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기옥형璇璣玉衡을 찾아라
- 천기天機를 아는 자者 세계世界를 경영經營한다
* 교학대한통사 편저자編著者 머리말
- 차례 -
* Prologue
- 사라진 캐릭터Character
* 1부 고조선시대
1화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탁록전쟁복원도涿鹿戰爭復元圖
2화 배달의 나라
3화 신神들의 나라
4화 비단길Silk Road 귀향歸鄕길
* 2부 열국시대
5화 군웅할거群雄割據 백가쟁명百家爭鳴
6화 고구려제국
7화 천지화랑天指花郞의 후예後裔
8화 백제 문화제국
9화 신라 1000년의 영화榮華와 가야
* 3부 10화 남북국시대
* 4부 11화 고려시대와 후3국
* 5부 12화 조선시대
* 6부 13화 대한제국시대
* 7부 14화 대한민국시대
* Epilogue
-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복원復元하는 사람들
* 책 편집 때, 관련 그림은 내용에 포함. 페이지의 좌우에 여백餘白을 두고 Image, 해설(내용 중 어려운 한자어漢字語,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지식, 고증考證되지 않은 참고자료 등) 등 보완자료를 게재, 초고草稿에는 이런 것들이 모두 지문地文에 삽입되어 있음
* 교학대한통사 편저자編著者(역사학자의 연구를 종합한 통사편찬)의 머리말
새야 새야 파랑새야 한웅시대 군신軍神 민족경전 갑골문자 천체운행을 관측한
동학농민혁명도 치우천왕 캐릭터 천부경 선기옥형(혼천의)
* Daum Blog 인용 고려 농은農隱 민안부
* 편저자가 역사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요인은 ‘광개토대왕비’ 조작이었다. 일제가 한일합방을 합리화하려고 광개토대왕비를 조작한 것이 세계제2차대전이 한창일 때였는데 뒤늦게야 우리 역사학계에서 비문 조작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역사에 문외한門外漢인 필자는 논란이 된 비문의 뭐가 문제인지, 비문 조작이 무엇을 뜻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문제의 관련기사를 요약하면, 광개토대왕 비문 가운데서 세월과 풍상에 깎여 보이지 않는, 그래서 글자의 해석이 어려운 몇 개의 문장이 문제였다.
광개토대왕비문
1884년 조작설의 사카와본本/ 1900년 경 나이또본本/ 1907년 샤반느본本
* Daum Blog 인용
‘백잔신라百殘新羅/ 구시속민유래조공舊是屬民由來朝貢/ 왜이신묘년래도倭以辛卯年來渡/ ㅁ파ㅁ破/ 백잔ㅁㅁ신라이위신민百殘ㅁㅁ新羅以爲臣民’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써 조공을 하였는데/ (요즘 조공을 하지 않다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침입하니/ ㅁ(왕)이 이를 물리쳐서/ 백제 ㅁㅁ(왜구) 신라를 신민(신하의 나라)으로 삼았다’ * 괄호 안의 글자는 추정되는 글자임
일제는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깎여버린 이 구절에 석회로 글자를 만들어 넣어 마치 왜가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를 속국으로 경영하였던 것처럼 조작하였다. 일제는 광개토대왕비 조작 문구를 근거로 대한 침략을 정당화 하고 한일합방의 당위성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였다. 이 외에도 일제는 비문에서 ‘석유한국昔有桓國(옛날에 한국이 있었다)’ 의 ‘國’ 자 안을 깎아내고 ‘因’ 자로 고쳐서 석유한인昔有桓因(옛날에 한인이 있었다)’ 으로 만들고는 한인천왕의 존재를 신화로 각색했다. 고조선의 존재를 글자와 함께 깎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래놓고는 선군조선을 곰과 호랑이신화로 만들었다. 또한 이 조작한 역사로 임나(가야)도 고대일본이 지배한 것처럼 역사를 왜곡했다.
조선총독부 청사
초기의 조선총독부는 종전의 통감부 기구를 계승하는 동시에 대한정부소속 관청도 적당히 축소 · 흡수해서 급격한 변화를 피하는 과도적 성격을 띠었다. 대한정부소속 관청 가운데 불필요해진 내각, 표훈원表勳院 : 賞勳局, 회계검사국은 폐지하고 학부學部를 축소하여 내무부의 일국一局으로 하는 외에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는 축소하여 존속시켰다. 통감부의 사법청은 사법부로 개편하고 새로 총무부를 설치했다. 학부의 축소는 경비절약을 내세웠으나 교육정책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민생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치안에 초점을 두었으므로 간소한 기구가 된 것이다. 당시 대한정부는 각 부 차관을 비롯해 중요한 국장 과장은 일본인으로 충원되었기 때문에 총독부체제로 이관되었어도 고위 요직의 일본인 배치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통감부와 대한정부의 중복되는 기구를 정리하여 직원 1434명을 감원하고 인건비 76만 5000원을 삭감했다. 신설된 총독부는 총독관방 외에 총무부,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의 5부를 구성하여 각 부의 장을 장관이라 하고, 각 부에 국을 두어 칙임勅任의 국장을 두었다. 또 부속기관으로는 취조국取調局, 철도국, 통신국, 임시토지조사국, 전매국, 인쇄국을 두었다. 직원의 배치를 보면 총직원 1만 5113명 가운데 5707명이 철도국, 통신국, 임시토지조사국 등 경제수탈기관에 배치되었고, 치안기관에 2600명, 사법기관에 1617명, 중앙행정기관에 974명이 배치되었는데, 여기에 헌병, 경찰 등을 포함하면 사법과 치안 등 탄압기구에 압도적으로 많은 직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즉 총독부는 탄압적 치안위주, 약탈 본위의 무단통치조직으로 한민족에게 전체주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 민족문화의 말살과 동화정책을 강요했다. (Daum Blog 인용)
일제는 일제의 무력 합방과 강압통치에 항거한 3․ 1운동을 겪었다. 창칼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제는 1922년 제 3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또오齊藤實가 문화총독을 자임하며 문화통치라는 허울좋은 구호를 내세워 ‘조선사편수’ 를 획책하였다. 조선사편수회 발족 때 총독의 기념사 요지는 이렇다.
․ 조선 사람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 민족혼과 문화를 상실케 하라
․ 조상과 선인의 무위무능 그리고 역사적 악행을 부각하여 과장함으로써 은영 중 조 선인의 후손이 조상을 폄훼貶毁, 비하卑下하도록 가르쳐라고 했다.
또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지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사편수회는 일제가 대한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식민주의적 한국사상韓國史像을 구축하기 위해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관청이고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 12. 4, 조선총독부 훈령 제 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 · 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로서 사업의 종류와 원칙은 이때 정해졌다.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는 이완용,박영효, 권중현 등이 임명되었다. 실제업무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교수인 쿠로이타黑板勝美가 총괄했으며,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대표자인 이나바稻葉岩吉가 편찬업무를 주관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주요사업은 조선사의 편찬과 이를 위한 조선사료의 수집이었다. 작업순서는 사료수집, 편찬, 기고起稿, 초고草稿 정리 등으로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조선사의 편찬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편년사編年史로 한다.
② 편찬의 시대구분은 3국 이전, 3국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전기 · 중기 · 후 기( -갑오개혁)의 7편으로 한다.
③ 편찬의 문체는 일문日文(일본어문장)으로 한다.
④ 사료의 수집범위는 인멸이 우려되어 갑오개혁 이후까지 한다.
심의과정에서 정만조, 이능화, 어윤적 등이 선군, 기자 등 건국신화는 민족정신 발휘상 중요하며, 3국 이전을 고대조선으로 하고 신화는 첫부분에 넣어야 할 것과, 강문綱文에 우리 글을 넣을 것 등을 제안했으나 일본인 위원들의 독단으로 원안 그대로 결정되었다. 사료 수집은 조선사편찬위원회 직원만으로는 어려워 1923년 5월 도지사회의에서 조선사료보존에 관한 협의회를 열고 '조선사편찬에 따른 고문기 · 문서 등 보존에 관한 건'이라는 훈시를 내려 관민이 일치하여 대대적으로 사료를 수집할 것을 독촉했다. 이것은 일제가 '학술적이고 공평한' 조선사의 편찬과 사료의 인멸 방지를 구실로 한국의 사료를 탈취하여 대한인의 사료 접촉을 막는 작업이었으며, 나아가 이 사료를 식민사관에 입각해 취사선택하여 조선사를 편찬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찬 작업을 더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위원회를 중심으로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새로운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회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쿠로이타, 핫도리服部宇之吉, 나이토內藤虎次郞, 위원에 이마니시今西龍, 이능화, 어윤적, 오다小田省吾 등, 간사에 이나바 등 3명, 수사관에 이나바, 홍희, 후지타藤田亮策 등 3명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병도, 신석호 등이 수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최남선도 1928년 12월 촉탁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의 조선사 편찬작업은 앞서 정해진 골격을 대부분 유지하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시대구분에 있어서 앞서의 제 1 · 2 · 3편을 제 1편 신라통일 이전, 제 2편 신라통일 이후라고 정정하여 모두 6편으로 했다.
둘째, 한국인 위원이 강력히 주장한 건국전설(단군 · 기자신화)을 편년적으로 본문에 넣는 것에는 반대했으나 제4편 고려 공민왕 24년 폐왕 원년조에 단군기사를 넣도록 했다.
셋째, 편수의 범위와 관련하여 시대구분의 시작을 신라통일 이전, 마지막을 갑오개혁으로 하는 것과 발해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나왔으나 결국 수렴되지 않았다.
넷째, 최남선이 지적한 삼국유사의 석유한국昔有桓國을 석유한인昔有桓因이라 개찬한 사실에 대하여 답변을 요구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이와 같이 조선사편찬작업에 참여한 일부 한국인 학자들은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하는 명분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뿐, 자기 의견을 거의 반영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사 편찬사업은 대한인들로부터 자기 역사연구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것으로서, 서술의 중심은 대한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서술하기보다는 대한이 중국의 속국이며 사대주의로 일관했다거나 중국과 일본보다 역사와 문화가 뒤떨어져 있다는 데 두어졌다. 즉 일본의 대한 침략과 강점의 합법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료의 취사선택 · 왜곡을 자행했으며,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목적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1938년까지 조선사, 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 조선사료집진 朝鮮史料集眞 등을 간행했다.
조선사편수회 방침을 요약하면
첫째,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둘째, 전편全篇을 상고上古3한(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3국, 통일신라, 고려, 조 선, 조선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셋째,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史話, 사실史實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국책사업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달고 시작한 조선사 왜곡․ 폄하․ 축소의 핵심은
첫째, 일본 보다 앞선 선군조선, 기자조선, 발해 등 대한고대사를 조작하고
둘째, 일본 고대국가 기원이었던 고대가야사와 백제사를 말살하는 것이었다.
조선사편수회는 16년 간의 활동으로 전권 35책 2만4000 페이지의 방대한 역사서를 완성했다. 인적 구성은 이완용, 권중현, 일본 관작을 하사받은 박영효가 고문으로 참여하고, 정무총감이 위원회장으로 자동 임용되었다. 중추원의 이나바稻葉岩吉, 역사학자 구로이타黑板勝美, 교토대 미우라三浦周行,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주도하고 경성제대 총장 사학자 신석호, 이병도가 참여하였다. 이렇게 편수된 조선사는 조선의 청년교육에 활용함으로써 일제어용사학의 조선 민중 일제어용의식화를 선도했다. 오늘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는 대한사가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작, 가공, 축소, 폄하, 왜곡, 비하 등 온갖 비열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일제가 만든 조선사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특히 이병도는 이마니시의 보조로써 수제자 역할을 하였다. 뒤에 경성제국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제가 조작한 조선사를 바탕으로 ‘실증사학’ 논리를 펴 일제가 의도한 바 조선사를 후학들에게 전수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이병도는 대한역사학계의 견줄 바 없는 주류학파를 형성하고 있고 그 실용주의 역사관으로 포장한 일제의 어용사학관은 대한역사의 근간이다. 뒤늦게, 만년의 이병도가 조선일보의 특별기고(이병도, 1966년 10월 9일 자 조선일보)에서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國祖’ 라며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이어내려온 단군제사를 일제가 조선사 신화화 일환으로 없애버렸다고 고백하였으나 어찌 이로써 역사 왜곡의 허물을 가리며 역사교육 훼절을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한편,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최남선과 이능화 등 몇몇 학자들이 조선상고사를 편
입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런 의견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울주군 전천리 암각화 * Daum Blog 인용 암각화가 있는 전천리 계곡
더불어, 일본제국 식민지시대 일제는 대한에 관한 서적을 모두 수거하여 불태웠다. 역사서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복식사나 음식에 관한 서적에 이르기까지 불온서적이라는 오명을 씌워 걷워들였는데 수집한 문서가 조선총독부 관보에 51종 20여 만 권으로 기록되어 있다(광복 뒤 출간, 제헌국회사,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문정창). 이 많은 사서들이 모두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 남당 박창화가 증언한 것처럼 사라져버린 우리 역사서가 일본의 궁내성 문서창고에 감추어져 있으리라 짐작한다. 또한 중국도 수 천 년 간 우리 조상들이 기록한 우리 고대사서를 숨겨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중국의 대한사 입장은 어떤가?
대한사는 중국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짓눌리고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바탕으로 한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예속되어 우리 스스로 깎아내리고 줄이고 낮추었다. 그래서 중국 보다 더 큰 고조선의 강역도 줄고, 중국 보다 더 잘 한 일들은 삭감되고, 중국 보다 훌륭한 문화는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왜? 종주국 중국 보다 더 위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만약 민속학에서라도 그런 고연 일이 일어나면 중국은 조선정부를 통해 응징했다. 그래서 감히 중국 보다 더 위에 설 수는 없었다. 더구나 요즘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역사 프로젝트를 만들어 고구려사와 대진국(발해)사를 중국의 변방정권邊方政權으로 편입시키려고 한다. 그 마지막 숨은 목적은 대한고대사를 빼앗으려는 얕은 꾀다.
한단고기 원본 배달역사 신단실기 3국유사 이지함의 토정비결
(독립군 교재) * Daum Blog 인용
우리 대한은 고조선의 멸망 뒤 강역이 축소되고 문화가 피폐로와지면서 한민족의 퇴행이 시작되었다. 부여, 대진국(발해)의 흥망성쇠에 이어, 당나라의 군세를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는 3국통일이라고 일제가 추껴세웠지만 실은 2국통일에 머물렀다.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영토를 중국에 할양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일어난 고려의 고토 회복을 위한 북진정책 실패로 우리나라의 강역은 더욱 쇠잔의 길을 걸었고, 이어 일어난 조선은 태생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일어난 정권이었다. 조선의 개국이 최영의 북진정책에 반대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비롯된 바와 주자학을 국가 통치규범으로 받아들이면서 모화사상 사대주의는 조선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리하여 대한민국의 강역이 광대한 영토를 잃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제한 된 것이 조선시대다. 조선시대는 강역뿐만 아니라 민족사 또한 사대주의를 표방하였다. 고려시대 때까지 전수되었던 고대조선의 역사서적들이 금서로 묶여 정권에 의해 걷워들여 국가도서관 장서각에 버려졌다. 그러나 이마저 임진왜란의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대부분 불타 사라져버렸다. 고려 국가도서관 서운관의 도서목록 30여권의 이름만 간신히 전해온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3국사기와 3국유사가 대한고대사의 전부인데, 3국사기는 모화사상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의 저술이어서 우리나라 역사의 폄하, 왜곡, 축소가 자심하다. 김부식은 북진정책을 표방한 ‘묘청의 난’ 을 제압한 맹신적인 사대주의자다. 그는 서운관의 고대역사서를 자의적으로 왜곡하였다. 또 역사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 중국의 사서를 인용하면서 한자의 빌려 쓴 어휘조차 가려내지 못했다. 고대어와 이두문을 이해하지 못하여 같은 인물이 두세 사람으로 나오고, 여러 지명을 중국과 대한의 강역에다 억지로 붙여놓으니 지도를 맘대로 그린 꼴이 되었다. 더구나 그는 사대주의에 걸맞지 않은 고대사서를 대부분 폐기해버렸다. 한편, 3국유사는 스님 일연의 전설, 기담奇譚 수준의 야사野史로써 특히 불가佛家의 입장을 역사에 대입하였고 기록까지 오락가락하여 역사서로써 가치가 덜 하다.
단재 신채호
단재丹齋 신채호는 한국근대사에 외세의 침투가 가중되던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출생.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신숙주의 후손인데, 할아버지가 향리에서 작은 한문서당을 열어놓고 있었으므로 이 서당에 들어가 엄한 교육을 받게 되는데 특히 신채호는 문재文才가 특출하여 9세에 통감通鑑을 읽고 이해하며, 10세에 행시行時를 지었으며, 14세에 4서3경四書三經을 독파하였다. 급속히 학문적 성숙을 거듭하던 신채호는 18세에 당시의 대학자이자 구한말의 재상宰相이었던 양원陽園 신기선申箕善 집을 드나들며 많은 책을 섭렵하였고, 1898년 가을에는 그의 추천으로 상경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수학을 하게 된다. 신채호가 성균관에 재학하면서 학문을 닦던 시기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이 격화되고, 이에 대응한 민족의 저항이 치열하게 타오르던 시기였다. 당시의 민족운동은 무장투쟁인 의병운동義兵運動과 국권수호를 위한 정치적 투쟁인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으로 크게 표면화되었다. 이 운동은 모두 외세의 침략과 이권경쟁利權競爭, 봉건왕조의 무능한 통치자들에 대한 민족적인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이 시기의 민족운동은 반침략반봉건反侵略․反封建이라는 공동의 투쟁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또 당시에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급진개화사상이나 위정척사사상의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개화사상을 자주적인 입장에서 민족자강사상으로 수용 발전시키고자 부심하였다. 역사저서로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가 있다. 단재가 좀 더 여유롭게 역사를 연구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배우는 대한사는 정맥을 찾았을 것이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에서 엮어낸 조선사를 대한역사로 바로 잡았을 것이다. 그는 방랑과 좌절 그 열악한 환경에서, 역사자료를 열람할 수도 없었고, 자료 하나 구입할 수도 없는 곤궁한 처지에서, 대한역사를 집필하기 매우 어려운 여건에서, 자료를 찾아다니며, 빌려 보고, 필사하여 조선상고사를 쓰다가 옥중에서 서거했다. 광개토대왕비문을 보고싶어도 여비가 마련되지 않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중국의 어느 학자에게 조선고대사 자료가 있는데, 러시아의 학자에게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구입할 자금이 없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자료 열람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의 단재가 3국사기와 3국유사에 매달리고 있는 대한사의 왜곡과 폄하를, 김부식과 일연의 오류를 고대 이두문의 해석으로 명칭과 위치 등 고증을 명확히 가려낸 일은 참으로 명쾌하다. 그래서 단재의 요절이 안타깝다. (Daum Blog 인용)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를 쓰면서 ‘백제가 망하고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가 송두리째 사라졌고,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병화를 입은 것도 아닌 만월대가 주춧돌만 남았다’ 고 한탄한다. 뒤에 일어선 나라는 앞선 나라의 역사, 문화유적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후손들이 선조들의 업적을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 우리나라의 역사다. 그래서 후학들이 역사를 정립하려고 해도 우리는 기록이 없다.
중국은 예로부터 ‘춘추필법春秋筆法’ 이라고 하여 - 공자孔子가 ‘춘추春秋’ 를 집필하면서 노나라 왕이나 주나라 천자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비유로 쓴 것이 후세에 은유隱喩의 문장기법이 되었다. 춘추필법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는데
․ 중국은 높이고 외국은 깍아내리고
․ 중국사는 상세히 외국사는 간단히 기술하며
․ 중국을 위해 수치羞恥를 숨기는 것이다
‘사기’ 의 저자 사마천이 궁형(남자의 거세去勢)을 당한 것도 한나라가 고조선과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기록했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역사서를 비롯한 서적 수백만 권을 불태우고 수천 명의 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 또한 고조선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한다. 아울러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식으로 중화中華라고 스스로 부르며 중국의 동쪽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모두 중화사상에 견주어 오랑케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이것이 중화사상의 요체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쓰면서 이러한 중국사서를 참고해야만 하고 더구나 ‘춘추필법’이라는 외국사를 조작한 중국사서의 행간(숨은 내용)을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대한사 찾기의 어려움이다.
중국은 3황5제를 신화로 세우고 역사적 시조로 황제헌원을 모시는데 기술한 바와 같이 황제헌원은, 고조선의 한웅천왕 신시시대 자오지(치우)한웅천왕이 ‘소전의 별고로써 짐승을 기르는데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하삭으로 추방한 무리’ 의 후손이다.
반면 일본역사는 어떤가? 일본도 신화로 역사를 연다. 일본의 창조신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나카다. 아마테라스는 태양신이다. 중국과 일본은 제 나라의 고대사 기록이 없어 신화를 창조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기록이 확연한 대한의 고대사를 말살하고 자기들의 역사처럼, 자기들의 역사 보다 뒤늦은 신화로 각색하려고 갖은 획책을 벌였다.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발표가 활발하다. 중국은 고구려와 대진국 (발해)를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조작하여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한다. 또한 제주도 남쪽 한국의 관측시설이 설치된 이어도(제주도 어부들이 죽으면 간다는 이상향으로 ‘이어도 사나’ 라는 민속노래가 전함)를 분쟁지역화 하려고 하고, 일본은 독도를 다께시마 라며 일본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金, 청淸나라를 대한사에 편입해야 한다(2006. 9. 14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고구려연구회 세미나)’, ‘중국의 동북공정 연구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 에서 ‘한漢 . 당唐나라 이후 중국 한족漢族은 만주를 완전히 지배한 적이 없다’ 고 전제했다.
요지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대진국 등 한민족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중국의 지방정권 역사로 편입하려는 악의적인 시도에 대응하는 한국고대사 바로 세우기 문제 제기다. ‘대한역사교과서는 중화中華사상에 물든 사대주의사관으로 만주지역에서 성립된 요遼, 금金, 원元, 청淸나라를 모두 중국역사로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 당 이후 중국 본토(중원中原)에 들어선 송宋나라와 명明나라가 북방민족인 금과 청에 각각 정복당했고, 당나라 멸망 이후 1949년 공산중국이 건국될 때까지 1000여년 간 한족이 만주지역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 이런 사관에 따라 중국과 역사 갈등을 겪은 몽골은 흉노 - 선비 - 유연 - 돌궐 - 위구르에 이어 요와 원을 자국역사로 편입했다.
금나라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마의태자의 자손이며, 청나라는 병자호란 때 청 태조가 조선이 형제국이라고 국가의 뿌리를 인정한 바 있다. 금나라와 청나라는 한민족역사다. 중국의 역사 왜곡을 정치적 차원으로 본다면 중앙정부는 35개 국가(진, 원, 명, 청 등등)가 부침을 했는데 지방정권(고구려)이 700년의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중국이 확보한 현재의 시점에서 영토문제, 속지국가주의라면 고대국가는 영토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대에서는 영웅천하였으므로 뛰어난 지도자가 떨쳐일어나 무리를 규합하여 국가를 건설하고 영토를 넓혀 국가를 이루었다가 패망하기를 반복하였다. 중국도 고구려 700여년 동안에 35개 국가가 평균 15년의 부침을 하였지 않은가? 현대의 국경 같이 인공위성으로 측도하여 선을 긋는 명확한 영토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시대의 영토개념을 고대에 적용하려는 의도는 넌센스가 아닌가?
전천리 암각화 남당 박창화와 화랑세기필사본 * Daum Blog 인용
*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역사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2004년 8월 23일 한 ․ 중 양 국이 합의문을 작성했는데
(1, 2항) 한․ 중 양 국은 역사문제로 한․ 중 우호관계의 손상을 방지하고 동반자적 발전 에 노력한다.
(3항) 고구려사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정치문제화를 막는다.
(4항) 중국이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대한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한다.
(5항) 양측은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의하여 두 차례의 학술 교류가 있었다.
4신도神圖, 현무(검은 거북이) 청룡(푸른 룡) 주작(붉은 공작) 백호(하얀 호랑이)* Daum Blog 인용
요즘 진보적인 시각을 지닌 학자들이 대한사의 잘못을 연구와 고증考證으로 바로잡아가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학생교육을 전제로 하는 ‘교학敎學대한사의 대계大系’ 를 세운다. 고조선 한인천왕의 한국시대桓國時代부터 9200여년 역사연대를 바로 세우고, 한 시대마다 민중적 삽화揷話 - 특히 민중적 역사 사건을 주제로 설정하여 한국사를 재정립함으로써 민족정기와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려고 한다. 이에 임승국의 ‘한단고기’ 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는 교학대한사대계를 세우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의 근간이 되었으며, 고대사 대부분을 인용하였다. 또한 ‘정신세계사’ 의 책들이 도움이 되었다. 교학대한사를 구상하던 중 만난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神들의 고향’ 은 충격이었다. 대한고대사에서 말하는 수밀이(Sumer)에 대한 확신(영감靈感)을 얻었음을 밝힌다.
맥족貊族 이동로 고려 농은 선기옥형 태양새 3족오
갑골문자 천부경 * Daum Blog 인용
* 또 하나의 전제가 있다. 대한사를 잘못 기록한 까닭으로 역사용어도 스스로 비하하거나 왜곡되어 있어 바로잡았다.
․ ‘한국’ 이라는 명칭은 일본제국이 조선사편수회에서 ‘임나고’ 를 조작하면서 만들어냈다. 일반적으로 ‘대한제국’ 이나 ‘대한민국’ 의 준말이라고 여겨지나 ‘한국’ 은 준말일 수 없다. ‘한’ 은 순수한 우리 말의 ‘한’ 인데 한자를 빌어 쓰면서 ‘韓, 桓’ 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대大한’ 은 중국이 사용하는 ‘대청국大淸國’ 이나 ‘대당국大唐國’ 같은 문법적 맥락이다. 해방 이전까지는 ‘대한’을 사용하였다 (Daum의 블로그 ram2dam 인용). 애국가의 ‘대한사람’ 이나 ‘대한독립만세!’ 를 보면 알 수 있다. 영국은 대영제국, 일본도 제 나라를 대일본제국이라고 한다.
․ ‘대한민국’ 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호를 논의하여 투표로 결정했다. 그러나 준말을 ‘한국’ 으로 공식화하지는 않았으니 고려해야 한다. ‘Corea’나 ‘대한’ 을 공식적으로 변경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으나 국호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으니 외교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그리고 사회에서 공용화하면 될 것이다. 흔히 쓰는 ‘한반도’ 와 ‘한국기원, 한기’ 그리고 Corea, ‘대한민국과 한국’ 들은 역사학 그리고 사회학적 접근이 요청된다.
․ COREA는 고려 때 세계에 알려진 우리나라의 고유명사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KOREA로 쓰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일제시대 일본의 영어 표기 JAPAN의 알파벹 순서가 COREA를 쓰게 되면 C가 J 보다 앞서기 때문에 뒤로 가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K로 바꾸었다는, 일제의 간교한 술책이었다고 하는데 수긍이 간다. 되찾아야 한다.
․ ‘한반도’ 라는 말은 일제가 국책사업이라고 내세워 꾸며낸 조선(사) 말살정책인 ‘조선사편수’ 에서 비롯했다. 편수회지침을 보면 조선‘반도’사는 편년체로 한다 라는 말이 나온다. 일제의 간교다. 일본은 열도 - 섬나라다. 영국도 섬나라다. 그러나 오스트렐리아는 대륙이다. 일본이 섬나라라는 태생적 여건을 스스로 높이기 위해 우리나라를 ‘반도’ 로 깎아내려 반도라는 말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대한’ 이라고 쓰면 될 일을 하필, 섬나라 되기 소원인 것처럼 한반도라 쓰는 건 스스로 나라를 낮추는 일이다.
43억 8천만년 된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땅 * Daum Blog 인용
․ 한국기원(한기)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단군기원(단기)으로 시작하는 고조선의 역사연대는 잘못 되었다. 우리는 단군기원을 써왔는데 근대국가로 들어가는 독립정부 수립시대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서력기원을 빌려왔다. 또한 우리가 사용한 단군기원은 우리 상고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역사연대다. 단군기원을 2333년으로 쳐서 서력기원에 2333년을 더해 사용하였는데, 단군기원을 사용하면 한인천왕의 한국시대 3301년,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1565년의 우리 상고사가 사라져버린다. 한인천왕 한국시대 3301년, 한웅천왕 신시시대 1565년, 단군왕검시대 2095년의 7197과 올해, 서기 2008년을 더한 9205년이 우리 대한의 역사다.
․ ‘단군왕검’ 을 ‘선군왕검’ 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박달나무 ‘단檀’을 옥편에서 찾아보면 ‘단’ 과 ‘선’ 의 두 가지 발음이 있다. 흉노 왕 호칭은 ‘단우單于’ 라 적고 ‘선우’ 라고 읽으며 대종교의 예배의식도 ‘단의식襢儀式’ 으로 적고 ‘선의식’ 으로 읽는다. 단군왕검이라는 해석은 차음借音인 박달나무 ‘단檀’자에 얽매어 ‘단檀’ 을 박달나무로 오역한데서 연유하였다. ‘선’ 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박달나무의 ‘박달’ 은 ‘배달’ 또는 ‘밝음’의 뜻이고 그래서 박달나무 ‘단檀’ 자는 우리말을 문자로 빌어쓴 한자(漢字, 차자借字)인데 이를 뜻으로 오해하여 박달나무 아래 도읍을 정하였다는 등 소리 말과 기록문자로 인한 오역이므로 바로 잡았다. 선군은 제사장이고 왕검은 통치자다. 한웅의 ‘한’ 이나 징기스칸의 ‘칸’ 그리고 ‘마립간’의 ‘간’ 도 순수한 우리말로써 한桓, 한韓, 한汗(칸)은 빌어쓴 한자다. ‘단군’ 이 이미 보편화되었는데 구지 ‘선군’ 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고유 신앙인 3신신앙三神信仰이 한(하늘, 천신天神), 감(땅, 지신地神), 선(사람, 인신人神)으로써 ‘인신’ 을 제일 귀한 신으로 친다.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사상도 같은 뜻이다. ‘단군’ 은 인신으로써 ‘선군’ 이다.
서울시청계획도 8괘 4대문명발상지 풍수 행정도시계획도
* Daum Blog 인용
- 고대사서 목록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동명성제, 대무신왕대에 사관이 조선상고부터 고구려 초엽까지 정치적 사실을 기록한‘유기留記 100권’이 있었는데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난리 때 빼앗겨버렸다. 선군왕검의 이름과 3한, 부여의 간략한 역사(약사略史)가 위서魏書에 모두 적혀있는 것은 위나라 사람들이‘유기’를 근거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 그 뒤 백제 중엽에 고흥박사가‘서기書記’를 지었고 고구려 말엽에 이문진박사가‘신집新集’을 지었으며
- 신라는 진흥대왕의 전성시대에 거칠부가‘신라의 고사故事’를 저술하여 3국이 다 한 세대의 전고典古를 비치하고 있었다. 이 외에 무명씨의 종교사‘선사仙史’, 위홍의 문학사‘향가집’, 김대문의 학술사인‘고승전’과‘화랑세기’가 있었으나 사라져버렸다.
- 고려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은이의‘3한고기’,‘해동고기’,‘3국사’ 등과 김부식의‘3국사기’, 일연의‘3국유사’가 있었으나 3국사기와 3국유사만 전한다. 그러나 이 두 사서, 3국사기는 북쪽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북진파와 압록강 이남에 안주하자는 유교도가 수백 년을 대치하였는데, 불교를 믿는 묘청이, 화랑의 개인적인 이야기에다가 음양가陰陽家의 미신을 보태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인 김부식에게 패하고, 중국 모화사상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우리나라 고대사서를 배격하고 중국사서를 근본으로 3국사기를 지었다. 그러므로 동북 양 부여를 모두 삭제하였고, 발해(대진국)을 빼버렸으며, 이두문과 한역을 구별할 줄 몰라서 한 사람이 여럿이 되고, 한 곳의 지명을 여러 곳으로 오기했으며, 국내 역사서와 외국서적을 취사선택하는데 흐려서 전후가 서로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역사적 가치가 없다. 그 뒤 고려가 몽고에 패하여 독립자존이 일체 금지되었고 기피되었기에 우리 고대의 모든 역사서와 고전은 폐기되었고 오직 3국사기와 3국유사만 남았다. 더구나 고려 당대의 사기는 고종 이전 나라가 강성하였을 때 기록은 모두 몽고가 두려워 깎아버렸고, 몽고에 복속되어 과장하거나 위작되었는데 이러한 사서들이 조선의 정인지가 찬술한 고려사의 기초가 되었다.
조선시대는 세종이 사책에 유의하였으나 태조와 태종이 최영의 북벌군에서 위화도 회군으로 혁명을 하였기에 권근, 정인지 등에 명하여 조선사략,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할 때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전의 실기로 역사를 세우지 못하고, 아첨과 문자(몽고는 대국, 조선은 소국으로 적는 역사 기록 방법)와 위조한 고사에 근거한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전대의 실록은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허락지 않고 규장각 안에 비장해두었다가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버렸다. 불경을 인쇄하고, 전쟁사 동국병감과 풍토사 동국여지승람은 공헌이다. 선조, 인조 이후에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한백겸의 동국지리설, 정약용의 강역고, 한진서의 지리서, 안정복의 동사강목이 있다. 유혜풍의 발해고, 이종휘의 수산집, 한치윤의 해동역사가 있다. 수서 2백권의 거질巨帙과 국조보감, 조야첨재, 조야집요, 연려실기술이 있다.
아라라트산 오로라 페루 나스카 유적 UFO
노아방주 흔적 * Daum Blog 인용
․ ‘동북공정東北工程’ 은 중국의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하는데 우리식으로 풀이하면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 연구과제’ 다. 중국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개년계획(예산 24억원)으로 수립한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변강사지연구중심 주관 역사프로젝트다. 이는 대한이 통일되었을 때 영토 분쟁은 없애려는 사전 정지작업 또는 북한을 중국에 편입하려는 의도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동북공정은 대한사의 고구려와 대진국(발해)역사를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편입하는 일이 첫 단계요, 궁극적으로는 고조선시대 대한고대사를 찬탈하려는 의도로 판단한다. 중국은 한족漢族의 역사적 시조를 황제헌원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고조선 한웅천왕의 신시시대 치우천왕을 3조당祖堂(중국 호남성湖南省의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 치우천왕蚩尤天王을 모시는 사당祠堂)에 중국인들의 역사적 시조와 함께 배향配享한다. (한국은 2004년 3월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발족하였고 2006년 이를 동북아역사연구재단으로 개정하였다.)
․ 덧붙여 대한사연구는, 고대사서의 의도적인 폐기(진시황의 분서갱유, 사마천의 사기와 중국의 역사서 의도적 조작, 김부식의 3국사기 저술 뒤 서운관 고대사서 폐기, 조선시대 수거 폐기, 조선시대 말기 서양의 약탈, 일제시대 수거 폐기, 해방 뒤 국외 반출)로 사료가 없어 대한사를 정립하는데 중국의 사서나 일본의 사서를 참고해야 하는 애로가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이 폐기하고 소각했다는 대한고대사서들(화랑세기 필사본의 박창화 증언 일본 궁내도서관 장서, 프랑스 박물관 강화사고 강탈 사료, 미국 하버드대학교 비공개도서 대한고대서적, 서울대학교 도서관 사적, 숙명여대 도서관 사적)이 요즘 들어나고 있다. 이외에 중국과 일본의 극비문서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은 대한고대사적들을 찾아내는 일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대한사를 필수의무교과로 교육하는 일은 대한사교육의 두 번째 일이다.
․ 한(순수한 우리 말. 桓, 汗, 韓은 빌어쓴 글자)은 나라 이름이 아니다. 만주나 몽고말로도 임금(칸, 징기스 ‘칸’, 고두막 ‘한’, 신라의 마립 ‘간’)이란 뜻이다. 고조선에는 진(신)한, 번(발, 불)한, 막한(말한, 일본서기의 모한이라고 함은 왜倭왕 무茂의 실수) 세 임금이 있는데 진한이 상황上皇이었다. ‘만주원류고’ 에서는 ‘한’ 을 나라 이름으로 저술한 ‘후한서’ 의 저자 ‘범엽’ 을 다음과 같이 질책한다. ‘당시 3국에는 3한이 있어 한 나라씩을 통치하였다. 사가史家들이 한에 군장君長의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음音이 같다는 것에 집착하여 오역한 일은 고증이 무능하였다는 결론이다’. 단재 신채호는 고조선의 3한을 신한, 번한, 막한이라고 가렸다. ‘한’ 은 본래는 왕의 칭호였으나 나라 이름으로도 두루 쓰였다.
* 역사서가 대부분 한문으로 쓰여져서 번역하거나 한글로 엮는데 어려움이 많다. 또 우리 나라 역사서는 거의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편찬하는데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서를 참고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더불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역사서를 어려운 한자어투로 엮었다. 그래서 쉬운 말로 번역하여 청소년들이 읽기에 편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서툴다. 특히 사서자료에서는 쉬운 한글로 엮는데 한계가 있었다. 무릇 읽는이들이 편저자의 노력을 이해하고, 사료史料는 바탕체로 그리고 본문은 견명조로 글자체를 달리하였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만주의 전설적인 3족오 수메르 한역韓易(주역周易)
광개토대왕비 (세 발 태양새) 점토판粘土板 3태극太極
* Daum Blog 인용
* Prologue
- 사라진 캐릭터Character
조선시대 조선시대 천문도 신라시대 선군조선시대
선기옥형(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첨성대 마니산 참성단
* Daum Blog 인용
# 제 3회 대전 엑스포EXPO 국제 에니메이션 경진대회장. 대한방송의 도깨비기자(별명, 본명 독고빈)가 2층 대회장 로비에서 서성거린다. 긴장된 모습. 잠시 뒤 서울지검 정보담당 부장검사와 서울경찰청 형사들이 숨가쁘게 들이닥친다. 도깨비기자, 황급하게 그들을 따라가며 부장검사에게 기사거리를 흘리듯 말한다.
도깨비기자 : (부장검사에게 바짝 다가서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요?
부장검사 : (도깨비기자를 흘끗 살피며, 저 도깨비가 벌써 냄새를 맡았나 하는 표정으로) 글 쎄, 아직은 뭐라 할 말이 ….
도깨비기자 : 단서 될 만한 것은 ….
부장검사 :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고 뺑소니치듯 통제실로 들어간다.) 없어요, 아직은, 아무 것도 없어요!
부장검사 일행이 대회장 통제실로 들어가자 뒤 따라 들어가려는 도깨비기자를 부장검사와 동행한 형사들이 문 앞에서 가로막는다. 슬며시 휩싸여 잠입하려는 의도가 좌절되자 도깨비기자 어색하게 웃으며 형사들에게 담배를 권한다. (무엇인가 있다? 지레짐작으로 접근하려다가 실패했으나 부장검사가 진두지휘를 하는 걸 보면 ‘크다’는 직감이 왔다.) 도깨비기자는 오랜 활동의 기자 감각으로 감을 느꼈다. 데스크는 에니메이션대회에서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다는 귀띰만으로 도깨비기자를 현장으로 몰아세웠다. 전혀 꼬투리가 없었다. 담배를 뽑아 불도 붙이지 않고 손가락으로 굴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과학기술처 담당 최기자다.
최기자의 정보에 의하면, 에니메이션대회장에 정보담당 부장검사가 들이닥친 시간대에 과학기술처 상황실로 청와대 과학정보담당 수석, 과기처 정보담당관, 우주센터 정보담당기획관, 기상센터 기획팀장, 국정원 정보담당 제 1부장과 문화재청 기획관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고 했다.
# 그 날 오후, 대한방송DBS 본사 기획실. 과학기술처 담당 최기자, 도깨비기자, 정보팀장과 기상방송팀장, 문화예술 담당기자가 원탁에 둘러앉자 있고 기획실장이 기사 취재에 대한 브리핑을 한다.
기상도 대전엑스포 과학공원다리(1993년 개최) * Daum Blog 인용
# 대전 엑스포 에니메이션대회장 상황실. 도깨비기자가 대회 홍보담당자와 마주 앉아있다. 마주 앉아있으면서도 시선은 각각 따로따로다. 양쪽이 다 못마땅한 표정이다. 대화를 나누다 말이 끊긴 듯 서먹하게 앉아 있다가 도깨비기자가 인사도 없이 일어선다.
# 기상청 예보관실, 도깨비기자가 예보관실에 들어서자 예보관이 마중하며
예보관 :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었나, 도깨비기자님께서 웬 일? 기상청엘 다 오시고 ….
도깨비기자 : (어깨에 멘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고 앉으며) 농담 말아, 나 지금 심각해. 위에 서는 짖어대고 가는 곳에서는 푸대접이고, 나 좀 도와줘!
예보관 : 도깨비기자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말씀, 도대체 무슨 일이 그리 꼬였나?
도깨비기자 : 감은 잡았는데 모두 오리발이라 … 자네 도움이 필요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 어. 어제 대전 엑스포에서 열린 3회 국제 에니메이션대회가 전격적으로 취소되었어. 국 제적 망신을 감수하고 말야. 바로 취소 성명을 내기 직전에 정부 모처에서 정보담당자 들이 긴급 모임을 한 직후야. 그런데 모인 사람들 면면이 심상찮아. 여기가 수수께끼의 단초야. 정보담당 관계자는 그렇다 치고 청와대, 과기부, 국정원, 기상청, 우주센터, 문 화부가 모였어. 안보도 아니고 문화도 아냐, 그렇다고 정보라고 할 수도 없고. 퍼즐이 맞지 않지? 요즘 기상청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예보관 : 기상청은 오보사태로 죽을 맛이지. 동네북이 되었어. 작년 가을 황사 오보에 된통 얻어터졌는데 엊그제는 울진지진 늑장 대처에 혼이 다 나갔고 … 그 외에는, 없어. 혹 기사거리라면, 일본이 낼 모레 아시아 전체를 커버하는, 해상도 1m의 기상위성을 쏘아 올릴 거라는 정보가 있는데 자네들이 더 잘 알거고, 기상위성시대가 도래하였다더라도 한국은 2010년이나 되어야 기상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고.
4계절 일기도와 기상도 * Daum Blog 인용
# 국정원 상황실, 도깨비기자가 해외담당관을 만나고 있다.
도깨비기자 : 에니메이션대회가 취소된 직접적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요?
담당관 : 글쎄 그렇다니까. 중요한 캐릭터를 해킹당했어요. 당사국에는 치명적인 사건이야. 뭐, 캐릭터 쯤 가지고 라고 말하겠지만 당사국에서는 퍽 심각한 모양인데 우리로서도 그 이상은 무리야. 정보가 없어요.
도깨비기자 : 에니메이션대회 캐릭터 해킹에 국정원이 간여한 동기가 있을 거 아닙니까?
담당관 : 우리야 뭐 상부의 지시를 받고 나갔으니까.
도깨비기자 : 그래도 어느 정도 상황과 내용은 알고 있을 게 아니요?
담당관 : (돌아앉으며) 알지도 못하고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기자 양반에게 발설할 수 없 다는 걸 기자 양반이 더 잘 알고 있을텐데 왜 그래요. 그만 합시다. 나 좀 바쁜 일이 있어서 ….
# 문화공보부 브리핑실, 도깨비기자와 브리핑실에 가득한 기자들이 곧 있을 엑스포 관련 브리핑을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문화부 대변인이 들어와 브리핑이 시작된다.
'대전 엑스포에서 열리고 있는 제 3회 국제 에니메이션대회가 취소되었습니다. 이미 취소 기사가 먼저 나갔기 때문에 국민 여러분이 알고 계시겠지만 특정 국가가 제출한 캐릭터가 해킹을 당했기 때문에 당사국으로서는 치명적인 정보 누출의 부담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 : 해킹당한 나라가 어느 나란지 밝힐 수 없나요?
답변 : (잠시 망설이며 연석한 보좌관에게 자문을 구하고) 한국입니다.
질문 : 해킹당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답변 : 3족오 캐릭터, 선기옥형 설계도 - 선기옥형은 혼천의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치 우천왕 캐릭터와 천상열차분야지도 모형, 천부경 캐릭터 그리고 한국이 곧 발사하게 될 무궁화위성 설계도입니다.
질문 : 캐릭터 해킹이 대회를 무산시킬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란 걸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에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어떤 연관이 있으며,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합니다.
답변 : 대변인으로써 더 구체적인 내용은 아는 바 없습니다.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상 마치겠습니다. (브리핑 관계자들이 서둘러 퇴장하고 미진한 브리핑으 로 서성거리던 기자들도 흩어진다. 그 틈새의 도깨비 기자, 기자들을 따라 휩쓸려나간 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임진왜란 노량대첩도 충무공 이순신장군상
* Daum Blog 인용
(브리핑 뒤) 일간지 기사 발췌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는 2007년 2월 28일 다목적위성 아리랑 3호의 기밀자료 유출과 관련하여 여당의원 보좌관 이 아무개(40세), 한국계 외국인 로비스트 G사 대표 이 아무개(47세)를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2006년 6월 - 11월 4 차례 기밀자료 7건을 유출한 혐의다. (2007년 2월 28일 아주일보)
# 대한방송DBS 앞 음식점, 과학부 최기자와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도깨비기자.
도깨비기자 : 수수께끼 퍼즐이야, 풀 수 없는 퍼즐 맞추기에 끼어들었어. 내 짐작으로는, 감 뿐이지만. 정부가 어떤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고 이는 국제적인 프로젝트다. 적어도 몇 개의 나라들이 이 프로젝트를 알고 있거나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뜻 하지 않게 중요한 관련 정보가 해킹을 당했다. 이런 정도의 추리가 가능하지. 국제적인 극비 프로젝트라면, 몇 개의 나라들이 경쟁하고 있다면, 그런데 정보가 해킹을 당했다? 해킹을 당한 한국도 해킹을 한 나라도 치밀한 계획으로 마주 서 있었는데 해킹이라, 하 기야 펜타곤Pentagon(미국 국방부청사)도 해킹을 당하는 판이지만 ….
최기자 : 3족오, 천부경, 선기옥형, 천상분야열차지도, 치우천왕, 기상위성이 다섯 개의 연관 성이란 말이지. 어려운 퍼즐이군. 전문가에게 자문을 받아봐. 국제대회를, 그것도 어렵 게 로비를 해서 유치한 대회를 캐릭터 해킹으로 취소했다면 상식을 뛰어넘는 뭔가가 있 다는 건 분명해.
도깨비기자 : 퍼즐을 풀만한 사람들이라 ….
최기자 : 고봉학술원의 운곡선생을 한 번 만나 보지. 운곡선생은 평생을 선기옥형 복원에 바친 사람이야. 천부경을 해석하는데도 탁월하고. 내게 몇 가지 자료가 있어.
도깨비기자 : 낭설이겠지만 … 일기예보에서 크게 오보가 난 뒤에는 기상청이 과학적인 데 이터를 너무 확신하는 게 아니냐는 … 뭐랄까, 역설적인 말들이 들리고 있어.
최기자 : 과학적인 데이터가 불확실하다는 말이겠지. 한국 기상장비는 초보적이야. 무궁화 위성을 쏘아올린 것이 엊그제지 아마 ? 수퍼컴퓨터를 도입한 것도 몇 년 전인데 그나 마어. 기상위성도 10개 이상이고. 열악한 상황에서 한국은 미.일 기상정보 의존도가 높지. 미국이나 일본 기상 데이터로 한국의 기상을 예보하는 것 자체가 우선 불확실성 을 수반하는 셈이야. 시민들이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겠나? 기상예보가 맞고 틀리는 것 에 집착하겠지. 그래서 기상예보라 하지말고 기상후보나 기상속보라고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예보를 하지말라고 비아냥거리지. 기상은 시민들의 일상과 농사 뿐만아니라 기 업에 도 직결되는 민감한 사안이야. 요즘에는 기상에 대한 의존이 광범위 해. 우산장사 와 짚신장사 얘기는 고전이야. 심지어 패션과 김밥장사에서 까지도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판이야.
도깨비기자 : 500억 짜리 슈퍼컴을 도입하고도 기상청은 그럴 때 마다 시설과 장비의 문제 점을 들고나와 모면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탁월한 여건을 가진 미국은 토네이도나 해일 을 예보하지 못하고, 일본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지진을 대처하지 못하잖나말야. 장비 나 기상여건의 돌변 또는 가변성의 문제가 아니지. 천체변화의 이치를 모르는 소치야.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야.
최기자 : 그 건 그렇지. 과학의 한계야. 과학적 맹신이랄까?
도깨비기자 : (허탈하게 웃으며) 하기야 과학, 그렇게 발달했다고 지구촌을 통째로 움직이는 것처럼 야단하는 과학으로는 모기 한 마리 복제해내지 못한다는 아이러니가 있지. 헌데 말야, 3국시대 백제에서는 천문 관찰이 3만여 건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나 신라 에서도 천문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어. 천상분야열차지도는 고려 때 제작한 천문도지. 그런데 놀랄 일은 그 천문도에 그려진 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거야. 시력으로는 볼 수 없었던 별들까지 수록되었다는 말이야. 도 대체 무슨 수로 시각 밖의 별들을 찾아서 그려넣었을까? 그 시절에 천체망원경이 있었 을 리도 없고. 한 술 더 떠서 조선시대 천문연구는 생각 보다 더 치밀하고 과학적이었 어. 과학적이란 말이 우리 시대의 표현이어서 적절하지 않지만 현대과학을 뛰어넘는 천 문관찰이란 불가사의 아니겠나? 나는 여기에 선기옥형이라는 천문기기와 천지화랑으로 불리우는 신관 즉 천문학자들이 있다고 가정하고 있어.
최기자 : 농본주의 사회에서 치산치수治山治水 다음으로, 아니 치산치수 보다 더 중요한 일 이 천문현상 아니었겠어? 가뭄이 들면 왕이 몸소 기우제를 지낸 일이 역사기록의 중대 사였잖아. 나야 뭐 문외한이라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둥 정도의 상식뿐이지만. 그래, 자 네는 자네의 그 가설을 추적해보겠다는 말이지?
도깨비기자 : 왕은 하늘에서 내었다고 백성 위에 군림했으니까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천기 현상을 책임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래서인지 천문박사로 불리우던 천문학자들 은 기능이 대단했던 모양이야. 사시사철 하늘의 운행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려냈으니 까. 그들의 판단으로 농사를 짓고 전쟁을 수행했지. 믿기 어렵지만 천문을 읽어 외침을 예견하기도 하고. 지금은 과학적인 무기로 전쟁을 수행하지만 그 시대에는 원시적인 활, 칼, 창으로 싸웠으니까 천문현상을 정확히 읽어내는 일은 곧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 을 거야. 우수한 천문박사들을 보유한 나라가 강대국이 되는 왕도王道였지. 씨를 뿌리 고 곡식을 거두는 일은 물론이고 병충해라든지 절기의 우순풍조雨順風調, 다리를 놓고 성을 쌓고 길을 닦는 데도 천기는 매우 중요한 정보였을 거야. 심지어는 천문현상을 보 고 국가 변란을 예측하기도 했어.
최기자 : 한인천왕이 한웅천왕에게 하사한 천부인의 뜻이 거기에 있었구먼. 허나 현대 - 첨 단과학의 시대에, 첨단 장비로도 해결하지 못한 천체현상을 선기옥형이나 천상열차분야 지도로 대체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도깨비기자 : 지구촌에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면서 천문현상을 파악하 려는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어. 수퍼컴을 비롯해 과학은 모기 한 마리조차 복제 해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니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이 선기옥형에 있다고 봐.
최기자 : (유쾌하게 웃으며) 지구에 또 다시 빙하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말이지? 그래서 인 류가 꽁꽁 얼어서 멸망하지는 않겠구먼, 자네의 노력으로 말야. (다시 너털웃음을 웃으 며) 자, 그 원대한 포부를 위하여 건배하자구.
마방진魔方陣 퍼즐게임Puzzle Game * Daum Blog 인용
◎ 위험한 퍼즐게임Puzzle Game
# 전라선 케이티엑스KTX, 도깨비기자 지나가는 홍익회 판매원을 불러 세우고 캔커피를 산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도깨비기자가 노트북을 꺼내 탁자에 펴놓고 최기자가 송고한 자료를 검색한다.
고려 농은 민안부 천체운행을 관측한 천상분야열차지도
갑골문자 천부경 선기옥형(혼천의) * Daum Blog 인용
고려 농은農隱유집遺集 갑골문자 천부경, 2000년대 초 농은의 후손 민홍규가 송호수박사에게 알리고 언어학자 박대종이 공개함. 농은 민안부는 고려시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수은 김충한과 함께 6은隱으로 불리웠던 학자. 조선 개국 때 두문동 은거 72현賢임
◎ 고조선의 천기天氣 사적史蹟자료
* 퇴계(이황)가 바라본 우주 500년만에 되살리다 (충북대 이용삼교수, 도산서원‘혼상’복원과정 발표, 동아일보 2007. 2. 2)
* 선생께서 제자 이덕홍에게 명命해‘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는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별자리를 관찰하게 하였다. 퇴계 이황(1501∼1570)의 족적을 담은‘퇴계선생언행록’에 나오는 이 대목은 초야에 묻힌 선비들이 천문현상을 연구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주요 기록 가운데 하나다. 1561년 낙향해 줄곧 학문에만 전념하던 퇴계는 왜 별자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 1000원권에 등장하는 도산서원에서 보관해 온 퇴계의‘혼상(渾象)’이 최근 복원됐다. 혼상이란 둥근 구면에 별자리의 위치를 그려 넣은 천문연구 장치. 시간에 따라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지는 별의 운행을 보여 준다.
* 1467개 별자리 담은 현대판 천체투영기
간재 이덕홍은 퇴계의 제자 중 치밀하고 꼼꼼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도 그가 그린‘구갑선도’를 본떠 만든 것이다. 스승의 명을 받자마자 간재는 곧바로 숲에서 소나무와 물푸레나무, 대나무를 구해 왔다. 혼상을 지지할 구조물로 쓸 재료다. 간재는 구해 온 나무들을 지름 49cm의‘구球’형태로 틀을 짰다. 방향을 새겨 넣은 지평환만 있을 뿐 천체의 남중고도를 측정하는 자오환도 없을 정도로 간단한 형태였다. 틀이 완성되자 간재는 조심스럽게 닥종이(한지)에 별자리를 그려 넣었다. 한양에서 입수한‘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별자리를 사용했다. 이 천문도는 조선 태조 때인 1395년 고구려의‘돌 천문도’의 탁본을 가지고 만든 별자리 그림으로, 별 1467개와 별자리 292개를 담고 있다. 혼상의 별자리는 하늘 밖에서 천체를 바라본 형태다. 땅에서 하늘을 바라본 모습을 그려 넣은 천문도의 별자리와 좌우가 바뀐 모습이다.
* 천문의 이치를 공부한 종합 교양인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얼마나 높은 천문지식을 갖췄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대다수 유학자는 천문을 깊이 연구하는 것을‘소도(小道)’라 해서 무시했다. 그러나 4서3경의 하나로 선비들의 필독서였던‘서경’은“순임금이 재위하자마자‘선기옥형’을 만들어 해와 달, 오행성을 관찰했다”는 식으로 천문장치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문중양 교수는“‘소도’ 역시 선비들이 추구하는‘도(道)’가운데 하나로 자연의 도를 담고 있다”며“서경에 관심이 많은 학자들은 반드시 천문을 공부했다”고 설명한다. 한국국학진흥원 박원재 박물관장도“당시 종합 교양인이었던 유학자들의 관심사에는 천문학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라며“‘우주와 하나 되는 것(天人合一)’이 목표였던 유학자에게 별
자리연구는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황 외에 서경덕, 서기, 송시열, 홍대용과
다른 명망 높은 학자들도 제각기 혼상과 혼천의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 3 - 4월 경 일반에 공개
퇴계의 혼상을 복원하는 데 5개월이 걸렸다. 이 번 복원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또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제작한 혼상을 직접 재현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자문역을 맡았던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이용삼 교수는 지난 달 19일 서울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열린 소남천문학사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복원과정을 소개했다. 복원팀은 원형과 똑같이 목재와 대나무로 지평환과‘구球’형태의 구조물을 만들고 한지 위에 별자리를 그려 넣었다. 혼상에 그려 넣은 별자리 역시 당시 사용된‘천상열차분야지도’에 그려진 별자리를 구면에 투영해 위치를 잡았다. 아쉬운 점은 혼상의 정확한 제작시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퇴계의 연보를 살펴보면 한기 8756년(AD. 1559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말년인 1570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전문가들은 현존하는 혼상이 1557∼156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혼상과 혼천의, 선기옥형, 혼의 등 문헌에서 발견되는 명칭들도 혼용되고 있다. 이 번 복원작업을 처음 계획한 안동 문화방송 조현상 PD는“음력 2월 열리는 퇴계 향사(제사)일에 맞춰 복원한 혼상을 도산서원에 기증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기상위성 천상분야열차도 여름철 일기도 천체도
(조선시대) * Daum Blog 인용
◎ 선기옥형璿璣玉衡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재승).
* 천부경의 사상을 담고 있고, 그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용도用道 - 구조에 집약集約되어 있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질서를 본받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있다. 즉 위(천문天文)를 보고 아래(지리地理)를 보며 다음에 자신(인간人間)을 보고 행行하라는 것이다. 형이하학적 용도로써는 천지운행天地運行의 원리를 담고 있는 수리적이치를 바탕으로 7정政(일월日月 +금목수화토성星)과 28숙宿의 운행을 관측하고 4계절 24절기의 기상변동을 예측한다. 이로써 국가적 공공사업이나 사회적 변동을 대비하는 기능을 하였다. 수행이 뛰어나 심안이 계발된 사람이 운용하였으나 이는 천기天機로써 매우 신중하였다. ‘선기는 천체를 관측하다는 뜻이고 옥형은 옥으로 만든 저울을 뜻’한다. 후세에 혼천의渾天儀라고 하였다.
* 선기옥형은 중국의 서경書經 제 1편 우서虞書 제 2장 순전舜傳에 처음 나온다. 순舜 임금이 요堯 임금으로부터 종묘에서 첫째 달 첫째 날 제위를 선양받고 맨 처음 한 일이 선기옥형을 살펴 7정政(해, 달, 금목수화토성)을 바로 잡았다. 그런 다음 하느님(상제上帝)께 제사를 올리고 하늘과 땅과 4시時에 제사지냈으며 산천과 여러 신들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4000년 전 요순시대에 선기옥형이 존재했다면 그 기원은 약 1만년 전 한배검께서 주재주로써 천부경의 진리를 밝혀준 개천의 시대로 본다. 그 후 선군시대로 전승되어온 선기옥형이 요순을 통하여 중국민족에게 전파된 것이다.
*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요순堯舜시대에 이미 선기옥형이 존재했다. 기원은 1만년 전 한배검(대황조)께서 주재주(主宰主, ●)로 천부경의 진리를 밝힌 개천開天의 시대다. 그 뒤 천부의 이치가 원방각(圓方角, ⊗)으로 표현되었던 천부인天符印시대, 복희伏羲임금시대를 거치며 약 5000년 전 지금과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고 본다. 그 뒤 선군시대로 전승되어 요순을 통하여 중국민족에게 전파된 것이다. 현재 중국에 2, 3종이 남아있고, 한국에는 경북 도산서원에 퇴계 이황이 제작한 목제 혼천의와 창경궁의 동재 소형 혼천의가 남아있으며 세계 유일의 기계 추동장치를 응용한 선기옥형이 - 조선시대 현종 10년, 한기 8866년(AD. 1669년) 10월 4일 관상감 천문교수 송이영이 제작 -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중국에서는 고대시대의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說에 기초하여 관측기구를 만들었는데 선기옥형, 혼의기渾儀器, 혼의로 부른다. 한기 7093년(BC. 104년)에 역법曆法을 개량하였는데 관측기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 대한에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고조선시대의 원형(천부인天符印)을 3국시대 후기에 복원하여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 의상조儀象條’ 에 세종의 명으로 정초鄭招와 정인지鄭麟趾 등이 고전을 연구하고 이천李天과 장영실蔣英實이 공역工役을 감독하여 한기 8635년(AD. 1438년) 세종 20년에 혼상渾象, 혼의渾儀 등을 비롯한 여러 천문의기天文儀器를 만들었다. 혼천의는 원元나라의 학자 오징吳澄이 쓴 찬언纂言에 기재된 바에 따라 칠목漆木으로 만들었고 다시 구리를 부어 만들었다. 한기 8745년(AD. 1548년) 명종 3년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혼천의를 만들어 홍문관弘文館에 두었다. 한기 8798년(AD. 1601년) 선조 34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에게 명하여 혼천의를 만들었다. 한기 8854년(AD. 1657년) 효종 8년에는 최유지崔攸之가, 한기8866년(AD. 1669년) 현종 10년에는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潁이 각각 혼천의를 만들었다. 이는 물을 이용하는 수격식水擊式이었는데 송이영이 만든 것은 자명종自鳴鐘의 원리를 응용하여 추錘의 운동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국보 제 230호로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영국의 과학자 일행들이 탐방하였을 때 단장이었던 니덤이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에 모형을 진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혼천의에는 지평선, 자오선, 적도, 회귀선, 극권極圈, 황도黃道 등이 포함되어 있고 두 추의 운동에 의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여러 개의 톱니바퀴로 연결되어 있으며 6합의合儀, 3진의辰儀, 4유의의 3부분과 이것들을 밑에서 받치는 용주龍柱, 별운鱉雲, 십자수준十字水準으로 되어 있다. 한기 8884년(AD. 1687년) 숙종 13년 이민철이 현종대에 만든 것을 중수했으며 한기 8901년(AD. 1704년)에는 안중태安重泰, 이시화李時華 등이 다시 만들었고, 한기 8929년(AD. 1732년) 영조 8년에 안중태가 다시 고쳤다.
아라라트산 오로라 페루 나스카 유적 UFO
노아방주 흔적 * Daum Blog 인용
* 서양에서 최초의 혼천의는 알렉산드린 그리스의 MeteoroskOpion(AD. 140년경)이지만 그 이전에도 고리형태의 기기를 이용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Almagest’ 에서 3개의 혼천의를 말하고 있는데 히파르코스(BC. 146년 - 127년)가 4개의 고리를 가진 기기를 사용했다고 했다. Astrolabon이라고 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기기器機는 눈금이 매겨진 환環 위에 지름 방향으로 배치된 튜브들이 있으며 수직선에 의해 수직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 기기는 천구를 각의 단위로 측정하기 위해 등분된 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D. 17 - 18세기에는 이 기구를 천장에 매달거나 받침대 위에 고정시키거나 손잡이에 붙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다. 아랍인들도 비슷한 기기를 사용했으며 AD. 12세기 유럽에서 사용했던 원형은 스페인의 무어인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 이번에 새로 나온 1만원권 지폐에‘천상열차분야지도’가 인쇄돼 있다.‘천상’ 이라는 말은‘하늘에 있는 모든 별을 총칭’하는 표현이다.‘열차분야’는‘12개의 분야로 펼쳤다’ 는 뜻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해석하면‘하늘에 있는 모든 별을 12개의 분야로 펼친그림’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 그림은 서기 300년 무렵의 고구려 하늘에 나타난 별자리를 평양성에 석각(石刻)해 놓은 것이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이 석각이 사라져버렸다. 그 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백성이‘천상열차분야지도 사본’을 조정에 바쳤다고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은 전한다.
* 조선시대에서는 권근의 감독 하에 고구려 ‘천상도天象圖’ 를 바탕으로 새로운 천상도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가 한기 8592년(AD. 1395년)이었다. 약 1000년 만에 새 천상도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지구의 자전축은 72년마다 1도씩 이동하며 춘분점春分點과 추분점秋分點이 변하게 된다. 이 이동을 세차운동歲差運動이라고 한다. 1000년이면 세차가 14도 정도 변했으므로 이 변화를 반영해 조선 초기에 새 천상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업데이트된 천상도였다.
조선이 권근과 같은 일급 학자를 동원해 새 천상도를 만드는 데 특별히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개국이 하늘의 뜻이었음을 정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것은 쿠데타가 아니라 하늘의 명을 받은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이 천상도였다. 이때 하늘이란 '인격적인 상제' 가 아니라 천문(天文), 즉 별자리를 지칭한다. 천상도는 일종의 왕권천수도王權天授圖였던 셈이다. (Daum Blog, 미주학당 조용헌)
* 조선시대 필사본 천문도‘건상열차분야지도乾象列次分野之圖’는‘건’이‘천’과 같은 뜻이므로 국내 최고 천문도인 국보 228호 천상분야열차지도각석天上分野列次之圖刻石 과 닮았는데 더 제작연대가 빠르다. 고려사에‘탁월한 천문학자 오윤부(? - 1305년)가 일찍이 스스로 천문을 그려 바쳤더니 일자日者(천문학자)가 다 취取하여 이를 본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천문도는 고려 때 천문도를 참고하여 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천상도를 제작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시간과 계절을 알기 위해서였다. 옛날에는 요즘과 같은 손목시계나 달력이 없었으므로 시간과 계절을 알기 위해 하늘의 별을 봐야 했다. 초저녁과 새벽에 어느 별이 떠오르는지를 보고 농사짓는 시기를 파악했다. 천상도에는 이처럼 다양한 의미가 숨은 그림처럼 들어 있다.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재승).
새야 새야 파랑새야 한웅시대 군신軍神 민족경전 갑골문자 천체운행을 관측한
동학농민혁명도 치우천왕 캐릭터 천부경 선기옥형(혼천의)
* Daum Blog 인용 고려 농은農隱 민안부
◎ 천부경天符經
* 81자字로 된 경전經典이다. 민족경전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기호나 부적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주역의 수리학자는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고 한다. 8괘掛, 역학易學, 5행行의 심오한 학문 없이 풀이할 수 없다. 아직 통일된 해석이 없다. 단, 천1 天一, 지2 地二, 인3 人三의 해석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신사기神祀紀' 가 이미 해설한 바 있는데 이 또한 동양고전의 상식적 해설이다. (한단고기, 임승국)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이니 析三極無盡本 석삼극 무진본이고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이라 一積十鉅無櫃化三 일적십거 무궤화삼이니라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이니 大三合六生七八九 대삼합육 생칠팔구하고 運三四成環五七 운삼사성 환오칠하니 一妙衍萬往萬來 일묘연 만왕만래라 用變不動本 용변 부동본이요 本心本太陽 본심 본태양이니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할지니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이니라
* 김백호의 천부경 해설(2007년 9월 중앙일보)
‘천부경(天符經)’은 오묘하다. 그리고 내용도 짧다. 81자의 한자漢字가 전부다. 그래서 간결함 뒤에 흐르는 시적인 여운, 그 울림도 크다.‘천부경’의 유래는 안개 속에 놓여 있다. 단군 시대에 녹도문(鹿圖文·배달국에서 만든 고대 문자로 갑골문자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으로 기록돼 우리 민족 대대로 내려오는 경經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내용은 결코 간단치 않다. 불교에선 270자의‘반야심경’안에 부처의 뜻이 모두 담겼다고 한다. 81자의‘천부경’안에도 그렇게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다.‘천부경’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이란 구절로 시작해‘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이란
구절로 끝을 맺는다. 시작과 끝이 하나란 얘기다.‘선과 악, 양변을 여의라’는 부처님 말
씀도 생각나고,‘나는 알파(시작)요, 오메가(끝)’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최근‘천부경’의 명치를 찌르는 해설서를 만났다. 유儒 ․ 불佛 ․·선仙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김백호(48·단일문화원 원장, www.danil.or.kr)씨가 풀어낸‘천부경(심거 출판)’이다. 그래서 13일 경기도 일산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한 때 그는 출가자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총림의 큰스님으로부터‘깨달음’에 대한 인가도 받았다. 뜻이 있어 다시 산문山門을 나온 그는 문답에 막힘이 없는‘선지식善知識’이었다. 그에게‘천부경’을 물었다.- 왜‘천부경’인가? 사람들은 세상을 평면적으로 본다. 평면에는 중심과 변두리가 있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 난다. 사람들은 늘 중심을 차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주위를 보라. 다 들 그렇게 산다. 그런데 세상의 실체는 평면이 아니다. 둥근‘구(球)’다.‘천부경’은 그 얘기를 하고 있다.
-‘구(球)’라니? 둥근 구에다 까만 점을 하나 찍어 보라. 그게‘나’라는 개체다. 그 옆에 또 하나 점을 찍어 보라. 그렇게 수백, 수천 개의 점을 찍어 보라.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의 점만‘나’ 라고 여기고 살아간다. 그래서 옆의 점은‘남’이 된다. 그게 착각이다.- 착각이라면? 점 하나만‘나’가 아니다. 원구 자체가 바로‘나’다. 그 때는 수백, 수천 개의 점을 찍 어도‘나’가 되는 것이다. 구 자체도 하나의 점이기 때문이다. 개체와 전체는 그렇게 조 화를 이룬다. 이 걸 자각해야 한다. 그 얘기가‘천부경’속에 있다.-‘천부경’의 첫 문장은‘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이다. 무슨 뜻인가? ‘하나는 비롯됨이 없는 하나에서 시작되었다’란 뜻이다. 이‘하나’는 언어와 생각이 있기 전부터 비롯되는‘하나’다. 없다가 생겨난‘하나’가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하 나’다. 만물과 만사의 근원인 이‘하나’를 알면 우주만물을 알게 된다. 그게‘깨달 음’이다.- 어떻게 다섯 글자에 우주의 이치를 담았을까? 굉장한 파워다. 이건 한 마디로 깨달음의 글이다. 진리의 글은 짧으면 짧을수록 더 좋다. 그래서 불교에서도‘선(禪)’이 나온 것이다. 경전의 수가 많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 둘째 문장이‘析三極無盡本(석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천일일지일이인일삼)’이 다. 왜‘천· 지· 인’이 나오나? 본래인‘하나’가 하늘, 땅, 사람의 순서로 쪼개졌다는 뜻이다. 그렇게 삼극(三極)으로 쪼개놓아도 근본 다 함은 없다, 즉 본성은‘하나’라는 것이다.- 그‘하나’는 어떤 식으로 존재하나? 있을 때는 한 덩어리로 있고, 없을 때는 한 덩어리로 없다. 그리고 있음의 한 덩어리와 없음의 한 덩어리가 둘이 아니다. 하나다.
- 그럼 없을 때 한 덩어리로 없음을 아는 이는 누구인가? 없는 그 놈이 안다. 그럼 있을 때 한 덩어리로 있음은 누가 아느냐. 있는 그 놈이 안 다.
- 책에는‘3족오’(三足烏, 발이 셋 달린 까마귀)도 그려 놓았다.‘천부경’과 관련이 있 나? 그렇다.‘천부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본 마음은 본래 태양과 같다(本心本太陽). 높이 밝히면 사람 마음이 천지와 하나가 된다(昻明人中天地一).’ 동이족에게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는‘태양새’였다. 3족오를 보라. 한 몸에 발이 셋 달렸다.‘하나’가 천, 지, 인 의 셋으로 쪼개져도 여전히 한 몸임을 뜻하는 것이다.
- 왜‘태양’인가? 태양은 단순히 밝기만 한 게 아니다. 빛과 함께 에너지도 가지고 있다. 만물을 살릴 수 있는 에너지다. 그래서 고구려의 금동관에 그려놓은 3족오는 단순한 까마귀가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의 실체를 그려 놓은 것이다.
-‘천부경’에는 여러 설이 있다. 선군시대에 녹도문으로 기록됐다는 얘기도 있고, 신라의 최치원이 묘향산 석벽에 전래되던 천부경 전문을 새겨 놓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 걸 근대 에 탁본으로 떴다는 기록도 있다. 어떻게 봐야 하나? 동이족에게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이 선군 때 문자로 기록됐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누가, 언제 썼느냐는 본질이 아니다. 핵심은‘천부경’이 깨친 자의 글이란 사실이다. 크게 깨 치지 않았다면 천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쓸 수가 없는 글이다. 깨친 자리에서 깨친 소리 가 난다. 그리고 그 걸 부대끼는 삶을 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쓸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고조선 때의 종이와 기록이 발굴된다고 해도 결국‘형식’일 뿐이다. 형식에 집착할 필요 는 없다.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Sumer 도시 Iraq유적
경주 첨성대 Ur의 Ziggurat Assur의 신전
* 첨성대瞻星臺(작가 최홍의 1400년 미스터리Mistery 추적)
우리 문화재 중에서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첨성대다. 이 우아한 조형물을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다가 그 구조물을 살펴봐도 용도를 가늠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첨성대의 진실은 무엇일까? 대다수 과학자가 주장하는대로 천문 현상을 관측하기 위한 천문대였을까? 아니라면 실제 용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후손들의 미흡함으로 밝혀내지 못한 의문사일까?
‘첨성대는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메소포타미아 여신女神 섬긴 개인 제단’에서 최홍은 첨성대가 천문대로써는 구조가 너무 불편하고, 3국사기나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이 없으며, 신라왕실과 페르시아 문화가 놀랍게 닮았으며, 첨성대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구라트Zigurat(제단, 피라미트Phyramit는 정상이 뾰쪽하고 지구라트는 평평함)와 닮고, 선덕여왕은 세 명의‘씨내리’를 두고도 후사를 얻지 못하여 다산多産과 성애性愛 상징의 이슈타르
Ishutar(제 1부 제 6화 Sumer편 참조) 여신을 우상으로 삼은 선덕여왕 개인 제단이라고 한다.
첨성대의‘첨’자는‘바라본다와 우럴어본다’의 뜻이 있다. 첨성대를 천문관측기구로 보는 견해는 첨성대를‘별을 바라보는 대臺’로 해석하였는데 우리 민족에게 해와 달 신앙은 있어도 별 신앙은 별로 없다. 칠성신이라 하여 북두칠성을 숭배하기도 하였으나 따로 제단을 만들지는 않았다. 조선시대‘동국여지승람’에‘신라 선덕여왕대에 돌을 다듬어 대를 쌓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그 속이 비어있어 사람이 오르내리며 천문을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첨성대가 천문대로써 역할을 하기에는 매우 불편한 구조다. 첫째, 하늘을 관찰하기에 구조가 불편하다. 둘째, 내부의 형태가 12단까지는 흙과 잡석으로 채워지고 19 - 20단과 25 - 26단은 우물 정井자 형태의 장대석이 걸쳐져있다. 일부러 내부 구조를 사람이 들락거리기 어렵게 하였다. 셋째, 3국사기에 기록이 없다. 3국유사에‘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한 줄의 기록 뿐이다. 넷째, 첨성대를 쌓은 뒤 천문기록이 늘었다는 것은 과장이다. 불교제단설(수미산설須彌山說 - 동양사학자 이용범, 도리천설忉利天說 - 고대사학자 김기홍), 농업신 영성靈性 숭배 박성래설, 규표설圭表說(태양고도측정), 주비산경周脾算經(고대 중국 수학서 상징물) 관련설이 있다. 그러나 규명하려는 의지가 꿰어 맞춘 논리다. 첨성대는 후계자를 두지 못한 선덕여왕이 수메르의 성애性愛와 다산多産의 여신 이슈타르Ishutar(인안나Inanna)를 섬긴 지구라트다. 마니산 참성단과 같은 쓰임새다.
* 해설 - 편저자는 첨성대가 제단이라는 논거는 인정하나 정상의 네모 정자틀에 선기옥형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천문을 관찰한 구조물로 파악한다.
* 마니산 제천대는 천문관측소였다(한겨레신문 2008년 10월 2일 목요일).
한국천문연구원은 대천천문연구원에서‘하늘이 열린 날, 천문을 얘기하다’라는 주제로, 밤 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리던 고대인의 마음과 천문지식을 복원하려는 고천문학 워크셥을 열었다. 토론학자들이 제기한 마니산 참성단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제단의 구조를 보면, 마니산 참성단뿐 아니라 태백산 천제단, 구월산 3성사는 모두 바깥쪽은 원형, 안쪽은 4각형 형태의 독특한 모습인데, 이는‘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아시아 고대인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우주관과 일치한다. 문헌사료로 조선시대 천문연구기관 서운관지에‘특별한 천문현상이 나타날 때 천문학자들이 마니산에 가서 천체를 관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고분의 별자리, 이를 바탕으로 삼은 조선 초기의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면 중국의 별자리와 다르다. 이런 독자적 천문지식의 전통은 고구려가 이어받은 고조선의 천문지식에서 비롯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지구 온난화로 바닷물에잠겨가는 태평양의 섬 투발루와 빙하가 녹고있는 북극
◎ 천기에 관한 신문기사 발췌
* 기상위성 아리랑 3호 - 기상이변으로 기상청 예보관들이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기상청은 ‘100% 정확한 예보는 있을 수 없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라고 항변했다.
지난 (2007년) 1월 29일, 기상청은 이 날 밤부터 새벽까지 1 - 8cm 가량의 눈이 내리겠다고 예보했다. 그러나 0. 3 - 0. 5cm의 눈발이 흩날렸을 뿐이었다. 30일에는 오전에 서해안을 중심으로 약한 황사현상이 있다는 예보를 했다. 황사 발생이 예년 보다 40일이나 빠른 예보였다. 그러나 이 예보도 오보였다. 주말에는 중부와 호남지역에 3 - 10cm의 눈이 내린 뒤 강추위가 닥치리라고 예보했다. 그러나 적설량은 1cm를 넘지 못했다. 기온도 평년기온을 웃돌아 기상청의 예보를 믿고 나들이를 취소했던 시민들의 항의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이처럼 일기예보가 빗나가는 데에 대하여 기상청은 지구온난화와 엘니뇨 등에 의한 이상기온 현상과 서해상공에서 수시로 급변하는 대기 흐름 때문에 일어나는 불가항력적 한계로 설명했다. 실제로 강수 유무 정확도는 27일은 76. 0%, 26일은 64. 0%였다.
남극 세종기지 앞 바다의 빙벽이 지난 50년 동안 1km 가량 사라졌다.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956년 - 1984년에 년 간 6m씩 사라지던 빙하가 1994년 - 2001년에는 년 간 81m씩 사라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북극의 아일랜드에는 빙하가 녹아 새 땅이 형성되었다. 빙하가 녹음으로써 해상수송로가 트여 미국과 소련은 해상로를 선점하려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난 100년 간 지구온도는 평균 0. 6도 상승했고, 남극은 평균 2. 5도 - 2. 6도 올라 기후 변화가 민감하다.
* 뜨거워지는 대한 - 올 겨울 한강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얼지 않았다. 30년 뒤 서울 기온은 현재 대구와 비슷할 것이다. 2040년 서울 기온은 평년 보다 1. 9도 높아진다.
* 대한과 세계의 자연재해 피해액 : 1960년 - 1969년, 대한 1조 670억원 / 세계 87조 5000억원. 1996년 - 2005년, 한국 18조 1814억원 / 세계 575조 5000억원
* 또 양치기 소년 된 기상청, 2007년 3. 5일자 중앙일보 : 3월 초순의 기온이 평년 보다 높고 3월 중순은 평년과 비슷하겠다(2월 3일 기상청 1개월 예보).
3월 6 - 9일 최저기온은 평년 보다 3 - 6도 낮을 전망이다(3월 5일 기상청 예보). 그러나 하루 새 기온은 15도가 떨어졌다.
2월 22일, 내일 우리나라에 강한 황사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23일 화창하고 맑았다. 황사는 서해안으로 내려가 제주도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1월 26일과 30일에는 서울에 폭설을 예보했지만 쌓인 눈은 없었다.
2월 17일에는 남부지방에 비교적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에 설 귀성객들이 긴장했으나 실제 강수량은 5mm에 불과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선진국들도 기상예보의 정확도는 85% 정도며 우리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 서해안 파도 : 2007. 3. 31일 새벽 1시 50분께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인근 바다에서 20여분 간 높이 5 - 7m의 파도가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국지성 해일로 서해안에서 4명이 죽고 상가 200여 채가 파손 유실되었다.
* 황사 : 2007. 4. 1일 봄꽃축제가 한창인 시기에 중국 발 황사가 들이닥쳤다. 농어가는 세척장비로, 학교는 휴교 조치를 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발원지인 중국 북쪽과 몽골 남쪽의 모래바람이 북서풍을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고 했다. 황사는 해마다 늘어가는 추세다. 한국의 피해는 직접적이고 일본은 한국의 1/3 정도며, 황사는 미국 서부지방까지 날아간다. 주변 국가들이 사막화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 나무심기 등 활동을 하고 있으나 속수무책일 뿐이다.
* 온난화 최대 피해지역은 아시아 : 인류가 멸종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유엔 산하 IPCC(유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2007. 4. 6일 발표할 <기후 변화 2차 보고서>에서 일부 과학자들이 이같이 경고했다. 대륙별 피해 상황에서 아시아지역은 히말라야 빙하가 녹아 홍수 위협이 증가하고 물 공급체계가 파괴된다. 델타지역 대도시 범람 가능성이 높다.
* 대한의 온난화 : 나주의 배가 충북의 천안에서 재배되고, 제주도의 감귤은 나주에서 재배한다. 남해안의 유자가 강원도에서 재배되며 제주도 바닷 속에는 열대어가 서식한지 오래다.
* 세계적 금융그룹 모건 스텐리 보고서 : 기후 변화가 향후 세계경제를 주도할 가장 큰 요인, 대한은 산유국이 아닌데도 미국, 호주, 폴란드와 함께 기후 변화에 가장 취약한 그룹. 기후 변화 적응력은 뛰어남. (2007년 10월 동아일보 횡설수설)
* 일기예보는 디지로그로 완성된다, 2007. 4. 6일 동아일보 : 첨단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적 직관과 경험. 슈퍼컴 예보, 디지털 예보. 일기예보의 정확도에 대한 기대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첨단기술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아날로그 요소들이 일기예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데이터와 경험의 충돌, 슈퍼컴의 서로 다른 데이터, 관측 결과 해석 등등
* 천기를 읽는 자者 세계를 경영한다, 날씨가 지배한다의 저자 도이치의 프리트헬름 슈바르츠는 세계 경제활동의 80% 이상이 날씨의 영향을 받으며 그 규모는 약 25조 1870억 달러(2경 3527조 1767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대한민국은 기온 상승으로 인한 피해 규모 세계 최대, 5년 간 27조 9800억원. 태풍 비중 건 수 8%이지만 재해액은 64%.
새야 새야 파랑새야 한웅시대 군신軍神 민족경전 갑골문자 천체운행을 관측한
동학농민혁명도 치우천왕 캐릭터 천부경 선기옥형(혼천의)
* Daum Blog 인용 고려 농은農隱 민안부
*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 천문을 연구하고 기록한 사례가 3국사기와 3국유사에 240개, 고려사에 5000여 건이며, 조선왕조실록은 무려 2만 건의 하늘 관찰연구를 기록하고 있다. 2만 건은 하루 한 번씩 관찰하였다고 가정하면 54년 10개월이 걸린다. 1604년 초신성 기록은 7개월 동안 130회를 기록하였다. 광도 변화 자료로써 케풀러의 관찰과 매우 흡사하여‘케풀러 초신성’은‘조선초신성’이 되어야 한다. 고대사서에 700 건의 오로라현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유럽의 기록 보다 많고 체계적이다. 이를 도표화하면 1000년 전부터 오로라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태양흑점 변화를 연구할 수 있다. 이 또한 고려 숙종 10년(1105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는데 이에 비해 서양은 400년 관측역사일 뿐이다. (중앙일보 07. 9. 7 금요일)
* 기후변화는 환경문제가 아니라 안보 ․ 경제문제다 : 2008년 7월 일본 홋카이도에서 G8(서방 선진 7개국 + 러시아) 확대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 정상선언문 발표 (John Ashton 영국 기후변화 특별대사 연설)
* 2008년 5월 12일 낮 중국 쓰촨성 대지진 : 32년만에 일어난 진도 7.8의 대지진, 피해액 1500위안(22조 5000억원), 사망실종 7만여 명, 부상자 25 - 30만여 명
* 2004년 12월 23일 인도네시아 쓰나미 : 23만여 명 사망
* 2008년 5월 미얀마 이라와디 3각주지역을 강타한 싸이클론 나르기스는 13만 8000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40만의 이재민과 재산 피해는 49억(5000억원)달러.
* 2008년 9월 미국 아이크태풍 피해, 2008 중국 베이징올림픽 인공강우와 쓰촨성 지진 사망 30여만 명, 미국 토네이도, 해일, 홍수 등
미륵불 전남장성 고봉 기대승 학술원과 빙월당 해남 대흥사미륵불
(조선시대 정조 하사下賜 빙심설월氷心雪月) * Daum Blog 인용
◎ 운곡선생과 선기옥형 복원
전남 장성의 고봉高峰(기대승)학술원에서 운곡선생을 필두로 선기옥형을 복원하는 모임이 결성되어 있다. 운곡선생은 선비로 자처하며 기이한 행적을 보이는 사람으로 지난 70년대부터 민족사학자들에게 알려졌는데 평생을 민족역사와 그 복원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선기옥형 복원은 설계도가 완성되었고 모형을 만드는 단계로 파악되었으나 연구 개발이 극비로 공개되지 않아 구체적인 정황은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근래에 정부의 몇몇 부처에서 선기옥형 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가 있고 개발비를 투자하였다는 말도 있으나 확인하지 못하였다. 운곡선생을 면담한 기자의 말로는 운곡선생이 세간의 소문처럼 기이한 인물이 아니고 한국고대사와 특히 천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일생을 헌신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선생은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국자랑, 천지화랑 - 국자랑들이 출입을 할 때 머리에 천지화(무궁화)를 꽂았으므로, 선뵈 - 선배 - 선비’, 고구려의‘조의’, 백제의‘싸울아비’, 신라의‘화랑’ 그리고 조선시대에는‘선비’의 맥을 이었다고 말했다.
# 도깨비기자, 컴퓨터 자료에서 눈을 떼고 차창으로 흩어지는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대한방송 본사 기획실 탐사기획기사 브리핑 회상)
정보팀장 : (도깨비기자에게) 자네의 기획의도는 충분해. 윗선에서도 이해하는데 … 기자가 개입하기에는 너무 민감한 사건이라고 판단하고 있어. 문제가 일어나면 난처하거든.
도깨비기자 : 그 거야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늘상 있는 일 아닙니까?
정보팀장 : 이번에는 더 신경이 쓰이는가봐.
최기자 : (도깨비기자를 돌아보며) 냄새 하나는, 깜이 확실하다는 말인데 …. 민감하다? 구 미가 동하는데요.
정보팀장 : (정색을 하며) 농담할 때가 아니야!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선다.
도깨비기자 : (따라 일어서며 단호하게) 기획안은 올리겠습니다.
# 잠시 뒤 열차가 서고 도깨비 기자 가방을 챙겨들고 기차에서 내린다. 전남 장성역. 도깨비기자가 탄 택시가 한적한 들녘 농로로 달린다. 왼쪽으로, 장성군을 관통하며 흐르는 황룡강을 끼고 있다. 택시, 황룡강 둑길로 달리다가 작은 마을길로 들어선다. 마을 뒤편 왼쪽 낮은 산 구릉에 잘 생긴 금강송들이 늘어서고 그 밑자락에 가지런하게 가꾸어진 산소가 몇 기, 그 아래로 제각祭閣으로 보이는 건물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선생 일가一家의 제각이다. 고봉은 퇴계 이황선생과 치열한 4단端7정론情論으로부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논쟁하였던 호남학파의 큰 학자다. 제각 앞에서 택시가 선다. 택시에서 내려서자 몇 방울 비가 얼굴에 떨어진다.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 비가 시작되었나 보다.
‘고봉학술원高峰學術院’. 대문이 열리며 한복을 차려 입고 우산을 받쳐든 사람이 도깨비기자를 맞는다. 대문을 들어서니 정면에는 댓돌이 높은 살림집, 왼쪽에 연못 - 대나무통으로 만든 물길을 따라 물이 흐르는 연못이 있고 오른쪽에는 ‘애일당愛日堂’ 현판이 걸려있다. 다탁茶卓 앞에서 운곡선생이 도깨비기자를 맞는다.
운곡선생 : (방석자리를 권하며)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운곡입니다.
도깨비기자 : (마주 절하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불쑥 찾아와 비례가 아니될지 미안합니 다.
운곡선생 : (차를 따라 권하며) 과학부 최기자의 요청으로 다소간 자료를 보냈는데 보내드 린 자료는 ….
도깨비기자 : 바쁘게 오느라고, 차 안에서 읽었습니다.
운곡선생 : 대전대회의 무산은 안타깝습니다. 대회 캐릭터들은 과기부 요청으로 저희들이 제작한 것입니다. 캐릭터 해킹이 대회를 취소할만한 사건이라고 생각지 않는데 ….
도깨비기자 : 외람됩니다만, 캐릭터가 일단 일반에게 공개되면 일정 부분 비밀 유지는 포기 한 게 아니겠습니까? 정부에서 너무 민감하게 대처하였다고 생각하는데 공개하지 못한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까?
운곡선생 : (벽면에 걸린 천부경 모사본, 선기옥형 모형, 천상분야열차지도 모사본, 치우천 왕상 캐릭터, 3족오 깃발, 무궁화위성 확대 사진을 낱낱이 가리키며) 아시겠지만 요체는 선기옥형일겝니다.
도깨비기자 : 연관이 있다고는 추정하였습니다. 선기옥형은 환인천왕이 하늘에서 가지고 내 려온 3개의 천부인의 원형입니다. 이를테면 저희들의 복원작업도 선기옥형의 원형을 찾 으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선기옥형을 복원하거나 원형을 찾으려는 노력은 꾸준히 지 속되었습니다만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근래 여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선기옥형을 놓고 몇몇 나라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대전엑스포 캐릭터 해킹사건은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선기옥형의 복원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운용이 문제입니다. 장수가 태어나면 명마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합니다만 저는 백락(伯樂, 명마를 알아보는 천하의 말 관 상쟁이)을 쫓지 못하였습니다.
도깨비기자 : 요즘 부쩍 잦아진 지진, 쓰나미, 터미네이토, 홍수 등 천재지변이 그 직접적 이유입니까?
운곡선생 : 몇 년 전 소련 잠수함 한 척이 북극 아이슬란드 해역을 탐색하다가 좌초된 일이 있었습니다. 핵잠수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승무원이 200여 명 타고 있었습니다. 조난 신 호를 받은 영국과 노르웨이 정부에서 근처에 있는 잠수함을 동원하여 구출하려고 하였 는데 소련 당국이 거부했습니다. 소련이 구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구조 도움을 거절한 것입니다. 끝내 잠수함의 승무원들은 희생되었지요. 국제적으로 비난이 일었습니다만 소련정부는 함구했습니다. 소련정부는 잠수함이 가지고 있는 극비자료를 승무원의 생명 과 바꾼 것입니다. 지리, 생태 그리고 자원정보들이 있었지만 그 정보의 핵심이 기상정 보입니다. 세계는 막하 기상전쟁 중입니다. 지금 하늘에는 수백 개의 기상위성이 떠 있 습니다. 남극에는 26개 나라가 기지를 설치하여 서로 선점하려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천기를 아는 자 세계를 경영한다’ 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선기옥형 복원에 일 생을 바쳤지만 아직 때가 아닌가 봅니다. 장수將帥가 태어나면 명마名馬가 출현하는 게 하늘의 이치입니다. 선기옥형을 복원해도 읽을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지요. 선기옥 형은 한국에 3개, 중국에 2개가 남아있습니다. 이 모두가 모형입니다. 역사 기록에 의 하면 고구려 주몽왕이 소서노와 헤어질 때 선기옥형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주 몽왕은 선기옥형 모사품을 100개 만들어서 주변 열국시대 국가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에도 선기옥형과 비슷한 천문 관측기구가 남아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 중화시 탁록현에 3조당祖堂이라는 중국인들의 역사적인 시조 사당이 있는데, 염제신농과 황제헌원 그리고 치우천왕을 모신 사당입니다. 원래는 태호복희가 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치우천왕을 모셨지요. 중국인들은 치우천왕을 자기들의 역사적 시조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역사를 자기들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거지요. 몇 년 전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에 한국이 주목할만한 그림 한 폭이 있습니다. 고조선의 한 웅시대 14세 천왕 자오지한웅 즉 치우천왕의 탁록전쟁도입니다. 그림 안에 선기옥형이 등장합니다. 3국지 제갈량의 동남풍은, 신비한 이적이 아니라 일생 동안 살면서 기후변 화를 관찰한 결론입니다. 현대 과학이 인공구름과 인공비를 만드는데 이는 아이들의 소꿉장난이지요. 선기옥형은 기후변화에 대응하여 인간을 구제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 입니다. 역사는 - 무기의 지배, 기계의 지배, 이념의 지배, 경제의 지배, 지식의 지배로 발전했는데 미래는 기후가 인류의 생활을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한참 동안 벽면을 응시하고 있다가) 인도의 시인 타고르를 아시지요?
고봉학술원 강좌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 Daum Blog 인용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세계의 밝은 빛이 되리라
# 장성의 고봉학술원에서 운곡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KTX 안의 도깨비기자. 승객들이 많지 않다. 이따금 가판대를 밀고 드나드는 홍익회 판매원이 지나갈 뿐, 밤 기차 안은 고즈넉하다. 멀리 더러는 가까이 불빛들이 명멸한다. 이맘때 쯤이면 - 고향에서 어린시절 해거름이면 동무들과 신나게 뛰어놀다가 동무들이 하나씩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이제 막 켜지기 시작하는 불빛들이 출렁인다. 상념을 지우려는 듯 머리를 흔드는 도깨비기자. 창 밖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는다. 자오지환웅, 2002월드컵축구 때 새롭게 떠오른 인물. 붉은악마가 자오지한웅을 캐릭터로 만들어 응원을 펼친 게 자오지한웅이 새롭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인들에게야 그저 도깨비 형상으로 각색된 치우천왕으로 알려졌겠지만 역사학을 전공한 도깨비기자에게는 새로운 이미지의 인물로 탈바꿈했다. 치우천왕이 도깨비 캐릭터로 환생을 했다. 도깨비기자가 탐색하려고 하는 선기옥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금방 만나고 나온 고봉학술원의 운곡선생은 치우천왕과 선기옥형의 관계를 명확하게 연관시켜주었다. 대한고대사에 관심이 없었던 역사학도라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현대사를 몸으로 살려고 했던 젊은 패기로만 대학생활을 하였기에 고대사에는 너무 무력했다. 대한고대사에 관심이 없었기에 자오지한웅이라는 치우천왕에 대하여 아는 게 없었다. 추적하려고 했던 선기옥형에 대한 한계가 들어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