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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이야기-5 야수의 본능을 가진 포수

북새 2020. 9. 16. 09:20

세기世紀의 사냥꾼

<사냥꾼이야기 5> 140화 

홍학봉洪學奉, 박춘호朴春浩 , 김왕석 역

이천만 윤색潤索

 

<목차>

 

140. 야수野獸의 본능을 가진 포수

 

18837월 어느 날, 만주 하얼빈에 있는 러시아인 모피상毛皮商 사모로위치의 집에서 달란인, 고리드인 사냥꾼 대여섯 명이 모였다. 북방 사냥꾼들이 좋아하는 화주火酒에 푸짐한 양요리 안주가 나오는 술자리였으며 술기가 돈 그들은 사냥얘기가 무르익었다. 달란인과 고리드사냥꾼들은 사모로위치와 호피虎皮(호랑이가죽), 흑초黑貂(수달), 여우껍질 거래를 하는 사냥꾼들인데 사모로위치는 그들과 오랜 우정의 표시로 잔치판을 벌였다고 했다. 잔치가 한창일 때 중년의 러시아인 남녀가 들어왔다. 사모로위치는 친구라고 말했으나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우선 미모美貌의 여인이 달란말을 할 줄 알았고, 웬만한 고리드말도 알아들었다. 달란인과 고리드사냥꾼들은 중국말로 사모로위치와 대화를 했으나 서로 중국말이 서툴렀으므로 제대로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타리나라는 여인은 달란말을 꽤나 잘 했기 때문에 대화가 상세해졌고 활기를 띠었다. 나타리나는 인류학을 전공한 학도인데 그 당시 만주에 진출한 러시아 정보부를 돕고있었다. 함께 온 사모어소령은 러시아정보부 소속이다. 사모어소령은 중대한 밀명密命을 받았다. 북만주 소싱안령(소흥안령小興安嶺) 동쪽 일대와 우수리강 유역의 만주와 러시아의 국경지대를 탐험하라는 지시다. 만주를 정복하려고 계획을 세운 러시아는 동북만주의 지세地勢, 지하자원, 동식물 등을 조사할 대규모의 학술단을 파견하려고 했는데 그에 앞서 사모어소령에게 예비조사를 시키기로 했다. 당시는 세계 어느 나라 지도에도 그 지역이 백지白紙였다. 그곳이 삼림森林지대인지, 광야廣野인지, 습지濕地인지도 알 수 없었고, 광대한 지역 어디에 어떤 사람, 어떤 동물이 살고있는지도 분명치 않았다. 다만 뱀, , 이리, 흑초, 오소리, 여우들이 살고있고, 사슴, 노루, 맷돼지 등 초식동물이 많다는 정도의 얘기만 떠돌았다. 그 광대한 지역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았으나 그래도 일부 산기슭이나 삼림어구 또는 강유역에는 만주족을 비롯하여 조선인, 달란인, 고리드인 등 일부 소수민족들의 마을이 산재되어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들 소수민족들은 호피, 흑초, 여우, , 곰 등의 껍질을 하얼빈에 가지고와 러시아 모피상들과 거래를 했는데 사모어소령은 거기에 주목했다. 그들 소수민족 사냥꾼들과 만나 그들의 협력을 얻기로 했다. 원주민사냥꾼들은 부탁을 받고 흥분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 민족에 대한 긍지를 갖고 있었으며 다른 민족 특히 러시아와 같은 대국大國사람들의 부탁을 받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원주민사냥꾼들은 즉시 러시아인들의 요청을 받아주겠다고 말했으나 이내 당황하더니 침묵했다. 단둘이서 광대한 북만주의 국경지대를 탐사하겠다는 러시아인들의 요청이 실현될 수 없는 모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 러시아인들은 제 정신이 아닌 미친사람 같았으며 미친사람을 어떻게 도와주겠는가? 원주민들의 침묵은 고통스러웠다. 일단 승락했던 요청을 다시 거절할 수 없다. 그들은 조그마한 소리로 서로 의논했다. 그 결과 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델수를 찾아야 해. 델수의 도움을 받으면 그런 일도 할 수 있어.’

그들은 모두 협력하여 델수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델수는 누구인가? 델수포수는 고리드사냥꾼인데 그는 이리의 코와 독수리의 눈 그리고 사슴의 귀를 가지고 있었다. 델수는 야수의 본능과 야수의 민첩성, 야수의 끈기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델수는 또한 총을 갖고있었고, 그 총솜씨는 백발백중百發百中이었다. 그러나 델수를 찾아내는 일은 어려웠다. 델수는 북만주의 원시림을 혼자서 돌아다니는 사냥꾼이었으며, 그가 잡은 짐승은 한정되어 있었다. 화사한 껍질의 범과 흑초, 주먹만한 쓸개의 흑곰, 연분홍색 뿔을 가진 초여름의 사슴 등이 델수가 잡는 사냥감이었고 다른 짐승은 눈앞을 지나가도 잡지 않았다. 델수는 그런 짐승을 잡으면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역에 있는 어느 고리드마을에 던져놓고 가버렸다. 그 마을에는 델수의 처와 아들이 살고있었다. 그러나 델수가 언제 마을에 들릴지는 알 수 없다. 1년에 한두 번이었는데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델수의 가족이 살고있는 고리드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고리드족은 사냥감을 찾아 원시림을 떠돌아다니는 수렵족이었고, 마을의 규모도 서른 명 내외에 불과했다. 따라서 같은 고리드족이라도 어떤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고리드족은 서로 연락을 하는 방법이 있기에 찾을 가능성은 있다. 원시림에서 사냥을 하다가 그를 만나는 원주민사냥꾼도 있고, 그를 만난 심마니도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원주민사냥꾼들이 델수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자기들의 마을에 돌아간 그들은 두 달 쯤 뒤에 델수를 찾았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델수가 가족이 있는 마을에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때가 9월 초다. 곧 겨울의 시기다. 겨울에 탐험을 할 수는 없다.

 

북만주의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다.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며 삼림의 나무들이 쓰러지는 폭풍과 폭설이 불어닥친다. 탐험은 7월 초에 시작하여 10월 말게 끝낼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을 두 달 동안이나 늦출 수 없다. 러시아 극동정보국은 사모어소령에게 탐험을 강행하라고 지시했다. 그 탐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러시아의 만주 침략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갑시다. 어차피 죽은 목숨 아닙니까?’

나타리나가 차디차게 말했다.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여인이었지만 두려움을 모르는 여자다. 사모어소령과 나타리나는 사흘 후에 소싱안령산맥 동북쪽에 있는 삼림에 들어갔다. 9월 초였지만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고리드족마을에서 사냥꾼 델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레나룻이 짙은 보통 키의 사내였는데 다부진 몸이다. 약간 우울하게 보이는 표정인데 눈이 예사롭지 않다. 야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이다. 델수는 러시아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뜻밖이다. 목숨이 걸린 위험한 일을 어떻게 그리 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델수는 아들을 장가들이려고 했는데, 그 아들은 사냥을 하다가 왼쪽 팔을 잃은 병신이었다. 그래서 며느리를 사오는데 꽤 많은 돈이 필요한데 러시아인이 제공하겠다는 돈이면 충당할 수 있다. 델수는 본디 말이 적은 사람인데 짧게 말했다.

바쁘니까 둘이서 먼저 가시오.’

어떻게 그 광대한 삼림에서 하루 전에 떠난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는지?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사람이란 두 발로 걸어다니는 동물이기 때문에 발자국을 남기게 되어있어요. 그 발자국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땅속으로 꺼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걸 찾아낼 수 있소.’

하긴 그 사나이는 발자국추적의 명수이며 그는 추적한 짐승의 발자국을 지옥까지도 따라간다는 소문이었다.

사모어소령과 나타리나는 삼림 안으로 들어가 동쪽을 향해 걸었다. 그날 밤에는 바위틈 사이에 모닥불을 피웠다. 송진으로 피운 모닥불이 활활탔으나 추웠다. 화염을 받은 얼굴은 화끈거리고 등쪽은 얼음짱이었다. 나타리나가 잠자리를 만들었다. 마른 풀을 두껍게 깔고 군용담요 두 장을 나란히 붙여 깔았다. 춥기 때문에 들은 몸을 꼭 껴안고 자야하는데 나타리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여인이다.

다음 날 하오 러시아인들이 물이 마른 하천바닥에서 쉬고있을 때 등 뒤에서 얕은 기침소리가 들렸다. 델수다. 델수는 이리껍질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작은 배낭을 맸다. 둘둘 만 밧줄을 어깨에 걸치고 허리에는 작은 손도끼, 왼손에 총을 거머쥐었다. 러시아군대에서 사용하는 구식단발총인데 총신을 잘라 짧게 개조했다. 손질이 잘 되어 번들거렸다. 걸치고 다니는 이리껍질외투는 방수防水가 잘 되기 때문에 이부자리가 되고, 손도끼로는 나무를 잘라 땔감을 만들고, 이쑤시개도 만드는 등 만능도구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기도 되었다. 거리가 20m 이내 같으면 도끼를 날려 토끼를 잡았다. 러시아인들이 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잠시 삼림 안으로 들어갔던 델수가 노루를 한 마리 잡아왔다. 짐승들이 총소리나 화약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에 덫을 놓아 잡았다고 했다.

여기는 노루숲이라고 불리지요. 노루들이 많아요.’

그 삼림에서는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꿩이 날아오르고 노루들이 툭툭 뛰어나왔다. 그래서 노루를 노리고 범, 표범, 이리들이 들어왔으나 노루가 잘 잡히지 않았다. 노루는 워낙 청각, 후각이 예민하고 동작이 빠르기 때문에 범은 노루사냥을 하지 못 하고, 이리들도 그랬다. 이리는 포위를 해서 노루를 잡으려고 했으나 노루는 껑충껑충 뛰면서 포위망을 뚫었다. 표범이 가장 노루를 잘 잡았는데 추위에 약했다. 그곳은 표범이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잇는 한계선이며 표범은 여름 한 철 나타났다. 털이 짧고 지방층이 얇은 표범은 추위를 이기지 못 해서 그곳에서는 살지 못 한다. 그러나 표범보다도 털이 짧고 지방층이 얇은 노루는 건재했으며, 추위에 강하다는 이리들이 얼어죽는 곳에서도 노루는 건재했다. 동양에서 노루는 음지陰地(그늘)의 짐승이라고 불리우며 노루는 날씨가 추워도 햇빛을 싫어하고 그늘을 좋아한다. 노루는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동북부 어디에도 살 수 있으며 델수는 노루가 탐험대의 친구가 되리라고 주장했다. 델수가 노루를 요리했는데 그는 우수한 요리사였다. 그의 배낭에는 마늘, 생강, 고추 등이 박혀있는 된장항아리가 나왔고, 기름, 식초, 화주火酒와 말린버섯도 있었다. 델수는 노루고기를 꼬치에 끼워 양념을 발라 모닥불 가장자리에 꽂아 돌려가면서 구웠는데 하얼빈의 어느 고급요리점에서도 맛볼 수 없는 훌륭한 요리였다.

 

댈수는 러시아 남녀가 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러시아인들은 신문지 크기의 종이에 무엇인가를 기록하였다. 만주동북부의 지도에는 소싱안령산맥과 우수리강이 나타나 있을 뿐이고 다른 부분은 백지白紙였다. 러시아인들은 그 백지지도에 자기들이 걸어온 길과 주변 지세를 깨알같이 기록했다. 러시아인들이 델수에게 진행할 길을 손가락으로 그려보였다. 일정한 목적지가 없이 탐험을 하기 때문에 지그재그로 되어있었다. 델수가 동북만주에는 들어가면 안 되는 지역이 있다고 하면서 그곳을 손가락질했다. 첫째는 범들의 집결지다. 만주와 러시아에 사는 범들이 1년에 한 번 겨울에는 한군데에 집결했다. 서로 만나 집단으로 선을 본 다음 짝짓기를 한다. 작게는 열서너 마리 많게는 서른 마리나 되는 암수범이 모여드는데, 그 때의 범은 모두 신경과민이 되어 눈에 띠는 동물은 무조건 찢어죽인다. 사람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걸 모르고 함부로 들어간 포수, 심마니, 나무꾼은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 5월부터 6월까지 초여름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지역이 있다. 사슴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그 때 숫사슴은 묵은 뿔이 떨어지고 새 뿔이 솟아오르는데 그게 녹용이다. 만병통치의 영약靈藥이며 호피虎皮만큼이나 비싸다. 그래서 그 때 숫사슴을 잡으려는 포수들이 돌아다녔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포수가 아닌 마적馬賊이나 범죄자들도 있다. 마적이나 범죄자들은 숫사슴만 노리는 게 아니고 숫사슴을 잡은 포수도 노렸다. 사슴을 잡지 않은 포수도 값비싼 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적이나 범죄자들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죽였다. 세 번째는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높은 산이다. 그곳에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첩보기관원들이 숨어있었다. 그 당시 만주는 사실상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며 만주를 침략하려는 여러 열국列國들이 첩보원들을 보냈다. 특히 러시아와 일본은 자기네 군사요충지를 찾아 상대방을 탐지하려고 많은 첩보원을 보냈다. 그들도 산중에서 사람만 보면 무조건 사살했다. 따라서 사모아소령이나 나타리나도 일본군만이 아니라 러시아 첩보원에게 사살될 위험이 있다. 자기들 편인가 아닌가를 가리기 전에 총탄이 먼저 날아왔다. 위험지역은 또 있다. 동북만주의 삼림 여기저기에 있는 마을들이다.

 

동북만주일대의 원시림에는 포수들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그래도 범이나 사슴을 쫓는 일부 사냥꾼들이 길을 잃고 들어갔다. 특히 남쪽에 있는 장파이(장백長白)산맥에서 범사냥을 전문으로 하던 러시아인 포수들이 그런 실수를 했다. 몇 년 전에도 두 명의 러시아인 포수들이 총탄에 맞아 절룩거리는 범을 추격하려고 삼림에 들어갔다.

바로 저 쪽 산 중복이었지요.’

델수가 말했다. 델수도 그 때 절룩거리는 범을 발견했으나 그 범을 쫓지 않았다. 동북만주의 원시림은 약육강식의 무법지대였으나 그래도 포수들 사이에는 지켜야 할 질서가 있다. 오랜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 질서이며 어기면 죽임을 당했다. 그 관습법 중 하나는 남이 먼저 손댄 사냥에 끼어들거나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델수는 그래서 그 범을 그대로 두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통나무사냥집을 발견했다. 통나무사냥집이란 일부 소수민족 사냥꾼들이 폭풍이나 폭설을 만났을 때 피신을 하려고 만든 대피소인데 그 사냥집이 시커멓게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두 사람의 러시아인 사냥꾼의 시신屍身이 있었다. 러시아인 포수들은 불에 타 죽었는데 이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사냥집의 불은 바깥에서 안으로 타들어갔고 집 주변에 마른 풀이 쌓여있었다. 방화放火가 분명하다. 죽은 러시아인 포수들의 소지품이 없는 것도 수상하다. 델수가 상세히 조사를 했다. 발자국들이 발견되었다. 고무바닥 가죽신인데 만주인들이 신는 신이다. 더 이상 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범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북만주의 삼림 남쪽에는 만주인, 달란인, 고리드인, 조선인들의 마을들이 있었는데 만주인들의 마을이 가장 컸다. 다른 부족의 마을에는 50여 명이 살았으나 만주인들의 마을에는 수백 명이 살았다. 만주인들은 음으로 양으로 관官憲의 비호庇護를 받으면서 횡포를 부렸는데 그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러시아인 포수다. 러시아인은 총을 가지고 다녔고 만주인을 대하는 태도도 오만했다. 만주인들은 러시아인들이 범을 잡는 걸 특히 싫어했다. 만주인들은 범을 산신령으로 모셨으며 범을 보면 큰절을 했는데 러시아인들은 그런 산신령을 마구 죽여 껍질을 벗겼다. 그래서 만주인들은 러시아인을 몰래 죽이거나 해쳤다.

 

델수도 만주인을 싫어했으나 탐험에 나선지 사흘만에 어쩔 수 없이 만주인마을에 들어갔다. 때 아닌 비가 내리는 건기乾期였다. 델수는 지평선 위에 나타난 시커먼 구름을 보더니 비가 내릴 것이니 남쪽으로 진로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델수는 일기예보능력이 있어 이번 비가 꽤 오래 내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남쪽의 만주인마을에 머물러야만 한다고 했다. 델수의 예언대로 그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남쪽 강변에 마을이 보였다. 만주인마을에는 두꺼운 흙벽돌로 지은 집들이 서른 채 쯤 있었고 굴뚝에서 연기가 올랐다. 일행이 마을에 도착하자 만주인들이 나왔다. 모두 시무룩한 표정이었으며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만주인들은 이방인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이방인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잘못 대하면 후환이 있을 수도 있다. 러시아는 대국이며 힘이 있다. 만주인마을 촌장은 어쩔 수 없이 이방인들에게 흙벽돌집 한 채를 빌려주었다. 그 집은 꽤 넓었으나 어두웠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겨울추위에 대비한 집에는 창이 없고 원목原木으로 짠 문이 하나 있을 뿐이다. 만주인은 본디 목욕을 하지 않았다. 온몸이 짐승들의 비늘처럼 때가 눌러붙었다. 몸냄새 뿐만이 아니다. 만주인들은 집에서 돼지들과 동거했다. 가족들보다도 많은 돼지가 동거를 했다. 그래서 만주인은 비교적 부유富裕하다. 농사를 짓고 돼지, 당나귀, 염소, 닭을 길렀다. 소수민족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생활필수품을 비싼 값으로 팔고, 돈이 없으면 빌려주었다. 이자가 원금 보다 많은 고리채高利債. 달란인이나 고리드인들은 수렵인들이라 짐승들이 잡히지 않으면 굶는다. 만주인들은 소수민족이 돈을 갚지 않으면 그들을 노예奴隸로 삼았다. 노예에게 일을 시켰고, 쓸만한 여자들은 첩을 삼았다. 탐험대 일행이 유숙留宿한 만주인마을에도 노예와 여인들이 열서너 명 쯤 있었다.

 

장마비가 사흘째 계속 내렸다. 러시아인들은 집에서 내뿜는 고약한 냄새에 죽을 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빈대, 벼룩이 들끓었다. 그래서 마을어귀에 간이천막을 쳤다.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가는 천막인데 빗물이 스며들었다. 그래도 방보다 나았다. 그 날 밤 바깥에서 소리가 났다. 다투는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얼마 후 델수가 나타났다. 어떤 젊은남자가 강을 건너와 마을에 들어왔는데 마을경비원들과 싸웠다고 했다. 다음날 진실이 밝혀졌다. 젊은남자는 달란인이었으며 마을에 사는 달란인여인을 납치하려다가 경비원에게 발각되어 싸움이 벌어졌다. 달란인여인은 촌장집에서 사는 하인下人이다. 촌장은 빚을 갚지 못한 달란인의 딸을 하인으로 데리고 있다고 했으나 실상은 첩이었다. 세 명의 경비원들이 달란인을 잡으려고 했으나 도망가버렸다. 경비원 한 사람이 달란인을 쫓다가 부상을 입었고, 두 사람의 경비원이 계속 달란인을 쫓았는데 강변에서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나이에게 기습을 당했다. 촌장은 경비원을 기습한 사나이를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나이가 힘이 세고 민첩했으며 경비원 두 명이 달려들어도 당해내지 못 했고 했다. 얘기를 들은 사모어소령도 짐작했다. 이틀 후 비가 그치지 일행은 만주인마을을 떠났는데 델수가 그제서야 실토를 했다. 마을 어귀에서 천막을 치고 있는 러시아인을 찾아가던 델수는 만주인들에게 쫓기는 달란인을 보았다. 만주인들은 손전등을 휘두르며 달란인을 쫓았는데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달란인청년은 죽을 것이다. 그는 약혼녀를 구하려고 만주인마을에 들어왔다. 델수가 그 청년을 살려주기로 했다. 델수에게 만주인 경비원 두 명을 처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델수는 신속하게 처리했고 경비원들은 누구에게 어떻게 당한지도 모르고 도망을 갔다. 사모어소령이 웃었다. 그러나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모어소령은 델수가 마을에 침입했던 달란인청년을 구해주는 것만으로 일이 끝난줄 알았으나 델수는 만주인마을의 달란인들을 모두 구하려고 했다. 델수는 그런 계획을 러시아인들에게 말 하지 않았다. 탐험대가 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있었다. 탐험대는 계속 동북쪽으로 가고있었는데 그 일대는 사흘 동안 내린 비로 온통 습지濕地로 변했고 무릎까지 차는 물은 점점 더 깊어졌다. 방향을 바꿔 고지대로 올라가야 한다. 날이 어둡기 전에 삼림지대로 올라가야 하는데 물이 점점 깊어졌다. 주위도 깜깜해졌다. 그 때 삼림이 있는 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횃불이었다. 델수가 공포空砲를 쏘았다. 총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왔다. 커다란 땟목이다.

아덴타, 델수!’

누군가 고함을 쳤다. 아덴타는 달란말로 대인大人이라는 존칭尊稱이다. 횃불을 든 열서너 명의 달란인들이 땟목에 타고있었고 통나무배가 안내를 하고있었다. 통나무배에 탄 달란인은 어제밤 델수포수가 구해준 청년이다. 러시아인들이 땟목으로 옮겨탔다. 손님을 환영하는 팔과 가슴이 러시아인들을 안아주었다. 아직 따뜻한 주먹만한 만두도 건네주었다. 만든지 몇 시간이 지났을텐데 따뜻했다. 달란인들은 만두를 가슴에 품어왔다. 델수가 통나무배를 타고 뗏목을 지휘했다. 횃불은 꺼졌으나 뗏목은 조용하게 남쪽의 만주인마을로 향했다. 어쩌자는 것인가? 만주인마을에는 열 명이 넘는 경비원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 자정 쯤 만주인마을이 보였다. 손전등불빛도 보였다.

 

최악의 상황이다. 만주족이 고용한 경비원은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살인자다. 만주족마을에는 50여 명이 넘는 남자들이 있고,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델수는 단 두 명의 달란인을 데리고 마을에 쳐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없다. 사모어소령은 불안한 표정을 보고 나타리나가 말했다.

염려하지 말아요. 델수는 예사 포수가 아닙니다. 그는 야수의 본능을 가지고있는 초인적超人的인 포수입니다. 그는 어둠을 꽤뚫는 올빼미의 눈을 갖고있고, 이리처럼 냄새를 맡는 코를 가지고 있어요. 거기다 표범처럼 빠르지요.’

사모어소령은 델수가 시킨대로 땟목에 머물렀다. 델수가 상륙을 한지 한 시간이나 되었지만 마을은 조용했다. 그러다 갑자기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경비원들의 총소리와 델수의 총소리다. 델수는 구식 단발 라이플을 가지고 있다. 경비원들이 손전등을 휘두르며 추격을 했다. 델수가 달란인들을 구출하여 마을을 탈출하고 있었다. 경비원만 추격을 하는 게 아니라 수십 명의 마을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추격을 했는데 그들도 총을 가지고 있다.

저 놈들을 모두 잡아죽여라!’

고함소리가 들렸다. 델수는 달란인포로들 뒤를 따라오면서 응사應射를 했는데 혼자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막아낼 것인가? 도망치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

다친 사람은 내가 데리고 갈테니 모두 빨리 땟목으로 가라!’

델수가 고함을 지르는 사이에 달란인들이 땟목에 올랐다. 만주족촌장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여인도 끼어있었다. 델수는 부상당한 사람을 데리고 오느라고 변변히 응사도 못 했다. 델수의 단발 라이플로는 그 많은 적을 상대할 수도 없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사모어소령이 발포했다. 사모어소령의 총은 미국제 최신형 반자동 6연발 라이플이다. 나타리나도 체코제 6연발 권총을 발사했다. 연발 라이플과 권총을 발사하니 마치 기관총 같았다.

 

만주인 경비대에 집중사격을 했다. 경비원들은 북만주광야를 떠돌아다니는 직업적 살육자들이다. 만주의 지방토호土豪들이 비적匪賊의 습격을 방어하려고 돈을 주고 고용한 살인자들이다. 수감중인 죄수나 깡패들이다. 러시아인들의 집중사격을 받은 경비대에서 희생자가 났다. 그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밭두렁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본디 돈 때문에 움직였으므로 목숨을 걸고 충성하지 않았다. 50여 명이나 되는 마을장정壯丁들도 싸움을 포기했다.

부자富者는 싸우지 않는다.’는 중국격언格言이 있다. 델수와 그가 구출한 달란인들이 다음 날 아침께에 달란인마을에 도착했다. 부상당한 젊은이도 경상輕傷이었다. 사모어소령의 탐험대는 임무와 관련이 없는 일을 한 셈이었는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달란인들이 탐험에 협력했고 큰 도움을 받았다. 달란인들은 수렵족이고 사냥감을 찾아 광대한 삼림을 떠돌아다녔다. 순록과 붉은사슴의 이동경로를 따라다니고, 폭풍이나 폭설을 피하기 위해 거주지를 옮겼다. 따라서 달란족은 동북만주의 삼림지세를 훤히 알았다. 나타리나는 백지지도에 달란인들의 마을과 사냥집을 그려넣었다. 달란인들은 친절하고 협조적이었지만 출발한지 한 달이 되었으며 이제 10월 초다. 북만주에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없고 10월 초는 겨울이다. 새벽이면 하얀 서리가 삼림을 뒤덮었다.

달란인들이 탐험대에게 더 이상 북쪽으로 가지 말라고 만류挽留했다. 그들이 떠돌아다니며 만들어놓은 마을이나 임시거주지 사냥집이 있는 삼림까지는 갈 수 있으나 그 이상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죽음의 땅이라고 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야고 해가 떠오르고 해가 지고 떨어지는 이 세상의 끝이라고 했다. 달란인들은 탐험대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도움을 주었다. 열서너 장의 이리껍질을 주었다. 이리껍질은 순록이나 사슴의 껍질에 비해 가볍고 방습성防濕性이 좋기 때문에 걸치고 다니다가 밤에는 이부자리로 쓴다. 이리껍질은 더럽고 털이 밀접하지 않아 상품가치는 없지만 이리들은 그 껍질로 영하 40도나 되는 북만주의 겨울을 버틴다. 탐험대가 이리껍질을 걸쳐입었는데 나타리나가 웃었다. 그 때 쯤에는 모두 털투성이가 되어있었는데 이리껍질을 걸치자 고대원시인 같았다. 탐험대는 사흘 후 사냥집에서 떠났다. 통나무와 흙으로 만든 엉성한 집이었으나 밖으로 나오니까 그 고마움을 알 수 있었다. 추웠다. 영하 5도였으나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아래다. 이리껍질을 몇 겹으로 껴입었으나 냉기가 스며들었다. 다음 날부터는 지세地勢가 바뀌었다. 타이가(한냉침엽수림寒冷針葉樹林)지역이 툰드라지역으로 변했다. 타이가는 추위를 견딜만했고 동식물이 있다. 토끼, 사슴, 맷돼지, 노루들은 물론이고 범이나 곰의 울부짖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툰드라(동토凍土지역)는 변두리에만 난장이가시나무나 한랭성이끼가 드문드문 있을 뿐 동물은 물론 들쥐조차 없다. 하늘을 나는 철새도 보이지 않았다. 툰드라는 죽음의 땅이다. 아직 10월이었는데 땅은 깊숙이 얼어붙었고 간이천막을 칠 쇠말뚝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타리나는 그 광야가 관다(완달完達)산맥 북쪽 우수리강 남쪽일대라고 추측했으나 지도의 백지부분에는 아무 것도 기입할 것이 없었다. 공백을 공백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툰드라의 광야에 들어간지 사흘째 되던 날 델수가 모닥불을 피웠다.

 

델수는 돌을 모아 바람막이를 하고 가시나무를 땔감으로 썼다. 모닥불 옆에 이리가죽을 깔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간이천막에 들어가는 걸 거부했다. 델수영감은 야수들처럼 추위에 강했으며 새벽에는 하얗게 뒤집어쓴 서리를 툭툭! 털어내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탐험대는 계속 동북쪽으로 진입했다. 아직 10월이었으므로 그래도 태양이 올라왔다. 태양은 낮 동안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다가 이내 지평선으로 떨어졌다. 탐험대는 기진맥진氣盡脈盡했으나 견뎌내고 있었는데 그날밤 겨울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폭풍이 몰아쳤다. 기관차소리처럼 불어닥친 폭풍이 천막을 날려버렸다. 천막은 쇠말뚝 채 폭풍에 휘말려 날아가버렸다. 모닥불도 꺼졌다. 영하 30도의 날씨에 온 몸이 마비되었다. 위기다.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델수가 고함을 쳤다.

괜찮아, 조금만 더 가면 돼!’

델수는 폭풍이 오래가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겨울의 전령傳令일 뿐이라고 했다. 탐험대는 인근의 하상河床으로 내려가 하상의 뚝 밑에 엎드렸다. 높이가 1m 쯤 되었으나 북풍을 막아주었다. 이리껍질이 살려주었다. 얼마 후 바람이 그쳤다. 죽음을 면했다. 델수는 방향을 남쪽으로 바꿨다. 이틀 쯤 내려가면 완다산맥이 나오고 고리드마을이 있다고 했다. 밤새 걸었다. 나타리나도 따라왔다. 가혹苛酷한 첩보훈련을 받은 여인이다. 다음날부터 완만한 기복起伏이 나타났다. 완다산맥의 자락이다. 그 날 하오 나지막한 구릉丘陵을 넘어서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소리다. 2만 년 전부터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개들이 힘차게 짖으며 달려왔다. 유명한 고리드의 사냥개들이다. 탐험대는 개들의 안내를 받으며 고리드마을에 도착했다. 온 마을사람들이 나와 손님을 환영했다.

 

고리드족은 수는 많지 않으나 북만주와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살고있는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우수한 수렵족이다. 그들은 북방의 엄한 자연에 잘 적응했으며 타이가뿐만이 아니라 죽음의 땅인 툰드라에서도 살고있었다. 고리드촌장은 동족인 델수의 명성을 듣고있었으나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안내하는 러시아 남녀 탐험가들이 광대한 툰드라를 가로질렀다는 말에 크게 놀랐다. 고리드마을에는 열서너 채의 통나무집이 있고,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있었는데 마을에는 붉은사슴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며칠 전에 얼어붙은 우수리강을 건너오는 사슴떼를 사냥했다. 탐험대들이 건너온 툰드라에는 짐승들이 살지 못했으나 동남쪽 타이가지역에는 붉은사슴, 맷돼지, 노루들이 살고있었고, 그들을 노리는 이리나 울부린, 범들도 돌아다녔다. 울부린은 족제비과의 짐승인데 족제비과 동물 중에서는 가장 크고 사나운 포식자捕食者.

탐험대는 고리드마을에서 며칠 쉰 다음 타이가지역으로 들어가 계속 동쪽으로 갈 계획이었는데 차질蹉跌이 생겼다. 그때까지 이를 악물고 따라오던 나타리나가 쓰러졌다. 나타리나는 높은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위험한 상태다. 사모어소령이 그녀의 옆을 지키며 간호를 했는데 석유드럼통난로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방안에서도 나타리나는 오들오들 떨었고 헛소리를 했다. 사모어소령이 밤새 그녀를 꼭 껴안고 밤을 지샜다. 촌장이 곰의 쓸개를 먹였다. 산삼山蔘, 녹용鹿茸과 함께 웅담熊膽3대 영약靈藥으로 알려진 값비싼 약이었으나 촌장은 아끼지 않았다. 웅담은 가을철 동면에 들어가기 전 곰이 동면을 하려고 영양을 잔뜩 채워놓은 가을곰을 잡아 곰의 쓸개를 채취해서, 전문가가 여러 날 동안 정제精製를 하여 만든다. 좁쌀크기의 환약丸藥으로 만드는데 그 좁쌀크기의 웅담 한 알은 집 한 채 값과 맞먹는다. 쓰러진지 꼭 사흘째 되던 날 하오 혼수상태의 나타리나가 정신이 돌아왔다. 웅담의 효력이다. 정신이 든 나타리나는 사모어소령이 자기를 꼭 껴안고 있는 걸 보았다. 둘 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옷이 땀에 젖었기 때문에 벗긴 것이다.

정신이 드오?’

사모어소령의 말에 나타리나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모어소령이 몸을 풀어주려고 하자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을 더 밀착시켰다. 그들은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옷을 벗으면서 첩보원 관계도 벗어버렸다.

 

그날 밤 사모어소령이 나타라나에게 특별한 치료를 했다. 북방에 사는 소수민족들에게는 독특한 치료법이 있다. 여인이 중병重病에 걸렸을 때 여인의 몸에 남자가 정기精氣를 주입注入하는 치료법이다. 소수민족의 장로長老들은 여인의 병에는 산삼, 녹용, 웅담보다도 그 치료법이 효과가 크다고 믿었다. 정기 주입은 시들어가는 여인의 몸을 소생蘇生시킨다. 사모어소령은 장로들이 조언한 대로 자연스럽게 치료를 했다. 나타리나도 자연스러운 치료를 받아들였다. 남자의 정기가 몸 안으로 들어오자 나타리나는 신음했으나 고통의 소리가 아니라 기쁨의 신음이었다. 나타리나는 소령의 몸을 놓아주지 않고 새벽에 또 몸과 마음이 어울어진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자연치료를 받았다. 다음날 나타라나가 앞장서서 몸이 다 나았으니 탐험에 나서야 한다고 독촉했다. 그러나 고리드촌장이 경고했다. 전 날 붉은사슴의 동태를 살피려고 숲에 들어갔었던 사냥꾼들이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왔다. 범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서너 마리나 되는 범들이 삼림에 모여들었다. 붉은사슴을 쫓던 범들이 사슴을 포기하고 삼림을 돌아다녔다. 범의 번식기다. 범은 한겨울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집단적으로 선을 보고 짝을 골랐다. 범들은 수십Km 떨어진 러시아에서 오고 수백Km나 되는 조선에서도 모여들었다. 범들의 집단 교미交尾장소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올해는 동북원시림이 될 것 같았다. 범들의 집단장소에는 들어가면 안 된다. 교미기에 신경이 날카로운 범들은 움직이는 물체만 보면 덮어놓고 갈기갈기 찢어죽인다. 먹이가 아니라 살육殺戮이다. 그 시기에는 고리드인들도 삼림에 들어가지 않았다. 용감한 사람들이지만 생식기에는 삼림을 피했다. 마을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집집마다 문을 걸어잠그고 숨을 죽였다. 마을에는 비상경계령이 내려지고 장정들이 마을어귀에 모닥불을 피우고 경비를 했다. 일부 생식에 미친 범들이 마을에 들어와 살육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어 마을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델수가 탐험을 연기하자고 했다. 그러나 연기할 시간이 없었다. 이미 11월이었으므로 더 이상 꾸물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소싱안령산맥 동북쪽 러시아와 국경지대 광대한 툰드라를 돌파한 탐험대는 계속 동쪽으로 걸어가 한랭산림지대로 들어갔다. 산림지대 어귀까지는 고리드사냥꾼들이 안내를 해주었으나 그들도 더 이상은 들어가지 못 했다. 고리드족 안내인과 헤어진 탐험대는 천천히 산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옷을 껴입었는데 눈을 뒤집어썼으므로 눈사람 같았다. 낮에는 영하 20, 밤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갔다. 앞머리에 선 델수는 지형을 살피면서 나무들을 한 그루 한 그루 조사했다. 나무에는 신호가 있다. 범이나 곰이 발톱으로 영역을 표시하고, 이리나 족제비도 표시를 했다. 사람들은 도끼나 칼로 길을 표시했다. 동쪽에 계곡이나 물이 있다는 표시, 폭풍이나 폭설을 피하는 대피소를 가리키는 기호가 있었다. 험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냥꾼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서로 살기 위해 공동표시를 남겼다. 델수가 사흘만에 대피소를 찾았다. 통나무로 지은 움막집에는 화덕과 땔감 그리고 음식이 있었다.

러시아 범사냥꾼이 지은 집입니다.’

델수가 벽에 새겨진 글을 보고 설명했다. 방바닥에 범의 뼈가 있었다. 그날 밤 범이 포효咆哮했다. 멀리서 울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한 마리가 아니다. 산 너머에서도 범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델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범들이 모여들고 있어요. 여기가 범들의 짝짓기 장소인 것 같아요.’

다음날 아침에는 또 다른 범들이 도착했다.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수컷은 수컷대로 암컷은 암컷대로 마음에 맞는 짝을 차지하려고 싸웠다.

여기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빨리!’

더 이상 범이 모여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주변은 온통 피바다가 될 것이다. 범들이 미치는 날에는 다른 짐승을 물론 사냥꾼들도 얼씬거리지 못 한다.

 

탐험대는 범들의 집합장소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그 날 정오께 앞서가던 델수가 멈췄다. 델수가 어느 나무 밑둥을 보고있었는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사람의 시신屍身이다. 찢겨져 신원을 알 수 없었으나 러시아인인 것 같았다. 총이 떨어져있었는데 총에 이빨자국이 나고 개머리판이 뜯겨져나갔다.

범들의 소행입니다.’

여러 마리의 범들이 사방에서 덤볐을 것이다. 포수는 사냥집에 땔감과 음식을 마련해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혼자 범사냥을 하다니 .’

땅이 쇳덩어리처럼 얼어서 시신을 묻어줄 수 없다. 탐험대는 불을 피워 시신을 화장하고 뼈와 유품을 챙겼다. 그런데 그 화장을 했던 불이 좋지 않았다. 연기와 냄새가 범을 불러들였다. 저쪽 구릉에 범이 나타나 노려보고 있었다. 어미와 새끼 두 마리다. 새끼도 다 자란 놈이고 생후 2년 쯤 되어보였다. 어미범은 새끼가 수컷일 경우 2년 쯤 데리고 다니고 암컷은 좀 더 오래 데리고 다녔다. 그 어미는 발정이 되어 수컷과 교미를 하려고 왔으나 새끼가 떨어지지 않았다. 어미가 새끼에게 으르렁거리며 위협을 했으나 새끼는 멀리 가지 않고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리드사냥꾼들은 다 자란 새끼는 어미와 교미를 하고 어미 곁을 떠난다고 하고 있었으나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침팬지의 어미가 새끼와 교미를 하는 경우가 있으나 학자들은 교미가 아니라 교미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고, 그 교미에서는 사정射精이 되지 않아 임신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튼 어미는 신경질이 되어있었다. 다른 수컷과 교미를 새끼가 방해를 했기 때문이다. 델수가 총을 들어올렸다. 그 범들은 러시아포수를 죽인 범들이다. 델수는 사람을 죽인 짐승은 반드시 죽였다. 그게 범이든 곰이든 끝까지 추적해서 죽였다. 사람은 산림의 맹주盟主이며 맹주를 해친 짐승은 죽어야 한다. 델수가 범들이 있는 구릉으로 가려고 했는데 범들이 스스로 다가왔다. 첩보원은 총을 지니고있으나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첩보원은 숨어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모어소령이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나타리나도 권총을 뽑아들었다.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고 델수의 뒤를 따라갔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범들이 멈춰섰다. 신경질이 난 범들이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다. 만주삼림의 왕인 범을 보고도 감히 도망가지 않고 덤벼드는 상대는 예사 적이 아니다. 델수가 고함을 쳤다.

네 이 놈! 사람을 죽이고도 성할줄 아느냐?’

어미범이 금방 덤벼들 것처럼 으르렁거렸지만 덤벼들지 않았다. 어미범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저 인간들이 덤벼들 것인가? 얼마나 센 적인가?’

범과 인간의 신경전이다. 어쩌면 그 신경전에서 승패가 난다.

덤벼! 덤벼들어봐.’

델수가 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태도였는데 어미범이 그 위세에 눌렸다. 어미범이 뒷걸음질쳤다. 그런데 젊은 수컷이 일을 벌였다. 그 놈은 어미 뒤에 숨어있다가 어미가 뒤로 물러서자 곧바로 앞으로 튀어나왔다. 상대를 모르고 저지른 짓이다. 델수는 총을 들어올렸으나 쏘지 않았다. 기다렸다. 단 한 발로 범을 죽일 수 있는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젊은 숫범이 껑충껑충 뛰어 달려들더니 델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렇게 위협하면 적이 도망칠줄 알았는데 적은 범을 마주보면서 꼼짝도 않았다. 젊은범이 당황했다.

덤빌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일순 멍 하니 서있었는데 그 건

날 잡아잡슈.’라는 말과 같았다. 델수가 발포했다. 굉음과 함께 콩알만한 납덩이가 범의 앞가슴을 뚫었다. 총탄이 범의 갈비뼈를 스쳐 심장을 파괴했다. 범이 뒹굴었다. 사냥감 한 마리를 잡는데 단 한 발만 쏘는 고리드 사냥꾼의 철칙鐵則이다. 새끼범이 눈앞에서 죽었는데 어미범이 덤벼들지 않고 등을 돌렸다. 산 너머에서 수펌들의 포효소리가 들렸다. 짝을 부르고 있었다. 어미 곁을 떠나지 않았다가 죽은 새끼는 포기하고 수컷을 받아들이려는 어미의 결단이다. 낳은 자식을 기르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발정이 되어 새로운 자식을 낳는 것이 더 긴박緊迫하다.

 

그러나 델수는 어미범을 놓아주지 않았다. 러시아포수를 죽인 범이다. 사냥꾼들에게는 불문율不文律이 있다. 사냥꾼들의 법이다. 델수가 범이 구릉을 넘어서기 직전에 발포했다. 범이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려고 구릉에서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다봤는데 총탄이 날아갔다. 100m가 넘는 거리였으나 델수의 사격은 실수가 없다. 이마에 총탄을 맞은 어미범은 일어나지 못 했다.

탐험대는 계속 동쪽으로 걸어갔는데 거기가 어디인지 델수도 몰랐다. 아마도 완다산맥 북쪽일 거라고 짐작했다. 백두산에서 북상하는 장파이산맥과 이어지는 대 산맥인데 지세는 아무도 모른다. 그 지역 동쪽 러시아땅에는 시호테 알킨산맥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일어난 산맥인데 거기서부터 바로 북상하여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우수리강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 산자락이 만주쪽의 완다산맥과 연결되었다.

탐험대 일행은 사흘 후에 원시림에서 벗어났다. 다행히 만주에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는 기후변화가 있어 일행은 비교적 추위가 덜한 시기에 산림에서 빠져나왔다. 허허벌판이 나오고 이름 모를 소수민족마을이 나타났다. 움막집들이 대여섯 채, 서른 명 쯤이 살고있었다. 주위에 나무 한 그루도 없는 허허벌판 동토에 어떻게 사람들이 살 수 있을까? 움막집에 들어서니 수수께끼가 풀렸다. 집안에 놓인 화덕에 불이 벌겋게 타고있어 견디기 어려울만큼 더웠다. 화덕에서 타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석탄이다. 주변에 석탄광산이 있다. 노천광상露天鑛床이다. 평지의 땅이 바로 석탄층이다. 마을주민들은 삽과 괭이로 석탄을 캤다.

석탄이 얼마나 많으냐?’는 질문에 주민들은 그냥 팔을 크게 벌렸다. 무진장無盡藏이라는 말이다. 덕분에 탐험대는 집안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주민들은 친절하고 밀가루음식을 주었다. 몇 백 리나 되는 만주인마을에 석탄을 가지고 가서 바꾼 밀가루다.

 

탐험대는 그 마을에서 나흘을 지냈다. 체중이 1/ 3이나 빠졌기 때문에 체력을 보충했다. 마을사람들은 탐험대가 동쪽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거기는 광대한 벌판이며 그곳이 바로 세상의 끝이라고 했다. 그래도 탐험대는 출발했다. 이 세상의 끝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벌판은 싱가이(흥개)광야의 서북쪽이다. 싱가이광야는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에 있는데 바다처럼 넓었다. 벌판은 쇳덩어리처럼 얼어붙었으나 본래는 습지濕地. 색깔이 검은 것으로 봐서 바닥이 석탄층이다. 그 벌판은 여름철에는 물이 무릎까지 절벅거리는 늪지대고, 겨울에는 쇳덩이 동토다. 이 세상의 끝이라는 원주민의 말대로 그 벌판은 버림받은 땅이다. 그러나 그곳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다. 서북쪽에는 러시아땅이 중국영토 안으로 들어와있고, 동남쪽에는 중국땅이 러시아의 영토 깊숙이 들어와있다. 군사상 요충지다. 특히 완다산맥의 줄기가 싱가이광야 안쪽으로 뻗어있는 곳이 중요한 요충지다. 산기슭에서 우수리강 너머 러시아측 군사벙커들이 훤히 보였다.

탐험대가 그 산으로 올라갔다. 나무들이 드문드문 있는 바위산인데 델수가 발자국을 발견했다. 노루를 쫓고있었다. 그곳에 노루가 있는 것도 놀라웠으나 노루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우선, 노루를 잡읍시다.’

델수의 말대로 노루를 잡아야 한다. 석탄마을에서 얻어온 식량이 바닥났다. 델수가 노루를 잡았다. 발자국을 추적하여 바위틈에 숨어있는 놈을 손도끼를 던져 잡았다. 총을 쓸 수는 없다.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얼 하는 사람들일까?’

델수는 불도 피우지 않았다.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노루고기를 구우려면 불이 필요한데 그 건 너무 위험하다. 불을 피우기 전에 그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다리로 걸어다니는 동물이면 델수의 추적을 피할 수 없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을 때 델수가 바위산 중복에서 멈췄다. 동굴이다. 동굴 안에 인기척이 있었다. 델수의 코와 귀가 인기척을 탐지했다. 델수가 동굴쪽으로 소리없이 기어갔다.

 

밤짐승처럼 동굴 앞까지 기어가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영하 30도나 되는 추위속에서 델수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약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동굴 안에서 소리가 났다. 속삭이듯 낮은 소리였으나 예민한 델수의 귀는 소리를 들었는데 델수가 크게 놀랐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그가 그 때는 마치 감전感電이 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동굴 안에서 들려온 말은 고리드말이었다.

덫을 놓은 곳으로 가볼까? 노루가 아니라 토끼라도 한 마리 걸렸으면 좋겠어.’

그래, 같이 가보자.’

델수는 그들이 덫을 놓은 곳까지 가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조용히 고리드말로 말했다.

동족님들, 놀라지 마시오. 나는 고리드사냥꾼 델수요.’

델수라고? 그 유명한 델수포수란 말이요?’

그래, 그러니 조용히 내 말을 들어요!’

동족이란 한 마디에 위험한 상황에서도 말과 뜻이 통했다. 두 사람의 고리드인이 일본인사람을 안내하고 있었다. 일본군정보원이다. 기밀부대원이다. 일본인과 고리드인은 모두 굶주리고 있었다. 나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 했다. 노루나 토끼도 잡지 못 했다. 다행히 동굴을 발견하고 불을 피웠으나 굶어죽을 판이다. 기력이 쇠진衰盡해서 움직이지도 못 했다. 델수와 고리드인들이 서로 돕기로 했다. 일본인은 굶주려 죽을 판이고 러시아인은 추워서 얼어죽을 판이다. 추의에 몸이 마비되었다. 나타리나는 심한 동상凍傷에 걸렸다.

 

델수가 결단을 내렸고 고리드인이 따르기로 했다. 델수는 고리드인의 영웅이고 그의 말에는 천금千金의 무게가 있다.

노루고기를 일본인들에게 나눠주자고?’

델수의 제안을 듣고 사모어소령이 펄쩍 뛰어올랐다. 이적利敵행위였으며 중벌重罰을 받는다. 러시아와 일본은 적대敵對국가다.

그 대신 우리는 동굴 안에 들어가 모닥불 옆에서 얼어붙은 몸을 녹일 수 있다. 이대로라면 얼어죽는다. 오늘 밤에는 북풍이 불 것입니다.’

그렇다면 .’

사모어소령이 총을 들어올렸다. 동굴 안의 일본인정보원들을 사살하겠다는 말이다. 나타리나도 권총을 뽑아들었으나 델수의 표정은 차가웠다.

우리 고리드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우리 사냥꾼들은 짐승은 잡지만 사람을 잡지 않아요!’

델수뿐만 아니라 두 명의 고리드인들도 사람을 죽이는 싸움에는 협조하지 않기로 했다. 싸울테면 당신들 끼리 싸우라는 말이다. 사모어소령은 생각이 깊었다. 일본인들을 죽이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일본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들도 특수훈련을 받은 정보원이며 최신형 무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승패를 알 수 없다. 타협을 할 것인가? 타협을 하면 동굴 안의 일본인들과 러시아인들은 모닥불에 노루고기를 구워먹게 된다. 따뜻하고 배부르게 쉴 수 있다. 본디 간첩이나 스파이들은 서로 타협을 하는 수가 있다. 목숨을 걸고 몰래 거래를 한다. 서로 주고받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그런 거래를 자주하면 이중간첩이 되지만 한두 번은 나쁘지 않다. 우선 목숨을 유지해야 할 것 아닌가? 그곳에서는 델수를 거역할 수도 없다. 북만주삼림에서 델수와 싸울 수 없다. 명령을 하는 사람은 사모어소령이 아니라 델수다. 사모어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델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일본인들이다. 그들이 고리드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인가? 고리드인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델수가 밖에서 귀를 기울였다. 만일 일본인들이 반항하면 뛰어들어가 일본인들을 처치할 것이다. 일본인들은 군기軍紀가 엄격했으며 군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불사不辭한다. 그들은 칼로 배를 그어 할복割腹을 하는 민족이다. 과연 동굴 안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러시아인들과 타협하자는 제안을 듣고 분격奮激한 것 같았다. 델수가 총을 들고 동굴로 뛰어들어가려고 했을 때 또 말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게 달래는 말이었다. 서로 흥분을 갈아앉히고 의논을 하는 중이다. 한참 후 고리드인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장총과 권총을 들고 나왔다. 무기를 델수에게 넘겨주었다. 델수는 러시아인들의 무기도 보관했다. 이로써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은 서로 무기를 버렸다. 델수가 러시아인들을 데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꽤 길었다. 7 - 8m 쯤 들어서자 옆으로 구부러진 곳이 나오고 열 평 쯤 되는 공간이 있었다. 모닥불이 타고있었기 때문에 불 옆에 앉아있는 일본인들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둘 다 중년이었으며 사복私服을 입고있었다. 오래토록 굶은 그들은 얼굴이 창백했고 힘이 없어 축 늘어져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중국말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오? 러시아 친구들, 고리드 친구들.’

안녕하시오, 일본 친구들.’

델수는 좀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감시했다. 델수의 손에 손도끼가 들려있었다. 숙련된 사냥꾼이 쓰면 총보다도 더 무서운 무기다. 그러나 인사를 주고받는 그들에게는 살기殺氣가 없다.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모어소령이 어깨에 매고있었던 노루를 모닥불 옆에 던졌다. 고리드인들이 모닥불을 활활 살리면서 노루고기를 꼬치에 꿰어 구웠다. 다갈색으로 잘 익은 노루고기를 먹은 일본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따뜻한 모닥불을 쪼인 러시아인들도 생기가 돌았다.

 

러시아와 일본정보원들은 그날 모닥불 옆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피곤했던 터라 그대로 잠이 들어 다음날 정오께 햇빛이 동굴에 스며들었을 때 일어났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동토에서는 사람들은 피아彼我 구분이 없이 서로 협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새벽에 사냥을 나갔던 델수가 하오께 노루와 오소리를 잡아왔다. 일본인과 고리드인들이 보름 동안이나 돌아다녀도 꼴도 구경 못 했던 짐승들이다. 그러나 델수는 마치 닭장에서 닭을 잡아오듯이 잡아왔다.

어떻게 잡았느냐고? 당신들은 엉뚱한 곳에 덫을 놓았어. 노루와 토끼들이 다니는 길에 옮겼지. 덫도 잘못 만들었기에 좀 고쳤고. 노루는 다니는 길이 있어. 그 길목에 덫을 놓아야 해.’

델수는 침엽수잎을 채집했다. 싱싱한 잎은 부드럽고 짙은 향기가 났다. 델수와 함께 있는 한 먹을 것 걱정은 없다. 등이 따습고 배가 부르면 사람은 관대寬大해진다. 서로 적대적인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러시아인들이 약용藥用으로 지니고다니는 알콜을 나눠마시며 담소談笑했다. 정보원이 얼마나 고생스럽고 위험한 일인지 서로 터놓았다. 동병상련同病相憐. 그런 광경을 유심히 관찰하고있던 델수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제 그 따위 일을 집어치우고 돌아가자고 했다. 더 이상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다고 했다. 때는 정월 초 한 겨울이다. 시베리아에는 무서운 폭풍이 불어닥쳤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동굴바닥이 흔들렸다.

앞으로 열흘은 쉬어야 하오.’

그의 말은 옳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 까? 그러나 그들은 맡은 임무를 다 끝내지 못 했다. 임무를 마치지 못 하고 돌아가면 군법회의가 그들을 기다린다. 중형重刑이거나 시베리아 유배형流配刑이다. 델수가 웃었다. 사람은 서로 모여 의논을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 고리드격언格言이다.

 

일본정보부의 에사기대위가 말했다.

일본에도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文殊(보살菩薩)의 지혜가 생긴다는 격언이 있지요.’

그들은 문수보살의 지혜를 짜냈다. 러시아와 일본인은 그 동안 수집했던 정보를 서로 교환하여 아직 미완의 정보를 통합하여 완전한 정보를 만들어내기로 했다. 그 동안 러시아의 정보원들은 동북만주 우수리강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면서 지형과 각종 정보를 수집했고, 일본정보원들은 우수리강의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오면서 정보를 수집했는데 그 양측 정보를 통합하면 동북만주 북방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선 일대의 정보들이 모두 모인다. 정보가 통합되어 완벽한 지도를 그릴 수 있다. 그들은 동굴에서 그 작업을 하기로 했다. 바깥에는 시베리아에서 쳐들어온 동장군冬將軍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나 동굴 안은 안전하다. 그 동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으나 안쪽에 사람과 짐승의 화석化石이 있었다. 몇 천만 년 전에 있었던 지각변동地殼變動으로 생긴 것 같았으며 동굴 안의 화석도 몇 만 년 전의 것으로 보여졌다. 창조주創造主가 만든 마지막 은신처隱身處인지도 모른다. 델수는 동굴 안의 사람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사냥을 계속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정보원들은 한 겨울 툰드라에서는 생명체들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툰드라의 땅밑이 쇳덩어리처럼 얼어붙었으나 생물이 살고있었다. 불사조不死鳥 같은 생명력을 지닌 노루, 하얀 털옷을 두껍게 껴입은 토끼, 눈속에 사는 뇌조雷鳥들이 있고, 그들을 노리는 북극여우와 족제비 종류의 짐승들이 있었다. 델수는 사냥을 계속했고 사람들이 그를 도왔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뇌조와 토끼고기는 세계 어느 음식점에서도 요리하지 못 할 맛이다. 러시아와 일본정보원들이 종합보고서를 만들고 있을 때 바깥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우선 나무들이 쾅쾅! 쓰러지는 소리가 사라졌다. 아름드리 나무를 쓰러뜨리던 강풍이 힘을 잃었다. 동굴 안의 희미했던 빛도 점점 밝아졌다. 밀려났던 태양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느 날 바깥에서 돌아온 델수가 웃으며 겨울이 물러가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와 일본정보원들도 웃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작별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