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만의 명상록 - Ⅰ
이천만의 명상록 (Ⅰ) 목차 : 1편 - 30편
1. 쑥댓머리 귀신형용形容/ 2. 여난女難의 상相/ 3. 올려다 보거나 내려다 보거나/ 4. 내리사랑/ 5. 서낭당 돌탑/ 6. 당달봉사/ 7. 명상瞑想/ 8. 화두話頭/ 9. 좋은 여자 좋은 아내/ 10. 술과 벗/ 11. 진화進化/ 12. 죽음의 미학美學/
13. 꽃/ 14. 꿈과 解夢/ 15. 눈 뜰 무렵/ 16. 비나리/ 17. 선입견先立見/
18. 운명, 시대의 비극/ 19. 탕자蕩子의 신앙/ 20. 첫사랑/21.천수天壽 120세 22. 일부다처一夫多妻/ 23. 하루 25시간/ 24. 운명運命, 아버지/ 25. 노인과 섹스/ 26. 아버지의 기억/ 27. 할아버지와 할머니/ 28. 어머니/ 29. 생명의 고비/ 30. (이)천만 뜻밖에
(이천만의 명상록 - 1) 쑥댓머리 귀신형용形容
함평가咸平歌의 첫 대목이다. 오늘도 옛날에도 귀신은 머리칼을 산발散髮하였던 모양이다. 어린시절에는 밤에 용변用便이 마려우면 뒷간(화장실) 가는 일이 지레 겁났다. 그 시절 뒷간은 안채와 멀리 떨어진 대문간에 있었는데 어른이 망을 보아주지 않으면 옷에 실례를 할지언정 혼자 칙간則間(화장실)에 가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유령幽靈들 때문이었다. 혼자 밤길을 걷는 사람 앞에 갑자기 나타나‘나 좀 봐라!’하면서 얼굴을 쓱! 문지르면 눈 코 입이 없어져 얼굴이 달걀 모양이 된다는 달걀귀신과 샘골 치자나무거리에서 밤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채왈(차일遮日)을 덮어 씌워 감쪽같이 잡아간다는 채왈귀신들이 흔했다. 혼재混在된 신과 귀신에 대한 성찰은‘눈 뜰 무렵’으로 이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한 밤중 같은 새벽, 얼음바닥처럼 찬 교회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했다. 몇 시간 동안 대화에 실패하고 일어서려면 몸이 꽁꽁 얼어붙어 다리가 마비되어버렸다. 근 한 달 동안 하나님과 대화, 그러니까 요즘 말로는 소통이 되지 않아 모태母胎신앙을 버린 뒤 탕자蕩子로 살았다. 그런데 인생 고희古稀가 낼 모레라서인지 요즘들어 부쩍 (죽은)귀신과 죽음에 맘이 좀 쓰인다. 공자님은 종심從心이라 했다지만 범인凡人 우리에게는 가당키나 한 말인가.
우리 집 옆으로 무등산옛길이 생겼다. 혼자 쉬엄쉬엄 오르내리면서 한 5년 주변의 돌들을 모아 하릴없는 사람처럼 서낭당을 만들었다. 고대어古代語로는 서낭당城隍堂이고 유식한 말로는‘서낭당을 모티브로 한 어번폴리’다. 세 개를 완성했다. 완성이라는 말이 좀 마뜩찮다. 왜냐하면, 서낭당이란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라 오가는 길손들이 돌멩이를 하나씩 올려놓고 소원을 빌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여튼 그 어설픈 서낭당을 만든다며 힘깨나 쏟았다. 큰 바위는 힘에 부쳐서 몇 번씩 쉬어가며 굴려왔다. 무등산옛길이 시작되는 1번 안내표지판에, 무진고성터(광주 옛 성터)를 지나 청풍쉼터로 가다보면 동문사지址 조금 못 미쳐서 한 개 그리고 전망대를 지나 장원봉 오르는 길목 등 3개다.
서낭당을 만들었던 5년 동안 많은 등산객들을 만났다. 대부분 노인들이다. 노인들의 몰골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모두 얼굴의 주름살 아래로 응축되어서 한 장의 잿빛 석판화石版畵 같다. 그런데 그 잿빛 석판화에서 한 군데 채색이 된 부분, 유난히 눈빛만 형형炯炯한 노인들이 많다. 도전하는 듯한, 경계하는 듯한, 뭔가 아직도 충족되지 않은 듯 삶에 대한 갈망이 그려진 잿빛 얼굴과 형형한 눈빛.
40대 초반, 나는 겨울 한 철 백양사 천진암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정초라서 불광화보살이 떡국을 끓였는데 학바위토굴에서 수도를 하는 선승禪僧을 만났다. 솔잎가루만 먹고 장좌불와 정진을 하는 스님은 동안童顔이었다. 예순이 넘은 스님의 얼굴은 투명하고 뽀얀 빛이 일어 마치 다섯 살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마주하는 눈빛은 맑은 호수 같았다.
귀신을 본적이 없다. 믿지도 않는다. 무식한 말로‘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이라고 궤변詭辯도 늘어놓는다. 신이 들으면 무고죄에 해당할텐데 서낭당을 쌓고 죽음을 셈하면서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유식한 체 하기는 마찬가지다. 서낭당을 손질하다가 산을 내려오던 어느 날 문득 산길에서 마주친 노인네의 몰골을 보고‘노인네들의, 죽음을 향해 가는 노인네들의 그 몰골이 바로 귀신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신의 모습이 처용가면處容假面이나 도깨비가면처럼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안타깝게 늙어가는 노인의 몰골이 바로 귀신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깨달음이다. 뜻은 다르지만, 옛말에 잘 먹은 귀신은 화색도 좋다고 했다. 잘 먹기만 해도 앞에서 말한 석판화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즘은 사람들이 영양 부족으로 몰골이 추해지지는 않는다.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가 귀신들린 사람 속의 귀신을 불러내서 돼지떼에게 들씌워버린 걸 알고 있다. 성경에는 마귀도 등장한다. 초등학교 때 마당 하늘을 가로질러가는 혼불을 보았고, 안개발이 자욱한 날 등교길에 천방산 정상의 무덤에서 울려퍼지는 방아찧는 소리도 들었다. 공동묘지에서 바가지만한 푸르스름한 불이 움찔거리는 것도 봤다. 도깨비전설과 처용신화를 읽었고, 올림푸스산 꼭대기에 사는 신들의 세계 - 그리스 로마신화도 읽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다 부처가 된다고 하고,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사상은 사람이 곧 신이다. 신화의 세계에서도 대부분의 신들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인간을 창조했다. 요즘에 발견된 점토판에서 Sumer(현재 이란, 이라크 지방. 고조선의 부속국가)인들은 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어 노동력에 이용한다. 그렇다면 ….
우리 할머니의 주신主神은 비나리였다. 1년 3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문고리가 딱딱 달라붙는 겨울 새벽에 치자거리 샘골 옹달샘물을 길어다가 집 뒤란 장독대 작수발에 올려놓고 빌었다. 한 겨울 새벽에 그 찬 얼음물로 목욕제계沐浴齋戒하고 수천 번 수만 번 두 손바닥을 비비며 햇발이 안산마루에 오를 때까지 수없이 허리를 굽혀 비나리를 하는 게 우리 할머니의 종교였다. 그러나 머슴에게 공양미를 지워 팔영산 능가사에도 다니고 무당을 불러다 푸닥거리도 했다. 신주神主단지도 모시고 부엌에는 조왕竈王신도 살았다. 할아버지는 부흥회復興會 때 교회 맨 앞자리에 담뱃대를 물고라도 참석을 했으나 할머니는 교회 문턱에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일요일이 되면 손자들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 미리 마련해둔 빨간 1원짜리 지전紙錢을 들려 교회에 보냈다. 장손인 내게는 5원짜리 지전을 주었다. 또 일요일 아침 일찍 우리 집 마당 턱받이언덕에 피어있는 가장 좋은 백합꽃을 가위로 잘라주며 교회 강단에 꽂게 하였다.
하나님과 소통에 실패한 뒤‘깨달으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박한 종교관이 더 좋았다. 그래도 불교를 믿는 건 아니다. 인내천人乃天이란 천도교의 종교관을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티베트인들은‘옴마니받메홈’을 외며 내세를 위해 현세를 산다. 아프리카 밀림 속 원시인들처럼 행복하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시쳇말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지만 행복하다. 북 유럽 선진국들 - 덴마크, 핀란드 그리고 스웨덴 국민들의 종교율은 25% - 30% 내외다. 종교를 거부하진 않아도 내세보다는 현실을 더 추구하며 인간답게 산다. 90% 국교國敎를 가진 국민들 보다 더 보람있게 산다. 현재의 삶을 즐기며 여유롭게 이웃을 배려하고 돕는다. 지구촌 최대의 강국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그 나라들이 천당이요 극락이다. 그들은 천당을 믿지 않아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종교인들 보다 더 적다고 한다.
철이 들고는 60이 넘으면 덤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젊었을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죽음이 머리맡 배갯머리에 앉아있어 두렵고 안타깝다. 죽음 자체보다도 죽을 과정이 더 불안하다.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3년을 벽에 페인트칠하다 가셨고, 장모는 5년 동안 의식을 놓은 상태로 병수발을 받았다.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자살을 선택했다. 고등동물이라는 인간이 동물처럼 자연사도 못하고 선승禪僧처럼 좌선坐禪한 체 죽지는 못해도, 태어남을 자기의지로 못했다면 죽음은 자기의지로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호흡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선승들처럼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연습하지만 자신이 없다.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최후를 맞고 싶지 않다. 인간으로써 마지막 자존심이다. 단전호흡을 하고, 선방禪房과 산방山房을 들락거리며, 서낭당을 쌓은 이유와 택도 없는 화두話頭 - 신과 소통을 시도한 이유는 얼마 남지 않았을 자투리 삶 동안이라도 귀신형용形容을 벗어나고 죽는 순간 평안하고 온화한 모습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냥 한 떨기 풀꽃처럼 숲의 야생동물처럼 잠자 듯 스러지길 기원한다.
(이천만의 명상록 - 2) 여난女難의 상相
교육대학시절이니까 50여년 전, 시골에서 광주에 유학留學을 했던 때 귀향열차에서였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독서에 미쳐있었던 때라 좌석을 정하자말자 독서삼매경讀書三昧景, 책읽기에 몰두했다가 잠시 차창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앞자리의 수염 허연 할아버지가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았다. 민망해서 시선을 피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는 ‘여난의 상’이라고 딱 한 마디 했다. 그 때는 여난의 상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살다보니 여난의 상을 체험하였고, 일흔이 낼 모레인 지금도 여자 꿈을 꾸면 다음 날 하루 종일 근신勤愼을 한다. 여자 꿈 무서운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희古稀, 내 나이 쯤 되면 옛말 하나도 그르지 않다. 가슴 설레던 명절도 묵어버려서 무덤덤하고 맛있게 먹었던 음식조차 소태맛이다. 기쁜 일도 좋은 것도 감정에 자극이 없다. 선명했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무채색無彩色으로 바래버렸다. 요즘에는 새벽잠조차 없어져 일찍 눈을 뜨면 상념만 무성하다. 일장춘몽一場春夢,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옛일들을 회상하다가 혼자 피식 웃으며 이제 남은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셈해보노라면 지난날의 기억들마저 안타까워진다. 그런데 이 망한忙閑 중 5감感을 다 잃고서 남은 게 하나 있는데 그 게 눈썰미다. 시력조차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할 정도로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눈썰미 하나는 여전하다, 아니 더 밝아졌다. 여난의 상이라고 했던 얼굴마저 차마 보기 어려울 지경으로 변해버렸는데도 눈만 또록또록하게 더 밝아졌다니 아직 물성物性 쪽은 셈이 안 되나보다. 그래도 거울보기는 차마 두렵다. 이마에는 굵은 주름, 목에 패인 나이테 그리고 눈 밑에 생긴 다크써클은 인생의 훈장치고는 보기에는 숭(흉)하다.
우리 할머니는 미수米壽, 여든 여덟에 돌아가셨다. 허연 머리 쪽지우고 손수 낳은 모시베옷 입고 마루에 앉아 부채를 들고 계시던 모습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1년 365일 그 추운 겨울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샘골 치자샘 첫물을 길어다 장독대 작수발에 차려놓고 찬물로 목욕제계沐浴齋戒하고 해가 안산마루에 오를 때까지 수천 번 수만 번 두 손을 비비고 허리 굽혀 절하는 할머니의 비나리는 내게 경외敬畏의 대상이다. 할머니를 여의고 마지막 조선 여인상女人像을 잃었다고 했다.
젊은시절 백양사 천진암에서 겨울 한 철을 지낸 적이 있었다. 마침 새해가 되어 암굴暗窟에서 수도修道에 정진精進한다는 스님이 천진암 불광화보살에게 세배 차 내려왔다. 동안童顔이었다. 머리칼은 하얀 은백색銀白色인데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 없이 발그레 눈부셨다. 스님은 암굴에서 콩가루와 솔잎가루로 생식生食을 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10여년 째 좌선坐禪 정진한다고 했다.
몇 해 전에 우리 집 옆으로 무등산옛길이 트여 등산객이 부쩍 늘었다. 특히 노인들이 많다. 얼핏 스치는 얼굴에서 눈길이 마주치면 섬뜩한 기분에 외면 外面을 한다. 허연 머리칼에 주름투성이 얼굴, 구부정한 모습까지는 누구나 별 수 없는 세월의 자국이니 벗어날 수 없었다 치자. 별나게 형형炯炯한 그 눈빛, 세월의 더께로 뒤덮인 얼굴에 유난히 빛나는 눈빛. 나도 젊은시절에는 부러 눈에 힘을 주고 살았지만 형형한 그 눈빛들을 마주 쳐다볼 용기가 없 다. 얼굴이 생애의 그림지도라면 눈, 눈빛은 생애를 비추는 거울일텐데 …. 귀신鬼神이 있다면, 귀신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소복素服을 입고 머리칼을 풀어 헤친 모습이나 처용탈 또는 도깨비가면假面이 아니라 세월의 나이테에 덧칠해진 사람의 눈빛 그 형형한 모습이 바로 귀신의 형상이 아닐까?
(이천만의 명상록 - 3) 올려다 보거나 내려다 보거나
‘몸이 천 냥이면 눈이 9백냥’이다. 사람을 대면하면서 처음 보는 게 눈이다. 관상에서도 눈은 예지와 인품의 척도다. 흔히 봉안鳳眼이나 사안蛇眼이라고 하는 눈 때문에 나는 안경을 꼈다. 옛 임금님들은 대부분 봉안이었는데 임금 눈은 봉안이지만 임금이 못된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결국 사안이다. 안경 쓴 사람이 지적知的으로 보인다는 사회적인 면이 작용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영향은 유명한 관상가가 충고한‘살기殺氣’를 죽이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청년시절부터 안경을 썼다. 반드시 살기만은 아니었다. 무질서한 독서가 눈을 근시와 난시로 만들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닥치는대로 읽었던 게 습관이 되었는지 책을 떼어놓고 살지 못했다. 문자해득을 하고부터 성경을 매일 아침 석 장씩 의무적으로 읽었는데 이는 아버지의 강요였다. 그 게 독서습관화로 교육이 되었는지 책을 떼어놓고 살지 못했다. 번 얀의 천로역정과 정비석의 돌베게를 초등학교 3학년 때 읽었다. 밥을 먹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등굣길에서도 책을 읽었다. 뒷간에서 책을 읽는 버릇은 지금까지도 지속된다. 교대에 입학해서는 도서관의 책을 다 독파하기로 작정하고 수업을 빼먹고 책을 읽었다. 그래선지 눈이 혹사를 당해서 조금만 먼 데는 누군지 모르고 밤이면 달이 4개나 다섯 개로 보인다. 요즘은 나이 탓인지 새벽잠이 없어 눈이 뜨이면 수면제로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 새 잠이 든다. 안경을 쓰면 지적으로 보일른지는 모르나 불편하다. 특히 축구나 야구 같은 야외운동을 할 때와 비 오시는 날에는 젬병이다. 눈 올 때도 마찬가지다. 눈발이 안경에 붙어 비 올 때 보다 더 난처하다. 그런데 더 난처한 것은 가끔 올려다보거나 쳐다봄으로 겪는 안타까움이다. 용돈이 좀 궁해서 자책하며 올려다 보는 개인재산 몇 조원이라는 대한부자들의 숫자는 절망적이다. 그러다 80만원짜리 시간제임금을 자위적으로 내려다 보며 안정을 찾으려고 해도 안간힘일 뿐. 지족안분을 뇌이다가도 절망에 이르면 좌절로 몸이 초라해진다. 안경을 써 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책을 읽다가 눈을 망쳤다는 게 더 자부심이다. 밖에 나서면 사물이 흐릿하게 보여 안타까울 때가 많지만 더러는 10미터 미인을 보는 맛도 있다.
(이천만의 명상록 - 4) 내리사랑
아이 둘을 키우면서 내리사랑이란 말을 실감했다. 그리고 내리사랑이란 말에 자위自慰했다. 아이들이 퍽 어렸을 때, 한 밤 중에 열로 펄펄 끓어 택시를 불러 읍내 병원 응급실로 간 적이 있다. 택시비가 너무 비싸 얼른 택시를 부르기 어려운 때였다. 그 한 달 전에는 밤에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도 다음 날 날이 새서야 고향 행 버스를 탔다.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 주자朱子 10회悔의 첫머리 말이다. 가끔 그 생각을 하면서 되뇌이지만, 또 출천지효出天之孝라도 효도는 끝이 없다는 말로 자위한다. 그리고 부모님께 다 못한 효도를 아이들에게 하는 게 순리가 아닌가 합리화 한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자식은 또 그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이 효도라는 논리다. 효도의 가치관이 평가절하平價切下된 세태의 논리다.
그런데, 손자를 거두워보니 이 게 장난이 아니다. 큰손자는 요람에 누웠을 때 우유를 먹이면서부터 거들었다. 뒤채고, 기고, 걷고, 달리는 과정을 기적처럼 생각하며 키웠다. 누워서 꼼지락거리던 녀석이 어느 날 제 힘으로 뒤집어 엎어졌을 때 마치 기적을 보는 듯 감격했다. 옹알이가 말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 걸 자랑하며 기적이라고 했다. 혼자만 그 기적을 보는 것처럼 기꺼워했다. 그 손주가 유치원을 거쳐서 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닌다. 하루도 안 보면 서운할만큼 정이 깊다.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아까운 것이 없다. 하자는 대로 다 해준다고 제 애비 에미가 안달을 할 지경이다. 아들을 키울 때는 몰랐던 일이다. 아들을 길렀던 때와는 도무지 딴판이다. 내리사랑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한 세대를 건너뛰기 사랑이니 징검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내리사랑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사랑에 빠져있다.
(이천만의 명상록 - 5) 서낭당 돌탑
무등산옛길이 우리 집 앞으로 나서 틈만나면 수시로 산에 오른다. 산을 오르내리다가 발에 치이는 돌맹이를 주워 서낭당 돌탑을 쌓았다. 오르면서 한 개 내려오면서 한 개를 주워 모은 탑이 제법 서낭당 돌탑 모양을 이루어졌다. 그 동안 두 번 누군가 허물어버려서 노여워하기도 했고 속이 상했으나 헐어버리면 다시 시작하는 셈치고 군말없이 다시 쌓았다. (군말이래야 혼잣말이지만). 하나 둘 모으다 보니 즐겨다니는 길에 돌탑 여나문 개를 쌓았다. 옛날 서낭당 돌탑은 길을 가던 나그네들이 여행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뜻으로 쌓았다. 이제는 제법 등산인들이 힘을 모아 돌탑은 자기 스스로 쌓아지고 높아진다. 즐겨다니는 장원봉 허릿길에 돌탑이 50여 개가 있었다. 둘레가 세 아름 쯤 되고 높이가 2, 3미터나 되는 원추형들이었다. 혼자 쌓은 것 같았는데 쌓은 사람이 10여 년 정성을 들인 돌탑이다. 내가 쌓은 서낭당은 돌무더기고 그 탑은 전문가 수준의 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등산길에 보니 모두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돌탑을 부셔버린 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라는 쪽지가 돌탑 잔해에 붙어 있었다. 한참 무너져버린 돌탑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이 탑을 다시 쌓을 수 있을까?’도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지는 해에 비유하여 ‘타오르는 노을처럼’이라고 했다. 떠오르는 태양은 장엄하다. 지는 태양도 장쾌하다. 인간의 죽음도 태양 같을 수 있을까? 동해 일출을 보면서 천지창조를 연상하는 글이 있다. 의유당은 동해 벼슬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동해 일출을 보면서 쓴 부인의 글인데 고등학교 국어책에서 읽었다. 장엄하고 웅대한 묘사가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고등학교 때 모태신앙에 회의를 가지면서 겨울 한 철 우리 고장에서 제일 높은 천방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산에 오르느라면 귀신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정상에서 풀지 못한 신에 대한 의문으로 동녘이 틀 때, 동해에서 타오르는 태양을 보았다. 마치 국어책에서 읽었던 장관을 보았다. 천지창조를 보는 듯 했다. 해질녘 노을은 아무래도 장엄하다는 건 무리다. 나이 들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깊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상념도 많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3년 동안 안타깝게 살다가셨는데 그렇게 죽지 않고싶다. 그래서 나름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방안에 대한 생각이 깊다. 죽는 본인은 의식이 가물가물해서 모르겠지만 곁에서 보는 사람은 겪어낼 자신이 없다. 동물들은 죽을 때에 이르면 조용히 사라지거나 고통스럽지 않게 죽는데 왜 사람만 고통스럽게 죽을까? 평소에 60이 넘으면 덤으로 산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수명이 늘어서 80이 되었다.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는가가 문제다. 죽지 못해서 고통스러운 소설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는 사치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 닥치고보니 남의 일이 아니다. 자살도 생각한다. 의식이 있을 때 자의로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 노벨문학상을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한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자살을 생각한다. 그래도 주위에 고통을 보여주고싶지 않다. 찬란한 죽음을 바라지는 않는다. 단지 꺼지는 불꽃처럼 사그러지는 죽음을 맞을 수는 없을까.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삶은 한 조각 구름 생겨나,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은 한 조각 구름 사라지는 거.
(이천만의 명상록 - 6) 당달봉사
이 달 초, 도이치 도르트문트의 오스트발 미술관에서 큰 소동이 났다. 110만 달러(약 12억원)짜리 도이치의 현대미술작가 마르틴 키펜베르거의 설치작품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When it starts dripping from the Ceiling)’을 ‘열성적인 청소부’가 훼손한 것. 이 작품은 나무판으로 세워진 탑형 구조물 밑바닥에 고무판으로 된 물받이접시가 놓여 있는 형태다. 문제는 작가가 접시바닥을 갈색 페인트로 칠해 놓았던 것. 빗방울이 떨어져 변색된 인상을 주고싶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라붙은 물때자국을 ‘예술’이라고 생각했으나, 청소부는 이를 ‘지워버려야 할 얼룩’이라고 생각했다고 프랑스의 르몽드는 전한다. 결국 청소부는 솔을 사용하여 바닥접시의 페인트를 박박 닦아내 새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 작품은 개인 수집가에게서 빌려온 작품으로 현재 보험사측이 피해액을 산정 중이다. 눈, 시력視力의 한계다. 넌센스라고 하기에는 서글픈 현실이다. 내 시력도 근시와 난시가 겹쳐서 하늘의 달이 대여섯 개로 보인다. 이런 눈으로 그 작품을 보았다면 역시 나도 박박 문지르는 편에 섰을 것이다. 이에 따라 몇 해 전에 프랑스여행에서 만난 모나리자가 왜 명화인지 도무지 감동이 없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비엔날레가 열린다. 첫 해의 구호가 ‘멈춤’이었는데 그럴 듯 한 호기심에서 관람을 했다. 다섯 살짜리 손자와 동행하여 돌아보았는데 손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지루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 내 눈높이에 맞은 작품다운 작품이 없는지라 어색하게 뱅뱅 몇 바퀴 돌아다니기만 했다. 아마 입장료가 아까와서 억지로라도 보는 척 했는지도 모른다. 지루한 감상을 벗어나서 돌아오는데 단체관람객들이 버스로 줄을 이었다. 그런데 유치원생으로부터 시골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들이닥쳤다.
눈만 당달봉사인 것이 아니라 머리도 따라가지 못한다. 젊은시절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들고 읽으려다가 몇 번을 팽개친 적이 있었다. 끝내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여 때가 왔노라고 쓴 약 먹 듯 병실에서 독파를 하겠다고 벼르고 별러서 읽어냈는데 몇 번을 읽었어도, 싯구 안에 표현된 고전의 인용 때문이라는, 그래서 그 인용된 고전을 알지 않고는 이해가 어렵다는 친절한 주석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황무지는 오리무중이다. 파스칼의 팡세가 그렇고, 베케트의 백년동안의 고독 또한 글자를 읽었을 뿐이다.
오페라나 무용발표회를 가보지 못했다. 나비부인이 어쩌고 백조의 호수가 아름답다지만 내게는 역시 당달봉사격이다. 심지어는 세계적인 가수의 명곡을 듣고도 감동을 일으키지 못한다. 바이얼린 연주도 그렇고 카라얀 같은 명지휘자의 지휘에 이르면 바보가 된다. 우물 안의 개구리인지 솔잎만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인지 아니면 벌거벗은 임금님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누드화를 보면 성경의 음란한 생각만해도 죄악이라는 문구가 두렵고, 여자를 보면서는 상상력을 동원하고.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인데 신중현의 미인美人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는 따라서 흥얼거리고.
(이천만의 명상록 - 7) 명상
애초에는 투병치료 때문에 시작했다. 정신적치료의 일환으로 의사들이 명상치료를 권유했다. 그러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태어나는 일은 내 맘대로 못했으나 죽는 일만은 내 맘대로 하고싶다.’ 나는 죽음을 세 번 봤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다. 그 육친의 죽음에서 할아버지의 죽음이 가장 처절하게 남아있다. 할아버지는 3년 간 중풍을 앓고 돌아가셨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벽에 똥칠한’ 상태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3년 동안 병수발을 했는데 할머니는 할아버지방켠으로 머리도 돌리지 않았다. 가끔 귀향해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나도 할아버지방에 가는 걸 꺼렸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짐승처럼 신음하며 앓는 소리는 차마 들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적어도 나는 저렇게 죽지 않았으면 소망한다. 그런데 죽음을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으니 어쩌랴. 물론 자살이란 방법은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자살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남은 자식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자살을 선택할 수 있을만한 여유가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설사 어려운 처지가 되면 자살하려고 약물을 사 간수해두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의식적으로 약물을 복용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고, 또 그 시기가 언제일 것인가는 매우 어렵다. 스님들은, ‘나 내일 갈란다’라고 미리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기도 하던데 나 같은 범인에게는 무리다. 그렇다면 동물처럼 자연사할 수는 없을 것인가? 동물들은 죽음이 임박하면 기력이 떨어지면서 움츠리고 있다가 스러지듯 조용히 눈을 감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만 이다지도 죽음이 어렵고 추한가?
가부좌는 무척 힘들기 때문에 편한 자세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부처님처럼 양 손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지긋이 눈을 감는다. 禪 修行에서 하는 것처럼 엄격한 자세로 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래서 누워서도 앉아서도 하는 자세로, 맘대로 명상을 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말자 가볍게 혈맥을 문질러 기운을 돋구고는 이부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는다. 습관처럼, 아니 서당에서 학동들이 명심보감을 외우는 것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머릿속으로 때로는 입으로 소리나게 하나, 둘을 외면서 명상을 한다. 정수리에 집중하여 오직 ‘빛’을 찾는다. 밝고 환한 빛이 몸속으로 들어오기를 기원한다. 눈을 감고 있으면 혼돈이 보인다. 오늘은 파도 같기도 한 검은 물결이 눈앞에 가득히 펼쳐진다. 어제는 뾰쪽뾰쪽한 산의 형상이 보였다. 어떤 때는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루도 똑같은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을 되뇌이지만 헛수고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한심한 것은 잡념이다. 궁예가 말한 ‘마구니’다. 잠깐 마음이 허트러진 사이, 그 찰나에 잡념이 틈입한다. 속으로 아차!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잡념은 막을 길이 없다. 나름대로 벌칙을 정해놓고 다스리려고 해도 결코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읽은 선승禪僧의 문답問答은 이런 나를 매우 당황스럽게 한다. 선승은 ‘이제는 24시간 동안 명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찰라, 1초의 몇 백 분의 1 시간에 스며드는 잡념으로 낭패를 하는 내가 보기에 24시간 선승 도사道士거나 부처의 경지다. 조용한 자연사의 하나로 명상을 선택했는데 가능성이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보는 앞에서 몸부림치며 죽고싶지 않다.
(이천만의 명상록 - 8) 화두話頭
뫼비우스의 띠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성인이 되고나서도 훌쩍 자란 시기였다. 그래서 더 놀랐다. 저런 게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놀람이다. 학교에서는 왜 저런 걸 가르치지 않았을까? 수학에서 무한대를 배웠는데도 메비우스의 띠는 몰랐다.
엊그제 이어령교수의 강의를 보았다. 뫼비우스의 띠와 8자 얘기가 새삼스러웠다. 중국에서는 9자가 임금님의 숫자라서 백성들은 최고의 숫자로 8을 선호했다. 서양인들은 7자를 좋아한다. 우리나라는 9자를 좋아한다. 9중궁궐의 임금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나보다. 화투의 갑오다. 4자는 죽을 사死자와 음이 같아서 우리가 싫어하는 숫자다. 서양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13일 금요일이 금기다.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을 한다. 병 치료에 도움이 될거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완치가 되고나서는 치매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데 좋겠다싶어 계속하고 있다.‘이뭣고’ 같은 화두를 생각했으나 앓고나서 밝고 환한‘빛’을 받아들인다 또는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머릿속을 비우려고 한다. 그런데 그 게 쉽지 않다. 빛 외에는 아무 것도 들이지 않으려는 노력은 할 때 마다 무위다. 잡념은 찰나다. 마음을 가다듬고 머릿속을 비우는데 섬광처럼 잡념이 스쳐간다. 통제하기 어려운 상념이다. 3년 쯤 명상을 해오는데 단 한 번도 잡념을 비워버린 적이 없다. 마구니다. 앓기 전에는 강박증을 믿지 않았다.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는 말도 그저 시큰둥하게 들었다. 마음과 몸이 일치한다는 생각조차도 시큰둥했다. 그런데 병을 앓고부터 마음이 몸을 주도한다는 가설을 믿게 되었다. 병의 90%는 마음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것도 믿게 되었다.
손자들이 감기를 달고 산다. 시도 때도 없이 감기에 걸려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 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열 살 이전에는 열을 자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니 열만 나면 병원으로 달려간다. 열 살이 차면 감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냉온수욕이나 냉수마찰로 길을 들일 생각이다. 냉수마찰과 냉온수욕으로 나는 평생 감기를 모르고 산다. 감기라고 하는 인풀루엔자는 약이 없다고 하지 않은가. 예방이라는 것은 바이러스다. 2년 전의 신종풀루현상을 다시 겪고싶지 않다.
‘병 속의 새를 다치지 않게 끄집어내라’거나‘이뭣고’를 탐구하는 일은 내게 버겁다. 그러나 이제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나이에 들어 잘 했건 아쉽고 안타깝던 간에 인생을 정리를 하고 편안히 가고싶다. 인연은 대강 끊고 있고, 주변도 정리하면서 생각마저 끊을 수 있다면 돌아가는 길이 편할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자말자 가부좌跏趺坐자세를 하고 명상에 든다.
(이천만의 명상록 - 9) 좋은 여자 좋은 아내
10m 밖에서 보는 여자가 미인美人이다. 가수 신중현이 노래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늙어가면서 변화되는 것이 많다. 온갖 삭신이 쑤시는 것은 다반사고 봄이 와도 단풍이 져도 감흥이 없다. 심지어는 맛있는 걸 먹어도 예쁜 걸 봐도 그저그렇다.
정년을 하고 손자 둘 - 초등학교 2학년과 유아원 아이를 돌보는데, 그 아이들 어쩌면 그리 잘 웃는지. 나는 그 아이들이 뭣 때문에 웃는지 모르겠다. 툭! 하면 웃음보다. 그것도 집안이 떠나갈 듯 박장대소拍掌大笑다.
언뜻 봤던 TV의 강사가 그랬다. 거울 앞에서 웃어보라고. 특히 우리나라 노인층은 웃는 걸 잊어버렸기 때문에 얼굴의 웃음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경직되어서 퇴화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씁스레한 웃음만 나온다.
우리 어렸을 때 어른들은 집안에서 크게 웃지 않았다. 박장대소라는 말은 있었지만, 모르겠다 어른들 끼리 어울리는 주막집에서나 있었음직하다. 아이들 앞에서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웃을 일이 있어도 거의 웃음이라고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근하게 웃었다. 그 걸 미덕美德으로 가르쳤다. 하물며 여인네들이야, 웃음 자체가 금기였다. 소리내서 웃는 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칠거지악七去之惡 쯤으로 축출되었을 것이다.
강사님의 말씀을 듣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웃어보았다. 아뿔사, 강시님 말씀이 틀린 데 없다. 웃는 게 아니라 우는 모습이다. 70년 간 웃음을 자제하고 살아왔더니 웃음근육이 경직되어버렸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는데, 웃음이 만병통치약이라고들 하는데 오늘도 나는 웃지 못한다. 얼굴로 웃지 못하고 가슴으로만 웃는다. 조선 여인네들이 옷고름을 물고 웃음을 참는 것처럼. 웃음 뿐이랴, 조선 여인네들은 슬픔도 노여움도 그렇게 참았다. 박장대소는 상놈들에게만 통용되었다.
아내,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 (2012. 3/ 20 화요)
‘하느님이라면 몰라도 …….’ 일생 동안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는 문익환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혼자 뇌까린 말이다. 부부가 일생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또 싸우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도 생각했고, 싸우지 않고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도 생각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서양사람들에게는 없는‘화병火病’이라는 게 있다.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 말로는 참고 사는 게 미덕인 생활의식에서 비롯한 우리 나라 사람만의 병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미쳐 규명되지 않았던 현대병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여자들한테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병들이 유난히 많다. 처방은 터놓고 살아야 한다다. 화를 낼 때는 화를 내고, 기분이 좋을 때는 크게 웃으며 거리낌없이 사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30여 년 전만해도 우리는, 특히 남자는 감정의 기복을 들어내지 않는 것이 남자다운 미덕이었다. 또 다른 심리학자들은 표정관리를 하지말고 들어내놓고 살아야 건강하다고도 한다. 감정의 응어리를 마음 속에 쌓아두면 병이 되므로 그 때 그 때 풀어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포커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포커 페이스라는 규율이 있다. 사람은 얼굴에 표정이 들어나는데 노름을 하면서는 절대로 표정이 노출되면 안 된다.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의 변화를 보고 상대방이 표를 읽어버리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서 감정표현은 무척 어렵다. 연애할 때는 보이지 않던 상대방의 허물이 결혼하고나면 적나라하게 들어난다. 그래서 사소한 일로 싸운다. 싸우면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화해는 너무 어렵고 멀리 있다. 누군가 중재해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이혼율이 급등한다. 이혼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부부 사이에 커다란 갭이 생겨 남남처럼 산다.
나는 안내에게 어떤 여자상을 바라는가? 아직도 구시대 인물이라서 조선여인이 내 여인상이다. 구체적으로는 할머니다. 외유내강外柔內剛 현모양처賢母良妻가 내 이상형이다. 그러나 현대에 그런 이상형 여성이 있을까?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내 이상형 여상이 있기는 했을까?
우리나라 이혼율은 서양 이혼율을 넘어선지 오래다. 성격차가 가장 많은 이유다. 더러는 성격차性格差가 아니라 성적차性的差라고도 한다. 얼굴이 예쁜 건 격언처럼 한 달 행복이니 놔두고, 돈이 많은 것도 1년 행복이니 차치하고 자상하고 배려하며 고상하고 음식을 잘하고 시부모님이나 시동생들에게도 맞며느리역할을 다 하는 여자. 이런 여자가 세상에 존재할까? 나는 신사임당이나 심청이 아니면 춘향이를 쫓고 있다. 그래도 다른 건 다 포기해도 되는데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는 포기하는 게 쉽지 않다.
(이천만의 명상록 - 10) 술과 벗
‘웬 날파리가 이러지?’
갑자기 날파리(초파리)가 극성이라고 아내가 투덜대더니, 장마철이라 그런가라고 혼자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는 그냥 모른 척 한다. 아내의 코에는 이 향기가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니까 구태어‘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 필요는 없다. 술이라면 머리를 흔드는 사람이라 사서 입씨름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
초파리는 부뚜막에 많았다. 어머니가 목이 긴 하얀 분청사기에 막걸리를 넣고 솔잎으로 주둥이에 마개를 닫았는데 막걸리가 식초로 발효되어 익기 시작하면 냄새가 진동한다. 그때 쯤 촛국을 걸러보면 무수한 은색 벌레들이 꿈틀거렸다. 징그러웠으나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그 게 초벌레라고 했다. 그게 살아있어야 식초가 잘 익는다고 했다. 촛국을 살피다가 초벌레가 꿈틀거리지 않아 죽어있으면 맛을 보고는 폐기했다. 초벌레가 죽어 초가 시어져버렸다고 버렸다. 그 초파리가 익힌 발효식초는 새콤달콤하달까, 미묘한 감칠맛이 났다. 그 초벌레의 어미가 바로 초파리다.
요즘 바짝 초파리가 많아진 것은 날씨 탓이 아니라 내가 베란다에 담궈놓은 송과주(솔방울술) 때문이다. 담궈놓은지 3개월 쯤 지나니까 도가니의 술이 익기 시작한 것이다. 초파리란 녀석도 나처럼 호주가好酒家인지 모른다. 미상불未嘗不, 술 익는 향기는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금목서 향만큼 향기롭다. 적어도 호주가인 내게는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에 나서면 술향으로 특히 코가 벌름거린다. 송과주는 향이 진하다. 태깔도 일품이다. 그래서 송과주는 일부러 유리컵에 따룬다. 사기컵이나 옹기에 따루면 빛깔이 탁濁하다. 유리컵에 송과주를 8부 정도 따뤄 마시기 전에 한 번 음미해보면 무아지경無我之境이다. 호박색 투명한 붉은 빛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향기는 바로 불로장생不老長生 신선주神仙酒라 할만하다. 음주飯酒 한 잔에 신선이 된 느낌이다.
‘사냥꾼의 이야기’에 ‘뱀할아버지’가 나오는데 가을 독사毒蛇에게 물린 포수砲手를 뱀할아버지가 살려낸다. 그리고 회복과정에서 소나무술를 처방한다. 소나무술은 50년생이 넘는 소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서 소나무뿌리를 소주독에 넣고 봉封했다가 반 년 쯤 뒤에 파낸다. 그 때 쯤 소나무는 기氣를 모두 술독에 빼앗겨서 말라죽는다. 뱀할아버지는 뱀장사를 하지만 소나무술은 팔지 않는다. 한 되에 10원 - 그 때 돈으로 쌀 세 가마 값에도 팔지 않고 혼자서만 마신다. 그래서 그런지 할아버지는 선승禪僧 같은 동안童顔이었다.
나는 젊어서부터 호주가였는데 집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래도 술 담그는 걸 좋아해서 여러 가지 과일주를 담궜는데 우리 집 술이 익을 때 쯤 어떻게 그 냄새를 맡고는 술친구들이 와서 하룻밤 새에 술독을 털어버렸다. 그런데 퇴임을 하고나서 반주飯酒가 습관이 되었다. 사람의 인연을 정년퇴임과 같이 끊어버렸기 때문에 술이 친구를 대신했는지 모른다. 사람과 인연을 끊은 건 뭐 특별한 계기가 있는 건 아니고 이제‘세상 소풍 끝날 때’가 되었으니 인생을 정리하려는 뜻으로 그 많던 계모임이나 동창회 등등 공식 비공식 모임을 모두 끊었고 아울러 친구들도 끊고 은둔隱遁했다. 물성物性(색色)을 지우려는 노력이다. 삶의 더깨를 벗어버리고 홀가분히 떠나려는 사람의 자성自省이다.
‘술과 벗은 오래 묵을수록 좋다’고 선인先人들은 그랬다. 생전의 할머니는‘친구가 많으면 주머니가 가볍다’라고 늘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그 때는 주머니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친구들에게 끌려들었는지 친구들이 내게 몰려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내 주위에는 친구들로 법석였다. 동창회, 직장모임, 문학친구, 당구撞球친구, 연구써클과 사회교육운동친구들 중에서 특히 술친구들이 많았다.
백아파금伯牙破琴 - 가야금 소리를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백아는 가야금줄을 끊었다. 지음知音의 친구를 잃었기 때문이다. 한산불어습득소寒山不語拾得笑 - 한산과 습득은 국청사 불목하니(담살이)였다가 도통道通을 한 스님인데 얼굴 표정만 보고도 서로 뜻이 통했다고 한다(년 전 중국여행 때 국청사에 들렸었는데 한산과 습득의 목상木像을 보았다). 이외에도 간담상조肝膽相照(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간과 쓸개는 상보相補한다), 송무백열松茂栢悅(친구가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춤을 춘다), 관포지교管鮑之交(관중과 포숙아의 우정友情), 문경지교刎頸之交(목숨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지란지교芝蘭之交(지초와 난초의 교분交分, 벗과 높고 맑은 사귐), 상견역무사相見亦無事 불래홀억군不來忽憶君(만나보면 그저 그렇고 아니오면 홀연히 생각나는 그대)은 조선시대 유학자儒學者 송귀봉과 율곡 이이의 친교親交고, 미인하처재美人何處在 망지천일방望之天一方(그리운 그대 어디 뫼 있느뇨, 하늘 끝 한 자락만 바라보네)은 서산대사가 속가俗家의 벗 양사언을 그리며 읊은 시詩다.
고희古稀를 맞은 지금 나는 속세의 인연을 다 벗어버리겠다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사람의 인연은 다 끊고 선방禪房과 산방山房을 들락거린다. 저녁노을처럼 붉게 타는 마무리는 바라지도 않는다.‘잠자는 것 같이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친구들, 사람의 인연은 다 끊었는데도 베란다의 술항아리만은 버리지 못했다.
(이천만의 명상록 - 11) 진화進化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한지는 오래되었다.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면서 토끼가 계수나무 아래서 떡방아를 찧는다는 전설은 폐기되어버렸다. 둘리라는 양을 복제하더니 이제는 아예 인간을 복제할 수도 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육체노동을 시키며 하인처럼 부려먹고, 더러는 전쟁에 총알받이로 보낼 수도 있다.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넓고 큰, 3차원의 사고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우주도 과학의 문제지만 머리카락을 몇 천분의 일로 쪼개기도 하고 과학은 기상천외의 발상을 한다. 그리고 문명의 발전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모기 한 마리도 제대로 복제할 수 없는 게 과학이라고도 한다.
창조론에 이어 진화론이 등장한지 벌써 100여 년, 창조론과 진화론은 평행선이다. 그래서 인간의 과학은 머리카락을 천 분의 일로 쪼개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섬세한 과학의 능력을 찬탄하고 기뻐한다. 우리시대에서는 원자, 분자 뿐이었는데 지금은 양자와 나노입자 그리고 쿼크인가 뭔가 하는 것들도 발견되었다며 과학이 깜짝 놀랄만한 시대의 업적을 이루었다고 호들갑을 떤다. 인공위성을 쏴올려서 우주를 정복하고 복제양 둘리를 만들어내고 머리카락을 1/ 1000로 발겨내는 인간들은 위대하다. 가히 천지만물을 창조한 신과 동격이 되었다.
자동차를 타고다니는 것은 효율적이다. 자동차를 타기 시작하면서 서 발만 나가도 차를 타고다닌다. 등산은 예외로 하고, 시내 걸음에는 정말 서너 발도 걷기가 싫다. 이 시대에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어진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교육학은 교육심리학 등 수십 개의 학문으로 분화했다. 교육심리학과 심리교육학을 구분하지 못한다. 더 작게 작게 쪼개는 일이 발전이라면 세포성인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세포성 인간은 아메바 같은 단세포다. 쪼개고 나누다가 인간이 단세포성으로 변화된다면, 21세기 문명이 원시시대로 돌아가는 격이다. 또 인간이 신이 되는 일이다. 인간이 신격화되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리스로마시대에 신들은 인간과 어울려 살았다. 더러는 혼인도 하고 서로 미워하여 죽이기도 했다. 로마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한 수 위였지만 우리나라 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사상을 믿는다. 그래서 귀신 형상도 인간 즉 늙은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천만의 명상록 - 12) 죽음의 미학美學
오랜 벗의 아버지가 자살을 했다. 연세는 여든 일곱이었고, 시골에서 부부가 단촐하나마 어렵지 않게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선산先山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벗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내 불효가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했다.’벗은 자책自責으로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곁에서 보는 내가 더 안타까웠다. 고인故人은 아이들 일곱을 낳아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중년에 사업에 실패한 아들이 있어 형제간에 갈등이 좀 있었지만 이것이 자살의 동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인은 고향마을 뒤에 있는 선산先山을 공원처럼 아름답게 가꾸었다. 매일 선산에서 살다싶이 했고 돈이 생기면 나무를 심거나 돌을 들여놓는데 다 썼다. 연못도 하나 파놓고 고기를 기르고 여름철이면 선산 일을 하고는 신선神仙목욕탕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고인의 가묘假墓를 만들어놓고 곱게 다듬었다.
평소에, 주제넘게도 나는 인생 60이 지나면 남의 목숨이라고 했다. 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뭘 할 수 없는 나이라서 무위無爲라고 했다. 다 산 나이이므로 기약이나 약속을 하지말자고 했다. 버리며, 하나씩 지우며 살려고 한다. 지금은 60을 훨씬 지나 7순에 다 찼지만 그래도 아직 뭔가 꼼지락거리며 산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니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음이 문제다. ‘설국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상을 받은 얼마 뒤 자살했다. 항간에서는, 더 위대한 작품 - 그러니까 설국을 능가할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없으므로 자살을 선택한 게 아닌가라고들 했다.
야생동물들은 죽음이 임박하면 스스로 알아채고 홀로 조용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잠자듯이 영면한다. 별로 고통스럽지도 않은 것 같다. 아프리카 코끼리는 진구들의 부축을 받아 죽음의 장소를 찾아간다. 그래서 상아사냥꾼들이 코끼리무덤을 찾으려고 했으니 실패했다.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탄생과 죽음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직업, 결혼이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내 의지로 죽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승高僧들은 미리 죽음을 알고 열반에 든다. 때로는 좌선坐禪을 한 채 열반涅槃한다. 그러나 내가 본 죽음은 매우 처절했다. 차마 보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항간에‘벽에 똥칠할 때까지’라는 말이 있다. 예수조차도 죽음에 이르러서는‘아버지, 가능하면 이 쓴 잔을 물리쳐주소서’라며 고통스러워했다. 왜 영원한 복락福樂을 누리는 천당天堂으로 향하는 발걸음인데 독실한 신자들조차 죽음에 이르면 한결같이 고통스럽게 죽을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마르께스의‘백 년 동안의 고독’은 죽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그렸다.
어떻게 하면 잠자는 것처럼 편히 갈 수 있을까? 이것이 칠순을 맞은 내 화두話頭다. 벽에 똥칠하며, 의식을 잃은 체 가족들의 수발을 받으며 죽어가고싶지 않다. 그래서 명상도 하고, 금강경도 외우고, 복식호흡을 하며 인연(생명)을 끊는 연습을 하고 있다. 단 며칠이라도 의식을 잃고 주변을 안타깝게 사는 건 치욕이다. 차라리 의식이 남아있을 때 - 내 의지로, 죽음이 머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아름답지 않을까, 인간답지 않을까?
(이천만의 명상록 - 13) 꽃
아, 예쁘다! 들길을 걷다가 별처럼 꽃잎을 펼친 작은 야생화를 발견하고 허리를 굽혔다. 옅은 청보랏빛이 투명하다. 찬찬히 살펴보니‘나생이꽃’이다. 나생이는 봄철에 시골 아이들의 간식거리였다. 뿌리가 무처럼 통통하지는 않아도 가늘지만 먹을 게 있었다. 통째로 뽑아 풀잎에 쓱쓱 문질러서 씹으면 약간 매캐한 맛을 낸다. 들길을 걷다가 이름 모를 야생화에 빠져 자꾸 발걸음을 멈춘다. 야생화는 찬찬히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신비한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나라 야생화는 색감이 화려하지 않아 소박해서 싫증이 나지 않는다. 야생화는 은근하다. 향기도 나는 듯 없는 듯 스쳐지나가면서 알싸하게 퍼진다. 한 포기 야생화가 어린시절의 시골살이의 기억을 일깨운다.
꽃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쁘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꽃도 없다. 화분도 가꾸었다. 그런데 가벼운 등산을 하고서부터 야생화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화분에 심은 꽃이라야 꽃 구실을 했는데 이제는 화분 보다는 야생화가 더 좋다. 입맛은 어린시절의 입맛이 평생을 간다더니 꽃도 어린시절의 기억이 평생을 좌우하나보다. 색깔이 화려한 외국산은 처음 보면 눈에 쏙 들지만 금방 싫증이 난다. 대개 향기도 너무 짙다. 독毒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야생화는 색감이 옅고 향기도 코끝에 스친다. 은근하다. 그래서 학교에 재직 중일 때 화단은 야생화로만 꾸렸다. 학교에 화단을 조성하면서 둠벙을 만들었다. 물길이 좋으면 운동장을 빙 둘러 개울을 만들고 군데군데 둠벙을 만들려고 했다. 여의치 않아 물이 나올만한 곳을 포크레인으로 몇 번 긁어냈다. 그리고 물을 채워넣으면 자연 연못이 된다. 자연의 섭생攝生이다. 둠벙을 만들어 놓으니 제일 먼저 물거미가 이사를 왔다. 풀씨가 날아와 둠벙 주변에 풀이 자라자 벌레들이 먼저 찾아왔다. 개구리도 찾아오고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아다가 넣었더니 왕잠자리가 물을 차고 날았다.
어린시절 우리 집은‘꽃집’이었다. 없는 꽃이 없었다. 여름철이면‘소만한 처녀들’이 모란꽃에 홀려 찾아들었다. 뒤란에 한 100평 남짓 모란꽃밭과 직약꽃밭이 흐드러졌다. 넓은 마당 주변에는 온통 백합 천지였다. 언덕 어디를 파도 백합 뿌리가 나왔다. 묵은 백합뿌리에서는 꽃대가 아홉 개나 나왔다. 주일날이면 할머니는 이슬을 털고 가장 실한 백합을 가위로 잘라주고 나는 교회 강단에 꽂았다.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 교회 강단에 꽃을 장식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넝쿨장미는 집 뒤 장독대 주변 담장에 얼크러지고, 장독대에는 봉숭아, 꽈리, 맨드라미. 촉두화, 수선화, 상사화들. 대문으로부터 호두나무, 살구나무, 하늘 높이 치솟은 가죽나무 - 머슴들이 긴 장대로 순을 쳐내려 가죽나무자반을 만들었다, 사랑방 앞에는 자두나무, 참팽나무 돌배나무. 느티나무. 시뉘대밭에는 처음에는 파란 그리고 노랗게 변해서 빨갛게 익는 쥐똥나무가 있었다. 큰 모과나무도 다섯 그루, 중년에 할아버지가 성주成柱를 하면서 베어 다듬지 않고 나무 자연결 그대로 문간채 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청배나무, 감나무는 앞뒤뜰에 여나문 그루, 해거리 뒤 감이 열리면 가지가 휘어져 땅에 닿았다. 무화과도 지천이었다. 꽃밭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선지 학교에서 인성교육시책으로 남들은 한자교육이니 붓글씨 또는 효행교육을 들먹일 때 우리학교는 동식물 기르기를 시도했다. 인성교육의 기반이 생명존중이고 그것은 꽃 가꾸기로 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황화춘란 한 촉을 얻었다. 말로만 들었던 황화를 보는 순간, 뭐랄까 그냥 멍!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보고, 밤에 TV를 보다가도 문득 나가고 시도때도 없이 쳐다본다.
(이천만의 명상록 - 14) 꿈과 解夢
한창 젊은시절 어느 겨울철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산에 뻘겋게 진달래가 만발한 꿈이었다. 봄도 아닌데 진달래꽃은 무슨 진달래 하고는 잊고 출근을 했는데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려 아까 웬 싸이렌이 울리더라고 하니까 몇 시간 전에 공군비행기가 학교 앞산에 떨어져서 인근 군인부대가 출동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행기가 추락한 곳은 크게 웅덩이가 패였고 조종사들의 시체가 주변 나뭇가지에 널려 있었다고 했다. 무심코 비행기 추락사고 얘기를 듣던 나는 깜짝 놀랐다. 불현듯 엊저녁 꿈이 생각났다. 그래도 설마 그 게 예언적인 꿈일줄은 몰랐다. 그 후 얼마잖아 상복喪服을 입은 아낙네 셋이 머리에 제수祭需를 이고 버스에서 내리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출근길에 버스를 만났고 상복의 여인네가 제수를 이고 내리는 걸 보았다. 또 한 번은 학교에 출근했더니 토요일이라‘책가방 없는 날’체험학습 장소를 의논했다. 나는 전근轉勤온지 오래잖고 객지客地라 선생님들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체험학습 장소가 향교鄕校로 결정되었다. 아뿔사, 향교에 갔더니 전 날 밤 꿈이 생각났다. 단청丹靑을 본 꿈이었다. 향교는 단청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연속적으로 예언적豫言的인 꿈을 꾸자 호기심에서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침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던 때라 아침에 눈을 뜨면 꿈부터 적었다. 그리고 그 날 일어난 일들을 붉은 펜으로 기록했다. 해몽解夢인 셈이다. 몇 년 간 지속적으로 꿈과 해몽을 거듭하자 놀랍게도 꿈과 해몽은 일치했다. 예언이었다. 해몽도 가능해졌다. 동료들의 꿈을 해몽하기도 했다. 동료들은 내 해몽을 듣고는 긴가민가 했으나 해몽이 맞으면 신기하게 여겼다. 프로이트나 노스트라다무스 그리고 토정선생의 반열班列에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가용家用은 한다. 방송국에서 현상 모집한 동요가사童謠歌詞에 응모했는데 수상 통보가 오기 전에 금메달 두 개를 얻는 꿈을 꾸었다. 노랗게 반짝이는 금메달 두 개를 받았는데 그 중 한 개가 스믈스믈 녹아내리더니 2/3쯤만 남았다. 2등이구나 하고 해몽했으나 메달이 녹아내리는 건 풀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2등 당선 통보를 받았다. 시상식에 참석했더니 상금에서 세금 30%를 공제하고 주었다. 사직辭職을 했던 때는 목이 부러지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는 예상치도 않은 사표를 쓰게 되었다. 벌거벗은 꿈을 꾸고 도道연구학교발표회에 군郡대표로 참석을 했다가 예정에 없었던 사회를 맡아 쩔쩔맨 적이 있다. 벌거벗은 꿈을 꾸면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고, 여자를 꿈에 보면 근신勤愼해야 한다. 더구나 꿈에 여자가 웃는 걸 보면 아무리 근신을 해도 액땜이 되지 않았다. 중년中年까지 끈질기게 많이 꾸었던 꿈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이었다. 요즘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신발을 잃는 꿈이 많다. 대강 짐작은 가지만 해몽이 잘되지 않아서 미궁迷宮이다. 이제 고희古稀가 다 되었는데 꿈에 얽매여 살지는 않아도 아직도 꿈이 예언적이라고 믿어서인지 생생한 꿈을 꾸는 날은 생각도 많다.
(이천만의 명상록 - 15) 눈 뜰 무렵
유둔장날이다. 집안에서 바쁜 사람은 어머니다. 할머니가 떠준 쌀되박을 이고 아침밥상은 담살이에게 맡긴 채 안산에 햇발이 오를 새라 득달같이 두리실고개를 넘는다. 쌀이 귀한 시대라 쌀을 가지고 가는 집은 많지 않고 쌀 몇 되박만 퍼가면 돈처럼 유용하다. 어머니의 장짐은 특별한 게 없다. 살림살이에 필요한 게 몇 가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생선횟감이다. 할머니는 생선을 좋아했다. 특히 싱싱한 횟감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안산마루에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해서 점심 이전에,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다른 장꾼들이 해가 설핏해서야 돌아오는 것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할머니가 생선을 좋아하는 덕에 나도 생선입맛이 남다르다. 횟감이라면 사족四足을 못 쓴다.
어린시절 장나들이는 대개 할아버지하고 했다. 어머니하고는 같이 갈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생선을 좋아하면서도 장나들이는 거의 없었다. 할아버지의 장나들이는 어머니와는 판이했다. 천천히 아침을 먹고 할머니가 숯불데리미로 다려준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갓망태에서 갓을 꺼내 먼지를 털어낸 다음에도 칙간을 다녀오는둥 해가 안산마루를 넘어서야 집을 나섰다. 모처럼 허락을 받아 장에 따라가려고 아침 일찍 채비를 마치고 댓돌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매우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장거리는 사두실고개를 넘어서부터 지지부진遲遲不進. 아침나절인데도 할아버지는 숯개 욕쟁이할멈의 주막을 비켜가지 못했다. 그러자면 나는 또 정자亭子 모퉁이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유둔장 가는 길목의 주막을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유둔장에 닿은 것은 해가 중천을 넘어선 때였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지난 장날 좌판坐板책방 할아버지와 약속 때문이다. 좌판책방 할아버지의 좌판에는 신판사주新版四柱나 헌 고서들과 함께 철 지난 학생잡지가 있었다.‘학원’이다. 학원은 우리시대 유일한 학생잡지였다. 내가 좌판할아버지에게 신신부탁을 해서 마련해둔 것이다. 할아버지는 학원잡지가 공부에 도움이 되는 참고서로 알고 있었다. 내가 조바심을 한 것도 할아버지의 술자리가 너무 늦어서 좌판할아버지가 좌판을 걷어치우지나 않았나 하는 조바심이었다. 좌판할아버지에게서 묵은 월간지를 넘겨받은 나는 앉은자리에서 책에 빠져들었다. 물론 할아버지는 또 장판 주막에서 사돈들이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책 읽는 재미에 폭 빠진 나는 해가 넘어가는 것도 잊었고, 술판이 흐드러지게 벌어진 주막에서는 땅거미가 지는 것도 몰랐다. 해가 기웃기웃해서 좌판할아버지가 좌판을 털며 해거름이라고 일깨울 때에야 주막에서 할아버지를 찾은 나는 할아버지를 재촉했다. 가까스로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신작로로 나섰다. 할아버지는 대취해서 발걸음도 자유롭지 않았다.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귀가를 하던 할아버지는 또 다시 출발과 거꾸로 주막을 순례했다. 나는 주막 귀퉁이에서 하염없이 할아버지의 술자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주모가 더러 판엿(가락엿이 아닌) 한 토막이나 누룽지를 던져주기도 했으나 밤은 깊어갔다. 귀가歸家는 언제나 달이 중천에 올라왔을 때였고 기다리다 지친 할머니는 사두실고개까지 마중을 나와서 대취한 할아버지에게 모진 핀찬을 퍼부었다. 좌판할아버지의 학원이 국민학교 때 존 번얀의 천로역정, 정비석의 돌베개를 읽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교육대학시절에는 도서관의 장서를 다 읽어버리겠다는 만용을 부리는 독서광으로 발전했다. 어린시절의 독서는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작가로 활동하는 기반이었다.
(이천만의 명상록 - 16) 비나리
우리 마을에는 교회가 무척 일찍 들어섰다. 교회 상량上樑에 건축년도가 소화召和(일본역사연호) 13년이다. 주변에는 교회가 없어 멀리 서너 시간씩 걸어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우리 마을은 일찍 개화했고 자식교육도 일찍 눈을 떴다. 코흘리개시절 코 큰 서양인 선교사들이 짚차를 타고 드나들었다. 특히 크리스마스에 받았던 크리스마스카드는 신비로왔다. 서양냄새가 나는, 황금색 산타할아버지가 은청색 사슴마차를 탄 그림이나, 빨간 호랑가시나무 열매는 황홀했다.
교회는 우리 뒷마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교회가 선 땅을 희사했다. 우리 뒷마당은 100평 남짓한 꽃밭이었다. 모란과 작약꽃밭이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할머니는 가장 싱싱한 모란을 가위로 잘라주었다. 교회강단 꽃병에 모란을 꽂는 임무는 내가 도맡았다. 주로 백합을 꽂았는데 백합이 마땅치 않을 때는 모란을 꽂았다. 우리 집 마당언덕에는 백합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어디를 파도 백합구근이 나왔다. 묵은 구근에서는 꽃대가 아홉 개나 나오는 것도 있었다. 우리 집은 일명 꽃집이었다. 없는 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꽃이 많았다. 과일나무도 집안에 빙 둘러서 있었다. 또 다름 이름은 과수원집이었다. 백합향은 멀리 약 1Km 떨어진 신작로에까지도 풍겼다. 특히 도시유학 중에 밤차로 귀향할 때 버스에서 내리면 백합향이 먼저 마중하 듯 코 끝에 스쳤다. 그 백합이 예수님에 대한 할머니의 정성이었다.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는 때 장로님들의 권유에 마지못해 교회에 나가서 젤 앞자리에 앉았으나 곧잘 장죽에 담배를 태워 목사님의 애를 태웠다. 그래도 할머니는 교회를 외면했다. 일요일이면 연보돈을 챙겨주면서 손자들이 교회에 가는 걸 기꺼워하면서도 필시 당신은 교회를 끝내 외면했다.
할머니의 종교는 비나리였다. 뒷마당 장독대에 작수발을 세우고 붉은 황토를 깔았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샘골 치자샘에서 첫 번 째 물을 길어다 작수발 종지기에 모시고, 나머지기 물로는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했다. 문고리가 얼어붙은 한겨울 새벽에 얼굴에 찬 물방울이 튀어 눈을 떴다. 할머니가 촛고지 등잔불 곁에서 긴 머리타래를 풀어 빗질을 하고 있었다. 찬 물방울은 거기서 튀었다. 단정하게 쪽을 짓고 할머니는 옷매무새를 여미고 장독대로 나갔다. 한밤중처럼 깜깜한 꼭두새벽이었다. 할머니는 아침해가 안산마루에 올라설 때까지 작수발 앞에서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허리를 굽혔다. 수 천 번 비나리가 계속되었다. 할머니의 비나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몸이 편찮을 때도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나는 내가 뜻하지 않은 위기를 벗어날 때마다 할머니의 비나리를 떠올린다. 음덕陰德이다. 음해로 감사원특별조사반의 석 달 감사를 받고도‘털어봐도 먼지를 발견하지 못한’그들이‘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을 때’와 유사類似장티브스로 다 죽어갈 때 나를 간호하던 어머니의 꿈에서 어머니가 대문 밖에 내놓고 태우려던 내 옷가지를 빼앗은 것도 돌아가신 할머니의 음덕이었다. 정년을 하자말자 발견된 암 3기에서 완치판정을 받은 것도 음덕이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완치되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비나리는‘그저 자손 번성하고 새끼들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었다. 수 천 번 허리를 굽혀 절하고 수 만 번 손바닥을 비비며 비는 말은 단지 손자들 잘되게 해달라는 비나리였다.
(이천만의 명상록 - 17) 선입견先立見
이상하게도 세차洗車를 하기만 하면 멀쩡하던 날씨가 구겨지며 곧장 비가 내린다. 아직은 몸이 쑤시거나 저리는 증세가 없이 말짱한데도 아무 생각없이 때가 되었다싶어 세차를 하고나면 비가 온다. 화단에 물을 주어도 마찬가지다. 특히 정해놓고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오늘 쯤 물을 주어야겠다고 맘먹고 물을 주고나면 비가 내린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는‘머피의 법칙’이 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예견豫見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쯤 꿈에 어떤 한자漢字를 보았다. 그 게 수십 년 뒤에 문득 생각나서 기억을 더듬어 가까스로 비슷한 만巒 자를 찾았으나 긴가민가다. 밑획이 뫼 산山인지 손 수手인지 확실치 않다.
한창 나이인 40대에는 꿈이 많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이다. 그 중에는 예언적인 꿈도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7순旬의 요즘에도 벌거벗은 꿈을 꾸기도 하고, 특히 신발을 잃은 꿈이 지속된다. 어렴풋이 나름대로 해몽은 하고 있다. 이루지 못 한 원념怨念일 거다.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 구도求道길을 떠나 국경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어 밤이슬을 피해 찾아들어간 곳이 무덤이었다. 중국 당唐나라 사람들의 무덤은 가족묘家族墓로 사당祠堂형태다. 목이 말랐던 두 사람은 마침 묘 안에 있었던 바가지에 가득 담긴 물을 번갈아 나눠 달게 마시고는 잠이 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었음을 알고는 두 사람은 구토嘔吐했다. 구토를 하던 원효는 문득 깨달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 자리에서 구도길을 접고 신라로 돌아와버렸다.
젊은시절에는 마음과 몸이 일치한다는 견해를 믿지 않았다. 병은 마음이 90%를 고친다는 말도 헛말로 치부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마음에 따라 병이 생기기도 한다는 걸 확실하게 알았다.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마음의 병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병들이 마음에서 온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시쳇말로 하면 홧병이고 요즘 의학적용어로는 스트레스다. 점술이나 풍수 같은 것은 고사하고 종교를 믿지 않은데도 사람을 보면 직업을 짐작하고, 얼굴을 보면 살아온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귀신이 있다 없다는 것은 차치하고 요즘 등산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귀신을 본다. 도깨비가면假面이나 처용상이 귀신이 아니라 늙은이의 모습이 바로 귀신이다. 귀신 몰골이 되지 않으려고 명상도 하고 산에도 오르지만 어떨지?
예언자들이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은 4주柱8자字를 토정비결土亭秘訣이라 이름 지어 인생의 길흉을 예언했다. 첨단과학시대의 오늘에도 정초正初에 토정비결을 펴놓고 1년의 운세를 점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지구촌의 위기 때마다 신문지상을 오르내린다. 요한계시록은 휴거라든가 말세론에서 부활을 화두로 던지며 인간을 계도啓導한다.
(이천만의 명상록 - 18) 운명
할아버지의 소원은 자손 번성이었다. 먹고 살만한 재산을 모았는데 자손이 귀했다. 3대 무녀독남. 무척 외로운 가계家系였다. 건장한 체구에 호기豪氣가 남달랐던 할아버지는 약주藥酒를 좋아하셨다. 출타出他에는 언제나 大醉. 할아버지의 귀가는 사장거리에서 손자들을 불러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호랑이 울부짖음 같은 표호를 듣고 할아버지 마중을 나가면 그 거구巨軀를 기대 듯 말 듯, 꼬맹이 손자의 부축을 받아 고샅으로 들어서면서 외치는 할아버지의 호통은 집안이 쩡쩡 울렸다.
3대 무녀독남에서 손자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이태에 한 명씩이 연달아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이제 부러울 것이 없었다. 첫 번째 장손長孫으로부터 2남, 3녀 그리고 또 연달아 남아들이 태어났다. 우리 집 문간채에는 이태마다 고추 달린 금줄을 쳤다. 그래서 무려 6남 4녀가 탄생했다. 할아버지의 남다른 의욕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여러 군데의 좋은 혼처婚處를 다 물리치고 다산多産 가정을 물색했다. 외가外家는 5남 4녀의 다산가계였다. 할아버지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래서 6남 5녀가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두 마지기 집 앞 텃밭의 절반에다가 단수수(사탕수수) 씨앗을 뿌렸다. 그 시절 단맛은 1년에 한두 번 얻어먹는 엿이나 눈깔사탕이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의 단맛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텃밭을 반으로 잘라 단수수밭으로 만들었다. 고작 밭 가장자리에 서너 그루 심어 단맛의 허기를 달랬던 시절의 파격破格이었다. 아마 동네사람들은 대놓고 말은 못해도 혀를 찼을 것이다. 타작마당의 곡식 낟알도 주어거두는 시절에 그 귀한 땅에 단수수를 심는 호사豪奢는 할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단수수가 약이 오르기도 전부터 단수수밭에서 살았다. 아예 단수수밭 가운데에다 동그랗게 자리를 만들어놓고 여름 내내 단수수를 잘라먹고 살았다.
늦여름, 유둔장에 다녀오시던 할아버지는 머슴 노동손에게 국화빵틀을 지워 오셨다. 고작 부침개나 칼국수로 별식을 달래던 우리들에게 국화빵을 맘껏 선사善事한 것이다. 빵틀을 사오신 뒤 할아버지는 밀밭을 크게 늘렸다. 밀이 구황救荒곡식으로는 귀치않아 보리에 밀리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우리 집은 선산先山 과수원 말고도 집안에 여러 가지 과일나무가 있어 과일에 그리 허기지지는 않았다. 감나무는 집안에만도 거목巨木 여나문 그루가 있어 홍시가 풍족했다. 선생님들이 가정방문을 나오면 꼭 우리 집에 자리를 잡았고 씨암탉 몇 마리가 안주가 되고나면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도 선생님들의 가정방문 선물이었다. 거기에다 대문으로부터 오른쪽으로 호두나무, 살구나무, 가죽나무, 석류, 자두, 참팽나무, 돌배나무, 유자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시누대밭에는 애초에는 파랗게, 그리고 노랗게, 익을 때는 빨갛게 열매의 색깔이 변하는 쥐똥나무가 있었다. 집안을 빙 둘러 얕은 돌담언덕이 둘러있고, 청배나무 옆으로는 무화가가 지천이었다. 더구나 집 앞 선산 발치에는 감나무와 배나무 과수원이 있었고, 감나무 밑에는 딸기도 심었다. 이른 아침 눈을 비비고 동생들과 경쟁적으로 과수원으로 달려가 익은 딸기를 찾아내는 것은 마치 보물찾기였다. 틈만나면 들락거렸으나 딸기는 잎 뒤에 숨어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3대 무녀독남의 독자獨子다. 딸 하나도 없는 독자 집안이다. 그리 3대가 내려왔으므로 가까운 친척이 없다. 할아버지의 고향이 고흥읍에서 좀 더 들어간 운대 자추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어렸을 때 몇 번 할아버지의 가을 시제時祭에 동행하려고 했으나 할머니가 어린 것을 데려간다고 강력히 말려서 기회를 잃었다. 할아버지는 장손을 시제에 데려가려고 했는데 할머니의 파워에 밀렸다. 또 대취할 것이 뻔한데 손자를 맡길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수성가自手成家로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일구었고, 손자들도 계획처럼 번성했다. 그런데 시대가 집안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 때 막 설립된 도립대학 조선대학교에 입학했다. 맨손으로 벽돌을 구워 학교를 짓는 중이라 학업은 명색名色뿐인 학교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조선대에 적籍만 걸어놓고 고향에서 교회와 야학夜學에 정진했다. 이웃 면의 유둔 외가에서도 외삼촌 두 분이 우리 집에서 기숙寄宿하며 공부했다. 그러던 차에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1948년 가을이었다. 교회 어른들이 모두 도망치고 혼자 교회를 지키던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잡혔다. 고흥을 점령하려고 말을 앞 신작로를 지나던 인민군이 우리 동네 교회 십자가를 보고 교회에 왔는데 마침 교회에 있던 아버지를 체포했다. 인민군들은 교회를 불태우려고 했다. 아버지가 몸으로 막았다. 그러자 인민군들은 아버지에게 교회 강단의 설교용 찬송가와 성경을 가지고 오게 하여 불태우라고 강요했다. 총뿌리를 갖다대고 강요하는 인민군에게 항거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찬송가와 성경을 불태우고 목숨을 건졌다. 교회도 살았다. 인민군이 떠나자 인민군 소식을 듣고 피신해버렸던 교회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찬송가와 성경을 불태운 아버지를 비판하고 교회에서 축출했다. 곧 국군이 입성했다. 누군가 아버지를 고발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버지를 고발한 사람들이 교회 어른들이라고 했다. 아마 여러 신들을 모셨던 할머니가 집안사람들의 교회 출입을 묵인하면서도 끝내 자신은 교회에 나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입을 닫고 계셨지만 할머니는 고발자의 구체적인 윤곽도 얘기했다. 국군과 경찰의 수배를 받자 아버지는 두리실 산굴에 잠자리를 마련하여 도피했다. 한 군데서 자지 못했다. 집안 칙간(화장실)에도 도피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피에 한계가 있어 또 고발로 아버지는 면소재지 지서에 끌려갔다.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좌익으로 몰았다.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아버지를 형틀에서 빼어내지 못했다. 포승을 지워 통나무 위에 세워놓고 몽둥이질을 한 정도는 약과였다. 아버지는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닷새만에 혼절昏絶했다. 아버지가 고문을 당하는 5일 간, 애가 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일 하루 세 끼 십 리 길 식사를 날랐다. 아버지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데 닷새 째 되는 날 면회를 청하니까 경찰은 지서 앞 개울을 가리켰다. 숨졌으므로 버렸다고 했다. 죽어버린 아들의 시체를 우마차에 싣고 돌아온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마음 놓을 새도 없이 백방으로 아버지를 간호했고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그러나 후유증이 컸다. 정신이상이 된 것이다.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그 후, 모함했었던 교회 사람들이 사죄를 하고 아버지는 퇴출된 교회에서 복권되어 성가대를 지휘하고 오르간반주자로 평생을 살았다. 여름철 하기아동성경학교 교장을 했다. 아버지는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존 번얀의 천로역정과 정비석의 돌베개를 나는 초등학생 때 읽었다. 아버지는 달필達筆이었다. 아버지가 써서 큰방 벽에 붙인 정읍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쳐오시라’는 글귀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림도 수준급이었다. 꽃병을 그린 그림이 아버지의 방에 붙어 있었다. 오르간은 찬송가의 4부 악보를 자유자재로 쳤다. 그 외 기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여름 날 저녁을 먹고 식구들이 마당의 평상이나 돗자리 위에서 모깃불을 쬐고 있을 때, 우리 남매들은 깔담살이(잔심부름 남자 머슴)가 소를 뜯기며 풀꿰미에 주렁주렁 잡아다준 메뚜기와 땅깨비(방아개비)를 모닥불에 구워먹으며 아버지의 옥퉁소 연주를 들었다. 천방산의 달이 안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버지의 퉁소 그 청아한 가락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배움을 중도에서 그친 한이었을까, 아버지는 남다르게 교육에 열정이었다. 나는 6살에 밑이 터진 가래중의를 입고 누나 등에 업혀 10리 산길로 등하교 했다.
(이천만의 명상록 - 19) 탕자蕩子의 신앙
모태母胎신앙이라고 곧잘 말하지만 어머니는 교회에 나갈 짬이 없었다. 어머니의 기억은 부엌에서 밥 짓고 빨래하는 일 뿐이다. 아버지가 교회에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모태신앙까지는 아니더라도 따박따박 걸을 때부터 아버지 품에 안겨 교회에서 살았을 것이다. 평상시에 아버지는 교회 반사班師였고, 성인예배 때는 오르간주자 겸 성가대 지휘자였다. 여름아동성경학교가 열리면 교장이었다. 성경학교에서는 해마다 새로운 성가聖歌를 가르쳤는데 그 괘도악보도 아버지가 만들었다. 창호지에 붓으로 그린 악보였다. 뒤란 감나무그늘 아래 평상을 펴고 동생들은 먹을 갈고 나는 붓에 먹을 묻혀 붓대롱에 할머니의 잣대를 대고 악보를 그렸다. 그러다 익숙해지자 아버지는 나와 동생들에게 악보 제작을 맡겨버렸다. 비법秘法도 전수傳授했다. 악보의 5선은 붓으로 긋고, 음표音標는 고구마로 새겨서 찍었다. 성경학교에서는 암송대회가 경연이 있었는데 1등상이 가죽케이스 신구약 합본合本 성경이었기에 누구나 탐냈다. 그 상을 타기 위해 요한복음을 통째로 외웠다. 크리스마스에는 예수탄생극을 연기했다. 그렇게 생활의 일부였던 교회를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만두었다. 회의懷疑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사람이었다. 신神은, 형체뿐만이 아니라 말도 없었다. 그래서 신을 만나기 위해 한겨울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한밤중 같은 새벽에 교회에 나가서 차디찬 마루바닥에 꿇어 엎드려 간구懇求했다. 신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을까? 아니면 내 간구하는 기도를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들어달라고 했을까?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어디에 기댈 데도 없이 방황했던 10대 시절, 간구해도 응답이 없었을 때 역사책에서는 원시신앙을 배웠다. 산, 바위 그리고 거목들이 신앙이 대상이었다. 심지어는 호랑이나 곰도 신앙이었다. 나약한 인간이 자신들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 없는 천재지변天災地變도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갈구渴求함에도 말이 없는 하나님이 신이 아니라 원시시대 신앙처럼 불가해한 대상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신을 버리고 탕자가 되어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그 이후 신은 내게 본질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신을 인간이 만들고 천당과 지옥도 인간이 설계했다. 우리나라에서 태동한 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불교는 신이 없다. 깨달으면 모두 부처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적에 당신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기독교의 진실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다. 사람이 곧 하나님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를 믿으면서 하나님을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창조주로 표현하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속성屬性으로 간주한다. 일찍이 수운선생이 외쳤던 인내천이다. 또한 기독교는 유일신사상을 추구하면서 중세中世 십자군 등 얼마나 많은 인명을 살상했는가? 십자군전쟁으로부터 마녀사냥 그리고 그 수많은 종교전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류 평화와 구원을 외치는 종교가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가? 나는 특정종교를 선호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그러나‘누그든지 깨달으면 부처님’이라는 불교가 마음에 와 닿는다. 그렇다고 깨닫기 위해 80년 남짓한 내 인생을 구도求道로 지새울 생각은 없다. 그냥,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처럼 살다가 죽으려고 한다. 풀과 나무도 바위나 물도 그리고 개도 닭도, 신도 부처님도 아닌 사람말이다.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는 것이다. 무에 그게 어려운가. 그래도 사람답게 사는 일과 사람답게 죽는 일은 끔찍하게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아파트관리비를 임원들이 다 돌라묵는다고 재판도 하고 나쁜 놈들과 주먹질을 하며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가 좀 정신이 들면 꽃씨 몇 알을 주문해다가 아파트화단에 심고, 이건 아닌데 하고 더 철이 나면 명상瞑想도 하고 선방禪房과 산방山房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단전호흡丹田呼吸도 한다. 산방, 선방, 명상, 단전호흡은 오직‘잠자 듯 가기 위한’ 단편斷片이기도 하다.
구도求道의 새벽기도가 끝나면 우리 면에서 제일 높은 마을 뒷산 천방산에 올랐다.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이 울부짓는 것 같다. 산마루에서 일출을 보았다. 남해일출은 마치 천지창조天地創造를 보는 듯 장엄했다. 애초에는 서서히 하늘이 물들기 시작했다. 푸른 빛과 붉은 빛이 교차되었다. 빛깔이 점차 확장되면서 바다가 물들기 시작하고 빛깔은 소용돌이쳤다.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면서 하늘이 온통 무지개빛깔의 소용돌이로 변해갔다. 하늘과 바다가 혼돈처럼 뒤섞여서 소용돌이쳤다. 나는 무한한 감동, 태초의 천지창조를 보는 듯 존재조차 잊고 무아지경無我之景의 천지창조를 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치 억겁億劫의 시간이 지난 듯 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평정되었고 다시 하늘과 바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도 나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 철을 보내고는 교회와 예수님을 버렸다. 생애 첫 번째 방황의 시작이었다. 최근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딸이 호킹의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호킹은 신에 대해 '신은 없다'고 단순명료單純明瞭하게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임종 직전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라는 질문에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이천만의 명상록 - 20) 첫사랑
이삐디 이삔 가시내가 있었다. 각시 삼고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5반에 사는 전씨댁 아가씨였다. 나 보다 한 학년 아래였으니까 서너 살 아래였을 것이다. 귀여운 소녀의 아버지는 면사무소 서기였고, 가정교사 겸 이웃동네에서 유학한 외삼촌이 가정교사 겸 보디가드였다. 외삼촌은 초등학교에 개설된 중학교과정에 다니면서 그 소녀와 매일 손을 잡고 등하교했다. 외삼촌은 중학교 같은 학년이었는데 나이는 한참 위였다. 가끔 그 하교길에 나도 끼었다. 우연인 것처럼 끼어들었지만 실은 의도적이었다. 때로는 짝사랑 소녀의 집에 초대받았다. 외삼촌의 친구로서다. 시골에서 면서기를 하는 집안이라 분위기가 달랐다. 입은 옷도 하늘거리는 망사였다. 음식도 달랐고 소녀 어머니는 농사를 짓지 않는 전업주부였다.
소녀의 외삼촌이 독실한 신자여서 우리는 교회에서 만났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는 예수 탄생 연극에서 같이 연기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밤 연습을 했는데 연습이 끝나면 우리는 교회마당에서 숨바꼭질이나 진뺏기(진돌이)놀이를 했다. 놀 때도 그 소녀에게만 눈이 갔다. 내가 광주로 유학을 한 뒤 그 소녀도 뒤 따라 유학을 왔다. 여고생으로 낮에는 대학교 전화교환으로 일하고 야간학교를 다녔는데 교환실 주변에 남자애들이 들끓는 다는 과 소문이었다. 그래서 한 번은 용기를 내서 소녀의 자취방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타락을 확인한 꼴이 되었다. 그 뒤에도 가끔 풍문을 들었으나 좋지 않은 소문뿐이었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결혼조차도 비정상적이었다. 어린시절이었지만 한 때의 연모戀慕가 지금까지도 낭패의 찌꺼기로 남았다.
다음에 만난 여학생은 성경학교에 다녔다. 성경학교 여학생기숙사는 금남禁男의 집이었는데 연애편지를 사감이 받아 공개했다고 들었다. 뭣도 모르고 편지질을 해서 곤란하게 만들었으나 여름방학 때 교회가 끝나면 오르간연습을 한다는 핑계로 둘만 교회에 남았다. 그리고 편지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그 소녀의 오빠가 알게 되어 집안에 감금되었고 인연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누나가 한 사람 있었다. 전화교환수였다. 그 시절에는 S남매가 유행이었다. 도시락도 싸다주고 반찬도 담가주었다. 예쁜 팔굽받침대도 만들어주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한창 문학써클활동에 심취해 있었고 시 낭송의 밤에서 누나는 열혈 팬이었다. 대학을 들어갈 때쯤에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곁눈질에는 심하게 질투를 했다. 여학생 급우들과 데이트를 감시당했다. 결혼을 작정하고 준비를 하는 듯 하였는데 그만 내 외도外道로 판이 깨져버렸다. 몇 번 머나먼 우리 집까지 찾아왔으나 다른 여성에게 취해서 각박하게 축출했다. 몇 달 뒤 대오각성大悟覺醒을 하고 다시 찾았으나 이미 정혼자와 약혼을 한 뒤였다. 그날 사 말고 폭설이 내렸다. 누나는 냉철하게 돌아앉아버렸다. 새벽까지 술을 먹고 취기가 목구멍에 차오르면 토해내고 다시 먹었다. 귀향길 기차에서 만난 노인이‘여난女難의 상相’이라고 했다.
(이천만의 명상록 - 21) 천수天壽 120세
구약성경을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있었다고 기ㅏ록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100세가 넘어 이삭을 낳는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고조선의 임금들은 500세를 넘어 나라를 통치했다.
5년 전, 그러니까 65세에 직장암3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다. 수술 직전에야 인간이 이렇게 미련한 동물이었던가 하고 새삼스럽게 개탄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후회막급後悔莫及, 배꼽을 물어뜯고 싶지만 이미 한 발 늦어버린 일이었다. 뒤늦게야‘병증病症에 몸은 반드시 신호信號를 보낸다’는 깨달음을 확인했을 뿐이다(암은 신호 - 자각증상이 오면 이미 많이 진행되어 고치기 어렵다).
꼭 암수술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고희古稀, 죽음의 헤아림이 가능한 나이다. 돌아가는 것인지 떠나는 일인지 또는 영면永眠인지 알 수 없으나 무등산자락을 걸으면서 보는 푸나무와 이름 모를 풀꽃들까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찰라라거나 초로草露도 실감난다. 이제는 사는 날보다도 죽는 일을 더 깊이 생각한다. 그러면서 삶의 끝이 광고카피대로‘잠자듯이 갈 수 있다면’하고 소망한다. 할아버님은 중풍으로 3년여 동안‘벽칠하며’살다 가셨고, 장모님은 한 5년 동안 거동을 못하고 대소변 수발을 받았다. 요즘 유행하는 9988234사死 -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 3일 앓고 잠자듯이 죽는 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죽음에 이르러 신고辛苦하는 마지막 모습을 내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내 죽음을, 벚꽃처럼 흩날리든지 동백꽃처럼 툭툭 부러지게 할 수 없을까? 동물들의 죽음을 보면 인간처럼 어렵지 않아 보인다. 시름시름 앓다가 오래 신고辛苦하지 않고 자연사한다. 또 야생동물들은 때가 되면 조용히 혼자만 사라진다. 그래서 아프리카 세랭게티 초원에서 코끼리무덤을 찾으려한 상아수집가들이 있었으나 코끼리무덤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코끼리들은 아픈 동료를 이끌고 치료차 이동했을 뿐이었다. 동물들의 귀소歸巢 본능을 더러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도 한다. 동물들은 죽음을 맞이하면 자기가 태어난 옛 굴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왜 유독 고등동물이라는 인간만 고통스럽게 운명殞命하는 것일까? 마르케스는‘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영원히 죽지 못하는 인간의 절망을 그렸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도 인간이 죽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신들은 인간을 부러워한다. 나는 죽지 않고 싶은 게 아니라‘잠자듯 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주제넘은 일이겠으나, 마지막을 아름답게 하려는 심산心算으로 산방山房과 선방禪房을 찾고, 명상瞑想을 하고, 단전丹田호흡도 한다. 스스로 생명의 숨을 끊는 연습이다.
신라 말 최치원은 입산入山하여 신선神仙이 되었다고 하고, 고승高僧들 중에는 좌선坐禪을 한 채로 열반涅槃하는 이도 있다. 더러는‘나 이제 이승을 떠날 때가 되었다. 내일 해질녘에 가련다’라고 수좌首座들에게 알리고 떠난 스님도 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을 남자 80, 여자는 90 전후前後로 본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에 죽었고, 아브라함은 100세 그 아내 사라는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신시시대神市時代 역대歷代 천왕天王들의 재위在位는 100년이 넘는 천왕만도 4명이다. 재위기간이 100년이면 수명은 최소 150세 이상이다. 학자들 말로는 현대 인간의 최대수명을 120세로 보고 있다. 의사들은 80세라고 하니 문명의 발달이 인간수명 40년을 갈아먹은 결과다. 허나 지금이라도 잘만 유지하면 120세까지는 너끈히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떻게 살면 인간수명 120세를 견지堅持할 수 있을까? 문명을 벗어나면 된다. 자연수명, 그러니까 천수天壽는 가꾸기 나름이다. 문명인으로 살지 않고 원시인原始人처럼 살면 최대수명을 유지할 수 있다. 원시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네안데르탈인시대나 크료마농인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시골로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서 꼬무락거리며 농사짓고, 산과 들에 지천인 나물 따먹고, 바다에 발을 쳐서 덤장이나 뚝방고기 잡아먹으면서 살면 인간수명 120세를 누릴 수 있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아이들 다 장가보내놓고 부부夫婦만 돌아가라. 수명은 가꾸기 나름이다. 특히 건강수명이 그렇다. 문명생활 - 기를 쓰고 부대끼며 돈 벌어서 더 큰 아파트, 더 맛난 음식 그리고 더 좋은 차를 탐내면서 우리는 스스로 자연수명을 단축시키고, 노후에는 병들어 골골골 하면서 병원이나 들락거리는 생애를 살고 있다.
(이천만의 명상록 - 22) 일부다처一夫多妻
좀 비싸더라도 좋은 걸 사서 오래 쓴다. 마누라가 들으면 펄쩍 뛸 일입니다. 싼 걸 많이 구입하여 변화를 찾는 것이 마누라의 천성天性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강 그렇게 맞춰 살아왔는데 딱 한 가지 실패한 게 있습니다. 결혼입니다. 사람이 일생에서 자기의지로 할 수 있는 일 세 가지 중 하나가 결혼인데 나는 그 걸 실패했습니다. 교미기交尾期에는 동물들도 상대방을 선택하는데 매우 신중하고 심지어는 식물들도 열성인자劣性因子는 씨방을 닫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연애를 하면 당달봉사가 됩니다. 눈에 고깔이 씌웁니다. 그래놓고는‘아내를 얻으면 3개월이 즐겁다’고 합니다. 말(자동차)을 사면 1년이 행복합니다. 비단 눈에 고깔을 쓰는 게 우리만이 아니 듯 합니다.
내 결혼의 실패는 고깔문제가 아닙니다. 결혼을, 인생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부적否的보상입니다. 여자는 다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문家門이 어쩌고 학벌이나 성품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사람은 거의 비슷하다고 보았습니다. 여자야 있을 곳에 있을 거 붙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비스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르고 선택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 있었던 여자들 중에서 그냥 골라 혼인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몰랐습니다. 바쁘게 살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서로 안 맞는 것들은 이해하고 조언助言하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그게 틀린 생각이었습니다. 바쁜 인생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상대 차이가 현격하고 명확하게 들어나 간격을 좁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동거하고만 삽니다. 이혼 이야기를 몇 번 꺼냈지만 실행은 못하고 그저 한 집 속에서 동거합니다. 결혼의 실패는, 특히 나 같은 장자長子에게는 부모 동기간의 절연絶緣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양육의 실패로 나타났습니다.
아메리카인들의 이혼률은 50%를 넘습니다. 프랑스는 아예 동거가 대세지만 우리의 이혼률도 거의 50%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2, 30년 전만해도 일본인의 아내들이 정년만 기다린다고 해서 코웃음을 쳤는데 우리나라도, 특히 요즘에는 황혼이혼이 부쩍 많아졌다고 합니다. 맘에 맞지 않아도 우리 부모들은 자식새끼들 때문에 이혼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윗대 할머니들은 칠거지악七去之惡 때문에 꼼짝없이 묶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혼도 대수롭지 않은 추세입니다. 독신자도 많고 동성애가 보편화되었으며 결혼에 대한 사회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가족의 해체를 예언합니다. 새로운 가족형태가 나타나리라고 말합니다. 더러는 원시시대의 모계母系사회 회귀回歸를 점占치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손자들은 사촌이나 3촌, 당숙 그리고 고모 등 친족을 모릅니다. 이모와 외3촌이 친척입니다. 남존여비男尊女卑 풍습이 사라져가는데도 여전히 인구비율은 남자가 더 많습니다. 특히 중국의 남녀 비율은 심각해서 여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부일처제도는 이 지구촌에서 몇 개 나라 몇 개 인종만이 지키는 규범입니다. 지구촌의 3/ 4 가량은 지금도 일부다처一夫多妻제입니다.
(이천만의 명상록 - 23) 하루 25시간
게오르규의 25시가 생각난다.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복제연구를 하면서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토일요일이 없다는 말인데 당시에는 무척 감동했다. 벌써, 50여 년 전에 손밑 동생을 잃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일忌日이 되면 향香을 사르고 독송讀誦을 했는데 그만두었다. 가버린 영혼은 가게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마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앨범을 들춰보면서, 삶과 죽음의 차이가 혼란스럽다. 사진에 찍혀 있는 걸 보면 동생은 형체形體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 그 형체가 문제다. 있었던 것이 없어져버리는 상황이 곤혹困惑스럽다. 무릇, 있다가 없어지는 게 세상 진리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생사에서는 납득이 쉽지 않다. 개나 닭이거나 풀이나 꽃이라면 그저 그렇거니 하고 인정을 하면서도 사람이기에 어렵다. 동생이 실체로 찍혀있는 그 때는 여기에 있었다. 사진에 찍혀있는 그 시간에는 실체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있는데 그는 없다.
스티븐 스틸버그의 영화‘쥬라기의 공원’을 보고 참 세상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도 많구나 놀랐다. 어떻게 모기가 화석化石이 된 호박琥珀결정체에서 모기 피를 뽑아 공룡을 재생시키는 기발한 생각이 나왔을까. 그 보다 오래 전에 영화‘타임머신’을 보며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4차원의 사고思考에 놀란 적이 있었다. 타임머신이나 쥬라기공원처럼 시간을 거꾸로 돌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요절夭折한 동생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저승과 이승에서 서로 헤어져 가슴 아프게 눈물로만 상봉하는 게 아니라 손을 마주 잡고 볼을 부비며 안타깝게 그리던 꿈을 이룰 수도 있을 게 아닌가? 일차원은 점點의 세상이고, 2차원은 선線의 세상이며 3차원은 점과 선이 이뤄내는 입체적 공간空間이고, 4차원은 시간이라고 한다. 정말 4차원의 세상이 가능할까? 나는 종교를 갖지 않고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지만, 사무엘 베케트의‘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죽지 못해서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을 그렸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도 신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인간은 죽을 수 있다는 일이다. 영생이나 부활 그리고 극락과 천당도 유전流轉도 믿지 않는다. 어설프지만 인간도 풀꽃처럼 한살이를 한다고 생각한다. 풀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풀로 자라고, 꽃이 피고는 씨를 맺고 다시 그 씨가 땅에 떨어져 풀이 되는 한살이의 순환이 삶이라고 믿는다. 이 순환과정을 시간으로 금 그어놓고 잘게 쪼개서 1초의 몇 분의 1을 나눠서 시간이라고 한다. 그 허상에 얽매어서 하루가 24시간이고, 1주일은 7일이며, 일요일에는 쉬고 월요일에는 다시 일터로 나간다. 1년 365일이 그렇다. 그리고 한 해가 가면 나이를 한 살 먹고 그 게 가득차서 70쯤 되면‘인생 70 고래희古來稀’라고 써놓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얽매여 안타까워한다. 그 게 삶이라면 시간을 지워버리는 게 어떨까? 시간은 인간이 만든 허상虛像이 아닐까?
(이천만의 명상록 - 24) 운명運命, 아버지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삐쩍 마른 노구에 염습을 하는 마당에서도 눈물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선산 묘지에 하관을 하고 장자로써 첫 삽 흙을 관 위에 뿌리면서 울컥 설움이 솟았다. 그 동안 미움과 회오로 대해왔던 아버지의 불행했던 일생이 자성自省의 눈물로 솟았다. 불가佛家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 한다. 사람들은 노후에 자기 일생을 돌아보면서는 파란만장이라고 한다. 식물들은 한 자리에서서 천 년을 살고 동물들도 열심히 먹이를 구하며 별 어려움 없이 삶을 지탱하는데 왜 인간만 삶을 고해니 파란만장이니 하며 인생을 어렵게 살아가는가. 정년을 하고 고희古稀를 맞으며 뒷방신세가 되어 하릴없이 소일消日하다보니 할 일이 없는 것처럼 견디기 힘든 것도 없다싶다. 그래서 하루 놀고 하루는 쉰다는 말이 회자膾炙되었다. 편히 쉰다는 것은 수사修辭다. 영원히 쉬는 영면永眠도 없다. 윤회니 부활이니를 불식하고 선택한 영면은 듣기 좋은 말로 잠자는 것이지 잠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허虛의 상태에서 무無로 출발하여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일자리가 생긴다고 해도 선뜻 나설 처지도 아니다.
어린시절 기억도 마냥 행복했다는 것만은 아니다. 할아버지야 3대代 무녀독남無女獨男 가계家系에서 자수성가自手成家한 땅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니 그 슬하膝下의 3대독자 종손宗孫이었던 나는 귀염을 독차지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여순사건麗順事件에 휘둘려 폐인廢人이 된 데서부터 우리 집의 비극悲劇이 시작되었다. 아마 할머니의 비나리는 여순사건 때 아버지가 부역附逆으로 몰려 경찰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대학을 다니며 교회에 야학夜學을 차리고 인근 청년들을 가르친 것과 공산군들이 들이닥친 교회를 지키려다가 부역죄로 몰렸다. 그리고 빈사상태로 지서 앞개울에 버려졌다가 할머니의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목숨만은 부지했으나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래서 할머니는 1년 365일 샘골 옹달샘에서 첫물을 길어 장독대 작수발에 올려놓고 얼음물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안산마루에 해가 돋을 때까지 축수祝手를 했다. 수 천 번 수 만 번 허리를 굽혀 절하며 양 손바닥을 비볐다.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갖은 약을 다 쓰고 무당굿도 하고 팔영산 능가사 40릿길에 공양미를 지워 공덕功德을 쌓아도 아버지의 정신줄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정신은 날이 궂으면 더 헛소리와 헛짓을 했다. 정상적인 때는 교회의 성가대를 지휘하고 찬송가의 4부악보의 반주伴奏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연주자였다.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독학으로 풍금 4부연주는 웅장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교대를 졸업하고도 2부연주조차 어렵게 한다. 퉁소나 통키타연주도 훌륭했다. 붓글씨는 일품이었고 아름다웠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춰오시라’가 아버지 방에 휘호揮毫가 있었으나 무엇인지 모르다가 고등학교에서 정읍사를 배우고서야 깨득했다. 그림솜씨도 수준급이어서 아버지 방 벽에 붙어있었던 화병畵甁을 기억한다. 서가에는 책이 가득했다. 증조할아버지의 유산이었던 한문서적과 일본서적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읽었던 정비석의 돌베개와 존 번얀의 천로역정은 아버지의 서가였다. 문학적 소양도 아버지가 아침 눈을 비비자말자 강제로 읽힌 성경 석 장 덕분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요한복음을 통째로 외웠고 신약은 약 세 번 구약은 한 번을 독파했다. 만약 손자들이 문학적 취향을 가졌다면 기초소양을 기르는 일은 사전을 통째로 외우는 일로 시작할 것이다. 문학성의 경쟁은 어휘력의 경쟁이다. 여름 겨울철에 여는 여름성경학교에서 교장을 했다. 그러나 멀쩡하던 정신이 흐려지면 식구들이 배척을 했다. 날씨가 꾸물거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어김없이 정신을 놓아버린 시간이 길었다. 철없었을 때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그렇겠거니 했으나 머리가 커지면서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쌓였다. 초등학생 때는 단순하게 미워했는데 중고등학생 때는 아버지가 죽어버리기를 바랬다. 비나리를 계속하는 할머니도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걸 푸념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모든 식구들의 공동의 장애였다. 시골에서 광주로 유학도 아버지의 뜻이었는데 아버지 슬하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기뻤다. 머리가 커져서 철이 좀 들어 광주일보에 연재된 ‘해방 30년’을 발견하고 탐독했다. 그때부터, 미움은 가시지 않았으나 한편 아버지를 역사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유망했던 청년’을 의식했다.‘여순사건麗順事件(1948년 9월 여수 주둔 14연대 제주도 파견 항쟁사건, 전남 동부6군이 피해를 입음. 1950년 6 ․ 25의 서막序幕)’전적지戰迹地를 탐사했다. 아버지의 불행한 일생을 역사적으로 조망眺望코자 했다. 그리고 2010년에 발족된‘진실화해위원회’에 제소하여 조사를 마쳤으나 기록에만 올렸을 뿐 신원伸寃을 하지는 못했다.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이 너무 많아서 피해를 입었다고 인정되나 살아남은 사람은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했다. 나는 유난히 직장상사들에 대한 증오가 많았다. 부정과 비리에 대한 병적인 집착도 컸다. 장학사들과 다툼은 예사고 청와대, 검찰, 경찰, 교육부와 안기부(정보부)도 싸우고, 정년 전후에는 전남도교육감에 출사했다가 상대방의 음해로 감사원(특별조사반)과도 싸웠다. 밖에서는 정의와 신념이라고 인식이 되어있지만 안에서 보면 혹 유년의 기억 때문, 아버지에 대한 즉 어른에 대한 원망과 소망 때문에 표출된 의식이 변형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한다.
(이천만의 명상록 - 25) 노인과 섹스
요즘 자네 … 어떻게 지내지? 뭘, 그럭저럭 …. 동문서답東問西答. 고희古稀 동년배同年輩들과 섹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보면 대부분이 직접적인 답변을 피한다. 그냥 참는다, 부인이 갱년기가 지나서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다, 혼자서 해결한다는 답변이 고작인데 잊어버렸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옛말에 짚 한 토매(단) 들 힘만 있어도 남자는, 섹스가 가능하다는 말 틀리지 않다.
노인이 섹스 얘기를 들먹거리면 참 자발없는 짓이다. 사람답게 사는 일 중에서 먹는 것과 함께 가장 으뜸된 2대 본능이라고 하면서도 섹스는 오랫동안, 특히 군자君子의 나라에서는 유별나게 금기시 되었고 오늘도 노인들에게는 터부다. 이에는 섹스의 생물학적요인이 작용한다. 남자 즉 수컷의 섹스는 종족번성이 근본적인 목적이다. 자기 유전자를 많이 퍼트려서 동족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 건 우성優性과 열성劣性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본위自己本位다. 동물이고 식물이고 다 똑같다. 수컷은 암컷을 많이 거느리고 활동영역을 넓힌다. 그래서 사정射精 한 번에 쏟아내는 정자수도 2억 마리다. 식물도 수많은 홀씨를 암술 하나에 수정시키려고 경쟁한다. 지구상에서 남성성이 여성성 보다 우세한 이유다. 그러나 여성은 다르다. 근본적으로 생명성을 유전하려는 의지는 남성성과 다를 바 없으나 개념에 차이가 있다. 생물학적 여성성은 우수한 유전자의 선택이다. 난자는 약 2억 개의 정자아기씨에서 가장 우수한 유전자 - 난자에 1등으로 도착한 아기씨를 받아들인다. 여성이 인기인 유명인들에게 열광하는 것도 다 우수한 유전자를 받아들이려는 본능적 몸짓이다. 세기적인 해학가 버나드 쇼오가 당대의 유명 여배우가 저명한 인사들의 모임에서 만났다. 버나드 쇼오를 만난 것에 감격한 여배우 왈‘쇼오 선생님, 선생님의 머리에 제 미모를 지닌 아이가 태어난다면… ’,‘부인 그 반대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단 보장이 없지요.’여배우가 벌겋게 상기되어 자리를 떴다. 동물의 암컷은 교미기가 되면 암내를 풍겨 근방의 수컷을 유혹한다. 예민한 후각을 가진 수컷들은 암내를 맡으면 흥분하고 암컷 주위로 몰려든다. 호랑이의 영역권은 4방 약 300Km다. 수컷 호랑이 4마리가 서식하려면 사방 1000Km의 영토가 필요하다. 교미기의 암호랑이 한 마리가 이 영역에 나타나면 주변의 호랑이 4마리가 경쟁에 돌입하고 승자를 가리기 위해 치열한 싸움판을 벌인다. 식물도 그 수많은 홀씨들이 암술의 씨방에 접근하지만 열성이라고 판단되면 암술은 씨방의 문을 닫아걸어 잠궈버린다.
그런데 인간에게 섹스가 자손번창子孫繁昌의 역할만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생겼다. 이브의 선악과善惡果가 문제다. 섹스를 즐기는 동물이 인간 외에는 없다. 침팬지와 고릴라가 인간처럼 수시로 섹스를 하는데 아직 학술적으로 규명이 되지 않았다. 인간도 자손번창에만 섹스를 이용했다면 성性으로 인한 오늘 같은 어려운 문제들은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노인네의 성생활도 잠재적요인은 없었을 것이다. 노인네의 성생활은 여자들의 폐경기에서 부조화가 시작되는데 이를 보면 여성은 섹스 그 자체를 즐기는 것 보다는 아직도 종족본능 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 폐경기의 할머니는 섹스 능력이 떨어지고 섹스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남정네들의 섹스 본능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은데 황혼부부의 성문제가 발생한다. 할아버지는 70이 넘어서도 섹스를 지속하려고 하고 할머니는 50을 넘어서면 몸을 사리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국제적으로 사회문제의 가장 큰 이슈는 영토, 종교, 결혼 즉 성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자서전형식(Daum Blog 이천만의 시 또는 이천만의 교학대한사)을 빌어 이 문제를 제기했다. (경제적 여유) 3, 40대 여성과 (혈기왕성) 2, 30대 남성의 결혼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요즘에는 연하커플이 유행하고 있다.
(이천만의 명상록 - 26) 아버지의 기억
아버지애 대한 기억은 애증愛憎이 교차한다. 성가대를 지휘하며 찬송가를 4부로 능숙하게 반주하는 모습과 퉁소와 키타연주 그리고 붓글씨, 그림솜씨 그리고 교회에 야학을 개설하고 근동 청년들을 가르쳤던 모습. 방안에 걸려있었던 꽃병그림과 벽에 붙은 정읍사 휘호揮毫, 그리고 국권을 일제에게 강탈당하자 자결한 민영환열사烈士의 혈죽도血竹圖를 배경으로 한 사진에는 아버지는 두툼한 책을 끼고 외투와 양복차림의 훌륭한 신사모습이다. 또 하나는 정신을 놓아버렸을 때의 부정적인 모습인데 끼니마다 강요한 이상한 냄새가 나는 문둥병 치료제는, 아랫집 큰아들이 문둥병에 걸려 소록도에 감금되었다는 발상에서 예방차원의 투약이었으나 정말 싫었다. 그래서 식구들은 밥숟갈에 따라주는 약을 먹는 체 하면서 모두들 쏟아버렸다. 생각만 해도 역겨운 냄새가 지금도 입 안에서 나는 것 같다. 또 하나는 나무에 대한 집착이었다. 우리는 산판이 네 개나 있었는데 아버지는 유난히 나무에 대한 애착이 비정상적이어서 산의 나무를 단 한 개도 베지 못하게 했다. 그 때는 땔감이 소나무 위주였던 시대라 머슴들이 산판을 했다가 나무가 마르면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아버지 모르게 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집 앞 선산先山에는 감나무와 배나무 과수원이 있었고, 온 집안이 과일나무와 꽃이었다. 또 하나는 공부에 대한 집착이다. 나는 만 여섯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가래중의(고쟁이, 밑이 터진 여자 속옷)를 입고 10리 산길 등교를 했는데 이웃누나들에게 업혀서 다녔다. 면내에서 가장 높은 천방산을 누나들의 등에 업혀서 등하교를 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면 누나들은 고학년 동네 총각들에게 나를 인계했고, 총각들은 누나들의 명령에 복종하여 그 험한 산길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번갈아 나를 업고 다녔다. 교실문 앞에서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담임선생님이 나를 인계하여 무등(무동舞童)을 태웠다.
또 하나 아버지의 집착은 성경공부였다. 이른 아침 새벽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성경을 3장씩 읽었다. 소리내서 읽어야 했다. 소리내서 읽는 척 웅얼웅얼하며 꾀를 부리기도 했다. 가끔 꾀를 부리기는 했지만 그 덕택에 나는 요한복음을 통째로 외워 여름성경학교에서 가죽으로 치장한 금박글씨의 고급성경을 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내 문학성의 모태母胎가 성경읽기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너무 일찍 학교에 입학한 나는 공부를 터득하지 못했다. 만 다섯 살에 입학을 했으므로 초등학교 동창생들은 나 보다 두서너 살 위였고, 동갑나기들은 2, 3년 후배였다. 그래서 동갑나기들은 내 동학년 친구들에게는 말을 올렸고 내개는 말을 놓았는데, 특히 어른이 되어서 동학년 친구들과 동갑나기들이 한 자리에서 어울릴 때면 난처할 때가 많았다. 성적은 늘 중간 정도였다. 초등학교 5학년 통신표를 보면‘두뇌는 영리하나 노력이 부족함’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단어시험이 있는 전 날 나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단어장을 몽땅 통째로 외워버렸다. 단어, 발음기호, 품사, 뜻을 줄줄 외워버린 것이다. 다음 날 단어시험이야 누워서 떡먹기, 100점을 맞았는데 선생님이 깜짝 놀라버렸다. 아마,‘이 녀석이 웬 일? 컨닝을 했겠지’라는 불순한 짐작 아래 나는 선생님과 아이들 앞에서 불려나가 칠판에 선생님이 부르는 단어시험을 다시 치뤘다. 자신만만한 나는 막힘이 없었고 모두들 내 영어성적을 인정했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모든 걸 시험으로 판정했기 때문에 통째로 외어버리는 공부에 열중했고, 선생님 말따나 기억력이 출중했던 나는 어렵지 않게 모든 과목을 섭렵했다. 그러나 단 한 과목, 수학이 문제였다. 2차방정식, x + 2 = 5가, x = 5 - 2라는 공식을 이해하지 못 해, 더하기가 이콜 뒤로 전환되면 빼기가 된다는 공식을 몰랐던 것이다. 아니 이해하지 못 했던 것이다. 남들처럼 그냥 원리라고 생각하지 못 해서 일어난 헤프닝 같은 이치였는데 늘 남아서 부진아지도를 받았다. 수학은 외워서도 안 되는 과목이었다. 수학은 할아버지 말씀대로 투리(이해)를 해야 하는데 영어단어처럼 외워서 해결하려고 했으니, 아무도 그 이치를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이후 수학은 학생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이천만의 명상록 - 27)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들을 키울 때는 몰랐는데 손자를 키워보니 알겠다. 할아버지는 일자무식一字無識 농사꾼이었다. 근본은 조부와 조모의 아버지 다 흥양현(고흥군) 수문장으로 무인武人 출신 집안의 양반이었는데 몰락하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고흥읍 근방의 고향 내발(자추)을 떠나 구름다리(운교雲橋 - 어린시절에는 운교 보다는 구름다리로 불리웠음. 주변에는 쇠섬 - 우도牛島, 자문다리 - 잠긴 다리, 침교沈橋, 배다리 - 주교舟橋, 숯개 - 탄포炭浦 등 우리 말 이름을 쓰는 마을들이 있었음)에 정착하였고 머슴을 살았다. 할아버지는 늦가을이면 고흥의 선산의 새양(시제時祭)에 다녀왔다. 몇 번이나 나를 대동對同하려고 하였으나 할머니의 반대(할아버지는 외출만 하면 고주망태가 되었으므로 3대 무녀독남의 어린 장손을 맡기기에 부담스러워서)로 무산霧散되어 나는 원적지原籍地를 모른다. 고흥읍 주변의 내발이란 지명地名만 안다. 할머니의 고향은 고흥읍 팔영산 밑 김녕김씨 집성촌集姓村 점암이다. 구름다리로 이거移居 이후 주막을 경영하여 가세家世를 높혔고, 마을 3번째 부자가 되었다. 논밭이 30여 마지기고 선산先山을 비롯하여 산판이 5개였다. 상머슴을 둘씩 데리고 황소 두 필의 소깔만 전담하는 깔담살이와 먼 친척 누나였던 부엌데기까지 있었다. 날마다 놉(일당 일꾼)이 서너 명씩 있었으므로 내 어릴 때 어머니의 기억은 빨래와 밥 짓는 것뿐이다. 할아버지는 기골氣骨이 장대하였고 호주가好酒家였다. 내가 성년成年이 된 뒤로도 할아버지의 고무신은 너무 커서 질질 끌 정도였다. 출타했다하면 대취하여 동네 앞 사장거리에서부터‘천만아! 천만아!’온 동네가 떠나갈 듯 장손을 부르며 귀가했다. 할아버지의 부름소리에 천방지축天方地軸 달려나가 할아버지를 부축하였는데 할아버지의 기골이 장대하였으므로 부축이라기 보다는 시늉만으로도 땀을 뻘뻘 흘리기 일쑤였다. 할아버지는 자수성가自手成家하였으나 자손이 귀한 것이 한恨이였다. 그래서 며느리를 자손이 벌족閥族한 유둔골의 배씨가裵氏家를 선택하였다. 외가外家는 9남매였다. 그 덕택에 우리도 10남매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집 앞 텃밭 300여 평의 1/ 3 정도를 할애하여 손자들을 위한 단수수밭(사탕수수)을 만들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굶주리고 헐벗었던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파격破格이었다. 손자들이 빵을 먹고싶다고 하자 아예 유둔장에서 국화빵틀을 사다가 여름밤이면 밀가루 빵을 구웠다. 빵을 굽기 위해 일부러 밀밭을 늘렸다. 점심을 고구마 한두 개로 연명했던 시절에 사탕수수밭이나 국화빵틀 그리고 밀밭은 웬만한 여유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대단한 호사豪奢였다. 할아버지는 교회와 동각 지을 땅을 희사했다. 도립대학 조선대학교 창립기금에도 쌀 몇 말을 희사했다. 해마다 명절이 가까와지면 머슴들을 시켜 어렵게 살아 떡도 못하는 집들에게 떡을 전달하고, 특히 노인들이 있는 집에는 해우(김)를 선물했다. 돼지를 잡아 고기를 돌리는 일도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 때 우리 마을에도 포로 몇 명이 배당되었는데 할아버지는 그들을 사랑에서 재우다가 일꾼으로 들였다. 몇 년 새경(봉급)을 이자놀이로 불려 독립시켰다. 최씨는 같은 처지의 처녀를 골라 장가 들여 뒷집에 살림을 차려주었는데, 그 후 최씨는 등짐장사로부터 발전하더니 자전거 봇짐장사를 하여 면내의 큰 부자가 되었다. 이씨는 이웃마을 과수댁 외동딸에게 장가를 보내 데릴사위가 되어 풍족하게 살았다. 그들은 명절이면 부모님을 모시듯 우리 집에 세배를 왔다.
할머니는 여든 여덟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누워계신 할머니께서는 필요한 게 없느냐는 내 선심善心에 용돈을 달라고 하셨다. 쓸 데가 없을텐데 어디에 쓰려고 했을까? 그래서 나는 고향에 들를 때마다 할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사탕을 사다가 할머니의 이부자리 밑에 넣어드렸다.
어린시절, 대청마루에 딸린 마루방에 할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가면 할머니는 동생들 몰래 쌀독에 묻어두었던 파시(홍시)를 꺼내주었다. 겨우내 잘 익은 파시는 껍질이 반지처럼 얇아서 바람만 닿아도 터질 것 같았다. 꼭지를 살짝 깨물어서 입술을 대고 쪽 빨아들이면 물처럼 입안에서 녹았다. 할머니는 막걸리독을 열어 용수를 들어내고 표주박으로 술맛을 보고는 내게도 맛을 보게 하였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질색을 했으므로 몰래 먹였다. 잘 익은 술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넘쳐났다. 향기로운 맛에 취해서 양껏 마셔 얼굴이 붉어지고 비틀거렸기 때문에 할머니가 난처해진 일도 있었다. 해마다 겨울철이면 할머니는 식혜를 담가 안방 쪽문 밑에 두었다. 이른 아침 꽁꽁 얼린 식혜를 먹는 맛은 안 먹어 본 사람은 모른다. 가끔 벌꿀장사가 오면 벌꿀과 쌀을 바꿔 뒷방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 걸 몰래 훔쳐먹는 맛도 안 해 본 사람은 모른다. 머리가 커서는 긴마까(참외)가 먹고싶어서 마루방에서 쌀을 퍼 대밭에 감추었다가 등교 때 상점에 가지고가서 팔아 참외를 사먹은 적도 있다. 용돈이 없었을 때니까 그 돈으로 오다마(큰 사탕)과 비과(Bigger, 포장된 과자)를 사먹고 그 도둑질한 용돈으로 계급장에 별이 그려진 그림딱지도 샀다.
홍시, 생선회, 무잎쌈, 국화빵, 얼린 식혜를 환갑이 훨씬 넘은 지금도 그리워한다. 뻐꾸기는 맷새둥지에 알을 낳는다. 뻐꾸기새끼는 알에서 깨자 말자 맷새알을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내고 둥지를 제가 차지한다. 맷새는 그렇게 깨어난 뻐꾸기새끼를 제 새끼로 알고 키운다. 덩치가 큰 뻐꾸기가 작은 맷새를 따라다니는 것은 가관可觀이다. 오리는 알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닭둥지에서 깬다. 닭둥지에서 깬 오리새끼는 닭을 어미로 알고 따라다닌다. 심리학에서는 각인刻印이라는 심리학요인이 있다. 눈 뜰 때 보인 어미를 자기 어미로 알거나 어릴쩍에 거둔 어미를 어미로 알고 따르는 현상이다. 아프리카 사자도 예외가 아니다. 입맛은 어린시절 입맛이 평생을 좌우한다.
할머니는 교회 문턱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지만 일요일만 되면 언제나 새 돈을 쥐어주었다. 내게는 빨간 5원짜리를 주었고 동생들에게는 1원짜리 돈을 헌금하게 했다. 교회를 마칠 시간이 되면 모두 눈을 감고 헌금을 했는데 우리 형제처럼 빨간 지폐 - 빳빳한 새 돈 헌금을 내는 동무들은 없었다.
우리 집을 둘러싼 언덕에는 온갖 꽃들이 피었는데 유난히 백합이 많았다. 성경에서 백합을 교회의 꽃으로 거론해서 아버지가 일부러 심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백합이 어찌나 무성했든지 우리 집 담장 어디를 파도 백합뿌리가 나왔다. 대개 백합은 꽃대 하나에 꽃 한 송이가 피는데 묵은 뿌리에서는 꽃 9송이가 피는 것도 있었다. 백합은 온 동네에 향기가 진동하는 건 말 할 것도 없고, 백합이 한창 필 때 한 2Km 떨어진 곳 신작로에서도 향기가 스쳤다. 일요일 아침 이슬이 맺힌 가장 싱싱하고 봉오리가 막 벌어지기 시작한 백합을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골라 잘라주면 교회 강단 꽃병에 꽂는 건 내 임무였다.
여름날, 감나무 그늘에 숯불을 피우고 쌀풀을 발라가며 모시베, 삼배를 다루는 모습과 여름철이면 점심 때 꼭 나를 시켜 집 앞 무명(목화)밭에서 무잎을 따고 샘물을 길어오는 것도 내가 맡았다. 목화를 심을 때 일부러 듬성듬성 뿌려놓은 무는 억세게 자라 잎줄기와 잎 뒷면에 가시가 돋았다. 할머니는 그 거친 무잎에 보리밥을 싸서 맛있게도 잡수셨다, 내가 갓 길어온 주전자의 찬 물을 곁들어서. 도시 사람들은 쌈밥을 먹을 때 고작 배추잎이나 상추, 깻잎 밖에 없는 줄 알지만 나는 머리가 허예져서야 무잎쌈맛을 알았다, 곁들인 찬물 맛도. 또 할머니는 생선회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유둔장날만 되면 어머니는 쌀 되를 이고 장에 나가 득달같이 횟감만 사들고 돌아왔다. 행여 생선이 상하면 안 되었으므로 득달같이 돌아왔다. 땡볕에 녹아 신문지 쪼가리에 달라붙은 엿이 우리들 몫이었다. 생선회를 즐겨 먹는 것은 할머니 물림이다. 한 주週라도 낙지를 챙겨 먹지 못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어린시절의 입맛이 평생을 좌우한다.
아버지가 폐인廢人이 되다싶이 되면서 할머니의 간병은 극진할 정도를 넘어 집착이었다. 비나리,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고리가 땡땡 얼어붙은 겨울 새벽에 치자거리 옹달샘물을 길어다 뒤란의 장독대 작수발 위에 정화수로 올려놓고, 할머니는 그 얼음 보다 더 찬물로 목욕제계沐浴齋戒를 했다. 머리채를 풀어 헤치고 얼레빗으로 찬물에 감은 머리칼을 빗으면 찬물방울이 얼굴에 닿아 새벽잠을 깼다. 정성스런 단장이 마무리되면 할머니는 장독대에 나가 황토를 깐 작수발 정화수井華水 앞에서 비나리를 시작했다. 양 손바닥을 비비며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수천 번 수만 번, 할머니의 비나리는 안산마루에 햇빛이 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88세의 할머니를 여의고 나는‘최후의 조선여인상朝鮮女人像’을 잃었다고 했다.
중년中年에 유사類似장티프스로 거의 사경死境을 헤맸는데 입원 중의 어느 날 간호하는 어머니의 꿈에, 어머니가 내 옷을 내다가 울 밖에서 태우려고 하자 할머니가 호통을 치며 빼앗았다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입었던 옷을 내다 울 박에서 태운다. 내가, 우리 가족들이 큰 탈 없이 살아오는 것도 할머니의 비나리 염원念願이었을 것이다.
(이천만의 명상록 - 28. 어머니
얼마 전 설날 고향을 찾아 뵌 어머니는 옛날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집안일을 손수하였는데 갑자기 요즘에 많이 늙어버렸다. 그렇게 건강하던 몸도 폭삭 늙었고 허리는 ㄱ자로 꼬부라져 보기에 안쓰럽다.
어머니는 이웃 고을 대섬 태생이다. 작은 섬 하나를 몽땅 소유했던 외할아버지는 부자였다. 슬하膝下에 9남매를 두었다. 할아버지는 외가의 자손에 유의했다. 그래서 명문가의 중매를 다 내치고 다산의 어머니가계를 선택했다. 무녀독남 3대의 한을 풀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염원은 성공했다. 외가의 9남매는 우리집에서는 10남매로 할아버지의 염원에 보답했다. 열여덟 살 동갑내기 부부는 결혼 1년만에 할아버지의 염원을 거 보란 듯 첫 번째 장손이 태어났다. 하도 얼떨결이었던지 할아버지는 장손의 이름을 ‘천만天滿’이라고 지었다.‘천만 뜻 밖’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두세 살 터울로 손자들이 연달아 태어났다. 먹고살만하게 재산을 모은 할아버지는 자손번성의 염원이 이루어지자 손자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호주가好酒家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렁찬 호통소리가 골을 울렸다. 아무도 할아버지의 기개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비호庇護 아래 연달아 10남매를 낳았다.
어머니는 무척 강건한 체질이었다. 우리 집은 매일 놉(일당 일꾼)을 사서 농사일에 눈코 뜰 새 없었다. 매일 같이 30여명의 식솔들을 거닐었다. 그래서 내게 어머니의 기억은 밥 짓고 빨래한 기억 밖에 없다. 먼 친척 누이가 담살이(부엌데기)로 들어와 몇 년 뒤 시집을 갈 때까지 어머니의 부엌일을 도왔다.
어머니는 그 쉴 새 없는 일의 연속에서도 밤이면 이불이나 옷을 등잔불 아래서 손질했는데 때로는 꾸벅꾸벅 졸았다. 매서운 시어머니의 전형典型 같았던 할머니는 그런 어머니가 못마땅했는지 가끔 친정으로 쫓아냈다. 할머니는 무척 매시라운 분이라서 어머니의 집안 꼴을 늘 못마땅했다. 쫓겨나면 아버지가 외가에 거서 어머니를 모셔오기도 하고, 때로는 할아버지가 가기도 했다. 더러는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가 대동했다. 누가 어머니를 데려오든지 간에 선물이 있었다. 싱싱한 횟감이다. 할머니는 회를 무척 좋아했다.
나도 자주 외가에 갔다. 외가에는 나와 동갑 사촌인 꽃예가 있었다. 꽃예는 이성異性으로 내가 만난 최초의 여자다. 외가의 섬 한복판에는 우산모양의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었다. 어지간한 비바람도 피할 수 있는 거목이었다. 꽃예는 나를 늘 당목으로 데리고 가서 바다 멀리 육지를 바라보았다. 답답한 섬생활을 하다보니 사촌이 사는 육지가 그리웠던가 보다. 또한 섬 태생이라는 특수성은 여자에게는 더 치명적이었다. 어머니는 당호堂號를 당곡댁으로 불렀다. 섬 태생을 회피한 것이다. 섬은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다. 쇠섬에는 동백이 많았다. 꽃이 고와서 캐서 심었으나 한 그루도 살리지 못했다. 동백꽃이 한창일 때 꽃예는 마치 동백꽃처럼 예뻤다.
외할아버지의 생신이거나 외삼촌의 혼사가 있으면 외가에 갔는데 더러는 파도가 심해 배를 대지 못해서 외가가 바라보이는 뭍에서 묵어 기다리는 때도 있었다. 장동마을의 작은 외할아버지 댁이었다. 바람이 잔잔해지면 굵은 디딤돌로 징검다리처럼 놓아둔 돌을 뛰어넘어 배를 탔다. 그래도 대개는 신발이 개뻘에 빠지거나 때로는 바지도 망쳤다. 외가에 들어서면 외할아버지가 마루에 화로를 놓고 바다장어를 구워 주었다. 때로는 외삼촌을 따라 발(그물)을 걷는데 따라나서거나 주낙(낚시)을 걷기도 했다. 주낙에는 문저리(망둥어)가 주렁주렁 달려 올라왔다. 때로는 청둥오리가 걸려있는 때도 있었다. 주낙의 미끼를 먹다가 걸려서 꼼짝도 못하고 잡혔다.
어머니는 3년 동안 할아버지의 중풍병 수발을 하고, 할머니의 입원 때도 혼자 간호를 맡았다.
(이천만의 명상록 - 29) 생명의 고비
인생에는 몇 번의 생사고비가 있다고 들었다. 나도 살아오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마을저수지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의례껏 저수지로 갔다. 저수지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달리다가 뚝을 달리면서는 윗옷부터 팬티까지 옷을 벗어재끼고 달리던 기세 그대로 풍덩! 저수지로 뛰어든다. 생사고비의 그 날은 가뭄으로 논밭이 바짝 말라가던 때였다. 저수지도 물이 줄어서 가운데 깊은 곳에만 물이 남고 가장자리는 개울이 되어 있었다. 나는 헤엄을 칠 줄 몰랐기 때문에 종아리를 걷고 무릎 보다 옅은 상류 쪽으로 물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데 5학년 철웅이형이 등에 업히라고 했다. 키가 넘을 개울을 나를 업고 건너겠다는 것이다. 대단한 수영실력이었으나 만용蠻勇이었다. 나를 등에 업고 두세 발 헤엄을 치던 형은 개울 중간에서 나를 팽개치고 혼자 건너가버렸다. 나는 물속에서 허푸! 허푸! 발버둥치며 저수지 깊은 물로 떠내려갔다. 마침 논에서 일을 하다가 둑에서 쉬고 있었던 마을 청년이 물속에 잠겼다가 떠오르는 내 비명을 듣고 나를 건져냈다. 꼼짝없이 물귀신이 되었을텐데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두 번째는 중2 때, 친구들 서너 명과 앞산에서 놀다가 한 친구가 죽은 장끼를 주웠다. 우리는 꿩을 산소에 올려놓고 편을 나눠 양쪽에서 달려가 먼저 차지하는 놀이를 했다. 몇 번째 꿩 뺏기놀이를 하다가 나는 반대편에서 달려온 친구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그리고 기억이 없다. 눈을 뜨니 해가 설픗한데 친구들이 낯이 새파랗게 질려서 나를 주무르고 있었다. 얼마 동안이나 정신을 놓았는지도 몰랐다.
세 번째는 30대 중반, 한창 정력적으로 술을 마시던 때였다. 퇴근하면 의례히 목로집 같은 술집을 찾았는데 마른 생선을 좋아했던 나는 술집에 들어서면 생선을 말리는 그물망부터 찾았다. (피)문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어물이고 간재미(가오리)나 꼴뚜기는 물론 풀치(작은 갈치)도 사양하지 않았다. 술집 여주인들은 내가 들어서면 고기 그물망부터 셈해야 했다. 그렇게 주전거리다가 유사類似장티프스에 걸렸다. 그런데 읍내 새로 생긴 병원 의사가 그만 오진誤診을 했다. 감기라며 약 1주일 간 감기처방을 했다. 차도差度가 없었다. 오전에는 살만 하다가 오후가 되면 열이 펄펄 끓었다. 1주일이 지나자 동료들이 문병을 와서는 내 몰골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빨리 광주로 가라고 했다. 높은 열 때문에 먹지 못해서 피골皮骨이 상접했고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택시 마중을 한 이웃 부인들은 내가 죽을 거라고 울었다. 그 날로 택시를 대절해서 광주로 갔다. 유사장티프스라는 진단이었다. 조금만 더 지체되었다면 큰 일 날 뻔 했다고 의사가 질책을 했다. 시골에서 어머니가 와서 간병을 했다. 며칠 뒤 어머니가 꿈 얘기를 했다. 어머니 꿈에, 어머니가 내 옷가지를 내다가 시골집 대문 밖에서 태우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호통을 치면서 옷을 빼앗더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모골毛骨이 다 송연松烟해졌다. 만약 할머니가 나타나지 않아 옷을 태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꿈 얘기를 듣고는 어머니한테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으나 나는 이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수호신守護神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2주일 후 나는 살아서 학교로 복귀했다.
네 번째는 마음을 추스르겠다고 자원한 섬 근무에서 걸린 장염腸炎이다. 마음에 매우 큰 상처를 받아 자포자기自暴自棄해서 섬을 지망했다가 아마 음식이 맞지 않았던지 한 달 만에 지독한 장염에 결렸다. 입원을 하려고 집에 온 다음 날 밤에 화장실에 갔었는데 엄청난 하혈下血을 했다. 까물어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날 밤중에 택시를 타고 종합병원에 한 달 간 입원을 해서 살았다. 병원 의사는 며칠만 하혈상태를 보고 그치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한 바가지 정도씩 하혈을 했다. 사나흘 되었을까, 화장실에 갔는데 아무런 낌새가 없었다. 한참만에 무른 변이 나왔다. 얼마만인지 몰랐다. 기분대로라면 하혈이 그쳤노라고 큰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감정을 혼자 숨겼다. 혹 그친 하혈이 다시 계속될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하혈은 이틀 사흘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의사에게 며칠 전부터 하혈이 멈췄다고 알렸다. 의사는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고 의아한 표정이었다. 한 달 만에 병원특실에서 퇴원했다.
그 뒤로는 비교적 잔병치레도 하지 않고 건강하게, 좋아하는 술 잘 먹으면서 지냈다. 특히 섬생활에서 터득한 냉수마찰로 겨울에도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지냈다. 감기기가 있어도 길어야 사흘이다. 콧물이 좀 나오거나 미열微熱이 있거나 목이 좀 컬컬하다가 저절로 지나가버린다. 냉온수욕이나 냉수마찰 덕분이다. 노인이 되면 제일 중요한 건강 포인트는 감기와 무릎이다. 감기는 합병증을 유발해서, 무릎은 걷지 못하고 누우면 죽기 때문에 중요하다. 무릎은 실내자전거타기로 보강한다. 종아리와 허벅지근육을 키워 무릎을 보호한다. 그런데 일생의 황혼이라고 해야 할 정년퇴임 해에 암이 발견되었다. 소리없는 살인자라는 암은 내게도 소리없이 왔다. 낌새는 있었다. 암을 앓고나서 나는 모든 병은 반드시 경고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단지 본인이 그 경고를 무시하거나 간과看過하여 병을 키운다. 내가 걸린 직장암도 몇 년 전부터 증후가 있었다. 대변大便 이상이다. 일생동안 아침에 한 번 화장실은 매우 규칙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느 날부터 대변을 참지 못하는 증세가 있었다. 30분 남짓 통근하는 차에서도 못 참을 지경이었는데 그냥 넘어갔다. 워낙 술을 많이 마셔대니 내장內臟이 좋지 않아서겠지라는 자가진단이었다. 그 증세가 심해져서 병원을 찾았더니 단골 원장은 민감성대장염이라고 했다. 팜프렛에서도 민감성대장염은 내 증세와 같았다. 그런데 출사出仕한 전남교육감선거에서 낙마하고 정년퇴임을 한 한 달 만에 갑자기 증세가 심해졌다. 그래도 원장의 진단을 믿고 있었던 나는 발가락무좀 치료 차 간 병원에서 여차로 진찰을 했다. 의사는 하루 빨리 검사를 하라고 했다. 1차검사에서 암 의심 소견이었다. 다른 종합병원을 찾았다. 조직검사를 해서 암으로 판정되었다. 바로 수술을 하자고 했으나 허탈해진 나는 그냥 병원을 나섰다. 가을이었다. 거리에는 가로수가 앙상한 가지를 떨고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먼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와서는 의외로 침착하게 가족들에게 알렸다. 서울에서 한 번 더 검사를 하기로 했다. 결과는 같았다. 임파선에도 침입을 했으니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저기 의사를 수소문했다. 인터넷에서 연락이 된 대전의 의사가 조언을 했다. 복강경수술을 권했다. 그러나 나는 복강경수술이 완벽치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왕 수술을 한다면 개복수술로 완벽하게 하겠다고 서울의 대학병원을 수소문 했다. 친구 아들이 대학병원에 있어서 서너 달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입원을 했다. 1주일 만에 수술일정이 잡혔다. 수술 하는 날 가족과 동생들이 왔다. 수술대에 누워서 꼬불꼬불한 엄청 긴 복도를 스쳐가는데 가족들이 따라오며 눈물을 훔쳤으나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수술실 문 앞에서 가족들이 멈추고 수술실로 혼자 들어가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이 문을 살아서 다시 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백열등이 눈부신 기억이 잠깐, 정신이 들자 회복실이었다. 2주일 요양을 하고는 통원치료를 했다. 항암제를 복용하며 투병한 6개월 정기검사는 광주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거의 하루 종일이 걸렸다. 의사의 진찰은 길어야 5분. 5년째 되는 겨울, 마지막검사를 하고는 의사가‘깨끗합니다. 오늘부터 암환자 등록이 취소됩니다’라고 했다. 완치판정이었다. 수술부터 만 6년만의 완치판정이었다. 하늘을 난다는 말을 실감했다. 나는 서울역에서 휴대폰 카메라로 완치판정 기념촬영을 했다.
암치료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원인을 혼자서 규명했다. 그리고 책과 인터넷을 뒤졌다. 암 치료를 통해 반半의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결론은 병에 대하여 몸은 반드시 경고를 한다. 몸의 세밀한 경고를 알아차리는 것은 본인의 판단력이다. 금기禁忌음식은 없다. 음식은 가리지말고 잘 먹어라, 몸이 건강해야 면역력이 왕성해져 병을 예방한다. 이것저것 가리다가는 영양실조로 지레 죽는다.
(이천만의 명상록 - 30) (이)천만 뜻밖에
‘어, 이천만씨!’
‘어?’
문득 지인知人을 만나면, 수인사修人事를 나눴는데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민망하다. 그래서 어! 어! 하고 얼버무리면 상대가 알아채고‘나, 00이야’라고 일깨워준다. 중학생 때, 시골에서 광주로 유학하여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충장로거리를 걷다보면 마주친 행인行人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빙긋 웃는다. 여학생들은 입을 가리고 호호거린다. 가게에 들어가도 힐끗 쳐다본 주인부터 웃는다.
광주교대를 졸업하고 초임발령을 받아간 학교에서는 부임 첫 날 부임인사 때부터 소동이 일어났다.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켜놓고 조회를 하는 자리에서 부임한 선생님들 소개가 있었는데 내 차례가 되자 교장선생님이 약력을 소개하고는 이름을 소개했다. 그랬더니 온 학교가 웃음판이 되어버렸다. 근엄하게 아이들 앞에 도열해있던 선생님들도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 뒤로도 1학년 꼬마들조차 내가 보이면 선생님인 내 이름을 함부로‘이천만, 삼천만’하고 불러댔다. 때로는‘오천만, 육천만’으로 승격도 시켰다. 내 탄생시대 우리나라 인구는 남북한을 합쳐서 2천만 명이었다. 이후 이천만이란 이름에 면역성이 생겼을 때, 내 이름이 이름을 짓는 명분에 그리 나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을 때, 선거철이면 나는 스스로 농담도 했다,‘나 하나를 (고무신이나 막걸리로)사면 아무라도 당선은 떼 논 당상인데…’라고, 지금도 유효하지만.
우리 집은 손孫이 귀했다. 3대代 무녀독남無女獨男의 독자獨子집안이라 가까운 친척이 없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해서 마을 부자가 된 할아버지의 소원은 자손번성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혼기婚期가 차자말자 부랴부랴 열여덟에 성혼成婚시켰는데 한다하는 집안의 청혼을 마다하고 벌족閥族한 집안의 규수閨秀를 찾았다. 어머니의 동기同期는 9남매였다. 아니나 다를까, 열여덟 살 동갑내기 부부는 결혼 1년 만에 아이를 생산했다. 그것도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할아버지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자다가 떡 얻어먹는 횡재였다. 그래서 장손長孫의 이름을‘천만天滿’이라고 지었다.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천만으로 지은 연유를‘천만 뜻밖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장손을 필두匹頭로 2년 터울 아들, 딸, 아들, 아들들들 줄줄이 아이들이 태어났다. 10남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은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은근히 격려하면서 끝없는 욕심을 부렸으나 어머니가 지쳤는지 우리 동기간은 10남매로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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