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를 연재하며
(고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까지 22화, 매주 목요일 1화씩 연재)
새야 파랑새야 치우천왕 민족경전 천부경 고려 천체운행 관측
동학농민혁명도 캐릭터 농은집 갑골문자 원본 선기옥형(혼천의)
* 그림, 임승국의 한단고기와 Daum Blog 인용
대한사는 중국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바탕으로 한 사대주의事大主義와 일본제국주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축소縮小, 폄하貶下, 왜곡歪曲되었다.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역사 프로젝트를 만들어 고구려사와 대진국(발해)사를 중국의 변방정권邊方政權으로 편입시키려고 하고, 일본은 평화헌법을 들먹이면서도 세계제2차대전 전범戰犯들의 위패位牌가 안치安置된 신사참배를 자행하며 식민지시대 러 . 일전쟁의 승리로 강탈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려고 한다. 한편,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실증사학이라는 미명 아래 사대주의 역사관과 식민사관의 틀을 답습하며 견고한 자기들만의 성城을 쌓고 있다. 요즘 진보적인 시각을 지닌 학자들이 대한사의 잘못을 연구와 고증考證으로 바로잡아가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학생교육을 전제로 하는 <교학敎學대한사의 대계大系>를 세운다. 고조선 한인천왕의 한국시대桓國時代부터 9,200여년 역사연대를 바로 세우고, 한 시대마다 민중적 삽화揷話 - 특히 실패한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설정하여 대한사를 재정립함으로써 민족정기와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려고 한다. 이에 <임승국의 한단고기>는 교학대한사대계를 세우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의 근간이 되었으며 고대사 대부분을 인용하였고, 주로 <정신세계사>의 책들이 도움이 되었다. 교학대한사를 구상하던 중 만난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神들의 고향>은 충격이었다. 한국고대사에서 말하는 수밀이(수메르)에 대한 확신(영감靈感)을 얻었음을 밝힌다.
만주의 전설적인 3족오 Sumer 쐐기문자 한역桓易(주역周易)
광개토대왕비 (세 발 태양새) 점토판粘土板 3태극太極
* 그림, Daum Blog 인용
교학대한사대계
1. 고조선시대(기존의 단군조선) :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선군(단군)왕검의 조선시대와 신국(수메르), 선기옥형 : 6/6화
*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 4군 규명
2. 열국시대(기존의 3국시대) : (북 . 동)부여, 3한과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100여 개 작은 나라들 : 6/6화
* 두 개의 3한, 가야민족 이주설, 임나일본부설, 한국 안의 왜국설 규명
3. 남북국시대(기존의 통일신라시대) : 대진국(발해)과 통일신라, 후 3국 : 3/3화
4. 고려시대 : 1화
5. 조선시대 : 2/2화
6. 대한제국시대와 일본제국 식민지시대 : 2/2화
7. 대한민국시대 : 2/2화
* Prologue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1/22화 : 1. 고조선시대(1/6) - 여는 글>
Shanidar 동굴의 한국군 포로, 겹십자가의 비밀
(삽화 - Sumer 겹십자가)
* 고조선과 Sumer 강역(도)
고조선 강역도 Sumer지역도
* 그림, Daum Blog와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
(임승국의 한단고기,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 선우영달(한국군 이라크 파병 자이툰부대 정보장교), 한국군 장교들, 이라크 저항군, 이라크 민간인 아누와 인안나, 한국대학 역사학과 주임교수
* Shanidar동굴 -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동북쪽 산악지대에 있는 동굴, 100,000년 전부터 13,000년까지의 인류의 기록이 남아 있음, 수메르 쐐기(설형楔形)문자로 기록된 점토판粘土板 25,000여 매가 발견되어 해독함으로써 창조적 관점에서 구약성서에 의존하였던 인류사가 획기적인 전기를 맞았고 인류 창조와 기원 그리고 신神에 대한 인류 최고의 역사기록으로 평가함
* <대변경大辯經>에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범족의 무리를 하삭河朔으로 추방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하삭은 이라크, 이란지역. 서아시아에서 터어키는 유일한 교착어膠着語를 사용하는 민족이고 생활습관이나 형식이 한국인과 유사함. 인류학적으로 터어키가 한국과 형제국이라는 사실은 일반화되어 있음
* Sumer 역사 발굴은 1843년 프랑스학자들이 시작하여 같은 해 영국인 A. H. Layard가 니네베 유적지遺蹟地에서 25,000매의 점토판을 발굴하였고, 1974년 3월 R. L. Crocker, A. D. Kilmer, R. R. Brown이 니푸르 유적지에서 점토판 30,000매를 발굴하여 해석하고 있음
* 한기韓紀 - 단군기원檀君紀元의 단기檀紀처럼 한국기원韓國紀元의 줄임말로 한인桓因의 한국桓國시대 BC. 7197년을 원년元年으로 하였다. 선군禪君(단군檀君)기원 BC. 2333년은 한국사의 왜곡, 축소다. 올해 2006년은 한기 9203년임
* Sumer 역사연대표(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연대(BC) | 역사개요 |
445,000 |
엔키가 이끄는 네필림이 12번째 행성에서 지구로 내려와 메소 포타미아 남부의 에리두(Eridu)에 '지구 기지 1호'를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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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000 |
빙하기가 물러가고 근동이 따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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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000 |
엔키는 내륙으로 더 들어가 라르사(Larsa)를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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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00 |
간빙기가 시작된다. 엔릴이 지구에 도착해 니푸르(Nippur)에 우주 관제소를 건설한다. 엔키는 남아프리카로 가는 해로를 개척하고, 그 곳에 가서 금을 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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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000 |
네필림이 제련과 정련을 위한 야금 중심지인 바드티 비라(Bad-Tibira)를 건설한다. 우주공항인 시파르(Sippar)와 다른 신들의 도시가 건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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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00 |
아눈나키가 폭동을 일으킨다. 원시적 노동자인 인간이 엔키와 닌후르쌍에 의해 창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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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00 |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가 늘어나 다른 대륙으로 퍼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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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0 |
새로운 빙하기로 인해 지구상의 생명이 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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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00 |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고, 신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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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000 |
신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인 우바르투투(라멕)가 닌후르쌍의 도시인 슈루팍을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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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00 |
새로운 빙하기, '지구의 저주'가 시작된다. 퇴보된 종류의 인간이 지구를 떠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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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00 |
엔키의 '충실한 종'인 지우수드라(노아)의 지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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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00 |
'일곱 번의 통과'로 인한 가혹한 기후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지고, 근동에 자리잡은 크로마뇽 인들만이 살아남는다. 인간에게 실망한 엔릴이 인간을 멸망시키 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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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0 |
다가오는 12번째 행성에 의해 시작될 해일에 대해 미리 안 네필림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을 결심한다. 대홍수가 지구를 휩쓸고 빙하기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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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er Sumer 신神 Sumer 왕
설형문자 점토판
* 그림,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이라크 주둔 한국군 자이툰부대 작전실
한기 9202년(AD. 2005년) 여름 이라크 북부 아르빌주, 한국군 자이툰부대 작전실, 선우영달 대위가 부대 장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한국군 정보장교 선우 대위는 미군과 작전 협의 차 미군부대를 방문하였다가 회의를 마치고 헬기로 귀대하던 중 이라크 저항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탑승자 7명 중 6명은 죽고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러나 추락 직후 이라크 저항군에게 포로가 되어 이라크 남동부 산악지대 샤니다르동굴에 연금되었고 모진 고문과 학대를 받았다. 포로가 된 이틀 뒤 이라크 저항군이 주거지를 옮기던 중 미군의 비행기 공습을 받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하고 이라크 민간인 오누이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부대로 귀환하였다. 살아서 귀환하였으나 포로로 잡혀간 경위를 해명하고, 체포된 뒤 고문 과정 그리고 고문에 의한 정보 누설에 대한 심문을 받고 있다.
* 선우영달 : 헬기 추락으로 이라크 저항군의 포로로 잡혀 동굴에 끌려가 심문을 받다가 이틀 뒤 그들은 부대를 이동하였습니다. 산악지대의 계곡으로 접어들었는데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들렸고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항군들은 몸을 피하느라고 미처 저를 건사할 여유가 없었지요. 두 번째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저는 무작정 계곡을 벗어나 구릉지대로 탈출하였습니다. 달아나는 중에 가까운 곳에 터지는 몇 발의 총성을 들었지만 비행기 공습인지 저항군의 총탄인지는 모릅니다. 공습은 약 2, 3분 동안 계속되었고 저는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구릉지대를 걸어 내려오다가 이라크 민간인 오누이 아누와 인안나를 만났고 그들의 구조를 받아 동굴에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들을 통해 저는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도시가 있고 도시 외곽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달 없는 밤을 틈타 도시로 나가는 아누를 따라 도시로 잠입했고 그 이후 일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시내의 외곽에 주둔한 미군부대를 찾아갔으며 미군부대에서 귀대를 주선했습니다. 군사작전과 한국군에 대한 정보는 그들이 미쳐 본격적인 심문을 하기 전에 탈출하였으므로 누설할만한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참석자 일동 격려의 박수)
# 한 달 뒤 서울, 한국대학 역사학부 주임교수실, 선우영달 대위 민간인 복장으로 주임교수를 만나고 있다.
* 주임교수 : 우여곡절을 겪었구먼. 헌데 왜 전역을 했나?
* 선우영달 : 살아 올 수 없는 적진에서 천운으로 빠져나왔습니다만 전역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정보장교가 포로가 되었다는 건, 이라크군에게 정보를 제공했던 안했던 불명예입니다. 껄끄러운 거지요.
* 주임교수 : 자네 전공이 응용물리학 쪽이었지, 아마? 그런 사람이 내게 무슨 볼 일이 ….
* 선우영달 : 귀국 인사도 드릴 겸 … (들고 온 신문지에 싼 물건을 풀며) 이 걸 좀 봐주십사 해서요. (신문지를 풀자 수메르 점토판이 나온다.)
* 주임교수 : (놀라며) 이 건, 설형문자가 아닌가?
* 선우영달 : 그렇습니다. 제가 이라크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저의 탈출을 도와준 이라크 현지인 아누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오누이가 동굴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전쟁으로 가족과 집을 모두 다 잃고 동굴로 피신하였다가 우연히 점토판을 발견하여 이를 몰래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 같았습니다. 동굴에는 이런 점토판과 도자기 파편들이 흩어져있었습니다. 벽화들도 많았습니다. 남매의 말에 의하면 이라크 서남부 산악지대에는 수없이 많은 동굴들이 미로처럼 산재해 있다고 합니다. 아누와 인안나도 동굴이 얼마나 있는지 어디로 뚫려 있는지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고대 원시인들이 살았던 흔적이 동굴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 주임교수 : 거 번, 뉴스 시간에 이라크 전쟁기사를 보면서 동굴과 문화재 파괴에 대한 우려도 들었네. 수메르와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등의 고대문화재 훼손이 심각한 모양이야. 도굴과 밀반출도 많고. (점토판을 보며) 이 건 최근에 알려진 이라크지역에서 발굴된 수메르 설형문자 점토판이야. 학계에서는, 수메르 문명을 BC. 4000년에서 3500년경으로 보고 있어.
* 선우영달 : 전설적인 수메르가 실존했다는 말씀이군요.
* 주임교수 : 물론이지.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전에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에 서 고도의 문명을 형성했다는 전설적인 고대인인데 최근에 이슈가 되었지. 그들의 기록이 발견된 거야. 최근에 발굴된 곳이 수메르인들의 도서관이었어. 대략 25,000장쯤으로 기억하는데, 수메르인들의 유적지에서 설형문자 점토판이 발굴되고 해독이 되었어. 발굴 자체로써도 일대 센세셔널이었지만 더 큰 이슈는 해독이었어. 알렉산더의 로제타석으로 이집트문자가 해독되지 않았나. 수메르 이전에 아카드어라는 글이 있었는데 이것이 빌미였지. 문자를 해독해 보니까 역사학계의 정설들이 모두 뒤집어졌고.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의존하던 기독교계는 발칵 뒤집혔지. 해독된 수메르역사는 구약성경의 원전이었어. 로마, 그리스신화들의 원전이었고 세계 여러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국가창조신화들의 원전이었단 말이야.
* 선우영달 : 수메르역사가 구약성경의 원전이라면 하나님의 창조론을 부정하는 일 아닙니까?
* 주임교수 : 그래서 기독교계가 발칵 뒤집힌 거야. 만약 수메르가 역사학계의 정설로 인정이 된다면 오늘날까지 설정해온 인류의 모든 학문이 원점으로 돌아가 원전을 다시 써야 하 거든. 반대급부로 창조론과 진화론의 미비점들이 완벽하게 보완되었고.
* 선우영달 : 획기적인 일대 사건이군요.
* 주임교수 : 획기적인 사건 그 이상이지. 경천동지라고 해야 하나. 학계의 지금까지의 연구와 업적들이 우습게 되어버린 거야. 기독교계는 창조론이 흔들리고. 이 수메르기록들이 인 정된다면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해결되지 않던 인류문명의 수수께끼가 일시에 풀리는 거야. 명쾌하게 해석이 되는 거지. (잠시 뜸을 들이고나서) 더구나 재미있는 일은 한국역사학계가 부정해왔던 한국고대사, 고조선역사에 수메르가 등장한다는 일이야. 우리 사학자들은 고증이 안 되었다는 논리로 고조선역사를 부정했는데 엉뚱하게 저 멀리 이라크에서 수메르문명을 발굴했고, 국수주의로 내몰았던 고대사서들의 수밀이가 실제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들의 황당해 하는 꼴이란 꼴불견이었지.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거야. 서양에서도 엉거주춤하고. 수백 년 역사학계의 연구업적이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고 학자적 위상까지 흔들리게 되는 일을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감수할 리 없지. 보겠나? 여기 이 걸 보게. 지금까지 정리된 한단고기와 몇몇 자료들을 살펴 발췌한 기록들이야. (주임교수, 컴퓨터를 켜서 자료를 들춰낸다.)
Sumer 도시 Ur의 Ziggurat Sumer의 도시 Iraq유적
(그림, Daum, YJins56 인용) Assur의 신전 * 그림, Daum, Wooseok 인용
(컴퓨터 자판)
한단고기(임승국)에서 수밀이국(수메르)의 기록은
* 선군왕검시대 15세 선군 대음(후을달) 재위 51년, 신사 2년 한기 3666년(BC. 1660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겨울 10월에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 선군왕검시대 27세 선군 두밀 재위 28년, 갑신 원년 한기 3003년(BC. 997년) 천해(바이칼호수)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 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 한국본기 제 2권에서 <삼성밀기>는 말한다. 파나류산(한인의 한국시대의 도읍지,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바이칼호수)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한인시대의 한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 남북 50,000리(약 25,000Km), 동서 20,000리(약 10,000Km)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캄차카),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퉁구스, 시위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12국이다.
* 인류학계와 세계의 사학계가 주목하는 수메르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수밀이국>이다. 수메르민족이란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수메르말이라고 불리는 언어를 사용한 민족으로 세계 최고의 도시문명을 메소포타미아에서 꽃피운 민족이다. 여기에서 최고라는 말은 마지막의 결론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학이 주도한 결론일 뿐이다. 서양역사학은, 서양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한인의 한국시대 12연방의 기록을 믿지 않는다. 이는 문화의 창조 동서양 선후 다툼이 아니라 동서문화 주도권의 쟁점이다. 서양역사학자들은 구약성경을 기원으로 하는 인간의 창조론에 입각한 인류사를 정립하였는데 느닷없이 수메르문명이 발굴되고 해독되어 구약성경 이전의 원전이라고 할 기록이 밝혀지자 황당해 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서양을 기점으로 하는 수메르인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갑자기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나타나>라는 식으로 기술한다. 서양역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메르인이 수메르지역 원주민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언제, 누가, 어디서, 이 땅에 이주하였는가? 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지금까지는 언어학적, 인류학적으로 아시아닉크계 민족설이 유력하다. <검은 머리칼의 교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한단고기의 한국 12연방 막내 나라 수밀이가 확실하다. 중국사서의 <진서 숙신열전>에 한인시대의 한국 12연방을 가리키는 말이 숙신으로 표현되는데 <숙신(쥬신)은 바로 조선이며 바이칼호수 접경 남북 50,000리와 동서 20,000리의 나라가 한국 12연방이었으며 그 막내 나라가 수밀이국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우수주, 소머리, 쇠머리, 소말, 우두머리와 수밀이국 그리고 숙신(쥬신)의 수메르의 관련을 주목한다.
* 주임교수 : 수밀이, 소말, 우수국, 우두머리들이 모두 수메르를 표현하는 말이지. 수밀이와 소말은 한자 차음이고, 우수는 소머리며 우두머리 또한 소머리야. 한웅의 신시시대에서는 5가에 우가가 있었어. 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는 한웅의 신시시대 공화제 화백제도의 족장이며 왕으로 선출되는 대표부족이었지. 한단고기는 수밀이를 신시시대 12연방 중 막내 나라로 기록하고 있어. 그래서 내 판단으로는 수메르문명이 한국고대사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지. 서양학자들은 동양, 그것도 한국이 수메르인의 조상이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테고. 바이칼호를 정점으로 남북 50,000리, 동서 20,000리의 한민족의 고대국가를 상정해봐. 남북 50,000리는 약 25,000Km고 동서 20,000리라면 약 10,000Km지. 아직은 한국역사학계에서도 한단고기는 불온문서랄까 일제 강점기에 국수주의자들에 의한 조작된 역사서로 간주하고 있어. 국권을 빼앗긴 국수주의자들이 국본을 위작했단 말이지. 일본이 역사 조작을 통해 대동아공영이라는 명분으로 아시아 침탈을 획책하고 있었던 때니까. 아쉬운 일은 원나라와 청나라가 우리 고대기록을 모두 불태워버렸고, 아마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이런 차원이었을 거야. 뒤이어 일제강점기에 대동아공영이니 내선일체니 하면서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기에 급급한 일제사학자들이 또 마지막 남은 한국고대사를 없애버렸는데 이에 부화뇌동한 우리 역사학자들의 역사관 또한 우리 역사 왜곡의 아픔이겠지. 고려 때만 해도 국가도서관이었던 서운관에 우리나라 고대역사서들이 소장되어 있었어. 조선실록에도 20여권의 한국고대역사서가 거론이 되고 있고, 책 이름뿐이지만.
* 선우영달 : 수밀이국과 수메르를 연관시켜 연구하시겠다는 뜻입니까?
* 주임교수 : 나 혼자만이 아니라 역사학계의 몇몇이 모여 정기적으로 토론을 하고 있고 연구 방향을 설정하고 연구분야의 분담 등 체계적인 활동을 시작했지. 목적은 수메르가 아니고 한국사의 재정립이야. 중화사상의 모화사상으로 인한 고대사의 왜곡, 축소, 폄하 그리고 일제가 대동아공영이라는 허울을 앞세워 그 전초기지로써 한국 병탐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왜곡하고 날조한 한국사를 바로 세우려는 의도야. 거기에 한 분야로 수메르가 포함되어 있어. 자네들이 긴가민가 의심하는 한단고기와 천부경을 해석하고 선기옥형을 제작하려는 사람들이야. 주도하는 분은 경기도에서 국선도장을 운영하는 운곡선생님이시고 참여한 학자들만도 수십 명이야.
* 선우영달 : 작업의 결과는, 지금까지의 연구자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 주임교수 : 뭣하면 운곡선생님께 점토판을 보여드려 봐. 크게 관심을 가지실만 하니까. 우리 모임 홈페이지에 지금까지 연구결과가 공개되어 있으니 참고하구. 물리학도의 대단한 외도인데 …
* 선우영달 : 호기심일 뿐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점토판 파편들을 보았고 오래 된 벽화와 겹십자가문양을 보았습니다. 수메르문헌을 보니 겹십자가는 수메르를 창조한 하늘에서, 태양계 12번째의 행성 마르둑에서 내려온 신들의 상징이었드구만요. 또 인더스문명에서도 신성시하는 문양이고 기독교에서도 십자가는 예수의 상징이 아닙니까? 그 벽화와 겹십자가, 특히 겹십자가문양이 마치 어린시절의 어떤 잊을 수 없는 기억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샤니다르동굴에서 만난 아누와 인안나가 수메르 관련 책에서는 수메르 남녀 으뜸 신의 이름이었습니다.
* 주임교수 : (깜짝 놀라며) 자네, 지금 수메르 신을 만났다는 말인가?
# 선우영달의 서재, 선우영달 컴퓨터로 자료를 검색한다. <한국사 바로세우기모임>의 홈페이지가 열리고 바탕에 고대한국강역도를 배경으로 먼저 선기옥형(혼천의) 동영상이 뜨면서 도깨비가면과 3족오그래픽이 동영상으로 합성되어 나타난다. 다음에 천부경, 한역의 8괘, 태극도형, 가림토와 남해각서가 차례로 뜬다. 그리고 첫 장 <치우천왕의 역사>가 치우천왕의 형상(2002 세계월드컵대회 붉은악마응원단의 캐릭터)과 함께 첫머리에 펼쳐진다.
1부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
4화 비단길Silk Road 귀향歸鄕길
고구려 무용총 남해각서(고조선 만주 고구려장군총 천부경 일반화
사냥도 상형문자 추정) (Ziggurat 제단祭壇 추정) 윷놀이말판
* Daum Blog 인용
# 한기桓紀 6959년(BC. 238년, 고조선의 선군왕검시대 제 47세 선군 고열가高列加 재위在位 58년 계해癸亥년) 봄, 100여 명의 말을 탄 기사들이 비단길Silk Road을 달리고 있었다.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에서 화백和白회의를 개최한다는 방문榜文이 전서구傳書鳩로 전달된 지 하루만이었다. 급박한 화백회의 소집령을 받은 번한, 막한의 왕들을 비롯하여 5가의 부족장들과 3한관경제 안의 모든 변경의 부족장들까지 고조선 진한의 수도 아사달을 향하여 달려왔다. 이 해 3월, 선군 고열가께서 유시諭示를 내렸었다.
해모수 고향 고리국 대흥안령 대백산 고주몽의 근거지 흑룡강(청색)
만주 흥안령 * Daum Blog 인용 홀본성, 졸본성, 5녀산성(중국)
◎ 한단고기桓檀古記(임승국)의 고열가천왕 유시諭示와 해모수 기록
* 47세 선군 고열가 재위 58년, 병인丙寅 원년元年, 한기桓記 6902년(BC. 295년) 기묘己卯 14년(BC. 282년) 선군왕검의 묘廟를 백악산白岳山에 세우고 유사有司에게 명命을 내려 4철 이에 제사지내게 하고 선제께서는 1년에 한 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 기유己酉 44년(BC. 252년) 연燕나라가 사신을 보내 새 해 인사를 올려왔다.
* 계축癸丑 48년(BC. 248년) 10월 초하루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이 해 겨울 북막北漠(몽고지방)의 추장酋長 아리당부阿里當夫가 군사를 내어 연 나라를 징벌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 임술壬戌 57년(BC. 239년) 4월 8일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몽고지방, 바이칼호수의 브리야트Buryaty인은 지금도 스스로 코리족이라고 부르고 만주 동북부 삼림에는 수렵족 고리드족이 있음) 사람이었다.
* 계해癸亥 58년, 한기 6959년(BC. 238년) 선제檀帝(선군)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5가加(선군을 추대하는 권리를 가진 고조선의 큰 부족 - 마馬 우牛 양羊 저猪 구狗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옛 우리 선조 열성列聖(왕의 선조先祖)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大統을 이어가실 때에 는 그 덕德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王道는 쇠미衰微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能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들 5가 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하시고 크게 옥문獄門을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죄수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튿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入山修道하시어 신선神仙이 되시니 이에 5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한인(안파견)천왕 거발한 한웅천왕 성모聖母 웅녀상
* 김산호 화백. Daum Blog 인용
* 3조선의 명칭과 유래(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역)는 사서史書에 3조선의 분립이 누락되었고, 3조선을 선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오류를 범했다. 3조선은 BC. 4세기 경이었으며 신한(도읍 아스라, 하얼빈), 말한(도읍, 아리티, 개평현蓋平縣 동북 안시安市 고허古墟), 불한(도읍, 펴라, 평양)의 분립이며 신한은 대왕大王이고 말불한은 부왕副王이다. 신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신조선, 말한은 말조선, 불한이 통치하는 영역은 불조선이다. 신 ․ 말 ․ 불 3한은 이두문吏讀文으로 진辰, 마馬, 변卞한으로, 신 ․ 말 ․ 불 3조선은 이두문으로 진眞막莫번番조선으로 기록했다. 강역은 신조선이 봉천성奉天省의 서북과 동북(개원開原 이북以北 흥경興京 이동以東), 길림, 흑룡과 연해주 남단. 불조선은 요동반도(개원 이남以南 흥경 이서以西). 말조선은 압록강 이남이었다. 신조선은 해解씨며 대단군 왕검의 자손이고, 불조선은 기箕씨이며 기자의 자손이며, 말조선은 한韓씨로 선대를 알 수 없다.
* 조선의 멸망은 한기 0000년, BC. 200년 경 두만이 흉노의 선우單于(단우로 쓰고 선우로 읽음, 대추장大酋長)가 되어 첫째 아들인 모돈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을 사랑하였는데 모돈이 인질로 가있던 월씨국月氏國을 탈출하여 부친을 살해하고 추장이 되었다. 이에 신조선의 왕이 모돈의 흉측함을 빌미로 공물을 요구한 바 모돈은 힘의 약함을 알고 말을 요구하면 애마를 보내고 여자를 요구하면 알씨閼氏(선우의 처첩妻妾, 아씨의 어원語源)를 보냈다. 신조선의 왕이 1000여리의 구탈甌脫(두 나라 사이의 중립지대)을 요구하자‘토지는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달라고 하느냐!’하고는 사자使者를 죽이고 기병을 동원하여 신조선의 서쪽(동몽고)를 유린하였다. 이에 신조선이 퇴각하여 수 천리 땅을 버리고, 선비의 나머지 무리는 선비산(흥안령)으로 도주하니 이로부터 신조선이 쇠약하여 오랫동안 이웃 종족과 겨루지 못하였다.
* 이 보다 앞서 종실宗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須臾(기비箕丕)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천왕랑天王郞이라 칭稱했다. 수유후候 기비를 권勸하여 번조선番朝鮮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上下의 운장雲障(중국의 하북성 또는 요녕성 해안 추정)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稱하는 바라.
# 머리에 하얀 터번을 두르고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린 채 질주하는 집단은 말들이 준마駿馬였지만 그들의 달리는 속도는 놀라웠다. 기사들이 지나간 길은 질풍노도疾風怒濤였다. 그들이 지나간 길은 한 식경이 지나도 뿌연 흙먼지로 뒤덮여 긴 흙먼지 띠처럼 보였다. 흙먼지 띠를 끌고 가던 기사들이 타클라마칸사막의 초입에서 멈췄다. 멀리 오아시스 도시의 네모지고 하얀 건물들이 나타났다. 선두에 선 기사가 손을 높이 들어 질주하는 말들을 세웠다. 선두를 중심으로 3각편대를 이루고 달리던 말들이 일시에 정지했다. 또 뿌연 흙먼지가 소용돌이쳤다. 잠시 뒤 흙먼지가 가라앉자 멈춰섰던 3각편대는 부여족, 돌궐족, 흉노족의 부족 모둠으로 나눠지고 각각의 기사집단은 한 마장씩 뜸을 들이며 도시에 들어섰다.
# 타클라마칸사막 초입의 오아시스 도시 우룸바치 객사. 부여족장 드라고미르 드라가노프Dragomir Draganov(불가리아인 시조), 돌궐족장 압둘라 메시드Abdulra Macid(터어키인 시조)와 흉노족장 꼬다이 졸탄 Koday Zoltan(헝거리인 시조)과 세습무당 도가이고오 후이Dogaiguo Hui(바이칼 호수 올혼Olkhon섬의 세습무당, 지구촌 민속신앙의 원조)가 부여족장의 방에 모여있다.
부여족장 : 강행군에 심신이 피로하겠으나 일정이 촉박하여 더욱 박차를 가하려고 하니 이 해하여주기를 바랍니다.
돌궐족장 : 천왕 고열가께서 제위를 물리겠다는 유시를 하시고는 곧장 입산하셨다는데 까지 만 알고 있습니다.
흉노족장 : (부여족장을 향하여) 5가 족장들에게서 다른 연락은 없었습니까?
부여족장 : 천왕의 유시가 갑작스런 일이라서 본인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흉노족장 : 무작정 입성하였다가 정쟁에 휘말리는 경우도 고려해야 합니다.
부여족장 :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도성에 입성해서 분위 기를 파악한 다음에 우리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돌궐족장 : 천왕 궐위의 중차대한 일인데 정보가 없다면 우리의 안위조차도 보장할 수 없는 지경 아닙니까?
부여족장 : 도성에 가까워지면 정보들이 입수되리라 생각됩니다. 우선 인솔한 부족들을 잘 챙기십시오. 내일은 동 트기 전에 출발합니다. 말은 낙타로 교체될 것입니다.
흉노족장 : 갑작스럽게 출발했기 때문에 모두가 혼란스럽습니다. 인원과 짐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여족장 : 낙타는 사막을 횡단하는 부대시설을 싣고 갈 걸 감안하여 충분하고 여유있게 확 보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물과 식량은, 운반 수단에 부담이 있어서 최소한 열흘 치만 준비했습니다.
돌궐족장 : 사막 횡단을 열흘이면 되리라고 보았는데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봄철로 접어드 는데 … 먼지 폭풍에 휘말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예상되는 모든 루트를 점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여족장 : 갑작스런 출발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물과 식량을 약간 늘린 것입니다. 사막이 변화무쌍하다고 하드라도 오랫동안 우리가 넘나들었던 길입니다. 이번에도 무사하리라 고 믿습니다.
세습무당 도가이고오 : 출발하던 날 아침에 독수리가 동쪽을 향해 날았습니다. 좋은 징조입 니다.
# 열흘 뒤 타클라마칸사막 동쪽 변경, 드라고미르를 비롯한 세 부족장들이 사막을 횡단했던 낙타를 말로 바꿔 타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길을 달린다. 사흘 뒤, 투르판Turpan에서 타타르Tatars족장과 부족들이 합세하여 기사집단은 더 늘어났다. 파미르고원Pamirs Plateau과 쿤룬Kunloon산맥을 거치면서 주변 부족들이 합세하여 수도 아사달이 보이는 구릉지대에서는 500여 명의 대집단이 되었다. 줄기찬 질주로 대원들의 복장은 흐트러지고 머리에 두른 터번에는 먼지가 쌓였다. 선두집단을 이끌었던 드라고미르가 구릉을 내려서서 구릉 밑을 흐르는 작은 강가에서 멈췄다. 비오 듯 땀에 젖은 말들이 물을 마시고 대원들은 잠시 쉬었다.
# 고조선 선군시대 수도 아사달. 화백회의가 열리고 있는 궁전의 대연회장. 사흘째 회의. 회의장 타원형 바닥의 길고 둥근 탁자에 3한의 왕을 비롯하여 5가의 부족장들과 대신들 그리고 1000여 명의 부족장들이 넓은 회의장을 가득 메우고, 타원형 바닥으로부터 위로 10여 단의 계단에는 각종 부족복장의 부족들로 발 딛을 틈조차 없다. 토론의 의제는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첫째, 47세 단제 고열가천왕의 궐위로 비어있는 천왕을 선출하는 일과 둘째, 해모수의 침공에 대한 방비책이었다. 해모수는 고리국왕으로 웅심산에 웅거하였는데 작년 가을에 병사를 이끌고 궁성에 들어와 선제께 제위를 몰려줄 것을 협박하였다. 선제께서는 절차의 부당함을 들어 물리쳤으나 대신들이나 장수들이 대비책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대신들과 장수들 가운데는 은근히 해모수를 비호하는 자들도 있었다. 단제 고열가천왕은 천왕의 제위가 위태로움을 간파하고 스스로 옥좌에서 물러나 입산하여버렸으나 5가는 정쟁에 휩싸였다. 이 틈을 타 해모수가 수유후 기비를 충동질하여 합세한 뒤 군사를 이끌고 아사달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화백회의는 5가의 왕위 계승 정쟁으로 왕위 추대가 먼저냐 해모수와 수유후 기비의 연합 침략군 방어 군사 동원이 우선이냐 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이렇게 사흘을 허비하는 사이에 해모수의 군대가 아사달에 바짝 다가섰다. 해모수와 밀약한 수유후 기비의 군대도 사흘 안에 아사달에 도달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제서야 천왕 추대의 정쟁을 미루고 방어책을 논의했으나 이 또한 4분5열이었다. 먼저 장수들이 동요했다. 5가는 장수들의 준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해모수를 추대하자는 의견도 개진되었다. 중구난방 속에서 변경의 부족장들이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어 장수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회의장에는 대신 몇 명과 5가의 부족장들만 남았다. 그들마저 통합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흩어지자 다음 날 해모수가 무혈 입성을 했다. 해모수는 궁성을 평정하고 천왕랑이라 스스로 부르며 천왕 승계를 선언했으나 5가의 부족장들과 대신들은 숨어버렸고 변경의 족장들은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버렸다. 해모수는 수유후 기비를 번조선왕으로 삼고 상하 운장의 수비를 맡겼다.
# 부여족장 드라고미르를 비롯한 서북 변경 족장들이 아사달 외곽 드라고미르의 막사에 모여있다. 타타르족장 에르게이Erugai Argouh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타타르족장 : 해모수가 궁성을 접수하고 5가의 족장들과 대신들을 불렀으나 아무도 모인 사 람은 없다 합니다.
부여족장 : 해모수는 반역잡니다. 누가 선뜻 나서겠습니까? 천왕께서는 5000년 역사를 이어 온 고조선의 계승잡니다. 해모수는 변방을 지키는 한낱 부족장일 뿐입니다. 정통성이 없습니다.
타타르족장 : 족장님들의 견해를 들어봅시다.
흉노족장 : 속수무책입니다. 3한의 왕들과 5가의 족장들이나 대신들조차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변방의 족장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돌궐족장 : 막조선 왕과 번조선 왕은 벌써 돌아가버렸다는 보고입니다. 5가의 족장들과 대 신들도 모두 피해버렸습니다.
부여족장 : 믿을 수 없습니다. 5000년 왕업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타타르족장 : 해모수가 수유후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임명했다든데 ….
돌궐족장 : 번조선 왕이 자기 영토를 장악을 하고 있는데 명목상 왕을 임명했다고 하더라도 부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장악하려고 하면 한바탕 혈전이 불가피 하겠지요. 그냥 물러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비의 군사로는 번조선의 병력을 상대하기 어렵습니 다. 그리고 또 막조선과 주변의 족장들까지 추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부여족장 : 구심점을 잃은, 명분이 사라진 전쟁에 누가 진두지휘를 하겠습니까? 해모수는 강성한 군대로 도성을 장악했습니다.
흉노족장 : 우리도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여족장 : 수습할 힘도 없고 그렇다고 해모수에게 항복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 다. 우리 병력으로 해모수를 상대하는 것은 무모합니다. 번한 막한 두 왕이 힘을 합쳐 해모수에게 대항하거나 5가의 부족장들과 대신들이라도 해모수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왕들도, 5가도 제위를 놓고 다투는 처지에서 서로 견제했기 때문에 해모수가 그 틈을 노렸습니다. 일단 돌아갑시다.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다가는 무모한 희생을 당할 염려가 있습니다. 자, 내일 아침이면 늦습니다. 언제 해모수의 군대가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되도록 빨리 도성을 뜹시다. 이렇게 된 이상 한 시도 도성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족장들이 흩어지 고 부여족장이 말에 오르려는 때 부장이 뛰어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더니 부여족장 다시 방으로 되돌아 들어간다. 이어 천지화랑 복장으로 말을 탄 한 떼의 무사들이 당도하여 족장의 방으로 안내된다.)
무인왕자 : (허리를 굽혀 절하며) 소장 단제 고열가천왕의 세 째 왕자 무인입니다.
부여족장 : (일어서 맞으며)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왕자께서 합류하시겠다면 기꺼이 승낙 하겠으나 길이 멀고 험난합니다.
무인왕자 : 시간이 촉박합니다. 거두어주십시오. 천왕폐하께서 유시하신 일입니다.
부여족장 : 상황을 이해합니다. 천왕폐하의 유지도 짐작합니다. 갑시다. (곁에 있는 부장을 돌아보며 짧게 명령한다.) 장군 소영은 왕자와 화랑을 편대 중앙에 모시고 옹위하라!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은밀히 하라!
# 아사달. 아리수 건너편 언덕의 신전 앞 뜰, 말에서 내리는 해모수를 향해 일단의 군사들이 달려온다. 선발대다.
선발대 부장 : (군례를 하며) 장군님, 신전이 텅 비었습니다.
해모수 : (말에서 내리던 자세로 뒤돌아보며) 신전이 비었다니 무슨 말이냐?
선발대 부장 : 장군님의 분부대로 곧장 군사를 몰아 도착해보니 이미 신전은 비어있었습니 다.
해모수 : (잰 발걸음으로 신전에 들어서며) 아니 이럴 수가! 천부인이 없잖느냐? 샅샅히 찾 아라? 모두 샅샅히 뒤져 천부인을 찾아내라! (부장을 돌아보며) 여기 천지화랑을 관리 한 책임자가 누구였더냐?
부장 : 고열가천왕의 세 째 왕자 무인입니다. 아무래도 무인이 천부인을 가지고 달아난 듯 합니다. 병사로 뒤를 쫓아야 하지 않을까요?
해모수 :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안절부절하며) 병사를, 무인이 어디로 간 줄 알 고 병사를 보낸단 말이냐?
부장 : 무인이 달아났다면, 어젯밤 화백회장을 빠져나온 동북변경족장 아니면 막한이나 변 한의 왕과 합류했을 것입니다. 병사들을 서너 갈래로 동원해서 추적하겠습니다.
해모수 : (머리를 흔들며) 이미, 그들이 떠난 지 오래다. 아침에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아리 수를 넘었을 것이다.
부장 : 늦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솔한 사람이 많고 부대시설을 지니고 가고있기 때문에 더 딥니다.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먼 길을 왔는데 충분히 쉬지도 못했습니다. 말들 이 지쳐서 달리지 못합니다.
해모수 : 그렇다면 … 동북족장들과 막한왕, 변한왕을 세 갈래로 추적해서 반드시 왕자 무 인을 잡아야 한다. 그가 지니고 있는 신물은 반드시 찾아야한다. (또 다른 부장을 가리 키며) 궁성을 빠져나가지 못했을지도 모르니 궁성 안을 샅샅히 수색하라! 아니다. 궁성 은 빠져나가지만 못하게 각 방면의 문을 막고, 그러니까 성문을 철통같이 닫아걸어라! 아무도 내보내지 말라! 먼저 출입을 막아놓고 수색하라! (해모수, 망연자실茫然自失한 표정으로 말에 오른다.)
한인(안파견)천왕 거발한 한웅천왕 성모聖母 웅녀상
* 김산호 화백. Daum Blog 인용
◎ 한인천왕, 한웅천왕, 선군왕검, 선제 해모수의 선기옥형 연관聯關
주술적呪術的 통치統治 기록 (한단고기桓檀古記 3성기聖記 전全 상편上篇, 임승국)
고조선에서 천왕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들은 5가 부족이었으며 화백회의에서 추대하였다. 해모수가 고열가천왕을 강압으로 퇴위시키고 천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랐으나 5가와 대신들은 물론 백성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해모수는 국정을 안돈하기 위해 수유후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임명하고 상하 운장을 지키게 하여 국경을 방비하고 내정을 안정하려고 하였으나 5가를 비롯하여 고조선의 1000여 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해모수는 5가와 대신들 그리고 1000여 부족을 설득하려고 불러들이기도하고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모두 해모수의 반란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부름에 오지 않았다.
더구나 해모수에게 치명적인 결함은 고조선 창건 이래 유전되어오던 선기옥형이 사라져버린 일이다. 신전을 수호한 고열가천왕의 셋째 왕자며 천지화랑의 신크마리(우두머리) 무인武印이 고열가천왕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 선기옥형을 옮겼던 것이다. 해모수는 왕위에 있었던 기간 내내 관리와 군사를 동원하여 선기옥형이 은닉되었을만한 곳을 샅샅히 뒤졌으나 선기옥형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민심을 얻지도 못하고 선기옥형조차 가지지 못한 해모수는 아사달 궁성생활 1년 여만에 자신이 세운 난변 궁궐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해모수는 고조선을 이어받지 못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고 정했으며 영토는 고조선의 1/100도 되지 못했다. 아사달을 중심으로 한 진한의 영토마저도 완전하게 통치하지 못했다. 그리고 영영 선기옥형을 찾지 못했으므로 왕권이 서지 못해 친위 장수들과 벼슬아치, 백성들에게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 해모수와 그 이후 북부여 왕들도 천왕의 명칭을 사용하지 못했으며 5대를 내려오는 동안에도 역대 왕들은 선기옥형을 찾는 일을 왕가의 사업으로 추진했으나 끝내 선기옥형은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고조선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지 못한 북부여는 오래가지 못했다. 1대 해모수(한기 6958년, BC. 239년)로부터 6대 고무서(한기 7138년, BC. 59년)까지 6대 180년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 한편, 천왕 추대의 화백회의에 참석하였다가 해모수의 반란에 휩싸여 밤중에 아사달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부여족장을 비롯한 고조선의 서북부족장들과 고조선의 고열가천왕의 세 째 왕자 무인 일행은 약속한 장소 아리수 언덕 신전 앞에서 만났으나 잠시 뜸을 들일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고 칠흑 같은 밤길을 재촉하여 서쪽으로 달렸다. 세습무당 도가이고오로부터 무인 왕자가 신전을 탈출하면서 고조선의 신물인 선기옥형을 가지고 나왔다는 말을 들은 부여족장 드라고미르는 상황의 급박함을 알자 꽁무니에 불이 붙은 듯 일행을 재촉하였다. 추격군이 쫓아오는 건 시간 문제였다. 쉬지 않고 밤길을 내달렸다. 사막 한 켠이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녘, 타클라마칸사막의 동쪽 입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쿤룬산맥의 끝자락 얕으막한 산 정상에 도착했다. 주변을 살피던 부여족장 드라고미르 눈에 아주 멀리 가느다란 먼지 줄기가 보였다. 추격군이었다.
부장 소영 : 추격군입니다, 족장님!
부여족장 : 예상 보다 빠르구나. 여러 족장들에게 알려라! 타클라마칸사막을 횡단하지않고 남쪽으로 우회한다. 단, 타타르족장만 예정된 길로 행군한다. 타타르족장에게 추격군과 너댓 시간 간격을 유지하면서 달리도록 명령을 전해라.
부장 소영 : 무인왕자를 제게 맡겨주십시오. 별동대로 모시겠습니다.
부여족장 : 해모수가 쫓는 것은 무인왕자다. 우리가 아니라 무인왕자가 위험하다. 무인왕자 가 도피하는 것은 고열가 천왕폐하의 유훈이다. 부장 소영은 왕자님을 모시고 앞장서 라! 추격군을 따돌려야 한다. 신속하고 은밀하게 사막을 우회해서 돌아간다.
# 부여족장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추격군은 타클라마칸사막을 횡단하는 타타르족장의 행렬을 쫓아갔다. 그로부터 7일 뒤, 바이칼호수 리스트비양카에 도착한 부여족장 드라고미르 드라가노프Dragomir Draganov(불가리아인 시조)는 돌궐족장 압둘라 메시드Abdulra Macid(터어키인 시조)와 흉노족장 꼬다이 졸탄Koday Zoltan(헝거리인 시조)과 세습무당 도가이고오 후이(Dogaiguo Hui 바이칼호수 알혼Olkhon섬의 세습무당) 등 동쪽 변경의 여러 족장들과 회동했다. 그러나 고조선에 부흥에 대한 아무런 대책을 내리지 못한 체 헤어졌다. 추후 상황을 봐가면서 대처하기로 회동을 맺었다. 그러나 한 가지, 세습무당 도가이고오가 제안한 일은 다소 어렵게나마 가결되었다. 동행하였던 고열가천왕의 왕자 무인의 거취에 대한 의논이었다. 왕자 자신이 원하기도 했지만 세습무당 도가이고오의 의견이 강경했다. 부여족장을 비롯한 세력이 큰 두 부족의 돌궐족장과 흉노족장을 비롯한 여러 족장은 무인 왕자가 부여족의 사비성(현재 불가리아의 소피아)에 머무르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세습무당 도가이고오의 주장이 의외로 강력하였으므로 족장들은 일단 잠정적으로 올혼섬에 기거하는 것으로 잠정합의했다. 세습무당 도가이고오는 무인 왕자가 지니고 있는 선기옥형에 무게를 두었고 아사달에서도 천지화랑으로써 신전을 관리하였으므로 신전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여족장 드라고미르를 비롯한 여러 족장들은 해모수에게 강탈당한 고조선의 부흥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도가이고오의 속셈을 염려하고 있었다.
* Daum Blog 인용 바이칼호수 알혼섬 장승 원주민
◎ 바이칼Baikal호수 알혼Olkhon섬의 고조선 왕자
# 부여족장 드라고미르의 궁궐, 왕자 무인이 기거하는 방에 족장의 딸 소영이 들어선다.
무인왕자 : (의자를 권하며) 부장이 소영낭자라는 걸 알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소영 : 여자 무사가 남장을 하는 건 천지화랑의 관례가 아닙니까?
무인왕자 : 그렇긴 하오만 너무 뜻밖이라 ….
소영 : 놀라셨다면 송구스럽습니다. 적적하실 것이니 병사들이 흔련하는 연병장에 나들이 하지 않겠습니까?
무인왕자 : 그래요? 말 달리는 솜씨들이 대단하던데 한 번 구경할까요. (무인왕자 소영을 따라 나선다.)
# 부여족장 드라고미르의 궁실, 밖을 내다보며 심각한 생각에 빠져있는 족장. 창밖으로 딸 소영과 무인왕자가 산책을 하고 있다.
# 그 날 밤 딸 소영의 궁실, 족장이 딸 소영과 마주 앉아 있다. 족장은 표정이 굳어있고 딸 소영은 매우 흥분된 모습이다.
부여족장 : (의자에서 일어서서 멸 걸음 걷다가) 내 충고는 애비로서가 아니라 족장으로서 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부장 소영에게 하는 말이다.
소영 : 명령입니까?
부여족장 : 명령이라고 하기 보다는 … 충고다.
소영 : 충고로 듣겠습니다.
부여족장 : 무인왕자의 혼인 문제는 개인 일이 아니고 부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야, 고조선 의 문제고.
소영 : 왕자의 혼인에 종족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족장님의 말씀은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무 당의 딸은 되고 족장의 딸은 안 된다는 것에는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부여족장 : 그 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왕가의 혼인은 대부분 정략적이다. 왕가를 이어가기 위한 자구책이지. 왕가의 속성을 모를 네가 아니지 않느냐?
소영 : 천왕가는 이미 망했습니다. 무인은 이름뿐인 왕자입니다.
부여족장 : 그래서 더욱, 천왕가의 재기를 위해 족장들이 내린 결론이다. 족장회의의 결론을 부여족장의 딸이 막아선대서야 말이 되느냐?
소영 : 아버지는 족장으로써 말씀을 하시지만, 천왕가의 부흥에 대한 여망을 저도 잘 알고 있으나 저는 지금 부장 소영이 아니라 딸 소영으로, 개인 소영으로 무인왕자와 결혼을 바라는 것입니다. 무인왕자도 저와 혼인할 것입니다.
부여족장 : 알고 있다, 왕자와 네 사이를 짐작하였기에 더욱 네 결정을 바꾸라고 말 하는 것이다. 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왕가의, 족장들의 결의에는 시시비비是是非非가 없다. 너도 알지 않느냐. 족장의 결의는, 예부터 내려오는 화백회의로써 만장일치고 번 복되지도 않는다는 걸.
소영 : 화백회의의 결의는 알지만 저는 족장으로써 아버지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저는 반드시 왕자와 혼인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돌아서 방을 나간다.)
# 알혼섬의 세습무당 도가이고오는 아사달에서 돌아온 뒤 자신의 복안을 은밀하게 그러나 구체적으로 진행시켜나갔다. 할아버지 때 선기옥형의 배향에 대한 한 차례 소용돌이가 있었다. 도가이고오가문이 선기옥형을 신전에 배향하고 싶었던 건절한 소망이 물거품으로 되어버린 사건이었다. 바이칼호수는 고조선의 발상지였다. 더불어 민속신앙의 발상지였다. 한인천왕이 하늘에서 가지고 내려온 천부인 세 개 중 하나인 선기옥형은 무당들의 몫이었다. 천왕이라고 해도 선기옥형을 정치적으로 배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천왕들은 중요한 국사 때 신전에 모신 선기옥형을 통해 신탁을 받았다. 그 중개자가 무당이었다. 민속신앙의 발상지였던 알혼섬에서 선기옥형이 진한의 수도 아사달로 옮겨진 것은 천왕들의 3한관경제(고조선의 3한. 진한, 마한, 변한으로 분할 통치)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다. 도가이고오는 지구촌 무당 - 민속신앙의 대부代父, 세습무당으로써 선기옥형이 알혼섬에 배향되기를 바랬다. 무당의 발원지인 자신의 제단에, 본래 있었던 자리에 선기옥형이 모셔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대先代 대대로 세습무당들의 염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당들의 이 소망은 천왕들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뒷전으로 밀렸다. 소원을 이룰 가망도 없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이었던지, 고조선이 해모수에게 찬탈된 것은 차치하고 선기옥형이 스스로 바이칼호수로 돌아오게 되었다. 주변의 족장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자기의 딸과 무인왕자의 혼인도 결의했다. 도가이고오는 자기 대에 와서 조상들의 염원이 이루어지게 된 것에 대해 감복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 왕자 무인이 지녔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선기옥형이 해모수의 찬탈로부터 선기옥형을 지키기 위한 위장술이었음을 알고는 도가이고오의 실망은 기쁨에 반하여 절망적이었다. 왕자 무인에게 선기옥형은 없었다. 해모수의 찬탈을 피하기 위해 왕자 무인이 지니고 탈출한 것으로 위장했다. 그 틈에 선기옥형은 신관과 신녀들에 의해 아사달 인근의 은밀한 장소에 은닉되었다. 도가이고오가 이 사실을 알고는 상심이 얼마나 컸던지 근 한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신전에서 칩거했다. 칩거 한 달 여 만에 신전에서 나온 도가이고오는 몰골이 수척해지고 눈에는 총기가 사라졌다. 사람이 변해버렸다. 그런 도가이고오는 초췌한 모습으로 칩거에서 나오자말자 제단을 건설을 시작했다. 지구라트Zigurat(제단으로 정상이 편평하여 제사를 지냄, 피라미트Pyramid는 능묘陵墓로써 정상이 뾰쪽함)였다. 단군시대의 제단과 같은 규모였다. 제단 주변을 정리하여 신성한 터전으로 닦아 웅상雄常(낙상雒常, 고조선에 자생하는 신비한 나무 추정, 마을의 당산堂山나무로 이어짐)을 심고 천지화(天指花, 무궁화)로 울타리를 둘러 소도蘇塗(천제天帝의 제사를 모셨던 성역聖域, 범죄인이 도피하여도 체포할 수 없었음)를 가꾸었다.
만주 집안 장군총 Sumer의 Ziggurat Egypt의 Pyramid 일본 Okinawa
(Ziggurat 추정) (제단祭壇) 수중 Pyramid
Mexico Maya 1945년 미국 수송기비행사 Mexico 태양의
Chichen - Itza 항공 촬영 만주 Pyramid들 신전神殿
중국 서북부 만주지방에 100개가 넘는 Pyramid 떼가 있는데 중국정부는 이 피라미트 군을 발굴하다가 한족漢族의 유적이 아니라는 내부적인 이유로 중단하고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집트 쿠프왕의 피라미트(145m) 보다 두 배 높은 300여m의 거대한 피라미트들 은 고조선의 Ziggurat(제단祭壇, 꼭대기가 평편함)거나 피라미트(무덤, 꼭대기가 뾰쪽함)로 추정한다. 이러한 유적이 만주를 비롯하여 이집트, 멕시코, 남미, 서북시베리아, 티베트, 동남유럽 등 지구촌 특히 각 대륙의 중심지에 산재함 * Daum Blog 인용
* 제단(祭壇, Zigurat) 자료
도성都城 아사달阿斯達에서 70리(35Km) 떨어진 완만한 구릉에 제단 터를 잡아 9한桓의 제후국 군사와 성 안 백성들을 동원하였는데 날마다 3만여 명씩 동원하여 연 인원은 1백 만 명이요 능묘陵墓 축성 기일은 석 달이 걸렸다. 거대한 돌을 다듬어 쌓은 제단의 기단基壇은 정방형正方形으로 각 방의 길이가 3000자尺(1Km)요 위로는 높이 또한 1000자(300m)로 일곱 단을 쌓아 올렸는데 흐린 날이면 그 꼭대기에 운무雲霧가 걸렸다. 첫째 단은 기단으로써 300자, 둘째 단 240자, 셋째 단 210자, 넷째 단 120자, 다섯째 단 90자, 여섯째 단 30자고 마지막 일곱째 단은 높이가 10자며 끝이 평편하고 안에 붉은 황토를 깔았다. 네 방면의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그리고 북쪽을 향하여 제단을 놓았는데 능히 수 백인이 모여 제사를 지낼 정도였다. 제단 주변을 정리하여 신성한 터전으로 닦아 소도蘇塗를 만들었다.
# 제단이 완성되자 왕자 무인의 혼인을 서둘렀다. 나름대로 계산이 선 행동이었다. 오랫동안의 칩거의 결론으로 얻은 해답이었다. 선기옥형을 가져올 수 없다면 선기옥형이 올 수 있는 길을 닦는다는 생각이었다. 고조선은 망했다. 선기옥형은 방랑할 것이다. 선기옥형이 갈 수 있는 가장 접근된 곳은 알혼섬이다. 그 구심점을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선기옥형을 되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혼인을 통해 왕자 무인을 알혼섬에 가두는 것이 선기옥형을 되돌아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왕자 무인은 고열가천왕의 왕통을 이어받은 천지화랑의 우두머리로써 소도의 관리자요 천지화랑의 우두머리, 신크마리였다. 고열가천왕이 앞날을 예측하는 능력으로 무인 왕자를 소도 관리자로 임명했다면 하늘의 뜻과도 부합되는 일이었다.
# 무인의 결혼식을 앞둔 석 달 전, 올혼섬 도가이고오의 사당. 도가이고오의 딸이 잠든 방 앞 뜰, 달도 없는 그믐밤에 소리없이 나타난 그림자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한 무리들은 고양이처럼 발소리도 없이 방문으로 접근한다. 공기조차도 흔들림이 없는 움직임이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무사들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이다. 몸이 움직이면서 주변의 공기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로써는 흉내내지 못할 일이다. 흉내가 아니라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다. 천지화랑의 훈련기술을 익힌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걸음법이다. 맹수들이 먹이를 쫓을 때 사용하는 움직임이다. 짐승들은 코와 귀가 민감해서, 특히 밤에 활동하는 짐승들은 눈 보다 귀와 코에 의존한다. 발자국 소리와 냄새를 상대편에게 흘리지 않고 사냥 거리까지 접근하는 것은, 사람으로써는 불가능하나 맹수들은 탄력있는 발바닥과 바람의 방향을 이용하여 사정거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그래서 사냥꾼들은 총이나 활, 창을 쓰지 않고는 짐승사냥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맹수사냥의 훈련법을 익힌 천지화랑은 맹수 보다 더 민첩하게 움직임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상대에게 접근할 수 있다. 자객들은 댓돌 밑에 납작 엎드렸다. 역시 이런 일련의 동작에도 바람 한 점 움직이지 않는다.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머리를 들어 방 안의 기척을 살피더니 댓돌로 올라선다. 그 때 쉬잇! 공기를 가르며 비수가 날아와 머리를 들고 방 안 기척을 살피던 자객의 가슴께를 파고든다. 자객은 비수 나는 소리로 이미 몸을 틀면서 허리를 굽혀 비수를 피하며 왼 손으로 비수를 맞받는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수가 손바닥을 파고든다. 그러나 자객은 역시 흔들림없이 비수가 날아온 방향, 맞은편 지붕 위를 향해 표창을 날린다. 한 점 빛이 없는 밤, 비수와 표창이 날아가는 소리가 공기를 서로 대각선으로 가른다. 퍽! 표창이 목표물에 꽂히는 소리와 함께 지붕 위로 몸이 글러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금새 조용하다. 순간 횃불이 켜지고 주위가 소란스러워진다. 신전 경비화랑들이 들이닥친다. 자객들은 또 한 발 소리 없이 한 점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도가이고오 : (쪽문을 밀고 내당으로 들어서며) 무슨 소란이냐?
경비화랑 : 자객이 침범했습니다.
도가이고오 : (횃불에 얼굴을 들어내며) 뭐라! 자객이?
경비화랑 : 소리를 듣고 달려왔더니 서너 놈이 달아났습니다.
도가이고오 : 그래, 놓쳤단 말이냐?
경비화랑 : 쫓고 있습니다. 허나 워낙 재빠른 놈들이라 ….
도가이고오 : 그렇다면, 화랑들이였단 말이냐?
경비화랑 : 그런 것 같습니다. 아가씨를 노렸습니다.
도가이고오 : 그렇겠지. 혼삿날이 낼 모렌데 … 엄중하게 지켜라! 물 샐 틈 없이.
도가이고오가 돌아서 나오는데 뒷문에서 경비화랑 몇이 부상당한 사람을 부축하고 나온다.
도가이고오 : 뭐냐?
경비화랑 : 부여족장, 드라고미르 족장님이십니다.
도가이고오 : (횃불 가까이로 다가가며) 뭐라? 족장님?
부여족장 : (병사들에게 부축하여 들어오며) 뭐라 … 드릴 말씀이.
도가이고오 : 무슨 말씀을 …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를 보며) 아니 이 건 다치지 않았습니 까! (화랑을 돌아보며) 뭣들 하는가, 족장님을 빨리 내실로 모셔라!
# 신전의 내실 침상에 누워있는 부여족장 드라고미르와 세습무당 도가이고오. 표정들이 침통하다.
도가이고오 : 다행입니다. 요행하게도 표창이 급소를 비켰습니다.
부여족장 : (알고 있다는 듯) 그랬을 겁니다. 날 죽이려고 던지지 않았으니까.
도가이고오 : 족장님을 치료한 화랑의 말로는 상처가 깊지 않다고는 합니다만 ….
부여족장 :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 보다는 따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도가이고오 : 딸을 노렸다는 걸 아시는 건지요?
부여족장 : (대답없이) 지붕 위에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막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큰 일이 날 뻔 하잖았습니까.
도가이고오 : (무언의 말로 이해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시름 놓았으니 치료 에나 마음 쓰시지요.
부여족장 : 고마우신 말씀입니다만 부끄럽습니다.
# 무당의 딸을 살해하려던 부여족장의 딸 소영의 음모는 이를 미리 알아챈 부여족장의 기지로 실패했다. 그리고 거사의 실패로 족장의 딸 소영은 궁궐을 떠나버렸고 부여족장은 군사와 백성을 풀어 딸을 찾으려고 온갖 애를 썼으나 딸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일설에는 깊은 산속에 은둔한 천지화랑들의 무리에 끼었으리란 추측이 세간에 떠돌았다. 부여족장과 무인왕자는 소영을 찾는데 석 달을 보내고나서는, 왕자 무인이 세습 무당의 딸과 혼례를 치룬 뒤 결국 딸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
# 알혼섬, 왕자 무인의 결혼식장. 고유의 무당복장인 오고이복장 -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에 사람, 말, 새 모양의 장식을 줄렁줄렁 달고 종과 원형 장식물은 금속 패넌트 차림을 한 무당들이 바이칼호수를 중심으로 흩어져있던 여러 지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신전의 제단을 에워쌌다. 울긋불긋한 헝겊들이 매달린 솟대가 제단 중앙에 높이 걸리고 동유럽 사방에서 모여든 부족들이 수백 개의 차일을 치고 운집했다. 족장들도 예복을 입고 제단 앞줄에 앉았다. 신부는 신녀 수업을 한 도가이고오의 딸이었다.
혼인식을 거행한 며칠 뒤 왕자 무인은 도가이고오로부터 세습무당의 신대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뒤 한 달여 만에 도가이고오는 아무 말 없이 알혼섬에서 사라졌다. 풍문에 천부인인 선기옥형을 찾아나섰다는 말이 돌았으나 아무도 확인할 수 없었다. 입산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가 실종되던 날 이른 아침에 호수로 배를 저어나간 걸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확인 결과 헛소문이었다. 왕자 무인은 신대와 함께 도가이고오 후이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 백두산 북쪽 능선 장백폭포 부근 47세 선군 고열가 은거 동굴. 좌선하고 있는 고열가천왕 앞에 홀연히 일단의 신녀神女들이 나타난다.
고열가천왕 : 천부인天符印은 잘 모셨는가?
대신녀 : (신녀들이 모셔온 궤를 천왕 앞에 내려놓으며) 안전합니다.
고열가천왕 : 하늘의 뜻일지니 내게 맡기고 너희들은 돌아가라!
대신녀 : 어디로 가라십니까? 저희들이 천부인을 지키겠습니다.
고열가천왕 : 아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곧 이제 다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선기옥형을 받들이가 나타날 것이니, 그리 알라. 그대들은 산을 내려가 신전을 지키라.
대신녀 : 천왕폐하도 계시지 않고 천부인도 모시지 못한 빈 신전을 지키라 하십니까?
고열가천왕 : 새 시대가 열리는 날을 기다려라. 이 또한 하늘의 뜻일지니….
◎ 수메르Sumer와 한단고기의 수밀이국 그리고 천신天神 통치統治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에서 제카리아 시친Zecharia Citchin은 이렇게 말 한다
* 모든 역사가 Sumer에서 시작되었다거나, 인류 최초의 문명이 수메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수메르문명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그것이 최초의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수메르문명은 인류 최초의 것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이미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문명이기도 했다. 그들은 태양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지구와 인간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알고 있었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신들이 어디에서 언제 지구로 왔고, 왜 인간을 창조했으며, 어떻게 지구를 왕래하며 인간을 지배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내용들이 수메르의 점토판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남아있으며,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이나 각국의 신화들은 수메르의 이 고대 기록들을 나중에 각색하고 번안한 것들에 불과하다. 과연 그들이 알고 있던 창조의 비밀과 과학 기술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 태양계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거대한 행성 하나가 더 있다. 3600년을 주기로 공전하는 이 12번째의 행성, 마르둑Marduk이 바로 지구에 문명을 창조한 ‘신들의 고향’ 이다. 그들은 행성 간 우주여행을 할 수 있었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지구에 왔으며, 노동력 조달을 위해 ‘인간을 창조’ 했다. 인간과 닮은, 인간처럼 울고 웃고 싸우기도 하는, 이 신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또한 그들은 왜 지구를 떠났으며, 언제 다시 오는가? 그리고 그들이 하늘과 땅 사이의 유대를 위해 남겨둔 지상의 낙원, Eden은 과연 어디인가?
태양계 행성과 작은 행성들/ 천체 밀집 태양계 바깥 Kuiper Belt 위치와 규모, NASA * Daum Blog 인용
◎ 한단고기(임승국)는 수밀이국(Sumer)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한국본기 제 2권에서 삼성밀기는 말한다. 파나류산(한인의 한국시대의 도읍지,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바이칼호수)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한인시대의 한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2만5000Km), 동서 2만리(1만Km)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캄차카),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퉁구스, 시위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12국이다.
* 선군왕검시대, 15세 선군대음(후을달) 재위 51년, 신사 2년, 한기 5537년(BC. 1660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겨울 10월에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 선군왕검시대 27세 선군두밀 재위 28년, 갑신 원년, 한기 6200년(BC. 997년) 천해(바이칼호수)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 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 인류학계와 세계의 사학계가 주목하는 수메르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수밀이국이다. 수메르민족이란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수메르말이라고 불리는 언어를 사용한 민족으로 세계 최고의 도시문명을 메소포타미아에서 꽃피운 민족이다. 여기에서 최고라는 말은 마지막의 결론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학이 주도한 결론일 뿐이다. 서양역사학은, 서양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12연방의 기록을 믿지 않는다. 이는 문화의 창조 동서양 선후 다툼이 아니라 동서문화 주도권의 쟁점이다. 서양역사학자들은 구약성서를 기원으로 하는 인간의 창조론에 입각한 인류사를 정립하였는데 느닷없이 수메르문명이 발굴되고 해독되어 구약성서 이전의 기록이 밝혀지자 황당해 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서양을 기점으로 하는 수메르인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갑자기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나타나’ 라는 식으로 기술한다. 서양역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메르인이 수메르지역 원주민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누가, 언제, 어디서 이 땅에 이주하였는가? 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수메르인에 대한 정설은 ‘검은 머리칼의 교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이다. 이들은 누구일까?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지금까지는 언어학적, 인류학적으로 ‘아시아닉크계 민족설’ 이 유력하다. 역사적으로 인류사를 규명하려면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야 하는데 인종과 언어다. 슈메르인은 검은 머리칼의 인종이었다. 수메르인의 언어는 교착어인데 서양학자들은 언어적 연관성 때문에 이를 우랄(유럽의 서쪽 끝 지역)-알타이어(아시아의 몽골지역)라고 규정하여 서양의 서쪽 끝과 아시아의 동쪽 끝을 묶어놓았다. 유럽에는 교착어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 ‘터어키어’ 가 교착어다. 서양학자들에게는 수메르인들이 어디서 이동하여 왔는지 규명이 불가능하지만 자연 조건 때문에 문화의 동서 이동은 빠르고 남북 이동은 느리다는 고인돌유적(고인돌의 70%가 한국에 있음)에서 고대한국인의 유럽 동쪽 이동을 밝혀낼 수가 있다. 인류학과 언어학적으로 터어키인, 항가리인에 주목한다.
* 중국사서의 ‘진서 숙신열전’ 에 한인시대의 한국 12연방을 가리키는 말이 숙신(쥬신의 한자 차음)으로 표현되는데 숙신은 바로 조선이고 바이칼호수 접경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의 나라가 한국 12연방이었으며 그 막내 나라가 수밀이국(Sumer)이라고 기록하였다.
* 여와는 태호복희씨의 누나다. 그녀는 흙을 빚어 7일 만에 사람을 만들고 혼을 불어넣었다고 하였다. ‘여와’ 라는 이름마저 한국어 번역판성경의 ‘여호와’ 와 일치하고 수메르기록의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기록과도 일치한다.
수메르 기록에도 최고 여신인 Inanna(Lipit-Ishtar)가 있다.
* 대저 9한(한국시대 한인천왕이 다스리던 강역의 나라 또는 백성)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황부인黃部人은 피부가 노랗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털은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백白부인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며, 적赤부인은 피부가 녹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특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藍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인종의 색깔이라고도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흑부인黑部人의 기록이 없음)
◎ Sumer의 역사(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 하나님이 대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할 때 인간의 딸들을 아내로 삼은 신의 아들들이 있었다. 히브리어 원전에서는 그들을 네필림이라고 했고 이는 ‘던져진 자들’, ‘지구로 내려온 자들’ 이다.
* 구약성경에는 야훼(여호아)의 옥좌가 하늘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지구)을 보고 있다. 신약성경의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말한다.
* 모든 고대인들은, 하늘에서 지구로 내려왔고 또 자기들 마음대로 하늘로 다시 올라갈 수도 있었던 신들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수메르를 비롯한 근동의 고대 유적지에서 엄청난 양의 천문학적 지식이 담긴 Sumer점토판들이 대량(5만5000매) 출토되었는데 이 문서들은 그런 신들의 존재와 그들의 고향인 특정한 행성(Marduk)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이를 지구태양계의 12번째 행성, 혹은 Marduk라고 불렀다.
*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경쟁하던 두 거대한 제국, 남쪽의 바빌로니아와 북쪽의 아시리아는 Acade어를 공통으로 사용하였다. 아카드어는 히브리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가나안어와 비슷하지만 그 보다 훨씬 앞선 어떤 원전의 복사였다. 그렇다면 누가 설형(쐐기)문자를 발명하고 그것의 정확한 문법과 풍성한 단어를 발전시킨 것일까? 도대체 앞 선 원전을 쓴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바빌로니아인들과 아시리아인들은 왜 그 언어를 아카드어라고 불렀을까? 구약성경(창세기 10장)에서는 ‘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 시날(수메르)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우르크)과 악갓(아카드)과 갈레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카드라는 왕조가 있었을까? 1869년 프랑스 고전고고학회에서 J. Oppert는 아카드 이전의 언어와 민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였고 학자들은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이 ‘아카드어 - 수메르어사전’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로써 수메르어를 판독하게 되자 놀랄만한 사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 수메르어로 엔시는 ‘정의로운 지배자’ 인데 라가시에서 발굴된 기록들은 라가시왕조가 BC. 2900년경에 시작되어 650년을 이어갔으며 43명의 엔시들이 다스렸고 수메르의 지도자들은 ‘신의 허락을 받아야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고 명백하게 기록하였다.
* 1956년 S. N. Kramer의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에서 바퀴, 고층건물, 음악과 악기, 야금술, 의학(서), 조각, 보석, 도시, 왕조, 법률, 사원, 기사도, 수학, 천문학, 달력, 학교, 양원제, 역사학자, 농업(서), 우주론, 격언, 문학 논쟁, 도서관 목록, 인간 영웅, 사회 개혁, 세계평화 노력, 욥, 노아, 인쇄술, 활자 사용, 원통형 인장윤전기, 60진법, 역청과 석유연료, 백내장 수술, 알코올, 죽은 신의 소생술, 투구(외투, 토가), 빵, 맥주, 포도주, 요쿠르트, 버터, 치즈 등 인류 최초의 발명 100가지 이상이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 수메르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잇는 어떤 고대문명 보다 더 발전적이고 포괄적인 문명이었다. 그리고 이 문명이야말로 현재의 우리 문명이 기원을 두고 있는 원전이다. 약 200만 년 전에 석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BC. 3800년 경에 수메르에서 고도의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수메르문명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수메르인이 도대체 누구였으며,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왜 수메르문명이 생겨났는가? 라는 물음이다. 고대인류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도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아주 갑작스럽고, 전혀 앞선 문명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 H. Frankfort는 ‘놀랍다’, P. Ammiet는 ‘비범하다’, A. Parrot는 ‘아주 갑자기 나타난 불꽃’, L. Oppenheim은 ‘엄청나게 짧은 기간에’, J. Campbell은 ‘수메르의 좁은 진흙땅에서 정말로 갑자기 세계의 모든 고등문명을 구성하는 단초들이 일시에 시작되었다’ 라고 말한다.
* 제카리아 시친은 인류학의 발전과정을 살펴 왜, 수 백 년 동안 고통스럽도록 느리게 진행되던 인간의 진화가 BC. 1만1000년경 농업의 획기적인 발전, 7400년경 신석기문명, 3800년경 갑작스런 문명의 발전이라는 세 차례의 계기를 통해 가속도를 얻어 원시적인 사냥꾼, 채취자를 농사꾼, 토기제작자로 바꾸어놓고, 다시 도시건축가, 수학자, 천문학자, 상인, 음악가, 판사, 의사, 작가로 바꾸어놓은 것일까? 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바벨탑 모형도 * Daum Blog 인용
* 구약성경의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대홍수 이후 지구에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수메르)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구약성경 창세기 11 : 2)>를 잡았다. 정착한 수메르사람들은 도시를 세우고, 탑(발사대, 지구라트)을 쌓았는데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사람들의 이름(쉠, 비행 물체)을 날리려고 하자 하느님은 인간들의 이 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통일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인간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인간들의 단합을 봉쇄하자고 자신의 동료들에게 제안한다. 언어의 혼란이 시작되자 바벨탑 건립은 무산되었다.
* 아라비아해에 착륙한(44만 5000년 전) 엔키가 이끄는 네필림은 태양계 12번째의 행성 마르둑에서 지구로 내려와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최초의 정착지 에리두(먼 곳에 지어진 집)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신들이 지구의 통치권을 나눠 가진 뒤 하급 신인 아눈나키들에게 노동을 시켜 자원을 확보했다. 하늘에는 300명을 두어 안(신들의 왕, 아눈나키들의 아버지)을 지키게 했고, 안의 명령을 따르게 했다. 또한 하늘에서 지구로 오는 길을 정하게 했다. 그리고 지구에는 600명을 살게 했다. 하늘과 땅의 아눈나키에게 지시를 내린 후 노역의 임무를 부여했다.
* 노역에 시달린 아눈나키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신들의 대법관 엔닐은 무기로 폭동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누스코의 충고를 받아들여 폭동의 원인을 조사한다. 그리고 아눈나키들의 노역이 너무 가혹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신들은 원시적 노동자, 인간을 창조해서 아눈나키의 노역을 대신하게 한다. 따라서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지만 우리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신의 창조물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만 년 전에 네필림이 원인(호모 에렉투스)들에게 자신들의 형상과 모습을 덧붙여서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다파(아담)는 신이 만든 인간의 모델이다. 아담을 모델로 노동력을 대신할 복제품 인간을 만들어냈다.
*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에 의하면 ‘10기간 동안 그들은 일에 시달렸다. … 40기간 동안 그들은 일에 시달렸다’ 는 반복된 기록이 있다. 네필림의 1년(1샤르)은 3600년(12번째 행성 마르둑의 공전주기)이다. 그래서 40샤르는 14만 4000년이다. 아눈나키들은 엔키가 지구에 착륙한 뒤 14만 4000년 동안 강제 노역에 시달린 것이다.
* 대홍수가 지나간 뒤 네필림은 지구의 신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회의를 한다. 회의의 결과 그들은 네 개의 지역을 만들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 나일강 유역, 인더스강 유역과 나머지 하나 마지막 지역은 신성한 곳이었는데 순수한 땅으로 불리운 그 곳은 틸문Tilmun(미사일의 땅, 우주 공항)이었다. 틸문은 어디인가? 네필림Nefilim(히브리원전 성서, 하급 신, 인간의 딸을 아내로 삼은 신의 아들들, 던져진 자들, 지구로 내려온 자들)들이 지구를 떠나면서 3600년 뒤, 오늘(AD. 2008년)로부터 1400년 뒤 돌아와서 살려고 남겨놓은 에덴Eden동산은 어디인가? 구약성경에서는 상징적으로 에덴을 설정하여 지정학적으로는 이스라엘 동쪽을 지칭했다. 그러나 수메르문헌에서는 이라크 동북지역을 확연하게 지정한다. 네필림들이 지구를 떠나면서 지정한 에덴이 서양학자들이 말하는 메소포타지역의 동북부 이라크 동북부지역인가, 고대 대한의 발상지인 바이칼호수일까, 아니면 금수강산이라고 불리웠던, 지구촌의 동방 해 뜨는 지역 대한민국인가?
1화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탁록전쟁복원도涿鹿戰爭復元圖
◎ 고조선 역사연대표 (임승국의 한단고기 인용)
*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1대 한인 (안파견) 한기 원년(BC. 7197년) - 7대 지위리 (단인)
한기 3299년(BC. 3898년), 7대 3301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한인(안파견安巴堅) | BC.7197 | 천제한임天帝檀任, 한국桓國 개국, |
2대 | 혁서 | / 인류 조상 나반那般과 아만阿曼, | |
3대 | 고시리 | / 9한九桓의 무리는 후손, | |
4대 | 주우양 | / 홍익인간弘益人間 | |
5대 | 석제임 | / 한웅 추천, 반고盤固, | |
6대 | 구을리 | / 가한可汗이라함 | |
7대 | 지위리(단인) | - 3896 |
*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역사연대표
1대 거발한(한웅) 한국기원(한기) 3299년(BC. 3898년) - 18대 거불단(단웅)
한기 4816년(BC. 2381년), 18대 1565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거발한(한웅) | 94 | BC. 3898, 태백산 신단수 신시 도읍, |
2대 | 거불리 | 86 | 3804 / 국호 배달, 웅녀 혼인 선군 출생, |
3대 | 우야고 | 99 | 3718 / 한족桓族 기원基源 |
4대 | 모사라 | 107 | 3619 |
5대 | 태우의 | 93 | 3512 |
6대 | 다의발 | 98 | 3419 |
7대 | 거련 | 81 | 3321 |
8대 | 안부련 | 73 | 3240 |
9대 | 양운 | 96 | 3167 |
10대 | 갈고(독로한) | 100 | 3071, 염제신농炎帝神農과 국토 경계 |
11대 | 거야발 | 92 | 2971 |
12대 | 주무신 | 105 | 2879 |
13대 | 사와라 | 67 | 2774 |
14대 | 자오지(치우) | 109 | 2707, 군신軍神, 동철기문화, |
15대 | 치액특 | 89 | 2598 / 염제신농 침략함, 황제헌원 |
16대 | 축다리 | 56 | 2509 / 黃帝軒轅 사로잡아 신하 삼음 |
17대 | 혁다세 | 72 | 2453 |
18대 | 거불단(단웅) | 48 | 2381-2333 |
* 고조선 선군왕검시대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1대 왕검 한기 4864년(BC. 2333년) - 47대 고열가 한기 6902년(BC. 295년),
47대 2038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왕검 | 93 | BC. 2333, 아사달 도읍 국호 조선(쥬신) |
2대 | 부루 | 58 | 2240, 帝舜有虞 토벌, 參佺의 戒, 七回曆제작 |
3대 | 가륵 | 45 | 2182, 三六大禮, 加臨多(正音 38字) 창제 |
4대 | 오사구 | 38 | 2137, 인삼 채취, 조개 화폐, 夏 나라 정벌 |
5대 | 구을 | 16 | 2099, 六十甲子 冊曆, 인도인 표류, 桓花 식수 |
6대 | 달문 | 36 | 2083, 誓效詞 창작, 和白會議, 4,000부락 供物 |
7대 | 한율 | 54 | 2047, 太平聖代 |
8대 | 우서한 | 8 | 1993, 생산 1/20 세금제도, 관제 개정, 3足烏 出現 |
9대 | 아술 | 35 | 1985, 靑海 褥薩 于捉 침입 3년 뒤 還都 |
10대 | 노을 | 59 | 1950, 가축 사육, 伸寃木(신문고) 설치, 河圖洛書 |
11대 | 도해 | 57 | 1891, 國仙의 蘇塗 설치, 選士 20명 夏 파견 |
12대 | 아한 | 52 | 1834, 遼河 남쪽에 巡狩觀境의 碑 세움 |
13대 | 흘달 | 61 | 1782, 州와 縣 정비, 桀왕 구원, 國子郞 창설 |
14대 | 고불 | 60 | 1721, 鳳凰 출현, 호구조사 1억 8천만 |
15대 | 대음 | 51 | 1661, 생산 1/80 세법, 태백산碑, 수밀이국 사신 |
16대 | 위나 | 58 | 1610, 九桓 寧古塔 三神 上帝 제사, 愛桓歌 |
17대 | 여을 | 68 | 1552, 五加와 나라 순시 蓋斯城 靑衣老人 |
18대 | 동엄 | 49 | 1484, 支伯特 사신이 공물 바침 |
19대 | 구모소 | 55 | 1435, 周天曆과 八卦相重論 지음 |
20대 | 고흘 | 43 | 1380, 영고탑 개축, 9한의 지도 제작 |
21대 | 소태 | 52 | 1337, 殷 나라 왕 小乙이 공물로 조공함 |
22대 | 색불루 | 48 | 1285, 은 나라 수도 격파 변한 백성 이주 |
23대 | 아흘 | 76 | 1237, 낙랑골 경영, 은나라에 6읍 설치 |
24대 | 연나 | 11 | 1161, 황숙 고불가 섭정, 소도 증설 제사 |
25대 | 솔나 | 88 | 1150, 箕子 西華에 避靜, 上蘇塗 儀禮 강론 |
26대 | 추로 | 65 | 1062, 가을 7월 백악산 계곡 흰 사슴 200수 |
27대 | 두밀 | 26 | 997, 천해 홍수 아란산 붕괴, 수밀이국 사신 |
28대 | 해모 | 28 | 971, 여름 4월 태풍, 氷海 汗 공물 |
29대 | 마휴 | 34 | 943, 周 나라 공물, 여름 지진 |
30대 | 내휴 | 35 | 909, 치우천왕비 세움, 주 나라 수교, 흉노 공물 |
31대 | 등올 | 25 | 874, 봉황과 기린 출현 |
32대 | 추밀 | 30 | 849, 鮮卑山 추장 們古 공물, 3월에 일식 |
33대 | 감물 | 24 | 819, 주 나라 사신, 감물산 삼성사 짓고 제사 |
34대 | 오루문 | 23 | 795, 도리가 지음, 2개의 해가 뜸 |
35대 | 사벌 | 68 | 772, 熊襲(일본) 평정, 燕 ․ 齊 나라와 전쟁 승리 |
36대 | 매륵 | 58 | 704, 12월 3도(일본) 평정, 연 나라 정벌 |
37대 | 마물 | 56 | 646, 남쪽 순시 淇水(하남성 林縣)에서 붕어 |
38대 | 다물 | 45 | 590, 재위 45년 붕어崩御(돌아가심) |
39대 | 두흘 | 36 | 545, 재위 36년 崩御 |
40대 | 달음 | 18 | 509, 재위 18년 崩御 |
41대 | 음차 | 20 | 491, 재위 20년 崩御 |
42대 | 을우지 | 10 | 471, 재위 10년 崩御 |
43대 | 물리 | 36 | 461, 隆安 于和冲이 서북 36개군 함락, 피난 |
44대 | 구물 | 29 | 425, 우화충 정벌, 장당경 즉위, 국호 대부여 |
45대 | 여루 | 55 | 396, 연 나라 침입, 번 ․ 진 ․ 막조선 장수 파견 |
46대 | 보을 | 46 | 341, 箕詡 번조선왕 책봉, 韓介 수유군 침입 |
47대 | 고열가 | 47 | 295-238, 3월 제사 뒤 양위, 입산 신선, 5加 통치 |
* 선군조선의 3한韓세가世家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연대 없는 연표 자료 없음)
* 진한세가 역사연대표(선군조선 역사연대 참조)
* 마한세가 역사연대표
1대 웅백다(년대 모름), 3대 불여래 한기 4968년(BC. 2229년) -
35대 맹남 한기 6959년(BC. 238), 35대 약 2000년 간
역대 | 왕명 | 역사 개요 |
1대 | 웅백다 | 기록 없음 |
2대 | 노덕리 | = |
3대 | 불여래 | BC. 2229 - 2180 |
4대 | 두라문 | 기록 없음 |
5대 | 을불리 | = |
6대 | 근우지 | BC. 2136 - 2107 |
7대 | 을우지 | 기록 없음 |
8대 | 궁호 | = |
9대 | 막연 | BC. - 1939 |
10대 | 아화 | 1939 - 1924 |
11대 | 사리 | 1924 - 1806 |
12대 | 아리 | 1806 - 1716 |
13대 | 갈지 | 1716 - 1633 |
14대 | 을아 | 1633 - 1550 |
15대 | 두막해 | 1550 - 1496 |
16대 | 독로 | 1496 - 1371 |
17대 | 아루 | 1371 - 1287 |
18대 | 아라사 | 1287 - 1285 |
19대 | 여원흥 | 1285 - 1232 |
20대 | 아실 | 기록 없음 |
21대 | 아도 | = |
22대 | 아화지 | BC. 1091 - 1055 |
23대 | 아사지 | 1055 - 934 |
24대 | 아리손 | 기록 없음 |
25대 | 소이 | = |
26대 | 사로 | BC. - 754 |
27대 | 궁흘 | 754 - 677 |
28대 | 동기 | 기록 없음 |
29대 | 다도 | BC. - 588 |
30대 | 사라 | 588 - 509 |
31대 | 가섭라 | 기록 없음 |
32대 | 가리 | = |
33대 | 전내 | = |
34대 | 진을례 | BC. - 366 |
35대 | 맹남 | 366 - 238 |
* 번한세가 역사연대표
1대 치두남(연대 모름) - 74대 기준 한기 7003년(BC. 194년),
74대 약 2100년 간
역대 | 왕명 | 역사 개요 |
1대 | 치두남 | 기록 없음 |
2대 | 낭사 | - BC. 2251 |
3대 | 물길 | BC. 2251 - 2238 |
4대 | 애친 | 2238 - 2187 |
5대 | 도무 | 2187 - |
6대 | 호갑 | - 2098 |
7대 | 오라 | 2098 - 2072 |
8대 | 이조 | 2072 - 2015 |
9대 | 거세 | 2015 - 1975 |
10대 | 자오사 | 1975 - 1960 |
11대 | 산신 | 1960 - 1946 |
12대 | 이전 | 1946 - 1893 |
13대 | 백전 | 1893 - 1844 |
14대 | 중전 | 1844 - 1826 |
15대 | 소전 | 1826 - 1770 |
16대 | 사엄 | 1770 - 1727 |
17대 | 서한 | 1727 - |
18대 | 물가 | - 1664 |
19대 | 막진 | 1664 - 1600 |
20대 | 진단 | 1600 - 1554 |
21대 | 감정 | 1554 - 1518 |
22대 | 소물 | 기록 없음 |
23대 | 사두막 | = |
24대 | 갑비 | = |
25대 | 오립루 | - 1411 |
26대 | 서시 | 기록 없음 |
27대 | 안시 | - 1393 |
28대 | 해모라 | 1393 - 1352 |
29대 | 소정 | 1352 - 1333 |
30대 | 서우여 | 1333 - 1285 |
31대 | 아락 | 1285 - 1225 |
32대 | 솔귀 | 1225 - 1224 |
33대 | 임나 | 1224 - 1184 |
34대 | 노단 | 1184 - 1105 |
35대 | 마밀 | 1105 - 1092 |
36대 | 노불 | 1092 - 1074 |
37대 | 을나 | 1074 - 1054 |
38대 | 마휴 | 1054 - 1014 |
39대 | 등나 | 1014 - 1012 |
40대 | 해수 | 1012 - 983 |
41대 | 오루문 | 983 - 966 |
42대 | 누사 | 966 - 954 |
43대 | 이벌 | 954 - 926 |
44대 | 아륵 | 926 - 900 |
45대 | 마휴(마목) | 900 - 836 |
46대 | 다두 | 836 - 785 |
47대 | 내이 | 785 - 752 |
48대 | 차음 | 752 - 746 |
49대 | 불리 | 746 - 736 |
50대 | 여을 | 736 - 707 |
51대 | 엄루 | 707 - 703 |
52대 | 감위 | 703 |
53대 | 술리 | 703 - 673 |
54대 | 아갑 | 663 - 648 (53대와 54대 10년 기록 없음) |
55대 | 고태 | 648 |
56대 | 소태이 | 648 - 634 |
57대 | 마건 | 634 - 616 |
58대 | 천한 | 616 - 605 |
59대 | 노물 | 605 - 595 |
60대 | 도을 | 595 - 520 |
61대 | 술휴 | 520 - 505 |
62대 | 사량 | 505 - 471 |
63대 | 지한 | 471 - 453 |
64대 | 인한 | 453 - 438 |
65대 | 서위 | 438 - 400 |
66대 | 가색 | 400 - 375 |
67대 | 해인 | 375 - 341 |
68대 | 수한 | 341 - 340 |
69대 | 기후 | 340 - 323 |
70대 | 기욱 | 323 - 315 |
71대 | 기석 | 315 - 290 |
72대 | 기윤 | 290 - 251 |
73대 | 기비 | 251 - 232 |
74대 | 기준 | 221 - 194 (73대와 74대의 11년 기록 없음) |
치우천왕 치우천왕상 중국 산동성 치우천왕
캐릭터 * Daum Blog 인용 치우천왕묘 사적표지
# 중국 남경 행 비행기 안, 도깨비기자, 구름 위를 날고있는 비행기 창밖을 보다가 컴퓨터를 연다. 컴퓨터에 한국 소재 선기옥형 3개의 영상 -경북 도산서원의 퇴계 이황이 제작한 목제 혼천의, 창경궁의 동재 소형 혼천의와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기계추동장치를 응용한 선기옥형. 운곡선생은 도산서원과 창경궁의 혼천의는 외형을 갖추었을 뿐 실용적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고 실제 천문기상을 관찰하는데 사용한 것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혼천의라며 중국 남경시 고대유물관에 2개가 더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전시된 선기옥형은 모제품이고 원형은, 고구려 태조 주몽대왕이 소서노, 그러니까 비류와 온조를 떠나보내면서 100여개를 모사한 원형에 가까운 선기옥형은 중국당국이 공개하지 않는 것 같다고 토를 달았다. 그리고 천문기술이 발달했던 아랍계 국가가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고조선시대 천부인은 한웅천왕이 하늘에서 하강할 때 가지고 내려온 것이고 선기옥형은 천부인의 원형이며, 중국 중화시 탁록현 3조당에 고조선 신시시대 치우천왕과 중국 역사적 시조의 하나인 공손헌원과 전쟁복원도가 있는데 거기에 선기옥형이 그려져 있었다고 했다. 그 선기옥형이 한웅천왕이 내려올 때 가져왔던 선기옥형이 확실하다고 했다. 그리고 치우천왕과 공손헌원의 탁록전쟁 이야기를 했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공손헌원은 소전의 별고로써 짐승을 기르는 관리였는데 짐승을 기르는 일을 게을리하여 쫓겨났다. 변방에서 세력을 모아 비적질을 하다가 차츰 세력이 커지자 고조선의 변방을 노략질했다. 치우천왕은 그 때 마다 장군들을 보내 선무하였으나 침략이 72회나 계속되자 천왕이 출전하여 괴멸시킨다. 그 마지막 전쟁이 고조선과 변방 공손헌원의 73회째의 대 전쟁 탁록전쟁이다.
* 치우천왕蚩尤天王 - 고조선 한웅천왕의 신시神市시대 14세世 자오지한웅, 한기 4490년(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誌’ 에 치우천왕의 능陵(묘墓)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다. 높이가 7척尺(약 21미터)으로 중국 한漢나라 때 10월이면 백성들이 제사를 모셨는데 붉은 기운이 띠 모양으로 뻗쳐올라 이를 ‘치우의 깃발’ 이라고 했다. 하느님으로써 3신神에 제사를 지내는데 군사軍司의 신神으로써 치우천왕 제사하니 3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천왕은 만고 무신武神으로써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했으며 비와 바람을 부르고 귀신들을 부렸다. 한漢의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치우천왕에게 제사를 모셨고 한왕漢王이 되어서도 장안長安에 치우천왕의 사당祠堂을 지었다. 후세에 관자管子는 이를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 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 라고 썼다. 강태공이 치우천왕의 후손이다. 중국의 역사학자 왕동령은 ‘중국민족사’ 에서 ‘4000년 전…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 들어오게 된 후에 이들과 융화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는 구려九黎, 군주君主는 치우다. 묘족은 현대의 묘족이다’ 라고 했다. 한웅천왕 신시시대의 강역疆域은 유럽 서남부에서 시베리아 동남부, 만주, 티베트, 이란, 이라크를 포함한 남북 5만리(2만5000Km), 동서 2만리(1만Km)의 광대한 영토였다. 이를 3한관경제韓觀境制로 다스렸다. 일붕 서경보 스님이 티벳을 방문하여 치우천왕의 사적史蹟인 옛 장당경을 확인하고 조선일보에 여행기를 쓴 일이 있다.
* 고려시대 서운관書雲觀(국립도선관) 소장所藏 한국고대역사서 목록 -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신비집神秘集,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대변설大辯說,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勳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안함로, 원동중 지음),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수찬기소修撰企所 100여 권(문태산, 왕거, 인설 3인 공저),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虱錄, 통부록通夫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은 조선실록朝鮮實錄에 책명만 남아있다.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고려시대 김부식의 한국고대사 폐기廢棄, 일제식민지시대에서는 20만여 권의 한국고대사를 불태웠다는 말처럼 한국고대사는 의도적으로 말살되었다.
* 5가加 - 고조선시대 나라를 구성한 다섯 큰 부족으로 우牛가, 마馬가, 저猪가, 구狗가, 양羊가인데 공화제 화백和白제도의 구성원이며 왕으로 추대되는 자격을 지녔다
창덕궁 육군사관학교박물관 김산호 화백의 김산호 화백
귀면 기와 투구 장식 치우상 탁록대전도 치우천왕상
* Daum Blog 인용
* 고조선 한웅천왕 신시시대 치우천왕(자오지한웅)의 탁록전쟁
# 한기 4490년(BC. 2707년) 늦은 여름,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14세 치우천왕의 궁전, 천왕이 옥좌에 좌정하고 계단 아래 대신들과 장수들이 늘어서있다.
재상 유소 : (도열한 줄에서 한 발 앞으로 나서 읍하며) 천왕께옵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 시어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 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사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시어 삶을 숭상하셨나이다. 우리나라는 남북 5만리(2만5000Km)와 동서 2만리(1만Km)의 3한관경을 관장하온 바 국세가 강대하다 고는 하나 권역은 넓어 아직 왕화가 미치지 않은 변방이 있사옵니다. 그 가운데에서 특 히 범족은 멀리 하삭으로 내침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재상 발귀리 : 유소의 말씀이 합당합니다.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불온한 무리를 평정하여 왕화를 누리소서.
치우천왕 : 옳은 말씀이요. 하삭에는 누구를 보낼꼬?
재상 발귀리 : 구가의 우두머리 소호대장이 적임인줄 아옵니다.
치우천왕 : (구가의 우두머리 소호를 불러) 소호대장은 범족을 하삭으로 이주시켜 교화하라!
천지화랑 다루 : 아뢰옵니다. 변방의 유망이 다스리는 정권이 쇠약한지라 정사가 어지러움으로 백성이 동요하나이다. 군사를 보내 평정하소서.
치우천왕 : 좋은 말씀이요. 저가대장 을보라를 파견하라!
천지화랑 다루 : 천하는 태평성대이오나 변방에 작은 도적들의 무리가 횡행하여 끊임없이 변경을 노략질 한 바 관경의 수비를 게을리 할 수 없는 법, 5가의 집안과 황실에서 장 수 될 인재를 가려 뽑아 양성코자합니다.
치우천왕 : 합당하다, 천지화랑 선인 다루는 천지화랑을 소집하여 소도의 신탁을 수행하고, 재상 발귀리는 장수될 인재를 훈련 육성하여 각 부대의 대장으로 삼고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긴 칼), 모극(양날창), 대궁(큰 활), 호시(호나무로 만든 강한 화살)를 많이 만들어 굳센 병사를 양성하여 변경의 안정을 도모하라! 변방을 평정하지 않고 짐은 궁 궐에서 쉬지 않겠다. 한국연방 12제후국에 격문을 알리라! 특히 공손헌원은 왕화로 덕 을 베풀려는 짐을 능멸하고 여러 차례 침탈을 자행하여 그 방자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므 로 이제 더 방관할 수 없다. 짐이 몸소 출전하여 공손헌원과 변방의 도적을 박멸함으로 써 왕권의 위대함을 보이리라. 지금 즉시 12연방에 군사 동원령을 하달하여 격문을 돌 리고 한 달 뒤 탁록의 유웅벌에 집결토록 하라!
격문에 일렀으되, 공손헌원은 본래 소전의 별고이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로 유배시켰다. 헌원의 무리는 그의 후손이다. 공손헌원과 도적의 무리들이 왕화가 미치지 않은 변경에서 일어나 무리를 모아 변경의 작은 읍성을 침탈하고 핍박한지 오래, 짐이 매양 병사를 보냈으나 그 기세를 꺾지 못하여 점점 오만방자하여 이제는 왕도를 넘보려는 세를 이루었으므로 이제 궤멸치 않으면 천왕의 왕화에 작은 부덕이 되리라. 이에 12제후 국왕에게 명하노니 다음에 따르라!
첫째, 12제후 국왕은 한 달 뒤 탁록의 유웅벌에 모인다.
둘째, 12제후 국왕은 보병 2000과 기병 1000을 동원하라.
셋째, 12제후 국왕은 5군으로 편성하되,
제 1군은 중군으로 삼아 짐이 친히 이끌 것이며, 구가의 대장이 통솔하고 천지화랑 다루 를 부대장으로 하여 짐을 보좌하고
제 2군은 양가의 대장이 통솔하고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을 편성하여 동쪽을 평정한 다.
제 3군은 마가의 대장이 통솔하고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으로 편성하여 서쪽을 평정 한다.
제 4군은 저가의 대장이 통솔하고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으로 남쪽을 평정한다.
제 5군은 우가의 대장이 통솔하고 사납아국, 선비국, 수밀이국으로 편성하여 북쪽을 평 정한다.
# 파발마들 사방의 성문에서 나와 12연방의 제후국으로 달린다.
# 치우천왕 출전의 날 아침의 궁성 앞 출전의 광장, 웅장한 석주들로 떠받친 제단 앞 옥좌에 금빛 찬란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치우천왕이 앉아있고 그 옥좌 아래로 300여단의 층계 밑에 수 백 명의 원로제신들이 양편으로 늘어서있다. 그 아랫 단에는 신장神將의 지휘를
받은 천지화랑으로 편성된 천왕의 근위대 300명이 3족오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선기옥형이 안치된 궤를 호위한다. 그 뒤를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가 따른다. 풍백은 천부天符를 새긴 거울을 들고 앞서서 나아갔고, 우사는 북을 쳐서 울리며 주변을 돌며 춤추었고, 운사는 100명의 무사를 거느리고 대장의 검으로 호위하였다. 천왕의 옥좌 양편으로부터 화려하게 차려 입은 귀부인들이 계단 밑까지 줄지어 서고, 이어서 궁성의 문까지 1만5000명의 기마병과 5000대의 전차들이 대오를 갖추고 있다. 기마대 뒷편에 출전을 환송하는 백성들 수 천 명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출전의 나팔소리가 우렁차게 광장을 뒤흔든다. 치우천왕, 일어서서 백옥의 홀을 높이 흔든다. 도열한 제신들과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이 환호한다. 광장이 흔들릴 정도의 함성이다. 함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치우천왕 계단을 내려와 전차에 오르자 홀을 들어 출전을 명령한다. 천지화랑의 우두머리 다루선인이 3족오가 그려진 5방색기를 둘러 선기옥형을 보위하고 천왕의 전차에 한 마장 앞서 나간다. 치우천왕의 전차가 속보로 달리기 시작한다. 함성, 더욱 커진다. 천왕의 전차 뒤를 따르는 전차와 기마병들의 요란한 말굽소리에 백성들의 함성조차 빛을 잃는다. 햇빛에 번쩍거리는 병사들의 투구와 갑옷 그리고 전차들의 화려한 장식이 햇빛에 눈부시다. 넓고 길게 늘어선 치우천왕의 군사대열의 행진이 끊임없어 후세 사람들은 치우천왕의 중군 병마들이 궁성 앞을 지나는데 하루 밤낮이 족히 걸렸다고 기록했다.
# 달도 없는 한 밤중, 탁록의 공손헌원의 성, 동서남북 사방의 성문이 일제히 소리없이 열린다. 공손헌원의 기습 특공대가 바람처럼 성문을 열고 숨을 죽여 출정한다. 군사들과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말발굽은 두꺼운 가죽으로 감았으며 군사들도 모두 검정 옷을 입었다.
# 치우천왕의 진지, 치우천왕, 진지 안 높은 지대에 다섯 층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제단을 마련하여 3족오가 새겨진 5방색기를 세워 신장을 배치한 다음 몸소 제단 앞에 좌정하여 묵상하고 있다. 한식경이 못되어 주변이 흐려지더니 진지에 짙은 안개가 몰려든다. 진지는 순식간에 어둠에 싸인다. 안개 속의 진지는 타는 모닥불 빛이 희미하고 막사를 지키는 병사들 뿐,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이 때 소리 없이 스며드는 공손헌원의 특공대, 짙은 안개 속을 헤집고 여기저기에서 불화살이 오른다. 불화살 신호가 오르자 특공대, 일제히 함성을 울리며 진지를 급습한다. 모닥불이 말발굽에 치어 흩어지고 막사 앞을 지키고 섰던 병사들이 기습군의 칼을 맞아 쓰러진다. 그런데 몰아치는 기습군의 외침과 말발굽소리 뿐 천왕군의 저항이 없다. 칼로 내리친 병사들도 쓰러지기만 할 뿐 비명도 움직임도 없다. 쓰러진 병사들이 흩어진 모닥불에 붙어 불타올라 주위가 더욱 밝아진다. 모두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병사다.
기습군대장 : (상황을 간파하고) 아뿔사, 계략이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퇴각신호를 울려 라!
# 퇴각의 나팔이 울렸으나 기습군들 당황하여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한다. 자기들 끼리 부딪치고 넘어지는 모습이 불빛에 들어난다. 아비규환이다. 진지와 허수아비병사들이 모두 불에 잘 타는 마른 짚으로 위장되어 대낮처럼 불빛이 밝아진다. 그 불빛 속에 멀리 진지의 외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 삽시간에 진지를 향해 돌진하여 소리없이 기습군을 궤멸한다.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기습군, 무참한 비명 소리 요란하다.
# 공손헌원의 성, 기습특공대가 네 방면 모두 한결같이 술수에 걸려 전멸했다는 보고에 공손헌원 벌떡 일어나 수염을 잡아 뜯는다.
공손헌원 : (화를 누르지 못해서 수염이 부르르 떨린다.) 기습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허수아비병사들도 짚으로 만들어 기름을 붓고 진지에도 온통 기름칠을 하여 함정을 팠단 말이냐! 그래 한 놈도 살아오지 못하고 모두 도륙을 당해! 전멸했단 말이냐? 치 우가 제단에 태연히 앉아있는 걸 보고도 그냥 도망쳐왔어! (이를 부드득 갈며 칼로 탁 자를 내리친다.)
# 다음 날 유웅벌 공손헌원의 성, 날이 밝기도 전에 치우천왕의 병사들이 4개 방면의 성문을 중심으로 맹렬히 공격한다. 사방의 성문 앞에 각각 백 여 대의 발석기가 배치되어 돌이 날고 천 여 명씩의 병사들이 줄지어 서서 불화살을 공손헌원의 성 안으로 쏜다. 돌과 불화살이 마치 불티가 번지는 것처럼 나른다. 성 안은 온통 불바다가 된 듯 사방에서 불꽃과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성 위에 군사들이 있으나 가끔 화살을 날릴 뿐 저항이 거의 없다. 공손헌원의 화살은 치우천왕의 병사들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발석기와 불화살의 공격이 마무리 되자 수 백 개의 구름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지고 병사들이 기어오른다. 5가의 대장들이 앞장서서 사다리를 오른다. 그제야 성 안에서 공손헌원의 군사들이 돌을 굴리고 창으로 막으며 성벽을 기어오르는 치우천왕의 병사를 방어한다. 뜨거운 기름이 쏟아져 병사들이 기름불에 탄다. 갈고리로 사다리를 걸어 흔들어 밀어낸다. 사다리의 병사들 창에 찔리고 돌에 맞고 기름불을 뒤집어쓰고 갈고리에 걸려 쓰러지고 떨어진다.
치우천왕 : (진지에서 구름사다리 공격을 주시하며 조의선인 다루에게 지시한다.) 퇴각을 명하시오. 군사들의 희생을 막으시오!
조의선인 다루 : 전군, 퇴각의 북을 울려라!
# 공손헌원의 성, 공손헌원 성루에 장수들을 대동하고 서서 치우천왕의 진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공손헌원 : (칼을 들어 치우천왕의 진지를 가리키며) 너희들은 치우의 병사를 두려워하지 만 그들은 한낱 오합지졸일 뿐, 무서워서 달아나는 저 꼬락서니를 봐라! 말을 몰아 치 우의 진지를 일거에 들이칠 자 누군가!
장수 타모라 : 아니되옵니다, 대왕마마! 저 군세를 보십시오. 12제후의 군사가 유웅벌 100 리 사방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처음 기세를 잡았다고는 하나 치우천왕은 쉽게 대적 할 수 없습니다.
장수 설화추 : 적은 군세로 큰 상대를 맞받아치는 것은 일찍이 전략에 없는 일이오니 치우 의 군사와 맞대적하는 건 이롭지 못합니다. 100만 병력의 많은 군사를 먹이자면 필시 보급로가 사방으로 뻗쳐 있을 것입니다. 장기전으로 성을 지키면서 기습으로 보급로를 교란하여 서서히 몰락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 밤 보급로를 기습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공손헌원 : 보급로 기습을? 좋다, 치우의 군량을 남김없이 불태워라!
# 치우천왕의 중군 군량보관창, 저가의 수비대장이 협곡의 진지를 순시한다. 달이 기운 밤 중 공손헌원의 기습부대, 협곡의 뒷길로 들어선다. 협곡 양 벽이 양 손을 벌리면 닿을 듯 가깝다. 말이 한 줄로 늘어서 소리 없이 전진한다. 협곡을 벗어나자 분지가 나타나고 감춰진 양곡창을 2중 3중 목책으로 방어진을 구축해놓았다. 목책을 걷어내려고 군사들이 말에서 내려 목책에 손을 대는 순간 절벽 위에서 천둥소리가 나며 흙먼지와 함께 돌과 화살이 쏟아진다. 갑작스런 공격에 뒤로 물러설 여유조차 없이 화살과 돌에 맞고 깔려 죽는 공손헌원의 기습군들. 몇몇이 화살을 피해 되돌아서 말을 달렸지만 들어올 때는 없었던 목책이 퇴로를 막고 있다.
# 공손헌원의 성城
공손헌원 : (공손헌원 옥좌에서 일어섰다 앉았다 안절부절하며) 또 당했단 말이냐! (머리로 기둥을 들이받으며) 도대체 치우는 귀신이냐 도깨비냐? 오늘 밤 보급로 기습을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 치우천왕의 진지 천왕의 막사, 12제후국왕들과 신하들이 모여 있다. 공손헌원의 기습부대가 보급창을 기습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양운국왕 : 헌원은 변경을 약탈하여 싸움에 이긴 오만함으로 우리 군사를 깔보았다가 두 번 실패하였으므로 우리를 쉽게 보지 않고 이제는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려 할 것입 니다. 성의 공격이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천지화랑 다루 : (빙그레 웃으며) 발석기와 불화살로 성을 함락하려는 시도는 그들의 방어 력을 시험해보려는 공격전술이었소. 내일은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성벽을 치는데 발 석기를 성벽에 집중하시오. 성벽의 가장 취약한 부분, 성문과 성벽이 연결되는 곳에 집중적으로 맹타를 가하도록 하시오.
# 공손헌원의 성, 이른 아침부터 발석기 수 백 대가 성벽의 성문과 성벽의 이음새를 맹타한다. 끄떡도 하지 않던 성벽이 수없이 이어지는 발석기의 돌에 맞아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뚫리는 성벽. 윗부분이 헐리고 뚫리자 아랫부분이 힘없이 무너진다. 치우천왕의 병사들 함성을 올리며 성 안으로 쇄도한다.
# 공손헌원의 궁성宮城, 치우천왕 옥좌에 높이 앉아 있고 오랏줄로 묶인 공손헌원은 봉두난발蓬頭亂髮의 모습이 마치 맹수猛獸를 연상케한다. 치우천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치우천왕 : 고개를 들어 짐을 보라! 되지도 않을 기습작전을 꾀하고 천왕군에게 어이없게 체포되는 너 따위 도적의 무리가 감히 천신의 나라를 노략질한단 말이냐! 죽어 마땅하 다!
공손헌원 :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천왕마마를 몰라 뵈웠습니다. 미련한 꾀가 오늘의 화 를 자초하였으니 불쌍히 여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치우천왕 : 너는 이미 짐의 변방을 수십 번이나 침탈하여 노략질을 자행하였기에 짐의 장
수들을 보냈으나 약은 꾀와 제 강함만 의지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복치 않았으며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강탈을 한 죄 크다. 짐이 여러 번 덕화로 교화시키려 하였었 는데도 짐을 기만하였으니 그 죄 더욱 크다. 끌어내어 목을 치라!
재상 발귀리 : (읍하고 앞으로 나서며) 공손헌원은 비록 도적의 무리나 용력이 뛰어나고 사 람들이 따르는 재주가 있습니다. 덕화를 입는다면 치세에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공 손헌원을 내려다 보며)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면 성덕에 따르겠는가?
공손헌원 : (머리를 조아리며) 용렬한 재주를 내세워 천왕의 심기를 어지렵혔습니다. 덕화 를 베풀어주시면 충성하겠습니다.
치우천왕 : 결박을 풀어라! (공손헌원을 내려다보며) 그대는 비록 도적의 우두머리였으나 덕치의 모습이 있다. 덕화의 경지를 깨우친다면 백성들이 따를 것이다. 공손헌원을 탁 록의 성주로 삼는다. 덕화로 다스리라!
중국호남성화원현 중국 황제 탁록중화삼조당 탁록중화삼조당
치우천왕상 탁록전쟁복원도 치우상과 전쟁도 목제 치우상
‘운급헌원기雲笈軒轅記’ 는 공손헌원이 무리를 규합하는 용력이 있다하나 돌과 활로써 어찌 치우천왕을 당해내겠는가. 치우천왕은 처음으로 구리 투구와 철편 갑옷을 사용했으며 안개를 부르고 천지조화를 부렸다. 사람들은 이런 치우천왕을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 그리고 쇳가루를 먹고 불을 토하며 바람과 안개를 부린다’ 라며 놀라고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더불어 천왕은 유의자를 독려하여 돌을 날려 보내는 발석기를 만들어 적의 진지를 맹타했으며, 수레를 동원하여 보급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공손헌원의 진지를 궤멸하니 공손헌원이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로써 10년 동안 73회에 걸친 공손헌원과 전쟁이 끝나고 서쪽으로는 예탁(바이칼호수 지역)의 땅을 지키고 동쪽으로는 회대(요동지역)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했다. ( Daum Blog 인용)
# 중국 남경비행장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도깨비기자. 초조한 기색이다. 낯선 사내가 택시를 잡으려는 것처럼 하며 접근한다. 도깨비기자, 멈칫 놀라 주위를 살핀다. 공항 입구라서 사람들이 왕래가 빈번하다. 안심해도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사내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사내는 도깨비기자를 스쳐가듯 지나며 ‘선생, 감시당하고 있으니 조심하시오.’ 하고는 미쳐 뭐라고 말 할 틈도 주지 않고 걷던 발걸음 그대로 뚜벅뚜벅 사라진다. 공항에서 출구를 빠져나올 때부터 감시당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비행기 안에서부턴지도 모른다. 비행기라서 잠깐 주변을 소홀히 하고 어깨 너머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게 가슴이 선뜻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지금 자기에게 주목하는 시선은 없다. 그러나 뒷통수에 의식되는 시선의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택시가 도착했다. 택시를 타면서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의심갈만한 징후는 없다. 그러나 도깨비기자는 알 수 없었다. 멀리 공항 안에서 유리창틀 그늘에 기대 도깨비기자를 추적하며 휴대전화로 어딘가로 줄기차게 통화를 하고 있는 사람을 도깨비기자가 알아채기는 어려웠다. 사내는 도깨비기자가 탄 택시가 가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급하게 통화를 하고 있다.
# 중국,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縣 중화시中華市 3조당祖堂의 도깨비기자. 사당에는 관람객으로 보이는 몇 사람들 뿐, 도깨비기자가 들어서자 사당지기의 얼굴이 긴장한다. 도깨비기자가 그 걸 놓칠 리 없다. ‘벌써 손길이 닿았군.’ 도깨비기자는 모르는 척 천천히 치우천왕 목상을 보고 영정을 감상하며 사당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벽화 앞에 선다. ‘탁록전쟁복원도蚩尤天王 涿鹿戰爭復元圖 - 황제헌원皇帝軒轅과 치우천왕 전쟁도’ 라는 부제副題가 붙어있다. 3조당이 중국의 신화적 시조를 모신 사당이라면 태호복희, 염제신농 그리고 황제헌원을 안치해야 하는데 치우천왕상과 영정이 중국의 시조로 모셔져 있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전쟁복원도를 만들고 게시한 일이다. 치우천왕은 황제헌원과 10여 년 간 73회의 영토전쟁을 했다. 왜 중국인들이 치우천왕을 자기들의 역사적 시조로 편입시키려는 걸까? 동북공정의 논리대로 고조선까지 고대중국의 변방으로 치부하려는 속셈이 아닐까? 오히려 황제헌원이 고조선에서 축출당한 변방의 무리였거늘, 스스로 중화라 자존하며 주변 국가의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는 짧은 생각이 스쳤다. 세로로 길게 펼쳐진 전쟁복원도를 살피다가 그림의 중심에서 치우천왕의 깃발과 나란히 서있는 선기옥형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 선기옥형! 도깨비기자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선명하게 들어나는 선기옥형, 선기옥형을 수레에 안치하고 3족오가 새겨진 5방색기를 든 병사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선기옥형, 운곡선생에게서 들은 바 있었지만 실제로 선기옥형 앞에 서게 된 도깨비기자는 정수리에서부터 가슴으로 이어지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선기옥형 호위무사들 중에서 약간 들어나게 처리한 신장 독고휘장군의 모습이 눈에 확연하게 띠었다. 고봉학술원을 나설 때 운곡선생이 귀띰한 독고가문의 시조, 도깨비기자의 시선은 선기옥형과 독고휘장군에 고정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도깨비기자의 시선이 전쟁터로 옮아갔다. 기병과 보병의 호위 안의 치우천왕은 선기옥형을 앞세우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천왕 앞에 선기옥형을 내세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운곡선생의 해설 그대로였다. ‘사진 촬영 금지’ 를 의식하며 일부러 취재용 카메라를 들어나게 어께에서 추스렸다. 사진을 촬영하지 않고 있다는 표시였다.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사당지기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멀리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척 자켓 안에 감춘 소형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찰칵! 셔터가 터지는 금속성이 도깨비기자의 신경에 날카롭게 닿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당지기가 ‘폐문시간입니다’ 라며 다가왔다. 사당을 나서면서, 전쟁복원도를 가리키며 그림의 화가에 대해 아는 바 있느냐고 묻자 직원은 말없이 책상 위에 놓였던 팜프렛을 한 장 주었다. 팜프렛에서 화가의 명세를 알 수 있었다. 제원사 화공畵工. 대기시켜놓은, 택시기사는 택시 안에서 운전석의자를 밀쳐내고 가볍게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 있었다. 택시기사를 깨워 제원사를 물었더니 8Km 쯤 떨어진 산 속이라고 했다.
* 한단고기桓檀古記 치우천왕蚩尤天王 편篇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독고휘獨孤徽 장군에게 5방색기方色旗를 내리고 천부인天符印의 보위保衛를 명命했다. 또 색도(산동성 임치현 동남쪽 성城의 이름)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회수淮水와 대산垈山 사이, 중원의 곡창, 한족桓族의 땅, 주周 나라 목왕穆王 때 결전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서언왕徐偃王의 대서제국大徐帝國의 터)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5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 한웅천왕桓雄天王의 신시神市시대,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친정親征한 탁록涿鹿전쟁 기록에 의하면 치우천왕은 선기옥형을 신주로 모시고 전쟁터에 나갔다. 선기옥형은 5방색기로 에워싸고 병사 300여 명이 호위했는데 그 호위 책임자가 독고휘장군이었다. 독고휘장군은 예사 무사가 아니라 고조선의 소도蘇塗(제사祭祀)를 관장하는 신장神將, 천지화랑이었다. 독고휘장군의 기록은 환웅천왕의 신시시대 역사에 처음 나온다. 독고씨의 문중에서는 중시조의 기록부터 족보가 만들어져서 독고휘장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중국으로 나오기 전 운곡선생의 해설을 확인코자 이를 (독고가獨孤家)문중 어른들에게 자문해보았지만 ‘그런 말들이 세간世間에 전해져 내려온다’ 는 정도의 전설로 치부되고 있었다.
# 제원사는 절이 아니라 사당祠堂인성 싶었다. 중국 사람들은 절과 사당을 구분하지 않았다. 입구 바짝 차를 대어 도깨비기자를 내려놓은 택시기사는 차문을 열어놓고 기지개를 켰다. 차를 대기시켜놓은 도깨비기자는 사당으로 들어서다가 입구에 높이 걸린 사당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제원사濟願祠’, 붉은 바탕의 흰 글씨에 덕지덕지 세월이 묻어있었다. 색이 바래 붉은 바탕과 흰 글씨가 구분이 안 될 만큼 희미했다. 애초에 단청이 있었는지도 모를 지경으로 세월에 깎인 현판목재의 무늬결이 돋을무늬처럼 들어났다. 도깨비기자가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을 쓸고 있던 노인이 돌아보았다.
도깨비기자 : 화공스님을 뵈러왔습니다.
노인 : (귀를 바짝 들이대며) 뭐라고?
도깨비기자 : (한층 목소리를 높여) 그림 그리는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 노인은 빗자루를 세운 체 손짓으로 안채를 가리켰다. 도깨비기자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돌아섰다. 손바닥만한 마당을 가로질러 중문을 넘어서자 ㄷ자형 건물이 나타났다. 왼쪽 건물에 신발이 놓였고 인기척이 있었다. 문 앞에서 도깨비기자가 기침을 하자 방문이 열렸다. 목에 염주를 건 노인이 엉거주춤 밖을 내다보다가 손님이 온 걸 보고는 댓돌로 내려섰다.
도깨비기자 : (깊이 머리를 숙여 합장을 하고) 화공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중화시 3조당에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의 탁록전쟁복원도를 그렸다는 스님을 찾습니다.
스님 : 들어오십시오. (도깨비기자에게 의자를 권하며) 한국에서 오셨나요?
도깨비기자 : 예, 금방 알아보시는군요.
스님 : 한국 사람들이 몇 번 다녀갔습니다. 이 사당은 마을 사람들 외에는 찾는 사람이 없 었는데 근래 한국과 중국 관리들이 더러 찾아왔지요. 손님도 탁록전쟁복원도의 선기옥 형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닙니까?
도깨비기자 : (당황하며) 그렇습니다.
스님 : 차차 설명해드릴테니, 먼저 새鳥 점占을 보시지 않겠습니까?
도깨비기자 : 새 점이라면?
스님 : (사당 구석을 가리키며) 기러기점을 보는 것이 소승의 직업입니다.
# 그제야 도깨비기자 사당을 둘러본다. 짐작한대로 도교道敎 신선상神仙像이 안치되어 있는 도교사당이었다. 사당 오른편 구석에 조롱이 있고 기러기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기러기는 가로대에 앉아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스님 : (조롱에서 기러기를 꺼내들고) 선생이 알고싶은 것은 현생 보다는 전생인 듯 한데 … (기러기를 모래를 담은 입이 넓은 쇠항아리에 놓는다. 기러기가 이리저리 걷는다. 한참 기러기가 걷는 것을 주시하고 있던 스님이 기러기를 다시 조롱에 넣고 항아리에 새겨진 기러기발자국을 살핀다.) 선생은 전생에는 무사였군요. 무사는 무사인데 향 냄새 에 둘러싸인 무사라? 무슨 뜻인지? 선생이 짐작해보구려, 나도 모르겠으니. 선생의 기 질이 무인을 닮지 않았나요? 선생의 집안 내력을 보면 무사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입 니다. 아마, 먼 옛날 큰 변란에 휩쓸려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 이후 선 생의 집안은 몰락했고 옛 시대의 전통마저 흐트러졌군요. 선생에게서는 칼 냄새와 향 냄새가 함께 납니다. 스님들처럼 짧게 깎은 머리, 검은 옷 그리고 참선 같은 수련. 선생 은 지금 무예나 도검 관계 일을 하지 않나요? 어떻습니까 기러기점이, 황당하지는 않지 요? (노승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선생도 선기옥형을 찾나본데 ….
도깨비기자 : (지폐 몇 장을 탁자 위에 놓으며) 스님이 그린 전쟁복원도의 선기옥형은 실물 을 그린 것입니까?
스님 : (탁자에 놓인 지폐를 가늠하듯 일별하고는) 물론입니다. 제 눈으로 목격한 실물을 그 렸습니다.
도깨비기자 : 내력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 스님이 고개를 돌려 다시 탁자에 놓인 지폐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말이 없다. 도깨비기자,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첫 번째 보다 더 많은 지폐를 스님이 보란 듯이 낱낱이 세서 탁자에 놓는다.
스님 : (또 장난스럽게 눈을 꿈벅거리며) 실물을 그린 거라면 그 걸 언제 어디서 봤냐고 묻
고싶은 거 아닌가요? 번번이 그랬지만, 새 점 치는 사람에게 새 점에는 관심이 없고 그
림만 묻겠다니 원. (혀를 끌끌 찬다.)
고구려 무용총 남해각서(고조선 만주 고구려장군총 천부경 일반화
사냥도 상형문자 추정) (Ziggurat 제단祭壇 추정) 윷놀이말판
* Daum Blog 인용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2/22화 : 1. 고조선시대(2/6) - 한인시대, 한웅시대>
군신軍神, 치우蚩尤의 깃발
(삽화 - 군신 치우천왕)
치우천왕 치우천왕상 중국 산동성 치우천왕
캐릭터 * 그림, Daum Blog 인용 치우천왕묘 사적표지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임승국의 한단고기)
* 치우천왕蚩尤天王 - 고조선 한웅천왕의 신시神市시대 14세世 자오지한웅, 한기 4490년(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誌>에 치우천왕의 능陵(묘墓)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다. 높이가 7척尺(약 21미터)으로 중국 한漢나라 때 10월이면 백성들이 제사를 모셨는데 붉은 기운이 띠 모양으로 뻗쳐올라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했다. 하느님으로써 3신神에 제사를 지내는데 군사軍司의 신神으로써 치우천왕 제사하니 3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천왕은 만고 무신武神으로써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했으며 비와 바람을 부르고 귀신들을 부렸다. 한漢의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치우천왕에게 제사를 모셨고 한왕漢王이 되어서도 장안長安에 치우천왕의 사당祠堂을 지었다. 후세에 관자管子는 이를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 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라고 썼다. 강태공이 치우천왕의 후손이다. 중국의 역사학자 왕동령은 <중국민족사>에서 <4000년 전…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 들어오게 된 후에 이들과 융화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는 구려九黎, 군주君主는 치우다. 묘족은 현대의 묘족이다>라고 했다. 한웅천왕 신시시대의 강역疆域은 유럽 서남부에서 시베리아 동남부, 만주, 티베트, 이란, 이라크를 포함한 남북 50,000리(25,000Km), 동서 20,000리(10,000Km)의 광대한 영토였다. 이를 3한관경제韓觀境制로 다스렸다. 일붕 서경보 스님이 티벳을 방문하여 치우천왕의 사적史蹟인 옛 장당경을 확인하고 조선일보에 여행기를 쓴 일이 있음
* 신지 우야고
* 조의선인皁衣仙人 다루- 검은 색 조복朝服을 입은 무사武士 계급의 우두머리, 천지화랑天指花郞, 국자랑國子郞, 고구려 때 조의선인이라 부름, 화랑花郞의 원류原流, 한국 선가仙家의 표본標本
* 운사 유소 - 고대古代의 성자聖者,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사는 일과 짐승들의 피해를 방지하는 방법을 가르침, 선기옥형璿璣玉衡(혼천의渾天儀) 창제, 나라의 제사 주관
* 풍백 유위자 - 국자랑國子郞(천지화랑)의 스승, 발석기發石機(나무의 탄력彈力을 이용하여 무게 40 - 50kg의 돌을 100여미터 날리는 전쟁 무기)와 수레 특히 바퀴의 창제. 인류사에서 불의 사용과 함께 바퀴의 사용이 인류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된 사건으로 꼽는데 요즘 발굴된 고대자료를 해석하여 수메르를 바퀴 창제의 효시嚆矢(처음)로 보고 있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서 수메르는 수밀이須密爾(소말蘇末)로써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12부족의 열두 번째 막내 국가
* 5가加 - 우가牛加(소를 상징으로 하는 부족, 곡식을 맡아 주관), 마가馬加(말, 목숨), 구가狗加(개, 형벌), 저가猪加(돼지, 군사), 양가羊加(양, 선악)로 왕으로 선출되는 자격을 가진 고대국가 화백제도和白制度(고대古代 공화제共和制)의 원로元老였으며 5가 아래 64족장族長이 있었음
* 한웅의 신시시대 한국연방桓國聯邦 12제후국왕諸侯國王
* 공손헌원(황제헌원, 중국 3황5제의 하나, 중국 한족의 역사적 시조) -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변방邊方 도적의 두목으로 무리를 모아 노략질하다가 차차 강성해지자 스스로 왕이라 말하고 치우천왕의 영토를 노략질함
* 하삭河朔 - 현대의 이란과 이라크 지방, 고대에는 기름진 평원이었으며 수메르의 에덴동산이 자리 잡음
* 옛글(3성기三聖記 전全 하편下篇)에 말한다. 파나류산波奈留山(불함산, 하르빈 남쪽 완달산)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바이칼호 또는 북해北海) 동쪽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0,000리(25,000Km)요 동서가 20,000리(10,000Km)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시위국豕韋國,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이니 합해서 12국이다. 한님의 나라 막내 수밀이국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룬 수메르임
안파견 한인천왕 거발한 한웅천왕 성모 웅녀상
* 그림, Daum Blog 김산호 화백
* 고조선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1대 한인(안파견) 한기 원년(BC. 7197년) - 7대 지위리(단인)
한기 3299년(BC. 3898년), 7대 3301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한인(안파견安巴堅) | BC.7197 | * 천제한임天帝檀任, 한국桓國 개국, |
2대 | 혁서 |
| / 인류 조상 나반那般과 아만阿曼, |
3대 | 고시리 |
| / 9한九桓의 무리는 후손, 한인, 한임, |
4대 | 주우양 |
| / 단임, 한님. 홍익인간弘益人間 서자庶子 |
5대 | 석제임 |
| / 한웅桓雄 추천, 반고盤固, |
6대 | 구을리 |
| / 가한可汗이라함 |
7대 | 지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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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1대 한웅(거발한) 한국기원(한기) 3299년 (BC. 3898년) - 18대 거불단(단웅)
한기 4816년(BC. 2381년), 18대 1565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한웅(거발한) | 94 | BC. 3898, 태백산 신단수 신시 도읍, 국호 배달, |
2대 | 거불리 | 86 | 3804 / 웅씨녀 혼인 선군 출생, |
3대 | 우야고 | 99 | 3718 / 한족桓族 기원基源 |
4대 | 모사라 | 107 | 3619 |
5대 | 태우의 | 93 | 3512 |
6대 | 다의발 | 98 | 3419 |
7대 | 거련 | 81 | 3321 |
8대 | 안부련 | 73 | 3240 |
9대 | 양운 | 96 | 3167 |
10대 | 갈고(독로한) | 100 | 3071, 염제신농炎帝神農과 국토 경계 정함 |
11대 | 거야발 | 92 | 2971 |
12대 | 주무신 | 105 | 2879 |
13대 | 사와라 | 67 | 2774 |
14대 | 자오지(치우) | 109 | 2707, 군신軍神, 동철기문화, 군대 조련, |
15대 | 치액특 | 89 | 2598 / 염제신농 침략, 황제헌원黃帝軒轅 |
16대 | 축다리 | 56 | 2509 / 사로잡아 신하로 삼음 |
17대 | 혁다세 | 72 | 2453 |
18대 | 거불단(단웅) | 48 | 2381 |
창덕궁 육군사관학교박물관 김산호 화백 김산호 화백
귀면기와 투구 귀면도 탁록대전도 치우천왕상
중국 호남성 중국 치우와 헌원 중국 화원현 삼조당 삼조당
치우상 탁록대전도 치우대전도 목제 치우상
* 그림, Daum Blog 인용
# 한기 4490년(BC. 2707년) 늦은 여름,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14세 천왕 자오지한웅(치우천왕)의 궁전, 천왕이 옥좌에 좌정하고 계단 아래 대신들과 장수들이 늘어서있다.
* 운사 유소 : (도열한 줄에서 한 발 앞으로 나서 읍하며) 천왕께옵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와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 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사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시어 삶을 숭상하셨나이다. 우리나라는 남북 50,000리와 동서 20,000리의 3한관경을 관장하온 바 국세가 강대하고 권역은 넓어 아직 왕화가 미치지 않은 변방이 있사옵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범족은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웃을 강탈하고 침범하여 행패가 자심하므로 멀리 하삭으로 내침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 신지 우야고 : 운사의 말씀이 합당합니다.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불온한 무리를 평정하여 왕화를 누리소서.
* 치우천왕 : 옳은 말씀이요. 하삭에는 누구를 보낼꼬?
* 신지 우야고 : 구가의 우두머리 소호대장이 적임인줄 아옵니다.
* 치우천왕 : (구가의 우두머리 소호를 불러) 소호대장은 범족을 하삭으로 이주시켜 교화하라!
* 조의선인 다루 : 아뢰옵니다. 변방의 유망이 다스리는 정권이 쇠약한지라 정사가 어지러움으로 백성이 동요하나이다. 군사를 보내 평정하소서.
* 치우천왕 : 좋은 말씀이요. 저가대장 을보라를 파견하라!
* 조의선인 다루 : 천하는 태평성대이오나 변방에 작은 도적들의 무리가 횡행하여 끊임없이 변경을 노략질 한 바 관경의 수비를 게을리 할 수 없는 법, 5가의 집안과 황실에서 장수될 인재를 가려 뽑아 양성코자합니다.
* 치우천왕 : 합당하다, 시행하라! 장수될 인재를 훈련 육성하여 각 부대의 대장으로 삼고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긴칼), 모극(양날창), 대궁(큰활), 호시(호나무로 만든 강한 화살)를 많이 만들어 굳센 병사를 양성하여 변경의 안정을 도모하라! 변방을 평정하지 않고 짐은 궁궐에서 쉬지 않겠다. 한국연방 12제후국에 격문을 알리라! 특히 공손헌원은 왕화로 덕을 베풀려는 짐을 능멸하고 70여회의 침탈을 자행하여 그 방자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므로 이제 더 방관할 수 없다. 짐이 몸소 출전하여 공손헌원과 변방의 도적을 박멸함으로써 왕권의 위대함을 보이리라. 지금 즉시 12연방에 군사 동원령을 하달하여 격문을 돌리고 한 달 뒤 탁록의 유웅벌에 집결토록 하라!
격문에 일렀으되, 공손헌원은 본래 소전의 별고이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로 유배시켰다. 헌원의 무리는 그의 후손이다. 공손헌원과 도적의 무리들이 왕화가 미치지 않은 변경에서 일어나 무리를 모아 변경의 작은 읍성을 침탈하고 핍박한지 오래, 짐이 매양 병사를 보냈으나 그 기세를 꺾지 못하여 점점 오만방자하여 이제는 왕도를 넘보려는 세를 이루었으므로 이제 궤멸치 않으면 천왕의 왕화에 작은 부덕이 되리라. 이에 12제후 국왕에게 명하노니 다음에 따르라!
첫째, 12제후 국왕은 한 달 뒤 탁록의 유웅벌에 모인다.
둘째, 12제후 국왕은 기병 1,000과 보병을 동원하라.
셋째, 12제후 국왕은 4군으로 편성하되
제 1군은 중군으로 삼아 짐이 통솔하고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을 편성하여
동쪽을 평정한다.
제 2군은 마가의 대장이 통솔하고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으로 편성하여
북쪽을 평정한다.
제 3군은 저가의 대장이 통솔하고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으로 서쪽을 평정한다.
제 4군은 우가의 대장이 통솔하고 사납아국, 선비국, 수밀이국으로 편성하여
남쪽을 평정한다.
# 파발마들 사방의 성문에서 나와 12연방의 제후국으로 달린다.
# 치우천왕 출전의 날 아침의 궁성 앞 출전의 광장, 웅장한 석주들로 떠받친 제단 앞 옥좌에 금빛 찬란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치우천왕이 앉아있고 그 옥좌 아래로 300여단의 층계 밑에 수 백 명의 원로제신들이 양편으로 늘어서있다. 뒤에는 화려하게 차려 입은 귀부인들이 계단 밑까지 줄지어 서고 이어서 궁성의 문까지 수 천 명의 기마병과 전차들이 대오를 갖추고 있다. 기마병들 뒤편에 출전을 환송하는 백성들 수 천 명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출전의 나팔소리가 우렁차게 광장을 뒤흔든다. 치우천왕 일어서서 백옥의 홀을 높이 흔든다. 도열한 제신들과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이 환호한다. 광장이 흔들릴 정도의 함성이다. 함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치우천왕 계단을 내려와 전차에 오른다. 홀을 들어 출전을 명령한다. 치우천왕의 전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함성 더욱 커진다. 천왕의 전차 뒤를 따르는 전차와 기마병들의 요란한 말굽소리에 백성들의 함성조차 빛을 잃는다. 햇빛에 번쩍거리는 병사들의 투구와 갑옷 그리고 전차들의 화려한 장식이 햇빛에 눈부시다. 넓고 길게 늘어선 치우천왕의 군사 대열의 행진이 끊임없어 후세 사람들은 치우천왕의 군사와 병마들이 궁성 앞을 지나는데 한나절이 족히 걸렸다고 기록했다.
# 달도 없는 한 밤중, 탁록의 공손헌원의 성 동서남북 사방의 성문이 일제히 소리없이 열린다. 공손헌원의 기습 특공대가 바람처럼 성문을 열고 숨을 죽여 출정한다. 군사들과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말발굽은 두꺼운 가죽으로 감았으며 군사들도 모두 검정 옷을 입었다.
# 치우천왕의 진지, 치우천왕, 진지 안 높은 지대에 다섯 층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제단을 마련하여 5방색기를 세워 신장을 배치한 다음 몸소 제단 앞에 좌정하여 묵상하고 있다. 한식경이 못되어 주변이 흐려지더니 진지에 짙은 안개가 몰려든다. 진지는 순식간에 어둠에 싸인다. 안개 속의 진지는 타는 모닥불 빛이 희미하고 막사를 지키는 병사들 뿐,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이 때 소리 없이 스며드는 공손헌원의 특공대, 짙은 안개 속을 헤집고 여기저기에서 불화살이 오른다. 불화살 신호가 오르자 특공대 일제히 함성을 울리며 진지를 급습한다. 모닥불이 말발굽에 치어 흩어지고 막사 앞을 지키고 섰던 병사들이 기습군의 칼을 맞아 쓰러진다. 그런데 몰아치는 기습군의 외침과 말발굽 소리 뿐 천왕군의 저항이 없다. 칼로 내리친 병사들도 쓰러지기만 할 뿐 비명도 움직임도 없다. 쓰러진 병사들이 흩어진 모닥불에 붙어 불타올라 주위가 더욱 밝아진다. 모두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병사다.
* 기습군대장 : (상황을 간파하고) 아뿔사, 계략이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퇴각 신호를 울려라!
퇴각의 나팔이 울렸으나 기습군들 당황하여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한다. 자기들 끼리 부딪치고 넘어지는 모습이 불빛에 들어난다. 아비규환이다. 진지와 허수아비 병사들이 모두 불에 잘 타는 마른 짚으로 위장되어 대낮처럼 불빛이 밝아진다. 그 불빛 속에 멀리 진지의 외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 삽시간에 진지를 향해 돌진하여 소리없이 기습군을 궤멸한다.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기습군, 무참한 비명 소리 요란하다.
# 공손헌원의 성, 기습특공대가 네 방면 모두 한결같이 술수에 걸려 전멸했다는 보고에 공손헌원 벌떡 일어나 수염을 잡아 뜯는다.
* 공손헌원 : (화를 누르지 못해서 수염이 부르르 떨린다.) 기습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허수아비 병사들도 짚으로 만들어 기름을 붓고 진지에도 온통 기름칠을 하여 함정을 팠단 말이냐! 그래 한 놈도 살아오지 못하고 모두 도륙을 당해! 전멸했단 말이냐? 치우가 제단에 태연히 앉아있는 걸 보고도 그냥 도망쳐왔어! (이를 부드득 갈며 칼로 탁자를 내리친다.)
# 다음 날 유웅벌 공손헌원의 성, 날이 밝기도 전에 치우천왕의 병사들이 4개 방면의 성문을 중심으로 맹렬히 공격한다. 사방의 성문 앞에 각각 백 여 대의 발석기가 배치되어 돌이 날고 천 여 명씩의 병사들이 줄지어 서서 불화살을 공손헌원의 성 안으로 쏜다. 돌과 불화살이 마치 불티가 번지는 것처럼 나른다. 성 안은 온통 불바다가 된 듯 사방에서 불꽃과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성 위에 군사들이 있으나 가끔 화살을 날릴 뿐 저항이 거의 없다. 공손헌원의 화살은 치우천왕의 병사들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발석기와 불화살의 공격이 마무리 되자 수 백 개의 구름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지고 병사들이 기어오른다. 5가의 대장들이 앞장서서 사다리를 오른다. 그제야 성 안에서 공손헌원의 군사들이 돌을 굴리고 창으로 막으며 성벽을 기어오르는 치우천왕의 병사를 방어한다. 뜨거운 기름이 쏟아져 병사들이 기름불에 탄다. 갈고리로 사다리를 걸어 흔들어 밀어낸다. 사다리의 병사들 창에 찔리고 돌에 맞고 기름불을 뒤집어쓰고 갈고리에 걸려 쓰러지고 떨어진다.
* 치우천왕 : (진지에서 구름사다리 공격을 주시하며 조의선인 다루에게 지시한다.) 퇴각을 명하시오. 군사들의 희생을 막으시오!
* 조의선인 다루 : 전군, 퇴각의 북을 울려라!
# 공손헌원의 성, 공손헌원 성루에 장수들을 대동하고 서서 치우천왕의 진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 공손헌원 : (칼을 들어 치우천왕의 진지를 가리키며) 너희들은 치우의 병사를 두려워하지만 그들은 한낱 오합지졸일 뿐, 무서워서 달아나는 저 꼬락서니를 봐라! 말을 몰아 치우의 진지를 일거에 들이칠 자 누군가?
* 장수 타모라 : 아니되옵니다, 대왕마마! 저 군세를 보십시오. 12제후의 군사가 유웅벌 100리 사방을 에워싸고 있 습니다. 처음 기세를 잡았다고는 하나 치우천왕은 쉽게 대적할 수 없습니다.
* 장수 설화추 : 적은 군세로 큰 상대를 맞받아치는 것은 일찍이 전략에 없는 일이오니 치우의 군사와 맞대적하는 건 이롭지 못합니다. 100만 병력의 많은 군사를 먹이자면 필시 보급로가 사방으로 뻗쳐 있을 것입니다. 장기전으로 성을 지키면서 기습으로 보급로를 교란하여 서서히 몰락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 밤 다시 보급로를 기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공손헌원 : 다시 기습을? 좋다, 치우의 보급를 모두 불태워라!
# 치우천왕의 중군 양곡보관창, 저가의 수비대장이 협곡의 진지를 순시한다. 달이 기운 밤 중 공손의 기습부대 협곡의 뒷길로 들어선다. 협곡 양 벽이 양 손을 벌리면 닿을 듯 가깝다. 말이 한 줄로 늘어서 소리 없이 전진한다. 협곡을 벗어나자 분지가 나타나고 감춰진 양곡창을 2중 3중 목책으로 방어진을 구축해놓았다. 목책을 걷어내려고 군사들이 말에서 내려 목책에 손을 대는 순간 절벽 위에서 천둥소리가 나며 흙먼지와 함께 돌과 화살이 쏟아진다. 갑작스런 공격에 뒤로 물러설 여유조차 없이 화살과 돌에 맞고 깔려 죽는 공손헌원의 기습군들. 몇몇이 화살을 피해 되돌아서 말을 달렸지만 들어올 때는 없었던 목책이 퇴로를 막고 있다.
# 공손헌원의 성
* 공손헌원 : 또 당했단 말이냐! (머리로 기둥을 들이받으며) 도대체 치우는 귀신이냐 도깨비냐? 오늘 밤 보급로 기습을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 치우천왕의 진지 천왕의 막사, 12제후국왕들과 신하들이 모여 있다. 공손헌원의 기습부대가 보급창을 기습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 양운국왕 : 공손은 변경을 약탈하여 싸움에 이긴 오만함으로 우리 군사를 깔보았다가 두 번 실패하였으므로 우리 를 쉽게 보지 않고 이제는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려 할 것입니다. 성의 공격이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 조의선인 다루 : (빙그레 웃으며) 발석기와 불화살로 성을 함락하려는 시도는 그들의 방어력을 시험해보려는 공격전술이었소. 내일은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성벽을 치는데 발석기를 성벽에 집중하시오. 성벽의 가장 취약한 부분, 성문과 성벽이 연결되는 곳에 집중적으로 맹타를 가하도록 하시오.
# 공손헌원의 성, 이른 아침부터 발석기 수 백 대가 성벽의 성문과 성벽의 이음새를 맹타한다. 끄떡도 하지 않던 성벽이 수없이 이어지는 발석기의 돌에 맞아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뚫리는 성벽. 윗부분이 헐리고 뚫리자 아랫부분이 힘없이 무너진다. 치우천왕의 병사들 함성을 올리며 성 안으로 쇄도한다.
# 공손헌원의 궁성, 치우천왕 옥좌에 높이 앉아 있고 오랏줄로 묶인 공손헌원은 봉두난발의 모습이 마치 맹수를 연상케한다. 치우천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 치우천왕 : 고개를 들어 짐을 보라! 되지도 않을 기습 작전을 꾀하고 적에게 어이없게 체포되는 너 따위 도적의 무리가 감히 천신의 나라를 노략질한단 말이냐! 죽어 마땅하다!
* 공손헌원 :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천왕마마를 몰라 뵈웠습니다. 미련한 꾀가 오늘의 화를 자초하였으니 불쌍히 여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 치우천왕 : 너는 이미 짐의 변방을 수십 번이나 침탈하여 노략질을 자행하였기에 짐의 장수들을 보냈으나 약은 꾀와 제 강함만 의지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복치 않았으며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강탈을 한 죄 크다. 짐이 여러 번 덕화로 교화시키려 하였었는데도 짐을 기만하였으니 그 죄 더욱 크다. 끌어내어 목을 치라!
* 신지 우야고 : (읍하고 앞으로 나서며) 공손헌원은 비록 도적의 무리나 용력이 뛰어나고 사람들이 따르는 재주가 있습니다. 덕화를 입는다면 치세에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공손헌원을 내려다 보며)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면 성덕에 따르겠는가?
* 공손헌원 : (머리를 조아리며) 용렬한 재주를 내세워 천왕의 심기를 어지렵혔습니다. 덕화를 베풀어주시면 충성하 겠습니다.
* 치우천왕 : 결박을 풀어라! (공손헌원을 내려다보며) 그대는 비록 도적의 우두머리였으나 덕치의 모습이 있다. 덕화의 경지를 깨우친다면 백성들이 따를 것이다. 공손헌원을 탁록의 성주로 삼는다. 덕화로 다스리라!
<운급헌원기>는 공손헌원이 무리를 규합하는 용력이 있다하나 돌과 활로써 어찌 치우천왕을 당해내겠는가. 치우천왕은 처음으로 구리 투구와 철편 갑옷을 사용했으며 안개를 부르고 천지조화를 부렸다. 사람들은 이런 치우천왕을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 그리고 쇳가루를 먹고 불을 토하며 바람과 안개를 부린다 라며 놀라고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더불어 천왕은 유위자를 독려하여 돌을 날려 보내는 발석기를 만들어 적의 진지를 맹타했으며 수레를 동원하여 보급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공손헌원의 진지를 궤멸하니 공손헌원이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로써 10년 동안 73회에 걸친 공손헌원과 전쟁이 끝나고 서쪽으로는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으로는 회대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했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3/22화 : 1. 고조선시대(3/6) - 한웅시대>
우주 섭리攝理의 지혜, 선기옥형璿璣玉衡
(삽화 - 선기옥형)
조선시대 조선시대 천문도 신라시대 선군조선시대
선기옥형(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첨성대 마니산 참성단
* 그림, Daum Blog 인용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재승)
* 선우영달-이라크 파병 자이툰부대 정보장교, 이라크 저항군에게 피랍되었다가 탈출,수메르 점토판 가지고 귀국, 제대 뒤 선기옥형 제작 동참
* 운곡선생 - 국선도國仙道 관장館長, 역사 바로 세우기 모임의 원로元老
* 치우천왕, 운사 유소, 신지 발귀리, 풍백 유위자, 관상감박사 허드레
* 선기옥형璿璣玉衡(혼천의渾天儀) -천부경天符經의 사상을 담고 있고, 그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용도用道는 구조에 집약集約되어 있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질서를 본받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있다. 즉 위(천문天文)를 보고 아래(지리地理)를 보며 다음에 자신을 보며 행行하라는 것이다. 형이하학적 용도로써는 천지운행天地運行의 원리를 담고 있는 수리적 이치를 바탕으로 7정政(일월日月 + 금목수화토성星)과 28수宿의 운행을 관측하고 4계절 24절기의 기상 변동을 예측한다. 이로써 국가적 공공사업이나 사회적 변동을 대비하는 기능을 하였다. 수행이 뛰어나 심안이 계발된 사람이 운용하였으나 이는 천기天機로써 매우 신중하였다. 선기는 천체를 관측하다는 뜻이고 옥형은 옥으로 만든 저울을 뜻한다. 후세에 혼천의渾天儀라고 하였다. 요즘 과학자들은 경주의 첨성대를 천문관측대로써 선기옥형 같은 천문관측기구의 설치 장소로 재인식하고 있다. 선기옥형은 중국의 서경書經 우서虞書 제 2장 순전舜傳에 처음 나온다.
* 최초의 혼천의는 알렉산드린 그리스의 MeteoroskOpion(AD. 140년경)이지만 그 이전에도 고리 형태의 기기를 이용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 중국에서는 고대시대의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說에 기초하여 관측기구를 만들었는데 선기옥형, 혼의기渾儀器, 혼의로 부른다. BC. 104년에 역법曆法을 개량하였는데 관측기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 한국에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고조선시대의 원형을 3국시대 후기에 복원하여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기록으로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 의상조儀象條>에 세종의 명으로 정초鄭招와 정인지鄭麟趾 등이 고전을 연구하고 이천李天과 장영실蔣英實이 공역工役을 감독하여 한기 8635년(AD. 1438년) 세종 20년에 혼상, 혼의 등을 비롯한 여러 천문의기를 만들었다. 혼천의는 원元나라의 학자 오징吳澄이 쓴 찬언纂言에 기재된 바에 따라 칠목漆木으로 만들었고 다시 구리를 부어 만들었다. 한기 8745년(AD. 1548년) 명종 3년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혼천의를 만들어 홍문관弘文館에 두었다. 한기 8798년(AD. 1601년) 선조 34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에게 명하여 혼천의를 만들었다. 한기 8854년(AD. 1657년) 효종 8년에는 최유지崔攸之가, 한기8866년(AD. 1669년) 현종 10년에는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潁이 각각 혼천의를 만들었다. 이는 물을 이용하는 수격식水擊式이었는데 송이영이 만든 것은 자명종自鳴鐘의 원리를 응용하여 추錘의 운동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국보 제 230호로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영국의 과학자 일행들이 탐방하였을 때 단장이었던 니덤이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에 모형을 진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혼천의에는 지평선, 자오선, 적도, 회귀선, 극권極圈, 황도 등이 포함되어 있고 두 추의 운동에 의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여러 개의 톱니바퀴로 연결되어 있으며 6합의六合儀, 3진의三辰儀, 지구의地球儀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한기 8884년(AD. 1687년) 숙종 13년 이민철이 현종대에 만든 것을 중수했으며 한기 8901년(AD. 1704년)에는 안중태安重泰, 이시화李時華 등이 다시 만들었고, 한기 8929년(AD. 1732년) 영조 8년에 안중태가 다시 고쳤음
* 고조선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1대 한인(안파견) 한기 원년(BC. 7197년) - 7대 지위리(단인)
한기 3299년(BC. 3898년), 7대 3301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한인(안파견安巴堅) | BC.7197 | * 천제한임天帝檀任, 한국桓國 개국, |
2대 | 혁서 |
| / 인류 조상 나반那般과 아만阿曼, |
3대 | 고시리 |
| / 9한九桓의 무리는 후손, 한인, 한임, |
4대 | 주우양 |
| / 단임, 한님. 홍익인간弘益人間 서자庶子 |
5대 | 석제임 |
| / 한웅桓雄 추천, 반고盤固, |
6대 | 구을리 |
| / 가한可汗이라함 |
7대 | 지위리 |
|
|
*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1대 한웅(거발한) 한국기원(한기) 3299년 (BC. 3898년) -
18대 거불단(단웅) 한기 4816년(BC. 2381년), 18대 1565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한웅(거발한) | 94 | BC. 3898, 태백산 신단수 신시 도읍, |
2대 | 거불리 | 86 | 3804 / 국호 배달, 웅씨녀 혼인 선(단)군 출생, |
3대 | 우야고 | 99 | 3718 / 한족桓族 기원基源 |
4대 | 모사라 | 107 | 3619 |
5대 | 태우의 | 93 | 3512 |
6대 | 다의발 | 98 | 3419 |
7대 | 거련 | 81 | 3321 |
8대 | 안부련 | 73 | 3240 |
9대 | 양운 | 96 | 3167 |
10대 | 갈고(독로한) | 100 | 3071, 염제신농炎帝神農과 국토 경계 정함 |
11대 | 거야발 | 92 | 2971 |
12대 | 주무신 | 105 | 2879 |
13대 | 사와라 | 67 | 2774 |
14대 | 자오지(치우) | 109 | 2707, 군신軍神, 동철기문화, 염제신농 침략, |
15대 | 치액특 | 89 | 2598 / 황제헌원黃帝軒轅(중국 한족 역사적 |
16대 | 축다리 | 56 | 2509 / 시조, 3황 5제의 한 사람) 사로잡아 |
17대 | 혁다세 | 72 | 2453 / 신하로 삼음 |
18대 | 거불단(단웅) | 48 | 2381 |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임진왜란 노량대첩도 충무공이순신장군상
미륵불 한산도대첩 기록화 해남대흥사 미륵불
* 그림, Daum Blog 인용
# 한웅의 신시시대 14세 자오지한웅(치우천왕) 재위 2년 한기 4492년(BC. 2705년) 10월 상달, 치우천왕의 궁전, 문무백관이 궁전 뜰에 도열하고 있다. 치우천왕, 일산을 떨치고 문무백관이 도열한 궁전 뜰로 나선다. 오늘은 천신께 제사하는 제천행사의 첫째 날이므로 궁전 뜰에 옥좌가 마련되었다. 치우천왕, 옥좌에 좌정한다. 여러 신하들 국궁으로 천왕께 하례드린다.
* 신지 우야고 : (국궁하며) 폐하, 제전 준비가 완료되었나이다.
치우천왕 사당으로 간다. 천주를 모신 사당이다. 제신들 뒤 따른다. 사당의 중앙에 옥대가 있고 그 위에 선기옥형이 받들어 놓여 있다. 치우천왕 먼저 선기옥형 앞으로 간다. 운사 유소가 국궁하여 맞는다.
* 치우천왕 : 선기옥형의 괘는 어떻습니까?
* 운사 유소 : 우주의 운행질서가 원만하고 28숙의 정렬이 가지런하여 풍우 순조롭사옵니다.
* 치우천왕 : 천기는 어떻습니까?
* 운사 유소 : 태극성과 자미성이 마주하여 큰 빛을 발하나이다. 대왕의 공덕은 사해에 떨치고 백성은 평안하며 변경 또한 12제후를 동원하여 도적의 무리를 평정한 이래 태평성대이옵니다.
* 치우천왕 : 유소는 천신께 제사지낼 준비를 하시오.
* 운사 유소 : 번제물을 대령하라!
치우천왕 번제물에 다가가서 손수 불에 달군 칠지도로 번제물을 마름질한다. 신지 발귀리가 시종을 거느리고 천왕의 번제물을 제단으로 옮긴다. 제단에 불이 붙는다. 악공들이 헌사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무녀들이 제단을 에워싸고 강신무를 춘다. 음률이 장중하다. 제단 위에서는 치우천왕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재상 아유타가 축문을 낭송한다. 제단 아래 층계 밑에서는 제신과 장수들이 엎드려 축수한다. 번제물을 태우는 불꽃이 연기와 같이 하늘로 치솟는다. 장엄하다.
# 치우천왕의 궁전, 제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12제후국왕들과 신하들을 모아놓고 유시한다.
* 치우천왕 : 사해를 평정하고 천신의 제사가 잘 치러진 일에 여러 제후들의 공이 컸다. 신지 우야고는 공로에 따라 작위를 높이고 봉작을 넓혀 공적에 보답하라. 아유타는 공적을 기려 역사에 기록하라! 모든 충신들과 용맹한 장수 그리고 사졸에 이르기까지 공과를 분명히 하여 균등하게 포상하여 영화를 사해에 떨치라!
* 신지 우야고 : 명을 받들어 균정하게 포상하겠나이다.
* 운사 유소 : 일월성신은 가지런하고 하늘의 운행이 질서 정연함으로 내우외환이 모두 사라졌나이다. 군사를 내어 12제후를 복속하고 변방의 도적무리를 척결한 이래 안으로는 백성들이 평안하고 밖으로는 환란이 없었나이다. 폐하의 성덕이 사해에 떨쳐 덕치왕화가 뚜렸하므로 내우외환의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졌나이다.
* 치우천왕 : 태평성대로구나. 모두 천신의 보살핌이요 제신들의 도움이니라. 천하의 운세는 어떠한고?
* 운사 유소 : 짧게 보면, 북두성 주변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관상감에서 논의컨대 꼬리별(혜성)의 징조로 봅니다. 이는 내년부터 향후 3년 간 일기가 풍우 순조롭지 못하리라는 예보이옵니다. 작은 내우외환을 미리 알아 대처한다면 크게 심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국운은 태평성대가 계속되고 국태민안 할 것이오니 심려마시옵소서.
* 치우천왕 : 혜성의 피해에 대한 대비책은 있는가?
* 풍백 유위자 : 혜성이 비침은 내년 봄의 가뭄을 예고하며 수리치수를 미리 대비코자 합니다. 봄에 뿌릴 씨앗을 가뭄에 강한 종자로 바꾸고 수확의 시기를 앞당겨야 합니다. 여름에는 안개가 짙은 날이 많아 오곡이 충실치 못하여 소출이 염려됩니다. 이것이 이후 3년 동안 지속될 것이니 올해부터 절약하여 먹고 남은 곡식을 비축하여야 할 줄 아옵니다. 또한 곡식을 추수하는 가을에는 예년 보다 많은 비가 내릴 조짐이 있습니다. 예년 보다 한 달 가량 서둘러 추수를 독려하여 저장하여야 합니다. 저장된 곡물은 각 제후국마다 저가의 족장들이 관할하되 3년가량 혜성의 주기가 끝나 풍요를 누릴 수 있을 때까지 배급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합당하리라 생각합니다.
* 치우천왕 : 제천행사와 세시풍속은 완성했는가?
* 신지 우야고 : 한웅천제께옵서 지으신 칠회제신의 책력으로 칠성력을 완성하고 시월을 상달이라 하여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습니다. 시월 상달에 첫날부터 이레까지 제사를 모시는데 첫째 날에는 하늘의 신, 둘째 날에는 땅의 신, 셋째 날은 물의 신, 넷째 날 불의 신, 다섯째 나무의 신, 여섯째 쇠의 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흙의 신에게 제사하나이다.
* 치우천왕 : 지혜롭도다, 상을 내리리라. 천체의 운행에 대하여 설명하라!
* 풍백 유위자 : (좌우에게 명하여) 관상감박사를 들라 이르라!
* 관상감박사 허드레 : (선기옥형을 받들고 나와 설명한다.) 이 행사는 한인천왕께옵서 이 땅에 배달의 나라를 세우신 이래 4000년, 선기옥형을 제작하시어 어리석은 백성들을 교화하시고자 베푸시는 행사이오나 이는 천기를 말씀드리는 자리오니 여러 제후께서는 자리를 엄정히 가다듬고 옷깃을 여미어 천기를 받드시기 바랍니다. (선기옥형을 받들어 농사와 날씨의 관계, 대비책 그리고 세시풍속을 해설한다.) 하늘은 100년만에 돌아오는 혜성이 3년 뒤에 돌아오므로 농사를 대비하되 가뭄과 풍우가 순조롭지 않을 것이니 유념하여 대비하소서. 지역으로는 하삭과 강역 동북쪽의 비리국, 일군국, 객현한국, 구모액국이 내년 6월부터 시작되는 가뭄과 비바람이 특히 자심할 것이므로 어려움이 크리니 선처하소서. 세시로는 역시 내년 6월부터 자연재해의 환란이 시작됨으로 7월과 8월 그리고 9월까지 제후 여러분들의 대비가 요구됩니다. 올 11월에는 … (관상감박사 허드레, 국가 대소사와 천문을 연계하여 한나절 동안 해설한다.)
<시대와 장소가 현대로 바뀌어>
# 한기 9202년(AD. 2005년) 가을, 경기도 파주군 운곡리 산골 운곡선생의 국선도장, 선우영달과 운곡선생 찻잔을 마주 하고 있다. 탁자 위에 수메르 점토판이 놓여있다.
* 선우영달 : 선기옥형이 실존합니까?
* 운곡선생 : 금방 설명한 바와 같아. 고조선 신시시대 자오지한웅 치우천왕의 예를 들었는데 하늘의 섭리를 인간에게 가르치려고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네. 현존하는 선기옥형은 혼천의라고 하여 세 개가 남아있네. 퇴계 이황 선생이 제작하였다는 목제 혼천의가 도산서원에 있고, 창경궁에 구리로 만든 작은 혼천의가 있으며, 조선시대 헌종 10년, 한기 5228년(BC. 1669년) 10월 4일 관상감 천문교수 송이영이 제작한 추로 움직이는 혼천의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 이 밖에 중국에 2, 3개 있다고 알고 있네만.
* 선우영달 : 중국사에서는 요 임금 순 임금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이전에, 요순 보다, 그러니까 약 4000년 전 한웅천왕의 신시시대에 이런 천체 관측기계를 만들어 천체를 관측하였다면 선기옥형은 대단한 발명품이군요.
* 운곡선생 : 발명품? 그 시대에는 천체를 관측하였다기 보다는 천체의 운행원리나 하늘의 변화 모습을 눈앞에서 보면서 변화무쌍한 날씨를 터득하려는 의도였겠지. 몇 년 전 영국의 물리학자 니덤 일행이 창경궁의 선기옥형을 탐방하고 인류사의 위대한 발명이라고 하였다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모조품을 만들어 세계 여러 박물관들에 전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었지.
* 선우영달 : 호기심이 이는군요. 주임교수님의 말씀으로는 선기옥형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운곡선생 :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진전이 없어. 수행력이 부족한 거야. 오래 전부터 우리 모임에서 선기옥형의 복원을 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계획은 계획일 뿐. 우리 모임 구성원들의 역량이 미치지 못해. 의욕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네. 선기옥형의 복원은 단지 옛 선현들의 유적을 재현하는 의미 그 이상일세. 조상들은 망원경이 없이 별자리를 관측했고 세시절기를 정확히 예측했었네. 역사는 이 일을 묵상을 통해 천체를 관측할 수 있었다고 기록했는데 요즘 과학자들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 그러나 역사 기록의 고증만으로도 그 일은 명확한 사실이야. 천문관에 있었던 관상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심안으로 천체를 관측하고 우주의 섭리를 통해 자연의 순리와 인간사를 예측할 수 있었네. 알려진 분들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정몽주, 이성계, 이순신, 정도전 그리고 토정비결을 쓴 토정 이지함이 있네. 특히 토정은 그 탁월한 천체현상 예지로 예언적 시사에 밝아 관상감에서 출발하여 충청도 아산의 현감 벼슬까지 역임한 대표적인 인물이지. 그 분들 모두 천문을 읽고 대사를 결정하였으며 우주의 섭리에 따라 미래예측을 한 분들이야. 관상감의 역할은 국가정책과 대소사를 정하는 기본이었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사대부가에서 촌가에 이르기까지 우주섭리는 사람들의 생활규범이였어.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에 어떻게 천체관측이 인간생활의 모든 일을 관장할 정도로 발달했으며 천체운행을 면밀하게 볼 수 있었겠나. 첨성대 정도의 높이로 별이 더 잘 보인다는 것은 허상이야. 선인들은 그것을 마음으로 본다고 표현했어. 선기옥형을 만들어 눈앞에서 천체를 보며 그 운행을 살핀 거야.
* 선우영달 : 제작하고 있는 선기옥형을 볼 수 있겠습니까?
* 운곡선생 : 선우군이? 물리학도가 참여해준다면 역사학자들의 이론에 불이 붙겠지.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그렇잖아도 뭐야, 저 주임교수님께서 선우군을 잘 대접하라셨는데 이 걸 예상했구만 그래. 주임교수님의 탁월한 안목이야, 그렇구말구. 선우군, 물리학도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주게나. 설계도를 놓고 긍끙대는 꼬락서니를 보노라면 안타깝지 안타까워. 이럴 때를 맞춰 준비된 말이 있지. 뭔지 아나?
# 역사 바로 세우기 모임의 홈페이지에서 선기옥형의 설계도와 제작 중인 선기옥형을 살피는 선우영달
# 경복궁 박물관의 선우영달, 선기옥형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스케치한다.
#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선우영달, 선기옥형을 카메라에 촬영하고 스케치한다.
# 도산서원에서 선우영달, 선기옥형을 촬영하고 스케치한다.
# 전남 장성군 고봉(기대승 선생, 퇴계 이황 선생과 이기2원론 토론)학술원 애일당, 선기옥형 설계도를 놓고 선기옥형을 복원하기 위하여 2, 3년씩 운기조식을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 다섯 명과 운곡선생 그리고 선우영달이 함께 있다. 운곡선생의 강의 마무리 부분
* 운곡선생 : (전략) 선기옥형은 아무나 언제든지 복원될 수 없다는 비전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선기옥형의 제작자로 추정하는 퇴계 이황 선생과 관상감 천문학자 송기영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비전의 전승자입니다. 선기옥형이 완성되는 날 새 세상이 열린다는 비전은 오랜 비기입니다. 지금가지 복원된 선기옥형은 기초적인 틀을 찾은 셈이지요. 종교적인 맥락과 일치한,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룰이 있습니다. 선기옥형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는 대상은 신, 신과 인간의 매개체, 예를 들면 무당이나 당골레 같은 신들린 사람들과 선군왕검 같은 제사장들, 깨달은 사람들 또는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선기옥형을 만졌을 때는 모두 비명횡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천기를 누설한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예를 들면 정도전이 비기로 정치를 하다가 이방원의 칼을 맞았고 이순신 장군은 적의 화살을 맞았습니다. 순교를 당한 예수나 많은 선각자들도 그 범주에 들어갑니다. 옛 왕들과 영웅들 중에서 신의 아들을 자초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대부분은 신의 뜻이 아니라면 모두 불행한 결과를 맞았습니다. 후 3국의 궁예를 아시지요? 궁예는 미륵을 자처했습니다. 선기옥형을 완성할 국가나 민족 그리고 당사자들은 이미 신의 뜻으로 결정되어 있을 것이니 우리가 이루려고 한다고 노력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단지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믿고 또 우리만이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민족 아닌 다른 사람들은 엄두를 내지 못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사명이 주어진다면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노력한다고 해서 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많은 시간을 연구하며 복원하려고 했지만 때가 아니었거나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진척이 없었는데 선우 군이 참여함으로써 다시 또 새로운 전기가 되었습니다. 선우 군은 물리학도입니다. 선기옥형 복원의 물리학적인 측면을 그에게 기대합니다. 선우 군은 이라크에서 예기치 않은 일로 어떤 불가사의한 경험을 겪었으며 우리에게 스스로 와서 참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선기옥형 복원의 새로운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먼저 운기조식을 철저히 따라 수행을 이루고 나서야 천체운행의 이치를 깨닫는다면 선기옥형은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분발을 부탁드립니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4/22화 : 1. 고조선시대(4/6) - 한웅시대>
하늘과 땅을 여는, 거불단한웅의 혼인婚姻
(삽화 - 천신天神의 나라)
고구려 무용총 남해각서(고조선 만주 집안 장군총 천부경 일반화
사냥도 상형문자 추정) (Ziggurat 추정) 윷놀이말판
* 그림, Daum Blog 인용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임승국의 한단고기)
* 거발한한웅 - 신시神市시대 1세 한웅, 한웅은 왕이나 천왕天王의 보통명사인데 1세 거발한한웅을 한웅으로 일컫음
* 거불단한웅 - 신시시대 마지막 18세 한웅, 곰족의 여왕과 혼인하여 선군禪君(단군檀君)을 낳아 천신天神의 시대에서 인신人神의 시대를 열었다. 단웅이라고도 함
* 선군왕검禪君王儉 - 단군檀君의 <단檀>은 <선>으로 읽어야 한다. 선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흉노匈奴의 왕은 <단우單于>라 적고 <선우>라고 읽는다. 단군을 국조로 모시는 대종교의 예배의식을 <단의식檀儀式>이라고 쓰고 <선의식>이라고 읽고, 선군은 한인, 한웅의 천신天神의 시대에서 인신人神시대로 바뀌는 인신이며 <인신人神>을 우리 고유의 말로 <선>이라고 했으니 <단군>은 <선군>으로 읽는 것이 옳다. 박달나무의 <박달>은 <배달> 또는 <밝음>의 뜻이고 그래서 박달나무 <단檀>자는 우리말을 문자로 빌어쓴 한자(차자借字)인데 이를 뜻으로 오해하여 박달나무 아래 도읍을 정하였다는 등 소리 말과 기록문자로 인한 오역이므로 바로 잡았다. 선군은 제사장이고 왕검은 통치자다. 한웅의 <한>이나 징기스칸의 <칸>도 순수한 우리말로써 한桓, 한韓, 한汗(칸)은 빌어쓴 한자임
* 고시례高矢禮 - 곡식의 신, 바람이 세게 부는 날 교목喬木이 서로 부딛쳐 불꽃이 일어나는 걸 보고 마른 나무를 문질러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발명하였고, 호랑이를 쫓으려고 돌을 던졌는데 돌과 돌이 부딛쳐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부싯돌을 발명하였다. 지금도 시골에서는 야외에서 음식을 먹기에 앞서 <고시례>라고 외치면서 음식을 주변에 뿌리는 풍습이 남아있음
* 신지 혁덕 - 신지는 직책명이고 혁덕이 이름이다. 태고문자 발명, 사슴과 기러기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구안하였다. 슈메르인이 사용한 설형문자의 원형으로 추정한다. 남해도南海道의 낭하리郎河里 계곡,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사이의 암석에서 각서刻書를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었다. 신지의 상형문자로 추정함
* 선인 발귀리 - 자부선인의 선조, 자부선인(중국 황제헌원의 스승)은 5행行 수리數理로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저작하였다. 칠성력七星曆(달력)의 시초임
* 풍백風伯 석제라 - 집을 설계하여 주거를 편케함
* 우사雨師 왕금영 - 사냥이 어려워지자 목축을 시작함
* 운사雲師 육약비 - 신시시대 1세 거발한한웅의 운사, 인간 360사 생활규범인 참전계경參佺戒經과 8조條의 금법禁法 제정, 고구려 재상 을파소가 백운산에 들어가 기도하고 천서天書를 얻으니 곧 참전계경임
* 운사 모수리 - 신시시대 18세 거불단한웅의 운사
* 범족과 곰족의 여왕 - 범족과 곰족 족장의 딸
* 고조선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1대 한인(안파견) 한기 원년(BC. 7197년) - 7대 지위리(단인)
한기 3299년(BC. 3898년), 7대 3301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한인(안파견安巴堅) | BC.7197 | * 천제한임天帝檀任, 한국桓國 개국, |
2대 | 혁서 |
| / 인류 조상 나반那般과 아만阿曼, |
3대 | 고시리 |
| / 9한九桓의 무리는 후손, 한인, 한임, |
4대 | 주우양 |
| / 단임, 한님. 홍익인간弘益人間 서자庶子 |
5대 | 석제임 |
| / 한웅桓雄 추천, 반고盤固, |
6대 | 구을리 |
| / 가한可汗이라함 |
7대 | 지위리(단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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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역사연대표
1대 거발한(한웅) 한국기원(한기) 3299년(BC. 3898년) - 18대 거불단(단웅)
한기 4816년(BC. 2381년), 18대 1565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거발한(한웅) | 94 | BC. 3898, 태백산 신단수 신시 도읍, |
2대 | 거불리 | 86 | 3804 / 국호 배달, 웅씨녀 혼인 선군 출생, |
3대 | 우야고 | 99 | 3718 / 한족桓族 기원基源 |
4대 | 모사라 | 107 | 3619 |
5대 | 태우의 | 93 | 3512 |
6대 | 다의발 | 98 | 3419 |
7대 | 거련 | 81 | 3321 |
8대 | 안부련 | 73 | 3240 |
9대 | 양운 | 96 | 3167 |
10대 | 갈고(독로한) | 100 | 3071, 염제신농炎帝神農과 국토 경계 정함 |
11대 | 거야발 | 92 | 2971 |
12대 | 주무신 | 105 | 2879 |
13대 | 사와라 | 67 | 2774 |
14대 | 자오지(치우) | 109 | 2707, 군신軍神, 동철기문화, 염제신농 침략, |
15대 | 치액특 | 89 | 2598 / 황제헌원黃帝軒轅 사로잡아 신하로 |
16대 | 축다리 | 56 | 2509 / 삼음 |
17대 | 혁다세 | 72 | 2453 |
18대 | 거불단(단웅) | 48 | 2381 |
Tokyo 칸타마쯔리 Lithuania 민속축제 Brazil Samba축제 Europe 사육제
북America 중국 용춤 일본 물 축제 중국 설날
Indian 축제 * 그림, Daum Blog 인용 불꽃놀이
지구촌 여러 나라들은 고유의 민속축제가 있다. 고대한국에서는 연등회, 팔관회를 비롯하여 동맹, 영고, 무천 그리고 달마다 열렸던 세시풍속 등 다양한 민족축제가 이어져오다가 조선시대에서는 명맥만을 유지했는데 일제식민지시대에 송두리째 말살되었다.
# 한기 3309년(BC. 3888년) 10월 상달, 한웅의 신시시대 1세 거발한한웅 재위 10년 신시(신불, 흑수 백산)의 궁전, 거발한한웅 옥좌에 좌정하고 제신들이 옹립하여 국궁하고 있다. 오늘은 10월 상달 제천행사의 첫째 날이다.
* 운사 육약비 : 폐하, 제천행사의 개막을 선포하소서.
* 거발한한웅 : 10월 상달 한인천왕의 유시를 받들어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천제한님을 외경하는 제천행사를 시작하라!
* 운사 육약비 : 소라와 나팔을 불어 천왕폐하의 유시를 알려라!
거발한한웅의 도읍 신시(흑수 백산) 동쪽 100리(50Km) 쯤 넓은 벌판에 세워진 높은 제단은 높이가 1,000자(300m)며 가로 세로의 길이는 3,000자(1Km)다. 동서남북 4문이 있고 4개의 단으로 축조되었다. 4개의 단 마다 91개의 계단이 있으며 360번째 맨 위의 단에 한인천왕의 위패를 가운데로 좌우 양쪽에 한국시대 한님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거발한한웅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12제후국 왕들과 중신들이 아홉 계단 아래 뒤를 따르며 옹위한다. 제단 아래는 양편으로 각 12제후국왕, 제신들과 장수 수 백 명, 그리고 각 제후국에서 온 벼슬이 높은 신하들이 화려하게 수놓은 옷차림으로 늘어서 있다. 벼슬아치들 아래는 수 천 명 병사들이 도열하고 그 다음에 수 만 명 백성들이 운집하였다. 풍백은 천부를 새긴 거울을 들고 앞서 나아가고, 우사는 북을 쳐서 울리며 주변을 돌면서 춤추었고, 운사는 1,000명의 근위무사를 데리고 대장의 칼로 호위한다. 거발한한웅 계단을 다 올라 신주 앞에 서서 백성들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든다. 금색 3족오와 3태극을 조각한 옥홀이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난다. 운사 모수리가 향로에 불을 붙이자 붉고 푸른 불꽃과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다. 거발한한웅 축문을 읽는다. (축문을 태워 하늘에 올리고 옥좌에 앉는다.)
* 풍백 석제라 : (한인천제의 유시문 두루마리를 들고나와 선인 아유타에게 건넨다.) 한인천제의 유시문을 낭독하니 제신들은 경배하라! (선인 아유타, 한인천제의 유시문을 펼쳐 받들고 소리 높여 읽는다.)
<유시문>
우리 한국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 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이를 한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이라고 불렀다. 천제한님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 할 곳이로다 하시며, 한웅천왕 폐하께 천부인 세 가지를 내려주시고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하셨으며,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 이르셨느니라. (거발한한웅 허리를 굽혀 삼육대례로 유시문을 받들어든다.)
* 거발한한웅 : 백성들에게 축제의 시작을 알리라! (이레 동안 열리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 나팔소리가 온 성 안에 울려퍼진다.)
선인 발귀리가 거발한한웅께 바치는 노래를 부른다.
대일(하나) 그 극(끝)은 이를 이름하여 양기(어진 기운)라 하니
없음과 있음이 섞여서, 빈듯하면서도 갖추어 묘함이 있도다.
삼일(셋)은 그 체(근본)는 일(하나)이요 그 용(쓰임)은 삼(셋)이라
혼묘(혼돈)가 한 둘레에 있으니 체와 용은 따로 갈라질 수 없도다.
대허(허공)에 빛 있음이여, 이것은 신의 형상이고
대기(큰 기운)의 오래토록 존재함이여, 이는 신(하느님)의 화(변화)로써
참 목숨이 근원으로 만물이 여기서 나는도다.
해와 달의 아들은 천신의 충(가득 참)에 있음으로써 비추이고
이로써 원각(깨달음)을 긋고 능히 크게 세상에 내려오니
뭇 중생이 그 무리를 이룬다.
원(둥근 것)은 일(하나)이 되어 무극(끝 없음)이 되고
방(모난 것)은 이(둘)가 되어 반극(끝의 반대)이며
각은 삼(셋)이 되어 태극(3태극)이라.
무릇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홍익인간)이란 천제 한웅에게 주어진 바니
일신(신)은 내려와 충만하사 성(이성)은 광명에 통하고
제세이화 홍익인간 함은 이를 신시가 선군조선에 전하신 바이라.
# 축제 둘째 날, 씨름과 수박 겨루기. 성 안과 12제후국이 1,000명씩 편을 나누어 오전에는 씨름판을 벌이고 오후에는 수박 겨루기를 한다. 거리에서는 곳곳에서는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은 백성들의 윷놀이, 고누놀이, 널뛰기, 그네뛰기들이 벌어지고 음식과 술이 풍족하다.
# 축제 셋째 날, 활쏘기 말달리기대회. 이른 아침 활쏘기대회장. 성 안 군사훈련장터에 1,000개의 과녁이 서고 그 거리는 50보다. 화살 3개를 쏘아 과녁에 명중하면 1차 선발에 통과하고 2차, 3차로 갈수록 과녁이 어려워진다. 마지막 두 사람이 겨루는데 우승자는 주몽으로 칭송받고 준마 한 필과 가죽 안장 그리고 1,000호 벼슬을 내린다. 성 안 백성들과 군사들은 물론이고 12제후국과 심지어는 곰족, 호랑이족들까지 남녀노소 신분에 차별 없이 참가할 수 있다. 천왕이 몸소 참석하여 격려한다.
활쏘기 진행을 맡은 양가의 비장들, 군사훈련장에 높이 세운 사대 위에서 깃발로 신호한다. 동시에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북소리 광장에 울려 퍼진다. 구경꾼들이 훈련장을 구름처럼 에워싸고 응원의 함성이 하늘을 찌른다. 참가자가 20,000명을 넘어선지도 벌써 5년째. 1,000개의 사대 앞에 첫 번째 선수들이 줄지어 서서 시위를 당긴다. 시위가 보름달처럼 휘어지고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나른다. 과녁에서는 명중 표시로 붉은 깃발을 흔든다. 명중 깃발이 오를 때 마다 경기자를 응원하는 함성이 광장을 뒤흔든다. 한 식경이 지나자 경기자들이 100명으로 압축되고 과녁이 바뀐다. 거리는 50보에서 100보로 바뀌고, 과녁은 10척 장대에 걸린 짐승 대가리, 과녁이 마치 손바닥만하게 보인다. 또 한 식경이 지나자 경기자 10명이 남는다. 해마다 강세를 보였던 성 안 참가자가 3명이고 12제후국에서 5명 그리고 호랑이족 참가자와 곰족 참가자 2명이다. 특히 호랑이족 참가자 한 명은 특출하다. 또 한 식경이 지나자 마지막 3명이 남았다. 역시 성 안에서 1명, 수밀이국 1명 그리고 호랑이족 사냥꾼 1명이 마지막 겨루기에 남았다.
* 거발한한웅 : 저들을 대령하라, 하사주를 내리리라! (마지막 경기자 세 사람, 천왕 앞에 국궁한다.) 가히 모두 주몽이라 할만하다. 소속과 성명을 일러라!
* 양가부족 탈탈 : 양가족의 비장 탈탈이옵니다.
* 수밀이국 협도라 : 수밀이국의 수문장 협도라입니다.
* 호랑이부족 사냥꾼 : 호랑이족 사냥꾼이오나 이름이 없나이다.
* 거발한한웅 : 호오, 이름이 없다? 무명의 사냥꾼이라고?
사대에 선 세 사람, 거리는 200보 과녁은 버드나무를 둥글게 말아 장대에 매달아놓은 손바닥만한 고리. 먼저 탈탈이 쏜다. 첫 번째 화살은 장대에 미치지 못한다. 두 번째 화살은 고리 근처에는 닿았으나 역시 실패, 세 번째 화살이 겨우 고리에 맞았으나 힘없이 떨어지고 만다.
* 탈탈 :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저런 과녁은 생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
* 사냥꾼 : (협도라를 돌아보며) 과녁을 높입시다.
* 협도라 : 뭐라? 과녁을 높이자고?
* 사냥꾼 : 그렇소. 과녁을 높여 단 판에 결판을 냅시다. (진행자를 불러 과녁의 크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거리를 300보로 할 것을 건의한다.)
협도라의 첫 번째 화살은 과녁 앞에서 땅에 떨어졌다. 두 번째 화살은 간신히 과녁에 닿았으나 맞히지 못했다. 세 번째 화살도 과녁 근처에 꽂히고 말았다.
* 협도라 : 저런 과녁은 귀신도 맞추지 못해! (사냥꾼을 돌아보며 빈정거린다.) 어디 한 번 쏘아보시지.
호랑이족 사냥꾼, 사대에 서더니 흙을 집어 날려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윽고 활시위가 점점 휘어지더니 보름달처럼 둥글어지고 이윽고 터질듯 한 시위 소리가 핑! 울리는가 했더니 화살 과녁에 명중한다. 둘러선 관중들 숨소리조차 없더니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자 함성 천지를 진동한다.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은 더욱 기가 막힌 광경을 연출한다. 첫 번째 화살처럼 신중하게 겨누지도 않고 대강 활을 들어 올려 시위를 당기자말자 놓아버리는, 그리고 세 번째 화살은 겨냥을 하지도 않은 듯 두 번째 화살에 이어 눈 깜짝할 사이에 쏘았는데 화살은 연달아 날아가 첫 번째 화살을 중심으로 과녁 한 가운데 명중한 것이다. 화살이 명중된 순간 한 동안 숨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이윽고 함성이 천지를 진동한다.
* 거발한한웅 : (감탄하며) 가히 신궁이로고. 호랑이족 사냥꾼에 신궁이 있었다는 말을 일찍이 듣지 못했는데 어디서 저렇게 출중한 궁사가 태어났단 말인가? 가까이 데려오라! (사냥꾼 봉두난발에 짐승 가죽을 걸쳤을 뿐 모습이 짐승과 다름없다.) 무예가 발군의 실력이므로 우승상을 내리되 (발귀리를 지명하여 하명한다.) 선인께서는 저 자를 맡아 책임지고 교화시켜 인재로 육성한 뒤에 벼슬을 내리도록 하시오!
# 축제 넷째 날은 진뺏기놀이, 축제 다섯째 날은 창과 칼 무예 겨루기, 축제 여섯째 날에는 격구경기를 하였다.
# 축제 일곱째 날, 거발한한웅과 12제후 중신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다시 제단에 모여 한인천왕께 제사를 드려 태평성대를 고하고 7일 간의 축제 막을 내린다.
# 그 해 겨울, 거발한한웅이 고시례에게 <백성들이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방안>을 강구하라 명하였다. 거발한한웅은 <아침에 하늘에서 내려와 백성을 안돈하고 오후에는 다시 승천>하였다.
고시례가 익힌 고기를 가르치기 전에 이미 백성들은 사냥을 나갔다가 자연 발생 화재로 숲이 탄 곳에 미쳐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불에 탄 짐승의 고기를 거두어 맛 보고는 불에 익은 고기 맛을 알게 되었는데, 고시례는 어느 날 바람이 몰아치는 숲을 거닐다가 강한 바람에 관목들이 서로 엉켜 불이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하고 마른 나무가지를 비벼서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이어 숲을 거닐다가 호랑이가 덤벼들어 큰 돌을 들어 호랑이를 쳤으나 맞지 않고 돌이 바위에 맞아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부싯돌을 만들어 불씨를 간수하는 일 없이 일상적으로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먹는 법을 가르쳤다.
거발한한웅께서 신지 혁덕에게 <나라에 글이 있으나 서로 유통하지 못하므로 백성들이 쉽게 익혀 사용할 수 있는 글자를 만들라>는 유시를 명하였으나 신통한 방법을 얻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신지 혁덕이 강변을 거닐다가 한 사냥꾼을 만났다. 사냥꾼은 혁덕에게 사슴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혁덕은 무심코 사슴이 남기고간 발자국을 가리켰다. 그 때 문득 혁덕은 모든 사물이 흔적을 남긴다는 일을 생각해내고 강가 모래밭에서 여러 짐승들의 발자국을 찾았다. 많은 발자국 가운데서 특히 사슴 발자국과 기러기 발자국을 살펴 글자를 창안했다. 이를 참글(상형문자로 추정)이라고 한다.
풍백 석제라는 백성들이 잠자고 쉬는 거처가 일정치 않아 맹수의 피해를 입어 다치고 상하며 벌레와 독충의 피해까지 겪고 있으며, 동굴과 흙구덩이에 의존하여 살고 있으므로 습기와 바람을 피할 길이 없어 질병이 많은 것을 염려하였다. 흙과 돌과 나무를 이용하여 집 짓는 방법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우사 왕금영, 인구가 불어나 식량을 충족하기 어려워지자 짐승을 잡기 위하여 서로 경쟁을 하고 다투며 싸움까지 일어나는지라 분쟁이 그치지 않고, 남획으로 인하여 사람을 피하지 않던 짐승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여 달아남으로 더욱 더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왕금영은 목장을 만들어 짐승을 번창케 하는 방안을 백성들에게 전파하였다. 소, 말, 개, 돼지, 독수리, 호랑이 등 짐승을 길렀다.
운사 육약비는 혼인의 법, 장례의 법과 강령 8조를 제정하였는데 강령 8조는 대략 성실함, 믿음, 사랑, 베품, 잘못됨, 복받음, 받음, 순리라 하였다.
<신시시대 1세 거발한한웅(한웅)에서 신시시대 18세(마지막 천왕) 거불단한웅(단웅)으로 역사무대가 바뀌어>
# 한기 4816년(BC. 2381년) 여름, 신시시대 18세 거불단한웅의 재위 45년, 거불단한웅 풍백, 우사, 운사와 제신들을 거느리고 궁전의 뜰을 거닐고 있다.
* 운사 모수리 : 범족과 곰족의 여왕들이 폐하 뵙기를 청하나이다. (범족과 곰족의 여왕들이 천왕 앞에 엎드린다.)
* 곰족의 여왕 : 우리 무리는 본래 왕화를 입지 못하여 성정이 거칠고 삶이 투박하여 인간답지 못하나이다. 이에 저희들이 왕화를 입어 온 무리가 모두 인간답게 살고자 바라나이다.
* 거불단한웅 : (여왕들에게) 어여쁘다. 100일을 기약하고 인간의 덕을 닦겠느냐?
* 곰족의 여왕 : 분부대로 힘써 노력하겠나이다.
이리 하여 범족과 곰족의 두 여왕들이 한웅천왕의 궁궐에서 살면서 현명한 선인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곰족의 여왕은 100일 동안 참고 견디어 기약을 지켰으나 범족의 여왕은 성격이 거칠고 활달하여 기한한 100일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니 다시 동족이 사는 하삭(서남 아시아와 동유럽지역)으로 추방되었다. 한웅천왕, 곰족의 여왕을 치하한다.
* 거불단한웅 : 약속한 날을 채웠으니 신통하다.
* 곰족의 여왕 :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의 궁중에 머물기를 바라나이다.
* 거불단한웅 : 너는 부족에게로 돌아가서 부족을 교화하여 너와 같이 사람답게 사는 일을 주관하는 게 옳거늘 어찌 짐의 궁전에 머물겠다고 하는고?
* 곰족의 여왕 : 저희 부족은 미련하와 아직도 짐승처럼 살고 있아옵니다. 부끄럽사오나 저는 이미 과년하여 배필을 구하려해도 마땅한 배필이 없어 무엄하옵게도 페하와 혼인하여 천자의 나라를 융성하게 하려 하나이다.
* 거불단한웅 : 갸륵한지고. 곰족의 여왕이 교화가 두텁고 그 뜻이 갸륵하니 혼인을 하락하노라. 여왕을 궁전에 머물게 하라!
1부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
3화 신神들의 나라 수밀이국(須密爾國, Sumer)
* Sumer 역사연대표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연대(BC) | 역사개요 |
44만5000 년 |
․ 엔키가 이끄는 네필림이 12번째 행성에서 지구로 내려와 메소 포타미아 남부의 에리두(Eridu)에 '지구 기지 1호'를 건설한다. |
43만년 |
․ 빙하기가 물러가고 근동이 따듯해진다. |
41만5000 년 | ․ 엔키는 내륙으로 더 들어가 라르사(Larsa)를 건설한다. |
40만년 |
․ 간빙기가 시작된다. 엔릴이 지구에 도착해 니푸르(Nippur)에 우주 관제소를 건설한다. 엔키는 남아프리카로 가는 해로를 개척하고, 그 곳에 가서 금을 캔다. |
36만년 |
․ 네필림이 제련과 정련을 위한 야금 중심지인 바드티 비라(Bad-Tibira)를 건설한다. 우주공항인 시파르(Sippar)와 다른 신들의 도시가 건설된다. |
30만년 |
․ 아눈나키가 폭동을 일으킨다. 원시적 노동자인 인간이 엔키와 닌후르쌍에 의해 창조된다. |
25만년 |
․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가 늘어나 다른 대륙으로 퍼져 나간다. |
20만년 |
․ 새로운 빙하기로 인해 지구상의 생명이 퇴보한다. |
10만년 |
․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고, 신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다. |
7만7000 년 |
․ 신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인 우바르투투(라멕)가 닌후르쌍의 도시인 슈루팍을 통치한다. |
7만5000 년 |
․ 새로운 빙하기, '지구의 저주'가 시작된다. 퇴보된 종류의 인간이 지구를 떠돌아다닌다. |
4만9000 년 |
․ 엔키의 '충실한 종'인 지우수드라(노아)의 지배가 시작된다. |
3만8000 년 |
․ '일곱 번의 통과' 로 인한 가혹한 기후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지고, 근동에 자리잡은 크로마뇽 인들만이 살아남는다. 인간에게 실망한 엔릴이 인간을 멸망시키 려고 한다 |
1만3000 년 |
․ 다가오는 12번째 행성에 의해 시작될 해일에 대해 미리 안 네필림 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을 결심한다. 대홍수가 지구를 휩쓸고 빙하기가 끝난다. |
고조선 강역도 수메르지역도
*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과 Daum Blog 인용
# 중국 남경 고대유물관의 도깨비기자, 운곡선생의 말대로 선기옥형이 진열되어 있다. 제원사 탐방을 마친 도깨비기자는 잠시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남경의 고대유물관을 찾았다. 설명서대로라면 이 선기옥형들은 중국 명나라 때 제작한 것이다. 문외한이랄 수 있는 도깨비기자의 눈에도 조악하다. 서투른 장인이 얼기설기 엮어놓은 시제품 같았다. 대한의 고려대박물관의 선기옥형에 미치지 못한 것 같아 실망스러웠다. 실제로 천문 탐구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상징성을 가진 모형에 불과했다.
* 선기옥형 자료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재승)
선기옥형의 문헌기록은 중국의 서경書經 제 1편 우서虞書 제 2장 순전舜傳에 처음 나온다. 순 임금이 요 임금으로부터 종묘에서 첫째 달 첫째 날 제위를 선양받고 맨처음 한 일이 선기옥형을 살펴 7정政(해와 달 그리고 금목수화토성星)을 바로 잡았다. 그런 다음 하느님(상제上帝)께 제사를 올리고 하늘과 땅과 4시時에 제사지냈으며 산천과 여러 신들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BC.4000년 전 요순시대에 선기옥형이 존재했다면 그 기원은 약 BC.1만 년 전 한배검께서 주재주로써 천부경의 진리를 밝혀준 개천의 시대로 본다. 그 후 선군시대로 전승되어온 선기옥형이 요순을 통하여 중국민족에게 전파된 것이다.
# 문헌의 기록에 나와있는 선기옥형이 중국 어디엔가 전승되어온다면 이는 한웅천왕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선기옥형, 원형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도깨비기자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유물관 현관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사내가 다가왔다. 몇 마디 말 끝에 그는 주중국대사관 무관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무관 : 불편하시지요? 본의는 아닙니다만 … 실망이 크신 것 같은데.
도깨비기자 : 실망이랄 것까진 없고 … 우리, 구면인 것 같은데요.
무관 : (계면쩍게 웃으며) 알아보시는군요. 그렇습니다. 북경공항과 3조당에서 뵈었지요. 아 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때는 보호 차원이었습니다. 기자 선생의 신변보호말입니다. 그러나 유연한 보호입니다. 중국 쪽의 움직임이 심상찮았었기 때문이지요. 듣기에 한국 에서 중국과 불편한 어떤, 국가적인 일이 있었나본데 그것 때문에 중국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와졌나봅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저와 동행하여주시겠습니까?
도깨비기자 : 연행입니까?
무관 : 아까 말씀대로 보호입니다. 선생이 중단하라면 돌아가지요. 그러나 중국 쪽 사람들이 선생을 보는 눈이 곱지않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중국은 아직도 안전의 사각지대입니 다. 외교적 관례도 통하지 않습니다. 중국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아 마도 그들이 일부러 기자선생의 자료를 흘린 것 같은데 … 그 이유는, 아마 선생의 활 동을 제재하려는 뜻이겠지요?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봅니다. 선생의 신변을 우리에게 맡 긴다는 뜻입니다. 만약의 경우 귀찮은 일을 우리에게 떠맡기겠다는 속셈이지요.
도깨비기자 : 일차적? 다음에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설마 납치하거나 죽이기야 하겠습니 까? 좀 따라다니다 말겠지요.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중국에서 찾아보려던 것들은, 비록 성과는 탐탁치않지만 이미 다 살폈습니다.
무관 :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기자선생을 주목하는 건 중국뿐만이 아닙니다. 중 국의 국가안전부 11국인 정보자료중심국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SVR(대외정보국) 제 1 국, 미국의 CIA, 프랑스의 DGSE(대외보안총국), 일본의 정보조사실까지 선생을 따라 붙었습니다. 일본의 정보조사실은 관방장관 직속 정보기관입니다. 이들이 모두 한결같 이 선생을 따라 붙은 목적이 뭣입니까?
도깨비기자 : 날 보호하겠다는 분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씀인가요? 저는 낼 오전 비행기 로 중국을 떠납니다. 비행기표도 이미 예약했습니다.
무관 : 실례가 안된다면 … 행선지가 어디인지 여쭈어도 ….
도깨비기자 : (말을 중도에서 끊어) 이라크입니다.
무관 : 위험을 자초하시는군요. 이라크 또한 정정이 매우 불안합니다.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 어서 우리로써는 더욱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취재라 하더라도 입국이 제한되어 있 습니다.
도깨비기자 : (단호하게) 기자가 못다닐 곳은 없습니다. (비아냥거리는 투로) 그 동안의 그 유연한 보호에 감사드립니다.
Sumer Sumer 신神 Sumer 왕
설형문자 점토판 Ishtar Gilgamesh
*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다음 날 이라크 행 비행기 안, 컴퓨터 인터넷자료를 살피는 도깨비기자
* 샤니다르Shanidar동굴 -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동북쪽 산악지대에 있는 동굴, 10만년 전부터 1만3000년까지의 인류의 기록이 남아 있음, 수메르 쐐기(설형楔形)문자로 기록된 점토판粘土板 2만5000여 매가 발견되어 해독함으로써 창조적 관점에서 구약성서에 의존하였던 인류사가 획기적인 전기를 맞았고 인류 창조와 기원 그리고 신神에 대한 인류 최고의 역사기록으로 평가함
* 수메르Sumer역사 발굴은 1843년 프랑스학자들이 시작하여 같은 해 영국인 A. H. Layard가 니네베 유적지遺蹟地에서 2만5000매의 점토판을 발굴하였고, 1974년 3월 R. L. Crocker, A. D. Kilmer, R. R. Brown이 니푸르 유적지에서 점토판 3만매를 발굴하여 해석하고 있음
* 겹십자가 - 2중, 3중으로 그린 십자가 모양, 고대 수메르인들이 태양계 12번째의 행성 마르둑에서 내려온 신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인더스문명에서도 신성시되었던 문양이다. 수메르 점토판粘土板의 기록에 의하면 태양계 12번째의 행성 마르둑은 3600년 주기週期로 태양을 공전하는데 지구 접근 때 신들이 지구에 내려와 지구의 원시인을 개화시키고 인간을 복제하여 함께 살다가 노아의 홍수를 예견하고 마르둑으로 돌아갔다. 인류문명은 BC. 1만1000년, 7400년, 3800년에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퇴보했다가 새로 시작되었다. 이를 근거로 마르둑의 공전주기인 3600년 마다 인류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었고 그렇다면 BC. 200년께 마르둑의 지구 접근으로 인한 해일과 빙하기,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인류의 멸망(노아의 홍수)이 있었으며, 현생 인류는 BC. 200년의 인류고 이어 올해가 2006년이므로 올해로부터 1400년 뒤 태양계의 12번째 행성 마르둑이 지구에 접근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구약성경이 수메르역사의 기록이고 수메르의 점토판 기록물이 우리가 알지 못한 현실적인 신과 현실적인 고대인류사의 기록이라면 성경의 부활(공중 들림)이나 불교의 미륵부처들 인간 구원은 1400년 뒤 태양계 12번째 행성 마르둑의 지구 접근 현상이 아닐지?
한국, 배달, (고)조선 Sumer Shem(비행체) Sumer 비행체 Sumer 인간 복제와
4대 문명 발상지 현대 Rocket (위 중간 백색) 현대 DNA 구조도
* Daum Blog와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대변경大辯經’ 에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범족의 무리를 하삭河朔으로 추방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하삭은 이라크, 이란지역. 서아시아에서 터어키(투르크, 돌궐)는 유일한 교착어膠着語를 사용하는 민족이고 생활습관이나 형식이 한국인과 유사하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터키의 전성시대로써 유럽을 제패하였다. 인류학적으로 터어키가 한국과 형제국이라는 사실은 일반화되어 있다. 불가리아(부여)는 부여족의 일파로써 유럽인으로써는 유일하게 몽고반점을 지니고 태어난다. 불가리아나 ‘발칸반도’도 모두 ‘부여’에서 전이된 말이다. 헝거리(흉노)는 훈족이 세운 나라로써 로마시대 말기의 아틸라는 전성기의 로마 보다 더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 수메르역사 발굴은 1843년 프랑스학자들이 시작하여 같은 해 영국인 A. H. Layard가 니네베 유적지遺蹟地에서 2만5000매의 점토판을 발굴하였고, 1974년 3월 R. L. Crocker, A. D. Kilmer, R. R. Brown이 니푸르 유적지에서 점토판 3만매를 발굴하여 해석하고 있음
◎ 한단고기(임승국)에서 수밀이국Sumer의 기록
* 선군왕검시대 15세 단군 대음(후을달) 재위 51년, 신사 2년 한기 3666년(BC. 1660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겨울 10월에 양운국과 ‘수밀이국’ 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 선군왕검시대 27세 단군 두밀 재위 28년, 갑신 원년 한기 3003년(BC. 997년) 천해(바이칼호수)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 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 한국본기 제 2권에서 ‘삼성밀기’ 는 말한다. 파나류산(한인의 한국시대의 도읍지,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天海, 바이칼호수)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한인시대의 한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 남북 5만리(약 2만5000Km), 동서 2만리(약 1만Km)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캄차카),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퉁구스, 시위국, 통고사국), ‘수밀이국’ 이니 12국이다.
Sumer 신의 상징 Sumer 천체도 지구 12번째 행성 Marduk의 궤도와
겹십자가 마르둑 위성들의 Tiamat(행성) 공격
* Daum Blog와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인류학계와 세계의 사학계가 주목하는 수메르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수밀이국’ 이다. 수메르민족이란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수메르말이라고 불리는 언어를 사용한 민족으로 세계 최고의 도시문명을 메소포타미아에서 꽃피운 민족이다. 여기에서 최고라는 말은 마지막의 결론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학이 주도한 결론일 뿐이다. 서양역사학은, 서양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한인의 한국시대 12연방의 기록을 믿지 않는다. 이는 문화의 창조 동서양 선후 다툼이 아니라 동서문화 주도권의 쟁점이다. 서양역사학자들은 구약성경을 기원으로 하는 인간의 창조론에 입각한 인류사를 정립하였는데 느닷없이 수메르문명이 발굴되고 해독되어 구약성경 이전의 원전이라고 할 기록이 밝혀지자 황당해 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서양을 기점으로 하는 수메르인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갑자기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나타나’ 라는 식으로 기술한다. 서양역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메르인이 수메르지역 원주민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언제, 누가, 어디서, 이 땅에 이주하였는가? 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지금까지는 언어학적, 인류학적으로 아시아닉크계 민족설이 유력하다. ‘검은 머리칼의 교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한단고기의 한국 12연방 막내 나라 수밀이가 확실하다. 중국사서의 ‘진서 숙신열전’에 한인시대의 한국 12연방을 가리키는 말이 숙신으로 표현되는데 ‘숙신(쥬신)은 바로 조선이며 바이칼호수 접경 남북 5만리와 동서 2만리의 나라가 한국 12연방이었으며 그 막내 나라가 수밀이국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우수주, 소머리, 쇠머리, 소말, 우두머리, 우가와 수밀이국 그리고 숙신(쥬신)의 수메르의 관련을 주목한다.
* 교착어膠着語 - 언어의 형태론적 분류에 의한 부류部類, 주로 접사接詞를 어근語根이나 변하지 않는 어간語幹에 덧붙이는 방법으로 문법적 관계를 나타냄.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 ‘터어키어’ 따위. 부착어附着語, 첨가어添加語
성경 Sharon의 장미, 고조선의 천지화, 한화 평남 진파리 1호분 금동관
무궁화 * Daum Blog 인용 (가운데 원 안의 3족오 무늬)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에서 제카리아 시친은 이렇게 말 한다
* 모든 역사가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거나, 인류 최초의 문명이 수메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수메르문명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그것이 최초의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수메르문명은 인류 최초의 것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이미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문명이기도 했다. 그들은 태양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지구와 인간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알고 있었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신들이 어디에서 언제 지구로 왔고, 왜 인간을 창조했으며, 어떻게 지구를 왕래하며 인간을 지배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내용들이 수메르의 점토판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남아있으며,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이나 각국의 신화들은 수메르의 이 고대 기록들을 나중에 각색하고 번안한 것들에 불과하다. 과연 그들이 알고 있던 창조의 비밀과 과학 기술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 태양계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거대한 행성 하나가 더 있다. 3600년을 주기로 공전하는 이 12번째의 행성, 마르둑Marduk이 바로 지구에 문명을 창조한 <신들의 고향>이다. 그들은 행성 간 우주여행을 할 수 있었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지구에 왔으며, 노동력 조달을 위해 ‘인간을 창조’ 했다. 인간과 닮은, 인간처럼 울고 웃고 싸우기도 하는, 이 신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또한 그들은 왜 지구를 떠났으며, 언제 다시 오는가? 그리고 그들이 하늘과 땅 사이의 유대를 위해 남겨둔 지상의 낙원, 에덴Eden은 과연 어디인가?
◎ 한단고기(임승국)는 수밀이국Sumer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한국본기 제 2권에서 삼성밀기는 말한다. 파나류산(한인의 한국시대의 도읍지,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天海, 바이칼호수)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한인시대의 한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2만5000Km), 동서 2만리(1만Km)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캄차카),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퉁구스, 시위국, 통고사국), ‘수밀이국’ 이니 12국이다.
* 선군왕검시대, 15세 선군대음(후을달) 재위 51년, 신사 2년, 한기 5537년(BC. 1660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겨울 10월에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 선군왕검시대 27세 선군두밀 재위 28년, 갑신 원년, 한기 6200년(BC. 997년) 천해(바이칼호수)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 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나폴레옹 마틴 루터 킹 목사 징키스 칸 마하트마 간디 이맘 호메이니
인류 5부인部人(종족) * Daum Blog 인용
* 인류학계와 세계의 사학계가 주목하는 수메르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수밀이국’ 이다. 수메르민족이란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수메르말이라고 불리는 언어를 사용한 민족으로 세계 최고의 도시문명을 메소포타미아에서 꽃피운 민족이다. 여기에서 최고라는 말은 마지막의 결론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학이 주도한 결론일 뿐이다. 서양역사학은, 서양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12연방의 기록을 믿지 않는다. 이는 문화의 창조 동서양 선후 다툼이 아니라 동서문화 주도권의 쟁점이다. 서양역사학자들은 구약성서를 기원으로 하는 인간의 창조론에 입각한 인류사를 정립하였는데 느닷없이 수메르문명이 발굴되고 해독되어 구약성서 이전의 기록이 밝혀지자 황당해 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서양을 기점으로 하는 수메르인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갑자기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나타나’ 라는 식으로 기술한다. 서양역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메르인이 수메르지역 원주민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누가, 언제, 어디서 이 땅에 이주하였는가? 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수메르인에 대한 정설은 ‘검은 머리칼의 교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이다. 이들은 누구일까?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지금까지는 언어학적, 인류학적으로 ‘아시아닉크계 민족설’ 이 유력하다. 역사적으로 인류사를 규명하려면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야 하는데 인종과 언어다. 슈메르인은 검은 머리칼의 인종이었다. 수메르인의 언어는 교착어인데 서양학자들은 언어적 연관성 때문에 이를 우랄(유럽의 서쪽 끝 지역)-알타이어(아시아의 몽골지역)라고 규정하여 서양의 서쪽 끝과 아시아의 동쪽 끝을 묶어놓았다. 유럽에는 교착어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 ‘터어키어’ 가 교착어다. 서양학자들에게는 수메르인들이 어디서 이동하여 왔는지 규명이 불가능하지만 자연 조건 때문에 문화의 동서 이동은 빠르고 남북 이동은 느리다는 고인돌유적(고인돌의 70%가 한국에
있음)에서 고대한국인의 유럽 동쪽 이동을 밝혀낼 수가 있다. 인류학과 언어학적으로 터어키인, 항가리인에 주목한다.
* 교착어膠着語 - 언어의 형태론적 분류에 의한 부류部類, 주로 접사接詞를 어근語根이나 변하지 않는 어간語幹에 덧붙이는 방법으로 문법적 관계를 나타냄.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 터어키어 따위. 부착어附着語, 첨가어添加語
* 중국사서의 ‘진서 숙신열전’ 에 한인시대의 한국 12연방을 가리키는 말이 숙신(쥬신의 한자 차음)으로 표현되는데 숙신은 바로 조선이고 바이칼호수 접경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의 나라가 한국 12연방이었으며 그 막내 나라가 수밀이국(Sumer)이라고 기록하였다.
Huns(훈족)의 정복자 아틸라왕 몽골 징키스칸 알렉산더와 티모클레시아
고조선시대 한족의 한 갈래 흉노 일파 전쟁도 * Daum Blog 인용
* 구약성경에 나오는 ‘샤론의 장미’ 는 예수의 별칭이기도 한데 이는 식물학명으로 한국의 국화 ‘무궁화’ 다. 한국고대사에서 소도(수두, 신성한 신의 영역)를 설치하고 천지화를 많이 심었으며 국자랑들이 머리에 쓴 관에 천지화를 장식하였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 불렀다. 서양인들이 신화적으로 숭앙하는 새 피닉스(불사의 새)는 밝새 또는 불새인데 한민족이 숭상한, 태양에서 사는 태양새(태양의 흑점 상징, 3족오, 세 발 달린 새, 세 발 까마귀)의 모습과 같다. 대진국 시조 해모수왕은 까마귀 깃털 모자를 썼고 고구려 벼슬아치들도 머리에 까마귀 깃털을 장식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3족오가 그려져 있고, 선군시대 8세 선군 우서한(오사함) 갑인 7년 한기 5210년(BC. 1987년)에 3족오가 대궐 뜰에 내려왔는데 날개 길이가 석 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 발 까마귀’ 는 3족오의 ‘오’ 를 ‘까마귀 오’ 로 해석하여 3족오를 ‘세 발 달린 까마귀’ 로 해석하는데 ‘오’ 를 ‘까마귀 오’ 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새김인 ‘검을 오’ 로 해석하여 3족오는 ‘태양의 흑점’ 을 상징하는 ‘불새’ 므로 ‘검은 태양새’ 다. 이를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데 태양새와 비슷한 ‘검은 까마귀’ 가 등장했다고 본다.
터어키 앙카라 2002 서울월드컵경기 고조선의 기원 바이칼호수
옛 성곽 형제국 한국과 터어키선수 * Daum Blog 인용
◎ 고대한국, 고조선의 역사
* 한인천왕의 한국桓國시대, 하느님의 시대
우리 한(桓, 韓, 汗칸은 표기 때문에 한자를 빌어옴. 한없이, 한마음의 크다, 높다, 같다, 많다의 순수한 우리 말임)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시베리아 Siveria)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 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 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은 또한 감군으로써 ‘천계에 계시면서’ 나라를 다스렸다. 이를 한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이라고도 했다. 수메르의 신들도 하늘에서 땅으로 오르내리며 인간을 다스렸다.
여와는 태호복희씨의 누나다. 그녀는 흙을 빚어 7일 만에 사람을 만들고 혼을 불어넣었다고 하였다. ‘여와’ 라는 이름마저 한국어 번역판성경의 ‘여호와’와 일치하고 수메르기록의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기록과도 일치한다. 수메르 기록에도 최고 여신인 인안나Inanna(Lipit-Ishtar)가 있다.
◎ 한웅천왕의 신시神市시대, 신인神人의 시대
* 한국의 말기에 한님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할 곳이로다 하시고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5가가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찌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마침내 천부인 3가지를 내려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 라고 하였다.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 곳을 신시라 하고 이 분을 한웅천왕이라고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을 주관하고, 선악을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 대저 9한(한국시대 한인천왕이 다스리던 강역의 나라 또는 백성)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황부인은 피부가 노랗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털은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백부인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며, 적부인은 피부가 녹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특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인종의 색깔이라고도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 (흑부인의 기록이 없음)
◎ 선군왕검, 인간의 시대
* 신인 왕검께서 불함산의 배달(밝달)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고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9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선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쥬신)이라고 불렀다. 선군은 하염없이 맨 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회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도록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 13세 선군 홀달 무술 20년 한기 5434년(BC. 1763년),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무궁화)를 심었다. 국자랑들은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 선제(대진국 해모수)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꽤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 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선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태양새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5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 ‘대변경’ 에서 치우천왕은 ‘범족 무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에 살도록 하고’ 라고 했는데 하삭은 이란, 이라크지역이며, 서아시아의 터어키가 한국계 민족임을 주시한다. 서아시아에서도 유독 터어키만이 교착어를 사용하고 생활습관과 생활양식이 한국인과 닮았으며 터어키가 한국과 형제국이라는 것은 인류학계 일반론이다. 2002 세계 월드컵대회 4강에서 한국과 터어키의 경기가 끝났을 때 터어키 선수들이 우리 선수들을 얼싸안고 ‘우리는 형제’ 라고 했다. 우리 언론은 이를 6 ․ 25 남북전쟁 때 UN군으로 참전하여 도운 ‘혈맹’ 이야기라고 했으나 혈맹이 아니라 형제다. 터어키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흩어진 한민족의 형제국이다. 터어키는 ‘투르크, 돌궐’ 이고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건설하여 유럽을 지배하였다. 터어키는 제도교육의 민족사에서 고대한국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임을 역사로 가르치기 때문에 터어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알고 있다. 또한 게르만족을 정복하여 로마를 멸망시킨 ‘아틸라’ 의 훈Huns(훈족)은 로마 보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한 제국이었다. 아틸라는 알렉산더, 징키스칸과 함께 세계 3대 정복자다. 훈족은 한민족의 갈래인 ‘흉노족의 일파’ 며 항가리민족이다. 이 사실을 몇 년 전 도이치의 GDF - TV가 역사스페셜로 방영한 일이 있다. 이 외에 한민족의 갈래는 남동부러시아(부리야트자치공화국, 러시아 남동시베리아 바이칼호 남쪽, 몽골과 접경, 레오니트 포타포프 대통령이 찾아간 기자에게 밝힌 바에 의하면 2000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 우리는 형제라고 말했음, 미국 에모리대학 연구소 DNA 분석 결과 유전자가 일치함, 중앙일보 2006년 7월 5일 자, 한민족의 고향 바이칼호에 우리 형제가 살고 있었네, 울란우데에서 김기현 특파원), 불가리아는 부여족이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몽고반점을 가지고 태어난다. 발칸반도의 발칸은 ‘밝한’ 이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는 ‘사비(성)’ 의 차음이다. 러시아령 바이칼호수 안의 알혼섬에 있는 부르한바위는 신성시 되는 제단인데 부르한도 ‘밝한’ 이다. 바이칼호수의 ‘바이칼’ 도 ‘밝한’ ‘발칸’ 과 유사하다. 바이칼호수는 본래 한민족의 기원이었던 곳인데 몽골땅이었다. 근대 모택동이 국공합작 때 러시아의 참전에 대한 보답으로 러시아에 할양했다. 동부 아프리카, 중국의 묘족과 일본 이누이트 그리고 북미의 에스키모, 남미의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에 이르기까지 고대한민족의 역사가 지구촌 대륙의 중심지에 널려있다.
Sumer 도시 Ur의 Ziggurat Sumer의 도시 Iraq유적
* Daum YJins56 인용 Assur의 신전 * Daum Wooseok 인용
◎ 수메르Sumer의 역사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 하나님이 대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할 때 인간의 딸들을 아내로 삼은 신의 아들들이 있었다. 히브리어 원전에서는 그들을 네필림이라고 했고 이는 ‘던져진 자들’, ‘지구로 내려온 자들’ 이다.
* 구약성경에는 야훼(여호아)의 옥좌가 하늘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지구)을 보고 있다. 신약성경의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말한다.
* 모든 고대인들은, 하늘에서 지구로 내려왔고 또 자기들 마음대로 하늘로 다시 올라갈 수도 있었던 신들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수메르를 비롯한 근동의 고대 유적지에서 엄청난 양의 천문학적 지식이 담긴 Sumer점토판들이 대량(5만5000매) 출토되었는데 이 문서들은 그런 신들의 존재와 그들의 고향인 특정한 행성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이를 지구태양계의 12번째 행성, 혹은 마르둑Marduk이라고 불렀다.
*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경쟁하던 두 거대한 제국, 남쪽의 바빌로니아와 북쪽의 아시리아는 아카드Acade어를 공통으로 사용하였다. 아카드어는 히브리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가나안어와 비슷하지만 그 보다 훨씬 앞선 어떤 원전의 복사였다. 그렇다면 누가 설형(쐐기)문자를 발명하고 그것의 정확한 문법과 풍성한 단어를 발전시킨 것일까? 도대체 앞 선 원전을 쓴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바빌로니아인들과 아시리아인들은 왜 그 언어를 아카드어라고 불렀을까? 구약성경(창세기 10장)에서는 ‘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 시날(수메르)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우르크)과 악갓(아카드)과 갈레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카드라는 왕조가 있었을까? 1869년 프랑스 고전고고학회에서 J. Oppert는 아카드 이전의 언어와 민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였고 학자들은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이 ‘아카드어 - 수메르어사전’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로써 수메르어를 판독하게 되자 놀랄만한 사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 수메르어로 엔시는 ‘정의로운 지배자’ 인데 라가시에서 발굴된 기록들은 라가시왕조가 BC. 2900년경에 시작되어 650년을 이어갔으며 43명의 엔시들이 다스렸고 수메르의 지도자들은 ‘신의 허락을 받아야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고 명백하게 기록하였다.
* 1956년 S. N. Kramer의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에서 바퀴, 고층건물, 음악과 악기, 야금술, 의학(서), 조각, 보석, 도시, 왕조, 법률, 사원, 기사도, 수학, 천문학, 달력, 학교, 양원제, 역사학자, 농업(서), 우주론, 격언, 문학 논쟁, 도서관 목록, 인간 영웅, 사회 개혁, 세계평화 노력, 욥, 노아, 인쇄술, 활자 사용, 원통형 인장윤전기, 60진법, 역청과 석유연료, 백내장 수술, 알코올, 죽은 신의 소생술, 투구(외투, 토가), 빵, 맥주, 포도주, 요쿠르트, 버터, 치즈 등 인류 최초의 발명 100가지 이상이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 수메르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잇는 어떤 고대문명 보다 더 발전적이고 포괄적인 문명이었다. 그리고 이 문명이야말로 현재의 우리 문명이 기원을 두고 있는 원전이다. 약 200만 년 전에 석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BC. 3800년 경에 수메르에서 고도의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수메르문명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수메르인이 도대체 누구였으며,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왜 수메르문명이 생겨났는가? 라는 물음이다. 고대인류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도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아주 갑작스럽고, 전혀 앞선 문명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 H. Frankfort는 ‘놀랍다’, P. Ammiet는 ‘비범하다’, A. Parrot는 ‘아주 갑자기 나타난 불꽃’, L. Oppenheim은 ‘엄청나게 짧은 기간에’, J. Campbell은 ‘수메르의 좁은 진흙땅에서 정말로 갑자기 세계의 모든 고등문명을 구성하는 단초들이 일시에 시작되었다’ 라고 말한다.
* 제카리아 시친은 인류학의 발전과정을 살펴 왜, 수 백 년 동안 고통스럽도록 느리게 진행되던 인간의 진화가 BC. 1만1000년경 농업의 획기적인 발전, 7400년경 신석기문명, 3800년경 갑작스런 문명의 발전이라는 세 차례의 계기를 통해 가속도를 얻어 원시적인 사냥꾼, 채취자를 농사꾼, 토기제작자로 바꾸어놓고, 다시 도시건축가, 수학자, 천문학자, 상인, 음악가, 판사, 의사, 작가로 바꾸어놓은 것일까? 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 구약성경의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대홍수 이후 지구에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수메르)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구약성경 창세기 11 : 2)’ 를 잡았다. 정착한 수메르사람들은 도시를 세우고, 탑(발사대, 지구라트)을 쌓았는데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사람들의 이름(쉠, 비행 물체)을 날리려고 하자 하느님은 인간들의 이 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통일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인간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인간들의 단합을 봉쇄하자고 자신의 동료들에게 제안한다. 언어의 혼란이 시작되자 바벨탑 건립은 무산되었다.
* 아라비아해에 착륙한(44만5000년 전) 엔키가 이끄는 네필림은 태양계 12번째의 행성 마르둑에서 지구로 내려와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최초의 정착지 에리두(먼 곳에 지어진 집)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신들이 지구의 통치권을 나눠 가진 뒤 하급 신인 아눈나키들에게 노동을 시켜 자원을 확보했다. 하늘에는 300명을 두어 안(신들의 왕, 아눈나키들의 아버지)을 지키게 했고, 안의 명령을 따르게 했다. 또한 하늘에서 지구로 오는 길을 정하게 했다. 그리고 지구에는 600명을 살게 했다. 하늘과 땅의 아눈나키에게 지시를 내린 후 노역의 임무를 부여했다.
* 노역에 시달린 아눈나키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신들의 대법관 엔닐은 무기로 폭동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누스코의 충고를 받아들여 폭동의 원인을 조사한다. 그리고 아눈나키들의 노역이 너무 가혹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신들은 원시적 노동자, 인간을 창조해서 아눈나키의 노역을 대신하게 한다. 따라서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지만 우리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신의 창조물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만 년 전에 네필림이 원인(호모 에렉투스)들에게 자신들의 형상과 모습을 덧붙여서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다파(아담)는 신이 만든 인간의 모델이다. 아다파를 모델로 노동력을 대신할 복제품 인간을 만들어냈다.
*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에 의하면 ‘10기간 동안 그들은 일에 시달렸다. … 40기간 동안 그들은 일에 시달렸다’ 는 반복된 기록이 있다. 네필림의 1년(1샤르)은 3600년(12번째 행성 마르둑의 공전주기)이다. 그래서 40샤르는 14만4000년이다. 아눈나키들은 엔키가 지구에 착륙한 뒤 14만4000년 동안 강제 노역에 시달린 것이다.
Sumer 실험실 수메르 복제인간 Egypt 고대벽화 고대 Egypt Abidos신전
복제 아기 탄생 노동력 동원 Rocket(흰색) 벽화, 헬리콥터와 잠수함
* Daum Blog와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대홍수가 지나간 뒤 네필림은 지구의 신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회의를 한다. 회의의 결과 그들은 네 개의 지역을 만들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 나일강 유역, 인더스강 유역과 나머지 하나 마지막 지역은 신성한 곳이었는데 순수한 땅으로 불리운 그 곳은 Tilmun(미사일의 땅, 우주 공항)이었다. 틸문은 어디인가? Nefilim(히브리원전 성서, 하급 신, 인간의 딸을 아내로 삼은 신의 아들들, 던져진 자들, 지구로 내려온 자들)들이 지구를 떠나면서 3600년 뒤, 오늘(AD. 2006년)로부터 1400년 뒤 돌아와서 살려고 남겨놓은 에덴동산은 어디인가? 구약성경에서는 상징적으로 에덴을 설정하여 지정학적으로는 이스라엘 동쪽을 지칭했다. 그러나 수메르문헌에서는 이라크 동북지역을 확연하게 지정한다. 네필림들이 지구를 떠나면서 지정한 에덴이 서양학자들이 말하는 메소포타지역의 동북부 이라크 동북지역인가? 아니면 고대 한국의 발상지인 바이칼호수일까?
* ‘1000년 주기로 태양 공전 태양계 9번째 행성 존재, 2008. 2/29 동아일보’ 일본 고베대학교 연구진 주장, 해왕성 바깥 쪽에 미지의 9번째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일본 언론에 따르면 고베대의 무카이 다다시(向井正) 교수팀은 상세한 이론과 컴퓨터 시물레이션을 통해 이 행성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 행성이 직경 1만 - 1만6000 Km로 지구(직경 1만2천800Km)와 거의 같은 크기며 총질량은 지구의 30 - 70%고 태양 주위를 타원궤도로 도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9번째 행성이 약 1000년 주기로 태양 주변을 공전하고 있으며 앞으로 관측체제가 정비되면 10년 이내에 실제 관측을 통해 이 행성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고 밝혔다.
# 이라크 이스탄불 국제공항, 도깨비기자 공항의 출구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어설프게 웃는다. ‘대한 도깨비기자 환영’ 이라고 한글로 서툴게 쓴 피켓을 발견한 것이다. 아주 들어내놓고 입국을 선전하는 것과 다름없다. 하기사 그들이야 도깨비기자가 추적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혼자만의 지레 걱정일 뿐. 전형적인 이라크인이었다. 머리에는 흰색 터번을 두르고 수염이 무성하다.
# 30분 뒤 이스탄불 교외, 택시가 서면서 경적을 울리자 집에서 역시 전형적인 이라크인이 마중한다. ‘Sumer의 역사’ 저자 디오도로스 다비드(Dyodoros David, 약칭 DD)다.
디디 :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도깨비기자 : 아닙니다. 오히려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Sumer Sumer 신神 Sumer 왕
설형문자 점토판 Ishtar Gilgamesh
*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디오도로스 다비드의 방담 취재 기록
디오도로스 다비드는 전통적인 유대교인의 집안에서 자랐다. 철저한 유대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디디는 맹목적인 그리고 전통적인 유대교리에 비판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그 갈등의 와중에서 인도 여행을 떠난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몇 가지 사실들을 답사하려는 의도였다. 랍비들은 이러한 여행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는 파문을 각오하고 종단의 간섭을 뿌리쳤다. 디디가 인도에 와서 3개월째가 되는 가을, 무료하게 시내 구경을 나섰다가 거리의 마술사를 만났다. 흥미롭게 구경을 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사내가 말을 걸었다. 저런 마술쯤은 기초라고 했다. 더 놀라운 마술을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디디는 그 사내를 따라나섰다. 걸으면서 사내는 디디가 무슨 목적으로 인도에 왔으며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디디가 다소 놀라서 그것도 마술이냐고 했더니 사내는 자기를 Master라고 소개했다. 굳이 풀어 쓰자면 대사大師란 뜻이었다. 그들은 한 시간 가까이 걸었고 그 때는 황량한 벌판에 있었다. 대사가 하늘을 쳐다보며 날아가는 새를 가리켰다. 전령이라고 했다. 자기 동료들이 자기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반신반의 하는 양을 보더니 대사가 오른 손을 하늘을 향해 뻗쳤다. 새가 그의 손등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후 디디는 대사와 사흘을 걸었다. 도착한 곳은 바위 산 정상에 지은 동굴사원이었다. 수 세기 동안‘빛의 사원’이라고 불리워왔다. 모세와 예수가 머물었던 사원이라고 했다. 모세와 예수의 기록도 있다고 했다. 그 곳에서 디디는 수많은 점토판을 보았다. 수메르역사를 기록한 점토판은 니네베 유적지에서 2만5000매, 니푸르 유적지에서 3만매가 발견되었다. 점토판이 보관된 방 옆 방에서는 20여 명의 사람들이 점토판 해석작업을 하고 있었다. 디디는 3년 동안 사원에 머물며 점토판 번역작업을 도왔다. 그리고 세상에 나와‘수메르의 역사’를 펴냈다. 대사는 세상에 나가더라도 여기의 일을 함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디디는 그 지시를 지킬 수 없었다. 책은 매우 센세이셔날한 반응을 보였다.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와 인류학계 그리고 역사학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디디는 점토판의 해석뿐만이 아니라 대사와 지난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한편으로는 그 황당한 내용들이 비난을 받았다. 물 위를 걷고, 불속을 걸어나가고, 유체이탈과 시공간의 초월, 컵속의 물을 응시하는 것만으로 얼리는 기적을 사람들은 황당무계한 거짓말로 치부했다. 그래서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인 점토판까지도 반신반의하는 추세였다.
도깨비기자는 대담을 마치면서 가슴속에 품은 한 마디를 망서렸다. 그러나 끝내 선기옥형에 대한 말은 꺼내지 못했다. 빛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서운함을 달랬다. 디디는 사원의 빛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지 못했다. 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따로 불을 밝힌 것도 아닌데 사원 내부는 은은하고 밝은 빛에 싸여 있어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이 없었다. 이제 돌이켜보니 빛뿐만 아니라 빛과 열을 함께 발산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빛에 의한 그림자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림자가 없는 빛. 그렇다면 그 빛은 발광체에서 나온 빛이었을 것이다. 그 발광체가 선기옥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디디는 발광체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깨비기자는 입술 끝에 선기옥향이라는 말이 달랑거렸으나 참았다. 디디가 낌새를 눈치 채고 먼저 말을 꺼냈다.
디디 : 선생은 기자지요? 선생이 알고자 하는 것이 점토판이나 점토판의 해석이 아니 라 선기옥형이라는 기물器物이라지요?
도깨비기자 : 선생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Sumer역사’ 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한고 대사에 고조선이라는 고대국가가 있었는데 그 고조선의 12제후국에 수밀이국이라는 나 라가 있습니다. 정통적인 역사학계의 정설은 아니지만 한국의 재야사학자들이 이를 연 구하고 있습니다. 수밀이국이 Sumer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나 서양학자들이 Sumer인들의 출현을 ‘어디선가 느닷없이 출현했다’고 표현한 그 ‘편두의 검은 머리’를 대한학자는 Sumer인이라고 확신합니다. 더불어 수메르어가 한국어와 비슷한 문법구조 를 지녔습니다.
디디 : 근거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확신은 없습니다. 인종과 언어는 역사 규명의 가장 핵심 적인 요소입니다. 점토판의 해석이 진행되어가면서 기자선생이 말하는 근거들이 나타날 지도 모릅니다. 규명해야할 과제입니다. 찬란한 문명을 이룬 고대국가를 ‘어디선가 느닷 없이 출현한’ ‘편두의 검은 머리 사람들’이라고 얼버무린 일은 역사학계의 수치입니다. 규명되어야 하고 규명될 것입니다. 일부에서 비판하는 동양인설의 문제는 편견입니다. 역사연구에서 인류의 기원이 동양이냐 서양이냐는 넌센스지요. 서양 위주의 역사관을 펴왔던 서양학자들에게는 학문적 문제가 될 소지는 있습니다.
도깨비기자 : 역사학 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선생이 동굴사원에서 보았다는 빛에 대한 의문 이 있습니다.
디디 :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이 찾고자 하는 선기옥형을 저는 모릅니다. 또 그 빛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위적인 빛은 아니라고 생각됩 니다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먼 길에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데 만족할만한 성과를 드 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디디와 대담을 통해 동굴사원의 빛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으나 디디를 통해서도 대사를 만날 방법은 없었다. 디디는 동굴사원을 다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대사의 안내가 아니면 사원에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사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쉽지만 포기하고 오스만투르크 유적을 살핀 다음 헝거리의 부다페스트로 그리고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거쳐 바이칼호수로 가겠다는 보고를 본사에 알렸다. 본사에서는 도깨비기자가 필드성향(현장 취재)에 대해서 제동을 걸지는 않았지만 도깨비기자의 취재에 대한 대책회의가 있었다. 취재의 성격 상 대사관이나 정부쪽에 공식적으로 협조를 요청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보조원을 증원하기도 곤란했다. 유럽의 주재원들도 도깨비기자와 동행을 꺼렸다. 또 도깨비기자가 보조원을 받아들일지도 알 수 없었으며 행방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일에 대한 욕심이나 열정도 그렇지만 도깨비기자는 어울려서 일 하는 걸 싫어했다.
# 대한방송DBS 기획실. 기획실장, 편집국장, 해외부장, 최기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중이다.
기획실장 : 독고빈 그 사람, 어떻게 된 게 몇 주째 소식 두절이야!
최기자 : 유럽 특파원을 풀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해외부장 : 특파원을 풀어서 해결될 일이 아냐. 서울에서 김서방을 찾는 게 낫지 그 넓은 땅에서 어디 박혀있는지 아나?
편집국장 : 취재는 취재고 또박또박 주재지라도 알려줘야지, 3청동에서도 난리잖아. 어딧는 가를 알아내면 즉시 귀환 명령을 내리라는 거야.
최기자 : 들어오란다고 유럽까지 간 사람이 돌아오겠습니까?
해외부장 : 3청동은 자칫 국제분쟁에 휘말려드는 거 아닌가고 안달이지.
최기자 : 중국이나 일본이라면 몰라도 유럽에서 국제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을 겁니다.
기획실장 : 최기자,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3청동이 언질을 했다면 문제가 심각해. 송고 된 기사로도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파악할 수가 있어야지, 기사랍시고 보고 서를 보냈는데 도대체 오리무중이란말야. 원 나 참. 기사래야 기사화할 수도 없는 원고 나부랭이야.
편집국장 : 문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호출명령을 내리는 게 옳아.
기획실장 : 말은 그런데 … 도대체 어디가 있는지 알아야 호출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 냐. 손이 닿아야 손을 쓰지.
최기자 : 머잖아 연락이 올겁니다. 계속 연락 두절이면 저라도 나서보지요. 연락두절이 계속 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기획실장 : 심각하다면 무슨 뜻이지? 하여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문제가 더 심각해질성싶 으니 우선 어디 있는지나 파악해보세요. 무슨 수를 쓰더라도.
# 대전 엑스포 기획실. 엑스포 관계자들과 정부부처 정보담당관들이 모여 있다.
대전 엑스포 기획실장 : (국정원 정보담당 제 1부장을 소개하며) 부장님 말씀을 먼저 듣겠 습니다.
국정원 정보담당 제 1부장 : 엑스포 해킹사건은 이미 알려진 일이니 부연할 건 없고, 해킹 사건 뒤 이 문제가 국제적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중국의 국가안 전부 11국인 정보자료중심국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SVR(대외정보국) 제 1국, 미국의 CIA, 프랑스의 DGSE(대외보안총국), 일본의 정보조사실까지 이 사건에 뛰어들고 있습 니다. 우리 국정원에서는 이 일이 국제적으로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추적해야 하는 정 보적 가치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그 결론을 얻고싶어 여러분을 초치했습니다. 이 말은 국정원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과기처 정보담당관 : 국제적인 에니메이션대회 취소와 같은 일은 그 문제의 심각성을 대변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번 대전엑스포 에니메이션 경연대 회에서 해킹 당한 캐릭터는 우리로써는 매우 심각한 사태입니다.
청와대 과학정보담당 수석 :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지요.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책임질 위치에 있는 분들입니다.
과기처 정보담당관 : (난처한 표정으로) 책임 유뮤를 떠나서 제 직책상 더 이상 말씀을 드릴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우주센터 정보담당기획관 : 과기처의 처지를 이해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 면 이미 공개되어야 할 캐릭터가 설사 사전에 해킹이되었다 하더라도 그 게 무슨 문제 가 있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센터 쪽에서도 더 이상 말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청와대 과학정보담당 수석 : 그렇다면 구지 더 설명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정원부장님이 마음을 쓰시는 문제는 비켜가는 아닌가요?
국정원 정보담당 제 1부장 : 아닙니다. 본질을 파악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에니메이션대회 무산과 관련해서 중국과 관계가 껄끄러워진 일은 대게 짐작하실 일이고, 더 우려하는 상황은 기자 한 사람이 이 일에 뛰어들었는데 자칫하면 국제 분쟁의 소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본질 보다는 기자에게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기자가 무엇 을 하든 어디를 다니든 그런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기상센터 기획팀장 : 기자의 안전의 문제입니까?
청와대 과학정보담당 수석 : 안전이야 … 개인적인 문제지요. 회사의 문제고요. 국제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대한의 기자가 추적한답시고, 현재까지 중국, 터키, 불가리아로 해서 러 시아령 바이칼호수까지 들쑤시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추적하는 기물, 뭐 확실하게 말씀드리자면 선기옥형이란 기물을 몇 개의 나라가 모두 관심사란 말입니다. 에니메이션 해킹사건으로부터 선기옥형은 국제적 미스터리로 부각되었습니다.
국정원 정보담당 제 1부장 : 정보 차원에서라면 국정원의 프로젝트인데 정부에서는 손을 놓 고 있는데 민간이 뛰어들어 국제 분쟁을 야기하는 셈입니다. 국정원은 이런 사태를 원 치 않습니다. 방관만 할 수도 없습니다.
청와대 과학정보담당 수석 : 대책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국정원 정보담당 제 1부장 : 그렇습니다. 유럽 쪽에서 접촉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 자를 추적하다가 안 사실인데 아까 말씀드린 몇몇 나라가 매우 은밀하게 국가적 차원에 서 선기옥형을 추적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우리 기자가 추적하는 선기옥형이 국가적 프로젝트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해당 기 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판단으로는 기자 개인적으로도 상 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고 봅니다.
기상센터 기획팀장 : 기자를 … 은밀하게 지원하거나 보호하는 일은 가능합니까?
국정원 정보담당 제 1부장 :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이 직접 뛰어들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기상센터 기획팀장 : 기상청 입장에서 보면 매우 미묘한 프로젝틉니다. 지원하고 보호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국정원 정보담당 제 1부장 : 그렇게 알고 내부적으로 협의하겠습니다.
# 다음 날 오후 늦게 바이칼호수에 인접한 브리야트Buryaty 소련자치공화국 수도 울란우데공항에 도착한 도깨비기자. 택시를 타고 곧장 바이칼Baikal호수 부근의 인구 200여 명의 작은 민속촌 리스트비양카로 갔다. 바이칼호수 안의 알혼Olkhon섬을 관광선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알혼섬은 브리야트인과 예벤키족의 성지聖地다. 징키스칸의 어머니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지구촌 무속신앙의 진원지다. 브리야트가 ‘부여’, 발칸이 ‘밝한 즉 부여의 땅’ 이라는 언어의 변형이나 차음遮音이라면 바이칼호수의 바이칼 또한 ‘밝한’ 의 차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도깨비기자는 민속촌의 거리를 한 바퀴 돌아보고나서 민박집 주인에게 부탁하여 알혼섬 관광선을 예약했다.
# 늦잠을 잤나, 민박집 주인이 문을 두드려서야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이다. 관광선은 유리알 보다 맑은 바이칼호수를 날으 듯 달려 알혼섬에 도착했다. 안내인이 추장을 소개했다. 추장은 전형적인 몽골인이었다. 깊게 패인 주름살과 몽골계 특유의 모습에 도깨비기자는 마치 먼 친척을 방문한 느낌이었다. 추장을 앞세워 서낭당을 찾았다. 신목神木이 있었다. 얼핏 봐도 수령이 몇 백년 쯤 되어보였다. 5색 헝겊을 걸어놓은 금줄과 돌탑도 한국과 똑 같았다. 신목 옆에는 솟대가 서있었다. 오고이복장,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에 사람, 말, 새 모양의 장식을 줄렁줄렁 달고 샤먼이 나타났다. 종과 원형 장식물은 금속 패넌트고 복장 역시 한국의 무당과 흡사했다. 추장이 도깨비기자를 소개했다. 도가이고오 후이Dogaiguo Hui는 올혼섬의 세습무당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도가이고오 후이였다. 무당 세습 전통을 묻자 도가이고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아주 오래라고 대답했다. 세습무당이고 이름까지 세습된다는 정도. 추장과 안내인도 아주아주 오래의 의미를 모른다고 했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이어내려온 가문일지 모른다. 신목의 세월만큼이나 세습무당의 이마에도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도가이고오가 도깨비기자를 제단으로 안내했다. 제단에는 향로가 한 개 놓이고 쑥을 태우는지 강한 쑥 냄새가 났다. 제단 밑에 북과 청동거울이 있었다. 도가이고오가 제단 뒤로 돌아가더니 검게 옻칠한 듯한 궤를 들고나와 향로 곁에 놓았다. 궤에 앉은 먼지를 입으로 후후 불어내고는 조심스럽게 궤문을 열었다. 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궤 안이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서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도가이고오가 향로 앞에 꿇어앉았다. 주문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얼마지 않아 향로를 감싼 쑥향 연기 사이에서 뭔가 어른거렸다. 연기가 소용돌이처럼 엉키고 있었다. 보고있는 사이에 연기는 몇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동그라미는 형체를 만들었다. 아니! 저 건…? 도깨비기자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신음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3족오였다. 3족오의 형체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형체를 이루고는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도깨비기자는 얼이 다 나간 듯 변화하는 형체를 보고있었다. 도가이고오가 묵상을 멈추고 일어서자 형체는 다시 곧은 한 줄기 연기로 되돌아왔다.
도깨비기자 : (제단을 나서며 도가이고오에게) 연기가 그린 형체가 무엇인지 아는가?
도가이고오 :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모른다.
도깨비기자 : 저런 현상이 언제부터 있었나?
도가이고오 :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라고 들었다.
도깨비기자 : 형체의 실물은 무엇인가?
도가이고오 : 모른다
# 추장이 뒤 따라 오면서 추장은 바뀌지만 세습무당은 바뀌지 않는다면서 매우 오래된 일이어서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저 입으로만 전해오는 전설이라고 했다. 도깨비기자가 추장에게 3족오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또한 하늘에 제사지내며 점을 치는 기물이었을 거라고 했다. 이르쿠츠크Irkutsk에 박물관이 있으니 거기 가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바이칼호수를 거점으로 이르쿠츠크는 서쪽에 그리고 동쪽에는 브리야트 몽골자치공화국의 수도인 울란우데가 있다. 그 날 오후에 찾아간 이르쿠츠크 향토박물관은 브리야트인의 생활사박물관이었다. 3족오와 선기옥형의 모습이나 흔적은 없었다. 도깨비기자는 리스트비양카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알혼섬의 도가이고오를 찾았다. 관광선 도크에 앉아 부서지는 물결을 무심하게 보고있던 도깨비기자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도가이고오? 도가이고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머리 속의 안개가 걷힌 듯 머리 한 쪽이 말갛게 트여졌다. 그렇다 도가이고오 후이는 독고 성씨의 차음인지 모른다. 독고휘? 독고후? 예상이 맞다면 도가이고오의 조상은 독고씨고 치우천왕의 신장神將이었던 독고휘 장군일지도 모른다. 급히 서낭당을 찾은 도깨비기자가 도가이고오를 찾아 조상의 내력을 물었다. 할아버지의 기억 밖에 없었다. 유목민들답게 족보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도가이고오를 확인하려던 도깨비기자는 맥이 좌악 풀리는 걸 느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때문인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차로 리스트비양카를 떴다. 불가리아로 들어가 소피아를 보고 곧장 헝거리에서 아틸라의 유적을 찾아본 뒤 터키로 다시 날아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유물을 확인하고 싶었다.
* 불가리아는 고조선의 유민인 부여족이 세운 나라다. 불가리아는‘부여의 땅’의 차음이며 발칸반도의 발칸은‘밝한’이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도‘사비(성), 백제의 사비성, 현재 충남 부여시’의 차음이다.
* 헝거리는 훈스족의 나라인데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민족의 일파인 흉노족이 서남진하여 세운 나라다. 헝거리나 훈스 또한 ‘흉노’ 의 차음이다. 헝거리역사에는 아틸라라는 왕이 있다. 아틸라는 AD. 434년에 로마를 제압하고 정복자가 되었다. 세계 3대 정복자는 징기스칸, 아틸라, 알렉산더다.
* 터키에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역사가 있다. 터키는 고조선의 유민 ‘돌궐족’이 세운 나라인데 AD. 1326년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이루어 유럽을 지배했다.
◎ 두 개의 3한韓
* 고조선은 마지막 47세 선군 고열가의 유지諭旨로 화백제도和白制度인 5가의 공화정을 6년 간 펴다가 해모수에 의해 북부여로 계승되었으나 고조선의 강역에서는 100 여 개의 나라들이 일어나 성읍국가城邑國家를 형성한다. 씨족 부족국가, 지역국가로 형성된 나라들이다. 북부여를 위시하여 동부여, 졸본, 읍루, 옥저, 동옥저, 북옥저, 최씨낙랑국, 동예, 맥, 3한(마한, 변한, 진한), 가야들이 대표적이다. 한기 7100년경부터 7600년경까지(BC. 1세기 - AD. 5세기) 이 성읍국가들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면서 국가연맹체로 결성되어 국가의 기틀을 구축한다. 한국역사에는 두 개의 3한이 있는데 그 하나는 고조선의 선군왕검시대 ‘3한관경제’ 의 3한(진한, 번한, 막한)이고, 두 번째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유민들이 남으로 이주하여 세운 3한이다. 본고에서 정립하는 3한은 한국의 3한이지만 두 3한이 이름이 비슷하여 혼동의 소지가 있고, 두 3한의 관련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정립되지 않아 일반화되지 못하였기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의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정리함
* 한(순수한 우리 말, 汗, 韓은 빌어쓴 글자)은 나라 이름이 아니다. 만주나 몽고말로도 임금(칸)이란 뜻이다. 고조선에는 진(신)한, 번(발, 불)한, 막한(말한, 일본서기의 모한이라고 함은 왜倭왕 무茂의 실수) 세 임금이 있는데 진한이 상황上皇이었다. ‘만주원류고’ 에서는 ‘한’ 을 나라 이름으로 저술한 ‘후한서’ 의 저자 범엽을 다음과 같이 질책한다. ‘당시 3국에는 3한이 있어 한 나라씩을 통치하였다. 사가史家들이 <한>에 군장君長의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음音이 같다는 것에 집착하여 오역한 일은 고증이 무능하였다는 결론이다’. 단재 신채호는 고조선의 3한을 신한, 번한, 막한이라고 가렸다. ‘한’ 은 본래는 왕의 칭호였으나 나라 이름으로도 두루 쓰였음
* 고조선의 3한은 국가통치방식이었던 3한관경제管境制의 진한辰韓, 번한番韓, 막한莫韓이며, 진한은 진조선眞朝鮮으로 선군왕검이 직접 통치하였고 수도는 송화강 유역 아사달이다. 강역은 압록강 이북에서 요하 동부로부터 만주까지였다. 번한은 번조선番朝鮮으로써 수도는 하북성이며 요하의 서쪽 하북, 하동, 산동, 산서, 강소에 이르는 중국대륙이었다. 막한은 막조선莫朝鮮으로 평양이 수도며 압록강 이남의 한국과 제주도, 대마도임
* 한국의 3한은 고조선이 멸망하고 3조선의 유민들 일부가 남하하여 한국 강역 안에 옛 고조선의 정신을 되살려 3한을 재건하였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을 참고하여 다시 이를 정리한 중국의 3국지三國誌 위지魏誌 동이전에 기록된 한국 안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말한다. 마한은 한강 유역과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자리잡은 54개국 연맹국가로써 총 10만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호 작은 나라 수천 호였다. 목지국目支國 또는 진국辰國의 진왕辰王이 맹주盟主로 군림하였고 초기에는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국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과 한서漢書 조선전에도 BC. 2세기 한국 중남부지역은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 3한이 진국에서 발전된 것으로 되어 있다. 진한辰韓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에 자리잡은 12개국 연맹국가로써 4 - 5만호였으며, 큰 나라는 4 - 5000호 작은 나라 6 - 700호였다. 변한弁韓은 낙동강 유역의 경상도에 자리잡은 12개국 연맹국가임
* 3한 중국설은 근래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한국의 3한(마한, 변한, 진한)이 한국강역과 중국의 동북지방이라는 학설이다. 3한을 계승한 3국(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설과 같은 맥락인데 한단고기(임승국)에서는 고조선 선군왕검시대가 멸망하고 상장군 탁이 유민을 이끌고 해로를 통하여 한국의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고조선의 3한을 계승하는 3한을 건국하였고 상장군 탁을 추대하여 진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단재 신채호도 같은 논리를 폈다. 그러나 근래 진보적인 학자들이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또 하나의 학설을 전개하였는 바 그림의 3한을 설정하고 있다.
◎ 가야의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가야문화의 특질, 신경철)
학계에서는 가야의 성립을 토착설과 북방민족 이주설 두 갈래로 논란이 되었는데 근래 가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두고 북방민족 이주설이 설득력 있는 정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음
* 도질토기陶質土器의 사용 : 도질토기는 북방 토기로써 AD. 3세기 말 금관가야 중심부였던 낙동강 하류 김해와 부산지역 고분에서 출현하여 영남 각지에 산재한다.
* 순장殉葬 : 한국 토착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고 부여 등 유목민 습속인바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확인되었다.
* 오르도스Ordos형 동복銅腹 : 북방 유목민의 청동솥인데 북부여 제작으로 추정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되었다.
* 무기武器의 훼손毁損 풍습 : AD. 3세기 말 무렵 추정, 김해 대성동 45호 고분에서 발굴된 대도大刀는 일부러 구부려 부장副葬함. 북방 유목민족 풍습이다.
* 갑주甲冑(갑옷)와 마구馬具 : 철제 갑옷과 투구, 기마용 마구는 북방 피혁 갑주문화인바 중국 동북방 선비족과 부여가 원류다.
* 묘제墓制 : AD. 3세기 영남에서 발굴된 묘제는 목곽묘로써 관묘제도와 다름. AD. 2세기 후반 추정, 양동리 162호묘에서 발굴되었다.
* 선행先行 분묘墳墓의 파괴 : 의도적으로 선행 묘를 파괴하는 행위는 앞 체제를 부정하는 유목민족의 풍습이다.
불가리아 Tsarevets Fortress 헝거리 부다페스트 Pyramid와 Sphinx
국가 문장紋章 차레베츠 요새 Danube강 * Daum Blog 인용
# 불가리아는 유럽 패권의 역사에서 약탈당하고 소실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불가리아에서 고대 유물과 유적을 찾는데 실패하고 도깨비기자가 헝거리의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다음 날 현지 신문에 ‘훈족 아틸라 칸의 궁전 오늘 낙성식’ 의 기사를 보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3년 전 도이치 TV ZDF,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 중 잃어버린 고리 찾기 편編’ 은 AD. 375년 게르만민족의 대 이동을 촉발해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아시아 유목민족 훈족을 집중적으로 추적한 바 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 동쪽 끝, 즉 대한인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고고학적으로도 신라, 가야와 훈족의 유물 유적을 비교해보면 편두扁頭, 금관의 머리장식 등 여러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고 결론지었다. 이를 계기로 역사적 현장을 재현하여 문화사업을 펼치려는 헝거리 기업가가 거액을 투자해서 아틸라 궁전을 재현하는 사업을 하였는데 착수한지 3년만에, 오늘 오전 11시에 각계 요인들이 참석하여 낙성식이 열린다는 내용’ 이었다. 도깨비기자는 흥분된 기대감을 가지고 아틸라 칸 궁전을 찾았다. 궁전은 예상 보다 넓고 컸다. 사방 1Km의 대지에 고대 양식의 건축물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에 매료되어 돌아다니다가 뜻밖에 도가이고오 후이를 만났다. 도가이고오는 지구라트(Ziggurat는 정상부분이 평평한 제단이고 피라미트Pramit는 정상부분이 뽀쪽한 무덤)에서 제사 준비를 지휘하고 있었다. 예의 그 알록달록한 무당복장을 하고 훌쩍 높은 지구라트에서 제사를 지휘하다가 그 역시 도깨비기자를 발견하고 계단을 내려와 반갑게 맞았다. 오늘 낙성식 제례를 맡았다고 했다. 도깨비기자가 의외라는 표정이자 도가이고오는 나라와 민족을 도외시하고, 핏줄이 같은 민족의 유럽 서남부지역의 큰 제사는 도가이고오 집안에서 맡는다고 했다. 그것은 오랜 전통으로써 부근의 민족들이 나라라는 개념을 넘어 종족의 모임으로 모두 모인다고 했다. 오늘도 불가리아, 헝거리, 터키, 브리야트, 코리족들이 모두 모였다고 했다. 고봉학술원에서 운곡선생은 동방과 서역의 무역로였던 ‘비단길’이 애초에는 민족 방문길이었다고 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부족들이 흩어져 여러 갈래로 나뉘었는데 유럽 서남부로 이동한 종족이 만든 나라들과 동쪽으로 이주한 종족들이 시베리아 남부로부터 만주, 몽골, 중국, 일본 그리고 대한(한국)이라고 했다. 비단길은 몇 년에 한 번씩 동족을 방문했던 고조선 부족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이들의 방문길에 편승한 장사꾼들이 빈번히 왕래하게 되어 장삿길로 발전하게 되었다. 근래 재야사학자들이 고조선의 역사를 이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도 이런 역사적 고증 때문이었다. 바이칼호수 올혼섬 세습무당의 위상을 새삼스럽게 가늠할 수 있었다. 도깨비기자는 도가이고오의 제사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제사의식에서도 선기옥형의 형체는 찾지 못했다. 제사의식을 보고 나오던 참에 또 뜻밖에 디오도로스 다비드를 만났다.
도깨비기자 : (놀라면서) 선생님께서도 여기를 ….
디디 : (어깨를 나란히 걸으며) 와봐야지요, 초청이 없었더라도. 지구라트 축조의 자문을 맡 았습니다. 서양인들은 피라미트나 지구라트에 문외한이지요. 서양에는 피라미트나 지구 라트가 없습니다. 지구라트는 수메르인들이 인류 최초로 쌓았습니다. 성경의 바벨탑도 지구라틉니다.
도깨비기자 : 선생님의 연구와 어떤 연관이 있나요?
디디 : 제 연구는 점토판의 번역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태양계 12번째의 위 성에서 내려온 신들’과 성경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대한과 같은 몇몇 나라들의 건국설화, ‘하늘에서 하강’입니다. 한결같이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기가 근본이고 다음은 ‘동방에서 불쑥 나타난 검은 머리’의 수메르인과 연 관성입니다. 기자님의 추적은 어떻습니까, 성과가 있나요?
도깨비기자 : 없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동굴사원의 빛과 중국의 3조당에서 확인한 전쟁 복원도의 그림 그리고 바이칼호수의 세습무당이 보여준 형상이 모둡니다. 참, 바이칼호 수의 세습무당, 아까 제사를 주관한 무당인데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을 보여주었습니다. 묵상 속에서 제가 찾는 선기옥형의 형체와 연관성이 있는 3족오라는 새의 모형을 재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물은 없었고 내력조차도 오리무중입니다. 세습무당이라면, 그는 대대로 무당을 세습한 가문입니다. 그렇다면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사라졌습니다. 무당 가문의 3대 이전에는 구전역사 조차도 없었습니다. 기록이 없는 탓 입니다. 아틸라는 동방의 그러니까 고조선의 흉노족으로 유럽에서는 훈족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 3대 정복자의 하납니다. 징기스 칸, 알렉산더와 함께 세계 역사상 가장 넓 은 영토와 왕권을 행사한 왕이지요. 영토로 보자면 로마의 2배 정도였습니다. 로마 말 기라지만 로마마저 아틸라에게 해마다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쳤으니까요. 아틸라에게 선 기옥형이 전수되었다고 추론합니다.
디디 : 선생의 추리도 놀랍군요. 제가 추적하는 ‘하늘’의 실체와 같이 선기옥형의 실체도 나 타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선기옥형이 기상이변이나 오염 그리고 공해 등 지구가 처한 현재적 상황을 타개하고 지구촌을 구제할 수 있다는 논리에는 제가 좀 취약합니 다.
도깨비기자 : 천기天氣의 흐름을 역사적으로는 세 단계로 봅니다. 하늘의 이치에 순응했던 관천망기觀天望氣시대 - 하늘을 보고 변화를 예측한 시대, 기기를 사용한 측기測氣시 대, 세 번째는 현대인데 관측자료를 수집하여 기상상태를 예측하는 일기도日氣圖시대지 요. 선기옥형은 두 번째 측기시대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의 기록을 보면 실 제 관측과 어우러지는 정신적측면이 있습니다. 그 게 선기옥형의 역할이었습니다. 세상 은 눈에 보이는 것 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이 많고 눈에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더 중요한 것인데… (아무래도 디디가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아 부연한 다.) 예를 들면 요즘에는 동양의 침술이 서양의학에서도 연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만 국에서 실제로 침술치료를 받고 놀랐지요. 서양에서는 수술을 하려면 마취제를 주사해 서 몸을 마비시킵니다. 동양의 침술은 몸의 경락에 침을 놓아 마취를 합니다. 경락은 인체에 360개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찍이 물리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인체의 생명력 을 알아냈습니다. 이른바 ‘기氣’라는 것인데 생명력이 있는 것은 모두 이 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철학에서 ‘이理와 기氣’는 세상을 이루는 기본 형상입니다. 한국인은 기 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생활에서도 ‘하늘의 기운인 천기天氣, 날씨를 일기日氣, 기운氣 運 또는 의학적으로는 감기感氣, 기운이 없다, 기가 막힌다’는 말 등 이와 기는 두루 널 리 쓰입니다. 침술에 적용하는 것도 기입니다. 침술로 수술한 환자는 수술이 끝나자말 자 곧 자신의 힘으로 걸어나갈 수 있습니다만 서양의 마취수술은 몇 날 며칠을 병상에 누워 꼼짝딸싹도 하지 못하다가 수술자국이 아물어야 일어납니다. 예가 적절한지 모르 겠지만 선기옥형의 정신적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눈으로 보는 일은 한계가 있지요. 또 관측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그 한계를 한 단계 뛰어넘는 것이 선기옥형을 통한 천기예 측이고 한국인의 예지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를 마음수련이라고 합니다. 고도의 정신수 련으로 얻어지는 지혜입니다.
디디 : 놀라운 이야기군요. 제가 이라크에서 만난 대사(大師, Master)의 이적異蹟과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합니다. 동굴사원의 이야기도 서양사람들은 당혹해하지요. 뭐, 일종의 신비주의로 인식하는 수준입니다. 엄연히 경험한 사실을 믿지 못하는 거지요. 서양의 과학적 논리로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틸라는, 통치시기가 짧았지만 대단한 인물이지 요. 알렉산더 보다는 앞서고 징키스 칸 다음가는 정복잡니다. 자, 같이 갑시다. 궁전을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더 듣고싶습니다. (아틸라의 대관식 장면에 멈춰서서) 이 기록은 정확합니다. 로마의 역사학자 프리스코스와 요르다네스 기록의 기록이지요.
Huns(훈족)의 정복자 아틸라왕 전쟁도 오스만 투르크 근위보병부대
* Daum Blog 인용 Yenichri
# AD. 434년(한기 7731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오스의 수도 라벤나궁전, 검도 연습 중인 아틸라에게 훈족의 전령이 전갈을 전한다.
전령 : (손을 가슴에 대고 절한 뒤 엎드려) 왕자님 급히 귀환하시라는 전갈입니다. 루가 황 제께서 급사하셨습니다.
아틸라 : (얼굴빛이 바뀌어 칼을 거두며) 뭐! 삼촌이? (손짓으로 전령을 따르게 하고 급하게 복도를 걸어가며) 병사인가?
전령 : 모릅니다.
아틸라 : 병사가 아니라면 암살이란 말이냐? 형은 뭘 하고 있느냐?
전령 : 저희들은 모릅니다. 명령만 전달할 뿐입니다.
# 황제 호노리오스의 수도 라벤나궁전 황제의 방
아틸라 : (황제 앞에 아틸라 부복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황제 : (손에 들고있는 왕홀로 아틸라를 가리키며) 왕자는 볼모가 아니다. 형제의 나라로써 로마에 유학했다. 서정이 급박하니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다. 돌아가거라! 왕이 되어서 도 로마와 나, 호노리오스의 우정을 잊지 말라!
# 호노리오스 궁전 아틸라의 방
아틸라 : (시종들에게) 칼과 무기만 챙겨 떠난다! (호노리오스의 공주 호노리아 달려들어온 다.)
호노리아공주 : 당장 떠나야해?
아틸라 : 급해! 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어. 루가 삼촌은 아버지의 섭정이야. 왕위계승자는 나와 형인데 형이 왕위를 물려받을지 내가 물려받을지 중대한 결정이 기다라고 있어.
호노리아공주 : 조심해! 황제가 아에티우스장군을 궁전으로 불러들였어. 호위병사들을 대기 했으니 대려가.
돌아오는 도중에 호노리아공주의 예상대로 복병이 있었다. 복병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호노리아가 준 병사만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혈전을 각오하고 포진을 하려는 때 다행히 마중나온 형 불레다의 병사들이 들이닥치자 아에티우스의 병사들은 엉거주춤 물러서더니 돌아갔다.
# 아틸라의 아버지 문주크왕의 궁전. 돌아온 아틸라와 형 블레다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대관식. 훈족의 세력을 과시하듯 서남부 유럽 45개 종족의 추장과 부족장들이 도열하고 있다.
#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공동으로 왕위(AD. 434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형 블레다(AD. 443년)가 죽고 황제로 왕권을 잡은 아틸라는 동로마가 공물을 제 때에 바치지 않는다는 구실로 동로마로 진격 이에 놀란 동로마는 공물 2배 증액 약속을 받는다. 이 때 서로마와 서코트의 경찰권도 넘겨받아 아틸라는 명실공히 유럽의 패자로 군림한다. 남으로는 발칸반도, 북 발트해안, 동 우랄산맥, 서로는 현재의 프랑스까지 다스린 종족만도 45개 종족이었다. AD. 450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가 황제 자리를 탈취하려고 음모를 꾸며 발각되자 동로마의 한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호노리아는 아틸라에게 결혼을 의미하는 자신의 반지를 증거물로 서로마로 진격해줄 것을 부탁했다. 아틸라는 ‘이미 내게 10명의 아내가 있으니 열한 번째 아내는 더 필요없다’고 호노리아공주의 제의를 거절하고 한편으로는 서로마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영토의 절반을 결혼지참금으로 할애할 것을 요구했으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호노리아를 다른 사람과 결혼시킨다. 서로마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AD. 451년 갈리아지역을 공격한다.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인 ‘최후의 로마인’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대적한다. AD. 451년 6월 20일 프랑스의 트루아시에서 세계 15대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살롱대전투’가 벌어졌다. 각각 20만에 이르는 대전투로 15만이 전사했다. 승부가 나지 않았다. 잠시 전쟁을 멈추고 퇴각한 아틸라는 11번째 왕비, 게르만 제후의 딸 일디코와 결혼식날(AD. 453년) 밤 급사했다. 게르만족의 유명한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일디코가 전쟁에서 살해당한 가족의 복수로 아틸라를 살해했다고 했으나 학자들은 과음 질식사 아니면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살로 추정한다.
# 아틸라의 장례식, 관이 안치된 궁전 앞 광장에 수십만의 군중이 운집했다. 아틸라가 정복한 45개 부족장과 종족장들과 아틸라의 장군들이 아틸라의 관 주위에 둘러서 있다. 지구라트를 지키는 100명의 신녀들이 촛불과 야생화를 아틸라의 관 가장자리에 바친다. 관이 꽃으로 가득하고 수 천개의 촛불이 관 주위에서 출렁거린다. 아틸라의 친위대장 오레스테스가 칼을 뽑아 수염을 자르고 팔뚝을 그어 관 위에 피를 뿌린다. 관의 주위를 둘러싼 장군들이 칼을 뽑아 피를 뿌린다. 장례는 밤낮 10일 동안 열렸다. 그리고 열하루 째 날 밤 자정, 군중을 해산하고 아틸라의 관을 가장 은밀하게 장례지로 옮겼다.
* 만가輓歌 - 아틸라 장례葬禮의 노래
훈족의 위대한 왕이시며
문드주크스의 아드님이시며
가장 용맹스런 부족들의 통치자이시며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위대한 힘을 지니셨던 아틸라 왕께서는
스키타이와 게르만왕국들을 소유하였고
동․ 서로마제국을 공포에 떨게 하였으며
그 도시들을 정복한 뒤
매년 공물을 받기로 하였다.
이런 모든 일들에 다 성공한 후
적의 공격이나 친구의 배반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화로운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복하고 즐겁게 어떠한 고통도 없이 돌아가셨다.
가장 값진 보물들과 가장 진귀한 보물도 함께
누구도 복수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 아틸라의 관은 가장 강력했던 왕을 기념하여 장식했다. 관은 세 겹이었는데 강철의 관은 정복자를, 금과 은의 관은 동․서로마 정복을 의미했다. ‘가장 값진 보물들’ 과 ‘가장 진귀한 보물’ 도 함께 매장했다. 그리고 매장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디디 : 아틸라는 안타깝게도 급사했습니다. 혼례 첫날밤에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로마의 장 군이자 아틸라의 친구였던 아에티우스장군의 간계로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조 작일 가능성이 높고, 학자들은 잘 마시지 못하는 술에 취해 열한 번째 부인 일디코와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에 급사했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암살당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도깨비기자 : 무덤을 찾지 못했다지요?
디디 : 동로마황제는 절치부심하여 아틸라의 무덤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군사를 보냈으나 허 사였습니다. 사후를 준비한 것입니다. 정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틸라의 묘는 다뉴브강물 아래 있다고 합니다. 강의 물줄기를 임시로 돌리고 강의 밑바닥에 무덤을 쓴 뒤에 강물을 다시 터버렸습니다. 선기옥형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도깨비기자 : 아틸라의 시신과 함께 묻혀버렸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위대한 왕의 곁에 두기 위해 신하들이 매장했을 수도 있습니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암시하는 것, ‘가장 진귀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가장 값진 보물’과 중복되어 있습니다. 강조한 것입니 다. 아틸라 사후 그 거대한 제국은 자식들과 신하들에 의해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100년이 채 되기도 전(AD. 469년)에 흔적도 없이 역사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게 또 마음에 걸립니다.
디디 : 니벨룽겐의 노래는 게르만족의 노랩니다. 헝거리인들은 노래 자체에 믿음을 주지 않 습니다. 불신하지요. 그렇다면, 제가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탄불로 함께 갑시다.
도깨비기자 : (놀라며) 터키를 말입니까?
디디 : (가볍게 웃으며) 기자 선생의 추적을 도와야지요? (농담처럼) 위험은 따르겠지만.
도깨비기자 : 알고계셨습니까, 뒤를 쫓는 눈들이 있다는 걸?
# 터키 이스탄불대학교. 도깨비기자, 디디 그리고 방의 주인 터키 고고학계의 태두라고 할만한 세림 교수.
세림 : 대한은 형제의 나라지요, 알고계신가요?
도깨비기자 : 알고있습니다.
세림 : 좋군요. 터키인들은 잘 알고있는데 대한인들은 무관심하다고 들었습니다.
도깨비기자 : 역사에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터키는 역사학과에서 의도적으로 가르 치고요. 학문 외적으로, 지난 88올림픽을 계기로 터키가 형제국이라는 사실이 일반적으 로 좀 알려졌습니다. 그 전에는 대한전쟁의 혈맹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디디 : 터키인들의 자존심은 밖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강합니다.
세림 : 기자선생이 알고싶어하는 고대국가,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후예라는 자부심이지요. 유 럽과 아시아 서남부 그리고 아프리카를 지배하였던 영광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디디 :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형성하는 요인 중 하나는 ‘예니체리’입니다.
세림 : 강력한 통치자와 그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군대가 오스만 트루크제국의 영광을 구현 했지요. 예니체리는 투르크 말로 ‘새로운 군대’ 또는 ‘신식군대’를 뜻합니다. 무라드 1세 의 군사적 역량이지요. 점령한 나라의 청소년이나 귀족의 자제들을 모아 투르크인으로 순치하고 엄격한 규율과 높은 도덕률을 책임지웠습니다. 초기 200년 동안에는 결혼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적 상징인 수염조차도 기르지 못했습니다. 활과 반월도로 무 장한 그들은 전장에 나서면 거의 싸움에 미친 짐승들처럼 싸웠다고 합니다. 그들이 지 나간 자리는 참혹했습니다. 적군은 살려서 포로로 잡지 않았습니다. 마을은 모두 불태 우고 사람은 물론 가축조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초토화작전이 예니체리의 기본전략이 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지레 겁을 먹고 항복했습니다. 항복을 해도 약탈과 방 화는 자행되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서는 군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14 만 명 정도의 규모로써 후기에는 술탄도 제어할 수 없는 권력집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결국 AD. 1826년 마흐무드 2세에 의한 유럽식 체제의 군대 편입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대부분이 처형되었습니다. 비참하게도 예니체리역사의 종지부는 ‘공인된 도 적떼’ 로 낙인찍혀 450여년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영광 뒤에 는 그들의 무절제한 만용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디디 : 대한 손님의 관심사는 예니체리가 아닐텐데….
도깨비기자 : 투르크의 예니체리는 놀랍게도 고조선의 천지화랑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고 조선의 군대와 투르크의 군대가 쌍둥이처럼 유사합니다. 훈련방식이나 규범 그리고 조 직 편제까지, 더 놀라운 것은 머리를 깎은 것까지 닮았군요.
고구려 무사 백제 무사 신라 화랑 일본 사무라이
* Daum Blog 인용
* 백제, 싸울아비의 ‘8선도仙道정신’
① 칼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쓴다.
② 전쟁에 나가면 최후의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③ 의로운 일에만 칼을 사용하며 함부로 죽이는 일은 안 한다.
④ 도전을 받았을 때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칼을 써야 하며
일단 칼을 들었으면 후회 없는 승패를 가려야 한다.
⑤ 적을 뒤에서 치지 않는다.
⑥ 칼을 들지 않는 자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
⑦ 칼을 내 몸과 같이 아낀다.
⑧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는 스스로 할복하여 그 명예를 지킨다.
* 신라, 화랑花郞의 ‘세속世俗 5계戒’
① 임금은 충성으로 섬기고(사군이충事君以忠)
② 어버이에게는 효도를 다 하고(사친이효事親以孝)
③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교우유신交友有信)
④ 전쟁에서는 물러서지 말며(임전무퇴臨戰無退)
⑤ 죽임은 가려서 해야 한다(살생유택殺生有擇)
◎ 조의선인 을밀과 대한 무예 그리고 선기옥형의 해석
* 우리나라의 무예는 고조선의 천지화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은 손자병법과 18기 또는 24기예가 있고, 일본은 사무라이 무사도가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국기로써 활을 드는데 동이족이란 말의 ‘이’ 는 큰 활을 뜻하며 주몽이라는 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주몽은 일곱 살 때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이었다. 머리에 이고 가는 물동이를 백 보 뒤에서 활로 쏘아 구멍을 뚫고 곧 이어 솜을 두른 화살로 그 구멍을 다시 맞혀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으며, 이고 가는 사람도 물동이가 깨진 것을 몰랐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무기는 창이고 일본은 칼이다.
* 조의선인은 고조선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천지화랑의 후예다. 기와 덕과 예를 겸비한 소년들을 가려 천지화랑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이 외출할 때 머리에 천지화(무궁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 불렀다. 천지화는 수두(소도) 즉 신성한 구역에 심은 나라꽃이다. 천지화랑은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여 고구려의 조의선인으로 맥을 이었고 백제에서는 싸울아비(무절武絶, 일본의 사무라이)가 되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이라고 하였다. 고조선 한웅천왕시대의 대재상 발귀리, 자부선인, 단군시대의 몇몇 단군들과 부여의 대조영 그리고 고구려의 을파소, 명림답부, 연개소문과 그의 아들 남생이 조의선인이었는데 남생은 총명하여 9살에 조의선인이 되었다. 고대에서 근세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대부분이 조의 출신인 바 우리 전통문화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지니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온달장군, 을지문덕, 양만춘도 조의의 후예다. 백제의 계백과 신라의 김유신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성계를 비롯하여 무학대사, 정도전, 홍윤성, 조광조와 율곡, 퇴계, 저 유명한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 관상감에서 선기옥형을 제작한 송이영,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덕령 의병장들이 그 후예다. 근세에는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이 조의로써 승마와 사격에 뛰어났으며 김좌진 장군 또한 조의인 바 동서양 병법에 통달하였다. 청산리 전투에서는 격전 중에 살며시 물러나 양쪽에서 공격해오던 일본군이 저희들 끼리 싸워 많은 전사자를 냈다. 권율장군도 조의로써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흔히 문관으로 알고 있으나 검술에 뛰어나고 병법에 밝았으며, 한기 8789년(1592년) 임진왜란 행주대첩 때 남원에서 1000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배고개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의 왜군 정예부대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진을 지휘하던 동복현감 황진이 격전 중에 전사하여 1진이 무너지자 2진에 있던 권율장군이 벽력같이 호령을 하며 의기소침한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 때 장군은 물러서는 병사들의 벙거지에 칼끝으로 표시를 해두었다가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 쉬는 짬이나면 가차없이 처단했다.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지도력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 조의의 문하였다.
* 애초에는 조의선인을 ‘선배 또는 선비’ 라고 불렀는데 선배라는 말은 고구려의 10월 제천 행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다(선뵈)는 데서 유래하였고 선인은 선배의 이두식 표기다. 사냥, 가무, 무예 등 여러 가지 경연에서 탁월한 사람을 선배로 불렀고 발탁된 이들은 나라에서 급료를 받고 무예와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전시에는 자치부대를 조직하여 정예군으로 싸웠다. 선배는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나라는 승군으로 착각하였다.
* 신라의 화랑은 원화라는 여성에서 비롯했다. 원화는 외모가 출중하고 가무와 학문에 뛰어난 여성을 가려 귀감으로 삼았는데, 뒤에 좋은 가문의 청년들 중에서 외모가 반듯하고 덕행이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았으므로 선배는 남성적이었다.
* 조의선인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것은 당나라 대군이 침략한 안시성전투였다. 당 태종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하고 군세를 총집결하여 안시성을 맹렬히 공략하였다.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도 실패하자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려고 안시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던 중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이 허물어졌다. 위기에 직면한 고구려군 진영에서 결사대가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토산을 점령하여버렸다. ‘검은 옷을 입은 100 명의 용사가 달려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내어 쫓고 토산을 차지해버렸다’ 라고 기록했는데 이 용사들이 조의선인이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이었고 그 우두머리는 연개소문이었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유년의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와 정신적 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교육을 통하여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육성하였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형성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판단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하였다.
* 고구려 제 22대 안장왕 때 조의선인으로 선발된 을밀(고구려 2대 유리왕 때 재상 을소의 후손, 고구려 10대 산상왕 때 재상 을파소는 을소의 손자, 평양의 을밀대는 을밀선인이 세움)의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여 명이 ‘참전의 계’ 를 익히고 ‘다물방지가’ 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은 되물린다는 뜻이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고주몽)의 연호인데 ‘선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선생은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조의라는 말이 6대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진국사(발해사)에서 선인을 사정병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서는 선비는 싸움에 당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고 했다.
* 선배는 본래 신수두(소도, 천제 천신을 모신 대신단이 있는 가장 신성한 숲인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마니산 참성단이 이에 해당한다. 소도는 신수두의 대신단을 본받아 각 지방에 만든 신단으로써 마을의 당집과 당산나무 - 신목 즉 웅상은 그 유물이다.) 교도의 보통명칭이었는데 6대 태조왕 때 3월과 10월 대제에 사람을 모아 칼춤을 추고 활쏘기, 깨금질, 택견(일명 수박, 송도에서 창안되었는데 중국에서는 권법으로 전수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유도로 발전했다)과 얼음물에서 물싸움 등 격기와 가무를 연출하여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우열을 판정했다. 여기에 대수렵을 벌여 그 사냥물을 더하여 종합 승리자를 <선배>라 하고 국가에서 녹을 주어 양성했다. 온달장군이 그 한 사례다. 선배가 되면 편대로 나뉘어 숙식을 함께하며 고전을 공부하고 학예를 익히고 산수를 유람하고 성곽을 쌓고 도로를 닦으며 군중에게 강습을 하기도 하는데 오로지 일신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선배들 가운데서 학문과 기예가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 스승으로 섬기며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고, 일반 선배는 머리를 깍고 조백(검은 베 띠)을 허리에 둘렀다. 스승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를 신크마리(두대형, 태대형)라 일컫고 그 다음을 마리(대형), 맨 아래는 소형이라고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어 참전하되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고구려의 직위는 골품제로써 미천한 사람은 높은 지위에 오를 수가 없었으나 오직 선배는 귀천이 없고, 학문과 기예의 높고 낮음으로 지위를 얻었으므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디디 : 교수님, 투르크의 유적에 선기옥형이라는 천문기기가 있습니까?
세림 : MeteoroskOpion 말씀이군요.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고와서 펼쳐보이며) 여기 있습니다.
* 서양의 선기옥형 자료
최초의 혼천의(선기옥형)는 알렉산드린 그리스의 MeteoroskOpion(AD. 140년경)이지만 그 이전에도 고리 형태의 기기를 이용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Almagest에서 3개의 혼천의를 말하고 있는데 히파르코스(BC. 146년 - 127년)가 4개의 고리를 가진 기기를 사용했다고 했다. Astrolabon이라고 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기기器機는 눈금이 매겨진 환環 위에 지름 방향으로 배치된 튜브들이 있으며 수직선에 의해 수직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 기기는 천구를 각의 단위로 측정하기 위해 등분된 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D. 17 - 18세기에는 이 기구를 천장에 매달거나 받침대 위에 고정시키거나 손잡이에 붙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다. 아랍인들도 비슷한 기기를 사용했으며 AD. 12세기 유럽에서 사용했던 원형은 스페인의 무어인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터키 이스탄불 유럽과 아시아 경계 헝거리 부다페스트
불루모스크 보스포러스해협 * Daum Blog 인용
도깨비기자 : (사진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터키에 이 천문기기 유적이 남아 있습니까?
세림 : 오스만 투르크제국(Osman Turk Empire, AD. 1297년 - 1922년)의 천문기기가 이 스탄불 고대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도깨비기자는 오스만 투르크의 선기옥형이 아틸라로부터 전수된 것이 아닐까 하는 흥분으로 밤 새 뒤척거리느라고 잠을 설쳤다. 세림교수가 보여준 책자만으로는 판별이 어려웠으나 기대감으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튿날, 식사조차 하는 둥 마는 둥 유물관으로 달렸다. 유물관은 아직 개관 전이어서 관람객도 직원도 없었다. 도깨비기자는 계단에 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유물관 앞 마당에 비둘기 몇 마리가 아침거리를 찾는 듯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깨비기자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비둘기들의 움직임과 문을 번갈아 쳐다보며 기다렸지만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광장 맞은 편에 노상 커피가게가 있었다. 커피를 한 잔 사면서 개관시간을 물었다. 오전 11시라고 했다. 눈이 뜨이자말자 달려왔던 일에 설픗 웃음이 나왔다. 흥분과 기대감으로 앞뒤를 생각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며 여유를 찾으려고 광장 주변을 산책했다. 11시 정각이 되자 유물관의 문이 열렸다. 애써 자제했던 마음이 다시 고조되었다. 곧장 안내소로 가서 그림을 보여주며 선기옥형의 소재를 물었다. 선기옥형은 고대유물관이 아니라 근대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도깨비기자는 선기옥형의 형태를 보고 아틸라의 유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조선시대에 제작한 선기옥형 보다 조악했다. 더구나 제작년대가 AD. 1326년 이후라면 고려시대 말기와 동시대였기에 그렇게 판단했다. 예니체리Yenicheri의 사적史蹟을 찾았다. 사적에서 혹시 선기옥형의 기록이나 형체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였다. 예니체리관의 유물은 초라했다. 몇 가지의 무기와 정복왕들의 전승기록 뿐이었다. 후세의 예니체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예니체리관을 초라하게 만든 것 같았다. 예니체리를 강제로 해체해야 했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상황이 겹쳐서 착잡했다. 예니체리는 막강한 군대세력으로 동유럽의 재패하여 오스만 투르크제국 번영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 14만여 세력을 바탕으로 부와 권력을 탐익하여 ‘공인된 도적떼’ 라는 오명을 얻었다. 술탄도 그들의 횡포를 막지 못했다. 집단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술탄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며 술탄의 임면과 지위에 도전했다. 개혁 군주 마흐무드 2세는 예니체리가 개혁의 걸림돌이라고 인식하여 해체하려고 했다. 예니체리는 유럽식 군대의 편입을 거부하고 1826년 5월 반란을 일으켰으나 포병의 공격으로 대부분 죽고 체포된 병사도 모두 처형되었다. 450년 역사가 부식된 병기 몇 점으로 남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고조선의 천지화랑도 고조선이 멸망하자 흩어져버렸다. 나라가 멸망하여 흩어진 천지화랑은 고구려,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천지화랑은 무예의 연마와 함께 정신 수양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망해버린 뒤에도 1만년을 지탱한 전통이 무예와 정신수련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막강한 권력과 부를 누렸던 예니체리는 역사에서 사라져버렸고 은둔과 칩거로 명맥을 유지한 천지화랑은 1만년을 이어왔다. 무엇이 ‘살아 5천 년 죽어 5000년’을 이어오게 하는 힘이었을까? 착잡한 심정으로 예니체리관을 나서는데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도가이고오 후이였다. 무당 복장을 벗고 평복을 하고 있어서 언뜻 알아보지 못했다.
도깨비기자 : 몰라 봬서 미안합니다. 워낙 낯이 설어서 ….
도가이고오 : (주저하듯) 드릴 말씀이 좀 …. 어딜 가면 뵐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혹 여기 오시지 않을까 하고 …. 주무시는 곳도 알 수 없었고 연락할만한 데도 없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깨비기자 : 무작정 기다렸단 말씀이신가요? 많이 기다렸겠군요.
도가이고오 : (주위를 돌아다보며 목소리를 낮춰서) 선생님, 걸으면서 말씀하세요. 선생님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깨비기자 : (소파에 앉으며) 미행?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관심두지마세요. (자연스럽 게 주위를 돌아본다.)
도가이고오 : 전에도 가끔 그런 일은 있었습니다만 어제 선생님을 만나고부터는 누군가 등 뒤에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니, 이틀 전 선생님께서 알혼섬으로 저를 찾았을 때부 터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깨비기자 : 제가 찾았던 선기옥형과 관계가 있습니다.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좀, 제가 머무는 동안 따라다니다 말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가이고오 : 우리는, 반 러시아적 성향이랄까 아니면 강제 복속의 영향으로 반감이 있고 또 당국에서는 반감이 있다고 보고 감시를 하는데 특히 무당을 주시합니다. 토속신앙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땅은, 바이칼호수를 비롯한 주변의 땅을 모택동의 공산당 이 소련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소련에게 할양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족들은 이를 인정 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도 브리야트Buryaty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코리Cory족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합니다. 숭조崇祖정신도 물려받은 거지요. 브 리야트는 소련에 편입되고서 그들이 정략적으로 붙인 명칭입니다. 소련과는 민족이 다 르고 역사가 다릅니다. 결코 소련에 병합될 수 없는 전제지요. 지난 90년 대 대한의 김 대중대통령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코리족 민족의 뿌리 문제가 제기되었지요.
* 고리국에 대한 기록 (임승국, 한단고기)
선군시대 47세 선군 고열가 임술 57년, 선군 고열가 선위 1년 전, 한기 6958년(BC. 239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었다. 해모수는 몰래 수유(수유후 기비)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만주 흥안령, 옛 고리드지역, 북부여 해모수의 고향, 일설 주몽의 고향.
바이칼호수 알혼섬에 고리드족이 있음 * Daum Blog 인용
도깨비기자 : 고조선의 문헌에 고리국이 나옵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100여 개의 부족국가 들이 할거한 열국시대가 전개되었는데 그 중에서 국가다운 면모를 갖춘 북부여의 해모 수가 고리국 사람이었습니다. 한단고기에는 해모수가 선군조선의 47세 고열가천왕을 위 협하여 천왕이 스스로 제위를 물러나 입산수도하는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모수는 정통적으로 천왕의 제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고조선은 100여 개의 부족국가로 낱낱이 흩어져버렸습니다. 고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지 못한 해모수는 북부여를 창건하였습니다. 해모수의 탄생 국가 고리국이 고구려로 고구려가 고려로 이어진 역사에 코리인들이 있 습니다. 지구촌에서는 한국을 코리아Corea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만주 동북부에는 수렵 생활을 하는 종족들이 있는데 스스로 고리드인이라고 하는 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고 리드인들이 기르는 고리드개는 수렵견으로 만주개, 러시아의 허스키, 아이누개, 한국의 진도개의 조상이지요. 코리족의 조상신화에 탱그리Tangri신화가 있지요? 한국학자들은 이를 선군신화로 보고 있습니다. 탱그리신화는 선군신화와 명칭뿐만이 아니라 내용도 같습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말에도 물, 불, 어머니 등 한국어가 있고 지게나 맷돌이 남 아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게는 지구촌에서 한국인들만이 사용하는 유일한 농사도구입니 다. 코리족이 겪는 고충은 약소민족이 겪는 민족적 시련입니다. 겉으로는 평온해보이는 데 민족적 갈등이 크군요. 제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고조선역사나 민족의 정통성이나 그런 게 아닙니다.
도가이고오 : 우리 조상은 몽골인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의 한 부족이었습니다. 기 자선생은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찾고 있는 선기옥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 는지는 모르지만 막연하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제게는 어떤 막연한,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갈증과 실체에 대한 확신이 없는 환상의 세계일뿐입니다. 저는 신단의 묵상에서 나타나는 형상, 그 그림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단지 신물神物의 형상이라는 것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으니까요. 선생을 만나고서야 제 환상이 구체적으로 다가오 고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세습무당으로 우리 선조들이 왜 그렇게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 - 타클라마칸사막을 지나고 히말라야를 넘는 모험을 강행하면 서 고조선을 참배했는지 하는 물음과 선생의 선기옥형이라는 신물이 연관이 있지 않겠 나 하는 의문을 가지고 선생을 찾았습니다.
도깨비기자 : 선기옥형은 고조선의 한웅천왕이 하늘의 뜻을 받아 인간세계를 다스리는데 사 용한 천부인 3개 중의 하나입니다. 전시된 선기옥형의 모형은 보셨지요?
도가이고오 : 저도 알고싶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역사박물관에 고 대 벽화 한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965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궁전에서 발굴 되었습니다. 이 벽화는 7세기 후반 이 곳의 지배자였던 와르후만 왕을 알현하는 외국사 절의 모습을 그린 대형 채색벽화입니다. 이 채색벽화에 고구려 사신 두 명의 모습이 담 겨져 있습니다. 복장과 조우관鳥羽冠 그리고 환두대도環頭大刀로 그들이 고구려인임이 분명합니다. 벽화에 남아있는 소그드어(8세기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언어 - 우즈베키스 탄과 타자키스탄 지방) 명문銘文을 통해 AD. 650년 - AD. 655년의 벽화란 것이 밝혀 졌습니다. 1400여 년 전에 고구려인들이 7000Km나 떨어진 이 나라를 방문한 놀라운 기록입니다. 선생이 찾고자 하는 선기옥형의 행방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실 크로드Silk Road가 기원 전 3세기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고조선시대에 형성되었다는 일입니다. 서유럽과 중앙아시아의 고조선 부족들이 해마다 시월 상달 제천행사 때에 맞 춰 고조선을 찾았다고 합니다. 고조선에서도 정기적으로 서유럽의 동족들을 방문했습니 다. 벽화는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할아버지께 들은 말입니다. 우리 가문에서 는 제천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갔고 부족장들은 정치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선군을 추 대하는 의식에 초대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차차 상인들이 동참하여 이들의 보호를 받으 며 왕래가 빈번해지고 장사길로 번창한 것입니다. 특히 고조선의 왕을 추대하는 해에는 서유럽으로부터 타크라마칸 사막지대에 걸쳐 살았던 중앙아시아의 모든 부족의 족장들 이 고조선의 왕위 추대 화백和白회의에 참여하였다고 들었습니다. Silk Road는 교역의 장사길 이전에 고조선의 부족들이 동족과 교류하는 길로 개척하였고 첨차 상인들의 무 역길로 발전된 것입니다.
2000년 실크로드 탐사의 주요국가 : 1만6000Km 대 장정, 이탈리아(로마 - 리브르노 - 피사 - 피렌체 - 베네치아 - 우디에) - 오스트리아(클라겐프르트 - 비엔나) - 헝가리(기와르 - 부다페스트) - 루마니아(츨루이 - 피테스티 - 브크레스티) - 불가리아(루사 - 스다라자고라) - 터키(이스탄불 - 알카라 - 카라카이) - 이란(타브리즈 - 테헤란 - 고르간 - 소피아) - 파키스탄(쿠에타 - 물탄 - 이슬라마바드 - 칠라스) - 중국(키시가르 - 돈황 - 안서 - 장예 - 난주 - 서안 - 정주 - 청도) - 대한(인천)
Silk Road * Daum Blog 인용
◎ 한단고기(임승국) 수밀이Sumer 기록
* 한국본기 제 2권에서 삼성밀기는 말한다. 파나류산(한인의 한국시대의 도읍지,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바이칼호수)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한인시대의 한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2만5000Km), 동서 2만리(1만Km)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캄차카),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퉁구스, 시위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12국이다.
* 15세 선군 대음(후흘달) 신사 2년 한기 5537년(BC. 1660년),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Sumer의 사신이 특산물을 바쳤다.
* 27세 선군 두밀 원년 갑신년 한기 6200년(BC. 997년),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S. N. Kramer’ 와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Zecharia Sitchin’ 의 저서 발췌
* 1956년 S. N. Kramer의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에서 바퀴, 고층건물, 음악과 악기, 야금술, 의학(서), 조각, 보석, 도시, 왕조, 법률, 사원, 기사도, 수학, 천문학, 달력, 학교, 양원제, 역사학자, 농업(서), 우주론, 격언, 문학 논쟁, 도서관 목록, 인간 영웅, 사회 개혁, 세계평화 노력, 욥, 노아, 인쇄술, 활자 사용, 원통형 윤전기 인장, 60진법, 역청과 석유연료, 백내장 수술, 알코올, 죽은 신의 소생술, 투구(외투, 토가), 빵, 맥주, 포도주, 요쿠르트, 버터, 치즈 등 인류 최초의 발명 100가지 이상이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 모든 역사가 Sumer에서 시작되었다거나, 인류 최초의 문명이 수메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수메르문명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그것이 최초의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수메르문명은 인류 최초의 것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이미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문명이기도 했다. 그들은 태양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지구와 인간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알고 있었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신들이 어디에서 언제 지구로 왔고, 왜 인간을 창조했으며, 어떻게 지구를 왕래하며 인간을 지배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내용들이 수메르의 점토판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남아있으며,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이나 각국의 신화들은 수메르의 이 고대 기록들을 나중에 각색하고 번안한 것들에 불과하다. 과연 그들이 알고 있던 창조의 비밀과 과학 기술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 수메르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잇는 어떤 고대문명 보다 더 발전적이고 포괄적인 문명이었다. 그리고 이 문명이야말로 현재의 우리 문명이 기원을 두고 있는 원전이다. 약 200만 년 전에 석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BC. 3800년 경에 수메르에서 고도의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수메르문명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수메르인이 도대체 누구였으며,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왜 수메르문명이 생겨났는가? 라는 물음이다. 고대인류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도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아주 갑작스럽고, 전혀 앞선 문명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 H. Frankfort는 ‘놀랍다’, P. Ammiet는 ‘비범하다’, A. Parrot는 ‘아주 갑자기 나타난 불꽃’, L. Oppenheim은 ‘엄청나게 짧은 기간에’, J. Campbell은 ‘수메르의 좁은 진흙땅에서 정말로 갑자기 세계의 모든 고등문명을 구성하는 단초들이 일시에 시작되었다’ 라고 말한다.
◎ 주석註釋
* 인류학계와 세계의 사학계가 주목하는 수메르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수밀이국’ 이다. 수메르민족이란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수메르말이라고 불리는 언어를 사용한 민족으로 세계 최고의 도시문명을 메소포타미아에서 꽃피운 민족이다. 여기에서 최고라는 말은 마지막의 결론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학이 주도한 결론일 뿐이다. 서양역사학은, 서양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12연방의 기록을 믿지 않는다. 이는 문화의 창조 동서양 선후 다툼이 아니라 동서문화 주도권의 쟁점이다. 서양역사학자들은 구약성서를 기원으로 하는 인간의 창조론에 입각한 인류사를 정립하였는데 느닷없이 수메르문명이 발굴되고 해독되어 구약성서 이전의 기록이 밝혀지자 황당해 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서양을 기점으로 하는 수메르인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갑자기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나타나’ 라는 식으로 기술한다. 서양역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메르인이 수메르지역 원주민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누가, 언제, 어디서 이 땅에 이주하였는가? 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수메르인에 대한 정설은 ‘검은 머리칼의 교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이다. 이들은 누구일까?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지금까지는 언어학적, 인류학적으로 ‘아시아닉크계 민족설’ 이 유력하다. 역사적으로 인류사를 규명하려면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야 하는데 인종과 언어다. 슈메르인은 검은 머리칼의 인종이었다. 수메르인의 언어는 교착어인데 서양학자들은 언어적 연관성 때문에 이를 우랄(유럽의 서쪽 끝 지역)-알타이어(아시아의 몽골지역)라고 규정하여 서양의 서쪽 끝과 아시아의 동쪽 끝을 묶어놓았다. 유럽에는 교착어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 ‘터어키어’가 교착어다. 서양학자들에게는 수메르인들이 어디서 이동하여 왔는지 규명이 불가능하지만 자연 조건 때문에 문화의 동서 이동은 빠르고 남북 이동은 느리다는 고인돌유적(고인돌의 70%가 한국에 있음)에서 고대한국인의 유럽 동쪽 이동을 밝혀낼 수가 있다. 인류학과 언어학적으로 불가리아인, 터어키인, 항가리인, 핀란드인에 주목한다.
도깨비기자 : 고조선의 선군세기라는 기록에 수메르Sumer의 사신들이 오간 기록이 있습니 다.
도가이고오 : 우리 부족은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 부족은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역사 는 구전口傳입니다. 구전이지만 우리 조상들이 정기적으로 선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을 오간 일은 전해져 내려옵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대에서까지는 정기적으로 왕래한 걸 로 알고 있습니다. 아사달의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정치적으로 왕래하였 던 부족장들과는 다른 어딘가 - 지구라트Zigurat나 소도蘇塗 같은 제사를 모시는 신성 한 장소를 참배하는 관습이 이어져 내려왔다고 들었습니다. Silk Road가 부족들에게는 정치적인 귀향길이었지만 우리 가문은 신과 접촉을 통해서 세습무당의 영험함을 유지하 는 의식적인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애초의 Silk Road는 우리 가문이 고조선을 참배하 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장사하는 것으로는 히말라야를 넘고 타클라칸사막을 횡단하는 그 험난한 여정을 개척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단이나 제 사의식 그리고 제사장을 참배한 것 같지는 않고 무엇인가를 참배하였다고 보는데 이것 이 제 묵상黙想 때마다 나타나는 그림자 형상과 선생이 찾는 선기옥형의 직접적인 연관 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5/22화 : 1. 고조선시대(5/6) - 선군시대>
곰부족部族 여왕의 아들, 1세世 선군왕검禪君王儉
(삽화 - 인신人神의 나라)
김산호화백의 중국 산동성 무씨사당武氏祠堂벽화 소도蘇塗에 심은
선군왕검상 (선군왕검의 행렬도 추정) 천지화天指花(무궁화)
* 그림, Daum Blog 인용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임승국의 한단고기)
* 선군왕검의 해석 -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박달나무 <단檀>을 옥편에서 찾아보면 <단>과 <선>의 두 가지 발음이 있다. 흉노왕 호칭은 <단우單于>라 적고 <선우>라고 읽으며 대종교의 예배의식도 <단의식襢儀式>으로 적고 <선의식>으로 읽는다. 단군왕검이라는 해석은 차음借音인 박달나무 <단檀>자에 얽매어 <단檀>을 박달나무로 오역한데서 연유하였다. <단군>이 이미 보편화되었는데 구지 <선군>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고유 신앙인 3신신앙三神信仰이 한(하늘, 천신天神), 감(땅, 지신地神), 선(사람, 인신人神)으로써 인신을 제일 귀한 신으로 친다.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사상도 같은 뜻이다. 단군은 인신으로써 선군이다.
* 선군왕검 - 신묘년 한기 4827년(BC. 2370년) 5월, 신시시대 마지막 천왕 18세 거불단한웅(단웅)과 곰부족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남, 선군시대 1세世 천왕, 신인神人의 덕德이 있어 웅씨熊氏의 왕이 그 비범함을 듣고 비왕裨王(우두머리를 보좌補佐하는 제 2인자)으로 삼았는데 무진년 한기 4864년(BC. 2333년) 아사달에서 천제天帝의 아들로 받들어 모심, 선군은 제사장祭司長이요 왕검은 감군監軍, 관경觀境(선군의 관경은 진眞조선- 천왕天王이 다스림, 막莫조선 - 여원흥을 마한馬汗으로 삼아 다스림, 번番조선 - 서우여로 번한을 삼아 다스림)인 바 진국辰國이며 선군조선이다. 한인(천제), 한웅(천제와 인신의 연계), 선군은 3신神으로써 선군은 인신人神의 시작이다. 이 때는 공화정共和政으로써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왕을 추대하였는 바 기록에 <태어나면서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서 9한九桓(고리, 시라, 고례, 남북의 옥저, 동북의 부여, 예와 맥)의 3한三韓 관경觀境을 모두 통합하였다 하였고, 신시神市(한웅천왕)시대의 옛 규칙을 회복하여 다스리니 온 세상이 그를 천신天神과 같다>고 하였으며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매 9한이 모두 뭉쳐서 하나가 되었다. 아사달에 도읍하였고 처음으로 조선 3한(진한, 번한, 막한)의 나라 명칭을 사용함
* 참전參佺의 계戒 - 고구려 재상 을파소가 백운산에 들어가 천서天書를 얻었다. 인간 360사事와 강령綱領 8조條가 있다.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선인仙人 발귀리가 창제하고 운사雲師 육약비가 정비한 생활규범
* 가림다加臨多(가림토土) - 선군 37세 가륵 2년 한기 5016년(BC. 2181년) 기록에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고대의 상형문자)이 있다고 해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다>라고 하였다. 한국 고대문자, 한글 자모와 똑 같아 한글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고대 일본 유물(구리거울)에서도 발견되었는데 한국에서 건너간 것으로 판단됨
한단고기의 가림다 중국 산동성 한태시桓太市 출토 가림다 조각품
탄소 측정 BC. 1850년 경 추정 (그림, Daum 한류 인용)
* 남해각서刻書 - 남해도南海道 낭하리郎河里 계곡, 경박호鏡珀湖의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사이의 바깥쪽 암석에 조각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다. 신지 혁덕이 만든 옛 문자로 추정됨
* 천지화랑 - 국자랑國子郞, 머리의 관冠(모자)에 천지화天指花(무궁화)를 장식함,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仙人, 백제의 싸울아비(무절武絶), 신라의 화랑花郞, 조선시대의 선비(고조선시대의 선뵈, 선배)로 이어졌다.
* 고조선 선군왕검의 조선시대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1대 왕검 한기 4864년(BC. 2333년) - 47대 고열가 한기 6902년(BC. 295년),
47대 2038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왕검 | 93 | BC. 2333, 아사달 도읍 국호 조선(쥬신) |
2대 | 부루 | 58 | 2240, 帝舜有虞 토벌, 參佺의 戒, 七回曆제작 |
3대 | 가륵 | 45 | 2182, 三六大禮, 加臨多(正音 38字) 창제 |
4대 | 오사구 | 38 | 2137, 인삼 채취, 조개 화폐, 夏 나라 정벌 |
5대 | 구을 | 16 | 2099, 六十甲子 冊曆, 인도인 표류, 桓花 식수 |
6대 | 달문 | 36 | 2083, 誓效詞 창작, 和白會議, 4,000부락 供物 |
7대 | 한율 | 54 | 2047, 太平聖代 |
8대 | 우서한 | 8 | 1993, 생산 1/20 세금제도, 관제 개정, 3足烏 出現 |
9대 | 아술 | 35 | 1985, 靑海 褥薩 于捉 침입 3년 뒤 還都 |
10대 | 노을 | 59 | 1950, 가축 사육, 伸寃木(신문고) 설치, 河圖洛書 |
11대 | 도해 | 57 | 1891, 國仙의 蘇塗 설치, 選士 20명 夏 파견 |
12대 | 아한 | 52 | 1834, 遼河 남쪽에 巡狩觀境의 碑 세움 |
13대 | 흘달 | 61 | 1782, 州와 縣 정비, 桀왕 구원, 國子郞 창설 |
14대 | 고불 | 60 | 1721, 鳳凰 출현, 호구조사 1억 8천만 |
15대 | 대음 | 51 | 1661, 생산 1/80 세법, 태백산碑, 수밀이국 사신 |
16대 | 위나 | 58 | 1610, 九桓 寧古塔 三神 上帝 제사, 愛桓歌 |
17대 | 여을 | 68 | 1552, 五加와 나라 순시 蓋斯城 靑衣老人 |
18대 | 동엄 | 49 | 1484, 支伯特 사신이 공물 바침 |
19대 | 구모소 | 55 | 1435, 周天曆과 八卦相重論 지음 |
20대 | 고흘 | 43 | 1380, 영고탑 개축, 9한의 지도 제작 |
21대 | 소태 | 52 | 1337, 殷 나라 왕 小乙이 공물로 조공함 |
22대 | 색불루 | 48 | 1285, 은 나라 수도 격파 변한 백성 이주 |
23대 | 아흘 | 76 | 1237, 낙랑골 경영, 은나라에 6읍 설치 |
24대 | 연나 | 11 | 1161, 황숙 고불가 섭정, 소도 증설 제사 |
25대 | 솔나 | 88 | 1150, 箕子 西華에 避靜, 上蘇塗 儀禮 강론 |
26대 | 추로 | 65 | 1062, 가을 7월 백악산 계곡 흰 사슴 200수 |
27대 | 두밀 | 26 | 997, 천해 홍수 아란산 붕괴, 수밀이국 사신 |
28대 | 해모 | 28 | 971, 여름 4월 태풍, 氷海 汗 공물 |
29대 | 마휴 | 34 | 943, 周 나라 공물, 여름 지진 |
30대 | 내휴 | 35 | 909, 치우천왕비 세움, 주 나라 수교, 흉노 공물 |
31대 | 등올 | 25 | 874, 봉황과 기린 출현 |
32대 | 추밀 | 30 | 849, 鮮卑山 추장 們古 공물, 3월에 일식 |
33대 | 감물 | 24 | 819, 주 나라 사신, 감물산 삼성사 짓고 제사 |
34대 | 오루문 | 23 | 795, 도리가 지음, 2개의 해가 뜸 |
35대 | 사벌 | 68 | 772, 熊襲(일본) 평정, 燕 . 齊 나라와 전쟁 승리 |
36대 | 매륵 | 58 | 704, 12월 3도(일본) 평정, 연 나라 정벌 |
37대 | 마물 | 56 | 646, 남쪽 순시 淇水(하남성 林縣)에서 붕어 |
38대 | 다물 | 45 | 590, 재위 45년 崩御(돌아가심) |
39대 | 두흘 | 36 | 545, 재위 36년 崩御 |
40대 | 달음 | 18 | 509, 재위 18년 崩御 |
41대 | 음차 | 20 | 491, 재위 20년 崩御 |
42대 | 을우지 | 10 | 471, 재위 10년 崩御 |
43대 | 물리 | 36 | 461, 隆安 于和冲이 서북 36개군 함락, 피난 |
44대 | 구물 | 29 | 425, 우화충 정벌, 장당경 즉위, 국호 대부여 |
45대 | 여루 | 55 | 396, 연 나라 침입, 번 . 진 . 막조선 장수 파견 구원 |
46대 | 보을 | 46 | 341, 箕詡 번조선왕 책봉, 韓介 수유군 침입 |
47대 | 고열가 | 47 | 295, 3월 제사 뒤 양위, 입산 신선, 5加 통치 |
만주집안 장군총 Sumer의 Ziggurat Egypt의 Pyramid 일본 Okinawa
(Ziggurat 추정) (제단祭壇) 수중 Pyramid
Mexico Maya 1945년 미국 수송기비행사 Mexico 태양의
Chichen - Itza 항공 촬영 만주 Pyramid들 신전神殿
* 그림, Daum Blog 인용
# 선군왕검의 조선시대 1세 선군왕검 원년 무진년 한기 4864년(BC. 2333년), 봄에 18세 거불단한웅이 재위 48년 82세로 승천하였다. 선군왕검은 천왕에 즉위하자 먼저 신시시대 마지막 18세 천왕 거불단한웅의 제단 축조를 추진하였다. 선왕이 승천하면 제단을 축조하여 기념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 선군왕검 : 오늘부터 석 달 동안 경내 모든 군사를 동원하고 제단을 정비할 백성들의 동원령을 내린다. 국조의 제사를 마칠 때까지 국가의 정사는 물론이고 백성들의 대소사도 중지한다. 재상 을보라는 제사장으로써 모든 책임을 맡아 시행하시오.
도성 아사달에서 70리(35Km) 떨어진 완만한 구릉에 제단 터를 잡아 9한의 제후국 군사와 성 안 백성들을 동원하였는데 날마다 30,000여 명씩 동원하여 연 인원은 1백 만 명이요 능묘 축성 기일은 석 달이 걸렸다. 거대한 돌을 다듬어 쌓은 제단의 기단은 정방형으로 각 방의 길이가 3,000자(1Km)요 위로는 높이 또한 1,000자(300m)로 일곱 단을 쌓아 올렸는데 흐린 날이면 그 꼭대기에 운무가 걸렸다. 첫째 단은 기단으로써 300자, 둘째 단 240자, 셋째 단 200자, 넷째 단 120자, 다섯째 단 90자, 여섯째 단 30자고 마지막 일곱째 단은 높이가 20자며 끝이 평편하고 안에 붉은 황토를 깔았다. 네 방면에 문이 있어 왕래하였다. 그리고 북쪽을 향하여 제단을 놓았는데 능히 수 백인이 모여 제사를 지낼 정도였다.
# 제단 축조를 마친 그 해 가을, 선군왕검은 재상 사려사마에게 옛 신시시대의 규범을 새로이 정비할 것을 명하여 포고하여 일렀으되
하늘의 법칙은 하나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참 마음을 다 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의 마음이 곧 한님을 보게 되리라. 하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하나라. 이런 까닭에 스스로 살펴보아 자기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도 살필 수 있으리라.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게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또 나라에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충성되고 효도함이라. 너희들은 들으라! 열 손가락 깨물어 보면 크고 작건 가림 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사랑할지언정 헐뜯지 말고 서로 도울지언정 다투는 일이 없다 보면 집안도 나라 도 다 크게 일어나리라. 너희가 서로 양보하고 함께 일한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리라.
* 선군왕검 : (포고문을 온 나라 만 백성들에게 유시한 다음 이어 명한다.) 팽우는 땅을 개척하시오, 성조는 궁실을 짓고, 고시는 농사를 맡으며, 신지는 글자를 정비하고, 기성은 의약을 베풀고, 나을은 호적을 관리하며, 희는 점을 치고, 우는 군대를 관장하시오.
정사 50년 한기 4913년(BC. 2284년), 홍수가 크게 나므로 선군왕검께서 풍백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케 하였다. 우수주에 공적비가 있다.
갑술 67년 한기 4930년(BC. 2267년), 회대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제후를 두어 세습 통치함)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제순유우, 중국사의 3황 5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 2세 선군 부루 신축 원년 한기 4957년(BC. 2240년), 신시 이래로 제사를 지낼 때 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어아가>를 불러 화목을 다지고 조상을 숭배하였으니 곧 <참전의 계>가 되었다.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말세
어아 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 맘으로 똑 같아라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 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약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Mexico Pyramid Bosnia Pyramid 중국 서안 Pyramid Egypt Pyramid
* 그림, Daum Blog 인용
계묘 3년 한기 4959년(BC. 2238년), 조서를 내려 백성들이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4월에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다투지 않도록 하였다. 임자 12년에는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책력, 달력)과 구정도(논밭의 구획)를 만들어 바쳤다. 뒤에 백성들이 집안에 정갈한 곳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으며,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라고 불렀고 <업주가리(현재 농촌에 유풍이 남아 있음)>라 하였다.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 3세 선군 가륵 기해 원년 한기 5015년(BC. 2182년) 5월, 3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 손을 올려놓은 <삼육대례>를 행하며 <대저 길은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을 하고자 하는 이는 곧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이 되고 신하가 되고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도 이를 지키면 되나이다> 라고 여쭈었다. 이로부터 조정에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다.
경자 2년 한기 5016년(BC. 2181년),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다르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고대의 상형문자)>이 있다고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다>라고 하였다.
신축 3년 한기 5017년(BC. 2180년), 신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하게 하였다. 갑진 6년에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연금하였으나 후에 풀어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다. 병오 8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무신 10년에는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3도(일본)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고 했다.
# 4세 선군 갑신 원년 한기 5060년(BC. 2137년), 선군 오사구가 동생 오사달을 몽골리한(왕)으로 봉하다. 지금의 몽고족이 후손이다. 겨울 10월에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 산삼을 얻다.
# 5세 선군 구을 을축 4년,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달력)을 만들었다. 4년 후에 인도인이 동쪽 바닷가에 표류하였다.
# 8세 선군 우서한(오사함) 갑인 7년 한기 5210년(BC. 1987년), 세 발 달린 태양새(3족오, 밝새, 불새, 불사조, 태양의 흑점 상징)가 대궐의 뜰에 날아왔는데 그 날개 길이가 석 자였다.
# 10세 선군 노을 원년 한기 5247년(BC. 1950년), 우리를 만들어 가축을 사육했다. 5년에는 신원목(조선시대 신문고의 원형)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16년에 천하(바이칼호수)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왔는데 윷판과 같았다.
# 13세 선군 흘달(대음달) 갑오 16년 한기 5430년(BC. 1767년), 주와 현을 나누어 정했다. 이 해 겨울에 은 나라가 하 나라를 정벌하니 하 나라 걸 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읍차 말량으로 9한의 군대를 이끌고 돕게 한지라 은 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그러나 뒤에 걸왕이 약속을 깼으므로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정복하였다.
무술 20년에는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한화, 무궁화, 구약성경에서는 샤론의 장미)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들을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여 국자랑이라고 불렀다. 국자랑은 천지화를 머리에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 14세 선군 고불 을해 56년 한기 5531년(BC. 1666년), 호구 조사를 하니 인구가 1억 8천만이었다.
# 15세 선군 대음(후흘달) 신사 2년 한기 5537년(BC. 1660년),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Sumer)의 사신이 특산물을 바쳤다.
# 16세 선군 위나 무술 28년 한기 5614년(BC. 1583년), 9한의 여러 한(왕)들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3신(한인, 한웅, 치우)께 제사를 모셨다. 닷새 동안 크게 연회를 베풀고 백성과 더불어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 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 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 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에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중국 서북부 만주지방에 100개가 넘는 Pyramid 떼가 있는데 중국정부는 이 피라미트군을 발굴하다가 중국민족의 유적이 아니라는 내부적인 이유로 중단하고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집트 쿠프왕의 피라미트(145m) 보다 두 배 높은 300여m의 거대한 피라미트들은 고조선의 Ziggurat(제단, 꼭대기가 평편함)거나 피라미트(무덤, 꼭대기가 뾰쪽함)로 추정한다. 이러한 유적이 만주를 비롯하여 이집트, 멕시코, 남미, 서북시베리아, 티베트, 동남유럽 등 지구촌 특히 각 대륙의 중심지에 산재함 * 그림, Daum Blog 인용
# 23세 선군 아홀 원년 갑신년 한기 5960년(BC. 1237년), 숙부인 고불가에게 낙랑골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걸손을 보내 은나라 땅에 6읍을 설치하고 가을 7월에 신독을 주살하였다.
# 27세 선군 두밀 원년 갑신년 한기 6200년(BC. 997년),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 34세 선군 오루문 원년 병오년 한기 6402년(BC. 795년), 오곡이 풍성하여 백성들이 기뻐하며 <도리가>를 지어 부르니
하늘에는 아침 해 맑은 빛내려 비추고
나라에는 어진 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나라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 35세 선군 사벌 무오 50년 한기 6474년(BC. 723년), 장군 언파불합을 보내 바다의 웅습(일본 규우슈 지방)을 평정하였다. 갑술 66년에는 조을을 파견하여 연 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 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 36세 선군 매륵 갑인 38년 한기 6530년(BC. 667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 3도(일본)가 모두 평정되었다.
# 45세 선군 여루 신축 17년 한기 6817년(BC. 380년), 연 나라가 변두리를 침범하여 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 32년에 연 나라 배도가 쳐들어와서 번조선 대장군 우문언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과 막조선도 군대를 보내 구원하니 연 나라 제 나라 연합군을 오도하에서 쳐부수어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신미 47년에는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말 200필을 바치며 함께 연 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번조선 젊은 장수 신불사를 보내 공격하였다.
# 46세 선군 보을 원년 경진년 한기 6856년(BC. 341년) 12월, 번조선 왕 해인이 연 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 당하니 5가가 다투어 일어났다.
# 47세 선군 고열가 기묘 14년 한기 6915년(BC. 282년), 선군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하여 사철 제사하며 선제께서도 1년에 한 번 친히 제사를 모셨다.
임술 57년 4월에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인이었다. 계해 58년 3월 하늘에 제사하던 날 5가들과 의논하여 어진이를 추대토록하고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이 되었다. 이에 5가가 나라 일을 함께 6년 동안 다스렸다.
이천만李天滿의 삽화揷話로 읽는
<교학敎學대한사 제 6/22화 : 1. 고조선시대(6/6) - 마무리>
태양계 12번째의 행성行星, 신神들의 나라
(삽화 - 고조선의 수밀이국 Sumer)
한국, 배달, (고)조선 / Sumer Shem(비행체) / Sumer 비행체 Sumer 인간 복제와
4대 문명 발상지 현대 Rocket (위 중간 백색) 현대 DNA 구조도
* 그림 Daum Blog와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등장인물과 참고자료(임승국의 한단고기,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 겹십자가 - 2중, 3중으로 그린 십자가 모양, 고대 수메르인들이 태양계 12번째의 행성 마르둑에서 내려온 신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인더스문명에서도 신성시되었던 문양이다. 수메르 점토판粘土板의 기록에 의하면 태양계 12번째의 행성 마르둑은 3600년 주기週期로 태양을 공전하는데 지구 접근 때 신들이 지구에 내려와 지구의 원시인을 개화시키고 인간을 복제하여 함께 살다가 노아의 홍수를 예견하고 마르둑으로 돌아갔다. 인류문명은 BC. 11000년, 7400년, 3800년에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퇴보했다가 새로 시작되었다. 이를 근거로 마르둑의 공전주기인 3600년 마다 인류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었고 그렇다면 BC. 200년께 마르둑의 지구 접근으로 인한 해일과 빙하기,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인류의 멸망(노아의 홍수)이 있었으며, 현생 인류는 BC. 200년의 인류고 이어 올해가 2006년이므로 올해로부터 1400년 뒤 태양계의 12번째 행성 마르둑이 지구에 접근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구약성경이 수메르역사의 기록이고 수메르의 점토판 기록물이 우리가 알지 못한 현실적인 신과 현실적인 고대인류사의 기록이라면 성경의 부활(공중 들림)이나 불교의 미륵부처들 인간 구원은 1400년 뒤 태양계 12번째 행성 마르둑의 지구 접근 현상이 아닐지?
* 고려시대 서운관書雲觀(국립도선관) 소장所藏 한국고대역사서 목록 -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신비집神秘集,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대변설大辯說,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勳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안함로, 원동중 지음),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수찬기소修撰企所 100여 권(문태산, 왕거, 인설 3인 공저),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虱錄, 통부록通夫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은 조선실록朝鮮實錄에 책명만 남아있다.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고려시대 김부식의 한국고대사 폐기廢棄, 일제식민지시대에서는 20만권의 한국고대사를 불태웠다는 말처럼 한국고대사는 의도적으로 말살되었음
* 교착어膠着語 - 언어의 형태론적 분류에 의한 부류部類, 주로 접사接詞를 어근語根이나 변하지 않는 어간語幹에 덧붙이는 방법으로 문법적 관계를 나타냄.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 <터어키어> 따위. 부착어附着語, 첨가어添加語
* 5가加 - 고조선시대 나라를 구성한 다섯 큰 부족으로 우牛가, 마馬가, 저猪가, 구狗가, 양羊가인데 공화제 화백和白제도의 구성원이며 왕으로 추대되는 자격을 지님
* Sumer 역사연대표(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연대(BC) | 역사개요 |
445,000 |
엔키가 이끄는 네필림이 12번째 행성에서 지구로 내려와 메소 포타미아 남부의 에리두에 <지구기지 1호>를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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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000 |
빙하기가 물러가고 근동이 따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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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000 |
엔키는 내륙으로 더 들어가 라르사를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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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00 |
간빙기가 시작된다. 엔릴이 지구에 도착해 니푸르에 우주관제소를 건설한다. 엔키는 남아프리카로 가는 해로를 개척하고, 그 곳에 가서 금을 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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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000 |
네필림이 제련과 정련을 위한 야금중심지인 바드티비라를 건설한다. 우주공항인 시파르와 다른 신들의 도시가 건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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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00 |
아눈나키가 폭동을 일으킨다. 원시적 노동자인 인간이 엔키와 닌후르쌍에 의해 창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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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00 |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가 늘어나 다른 대륙으로 퍼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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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0 |
새로운 빙하기로 인해 지구상의 생명이 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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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00 |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고, 신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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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000 |
신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인 우바르투투(라멕)가 닌후르쌍의 도시인 슈루팍을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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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00 |
새로운 빙하기, <지구의 저주>가 시작된다. 퇴보된 종류의 인간이 지구를 떠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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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00 |
엔키의 <충실한 종>인 지우수드라(노아)의 지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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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00 |
<일곱 번의 통과>로 인한 가혹한 기후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지고, 근동에 자리잡은 크로마뇽인들 만이 살아남는다. 인간에게 실망한 엔릴이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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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0 |
다가오는 12번째 행성에 의해 시작될 해일에 대해 미리 안 네필림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을 결심한다. 대홍수가 지구를 휩쓸고 빙하기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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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er 신의 상징 Sumer 천체도 지구 12번째 행성 Marduk의 궤도와
겹십자가 마르둑 위성들의 Tiamat(행성) 공격
Sumer 실험실 수메르 복제인간 Egypt 고대벽화 / 고대 Egypt Abidos신전
복제 아기 탄생 노동력 동원 Rocket(흰색) / 벽화, 헬리콥터와 잠수함
* 그림, Daum Blog와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에서 제카리아 시친은 이렇게 말 한다
* 모든 역사가 Sumer에서 시작되었다거나, 인류 최초의 문명이 수메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수메르문명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그것이 최초의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수메르문명은 인류 최초의 것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이미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문명이기도 했다. 그들은 태양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지구와 인간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알고 있었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신들이 어디에서 언제 지구로 왔고, 왜 인간을 창조했으며, 어떻게 지구를 왕래하며 인간을 지배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내용들이 수메르의 점토판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남아있으며,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이나 각국의 신화들은 수메르의 이 고대 기록들을 나중에 각색하고 번안한 것들에 불과하다. 과연 그들이 알고 있던 창조의 비밀과 과학 기술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 태양계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거대한 행성 하나가 더 있다. 3600년을 주기로 공전하는 이 12번째의 행성, Marduk이 바로 지구에 문명을 창조한 <신들의 고향>이다. 그들은 행성 간 우주여행을 할 수 있었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지구에 왔으며, 노동력 조달을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 인간과 닮은, 인간처럼 울고 웃고 싸우기도 하는, 이 신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또한 그들은 왜 지구를 떠났으며, 언제 다시 오는가? 그리고 그들이 하늘과 땅 사이의 유대를 위해 남겨둔 지상의 낙원, Eden은 과연 어디인가?
# 한단고기(임승국)는 수밀이국(Sumer)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한국본기 제 2권에서 삼성밀기는 말한다. 파나류산(한인의 한국시대의 도읍지,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바이칼호수)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한인시대의 한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0,000리(25,000Km), 동서 20,000리(10,000Km)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캄차카),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퉁구스, 시위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12국이다.
* 선군왕검시대, 15세 선군대음(후을달) 재위 51년, 신사 2년, 한기 5537년(BC. 1660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겨울 10월에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 선군왕검시대 27세 선군두밀 재위 28년, 갑신 원년, 한기 6200년(BC. 997년) 천해(바이칼호수)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 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 인류학계와 세계의 사학계가 주목하는 수메르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수밀이국>이다. 수메르민족이란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수메르말이라고 불리는 언어를 사용한 민족으로 세계 최고의 도시문명을 메소포타미아에서 꽃피운 민족이다. 여기에서 최고라는 말은 마지막의 결론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학이 주도한 결론일 뿐이다. 서양역사학은, 서양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12연방의 기록을 믿지 않는다. 이는 문화의 창조 동서양 선후 다툼이 아니라 동서문화 주도권의 쟁점이다. 서양역사학자들은 구약성서를 기원으로 하는 인간의 창조론에 입각한 인류사를 정립하였는데 느닷없이 수메르문명이 발굴되고 해독되어 구약성서 이전의 기록이 밝혀지자 황당해 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서양을 기점으로 하는 수메르인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갑자기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나타나>라는 식으로 기술한다. 서양역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메르인이 수메르지역 원주민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누가, 언제, 어디서 이 땅에 이주하였는가? 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수메르인에 대한 정설은 <검은 머리칼의 교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누구일까?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지금까지는 언어학적, 인류학적으로 <아시아닉크계 민족설>이 유력하다. 역사적으로 인류사를 규명하려면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야 하는데 인종과 언어다. 슈메르인은 검은 머리칼의 인종이었다. 수메르인의 언어는 교착어인데 서양학자들은 언어적 연관성 때문에 이를 우랄(유럽의 서쪽 끝 지역)-알타이어(아시아의 몽골지역)라고 규정하여 서양의 서쪽 끝과 아시아의 동쪽 끝을 묶어놓았다. 유럽에는 교착어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 <터어키어>가 교착어다. 서양학자들에게는 수메르인들이 어디서 이동하여 왔는지 규명이 불가능하지만 자연 조건 때문에 문화의 동서 이동은 빠르고 남북 이동은 느리다는 고인돌유적(고인돌의 70%가 한국에 있음)에서 고대한국인의 유럽 동쪽 이동을 밝혀낼 수가 있다. 인류학과 언어학적으로 터어키인, 항가리인에 주목한다.
* 중국사서의 <진서 숙신열전>에 한인시대의 한국 12연방을 가리키는 말이 숙신(쥬신의 한자 차음)으로 표현되는데 숙신은 바로 조선이고 바이칼호수 접경 남북 50,000리, 동서 20,000리의 나라가 한국 12연방이었으며 그 막내 나라가 수밀이국(Sumer)이라고 기록하였다.
성경 Sharon의 장미, 고조선의 천지화, 한화 평남 진파리 1호분 금동관
무궁화 (가운데 원 안의 3족오 무늬)
* 그림, Daum Blog 인용
* 구약성경에 나오는 <샤론의 장미>는 예수의 별칭이기도 한데 이는 식물학명으로 한국의 국화 <무궁화>다. 한국고대사에서 소도(수두, 신성한 신의 영역)를 설치하고 천지화를 많이 심었으며 국자랑들이 머리에 쓴 관에 천지화를 장식하였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 불렀다. 서양인들이 신화적으로 숭앙하는 새 피닉스(불사의 새)는 밝새 또는 불새인데 한민족이 숭상한, 태양에서 사는 태양새(태양의 흑점 상징, 3족오, 세 발 달린 새)의 모습과 같다. 대진국 시조 해모수왕은 태양새 깃털 모자를 썼고 고구려 벼슬아치들도 머리에 태양새 깃털을 장식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3족오가 그려져 있고, 선군시대 8세 선군 우서한(오사함) 갑인 7년 한기 5210년(BC. 1987년)에 3족오가 대궐 뜰에 내려왔는데 날개 길이가 석 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 발 까마귀>는 3족오의 <오>를 <까마귀 오>로 해석하여 3족오를 <세 발 달린 까마귀>로 해석하는데 <오>를 <까마귀 오>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새김인 <검을 오>로 해석하여 3족오는 <태양의 흑점>을 상징하는 <불새>므로 <검은 태양새>다.
# 고대한국, 고조선의 역사
*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하느님의 시대
* 우리 한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Siveria)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 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 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은 또한 감군으로써 <천계에 계시면서> 나라를 다스렸다. 이를 한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이라고도 했다. 수메르의 신들도 하늘에서 땅으로 오르내리며 인간을 다스렸다.
* 여와는 태호복희씨의 누나다. 그녀는 흙을 빚어 7일 만에 사람을 만들고 혼을 불어넣었다고 하였다. <여와>라는 이름마저 한국어 번역판성경의 <여호와>와 일치하고 수메르기록의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기록과도 일치한다.
수메르 기록에도 최고 여신인 Inanna(Lipit-Ishtar)가 있다.
*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신인의 시대
* 한국의 말기에 한님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할 곳이로다 하시고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5가가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찌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마침내 천부인 3가지를 내려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 곳을 신시라 하고 이 분을 한웅천왕이라고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을 주관하고, 선악을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 대저 9한(한국시대 한인천왕이 다스리던 강역의 나라 또는 백성)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황부인은 피부가 노랗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털은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백부인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며, 적부인은 피부가 녹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특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인종의 색깔이라고도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흑부인의 기록이 없음)
나폴레옹 마틴 루터 킹 징키스칸 마하트마 간디 이맘 호메이니
* 그림, Daum Blog 인용
* 선군왕검의 조선시대, 인간의 시대
* 신인 왕검께서 불함산의 배달(밝달)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고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9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선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쥬신)이라고 불렀다. 선군은 하염없이 맨 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회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도록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 13세 선군 홀달 무술 20년 한기 5434년(BC. 1763년),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무궁화)를 심었다. 국자랑들은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 단제(대진국 해모수)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꽤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 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선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태양새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5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Huns(훈족)의 정복자 아틸라왕 몽골 징키스칸 / 알렉산더와 티모클레시아
고조선시대 한족의 한 갈래 흉노 일파 전쟁도 * 그림, Daum Blog 인용
* <대변경>에서 치우천왕은 <범족 무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에 살도록 하고>라고 했는데 하삭은 이란, 이라크지역이며, 서아시아의 터어키가 한국계 민족임을 주시한다. 서아시아에서도 유독 터어키만이 교착어를 사용하고 생활습관과 생활양식이 한국인과 닮았으며 터어키가 한국과 형제국이라는 것은 인류학계 일반론이다. 2002 세계 월드컵대회 4강에서 한국과 터어키의 경기가 끝났을 때 터어키 선수들이 우리 선수들을 얼싸안고 <우리는 형제>라고 했다. 우리 언론은 이를 6 . 25 남북전쟁 때 UN군으로 참전하여 도운 <혈맹>이야기라고 했으나 혈맹이 아니라 형제다. 터어키는 치우천왕시대 하삭으로 추방한 한민족의 형제국이다. 터어키는 제도교육의 민족사에서 고대한국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임을 역사로 가르치기 때문에 터어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알고 있다. 또한 게르만족을 정복하여 로마를 멸망시킨 <아틸라>의 Huns(훈족)이 한민족이라는 사실은 서양역사학계에서 고증한다. 아틸라는 알렉산더, 징키스칸과 함께 세계 3대 정복자다. 훈족은 한민족의 갈래인 흉노의 일파며 항가리민족이다. 이 사실을 몇 년 전 도이치의 ZDF - TV가 역사스페셜로 방영한 일이 있다. 이 외에 한민족의 갈래는 남동부러시아(부랴트자치공화국, 러시아 남동시베리아 바이칼호 남쪽, 몽골과 접경, 레오니트 포타포프 대통령이 찾아간 기자에게 밝힌 바에 의하면 2000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 우리는 형제라고 말했음, 미국 에모리대학 연구소 DNA 분석 결과 유전자가 일치함, 중앙일보 2006년 7월 5일 자, 한민족의 고향 바이칼호에 우리 형제가 살고 있었네, 울란우데에서 김기현 특파원), 동부 아프리카, 중국의 묘족과 일본 그리고 북미의 에스키모, 남미의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에 이르기까지 고대한민족의 역사가 지구촌 대륙의 중심지에 널려있다.
터어키 앙카라 2002 서울월드컵경기 고조선의 기원 바이칼호수
옛 성곽 형제국 한국과 터어키선수 * 그림, Daum Blog인용
# Sumer의 역사(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 하나님이 대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할 때 인간의 딸들을 아내로 삼은 신의 아들들이 있었다. 히브리어 원전에서는 그들을 네필림이라고 했고 이는 <던져진 자들>, <지구로 내려온 자들>이다.
* 구약성경에는 야훼(여호아)의 옥좌가 하늘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지구)을 보고 있다. 신약성경의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다.
* 모든 고대인들은, 하늘에서 지구로 내려왔고 또 자기들 마음대로 하늘로 다시 올라갈 수도 있었던 신들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수메르를 비롯한 근동의 고대 유적지에서 엄청난 양의 천문학적 지식이 담긴 Sumer점토판들이 대량(55,000매) 출토되었는데 이 문서들은 그런 신들의 존재와 그들의 고향인 특정한 행성(Marduk)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이를 지구태양계의 12번째 행성, 혹은 Marduk라고 불렀다.
*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경쟁하던 두 거대한 제국, 남쪽의 바빌로니아와 북쪽의 아시리아는 Acade어를 공통으로 사용하였다. 아카드어는 히브리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가나안어와 비슷하지만 그 보다 훨씬 앞선 어떤 원전의 복사였다. 그렇다면 누가 설형(쐐기)문자를 발명하고 그것의 정확한 문법과 풍성한 단어를 발전시킨 것일까? 도대체 앞 선 원전을 쓴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바빌로니아인들과 아시리아인들은 왜 그 언어를 아카드어라고 불렀을까? 구약성경(창세기 10장)에서는 <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 시날(수메르)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우르크)과 악갓(아카드)과 갈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카드라는 왕조가 있었을까? 1869년 프랑스 고전고고학회에서 J. Oppert는 아카드 이전의 언어와 민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였고 학자들은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이 <아카드어 - 수메르어사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로써 수메르어를 판독하게 되자 놀랄만한 사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 수메르어로 엔시는 <정의로운 지배자>인데 라가시에서 발굴된 기록들은 라가시왕조가 BC. 2900년경에 시작되어 650년을 이어갔으며 43명의 엔시들이 다스렸고 수메르의 지도자들은 <신의 허락을 받아야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고 명백하게 기록하였다.
Sumer Ziggurat Sumer인의 바퀴 Sumer벽화 Sumer 신 Inanna
* 그림,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인용
* 1956년 S. N. Kramer의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에서 바퀴, 고층건물, 음악과 악기, 야금술, 의학(서), 조각, 보석, 도시, 왕조, 법률, 사원, 기사도, 수학, 천문학, 달력, 학교, 양원제, 역사학자, 농업(서), 우주론, 격언, 문학 논쟁, 도서관 목록, 인간 영웅, 사회 개혁, 세계평화 노력, 욥, 노아, 인쇄술, 활자 사용, 원통형 인장윤전기, 60진법, 역청과 석유연료, 백내장 수술, 알코올, 죽은 신의 소생술, 투구(외투, 토가), 빵, 맥주, 포도주, 요쿠르트, 버터, 치즈 등 인류 최초의 발명 100가지 이상이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 수메르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잇는 어떤 고대문명 보다 더 발전적이고 포괄적인 문명이었다. 그리고 이 문명이야말로 현재의 우리 문명이 기원을 두고 있는 원전이다. 약 200만 년 전에 석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BC. 3800년 경에 수메르에서 고도의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수메르문명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수메르인이 도대체 누구였으며,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왜 수메르문명이 생겨났는가? 라는 물음이다. 고대인류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도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은 아주 갑작스럽고, 전혀 앞선 문명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 H. Frankfort는 <놀랍다>, P. Ammiet는 <비범하다>, A. Parrot는 <아주 갑자기 나타난 불꽃>, L. Oppenheim은 <엄청나게 짧은 기간에>, J. Campbell은 <수메르의 좁은 진흙땅에서 정말로 갑자기 세계의 모든 고등문명을 구성하는 단초들이 일시에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
* 제카리아 시친은 인류학의 발전과정을 살펴 왜, 수 백 년 동안 고통스럽도록 느리게 진행되던 인간의 진화가 BC. 11000년경 농업의 획기적인 발전, 7400년경 신석기문명, 3800년경 갑작스런 문명의 발전이라는 세 차례의 계기를 통해 가속도를 얻어 원시적인 사냥꾼, 채취자를 농사꾼, 토기제작자로 바꾸어놓고, 다시 도시건축가, 수학자, 천문학자, 상인, 음악가, 판사, 의사, 작가로 바꾸어놓은 것일까? 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 구약성경의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대홍수 이후 지구에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수메르)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구약성경 창세기 11 : 2)>를 잡았다. 정착한 수메르사람들은 도시를 세우고, 탑(발사대, 지구라트)을 쌓았는데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사람들의 이름(쉠, 비행 물체)을 날리려고 하자 하느님은 인간들의 이 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통일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인간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인간들의 단합을 봉쇄하자고 자신의 동료들에게 제안한다. 언어의 혼란이 시작되자 바벨탑 건립은 무산되었다.
* 아라비아해에 착륙한(44만 5000년 전) 엔키가 이끄는 네필림은 태양계 12번째의 행성 마르둑에서 지구로 내려와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최초의 정착지 에리두(먼 곳에 지어진 집)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신들이 지구의 통치권을 나눠 가진 뒤 하급 신인 아눈나키들에게 노동을 시켜 자원을 확보했다. 하늘에는 300명을 두어 안(신들의 왕, 아눈나키들의 아버지)을 지키게 했고, 안의 명령을 따르게 했다. 또한 하늘에서 지구로 오는 길을 정하게 했다. 그리고 지구에는 600명을 살게 했다. 하늘과 땅의 아눈나키에게 지시를 내린 후 노역의 임무를 부여했다.
* 노역에 시달린 아눈나키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신들의 대법관 엔닐은 무기로 폭동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누스코의 충고를 받아들여 폭동의 원인을 조사한다. 그리고 아눈나키들의 노역이 너무 가혹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신들은 원시적 노동자, 인간을 창조해서 아눈나키의 노역을 대신하게 한다. 따라서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지만 우리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신의 창조물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만 년 전에 네필림이 원인(호모 에렉투스)들에게 자신들의 형상과 모습을 덧붙여서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다파(아담)는 신이 만든 인간의 모델이다. 아담을 모델로 노동력을 대신할 복제품 인간을 만들어냈다.
*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에 의하면 <10기간 동안 그들은 일에 시달렸다. … 40기간 동안 그들은 일에 시달렸다>는 반복된 기록이 있다. 네필림의 1년(1샤르)은 3600년(12번째 행성 마르둑의 공전주기)이다. 그래서 40샤르는 14만 4000년이다. 아눈나키들은 엔키가 지구에 착륙한 뒤 14만 4000년 동안 강제 노역에 시달린 것이다.
* 대홍수가 지나간 뒤 네필림은 지구의 신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회의를 한다. 회의의 결과 그들은 네 개의 지역을 만들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 나일강 유역, 인더스강 유역과 나머지 하나 마지막 지역은 신성한 곳이었는데 순수한 땅으로 불리운 그 곳은 Tilmun(미사일의 땅, 우주 공항)이었다. 틸문은 어디인가? Nefilim(히브리원전 성서, 하급 신, 인간의 딸을 아내로 삼은 신의 아들들, 던져진 자들, 지구로 내려온 자들)들이 지구를 떠나면서 3600년 뒤, 오늘(AD. 2006년)로부터 1400년 뒤 돌아와서 살려고 남겨놓은 에덴동산은 어디인가? 구약성경에서는 상징적으로 에덴을 설정하여 지정학적으로는 이스라엘 동쪽을 지칭했다. 그러나 수메르문헌에서는 이라크 동북지역을 확연하게 지정한다. 네필림들이 지구를 떠나면서 지정한 에덴이 서양학자들이 말하는 메소포타지역의 동북부 이라크 동북지역인가? 아니면 고대 한국의 발상지인 바이칼호수일까? 혹은 세계 4대 문명발상지 황하문명의 동쪽 한국이 아닐른지.
2부 열국시대列國時代
7화 천지화랑天指花郞의 후예後裔
◎ 고구려 역사연대표
1대 동명왕 한기 7160년(BC. 37년) - 28대 보장왕 한기 7865년(AD. 668년),
28대 705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동명성제 | BC.37-19, 多勿 | 高鄒牟, 압록강 변 졸본천 고구려 건국 |
2대 | 유리 | BC.19-AD.18 | 국내성 천도, 한나라 고구려현 탈취 |
3대 | 대무신 | AD. 18 - 44 | 동부여 개마국 병합, 낙랑국 정벌 |
4대 | 민중 | 44 - 48 | 대무신왕 동생, 태자 어려 대신 즉위 |
5대 | 모본 | 48 - 53 | 정사 문란, 신하 두노에게 피살 |
6대 | 국조 | 53 - 146 | 영토 확장, 중앙집권체제 구축 |
7대 | 차대 | 146 - 165 | 학정 횡포 신대왕이 살해 |
8대 | 신대 | 165 - 179 | 산속 은거 차대왕 시해 뒤 추대 등극 |
9대 | 고국천 | 179 - 197 | 빈민 구제 진대법 시행 |
10대 | 산상 | 197 - 229 | 고국천왕 동생, 후사 없어 등극 |
11대 | 동천 | 229 - 247 | 신라와 화친 |
12대 | 중천 | 247 - 270 | 동천왕의 아들 |
13대 | 서천 | 270 - 292 | 이름 약로 또는 약우 |
14대 | 봉상 | 292 - 300 | 연나라 침입 격퇴, 국상 창조리 폐위 자살 |
15대 | 미천 | 300 - 330 | 현도군 공격, 낙랑군 점령 |
16대 | 고국원 | 330 - 371 |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 전투 전사 |
17대 | 소수림 | 371 - 384 | 중국 전진 순도 불상 경문 수입 |
18대 | 고국양 | 384 - 391 | 요동과 백제 정벌 |
19대 | 광개토 | 391 - 413 | 고구려 전성시대, 영토 확장, 불교 신봉 |
20대 | 장수 | 413 - 490 | 남하정책, 백제 한성, 신라 7성 함락 |
21대 | 문자명 | 490 - 519 | 부여 점령, 신라 백제 공격 영토 확장 |
22대 | 안장 | 519 - 531 | 백제와 2회 전쟁 |
23대 | 안원 | 531 - 545 | 양나라, 동위 수교 |
24대 | 양원 | 545 - 559 | 돌궐 침입 격퇴, 백제 신라 침입 받음 |
25대 | 평원 | 559 - 590 | 중국 진, 수, 북제와 수교 |
26대 | 영양 | 590 - 618 | 수 문제 30만, 양제 113만 을지문덕 격퇴 |
27대 | 영류 | 618 - 641 | 포로 송환, 도교 수입, 연개소문이 살해 |
28대 | 보장 | 641 - 668 | 연개소문 추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 |
을지문덕 장군 을지문덕장군상 연개소문 장군 중국 뤄양(낙양)
살수대첩도 * Daum Blog 인용 당 태종 전쟁도 연개소문가묘
◎ 을지문덕
# 고구려 26대 영양왕 때 평양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입산수도하다가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3월 16일이면 마리산에서 공물하며 경배하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자치통감에는 위지문덕으로 적었다.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에서는 그의 가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명장전에서는 평양 석다산 사람이다라고 했다. 영양왕 홍무 23년 한기 7809년(AD. 612년) 수나라 양제가 군사 130만 명을 동원하여 대규모 침공을 했는데 우중문, 우문술을 지휘부로 별동대를 조직하여 해군과 함께 30만 5천명의 군세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을지문덕 장군은 패주하는 척 하면서 침략군을 평양성 가까이 진격하게 하여 지치게 만든 다음 전의를 잃고 후퇴의 구실을 찾는 수나라의 진영을 찾아 항복하는 체 하면서 군세를 파악하였다.
여수장우중문시與隨將于仲文詩
(을지문덕장군이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보낸 시)
신책구천문神策究天文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며
묘산궁지리妙算窮地理 묘한 꾀는 지리를 꿰뚫는구나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 싸움 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만족한줄 알아서 그만둠이 어떠리
# 수 양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애걸했으나 퇴각작전과 회유책을 쓰면서 침략군을 유인해놓고 살수(청천강)를 건너는 침략군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전멸시킴으로써 불과 2,700여명만 살아서 돌아갔다. 살수의 물길을 쇠가죽으로 막았다가 패잔병들이 강을 건너자 일시에 터 수장시킨 전법과 국지전(게릴라전)으로 대군을 괴롭힌 고사작전은 동서고금의 전범이 되었다. 이 싸움의 주력부대가 조의 2만이다. 살수대첩의 패배로 수나라는 국운이 기울어 패망했다. 을지문덕 장군은 승승장구하여 현도로부터 태원(산서성 성청 소재지) 또 다른 쪽은 낙랑으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정복한 건안, 건창, 백암, 창려는 안시성에 편입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는 여기성에 편입했다.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성에 편입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성에 편입했다. 이로써 강병이 100만이 되었으므로 군세는 더욱 커지고 국토는 동북아를 아우렀다. 문충공 조준(고려시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살수의 백상루에 올라 축배하고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푸르고 허하고나
수나라 병사 백만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 때 얘기 듣나니
장부의 한 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고구려제국 캐릭터 멸망한 고구려 출신 고구려 전성기
* Daum Blog 인용 고선지 장군 서역 정벌도 강역 확장도
◎ 연개소문
# 일명 개금이라고 한다. 성은 연(淵, 또는 천泉)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인데 남생(연개소문의 큰아들)묘지의 기록으로 아버지는 태조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이니 모두 막리지 벼슬을 역임했다. 26대 영양왕 홍무 14년(한기 7801년) 5월 10일 태어났다. 성씨는 중국의 기록으로는 천, 전이라 했는데 연의 중국어 발음이다. 그의 시조는 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천, 전, 연씨로 거론된다(일설에는 3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중국 왕의 성씨에 ‘천’ 씨가 있었으므로 ‘연’ 씨로 개명했다고 함). 일본서기는 이리가수미라고 기록했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儀表雄威하고 의기호일義氣豪逸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 했다. 혼란 속에서도 작은 것을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어 땅을 날줄로 삼고 하늘을 씨줄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써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나다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도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때는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일세의 쾌걸인저! 물속을 헤쳐가며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뛰어도 피로한줄 몰랐다. 무리들이 우러르며 창해의 용신이 몸을 나타내심이다 라고 추앙했다.
# 고구려 26대 영양왕 홍무 9년 한기 7796년, 서부대인 막리지 연태조(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반란을 일으킨 등주(산동성 모평현)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수나라 영주자사)을 척살하였다. 이 때 백제가 병력으로 제, 노, 오, 월나라를 평정한 뒤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명치(고구려 문자왕 연호) 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여 진흥치 못하매 권익이 모두 성조(고구려 영양왕)로 돌아왔다.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나라를 돕고자 막리지 연태조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막리지는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 차례 진정하였으나 영류왕(27대, 이름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모든 정책이 폐기되었다. 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노자의 인물상을 구하여 백성들에게 도덕경을 청강시키고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리 장성을 쌓게 하였다.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노자의 도덕경이 진취적인 민족정신을 저해한다고 보고, 장성 축성은 동북아 재패의 이상을 지닌 민족적 강역을 축소 한정하는 패배주의임을 들어 중지시키고자 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연개소문의 병사를 빼앗고 변방으로 축출하여 장성 감독을 명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를 미리 알고 ‘어찌 몸이 죽고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하며 부장들을 회유하여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 구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하니 빨리 제거하라!’ 고 부장들에게 명령했다. 영양왕은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으로 가서 조서를 내려 대신들을 모으려고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이 없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붕어하였다.
# 연개소문은 27대 영양제를 내어 쫓고 ‘고장’ 을 맞아들여 28대 보장제로 삼았다. 연개소문은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성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3홀을 전으로 하며 조의에 율이 있게 하여 국방에 힘을 쏟아 완전하였다. 백제의 상좌평 성충과 의를 세우고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로움을 잊고 3국은 백성을 모아 당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전승 뒤에 인의로 다스리자’ 재삼 권유하였으나 종내 듣지 않으니 애처럽고 가석할 일이었다. 연개소문이 죽고 동생 연정토와 그 아들들이 정권을 물려받았으나 권력 다툼으로 내분이 일었다.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 정복의 자문 역할을 하였고, 막리지를 이어받은 큰아들 남생은 당에 투항하여 고구려 침공의 선봉장이 되니 700여년 고구려의 부침이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 때를 이용하여 김춘추는 당나라와 밀통하고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쳤으며 이어 고구려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통일은 당나라를 끌어들인 외세의 야합이며 대동강 이북 고구려의 강역을 당나라에 내어주고 고작 백제의 고토만을 합병한 동서통일로써 3국통일은 언어도단이며, 고조선시대의 강역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전성기 때 강역의 100분의 일이 되지 못하였으니 고작 대동강 이남의 강토를 차지한 강역의 축소라 이를 어찌 통일이라고 말 할 수 있으랴. 이리하여 동북아 패권의 웅대한 고구려의 이상은 사라지고 요동, 요서, 양자강 이북으로부터 북위에 이르는 중원의 땅 그리고 만주와 몽골, 연해주의 광대한 민족의 강역을 잃었다.
무용총 수렵도 민족성산 백두산천지의 봄 무용총 춤과 노래 그림
* Daum Blog 인용
◎ 연개소문의 출생(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저, 박기봉 역)
# 연개소문은 고구려 900년 이래 전통이었던 호족공화제豪族共和制라는 옛 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장수태왕 이래 철석처럼 굳어진 서수남진정책西守南進定策을 남수서진정책으로 변경하였으며, 국왕 이하 호족들을 대 살육하고 당 태종의 침략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정벌을 도모한 동아시아 전쟁사의 중심인물이다. 그러나 3국사기에는 연개소문에 관한 사실이 겨우 김유신전에서
‘태대대로 개금이 김춘추의 숙소를 정해주었다.’
는 한 마디 뿐이고, 그 외에는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등 중국역사서에서 초록한 것 뿐인데 연개소문과 혈전을 벌였던 당 태종 군신들의 입과 붓끝에서 나온 자료들이라 믿기 어렵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서부세족으로 서부의 명칭이 연나기 때문에 성씨가 연이 된 것이다. 3국사기에서 그의 성을 천泉씨라고 한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당 고조高祖 이연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하여 연을 천으로 바꾸었는데 그대로 옮겨 적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장열이 규염객전에서 규염객虯髥客(연개소문)에 관한 일을 서술하면서‘규염객은 부여국(고구려) 사람으로써 중국에 와서 저 태원太原(당나라 발상지)에 이르러 이정과 교우관계를 맺고 이정의 처 홍불지와 남매의 의를 맺고, 중국의 제왕이 되고자 하다가 이연의 아들 이세민을 만나보고는 그의 연기에 눌리어 이정에게
’중국의 제왕되기를 단념하였다.‘
고 말 한 뒤 귀국하여 난을 일으키고 부여국 왕이 되었다.
# 또한 중국에 전해내려오는 ‘갓쉰동전’ 은 연국혜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나이 50이 되도록 아들이 없어 하늘에 빌어 옥동자를 낳아 갓쉰동이라고 이름지었는데 50살에 낳은 아들이란 뜻이다. 갓쉰동은 자람에 용모가 비범하고 재주와 지혜가 남달랐다. 갓쉰동이 7살 나던 해, 도사道士가 지나가다가 놀고 있는 갓쉰동이를 보고
‘아깝다, 아까워!’ 했다. 연국혜가 도사에게 물었더니
‘아이에게는 공명과 부귀가 있으나 다만 수명이 짧다’
고 했다. 그리고 15년 동안 아이를 버려 부모와 만나지 못하게 하면 흉액을 면한다는 비방을 내렸다. 연국혜는 갓쉰동의 등에 이름을 새겨 원주의 학성동에 버렸다. 그 동네에 장자 유씨가 꿈에 앞 개천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새벽에 나가보니 갓쉰동이 있는지라 자기집 종으로 부렸다.
하루, 갓쉰동이 나무를 하는데 청아한 퉁소소리가 들려 지게를 받쳐놓고 찾았더니 노인이 ‘네가 갓쉰동이 아니냐, 네가 오늘 배우지 아니하면 장래에 어찌 큰 공을 이루겠느냐?’
고 말했다. 그 뒤로 나무를 하러가서는 노인을 만나 검술, 병서, 천문, 지리 등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갓쉰동이 종 노릇하는 집에는 아들은 없고 딸이 셋이 있었는데 문희, 경희, 영희였다. 모두 미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셋째 딸 영희가 뛰어났다. 갓쉰동이 15세 되는 해 봄 날, 세 아가씨를 가마에 태워 봄 구경 나들이를 하는데 가마에서 내린 아가씨들이 것쉰동의 등을 디딤돌 삼아 발로 밟고 내렸으나 영희는 이를 꾸짖었다. 갓쉰동은 영희에게 자신의 출생을 이야기 하고
‘달딸이(달단韃靼) 매번 우리나라를 침범하는데 이를 평정하고 백년의 대평을 이루고싶 다’
고 포부를 말했다. 영희가 기뻐하며 적을 치려면 적의 사정을 알아야 하니 적국에 잠입하기를 권하였다. 갓쉰동은 달딸국에 들어가서는 이름을 돌쇠로 바꾸고 달딸왕의 종이 되어 말도 배우고 풍속을 익혔다. 그 행동이 민첩하고 영리하엿기 때문에 곧 왕의 신임을 받았는데 왕의 제 2왕자가 비범하여
‘갓쉰동은 비상하게 뛰어난 인물이지만 달딸의 종족도 아니므로 잡아 죽여서 후환을 없애 야 한다’
고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애처롭게 여긴 공주가 갓쉰동을 몰래 방면하였다. 갓쉰동은 귀국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영희와 혼인했으며 달딸을 토평했다.
# 연개소문은 중국의 경극京劇에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용감무쌍한 용龍의 화신化身이다.
# 갓쉰동은 연개소문이니 ‘개蓋’ 는 ‘갓’ 으로 읽고, ‘소문蘇文’ 은 ‘쉰’ 으로 읽으며, ‘국혜’는 남생의 묘지에 쓰인 개소문의 아버지 태조太祚다. 달딸국왕은 당 고조高祖고, 제 2왕자는 당 태종이다. 당 태종은 태자인 자기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이 권력 다툼을 벌여 자기를 죽이려는 걸 알고 친위병을 동원하여 두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정관’이라 하였다. 당 태종은 황제에 올라 15년 동안 내치에 힘써 문화사업을 증진하고, 국가사회주의정책인 공전제도를 실시하였으며, 고구려 징병제를 본받아 상비병과 예비군제도를 시행하여 부국강병으로 돌궐(내몽고), 서돌권(서몽고), 철륵(외몽고)과 고창의 토욕혼(서장)을 정복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이로써 중국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치적의 표본이 된 ‘정관지치貞觀之治’ 다.
# 그러나 연개소문이 귀국한 이듬해, 한기 7815년(AD. 618년)에 수나라가 망한 뒤로부터 고구려의 내정은 왕의 아우 건무와 을지문덕 양웅이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쳤으나 을지문덕은 북진남수주의北進南守主義로, 건무는 북수남진주의北守南進主義로 정견을 다투었다. 영양왕이 죽고 건무가 즉위하였는데 마침 중국은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개국하는 혼란기를 틈 타 중원을 도모코자 하였으나 건무는 당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고 오히려 백제와 신라를 쳤다. 이에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우환은 당나라지 신라, 백제가 아니다. 신라와 백제는 서로 견제하게 하여 남 쪽의 경계를 막고 고구려와 당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나라이므로 당 태종의 왕위쟁탈 의 혼란을 이용하면 쉽게 중원을 평정할 수 있다’
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당이 평정을 되찾자 한기 7823년(AD. 626년)에 신라와 벡제에 화친을 주장하고, 을지문덕이 수나라와 싸움에 이겨 건립한 경관京觀(적의 시체를 묻고 탑을 세운 건물)이 양국 평화에 걸림돌이 된다고 하며 허물 것을 주장하엿다. 이에 영류왕은 뒤늦게 놀라 북부여성으로부터 요동반도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3국사기에는 장성 축성이 연개소문의 진언에 의한 사업이라고 하였으나 북진주의를 주장한 근거로 무설誣說이다). 장성은 16년이 걸렸으며 이로 인해 백성의 생활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피폐로왔다. 한기 7843년(AD. 646년 경, 3국사기는 642년) 서부살이西部薩伊(라살) 연태조가 죽자 연개소문이 이를 승계하였으나 영류왕과 대신 호족들은 연개소문을 경계하여 승계를 반대하였으므로 연개소문은 허리를 굽혀 대신과 호족들을 찾아다니며 읍소하였다. 호족들이 애처롭게 여겨 승계는 인정하였으나 연개소문을 장성 축조 감독을 임명하여 변방으로 축출하려고 했다.
# 그런데 당 태종이 고구려의 내정을 탐지하려고 자주 밀사를 보냈는데 당나라 사람은 고구려의 나졸들에게 발각이 되었으므로 남해에 있는 3불제佛齊국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고구려의 군사 수, 군대 배치, 군사용 지리와 기타 내정을 탐정해달라고 부탁하였다. 3불제국은 남해의 한 소국으로써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쳐오고 있었기 때문에 조공사자는 자유롭게 고구려의 국정을 살필 수 있었다. 3불제국왕은 이를 허락하고 조공을 명목으로 정탐을 하였다. 정탐자료를 지닌 사자가 귀국하다가 고구려의 해라장海邏長(고구려 해상 경비대장)에게 붙잡혔는데 그는 연개소문을 받드는 사람인지라 정탐자료를 연개소문에게 바치려다가 국내 정세가 연개소문의 북진주의를 반대하고 있음을 통탄하며 자료는 물에 던져버리고 사자에게는 얼굴에 한시漢詩로
‘해동의 3불제국 사자의 얼굴에 글을 새겨 내 아들 이세민에게 말을 전하노니 금년에 만약 와서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내년에는 꼭 죄를 묻기 위한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라며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의 졸병 아무개 씀’ 이라고 먹물로 새겨 돌려보냈다. 얼굴에 많은 글자를 새겼으므로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웠으므로 다시 종이에 글의 내용을 적어 보냈다. 당 태종이 이를 보고 노발대발怒發大發하여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겠다고 하니 신하들이 말리며 한낱 연개소문의 병졸의 장난인즉 이로 인하여 지난날의 맹약을 깨뜨릴 수 없다고 말렸다. 당 태종은 이의 사실 진위를 알기 위해 고구려에 밀서를 보내자 영류왕이 경호병을 보내 해라장을 포박하여 조사를 했다. 해라장의 자백을 받은 영류왕이 놀라 각 부 살이와 대대로, 울절 등 대관을 비밀히 소집하였다.
‘연개소문은 늘 당을 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그를 따르는 장졸들을 선동하여 조정에 반대 하고 있음이 명백하므로 직위를 박탈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옳다’
는 결론을 내렸다. 이 때 연개소문은 장성 축조의 명을 받아 도성을 떠나려는 때였으므로 휘하의 장졸들이 반발을 염려하여 단신으로 왕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려고 궁성에 입성할 때 체포하려고 획책했다. 그러나 이 어전회의의 비밀이 연개소문에게 새나가자 장졸들과 의논하며
‘선발제인先發制人 - 먼저 손을 쓰는 자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라며 장성 축조 명을 받아 떠나는 열병식을 거행을 빙자하여 영류왕과 대신들을 초대하였다. 대신들은 의심하여 내키지 않았으나 그들의 어전모의가 탄로날까 두려워 울며 겨자먹기로 참여했는데, 왕이 안전하다면 감히 모반을 꾀할 수는 없으리라 판단하여 영류왕은 참석치 않도록 했다. 대신들에게 술을 두어 잔 권했을 때 연개소문이 술잔을 들어 바닥에 내려치며
‘반역의 무리를 잡아라!’
고 외치자 장막 주위에 숨어있던 무사들이 순식간에 호족과 대신 수백 명을 척살하였다. 연개소문은 군사를 이끌고 궁성에 들어가 영류왕을 죽였으므로 그 위세에 눌려 반항하는 자가 없었다. 20여년 전 대동강 입구에서 수나라 장수 래호아의 수십만 수군을 일격에 섬멸하여 육지의 연개소문과 함께 지략과 용맹함을 견주어 천하에 비할 사람이 없다던 고건무는 이렇게 하염없이 죽었다.
# 연개소문이 열병식장에서 대신과 호족을 모두 척살하고 궁성으로 쳐들어가자 그나마 궁궐을 지키던 근위병들도 모두 제 살기에 바빠 달아나버렸다. 연개소문은 궁궐에 숨어있던 영류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 종친들을 씨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결의로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왕가는 멸망했다. 이 변란의 소용돌이에서 수많은 환관과 궁녀들도 묵숨을 잃었다. 연개소문은 궁궐을 수습하자 곧 소도로 향했다.
연개소문 : 궁궐은 평정되었으니 연정토장군(연개소문의 동생, 신크마리)이 남아 정리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궁성을 단단히 수비하라! 부장 남생(연개소문의 큰아들, 신크마리)은 신궁으로 달려가 소도를 지키라!
연정토장군 : (연개소문을 향하여 허리를 굽히며) 소도는 이미 불타고 있습니다.
연개소문 : (깜짝 놀라며) 소도가 불 타? 누가 소도를 태우라 했느냐?
연정토장군 : 누가 시켜서 불이 난 게 아니라 ….
연개소문 : (칼을 치켜들고 곧 누구라도 내려칠 기세로) 시킨 게 아니라면 뭐냐!
연정토장군 : 무지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저지른 짓입니다. 약탈 방화입니다.
연개소문 : (남생을 돌아보며) 너는 즉시 말을 달려 신궁으로 가라! 병사들을 풀어 약탈자 를 잡아들이고 신궁의 불을 잡아 내가 갈 때까지 신궁을 물 샐 틈 없이 지켜라!
# 남생이 병졸을 이끌고 신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소도는 재가 되어 있었다. 남생은 신궁을 지키던 천지화랑과 신녀들을 수소문 했으나 천지화랑과 신녀들은 이미 하나도 남김없이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남생은 병졸을 수습하여 신궁의 불길을 잡았다. 불길이 다 잡힐 때 쯤 연개소문이 신궁에 들이닥쳤다.
연개소문 : 뭐라! 신궁을 지키던 천지화랑과 신녀들이 하나도 없어? 소도는 불타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뒤를 쫓고 있느냐?
남생장군 : 예! 장군. 사방 성문에 전령을 보내 먼저 출입을 통제해놓고 행방을 쫓고 있습 니다. 염려마십시오. 곧 연락이 올 것입니다.
# 그러나, 연개소문의 뜻과는 별개로 소도가 불타면서 실종된 선기옥형은 오리무중이었다. 그 뒤 연개소문은 실권을 잡아 태대대로가 되어서도 일변 백성들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걸고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관백을 독려하고 군사를 풀어 선기옥형의 소재를 쫓았으나 선기옥형은 결국 찾지 못했다.
지린성 산성 옛무덤 홀본성(5녀산성) 지린성 국내성 유적 라오닝 연주산성
소서노와 주몽의 초기 근거지 * Daum Blog 인용
◎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
* 조의선인(고조선 천지화랑의 후예)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것은 당나라 대군이 침략한 안시성전투였다. 당 태종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하고 군세를 총집결하여 안시성을 맹렬히 공략하였다.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도 실패하자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려고 안시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던 중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이 허물어졌다. 위기에 직면한 고구려군 진영에서 결사대가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토산을 점령하여버렸다. ‘검은 옷을 입은 1백 명의 용사가 달려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 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내어 쫓고 토산을 차지해버렸다’ 라고 기록했는데 이 용사들이 조의선인이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이었고 그 우두머리는 연개소문이었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승병으로 오해하고, 농사를 짓고 가정을 꾸려가며 수련을 하였으므로 더러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고 하기도 했다. 유년의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와 정신적 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교육을 통하여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육성하였다. 선발되면 국가에서 가족과 식솔들의 생활을 책임졌으며 조의는 심신연마에 몰두하였다. 소도蘇塗(나라의 제단祭壇)를 관리하였고, 국가 유사시에는 거느렸던 조의들을 소집하여 전쟁에 나가 패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형성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판단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하였다.
* 연개소문 집권의 반대파였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여의 공략에도 실패하자 양만춘장군을 달래고 설득하여 그 지위를 보장하고 타협하였다. 양만춘장군은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고 송준길의 동춘당선생 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기록이 있는데 용기와 소신의 인물이었다고 기록했다.
* 한기 7742년(645년) 보장왕 4년 당 태종의 침략에 요동지역의 개모성과 비사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요동성과 백암성도 함락되었다. 당군은 다음 목표를 놓고 이견이 있었는데 이세적이 주장한 안시성 선제공격이 채택되었다. 안시성이 위태롭자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거느린 15만 군대로 구출작전을 폈으나 안시성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양만춘장군은 고립무원이 되었으나 안시성은 성 안 남녀노소 백성들까지 총동원한 5만의 병력으로 당군 50만의 60일에 걸친 총공격에도 강력히 저항하였다. 결국 당군은 추위와 군량 부족으로 철군하였는데 철군하는 날 양만춘장군이 성벽에 올라 당태종에게 송별의 예를 하자 당 태종은 안시성의 전의를 찬탄하여 비단 100필을 주었다. 안시성 싸움에서 물러선 당나라는 이 전쟁 패배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패망했다. 뒤에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멸망 뒤 끝까지 저항한 고구려 11성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되어 있다. 유림관은 산서성 경현의 동북에 있는 관문으로써 훗날 고려 때 목은 이색이 유림관을 지나며 ‘정관음’ 을 지었는데 당태종이 양만춘 장군의 백우전에 눈알이 빠졌다고 읊었다.
고구려 쯤 주머니에 든 물건일 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큰소리치더니
어찌 알았으리요
검은 꽃(눈알)이 흰 깃 화살(백우전)에 맞아 떨어질 줄
# 3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대 수당전쟁사는 대부분 수서와 당서를 초록한 것이다. 수서는 수나라가 멸망하고난 뒤 당나라 사람이 기록했기 때문에 무록誣錄의 정도가 경미하지만 당서는 당대의 사관의 기록이므로 춘추필법을 따라 그 무록이 어떤지 짐작조차도 어렵다. 당 태종은 ‘정관지치貞觀之治(태종의 연호가 정관이고 내외 치적이 탁월하여 중국정치사의 귀감)’ 라는 왕도를 펴 국가가 안정되자 주변국가를 복속시켰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당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주변국가들 처럼 쉽게 도모하기 어려웠다. 또한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여 그 후유증으로 멸망한 사실도 고구려를 주변국가들처럼 쉽게 넘보지 못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국세가 안정되자 천하에 두 국가가 온존할 수 없다는 오만함으로 드디어 전쟁에 돌입한다. 당 태종은 AD. 644년 7월, 군대를 낙양에 집중하고 군량은 영주 대인성(진황도)에 모았다. 영주도독 장검에게 유주 영주 2개 주 병마를 거느리고 요동 부근을 유격하여 고구려의 형세를 탐지하고, 장작대장(공병대장) 염립덕에게는 군량을 대인성으로 운반토록 지시하였다. 같은 해 10월, 형부상서 장량을 평안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상하와 좌난당을 부총관으로 하고, 방효태, 정명진, 염인덕, 유영행, 장문관은 총관으로 장강, 회남, 영동, 섬서의 정병 4만과 장안, 낙양의 병사 3000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떠나게 하였다. 그리고 이적으로 행군대총관, 강하왕, 이도종은 부대총관으로 장사귀, 장검, 집실사력, 걸필하력, 아사나미야, 강덕본, 오흑달을 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요동을 치게하고, 당 태종은 황제의 어군 20만으로 뒤따랐다.
당군이 쳐들어오자 연개소문은 전략을 협의하였는데
‘평원왕 때 온달장군이 주나라 군사를 맞아 싸운 병법으로 기병을 동원하여 선진을 부수 고 요동평야에서 결전을 하자.’
는 전략과
‘영양왕 때 을지문덕의 수나라 전쟁처럼 황폐화전략으로 양도를 끊은 뒤 굶주리고 지친 적을 평양으로 유인하여 격파하자’
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연개소문은
‘전략은 형세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옳다며 오늘의 형세는 평원왕 때와 다르고 영양왕 때 와도 다르다.’
며 이 번에는 지형을 택하여 방어하고 기회를 틈타 진공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건안, 안시, 가시, 횡악 등 몇 개의 성만 고수하고, 황폐화작전을 하여 적들의 노략질을 막고, 오골성(연산관)을 방어선으로 삼아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은밀히 작전을 지시했다.
‘당나라 군사는 전의 수나라 전쟁의 패배를 교훈삼아 양곡에 쓸 소와 양들을 무수히 대 동하였으나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 풀이 마르고 강이 얼면 가축을 무엇으로 먹여 양곡 을 확보하겠는가? 그러니 저들은 속전을 도모할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수나라의 패전을 거울삼아 평양으로 곧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안시성(아리티, 환도성, 북평양)을 칠 것이니 성주 양공은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들이 굶주리고 지칠 때를 당하여 앞에서 치라. 또한 이 때 추공이 밖에서 협응하고 뒤에서 내가 무찔러 아예 그들이 도주할 길을 막아 이세민을 사로잡으리라.’
# 해상잡록海上雜錄에 의하면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계획하면서 당의 제 1 명장 이정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였더니 그가 사양하며
‘임금도 중요하지만 스승의 은혜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일찍이 태원에 있었을 때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웠는데 오늘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 것은 다 그 배 움 때문입니다. 헌데 어찌 신이 스승을 칠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물었다.
‘연개소문의 병법이 옛 사람들 중 누구에게 견줄만 한가?’
이정이 대답하였다.
‘옛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 폐하의 장수 중에서는 적수가 없고, 비록 폐하가 나서더라 도 이기기 어렵습니다.’
태종이 노여워하며 말했다.
‘중국은 나라가 크고 병력도 강한데 어찌 연개소문을 두려워하랴!’
이정이 대답했다.
‘연개소문은 비록 단 한 사람이지만 그의 재주와 지략이 만중에 뛰어난데 어찌 두렵지 않 겠습니까?’
# 한기 7942년, AD. 645년 2월에 당 태종이 낙양에 이르러, 수나라의 우무후장군으로써 수 양제를 따라 살수전투에 참여했다가 수나라가 망한 뒤 당의 선주자사를 역임하고 노후를 지내고 있는 정원숙에게 전략을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 양식 운반이 힘들고, 고구려는 수성에 능하여 공격하여 함락시키기가 매우 힘들므로 이 번 전쟁은 위태롭습니다.’
당 태종이 요택(발착수)에 이르니 200여리에 뻗친 진흙탕에 말과 병사들이 나아가지 못했다. 수나라 병사들의 해골이 널려 있었다. 장작대감 염립덕에게 나무와 돌로 길을 만들게 하고
‘오늘 중국의 자손들은 대부분 이 해골들의 자손이다. 어찌 복수하지 않으랴!’
하고는 요택을 무사히 건너자
‘병법을 안는 자가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인가?’
라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때 당 태종은 그 웃음이 비웃음이 되어 다시 자기에게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요하를 건넌 뒤에는 진군이 순조로왔다. 고구려가 황폐화전략으로 주변의 성들을 버렸기 때문에 오열흘, 백암, 개평, 횡악, 은산, 후황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그런 다음 전략회의를 했는데 강하왕 이도종은 먼저 오골성(연산관)을 치고 평양을 습격하자고 하고, 이적과 장손무기는 안시성을 먼저 쳐야 한다고 의견이 대립되었다. 수 양제가 일찍이 우문술로 하여금 30만 대군으로 안시성을 그대로 지나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했는데 이는 안시성이 배후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연개소문의 전략과 맞아 떨어진다. 당 태종이 이적과 장손무기의 전략을 받아들여 그 해 6월에 안시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당 태종은 안시성의 방어가 매우 튼튼하여 쉽게 깨뜨릴 수 없음을 알고 성을 포위하여 고립작전을 썼으나 연개소문의 전략으로 이미 이를 대비한 안시성은 안정적이었으나 당군은 차차 양곡이 떨어지고 추위에 지친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수로를 통해 조달하려던 군량도 고구려 수군에게 격파되어버렸다. 낭패한 당 태종은 묘안을 내어 토산을 쌓았다. (토산의 결론은 앞 절에 말 한 바와 같다.) 연개소문은 요동전쟁을 양만춘장군과 추정국장군에게 일임하고 정예병 3만으로 적봉진(열하 부근)을 쫓아 장성을 넘어 성곡(하간)을 격파하니 당 태자 치治(당 태자는 원래 승건이었는데 643년 모반을 꾀하다가 폐서인 되고 진왕 치가 태자가 됨)가 어양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봉화를 올리니 안시성까지 이어졌다. 당 태종이 임유관에 변괴가 있음을 봉화를 통하여 알고 군대를 물리자 양만춘장군과 추정국장군이 봉화의 뜻을 간파하여 연개소문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추정국장군은 안시성의 동남 협곡으로 나가서 공격하고 양만춘장군도 성문을 열고 나와 협공하니 당 태종은 헌우락에 이르러 말이 진흙탕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고 양만춘장군의 백우전에 왼쪽 눈을 맞아 눈알이 빠져버렸다(이로 인해 당 태종은 3년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음. 고려 때 목은 이색이 산해관을 지나면서 정관음 - 당 태종을 노래함을 지었고, 조선 효종 때 유학자 김창업은 북경을 오가며 지은 글 천산시에서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이 화살을 쏘아 구염(당 태종)의 눈알을 빼었네’ 라고 함, 당 태종의 죽음에 대한 중국사서 구당서의 태종본기는 내종(암), 신당서는 한질(감기), 자치통감은 이질로 기록이 모두 다르다. 당 태종이 생포될 찰나에 설인귀가 구해 생포를 면했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이병도 선군신화 태양새 3족오/초기 3국시대 4국 위치도 3국사기
천문현상 추적 특별기고(조선일보) (고구려, 백제, 신라, 당)
중국 안의 3국 추정도 * Daum Blog 인용
* 연개소문이 중국에 쳐들어간 기록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나 북경시의 조양문 밖 7리 쯤 황량대를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거리에 황량대라고 이름 붙은 지명이 10여 개나 되는데, 전설에 의하면 황량대는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노적가리라고 속이고 고구려인들이 쳐들어오면 복병으로 유격하였다고 한 즉 이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북경까지 추적한 유적이다. 또 산동성, 직예(북경) 등지에는‘고려’라는 앞말이 붙은 지명들이 있는데 북경 안정리 밖 60리 쯤에 고려진과 하간현 서북 12리 쯤 고려성이 대표적이다.
* 책성에 태조무열제(6대왕) 기공비紀功碑가 있다. 동압록의 황성(국내성)에 광개토경대훈적 大勳績의 비碑가 있다. 안주 청천강변에 을지문덕의 석상石像이 있다.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평양 모란봉의 중간 기슭에 동천제東川帝(북부여 시조 해모수, 동명왕)의 조천석朝天石(동명왕이 기린마를 타고 승천한 곳)이 있다. 삭주 거문산의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무덤이 있다.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음
* 고구려 요서遼西 12성 - 태조(6대왕) 융무 3년 한기 7253년, 요서에 10성城을 쌓고 이로써 한漢의 10성에 대비케 했다. 안시는 개평의 동북쪽 70리(35Km)에,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풍성은 안시의 서쪽 100리에,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융무 5년 봄 한기 7255년 정월에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음 (10리는 약 5Km)
* ‘동북공정東北工程’ 은 중국의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하는데 우리식으로 풀이하면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 연구과제’ 다. 중국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개년계획(예산 24억원)으로 수립한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변강사지연구중심 주관 역사프로젝트다. 이는 대한이 통일되었을 때 영토 분쟁은 없애려는 사전 정지작업 또는 북한을 중국에 편입하려는 의도 정도로 간과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대한사의 고구려와 대진국(발해)역사를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편입하는 일이 첫 단계요 궁극적으로는 고조선시대 대한고대사를 찬탈하려는 의도로 판단한다. 중국은 한족漢族의 역사적 시조를 황제헌원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고조선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치우천왕을 3조당祖堂(중국 호남성湖南省의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 치우천왕蚩尤天王을 모시는 사당祠堂)에 중국인들의 역사적 시조와 함께 배향配享한다. (대한은 2004년 3월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발족하였고 2006년 이를 동북아역사연구재단으로 개정하였다.)
* 대한의 고조선시대에는 아시아대륙과 동유럽의 광대한 대륙이 강역이었고 고구려시대와 대진국시대에는 동북아시아 대부분이 영토였다. 그러나 신라의 동서東西통일은 대한의 강역이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되는 결정적 계기였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요동과 만주의 동남북부와 압록강 이남의 강역으로 한정되었더니 일본제국 식민지시대에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으로 고착되었으며 그나마 6・25남북전쟁을 겪고나서는 백두산마저 중국에 45%를 할애하였다. 이렇게 광활한 대륙의 강역을 잃고 대한에 정착한 한민족은 고대역사 유적이 대부분 중국과 서남아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아시아대륙과 동북러시아 영토에 있다. 이런 까닭으로 역사 고증考證의 학문적 접근이 통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 자의적으로 대한고대사 유적을 발굴, 해석하고 자국의 역사에 편입하는 일은 통탄할 일이다. 유적 찬탈과 연계하여 중국은 체계적인 역사 찬탈 의도를 들어내어 고구려유적을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중국유산으로 등록하고 있으며 6・25남북전쟁 참전을 빌미로 할양한 백두산을 대대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심지어 백두산 광천수까지 상품화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나 대진국 그리고 고조선의 유적은 물론이고 중국 동북부 관광까지도 대한인의 접근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한 무제와 사마천의 사기史記 훼절로부터 만주의 거대한 고대 피라미트 떼의 발굴 중단 등 중국의 의도는 영토 분쟁의 빌미를 넘어 궁극적으로 대한고대사 고조선의 역사를 찬탈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역사를 자의적으로 찬탈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왜곡, 조작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면 몇 시대가 걸리는데 그 동안 겪어야할 수난과 간난을 어찌 겪어야 할 것인가?
* 한편 일본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 조작한 조선사와 일본서기 등 고대역사서를 바탕으로 ‘일본역사교과서’ 를 통해 역사 조작을 끊임없이 획책하고 있다. 세계제2차대전(대동아전쟁)을 미화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서기의 자의적 해석과 조선사 왜곡, 조작은 정치적 의도 아래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대한인의 역사의식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대한사학계는 일본어용사학자들의 학문적 추종자였으므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조선역사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본이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발족시킨 ‘조선사연구회’ 를 통하여 고증된 사실事實만 기록한다는 사실史實을 바탕으로하는 ‘실증사학’ 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에서 일제어용사학자들의 앵무새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대한사학계에서 역사학의 태두로 일컫어지는 이병도(학파)는 일제어용사학의 조선사 편수에 직접 참여하여 조선사를 왜곡, 조작, 폄하하는데 동조했을 뿐만아니라 이를 청년교육에 활용함으로써 일제어용사학의 의식화를 선도했다. 뒤늦게, 만년의 이병도는 조선일보의 특별기고 (이병도, 1966년 10월 9일 자 조선일보)에서 ‘선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國祖’ 라며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이어내려온 선군제사를 일제가 조선사 신화화 일환으로 없애버렸다고 고백하였으나 어찌 이로써 역사 왜곡의 허물을 가릴 수 있겠는가?
더불어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한(사) 인식은 어떤가? 영토의 넓고 좁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비해 대한 인식은 학문적으로는 매우 미미하고 사회사적으로도 일천하다. 근래 88서울올림픽과 2002세계월드컵 그리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면서도 대한 자체를 알지 못하는 일 뿐만 아니라 교과서에서 대한을 다루는 나라들도 중국이나 일본의 변방 정도로 다루고 있어 한심하다. 요즘 대두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분쟁’ 이나 세계지리학회의 ‘동해, 대한해 - 대한해협이었지 한국해협이라고 쓰지 않았다, 일본해’ 표기에서 들어나듯이 대한의 세계적 위상을 높여야 할 것이다.
* 덧붙여 대한사연구는 고대사서의 의도적인 폐기(진시황의 분서갱유, 사마천의 사기와 중국의 역사서 의도적 조작, 김부식의 3국사기 저술 뒤 서운관 고대사서 폐기, 조선시대 수거 폐기, 조선시대 말기 서양의 약탈, 일제시대 수거 폐기, 해방 뒤 국외 반출)로 사료가 없어 대한사를 정립하는데 중국의 사서나 일본의 사서를 참고해야 하는 애로가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이 폐기하고 소각했다는 대한고대사서들 (화랑세기 필사본의 박창화 증언 일본 궁내도서관 장서, 프랑스 박물관 강화사고 전적, 미국 하버드대학교 비공개도서 대한고대서적, 서울대학교 도서관, 숙명여대 도서관)이 요즘 들어나고 있다. 극비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은 대한고대사적들을 찾아내는 일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필수의무교과로 교육하는 일은 대한사교육의 두 번째 일이다.
◎ 고주몽 동명성제
*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시작된다.‘조대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 임술 원년 한기 6958년(BC. 239년) 4월 초 여드렛날, 진시황 정의 8년에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서 추대되었고 곧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북부여의 시조다. 태양새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5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500여명이었는데 아침에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에 올랐다.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하고 도적이 없었다.
* 고리국의 왕(고구려후)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그 손자는 옥저후 고모수(일명 불리지)다. 모두 도적 위만의 토벌에 공을 세워 봉작을 받았다. 고모수가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나들이 나온 하백녀 유화부인을 만나 유혹하더니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강제로 자기 멋대로 하여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꾸짖고 구석방에 가두었다. 해부루(동부여 시조, 북부여 5세 선제 고두막의 동생,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동명왕의 강요에 못 이겨 가섭원으로 쫓겨가 한기 7111년 BC. 86년 동부여 세움)께서 이를 듣고 이상하게 여겨 수레에 태우고 궁전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었다. 유화부인은 한기 6998년(BC. 199년, 한 나라 왕 소제의 원봉 2년) 5월 5일에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으므로 고주몽이라고 했다. 동부여 3세 금와왕에게는 아들 7명이 있었는데 태자 대소가 고주몽이 인물이 출중하고 금와왕이 사랑함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유화부인이 이를 눈치 채어 일러주었으므로 고주몽은 덕으로 사귄 친구 마리, 오이, 협보와 함께 도망쳤다. 엄리대수(분릉수)에 이르러 깊은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인데 추격병이 쫓으니 어찌하란 말인가?’라고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무사히 건너고 곧 흩어지니 추격병을 모면했다. 이후 천하를 주유하다가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의 관직인 말지기를 얻었다. 왕이 아들이 없었음으로 주몽의 범상치 않음을 보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아 대통을 잇게 하여 즉위하였는데 그 때 나이 23세였다. 고구려의 시조로 1대 동명성왕(아들 장수왕이 붕어 뒤 추증)이다. 연호는 다물, 한기 7100년(BC. 97년) 등극하여 한기 7178년(BC. 19년)까지 78년 간 재위했다.
* 한단고기(임승국)의 고주몽 기록은‘북부여기 하편’6세 선제 고두막(동명왕, 조선족 장수 4명과 의병을 일으켜 위만의 우거성을 회복함, 고리국에서 일어나 북부여를 승계함) 임인 30년, 한기 7118년(BC. 79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릉에서 태어났다, 해설에서 고주몽은 고구려의 시조, 한기 7139년(BC. 58년)에 고구려를 세웠다, 고진(고구려후)의 손자인 옥저후 고모수(불리지)의 아들이다, 3국사기와 3국유사에는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 있다. 어머니는 하백(부족)녀 유화다, 본부인은 예씨(유리왕의 어머니)고 북부여로 남하하여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의 사위가 되었으며 북부여를 승계하였다. 고구려 건국에 공로가 큰 계루부족 군장 연타발의 공주 소서노를 부인으로 삼아 비류와 온조 형제를 두었다. 소서노는 유리왕자와 정권 다툼 때문에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고 고주몽으로부터 어라하(돌궐의 천자 칭호)의 책봉을 받는다.
◎ 국상國相 을파소
# 고구려 9대 고국천왕 13년 한기 7388년(AD. 191년), 외척인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가 권세를 남용하여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함이 하늘을 찔렀다. 왕은 국정을 쇄신키 위하여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미리 알고 모반을 일으켰다. 모반은 가까스로 평정하였으나 권문세가의 권력이 워낙 뿌리 깊어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 고구려 고국천왕 13년 한기 7388년(AD. 191년), 왕의 궁전
고국천왕 : 모반은 평정되었으나 반란으로 나라와 백성들이 안정되지 않아 국정이 크게 위 태로우니 4부(동서남북부)는 난국을 타개할 어진이를 천거하라!
대신 안류 : 서부 압록곡의 을파소를 추천하나이다. 2세 유리왕 때 국상 을소의 손자로써 능히 난국을 수습할만한 인걸인줄 압니다.
고국천왕 : 소문은 듣고 있노라. 그를 중외대부 벼슬을 내리고 작위로 우태를 삼노라.
대신 안류 : (왕 앞에 부복하여) 황공하오나 폐하, 을파소는 국정을 책임질 수 있어야 출사 할 것입니다. 재고하소서.
고국천왕 : (잠시 생각한 뒤) 짐이 가벼웠노라. 국상으로 격상하여 국왕에 버금가는 예로써 초빙하라.
대신 초초아 : (비양거리는 투로) 아니되옵니다, 마마. 을소의 손자라 하나 어찌 어제까지의 농사꾼을 국상 자리에 앉히려 하십니까. 우리 조정에 이다지도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대신 두모려 : (동조를 구하는 어조로) 불가합니다. 대신들 가운데서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 도 넘치옵니다. 한낱 백면서생을 국상의 자리에 앉힌다면 백성들이 웃을 것이옵고 귀족 과 관리들이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국천왕 : (불 같이 노하여) 교서를 내리라! 오늘 이후 짐이 임명한 을파소에 대하여 출신 을 왈가왈부하거나 국상의 명을 소홀히 하는 자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삭탈관직하고 중 벌을 면치 못하리라!
# 을파소는 국정의 혼란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정교를 밝히고 상벌을 엄격하게 했다. 한기 7391년(AD. 194년)에 진대법을 실시하여 3 - 7월에 호구의 차이에 따라 나라의 곡식을 빌려주고 10월에 갚았다. 또한 나이 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 이라고 하였다. 교화를 관장함을 ‘참전’ 이라 하였으니 무리들을 선택하여 계를 지키고 천신을 섬기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皁衣(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음)’ 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을 위하여 몸을 바친다. 일찍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신시이화의 세상은 백성들의 지혜가 열림에 따라서 날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만세에 걸쳐서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는 이유가 된다. 때문에 참전에 계가 있으니 신의 계시에 따라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제사)에 율이 있으니 하늘을 대신하여 공을 행한다. 모두가 스스로 마음을 써서 힘을 모아 뒤에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 ‘참전계경’ 은 선생이 일찍이 백운산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를 얻었으니 참전계경이라 한다. 하늘이 열렸을 때 위대한 분은 위에 계시사 인간의 360여 일을 주재하였다. 그 강령에 8조가 있으니 성, 신, 애, 제, 화, 복, 보, 응이라 한다. 성은 충심이 발하는 곳으로써 진실에서 나오는 정성을 관장하는 곳이라 6체과 47용이 있고, 신은 천리의 필합으로써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라 5단 35부가 있다. 애는 자비심의 자연으로 어짐의 본질이다. 6범과 43위가 있다. 제는 덕의 겸선으로써 도가 잘 미치는 것이라 4규 32모가 있다. 화는 악이 부르는 것이다. 6조 42목이 있다. 복은 착함으로 얻는 기쁨이다. 6문 45호가 있다. 보는 천신이 하는 것으로 악인에게 보하는데 있어서는 화로써 하고 선인에게 보하는데 있어서는 복으로써 한다. 6계와 30급이 있다. 응이란 악은 악보를 받고 선은 선보를 받음이라. 6과 39형이 있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없으나 척강(하늘에 올랐다 내렸다 함)하여 두루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 같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사람이 계를 받음이라. 신시이화의 세상은 8훈으로써 경經(씨줄)을 삼고, 5사를 위緯(날줄)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하였으니 참전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전계에 의해 더욱더 스스로에 힘쓸지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로 될까 보냐? 라고 말했다. 산상왕 때까지 2대에 걸쳐 국상을 역임하고 산상왕 7년 한기 7400년(AD. 203년) 가을 8월에 돌아가시니 온 나라 백성들이 통곡하였다.
평양 을밀대 천지화(무궁화) 온달산성 중국 동북, 서남, 서북
(을밀선인 건축) * Daum Blog 인용 하상주단대공정도
◎ 조의선인 을밀과 한국 무예 그리고 선기옥형의 해석
# 우리나라의 무예는 고조선의 천지화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은 손자병법과 18기 또는 24기예가 있고 일본은 사무라이 무사도가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국기로써 활을 드는데 동이족이란 말의 ‘이夷’ 는 큰 활을 뜻하며 ‘주몽이라는 말은 활을 잘 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고주몽은 일곱 살 때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이었다. 머리에 이고 가는 물동이를 백 보 뒤에서 활로 쏘아 구멍을 뚫고 곧 이어 솜을 두른 화살로 그 구멍을 다시 맞혀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으며, 이고 가는 사람도 물동이가 깨진 것을 몰랐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무기는 창이고 일본은 칼이다.
# 조의선인은 고조선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천지화랑의 후예다. 기와 덕과 예를 겸비한 소년들을 가려 천지화랑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이 외출할 때 머리에 천지화(무궁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 불렀다. 천지화는 수두(소도) 즉 신성한 구역에 심은 나라꽃이다. 천지화랑은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여 고구려의 조의선인으로 맥을 이었고 백제에서는 싸울아비(무절, 일본의 사무라이)가 되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이라고 하였다. 고조선 한웅천왕시대의 대재상 발귀리, 자부선인, 선군시대의 선군들과 부여의 대조영 그리고 고구려의 을파소, 명림답부, 연개소문과 그의 아들 남생이 선인이었는데 남생은 총명하여 9살에 선인이 되었다. 고대에서 근세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대부분이 조의 출신인 바 우리 전통문화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지니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온달 장군, 을지문덕, 양만춘도 조의의 후예다. 백제의 부여성충과 그의 동생 부여윤충, 계백과 신라의 김유신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성계를 비롯하여 무학대사, 정도전, 홍윤성, 조광조와 율곡, 퇴계, 저 유명한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 관상감에서 선기옥형을 제작한 송이영,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덕령 의병장들이 그 후예다. 근세에는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이 조의로써 승마와 사격에 뛰어났으며 김좌진 장군 또한 조의인 바 동서양 병법에 통달하였다. 청산리 전투에서는 격전 중에 살며시 물러나 빠지는 전략으로 양쪽에서 공격해오던 일본군이 저희들 끼리 싸워 많은 전사자를 냈다. 권율장군도 조의로써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흔히 문관으로 알고 있으나 검술에 뛰어나고 병법에 밝았으며 한기 8789년(1592년) 임진왜란 행주대첩 때 남원에서 1천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배고개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의 왜군 정예부대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진을 지휘하던 동복현감 황진이 격전 중에 전사하여 1진이 무너지자 2진에 있던 권율 장군이 벽력같이 호령을 하며 의기소침한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 때 장군은 물러서는 병사들의 벙거지에 칼끝으로 표시를 해두었다가 가차없이 처단했다.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지도력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 조의의 문하였다.
# 애초에는 조의선인을 ‘선뵈 또는 선배’ 라고 불렀는데 선배라는 말은 고구려의 10월 제천 행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다(선뵈)’ 는 데서 유래하였고 선인은 선배의 이두식 표기다. 사냥, 가무, 무예 등 여러 가지 경연에서 탁월한 사람을 선배로 불렀고 발탁된 이들은 나라에서 급료를 받고 무예와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전시에는 자치부대를 조직하여 정예군으로 싸웠다. 선배는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나라는 승군으로 착각하였다. 신라의 화랑은 원화라는 여성에서 비롯했다. 원화는 외모가 출중하고 가무와 학문에 뛰어난 여성을 가려 귀감으로 삼았는데, 뒤에 좋은 가문의 청년들 중에서 외모가 반듯하고 덕행이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았으므로 선배는 남성적이었다.
# 조의선인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것은 당나라 대군이 침략한 안시성 전투였다. 당 태종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하고 군세를 총집결하여 안시성을 맹렬히 공략하였다.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도 실패하자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려고 안시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던 중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이 허물어졌다. 위기에 직면한 고구려군 진영에서 결사대가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토산을 점령하여버렸다. ‘검은 옷을 입은 1백 명의 용사가 달려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내어 쫓고 토산을 차지해버렸다’ 라고 기록했는데 이 용사들이 조의선인이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이었고 그 우두머리는 연개소문이었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유년의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와 정신적 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교육을 통하여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육성하였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형성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판단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하였다.
# 고구려 제 22대 안장왕 때 조의선인으로 선발된 을밀(고구려 2대 유리왕 때 재상 을소의 후손, 고구려 10대 산상왕 때 재상 을파소는 을소의 손자, 평양의 을밀대는 을밀선인이 세움)의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여 명이 ‘참전의 계’ 를 익히고 ‘다물방지가’ 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은 ‘되물린다’ 는 뜻이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고주몽)의 연호인데 선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조의라는 말이 6대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진국사(발해사)에서 선인을 사정병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서는 선비는 싸움에 당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고 했다.
# 선배는 본래 신수두(소도, 천제 천신을 모신 대신단이 있는 가장 신성한 숲인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마니산 참성단이 이에 해당한다. 소도는 신수두의 대신단을 본받아 각 지방에 만든 신단으로써 마을의 당집과 당산나무 - 신목 즉 웅상은 그 유물이다.)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6대 태조왕 때 3월과 10월 대제에 사람을 모아 칼춤을 추고 활쏘기, 깨금질, 택견(일명 수박, 송도에서 창안되었는데 중국에서는 권법으로 전수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유도로 발전했다)과 얼음물에서 물싸움 등 격기와 가무를 연출하여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우열을 판정했다. 여기에 대수렵을 벌여 그 사냥물을 더하여 종합 승리자를 ‘선배’ 라 하고 국가에서 녹을 주어 양성했다. 온달 장군이 그 한 사례다. 선배가 되면 편대로 나뉘어 숙식을 함께하며 고전을 공부하고 학예를 익히고 산수를 유람하고 성곽을 쌓고 도로를 닦으며 군중에게 강습을 하기도 하는데 오로지 일신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선배들 가운데서 학문과 기예가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 스승으로 섬기며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고, 일반 선배는 머리를 깍고 조백을 허리에 둘렀다. 스승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를 신크마리(두대형, 태대형)라 일컫고 그 다음을 마리(대형), 맨 아래는 소형이라고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어 참전하되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고구려의 직위는 골품제로써 미천한 사람은 높은 지위에 오를 수가 없었으나 오직 선배는 귀천이 없고, 학문과 기예의 높고 낮음으로 지위를 얻었으므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을지문덕 장군 을지문덕장군상 연개소문 장군 중국 뤄양(낙양)
살수대첩도 * Daum Blog 인용 당 태종 전쟁도 연개소문 가묘家廟
◎ 을지문덕
# 고구려 26대 영양왕 때 평양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입산수도하다가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3월 16일이면 마리산에서 공물하며 경배하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자치통감에는 위지문덕으로 적었다. 3국사기 을지문덕전에서는 그의 가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명장전에서는 평양 석다산 사람이다라고 했다. 영양왕 홍무 23년 한기 7809년(AD. 612년) 수나라 양제가 군사 130만 명을 동원하여 대규모 침공을 했는데 우중문, 우문술을 지휘부로 별동대를 조직하여 해군과 함께 30만 5천명의 군세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을지문덕 장군은 패주하는 척 하면서 침략군을 평양성 가까이 진격하게 하여 지치게 만든 다음 전의를 잃고 후퇴의 구실을 찾는 수나라의 진영을 찾아 항복하는 체 하면서 군세를 파악하였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며 묘한 꾀는 지리를 꿰뚫는구나. 싸움 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줄 알아서 그만둠이 어떠리’ 란 시를 우중문에게 보낸 건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이야기다. 수양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퇴각작전과 회유책을 쓰면서 침략군을 유인해놓고 살수(청천강)를 건너는 침략군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전멸시킴으로써 불과 2700여명만 살아서 돌아갔다. 살수의 물길을 쇠가죽으로 막았다가 패잔병들이 강을 건너자 일시에 터 수장시킨 전법과 국지전(게릴라전)으로 대군을 괴롭힌 고사작전은 동서고금의 전범이 되었다. 이 싸움의 주력부대가 조의 3만이다. 살수대첩의 패배로 수나라는 국운이 기울어 패망했다. 을지문덕 장군은 승승장구하여 현도로부터 태원(산서성 성청 소재지) 또 다른 쪽은 낙랑으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정복한 건안, 건창, 백암, 창려는 안시성에 편입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는 여기성에 편입했다.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성에 편입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성에 편입했다. 이로써 강병이 백만이 되었으므로 군세는 더욱 커지고 국토는 동북아를 아우렀다. 문충공 조준(고려시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살수의 백상루에 올라 축배하고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푸르고 허하고나
수나라 병사 백만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 때 얘기 듣나니
장부의 한 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여수장우중문시與隨將于仲文詩
*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詩
신묘한 전략은 하늘을 꿰뚫었고(신책구천문神策究天文)
그 지략은 땅에 통했다(묘산궁지리妙算窮地理)
싸워서 이갸 그 공이 높으니(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
이제 그만 만족함을 알아 물러감이 어떤고(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2부 열국시대列國時代
8화 백제百濟 문화제국文化帝國
백제제국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초기 4국 강역도
전성기 강역도 3국사기 천문현상 추적 (고구려, 백제, 신라, 당)
중국 안의 3국 추정도 * Daum Blog 인용
◎ 백제 역사연대표
* 우태(구태, 비류)백제
1대 우태 - 5대 여영(연대, 역사 기록 없음)
역대 | 왕명 | 역사 개요 |
1대 | 우태 | 기록 없음 |
2대 | 기록 없음 | |
3대 | 여구 | |
4대 | 여휘 | |
5대 | 여영 |
* 온조백제
1대 온조 한기 7179년(BC. 18년) - 31대 의자왕 한기 7857년(AD. 660년),
31대 678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온조 | BC.18-AD.29 | 위례성 건국, 한산 천도, 마한 병합 |
2대 | 다루 | AD. 29 - 77 | 농사 장려, 말갈 격퇴, 낙랑군 멸망 |
3대 | 기루 | 77 - 128 | 다루왕 장자 |
4대 | 개루 | 128 - 166 | 북한산성 축성 |
5대 | 초고 | 166 - 214 | 신라 침략, 적현성 ․ 사도성 축조 |
6대 | 구수 | 214 - 234 | 가뭄과 홍수 대비 둑 축조 농사 장려 |
7대 | 사반 | 234 | 나이 어려 폐위 |
8대 | 고이 | 234 - 286 | 관제 제정, 중앙집권 강화 국가 기반 |
9대 | 책계 | 286 - 298 | 고이왕자 |
10대 | 분서 | 298 - 304 | 낙랑군 서현 점령, 낙랑 자객 피살 |
11대 | 비류 | 304 - 344 | 민심 파악 선정 |
12대 | 설 | 344 - 346 | 분서왕 장자 |
13대 | 근초고 | 346 - 375 | 마한 ․ 대방 병합 평양 점령, 사기 편찬 |
14대 | 근구수 | 375 - 384 | 일본 국교 문물 보급 공헌 |
15대 | 침류 | 384 - 385 | 불법 시행, 한산 절 창건 |
16대 | 진사 | 385 - 392 | 한강 이북 수복 광개토왕과 전쟁 병사 |
17대 | 아신 | 392 - 405 | 고구려 정쟁 패함, 일본 국교 태자 볼모 |
18대 | 전지 | 405 - 420 | 아신왕의 아들 |
19대 | 구이신 | 420 - 427 | 전지왕 장자 |
20대 | 비유 | 427 - 454 | 송나라․신라 화친 |
21대 | 개로 | 454 - 475 | 고구려 장수왕 피습 피살 |
22대 | 문주 | 475 - 477 | 웅진(공주) 천도, 병관좌평 해구가 살해 |
23대 | 삼근 | 477 - 479 | 해구를 진로에게 토평케 함 |
24대 | 동성 | 479 - 501 | 신라 혼인 동맹, 고구려 전쟁 |
25대 | 무령 | 501 - 523 | 국정 안정, 쌍현성 축조 외침 대비 |
26대 | 성 | 523 - 554 | 사비 천도 국호 남부여, 신라 공격 전사 |
27대 | 위덕 | 554 - 598 | 중국 화친, 고구려 대비, 신라 공격 |
28대 | 혜 | 598 - 599 | 위덕왕 아들 |
29대 | 법 | 599 - 600 | 불교 신봉 살생 금지, 왕흥사 창건 |
30대 | 무 | 600 - 641 | 당나라 화친, 일본에 불교․문물 전파 |
31대 | 의자 | 641 - 660 | 신라 공격 영토 확장, 당나라 압송 병사 |
* 고주몽은 재위 때 일찍이 말하기를‘만약 적자嫡子(큰아들, 장자長子)인 유리(고주몽이 방랑하던 시절 혼인한 예씨부인禮氏婦人에게서 난 아들, 주몽이 떠난 뒤 예씨부인은 유리가 장성할 때까지 출생의 비밀을 말하지 않다가 주몽이 떠날 때 남긴 반半 조각 칼 징표를 주며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 하고 고구려로 주몽을 찾아가도록 함)가 오거든 마땅히 봉封하여 태자太子(다음 임금 계승 왕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 고주몽의 두 번째 부인, 계루부족장 연타발의 공주, 고주몽과 혼인하기 전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 온조를 낳았음)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己卯년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 ․ 번番(진번, 요녕성 해안가)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여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莊園을 두고 부富를 쌓아 몇 만금萬金(큰 부자富者)이러니 원근遠近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者들이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산해관 남쪽)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半 1000리里(500리, 250Km)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帝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돌궐의 천자天子 칭호稱號, 여왕)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壬寅 한기 7178년(BC.19년)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馬黎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臣 등等이 듣기로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될 때입니다.’ 라고 했다. 온조가‘좋다’고 승낙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만에 한산漢山에 이르러서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烏干 등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생각컨대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 곳은 천험의 지리地利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으로 정할만한 곳입니다. 여기 보다 더 다른 곳을 찾지마시옵소서.’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마침내 하남의 위지성慰支城(하남 위례성尉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十濟라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십제가 융성했을 때 백 사람이 건너왔다는 뜻의 뒤에 지은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왔다. (임승국의 한단고기)
◎ 우태(벼슬 이름, 혹은 구태)백제와 온조백제, 백제의 건국과 웅대한 강역
* 3국사기(김부식)와 3국유사(일연)에서는 백제 건국역사를 두 나라로 기록한다. 우태(비류)백제와 온조백제다. 그런데 건국시조에 대하여 3국사기와 3국유사 그리고 중국, 일본사서의 기록이 다르다. 그 하나가 정설로 이어오는 주몽 시조설인데, 비류와 온조가 망명 남하하여 비류는 만주지방에 우태백제를 건국하고 온조는 한강지역에 온조백제를 건국했다는 기록이다. 비류와 온조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 계루부 지방호족 연타발의 공주 소서노와 우태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우태가 죽고 과부가 되었던 소서노와 주몽이 혼인동맹을 하여 의부가 되었다. 그러나 동부여에서 유랑할 때 혼인한 본부인 예씨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유리를 태자로 삼았기 때문에 왕통에 따른 정변의 조짐이 일어나 소서노는 정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고 유리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망명하였다고 한다. 그 둘째 시조설은 이 기록대로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후손이라면 망명을 하였다 하더라도 나라를 세우고는 당연히 성을 ‘고’ 씨로 써야하나 백제의 왕들은 한결같이 성을 ‘부여’ 씨로 썼다.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 고 밝히고 있고, 중국사서들 또한 백제가 부여계 우태(구태)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시대에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요 장수였던 고진은 변경을 노략질하는 위만의 잔당을 평정한 공로로 고구려후가 되었는데 주몽의 증조부다. 고진의 손자가 옥저후 고모수(불리지)며 하백녀 유화부인과 사이에서 고주몽이 태어났다. (해모수, 고진, 고모수, 고주몽의 성씨를 해씨, 고씨, 부여씨로 가르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음) 3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는 성왕 16년, 한기 7735년(AD. 538년)에 도읍을 웅진(공주지방)에서 사비(부여지방)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 로 바꾸었다. 백제왕들은 즉위를 하면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동명묘(여기서는 북부여 시조 해모수, 동명왕이라는 칭호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뜻이며 해모수 외에 북부여 고두막왕, 고주몽이 동명왕의 칭호를 사용했음)에 제사를 지냈다. 만주지역의 비류백제는 중국 동북부의 세력이 강한 전연의 압박과 동쪽 고구려의 복속정책으로 국가 존망이 위태로워지자 남하하여 한 뿌리였던 온조백제와 통합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중흥을 이뤄 13대 근초고왕 한기 7543년(AD. 346년)을 기점으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세력을 떨쳤다.
* 만주지역 비류백제의 한강 정착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는데 서울의 석촌동 백제고분의 기단식 적석총은 북방민족의 묘제로써 한강지역 고유의 묘제와는 판이한 양식이다. 이러한 북방식 묘제가 4세기 후반 한강지역에 느닷없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비류백제의 남하를 고증한다. 또 이때부터 백제는 북방 유목국가의 직제인 좌우현왕제를 도입하고 북방민족 돌궐의 천자 칭호 어라하, 건길지 같은 왕호를 사용했다. 비류백제가 남하한 4세기 중반 이후 만주지역 (우태)백제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는 것도 이를 뒷바침한다. 또 백제는 담로제를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시행하였는데 담로제는 왕족이나 귀족을 분봉왕으로 임명하여 지방을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군주제로써 유목국가의 정치제도다.
* 대한에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한 백제는 대한의 서남부 해안을 장악하고 중국대륙의 동남부와 일본의 동남부에 강력한 통치권을 형성한다. 수서에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함께 살고 중국인들도 섞여있다’ 라고 기록하여 백제인들의 해외무역이 왕성하였음을 입증한다. 아울러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부남(캄보디아)의 재물과 노비 2명을 왜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백제의 사인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 무역을 시도한 곤륜(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의 통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한기 7751년(AD.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 ‘탑등(Tapen)’ 이라는 물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양모로 짠 페르시아 직물로 백제의 해외무역이 동남아시아를 재패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백제의 해외 외교활동을 보여주는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된 ‘양직공도’ 는 남북조시대 한족이 세운 남조의 하나인 양나라(AD. 502년 - 556년) 원제(AD. 552년 - 554년) 재위 때 조공사신의 모습을 태수 소역(AD. 505년 - 554년)이 그린 궁중행사그림이다. 백제 성왕(AD. 523년 - 554년) 때인데 사신들 옆에 7행 160자로 기록한 설명문에 백제의 22담로제와 반파(고령가야), 탁(창원), 다라(합천), 전라(경산), 신라, 지미, 마련, 상사문(전북 임실), 하침라(전남 강진)의 백제속국 9개국의 이름을 열거하여 진 나라 말기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고, 백제가 요서지방과 진평을 차지했다고 해설하였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양직공도 보다 100년 뒤인 7세기 초 당 태종 재위 때 궁중행사에 참석한 3국(고구려, 백제, 신라)과 왜, 파사(페르시아) 등 중국 주변 32국의 사신도를 당시 화가 염립본이 비단에 그린 왕회도에도 같은 복색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 송서 백제조에 ‘백제국은 본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천여 리(500Km)에 있다’ 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건광 원년조에 ‘가을에 궁(왕자나 장군 추정)이 마한(백제)과 예맥(만주지역)의 군사 수 천기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백제를 대한 강역에 한정하는 대한사처럼 만약 여기에 나오는 백제가 대한의 백제라면 대한의 백제는 북방 경계에 고구려가 있는데 고구려 북쪽의 예맥과 어떻게 연합군을 편성할 수 있었겠는가? 또 송서는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였는데 진평군 진평현이다’ 라고 기록했으며 양서에서는 ‘백제는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여 백제군을 두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송서와 양서 백제전에 ‘백제는 뒤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 나라(한기 7462년, AD. 265 - 316)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 역시 진평, 요서의 2군을 점거, 소유했다’ 고 기록하였다.
* 남제서에는 백제의 중국 안 식민지 명칭과 통치자의 관직명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는데 중요한 7군은 중국 동북쪽 고구려 경계와 만리장성으로부터 양자강까지 북방에서부터 차례로 대방군, 낙랑군, 광양군, 조선성, 청주군, 성양군, 광능군이다. 또한 남제서 권 58의 백제전에는 북위의 군대와 백제의 전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북위는 양자강 이북의 중국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북부의 고구려와 접경한 나라다. 대한의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하려면 고구려를 건너뛰어야 함으로 백제는 양자강지역과 요동에 있어야 한다. 3국사기에는 동성왕(백제 24대 왕, AD. 479년 - 501년) 10년에 북위가 침범했으나 백제군에게 패퇴하였다고 하였으며, 자치통감에서도 영명 6년(AD. 488년)에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말 최치원이 상대사시중장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병사가 100만 명이나 되어 오월(중국의 오나라 월나라)을 침략하여 복속하였다고 적었다. 신당서,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중국의 월나라, 주나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 고구려왕들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왕위 계승을 하였을 때는 반드시 동명묘(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설치된 만주의 한인지방까지 먼 길을 가서 참배하였다. 백제도 동명사당을 지어 왕위 계승을 고지하고 참배하였다. 한기 7924년(AD. 727년)에 대진국(발해)의 무왕이 왜에 보낸 외교문서에 ‘대진국은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역사와 문화, 풍습)을 가지고 있다’ 고 했다.
*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백제의 근구수왕이 한기 7572년(AD.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는 단 한 번 침략하였으나 바다를 건너 중국대륙을 여러 번 공략하여 선비 모용씨의 연나라와 부씨의 진나라를 정벌하고 지금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성을 식민지로 삼았다고 했다. 정약용도 백제가 3국(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라고 했다.
* 4세기 이후 중국대륙은 남조와 북조로 나뉘는데 백제가 남조에 파견한 사신들의 직명이 서하태수(산서성 분양현), 광양태수(북경 서남), 조선태수(하북성 노룡현), 광릉태수(강소성 양주시), 청하태수(하북성 청하현), 대방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하남성 비양현)으로 중국 동남부지역을 대표한다.
* 백제 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흑치상치(AD. 630년 - 639년)는 백제의 장군이며 신흥귀족인데, 1929년 10월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된 허난성 낙양 북망산의 묘에서 흑치상치의 묘석이 발굴되었다. 1960년 대만학자들의 해석 결과 흑치씨는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는 본래 동남아시아지역의 여러 섬을 가리키며 대표적인 섬들이 필립핀이라고 밝혔다. 백제가 필립핀에 해상 실크로드의 거점을 형성하고 부여씨의 귀족에게 흑치씨를 하사하여 필립핀의 분봉왕으로 임명했다는 해석이다. 이는 자치통감의 백제기록을 입증한 사료인바 이병도 등 일제식민사학자들과 일본학자들은 자치통감에서 백제가 요동을 다스렸다는 기록을 고구려의 오기일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1920년 숭산 부근 낙양의 북망산에서 묘지석이 출토되었는데 묘지의 주인공이 백제 의자왕의 왕자 부여융이었다. 부여 융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자 흑치상치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사람얼굴기와 반가사유부처상 봉래산향로 구리거울
* Daum Blog 인용
* 부여성충의 뛰어난 전략과 백제의 영토 개척(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저, 박기봉 역)
부여성충은 백제의 왕족으로써 어릴 때부터 지모가 뛰어났다. 일찍이 예濊가 처들어오자 주위 사람들을 모아 산성에서 지켰는데 예의 장수가 사자를 보내
‘여러분들의 나라를 위한 충절을 흠모하여 사소한 음식을 보낸다’
하고는 궤짝 하나를 보내왔다. 주위의 사람들이 궤를 열어보자고 하였으나 성충은 한 마디로 거절하고 불태웠다. 궤 안에는 벌과 땅벌이 있었다. 다음에 또 장수가 궤를 또 보내왔다. 산성 사람들이 불태우자고 하였는데, 성충이 열어보았더니 화약과 염초가 들어 있었다.
세 번째로 궤를 보내왔는데 성충이 이를 톱으로 켰더니 칼을 품은 병사가 들어 있었다. 이 때가 한기 7842년(AD. 645년) 무왕이 죽고 의자왕이 즉위한 해였는데 왕이 이를 듣고 성충을 불렀다.
‘짐이 부덕하면서 대위를 이어 무거운 짐을 감당하지 못할까 하던중, 신라와 백제가 철천 지원수가 되어 이는 짐이 더욱 염려하는 바다. 옛적에 월왕 구천이 범려를 얻어 10년 간 생취(인구를 늘리고 재물을 쌓아)하고 10년 간 교육하여 오를 멸망시켰으니 군이 범려가 되어 짐을 도와서 구천으로 만들어줌이 어떤가?’
성충이 말했다.
‘구천은, 오왕 부차가 교만하고 오만하여 월에 대한 염려를 잊고 있었기 때문에 20년 간 생취하고 교육하여 오를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 는 신라의 침입이 그칠 날이 없으므로 전쟁의 승패가 순간에 달려있고 국가의 흥망이 조석 간에 결판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한가하게 20년 간 생취하고 교육할 틈이 있 겠습니까? 그런데 고구려는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반역의 뜻을 품고 있으므로 멀지 않아 내란이 있을 터인즉 한참 동안은 나라 밖을 경영 못할 것이니 아직 우리가 근심할 바가 못 됩니다. 그러나 신라는 본래 소국으로써 진흥왕 이래 갑자기 강국이 되어 우리나라와 원수 가 되었고 근래에 와서는 더욱 심합니다. 신라의 내성사신 김용춘이 선대왕과 혈전을 벌이 다가 죽었고 그 아들 김춘추가 늘 우리나라 틈을 엿보았으나 다만 선대왕의 영무하심이 두 려워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이제 선대왕께서 돌아가셨으므로 저들은 대왕을 군사에 밝지 못한 소년으로 판단하여 틀림없이, 또 국상을 기회로 머지않아 쳐들어올 것이니 이에 대한 반격을 미리 구상해야 할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신라가 쳐들어오면 어디로 들어오겠는가?’
성충이 대답하여 말했다.
‘선대왕께서 선열성(청풍) 이서以西, 가잠성(괴산) 이동以東을 차지하자 신라가 이를 원통 하게 여긴지 오래니 반드시 가잠성을 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가잠성 수비를 더 늘리는 게 어떤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가잠성주 계백은 지모와 용맹을 겸비하여 비록 신라가 전국의 병사를 다 모아 오더라도 쉽게 빼앗지 못할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신라가 정예병으로 가잠성을 공격 하면 우리는 가잠성을 구한다는 소문을 내고 다른 곳은 공격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왕이 물었다.
‘어느 곳이 좋겠느냐?’
성충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대야주(합천, 대량, 하래) 도독 김품석이 김춘추의 사위됨을 믿고 부하와 성민을 학대하며 사치를 일삼아서 원망이 가득함으로 또한 우리가 국산 중임으로 수비가 허술할 것입니다. 대야성이 위태롭더라도 가잠성의 병사를 돌리지 못할 것이므로 대야성을 빼앗고 승세를 타 나아간다면 쉽게 신라를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성충을 상좌평에 임명하였다.
한기 7939년(AD. 642년) 3월에 신라가 김유신장군으로 정예병 3만명을 거느려 가잠성을 공격하자 계백이 성을 의지하여 응전하여 여러 달 동안에 신라가 많은 손실을 입었다.
7월에 의자왕이 정예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가잠성을 구한다고 소문내고 대야성의 미후성을 포위하였다. 대야주는 관할하는 성이 40여 개였다. 김춘추는 대야주에 속한 고타현을 딸 소낭에게 식읍으로 주고 김품석과 혼인하여 대야 도독으로 삼아 성주로 임명하여 40여 성을 총괄하였다. 김품석은 김춘추의 권세를 믿고 포악한 행세를 했는데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막료 김일이 백제군과 내통하였다. 의자왕이 부여윤충(성충의 아우)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공격하였는데 김일이 창고에 불을 질러 군량을 불태워버렸으므로 민심이 흉흉하여 싸울 뜻이 없었으므로 품석이 막료 서천으로 화의를 청했다.
‘우리 부처가 살 길을 터주면 성을 내주겠다.’
윤충이 부하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저희가 살기 위하여 백성을 버린 장수에게 어찌 살려주겠는가 했으나 간계를 써서 회유하고, 복병으로 모두 격살하였다. 의자왕이 공을 세운 장졸을 상찬하고 백성을 위무하니 본레 임나가야에 속했던 백성들이 귀속을 환영했다.
의자왕이 대야주 40여 성을 함락한지 얼마 뒤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고 고구려 전권을 잡았다. 의자왕이 성충에게 물었다.
‘연개소문이 신하로써 그 왕을 살해하였는데도 고구려 전국이 다 복종하고 그 죄를 묻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고구려가 여러 번 중국과 싸움에 진지 수백 년 만에 근세에는 강대하여 그 세력이 요동 요서에까지 미치고 해상까지 장악했으며, 영양왕 때는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으므로 국위가 크게 향상되었는데도, 영류왕(고건무)은 중국과 화친하고자 하였으므로 연개소문 의 북진정책은 뜻을 이루기 어려웠다. 그래서 백성들의 환영을 얻은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우면 어느 나라가 이기겠는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당나라가 비록 토지가 넓고 백성들도 고구려 보다 많으나, 연개소문의 병법전략은 이세민 이 따라올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승리는 고구려에게 있을 것입니다.’
의자왕이 물었다.
‘이세민은 네 나라의 군웅을 토벌하여 통일 황제가 되었고, 연개소문은 전쟁 경험이 일천 한데 어찌 이세민 보다 전략이 낫다고 하는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신이 일찍이 고구려에서 연씨가의 귀 소년 연개소문을 만나 본 바 생김새가 장대하고, 의 기가 호방하여 담론하다가 병법을 문답한 적이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벼슬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하루 아침에 수백명의 대신과 호족들을 죽이고, 패수(대동강)전투에서 수나라 수군을 대파한 용장 건무왕을 쳐 대권을 잡았으니 이는 이 세민이 따라올 수 없는 일입니다.’
왕이 물었다.
‘고구려가 당을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연개소문이 10년 전에 대권을 잡았다면, 그가 주장한대로 혼란기 의 당은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벌써 20년 전에 통일을 이루었고, 치국 의 수완도 정밀하여 만약 이기더라도 백성들이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아직 국내의 기반도 튼튼치 못합니다. 흥망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왕이 말했다.
‘대야성을 토평했으나 신라를 복속하지 못했는데 고구려나 당이 서로 싸워 누가 이기든지 남침을 해올 것인데 북쪽과 동쪽의 신라를 견제할 수 있겠는가?’
성충이 대답하였다.
‘고구려와 당은 서로 대립할 것인데 그러자면 백제와 신라가 화친하여야 남쪽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점을 연개소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 어느 한 나라와 화친을 하고 백제와 신라가 견제하는 전략을 세우고서야 당을 칠 수 있을 것입니 다. 신라는 백제의 적수가 되지 못하므로 유리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입니다.’
성충이 고구려와 동맹조약이 성사되어 가는 판에 결정이 늦어지고 있었는데 신라의 사신 김춘추가 훼방을 놓아서였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신라가 동맹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다음에 당을 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신라와 백제는 견제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보고 오직 당을 치려는 원대한 계획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김춘추에게
‘구원(대야성의 함락 때 전사한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낭)을 모두 잊고 세 나라가 연합 하여 당을 치면 당은 정권쟁탈의 혼란기이고 야만인이기에 오히려 쉽다.’
고 종용했다. 그 때 성충이 글로써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중국이 고구려를 칠 때면 매 번 군량의 운반을 수로로 하였는데 이의 실패로 패전하였습 니다. 수나라가 그 거울입니다. 이제 고구려가 백제를 경원하여 백제가 당과 연합하면 당은 육로로 침략하고 바다로 군사와 군량을 지원하여 백제에 주둔하면서 남으로부터 고 구려를 협공할 것이니 견디기 어렵습니다. 신라는 동해이므로 당과 수운의 편리가 백제만 못할뿐더러 신라가 일찍이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치다가 백제를 속이고 죽령 밖 고현 안 쪽 10개 군을 점령하여 배반하였던 일은 공께서도 아시는 바 지금 신라가 동맹을 맺을지라도 언제 배반하여 돌아설지는 가늠키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은 성충의 전략을 듣고는 김춘추를 연금해버렸다. 김춘추는 귀토설화의 고사를 들어 거짓으로 고구려왕에게 글을 올렸다.
‘욱리하 일대의 땅을 고구려에 바치겠습니다.’
그런 다음, 선도해에게 뇌물을 써서 도망쳤다. 마침 김유신이 김춘추를 구하려고 병력을 동원하였기에 고구려 병사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곧 왜로 건너가 지원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왜의 국내 사정이 복잡하여 실패하고, 이어 당 나라로 건너가서 두 아들, 법민과 인문을 인질로 맡기고 지원을 얻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고, 이어 고구려를 쳤다.
몽촌토성 고구려 홀한성 송산리고분떼 부소산성터
(소서노와 고구려 건국 발원지) * Daum Blog 인용
* 동서전쟁同婿戰爭
한기 7800년(AD. 6세기) 후반. 백제 위덕왕의 증손자 서동은 매우 준수하여 3국에 이름이 알려졌고, 신라 진평왕의 둘째 공주 선화 또한 미색으로 이름이 났다. 진평왕은 따만 셋이었는데 매양
‘신라의 왕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선화의 아비 된 것이 자랑이다.’고 말했다.
백제의 위덕왕도 선화의 소식을 듣고 탐냈으며 왕자 서동 또한 선화를 한 번 보고자 하였다. 두 나라 왕의 바램이 이렇다면 혼사가 가능했겠지만 신라는 누대로 박, 석, 김 세 성이 혼인하여 아들이나 사위에서 연장자로 왕위를 물려왔기 때문에 세 성받이의 딸들은 다른 성씨로 출가를 할 수 없었다.(신라 소지왕이 백제의 동성대왕에게 딸을 주었다 하고, 법흥왕이 밈나가라의 가실왕에게 누이를 시집 보냈다고 하지만 사실은 친딸이나 친누이가 아니라 6부 귀골의 여자였다.) 백제는 왕가의 혼인에 신라처럼 엄격한 규제가 없었는데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을 죽인 자가 진평왕의 아버지 진흥대왕이고 진흥대왕은 성왕의 사위였다. 이 때문에 서동왕자의 여자는 목씨, 국씨 등 백제 8대성의 여자거나 다른 민간 성씨녀가 될지언정 전대의 원수인 진흥대왕의 공주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번 선화공주를 흠모하게 된 서동은 백제궁을 몰래 탈출하여 신라 땅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 행세를 하며 신라 왕가가 출입하는 절의 큰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서동이 법연을 기회로 선화와 만나자 두 사람은 천생배필天生配匹로써 눈이 맞았다. 그러나 혼인이 어렵다는 것을 서로 아는지라 노래를 지어 널리 유포시켰는데 설화자료가 약간씩 차이가 있다.
선화공주님은/ 남그스기 얼어두고/ 맛동방을/ 밤에 몰 안고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숨겨둔 서동 서방님을 밤이면 안고 가다. 3국유사 무왕편, 4구 체 향가)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본래는 왼(온)통이었지만/ 반쪽은 떼어서 서동에 게 주고/ 반쪽은 남기어 자기가 가졌으나/ 상사병에 앓고 있네/ 서동아 어서 오소서/ 어서 오소서/ 염통을 도로 주시어/ 선화공주님을 살리소서.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저, 박기봉 역)
* 서동(맛동)은 훗날 백제 무왕이다. 총각시절 마(산 감자)를 캐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신라의 선화공주를 탐내 서라벌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마(맛동과 마를 연관시켜 해석한 것은 오류)를 주고 노래를 지어 은근히 전파시켰다. 차츰 노래가 퍼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은 공주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공주는 억울할 뿐. 공주의 해명을 듣지 못한 왕이 노래가 사실인 것으로 오해하여 공주를 내쫓자 서동은 이를 구해 아내로 삼았다.
(2009년, 분묘 발굴에서 묘지가 발굴되었는데 선화공주가 백제 귀족의 며느리임이 밝혀짐, 서동요는 백제 멸방 뒤 백제 유민들의 전설로 인식함)
* 노래가 널리 퍼지자 선화공주는 진평왕에게 자백하였고 서동은 백제로 돌아가 증조부 위덕왕에게 사실을 말하여 죽기로 간청하니 결혼을 허락하여 양 왕실이 사돈을 맺었다.
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몇 해, 신라에는 왕위 계승을 할 왕자가 없었다. 진평왕은 딸만 셋이었는데 첫째 공주는 출가하였으니 둘째 선화공주의 남편 무왕이 왕위 계승권자였다. 이 때 백제는 부여, 진眞, 국國, 해解, 연燕, 목木, 백苩, 협劦의 8대가가 있었으나 부여씨가 정권을 장악하였고, 신라는 박朴, 석昔, 김씨가 있었으나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였다. 진평왕과 위덕왕은 백제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계승하는 일을 잠정적으로 승인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 진평왕의 셋째 공주 문명의 남편 김용춘이었다. 순리대로라면 자기에게로 와야할 왕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용춘은 진평왕을 설득하여 첫째 공주로써 출가 여승이었던 덕만을 선덕여왕으로 세우고 자기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백제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니 김용춘은 내성사신과 대장군을 겸하여 동서지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백제계 칸무천황 사쓰시마 심수관가 일본문화전파도 백화정과 고란사
초대 심당길 도예 * Daum Blog 인용
* 백제는 대한 서남부의 곡창지대 그리고 황해와 중국해의 해상교통요지를 차지하여 중국 동남부와 일본 서남부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강역을 해외거점으로 확보함으로써 강대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 동북부와 시베리아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와 영토전쟁을 벌인 막강한 군사대국이었으며, 한편 활발한 해외영토 개척과 무역을 통해 받아들인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백제 특성의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킨 찬란한 문화제국이었다. 이로써 백제문화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그러나 강대하고 찬란한 제국으로써는 의심스러울 만큼 싸움다운 싸움이나 저항도 없이 멸망하였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라 하더라도 계백의 황산벌전투 외에 이렇다 할 전쟁 기록이나 저항이 보이지 않는다. 멸망 뒤 부흥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라통일이 된 뒤 사적이 철저하게 말살되고 소멸되었으며 백제역사연구에 대한 역사학계의 의지가 미흡하여 묻혀진 왕국으로 전설처럼 남아있다가 요즘에야 진보적 역사학자들이 중국과 일본의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백제문화를 조명하고 있어 기대됨
* 사쓰시마의 심수관가沈壽官家 도예陶藝는 일본에서는 말 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 도예와 함께 세계 도예의 양대 도예맥陶藝脈을 대표한다. 한기 8795년(AD. 1598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전투의 패전으로 사쓰마의 번주藩主 시마스 요시히로에게 잡혀간 심수관가 초대初代 심당길沈當吉이 세운 도예다. 400년 전통을 이어온 심수관가는 현재 15대며 대대로 선군신을 모셔왔는데 메이지유신 뒤 백제의 전통을 단절시키려는 일본정부의 폐쇄 조치로 제사가 끊어졌으며 심수관가는 한국명예총영사관임
◎ 백제왕국의 흥망성쇄, 700년 유구한 역사
* 한성 도읍시대 (한기 7179년 - 7672년, 1대 온조왕 BC. 18년 - 21대 개로왕 AD. 475 년), 21대 493년 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패망한 백제의 역사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소멸되었는데 1916년 일제식민지시대 몽촌토성(일명 남성 또는 고려사의 고원성)이 발굴되었고 이어 풍납토성(북성)이 발굴되어 한성백제의 궁성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들어났다. 몽촌성과 풍납성은 반경 8km 안에 불암산성, 광장리산성, 이성산성, 삼성리산성 등 6성이 연계되어 궁성 방위의 체제를 간파할 수 있으며 웅위한 한강백제의 국력을 가늠할 수 있다. 고이왕(AD. 234년 - 286년) 때에 6좌평과 16관등의 직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었고 귀족연합이 국정을 책임졌다. 이어 걸출한 군주인 근초고왕(AD. 346년 - 375년)이 백제의 영토를 확장하여 백제 최대전성기를 이루었다. 개로왕(AD. 455년 - 475년)은 친위정변을 일으켜 귀족연합의 정치제도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도모하여 강력한 군주제를 시행하였다. 왕권 강화를 위해 개로왕은 한강의 큰 돌로 부왕 비유왕의 무덤을 웅장하게 증축하고 국고를 기우려 화려한 궁궐과 누각도 신축했다. 이 때 세습귀족 세력인 재증걸누, 고이만년은 왕권 강화에 반발하였으므로 거세하려고 하였는데 미리 알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개로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돌려주기를 청했으나 고구려는 거절했다. 이로 써 두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가 무너지고 전쟁으로 비화하였는데 배신한 두 신하가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한강 부근 전쟁터에서 개로왕과 맞섰다. 그러나 전황이 백제군에 불리하여 개로왕은 적군에게 포위되고 탈출할 길이 막히자 개로왕이 두 옛 신하에게 무릎을 꿇고 정리를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빌었으나 무참히 살해되었다. 개로왕이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준비없이 갑자기 웅진(공주)으로 천도를 한다. 한성시대의 백제문화는 가장 전성기였으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불타고 파괴되었으며 이후 의도적으로 훼손되어 사적이 남아있지 않다.
* 웅진 도읍시대 (한기 7672년 - 7735년, 22대 문주왕 AD. 475 - 26대 성왕 AD. 538년), 5대 63년 간
웅진은 개로왕의 전사로 급히 천도하였으므로 도읍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으나 차령정간(산맥)과 금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남쪽으로는 호남평야가 곡창을 이루어 물산이 풍부하고 서남해는 해외무역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백제부흥의 기반을 이루었다. 24대 동성왕(AD. 479년 - 501년)은 중국과 외교를 성공적으로 성사시켰고 무령왕(AD. 501-523)은 담로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1927년 발굴한 송산리 고분군과 1971년 발굴한 무령왕릉은 전축분(전 즉 벽돌을 구워서 쌓은 묘, 중국식 묘제, 북방은 석축묘며 남방은 토분임)인데 중국 남북조시대 강남지역 묘제와 동일형태로써 백제의 왕성한 대외외교활동을 엿볼 수 있는 사적이다.
* 사비 도읍시대 (한기 7735년 - 7857년, 26대 성왕 AD. 538 - 31대 의자왕 AD. 660년), 6대 122년 간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명을 남부여로 바꾸어 백제중흥을 도모하였다. 중앙통치조직을 16관등으로 정비하고 행정부서도 내부 12부, 외부 10부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또한 행정조직을 방 → 군 → 성으로 개선하여 중앙집권적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신라, 가야와 동맹을 맺어 한기 7748년(AD. 551년)에 이를 수복하였으나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가 수복한 한강유역을 한기 7750년(AD. 553년)에 점령하였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한기 7751년(AD. 554년) 태자 위덕왕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대패하였다. 수서 동이전에 위덕왕(AD. 554년 - 598년)대에서 사, 연, 협, 해, 진, 목, 국, 백씨로 대성 8족의 귀족연합이 국정을 통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지방호족들의 화백정치다. 무왕(AD. 600년 - 641년)은 호족의 견제를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고자 복신, 계백, 흑치상치들 걸출한 인물을 등용하여 신진귀족들로 정치를 쇄신하려고 천도를 계획하였다. 왕궁리에 행궁을 조성하고 미륵사를 짓고 내재석궁을 지어 천도의 의지를 보였으나 끝내 대성 8족을 비롯한 기존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뒤를 이어 등극한 의자왕은 3국사기에서 해동증자로 평가한다. 왕은 성왕의 전사가 신라의 배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매양 신라에 공세적 입장이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왜와 관계를 돈독히 하여 당과 연합한 신라와 대결구도를 만들었다. 이른바 ‘십자형 국제관계구도’ 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에 밀사로 잠입하여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한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백제의 상좌평 성충과 밀사 김춘추에게 제의한 중국대륙 정벌 연합전략이 김춘추의 당나라 잠입과 연합 제휴로 오히려 역공을 초래했다. 이 때 백제는 왕권통합이 되지 않아 국정이 문란해지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와 아들 남생 3형제의 정권다툼으로 내분이 일어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윽고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 정복의 자문역할을 했고, 남생은 당에 망명하여 고구려 침공의 선봉장이 되었다. 1993년 12월 부여읍 능산리 고분과 나성 사이에 있는 절터의 북쪽 공방터에서 발굴된 금동용봉 봉래산 향로는 7세기 백제 안정시대의 백제 조각예술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 백제왕국, 역사에서 묻혀져버린 역사
* 백제는 대한에서는 한강 이남의 곡창지대를 확보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중국 동남부와 일본 서남부에 식민지를 개설하였으며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해상무역로를 개척하여 서남해와 중국해의 교통요지를 근거로 해외무역이 활발하였으므로 국력이 강대하였다. 활발한 해외 진출로 한문 보급이 빨라 4세기 중엽 근초고왕(AD. 346년 - 375년) 때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했는데 이후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이 잇달아 간행되었다. 고구려가 한기 7797년(AD. 600년) 영양왕 11년에 유기 100권, 신집 5권을 펴냈고 신라가 한기 7742년(AD. 545년) 진흥왕 6년에야 비로소 국사를 편찬한 일에 비하면 200여년이 앞선다.
* 또한 백제 불교는 침류왕 원년 한기 7581년(AD. 384년) 즈음에 교리를 연구하는 학문불교가 성행하여 인도, 중국에 유학승려를 많이 보냈다. 백제후기에는 미륵신앙이 융성하였고, 무왕은 거대사찰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건축사 입장에서 미륵사 건축은 대규모 건축기술을 보유하지 못하면 엄두를 낼 수 없는 건축이다. 일본 법륭사 5층 목탑과 대마도 정림사 소장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정립사지 석탑은 돌과 목재를 자유자재로 이용한 기술로써 현대건축술에서도 찬탄의 대상이다. 신라가 황룡사를 건축하면서 백제인 아비지 초빙하였다는 일도 백제 건축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95년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한 백제대향로의 금세공술은 고식을 따른 섬세함이 비길 데 없다. 전북 김제 벽골제는 완벽하고 거대한 수리시설로써 수학측량학의 발달을 웅변하는 사적이다. 전북 태안 서산의 마애삼존불은 불교미술의 극치로 표현되고, 무왕 35년 한기 7831년(AD. 634년)때 건설한 궁남지는 인공으로 만든 왕궁정원의 전범이다. 1995년 10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 27대 창왕(위덕왕, 523 - 554)의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은 세기적 발견이라고 학계에서 찬탄한다. 1917년 12월에 전남 나주 신촌리 9호분 을호 옹관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AD. 5,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백제금관 형태로는 유일한 관모로써 신라금관의 직선적 형태와 달리 옛 형태를 따르고 있어 학술적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재다.
* 왕인은 아직기의 후임이다. 왕인 이전에 아직기가 근초고왕의 지시로 일본에 건너가서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는데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게 되자 일본 응신천황이 아라타와케를 보내 학자와 서적을 청했다. 그래서 왕인(32세 때)은 근구수왕의 손자 진손왕과 함께 논어 10권과 천자문, 5경박사(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 경서학자), 재봉녀(옷 마름질 장인), 직공(베 짜는 장인), 야공(칠 장인), 양주자(술 제조공), 도공(그릇 장인), 안공(가죽 마름질 장인), 화원(화가), 금공(귀금속 장인), 의사 등 기술자와 함께 초빙되어 일본의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오오사카 히라카타시 등판에 있으며 1938년 5월 일본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왕인박사 이후에도 학자의 초빙은 그치지 않아 무령왕 때 고안무, 단양이와 성왕 때 왕유귀가 초빙학자다.
* 1996년 10월 허난성 숭산 소림사 관광버스에 ‘백제’ 라고 표시판이 쓰인 버스가 있었다. 아직도 중국에 백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3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사람을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강을 따라 둑을 쌓아 사성 동쪽에서 숭산 북쪽까지 닿았다’ 고 했다.
* KBS 방송팀이 역사학자들과 함께 베트남 인접지역인 광서성 장족자치구 일대를 탐방했는데 백제향이라는 이름의 마을에서 맷돌, 외다리방아, 서낭당을 발견했다. 장족자치구 창호현 사람들의 생활풍습은 마한의 생활과 같다. 정월대보름과 단오절이 최대 명절이고 그들의 3현춤은 3국지 동이전의 기록 마한의 강강술래와 같다.
* ‘팥 문화권’ 은 세계에서 대한을 위시하여 일본과 장족자치구 밖에 없다.
* 중앙일보 탐사팀이 운남성 호도현 나시족을 탐방하였는데 우리 민족 고유의 지게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 사서에 백제의 가구수를 76만호로 기록하였는데 백제 패망 뒤 760년이 지난 조선시대 초기의 백제권(경기, 충청, 전라 3도) 가구수는 6만호였다. 백제의 중국대륙과 일본 경략설의 입증이다.
* 하남위례성이라는 지명이 하북위례성을 전제로 한 설정이라면 하북위례성은 건국도읍지이며 하남위례성은 천도도읍지다. 하남위례성이 한성 즉 서울지역인데 1994년에 벌인 ‘서울 정도 600년 행사’ 는 백제의 한성시대 500년을 우리 스스로 축소 왜곡한 몰역사적 사업이다. 서울 정도定都는 2000년이고, 서울은 한기 7961년(BC. 18년) 한성백제 이래 도읍지다.
2부 열국시대列國時代
9화 신라新羅 1000년의 영화榮華와 가야
◎ 신라 역사연대표
* 3국사기(고려 김부식) : 상대上代(1대 박혁거세 - 28대 진덕여왕), 중대中代(29대 무열왕 - 36대 혜공왕), 하대下代(37대 선덕여왕 - 56대 경순왕)
* 3국유사(고려 스님 일연) : 상고기上古期(1대 박혁거세 - 22대 지증왕), 중고기中古期(23대 법흥왕 - 38대 진덕여왕), 하대下代(39대 소성왕 - 56대 경순왕)
1대 박혁거세 한기 7140년(BC. 57년) - 56대 경순왕 한기 8132년(AD. 935년),
56대 992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박혁거세 | BC.57-AD.4 | 13세 등극 국호 서라벌, 수도 금성 |
2대 | 남해차차웅 | AD. 4 - 24 | 석탈해 사위 정사 위임, 병선 왜구 격퇴 |
3대 | 유리이사금 | 24 - 57 | 6부명 개정, 성씨 내림, 도솔가 창작 |
4대 | 탈해이사금 | 57 - 80 | 국호 계림 개정, 김알지 탄생 |
5대 | 파사이사금 | 80 - 112 | 월성 구축 백성 이주, 주변 병합 국위 선양 |
6대 | 지마이사금 | 112 - 134 | 백제 연합 말갈 격퇴 |
7대 | 일성이사금 | 134 - 154 | 농본정책 경지 개간, 백성 사치 금함 |
8대 | 아달라이사금 | 154 - 184 | 현 설치, 도로 개통 내치 힘씀 |
9대 | 벌휴이사금 | 184 - 196 | 탈해왕의 손자 |
10대 | 나해이사금 | 196 - 230 | 벌휴왕의 손자 |
11대 | 조분이사금 | 230 - 247 | 벌휴왕의 손자 |
12대 | 첨해이사금 | 247 - 261 |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 동생, 고구려 국교 |
13대 | 미추이사금 | 261 - 284 | 김씨 왕가의 시조 |
14대 | 유례이사금 | 284 - 298 | 조분왕 큰아들, 백제와 수교 |
15대 | 기림이사금 | 298 - 310 | 조분왕 둘째 아들, 국호 신라 개정 |
16대 | 흘해이사금 | 310 - 356 | 기림왕 후사 없어 군신 추대 등극 |
17대 | 내물마립간 | 356 - 402 | 중국 문물 수입 |
18대 | 실성마립간 | 402 - 417 | 백성 추대 등극, 내물왕 태자에게 피살 |
19대 | 눌지미립간 | 417 - 458 | 牛車法 제정, 고구려 묵호자 불교 전파 |
20대 | 자비마립간 | 458 - 479 | 고구려 백제 공격 나제동맹 맺음 |
21대 | 소지마립간 | 479 - 500 | 김씨 |
22대 | 지증 | 500 - 514 | 왕 칭호 사용, 이사부 우산국 점령 |
23대 | 법흥 | 514 - 540 | 율령 반포, 연호 건원, 이차돈 순교 |
24대 | 진흥 | 540 - 576 | 순수비, 이차돈 순교, 대가야 멸망 |
25대 | 진지 | 576 - 579 | 이름 사륜 |
26대 | 진평 | 579 - 632 | 이름 백정 |
27대 | 선덕여왕 | 632 - 647 | 진평왕 맏딸, 이름 덕만, 첨성대 건립 |
28대 | 진덕여왕 | 647 - 654 | 이름 승만 |
29대 | 무열 | 654 - 661 | 김춘추, 나당연합 외교, 백제 멸망 |
30대 | 문무 | 661 - 681 | 고구려 멸망, 동해 대왕암 수장 유언 |
31대 | 신문 | 681 - 691 | 만파식적 제작 |
32대 | 효소 | 691 - 702 | 설총의 이두 정리 |
33대 | 성덕 | 702 - 737 | 혜초 왕5천축국전 저술 |
34대 | 효성 | 737 - 742 | 이름 승경, 성덕왕 둘째 아들 |
35대 | 경덕 | 742 - 765 | 김대성 불국사 창건 |
36대 | 혜공 | 765 - 780 | 여자 행세, 대공・김지정 난, 신종 주조 |
37대 | 선덕 | 780 - 785 | 혜공왕 죽임, 이름 양상, 내물왕 10세 손 |
38대 | 원성 | 785 - 798 | 홍수로 먼저 도착 즉위, 독서출신과 설치 |
39대 | 소성 | 798 - 800 | 2년 만에 병사 왕위 쟁탈전 벌어짐 |
40대 | 애장 | 800 - 809 | 숙부 김언승 왕위 찬탈 시해, 해인사 창건 |
41대 | 헌덕 | 809 - 826 | 친당정책, 패강 300리 장성 축조 |
42대 | 흥덕 | 826 - 836 | 완도 청해진 설치 장보고 관리 |
43대 | 희강 | 836 - 838 | 3촌 균정 척살 왕위 계승, 김명 난 자살 |
44대 | 민애 | 838 - 839 | 희강왕 추대 상대등, 왕 자살 뒤 등극 |
45대 | 신무 | 839 | 민애왕 죽이고 왕위 등극, 이홍의 저주 死 |
46대 | 문성 | 839 - 857 | 신무왕 태자, 장보고 반란, 염장에게 피살 |
47대 | 헌안 | 857 - 861 | 후사 없어 왕족 응렴 사위 삼아 왕위 계승 |
48대 | 경문 | 861 - 875 | 이름 응렴 |
49대 | 헌강 | 875 - 886 | 처용무 유행, 사치 환락 |
50대 | 정강 | 886 - 887 | 경문왕의 둘째 아들, 진성여왕 오빠, 병사 |
51대 | 진성여왕 | 887 - 897 | 이름은 만, 淫行, 兵制 퇴폐, 나라 혼란 |
52대 | 효공 | 897 - 912 | 궁예와 견훤에게 영토 빼앗김, 정사 혼란 |
53대 | 신덕 | 913 - 917 | 후사 없어 백성 추대 등극 |
54대 | 경명 | 917 - 924 | 신덕왕의 태자, 후당에 구원 요청 실패 |
55대 | 경애 | 924 - 927 | 후백제 침공, 포석정 天祭 중 자살 |
56대 | 경순 | 927 - 935 | 견훤 추대, 왕건에 항복, 경주 事審官 餘生 |
전성기강역도 동서통일강역과 왜 정벌도(붉은색)
나당전쟁도 * Daum Blog 인용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열국시대 한국의 왜倭 분국分國 경영사(임승국의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대진국본기의 일본기를 인용하여 대진국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덧붙인다. 아울러 3한과 가야시대에서 말하는 분국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으니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졸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속했는데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고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나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가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의 유민으로써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의 노예다. 왜인들은 이 때 산과 섬에 근거하여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들이 통상했다. 바다를 건너 천 여리에 대마국(대마도)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 쯤 된다.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 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사방 300여 리 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반여언의 옛 읍임
* 임나任那일본부설 (이경진, Daum 블로그)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고대사에서 왜倭나라가 대한 남부지방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근대사에서는 일본이 한국, 만주, 중국을 침략한 사실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대동아건설이라는 거짓 구호를 내세워 호도하는 것이다.
일본역사교과서는‘대한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는데 대화大和정권이 임나라는 곳을 식민지로 삼아 임나일본부를 두었다. 대화정권에서 파견된 역인役人(관리)이 주재하여 군정軍政을 폈다’라고 고대일본의 대화정권이 대한의 남쪽에 식민지를 두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일본교과서의 역사부도에는 대한 남부지방이 가라(임나)로 그려져 있고 일본의 고대 신공왕후시대에 이곳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경영하였다고 조작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에는 여러 학자들의 학설이 있는데 대부분 일본학자들이 일본서기를 참고하여 한국경영설을 조작한 내용이 주류다. 이 학설들은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로 조작하였기 때문에 일본사학계에서 조차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국의 사기, 일본서기, 3국사기에서 대부분의 기록들이 임나는 대마도 일대를 지칭한다.
* 출선기관出先機關 즉 출장소설出張所說 : (1949년 천황주권국가를 표방한 칸마사토모, 쯔다소우키치, 이케우치히로시 등이 발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은 5세기의 역사를 기록한 웅략천황기雄略天皇紀에 단 한 차례 일본부의 기록이 있는데 일본부 장군들이 임나왕의 명에 의해 신라의 침공을 견제하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임나일본부의 대부분 기록은 6세기의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에 나온다. 그러나 흠명천황기의 기록은 일본부가 임나의 작은 나라 한지(우두머리)들과 신라를 물리치기 위한 작전회의 성격이 대부분이고 조세 징수나 군사 동원 등 정치적인 내용은 없으므로 국가 경영에 대한 내용은 전혀 기록이 없다.
* 기마騎馬민족설 : 출선기관설이 일본서기에서 조차 임나를 경영하였다는 일본부의 성격과 맞지 않으므로 정략적으로 조작한 학설이다. 동북아시아 계통의 기마민족이 만주에서 대한으로 이동하여 한동안 남한을 지배하다가 (마한)진왕의 자손이 4세기 초에 일본 북큐우수로 건너가 왜한倭韓 연합왕조를 건국하고, 숭신천황崇神天皇이 되었으며 5세기 초에는 그 자손인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북큐우수에서 키나이로 진출하여 야마토왕조를 창시한 뒤 일본열도를 통합하고 대한 남부지방을 경영하다가 7세기 중엽 임나 경영을 중단하였다는 학설이다.
* 왜倭 자치기관설 : 출선기관설의 수정론이다. 학문적으로 조작된 임나일본부설이 정설로 인정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분국설을 발표하여 반론을 제기하자 1970년대 이후 임나일본부설을 재수정하여 가야지역의 일본인들이 자치기관을 형성했다는 학설이다.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록에는 임나일본부가 외교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자치기관을 형성할만한 일본인의 대규모 정착 근거가 없다.
* 분국설分國說 : 1963년 북한의 김석형이 제기한 학설로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기본적인 발상이 역전환된 획기적인 학설이다. 선사시대 이래 3한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하여 가야인이 히로시마 동부와 오키야마지역에 임나국을 세우고, 서부에 백제계 분국, 동북쪽에 신라계 분국, 동쪽에는 고구려 분국을 세워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은 왜인들이 세운 대화정권과 한국인들이 세운 분국들과 각축 기록이다. 일본 동부의 대화정권은 5세기 중후반부터 서부 일본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가야계 분국이었던 임나국에 전략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임나일본부다.
* 백제사령부설 : 대한의 역사학자 천관우가 제기한 학설로 백제가 가야지역에 설치한 군사령부다. 이 학설은 일본서기나 3국사기와 전혀 다른 주장이다.
* 외교사절설 : 1970년대 스즈키야스타미, 우케다마사유키, 오쿠다쇼우, 키토우키요아키의 학설로써 그들의 저서 고대왕국과 조선제국에서는 6세기 전반 왜 왕권은 한국의 금속문물을 수입하는 대신 백제에 병사를 파견하고 무기를 공급하여 동맹 관계를 맺었다. 대화 왜가 임나에 파견한 사신들이 주둔하며 임나의 요청에 의하여 주둔군을 관장하였다.
경주 석탈해왕릉 석탈해왕 인도 허황옥왕비릉 허황옥왕비
* Daum Blog 인용 Colla왕국 추적도 인도 물고기상 파사석탑
* 일본제국 식민지시대 일제는 한국에 관한 서적을 모두 수거하여 불태웠다. 역사서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복식사나 음식에 관한 서적에 이르기까지 불온서적이라는 오명을 씌워 걷어들였는데 수집한 문서가 조선총독부 관보에 51종 20여 만 권으로 기록되어 있다(광복 뒤 출간, 제헌국회사,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문정창). 이어 일제는 조선 병탄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조선사를 왜곡, 조작하였는데 이마니시(금서룡今西龍)를 비롯한 일제의 어용사학자들이 주도하였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사지침을 보면
첫째,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둘째, 전편全篇을 상고上古3한(선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3국, 통일신라, 고려, 조 선, 조선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셋째,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史話, 사실史實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고 되어 있다. 편찬에 참여하고 왜곡과 조작에 참여한 이마니시의 충실한 추종자 한국사학자들이 내세운 실증사학의 실체다. 상고사는 한인의 한국시대와 한웅의 신시시대를 잘라내고 선군왕검부터 시작하였으며 선군왕검은 신화로 각색하였다. 고려사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은 속국으로 전락시키고, 조선사는 당쟁과 붕쟁으로 날을 새운 민족으로 폄하함으로써 역사적 우위에 일본사를 접목시켜 한국 병탄을 합리화하고 역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한국사에 대한 회의와 지도자들에 대한 모멸감을 지니도록 그래서 일본인의 우월감을 각인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역사문화정책은 한국인의 의식에 크게 영향을 미쳤음
* 흔히 대한고대사는 세계사의 봉건제도시대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서양의 중세 영주와 기사, 중국의 주나라 봉건제도, 일본의 에도시대(강호江戶시대) 성주와 다이묘(대명大名) 형성기가 유독 대한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인식하였는데 대한사의 열국시대의 성읍국가시대가 중세의 봉건시대임
◎ 가야의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야문화의 특질, 신경철)
학계에서는 가야의 성립을 토착설과 북방민족 이주설 두 갈래로 논란이 되었는데 근래 가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두고 북방민족 이주설이 설득력 있는 정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음
* 도질토기陶質土器의 사용 : 도질토기는 북방 토기로써 AD. 3세기 말 금관가야 중심부였던 낙동강 하류 김해와 부산지역 고분에서 출현하여 영남 각지에 산재한다.
* 순장殉葬 : 한국 토착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고 부여 등 유목민 습속인바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확인되었다.
* Ordos형 동복銅腹 : 북방 유목민의 청동솥인데 북부여 제작으로 추정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되었다.
* 무기武器의 훼손毁損 풍습 : AD. 3세기 말 무렵 추정, 김해 대성동 45호 고분에서 발굴된 대도大刀는 일부러 구부려 부장副葬함. 북방 유목민족 풍습이다.
* 갑주甲冑(갑옷)와 마구馬具 : 철제 갑옷과 투구, 기마용 마구는 북방 피혁 갑주문화인바 중국 동북방 선비족과 부여가 원류다.
* 묘제墓制 : AD. 3세기 영남에서 발굴된 묘제는 목곽묘로써 관묘제도와 다름. AD. 2세기 후반 추정, 양동리 162호묘에서 발굴되었다.
* 선행先行 분묘墳墓의 파괴 : 의도적으로 선행 묘를 파괴하는 행위는 앞 체제를 부정하는 유목민족의 풍습이다.
나정 남당 박창화 일본 궁내성도서관 계림
박혁거세 탄생설화 화랑세기필사본 김알지 탄생설화
(2006년 8월, 건축물 구조대로 판명됨) * Daum Blog 인용
* 중국 3국지의 가야 12국명(4개국 이름 모름)
구야국狗邪國(김해), 안야국安邪國(함안), 반로국半路國(고령), 불사국 不斯國(창령), 독로국瀆盧國(거제),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밀양), 고순시국古淳是國(창원),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성)
* 3국유사의 가야 7국명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冠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 가야의 역사 (김세기의 사라진 가야의 역사, 이영식의 가야사 개관, 김영심의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와 백제)
* 가야의 역사는 기원 전후 한국 남쪽의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한기 7750년경)에 한국 북쪽의 내륙에서 끝났다. 중국의 3국지, 3국사기, 일본서기 등 문헌에서는 대략 12개 나라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600여 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들과 동등하게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여 년 전이다. 3국유사는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의 서지리산(섬진강)까지로 본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 양산, 창녕지역과 섬진강 서쪽의 진안, 장수, 임실, 남원지역에서도 가야문화가 확인되고 있다. 가야의 어원은‘가라’에서 온 말인데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한다.
중국 3국지에는 3세기경(한기 7400년경)에 경남지방에 산재했던 12개의 가야국을 열거하는데 구야국, 안야국, 반로국, 불사국, 독로국, 난미리미동국, 고순시국, 고자미동국 등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금관가야, 아라가야의‘가야’란 말은 고려시대 3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라는 어휘를 붙여 지은 것이다. 3국유사는 가야 5, 6개국이 낙동강 서쪽에 있고, 이는 변한 소국들이 3세기 이후 가야가 되었다고 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 7국과 가라 10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 AD. 1 - 3세기에 낙동강 연안의 변한 소국들이 AD. 3세기 이후 가야 또는 가라의 5, 6개 연맹체를 구성하여 3국시대에 공존하였다고 했다. 3국유사 가락국기 5장 가야조에 김해 금관가야, 함안 아라가야, 고령 대가야, 상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 성산가야(변진가야), 고성 소가야, 창녕 비화가야가 기록되어 있다.
* 임나는 일본서기에 많이 거론되었고 임나일본설을 정착시키려고 일본인들이 조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광개토왕비(한기 7597년, AD. 400년), 3국사기 강수전(한기 7800년경, AD. 7세기), 진경대사비(한기 8129년, AD. 932년)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고구려인들과 신라인들이 사용하였다. 임나는‘임의 나라, 주인의 나라’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다. 두 나라는 가야의 대표로 일본과 교역을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가야의 대명사로 쓰였다. 임나일본부는 왜왕이 가야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라는 학설이 정설이다.
* 한기 7597년(AD. 400년)에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로 가야를 공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가야의 역사는 전기가야 김해의 가락국과 후기가야 고령의 대가야로 나누어진다. 여러 가야국의 인구는 대개 3000명에서 3500명 정도의 소규모였으나 김해의 구야국과 함안의 안야국은 2만명에서 2만5000명의 대국이었다. 3국사기와 3국유사에 기록된‘포상 8국의 난’은 사천, 고성, 칠원, 마산지역의 가야가 김해지역의 해상교통로를 빼앗기 위해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했던 전쟁이다. 한기 7729년(AD. 532년)에 가락국(김해), 한기 7757년(AD. 560년) 경에 안라국(함안), 한기 7759년(AD.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신라의 회유와 무력에 차례로 통합되어 지배세력의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대부분은 김유신처럼 신라에 귀속하여 진골 대우를 받았다.
* 김해 금관가야 : 변한 소국 구야국이 발전한 나라다. 6개 부족장들이 구지봉에서 제사를 지낼 때 6개 알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여섯 동자가 되었는데 큰 맏이가‘수로’로써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 철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과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중개무역 성행하였으므로 크게 번창하였다. 김해 양동리 고분 유적이 대표적이며 AD. 5세기 이후 가야국들의 주도권을 지닌 맹주였다. 한기 7729년(AD.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 함안의 아라가야 : 변진의 안야국이 발전하였다. 서부 경남지역 중심과 남해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AD. 3세기(한기 7400년경) 안야국을 중심으로 포상 8국이 연맹하여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였으며 신라와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여 국가연맹을 형성하고 주도하였다. 함안읍 말이산 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고성의 소가야 : 변진의 소국이었던 고자국이 발전하였다. 한국 남부지방의 여러 나라들과 일본의 교통로의 거점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 창녕의 비화가야 : 북서쪽에는 대가야와 접경하였고 남서로는 아라가야와 접경한 삼각지로써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신라가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낙동강유역으로 진출하였던 거점지역으로 신라에 복속된 뒤 진흥왕이 척경비를 세웠다. 창녕의 교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성주의 성산가야 : 벽진가야라고도 하며 성주읍내 성산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고령의 대가야 : 현재의 고령읍에 있었다. 중국의 3국지에서는 미오야마국이 발전하였다고 하였으나 변진의 반로국설이 정설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건국설화가 있으며, AD. 4세기(한기 7500년경)에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AD. 5세기(한기 7600년경)에는 철을 생산하여 교역함으로써 여러 가야국들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역하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합천, 함양, 거창, 산청지방을 복속하였고 소백산맥 넘어 남원, 운봉고원까지 평정하여 섬진강을 장악함으로써 하동까지 진출하여 거대한 영역국가로 발전하였다. 한기 7759년(AD. 562년) 신라 진흥왕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경주 첨성대 북한산 토함산석굴암 석가탑(무영탑)
진흥왕순수비 * Daum Blog 인용
* 사로斯盧(신라가 국가형태를 갖추기 전의 성읍시대 이름)의 시왕始王(시조)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왕실)夫餘帝室의 딸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뱄으므로 눈수嫩水(만주 흑룡강)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거기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奈乙村에 닿았다. 여기에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자가 있어 소식을 듣고 집에 데려다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여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居世干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동만주 길림성 부근 추정)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이라고도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예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는 3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가 또 갈려서 3가라加羅가 되었다. 소위 가라란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중략) 영락(고구려 광개토대왕 연호)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광개토대왕)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함 (임승국의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 신라라는 국호는 6세기 초 지증왕 때 지정되었는데 그 전에는 사로, 사라, 서나, 서라, 서벌로 불리었다. 이는‘새로운 나라’,‘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고대사회에서 성역으로 섬겼던‘수풀’의 뜻이 있다. 신라는 고대국가들처럼 성읍국가(부족국가)로 시작되었다. 성읍국가로써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를 잡은 급량, 사량, 본피, 한지, 습비, 사로 등 6개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경주는 신라 1000년의 도읍지다. 한 고을이 천년을 이어 도읍지로 역사를 이어온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경주는 본래‘새 벌’,‘서나벌’,‘서라벌’이라고 불렀다. 지금의‘서울’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가 한기 7140년(BC. 57년)에 경주평야에 세운 나라로써 건국 당시에는 6개 부족을 바탕으로 형성된 진한 12개국 중 하나로 가장 작은 나라였다. (박)혁거세는 급량 출신으로 거서간이 되었는데 사량 출신의 (김)알영과 혼인하였다. 이는 6부족에서 가장 강대한 두 부족이 연합함을 뜻한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인도 Cholla 왕국 도래설과 수로왕비 허황옥의 아유타국 도래설)으로부터 진출한 새로운 세력 (석)탈해부족에게 복속된다. 탈해부족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혁거세부족을 제압했는데 탈해가 죽자 해체된다. 이후 신라는 부족연합 또는 군사정벌로 성읍국가를 통합하여 연맹국가가 되었으나 성읍국가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으므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신라가 비록 종주국 역할을 하였다고는 하나 영향력이 미약하여 성읍국가들은 신라 수도 금성으로 쳐들어오는가 하면 토착세력들 가운데는 중국의 군현과 내통하는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한기 7500년 경(AD. 4세기 초) 고구려가 중국 동남부의 군현을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와 백제 양 대 세력이 한국 중부지역에서 대립하자 한기 7550년 경(AD. 4세기 중엽) 낙동강 유역의 성읍국가들이 신라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대 연맹국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를 고증하는 것이 지도자의 호칭이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은 권력 통합의 의미가 아니었는데 내물마립간(AD. 356년 - 402년) 때부터 쓰기 시작한 마립간(으뜸가는 지배자)은 권력자로써 권위를 부여한 명칭이다. 이 시대부터 왕권이 확립되고 왕위를 세습한다.
* 김유신은 신가라加羅 국왕 구해의 증손으로 다섯 가라국들이 모두 신라와 혈전을 벌여 망하였으나 신가라는 나라를 양도하였으므로 김구해에게 감사하여 식읍을 주고 준귀족으로 대우하였다. 김구해의 아들 김무력은 병사로써 구천의 싸움에서 백제의 성왕을 죽인 전공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귀골들은 김무력이 외래의 김씨라 3성과 차별하여 혼인을 허락지 않았다.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이 놀러나갔다가 3성 김씨 숙흘종의 딸 만명의 아름다움에 추파를 통하여 임신하였다. 숙흘종이 노하여 만명을 가두었는데 도망하여 금물내(진천)의 김서현의 집으로 찾아가서 혼인을 하고 김유신을 낳았다. 유신이 방탕하였으나 모친이 눈물로 회유하여 학업에 종사하여 17세(3국사기에서는 15세)에 화랑이 되고 중악산, 임박산에 들어가 참선을 하고 검술을 익혀서 명성이 났다. 그러나 유신은 가라 김씨였기 때문에 벼슬할 길이 없음을 알고 총신이었던 내성사신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를 사귀었다. 하루는 유신의 집 부근에서 제기를 차다가 일부러 춘추의 단추를 떨어뜨리고서 막내누이 문희를 불러 단추를 달게 하였다. 문희의 엷은 화장을 하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몸매와 얼굴이 춘추의 눈을 홀렸으므로 정이 통하여 임신하고 김유신은 김춘추의 매부가 되었다. 김용춘이 죽고 김춘추가 정권을 장악하자 김유신은 장수의 자질로 신라의 한 군주가 되었다. 이어 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유신은 소뿔한(장수와 재상을 겸직한 관직. 각간은 이두문)의 지위로 신라의 병마대권을 장악하였다. 김유신의 역사기록에는 거짓 전공이 많다. 3국사기에서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은 전략전술이 뛰어나 백전백승의 명장이라고 하였으나 패전은 감추고 작은 승리를 과장한 거짓들이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어떻한 인물인가? 김유신은 백전백승의 명장이 아니라 노회한 정치가였으며 그 평생의 업적은 전공이 아니고 간계에 의한 정치였다. 신라 부산현(송도 부근) 조미곤의 예화가 3국사기 김유신전에 실려 있다. 백제의 출중한 부여성충과 임자를 무녀巫女 금화를 꾀여서 이간질하여 결국은 임자의 참소로 부여윤충은 당나라의 강남을 도모하려다가 울분으로 죽었다. 동생 윤충이 울화로 죽고 성충 또한 홀대를 당하여 의자왕과 관계가 소홀하여지자 무녀 금화의 간계는 더욱더 악랄하였다. 백제 산천의 지덕이 험악하니 쇠로 진압한다면서 백제 땅의 쇠를 녹여 말뚝을 박았으므로 백제의 쇠가 탕진되었으므로 백성들은 금화를 불가살이不可殺라 하였다. 이에 성충이 상소를 올려 금화를 탄핵하니 금화가 자기 세력을 동원하여 성충을 참소하였다. 왕은 성충을 감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도 고마미지(장흥)으로 내쫓고, 서부은솔 복신을 가두니 이들이 모두 성충을 따르는 무리였다. 성충이 옥중에서 죽음을 앞두고 유언의 상소를 올렸으니
‘신이 천시와 인사를 살피건데 머지않아 병역의 화(전쟁)가 닥칠 것인 바 육로로는 탄현 (보은)을 막고, 수로로는 백강(서천 기벌포)을 막아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 다.’
하고는 식음을 끊고 28일 만에 옥사했다. 고구려 연개소문이 죽기 1년 전이었다.
한기 7851년(AD. 654년)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왕위를 이으니 이가 곧 태종 무열왕이다. 태종은 부친 김용춘 때부터 대왕의 실권을 가졌으나 다만 동서인 백제 무왕(왕비가 신라 선화공주)과 왕위 다툼에서 악화될 세간의 여론을 의식하여 선덕과 진덕 출가여승을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태종은 왕이 되어서 사위와 딸 김품석 부처의 앙갚음에 몰두하였고 백제의 침입이 자심하므로 태자 법민을 당나라에 보내 원병을 청하였다. 당나라 또한 이 때 당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여 고구려에 대한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절치부심하여 여러 번 고구려를 쳤다가 모두 실패하였던지라 신라와 연합을 호기로 삼았다. 신라를 도와 먼저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천마총금관 분황사탑 남산마애불 울주 천전리각석
* Daum Blog 인용
# 한기 7857년(AD. 660년) 3월에 신라 왕자 김인문이 당의 행군대총관 소정방과 함께 군사 13만명을 거느리고 래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6월에 덕물도(남양)에 이르렀다. 신라 태종이 금돌성(음성)에 진을 치고 태자 법민, 대각간 김유신에게 병선 100척으로 영접케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신라 병사는 뭍으로 진격하고, 당은 해상으로 지쳐올라가 7월 10일에 백제 서울 소부리에 서 만나자.’
고 했다. 법민과 김유신이 금돌성으로 돌아와 김품일, 김흠순 등 여러 장수들을 앞세워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진군했다.
의자왕은 조정의 의견이 분분하자 귀양 가 있는 흥수에게 사람을 보냈다. 흥수가 진언했다.
‘당나라 군사는 기벌포를 넘지 못하게 하고, 신라의 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대 왕은 궁성을 지키고 있다가 양국의 적들이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꺾인 뒤 배후를 치면 백전백승할 것이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임자의 무리들이 참소하여
‘성충이 옥에 갇힘을 원망하여 요사스런 술책으로 왕을 핍박하려 하니 당군은 기벌포를 지 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게 하여 들이친다면 항아리 속의 쥐를 잡는 것처럼 쉽게 양군을 궤멸할 수 있을텐데 어찌 험한 곳을 막아 시일을 허비하며 우리 군사의 사기를 꺾 으랴.’하였다.
의자왕이 이 때 총기가 흐려지고 간언에 귀가 열려 승낙하였다.
7월 9일에 신라 대장 김유신과 김품일 등이 5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무난히 탄현을 넘어 황등야군(논산과 연산 사이)에 이르자 장군 부여계백을 보내어 신라군사를 막으라 명하였다. 계백이 출전하면서
‘아아, 탄현의 천험의 요새를 내주고 5천의 군사로 열 배의 적을 막으라하니 앞 일을 알겠 다.’
그리고는 처자를 불러
‘적군의 포로가 되어 수치를 받기 보다는 내 손에 죽어라.’
며 처자를 죽이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고구려의 안시성주 양만춘은 5천의 군사로써 당 나라 군사 70만을 깨뜨렸는데 일당백이면 어찌 겁내겠는가!’하고 황등야군에 이르러 적을 맞아 싸우니 신라군이 네 번 쳐들어왔다 가 네 번 패하여 1만여 희생자를 냈다.
김유신이 네 번을 쳐들어가 네 번을 패하자 소정방과 약속한 10일 기한을 이루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품일과 흠순에게 말했다.
‘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어기게 되고, 당나라 군사 역시 패한다면 신라의 수십년 간 계획이 허사가 된다. 만약 당군이 이긴다고 하더라도 신라는 모멸을 당할 것이다.’
흠춘이, 오늘 10배나 되는 군사를 가지고도 이기지 못했으니 신라인들은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아들 반굴을 진중으로 부르고, 이어 품일도 아들 관창을 불러 말했다.
‘신라의 화랑이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오늘 1만의 화랑으로도 수천의 백제군 을 이기지 못한다면 이는 곧 신라의 화랑이 망하는 일이며 신라 또한 망하는 길이다. 너 희들은 화랑의 장수들인데 화랑을 망치려는가? 신하로써는 충을 다 하고, 자식으로써는 효를 다 해야 하는데 나라의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버려야 충과 효를 다 했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충효를 다 해 공명을 세우는 것이 오늘의 일이다.’
반굴이 거느리는 화랑의 무리를 이끌고 백제 진영에 들이쳐 장렬하게 전사하니, 관창은 그 때 나이 비록 16세였으나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백제 진영으로 돌진하여 싸우다 사로잡혔다.
계백이 용기를 가상히 여겨 투구를 벗겨보니 아직 앳된 소년이라 무훈을 칭찬하고 살려 돌려 보냈다. 관창은 신라진지로 돌아와 살아 돌아왔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물 한 모금을 마신 다음 다시 백제 진중으로 쳐들어갔다. 계백이 다시 사로잡았으나 목을 쳐 말에 묶어 돌려보내자 아버지 품일이 목을 안고 울었다. 이를 목격한 신라군이 총공격을 하여 육박전을 벌렸으므로 군사가 적은 백제군이 죽기로 맞았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어서 결국 백제군 5000명은 계백을 위시하여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강 입구 기벌포에 도착하였으나 갯벌을 만나 행군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풀과 나무를 갯벌에 깔아 어렵게 행군을 하였는데, 의자왕이‘항아리 속의 자라를 잡으려고 기벌포를 지키지 않았기에’그나마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의직이 죽기로 싸워 순사하니 신라 군사들도 의직이 죽은 곳을 조룡대라고 이름 지었다. ‘여지승람與地勝覽’ 에 소정방이 의직군을 대파하여 의직이 죽은 것을 용을 죽였다 하여 조룡대라 한다 하고, 백마를 미끼로 사용하였다 하여 백마강이라 하였다 하였으나 백마강(백강, 일본사의 백촌강)이란 이름은 그 이전부터 있었으므로 허황된 것이다. 해상잡록海上雜錄의 의직이 죽은 곳이란 말이 옳다.
김유신이 계백을 격파하고 11일에 백강에 다다르니 소정방이 기한을 어겼다고 신라 독군 김문영을 효수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불같이 노하여
‘신라가 당의 번국(속국屬國)이냐! 백제는 놔두고 먼저 당과 싸우자!’
고 칼을 빼들었다. 소정방이 놀라 김문영을 방면하였다.
마의태자 덕주공주 이차돈순교비 불국사다보탑 봉화군 북지리
월악산 성계계곡 금강산 백율사 * Daum Blog 인용 마애여래좌상
# 의자왕은 태자 이외에 적자가 여럿이고 서자들이 40여명이나 되었는데 왕은 그들 모두 좌평 등 관직을 주어 곁에서 보필케 하였다. 이 때 왕자들이 세 파로 나뉘어 태자 효는 ‘북경의 곰나루성으로 가서 지키면서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으자.’ 하였고, 둘째 왕자 태는 ‘솝을(소부리)을 힘껏 지키면서 의병을 기다리자.’ 하였고, 왕자 륭은 ‘소와 술과 폐백을 당군에게 바치고 군사를 물려주기를 간청코자.’ 하였다. 의자왕은 이 세 의견에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세 의견을 다 받아들였다. 왕자 륭에게는 강화의 권한을 맡기고, 왕자 태에게는 싸우면서 지키라 하였고, 왕은 태자와 곰나루성으로 도망쳤다. 왕자 륭이 화의를 요청하여 당군이 물러서자 륭은 태자의 자리에 올라 지휘를 하였는데 태자의 아들 문사가 숙부가 태자의 자리에 앉음을 힐난하였으므로 좌우를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 항복했다. 당군들이 성으로 입성하자 왕후와 희첩들 그리고 태자의 비빈들은 당군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대왕포로 달아나 암석 위에서 강물로 뛰어내렸다. 낙화암의 전설이다. 여러 왕자들은 자살하고 더러는 도망하였고, 의자왕은 곰나루성에 도착했으나 성을 지키는 장수가 임자의 무리들이라 왕을 붙잡아 항복하려고 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려고 했으나 죽지 못해 태자 효와 어린 아들 연과 함께 포로가 되어 묶여서 당군의 진영으로 끌려갔다. 소정방은 목을 찔러 빈사지경瀕死之경에 이른 의자왕을 놀리면서
‘아직도 대국에게 항거하겠느냐?’ 고 비웃었으며
신라 태자 김법민은 항복한 왕자 륭을 놀리면서
‘네 아비가 우리 누이 내외를 죽인 일이 생각나느냐?’ 고 앙갚음을 하였다.
신라 태종이 소정방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금돌성에서 솝울로 달려왔더니 소정방이 백제를 멸했으므로 이제 신라를 칠 간계奸計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소정방은 당나라를 떠날 때 이미 백제를 멸하고서는 신라를 쳐서 군량과 군사를 확보한 뒤 고구려를 남과 북에서 협공하려는 당 고종의 밀지를 받았던 것이다. 또한 소정방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기옥형이었다. 소정방은 당나라에 안치되어있는 선기옥형이 고주몽의 모사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소정방이 나라를 위해 선기옥형을 탐냈는지 개인적인 야심을 위해 선기옥형을 찾으려고 했는지는 그가 선기옥형에 대한 언행을 삼갔으므로 파악할 수 없으나 소정방은 백제를 치고서는 곧 바로 부장들을 동원하여 선기옥형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소정방이 신라군이 늦게 도착했음을 빌미로 신라를 압박한 것도 선기옥형을 빼앗으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올 때 주몽제가 소서노에게 하사한 선기옥형 뿐이었다. 소정방은 고구려를 지목했다. 선기옥형의 원형이 백제에는 없었으므로 고구려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김유신이 이 간계를 탐지하여 태종에게 보고하고 전략을 세웠는데 장수 김다미가 말했다.
‘신라병에게 백제병의 옷을 입혀 당군을 치면 당군이 우리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할 것이므 로 그 때 군사를 움직여 당군을 궤멸하자.’
고 했다. 김유신은 흔쾌히 승낙했으나 태종이 반대하여 당군을 치는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소정방도 신라군의 작전을 알고 신라를 치는 일을 포기했다.
# 백제 부흥운동은 - 신라본기, 김유신전, 해상잡록, 당서, 일본서기의 자료를 보면 의병활동을 ‘다물(옛 것을 되찾는다는 뜻, 고조선시대와 고구려에서도 다물군이 있었음)’ 이라 하였으며
남부의 동북(전라도 금산, 진안),
서부의 서반(의병장 부여복신 - 충청도 대흥, 홍주, 임천),
중부(충청남도 연기)에서 의병이 일어나 활발하게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부여복신은 왕자 풍을 왕으로 세워 싸웠는데 고구려의 남생이 구원병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쳐 복신을 응원하였으며, 바다 건너 왜도 화살 10만개를 보내 도왔다.
* 신라는 성읍국가로써 경주평야에 위치한 진한 12개국의 작은 나라들 가운데 제일 작은 한 부족국가였다. 그러나 차차 주변 국가를 정복하여 한기 7600년 경(AD. 5세기)에는 국가 형태를 갖추었고 한기 7850년 경(AD. 7세기 중반)에는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서쪽의 접경 백제와 북쪽의 접경 고구려가 강대하여 국가의 안위가 늘 불안하였다. 신라는 이를 선린근교善隣近郊의 외교정책으로 지탱하다가 백제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당 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함으로써 동서통일東西統一을 하였다. 통일 뒤 당나라가 한국 경영의 야심으로 설치한 백제의 웅진도독부, 고구려의 안동도호부, 신라의 계림도독부를 축출하여 당 나라 세력마저 제거함으로써 자주적인 한국 통일의 명분을 세웠다. 동서통일의 바탕에는 가야세력의 김유신이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김춘추의 외교가 남달랐던 데 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잠입하여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견제해줄 것을 요청하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私事로움을 잊고 3국은 백 성을 모아 당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전승 뒤에 인의仁義로 다스리자’
며 당나라를 정복할 것을 제안한다. 그 때 중국은 고구려 정복에 실패한 수 양제가 실각하여 그 후유증으로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는 혼란기였으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힘을 합하면 중원을 경영할 수 있다는 이상을 제기한 것이다. 이미 백제는 상대등 성충이 동의하였으므로 신라가 합세한다면 중원정복의 이상이 실현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 일의 불가함을 내세워 동조하지 않았으므로 연개소문에게 2년간 억류되었다. 김춘추는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고, 고구려가 요청한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거짓말(토끼와 자라의 용궁 우화 인용)과 김춘추를 구하려는 김유신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략하자 김춘추를 방면하였다. 고구려에서 풀려나오자말자 김춘추는 왜로 건너가 연합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하자 다시 당나라로 밀입국하여 정벌 뒤 백제 땅을 신라에 복속한다는 당 태종의 약조를 받고, 스스로 아들 왕문을 인질로 맡기고서 당나라와 연합을 이뤄낸다. 동서통일 뒤 당나라의 한반도 경영 획책을 축출하였지만 이는 대동강 이남의 2국통일 또는 백제 합병의 동서통일로써 고조선과 고구려의 광활한 강역 1/100도 못되는 축소통일이었다. 이후 한민족은 동북아의 넓은 대륙을 잃고 웅지를 펴지 못하였으니 신라의 동서통일은 대한역사에서 대륙한국을 잃어버린 가장 애석한 일이었음
* 신라시대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 는 사서史書의 기록에 이름만 있을 뿐 사라져버렸는데 1989년 남당 박창화가 필사筆寫한 발췌본拔萃本이 등장하여 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진위眞僞논쟁이 치열하였다. 박창화는 필경사로 일본 궁내성도서관에 근무하였는데 이 때 도서관에 비치된 화랑세기를 몰래 필사한 것으로, 약간의 문제점은 있으나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다.
* 공식적으로 일제는 강점기 초에 대한사를 말살하기 위하여 대한사를 비롯한 고서적과 고문서를 낱낱이 수거하여 폐기하거나 소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38년 6월에 발행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를 보면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에 서적 4950종을 수거하였고, 1910년 11월부터 12월 2개월에만 고서적과 고문서 51종 20만여 권을 수거하였다고 기록했다. 또 일본 사학자며 평론가였던 하라타 사카에루(原田 榮)는 저서 ‘역사와 현대, 1981년 발행’ 에서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顧問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가 대마도에 조선사료 탐사를 갔는데 조선고문서류 6만6469매와 고기록류 3576책 그리고 고지도 34매를 은폐하거나 분서(불태움)했다고 실토하고 있다. 일제의 고서 수거에는 복식사服飾史나 음식사飮食史 그리고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까지 대한에 대한 기록이면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어 일제가 얼마나 치밀하게 의도적으로 대한기록을 말살하였는지 그 역사 훼손이 가증스럽다. (일제의 선군조선을 비롯한 대한사 왜곡과 말살 주제의 최태영 박사 글을 우리 역사 바로알기 시민연대가 따왔고 Daum BLog에 ID 치우천왕이 게재하여 인용함) 그러나 남당 박창화의 증언처럼 일제는 대한고서적이나 문서를 모두 폐기하지는 않았다. 극비의 금기구역인 일본 궁내성도서관에는 수만 권의 대한서적이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화랑세기는 대한고대사인 3국사기 보다 460여 년 앞선 기록임
* 마의태자는 경순왕 김부의 왕자 김일이다. 강원도 인제의 김부리 혹은 김부대왕리는 경순왕이나 마의태자와 연관이 있는 마을이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이 고려 왕건의 위세에 눌려 천년왕국 신라를 스스로 들어 바치려고 하자 피를 토하며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자의 자리를 벗어던져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오빠를 좋아했던 동생 덕주공주가 따라왔다. 마의태자는 세상을 버리려고 하였으므로 공주를 말렸으나 공주는 뜻을 굽히지 않아 두 남매는 거친 삼베로 옷을 해 입고 열매와 풀뿌리를 캐어 먹었으며 바위 틈과 짐승굴에서 잠을 자는 은둔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덕주사는 덕주공주가 세웠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후기 역사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후손이 여진으로 들어가 금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금나라가 신라의 후예라는 기록은 정설이다.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기록한 ‘송막기문松漠紀聞’ 에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이라고 적었다. 청淸 황실의 역사서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에는 ‘신라 왕의 성씨를 따라 나라 이름을 금이라고 한다’ 고 했다.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金史’ 에는 왕의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 라고 했는데 풀이하면 ‘신라를 사랑하고 늘 마음에 새겨라’ 는 뜻이다. 또 ‘시조는 함보(법명, 이름은 김행 또는 김준)인데 60세가 넘어서 망명하였다. 형 아고보홀은 고려에 남았다’ 고 했다. 김준은 의자왕 김부의 손자고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다. 조선 숙종대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에서 김준은 3형제인데 혼자 여진으로 망명하여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함
*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한 역사학계의 발표가 활발하다. 중국은 고구려와 대진국 (발해)를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조작하여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한다. 또한 제주도 남쪽 대한의 관측시설이 설치된 이어도 (제주도 어부들이 죽으면 간다는 이상향으로 이어도 사나라는 민속노래가 전함)를 분쟁지역화 하려고 하고, 일본은 독도를 다께시마 라며 일본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미나 발표의 요지要旨는, 이러한 상황에서 ‘금金, 청淸나라를 대한사에 편입해야 한다 (2006. 9. 14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고구려연구회 세미나)’, ‘중국의 동
북공정 연구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에서 ‘한漢 . 당唐나라 이후 중국 한족漢族은 만주를 완전히 지배한 적이 없다’ 며 이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대진국 등 한민족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중국의 지방정권 역사로 편입하려는 악의적인 시도에 대응하는 한국고대사 바로 세우기 문제 제기다. ‘한국역사교과서는 중화中華사상에 물든 사대주의사관으로 만주지역에서 성립된 요遼, 금金, 원元, 청淸나라를 모두 중국역사로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 당 이후 중국 본토(중원中原)에 들어선 송宋나라와 명明나라가 북방민족인 금과 청에 각각 정복당했고 당나라 멸망 이후 1949년 공산중국이 건국될 때까지 1000여년 간 한족이 만주지역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 이런 사관에 따라 중국과 역사 갈등을 겪은 몽골은 흉노 - 선비 - 유연 - 돌궐 - 위구르에 이어 요와 원을 자국역사로 편입했다. 금나라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마의태자의 자손이며, 청나라는 병자호란 때 청 태조가 형제국이라고 국가의 뿌리를 인정한 바 있다. 금나라와 청나라는 한민족역사다. 중국의 역사 왜곡을 정치적 차원으로 본다면 중앙정부는 35개 국가가 부침을 했는데 지방정권이 700년의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역설이 성립되고, 중국이 확보한 현재의 시점에서 영토문제, 속지국가주의라면 고대국가는 영토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대에서는 영웅천하였으므로 뛰어난 지도자가 떨쳐 일어나 무리를 규합하여 국가를 건설하고 영토를 넓혀 국가를 이루었다가 패망하기를 반복하였다. 중국도 고구려 700여년 동안에 35개 국가가 평균 15년의 부침을 하였지 않은가? 현대의 국경 같이 인공위성으로 측도하여 선을 긋는 명확한 영토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시대의 영토개념을 고대에 적용하려는 의도는 넌센스가 아닌가?
* 무영탑無影塔은 석가탑의 별명인데 불국사를 완성한 김대성은 절 안에 두 개의 탑을 짓고자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석수장이를 초빙한다. 아사달이다. 아사달이 신라로 초빙되어 다보탑을 짓고 석가탑을 쌓는 동안 오랫동안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 아사녀가 신라로 아사달을 찾아온다. 그러나 탑을 짓는데 여자를 만나는 것은 금기라며 만나지 못하게 하면서, 구지 보고싶으면 달이 밝은 날 밤 불국사 앞 영지影池에 탑과 탑을 짓는 아사달의 그림자가 뜨므로 그림자로나마 남편을 보라고 귀띰을 해준다. 아사녀는 영지에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으나 웬일인지 다보탑만 보일 뿐 석가탑은 보이지 않아, 달이 밝은 밤마다 영지를 헤매던 그녀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영지에 빠져 죽고만다. 탑을 완성하고 나와 뒤늦게 아사녀가 죽은 일을 안 아사달도 영지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
◎ 신라왕국, 1000년의 역사
* 성읍국가 연맹시대
한기 7140년 - 7711년(1대 박혁거세 BC. 57년 - 22대 지증왕 AD. 514년), 571년 간
* 신라라는 국호는 6세기 초 지증왕 때 지정되었는데 그 전에는 사로, 사라, 서나, 서라, 서벌로 불리었다. 이는 ‘새로운 나라’, ‘동방의 나라’ 라는 뜻으로 고대사회에서 성역으로 섬겼던 ‘수풀’ 의 뜻이 있다. 신라는 고대국가들처럼 성읍국가(부족국가)로 시작되었다. 성읍국가로써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를 잡은 급량, 사량, 본피, 한지, 습비, 사로 등 6개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경주는 신라 1000년의 도읍지다. 한 고을이 천년을 이어 도읍지로 역사를 이어온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경주는 본래 ‘새 벌’, ‘서나벌’, ‘서라벌’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서울’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가 한기 7140년(BC. 57년)에 경주평야에 세운 나라로써 건국 당시에는 6개 부족을 바탕으로 형성된 진한 12개국 중 하나로 가장 작은 나라였다. (박)혁거세는 급량 출신으로 거서간이 되었는데 사량 출신의 (김)알영과 혼인하였다. 이는 6부족에서 가장 강대한 두 부족이 연합함을 뜻한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인도 Cholla 왕국 도래설과 수로왕비 허황옥의 아유타국 도래설)으로부터 진출한 새로운 세력 (석)탈해부족에게 복속된다. 탈해부족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혁거세부족을 제압했는데 탈해가 죽자 해체된다. 이후 신라는 부족연합 또는 군사정벌로 성읍국가를 통합하여 연맹국가가 되었으나 성읍국가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으므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신라가 비록 종주국 역할을 하였다고는 하나 영향력이 미약하여 성읍국가들은 신라 수도 금성으로 쳐들어오는가 하면 토착세력들 가운데는 중국의 군현과 내통하는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한기 7500년 경(AD. 4세기 초) 고구려가 중국 동남부의 군현을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와 백제 양 대 세력이 한국 중부지역에서 대립하자 한기 7550년 경(AD. 4세기 중엽) 낙동강 유역의 성읍국가들이 신라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대 연맹국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를 고증하는 것이 지도자의 호칭이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은 권력 통합의 의미가 아니었는데 내물마립간(AD. 356년 - 402년) 때부터 쓰기 시작한 마립간(으뜸가는 지배자)은 권력자로써 권위를 부여한 명칭이다. 이 시대부터 왕권이 확립되고 왕위를 세습한다.
* 3대 유리이사금 때 불리운 ‘도솔가’ 는 가악의 시초며, 경주 일대 6부를 정리하고 성씨를 하사하였고 17관등제를 정비했다. 5대 파사이사금 때는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군비를 강화하여 서쪽 백제를 견제하고 남쪽의 가야에 대비하여 마루성을 축조했고 서울에는 궁성인 월성을 신축했다. 16대 홀해이사금 때는 벽골지(김제)를 축조하여 농업의 혁신을 이루었다. 19대 눌지마립간은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견제하기도 했다.
◎ 신라왕국시대
한기 7711년 - 7977년(23대 법흥왕AD. 514년 - 36대 혜공왕 AD. 780년), 266년 간
* 김씨 왕가의 세습으로 한기 7650년 경(5세기 중반) 이후에는 왕위 부자 상속제도가 확립된다. 내물마립간 때 한기 7574년(AD. 377년)과 한기 7579년(AD. 382년) 두 차례 고구려의 협조를 얻어 중국 북조의 전진에 사신을 보냈는데 한기 7579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는 전진의 국왕 부견이 ‘경이 말한 해동의 사정이 전과 같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 고 묻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나라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이 지금 해동은 달라지고 있다’ 고 대답했다. 신라왕국의 건국을 말한 것이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원조를 받았는데 광개토대왕비문에 한기 7537년(AD. 340년)에 5만명의 고구려 기병과 보병이 신라 국경지대에 출병하여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와 위의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멀리 낙동강 중부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를 빌미로 신라 조정의 왕위 계승을 간섭하는 등 신라의 자주력을 침해하였다. 고구려가 한기 7624년(AD. 427년)에 도읍을 통구에서 평양으로 남하하자 신라는 위협을 느껴 한기 7630년(AD. 433년)에 적대적 관계였던 백제와 혼인동맹을 맺어 대처한다. 한기 7672년(AD.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무력으로 점령하자 신라와 백제는 다시 혼인동맹으로 유대를 강화했으며 많은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했다.
* 한편 이 시기에 신라는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기 위하여 개혁적인 통치를 단행하였다. 왕족과 귀족의 혈연에 의한 6부를 개선하기 위해 한기 7666년(AD. 469년)에 경주지역 구분을 새로이 하였으며, 한기 7684년(AD. 487년)에는 우편소 설치하고, 한기 7687년(AD. 490년) 도읍지에 시장을 개설하여 물류유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경제활동을 조장했다. 한기 7600년 경(AD. 5세기)에는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적 정치형태를 구축하였다. 이는 황남대총 등 국력을 기우린 사업을 펼친 것으로 증명된다. 지증왕(AD. 500 - 514년)은 김씨 왕실의 종묘인 신궁을 신축했으며, 이로써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통치체제가 완성기에 접어들었다. 정치안정을 위하여 귀족세력과 타협을 도모한 것이다. 이후 법흥왕의 개혁적통치로 왕권은 안정되었고 농사를 장려하고 우경제(농사에 소를 이용)를 시행하여 농업발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또 중국의 정치제도를 수입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지도자 성격의 마립간 대신 강력한 통치를 상징하는 중국 왕호인 왕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한기 7702년(AD. 505년)에는 지방행정제도를 주군제도로 확립하였으며, 한기 7699년(AD. 502년)과 한기 7705년(AD. 508년)에는 중국 북조의 북위와 외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기 7579년(AD. 382년) 이래 120년 동안 단절되었던 외교의 복원이었다.
* 법흥왕(AD. 514년 - 540년)은 한기 7717년(AD.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공복을 17관등으로 정비하였으며, 골품제도의 중요규정을 개정하여 진골 귀족회의에서 상대등 선출을 제도화하였다. 국가체제를 법제화, 조직화한 것이다. 아울러 불교를 공인하여 사회적 기반을 확립함으로써 통일을 위한 사상적 발판 구축하였다. 한기 7733년(AD. 536년)에는 ‘건원’ 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과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위치를 확보함으로써 자신감을 들어냈다. 진흥왕(AD. 540년 - 576년)에는 국가체제를 재정비함으로써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미 법흥왕 때 합병한 김해의 금관가야를 비롯하여 함안의 아라가야, 창령의 비화가야, 합천의 다라가야를 병합하였다. 한기 7759년(AD. 562년)에는 이사부 장군이 고령의 대가야를 쳐서 정복하였는데 이 때 화랑 사다함의 공적이 컸다. 이로써 신라는 낙동강유역을 통합하였고, 이어 진흥왕의 한강유역 정복, 진흥왕(AD. 550년)의 백제의 도살성(천안, 증평 추정) 함락, 고구려의 금현성(전의 추정) 정복 등 차례로 접경 주변을 복속시켰다. 이듬해에는 연호를 ‘개국’ 으로 개정하였으며, 백제의 성왕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한강유역 침략하였으나 신라는 오히려 한강의 상류인 죽령 이북의 고현(철령)과 죽령 이남의 10군을 점령하고, 2년 뒤 한기 7750년(AD.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한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한강유역을 확보했다. 한기 7751년(AD. 554년)에 동맹 위반으로 분격한 백제 성왕이 군사를 몰아 쳐들어왔으나 이를 관산성(옥천)에서 맞아 오히려 성왕이 전사하고 백제의 30,000 대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강유역은 평야지대로써 물산이 풍부하고, 중국과 해양교통로로써 이후 통일외교정책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후 신라는 점점 강대해져 함흥평야까지 점령하였고, 진흥왕은 창령과 북한산의 황초령과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우고 단양에는 적성비를 세웠다. 한기 7757년대(AD. 560년) 신라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 그러나 이후 한기 7757년(AD. 560년)과 한기 7857년(AD. 660년) 100년 동안에 국토 회복을 노리는 백제, 고구려와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났다. 진평왕(AD. 579년 - 632년) 후반기부터 두 나라의 침략이 본격화되었으며, 선덕여왕(AD. 632년 - 647년) 때는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워졌다. 한기 7739년(AD. 642년)에는 당항성(남양)이 함락 직전의 위기를 겪었고, 낙동강 방면의 제 1선 기지인 대야성(협천)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신라는 서부 국경선인 합천에서 낙동강 동쪽의 경산지방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외교강화를 도모하였으나 당나라는 여왕의 나라라고 업신여김으로써 신라의 내분을 조장하였고 이는 끊이지 않은 반란으로 점화되었다. 그러나 명신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이 있어 이를 수습하여 평정하였고, 김춘추는 선덕여왕이 퇴위하자 진덕여왕(AD. 647년 - 654년)을 옹립함으로써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김춘추는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하여 신라 수호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통일전쟁의 대전환을 모색하였다. 결국 태종무열왕은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등극한 문무왕(AD. 661년 - 681년)이 고구려를 정복함으로써 신라는 통일의 숙원을 달성한다. 이어 옛 고구려 땅과 백제를 경영하려고 도호부를 설치한 당나라를 축출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통일의 의지를 확립한다.
◎ 내란시대 - 분열과 자멸
한기 7977년 - 8132년(37대 선덕왕 AD. 780년 - 56대 경순왕 AD. 935년), 155년 간
* 전제왕권은 강력한 국가체제로 신라의 강역을 넓히고 외교를 전개하는데는 유리했으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갈등을 수반했다. 황금기였던 경덕왕(AD. 742년 - 765년) 때는 폐지된 진골귀족들의 녹읍이 한기 7954년(AD. 757년)에 부활되었다. 또한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하기 위하여 관청과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하는 한화정책을 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 즉위한 혜공왕(AD. 765년 - 780년) 때는 친왕파와 반왕파의 여섯 차례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런 연유로 경덕왕 말년부터 제작한 성덕대왕 신종은 한기 7968년(AD. 771년) 말에야 완성되었다. 특히 한기 7965년(AD. 768년)에 일어난 귀족 ‘대공의 반란’ 은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반왕파들이 득세하여 왕권을 쥐기도 했다. 끊임없는 내분에 휩싸인 신라는 지방호족들 간의 정권쟁탈이 날로 심해졌다. 9세기 초 애장왕(AD. 800년 - 809년) 때는 숙부가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율령을 개정하고 5묘제도를 확립하는 등 왕권강화에 힘을 썼다. 그러나 소외된 귀족들의 반란이 그칠 새 없었고 이 틈을 타 지방호족들은 세력을 확장했다. 청해진을 근거로 한 장보고가 한 예다. 그 뒤 경문왕(AD. 861년 - 875년)과 헌강왕(AD. 875년 - 886년)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개혁정치를 하였으나 왕권을 정립하지는 못했고 진성여왕이 즉위한 시기에는 내란과 분열이 극에 달했다. 설상가상으로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조세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농민반란의 명분이 되었고, 이를 장기간 수습하지 못하여 50여년의 내란이 지속됨으로써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끝내 한기 8124년(AD. 927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와 경애왕을 척살하고 경순왕을 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시기는 견훤과 궁예가 필사적인 전쟁에 휘말려 있었으므로 신라는 각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명맥만을 유지했다. 한기 8115년(AD. 918년) 궁예를 쓰러뜨린 뒤 즉위한 왕건은 신라에 유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고려가 강건해지자 경순왕은 국운이 더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한기 8132년(AD. 935년) 11월 스스로 천년사직을 들어 고려에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여 경주 사심관으로 여생을 보낸다.
◎ 신라의 정치, 문화, 사회제도
* 골품제도
신라가 고대국가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귀족 상호 간의 위계질서 확립을 정비한 사회제도로써 성골과 진골 그리고 6두품에서 1두품까지 8개의 신분위계다.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 왕으로 선택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하였다. 진골도 왕족이었으나 왕으로 선택되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다가 성골이 소멸되자 김춘추부터 왕위에 올라 신라 멸망 때까지 진골이 왕위를 이었다. 뒤에 새로운 김씨라 하여 가야의 왕족, 왕비족, 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안성 등은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영화를 누렸다. 골품제도는 성골이 소멸한 뒤에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과 일반 백성들로 정리된다. 후기 신라에서는 이 골품제도로 갈등이 깊어져 반 신라세력이 형성된다. 정치적 출세는 물론 같은 신분끼리의 결혼, 가옥의 크기, 옷의 색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제약과 특권은 왕권이 강성할 때는 중앙집권의 수단이었으나 국론의 분열과 갈등의 요인으로써 국운쇠망의 요인이 되었다. 골품제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아니고 고조선시대에서도 지방호족인 5가의 부족장들이 정치를 분담하여 행사하였는데 계급사회의 형성은 정치적인 권력 배분에서 비롯되었다.
* 화백제도
호족들의 연합 정치제도로써 그 기원은 연맹시대의 정사당 혹은 남당이라는 제도에서 기원하였다. 이 제도가 활성화된 때는 화백회의장으로 상대등직이 설치된 이후다.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불교의 공인 같은 국가 중대사를 전원 합의에 의해 결정했다. 그러나 통일시기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집사부가 설치되자 실권을 잃었다. 고조선시대에 화백회의가 있었고 신라의 화백제도와 다름이 없다.
* 화랑제도
신라시대 국가에서 인재발굴의 의도로 장려한 청소년 수련단체인데 화랑이라는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 이라는 말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고조선의 천지화랑에서 조의(선인)들이 바깥에 나갈 때 머리에 천지화(무궁화)를 꽂았으므로 비롯된 말이다. 화판, 선랑, 국선, 풍월주로도 불렀다. 단체정신에 집착한 교육적, 군사적, 사교적, 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력신장에 필요한 군사와 행정 지도자의 양성기관이었다. 또한 골품제사회에서 일반 백성들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었으므로 벼슬과 관직에 대한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도 있었다. 화랑 초기의 원화 남모와 준정은 여성으로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렸는데 무리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춘 낭도들은 인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가 심하여 준정이 남모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뒤 원화는 남성으로 바뀌었고 역할도 달라졌다. 한기 7759년(AD. 562년)의 대가야 정벌 때 화랑 사다함의 공적이 크게 부각되었는데 초대화랑은 설원랑으로 알려졌다. 경덕왕 때 충담사의 10구체 향가 찬기파랑가는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찬미한 노래로써 화랑정신이 쇠퇴해가는 시대 은유적 노래다. 화랑의 조직구성은 화랑 한 명에 승려 약간 명이 포진하고 다수의 낭도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3년 의무기간 동안 단체수련을 하였다. 연령은 15세 - 18세며 명승지와 국토를 순례하여 애국심을 기르고 도의를 연마했다. 고조선시대에 천지화랑이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으로 백제에서는 싸울아비(일본으로 전파되어 사무라이가 됨, 싸울아비와 사무라이의 연관은 언어적으로 무리라는 주장이 있음), 신라에서는 화랑으로 계승되었다. 찬기파랑가, 화랑세기, 세석, 세속5계 등 관련 유적이 있다.
* 불교
신라의 불교는 정치 사회적으로 국가경영에 크게 영향력을 미쳤다. 지도자들이 불교를 통해 사회통합과 사상적 일체를 이루려는 노력을 기우렸기 때문이다. 동서통일에도 불교는 사회통합의 역할이 컸다.
제 1기 - 불교 도입기로 한기 7724년(AD. 527년) 눌지왕 때 아도화상으로부터 받아들였는데 고구려(한기 7569년, AD. 372년), 백제(한기 7581년, AD. 384년) 보다 150여년 뒤졌다. 법흥왕 때 이차돈은 22세의 나이로 법흥왕의 근신이었는데 왕이 불교에 심취한 반면 신하들은 불교의 전래를 우려하고 배척하였다. 왕권이 신권을 제어하지 못하는 정치적 상황이었으므로 이차돈은 불교의 진흥을 위한 법흥왕의 의지를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한다.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절개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입니다’ 라며 불법을 위하여 자신의 한 목숨을 희생할 것을 간언하였다. 왕은 천경림에 절을 지으면서 이차돈이 왕명을 도용하여 불사를 일으켰다고 소문을 내자 신하들이 이차돈을 처형해야 한다고 일어났다. 이차돈은 형장에서 ‘내가 죽으면 기이한 일이 일어나리라’ 예언했는데 목을 치자 흰 피가 솟구쳤다고 한다.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왕실이 돈독한 신자가 되었고 왕이 곧 부처라는 왕권, 국가통치의 기본이 확립되었다. 경주 백율사는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순교비가 있다. 순교비에는 요동치는 땅과 처형되어 구르는 목 그리고 목이 없이 단정히 꿇어앉은 이차돈의 상이 새겨져 있다. 불교식 왕명을 가진 왕은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다.
제 2기 - 불교가 정착한 단계로 7개 사성전(사천왕사, 봉성사, 감은사, 봉덕사, 봉은사, 영묘사, 영흥사)을 국찰로써 건립하고 국가 차원에서 융성한 불교는 사회사상으로 정착되었다. 공적인 승인을 받아 국가가 불교 흥륭의 기반이었으나 민간 개인적인 수행자로 노힐부득, 달달박박, 광덕, 엄장들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유가계와 화엄계 불교가 양립하였다. 신앙적으로는 아미타신앙과 미륵신앙, 관음신앙이 공존했다.
제 3기 - 불교의 개혁기로 선종이 유입되어 불교의 일대 변화가 이루어졌으나 기존의 화엄종과 법상종도 왕실과 지배층에서 융성하였다. 신라 말에 국가가 혼란하자 신인종이 재등장하여 미륵사상 대두되었다. 후고구려를 복위한 궁에는 미륵부처의 환생이라고 자처했다.
3부 10화 남북국시대
대진국(발해)과 통일신라
◎ 고구려를 계승한 해동성국海東聖國, 대진국大震國
대진국행정구역도 무역로 고구려 부흥운동도
* Daum Blog 인용
* 대진국 역사연대표(임승국의 한단고기) - 1
1대 진국열황제 한기 7895년(AD. 698년) - 15대 애제 한기 8123년(AD. 926년),
15대 228년 간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 진국열황제부터 시작 15대)
역대 | 묘호 | 시호 | 연호 | 이름 |
1 | 세조 | 진국열황제 | 중광 | 대중상 |
2 | 태조 | 성무고황제 | 천통 | 대조영 |
3 | 광종 | 무황제 | 인안 | 무예 |
4 | 세종 | 광성문황제 | 대흥 | 흠무 |
5 | 원의 | |||
6 | 인종 | 성황제 | 중흥 | 화흥 |
7 | 목종 | 강황제 | 정력 | 숭린 |
8 | 의종 | 정황제 | 영덕 | 원유 |
9 | 강종 | 희황제 | 주작 | 언의 |
10 | 철종 | 간황제 | 태시 | 명충 |
11 | 성종 | 선황제 | 건흥 | 인수 |
12 | 장종 | 화황제 | 함화 | 이진 |
13 | 순종 | 안황제 | 대정 | 건황 |
14 | 명종 | 경황제 | 천복 | 현석 |
15 | 애제 | 청태 | 인선 |
* 대진국 역사연대표(중국사서와 일본사서) - 2
(대조영부터 시작 15대)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고(대조영) | AD.699-719 | 고구려 유민, 말갈족 규합, 국호 진(발해) |
2대 | 무 | 719-737 | 일본 국교 문물 교환, 당 나라 공격 |
3대 | 문 | 737-793 | 용천부 천도, 관직제도 정비, 주자감 설치 |
4대 | 대원의 | 793-794 | |
5대 | 성 | 794-795 | 연호 중흥, 상경 천도 |
6대 | 강 | 795-809 | 연호 정력, 일본 . 당 사신 왕래 문물교환 |
7대 | 정 | 809-812 | 연호 영덕 |
8대 | 희 | 812-817 | 연호 주작, 당 문물제도 수용 |
9대 | 간 | 817-818 | 연호 태시 |
10대 | 선 | 818-830 | 중국이 해동성국 칭함, 영토 확장 |
11대 | 대이진 | 830-858 | 연호 함화 |
12대 | 대건황 | 858-871 |
|
13대 | 대현석 | 871-894 | |
14대 | 대위해 | 894-906 | |
15대 | 대인찬 | 906-926 | 103개 성 모두 거란에 점령 멸망 |
* 대진국大震國역사는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사대주의事大主義와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에 의한 대한역사 깎기, 낮추기, 거짓으로 만들기의 본보기다. 중국은 대진국을 ‘발해’ 라고 낮추어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몰아세웠다. 일제는 아예 대한사에서 대진국역사를 잘라내 없애버렸다. 쥐뿔(주체)도 모르고 이를 받아들인 대한 일제 어용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대진국역사를 없애고 통일신라로 대한사를 세웠다. 한 술 더 떠서,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실증주의 역사학파로 일컫어지는 이들 일제 어용학자들은 신라통일을 자주통일, 민족통일, 국토통일의 위대한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신라통일은 땅 넓이로 보자면 옛 고조선 땅의 1/100이고 고구려와 대진국 땅 1/50의 좁혀지고 오그라든 통일이다. 더구나 고구려의 드넓은 땅을 당나라에 통째로 바친, 백제와 신라만의 ‘2국통일’ 이요 ‘동서통일’ 일 뿐이다. 통일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아래쪽 영토통일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강역과 고구려인을 감싸 안을 수 없어 당나라가 고구려의 땅에는 안동도호부, 백제에는 웅진도독부 그리고 신라에마저 계림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대한 강역 모두가 당나라의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신라는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 전쟁을 마다하지 않으며 웅진도독부와 계림도독부는 밀쳐냈으나 고구려는 당나라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안동도호부의 고구려 유민들이 안동도호부가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대걸중상과 대조영이 대진국을 세워 당나라는 고구려 경영의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으나 대한사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이 대한 영토의 가름이 된 빌미가 바로 신라통일이다.
* 신라통일 바로 앞서 중국의 정치 상황은 고구려 침공 실패로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백제의 상대등 부여성충과 연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경영하려는 꿈을 세우고 먼저 중원대륙을 치기로 합의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私事로움(대야성 성주였던 사위 김품석과 애지중지하였던 딸 고타소낭이 백제의 침공으로 전사함)을 잊고 3국은 백성을 모아 당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이긴 뒤에 인의仁義로 다스리자’. 때마침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쳐서 철천지한의 원수를 갚고자 신라의 사신으로 들어온 김춘추에게도 이렇게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직 개인적인 원수를 갚으려는데 몰두한 김춘추는 아무리 당나라가 어려운 시기라고는 하나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김춘추에게는 당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백제 타도가, 딸의 원수를 갚는 일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춘추는 연개소문이 죽령 이북의 옛 땅을 돌려주라는 터무니없는 조건에 얽매여 2년간이나 연금되었다. 김춘추가 이 조건을 자신의 능력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거절하였기 때문이었다. 김춘추의 억류 소식을 들은 김유신이 김춘추를 구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 남쪽 국경을 침략하자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풀려나온 데는 고구려 국상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었고, 거짓말로 죽령이북의 땅을 되돌려주겠다면서 옛 이야기 - 자라에게 속아 용궁에 간 ‘귀토설화龜兎說話(토끼와 자라)’ 의 고사故事를 선도해가 귀띔해주어 이를 응용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 살아나온 김춘추는 왜로 건너가 백제 침략연합을 꾀하였다. 왜나라는 이 때 전국시대로써 국정이 혼란하였으므로 거절당하자, 김춘추는 해상권을 장악한 고구려 몰래 당나라로 들어가 연개소문과 부여성충의 침략 계획을 일러바쳤다. 그렇잖아도 고구려 침입의 빌미를 찾고자 호시탐탐 노리던 당나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더구나 백제는 왕정말기의 내정문란으로 정치적 혼란이 자심했고, 고구려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연개소문이 죽은 뒤 동생 연정토와 대막리지 지위를 물려받은 장남 남생을 비롯한 세 아들의 권력쟁투로 역시 국정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김춘추의 고자질로 3국 정세를 살핀 당 태종은 나당연합을 성사시켰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알현할 때 당 태종의 환심을 사고자 구지 당나라의 옷을 입고 당 태종을 뵙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며 수행한 두 아들(장남 왕문과 둘째 아들)을 인질로 맡겼다. 더불어 당나라 정치제도와 복식을 따를 것을 약속하기도 한 철저한 굴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당 태종은 연합의 조건으로 승전 뒤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차지하고 백제 땅을 신라가 경영하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김춘추가 그렇게도 백제 타도에 연연한 이유를 ‘왕가王家의 사사私事로움’ 에서 보는 견해가 있다. 앞에서 말한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김춘추의 외교활동을 3국통일이라는 큰 뜻을 펴기 위한 원대한 계책이라고 추겨세웠지만 그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다. 대야성의 멸망과정에서 자살한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古妥素에 대한 원한으로 보는 시각이다. 연개소문과 대담에서 ‘사사私事로움울 잊고’ 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기록에 의하면 김춘추는 사위와 딸이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기둥에 의지해 종일토록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짐승이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했다’ 고 했다. 또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정도를 멸하지 못하랴’ 라고 식음을 전폐하고 원망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 요즘 진보적인 역사관을 지닌 학자들이 문헌과 고증을 통해 대한사, 특히 고대사를 재정립하여 잘못을 낱낱이 밝혀내고 수정 ․ 보완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중국이 ‘대진국’ 을 ‘발해’ 라고 부르는 것은 당 현종玄宗이, 진국의 황제라고 스스로 말하는 대조영을 대진국이 보낸 사신을 통해 좌해위원외대장군左駭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였고 통치하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아 홀한주도독都督을 보탰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진국은 건원칭제建元稱帝하였는데 당나라가 이를 깎아내려 발해로 불렀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발해로 불리웠다.
덧붙이면 일본이 섬나라라는 정신적 영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서 한국을 ‘반도半島’ 라는 지어낸 말로 부르게 하여 스스로 높이려는 뜻과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구지 ‘반도’ 라는 지명을 왜 만들어냈으며, 특정지역을 지리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어 조어造語를 했다면 왜 ‘반대륙半大陸’ 이라 하지 않고 하필 ‘반도’ 라고 하였겠는가? 지구는 대륙과 섬으로 구성되었지 반대륙이 없는 것처럼 반도는 없다. ‘통일신라’ 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한통일이랄 수 없는 일이어서 학계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후기신라’, ‘대신라’, ‘2국통일’, ‘동서통일’ 등 명칭이 이야기되고 있으나 아직 마땅치 않아 기존의 ‘통일신라시대’ 를, 일제가 빼버린 대진국역사를 복원하여 ‘남북국시대’ 로 정립하고 후기신라의 명칭은 ‘통일신라’로 부른다.
* 중국의 주은래주석은 기자 방담을 통해 고구려가 대한역사라 했고, 학자요 문필가인 임어당도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일을 비판했다. 당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추앙받는 이태백李太白(AD. 701 - 762년)도 시문집 ‘옥진총담玉塵叢談’ 에서 대진국을 고려(고구려)와 백제로 부르며 한민족의 독자적인 국가임을 말했다. 이태백은 말갈어를 잘 해서 대진국과 중국의 외교문서를 번역했다. 또한 이태백의 ‘혁만서嚇蠻書’에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대진국을 고려나 백제로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진국 건국의 주도세력은 말갈족으로 고대 한민족이다. 대진국이 건국되던 6 - 7세기 초 중국 지린성 등 동북지방에 7개의 말갈부족이 있었는데 한민족의 원류인 예맥계가 가장 강성했으며 대진국 건국의 중추세력이었다. 이들은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 대진국을 세웠으며 고구려의 유민을 흡수해서 중국 북방에 현재 대한의 7배나 되는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나라 이름에도 국國자를 넣어 자주국임을 과시했다. 한편 일본학자들도 대진국사를 중국역사로 보는데 부정적이다. 역사학자 쓰다 소기치는 ‘발해사고渤海史考’ 를 통해 대진국의 전신은 말갈 7개 부족으로 이 가운데 속말말갈이 주축이며 이들은 고구려와 당 문화를 수입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한 나라라고 주장하였다.(홍콩 넝런서원의 대한학과 김광석교수 대진국사 연구 논문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1991년 홍콩 위안둥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6. 9. 19일자 중앙일보)
* 본고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나, 이 글이 ‘한단고기의 태백일사(임승국)’ 를 참고하였는데 ‘태백일사의 대진국본기’ 에 기록된 일본기를 인용하여 대진국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덧붙인다.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으니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졸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 에 속했는데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고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나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가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 의 유민으로써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의 노예다. 왜인들은 이 때 산과 섬에 근거하여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들이 통상했다. 바다를 건너 천 여리에 대마국(대마도)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 쯤 된다.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 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사방 300여 리 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반여언의 옛 읍임
* 1949년 길림성 돈화현의 현성 근처 우정산 고분에서 한기 7989년(AD. 792년)에 죽은 대진국 4대 문황제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지墓誌가 나왔다. 대진국의 묘지로써 처음이다. 묘지에 일렀으되 ‘(공주가 죽자) 황상께서 조회를 폐하고 크게 슬퍼하사 음악 연주도 금하였다’ 라며 황제 호칭을 사용하였음을 적었다. 중국은 이제까지 대진국을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나 제후국 정도로 낮추고 대진국역사를 거짓으로 만들었는데 당나라와 대등 ․ 대립한 건원칭제의 나라라는 것이 알려졌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은 ‘태백일사’ 의 역사서로써의 사료적 가치를 정혜공주묘지가 입증하였다.
* 대진국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은 남부 시베리아 여러 종족이 형성한 복합적 국가로써 독자적인 역사를 지녔다고 본다. 신라는 중국처럼 발해라 하였고 낮춰서 ‘흉이凶夷’ 니 ‘말갈발해’라 하였으며 더 낫게 부르면 ‘북국北國’ 이라고 하기도 했다. 일본 승려 에닌(圓仁)이 한기 8036년(AD. 839년)에 지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에서는 신라인들이 8월(음력) 15일에 3일 동안 노래춤잔치를 벌이는데 이를 ‘발해전승기념행사’ 라고 하였다. 신라인들의 대진국관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1949년 발굴된 대진국 정혜공주묘는 대진국 4대 문황제 둘째 딸의
무덤으로,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한 일제 어용
실증사학계에 사료적 가치를 증명함. 앞에서부터 정혜공주묘지석,
묘지 안 벽화와 부장품 * Daum Blog 인용
◎ 대한역사에서 사라진 대진국(발해)의 역사
* ‘대진국’ 은 잊혀져서는 안 되는 한민족의 나라다. ‘발해’ 는 밖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고구려 유민들은 끝내 ‘고구려’ 라 하였다고 한다. 대진국은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청 나라 사람 김소발의 ‘발해국지장편’ 권 20에 대진국문자 20여 글자가 소개되어 전해지고 있다. ‘전자篆字도 아니고 예자隸字도 아닌’ 대진국의 독특한 문자(고조선의 가림토와 비슷함)다. 중국과 다른 자기들만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던 나라, 건원칭제하고 멸망한 고구려를 주체적으로 이은 나라, 전성기에는 고구려의 드넓은 영토 보다 더 넓은 강역을 경영한 나라, 이것이 대진국인들의 기상과 주체성이다. 국경을 맞댄 통일신라와는 일상적인 무역로는 열었으나 국가적인 외교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먼 동해 바다를 건너 왜국과는 여러 차례 국서를 나누었다. 고구려를 이었음을 스스로 말한 데서 보듯이 외세를 끌어들여 2국통일을 하였던 신라를 못마땅하게 보았고 고구려유민들로써 원한이 서렸으리라. 그래서 더욱 대한역사에서 발해역사는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발해지장국편’ 에는 대진국이 왜의 천황과 서로 나눈 문서가 권 18의 문징편을 거의 다 채우고 있어 활발했던 외국교역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 ‘조대기’ 에서, 개화(고구려 28대 보장왕의 연호, AD. 668년, 한기 7865년) 27년 9월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걸걸중상, 대조영의 아버지)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무리를 이끌고 영주에서 2000리(약 1000Km) 떨어진 하늘이 내린 땅 동모산에 이르러 머물렀다고 했다.
# 한기 7893년(AD. 696년) 늦가을, 서압록강변 고구려 진국장군 대중상(걸걸중상, 대조영의 아버지)의 진영, 대중상과 거란족 추장 이진충, 말갈족장 걸서비우가 고구려의 멸망을 한탄하며 울분을 토한다.
대중상 : (비통한 어조로) 고구려는 망했습니다. 싸움 한 번 하지 못하고 나라를 들어 당 나라에 바쳤습니다. 고구려 조의선인의 우두머리고 대막리지며 장군이었던 연개소문 장군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안에서 정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정권을 차지하려는 내 부 분열로,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당나라 30만 대군을 쳐부셨던 그 막강했 던 고구려가 변변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단 말입니까? 이 어찌 통분하지 않으리요! 대막리지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로 향 하는 신라군의 길잡이를 맡아 길을 안내하였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당 나라로 도망가서 당나라 벼슬을 얻고 당나라 군대의 선봉이 되어 고구려로 쳐들어 와 고구려를 지키려는 동생 남산, 남건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정권에 눈이 멀었다지만 어떻게 조국에 창칼을 들이미는 적대행위를 할 수 있으며 적의 나라 군사를 지휘하여 조국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 대로 두고만 보시렵니까?
추장 이진충 : 수천 년 이어오던 민족정신이 스러지고 고구려는 망했습니다만 통분은 갈 아 앉히고 냉정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아직 민심은 우리 편입니다. 백성들은 고 구려가 당나라에 귀속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영주부를 쳐서 발판을 삼고 군사를 정비하여 당나라를 몰아내고 다시 고구려를 일으킵시다.
걸서비우 족장 : 좋습니다. 저도 이미 모든 족장들에게 동원령을 내려두었습니다.
대중상 : 거사는 내일 밤 자정입니다. 족장께서는 동문과 서문을 맡아주시고, 추장께서는 북문을 맡아주시되 달아나는 군사는 쫓지 말고 항복한 군사는 거두십시오. 저는 남문 을 통해 관아를 습격하여 영주부를 탈취하겠습니다.
# 대중상이 주도한 혁명은 실패하였다. 대중상은 이진충과 걸사비우에게 훗날을 언약하고 천험의 요새인 동모산으로 물러났다. 이윽고 ‘후고구려’ 라 이름하고 격문을 돌리니 원근 많은 성들이 모여들었다. 대중상은 중광 32년 5월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라 하였다. 태자 대조영은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와서 제위에 올랐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사 10만을 모집하여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새롭게 하여 당 나라에게 대항하여 고구려 부흥을 맹세하였다. 대조영은 젊은 시절에 천하를 주유하였는데 이는 아버지 대중상(걸걸중상)의 극비명령이었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자 사라져버린 천부인 선기옥형을 찾는 일이었다. 고조선시대부터 전승되어온 선기옥형은 연개소문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할 때 사라져버렸다. 신궁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그 때 소도가 타서 재가 되어버렸는데 소도를 지키던 천지화랑과 신녀들이 모두 함께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대중상은 고구려를의 명맥을 이어가려면 무엇보다도 선기옥형을 찾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고구려 태조 주몽제 이래 고구려를 지켜왔던 선기옥형을 찾지 못한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후고구려를 세우는 원대한 그의 이상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 대조영을 시켜 고구려 강역을 샅샅이 뒤졌다. 대중상 뿐만 아니라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소정방으로부터 열강들이 모두 선기옥형을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선기옥형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선기옥형이 사라진 것은 비단 이 때뿐만이 아니었다. 대중상은 초조했다. 선기옥형을 물려받지 못하면 고구려를 재건한다는 그의 이상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1년여에 걸친 아들 대조영의 탐색에도 불구하고 선기옥형은 끝내 대중상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대중상은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선기옥형을 안치하겠다는 미련을 버리지는 않았다. 혁명에 실패하여 은거한 동모산에 제일 먼저 신궁을 짓고 소도를 설치했다. 비록 한인천제가 하늘로부터 전승한 원형을 안치하진 못했으나 주몽제가 모사한 선기옥형이 있었다.
*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써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다. 걸걸중상(대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자리를 잡았다. 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쳤다. (걸사)비우의 무리와 합쳐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얻었다’ 라고 기록했다.
* 대조영은, 당나라가 거란족 출신 이해고를 토벌대장으로 삼아 쳐들어오자 말갈(읍루)의 족장 걸사비우와 거란의 추장 이진충과 연합하여 당나라 장군 이해고의 군사를 천문령(흥경지방 영액성 부근, 청 태조 도읍지, 대진국 근거지)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에 기강을 새롭게 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국호를 ‘대진’ 으로 하였으며 연호는 ‘천통’, 국토는 6000리(3000Km)였다. 3대 무예황제 때 등주와 동래를 빼앗고 자사 위준을 죽인 일로 당 나라 왕 유기가 군사를 보냈으나 당나라는 크게 패하였고, 다시 당나라가 신라와 연맹하여 동남방의 여러 군을 급습하였으나 역시 크게 져서 그로부터 신라가 조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여러 성은 대진국이 차지하였다.
* 인안(3대 광종 무황제) 16년 한기7932년(AD. 735년)에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하니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5경, 60주, 1군, 38현을 편제하니 나라가 9000리(5000Km)였다. 동쪽은 연해주지역에서 아무르강까지, 서쪽은 요동지역, 남쪽은 대동강과 원산이남 그리고 북쪽은 송화강이북으로 흑수말갈까지 복속시켰다. 이는 전성기 고구려 보다 훨씬 넓은 영토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다. 이 해에 당나라, 신라, 거란, 왜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천하는 ‘해동성국’ 이라고 칭송하였다. 5곡은 풍성하고 4해는 안락하여 ‘대진 6덕의 노래’ 를 찬미하였다.
* 흠무(4대 광성문황제 이름, 묘지가 출토된 정혜공주의 아버지)가 즉위하여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의하고, 문사에게 명령하여 국사 125권을 편찬케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을 홍익하는 교화는 만방에 미쳤다.
* 대흥(4대 광성문황제 흠무의 연호) 45년 한기 7978년(AD. 781년) 치정의 절도사 이정기(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요동에 고구려를 계승한 제나라를 세움)가 당 나라 군사와 접전하자 황제가 장수를 보내 도왔다.
* 성종(11대) 선황제는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태조의 풍체가 있다 하였다.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7주를 두고 북은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과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 모란의 동쪽을 철리,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 장령의 동쪽을 장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에 있었다. 대개마의 남북에 자리잡고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대진국 인(도)장 대진국사 왜곡 안내판 중국 세계문화유산 등록 대진국영광탑
(당대발해유지) * Daum Blog 인용
◎ 대진국의 정치, 문화, 외교활동
* 한기 7924년(AD. 727년) 가을, 대진국의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외교가 시작되어 대진국은 35회, 일본은 13회 사신을 주고받는다. 국경을 한 당나라와 신라에 대비한 군사적 협력이 관건이었다. 한기 7954년(AD. 757년)에 왜가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대진국에 동맹을 요청했으나 대진국이 이를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결국 무산시켰다. 왜의 신라 침략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 대진국의 해상활동은 한기 7929년(AD. 732년) 9월, 당나라 북방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요 군사적 요충인 등주를 공격하여 쉽게 함락시킨 것으로 미루어 거대한 해상 군사조직과 무역활동 조직이 있었다고 가늠되는데 이는 옛 고구려의 해군조직이라고 판단한다.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진국이 당나라의 요충인 항구도시를 공격하여 쉽게 격파할 수 있는 군사적 정비, 특히 해군의 정비가 그렇게 빨리 갖춰질 수 없다는 판단이다. 또한 ‘당회요’, ‘책부원귀’, ‘요사’ 에 고구려의 기록이 8세기에서 10세기 초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비록 대진국에 복속되었으나 사실상 분권적 독립성을 유지한 고구려 해상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 3국사기는 대진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의 4부는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라고 했으며, 신라의 천장군지역으로부터 책성부까지 39개의 역(교통의 거점)이 있다. 주요도로 5개 가운데 신라도(길)가 있다. 이는 대진국이 신라와 교통하지 않았다는 역사 해석의 반증이다. ‘협계 태씨 족보’ 에 왜구가 신라 동해안을 침략하자 대진국 군대가 출동하여 격퇴시킨 기록이 있고 대진국 멸망기에 신라에 군사를 요청한 사실도 있다.
* 고려 태조는 대진국을 고려왕실과 혼인한 ‘친척의 나라’ 라고 했다. ‘자치통감’ 에 서역 승려 ‘말라’ 가 고려 태조에게 들은 내용을 중국 후진의 고조에게 전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 태조는 말라에게 대진국은 본래 친척의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 잡혀있으니 후진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여 대진국 왕을 구하고 옛 원한을 갚고자한다’ 고 했다.
* 중국과 러시아는 대진국역사를 소수민족사로 간주하고 있는데 ‘속일본기’ 권 10에는 대진국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 라고 하여 대진국이 고구려의 후계임을 말하였다.
* ‘발해’ 라는 명칭은 한기 7910년(AD. 713년) 대조영이 건국 초기 국력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외교적 관례로 당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조공의 예를 하자 당 현종이 대조영을 ‘좌해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이라는 벼슬을 내림으로써 나라 밖에서 발해라 불렀으며 안에서는 건원칭제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패망 뒤 고구려 왕족과 고구려에 협력한 말갈족 족장들을 강제로 영주에 이주시켰다. 대진국의 건국은 여기서 시작된다.
* 정치행정제도는 당의 행정체제를 모방하였는데 3성(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밑에 6부(충인의예지신부, 장관은 경)를 두었고 1대, 7사, 1원, 1감, 1국의 관료체제였다. 지방행정기구는 8 - 9세기경에 정비되었는데 5경(수도는 상경, 중동서남경) 아래 15부, 62주, 100여개 현(책임자 현승)의 체제였다.
* 군사제도는 ‘신당서 발해전’ 에 10위(좌우맹분위, 좌우웅위, 남좌우위, 북좌우위 등 대장군 장군 통솔)에 10만 군사를 두었고 전성기에는 20만 명의 군사였는데 지방군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유사시에 동원되는 촌락 단위의 예비군제도가 있었다.
* 사회경제제도로 남부는 농업을, 동부는 농어업이, 북부는 어업과 수렵과 목축업이 성했으며 이외에 수공업 형태의 방직, 도기제작과 국가경영의 중대사였던 철의 제련이 활발했고 읍루인들은 뛰어난 조선술을 발휘했다. 특히 저마(삼베)는 말갈족이 잘 다루어 고려인들에게 전수하여 발전하였다. 당나라와 143회, 왜와 34회의 바닷길 무역의 기록이 있다.
* 기층(일반)문화는 말갈문화가 중심이었고, 중앙아시아와 남부시베리아 문화(도기, 소그드 화폐, 경교 십자가), 고구려 문화(지붕 장식 막새기와의 연꽃잎 배치)가 공존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지배층문화는 고구려인의 문화로써 종교는 불교가 성행하였고 불상은 전불(구은 벽돌 불상)이 남아있다. 지배층에서는 도교가 성행하였는데 정혜공주 묘지에서 도교의 용어와 장자사상의 제도를 엿볼 수 있다. 묘제는 흙무덤(말갈 묘제)과 돌무덤(고구려 양식으로 석실봉토묘이며, 정혜공주묘), 벽돌무덤(당나라 묘제)이 두루 사용되었다. 산성 축조법은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고구려식 산성과 당나라식 평지성이 혼재되어 있다. 구당서, 신당서, 5대회요의 발해전 기록에 대진국인은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주축을 이룬다 하였고,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에도 구려유진(고구려 유민)과 물길잡류(속말말갈인)들이 세운 나라라고 했다.
* 당나라와는 한기 7902년(AD. 705년) 공식적으로 접촉하였고, 한기 7906년(AD. 709년)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대진국은 4번 천도했는데 첫 번째는 천보 년간에 구국에서 현주의 중경으로, 두 번째는 천보 말에 상경으로, 그리고 정원 때에 동경으로, 마지막은 5대 성왕 때 다시 상경으로 되돌아왔다. 성씨는 왕족은 대씨였고, 유력 성씨로 고, 장, 양, 보, 오, 이씨 등 62개였다. 평민은 성씨가 없고 두루 편호 또는 백성이라고 했으며 부곡(백정 등 천민)과 노비가 있었다. 대한의 대진국 기록은 ‘한단고기’ 의 ‘대진국본기’ 와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발해고’ 가 있을 뿐이다. 근대의 대진국연구는, 일본사학계는 고구려 계승과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인 문화로는 인식하나 독자적 문화형성을 인정 안하고, 중국 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지방봉건정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동북공정’ 을 추진하고 있으며, 러시아사학계는 남동부시베리아 여러 민족과 종족이 형성한 문화를 지닌 복합국가로 독자성은 인정한다.
◎ 대진국의 멸망
* 내분설
대진국의 멸망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자체의 내분설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요사(요나라 역사)에서 ‘이심, 민심의 배반’ 이라는 말이 거론되었고 요나라가 싸우지 않고 쉽게 복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내분을 뜻한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대진국 멸망 즈음에 반란이나 폭동이 없었다. 오히려 멸망 뒤 반요투쟁이 100여 년 간 치열하게 나타난다. 요 나라의 대부대에 3일 간 항거했던 부여부전투(성주 이하 전원 사망)와 항복한 뒤 다시 전개된 상경용천부전투, 장령부, 압록부,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 남해부, 철주민의 항쟁을 보면 내분설이 설득력이 없다.
* 백두산 화산 폭발설
1970년대 말,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헤이안시대의 주거지역을 발굴하다가 화산재가 두껍게 쌓인 지층이 발견되었는데 분석결과 백두산 화산재로 결론지었다. 일본 도쿄의 메트로폴리탄대학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백두산 화산 폭발과 그 환경적 영향’ 논문에서 백두산의 화산이 폭발하여 반경 수십 킬로가 초토화되었고 그 영향으로 대진국이, 마치 구약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 복합설
지배층의 권력 다툼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국정이 문란해지고 외교정책의 실패로 요나라가 그 틈을 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기습하자 방어 또는 대비하지 못한 정치적 군사적 실패가 원인이었다. 멸망 뒤 100여년 간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을 추정하여 대진국 멸망의 정설로 본다.
◎ 대진국 부흥운동
대진국 애제의 청태 26년, 한기 8123년(AD. 926년)봄 정월, 야율배(청 태조 야율아보기의 큰 아들)가 거란 건국 초에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대진국의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 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15대 228년 동안 고구려의 후계를 스스로 다짐하며 중원경영을 이상으로 건국했던 대진국은 패망했다. 야율아보기는 유목민을 모아 거란을 건국하고 중원경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위협세력을 복속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작전으로 서북의 돌궐, 토번과 동쪽의 대진국을 먼저 평정하려고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거란과 대진국은 한기8121년(AD. 924년) 이후 끊임없이 변방에서 대립하였다. 대진국 멸망 뒤 요(거란)의 태조가 ‘동단국(동쪽의 거란국)’ 을 세우고 ‘감로’ 라 개원하여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며 유화정책을 폈으나 대진국유민들은 요와 금나라에 흡수되었고 지속적으로 고구려로 망명했다. 요나라는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였다. 대진국 멸망 뒤 유민이 세운 ‘후발해’는 한기 8172년(AD. 975년)부터 군사작전을 개시하였고, 후당에 7회의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호소하였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대조영의 후손, 1029년 동경에서 대진국 복원의 난을 일으킴)은 태조 고황제의 17세(한단고기에는 7세손이라 하였으나 오기임)의 자손이다. 유수부마 소효원과 남양공주를 사로잡고 호부, 사한, 소운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흥)요’ 라 하고 ‘천경’ 이라 개원했다. 요나라를 치기 위해 고려에 5회의 사신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했으나 고려가 거절함으로써 숙원을 달성치 못했으며 이듬해 8월 요 나라에 패망했다. 요동의 유수 ‘수보’ 는 정치가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 11년 정월, 동경의 비장 대진국 사람 고영창이 유수에게 거짓으로 외군이 쳐들어왔으니 대비한다 하여 수보를 죽이니 모두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라 하고 ‘융기’라 개원하니 요동 50여주를 거느렸다. 이후 100년 동안 대진국 부흥운동은 계속되었다.
◎ 외세外勢를 빌은 동서東西통일, 2국통일 - 통일신라
동서통일신라강역도 9산선문山禪門 신라통일반란도叛亂圖
* Daum Blog 인용
* 통일신라 역사연대표
백제는 29대 무열왕 한기 7857년(AD. 660년),
고구려는 30대 문무왕 한기 7865년(AD. 668년)에 패망
1대 박혁거세 한기 7140년(BC. 57년) - 56대 경순왕 한기 8132년(AD. 935년),
56대 992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 기간 | 역사 개요 |
1대 | 박혁거세 | BC.57-AD.4 | 13세 등극 국호 서라벌, 수도 금성 |
2대 | 남해차차웅 | AD. 4 - 24 | 석탈해 사위 정사 위임, 병선 왜구격퇴 |
3대 | 유리이사금 | 24 - 57 | 6부명 개정, 성씨 내림, 도솔가 창작 |
4대 | 탈해이사금 | 57 - 80 | 국호 계림 개정, 김알지 탄생 |
5대 | 파사이사금 | 80 - 112 | 월성구축 백성이주, 주변병합 국위선양 |
6대 | 지마이사금 | 112 - 134 | 백제 연합 말갈 격퇴 |
7대 | 일성이사금 | 134 - 154 | 농본정책 경지 개간, 백성 사치 금함 |
8대 | 아달라이사금 | 154 - 184 | 현 설치, 도로 개통 內治 |
9대 | 벌휴이사금 | 184 - 196 | 탈해왕의 손자 |
10대 | 나해이사금 | 196 - 230 | 벌휴왕의 손자 |
11대 | 조분이사금 | 230 - 247 | 벌휴왕의 손자 |
12대 | 첨해이사금 | 247 - 261 | 벌휴왕 손자, 조분왕 동생, 고구려 국교 |
13대 | 미추이사금 | 261 - 284 | 김씨 왕가의 시조 |
14대 | 유례이사금 | 284 - 298 | 조분왕 큰아들, 백제와 수교 |
15대 | 기림이사금 | 298 - 310 | 조분왕 둘째 아들, 국호 신라 개정 |
16대 | 흘해이사금 | 310 - 356 | 기림왕 후사 없어 군신 추대 등극 |
17대 | 내물마립간 | 356 - 402 | 중국 문물 수입 |
18대 | 실성마립간 | 402 - 417 | 백성 추대 등극, 내물왕 태자에게 피살 |
19대 | 눌지미립간 | 417 - 458 | 牛車法 제정, 고구려 묵호자 불교 전파 |
20대 | 자비마립간 | 458 - 479 | 고구려 백제 공격 나제동맹 맺음 |
21대 | 소지마립간 | 479 - 500 | 김씨 |
22대 | 지증 | 500 - 514 | 왕 칭호 사용, 이사부 우산국 점령 |
23대 | 법흥 | 514 - 540 | 율령 반포, 연호 건원, 이차돈 순교 |
24대 | 진흥 | 540 - 576 | 순수비, 이차돈 순교, 대가야 멸망 |
25대 | 진지 | 576 - 579 | 이름 사륜 |
26대 | 진평 | 579 - 632 | 이름 백정 |
27대 | 선덕여왕 | 632 - 647 | 진평왕 맏딸, 이름 덕만, 첨성대 건립 |
28대 | 진덕여왕 | 647 - 654 | 이름 승만 |
29대 | 무열 | 654 - 661 | 김춘추, 나당연합 외교, 백제 멸망 |
30대 | 문무 | 661 - 681 | 고구려 멸망, 동해 대왕암 수장 유언 |
31대 | 신문 | 681 - 691 | 만파식적 제작 |
32대 | 효소 | 691 - 702 | 설총 이두 정리 |
33대 | 성덕 | 702 - 737 | 혜초 왕5천축국전 저술 |
34대 | 효성 | 737 - 742 | 이름 승경, 성덕왕 둘째 아들 |
35대 | 경덕 | 742 - 765 | 김대성 불국사 창건 |
36대 | 혜공 | 765 - 780 | 여자 행세, 대공 ․ 김지정 난, 신종 주조 |
37대 | 선덕 | 780 - 785 | 혜공왕 죽임, 이름 양상, 내물왕 10세손 |
38대 | 원성 | 785 - 798 | 홍수로 먼저도착 즉위, 독서출신과설치 |
39대 | 소성 | 798 - 800 | 2년 만에 병사 왕위 쟁탈전 벌어짐 |
40대 | 애장 | 800 - 809 | 숙부 김언승 왕위찬탈 시해, 해인사창건 |
41대 | 헌덕 | 809 - 826 | 친당정책, 패강 300리 장성 축조 |
42대 | 흥덕 | 826 - 836 | 완도 청해진 설치 장보고 관리 |
43대 | 희강 | 836 - 838 | 3촌 균정 척살 왕위계승, 김명의 난 자살 |
44대 | 민애 | 838 - 839 | 희강왕 추대 상대등, 왕 자살 뒤 등극 |
45대 | 신무 | 839 | 민애왕 살해 왕위 등극, 이홍 저주로 죽음 |
46대 | 문성 | 839 - 857 | 신무왕 태자, 장보고 반란, 염장 피살 |
47대 | 헌안 | 857 - 861 | 왕족 응렴 사위 삼아 왕위 계승 |
48대 | 경문 | 861 - 875 | 이름 응렴 |
49대 | 헌강 | 875 - 886 | 처용무 유행, 사치 환락 |
50대 | 정강 | 886 - 887 | 경문왕의 둘째아들, 진성여왕 오빠, 병사 |
51대 | 진성여왕 | 887 - 897 | 이름은 만, 淫行, 兵制 퇴폐, 나라 혼란 |
52대 | 효공 | 897 - 912 | 궁예와 견훤에게 영토 빼앗김, 정사혼란 |
53대 | 신덕 | 913 - 917 | 후사 없어 백성 추대 등극 |
54대 | 경명 | 917 - 924 | 신덕왕의 태자, 후당에 구원 요청 실패 |
55대 | 경애 | 924 - 927 | 포석정 백제 침공 제사 협의 중 자살 |
56대 | 경순 | 927 - 935 | 견훤 추대, 왕건에 항복, 경주事審官 餘生 |
* 대한역사는 신라의 통일을 위대한 역사로 적는다. 자주통일, 민족통일, 국토통일이라고 하여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은 창조적 통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대한역사 말살정책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입장이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로 국경을 이웃하여 끊임없이 화해와 전쟁을 반복하였다. 구지 영토 확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권의 문제였으므로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북쪽에는 힘 센 고구려가 버티고 있어서 나갈 길이 막혀있었으므로 백제와 신라는 동서로 국경을 마주한 나라끼리의 어쩔 수 없는 대결을 벌였다. 나라 밖의 영토 - 중국 동해안과 일본 전역의 영토 넓힘도, 이러한 영토 넓힘의 뜻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의 중국 요동지방과 동북부지역 그리고 일본 북부지방 경영은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으로, 백제는 중국의 요동과 일본의 동부지역, 신라가 중국 서남부지역과 일본의 서부지역을 경영한 것은 해외 진출을 꾀했던 영토 확보다. 특히 뒷날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는 백제 정복의 야심을 가졌으나 나라의 힘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이웃 나라에 동맹을 호소한다.
김춘추는 사신으로 한기 7824년(AD. 627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았으나 연개소문은 일찍이 중원(중국) 경영의 야심을 키워왔으므로 오히려 김춘추를 설득하려고 한다.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私事로움을 잊고 3국은 백성을 모아 당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이긴 뒤에 인의仁義로 다스리자’ 고 했다. 그러면서 옛 고구려 영토였으나 진흥왕대 이래 신라의 영토였던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연개소문은 김춘추가 맘대로 할 수 없는 조건을 말하여 김춘추가 집착하고 있는 백제 침공을 그만두게 하고 큰 이상에 동참하기를 바란 것이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의 조건을 ‘신하로써는 결정할 수 없다’ 고 거절했다. 연개소문은 이미 중원 경영의 이상을 백제의 상좌평 부여성충과는 합의에 이르렀으므로 신라가 동의하면 중원 도모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수나라를 이어받은 바로 뒤였고 더구나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여 나라의 기틀이 확립되지 못한 체 혼란스러웠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2년간 잡아두었는데 김춘추는 탈출을 꾀하기 위해 고구려 재상 선도해에게 뇌물을 바쳤다. 김춘추의 뇌물을 먹은 선도해는 귀토설화龜兎說話(용궁에 간 토끼와 자라)를 이용할 것을 사주하여,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고 거짓 약속을 했다. 때맞춰 김춘추를 구하려는 김유신이 국경 남쪽을 침략하자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 고구려에서 풀려나자말자 김춘추는 한기 7844년(AD. 647년) 왜倭로 건너가 백제 침공을 모의한다. 본래 왜는 백제에 우호적이었고 신라와는 적대적이었는데 왜국은 한기 7842년(AD. 645년) 타이카개신(대화개신大化改新) 즉 나카노오에(중대형中大兄) 왕자가 왜 왕가王家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던 백제계 호족豪族 소가노아루카(소아입록蘇我入鹿)를 죽이는 ‘태극전太極殿의 정변政變’ 을 일으켰다. 김춘추는 왜의 반백제계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백제 정벌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계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 딴판으로 혼란한 일본정국의 수습이 시급하였던 나카노오에의 거절로 실패하자, 진덕여왕 2년 한기 7845년(AD. 648년) 두 아들 - 문왕文汪과 둘째를 대동하고 당나라로 건너가 나당연합을 성사한다. 점령 뒤 백제를 신라가 갖는 대신 고구려를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조건이었다. 3국사기 신라본기 문무대왕조에는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내가 양 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신라에게 주어 길이 평안하게 하려 한다’ 는 영토 나눔에 대한 당 태종의 일방적인 선언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비문에서 보듯이 백제와 신라를 정벌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마음만 먹었다면 쉽게 합병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왜구의 침략에서 구원할 뿐이었는데 신라는 오직 백제 타도를 끈질기게 추구하였다.
* 김춘추의 백제 정벌을 ‘왕가王家의 사사私事로움에 집착’ 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설득하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눈을 더 크게 떠 중원을 경영하자라고 한 말은, 백제가 대야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자 김춘추의 사위 대야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古妥素가 자살한 원한을 사사로움이라고 말한 것이다. 백제의 의자왕은 즉위 다음 해에 한기 7839년(AD. 642년) 7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 미후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다음 달에는 당항성을 치는 것처럼 위장하고 윤충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가 자살했다. 화랑세기는 김춘추가 고타소를 매우 사랑했는데 딸이 죽자 ‘기둥에 의지해 종일토록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짐승이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했다’ 고 기록했다. 또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정도를 멸하지 못하랴’ 라고 원망하고 한탄했다 한다.
* 강역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라의 통일은 고조선시대의 드넓은 강역의 1/100, 고구려시대와 대진국시대의 1/50 정도다. 신라통일은 대동강 이남의 통일이다. 대륙 고구려를 중국에 고스란히 넘겨준 것이다. 그것 보다 더 통탄할 일은 신라통일부터 대한의 강역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한정된 일이다.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통일신라를 ‘대신라’ 또는 ‘후기신라’ 로 논의하며 ‘2국통일’ 또는 ‘동서통일’ 로 규정한다.
* ‘예맥濊貊은 중국민족’ 한민족 조상까지 왜곡(2006. 9. 1 중앙일보)
중국사학자 왕원광(王元光, 윈난대, 서남변강소수민족연구센터연구원)은 2005년 펴낸 ‘중국민족발전사’ 에서 ‘예맥족도 중국민족’ 이라고 주장했다. 예맥족의 일부는 나중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대한민족의 직계 조상이다. 왕원광은, 중국사에서 지금까지 자기들이 정설로 주장한 옛 만주지역 안 예맥, 숙신, 동호계열 가운데 숙신과 동호만 중국민족으로 간주했던 역사를 한 발 더 나아가 예맥족도 중국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부여족 가운데 대부분은 고구려, 대진국, 거란, 여진, 한족으로 융합되었고 일부만이 고구려를 거쳐 대한으로 들어가 오늘날의 한민족이 되었다’ (위 책 314쪽)라고 했다. 헤이룽장대학의 왕젠중 교수도 2004년 편찬한 ‘동북지구식생활사’ 에서 ‘부여는 중국 동북지구에서 가장 먼저 문명시대를 연 소수민족정권’ 이라고 하여 부여를 중국변방정권으로 간주했다. 중국의 주요논문, 특히 고대사와 관련된 논문은 국무원문화부와 국가신문출판총서의 허가나 묵인없이는 출판이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 학자의 주장은 학자 개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중국 당국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본다.
*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역사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2004년 8월 23일 한 ․ 중 양 국이 합의문을 작성했는데
(1, 2항) 한 ․ 중 양 국은 역사문제로 한 ․ 중 우호관계의 손상을 방지하고 동반자적 발전에 노력한다.
(3항) 고구려사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정치문제화를 막는다.
(4항) 중국이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대한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한다.
(5항) 양측은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고 합의하여 두 차례의 학술교류가 있었다.
* 중국은 1996년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고구려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동북공정을 시작했고, 2002년 2월 동북공정을 본격 출범하여 대한이 강력히 반발했으며 요즘에는 대진국(발해)사를 넘보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고조선사를 찬탈하려는 야욕이다. 대한은 2006년 5월 동북아역사재단특별법을 국회에서 발의했으나 다른 정쟁으로 13개월만에 늑장 통과시켰으며 8월에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확대 출범하였다.
금관총금관 단석산 신선사마애불 외세 침략도 수로왕비
* Daum Blog 인용 허황옥릉
# 한기 7857년(AD. 660년)의 초여름,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 백제군 진영은 계백장군이 5000의 결사대를 높고 험한 산을 배경으로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신라는 김유신장군이 앞장서서 백제군을 단숨에 휘몰아치려는 작전을 펴 5만 군사를 3대로 나누어 백제 진영을 세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그러나 5000 대 5만의 대결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백제군의 완강한 저지선을 뚫지 못하고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네 번, 이로 인해 신라는 군사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침통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 신라의 김유신장군 진영, 김유신장군이 병사들의 진영을 순시한다. 병사들 피로와 지친 모습으로 삼삼오오(셋, 넷, 다섯 사람씩) 앉아 있거나 누워있다. 네 번의 패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이 많았고 부상당한 병사들 또한 치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울부짖고 신음하는 처참한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묵묵히 진영을 돌아보던 김유신장군, 막사로 들어와 힘없이 의자에 앉는다.
우장군 김흠춘 : (비장한 목소리로) 반굴을 불러오라!
반굴 : (무장을 한 채 아버지 앞에 서서) 부르셨습니까?
우장군 김흠춘 : 전황을 타개할 뾰쪽한 수가 없다. 네가 나서거라!
반굴 :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김유신장군 : (칼로 마루를 치며) 다 소용없소. 이미 네 번이나 실패하지 않았소! 이 싸움은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구료.
우장군 김흠춘 : 아닙니다. 지금 이를 타개하지 못하면 전쟁이 어렵게 되고, 기벌포에서 기 다리는 소정방과 기약한 날짜를 지키지 못하면 소정방은 이를 빌미삼아 또 무슨 조건을 꺼낼지 모릅니다. 오늘 중으로 계백의 군사를 쳐부수지 못하면 전쟁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김유신장군 : 소정방은 우리가 적의 앞머리를 꺾으면 뒤늦게 병력의 손실없이 끼어들어 과 실만 주우려는 속셈이요. 모르는 바 아니지만 방법이 없어 답답하오. 섣부른 작전은 오 히려 백제군의 사기를 북돋울 뿐.
우장군 김흠춘 : (다시 아들 반굴을 돌아보며) 화랑으로써 기개를 보여라!
반굴 : 명령대로 충성하겠습니다.
# 반굴은 막사를 나와서 결사대를 조직한다. 화랑과 낭도를 중심으로 100여명의 기마결사대를 편성하여 백제군 진영으로 쳐들어간다. 김유신장군과 우장군 김흠춘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신라군의 돌격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백제진영에서 역시 100여명의 기마결사대가 마주쳐온다. 양 진영의 중간에서 마주친 양 결사대가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인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자 신라 기병대는 전멸하였고 승리한 백제군들이 자기 편 부상자와 사상자를 수습하면서 신라군의 부상자들은 가차없이 살해한다. 이를 지켜보는 김흠춘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신라군 병사들이 숨죽여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다.
김유신장군 : (비통한 목소리로 김흠춘장군을 나무란다. 김흠춘장군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다.) 부질없는 희생은 오히려 우리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하지 않 았던가!
좌장군 김품일 : 그렇지 않습니다. 군사의 사기를 살려내는 다른 묘책이 없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며) 관창을 불러라!
관창 : (아버지 김품일장군 앞에 서며) 부르셨습니까?
좌장군 김품일 : 보았느냐, 반굴의 죽음을!
관창 : 예! 장군! 분부만 내리십시오.
좌장군 김품일 : 필마단기로 적진을 무찔러라!
관창 : (엎드려 절을 올리며) 만수무강하소서!
# 관창은 막사를 나오자말자 말을 몰아 백제군 진지로 달려나간다. 신라군 병사들이 숨을 죽이며 보고 있다. 백제군 진영에서는 필마단기(혼자)로 달려오는 장수를 보자 부장 한 사람이 마주 달려 나온다. 두 사람은 양 진영 중간 지점에서 칼과 칼로 승부를 겨룬다. 칼과 칼이 부딛쳐 불꽃이 튄다. 그러나 몇 합, 백제군 부장의 칼이 크게 번득이는가싶더니 신라군 장수가 말에서 떨어져 뒹군다. 백제군 장수가 땅에 떨어져 늘어진 신라군 장수를 가볍게 움켜쥐고 백제군 진영으로 달려간다. 백제군에서 큰 함성이 황산벌을 울린다.
# 백제군 진영
부장 : (말에서 내리며 계백장군 앞에 잡아온 신라군 장수를 내팽개친다.) 다녀왔습니다.
계백장군 : 수고했소, 포로의 투구를 벗겨라! (부장이 나가 포로의 투구를 벗긴다. 앳된 소 년의 얼굴이 나온다. 아니, 저 건! 둘러선 장수들이 모두 어이없는 탄성을 지른다. 계백 장군 자리에 앉으며) 아니, 어린애잖소. 성명을 말해 보아라!
관창 : 본관은 김유신대장군의 우장군 김품일장군의 아들 화랑 관창이다. 포로로 잡힌 부끄 러움을 참기 힘들구나.
계백장군 : 나이는 몇이냐?
관창 : 열여섯이다.
계백장군 : 열여섯이라면 … (고개를 젓는다. 언뜻 머리 속에 스치는 기억에 몸서리친다.)
부장 : (계백장군을 돌아보며) 어찌 할까요?
계백장군 : (안타까운 듯) 어린애잖소, 말에 묶어 돌려보내시오!
# 신라군 진영, 말에 꽁꽁 묶인 관창이 돌아오자 병사들이 마중하여 결박을 풀고 그를 김유신 장군의 막사로 데리고간다.
좌장군 김품일 : (관창이 들어서자) 살아서 돌아오려고 했더냐!
관창 : (아버지 앞에 엎드려) 죽기로 싸웠으나 힘이 부쳤습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관창, 다 시 돌아나가서 곧 바로 무기를 바꿔들고 말에 오른다. 막사를 향해 경례를 하고 백제 진영으로 달려간다.)
# 백제 진영, 또 장수가 나와 맞는다.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신라군의 장수를 잡아간다.
계백장군 : 포로의 투구를 벗겨라! (계백장군, 깜짝 놀라며) 너는 아까 잡혀왔던 소년장수가 아니냐?
관창 : 그렇다. 본관은 신라의 화랑이다. 죽을지언정 항복하지도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계백장군 : 안타까운 일이다,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한다.) 목을 치되 정중하게 시신을 모셔 돌려보내라!
부장 : 장군! 신라의 간사한 꾀입니다. 고육지계(자기 살을 베는 아픔으로 우리 편 사기를 올리는 꾀)입니다.
계백장군 : 알고 있다. 소년장군의 죽음을 명예롭게 하라! (눈을 지그시 감는다.)
# 계백장군의 회상, 황산벌 출전의 날 새벽 계백장군의 집. 계백장군, 뜰을 거닐고 있다. 한참 뒤에 인기척이 나더니 장군의 부인이 다가선다. 두 사람 마주 보고 선다. 계백장군의 충혈된 눈을 한참 동안 마주 보고 있던 부인이 조용히 되돌아선다. 한참 동안 더 뜰을 거닐던 계백장군 동이 터오는 새벽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고는 방안으로 들어가 완전 무장을 하고 마당으로 나온다. 부인이 두 아들과 딸을 데리고 마당 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다. 계백장군 처연한 얼굴로 부인과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칼을 뽑아 들고 다가선다. 핏발이 선 눈에 불꽃이 일어난다.
# 반굴과 관창의 죽음으로 전장의 분위기는 거꾸로된다. 신라군은 분기탱천憤氣撐天(사나운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하여 성난 파도와 같이 백제군을 밀어부쳤다. 중과부적(월등하게 수가 많음)인 처지에 신라군의 사기가 되살아났으므로 제아무리 결사대라 할지라도 백제군은 계백 장군 이하 전군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백제의 싸울아비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5000 결사대는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백제도 패망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관창은 급찬으로 추증(죽은 다음에 벼슬을 높여줌)되었다.
창녕 진흥왕척경비 수로왕비릉 물고기무늬와 수로왕비 허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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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백장군에 대한 기록은 3국사기에는 없고 ‘대동지지’ 에 ‘계백의 이름은 승이요 백제 왕가와 같은 성씨다’ 라는 기록이 있어 계백은 왕가로써 ‘부여씨’ 로 추정한다. 백제 16관등의
둘째 서열인 달솔이었다. 달솔은 흑치상지 등과 같이 부여받은 신진귀족의 최고 관등이다. 의자왕은 내부혁신을 하기 위해 계백, 흑치상지들 신진귀족을 등용하여 보수귀족을 견제했다. 계백장군의 아버지는 병관이며 좌평(국방장관)이었다. 계백장군은 의자왕과 동갑으로 문무를 함께 익혔는데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이 사냥대회를 열었을 때 두 사람은 활솜씨가 엇비슷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어느 해 사냥에서 태자(의자왕)가 꿩 3마리, 노루 1마리, 토끼 4마리를 잡았고, 계백은 꿩 2마리, 노루 2마리, 토끼 3마리와 맷돼지 2마리를 잡아 계백이 이겼으나 두 사람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서로 격려했다. 의자왕은 뒤에 ‘해동증자’ 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효도하고 무예도 뛰어났다. 늘 중국의 요동과 일본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백제의 청년들은 나이가 17, 8세에 차면 절에 들어가 의무적으로 부처님 말씀을 새기고 무예를 익혔다. 계백은 수덕사에서 수행하였다.
* 백제의 결사대 5000은 ‘싸울아비(무절武絶)’ 다. 계백은 백제 싸울아비의 우두머리였다. 싸울아비의 시작은 고조선의 천지화랑과 선배(선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 마다 나라의 사냥대회를 열어 가장 우수한 사냥꾼을 뽑아 선배로 상을 내리고 선배가 되면 국가에서 먹고 입고 사는 것을 책임졌다. 평상시에는 국가의 공공사업에 동원되었고 국가가 어려움을 당하면 조직을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가 국가방위를 책임졌다. 전쟁에 나서면 져서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싸울아비에게는 ‘8선도정신’ 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칼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쓴다.
② 전쟁에 나가면 최후의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③ 의로운 일에만 칼을 사용하며 함부로 죽이는 일은 안 한다.
④ 도전을 받았을 때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칼을 써야 하며
일단 칼을 들었으면 후회 없는 승패를 가려야 한다.
⑤ 적을 뒤에서 치지 않는다.
⑥ 칼을 들지 않는 자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
⑦ 칼을 내 몸과 같이 아낀다.
⑧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는 스스로 할복하여 그 명예를 지킨다.
* 신라에는 ‘화랑’이 있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화랑이 있었기에 지탱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화랑으로 뽑히면 글과 무예를 익히고 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가꾸었다. 화랑은 낭도들을 거느렸는데 수백 수천을 거느린 화랑도 있었다. 신라의 화랑제도는 인재 등용의 관문이었고 특히 골품제도가 엄격한 사회에서 평민이 발탁되는 유일한 신분 상승의 등용문이었다. 소문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화랑세기(김대문 지음)’ 필사본(역사학자 남당 박창화 1889 - 1962, 일본 궁내성도서관에 사서로 재직시 베낌 주장)이 발견되어 진위眞僞가 문제가 된 일이 있다. 한기 7797년(AD. 600년)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경북 청도 인근의 가슬사에 있을 때 화랑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서 평생 지닐 계명을 지어달라고 했다. 원광법사는 ‘불교에는 보살 10계가 있지만 그대들은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므로 세속 5계를 준다’ 하며 내린 화랑도의 계율이 ‘세속 5계’ 다.
① 임금은 충성으로 섬기고(사군이충事君以忠),
② 어버이에게는 효도를 다 하고(사친이효事親以孝),
③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교우유신交友有信),
④ 전쟁에서는 물러서지 말며(임전무퇴臨戰無退),
⑤ 죽임은 가려서 해야 한다(살생유택殺生有擇).
◎ 고구려의 멸망과 ‘선비’
* 당나라는 한기 7857년(660년) 7월 13일 13만 대군을 휘몰아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장안에서 출병한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기벌포에 상륙하여 신라 5만 군사와 합세 단숨에 백제를 함락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고구려를 협공한다. 고구려는 대전했으나 당의 장수 이적에게 크게 패한다. 다시 2개월 뒤에 당군은 설필하력이 4만4000 보강병력을 인솔하고 평양성에 도착하여 이적과 합류하여 1개월 간 평양성을 포위한다. 또 4월에는 이들 군사를 총체적으로 재편하여 35군단으로 편성한다. (수나라가 1백1십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24개 군단이었음을 감안하면 공격군은 20만이 훨씬 넘었으리라 짐작한다.) 이에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남산에게 항복문서를 주어 항복하려 했으나 둘째 남건이 성문을 닫아걸고 강력히 저항한다. 그러나 남산의 가장 신임했던 부하 신성이 이적과 내통하여 스스로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고구려 보장왕은 자살에 실패한 남산과 수령 98명을 대동하고 백기를 들고 항복한다. 한기 7865년(AD. 668년) 12월 당나라는 대대적으로 항복의식을 거행하고 보장왕에게 사평태상백완외동정을, 남산에게는 사재소경, 신성은 은청광록대부, 남생은 우위대장군에 임명하여 회유하였고 남건은 검증으로 유배한다. 곧 당 고종은 5부, 16성, 69만호였던 고구려 행정체제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개정하고 평양에 안동도독부를 설치했으나 통치에는 실패했다. 고구려 유민들이 크게 저항운동을 전개했고 복속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어 대중상의 대진국으로 고구려는 다시 계승되었다.
* 고구려는 강력한 통치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한기 7862년(AD. 665년) 사망하자 내분이 일어났다. 동생 연정토와 연개소문의 세 아들 - 남생, 남건, 남산 간의 권력 다툼이었는데 이는 연개소문의 강력한 통치에 짓눌려 있었던 호족들이 억눌렸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권쟁탈이었다. 이러한 내부상황에서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직면한 고구려는 대비책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잃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권력투쟁에서 불리해지자 한기 7866년(AD. 669년) 9월 당나라로 망명하여 벼슬을 얻고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군의 앞장을 선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12개 성읍 3543명의 백성들을 끌고 신라에 투항하여 역시 고구려정벌군의 안내를 맡는다.
*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 뒤 지도층을 당나라에 인질로 잡아갔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고선지장군과 이정기장군이다. 고선지장군은 중국의 서역 개척에 큰 공헌을 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정기장군은 고구려가 망한 98년 뒤 산동지방에 유민왕국을 세워 55년 간 통치했다. 장군은 본래 산동지역 15주 치청절도사였는데 한기 7952년(AD.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상관이요 이모의 아들, 이종사촌이었으나 고구려 유민들을 학대한 후희일을 척살하고 ‘치청국’ 을 건설하였다. 치청국은 한기 7962년(AD. 765년)에 건국하여 한기 8016년(AD. 819년) 까지 55년 간 군사강국으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이정기장군이 49세에 한창 당 정벌을 준비하던 중 등창으로 죽었고, 이어 아들 이납이 등극하여 국호를 ‘제’ 라 하였다. 제나라는 양자강 하류의 물류교통의 이점을 확보하여 당나라 장안의 물자보급을 끊었으므로 장안주민들이 1년 동안 굶주림에 시달렸다. 당 덕종은 제나라의 세력에 밀려 수도를 장안에서 서북쪽 봉천으로 도망가다싶이 옮겼다. 3대는 이사고로 이납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양주를 점령하였다. 4대에 이사고의 이복동생 이사도가 즉위하여 낙양과 화음을 공략하였다. 한기 8016년(AD. 819년) 도지병마사 유오(중국계)가 이사도와 아들을 암살함으로써 제나라는 망했다. 당 조정은 3일 동안이나 잔치를 열어 제나라의 멸망을 축하했으며 고구려계 장수 1200명을 학살했다. 전거典據는 ‘신 ․ 구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구’, ‘태평어람’ 이다.
* 학살된 장수 대부분이 ‘조의’ 였다. 고구려는 조의라는 무사집단을 국가에서 길렀다. 고조선의 천지화랑에서 비롯한 국가무사다. 조의는 국가행사인 사냥대회에서 가장 우수한 사냥꾼을 가려 ‘선배’ 로 임명하고 국가에서 의식주를 책임졌다. 온달장군이 그 한 예다. 선배는 평화시에는 공공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국가 위기에는 수하조직을 모아 출전하여 패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선배 3만명의 우두머리였다. 유명한 안시성전투에서 앞장서 수나라 113만 대군을 물리친 ‘승군’이 조의였다.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승군으로 오해한 것이다.
남산골 수막새 단양 진흥왕적성비 영일 냉수리비 임신서기석
도깨비형상기와 * Daum Blog 인용 壬申誓記石
◎ 통일신라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
* 골품제도骨品制度
왕위를 이어가는 성골聖骨은 인물이 고갈되었고, 지도층이었던 진골眞骨은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되었으므로 통일신라 말기에는 골품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신귀족세력이 등장하였다. 호족豪族들이 지방의 행정과 군사력, 재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왕권이 약화되어 왕권을 복원하려는 의도였다. 기존권위를 부정하는 국토의 지방중심 재편을 주장하고 풍수지리설로 사상적 배경을 삼아 진골 16등급을 폐지하고 반귀족적 6두품을 신설하여 정치적으로 신귀족과 결합하였는데 그 배경은 유교정치이념의 정착이었다.
* 중앙정치조직과 지방행정조직
신문왕 때 공장부와 예작부를 설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으므로 집사부와 시중의 위상이 높았다. 왕권화 과정에서 유교정치를 이념으로 도입했는데 귀족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학에 견식이 뛰어난 6두품 집단이 국왕과 손을 잡고 귀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지방행정조직은 신문왕 때 9주 5소경의 지방행정제도 완성했는데 9주를 편성하여 민족융합책으로 관리를 골고루 등용하였다. 호족의 발호를 제어하기 위하여 상수리제도라는 인질제도를 실시하였다. 천민을 위한 향부곡제도를 설치했다.
* 군사조직
지방군은 10정으로 9주에 1정씩 배치하였고 수도방위군이 있었다. 중앙군은 9서당으로 편제하고 신라, 백제, 고구려인을 혼합 편성하여 민족융합을 꾀하였다. 중앙군당은 9서당으로 유민을 참여시켰는데 이는 견제와 회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 토지제도와 경제체제
귀족녹읍(토지에 대한 조세공납과 노동력 수취권을 귀족에 위임하는 제도)을 폐지하고 관료전(조세와 공물 수취권만 부여하는 제도)을 지급하였다. 융성의 절정기였던 성덕왕은 정전과 민전제도를 설치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함으로써 귀족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경덕왕 때 귀족들의 반발로 다시 녹읍을 부활했다. 이는 왕권의 약화를 뜻한다. 경제체제는 귀족중심으로 귀족들이 식읍과 녹읍 그리고 목장을 소유했다. ‘신라장적(경덕왕 755년의 기록을 1933년 일본에서 발견)’ 을 만들어 노동력과 생산력을 철저히 관리하였는데 정창원(청주 부근) 4개촌의 생산력을 3년 마다 기록했다. 촌주가 작성하였으며 내용은 인구를 연령별, 남녀별 6등급으로 나누고, 호수는 9등급으로 분류했다. 전답, 노비수, 뽕나무, 잣나무, 우마의 수를 기록한 문서다.
* 문화, 종교, 예술
독서3품과讀書三品科를 계획하여 대물림의 관료체제를 개선함으로써 왕권강화를 시도했으나 진골의 반대로 실시하지 못했다. 자주적 한문학을 개발하였으며 김대문과 6두품 출신의 최치원 같은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종교는 불교로써 5교(교종敎宗)는 주로 중앙귀족의 신앙으로 이를 통해 조형미술 발달을 가져왔으며 전통과 권위의식을 강조했다. 9산(선종禪宗)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목적으로 지방호족들이 선호했으며 교종에 대항하는 신앙이었다. 화엄종은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부석사에서 개설했다. 화엄사상을 주체로 하였으며 전제왕권 확립에 기여했다. 원효대사는 법성종을 창시하여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주체화하였고 불교사상의 체계화에 기여했다. 또 그는 종파 간 융합을 시도했으며 대중화를 꿈꾸며 정토사상을 추구했다. 예술은 안압지 축조에서 보듯이 조경예술이 뛰어났으며 조화된 자연미를 추구했다.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금동약사여래상이 있다.
4부 11화 고려시대와 후3국
◎ 묘상苗床의 각축角逐
후 3국 강역도 백제 부흥운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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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 3국은 대한역사의 과도기다. 역사학자는 이런 시대를 ‘묘상苗床의 시기’ 라고 하기도 한다. 한 나라 또는 한 시대가 스러지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묘판에서 싹이 트는 시대라는 뜻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그 유민들은 강력한 저항운동을 벌인다. 고구려를 이어받은 대조영의 대진국,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가 일어난다. 신라왕조 말기에는 국정이 문란하여 통치력을 잃었으므로 4방에서 도적들이 횡행하고 사회가 혼란하였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 부흥의 명분을 세워 영웅들이 일어선다.
이 시대의 특징은 우리 고유의 신앙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활발하게 정치적으로 발현되는 일이다. 왕조가 멸망하자 현실적인 사회의 구심점이나 이상이 사라졌으므로 사회는 미륵신앙과 풍수지리의 등 신앙으로 염원을 승화한다. 이에 도참설은 왕조말기의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는 명분 아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또 새로운 하나의 정치적 기반을 일궈낸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부처라고 했다. 신앙은 대물린 가난과 왕실을 비롯한 관리들의 횡포 그리고 착취에 시달린 백성과 민중의 바램을 등에 업고 이상국가 실현을 꾀한다.
* 견훤의 탄생과 왕건과 도선국사의 이야기는 설화說話다. 특히 도선국사는 나이 들어 전남 광양의 옥룡사에서 거의 두문불출杜門不出(문 밖을 나가지 않음)하였고, 도선국사의 스승이었다는 중국의 일행스님은 당나라 중기中期의 스님으로 도선국사의 출생 100여 년 전에 입적入寂(돌아가심)하였으므로 도선국사를 직접 지도하기는 불가능하다. 또 왕건이 태어난 해가 한기 8074년(AD. 877년)이므로 왕건이 16세 때 도선국사가 스승이 되어 가르쳤다는 한기 8090년(AD. 893년)은 도선국사가 입적하기 불과 4년 전이다. 게다가 스님은 한기 8093년(AD. 866년)에 지리산 자락 옥룡사에서 산문山門(불경강의)을 열고 입적할 때까지 산문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의상대사의 수행길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의상대사의 귀국길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서유기 소설로 잘 알려진 삼장법사(당나라 태종이 구도의 길을 따라 인도에 가는 현장법사에게 내린 칭호)는 13세에 출가해 여러 이론에 통달하였으나 원전原典을 접하려 AD. 629년 인도로 유학길을 떠난다. 서유기는 삼장법사가 구도의 길을 떠난 일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인도에 도착한 삼장법사는 인도의 여러 성지를 참배하고 대덕大德들을 찾아 불교와 학문· 예술을 익혀 한기 7842년(AD. 645년)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불교사는 일대 전환기(예전 경전을 구역舊譯, 삼장법사 이후를 신역新譯이라고 함)를 맞는다. 이 전환기에서 신라의 원효와 의상은 삼장법사를 만나기 위해 한기 7847년(AD. 650년, 진덕여왕 4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3개월 감금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는데 고구려 병사들은 의상과 원효를 신라에서 파견한 간첩으로 오해했다. 백제가 멸망(한기 7857년, AD. 660년)하고 난 다음해인 한기 7858년(AD. 661년)에 원효와 의상은 다시 유학길을 떠나 현재 화성시에 있는 남양반도 당항성에 이르러 무덤가에서古塚 잠을 자게 된다. 원효가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무덤 속 바가지에 든 물을 달게 마셨는데, 날이 새자 간밤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는 기겁을 하며 토해내고 만다. 이 때 원효는,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는데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크게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그냥 서라벌로 돌아간다. 이후 원효는 통불교를 제창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서라벌 거리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요석공주瑤石公主가 원효의 노래를 새겨듣고 원효를 요석궁으로 초대하여 동침한 바, 이두문자를 창제한 설총이 태어났다. 원효는 이를 두고 스스로 파계破戒로 단정하여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 혹은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자칭하며 무애가無㝵歌를 지어 그 노래를 거리에 퍼뜨렸으며 이를 통해 불교가 민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원효는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선구자며,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큰스님이다.
의상대사와 부석사 전설 그리고 선묘일화, 한편 혼자서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난 의상은 중국 당나라 산동반도의 신라방 법화원 인근 주막에 머물렀는데, 주막의 딸 선묘낭자가 의상의 귀골선풍貴骨仙風의 모습에 취해 청혼을 하였다. 목숨을 버리려는 의지로 청혼을 하였으나, 원효는 이미 출가한 몸으로써 결혼할 수 없다는 간절한 설득에 오히려 선묘낭자를 감화시켰고, 선묘낭자는 불교에 귀의하여 의상이 뜻을 펼치는데 그녀 자신이 도움이 되어야 되겠다고 스스로 결심하여 의상이 수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후견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의상은 삼장을 만나기 위하여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되면서 선묘낭자와는 헤어지지만 선묘낭자는 의상의 주위에서 의상의 수도생활을 돕는다.
의상은 장안에 당도해서는 그토록 염원했던 삼장법사의 문하생을 포기하고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새로운 학문(화엄華嚴)을 공부하게 된다. 의상은 구법승 현수賢首와 더불어 지엄스님의 수제자가 되지만, 나당연합을 만들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당나라가 연합의 약속을 깨고 신라를 쳐서 속국으로 만들려한다는 정보를 알고 10년 만에 조국인 신라를 위하여 서둘러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의상은 귀국하는 길에 선묘낭자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후의에 감사를 드리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낭자가 의상이 귀국한다는 걸 알고 급히 밤 새워 만든 가사장삼袈裟長衫을 전해주지도 못했는데 의상이 배를 타고 떠났다는 걸 알았다. 선묘낭자는 의상이 떠난 부두에 닿아 이미 멀리 사라져가는 배를 향해 의상대사에게 전해지기를 축수하며 가사를 던졌으며, 이어 자신도 의상대사가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해룡이 되어 의산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기를 축원하며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귀국하여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는 선묘낭자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선묘각을 지었고,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바위가 공중에 들려올라가는 이적을 배풀어서 부석사라 했다.
의상(원효는 6두품 출신)은 성골인 왕가 출신이라 기본적으로 왕실과 가까운 신분이었다. 고국 신라에 돌아와서 당나라의 침공 정보를 알려주고 화엄종을 보급하려고 양양 낙산사에서 첫 도량을 짓고 포교활동에 전념하는데 당시 화엄사상은 새로운 사상이었다. 화엄사상은 인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장점을 접목한 것이고, 부처님이 21일 동안 깨달음을 얻을 때 느끼는 그 순간이 화엄, 화엄종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종파로 일체 천지만물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현顯現으로 보며,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전 우주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통일적 입장에 있다.
하나 안에 일체一切요/ 많음 안에 하나이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음陰이 곧 하나이다/ 한 띠끌 속에 시방十方을 머금고/ 체體의 티끌 속 또한 이와 같다
해동 화엄종 종조 의상은 신라 문무왕 16년(한기 7873년, AD. 676년) 화엄종의 본산을 삼기 위하여 부석사를 창건한다. 부석사는 화엄종 도량이지만 아미타불이 주불이다. 파격적으로 아미타불에 항마촉진降魔促進하는 자세를 취하려 했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을 세워 극락세계를 보여 주고자 했다.
무량수전을 바라보며 그 앞 뜰에 누워있는 석룡(해룡, 선묘낭자의 화신化身),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된 의상대사의 그림, 또 다른 이야기는 의상이 화엄사상을 전파하려고 그 곳에 부석사를 지으려하자 토착세력이 극력 반대 그러자 용으로 변한 선묘낭자의 도움으로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서 그들을 진압하여 무사히 창건 할 수 있었다 하여 부석(浮石)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최근, 부석사의 석룡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최첨단 레이다 탐사 결과 실제 길이가 무려 13m에 이르는 거대한 석룡을 발견, 자연 암반 형상으로 용의 등줄기가 솟아있었고, 밑으로 내려가며 좁아지는 꼬리의 형상, 전체적으로는 조금 휘어있는 석룡의 형태다. 영원히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용의 실체가 드러난 것. 꼬리는 땅을 향하고 머리는 부처가 있는 본존불로 향하고 마치 하늘로 승천하려는 형상을 한 부석사 수호신 석룡
부석사 선묘각 원효대사
속성 설薛, 법명 원효. 경산시 압량(押梁, 경산군慶山郡)에서 태어난 원효는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며, 스님이 되어 원효라는 이름을 받기 전에는 휼륭한 화랑이었다. 당시에 화랑의 신분은 장차 장군이 되거나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는 선택된 젊은이들의 무리였다. 원효대사는 한글 이전에 사용한 이두문 창제학자 설총薛聰의 아버지다. 나이 32세 되던 해 한기 7845년(AD. 648년, 진덕여왕 2년)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한기 7858년(AD. 661년)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시 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을 하고 배를 타기 위하여 백제로 가다가 밤이 늦어서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굴 속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밤에 잠에서 깬 원효대사는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을 찾다가 옆의 그릇에 담긴 물을 아주 달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깨어난 원효대사가 다시 물을 찾다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순간, 진리를 깨우친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마음이 일어난 즉 여러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니 해골과 바가지가 둘이 아니로구나/ 3계가 오직 마음뿐인데/ 당나라에 가나 신라에 있으니 항상 그 마음인 것을 …
원효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할 생각을 버리고 곧장 서라벌로 돌아와 깨달은 바를 책으로 썼다. 그것이 '화엄경소', ' 대승신기론', '십문화정론' 이다. 그 후 원효는 절에서 나와 전국을 돌며 부처님의 가름침을 폈고, '무내가' 라는 노래를 만들어 모든 대중이 쉽게 염불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귀족만이 차지하던 불교를 온 백성이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 원효의 취지였다. 겉치례를 배제하고 일반 백성들과 더불어 생활하였으며,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이두문자 완성자)을 낳기도 하였다. 귀족과 승려들은 그를 파계승이라 백안시하였으나 왕과 고승들에게‘금강삼매경’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일반 백성들로부터는 ‘살아있는 부처(생불生佛)’라 칭송을 받았다. 한기 7883년(AD. 686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신라인들은 통곡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 했다.
* 후3국 역사연대표
시대 | 후백제 | 후고구려 | 통일신라 |
* AD. 867 | * 견훤, 상주 가은현 출생 | ||
* 870 | * 궁예 출생 | ||
* 876 | * 도선, 왕륭에게 명년에 3한 통일 인물 출현 예언 | ||
* 877 | * 왕건 출생 | ||
* 889 | * 아자개, 상주 장악, 장군 호칭, 수군 견훤 독립 | * 상주 원종, 애노의 난 | |
* 891 | * 궁예, 죽주 도둑 기훤 투신 | ||
* 892 | * 견훤, 무진주 (전남 광주) 장악 | * 궁예, 북원(원주) 양길 투신 | |
* 893 | 왕 호칭 | * 도선, 왕건 교육 | |
* 894.2 | * 최치원 시무10조 진상 | ||
10 | * 궁예, 명주(강릉)에서 장군 호칭 | ||
* 896 | * 왕륭 왕건 부자 귀순 | ||
* 897.6 | * 진성여왕 선위 | ||
* 898 | * 궁예, 송악성 천도, 팔관회 개최 | ||
* 899.7 | * 양길, 궁예 공격 대패 | ||
11 | * 최치원 면직 해인사 은둔 | ||
* 900.10 | * 견훤 완산 도읍, (후)백제 건국 | * 궁예 경기 남부 충북 장악 | |
* 901.8 | * 견훤,금성군 남쪽 10여개 성 공격, 대야성 공격 실패 | * 궁예 왕 호칭, 후고구려 건국, 영주 부석사 신라왕 화상 칼로 벰 | |
* 904 | * 궁예, 백관 설치, 국호 마진, 연호 무태 | ||
* 905.2 | * 별이 비오듯 쏟아짐 | ||
* 905.7 | * 궁예, 철원 천도 연호 성책 | ||
* 908.2 | * 동방에서 혜성 출현 | ||
* 909 | * 궁예, 왕건 해군대장 나주출전 | ||
* 911 | * 궁예, 국호 태봉, 연호 수덕만세 | * 효공왕 정사문란, 대신 후궁 척살 | |
* 913 | * 궁예, 왕건 파진찬 겸 시중 임명, 수군 통솔 좌천 | ||
* 914 | * 왕건 역모죄, 한림랑 최응 구함 |
부여 백화정과 평양 대동문 고구려 성산산성 일본 교토 정교사
고란사 * Daum Blog 인용 안내비석 백제 아미타 8대보살도
# 후백제 견훤(진훤)의 출생설화(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수회 인용)
옛날 광주(광역시)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다. 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용모가 곱고 자태가 뛰어났으며 행실이 바르고 단정했다. 딸이 성숙한 나이에 접어들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밤이면 전혀 모르는 사내가 딸의 침실로 찾아드는 일이었다. 용모가 빼어나게 준수하고 보랏빛 옷을 잘 차려 입은 사내는 날마다 밤에 찾아왔다. 그리고 새벽이면 사라졌다. 딸은 이러한 일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으나 사내를 거절하지 못했다. 너무나 준수하고 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많은 날들이 계속되자 딸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에게 고민을 이야기 하고 신분을 밝혀주면 부모에게 말씀드려서 혼인을 하겠다고 했으나 여전히 사내는 이렇다 저렇다 단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만나면서 지금까지 전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딸은 사내에게 자기는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내를 따르겠다는 약속을 하고 남몰래 저지르는 이러한 일이 계속될 수 없음을 몇 번이나 정성들여 말했다. 딸의 간곡한 호소에도 사내는 묵묵부답黙黙不答(말이 없음)이었다. 딸은 마음을 졸이다가 병이 되었다. 딸의 행동이 예전 같지 않고 날이 갈수록 병색이 짙어가는 딸의 정황을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가 딸에게 캐물었으나 딸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가, 어디가 아픈 거냐?”
“아니예요.”
“어디 아픈 데가 있거든 얘기하려무나. 얼굴빛도 좋지 않고 …. ”
“실은 …. ”
딸은 끝까지 비밀을 혼자 지키려고 했으나 자기 힘으로는 풀 길도 없고 언제까지 감출 수도 없는 일이라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자초지종自初至終(처음과 끝)을 말씀드렸다. 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귀신의 조화란 말인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아버지가 딸에게 일렀다.
“오늘 밤에는 몰래 바늘에 실을 꿰어 옷섶에 꽂아두거라.”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사내가 잠든 사이에 옷깃에 바늘을 꽂았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와 딸은 실이 풀려가는 길을 따라갔다. 실은 꼬불꼬불 골목길을 지나 어느 집 담장 밑으로 들어갔다. 담장 밑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실이 그 구멍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구멍을 파 보았더니 깊은 구멍 속에 커다란 자주색 지렁이가 몸에 바늘이 꽂힌 체 죽어 있었다. 처녀는 열 달 뒤에 아들을 낳았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다.
견훤은,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아자개가 군사를 일으켜 난을 수습하고 장군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무진주(전남 광주)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나주지방 수군의 비장(고을 수령 다음의 제 2인자)이었던 아들 견훤이 아자개의 기반을 토대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 후 견훤은 신라와 전쟁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싸울 때마다 이김)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고 백제를 계승한 ‘후백제’ 라 이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통치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금강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결정하자 첫째 부인의 장자인 신검이 반발하여 양검, 용검 형제와 함께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전라북도)에 가두었다. 견훤은 3개월 뒤 딸과 사위와 더불어 서해안으로 탈출하였는데 은밀히 견훤의 탈출을 도운 고려는 상부尙父(아버지)의 지위를 주고, 남궁을 견훤의 살림집으로 내주었으며, 양주를 식읍(다스리는 땅)으로 주어 부족함이 없이 살도록 배려하였다. 신검은 이후에 신라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으나 아버지 견훤과 왕건이 앞장 선 일선군(선산)싸움에서 무참하게 진 뒤 고려에 항복하였다.
# 후고구려 궁예의 출생설화(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수회 인용)
* 궁예는 신라 왕가의 후궁에서 태어난 왕자였다. 신라 말기에 정국이 매우 혼란스러워 정권싸움이 자심하였으므로 궁예는 정쟁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갔는데 탈출할 때 알려져 쫒기다가 성벽에서 내던져졌다. 그러나 밑에서 받는 사람의 실수로 왼쪽 눈이 찔려 애꾸가 되었다. 궁예는 궁중에서 도망한 다음 절에서 이름 없는 불목하니(부엌에서 불을 지피는 머슴)로 자랐다. 선배와 동료들에게 온갖 시달림을 당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매우 반항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절의 법도와 스님의 계율을 지켜 수도하는 것 보다는 칼 쓰기, 활쏘기를 즐기고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 무술을 익히며 스님으로써는 망나니에 가까웠다. 그래서 스승에게도 늘 꾸중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이 궁예를 불렀다.
“궁예야, 너는 아무래도 산을 내려가는 것이 옳을듯하구나.”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아니다. 네 잘못을 꾸중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은 너에게 네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마.”
스승은 뜻밖의 비밀을 들려주었다. 궁예가 신라왕의 왕자라는 것과 궁예가 궁중에서 탈출할 때 일어난 사건을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궁예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절을 내려와 죽주의 도둑무리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의심이 많고 애꾸인 궁예를 푸대접하였으므로 다시 산을 나와 북원(원주)의 양길의 무리에 합세하였다. 양길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궁예는 이어 부두목이 되었다. 궁예는 예사 도둑이 아니었다. 궁예는 자기를 축출한 신라왕가를 토벌하여 왕자의 지위를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상을 지닌 궁예는 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므로 뜻을 세워 일어서자말자 곧장 3500명의 대 부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궁예는 북원(원주)에서 명주(강릉)로 쳐들어가 기반을 잡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불렀다.
궁예는 민심을 얻었으므로 백성들이 따르고 지방 호족들과 좋은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송악의 왕륭과 왕건 부자가 귀순한 일은 궁예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왕륭은 궁예에게 귀순하며 왕건을 중요하게 쓰도록 권유했고 왕건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궁예의 뜻에 보답했다. 그러나 나라의 힘이 굳건해지고 나라의 밑받침이 쌓이는 시기에 궁예는 의심이 많아지고 주위를 믿지 못하는 성격이 나타났다. 왕후 강씨를 의심하여 불에 달군 쇠부지깽이로 국문(심문)하여 죽였으며, 이어 강씨와 자기의 소생인 두 왕자도 죽였다. 신하들도 분별없이 죽이고 물리쳤으므로 불안한 신하들이 전전긍긍戰戰兢兢(어쩔 줄 몰라)하였다. 자신을 미륵의 화신이라 스스로 추대하고 부처님이 되었으며 불경을 지어 반포하였다. 관심법觀心法을 자행하여 사람의 속셈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호언하며 무수한 사람들이 쫓겨나거나 죽었다. 승려 석총은 당대의 고승이었는데 궁예가 지은 불경을 쓰레기라고 비판했다가 궁예가 내리친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왕건도 몇 차례 위기를 넘겼는데 반역을 도모한 혐의로 불려와 사경에 처했을 때 한림랑 최응이 임기응변으로 구해 가까스로 연명한 일도 있었고 몇 번이나 좌천되고 추천되는 반복을 거듭했다. 신하들은 불안에 떨고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이에 마군장군 신숭겸, 홍유, 복사귀, 배현경들이 모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혁명을 모의했다. 그러나 왕건은 사양했다. 왕건의 집으로 찾아온 그들은 동석한 왕건의 부인에게 술안주로 하게 텃밭의 오이를 가져다달라고 자리를 피하게 하고 왕건에게 혁명세력의 추대를 승락할 것을 모두가 무릎을 꿇어 간청했다. 그래도 왕건은 군왕과 신하의 의리를 들어 거절했다. 이를 미리 간파하고 옆방에서 엿듣고 있었던 부인이 왕건의 갑옷을 가지고 와서 왕건에게 입혔다. 비로소 왕건이 승낙하고 혁명은 성공하여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궁예는 모반의 소식을 듣자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왕건이 그럴 리 없다고 반신반의하였으나 결국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왕의 옷을 벗고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궁성을 탈출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맞아죽었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뒤 영주 부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신라왕의 화상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분을 참지 못하여 화상을 칼로 내려쳤다고 한다. 신라 왕실에 대한 반감이었다.
# 고려 왕건의 출생과 도선국사 설화(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수회 인용)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개성의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림을 차렸다. 어느 날 도선국사(백두선인)가 왕륭의 집 앞을 지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허, 기장(쌀, 보리, 콩, 조와 더불어 5곡의 하나)을 심을 터에 어찌 삼(삼베의 원료)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한씨가 남편에게 전했고 왕륭은 도선국사를 쫓아가 동구 밖에서 만났다. 공손히 예를 올려 삼가 뵈옵기를 청하니 도선국사가 왕륭에게 말했다.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이치)에 부합하여 이 집에서 명년에 슬기로 운 인물이 태어나리니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봉투를 만들어 겉에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3한을 통일할 주인 대원군자를 당신에게 드리노라’ 라고 써주었다. 왕륭은 도선국사를 모셔가려고 몇 번이나 머물기를 간청하였으나 도선국사는 곧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기다리라고 하며 떠났다. 왕륭은 봉투를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도선국사가 말한 대로 집을 지었더니 예언대로 다음 해에 왕건이 태어났고 스님은 약속대로 왕건이 16세 되던 해에 다시 찾아와 2년 동안 왕건의 스승이 되어 가르쳤다. 두 번째의 만남에서 도선국사는 왕건에게 왕도를 전수했으며 또한 비기 선기옥형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선기옥형은, 연개소문의 반란 때 군사들이 신궁을 범접하고 소도가 불타자 천지화랑과 신녀들이 도피시켰다. 고구려 주몽제가 백두선인으로부터 물려받았던 백두산의 동굴이었다.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영예를 얻고 새 나라를 세우는 절차였다. 왕건은 궁예를 물리치고 고려를 창건하자마자 백두산으로 달려가 선기옥형을 참배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기틀이 완성되자 신궁을 세우고 소도를 설치한 뒤 선기옥형을 안치했다. 고려의 500년 역사가 여기에서 비롯했다. 왕건이 백두선인 즉 도선국사에게 선기옥형을 전수받은 일은 역사의 기록에는 없으나 왕가에 비전되는 설화로 이어져내려왔다.
*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그 어머니가 빨래를 하다가 시냇물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낳았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시조다. 전국 방방곡곡에 도선국사의 전설이 흩어져있다. 도참설의 창시자 중국 당나라 일행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조선시대 초 무학대사가 조선의 새 궁궐터를 물색하던 중 한양(서울)의 삼각산에 올랐는데 ‘무학, 여기에 잘못 오르다’ 라는 도선국사의 비기(비밀로 전해 내려온 비석)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무학대사가 삼각산 만경대(국망봉)에 올랐을 때 궁궐터를 왕십리 부근에 잡으려고 했는데 정확한 자리가 마땅치 않아 머리를 싸매고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던 때, 어느 날 소를 타고 가는 한 노인과 마주쳤다. 무심코 지나치는데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이 놈 소야, 미련하기가 무학이 같은 놈이로고. 왜 바른 길을 두고 굽은 길로 가느냐!’ 고 소를 채찍질했다. 눈이 번쩍 뜨인 무학대사는 노인에게 정중하게 가르침을 빌었고 노인은 여기서 10리를 더 가라고 했다 한다. 노인은 무학대사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도선국사의 현신(나타남)이었으며, 서울의 왕십리는 여기서 생겨났다.
고구려는 한국사 풍수지리 비조鼻祖 도선국사와 풍수지리개념도 지구촌
주은래(오른쪽) 방담 풍수의 한국 위치 * Daum Blog 인용
◎ 통일신라의 멸망
* 말기로 내려오면서 통일신라는 골품제도가 문란해지고 왕위쟁탈이 자심하여 중앙집권력, 왕권이 약화되었다. 김현창은 헌덕왕 14년 한기 8019년(AD. 822년) 난을 일으켜 ‘장안국’ 을 건국하고 연호를 정운이라고 했다. 36대 혜공왕 때는 ‘대공의 난’ 이 있었고, 지방세력들이 성장하여 호족세력으로 대두되었다. 그 예로 나주에서는 해상세력이 대두했고 군소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국가정신은 약화되고 화랑도는 개인주의가 팽배하였으며 사치와 향락풍조가 만연하였다. 농민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진성여왕 때는 농민들이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 한기 8084년(AD. 887년)부터 진성여왕의 문란한 생활, 대야주의 은자거인 사건, 상주의 원종와 애노의 난, 평주의 대호족 박지윤 가문 궁예에게 귀순, 왕륭 왕건 부자 귀순, 최치원 면직, 견훤의 후백제 건국, 공주 장군 홍기 궁예에게 귀순, 별이 비오듯이 떨어짐, 강주 장군 윤응 궁예 귀순, 명주 장군 김순식 귀순, 진보성주 홍술 귀순, 견훤이 신라 왕경에 침입 경애왕 자살 경순왕 보위에 올림, 동쪽 110여성 고구려에 항복 등 끊임없는 내우외환內憂外患과 후백제의 침공으로 통일신라는 국운의 쇄락을 막을 길이 없어 환란 때마다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드디어 한기 8132년(AD. 935년) 10월, 경순왕이 김봉휴를 보내 고려에 투항을 상의했다가 그 해 11월 백관百官(모든 신하)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왕건은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고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후비后妃로 주었으며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 잡간 억렴의 딸과 혼인했다.
◎ 미륵신앙과 풍수지리 그리고 선기옥형
* 미륵신앙은 백성들의 현실지향 이상국가의 염원이다. 미륵부처님의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특히 세기말이나 국가 쇠망기에 집권자의 힘이 쇠퇴하고 지도층의 생활이 퇴폐적이고 부패가 만연되어 사회상이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현실을 도피하려는 미래지향적 이상이 두드러진다. 고대의 지도자들은 신화적 인물이었으나 근세의 지도자는 영향력이 큰 인간이었으므로 신화로 각색할 수도 없었고 부처라든지 미륵임을 구체적으로 말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궁예는 오랫동안 절에서 터득한 경륜으로 스스로 산 부처가 되었다. 법회를 열고 불경을 집필하며 국가통치체제의 기치를 불교적 이상국가로 내걸었다. 아들들의 이름도 보살로 지었다. 관심법(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일)이라는 심리적세계를 끌어들여 통치를 신격화하려고 했다. 이런 일은 종교에서는 가능하지만 국가경영자로써는 합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는 왕조말기의 행태로 부패와 부조리가 발호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륵신앙과 풍수지리설 등 이상주의가 널리 퍼졌다.
도선국사는 풍수지리의 비조鼻祖(始祖)다. 중국의 일행 스님에게 사사(배움)를 했다고 하나 역사연대로 봐서는 믿기 어렵고 그 사상적 후계를 이었다고 본다. 도선국사는 한국 방방곡곡에 도참설을 심어 오늘날까지도 도선국사의 행적이 여기저기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기론에 의하면 우주 삼라만상이 우주의 운행질서의 이치로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그리며 돌아가는데 자연 안의 하나인 인간도 우주질서의 운행에 따라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래서 사주팔자나 풍수지리가 인간의 삶에 대입된다. 여기에 미륵신앙이 개입한다.
* 이와 같은 민속신앙적 토대에서 선기옥형은 이상주의적 과학의 산물이다. 우주천체를 선기옥형으로 모사하여 만들어놓고 있지만 천체운행의 요체는 심안, 마음이었다. 모사해놓은 선기옥형이 오히려 상징적이었던 것이다. 요즘 경주의 첨성대가 실제 천문관측대가 아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견해가 있다. (요즘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이라는 연구 결과, 이 역시 제단과 천문 관측 역할 수행 시설, 위 장방형 틀에 선기옥형을 안치했다고 생각함) 고작 10미터 남짓한 단을 쌓고 천문을 관찰하는 일은 과학적 의미가 없다. 높이 올라가 하늘을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면 더 높은 구릉지대나 산이 있었지 않은가? 마니산의 참성단은 산 정상의 제단(요즘에 참성단이 제사와 천문 관측 시설이라는 연구결과 발표)이다. 하늘과 소통하는 장소는 대부분 산 정상이었다. 첨성대는 평지제단이었을 것이다. 첨성대는 선기옥형을 설치하여 천체 운행을 관찰하고 하늘에 제사도 지내는 천체운행 관측의 제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기옥형은 천체운행의 원리를 본떠서 만든 천문관측기로써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여 생활과 직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망원경이 없었던 시대에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일은 누적된 기록과 천체 변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주술적이거나 초인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심안의 세계와 결부하여 판단하는 일이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이 일을 대개 신관이 맡았는데 고려시대에서는 서운관, 조선시대에서는 관상감의 관리들이 맡았다. 선기옥형(혼천의)은 한국에 세 개가 남아있다. 선기옥형 원형, 고조선 신시시대 한인천왕이 하늘에서 가지고 내려온 천부인 선기옥형은, 그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게까지는 도선국사를 통해서 전수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전승하지 못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전국의 명산 30여개를 수행자처럼 순례하면서 찾으려고 했으나 얻지 못했다. 그에게는 왕사 무학이 있었으나 무학을 통해서도 선기옥형을 얻지 못했다. 선기옥형을 전수하는 하늘의 뜻이 무학에게도 닿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은 선기옥형을 얻지 못하였고, 태종 때 농부가 대동강변에서 발굴한 ‘천상분야열차 각석’ 으로 천체 운행을 살폈을 뿐이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 들어서자 선기옥형을 제작하여 사용했다. 고구려 주몽제가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 데리고 고구려를 떠날 때 주었던 모사한 선기옥형을 참조했으리라는 가정 뿐 이 또한 기록이 없다. 조선이, 이성계가 선기옥형을 전승하지 못한 이유는 모른다. 단지 하늘의 뜻으로만 파악한다. 선기옥형은 천지화랑과 함께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계승하여 복원하려는 이들이 있다. 1만 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천지화랑(선비)의 후예들이다. 단순한 선기옥형 실체의 복원이 아니라 대한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을 영적인 세계, 정신계발이다.
3신할미, 탄생설화 3신각 비파형 동검과 유물 청나라 서태후
생명의 꽃 * Daum Blog 인용 (조선인설)
# 전남 장성의 고봉학술원 애일당, 선기옥형을 복원하려는 수도자들에게 하는 운곡선생의 정기강의
(전략) 한 예를 들어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자신의 출생이 신라의 왕자였다는 것을 안 뒤에 삶이 달라집니다. 망나니생활에서 벗어나 웅대한 이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산 부처로, 미륵의 환생으로 이상국가의 실현을 펼치려고 했습니다. 제정분리시대에서 정치적 판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궁예는 국가를 창업할 수 있는 자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를 꿰뚫어 본 사람이 한림랑 최응입니다. 최응은 소년천재로 약관에 발탁되어 궁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궁예는 최응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습니다. 궁 안에서 살게 하고 국가 크고 작은 일로부터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모두 최응에게 물어서 결정하였습니다. 최응이 발탁되었을 때 그는 궁예의 이상국가 실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최응은 몇 번이나 벗어나려고 했지만 궁예에게 매인 인연의 사슬은 너무 질겨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응이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왕건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왕건도 궁예에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결정적인 고비는 왕건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참소(고발)였습니다. 최응이 이를 먼저 눈치채고 왕건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고지식한 왕건은 최응의 충고를 듣지 않고 궁예에게 붙들려왔습니다. 궁예는 관심법을 들먹이며 왕건의 반역을 다그쳤습니다.
궁예 : (불 같이 격노하여 석장을 궁궐 바닥에 내리치며) 내 그대를 형제로 부르며 내 몸처 럼 신임했거늘 반역을 꾀하다니 ….
왕건 : 폐하! 신은 결코 반역을 한 일이 없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궁예 : (석장을 왕건의 머리 위에 내리칠 듯이 들이대며) 짐이 관심법을 한다는 사실을 알 지 못하는가?
왕건 : (엎드려 마루에 이마를 찧으며) 폐하! 어찌 신이 폐하에게 반역을 도모하리까? 폐하! 제 아비를 상기하소서!
궁예 : (한층 누구러지며) 네 아비 왕륭이 내 목숨을 구해준 일은 잊지 않는다. 그러나 네 배반은 용서할 수 없다.
왕건 : 폐하! 목숨을 버리라면 버리겠나이다. 그러나 신의 결백은 믿어주시옵소서.
궁예 : 그래도 이 놈이! 내 관심법을 우습게 보누만.
한림랑 최응 : (곁에 부복하여 있다가 들고 있던 서책을 왕건의 발 앞에 떨뜨린다. 서책을 줍는 척 하며 왕건에게 눈짓을 하며) 장군, 폐하의 관심법은 신통미묘합니다. 자복하시 지요. 이미 폐하께서 다 알고 말씀하시는 것이니 …. 자복하고 목숨을 비십시오.
왕건 : (최응을 한 번 쳐다보고 작심한 듯 그러나 난감한 표정으로) 폐하! 죽을 죄를 졌습 니다. 반역을 꾀했나이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궁예는 왕건이 자복하자 자신의 신통한 관심법에 깊이 빠져들어 자만심이 더욱 커지고 자칫 죽을뻔한 왕건은 한림랑 최응의 기지로 살아났습니다. 한림랑 최응은 나이 어린 천재소년 선비였습니다. 선기옥형으로 천문을 통달하여 천리를 꿰뚫고 있어 왕건의 고려 건국을 예견하고 있었으나 궁예에게 의탁한 몸이었고 궁예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으므로 끝까지 인연을 버리지 못하였지요.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우자 최응은 입산하였습니다. 병이 들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궁예의 죽음을 목격한 최응은 왕건의 왕실에 남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최응은 궁예의 비극적인 삶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궁예의 부름에 따라나섰고 왕건을 살려냈으나 궁예도 버리지 않고 한 시대를 마무리 한 것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예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선기옥형의 설계도가 완성되었으니 재료를 마름질 하는 일이 시작되리라고 기대합니다.
◎ 격동하는 사회, 고려
고구려 계승 고려의 전성기 강역과 여진정벌도
중국 동북부, 왜 통치 강역도 * Daum Blog 인용
* 고려역사연대표
1대 태조 한기 8115년(AD. 918년) - 36대 공양왕 한기 8589년(AD. 1392년),
34대 473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태조 | AD. 918-943 | 궁예 의탁, 장군들의 혁명 왕건 왕권 획득 |
2대 | 혜종 | 943-945 | 태조의 장자 |
3대 | 정종 | 945-949 | 왕규의 난 평정, 불교 숭상, 서경 천도 계획 |
4대 | 광종 | 949-975 | 노비안검법, 과거제, 공복제도 실시 |
5대 | 경종 | 975-981 | 전시과(관리 안정의 새로운 토지제도) 제정 |
6대 | 성종 | 981-997 | 유교 수용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
7대 | 목종 | 997-1009 | 전시과 개정, 학문 장려, 강조에게 피살 |
8대 | 현종 | 1009-1031 | 강조 옹립, 거란 침입 혼란 강화, 문화 발전 |
9대 | 덕종 | 1031-1034 | 거란 대비 천리장성 축조, 국사 편찬 완성 |
10대 | 정종 | 1034-1046 | 천리장성 축조, 적자 상속 적서 구별 법제화 |
11대 | 문종 | 1046-1083 | 율령 관제 병제 완비, 학문 열성 서예 능함 |
12대 | 순종 | 1083 | 문종 장자, 즉위 해 사망 |
13대 | 선종 | 1083-1094 | 동생 대각국사 의천, 문화 융성기 |
14대 | 헌종 | 1094-1095 | 이자의의 난 평정, 병으로 숙부 양위 |
15대 | 숙종 | 1095-1105 | 해동통보 주조 화폐제도, 황금시대 전개 |
16대 | 예종 | 1105-1122 | 학교 설립 학문 진흥 |
17대 | 인종 | 1122-1146 | 이자겸과 묘청의 난, 김부식 3국사기 편찬 |
18대 | 의종 | 1146-1170 | 정중부의 난 폐위 |
19대 | 명종 | 1170-1197 | 정중부 추대 등극, 최충헌 폐위 |
20대 | 신종 | 1197-1204 | 최충헌 옹립 등극 |
21대 | 희종 | 1204-1211 | 최충헌 제거 실패 폐위 |
22대 | 강종 | 1211-1213 | 최충헌 추대 등극 |
23대 | 고종 | 1213-1259 | 몽고 침입 강화도 천도, 8만대장경 간행 |
24대 | 원종 | 1259-1274 | 삼전도 굴욕, 임연, 3별초 난 |
25대 | 충렬왕 | 1274-1308 | 원에 굴복, 왕명에 忠字, 왕비 원 제국공주 |
26대 | 충선왕 | 1308-1313 | 등극 10년 만에 원나라에서 국정, 학문 교류 |
27대 | 충숙왕 | 1313-1330 | 정사 염증 양위, 2년 만에 복위 |
28대 | 충혜왕 | 1330-1344 | 정사 혼란, 원나라 귀양 가던 중 병사 |
29대 | 충목왕 | 1344-1348 | 원나라 볼모, 모 덕녕공주 섭정 |
30대 | 충정왕 | 1348-1351 | 외척 발호 정치 문란, 왜구 침입 |
31대 | 공민왕 | 1351-1374 | 원나라 배척 기씨 제거, 국토 수복, 노국공주 |
32대 | 우왕 | 1374-1388 | 10세 즉위, 위화도 회군 이성계 폐위 |
33대 | 창왕 | 1388-1389 | 이성계 세움, 1년 만에 강화도 축출, 시해 |
34대 | 공양왕 | 1389-1392 | 이성계 세움, 실권 탈취 폐위, 고려 멸망 |
직지심경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고려청자
1377년 인쇄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 Daum Blog 인용
* 고려는 고려인삼과 고려청자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청자의 신비한 색조는 맑은 하늘빛 비취색이다. 오늘날도 재현하기 어려운 이 빛깔을 고려 백성, 그러니까 민중의 염원이 서린 빛깔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유난히 민란이 많았다. 고려역사를 민란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천민들까지도 반란을 일으켰다. 말하는 짐승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섰던 것임
* Corea(꼬레아)는 고려시대 이후 불리운 대한 이름이다. 유럽권이나 스페인어권에서 사용했던 고려의 이름이 대한의 범세계적인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를 물려받은 Korea가 대한민국의 공식명칭인데 젊은이들은 Corea를 고집한다. Korea가 일제시대의 잔재殘滓로써 한국명을 영어 알파벧 C(Corea)로 시작하면 일본의 J(Japan)가 뒤에 오기 때문에 일본제국 식민지통치 때 일부러 K(Korea)로 시작하는 명칭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대한민국의 호칭은 Corea였는데 언제부턴가 Korea로 바뀌었다. 국호를 함부로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젊은이들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면 일제청산과 민족정기 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
덧붙여 ‘한국’ 이라는 명칭은 일본제국이 조선사편수회에서 ‘임나고’ 를 조작하면서 만들어냈다. 일반적으로 ‘대한제국’ 이나 ‘대한민국’ 의 준말이라고 여겨지나 ‘한국’ 은 준말일 수 없다. ‘한’ 은 순수한 우리 말의 ‘한’ 인데 한자를 빌어 쓰면서 ‘韓, 桓’ 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대大한’ 은 중국이 사용하는 ‘대청국大淸國’ 이나 ‘대당국大唐國’ 같은 문법적 맥락이다. 해방 이전까지는 ‘대한’을 사용하였다 (Daum의 블로그 ram2dam 인용). 애국가의 ‘대한사람’ 이나 ‘대한독립만세!’ 를 보면 알 수 있다. 영국은 대영제국, 일본도 제 나라를 대일본제국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호를 논의하여 투표로 결정했다. 그러나 준말을 ‘한국’ 으로 공식화하지는 않았으니 고려해야 한다. ‘Corea’나 ‘대한’ 을 공식적으로 변경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으나 국호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으니 외교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그리고 사회에서 공용화하면 될 것이다. 흔히 쓰는 ‘한반도’ 와 ‘한국기원, 한기’ 그리고 Corea, ‘대한민국과 한국’ 들은 역사학 그리고 사회학적 접근이 요청됨
* 신라 천년은 역사의 일어남과 스러짐에 의한 왕조의 멸망이라고 보더라도 궁예의 한 장군에 불과했던 왕건이 일어서고, 웅대한 이상을 품고 백제의 옛 땅을 거의 장악하여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늘을 찌를 듯 한 기상)의 기세로 3한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었던 견훤은 국가 건설의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당대에 몰락한다. 이는 역사적 필연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건국자로써 제왕적 기반의 문제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3국은 왕건의 고려 건국을 위한 역사적 과도기였고 묘상苗床(새싹을 키우는 못자리)의 시기였다. 왕건은 자중지란自中之亂(안에서 스스로 무너짐)으로 무너져 내린 견훤의 후백제를 일산(선산)전투의 승리로 복속시키고, 신라마저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스스로 항복 귀순하여 왕도王道가 열린다. 그러나 왕권이 취약하여 왕가와 귀족 그리고 유력한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혼인동맹을 하였는데 후궁이 무려 29명이었고 왕자들이 25명 공주가 9명이었다. 또한 지도층의 규합만으로 창업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추스르려고 민심을 다독이는 정책을 같이 편다. 후백제는 아자개를 앞장세워 전쟁으로 여러 작을 고을들을 합병했으나 신라는 스스로 귀순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민심을 얻으려고 스스로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수많은 내부의 반란을 겪었음
공민왕의 김은진 화백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상 루벤스의
천산대렵도 인삼 그림 * Daum Blog 인용 개성상인
◎ 고려, 반란叛亂과 민란民亂의 역사
* 요나라(거란)의 침입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역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대진국 애왕 16년 한기 8119년(AD. 922년)에 요나라를 건국하였고, 한기 8123년(AD. 926년) 요나라의 침략으로 대진국은 멸망하였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 옛 땅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다. 대진국 유민을 같은 민족이라며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요나라는, 남으로 경계를 한 고려의 북진정책과 동쪽으로 국경인 중국 송나라와 고려의 돈독한 외교적 관계 그리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과 연합 등 요나라에게는 국경을 맞댄 세 방면의 국제적 고립과 위협이었다. 그래서 요 나라(성종 12년, AD. 993년)는 먼저 정안국을 쳐서 복속하고 고려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압록강 유역에 3개 성을 쌓았다. 그리고 고려의 친송정책에 위협을 느낀 요나라가 한기 8190년(AD. 993년), 한기 8207년(AD. 1010년), 한기 8215년(AD. 1018년) 고려 현종 9년에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 1차 침입 - 한기 8190년(AD. 993년) 10월에 요나라 소손녕이 고려의 박양유장군, 서희장군과 맞부딛쳤는데 고려는 봉산군을 빼앗기자 청화사를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다. 소손녕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라는 할지론을 요구했다. 조정의 중의는 할지론을 선택하였으나 서희장군과 이지백이 항전을 주장함으로 화의가 결렬되어 소손녕이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서희장군의 담판을 받아들였다. 소손녕은 서희장군에게 ‘고려는 본래 신라에서 일어났는데 어찌하여 고구려 땅을 침식하는가’ 라며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고, 그리고 ‘송나라와는 외교를 하면서 이웃 나라인 요나라는 왜 소외시키는가?’ 하고 추궁했다. 서희장군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요나라의 동경도 옛 고구려의 영토이므로 돌려주어야 한다’ 고 맞대응 했다. 요나라가 세 번째로 트집을 잡은 압록강 유역 방위에 대해 ‘압록강 유역에 성을 구축한 것은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여진이 있어 이를 견제를 하자는 것이다’ 라고 설득했다. 유명한 ‘서희장군의 담판’ 이다. 이렇게 담판하여 압록강 280여리 개척에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송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고려는 은밀히 송나라와 교류를 계속하였고 강동 6주도 돌려주지 않았다.
․ 2차 침입 - 한기 8207년(AD. 1010년) 고려 현종 1년에 요나라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는데 고려 안에서 일어난 ‘강조의 반란’ 을 빌미로 삼았다. 그러나 실상은 송나라와 교류를 차단시키고 강동 6주를 회복하려는 속셈이었다.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전남)로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요나라는 병참선이 차단되자 화친을 요청했다. 현종은 친조를 약속하고 화친을 맺었는데 퇴각하는 요나라 군사는 고려의 귀주성 군사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 이후에도 고려는 친조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여전히 송나라와 교친하였으므로 요나라는 3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 3차 침입 - 유명한 ‘귀주대첩’ 으로써 한기 8215년(AD. 1018년) 12월 요나라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고려는 강감찬장군을 상원수로 삼고 부원수에는 강민첨장군을 임명하여 20만 군사로 대비하였다. 소배압은 몇 번의 실패로 퇴각하다가 귀주성에서 강감찬장군에게 대패, 살아서 돌아간 적은 수천에 불과했다.
* 여진 정벌
새로 일어난 동여진 완안부족의 우야소가 한기 8300년(AD. 1103년) 고려 숙종 8년에 함흥 부근까지 영역을 넓혀 주둔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 밖에까지 쳐들어왔다. 문하시랑 평장사 임간장군을 보내 평정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추밀원사 동북면 행영 병마도통 윤관장군을 여진 정벌에 투여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임기응변으로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윤관장군은 패인이 여진의 기마병에 있었다고 보아 별무반을 신설하여 기마특수부대를 창설하였다. 한기 8304년(AD. 1107년) 여진의 동태를 감시하던 변방의 보고를 받고 원수 윤관장군과 부원수 오연총장군이 17만 대군을 출병, 크게 이겨 9성을 쌓았다. 그러나 뒤에 요나라 서쪽과 국경인 여진이 자국의 방위를 역설하며 9성을 되돌려달라고 하여 화평을 위해 되돌려주었다. 이는 뒷날 아골타가 금나라 (신라 경순왕의 태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후예)를 세워 중원을 평정하는 바탕이 되었다.
해동통보 고려청자 * Daum Blog 인용
* 몽고전쟁
최씨정권이 확립되었을 때부터 고려는 몽고의 압박을 받았다. 몽고족은 금나라의 세력권에 있었는데 13세기 걸출한 영웅 테무친이 부족을 통일하고 한기 8403년(AD. 1206년) 칸(한, 황제)에 즉위하였다. 징기스 칸이다. 징기스 칸은 금나라(여진의 아골타가 건국)를 침략하고 요나라(거란의 야율아보기가 건국)를 공격하였으며, 징기스 칸에게 밀려난 요나라는 고려의 국경 강동성에 은거하였다.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강동성의 요나라를 공격하여 요나라는 패망하였는데 몽고는 이를 빌미로 과다한 공물을 요청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화전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전쟁론이 우세하였다. 때마침, 한기 8422년(AD. 1225년) 몽고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저고여가 돌아가다가 압록강 부근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고는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공했다.
․ 1차 침입 - 한기 8428년(AD. 1231년) 몽고 장군 살리타가 북쪽 경계의 여러 성을 함락하고 개경을 포위하였다. 고려는 귀주에서 박서장군이 분골쇄신(뼈가 부서지고 몸이 으스러짐)하였으나 수도가 포위되자 화의를 요청했다. 몽고는 서북면에 다루가치(몽고군 주둔지)를 설치하고 물러났다. 이후 몽고가 더욱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자 막리지 최우는 항전을 결심하고 한기 8429년(AD.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몽 결전에 들어갔다. 몽고군이 기마병 위주기 때문에 물에 약하다는 전술적 천도였다.
․ 2차 침입 - 몽고는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하였으나 살리타가 처인성 싸움에서 김준후장군에게 사살되어 철군했다. 그 이후에도 몽고군은 한기 8456년(AD. 1259년) 고려 고종 46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했다. 그러나 강력한 반몽정책을 표방한 최씨정권이 강화도를 근거지로 끈질긴 항쟁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위기에는 산성과 섬으로 물러서고 한편으로는 집단으로 농사를 지으며 침략군에 대항하는 전술을 활용하였으므로 몽고군은 강화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최씨정권이 붕괴되어 항몽전은 변화를 초래하였으나 또 다시 정권의 부침이 계속되면서 강화와 항몽전이 번갈아 일어났다. 한기8467년(AD. 1270년) 몽고의 세력을 업은 국왕이 개경으로 환도를 하였고 무신정권도 끝났다.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3별초는 배중손장군을 필두로 진도에서 항몽전을 펴다가 제주도로 옮겼으나 한기 8470년(AD. 1273년) 진압되었다.
* 합단의 침입
한기 8487년 (AD. 1290년) 고려 충렬왕 16년 원나라의 합단이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동북지방을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압하였다.
* 홍건적의 침입
홍건적은 중국 직례지에서 일어나 한 때 기세를 떨쳤으나 원나라 군대에 쫓겨 만주로 들어왔다. 랴오양을 점거한 홍건족 장군 모거경이 4만의 무리를 이끌고 한기 8556년(AD. 1359년) 고려 공민왕 8년에 침범하였다. 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서경(평양)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편장 이방실, 안주만호 안우가 이끄는 고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서경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궤멸되어 남은 병사 30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도망갔다. 그 뒤 홍건적은 수군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침범하였고, 공민왕 10년 한기 8558년 (AD. 1361년) 10월에 10만 병력으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다시 고려에 침입하였다. 공민왕은 남으로 피난하고 도지휘사 이방실, 상원수 안우가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개경이 함락되었다. 한기 8559년 (AD. 1362년) 1월 총병관 정세운이 이방실원수들과 개경을 수복하고 평정하였다. 개경을 수복할 때 동북면 상만호 이성계가 홍건적의 괴수 사유, 관선생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웠다. 홍건적은 패망하여 물러갔으나 막대한 타격을 입은 고려의 국운도 기우러졌다.
* 왕규의 반란
혜종 임종 직전, 한기 8142년(AD. 945년)에 일어난 조작적 반란이다. 서경장군 왕식렴이, 대광 왕규가 반란을 모의한다고 하며 개경에 난입하여 왕규와 300여명의 추종 세력을 참살한 사건이다. 정종이 왕식렴의 군대를 동원하여 정적을 거세하고 왕권을 찬탈한 구테타였다.
* 이자겸의 난
이자겸은 고려 전기 최고 문벌 귀족이고 예종의 외할아버지로써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왕위 찬탈을 모의하였다는 죄로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보와 그 세력을 처형하였다. 지방 출신 신진관료세력의 발흥을 제거하는 정치적 책동이었다. 이자겸은 인종에게 두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고 마침내는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러나 동지였던 척춘경과 반목하여 축출되었고 전기 귀족사회가 몰락하는 발단이 되었다.
* 묘청의 난
연이은 반란으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어지러운 때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개혁 정치세력과 묘청이 임금의 총애를 업고 권력의 전면에 떠올랐다. 고려는 국시를 북진정책에 두었고 북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경(평양)은 북진정책의 전진기지였다. 묘청은 도참설과 풍수지리를 내세워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더불어 정치, 교육 등 내정의 유신과 칭제건원을 진행하고 여진의 금나라를 정벌코자 했다. 반면 김부식을 비롯한 개성의 중앙세력은 보수적이어서 충돌이 불가피했다. 뜻이 좌절되자 묘청은 한기 8331년(AD. 1134년) 서경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켰다. 국호를 ‘대위’ 라 하고 연호를 ‘천개’ 라고 했으며 군대는 ‘천견충의군’ 이라고 불렀다. 개혁세력을 지원하던 임금이 등을 돌리고 김부식이 대원수로 임명되어 진압을 했는데, 반란군에서 내분이 일어나 묘청이 죽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11세기 잉글랜드의 코벤트리 레오프릭성주 고다이버 부인(16세)상像, 가혹한 세금을 감면해주라는 부인의 탄원에 성주가 반 농담으로 발가벗고 말을 타고 성 안을 한 바퀴 돈다면 감면해주겠다고 하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연히 실행함, 주민들은 모두 커틴 을 내리고 문을 잠궜다고 함. 동시대 고려 백성들의 사회상 대비. 이어 김부식상, 보각 국사 일연상, 해인사의 대장경판 * Daum Blog 인용
* 무신정변
무신의 반란으로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는 한기 8367년(AD. 1170년) 무너졌다. 무신정권의 성립은 귀족사회의 정치권력 독점과 토지 소유의 특권적 지위가 극심한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권력과 영지를 놓고 귀족들 간에 항쟁이 전개되었는데 특히 기성 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 신진관료들의 도전이 치열했다. 문반들의 권력다툼에 무반은 소외되고 천대를 받았다. 무반은 귀족의 호위병 역할이 고작이었다. 무반은 요나라와 여진의 전쟁을 통해 세력을 축적하고 한기8273년(AD. 1076년)의 전시과, 한기 8306년(AD. 1109년) 무학재 설치로 기반이 강화되었다. 고려의 군사제도는 일반 농민으로 충당되었는데 귀족들의 농민 착취가 심하였고 온갖 잡역에 시달렸으므로 농민 출신 무반들이 직접 상관인 무인들의 불만에 동조하였다. 한기 8367년(AD. 1170년) 태평호문泰平好文(글을 좋아함)의 군주 의종이 문신들과 보현원에 놀러갔을 때 이를 호위한 무신 정중부, 이의방, 이고들이 구테타를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페한 뒤 왕의 동생 명종을 옹립하여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무신정권은 한기 8467년(AD. 1270년) 원종 11년 임연 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100년 간 지속되었다. 무신정치는 무인들의 집합체인 중방(무신의 협의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기 8368년 (AD. 1171년) 이의방이 이고를 주살, 한기 8371년 (AD. 1174년) 정중부가 이의방 제거, 한기 8376년 (AD. 1179년) 정중부도 경대승에게 참살, 한기 8380년 (AD. 1183년)에는 이의민이 집권하였으나 그 역시 한기 8393년 (AD. 1196년) 최충헌에게 숙청되었다. 최충헌은 전제정치로 무신정권의 안정을 찾아 최우, 최항, 최의에 이르는 4대 62년 간 최씨정권이 지속되었다. 최충헌은 명종을 폐하고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을 마음대로 세우는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한기 8455년 (AD. 1258년) 고려 고종 45년 김릉, 임연이 최의를 제거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졌다. 무신정권이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은 몽고의 무신정권에 대한 압력이었고 국왕도 왕권회복을 위해 몽고와 결합하였다. 한기 8467년(AD. 1270년) 몽고의 옹호를 받은 국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천도를 명하였으나 임유무가 이를 듣지 않자 홍문규, 송성례들이 임유무를 죽였다. 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100여년에 걸친 무신정권은 끝났다.
* 농민, 천민(개인노비 만적)의 난
무신정권은 농민의 수탈이 과중하여 농민생활은 더 곤궁하였으므로 무신 상호간의 정권다툼으로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농민들이 봉기했다. 무신정권기의 민란은 명종과 신종대의 30년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무신정권의 형성기와 최충헌의 독재정치가 자리잡기 전의 시기로 지방통제력이 약한 시기다. 한기 8369년 (AD. 1172년) 명종 2년 서북계의 창주, 성주, 철주 주민이 수령首領의 탐학貪虐(욕심 많고 괴롭힘)과 가렴주구苛斂誅求(약탈 수준의 빼앗음)에 반발하여 일어났고, 한기 8371년 (AD.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 때에는 농민들이 참여하였다. 한기 8373년 (AD. 1176년) 명종 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난을 일으켰다. 농민이 주체였으나 천민집단의 특수행정구역인 ‘소’ 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농민반란에 부곡천민部曲賤民들의 신분해방운동이 복합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기 8379년(AD. 1182년) 명종 12년 충청도 관성(옥천)과 부성(서산)에서 수령의 탐학에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전주에서는 군인과 관노(관청의 노예)가 반란을 일으켰다. 한기 8390년(AD. 1193년) 명종 23년에는 경상도일대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김사미는 청도(운문)에서, 효심은 초전(울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로 연합하여 경상도일대에 확장되었으나 밀성(밀양)에서 정부군에 밀려 7000여 명이 죽고 진압되었다. 한기 8396년(AD. 1199년) 신종 2년에는 명주(강릉)에서 민란이 일어나 동경(경주)민란과 합세하였다. 이듬해 진주에서 공사노비의 반란이 일어났고, 협천(합천)에서는 부곡민(천민)의 반란이 일어나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는데 농민도 가담하였다. 경상도 일대의 민란은 한기 8399년(AD. 1202년) 신종 5년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민란으로 확대되었다. 반란의 기치로 신라의 부흥을 내걸었는데 최충헌의 토벌로 평정되었다. 한기 8395년(AD. 1198년) 개인노비 만적이 개경 북산에 공사노비를 모아 ‘무신란 뒤 공경대부(높은 벼슬아치)가 천민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우리들도 최충헌과 우리의 주인들을 죽이고 천민에서 해방되면 공경장상(높은 벼슬아치)이 될 수 있다’ 고 선동하였으나 모의 첫날 인원이 많이 모이지 않아 다음 날로 기약을 했는데 내부의 밀고자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정권은 농민을 감싸고 권농에 치중하여 토지를 돌려주었으며 세금을 줄였다. 이들 민란은 귀족중심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새로운 사회체제로 변하는 원동력이 되어 고려사회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 김보당과 조위총의 난
정중부의 난이 발생한지 3년 뒤 명종 3년 한기 8370년(AD. 1173년)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일으킨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난이다. 김보당은 전통적으로 문벌귀족 가문이었는데 무신정권에 참여하였다가 소신과 기대가 사라지자 의종 이래 문란해진 정권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정중부와 이의방의 제거와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거병하여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김보당이 안북도호부에서 붙들려 개경으로 이송된 뒤 죽었고 의종도 이의민에게 살해되어 3개월 만에 무산되었다.
명종 4년에는 서경 유수 조위총이 정중부와 이의민의 토벌을 목적으로 거병하였다. 민란의 성격을 띠었으나 무신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북벌정책 강화도 초지진 강화도 척경입비도
효종 영릉 * Daum Blog 인용 갑곶돈대(포대)
◎ 고려의 멸망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밖에서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그리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의 대외관계 변동이 멸망의 원인이었다. 왜구는 대마도와 일본 근해연안에 본거지를 두고 고종 때부터 연해에 출몰하였는데 충정왕 때는 강화도까지 약탈을 당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 때문에 바다의 물자 운반 길이 끊겨 중앙정부의 재정에 타격이 오고 농민들도 수탈에 핍박을 당하였다. 일본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일본정부도 통제를 하지 못했다. 고려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왜구 토벌에 나섰는데 최무선은 한기 8574년(AD. 1377년)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포를 제작하였다. 공민왕 때는 홍건적이 원나라의 반격을 받아 서경을 침입하였다. 홍건적이 두 번째 침입한 한기 8558년 (AD. 1361년)에는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다. 동북아정세가 요동을 치는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일어나 원나라를 치고 명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 북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조정은 친원친명세력으로 대립하였는데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1388년 쌍성총관부 관할로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의 직속령으로 한다는 일방적 통고를 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최영은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드디어 우왕 14년 최영장군은 8도도통사로써 좌군도통사 조민수장군, 우군도도통사 이성계장군을 거느리고 요동정벌에 나선다. 이 때 이성계장군은 ‘4불가론’ 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첫째,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과도기라 하나 고려의 군사로 대국 명나라를 친다는 것 은 불가하다
둘째, 한창 농사철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에 지장을 주고
셋째, 원정을 틈타 왜적이 침입한다면 도성이 위험하며
넷째, 장마철이라 주무기인 활의 아교가 녹을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 다
그러나 최영장군은 이성계장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병했다. 마지못해 출병한 이성계장군은 압록강 안 위화도에서 장마를 피해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내 회군하여 최영 등 반대파를 제거하였으며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웠다가 다시 공양왕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였고 왕은 허수아비였다. 결국 이성계는 조준과 정도전 등의 추대로 고려왕국을 종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5부 12화 조선시대
◎ 성리학性理學의 나라, 조선朝鮮
조선 전도全圖 불후不朽의 명작名作
* Daum Blog 인용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조선 역사연대표
1대 태조 한기 8589년(AD. 1392년) - 17대 순종 한기 9107년(AD. 1910년),
27대 518년 간
역대 | 왕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태조 | AD.1392-1398 | 이성계, 위화도 회군, 왕조 건국 |
2대 | 정종 | 1398-1400 | 사병私兵 3군부 편입, 이방원에게 선위 |
3대 | 태종 | 1400-1418 | 왕자의 난, 창업 기반 구축 |
4대 | 세종 | 1418-1450 | 집현전 훈민정음, 측우기, 4군 6진 3포 |
5대 | 문종 | 1450-1452 | 유교적 이상정치, 문화 발전 |
6대 | 단종 | 1452-1455 | 숙부 수양대군 선위, 영월 유배 노산군 |
7대 | 세조 | 1455-1468 | 왕권 확립, 경국대전 집필, 관제 개혁 |
8대 | 예종 | 1468-1469 | 경국대전 완성 |
9대 | 성종 | 1469-1494 | 승유억불, 문물제도 완비, 인재 등용 |
10대 | 연산군 | 1494-1506 | 무오 ․ 갑자 ․ 병인사화, 중종반정 폐위 |
11대 | 중종 | 1506-1544 | 조광조 혁신정치 실패, 기묘 ․ 신사사화 |
12대 | 인종 | 1544-1545 | 현량과 부활 |
13대 | 명종 | 1545-1567 | 을사 ․ 정미 ․ 을유사화, 을묘왜변 |
14대 | 선조 | 1567-1608 | 당쟁, 임진왜란 |
15대 | 광해군 | 1608-1623 | 명 ․ 후금 양면정책, 인조반정 폐위 |
16대 | 인조 | 1623-1649 |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
17대 | 효종 | 1649-1659 | 청나라 볼모 8년, 북벌정책 추진 |
18대 | 현종 | 1659-1674 | 남 ․ 서인 당쟁, 선기옥형, 금속활자 |
19대 | 숙종 | 1674-1720 | 남 ․ 서인 당쟁 기사사화, 백두산정계비 |
20대 | 경종 | 1720-1724 | 신임사화 당쟁 절정 |
21대 | 영조 | 1724-1776 | 탕평책, 균역법, 신문고, 사도세자 비극 |
22대 | 정조 | 1776-1800 | 탕평책, 규장각, 새 활자, 실학 황금시대 |
23대 | 순조 | 1800-1834 | 안동김씨 세도, 천주교 탄압, 홍경래 난 |
24대 | 헌종 | 1834-1849 | 천주교 탄압 기해사옥, 안동김씨 세도 |
25대 | 철종 | 1849-1863 | 안동김씨 세도정치, 진주민란 |
26대 | 고종 | 1863-1907 | 대한제국, 동학혁명, 대원군, 열강 각축 |
27대 | 순종 | 1907-1910 | 35년 간 치욕의 일제식민지시대 |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고려 말기는 동북아 정세가 요동을 치는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일어나 원나라를 치고 명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 북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친원 ․ 친명세력으로 대립하였는데 명 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한기 8585년(AD. 1388년) 쌍성총관부 관할로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의 직속령으로 한다는 일방적 통고를 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최영 장군은 이참에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드디어 우왕 14년 최영장군은 8도도통사로써 좌군도통사 조민수장군, 우군도도통사 이성계장군을 거느리고 요동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이성계장군은 ‘4불가론不可論’ 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첫째,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과도기라 하나 고려의 군사로 대국 명나라를 친다는 것 은 불가하다
둘째, 한창 농사철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에 지장을 주고
셋째, 원정을 틈타 왜적倭敵이 침입한다면 그 또한 어려움이며
넷째, 장마철이라 주무기인 활의 아교가 녹을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최영장군은 이성계장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병했다. 마지못해 출병한 이성계장군은 압록강 안 위화도에서 장마를 피해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내 회군하여 최영 등 반대파를 제거하였으며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웠다가 다시 공양왕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였고 왕은 허수아비였다. 결국 이성계는 조준과 정도전 등의 추대로 고려왕국을 종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왕사 무학 초상화 몽골 추장 징기스 칸의
* Daum Blog 인용 손자 쿠빌라이 칸
# 이성계와 무학대사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무학대사는 1353년 공민왕 때 원나라 연도에 수행 차 갔다. 연도에는 인도인으로써 가섭존자의 108대 후계자였던 스님 지공이 있었는데 무학대사는 나옹선사와 함께 지공스님에게 수학했다.
1881년 고종 18년 승려 우송이 쓴 회룡사중창기에는 1398년 태조 7년 함흥에서 한양으로 가던 중 이성계가 왕사 무학대사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그 때 무학대사는 1394년 정도전의 미움과 시기를 받아 회룡사 토굴에 은거하였는데 태조가 방문하자 절을 중창하고 임금이 돌아갔다는 뜻의 회룡사라고 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1250년 원나라 몽골에 투항하여 다루가치(지방관, 총독) 벼슬을 하고 옷치킨가家로써 고려계 몽골 군벌가문이 되었다. 조부 이춘은 보안테무르, 큰아버지는 타스부카, 아버지 이자춘은 울루였다. 가문은 고려의 북벌을 돕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왕조를 감시하는 2중적 태도를 지녔는데 원나라가 고려의 발흥을 제지하기 위하여 고려군 감축을 도모하자 고려가 국방력이 쇠약해짐을 틈타 가문의 군대를 강군으로 양성하였다.
나옹선사가 무학대사와 함께 길을 걷다가 좋은 산소자리를 발견하고 이야기 하는 것을 이성계의 청지기가 듣고 이성계에게 전하여 이성계가 나옹선사에게 산소자리를 천거해주기를 바랬으나 나옹선사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찾아 산소자리를 물었고 무학대사가 점지한 곳, 왕이 나온다는 길지에 아버지의 묘를 썼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인연은, 서산대사의 글에 우왕 10년(1384년) 무학대사가 함경도 설봉산 석왕사 토굴에 은거하였을 때 근처를 지나던 이성계가 한 꿈을 얻어 이를 해몽하려고 하였다. 주위에 물으니 한 노파가 영험타하여 찾았으나 노파는 없고 딸이 100냥을 주면 해몽하겠다 하여 주었더니 개꿈이라고 하였다. 뒤늦게 돌아온 노파가 꿈 이야기를 듣고는 손사래를 치며 100냥을 돌려주고는 자기는 그 꿈을 해몽하기 어려우므로 동내 뒷산 토굴에 은거하는 8만대장경을 통째로 외우는 얼굴 새카만 중을 찾아가라 일렀다. 이성계가 토굴을 찾았으나 중은 가부좌를 틀어 묵상하는 자세로 이성계가 몇 번이나 절을 했는데도 눈도 뜨지 않았다. 냉대에 노한 이성계가 칼을 빼들고 목을 치겠다고 엄포를 놓자 중이 비로소 꿈 이야기를 허락했다.
‘간밤의 꿈에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서까래 셋을 짊어지고 나왔다. 닭이 울고 꽃이 떨어지 고 있었다.’
‘등에 서까래 셋을 졌으니 임금이 될 꿈이라. 닭이 울면 새 날이 오고, 꽃이 떨어지니 열매 를 맺으리라.’
김일훈의 신의원초에 있는 이야기인데 얼굴 까만 중이 훗날 조선의 왕사가 된 무학대사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 꿈을 해몽한 무학을 찾았다. 경기, 황해, 평안감사를 동원하였으니 무학은 행방이 묘연하였는데 수소문 3년 째 곡산(전남 곡성) 고달산 초막에 은거하는 무학대사를 찾아냈다. 신하를 보냈으나 오지 않자 왕이 가서 무학대사를 맞아들여 왕사로 삼았다. 칭호는 대조계종大曹溪宗 종사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변지무애辯智無碍 부종수교扶宗樹敎 홍리보제弘利普濟 도대선사都大禪師 묘엄존자妙嚴尊者다.
또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파적기가 전해내려오는 바, 어느 날 태조가 입궁한 무학대사와 마주 앉았는데 태조가 장난삼아 슬며시 농담 방담을 주문했다. 그러자고 했다. 태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학대사가 얼굴이 까맸으므로 얼굴에 빗댄 농담이었다.
‘대사는 오늘 보니 마치 돼지를 닮았구료.’
무학대사가 정색을 하며
‘폐하께서는 마치 부처님 같사옵니다.’
‘아니, 대사. 나는 농담을 하자고 대사를 돼지라고 했는데 부처님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요.’
‘농담이옵니다.’
‘무슨 농담이 그렇소. 흥이 다 깨지지 않았소 그려.’
‘폐하,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이옵니다.’
* 태조 이성계는 북방 강역의 평정뿐만 아니라 왜구를 물리쳐 크게 공을 세운 적이 있었다. 전남 보성 득량의 칼바위전설에 이성계의 동굴 수련 이야기가 전해온다. 거대한 바위가 칼날을 하늘로 치켜든 형상의 칼바위 아래 사방 10여미터의 동굴이 있는데 이성계가 산천을 주유하면서 몇 달 동안 머물렀다는 전설이다.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 전국 방방곡곡의 명산 30여 곳을 모두 순례하였다. 산신의 계시를 받겠다는 명목이었으나 그 가슴 속에는 왕건 태조가 도선국사로부터 인수한 선기옥형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려 말 고려의 신궁에서 선기옥형이 사라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비밀이었다. 선기옥형은 고려 24대 원종 때 고려의 신궁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 해에 청 태종의 남한산성 정복으로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다. 왕이 청 태종에게 3 ․ 6대례의 예로써 항복을 하였는데, 3 ․ 6대례는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 할 때마다 머리를 두 번씩 굽히는 고조선시대 이래의 큰 절 예법이었다. 왕이 대례를 하는데 머리를 깊이 굽히지 않는다고 청 태종이 질책하여 왕은 언 땅에 이마를 찍어 휴혈이 낭자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왕의 이름에 ‘충성할 충忠 자’를 쓰게 된다. 몽골에 충성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에 전후하여 선기옥형이 사라졌다. 선기옥형이 사라졌다는 것은 고려가 국운이 다 했다는 예언이기도 했다. 야심에 찬 그리고 국제정세에 누구보다 능한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증거다. 꿈의 해몽이나 지공스님이나 나옹화상, 무학대사의 전설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대한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자 마침 기회가 왔다. 최영장군의 북벌정책이었다. 4대불가론은 이성계의 모화사상을 대변한다. 위화도 회군은 빌미였다. 이성계는 고려 말기의 국정의 문란과 혼란을 간파하고 고려의 쇄락을 예견했다. 함경도 호족으로써 사병을 주축으로 강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적 관계에 있었던 최영장군과는 다른 복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국제정세를 구실로 삼아 4대불가론을 설파하며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회군을 단행하자 이성계는 반대파인, 그러나 국정의 대세를 쥔 최영장군 일파를 전광석화 같이 제거했다. 혼란과 실정으로 국운이 스러져가는 고려는 500년 왕업이 비참하고 허망하게 무너졌다.
이성계는 창업 이후 끈질기게 선기옥형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태종 때 개경의 한 농부가 대동강변에서 발견한 고려의 ‘천상분야열차각석’ 을 바치자 이를 근거로 선기옥형을 제작했다. 그 이후 여러 번 선기옥형을 제작하였는데 지금 대한에 비치된 3개는 조선 중기 때 제작한 선기옥형이다.
◎ 선기옥형璿璣玉衡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재승)
* 천부경의 사상을 담고 있고, 그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용도用道 - 구조에 집약集約되어 있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질서를 본받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있다. 즉 위(천문天文)를 보고 아래(지리地理)를 보며 다음에 자신(인간人間)을 보고 행行하라는 것이다. 형이하학적 용도로써는 천지운행天地運行의 원리를 담고 있는 수리적이치를 바탕으로 7정政(일월日月 +금목수화토성星)과 28숙宿의 운행을 관측하고 4계절 24절기의 기상변동을 예측한다. 이로써 국가적 공공사업이나 사회적 변동을 대비하는 기능을 하였다. 수행이 뛰어나 심안이 계발된 사람이 운용하였으나 이는 천기天機로써 매우 신중하였다. ‘선기는 천체를 관측하다는 뜻이고 옥형은 옥으로 만든 저울을 뜻’한다. 후세에 혼천의渾天儀라고 하였다.
* 선기옥형은 중국의 서경書經 제 1편 우서虞書 제 2장 순전舜傳에 처음 나온다. 순舜 임금이 요堯 임금으로부터 종묘에서 첫째 달 첫째 날 제위를 선양받고 맨 처음 한 일이 선기옥형을 살펴 7정政(해, 달, 금목수화토성)을 바로 잡았다. 그런 다음 하느님(상제上帝)께 제사를 올리고 하늘과 땅과 4시時에 제사지냈으며 산천과 여러 신들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4000년 전 요순시대에 선기옥형이 존재했다면 그 기원은 약 1만년 전 한배검께서 주재주로써 천부경의 진리를 밝혀준 개천의 시대로 본다. 그 후 선군시대로 전승되어온 선기옥형이 요순을 통하여 중국민족에게 전파된 것이다.
*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요순堯舜시대에 이미 선기옥형이 존재했다. 기원은 1만년 전 한배검(대황조)께서 주재주(主宰主, ●)로 천부경의 진리를 밝힌 개천開天의 시대다. 그 뒤 천부의 이치가 원방각(圓方角, ⊗)으로 표현되었던 천부인天符印시대, 복희伏羲임금시대를 거치며 약 5000년 전 지금과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고 본다. 그 뒤 선군시대로 전승되어 요순을 통하여 중국민족에게 전파된 것이다. 현재 중국에 2, 3종이 남아있고, 한국에는 경북 도산서원에 퇴계 이황이 제작한 목제 혼천의와 창경궁의 동재 소형 혼천의가 남아있으며 세계 유일의 기계 추동장치를 응용한 선기옥형이 - 조선시대 현종 10년, 한기 8866년(AD. 1669년) 10월 4일 관상감 천문교수 송이영이 제작 -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중국에서는 고대시대의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說에 기초하여 관측기구를 만들었는데 선기옥형, 혼의기渾儀器, 혼의로 부른다. 한기 7093년(BC. 104년)에 역법曆法을 개량하였는데 관측기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 대한에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고조선시대의 원형(천부인天符印)을 열국시대 고구려에서 복원하여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 의상조儀象條’ 에 세종의 명으로 정초鄭招와 정인지鄭麟趾 등이 고전을 연구하고 이천李天과 장영실蔣英實이 공역工役을 감독하여 한기 8635년(AD. 1438년) 세종 20년에 혼상渾象, 혼의渾儀 등을 비롯한 여러 천문의기天文儀器를 만들었다. 혼천의는 원元나라의 학자 오징吳澄이 쓴 찬언纂言에 기재된 바에 따라 칠목漆木으로 만들었고 다시 구리를 부어 만들었다. 한기 8745년(AD. 1548년) 명종 3년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혼천의를 만들어 홍문관弘文館에 두었다. 한기 8798년(AD. 1601년) 선조 34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에게 명하여 혼천의를 만들었다. 한기 8854년(AD. 1657년) 효종 8년에는 최유지崔攸之가, 한기8866년(AD. 1669년) 현종 10년에는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潁이 각각 혼천의를 만들었다. 이는 물을 이용하는 수격식水擊式이었는데 송이영이 만든 것은 자명종自鳴鐘의 원리를 응용하여 추錘의 운동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국보 제 230호로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영국의 과학자 일행들이 탐방하였을 때 단장이었던 니덤이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에 모형을 진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혼천의에는 지평선, 자오선, 적도, 회귀선, 극권極圈, 황도黃道 등이 포함되어 있고 두 추의 운동에 의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여러 개의 톱니바퀴로 연결되어 있으며 6합의合儀, 3진의辰儀, 4유의의 3부분과 이것들을 밑에서 받치는 용주龍柱, 별운鱉雲, 십자수준十字水準으로 되어 있다. 한기 8884년(AD. 1687년) 숙종 13년 이민철이 현종대에 만든 것을 중수했으며 한기 8901년(AD. 1704년)에는 안중태安重泰, 이시화李時華 등이 다시 만들었고, 한기 8929년(AD. 1732년) 영조 8년에 안중태가 다시 고쳤다.
* 조선시대에서는 권근의 감독 하에 고구려 ‘천상도天象圖’ 를 바탕으로 새로운 천상도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가 한기 8592년(AD. 1395년)이었다. 약 1000년 만에 새 천상도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지구의 자전축은 72년마다 1도씩 이동하며 춘분점春分點과 추분점秋分點이 변하게 된다. 이 이동을 세차운동歲差運動이라고 한다. 1000년이면 세차가 14도 정도 변했으므로 이 변화를 반영해 조선 초기에 새 천상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업데이트된 천상도였다.
조선이 권근과 같은 일급 학자를 동원해 새 천상도를 만드는 데 특별히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개국이 하늘의 뜻이었음을 정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것은 쿠데타가 아니라 하늘의 명을 받은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이 천상도였다. 이때 하늘이란 '인격적인 상제' 가 아니라 천문(天文), 즉 별자리를 지칭한다. 천상도는 일종의 왕권천수도王權天授圖였던 셈이다. (Daum Blog, 미주학당 조용헌)
* 조선시대 필사본 천문도‘건상열차분야지도乾象列次分野之圖’는‘건’이‘천’과 같은 뜻이므로 국내 최고 천문도인 국보 228호 천상분야열차지도각석天上分野列次之圖刻石과 닮았는데 더 제작연대가 빠르다. 고려사에‘탁월한 천문학자 오윤부(? - 1305년)가 일찍이 스스로 천문을 그려 바쳤더니 일자日者(천문학자)가 다 취取하여 이를 본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천문도는 고려 때 천문도를 참고하여 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천상도를 제작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시간과 계절을 알기 위해서였다. 옛날에는 요즘과 같은 손목시계나 달력이 없었으므로 시간과 계절을 알기 위해 하늘의 별을 봐야 했다. 초저녁과 새벽에 어느 별이 떠오르는지를 보고 농사짓는 시기를 파악했다. 천상도에는 이처럼 다양한 의미가 숨은 그림처럼 들어 있다.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재승).
* 조선은 억불승유정책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여 이를 정치이념으로 사회가 안정되었다. 성리학은 선비사상과 부덕으로 발현되었으며, 충효사상은 국가 왕권주의와 부권사회의 기반이었다. 안정된 시대로써 학문이 진흥되었고 정치는 발전하였으며, 고려말기에 민란으로 표출되었던 백성과 노비의 위상도 제한적이었지만 신장되었다. 밖으로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었었으나 어려운 가운데서 이를 타개하였으며 승병, 민병들이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민중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안에서도 당쟁의 소용돌이가 여러 번의 사화를 일으켜 국가와 사회에 파장을 불러 일으켰으나 이는 격동기의 정치치적 현상으로 정치 발전의 새로운 창조적 생성의 과정이었다. 정치적 담론이 무성한 일을 남인, 서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로 나뉘어져 4색 당파가 논쟁과 투쟁으로 국가질서를 문란케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역사 해석은 재고해야 한다. 지나친 경쟁의식이 뒤에 사화를 일으키는 부정적 붕당으로 변질되었지만 정치는 담론과 대화 그리고 타협의 생성이요 창조가 아니겠는가? 이를 부정적으로만 ‘싸움으로 날을 세운’, ‘당파와 개인의 정치권력을 위한’, ‘내분으로 4색 당파로 찢기고 나뉘어진’ 의 시각은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에 의한 한민족 깍아내리기와 역사 왜곡이요 역사 거짓으로 만들어내기의 산물이다. 조선시대 역사는 시대적 진실과 이상 그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이상주의 국가 건설 보다는 현실 정치)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후세에서 지나온 역사를 고찰하는 태도는 시대적 진실을 역사를 통해 이해하고 미래지향적 역사관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
성리학의 일반적인 사회의식은 ‘선비사상과 부덕婦德’으로 요약된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 는 선비정신은 고조선 천지화랑정신의 학문분야의 계승이다. 열국시대를 거치면서 쇠퇴하여 무예부문이 퇴조하고 문약文弱(글에 치중함으로써 신체 단련에 소홀함)에 흐르게 되었으나 선비정신은 조선시대를 관류하는 강건하고 투철한 지성인의 이상이었다. 부덕은 자유로와서 문란해진 사회기강을 세우는 방편이었다. 부덕이 여성을 억압하고 지나치게 절제를 강요하였으나 외유내강外柔內剛(자신을 다스리는데 강함과 부드러움을 조절함)의 정신은 조선시대 가정으로부터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3강5륜三綱五倫과 7거지악七去之惡은 대표적인 관습이다.
* 3강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을 다 하고),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버지를 받드는 일은 자식의 도리며)
부부유강夫爲婦綱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아내의 의무다)
* 5륜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는 의리로 맺어지고)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은 피를 나눔이며)
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 사이에는 서로 역할이 다르고)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는 위아래 질서가 있고)
붕우유신朋友有信 (벗을 사귀는 데는 믿음으로 한다)
* 칠거지악 - 대대례기大戴禮記의 본명편本命編에 있는데 7출지악七出之惡이라고도 하며 3종지도三從之道(어려서는 아버지를 받들고, 시집을 가면 남편을 뜻을 쫓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하는 여자의 인습)는 여성의 사회적 멍에였는데 일곱가지 죄를 지으면 쫓아낼 수 있다는 사회적 계약, 더불어 3불거三不去 - 조강지처糟糠之妻(좁쌀과 조를 먹고 살았던 어렵게 같이 살아온 아내)를 쫓아내서는 안 되는 대안이 있었는데
첫째,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돌아갈 친정이 없거나
둘째, 시부모의 3년 상喪을 같이 치렀거나
셋째, 시집 올 때는 시집이 가난했는데 온 뒤에 부유해진 경우에는 쫓아내지 못했다.
① 불순구고不順舅姑 (시부모 순종하지 않음)
② 무자無子 (아들을 낳지 못함)
③ 음행淫行 (음란함)
④ 질투嫉妬 (남자들은 첩을 둘 수 있었고 기생제도를 만들었음)
⑤ 악질惡疾 (고칠 수 없는 병)
⑥ 구설口舌 (말이 헤품)
⑦ 도절盜竊 (도둑질)
* 훈민정음 원본 서문
國之語音(국지어음이) 異乎中國(이호중국하야), 與文字(여문자로) 不相流通(불상유통할새), 故(고로) 愚民(우민이) 有所欲言(유소욕언하여도), 而終不得伸其情者(이종부득신기정자) 多矣(다의라). 予(여), 一爲此憫然(일위차민연하야) 新制二十八字(신제이십팔자하노니), 欲使人人(욕사인인으로) 易習(이습하야) 便於日用耳(편어일용이니라)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못 배운 백성들이 제 뜻을 전달하고자 해도 그 뜻을 바로 기록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많으니라. 이를 안타까이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게 하여 날로 사용함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 조선 세종시대 창제한 훈민정음은 고조선 선군시대 가림다加臨多(가림토土)와 같은데 가림다는 선군 37세 가륵 2년 한기 5016년(BC. 2181년) 기록에,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고대의 상형문자)이 있다고 해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다’ 라고 하였다. 대한 고대문자, 한글 자모와 똑 같아 한글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몇 년 전 일본에서 발굴된 구리거울에도 가림다와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단고기의 가림다 중국 산동성 한태시桓太市 출토 가림다 조각품
* Daum Blog 한류 인용 탄소 측정 BC. 1850년 경 추정
*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지식인과 정치가 포섭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렸으나 고려의 신하들은 끝내 거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두문동 사건과 정몽주가 대표적인 사례다. 방원은 정몽주를 설득하려고 ‘하여가’ 를 불러 의중을 살폈으나 포은은 ‘단심가’ 로 화답하여 단호하게 회유를 물리쳤다.
방원의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을 누리리라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사6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
사6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항 6명의 충절로써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다. 세종대왕은 아들 문종의 병약함을 걱정했고 만약의 경우 나이어린 손자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 종실宗室의 안위를 염려했다. 그래서 붕어崩御(죽음)하기 전에 중신重臣들을 불러 고명顧命(임금이 죽기 전에 신하들에게 뒷일을 부탁함)을 내렸다. 문종은 세종대왕 말년부터 정사를 처리하였는데 일의 처리가 명확하였다. 그러나 염려한대로 재위 2년 만에 요절夭折(일찍 죽음)하고 나이 어린 단종이 12세로 등극하자 김종서와 황보인 등 중신들이 국가대소사를 관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황표정치黃標政治’ 다. 황표정치는 인물을 천거할 때 3배수를 추천하는데 어린 단종이 식별하기 쉽게 천거薦擧(추천)할 사람 이름에 노란 표식을 붙여 장계狀啓(추천서)를 올렸다. 단종은 노란 표만 보고 낙점落點(임명)을 했다. 신권臣權이 왕권王權을 능가한 상황에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아들로 뛰어난 자질을 지녔는데 왕권을 회복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계유정란癸酉靖亂(계유년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으로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뜻있는 신하들과 유생들이 왕위 찬탈에 반발했다.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환영연에서 운검雲劒(임금 호위무사)으로 뽑힌 무장武將들이 때를 보아 세조를 베고 단종을 복위復位(다시 왕으로 추대)하려는 비밀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모사謀士 한명회가 이를 눈치채고 갑자기 환영연에서 운검을 폐지하는 바람에 거사일을 연기했는데, 위험을 느낀 김질의 고발로 모의는 좌절되었고 모의 주도세력은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부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성삼문은 국문鞠問(심문)을 당하면서 세조를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했다. 세조가 내린 봉록(월급)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곳간에 쌓아두었다. 능지처참陵遲處斬(네 팔과 다리를 네 마리의 소나 말에 묶어 각기 네 방면으로 채찍질을 하여 사지四肢를 찢어죽이는 형벌)을 당하면서 절명시絶命詩(죽으면서 짓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북소리 둥둥 갈 길을 재촉하는데
서녘 하늘에 해는 저무는구나
황천皇天(하늘나라)에는 주막이 없다는데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잘꼬
백두산정계비 청구도 정문부 장군상과 북관대첩비
* Daum Blog 인용
가문家門(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뿔뿔이 흩어져 망함)를 당할 것을 예상한 신숙주의 부인은 미리 목을 매달아 죽었으나 신숙주는 변절하여 영화를 누렸다. 사회에서는 빨리 상하는 녹두나물에 신숙주의 이름을 붙여 ‘숙주나물’ 로 풍자諷刺(비꼬며 비웃음)하였다.
생6신은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인데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草野(산과 들, 시골)에 묻혀 살았다. 김시습이 신숙주의 집을 찾아와서 친구가 죽었노라고 상복을 입고 곡을 한 예화가 전한다.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국가와 왕에 대한 충절과 신념을 웅변한다.
* 거북선은 조선시대 초기에 만든 귀선龜船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장군이 전쟁을 대비하여 무장을 정비할 때 돌격선으로 사용하고자 귀선을 재정비했다. 임진왜란 때 실전에서는 3척이 활동하였고 철갑선으로써 공격선의 역할은 막강하였으나 해전의 주체는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이 전쟁의 주체가 된 데는 판옥선의 크기와 바닥의 구조다. 판옥선을 개발하여 전함으로 투입한 것이 이순신장군 해전 승리의 큰 요인이다. 중국과 일본의 전함은 바닥이 앞 뒤로 뾰쪽하여 침몰의 위험이 적고 깊은 물에서는 운용이 좋으나 기동성이 떨어졌다. 우리나라처럼 해안이 긴 해변에서는 움직임이 어려웠다. 우리나라 전함, 판옥선은 배 바닥이 편평하여 해안선이 길고 개펄이 많은 얕은 물에서도 자유자재로 운행이 쉬웠고 깊은 물에서도 진로를 바꾸기가 쉬웠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전함은 탑승 인원이 2, 300명이었기 때문에 운용이 더디고 무거운데 비해 이순신장군의 판옥선은 4, 50명의 날렵한 작은 배로 바다를 마치 물살을 타는 고기처럼 운용할 수 있었다.
* 임진왜란 3대첩(큰 싸움)은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그리고 김시민장군의 진주대첩을 말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3대첩은 정문부장군의 길주대첩을 보태 4대첩이 되어야 한다.
*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반환(2005. 10월, 러 ․ 일전쟁 때 탈취 반출하여 100년만의 반환)으로 알려진 정문부장군의 함경도 길주대첩 등 6대첩은 위 3대첩에 못지않는 임진왜란의 중요한 싸움이었고 승전이었다. 정문부장군은 문관으로 낮은 벼슬이었는데 의병에 의해 창의군대장으로 추천되는 문무 겸전의 학자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를 기반으로 의병의 선두에 서서, 먼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에 파견된 임해군과 선화군을 왜적에게 넘긴 역적을 주살하고 싸우는 곳곳마다 왜적을 박멸하였는데 함경도지방을 노략질하였던 왜군의 가장 강한 철포군단, 왜병 최고의 대장으로 일컫어지는 가또 기요사마(가등청정加藤淸正)의 2만2000명의 왜군을 불과 3000여명의 의병으로 쳐부수어 왜군의 북진(당나라 정벌)을 저지하고 결국은 패퇴케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정문부장군은 정권으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는데 이는 낮은 벼슬(정 6품)로 의병을 이끌었던 정치적인 문제와 관군이 패퇴를 거듭했던 당시에 의병으로써 승전한 일 그리고 인조 2년 일어난 박홍구 역모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무고로 풀려났으나 결국은 효종 대의 출중한 장수였던 남이장군처럼 한 편의 시가 도화선이 되어 시화詩禍로 국(고)문사했다. 북관대첩비는 함경도민들이 장군의 공적을 기려 백성들의 성금으로 숙종 35년 한기 9006년(AD. 1709년) 길주에 세웠는데 일제식민지시대 전리품으로 탈취한 왜군이 천황에게 진상하였고 야스쿠니신사에 버려져 있었다.
세종대왕상 사6신 성삼문상 신숙주상 청 태조 누르하치
* Daum Blog 인용 (한국의 형제국)
◎ 조선의 창업, 왕자의 난
* 방원은 성격이 호탕하고 위엄이 있었다. 무인기질은 아버지 이성계를 닮았다고들 했다. 한편 침착하고 냉정한 판단력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고려의 옛 지도층을 회유하고 설득하는 일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역성혁명이었으므로 우선 사회 지도층의 회유가 선결 문제였으나 충의가 절대가치였던 고려의 충실한 신하들은 역성혁명을 거부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 학자, 정치가들이 죽었다. 방원이 ‘하여가’ 로 마음을 떠보았으나 ‘단심가’ 로 대꾸하였던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척살한 것도 방원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둘째 부인에게서 난 방석을 애지중지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방원은 세자 방석과 그 형제를 제거하고 형(정종)을 형식적으로 보위에 추대하였다가 2년 뒤에 3대 태종으로 등극하였다. 창업 보다는 수성이 더 어렵다고 했던가? 태종은 수성의 길을 닦았다. 창업공신들이 대부분 도태되었다. 외척들도 뿌리를 잘라버렸다. 왕가의 혈족들도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세종이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태종의 셋째 충녕대군이었다. 양녕은 세자였으나 스스로 물러나 주유천하를 하였고 둘째 효령에게도 입산을 권유하여 효령은 스님이 되었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으면 부처님의 제자인데 무엇이 부러우랴’, 효령이 남긴 말이다.
* 세종은 태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얼마나 학문을 좋아했던지 눈이 짓물러 눈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능한 선비들을 길러내고 ‘훈민정음’ 을 창제하였다. 측우기 등 과학기기를 발명했고 4군, 6진, 3포를 개척했다. 그러나 아들 문종은, 세종이 병으로 시달렸던 말기에 세자로 정사를 유능하게 보좌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2년을 넘기지 못했고 12세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이 주축이 되어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척결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왕권의 확립이라는 명분과 정권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 수양대군은 태조와 태종의 기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신권에 대한 왕권의 대립이었다. 김종서, 황보인 등 수많은 신하들이 주살되었다. 이른바 ‘왕자의 난’ 이다. 단종은 보위 3년 만에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된 다음 비명횡사했다.
사6신과 생6신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학사회의 가치이념이었다. 조카를 밀어내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했다.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조선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0대 연산군 때 무오사화, 갑자사화, 병인사화가 있었고, 11대 중종은 기묘사화, 신사사화 그리고 13대 명종은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또 19대 숙종은 남인과 서인 각축의 기사사화, 20대 경종은 신임사화를 겪었다. 그러나 크고 넓게 보면 이들은 정치구도의 변화였을 뿐이고 나라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내외치의 안정 그리고 강력한 왕권 아래 파벌정권의 쟁탈은 외교정세를 살피지 못했다. 군비를 소홀히 하여 외침에 대비하지 못하고 주변국가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이룩한 다음 대륙 진출을 획책하고 있었다.
◎ 조광조, 개혁을 꿈꾸다
* 조선 11대 중종 때 학자요 정치가로써 도학정치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하였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사사(賜死, 왕의 사약을 받고 죽음)되었다. 조선 개국공신 온의 5대 손이며 아버지는 감찰 원강이다. 17세 때 어천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귀양살이 중이던 김굉필에게 학문을 베웠고 청년학자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한기 8707년(AD. 1510년) 사마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대학의 경륜을 역설하는 도학정치, 철인정치를 주장하는 대자성 유승조의 영향을 받았다. 한기 8712년(AD. 1515년) 관직에 나갔고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욕이 있었다. 37세에 대사헌의 자리에 올라 정치제도 개혁에 앞장섰다가 38세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전남 화순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왕도정치를 펴고 도학을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씨향약’ 을 간행하여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복리의 증진을 꾀했다.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반정공신의 훈작 삭탈을 요청했다. 특히 훈작 삭탈은 훈구파의 반발을 샀다. 이이, 이황 등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사림은 정신적 주체로 받들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한 학자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100년 뒤의 율곡 이이는 ‘其進有階기진유계 其變有漸기변유점, 일을 추진하는 데는 밟아야 할 단계가 있고, 그 상황을 바꿔나가는 데는 점진성이 있어야 한다’ 며 젊은 나이에 경세의 뜻을 다 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출중한 경세가를 애도했다.
조선 초 건조된 거북배를 한산대첩도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장군이 전투함으로 개조 * Daum Blog 인용
◎ 임진왜란,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
* 동아시아의 조선, 중국, 일본은 14세기에 새로운 국가와 정권이 등장하여 2세기 동안 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명나라가 동요하고 이웃한 여러 나라들이 자주적인 독립을 지향하는 경향으로 동아시아 정세는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명나라는 환관이 실권을 장악하고 지방의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하여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은 다이묘들이 무역을 통한 상권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하고 오다 노부시게정권이 통일을 강화하였다. 또한 일본은 포르투갈인들이 총을 보급하여 총포부대로 새로운 전투대형을 편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여 한기 8787년(AD. 1590년)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 뒤 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하였으나 다이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하급 무사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더욱이 삼포왜란, 영파의 난으로 명나라, 조선과 무역이 폐쇄되자 국내 안정을 위하고 국제교역을 타개하기 위하여 대륙진출을 통한 <체제변혁전쟁>을 획책하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1세기 동안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이루었으나 15세기 말부터 훈척(공신, 왕족)과 사림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연달아 사화가 발생하였고 선조 즉위 전후에 사림정치가 확립되었지만 혁신세력들은 보수파들이 꾀한 모의에 의해 정파정치로 변질되었다. 특히 군민일치의 개병제도가 붕괴되어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왔으며 선각자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도 정파 간의 이해로 무산되었다.
* 도요토미는 한기 8784년(AD. 1587년) 중국 침략을 위해 쓰시마 도주 소(종의조)에게 조선 침략방안을 논의했다. 소는 조선과 우호선린을 건의했으므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조선조정이 거절하자 다시 한기 8785년(AD. 1588년) 10월과 다음 해 6월 소는 승려 겐소와 같이 내한하여 다시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마지못해 조선에서는 한기 8787년(AD. 1590년) 3월 황윤길과 김성일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이듬 해 1월 귀국한 두 사람은 당파의 정략에 따라 상반된 의견을 보고했으므로 전쟁 발발 논의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그 해 4월 다시 겐소가 1년 뒤에 ‘명나라에 가는 길을 빌리겠다’ 고 통고하자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통보하고 대비를 하였으나 조정의 대부분은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에 민폐만 일으킨다는 정세론으로 적극적인 대비는 없었다. 군기도 문란했다.
도요토미정권은 한기 8788년(AD. 1591년)부터 조선 침략을 준비하여 군대를 재편하고 15만 8700명의 육군을 9대로 편성하였다. 한기 8789년(AD.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 1만8700명이 700여척의 병선으로 쓰시마항을 출발하여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전사했고 부산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동래부사 송상현도 전사하고 18일 가토의 후속부대가 부산에, 구로다의 제 3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이후 4 - 9번대의 후속부대가 상륙하여 수군병력 약 9000명과 합해 침략 병력은 20만이었다. 왜군은 세 길로 나뉘어 서울로 진격했는데 관군은 변변히 전투다운 전투도 치루지 못하고 패퇴를 거듭했다. 선조와 세자 광해군이 평양으로 피난했다. 선조의 피난 행렬에 돌을 던지는 백성들이 있었다. 난을 막지도 못했고 백성들을 남겨두고 피난을 가는 임금과 조정에 대한 불만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성난 백성들이 두 왕자를 잡아서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 역시 임금과 조정의 무능에 대한 불만이었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18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조정은 명에 원병을 청한다. 6월 평양이 함락되고 왕은 의주로 떠났다. 전쟁 2개월 만에 전국이 왜군에게 떨어진 것이다.
* 왜의 수군은 남해와 황해를 돌아 육군에게 물자를 조달하면서 수로로 북상하여 육군과 합세하는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였다. 조선수군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 장군,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 장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 전라우군 수군절도사 이억기장군이었다. 특히 이순신장군은 조정의 안일한 전쟁 논의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예상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식량을 비축하며 무장을 준비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돌격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조선 초기에 만들었던 귀선(거북배)을 개량하여 월등한 성능을 가진 철갑공격선을 건조했다. 4월 왜군은 경상도 좌우수영군을 쉽게 물리치고 저항 없이 전라도로 진격하였다. 5월 전라좌수영군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7척 도합 86척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6일 동안에 적선 40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5월과 6월에 이억기장군이 경상우수영과 합세하여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적선 70여척을 침몰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사천전투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했다. 왜군은 전 수군을 집결하여 조선수군을 격파하기로 하고 구키, 도토, 가토 등이 합세하여 6월 말 부산포에 진을 쳤다. 7월 이순신장군은 이억기장군의 함대와 합세하여 55척의 전선으로 견내량에 정박 중이던 와키사카 함대 73척을 공격하였는데 견내량이 물길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의 민첩성이 떨어져서 작전 수행이 원활치 못하자 이순신장군은 적을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학이 날개를 편 모습)으로 포위 공격하여 적선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포획하였다. ‘한산도대첩’ 이다. 이 전투로 남해의 재해권을 조선수군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남서해를 돌아 북상하는 육군에게 물자를 보급하고 합세하려던 왜군의 전략이 좌절되었고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뒷날 도요토미는 곡창 전라도를 재패하지 못한 것이 전쟁의 패인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침공에 전략적 중점을 둔다. 재해권 장악은 패퇴를 거듭하였던 관군과 지방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고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 해전에서 승리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경상도의 홍의장군 곽재우, 김면, 정인홍, 권응수. 전라도의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유팽로. 충청도의 조헌과 700의사. 경기도에서는 홍계남, 우성전. 황해도는 이정암. 함경도의 정문부, 정현룡, 오응태. 평안도의 조호익, 양산숙 그리고 의승군으로 묘향산의 휴정(서산대사)은 수천 명의 제자들로 승군을 조직하고 사찰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했는데 관동에서 유정(송운대사), 해서에서 의엄, 호남에서 처영, 충청도의 영규 등이 제자들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한기 8790년(AD. 1593년) 전국의 의병은 2만2600여 명으로 관군의 1/4 수준이었다.
* 한기 8789년(AD.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의 진주성전투는 김해 주둔의 왜군이 전라도 침공의 요지인 진주를 점령하기 위해 3만의 병력으로 공격한 전투다. 수성군 8600명과 곽재우, 최경회, 이달의 의병들이 성 밖에서 협응하여 6일 간의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을 마련하려던 왜군의 책략을 무산시켰다. 한편 조선조정의 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왜군의 최종목표가 명나라 침공이었으므로 자위책 차원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 선발대 랴오양 부총병 조승훈이 5000명으로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였으므로 이여송을 동정제독으로 삼아 4만3000을 파견했다. 한기 8790년(AD. 1593년) 1월 명군은 조선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 후 명군은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다가 벽제관에서 패하고 평안도로 후퇴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장군 의병부대가 가토군을 섬멸하였다. 이 때 우키다가 3만의 군사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는데 삼도절제사 권율장군은 백성과 합세하여 여러 번의 공방 끝에 이를 물리쳐 왜군이 서울 이북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 이다.
5륜행실도 훈민정음 학익진 조선백자
* Daum Blog 인용
* 전쟁이 장기화되고 소강상태에 이르자 왜군은 철수를 보장받기 위해 고니시의 강화 제의가 있었는데 명나라도 심의경을 보내 강화를 협상했다. 도요토미는 강화의 조건으로 명나라의 황녀를 왜왕의 후비로 보낼 것, 왜와 무역을 재개하고, 조선 8도 중 남부 4도를 왜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패전한 나라로써는 무리한 요구였다. 이에 명나라는 도요토미를 왜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책서를 보냈는데 도요토미가 크게 분노하고 정유재란을 획책했다.
강화가 결렬되자 한기 8784년(AD. 1597년) 선조 30년 1월 왜는 14만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두 번째 침략했고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를 총독, 양호를 경리조선군무, 총병관 마귀를 제독으로 5만5000명의 원군을 파견했다. 이미 조선은 재란을 예상하고 대비하였으므로 왜군은 북상하지 못하고 고니시군은 전라도 순천, 가토군은 경상도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순신장군이 왜군의 첩자에 의한 무고와 출동 명령을 보류하였다는 서인의 모함으로 파직을 당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장군이 파직되었다는 것을 안 왜군은 부산에 상륙하였고, 다시 재해권을 확보하여 원균의 조선수군은 6월 안골포전투, 7월 웅포전투, 칠천도전투에서 대패하였다. 8월 초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장군은, 수군이 전멸했으므로 전쟁을 육상으로 끌어들여 육지에서 합류하라는 조정의 지시를 반대하고 해상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병선이 있나이다’ 라는 장계를 올린 뒤 남은 전함 12척을 이끌고 명량(전남 진도)에서 지형을 이용한 전략으로 왜군의 전함 300여척을 대파했다. 이 승리로 왜군의 수륙병진전략은 수포로 돌아갔고 다시 조선이 재해권을 잡았다. 한기 8785년(AD.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조선군은 육지에서 명군 마귀, 유정, 동일원과 합세하여 물러서는 왜군을 추적했으나 명군 유정이 왜군의 뇌물을 받고 추적을 지연시켜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이순신장군은 명군 진린과 연합하여 퇴각하는 왜의 수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에서 왜 전함 300여척과 교전을 하여 200여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순신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지금은 싸움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는 유언을 남겼을 뿐이다. 노량해전으로 7년 동안 전라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노략질 당한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전란 뒤 임금 선조가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도 없었다(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라고 한 말은 이순신장군의 전라도 사수 전략의 탁월한 전술적 경륜을 웅변한다.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해전은 세계전쟁사에서 4대해전의 살라미스해전, 칼레해전, 트라팔가해전의 가장 윗자리에 선다. 러 ․ 일전쟁 때 러시아 무적함대를 대한해협에서 격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노 헤이하치로 제독은 승리를 축하하는 찬사를 겸양하며 ‘나를 넬슨에게 비교하는 것은 용납되지만 이순신장군에게는 비교하지 말라’ 고 했다. 일본에서도 이순신장군은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 임진왜란은 16세기 말 동아시아 3국이 참가한 국제전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왜는 도요토미정권이 붕괴되고 바쿠후정권이 등장했다. 바쿠후정권은 도요토미의 팽창정책을 철회하고 조선에 유화정책을 폈다. 전쟁 중 약탈한 문화재와 포로로 잡아간 우수한 학자와 장인들이 왜의 문화 발전을 촉진했다. 명나라는 국력이 소모되어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만주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칸에 즉위하고 후금을 세워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후진족이었던 왜와 여진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패자였던 명나라와 조선은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 호란, 다시 전쟁으로
조선시대 15대 왕 광해군은 명나라와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을 포괄하는 양면정책을 폈다. 누루하치가 10만의 원정군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조선에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양면정책을 펴고 있었으므로 강홍립에게 1만 명의 군사를 맡기면서 정세를 판단하여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강홍립은 조 ․ 명연합군이 심하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에 투항했다. 누루하치는 국제정세를 인정하였으므로 광해군시대는 후금과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집권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의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후금을 괴롭혔다. 누루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중원경영의 야심을 품고 명나라를 치기 전에 배후에서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먼저 공략해야 했다. 마침 ‘이괄의 난’ 이 실패하여 망명한 잔당들이 조선군사 정보를 알려주고 조선 침공을 부채질하자 한기 8824년(AD. 1627년) 인조 5년 후금은 3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압록강을 건너 침공했다. 명나라와 관계를 청산한다는 맹약을 위반하여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이었다. 정묘호란이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진격한 침략군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발생하자 원래 목표가 명나라 정벌임을 구실로 강화를 요청했다. 3월에 열린 강화의 조건은 ‘형제의 나라’ 맹약,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명나라와 잠정적으로 교류를 지속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후금은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한기 8829년(AD. 1632년)에는 형제의 맹서를 군신의 맹서로 고칠 것과 금 100냥, 은 1000냥, 직물 1만2000필, 말 3000필, 병사 3만 명을 요구했다. 이에 격분한 조정에서는 후금의 사신 접견마저 거부하고 죽일 것을 주청하였다. 그리고 8도에 전쟁유시를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를 정복하여 국호를 청나라로 개정한 후금은 한기 8833년(AD. 1636년) 인조 14년 12월 다시 신하의 맹서를 강요하였으나 조선이 듣지 않자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청 태종은 청, 몽골, 중국 한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명나라의 조선 지원을 막기 위해 랴오허에 별군을 배치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봉림대군 등 일부가 먼저 강화로 피난하고 뒤 이어 따라 들어가려고 했던 인조는 청군이 압박해오자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칩거했다. 인조는 1만3000여 명의 군사로 성을 사수하고 8도에 교서를 보내 근왕군을 모집했다. 그러나 관군과 의병은 성 밖에서 패전하여 흩어졌고 군량마저 부족했다. 전투는 소강상태였으나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조정은 혹한 속에서 식량이 떨어져 위기였다. 명나라는 수천 명의 원병을 지원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가고 말았다. 청군은 병력 12만을 결집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세자를 비롯한 2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견디다 못한 조정에서는 성문을 열고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거행하였다. 인조가 청 태종 앞에 3배9고두의 예를 하였다. 세 번 절을 하는데 한 번 절을 할 때 마다 3번씩 이마를 땅에 대는 ‘황제의 예, 고조선의 삼육구배三六九拜 또는 삼육대례三六大禮’ 였다. 절하는 이마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지 않다고 해서 언 땅에 이마를 수십 번 부딛쳤으므로 이마에서 선혈이 낭자했다고 전한다. 군신의 맹서, 인종의 장자 소헌세자와 봉림대군, 귀족의 자제들 수십 명의 인질, 명나라 연호 사용 금지와 국교 단절, 명나라 정벌 때 원정군 파견, 통혼, 성 개축과 신축 금지 등을 강요받았다. 청 태종의 승리를 기념하는 ‘삼전도비’ 가 그 날의 처참함을 새겨 말없이 남아있다. 청군이 물러간 뒤 공물과 사대는 형식적으로 하였고 명나라 공격 때 출병한 임경업장군은 군량미를 일부러 수장시키고 군선을 파괴한 다음 몰래 명나라에 전황을 알렸으므로 뒤에 이를 알게 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리고 오히려 숭명배청사상이 활발해졌다. 다음 즉위한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잡혀가 8년 간 인질이 되었던 봉림대군이다. 효종은 등극하자 북벌의 강한 의지로 조정을 전시체제로 운영하였다. 이완대장을 앞에 내세워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허생전의 허생은 이완대장에게 북벌을 하려거든 지금부터 10년 간 칼을 녹혀 괭이를 만들고 창을 두드려 호미를 만들라고 말한다. 효종은 원대한 이상을 발현하지 못하고 장년의 나이에 요절했다.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동학東學농민혁명
임진왜란민화 임진왜란의병도 임진왜란침략도
* Daum Blog 인용
* 압록강과 두만강 위쪽 백두산 너머 그리고 시베리아와 만주 남쪽에는 슈하이樹海라고 불리는 한국영토의 30배 정도 되는 밀림이 있다. 여기에는 한국인, 만주인, 중국인, 러시아인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고리드인라는 종족이 있다. 고리드인은 수렵족인데 그들의 개는 고리드개로써 한국의 풍산개, 만주개, 러시아의 허스킨, 일본 토착인 아이누개와 함께 동북아의 사냥개로 이름이 높다. 고리드개 한 마리는 사슴을 잡고, 두 마리면 맷돼지를 잡을 수 있으며, 세 마리면 곰을 잡고, 다섯 마리는 호랑이도 잡는다. 세계의 사냥개들 중에서 호랑이를 잡는 개는 고리드개 뿐이다. 동북아 사냥개들의 조상이 고리드개라는 학설이 있다. 고리드개를 기르는 고리드인들의 이름에 고조선시대의 작은 성읍국가들과 고려의 이름이 묻어난다.
경국대전 조광조 전남화순 정약용 목민심서 조선백자
귀양살이 유적 * Daum Blog 인용
◎ 영조의 탕탕평평책蕩蕩平平策, 또 다시 노소시벽老少時僻 할 것인가?
* 붕당朋黨은 한기 8772년(AD. 1575년) 선조 8년 이조의 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동인)과 심의겸(서인)의 반목에서 시작되었다. 전랑직은 정 5품으로써 직위는 낮으나 인사권을 행사하는 직책으로 인사를 국왕이나 판서가 하지 않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여 공의에 부쳐 선발하였으므로 관료들의 대립이 불가피하였다. 동인은 서인에 대한 강온 양론으로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3색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 뒤에 화의를 주장했던 유성룡이 실각하자 남인이 몰락하였다. 북인은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광해군을 옹립하여 폭정이 계속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득세하였으나 남인도 제 2세력으로써 숙종 때까지 100여 년 간 대립하였다. 서인집권은 현종대까지 지속되었는데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예학논의가 벌어졌는데 당론으로 전환되어 정치적 운명을 걸었으나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복상문제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남인의 횡포가 자심하자 송시열이 다시 등용되었으나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영조는 탕평책을 내세워 정쟁이 완화되었으나 남인의 소론이 시파 벽파로 분파되고 카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신서교파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시 ․ 벽파의 카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 뿐만 아니라 남인의 대부분인 실학자를 말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7세기 중엽까지는 정치이념과 학연에 따라 상대세력과 공존공도를 추구하는 정치 활성화와 상호 비판 견제의 기능을 발휘하였으므로 원리가 확고하여 정국이 안정되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는 정권 획득에 집착한 논쟁이 학벌, 문벌, 지방의식까지 연결되어 국가 사회 발전에 폐해가 되었더니 이어 생존을 건 사화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사림세력이 붕당정치를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은 향촌사회의 사원과 향약이며 경제적 토대는 사원에 할당된 농장이었다.
* 숙종은 재위 말년에 탕평책을 도입하였으나 불완전했다. 영조는 불편부당의 본격적인 탕평책을 시행하여 당파의 행위는 무조건 축출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기 8925년(AD. 1728년) 영조 4년 소론과 남인이 연좌된 ‘이인좌의 난’ 에 노론이 중용되어 노론천하가 되었다. 노론 소론의 분쟁은 사도세자의 폐위에 이르렀고 노론의 시파 벽파는 치열한 당쟁을 일으켰다. 정조는 사도세자인 아버지에 동정적인 시파를 중용했다.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세도정치라는 파행적인 정치형태가 등장한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헌종, 철종대까지 지속되었다가 대원군정권에서 막을 내리나 곧 다시 명성황후가 주도하는 풍양조씨의 세도가 시작된다.
◎ 천주교의 순교殉敎
당시 지도층은 천주교를 동양윤리의 이단異端으로 몰아 온갖 박해迫害를 자행하였는데 한기 8998년(AD. 1801년) 박해의 직접적인 배경은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었다. 5가작통법(다섯 집을 묶어 서로 고발하는 호적제도)로 천주교도를 적발하였고 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초대 교회 건설 신도들이 대부분 순교했다. 한기 9028년(AD. 1831년) 9월 정약종의 아들이 로마 교황청에 호소하여 서울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한기 9036년(AD. 1839년) 기해사옥은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박해에 이은 풍양조씨 세도정권에서 자행된 박해다. 조선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8043년(AD. 1846년) 병오박해로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대원군이 집권하여 6년 동안에 8000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정권 싸움에 희생되었다.
◎ 민란民亂, 동학농민혁명
* 홍경래의 난 은 조선시대 23대 순조 11년 한기 9008년(AD. 1811년) 12월부터 순조 12년 4월까지 5개월 간 일어난 조선시대 최대의 난이다. 조선시대 주요산업인 농업은 17 - 18세기에 들어 농사기술의 향상과 토지겸병으로 광작운동이 일어나 경영형 부농층이 형성된다. 그러나 극소수의 부농층에 비해 대다수의 농민들은 유리민이 되어 광산 노동자나 도시 빈민층이 되었다. 상공업에서도 수공업자가 전업화되고 대외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종식되고 안동김씨세도가 횡행하여 3정의 문란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 우군직, 김사용, 김창시, 이서충이 정감록을 이념으로 부농, 서민지주층, 개인상인층의 재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결집했다. 특히 홍경래가 살았던 서북지방은 구조적 수탈과 서북민의 차별화정책이 공동 피해의식으로 나타나 한기 9005년(AD. 1808년) 순조 7년 농민이 봉기하자 평안도의 다양한 계층이 결집했다. 삽시간에 1000여 명의 봉기군을 수습하여 10여 일만에 청천강 이북의 10여개 지역을 점령하고 평안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봉기군은 곧 수천 명이 되었고 농민군의 성격으로 기세를 떨쳤으나 경군, 향군, 민병토벌대와 4개월 공방전 끝에 패퇴했다. 농민군이 크게 떨치지 못한 원인은 지휘부에서 부농 상인층과 소농, 빈농, 유민 노동자의 상호 대립적 성격을 융화시키지 못하였고, 서북인의 차별 대우 시정,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척결, 정도령의 출현을 통한 이상 등 이념과 정략의 한계 때문에 관군의 반격으로 대패하여 정주성에 칩거하였으나 200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수습되었다.
6. 25 이전에는 일본인 학자 오다 등이 당쟁사적 관점에서 서북인의 푸대접, 개인적 정권
기도라는 해석을 했으나 1960년대 이후 정체성 비판의 일환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규정한다.
두만강의 중국과 중국 화동사범대학 동학농민군 철화백자
조선 국경 표지판 출판 당나라 지도 * Daum Blog 인용
* 진주민란 은 철종 13년 한기 9059년(AD. 1862년) 2월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봉기다. 경상도에서 단성현의 농민들이 일어난 것을 필두로 18개 지역에서 봉기가 있었다. 전라도에서는 3월에 시작되어 익산 등 40여 곳에서 일어섰는데 이는 전라도의 전 지역이다. 충청도에서는 5월에 회덕 등지에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진주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탐관오리들의 불법 수탈 방편인 도결과 환보문제였다. 이는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자행된 관료 수탈의 전형이었다. 진주민란의 시발지는 진주읍 서남쪽 유곡동인데 유곡동리회에서 모의했다. 세도정권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을 약속하였으므로 곧 자진 해체되었으나 이는 임기응변의 기만책이었다. 그래서 근본적인 대책으로 토지제도의 개혁으로부터 사회의 제도개혁이 요구되었으며 봉기는 잠재했다.
# 고종 31년 한기 9091년(AD. 1894년) 갑오경장의 정변이 일어났고 동학혁명이 꿈틀거리던 해 초봄, 서울 장안의 중인中人마을에 큰 잔치가 벌어졌다. 상업으로 거부가 된 집안에서 가문이 좋은 양반사위를 맞는 날이었다. 돈과 신분을 결합시키는 정략혼인이었는데 양쪽 집안에서는 그 걸 과시하기 위해 천 평 가까운 마당에 수십 개의 차일이 둘러서고 수백 명의 손님들이 끊일 사이 없이 드나들었다. 잔치에는 소가 3 마리, 돼지가 10 마리, 닭은 50 마리를 잡았다는 소문이었다. 열 말 들이 술독이 쉴 새 없이 비워졌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 키가 여섯 자가 넘는 건장한 사내가 대문에 들어섰다.
“무성이다!”
잔치판이 술렁거리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서울 장안 백정白丁(소나 돼지를 전문적으로 잡는 일) 두목 무성이었다. 무성無姓이란 성씨를 모른다는 뜻이다. 무성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는데 그가 걸어오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경비를 위해 나온 포졸들과 일당을 받은 장돌뱅이들이 달려왔으나 나타난 사람이 무성이란 걸 보고는 슬슬 피했다. 무성은 무표정이었으며 눈이 얼음처럼 차가왔다. 그는 힘이 장사였다. 그가 씨름판에 나서면 한다하는 장사들도 모두 설설 긴다고 했다. 그는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다. 소를 잡을 때 사용하는 날이 시퍼런 칼이었는데 필요하면 사람도 잡는다는 소문이었다.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노비법이 폐지되고 있었다. 그를 건드리면 장안의 수천 명 백정들이 들고 일어선다. 단결력이 강한 그들은 불도 물도 모른다. 경호원들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을 막고 있었으나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늙은 집사가 나섰다.
“자네가 웬일이가? 볼 일이 있다면 은밀하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
“거지처럼 뒷문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입니까? 백정은 거지가 아니외다.”
“볼 일이 뭔가?”
“이 천한 놈은 친척을 뵈러왔소이다.”
실수였다. 가축 도살은 백정들의 생업이었다. 돈을 좀 아끼려고 집안 종들을 시킨 것이 말썽이었다. 백정들의 정보망은 정확하고 빨랐다.
“종들이 모르고 한 일일세.”
“천만에, 종들이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법. 혹 집사 어르신이 우리네 친척이요? 아니 면, 이 집 주인이든지.”
“예끼, 이 사람!”
집사는 무성이 요구한대로 소 한 마리 값을 물어주었다. 그 이상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만 다행이었다.
무성이 잔칫집에서 한 건 올리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멀리 전라도에서 손님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성의 집은 대지가 200여 평이나 되고 사랑채, 안채는 물론 행랑채까지 있었다. 백정들은 일반 서민들과 떨어져 자기들 끼리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사회에서는 천대를 받고 있었으나 생활이 궁핍하지 않았다. 전라도에서 온 손님들은 별당에 모셨다.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비밀 방이었다. 손님들은 두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형님 아우로 지내는 전라도 백정두목 곰보였고 다른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곰보는 그를 박주사로 존대를 했는데 건장한 체구에 눈이 날카롭고 상투를 틀었다. 무성은 뭔가를 짐작하고 긴장했다. 동학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 같았는데 무성의 짐작은 옳았다. 손님은 조용조용하게 말했고 무성은 듣기만 했다. 박주사는 동학 수령 전봉준장군의 최측근이었다. 동지규합 책임자였다. 백정들은 포섭해야할 대상이었다. 박주사는 이미 전라도 백정들을 혁명에 끌어들였다. 박주사는 신분을 밝히거나 혁명에 동참해달라고 직접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혁명은 반역이었으며 중죄였다. 잔인한 불고지죄도 있었다. 박주사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그저 조용하게 말했다. 양반댁에서도 구경하기 어려운 값비싼 소주가 나왔고 부잣집 못지않은 좋은 안주가 나왔다.
“기왕 오셨으니 며칠 머물다 가시지요.”
백정사회에도 장로들이 있었으므로 상의를 해보겠다는 뜻이라고 곰보가 설명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고지죄不告知罪를 면하기 위해 고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백정사회에는 그들만의 불문율不文律이 있었다. 배신은 없었다. 그래도 박주사는 품속에 지니고 다니는 6혈포穴砲(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어놓았다. 박주사 일행은 사흘 동안 머물렀다. 무성은 그저 모든 일은 자기에게 맡기라고만 얘기했다.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면 협조하겠다는 암시였다. 백정들이 뭉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만일의 경우 책임을 자기 혼자 지겠다는 의도였다. 무성은 떠나는 박주사를 마을 입구에 까지 따라 나와 작별했다. 작별 인사 외에는 말이 없었다.
박주사는 그 길로 함경도로 향했다. 관군을 돕는 일본군들은 조총鳥銃을 가지고 있어 그들과 겨루려면 화승포火繩砲를 가진 포수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포수들도 단결력이 강했고 소외된 집단이었다. 박주사는 함흥에 도착하여 어느 주막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종달이라는 포수를 만났다. 종달은 5년 전에 주인집에서 도망친 노비奴婢(종)였다. 열여섯 된 누이가 밤에 주인 양반의 침실로 끌려가는 것을 봤고, 질투에 미친 안주인에게 매를 맞고 죽었다. 탈출을 도와준 것이 박주사였다. 종달을 만나 하루 종일 산길을 가다가 해가 져서 동굴을 찾아 밤을 새는데 밤중에 범이 으르렁거렸다.
“여기서부터는 범의 영토입니다.”
“자네 주인은 혁명군에게 잡혀 처형되었어.”
그 혁명군을 박주사가 지휘했었다. 혁명군에게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으나 악독한 종달의 주인은, 박주사가 말릴 새도 없이 원수를 갚으려는 농민군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었고 주인 보다 더 악랄하다는 안주인은 마당에 끌려나와 옷을 벗긴 체 난도질을 당했다. 종달이 일어나 박주사에게 넙죽 절을 했다. 눈에 눈물이 어려 있었다. 이튿날도 종일 산을 탔는데 밤중에 종달은 박주사를 동굴에 남겨두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가 잠시 뒤 돌아왔다. 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뒤를 미행하는 염탐꾼을 처치했습니다.”
관아에서는 염탐꾼을 사방에 풀어놓았다. 농민반란의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따라붙은 염탐꾼은 주막에서부터 미행했었던 것 같았다. 시신을 늑대길에 던져놓았으므로 다음 날에는 뼈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개마고원은 그런 산이었다. 개마고원에는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톱니처럼 이어져 있었고 그런 첩첩 산중에는 관아의 힘이 미치지 못했으며 그 곳을 지배하는 사람은 축지縮地장군(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축지법을 쓰는 포수마을 두령頭領)이었다.
“여기에는 양반도 없고 상민이나 천민도 없소이다. 모두 같은 사람이지요.”
축지장군은 반백半白의 머리칼을 짧게 깍은 깡마른 체구였다.
“군수인가 뭔가가 범 껍질을 바치라고 하지만 어림도 없지요. 우리는 이렇게 사는 산 사람 입니다. 평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우리는 우리대로 삽니다.”
“관리나 양반들이 착취를 한다면 힘으로 때려 부숴야지, 왜 착취를 당하고 있는 거요?”
“평지에서 살지 못하게 되면 이리 오시오. 우리와 함께 삽시다.”
박주사는 사흘 동안 포수마을에 머물면서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박주사가 떠나는 날 축지장군은 종달을 데려가라고 했다. 포수마을로 오는 길을 종달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축지장군의 이러한 배려는 몇 달 뒤에 동학지도부에게 대단히 중요한 암시가 될 줄은 그 때는 몰랐다. (사냥꾼의 이야기, 광주일보사)
전봉준 압송과 황토현 전봉준상 동학군 제단 동학교도 비밀장소
농민혁명 그림 * Daum Blog 인용 병풍바위(흰색)
* 19세기 후반 조선 봉건사회는 농업생산력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이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었다. 한기 9057년대(AD. 1860년)부터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나 정부는 봉건지배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을 간과하고 현상적인 조세제도의 부분적 개선을 통해 무마하려고 하였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일본제국과 불평등 무역구조에서 소수의 지주, 부농, 상인들의 고리대금과 수탈로 대다수 농민들은 몰락의 강도가 심해졌다. 호남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의 봉건적 수탈이 자심했고 유형원의 학통을 잇는 부안의 동림서원과 강진으로 유배되었던 정약용의 실학적 진보주의가 형성되고 있었다. 동학은 몰락 양반 최재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개벽을 통한 만민평등을 이념으로 삼았다. 대규모 조직이 필요했던 농민운동은 동학을 근거로 했다. 한기 9091년(AD. 1894년) 1월 일어난 고부민란이 동기였다. 고부민란은 부당한 세금을 수탈하여 착복한 군수 조병갑을 징계하자 일단 해산했다. 전봉준 장군은 무장에서 3월 초 손화중 김개남과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표방한 창의문을 발표하고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였다.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척결하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을 전국에 배포했다. 백산에서 대오를 정비한 동학군은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물리친 뒤 정부가 파견한 홍계훈을 장성에서 격파했고 이어 진주성을 점령했다. 정부는 4월에 청나라와 일본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는데 농민군이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여 5월에 화약이 체결되었고 농민군은 진주성을 양도했다. 그러나 화약이 실행되지 않자 전봉준 장군은 전라도 53주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작업을 착수했다.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가 연계 봉기하였다. 한기 9091년(AD. 1894년) 6월 정부의 요청으로 입국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 ․ 일전쟁을 도발하였으며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봉건체제의 개혁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이 내정을 간섭하고 농민군 토벌에 나섰으므로 농민군이 재봉기했다. 전봉준 장군은 동도창의소를 만들어 항일투쟁을 촉구했다. 1차 봉기에 반대했던 최시형의 북접도 연합했다. 공주의 20일 간 공방전에서 동학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논산으로 밀렸으며 패전했다. 금구, 태인 전투에서 핵심지도부가 총 집결한 가운데 마지막 결전을 벌였으나 역시 패퇴하여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렸다. 이후 산발적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으나 괴멸되었고 농민군은 초토화되었다.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을 기치를 내걸고 일어난 동학혁명은 봉건지배층과 농민층의 근대화노선의 충돌이었다. 영세한 농민들이 소품생산자로 자립 발전할 수 있는 농민의 토지 소유, 탐관오리 제거, 민씨정권의 봉건적 폐단 시정, 봉건제도 폐지, 친일정권 타도를 외치며 들불처럼 일어난 민족운동은 많은 희생을 내고 패퇴하였으나 농민을 각성시키고 대중투쟁세력을 강화한 불길이 되어 이후 한국 정치사회의 영원히 꺼지지 않은 불씨로 되살아났다.
동학농민혁명이 정권교체의 혁명으로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애초에 부정부패 척결을 목표로 탐관오리의 응징 차원에서 발생하여 정권교체의 적극적 정치적 이념과 주체가 없었고, 국민적 봉기로 힘을 모으기 위해 저변확대에 치중하다보니 시기를 놓쳤다. 청군과 일본군 그리고 관군의 화력이 우수하다고 하나 전국적인 봉기로 거대한 군단을 이룰 수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므로 정략적 전략이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정권을 타도하고 농민을 위한 진보적정권이 수립될 수 있었는데 한국역사에서 민중혁명의 기회는 물거품이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AD. 1628년), 프랑스의 시민혁명(AD. 1789년) 그리고 일본의 명치유신(AD. 1837년)과 같은 반열의 정치혁명이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세계열강의 각축장화 되었던 국제적인 정세가 크게 작용했지만 민족적으로 동학혁명의 실패는 근대화의 시기를 잃고 이후 수많은 질곡을 겪어야 하는 운명적인 시련이었다. 근대대한사에서 잇달아 일어난 소요와 사태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 의한 역사적 필연이었을 것이다. 전봉준장군이 사형을 당하고 지도부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조선민중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이렇게 노래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나무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르다
전남 장성군 전남 장성 복원된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일지매
홍길동 캐릭터 홍길동 생가 계란도술 겨루기 * Daum Blog 인용
◎ 조선의 기인열전奇人列傳
조선시대의‘선비’는 고조선의‘선뵈’에서 유래했다. 고조선에서는 가을 사냥대회를 열어 수확물이 가장 많은 사람을 선보이고 선뵈라 불렀다. 뒤에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했는데, 선뵈로 뽑힌 사람이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무궁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 하였다.
천지화랑은 열국시대 고구려에서는 조의皁衣로 불렸다. 백제의 무절武絶이나 신라의 화랑花郞도 같은 뜻이다. 최치원이‘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라고 했는데 이 또한 유불선儒佛禪을 아우르는 천지화랑의 수련과정이었다. 고구려의 조의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띠를 둘러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의는 사냥대회에서 뽑히면 나라에서 의식주를 책임졌다. 오직 문무文武 수련에 몰두했으며 국토 순례도 수련의 과정이었다. 조의는 평상시에는 문무를 수련하였으나 국가가 주도하는 국책사업 - 길을 닦는다거나 성을 축조하는 일에 동원되었고, 일단 유사시에는 신크마리라고 불리웠던 조의의 우두머리가 수하부대원을 동원하여 나라를 지켰다. 조의는 전쟁에 나가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으며 전쟁에 패하면 살아서는 돌아오는 일을 부끄러이 여겨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고조선과 고구려와 열국들이 나라를 수호하고 국토의 강역을 넓힌데 이들의 역량이 원천이었다. 세계 전사상 3대 위대한 정복자의 하나로 꼽히는 흉노 일파 훈족의 아틸라나 돌궐족의 일파였던 오스만 투르크의 예니체리도 천지화랑과 같은 조직체의 군대다. 이들이 머리를 깎아 스님처럼 보였으므로 승군僧軍이나 재가화상在家和尙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또한 귀족이 아닌 일반인이나 천민 신분으로 벼슬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어서 인재 등용문이었다.
고려 말부터 천지화랑의 정신과 조직이 쇠퇴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천지화랑이 선비로 고착되었는데 무武를 천시하고 문文을 숭상하는 풍조가 형성되어 천지화랑정신은 문무文武 양반兩班 중 문반文班으로 고착되었다. 그래서 천지화랑은 사라지고 선비만 남았다. 선비는 문반을 뜻한다.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을 표현하는‘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는 말에는 천지화랑의 기개가 들어 있다. 이렇게 문약文弱에 흐르면서 천지화랑은 사라졌다. 그러나 천지화랑의 후예後裔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고조선이 멸망하자 선기옥형을 받들고 은둔한 것처럼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따라 그들은 깊은 산속이나 절로 들어갔다. 그리고 연연한 명맥을 이어왔는데 그 명맥은 1945년 해방조국에서 요인 암살을 자행했던 백백단으로 조직적으로 이어졌으나 그 이후에는 완전히 소멸하고 다만 아직도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련하는 이들이 몇몇 남아있다고 본다. 그들은 문무겸전文武兼全으로 선기옥형을 통해 천기를 살펴 우주원리 안에서 순리를 쫓아 살면서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지켰다.
고조선의 천지화랑들이 고조선이 멸망하자 선기옥형을 감추고 입산하였다가 고주몽이 고구려를 창업하자 백두선인 - 고주몽은 백두선인을 고조선의 마지막 천왕 고열가로 믿는다. 백두선인은 고주몽에게 선기옥형을 전수하고 천지화랑들이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고구려 700여년 간 천지화랑은 조의가 되어 고구려가 옛 고조선의 강역을 회복하는 다물多勿을 이루었으며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정권 찬탈 뒤 조의는 다시 선기옥형과 함께 사라졌다. 그 뒤 선기옥향은 도선국사 - 왕건은 도선국사를 백두선인으로 알고 있다, 도선국사로부터 왕업을 전수한 왕건은 선기옥형을 물려받아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창업했다. 그러나 고려는 선기옥형을 전승했지만 천지화랑을 몰려받지 못했다. 천지화랑이나 조의가 없었던 고려는 강역이 축소되었고 외세의 알력과 내부의 반란에 시달렸다. 정중부의 난은 문반과 무반의 갈등에서 무반의 국권 찬탈로 무반이 일어서는 계기였다. 그러나 국정 쇄신을 기치로 일어선 무반은 문반의 병폐를 그대로 답습했다. 끝내는 중국의 청나라에게 정복되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고려와 형제의 나라였다. 그래서 나라의 명맥은 유지되었다. 뒤이어 일어난 조선은 선기옥형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천지화랑도 사라졌다. 태종 때 농부가 고려시대의 천상분야열차지도각석을 대동강변에서 주어 태종임금에게 바치자 이 우주도로 선기옥형을 대신했다. 조선시대부터 천지화랑과 조의는 명맥이 사라지고 선비만 남았는데 조선시대의 선비는 학자를 뜻했다. 문무겸전의 정신은 사라지고 문예만 남았기에 문약으로 흘렀다. 조선시대에 양반이 있었는데 문반이 정국을 주도하였고, 무반은 문반의 문지기에 불과했다. 천지화랑들은 구심점을 잃고 자존감도 없어졌으므로 자연히 깊은 산속에 은둔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이 속세에서 이르는 화적이나 의적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기도 했으나 대부분 천지화랑과 조의들은 때를 기다리며 수련과 수행에 정진했다. 그러나 나라는 오래토록 그들을 불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 유사시에는 의병으로 승병으로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는 또 다시 은둔해버렸다. 조선중기에 선기옥형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비들이 선기옥형을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시대 고주몽이 소서노와 열국에 기증한 모사품에 불과했다. 기인열전의 기록은 천지화랑과 조의의 기록이다.
* 홍길동洪吉童
홍길동의 저자 허균은 허엽의 아들로써 서얼庶孼이 아니고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이었는데 이복 형들의 차별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반항적 기질이 있었다. 이복 형 허성은 문장이 출중하여 중국 사신으로 활약했고, 문장과 그림에 천부적 재질을 발휘한 허난설헌은 허균의 동복 누이다. 허엽은 서경덕 문하의 문장가요 학자였다. 허균은 출사를 하였으나 불교에 심취하거나 기인 기질로 늘 관직을 박탈당했다. 1615년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 책임자로써 천추사로 2회 파견되었는데 명나라 문헌의 조선의 종묘사 기록 오류를 발견하여 바로 잡음으로써 광해군으로부터‘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처럼 빛난다’라는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허균은 혁명을 꿈꾸었다. 서얼 차별, 신분계급 타파, 붕당 혁파가 혁명의 기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혁명 기밀이 누설되고 이이첨의 진압군에게 체포되어 능지처참(팔다리 등 4지를 4방으로 향한 말이나 소에 묶어 채찍질하여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였다.
홍길동은 연산군 6년, 가평과 홍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화적火賊이다. 허균은 홍길동과 명종 때 의적 임꺽정, 선조 29년 7월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종실 서얼로써 충청도 홍산에서 활약했던 이몽학 등을 조합하여 홍길동전을 썼다.
극중의 홍길동은 홍판서의 첩 초란에게서 태어난다. 자라면서 호형호제呼兄呼弟를 하지 못하고 차별을 받았기에 반항아다. 더구나 큰어머니의 질시가 압박해오자 어머니는 홍길동에게 가출할 것을 권유한다. 홍길동은 유랑하다가 스승을 만나 도술 - 도교사상의 둔갑술, 축지법, 분신술, 승운법을 익히고 동지들을 모아 활빈당을 결성한다. 가난한 백성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축적한 재물을 빼앗아 백성들을 규휼한다. 국왕은 홍길동을 잡기 위해 관군을 풀었으나 도술을 익힌 홍길동을 잡을 수가 없었다. 도술을 부리는 그는 조선 8도를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출몰하여 도저히 포박할 수가 없다. 또 8도 관아가 같은 날 한 시에 습격당한다. 그러자 홍길동의 아버지 홍판서를 위협해서 홍길동을 회유한다. 홍길동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활빈당과 함께 이상향을 찾아 나라를 떠난다. 남경을 거쳐 율도국에 이르러 산수가 수려하고 땅이 기름졌으므로 스스로 왕이 되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아버지의 부음을 받아 귀국하여 3년상을 치루고 다시 율도국으로 떠난다. 율도국은 홍길동전 연구학자들에 의해 오끼나와로 추정된다. 오끼나와에 홍길동전괴 비슷한 전설이 있고, 홍씨 가문이 있다.
* 남사고南師古
조선 중기의 학자요 도사道士. 역학, 참위讖緯, 천문, 관상, 복서卜書의 비결에 뛰어났다. 본관은 양양, 호는 격암.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년)의 동서분당과 1592년의 임진왜란을 예언했다. 풍수지리에 능해 전란을 피할 10승지지勝之地를 천거했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년) 울진의 향사鄕祠에 제향. 한역(주역)을 연구하여 천문지리에 통달하였다. 그의 예언은 동시대 동서 예언가로써 노스트라무스의 예언과 일치하는데 노스트라무스가‘구원의 거룩한 무리가 동방에서 출현한다’고 한 것과 남사고의 격암유록에서‘천하의 문명이 간방艮方(동북방)에서 시작하니(天下文明始於艮) 동방예의지국 조선 땅 호남 전라도에 천지의 도가 통한 무극無極의 도道라 고 했다.
*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피란처避亂處, 10승지지勝之地
정감록鄭鑑錄,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責,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공통되는 장소는 다음과 같다.
영월의 정동正東 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 동북쪽,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雲峯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무주茂朱의 무풍茂風 북동쪽 등이다. 이중에서 위치를 현재의 지명으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는 곳은 운봉의 동점촌, 무풍의 북동쪽, 부안의 호암, 가야산의 만수동이다. 한편 영월 정동 쪽 상류는 오늘날의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풍기의 금계촌은 영주군 풍기읍의 금계동, 욕금동, 삼가동 일대.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는 말 그대로 공주군 유구면과 마곡면을 각각 흐르고 있는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의 지역, 예천 금당동 동북쪽은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의 금당실金塘室지역, 보은의 증항 근처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인 시루봉 아래 안부鞍部지역, 안동의 화곡은 봉화군 내성면지역, 단양의 영춘은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부근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남한에 편중되어 있고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접근하기 힘든 오지이다. 이런 곳이 선호된 것은 전통사회에서 전쟁이나 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이 취할 수 있는 방도란 난리가 미치지 않을 만한 곳으로 피난하여 보신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십승지에 대한 열망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6 · 25전쟁 때에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십승지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피란 보신의 소극성은 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이상세계를 대망하는 적극성과 연결되어 있다.
* 전우치全禹治
전남 담양의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도술소설 주인공. 중종 때 도술과 시에 능함. 그러나 반역을 도모한 죄로 처형당함. 조야집요朝野輯要, 대동야승大東野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수록됨. 개성에 신비한 도술을 부리는 기인이 살았는데 재주가 출중하였으나 재물을 탐하지도 않고 벼슬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적이 출몰항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피폐로와지자 천상선관天上仙官으로 변신하고 왕을 찾아가 옥황상제의 명령이라며 황금들보를 만들라고 한다. 그는 이 황금들보를 외국에 팔아 쌀 수 만 섬을 장만하여 백성을 규휼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뒤늦게 전우치에게 속은 것을 안 왕이 잡아다가 국문하자‘나의 죄를 다스릴 정신이 있으면 백성을 다스리라’고 충고했다. 왕이 이를 깨닫고 방면하였다. 그러나 곧 역적의 누명을 쓰고 처형의 위기에 몰리자 죽기 전에 한 가지 소청이 있다며 그림을 한 장 그리게 해달라고 했다. 왕이 허락하자 그는 붓을 들고 산수화 한 폭을 그린 뒤 마지막으로 나귀 한 마리를 그려서는 이 나귀를 타고 홀연히 그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뒤 서화담(서경덕)의 도술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화담을 찾아가 도술을 겨누고는 자신 보다 한 수 위임을 자인하여 제자가 되어 태백산에 들어가 수도했다.
* 서산대사(휴정)과 사명당(유정)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구한 의병장이다. 사명당이 서산대사와 도술을 겨루는 일화가 전해온다.
사명당은 나름대로 도술을 터득하여 당대 일인자로 행세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산대사의 명성을 들었다. 그래서 자웅을 겨루고자 서산대사가 머물고 있는 금강산 유점사를 찾아갔다. 서산대사가 중노미를 불렀다.
‘얘야, 손님이 오시고 있으니 동구 밖으로 마중해라. 가다가 개울이 거꾸로 흘거든 손님이 가까이 왔다는 걸 알아라.’
중노미는 대답은 하였으나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왜냐면 대사는 아침부터 대웅전에서 염불을 하였고 밖에 나간적도 또 누가 손님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심쩍었으나 산문 밖을 나섰는데 아니나 다를까 개울물이 거꾸로 흐르지 않은가. 놀래서 어쩔줄 몰라 엉거주춤 서있는데 스님 한 분이 개울길을 타고 올라온다.
‘얘야, 네 스승이 마중가라더냐?’
‘그렇습니다만 스님께서는 뉘시온지?’
‘차차 알게 되겠지. 헛헛, 헌데 내가 졌구나.’
스님은 모를 소리를 하면서 앞장 서서 걷는다.
절에 다다르자마자 사명당이 하늘로 손을 쭉 뻗치더니 날아가는 새를 잡아 손아귀에 넣고는 마침 마중나오는 서산대사에게 묻는다.
‘대사님, 이 새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서산대사는 사명당의 물음을 간파했다. 살았다면 손을 쥐어 죽일 것이고 죽었다면 손바닥을 펴 날려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서산대사는 내기에서는 어차피 지게되었으므로 새라도 살리기 위해 새가 죽었습니다 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사명당은 손을 펴서 새를 날려버렸다. 그러고는‘또 내가 졌다.’라고 했다. 두 번째 승부, 서산대사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마중을 나오던 자세 그대로 한 발은 문지방을 넘어 밖에 또 한 발은 방안에 걸치고서 물었다.
‘스님, 제가 이제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방안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이 또한 답이 없는 질문이다. 무승부다. 그런데 또 사명당은 자기가 졌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방안에 좌정하고는 사명당이 여기에 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서산대사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말을 마친 사명당이 바랑에서 사발 두 개와 바늘 한 쌈지를 꺼내서는 양 쪽 사발에 나누어 담고는 시장하실테니 드시란다. 두 번째 승부다. 그러면서 사명당은 젓가락으로 접시의 바늘을 마치 국수처럼 훌훌 들어마신다. 서산대사도 마지못한 체하며 바늘국수를 먹었다. 다 먹은 서산대사가
‘바늘국수라 소화가 안 될테니 다시 게워내시지요.’
‘한 번 목구멍으로 넘어간 국수를 어찌 다시 게워낼 수 있겠습니까?’
사명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산대사는 먹은 바늘국수를 다시 바늘 그대로 접시에 토해낸다. 또 사명당이 졌다. 세 번째 마지막 관문이다. 사명당이 바랑에서 달걀 100여개를 꺼내더니 방바닥에 모로 세우고는 허공에다가 쌓아올린다. 달걀이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어디 봐라, 이 번에는 내가 이겼지? 사명당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럼, 제가 해볼까요? 서산대사가 역시 달걀 100여개를 담아가지고 오더니 일어서서는 천정에서부터 거꾸로 이어내려온다. 이 무슨 조화냐! 달걀을 방바닥에서부터 쌓아올리는 것도 최고의 도술인데 천정에서부터 거꾸로 내려쌓다니! 사명당은 서산대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명당은 곧바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금강산에서 수련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승병을 모아 왜적을 물리쳤다.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전쟁중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구해야 한다는 논의가 벌어졌으나 아무도 선뜻 사신으로 나서지않았다. 왜냐하면 왜적들이 조선의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사명당이 사신을 자청했다. 왜 막부에서는 휴전 사신이 온다는 전언을 듣고 만반의 대비를 했다. 포로 송환은 절대불가라는 합의를 해놓고 조선의 사신을 기다렸다. 사명당이 왜국에 도착하자 왜인들은 수백 개의 병풍을 길 양쪽에 세워놓고 사명당을 맞았다. 그러고는 짐짓 모른 체 하면서 오시는 길에 병풍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사명당이 보았다고 하자 왜인들은 자기들의 글솜씨를 과시할 겸 병풍에 쓰인 글 중 좋은 글귀가 있었는가고 되물었다. 사명당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왜인들이 기뻐하며 글귀를 알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사명당은 그렇다 라며 몇 자 글귀를 읊었다. 그러면서 나머지 글귀도 들어볼텐가 하고는 병풍의 글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외어버렸다. 왜인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 조선에서는 이런 정도야 3척동자도 할 수 있다.’
사명당의 말에 왜왕은 까물어칠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애초에 사신을 골탕먹이려든 생각과 달리 사명당을 국빈으로 최상급 대접을 한다면서 특별한 숙소에 모셨다. 왜왕은 사명당 같은 사람이 조선에 있으면 저희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사명당을 무쇠로 지은 집에 안내하고는 밖에서 고리를 걸어 문을 잠그고 4방의 아궁이에 불을 때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무쇠로 된 방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미덥지 않았던지 한 식경이나 더 불을 지피던 왜인들이 다음 날, 아무리 도사라지만 이젠 불에 타 가루도 남지 않았겠지 라며 사명당의 방문을 열었다.
‘어이 춰 에취, 아 이사람들아 날 얼어죽일 셈인가?’
사명당은 수염에 허연 얼음을 달고 나오며 덜덜 떨었다. 방안에도 천정에서 고드름이 줄줄이 달려있었다. 천정 한가운데‘얼음 빙氷 자’가 붙어있었다. 왜인들이 모두 제 스스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두려움에 몸이 사시나무 떨 듯 했다. 왜왕은 사명당의 도술을 자신이 확인하고는 사명당이 요구한대로 포로 5000여명을 돌려주었으며 돌아가는 길까지 모든 편의를 다했다.
* 토정 이지함
본관은 한산. 호는 토정. 시호는 문강. 토정비결土亭秘訣 지음. 거의 평생을 마포강변 토굴에서 살았으므로 호를 토정이라함. 고려말 선비요 학자 목은 이색의 6대손. 현령 이치의 아들. 북인 영수 이산해의 숙부. 서경덕 문하에서 경사자전 경사자전 통달.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 해박함. 1573년 포천 현감, 바다와 육지 개발 국부론 상소, 다음 해 사퇴. 1578년 아산 현감, 걸인청 설치 서민과 걸인 생업기술 교육. 박순, 이이(율곡), 성혼과 교유. 조식은 도연명에 비유. 김계휘가‘토정이 어떤 사람이냐?’ 묻자, 이율곡은‘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 1713년 이조판서 추증, 아산 인산서원과 보은 화암서원에 제향
토정 이지함선생(1517년~ 1578년)은 조선 중종 12년(1517년) 정축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형백馨伯. 형중馨仲. 호號는 토정土亭. 수선水仙,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며 한산이씨韓山李氏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이다.
부친은 수원水原 판관判官을 지낸 이치李穉=稚이며 어머니 광산김씨의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외가인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장성한 뒤에는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 28세 연상)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혹인기사或人記事에, 토정선생은 당당한 몸집과 훤칠한 키에 둥글넓적한 얼굴, 화경같이 번쩍이는 눈, 때로는 한꺼번에 두 말이나 서 말의 밥을 거뜬히 먹어치우는 식욕, 그러나 며칠을 굶고도 시장해 보이는 기색도 없이 하루 수백 리의 길을 다녔다. 길을 가다가도 아무데서나 주저앉아 지팡이를 팔에 끼고 웅크리고 앉은 채 잠이 들면 산천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코를 골아댔다. 누덕누덕 해어진 홑옷 단벌을 사시장철 걸치고 다니면서 손에는 참대 지팡이가 떠날 줄 몰랐고, 머리에는 낡아빠진 패랭이가 얹혀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공부하기 위하여 팔도강산을 떠돌아다니던 시절의 선생의 모습으로, 권세가 쩡쩡 울리는 당대의 벼슬아치 사랑에서건, 만석꾼을 자랑하는 부잣집 대청에서건 짚신을 벗어던지고 땟자국이 흐르는 홑옷 자락을 펄럭이며 앉으면, 곁에 사람이라고는 없는 듯 말이며 몸짓이 어찌 보면 방자스럽고, 어떻게 보면 뭇 닭의 한 마리 학처럼 우뚝하고 당당해 보였다. 토정선생은 밖에 걸치고 있는 것을 벗어던지면 당대의 선비 가운데서 빠질 것이 없는 분이었다.
재물이란 많으면 많을 수 록 재앙이 따르는 법이라며 가난을 재미삼아 한평생 청담[淸淡], 무욕無慾, 청빈淸貧하게 살며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면서도 박학博學과 다식多識을 자랑하지 않았고 벼슬아치를 탐내지도 않았으며 어디에도 붙박이어 얽매이지 않았다. 범인凡人을 뛰어넘는 기지奇智와 기행奇行으로 일관한 토정선생土亭先生은 먼 훗날을 미리 훤히 내다본 예언가豫言家, 서민철인庶民哲人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과 경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은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선구자였으며, 만년의 짧은 관리생활에서는 백성편에 서서 구세제민救世濟民한 청백리淸白吏였다.
토정선생이 공부하던 시절 경기도 파주군 광릉의 농장에서 공부를 할 때 하인을 시켜 집에 가서 등잔기름을 더 가져오게 했다. 장인인 모산수毛山守가 글공부에 너무 열중하는 사위가 탈이 날까 걱정돼 기름을 주지 않으니 토정선생은 도끼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소나무 관솔을 찍어와 불을 밝히고 꼿꼿이 앉아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하여 1년 동안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통달通達하였다.
하루는 형을 보고 말하기를
‘처가를 살펴보니, 길吉한 기운이 없으니 오래지 않아 무슨 화禍가 있을 것 같은데 오래 그 집에 있다가는 나까지도 화를 입을 염려가 있습니다.’
하고는, 데릴사위로 들어간 그 집에서 처자를 데리고 떠나왔다.
과연 그 다음 해에 어떤 일로 화를 입어서 온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 그 형도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신기하게 여겼다.
선생의 초립동 시절의 이야기다.
그의 장인은 정종定宗의 증손인 모산수毛山守 이성랑李星琅이라는 분이었다. 데릴사위가 되어 초례한 다음날 엄동설한 몹시 추운 때였었는데, 처가에서 새 옷을 한 벌 해주었더니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져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밤늦게 서야 벌벌 떨면서 들어오는데 보니까 아침에 입고 나간 도포가 없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볼일이 있어서 홍제원弘濟院까지 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다릿목에서 거지 아이 셋이 떨고 있기에 세 조각으로 잘라서 세 아이에게 입히고 왔다는 사연이었다.
토정선생은 한때 토실 생활을 했었지만 그것조차 귀찮다고 생각했던지 팽개쳐 버리고 나중에는 큰 뜻을 품고 팔도강산을 두루 살펴 보려고 길을 떠났는데 역시 해어진 옷과 신에다가 쇠鐵로 갓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그렇게 차리고 과객질을 다니다가 이따금 갓을 벗어 솥鼎으로 썼다니 기괴하지 아니한가? 그런 기괴한 생활을 그의 말대로 사람이란 제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는 법인데 나 자신은 이런 것을 즐긴다 라고 한 신념에서 나온 것일 게다.
선생은 그렇게 빈궁할 정도로 청빈하게 지냈지만, 마음만 먹으면 돈 만드는 재간 또는 비상했다. 바다를 좋아하여 조그마한 쪽배를 타고 먼 바다까지 자주 나갔으며 세 차례나 제주도를 왕래하였는데, 다른 배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쪽배의 네 귀퉁이에 커다란 박을 달아
손수 노를 저어 제주까지 가고 오고하는 데에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항해하다가 섬에 들어가서 버려져 있던 처녀지를 개척하여 곡식도 심고, 백성에게 장사하는 방법도 가르치며 여러 가지로 물산物産을 장려했다. 그때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은 섬이 많이 있을 때라 거기다가 박과 콩을 심어 두었더니, 거름을 안 주어도 잘 되어서 가을에는 많은 박을 따게 되었다. 그것으로 바가지 만들어 팔아 많은 곡식을 장만하고, 그것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의 처자는 여전히 배를 곯았으며 집안은 항상 가난했다.
선생은 가문도 좋았거니와, 재질이 비상하고 도학道學과 문장이 탁월하여 경전經典에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 병서兵書, 음양술서陰陽術書등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인격과 사상, 식견이 또한 고상하여 평생에 기행 이적이 많으니 세상 사람이 이인異人 또는 기인奇人이라고 말하였다.
황강黃剛 김계휘(金繼輝 1562~1582, 21세 연하)가 이율곡에게 묻기를
‘형중馨仲이 제갈량諸葛亮에 비해 어떠하냐?’
‘토정은 직용 할 인재는 아니나, 물질에 비하면 기화이초奇花異草요, 진금기수珍禽奇獸와 같아서 놓고 구경이나 할 것이지 포백숙율布帛菽栗같이 긴요한 것은 못된다.’
토정선생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내가 콩이나 조가 못 된다면, 도토리나 밤은 될 것이니, 어찌 전연 쓸 곳이 없으랴.’
고 말하였다.
그 한 가지의 자타自他 비평한 것만 보아도 당시의 사람들이 제갈공명에 견줄 만큼 학문이나 지혜가 상식을 벗어날 만큼 놀라왔던 것이 틀림없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문제의 인물로 부각되었으며, 토정 자신도 자부심이 만만치 아니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을 토정 선생은 곧 잘 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은 주자학朱子學 외에는 행세 못하던 시절이라 선생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율곡까지도 그를 기화이초나 진금기수에 비하고 말았으니 어찌 애석치 않으랴. 그 때에 그가 일부러 광객狂客 행세를 하며 세상을 비웃은 것 또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율곡이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을 토정선생께 권한 일 있었다. 토정선생은 욕심이 많아서 잘 안 된다 하여 서로 웃었던 일까지 있던 사이였다. 이따금 토정선생은 연하인 율곡의 집에 놀러갔었는데, 율곡의 집에는 같은 뜻을 가진 당대의 명사들이 자주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 때 율곡은 대간大諫으로 있었는데 국가대사를 의논하기도 하고 비판도 하다가 임금께서 청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 일이 있었다. 그에 동조한 선비들은 병을 핑계 삼아 율곡이 벼슬을 물러나는 것이 옳다는 공론으로 기울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토정선생이 별안간 코웃음을 크게 치면서 옛날 성인聖人이란 형식과 체면 덩어리라, 잔뜩 후폐後弊만 남겨놓고 말았군한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 멍하니 있는데, 주인인 율곡이 또 무슨 기담이 계시오하니, 그 제서야 빙그레 웃으면서 공자는 병이라 일컬어 유비儒非를 보지 않았고, 맹자는 제선왕齊宣王이 부를 때 병이 들었다고 가지 않았는데 후세에 소위 선비라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병이 있다는 핑계로 그것을 본받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병이 들었다고 핑계하는 것은 게으른 종놈의 행습行習이지 어찌 선비로서 할 짓이란 말인가! 맹자도 그러했는데 우리가 그러기로서 무엇이 나쁘겠는가 하겠지만 공맹자는 무슨 심술로 후세 사람들에게 이따위 더러운 형식을 시범했단 말인가! 하니 모두 함께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을 못하고 말았다.
토정집土亭輯에 사람은 누구나 안으로는 신령스럽고 굳세기를 원하며, 밖으로는 부귀를 원한다. 귀하기란 벼슬을 안 하는 것보다 더 귀함이 없고, 부富하기란 욕심내지 않음보다 더 부함이 없고, 굳세기란 다투지 않음보다 더 굳셈이 없고, 신령스럽기는 알지 않음보다 더 신령스러움이 없다. 재물이란 흉한 물건이 아니나, 나라의 재앙이 재물에서 많이 생기고, 권세 또한 흉한 물건이 아니나 벼슬아치의 재앙은 권세에서 많이 생기고, 보배를 지니는 것이 흉한 물건은 아니나 필부의 재앙은 보배를 지니는 데서 많이 생기고, 나를 알아준다는 것이 나쁜 일 아니나 선비의 재앙이 나를 알아주는 데서 많이 생긴다.고 하였다. 노자老子나 장[莊子의 글을 읽는 듯이 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선생이 일생을 통하여 스승으로 모셨거나 가까이 사귀어온 분들로는 서화담徐花潭, 이율곡李栗谷, 이백사, 성우계 와 같은 학자들이었고 제자 가운데서 가장 사랑을 받은 사람도 조중봉 같은 분들이 있음을 보아 역시 노장老莊보다 공맹孔孟의 학문에 근본적으로 뿌리박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도학파道學派 문장으로도 당대에 명망이 높았지만, 기행이적奇行異蹟으로 더욱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 때 한강漢江 하류이던 동막東幕 근처에서 살았는데 한강가의 진흙을 이겨서 손수 높이가 십여 척이나 되는 토실土室을 한증막汗蒸幕처럼 만들어서 낮에는 지붕 위에서 놀고 밤이면 방안으로 들어가서 잠을 자곤 하였다. 그 집을 토정土亭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의 별호를 토정이라 불게 되었고, 선생이 살던 동리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토정리(지금의 마포로타리 서쪽)라고 붙여졌다.
이 한강가의 토정에서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선생은 그 토정에서 한강물의 변동을 보고 훗날 제주濟州를 왕래하는 물길을 보는 연습을 하였던 것이다.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토정선생은 배 젓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바다에서 노는데, 한 노인이 배를 저으며 천천히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토정은 그 노인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빨리 배를 저어 뒤를 쫓아갔으나, 하루 종일 있는 힘을 다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토정선생이 지쳤을 때 그제 서야 노인이 돌아보고 웃으면서 배 젓는 솜씨가 겨우 그 정도로군, 배를 젓는 법을 가르쳐주지.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해보게. 광풍이 노한 파도를 몰아와서 땅을 휩쓸고, 하늘을 들먹거리는 비바람과 천둥번개를 몰고 올지라도 재난을 당하지 않고 눈 깜짝하는 사이에 천리를 갈 수 있게 될 걸세라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선생은 바다의 물줄기를 보는 영안靈眼이 트이게 되었다고 한다.
토정선생의 시詩 가운데
만리행장쌍각건 萬里行裝雙脚健 만 리 길을 떠도는 행장과 두 다리가 튼튼하니
백년신세일표경百年身世一瓢輕 백 년의 인생길이 표주박같이 가볍구나
하는 구절이 있는데, 선생의 일생을 그대로 나타낸 시 구절이다. 행장과 두 다리가 튼튼하면 어디를 간들 무엇이 두려우며 인생이 허무하니 무엇을 연연戀戀하랴는 것이 아닌가.
토정선생의 조카인 아계鵞溪 이산해李山海는 조선시대 당파 최대 파벌이었던 북인의 영수다. 조카는 평소에 숙부인 토정을 평소에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하루는 선생이 아계더러 뱃놀이를 가자고 하였다. 아계는 싫다할 수가 없어서 따라가게 되었다. 토정선생은 서강에서 손수 노를 저어서 한강하구로 나갔다. 때는 음력 7월이라 약간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밤이었다. 합수를 벗어나서 선생은 돛을 올리더니 힘을 내어 노를 젓기 시작하였다.
배는 茫茫大海망망대해를 쏜살같이 달더니 어떤 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다. 아계鵝溪는 숙부의 노 젓는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어
‘여기가 어딥니까?
천천히 배를 저으며 토정선생이
‘양자강[楊子江] 일세.’
아계는 크게 놀랐다. 글로만 보던 양자강을 실제로 온 것이었다. 배는 다시 달려서 어떤 호수로 접어들었다. 아계가
‘여기는 호수가 아닙니까?’
‘동정호洞庭湖지!’
갈대밭 사이로 잠시 거슬러 올라가더니
‘여기에 올라가세!’
하며 배를 대는데 아계가 쳐다보니 큼직한 누각이 달빛에 보인다. 가까이 가서 현판을 보니 악양루岳陽樓라고 써 있지 않는가! 아계는 더욱 놀라게 되었다. 토정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가세!’하였다. 그리고는
‘꼭 하나 선물할 것이 있네.’하고는 천천히 배를 저었다.
어느 조그마한, 대나무가 무성한 섬에 배를 대더니
‘저 대나무를 붓만한 굵기로 석 자만 꺾어오게.’했다. 아계가 꺾어오니
‘이 대가 소상반죽蘇上班竹일세! 집안에 들어가게 되거든 한 자 길이로 다듬어 언제나 소 중하게 간직하게. 훗날 꼭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걸세!’하였다.
어느 때와는 달리 이렇게 엄숙하게 말씀하시고는 다시 돛을 올려 배를 쏜살같이 저어 망망대해에 나오더니 동북쪽으로 뱃머리를 잡았다. 한참 후에 어느 섬에, 섬이라기보다는 조그마한 돌무더기를 향해
‘저기 잠시 올라가 조심석照心石을 보고 가겠나!’하였다.
아계는 조심석이란 말을 난생 처음 듣기에
‘조심석이란 어떤 돌입니까!’하고 물었다.
‘조심석이란 마음을 비춰 보는 돌일세. 그 앞에 서면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네. 마음 공부의 정도에 따라 염통의 그림자가 보이는데 혹은 흐리기도 하고 혹은 진하게 검게 보 이기도 한다네. 진한 사람은 아직 공부가 모자라는 것일세. 그래서 조심석이라 한다네.’ 하였다.
미끄러운 바위를 겨우 기어올라 정상 가까이에 이르니 이상한 빛이 은은히 나고 있는 흰색의 자연석이 있었다. 과연 두 개의 형상이 비치는데 아계가 숙부의 것을 보니 염통이 좀 흐리게 보이는데 자기의 것은 새까맣게 보였다. 선 자리를 바꾸어서 보아도 여전히 자기의 것은 검다. 큰소리로
‘어떤 원리에서 이런 일이 있습니까!’물으니
‘이런 것이 있네. 이제 보았으니 돌아가세.’하였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또 쏜살같이 배를 저어가더니 눈 익은 한강 하구에 이르러서야 천천히 노를 저었다. 마포 나루에 닿아 하늘을 쳐다보니 묘시에 가까웠다. 즉 아침 5시 경이었다. 이런 일이 있는 후에 아계는 숙부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였으며 더욱 공부에 힘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 가지고 온 소상반죽蘇上班竹이 훗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의 고집을 꺾는데 한몫을 한 것은 토정선생이 돌아가신 뒤의 일이다.
또 한 번은 한 친구와 함께 마포(麻浦, 삼개)나루에서 배를 타고 나가 한 섬에 정박하였다. 그 섬은 험준한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었다. 토정선생이 친구를 돌아보고 하는 말이
‘여기서 잠깐 쉬고 있게. 내 잠깐 산속에 들어갔다가 올 것이네.’하고는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친구는 그의 기행을 아는지라 몰래 뒤를 밟아보니 10여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듯이 험한 절벽 위에 서너 명의 미녀가 있어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보고 있으려니까, 토정이 껑충 뛰어 절벽 우로 오르더니 무엇인가 그 미녀들과 환소歡笑하더니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친구는 어쩔 수 없이 돌아와서 맑게 갠 하늘만 쳐다보면서 배 안에 누워 있었다. 이윽고 토정선생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섭섭히 생각하지는 말게. 그럴 일이 있네.’하였다.
친구가 갔던 곳을 물어도 토정선생은 그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배를 돌려 돌아왔으나 끝내 그가 만났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토정선생께서 아산고을 살이 할 때, 많은 사람이 해일로 죽은 일이 있었는데, 자오상충子午相沖으로 자일子日 오시午時에 해일이 일어난다고 미리 경고를 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토정선생은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만사 제쳐놓고 어디든지 찾아가 만났는데, 남명南溟 조식曹植과의 만남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토정선생이 남루한 옷을 입고 대삿갓에 지팡이를 짚고 남명을 찾아가니, 하인이 안으로 들어가 행색이 이러저러한 사람이 왔다고 알렸다. 전해들은 남명이 뜰아래까지 쫓아내려가 반겨 맞으며 극진히 대접하니, 토정선생이 ‘존장께서 어찌 한낱 야인野人에 불과한 저를 이토록 후대厚待하십니까?’
‘범상치 않은 풍도風度를 보고도 내 어찌 성명聲名을 떨치는 토정선생을 몰라 보리요.’ 하였다. 남명은 토정선생보다 16년 연상이어서 존장으로 존경했지만 남명 또한 토정선생의 인품을 존중하여 격의 없는 벗으로 예우禮遇했다.
벼슬하기를 싫다는 선생을 억지로 끌어내다시 하여 만력萬曆 계유癸酉(1573년), 탁월한 행적으로 벼슬을 내린다는 핑계로 6품직六品職을 제수하여 포천 현감을 시켰다. 친구들의 권고에 못 이겨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그다운 관리 노릇을 하였다. 포천 고을에 처음 도임하는 날, 그 날도 여전히 짚신 베옷 헤어진 갓으로 부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저녁상을 차려 들여온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토정 원님은 먹을 것이 없다며 수저도 들지 않고 도로 물리쳤다. 그 날 저녁 새로 부임한 원님의 도임상이랍시고 그 고을에서 나는 갖은 진미를 갖춘 굉장한 저녁상을 다시 그 보다 훨씬 더 잘 차려서 올렸더니 그래도 여전히 거들 떠 보지도 않고 도로 물리쳤다. 아전들은 죄송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뜰 아래 엎드렸다. 그 중 말주변께나 있는 아전이
‘저희 고을은 한양과 달라서 이 이상은 도저히 더 차릴 수가 없사오니 그저 용서하여 주옵 소서.’라고 빌었다.
그는 그제 서야 온화한 낯을 하고
‘나를 새로 온 관장이랍시고 손님 대접하여 그렇게 하였겠지만, 나는 내어온 그런 음식을 여태 먹어본 일이 없어서 그랬다. 우리나라의 지금 형편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굶고 있 는데 조그마한 고을에 관장이랍시고 어찌 그런 큰 상을 받아 목에 넘어갈 것 같으랴. 그 상은 나를 욕보이는 짓일세. 나는 잡곡밥과 나물국이면 그만이다. 이 후로는 그런 음식은 결코 먹지 않을게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국 한 그릇 밥 한 그릇으로 상도 받치지 않고 태연히 식사를 마쳤다. 오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말렸으나 토정 선생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토정선생이 아산현감[牙山縣監]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만들고자 한 것이 걸인청乞人廳이었다. 그러나 아전들은 저마다 반대를 하고 나섰다.
‘사또! 거지새끼들을 모조리 쓸어다가 아산 바깥으로 내쫓아버리면 되지 않겠아옵니까? 가 난구제는 나라도 못 감당한다는데 무슨 수로 걸인청이란 걸 만들어 아산고을을 거랑뱅이 소굴로 만들려 하시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어허, 고얀지고!’
토정선생이 아전들을 꾸짖으며,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따뜻이 보살피는 게 수령守令의 책무가 아니드냐? 걸인청을 세우려 는 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여 양민良民으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도 집 과 땅을 가져 잘살게 만들려함이니라. 그렇게 되면 아산고을은 걸인도 가난뱅이도 없는 살기 좋은 고을이 될 것이다.’
‘너희들이 건물이 없다느니, 재물이 없다느니 한다마는, 건물은 세미稅米창고를 비워서 수 리하면 될 것이고, 재물은 한 해 동안 만 먹여주면 자립할 방도가 마련될 것이니라.’
걸인청이 만들어지자 고을안의 걸인들을 모두 수용했는데, 그냥 먹고 놀린 게 아니라 일 시켰다. 느리고 약한 자는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으며, 힘 있는 자는 땅을 개간하고 고기잡이를 하며 또 손재주가 있는 자는 도구를 만들며 공업에 종사토록 하여 일하며 살아가라는 교훈을 심어주었다.(걸인청은 지금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424-3 목조건물로 남아 있음.)
이조실록李朝實錄 선조 6년(1573년) 6월 계축癸丑에 제수除授 6품직六品職의 기록이 있고, 7월 갑신甲申에 이지함李之菡, 호號 토정土亭이 형 지번之蕃의 병으로 서울에 들러 6품직六品職을 받았으나 귀를 씻고 곧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태천기笞泉記에 토정선생의 둘째아들 산휘山輝도 아버지를 닮아 지음知音의 기재奇才였다. 열자列子에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는데 그 신묘神妙한 소리를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만이 알아들었다. 그러던 친구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제 내 거문고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하고 거문고 줄을 모두 끊어버리고 다시는 손대지 않았다는 고사故事서 지음知音이란 말이 유래[由來]되었다.
어느 날 토정선생을 찾아온 사람이 휘호를 간청하자 토정선생이 거문고를 뜯으니 산휘山輝가 듣고
‘대인大人, 아버지께서 노중연魯仲連을 생각하고 계시누나.’하였으며
토정선생이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병으로 구토를 자주했다. 하루는 토정선생이, 구리로 만든 대야를 치자 아들 산휘가 듣고 나서 말하기를
‘그 소리가 심[甚]히 조화[調化]를 이루었구나! 대인께서 곧 편안함을 얻을 것이로다.’
하고 밖으로 나가 손으로 가슴을 치고 발로 땅을 구르며 슬퍼했다. 그로부터 토정선생은 일어나지 못 했다.
토정선생이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아전 하나가 어찌나 흉물스럽게 백성의 등을 치는지 한번은
‘너 같은 놈은 늙었으나 마음은 못난 버릇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린애 대접을 할 수 밖에 없다.’
하곤 아전의 갓을 벗기고 흰머리를 총각머리로 땋아 내리도록 하고 벼루를 들려 통인通人처럼 종일 세워두었다. 그 아전은 그러한 부끄러운 벌을 받고는 속으로 항상 앙심을 먹고 있었다. 한 평생을 못된 짓을 예사로 생각하고 살아온 늙은 아전이, 그 전 상관은 그렇게 꾸짖지도 않았고, 많은 고을 사람들도 그 아전 앞에서는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토정 원님만이 그렇게 벌을 내리니 속으로 분이 났던 것이다. 토정선생은 언제나 지네의 생즙을 하루 한 그릇씩 마시고 제독하려고 약 사발을 떼면서 바로 날밤을 씹는 버릇이 있었다. 하루는 약을 마신 뒤 날밤을 딱 깨물고 보니 밤이 아니라 밤과 꼭 같이 깎아 다듬은 버드나무 조각이었다. 토정선생은 아fot 사람을 다그쳐 밤을 씹으면 될 일이였으나 내 운명이 여기까지인것을 어찌 더 미련이 있겠느냐며 무참히도 돌아가셨다고 전해온다. 그 때가 선조 11년[1609] 7월 17일이었다.(이율곡은 토정선생이 이질에 걸려서 돌아 가셨다고 했음)
이율곡이 토정선생을 제사하는 글,
나무들이 빽빽이 늘어섰는데, 그 사이에 큰 나무가 우뚝 솟아있듯, 풀들이 띄엄띄엄 나 있는데, 어떤 신령한 한 포기 풀이 빼어나 이삭을 맺었으니 이상하도다. 공을 또한 수산水山이라 호號한다 하였으며, 조중봉은 스승으로 섬겼을 뿐 아니라, 토정선생이 세상을 떠난 다음 임금께 상소하여 돌아가신 분에게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려주기로 청하였다.
그 글 가운데, 선생은 청백淸白하기로 천고에 둘도 없다고 하였으며, 그 어른의 학문이나 행실은 실로 동방의 이윤伊尹이요 백이伯夷라 하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집에는,
'토정선생은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았는데 퇴계가 그의 기풍을 높이 여겨 벗으로 삼았다.
일찍이 아산의 현감이 되어 간사한 관리를 엄하게 단속하다가 문득 어느 날 갑자기 죽음 을 당하였다. 그 사람들은 그가 독살 당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토정은 남을 알고 기미를 알아 뜻과 기운이 신과 같았으니 그런 흉측한 일을 응당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토정선생은 죽기 전에 자기가 묻힐 자리를 미리 정해 놓은 보령군 주포면 고정리 사당골 국수봉 기슭에 묻히었다. 그런데 훗날 증손자 되는 이가 감사를 지내면서 당시 유명하다는 지관地官의 말을 듣고 이장移葬을 하려고 했다. 묘墓를 파다보니 안에서 빗돌이 하나 나왔다. 그 빗돌에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불초손이 이 묘를 파고 개봉축改封築하리라.' 고 적혀 있었다. 그제서야 후손은 깨달은 바가 있어 이장을 멈추고 선생의 묘 밑에다가 조그맣게 자기 묘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봉집龜峯集에 송구봉(宋龜峯, 1534~1599년)이 이율곡에게 보낸 글 가운데 토정의 아들이 시묘侍墓하던 중 호식虎食을 당한 사실을 알리고, 옛날에는 호랑이를 길들여 복종하게 한 효자도 있었는데, 요새는 범이 묘를 지키는 자식을 잡아먹다니 하고 애도하고 있다.
명신록名臣錄에는 조부모를 장사지낼 때에 장례 모실 산을 보니 자손들 중에 두 재상이 나오게 되어있고 막내는 불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이 스스로 그 재앙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인지 후에 이산해(李山海, 1538~1609년)와 이산보(李山甫, 1539~ 1594년)는 과연 벼슬이 일품一品이 되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11년 (1609년) 5월 을묘乙卯에 이조吏曹에서 아산현감 이지함에게 알맞은 직책을 받기를 청하나 답하기를 어진 자를 쓰는 것이 백성을 위함이라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하며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그 이튿날의 기록에는 아산현감 이지함이 폐단을 진정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였으나 그 내용에 관한 기록이 없다. 계啓에 답하기를 너의 생각이 옳다 하였다 한다.
그리고 12년(1610) 2월 계유癸酉에 충청도 도사都事의 서장書狀에 아산 현감 이지함이 상소를 올렸으나 상부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죽었다하였고 이어서 정원政院에 장계狀啓가 들어 왔다. 계에 이지함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적었으며 높은 재능과 식견이 있어 언변과 행실로 사람의 귀와 눈을 감동시켰고, 집에서는 효성과 우정이 두터웠으며, 백성을 진심으로 생각하였고 죽기 전에 상소문을 보니 지극히 간절하게 백성을 측은히 생각하여 공손한 글로써 가히 세상 일을 처리하는데 호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선조 27년(1625) 2월에 임금께서 지함의 적자가 몇이냐 물으니 장자는 산두山斗인데 전염병으로 죽고, 그 아들 즉 손자 거인據仁이 지금 살고 있으며, 차자 산휘山輝는 범에 물려 죽었으며, 그 다음의 산룡山龍은 12살에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라고 이덕형李德馨, 1561~1613년)이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월영도月影圖 이지함 원저原著, 백동기白冬基 편역編譯 명문당明文堂 인용)
특히 참고사항으로
토정선생께서 아산 고을살이 할 때 많은 사람이 해일로 죽은 일이 있었는데, 자오상충子午相沖으로 자일子日 오시午時에 해일이 일어난다고 미리 경고를 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격암유록 예언서에서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소래산蘇萊山일대와 시화호와 남양만 그리고 아산만 일대에 해일海溢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피해가 있었던 곳이다. 일본 오키나와열도에는 해일海溢로 떠내려간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원문原文
救援枋舟 구원방주 높이 떴네.
風浪波濤洶洶 풍랑파도 흉흉하나
山岳波濤 산악파도 두려워라
* 임꺽정
조선 중기의 의적義賊.
16세기 중반 몰락농민과 백정 · 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진다. 일명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居叱正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생활했다. 뜻을 같이하는 비슷한 처지의 농민 수십 명과 그 가족으로 집단을 이루어 황해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시작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웠던 그는 1559년경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이 지역의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 이들이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다. 또한 서울, 평양 간 도로와 그 밖의 주요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 공물, 진상물 등을 탈취했다. 이와 함께 관군의 방비와 토벌의 허점을 교묘히 찌르며 세를 확장하면서,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고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 지배층이 여러 차례 관군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이를 번번이 물리치고 1559년에는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李億根마저 잡아죽였다. 1560년 가을에는 봉산, 개성을 거점으로 서울까지 진출했으나, 같은 해 11월 참모인 서림徐林이 체포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정부는 서림에게서 활동의 계획과 비밀을 알아내고 선전관 정수익鄭受益과 봉산, 평산의 관군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했으나 뛰어난 전투력과 농민, 이서吏胥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당시 이서와 농민의 도움은 임꺽정의 부대가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되어 출몰을 예측할 수 없어 잡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1561년에 들어 황해도, 경기도 북부, 평안도, 강원도지역에 출몰하여 활동했으나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어져 형인 가도치加都致가 체포되는 등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부터 도망하던 중 마침내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다.
임꺽정의 의적활동은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일환이며 그 집약점이었다. 이 시기 농민의 저항은, 당시의 사관史官이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질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서 지배층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치열하고 오랜 활동은 정부 지배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위기의식을 심어주었으며, 피지배층 일반에게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민중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그 뒤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로 그려지기도 했다.
* 일지매
정의로운 소년 일지매가 약한 자를 돕는 도둑이 되기까지의 일화逸話 ‘오늘밤도 넌 매화 한 가지만 그리고 있었구나. 오늘부터 너를 일지매라고 불러야겠다.’ 그러나 소년은 어머니의 말에는 대꾸도 아니 하고 그림 그리던 붓을 천천히 놓고 어머니의 얼굴을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아버지는 도둑질 가셨지?’ 하고 씹어 뱉듯이 중얼거린다. 일지매는 도둑질하는 아버지가 창피해서 동무들이 '도둑놈의 아들' 이라고 놀려도 묵묵히 참아낸다. 그렇게 쌓였던 울분들은, 부모와 할아버지가 탐관오리들에게 억울하게 농터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당함으로 돌변해 앞길을 결정하는 힘이 된다. 그 뒤 우연히 만난 일휴대사에게 좀도둑이 아니라 세상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운다. 대사를 만나기 전에 벌써 양반들을 골려주는 재미를 알고, 또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소년 일지매는 이 만남을 계기로 7년간 일휴대사 밑에서 수양을 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큰 사람으로 성장한다. 일휴대사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교만하지 말고 참을성을 기르는 것. 이 가르침 덕분에 일지매는 백성들의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일지매를 사칭하는 가짜 일지매와 일지매를 잡기 위해 키가 6척만 넘으면 모두 잡아들인 포도대장 장유식 등 이외에도 교훈적이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 김삿갓
김삿갓 1807년 ~ 1863년(순조 7년 - 철종 14년). 그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그렇다면 김병연 그가 왜 김삿갓을 자처하고 한평생을 방랑했는가? 1826년(순조 32년)에 김병연은 백일장을 보게 되었다. 백일장이란 초야草野에서 학문을 닦고 있는 무명유생無名儒生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단위로 글짓기대회를 하는 일종의 지방과거와 같은 것이다. 이 때 김병연의 나이는 갓 스물. 자字는 성심性深이요, 호號는 난고蘭皐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에 이미 4서3경四書三經을 통달 하였다. 게다가 시재詩才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 오고 있었던 그는 고금의 시서詩書와 사서史書를 닥치는 대로 섭렵涉獵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었던 것이다.
삿갓 하나를 쓰고 주유천하를 일삼으며 가난하게 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작물을 쓸 줄 알았던 시인이었고, 세상을 바로 볼 줄 알았던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치르는 과거에 합격한 이후에 방랑길에 올랐다. 그가 합격한 과거시험의 문제는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에 저항하다가 죽은 정가산과 항복한 김익순의 행동에 대해서 쓰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정가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김익순의 비굴한 처사를 질타하는 글을 써서 당당히 장원을 한 것이다.
그러나 본시 글공부만 좋아했을 뿐이지 공명심이나 출세욕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던 김병연이 이날 백일장을 보러 온 것은 홀어머니 이씨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늘날의 공무원고시와 같았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詩題는 다음과 같았다.
논정가산충절사論鄭嘉山忠節死 탄김익순죄통우천嘆金益淳罪通于天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
이 시제는‘홍경래의 난’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홍경래가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 신미년辛未年 12월 홍경래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고 자칭해 가면서 반란군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대는 가산嘉山, 박천搏川을 함락 시키면서 서울로 남진南進하였고, 다른 1대는 서북西北으로 진격하여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천宣川 등을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 석권席捲해버렸다. 그 통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가산 군수 정 시는 문관文官이면서도 그러했건만,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 김익순金益淳은 국가 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武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을 해버렸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시키고 나자, 김익순을 역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참형에 처해버렸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시제로 나오자 김병연은 평소부터 반란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가산 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이라고 존경해 왔던 반면에, 김익순을 백 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고 있었다. 비겁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김익순이란 놈을 백일장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마침 잘 만났다. 오늘은 나의 필봉을 마음껏 휘둘러 비겁하기 짝 없는 네 놈을 뼈도 못 추리게 탄핵彈劾하리라.
하지만, 김익순은 다름아닌 김삿갓의 할아버지였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여 숨어산 부모는 모든 사실을 숨기고 살아 왔으며, 장원이 됨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밝혀 진 것이다. 할아버지를 천하에 비굴한 인간으로 묘사해 장원이 된 자신… 그리고 조상을 잘 못 만난 죄로 인하여 출세의 길이 막혀 버린 시대의 현실 앞에 김병연은 노모, 아내, 자식도 있었지만, 모두 버려두고 방랑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런 삶은 그가 죽기 직전에 쓴 '난고평생시' 에 잘 나타나 있다.
새도 짐승도 제 집이 있는데/ 나는 한평생 혼자서 씁쓸히 떠 돌았네/ 미투리 대지팡이로 천리길을 걸었고/ 구름따라 머문 온갖 곳이 집이었다/ 사람을 탓하랴, 하늘을 원망하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내 마음만 아플 뿐이네 (중략)
강산 따라 구경한 대문은 천만 호에 이르렀고/ 가진 싯귀는 많았지만 행장은 언제나 빈 주머니뿐/ 부러울 것 없는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나서/ 후하고 야박한 세상의 온갖 인심을 맛 보았네/ 기구한 팔자라 천대만 받다보니/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어졌구나/ 가도 오도 못하고 서 있지도 못하며/ 하염없는 나날을 나그네로 떠돌았을 뿐이네.
또 그는 '삿갓'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는데, 그에 대해서는 다음의 시에 그대로 표현이 되어 있다.
떠돌던 나에게 삿갓은 가벼운 배와 같았고/ 우연히 한번 쓴 것이 사십 평생을 지냈구나/ 목동이 소 뜯길 때 폭양을 피해 쓰던 것이고/ 늙은 어부가 백구와 더불어 고기 잡을 때 쓰던 것이었다/ 술이 취한 나는 벗어 꽃피는 나무에 걸었고/ 흥이 거나하면 들고 다락에 올라 달구경을 하였지/ 속인의 의관이야 모두 겉치레지만/ 나의 삿갓이야 모진 풍우에도 끄떡없는 고마운 의관이지.
그는 방랑 중 전라도 화순에 갔을 때 길에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쓰러졌다.그런 그를 한선비가 업어다 집으로 데려갔는데, 며칠 후에 몸이 좀 낫자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다시 그 선비를 찾아와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저 등잔불 좀 꺼 주시오.’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그가 죽은 후에는 전국에 김삿갓을 모방하는 많은 방랑객들이 있었고, 물론 모두 가짜 기인奇人들이었다.
* 장길산張吉山
조선 숙종 때의 도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 장길산에 관한 기사가 짧게 언급되어 있으나 생사 년도나 다른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장길산 관련 기사는 2개다. 하나는 1962년 평안도 양덕현에서 장길산을 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그 고을 현감을 좌천시켰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1697년 이익화, 장영우 등의 반역 모의와 관련되어 이들이 장길산과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된 부분이다. 특히 1697년의 실록 기사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국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 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 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초사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은밀히 신칙申飭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 뢰도록 하라.’
실록은 장길산이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였고 일부 반역에도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홍길동, 임꺽정과 달리 장길산의 체포 기사가 실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장길산은 체포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효종 때, 노비의 몸에서 태어난 장길산은 태어나자 어머니를 잃고 광대 장충의 도움을 받아 재인才人마을에서 성장한다. 그는 역사 이갑송, 송도 상단의 행수 박대근, 구월산 화적 마감동 등과 사귀고, 창기였다가 버려진 묘옥과 정분을 맺는다. 장길산은 해주 간상배 신복동을 징벌하려다 붙잡혀 사형을 언도받지만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옥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운부대사의 가르침을 받는다. 숙종 10년, 대 기근이 발생하자 장길산은 관아와 부호를 털어 기미구휼에 힘쓰며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하려고 하지만 그는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정묘년 4월, 백성의 구제에 뜻을 가진 장길산의 활빈도, 운부대사의 승병, 해서의 무례, 근기지방의 미륵교도들이 구월산에 모인다. 이들은 언진산에 터를 잡고 관군과 맞설 자금을 조달하지만 고달근의 밀고로 최형기의 급습을 당한다.
6부 13화 대한제국
고종황제 행차 대원군의 경복궁 고종황제 일가
* Daum Blog 인용
◎ 대한제국, 개혁과 개화 그리고 세계열강의 각축장
• 대한제국 역사연대표
* 조선시대 26대 고종(황제) 한기 9060년(AD. 1863년) - 27대 순종황제(이왕)
한기 9107년(AD. 1910년), 2대 47년 간
* 일본제국 식민지통치시대
한기 9107년(AD. 1910년) - 한기 9142년(AD. 1945년), 35년 간
역대 | 황제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조선26대 | 고종 (황제) | AD. 1863년 -1907년 | 대원군과 명성황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헤이그 밀사 |
27대 | 순종 황제 (이왕) | AD. 1907년 -1910년 AD. 1910년 - 1945년 | 안중근 의사 의거, 한일합방과 일제 식민통치 35년, 상해임시정부, 3 ․ 1 독립선언, 청산리전투, 이봉창 의사 의거, 윤봉길 의사 의거,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 |
북관대첩비 대원군 척화비 명성황후 시해 칼 시해범 후손
(2006년 3월 야스쿠니신사 반환) 쿠시다신사 소장 사죄 방문
* Daum Blog 인용
◎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 강화도령 철종이 30대로 요절하자 헌종의 모후 조씨는 대왕대비로써 비상대권을 잡아 한기 9060년(AD. 1863년) 흥선군의 둘째 아들 12살 명복을 조선 26대 왕으로 지명했다.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파란만장의 세월을 살았다. 안동김씨의 세도가 절정이었던 시대에 언제 무슨 일로 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파락호(술주정뱅이)로 세월을 낚았다. 겉과 속이 달랐다. 한 예로, 충청도를 여행하던 중 예산의 가야사에서 ‘탑을 세운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며 무덤을 쓰면 반드시 왕이 나올 자리라’ 는 말을 듣고는 재산을 팔아 1만냥을 만들어 절을 옮기게 하고 남몰래 아버지 남연군묘를 이장했다. 파락호처럼 살면서 중인이나 상한의 교유의 폭도 넓었다. 철종의 장인 김문근을 위시하여 안동김씨의 김병학은 대제학, 김병국은 훈련대장, 김병기는 좌찬성으로 국정의 요직을 차지하여 3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했다. 벼슬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은 다반사였고 벼슬을 산 지방관리들의 수탈과 횡포는 백성들의 삶을 피폐롭게 만들었으며 불만도 쌓여갔다. 그 시대 3대에 걸친 안동김씨세도는 딸을 아들로만 바꾸지 못할 뿐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했다.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전광석화 같이 개혁을 단행했다. 안동김씨를 밀어내고, 당파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상민에게만 부과되었던 호포를 양반에게 부과했고, 붕당의 근원이었던 서원을 철폐했다.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 전국 주요 고을에 세웠다.
서양 오랑케가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해인데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흥선대원군, 이름은 이하응李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구球며, 아들이 조선 제 26대 왕 고종이다.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백성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양반과 유생의 반발을 샀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 재건과 국고를 채우기 위해 발행한 당백전은 유통경제의 혼란을 가져왔다. 국제문제에 어두웠던 그는 천주교를 탄압하여 외세가 간섭할 명분을 제공했고, 외국의 통상 요구를 묵살했다. 더구나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자 프랑스를 끌어들여 견제하려던 시도가 무산되었다. 천주교 탄압으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수천 명의 신도가 처형되었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하여 문화재(도이치 구텐베르크의 성서 보다 100여 년 앞선 금속활자본 직지심경 등 수천 점)를 약탈한 국제적인 사건이다. 5년 뒤에는 미군함 5척이 강화도에 정박했다. 신미양요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들을 물리쳤다. 이어 도이치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양이洋夷(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으면 곧 화의하는 것인데 화의를 주장함은 매국이다’ 라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외교를 철저히 배격하는 쇄국정책을 폈다. 천주교도의 탄압과 외국함대의 공격으로 민심이 동요하는 가운데 최익현이 탄핵상소를 올렸다. 대원군은 이를 통해 정세를 반전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고종이 이를 옹호하자 하야했다. 고종의 뒤에는 명성황후가 있었다.
명성황후 쿠시다신사 소장 사죄 방문
명성황후 시해 칼 시해범 후손
* 명성황후는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 외척의 세도정치의 폐해에서 벗어나려는 대원군이 간택한 왕비였다. 손이 귀한 왕실에 왕자가 늦었다.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출생하여 궁중과 대원군의 사랑을 받는 가운데 황후의 왕자가 태어났으나 며칠 만에 죽었는데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준 산삼에 원인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후사를 보지 못한 황후는 권력에 집착했다. 황후와 대원군은 국제정세에 대한 시각차가 있었고 고종은 그 틈을 이용했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황후는 양養오빠 민승호, 조대비 일족의 조영하, 안동김씨 문중,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과 대원군의 형 이최응을 포섭했다. 이 세력을 바탕으로 고종 10년 한기 9070년(AD. 1873년) 최익현이 대원군의 정책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렸다. 새로운 내각의 출범과 통상개화론자들의 등장으로 개화정책이 급류를 탔고 제도개혁도 잇달아 시행되었으나 갈등과 불협화음도 생겼다. 명성황후의 국고 남용이 국고 탕진을 가져왔다. 임오군란이 터졌다. 흥선대원군은 하야 8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먼저 황후의 국상을 발표했으나 황후는 충주로 도주하여 고종과 연락하고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대원군의 납치를 종용했다. 대원군은 4년 간 청 나라에 억류되었다. 청나라의 국정 간섭이 도를 넘자 급진개혁파들이 일본의 지원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의 3일천하’ 였다. 한기 9091년(AD.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대원군에게 재집권의 기회였다. 대원군은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켜 갑오경장을 단행하였지만 집권력이 떨어졌다. 일단 정계에서 물러난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손을 잡고 배일친러정책을 추진했다. 위협을 느낀 일본은 고종 32년 한기 9092년(AD. 1895년) 미우라 공사의 지휘로 낭인들을 모아 명성황후(44세)를 시해하였다. 을미사변이다. 대원군의 보복이었다. 이 만행에 열강이 항의하자 일본은 공사와 낭인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였고 대원군도 책임을 지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일제가 멸종시킨 일본 침몰 한국역사 말살 하르빈역 이토오
토종 삽살개 영화 포스터 * Daum Blog 인용
◎ 임오군란
한기 9079년(AD. 1882년) 6월 5일 선혜청 도봉소에서 13개월이 밀린 병사들의 월급을 지급하며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배급하자 우위영 소속 구 훈련도감 군병들이 관리를 구타하면서 일어났다. 이는 곧 민씨정권 세도에 대한 투쟁으로 진화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통문에 의해 동별영에 모인 병사들은 무기고를 열어 무장하고 포도청을 습격하여 관리 구타로 잡혀간 동료들을 구해내고 의금부를 탈취하여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경기감영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할 때쯤에는 하급군변과 빈민들이 가세하여 대집단이 되었다. 10일에는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와 김보현을 살해한 다음 민씨세도권력의 정점에 있는 명성황후를 찾기 위해 궁중을 샅샅이 수색했다. 반란을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이 병사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반란이 수습되자 일본과 청국은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하나부사 요시타다는 주모자 처벌, 피해 보상, 개항과 통상, 그리고 병력 주둔 등 8개항을 요구했다. 대원군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를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마산항에 주둔한 청국군에게 견제를 요청했다. 서울에 진입한 청국군은 오히려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는 한편 군대로 궁궐을 장악했다. 청국군의 이러한 태도에 격분한 군병과 시민들은 다시 일어나 청국군에 대항했다.
◎ 갑신정변
한기 9081년(AD. 1884년)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 종속관계를 청산하고자 개화파가 일으킨 국민주권을 지향한 정치개혁운동이다. 한국사에서 정치세력으로써 근대적 개혁문제를 제기한 것은 개화파가 처음이었다. 실학으로 북학사상을 계승한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를 중심으로 진보세력이 적극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을 핵심으로 정치세력화 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한기 9079년, AD. 1882년)을 계기로 민씨정권의 친청수구정책은 심화되었고 청국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들어냈다. 개화파는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 종속관계를 청산을 결의했다. 마침 베트남 문제로 청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청국이 패하자 청국이 느슨해진 틈을 이용하여 일본공사의 후원을 업고 한기 9081년(AD. 1884년) 12월 우정국낙성식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혁안 14조는 청국과 종속관계 청산, 문벌 폐지, 인민평등권 제정, 인재 등용, 지조법 개혁, 탐관오리 처벌, 환자미 면제, 세금의 호조 관할, 경찰제도 실시, 혜상공국의 혁파였다. 이러한 국왕의 정치혁신조서가 내려졌으나 이에 반발한 청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개화파들은 인천항에서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치변혁을 담당할 주체가 성숙되지 못하고 치밀하지 못한 계획으로 정권을 혁파하려는 의욕이 앞선 도전과 외세의 힘을 통해 자주정권을 창출하려는 배반적인 성향이 원인이었다.
* 갑신정변, 개화파의 3일천하 재조명
한기 9081년(AD. 1884년) 갑신정변은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급진개혁파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변혁’ 이 아니라 상한常漢(일반 백성, 상놈)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아래로부터 민중계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주체세력인 김옥균을 지도한 사람도 유대치와 오경석으로 중인계급이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서구이론을 적용하기 위한 부르쥬아혁명으로 오도했다. (박은숙, 서울시편찬위원회, 갑신정변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편, 2003년, 갑신정변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췌)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당의 핵심인사와 적극 참여자 77명을 추적한바, 의금부에서 심문을 당한 주도자 23명의 기록이 있는 ‘추안급국안’ 을 검토 분석했다. 그 가운데는 양반兩班 10명, 중인中人 5명, 상한常漢(평민, 백성, 상놈) 39명, 미확인 23명이었는데 미확인은 상한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름을 들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한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분류는 상한, 군인, 겸종(양반가 심부름 평민), 상인, 내시, 궁녀가 망라되어 있다. 이들은 중간지휘자, 정보원, 행동대원, 심부름꾼으로 활동했는데 불고지죄의 엄격한 법치에서 고발하면 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고발한 사람이 없었으며, 친청파 민영익의 겸종까지 참가하였다. 심문에서 밝혀진 특별한 내용은, 능력에 의한 인재 발탁과 개화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가담 이유로 진술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완하는, 갑신정변의 14개조 정령에는 상한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 또 정변 뒤 상한이 정 3품 벼슬을 제수받은 일도 있다. 개화당은 거사 직후 전후좌우영 병사 2000명 지휘권을 장악했으나 청군의 영향 아래 있었던 좌우영의 지휘자를 교체하지 않아 좌우영병사들의 지휘가 일사분란하지 못해 청군 1500명의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근대적 부르쥬아 혁명, 유교적 질서 문벌세력 정권쟁탈전이라는 해석은 재조명해야 한다.
명성황후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전시 일제 조작
* Daum Blog 인용 2차대전 유물 점재현비
◎ 갑오개혁
한기 9091년(AD. 1894년) 7월 개화파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으로써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씨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텐진조약을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출병했다. 반란이 진압되자 조선정부는 양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는데 청국은 수용했으나 일본은 반대했다. 일본군은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을 복귀시켰다. 김홍집을 수반으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진행된 개혁정책은 210여 건에 이른다. 정부와 왕실의 분리, 국왕의 권한 축소, 과거제 폐지, 청국연호 폐지, 청국과 사대관계 일소, 신분제 철폐, 조혼 금지 등 봉건적 관습이 일신되었다. 화폐제도는 은본위제도로 일본화폐의 유통을 허용하였다. 2차개혁에서는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 홍범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으로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 공포하였다. 3차개혁은 태양력 채택, 소학교령 반포 등 140여 건이다. 그러나 단발령은 유생들의 봉기를 유발했고 아관파천 뒤 김홍집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갑오개혁은 끝났다. 갑오개혁은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한 내재적 개혁이며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질서에 조선이 편입되는 빌미를 제공한 양면성의 정변이었다.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근대화이념 성취를 달성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식민지화 길을 열었다.
◎ 헤이그밀사 사건
한기 9104년(AD. 1907년) 고종이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의정부 참판 이상설, 평리원검사 이준,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파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참석하여 세계만방에 조선의 일제 강압침탈을 호소하였으나 국제정세는 냉담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가 일본의 장교단을 이끌고 궁중에 들어와 고종을 협박하였으며 이토오는 고종의 폐위를 일본총리에게 건의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양위를 주청하고 궁궐에 연금했다.
안중근의사 안중근의사 순국비
# 한기 9106년(AD. 1909년) 10월,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중국의 하얼빈 역사, 정면에 ‘이토오 히로부미 통감각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일본헌병과 경찰들이 2중 3중으로 둘러서서 물 샐 틈 없는 경비를 하고 있었다. 기자완장을 차고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인이 경비 뒷줄에서 기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살피고 있었다. 육혈포를 품속에 감춘 안중근의사였다. 몇 분 뒤 통감이 탄 특별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있었다. 안중근의사는 긴장한 얼굴로 경찰들의 저지선을 기웃거렸다. 이윽고 특별열차가 역 구내로 진입했다. 헌병들이 열차 앞에 도열하고 외투를 걸친 이토오 히로부미가 모자를 눌러 쓰며 열차의 승강구를 걸어 내려와 도열한 관리들을 열병하고 있었다. 이 때 경비 헌병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있던 안중근의사가 헌병이 제지할 새도 없이 저지선을 뚫고 달려 나왔다. 어느 새 안중근의사는 손에 육혈포(권총)를 겨누고 있었다.
“탕! 탕! 탕! 탕!”
연속적으로 네 발의 총성이 하얼빈 역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의 총성이 탕! 하고 또 울렸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안중근 의사는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3창했다. 그 때야 정신을 차린 일본헌병들과 경찰들이 안중근 의사에게 들이닥쳤다. 의사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권총을 버리고 태극기를 손에 든 체 헌병들에게 순순히 잡혔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권총 다섯 발을 가슴과 배에 맞고 즉사했다. 일본인들은 안중근 의사를 암살자로 처형하려고 했으나 의사는 끝끝내 한국의 역적을 죽인 애국자로 당당하게 재판에 섰다. 중국인들은 <10억 중국인들이 못한 일을 한 사람의 한국인 안중근 의사가 했다>고 놀라워했으며 한국인과 독립군에 대한 성원이 한결 활발해졌다. 그 해 3월 일본인들만의 재판으로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 대한제국,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35년과 독립운동
백두산 천지 대한민국행정도 중국 백두산 성화채화
* Daum Blog 인용
* 을사조약과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
한일의정서 체결, 1904년, 이토 히로부미, 일본공사관/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년, 조선지도감독권/ 을사조약 체결 뒤 경운궁 중명전을 나서는 대신들/을사조약 반대 경운궁 앞 민중
민영환 혈죽血竹, 한일합방 을사조약 뒤 자결, 민족에게 드리는 글 유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는 대한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 시대 중 하나로, 대한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 놓였던 시기다. 다른 명칭으로는 일제시대日帝時代, 일제암흑기日帝暗黑期, 일본통치시대日本統治時代, 일정 시대日政時代, 일본식민지시대日本植民地時代, 왜정시대倭政時代, 대 일본전쟁기對日本戰爭期,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국권피탈기國權被奪期 등으로도 부른다. 현재 일본에서는 대한병합大韓併合, 일한합방日韓合邦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일본의 대한 지배정책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헌병경찰통치기(무단통치기, 1910년 ~ 1919년), 민족분열기(문화통치기, 1919년 ~ 1931년), 민족말살통치기(1931년 ~ 1945년)로 각각 지칭한다.
일본의 우파적 사학자들과, 식민지 근대화혜택론을 주장하는 일부 대한 사학자들은 일제 강점기 전반기에는 일본이 대한의 근대화를 도왔다고 주장하는 반면, 대한의 사학계에서는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萌芽論에 의거, 이러한 근대화정책이 개항 이전과 이후 자생적으로 성장했던 대한 안의 민족자본을 말살한 바탕 위에서 일본의 경제개발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일본의 영속적인 대한 지배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일본이 대한에서 철도 건설 등을 한 이유는 식민지를 근대화하려는 게 아닌, 식민지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19세기 후반, 전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의 일환으로 탈脫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 측에서 일본과 외교관계 수립을 거부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공식적으로 정한론을 제기한 이래 메이지 천황시대의 과두정부는 일본 국내에 대륙 침략을 위한 소위 정한론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 일전쟁과 1905년의 러․ 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엄연한 독립국인 대한제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 일동맹과 가쓰라 - 태프트 밀약 등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하였으며, 1905년의 무력을 동반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한 데 이어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으로 대한제국의 배타적 권리를 차례차례 강제로 박탈하였다(이 시기의 자세한 역사는 대한제국이나 개화기 등을 참조).
• 1909년 7월에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 병합이 일본내각에서 결정되었고, 1909년 10월 26일에 이에 분노한 대한인 민족주의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고, 이를 기회로 일본 내에서 대륙 침략을 위장한 소위 정한론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대한제국 강제 병합의 추진이 가속화되었다.
•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대한에서는 경술국치라고도 한다)이 맺어지면서 5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소위 천황 직속의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5년까지 35년간의 고통 어린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일제통치의 시대별 전개
일제식민지시대는 19세기 후반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쟁탈전으로 탈 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이 외교관계를 거부한다는 명분을 들어 공식적으로 정한론을 제기하여 한기 9073년(AD.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무력 식민지정책, 한기 9091년(AD. 1894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데 이어 한일신협약과 기유약조로 대한제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한기 9106년(AD. 1909년) 대한제국 강제합병이 일본각의에서 결정되었고, 한기 9106년(AD.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빌미로 정한론이 가속화되었다. 한기 9107년(AD. 1910년) 한일합방조약(경술의 국치)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일본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35년 간 식민지배를 받았다.
․ 헌병경찰통치기(무단통치기, 1910년 ~ 1919년)
‘헌병경찰 통치기’라는 명칭은 1910년 9월에 창설된 헌병경찰제도에서 나왔다. 즉 헌병이 일반 경찰행정까지 담당하면서,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즉결처분권 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조선총독은 일본군 현역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고,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과 군대통솔권까지 장악하였다. 일본은 2만여 명의 헌병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대한 전국에 배치하여 무단식민통치를 자행하였다. 이 당시 통치의 강압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태형령으로, 갑오개혁 때 폐지된 태형을 조선인에게만 적용하여 처벌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조선인의 각종 단체가 해산당하였다. 1911년 신민회를 해산시킨 105인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1912년부터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면서 기한부신고제로 시행, 이를 잘 알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를 침탈하였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마을이나 문중의 토지, 왕실의 토지 등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겼다. 침탈된 토지는 일본 이민들에게 싼 값에 팔렸고 이 때에 고래의 소작권개념이 무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대한에서 이뤄진 최초의 실질적 근대 토지소유개념을 도입한 정책이나, 광무개혁시기에 이뤄진 양전사업이나 지계의 발급이 일본 측의 방해로 실패했다는 것을 되돌아보건대 그 실질적 의도는 토지의 침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의 허가에 의해서만 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는 회사령이나, 산림령과 임야조사령, 어업령, 광업령 등으로 대한의 경제적 지배권은 대부분 일본에 넘어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익이 대한에 진출한 일본 재벌이나 조선인 지주층의 회사에 투자되면서 대한의 경제적 개발을 촉진시켰다고 볼 수는 있으나, 민족자본의 성장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와중에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함에 따라 1919년 3월 1일 3· 1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으로 평화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적극적으로 탄압하여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하나로 일치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의 통치정책 방향 또한 급선회하게 되었다.
․ 민족분열통치기(문화통치기, 1920년 ~ 1931년)
3· 1운동에 의해 일본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통치에서 회유적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일부 단체활동과 언론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교육과 기술교육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조선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간악하고 교활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대한에서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경찰제' 를 도입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문화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조선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학문과 기술교육만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 안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개량주의로 분화하여, 민족성개조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자치운동(참정권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한편으로 이 당시에는 일본의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산미증식계획이 수립되어 대한의 미곡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 높아져 대한의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다.
․ 민족말살통치기(1932년 ~ 1945년)
1930년대에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대한을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의 병참기지로 삼고, 이에 따라 일본의 경제적 지배정책도 병참기지화정책으로 선회한다. 이어 1940년대에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을 취하고, 인적· 물적자원 수탈에 광분하였다.
조선인들을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민족말살통치가 진행되어,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에 의거한 황국신민화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황국신민의 서사의 암기와 신사 참배 그리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학교의 한글교육은 중단되었고,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며,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는 폐교되거나 강제 개명당했다. 특히 일본은 강제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장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한편,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하여 군수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쟁이 차츰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대한인의 해외 단파방송 청취를 엄중히 단속하였지만 경성방송국의 직원이 독립운동 차원에서 미국의 소리 한국어방송을 들은 것이 일본 경찰에 의해 들켜 수많은 방송인들이 옥고를 치른 단파방송 밀청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과 함께 대한이 해방되면서 일제시대는 종결되어 대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 대한독립운동의 전개
이 시기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었다.
. 구국운동기
• 계몽운동, 의병전쟁으로 전개
• 1910년대 - 민족 전열 정비
• 국내, 국외로 나뉘어 독립운동 기지 건설
• 3․ 1운동 참여 - 거족적 국립운동
• 1920년대 - 민족 총력 항쟁
•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중국과 연합하여 항일연합군으로 대항
• 우파와 좌파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 대두
• 1930년대 - 해외 독립군, 전열 재정비
• 1938년 이후 - 독립전쟁기
• 전반적인 독립전쟁 체계를 갖추었다.
*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 학살사건
• 제암리 학살사건(1919)
• 간도참변(1920)
• 관동대학살(1923)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이 있으나 구체적 자료를 소멸하고 은폐시켰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광복군의 선서 정신대 참상 청산리전쟁 승전 패전 일본군
* Daum Blog 인용 퇴각
․ 3 ․ 1독립선언
한기 9116년(AD. 1919년)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다. 일본제국주의의 강탈에 신음하던 한국인은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3 ․ 1독립선언서는 한기 9116년(AD. 1919년) 3월 폭압적인 일본의 무단정치에 항거하여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계 2명의 지도자들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뒤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전국적으로 독립선언문을 돌리고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 ․ 1독립선언이 있기 전 한기 9116년(AD. 1919년) 2월 8일 일본제국의 한복판 도쿄에서 한국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다. ‘조선청년독립선언’ 이라고 한다.
3 ․ 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한기 9115년(AD. 1918년) 11월에 만주 노령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 한기 9116년(AD.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발표한 ‘2 ․ 8독립선언서’, 셋째 한기 9116년(AD. 1919년) 서울의 ‘3 ․ 1독립선언서’ 다. 2 ․ 8독립선언서는 일본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었고 일본제국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어났으며 3 ․ 1운동의 발단에 지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데 의의가 크다. 동경 유학생들은 한말부터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학회지 ‘대한흥학보’ 를 발간하여 애국개화운동에 기여하였다. 한기 9109년(AD. 1912년) 조선유학생학우회에는 유학생 전원이 자동가입되었으며 ‘학지광學之光’ 을 발간하여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 기미독립선언문(원문)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의 政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 天(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며, 全人類(전 인류) 共存 同生權(공존 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 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유사이래) 累千年(누천 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전)의 障애(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奇緣(기연)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파탈하려하면 장래의 협위를 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소잔)을 興奮伸張(흥분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급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하고, 人類通性(인류통성)과 時代良心(시대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 수호 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서, 我(아) 祖宗世業(조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락(탁락)한 民族心理(민족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辯(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기미(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한 政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한 兩國倂合(양국병합)의 結果(결과)가,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과 統計數字上(통계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원)히 和同(화동)할 수 없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심조)하는 今來實積(금래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하는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동양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여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하는 不安(불안),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평화), 人類幸福(인류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 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일시)의 勢(세)라 하면 和風暖陽(화풍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일시)의 勢(세)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오인) 아모 주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 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滋(자)에 奪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만휘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복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 着手(착수)가 곳 成功(성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公約三章(공약 3장)-.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여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 기미독립선언문(번역문) 우리 조선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똑똑히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 만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 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를 두루 펴 밝히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 박은 세계 개조의 큰 움직임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움이니, 이는 하늘의 분명한 명령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니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 년이 지났는지라, 우리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이며, 겨레의 존엄과 영예가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력으로써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떨쳐 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위협을 없이 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체모가 도리어 짓눌려 시든 것을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올바르게 가꾸어 나가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이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길이 누리도록 이끌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고,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무기로써 지켜 도와주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얻고자 하매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랴?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죄주려 하지 아니 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물려 온 터전을 식민지로 보고, 우리 문화 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우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의리 적음을 꾸짖으려 하지 아니하노라. 우리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을 갖지 못하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가릴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로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한 때의 감정으로써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심에 희생된,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그릇된 상태를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바른 길, 큰 으뜸으로 돌아오게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의 요구로서 나온 것이 아닌 두 나라의 병합의 결과가 마침내 한때의 위압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지금까지의 실적을 보라! 용감하고 밝고 과감한 결단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이해와 한 뜻에 바탕한 우호적인 새 판국을 열어 나가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울분과 원한이 쌓인 2천만 국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동양의 안전과 위태를 좌우하는 굴대인 4억 중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의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지지하는 자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리요? 아아! 새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온 세기에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의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도다. 새 봄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도다. 얼어붙은 얼음과 찬 눈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이 저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때를 맞고, 세계 변화의 물결을 탄 우리는 아무 머뭇거릴 것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온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온누리에 민족의 정화를 맺게할 것이로다. 우리가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은밀히 우리를 지키며, 전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나니, 시작이 곧 성공이라, 다만 저 앞의 빛으로 힘차게 나아갈 따름이로다.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셋,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조선청년 핵폭탄 평화공원 상해 임시정부 올림픽의 손기정
징병 독려 (나가사키) * Daum Blog 인용
*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직접적인 동기는 한기 9115년(AD. 1918년) 세계 1차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원칙 14조와 그 해 11월에 성립된 1차대전의 휴전조약이다. 한기 9115년(AD. 1918년) 12월 15일 자 ‘Japan Advertizer(일본 신호에서 영국인이 발간한 영자지)의 한국인 독립을 주장’ 제하의 기사에서 미국의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기사와 12월 18일 자 ‘약소민족들의 발언권 인정 요구’ 기사에서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의 2차 연례총회가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 보도였다. 강황회의에 한국대표가 포함된 사실도 실었다. 학생회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2 ․ 8 독립선언서’ 를 발표했다. 한일합병조약의 폐기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민족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만국평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할 것이며,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영원한 혈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다. 선언서는 3 ․ 1 독립선언서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이광수의 선언서를 최남선이 평화적으로 유연하게 다듬었다.
* 유관순은 이화학당 재학생으로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의 예배가 끝난 뒤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고 4월 1일 만세시위를 하가로 결의하고 마을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고 수천 명의 군중을 결집하여 아오내장터에서 시위를 주동했다. 시위 중 부모가 피살되었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주동자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투쟁의 정당함을 주장하다가 의자를 던져 법정 소란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만세운동을 주창하여 더욱 심한 고문과 형벌로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사했다.
총독부 일장기 안중근의사 유관순열사
내림 순국비 기념 그림 * Daum Blog 인용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한기 9116년(AD.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수립․ 선포되어 한기 9142년(AD. 1945년) 해방 환국할 때까지 일제의 한국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치했던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로 한기 9116년(AD. 1919년) 3 ․ 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1919년 4월 중국 상하이), 대한국민의회정부(1919년 3월 러시아령),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1919년 4월 서울), 조선민국입시정부(1919년 4월 서울), 신한민국임시정부(1919년 4월 평안도), 한성임시정부(1919년 4월 서울 인천), 동東 3성省(만주 일대)의 고려임시공화국 등 6개의 지역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으나 이 가운데 상하이, 러시아령, 서울의 3개 지역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헌법, 의회, 서고문, 정강, 강령을 갖추었고 나머지 정부는 전단적인 범주에 머물렀다.
*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다.
․ 제 1기 상해시대(1919년 - 1932년)는 교통국과 연통제의 상설기구를 설치했다. 교통국은 군자금 모금, 정보수집, 정부의 지령전달, 인물포섭과 무기 수송전달을 했다. 연통제는 행정제도다.
․ 제 2기는 이동시대(1932년 - 1940년)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빌미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자싱, 항저우, 쑤저우, 전장,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린, 치장 등 10여 지역으로 피난한 시기다.
․ 제 3기 충칭시대(1940년 - 1945년)는 충칭에 정착한 시기로 광복군을 창설하고, 주미외교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하고, 3균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건국강령을 반포했으며, 강력한 통치이념과 독립전쟁을 천명했다. 세계 제 2차대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중국에 이어 12월 공식적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국민국가의 민주공화제적 전환의 민주정치사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었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었으며, 특히 임시정부는 좌우익을 통한 연립내각을 수립하여 민족통합을 실현하였다.
청산리전투 기록화 김좌진장군
* 청산리전투
한기 9117년(AD.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 동지대 소속 군사를 전멸시킨 대첩이다.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천수평 등 10여회의 승첩이다. 무기와 탄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하루 주먹밥 한 개로 독립군 2000여 명이 일본군 5000여 명을 대파했다.
<독립군가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나가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길 이 너와 나로다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나가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됨이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빛낼 이 너와 나로다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나가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이봉창의사 거사 전에 찍은 사진, 1932년 단성사에서 대중가요 황성옛터를
중국어판과 대한어판 도왜실기 합성사진 불러 나라 잃은 슬픔으로 공연장을 울음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바다로 만들었던 이애리수(이음전)
배경식 지음(한겨레신문 2008. 10. 25) 2008년 98세로 생존 확인
* 이봉창의사 의거
한기 9129년(AD. 1932년) 1월 일본 육군 새 해 관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도꾜 사쿠라다몬 다리에서 히로히토 일본국왕 행렬 두 번째 마차를 향해 수류탄이 날아갔다. 이봉창의사가 던진 수류탄은 목표물을 정확히 맞혔고 폭탄은 요란하게 터졌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맨 앞 마차에 타고 있었다. 게다가 폭탄의 위력이 신통치 않아 몇 사람이 다치고 잠시 말들이 놀라 날뛰었을 뿐이다. 이봉창의사는 지니고 있었던 두 번째 폭탄을 던지지도 못했다. 폭탄을 던져 일본국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던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봉창의사는 히로히토의 얼굴을 익히지도 않았고 행렬의 코스도 사전에 탐지하지 않고 거사를 계획했다. 국왕 암살치고는 계획이 매우 허술했다. 이봉창의사의 거사는 실패했으나 자금난과 인재난으로 고충을 겪고있었던 상해임시정부에는 꺼져가던 불꽃이 다시 붙는 성과였다. 이봉창의사의 폭탄 투척사건을 보고는 세계가 놀랐다. 독립자금이 답지하고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김구선생은 ‘동경작안의 진상’ 에서 ‘이봉창의의사의 엄친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광대한 땅을 철도부속지라는 명목으로 왜적에게 강점당하고 … 사쿠라다몬 앞에서 폭탄이 폭발한 것을 본 이의사는 가슴에 품었던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백범일지, 도왜실기에 이봉창의사의 거사기록이 있다. 1994년 최서면의 노력으로 이의사의 옥중수기 ‘상신서’가 공개되고 재판기록이 알려지면서 요즘 뉴라이트가 펼치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근대화론’ 이 얼마나 관념적 허구인지 상세하게 들어난다.
백범 김구선생 윤봉길의사 연행 윤봉길의사 윤봉길의사 처형
* 김구선생, 1876년 8월 29일~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1940년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제6대, 8대, 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주석을 지냈다. 아호는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범(凡)’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의사義士 19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의거 연행 사진, 1932년 5월 1일 일본 아사히신문 보도. 연행인 윤봉길 본인 진위 논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김구선생의 도왜실기 사진과 같고, 1976년 부인 배용순, 동생 윤남의 증언 윤봉길 본인 확인
1948년 남북 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으며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선우진, 김구, 아들 김신(왼쪽),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를 찾은 김구 선생과 일행(가운데), 미군정기의 이승만, 하지 중장(왼쪽)
# 한기 9129년(AD. 1932년) 4월 상해 홍커우공원에서는 일본천황의 생일축하식이 거창하게 거행되었다. 홍구공원 폭탄투척거사 직전의 상해임시정부청사, 김구주석의 사무실 겸 침실, 식당. 김구주석과 윤봉길의사, 사무용 책상으로도 사용하는 식탁에 좌정하여 마주 앉아 있다. 식탁에는 오랜만에 보는 하얀 이팝과 소고기국 그리고 몇 가지 나물반찬이 차려져 있고 윤봉길의사가 맛있게 밥을 먹는다. 김구주석 앞에도 밥상이 차려져 있지만 주석은 숟가락을 든 체로 윤의사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다.
윤봉길의사 : (숟가락을 놓고 숭늉을 마시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잘 먹었습니다. 오 랜만에 이팝으로 포식을 했군요. 이제 가야할 시간입니다. 선생님 건강하게 잘 지내십 시오.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다가 돌아서며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김구주석 에게 드린다.) 선생님, 이제 제 시계는 쓸모가 없습니다. 제 것이 더 새 것이니 바꿔 찹 시다. (김구주석 망설이다가 손목시계를 풀어 서로 바꿔 찬다. 그리고 왈칵 윤봉길의사 를 가슴에 안고 등을 쓸어내린다. 김구주석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 상해 홍커우공원 일본천황 생일축하연장, 일본인 차림의 윤봉길의사가 어께에는 물병을 메고 손에는 도시락을 들었다. 일본헌병이 검문하지만 유창한 일본어를 구시하면서 일본인 행세를 하자 의심없이 들여보낸다. 잠시 뒤 군악대의 일본국가 연주로 의식이 시작되고 단상 위에는 상해에 주둔한 일본군 고위장성을 비롯한 영사관 직원들과 일본상인조합 대표 등 그리고 초청되어 참석한 중국 고위관리들이 포진하여 기미가요를 들으며 일장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었다.
윤봉길의사 : (단상 앞으로 달려나가며 도시락폭탄을 단상으로 던진다. 그러나 불발, 다시 어깨에 맨 물병폭탄을 벗어 던진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단상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 천 명의 관중들은 아비규환이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윤봉길 의사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만세를 3창한 뒤 우왕좌왕하고 있는 일본헌병 앞으로 걸어가 두 손을 내민다.
헌병 : (눈을 희번덕거리며) 뭐야, 너는?
윤봉길의사 : (태연하게) 내가 폭탄을 던졌다. 체포하라!
헌병 : 미친 놈이구만, 저리 가라!
윤봉길의사 : 이 멍청한 놈아, 내가 폭탄을 던졌다니까!
헌병 : 돌았나?
윤봉길의사 : (웃으며) 날 체포하지 않으면 곧 후회할 것이다.
윤봉길의사는 스스로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김구주석은 그 말을 전해 듣고는 통곡했다.
베를린마라톤 시상대의 손기정선수, 우승자면서도 전혀 기쁜 표정이 없고 일장기를 꽃화분으로 가리고 있음. 일장기가 삭제된 동아일보 2판과 아사이신문 원본
*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
한기 9133년(AD. 1936년) 8월 도이치의 베를린 올림픽경기 마라톤에서 손기정선수가 1등을 하고 남승룡선수가 3등을 했는데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았으므로 동아일보는 2판부터 일장기를 지우고 발행하여 무기 정간되었고, 역시 일장기를 없애버린 손기정선수의 사진을 실은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하였다.
7부 14화 대한민국(이승만대통령의 자유당정부 - 노무현대통령의 참여정부) 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주석 - 김정일국방위원장)
휴전선 긋기 철마는 달리고싶다 2006년,
* Daum Blog 인용 55년 만에 열린 철길
◎ 대한민국 역사연표
초대 이승만 자유당정부 한기 9145년(AD. 1948년) 7월 -
현재 16대 노무현 참여정부 한기 9195년(AD. 2003년) 2월 출범
역대 | 대통령 | 재임 기간 | 역사 개요 |
초대 | 이승만 | AD.1948.7-1952.8 | 해방, 남북 분단, 6․ 25 |
2대 | = | 1952. 8 - 1956. 8 | 자유당 독재, 4사5입 개헌 |
3대 | = | 1956. 8 - 1960. 4 | 4․ 19 학생의거, 망명 |
과도내각 | 허정 | 1960. 4 - 1960. 8 |
|
4대 | 윤보선 | 1960. 8 -1963. 12 | 5월의 봄 |
5대 | 박정희 | 1963. 12 -1967. 6 | 5․ 16 군사혁명 |
6대 | = | 1967. 7 - 1971. 6 | 3선 개헌 |
7대 | = | 1971. 6 -1972. 12 |
|
8대 | = | 1972.12 -1978. 12 | 유신시대 |
9대 | = | 1978.12 - 1979.10 |
|
10대 | 최규하 | 1979.12 - 1980. 8 | 12․ 12 사태 |
11대 | 전두환 | 1980. 8 - 1981. 2 | 5․ 18 광주민주화운동 |
12대 | = | 1981. 2 - 1988. 2 | 통일주체국민회의 |
13대 | 노태우 | 1988. 2 - 1993. 2 | 6․ 29 선언 |
14대 | 김영삼 | 1993. 2 - 1998. 2 | 문민정부, 군사정부 담합 |
15대 | 김대중 | 1998. 2 - 2003. 2 | 국민의 정부, 반공과 용공 |
16대 | 노무현 | 2003. 2 - 2008. 1 | 참여정부, 혁신과 보수 대립 |
17대 | 이명박 | 2008. 2 - | 이명박 실용정부, 보혁 대립 |
해방 대한민국 해방기사 독립신문 임시정부 귀국 축하
* Daum Blog 인용
# 한기 9142년(AD.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미치노미야 히로히토의 항복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히로시마 원폭 피해 * Daum Blog 인용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 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생각컨대 제국 신민의 강령을 도모하고 만방 공영의 낙을 같이함은 황조황범의 유범으로써 짐의 권권복응하는바 전일에 미영 양국에 선언한 소이도… 모름지기 거국일치 자손상전하여 굳게 신국의 불멸을 믿고 각자 책임 이 중하고 갈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총력을 장래 건설에 쏟을 것이며 도의를 두텁게하고 지조를 튼튼케하여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도록 노력할지어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뜻을 받들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가미가제(신풍神風), 도라도라도라(기습 암호) * Daum Blog 인용
* 일본에서만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었다. 조선통감부의 관리들은 책상을 치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고 거류민들도 동쪽으로 무릎을 꿇고 비통하게 울었다. 많은 거류민과 일손을 놓은 관리들이 저들의 신사를 찾아 넋을 잃고 합장을 했다. 대동아전쟁은 필승이라고 믿고 있었던 일본인들에게 패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야모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지휘 아래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일본군의 가미가제와 잠수함을 동원하여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 한기 9138년(AD.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아침이었다. ‘도라 도라 도라, 여기는 진주만’ 이 암호였다. 일요일을 디데이로 잡은 것도, 이른 아침을 택한 것도, 그리고 워싱턴에서는 일본대사가 미국 국무부장관 면담을 신청한 것도 모두 기습을 하기 위한 기만 전략이었다. 미국 국무부장관은 찾아온 일본대사에게 협상 진행 중, 그것도 선전포고 없이 기습이란 국제도의에 어긋난다고 하며 면담을 거절했다. 일본대사는 진주만을 공격한 한 시간 뒤에 선전포고를 전달하려는 속셈이었다. 일본은 미국 전함이 몰려있는 진주만을 일거에 때려부순다면 미국이 일어설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일요일 아침 잠자고 있던 미국은 분노로 깨어났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은 12척의 함선, 전투기 188대, 2400여 명의 군인들과 70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 피해를 입었다. 일본의 예상은 적중했다. 미국은 회복하기 어려운 결정적 피해를 입었다. 일본의 승승장구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본 국민은 진주만 기습에 환호작약했다. 천황폐하 만세! 소리가 일본 전역을 뒤흔들었고 군국주의자들이 앞장서서 대동아 경영이 시작되었노라고 거품을 물었다. 일본의 대륙 진출 의지는 대한의 열국시대 백제 멸망을 구실로 대한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획책 이래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부터 한일합방까지 이어졌다. 한일합방으로 수백 년 동안 잠재했던 대륙 진출 야욕의 전초기지 확보에 성공했다.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판단한 제국주의자들은 한기 9133년(AD. 1936년) 노구교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한기 9134년(AD. 1937년) 중국과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철강과 원유 수출을 제재했다. 일본이 1차적인 조치에도 중국 침략 의도를 포기하지 않아 미 ․ 영은 자국 안의 일본자산을 동결하고 파나마운하 통행을 억제했다. 한기 9138년(AD. 1941년) 헐 통지문을 최후의 통첩으로 받은 도조 히데키 일본수상은 중국 안의 일본군을 철수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륙 진출의 야욕을 버린 것이 아니라 대동아공영의 걸림돌이 되는 미국을 먼저 치기로 계획을 바꿨을 뿐이었다. 아인시타인은 핵이 전쟁의 수단이 되는 일을 우려했다. 노벨이 다이나마이트가 무기가 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처럼 핵이 세계평화에 이용되기를 염원했으나 미국은 이 전쟁을 빨리 종결시켜야 했다. 국력을 탕진을 막아야 했다. 한기 9142년(AD. 1945년) 8월 6일 B - 29 폭격기에 장착된 ‘Little Boy(꼬마)’ 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도시 모든 주민 42만 명이 피폭되었고 16만 명(40%)이 죽었다. 한기 9142년(AD. 1945년) 8월 9일에는 고쿠라로 향하던 폭격기가 기상 악화로 회항하던 중 나가사키에 ‘Pat Man(뚱뚱보)’ 을 투하했다. 도시 모든 주민 27만 명이 피폭되었고 23만 명(90%)이 죽었다. 일본은 경악했다.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무력이었다. 제국주의자들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미 패전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던 때였다. 일본은 국력이 바닥나있었고 전쟁자원이 동이나 송진(소나무액)을 비행기 연료로 가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비참하게 항복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욱일승천했던 기개가 떨리는 목소리로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 그대들 충량한 신민은 짐의 뜻을 받들라’.
서울시청 앞 영월무궁화 만주용정 반일의사릉 을사 5적
월드컵 응원 * Daum Blog 인용
* 안타깝게도 한국인들이 히로시마에서는 5만여 명이 피폭되어 2만여 명이 죽었고, 나가사카에서는 2만여 명이 피폭되어 1만여 명이 죽었으나 치료나 보상은커녕 잊혀진 존재, 잊혀진 게 아니라 없었던 존재로 나가사키의 위령탑에 등재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일본은 나가사키 중심에 ‘평화공원’ 을 조성해놓고 해 마다 평화시위를 벌인다. 전쟁을 발발했던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 평화를 호소하는 넌센스가 벌어지고 있다. 종전 뒤 평화헌법을 제정하여 세계평화를 교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그들은 일본총리의 야스쿠니신시 참배를 자행하고 있다. 야스쿠니에는 1급 전범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유사 이래 대한령이었던 독도를 러․ 일전쟁의 보상으로 강탈하였는데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려는 야욕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도이치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일제의 도조 히데키가 획책한 세계 제국주의화 야심은 세계 제 2차대전을 일으켜 또 한 번 지구촌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인민군 전차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개입 6․ 25 살육
서울 진입 * Daum Blog 인용 1․ 4후퇴 흥남부두
* 해방조국, 미국군과 소련군의 진주進駐
한기 9142년(AD.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의 라디오 방송에 목이 메인 사람들이 또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봉건사회의 수탈과 압제에서 개화의 여명을 찾아 꿈틀거리던 역동적인 시국이 일본제국의 대륙 진출 전진기지의 전초가 되어 수탈과 압제는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하게 자행되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얼마만한 희생을 치루어야 했던가? 조선시대 후반기 봉건사회에서 백성은 깨어가는 민중이었으나 일제시대의 대한인은 노예로 전락했다. 학도병으로 끌려간 학생들은 일본군대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누이들은 정신대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 노무자로 끌려간 아버지들은 탄광노동자로 학대와 중노동에서 희생되었다. 대한이 일본제국 전쟁의 전초기지였고 대한의 생산물은 일본제국의 전쟁 물자 수급원이었다.
해방의 감격을 기쁨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어 입술을 깨무는 대한인들이 있었다. 독립투사들이었다. 대한을 광복하기 위한 전략이 수립되어 이미 중국에서 두 갈래로 대한을 향해 진격하던 독립군은 아연실색했다. 우리 힘으로 광복을 이룩해야 했다.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되는 계기였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시작된 대한에 공식적으로 입국하지 못했다. 이미 미국이 주도한 한기 9140년(AD. 1943년) 이집트의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대한의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그리고 남에는 미국군정이 북에는 소련군정이 설치되었다. 국내의 좌우익은 신탁과 반탁으로 갈라졌다. 이승만 한민당의 주도 아래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어 북한에도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상해 임시정부를 주관했던 김구주석은 미군정이 개인자격 입국을 요구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입국하지 못했으나 남북협상을 주도하여 남북 분열을 막으려고 했지만 경교장에서 현역 군인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일본 반환 오대산사고 일송정 임정국무위원 홍범도, 김좌진,
조선왕조실록 * Daum Blog 인용 지청천 장군
* 대한민국 정부 수립(Daum Blog 위키백과 인용)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였고, 1948년 8월 15일부터 1960년 4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초대, 2, 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미국 정계에서 활동한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의 정책을 수용했다. 미국은 세계 제 2차대전 뒤 재편되는 세계 정치질서의 양축으로 소련과 미국의 역할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소련과 양분했다. 미국은 남한의 복구를 지원했다. 소련군은 북한에 김일성정권을 세웠다. 이승만대통령은 모든 정치세력, 친일파까지도 포용했다. 한국의 국부國父로써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정권욕과 독재권력을 일으켰다.
․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러시아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인국민회에서 국무총리에 선출되었고 1919년 4월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3․ 1운동 이후, 1919년 9월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져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동휘로 하는 통합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에 뽑혔지만 여전히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고,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 1921년 5월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며,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오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다수의 독립운동가와 갈등하다가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
같은 시기인 1918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집정관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
그 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의 재미교포조직들은 안창호 지지세력과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 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승만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1948년 도꾜의 맥아더와 이승만대통령
* Daum Blog 인용
․ 이승만대통령의 제 1공화국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2위 김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하였으며,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 19혁명으로 붕괴되기 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 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반일외교노선을 지향하였다.
․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 3호로 제정된 법률로 만들어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는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되었다.또한 제 1공화국 연 인원 96명의 각료 가운데 30자리 이상을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에게 배정했다.
4 ․ 19 학생의거 초등학생 시위 정의의 승리 * Daum Blog 인용
․ 3 ․ 15 부정선거와 4 ․ 19혁명
1960년 4월,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사회의 전 계층으로 확산된 시위인 4 ․ 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대통령은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였다.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하였으며,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총재직을 사임하였다. 4 ․ 19혁명은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었고, 4월 25일 이승만은 자진 퇴임을 선언하고 국회에 사퇴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
․ 망명과 죽음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한국을 떠날 때 영구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대통령은 특별지시를 통해 이승만대통령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 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대통령의 귀국을 반대했다. 이후 그 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6 ․ 25 집단학살 * Daum Blog 인용 6 ․ 25전쟁일지 파괴된 서울
* 6 ․ 25민족전쟁
한기9147년(AD. 1950년) 6 ․ 25남북전쟁이 터졌다. 이전 한기 9145년(AD. 1948년) 10월에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고 4 ․ 3제주항쟁이 일어났다. 여순반란사건에서 연대장 박정희는 핵심 역할을 맡았는데 사건 진압 뒤 군대 안의 공산당 조직을 밀고하는 조건으로 살아남았다.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만주에서 활약한 일본 관동군의 장교였다. 특히 일본군 정보장교로써 독립군 색출과 처형에 공훈을 세워 남달리 인정을 받았다. 남한의 정치적 상황과 미국 국무부장관 애치슨의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 애치슨라인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오판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소련과 중국의 허락을 받아 기습 침략을 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남한 보다 월등했었다.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국제적으로는 이승만대통령의 독재와 독자로선에 미국이 등을 돌려 애치슨라인(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으로 일본까지만 포함됨)을 상정했다. 변변한 탱크 한 대도 없었는데 북한은 소련제 탱크로 무장하고 있었다. 남한은 북침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또 전쟁 발발 뒤에 북한군이 열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정부는 한강 다리를 끊고 퇴각했으며, 한 달도 못되어 낙동강까지 밀어닥친 걸 보더라도 북침은 어불성설이다.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유엔군을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 북진하여 백두산 천지 물을 떠다 이승만대통령에게 바쳤으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개입하여 휴전이 성립되었다. 전쟁 등 실책으로 이승만대통령은 국회에서 실시하는 간접선거로는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발췌개헌안으로 직선제개헌을 하였다. 그 후 종신집권을 획책하여 4사5입 파동을 일으켰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선생을 용공주의자로 처형했다. 여운형선생은 암살되었다. 신익희선생과 조병옥선생은 대통령 선거 유세 중 급사했다. 이승만정권의 권력기반의 이데올러기는 반공과 반일이었다. 경찰, 군부, 청년단체가 정권 수호유지의 첨병역할을 했다. 자유당이 그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일제청산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제에 협력하고 독립투사를 박해하였던 사람들이 정부요직과 부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남한은 국가적 도덕적 정체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가치질서가 정당성을 잃고 있다. 북한은 일제부역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처리하였으며 전후 유럽에서도 뉘렌부르크 재판을 기준으로 사회에서까지 응징하고 처리한 반면 남한은 이에 실패하여 가치혼란을 겪고 있다. 전쟁 당사자인 일본은 평화헌법을 제정하였으나 전후 도이치처럼 역사적인 반성이나 사죄 없이 형식적이다. 3 ․ 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독재정권의 절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로써 위치에서 4 ․ 19 학생의거로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내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6 ․ 25 참상 3 ․ 8선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남하하는 피란민
* Daum Blog 인용
3 ․ 1운동 5 ․ 18광주민중항쟁 간도동포 북한 평양
* Daum Blog 인용
* 박정희대통령의 5 ․ 16군사구테타(Daum Blog 브리테니커 인용)
한기 9163년(AD. 1966년) 5월 16일 박정희소장이 주축이 되어 군사구테타가 일어났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이 분출되었던 ‘5월의 봄’ 은 이렇게 스러졌다. 군사혁명은 5월의 봄을 국정의 혼란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30년 동안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한기 9169년(AD. 1972년) 개정 ․ 공포된 유신헌법에 의해 유신체제가 등장하는데 이는 박정희대통령의 장기(종신)집권화였다. 10월유신은, 경제적으로는 무분별한 외자 도입과 수출진흥정책으로 인한 시설 과잉과 외채 상환의 압박으로 금융공황적 자금난으로 이어졌다. 사회적으로는 경제발전이 대자본 위주의 저곡가 저임금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 서민층의 생존권문제가 분출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닉슨독트린을 계기로 아시아에서 미국이 후퇴하고 7 ․ 4 남북공동성명 등 국제적 긴장 완화와 반공체제의 이완, 정치적으로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전개되어 정권의 안위가 흔들리자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하려는 헌정 중단을 통한 장기집권계획이었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으로 군사독재체제를 강력한 집권력으로 유지하면서 국민의 자유를 짓밟고 국가의 민주를 말살한 독재자로 규정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보릿고개를 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조국의 근대화를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한다. 과거의 경력으로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 탄압의 행적이 있고, 여순반란사건에서 공산당원으로써 반란의 주모자 역할을 했는데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은 배신자로 규정한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인간적인 평가와 군인으로써의 평가 그리고 대통령으로 평가들이 혼합되어 관점을 달리하면서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5월 민주화의 봄을 국가사회적 혼란이라고 호도하면서 일으킨 군사혁명은 정치적인 군인들의 쿠테타다. 무인반란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사 뿐만아니라 역사에서 대한민국의 정치를 후퇴시키고 민주화를 역행한 반란이다. ‘성공한 구테타를 혁명으로 간주한다’ 는 법률적인 결론은 시대적 필연이라는 전제를 상정하고 판단한 결과론이다.
호는 중수中樹.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朴成彬과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소학교(聞慶小學校)에서 3년간 교직에 몸담았는데, 일본인 시학관(侍學官:지금의 장학사)과 충돌해 스스로 사직했다. 이후 장래를 고민한 끝에 1942년 만주에 있는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에 입학해 2년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한 다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4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8 · 15해방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關東軍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했다.
8 · 15해방 후 1946년 귀국해 국군창설에 참여했고,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제 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했다.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1949년 여수순천 10 · 19사건(여순반란)을 계기로 군내 공산주의자와의 관련 혐의를 받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동료장교의 감형운동으로 석방되어 문관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다가 6 · 25전쟁 이후 소령으로 복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을 지냈다. 소령으로 복귀되는 과정에서 군고위급 장성 사이에 그의 과거 공산주의자와의 관련 사실을 두고 의견 차이가 있어 복귀에 어려움도 있었다. 1953년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육군포병학교장, 제 2군단 포병사령관, 제 5 ․ 7사단장, 제 1군 사령부참모장, 제 6관구사령관, 육군군수기지사령관, 제 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 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5 ․ 16군사혁명 박정희대통령 * Daum Blog 인용
1961년 소장으로 제 2군 부사령관에 재직중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 는 등의 혁명공약을 내걸고 청년장교들과 함께 5 · 16군사정변을 주도했다. 같은 해 7월 군사정변의 최고권력기관으로 입법권 · 사법권 · 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으며, 1962년 3월 윤보선대통령의 사임으로 그때부터 대통령 권한대행도 함께 맡았다. 군정기간 동안 전면적인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정당 · 사회단체 해체, 용공분자와 깡패 검거 소탕, 댄스홀과 고급요정 폐쇄,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해 7억 2000만 환에 이르는 부정축재 환수 등을 단행했으며, 국민의식개혁을 위해 '재건국민운동본부' 를 설치해 생활간소화 · 가족계획 · 문맹퇴치운동 등을 실시했다. 경제시책으로는 농어촌고리채정리와 화폐개혁 등을 단행했으며, 역대정권의 무관심과 무기력 속에 방치된 국토와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함으로써 그가 내세운 조국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당시 이런 개혁정책들은 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군정기간 동안 중앙정보부에 의해 '4대 의혹사건' (증권파동의 부정, 회전당구 사건,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이 발생했으며, 군정실시 2년 후에 민정 이양을 하겠다고 공언해 1963년 '2 · 27선언' 으로 원대복귀를 약속했으나 '4 · 8조치' 로 군정 연장을 발표했다가 국민여론에 밀려 철회하는 등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대통령 취임 이후 부존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기치하에 수출을 독려 · 촉진하기 위해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직접 주재해 수출 목표를 확인하는 한편,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해외공관을 활용해 수출에 주력했다. 제 3공화국 기간 동안 수출주도의 고도성장과 경제개발5개년 계획, 사회간접자본인 산업기지건설 등을 이룩해 경제발전을 위한 기본토대를 구축했다. 이러한 정책 이행을 통해 국민의 정치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는 1967년 7월 제 6대 대통령 재선에 이어 1969년 10월 17일 '3선 개헌' 을 통한 장기집권을 모색했다. 미국의 주한미군철수론,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의 국론분열(영남 · 호남 간의 지역감정 격화), 북한의 남침 위협, 근대화에 따른 갈등과 모순 증폭 등의 국내문제와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변화, 오일 쇼크의 엄청난 충격 등 국내외적인 정치적 · 경제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3선개헌에 의해 1971년 7월 제 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마침내 1972년 국회와 정당 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 을 제정해 제 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유신시대' 라 불리는 제 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그는 장기집권의 유신시대에 국민의 의식을 한데 모으기 위해 '새마을운동' 이라는 일대 개혁적운동을 펼치고자 했다. 1971년에 제창된 새마을운동은 '조국근대화' 라는 기치하에 '근면 · 자조 · 협동' 의 정신을 가지고 국민 개개의 생활 향상과 자유로운 성장은 물론 국가의 발전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사회혁신운동이라고 내세웠다. 새마을운동은 농촌 · 도시 · 학교 · 공장을 불문하고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민간 주도가 아닌 관 주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강제성을 띠었기 때문에 부작용도 많았다.
결국 유신시대를 통해 절대빈곤은 해결되었지만 날로 심화되어 가는 상대적 빈부의 격차와 장기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과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국민의 지지가 약화되자 '긴급조치' 발동으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그러나 장기집권과 반민주적인 통치를 반대하는 학생 · 지식인 · 종교인 · 정치인의 민주화운동과 고도성장의 경제적인 분배에서 소외당한 근로자·농민 · 도시빈민의 생존권 요구를 긴급조치로 억압함으로써 국민의 저항에 부딪쳤다. 유신시대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라는 기록적인 기록을 보였으나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과 갈등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신시대 초기에는 남북한통일문제를 제기해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1972년 ‘7 · 4남북공동성명', 1973년 '6 · 23선언' 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 에 관한 '대통령 특별성명' 등을 발표해 이를 구체화하고자 했으나 북한측의 태도 변화와 국내사정으로 말미암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신시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정권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그 나름의 여러 조치를 내렸으나 효과는 크지 않았다. 결국 핵심권력층 구성원들의 상호견제를 통해 충성심을 유도하는 그의 용병책은 유신체제에 항거한 1979년 '부마사태' 에 직면해 오히려 측근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다. 1979년 10월 26일 안가의 술자리에서 부마사태의 수습책을 둘러싼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사이의 언쟁 도중 그는 차지철과 함께 김재규에게 권총으로 피격당해 사망했다. 저서로는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지도자의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민족중흥의 길’, ‘연설문집’ 등이 있다.
* 전두환대통령의 12 ․ 12군사반란(Daum Blog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인용)
1931. 1. 18 경남 합천 출생/ 군인 · 정치가, 제 11 - 12대 대통령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했다. 1960년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수료하고 1965년에는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5 · 16군사혁명 직후에 조직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을 지냈다.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를 거쳐 1966년에는 제 1공수특전단 부단장을 지냈다. 1967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이후락의 추천으로 청와대를 경호하는 수도경비사령부 제 30대대장으로 발탁되었고 1969년에는 서종철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을 지냈다. 이듬해인 1970년 백마부대인 제 9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1971년에는 제 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3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고 1976년에는 청와대 경호실차장보를 거쳐 1977년에는 육사 11기생 156명 가운데 가장 빨리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소장 진급 후 1978년 제 1사단장을 지냈으며 1979년 초에는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79년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인 10 · 26사태를 계기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0 · 26사태 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책임을 맡았고, 11월 6일 사건 전모를 발표하면서 국민 앞에 나타났다. 1979년 12월 12일 합동수사본부 소속의 허삼수, 우경윤대령에게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강제연행과정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권력 공백기에 실권을 장악하였다. 1980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4월 14일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하면서 권력에 접근했다. 1980년 5월 17일 저녁 제 42회 임시국무회의에서는 국방부가 제출한 비상계엄확대선포안이 찬반토론 없이 가결되었고,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라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는 조치와 함께 계엄포고령 제 10호를 발표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였다. 5 · 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 진압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후 대통령 자문과 보좌기구라는 명분을 내세워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를 신설하고 상임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행정과 사법 전반에 걸친 주요 업무에 대해 지휘 · 감독과 통제기능을 수행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구로써, 유신체제 이후의 새로운 군사정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대통령이 군부의 강압에 의해 사임하고 이로부터 6일이 지난 8월 22일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대장으로 진급한지 불과 17일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8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간접선거인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선거에서 제 7차 회의에서 대통령선거 단일후보로 나서 2524표를 얻어 99. 9%의 득표율로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당선에 즈음한 담화’ 에서 ‘국정운영에 있어 항상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직하고 능률적인 정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고 말했다.
최규하대통령 서거 12 ․ 12의 진실 재산 29만원 패러디 어색한 악수
* Daum Blog 인용
1980년 9월 29일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이 공고되었고, 이에 따라 10월 22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우리나라 투표사상 가장 높은 95. 5%의 투표율과 91. 6%의 찬성율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10월 27일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1981년 1월 15일 창당된 민주정의당총재에 추대되었고 제 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치러진 제 12대 대통령선거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 선거에서 총선거인 5277명 가운데 5271명이 투표에 참가하였고 투표자의 90. 2%를 얻어 제 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3월 3일 임기 7년의 제 12대 대통령에 정식 취임하여 제 5공화국정부를 출범시킴으로써 12 · 12사태로부터 15개월 여만에 군사쿠데타에 의한 정권 장악을 마무리지었다. 이날 잠실체육관에서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에서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시련과 고뇌의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제 5공화국의 출범으로 자기완성시대를 형성하여야 할 성장과 성숙의 시대에 들어서는 찰나에 있다’ 는 취임사를 하였다. 제 5공화국의 4대 국정지표로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사회의 건설, 정의사회의 구현,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을 내세웠다. 대북한 정책으로는 1981년 1월 12일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간의 상호방문을 제의하고 김일성주석을 조건 없이 서울에 방문토록 초청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레이건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여 2월 3일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주한미군 철수 백지화 등 14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아시아 국가들과의 선린우호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6월 25일 ASEAM 5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타이, 필리핀) 순방을 위해 출국하였다. 1982년 8월 16일에는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등 아프리카 5개국을 순방하였고 캐나다와 프랑스, 서독, 벨기에, 영국 등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1983년 1월 11일에는 방한한 일본 나카소네총리와 첫 회담을 갖고 경제협력 문제를 포함한 두 나라 간의 현안을 논의하였고 이에 따라 12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고, 10월 8일에는 동남아, 대양주 6개국 순방을 위해 출국하였다. 그러나 이튿날인 10월 9일 첫 방문국인 미얀마 랑군 시내의 아웅산묘소에서 북한에 의한 폭탄 테러사건이 발생하여 도열중이던 서석준부총리 등 수행원 17명이 순직하는 사태가 벌어져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11월 12일에는 방한한 레이건대통령과 안보문제를 비롯한 두 나라간 현안을 논의하고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재정립하는 등 대외관계에서 적극성을 보였다. 이처럼 대외관계와 대북관계 그리고 스포츠외교분야에서 다소 진전된 모습을 보였으며, 경제부문에서도 3저호황에 힘입어 물가안정, 수출신장, 대외무역 흑자를 기록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를 나타냈다. 이와는 달리 대내적으로는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화운동을 탄압했으며 인권을 유린하는 등 군사독재정치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감옥을 나서며 체육관선거 법정에서 국가보위부 현판식
* Daum Blog 인용
7년간의 대통령 임기 가운데 마지막 1년 여를 남겨 놓고 있던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들의 개헌요구와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의 제 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고, 이를 위한 대통령선거를 연내에 실시한다는 내용의 특별담화인 4 · 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4 · 13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국정치사의 커다란 분기점인 6월민주화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때였던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여 차기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거센 직선제 개헌요구에 굴복하여 6월 24일 김영삼 통일민주당총재와 청와대회담을 통해 개헌논의를 즉각 재개키로 하였다. 이에 따라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가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포함한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인 6 · 29선언을 발표하자 7월 1일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를 통해 6 · 29선언을 전폭 수용한다고 밝혔다. 7월 10일에는 민주정의당총재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12월 16일 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후보가 당선되자 정권인수인계 절차를 거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국가원로자문회의와 일해재단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으나 5공군부와 6공군부 간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1988년 4월 13일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직에서 사퇴하였다. 제 6공화국 초기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회청문회가 진행되면서 5 · 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제 5공화국 권력비리에 대한 진상 규명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전 국민적인 요구에 직면하였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11월 23일 대 국민 사죄와 함께 재산 헌납을 발표하고 백담사에 은둔하였다가 2년 1개월 만인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였다. 백담사에 은둔 중이던 1989년 12월 31일에는 국회의 줄기찬 요구에 의해 국회 5공특위․ 광주특위 연석회의에 출석하여 125개 항목에 걸친 서면질문에 관해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영삼정부 출범 후 12 · 12사태와 5 · 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수천억 원에 이르는 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97년 12월 18일 제 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후보의 승리로 최초의 여 · 야간 정권교체가 실현되면서 나흘 뒤인 12월 22일 김영삼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새로 등장한 김대중정부 아래서 5공신당 창당 등 정치활동 재개 가능성으로 주목받았으나 끝내 무산되었다. 화랑, 충무, 을지무공훈장, 월남엽성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5 ․ 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백담사법회
* Daum Blog 인용
* 5 ․ 18광주민주화운동
한기 9177년(AD. 1980년) 5 ․ 18광주민중항쟁은 전두환장군이 신군부세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12 ․ 12 반란이 빌미가 되어 일어났다. 광주와 전남인들은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장군의 정치 일선 퇴진 그리고 김대중선생의 석방을 요구했다.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의 책동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한기 9185년(AD. 1988년) 제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으로 규정하였다. 신군부세력이 한기 9177년(AD.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자 학생들이 반발하여 데모가 일어났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자행하면서 시민항쟁으로 이어졌다. 시민항쟁은 시민자치와 민주주의 공동체구현를 실현하였다. 5월 27일 새벽 2만5000명의 군대를 투입한 ‘화려한 휴가’ 의 무력진압으로 정부 발표 사망 191명(광주에서는 행방불명자 등 2000여 명의 사망을 주장하고 있음), 부상 852명의 비극적인 막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대한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의 지식인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 변화했고, 국민들의 대미 인식 변화와 민족 해방, 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이후 광주는 범 세계적으로 평화와 자유의 민족운동 성지로 인식되었으며 망월동묘역은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5․ 18을 통한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의 선도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노태우대통령(Daum Blog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인용)
1932. 12. 4 경북 달성 출생/ 군인 · 정치가, 제 13대 대통령
대통령 취임선서 * Daum Blog 인용
노병수와 김태향의 맏아들로 태어나 6세에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경북 달성군 공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8년 경북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1950년 6 · 25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자진 입대하기도 했다. 195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육사생도시절에는 스포츠에 뛰어나 육상부와 럭비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1955년 전두환, 정호용, 김복동 등과 함께 육사 11기생으로 육군소위에 임관되었다. 1956년 전방 사단의 보병소대장을 거쳐 광주보병학교 구대장으로 복무중이던 1959년 육사 동기생 김복동의 누이동생인 김옥숙과 결혼했다. 결혼 직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특수전학교로 유학하여 6개월간 심리전과정을 거쳤다. 1960년 4월혁명 후 귀국하여 같은 해 말 학생군사교육단(ROTC) 창설요원으로 뽑혀 서울대학교에서 교관생활을 했다. 이어 군사정보대에서 영어 번역장교로 근무하다가 1961년 5 · 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방첩부대 정보장교로 근무했으며 1966년 방첩부대 방첩과장을 지낼 때까지 정보관련분야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그 사이 1962년에는 육사 11기 이후 정규 육사출신들로 구성된 북극성회회장에 선출되어 육사 졸업생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68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수도사단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1년간 근무했다.
1970년 육군대령으로 진급하여 서종철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을 지냈고 이듬해인 1971년에는 보병연대장을 지냈다.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해 공수특전단 여단장을 지내다가 1978년부터는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되었으며 1979년 초에는 제 9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사단장으로 부임 당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12 · 12사태를 계기로 군 지휘권을 장악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2 · 12사태 직후인 12월 13일 육군의 핵심부대인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군사쿠데타 성공으로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군보안사령관직을 1년간 맡다가 1981년 7월 15일 육군대장으로 예편했다. 군에서 예편한 직후 외교안보담당 정무2장관에 임명되어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82년에는 잠시 남북한 고위회담 수석대표를 맡다가 뒤이어 초대 체육부장관과 제 41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약 3년 동안 제 5공화국의 가장 큰 역점사업이었던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와 함께 1984년부터 약 1년 동안 제 28대 대한체육회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으면서 대내외적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985년 2월 12일 제 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하여 1987년까지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을 지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차기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전두환대통령의 4 · 13 호헌조치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대통령직선제개헌 등을 주장하는 민주화운동이 확산되자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그리고 구속자 석방 등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인 ‘6 · 29선언’ 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강성 군부세력과 구별되는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군사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다가오는 제 13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5일 민주정의당 제 2대총재에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16년 만에 실시되었으며 노태우 후보는 36. 6%의 득표율로 28. 0%를 얻어 2위를 기록한 김영삼 후보를 8. 6%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2월 25일 제 13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 6공화국을 출범시켰고, 취임 이틀 후인 2월 27일 시국사범 등 7234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해 국민통합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 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여소야대국회가 탄생하여 민주정의당 중심의 정국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원활한 여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5월 28일 야 3당 총재와 청와대 4자회담을 열어 구속자석방 등의 방침을 밝혔다. 대북관계를 포함하여 대외관계 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8년 7월 7일 남북동포 교류 추진 등 대북정책 6개항 특별선언인 '7 · 7선언' 을 발표하였으며 다음 날인 8일에는 중공을 중국으로 공식 호칭키로 발표하였다. 9월 17일 160개국에서 1만 3600여 명이 참가한 제 24회 서울올림픽이 개막되었으며, 우리나라는 금 12, 은 10, 동 11개로 종합 4위를 차지한 가운데 10월 2일 폐막되었다. 1989년 2월 1일 공산권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공식수교를 맺었다. 2월 27일 부시 미국대통령이 방한하여 한 · 미 정상회담을 가졌고, 우리나라의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공식화했다. 또한 1990년 5월 24일 일본을 방문하여 가이후총리와 1차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일왕으로부터 ‘통석痛惜의 염念’ 을 금할 수 없다는 사과를 받았다. 뒤이어 6월 5일에는 고르바초프와 한․ 소정상회담을 가졌고, 6월 6일에는 부시대통령과 한․ 미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와 같은 성과에 따라 10월 1일 소련과의 역사적인 수교가 이루어지고, 10월 30일에는 주소駐蘇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남북문제와 관련해서는 더 큰 성과가 있었다. 1989년 대북관계 개선의 일환으로 9월 11일 국회 본회의 특별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통일논의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듬해인 1990년 1월 10일 연두회견서 고령이산가족 왕래와 금강산 공동개발 등을 제의했다. 1990년 6월 20일 남북대화 재개를 요청한 북한의 제의에 따라 남북고위급회담 제 7차 예비회담이 7월 3일 열렸다. 남북 간의 대화분위기가 지속되자 7월 20일 남북한 민족대교류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자유방문, 귀환보장 등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9월 4일 북한 연형묵총리 등 북한대표단 90명이 서울을 방문하였으며, 다음날인 9월 5일 남북총리회담이 개막되었다. 9월 6일에는 연형묵총리가 노태우대통령을 단독 면담하고 김일성주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와 같은 남북관계의 진전으로 1991년 9월 16일 남북한이 만장일치로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등 대북정책의 큰 성과가 나타났으며, 1992년 8월 24일에는 중국과도 역사적인 국교 수립이 이루어져 82년 만에 양국 관계가 공식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대북 관계의 진전과 달리 국내정치에서는 우여곡절을 경험했다.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2월 9일 민주자유당이 공식 출범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는 순식간에 216석의 거대여당과 왜소한 야당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5월 9일 민주자유당 첫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대표에는 김영삼씨가 선출되어 당 체제가 재정비되었다. 당내 큰 논란거리였던 대통령선거 문제와 관련해서 1992년 1월 10일 연두회견을 통해 김영삼대표를 중심으로 총선을 치른 뒤 대통령후보를 경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3월 25일 제 14대 총선에서 패배한 민주자유당은 대통령선거 분위기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여 5월 19일 김영삼대표를 차기 대통령후보로 선출했다. 9월 18일 노태우대통령은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 이에 따라 10월 9일 사상 첫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후보가 42. 0%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2월 25일 제 14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정부 당시 부각되었던 수천억 원 규모의 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았으며, 그 결과 1995년 11월 16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어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 1997년 4월 17일 12 · 12사태와 5 · 18사건 그리고 대통령 비자금사건 관련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역사상 최초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1997년 12월 18일 제 15대 대통령선거 직후 김영삼정부의 특별사면조치에 의해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석방되었다. 화랑, 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 김영삼대통령의 문민정부(Daum Blog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인용)
1927. 12. 20 경남 거제 ~ 현존/ 제 14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가
김영삼대통령과 영부인/ 현대 정치사의 3김 :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 단식
9선의원으로 유명하다. 9선의원 역임. 1947년 경남고등학교를 나와 195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6 · 25전쟁 당시 학도의용군으로 복무하였으며,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1954년 제 3대 민의원선거 당시 거제에서 자유당후보로 출마하여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 12월 이승만대통령의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를 위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파동’에 반발하여 자유당을 탈당한 김영삼은 호헌동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실시된 제 5대 민의원선거에서 부산 서구의 민주당후보로 출마하여 재선됨으로써 정치무대를 부산으로 옮겨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장면정권 아래서 김도연, 유진산 등 민주당 구파가 주도한 신민당에 참여하여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61년 5 · 16군사정변으로 정당이 해산되면서 정치활동이 중단되었다. 1963년 5월 민정이양을 앞두고 창당한 민정당에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며, 그 해 12월에 실시된 제 6대 총선에서 민정당후보로 부산 서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던 1965년 5월 당시 민중당원내총무 겸 대변인을 맡는 등 중견정치인으로 성장했으며, 1967년 2월 제 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신한당이 통합하여 새로 출범한 신민당에서 원내총무를 맡아 3선개헌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1970년대 들어 최초로 '40대 기수론' 을 제창하고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제 7대 대통령 선거후보 경선에 참여하였다. 1970년 9월 29일 대통령후보 지명을 위한 임시전당대회에서 유진산총재의 지원으로 참석 대의원 885표 중 421표를 얻어 382표를 얻은 김대중후보를 39표 차로 앞섰으나 과반수에 미달되어 2차투표를 실시한 결과 오히려 1차 투표보다 적은 410표를 얻어 458표를 얻은 김대중후보에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에 실시된 제 8대 총선과 1973년의 제 9대 총선에서 연이어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해 5월 신민당부총재로 임명되는 등 정치력을 회복했다. 유진산총재 사망 후 새 지도부 구성을 위한 1974년 8월 22일의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당권 장악을 계기로 유신헌법 개정투쟁을 전개하는 등 선명야당을 표방했다. 신민당은 '헌법개헌심의위원회' 를 구성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입법부와 사법부의 권한을 강화하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개헌대강안改憲大綱案' 을 발표한 후 개헌투쟁을 원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내외의 반대여론과 저항이 고조되자 1975년의 베트남 공산화와 남북한 간 긴장고조를 빌미로 총력안보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자유를 초법적으로 억압하는 긴급조치 국면에서 유신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자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대통령과 회담하는 등 정치적 유화전략을 구상하기도 했다. 동시에 1975년 8월 23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필요하다면 야당 총재로서 북경정부를 방문하여 대한의 평화정착에 관한 협의를 하겠다’ 고 밝히면서 ‘남북대화를 재개하여 우리들 스스로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 이라고 주장하는 등 대한 통일과 평화문제로도 활동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기자회견 내용이 문제가 되어 다음 해 1월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1976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의 대표최고위원 경선에서 패배하여 이철승에게 당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1978년 12월 12일의 제 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민주공화당보다 1. 1% 높은 득표율을 거두자 여기에 힘입어 당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김영삼은 선거 결과를 ‘이철승의 타협적 노선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공화당의 폭정에 대한 국민의 항거’ 로 규정하면서 당권에 재도전하였다. 1979년 5월 30일 실시된 신민당 전당대회의 총재 경선에서 이철승과 경합한 김영삼은 김대중의 지원으로 총재로 선출되면서 당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은 박정희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1979년 YH무역 여성노동자의 신민당사 농성에 대한 경찰 투입으로 정국은 더욱 경색되었다. 김영삼은 이 시기에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미국정부가 박정희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사대주의적 발상으로 매도하면서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신민당 3개 지구당 위원장들이 제출한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이 서울민사지방법원 합의부에서 받아들여져 김영삼은 총재직까지 상실하였다. 김영삼에 대한 의원직 제명과 총재직무 정지가처분은 정국을 극도로 경색시켰으며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고조시켰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와 김영삼에 대한 정치적 탄압은 김영삼의 정치적 지지기반인 부산 · 마산 일원의 반독재 열기를 폭발시킴으로써 부마항쟁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당 · 노동 · 재야 · 학생 등 유신정권에 대한 전면적인 사회적 저항의 분출과 부마항쟁 등 지속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유신정권 내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는 갈등 상황을 유발했으며, 이 갈등은 온건파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강경파인 차지철 청와대경호실장을 저격하고 박정희대통령을 살해하는 10 · 26사태로 확산되었다. 유신체제가 붕괴된 이후 정치활동이 일부 허용된 이른바 '서울의 봄' 이 도래하자 김대중, 김종필 등과 경쟁적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했으나 신군부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신군부에 의해 가택에 연금되면서 정치활동이 차단된 김영삼은 1983년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23일간의 단식을 단행했다. 단식사건은 언론이 철저하게 통제된 당시 상황에서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가 결성되었다. 김영삼은 미국에 체류 중인 김대중과 협력하여 민추협을 이끄는 한편 민주산악회를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1983년 하반기의 유화국면으로 정치활동에 대한 규제가 일부 완화되자 1985년 2월에 실시된 제 12대 총선에 대응하기 위하여 김대중과 공동으로 전두환정권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선명야당인 신한민주당을 창립하여 총선에 참가하였다. 신민당은 2 · 12총선 직전에 급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12대 총선에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제 1야당이 되었으며 제 2야당인 민주한국당의원들을 대거 흡수하여 강력한 반독재 전선을 구축하였다. 정국이 전두환정권과 신민당의 대결구도로 재편된 상황에서 김영삼은 대통령직선제 개헌 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정권과의 타협을 전제로 한 '조건부 내각제개헌' 방안인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계기로 1987년 봄 김대중과 협의하에 신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통일민주당 창당, 전두환의 4 · 13호헌조치에 대한 사회 각계각층의 거센 저항,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 · 축소 조작 등 일련의 사건은 결국 '6월 민주항쟁' 으로 연결되었으며 전두환정권의 대국민 항복문서인 '6 · 29선언' 을 강제하게 되었다. 6 · 29선언으로 김대중이 사면복권되고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자 선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1987년 12월의 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은 김대중과의 후보단일화 협상의 실패로 야권이 분열된 상태에서 통일민주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게다가 대통령 선거 직후 실시된 1988년 4월의 제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에 이어 제 2야당으로 전락하면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약화되었다. 이러한 불리한 정치적 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1988년 이후 전개된 정계개편 과정에서 3당합당에 참여하였다.
1990년 1월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이 통합한 의석수 216석의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으며, 여기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민주자유당 안에서 민정계 중심의 정치적 저항과 계파 갈등을 극복하고 5월 19일 치러진 민주자유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대의원 66%의 지지를 얻어 여당의 대통령후보가 되었으며, 12월 18일 실시된 제 14대 대통령선거에서 42%의 지지를 얻어 민주당의 김대중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자신의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 로 규정하고 '신한국 창조' 라는 국정지표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사정개혁과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 정치개혁을 필두로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제거, 국군보안사의 조직 축소와 명칭 변경, 금융실명제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12 · 12사태와 대통령 비자금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수감하였다.
그러나 개혁철학과 개혁방향이 모호한 상태에서 대통령의 결단에만 의존해서 개혁이 진행되면서 개혁의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 그 결과 임기 중 발생한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고들뿐만 아니라 정경유착의 표본인 한보비리사건과 아들 김현철의 국정 개입 등 일련의 사건으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집권 말기에 발생한 외환위기 상황에서 IMF관리체제를 수용함으로써 엄청난 국민적 비판 속에서 임기를 마감했다.
저서로는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 ‘40대 기수론’, ‘정치는 길고 권력은 짧다’, ‘민주화의 깃발을 올리며’, ‘나와 조국의 진실’, ‘2000 신한국’, ‘우리 모두는 승리할 것이다’ 등이 있다.
* 김대중대통령, 국민의 정부(Daum Blog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인용)
1924. 1. 6 전남 신안/ 제 15대 대통령
남북한 정상회담
5 · 16군사정변(1961년) 이후 약 30년간 역대 군사정권 아래서 납치 · 테러 · 사형선고 · 투옥(6년) · 망명(10년) · 가택연금 등의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군사정권에 끝까지 맞서 민주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함으로써 대중적인 카리스마를 얻었으며, 세계적으로는 대한의 인권투사로 널리 알려졌다. ‘인동초忍冬草’ · ‘대한의 넬슨 만델라’ 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4차례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의 지론인 남북화해정책을 꾸준히 펼쳐 대외적 명성을 높였다. 대한과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정책의 공로로 노벨평화상(2000)을 수상했다.
․ 성장기와 정치 입문
1924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43년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에 취직했다. 8 · 15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떠나자 이 회사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으며, 목포일보사장(1948~50)을 지냈다. 6 · 25전쟁의 와중에서는 해상방위대 전라남도지구부대장(1950), 한국해운조합연합회이사(1951), 흥국해운 · 대양조선공업사장(1951)을 역임했다. 1954년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제 4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데 이어 2차례 더 낙선했으며, 1961년 5월 14일 4번째로 도전한 제 5대 민의원보궐선거(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이틀 후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강제해산되는 바람에 의원등록조차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후 6 · 7 · 8대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되었으며 민주당대변인(1960), 통합야당 민중당대변인(1965), 민중당 정책위원회의장(1966), 신민당대변인(1967)을 지내며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 고난의 행로
마침내 3선개헌 다음 해인 1970년 9월 김대중은 신민당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공식지명되었다. '40대 기수론' 을 주창한 김영삼 · 김대중 · 이철승의원이 함께 출마해 3파전으로 진행된 이 전당대회에서 소수파인 그는 1차투표에서 김영삼에 밀려 2위에 그쳤으나 2차투표에서 유진산총재의 김영삼 지지에 반발한 이철승이 지지표를 몰아줌으로써 대통령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1971년 제 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 · 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대한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박정희대통령의 안보논리와 경제성장론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선거과정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유권자들의 선풍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으나 박정희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당시 공공연하게 벌어진 선거부정을 빗대어 ‘김대중은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졌다’ 는 말이 회자되었다.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쳤다. 1973년 미국에서 대한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한 데 이어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을 추진 중이던 1973년 8월 8일 그가 일본 도쿄東京 팔레스호텔에서 중앙정보부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납치사건' 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대한정부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하다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해 대일관계가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한 면책, 김종필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에 합의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되었다.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1976년 3 · 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 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 등을 주장하는 '3 · 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이듬해 3월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유신정권은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이 고조되자 1978년 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해 가택연금시켰다. 그러나 그는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을 결성해 윤보선 · 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재야활동을 계속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그는 1980년 초의 '서울의 봄' 시기에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2 · 12사태(1979년)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도발에 대한 우려는 5월 17일 자정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통해 현실화했다. 이때 그는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 수감되었다. 정부군의 학살행위에 대항해 시민군이 무력으로 맞선 5 · 18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미국 · 일본 · 독일 · 프랑스를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 · 문화인 · 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활동하다 1985년 제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했다.
․ 집권과정
김대중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는 그가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이 제 12대 총선에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 1야당으로 부상한 데서 잘 나타났다. 그는 이에 힘입어 대통령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자 군사정권은 대통령직선제 수용과 그의 사면복권을 뼈대로 한 이른바 6 · 29선언으로 후퇴했다. 비로소 사면복권된 그는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제 1야당인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자격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 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독자 출마로 방향을 돌려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영삼후보와 3파전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당초부터 없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 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자 그는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일시 사퇴했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이듬해(1988년) 4월에 실시된 제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 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는 다시 평화민주당총재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1990년 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의 '3당합당' 은 정국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호남 고립화 전략으로 요약되는 이 사태는 그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는 3당합당으로 출범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약칭 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해 1991년 4월 재야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 준비위원회(약칭 신민연)와 통합해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김영삼의 3당합당에 반대해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과 합당했다.
1992년 12월 18일 그는 제 14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해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호남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의원직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는 그의 지지자들에게나 반대자들에게나 충격적이고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해 연구활동을 하다 6개월 만에 귀국했으며,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후 아태평화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1995년 6 · 27지방선거 과정에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7월에는 정계은퇴를 번복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해 이를 기정사실화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시 빗발치는 비난을 받았으나 이를 애써 무시하며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 1야당의 지위를 굳히자 그는 오직 제 15대 대통령선거를 향해 질주했으며, 1997년 11월 충청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총재와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두 당의 단일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 1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여권후보의 분열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외환위기를 등에 업고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평가
김대중대통령의 당선은 건국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1998년 2월 25일 제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자유민주연합과 공동정부를 구성한 그는 '국민의 정부' 를 표방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과정에서 공언한 '준비된 대통령' 답게 과감한 경제개혁에 착수해 지난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한편, 기존의 완강한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이른바 '햇볕정책' 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견지함으로써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는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 을 발표한 데 이어, 2000년 6월 13 ~ 15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 · 15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또한 한국 최초의 노벨 평화상수상자로서 국위를 선양했다. 하지만 김대중대통령은 임기 말 두 아들과 측근의 비리로 도덕성에 타격을 받아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고 소수정권의 한계로 인해 정치개혁 역시 지지부진했다. 또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노동조건은 악화되었으며, 아울러 지역감정과 지역분열을 해소하지 못했고, 국민적 동의 없이 대북송금을 추진해 대북관계에서 거둔 중요한 업적의 빛이 바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일관되게 추진한 햇볕정책은 남북관계에 극적인 진전을 가져와 금강산관광이 가능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김대중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설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 국민기초생활법 제정, 여성부 신설, 정보통신(IT)산업 기반정착 등 인권과 복지분야에서 개선을 이룩해냈으며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민주당에 대통령후보 국민경선제를 도입해 젊고 개혁적인 정치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6선 의원을 역임한 김대중대통령은 정치활동 외에 ‘행동하는 양심으로’, ‘대중경제론’, ‘평화를 위하여’, ‘민족의 내일을 생각하며’, ‘공화국연합제’,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나의 길 나의 사상’, ‘후광 김대중대전집(전 15권)’, ‘21세기 시민경제이야기’ 등 수많은 저서를 냈으며, 1992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에서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노무현대통령의 참여정부
1946. 9. 1 경남 김해/ 인권변호사 · 정치가
노무현대통령과 영부인 봉하마을 귀향
제 16대 대통령으로서, 건국 이후 첫 한글 세대 대통령이다.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하며 양심수 · 노동자의 인권옹호와 권익신장을 위해 헌신했으며, 대한 민주주의의 분수령인 6월민주화운동(1987년)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했다. 42세 때 정계에 입문한 뒤 민주민족세력의 정치적 대변자, 노동자 · 농민 · 도시영세민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옹호자, 군사독재의 유산인 영 · 호남 간 지역대립 극복을 위한 동서화합의 전도사를 자임하며 남다른 정치 역정을 걸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대한 사회의 비주류非主流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극우 · 보수 기득권세력의 집요한 반대를 물리치고 21세기의 첫 대통령 선거(2002년)에서 승리해 대한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다.
․ 성장기와 정치 입문
노무현은 8 · 15해방 이듬해에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화마을에서 빈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뼈저린 가난은 향학열을 자극하는 한편 사회적 불평등에 일찌감치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가정교육을 통해 불의에 대한 저항감을 물려받았다. 입학금이 없어 외상 입학한 중학교 1학년 말, 제 4대 정 · 부통령선거(3 · 15부정선거, 1960년)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대회가 열리자 그는 백지동맹을 선동하다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한 해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쳤으며, 지방 명문이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장학생으로 마지막 학업을 마쳤다. 이후 농업협동조합 입사시험에 낙방하고 한 어망제조업체에 취직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해 곧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고시준비생시절 사상범 권오석의 딸 권양숙과 결혼(1973년)했으며, 197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1977년 대전지방법원판사로 발령받았으나 이듬해에 법복을 벗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해 세무 · 회계 전문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1981년 전두환정권의 대대적인 반정부세력 소탕작전에 따라 부산지역의 민주인사 22명이 무더기로 구속된 이른바 부림사건釜林事件은 노무현이라는 열정적인 인권변호사의 출현을 알렸다. 약 3개월간의 구금과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학생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치열한 시대정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동료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지적하고 군사독재정권의 전가의 보도인 국가보안법에 대한 재평가를 재판부에 요구했다.
이후 재야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그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등의 주요 시국 · 노동사건 변론과 부산공해문제연구소이사(1984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활동(1985년)을 통해 용기있고 신망받는 재야지도자로 성장했으며, 자신의 변호사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어(1985년) 노동자들의 권익보호와 노동운동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 6월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같은 해 8월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평화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된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사건을 수습하다 제 3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여론의 강한 반발에 힘입어 20여 일만에 풀려났으나, 변호사 업무정지처분이라는 정치보복을 당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대중적 지도자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 12 · 12사태(1979년)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후보의 당선으로 귀착된 제 13대 대통령선거는, 전국의 거리를 뜨겁게 달구었던 6월민주화운동은 물론 이 운동의 야전사령관 격이었던 그에게도 찬물을 끼얹었다.
이듬해(1988년) 4월 그는 김영삼 통일민주당총재의 권유로 제 13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박해받는 노동자 · 농민 · 도시영세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의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다른 정치인들이 낙선을 우려해 맞대결을 기피하던 신군부 실세 허삼수 민정당후보의 대항마를 자청해 부산 동구에 출마, 승리함으로써 화려한 정계 입문의식을 치렀다. 이어 같은 해 11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국회 제 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경호실장, 이종원 전 법무장관,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이들의 습관성 '기억상실증'과 위증僞證 · 발뺌에 쐐기를 박으며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어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 불굴의 정치 역정
그러나 국민적 각광을 받는 이른바 '청문회 스타' 가 된 그에게 보수적인 정치 · 언론 풍토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옹호하며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1987년 12월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행한 연설)’ 고 한 발언으로 언론의 포화를 맞은 그는 1989년 초 국회 5공비리 · 광주특위 증인 출석을 둘러싼 정부 · 여당의 집요한 방해책동에 항의해 의원직사퇴서를 냈다가 이를 다시 거둬들였다.
1990년 1월 노태우대통령의 집권 민정당, 김영삼의 제 2야당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제 3야당 신민주공화당 간의 이른바 '3당합당' 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민주화국면을 일거에 뒤집고 국민을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2개의 국민' 으로 갈라놓았다. 그는 이를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부산 · 경남의 정치적맹주인 김영삼과 결별했다. 그는 3당합당을 거부한 일단의 통일민주당의원들과 함께 소수야당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후 1991년 지방의회선거에서 야권이 참패하자 제 1야당인 신민주연합당(평민당의 후신)과의 통합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민주당의 대변인과 부총재로 활약했으며, 1992년 제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허삼수 민자당후보와 재대결했으나 강한 지역감정에 밀려 재선에 실패했다. 그의 패배는 1995년 부산시장선거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
그의 좌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 14대 대통령선거(1992년)에서 김영삼 집권 민자당 후보에게 패한 뒤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이 지방의회선거 직후인 1995년 9월 정계에 복귀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그는 이를 야권 분열로 규정하고 김대중과 결별했다. 보스 중심의 줄서기와 이합집산을 거부한 결과 그는 이듬해 제 15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이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해 풀뿌리민주주의를 본격 연구하며 자신의 지방분권 철학을 다듬었다. 제 15대 대통령선거(1997년)를 앞두고 자신이 속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구성원들의 의견이 엇갈리자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해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 를 이끌었다.
이듬해 서울 종로 보궐선거를 통해 6년 만에 원내 입성에 성공했으며, 평생의 꿈인 동서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제 16대 총선(2000년)에서 부산 북 - 강서 을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를 계기로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이 결성되었다. 이후 그는 해양수산부 장관(2000년 8월 ~ 2001년 3월)을 역임하며 행정가로서 수완을 발휘한 뒤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집권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정치권에 복귀해 제 16대 대통령선거 후보경선에 나섰다.
․ 집권과정
2001년 9월 그는 집권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출마를 선언했다. 자금도 계파도 조직도 없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 이라는 대중적 평판뿐이었다. 게다가 민주당주류인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이른바 '이인제 대세론' 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민주당이 당 쇄신안으로 내놓은 대통령후보 국민참여경선제는 그에게 절호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대한 정치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국민참여경선제는 당원 외에도 일반 국민이 집권당의 대통령후보 선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지금까지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국민을 정치의 장으로 불러모았다. 7만 명 규모의 선거인단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일반선거인단 참여를 신청한 국민이 무려 200만 명을 웃돌 정도로 이 제도는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3월 ~ 4월 경선후보 7명이 출마한 가운데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 · 도에서 실시된 49일간의 경선 장정 끝에 그는 무려 72. 2%의 높은 지지율로 당당히 집권당후보가 되었다. 특히 영남 출신인 그의 광주 경선 1위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며 동서통합의 가능성을 알렸다. 이후 이른바 ‘노풍盧風’ 은 대선정국을 이해하는 핵심어가 되었다. 한편 야당 한나라당도 5월 초 국민경선제로 이회창을 대통령 선거후보로 확정했다.
그러나 경선기간 중 60%까지 치솟았던 그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은 경선 직후 '민주 대연합론' 을 내세운 그의 김영삼 방문을 계기로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김대중대통령의 두 아들 비리 관련 구속, 6월 대한 국가대표축구팀의 월드컵 4강 진출 열기에 힘입은 정몽준 대안론의 부상, 민주당의 잇달은 6월 지방의회 선거 참패, 8월 재보궐선거 참패로 20%대까지 떨어졌다. 이에 따라 그는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상임고문을 중심으로 한 당내 반대세력의 집요한 재경선 · 후보 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또한 당권파는 당권파대로 그의 대안으로 정몽준의원을 내세우기 위해 신당 창당도 불사하겠다고 그를 압박했다. 이어 9월 중순 정몽준 의원의 대통령선거 출마선언을 계기로 그는 후보단일화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그 사이에 여론조사 지지율은 3위로 떨어졌다.
11월 초 그는 정몽준 국민통합21후보에게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잇달아 제의하면서 대역전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11월 중순 정몽준후보와 '정책중심의 텔레비전토론 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방식의 후보단일화 원칙에 전격 합의한 데 이어 여론조사 설문내용을 둘러싸고 양당 간의 단일화협상이 난항을 겪자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전격 수용했으며, 11월 말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승리했다. 그 결과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이회창 한나라당후보를 단숨에 앞질러 선거 막판까지 이를 유지했다. 대통령선거 전 날 저녁 정몽준 국민통합21대표의 갑작스러운 지지철회도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마침내 12월 그는 민주당후보 경선 승리, 후보직 사퇴 위기, 야권 후보단일화를 통한 극적 반전 끝에 유효표의 48. 9%를 얻어 46. 6% 득표율에 그친 이회창후보를 누르고 제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은 많은 국민들에게 건국 이래 50여 년 간 이어온 보수독점정치에 대한 국민참여형 새 정치의 승리, 사대외교에 대한 자주외교의 승리, 기득권세력에 대한 서민대중의 승리, 흑색선전 · 폭로전에 대한 정책선거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7만 명에 이르는 '노사모' 의 자원봉사, 미디어 · 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표상되는 국민의 자발적후원금 등 그가 선보인 선거운동은 자금과 조직, 지역주의라는 낡은 방식에 의존한 이회창후보의 선거운동과 크게 대비되었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했다.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 이후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과 계속 갈등을 빚어왔는데, 두 정당은 3월 9일 측근비리, 경제파탄, 선거법 위반 등의 사유로 대통령탄핵소추안을 제출했다. 결국 3월 12일 열린우리당의 물리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그러자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촛불시위와 시민단체들의 탄핵철회운동이 거세지면서 전국이 탄핵사태로 들끓었다. 이러한 전국민적인 분노의 결과는 4월 15일 제 17대 총선에서 나타났다. 노무현을 지지하며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해온 열린우리당이 결국 원내과반수를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또한 5월 14일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어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의 권한을 회복했다. 노무현은 비록 대통령 탄핵사태에 휘말렸지만 결국 대통령의 권한도 회복하고, 그를 지지하는 열린우리당도 압승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결과가 되었다.
저서로 ‘여보 나 좀 도와줘(1994)’,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 - 상식 혹은 희망(2002, 공저)’,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 행정가와 CEO를 위한 8가지 리더십의 원리(2002)’ 등이 있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탄생하였다. 이른바 인터넷선거의 승리라고 한다. 사회이념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다. 개혁과 수구의 상호역할의 대립이다. 요즘에는 중도보수라는 뉴라이트가 등장해서 사회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양극화 문제와 남북통일, 6자회담의 과제 그리고 해결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 대학입시를 비롯한 교육문제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다. 개혁투쟁에 헌신했던 이른바 386세대와 일제시대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보수층과 갈등은 용공과 반공으로 변질되었다가 이제는 보혁갈등으로 대한사회를 왜곡시키고 있다. 이것이 군사독재정권에서 만들어낸 지역감정과 연계되고 이념도 사상도 정책마저도 아닌 지역감정이 대한사회를 주도하고 있다. 보혁갈등, 386세대. 진보와 혁신의 도도한 물결이 한국사를 관류한 한국인의 명제일진데 영호남의 지역을 담보로 하는 동서분열의 지역분할정치, 기득권 수호의 보수세력의 발호로 진보와 개혁이 기반을 정착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 기저에는 영호남인들의 근본적인 의식구조가 깔려있다. 영호남의 정치적 사회적 인식의 차이가 크다. 한 예로 종교 신도조사(2006. 5월 지역 총인구 대비 신자 비율 조사)에서 호남(광주, 전남, 전북)은 개신교가 23%(천주교는 10%, 불교 14% 내외)고, 영남(대구, 부산, 경남, 경북)은 불교가 38%(개신교는 10%, 천주교는 7% 내외)였다. 3권분립, 검․ 경의 독립적 위치 확보, 과거사 청산, 교육 개혁, 양극화 해소, 복지정책, 남북통일이 이러한 지역(정치)적 갈등상황에서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더구나 그래 북한이 6자회담을 거부하고 미국과 양자회담을 요구하다가 실현되지 않고 경제적 제재를 하자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여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그러나 자주국방을 전제로 민족통일을 염원하며 북한과는 김대중정권의 햇볕정책을 계승하고 김정일국방위원장과 ‘10․ 26 정상선언’ 을 채택하여 햇볕정책의 실행단계를 천명했다.
◎ 북한의 인민민주의공화국
역대 | 지도자명 | 재위기간 | 역사 개요 |
1대 | 김일성주석 |
AD. 1948년 - 1994년 (46년 간)
| ․ 주체사상, 사회주의 표방 |
2대 |
김정일 국방위원장
| AD. 1994년 - 현재 | ․ 장남 김정일 세습 |
* 북한의 김일성주석(Daum Blog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인용)
본명 김성주 한자명 김일성金日成/ 출생-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1994년 7월 8일 (심장마비) 사망
* Daum Blog 인용
1926~15세 만주 화전현 화성의숙 수학/ 1926~15세 육문중학 입학, 공산청년동맹 가입 /1929~18세 동만지구 공산주의청년동맹 서기/ 1931~20세 중국 공산당 입당/ 1932~21세 중국 공산당 조선인지대 지대장/ 1936~25세 조선광복회 조직, 회장/ 1945~34세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 책임비서/ 1946~35세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36세 북조선 임시인민위 위원장, 인민위 위원장/ 1948~37세 북로당 부위원장/ 1948~37세 1기~9기 대의원/ 1948~37세 내각 수상/ 1949~38세 노동당 중앙위 위원장/ 1950~39세 군사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6~45세 당 중앙위 위원장/ 1966~55세 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총비서/ 1972~61세 사회주의헌법 채택, 국가 주석, 중앙인민위원, 국방위 위원장/ 1994~83세 심장마비로 사망
김일성주석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하리 칠곡(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평양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 ~ 1926년)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 1892년 ~ 1932년)의 3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주석의 전주 김씨 12대조가 전라북도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 김형직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집안의 묘지기였으며,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강반석은 기독교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는 칠골교회의 장로였다.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
북한정권 수립 56주년. 관영 러시아방송은 특집방송에서 남북분단과 6· 25전쟁에 대한 오래된 논란을 정리하는 결정적 비화 하나를 전했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소련군 환영 군중대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게 인상적이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뒷날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이 사진을 변조했다. 뒤에 서 있는 소련군 지도부는 물론 김일성 가슴에 단 소련무공훈장까지 지워 버린 사진을 각종 기록에 게재했다.(Daum Blog 동아일보 자료사진)
소련에서 귀국 후 김일성은 가명을 사용하며 비밀리에 북한 전역을 순회했다. 그가 북한 대중들에게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에서였다.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원과 열성자대회' (1945. 10. 10일 ~ 10. 13일)에 참석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의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12월 17일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 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분국 책임비서로 취임했다. 이어서 1946년 2월 북한에서 임시중앙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에 선임되어 토지개혁 등 여러가지 반제반봉건적 성격을 갖는 개혁들을 추진했다. 이후 1947년 2월 북한주민들의 선거로 결성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수상에 선임되었다. 1949년 6월 남 · 북노동당이 합쳐서 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며, 이때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50년 6 · 25전쟁 당시 내각수상직에 있으면서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인민군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폐허가 된 북한사회의 전후복구건설방향으로 '중공업 우선의 경공업, 농업의 동시발전' 노선을 제창하는 한편 농업의 협동화를 위시해 급격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이 전후 복구건설노선에 대하여 조선노동당 안의 일부세력이 반대하고 이를 소련이 두둔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1956년 8월 발생한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소련의 영향력 배제에도 성공하여 자신을 정점으로 한 유일지도체계 확립의 기반을 닦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일지도체계를 더욱 강화했으며, 그 일환으로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북한 정치체계 전반을 관장할 조선노동당비서국이 신설되자 총비서로 취임했다. 그가 주체사상을 공개적으로 제창하기 시작한 것은 1965년부터였다. 그는 주체사상을 제창하면서 이 사상을 북한사회의 유일사상으로 만들려고 했다.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는 조선노동당 안에서 반대도 있었으나 1967년 5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의 사상투쟁을 계기로 반대세력은 자취를 감추었다. 주체사상의 현실에 대한 적용과 이론의 체계화가 본격화되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에서 그의 유일지도체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72년 새로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에 의해 신설된 국가 주석에 취임했다. 주석은 구 헌법의 내각수상보다 훨씬 강력한 지위와 역할을 갖는 직책으로 국가의 수반이며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직책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주석제도의 신설은 당시 체계화되기 시작한 주체사상의 '혁명적 수령관' 을 현실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령으로 접어드는 1980년대에 들어서자 공개적으로 아들인 김정일金正日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일환으로 1980년 10월 열린 조선노동당 제 6차 대회에서는 김정일의 공개적인 등장과 함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수’ 할 것이 강조되었다. 동 대회 이후 국내부문의 지도를 점차적으로 김정일에게 맡기면서 자신은 통일·외교 분야를 주로 관장하는 형식으로 권력승계 작업을 추진해갔다. 그 결과 1980년대 말에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를 위한 준비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는 통일·외교 분야에서도 김정일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또한 1991년 12월 24일 당 전원회의를 열어 김정일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했다. 1992년 4월 13일 생일을 앞두고 그는 대원수(大元帥)에 추대되었으며, 21일 김정일을 원수로 추대하여 본격적인 권력승계를 진행시켰다. 1994년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사망했는데, 사인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으나 북한측은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로 공식 발표했다.
* 권력을 이어받은 김정일국방위원장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밀영 또는 러시아 ․ 만주 국경지대 출생/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
김정일국방위원장 6 ․ 15남북공동성명 금수산 김일성주석 기념궁전
* Daum Blog 인용
북한의 최고지도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중앙인민위원회 산하 국방위원회 제 1부위원장 등의 직책을 거쳐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을 맞아 북한군 원수로 최고지휘권을 인수한 데 이어,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후 '최고 지도자' 로 추대되었고,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했다. 1998년 9월 '나라의 정치 · 군사 · 경제 역량의 총체를 통솔 · 지휘하는 국가 최고 직책' 으로 규정된 국방위원장에 재 추대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항일무장투쟁 당시인 1942년 2월 16일 항일유격대를 지휘한 김일성과 유격대원 김정숙金貞淑 사이에서 태어났다. 8 · 15해방 후 부모를 따라 입국했으며, 1948년 평양의 남산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6 · 25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삼석인민학교를 거쳐 6 · 25전쟁 후에 평양 제 4인민학교를 졸업했다.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시절 이 학교의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위원장은 교사)으로 활동했다. 남산고급중학 졸업 후 당시 외국유학의 풍조 속에서 국내 대학으로 진학을 선택하여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64년 3월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 이었다. 대학 졸업 후 곧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배속되어 주로 당의 조직 · 선전 부문의 일을 담당했다.
조선노동당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 · 지도하고 1975년에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 을 발기하는 등 새로운 대중운동을 주도하면서 당내의 기반을 넓히는 한편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73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5기 7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 비서로 선임되었으며, 이듬해인 1974년 2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조선노동당의 실권자로서 북한사회 전반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후계자로서의 김정일의 위상이 공적으로 확인된 것은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 6차 당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당내 서열은 4위였지만 김일성을 빼고는 유일하게 당내 3대 권력기구라 할 수 있는 정치국(상무위원회 상무위원) · 비서국(비서) · 군사위원회(군사위원)에 모두 참여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2인자의 자리를 굳혔다.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가 끝난 직후 북한의 언론 · 출판물들에 의해서 '영광스러운 당 중앙' 이라는 익명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곧 북한의 언론 · 출판물들이 그를 '친애하는 지도자' 로 호칭함으로써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공식화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권력승계작업이 본격화되자 자신의 활동범위를 더욱 확대시켜나갔다. 이때부터 김일성을 대신해서 많은 산업현장과 교육현장, 군대 등을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발언은 북한사회에서 김일성의 발언 못지 않은 무게를 지닌 교시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1980년 그의 활동은 김일성의 역할을 승계하면서 모든 분야에 걸쳐서 나타났으나 조선노동당에서와는 달리 정부기관에서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고 있었다. 이에 그의 모든 기관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기 위해 1990년 5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 9기 1차 회의에서 그는 북한의 최고지도기관이라고 하는 중앙인민위원회 산하 국방위원회 제 1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91년 12월 24일 조선노동당 제 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되었다. 또한 1992년 4월 15일 김일성은 자신의 80회 생일을 맞아 ‘우리는 이미 김정일에 의해 모든 일이 운영되고 있다’ 고 밝혔으며, 같은 달 21일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가 공동명의로 김정일에게 원수元帥칭호를 수여했다. 이로써 사실상의 권력승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가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와 체계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주체사상이 북한사회의 유일사상으로 제시되는 1960년대 말부터 이미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작업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 이후에는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체사상에 대하여(1982)’ 를 비롯한 많은 주체사상관련 논문을 낸 것으로 북한은 발표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그만이 주체사상을 해석할 수 있는 배타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북한관계 전문가들은 풀이하고 있다.
김일성주석 사후 3년 3개월 만인 19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의 추대를 받은 형식으로 당 총비서직을 승계함으로써 '김정일시대' 를 연 그는, 잇단 가뭄으로 인한 식량난과 경제정책 실패와 대외적 고립으로 인한 경제난 등의 난제를 수습해야 할 급박한 처지에 놓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최고 지도자' 로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이래 북 · 미관계와 남 · 북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북 · 미관계는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열린 북 · 미 회담에서 북한의 핵개발 포기를 조건으로 대한표준형경수로 지원과 대체에너지 제공을 추진하기 위한 대한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설립 합의와 1995년 3월 KEDO 출범, 1998년 7월 북․ 미 미사일회담 재개 등으로 진전을 보였다. 또한 1994년 7월 8일 사망한 김일성주석 조문을 둘러싸고 남한에서 벌어진 이른바 '조문 파동' 과 당시 김영삼정부의 대북 강경책 등으로 크게 냉각되었던 남북관계도 1998년 2월 출범한 김대중정부의 대북 연착륙 정책, 정경분리 정책과 맞물려 새 국면을 맞이해, 2000년 6월 13 ~ 15일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그 결과로 5개 항의 6 · 15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그는 예술방면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1970년대 초반 ‘피바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의 혁명가극 제작을 주도했다고 하며, 1973년 김정일이 직접 ‘영화예술론’ 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pilogue
선기옥형을 복원하는 사람들
◎고조선의 천기天氣 사적史蹟자료
* 퇴계(이황)가 바라본 우주, 500년만에 되살리다 (충북대 이용삼교수, 도산서원‘혼상 - 선기옥형’복원과정 발표, 동아일보 2007. 2. 2)
․ 선생께서 제자 이덕홍에게 명命해‘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는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별자리를 관찰하게 하였다. 퇴계 이황(1501년 ∼1570년)의 족적을 담은‘퇴계선생언행록’에 나오는 이 대목은 초야에 묻힌 선비들이 천문현상을 연구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주요기록 가운데 하나다. 한기 8758년(AD. 1561년) 낙향해 줄곧 학문에만 전념하던 퇴계는 왜 별자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 1000원권에 등장하는 도산서원에서 보관해 온 퇴계의‘혼상(渾象)’이 최근 복원됐다. 혼상이란 둥근 구면에 별자리의 위치를 그려 넣은 천문연구 장치. 시간에 따라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지는 별의 운행을 보여 준다.
․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 1467개 별자리 담은 현대판 천체투영기
조선시대, 간재 이덕홍은 퇴계(이황)의 제자 중 치밀하고 꼼꼼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도 그가 그린‘구갑선도’를 본떠 만든 것이다. 스승의 명을 받자마자 간재는 곧바로 숲에서 소나무와 물푸레나무, 대나무를 구해 왔다. 혼상을 지지할 구조물로 쓸 재료다. 간재는 구해 온 나무들을 지름 49cm의‘구球’형태로 틀을 짰다. 방향을 새겨 넣은 지평환만 있을 뿐 천체의 남중고도를 측정하는 자오환도 없을 정도로 간단한 형태였다. 틀이 완성되자 간재는 조심스럽게 닥종이(한지)에 별자리를 그려 넣었다. 한양에서 입수한‘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별자리를 사용했다. 이 천문도는 조선 태조 때인 한기 8592년(AD. 1395년) 고구려의‘돌 천문도’의 탁본을 가지고 만든 별자리 그림으로, 별 1467개와 별자리 292개를 담고 있다. 혼상의 별자리는 하늘 밖에서 천체를 바라본 형태다. 땅에서 하늘을 바라본 모습을 그려 넣은 천문도의 별자리와 좌우가 바뀐 모습이다.
․ 천문의 이치를 공부한 종합 교양인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얼마나 높은 천문지식을 갖췄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대다수 유학자는 천문을 깊이 연구하는 것을‘소도小道’라 해서 무시했다. 그러나 4서3경의 하나로 선비들의 필독서였던‘서경’은“순임금이 재위하자마자‘선기옥형’을 만들어 해와 달, 오행성을 관찰했다”는 식으로 천문장치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문중양 교수는“‘소도’ 역시 선비들이 추구하는‘도道’가운데 하나로 자연의 도를 담고 있다”며“서경에 관심이 많은 학자들은 반드시 천문을 공부했다”고 설명한다. 한국국학진흥원 박원재 박물관장도“당시 종합 교양인이었던 유학자들의 관심사에는 천문학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라며“‘우주와 하나 되는 것天人合一’이 목표였던 유학자에게 별
자리연구는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황 외에 서경덕, 서기, 송시열, 홍대용과
다른 명망 높은 학자들도 제각기 혼상과 혼천의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3 - 4월 경 일반에 공개
퇴계의 혼상을 복원하는 데 5개월이 걸렸다. 이 번 복원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또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제작한 혼상을 직접 재현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자문역을 맡았던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이용삼교수는 지난 달 19일 서울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열린 소남천문학사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복원과정을 소개했다. 복원팀은 원형과 똑같이 목재와 대나무로 지평환과‘구球’형태의 구조물을 만들고 한지 위에 별자리를 그려 넣었다. 혼상에 그려 넣은 별자리 역시 당시 사용된‘천상열차분야지도’에 그려진 별자리를 구면에 투영해 위치를 잡았다. 아쉬운 점은 혼상의 정확한 제작시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퇴계의 연보를 살펴보면 한기 8756년(AD. 1559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말년인 한기 8767년(AD. 1570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전문가들은 현존하는 혼상이 한기 8754년 - 8764년(AD. 1557∼156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혼상과 혼천의, 선기옥형, 혼의 등 문헌에서 발견되는 명칭들도 혼용되고 있다. 이 번 복원작업을 처음 계획한 안동 문화방송 조현상 PD는“음력 2월 열리는 퇴계 향사享祀(제사祭祀)일에 맞춰 복원한 혼상을 도산서원에 기증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맥족 이동로 고려 농은 선기옥형 태양새 3족오
갑골문자 천부경 * Daum Blog 인용
* 2006년 6월 초 예년에 없었던 황사가 들이닥쳤다. 예년에는 봄철에 몇 번씩 겪는 연례행사였는데, 올해는 평년처럼 넘어갔으므로 안심하고 있던 때 - 어느 때 보다 더 극심한 황사가 몰아닥쳤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이 희뿌연 먼지에 휩싸였다.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시민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더구나 봄철 나들이가 절정이었던 일요일이어서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기상대에서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라서 당황했고 기상대책임자가 방송으로 ‘기상대 관측의 한계, 갑작스러운 일기 변화 그리고 최신 장비 도입과 중국과 긴밀한 협조’ 를 내세우며 사과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상이변에 대한 자연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환경의 변화를 환경학자들을 내세워 결론을 맺고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열악한 장비의 한계로 몰아 최신 장비 구입이 시급하다는 타령이 기상대의 한계다. 기상대의 결론을 수용한다 해도 정확한 예보를 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앉아서 당하는 것을 서서 당하는 수준일 뿐.
◎ 천부경天符經
* 81자字로 된 경전經典이다. 민족경전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기호나 부적符籍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주역의 수리학자는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고 한다. 8괘掛, 역학易學, 5행行의 심오한 학문 없이 풀이할 수 없다. 아직 통일된 해석이 없다. 단, 천1 天一, 지2 地二, 인3 人三의 해석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신사기神祀紀' 가 이미 해설한 바 있는데 이 또한 동양고전의 상식적 해설이다. (한단고기, 임승국)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이니 析三極無盡本 석삼극 무진본이고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이라 一積十鉅無櫃化三 일적십거 무궤화삼이니라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이니 大三合六生七八九 대삼합육 생칠팔구하고 運三四成環五七 운삼사성 환오칠하니 一妙衍萬往萬來 일묘연 만왕만래라 用變不動本 용변 부동본이요 本心本太陽 본심 본태양이니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할지니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이니라
* 김백호의 천부경 해설(2007년 9월 중앙일보)
‘천부경天符經’은 오묘하다. 그리고 내용도 짧다. 81자字의 한자漢字가 전부다. 그래서 간결함 뒤에 흐르는 시적인 여운, 그 울림도 크다.‘천부경’의 유래는 안개 속에 놓여 있다. 선군시대에 녹도문(鹿圖文,·배달국에서 만든 고대 문자로 갑골문자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으로 기록돼 우리 민족 대대로 내려오는 경經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내용은 결코 간단치 않다. 불교에선 270자의‘반야심경’안에 부처의 뜻이 모두 담겼다고 한다. 81자의‘천부경’안에도 그렇게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다.‘천부경’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이란 구절로 시작해‘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이란
구절로 끝을 맺는다. 시작과 끝이 하나란 얘기다.‘선과 악, 양변을 여의라’는 부처님 말
씀도 생각나고,‘나는 알파(시작)요, 오메가(끝)’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최근‘천부경’의 명치를 찌르는 해설서를 만났다. 유儒 ․ 불佛 ․·선仙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김백호(단일문화원 원장, www.danil.or.kr)씨가 풀어낸‘천부경(심거 출판)’이다. 그래서 13일 경기도 일산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한 때 그는 출가자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총림의 큰스님으로부터‘깨달음’에 대한 인가도 받았다. 뜻이 있어 다시 산문山門을 나온 그는 문답에 막힘이 없는‘선지식善知識’이었다. 그에게‘천부경’을 물었다.- 왜‘천부경’인가? 사람들은 세상을 평면적으로 본다. 평면에는 중심과 변두리가 있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 난다. 사람들은 늘 중심을 차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주위를 보라. 다 들 그렇게 산다. 그런데 세상의 실체는 평면이 아니다. 둥근‘구(球)’다.‘천부경’은 그 얘기를 하고 있다.
-‘구球’라니? 둥근 구에다 까만 점을 하나 찍어 보라. 그게‘나’라는 개체다. 그 옆에 또 하나 점을 찍어 보라. 그렇게 수백, 수천 개의 점을 찍어 보라.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의 점만‘나’ 라고 여기고 살아간다. 그래서 옆의 점은‘남’이 된다. 그게 착각이다.- 착각이라면? 점 하나만‘나’가 아니다. 원구 자체가 바로‘나’다. 그 때는 수백, 수천 개의 점을 찍 어도‘나’가 되는 것이다. 구 자체도 하나의 점이기 때문이다. 개체와 전체는 그렇게 조 화를 이룬다. 이 걸 자각해야 한다. 그 얘기가‘천부경’속에 있다.-‘천부경’의 첫 문장은‘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이다. 무슨 뜻인가? ‘하나는 비롯됨이 없는 하나에서 시작되었다’란 뜻이다. 이‘하나’는 언어와 생각이 있기 전부터 비롯되는‘하나’다. 없다가 생겨난‘하나’가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하 나’다. 만물과 만사의 근원인 이‘하나’를 알면 우주만물을 알게 된다. 그게‘깨달 음’이다.- 어떻게 다섯 글자에 우주의 이치를 담았을까? 굉장한 파워다. 이건 한 마디로 깨달음의 글이다. 진리의 글은 짧으면 짧을수록 더 좋다. 그래서 불교에서도‘선禪’이 나온 것이다. 경전의 수가 많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 둘째 문장이‘析三極無盡本석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천일일지일이인일삼’이 다. 왜‘천· 지· 인’이 나오나? 본래인‘하나’가 하늘, 땅, 사람의 순서로 쪼개졌다는 뜻이다. 그렇게 3극三極으로 쪼개놓아도 근본 다 함은 없다, 즉 본성은‘하나’라는 것이다.- 그‘하나’는 어떤 식으로 존재하나? 있을 때는 한 덩어리로 있고, 없을 때는 한 덩어리로 없다. 그리고 있음의 한 덩어리와 없음의 한 덩어리가 둘이 아니다. 하나다.
- 그럼 없을 때 한 덩어리로 없음을 아는 이는 누구인가? 없는 그 놈이 안다. 그럼 있을 때 한 덩어리로 있음은 누가 아느냐. 있는 그 놈이 안 다.
- 책에는‘3족오’(三足烏, 발이 셋 달린 까마귀, 태양새, 태양의 흑점, 사양의 피닉스Phynics)도 그려 놓았다.‘천부경’과 관련이 있나? 그렇다.‘천부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본 마음은 본래 태양과 같다本心本太陽. 높이 밝히면 사람 마음이 천지와 하나가 된다昻明人中天地一.’ 동이족에게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는‘태양새’였다. 3족오를 보라. 한 몸에 발이 셋 달렸다.‘하나’가 천, 지, 인 의 셋으로 쪼개져도 여전히 한 몸임을 뜻하는 것이다.
- 왜‘태양’인가? 태양은 단순히 밝기만 한 게 아니다. 빛과 함께 에너지도 가지고 있다. 만물을 살릴 수 있는 에너지다. 그래서 고구려의 금동관에 그려놓은 3족오는 단순한 까마귀가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의 실체를 그려 놓은 것이다.
-‘천부경’에는 여러 설이 있다. 선군시대에 녹도문으로 기록됐다는 얘기도 있고, 신라의 최치원이 묘향산 석벽에 전래되던 천부경 전문을 새겨 놓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 걸 근대 에 탁본으로 떴다는 기록도 있다. 어떻게 봐야 하나? 동이족에게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이 선군 때 문자로 기록됐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누가, 언제 썼느냐는 본질이 아니다. 핵심은‘천부경’이 깨친 자의 글이란 사실이다. 크게 깨 치지 않았다면 천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쓸 수가 없는 글이다. 깨친 자리에서 깨친 소리 가 난다. 그리고 그 걸 부대끼는 삶을 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쓸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고조선 때의 종이와 기록이 발굴된다고 해도 결국‘형식’일 뿐이다. 형식에 집착할 필요 는 없다.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Sumer 도시 Iraq유적 마니산 참성단
경주 첨성대 Ur의 Ziggurat Assur의 신전 * Daum Blog 인용
* 첨성대瞻星臺(작가 최홍의 1400년 미스터리 추적)
우리 문화재 중에서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첨성대다. 이 우아한 조형물을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다가 그 구조물을 살펴봐도 용도를 가늠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첨성대의 진실은 무엇일까? 대다수 과학자가 주장하는대로 천문 현상을 관측하기 위한 천문대였을까? 아니라면 실제 용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후손들의 미흡함으로 밝혀내지 못한 의문사일까?
‘첨성대는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메소포타미아 여신女神 섬긴 개인 제단’에서 최홍은 첨성대가 천문대로써는 구조가 너무 불편하고, 3국사기나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이 없으며, 신라왕실과 페르시아 문화가 놀랍게 닮았으며, 첨성대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구라트Zigurat(제단, 피라미트Phyramit는 정상이 뾰쪽하고 지구라트는 평평함)와 닮고, 선덕여왕은 세 명의‘씨내리’를 두고도 후사를 얻지 못하여 다산多産과 성애性愛 상징의 이슈타르
Ishutar(제 1부 제 6화 Sumer편 참조) 여신을 우상으로 삼은 선덕여왕 개인 제단이라고 한다.
첨성대의‘첨瞻’자는‘바라본다와 우럴어본다’의 뜻이 있다. 첨성대를 천문관측기구로 보는 견해는 첨성대를‘별을 바라보는 대臺’로 해석하였는데 우리 민족에게 해와 달 신앙은 있어도 별 신앙은 별로 없다. 칠성신이라 하여 북두칠성을 숭배하기도 하였으나 따로 제단을 만들지는 않았다. 조선시대‘동국여지승람’에‘신라 선덕여왕대에 돌을 다듬어 대를 쌓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그 속이 비어있어 사람이 오르내리며 천문을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첨성대가 천문대로써 역할을 하기에는 매우 불편한 구조다. 첫째, 하늘을 관찰하기에 구조가 불편하다. 둘째, 내부의 형태가 12단까지는 흙과 잡석으로 채워지고 19 - 20단과 25 - 26단은 우물 정井자 형태의 장대석이 걸쳐져있다. 일부러 내부 구조를 사람이 들락거리기 어렵게 하였다. 셋째, 3국사기에 기록이 없다. 3국유사에‘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한 줄의 기록 뿐이다. 넷째, 첨성대를 쌓은 뒤 천문기록이 늘었다는 것은 과장이다. 불교제단설(수미산설須彌山說 - 동양사학자 이용범, 도리천설忉利天說 - 고대사학자 김기홍), 농업신 영성靈性 숭배 박성래설, 규표설圭表說(태양고도측정), 주비산경周脾算經(고대 중국 수학서 상징물) 관련설이 있다. 그러나 규명하려는 의지가 꿰어 맞춘 논리다. 첨성대는 후계자를 두지 못한 선덕여왕이 수메르의 성애性愛와 다산多産의 여신 이슈타르Ishutar(인안나Inanna)를 섬긴 지구라트다. 마니산 참성단과 같은 쓰임새다.
* 마니산 제천대는 천문관측소였다(한겨레신문 2008년 10월 2일 목요일).
한국천문연구원은 대천천문연구원에서‘하늘이 열린 날, 천문을 얘기하다’라는 주제로, 밤 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리던 고대인의 마음과 천문지식을 복원하려는 고천문학 워크셥을 열었다. 토론학자들이 제기한 마니산 참성단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제단의 구조를 보면, 마니산 참성단뿐 아니라 태백산 천제단, 구월산 3성사는 모두 바깥쪽은 원형, 안쪽은 4각형 형태의 독특한 모습인데, 이는‘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아시아 고대인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우주관과 일치한다. 문헌사료로 조선시대 천문연구기관 서운관지에‘특별한 천문현상이 나타날 때 천문학자들이 마니산에 가서 천체를 관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고분의 별자리, 이를 바탕으로 삼은 조선 초기의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면 중국의 별자리와 다르다. 이런 독자적 천문지식의 전통은 고구려가 이어받은 고조선의 천문지식에서 비롯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해설 - 편저자는 첨성대가 제단이라는 논거는 인정하나 정상의 네모 정자틀에 선기옥형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천문을 관찰한 구조물로 파악한다.
지구 온난화로 바닷물에 잠겨가는 태평양의 섬 투발루와 빙하가 녹고있는 북극
서울시청계획도 8괘 4대문명발상지 풍수
* Daum Blog 인용 행정도시계획도
◎ 천기에 관한 신문기사 발췌
* 기상위성 아리랑 3호 - 기상이변으로 기상청 예보관들이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기상청은 ‘100% 정확한 예보는 있을 수 없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라고 항변했다.
지난 (2007년) 1월 29일, 기상청은 이 날 밤부터 새벽까지 1 - 8cm 가량의 눈이 내리겠다고 예보했다. 그러나 0. 3 - 0. 5cm의 눈발이 흩날렸을 뿐이었다. 30일에는 오전에 서해안을 중심으로 약한 황사현상이 있다는 예보를 했다. 황사 발생이 예년 보다 40일이나 빠른 예보였다. 그러나 이 예보도 오보였다. 주말에는 중부와 호남지역에 3 - 10cm의 눈이 내린 뒤 강추위가 닥치리라고 예보했다. 그러나 적설량은 1cm를 넘지 못했다. 기온도 평년기온을 웃돌아 기상청의 예보를 믿고 나들이를 취소했던 시민들의 항의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이처럼 일기예보가 빗나가는 데에 대하여 기상청은 지구온난화와 엘니뇨 등에 의한 이상기온 현상과 서해상공에서 수시로 급변하는 대기 흐름 때문에 일어나는 불가항력적 한계로 설명했다. 실제로 강수 유무 정확도는 27일은 76. 0%, 26일은 64. 0%였다.
남극 세종기지 앞 바다의 빙벽이 지난 50년 동안 1km 가량 사라졌다.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956년 - 1984년에 년 간 6m씩 사라지던 빙하가 1994년 - 2001년에는 년 간 81m씩 사라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북극의 아일랜드에는 빙하가 녹아 새 땅이 형성되었다. 빙하가 녹음으로써 해상수송로가 트여 미국과 소련은 해상로를 선점하려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난 100년 간 지구온도는 평균 0. 6도 상승했고, 남극은 평균 2. 5도 - 2. 6도 올라 기후 변화가 민감하다.
* 뜨거워지는 대한 -올 겨울 한강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얼지 않았다. 30년 뒤 서울 기온은 현재 대구와 비슷할 것이다. 2040년 서울 기온은 평년 보다 1. 9도 높아진다.
* 대한과 세계의 자연재해 피해액 : 1960년 - 1969년, 대한 1조 670억원 / 세계 87조 5000억원. 1996년 - 2005년, 한국 18조 1814억원 / 세계 575조 5000억원
*또 양치기 소년 된 기상청, 2007년 3. 5일자 중앙일보 : 3월 초순의 기온이 평년 보다 높고 3월 중순은 평년과 비슷하겠다(2월 3일 기상청 1개월 예보).
3월 6 - 9일 최저기온은 평년 보다 3 - 6도 낮을 전망이다(3월 5일 기상청 예보). 그러나 하루 새 기온은 15도가 떨어졌다.
2월 22일, 내일 우리나라에 강한 황사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23일 화창하고 맑았다. 황사는 서해안으로 내려가 제주도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1월 26일과 30일에는 서울에 폭설을 예보했지만 쌓인 눈은 없었다.
2월 17일에는 남부지방에 비교적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에 설 귀성객들이 긴장했으나 실제 강수량은 5mm에 불과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선진국들도 기상예보의 정확도는 85% 정도며 우리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 서해안 파도 : 2007. 3. 31일 새벽 1시 50분께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인근 바다에서 20여분 간 높이 5 - 7m의 파도가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국지성 해일로 서해안에서 4명이 죽고 상가 200여 채가 파손 유실되었다.
* 황사 : 2007. 4. 1일 봄꽃축제가 한창인 시기에 중국 발 황사가 들이닥쳤다. 농어가는 세척장비로, 학교는 휴교 조치를 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발원지인 중국 북쪽과 몽골 남쪽의 모래바람이 북서풍을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고 했다. 황사는 해마다 늘어가는 추세다. 대한의 피해는 직접적이고 일본은 대한의 1/3 정도며, 황사는 미국 서부지방까지 날아간다. 주변 국가들이 사막화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 나무심기 등 활동을 하고 있으나 속수무책일 뿐이다.
* 온난화 최대 피해지역은 아시아 : 인류가 멸종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유엔 산하 IPCC(유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2007. 4. 6일 발표할‘기후 변화 2차 보고서’에서 일부 과학자들이 이같이 경고했다. 대륙별 피해 상황에서 아시아지역은 히말라야 빙하가 녹아 홍수 위협이 증가하고 물 공급체계가 파괴된다. 델타지역 대도시 범람 가능성이 높다.
* 대한의 온난화 :나주의 배가 충북의 천안에서 재배되고, 제주도의 감귤은 나주에서 재배한다. 남해안의 유자가 강원도에서 재배되며 제주도 바닷 속에는 열대어가 서식한지 오래다.
*세계적 금융그룹 모건 스텐리 보고서 :기후 변화가 향후 세계경제를 주도할 가장 큰 요인, 대한은 산유국이 아닌데도 미국, 호주, 폴란드와 함께 기후 변화에 가장 취약한 그룹. 기후 변화 적응력은 뛰어남. (2007년 10월 동아일보 횡설수설)
* 일기예보는 디지로그로 완성된다, 2007. 4. 6일 동아일보 : 첨단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적 직관과 경험. 슈퍼컴 예보, 디지털 예보. 일기예보의 정확도에 대한 기대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첨단기술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아날로그 요소들이 일기예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데이터와 경험의 충돌, 슈퍼컴의 서로 다른 데이터, 관측 결과 해석 등등
* 천기를 읽는 자者 세계를 경영한다.‘날씨가 지배한다’의 저자 도이치의 프리트헬름 슈바르츠는 세계 경제활동의 80% 이상이 날씨의 영향을 받으며 그 규모는 약 25조 1870억 달러(2경 3527조 1767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대한 기온 상승으로 인한 피해 규모 세계 최대, 5년 간 27조 9800억원. 태풍 비중 건 수 8%이지만 재해액은 64%.
새야 새야 파랑새야 한웅시대 군신軍神 민족경전 천부경 천체운행을 관측한
동학농민혁명도 치우천왕 캐릭터 * Daum Blog 인용 선기옥형(혼천의)
*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 천문을 연구하고 기록한 사례가 3국사기와 3국유사에 240개, 고려사에 5000여 건이며, 조선왕조실록은 무려 2만건의 하늘 관찰연구를 기록하고 있다. 2만 건은 하루 한 번씩 관찰하였다고 가정하면 54년 10개월이 걸린다. 1604년 초신성 기록은 7개월 동안 130회를 기록하였다. 광도 변화 자료로써 케풀러의 관찰과 매우 흡사하여‘케풀러 초신성’은‘조선초신성’이 되어야 한다. 고대사서에 700건의 오로라현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유럽의 기록 보다 많고 체계적이다. 이를 도표화하면 1000년 전부터 오로라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태양흑점 변화를 연구할 수 있다. 이 또한 고려 숙종 10년(1105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는데 이에 비해 서양은 400년 관측역사일 뿐이다. (중앙일보 07. 9. 7 금요)
* 기후변화는 환경문제가 아니라 안보 ․ 경제문제다 : 2008년 7월 일본 홋카이도에서 G8(서방 선진 7개국 + 러시아) 확대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 정상선언문 발표 (John Ashton 영국 기후변화 특별대사 연설)
* 2008년 5월 2일 낮 중국 쓰촨성 대지진 : 32년만에 일어난 진도 8.0의 대지진, 피해액 1500위안 (22조 5000억원), 사망실종 5만여명, 부상자 25 - 30만여명
* 2004년 12월 23일 인도네시아 쓰나미 : 23만여명 사망
* 2008년 9월 미국 아이크태풍 피해, 2008 중국 베이징올림픽 인공강우와 쓰촨성 지진 사망 30여만 명, 미국 토네이도, 해일, 홍수 등
미륵불 충무공 이순신장군 해남 대흥사미륵불
한산도대첩 기록화 * Daum Blog 인용
◎운곡선생과 선기옥형 복원
전남 장성의 고봉高峰(기대승)학술원에서 운곡선생을 필두로 선기옥형을 복원하는 모임이 결성되어 있다. 운곡선생은 선비로 자처하며 기이한 행적을 보이는 사람으로 지난 70년대부터 민족사학자들에게 알려졌는데 평생을 민족역사와 그 복원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선기옥형 복원은 설계도가 완성되었고 모형을 만드는 단계로 파악되었으나 연구 개발이 극비로 공개되지 않아 구체적인 정황은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근래에 정부의 몇몇 부처에서 선기옥형 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가 있고 개발비를 투자하였다는 말도 있으나 확인하지 못하였다. 운곡선생을 면담한 대한방송 최기자의 말로는 운곡선생이 세간의 소문처럼 기이한 인물이 아니고 대한고대사에 정통하고 특히 천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고대사연구와 선기옥형의 복원에 일생을 헌신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선생은 스스로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국자랑, 천지화랑(국자랑들이 출입을 할 때 머리에 천지화 - 무궁화를 꽂았으므로), 선배(선뵈, 선비)’, 고구려의‘조의皁衣’, 백제의‘싸울아비(무절武絶)’, 신라의‘화랑花郞’그리고 조선시대에는‘선비’의 맥脈을 이었다고 말했다.
# 전남 장성 고봉학술원 애일당, 운곡선생의 강의가 끝나고 연못 주변의 정원에서 초청 인사 한담閑談. 다섯 명의 수행자修行者들이 동석하고 불가리아와 바이칼호수를 6개월 가량 탐방하고 돌아온 도깨비기자가 합석했다.
운곡선생 : (도깨비기자를 향해) 불가리아는 부여고, 터키는 돌궐이며, 헝거리가 흉노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서양 고고학계에서는 정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깜깜하고. 특히 바이칼호수가 몽고인들에게는 신성한 곳이지요. 우리가 백두산을 신성시 하는 것과 같 은 이치입니다. 바이칼호수의 알혼섬이 징키스칸의 어머니 탄생지이기 때문에 몽골인들 에게는 성지聖地입니다. 바이칼호수가 지금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어 있지만 원래는 우리 땅입니다. 잊혀진, 잃어버린 고조선의 성지지요.
도깨비기자 : 모택동이 장개석과 싸우면서 러시아에 원군을 요청해서 공산당정권을 세운 뒤 전쟁 승리의 보답으로 러시아에 할양을 해버렸는데 그 곳의 부리야트족(부여족)이나 코 리족(고려족, 가우리족)들은 러시아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특 기할만한 일은, 바이칼은 샤먼의 성지였습니다. 알혼섬에서 만난 샤먼이나 몽골 샤먼이 우리나라 샤먼과 똑같았습니다. 신당神堂의 모습이나 의식儀式까지 판박이로 닮았습니 다. 더구나, 믿기 어려울런지 모르나 저는 알혼섬 샤먼 도가이고오의 신당에서 3족오 형상을 보았습니다.
운곡선생 : 3족오 형상이 향로에서 피어났다는 걸 일반인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 에 보이는 것만을 신봉하는, 과학교육의 맹점입니다. 영성靈性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 양과학의 모순입니다. 그들도 성경의, 예수가 바다를 걸었다거나 소경의 눈을 고쳤다 는 건 기적이나 이적이라고 말하면서 중국 소림사 동굴 바위벽에 새겨진 달마조사의 모 습은 믿지않지요. 사람이 새겼다고 합니다.
도깨비기자 : 수메르 점토판의 해석을 주관하는 세림교수는 수메르 점토판이 지구촌의 역사 를 다시 쓰게 할 문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점토판이 성경의 원본이라는 말입니 다. 성경뿐만이 아니라 지구촌 신화의 원본이라고 했습니다. 수메르 점토판의 신들은 로마 그리스신화의 신들과 같습니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와도 같지요.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의 여자들과 결혼도 합니다.
운곡선생 : 과학적으로 규명하려고 드는 인류사의 한계지요. 고고학에 의존하는 역사학의 한계이기도 하고. 독고빈기자가, 비록 6개월의 장정에서 얻은 것이 - 선기옥형의 형체 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만 소생도 선기옥형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십자군이 예수의 성배를 찾았던 일 보다 더 근본적이고 실체적인 과제입니다.
도깨비기자 : 제가 선기옥형을 찾아나선다니까 회사의 윗분들은 물론이고 아는 사람들이 모 두 이상해진 게 아니냐는 표정이었습니다. 마치 십자군시대 성배를 찾아나선 기사, 그 러니까 돈키호테 취급을 했습니다.
운곡선생 : 독고기자의 선기옥형 탐사는 십자군의 성배 보다는 훨씬 실체적입니다. 선기옥 형을 찾는 일이 실체적 진실이라면 십자군의 성배는 이상 같은 것이지요. 실용성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선기옥형으로 천문을 관찰했습니다.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한 것입니다. 치산치수가 왕도王道의 근본이고 그 바탕에 선기옥형이 있었습니다. 천기현 상을 관찰하고 탐색하여 나라를 다스렸던 것입니다. 고대에는 왕과 제사장을 겸한 것 처럼 천기가 인간의 삶을 좌우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서도 천기가 인간의 삶을 좌우하 는 일은 마찬가지지만 현대인들은 천기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인공위성 몇 개 쏘아놓고 인공강우에 성공했다고 천기를 지배한 것은 아닙니다. 천기는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순 응하고 활용하는 일입니다. 인간의 삶이, 진보와 발전 그리고 문화문명이라는 생활이 이렇게 지구 생태를 파괴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하늘의, 정확히 말하자면 천기의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진, 홍수, 토네이도, 해일, 사막화 그리고 남북극빙하가 해빙되는 것 들이 천재입니다.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천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선기옥형을 복원하 려는 의미입니다.
도깨비기자 :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연구라고 하기에는 쑥스럽습니다만, 선기옥형이 고 려 태조 왕건에게까지는 계승되었습니다. 도선국사가 전승한 것입니다. 그런데 몽고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사라져버렸습니다. 몽고의 침입으로 서경(평양)이 불탈 때 선기옥 형을 모신 소도(신전)가 타버렸으며 대신녀와 신녀들이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고 그 난 리 때 선기옥형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왕의 이름에 충성 충자 돌림이 되고는 고려는 혼란기였습니다. 선기옥형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요. 그 혼란상을 이용한 이성계가 왕권 찬탈을 도모했지만 이성계도, 백두산에서부터 지리 산까지 천하의 산천을 다 뒤졌습니다만 선기옥형의 행방은 묘연하였습니다. 국사 무학 도 이성계처럼 전국 산천을 다 돌아다녔지만 선기옥형을 전승하지 못했습니다. 왕권신 수설로 백성들에게 왕조의 당위성을 정립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용비어천가가 등장했습니다.
운곡선생 : 고려 이후로 우리나라의 강역은, 그러니까 조선시대에서 우리나라의 강역이 고조선 강역의 1/100로 고착되었습니다. 고려시대말기는 원나라에 복속되었지만 중국 동북부와 만주가 우리나라 영토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영토의 대략 10배 정도의 땅입 니다. 공민왕은, 비록 노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지만 왕의 이름에서 충성 충자를 지 해버렸습니다. 중국이, 명나라나 청나라가 바래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렇게 선을 그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그 드넓은 중국 동북부와 만주, 몽골의 땅은 주인이 없었습니다. 물론 소수민족들이 할거하고는 있었지만 국가 형태가 아니라 부족 형태였 습니다. 통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해버린 것이지요. 김종서를 보내 6진을 개척한 것이 함경도입니다. 강역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고착화한 것이지요. 강역이 선기옥형 이나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국토가 졸아들면 나라가 망한 일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진리입니다. 몽골이 강성해지자 우리나라는 영토 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고정되어버렸습니다. 몽골의 징기스칸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왕입니다. 징기스칸의 영토는 중앙아시아는 물론 유럽, 인도, 러시 아까지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광대한 강역을 정복했습니다.
도깨비기자 : 선기옥형과 영토의 연관성이 없다고는 합니다만 국력과 정통성의 문제는 연관 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태조 이성계는 선기옥형을 찾고자 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국내 사정 때문인지 선기옥형에 관심을 기우린 왕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가 임진왜란이 터지고 왜란이 그치자 선기옥형이 대두됩니다. 퇴계가 주창을 했습니다. 원형을 찾기 보다는 복원이었습니다. 원형을 찾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만약 퇴계 때 복원이 아니라 원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지금 보다는 더 접근이 쉬었 을 것입니다.
운곡선생 : 고봉선생께서도 선기옥형에 관심을 가졌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접근한 정황은 없습니다. 율곡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데 그 밑바탕에는 임진왜란을 막자는 것만이 아니라 더 크고 넓은 뜻이 있었지요. 작게는 코 앞에 닥친 임진왜란을 막고 넓게는 고조선의 넓은 강역을 재패하였던 천지화랑을 복원하여 국력을 중흥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조의의 부활을 제창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는 이미 조의나 천 지화랑의 맥이 양반으로 나뉘어져버렸습니다. 문반과 무반으로 정착되어버렸는데 더 가 상한 상황은 이들의 세습입니다. 양반, 문반과 무반은 세습귀족으로 전락하였습니다. 10만의 조의를 부활하여 옛 고조선의 강역을 회복하려는 웅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퇴계 나 고봉 그리고 율곡선생은 선기옥형의 원리를 터득한 예지를 지닌 선현들입니다. (독 고기자를 지목하여) 이 번 탐사에서 서양 선기옥형을 보았다지요?
도깨비기자 : 예, 메트로스코피온MeteoroskOpion이라는 스페인의 무어인들이 만들어 사용 했다는 선기옥형 비슷한 기기가 있었지만 우리의 선기옥형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고 흥분했지요. 원형이 아니가 하고요. 왜냐면 헝거리에, 흉노족의 후예인 아틸라라는, 훈족의 - 그러니까 헝거리인의 조상으로 고대 로마를 지배할 정도로 세력 을 떨친 걸출한 왕이 있었기 때문에 기대를 한 것입니다. 아마 우리 고대의 선기옥형이 나 고구려 주몽왕이 만들어 배포한 100개의 모사품 선기옥형을 본뜨지 않았나 생각하 는데 조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천문을 연구한 기기로 생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운곡선생 : 그나저나 느닷없는 황사가 들이닥쳐 피해가 많았다지요?
변처사 : 기상대가 혼이 났습니다. 황사가 들이닥친 날이 마침 봄나들이 마지막 일요일이라 기상청의 오보로 나들이 길에 나섰던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강처사 : 병원에도 환자들이 평소의 네 배가 몰려들었답니다.
동화스님 : 원인은 중국의 동북부 사막인데 기상상태에 따라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미국 서부까지 피해를 입는다고 합니다.
하연스님 : 정부에서나 환경단체들이 중국정부와 연대해서 나무를 심어 사막화를 막으려는 시도를 합니다만 효과가 있을지 ….
운곡선생 : 나무 몇 그루 심어서 사막화가 막아지겠습니까? 나무를 심어 사막화를 막는다는 발상은 어쩌면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지요. 먼저 사막화가 되어가는 원인을 찾고 거기서 해결을 강구해야 합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같은 행태지요. 마치 논두렁에서 터진 물꼬를 막는다면서 터진 구멍만 찾아 헤매는 꼴입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서 농부가 논 에서 김을 매고 있었는데 이웃 선비가 자기네 논의 물꼬를 보러왔다가 논둑에 구멍이 나 물이 새는 걸 보고는 물꼬를 막더랍니다. 헌데 터진 곳을 쫓아다니면서 막는 지라 막으면 터지고 또 막으면 터지는 게 아니겠어요? 보다 못한 농부가 선비에게 물었답니 다. 선비님, 책에서는 물꼬를 어떻게 막으라던가요? 선비가 서슴없이 대답했답니다. 그 야, 물꼬는 근원을 막으랬지요 라고 말입니다. 지금 중국과 우리나라가 사막화에 대처 하는 일이 이와 같잖습니까? 이 또한 서양논리입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면 한약은 병인 을 찾아서 원인 치료를 합니다. 서양의학은 바로 잘라내는 수술을 하지요. 사막화를 방 지한다며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는 발상과 일맥상통하는 생각입니다.
청담선사 : 사막화 방지에 나무를 심는다는 노력은 가상합니다만 인간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하늘의 힘을 빌어야 원천적으로 해결이 될 것입니다.
변처사 : 사막화나 지진 그리고 홍수, 가뭄들이 지구촌의 재앙인 셈인데 어떤 사람들은 지 구촌의 종말을 연계하여 말합니다. 여러 가지 예언서나 성경에도 그렇게 쓰여 있구요.
하연스님 : 이 시대나 다음 세대에서 지구 자체가 전체적으로 파괴되는 일은 없겠지만 부분 적으로 크게 재앙이 닥칠 위험이 있습니다. 지질학자들이 말하는 판구조론에 의한 대륙 판의 충돌지역이 전설적인 아틀란티스대륙처럼 갈아 앉거나 히말라야처럼 치솟을 가능 성 말입니다. 지구에서 몇 개의 대륙이 파괴되는 참변이지요.
기상위성 천상분야열차도 여름철 일기도 천체도
(조선시대) * Daum Blog 인용
강처사 : 가상이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지구는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이 됩니다. 판의 충돌의 여파로 해일이 일어나고 수증기와 가스로 뒤덮인 지구는 곧 햇빛과 햇볕이 차단 되어서 새로운 빙하기로 접어들어 지구 전체가 꽁꽁 얼어붙을 수도 있으니까요. 스티븐 호킹 박사가 행성 개척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사를 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달나라나 화성 같은 별로요.
운곡선생 :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지구가 크게 파괴되어 인류가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되거나 빙하기가 닥쳐 온통 얼어붙는다면 유일한 생존방법은 다른 행성으로 옮겨가는 거지요. 그런데 이 또한 선비의 물꼬와 유사한 발상입니다. 옮기는 일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닙 니다. 문화문명이라고, 개발과 발전이라고 자행되는 발전과 변화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 렇다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를 줄이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일, 세재를 쓰지 않고 물로만 씻어도 98%가 씻어지는데 구지 세재를 사용하는 것은 습 관적 타성이고, 1회용을 줄이는 일, 벽돌 건축이나 거대한 시설을 억제하는 일들이 그 것입니다.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생산하여 남기지 않고, 아끼고 줄여서 절약하고, 공동으 로 사용하고 서로 나누고, 끝없는 경쟁을 중단하는 일들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유엔이 나 국제기구들의 역할이 활성화되어야 할 시대입니다. 그것이 한국의 당면과제인 황사 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류가 현명하다면 황사로부터 시작되는 지구 황폐화를 직시하 고 지구가 살아갈 길을 깨우쳐야 합니다. 괜한 기상대만 욕을 먹었습니다. 과학기재 덩 어리인 기상대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기상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상 위성에 의존해서 데이터를 뽑아 분석하는 일이 고작입니다. 해, 바람, 구름, 비 그것으로 지구 의 천체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자연현상은 태양계의 운행질서인데 인간이 개 발한 몇 가지 자료로 천체 변화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데이터가 부적절해서 결론이 왜 곡되겠지요. 과학기계 관측으로 불가능한 기상변화가 많습니다. 수시로 변화하는 자연 현상을 어떻게 기계가 측정해낼 수 있겠습니까? 마치 인간의 두뇌조직을 측정할 수는 있지만 그 복합적인 기능 즉 연관관계를 그려낼 수 없는 것처럼 한정된 관측이 기상 오보를 부르고 기상대는 장비 탓을 하게 됩니다. 장비 탓이 아니지요.
아라라트산 방주 오로라 페루 나스카 유적 UFO
흔적 * Daum Blog 인용
강처사 : 고대에서는 제정일치로써 지도자가 제사장을 맡아 우주질서를 파악해서 치세에 활용했습니다.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면서 더욱 정밀하게 전문화되었습니다.
운곡선생 : 서양에서는 신탁에 의지하고 동양에서는 심안을 활용하였습니다. 현대 서양학문 은 눈에 보이는 실증적 탐구를 주조로 현미경으로 분석하는 미시적인 과학에 의존하는 데 동양은 동양 자체의 주체적사상을 잃어버리고 서양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만 년을 이어 내려오던 한사상의 맥이 오늘에서 끊겼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많은 선비들 이 심안으로 보고 깨우치려고 하였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선비정신을 계승하였기에 문 무를 겸비하였고 젊은 시절 수련을 통하여 ‘국유현묘지도’ 를 깨우친 분입니다. 신라시 대 최치원선생이 말한 한국의 사상입니다. 현묘지도는 조선시대 동학에까지 명맥을 유 지하다가 오늘날에는 사라져버렸습니다.
# (운곡선생, 다시 강의형태로 들어가) 조선시대는 선비사상을 왜곡시켜 문예에 치우 쳐서 반 쪽 선비를 양성했는데 이순신장군은 정통적인 선비로써 앞날을 예견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는 한국이 국체의 정통성을 잃고 정치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변방정권이 되어버린 불행한 시대였습니다. 고조선으로부터 대한의 정통성으로 보면 조선시대는 중국의 변방정권입니다. 후금의 청 태종이 남한산성의 고려 인조 임금에게 삼전도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형제다, 같이 힘을 모아 한족의 명나라를 치자. 몽골족은 우리의 정통적 형제입니다. 한족은 방계지요.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는 죽음을 각오하고 비통한 어조로 외친 하늘에 대한 상소문 같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생애와 비슷합니다. 백성들의 고난을 짊어진 구세주였지요. 장군이 전사한 명량대첩은 십자가였구요. 이순신장군 이후 오랜 기간 명맥이 끊겼던 선비는 동학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그러나 동학은 제세구민濟世救民이라는 명분 때문에 완벽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지도자들이 주도해서 크게 희생을 치루고 실패하였습니다. 인내천人乃天사상을 내걸면서 근본적으로는 왕권을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려는 혁명적 기본이념의 오류와, 추수기를 기다려서 군량을 확보한 다음에 서울로 진격하려고 했던 전략적 실패에서 동학은 민란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한니발은 로마로 진격하기 위해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4만의 보병과 6천의 기병은 알프스를 넘으면서 사기가 쇄진되었고 그나마 군량이 바닥났습니다. 로마군은 보병 20만이고 기병이 2만, 한니발군의 3, 4배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이 알프스를 넘은 군대라는 상징만으로 감히 도전할 의욕을 잃었습니다. 한니발은 휘하 장군들이 카르타고의 지원군과 보급을 기다리자고 말했을 때, 싸움에 이기면 군량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싸움에 지면 군량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했습니다. 녹두장군이 군량 때문에 추수기를 기다리느라고 망설이는 사이에 정부군이 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일본군대가 개입할 명분을 주었습니다.
한단고기 원본 배달역사 신단실기 3국유사 이지함의 토정비결
(독립군 교재) * Daum Blog 인용
변처사 : 동학 이후에는 선비의 맥이 완전히 끊어졌습니까?
운곡선생 : (웃으며) 여러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돌아보며) 청담선사께 여쭤보시지요.
청담선사 : 그렇습니다. 몇몇 분들이 남아 있으나 모두 세상에 나서기를 꺼려합니다. 명맥이 끊어졌습니다. 몇몇 남아있는 선비들도 산속에 은거하며 개인적인 수신에만 전념할 뿐 세속과는 인연이 끊겼습니다. 설사 그 분들이 세상에 나온다한들 수용이 어렵지요. 더 러는 때가 아니라고들 합니다만 ….
하연스님 : 토정 이지함선생의 정도령 출현 같은 때입니까?
강처사 : 수메르 점토판 해석에서 말하는 3600년 주기의 태양계 12번째 행성이 지구에 접근하는 시기가 1400년 뒤입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다녀간 것이 BC. 200년께였으 니까 서기 3400년 쯤이지요. 한기로는 1만600년 쯤입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신들 과 수메르 점토판에 나타난 신들이 닮았습니다. 닮았다기 보다는 같습니다. 성경의 일 정 부분도 같습니다. 고대 대한의 역사신화의 왕들이 이들 신화와 같습니다. 수메르에 서 말하는 머르둑이라는 3600년 주기의 행성의 신들이 신화에서 말하는 신들이 아닐까 요? 365일 주기의 지구와 3600년 주기의 머르둑은 1년의 개념이 같을 수도 있습니다. 태양계의 행성이기 때문입니다. 머르둑에서 사는 신들은 태양의 1주기 3600년이 한 살 이고, 지구에서 사는 인간은 태양의 1주기 365일이 한 살입니다. 그래서 머르둑에서는 신이나 신화가 되고 지구에서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변처사 : 글쎄요, 그래야 신화시대의 역시적 가설이 설명이 되기는 합니다만 너무 요원한 이야기 아닙니까? 머르둑에서 3600년이 지구에서는 365일이라. 접근이 어렵군요. 허나 고고학적으로 인류역사를 증명하는 한계는 분명합니다. 새로운 문화적 단서가 끊임없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트로이의 발굴, 흑피옥 발견, 요하문명 이전의 문명 발견들 말입니 다. 그러나 일이백년도 아니고 1400년이라면 ….
하연스님 : 인생 팔십이 찰라라면 백년도 천년도 찰라지요. 억겁도 찰라 아닌가요. 천년 세 월이 흐른 뒤에 우리가 다시 만나 여기에 모여 있을 수도 있지요. 그 건 꿈입니다. 이 상입니다. 설사 모인다 하드라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백년 뒤에 천년 뒤에 모일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천년 뒤에 모여 무슨 의미가 있지요? 그리고 백년 뒤나 천년 뒤는 없습니다. 자연입니다. 풀꽃이 스러지는 걸 보았지요? 인생도 풀꽃의 한살이와 같습니 다. 유독 뛰어나다는 인간만 어렵게살고 어렵게 죽습니다. 풀꽃이 스러지는 걸 보면 아 주 자연적입니다. 동믈들도 그렇습니다. 주변의 동물들의 죽음을 보십시오. 자기 죽음을 들어낸 야생동물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야생동물들은 아무도 모르는 데서 혼자 조용히 사라집니다. 시신을 실은 꽃상여도 없고 죽음을 기리는 명정銘旌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만 죽음이 요란스럽고 또 어렵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길들였 다는 가축도 역시 어렵게 죽습니다. 인간의 손길은 마이다스의 황금 손이 아니라 파괴 자의 도구인 셈입니다. 자연 상태의 동믈들은 불꽃이 사그러지듯 그렇게 죽습니다. 어 렵게 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초인생활(超人生活, 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이라는 탐험보고서로 센세이셔널을 일으킨 미국인 탐험가 스 폴딩(Baird T. Spalding)은 티베트의 오지奧地에서 만난 마스터Master(guru, 산스크 리트어語, 영적 스승)들이 2000년을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석가가 부활 이 아니라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수메르 점토판에서 말하는 3600년 주기의 행성 머르 둑과 관련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고고학적 역사논 리는 문화사의 큰 오류입니다. 직접적인 비근한 사례, 전설이었던 트로이의 발굴에서처 럼 말입니다. 역사에서 진화라는 논리가 부정되고 있습니다. 신화, 성경, 수메르 점토판 그리고 초인생활들의 기록에서 역사는 재 조명이 필요합니다. 몇 천 년 전, 우리가 역 사 이전이라고 불렀던 앞선 문명들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문명 보다 더 찬란했다는 증거 들이 고고학적 발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청담선사 : 진화론으로도 창조론으로도 부족하지요? 생명의 탄생은 연기설로도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죽음 또한 그렇습니다. 윤회설은 후대에 낳은 인과응보 때문입니다. 들꽃이나 들풀과 같습니다. 태어나고 스러지는 것은 자연이치입니다. 순리지요. 천당이니 지옥이 니 연옥이니 윤회니 내세니 영세니 하는 것들은 부질없는 호도입니다. 한 떨기 풀꽃이 씨로 인해 싹이 되어 자라 들풀꽃이 되고 꽃을 피우고 씨를 맺고 스러지고 그 씨앗이 다시 흙에 묻혀 싹으로 자라는 것이 윤회입니다.
강처사 : 그렇다면 선기옥형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자연 순리대로 살아가야 한다면 구태어 하늘의 도리를 읽을 필요가 없잖습니까?
운곡선생 : 그래서 더욱 필요합니다. 순리대로 살려면 지금처럼 인공강우를 내리게 한다거 나 지진이나 해일에 속수무책이어서는 안 되니까 말이지요.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과학은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거지요. 과학이 자연재해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 러 인간이 말하는 문화문명이 오히려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류는 종말을 맞게 될른지도 모릅니다. 온난화가 계속되면 남북극이 녹아내리 고, 수면이 상승하면 수증기가 많이 발생하고, 그 수증기는 태양볕을 가리고, 태양볕이 가려지면 동식물이 살아가지 못하게 되어 생태계가 파괴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면 인간 도 파멸이지요. 이렇게 생태계가 악순환되다가 빙하기가 오겠지요. 지구 온난화는 필연 적으로 빙하기를 유도합니다. 인류 종말을 향하고 있는 인류를 구제하는 방안은 선기옥 형 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변처사 : 선기옥형으로, 온난화에 따라오는 빙하기의 지구촌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말씀인 가요?
운곡선생 : 막을 수 없을른지 모릅니다. 이미 온난화가 시작되었고 인류가 문화문명이라고 부르는 시대가 한창 진행되어서 중단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을 상황입니다. 그러나 현대 인류가 지향하는 이 발전은 파멸로 향하는 길이니 대안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늦었는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방안은 단 하나뿐이니 시도해야지요.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릅니 다. 마치 인간이 벌이는 전쟁처럼 말입니다. 전쟁을 보십시오.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합니 까? 생존입니까? 철학입니까? 종교입니까 아니면 이념입니까? 설사 종교나 이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살생의 당위성을 지녔습니까? 이제 막 피어나는 젊은 영혼들이 전쟁이라는 미명으로 수없이 죽어갔습니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종교를 위해, 이 념을 위해, 영토를 위해, 국가를 위해 수많은 젊은 생령들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하나 뿐인 목숨을 희생했습니다. 이게 신이 - 종교가 말하는, 이념이 추 구하는, 국가라는 집합체가 지향하는 목적입니까? 전쟁에서 희생한 그 수많은 목숨들은 천당이나 극락에 가 있는가요? 왜 거기 있지요? 태어나서 세상에 살지 못하고 하늘나 라에 있습니까? 부모형제 이웃을 다 버리고 그 곳 - 설사 천당이라하더라도 행복할까 요? 그리고 그들은 환생합니까? 환생하면 죽기 전에 살았던 부모를 만날 수 있는가요? 형제자매를, 정다웠던 이웃을 다시 볼 수 있는가요? 사랑했던 사람과 다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가요? 이게 신의 뜻입니까? 전쟁을 필요악이라고 하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인류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삶의 패턴을 바꾸지 않으면 인류는 아니 지구촌 은 머지않아 파멸입니다. 앞서 살았던 조상들이 선조들이, 앞 세대가 벌여놓은 재앙으 로 지구 빙하기를 맞아 파멸되어야 하는 후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문명문화입니까 발전적 진화입니까? 아니면 종교, 신의 나라나 신의 뜻입니까? 사회적동물이라는 인간 이 만드는 국가와 정치입니까?
청담선사 : 선기옥형으로 파멸로 향해 치닫고 있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 다. 그러나 분명 인류가 파멸을 자초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 걸 막지 않으면 인류의 앞날은 없습니다. 어떻게 두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 선기옥형은 유일한 방편입니다. 다 른 대안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쟁은 극단적인 사례고 기후변화로 인류는 머지않은 미래에 멸망하게 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빙하기는 필연입니다. 전쟁은 기후 변화에 비하면 국지적입니다.
동화스님 :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가 선기옥형을 만들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가 바로 빙 하기의 예방입니까?
운곡선생 : 소명의식입니다. 국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반 조각이나마, 양반으로 유지되었 던 선비정신과 부덕이 사라지고 홍익인간이라거나 제세이화의 신념도 흔적조차 남지 않 았습니다.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블록화니 또 패권이니 하면서 일체화를 추구하는데 일 체화는 패망의 길입니다. 다양화가 나아갈 길입니다. (운곡선생의 강의가 이어진다.)
세계는 다시 혼란에 들어섰습니다. 연대화의 모색이 그것입니다. 아시다싶이 블록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패권주의가 발단이지요. 패권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국가들의 자구책입니다. 블록화가 가속되리라고 여겨집니다. EU나 동남아국가연합이 한 예입니다. 미국의 패권적 지배에 대한 대안입니다. 민주주의를 대표한 미국이 자유 진영을 이끌었고 공산사회주의를 표방한 소련이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을 선도했다가 소련연방의 해체로 미국이 지구촌의 패권을 행사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이라크 침공 그리고 서브프라임 경제 상황으로 패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는 패권국가로 역할을 하리라 예견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될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말한 역사 발전 동진설이 자연현상의 순리처럼 순환하고 있습니다. 해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냉전시대를 연 프론티어정신의 미국과 소련연방으로 그리고 일본을 거쳐 - 일본도 완벽하게 천기를 붙들지 못했고, 이어 대한으로 다음에는 중국으로 동진설이 건너갑니다. 중국은 한 가지 불안의 요소가 있습니다. 티베트를 비롯한 56개 소수민족의 독립입니다. 영연방이 해체되고 소련연방이 독립한 것처럼 중국도 경제 수준이 어느 선에 도달하고 민주화가 시작되면 중국은 소수민족의 독립 투쟁이 가속화할 것입니다. 중국은 이를 예방하기 위해 한족과 소수민족을 융화시키려고 상호 이주를 장려하는데 융화정책으로 독립의지를 해소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21세기 초반에서 소수민족의 독립에 직면하게 되고 다소 충돌이 예상되지만 소수민족의 독립은 필연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발전적 동진설과 패권주의는 자연 도태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대한, 우리나라의 역사 발전 동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갈 천기가 우리나라에서 머뭇거린다는 말입니다. 일본이 잠깐 반짝하다가 우리나라로 천기가 들어왔는데 일본 보다 더 잠깐 머물렀다가 중국으로 건너갈 참에 중국이 분열되어 천기가 우리나라에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역사 발전 동진현상을 미처 대비하지 못했으므로 잠깐 머므르는데 그치는 걸로 수용했으나 중국이 수용할 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천기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만 지닌다면 오랜 기간 우리나라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선기옥형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세계평화 공존의 시대에 선민의식은 터부입니다만 소생은 한국인을 천부적으로 재질을 타고난 민족으로 상기시키려고 합니다. 흔히 유태인이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선도한다고 합니다. 노벨상의 40%를 유태인이 차지합니다. 그들에게도 선민의식이 있지요. 대단한 민족입니다. 2000년을 유랑하면서도 민족정체성을 잃지 않고 나라를 다시 세운 민족입니다. 유태인은 인위적인 교육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물고기를 잡아주지 않고 잡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탈무드입니다. 그에 비해 대한인은 자질을 타고났습니다. 고조선시대로부터 이어온 민족적 자질일 것입니다. 단지 그 자질을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지도자를 얻지 못했습니다. 타고난 천부적인 자질을 개발하고 계발할 지도자를 얻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고려인삼은 세계가 알아주는 영약입니다. 중국, 미국, 만주에도 인삼이 있습니다. 한 때 징코민이라는 약을 개발하려고 도이치에서 한국의 은행나무잎을 채취해간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은행나무의 원산지고 우리나라 보다 더 많은 은행나무가 있고 인건비가 절반도 되지 않은데도 구지 우리나라 은행잎을 찾은 이유가 있습니다. 또 십여년 전에 우리나라의 공중화장실에서 우리의 오줌을 받아갔습니다. 미국의 인슐린 개발회사입니다. 중국이 대한 배를 개발하려고 우리나라 산 삽목을 가져다가 우리나라와 기후대가 같은 지역에서 가꾸었습니다. 엄청난 물량을 가꾸었는데 실패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똑같은 자연상태에서 길렀는데도 품질이 우리나라 산의 품질과 비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김치의 세계화를 독점하려고 기무치를 개발해서 세계시장에 내놓았으나 실패했습니다. 채소의 품질이 대한산의 감칠맛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도 대한산 채소 씨앗을 가져다가 우리나라와 같은 기후대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인도의 타고르가 일찍이 우리나라를 동방의 빛이라고 한 일은 타고르가 고대역사를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대한의 토양 즉 우리나라의 자연생태계에서 자라는 산물이 우수하듯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우수하리란 것은 자연생태학적인, 인류학적인 믿음입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지요. 대한인은 조선시대 초에 거북선을 건조했고 한글을 창제했으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인쇄한 나라입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또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이미 고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일에 불과합니다. 고조선시대 문화문명의 복원이었습니다. 수메르의 신들이 7일 만에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구약성경의 여호와도 7일 만에 인간을 창조합니다. 수메르의 신들이 태양계 12번째 행성인 마르둑을 오르내리며 지구를 다스렸는데 고조선시대 한인천왕과 한웅천왕 그리고 부여의 해모수도 아침에는 하늘에서 내려와 백성을 돌보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신약성경의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수메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훈족의 헝거리인과 핀란드인, 터어키인, 중국의 묘족 그리고 인도지역의 한 종족도 대한인과 유사합니다. 남아메리카에도 대한인과 유사한 종족이 남아있습니다. 아프리카에도 있고요. 2002년 세계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터어키와 우리가 경기를 하고난 다음 어떤 광경이 벌어진 줄 아십니까? 터어키 선수들이 우리 선수들의 어깨를 얼싸안고 우리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좀 어리둥절했겠지요. 그리고 6 ․ 25 남북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여하여 맺은 혈맹이란 말이거니 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이 형제라고 한 것은 그들의 역사에서 배운 동족이란 뜻입니다. 중국 서부와 만주에는 이집트의 피라밑 같은 거대한 무덤들이 있는데 중국은 이를 발굴하다가 중단했습니다. 공개도 하지 않습니다. 발굴하다 보니 한족의 유물이 아니라 고조선의 유적이었습니다. 수메르인들도 지구라트라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만주의 장군총 같은 모양입니다. 대강 대강 말씀드리느라 체계가 없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은 대한사를 복원하고 옛 조상들의 가치관을 되새기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인류 멸망으로 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천기의 누설은 금기입니다. 선비로써 천기를 누설하고 요절한 이들이 많습니다. 고려의 한림랑 최응은 왕건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백제의 계백장군은 나라를 구하는 명분 앞에 가족을 칼로 베고 자신도 장렬하게 산화하였습니다. 고구려에는 온달장군이 있고, 신라의 관창과 반굴도 같은 맥락이고, 조선의 정도전, 남이장군, 토정이 모두 천기天機 누설漏泄로 자기를 희생한 분들입니다. 반면에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은 천명을 다 했습니다. 명분이 있다고 해도 천기의 누설은 삼가야 합니다. 천기 누설이란 인공 강우처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일시적으로 인공 강우를 만들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가뭄을 극복하는 원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양약이 병을 다스리는 한계 같은 것입니다. 한방은 면역체계로 병을 다스리지만 양약은 잘라내고 꿰매고 파헤칩니다. 순응과 정복의 상반된 원리입니다. 오직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理化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경지에 들어서야 합니다. 우주의 섭리는 하늘의 이치고. 우리는 자연현상을 관찰해서 적응하고 인간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일에 선기옥형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선기옥형을 추적하는 두 가지 방법은 첫째, 실체적 추적으로써 치우천왕의 탁록전쟁복원도에서 시작하여 터키, 헝거리, 불가리아로 해서 바이칼호수를 탐색한 독고빈기자의 추적이고, 문헌상의 추적은 고봉학술원에서 우리들이 진행하는 복원 즉 역사적 추적입니다. 그러나 이직 선기옥형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고조선시대의 원형은 놔두고라도 고구려 태조 주몽왕이 만들어 배포한 100여 개의 모사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겠느냐는 가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구려 주몽왕에게 전승된 선기옥형은 고구려말 연개소문의 왕권 찬탈과 왕권 퇴락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라진 선기옥형을 도선국사가 보존하였다가 고려 태조 왕건으로 이어졌는데 고려 말 혼란기에 다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자취를 감춰버렸고 흔적조차 없습니다. 그러자 3별초가 일어나 그 전통을 이으려고 했으나 항쟁으로 끝나버렸고 조의 조차 영영 퇴락하였습니다. 왕조 쇄락의 동반현상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전국 명산 대찰을 순렵하며 선기옥형의 존재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선기옥형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조의 또한 양반으로 나뉘어져 명맥은 유지하였으나 정신이 소멸되었습니다. 조의가 사라지자 선기옥형이 사라지고 3족오도 사라졌습니다. 현대에서 선기옥형의 의미는 좁게는 천기의 순리를 읽어 치산치수治山治水 하는 것 그리고 넓게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理化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