다. 부정사 실은 사태가 아니고, 따라서 분자적계열에 속한다. 요소명제는 순전히 이름들의 결합이므로, 부정명제가 요소명제가 아니라함은 그속에 이름 이외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도 된다. 부정명제 이외에 요소명제가 아닌 분자적명제들에는 보편명제, 선언選言명제, 가언假言명제 등이 있다. 그와같은 복합명제들은 사태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들의 복합적인 분자적 상황들을 기술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비요소적명제들은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函數이다. 이를테면 명제 P와 명제 Q로 구성된 복합명제 P & q의 진리가眞理價는 오직 P의 진리가와 q의 진리가에 의하여 결정될 때 P & qpq의 진리함수이다. ‘P 그리고 Q’ 라는 복합명제에 있어 그리고라는 결어가 ‘P 그리고 q' pq의 진리함수가 되게끔 pq를 연결할 때 그 결어를 진리함수적 결어라고 한다. 'p 그리고 q' ‘p' ‘q' 의 진리함수일 때 ‘p' ‘q' 의 순서를 바꾸어 ‘q 그리고 p' 라 하여도 그 진리가에는 변함이 없다.

일상언어에서 사용되는 '그리고' 라는 말이 진리함수적 결어가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보편적명제 또는 전칭판단全稱判斷 및 전제적명제 또는 특칭特稱판단은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이다. ‘ 모든 ABA를 구성하는 대상들 및 B를 구성하는 대상들에 요소명제들에 환원된다는 것이다. ‘약간의 AB도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라고 본다. 모든 명제들은 요소적명제들이든가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들이라는 주장을 외연성外延性의 원리라고도 한다. 이 원리가 모든 종류의 명제들에 적용되는가에 관해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이미 신빙문장信憑文章의 구조에 복잡성에 착안하였다. A가 어떤 사태를 믿고있을 때, 그가 그것을 믿는다는 진위는 그 사태의 성립여부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그 신빙문장은 진리함수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점은 신빙문장 뿐 아니라 럿셀의 이른바 명제적 태도를 표현하는 여러 동사動詞, 이를테면 생각한다’ ‘바란다’ ‘의심한다’ ‘의도한다등을 주동사로 삼는 모든 진술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교에서 매우 짧은 문장으로 그와같은 명제들이 궁극에 있어 외연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모든 명제들이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들이라는 것, 즉 후자에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곧 우리가 세계를 기술함에 있어, 이를테면 보편명제는 원리상 불가결하지 않다는 것, 따라서 개별적사실들 이외에 또한 보편적사실들, 편적연관들 같은 것이 고유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함축含蓄한다. 든 요소명제들이 열거되고 그 중의 어느 것들이 진인가 결정하면 세계에 관한 기술은 완결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창한 일반명제들의 환원의 불가능성을 논증한 일이 있다. 그의 요점은 일반명제를 특수명제들에 환원함에 있어 무가내하無可奈何(무지 어찌할 수 없는)로 전칭적全稱的개념이 다시 도입된다는 것이다. 모든 명제들은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들이라는 주장은 모든 진정한 명제들은 요소명제들로부터 구성된 분자적명제들이든가 요소명제들이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즉 모든 분자적명제들에 대해 요소명제들은 논리적원자들이다. 이 주장에 대응하여 또한 사태들은 분자적상황들의 논리적원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적원자주의는 또한 요소명제들 상호간의 관계 및 사태들 상호간의 관계에 관하여, 그들이 철저히 독립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사태들은 각각 완전히 독립되어 있으며, 따라서 원자적사실들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必然的 관계도 성립치 않는다. 한 사태의 존재로부터 딴 사태의 존재를 추리함은 불가능하며, 또 한 사태의 비존재로부터 딴 사태의 비존재를 추리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한 요소명제로부터 딴 요소명제로 연역演繹할 수는 없다. 어떠한 요소명제도 딴 요소명제와 모순될 수 없다. 그는 또한 인과적 필요성 또는 인과관계에 관한 통속적 견해를 배격한다. 논리적 원자주의의 다원론多元論에 관해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합의를 보고 있다. 독립적사실들의 궁극성의 원리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유럽을 풍미한 일원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으로 대두한다. 관계의 내면성에 대립하여 외적관계들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따라서 그 관계들의 제항諸項의 실제성이 역설된다. 요소명제가 사태를 기술한다는 점에서 어떤 회화繪畵가 어떤 사태에 대하여 악보樂譜가 어떤 교향악交響樂에 대하여 갖는 것과 같은 구조상의 대응관계가 그 양자 사이에 성립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보았다. 명제는 그것이 기술하는 사태의 논리적회화라는 것이다. 명제의 의미는 그것이 기술하는 상황

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흥미를 끄는 것은 이른바 논리적항수恒數(Logicalconstants)와 관계문장에 관한 소론所論이다.

모든 논리적항수項數들은 진리함수적 결어結語로 간주看做한다. 두 문장을 맺는 어떤 결어에 대응하는 유대紐帶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사否定詞에 관해서 그것이 이름이 아님을 역설力說한다. 한 명제와 그것의 부정이 동일한 상황을 기술하고, 전자는 상황의 존재를 긍정하고, 후자는 그것을 부정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그 양자가 가리키는 상황이 동일하지 않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에 철학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관계문장 ‘ab에 대하여 관계 R을 갖는다(간단히 표현하여 a R b)에 있, R가 어떤 대상의 이름이 아님을 밝힌다. 그것이 한 대상의 이름이라면, 논리적 난관에 봉착逢着하게 된다. 그는 논리적으로 명료明瞭한 언어, 즉 일종의 이상적언어를 구상한다. 그러한 언어에 있어서는 한 상황 안의 대상들의 연계가 명제적 부호 안의 단순부호를 즉 이름들의 행태에 대응한다. 리하여 관계 Rab 사이에 성립함을 표시하는 명제적 부호의 형태는 ab의 여러 가지 위치 또는 모양으로써 R을 사용하지 않고도 갖추어질 수 있겠다.

명제회화설은 명제와 상황 사이에 그 무슨 본질적 연결이 없다면, 어찌하여 전자가 후자를 진술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에 해답을 줄 수 없겠다는 생각에서 한 명제가 그 무엇을 진술하는 힘을 갖는 서종래所從來를 바로 그것이 한 상황의 논리적 회화임에서 찾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창한, 또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이 그와 공명共鳴하여 널리역설한 사실적 유의미성의 규준을 명제회화설에 비트겐슈타인은 근거시키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진리함수론에 입각하여 논리 및 기타 형식과학에 명제들이 가지는 필연적 진리성에 대한 매우 재치있는 구명을 이룩했다. 진리함수의 한 종류에 이른바 동어반복(Tautology)이라고 일컫는 것이 있는데 그 기본형식은 ‘p 또는 비p' . 그는 이 진리함수는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명제들의 모든 가능한 진위결합에 있어 늘 진임을 진위표를 작성함으로써 명시하고, 모든 논리적진리 및 기타 형식과학의 제 명제의 진리의 본성은 그것들이동어반복에 불과함에 있음을 보인다. 그 보장된 진리성은 그것들이 내용상 공허하다는 값을 치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논리학의 동일율 同一律‘pp로 정식화되고, 그것은 ‘p 가 진이든가, p가 위라는 동어반복이다. 모든 동어반복적 진리함수들은 실제에 관하여 매우 일반적인 형식적측면 이외에는 아무 주장도 하지 않으며, 어떠한 상황도 기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가 없다. 그러나 어불성설語不成說 따위의 무의미는 아니다. 가리키는 상황이 없다는 뜻에서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 ‘p이며 p 아님이라는 형식의 모순은 늘 위인 진리함수다. 동어반복과 같이 가리키는 상황이 없으므로 의미가 없다. 따라서 진정한 명제들의 종류들은 오직 셋이다. 사태를 기술하는 요소명제들 또는 그것들의 진리함수, 동어반복들, 모순들이며 그 이외 모든 외견상명제 같이 보이는 것들은 이른바 사이비似而非명제에 불과하다. 첫째 종류에 속하는 것은 일상지각을 포함하는 경험과학의 영역들에 속하는 진 또는 위인 명제들이. 이리하여 형이상학속에 나타나는 진술들은 첫째 것에 환원되거나, 둘째 또는 셋째 것에 속하지 않는 한 사이비명제들이다.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교에 나오는 진술들은 어떠한가? 그것들도 사이비명제들이라 한다. 그것들은 아무런 사태도 가리키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가 없다. 세계는 모든 원자적사실들의 총체며, 모든 원자적사실들은 진인 요소명제들에 의하여 완전히 기술되므로 후자들로써 구성되는 과학적명제 이외에 존재하는 것에 관한 초과학적명제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저서는 1922년에 그의 고국 오스트리아 아닌 영국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된 이래 남미의 분석적철학의 방향을 확고히 틀잡아 놓았. 그러나 그는 1932년 경부터 차츰 그의 논리철학논교의 여러 주장이 지탱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유고遺稿로써 철학연구(1953) 등을 남겼는데, 그의 강의와 아울러 그 유고들은 영미의 분석적철학의 새로운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독창적이며 위대한 철학자를 낳는데 이바지한 이들 중에 가장 저명한 철학자들은 버트란트 러셀과 G. E. 무어다.

 

023  상징형식象徵形式의 철학 Philosophie der Symbolischen Formen (1923 - 1929), 캇시러 Ernst Cassirer

 

캇시러(1874 - 1945)는 신칸트학파의 하나인 마르부르크학파에서 철학을 연구하고,‘리이프니츠의 학적체계’‘근대의 철학과 과학에 있어서의 인식문제’‘실체개념과 기능개념등을 저술하여 뛰어난 철학자로써의 역량을 과시하였거니와, 이에 뒤이어 1923 - 1929년 어간에 내놓은상징형식의 철학3권에 의하여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캇시러가 베를린, 라이프찌히,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공부하던 당시, 도이치에서는 강한 관념론적 내지 이상주의적 경향이 신비주의에 대해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듯 싶었다. 이 신비주의는 여러 세기에 걸쳐 도이치의 정신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다. 13세기 전반기 도이치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그의 신조信條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인간이여, 나는 시간에 앞서 하나님과 함께 서 있었고, 그리고 세계는 창조되었느니라. 그렇다, 나는 저 영원한 신성神聖이 하나님이 되기 벌써 전에 그 신성 속에 들어있었다. 나와 함께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또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창조하고 계시느니라. 오직 나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것은 의 영혼이 불꽃을 튀길 때생명이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가 되는 엑스터시스(그리스어 ek, exo (~의 밖으로)histanai(놓다, 서다)의 복합어인 엑스터시스(ekstasis)에서 나온 것으로, 영혼이 육체를 떠나 있는 상태의 경지를 묘사)이어니와, 이러한 생각은 5세기 동안 아무 적대세력 없이 도이치에 있어서의 모든 큰 민족운동의 정신적지주가 되어있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에 이와 아주 방향을 달리하는 사상 경향이 도이치문화의 전면에 나타났다. 라이프니츠와 볼프, 레싱과 괴테, 실러와 칸트는 도이치 안에서 진정한 휴머니즘의 밝은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이성주의와 혼합한 관념론철학이 도이치의 지적知的생활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이성과 휴머니즘에 철학은 그 명맥이 짧았다. 19세기의 시작과 함께 신비주의에 깊이 젖은 낭만주의 거대한 물결이 대두하여, 이성의 모든 방벽防壁을 깨뜨렸다. 19세기의 낭만주의 - 신비주의는 18세기의 이성주의철학에 대한 심각하고도 맹렬한 반동이요, 신화적사상에로의 복귀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 다시 19세기 마지막 3반기半期에 오토 리프만, 헤르만 코헨에 의해 칸트와 18세기의 이성의 철학에로 되돌아가라고 외치는 철학운동이 크게 일어나, 신 칸트학파가 도이치대학의 대다수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캇시러가 학구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도이치철학의 상황이었다. 캇시러의 학적생애는 칸트철학연구로부터 시작했다.‘근대의 철학과 과학에 있어서의 인식문제에서 그는 근대 유럽사상이 칸트철학에까지 발전해온 과정의 큰 윤곽을 그렸고, 이윽고 칸트 전집을 새로 편찬하여, 칸트철학에 대한 귀중한 해결을 가하였다.

그러던 중 세계 제 1차대전이 일어나자, 그의 관심과 사색은 인간의 운명과그 존재의 고귀성에로 깊어졌다. 그는자유와 형식을 저술, 간행하여, 궁극의 정신적가치에 대한 투쟁의 태도를 표명表明하였고, 한편 개인 및 민족의 존엄성과 자유를 선언한, 도이치문화의 휴머니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경향의 대표인 레싱, 실러, 칸트 및 괴테의 정신을 웅변적으로 옹호하였다.

1차대전은 유럽에 깊은 정신적위기를 초래하였다. 특별히 인간의 이성이 인간의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힘이 된다고 하는 신념이 뿌리채 흔들리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프랑스의 사회학자 조르즈 소렐은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제창하였다.

이성이 아니라, 사회적신화神話가 인류역사의 추진력이 된다. 인간사회의 온갖 행동은 객관적인 진리와 냉정한 숙려熟廬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괴이한 심성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 심성은 대부분이 증오와 반동과 모멸에서 생기며, 강한 충동과 정동情動에 차있으며, 또 진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오히려 가끔 최대의 허위虛僞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이것을 괴상한 이론이라 하여 일소一笑에 붙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여러 전체주의 이데올러기의 득승得勝과 유럽에서 생긴 어수선한 사태는 이 이론이 진리임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노도怒濤와 같은 역사적사건들의 진전은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새로운 검토와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캇시러의상징형식의 철학의 배경이 된 시대적상황이었다. 그는 비합리적인 사상의 난무亂舞를 보고, 그 본질을 해부解剖하고, 이와 대결하여 이성주의철학에 기치旗幟를 높이 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캇시러는 우리의 시대와 역사의 여러 가지 절실한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1차대전 후 얼마 안 가서 캇시러는상징형식의 철학의 저작에 몰두하였다. 1917년 어느 날 집으로 가려고 전차電車를 탔을 때 상징형식의 상념想念이 그의 뇌리腦裏에 번뜩였다고 한다. 이래 10년 동안에 걸쳐 이 저술이 성취되었다. 그 상념이 번뜩이고 집에 돌아갔을 때, ‘상징형식의 철학이라는 방대尨大한 저작의 전체 플렌Plan이 세워졌던 것이다.

상징형식의 철학은 전 3권으로 되어있다. 1권은 언어’, 2권은 신화의 사고’, 3권은인식의 현상학이다. 캇시러에게 있어서 상징은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징과 비슷한 것에 신호信號(Sign)’가 있는데 신호에 대해서 동물이나 인간은 즉각적 반응을 한다. 사려하는 일 없이 행동으로 나아간다. 이와 반대로 상징은 우리를 깊은 생각으로 이끌어가고 반응을 더디게 한다. 인간은 그 정신생활의 여러 가지 의미를 상징에 담는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에는 우수한 상징이 있다. 인간은 깊고 복잡한 정신생활, 즉 생각하는 생활을 하기에 말이다. 인간은 갖가지 상징을 만들며, 또 그 상징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캇시러는 인간을 상징의 동물(animal symbolizm)'이라고 정의하였다.

왜 인간은 상징들을 형성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현실에만 만족하지 않고 이상을 촉구하며, 따라서 의미 있는 것, 더욱 가치있는 것을 찾으며, 또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 바, 이 본성은 이윽고 문화를 산출産出하여 온 터이다. 문화는 본래 자연을 떠나는데서 성립하는 것인데, 인간이 보다 높은 것을 촉구하여 건설한 문화가 다름 아닌 종교요, 언어요, 예술이요, 문학인 것이다. 캇시러에게 있어서는 이 여러 문화형식이 다름 아닌 상징형식인 것이다.

칸트철학에서 출발한 캇시러는 칸트와 자기 선생인 신칸트학파의 코헨의 인식론의 일면성이 갑자기 명백하게 되었다. 상징형식의 상념이 캇시러의 머리에 떠올랐을 때, 그는 칸트철학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넘어서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칸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캇시러에게 있어서도 철학의 궁극, 최고의 문제는인간이란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이성의 비판만으로 충분치 못 하다. 오직 인간이성만이 현실이해에 문을 열어준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정신과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념을 결정하고 조형造形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심성 전체다. 즉 그 여러 가지 기능과 충동, 상상의 잠세력潛勢力, 감정, 의욕 및 논리적사고 전부를 합한 인간심성 전체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심성 전체의 활동은 다름 아닌 인간정신의 상징기능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따라서 심각한 문제로 되어온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그저 인간 자체의 내성內省이나 외부적 관찰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상징기능의 소산인 갖가지 문화형태를 규명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상징형식의 철학은 이러한 관점에 서는 까닭에 이윽고 문화철학에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상징형식의 철학에서 캇시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실의 참된 개념은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존재형식에 각인刻印될 수 없고, 오히려 정신생활의 다양성 전체와 풍부함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느 상징형식이나 인식의 개념과 체계뿐 아니라 또한 예술이나 신화나 언어의 직관적인 형식도 - 내부로부터 외부로 향한 계시가 되며, 세계와 정신의 종합이 되는 바, 오직 이것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결합을 확보하여 주는 것이다. 현실세계 전체는 오직 어떤 심적 영상映像을 통해서만, 즉 신화 내지 종교를 통해서건, 예술이나 언어를 통해서건, 혹은 과학적개념을 통해서건, 하여튼 상징형식의 도움을 빌어서만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철학의 임무는 한없이 많고 가지각색으로 다른 신화적 심상心象, 종교적 교리敎理, 언어형태, 미술작품이 거기서 나오는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정신의 상징적기능의 통일성을 밝히는데 있다. 원시적 토테미즘 totemism (, 1)의 기이한 심상은 현대의 4차원적 공간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정신의 상징기능에서 나온 한, 다같이 내적구조의 명확한 규칙성을 보여주며, 또 인간정신의 몇 가지 근본적인 기능에 환원시킬 수 있다. 인간문화 전체는 우리의 정신속에 상징형식의 끝없는 조직으로써 반영된다.’ 캇시러는 이제 이 형식 일반에 구조를 분석하는 거대한 사업을상징형식의 철학에 의하여 수행한 것이다.

싱징형식의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신화나 종교는 인간정신의 상징기능의 결과다. 신화에서 종교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단절이 없으나, 신화의 기초는 이성적사고가 아니고 감정이다. 모든 종교에는 신화적요소가 없지 않으나, 인간이성의 승리는 종교로부터 신화적요소를 제거하고 종교로 하여금 인류애를 지향하는 순수하고 높은 윤리성을 띠게 한다. 그런데 현대 정치사상에는 비이성적인 신화적세력이 적지 않았다. 캇시러는 이성주의 철학자로서 서구의 모든 위대한 사상가의 고귀한 이성주의에 입각하여 비합리적인 전체주의사상에 맞섰다. 종교는 어리숙한 의식과 교리로써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인류의 높은 이상을 구현하는 것인 한 긍정하는 것이 캇시러의 태도다.

캇시러에게 있어서는, 언어도 역시 상징이다. 언어는 기성물旣成物이 아니고, 우리가 쉴 새 없이 현실세계와 교섭交涉하고 현실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없지 못 할 도구요, 또 그러한 활동인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국어國語(모국어母國語)의 차이는 발음이나 낱말들의 차이가 아니고, 세계를 보는 태도의 궁극에 있어, 언어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현실의 길이요 방편이다.

예술작품이 상징임은 두 말 할 것 없는 일이다. 예술은 인생과 세계의 의미를 담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해주며, 또 현실의 순수한 형상形象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한 인간의 마음을 정화淨化하고 높여주는 것이다.

역사와 과학 역시 상징기능의 발로發露의 터전이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살면서 빛나는 내일의 역사를 계획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은 복잡한 자연현상을 단순한 법칙에로 해소시켜 현실을 이해하는 것으로써, 인간정신 발달의 최후 단계다.

이와같이 캇시러의상징형식의 철학은 인간이성의 기능을 크게 발휘하고, 인간의 사고가 순수해질 것을 강조하는 까닭에, 철학면에서는 논리실증주의에로 나아가는 방향의 교량橋梁이 되었고, 문화현상의 분석 및 문화본질의 이해에 길잡이가 되어, 밝고 평화로운 문화세계 건설에 용기와 예지叡智를 주었고, 자유인들에게 비합리적 사상세력 및 정치세력에 대하여 크게 경각警覺시킨 바 있다.

 

. <1> 토템이란 용어는 혈연관계를 의미하는 오지브와족의 단어 오토테만에서 유래함. 토테미즘은 한 사회나 개인이 동물이나 자연물(토템)과 맺는 숭배관계 또는 친족관계를 포함하는 다양한 관계를 의미하며, 토테미즘은 많은 원시부족들의 공동체나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 한 집단 구성원의 토템신앙은 유전되고 평생 지속되는데, 그것은 토템신앙이 그의 자녀와 혈족과의 관계를 규제하고 심지어는 출산을 위한 배우자의 선정까지도 좌우하기 때문임. 토테미즘의 모든 기준을 이상적으로 충족시키는 사회는 없지만 많은 집단에서 토테미즘의 여러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음. 토테미즘에 대한 가장 예리한 비평은 토테미즘의 실재성을 거부한 것으로,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쓴오늘날의 토테미즘.

 

024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25),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화이트헤드(1861 - 1947)는 수학과 자연과학의 연구를 거쳐 63세부터 철학적저작을 시작한 생애가 독창적 사색을 가능케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1861년 영국 켄트 주 람스게이드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영국국교회 승직僧職과 사립학교 교장을 겸한 명문에서 자라, 1880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치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1910년 모교의 수학주임강사를 사퇴하기까지사도회使徒會란 토론회를 통해 널리 식견을 얻었다. 1910년 런던대학의 강사를 거쳐 수학교수가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협회 회장을 역임한 적도 있다. 그때 러셀과 공저로 기호記號논리의 대성大成이라 할 수학원리’ 3권을 출간했다. 192463세에 하바드대학의 철학교수로 초빙되어 로웰강좌講座에서 본서의 내용을 특별강의 하였고, 정년을 넘어 76세까지 하바드에서 그의 위트와 지혜가 번득이는 명강 혹은 철인적인 다이얼로그로 명성을 떨쳤다. 신랄辛辣한 독설가인 러셀경도 화이트헤드를 높이 평하여 원만한 인격자요 비상한 도덕적훈련과 경건할만큼 자기 연구에 몰두한 학자였고, 교사로써의 화이트헤드는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고 했다.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은 그의 생애를 3기로 나누어

1. 대학 졸업 후 1914년까지의 수리철학시대

2. 1914 - 1924년까지의 자연철학시대, 이미 1919자연지식의 원리를 내고, 다음 해자연의 개념을 낸 다음, 1922상대성 원리를 내어, 과학철학 3부작은 영국 경험론과 이성주의의 비판적 종합을 칸트를 넘어서 새롭게 시도한 것이다.

3. 1924 - 1947년의 형이상학시대, 하바드로 온 화이트헤드는 로웰강좌를 위해 과학과 근대세계(1925)를 쓰고, 경험론과 이성론의 종합과 물심이원物心二元의 종합에로 가는 유기적 자연관을 확립했다. 그후 본서에서 성립된 새로운 철학을 여러 방면에 적용하여 1926형성 도상途上의 종교’, 1927상징작용’, 1933년 문명비판면에서 사상의 모험을 냈는데, 1929년 기포드강좌를 위해 그의 형이상학의 완성이라할 주저 과정과 실제를 썼다. 과정과 실제3대 난서難書 다음 가는 난삽難澁한 표현으로 된 형이상학서로써 데카르트 이래 물심이원의 분열을 재통합한유기론有機論의 철학체계를 건설한 대저大著. 이 주저主著 보다과학과 근대세계가 널리 영향을 주었고, 형이상학의 우유함이 덜 하다는 점에서 연구가들은 대게 본서를 대표작으로 추천한다.

이 책과학과 근대세계17세기 근대과학의 성립에서 20세기 상대성원리 및 양자론量子論에 이르는 과학사상사를 뼈대로 해서 각 시대의 물질관, 인식론, 존재론을 규명하고, 과학, 미학, 윤리, 종교 등의 밑바닥에 있는 세계관적 전제를 파헤쳐 그 오류誤謬를 규명糾明한 다음 ‘20세기 과학의 철학즉 새로운 세계관을 수립한 노작勞作이다. 서문 첫머리에서 이 책은 과학 발견의 영향을 받은 한에 있어서의 지난 3세기 간 서구문화의 제양상樣相의 연구라고 전제하고, ‘각 시대는 각기 그 선입견을 가진다고 보고, 지난 세기의 우주관도 고전적 자연과학의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는 관에서 본서를 출발시키고 있다.‘철학이 감당해야 할 기능 중의 하나가 우주관 비판(본서 서문)이라면 17세기 근대과학의 천재들이 설정해놓은 편견을 오늘에 비판을 통해서 근대정신 전반의 전제를 비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철학의 근본문제인 주관과 객관, 의식과 물질, 기계적 필연론과 목적론의 2원적 대립을 새로이 통합한 제 3의 길을 추구하게 된다. 먼저 근대자연과학의 자연 발흥勃興에서 수학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는 제 2사상사의 한 요인으로써 의 철학에서 강조했다. 17세기의 갈리레이, 데카르트, 뉴튼 등 수많은 천재들이 배출되어 근대적 자연관의 기틀을 마련한 세기라고 해서 그는 본서에서 이 시대를 천재의 세기世紀(the age of genius, 본서 제 3)로 명명한 것도 유명하다. 이 시대의 사고방식은 기계론적이요, 자연의 기본개념도물체, 시간, 공간 등 모두가단순정위正位의 오류(Fallacy of simple location)를 범하고 있다 한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켜 경험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성립하는 기왕의 물질개념은죽은 자연에 불과하다. 돌이나 산이나 무기물까지 포함해서 만물은 모두 살아있는 유기적 자연의 부분들이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 세기에 성립된 물질과 의식의 이원론은 추상적사고방식이 저지른 결과로써 야기惹起된 잘못된 전제로써 그에 이른바 거꾸로 된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ereteness)', '자연이분법(befurcation of nature)'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런 오류론이 그의 근대사상비판의 방법론이다. 이것이 18세기(4)의 과학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자연의 기계론적 설명을 도그마화(dogma,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어원은 그리스어‘dokein(생각하다)’에서 유래했고,‘의견·결정을 의미함)해서 유물론이 성해졌는데, 이 역시 온전치 못 한 이성의 산물이요, 깊은 통찰이 결여된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5낭만주의적 반동장은 기계론적 유물론에 대한 워즈워드, 셀리 등 낭만시문학이 17세기 이래무기적無機的자연을 거부하고 시공時空의 연관속에서 산 자연을 파악한 위대한 공로가 있다고 높이 평가한다. 직접적경험의 원초적 양태樣態는 인식적(cognitual)이란 그 본래의 대 전제大前提는 거부하고 오히려 그것은 정서적이고 인과적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가 말하는 근본경험은 인간만의 의식에 국한되지 않는 우주적경험(weltgefohl)으로 파악하게 된다. 19세기(6)장에서는 물질개념이 파괴되고 종래의 물질관 대신 에너지개념이 바꿔들고 장(field)의 개념이 들어선다. 물리학의 원자나 생물학의 세포나 모두 유기체(organism)로 되어, 두 과학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견해다. 이제 20세기를 다룬 상대성원리(7)양자론(8)의 두 장에 이르러, 물질 대신 유기체 혹은 이벤츠(events)의 새 개념이 등장한다. 이벤츠개념은 이상 지적한 오류를 회피하고 변화와 관계성을 지닌 새로운 자연이며, ‘이벤츠는 실제하는 것의 단위이다라고 그는 선언한다. 과학과 인생의 가장 본질적이요 영속적인 사실은 사상事象, 활동태活動態, 사건(the happening, the activities the events)이라고 했고, 이는 다름 아닌 두 개의 전자電子가 만나는 물리적사건으로 예시例示된다고 했다. 아이시타인의 상대적 시공(space - time)이요 양자요, 통일장의 단위장單位場에도 해당되는 포괄적인 자연상의 새 철학개념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벤츠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process)으로 파악하며 이 연속 가운데서 비연속을 인정하여, 이 비연속적 원자성을영구적대상(eternal object)이라고 했다. 그의 세계관은 이벤츠속으로 영구적대상이 진입하여 현실세계가 실현되었다고 본다.‘영구적대상의 형이상학적 지위地位는 현실성에 대한 가능성의 지위이다(10장 추상). ’그는 수학이나 논리의 추상'을 오늘날의 논리실증주의자들처럼 인공언어로 보는 규약規約주의(conventionalism)에 반대하여 차라리 플라톤의 에이도스(형상形相)처럼 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可能態(dunamis)의 지위에 놓음으로써 생명적자연을 구성하는 한 요인으로 해석한다. , 과 같은 본질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형식성도 영구적대상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특유의 견해다. 근세철학 특히 로크는 음, , 향 등 감각적성질은 주관적이라고 했다. 그와 반대로 화이트헤드는 감각적성질을 포함해서 이러한 영구적대상들이 추상자抽象者요 철저히 객관적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의 경험의 개념은 인간경험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그것을 도리어 우주적경험의 일부로 보는경험의 형이상학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무도 경험하고 풀도 경험한다는 뜻에서의 경험이다. 이 경험이론은 화이트헤드가 자기 나름으로 만든 수많은 신조어新造語 중의 하나인 프리헨션(prehension)이론으로 발전한다. 프리헨션은 파악한다는 뜻으로 지각을 포함해서 지적인 파악과 감각적파악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무기물이라고 부르는 존재들도 역시 프리헨션한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산도 낮은 감응성感應性(senstiveness)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單子論을 상기케 된다. 칸트가 주관주의적으로 오성悟性의 한 형식이라고 보았던 인과성도 역시 감성속에서 찾게 되고, 실체라든가 인과因果 등 이념성은 기실 감성이라는 아래로부터의 규제작용이 세련된데 불과하다는 견해다.

그리고 영구적대상인 형상이 현실의 경험속에 진입(ingression)해서 얻어지는 통일의 안정도가 가치를 이룬다. 그는 미적가치를 모데(mode)로 하여 가치일반을 객관주의적으로 해석한다.

그의 유기적자연의 형이상학은 제 11에서 완결된다. 이미 그는 기독교적인 초월적 인격자로써의 신을 한낱 추상자에 불과하다고 해서 비판하고 피조물被造物인 동시에 조물주造物主(the creator whith the creatures)라는 새로운 신관神觀을 제기했다. 그의 가장 실제적인 것으로써 실제의 양극인현실성과 가능성을 함께 지닌 자이다. 그는 언제나 구체자具體者로 모색摸索한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原動者로써의 신 대신에 구체화의 원리로써의 신을 요청한다고 했다. 그러나신이 구체적인 것은 아니고, 구체적 현실의 근거이다. 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유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이 합리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라고, 신은 궁극적 한정限定이며, 그의 존재는 궁극적 비합리성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확정성確定性으로 신을 긍정한다. 따라서 경험론의 일반원리도 의존하는 바 추상적 이성理性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구체화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신이다.

이상과 같이 화이트헤드의 신관神觀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교류의 인격신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 자신의 철학적 신이다. 따라서종교와 과학(12)대한 그의 견해도 자연 기성종교나 기왕의 통념과 크게 달라진다. 이 장은 지난 3세기 간에 과학과 종교가 대립해서 투쟁한 면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과학측에는 중력重力의 법칙이 있고, 종교측에는 성스러운 미의 관조觀照가 있다. 각기 한편이 보는 바를 다른 편이 간과하고 있다, 설혹 과학과 종교가 투쟁하는 면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 우려할 것이 못 되는 것이 이상理想의 충돌은 화가 아니라 복이다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충돌은 종교가 보다 심오深奧해지고, 과학이 보다 정치精緻해져서 거기서 화합할 수 있는 보다 넓은 진리와 훨씬 멋진 전망이 설 수 있으리라는 증거이다. ’종교가 오늘날 수세守勢에 서게 된 것은 변화하는 현실과 대결하기를 피한데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종교의 원리들은 영원한 것이나, 그 원리의 표현은 항상 새롭게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화이트헤드는모험(adventure)이란 용어를 좋아해서종교의 사멸死滅은 모험의 높은 희망을 억압하는데서 온다고 경고했다.

화이트헤드의 저작 중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과학과 근대세계1925년에 하바드대학에서 열린 로웰강좌 내용을 정리해서 낸 책으로, 근대과학사상사를 서구문화의 저류底流에서 파헤쳐 20세기의 새로운 자연관을 세운 책이다. 존 듀이도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과학과 철학, 생명의 문제들과의 관계를 가장 깊이 해명한 노작勞作으로써, 칸트가 고전물리학에 철학적기초를 두려고 했던 것에 비하여, 그는 20세기의 상대성원리, 양자역학 및 생명과학의 발전에 대해 수행하려고 한 점에서 ‘20세기의 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버트 리드도 이 책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래 과학과 철학의 연합면에서 출간된 저작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생명’ ‘존재의 개념뿐만 아니라 도덕, 예술상의 중요개념들을 개신改新케한 세기적 명저名著. 시인詩人 T. S. 엘리어트는 이 책 제 5낭만주의적 반동反動에 대해 극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영국 낭만시에 대한 그의 새로운 접근은 17, 18세기 기계적역사관에 대한 비판에서 세워진 새로운 유기적자연관의 모색에 큰 몫을 한다. 특히 근세 이래 자연의 기초개념을 물질(metter, meteria)로 설정해온 것을 화이트헤드는 그의 개념의 밑바닥을 파들어 이벤츠(사건),‘유기체등으로 대체시켰다. 이제 유물론이라는 용어는 무의미하게 되고, 굳이 무슨 유론唯論이라는 투로 20세기의 자연관을 작명作名한다면 이벤츠 론이 된다.

 

025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 (1927), 하이데커 Martin Heidegger

 

하이데커는 1889926일 바아덴 주 메스키르히에서 탄생하였다. 1909년 그는 후리브르크대학에 입학하여 서남西南 도이치학파의 거장巨匠 리케르트와 현상학의 창시자인 훗설 밑에서 배웠으며, 한편 딜타이와 베르그송의 생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의 독특한 철학적지반을 마련하였다. 1914년에는 리케르트의 입장에서 심리주의를 비판한 논문 심리학에 있어서의 판단론으로 학위를 받았고, 1915년에는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範疇論과 의미론의 교수자격논문을 발표하여 후리브르그대학 사강사가 되었다. 1923년에는 마아르부르그대학 교수로 취임하였고, 1928년에는 스승 훗설의 후임으로 모교母校의 교수로, 1933년에는 총장總長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구생활과 총장의 직책이 양립할 수 없었는지 또는 도이치대학의 자기 주장이라는 총장 취임강연이 남긴 문제점 때문인지, 그는 겨우 1년만에 총장직에서 물러나서 또 다시 조용한 사색과 강의생활로 되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교단을 떠났고, 그때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80세를 눈앞에 보는 백발의 거장으로써 오직 저술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다.

191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의 시대는 1차대전으로 인한 파괴와 폐허, 고통과 불안 속에서 온 유럽은 숨가쁜 호흡을 모으고 있었으며, 1918년에 도이치는 드디어 패배敗北로써 종전을 맞았다. 혼란과 혼미의 열풍이 유럽세계에 밀어닥쳐 사람들은 갈 길 모를 종말의식에 사로잡혔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1918년에는 도이치혁명이 일어나서 도이치제국이 붕괴되고, 바이마아르헌정憲政에 의한 도이치공화국의 발족이 바야흐로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러한 해체와 불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든 지주 잃은 그 현실적인 인간존재에게 인간문화를 가장 깊은 뿌리에서 떠받치고 있는 철학은 무엇인가를 결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무엇인가를 속 시원히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적인 의식일반에 호소하여 치유되기에는 인간은 너무 병들어 있었다. 삶의 즐거움이 전적으로 후퇴해버린 인간에게 소생蘇生의 의욕을 불러일으킬 유일한 길은 지적知的인 것에 선행先行하는, 오직 구체적 생의 사실성과 현실성에 대한 응시凝視가 아니었던가. 하이데커는 벌써 그의 철학의 새로운 형이상학적 지향志向의 발족發足16년의 역사학에 있어서의 시간개념속에서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적 충동이 철학 자체 속에서 눈을 떴다고 지적한 바 있었으며, 그러한 사색의 시도가 10여 년 동안의 침묵의 결정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1927년에 나온 존재와 시간이라는 획기적 대작이다.

하이데커의 철학은 존재일반의 의미해명을 본래 목표로 하는 존재론이다. 그러나 이런 존재의 의미해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존재의 존재분석을 그것의 단초端礎로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현 존재現存在 Dasein (, 1)의 존재분석론의 한계내에서 실존철학이라 불리워진다. 그러나 그 자신은 실존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기본존재론이라 불렀으며, 이 명칭이 그의 전체적 철학체계 내에 있어서의 그 분석론의 위치를 정당하게 밝힌 명칭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존재 물음의 문제는 그의 철학의 중심과제가 되거니와 존재란 가장 보편적이며, 정의定意 불가능하며 그리고 가장 자명적自明的인 개념이다. 존재가 가장 보편적이라는 것은 가장 명백한 개념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불분명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요, 그것은, 정의 불가능성은 존재가 아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자와의 구별문제로 귀각龜脚되며, 존재개념의 자명성은 평균적인 존재이해이며, 진정한 존재의미가 아직도 어둠에 싸여있고, 존재 속에 선천적인 하나의 수수께끼가 놓여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여기에 존재물음의 필연적인 반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물음은 문제일반이 그러하듯이 그것의 형식적구조를 가지는 것이니 그 물음에는물어지는 것(das gefragte)’물어내어지는 것(das erfragte)’그리고물음이 걸려지는 것(das befragte)’이 속한다. 그것들은 존재요, 존재의 의미요, 그리고 존재자 즉 현 존재이다.

그의 철학은 그것의 대상에서 보면 존재를 묻는 존재론이며, 그것의 방법은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 (, 2)이다. 현상은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본체本體 또는 실체實體에 대한 가현假現으로써의 현상이 아니라, 그것 자신이 자기를 스스로 나타내는 것, 은폐隱蔽된 상태에서 그 은폐를 벗겨보이는 것, 즉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본존재론은 방법론적으로 현상학적 해석학이다.

현 존재는 그 근본기구機構에 있어서 세계내존재(Das In - der - Welt - sein)이며, 현 존재의 존재는 전체성에 있어서 관심(Sorge)이며, 관심의 의미는 시간성(Zeitlichkeit)이다. 그러므로 시간성은 현 존재의 존재해명의 지평地平일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 가능근거이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관심에 있어서, 나아가서 시간성에 있어서 해명된 것이다.

세계내존재의 근본기구는 세계’ ‘있는 자그리고 안에 있음3계기契機로 나누어진다. 세계는 어떻게 있는가? 우리는 그것과 어떠한 방식으로 교섭하고 있는가? 세계는 우선 환경環境이다. 일상적 현 존재는 환경 안에서 여러 사물을 만나며, 이러한 존재자를 우리는 안전眼前존재자(Vorh - andenes)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자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그 때 그 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 즉 우리의 배려가 그것에 작용하는 사물을 유용有用존재자(Zuhandenes) 또는 도구道具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방식은을 위한이며, 이 존재방식은 결국 현존재를 위한 것이며, 이러한 전체연관성을 유의의성(Bedeuts - amkeit)이라 하여, 이것이 실존주實存疇(실존의 존재방식을 규정한 범주範疇로 곧 실존적범주)로써 세계이다. 그리고 있는 자는 물론 현존재로써의 인간존재를 말한다. 세계내존재로써 현존재는 타인으로부터 고립되어있는 자기를 생각할 수는 없다. 이때 타인과 함께 있는 세계는 공존계共存界(Mitwelt, 공존계와 독립계, 우리는 한 우주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한 우주에 산다. 이 두말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말하는 차원이 다른 것임), 현존재는 공존(Mitsein)이다. 현존재는 환경에 대하여 배려하며(Bursorgen), 타인에 대하여 고려하며(fursorgen),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Sorgen). 그러나 이때 현존재는 그 누구도 아닌 막연한 세인世人(das man)이며, 일상적 현존재의 존재방식은 이러한 평균성 안에 분산되어있다. 끝으로안에 있음은 가령 방 안에 탁자가 있는 것과 같은 사물의 존재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으로써 자기가 자신에 대하여 개시開示되어 있으며, 이미 그러한 개시성 안에 있음을 말하며, 이것이 다름 아닌 Dasein(현존재)Da()이다. Da는 거기를 의미하며, 현존재가 거기에 내던져져있음, 즉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을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상황성狀況性(Behn - dlichkeit)이라고 하며, 기분氣分(Stimmung, 상대적으로 길게 지속되는 감정의 상태를 말한다. 구체적이거나 강하지 않고, 특정 자극이나 사건에 의해 쉽게 촉발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감정'과 구별됨)이라고도 한다. 기분은 어떠한 인식認識에도 선행先行한다. 그리고 기분은 항상 이해를 동반하고 있다. 현 존재는 피투彼透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존재가능으로써 자기 자신을 앞으로 내던지고 있는 즉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가능을 앞질러 이해하고 있다. 이 이해의 구조를 기투旣投(Entwurf,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라 한다. 현존재는 일상적으로 공존계에 공존하며, 세인世人으로써 호기심에 사로잡혀 한담閑談을 일삼고 사물에 눈이 팔려있다. 이러한 존재방식을 비 본래적 존재방식으로써 퇴락頹落(Verfallen)이라 부른다. 세계 내 존재로써 현 존재가 그의 일상성에 있어서 본래적 자기에서 도피하고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불안 때문이다. 불안은 공포와는 달라서 대상이 없다. 현 존재가 세계 내 존재라는 그 자체가 불안인 것이다. 따라서 불안을 현 존재의 탁월한 개시성으로써 근본상황성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현 존재는 자기의 존재 가능성을 기투하는 의미에 있어서 자기에 앞서서(Das Sichvor - weg)있으며, 세계 내에 내던져저있다는 면에서내에 이미 있음(Das Schon - sein - in)이다. 전자가 실제성을, 그리고 후자가 사실성을 현시顯示한다. 그리하여 현 존재의 실존성은 본질적으로 사실성에 의하여 규정되거니와, 그때 현 존재가 사실적으로 실존한다함은 언제나 벌써 내세계적으로 배려配慮된 유용有用존재자 옆에 퇴락頹落해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이 옆에 있음(Das Sein - bei)이요, 현 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에 있어서의 퇴락성을 나타내고 있는 계기契機이다. 그리하여 현 존재의 존재 전체성은내 세계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의 옆에 있는 것으로써 자기에 앞서서 이미 내 세계에 존재함(Sich - vorweg - schon - sein - in - einer Welt als Sein bei innerweltlich begeg - nenden Seiendes)이라는 관심으로써 해명되었다.

그러면 현 존재의 존재로써의 이 관심은 그것의 존재의미로써의 시간성과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 관심의 어떠한 계기가 시간성의 양상樣相에서 해명될 것인가?

현 존재는 죽음으로의 존재(Sein zum Tode)이다. 죽음은 확실성과 부정성不定性을 그 특징으로 가진다. 죽음은 현 존재에게 던져진 으로써의 가장 자기적이고 타인과 단절된, 확실한 그러나 언제 있을지 모르는 부정不定,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설 수 없는 가능성이거니와, 이 죽음에로의 존재를 선험先驗(Vorlaufen)이라 한다. 현 존재는 선험적 결의에 의하여 세인에게로의 몰입이 폭로되고 본래적인 자기에게로의 돌아오게 되며, 이 자기에게로의 도래渡來가 바로 장래將來( Zukunft)라는 시간적현상이다. 현 존재는 그 존재에 있어서 장래적이기 때문에 본래적인 자기를 가능케 한다. 그리하여 자기에 앞서서의 계기는 장래에 근거한다. 현 존재는 본질적으로 그의 부채적負債的존재(Schuldigsein)에 있어서 존재하고 있다. 물론 부채는 통속적인 부채, 책임, 과실, 범죄 등을 의미하지 않고, 또한 당위當爲나 법과 관계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 존재의 피투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 존재는 이미 내던져진 자로써 존재하고 있는 의미에 있어서 기재적旣在的존재이며,‘내에 이미 있음의 관심계기는 이 기재旣在(Gewesen - heit)를 표명하고 있다. 끝으로 옆에 있음은 내 세계적 존재자를 배려하고 있음이요, 그러한 존재자를 현전現前시킴(Gegenwartigen)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재 (Gegenwart)이다.

전술한 바에 의하여 현 존재의 존재 전체성으로서 관심은 시간성의 지평에 있어서 해명되었다. 그러나 시간성은 본래 탈자적脫自的 통일체로써 장래에서 시성時成하는 근원적시간이다. 현 존재는 원래 시간적이다. 이것은 현 존재가 시간이라는 어떤 것의 안에 존재한다든가, 시간 안에서 탄생하여 시간 안에서 죽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현 존재의 존재방식을 떠나서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근원적시간은 장래적 기재적 현재의 통일체이며, 통속적시간 이해에서 나오는 미래, 과거, 현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통속적시간이나 우리가 사용하는 세계시간은 모두 이 근원적시간에서 파생한 것이며, 이것을 수평화水平化한 것에 불과하며, 그때 시간은 미래에서 와서 과거로 지나가는 무한한 시간이 된다. 근원적시간은 현 존재의 시간이며 유한적이다. 그것은 제 1차적이며 장래에서 시성時成한다. 그러나 통속적시간 이해는 시간의 근본적현상을지금안에서 본다. 이러한 지금에 있어서는 본래의 시간성에 있어서의 순간의 탈자적脫自的현상의 설명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 이유는지금은 무한한 것으로써 지금의 연속이며, 탈자적 통일에 있어서 장래에서 시성하는 현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근원적 시간은 본래적 양상, 선험적先驗的 복귀적復歸的 순간(Der vorlaufend wiederholende Augenblick)과 비 본래적 양상인 예기적豫期的 망각적 현상(Das gewartigend - ver gesende Gegenwartigen)으로 분석된다.

그리고 이 본래적 시간성의 구체화가 다름 아닌 역사성(geschichtlichkeit)이다. 역사(Geschichte)는 사건이며, 이 사건은 현존재를 제외하고 생기生起하지 않으며, 그것은 바로 현 존재 자신의 사건이다. 현 존재는 시간적인 것으로써 동적이며, 이 동성動性이 생기(Geschehen)로써의 사건이다. 사건은 실제의 선험적 결의에 의한 생기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며, 이때 현 존재는 기재적旣在的인 것으로써 피투성被投性의 인수引受, 즉 유산遺産의 전승傳承이며, 이것이 숙명宿命(Schicksal)의 근본적인 의미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선험적 결의에 의한 유산의 전승으로써의 순간에 있어서의 생기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역사요, 현 존재의 역사이며, 기술記述로써의 역사학(Historie)도 이것을 전제하여 비로소 성립된다.

 

. <1> 현 존재現存在 Dasein,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특히 그의 걸작傑作존재와 시간에서 중요한 개념임. 이는 그곳에 있는또는 현존하는을 의미함. 본질이나 가능태可能態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할 것. 일반적으로 이다에 대하여, ‘있다고 할 때의 존재양식. 하이데거에서는 인간을 가리키고 기초적 존재론의 주제임

. <2>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의 선구先驅를 이루는 것으로서는 베른하르트 볼차노의 논리학과 프란츠 브렌타노의 심리학을 들 수가 있음. 볼차노는, 명제가 나타내는 의미는 그 진·위에 상관없이 주관에서 독립하여, 그 자체에 있어서 성립한다고 생각하였음. 브렌타노는 이와 같은 객관적인 진리의 심리학적 포착을 중심문제로 삼음. 그는 의식이란 '무엇에 관한 의식'이라는 점에 조심하여 의식현상의 본질은 대상을 '지향'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음. 브렌타노의 제자 알렉시우스 마이농 Alexius Meinong (1853-1920)은 이와 같은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관점에 의거해서 대상의 본질구조를 밝히려 하였음. 그의 대상론은 보통 표상되는 현실적인 대상만이 아니고, 다만 사유될 수 있을 뿐인 비현실적인 것도 충분한 대상으로서 인정하는 것임.

후설의 현상학은 위와 같은 두 면을 이어받아, 한편에서는 객관적 진리를 어디까지나 엄밀하게 나타내려고 하는 동시에, 이것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 하는 '기술학'. 그는 '사상 자체에로 Zu den Sachen selbst!'라는 것을 모토로 함. 그에 의하면 철학은 엄밀학, 보편학이어야 한다고 함. 이제까지의 철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성이 불충분하였고, 또 참으로 객관적인 존재로 향하지 않고 다만 주관적인 세계관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철학의 무정부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음. 철학은 이러한 점을 고쳐야만 수학과 같은 보편학으로 되어 '철학의 기초학', '엄밀학으로서의 철학'이 된다고 함

 

<역사歷史, 지리地理>

 

026  역사歷史 Historiai (B.C 429년 경), 헤로도토스 Herodotos

 

헤로도토스는 B.C 484, 1회 페르시아전쟁과 제 2회 페르시아전쟁 간에 출생하여 페르시아 왕 아타르크세요세스 1세가 죽은 해 B. C 425년 전후에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출생지는 소아시아 서남방의 할리카르나소스라는 도시국가다. 본래 도리아인의 식민지였으나 이오니아문화가 널리 보급되어 이오니아어를 사용했다. 할리카르나소스는 한 때 리디아의 속국屬國이 되었으나 페르시아 지배지역이 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할리카르나소스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가품家品을 자랑할 것이 못 된다하듯이 과연 그가 귀족 출신인지는 정확치 않다. 헤로도토스 자신의 기분으로는 귀족적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후년에 세계여행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 경제적으로 유복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어렸을 때 교육을 충분히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의 숙부叔父 타뉴아스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문학을 공부하고 상고尙古사상을 가지고, 종교심을 길러준 것도 숙부의 감화라고 한다. 그는 서사시인敍事詩人으로 알려졌고, 헤라클레스를 노래한 시도 있다.

여행은 육지와 바다, 그리스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역은 거의 전부 돌았다. 그리스 본토와 그 식민지는 물론이고, 동으로 바빌로니아, 서로 이탈리이아, 북으로 스키타이, 남으로 이집트에까지 갔다. 이집트여행은 B. C 445년에서 449년 간인 듯 하며, 아테네에서 출발하였는지 튜리이에서 떠났는지 분명하지 않다. 최초의 활동무대는 아테네였으며, 소포클레스, 페리클레스 등을 만났다. 아테네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아테네식민단植民團에 가담하여 마그나그레키아의 튜리이로 이주(B. C 444)하여 일생을 보냈다. 또한 여기에서역사를 집필하였다. 헤로도토스의 사망은 아테네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헤로도토스는 장기여행을 통하여 각지를 답사하여 견문을 넓혔으며, 페르시아전쟁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대사건을 세계사적인 면에서 취급하였음은 그리스 사학사상史學史上 와 역사의 세계에서의 선을 그어놓은 최초의 인물이다. 로마공화정 말기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역사의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오늘에도 그대로 추대推戴된다.

헤로도토스의역사9권으로 되어있으며, 대체로 B. C 429년 혹은 428년 경에 쓴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작품을 읽어본 이는 곧 짐작이 가겠지만 이 9권으로 그의 역사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 내용에 따라 구분하면,

1, 키루스와 칼비세스의 통치

2, 다리우스의 통치

3, 크세르크세스의 통치로 되어있다.

1부에서는 이집트를 포함한 아시아에 관한 서술로써, 페르시아세력의 흥기興起와 승리, 즉 아시아지역을 중심하였고, 2부에서는 스키타이와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의 실패와 이오니아에서 그리스군의 실패에 대한 유럽을 중심으로, 3부에서는 페르시아의 실패와 그리스의 승리를 내세우고 헬리스를 주제로 하였다.

페르시아전쟁은 헤로도토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동서분쟁의 원인을 회상하는 데에서, 이오니아반란에서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의 침입에 실패를 취급하는 한편 페르시아제국의 기원基源과 주도적인 그리스국가를 서술하였는데,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취급하였다. 이러한 구상은 무엇보다도 그의 망명생활에서 얻은 힘이 컸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이민족異民族이 말하여놓은 하나의 사료집史料集이라고 할까, 신관神官, 승려僧侶 등에게서 얻은 자료의 본원성本源性을 인멸湮滅시키지 않고 만들어낸 대사료집이다. 그는 역사의 개척자로써 고전학자였다. 역사는 그의 획기적인 사업이다. 역사의 구성은 방대하여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의 분쟁을 많은 자료로 세계적인 대립, 충돌로써 다양성의 세계사를 기록했다.

헤로도토스는 아테네에 체류하면서 비극悲劇의 표현양식을 배웠다. 5권과 제 6권에서 클레오메네스, 7, 8, 9권에서 크세르크세스와 마르도니우스를 취급하였는데 이것을 읽으면 문장 전체의 구상도 구상이려니와 문학적인 기교技巧도 상당하다. 비극의 특징은, 마치 행군하는 군대에게는 시간과 공간에 하등 통일이 없기도 하듯이, 이때 시간은 스페이스의 정지를 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마치 조각된 츠리즈와 비슷하게 정적인면도 동적인 면도 있다. 그는 각 부분에 해명을 내리면서도 전면의 통일을 상실하지 않았다. 헤로도토스는 대사건을 저술하려고 할 때에는 그 중간에 신화神話를 넣어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고 하였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전후가 연결이 되지 않으나 독자에게는 흥미를 북돋우며 전체적으로는 통일이 되어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하나의 예술작품인 동시에 연구물이다. 그의 역사는 큰 화폭畵幅과 같아서 절정絶頂도 있고 삽입揷入도 있다. 격전激戰 중에는 승리의 신 아테네에게 승리의 선물을 바치는 진열물陳列物과도 같다. 7, 8, 9권에 들어나는 크세르크세스의 즉위卽位, 7권 제 1에서 19까지에 페르시아제국의 선전宣戰 광경은 이 자체가 크세르크세스와 알타바투스의 회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대차적對蹠的으로 서술하여 놓은 것과 같은 점은 헤로도토스의 탁월한 구상이었다.

그의 역사는 다면적인 서술로써 비판정신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인과因果의 설명이 결여되어 있으며, 사건의 동기를 심리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역사의 동인動因을 신의 섭리로 알았다. 그의 역사에는 합리성이 결핍되어 있지만, 그의 서술에는 매력이 있으며, 또 순수한 면이 표시되어 있다. 역사에서 과학성을 찾으려면 다음에 나타나는 투키디디데스 때에 가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로도토스는 그 넓은 범위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그 자료를 어디서 얻었을까? 지금 같으면 고전서관古典書館, 도서관, 박물관 등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시설이 없었다. 헤로도토스에게는 도서관도 없었고, 자료도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하여역사를 저술했을가?

이집트, 페르시아에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금석문金石文이 있었다. 페르시아에는 공문서公文書가 남아있었다. 헤로도토스가 과연 이들의 자료를 이용하였는지는 의문이며, 헤로도토스에게 그리스의 신화, 전설, 역사의 자료를 제공한 것은 과거의 서사시다. 호메로스 이래 전해내려온 서사시의 전통이 살아있었다. 과학적이라고는 못 할망정 로고포이오이가 남겨놓은 그리스 사에 대한 사실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술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크산토스, 헬라너코스, 헤카타이오스 등의 저작은 중요한 사료였다. 이와같이 그의 그리스 사 서술에는 로고포이오이의 도움을 빌었다. 그리고 페르시아전쟁에 관하여서는, 간단하기도 하지만 각 도시의 기록 혹은 신관의 기록이 남아있었으며, 그 중에는 구전전설도 있었다. 또한 그 이야기 중에는 실제로 견문한 사람들의 담화談話도 기록되어 있었다. 구전口傳은 결코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헤로도토스는 이 불완전한 자료만을 의지하지 않고 사적史蹟을 답사하여 지식을 보충하였다. 헤로도토스의 장기長期에 걸친 대 여행은 직접 그에게 지리상 또는 역사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한편 외국어를 해득解得할 수 있었던 그에게도 오해는 있었을 것이고, 난점도 있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서술에 있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신이 인간역사에 간섭하는 것을 믿었다. 그는 탁의託宜, , 전조前兆 등은 인간에게 대한 신의神意의 시현示顯이라고 하였다. 위기에 천우天佑를 생각하는 그에게는 불만도 있기는 하였지만 여기에 대하여 윤리적비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신의 질투를 관대히 다룬 것도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는 역사 서두에서 이 책을 쓰는 태도를 밝혔다. 이 책은 할리카르나소스 인 헤로도토스의 연구로 된 것이며, 인간의 공적功績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잊어버릴 수 있다든지, 그리스인과 이방인 간에 이룩하여놓은 위대하고 놀랄만한 기적奇蹟을 돌아보지 않게 된다든지, 특히 그들이 서로 다툼으로 인해서 원인이 똑똑치 않게 된다든지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발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인간의 업적 및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유럽인과 아시아인, 문화와 야만野蠻과의 전쟁의 기원基源, 소장消長, 결과를 서술하는 것이 역사의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두 민족의 충돌은 심히 복잡하다. 얼핏 보면 혼잡스러운 사실과 전설의 집적集積 같이 보이지만, 역시 여기에는 어떠한 통제統制의 원리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의 역사는 결코 사건의 단순한 나열羅列이 아니라 서사시의 통일이 있으며, 여러모로 얽혀있으므로, 사실史實의 범위를 제한하여 흥미 본위의 서술체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두 민족의 충돌의 역사를 마르도니오스의 침입에서 시작하여 크세르크세스의 실패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로 제한한 것도 이 까닭이다. 그는 범위를 줄여가지고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국세國勢의 성쇠盛衰를 전망하며, 그 잡다한 자료를 신화의 형식으로 엮어놓았다.

일찍이 헤로도토스는 아테네에서 역사의 일부를 낭독한 일이 있다. 그의 생활에는 가인적歌人的인 면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신화, 전설을 사실의 서술로 바꾸어놓았다. 오늘날처럼 신문, 잡지의 보도가 없었던 당시에는 헤로도토스의 즉흥적인 서술은 사람들에게 매우 환영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있어 주요 테마가 페르시아와 아테네, 그리스, 스파르타로 되어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개인의 성격묘사에 있어 출중한 재질을 발휘하고 있다. 페르시아제국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강경强硬에서 점점 애민愛民의 사상으로 옮아간 큐포스, 횡폭橫暴한 캄뷰세스, 지인용智仁勇을 겸비兼備한 명군名君 다케이오스, 전제적專制的이고 잔인무도殘忍無道하며 비겁하여 간신奸臣에게 좌우된 크세르크세스 등 제왕諸王의 성격을 여실히 묘사하였다. 그리스의 경우에 있어서는 아리스테미데스를 공평무사公平無私의 정치가로써, 테미스토클레스를 권모술수權謀術數의 인물로 다루었다. 페이스이스트라트스, 헤리안드로스를 독재자로, 페오니데스, 파우사니에스, 클레오메네스를 군주君主로써 기록하였는데, 모두 걸출傑出이다. 결국 헤로도토스가 우리의 흥미를 이끄는 것은 사학사상史學史上에 어떤 일반적인 원리를 잡아넣지 않고 도리어 인물의 성격을 잘 묘사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있어 초인간적인 면을 긍정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역사도 비과학적이라고 비난을 하지만 사실의 진상을 찾아내기에 노력하였다는 점, 그리고 사실의 진상을 그대로만 보려고 하지 않고 발전적인 면에서 참고한 바 사학史學의 정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서사시인처럼 과거의 달콤한 꿈의 세계를 유일한 자료로 삼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의 서술방법은 현실적이며 실증주의적이었다. 정확을 기하는 뜻에서 그는 마침내 실지답사實地踏査를 떠났다. 그는 실제 조사하여 얻은 사실과 전설을 구별하였으며, 단정斷定과 억측臆測을 혼동하지 않았다. 그는 사가史家로써 공평公平을 잃지 않았으며, 편견偏見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명경明鏡과 같았다. 그의 역사는 사실의 공평한 기록일 뿐 아니라 엄중한 비판을 거친 귀중한 연구물이다.

 

027  사기史記 (B. C 104), 사마천司馬遷

 

옛적부터 중국의 제왕帝王들은 사관史官을 두어 그들이 말과 행동을 기록하였다. ‘예기禮記에 이른바 좌사기동左史記動, 우사기언右史記言이라 한 바와 같이 사기는 좌사, 우사하는 를 말하는 것이요, ‘는 기동, 기언하는 를 말하는 것이니 사기의 본래 뜻은 사관의 기록혹은 사관이 기록한 글이란 말이다.

사관이 기록한 글이란 뜻에서 중국 고대의시경詩經이나서경書經같은 글도 사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서경'은 당, , 3대의 제왕들의 말 - , , , 등을 기록한 것으로써, 고대의 정치사나 정치사상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의미의 사서는 공자가 편수한 춘추春秋에서부터 시작된다. 춘추에 대하여 최초에 말한 사람은 맹자孟子. 맹자에 의하면 왕실王室이 동천東遷한 이후부터 점점 쇠미衰微해지고 정치가 문란하고 도덕이 퇴폐하여,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현상이 계속 발생하므로 공자가 이를 걱정하여 춘추를 지었다.’하며, 또 말하기를공자가 춘추를 지으니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춘추는 단순한 사관의 기록과는 다른, 공자의 정치이상을 내포한 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기는 하나 춘추를 시, , , 와 함께 오경五經 속에 포함시키고 사서류史書類와 구별하는 종래의 고전 분류는 역시 이와같은 견지에서다.

중국에서 본격적인 역사 저술은 사마천(B. C 144 - 90?)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마천은 사기의 끝에 자서自序를 붙여 자기가 사기를 편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遺言에 따라 사기를 썼다. 유언의 내용은

 ‘나의 먼 조상은 주왕실의 태사太史. 상고上古에 우, 에 공명功名을 세워 천관天官의 일을 맡아보다가 후세에 중절中絶되어 나에게 이르렀다. 이제 나는 다시 한나라 황제로부터 천관의 벼슬을 맡게되었는데, 천자(무제武帝)가 태산泰山에 봉경奉敬하는 큰 예식을 거행하는데도 참여 못 하고 죽게되니, 이는 천명天命이라 할 수 없구나! 내가 죽거든 너는 내가 뜻하던 바를 잊지 말고 우리 조상의 업을 계승하여라. 대저 찬하 사람들이 주공周公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덕, 주공, 소공召公의 풍을 잘 읊어 노래하게 하고, 태왕太王, 왕계王季의 생각을 잘 전달하고, 위로 공경公卿에까지 미쳐, 이로써 주의 시조始祖인 후직后稷을 추존追尊해주었기 때문이다. 유왕幽王, 여왕厲王 이후로 왕도王道가 무너지고 예악禮樂이 쇠퇴하였으므로 공자가 옛것을 닦아서 없어졌던 것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시, 를 논하고, 춘추를 지었다. 그래서 학자들이 지금까지 모범으로 삼는다. 춘추가 나온 뒤로 오늘날까지 제후諸侯들이 서로 겸병兼倂을 일삼았으되 사관의 기록이 끊어졌고, 이제 한조漢朝가 일어나 해내海內가 통일되고, 명왕明王, 현군賢君, 충신忠臣, 의사義士가 속출했으되 내가 태사太史로 있으면서 이를 논재論載하지 못 하여 천하의 사문史文을 폐하고 말았으니 송구하기 짝이 없다. 너는 나의 이루지 못 한 뜻을 잘 명심하여라!’

이 유언의 요지要旨는 주공, 공자의 사업을 찬미하면서 그것을 계승할 것을 아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 유언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소자小子가 불민不敏하오나 아버님께서 모아놓으신 옛 기록들을 빠짐없이 엮어서 논술의 일을 끝마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는 춘추에 대하여 황중서黃仲舒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자가 춘추를 쓴 것은 자기의 이상理想을 말로 하는 것보다 역사상의 사실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그 시비是非를 지적하는 것이 더 절실하고 알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춘추는 위로 삼왕三王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 인사人事의 법칙을 세워 혐의嫌疑를 가리고 시비를 밝히어, 선한 자를 선하다 하고 악한 자를 악하다 하며, 망한 나라를 보존해주고, 끊어진 세대世代를 이어주는 것이니, 이는 왕자王者로써의 할 큰일이다.’고 하였다. 사마천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3년만에 태사령太史令이 되었으니 이 때부터 사기 편찬에 착수했을 것이다. 그는 태사의 자격으로 한 왕실의 석실石室, 전괴全匱속에 비장秘藏되어있는 서적까지 열람하면서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 당시의 이릉李陵사건(, 1) 때문에 한 무제의 노를 사서 궁형宮刑(거세형去勢刑)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친구 임안任安(소경少卿)은 사마천에게 편지로써 임금께 현자를 추천하라고 권고하였다. 사마천은 이 편지의 회답에서 그의 불우한 신세를 개탄하고, 울분의 심회를 토로하였는데, 이 편지의 뒤끝이 사기 저술에 대한 말로 끝맺었으므로 내용을 요약하면

소경 형, 나 같은 사람이 누구를 추천할 수 있겠소. 나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이요. 벌써 죽었어야 할 것을 죽지 못 하는 것은 부친의 유명遺命인 사기 편술 때문이요. 이 때문에 나는 온갖 굴욕과 수치를 참아가면서 밤낮으로 이 일에만 열중하고 있소. 옛적에 문왕은 유리羑里에 갖혀서 주역周易을 풀었고, 공자는 곤액困厄속에서 춘추를 지었고, 굴원屈原은 추방되어 이소離騷를 썼고, 좌구左丘는 실명失明하여 국어國語를 지었고, 손자孫子는 다리를 끊기고 병서兵書를 썼다오. 이 사람들은 모두 하고싶은 일을 이루지 못 하여 가슴에 울분을 품고 그 뜻을 알리기 위해서 이런 글을 썼던 것이 아니오. 나도 감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세간에 흩어져있는 옛 전설을 모으고 과거의 행사行事와 사적史蹟을 조사하여 그 성공 실패와 흥망성쇠興亡盛衰의 배후에 있는 이치를 구명해볼까 하여 130권의 책을 저술하였소. 나는 천인天人의 관계를 알아보고, 고금변천古今變遷의 이치를 통하여 일가一家의 설을 세우고싶소. 그런데 원고가 끝나기도 전에 이런 화단禍端을 당하였소. 나는 이 일을 완성하지 못 한 것이 유감이 되어 극형極刑도 참고 견디는 것이요. 만약 나의 이 저서가 완성되어 명산名山에 간직되고, 알아주는 사람이 전해보고, 통도대읍通都大邑에 전파될 수만 있다면, 이런 형벌이야 천 번 백 번 받은들 원한이 있겠소.’

이 편지의 말대로 하면 사마천의 사기는 과거의 행적과 사업을 조사하여 그 성패 흥망을 구명하고 천 인 관계를 엿보며, 고금 변화를 통달하려는 것이니 사마천의 의도는 단순히 사서를 편술하는데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역사철학 인생철학을 터득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사마천의 학자로써의 위대성을 이루어준 것은 그의 이러한 의도 때문일 것이다.

임소경에게 보낸 편지가 한 무제 정화征和 211(B.C 91)이었고, 사마담(부친)이 죽은 해가 한 무제 원봉元封 원년(B.C 110)이었으니, 부친상父親喪 3년만에 저술에 착수했다면 이때까지 사마천은 이미 16년의 세월을 이에 종사했다고 볼 수 있다. 편지에 원고 미완未完이라고 하였으나 이미 130편이란 숫자를 말한 것으로 보면 대체로 초고草稿는 이때 완성되었던 모양이다. 반고班固의 사마천전에 의하면 그가 죽은 뒤 선제宣帝(B.C 74 - 49)때에 외손外孫인 양휘楊揮사기를 발표하였다 한다.

 

. <1> 이릉사건 - 이릉은 한의 뛰어난 장군으로서 효무제의 명을 받아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고비사막을 넘어 몽고 지방으로 원정을 나섰다. 그런데 5천에 불과한 그의 군사가 흉노의 8만 대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룽은 흉노 군사 1만을 배면서 분전하였으나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다. 흉노의 왕 선우는 열 배가 넘는 자기의 군대를 상대로 무려 열흘동안이나 맞서 싸우며 엄청난 피해를 준 이 젊은 장군에게 크게 감동하여 정중히 대접했다.

이릉은 비록 흉노의 포로가 되었으나 자신을 신임한 한나라 조정을 위해 다시 싸우려고 흉노의 내부 사정을 살피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의 왕 효무제는 이릉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이릉의 죄를 묻는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사마천은 이릉장군을 비난하는 대다수 사람들과 달리 이릉이 충직한 사람이고 흉노의 대군에 맞서 한나라 군사의 용맹함을 과시 하였으며, 죽지 않고 항복한 것도 뒷날 나라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그를 옹호했다.

사마천은 효무제의 미움을 받아 옥에 갇혔고, 끝내는 궁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졌다. 궁형이란 남자의 상징을 자르는 형벌로서 어떤 면에서는 사형보다도 더 가혹한 형벌이었다.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절망에 빠져 '아무 쓸모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가 자결하지 않고 그 치욕스러움 형벌을 감수한 것은 사마천의 열전에서 태도를 밝혔다.

나의 조상은 기록이나 천문, 역사를 주관하는 하잘것없는 직업으로 점쟁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원래부터 폐하가 마음이 내키면 노리갯감으로나 상대하는 배우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말하자면 세상이 경멸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런 신분을 이어받은 내가 법의 제재를 받고 사형을 당하더라도 황소의 터럭하나가 없어지거나 벌레와 개미가 죽은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절개와 의리를 위해 죽은 사람들과 같아 보아줄 리 만무하고 그저 지혜까 모자라고 죄가 무거워 그랬다고 밖에는 생각 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인간이란 누구나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혀 있는데, 발산할 길이 없으며 과거의 일을 써서 미래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도 엉뚱한 생각인지 모르나 재주 없어 보잘것없는 문자이나마 천하에 흩어진 기록과 이야기를 망하고 역사상 활동했던 인간들의 행동을 깊이 관찰하고 그 진상을 추구하여 왕조의 흥망성쇠를 대국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성공과 실패의 이치를 밝혀 황제에게 지금까지의 130권의 저술을 완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을 마치지 못 하고 죽는 것이 아깝다는 마음 하나로 궁형이라는 극형을 감수했습니다. 내가 심혈을 기울인 이 저술을 완성하여 한 벌은 명산에 감추어 영원히 전하고, 다른 한 벌은 수도에 사는 뜻있는 분들께 전할 수 있다면 나의 치욕은 씻겨질 것이며, 일만 번 사형을 받더라도 조금도 한이 남지 않을 것입니다

* 사마천은 황제의 명으로 역사서를 집필하지 않았으며, 사후에도 이것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기라는 제목은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028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646), 현장玄奘

* 한자어와 어려운 전문용어에 유난히 애를 먹었다. 인명, 지명 등 고유명칭은 한자표기를 배제하고, 이해에 필요한 용어     만 한자를 표기함

 

중국의 불교 전래에 여러 설이 구구하나 신빙성이 있는 말로는, 전한前漢 말 애제哀帝시대와 후한後漢 초 명제明帝시대설이 유력하다. 애제시대설에서는 어환魚豢(삼국시대)위략魏略애제 원주元疇 2년에 박사 제자 경려景慮가 대월씨왕大月氏王의 사자使者 이존伊存에게서 부도경浮屠經을 구수口授받았다고 한 것(삼국지三國志 위지魏誌 30 소인所引)이 근거이며, 후자 즉 명제시대설은 후한 명제 영평년간에 사자使者를 서역西域(인디아와 중동지역)에 보내 불교를 들여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래로 널리 알려진 명제시대설은 원굉袁宏(진인晋人)후한기後漢記와 범엽范曄(남조南朝 송인宋人)후한서後漢書및 고승전高僧傳 등에 보이나 그 전래의 연대가 일정치 아니하고 전래에 관한 이야기가 설화說話에 가까워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전자 즉 애제시대설을 전하는 위략은 후한기 등에 앞서 된 사적史籍일뿐만 아니라 후한 명제의 초년에는 이미 황족 사이에 불교가 행하였으며, 그때에 벌써 이포새伊蒲塞(우파새優婆塞 - 청신사淸信士), 상문桑門(사문沙門 - )등의 명칭이 쓰여진 것(후한서 권 72 초왕영전楚王英傳)으로 보아 애제시대설이 학계로부터 인정받는다.

어쨌든 중국의 불교가 서역에서 전래되었음은 지리상으로 보아도 의심치 못 할 사실인 것이니 당시 서역에는 이른바 서역불교가 형성되었다. 원래 서역지방(협의狹意)은 지금 신강성新彊省의 타크라마칸사막沙漠을 중심으로 곤륜산맥, 천산산맥, 총령葱嶺산맥이 남북서에 둘러있고, 동은 중국에 통하는 지방으로써 예로부터 동서교통의 요충要衝이 되어온 곳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서역문명이 여기에서 발달되었거니와 불교에 있어서도 또한 서역적인 것이 이룩되었던 것이니, 당시 서역불교는 순수한 인디아불교라기 보다도 인디아불교에 서역문화가 가해져 다소의 변화를 띠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디아의 불교가 서역에 전하여 그 경전 등이 서역어로 역출譯出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초기전역시대에 중국에 전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몇 가지 예를 들면, 사문沙門, 외도外道, 출가出家와 같은 말은 범어梵語로부터 역출된 것이 아니라 서역어로부터 번역된 것이며, 12인연설의 명목도 범어에서 역출된 것이 아니라 서역 토화라吐火羅(토카라)어의 경문經文으로부터 번역된 것이다. 이와같은 지리적 관계로 인하여 인디아의 존재가 중국에 알려진 것도 후한 중엽의 일이요, 장려의 서역원정에 의한 것이어니와 불교의 전래 또한 먼저 서역을 거쳤던 것이다. 그리고 인디아불교가 직접 중국과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은 동진東晋시대부터다. 동진시대로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 인디아승 즉 범승梵僧이 건너오고, 중국으로부터 법현, 보운, 지엄, 지맹, 지용 등 많은 입축入竺구법승이 배출되었다. 그리하여 불도증(천축天竺, 인디아인) 도안, 구마라십(인디아인으로써 귀현에서 수도함), 혜원, 각현, 법현, 담무식(인디아인) 등 많은 고승, 석학으로 말미암아, 역경譯經도 행하여졌으나 주로 교리의 연구와 강술이 널리 행하여 중국 불교계에 한 전환기를 이루었다.

수당시대로 들어와서는 전대로부터 역출된 불전과 연구된 교리가 더욱 세간에 보급되어 마침내 각종各宗의 확립과 완성을 보게된 것으로써 중국불교의 융성기를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중국불교사상에 가장 원대한 업적을 이룩한 삼장법사 현장도 이러한 기운機運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다. 현장은 하남의 진류인陳留人(언사인偃師人)으로 속성은 진이요, 속명은 의이니 수 문제 개황 16(596)경에 출생하였다(현장의 생년에 관하여는 제설諸說이 구구함). 그는 명문 출신으로써 한의 태구장인 중궁의 후예니 증조曾祖()는 후위의 상당태수요 조()는 제()에 벼슬하여 국자박사에 이르렀으며, ()는 영결英潔의 사로 일찍이 경술經術에 뛰어났는데 현장은 넷째 아들이다. 현장은 어려서부터 총명영오聰明穎悟하여 유가儒家경전에도 능통하였고, 그 둘째 형(장건)의 뒤를 이어 13세에 또한 낙양의 정토사에 출가하였다. 그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나매, 현장은 당의 수도 장안에 진출하였다가 다시 촉의 성도로 나아가 도기, 보천, 진법사 등에게 불학을 배우고, 그 다음 형주, 상주, 조주 등 각지를 순력하면서 고승을 찾아 도를 닦았다. 장안으로 돌아와 대각사에 머물면서 도악, 법상, 승변 등 대덕에게 나아가 학을 닦아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여러 스승들이 각각 종도宗途를 달리하고 성전聖典()도 은회隱晦(감추거나 서로 다름)한 것이 많아 지표를 세우기가 어려웠다.

이에 현장은 서유西遊의 뜻을 품고 조정朝廷(나라)에 출국구법할 것을 표청表請(청원)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 하였다. 그는 소지所持()를 굽히지 않고 당 태종 정관 3(629) 에 유랑流浪하는 빈민貧民의 틈에 끼어 감시를 피하면서 만리통유萬里通遊의 길어 올랐다. 도중에서 가지가지 고난을 겪으면서 서역제국諸國을 거쳐 홀령(파미르고원)을 넘고 철문관을 지나 북 인디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건태라(간다아라), 가습미라(카슈미르)에 이르러 그곳의 고승으로부터 구사론, 순정이론, 인명, 성명의 제론을 배우고 다시 북 인디아의 제국을 순력하여 당시 인디아의 중심지역인 마갈타(마가다)국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는 정관 7년 경의 일이다. 그는 당시 인디아에 있어서의 교학의 연총淵叢인 나란타사에 머물면서 고승 계현론사(시라발타라 - 시라바아드라)에게 나아가 다시 유가사지론, 순정이론, 현양론, 대법론, 구사론, 인명, 성명론 등 대소승의 불전을 온습溫習하고, 널리 천문, 지리, 의술, 수학 등의 제학을 섭렵하기 약 5년 동안에 인디아의 제지를 순방하였다.

현장의 그의 학업이 완숙됨에 따라 계현론사의 명에 의하여 나타사봉에서 섭대승론, 유식결택론 등을 강설했다.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높아지매 가마루파국의 구마라왕과 곡여파의 계일왕(시라아실다 - 시라아디챠)은 그를 초청하여 대회를 열고 경론을 강케 한 일도 있었다. 특히 당시 곡녀성의 대회에는 18국왕 가국대소수승 3,000여 인, 나란타사승 1,000여 인, 바라문 등 외도 2000여 인이 참가하였는데 현장은 이 대회의 논주論主가 되어 크게 대중의 논의를 선양하였다.

현장은 정관 19년에 불사리 150(), 불상 8, 대승경 224, 대승론 192, 경륜론 92, 인론 36, 성론 12 등 합계 562() 657부를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와 홍복사에 봉납奉納하였다가, 자은사에 26(길이)의 안탑雁塔을 쌓아 갈마두었다. 현장은 15년의 서역과 인디아에서 구법을 하면서 지대한 성과를 거두웠을뿐만 아니라 본국에 돌아온 뒤에는 태종과 고종의 존신尊信(존경과 믿음)과 총우寵遇(총애와 대우)를 받으며 역장譯場을 장안의 홍복사, 자은사, 서호사, 옥화()사에 베풀고, 제자들과 이에 종사한 결과 경론經論 751375권을 번역했다.

번역은 라십, 정체 등의 구역에 대하여 신역으로써, 신역은 직역법을 구사하여 원의原意를 정확히 나타냈다. 더불어 대당서역기를 귀국한 익년翌年(다음 해) 정관 20년에 찬진(봉륵, 저술)한 것이다.

현장은 당 고종 원년(664)에 입적入寂(죽음, 향년享年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음)했는데 구법, 수행, 역경, 저술 등으로 중국불교계에 위대한 공헌을 끼쳤을뿐만 아니라, 중국 법상종의 개조開祖(창시자)로써 수천의 제자를 길러냈으며, 규기, 원측, 보광, 법보, 신태, 청매, 혜립, 현종, 신방, 종철, 가상 등 고승高僧, 대덕大德이 배출되어 당대唐代 불교 융성에 이바지하였으므로, 현장은 고금을 통털어 중국불교계의 일인자로써 추앙을 받는다.

대당서역기(12)7세기 초 서역(협의狹意) 인디아(천축天竺) 여러 나라의 종교, 역사, 지리, 불사佛寺, 고적古蹟, 제도, 풍속, 언어, 문자, 학술, 산업을 본대로 들은대로 충실하게 기록한 현장의 인디아 여행기다. 현장은 당 태종 정관 3(원년설도 있음) 금법禁法을 무릅쓰고 만리원유萬里遠遊의 길을 떠나 서역 여러 나라를 거쳐 인디아 여러 나라를 편력遍歷하고 정관 19년에 장안에 돌아와 태종의 우대를 받으며 경역經譯과 설교에 종사하면서 칙령勅令(왕의 명령)을 받들어 찬술撰述하고 고제자高弟子인 변기가 편차偏差하여 정관 20년에 진헌進獻(출판出版)하였다.

본서에 기록된 나라는 183개국에, 부기附記된 것이 16개국이며, 현장이 친히 답파한 곳이 110개국이다.

1권은 서론으로 태종의 공덕이 외방外方에까지 빛나고 있음을 찬양하고, 사주(동 비제가주, 남 담부주, 서 구타이주, 북 구로주)의 형세를 서술한 다음에 그가 경유한 서역제국西域諸國 가운데 한토漢土의 사적史籍에 나타나지 않은 수많은 나라의 경역, 풍토, 습속, 종교, 사원, 궁전, 성곽, 제도, 물산 등을 수록하였으며

2권의 상반上半에는 인디아의 명칭, 지세, 풍속, 제도, 문자, 학술, 예의, 물산 등을 개술槪述하고, 하반에는 제 11권에까지는 사방의 인디아에 관하여 상기 각항의 것들을 상술詳述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당시 현황 이외에 역사 및 전설에까지 논급論及하였다. 특히 제 2권에서는 희랍(그리스)의 영향으로 발달된 건태찬예술의 고장이요, 무저보살, 세친보살, 협존자 등 이름 높은 작론제사作論諸師의 본국인 건태찬국에 대하여 예전 가적색가(카니시카)왕이 이룩한 졸저파(), 가람伽藍(사원寺院), 불상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수록하였으며, 8, 9 권은 오로지 마갈타국의 일을 실었는 바, 이는 상술한 바와 같이 그가 주로 그곳의 야란타사에서 약 5년 동안 머물면서 계현론사를 사사師事하여 대소승의 불전佛典과 여러 가지 학술을 연구하고 때로는 논주論主가 되어 대승大乘(대승불교)의 오지奧旨(깊은 뜻)를 천양闡揚(갈고닦아 드높임)하는 등 깊은 인연을 가꾸었다. 12권에서는 귀로歸路에 거쳐온 서역제국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이상으로 대략 대당서역기에 관하여 기술하였거니와 동방구법승의 인디아여행기로는 현장에 앞서 동진東晋 법현의불국기佛國記(법현전 또는 불유천축기佛遊天竺記)한 권과, 북위北魏 송운宋雲행기行記(위국기서魏國己西 11국사國事)한 권, 그리고 현장의 영향을 받은 당 승 의정의남해기귀내법전네 권, 신라新羅 (입당구법승入唐求法僧) 혜초의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세 권 등 인디아 종교, 역사, 지리연구에 귀중한 문적文籍도 적지 아니하나 이러한 여행기 등은 대개 인디아제국에 관한 문헌으로써 내용에 있어서도 불교적인 것이 위주로 되어있으며, 서사敍事에도 상략詳略이 고루지 못 하다. 그런데 대당서역기는 양에 있어서도 12권이고, 내용에 있어서 서역 인디아제국의 불교의 현상뿐만 아니라 불타佛陀(부처)시대에까지 올라가 여러 가지 사실과 전설을 채록採錄(수집 기록)하고 제도문물과 풍토산물을 수라搜羅(수집 기록)하였으며, 불사고적佛寺古蹟을 기록하면서 위치와 이정里程(거리)을 정확히 밝혔는가 하면 원어原語를 한역漢譯하는데에도 약역略譯의 상투常套를 벗어나 충실히 그 본음本音을 표사表寫하였다.

본서는 기록이 거의 결여되어있는 당년의 서역, 인디아의 불교역사에 있어 근본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역사, 지리, 고고考古, 언어, 풍습, 물산 등 각 분야의 연구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며, 근래 중아中亞 및 인디아의 탐험답사에도 지침이 된다. 본서는 일찍이 구역歐譯(유럽어역)되어 널리 구미제국에까지 알려졌다. 대당서역기는 고려대장경판에도 들어있어 해인사 장경판고에 보존되어 오는 바 세계에서 가장 오랜 판본이다.

 

029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The Description of the World (1298),  마르코 폴로 Marco Polo

 

로마제국 멸망 후 서구에는 중세 기독교문명이, 유럽대륙의 동쪽에는 중국문명이, 남쪽에는 인디아문명이 발달하고 있었고, 그 중간인 서 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는 이슬람문화가 번창하고 있었다.

동서 간의 교섭은 이미 13세기 이전에도 있었다. 4세기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은 헬레니즘문화를 동양 각지에 전파시켰고, 로마시대가 되어 동 터키스탄의 서부지방은 로마와 중국의 상품시장으로 번창하였다. 중세를 거쳐 13세기 중엽이 되면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경제적으로 크게 번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노아, 피사 두 도시의 도전을 물리치고 제 4 십자군에 참가하여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이곳을 제 2의 조국, 동방무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한편, 13세기 초엽 이래 유라시아의 동부 즉 외몽고의 북부 흑룡강유역에는 유목민족인 몽고족이 등장한다. 알렉산더대왕에 비견比肩되는 군사적, 정치적역량을 가진 징키스칸이 몽고 여러 부족의 칸()으로 즉위한 1206년 경 이래 그의 원정은 계속되어 금의 연경(북경)은 물론이요, 서 터키스탄으로부터 카스피해에 이르는 지역 그리고 남 러시아지방까지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특히 칸의 서방원정은 유혈과 파괴의 참극을 빚어냈으나, 동시에 유럽과 극동과의 접촉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서구의 기독교도들은 터키스탄과 페르시아의 이슬람교도를 정복한 징키스칸을 옛 전통에 나오는프레스터 존의 아들 또는 손자로 보고 그와 협력하여 사라센인을 동서로 협격挾擊하려는 생각을 품은 사람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독교도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유럽은 몽고인의 위협을 받았다.

징키스칸의 3남 오고타이(태종)1234년에 있었던 금의 격파, 송 및 서방에 대한 정복 결심, 그의 조카 바투의 러시아, 헝거리, 폴란드 격파와 발틱해로 진출은 유럽인들을 당황케 하였다. 1260년 즉위하여 원을 세운 후 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전토를 통일한 쿠빌라이시대는 몽고민족의 전성기였던 동시에 몽고제국의 분열의 징조가 보인 때이기도 했다. 이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영토의 사회적, 경제적, 민족적 조건은 너무나 복잡했다.

몽고인의 위협이 사라진 후 유럽인들은 타르타르인(달탄인) - 유럽인들은 몽고인과 그 지배하의 동양인을 이렇게 불렀다 - 과 협력하여 사라센인을 격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타르타르인들이 모든 종교에 관심이 있고, 또한 그들의 기독교에 관심이 많으며, 아시아에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 신앙이 존재하다고 믿었다.

이런 타르타르인과의 동맹의 가능성을 타진키 위해 이탈리아의 고승高僧 카르피니와 플랑드로인 루브룩이 몽고에 파견되었다. 전자는 1245년 출발, 외몽고의 카라코룸에 이르러 귀유칸을 만나 법황法皇의 친서를 전달한 후 답서를 가지고 돌아와 법황에게 전했는데, 이 친서는 몽고어, 라틴어, 페르시아어로 된 동서문화 교섭사상 귀중한 외교문서다. 후자는 몽고에 갔다 1254년 사이프러스섬에 귀환했다. 그는 지리, 역사, 언어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던 사람으로 믿어지며 그의 기행문은 중세 아시아북부의 귀중한 민속자료다.

마르코폴로의 선구자인 아버지 니콜로폴로와 숙부 마페오폴로, 이 두 사람은 폴로보다 앞서 중국땅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점에서, 또는 폴로의 동방여행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인물들이다.

베니스의 보석상이었던 그들은 1253년 가족들을 남겨둔 체 베니스를 떠나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그곳에서 6년 간 체재하면서 상업을 하다가 콘스탄티노플을 싸고도는 그리스인, 십자군, 베니스, 제노아 사이의 이해충돌로 그곳을 떠나 크리미아반도의 솔다이아를 거쳐, 타르타르인과 장사하기 위해 말을 타고 북동쪽의 초원지대를 거쳐, 징스칸의 손자 바르카의 수도 볼가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돈을 번 그들은 1262년 고향을 떠난지 8년만에 귀향하려 했으나, 그 무렵 바르카와 페르시아의 홀라쿠칸과 싸움으로 귀향을 중지하고 초원과 사막을 여행한 후 서터키스탄의 보하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3년 후, 쿠빌라이칸의 사절을 따라 1265년 경 쿠빌라이궁전에 도착하여 대칸을 알현謁見하였다. 그 쿠빌라이궁전이 당시 칸발리크(북경)에 있었는지 혹은 내몽고의 상투(상도上都)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하간 그곳에서 라틴어와 타르타르어에 능통했던 그들은 쿠빌라이칸으로부터 서방국가의 민정民政과 민속에 관해, 또한 로마법황과 기독교에 관한 질문을 받는 한편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기독교신자를 모친으로 모신 쿠빌라이칸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고 법황에게 친서를 전할 것과 공예工藝에 능통한 기독교학자 100명을 데리고 돌아올 것,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성묘聖墓에 가서 그곳의 등유燈油를 받아올 것 등의 명령을 받은 그들은 다시 아시아대륙 횡단여행길에 올라 황금의 할부割符를 가지고 안전한 여행을 계속, 아르메니아, 아크로, 네그로폰드를 거쳐 15년 간에 걸친 대여행 끝에 무사히 베니스에 귀향했다. 귀향하고본즉 니콜로의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태아胎兒였던 폴로는 15세의 소년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부재중 쓸쓸한 생활을 해오던 폴로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타르타르인의 이야기, 중국이야기가 무척 흥미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어린 폴로의 동방 여러 나라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킨 것은 자명하다.

중세 최고의 여행자 마르코폴로는 결코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다. 십자군의 원정,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경제적인 활동, 몽고제국의 성립이라는 시대적 산물이다. 마르코폴로(1254 - 1329)의 조상은 달마티아의 구가舊家출신이며, 11세기에 베니스에 이주해 온 사람들로 베니스의 부유한 상인 축에는 들어가지 못 했으나, 그래도 근동지방에 판매망을 가지고 있었던 보석상이었다. 폴로의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 한 걸로 되어있다.

귀향 후 2년만에 법황 선출의 지연遲延에 지치고, 그래서 몽고황제의 실망을 두려워한 니콜로와 마케오는 어린 마르코와 동반, 다시 카타이(중국 북부) 지방에 가기로 하여 1271년 베니스를 출발하였다. 그들은 지중해를 횡단한 후 동지중해의 상항商港인 아크로를 거쳐 성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몽고황제가 요청한 성유와 아크르법황 사절의 친서를 받아가지고 출발, 아르메니아지방, 아나톨리아지방을 거쳐 바그다드, 다브리즈, 케르만을 거쳐 페르시아의 호르무즈에 도착했고, 그 뒤 다시 여행을 계속하여 아프카니스탄, 카시미르를 거친 후, 3년만에 중국에 도착, 쿠빌라이황제를 찾는다. 쿠빌라이황제에게 17년 간 봉사한 후 천주를 떠나 1295년 그들이 그리던 고향 베니스에 돌아왔다.

귀향후 마르코는 동부 지중해의 무역권을 둘러싼 베니스와 제노아 사이의 해전에서 베니스의 참패로 라스페르바라는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동료 포로였던 피사 출신의 루스티첼로에게 마르코가 동방여행에서 견문한 바 진귀한 이야기들을 구술하여 등사謄寫케 했다. 1298년에 석방된 마르코는 1324년 아내와 세 딸을 남긴 체 세상을 떠났다.

이 견문록은 서편序篇 외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편에는 마르코의 부친형제의 동방여행, 그리고 마르코를 포함한 세 사람의 여행과정이 소개되어 있고

1편에는 소아르메니아로부터 상부上部에 있는 쿠빌라이황제의 궁정에 이르는 여행 중 방문한 지역들, 그밖에 여러 지방에 관한 이야기가,

2편에는 쿠빌라이황제와 그 수도, 정부, 중국에서의 여행이

3편에는 그가 직접 가보지는 못 했으나 풍문으로 들은 일본, 그밖의 동남아지역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고

4편에는 러시아, 터키지방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특히 아라랏산 정상에 남아있는 옛날 노아의 방주의 전설, 바쿠의 유전油田, 게르만과 호르무즈 사이에 횡행하는 무서운 도적이야기, 페르시아지방의 암살자인산의 노인老人에 관한 이야기, 고비사막의 악령惡靈의 이야기, 중국에서의 몽고 조정朝廷, 쿠빌라이황제, 몽고 역대 통치자의 전투 정책, 북 중국의 기이한 풍속, 그밖에 동남아 각지의 기습奇習, 인정人情, 지리 그리고 그가 지난간 곳의 동식물에 관한 이야기 등 실로 광범위한 견문담을 놀라운 관찰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낱 상인에 불과하였으나 착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마르코의 문장은 유려한 맛은 없고, 암시도 없는 순수한 글이나 그래도 이 견문록은 출판된지 600년 이상이 경과했음에도 모든 시대 사람들을 황홀경에 몰아넣는다.

마르코가 무스티첼로로 하여금 그의 여행기록을 쓰게 한 것은 당시 전 유럽의 배합어配合語였던 프랑스어다. 그 뒤 이탈리아의 방언方言은 물론이요,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현재 138이나 되는 사본寫本이 발견된다. 최초의 인쇄본은 구텐베르크의 성서 출간 후 21년째 되는 1477년 도이치어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그 뒤로도 마르코연구는 계속되어 1818년에 윌리엄 마르스덴이 번역하고, 1854년 토마스 라이트가 편찬한 영역본이 나왔으며, 가장 훌륭한 주석註釋이 되어있는 헨리 율 본1871년에 나왔으며, 그밖에 무울, 펠리오, 알도 리치, 맨스필드, 마누엘 콩로프 등의 학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이상하게도 마르코가 탄생하기 이전 수십 년 동안은 동방에 이르는 루트가 개방되었는데, 1324년 마르코가 죽은 다음에는 루트가 폐쇄되었다. 13세기 초 징키스칸의 즉위와 함께 다시 개방되었으나, 1368년 명 왕조의 성립과 함께 또 폐쇄되었다. 이리하여 동양은 1950년대 예수회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근거지를 마련하기까지 서구인에게는 미지의 세계와 암시의 세계였다.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은 동방을 가리고 있었던 베일을 처음으로 벗겼다. 14세기 초 북 아프리카의 모슬렘 교도인 이븐 바투타, 오도릭 등이 마르코가 밟은 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여행기는 마르코의 것 보다는 단조롭다. 14, 15세기의 유럽인들은 기독교적 중세관을 탈피 못 하고, 마르코의 견문록이 큰 영향이나 감동을 받자 못 하고, 다만 견문록에 나타난 단편적인 설화나 환상에 만족하였으며, 지도제작자나 지리학자들까지도 이 책을 로멘틱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375년 카탈로니아 지도地圖의 제작자들과 함께 활동했던 제도가製圖家들이 처음으로 마르코의 책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지도는 발견시대의 탐험가들, 특히 콜럼버스의 탐험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마르코는 서쪽으로 항해함으로써 인디아제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콜럼버스의 확신을 굳게했다. 더욱이 1474년에 피렌체의 지리학자인 토스카넬리가 마르코의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한 일본과 인디아제도를 포함한 아시아 동부의 지도를 콜럼버스에게 보내왔는데, 이것은 콜럼버스로 하여금 동방에 이르는 서진西進의 길을 개척하게끔 북돋아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콜럼버스 이외의 다른 지리상 발견시대의 탐험가들도 적지 않게 마르코의 견문록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근세 이래 동방무역권을 독점하게 된 신흥 유럽제국은 동방무역로 개척과 시장 확보상 절대 필요했으며, 한편 종교개혁 후 카톨릭은 새로운 전도傳道의 대상지가 필요했는데, 이런 여건하에서 단행된 지리상의 발견, 그 원동력이 된 것의 하나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030  여행기旅行記 아랍어: ابن بطوطة, 리흘라 Rihla (1355 - 1356), 이븐 바투타 Ibn Battutah

 

이븐 바투타(1304 - 1377)는 아프리카의 모로코 북부 텐제(탄지르)에서 바바리인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무하마드 이븐 압돌라, 바투타는 그의 가계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의 고향 텐제는 일찍이 이슬람교권에 들어있었으며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도였다. 탄지르대학에서 법학과 신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저서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독실한 이슬람교도로써 중동의 성지 메카 순례를 위한 여행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아프리카 한 구석에서 중동의 메카로의 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와 감정, 생각이 통하지 않는 잡다한 종족, 길 없는 밀림, , 산악을 오직 신앙심으로 극복하며 그의 여정과 각지의 풍습, 풍물을 착실히 그린 것이 이 여행기다.

1325년 메카 순례의 길에 오른 그는 탄지르를 출발, 사하라사막을 횡단하여 자비慈悲의 동맥인 나일강에 이른다. 열사熱沙의 사막을 건너고, 밀림을 헤치고, 대 폭포를 돌아 도착한 이 땅은 전란戰亂이 휩쓸고 있어 다시 하류로 되돌아간다. 하구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사라센문화가 화려한 도시 다마스커스에 도착하나 이문화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전에 그곳은 전염병 페스트의 만연으로 매일 2만 여 명의 생명이 죽어나가는 참상을 보았다. 바그다드로 우회迂廻, 꿈에 그리던 성지 메카에 이른다. 3년을 묵은 뒤 아라비아반도를 돌아 페르시아를 방문하고, 다시 메카로 돌아왔다가, 이집트와 시리아를 거쳐 소 아시아의 아나토리아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제노비아와 베네치아가 동 지중해의 패권을 위한 전쟁이 한창이었고, 콘스탄티노플과 이집트 등 강대국들은 세르스크왕조의 몰락 후 남은 약소국들을 약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시 흑해 연안의 시노페에 들른다. 여기서는 도독都督이 해적질을 한다. 잠수부를 동원하여 배에 구멍을 뚫어 전함戰艦을 침몰시기기도 했다.

다음에는 그리미아에 도착, 사루탄, 마호메트, 우즈벡 만의 국가들을 순회하는데, 이 민족은 유목민이어서 마차에 침실을 마련하여 그들을 따라다니며 견문한다. 술탄의 영접을 받은 그는 게르(조립식 천막)로 된 주택의 신기한 모습을 보고, 그들이 인디아와 중국에서 가져온 금제그릇과 보물을 보고 놀란다.

그는 북반구로 여행을 잡았으나 유일한 교통수단인 말로는 북반구의 빙원氷原을 갈 수가 없어 키프자크에 돌아와 술탄의 비- 황제 아도로니고스 3세의 딸을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에 보내줄 것을 탄원, 탄원이 수락되어 그는 황제의 딸과 500명의 기병騎兵, 300명의 노예, 2000두의 말, 300두의 소, 200두의 낙타, 400대의 차량을 거느리고 흑해 연안을 따라서 다뉴브강을 횡단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다. 그들이 도착하자 이 도시 사원寺院의 모든 종들이 일제히 울리며 그들을 환영한다. 이곳에서 약 한 달을 묵고 다시 키프차크에 귀환, 인디아방면으로 여정을 잡아 인더스강을 거쳐서 수도 델리에 이른다. 여기서 3년을 체류하는 동안 재판관에 임명된다. 지배자 술탄의 총애를 받은 것이다. 1279년에 마르코 폴로가 몽고에 가서 쿠빌라이칸의 총애를 받아 항주지사에 임명된 역사적인 일과 비슷하다.

원래 그는 법학, 신학의 박사학위를 가진 지식인이라고는 하나 이국異國에서 사형수를 다루는 법관이 되었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는 상아象牙에 단검短劍을 매단 코끼리 위에 사형수를 던지는 것이 사형방법이었다. 그는 재판관에서 승진, 중국황제에게 가는 사신으로 발탁되어 직물, 노예, 보물 등 조공朝貢을 가지고, 2,000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으나 도중에서 약탈을 당했다. 생명조차 간신히 건졌다. 돌아와 다시 수습해서 떠났으나 폭풍을 만나 칼커타항에서 침몰되었다. 그는 사신의 자리를 버리고 말다이보제도로 가서 결혼했다. 그러나 여행의 갈망은 그를 묶어두지 못 했다. 그는 다시 남 지나해에 도착했다. 1346, 중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견문하는 도중 장례식 때 10인의 기병이 생매장(순장殉葬)당하는 것도 본다. 대 칸의 죽음으로 이 지역에서 정치적 분쟁이 일자 그는 다시 남양의 스마트라, 옴스크, 중동의 메카를 거쳐 1350- 25년만에 고향 탄지르로 돌아왔다. 1351년에 스페인의 그라나다 등지를 돌아보고 1352년에는 사하라사막을 넘어 니제르 등 흑인왕국의 순방에 나섰다. 그가 니제르강에 이르렀을 때 이 강이 누비아와 이집트를 거쳐 흐르는 줄 알았다. 이 오해가 풀리기에는 5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그의 아프리카여행은 중동, 아시아 등지의 여행에 비하면 약 1년의 짧은 여행이었고, 기술도 소상치 못 하다. 아프리카인이어서 아프리카 사정에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견문보다 소홀히 다루었다고 추측한다.

그는 1377년 모로코에서 사망했다. 사망한 년대도 장소도 분명치 않지만 그가 사망할 때까지 여행을 계속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여행기에 기록한 지명과 연대도 석연치 않은 점이 허다하지만, 14세기의 이슬람세계를 폭넓게 관찰하여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기록한 것은 이 책의 특징이며 또한 공헌이다. 1275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소개된 이후 이븐 바투타처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광범한 여행을 감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1492년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는 콜럼버스도 당시 장거리여행으로 유명하지만 이븐 바투타를 능가하지는 못 한다. 그는 20세 이후 거의 전 생애를 바쳐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중심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3대륙에 걸친 이슬람교권 전역에 그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아시아에 있어 인디아, 스마트라, 중국까지 순방한 것은 역사적으로 특기할 사실이다. 그의 여정은 약 5Km나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세계 최초의 위대한 여행가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이슬람교권을 지배하였던 사라센인은 원래 건조한 아라비아를 기반으로 유목생활을 하는 소 부족국가로 분열되었으나, 마호메트의 출현으로 이슬람교를 토대로 정치활동을 일치시킴으로써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에 걸친 대 국가를 건설하여 전 아라비아를 통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 대 통일에 따른 국민의 상업 항해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진 주위의 문화 즉 인디아, 중국, 메소포타미아문화, 그리고 헬레니즘문화, 그리스도교의 헤브라이문화 비잔틴문화, 로마문화 등의 융화에는 사라센문화가 동서 양문화의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

중국으로부터는 제지법製紙法, 인쇄기술, 화약, 조선造船, 나침판 등을 유럽으로 전파시키는 한편, 유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롯 천문학, 지리학, 의학,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을 수입, 전파시켰다. 아라비아숫자와 악보樂譜가 전해졌다.

이와같이 사라센문화는 학문이나 예술에 있어서도 뛰어났으며, 그것은 동서의 문화가 융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 문화의 근간은 역시 그리스의 학문이었다. 아라비아인들은 헬레니즘문화를 존중하여 중세의 암흑시대를 거친 후에 온 문예부흥의 발흥에 계기를 주었다.

또 사라센인들은 고래로 정치적, 종교적 실력을 기초로 동서의 상업무역에 활동이 뛰어나 아시아의 인디아, 중국에서 유럽의 지중해에 이르는 해륙海陸의 상무역을 독점했다.

3대륙에 걸친 이슬람교권내에 확립된 사라센문화의 시대적인 배경을 지고 대 여행가로 태어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지구상의 신 발견에 따르는 동서 해륙의 상 무역과 양 세계의 문화 교류의 촉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또한 후세에 그 당시의 생생한 기록을 남겨준 것이다.

이븐 바투타가 세계적인 대 여행을 시도한 1325년의 이듬 해인 1326년은, 오스만 터키가 발흥하여 동서교통의 요지要地를 장악하여 상 무역을 방해하자 더욱 그 욕망을 자극시켰고, 따라서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 연안으로 해상로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해외 진출의 기운은 당시 나침판의 발명, 사용에도 있으나 그보다는 동방의 매력이 더욱 큰 촉진제였다.

이러한 활동의 원동력이 된 것은 당시 원조元朝에 사신으로 다녀온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직접 유럽인들로 하여금 미지와 동경의 세계, 동방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불질러 마침내 지구상 발견의 직접적인 동기를 낳게 한 것이다.

1486년에는 인디아항해가 개척되었고, 1492년의 콜럼버스에 의한 신 대륙의 발견, 1519년에서 1522년에 걸친 마젤란의 세계일주 탐험 등 이스파니아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이 해외로 뻗은 발길이 바로 그 결과다.

이 여행기는 아라비아문학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은 한 동안 잊혀져 있다가 1818년 코제가르텐(J. G. L. Kosegarten)의 도이치어역을 시작으로, 1840년 포르트칼 신부神父 안토니오 모우라(Joee de Santo Antonio Moura)의 포르투칼어역을 거쳐 1858 - 1859년에는 프랑스 아시아협회 후원으로 데프레 메리(Defre Mery)와 상키네티(B. R. Sanquineti) 두 사람이 번역한 이븐 바투타의 항해(Voyaged, Ibn Batoutah)’라는 서명으로 4권 전역이 출간되었다.

그후에 영국인 기브(H. A. R. Gibb)이븐 바투타의 아시아 아프리카 여행(Ibn Battutah, Travels in Asia and Africa, 1325 - 1354, 21939, 31342초역抄譯인데, 따로 전역全譯을 하크루이트 소사이어티, Hakluit Society) 2집에 끼어서 출간되기 시작 ,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1권은 1958년에 세상에 나왔다. 우르드어 전역판은 1898년 후세인에 의해 라흘에서 간행되었다.

인디아와 중국에 관한 부분은 한스 무지크(Hans von Mugik)가 이븐 바투타의 인디아와 중국 여행기(Die Reise des Arabers Ibn Batuta durch Indien und China)란 이름을 붙여 1911년에, 인디아부분은 마디 후세인에 의해이븐 바투타의 여행(The Rehla of Ibn Battutah)란 이름으로 1953년에 번역되었다.

 

031  세계사世界史 Universal History (1375 - 1378), 이븐 할둔 Ibn Khaldun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 저술을 해설할 때 그 시대적배경, 저자의 생애를 먼저 소개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판에 박은 형식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븐 할둔(이하 할둔)세계사의 경우 그 시대적배경과 저자의 생애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련을 가진다.

할둔이 살았던 시기는 14세기의 30년대로부터 15세기의 처음 10년대에 걸친 시기(1332 - 1406). 서기 7세기에 아라비아반도의 일각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는 불과 100년이 못 가서 중앙 아시아로부터 서남 아시아, 아프리카 북안北岸, 그리고 이베리아반도에 걸친 거대한 이슬람교권을 건설하였다. 3대륙에 걸친 거대한 이슬람제국은 동은 바그다드를, 서는 이베리아반도(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하는 두 교주국敎主國으로 분열되었지만은, 그 문화는 8세기로부터 10세기에 걸쳐 절정기를 맞이하였으며, 당시 로마제국의 몰락과 게르만 이동으로 초래된 암흑시대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던 중세 유럽세계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중세 유럽인이 사라센이라고 부른 이슬람세계와 그 문화는 11세기 이후에도 크게 쇠퇴하거나 빛을 잃지는 않았지만 절정기를 지난 정체기의 징조를 보이게 되고, 할둔이 산 14세기에는 분열과 혼란과 쇠퇴의 징조가 거대한 이슬람세계의 전역에 걸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정치적 분열은 이 넓은 지역을 갈래갈래 찢어노았고, 동으로부터는 몽고족의 침입, 아프리카에서는 베르베르족과 같은 미개한 유목민의 침입이 잦았다. 그래도 동쪽에서는 새로이 오스만투르크가 흥기하고 카이로를 중심으로 한 이집트는 그래도 과거의 영광과 경제적 번영을 아직 누리고 있었으나, 그 이서以西의 이슬람세계는 정치적 분열로 소 군주국이 난립하여 갈등을 일삼고, 사막으로부터 유목민의 침입은 정치적 혼란을 한층 더 격화시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때 서부 이슬람세계의 중심이었던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점차 팽창하는 기독교도국가들의 압박으로 그 판도版圖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할둔은 1332년 북부 아프리카의 튜니스에서 태어나 1406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짧지 않은 일생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 바, 전반기인 정치적 활동기, 후반기인 세계사 저술기이다.

할둔의 집안은 아라비아반도의 이름있는 부족 출신이라 전하며, 7, 8세기의 이베리아반도 정복시에 종군하여 스페인으로 건너온 후 10세기에는 세빌리아의 내전에서 이름을 날려 시정에도 참여한 명문이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중엽에는 점차로 팽창하는 기독교세력의 압박으로 세빌리아가 압박을 받게되자 일가는 북부 아프리카로 이동하여 튜니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튜니스의 군주君主로부터 환영을 받고 영지도 수령하였는데 고관을 지내기도 했다.

할둔은 부유한 명문의 자제가 받는 교육을 받았다. 코란을 중심으로 종교교육, 철학, 논리학, 수학, 자연철학 등이었으며, 전기와 사서도 읽고 궁정의 공문서 작성법이나 행정기술도 배웠다.

그는 일찍이 20대 초에 정치활동에 참여하였고, 이로부터 그의 파란 많은 생애가 시작된다. 당시 북 아프리카의 정정政情은 착잡했다. 전제적專制的인 소 군주들이 분립하여 갈등을 일삼아 지배자의 교체는 다반사요, 궁정은 모략과 음모의 소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할둔은 그의 정치적 야심을 펴고 올바른 정치와 개혁을 해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정변에 휘말려 2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하고 스페인의 그라나다로 갔다.

스페인의 이슬람세계는 북부 아프리카에 비하면 훨씬 안정되고 높은 문화 수준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스페인의 이슬람군주의 총애를 받은 할둔은 비로소 자기의 뜻을 펼 곳을 찾았다. 그는 군주의 특사로써 카스틸왕국의 페드로 1세와 세빌리아에서 회견하여 평화 체결에 성공하였고, 돌아와서는 군주의 개인교사이며 정치고문顧問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보호자요 학자인 수상首相의 시기심으로 스페인을 떠나 다시 북부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정치활동에 분주하였으나 어디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 했다. 40세가 넘은 할둔은 20년에 걸친 정치활동이 아무런 성과를 이루지 못한 반성을 하며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자기의 실패를 현실정치와 사회의 역사에 어두웠던 때문이라 생각하고, 1375년 오랑 근처의 이븐 살라마의 별장에 은거하며 철저히 성찰하였다. 그리하여 구상한 것이세계사였으며, 그는 그 일부를 이곳에서 집필하고 4년 후에 사료와 문헌을 찾아 튜니스로 돌아왔다. 이 때 할둔의 머리에는 오직 세계사 저술이었다. 그러나 그가 튜니스 지배자의 두터운 후원을 받게되자 동료학자와 궁정인宮庭人들의 모함이 심해졌다. 그래서 튜니스를 떠나 메카로 가던 도중 이집트의 카이로에 기착한 것이 인연이 되어 죽을 때(1382)까지 머물렀다.

당시 이집트는 이슬람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한 나라였고, 군주도 현명하였다. 할둔은 두터운 보호를 받아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대법관직을 수행하면서 세계사 저술을 계속하였다. 할둔의 생활이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 뜻밖의 참변慘變이 일어났다. 카이로에 안주할 생각으로 튜니스의 가족을 부르기로 하였는 바, 가족을 실은 배가 난파당하여 처자와 전 재산을 잃었다. 충격과 슬픔이 컸다. 그는 다시 메카 순례(1387)의 길을 떠났다. 할둔의 만년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은 징키스칸의 후손이라고 자칭한 티무르(Timur 첨목아)와의 회견이다. 중앙 아시아로부터 인디아와 서남 아시아를 석권한 티무르가 다마스커스를 위협하였을 때, 이집트의 군주를 따라나섰던 할둔이 포로捕虜가 되었다. 이미 명성을 듣고 있었던 티무르는 그로부터 북부 아프리카의 정세를 듣기를 원했으며, 40여 일을 보낸 후 무사히 카이로(1400)에 돌아왔다. 그는 다시 대법관에 임명되고 그 지위를 누린 체 1406년 카이로에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일생을 마쳤다.

할둔의 세계사는 내용으로 보아 이론적인 서론(Prolegomena)’과 구체적인 역사 서술인 세계사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분량은 후자가 훨씬 많고, 또 그 내용도 이슬람세계의 역사를 발흥기로부터 14세기까지 서술한 것으로 매우 귀중하다. 그러나 현대의 입장에서, 그리고 학문적인 면에서 볼 때, 이 보다 더 가치있고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은 세계사의 서론부분이다.

할둔은 정치활동에 실패한 원인을 모색하던 끝에 당시 이슬람세계 그것도 서부의 역사를 서술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를 서술하고자 하였을 때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당시의 착잡한 사건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는 문제에 부딛친 것이다. 아무래도 구체적인 역사서술에 앞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론적인 기초작업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는 구체적인 당대사의 서술을 일단 보류하고,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성찰과 세계사 서술을 가능케하는 이론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구체적인 역사 서술도 당대사當代史로부터 이슬람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세계사로 그 구상이 확대되었다. 할둔에 의하면 참된 역사서술은 단순한 표면적인 역사적사건의 서술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한 사건의 내면에까지 파고들어가서 그 성격과 의미를 캐내지 않으면 안 된다. 종전의 역사서술은 단순히 사건만을 기술하므로써 외형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적이고 표면적인 사건의 배후를 살피고, 그 밑바닥에 놓여있는 보다 큰 역사의 흐름을 다시 말하여내면적역사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사건에 관한 보고나 문서의 내용을 엄밀히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잇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인간과 사회 그리고 문화에 대한 깊은 체계적이고 이론적이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파악은 역사서술 본래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역사서술, 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내적인 역사서술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써 인간과 사회에 관한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 이리하여 할둔은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역사연구의 방법론과 더불어문화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문화과학은 인간과 사회의 본질 및 그 발전과 운동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려는 학문으로써, 그 자체를 독립된 학문으로 볼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역사서술의 보조학문으로써, 역사적사건을 보다 깊이 내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참된 역사연구와 역사서술위 기초요, 전제이다.

이와같이 참된 역사서술을 시도한 끝에 문화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영역을 설정하게 된 할둔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발전에 관한 폭넓은,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고찰을서론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역사와 문화는 인간의 본능적인 여러 욕망과 욕구,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짖는 지성과 이성, 물질적인 조건과 지리적 요인 등 여러 요인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발생하고 성장한다. 인류문화는 가장 유치한 단계, 먹고 살아야겠다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과 욕망의 충족으로부터 시작되어 원시문화의 단계를 거쳐 점차로 성장하여 문명단계로까지 발전한다. 원시문화는 주로 농경과 목축에 의존하고, 문명단계는 제국의 건설과 도시문명의 성립을 뜻한다. 이러한 문화발전에 있어 여러 요인이 작용하지마는 특히 사회적 연대의식 내지 집단정신과 종교의 힘이 크고 중요하다. 그러나 문화는 한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문명단계에 이르러 제국이 건설되고 도시문명이 성립하면 멀지 않아 성장과 발전은 그 한계에 도달하게 되며, 제국과 도시의 건설에 이바지한 단체정신이 해이해지고 문화발전의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었던 정신적 도덕적 정력도 도시문명의 사치와 향락속에서 마비된다. 이리하여 성장의 한계점에 도달한 문화는 해체와 쇠퇴의 과정으로 접어들게 되며, 결국은 몰락하게 된다. 인간과 사회의 노력 그리고 우연은 성장과 몰락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을지 몰라도 몰락 그 자체를 방지할 수는 없다. 이리하여 몰락과정에 있는 정착적이고 제국적인 도시문명에 강한 단체정신과 원시적인 정력의 소유자이며 소수자인 유목민의 무리가 침입하고, 그들은 기성문명을 파괴하는데 그치거나 스스로의 새로운 문명을 새로 건설하기도 한다.

할둔의 문화과학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지만은 이것만으로 14세기의 이슬람시대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놓고 생각할 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학문적업적이었는가를 짐작할 단서는 될 것이다. 토인비는 할둔을 투키디데스와 마키아베리에 비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아무도 창조한 일이 없는 가장 위대한 역사철학을 구상하고 이론화하였다(역사의 연구, 3322).’

부기附記, 할둔의 서론세계사전부를 아라비아어 이외의 언어로서 보기는 힘들지만은 서론은 전역全譯, 초역抄譯이 몇 개 있다. 가장 최근의 것(1958년 간)으로 완전한 것은 3권으로 된 Franz Roseniha 의 영역본이 있다. 가장 좋은 연구서로는 Muhsin Mahdy Ibn Khalduns Phylosophy of History (Phoenix Book 1964)가 있으며, 이 글도 주로 이 책에 의존하였다.

 

032  로마제국쇠망사帝國衰亡史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 - 1788)

       기본 Edward Gibbon

 

로마제국쇠망사(이하 쇠망사)의 제 1권이 간행된 것은1776년 초였으며, 같은 해에 그의 친구인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왔으니 특기할만한 연대다. 처음 500부로 한정하였다가 출판사의 용단으로 1,000부를 찍었던 로마제국쇠망사의 초판이 며칠 새에 매진되었고, 재판, 3판도 수요에 응하지 못 할 정도였다. 당시로써는 공전의 대 성공이다. 그래서 저자 기본은 바이른의 말마따나하루아침에 유명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셈이었다. 마지막의 제 6권은 1788년 그의 51회 생일을 기념하여 출판되었다. 1768년에 그가 저술을 계획한 뒤 무려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스미스는 축사를 보내서그것은 당신을 유럽의 현 문단의 정상에 올려놓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뒤 2세기가 흘렀으나 쇠망사의 고전으로써의 지위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하다. 르네상스 이후 허다한 역사서술이 나왔지만, 오늘날도 꾸준히 간행되어 일반에게 읽히는 사서로 독보적인 존재다. 오래토록 사서로써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19세기 이후 역사학이 크게 발전하였으므로, 쇠망사는 수정되어야 할 곳이 적지 않다. 특히 동 로마제국에 관한 대목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이 자신을 가졌던 정확성은 사서로써의 가치를 지탱하고 있다. 문학적가치다. 기본은 문체에 고심하고, 또 성공했다. 쇠망사가 글자 그대로 조심누골彫心摟骨의 작품인 것은 그 자신의 고백을 들어도 알 수 있다.‘한 작가의 문체란 그 정신의 반영이겠으나, 언어의 선택과 구사는 연마의 결실이다. 나는 여러 번 실험을 해본 끝에 단조로운 연대기와 미문美文조의 열변熱辯 사이의 중간中間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1장을 세 번, 2장과 제 3장을 두 번 고치고나서 나는 그 성과에 만족했다. 그 뒤로는 더 탄탄하게 쉽게 써나갈 수 있었으나, 15장과 제 16장은 계속 세 번이나 고쳐 써서 한 권짜리 분량을 지금의 크기까지 줄인 것이다.’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본은 1737년 런던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초등교육을 제대로 받자 못하여, 혼자서 독서하는 버릇이 생겼다. 12세 경부터 독서의 범위가 넓어지고, 역사분야에 눈 뜨기 시작했다. 건강이 좋아지자 1752년 옥스퍼드에 입학하였으나, 대학교육에 실망하였다. 신학으로 마음을 정한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에 화를 낸,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부친은 스위스 로잔느로 보내버렸다. 14개월의 대학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양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의 개종은 늘 그랬듯이 혼자서 조용히 이룬 지적인 것이었으나, 당시의 영국에서는 카톨릭교도가 공권을 박탈당하고 있었으므로, 세속적 활동가였던 부친이 단호한 조치를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로잔느에서는 칼빈목사에게 의탁되었다. 목사의 탁월한 지도 아래 프랑스어를 배우고, 프랑스의 사상가들을 읽는 한편 라틴문학을 마스터하였다. 2년 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으나, 이것은 그에 의하면종교적탐구를 중지한 것이었다고 하니, 당대의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결과다. 당시 근처에 살던 볼테르의 파티에 참석도 했다. 로잔느에서 또 하나의 사건은 후년의 네커 부인인 퀴르소 양과 사랑하게 된 일이다. 부친의 반대로 결혼하지는 못 했으나 그 뒤에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리고 기본은 일생 독신으로 살았다.

1758년에 귀국하여 1761년에는 문학연구론이라는 처녀작을 프랑스어로 출판하였다. 그 동안 2년 간 민병대에 복무하였으며, 그 경험은 후년 하원의원으로써의 경력과 아울러 역사가로써의 이해력을 쌓는데 이바지했다. 1763년에는 2년 예정으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파리에서는 디드로, 달랑베르, 엘베슈스 등 쟁쟁한 계몽사상가들과 만났다. 1764년에 로마로 갔다. 이 때 고대도시의 폐허속에서 그 쇠퇴의 역사를 더듬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이것이 1768년 경에는 쇠망사의 구상으로 성정하였다. 1765년 초에 귀국, 1770년 부친의 사망으로 독립성가하게 된 기본은 본격적으로 저술에 힘을 기우렸다. 1776년에는 하원에 들어갔으나, 벙어리의원으로 시종始終하였다. 1778년 쇠망사 제 1권 간행, 1783년에는 일체의 속무俗務를 떨치고 런던을 떠나서 로잔느로 옮겨 쇠망사의 완성에 전력을 기우렸다. 그리고 마침내 1787627일 탈고하였다. 그 뒤 런던으로 돌아와서 17941월에 작고作故하였다. 이 가간에 자서전을 집필했다.

계몽사상은 반역사적이라고 흔히 말하지만은 실상 18세기 후반에는 많은 계몽사상가들이 역사를 썼다. 단지 그들은 역사에 있어서 사실에 충실한 탐구가 아니라 가치의 증명을 바란 점이 다를 뿐이다. 그들은 이성의 이름으로 역사에서 교훈을 꺼내거나 또는 과거를 단죄하였다. 볼테르에 의하면 역사란, 범죄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기본도 역사를인류의 범죄와 우매와 불행의 기록이라고 보는 점에서 같다. 다만 그의 근면에서 우러나온 박식과 정확을 기하는 탐구가 그의 역사를 교훈과 단죄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단죄 대신에정중하고 온건한 아이러니를 쓴 것이다. 계몽사상가들의 단죄의 초점은 중세다. 기본은 이를 고대문명의 쇠망의 시대로 파악한 것이다. 고대 중세 근세라는 시대 구분은 17세기 말엽에 성립된 것이지만, 그 근원은 르네상스에 인문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이상인 고대와 문예가 부흥한 당대 사이를 가로막는 야만스런 중간기를 설정한 데 있었다. 18세기의 계몽사상가들도 근본적으로 같은 견해다. 아니 중세에 대한 부정은 그 보다 더 강조된 것이다. 르네상스인의 자연의 기치에 대하여 이성의 기치를 든 18세기인에게 중세는 무지, 미신, 폭정의 암흑시대로써 부정되게 마련이었다.‘봉건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중세를야만과 종교의 승리라고 보는 점에 있어서 기본도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선다.

이것은 왕정과 교권의 압제에 대하여 투쟁하고 있었던 계몽주의사상가들로써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역사에 있어서 그들은 현실의 투쟁을 과거에 투영하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볼테르의 슬로건이었던 ‘Ecrasez Iinfame'를 역사에 옮기면 암흑시대인 중세의 부정이 나온다. 이와 아울러 진보를 믿는 그들은 또한 역사에 있어서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볼테르에 의하면, 인류사에는 4대 행복기가 있었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시저시대의 로마, 메디치시대의 피렌체와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이다.

거기서 중세는 로마와 르네상스 사이의 암흑시대로써 부정되는 한편, 루이 14세시대가 고대보다도 우월하다고 함으로써 진보가 증명되어있다. 기본도 진보에 기대를 건다. ‘인류가 완성을 향하여 어떤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을른지는 단정하기 어려울진데, 자연의 특징이 변하지 않는 한, 다시 야만으로 타락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쇠망사를 고대와 근대를 잇는 다리라고 지적한 사람은 네커 부인이었다고 한다. 다리의 고대쪽 끝에는 5현제시대의 로마가 있다. 3장 말미末尾의 다음 서술은 쇠망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키는 점에서 발단으로써 매우 적절한 구절이다.

만일 세계사상 인류의 상태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한 시기를 말한다면 서슴치 않고 우리는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뒤부터 코모두스가 등극하기 전까지의 경과한 시기를 들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기를 로마제국이 그려져서 출발점이 마련된 뒤에 코모두스 때부터 쇠퇴, 몰락의 역사가 서술된다.

쇠망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서 로마제국의 몰락까지 약 300년 간이요, 후반부는 동 로마제국 멸망까지의 약 100년 간이다. 이 후반부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중세사에서 다루는 대목이 동 로마제국의 역사를 기축基軸으로 하여 이에 서구와 이슬람의 역사를 곁들이고, 십자군을 거쳐 터키세력의 서점西漸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까지가 서술되어 있다.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뒤에도 기본은 하나로 보고, 수도 로마는 그의 관심을 떠나지 않는다. 기본이 쇠망사의 저술을 계획한 것은 1768년의 일이었으나, 이미 4년 전에 처음으로 로마에 갔을 때 감격속에 움텄다. 그의 회고는

‘25년이 지난 지금, 내가 처음으로 영원의 도시에 갔을 때, 내 마음을 뒤흔든 세찬 감정을 잊을 수도 없고 또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잠 못 이룬 하룻밤을 지내고나서 나는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포룸의 폐허를 걸었다. 로물르스가 선 자리, 키케로가 연설한 자리, 또 시저가 쓰러진 자리, 이 모든 기념할 자리가 다 내 눈 앞에 있었다. 감격의 며칠이 즐거움 속에 지나간 뒤에 나는 냉정하고 자세한 관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은 로마제국이 아니라영원의 도시로마 쇠망의 역사였다.

그 도시의 쇠망을 서술하려는 생각이 처음으로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17641115일 로마에서 내가 카피톨의 유적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을 때였다. 곁에서는 맨발의 탁발승이 쥬피터신전에서 저녁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쓰러진 이교異敎의 신전에서 기도하는 승리한 기독교의 수도사, 이것은 고대 로마의 페허 속에서 영광된 과거에 대한 로코코적 감상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는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 뒤 도시 로마가 아니라 제국 로마의 쇠망사를 쓰기로 작정하였지만, 그때의 감상이 살아있어서, 서술 가운데서 이따금 영원의 도시로 돌아가 그 쇠망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쇠망사를 하나의 위대한 추도사追悼辭라고 한 이가 있으나, 그것은 도시 로마에 대한 추도사가 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 따라서 제국의 멸망 -을 서술하고나서, 기본은 에필로그에서 중세와 16세기의 로마를 그렸다. 16세기는 이미 르네상스이다.‘새 로마의 몰락은 재생再生의 로마에 계승되는 것이다. 그의 눈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도 떠있다. 사멸死滅뿐만 아니라 탄생에 대해서도 떠있었던 것이다.

 

03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an (1860)

      부르크하르트 Jacob (Christopher) Burckhardt

 

부르크하르트가 학문활동을 시작한 19세기 전년에는 소위 비정치적 역사로써의 문화사의 서술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많은 시작試作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문화사가 주장하는 바는 왕조와 왕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과정을 더듬는다는 식의 낡은 의미의 역사를 지양하고, 역사연구의 대상과 관심을 문화영역 전반에까지 넓혀놓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역사는 민족과 제국, 전쟁과 정치당파 등의 주제 대신에 사회와 문화의 전 분야를 대상으로 삼게되었으며, 제왕과 귀족과 승려를 주역으로 하는 역사가 아니라, 시민과 농민 즉 대중을 주인공으로 하는 역사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부르크하르트의 주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르네상스의 근대적개념을 확립해준 명저名著로써 그리고 역사서술의 신 양식으로써의 문화사의 지위와 유효성을 확립해준 고전적인 사적史籍으로 유명하다. 그러기에 19세기의 대 사가 액튼 경(Lord Acton)은 이 책을 가리켜서 사적史籍으로써 유래없는 가장 정교精巧한 문화사라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역사서술의 필수요건들을 구비한 정상적인 사서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성격이 너무나도 이례적異例的이고,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취급하고 있는 대상이 문화라는 의미에서 문화사일 뿐, 어떠한 학파나 양식을 대표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 성질의 저작인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의 사가로써의 이단적인 성격은 그의 저작에 비대중적인 난해성과 귀족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있으며, 초심자들을 당혹케하고 그릇 인도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저작에 나타난 특이한 성격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그 구성방법에 있어서 역사서술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역사에 있어서 시간1차적인 질서이며, 사실이 시간과 더불어 발전 혹은 변질한다는 전제를 떼놓고서는 역사는 성립될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변화에 대한 감각, 시간에 대한 감각을 결여한 자는 우선 역사가로써의 자격부터 없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가 역사속에서 추출하려고 했던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것, 일정불변한 것, 유형적類型的인 것이다. 그가 포착한 르네상스문화는 형성도상途上이나 변질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국민의 근대적정신이라고 하는 완성된 본질의 자기표현이다. 대상이 완결되어있는 이상 시간 또한 고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부르크하르트의 역사서술의 과제는 역사사실의 시간적질서, 역사의 종적인 파악이 아니라 역사시기의 횡적인 단면을 그려낸다는 것이었다. 그의 역사에는 시간의 정지靜止와 마비痲痺라는 실로 아이러니칼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며, 역사의 단절적 파악이라는 결과가 불가피하게 뒤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의 또 하나의 특이성은 철학의 거부라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생애를 통한 정신적인 벗이었던 니체에게 자기는 철학적사고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역사철학이라는 것조차도 인연이 멀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 이유는 역사는 사물을 동위同位에 놓기 때문에 비철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면, 철학은 사물을 종속從屬시키기 때문에 비역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의 이러한 견해는 상식적으로는 철학의 거부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거부라고 해석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의 선택규준과 무수한 인과관계의 통합규준의 결여를 뜻하기 때문이며, 가치의 혼란과 무정부상태가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는 반복되는 것, 불변한 것, 전형적典型的인 것을 추구한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목적은 논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일관되게 추구된 것이 아니고, 이론적인 설득을 위한 노력조차도 일체 생략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구성에 있어서의 시간적질서에 초연超然하고, 무수한 사실의 인과관계를 통합하여 질서지어줄 철학을 거부하고 난 다음에 부르크하르트에게 남을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그의 두 가지의 뛰어난 천부天賦의 자질資質, 무진장한 사실에 관한 지식과 이를 자유자재로 구사驅使할 수 있는 예술적 직관력 및 표현력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가史家이기 전에 비범한 예술가고, 그의 저작은 역사서술이라기 보다는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소위 과학으로써의 역사에 대립하는예술로써의 역사라는 고루固陋하고 낡아빠진 역사서술의 일양식一樣式이 그에게 있어서처럼 생생하고도 아름다운 광채를 발한 일은 없다. 그런 까닭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문화는 부르크하르트와 같은 천제적인 개성이 아니고서는 모방될 수 없는 특수한 역사서술이며, 본질상 이단異端의 역사다.

부르크하르트가 목적한 것은 르네상스문화의 근원을 이루는 전형적인 시대정신을 추출하여 묘사한다는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주제가 되는 것은 이탈리아의 근대성과 국민정신, 고전의 부활과 인간 및 세계의 발견, 새로운 개성과 인간활동의 예술적 완성 등등이었다. 그러나 그의 수법은 이러한 주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한다거나, 사실과 사건의 인과적인 연결을 통하여 설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르네상스사회의 무수한 단면斷面을 회화적繪畵的인 수법으로 묘사하여 사회와 문화의 시대적특징을 다각도로 제시하는 특이한 방법을 쓰고 있다. 이러한 활도活圖속에는 르네상스시대의 무수한 전형적 개인들이 등장하며 엘리트의 찬란한 꽃밭을 이루고 있다. 중세 천 년의 철학사에서 풀려나서,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다재다능多才多能한 개인들이 다채로운 시대배경 속에서 약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 시대의 심리와 생태를 부르크하르트와 같이 날카롭고 섬세하게 그려내는데 성공한 예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이었고, 이러한 성공은 오로지 그의 천재적인 자질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의 저작에 반영되고 있는 그 밖의 특질은 오히려 그의 생애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이하 그의 약력 소개에 따라 언급한다.

부르크하르트는 1818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출생하였다. 초년기에는 주로 종교가인 부친 밑에서 신학에 치중한 교양을 쌓았으나 베를린대학에 유학(1839 - 1843)한 이후로는 오로지 역사와 예술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당시 도이치는 근대사학의 일대 흥륭기興隆期로써 베를린대학에서 그는 랑케와 드로이젠을 위시한 세계적인 대가들의 강의와 직접적인 교도敎導를 받을 수 있었다. 부르크하르트가 특히 랑케에 깊이 사사하여 역사가로써 기술적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의 중요한 계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승의 방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에는 그는 강한 개성의 소유자다. 즉 랑케가 주로 정치사에 집중하여 실증적인 역량을 발휘하였음에 반하여 부르크하르는 탐미주의자眈美主義者로써 예술에 깊이 몰입하여 예술을 통한 역사의 탐구와 표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884년에 그는 바젤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여 역사와 미술사를 담당하였으며, 바젤대학의 교수직은 그후 1893년에 이르기까지 약 50년 간 지속하였다. 1886년에 랑케가 사거死去하자 베를린대학에서는 일류 사가로써 명성을 쌓아올린 부르크하르트를 후임자로 초청하였으나 그는 일축하였다. 그가 베를린대학의 명예스러운 초청을 거절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도이치에 대한 반감, 비스마르크의 도이치에 대한 강한 증오로 설명된다. 부르크하르트는 전형적인 스위스의 시민이었으며, 자유와 중립의 스위스적인 기풍을 견지한 인물이다. 멀리는 에라스무스와 칼빈으로부터 19세기의 니체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자유인과 지적인 이단자들의 피난처였던 스위스시민으로써 항상 개인의 자유와 이상에 민감하였고, 군국주의적 권력과 독재적 국가체제에 대한 강한 증오와 반발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자기생애의 40 - 50대에 도이치와 이탈리아의 국민적 통일을 목도하였으나, 이러한 과정을 떠받쳐온 군국주의적 침략과 힘의 정치를 타기唾棄하였던 것이다. 비스미르크의 프러시아에서 느낀 그의 불길한 예감은, 개인과 자유의 옹호자로써의 부르크하르트의 인간성을 말해줌과 아울러, 20세기의 문제성을 민감하게 예감한 사가로써의 뛰어난 감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소위 실증과 과학을 제1 사명으로 앞세우는 정통사가들이 도이치의 군국주의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국제정치의 화려한 무대에 도취되어 있을 때, 부르크하르트의 예술적인 감촉은 유럽의 대세와 장래 운명을 예리하게 포촉脯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랑케에게서 정치를 배우지 않고, 비정치적 역사로써의 문화의 역사를 택했다는 것도 이상과 같은 스위스적인 생리의 소치다.

철학을 거부한 부르크하르트가 니체의 생애의 벗이었다는 사실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국가주의, 애국주의, 군국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사조에서 홀로 떨어져 고립한 부르크하르트는 고독한 인간이었고, 쇼펜하우어를 열독한 비관주의자이기도 하다. 그의 국가주의Nationalism에 대한 증오, 개인주의와 반 국가주의, 이상주의와 귀족주의는 니체와 상통한다. 역사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예술적표현이 철학에 대한 니체의 예술적표현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가 출간된 후로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부르크하르트에게는 빛나는 학문적 영광과 더불어 무수한 학술적인 도전이 집중되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원래 그가 목적했던 바는 르네상스의 제 문제에 대한 이론적인 규명을 하자는 것도 아니었고, 사실상 당시의 일반견해에 비하여 전연 참신한 신 학설을 내세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가 제시한 르네상스시대의 시대상을 통하여, 근대적인 르네상스관이라는 것이 확립되고 정설화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는 정통학설에 바쳐지는 영광과 수난은 불가피한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적인 르네상스 관에 대한 활발한 학설적 도전이 일어나게 된 것은 대체로 1920 - 1930년대 이후이며, 오늘날에 이르도록 활기를 잃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이러한 학설적인 분규는, 현대 서양사학계의 가장 중요하고 흥미있는 문제분야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정통적인 견해에 가해진 도전 중에서도 가장 큰 협박으로 나타난 것은, 19세기 이후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나온 중세 사가들의 새로운 연구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이 설정된, 정통적 르네상스관의 최대의 허점을 찌른 것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암흑의 중세와 광명의 근세를 대조시킨 단절적인 르네상스관을 부정하면서, 역사발전과 비단절성과 연속성을 내세웠다. 즉 중세란 결코 암흑과 혼란의 야만시대가 아니며, 고전의 부활은 소위 르네상스시대가 아니라 중세, 특히 12세기의 큰 공적임을 지적하였다. 또한 근세문화의 핵심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 및 기술의 발달이라는 면에 있어서도, 르네상스시대는 침체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르네상스란 중세적 발전의 연장 내지 그 종국으로 봐야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부르크하르트가 거의 간과했던 사회경제사의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15세기는 경제적 번영기가 아니라 오히려 쇠퇴기였음을 밝힌 주목할만한 학설이 나타났고, 르네상스의 비종교적 경향과 세속화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인문주의자들의 종교적 성격을 재 강조하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고전의 가치란 이설에 의하여 쉽사리 뒤흔들리는 법이 아니며 부르크하르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도 수많은 세계적 권위자들이 이 거인을 학설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치될만한 어떤 새로운 종합적인 견해도 아직은 나타나지 않는다.

 

034 금엽지金葉枝 The Golden Bough (1911 - 1915), 프레이저 Sir James George Frazer

 

프레이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Sir James George Frazer(1854 - 1941)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아직껏 어린 학문분야로 남아있고, 문화인류학 본 고장을 통해서 보다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론이나 현대 영미문예비평에 끼친 간접적인 영향 등을 통해서 가까스로 선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1854년 스코틀랜드에 글레스고우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글레스고우대학과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칼레지에서 펠로우로 있으면서 그 분야의 거작을 발표하였다.

법률을 공부하라는 부친의 명을 어기고 고전문학을 공부해서 일가견을 갖게된 그는 동양학자 W. R. 스미스의 영향을 받아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적靈的 통일성(Psychicunity)이 있다는 이론적 가설假說 아래 토템 Totem (신성하게 여기는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 각 부족·씨족·사회집단의 상징물)이나 타부(, 1)의 연구에 비교방법을 도입하여 원시인의 관습이나 전통 주술呪術, 원시신앙, 신화神話, 속언俗言, 전설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 연구하였다.

1907- 1932년 사이에는 리버플대학에서 사회인류학을 강의하면서 왕성하게 저작활동을 하였다.

영국에서 인류학의 선구자로 흔히 타일러(Sir Edward Burnett Tylor)를 드는 것이 보통인데 그의 고대인류의 연구’‘원시문화가 나온 것이 각각 1865년과 1871년이고 보면 1890년대의 금엽지는 획기적이다.

주술과 종교에 관한 연구라는 부제가 달린 금엽지는 18902권으로 간행되었다가 1911- 1915년 사이에 12권으로 증보 출판되었고, 일반독자들의 요구에 응답하여 1922년에 초략단권본抄略單券本을 내었고, 1936년에는 금엽지후서편(Aftermath : Supplement to the Golden Bough)를 내었다.

이 밖에도 토테미즘’ ‘토테미즘과 이족異族결혼’ ‘구약성서속의 민간설화’ ‘인간 불사성不死性’ ‘불의 기원基源에 관한 신화등 수많은 거작을 내었으나, 프레이저 하면 금엽지를 연상할 정도로 이 저작은 대표작이다.

색인索引까지 12권으로 되어있는 금엽지는 전 7부로 나뉘어져있는데

1, 주술呪術예술과 제왕帝王의 진화(The Magic Art and the Evolution of King) 2

2, 타부와 영혼의 위험(Taboo and Pperils of the Soul)

3, 죽어가는 신(The Dying God)

4, 지역신地域神(Adnis, Attis, Osiris) 2

5, 곡신穀神(Sprits of the Corn and of the Wild) 2

6, 공희供犧(The Seapegoat)

7, 아름다운 별의 신(Balder the Beutiful the Five Festivals of Europe , and the Doctrine of the External Soul) 2

북구北歐에서 아프리카, 인디아 등에 이르는 모든 지역의 민간설화나 습속習俗을 광범위하게 다루면서 프레이저가 포괄적으로 또 집중적으로 추구한 것은 프레이저 이전에도 학자들이 산발적으로 주문했던 주술(Magic)의 정체다.

그는 저서에서 주술의 종류나 원리를 분류 설명하면서 주술과 과학과 종교의 상관관계를 역사적인 입장에서 밝히려고 하였다. 프레이저에 의하면 올바르게 사용하면 과학이 낳을 것임에 틀림없는 연상聯想원리를 잘못 사용하는데서 나온 사이비과학이 곧 주술이며, 이러한 실패에서 종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주술의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생활의 코오스를 통제하고 방향을 정해주는, 인간 보다 탁월한 존재를 믿게 되고 하소연을 하게 되며 여기에서 종교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강제력을 발휘하는 주술呪術, 인간이 복종하는 것으로써의 종교를 정의하여 양자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프레이저의 견해를 따르면, 주술로부터 종교로의 자연스러운 전환과 발전은 쉽게 예견할 수 있다. 프레이저의 주술과 종교의 연구는 미개未開민족의 종교를 보다 진보한 종교의 원형이라고 생각하고, 미개민족의 종교를 연구함으로써 종교의 기원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믿게 되는 심리적과정을 이해하려는, 이른바 진화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타일러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술과 종교라는 문제 추구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금엽지가 거둔 커다란 성과는 그 예증例證이 엄청나게 풍부하다는 점에 있다.

프레이저의 근본견해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그 광범위하고 범세계적인 사실의 집대성에는 누구나 경탄해마지 않는다. 그의 주술과 종교와 과학의 상관관계 분석이라는 주안점 이외에도 그는 수많은 독자적 해석으로 신화, 전설, 속신俗信을 들고 있는데, 가령 곡물穀物의 심볼로써의 죽음과 소생蘇生을 이집트의 오시리스신의 근본적인 속성으로 본다든지, 공희供犧의 원리는 신비적인 주력呪力을 획득한다든가 이전하는데 있다고 하여, 이른바 신인공식神人共食 의례관儀禮觀을 동물의 공희에서 곡물의 그것까지 확대시켜 새로운 해석을 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프레이저가 거의 독자적으로 발견해서 유명해진 대표적인 것으로 국왕(추장酋長) 살해의 관념을 들 수 있다. 프레이저는 라틴족 초기의 왕들이 외족外族으로써 신의 구실을 하다가 특수한 의식에 즈음하여 엄숙히 살해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해마다 신을 죽이는 것이 샘족의 종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도 지적한다. 그는 국왕(혹은 추장)이 본래 주술사로써, 주술에서 종교로 발전해감에 따라 성직자적 기능을 하게 되며, 또한 신령의 일시적 혹은 영속적인 권화權化에 의해 인신人神으로써 종교적 태도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리고 이 신인 제왕사제帝王司祭가 의례적으로 살해되는 관념적배경을 이상과 같은 예를 들어서 밝히고 있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부친살해(Parricide)의 관념이 프레이저에 힘입고 있음은 토템과 타부에 직접 토로吐露되어 있다.

또 한 가지 이니이드(Aeneid)의 얘기를 표제로 삼은 금엽지의 특색은 그것이 유려한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어 고도의 문학성을 누린다는 점이다. 방대한 학술서인 이 저작이 비전문적인 일반독자에게도 흥미있는 읽을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열거된 인간만태萬態의 디테일에 대한 흥미와 함께 그 탁월한 문장력과 문학성 때문이다.

단권單券의 초록판抄錄版이 간행된 것은 그 사정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 점 파브르의 곤충기와 견줄 수 있겠다. 학술서의 글이 대개 정확하나 무미건조無味乾燥한 경우가 보통인데 이 점 프레이저는 프로이트와 함께 퍽 이채異彩로운 존재라고 할 것이다.

현대 영미 문예비평의 방법론에 특색을 다루고있는 무장武裝한 비전Vision의 저자 하이만은 현대문예비평을 문학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 문학 이외 수법과 지식체계를 유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현대비평가들이 방법상으로 크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 다윈, 마르크스, 프레이저, 프로이트 등 네 사람의 위대한 사상가의 업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인간관을 크게 변혁시킨 바 있는 사상가들, 즉 다윈이나,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와 똑같은 위치에 프레이저를 과연 올려놓을 수가 있느냐? 그리고 그를 위대한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금엽지에서 그가 풍부한 자료를 인용하며 웅변으로 표명한 많은 견해가 도전과 비판을 받고 있으며, 또 이러한 도전이나 비판에 대해서 무력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비판과 공격은 또한 다방면에서 나오고 있다. 예컨대 상징형식의 철학자 에른스트 캇시러는, 주술예술과 우리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르는 날카로운 차이는 발견할 수 없으며 주술 수단에 있어서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 하더라도, 그 목적에 있어서는 과학적이며, 궁극에서는 믿음으로 가게 된다는 프레이저의 가장 줏대되는 주술관을 공박하면서, 현대 인류학은 이러한 견해를 이미 버린 바 있다고 말하고 있다. 캇시러 인간론 중 신화와 종교이어서 그의 주술의 시대에서 신앙의 시대로 이르는 조화론적 견해를 부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본 고장인 인류학 쪽의 루스 베네딕트는 금엽지에서 보인 견해나 이와 유사한 인종학의 연구가 문화적특징을 분석적으로 논구論究하고 있는 반면, 문화의 집성集成의 전국면全局面은 외면하고 있다고 통박痛駁하고 있다. 가령 죽음의 의식을 다루는데 있어, 서로 다른 문화권 내에서 아무렇게나 선택된 예증例證을 열거하기 때문에 거기서 유도誘導, 귀결歸結되는 의론議論은 결국 피지족의 오른쪽 눈, 유럽인의 왼쪽 눈, 타이티 섬사람들의 다리들로 뜯어맞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루스 베네딕트문화의 형태3). 그런가 하면 비교적 많은 영향을 끼친 말리노프스키 등의 기능주의파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높다.

본 고장인 인류학쪽에서의 비판은, 프레이저가 현대의 과학, 사회학, 심리학 등이 거둔 여러 성과를 민첩하게 방법론적으로 활용할 수 없었던 시기에 선구자였다는 것을 착각할 때 충분히 납득이 간다.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도로써의 충분한 자격을 갖지 못 한 고전학자로써의 프레이저의 출발이, 전 시대를 통하여 변치 않는 영적靈的 통일성을 쉽사리 믿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의 한계성으로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L. H. 모오간의 고대사회가 간행된 것이 1877년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 사상가의 공헌이라고 하는 것은 비판에 대해서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론적 완벽성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롭고 도전적인 관점을 제시하여 보다 크고 새로운 의문을 야기하며, 그 이전의 사람들이 간과했던 사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데도 있는 것이다.

프레이저 이전에도 타일러와 같은 선인先人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뒬께임, 레비부률, 말리노프스키 등의 미개인에 대한 관심은 그에게 힘입은 바가 많고, 많은 인류학자를 원시의 대륙이나 남해의 섬으로 찾아가게 한 것은 그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이에 따라 서구인의 정신을 부지불식不知拂拭 중에 지배하여 온 신인동형동성설神人同形同性說

(Anthropomorphism)의 파괴에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그릇이 큰 사상가의 저작은 그 이외 분야의 사상가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는 법인데, 프로이트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프레이저가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학의 주제와 형태의 기반이 되어있는 원시 주술, 신화, 의식儀式을 연구하여 그 관련하에 문학작품을 밝히려는 가령 콘스탄스 라우르크(Contace Rourke)류의 비평도 비록 간접적이나 그가 끼친 영향과 관련되어 있다.

그의 방법론적 결함 때문에 설혹 그의 견해가 퇴색한다 하더라도 인간 만물상萬物相의 거대한 집대성인 금엽지는 이색적인 문학으로 오래 동안 읽혀질 것이다

 

. <1> taboo는 폴리네시아어 터부tabu에서 나온 말로금기(禁忌)의 뜻으로, 원래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신성시 또는 부정시하여 접촉하거나 언급하기를 금하는 풍습임. 사회적으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상생활에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특정 행동이나 말을 지칭함, 남 앞에서 언급해서는 안 되는 화제를 taboo subject라고 하며, 사용하기 거북스런 말은 taboo words라고 함

 

035  역사歷史의 연구 A Study of History (1934 - 1954),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

 

아놀드 토인비가 그의 필생의 대작인 역사의 연구의 첫 선을 보인 해는 1934년이다. 이 해 최초의 3권을 발표하고, 1939년에 다음 3권을 발표했다. 그 뒤 오랫동안 중단되었다가 1959년 마지막 4권을 출간함으로써 전 10, 6,000장에 이르는 거작을 완결하였다. 역사의 연구는 발표에만 20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가 이 저작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 1930년이라는 것, 역사의 연구를 완결한 뒤 토인비 사학史學에 대한 비판을 검토하고, 또 그 사학을 보충할 의도로써 따로 쓴 제 12재고편再考編(11권은 지도地圖와 지명사전地名辭典)이 나온 것이 1961년이라는 것을 아울러 생각한다면, 역사의 연구에는 실로 40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동안 인류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으나, 이에 따라 그의 역사연구도 많이 달라졌다. 그가 역사의 연구에 착수하는데 있어서는 제 1차대전으로 노출된 서구문명의 위기의식이 크게 작용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있어서는 슈팽글러의 서구세계의 몰락이 가장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보통 사가와는 달리 시야를 넓혀 전 세계의 문명을 대상으로 하여 문명의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일반적법칙을 탐구하는데 그의 주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처음 3권을 낸 이후에 세계정세의 악화, 이에 따르는 새로운 위기의식은 제 2차대전의 전야前夜에 나온 3권에 더욱 깊이 반영되어, 단순히 문명법칙의 모색단계를 넘어서 인류문명의 장래에 대한 우려를 현실적과제로 논의하는 태도로 나타났다. 이러한 그의 새로운 연구자세는 학구學究로써 확정된 그의 명성을 전후 세계적 각광을 받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왜냐하면 방대한 사실의 종합과 해석에 그치지 않고, 그 토대 위에서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려는 진지한 역사적고찰은, 미증유未曾有의 전화戰禍를 입은 뒤 아직도 허탈한 감정에 사로잡혀있는, 전후의 세계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후의 지속적인 혼미한 정세는 그전보다도 더욱 현대를 위기로 충만시켰다. 양대 진영의 대립, 냉전冷戰으로부터 열전熱戰으로의 발전, 극한 무기의 발달 등은 토인비를 더욱 더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결시켜,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미래를 제시하고 구현하는 것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그의 연구의 총력을 기울이게 하였다. 이 결과로 나온 것이 마지막 4권이다. 그러므로 전후에 나온 역사의 연구에서 부조浮彫된 토인비는 그 전에 나온 저작과의 사이에 13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으나, 역사가로써 보다는 신비론자, 신학자, 예언자, 시인詩人으로써 다양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토인비는 1889년 영국 런던의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영국의 산업혁명이라는 경제사의 고전적 명저를 발표한 경제학자이며, 사회개혁가이기도 한 동명의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숙부叔父.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도 가장 유서깊은 벨리올학사에서 라틴어 고전을 공부하고 졸업 후 그리스에 유학하여 1년 간 연구하고, 귀국 후에는 모교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이때부터 서양 고대사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가 특히 고전학 중에서도 문학이라든가 철학을 전공하지 않고, 역사를 전공하게 된 동기는, 빅토리아왕조의 견실한 풍조에서는 보기드문 여성 인텔리였던 그의 모친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부터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대사의 연구는 그의 사관에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그리스 로마역사라는 위대한 교향곡을 들은뒤로는 국가중심의 편협한 역사가 이국풍異國風의 음악같이 들리게 되고, 나아가서 역사연구의 가지적可知的 단위單位자의적으로 도려낸 자그마한 토막 즉 고대의 도시국가, 근대 동구의 국민국가가 아니라 여러 사회의 통합체로써의 문명이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19년 제 1차대전이 일어날 당시 모교에서 그리스의 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사를 강의하고 있던 그는 투키디데스가 역사를 집필한 동기인 위기의식에 공감하게 되고, 그리하여 투키디데스와 그는 철학적으로 동시대에 살고있다는 직관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대전이 일어난 뒤 그는 학구의 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외무성 정보국에 들어가 중동문제를 담당하였고, 이 때문에 전후 파리강화회의에는 중동 관계 전문위원으로 임명되어 영국대표단을 도왔다. 회의에서 돌아온 뒤 런던대학의 킹스학사 교수로 취임하여 고전학강좌를 담당하였다. 대전을 계기로 국제적 시야가 넓어진 그는 1925년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 들어가 연구부장, 교수를 역임하면서 지금도 그 성가가 높은 국제문제의 국제문제 전문지인 국제문제대관을 편집하였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외무성에 들어가 1943년 조사부장이 되고, 전후에는 파리 국제평화회의의 영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그 뒤 전쟁 중 중단된 역사연구의 마지막부분을 집필하면서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 각처에 강연행각에 나서기도 하고, 때에 따라 중요한 시사문제에 발언하여 그의 고견에 귀를 기울이게 하였다.

그러면 그는 역사연구에서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관조觀照하고 있는가?

그는 전기한 바와 같이 역사연구의 단위로써 문명을 인정하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기지旣知의 문명을 21개로 구분하여 이들 문명의 발생, 성장, 파탄破綻, 붕괴崩壞의 과정을 검토한다.

그는 문명의 발생을 해명하는데 있어 종래의 결정적요인이라 생각되어온 인종설人種說, 환경설을 배격하고, ‘도전挑戰과 응전應戰(Challenge and Response)의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이 이론은 비단 문명의 발생뿐 아니라 성장, 파탄, 붕괴의 각 과정을 설명하는데 사용하는 마법魔法의 열쇠와 같은 것으로써의 연구단위로서의 문명과 철학적 동시대성이 역사의 연구라는 구조물의 기반이라고 한다면, ‘도전과 응전은 이 구조물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을 적용하여 그는 문명이 순경順境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 = 도전을 극복 = 응전하는 데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환경설의 변종變種과 같은 것이나, 다만 이 역경이라는 것을 물질적 환경에서만 파악하지 않고, 문명이 발생하는 외부지대로부터의 압력, 또 내부적 압력도 포함하여 고찰한 점에 특색이 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문명은 물질적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이 증대하는데 따라 성장하지만 물질적환경이 중요성을 잃게되면 승화과정(etherialization)이 일어나서 인간의 행동을 외부적으로부터 내부적으로 옮겨진다. 이 시기에는 그 문명이 당면한 불가피한 문제가 도전의 형식을 취하고, 이에 대하여 창조적 소수세력이 응전의 태세를 갖춘다. 즉 이들은 해결책을 발견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그들을 모방케하여 창조력을 지속시킨다.

그러나 문명의 성장을 지도해온 창조적 소수세력의 창조력이 감퇴되고, 이에 따라 대중의 모방력이 위축되고, 이때까지 유지되어왔던 사회적 통일에도 균열龜裂이 생길 때, 문명은 바로 파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응전이 도전에 대하여 충분한 대응력을 발휘하지 못 하는 상태가 파탄의 단계에서는 일어나는 것이다.

이 파탄이 지속되면 그 문명사회는 내부적으로 분열하여 붕괴과정으로 들어간다. 즉 성장기의 창조적 소수세력은 지배적 소수세력으로 타락하고, 모방력을 상실한 대중은 내부 플로레타리아트로 화하고, 그 문명의 변두리의 새로운 세력은 외부 플로레타리아트가 되어 문명을 붕괴시키는 가공할 요소가 된다. 이러한 상태에 들어가면 인간의 심령에도 분열이 생긴다. 즉 사회의 무질서상태는 무기력을 만들어 현실도피의 의식이 발생하며 이 의식은 복고復古정신 또는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표현되어, 철학 또는 종교를 통하여 구제를 찾게 된다. 이러한 증세가 나타나는 시기를 토인비는 고난의 시기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 고난이라는 도전에 대하여 어떠한 응전이 벌어지는가?

우선 지배적 소수세력은 그들에게만 봉사하는 철학 또는 이념을 강조하여 보편국가를 세우려고 하고, 내부 플로레타리아트는 고등종교를 창시創始하여 보편교회를 세우려고 하고, 외부 풀로레타리아트는 무력에 호소하여 영웅시대를 만들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좌절挫折과 흥기興起(Rout and Rally)의 반복되는 발작發作을 몇 차례 거치는 동안에 드디어 문명은 붕괴해버린다.

그러면 문명은 영원히 붕괴해버리는 것인가?

실은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문명의 탄생이 준비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문명의 모체가 되는 것이 내부 플로레타리아트의 고등종교이며 보편교회. 왜냐하면 지배적 소수세력의 보편국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한낱 수단에 자니지 않는 것이며, 외부 플로레타리아트가 연출하는 영웅시대는 야만의 대명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다같이 새로운 문명의 모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같은 문명의 과정은 결국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문제의 도전을 스스로 제기하고, 이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토인비는 역사의 의미를 해명하려고 하고 있다. 즉 역사란 수많은 문명의 발생으로부터 붕괴에 이르는 과정을 그저 기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또 이러한 문명의 제 과정은 순환적 기계적과정도 아니라고 단정한 토인비는,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에 어떤 대 사업이 진행되고 있을지 모른다고 하고, 그 대 사업이란 바로 이 세계라는 협소한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신의 계획>이 아닌가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이 세계는 신의 나라가 실현되는 장소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역사의 연구의 대 결론이며 총결산이다.

오늘날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와 이에서 나타나는 그의 사관에는 대체로 두 개의 대립적 견해가 있다.

하나는 그를 비단 20세기의 대 사가로만 보지 않고, 인류의 미래까지를 계시한 대 사상가로 보는 견해다. 바로 이 점에 그의 이름이 전문적 사가들에 의해서보다는 일반 식자에 의해서 더 많이 오르내리고 또한 메스컴에 의하여서도 널리 퍼지게 된 요인이라 하겠다.

한편 토인비의 말을 빌리면 신의 법칙을 버리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과학도로써의 전문적 사가는 역사의 연구에 대하여 극히 비판적이다. 이들 비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인비가 그리스 로마문명의 역사를 하나의 모델케이스로 하여 세계의 모든 문명의 과정을 해명하는데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토인비의 문명의 역할에 대한 이론 즉 문명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교회를 탄생하게 하는 서곡序曲으로써 존재한다는 이론에는 커다란 반발이 있다. 이러한 비판이 있기는 하나 그의 역사연구에서 계발되는 점이 많다는 것도 시인한다. ‘도전과 응전의 이론은 문명의 흥망을 검토하는 매력적인 마법의 열쇠이며,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 및 종교의 역할을 새로 인식시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 아닌가?

역사지식의 넓이와 폭에 있어 또 취급대상의 규모에서 감히 다른 사가의 추종을 불허하는 토인비의 방대한 역사의 연구의 통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머벨(D. C. Somervell)의 약 1,000장으로 요약한 축소판이 읽기에는 간편하나, 원저에 비하면 너무 무미건조無味乾燥하다. 오히려 토인비 자신의 단편적 논문, 강의를 수록한 문명의 시련試鍊(Civilzation on Trial, 1948)역사가의 종교관(An Historians Approach to Religion, 1956)을 권하고싶다. 또 토인비사학의 비판서로는 몬테이그편의 토인비와 역사(Montague cd. Toynbee and History, 1956)가 정평이 있다.

 

<사회社會>

 

036  군주론君主論 Il principe (1513),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오직 현실을 냉철한 눈으로 통찰, 분석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서술, 설명한 탓으로 오해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 마키아벨리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혹독한 혐오와 지탄을 받은 인물은 아마 인류역사상 드물 것이다. 인류가 정치생활을 영위한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시대, 어떠한 사회를 막론하고 그 양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치가 결코 투쟁의 성격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의례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따르기 마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가 정치의 이면에 숨은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그로써 경국치세도經國治世道(Statecraft)를 내세우고자 1523년 군주론과 그 부수附隨논문(Discourses)을 세상에 내놓은 후, 그의 이름은 흔히 권력무대에서 권모술수를 농하는 권력인의 대명사가 되다싶이 하였다. 물론 그의 이론이 나타난 시대적, 사회적 배경, 그리고 그의 이론이 지니는 참된 가치를 이해하는 일부 식자識者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심한 경우 사람들은 흔히 그를 마치 권모술수, 약육강식弱肉强食 등 파렴치한 정치적 악덕惡德의 권화權化, 또는 그러한 악덕의 씨를 뿌린 장본인張本人인 양 치부致賻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이 일반에게 주는 인상은 이렇듯 좋은 것이 못 되지만 그의 저술, 특히 군주론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현실 정치나 학문으로써의 정치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만은 부인할 도리가 없다. 프러시아의 프레드리히대왕도 초년시절에 군주론을 일독한 후 그것을 통박痛駁하는 논문을 썼으며, 도이치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하였지만, 후년이 이르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그의 치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솔직히 자인한 것은 그 사소한 일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과연 그처럼 파렴치한 악한이었던가?

만약 그가 남달리 날카로운 정치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외에는 극히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면, 그가 그와 같은 파문波紋을 일으킬 이론을 세상에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당시 이탈리아의 시대적, 사회적배경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저술이 어떠한 가치와 내용을 가졌기에 그처럼 많은 논란을 자아냈는가 하는 문제는 그 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직면한 정치 현실에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이상, 우리가 마땅히 재고해볼만한 일이다.

마키아벨리는 146953일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이름있는 귀족가문의 출신이며, 부친은 변호사로 명성이 높았다. 그의 유년기와 소년시절에 관해서 는 별로 알려진 바 없으나 그의 가정환경으로 미루어보건데, 그리고 후년에 병약한 아들이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가 쌓은 지식으로 남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들에게 지적하고, 특히 문학과 음악에 정진할 것을 당부한 귀절로 보아서, 유복한 환경에서 면학에 힘쓰고 고상한 취미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귀족 자녀의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그가 15세인 1494, 이틸리아반도에서 가장 강한 도시국가인 플로렌스는 일대 변혁을 겪었다. 오랫동안 법왕세력을 배경으로 플로렌스를 통치하고 있었던 메디치가가 권력으로부터 축출당하였으며, 새로운 공화정이 실시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신생 플로렌스 공화국의 관리가 되었으며, 4년 후에는 제 2 대심원大審院 서기장書記長으로 임명되어 1512년까지 14년 간 봉직하였다. 그 동안 그는 때때로 플로렌스 공화국의 특사로 로마법왕, 각국 원수, 재상 등 수많은 권력인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플로렌스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모智謀의 인사로써 정치인들에게 충언을 하는, 브레인 트러스트의 영향력을 갖고있을지언정 결코 군왕론에서 개진한 경국치세도로써의 권모술수를 휘둘러서 주목을 끈 적은 없었으며, 사실상 그런 지위에 있지도 않았다. 남달리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고 권력자의 행태와 성쇠를 냉정하게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뿐이다. 그 소산所産이 군주론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군주론을 세상에 내놓은 것도 그가 몸을 담고있었던 플로렌스에서 발생한 중대한 정치적 격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일신상에 미친 큰 충격을 계기로 한 것이다.

1512년 플로렌스의 공화정은 무너지고 메디치가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며, 이 정변으로 마키아벨리는 하루아침에 관직에서 쫓겨나 시골로 은퇴하였다. 그 후 그는 메디치가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였으며, 법왕청이 마련한 보석금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가 반역음모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후세의 마키라벨리 연구가들에 의하여 입증되었다. 성격상 그런 음모에 가담할만한 야망가는 아니며, 적극성도 없고, 겁 많은 사람이다. 메디치가에서 냉혹한 대접을 받고도 옛 관직에 돌아가를 염원하는 위인이다. 그가 메디치가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하여 충성의 표시로 군주론을 썼단 설도, 비록 전적으로 수긍할 수는 없을지라도 일리는 있는지 모른다. 메디치가가 집권한 다음 해 1513년 군주론을 메디치가의 유력자 로렌조에게 바쳤다. 메디치기는 그의 군주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수 년 후 그의 문재文才를 인정하여 플로렌스사의 집필을 위촉하였을 따름이었다. 1527년 향년 58세로 병사하기까지의 생활은 전원에서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저작에 골몰하는 생활이었다. 병사하기 수 주일 전에 메디치가가 또다시 실각하여 권력을 잃는 정변이 있었다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시대가 겪은 정치적 기복起伏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일생, 그리고 그가 군주론을 공표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간단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참 모습이 그에 관한 일반적 인상과는 판이하다는 것, 그리고 그의 군주론이 그의 직접적인 행동의 결과라기보다도 한낱 그의 지적 관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뜻하지 않은 정변으로 관직을 잃고 전원생활로 돌아가자 지난 날에 만났던 권력자들의 인품, 행태 그리고 그들이 처한 정치상황을 되새겨보고, 그들이 왜 권력을 얻고, 왜 잃었는가를 한층 높은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한 결과가 군주론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군주론을 학술적소산으로 보아야 한다.

정치와 윤리와 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마키아벨리의 시대, 즉 르네상스시대는 이탈리아의 정치질서가 일대 전환기에 처해있던 때였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체제에 있어서는 개인의 윤리와 국가의 윤리는 일치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정치와 윤리 사이의 대립은 없었다. 개인은 국가생활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완성된다는 견해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보편화되어 있었다. 로마제국시대에 이러한 정치, 윤리관이 무너졌으나 기독교가 유럽의 새로운 보편적인 종교로 등장함에 따라서 그러한 정치와 윤리 사이의 간격은 곧 해소되었으며, 기독교의 교리는 군주와 신민을 아울러 지배하는 절대적인 가치원칙으로 군림함으로써 정치와 윤리는 또 다시 통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운동 이후 르네상스시대에 접어들자 기독교회의 영향력이 크게 동요되었으며, 이에 따라 로마법왕은 세속권력의 대두를 크게 두려워하고, 그것을 견제하는데 부심腐心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대 이탈리아가 플로렌스, 베니스를 위시한 5개 도시국가로 분열, 대립하고 있었으며, 거상군주巨商君主 봉건군주封建郡主들이 권력 쟁탈전을 벌이는 활동무대로 화하고 있었던 것은, 이웃에 강대한 세속권력이 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법왕의 분열책동에 기인한다. 플로렌스에서 메디치가가 그처럼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한 것도 메디치가의 집권이 법왕권의 안정에 필요하다고 법왕이 믿고 배후에서 조종, 후원한 까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 동양과의 무역에서 황금항로였으며, 거의 유럽의 패권을 좌우하였던 지중해로의 진출을 꾀하였던 프랑스, 스페인, 도이치, 스위스 등 제국의 군주의 개입과 간섭으로 이탈리아의 분열과 혼란은 더욱 조장되어, 거의 극에 달했다. 이들 외세의 이해가 얽혀 이탈리아의 군소群小 도시국가는 정변이 그칠 날이 없었으며, 그들 사이의 관계도 반목反目, 전쟁, 이간離間술책으로 변화무상無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불안정한 혼란속에서 10여 년 간 관리, 외교관으로써 국가의 실무를 처리하였으며, 여러 군주들의 위선僞善, 음모陰謀 그리고 술수를 직접 목도目睹하고 경험했다. 정치적 안정을 집권자가 추구하여야 할 주된 가치라는 전제, 가정하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게 된 동기는, 그가 처한 이탈리아의 정치정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치와 개인의 윤리를 엄격히 구별하고, 윤리원칙에 의하여 방해되지 않는 안정된 세속권, 국가권력 확립 밑에서, 개인은 비로소 도덕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은 진위眞僞에 충분히 이해한다.

그가 군주론을 메디치가의 로렌조에게 바친 것도 한낱 엽관獵官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이탈리아의 정치적안정, 통일에 대한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상인군주 아닌 메디치가의 집권이 프로렌스, 나아가서는 이탈리아 전체의 정치적안정의 관건關鍵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그들을 위해서 경국치세의 술수를 진언陳言한다는 의도에서 군주론을 바쳤던 것이다. 후세에 이탈리아인들이 그를 이탈리아 통일의 선각자先覺者로 우러러보고 그를 위해 명비銘碑를 깎아 세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시종일관始終一貫하여 흐르고 있는 주 테마는 군주권이란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권력을 획득하였으며, 또한 어떻게 유지하였는가? 권력을 잃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의 구명究明이다. 권력을 획득, 유지할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가치의 측도測度로 하여 이탈리아와 다른 유럽 제국諸國의 군주들의 행태, 공과를 관찰, 평가하고 그것으로부터 통치자의 치세도治世道에 관하여 귀납법적歸納法的 induction (, 1 귀납법과 연역법演繹法)인 여러 가지 일반원칙을 추출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관찰, 분석, 종합의 과정에서 그는 바로 자연과학자가 자연현상을 관찰하듯이 일체의 윤리적, 도덕적 선입견의 개입을 배제하는 태도를 견지堅持하였던 것이다. 그가 비도덕적인 냉혈한冷血漢으로 보인 것은 냉혹한 정치현실을 철저한 과학적태도로 관찰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요컨대 마키아벨리는 통치자를 위해서 치국책의 교본敎本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학이 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는 초석礎石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공적功績은 인류역사가 계속하는 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 <1> 귀납법은, 논리적인 추리 방법에는 연역법 이외에, 특수한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혹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의 추론推論이 있다. 이것이 귀납법이다. 귀납법은 발견적, 창조적인 요소가 있으며, 사회과학이나 실험적 자연과학에서는 그 기본적인 연구태도의 하나이다. 귀납법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추리의 방법을 귀납법적 추리라고 함, 대비하여 연역법演繹法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원리에 따라 혹은 진리 보존적 추리규칙에 따라 주어진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법임

 

037  유토피아 Utopia (1556), 모어 Sanctus Thomas Morus

 

1556년에 나온 유토피아는 2권으로 된 라틴어 저서著書. 첫 권은 서론序論이고, 둘째 권은 유토피아를 여러 분야로 나누어서 묘사한 각론各論과 같은 것이다. 그로부터 약 40년 전, 30여 세의 모어는 이미 당대의 법관으로써 이름이 나고 젊은 왕 헨리 8세와 울지 추기경樞機卿의 총애寵愛를 받기 시작했고, 왕명으로 외교임무를 띠고 안트워프에 가 있었다. 그 때 에라스무스의 친구 피이티 자일즈와 알게 되었고, 유토피아를 구상한 것도 바로 이 때의 일로 알려져있다. 유토피아는 모어가 피이티와 함께, 안트워프에서 레프 히슬로데이라는 가공架空의 여행자로부터 들은 유토피아라는 도화경桃花境 이야기로 엮어졌다.

토마스 모어는 1478년 법관의 아들로 런던에서 출생하여, 옥스포드의 켄터베리 홀(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당시 옥스포드를 휩쓴 신 학문 즉 인본주의에 어린 모어가 물들까 두려워했고, 또 모어에게 가업을 계승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옥스포드에서 런던의 링컨즈 인Inn으로 옮기게 했다. 법관으로써의 모어는 성공적이었고, 좋은 관운을 타고, 45세에 울지 추기경의 천거薦擧로 국회의장에 올랐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523년에는, 울지의 후임으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격萬人之上格인 헨리왕의 제 1 재상宰相이 되었다. 모어는 평신도로써 이 자리에 오른 최초로써 영예를 누렸지만, 그와같은 영달은 결국 모어의 비극의 근원이기도 하다. 모어는 평신도로 결혼을 했고, 상처하여 재혼을 했지만 이혼문제에 대한 교회의 법을 지키는데는 털끝만큼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고, 런던으로 자리를 옮겨 공부하는 동안에도 옥스퍼드에서 익힌 인본주의의 매력에 연연戀戀하여, 고전 그리스어를 공부하여 신 학문에 일가一家를 이룰 정도의 휴머니스트였지만, 모어는 끝내 교황의 권위를 믿고, 교회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독실한 신자로써 그의 일생을 살았다. 20대에는 한 4년 동안 카루트교단의 계율을 거울삼아 거의 완전한 금욕생활을 자신에게 강요한 일이 있고, 한 때는 성직자가 될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모어는 헨리왕의 이혼과 앤 볼레인과의 재혼에 찬성할 수 없었고, 헨리왕의 의도와 고집을 알아차렸을 때, 홀연히 재상직을 내던졌다. 모어가 재상이 되었을 때, 이렇다 할 가산家産이 없었고, 퇴관해서 그의 궁핍은 혹심했다. 그러나 궁핍은 참을 수 있었으나, 앤 볼레인의 소생所生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에 승복할 수가 없었다. 헨리왕의 보복은 무자비했다. 15343월부터 신체의 자유를 빼앗긴 모어는 4월에 런던탑에 갇히고, 다음 해 71일에는, 검찰측 증인의 터무니없는 위증에 의해서국회는 국왕을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만들 수 없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위증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모어는 그 후 1주일을 체 넘기지 못 하고 77일에 처형당했다. 1935년에 피우스 11세는 모어에게 성인聖人칭호를 추서追敍했다.

모어는 음악, 수학, 천문학에 능통한 학자였고, 에라스무스와 친교가 두터웠던 휴머니스트였으며, 한 때는 그리스어 신약新約을 출판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의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율법을 지켜 일생을 청빈과 양심으로 살고, 한 때는 성직을 원했을 정도의 정통적인 로마교인이었으며, 로마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기념하고 있다. 어쩌면 서로 모순되는, 이와같은 양면을 한 몸에 지니고, 다사다난多事多難던 한 평생을 살다간 모어에서, 우리는 영국 튜더시대의 한 전형적인 지식인의 수난상을 볼 수 있다.

헨리왕의 치세는 난세다. 난세에 처한 모어와 같은 사람이, 예술과 고전, 그리스어의 정묘精妙한 흥취에 몰두하여 세속을 버리지 않고, 난세에 의례히 따르기 마련인 세속의 갖은 부정과 비합리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구제책을 모색하는 의욕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이것이 모어의 또 다른 극히 현대적인 면모를 그의 일생에서 보는 이유다. 유토피아는 바로 모어의 이런 면의 소산이다. 유토피아에 담아낸 모어의 경세책이 놀랍게도 현대적인 뉴앙스를 풍겨주는 것은 모어의 식견이 그의 시대적 제약을 크게 벗어난 탁월한 것이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면, 한편 유토피아를 집필케한 동기와 의욕에 있어서, 토마스 모어는 한 현대적인 혹은 시대 구분을 초월하는 지식인이었다.

유토피아는 사방 약 200마일mail의 섬나라. 원래는 대륙에서 뻗어나온 갑() 모양이었는데, 그 지방을 정복한 시조始祖 유토푸스가, 15마일 길이의 호를 파게 해서 대륙과 떼어놓았다. 이 섬에는 같은 크기와 같은 관습을 가진 54개 도시가 있어 매년 한 번씩 각 도시는 세 사람의 대표를 수도首都인 아마우릇에 보내서 국정을 토론하게 한다. 시민들은 주로 농사에 종사하는데, 도시민들은 가족 단위로 일정한 기간을 시골에 있는 농장에서 일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유토피아의 백성들은 누구나 농업기술을 터득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176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주택에는 정성들여 가꾼 정원이 있고, 창문은 모두 유리창이라 바람을 막고, 햇빛을 풍성하게 받아들인다. 유토피아는 왕국이지만 왕은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된다. 30세대가 한 단위가 되어, 시포그란트라는 수장首長을 뽑고 200명의 시포그란트가 모여 종신직終身職 왕을 뽑는다. 왕이나 왕을 뽑는 시포그란트가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율법律法은 국사國事를 결정함에 있어서 최대의 공평과 숙고熟考를 다 하며, 시민을 노예화하거나, 정권을 함부로 바꿔치는 반역을 삼가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으뜸가는 사업은 농업이지만 모든 시민은 제각기 한 가지씩 기술을 가지고 있다. 11가 원칙이며, 시포그란트들은 시민이 단 한 사람도 무위도식無爲徒食하지 않도록 감시한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루에 정확하게 6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각자의 취미에 따라 여가餘暇를 즐길 수 있다. 오락이라면 장기將棋 같은 것을 둘 따름, 노름이라는 것을 모르며, 대부분은 독서를 즐긴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기에 수요를 공급하기에 족할 정도의 노동만이 허용된다. 6시간만 일해도 되므로 사치를 모르고 검소하게 살기 때문에 물자가 남아돌아가고, 그래서 생산을 멈추고 도로道路 수리와 같은 일에 시민을 돌려야 할 때가 많다. 유토피아는 철저한 계획경제를 실천하고 있다. 도시인구의 조절법도 마련되어있다. 한 도시에는 6,000세대 이상이 살 수 없으며, 세대는 최소 10, 최대 16명의 가족밖에 가질 수 없다. 여자는 남편에게 절대 복종한다. 각 도시에는 4개씩의 병원이 있어서, 환자를 돌보며 환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의 전 시민들은 공동식당에 모여서, 공동으로 장만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소를 잡는 일과, 그 이외의 유토피아시민의 위신威信을 손상할 천역賤役은 노예들이 맡는데, 유토피아는 사형死刑의 효능을 믿지 않고, 중범자는 노예로 일생 일을 시키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있다. 학자로 성공할 자질을 가진 사람들은 노동을 면제받고 학문에 몰두하여 높은 수준의 학식을 과시한다. 유토피아시민들은 인간 영혼의 사멸을 믿고 후세에 선에 대한 상을 받고, 악에 대한 벌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선이란 이성과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고, 이기심으로 남의 자유나 쾌락을 빼앗는 것은 사악邪惡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기쁨은 진정한 덕성과 양심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황금이나 화사한 옷에 대해서 그들이 냉담한 것은 물론 결혼에 대해서도 엄격한 율법이 있다. 남자는 22, 여자는 18세가 되면 결혼 할 수 있고, 한 번 결혼하면 중혼重婚이나 이혼을 할 수 없다. 간음姦淫을 하기 위해 유혹한자는 간음한 자와 똑같은 벌을 받는다. 유토피아의 법은 몇 개 되지 않고 법률가가 따로 없다. 그들은 매일 군사훈련을 받지만 전쟁을 싫어하고, 전쟁에서 얻은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 유토피아에는 거의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잡다한 교파가 난립하여 큰 싸움이 벌어졌지만, 시조 유토피스의 예지叡智로 터무니없는 미신을 없애고, 결국에는 이성과 설득과 관용이 지배하는, 신교信敎의 자유를 국법으로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종교가 있으니 사제司祭도 있다. 사제는 덕망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극소수 - 한 도시 13개 사원寺院에 한 사람씩 13- 다른 관장館長들과 같은 방법으로 비밀투표에 의해서 선출된다. 사제들이 죄를 지으면, 오직 그들의 양심에 맡기고 벌을 주지 않는다. 사제는 종군從軍도 한다. 그러나 싸움터에 나가서는 기도를 드리고, 자기편이 이기면 병사들 사이에 들어가서 적에게 너무 가혹한 짓을 하지 않도록 타이른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특히 그 무하나경無何奈境의 경제조직을 보고 모어가 일종의 공산사회를 그려놓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모어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엄격한 가족제도가 있고, 노예제도가 있고, 종교생활을 보살피는 특권계급인 사제들이 있는 유토피아를 무신론적 공산사회와 혼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유토피아는 모어가 알던 튜더 영국에 대한 풍자諷刺로써 쓰여진 것이고, 또한 풍자문학으로 읽혀질 때 그 불멸의 진가眞價가 들어나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첫째 권은 모어가 관찰한 당시 영국의 난맥상을 기술한 것이다. 근대적인 산업과 상업이 싹트기 시작해서 농업위주의 장원제莊園制는 물론 중세기의 직인동맹제職人同盟制마져 쇠퇴하게 되고, 귀족들은 공유지를 사유화했다. 농노제農奴制가 무너지고 일반서민들은 이후 헤아릴 수 없는 궁핍과 고난을 겪게 되었다. 모어는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한 수사修士의 율법대로의 금욕생활을 강요할 정도의 인물이었기에, 당시 영국의 귀족이나 영주들이 돈과 사치에 팔려 놀아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모어는 정의와 양심의 미덕을 믿는 법률가였으므로, 법이 공연한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농하는 자들의 손으로 좌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모든 범죄가 빈곤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믿고, 백성의 빈곤을 나태한 귀족들의 사치와 탐욕의 결과라고 파악했다. 히슬로데이의 이야기를 듣고난 모어는 유토피아의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고는, 보다 세밀히 검토하기 위해서 재회를 약속했다. 그러나 유토피아에는 본받을만한 사물이며 관습이 허다하다는 말로 제 2권을 맺었다. 그중에서도 모어의 마음을 끈 것은 유토피아가 다복하고 질서있는 사회로 유지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유토피아의 철학 즉 개인의 이익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라는 말의 출전出典이며, 플라톤의 공화국이후 끊겼던, 유토피아문학을 근세에 다시 시작한 기념할만한 책이다. 후세에 미친 영향에 있어서, 모어의 유토피아와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서로 백중伯仲한다고 할 수 있으나, 유토피아가 근세 최초의 유토피아적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베이컨의아틀란티스, 캄파넬라의태양의 도시가 철학적인 명제를 다룬데 비해, 모어의 유토피아는 당대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기억할만한 특색이다.

 

038  리바이어던 Leviathan (1651), 홉스 Thomas Hobbes

 

서구사西歐史에 있어 17세기는 전쟁과 알력軋轢, 내란과 변혁의 시대였다. 이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잉태되었던 새로운 역사의 기운은 1618년 보헤미아에서의 신교도 반란을 계기로 일어난 30년전쟁에서 분만分娩되고 있었다. 영국 역시 이러한 변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던 것으로 청교도혁명과 내란으로 종교, 사회, 경제, 정치의 제 영역에 걸쳐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바로 이 때, 이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고독하고도 센세이셔날한 사상가 토마스 홉스가 살았었고, 또한 그의 역사적 저술인 리바이어던이 세상에 선을 보인 해는 1651년으로, 그가 의회세력의 승리 때문에 친왕실파인 자기의 신변에 위험을 느낀 나머지 프랑스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보낸 끝에 본국으로 귀국하기 직전이었다. 이 때는, 바로 봉건적 여러 관계의 해체와 반 군주적 시민층의 두드러진 성장에 따르는 사회적 경제적 변동으로, 그 기초부터 동요를 면치 못 한, 절대군주제의 전제정치에 어리석게도 집착하고 있던, 찰스 1세가 혁명세력에 의하여 런던에서 처형된지 2년 되던 헤이며, 크롬웰의 공포정치 초기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시대의 지배적 상황은 굽이치는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극적인 대립과 반목이었다. 영국교회와 청교도 간의 종교적 반목, 왕과 의회 간의 정치권력적 투쟁,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구조 변동으로 새로히 성장한 신흥시민세력과 봉건적 구 세력 간의 알력이 그것이다.

17세기 전반의 어지러운 시대적 상황이 바로 홉스의 정치철학을 형성하고, 그로 하여금 국가 구성원에게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국가이론에의 획기적 시도를 감행케 한 배경이 되고 있다. 홉스는 파란 많은 시대에 살았을 뿐 아니라 파란 많은 가정에서 고독하게 자랐다. 출생으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파란과 고독은 그에게 있어서 숙명이었다.

홉스는 매우 가난한 이상성격의 한 무명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페인함대의 침공 소식에 놀란 그의 어머니가 그를 조산早産했을 때부터 홉스는 이미 순탄치 못 했다. 그의 아버지는 토요일 밤 늦게까지 트럼프놀이를 한 끝에, 다음 날 설교단 위에서 졸고 있다가 갑작스레 엉뚱한 고함을 치고 깨는 바람에, 교회 안에서 조용히 예배하고 있던 회중會衆을 놀라게 한 일도 있는 변태적 인간이었으며, 마침내 다른 목사와 싸움 끝에 그의 부인과 세 아이들을 버려둔 체 쫓겨났다. 그러나 이 가난 속에서도 토마스 홉스는 유달리 뛰어난 재동才童으로 자라났다.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혔고, 열다섯 살 나던 해에 옥스포드에 입학했다.

그에게 감명깊은 인상을 주지 못 했던 옥스포드에서 5년을 보낸 뒤, 학위를 얻자마자

그는 캐븐디시경(Lord Cavendish)에게 추천되어 그 장남의 가정교사로 지내게 되었고, 그 뒤부터 이 귀족과의 친분은 나날이 두터워졌다. 홉스가 캐븐디시가에 머무는 동안 그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 숱한 지인 명사 - 베이컨, 하비, 갈릴레오 등 저명한 학자들을 만났으며, 재정적 도움을 얻어 파리를 중심으로 대륙의 여러 지역을 여행함으로써 시대의 첨단적인 철학적 조언에 접할 수 있었다.

홉스는 1940년 의회세력이 승세에 올라서자 그의 반 의회적인 초기저술과 왕족들과의 친분으로 인한 신변의 위험을 의식한 나머지 파리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도 프랑스 성직자들의 그에 대한 적의를 직감하고 공포와 피해의식으로 귀국하였다. 정치문제에 언급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공화정의 보호를 받았다. 희대稀代의 천재 홉스의 생애는 어두운 고독과 피해의 공포, 불신으로 일관되었다.

리바이어던은 흔히 그릇 이해되고 있듯이 스튜어트왕조의 변호를 위하여 쓰여진 전제정치의 문법文法은 아니다. 인간능력의 차이에 대한 신념에서 출발하는 절대정치옹호자의 논리와 달리 인간능력의 본래적 평등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한다. 인간의 근본적 평등에서 홉스는 모든 비극의 씨앗을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일반적으로 능력이 같기 때문에, 이 사실로부터 어떤 목적의 성취에 같은 희망과 욕구를 가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동일한 희망의 추구에서 경쟁적 관계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자연상태에 있어서 서로 적대시하고 서로 파괴하고자 하는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투쟁의 중요한 심리적 원인으로써, 경쟁과 불신 그리고 명예를 들고있으며, 이것들이 끊임없는 공포와 투쟁의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오직 힘과 기만欺瞞만이 지배하는 상태, 즉 법이나 그것을 강제하는 일반적 권력이 결여된 상태가 곧 자연상태인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자연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의 본성과 행위를 비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단 점에서 홉스의 이론은,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을 이성과 자연법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개념한 로크보다 낙관적인 견해와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가지는 고경苦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부인할 정도로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가 인간으로 하여금 평화로의 정열로 이끄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무자비한 경쟁이 죽음의 공포를 낳는 일차적인 원인임을 인식할 때 남이 자기에게 가할 수 있는 불합리한 짓을 남에게 가하지 않는이성을 나타내는 가능성도 믿고있는 합리주의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만한 것은 인간이 죽음의 공포앞에서 배우는 분별과 자제가, 권력과 명예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 의하여 무너질 수 있다는 전제에서, 공동계약에 입각한 시민정부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보다 온건하고 소극적인 로크의 국가개념과는 달리 모든 권력이 1인 또는 1의 인간에게 주어진강력하고도 불가침적인 주권국가를 고집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국가를 일컫어 국민은 인간의 야만적 불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필요악으로써의 거대한 리바이어던(Great Leviathan)’이라고 했으며, 또한 불멸의 신아래서 국민의 평화와 방위를 담당하고있는 멸하는 신(moral God)으로까지 미화하고 있다.

홉스의 사회계약은 국민 상호간의 계약이므로 주권자는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며, 그 계약의 결과임으로 따라서 주권자는 계약의 상위에 있는 절대적존재로써 불법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홉스에게 있어서 지배권력은 절대적이고 불가분의 것이기 때문에 권력분립이나 혼합정부형태의 정당성은 엄격히 부인되고 있다. 주권자는 계약을 어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국민의 반항권은 인정되지 않으며, 부정한 통치자의 처벌은 오직 신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는 생각한다. 그는 또한 교회를 포함하는 모든 반전능反全能국가적세력의 성장을 경계하고 있다. 홉스에게 있어서 정부의 교체는 곧 국가의 해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따라서 그는 통치자의 지혜나 그 행위의 합법성에 대한 국민이나 개인의 도전권을 부정하면서 국민의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모든 개인은 선행과 악행의 심판자라든가,‘인간이 그의 양심에 어긋나게 한 것은 무엇이든 죄악이다라는 교의敎義를 독소적이라고 격렬하게 공격한다.

리바이어던 가운데서 발견되는 홉스의 정치이론 중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자연법에 관한 이론이다. 홉스는 자연법을 실정법에 우선시키는 스토아학파 이래 전통적 견해를 부정하고 이 두 가지 법의 관계에 언급하여서로 포용(contain each other)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통치자에게 절대적인 지위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법 효력의 근원을 법적 통치자의 칙령勅令이나 명령 이상의 고차적 자연법에서 구하는 전통적이론을 배격하고, 사실상 자연법은 법이 아니고 다만사람을 평화와 복종으로 끌어주는 속성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짓고 있다. 홉스가 자연법에 관한 그의 독특한 이론을 정교하게 설정하고 있는 것은, 그의 전반적 국가이론의 전제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벤슈타인이 지적한 것처럼 천재적 통찰로써 자연법사상의 혁명적의미를 정확하게 예견했기 때문이다. 곧 홉스는 주권자에 대한 국민혁명의 이론적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그의 국가이론으로부터 전통적 자연법이론의 영향을 조심스럽게 삼제芟除(배제排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홉스의 사상은 자연법이론이 지니고 있는 혁명의 이론적 가능성을 그대로 용인하고 있는 로크의 그것과 흥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위에서 본대로 리바이어던은 기존질서의 동요 가운데 급변한 17세기 전반의 서구적상황에서 평화와 안전의 희구에 집착하고 있던 고독한 홉스의 정치철학의 총결정結晶으로 당시 영국사회의 비상한 관심과 시비의 대상이었으며 그 뒤 오랜 역사를 두고 이 유명한 저서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들로부터 적의敵意와 회의懷疑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홉스의 생애처럼 복잡한 그의 사상과 이론은 어느 세력에게도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홉스는 대체로 군주제지지파에 친근했고, 그의 이론에 있어서도 실제상의 이유로 군주제를 최선의 정부형태로 본 탓에 절대군주체제의 이론적강화에 공헌하는 결과가 되었지만, 홉스의 공리功利주의적이고도 프라그마틱한 이론적 성향이 군주제를 도의적측면에서 신비화하려는 보수적 절대왕정주의자의 구미에 맞을 리 없었다. 종교적 보수분자들도 교회와 신학을 국가와 철학의 하위에 종속시키는 홉스의 이론적태도에서 적의적 비판을 보낸 것은 당연하다.

근본적으로 의회제도의 정당성과 실용성을 부정하는 정치철학으로 일관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의회주의자들로부터 냉대와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하거니와 통치권력의 절대성 강조에 있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의 사상이 절대군주제의 옹호자들에게서 까지 비판을 받아야만 했던 사실부터가 이 세기적 저작이 갖고있는 문제성을 시사示唆한다.

여하튼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시대로부터 후세로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문제도 남겨준다. 리바이어던이 확고한 민주적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영미英美의 정치사상에 끼친 영향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이 만큼 경미한데 반해서, 그것이 권위주의적 전통을 가진 국가, 그리고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등장한 전체주의국가에 끼친 영향을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물론 인간본성에 관한 홉스적 묘사부터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자연상태에서 야만적 인간의 분방한 원시적본능이 어떻게 분별있는 이성으로 전환되는가에 대한 명료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저서는 이론적 결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지배적 성향이 권위주의적 전통에 잘 영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이치와 같은 국가에서 그 영향은 두드러졌다. 그리고 리바이어던에 표현된 홉스의 정치철학이 국가기원에 관하여 계약론적 어프로치이고, 그 목적 설정에 있어서 행복추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그 성격에 있어서 반 신비주의적인 점에서 전체주의에 배치되지만 서구적지식의 총체속에 뿌리박고 있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홉스류의 절대주의적사상의 토대에서 성장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039  통치론統治論 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90), 로크 John Locke

 

자유주의의 시조始祖 존 로크는 17세기 영국의 혼돈속에서 타협과 정착의 이론으로 입헌군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인 사상가다. 그의 통치론은 1688년의 명예혁명을 정당화하는 정치적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근세계몽사상은 이성의 주권으로 르네상스의인간의 시대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이성의 끝없는 비약은 또 새로운 형이상학적체계를 시도하게 되어 급기야 홉스의 정치적 보편주의를 낳게 되었다. 이에 대해 자유, 생명, 재산이라는 일련의 시민혁명의 구호를 구체화시켜, 현실의 경험적 문설주에 안착시킨 정치이론가가 바로 로크다. 이것은 결국 경험적세계에 대한 이성의 보충작용을 의미한다.

로크의 사상내용은 시대적 함수函數에 제약된다. 그는 찰스 1세의 처형, 1649년에 시작된 청교도혁명과 크롬웰의 무단武斷정치, 1660년의 왕정복고王政復古, 그리고 복고 후의 찰스 2, 제임스 2세의 카톨릭에 대한 편향偏向, 그리하여 오렌지공 윌리엄의 명예혁명 등 일련의 실제정치의 소용돌이를 직접 목도目睹하였다. 명예혁명은 한 마디로, 스튜어트왕조의 전제정치에 대하여, 크롬웰에 인도引導된 신흥 부르조아지의 반항을 완성시켰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 혁명의 이론적 저초자底礎者가 로크다.

로크는 1632년 링턴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옥스포드대학에 입학, 당시의 옥스퍼드대학은 청교도의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반드시 청교도의 편협성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결국 로크는타협의 철학자였다. 대학 재학시 로크는 데카르트, 홉스에게서 강한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또 한 편 새로운 경험적방법의 성공에 충격을 받고, 의학연구에 관심을 두었다. 사회에서는 한 때 의업에 종사했다. 이것이 애슐리경(샤프츠베리 백작伯爵)과의 인연을 맺게 했으며, 1672년 그의 시의侍醫 겸 비서가 되었다. 그러나 휘그당 창당자 샤프츠베리백작이 왕당파와 대립, 하야下野하자 그는 프랑스로 건너갔다. 일시 귀국했다가 1683년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인연이 된 네덜란드 망명길에 올랐다. 네덜란드에 있는 동안 로크는 휘그당의 정치적 실제에 더 깊이 터치하고, 윌리엄의 원정계획에 간여하면서도,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윌리엄의 무혈혁명 후, 부란데부르크의 대사大使로 임명되었으나, 건강상 이유로 사퇴했다. 만년에는 건강을 지탱하지 못 하고, 에섹스의 오츠에 은퇴, 1704년에 서거逝去했다.

로크는 30여 저작을 남겼으며, 대표적인 저술은

. 관용론寬容論, 1689, 라틴어로 집필

. 진실에 관한 제 2 서간書簡, 1690, 속칭 관용론

. 인간오성론悟性論, 1690, 철학적 기초

. 교육에 관한 몇 가지 고찰考察, 1693

. 성경에 얘기되고 있는 기독교의 합리성, 1695

그리고 1812년에 12권으로 된 존 로크 존집全集이 나왔다.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원제는 통치에 관한 2)16898월에 인쇄되어, 1690년에 익명匿名으로 출판되었다. 1694, 1698년 각각 2, 3판이 나왔는데 증보수정판增補修正版이다. 그러나 로크의 근본취지는 그대로 살아있다.

이 통치론은 원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제 1론과 제 2론으로 구분되어있다. 1(The First Treatise)은 홉스의 절대주의, 구체적으로는 로버트 필머의 부권론父權論(Patriarchs, 1680)을 반박한 것이며, 1681년에 집필되었다. 필머에 의하면, 국왕의 권력은 신에게서 파생한 것이며, 신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준 가장家長으로써의 지배권에 유래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이에 대해, 아담이 인간 및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은 오류이며, 만일 아담에게 지배권이 부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속자에게는 그러한 권리는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확정할 수 없는 것, 만일 확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속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결코 확정될 수 없다는 점들을 논증했다. 2(The Second Treatise)이야말로 적극적으로 로크가 자신의 이론적 구성을 시도한 것이며, 이것은 밀튼 및 시드니 정부론(Discourses Concerning Government, 1689년까지 공판하지 않았음)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2론은 1683년 네델란드에 망명, 1889년 귀국할 동안 집필된 것으로 추측된다. 2론이 시민정부론이다.

통치론의 내용은

자유의 이념과 자연상태 : 자유의 이념이야말로 로크 정치이론의 핵심이다. 자유는 자연적능력, 즉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자기 결정적인 인간의 독립적인 판단에 의거한다. 그리고 각자는 자연법의 빛에 후광後光을 입어 자유를 갖는다. 그런데 정치사회의 전제인 자연상태는 이 에 의하여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상태다.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의 상태이며, 전 정치사회로써 항상 국가를 규제하는 이념적의의를 갖는다. 이리하여 홉스의 경우와 달리, 자연법은 자연권에 대한 제한이라기보다 그것을 성립시키고 지지하는 법칙이다. ‘자연상태(state of nature)’,

자연권(natural right)’ ‘자연법(Law of nature)은 삼위일체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하지만 자연상태에는, 자연법을 해석, 집행하는 공적권위가 아직 없고, 이론적으로 불완전한 각 개인의 판단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자연상태는 하늘 이외에는 호소할 수 없는, 투쟁이 가능한 상태를 면치 못 한다. 이리하여 인간 각자는 서로 자유의 계약에 입각, 정치사회를 건설하게 된다.

자연권의 보장과 정치사회의 목적 : 이 정치사회 즉 시민사회는 홉스와 같이 개체를 전체로 통합하는 거대한 리바이어던적 존재가 아니고, 개인 각자의 자유로운 결합체로써, 사회의 일종에 불과하며, 한정된 특수목적, 즉 자기방어력으로써의 자연의 힘(natural power)을 임무로 갖는 목적적 결합이다. 따라서 국가의 목적은, 시민의 독립과 행복의 유지 - 자연권의 보장, 더 세분화하면 자유, 생명, 재산을 확보해주는 데 있다. 이 자연권의 보장이 정치사회의 목적이다.

재산권 : 로크의 정치철학이 가장 잘 표시되어 있는 장이며, 이것에 의해서인간의 경험적 행복이 언급됨과 동시에, 그 배후에 인간의 이성적 인격으로써의 활동이 전제되어있다.‘시민사회의 성립은 각자의 자유, 신체, 재산을 한층 더 확실히 보존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회의 권력은 공공선公共善을 넘은 범위에까지 이른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모든 개인의 재산을 보장하도록 의무지워진다(29, 정치사회와 정부의 목적, 131)’, 또한재산권이란 모든 시민 각자의 명백한 계약 없이도 존재(25, 재산권 25)하는 전형적인 자연권이다. 이와같이 자유, 독립적인 인격의 산물인 노동의 과실을 재산권의 기초로 삼음으로써, 브르조아지의 경제이론형성에 공헌하고 있다. 요컨대 자유방임과 상반하여 앙시엥 레짐ancien regime(프랑스말로 구체제體制란 뜻,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체제)에 대항하는 브르조아지의 이데올러기 구실을 이 재산권은 저항권과 함께 담당하고 있다.

입헌주의立憲主義 : 정치사회의 목적은 법률국가의 이념을 표시하며, 입법권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입법자를 포함해서 권력을 잡는 자는 국가의 실정법보다 높은 규범인 자연법의 요구, 즉 공공의 비판 - 인민의 동의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주권은 공동사회 즉 인민의 전체에 속하며, 이것이 정치사회인 국가(commonwealth)의 유일한 형태여야 한다. 이 점이 근대의 자유국가 내지 민주국가의 근거가 되었다.

로크는 홉스와 달리 사회계약과 정치계약을 구별하고 있으며, 또한 입법권과 행정권을 구별하고 있다. 권력분립에 관한 로크의 입장은 군주절대주의에 대해서 개인의 자연법상의 권리를 보호하자는데 있다.

저항권(반항권) : 로크 이전의 폭군방벌론暴君放伐論을 받아들여, 군주가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의하여 자기 개인의 이익만을 꾀하고, 공동선에 반하는 자의恣意에 의하여 통치하는 경우에는, 인민은 반항하는 권리(power to resist)를 가지며, 국가는 자연상태로 복귀한다. 이 때 인민의 다수가 이 문제를 결정한다. 여기에 사회계약의 근본조건으로써의다수결多數決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사상의 자유에 의한 교육과 신교信敎의 자유 : 로크의 자유주의의 기본적 엑센트는 인간의 계몽 즉 교양에 있다. 따라서 시민에 있어서는 사상의 자유 특히 신교의 자유가 근본요건으로 되어 있으며, 국가는 어떠한 제약도 가해서는 안 된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정치적 시민주의의 등뼈 구실을 하여, 제퍼슨의 독립선언문과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에서 구체화되었다. 미극 독립선언문 모두冒頭에 나오는 천부天賦 인권의 자명론自明論은 로크의 통치론 제 225항에서 본딴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 급진파인 벤덤주의자에 대해서는 상상적 안내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벤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를 확립함에 있어, 모든 형이상학적 구상을 배격하고는 오로지 경험적사실의 기반에 의거했다. 벤덤의 공리주의적 도표道標 및 인간관은 그대로 로크의 경험적 심리적 연구방법, 즉 감각 및 반성에 관한 자기경험을 중심으로 했다. 이리하여 그는 로크의 자유주의를 발전시켜 새로운 공리주의 철학에 입각, 근대 대의제代議制 민주정치의 기초를 확립했다. 이와같이 흔히 서구 민주주의라고 불리우는 이데올러기는 그 수원지水源池를 로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한편 로크의 사상내용은 루소를 전기로 하여 자유의 이념과 국가원리의 결합문제에서 도이치 이상주의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루소사상은 무엇보다도 프랑스혁명과의 관계에서 이야기 된다. 그런데 루소의 일반의지 및 직접민주주의는 적용되지 않고, 혁명의 개개의 이론에 있어서는 오히려 로크의 자연권사상이 채용되었다. 여기에서 루소의 일반의지는 각자의 자유 평등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권력은 실질적으로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있어서, 결국 로크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일면에 있어 루소의 정치이론은 개인주의에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철저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초 개인적인 새로운 국가원리의 구성을 시도했다. 이 안간힘은 결국 종래의 자연법 내지 자연상태의 사상을 엷게 하여, 자연과 분리된 이성법, 자연생태에 대신할 이성국가이념의 싹을 움트게 한다. 이 루소의 이상국가관은 아담, 뮐러 등의 도이치 낭만주의 세계관, 더 나아가서는 도이치 이상주의철학의 대성자大成者 헤겔에게 영향을 끼쳤다. 헤겔은 민족성을 통한 이성국가의 실현을 세계역사의 과제로 삼고 있다. ‘인류역사는 자유의식의 부단한 진보라는 명구名句는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헤겔에 의하면, 각자의 자유는 국가의 봉사에 전념하는 한도 내에서 얻어질 수 있으니, 이것이 시민사회와 국가의 상호관계 즉 자유의 이념과 국가원리의 결합이 문제이다.

로크 사후 거의 3세기에 접어드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의그늘에서 혜택과 안주를 보증받고 있다. 민주주의의 공동화에서 그의 이미지가 단편화되어가건, 또 대항 이데올러기에서 현기증을 느낄지라도, 결국 인간이 자유결정의 트레카(절대자)라는 점에서, 추호도 의혹의 씨가 뿌려지지 않는다면, 그의 가르침은 현실을 살고있는 것이며, 그가 심은자유의 나무는 계속 성장할 것이다.

 

040  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1748)  몽테스큐 Charles Louis de Secondat Montesquieu

 

몽테스큐는 1869118일 프랑스의 보르도 가까이에 있는 라브레드에서 출생하여, 1755110일 파리에서 66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짐은 국가다라고 호언하여,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던 루이 14세의 치세의 말기에 성인이 되었다. 따라서 절대군권君權사상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다. 그런데 루이대왕의 권력이 그 절정에 달하자 프로테스탄트교도敎徒를 선봉先鋒으로 하여, 각 방면에서 그의 전제주의를 공격하는 바람이 불어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정치사상은 주로 현존하는 정치조직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프랑스에서도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게 되었는데, 이것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영국의 시민사회사상이었다. 영국은 일찍이 산업혁명을 완성하여 근대화되었다. 우선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이 정지작업을 하여 백과전서를 편찬하고, 인간 자연의 능력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므로 신장시킨 다음 합리적인 정치력으로 그것을 공공의 복리에 끌어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의 자연법, 자연권, 인민주권 또는 대의제代議制의 사상이 프랑스에 도입되어 프랑스의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이론화, 일반화, 체계화되었다. 몽테스큐의법의 정신은 이러한 사상적배경과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몽테스큐는 법조法曹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규이엔법원의 원장이었다. 어릴적에는 역사를 공부하였으나, 보르도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하여 파리에 나가 1723년까지 머물렀는데,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국적인 것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는 1713년 보르도로 돌아와 이듬해 법원의 평정관評定官이 되었으며, 1725년에 잔과 결혼하여 애정과 존경의 반려伴侶를 얻었다. 1716년 백부의 뒤를 상속하여 법원장이 되었다. 그해에 보르도학술원에 들어가 정치 내지 행정에 흥미를 가지고 활동하였으며, 물리학이라든가 생물학을 주로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가 처음으로 낸 중요한 작품은 당시의 유럽과 페르시아의 사회, 정치, 풍속 기타를 풍자적으로 논한페르시아인의 편지였다. 이 책은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나 관변官邊에는 좋은 인상을 주지 못 하였다. 그 후 파리에 나가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1728년에는 프랑스학술원에 들어가불사不死40의 대열隊列에 끼었다.

그의 대표작법의 정신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아카데미에 들어가자 곧 3년 간의 유럽여행을 떠나 여러 나라의 제도와 관습을 보았다. 특히 영국에 2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영국의 법률, 정치, 경제, 사회를 연구했다. 1731년 많은 자료를 가지고 라브레드에 돌아와 그때부터‘20년 동안의 저작이 시작되고, 성장하고 진보되고, 완성되었다고 서문에서 말한 법의 정신의 선구적 소묘素描라고 할 수 있다.

법의 정신은 1748년에 제네바에서 저자의 이름 없이어머니 없이 낳은 자식이라는 표어를 붙여 출판하였는데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 출판 후 2년이 되기 전에 22판을 냈다. 반면 일부에서는 비난도 있어1750년에

법의 정신의 변호(Defense de IEsric des Loix)를 발표하였으며, 금서禁書가 되기도 했다.

몽테스큐의 사생활에 관하여는 알려진 것이 적다. 그가 작품 이외의 것으로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귀족이고, 귀족적인 성격의 소유자며 재사才士였다.

법의 정신의 풀 타이틀은법의 정신에 관하여 - 혹은 여러 법이 각 정체의 헌법, 습속, 풍토, 종교, 상업 등의 사이에 가져야 할 관계에 관하여 - , 상속相續에 관한 로마법, 프랑스법 및 봉건법封建法에 관한 신 연구로 장황하다. 이것으로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법의 정신의 근본사상은 제 1법 일반에 관하여중의 다음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법이라는 것은 최 광의廣義에 있어서 사물의 성질에서 생기는 필연적 관계다. 그리고 이 의미에 있어 모든 존재는 그의 법을 가진다 , 그렇지만 지성계知性界는 결코 물질계처럼 완전히 지배되지 않는다. 지성계 역시 성질상 불변한 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법에 따르는 것이 물질계가 그 법에 따르는 것처럼 불변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리적존재로써 다른 물체와 마찬가지로 불변의 법에 지배당한다. 그러나 지혜적존재로써 끊임없이 신이 정한 법을 어기고 또 자기가 정한 법을 고친다.’

법은 일반적으로 세계의 모든 인민을 지배하는 한에 있어 인간이성이다. 그리고 각 국민의 정법政法 및 시민법은 이 인간이성이 적용되는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법은 그 각 인민에 대해서 끝내 고유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일 국민의 법이 타 국민에 적합할 수 있다면, 그는 비상한 우연이다. 그런 법은 성립한, 내지는 사람들이 성립시키고자 하는 정체政體의 성질 및 원리에 관련해야 한다. 그런 법은 나라의 지세地勢기후에 관계되어 있어야 한다. 토지의 성질, 그 위치, 크기, 인민의 생활양식 에 관계해 있어야 한다. 헌법이 인정하는 자유의 정도, 주민의 종교, 그들의 성품, 재부財富, 수효數爻, 상업, 습속習俗, 생활양식에 관계해 있어야 한다. 끝으로 그런 법은 그들 사이에 있어서도 관계를 가진다. 기원基源, 입법자의 목적, 또 기초인 사물의 질서와도 관계를 가진다. 이런 모든 입장에서 그것들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관계다. 나는 이런 모든 관계를 검토할 작정이었는데 이런 모든 것이 법의 정신이라고 불리우는 바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몽테스큐는 먼저 법이 각 정체의 성질과 원리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를 검토하였다. 그에 의하면 정체에는 인민이 전체로써의 또는 그 일부분만이 주권을 가지는 '공화정체'와, 한 사람이 고정적으로 정립된 법에 의해 통치하는 군주정체'와, 한 사람이 법도 규율도 없이 만사를 그 의지와 자의恣意에 따라 행하는 전제정체'의 세 가지가 있으며, 공화정체에는 민주정체와 귀족정체가 있다.

그런데 어느 정체에서도 자유가 원리가 되어있지 않다. 몽테스큐는 자유, 특히 정치적 자유를국가에 있어서 즉 법이 존재하는 사회에 있어서 자유란 다만 그 바라는 것을 행할 수 있고, 또한 바라지 않는 것을 행하도록 강제당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법이 허용하는 것을 행하는 권리라 하고, 그것은 권력의 남용이 행해지지 않는 때에 한해서 존재한다. 권력의 남용을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권력을 억제하도록 사물을 조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다음 유명한 영국헌법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각 국가에는 3종의 권력이 있다. 입법권, 만민에 관한 사항을 집행하는 권력 및 시민법에 관한 사항을 집행하는 권력이라고 하여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명확히 구분하고, 그것을 각자 별개의 독립된 기관에 분속分屬시켜 서로 침범하는 이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논하였다. 같은 기관이 법을 만들어 그것을 적용하거나 법적 결정을 내려 그것을 집행하든가 하면 모든 정치적 폐해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몽테스큐의 ‘3권분립론이다.

이상이 법의 정신의 간략한 내용인데, 이 시대에 몽테스큐가 한국에 관하여 한국의 남부의 인민은 북부의 인민만큼 용감하지 못 하다라든가, 한국의 기후가 어떻다든가 하여 우리나라에까지도 언급하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끝으로 몽테스큐는 법의 정신을 서술함에 있어, 방법적 혼란을 범하고 있다. 즉 단순하고 명백한 원리에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분석에 의하여 모든 필연적인 결과를 연역하려고 하였음은 데카르트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반면에 분석적방법은 영국 사상의 영향을 받아 적지 않게 감각주의적 경험주의적 요소를 섞어 쓰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적 혼란은 도리어 그 입장이 풍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고 보고싶다. 요컨대 몽테스큐의 특색은 무엇보다도 다면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몽테스큐 연구자는 몽테스큐라는 하나의 사람 속에 서로 별로 관계없는 다수의 사람이 있으며, 다수의 체계가 있다고도 지적한다.

몽테스큐 속에는 고대인이 있고, 근대인이 있고, 동시대인이 있고, 미래인이 있으며, 보수주의자가 있고, 귀족주의자가 있고, 민주주의자가 있고, 자연철학자가 있고, 합리주의자가 있다고 하리만큼 다면적인 특색을 지닌 법의 정신은 그것이 발간된 후에 미친 영향에도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우선 몽테스큐는 그 자신이 귀족이며 귀족주의적이었지만 그나름의 입장에서 전제주의를 열심히 공격하였다. 표면상 역사적연구라고 보이는 방법으로 과거의 제도를 소개하고 비판함으로써 당시의 절대주의적제도 전체에 대하여 신랄한 비난을 하였다. 전제적 국가에는 성질상 기본법이라는 것이 전연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권력을 행사하는 유일자는 게으로고 무식하며 향락을 좋아하여 정무를 포기한다. 그리고 전제정체를 움직이게 하는 원리 내지 인간의 감정은 덕성이나 절제와 명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라고 한다. 이와같은 전제정체에 대한 몽테스큐의 비판은 얼마 가지 않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성취시킨 혁명사상의 싹을 배양하는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기의 혁명가들은 이 사상을 절대군주제 비판의 무기로 원용했던 것이다.

몽테스큐의 전제정체에 대한 비판은 단순한 비판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시민적자유를 확립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을 검토하고 권력분립의 사상을 만들어냈다는 유명한 사실은 그로 하여금 근대적인 공법公法원리에 건설자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입법정체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더욱이 미국독립운동의 이념적지주가 되어 그 민주주의적 조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몽테스큐의 방법은 데카르트주의에 따르면서, 동시에 경험적 역사적 색채를 많이 띠고 있었기 때문에 법의 정신을 고찰함에 있어서 그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고, 시간적으로 로마 이래의 역사적과정의 배경을 기초로 하고, 공간적으로는 널리 여러 나라의 지세地勢, 기후, 습속習俗, 종교, 기타의 사회사상의 배경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 비교법학이나 사회학의 창시자라고 할 뿐만 아니라, 역사철학의 거장巨匠으로 추앙推仰되고 있다.

 

041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Du contrat socia (1762), 루소 Jean Jacques Rousseau

 

루소는 1712년 제네바에서 탄생하였다. 그의 가족은 종교전쟁 때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망명했고, 1세기 이상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출산시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세계상時計商으로써 루소가 10세 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숙부 밑에서 자랐고, 교육은 보와지의 목사에게서 받았다. 16세가 된 1728년에 가족을 떠나 20여 년 간 방랑생활을 했다. 9 - 10년 동안 드 바란스 부인과 생활한 것도 이 시기이고, 철학연구와 저작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때 목사 음악가로써 성공하려고 했으나 성취하지 못 했다. 1741년 파리에 가서 음악비판가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디드로, 볼테르와 교제가 시작되었다. 37세가 된 1749년 디종 아카데미의 현상懸賞논문과학 및 예술의 진보는 도덕을 부패시키는데 공헌하였는가? 또는 이를 순화하는데 공헌하였는가?’에 당선되어 문사적文士的 명성을 획득하였다. 1755년 엔사이클로페디아에 미드로의 알선斡旋으로 정치적 경제론을 발표하였고, 동년 디종 아카데미의 응모논문으로불평등기원론을 저작하였다.

1762년 교육에 관한 혁명적 저서에밀사회계약론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에밀로 말미암아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여러 곳을 전전하며 거주하였다. 결국 1766년에 데이비드 흄의 초청으로 영국에 건너가 갈채喝采를 받았다. 그러나 곧 흄과 싸워 1767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 후 10여 년 간의 은퇴생활에서 그의 자사전고백을 완성하였으며, 17787월에 사망하였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도처到處에 얽매어있다.’

이 감동적인 선언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쓴 목적을 서술하기 위해서 사용한 명 구절이다. 사회계약론의 목적은 그 별 표제 정치권리의 원리가 표시한 바와 같이 모든 합법적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근본원리를 설정하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째서 또 어떻게 인간의 속박束縛이 합법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구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 아래서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상호 대체적代替的3단계로 구성시킨 것이다. 즉 사회계약, 주권 및 그의 독특한 아이디어인 일반의사一般意思가 그것이다.

17세기의 사회계약론자 홉스, 로크가 그러하였듯이 루소도 그의 정치사상의 기초개념으로써자연상태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루소에 있어 자연상태는 인간의 조건을 규명하기 위한 가설로서 사용되었다. 인간의 조건은 가설적인 자연상태의 자유와 상반된 속박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는 자연상태의 가설에서부터 본질적문제로써무엇이 인간 속박을 합법적으로 만들 것인가?’에 둔 것이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그들을 보존하려고 하는데 있어 박해가 되는 것이, 자연상태 내에서 생명을 보전해가려는 각 개인의 수단 방법보다도 더 큰 저항력을 표시하는 지점에 인간이 도달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이 원시상태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인류는 그 생활방법을 변경하지 않는 한 멸망될 것이다.’

이 곤란한 문제 해결은 시민정부 아래서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결사結社인 것이다. 그러나 홉스와 달리 루소는 인간이 정부 아래서 생존하면서 동시에 자유스러워야 하는 극히 복잡한 문제에 당면치 않을 수 없게 된다. 얼핏 보기에 해결이 불가능한 것 같이 보이는 이 난제를 루소는 사회계약 속에서 그 해결을 발견한 것이다.

루소가 취한 태도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느낄 수 있다. 즉 그는 한 문제(인간 속박의 합법성)에 대해서 그 해결자세를 취한 것으로써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나머지 문제(어떻게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자연상태에 있어서와 같이 자유스러울 수 있을 것인가?)를 해결된 것으로종말終末이다. 무엇이 첫째 문제에서부터 둘째 문제로 전환되었는가? 어떠한 관계가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가? 이에 대해서 다음에서 좀 더 고찰해보기로 한다.

루소의 사회계약은 국가 또는 그 법에 의해서 인간에게 씌워진 속박이다. 이런 뜻에서 그의 모두문징冒頭文章,‘인간은 자유스럽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到處에서 그는 정부 아래 살고 있다.’라고 썼어야 할 것이다. 만일 루소가 사회계약이란 용어로 정부 아래 있는 시민사회의 생활이 속박된 생활이 아니라고 표시할 수 있다면, 즉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각인各人전체와 결합하면서, 그러나 그 자신만에 복종하고, 이전과 동일하게 자유스러울 수있다면 제 2의 문제 해결은 제 1의 문제 해결에서 마련된 셈이다. 속박은 단지 외견상 존재한데 불과하고 합법적이고 인간을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고 자유의 조건에 놓이게 한 것이라면, 이 두 문제는 동시에 간단히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회계약으로써 인간이 그 자신만에 복종(to obey himself alone)하여 시민사회에서 자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루소의 논의는 두 개의 관점으로 정해졌다.

첫째 관점은 인간이 자연적인 자유를 시민적인 자유의 획득을 위해서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필연적으로 자연상태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와 시민상태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는 동일한 자유가 될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종류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한 종류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루소가 창시한 것이 아니고, 홉스나 로크에게서 발견되는 관점이다.

루소의 기발한 공헌은 제 2의 관점에 있다. 즉 인간은 시민사회에 있어서 그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것(Man in civil society obeys himself alone)이다. 이 아이디어는 극히 실제성이 결여된 것 같이 보인다. 사실상 시민은 가끔 그들의 의사에 반대되는 일을 정부 또는 법에 의해서 강제로 당할 때가 있다. 시민이 그의 의사에 반대되는 행동을 강제당할 때 어떻게 시민은 그 자신만의 복종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루소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회계약을 공허한 공식公式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일반의사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전 단체에 의해서 복종되도록 강제된다는 약속을 암암리에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유스럽게 되도록 강제된다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각 시민을 그의 국가에 준다는 것은 시민을 인격적 종속從屬에서 보호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논의는 루소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나타내고 있다. 요약하면, 루소는 인간을 자유스럽게 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것(Man can be forced to be free)이다. 이 때의 속박은 노예로가 아니고 자유로의 인도引導라는 것이다. 루소는 시민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존재할뿐 아니라, 그로하여금 어떤 양식으로 강제한다 하더라도 그는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우리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이론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루소의 주권 및 일반의사의 설명으로써 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루소에 의하면 사회계약이란 필경 인민주권의 능동能動에 의하여 행해지는 협정協定이고, 주권은 일반의사의 행사行使에 불과하다. 그에 있어서의 주권은 계약을 행한 사람들의 일반의사이고, 불가양도不可讓渡, 불가분할分割의 것이고, 타인에 의해서 대표될 수 없는 것이다. 또 일반의사意思는 국가의 의사이고, 그에 있어 국가는 의인체擬人體로 생각된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사회계약이냐 하면 개인으로 하여금 일반의사의 방향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가를 떠나서 일반의사는 존재하지 못 한 것이다. 루소에 의하면 일반의사는 공동이익만을 생각하고, 그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올바르다는 것이다. 그는 일반의사는 전체의사(will of all)와 상이相異하다고 한다. 일반의사는 오직 공동이익만을 생각하는데 반하여, 전체의사는 개인적 특수적 이익을 생각한 것으로써 개인의사의 총화總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루소의 일반의사는 부분적으로 지적성격이 부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관적 객관적 의사가 완전히 일반적인 정치적의사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떠한 사람도 일반의사의 정치적의도와 분쟁을 야기시킬 수 없다. 그리고 사회의 어느 특수한 요소가 특별한 수익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적 특수적의사대 일반의사와의 분쟁>이 논리상 불가능하게 된다. 한편 루소의 일반의사의 개념은 그의 결론을 위해서 중요한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개인 자신 속에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의 부분으로써 이기주의적 요소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회적요소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개인이 선택한 어느 것은 이기적인 개인 이익에 좌우될 수 있으나, 개인이 선택한 어느 의사는 자발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라는 것이고, 더욱이 이러한 사회참여는 만족스러운 생활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에 있어서 정부는 정치적, 선택, 완전한 권위, 그리고 완전한 자유가 공존할 수 있는 단순성 보증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그의 일반의사의 개념은인간 대 국가에 있어 분쟁을 제거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일반의사는 이 아이디어의 해석, 실제 생활에서의 적용, 그가 활동하는 기구機構의 발견 등의 문제가 남아있고, 이것이 루소가 정치사상에 파문을 던지게 된 연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소의 정치철학은 광대하고, 특정방향을 잡기 곤란하다. 그의 사상은 모순과 당착撞着에 차있고, 그의 논리에는 비약飛躍이 많을 뿐만 아니라, 명확 투철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로크적 , 플라톤적, 홉스적요소와 개인주의적 자기주의적면, 단체주의 내지 전체주의적면이 아울러 풍기고 있으며, 보편적요소가 있는가 하면, 비합리적요소도 포함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근세사에서 정치적 실제와 정치철학 양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소의 아이디어는 북미北美의 식민지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으나, 그는 분명히 로비스피에르와 쟈코뱅당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인민주권, 정부 내의 어떠한 편중된 권리의 거부 등은 분명히 루소에서 얻은 것이다. 루소의 평범한 인간의 도덕적 감각에 대한 이념화는 칸트의 윤리에 직접적인 반영을 주었다고 한다. 칸트의 범주적範疇的 명령은 도덕적의사의 형태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 루소의 집단적의사 및 공동생활 참여에 대한 이념화는 헤겔, 피히테의 이상주의적인 도이치철학에 영향을 주었다. 헤겔철학은 일반의사를 역사적헌법 속에서 그 기원이 창조되고, 국민문화 속에서 확장 형성되는 국민국가정신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근래에는 이 말썽많은 그의 일반의사는 탈몬과 프리드리히와 트르제진스키 등에 의해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시원始原 또는 정치적 메시즘으로 고려되고 있다.

루소의 일반의사에 기축基軸을 둔 인민주권론은 당초 인민의 자연적 여러 권리, 특히 사유재산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정치적 복종服從계약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소위 백과사전파의 이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로크 보다는 홉스에 자연권이론에 크게 영향받은 그의 일반의사론은 오늘날 그것이 악용될 때 전체주의적 정치지배를 옹호할 염려가 있으나, 그것이 선용될 때는 진실한 민주주의의 기수旗手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살필 때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 정치이론은 물론 근대 민주시민사회의 발전에 불후不朽의 공헌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042   국부론國富論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 (1776), 스미스 Adam Smith

 

1776년 아담 스미스는 중상重商주의정책에 대한 고양高揚된 반항을 종합하여 국부론을 출판하였다. 이는 경제학의 발전에 새로운 시기를 긋는 것이었다. 종전의 경제학은 이의 준비과정에 불과하였고, 그 후의 경제학은 이를 토대로 발전하였다. 이제 국부론의 분석대상인 역사적배경과 분석주체인 스미스의 생애를 개관한다.

18세기는 경제사적으로 산업혁명의 단초기端初期에 해당한다. 영국은 자본의 본원적本源的 축적蓄積과 종획縱劃운동(enclosure movement)에 의하여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가장 일찍이 실현되고, 종래의 수공업手工業, 가내家內공업은 근대적 기계제機械制 대공업의 전 단계인 공장제 수공업 또는 선대先貸제도로 이행하여, 공업의 자본주의화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제는 생산이 유통流通의 기저基底가 되었으며, 또 유통이 생산을 제약制約하여 경제현상은 자못 복잡성을 띠우게 되며, 그것을 종합적 내면적으로 고찰하지 않고서는 경제기구機構 전체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생산자가 사회의 중견中堅이 되며, 경제는 정치에 대한 독립을 요구하게 되고, 이에 대응하여 독립적과학으로써의 경제학의 성립이 촉구된다. 이러한 역사적배경이야말로 영국에서 경제학의 성립이 제일 먼저 이루어지게 된 객관적배경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스미스는 1723년 키에르칼다에서 세관稅關감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사상적으로 진보한 글라스고우대학과 옥스포드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허치슨으로부터 자유주의사상을, 망드빌로부터 사익私益과 공익公益의 자연조화사상을, 흄으로부터 무역평형론貿易平衡論을 비판적으로 섭취하고, 젊은 버쿠루공작公爵을 따라 2년 간 프랑스를 여행하고, 프랑스 중농重農주의자의 경제의 일반이론을 습득하여 그의 방대尨大한 학설체계 수립의 준비를 일단 끝내고, 17675월 국부론 집필에 착수하여 1776년 출간하였다. 그의 이론은 독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선행한 사상과 학설을 종합체계화한 것이며, 그의 방법론상의 특징은 경제학적 여러 범주의 내적 관련 즉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깊이 파고드는 과학적태도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실제 참여하여 이해관계를 가진 자의 눈에 비친 바 관련을 그대로 기술記述, 분류하는 비과학적태도가 병립竝立 교착交錯되는데 있으며, 따라서 그의 이론내용은 적지 않은 모순을 들어내고 있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정치경제학이란 인민과 국왕을 다같이 부유케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5편 중

1에서 노동의 생산력의 개선의 원인과 그 생산물이 여러 계급에게 자연적으로 분배되는 질서에 대하여라는 제하題下에 분업론, 가치 및 가격론, 생산 분배론을 밝히고

2에서 자본의 저축 투자이론을 전개하고

3에서 부유富裕의 자연적 진보에 대하여

4에서 중상重商주의에 대한 치열한 비판과 중농重農학파에 대한 호의적 비판을 다루고

5에서 국가재정에 관하여를 논의하고 있다. 이하에서 분업론과 가치 및 가격론, 분배론, 자본론, 경제정책의 순으로 살펴보자.

분업론 : 스미스는 국부의 근원은 년년年年의 사회적노동에 있고, 사회적 노동 생산력의 질적 개선의 노동의 숙련, 기술판단력에도 달려있지만, 분업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예로써 핀Pin 제조업을 들었다. 즉 당시 영국에서 1인의 노동자가 제아무리 부지런히 일한다고 하더라도 하루 1 - 20개의 핀을 만들기 어려우나, 그 제조공정을 18단계로 분업하면 1인당 평균 하루 생산고는 4,800개에 달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분업의 기원을 인간의 교환성향, 이기심에 두어 그 당시의 교환관계, 경제관계를 인간의 본성과 자연에 결부시켜자연적인 것으로 절대시하는 경제사회관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그는, 분업의 발달은 시장의 크기에 의하여 제약되고, 사회적분업이 발달하면 상품교환이 시작되는 관계 즉 상업사회의 성립과정을 논한다.

가치 및 가격론 : 상품사회가 성립 발전하면 교환에 있어 욕망의 질과 양을 적합시키기가 곤란하게 된다. 이에 교환의 매개媒介수단으로 화폐가 출현한다. 교환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재화財貨와 화폐를 교환함에 있어, 사람이 자연적으로 준수하는 법칙이 문제가 되며, 법칙이 재화의 상대적가치 또는 교환가치를 결정한다. 이 교환가치의 척도尺度에 대하여, 스미스는 일면一面에서 재화의 교환가치는 그 재화가 구매 또는 지배하는 노동량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지배노동가치설을, 타면他面에서 재화의 진실가격은 사람이 그 재화를 획득코자 하는 노역勞役과 고심이다라는 투하投下노동가치설을 주장하여 투하노동량과 지배支配노동량의 이질적개념을 동일시하여 사용하였다. 또 투하노동가치설을 주장하는데 있어서도 교환가치를 노동의 고역과 고심이라고 보는 노동 = 비효용가치론의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고, 다른 어떤 곳(1편 제 6)에서는 객관적 투하노동량 즉 노동시간에 의하여 교환가치가 결정된다는 투하노동량의 가치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스미스는 이 후자를 자본 축적과 토지의 소유가 없는 초기 미개의 사회상태에 타당하다고 논의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총사회생산물이 노동자에게 그 일부가, 그리고 나머지는 자본가에게 귀속歸屬한다는 사실에서 투하노동가치론을 적용할 수 없다고 보고, 궁리 끝에 결국 제 6장 및 제 7장에서 임금, 이윤 및 지대地代는 모든 교환가치의 세 가지 본원本源인 동시에 소득의 세 가지 본원이다라고 하여 생산비설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앞선 설명과 정반대의 입론立論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에 대하여서도 전 자본주의사회와 마찬가지로 노동가치설이 관철, 적용된다는 것을 리카르도와 마르크스가 이론적으로 발전, 완성시켰다. 한편 스미스는 가격을 자연가격(일정한 자연율, 평균율로써의 임금, 이윤, 지대地代의 합계)과 시장 내에서 재화財貨의 수급에 의하여 변동되는 시장가격으로 나누고 시장가격은 자연가격을 중심으로 상하上下하며 자연가격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품의 공급량이 유효수요량보다 적을 때는 수요자 간에 경쟁이 일어나 시장가격은 자연가격을 초과하고, 따라서 그 상품생산에 참가한 노동자, 자본가 및 지주는 평균율 이상의 임금, 이윤 및 지대를 취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 유리한 부문部門으로 자본이 몰려들어, 그 결과 상품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따라서 공급량은 수요량에 가까워지고, 시장가격에 접근함과 동시에 임금, 이윤 및 지대는 각각 자연율에 접근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경향은 자유경쟁의 현상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스미스는 중상주의적 가격통제가 언제나 최고의 독점가격을 유지코자 하기 때문에 국민대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데 반하여 자유경쟁에 의한 자연가격은 최저의 가격으로 되기 때문에 국민대중에게 유리하다고 보아, 중상주의적 통제에 반대한다. 이상과 같이 자유경쟁은 그의 이론과 실천면이 동시에 전제되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자연가격을 임금, 이윤, 지대에 의하여 구성되었다고 보고 이 임금, 이윤, 지대의 자연율을 밝히는 것이 그의 분배론이다.

임금 : 자금은 먼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계약에 의하여 그 수준이 결정된다. 많이 받으려는 노동자와 적게 주려는 자본가 사이에 때때로 쟁의가 일어나나, 자본가는 여러 가지 강점에 의하여 녿오자 보다 언제나 유리한 입장에 선다. 그러나 임금에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저 한계가 있어 이를 임금의 자연율이라고 한다. 임금의 자연율은 놓동자 자신 및 그 가족의 생활 유지비에 의하여 결정되는 보통 인도人道에 벗어나지 않는 최저율이라고 스미스는 보았다. 그리고 노동자의 수급에 의하여 결정되는 현실의 임금은 자연율을 상하한다. 즉 국부國富가 증진되어 자본(노동기금)의 여유가 증대하면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임금은 자연율 이상으로 올라간다. 임금의 등귀騰貴로 노동자생활이 윤택해지면 노동인구가 증가하여 노동공급이 노동수요를 초과하여 임금은 다시 자연율로 하락한다. 반대의 경우에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스미스 후에 리카르도와 랏사레에 의해 발전된 소위 임금철칙鐵則의 근본명제命題.

이윤利潤 : ‘노동자가 원료에 부가한 가치라고 보아 착취설을 취하는 듯 하지만 원료 및 임금을 선불한 대가로 기업가가 당연히 얻는 가치부분으로 보았다. 현실의 이윤은 자본의 수급에 의하여 결정되므로 여하한 나라에 있어서도 자본이 증대함에 따라 자번의 투히에서 얻어지는 이윤은 필연적으로 감소한다.’그리고 그 원인은 스미스에 의하면 임금의 증대와 자본가 가의 경쟁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스미스는 이윤을 가치의 분해分解부분으로 보지만, 타면에서는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높은 이윤은 높은 임금보다도 생산물의 가치를 훨씬 현저하게 높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가치론상의 혼란의 이윤율에 있어서의 반영이다.

지대地代 :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지대는 토지 경작에 소비된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최초의 공제控除이라는 노동가치설적 지대론의 전개하기도 하고, 지대는 가격의 변동을 가져온다는 생산비적 지대론을 펴기도 한다. 또 한편 스미스는 일 국가의 토지가 전부 사유화되자 지주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밭 갈지 않는 곳에서 거두어들이려고 하고, 천연의 산물에 대하여까지 지대를 요구한다고 하여 절대 지대설의 근본사상을 주장하기도 하고, ‘특수한 생산물, 예컨대 농산물 중 식물食物은 공급이 수요에 비하여 부족하기 때문에 일종의 독점가격이 형성되고, 따라서 실제 생활비를 제한 나머지가 지대가 된다.’는 식으로, 통설적 차액지대설과 독점가격설 중의 수요과다설을 절충한 차액지대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스미스는 분배설을 설명하고, 소득 간의 대립을 간단히 논급하고 있다.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 농산물의 실질가격은 등귀하나 공산물의 실질가격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어서 지주地主는 이중의 이득을 보고 노동자는 그의 자금이 높아지고 구매하는 재화의 가격의 일부가 하락되어 이득을 얻는데 상인 및 공장주는 이윤율이 저하되어 고민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소득을 싸도는 계급의 이해 대립에 대한 스미스의 문제는 리카르도와 마르크스에 이르러 더욱 명확해진다.

이제 그의 자본 및 자본축적론蓄積論을 보자. 자본이란 이윤을 목적으로 투하되는 재화이며, 고종자본과 이동자본으로 구분된다. 고정자본은 노동요구, 건물, 토지 등으로 소유자의 손을 떠나지 않고 이윤을 올리는 자본이고, 유동자본은 그 반대다. 다음에 스미스는 사회구성원의 노동을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으로 분류하였다.

‘ 1. 소비자의 전가치를 하나의 이윤을 붙여서 재생산하는 노동, 2.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3. 노동이 끝난 후 적어도 어느 시간까지 존속하는 특정 대상물, 또는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생산의 노동이라고 정의하고, 군주君主, 관리, 군인 등의 지배계급을 비생산계급이라고 규정하였다.
끝으로 그의 경제정책을 들어보자. 경제발전의 순서는 사물의 자연적과정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제정책으로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속박束縛과 중상重商주의적 통제, 독점에 반대한다. 1. 도제법徒弟法 및 거주법의 철폐撤廢와 노동 이동, 직업 선택의 자유, 2. 토지소유권을 제한하는 상속한정법, 장자長子상속법의 철폐, 3. 지방관세 장벽의 철폐와 국내산업의 자유, 4. 관세 및 장려금의 철폐와 무역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그는 이러한 제한과 속박을 철폐하면 각 개인은 정의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제심에 따라 자유롭게 노동과 자본을 자유 경쟁하게 되고, 사회 전체의 후생厚生을 촉진 실현하게 된다고 보았다.

사실상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당시의 경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스미스의 국부론은 확실히 그 이상의 모든 경제적 논의를 종합한 것이며, 고전파경제학의 창시적 위치를 굳혀 그 후의 경제학 발전의 모든 싹을 잉태孕胎하고 있었다. 오늘날 경제사회가 사회주의국가와 자본주의국가로 대립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학파를 통하여 국부론은 내용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043  인구론人口論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1798), 말사스 Thomas Robert Malthus

 

말사스(1766- 1834)는 영국 사레이주의 부유하고 교양있는 지방 유지有志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다니엘 말사스는 법률전문가였으며, 식물학, 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사상에 공명共鳴해 흄, 루소를 비롯한 당대 명사와 교제하였다. 이러한 사상적배경이 후에 말사스가 인구론을 쓰게 된 계기다.

말사스는 1784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으며, 재학 시 그리스, 라틴어 및 수학에서 상을 탈 정도로 능통하고, 1788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793년부터 1804년 그가 결혼할 때까지 모교 지사스 칼레지의 히어로로 있었으며, 1805년에 신설된 동 인디아학교의 역사와 경제학교수에 임명되어 1834년 사거死去할 때까지 재직했다. 이 보다 앞서 1796년에는 영국교회의 목사보직에 임명되었으며, 그가 목사였다는 사실은 인구론에 종교적 신학적 색채를 띠게 했다. 일찍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최초로 발표했던 논문이 당시 피트행정부에 대한 정책비판문이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2년 후인 1798년에 인구론 초판이 간행되었다. 고전경제학파의 이론경제학자로써의 말사스는 그의 친구 리카르도와는 많은 면에서 의견을 달리 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종생토록 변치 않았으며, 또 인구론에 관한 한 리카르도도 말사스의 이론에 무조건 찬동해 그의 유명한 임금, 지대, 평균이윤율 등의 이론은 말사스의 인구론을 그 논거로 삼았다.

모든 사회이론은 그 소박하고 단편적인 형태로는 이미 고대로부터 존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인구론도 예외가 아니다. , 그것이 체계화되어 하나의 이론으로 성립한 것은 18세기 말 영국의 말사스를 기다려서 비롯했던 것이다. 동시에 모든 사회이론은 진공상태에서 별안간 솟아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후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역사적 산물이며 말사스의 인구론에서도 또한 예외는 아니다.

18세기는 서양사상 계몽주의시대라고 불려진다. 계몽이란 간단히 말해 수백 년 간을 두고 계속되었던 중세기의 어둠침침하고 침체적인 사회적 정신적 분위기를 타파하고 봉건적 전통과 속박을 이탈해 자유로운 지식을 보급해서 사람들을 미신과 무지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것을 뜻한다. 요약하면 신에 대한 절대적 귀의歸依에 대신해 인간이 자기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그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이성의 무한한 진보를 의심치 않았으며,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입각해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사회의 출현을 확신했던 것이다. 사실 근대과학 성립기로써의 18세기에 있어 눈부셨던 과학의 발전은 이러한 견해를 낳기에 충분할만큼 발전을 거듭했다.

당시 영국의 사상가 윌리엄 고드윈도 이라한 계몽주의 사상에 한 기수騎手였다. 1793년 그는 정치적 정의라는 대저大著를 내놓아, 거기서 인간은 원래 백지상태에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죄악과 곤궁은 오로지 인위적 환경과 제도의 산물이므로 인지人智의 발달과 이성의 진보로써 그들은 극복되리라고 말하려 했다. 따라서 그는 일체의 인위적제도를 부정하며, 완전한 자유속에 인간이성의 무한한 진보로써 도래할 이상사회를 예언하고 있다. 동시에 이상사회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늘어날 인구에 관해서 그것도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으며, 또 궁극적 이성은 육체에 대해 만능이 될 것이며 사람은 죽지도 않고, 낳지도 않으며 일체 고뇌와 곤궁은 이 사회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고드윈처럼 말사스가 인구론을 발표하는데 직접적 동기를 이룬 사람에 꽁도르세가 있다. 그는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운동의 제 1선에서 활약했으나, 1794년 투옥되어 옥중에서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가 투옥되기 전 9개월 동안 잠복 중 쓴 책이 유명한 인류정신 진보의 사적소묘史的素描이며, 여기서 그도 고드윈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이상사회를 논해 생명 불사설不死說에 도달했다.

한편 말사스의 인구론 초판이 출판된 1798년을 전후해 당시의 영국사회는 사상 유래없는 격동과 혼란의 도가니에 처해 있었다. 즉 고전경제학파의 두 거장인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주저主著 국부론과 정치경제학과 과세課稅의 원리가 각기 출판되었던 1776년에서 1817년 간의 약 반세기 사회적 경제적 의미에서 혁명의 시기라고 말 할 수 있다. 우선 영국은 1775년에 시작했던 미국 독립전쟁에 뒤이어 유럽대륙에서의 프랑스혁명(1789)과 이에 계속했던 나폴레옹전쟁으로 말미암아 나라의 흥망을 건 전쟁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은 이러한 대외적인 격심한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한편 대내적으로도 전례없는 변혁의 와중에 있었다. 즉 이때를 당해 바로 산업혁명의 뜻하지 않은 모순이 속속 노출되기 시작했다. 스미스가 예언했던 예정조화豫定調和'의 낙관적 견해와는 달리 비참한 공장노동자들의 생활난, 농지개혁의 결과 땅을 잃은 이농민離農民의 도시 집중, 빈민貧民의 범람氾濫, 전쟁의 여파로 끊임없이 기복을 되풀이하는 물가, 특히 곡가穀價의 앙등仰騰 등 이러한 일련의 현상속에 새로이 나타난 계급 간의 대립을 이 모든 것은 영국사상 여태껏 경험하지 못 한 혼란을 일으켰다. 40, 50년 사이야말로 어느 의미에서는 근대자본주의 발달사상 가장 위기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98년 익명匿名으로 출판된 인구론의 정확한 제목은 인구의 원리에 관한 일론一論 - 고드윈씨, 꽁도르세씨 및 기타 저자들의 고찰에 언급하면서 사회 장래의 개선 대한 영향을 논함.’

이 제목이 표시하듯이 인구론 초판은 이상사회의 실현을 확신했던 고드윈, 꽁도르세 및 기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공상적 낙관론을 타파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일찍이 이에 의심을 품은 말사스는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그의 아버지와 토론을 했으며, 드디어 그의 견해를 세상에 묻기로 했다. 원래 시골에서 별로 많지 않은 문헌을 참고로 즉흥적으로 쓴 것이었지만 발표되자 익명인데도 불구하고, 그 저자가 누구인지는 곧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고드윈의 이상론은 일거에 분쇄되고, 이 책이 거둔 성공은 경이적이었다.

말사스는 그의 인구에 관한 원리를 두 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

1. 식량은 인간 생존에 필요한 것이다.

2. 양성兩性 간의 열정(passion)은 필요한 것이며, 또 거의 현상대로 유지될 것이다.

그런데 인구가 제거되지 않는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생활자료(식량)는 단지 산술급수적으로 밖에는 증가하지 않는다.’1, 2, 4, 6, 8의 율로 밖에는 증가하지 않는 식량에 비해, 인구는 1, 2, 4, 8, 16, 32, 64 율로 놀랍게 증가한다면 인간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인구 간의 균형은 깨어지고 인간의 생존은 위태롭게 된다. 따라서인간의 생활에 식량을 필요로 하게 했던 그 자연의 법칙에 의해 이 두 개의 같지 않은 산출력産出力은 균형을 잡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면 산술급수적으로 밖에는 증가하지 않는 토지의 산출력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인간의 산출력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그 자연의 법칙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말사스가 말하는 인구의 적극적 제거작용으로서의 악덕惡德과 곤궁인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인위적인 수단으로서도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악덕과 곤궁은 소멸되지 않으며, 또 말사스에 의하면 그것으로서만 인간의 생존은 가능했었다. 인류의 미래를 인간이성의 무한한 발전으로 도래하는 이상사회로 그렸던 고드윈, 꽁도르세의 꿈은 말사스의 인구론으로 여지없이 분쇄되었다. 그러나 말사스의 너무나 가혹할이만큼 심각한 비관론은 또한 치열한 반대론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초판이 나온 다음해에 또 다시 1802년 유럽대륙을 방문해 직접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보다 정밀한 연구를 거듭해 1803년 인구론 제 2판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2판은 몇 가지 점에서 초판과는 다르다. 첫째, 양적으로 자수字數로 초판의 4, 610면에 달하며, 특히 초판 발행 후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과 논란을 검토해 그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 수정을 했다. 이 점 인구론 초판과 재판은 어느 의미에서는 별개의 저작이라고 생각된다. 재판의 정확한 제목은 인구의 원리에 관한 일론一論 - 인류의 행복에 미치는 그 과거 및 현재의 영향에 관한 고찰과 더불어 인구가 야기하는 폐해가 장래 제거 또는 완화되는지에 관한 전망에 대한 연구.

재판에서는 고드윈, 꽁도르세의 이름은 이미 그 제목에서 떨어졌으며, 초판에서 일관했던 그의 주장의 근본적 수정을 가했다. 말사스는 인구의 강력한 증가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악덕과 곤궁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고 했지만, 이제 악덕과 곤궁이라는 적극적 억제에 덧붙여 도덕적 억제(혼인 연령의 연장, 혼인생활 내에서의 절제 등)’을 첨가해 인간이성에 대한 신뢰를 표명했다. 바꾸어 말 해 인간이성의 무한한 진보와 발전을 확인하고, 이상사회의 실현을 꿈꾸었던 고드윈, 꽁도르세이론의 전면적 반박문으로써의 말사스이론은 그 핵심 부분에 수정이 가해진 것이다. 그러나 2판에서의 그의 수정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식량의 산술급수적 증가라는 그의 전제에는 그 후 일곱 번에 걸친 개정판의 발행에 있어서도 끝끝내 변동이 없었다. 요컨대 말사스의 인구론을 요약하면 다음의 세 가지 명제로 집약된다. , 인간의 정열의 불변에서

1. 인구는 반드시 생활자료(식량)에 의해 제한을 받게된다.

2. 인구는 어떤 극히 강력하고 현저한 방해로 인해 제거되지 않는 한, 생활자료가 증가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증가한다.

3. 이러한 인구의 강력한 증가력을 억압해서 그것을 생활자료와 같은 수준으로 머물게 하는 제가작용은 도덕적억제, 악덕 및 곤궁이다.

방대한 말사의 인구론은 결국 이 세 가지 명제를 부연敷衍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말사스 인구론의 원래 의도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공상적 이상사회론을 타파하는데 있었으며, 이러한 의도의 논리적 결과로 그는 생존권의 부정, 동시에 구빈법救貧法에 대한 반대 및 임금의 인위적 인상에 대해 반대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인구론이 내포했던 이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없으므로 직접적인 결함만을 열거하기로 한다.

1. 도덕적억제로써 인구의 억제가 가능하며, 또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2. 말사스는 과학의 발전을 과소평가 했었다. 토지 - 농업이 생산력 이 아니더라도 이미 산술급수적이라는 생각은 그 후의 사실이 틀렸음을 증명한다.

3.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는 당시 미국에서의 인구 증가에 입각했던 숫자다. 특정시기의 특정사회에서의 특수한 증가 현상을 보편적인 증가 현상으로 규정한 것은 잘못된 단정이다.

4. 말사스는 인구 억제의 가장 효과적방법인 과학적 피임법에 대해서는 그것이 당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끝내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는 인구 증가의 억제를 가능케 한 한 가지 근본적 원인이 과학적 피임법의 보급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타 할 말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를 근대 인구문제의 연구의 시조라 하는 것은 그의 이론이 그 전 시대의 사변적 추상적 단편적 인구론과는 달리 사실에 입각해 체계적으로 구성된데 있으며 인구의 연구를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 사회과학의 한 분과로 성립시킨데 잇다. 동시에 오늘날 후진지역의 인구 폭발과 관련해 이른바 말사스적 인구라는 말이 유행하는데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이론은 재평가되고 재음미되고 있다는 것을 부언附言해둔다.

 

044  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 Manifesto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 마르크스 Marx - 엥겔스 Engels

 

공산당선언은 이른바 과학적 공산주의의 최초의 강령적綱領的 문헌文獻이라고 불리워진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이 책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퇴색된 성서에 비유되기도 한다.

어쨌든 세계사의 흐름속에서 찬반 간에 누구라도 무시할 수 없는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 것 같고, 사실 그 기본사상의 영향력은 120년 후인 오늘날에도 아직껏 엄중한 문제제기를 느끼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칼 마르크스와 그의 충실한 벗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 책을 최초에 도이치어 원문으로 썼고, 망명지 런던에서 인쇄했는데, 원래 1848년 그곳에서 개최된 도이치인 중심의 공산주의자 동맹대회 위촉에 따른 것이다. 당시 마르크스는 30, 엥겔스는 28세였다. 출판은 1848, 프랑스 2월혁명 직전에 해당된다.

칼 마르크스(1818 - 1883)는 도이치의 라인프로이센에 위치한 트리에르시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로운 가정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본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역사, 철학,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당시의 도이치는 문제가 많은 불안한 나라였다.

유럽을 판치고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 공업화 선진국인 영국과 동방 전제주의의 아성牙城이던 짜르 러시아였다. 도이치는 그 이중 압력하에서 봉건 절대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자본주의 공업화의 물결은 이미 라인강변을 두드리는 모순적 상황을 느끼게 하였다. 청년 마르크스는 봉건 절대주의체제를 증오하였지만, 당시 도이치 브르조아지는 영 불의 경우처럼 민주적, 전진적일 수 없었다. 후진국에서 공업화를 추진하는 마당에 선진국의 압력을 감촉했고, 한편 도이치 노동자들은 막연하나마 선진국 혁명풍조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틈에서 도이치 브르조아지는 반 봉건 민주투쟁 대신 권위주의적인 구 세력과의 타협의 길을 걷고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학생시절에 이에 체제비판적인 청년헤겔좌파左派에 경도傾倒되었다. 게다가 수재秀才임이 틀림없었던 그는 대학교수를 지망하였다가 프로이센정부의 탄압적 문교정책하에 소망을 달성하지 못 한데서 원한이 한결 더 뿌리내린 것 같다. 결국 브르조아 급진론이 특징적이던 라인신문에 투신, 주필로 정치논설을 썼다. 프로이센정부의 관료 만능, 봉건적 국가기구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과정에서 인간소외(Menschen Entfremdung) 에 항의하다보니근본적인 인간해방 혁명을 구상하는데 이르렀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영향을 헤겔 - 포이에르바하선의 도이치 고전철학에 결부, 사회발전 추진세력으로써 프로레타리아트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도이치에서 쫓겨나 파리에 갔으나, 다시 추방되어 벨기에를 거쳐 영국의 런던에 체재하는 동안 친구 엥겔스(1820 1895)공산당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선언의 기본사상은 영국 고전경제학의 비판적연구를 거쳐 유명한 자본론(1867)으로 성숙되어갔다. 하지만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휴머니즘적 기미氣味, 후기에 이르러 냉담한 계급투쟁이론의 과학적 전개과정에서 결국은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에 표현된 바와 같은 인간 유린蹂躪의 도구로 되고말았다.

한편 마르크스가 선언을 발표한 1848년의 시대적배경은 어떠했던가? 하이네에 의하면 자유사상에 대한 대수렵狩獵의 시대였고, 도이치민족 해방, 정치적 자유 획득운동은 메테르니히 등 구식 정치가에 의하여 엄중한 취제取締대상이 되었다. 영국의 경우는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자들의 생활상태가 비참을 극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경우 소수 지식인들의 인도적인 위로부터 사회주의운동은 빈번히 개혁에 성의없는 상층 정치가들에 의하여 외면당했다. 그러나 소연騷然스러운 현상 타개 기운이 유럽의 곳곳에 자라고 있었다. 1847년에는 전 유럽 경제가 과도기적過渡期的 공황恐慌에 빠졌고, 프랑스는 설상가상격雪上加霜格으로 대 흉작 속에 기아飢餓상태가 초래되었으며, 파리의 대학생과 노동자들은 국왕 루이 필립과 기조 내각의 실정에 반대해 가두 진출을 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선언이 발표된 직후(‘선언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프랑스는 1848‘2월혁명을 겪게 되었다. 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망명지에서 욕구불만에 가득찬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투쟁강령을 기혁起革했던 것이므로, 그들이 당시의 세태를 주관적, 희망적 관측에 따라 과장誇張해 표현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아 당시의 정치, 경제상태는 자본주의 발전에 관한 한, 결코 말기단계가 아니라 초기 진통기鎭痛期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일시적인 성격을 발견하고,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고 새 사회주의사회의 창조자로 될 프로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을 논증한 연구성과를 간결히 요약했다고 공산주의자들은 말하고 있다.

선언의 전문前文

하나의 괴물怪物이 유럽을 배회한다. 공산주의라는 괴물이 즉 그것이다. 낡은 유럽의 모든 권력자들이 이 괴물 퇴치를 위해 신성동맹神聖同盟에 참가하였다. 법황도, 짜르도, 메테르니히도, 기조도, 프랑스의 급진당도, 도이치의 경찰도.’

이 문면文面의 뉴앙스에도 두드러진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공산혁명을 생각할 적에 주로 자본주의 공업화가 발전한 유럽, 특히 선진적 유럽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선언의 본문은 우선, ‘종래에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쓰는 데서 시작하였다.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는 이 문구에 원시 공산사회를 제외하면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선언의 말미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잃은 것은 철쇄鐵鎖뿐이고 얻은 것은 전 세계다. 만국萬國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선동적 문구로 맺어져있다.

이러한 표현은 선언 자체의 퇴색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의 사태 진전은 우리의 비판을 내세우기에 앞서 다름 아닌 공산국가 자체의 현실이 선언과의 모순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언의 제 1장은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트, 2장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 3장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문헌, 4장은 재야在野 정당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로 되어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시되는 제 1장에 하층 중류계급, 제조업자, 상점주, 직원, 농민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역전逆轉하려고 하는 까닭에 반동적反動的이다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한 레닌은 혁명전략상 노농勞農동맹을 제창해야만 했기 때문에 수정을 단행했던 모양이다. 2장은 또 프롤레타리아트는 조국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안 가진 것을 빼앗을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이 구절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에 명백해진 사태 진전은 어떠한가? 동서대결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공산주의는 이 경우에 동으로 상징되는 후진지역 즉 동구東歐나 중국 같은데서 집권한 것이지, 마르크스가 선차적으로 예상했던 서구에서는 공산화란 애당초 논외라고 판단되는 실정이다.

그나마 2차대전 후 동방 후진지역에서의 공산주의 확장은 비록 지구 육지면적과 인류 총 인구의 1/ 3을 지배하는데 이르기는 했지만, 그 집권은 예외없이 소련군에 의한 정복이나 전쟁 화염속의 폭력에 의존한 것이다. 어느 모로나 자본주의 발전의 자체 논리에 의한 내부적 붕괴요인 형성과는 전혀 딴판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 공산주의가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만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 레닌주의라고 자체 규정을 하고 나서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에 이어 제 2교조격인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결코 완성된 불가침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이론은 사회주의자가 실생활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모든 방향에서 가일층 전진시켜야 할 하나의 과학의 초석을 마련해놓은데 불과하다고 우리는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원칙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알쏭달쏭한 용례用例가 도출되는 모양이다.

표현이야 어떻든 레닌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이론에 대한 제 1차적 수정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지구의 1/ 6을 차지하는 소련에최초의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한 이른바 혁명의 아버지로써 바로 실생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교조敎祖의 교리에 대한 수정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이 점은 중소中蘇분쟁에서 거듭 관찰되는 바로써 모스크바와 북경의 지도자들은 각각 상대편이 레닌주의를 어겼다고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인 인용을 일삼으면서 부질없는 논란을 지루하게 반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차피 광신狂信을 이기게 마련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소련 공산당은 1962년 제 22차 당 대회에서부터 중국의 맹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인민국가를 표방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소련사회에서 계급투쟁이 치워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공산당선언의 사회관에 대한 근본적 수정을 의미하게 되는 셈이다. 북경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변화를 ‘10월혁명에 대한 배신이니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포기또는 현대 수정주의라고 말하고 있지만, 모스크바의 귀에는 그야말로 우이독경牛耳讀經 꼴인 것 같다.

소련 과학아카데미아 철학연구소의 1958년 판 집단저작을 보면 그 내부 변화의 깊이와 넓이를 더욱 큰 놀라움과 함께 관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공식적 출판물은 도이치의 괴테까지 인용하면서

괴테의 유명한 금언金言 - <벗이여, 이론은 무미건조無味乾燥하고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고 한 것은 , 그것이 이론에 대한 생명의 우위와 우선, 그리고 현실 자체가 차지하는 정신적반영에 대한 우위와 우선을 표현하는 한 진실이다. 한편 이론도 그것이 생명의 결코 막지 못 할 발전을 고려하면서 생명과 함께 이론 자체의 발전을 이룩한다면 항시 그 역량과 신선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생명이라고 이름한 현실은 결국 공산당선언의 교조敎條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바로 한 때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총 본산이라던 소련에서조차 공식적으로 보급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선언에 이른바 잃을 것은 철쇄뿐이라는 설교는 적어도 소련권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고 볼만한 추세다. 그들은 이제 투쟁으로 잃을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또 선언이 계시啓示한 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철석같은 단결에 관한 신화神話도 이제 와서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었다. 원래 이데올러기 자체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열광熱狂은 어디서나 조만간 현실 앞에 자리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요컨대 마르크스의 이론은 서구혁명 선행관先行觀에서 착오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동방에서도 차질을 면치 못 하였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각국 공산당의 당원 교양자료에서는 사실상 선언이 권장되지 않는다고 알려져있다. 흔히 지정되는 학습문헌은 지정국指定國 공산당의 독재자인 수령首領어록語錄이나 선집選集그리고 시사성을 띤 당보黨報내지 강령규약綱領規約의 해설, 기껏해야 당사黨史가 들어있을 따름이다. 물론 공산국의 당이론 간부幹部나 사회과학교수들은 선언을 읽고 있지만, 그들 이상으로 이 책은 비 공산권의 동조자나 호기가豪氣家 그리고 연구자에게 많이 읽히고 있다.

그들은 또 역사적 유물론唯物論에 대한 집착과 갓 착상한 잉여剩餘가치학설의 선입견에 좌우되어 냉엄한 법칙성을 강조하는데 열중한 나머지, 새로 정립되어가던 사회체제 주도세력의 환경적응능력을 정확히 측정하지 못 하였다.

마르크스는 예언자로써 실패하였으며, 또 그 때와 오늘날과는 객관적 조건이 판이하다. 그는 전 세기 자본주의의 비판에서 출중하였으나, 주관과 희원希願과 시대적 제약성으로 말미암아 금세기의 혼합경제와 복지국가의 발전을 내다볼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공산국가에서조차 그의 교리敎理는 날이갈수록 현실에 의하여 밀려나고 있다.

 

045  자유론自由論 On Liberty (1859), John Stuart Mill

 

밀의 자유론은 근대 민주주의에 관한 위대한 고전으로 간주된다. 이 책은 읽을 때마다 감명을 새롭게 하는 문헌이다.

자유론은 어떠한 의도에서 쓰여졌을까?

그는 어린시절 은사恩師인 제레미 벤덤과 아버지 제임스 밀을 통해서 습득하게 된 사상은 존 로크, 흄 등의 경험주의적인 인식론과 쾌락주의의 인성론, 그리고 공리주의적인 윤리관 등이다.

그런데 그의 사상편력의 제 2기에서는 전기한 사상에 대해서 일종의 비판과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즉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콜리지를 통하여 도이치의 이상주의사상에 접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무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벤덤주의에 대한 일종의 불만과 약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는 대체로 1826 - 1827년 경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의 유명한 자서전 속에서 내면적 역사에 있어서의 위기라고 이름을 붙여 기술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2기에 그는 다분히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예외를 인정 사회주의로 기우러졌다.

그의 사상편력의 제 3기는 테일러 부인과 결혼한 1851년 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제 2기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써 벤덤주의의 복귀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그는 이 제 3기에 있어서 제 1기로 다시 복귀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제 2기에서 경험한 이상주의적 경향은 결코 제 3기에 있어서도 소실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제 3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그의 자유의 동경은 힘차게 다시 살아나 간섭주의에 대해서 단호히 반대를 소리 높이 외치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 여기에 소개하려는 자유론이다.

자유론은 4장으로 되어있다.

1장은 서론으로 전편에 걸친 개괄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종래에는 정치적 지배자들의 권력행사에다 여러모로 제한을 가하기만 하면 인민의 자유는 자연히 보장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인 생각은 쉽사리 실현되지 못 했으며, 새로이 다수자의 전제라는 현상도 보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압제는 반드시 정부기관을 통해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또한 여론의 압박이라는 것도 있다.

자유의 이론이 동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원리의 확립이 필요하다.

밀은 이런 생각에서 자유의 영역에 속해야 할 것에는 다음과 같은 세 종류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의식의 내면적 영역으로써 일반적으로 사상의 자유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들 자신의 생활계획을 세울 수 있는 자유와 취미를 가지며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다.

셋째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단결의 자유다. 요컨대 적어도 자유라고 불리울만한 유일한 자유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 한, 또한 자유를 얻으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들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에 따라서 우리들 자신의 선을 행하는 일이다. 각자는 육체적, 정신적 및 영적인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그 자신의 적당한 건강의 관리자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선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강요해서 행하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자신에 대해서 선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자유로히 행하게 함으로써, 인류 전체는 얻는 바가 더욱 클 것이다.’라고 밀은 말하고 있다.

2장은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관하여 논한 것으로, 자유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밀은 우선 권력을 가지는 정부가 인민의 이름으로써 자유에 간섭하는 것을 날카롭게 공격한다. 그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논할 때에는 이 문제를 일단 둘로 나누어서 고찰해보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즉 첫째는 박해를 받는 사상이 정당하고 현시現時에는 지배적인 사상으로 되어있다 할지라도 다음 시대에까지 영구히 권위를 가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인류의 사상을 보면 그것은 언제나 변화해왔다. 사리가 그러하다면, 비록 현시의 지배적사상이라 할지라도 독선에 흐르지 않고 보다 나은 사상의 출현을 위하여 사상의 문을 넓게 열어놓은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이단자의 주장을 계속 무자비하게 탄압해간다면 과연 어떻게 보다 더 좋은 사상의 출현을 기대할 수가 있을까? 밀은 둘째의 경우로써 박해를 받는 사상이 잘못 되는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탄압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상은 비록 어느 시기에는 정당시 되고 있다 할지라도 오랜 시일이 경과하게 되면 죽어버린 독단으로 되어, 생생한 진리로 될 수 없는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의 진리가 생기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일단 생기를 잃어버린 사상은 다시 그 내포하는 진리성을 환기시켜야 한다. 그것은 정정당당正正堂堂히 반대설과 진지한 토론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반대설은 비록 잘못이 있다할지라도 너그러히 그 존재를 허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3장은 행복의 한 요소로써의 개성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로 타인에게 관계되지 않는 사실에 관해서는 개성이 자기를 주장하도록 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자신의 성격이 행위의 규범으로 되지 못 하고 타인의 전통과 관습이 행위의 규준으로 되고 있는 곳에서는 인간행복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결여되고 있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와 행위의 자유를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 타인에게 관계되는 별 문제로 하더라도 - 오직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행위에 대해서는 행위는 사상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밀은 개성있는 자발적인 선택이 얼마나 인간의 성정에 필요한 것인가를 역설하고 있다. 그는 자유를 요구하는 준거를 개성있는 자발심에다 두고 더 나아가서 인생의 목적인 인격의 성장에다 궁극적인 입장을 구했다.

일체의 고귀하고 어진 것은 모두 개성으로부터 싹터오른다. 많은 수도 결국 처음에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이상과 같은 사실을 잘 표시해주고 있다.

4장은 개인에 대한 사회 권위의 한도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즉 이 장에서는 전 장을 이어받아 과연 어떠한 행위가 자유로워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두 경우로, 즉 주로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이, 개인인 경우와 사회인 경우로 나눠서, 전자의 행위는 자유로와야 하지만 후자의 행위는 사회가 이것에 간섭할 권한이 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개인의 행위를 오직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행위타인에게 관계되는 행위로 분류하여 오직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만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교통 통신기관이 발달되고, 제반 거래도 신속하고 복잡하게 됨으로써 개인 상호 간에 교섭이 밀접하게 된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과연 그와같은 개인의 행위를 둘로 명백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하여간 그는 이 장에서는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개인의 정당한 자유에 대한 부당한 간섭의 실례를 열 개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제 5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의 많은 실례를 들어 전술한 자유의 한계에 관한 원리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즉 이러한 실례로써 상행위, 자유무역론, 독약 매매, 술주정꾼의 취체取締, 매음賣淫과 도박賭博의 유혹, 외설죄猥褻罪 등을 들어 자유의 한계를 논하고 있다.

이렇게 하려는 것은 이 책의 주지主旨를 이루는 2개의 공리公理의 의의와 한계를 더 한 층 명료하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이다.

첫째의 공리는 개인은 그 행위가 그 자긴 이외의 어떤 사람의 이해에도 관계되지 않는 한, 사회의 제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요, 둘째의 공리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에 관해서는 개인은 당연히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으며 또한 사회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옹호해주기 위해서 사회적, 또는 법률적 형벌을 가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해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자유론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끝을 맺고 있다.

국가의 가치는 결국 따지고보면 개인의 가치이다. 세부의 소소한 행정상의 능률을 얻으려는 나머지 이들 각 국인의 정신적발달과 향상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은 정부는 - 비록 국민의 이익을 고려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 멀지 않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소인을 상대로 해서는 참으로 위대한 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비록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기구를 만들어놓는다고 할지라도 , 그 기구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려는 나머지 가장 중요한 성원成員의 활력을 배제해버리려고 한다면, 애써 만든 기구도 결국 조금도 유익되는 바가 없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자유론은 자유주의 문헌 중에서 대표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아담 스미스와 벤덤 등에 있어서는 인간은 이기심에 의해서 움직이는 또는 쾌락을 구해 고통을 피하려는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동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자유론에 나타나고 있는 인간관은 전기한 벤덤류의 인간관과는 판이하다. 즉 밀은 인간이란 결코 쾌락과 고통의 충동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의식하여 자유로히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할 수 있는 이성자理性者로써 보고 있다. 또한 밀에 있어서의 인간은 단지 이성자일 뿐만 아니라 각 이성자는 또한 서로 판이한 개성을 가지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또 밀에 있어서는 적어도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관한 한, 그 자유는, 어떤 사실의 수단으로 되므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고유한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물론 자유라는 것은 인격의 성장과 진리의 천명闡明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수단의 하나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수단은 그 목적이 인격이며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의 수단과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보았다. 또한 밀은 인간에게 자유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인격의 성장에 두었으므로, 이 인격의 성장을 위해서는 매우 광범한 간섭의 섭리를 인정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론은 자유적이론의 대표적문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면에 있어서는 간섭의 원리를 밝혀 보여준 것이 라고도 볼 수가 있다. 또한 밀은 마지막 장절章節에서 인간생활에서 아무리 자유가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리려는, 즉 자기를 포기해버리려는 자유마저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런 경우에서 말하는 자유란 종래의 자유주의에서 생각하던 강제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이었다.

이상과 같이 생각해볼 때, 요컨대 밀은 자유주의를 이상주의 위에다 건설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유주의라는 사회사상으로부터 인간과 사회는 과연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를 논했다. 그리하여 사회와 인간의 이상으로부터 자유주의의 타당성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의 사상은 세 차례의 편력遍歷과정을 거치고 있다. 만일 그가 여전히 벤덤처럼 인식론에서는 경험주의를, 인성론에서는 쾌락주의를, 그리고 윤리관에서는 공리주의를 계속 철저하게 취하고 있었다면 그와같은 자유주의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046  자본론資本論 Das Kapital (1867 - 1894), 마르크스 Marx Karl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얘기하려면 헤겔철학을 먼저 들추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사회의 여러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는데 있어 철두철미徹頭徹尾 변증법적辨證法的인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입각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유물사관은, 즉 따지고보면 그 이전에 이미 정립되어 있었던 헤겔의 관념적인 평면변증법을 마르크스류의 유물사관으로 뒤바꿔놓은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1835년 본대학에 들어가 1년 동안 법률학을 배운 끝에 1836년 베를린대학으로 옮기면서부터 헤겔철학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도이치는 프랑스 7월혁명(1830)의 반동 탄압시기였지만 자유 평등의 거센 사조思潮는 지식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고, 베를린은 그들의 중심지였다. 학계는 헤겔철학, 특히 포이엘바하, 슈트라우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 헤겔철학이 날리고있는 때였다. 젊은 마르크스를 사로잡은 것은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절대이념이란 정반합正反合3단계운동에서 형성 발전한다는 헤겔의 변증법칙이었다. 마르크스는 포이엘바하를 통해서 이것을 배웠고, 여기에 역사학에서 얻은 여러 법칙성을 혼합해서 그 나름의 유물사관을 체계화시켰다. 인간사회의 발전해가는 역사과정을 설명함에 있어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을 바탕으로 하는 모순과 통일의 운동법칙이 지배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181855일에 라인주 트리엘의 유태계 도이치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윤택한 생활환경에서 자라났고 또한 당시 트리엘에서 가장 미인이라는 네 살 연상의 엔니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투사 마르크스의 첫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순탄도 오래가지 않아 프랑스, 영국 등으로 망명생활이 시작되면서 파란만장波瀾萬丈의 풍운아風雲兒로 변해간다. 기존 사회제도를 부인하고 혁명으로써 뒤엎겠다는 집념은 마침내 혁명의 성전聖典이라고 할 자본론을 구상케 하였다. 그토록 역경에서 그토록 많은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64세란 비교적 오랜 세월을 살아있었다는 것은 그의 체질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는 것과, 막상 그가 예견한대로는 적중치 않았지만 인류구제라는 대 이상에 불같은 정열을 다 쏟겠다는 무서운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동시에 그의 가장 친한 벗이며, 공저자이며 물질적인 지원자였던 엥겔스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었다. 자본론 제 1권이 완성된 것은 1867년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그의 유물사관에 입각해서 역사사회적인 하나의 단계로써의 자본주의 사회제도를 총 비판해보겠다는 웅지를 품고 기고한 것은 그보다 15년 전 부터였다고 술회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어디가 자본론 즉 마르크스주의의 시발이었던 가는 논자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1844년 독불연보獨佛年譜에 실린 헤겔의 법률철학비판서설를 가리켜 마르크스주의 의 태동이라고 본다면, 마르크스주의가 자본론 제 1권으로 집대성되어 나오기까지는 20여 년이라는 자가自家 정리를 위한 오뇌懊惱와 진통鎭痛을 겪은 나머지 비로소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대학 졸업 뒤에 빌헬름 4세 치하의 반동적인 학문 사상 탄압에 저항코저 라인신문의 기고가寄稿家, 주필主筆을 역임하는 동안 그의 문필가로써의 재능은 다듬어졌지만 아직은 사회주의를 몰랐었다. 1843년 프랑스로 망명하면서부터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 푸르동 등에게서 사회주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나중에는 지우知友인 푸르동의 무정부주의의 비과학성을 통박痛駁하기에 이르렀다. 저 유명한 철학의 빈곤을 내면서부터 그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한 발 한 발 지보地步를 굳혀가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교우관계는 깊어갔고, 마침내 이 두 사람의 의견으로 공산주의동맹이 탄생하고, 유명한 공산당선언을 기초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482월 파리혁명이 발발하자 그로부터 유럽 각국이 혁명, 선동의 장본인처럼 되어버린 마르크스의 정착을 방해하게 되자 마침내 영국 공산당본부의 초대를 받아들여서 런던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8833월 그가 죽을 때까지 런던은 그의 집필을 위한 서재였으며, 궁핍을 이겨내야 할 시련의 장소였다. 대영박물관에서 영국 고전파경제학과 이와 관련된 문헌을 볼 수 없었다던가, 노동문제에 관한 영국의회의 의사록이나 정부위원회의 보고서, 공장 감독관의 보고서들을 열람할 수 없었다면, 자본론은 나올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1859년에야 비로소 경제학비판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의 본문은 자본론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책의 서문에는 그의 독특한 유물사관에 관한 공식이 뚜렷이 나타나있어, 이로부터 본격적인 자본론이 전개되었다.

자본론 제 1권이 나온 때로부터 17년 동안 즉 죽을 때까지의 마르크스는 이 희유稀有의 대저大著인 자본론에 사로잡힌 광적 집념의 화신化身이었다. 과로過勞와 과도한 끽연喫煙으로 만성기관지염에 걸려 쿨룩거리면서 생명을 깎는 듯 한 노고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의사는 죽음을 자청하지 않으려면 집필을 중지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동물이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에 있어서는 죽음의 선언과 같다고 하면서 붓을 놓지 않았다. 이렇듯 악착같은 마르크스도 1881년 그가 사랑했던 아내 엔니와 큰 딸의 잇달은 사거死去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기진맥진氣盡脈盡한 듯 풀이 꺾이기 시작하였다. 1883년 초,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깨닫자 막내딸에게 내 원고는 엥겔스가 정리해줄 것이다고 중얼거리면서 안락의자에 앉아 펜을 쥔 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는 11년 걸려서 그의 유고遺稿를 정리해서 자본론 제 2권을 공간公刊했고, 그로부터 다시 9년 뒤인 1893년 자본론 제 3권을 내고, 그 이듬해인 189585일 엥겔스도 7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엥겔스가 자본론 제 4권으로 예정했던 마르크스 남은 유고는 1904년 카우츠키에 의해 잉여가치학설사로 정리, 공간公刊되었다.

이렇듯 심혈을 기울인 자본론이란 어떤 것인가? 또한 그것은 그 뒤에 어떤 영향을 인류 앞에 남기고 있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그의 유물사관 속에서 뚜렷이 하고 있듯이 모든 역사는 생산양식을 둘러싼 적대관계 간의 투쟁의 연속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론에서 따지고있는 자본주의사회도 인류의 역사, 사회적인 필연과정에서 성립되고 또한 그 내부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멸망하고 보다 좋은 제도, 즉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지양止揚, 발전한다는 것이다. 자본론은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사회의 생성에서부터 시작해서 발전과정을 거쳐 노쇠老衰하고 멸망하는 전 과정을 총람總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서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든 재화財貨란 방대한 상품의 집적集積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개의 상품은 재화의 원소元素형태로써 표현돼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론은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상 자본주의사회에서 상품 아닌 것이란 거의 없다. 그에 의하면 본시 상품이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람의 노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평범한 물체이지만 그것이 매매교환과정에서 들기만 하면 상품 스스로가 지니는 물리적관습을 벗어나 불가사의한 마력魔力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물체가 그것을 생산한 사람이나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 의하여 사용될 적에는 상품이 아니지만 그것이 상품으로써 시장에 나서기만 하면 화폐로 바꿔지기도 하고 다시 전매轉賣, 전매轉買되기도 하는 이상한 성질을 갖는다고 본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생기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상품도 그 소유자에게는 비사용가치이며, 반면 비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상품 가치의 성림에 관한 이 같은 정반모순과 대립에서 유통운동의 법칙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품이란 반드시 인간의 노동에 의한 생산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공기나 태양 또는 자연물인 처녀지나 원시림 같은 것은 상품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상품의 교환가치의 실체인 상품가치의 척도는 인간의 노동량에 의해서 결정되어야지 이른바 수요 공급원칙에서 말하는 상품의 효용도나 사용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실상 상품의 가치가 사람의 노동량에 의해서 정해져야 한다는 설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상가들에 의해서도 제창된 것이지만 그런 소박한 노동가치설을 디디고 서서 노동가치를 측정하는 과학적 인식을 정립한 것은 마르크스의 공적이라고 봐야 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상품가치의 실체를 형성하는 것은 어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하여 투하된 개개 노동량의 다과에 의해서 정할 것이 아니라 그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평균적 노동량에 의해서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사회의 재화의 원소형태인 상품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생산되고 또 이에 투하된 사회적 평균적 노동량에 의해서 가치가 부여되어야 하는 만큼 이에서 이탈한 가치기준이란 응태적凝態的이거나 가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자본가나 상인들이 상품을 생산, 판매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이른바 이윤이라는 것은 따지고보면 그 상품생산에 소요된 노동가치에서 우러나온 잉여가치를 저들끼리 분배, 착복하는 반 윤리행위라고 규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이윤을 목적으로 출발해서 상품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차액差額 즉 잉여가치를 자본가측이 수탈收奪하는 바탕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공평한 제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 즉 화폐는 이윤을 축적하는 수단으로는 쓰이지만 그 자체가 잉여가치를 창조하지는 못 하니까 못 하니까 자본가는 불로소득을 본다는 것이다. 잉여가치의 증식과 자본축적이 촉진됨에 따라서 자본가들이 비대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보겠다.

반면 잉여가치의 창조자인 노동자들은 잉여가치의 환부還付는커녕 필요노동 이상의 가혹한 잉여노동을 강요함으로써 빈곤의 축적만이 늘어나는 한편 자본가는 착취의 아성을 더욱더 강대한 것으로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이 촉진됨에 따라 대자본에로의 집중형태가 나타나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경쟁원리에 쫓아서 중소자본가들을 몰락시키고 마침내 거대재벌 손아귀에 모든 사회적자본이 집중된다.

동시에 자본의 고도화는 노동수요를 줄이게 되므로 자본이 없는 노동자계급에게는 실업失業과 빈곤이 심화되어 간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가리켜 한쪽 극에서 부의 축적은 곧 다른 한쪽 극, 즉 그들 스스로의 생산물을 자본으로써 생산하는 계급측에 있어서의 빈곤, 노동 공급, 노예 상태, 무지, 잔인 및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불공평, 불균형을 이루는 자본주의사회가 오래가지 못 하리라 는 것은 뻔하다고 보는 것이다. 소수자에 의한 자본의 독점으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그 자체를 더는 발전시킬 수 없게 만들고 종국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무너질 운명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필연성 때문에 멸망한다고 하였지만 노동계급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파쇄破碎되어져야 한다고 선동한다. 이것이 바로 공산폭력혁명의 이론 근거가 되고있는 것이다.

통칭 자본론이라고 할 때는 총론으로써의 제 1권과 자본의 유통과정을 분석해 보이는 제 2권 그리고 이윤과 이자, 그리고 지대地代 등을 각론各論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을 제 3권으로 하고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요약 표현하면, ‘자본주의는 불공평, 불합리, 부도덕성 때문에 그것이 무너져야 하고, 또 무너지고야 말 것이라는 점을 다각도에서 분석하고 논증하려고 노력하는 총화라고 줄여서 생각하면 된다.

 

047  제국주의론帝國主義論 Imperializm, kak vysshaya stadiyn kapitalizma (1917), 레닌 Vladimir Ilich Ulyanov

 

블라지미르 일리치 울랴노프, 즉 레닌(1870 - 1924)이 그의 노작勞作 - 제국주의론, 정확하게는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써의 제국주의를 집필한 것은 1916년 봄, 당시의 망명지 스위스에서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처음에는 베른 후에는 취리히의 도서관에서 소위 제국주의시대의 경제, 정치, 기술, 노동운동, 식민지와 그 밖의 사회문제 등에 관한 광범한 문헌과 자료를 독파, 분석한 후 20여 권에 달하는 노트를 작성했다. 이 노트는 그의 사후제국주의 노트라는 표제로 출판되었는데, 그가 이것을 토대로 191672일에 탈고한 것이 통칭 제국주의론(이하 제국론)’이다.

제국론은 제정 러시아에서 합법적으로 출판할 의도에서 극히 조심해서’‘암시적으로썼던 것이지만, 이것은 1917년에 접어들면서 뒤늦게 출판에 회부되었다가 동년 중간에, 2월혁명 후 자유 러시아에서 발행되었다.

레닌이 제국론을 쓴 1916년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의 자본주의 열강이 미증유未曾有의 살상과 파괴속에 휘몰려 들어가 국제 사회주의운동에도 각국 사회주의 정당들이 자국의 전쟁정책을 지지함으로써 심각한 분열이 나타난 시기다. ‘2 인터네이셔날1907년의 슈르트가르트대회에서 절박한 세계대전에 대해 반대결의안을 채택했고, 1912년의 바젤대회는 이것을 재확인했지만, 1914년 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제외한 교전국交戰國의 사회주의정당의 대다수는 전쟁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의 맹세를 잊어버리고 자국의 전쟁수행정책에 협력했다. 레닌이 제국론을 쓰게 된 직접 동기는 대전大戰에 직면하여 발생한 사회주의자들의 논쟁과 행동통일의 균열龜裂의 경제적 근저根底를 해명하고, 소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소생시켜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에 대해 취할 태도를 이론적으로 제시하는데 있었다. 레닌의 말(서문序文)대로 이 책은 짜리즘의 검열을 고려하면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치에 관해서는 극히 적은 부분을 암시적으로 언급했을 뿐이요, 따라서 이론적분석도, 경제적분석에 국한할 수밖에 없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자본주의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왜 불가피한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자본주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비인간화하여 기계의 일부로 전락시키는 때문이요, 객관적으로 불가피하다는 것은 자본주의는 그 내재적 모순에 의하여 자체를 파괴할 사회적 혁명적세력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순이란 근본적으로 경제적 모순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노출되는 3대법칙 - 자본축적의 법칙, 자본집중의 법칙, 빈곤증대의 법칙을 도출했는데, 이러한 법칙은 결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단결을 강화시켜 이들을 드디어 자본주의제도 - 브르조아계급을 타도하는 계급혁명으로 유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 20세기 초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분석이 제시할 그 일부의 특징과 경향이 비 현실적이라는 것을 실증했다. 아울러 적어도 전형적인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에 대한 답변은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의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닌의 제국주의이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언한대로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국가에서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적응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의 냉엄한 사실을 해명하자는 것이다. 레닌은 주로 영국의 자유주의자 홉스의 제국주의 - 한 해석과 도이치의 반 볼쉐비키적 마르크스주의자 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의 설명을 원용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구성했던 것이다. 이 점 레닌의 기본적개념은 결코 독창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부르조아 경제학자또는 제국주의 지지자라고 스스로 비난한 많은 사람들의 방대한 저술을 인용하면서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설명한 것은, 왜 아직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가 하는데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이론이 그러했듯이 레닌의 제국주의이론도 자본주의의 발전은 반드시 위기와 혁명적 정세를 조성하여 파멸하지 않을 수 없음을 논술하고 있다.

레닌은 자본주의를, 자유경쟁이 지배하던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마르크스시대의 자본주의, 19세기 1960 - 1970년대에 발전의 정점에 달함)와 독점자본주의(레닌시대의 자본주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완성됨)로 구분하고, 독점자본주의는 곧 제국주의요, 이것은 자본주의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단계라고 규정했다. 이 단계의 기본적특징은 자유경쟁 대신에 독점의 지배가 나타난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독점을 제국주의의 경제적본질로 인식하면서 독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제국주위의 개념 규정에 있어서, 레닌이 이것을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필연적 단계라고 본 것은, 레닌에 선행한 자유주의자 홉스 또는 마르크스주의자(카우츠키, 힐퍼딩)들이 이것을 자본주의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특수한 정책이라고 본 것과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견해다. 제국주의를 임의의 정책으로 보느냐 또는 필연적 단계로 보느냐에 따라 사회주의혁명의 전략 전술은 갈라질 수밖에 없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필연적단계로 파악하고, 그 내부적 모순에 의하여 제국주의가 멸망하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승리할 기회도 또한 필연적이라는 것을 논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제국주의의 중요한 경제적 표지標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생산과 자본의 축적. 이것이 고도의 발전단계에 달하여 경제생활에서 결정적역할을 하는 독점체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는 것

2.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이 융합하여, 금융자본을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寡頭制(금융 소수 지배제)가 형성되었다는 것

3. 상품수출과는 별도로 자본수출이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

4. 자본가의 국제적 독점 단계가 형성되어 세계를 분할하고 있다는 것

5. 자본주의적 최 강국에 의한 지구의 영토적 분할이 완료되었다는 것

이러한 경제적 표지에서 그가 유도하려는 정치적 결론은, 세계를 재 분할하기 위한 투쟁이 앞선 제국주의국가와 신흥 제국주의국가 간에 발생하고 이 투쟁은 불가피하게 세계적 규모의 제국주의전쟁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제국주의 하에서는 국제평화란 존재할 수 없다. 그는 독점자본주의 식민지를 강탈하고, 약소국, 약소민족을 정복하여 강대한 제국을 형성하려는 욕구가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지만, 독점자본주의시대의 식민정책은 과거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즉 이 시대에는 식민정책의 낡은방법 - 약탈, 상품교역 등에 덧붙여 새로운방법 - 재배, 개발, 자본수출 등을 통한 식민지의 방대한 영역이 경제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이 촉진되어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체제의 형성이 완료된다는 것이다. 이 체제는 식민국과 식민지 - 반 식민지와의 종속관계, 지배와 복종관계, 수탈관계 위에 수립된다. 그리하여자본주의는 한 줌의 선진국이 지상의 인구의 대다수를 식민지적으로 억압하고 금융적으로 암살하는 세계체제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각국의 국민경제는 세계경제라는 하나의 사슬() 개개의 고리로 된 것이다. 여기서 레닌은 열강의 극소수의 가장 부유한금융자본가의 지배체제에 의하여 착취를 당하는 식민지 - 반 식민지의 피 압박민족에다 눈을 돌리고 이들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로 동원할 혁명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이제 레닌시대에 들어서면서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선진적 유럽의 노동운동에서 후진적 아시아(또는 아프리카)의 민족해방운동으로 그 무대를 바꾸게 되었다.

제국주의론은 자본주의 일반에 대해 제국주의 특수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191610월에 집필한 레닌의 논문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에서 더욱 체제적으로 설명되었다. 레닌에 의하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특수한 역사적단계다. 이 특수성은 세 가지다. 즉 제국주의란 (1) 독점자본주의요, (2) 기생적寄生的인 또는 부패한 자본주의요, (3) 사멸하고 있는 자본주의다.’

그는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를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발견하고 있다. 즉 독점체는 높은 이윤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상의 진보를 응용하는데는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따라서 생산력의 발전은 저지되고 자본주의는 불가피하게 정체停滯,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보다 강조한 것은 제국주의국가의 자본가의 방대한 층이 금리생활자로, 즉 유가증권을 소유하고 이로부터의 수입으로 생활하는 인간이 되고 제국주의국가는 식민지 - 종속국의 인민을 착취함으로써 생활하는 기생적 금리생활자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수회收賄, 엄청난 매수, 각종 의혹, ‘전선全線에 걸친 정치적반동反動도 제국주의의 부패현상이다. 특히 자본가들은 식민지에서 수탈한 초과이윤으로 노동자의 지도층과 노동가족의 상층부를 매수하여 이들을 자본가의 번견番犬’, ‘노동운동을 타락시키는 인간으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레닌에 의하면, 이렇게 하여 부르조아지는 노동운동을 자기의 이익에 적응시켰고, 부르조아지에 매수된 기회주의자’, ‘개량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에 대한 레닌의 통칭)’들은 자본주의의개선改善을 떠들면서 노동계급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그 전열을 분열시키다고 한다. 그는 많은 선진자본국가에서 독점자본가들이 권력을 계속 장악하고 있는 원인의 하나를 여기서 찾고 있다.

한편 레닌에 의하면, 그렇다고 해서 제국주의 생명이 영속하는 것은 아니다. 독점자본가들은 식민지의 착취에 의하여 국내시장을 회복, 육성하고 소시민계급, 노동계급의 상층부까지 식민적 착취의 혜택을 베풀어 그 붕괴를 연장시킬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제국주의는 사멸하고 있는 자본주의. 왜냐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을 격화시키고, 이것을 혁명이 폭발한 한계선까지 첨예화시키는 때문이다. 스탈린은 이 모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제국주의의 3대 모순 - (1) 자본주의 각국 내의 노동과 자본과의 모순, (2) 제국주의 열강列强과의 모순, (3) 식민지 - 종속국의 피 압박 민족과, 이들을 착취하는 소수 제국주의 열광과의 모순으로 정식화(레닌주의 기초)하였다.

끝으로,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핵심이 되고, 이론의 구성을 가능케 한 것은 제국주의 시대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제국諸國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불균등법칙이었다. 이 발전 불균등성의 법칙에 의하여 귀결된 것은, 비단 제국주의전쟁의 필연성과 세계 제국주의 전선의 약화론 뿐만 아니라, 국제 제국주의의 철쇄鐵鎖는 그의 가장 약한 일환에서 끊어질 가능성, 사회주의혁명이 처음에는 몇몇 나라에서 심지어는 한 나라에서까지도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정 러시아를 세계 제국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로 파악하고, 러시아혁명의 합법칙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러시아혁명을 세계혁명의 일환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제국주의론은, 20세기 독점 자본주의시대에서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이것을 합법화하는데, 그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이론은 혁명을 위한 전략이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과 타당성에는 많은 맹점을 내포한 한 혁명가의 정치적 논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048  경제經濟와 사회 Wirtschaft und Gesellshaft (1921), 웨버 Max Weber

 

웨버는 1864년에 출생하여 1920년에 사망하였지만, 그의 알찬 학문적활동은 20세기에 들어서서부터였다. 당시 도이치의 사회과학은, 일면에서는 역사학파가 판을 치고 있었고, 그리고 타면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세력도 또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웨버는 하이델베르크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따라서 규범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당시의 학계의 대세를 따라 역사학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도이치학자들이 언필칭言必稱 민족정신(Volksgeist)’을 앞에 내세우면서 형이상학적인 불투명 속에서 모든 것을 제멋대로 다루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불만을 당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 역사과학의 대상이 되어있는 사회현상은 이것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종래의 도이치학자들과 웨버와의 사이에 사회과학방법론에 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그가 명백히 한 것은 이념형’ ‘객관적 가능성 판단’ ‘인과귀속因果歸屬등에 관한 이론이었으며, 여기에 그의 이해사회학(Verstehende Sogiorogie)’은 그 기초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있어서, 그가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19세기 말엽은 비스마르크의 영도 밑에서 도이치가 맹렬하게 영국의 뒤를쫓아가던 시대였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어째서 자본주의가 먼저 발달하였고, 그리고 그 나라가 근대화의 길을 순조롭게 걸어가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도이치학자의 머리를 스쳐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사회과학방법론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입장을 확인한 웨버는 우선 이 문제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을 발표한 것은 이러한 연구의 성과였고, 계속하여 그는 세계 종교의 경제윤리라는 대 저작(미완)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가 견지한 입장은, 사회와 문화의 형성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종교적인 것도 또한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웨버는 그의 오랜 논쟁과 저작의 결과를 총 집결하여 그의 사회과학체계를 완성시켜보려고 결심하게 되었고, 이리하여 새로운 집필에 착수하였던 것이지만, 불의의 사망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 하였고, 유고遺稿는 부인에 의하여 정리되어 발간되었다. 이것이경제와 사회이지만 비록 미완성이라고 할지라도, 1,000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유고만으로도 그의 이론체계가 얼마나 웅대하고, 세밀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웨버는 유복한 자유주의적 부르조아지였던 동명同名의 아버지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였던 어머니의 장남으로 에르푸르트에서 출생하고, 1920614일 뮨헨에서 폐렴으로 급사하였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22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25세에 중세 상사商事회사의 역사라는 논문으로 박사가 되었으며, 27세에 로마 농업사라는 논문으로 강사자격을 취득하였다. 이리하여 그 해에 베를린대학의 무급강사가 되어 상법, 로마법, 게르만법 등을 강의하였고, 30세에 프라이푸르크대학의 교수가 되어 경제학을 담당하였다. 33세에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다음 해에 신경질환으로 이탈리아 등지에서 휴양하다가 39세 때에는 교직을 떠났다. 다음 해에는 좀바르트와 함께 사회과학 사회정책 아르히프라는 학술잡지의 편집을 맡아보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귀중한 연구논문을 계속 발표하여, 그의 연구생활에 있어서 가장 소득이 많은 시기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50)이 일어나자 군무를 지원하여 야전병원에 근무한 일도 있었으나 곧 돌아와서, 일면 빌헬름 2세의 전쟁방침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종교사회학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전쟁이 끝나자(54) 윈 대학의 초청으로 강의를 맡았는데 교단을 떠난지 15년만의 일이다. 패전의 강화講和위원으로 베르사이유에 불려간 일도 있다. 55세 되는 1919년에는 뮨헨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여 사회학, 경제사, 사회주의, 국가론 등을 강의하였으며, 학적능력이 절정에 도달한 그가 마음껏 연구를 해보려고 준비하던 때, 192066일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어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제와 사회(Wirtschaft und Gesellschaft)’는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921년 미망인에 의해 발간되었고, 1925년에 제 2, 1947년에 제 3판이 나왔으며, 현재 우리가 읽는 것은 1955년에 빙켈만(Johannes Winckelmann)에 의하여 교정校正, 증보增補된 제 4판이다. 상하 2권으로 되어있으며, 그 편별내용(숫자는 면호面號)

1

1부 사회학적 범주론, 1장 사회학적 기초개념(1 - 30), 2장 경제의 사회학적 기초범주(31 - 121),3장 지배와 유형(122 - 176), 4장 신분과 계급(177 - 180)

2부 경제와 사회적질서 및 권력, 1장 경제와 사회적질서의 원리적 관계(181 - 198), 2장 경제와 사회일반(196 - 211), 3장 경제와의 관계에서 본 공동사회 및 이익사회의 유형(212 - 233), 4장 종족 간의 사회 관계(234 - 244), 5장 종교사회학(245 - 381), 6장 시장사회(382 - 385)

2

7장 법사회학(387 - 513), 8장 정치사회(514 - 540)

9장 지배사회학(541 - 876), 1절 지배의 구조와 기능(541 - 550), 2절 정당한 지배의 3개의 순수형태(551 - 558), 3절 관료제지배의 본질 전제 및 발전(559 - 587), 4절 가부장적家父長的 및 가산적家産的 지배(588 - 632), 5절 봉건제 신분국가 및 가산제(633 - 661), 6절 카리스마적 지배와 그 변형(662 - 695), 7절 정치적 및 승려僧侶정치적 지배(696 - 734), 8절 도시의 유형학類型學(735 - 822), 9절 국가사회학(823 - 876), 부록 음악의 합리적 , 사회학적 기초(877 - 928), 색인索引(929 - 1033)

이 방대한 책의 내용을 여기에서 개요 정도로 소개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열羅列된 목차를 보아도 웨버가 사회현상을 과학적으로 다룸에 있어 어디에 중점을 두었는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즉 일면에 있어 그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못지않게 경제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있어 종교적인 요소가 경제적인 그것에 못 하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그는 사회주의자들과 다른 면을 나타내고 있다.

1, 1사회학적 기초개념은 원서의 분량은 겨우 30면밖에 되지 않지만, 그의 이해사회학의 성과는 남김없이 수록되어 있다. 가령 물리학자는 질점質點, 속도, 등등의 기초적인 개념을 정해놓고 이것을 가지고 물리학상의 법칙에 몇 가지를 준비해둠으로써 물리현상을 엄밀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웨버는 역사와 사회 - 특히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여러 현상에 관하여서도 그것을 과학적인 엄밀성을 가지고 이해하기에 필요한 몇몇 기초적인 이념형理念型을 준비해두려고 하였다. 가령 지배에 관하여 말한다면, 그것이 역사적 사회적으로 가능한 모든 유형을 A, B, C 라는 식으로 미리 정해놓고, 그리고는 실제로 문제가 되어있는 어떤 사회의 지배형태를 가령 A에 가깝지만, B의 요소도 약간은 들어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현실이해를 가장 정확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그리고 이와같이 가능한 모든 경향을 망라적網羅的으로 열거해놓은 것을 카수이스틱(Casuistik)’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령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을 육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신장, 체중, 흉형胸形 등등 무수한 관점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역사적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 갖추어야 할 관점의 수효도 사실은 무한히 많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을 총 망라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가능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웨버는 유럽사회의 근대 역사적 현실을 이해한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그리고는 이것과 관련하여 필요한 범위 내에서 다른 사회의 역사적 현실도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관점의 일람표만을 만들어보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즉 위의 제 1장에서 전개되어 있는 순수이념형에 의한 사회학적 카수이스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 2장 이하는 이러한 카수이스틱의 응용, 전개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범위는 경제, 정치적 지배, 신분과 계급, 종교, 일반사회 관계, 시장, , 봉건제와 가산제家産制, 근대의 관료제, 도시, 국가 그리고 심지어는 음악사회학에까지 미치고 있지만, 그 궁극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근대의 자본주의사회를 그것 자체로써 직접적 또는 다른 전 근대사회와의 비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이해해보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의 웨버의 연구는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치밀하기 때문에 그 얼마되지 않은 짧은 1장이라고 할지라도 범용凡庸한 학자라면 일생이 걸려도 못다할 풍부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지금까지의 세계의 사회학은 거의 전적으로 웨버의 영향 밑에서 자라나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 점에서 그를 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라고 부를 수가 있다.

특히 제 2차대전이 끝나고 동서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웨버의 연구목표와 방법은 동시에 모든 학자의 그것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아시아에 발판을 가지게 된 미국이 자기자신과 이러한 이질異質문화사회를 비교해볼 필요성에 이끌리어 여러 방면에서 연구를 거듭하고 있거니와 이때에 있어서 웨버의 방법론은 둘도 없는 좋은 지침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3국에 있어서는, 근대화라는 시급한 과제를 앞에 놓고서 역시 웨버의 성과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에서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웨버 열이 대단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들어질 줄 모르고 있는 셈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약 10년 전부터 웨버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몇 개의 소개서와 몇 종의 번역서까지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리하여 오늘날 근대화를 논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와 사회는 마치 법률가의 육법전서六法全書와 같은 책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049  삼민주의三民主義 (1924), 손문孫文

 

삼민주의는 청말淸末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중국혁명의 지표이자 중국 근대화의 방침이고 손문사상의 결정結晶이다. 따라서 삼민주의의 이해를 위해서는 그 시대적배경과 손문사상의 형성과정을 살피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로 안다.

손문사상을 형성케 한 요소로써 태어난 시대의 환경, 탄생한 지역, 가정환경, 교육, 해외 망명생활 그리고 30여 년 간의 혁명투쟁을 꼽을 수 있다.

그가 탄생한 1866년으로 말하면 광서성에서부터 일어나 양자강 이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던,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1850 - 1864)’이 평정된 2년 후다. 만주족의 한족에 대한 지배는 이 난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으며, 한족들의 세력은 이를 계기로 크게 대두되기 시작할 때다. 또한 애로호사건을 구실로 영불英佛 양국이 중국을 다시 침략하여 천진조약(1858)’북경조약(1860)을 청에게 강요한 것도 손문이 태어날 무렵이었다. 이러한 시대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손문은 어려서부터 제 2의 홍수전洪秀全(태평천국의 지도자)으로 자처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은 동심童心에도 가증可憎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다음으로 손문이 탄생한 광동성 향산현 취형향을 살펴보면, 광동에서 16Km, 마카오에서 12Km, 홍콩에서 12Km 지점이 되는 곳이다. 말하자면 서방제국西方諸國과 가장 먼저 접촉한 지역이며, 또한 서방문화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침투된 곳이다. 혁명운동의 영수領袖인 홍수전이나 손문 그리고 유신維新운동의 지도자였던 강유위康有爲가 모두 이 지방에서 탄생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손문의 사상형성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릴 때 하와이에서 5년 간 서방교육을 받은 일인데, 그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도미渡美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태어난 지역의 연유緣由. 동남아나 구미歐美의 화교華僑의 절대다수는 광동성이나 복건성에서 건너간 사람들인데 손문의 경우도 그의 맏형(손덕창孫德彰)이 화교로 하와이에 이주해서 손문을 데려갔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형성의 소인素因이 된 것은 그가 태어난 가정환경이다. 손문은 취형향의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난했기 때문에 그의 맏형은 일찍이 화교의 신세가 되었으며, 손문 역시 가난한 탓으로 열 살이 되도록 시골 서당書堂에 입학하지도 못 했다. ‘세이이학전가世以理學傳家라는 명문名門의 집안에서 태어난 강유위와는 달라, 어릴 때부터 제 2의 홍수전으로 자처하면서 철두철미徹頭徹尾 만청타개滿淸(만주, 청국)打開를 위하여 맹진猛進한 손문의 배후에는 가정환경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받은 교육은 손문의 사상형성에 있어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젊은시절에 받은 교육이다. 손문은 열네 살에 하와이로 이주한 다음해부터 3년 간 교회敎會학교 이올라니대학(Iolani College)에서 공부하였고, 22 - 27살까지 홍콩에서 의학공부를 하였다. 하와이에서 거주한 5년 간은 감수성이 많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나 인생항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만청제국을 타도한 이후에 공화국을 세우려고 생각하고, 인간의 평등과 민권民權사상을 고취鼓吹하게 되는 배후에는 하와이에서의 미국식교육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음으로 영국에서도 왕관王冠 중의 보석이라고 하는 홍콩에서 5년 간 의학공부를 한 것도 손문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사상이 공허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분석적이고 실질적이었다는 것은 그가 배운 과학의 도움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교육은 자연과학적인 의학이기 때문에 중국인의 인체人體는 옳게 분석하고 처방할 수 있었으나, 중국사회에 대한 분석과 처방에 대한 지식과 사상은 학교교육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사회과학에 대한 지식과 사상은 그가 대학졸업후부터 투신한 30여 년의 혁명운동과 여러 번의 유럽, 미국, 일본의 망명생활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우선 그의 망명생활을 살펴보건데 1896(31), 1905(40), 1909(44), 1910(45) 등 네 차례의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 특히 그의 사상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유럽방문이다. 18969월에 뉴욕에서 런던으로 건너가 청국공사관에 구류拘留되는 봉변逢變도 있었지만, 이때부터 다음해 7월에 런던에서 떠날 때까지 약 10개월 간 손문은 주야불휴晝夜不休로 대영박물관에서 그가 필요한 사회과학연구에 몰두하였다. 그가 읽은 책은 정치, 외교, 법률, 경제, 군사, 광업, 농업, 축산, 공정工程 등 다방면의 서적들이었다. 학생시대에 이미 그는 만청타도滿淸打倒의 민족사상에 투철하게 되었으며, 하와이와 뉴욕생활을 통하여 민권사상이 굳어지게 되었지만 그의 사상의 중요한 민주주의사상은 영국생활에서 얻어진 것이다. 헨리 조지가 저술한진보와 빈곤의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손문은 당시 유럽을 풍미하고 있던,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을 보고, 중국에 있어서는 민족혁명, 민주혁명과 함께 사회혁명도 동시에 하자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그의 필생畢生과 경편經編삼민주의의 윤곽이 완성된 것이지만은 그후로 계속되는 자의 타의에 의한 세계여행은 항상 그의 사상에 새로운 것을 주입한 것이다. 특히 혁명근거지로 삼은 일본에서의 망명생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근대화과정이나 일본의 대륙정책에 대한 인식은 중국의 장래에 대한 그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가 소련과 접근하려고 생각한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그에 대한 방비책으로 고려한 점도 있다.

손문의 사상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그의 혁명운동이다. 그의 사상은 30여 년 간의 실제적인 혁명운동을 통해서 형성되고, 발전하고, 단련되었다. 만청정부를 전패顚覇하기 위한 수많은 거사擧事를 통하여 그의 민족주의는 뼈까지 스며들게 된 것이고, 혁명의 진전에 따라 장래의 중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이 굳어진 것이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영미 등 서방국가의 후원을 받으려고 기대했으나 혁명의 진보에 따라 제국주의열국과는 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손문이 누차 믿었던 - 최소의 혁명 완수를 위하여, 이용하려고 했던 군벌軍閥들의 배신과 자기가 믿었던 영미英美의 무성의로 말미암아 손문은 사상적으로 일대 수술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서남군벌들의 배신행위로 누차 상해의 외국조계지外國租界地로 망명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혁명의 전도에 대하여 깊은 근심에 잠기게 되었다. 그의 건국방략建國方略건국대강建國大綱은 이러한 환경에서 저술되었다. 또한 손문이 이러한 비운悲運에 처해 있을 때 발생한 것이 1917년의 소련혁명이다. 그해는 바로 서남군벌들의 영접으로 북경정부와 대립되는 광동군정부 대원수大元帥에 취임한 때다.

1921년 중국공산당의 창립을 위하여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의 대표인 마링은 당시 제 2차로 광동군벌의 요청으로 총통總統에 취임하여 북벌北伐을 준비하고 있던 손문을 계림桂林으로 방문하고 있으며, 1922년 말 일본으로 건너가던 코민테른의 요체는 당시 진형명의 반란으로 간신히 난을 피하여 상해로 피신해있던 손문을 방문하여 국공합작國共合作에 관한 공동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손문의 삼민주의는 변질되고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된다. 손문은 19241월에 개조된 국민당의 제 1차 전국 대표자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때의 대회선언에는 새로 발전된 손문의 삼민주의사상이 표현되었다. 손문은 19241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광동대학(후 중산대학)에서 삼민주의 강연을 했는데, 민족주의 6, 민권주의 6, 민생주의 4회에 걸친 강연내용을 한 데 모은 것이 바로 삼민주의로 보급되고 있으며, 가장 발전된 삼민주의 내용이 서술되었다.

손문의 사상은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때에 따라 변천하기는 하였지만은 그의 중심사상은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사상이었다. 그의 삼민주의는 민족, 민권, 민생으로 구성되기는 하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민족정신을 양양하자는 것이다. 그는 내부적으로 청말의 혼돈상태를 바라보고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제국주의열강의 압박에 허덕이는 중국의 현상을 보고, 중국의 민족정신을 부활하고, 한족漢族의 새로운 의식을 환기喚起하며, 중국의 도덕, 능력, 지식을 보존할뿐더러 이를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손문은 내가 주장하는 주의 가운데는 우리나라의 고유사상을 계승하는 부분도 있고, 유럽의 학설사례에서 취해온 부분도 있고, 또 내가 독창獨創한 부분도 있다고 한다. 삼민주의 가운데서도 민생주의가 가장 중요하며, 그 민생주의의 요점은 또한, ‘지권地權을 평등하게 하는 것자본을 절제하는 것이다. 손문의 혁명동지였던 호한민胡漢民삼민주의의 연환성連環性이라는 저술을 내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삼민주의를 계통적으로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주의는 민족주의의 이상이고, 민족주의는 세계주의의 실천이다’‘무정부주의는 민권주의의 이상이고 민권주의는 무정부주의의 실천이다’‘공산주의는 민생주의의 이상이고 민생주의는 공산주의의 실천이다그런데 손문의 유저遺著를 세심하게 읽어보면 세계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것은 확실히 호한민이 말한대로 언급한 일이 있지만 무정부주의에 관해서는 손문은 그런 뜻의 이야기를 한 일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삼민주의와 공산주의를 혼동해서는 아니 된다.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1. 민족적 부분 - 손문은 민족혁명을 계획하고 있는 데 반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조국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정권 부분 - 손문은 지식분자의 정치주권을 주장하였지 결코 노동자나 농민을 정치운동의 중심으로 삼고있지는 않다. 공산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무산無産계급에 의한 정권의 탈취와 그들에 의한 전권專權을 주장하면서 어디까지나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3. 경제 부분 - 손문은 장래에 있어서의 공산제의 가능성과 민생사관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공산주의자들은 현재에 있어서의 공산제와 유물사관을 주장하고 있다.

4. 문화 부분 - 손문은 구 도덕의 현창顯彰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공산주의는 구 도덕을 증오하고 파괴한다.

5. 실행 부분 - 손문은 평화, 점진漸進, 조화를 주장하는데 반하여 공산주의는 투쟁, 급진急進, 철저徹底를 주장한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부언附言해야 할 것은 손문의 사상은 완정完整된 것은 아니며,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연구와 발전에 노력한다는 점이다. 손문학회도 그 중 하나다.

 

<사족蛇足> 이 책들을 윤색하면서 재독을 했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 다른 생각을 한다. 대부분의 책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어떻게 잘 살아볼 수 있을까 하는 책들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삼민주의 등등 모두가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평등세상을 희구한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다. 우리나라를 사례로, 우리나라는 경제적 발전으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 있는데, 빈부의 차가 크다. 그런데 사람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면서 빈민을 방치하고 우주개발, 건축, 도로 건설, 투자 등 더 발전적인 인프라 구축에 총력을 기우린다. 하류 빈민층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거지다. 인프라 구축은 전 국민 최저생계비를 주고 남은 돈으로 하자. 발전은 하늘과 우주처럼 높이가 없다. 노숙자와 휴지 줍는 노인들을 구제하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아프리카 빈민을 먼저 굶어죽지 않게 돕고 돈이 남으면 우주로 가자. 먼저, 사람답게는 놔두고 굶어죽지 않고, 굶어죽는 사람을 방치하고 우주로 하늘로 간들 무엇이 발전인가? 사람은 우선 살아야 한다.

 

050  나의 투쟁鬪爭 Mein Kampf (1925 - 1927), 히틀러 Adolf Hitler

 

히틀러(1889 1945)나의 투쟁(이하 투쟁)’은 제 3제국帝國이 등장하는 과도기의 산물이다. 그러면 이 과도기란 과연 도이치가 어떠한 상황에 있었던 시대였을까?

1918년 호헨졸레른 왕가王家의 도이치제국을 무너뜨린 혁명은 1030일 키엘군항軍港에서 수병水兵들의 반란을 계기로 발단되었다. 즉 제 1차 세계대전에 있어서의 군사적인 패전은 이미 결정적인 것으로써, 모든 병사들과 일반대중은 무익한 전쟁의 희생물이 될 것을 거절한 것이다. 따라서 혁명의 물결은 도이치 각지에 파급되어 수도 베를린에서는 무장노동자들이 혁명병사들과 119일 왕실은 물론 주요관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918년의 도이치혁명은 1년 전에 레닌에 의하여 지도된 러시아의 10월혁명과는 달리 혁명적 정당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도이치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당은 있었다 하더라도 혁명주도부는 뚜렷하지 않고, 다만 좌익정당이라든가 혁명가들은 대중의 혁명물결에 뒤쫓았을 뿐이다.

119일에는 공화정이 선포되고 군주정권에 대신하여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수반首班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황제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폴란드에 망명하였다. 1111일 중앙당의 에르츠베르거를 위원장으로 하는 도이치 휴전위원회가 연합국과 휴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 1차 세계대전은 끝을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바이마르공화국시대에 들어서자 반동적인 국수주위와 군국주의자들은 도이치 패전이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사회주의자와 유태인의 배신 이른바 배후背後로부터의 와해瓦解에 기인하였다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만들어 그들을 ‘11월의 범죄자라 부르고, 처음부터 바이마르공화국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즉 베르사이유조약에 조인한 것은 도이치제국에 대한 반역자인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가들이라는 선전은 패전의 책임이 부당하게도 바이마르공화국에 전가되어버렸다.

1919년 바이마르헌법이 채택되었으며,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는 나는 혁명을 범죄와 같이 증오한다는 에베르트가 취임하였다. 동시에 사회민주당 우파에 속하며 제정帝政도이치의 최후 내각에도 입각한 샤이데만이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회민주당에 우파 지도자들은 구 세력, 특히 군부와 손을 잡고 러시아의 소비에트를 본따 형성된 노병평의회勞兵評議會를 통하여 혁명을 증진하려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을 강압하였다. 샤이데만정부도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한편 19196월에 조인되고, 19201월에 발효한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은 일찍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패전한 도이치에게 가혹했다. 그 가운데서도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다는 사실은 전쟁의 의한 경제적 파탄과 이에 따른 인플레를 촉진시켰을 뿐더러 도이치에 큰 정치적 및 사회적 부정을 조성시켰다. 이러한 정세 하에 1923년 프랑스는 도이치의 배상금 지불을 이유로 중공업의 중심인 루르지방을 점령하여 도이치국민의 빈궁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이치국민들은 베르사이유조약의 중하重荷를 크게 느끼게 되었으며, 국수주의자와 군국주의자들의 세력에 동조하는 경향이 짙어갔다.

이러한 동향에 힘입은 국쇄國鎖주의자들과 군국주의자들은 더욱 더 공화제를 적대시하고, 그들의 운동과 조직을 확장해나갔다. 히틀러가 뮨헨에서 폭동을 일으킨 것도 바로 이 시기다. 1923118, 바이에른 주정부의 실력자가 뮨헨의 비어홀에서 연설하는 기회를 틈타 이른바 비어홀폭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실패하고 체포되어 1924226, 재판에서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아야 함에도 5개월의 감금형을 받았다. 더욱이 히틀러는 수감 중에도 귀빈貴賓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9개월 후 19241120일에 석방되었다. 히틀러가 이와같이 관대한 형을 받게 된 것은 상술한 바와 같은 도이치정권과 국내동향의 결과다. 히틀러는 이를 계기로 오히려 도이치국민들의 눈에 영웅으로써 또한 애국자로써 투영投影되었다. 투쟁은 이러한 시대적배경아래서 세상의 햇빛을 보았다.

투쟁은 그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레이강변의 란즈버그 요새要塞 감옥에서 그의 협력자인 모리스와 헤스에게 구술된 것을 엮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읽기 어려울 정도의 악문惡文이다. 이 책은 2권으로 되어 있는 바, 재판에서는 개정된 부분도 있다고는 하나, 그 개정된 부분은 좋지 못 한 용어라든가, 문장을 삭제 내지 변경했을 뿐이며, 전체 내용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1권은 1925년에, 2권은 1927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판매부수는 년 간 약 1만 부였으나, 나치스세력의 신장과 더불어 그 부수도 증대되었으며, 특히 1933,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년 간 약 5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1940년에는 무려 6백만 부가 팔렸다.

첫째 권은 논평이라는 제목으로, 히틀러의 탄생에서부터 제 1차 세계대전을 거쳐, 뮨헨에서 나치 전신인 도이치노동당에 입당하여 그것을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으로 발전시킨 것까지를 수록한 것으로써, 12장으로 되어있다. 이 책에서는 대체로 히틀러의 성격형성과 논리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권은 국가사회주의운동이라는 제목으로, 히틀러의 세계관을 비롯하여 나치스의 세력확장과 정책이 다루어지고, 15장으로 구성되어있다.

따라서 나의 투쟁은 히틀러의 사상과 나치즘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첫째 권에 있는 히틀러의 자서전적 부분과 , 둘째 권에 있는 그의 역사해석 내지 여기에 원용되고 있는 오스트리아나 비스마르크정책에 관한 그의 견해는 믿을 수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실은 나의 투쟁이 나치즘연구를 위한 자료적가치를 감소시키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책은 히틀러가 한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어떠한 허위와 술책을 사용했는가를 어떻게 분식粉飾하며, 나치당간부가 신격화되도록 했는가를 역력히 보여줌으로써 나치즘이라는 독재정치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 나의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히틀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히틀러의 사상이 투쟁 가운데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잠견暫見함으로써 나의 투쟁의 내용에 대할까 한다.

히틀러는 제 1권 제 3장의 끝부분에서 은 과거에 있어서도 가장 무정한 거리이며, 지금 역시 그러하지만, 나의 인생에 있어서도 가장 유감없는 학교였다. 나도 거기서 나의 세계관이라든가 정치지식의 토대를 닦았다. 그 후 나에게는 늘 그 세부를 풍부하게 만들 일만이 남겨졌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히틀러의 입장은 제 2권 제 2국가에서 더욱 반증되어 있다.

아무튼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도이치를 세계 최 강대국으로 만들어낼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일찍이 도이치의 그러한 예를 프리드리히대왕의 시대로 들고 있다. 그리고 최대 강국이 되기 위한 여러 방책을 논의하면서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힘의 정책임을 강조하고, 그 수단으로 군사력 강화, 식민지 획득, 돌격대의 편성, 나치스의 시위示威운동을 열거하였다. 이러한 힘의 정책을 근저로 하여 도출해낸 것이 그 유명한 지도자론이다.

이것은 의회주의정치를 배제하고, 그 대신 히틀러가 말하는 게르만적 민주주의인 지도자사상을 확립한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 사상이 민족관에 전용轉用될 경우 편협한 아리아인종 우월론이 도출되며, 이 세상 인류 가운데서 최고 인류인 아리아 인종만이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을 밑받침으로 하여 히틀러는 그의 자연적 귀족주의 이념토대로 하는 광신적 국가관과 세계 재패의 야욕을 아낌없이 이 책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히틀러의 이러한 광신적 민족주의 국가관은 그의 편협한 논리의 기만성欺瞞性과 사상의 빈곤성을 여실히 들어낸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내용으로 충만되어 있는 투쟁이 도이치는 물론 이 세상에 미친 영향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다. ‘투쟁에 나타난 사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및 사회적 불안이 심할수록 유리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바이마르공화국으로 출발한 패전 도이치는 바로 이러한 온상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히틀러는 감옥에서 풀려나오자 나치스당을 재건함과 아울러 돌격대, ‘히틀러 유젠트라는 청년단, 나치스학생연맹, 도이치부인회, 나치스교원연맹, 나치스변호사협회 및 나치스의사협회 등을 조직하여 그의 산하傘下에 넣었다. 이와같이 세력을 확장해나간 나치스당은 1929년 세계 공황恐慌을 계기로 실시된 총선거에서 나의 투쟁에 나타난 바와 같은 교묘한 선동과 선전으로 107석의 의석을 획득하여 일약 제 2당이 되었다. 그 후 19327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는 돌격대의 폭력과 선동활동으로 나치스당은 330석이라는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제 1당이 되었다. 그리하여 1933130일에는 마침내 히틀러가 수상의 자리에 앉았다.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바야흐로 투쟁에서 제시한 그의 정치이념을 실현시킬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히틀러는 정적政敵들을 숙청熟淸하고 감시하기 위하여 괴링으로 비밀경찰을 창설하게 하고, 1933227일에는 의사당 방화사건을 일으켜 국민을 탄압하는 구실로 삼았다. 드디어 동년 323일에는 전권全權부여법을 국회에서 가결하고, 유태인 배척, 사회민주당 금지, 신당 신설 금지법을 제정하여 일련의 독재정책을 내세웠다. 193482, 힌덴베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통 겸 수상의 자리에 올라 명실공히 정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나치즘 독재정치의 기틀을 굳건히 하였다. 투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히틀러는 유태인을 매우 증오하였다. 따라서 그가 권력을 잡은 이상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19334월에 제정된 공무원법에서는 유태인의 혼혈인은 공직에서 추방할 것을 규정하고, 19359월의 뉴렌베르크법에서는 유태인 및 1/ 4 이상 유태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하고, 유태인과 아리아인과 결혼을 금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939년 이후에는 유태인 박해가 폭력으로 변하고, 마침내 살육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울러 기독교 탄압도 병행되었다.

또한 투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히틀러는 여러 민족 가운데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권리가 잇다는 논리의 귀결로서 베르사이유조약에서 맺은 군비축소를 무시하고 군비 경쟁을 서둘렀을뿐더러 군비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후에는 제국주의정책을 표방하여 영토 침략에 나섰다. 이러한 침략주의정책은 마침내 제 2차 세계대전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세계는 일찍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전화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나치즘은 불안의 시대에서 탄생되어 세상에 풍파를 불러일으켰다. ‘투쟁이 출판되자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무려 7천만 부 이상이라는 경이적인 발행부수를 냈다는 것도 결코 우연한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고보면 오늘날에 있어서도 나의 투쟁은 결코 과소寡少평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유동적인 사회,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나의 투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나치즘의 아류亞流가 발생할 소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 2로 넘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