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만의 명상록 - 2

이천만의 명상록 - 2

북새 2018. 10. 12. 17:45



이천만의 명상록 - 

 

이천만의 명상록 ()   목차 : 31- 60

    

31. 여행女幸/ 32. 둠벙과 인성교육/ 33. 학교생활/ 34. 최초의 시 35. 가정교사/ 36. 교육대학시절/ 37. 동생의 요절妖折/ 38. 모교 발령/ 39. S누나의 자살/ 40. 탕자蕩子/ 41. 고향 탈출42. 댕갱이/ 43.  곰재시절/ 44. 글쓰기지도/ 45. 한국민화/ 46. 교육환경/ 47. 무등산옛길/ 48. 고무다리 긁기/ 49. 그림의 떡/

50. 부러진 화살/ 51. 군사용어軍事用語/ 52. 생활체육53. 손주의 입학/

54. 문자연文字然55. 체벌體罰 폭력/ 56. 태극기 게양 방송57. 꿈의 해석/

58. 멍텅구리배/ 59. 돈키호테의 선거60. 창조론과 진화론 

    

(이천만의 명상록 - 31)     여행女幸

초등학교 때, 앞집에 나 보다 한 살 아래 여학생이 이사왔다. 여수에서 왔는데 우리와는 말씨부터 달랐다. 날마다 어울려 놀았는데 다른 여자 후배들이 질투를 할 정도로 그 여학생도 나를 무척 따랐다. 뒤에 광주에 유학을 했을 때 그 녀도 광주에서 유학을 했는데 할머니 부탁으로 내 자취집에 와서 이불을 꿰메주기도 했다. 그 즈음, 외가에 나 하고 동갑인 외사촌 꽃예가 있었다. 외가에 가면 꽃예하고만 어울렸다. 다른 외사촌들은 나이가 어렸다. 꽃예는 몇 번 우리 집에도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대섬(竹島) 외가에서 동백꽃을 파다가 우리 집에 심어 가꾸려고 애를 썼으나 늘 실패했다. 동백은 뿌리가 직근성直根性이어서 옮겨 심으면 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훨씬 장성해서 알았다.

광주로 유학을 했을 때 시골 후배가 광주로 유학을 왔다. 가끔 나와 동급생이었던 삼촌과 등하교를 했던 여학생이었는데 무척 예뻤다. 크리스머스 이브를 위한 공연 연습이 끝나면 우리는 달 밝은 밤 동각마당에서 숨바꼭질이나 진도리 등 놀이를 했는데 나는 그 아이가 숨는 곳을 눈여겨 봐뒀다가 그 여학생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그녀가 광주에서 유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녀를 만나고서 나는 그녀가 나 보다 훨씬 성숙해졌음을 알았다. 부끄러움이 여드름처럼 얼굴에 나타난 시기였다.

그 시대에는 S누나가 유행했다. 전화국교환이었던 친구의 친척을 누나 삼았다. 밤 늦게 교대를 하는 날이면 한 겨울 눈밭을 걸어 누나를 에스코트했다. 누나는 가끔 도시락을 싸주기도 하고 김치를 담가주기도 했다. 한창 시 창작에 몰두했던 시기였다. 일간지에 시가 실려서 기고만장氣高萬丈하고, 시화전詩畵展을 열었고, 광주의 3개 대학 문학써클을 통합하여 문학의 밤을 개최하고 시 낭송을 했다. 누나는 문학을 꿈꾸었던 내 곁에 있었다. 그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살 같이 빠른 세월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되었다. 시골로 발령을 받아 산을 넘어 출퇴근하면서 동학년 처녀 여선생님에게 찔레꽃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누나는 그 배신으로 자살을 기도企圖했고 소식이 끊겼다. 그 후 반 년도 되기 전에 나는 여선생님에게 배신을 당하고 누나를 찾아갔으나 누나는 이미 약혼한 남자가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누나 집에서 나와 황금동 술집거리에서 밤새 술을 퍼마셨다. 술이 목구멍에 차오르면 손가락을 넣어 토하고 또 마셨다. 하룻밤 내내 토하고 마시고는 누나를 잊었다. 여자가 두려웠다. 너무 충격이 커서 여자를 거뜰떠보지도 않았다. 주변에 어른거리는 여자들이 있었으나 돌부처처럼 냉담했다.

음악에 심취해서 축음기를 사다가 베토벤의 운명과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을 듣던 때 동료 여선생님이 밤나들이에 초대를 해서 긴 들길을 걸어 간척지 수문에 내려가 늦은 밤까지 데이트를 했으나 여자에게 자신이 없었다. 특히 접근해온 여교사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가서 여선생의 방에서 술에 취해 자기도 했고, 광주 데이트를 하기도 했으나 내 가정 형편에서 그녀를 용납할 수 없어 냉담했다. 귀신소리가 나는 과수원집에서베토벤의 운명차이코프스키의 미완성만 몇 날 며칠 귀에 딱지가 맺히도록 들었다.

곰재로 발령을 받아 부임한 학교에는 처녀여선생님이 아홉 명이었다. 총각선생 일곱 명과 어울려서 처녀총각당을 조직했다. 생일파티를 필두로 딸기밭 복숭아밭 배밭을 순례했다. 방학 때는 여행도 다녔다. 그 시절 나는 결혼적령기를 맞았다. 나이가 아니라 망해버린 집안을 경영해야 했다. 그래서 부부교사에 눈을 떴다. 처녀 아홉 중 아무라도 구혼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에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를 며칠 생각하다가 세 번째에 집사람을 설득했다. 그 때만 해도 옛날이라서 연애결혼은 절대로 안 된다는 장인丈人의 거부로 몸살을 앓았다. 연애가 아니라 우리 집 형편을 설명하고 내가 집안을 재건하는데 협조할 수 있겠는가로 승낙을 얻어 연애다운 연애도 하지 못하고 간난艱難을 겪었다.

여자는 다 똑같다는 생각으로 아홉 처녀 중 누구라도 마음만 맞으면 결혼을 해야겠다고 한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는 곧 알게 되었다. 일곱 총각 중에서 선망羨望받는 남자와 결혼에 성공한 아내도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는 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은 실패였다. 여자를 쉽게 생각한 실수다. 여자란 다 같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안 건 아이들을 둘 낳고야 알았으나 이미 늦었다. 가정을 겉돌았고, 여러 여자들이 주변을 서성거렸다. 도피하려고 신안 섬으로 들어갔으나 생활은 더 정리되지 않았다. 방황과 질곡桎梏의 시간들의 혼미昏迷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중에 보니 결혼, 그 실패로 그리고 가정도 인생도 어렵게 보냈다. 그러나 인생에서 실패와 성공이란 없다. 그냥 살아온 과정이 어려웠다는 말인데 어렵지 않게 사는 과정이란 없다. 어설프게도 나는 신과 여자를 화두話頭로 삼았다. 신과 여자는 내게 우상愚像이다.

 

(이천만의 명상록 - 32)    둠벙과 인성교육

초등학생을 성폭행하려다가 목 졸라 죽여 암매장하고, 제주 올레길 관광객을 성폭행하려다가 죽여 암매장했다. 학생들은 입시정쟁에 숨이 막혀 자살이 속출하고 왕따 등 학교폭력을 자행한다. 대학입시로 대변되는 성적지상주의成績至上主義교육 때문에 학교와 선생님들도 교육의 지평地平을 잃고 있다. 이런 와중渦中에서 잊을만하면 교육의 역할을 찾는답시고 인성교육이네 감성교육이네라며 립서비스가 요란하다. 그러면서 인성교육정책을 개발한다며밥상머리교육이니 양로원 봉사 같은경로효친敬老孝親교육체험 가산점이니 하는 시책들이 나온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형상은 교육에서는 학력지상주의교육과 사회적으로는 물신物神주의 팽배가 원인이다. 그래서 대학입시는 손대지도 못하면서 고작 인성교육을 나발분다. 공부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어만 데로 풀린다. 왕따 폭력을 자행하고 비행非行청소년이 된다. 학교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갈 데가 없다.

그 첫 번째 방안은 인문교육과 실업교육 2원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질과 특성을 평가하여 두 길로 나누는 교육을 한다면 소외된 아이들도 없어지고 무조건 대학에만 가려는 대학입시의 대한민국적 고질병도 자연스럽게 고쳐진다. 지금의 특성화고등학교나 마이스터교로는 역부족이다. 실업과 인문을 6 : 47 : 3의 비율로 교육제도 개혁을 해야 한다.

둘째, 오래 전에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치며 중학생이 자살했을 때 교육계에서는 오늘처럼 인성교육을 들고나선 적이 있었다. 학교마다 특수시책이라 해서 인성교육시책을 수립했다. 밥상머리교육도 이 때 나왔다. 서예書藝를 통해 인성을 도야陶冶한다는 서예학교, 예절교실을 만들어 경로효친교육을 활성화 한다는 예절학교와 한자한문교육을 해서 인성의 본성을 찾겠다는 서당書堂학교들이 생겨났다. 애초에 인성교육은, 엄밀하게 따지면 학교와 교사의 몫이 아니다. 교과서로 인성교육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성교육의 은은 학교가 아니라 가정이다. 가정환경교육이고 부모다. 학교는 인성교육의 지식적인 면을 가르칠 뿐이고 인성도야陶冶를 완성하는 것은 가정과 부모며 그 적용은 사회다. 교과서에서버스는 줄을 서서 탄다고 가르쳐도 한 발 사회에 나와서 줄을 서서 버스를 타려고 하면 지각을 하거나 아예 등교를 못할 상황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버스는 줄을 서서 탄다는 지식적인 가르침을 받고, 가정에서는 부모가 모범을 보여 지식을 보강하고, 사회에서는 실제로 줄을 서서 버스를 타면서 적용을 한다. 그래서 교통질서에 대한 인격이 완성된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이 실종되었고 그 교육부재를 온통 학교에다 전가轉嫁한다.

이런 교육적이론을 바탕으로, 인성교육이 한창 유행일 때 우리 학교는동식물 가꾸기를 시도했다. 인성교육은생명존중교육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에서다. 학생들이 자기 화분을 가꿔보고, 애완동물을 기르고, 자투리화단을 자기 집에 꾸며서 실제로 동식물을 가꿔보게 하는 시책이다. 생명을 기르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방법이다. 그리고 년말에는 품평회를 열어 시상도 했다. 아울러 학교에는 연못을 만들었다. 물의 순화馴化작용을 인성교육에 대입하려는 의도였다. 축대築臺를 쌓거나 돌담으로 연못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적당한 장소를 골라 포크레인으로 한 입 크게 웅덩이를 팠다. 한 달이 못가서 웅덩이는 연못이 되었다. 자생력이다. 옛날 시골 논에 있었던 둠벙이다. 반 년 쯤 되자 물거미가 놀고 마실왔던 개구리가 눌러 앉고 부들이 씨앗을 뿌렸다. 물잠자리도 찾아왔다. 애초에는 운동장을 빙 둘러 개울을 만들고 군데군데 한 입씩 둠벙을 만들려고 했으나 물길 끌어들일 수원水原이 어려워서 둠벙으로 만족했다.‘사철 꽃 피는 학교인성교육이 요란했을 때 교육계를 풍미했던 시책이었다. 학교가 너무 삭막하다. 나무들 뿐이다. 꽃이 없다. 개울을 만들고 둠벙을 파고 주변을 한국자생화로 치장한다면 인성교육이 절실한 요즘의 사회상황에서 좋은 방안이 되리라 생각한다. 자연은, 물은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치료작용을 한다.

 

(이천만의 명상록 - 32)   어린시절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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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사립문 밖 골목 양지쪽에 앉아 해바라기를 했다. 동무들과 땅 뺏기놀이나 고누를 두고 더러는 구슬치기도 했다. 유리구슬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나 혼자였다. 하얀 사기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그려진 아름다운 구슬은 놀이기구가 아니라 보물이었고 구슬치기 구슬은 상수리열매였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도 집안일을 거들기 때문에 거의 나는 혼자였다. 공부를 하다가 싫증이나면 나물바구니를 들고 들로 나갔다.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꾸지람을 할머니가 감싸주었다. 할머니는 쌉쌀하고 향긋한 봄나물국을 좋아했으므로 아버지의 봄나들이 제지를 한 마디로 풀어주었다. 냉이는 너럭바위가 앉아있는 황토밭에 많았다. 머리가 커서야 고인돌이란 걸 알았다. 달래는 싹이 퍼런 보리밭에서 캤다. 뿌리가 깊어서 대칼로 끙끙거리며 파냈다. 그래도 자칫하면 줄기가 끊어져 뿌리가 나오지 않았는데 할머니는 뿌리없는 달래는 가려내버렸다. 아기 주먹을 닮은 봄쑥은 밭 언덕이면 어디에나 있었다. 그 밖에도 나생이도 캐고 싹이 부드러운 건 모두 나물이었다. 파릇파릇한 보리싹을 캐서 국을 끓여 먹는 집도 있었으나 자기 밭을 짓는 사람들은 결코 보릿국을 먹지 못했다. 농사가 없는 사람들이 주인 몰래 캐다가 끓여먹었다. 보릿잎을 캐서 반지락(바지락)국을 끓여놓으면 입맛이 상쾌했다.

 

<여름>

마을에서는 바다가 보일락말락 했다. 한 마장 밖에 바다가 있었다. 바다에서는 갯것이 풍부했다. 특히 꼬막, 반지락, (석화)이 지천이었다. 장태고동(고둥)이나 비틀이고동은 비로 쓸어담을 정도 무진장이었다. 비틀이고동은 쓴맛이 나서 아무도 먹지 않았고 장태고동이나 각시고동만 쓸어다 먹었다. 우리 집은 썩 좋은 갯밭이 많았다. 바다에만 나가면 해산물이 널려 있어서 물때를 기다려 바다에 나갔다. 동개(마을 바다밭)를 트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웃보터로 모였다. 동네 소유의 굴밭을 터서 그날만은 굴을 쪼시개로 바다에서 바로 깠는데 잡은 양을 동네와 개인이 반반으로 나누었다. 해거름이 되어 밀물 때가 되면 여자들이 자기가 깐 굴을 이고 줄줄이 서서 나오는데 동각지기 송서방이 되로 퍼서 반반으로 나누었다. 꼬마들은 어른들이 막걸리 안주로 하는 굴회를 한 점 얻어먹으려고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어른들은 매정하게 아이들을 내몰았으므로 아이들은 꾀를 내서 비사리대를 꺾어 어른 몰래 굴통에 다가가 굴통을 냅다 쑤셨다. 송서방의 호통소리에 걸음아 날 살려라고 내빼는데도 비사리대에는 생굴이 꼬치구이처럼 꿰어져 있었다.

바다는 그 밖에도 짱뚱이(망둥어)나 문저리, 갯장어 그리고 바닷가재 비슷한 쏙도 많았다. 아버지는 짱뚱이를 훌치기로 꿰어낚았고, 긴 장대 끝에 매달아 말렸다. 말린 짱뚱이를 방망이로 두드려 양념장을 발라 구우면 천하일미. 문저리는 갯고랑에서 아무거나 꿰기만 하면 줄줄이 물었다. 잇감(미끼)이 부족하면 금방 잡은 문저리를 토막내서 잇감으로 써도 문저리가 낚였다. 갯장어는 썰물 때 바다에 웅덩이를 파고 굵은 돌을 가득 채워놓고 밀물이 나간 뒤에 웅덩이의 돌을 들어내면 갯장어들이 2, 30마리씩 들어 있었다. 갯장어국도 기름져서 맛있지만 갯장어 소금구이가 일품이었다. 꿈틀꿈틀 살아있는 갯장어를 숯불 화로에 적사를 놓고 굵은 소금을 뿌려가며 구우면 노르스름하게 익어 찰지고 고소했다.

 

<가을>

우리 마을에는 상수리나무(참나무)가 딱 한 그루 있었다. 신영감네 집 뒤 대나무밭에 있는 상수리나무는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구슬치기를 하려면 상수리나무 열매인 도토리가 필요해서 아이들은 대나무밭 울타리를 비집고 몰래 들어가 도토리를 주웠다. 그런데 귀신같은 신영감은 아이들의 침입을 어떻게 아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죽여도 금방 지게작대기를 추겨들고 호통을 쳤다.‘네 이놈들, 썩 안 나가냐?’아이들은 혼비백산 도망을 쳤으나 다시 슬금슬금 울타리로 모여들었고 또 신영감의 호통소리가 쩡쩡 울렸다. 신영감네 집 앞 보리밭에는 작은 둠벙이 있고 주위에 앵두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보리가 노릇노릇 익기 시작할 때 쯤이면 빨간 앵두가 주렁주렁 열렸다. 아이들은 입맛을 다시며 보리고랑(이랑)을 엎드려 기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보리가 울렁거려서 집에서 지켜보던 신영감이 또 지게작대기를 들고 쫓아나왔다. 아이들은 숨었던 보리고랑에서 냅다 뛰었다. 보리밭이 엉망으로 망가져버려서 신영감이 항의를 했으므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톡톡히 꾸중을 들었다. 우리 집 윗집 상숙이네 집 울타리에는 포도나무가 기어올라서 먹음직스러운 포도가 까맣게 익어갔다. 아이들은 포도가 설익었는데도 그 시큼달콤한 맛을 잊지 못해 대나무 울타리를 타고 오르다가 울타리 밑에 숨어서 지켜보던 상숙이할아버지가 벌떡 일어서며 질러내는 호통소리에 정기(경기)를 앓는 아이들처럼 놀라 냅다 튀었다. 더러는 통 큰 아이들이 맷돌바위 밑 천방산 능선에 개간해서 만든 옥동이네 참외밭으로 원정도 했다. 달빛이 없는 그믐밤을 지정하여 눈구멍 두 개를 튼 마대자루(밀가루포대)를 뒤집어쓰고 맨발로 참외밭에 침입했다. 바로 원두막 밑으로 군인처럼 포복을 하여 원두막 부근에서 참외를 마대자루에 따 담았다.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지키는 옥동애비는 원두막과 밭의 가장자리만 주시하고 있었다. 때로는 몇 푼 돈을 거둬서 참외를 사는 척 하고 몇몇 동무들이 참외밭을 턴 적도 있었다. 그런 날은 대개 비 오는 날이거나 흐린 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뙈기를 딱딱 치면서 참새를 쫓는 일도 아이들의 몫이었다. 뙈기소리에 면역이 된 참새는 사람이 가까이 가도 겁을 내지 않았다. 물론 허수아비는 전혀 무시해버렸다. 녀석들은 되려 허수아비 어깨나 머리에 앉아서 조잘거리거나 쉬었다. 그래서 새총을 만들었다. 가지가 알맞게 벌어진 Y자형 나뭇가지를 찾아 잘 다듬어서 빨간고무줄로 묶고 총알받이는 헝겊이나 가죽이어야 했다. 총알은 작은 돌맹이나 도토리였다. 참새들은 사람이 접근해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나락() 모개(줄기)에 내려 앉아 나락 까먹기에 열중했으므로 두세 발까지 접근해서 겨냥을 했다. 그러나 새총은 빗나가기 일쑤였다. 어쩌다 명중하여 깃털이 날리면 환호성을 치며 달려가 잡았으나 참새가 죽은 건 아니고 총알의 충격으로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 고구마서리나 수수서리도 했으나 가장 일반적인 서리는 콩서리였다. 절골에 소를 풀어놓고 콩깍지를 베어 마른 솔가지에 불을 붙여 콩타작을 했다. 손바닥과 입 주위가 새카맣게 되었어도 아이들은 모닥불을 헤치며 콩알을 주워먹었다. 붉으스레 알이 찬 방아개비나 뒷다리가 억센 메뚜기구이도 별식이었다. 산밤을 구워먹다가 밤알이 튀어 눈에 재범벅이 되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건 예사였다.

 

<겨울>

겨울방학 중인데도 10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학교를 찾은 건 어떤 목적 때문이었다. 학교 창턱의 레일이 필요했다. 곧 얼음이 얼면 저수지가 꽁꽁 얼고 얼음이 두터워지면 아이들은 시세워서 썰매를 탔다. 무논(물을 가둔 논)에서도 탈 수 있었지만 벼를 수확하고 남은 벼포기가 장애가 되어 신나게 달릴 수가 없었으므로 위험한줄 알면서도 저수지로 모여들었다. 아침나절이면 꽁꽁 얼었던 얼음이 정오 가까이 되면 풀렸다. 그래도 악동들은 썰매를 놓지 않았다. 얼음이 녹아내려 썰매가 달리면 얼음장이 마치 파도처럼 굴곡이졌다. 그 위험한 얼음 위에서 놀다 지치면 모닥불을 피우고 물에 젖은 옷을 말렸다. 주머니에서 생고구마를 꺼낸 동무라도 있으면 군고구마파티가 열렸다.

우리 동네 교회는 상량에 일본제국 연호인 소화년도가 쓰여있었다. 인근 주변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동네 전체가 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2월이 되면크리스마스 이브연극제가 시작되었다.‘구유에 누운 예수 탄생과 동방박사의 참배가 해마다 같은 줄거리였다. 배역이 결정되고 무대를 꾸미고, 금은박지를 사다가 왕관과 옷 등 장식물도 손수 만들었다. 우리 집 뒤의 사촌누나 집이 연습장소였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고 먼 데 사는 동무들 특히 여자애들을 바래다주었다. 그때부터 사내애들은 예쁜 그러니까 좋아하는 여자애를 데려다주려고 서로 은근히 신경전을 벌였다. 눈 뜨기도 전이었다. 5반에 사는 면서기의 딸 평숙이가 제일 인기가 좋았다. 금례나 주남이 동생 인숙이가 질투를 했으나, 금례는 집이 가까웠고 바로 우리 집 앞에서 살았으므로 예외가 되고 인숙이는 자기 오빠가 있어서 늘 불만이었다. 날이 풀리면 연극연습을 끝내고 동각마당에서 달밤놀이를 했다. 진도리라는 숨바꼭질이었다. 그때도 사내애들은 평숙이만을 쫓아다녔다.

우리 집 안 뒷밭에는 커다란 유자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겨울이면 추위를 타는 유자나무가 얼지 않게 짚호배기(짚다발)를 만들어 나무에 두툼하게 걸어주었는데 그 곳은 참새들의 잠자리가 되었다. 사랑방에서 놀던 청년들이 전지를 가져와서 사방에서 갑자기 전짓불을 밝히며 나무를 흔들면 갑자기 눈에 강한 빛이 쏘여 잠을 자던 참새들이 도망하지 못하고 뚝뚝 땅에 떨어졌다. 참새구이에 소금을 쳐서 먹으면 고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러는 밤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초가 처마의 구멍을 쑤셔 잠자던 참새를 꺼내서 잡기도 했다. 거년(작년)에 상수는 참새구멍에 손을 넣었다가 구렁이가 잡혀 기겁을 한 일도 있었다. 구렁이도 참새를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상수와 맞부딛혔던 것이다

 

(이천만의 명상록 - 33)     학교생활

     

<국민(초등)학교>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파격이었다. 3대 무녀독남의 가계에서 열여덟에 혼인하여 열아홉에 덥석 아들을 낳았으니, 그것도 3년 터울로 줄줄이 자손이 번성하니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래서 조급했을까, 그 시대에는 어려서 아이들을 잃기 일수이기 때문에 호적을 한두 살 늦게 올리고 학교에는, 우리 마을처럼 학교가 산길로 10여 리나 되고 산등성이를 서너 개씩 넘어야 하는 등교길에서는 초등학교 입학은 적령기를 훨씬 넘긴 아홉 살이나 열 살 때나 되어야 학교 문턱을 밟았다. 그런데 나는 여섯에 입학을 했다. 동갑내기들과는 3, 4년 차이가 난다. 이른 입학은 커서 문제가 생겼다. 나는 3, 4년 선배들과 학교 동창이 되고 같은 또래 친구들은 학교 3, 4년 후배가 되기 때문에 선후배가 모인 자리에서 동갑나기들은 내 동창인 선배한테는 말을 올리고 같은 자리에서 나와는 맞먹는, 어찌 보면 헤프닝 같은 어색한 광경이 벌어져서 서로 말을 어물거리는 서먹서먹한 광경이 벌어졌다.

그건 그렇고, 하여튼 나는 코흘리개를 못 면한 걸음마 단계에 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학교가 10여 리가 넘는, 더구나 산길을 한 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등교가 문제였다. 그래서 이웃집 사촌누나의 등에 업혀 등교를 했다. 정금이누나는 먼 친척이었는데 아침밥을 먹고나면 의례껏 우리 집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그 가파른 산길에 나를 업고다닌 걸로 어른들은 알고 있었다.그러나 누나가 무척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고생을 덜었다. 대문간만 벗어나면 정금이누나 대신에 나를 업고 산길을 갈 상급생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하여튼 나는 초등학교 2학 때까지 가래중의(여자들이 입었던 밑이 터진 속옷, 고쟁이)를 입고 다녔다. 대소변을 쉽게 할 수 있어서다. 그 먼 길을 등에 업혀서 학교 복도에 당도하면 나를 발견한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덥석 들어올려 무등을 태우고 교실로 들어갔다. 3학년 때 쯤에는 자립했다. 용돈으로 학교 뒤 콧구멍만한 가게에서 사탕도 사먹고 별이 그려진 딱지도 샀다. 용돈이 없었던 시절에 오직 나만 용돈을 썼기 때문에 동무들이 줄줄 따랐다. 오다마(일본어, 큰 다마 즉 구슬)라는 사탕은 동무들이 윤번제로 빨아 먹었다. 겉에 쌀알만한 설탕덩어리가 붙어있는 오다마는 한 개 사면 동무들이 돌려가면서 빨아도 산길을 다 내려올 때까지도 닳지 않았다. 그러나 정금이누나가 졸업을 하고는 자립을 했다. 가래중의도 벗고 동무들과 어울렸다.

학교가 끝나면 줄달음쳐서 산길에 들어 산새둥지를 찾고, 딱주(더덕)를 캐먹고, 가재를 잡고, 송쿠(소나무 1년 생 가지 속 껍질)를 해먹고, 솔잎에 벌이 토해놓은 벌꿀을 빨아 먹었다. 해가 설풋할 때까지 산속을 헤매다가 날이 거뭇거뭇해지면 비로소 동네 입구에 들어서서 메뚜기나 방아개비를 잡아 뀀지(호배기, 벼 이삭이나 싸리나무 줄기)에 꿰어 주렁주렁 들고 집에 돌아와 모닥불에 던져 넣어 구워먹었다.

공부는, 철이 들지 않아서 그럭저럭 중간 정도의 실력이었는데 5학년 담임선생님은 통신표에기억력은 좋으나 노력이 부족함이라고 썼다.

 

<중고등학교>

남양중학교. 초등학교 뒷마당에 커다란 군대용 천막을 치고 초등학생용 책걸상을 맨땅바닥에 놓았다. 학생들은 30여명. 시골에서 도시유학은 꿈도 못 꿀 때라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왜 나를 그 간이학교에 보냈을까? 집안이 넉넉했으므로 유학보내는 건 문제가 없었을텐데 나도 그 간이학교에 입학했다. 아마 귀한 손자를 품에서 못 놓아서였으리라 짐작한다. 교회가 일찍 들어와서 깨인 마을이었으나 할아버지는 감히 도시유학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겨울에 우리 학교에 낯선 학생이 전학을 왔다. 지금 말하자면 형편이 어려워서 시골로 내려온 아이였는데 도시물을 먹어서 약간 되바라졌다. 그 아이에게는 빨간 목이 긴 구두가 있었는데 용돈이 아쉬워서 팔려고 했으나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욕심이 났다. 밤에 곁에 누워서 자면서 할아버지를 졸랐다. 다음 날 할아버지는 선뜻 의관을 챙겨 입고 같이 등교해서 그 아이 할아버지와 흥정을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그 구두를 신고 등교하지 못했다. 너무 튀는 빨강색인데다가 운동화도 변변히 신지 못하던 시절에 그 빨간구두를 신고 다닐 용기가 없었다. 방안 선반에 모셔두고 가끔 내려서 방안에서만 신었다.

아주 예쁜 동창생이 있었다. 학교 옆 고란마을에 살았는데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녀는 말만한 처녀로 탈바꿈했다. 중학생들 중에도 나이가 많은 선배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학교가 끝나면 서로 어울려 밤늦게까지 놀아나는 것 같았다. 교실에서 수근대는 말들이 그랬다. 그래서 그녀에게 호감이 많았으나 실망도 컸다. 할아버지께 말씀만 드리면 그녀는 내 색시가 될 수 있었는데 한 철 지켜본 결과 실망해서 포기 했다. 공부는 역시 중 정도였는데 그 놈의 수학과 영어가 문제였다. 특히 2차방정식에서 골머리를 앓았다. 2x - 3 = 5에서 x값을 풀지 못했다. 선생님은 -3= 뒤로 이항하면 -+가 되어 2x - 3 = 52x = 5 + 3이니 2x = 8이고 x = 8/ 2, 82로 나누므로 x = 4라고 했으나 나는 2x = 5 + 3의 이항과 x = 8 나누기 2를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이항을 미지수는 미지수대로 숫자는 숫자대로 모아서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라고만 말해서 머릿속에 틀어박으려고 했으나 내 머리로는 왜 그렇게 계산해야 하는지 투리(이해)가 생기지 않아 퍽 고심했다. 그래서 맨날 남아 부진아지도를 받았다. 수학과 물리는 고등학생 때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장학생이 되어서도 수학과 물리시험은 짝꿍을 컨닝해서 간신히 버텼다. 그래도 그 덕택에 동창여학생 다음으로 좋아했던 웃보터 면서기 딸이였던, 1년 후배 여학생과 가끔씩 함께 하교를 했다. 그녀의 외삼촌이 중학동창이었는데 외삼촌이 그녀를 대동하여 등하교를 했기에 늦게 남아 보충학습을 받던 나와도 동행이 되었다. 외삼촌과 손을 잡고 걷는 그녀 뒤를 졸졸 따라 시오리 신작로를 걷는 내 마음은 풍선처럼 파란 하늘을 날았다.

다음 문제는 Living English라는 영어였다. 맨날 노력을 해도 성적은 늘 하위였다. 유독 영어만 하위였다. 내일 영어단어시험을 본다던 날 나는 아버지에게 시험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단어장을 보더니 무조건 외우라고 했다. ‘기억력은 좋으나 노력이 라는 5학년 담임선생님의 말처럼 내 기억력은 괜찮았던지 아버지가 평상에 누워 성경을 읽는 한 시간 남짓에 단어장을 통째로 달달 외어버렸다. 단어 알파벳, 발음기호, 품사, 뜻을 등 30여 개 낱말을 순서대로 외어버렸다. 다음 날 영어시험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당연히 100. 평소에 2, 30점에 매달려있던 내가 100점을 맞자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컨닝?’이라고 의심한 거 같았다.‘, 나와!’선생님은 칠판 앞에 나를 불러세우고 아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똑같은 단어를 불렀다. 한 개, 두 개 . 선생님과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져버렸다. 막힘이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자신의 예상이 빚나가자 퍽 계면쩍어 인상이 요상스럽게 찌그러졌으나 칭찬은 했다. 그때부터 내게 영어는 매우 쉬운 과목이었다. 기억력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아예 책을 통째로 외어버렸다. 그 덕에 교회 여름성경학교의 성경암송대회에서요한복음을 통째로 외어 탐내던 가죽 신구약 합본 성경책을 상으로 받았다.

그 다음 해, 그러니까 간이중학교 2학년 때 중학교가 폐쇄되었다. 그래서 광주로 유학을 했다. 아버지가 날 데리고 광주의 조대부중 야간 교무부장 김석태선생님을 찾았다. 씨암탉 한 마리는 내가 들고 아버지 뒤를 따랐다. 김선생님댁은 학동 3거리 근방에 있었는데 낡은 기와집이었다. 지산동에 자취방을 얻고 고향 아이들 서넛이 함께 자취를 했다. 비좁은 방에 새우잠을 자며 주야간을 다니는 친구들과 몸을 비볐다. 흙난로에 장작을 쪼개서 밥을 지었고 반찬은 되는대로 먹었다. 때로는 양념소금에 맨밥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산동 자취집 대문 앞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무게를 못이겨 휘어진 나무다리를 건너 벽돌공장으로 들어서면 전깃불이 휘황한 교실이었다.

용돈이 떨어지면 몰래 학교 뒷산을 넘어 교실에서 걸상을 도둑질해서 땔감으로 썼다. 뒷산에서 솔갓을 쳐다가 불도 지폈다. 우리가 다닌 길 옆에 큰 연못을 가진 기와집이 있었는데 손자와 머리 허연 할아버지가 바둑을 두는 걸 보았다. 당시 지산동은 왕대밭을 지나면 온통 딸기밭이었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복숭아밭이었다. 친구네 복숭아밭을 밤새 지켜주면 벌이 쏘아 터진 복숭아를 맘껏 먹을 수 있었다. 벌이 쏜 복숭아가 제일 달았다. 여름날에 목욕은 개울에서 했는데 덤으로 손바닥만한 가재를 잡아다가 도시락에 넣고 소금을 뿌려서 구워먹었다. 발갛게 익은 가제는 파삭하게 구워져서 별미였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주간으로 전학했다. 주간학생이 되고부터는 공부에 취미가 붙었다. 1등에서 4등 사이였다. 촌놈이 1등을 하자 담임선생님이 놀랐다. 아이들에게는 질시의 대상이었다. 조대부고 장학생시험은 24 : 1의 경쟁이었는데 붙었다. 조대부중 동급생들 중 서너 명만 합격했다. 장학생시험에 난방하고 명문 광주일고나 광주고에 붙었다. 할아버지가 쌀 세 가마니를 팔아 투가레스 손목시계를 사줬다. 아버지의 일제시계는 잃어버렸는데 아마 야간중학교시절 동급생들의 장난이었을 거다.

 

<주간晝間중학교>

야간夜間중학교 올빼미신세에서 벗어나 주간중학교로 전학했는데 친구가 없었다. 3학년 1년 동안 외톨이로 지냈다. 공부는 잘해서 시험 때마다 1 - 3등을 유지했다. 그래서 질시를 받았다. 야간에서 전학해온 촌놈이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이었다. 담임도 특별히 예뻐했다. 일기장검사에서 뛰어난 문장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담임이 가져간 일기장은 되돌려받지 못했다. 졸업 때 수상할 학생들 이름이 수군수군거렸다. 내가 1등이다라고 한 말이 있는가 하면 3학년 때 야간에서 주간으로 전학을 했기 때문에 우등상을 못탄다는 말도 있었다. 결국 졸업식에서는 상을 타지 못했다. 그리고 곧 조대부고 장학생시험에 담임추천학생으로 응시했다. 조대부중에서 여나무 명이 시험을 치뤘는데 나와 두 명이 합격했다. 내가 1등이었다. 우등상을 못 타 서운했던 마음이 통쾌해졌다. 동급생들도 눈길들이 무안했다. 조선대학교 박철웅총장의 교육철학은 크게 세 개였는데 그 중 하나가가난으로 학업을 할 수 없는 영재의 휘몰을 용납치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학년 당 네 개 반에서 두 개의 장학생반을 뽑았다. 대단한 교육력이었다. 또한 특기장학생도 뽑았다. 체육, 음악과 미술특기생을 대대적으로 선발해서 무상교육을 펼쳤다. 국가대표급 체육특기자가 배출되었고, 대한민국의 중견 예술가들의 산실이 되었다. 내 친구들 중에도 이런 특기장학생 출신으로 국가적인 예체능인들이 있다.

조선대학교 박철웅총장은 우리 마을 뒤 사두실고개 넘어 배다리(주교舟橋) 태생이다. 할아버지 말에 의하면 박총장의 아버지는 솔(야생 별꽃뿌리로 만든 모시베나 삼베 낫는데 사용하는 솔)이나 챙이(알곡을 고르는 키) 그리고 대바구니장사였다. 그리고 박총장의 여동생과 아버지의 혼담이 있었으나 할아버지가 자손 번성을 염원했기 때문에 파기되었고, 그 여동생은 윗집 상숙이네 어머니가 되었다. 조선대는 도민대학으로 도민들의 성금으로 설립되었고, 같은 고향출신 서민호도지사의 각별한 도움으로 세운 대학이었다. 할아버지도 쌀 서 말을 희사했다고 했다. 성금모집위원들이 할아버지네 주막에 묵어갔는데 아직도 외상 밥값이 외상이라고도 했다.

조대부고 장학생반은 치열한 경쟁을 시켰다. 평가를 해서 평균 90점 미만이 되면 탈락시켰다. 머리 좋은 학생들은 반발을 했다. 교사진이 문제였다. 학생들의 실력이 교사 보다 월등한 상황이 벌어졌다. 더구나 일반학생과 장학생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장학생반 학생들이 교사 교체를 항의했다. 학교로써는 퍽 어려운 딜렘마인 셈인데 학생들은 그 걸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조대부고는 교사진이 대부분 조대출신이었다. 결국 데모가 시작되고 박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4 . 19가 일어났던 시대였다. 그래서 장학생반이 해체되어 일반학생들과 섞였다. 문제가 더 커졌다. 과장이지만 조대부고는 장학생반과 깡패반이 절반씩이었는데 이렇게 이질적인 집단이 혼성되자 수업이 안 되었다. 영재와 부진아 공존불립不立.

체육교사는 깡패출신이었다. 나중에 박총장의 질녀사위가 되었는데 나를 예쁘게 봐서 가끔

천만아, 누나 있니? 있으면 나 좀 소개해주라.”

고 농담도 했다. 체육시간이 끝나면 팔씨름도 했다. 심부름은 꼭 나를 불러 시켰다. 하여튼 최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는 깡패로 낙인 찍혔는데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가방에 식도를 신문지로 말아가지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통제하려면 깡패 체육교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머리칼을 통제하던 시대였다. 나팔바지나 불량 학용품도 수시로 통제했다. 학생들은 머리를 기르려고 기를 쓰고 체육교사는 갑자기 들이닥쳐 머리칼을 바리캉(이발기계)으로 밀어닥치던 시대였다. 학기말고사가 한창이던 교실에 체육교사가 바리캉을 들고 나타났다. 보통 수업 중이라면 재빨리 창문을 넘어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지만 시험 중이라 불가능했고 체육교사도 그 걸 노렸다. 시험지 위에 머리칼이 수북히 쌓이고 머리에 열십자 도로가 생긴 아이들은 눈물을 똑뚝 흘렸다. 그런데, 다음 날 하필이면 영어시험시간에 체육교사가 시험감독이었다. 아이들은 무언중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체육교사를 놀리기 시작했다. 영어에만은 일자무식인 체육교사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몇 번째 문제가 잘 안 보이니 읽어달라, 다섯 번째 답지의 3번을 읽어달라, 사방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체육교사는 뜻밖의 상황에 당황해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내가 일일이 답변을 해버린 것이다. 체육교사는 고맙다 못해 존경스러운 눈빛이었고 나는 왕따를 자초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 희망은 판사였으며 서울 유학을 계획했다. 그러나 가세가 한참 기울어져가고 있어 판사의 꿈은 접었다. 1년을 놀고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서 교육대학을 지망했다. 담임은 원서접수를 거부했다. 영재의 휘몰을 막아보려는 은사의 배려였으나 처지가 처지인지라 원서접수마감 3시간 전에야 가까스로 빌어 원서를 들고 뛰어서 마감시간 안에 포도씨 원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조카에게 전과지도서를 빌어 전혀 문외한이었던 예체능을 공부했고, 교대입학시험에서는 도레미파 한 번 부르고, 생전 처음으로 왼손 데쌩을 오른손으로 그려내고 합격했다. 깨진 항아리소리로 부른 도레미파나 개발새발 그린 데쌩이 아니라 당시에 전국 고3이 시행했던 국가고시합격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이천만의 명상록 - 34)     최초의 시

무더운 여름날 나는 극도의 불안감으로 사랑방에 누워있었다. 아버지와 갈등 때문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오후 해거름판에 탈출을 감행했다. 유둔장터까지 시오릿길을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어 아랫집 후배 - 유둔장터에서 미장원을 경영하는 후배를 찾아가 차비를 빌렸다. 비를 흠뻑 맞은 나를 보고 후배는 깜짝 놀랐다. 그 기억이초조焦燥라는 시를 탄생시켰다. 일기 외에 쓴 최초의 글이었다. 고등학교 졸업문집에 가명假名(ㅊㅁ,은 천만 이로써 이천만의 약자略字)으로 투고했는데 찬사가 대단했다. 기성시인의 시가 아니냐고 했다. 이에 용기를 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지방지의 단골 투고가가 되었다. 교대신문에도 투고했다.‘산호문학써클에서 접촉이 왔다. 문학활동이 시작되었다. 머리칼을 자의로 박박 밀어버리고 모자를 쓰고, 수업은 대리대답을 시키고, 도서관의 장서를 모두 독파해버린다는 원대한 희망을 앞세워 아리랑고개의 벤치에 누워 맨날 도서관의 책만 읽고, 교대신문사에서 일 좀 거들고는 교대의 기억은 별로 없다. 음악교수가 강당에다 몰아넣고 강제로 들려주었던 클라식음악, 체육과부전공의 단팥죽내기 연식정구, 가난 때문에 한 숙식가정교사 전전輾轉과 교수강의노트 필경 그리고는 책 뿐. 광주교대의산호珊瑚문학과 전남대학교의 ㅇㅇ문학그리고 조선대학교의청록靑綠문학이 모여노령蘆嶺(노령산맥)문학을 만들고 시민회관에서 치뤘던문학의 밤이나 시화전詩畵展 행사 정도가 생각날 뿐이다. 낡은 염색군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서서 치기어린 시 몇 줄을 조명을 받아가며 낭독했던 여기서도 기성시인 대접을 받았다. 그래도 그 때의 문학도 몇몇은 문단에서 성가를 높이고 있다.

내 문학의 입문은 성경과 일기였을 것이다. 그렇잖으면 쓰기에 어떤 공부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글을 끄적거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매일 새벽이면 강제로 읽게 한성경 석 장이 밑천이라고 짐작한다. 구약성경은 한 번 정도 그리고 신약은 세 번 정도 독파했다. 특히 요한복음은 통째로 외웠다. 또한 언젠가부터 혼자 쓰기 시작한 일기가 문장수업의 전부였다.

 

(이천만의 명상록 - 35)     가정교사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눕자 농사 지을 사람이 없는 집안은, 식구들이 많았고 아이들은 잔밥에 싸여 있었다. 포도씨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대학에 진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1년을 쉬었다. 뽀쪽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같이 대학 진학을 방황했던 친구가 교대진학을 권장했다. 두 말 않고 교대를 선택했으나 학교는 장학생이었다는, 장학학비를 갚아야 한다는 논리로 조대진학을 강요했다. 원서마감 한 시간 전에야 원서를 써주었다. 친구와 나는 계림동 철도길을 숨차게 뛰어 마감시간이 지나서 원서를 접수시켰다. 교대 시험과목도 모르고 지원했는데, 초등학생들의 전과지도서를 볼 정도로 우매한 입시공부가 다행히 합격되었다. 음악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8음계를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불렀고, 미술은 주먹 데쌩을 했다. 아마도 대학수능시험에 합격한 프리미엄이라고 생각한다.

교대에 입학해서는 자포자기, 도서관의 책을 다 독파해버리겠다는 만용으로 수업시간도 대리대답으로 빼먹고 책만 읽었다. 교대신문사에서 원고 교정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문학동인에 가입해서 시화전도 하고 문학의 밤에도 나갔다. 그러나 숙식과 학비가 문제였다. 그래서 가정교사를 하는 친구들에게 가정교사자리를 부탁했다. 맨 처음 가정교사는 자취집에다 중학생들을 불러 모아 영어를 가르쳤다. 칠판을 사다 방벽에다 걸고 대여섯 명 여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용돈 정도는 벌었다. 그러다가 형편이 더 어려워져서 입식으로 들어섰다. 동명동에서 중학생과 초등학교 6학년을 가르쳤다. 초등학생이 까타로와서 애를 먹었다. 친구는 아이를 힘으로 잡아야 한다고 하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와 겁을 주라고 했다. 고등학생 누나가 내 방에 들어와 낮잠을 즐겼는데 보기 민망할 정도로 하체를 들어냈던 게 기억난다. 중학생 누나도 경쟁적으로 내 방에 무시로 들락거려서 어려웠다.

그 외에 교수들의 프린트 강의안을 만들었다. 교대 행정실 구석방에 프린트실이 있었는데 전담 프린트사가 상주하면서 교수안을 작성했다. 나는 그 프린트사의 필기기구를 빌려 강의안을 필경했다. 수학과교수님의 강의안이었는데 원지 한 장 당 얼마 이런 식이었다. 필경 전담사 보다 훨씬 단가가 높은 꽤 많은 돈이었는데 아마 교수님께서 특별히 선심을 쓰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전전하면서 고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부잣집 도련님의 고난의 시작이었다.

 

(이천만의 명상록 - 36)       교육대학시절

교육대학에 나와 같은 처지의 고교동창과 동행했다. 친구도 가정형편으로 일반대학의 꿈을 접고 교육대학에 들어갔는데 거주지가 서석동으로 같아서 교대 2년 내내 붙어다녔다. 동성연애를 한다고 수근거릴 정도였다. 그 친구와 나는 교대 도서관의 장서를 2년 동안에 독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강의는 딴전이었다. 당시 교대는 국비였으므로 밥만 해결되면 다닐 수가 있었다. 강의시간은 친구들에게 대리대답을 시켜놓고 아리랑동산 벤치에 누워 책을 읽었다. 깐깐한 국어교수가 대리대답을 막아버린 뒤로는 결석을 잡든 말든 강의를 F학점이 안될 만큼 적당히 출석하고 책벌레가 되었다. 잔디밭에서 책을 읽는 사람 위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그린 독사삼매경이란 만화를 연상시켰다. 단팥죽내기 정구에 미쳐서 날마다 30분 정도는 연습해야 하는 오르간을 게을리했다가 연속 세 번 권총(F학점)을 차고 졸업을 못할 지경에 이르러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단짝 친구와 교대해서 오르간을 강점했다. 눈 비비자말자 학교 풍금실로 달려가 다른 학생들이 점거하지 못하게 오르간 두 대를 잡아놓고 맹렬히 하는 연습이다. 특히 행사음악의 3부연주가 모든 학생들의 저주를 받았다. 우리 아버지는 전혀 음악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었는데도 자습으로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고 찬송가의 4부합창을 능란하게 연주했는데 나는 그 유전인자도 타고나지 못한 망나니였다. 그래도 약 한 달 간 했던 새벽연습이 효과를 봐서 해린 C(체육에 젬병이라 체육교수가 배구 토스시험을 치루며 내게 한 말, 너는 C가 조금 해리다, 약하다)’ 정도의 학점으로 졸업은 했다. 많은 학생들이 오르간 때문에 졸업을 못했는데 그 시절 오르간교수의 집에는 협박편지가 날아오는가 하면 장독대가 남아나지 않았다고들 한다. 물론 풍금실도 수난을 겪었다. 피아노건반을 뜯어버리는 횡포는 약과였다.

책과 아리랑동산의 벤치와 신문사를 들랑거리며 2년이 후딱 지나갔다. 숙식가정교사를 하고, 단팥죽내기 정구게임에 몰두하고, 교수님의 강의안을 필경하여 용돈을 벌고, 문학의 밤과 시화전을 몇 번 하는 사이 교대 2년은 금방 지나가버렸다. 운 좋게 고향 모교로 발령을 받았다

 

(이천만의 명상록 - 37)        동생의 요절妖折

두 살 터울의 동생은 수재였다. 초등학교 졸업 때 교육감상을 받았고 광주의 조대부중에 입학원서를 냈더니수재가 원서를 냈다고 감탄했다.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미술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서 퍽 자랑스러웠다. 생김새는 할아버지를 닮았는데 걸쭉하고 키가 커서 장대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고 동생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둘이서 서석동에서 자취를 하며 살았는데 그만 몸이 아팠다. 시름시름 앓더니 몸을 가누지 못해, 그때 한 창 줏가를 올리던 신설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으나 병명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요양을 하면 낫겠거니 하여 고향으로 내려보내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전보가 날아왔다.‘동생 사망’. 청천벽력靑天霹靂, 차편이 떨어져서 밤 새 울었다. 친구들이 남광주역에 바래다주었는데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울었다. 그때 남광주역 스피커에서 흘러나온엘리자를 위하여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음악이 되었다. 도착해보니 집안 식구들은 넋을 놓고 있었고 동생은 이미 선산 발치에 묻었다고 했다. 하산하는 길 옆 보리밭에는 막 패기 시작한 보리밭이 초록 주단처럼 깔려 있었고 먼 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거지가 되어 밖에 나앉지 않으려고 가산을 팔아 빚을 갚으면서도 마지막 가산이었던 선산과 집터만은 팔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탓에 빚 청산이 몇 년 더 늦어졌다. 순전히 가세를 일으키려고 부부교사를 선택했고 동생들은 가까스로, 그것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리한 배려로 중학교만 포도씨 마치고는 모두 서울로 가출했다. 망해가는 집안 살림은 순식간이었다. 집 앞 평야가 대부분 다 우리 밭이었고, 논이 30여 마지기에다가 산판이 다섯 개나 된 살림이 단 2년 만에 거덜이 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고흥 팔영산 아래서 솔가하여구름다리로 이사와 진등 입구 신작로 옆에 터를 마련하여 술장사와 머슴을 살면서 자수성가한 재산이었다. 그러려고 그랬는지 2년 가뭄에 흉년이 들었다. 빚은 장리벼로 1년에 5할이 이자가 불어나는 고리채였다. 100가마니가 다음 해에는 150가마니 그리고 한 해만 더 묵히면 225가마니가 되어 2년 만에 원금의 2배 이상 불어나는 엄청난 고리채였다. 그래서 농사를 지어 갚으려던 계획마저 좌절되었고 2년 흉년에 우리 집 논과 밭은 헐값으로 팔려나갔다. 흉년이라 살 사람은 마땅치 않았고 살 여력이 있는 부자들은 턱도 없이 값을 후려쳤다.‘울며겨자먹기로 재산을 처분했다. 애걸하다싶이 팔았으니 제값을 받을 턱이 없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산판을 쌀 네 가마니에 넘겨야 했다. 우선 이자라도 갚아야 했으니까. 동네사람들은 참 야박했다. 현씨는 금산 김(해우)장사 돈놀이로 부자가 되었는데 부자가 되기 전 큰아들이 급성맹장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새벽에 우리 집 마루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장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돈을 빌려갔다. 할아버지는 선뜻 거금을 빌려주었다. 그런 그가 우리 집 논밭을 거의 다 샀는데 무정했다. 할아버지는 교회부지와 동각부지를 희사했고, 명절이면 떡을 돌렸다. 노인들을 모시고 있는 가난한 집에는 떡쌀을 주고, 집에서 잡은 돼지고기를 돌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한량이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대농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었고 이에 감농할 사람이 없어 집안에 빚이 채이자 그 이자가 집안을 순식간에 거덜내버렸다. 나조차 고등학생시절이라 아무 것도 모르고 이장과 주막 김씨의 조언대로 하는 판에 살림이 거덜나버렸다. 이웃 고을에 벌족한 외가가 있었으나 외삼촌들도 망해가는 우리 집을 말로나마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판에 동생이 죽었다. 그 많던 재산이 거덜나고 선산과 텃밭과 집만 달랑 남았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동생도 잊고 살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백양사 천진암에서 천도제를 올렸다. 증조부모, 조부모, 일제시대 행방불명된 - 아마 강제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큰 조고모, 아버지 그리고 동생의 영혼을 천도했다. 선산의 묘도 곱게 잔디를 입혔다. 빌흙땅이라서 묘봉에 잔디가 살지 않아 헐벗었는데 잔디를 사서 입혔다. 그리고 매년 41일이면 하루 종일 동생을 위해 불경을 외우고 촛불을 밝혔다.

 

(이천만의 명상록 - 38)     모교 발령

 감개무량感慨無量, 모교에는 선배들도 많았다. 더구나 교장선생님은 어린시절의 교장선생님이었다. 2년 차에 1학년을 맡았다. 묘한 웃음을 흘리면서 1학년담임에 임명한 교감선생님의 원대한 음모를 그때는 몰랐다. 선배선생님들이 비실비실 웃는 이유도 알 리 없었다. 1학년과 숙명적 인연이 시작되었고 치명적인 발병의 근원인줄 그때는 몰랐다. 1학년은 세 반인데 교실은 두 칸 뿐이었다. 그래서 한 칸은 학년주임이 단독교실로 사용하고 남은 한 칸을 처녀선생님과 같이 썼다. 1학년은 2부수업도 없었기 때문에 2시간씩 교대를 했다. 3월의 칼바람을 맞으며 양지쪽 언덕을 찾아다녔다.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땅바닥에 펴놓은 아이들의 공책에 먼지가 수북히 쌓이고 꽁꽁 얼어 새파란 손가락으로 개발새발 글씨를 그려내는 아이들은 연필조차 제대로 쥘 수 없었다. 훌쩍거리는 코벙청이 되어 아이들 얼굴은 차마 쳐다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밖에서 꽁꽁 얼었다가 교실에 들어서면 난로 훈기에 아이들이나 선생이 모두 녹아내려 취한 듯 비실거렸다.

그 시절 나는 고향집에서 10리 산길을 걸어 통근했다. 어린시절 학교 다니던 상황과 같았다. 안개 짙은 날이면 쿵쿵! 방아소리가 나던 묘지, 늘 쉬어가던 쌍묘. 친구들과 맷새둥지를 쫓고 종달새둥지를 찾아 올가미로 잡았던 기억이 새롭게 다가와서 고개를 두세 개 넘는 산길 10리가 고된 줄 몰랐다. 비 오는 날, 발가벗고 공동묘지 옆 참외밭을 습격했다가 들켜서 망신을 당한 기억도 새로웠다. 단지 친구들이 사라지고 키가 훌쩍 자란 나만 남았을 뿐이다. 초여름이면 찔레꽃이 곱게 피었다. 나는 그 찔레꽃을 꺾어다 잉크병에 꽂았다. 파란 빨간 잉크병에서 하얀 찔레는 입맥을 따라 채색이 되어갔다. 보고있는 사이에 입맥이 실핏줄처럼 들어나고 입맥이 다 물들면 꽃잋 전체가 물들다. 신비로왔다. 입맥이 살아나고서는 채색이 되는 과정이 무척 아름다웠다. 아마 그때부터 가슴앓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녀선생님과 나는 토요일이면 인근도시로 애정행각을 시작했다.

교사용책상도 한 개 뿐이었다. 그래서 사무를 볼 때는 마주 앉았다. 서랍도 한 개씩 사용했는데 어느 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사했더니 여선생이 내 설합을 뒤져 광주의 S누나한테서 온 편지를 읽은 걸 알았다. 그 후로 그 여선생과 묵비상태가 계속되었다. 동학년주임이 화해를 시키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나는 거부했다. 동료 여선생들도 화해를 주선했으나 거부했다. 한 교실 하나의 책상을 사용하며 하루 종일 부딪치는 사람들이 묵비로 일관되니 상대 여선생은 벼라별 짓을 다 동원했으나 묵묵부답黙黙不答이었다. 그런데 이게 불행의 단초가 되었다. 주말이면 행사처럼 다녔던 광주행 버스를 버리고 순천행으로 바뀌었다.

 

(이천만의 명상록 - 39)      S누나의 자살

광주행 버스를 헌 신짝처럼 버리고 순천행을 하는 사이에 번민이 깊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광주에서 재학시절 사귀었던 S누나였다. 누나는 전화국 교환수로 일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내 뒷바라지를 했다. 자취를 하던 때는 김치도 담궈주고 가끔 점심 도시락도 만들어주었다. 도시락은 맛깔스럽기도 했지만 곱게 만들어서 급우들 보기가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한창 문학소년으로 위세를 떨치던 때라문학의 밤이니시 낭송회가 연례적으로 열렸을 때도 누나의 뒷바라지가 절대적이었다. 누나가 애인 사이로 발전한 건 교사발령을 받은 뒤부터였는데 결정적 계기는 기억이 없다. 그때 쯤 할머니는 몇 번 본 적이 있는 누나를 장손 며느리감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하여튼 나는 토요일만 되면 광주행 버스를 탔고 누나는 나를 아예 신랑으로 대접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껴안고 자기도 하고 입술을 맞대고 잔 일은 있었어도 최후의 선만은 넘지 않았는데 교사발령을 받고 처음 상경한 토요일 밤 누나는 나를 신랑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놋쇠 반상기까지 맞춰 구비했다. 결혼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느닷없는 여자가 나타나 한눈을 팔기 시작했고 갑자기 광주행이 단절되자 누나가 짬을 내서 시골로 찾아왔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할머니는 손자며느리가 왔다고 은근히 동네사람들한테 자랑을 했으나 내 마음은 이미 콩밭에 있었다. 누나는 나를 밤새 설득했으나 한 번 눈이 뒤집힌 사내가 쉽게 제자리를 찾을 리 없어 혼자 울며 돌아갔다. 그러고도 몇 번 더 와서 할머니에게 애원을 했으나 소용이 없어 소식도 없더니 그해 겨울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다

 

(이천만의 명상록 - 40)       탕자蕩子

교육계에서 시답잖으나 교육에 대한 이론을 배웠다. 교사발령을 받고는 심리학이나 교육학 같은 것들이 교육에 직접 대입되는 걸 보았다. 그런 점에서 내 심리상태는 비정상적이었을 것이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정신분열증이 자라는 마음에 큰 트라우마였으리라. 아버지는 정신분열증상을 가지고도 교회에서 성가대를 맡았고 풍금반주도 했다. 그림 그리기와 악기를 다루는 솜씨도 전문가 수준이었다. 글씨는 달필이어서 교회나 마을행사 때는 아버지의 글씨가 팔랑거렸다. 그리고 지성스럽게 매일 새벽이면 곤히 잠에 취한 우리 형제들을 깨워 성경 낭독을 시켰다. 매일 성경 석 장씩을 읽지 않으면 아침밥이 없었다. 성장하면서 눈만 뜨고 웅얼웅얼 성경을 읽는 체 책장을 넘기는 잔꾀도 부렸지만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義自現때문에 성경을 통째로 외우는 실력도 늘었다. 그러나 본심은 어쩔 수 없는 셈,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 태생의 사람에게도 프로이트학설은 대입되었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가 믿음에 대한 회의였다. 모태母胎신앙이었던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새벽에 교회를 찾아 신과 대화를 시도했다. 온 몸이 꽁꽁 얼어붙어 기구祈求한 기도에 응답이 없어서 산에 올랐다. 일출과 일몰은 황홀했다. 천지개벽天地開闢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신을 잃었다. 여자에 탐익하고 술에 빠졌다. 그러면서신과 여자를 알면 이라고 했다. 음악을 듣고, 정구를 치고, 노름도 했다. 백양사 천진암 선방禪房에서 한 철을 지내면서도 애인을 부르고, 눈 쌓인 산길을 내려가 저자거리에서 취해 눈길에 뒹굴었다.

A. S. Niel스트레스를 받은 강도만큼 반발력이 세고, 기간만큼 반항한다고 고무줄이론을 설파說破했다. 내 유년의 시기가 모두 반항의 역사였다. 그리고 아이들을 보았다. 결손된 아이들은 한결같이 반항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반항을 표출했다. 심지어는 교사들도 좀 정도에 벗어난다싶어 추적해보면 어린시절의 억압에 대한 반발이었다. 학교에둠벙을 만들어놓고 물고기를 잡아넣고 물풀을 심었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가 둠벙에 관심을 보였다. 물고기도 잡아넣었다. 수업을 빼먹고 딴짓을 해서 추적했더니 문제아였다. 어머니는 가출하고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 아이가 밥과 반찬을 손수 마련하며 연명하고 있었다. 3학년 여자아이가 점심급식에 집착했다. 세 번씩이나 밥을 먹고는 밤이면 보건소 신세를 져서 할머니가 매우 안타까와했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해서 할머니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먹어도 먹어도 식욕이 차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이 빈 마음을 밥으로 채우려고 한 것이다. 매우 모범적이고 유능한 여교사가 있었다. 전국적 제일 규모의 학교에서 약관에 연구부장을 맡았다. 그런데 밖에서는 몰랐지만 모범교사였던 낮과 달리 밤이면 문제가 있었다. 술을 마시고 아무 남자나 가까이 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여교사는 어린시절 딸딸딸 가정의 여섯째 딸로써 아무 애정없이, 오히려 무관심의 대상으로 자랐었던 어린시절을 울면서 말했다. 남아선호의 가정에서 여섯 번 째 태어나 천둥이로 자랐고 남녀공학 학교에서도 여성차별을 경험했다. 나도 프로이트의 심리적 예측에서 벗어날 수 없어 많이 방황했다.

 

(이천만의 명상록 - 41)     고향 탈출

내가 중매를 서랴?”

초등학교 은사고 고향 선배인 교장선생님께서 퇴근길에 물었다. 여선생과 연애는 이미 학교 안에는 물론 지역사회에까지 소문이 파다했다. 절제와 예절을 넘어서버려서 소문이나 악설을 개의치 않았으나 이는 젊은이의 협기였을 뿐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는 교장선생님으로서는 난제였을 것이다. 또한 여선생의 평소 행동을 잘 아는 분으로써 중매 제안은 내 의중을 떠보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외지로 발령을 내주십시오.”

어디로?”

, 타향이 좋겠습니다.”

그래도 내 집안 형편을 아는 선배라서 인근 보성으로 보내주었다. 여자는 잊었다. 잊고싶어서 떠난 고향이었다. 학창시절 광주에 유학할 때 칙칙폭폭 석탄기차를 타고가다보면 가파른 철도에서 기차가 서기도 하고 비실거려서 기차에서 내려 걸으며 바람을 쏘이고 더러는 석탄재 범벅이된 얼굴도 씻었던 고장이었다. 열심히 했다. 그때 쯤 1학년 문자해득이라는 과제를 붙들고 있었다.‘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한글이 아이들에게는 매우 어려웠다. 3월 진급을 하면 늘 서너 명의 한글미해득아가 발생했다. 한자에 비해 쉬워서 한글 창제 당시에는 한나절이면 깨우칠 수 있다고 반절半切이라고 했다는데 아이들은 1년을 배우고도 미해득이 되어 진급을 했고, 미해득 진급아는 2학년에서부터 부진아가 되었다. 대개는 평생 부진아가 되었다. 한글교육에 대한 의구심과 수업에 대한 불만도 겹쳤다. 나름대로 연구를 했다. 교육일지도 썼다. 맡기 싫어하는 1학년만 고집했다. 그래도 한두 명씩의 부진아는 어쩔 수가 없었다. 100% 문자해득에 매달렸다. 그 해 겨울 교육청회의에 다녀온 교장선생님께서 모범교사 표창장을 수여했다. 그 다음 해에도 모범교사상을 탔다. 그렇게 해서 1학년을 내리 9년 동안 맡았다. 1학년담임 선수라는 평을 얻었다. 엄두도 못낼 일이라서 거절했지만 강의 요청도 왔다.

인생의 스승을 만났다. 광주에서 밀려온 교장선생님은 부임부터 특이했다. 부임하자말자 하루도 빠짐없이, 한 집도 거르지 않고 사모님과 같이 가정방문을 했다. 그리고 꽃을 심었다. 학교가 온통 꽃밭이 되었다. 아니 보성군내 학교가 다 꽃밭이 되었다. 채송화가 퇴화되었다고 일본에서 채송화씨 세 알을 주문해서 심었다. 교사조회를 마치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꽃밭을 일구었다. 아침이면 늦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같이 깨웠다. 한창 총각시절이라 잠이 많았는데 어김없이 깨워 빗자루를 손에 쥐어주었다. 학교교문을 쓸었다. 가끔, 퇴근 후 불러 관사 항아리에 담궈둔 과실주를 대작對酌했다. 밤이면 자기 시간이라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데 특별히 불러 술을 대작했다. 눈 내리던 겨울밤 출장 다녀오면서 사온 소고기볶음을 손수 만들어 매화주를 마셨던 밤이 생각난다.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해서 서로 헤어져서도 가끔 찾아왔다. 더러는 교장 친구들과 같이 왔다. 무슨 얘길 했었을까? 피아노를 수준급으로 연주하고, 그림도 일가견一家見이 있었고, 교장 되기 전에는 목사라서 해 마다 년초와 년말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했으므로 그런저런 세상 사는 얘기들이었을 것이다.

오늘만은, 아무리 싫어도 넥타이를 매라!”

주례를 부탁하자 교장선생님은 넥타이를 사가지고 와서 사모님에게 매주라고 했다. 생전 처음 메는 넥타이였다. 일생을 넥타이를 매지 않고 살았다. 마치 코뚜레에 꿰인 황소 같아서 매우 부자연스러워 매지 않았다. 교장이 되어서도 카키색 헐렁한 캐주얼에 노타이였는데 도교육청 교장회의에 나가면 1,000여명의 까만 복장의 교장들 틈에서 하얀 캐주얼의 내 복장은 마치 쌀밥의 뉘꼴이었다. 그리고 문득

저 건 우리 종족이 아니다. 퇴출해버리자.’고 집단적으로 쫓아낼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양말을 벗어던져버리는 습관 때문에 비신사적이라는 평판도 있었다. 그래서 돈키호테로 통했다.

 

(이천만의 명상록 - 42)      댕갱이

댕갱이새끼를 보성읍장에 내다 팔려고 하면 서로 사가려고 해서 내다놓자말자 금방 팔렸다. 윤기가 번드르르했고 토실토실해서 보는 사람들이 욕심을 냈다. 댕갱이는 아내가 보성읍장에서 사온 토종개다. 꼬리가 짧아 댕갱이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댕갱이는 사라진 토종개였다. 학자들은 댕갱이를 동경東京이로 표기하는데 억지 한자표기다. 하여튼 댕갱이는 호사했다. 아내는 보성읍장에 가면 댕갱이 먹이로 생선을 사서 보리쌀을 넣어 푹푹 끌였다. 끓였다기 보다는 한약처럼 고았다는 편이 더 옳다. 한데(바깥) 솥에서 고은 댕갱이죽은 고소했다. 그렇게 건사乾飼한 댕갱이가 새끼를 낳으면 아내는 생선찌꺼기가 아니라 물 좋은 생선으로 바뀌었다. 댕갱이는 겨울철에 난방용으로 사용하고 남은 솔가지 무데기 밑에 구멍을 파고 새끼를 낳았다. 번듯한 제 집을 마다하고 솔가지단 구멍에 새끼를 낳는 처사處事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쥐벼룩 때문에 개집에 파리약을 품었는데 개는 냄새에 민감하기 때문에 약 냄새 속에서 새끼를 낳고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솔가지단이 깊어 아무도 모르다가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 들여다보니 새끼들이 오물거렸다. 몇 마리 낳았는지는 새끼들이 바깥나들이를 해서야 알 수 있었다. 댕갱이새끼는 이웃 사람들이 욕심을 내서 사갔지만 남은 새끼들은 보성읍장에 내다 팔았다. 비바람이 몰아 치는 날 자전거를 끌고 얕으막한 고개를 넘어 귀가하는데 컴컴한 밤에 앞에 뭔가 어른거렸다. 댕갱이가 나를 마중나온 것이다. 그 후 댕갱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 1Km까지 마중을 했다. 방학 때 집을 비우면 우리가 버스를 탄 길에서 날마다 하염없이 기다린다고도 했다. 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눈 내리는 겨울이라 댕갱이를 부엌에서 재웠는데 추웠던지 부엌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출근도 못 하고 녀석을 불러내느라 애를 태운 적도 있었다. 하는 수 없어 방바닥을 들어내고 구들을 파서 댕갱이를 구하려고 했더니 장판을 걷어내는 사이에 아궁이를 나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학교 근무 만기가 되어 산골벽지로 이사를 했다. 트럭 이사짐에 가구를 바깥으로 쌓고 댕갱이집을 가운데 넣고 문에 못질을 했다. 보성읍에서 새 근무지 율어까지는 60릿길이었다. 이사를 한 다음 날 퇴근해서 돌아와보니 댕갱이가 없었다. 끈으로 묶어두었는데 개줄이 풀려있었다. 밤 늦게까지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돌아와 있었다. 몹시 후줄근한 모습으로 밥도 먹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댕갱이는 사라졌다가 아침에 돌아오는 걸 반복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는데 윗집 아주머니가, 우리가 출근하자마자 댕갱이가 목줄을 풀고 밖으로 달려나간다고 알려주었다.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어디에 가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며칠 동안 끙끙대다가 혹시나 해서 전임지로 연락을 했더니 댕갱이가 거기에 있다고 했다. 이사한 다음 날부터 날마다 온다고 했다. 전임지 청부廳夫의 집에 새끼가 한 마리 있었는데 댕갱이는 새끼를 보려고 왕복 60릿길을 날마다 뛰었다. 우리가 출근하면 보성읍의 새끼를 보러갔다가 밤새 또 달려고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 신기한 것은 율어에서 보성읍까지 60릿길을 어떻게 찾아가느냐는 신비로움이었다. 이사짐 속에서 댕갱이는 밖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힘으로 보성읍까지 찾아갈 수 있었을까? 윗집 아주머니 말로는 댕갱이가 집을 나서면 직선으로 달린다고 했다. 버스길을 따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논밭과 산을 직선으로 달린다는 것이다. 감각적으로 찾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댕갱이의 귀소歸巢본능은 지금도 신비神秘.

 

(이천만의 명상록 - 43)     곰재시절

병역기피로 자진사표를 제출하고 스스로 교단을 떠났다. 집안이 풍비박산風痱博山이 난, 하필 그런 때 군대영장이 나왔는데 식솔들을 두고 군대에 가버릴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세상만사 귀찮다고 다 팽개치고 비켜서버린다면 할머니를 위시한 식구들은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병무청 현역소령이란 파견군인은 내가 슬쩍 찔러준 돈봉투를 설합에 밀어넣었다. 의가사依家事로 인한 1년 연기였다. 그런데 그 소령이 돈만 쳐먹고 수속을 밟지 않아 병역기피가 되어버렸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교단에 서 있었다가 일제검거령이 내려 색출되었다. 학교를 떠나는 날, 교장선생님은 편지를 보내왔다. 차마 떠나는 걸 볼 수 없어 마중을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광주에 올라와 친구들 더부살이를 하다가 옛 중학 동창을 만나 약거래상의 가정교사를 맡았다. 그리고 8개월 뒤 나를 아껴주었던 사람의 귀띰으로 전남도교육청 인사장학학관 찾아 사모님 치맛감 한 벌을 들고가서 복직을 했다. 장학관 사모님은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었다. 웅치, 곰재초등학교에 복직했다. 책을 더럽힌다고 잠궈둔 도서관을 혼자서 분류하여 개관을 하고, 학교 정원에 꽃을 심었다. 달맞이꽃, 옥잠화, 글라디올러스, 백합을 연못 주위에 심었다. 유신시대, 육영회에서 벌이는 어깨동무 어린이사업을 열심히 했다. 아이들이 잔디씨를 모아 보내면 축구공과 배구공이 선물로 왔다. 학용품도 왔다. 그리고 년말에는 우수사례로 뽑혀 반장하고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다. 부상副賞은 탁구대였다. 누구보다도 복직을 기뻐한 분은 조교장선생님이었다. 가끔 놀러오셨다. 친구들과 같이 오기도 했다. 안주와 약주를 준비해서 유쾌하게 놀다가셨다. 그리고 결혼주례를 부탁드렸다. 집안 정리가 웬만큼 되어 재건하려면 부부교사가 제격이라 판단해서 색시감을 물색했다. 마침 처녀선생님들이 아홉 명이었다. 그 중에서 선정했다. 아내다. 웅치가 고향인데 웅치면을 주름잡는 광산김씨 집안이었다. 장인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울며 애원하여 식을 올리기로 작정하고 혼자 다 준비했다. 애초에는 마을교회를 빌리려고 했으나 신자信者가 아니어서 장로회의에서 거절당했다. 읍내 천주교에 갔으나 거절당했다. 눈 내리는 천주교 문을 나서는 길이 매우 착잡했다. 그 해 첫눈이었다. 그 길로 읍내 사진관식장을 빌렸다. 청첩은아무개와 아무개가 결혼했습니다라고 써서 신혼여행지에서 발송했다. 입던 옷 입고 헌 구두 신고 신부는 한복에 너울만 쓰고 가족들만 참석했다. 끝까지 반대했던 장인도 족장族長이었던 육성회장의 손에 끌려 혼사 당일에는 참석했다. 예물도 인사도 모두 생략했다.

교장과 무던히도 다투었다. 학교경리는 교장의 사비私費였다. 예산을 통째로 돌라먹었다. 조금씩 교육에 눈 뜨기 시작했다. 월간 교육자료에 교육의 부조리를요철凹凸교실이란 제목으로 연재했다. 30회 예정이었는데 5회 장학편에서 그만 문제가 발생했다. 나중에 들은 거지만, 교육부는 물론이고 청와대, 검찰, 경찰, 감사원들이 동원되었다. 교육장이 사흘이 멀다고 연재물을 들고 찾아와 기사의 내용 해명을 요구했다. 보성군 교장회의에서는 교단 축출이 거론되었다. 교장회와 담판을 요구했다. 회유도 하고 협박도 당했다. 연제가 중단되고 교육자료사 담당자와 기자 몇몇이 사표를 쓰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가는 세상이었는데 천우신조天佑神助 조상님의 음덕陰德이라고 생각한다. 그 난관은 피했으나 유사類似장티프스를 피하지 못했다. 감기인줄 안 읍내병원 처방이 사람을 잡았다. 직원들이 와서 보고는 사람 잡겠다고 택시를 불러 광주병원으로 보냈다. 입원하는 날 택시를 마중하며 마을 아낙네들이 눈물을 흘렸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입원 1주일 째 어머니 꿈에 어머니가 내 옷가지를 마당에 내놓고 태우려는데 할머니가 호통을 치며 말려서 태우지 못했다고 했다. 읍내병원 처방으로 열이 내렸다가 밤에는 40도가 넘는 일이 반복되었다. 열이 펄펄 끌어서 밥을 먹지 못했으므로 1주일 만에 피골皮骨이 상접했다. 그 열 속에서 신춘문예 동시작품을 응모했다. 당선되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상황이었다. 그 후에도 신안 섬 생활에서 장출혈로 한 달 간 입원, 4시간에 걸친 다리의 혈전血栓수술 그리고 직장암 등 큰 위기를 몇 번 넘겼다.

 

(이천만의 명상록 - 44)     글쓰기지도

조순영이는 6학년이었는데 소아마비였다. 학교신문을 발간하였을 때였는데 그 아이의 투고작품은 글솜씨가 뛰어났다. 하루는 아이와 의논할 일이 있어 무심코 교실로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더니 서너 명의 친구들이 운동회 기마전騎馬戰 할 때 업는 것처럼 여럿이 안고 와서 깜짝 놀랐다. 소아마비인줄 몰랐다. 순영이 글을 계기로 전국적인 어린이 작품모집에 응모하기 시작했다. 순영이는 글을 약간 수정 보완하여 보내면 늘 장원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바깥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순영이는 독서가 유일한 즐거움이었고 나이에 비해 많은 독서량이 글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전국적인 글쓰기대회를 놓치지 않고 응모했다. 보내면 상을 탔다. 재미가 붙었다. 보람도 있고 공명심도 있었다. 기술을 부렸다. 아이들의 글을 어린이들의 상태로, 약간 미숙한 듯 하면서 감동적으로 변형시켰다. 현장대회가 아니고 원고로만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을 감쪽같이 속이는 재주였다. 그래도 그 속임수는 아이들의 글 수준을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전국대회를 휩쓸자 유명해졌다. 교육계에서 알아주는 글쓰기교사로 명성을 날렸다. 복내교에서는 6학년을 맡아 주제일기쓰기를 강조하여 글쓰기지도를 겸했는데 군내백일장에서 1등부터 5등까지 싹쓸이를 하는 변괴變怪도 일어났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나면서 글쓰기지도에 일가견一家見이 생겼고 이를 체계화하였다. 자기주도적 글쓰기방안이었다. 글쓰기방안을 모델화했다. 4 - 500명의 순천교육청 선생님들에게 글쓰기방법론을 강의했다. 선생님들은 특히 시 쓰기 교육에서 애를 먹었다. 교과서나 지도서에서도 구체적방안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실에서 시 쓰기지도는 산문문장을 행이나 연으로 작위적으로 구분해놓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시 쓰기 형식을 만들어 제시하자 선생님들이 좋아했고 아이들도 쉽게 익혔다.

우리 자연이가 시 쓰기 과제를 할 때면 도무지 어떻게 할 줄 몰라 당황했 는데, 어머니로써도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는 시 쓰기가 쉽다고 좋아합니다.”

글쓰기 특별반 어머니의 말이다. 그 어머니는 날마다 커피나 식혜를 보온병에 담아왔었다. 순천부영초등학교 교감 재직할 때 학교 대항 백일장에 참여하려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선수들을 선발하여 아침공부 시작 전 8시에 특별교실을 운영했다. 글쓰기선수 양성이었다. 그것도 단기간에 수준급 글을, 특히 시 부문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백일장은 시와 산문부문으로 나뉘어 각 학년별 최고상부터 우수, 장려, 가작까지였다. 그리고 학교 단체상과 지도교사상이 있었다. 모조리 휩쓸어버리려는 야심찬 획책이었다. 최고상 12개 중에서 6개를 수상했다. 단기간 치고는 굉장한 성적이었다. 덕분에 나는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문예선생으로 이름을 떨쳤다. 줄잡아 약 100여 명의 학생들이 전국 장원을 수상했고, 도 단위 이하는 부지기수다. 퇴직 후 이 글쓰기모델을 Daum Blog <이천만의 교학대한사>에 올렸다. 논술자율학습 프로그램과 신문에 연재한 논술 칼럼자료와 같이 등재했다. 문학지망생들에게는 작가수업, 입시생들에게는 자율적 논술수업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으나 탑재한지 어언 10여년이 지났는데 크게 각광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학교를 통해 실현을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

 

(이천만의 명상록 - 45)      한국민화

무유호추無有好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한국민화에 대한 찬탄이다. ‘좋고 나쁘고를 가리기 이전의 아름다움이라고 풀이한다. 또한 한국민화는전신傳神의 효과라고 말한다. 내가 한국민화를 알게 된 것은 한글 문자해득 때문이었다. 우연히 맡은 1학년들이 1년 동안 문자해득에 씨름을 했는데도 진급할 때는 의례히 서너 명의 미해득아가 발생했다. 한글 창제 당시반절半切이라고 해서 영리한 사람은 반나절이면 깨우친다고 했는데 1년 동안을 노력해도 안 되는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내리 9년 동안 1학년만 맡았다. 1학년박사라는 별칭을 얻었으나 벼라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목표로 했던 문자해득 100%는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교과서를 분석했다. 교육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과서를 분석하다가 엉뚱한 것에 눈이 쏠렸다. 교육과정에는한국인을 기른다라고 정체성을 제 1로 삼았는데 교과서는 서양교육 위주의 편제였다. 예를들면, 미술교육에 한국화는 없었다. 아예 한국화란 명칭도 없이 동양화였다. 일제의 간교한 민족 말살정책 술수였는데 해방 50여 년이 된 근대교육에서도 일제잔재日帝殘滓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음악에서의 국악, 체육에서의 민속놀이도 그랬다. 서양교육편제, 서양교육방식, 서양교육제도로 어떻게 한국인을 기르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한국화교육연구로 이어졌다.‘한국인의 정감표현은 한국화로만이 가능하다는 가설假說을 세우고 교육연구를 시작했다. 교육과정 변화를 시도했다. 한국인의 정체성교육을 표방했다. 이어서 한국민화를 알게되었고 한국민화교육연구로 교육일생을 보낸 계기가 되었다.‘무등전통문화예술교육 교사모임을 창설하여 문화부의 보조를 받아, 여름방학에는 교사교육을 하고 겨울방학에는 어린이교육을 했다. 금호예술재단에서는 어린이민학당을 개설해서 아이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교육을 했다. 교과서가 바뀌었다. 내용에 한국화와 국악 그리고 민속놀이가 개편되었다. 대학가에서는 풍물패가 등장했다. 민속씨름도 부활하고 국가적으로 민속놀이대전이 개최되어 민속문화가 대대적으로 장양되었다. 민속붐이 일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퇴직 후에는교학대한사를 집필했다. 축소, 왜곡 그리고 폄하된 우리 역사대계를 세우려는 노력이었다. 반만년역사를 만년으로 바로잡고, 곰과 호랑이신화를 한인한웅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바이칼호수 올혼섬에서 비롯된 민족의 시원始原을 찾고, 유라시아, 중동, 러시아남부 그리고 중국북부에서 시베리아남부에 걸친 남북 1만 리 동서 2만 리의 영토 확장을 꾀했다. , , , 적 람색 5部人으로 구성된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았다. 중국 사대주의와 일제 민족사 폄훼를 바로잡았다. 대한민국의 명칭부터한국이 아니라대한으로 바로잡고,‘한반도로 폄하하는 자의식을 바로 잡았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각성해야 한다. 중국은 고구려역사만 자기 복속국가로 편입하려는 게 아니다. 고조선의 역사를 찬탈하려는 획책이다. 고구려역사는 중국의 변방사가 되고 있다. 연변자치주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벌이는 고구려태왕 주몽의 군대사열식은 중국의 역사왜곡이다. 졸본산성은 오녀산성이 되어 있고, 산해관의 옛 박작성은 호산산성으로 둔갑遁甲되었다.

 

(이천만의 명상록 - 46)      교육환경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맹자가 어린시절 그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고사故事인데 교육환경의 중요함을 이르는 불변의 진리다. 어린 맹자가 살던 마을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을 아이들이 하는 놀이가 상여를 메고 상두꾼들이 하는 흉내놀이였다. 그래서 맹모는 장터로 이사를 했더니 맹자가 하루 종일 장사놀이를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학교 옆이었다.

평생교단에 있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문제아나 부진아문제였다. 우연히 맡은 1학년에서 문자해득이 과제가 되었다. 한글 창제 당시영리한 사람이나 어른들은 한나절이면 익힐 수 있다반절半切이라고 했다는데, 이건 1365일을 몰두하고도 학년말이면 두세 명 더러는 너댓 명까지 문자미해득아가 발생했다. 탈락제도가 없기 때문에 2학년으로 진급시켜놓고는 고민이 컸다. 책임을 다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었다. 그래서 오기가 생겼고 내리 9년 동안 1학년을 맡았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완전해득은 이루지 못했다. 끝내는 두 손을 들고 교육과정을 분석했다. 지도방법, 사람의 힘으로 안 되니까 그 오류를 교육과정에서 찾아보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교육연구가 시작되었고 한국화교육, 한국민화교육 등 한국인의 정체성교육을 평생 교육과제로 연구했다. 연구한지 3년째부터는 국가교육과정이 내 연구주제 결과대로 현실화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교육적발견은 문제아문제였다. 부진아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문제아와 연계되는 일이 많았다. 아이들은 머리가 미련해서 문자해득을 못하는 게 아니라 첫째는, 아이들의 학습능력의 성취단계가 다 다르고, 또 하나는 가정이나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어 문제를 지닌 아이들이 문자해득이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문제아의 뒤에는 반드시 문제의 부모가 있다Sumer Hill의 설립자 A. S. Niel의 책(Sumer School)을 읽은 것도 그 무렵이다. 교대 때 의무적으로 읽었던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룻소의 에밀을 다시 읽은 것도 그 무렵이고, 일본인 산전정지霜田靜志꾸짖지 않는 교육을 읽은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Sigmund Freud꿈의 해석이나정신분석학을 심독心讀하였다. 막고 품는 내 교육방식이 이론적 접근을 하는 시기였다. 교육현장에서 이 논리들이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순천부영초등학교에서는 전국적인 소매치기가 두 명이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에 철망을 치고 가둬놔도 탈출해서 강원도경찰서에서 또는 인천경찰서에서 보호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부모에게 연락을 해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이었다. 교감 초임의 용림초등학교에서 3학년 여자 아이가 문제였다. 부모가 이혼을 하여 외할머니 집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급식시간이면 늘 허기가 졌다. 서너 번씩 밥을 더 달라고 해서 과식過食을 하고나서는 밤이면 할머니가 보건소로 업고 가야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할머니의 하소연을 듣고서야 문제성을 알았다. 아이는 과식 후유증으로, 할머니는 치다꺼리로 밤 새 고통스러웠는데 영양사는 아이가 밥을 더 달라고 하므로짠해서그냥 주었다는 것이다. 중흥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할 때 수업시간도 쉬는시간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4학년 세운이를 만났다. 둠벙(연못)을 만들어놓고 날마다 관리를 하는데 거의 날마다 수업시간 중임에도 한 아이가 둠벙 주위를 배회하였는데 유심히 관찰을 하고 있을 즈음 아이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둠벙을 자기가 좀 가꿔도 되겠느냐?’고 했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고, 어머니는 가출했다. 세운이가 밥을 해먹고 반찬은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도와주고 있었다. 담임도 아예 포기를 했다고 했다. 하루는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여수산단 공장에 들어가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 8대의 유리창을 박살내버렸다는 것이었다. 세운이가 주동이 되어 저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저지른 사고였다.어린시절에 받은 스트레스는 언제인가 반드시 표출되며, 그 강도는 스트레스와 정비례한다Niel의 고무줄이론은 내가 겪은 교육현장에서도 확실하게 또는 처연悽然할 만큼 명료하게 증명되었다. 그 후로 나는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교육의 진리를 터득했다. 교육 10여 년 째 되는 해에사랑의 매를 버렸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매를 버리자 먼저 내게 평화와 안정이 찾아왔다.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온 즐거움은 덤이었다. 이어 촌지寸志도 끊었다. 마음이 정말 홀가분했다. 이후 부정한 돈이라면 아니 물건까지도 일체 사절하고 교직생활을 했다. 보람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아들 규는 어렸을 때 공부를 참 잘 했다. 착하고 성실했다. 그런데 광주로 이사하면서 중학교 배정에서부터 교육적 실패를 했는데 나는 그 때는 그 걸 간과看過했다. 착실하고 공부를 잘 했으므로 어디서든지 어떤 환경에서도 잘 할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교육환경과 여건이 아이들의 면학勉學에 크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걸 짐작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사춘기 배려에 무지했다. 그래서 공부에 담을 쌓아버렸고 시답잖은 친구들과 사귀면서 놀이에 빠져버렸다. 늦게야 바로 잡으려고 했으나 노력만 허사였다. 그래도 기를 쓰고 미대美大를 보냈는데 다시 한 번 기회를 놓쳤다. 기능교육으로 전환했어야 했는데 아버지로써 멘토의 미숙이 아이가 어렵게 살아가는데 책임이 있다.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서도 제가 하려고 하면 잘만 큰다고도 하지만 그 건 매우 확률이 작은 예외의 사례다. 그래서 규는 내가 보기에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반발과 부모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커서 반항도 강하다고 보고 있다. 작은 아들 유는 광주에서도 일류학교에서 30등 내외였다. 그래서 서울의 일류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학과선택에서 실패했다. 역시 아버지의 멘토역할의 오류다. 공부를 잘 했으므로 아버지의 권유를 수용치 않았으나 잘 풀리리라 낙관한 것이 오류였다. 미래예측을 간과했다. 그래서 지금 어려움을 겪는다.‘자식농사가 최고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래서 그런지 손자들의 학습에는 매우 관심이 크다. 어떤 때는 내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라고도 생각할 때가 있다. 특히 아들 며느리와 견해차가 있을 때는 매우 심각하게 반추反芻를 한다. 그러나 교육환경이 교육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교육철학에는 한 치도 변함이 없다. 특히 Freud의 정신분석학과 Niel 교육방법을 교육적진리로 믿고 있다. 특히 문제아에 관한 한 NielSumer Hill은 교육적진리다.

 

(이천만의 명상록 - 47)      무등산옛길

몇 년 전에 우리 집 앞으로 무등산옛길이 트였다. 집 앞에서 출발하여 광주 고성古城을 지나 청풍수원지를 경유하여 충장사 그리고 원효사를 거쳐 숲길로 무등산 정상頂上 서석대瑞石臺까지 오른다. 천지인왕봉天地人王峰을 올려다 보며 잠시 땀을 들였다가 중머리재를 건너다 보며 증심사로 내려온다. 제일 긴 코스로 철에 한 번 정도 걷는 길이다. 봄철에는 새싹, 여름철에는 녹음방초綠陰芳草, 가을에는 단풍과 낙엽 그리고 겨울철에는 설경雪景과 상고대霜膏帶가 일품逸品이다. 가끔은 너덜겅을 지나는 길을 걷기도 하고 규봉암길로 들어서서 허리를 감고 돌기도 한다. 또 멋진 소나무가 있는 중머리재길도 좋다. 그러나 제일 좋아하는 코스는 원효사를 지나 바람재로 해서 무당골 계곡길을 증심사로 내려오는 길이다. 바람재에서는 다람쥐와 앞가슴에 붉은 털이 예쁜 산새들과 만난다. 붉은가슴새가 손바닥에 놓은 먹이를 먹는 모습은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이 녀석들도 빵을 좋아한다. 아내의 핀찬을 들어가며 쌀뒤주에서 쌀, 보리, 콩을 나눠다주는데 빵부스러기를 좋아하는 건 바람재에서 등산객들이 먹다 흩어진 음식 때문이다. 원효사 입구 마트의 아주머니가 팔다 남은 음식 찌꺼기를 모아두웠다가 주는데 김밥부터 쏘시지까지 메뉴가 다양한데도 이 녀석들이 빵을 좋아하는 건 등산객들처럼 인스턴트음식으로 입맛이 바뀌어져서다. 어쩌다가 다람쥐나 청솔매를 만나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다. 새들처럼 가까이 오기에는 아직은 먼 당신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계곡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서낭당을 만난다. 허물어진 것을 보수하고, 몇 개는 쌓았다. 증심사 가까이 계곡에 사는 산천어에게 삶은 달걀을 던져주면 은빛을 그리며 200여 마리가 달려든다. 증심사 입구 다리를 거쳐 식당에 들어 무뼈닭발전골이나 홍어무침에 술 한 잔, 1주일 마음에 쌓인 더깨를 씻고

 

(이천만의 명상록 - 48) 고무다리 긁기

대구 학생 자살로 교육계가 또 한 번 시끄럽다. 유서가 공개되고 가해학생들이 경찰의 수사를 받는다. 교육청에서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설문지를 만들고 이를 토대로 상담활동을 했는데 정작 자살한 학생은 2년 동안 학교폭력에 시달렸지만 상담후보자명단에도 없다. 학교에 CC-TV를 설치했는데도 사각지대를 커버하지 못했다고 해상도가 높은 CC-TV를 설치하기로 했다고도 한다. 아이가 유서를 써놓고 자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2년 동안이나 학교폭력에 시달렸는데도 학교와 선생님들은 뭣을 했느냐고 질타한다. 그러나 교육계의 야단법석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아니면 도루묵처방일 뿐이다. 똑같은 일이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는 걸 교육사회가 간과看過하고 있다. 땜질처방이나 탁상행정卓上行政으로는 학교폭력 근절이 안 된다는, 아이들의 죽음을 막지 못 한다는 표증表證이다. 학교폭력 예방대책의 본질이 틀렸다.

선비가 논에 방천防川을 하고 있었다. 논둑에 방천이 난 곳을 찾아 막는데 아무리 막아봐야 여기를 막으면 저기가 터지고 또 저기를 막으면 다른 곳이 터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농부가선비님, 책에서는 물꼬를 어떻게 막으라고 했습디까?’라고 물었더니 선비 왈그야 근원을 막아야지요.’라고 대답했다.

첫째, 학교폭력은 도덕교과서나 스승의 역할과 사표師表로써의 귀감龜鑑으로는 막지 못한다. 부모들은 아이를 학교만 보내놓으면 공부도 배우고 인성人性도 도야陶冶될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교육의 총체적인 모든 것을 학교가 해결해주리라고 믿는다. 도덕교과서라는 우리나라만의 교과목도 있고, 사표와 스승이라는 말도 있으니 그렇게 믿을 법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학교는 지식전수가 목적이다. 특히 오늘날 교육에서 선생님은 지식전달자일 뿐이다. 인성교육을 학교에 의존하는 것은 교육심리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고작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학교폭력이 일어난 뒤에야 어쩌다 발각이 되면 상담교사가 개입하여 반성문을 쓰게 하거나, 전학을 시키고, 대안학교에 보내고 또는 소년원에 보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인성교육의 근본적인 교육의 장은 가정이요 부모다. 인성교육과정은 교과서를 통한 지식전수가 아니라 실천적이기 때문에 학교와 교사로써는 불가능하다. 가정이 인성교육의 보루堡壘인데 오늘 우리의 가정교육이 해체解體되어버렸으므로 가정교육의 장이 사라져버렸다. 부모와 아이들 간에 인성교육적 통로가 없다. 이를 부활하지 않고는 학교폭력을 근절시킬 수 없다. 학교나 교사에게 책임을 전가시키지말고 가정과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아이들과 함께 부모를 징벌해야 한다. 반성문을 쓰든, 정학을 시키든 - 미국에서는 아이가 행동성 잘못을 저지르면 가정으로 돌려보내 그 잘못이 개선될 때까지 등교를 중단한다, 사회봉사를 하든, 벌금을 물리든, 감옥살이를 하든 어떻든 부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대책이랍시고 해상도가 높은 CC-TV 몇 대를 더 설치한다고 취약지대가 사라질 수도 없고, 상담을 한답시고 반성문을 쓰게 하거나 또 감시역할로는 전혀 역부족이다.‘한 도둑 열이 못 당한다는 속담도 있다.‘Big 브라더Brother(조지 오웰의 소설)’로 사회악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가? 부모가 부모역할을 하지 못할 최후상황에서만 대안학교나 교화소敎化所로 보내서 해결해야 한다.

두 번째, 교육제도 문제다. 되나 캐나 다 대학을 향해 달리는데 문제가 있다. 지식위주의 대학입시에 문제가 있다. 사람마다 특기와 재질이 다르다고, 특성화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한 곳을 향해 한 줄로 세우는 교육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면서도 대학입시가 망국적이네 사교육에 허리가 휘네라고 엄살을 떤다. 공학적인 기능이 뛰어나고 흥미가 있는 아이를 억지로 철학과에다 집어넣고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문제아 또는 부진아를 만들어버린다. 현재 우리나라 학교교육이 그렇다. 특기나 소질 그리고 적성에 맞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적성검사를 해서 인문과 실업으로 나누어 적성에 따라 진로교육을 해야 한다. 이렇게 교육제도를 혁신하면 인문계를 희망하는 아이들은 인문계대학을 가고, 기능교육에 적성이 맞는 아이들은 특성화학교나 전문대학으로 진학하면 교육적 낭비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대학입시니 사교육이니 하는 망국적 교육난제들이 일시에 해결된다. 지식교육 성적위주에 밀려나 문제아나 부진아로 뒤처지는 아이들이 없어지므로 학교폭력은 자연적으로 해소된다. 학교폭력은 저절로 사라진다.‘형식形式이 실질實質에 우선優先한다.’공자님의 말씀이다.

 

(이천만의 명상록 - 49) 그림의 떡

법의 상징그림을 보면 여신이 저울(공평)과 칼(정의)을 들고 있다. 사소한 다툼으로 엊그제 약식판결을 받았다. 쌍방폭력으로 인정하여 공평하게 벌금 백만 원씩을 판결했다. 항소를 하려고 전문가에게 자문을 했더니 고개를 흔든다. 괜히 괘씸죄에 걸리지 말라는 뜻으로 새겨들었다.

사연은,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문제로 아파트 대표자협회 회장과 다투었다. 엘리베이터 교체 실행위원회를 결성해서 정보수집을 하던 중 느닷없이 회장이 독단으로 설명회를 개최하겠다고 공고를 했다. 부당함을 제기했더니 한 술 더 떠서 특정회사 3개를 선정하여 설명회를 개최한다고 재공고를 했다. 정보수집을 해서 협의를 하자고 해놓고 실행위원들의 합의도 없이 설명회를 여는 건 독단이고, 특정회사의 설명회는 경쟁입찰을 명시한 관리규약의 위반이라고 항의했으나 막무가내다. 그래서 언쟁과 몸싸움이 일어났다. 회장은 언쟁 중에 의자에 앉아있는 내게 달려들어 뺨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안경이 벗겨져서 줍고 있는데 다시 주먹으로 또 가격을 했다. 그래놓고 회장은 허리를 다쳤다고 2주 진단서를 끊어 고소를 했다. 억울하지만 챙피하고 번거로와서 화해를 하려고 했는데 회장은 끝내 합의를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어 맞고소를 했다. 그런데 법원은 쌍방폭력으로 양쪽 다 벌금 백만 원씩을 통보했다. 싸움의 원인도 회장이 제공했고, 정당한 의의제기를 묵살하며,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는데 쌍방폭력으로 판결을 했다. 몸싸움을 법적으로는 쌍방폭력이라고 하는지 몰라도 내 폭력은 회장의 선제폭력을 맞대응한 정당방위다. 이게 여신의 저울이고 칼인가? 힘없는 백성은 어디다 호소를 해야 하는가. 신문고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저울과 칼을 든 법원이라는 게 없었으면 울화증鬱火症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천만의 명상록 - 50) 부러진 화살

지성知性과 신성神性의 대결對決인데 마치 무슨 서부영화 같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최고 지성인 대학교수가 석궁石弓을 들고 나섰겠나.‘부러진 화살영화는 개봉 2주만에 2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도가니 열풍보다 더 열광적이다. 판사는 신의 영역인 선과 악을 다루기 때문에 신성영역을 관장管掌한다. 사법부 스스로도 신성을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내걸고 검은 망또의 판사복을 걸치고 일반인 보다 높은 법대法臺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재판을 한다.

석궁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경찰과 검찰은 수사권조정 문제로 다투었다. 서로 사회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국민들의 정당한 법적 권리를 보호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수사권을 가져야 정당한 법 집행을 할 수 있다고 외쳤다. 그런 상황에서 도가니가 터지고, 석궁테러 영화가 개봉되었고 관객이 몰렸는데, 대법원은 점잖게 한 마디 했다.‘부러진 화살은 법적진실을 왜곡했다.’

법과 재판은 신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선과 악을 가리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신성을 앞세운다. 그래서 높은 재판장석 위에, 옛 사제司祭처럼 검은 법복을 걸치고 앉아 아래 피고석을 내려다보며 판결한다. 그런데 우리는 판사들의 그 신성과 법복으로 가리워진 가면假面 뒤의 수많은 왜곡된 판결을 알고 있다. 조봉암 간첩사건은 60여 년이 지난 뒤에야 허물이 벗겨졌다. 판사가 사형을 판결하여 사형당했는데 60년 후 다시 판사가 신원身元을 회복시켰다. 이 아이러니를 대법원은 뭐라고 할 것인가?‘조봉암재판은 법적진실을 왜곡했다?’어디 그것뿐이랴. 정치적 또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들씌워진 용수龍鬚는 이 땅의 정의를 수호한다는 사법부에 의해 자행된 의도적인 만행이었다. 그러고도 사법부는 부끄러운줄 모르고 아직도 자기네들을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국민들의 불신은 애써 모른 체 한다. 최근 여론조사의 사법부 불신은 80%였다. 사법부 존립 가치를 위협하는 위험수위다. 아니 이미 사법부는 죽었다. 국민들은 정의와 양심을 추구한다든가 정의사회와 공정사회를 지향한다는 사법부의 나팔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정의의 수호자 사법부는 자기도취요 자기 부정이요 자기혐오다. 신성은 자기들만의 깨벌레춤이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는 집단살인을 한 떼강도들이 외친 이 시대의 명언이다.

 

(이천만의 명상록 - 51)     군사용어軍事用語

세계는 지금 이야기 전쟁 중맞다. 지구촌은, 모두 입만 열면 평화를 외치면서도 인간의 가장 야만적인 생태의 하나인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폭탄테러나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위의 기사는 전쟁기사가 아니라 문화기사다. 문화기사에 왜 이런전쟁이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일까?

위의 기사는 해리포터 시리즈가 처음 10년 동안에 창출해낸 수익이 300조 원인데 우리 반도체산업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230조원이었다고 스토리텔링의 문화사업 콘텐츠화를 독려하는 신문기사 내용이다. 오늘 아침 서울지와 광주지에서 얼핏 찾아낸 군대용어들은 - 기사내용은 일일이 들어내지 못하고 타이틀에서만 간추린 것인데, 대충 정치면에서 승부수勝負手, 계백장군, 파부침주破釜沈舟, 스포츠면에서 장타지존長打至尊, 도전, 미중美中 친선농구의 난투극, 대구육상 기사의 난공불락難攻不落, 양강구도兩强構圖, 내부의 적, 용병傭兵, 문화면에서 콘텐츠 강국, 박정희가전쟁의 끝 등이 보인다. 대개 군대용어는 톤이 강하다. 침략과 방어, 살상殺傷이라는 극한상황을 설정하여야 하는 군대제도가 군대용어를 전투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군대가 헌법정신의 신성한 의무였기 때문에 국민개병제도 아래서 군대를 마친 청년들이 사회에 정착하면서 군대기질을 전파한 것이 군대용어가 사회화된 요인이다. 그 여파로 요즘에는 언론에서도 톤이 강한 군대용어를 즐겨 쓴다. 우리는 전쟁을 경계하면서 아이들이 장난감총을 가지고 노는 것까지도 경계하면서 말이다.

법정은무소유無所有아름다움 - 낯 모르는 누이들에게라는 글에서, 어느 날 들른 빵집에서 엿들은 우리 누이들의 거친 말, 대화를 듣고 한탄하며 경계를 한다. 빵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전혀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주고받는 나이 어린 여고생들의 욕지거리를 섞은 거친 말을 자탄自嘆한다. 요즘, 특히 학생들의 입에서 내뱉는 말은 비어卑語, 속어俗語가 많고 욕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난무亂舞한다. 욕을 섞어 써야 말발이 선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군대의식이다. 언어의 속성俗性에서 경음화硬音化라는 부분이 있는데 전달의 의미를 북돋우려고 하는 현상이다. 세상살이가 복잡해지고 각박刻薄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삶이 어려워지면 곱게 할 말도 욕설이 되어 나온다. 욕설은 상승작용相乘作用이 있어 차츰차츰 강하게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이 새끼야!’X새끼야!’로 강해지고 더 강해지면 입에 담기 어려운 말로 진화한다.

이를 언론, 특히 신문이 받아들여 전파력을 확장한다. 신문용어의 언어정화는 언어사회화의 지름길이다. 우리는 모국어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부실하다. 도이치나 프랑스는 아름다운 자국어를 지키는 장치가 여러 가지로 마련되어 있고, 이웃 중국에서는 모든 외래어를 자국어로 번안해서 사용한다. 그런데 거꾸로 대한의 학자들은 외국어를 번역하면서 한글은 도외시하고 한자어로 조어造語를 한다. 연구논문과 법률문장이 대표적이다. 한글은, 우리의 모음母音은 유식한 지성知性의 한자어에 찌들어 있다. 기술용어들은 일제식민지 6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어판이다. 의료기록은 환자가 넘볼 수 없는 꼬부랑글씨 투성이다. 요즘에는 국제화를 앞세워 영어가 한글을 쫓아내고 주인자리를 넘보고 있다. 거기에다 욕설과 경음화 그리고 인터넷언어가 춤을 추니 이러다가 한글이 온갖 잡탕雜湯언어의 토씨로만 남지 않을까?

 

(이천만의 명상록 - 52)      생활체육

런던올림픽이 끝나고, 해단식도 끝나고, 청와대 오찬午餐도 끝났다. 1초의 오심誤審으로 눈물을 흘렸던 여검객도 TV화면畵面에서 사라지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해프닝을 벌인 축구선수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러나 태릉선수촌의 불은 올림픽성화처럼 꺼지지 않는 불이다. 올림픽 단복團服을 벗자마자 4년 뒤 브라질올림픽에 대비하기 위해 다시 담금질을 시작할 것이다. 선수들은 구슬땀을 흘리고 코치나 감독은 승리의 간극間隙을 파고들기 위해 작전을 짜고, 기술을 개발하고, 훈련을 하는 데 불철주야不撤晝夜할 것이다. 오직 금메달을 향하여 매진邁進하게 될 것이다. 포상금도, 연금도, 병역면제도 오직 금메달에 달렸다. 쿠베르탱의참가하는 데 의의 는 이미 박물관에 박제剝製된 지 오래다.

언론은 금메달 수가 국력과 일치한다고 선전한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이를 증명한다. 예전의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의 경쟁무대였는데 소련연방이 붕괴된 뒤에는 미국과 중국의 금메달 경쟁무대가 됐다. 한국은 애초 ‘10-10’, 그러니까 금메달 10개에 종합 10위를 예상했는데 그보다 많은 메달을 따 대한체육회가 오히려 민망해할 정도다. 세계 5, 정말 올림픽이 국가경쟁력의 순위라면 대한민국은 런던올림픽에서 지구촌 5위의 나라가 되었다. 북한이 19위를 했으니 북한 또한, 굶어죽는 백성이 속출하고 세계에서 가장 후진국이었던 나라가 런던올림픽에서 지구촌 200여 개의 나라들 중 일약 19위의 나라로 도약跳躍해버렸다.

지방자치제가 실현되면서 눈에 띄게 활발해진 것이 있다. 축제祝祭. 전국 200여 시군市郡이 대략 2000여개의 축제를 연다. 이 가운데 전남 함평의 세계나비축제는 전국적으로 성공한 축제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올해는 개최 여부가 불투명하다. 적자예산 때문이다. 함평군은 10년 간 10회의 나비축제를 개최하였는데 해마다 300여 억 원의 예산을 썼다. 10여년간 3000여 억 원을 투입한 셈이다. 30억 원을 들여 황금박쥐를 만들었는데 세계적으로 금값이 폭등하자 대박大舶이 났다고 대서특필大書特筆했다.

막상 축제가 시작되면 나비축제에서 군민들이 하는 일이라곤 모자 한 개 얻어 쓰고 완장 차고 안내하는 일이다. 점심밥이나 한 끼 얻어먹는지 모르겠다. 함평군은 축제결산을 하면서 늘 흑자黑子라고 했지만 그 일부분을 주민들에게 돌려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익금은커녕 지방세를 얼마쯤 보조했다는 말도 없다. 참 미련한 셈법이지만 함평군 가구수가 300여호 남짓일테니 10여 년 동안 투입한 예산을 나눴다면 함평군민 모두가 가구당 10억원씩을 받아 떼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게 축제의 허상虛像이다.

이런 말을 하면 올림픽 금메달로 국민들이 얻은 승리감과 자존감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다고 한다. 찬물 먹고 이 쑤시는 형국이다. 히틀러는 전체주의 국가를 획책하려고 올림픽을 이용했다. 마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축제를 선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프로체육은 국민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지만 대부분 정치적도구로 이용된다.

유럽 선진국들은 금메달에 관심이 없다. 이웃 일본도 몇 해 전부터 클럽체육으로 전환했다. 국민복지에 체육활동을 접목해 국민건강에 전념한다. 정부에서 국민건강을 위해 마을마다 체육관을 짓고, 체육시설을 만들고, 전문체육인을 고용해 주민건강을 돕는다. 특별히 재능있는 사람은 발탁해 훈련시킨 뒤 올림픽에 내보낸다. 그래서 우리처럼 금메달에 집착하지 않는다. 올림픽시상대에 선 우리 선수들은 공통된 제스처가 있다. 시상대에서 메달을 입으로 깨무는 포즈다. 또 결승에서 이긴 선수들 대부분은 눈물을 흘린다. 외국 선수들은 우리 선수들의 그런 행태에 의아해한다. 왜 유독 우리 선수들의 제스처만 다른 나라 선수들과 다를까?

금메달 한 개에 들어가는 예산은 얼마일까? 태릉선수촌만 해도 천문학적 예산이 투입된다. 금메달선수 한 명을 배출시키는 데 드는 비용과 향후 연금이나 포상금을 산출하면 국민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올림픽기간에 밤을 새우며 열광하던 그 입이다. 엘리트체육에 집착하는 한, 국민들을 전체주의의 허상으로 몰아가는 한 경제적 선진국은 이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후진국 위상位相을 벗어나지 못한다. 졸부猝富의 위상이다. 태릉선수촌을 해체하고 그 천문학적 예산을 클럽체육으로 돌려 온 국민이 건강을 스스로 관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체육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이천만의 명상록 - 53)    손주의 입학

큰 손주 아라한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뒤끼지도 못 할 때부터 우유를 먹여서 내 손으로 키우고 돌본 아이라 감회가 새롭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의 길을 걸어야 하는 아이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염려와 우려도 이 날만은 날아가버리고 내가 맘이 들떴다. 이름표를 달고 강당에 모인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모두 병아리처럼 귀엽다. 그 중에서도 손자만 눈에 확 뜨인다.

서울음대 교수가 제자들에게 한 폭행과 티켓 강매 그리고 명품 선물로 사회적 물의가 크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 교수는 별 죄의식이 없다. 발설한 제자들에게 회유하는 걸 보면서 우리 교육의 실상을 보는 듯 안타깝다.

지금도 그렇지만, 체벌이 사회문제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 특히 선생님들은 체벌이 교육적이라고 강변한다. 배우는 과정에 있는 어린(미성숙) 또는 어리석은(유치幼稚) 학생은 매를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논리다. 말인즉사랑의 회초리논리다. 서당(구식舊式)교육에서 회초리는 교육의 수단의 하나였다. 아이를 서당에 맡기면서 아버지는 회초리 다발도 같이 들였다. 인권적 측면을 떠나서 정말로 매가 교육적효과가 있는가? 아니다. 일시적 통제로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오히려 그 저변低邊에서는 반작용이 체벌의 강도만큼 잠재한다. A. S. NielSummer Hill(자유학교)에서, 꾸짖지 않는 교육에서 말하는 교육관敎育觀이다. 공연티켓을 강매하는 일은 오랜 관행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티켓을 팔아야 하는 고충을 교수는 모른다. 명품 선물도 그렇다. 초등학교에서는 촌지寸志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진 선물문화 - 문화라는 이름을 붙이기 부끄럽지만, 이것 또한 폐단弊端이 크다. 스승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관례가 아니라 강요당하는 부조리不條理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럿이 돈을 거둬서 하는 것을 제재制裁하고 개인적으로 하라는 교수의 권유는 고리대금업자高利貸金業者와 무엇이 다른가?

학교에서는 대문을 잘 열지 않는다. 대형차나 트럭이 들어올 때나 연다. 대문의 주인은 대형차다. 학생들은 어깨를 부딪칠 정도의 쪽문으로 다녀야 한다. 현관의 큰 문도 학생들은 출입금지다. 교사들 전용이다. 학생들은 반대편 쪽문이나 복도문이다. 교실에서도 앞문은 교사 전용이고 학생들은 뒷문 출입이다. 쉬는시간이면 한꺼번에 몰리는 교실 사정도 고려치 않고 앞문은 교사 혼자만 사용한다. 오늘날까지 학교와 교사의 권위가 이렇다. 권위를 물리적으로 확보하려는 전근대적 발상이 학교에 남아있는 한 교수폭력은 사라지지않을 것이다.

 

(이천만의 명상록 - 55)     문자연文字然

내 자존심의 무게는 얼마일까? 몸무게와 정비례한다면 한 70Kg ?

30대 중반, 햇병아리 교사시절 교원연수강사로 위촉을 받아 동료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처음 강단에 서던 날, 강당을 가득히 채운 선생님들의 시선을 받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부분 얼굴이 익은 동료들인데 한 사람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강단을 뛰쳐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 나도 모르는 말을 중언부언重言復言 지꺼린 것 같았다. 강의노트를 작성했으나 강단에 펴놓은 노트의 글씨조차 보이지도 않았다. 후회막급後悔莫及, 배꼽을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그만둘 수도 없었다. 애초에 장학사가여름방학 교사 재 연수 프로그램에 강사로 추천하겠다면서 강의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미쳐 이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다.‘까짓 것 한 번 해보지 뭐라는 자만심이었다. 그럭저럭 며칠 비몽사몽非夢似夢기간이 지나자 차차 동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중의 반응도 보였다. 그러나 청중들은 시답잖은 표정이었고 강사 혼자 열성적으로 웅변을 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해 겨울방학 연수 때 일어났다. 호되게 경을 쳤으므로 다음번에는 정중히 사양했어야 옳았는데 무슨 오기傲氣가 발동해서인지 또 덜컥 승낙하고 말았다. 젊은나이에 교사들의 강사로 발탁되었다는 자긍심이 수모를 당한 창피함을 부추겼는지 모른다. 하여튼 다시 강의를 맡았고 두 번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꼼꼼하게 준비도 했다. 경험이 있었으므로 여유도 있었다. 강의가 지루하거나 청중들의 분위기가 흐트러진 게 보이면 유모어를 섞는 여유도 보였다. 자화자찬自畵自讚이거나 동료들의 격려였겠지만 두 번 째 강의는 비교적 평판도 괜찮았다. 무난하게 잘 나가던 어느 날 강의를 하고 나오는데 동창同窓녀석이 불러세웠다. 입치레로 몇 마디 격려를 한 다음, 너 오늘 강의에서 독서백편의자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했는데 그 건 독음讀音이 다르다고 했다. 순간, 아차, 실수를 했구나! 하고 자책을 했으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그렇게도 읽는 거야! 한자는 다르게 읽는 글자들이 많잖아?’‘그래도 그래, 그 건으로 읽는 게 아니야!’동창이 허허 웃으며 다시 일깨웠으나 나는 끝까지 변명했다. 남다르게 약관의 30대에 동료교사들의 강사로 발탁이 되었는데 잘못을 인정한다는 건 강사로써 모욕적이었을 거다. 그 후 녀석만 만나면 그 떨떠름한 기억이 떠올라 입맛이 썼으나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실수를 인정하는 것도 즉시 바로잡아야 쉬운가보다, 30여 년을 그렇게 지냈으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지 하면서도 녀석을 만나면 사과의 말이 입안에서만 뱅뱅 돌다 그쳤다. 그 날 녀석이 잘못을 지적했을 때,‘, 그래. 실수했는 걸. 낼 강의 때 수정하지.’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말은 안 했지만 몇 백 명의 수강교사들 중에는 동창녀석처럼 강사의 실수를 알고 있는 선생님들도 있었을텐데

 

(이천만의 명상록 - 55)     체벌體罰 폭력

교장이 담임을 학생들 앞에서 체벌한 황당한 사건이 알려졌다. 여선생도 엉덩이를 때렸다니, 이 건 체벌이 아니라 폭행이겠지. 교직생활 20여 년에 접어들었을 때, 우연히월간 교육자료의 부록으로 딸려온 A. S. Neill‘Summer Hill(자유학교)’을 읽었다. 이어 상전정지霜田靜志가 쓴꾸짖지 않는 교육도 읽었다. 충격이었다. 교대시절 J. J. RousseauEmil을 읽고 느낀 감동보다도 더 큰 충격이었다. 왜냐면, 에밀은 학생신분이라 감성적 독후감으로만 남았지만 자유학교는 현장경험으로 실증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 학교체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진보교육감으로 불리는 교육감들이 당선되면서 학생인권과 체벌에 대한 화두話頭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허나 보수권의 반발이 예상 외로 거세다. 우리는 아직도 학교에서나 가정의 체벌을사랑의 매라거나 훈육訓育이라고 당연시 하는 경향이다. 서울에서는 교육감이 연 학생인권조례와 체벌금지에 대한 연수회 도중에 일부 교장들이 퇴장하는 일도 있었다. 정작 회초리가 필요하다면 매를 맞아야 하는 사람은 이들 교장들이다.

Summer Hill을 읽고 난 뒤 교실에서 매를 꺾었다. 상비품이었던 매를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꺾어버렸다. 대나무뿌리로 만든 매도 곧잘 부러지기 때문에 우리 교실의 매는 특별히 맞춘 탱자나무매였다. 그리고 선언을 했다. ‘오늘 이후 선생님에게 한 번이라도 매를 맞거나 꾸지람을 들은 학생들은 학기 말 반성회에서 고발을 해라!’자기최면催眠인 셈이다.

매를 버리고 맞은 첫 번째 변화는 평안과 화평이었다. 마음이 편했다. 매일 일과처럼, 숙제를 안 해왔다고 손바닥을 때리고, 공부시간에 해찰을 한다며 종아리를 치고, 동무와 다퉜다고 엉덩이를 두드렸던 날카로운 감정이 부드럽고 깨끗하게 맑아졌다. 먼저 자신에게 평화와 안정이 왔다. 두 번째 변화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전에 느끼지 못한 기쁨이었다. 교사가 권위적이었을 때 아이들은 교사에게 잘 보이려고 또는 인정을 받으려고 했는데 매를 버리자 아이들이 달라졌다. 스스럼없이 기대오고 나중에는 저희들끼리만 하는 이런저런 속엣말도 소곤거렸다. 그래서 아이들의 마음과 행동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을 지내고 학년 말에 매와 꾸지람에 대한 품평을 했다.‘한 사람도 없어요!’모두,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밝게 웃었다. 그 이후 동료들에게 매를 버릴 것을 권유하고, 더러는 교실에서 매를 발견하면 치우고 꺾었다. 더러 불쾌하게 생각하는 동료들에게는 경험담을 내세워 설득을 했다.

체벌은 인격적인 문제 외에 더 심각한 교육적문제가 있다. NeillSummer Hill에서 이렇게 말한다,‘체벌이나 억압은, 그 체벌의 양과 체벌의 기간에 비례한다’. 고무줄 탄력성이론이다. 스트레스를 받은 만큼 폭발력이 강하고 치유기간도 오래 간다는 말이다. 교장의 뺨을 때리고싶어 하는 아이가 있었다. Neill은 허락했다. 아이는 한나절 내내 교장의 뺨을 때렸다. 점심을 먹고나서 다시 계속하자니까 아이가 그만하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때려도 때려도 반응이 없어 재미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뺨이 빨갛게 부어오르도록 수백 대 맞은 교장은 체벌보상자報償者였다. 다른 아이는 톱을 달라고 했다. 교정校庭의 나무들을 자르고싶다고 했다. 아이는 수십 년 생 나무를 서너 그루 자르더니 스스로 포기했다. 억압에 대한 반발이었는데, 나무를 잘라도 아무도 간섭을 하지 않아 싫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 내부에 잠재한 억압과 폭력에 대한 감정을 씻어내고 자율학습에 불이 붙자 2년을 배워도 어려운 라틴어를 6개월 만에 완파完把했다. 강제로 주입시키는 교육과 자발적으로 하는 학습효과에 대한 차이였다. Summer Hill에서는 영국 전국에서 버려진 또는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을 데려다가 우등생으로 만들었다. Neill의 결론은, 체벌이나 억압은 반발을 감정이나 성격형성으로 잠재시키는데 그 탄력적 강도는 체벌의 양과 억압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그리고 체벌과 억압은, 어떤 형태로든 언제든 반드시 나타난다. 어른이 되어서든 늙어서든, 흉악범으로 나타기도 하고, 파괴행위로 보상받기도 하며, 일탈逸脫행동으로 발산發散하기도 한다.

학생, 교사, 학부모들을 교육현장에서 만나고 함께 생활하면서 Neill의 가설假說이 진리임을 체험으로 알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체벌이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논리를 무지의 소치라고 말할 수 있다. 체벌은 어떤 변명에도 폭력일 뿐이다. 체벌을 하다보면 습관성 중독이 된다. 사랑의 회초리는 없다. 정년퇴직을 하고 손자들을 돌보면서 아들과 며느리에게 체벌을 금지하고 꾸짖음도 유념하라고 깨우친다. 꾸짖어야 할 때도 말을 바꿔하지마라보다는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라거나,‘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라고 생각을 변화시키라고 권유한다.‘사랑의 회초리로 행동변화가 이뤄졌다는 생각은 자기합리화다. 내면적성찰省察이 스스로 일어나지 않는 행동변화는 가식假飾이다. 일시적인 눈가림이고 모면謀免행동이다. 사랑으로 기른 아이는 자라서 사랑을 실천한다. 사랑은 마음을 사로잡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다.

 

(이천만의 명상록- 56)    태극기 게양 방송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우리 아파트의 충실한 애국자 경비원아저씨가 오늘은 제헌절이므로 각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게양하라고 방송을 했다. 오늘 아침 뿐만이 아니라 어제 밤부터 태극기 게양을 권장하는 방송을 했다. 국경일에는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정부조례나 어디에 입법화 되어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한명숙 전 총리가 어느 행사장에서 태극기를 밟았다고 해서 물의가 일어나고 고소고발이 거론된 일이 있었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상징이므로 자칫 실수를 했다가는 챙피 아니 고발도 불사不辭한다. 이명박대통령은 운동선수를 격려하기 위해 운동장을 찾았다가 거꾸로 들린 태극기로 해프닝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한 유치단이 든 태극기가 또 문제가 되었었다.

국경일에 태극기를 게양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접근한다면 매국노나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60년대 구호口號정치를 했다. 특히 국가안보에서 출중出衆했다. 관공서건물 벽은 하얗게 칠을 해서 대문짝만한 구호들이 난무亂舞했다. 반공구호는, 지금 거론한다면 끔찍할 정도로 문구가 도발적이었다.‘공산당을 때려 죽이자!’는 구호는 건전한 편이다. 북한괴뢰傀儡를 찢어 죽이자고 했다. 그 후예後裔답게 지금도 우리는 구호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거리에는 간판 뿐만 아니라 구호들로 뒤덮여져 있다. 관공서가 앞장선다. 학교 현관이나 관공서 현관에는 각종 구호가 걸려 있다. 기관장이 바뀌면 구호가 바뀌는데 그 예산만 수억이 드는 사례도 있다. 지자체장을 선거로 뽑는 상황이 되면서 지자체장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홍보하는 방법으로 건물 앞면을 뒤덮는 홍보성 게시물을 치장하는 건 애교다.

이제 국위선양이나 애국심 고양 따위를 내걸고 경축일 마다 태극기 게양을 권장하는 방송은 없어졌으면 한다. 태극기 게양을 의무화한 정부조례도 개정했으면 한다. 태극기 게양이 애국심을 고양한다는 얄팍한 60년대식 논리는 박물관으로 가라.

 

(이천만의 명상록 - 79)      꿈의 해석

초등학교 때 꿈에 이상한 한자漢字를 보았다. 잊어버렸다가 어른이 되어 문득 되짚어내고는 옥편을 뒤져 한자를 찾았다. 별 의미가 없었다. 교육대학에서 아동심리학을 배우면서 프로이트의꿈의 해석과 교육의 연대관계를 생각하고 관심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바쁜 소장년시절에 꿈에 관심을 가질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40대가 되자 꿈이 많아졌다. 예언적인 꿈이다. 산골벽지학교 근무 때, 산이 온통 시뻘건 꽃 - 진달래꽃 같은 붉은 꽃이 만발한 꿈을 꾸었다.‘겨울철에 꽃은 무슨?’하고 잊었는데 학교 앞길로 싸이렌을 울리는 자동차 행렬이 지나갔는데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점심시간에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다. 공군연습기가 학교 앞 존제산기슭에 추락해서 큰 구덩이가 패였고, 조종사의 시신이 갈가리 찢겨져 나무가지 위에 널렸다는 소식이었다. 꿈에 버스가 멈추고 삼베상복喪服을 입은 여인 세 사람이 머리에 제수용祭需用 고리짝을 이고 내렸다. 등교길에 버스에서 내리는 상복 입은 세 여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토요일이면자유학습의 날이라고 해서 책가방 없이 등교하여 야외 체험학습을 하던 때, 등교하니 향교체험을 한다고 했다. 향교에 가서야 단청丹靑을 보았는데 어젯밤 꿈에 단청을 보았고, 단청기둥이 떡판처럼 쌓여 있는 걸 보았다. 중년에, 교실로 선배가 돋보기관상쟁이를 데리고 왔다. 운명이네 신이네 하는 것들을 별 탐탁치않게 생각하던 터라 시답잖았는데 관상쟁이가 손바닥에 돋보기를 들이대고는,‘관운官運이 없다.’‘곧 직업을 바꿀 것 같다는 흰소리를 들었는데 6개월 후에 자의반타의반自意半他意半으로 교직을 떠난 적이 있었다. 꿈에 목뼈가 부러졌다. 며칠 후에 일생일대의 사건이 터져 곤욕을 치렀다. 그래서 중년 한 때 꿈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 매일 일기를 쓰던 시절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기억되는 꿈을 기록하고 오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붉은 펜으로 기록했다. 꿈의 해석이었다. 신통하게도 꿈이 앞날을 예언한다는 가설假說이 입증立證되었다. 그래서 제법 해몽가 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한참 뜸하더니 불이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번번히 불은 중도에 꺼졌다. 알몸이 되어 창피한 꿈을 꾸고는 느닷없이 교사연수회에서 사회자로 지명되어 쩔쩔맨 때도 있었다. 대개 여자, 그것도 가까웠던 여자 꿈은 제발이다. 그래서 여자 꿈을 꾸면 하루 종일 긴장하고 조심한다. 중년의 꿈 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꿈은 비행飛行하는 꿈이다. 때로는 발가벗고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을 졸이는 꿈이다. 아마 못다한 이상理想에 대한 염원이 꿈으로 발현發顯된 게 아닌가 한다. 요즘에도 꿈이 잦은데 대부분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이다. 운명이나 신을 믿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기 때문에 나타난 복합적인 사고가 유발한 꿈일 것이다 라고 지레짐작할 뿐이다. 꿈은 불면不眠을 야기惹起한다고 저녁음식을 금하면 꿈이 없는 잠을 잘 수 있다고 해서 요즘에는 5시 이후에는 간식조차도 금지했다. 늙어가니 잠을 설치기 때문에 좋은 꿈조차도 숙면熟眠을 위해서 포기한 것이다.

 

(이천만의 명상록 - 58)     멍텅구리배

멍텅구리배는 신안 전장포 앞 바다의 새우잡이배다. 무동력선無動力船이다보니 멍텅구리배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력이 없어 제 혼자서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도선導船이 끌어야 움직이는 배다. 이런 무동력선은 파도에 대처하기 위해 배들 끼리 장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새우잡이철이 되면 멍텅구리배는 몇 달씩 바다에 떠 있다. 1주일에 한 번 선주船主가 식량과 물을 공급해주고 선원들은 몇 달씩 바다에서 산다. 더러는 1년도 넘게 바다에서 육지 구경을 못하는 수도 있었다.

도피처逃避處였다. 갈등을 해소할 길이 없어 섬으로 도망가기로 했다. 선방禪房으로 도망을 간 일이 있었으나 그건 일종의 도피였고 이번 섬으로 탈출은 안식을 위해서였는데 섬이 그리 만만하던가. 2개월 남짓 서성거리다가 급성장염에 걸렸다. 수술 직전의 위험한 상태였다. 종합병원에서는 1주 정도 추이를 보다가 약으로 치료가 안 되면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사흘만에 하혈下血이 기적처럼 멈췄다. 너무 기뻐서 하혈이 멈춘 걸 의사에게 말하지 못했다. 다시 하혈을 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다행히 장출혈은 한 달 만에 퇴원을 했다. 그러나 몸은 바싹 마른 나무장작 같았다. 오만가지 상념이 괴롭혔다. 밤이면 멀리 바닷가로 나가 달빛이 일렁이는 파도를 보며 시름을 달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밤 늦게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누우면 온갖 잡념으로 불면不眠의 밤이 계속되었다.

환경조건이 더 나은 섬으로 지원을 했다. 광주에서 다니기가 좋았다. 섬이지만 배를 타지 않고 도선(자동차를 싣고 다니는 철선鐵船)을 탔다. 자은도는 광주에서 목포까지 직행버스를 타도 2시간이 걸렸으며 배시간을 기다리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자은도는 목포에서도 3시간씩 작은 배를 탔기 때문에 나들이가 무척 어려웠는데 새로 간 임자도는 광주에서 직행버스로 2시간이면 도선나루에 닿았고, 도선으로 15분 정도면 섬에 닿았다. 학교 규모도 크고 근무조건이 좋아서 벽지점수를 챙기려는 광주선생님들이 몰려 있었다. 벽지점수학교를 지정하는데 목포를 기점으로 하기 때문에 육지에서 15분 거리의 학교가 3시간 거리의 흑산도와 같은 특지혜택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학교는 마치 광주시내학교를 방불했다. 치맛바람이 셌다. 반장에서 떨어졌다고 학업을 중단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입학하는 사례도 있었고, 담임에게는 의례 양복 한 벌을 해주는 건 통과의례通過儀禮였다. 날마다 보온병에 커피를 끓여서 가져오는 학부모도 있었고, 선생님 초대잔치도 거창했다. 광주시내 최고 음식점 보다 더 화려했다. 고급음식점 - 그러니까 요정料亭에서나 맛 볼 수 있다는, 구증구포九蒸九飽라더니 아홉 번 기름을 발라 말린 대구나 부서의 생선알을 맛 본 것도 처음이었다. 요정에서도 매우 비싸고 귀한 안주라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안주로 한다고 자랑했다. 대접사가 좋은 만큼 말도 많았다. 다방에서 뱃사람과 다투고, 거친 학부모와 씨름판을 벌이다가 위자료를 물어주기도 했다. 섬에서 지역인들과 싸움은 금禁忌. 쫓겨도 도망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어려웠던 일은 교장과 싸움이었다. 경찰을 하다가 혼란 시에 벽지僻地파견교사 혜택으로 단숨에 섬생활 3년을 하고는 교장자격을 주운 경찰 묵치 교장은 학교운영을 떡 주무르 듯 했다. 그래서 소장少壯교사들은 반팽이당을 조직해서 날마다 술집에 모였다. 처음으로 생돼지고기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반팽이는 얼치기 반쪽이라는 전라도 사투리다. 벽지점수를 얻어서 승진하려는 교사들에게 섬은 낭만이 아니라 감옥이다. 하루 이틀 하는 여행이 아니다. 임자도에서 멍텅구리배(무동력선)의 새우잡이 이야기를 듣고 노예선이란 제목으로 KBS 방송극 소재모집에 응모했는데 낙방했으나 실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회성 보도로 그치더니, 그 후 20여년이 지나서 노예선이 다시 한 번 사회에서 거론되었고 경찰이 수사를 했다. 대개 무연고자나 정신이상자, 부랑아들을 꼬여 목포의 여관에 감금해놓고 숙식비 등 생활비 명목으로 협박해서 새우잡이 선장에게 넘긴다. 새우잡이배는 무동력선이라 한 번 들어가면 서너 달을 배 위에서 생활한다. 1주일 마다 선주가 조달해주는 물과 식량으로 버틴다. 가끔 탈출을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바닷가에 밀려오는 시체가 발견되어도 무연고자로 처리되어버린다. 태풍이라도 오면 이들은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떼죽음을 당하여 많은 시체들이 때밀려오기도 했으나 섬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쉬쉬 하며 입을 막았다. 그런 새우잡이배가 200 - 300여 척이 신안 전장포 앞 바다 새우잡이어장에 떠있고, 한 배에 서너 명씩 선원들이 있으므로 멍텅구리배의 선원들은 줄잡아 1,000여 명이 조업操業을 한다. 배와 배들을 서로 묶어 난파難破를 대비하고는 있으나 태풍 때에는 이들이 몰살하는 수도 있다. 어쩌다 가끔 그들이 뭍으로 나가기 위해 철부선(도선)을 타는 일이 있었는데 몰골이 귀신같았다. 사람들이 보건 말건 아무데서나 오줌을 싸고 술 취해서 인사불성人事不省이었다.

 

(이천만의 명상록 - 59)      돈키호테의 선거

로마는 도편陶片추방이란 선거제도가 있었다. 사기그릇 조각에 추방해야 할 사람의 이름을 적어 이름이 많이 나온 사람은 국외로 추방했다. 시민들을 돈으로 사서 추방해버리는 정적政敵 제거 수단이다. 민주주의가 시작되면서 선거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선거에도 게리맨더링(자기가 유리하게 선거구를 조정함)이나 중우衆愚정치(유행이나 인기몰이)라는 함정이 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전남교육감에 출사표出師表를 던졌다. 우리나라 같은 경력위주의 사회에서는 어려운 선거가 되리라는 예상을 했으나 믿는 데가 있었다. 전국교직원조합이다. 전교조는 이전에 교육감선거에 도전했다가 근소한 표차로 낙선했다. 간접선거에서, 보수적인 색깔이 농후한 운영위원투표에서 8,000표 중 100여표 차의 낙선은 대단한 성과였는데 이번에는 전교조쪽 출마자가 없으리라는 예상이었다. 전교조 전남지회장이 문학동인同人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전교조를 바탕으로 소외된 교장들을 포섭하는 선거전략을 세웠다. 충북 예천 초등학교 교장 자살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을 때 전교조는 살인마殺人魔로 몰렸다. 회생시킬 길이 없어서 변명이나 해명의 입조차 열지 못했다. 변명을 하면 할수록 더 진흙탕으로 빠져들어 숨이 목구멍까지 잠기고 있었다.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시간에 현직교장으로써 오마이뉴스에 진실을 밝히는 글을 기고했다. ‘교장자살의 원인은 전교조가 아니라 교육청이다.’ 한겨레신문에서 리바이어블을 했다.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일대 반전反轉이 일어나고 전교조가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 전교조는 환호했다. 수만 건의 댓글이 올라왔다. 그렇잖아도 나는 전교조 전신前身의 창립회원이었다.

예천사건은 교장의 제자인 기간제 여교사에게 교감이 차심부름을 강요했다. 여교사가 교사는 다방종업원이 아니라고 반발하자 예고없는 수업 참관, 수업록 작성 등 공권력으로 핍박을 하자 견디지 못한 여교사가 전교조에 하소연을 했고 전교조가 개입했다. 교장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사흘 후에 사과각서를, 그리고 전교조는 더 이상 사회문제화 시키지 않겠다는 각서를 서로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전교조에 굴복이라고 판단한 교감이 교육청에 보고를 했고, 교육청은 긴급 교장회의를 열었다. 교장회의 회의록에는 학생생활지도라고 기록했다. 교장은 교육청 긴급 교장회의 이튿날 어머니 묘소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누가 교장을 목매어 자살하게 했을까? 전교조인가 교장회의인가? 보수진영의 전교조 때려잡기에 반발하기라기 보다는 진실을 호도糊塗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쓴 글이 전국적인 파장波長을 일으켰다.

전교조가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전 교사회시절에 나는 회원이었다. 그러나 승진에 걸려 자의반 타의반으로 탈회했으나 학교경영자는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다는 법률조항을 비켜서 기부금으로 회비를 내고 있었다. 특별기부금이었다. 이런 바탕에서 지회장은 전교조를, 나는 소외된 교장 포섭을 책임지기로 의기투합했다. , 모두 5명이 교육감 출사했는데, 1차투표에서 과반수가 안 되어 2차투표로 갈 경우 현 교육감을 제외한 4명이 담합談合하기로 논의도 되어 있었다. 현직 교육감측의 모함으로 감사원 특별조사반이 3개월 동안 학교 3년 치 경리장부를 압수해서 감사를 벌였다. 국민일보 교육계 고해성사건告解聖事件으로 전남도교육청이 언론중재위원회에 고소를 해서 밤마다 교육청직원들이 아파트계단에서 내 귀가歸家를 기다리기도 했다.

지역별 TV연설을 진행하면서도 전교조지부장들을 찾아다녔다. 전교조지회장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각 시군을 돌아다니며 지부장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했다. 분위기가 냉랭했다. 전교조는 지부장회의를 10여 차례나 열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사보타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교조의 도움없이는 1등은 고사하고 2등도 어려웠다. 전교조가 돌아서버렸다. 지회장의 연대 믿음과 개혁적인 후보자를 돕겠다는 전교조의 공식입장을 믿었는데 그들은 입장을 철회했다. 그래서 결국은 8,000표에서 500표를 얻었다. 전교조마저 투쟁의 대상이었던 현직교육감 지지로 돌아서버렸다. 기미는 알고 있었다. 현직교육감쪽 사람이 나에게 선거를 포기하라면서 전교조상황을 귀띰해주었다. 협박과 설득에 실패하자 감투를 내걸고 회유도 했다. 현 교육감선거단과 전교조가 손을 잡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인지 현직교육감이 66% 득표로 재선되었다. 나는 6% 득표였다.

선거에 간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교사시절 국회의원선거에 개입하여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불모지 전라도에서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다섯 개의 아이디어를 수용했던 후보자가 선거 3일 전 가장 중요한 시기 가장 중요한 선거전략을 포기해버려서 최소표차로 졌다. 내 의견을 따랐다면 최소표차지만 이긴 선거였다. 또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때 대학원회장선거에 나선 적이 있었다. 상담심리학과 8명의 기반으로 행정학과 200명을 이기려고 했다. 전통적으로 물려내려왔던 회장에 반기反旗를 들었다. 실패는 예상된 일이었다. 동문同門 선후배끼리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부회장을 주겠다고 회장 출마를 포기하라고 선배들이 회유했으나 거절했다. 인생 세 번의 선거에서 모두 실패했다.

 

(이천만의 명상록 - 60)     창조론과 진화론

무식한 사람은 용감하다. 일제시대 활동한 독립군의 대부분은 지식인이 아니었다. 지식인들은죽지 못해서라고 일제에 아부阿附하지 않았으면 타협하거나 굴종屈從했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면反面, 머슴살이를 하거나 농사를 짓던 무지랭이들은 독립군에 가담하여 목숨을 담보擔保로 일제와 싸웠다. 무지막지無知莫知란 말이 있다. 무지랭이들이 무지해서 무작정 투쟁했다는 말이 아니라 지식께나 쌓은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한다거나 연만連巒한 부모를 모신다거나 토끼새끼 같은 자식들 때문에라는 핑계로 모두 훼절毁折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에 관한 한 나도 무식하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철 몰입했던 신과 대화에 실패하고는 성경에서 배운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역사책에서 읽은대로신은 인간이 창조했다고 단정짓고 신을 버렸다. 역사책에서는 고대인들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을 신으로 만들었다고 씌어있었다. 큰 나무, 바위, 높은 산, 바다의 용왕, 비 바람, 천둥 번개, 별들이 신이었다. 거기에다가 내가 신을 버린 결정적인 계기로는 불교의 세상만물이 다 부처다라는부처관과 천도교의인내천人乃天사상도 한몫했다.

과학자들에게우주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으면 지금도 큰 붓을 한 번 휘둘러 끝이 없는 원을 그리고 만다. 좀 더 발전하면, 태평양에 붉은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려 번져가는 것이 우주의 실체요 원리라고 한다. 그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우주다. 3차원의 인간이 4차원이나 그 이상을 그리는 것은 한계다.‘우주는 끝이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흔든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빅뱅이니블렉홀이 전부다. 옛 사람들은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고 했다. 밤에 보이는 하늘과 낮에 보이는 땅의 눈앞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그래도 도가道家에서는 신선神仙을 말하고 장자莊子나비 꿈을 꾸었다. 찰스 다윈은 갈라파고섬의 거북이를 관찰해서 인류의 진화론은 가설로 세웠다. 침팬지와 고릴라 그리고 네안데르타인을 나뭇가지처럼 생긴 인류진화의 설계도를 그렸다. 염분鹽分과 물 그리고 각종 유기물질이 녹아있는 바닷물에서 우연히 생긴 아메바성세포가 진화하여 생물이 되고 몇 억만년이 지나는 동안 수억만 종의 동식물과 무생물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한꺼번이 아니면 하나씩 하나씩. 그런데 그 진화과정의 끊긴 단계가 있는데 아직까지 그 끊긴 단계를 증명하지 못한다. 또 그렇다면 지금, 설사 진화과정이 매우 느리다고 할지라도 진화 중에 있는 것들이 있을텐데 지금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 중에 진화가 진행중인 생물이 없다. 달걀과 닭의 문제다. 그래서 명백하게 진화의 단계를 증명해내지 못한다. 인간도 자연의 극히 한 일부분인데 과학으로는 진화과정을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주랴? 그래서 과학자들에게 우주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하면 큰 붓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을 그린다. 그리고 끝없는 탐구를 하면서 힉스입자粒子니 불랙홀 그리고 빅뱅이론을 내놓는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우주의 실체를, 자연의 모습을 규명하지 못한다. 과학이 지구를 지배한다지만 지구 밖에서는 깜깜이다. 컴퓨터를 만들고 인간 복제複製기술을 발견하지만 아직도 모기 한 마리 만들어내지 못하는 게 과학이다. 그래서 도가道家나 노자老子 장자莊子가 거론되고 무당이나 점술가가 횡행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 흙으로 빚은 주물鑄物에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었고, 특히 이브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었다. 낙원 에덴동산에서 살게 했더니 뱀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과일인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 땀 흘려 노역勞役을 하는, 눈이 트인 사람의 신세로 전락했다. 노동과 땀의 가치 그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지혜를 얻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모티브다. 나머지 자연은 이렛만에 다 만들었다. 아담과 이브가 원조元祖. 아무리 만사형통萬事亨通의 신이라고 하지만 이렛만에 하늘과 땅, 바다를 다 만들고 수많은 동식물과 무생물들을 여기저기 다 알맞게 배치했다는 것은 좀 3차원의 인간 두뇌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거미, 개미, 무당벌레들 그 셀 수도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운 생물들을 며칠만에 다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골치가 아프다. 헷갈린다. 물론 인간이어서겠지만 하여튼 신 즉 하나님이 세상만물을 일시에 다 만들었다는 것도 믿음직스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창조론이나 진화론 다 세상만사를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해서 고민이다. 진화가 맞다면 진화과정 중에 있는 생물이 있어야 하고 창조론이 옳다면 소멸되는 생물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돌연변이 말고도 새로운 종이 생겨나거나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징조徵兆가 없다. 나야 신을 믿지 않아서 진화론쪽에 가깝지만 나 같은 범인凡人이야 창조론이면 어떻고 진화론이라면 어떠랴만 가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보면, 우주나 창조진화에 맞부딛치면 꽉 막혀서 답답하다.


#  이천만의 명상록 (),  31편 - 60편  끝,  (3)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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