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가세보, 이천만 현대적편집가계보

이천만가의 현대식족보 전가세보

북새 2018. 3. 16. 09:21

 

 

           전가세보傳家世譜 약보略譜
           (2013. 9. 20 금요  이천만 기록)          * 사진과 화보 추후보완

 

□ 시조始祖
* 이한李翰 : 전주全州이씨李氏 시조始祖
  신라시대 문성왕 때 사공司空(정승 벼슬이름)
* 이회李懷 : 익양군파益陽君派 시조
  조선朝鮮 제 10대代 중종대왕中宗大王의 15남男 11녀女 중
  제 8남男 익양군益陽君
. 익양군의 어머니는 숙의淑儀 남양南陽 홍씨洪氏
. 경기도 파주군 조리곡면條里谷面 시래동時來洞 대국령大局嶺에 선영先塋
* 시조始祖 계보系譜(1세世 = 0대代) 이한李翰
 (* 시조 이한 윗대의 계보系譜는 인터넷 검색)
 1대代 자연自延, 2대 천상天祥, 3대 광희光橲, 4대 입전立全, 5대 긍휴兢休,   6대 염순廉順, 7대 승삭承朔, 8대 충경忠慶, 9대 경영景英, 10대 충민忠敏,   11대 화華, 12대 진유珍有, 13대 궁진宮進, 14대 용부勇夫, 15대 인璘,
 16대 양무陽茂, 17대 목조穆祖(안사安社, 태조太祖 이성계의 고조부高祖父),
 18대 익조翼祖(행리行里,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曾祖父),
 19대 도조度祖(춘椿, 태조 이성계의 조부祖父), 20대 환조桓祖(이자춘李子         春, 태조 이성계의 부父), 21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 17대 목조穆祖부터 ‘조祖’가 붙어 이름 지어진 것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왕이 되면서 고조부까지 조상을 추존追尊한 것임
* 이천만은 시조始祖 이후 26대代 손孫이고, 파시조派始祖 익양군 이후 16    대代 세손世孫, 이규李赳는 시조 이후 27대(810년) 손이고, 파시조 이후     17대(510년) 손孫

□ 항렬行列
훈자지薰字之 규자이揆字以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 성행수자지成行洙字之 용자이鎔字以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 성행成行 훈薰(이종구), 구九(이천만), 우雨(이규), 형珩(이아라한), 성成과 기起, 용庸, 재宰, 정廷, 규揆, 수洙와 병柄, 열烈과 기基, 현鉉과 영永, 종種과 연然, 규圭와 용鎔

 

□ 왕조연표王朝年表(족보族譜 1권 21쪽)
목조穆祖(이안사, 신라시대 벼슬 사공司空, 전주全州 건지산乾止山 선영先塋),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이자춘, 고려시대 오랑캐와 왜구의 침입 격퇴로 공이 큼, 정승에 준準하는 벼슬을 하사받은 함경도 지방 호족豪族), - 태조太祖(이성계, 압록강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과 정몽주 등을 척살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조선 건국), - 정종(태조의 장자長子), - 태종(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원), - 세종(한글 창제), - 문종(병약하여 요절夭折), - 단종(문종의 장자였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양위讓位,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귀양, 사사賜死), - 세조(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단종이 양위), - 예종(덕종, 수양대군의 장자가 일찍, 20대에 죽어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름, 그러나 이 또한 일찍 병사病死), - 성종(수양대군의 장자의 둘째 손자 자산군, 한명회의 사위, 첫째 월산군은 병약하여 제외) - 연산군(박원종이 주도한 중종반정으로 퇴위), - <중종>(파시조派始祖 익양군의 아버지, 성종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부흥시대), - 인종, 명종, 선조(임진왜란), 원종, 인조(병자호란), 효종(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감, 북벌北伐정책), 현종, 숙종, 경종, 영조(사도세자의 할아버지), 장조(진종), 정조(사도세자), 순조, 문조, 헌종, 철종(강화 도령), 광무, 융희(일제 식민시대)

 

□ 세가世家 (운교雲橋, 구름다리 집)
전남 고흥군 남양면 중산리 운교 3반. 집터는 이 장로長老(중산교회 → 운산교회)가 살던 세가世家로 천방산의 세 번째 줄기가 내려 뻗어 마당에 거북바위로 뭉쳐져 있어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짐. 집 앞 산(선산先山, 천방산의 네 번째 줄기, 다섯 번째 줄기는 4반의 옥녀봉), 선산 정상에 증조부모, 조부모 그리고 능선을 타고 내려와 남해가 보이는 양지에 부父 선영先塋. 요절한 둘째 동생 정섭의 묘는 부친 묘역 아래, 선산의 정기는 천방산의 4번째(천방산의 맥脈은 모두 다섯 줄기로써, 첫 번째는 맷돌바위가 있는 2반 뒷산, 두 번째는 샛골, 세 번째 줄기는 집터로 내려와 마당 거북바위로 맺히고, 네 번째는 선산 줄기로 용두상龍頭相, 다섯 번째는, 용의 날개로 옥녀봉에서 한 줄기는 남양산성(조선시대, 과역은 역말이고, 남양산성은 역마驛馬를 기른 마장馬場)으로 그리고 또 한 줄기는 4반에서 진등(긴 등처럼 생긴 언덕)을 거쳐 5반까지 뻗어내린 맥脈, 선산에 올라 주위 풍광을 보면 천방산의 다섯 갈래 맥이 마치 한자의 <물勿>자字 형국이며, 안산이 밥그릇이라면 개가 밥그릇을 향해 입을 대고 엎드려 있는 모습임, 우리 선산은 풍수지리상, 용의 머리나 개의 머리에 해당됨.
증조할아버지가 고흥 자추에서 이사를 와서, 애초에는 5반 들머리(국도 변邊, 732번지)에서 살다가, 3반 이 장로(156번지, 이 장로는 친척임)가 함경도로 이사를 가자 집을 매매하여 이사함, 고흥에서 전입할 때는 5반 들머리(옛 남양서교 터 맞은 편 안산 자락 밑 굽이 국도 변)에 집이 두세 채 있었는데 거기에서 주막을 했음(추정推定인데, 고흥 자추에서 살 때 가세가 기울어져 운교로 이사를 했다고 추측됨, 운교 5반 주막에서 재산을 모아 3반 이李 장로長老 집으로 이전했음)
* 고조부高祖父 (원적原籍에 기록이 없어 족보에서 찾는 중)
* 고조모高祖母 (족보에서 찾는 중)

 

□ 증조부曾祖父
  (이일수李日洙. 족보 이름, 함자銜字 또는 휘諱 = 용현鎔顯)
* 전주이씨 파보派譜 제 3권 89쪽(이천만 소장所藏)
* 계유癸酉 1월 15일 생生, 갑진甲辰 12월 29일 156번지에서 입적入寂
  용현鎔顯은 증조부의 족보 함자銜字, 본명은 이일수李日洙, 무녀독남
  남양면사무소 원적原籍 참조, 절충折衝 겸 오위장五衛將 (무반武班)
* 운교 2반 박씨가 말잡이였으며 말을 타고 고흥읍내 출입하였음, 이천만이 어린시절에 한적漢籍이 마루방에 가득했으나 과수원 배 봉지로 소멸됨, 자필 문적文籍도 많았음,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말씀으로, 흰 콩과 검은 콩으로 주역周易을 하였다함, 고흥 자추에서 운교로 이사 옴, 가세가 기울었으나 양반 선비로써 운교 2반 박씨를 말잡이로 흥양현 관아官衙에 출입하였음
* 족보에서 증조모를 숙부인淑夫人으로 지칭한 것을 추정하여, 숙부인은 조선시대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封爵이었으므로, 향직鄕職이었더라도 높은 벼슬의 선비였음
* 운교 천방산 선영에 증조모와 쌍분雙墳

 

□ 증조모曾祖母
  (정하동鄭河東 - 족보에서는 여자 이름을 기록하지 않음으로 이름 기록      없어 하동정씨로 이름을 대신 기록 예측)
* 족보 - 정미丁未 생生, 원적 - 개국 464년 10월 15일 생, 족보에는 소화召和(일본년호) 13년 5월 17일 오전 4시 156번지에서 입적, 원적은 소화 11  년 5월 17일 오전 4시 본적지에서 입적(* 원적의 기록을 우선하여야 함)
* 족보族譜에 숙부인淑夫人으로 하동河東 정씨鄭氏며, 성함은 정하동鄭河東,  부친은 수문장守門將(흥양현興陽縣, 현 고흥군 무장武將) 호현虎鉉(원적原籍에는 부친 정내삼鄭乃三과 모친 김학순金學順의 장녀長女임)의 딸
* 선영에 쌍분

 

□ 조부祖父
  (이진기李鎭基, 족보 이름, 함자銜字 또는 휘諱 = 근회根洄)
* 이진기李鎭基(족보 - 신묘辛卯 6월 10일 생生, 원적 - 개국 490년 6월 11일 생生, 1967년 1월 12일 오전 3시 156번지에서 입적)
* 근회根洄(조부의 족보 함자), 1남 1녀의 장남, 부친을 따라 운교 5반 주막거리(732번지)에 이거하여 장사로 생계를 이었으며 차츰 부를 이뤄 3반 이 장로가 함경도로 이사를 하자 집을 물려받았음. 집터가 천방산 주봉의 맥으로써 마당에 거북바위가 있으며 마을 부자였음. 논이 30여 마지기, 밭은 3반 동네 앞뜰 대부분 그리고 산도 5군데가 있었음. 집 뒤 교회터를 희사함. 명절이면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 고기(명절 때 쓰려고 기른 돼지를 한두 마리를 잡아), 김과 떡을 선물함. 반공포로 석방 때 마을에 배당된 불우한 이북 반공포로 2명을 일꾼으로 거두어 자수성가自手成家시킴. 상일꾼 2명, 소 2 마리, 깔담살이, 식모(점순이, 먼 친척 누나, 성장하여 출가시킴)를 두고 살았음. 술 잘 하고 기골氣骨이 장대하였으며 인정이 많았음. 손孫이 외로운 1남1녀의 가세를 일으키기 위하여 한다하는 명문名門의 청혼을 거절하고 다산多産 가정을 골라 혼인함으로써 자손 번영의 기틀을 마련함. 선비요 무반武班이었던 증조부가 가세가 빈곤하여 공부를 시키지 않아 일자무식이었음. 여자 동생 한 분(이천만으로는 고모할머니)이 있었는데 행방불명되었으며, 일제의 정신대에 강제로 끌려갔으리라 추정됨
* 할아버지의 초상화가 할머니 초상화와 함께 고흥집에 있었는데 분실되어 아련하게 모습만 기억하고 있음, 장군의 후예後裔답게 기골이 장대하고 거친 수염이 마치 삼국지의 관운장처럼 있었으며, 어린시절 그 수염을 잡고 놀았던 기억이 있음, 눈썹도 억세고 수염처럼 튀어나온 눈썹이었음

* 선영에 조모와 쌍분

 

□ 고모 할머니 - 조부(이진기)의 여동생, 이천만으로는 고모할머니가 한 분 계셨는데 행방불명되었음, 추측으로 일제시대 정신대 등 강제 연행이 아닌가 추측함

 

□ 조모祖母 
 1970년대 설날 서울 할머니 뵈러가서,(왼쪽 윗줄로부터) 규섭, 경섭, 귀예, 만섭,
            아래 줄에 천만, 처 문자와 장남 규와 할머니
* 김점순金占順 (광무 光武 6년 3월 16일 생, 1990년 8월 3일 밤 8시 156번지에서 입적入寂, 8월 6일 교회식 장례 선산에 안장安葬)
* 원적原籍 김녕김씨金寧金氏 (* 족보族譜에는 김해김씨로 되어 있으나 추적한 바 원적이 옳음)
* 부친父親 김치홍金致洪, 모친母親 신소심申小心의 장녀
* 고흥 팔영산 아래 점암면 김녕김씨 집안에서 시집옴. 부친 치홍致洪은 흥양현(고흥현)수문장, 풍모風貌가 유덕有德하여 위엄이 서리고, 성격이 깔끔했으며, 집안을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함. 제랑弟郞으로 정00(여우 목도리 등 가죽장사, 과역에서 살았음, 정학수 광주시 초등교장의 부친), 김천수(고흥읍내 생선장사), 월악 아니면 도화에도 남동생 등이 있었음. 조선시대 여인상의 귀감龜鑑이었음. 자손의 번영을 위하여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새벽에 샘골 치자샘에서 정화수를 긷고 목욕재계하고 안산에 해가 뜰 때까지 삼시랑, 하눌님에게 치성 드림. 삼시랑 등 무속巫俗, 무당巫堂, 하나님, 부처님을 모두 섬기는 다신교적多神敎的 신앙
* 선영에 쌍분雙墳

 

□ 부父親

 * 여순반란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운산교회에 야학당을 열어 청년들을  가르치던 시절이라 예측, 인근 여러 고을에서 청년들이 모여들었음, 외숙外叔들은 우리 집에서 하숙하며 공부함, 만 18세 동갑 신랑 신부 결혼, 결혼사진 배경은 운교 3반 본가 추정(이천만의 돌사진과 배경이 같음),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았음

* 부친의 遺品, 충정공 민영환의 절죽도絶竹圖, 작은 방(부모) 벽에 화병 그림, 정읍사 서예와 함께 표구되어 걸려 있었음
* 이종구李鍾九 (독남무녀, 족보 - 을축생乙丑生, 원적 -  단기 4258년 (서    기 1925년), 大正 (일본년호) 14년 5월 27일 生, 2003년 서거逝去 - 겸면    초교 재직 시) 단기 4277년 7월 11일 배일엽과 결혼, 부부 동갑
* 양훈良薰 (부친 족보의 함자, 본명은 종구鍾九), 여순반란으로 조선대학교를 중퇴함. 낙향하여 중산교회(후일 운산교회, 운교교회)에 야학을 개설하여 인근 청년을 지도하였음. 교회에서는 성가대 지휘와 반주를 하였음. 어린이 성경학교 교장을 도맡음. 풍금은 찬송가의 4부를 능란하게 연주하였고 퉁소, 키타 그리고 그림과 붓글씨가 탁월함. 여순반란군이 교회를 불태우고 성경을 훼손하는 것을 막으려다가 반란군에게 쫓기고, 그 사건을 빙자하여 우익 경찰이 부역附逆으로 몰아 양 진영에서 모두 피해를 봄. 뒷간(변소) 안 볏집더미 속에 은신처를 만들어 지내다가 여의치 않아 사두실 산 속에 굴을 파고 살면서 피해다녔으나 수복 후 경찰이 부역자로 낙인을 찍어 통나무에 세워놓고 매질을 하는 등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여 빈사 상태가 되자 시체를 거적에 말아 남양지서 앞 개울에 던져놓고 시체를 가져가라고 통고함. 시체와 다름없는 아버지를 점심을 이고 간 할머니가 우마차로 거두어 기사회생하였으나 그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책과 풍악 등 예술활동 뿐 농사를 모르는 한량생활을 함. 배샌(일본어로 배가 나온 샌님 또는 선생님이라는 뜻), 배보상이라 할 만큼 배가 나왔으나 운동을 좋아하여 건장하였음. 나무를 사랑하고, 꽃을 가꾸며, 이웃들을 돕는 자선활동으로 일관했으며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과 교회 일에 헌신함. 일체 가사를 모르고 농사를 안 함.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자녀 교육에 헌신적이었음. 그래서 가산이 기울어 어려운 가운데서도 10 남매 모두 학업을 독려함. 할아버지 별세 후 감농을 못하고, 설상가상 2년 간 흉년이 들자 갑자기 가사가 기울어짐.
* 선산 자락 동남향, 운산교회 뒤편, 남해南海가 보이는 명당明堂에 모심

 

<자손子孫>
1. 장남 천만天滿
2. 2남 정섭正燮 : 천만과 두 살 터울, 남양초등학교 졸업 때 교육감상 수상(전교 1등),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장학생 입학(전 과목 수秀, 입학원서를 제출했는데 접수계가 성적이 최고라며 칭찬), 미술부 활동, 학동, 현재 조대의대 자리에서 나하고 자취하던 중 고등학교 2학년 때 병사病死, 서석동 김록고병원(당시 최신병원) 진찰했으나 병명 미상未詳, 지금 생각하면 암이 아니었나 추측, 병이 악화되자 고흥으로 보냄, 4월 1일 과역병원 입원 약 한 달만에 병사, 선산 부친 묘소 발치에 분묘, 병사한 날이 만우절이어서 2012년까지 추모했음, 할아버지 닮음, 내 가족앨범에 영정 있음
3. 갑례甲禮(첫 딸이란 의미), 4. 만섭滿燮, 5. 경섭京燮, 6. 규섭圭燮, 7. 규예圭禮(영아), 8. 규숙圭淑, 9. 정진正眞, 10. 우섭又燮(또 아들이란 의미)

 

□ 모母親

* 옛집古家의 어머니와 이천만의 돌 사진
* 배일엽裵一葉, 原籍 성주배씨星州裵氏 (족보族譜 대구배씨大邱裵氏), 원적 - 단기 4258년(서기 1925년), 소화 2년 2월 14일 출생(陰 8월 22일, 부친과 동갑, 을축 생)
* 주민번호 : 270214 - 2637816
* 고흥군 동강면 대섬竹島 (족보 - 부친父親 찬범贊凡, 별명 외불이 = 외 불알, 원적 - 부친 裵坤不, 모 金奉愛의 5남 4녀의 장녀, 죽도竹島(현재는 간척으로 육지화)에서 고을 富者(대섬竹島가 통째로 외가 소유였으며 건너편 뭍 병동과 장월에 토지가 많았음) 배씨 집 9남매 중 장녀, 동강초등학교 졸업, 외척外戚들처럼 氣骨이 크고 건장함

<이후는 형제자매 가계家系 기록란>

 

전가세보傳家世譜 (족보族譜)

 

전주全州 이씨李氏 익양군益陽君 (회懷 함자, 시조始祖 목조穆祖, 사공공司空公 - 신라시대 벼슬, 이래 27대 손孫, 조선왕朝鮮王 제 10대代 중종대왕中宗大王의 15남男 11녀女 중 제 8男, 어머니 숙의淑儀 남양南陽 홍씨洪氏, 경기도 파주군 남 20리 조리곡면條里谷面 시래동時來洞 대국령大局嶺 아래 선영)파派 16대代 (천만 天滿 기준, 규와 유는 17대손) 세손世孫

 

□ 항렬行列
훈자지薰字之 규자이揆字以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 성행수자지成行洙字之 용자이鎔字以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 성행成行 훈薰(이종구), 구九(이천만), 우雨(이규), 형珩(이아라한), 성成과 기起, 용庸, 재宰, 정廷, 규揆, 수洙와 병柄, 열烈과 기基, 현鉉과 영永, 종種과 연然, 규圭와 용鎔

 

□ 왕조연표王朝年表(족보 1권 21쪽)
목조穆祖(신라시대 벼슬 사공공司空公 역임, 전주全州 건지산乾止山 先塋),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고려시대 오랑캐와 왜구의 침입 격퇴로 공이 큼, 정승에 준하는 벼슬을 하사받은 함경도 지방 호족), - 태조(이성계, 압록강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과 정몽주 등을 척살하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 건국), - 정종(태조의 장자), - 태종(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원), - 세종(한글 창제), - 문종(병약하여 요절), - 단종(문종의 장자였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양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귀양 사사), - 세조(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 예종(덕종), - 성종, - 연산군(박원종이 주도한 중종 반정으로 퇴위), - 중종(파시조派始祖 익양군의 아버지, 성종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부흥시대), 인종, 명종, 선조(임진왜란), 원종, 인조(병자호란), 효종(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감, 북벌정책), 현종, 숙종, 경종, 영조(사도세자의 할아버지), 장조(진종), 정조(사도세자), 순조, 문조, 헌종, 철종(강화 도령), 광무, 융희(일제 식민시대)

 

□ 세가世家 (雲橋, 구름다리 집)
전남 고흥군 남양면 중산리 운교 3반. 집터는 이 장로 (중산교회)가 살던 세가로 천방산의 세 번째 줄기가 내려 뻗어 마당에 거북바위로 몽쳐져 있어 명당으로 알려짐. 앞 산 (네 번째 줄기, 다섯 번째 줄기는 4반의 옥녀봉) 선산 정상에 증조부모, 조부모 그리고 능선을 타고 내려와 남해가 보이는 양지에 부 선영. 요절한 동생 정섭의 묘는 부친 묘역 아래, 선산의 정기는 천봉산의 4번째 (천방산의 맥은 모두 다섯 줄기로써 첫 번째는 맷돌바위가 있는 1반 뒷산, 두 번째는 샛골, 세 번째 줄기는 집터로 내려와 마당 거북바위로 맺히고, 네 번째는 선산 줄기로 용머리 상, 다섯 번째는 옥녀봉의 4반에서 진등을 거쳐 5반까지 뻗어내린 맥. 선산에 올라 주위 풍광을 보면 천방산의 다섯 갈래 맥이 마치 한자의 물자勿字 형국이며, 안산이 밥그릇이라면 개가 밥그릇을 향해 입을 대고 엎드려 있는 모습임 - 풍수지리상. 애초에는 5반 들머리 (732번지)에서 살다가 3반 이장로님(156번지, 이장로님은 친척임)이 함경도로 이사를 가서 집을 매매하여 이사함. 고흥에서 전입할 대는 5반 들머리 (옛 남양서교 터 맞은 편 안산 자락 밑 굽이 국도변)에 집이 두세 채 있었는데 거기에서 주막을 했음 (추정인데 고흥 자추에서 살 때는 가세가 기울어져 할아버지가 머슴을 살다가 재산이 모이자 운교로 이전했음. 주막에서 재산을 모아 3반 李 長老 집으로 이전했음)
* 고조부高祖父 (原籍에 기록이 없어 족보에서 찾는 중)
* 고조모高祖母 (족보에서 찾는 중)

 

□ 증조부曾祖父 (이일수李日洙, 족보 이름銜字 - 용현鎔顯)
* 전주이씨 파보派譜 제 3권 89쪽 (천만 보관)
* 계유癸酉 1월 15일 생生, 갑진甲辰 12월 29일 156번지에서 입적入寂
  용현鎔顯 - 증조부의 족보 함자銜字, 본명은 이일수李日洙, 무녀독남, 남  양면사무소 원적原籍 참조, 절충折衝 겸 오위장五衛將 (무반武班)
* 운교 천봉산 선영에 모심
* 운교 2반 박씨가 말잡이였으며 고흥읍내 출입하였음. 한적漢籍이 많았고 자필 문적文籍도 많았음. 흰 콩과 검은 콩으로 주역周易을 하였다함. 고흥 자추에서 운교로 이사 옴. 가세가 기울었으나 양반 선비로써 운교 2반 박씨를 말잡이로 고흥 관아에 출입하였음

 

□ 증조모曾祖母 (정하동鄭河東 - 족보에서는 여자 이름을 기록하지 않음으로 이름 기록 없어 하동정씨로 이름을 대신 기록 예측)
* 족보 - 丁未 生, 원적 - 개국 464년 10월 15일 생, 족보 - 소화召和 (일본년호) 13년 5월 17일 오전 4시 156번지에서 입적, 원적 - 소화 11년 5월 17일 오전 4시 본적지에서 입적
* 원적의 기록을 우선하여야 함
* 족보族譜 - 숙부인淑夫人으로 하동河東 정씨鄭氏며 성함은 정하동鄭河東, 부친은 수문장守門將 (무장武將) 호현虎鉉 (원적原籍에는 부친 정내삼鄭乃三과 모친 김학순金學順의 장녀長女임)의 딸

 

□ 조부祖父 (이진기李鎭基, 족보 이름銜字 - 근회根洄)
* 이진기李鎭基(족보 - 신묘辛卯 6월 10일 생生, 원적 - 개국 490년 6월 11일 생, 1967년 1월 12일 오전 3시 156번지에서 입적)
* 근회根洄 (조부의 족보 함자, ?녀독남, 부친을 따라 운교 5반 주막거리 (732번지)에 이거하여 장사로 생계를 이었으며 차츰 부를 이뤄 3반 이 장로가 함경도로 이사를 하자 집을 물려받았음. 집터가 천봉산 주봉의 맥으로써 마당에 거북바위가 있으며 마을 부자였음. 논이 30여 마지기 밭은 동네 앞뜰 모두가 그리고 산도 3군데가 있었음. 집 뒤 교회 터를 희사함. 명절이면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 고기, 김과 떡을 선물함. 불우한 이북 반공포로 2명을 일꾼으로 거두어 자수성가시킴. 상일꾼 2명 황소 2 마리 깔담살이, 식모를 두고 살았음. 술 잘 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인정이 많았음. 3대 무녀독남의 가세를 일으키기 위하여 다산 가정을 골라 혼인함으로써 자손 번영의 기틀을 마련함. 선비요 무반이었던 증조부가 무슨 이유인지 공부를 시키지 않아 일자무식이었음. 일설로 여자 동생 한 분이 있었는데 행방불명되었으며 일제의 정신대에 강제로 끌려갔으리라 추정됨
* 명함판 사진이 고흥집에 한 장 있었는데 찾지 못함

 

□ 조모祖母 (김점순金占順)
 19XX년 설날 서울 할머니 뵈러가서, 왼쪽 윗줄로부터 규섭, 경섭, 귀예, 만섭,
           아래 천만, 처 문자와 장남 규, 할머니

* 김점순金占順 (광무 6년 3월 16일 생, 1990년 8월 3일 밤 8시 156번지에서 입적, 8월 6일 교회식 장례 선산에 안장)
* 원적原籍 김녕김씨金寧金氏 (족보族譜 - 김해김씨로 되어 있으나 추적한 바 원적이 옳음)
* 부친父親 김치홍金致洪, 모친母親 신소심申小心의 장녀.
* 고흥 팔영산 아래 점암 김녕김씨 집안에서 시집옴. 부친 치홍致洪은 수문장, 몸이 부덕하고 성격이 깔끔했으며 집안을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함. 제랑으로 정00 (여우 목도리 장사, 과역, 정학수 광주시 초등교장의 부친), 김천수 (고흥읍내 생선장사), 월악? 아니면 도화에도 남동생 등이 있었음. 조선시대 여인상의 귀감이었음. 자손의 번성을 위하여 매일 새벽에 치자샘에서 정화수를 긷고 목욕재계하고 안산에 해가 뜰 때까지 삼시랑, 하눌님에게 치성 드림. 삼시랑, 무당, 하나님, 부처님을 모두 섬김

 

□ 고모 할머니 - 조부의 여동생, 천만으로는 고모할머니가 한 분 계셨는데 행방불명되었음. 추측으로 일제시대 정신대 등 강제 연행이 아닌가 추측함

 

□ 부父親 (이종구李鍾九, 족보 이름함자銜字 - 양훈良薰)
 * 청년시절의 아버지, 야학시절이리라 예측,  신랑 신부 18세의 결혼

 * 부친의 遺品   충정공 민영환의 절죽도絶竹圖
* 이종구李鍾九 (무녀독남, 족보 - 乙丑生, 원적 -  단기 4258년 (서기 1925년), 大正 (일본년호) 14년 5월 27일 生, ? 逝去 - 겸면초교 재직시) 단기 4277년 7월 11일 배일엽과 결혼, 모친과 동갑
* 양훈良薰 (부친 족보의 함자, 본명은 종구鍾九), 여순반란으로 조선대학교를 중퇴함. 낙향하여 중산교회 (후일 운산교회, 운교교회)에 야학을 개설하여 인근 청년을 지도하였음. 교회에서는 성가대 지휘와 반주를 하였음. 어린이 성경학교 교장을 도맡음. 풍금은 4부를 능란하게 연주하였고 퉁소, 키타 그리고 그림과 붓글씨가 탁월함. 여순반란군이 교회를 불태우고 성경을 훼손하는 것을 막으려다가 반란군에게 쫒기고 그 사건을 빙자하여 우익 경찰이 부역으로 몰아 양 진영에서 모두 피해를 봄. 뒷간 안 볏집더미 속에 은신처를 만들어 지내다가 여의치 않아 사두실 산 속에 굴을 파고 살면서 피해다녔으나 수복 후 경찰이 부역자로 낙인을 찍어 통나무에 세워놓고 매질을 하는 등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여 빈사 상태가 되자 시체를 거적에 말아 남양지서 앞 개울에 던져놓고 시체를 가져가라고 통고함.  시체와 다름없는 아버지를 할머니가 거두어 기사회생하였으나 그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책과 풍악 등 예술활동 뿐 농사를 모르는 한량생활을 함. 배센 (일본어로 배가 나온 사람이라는 뜻), 배보상이라 할 만큼 배가 나왔으나 운동을 좋아하여 건장하였음. 나무를 사랑하고 이웃들을 돕는 자선활동으로 일관했으며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과 교회 일에 헌신함. 일체 가사를 모르고 농사를 안 함.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자녀 교육에 헌신적이었음. 그래서 가산이 기울어 어려운 가운데서도 10 남매 모두 학업을 독려함. 할아버지 별세 후 감농을 못하고 설상가상 2년 간 흉년이 들자 갑자기 가사가 기울어짐

 

□ 모母親(배일엽裵一葉 

* 옛집古家의 어머니와 천만의 돌 사진
* 배일엽裵一葉, 原籍 성주배씨星州裵氏 (족보族譜 대구배씨大邱裵氏), 원적 - 단기 4258년 (서기 1925년), 소화 2년 2월 14일 출생 (陰 8월 22일, 부친과 동갑
* 주민번호 : 270214 - 2637816
* 고흥 동강 대섬竹島 (족보 - 부친父親 찬범贊凡, 원적 - 부친 裵坤不, 모 金奉愛의 5남 4녀의 장녀, 죽도竹島, 현재는 간척으로 육지화)에서 고을 富者 (대섬, 竹島가 통째로 외가 소유였으며 뭍 병동과 장월에 토지가 많았음) 배씨 집 9남매 중 장녀. 동강초등학교 졸업. 外戚들처럼 氣骨이 큼

 

◎ 천만天滿 (족보명 갑구甲九)
* 원적 - 단기 4276년 (서기 1943년), 소화 18년 4월 27일생, 실제년령 - 甲申 잔나비띠, 1944년 음력 6월 29일생 (* 호적에 1년 빠르게 신고됨, 동네 이장의 申告 誤謬. 부모 18세에 결혼 19세에 태어남)
* 주민번호 : 430427 - 1640312
* 원적의 기록이 태어난 해와 계산으로 부모 출생년도가 맞지 않음
* 갑구甲九 (족보의 이름, 본명은 천만天滿), 1944년 (호적 등재 서기의 실수로 1943년 잘못 등재) 음력陰曆 6월 (양력 8월) 30일 오후 술시 (저녁밥 먹은 뒤, 7시 - 9시) 태어남. 부친이 18세에 혼인하여 동갑나기 모친 사이에 19세에 장손을 낳자 조부가 뜻밖이라 기뻐하여 ‘천만뜻밖’ 이라는 의미로 ‘천만’ 이라 이름 짓고 작명가에게서 한자를 골라 씀.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 부속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졸업함.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희망했던 법학대학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가정을 돌보기 위해 광주교육대학  진학. 가정교사와 교수들의 교수자료 프린트물 등사를 하여 근근이 교대 졸업. 모교인 남양초등학교 첫 발령. 이후 교장 승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남지부의 추천으로 전남도교육감 출마(예정), 정년 퇴임 (교원 40여년 봉직 2005년 8월말 퇴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로 등단 문학활동. 시집, 논문, 칼럼, 동화, 동시 등 작품 활동과 문단 활동
* 장남 천만天滿 (족보 天九)
 . 천만 : 초등교장, 문학활동, 교육학석사
 . 처 김문자 : 초등교사
 . 장남 규 : 미술전공 석사, 부인 나윤영 미술전공 피부미용 박사
 . 차남 유 : 물리학 전공, 대학원 에니메이션 전공 박사과정 (논문 : Cloth         Retargeting, 2004,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미디어공학과)
* 이천만(李天滿, 아호雅號 범당凡堂) 약력
1. 본적
전남고흥 남양운교 출생(1944년, 甲申年, 陰曆 6월 29일 술시戌時, 戶籍
1943년 4월 27일생 謄載書記의 誤謬
2. 학력
전남고흥 남양초등학교(1955년 졸업, 23회)/ * 남양고등공민학교(중학과정) 1년 수료(1956년)/ 광주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1957년 2학년 夜間 編入, 1958년 3학년 주간 편입, 1959년 졸업, 10회)/ 광주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1962년 졸업, 11회)/ 고교 졸업 뒤 1년 쉼/ 광주교육대학(2년제, 1965년 졸업, 3회)/ 한국방송통신대학교(3년제, 1985년 졸업)/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 교육학석사(2년제, 1992년 졸업)
3. 교육경력
전남고흥 남양초등학교(1965년 교사), 보성득량남, 휴직, 보성웅치, 보성,    율어동, 복내분교, 복내, 신안자은남, 임자중앙, 보성율어동, 율어, 벌교중    앙, 보성남, 광양진월남/ 전남순천 용림초등학교(1995년 교감), 순천부영/ 전남곡성 겸면초등학교 교장 (2005년 8월), 전남 여수시 중흥초등학교 교장 40년 재직 교원 퇴직
* 2005년 10월 전라남도교육청 교육감선거 출사표
4. 문단경력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신춘문예 등단(1973년, 동시 봄꽃씨, 윤석중         심사평 <봄맛 없는 봄꽃씨>)/ 바다를 가슴으로 뜨는 별(1981년), 시와 산문집/ 벌쭉이대장(1985년), 장편동화, 월간 교육자료 연재/ 도깨비우화(1990년), 옴니버스 장편동화, 소년 동아일보 연재/ 반디전설(1995), 장편동화(미간)
5. 사회활동
무등전통문화예술교육연구교사회장(1980년) 창설과 청소년 전통문화교육    어린이민학당 활동, 금호문화재단 부설 어린이민학당 활동/ 전남교감수업장학연구회장(1998년) 창설
6. 저서
한국화교육론(1983년)/ 한국민화교육론(1988년)/ 교육테마에세이집,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1991년)/ 공저, 학교운동회 지역축제화 민속놀이 자료집(1991년, 월간 교육자료사)/ 논문, 학교운동회 민속놀이 지역축제론(1992년, 석사논문)/ 교육테마에세이집, 한국교육 목적과 방법론, 훈사정음(1993년)/ 교육칼럼 연재, 1980년부터 2005년까지광양신문, 순천신문, 미래교육신문, 대한교육저널, 광주교사신문, 광주일보, 한겨레신문, 우리교육 등 잡지와 일간지에 교육칼럼 연재, 게재/ KBS 광주방송국 전통민속놀이 보급/ <창의력을 계발하는 과제학습> 자율학습지 개발, 월간 교육자료(1991년)/ 신문연재교육칼럼 모음집, <독서와 논술>, 한국논술교육원, 2005년
7. 수상
교육부장관상, 교육 공로/ 국제청소년문화교류협회장상, 청소년 문화예술활동 공로/ 조선대학교총장상, 글쓰기지도 공로/ 홍조근정훈장, 교육 공로 (정년퇴임)
* 가훈 : 正心康體 (본인 지음, 정심강체, 바른 마음 튼튼한 몸)
* 上善若水 (인생의 명감, 상선약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논어에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되 앞서거나 뒤 따름을 다투지 않고), 敎學相長 (교학장상, 공자의 예기 학기편, 배우기와 가르치는 일은 서로 상보하며 성장을 돕는다), 率先垂範 (솔선수범, 교직의 명감, 내가 먼저 모범을 실행한다)을 명감銘鑑으로 교단생애 42년을 2005년 8월 정년함

 

□ 처妻 (김문자金文子)
* 출생 1949 (소띠)년 12월 24일 (  시)생
* 주민번호 : 491210 - 2640314
* 보성군寶城郡 웅치면熊峙面 유산리柳山里 오류동五柳洞,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홍중金弘中과 ?의 둘째 딸 (형제자매 순금, 현숙, 행주, 행두, 행란) 웅치초등학교, 보성여중, 광주여고, 한국방송통신대학, 초등학교 교사, 고흥 망주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웅치초, 보성남초, 율어초, 문덕초, 장성, 화순, 광양, 광주에서 교편. 천만과 19**년 12월 8일 보성 읍내 사진관에서 초대없이 양가 가족만 초청하여 결혼, 제주도 하이야트 호탤 신혼 여행. 동남아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 여행

 

□ 장남長男, 규赳(父 作名)
* 출생 1972 (쥐띠)년 6월 11일, 금요일 오후 4시 50분
* 주민번호 : 720611 - 1640314
* 보성군 웅치면 오류동 외가에서 머물다 태기가 있어 태풍을 무릅쓰고 택시로 읍내 병원 보성 동산병원에서 태어남. 태어났을 때 성격이 너무 유약하다는 예상으로 강하게 살라는 뜻으로 굳셀 규로 이름을 지음. 이름에 형제 간의 항렬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한글 자모 순서에 따라 형제의 서열을 생각했음. 부모를 따라 웅치, 웅치 삼수, 보성읍 빗가리, 율어 (초등학교 입학), 문덕, 광주 지산동 (법원 앞), 산수동 무등파크에서 살았음.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 전남고등학교, 호남대학교 미술과 석사, 서양화 전공. 자동차판매업
* 처妻 xx00 慶州 0씨x氏 (부친, xx 자동차 이사 퇴임) xx대학교 xx과 oo 전공, 1974년(  띠) 7월 20일 오후 12 : 05 생, 1972년  월  일 결혼. 장손 아라한, 둘째 아나율 낳음, xx 관련 xx대학교 박사

 

□ 차남次男, 유裕(父 作名)
* 출생 1975 (  띠)년 7월 12일, 토요일 오전 7시 50분
* 주민번호 : 750712 - 1640315
* 웅치 오류동 외가에서 태어남. 태풍이 거세고 비가 왔음. 택시를 불렀으나 늦어 외가에서 순산. 태어났을 때 성격이 좀 날카로우리라 예상하고 넉넉하게 여유있게 살기를 바라는 뜻으로 <유>라고 이름을 지음. 부모의 직장을 따라 웅치 외가에서 컸고 중산리 우체국 변씨네 바깥채에서 살았음. 모친이 삼수분교장으로 발령나자 분교장 관사에서 살았고 보성읍 빗가리, 율어, 문덕 (초등학교 입학), 광주 지산동 동산초등학교로 5학년 때 전학, 서석중고등학교 우수반 (학년 성적 우수 학생 50명 수용 기숙사 입학 특별지도),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에니메이션학과 석사, 2016. 2/ 16일 공학박사 취득

 

□ 장손長孫, 아라한(祖父가 作名), 男
* 출생 2004년 9월 12일 오후 01 : 16 광주시 봉선동 모아산부인과병원에서 태어남. 040912 - 3553315
* 날씨가 청명하고 가을 정취가 한창이었음. 아라한 (亞羅漢, 원래 한자가 아니고 한글 이름으로 고조선 12대 왕 아한의 이름을 빌어 지었음. 참조 <임승국의 한(환)단고기桓檀古記 역사연대표>, 한자 옥편에서는 <한桓>을 <환>자로 표기하는데 신진 사학자들은 한단고기의 <환桓>자는 본래 한자漢子가 아니고 우리 글이 없었을 때 빌어 쓴 한자로써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함. 우리 말의 <한>은 한아름, 한없이, 한껏, 한 세상, 한 세월 등등 크다, 넓다의 뜻이 있음. 아라한의 한자도 원래는 한桓을 상정했으나 사내 한漢으로 섞어 씀. 불교에서는 고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존경의 대상, 인터넷 검색의 <아라한>을 참조.
 * 이후 형제자매 간의 항렬 行列은 정하지 않았지만 아이 이름은 순서대로 국어 자모 순서를 고려하여 지었으면 바람. 여아의 경우는 아리수 <한강의 백제시대 이름. 한자로 쓰려면 亞璃秀, 뜻은 없음. 본래는 마을 리里와 물 수水자였으나 편의상 고침, 아리하 등> 미리내 (은하수의 우리 말, 미리는 용龍 내는 냇물川, 한자는 龍川) 등등

 

□ 次孫, 아나율(父가 作名), 男
아나율, 2007년 3월 25일 오전 02 : 29 봉선동 모아산부인과병원에서 태어남, 날씨 청명 화창, 070325 -

 

父親 이종구의 <진실화해위원회> 신청서  

 

 

사건번호

 

진실규명신청서

접수기관

 

접수번호

 

사건유형

123

45기 타

신청인

개인

성명

이천만

주민등록

번호

430427

-1640312

사건과의

관계

피해자의

장남

(한자)

李天滿

주소

광주직할시 동구 산수 279-3

무등파크 1201

전화번호

(휴대폰)

010-9481-7074

신청의 취지

고등교육을 받아 야학을 개설하고 기독교청년교육에 선도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청년이 인민군과 경찰 양쪽의 잔학한

폭행으로 폐인이 됨

사건

관련자

성명

(한자)

주민등록번호

또는 생년월일

(성별)

본적 및 주소

(연락처)

생존

여부

사건과의 관계

신청인과의 관계

이종구

1925527

 

본적 : 전남 고흥군 남양면

중산리 156번지

사망

여순반란사건

피해자며

피해 발생이 피해자의 결혼

전이므로

신청인(장남)

피해자와 조부모,

마을 어른들에게

들은 내용 종합

주소 : 위와 같음

李鐘九

피해자의 장남

 

전화 : 061-833-1298

 

 

본적 :

 

 

주소 :

 

 

 

전화 :

 

신청의

원인이 된

사 실

 

* 별지로 작성하여 첨부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0조 및 같은 법 시행령 제3조의 규정에 의하여 진실규명을 신청합니다.

                 2006109

             신청인 이 천 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귀중

접 수

담당자

접수일자

첨 부

입증자료

대표자선정신고서 및 법인인 단체의 경우 법인등록증

(단체의 대표자가 신청하는 경우에 한함)

 

 

 

   작 성 유 의 사 항

 

1. 단체가 신청할 때에는 대표자의 명의로 신청

- 신청인의 성명란에는 단체명을 함께 기입

 

2. 신청인의 사건과의 관계란은 진실규명대상사건과 신청인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작성

) 희생자”, “피해자”, “희생자의 배우자”, “목격자”, “전하여 들은 자

 

3. “사건관련자란은 신청사건 관련자(피해자, 희생자, 가해자, 목격자 등)의 인적사항을 기재

(필요시 별지 작성)

 

4. 사건의 경위를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작성하고, 신청사건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 기록 등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 함께 제출

 

 

 

 

 

 

의 견 진 술 신 청 서

사건번호

 

성명

이천만

주민등록번호

430427-1640312

주소

광주직할시 동구 산수 2

79-3 무등파크 1201

전화번호

010-9481-7074

자격

피해자의 장남

진술하고자

하는 요지

 

진실규명을 신청한 피해자 이종구는 면내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전도유망한 청년학도로써, 광주의 조선대학교

재학 중 여순반란을 겪었다. 반란 전에는 학생으로써

방학중 마을의 교회를 빌어 인근 면내 청년들에게 야학을

개설하여 가르쳤으며, 교회에서는 독실한 신도로써 성가

대를 지휘하고 올갠 반주를 맡았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에는 성경학교 대장을 맡아 어린이 성경학교를 열었고

성경학교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도맡아 했다. 반란이

일어나자 모든 신도들이 피해버렸는데 혼자 교회를 지키

다가 반란군들에게 붙들려 반란군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폭거로 교회의 성경과 찬송가를 불태운 일이 있었고,

그 후 산속과 집안의 비밀 거처에서 수복을 맞았다.

그러나 경찰은 성경과 찬송가를 태운 일로 반란군의

협조라는 누명을 씌워 10여 일 간 모진 고문을 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이 생겨 평생을 폐인으로

살았으며, 이는 유복한 가정이 풍비박산이 된 빌미가 되었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32조 제3항의 규정에 의하여 위와 같이 의견진술을 신청합니다.

 

                                          2006109

                                  신청인 이 천 만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귀중

 

(첨부자료) 신청의 원인이 된 사실 기록

 

(이 글을 쓰는 사람은 피해자 이종구의 장남이며, 피해자가 미결혼 청년시절이었으므로 신청인이 태어나기 전 사건인 바 피해자에게 직접 들은 내용과 조부모 그리고 마을 어른들에게서 들은 내용을 종합하였음)

 

여순반란사건의 피해자 이종구 (이하 피해자)는 전남 고흥군 남양면 중산리 156번지에서 태어나 고흥읍에서 솔가한 증조부 이래 운교마을에서 살았다. (신청인의)증조부는 고흥현의 낮은 관리로 가세가 유복하지 못했으므로 증조부가 별세하고는 가세가 기울어 조부는 생계를 위해 머슴살이와 주막을 운영했다. 역시 고흥현의 하급관리의 여식이었던 조모와 양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가세가 불어나 유족해졌으나 대를 이어갈 자식이 태어나지 않아 불공을 드리고 여러 가지 방편을 하던 중 무녀독남 피해자가 태어났다. 피해자는 증조부, 조부 때부터 독자였던 가문에 3대 독자의 무녀독남이었다. 가세가 확장되고 아들이 태어나자 조부모는 피해자를 애지중지 길렀으며 피해자 역시 총명하여 면내 준재로 명성을 떨치며 광주의 조선대학교까지 유학을 하였다.

 

대학교 유학중 피해자는 방학이면 고향에서 교회를 빌려 야학을 개설하여 인근 3, 4개면 (남양, 동강, 대서, 과역 등, 인근 면에는 교회가 없었음)의 청년들을 가르쳤다. 가세가 넉넉하였으므로 때로는 집에서 숙식을 시키는 일도 있었다. 또한 피해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써 교회에서는 성가대를 지휘하며 오르간 반주를 하였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어린이 성경학교의 대장을 하면서 모든 준비와 교육을 도맡았다.

이런 와중에 19481019일에 여순반란이 일어났다. 19481022일 경, 반란군들이 벌교에서 고흥으로 진입하면서 벌교 고흥 간 국도에서 보이는 십자가를 보고 운교마을에 들어왔다. 고향에 머물고 있었던 피해자는 주위에서 같이 피난하자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교회를 지켰으며 장로 이하 모든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피난하였는데 혼자 교회를 지키는 중에 반란군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반란군들은 교회를 지키는 피해자를 잡아 교회 마당에 꿇어앉히고 심문을 하였는데 같은 마을의 몇몇 주민들이 피해자의 이력과 가정의 내력을 고자질했다. 반란군은 피해자가 기독교를 신봉한다는 것과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죄인시했으며, 어렵고 못살았던 일부 주민들은 피해자가 부자라는 것을 질시하여 과장해서 고자질했다.

조부모는 어려운 가정에서 자수성가하였으나 명절이면 떡을 하고 돼지를 잡아 마을의 형편이 어려운 어른들에게 돌렸으며, 쌀을 나눠주는 일을 년중행사처럼 하였다. 또한 교회를 지을 때 교회 부지를 헌납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마을에 배당된 포로 5명을 사랑방에 수용하였다. 특히 포로 중 2명을 일꾼으로 채용하여 3년만에 성혼시키고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한 사람 최씨는 피난온 처녀와 결혼을 시킨 다음 비어있었던 뒷집을 수리하여 살림을 차려주었으며, 보따리장사부터 시작한 그들은 곧 자전거장사로 발전하더니 10여년 뒤에는 동네부자가 되었다. 다른 한 명의 포로 이씨는 이웃동네 과부댁의 무남독녀와 혼인시켜 데릴사위로 정착시켰으므로 생계 걱정이 없게 되었다. 그들은 명절이나 기념할 날이면 우리 집을 가족처럼 드나들었고 조부모님을 마치 친부모처럼 섬겼다.

이어 반란군들은 교회 강단을 들어내 교회 마당에 팽개치고 강단 속에 비치된 성경과 찬송가를 자기들이 보는 데서 불태우라고 피해자에게 협박했다. 총부리를 들이대며 목숨을 담보로 하는 강압에 피해자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요구를 이행했다. 그 후 피해자는 집에서 3Km 쯤 떨어진 산속에 토굴을 파고 생활했으며 가끔 집에 돌아와도 변소에 쌓아둔 집단 속에 거처를 만들어놓고 숨었다. 수복이 된 뒤 도망쳤다가 돌아온 교회 임직원들은 임원회의를 소집하여 피해자가 성스러운 성경과 찬송가 책을 불태운 일을 논의하였으며 피해자에게 교회에서 맡았던 모든 직책을 박탈하는 징계를 시행하였으므로 이에 피해자는 매우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194810월 말 경, 반란이 수복되자 남양지서 순경들이 피해자의 집으로 찾아와 심문할 일이 있다면서 피해자를 연행하였다. 곧 석방이 되라고 기대했던 피해자의 가족은 이튿날 이른 아침에 남양지서를 방문했는데 피해자는 유치장에 갇혀 있었고 온 몸이 상처 투성이였다. 죄목은 반란군들의 요청에 따라 성경과 찬송가를 불태운 일이었고 이는 반란군에게 동조하였다는 사실로 날조되었다. 이에 가족들은 교회 임원들과 면내 유지를 찾아다니며 선처를 호소했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혐의가 있든 없든 부역자로 체포된 사람에게는 등을 돌리는 것이 현명한 처신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아무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피해자는 풀려날 길이 없었고, 피해자의 부모는 지서에서 살다싶이 하면서 지서직원들에게 피맺힌 탄원을 했으나 순경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피해자는 (신고자의)증조부 이래 3대의 무녀독남이었다. 날마다 고문과 매질이 심해지고 피해자는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한 가운데 몸이 붓고 말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피해자의 부모는 날마다 끼니마다 운교마을에서 지서까지 4Km를 오가며 피해자의 아침, 점심, 저녁밥을 날랐으며, 이 과정에서 고문과 매질을 당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 부모는 인사불성이 되어가는 피해자의 상황에 애간장이 탔으나 구하여낼 길이 없었다. 이렇게 열흘째 되던 날 저녁, 피해자의 부모가 남양지서를 찾았을 때 유치장의 피해자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피해자의 행방을 묻는 애원에 지서 직원 한 사람이 살며시 귀띰을 했는데 피해자가 매질과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시체를 밖에 버렸다고 했다. 피해자의 부모는 넋이 나간 체 직원이 가르쳐준 곳으로 달려가보니, 지서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논과 논 사이의 물이 고인 도랑에 아들의 시체가 있었다. 통곡하며 시체를 부여잡은 부모의 손길에 체온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부모는 아들이 살아있다는 일이 알려질까 두려워 몰래 아들을 수습하여 집에 데려와 온갖 약을 쓰고 구완하여 가까스로 피해자가 7일만에 깨어났다. 그러나 피해자는 정신착란증세를 일으켰다. 거동이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았다. 이후 세월이 가자 몸은 치료되어 비정상적이나마 건강을 회복하였으나 정신은 영영 정상을 되찾지 못하였다.

이후 교회에서는 피해자의 수난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느꼈던지 다시 임원회의를 열어 재심을 함으로써 피해자가 억울하게 교회에서 축출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경찰들의 고문으로 정신분열증을 얻어 폐인에 가까운 처지가 된 것에 대하여 자성하였으나 피해자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정상적이 아니었기에 최소한의 직책을 맡겨 복원시켰다. 특히 오르간 반주는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피해자는 이 일을 계속 맡았다. 이후 정신착란증세가 완화되고 신체활동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예전처럼 성가대를 지휘하고 어린이 성경학교도 맡아서 이끌었다. 피해자는 붓글씨, 악기연주(오르간 연주는 4부 연주 능숙, 키타, 퉁소 등), 꽃과 나무 가꾸기, 과수원 조성, 그림 등 다양한 소질을 지니고 있었기에 학생교육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다. 또 장서(500여권 추정)가 많았고 독서력도 대단했으므로 때때로 정신분열증세가 나타났으나 가족은 피해자의 자연 치유를 기대하며 교회의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동네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마을 부자, 30여마지기 밭 20여마지기, 산이 다섯 군데, 동네 앞 갯벌에 바지락과 꼬막 그리고 굴밭 등등 많은 부동산을 가졌으므로 상머슴이 2, 깔담살이 (소년 일꾼)와 소가 3마리, 부엌데기 한 명을 두고 사는 유족한 살림이었다. 생활에는 걱정이 없었고 피해자는 교회 일과 농촌 한량으로 살아갔으며 결혼을 하여 10남매의 자손을 두었다. 조부님은 피해자의 억울하고 서글픈 인생을 시대의 질곡으로 치부하고 체념했으며 그나마 자손이 번창하고 생활이 유복한 것을 큰 위안으로 삼았다. 조부모님은 초년에 온갖 고생을 하였으나 중년의 생활은 비교적 유복하였으므로 3대 독자 집안의 자손 번창이 최대 과제였다. 이 또한 피해자를 혼인시켜 10남매를 얻었으므로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이었다. 피해자는 나이 들어 군인에 징병되었는데 징병조항에 정신분열증세와 독자 병역면제 또는 의무병역 단축조항이 있었음에도 담당공무원들의 농간으로 면제를 받지 못하고 16개월을 복무하고, 가까스로 증명한 의사의 진단서와 호적의 독자 조항에 의한 의가사제대를 하였다. 6 . 25 때는 앞산 과수원에서 어린 신고자를 데리고 일하다가 인민군의 총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고흥으로 진입, 많은 민간인을 연행하여 벌교방면으로 나오던 인민군들이 마을 앞 안산 골짜기에서 연행한 민간인을 사살하고 (이 또한 규명되어야 할 사안임) 안산마루에 올라 건너편에서 일을 하고 있던 피해자에게 표적을 맞추는 장난처럼 총을 쏘았던 것이다. 신고자의 조모가 이를 발견하고 총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과수원으로 달려가 피해자를 피하게 하였으며 신고자를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업고나와 구했다고 증언하였다.

196512월 고혈압으로 3년째 투병을 하던 조부님이 돌아가시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진 집안 경제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하여 가족 특히 10남매의 학비 조달이 어렵고 생활조차 곤란해졌다. 빚으로 연명한지 3년이 되자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농토를 비롯한 가산을 팔기 시작했으나 이미 늦어 집안은 풍비박산 일보 직전이 되었다. 조부모님의 피와 땀으로 마련한 농토를 차마 팔 수 없어 어떻게든 버티면서 빚을 정리하려던 계획이 무모했던 것이다. 드디어 1967년 모든 가산을 정리했으나 가산 정리만으로는 장리빚 (이자가 년 50% 고리채)을 모두 갚을 도리가 없었다. 가산을 정리해서 갚고 남은 빚을 갚기 위해 신고자는 꿈꿔왔던 4년제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가정교사와 대학 교수님들이 도와주는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며 근근이 학비를 조달하여 졸업하면 바로 취직이 되는 교육대학을 선택했고 곧 이어 가족을 돌보고 빚을 갚기 위해 부부교사로 결혼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봉급으로는 장리(50% 고리채)로 불어나는 빚의 이자를 갚기에도 역부족이었고, 이 와중에서 피해자의 동생들은 먹고 살기에도 벅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모두 뿔뿔이 도시로 흩어졌다. 간난과 질곡의 세월, 모든 빚을 다 갚는데 향후 15년 정도가 걸렸다. 이러한 여건에서 자라난 동기간은 모두 피폐로운 생활을 하였고 정신적으로도 크게 충격을 안고 자랐으며, 특히 둘째 (신고자의)동생은 고등학교 2학년 재학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변변히 치료도 못하고 요절했고, 셋째는 피해자와 병증이 유사한 정신분열증이 나타나 단란한 가정이 풍비박산되고 3번의 장기간 입원 치료로도 효과가 없어 이혼했으며 가족과 결별하고 낙향하여 운교마을에서 8순의 노모와 생활하고 있다.

이는 여순반란이라는 시대적 비극에서 비롯된 개인의 피해상황이지만 전도유망한 청년이 좌우익의 이념 갈등에서 양쪽의 질시를 받아 폐인이 되었고, 이후 피해자의 피해로 인해 유복하고 단란했던 가정이 몰락하였고 끝내는 파산했으며, 이후 신고자의 동기간들은 성장기에 온갖 수모와 질곡을 겪었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였으며, 생계조차 어려워 어린 나이에 서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비극적인 삶을 영위했다.

이에 피해자의 신원을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일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망자에 대한 후손의 의무며 최소한의 도리고, 그로 인해 기족이 입은 피해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지울 수 없는 비극으로 남아있다. 마치 일본제국주의시대 식민지에서 가족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들의 가족이 겪은 질곡과 간난을 방불케 하는, 오늘날까지도 서럽고 원통하게 살아가는 처지와 무엇이 다르랴? ()

 

<첨부> 어린시절 우리 집에는 漢籍이 선반에 수 백권 쌓여 있었다. 또 마루방과 부친의 방에는 일본 책과 근대 서적들이 수백권 있었다. 기억나는 것으로 한적은 알지 못할 시문과 산문들이었는데 증조부 집필 문건이라고 했고, 돌벼게, 천로역정, 큰 고래가 그려진 일본어 그림책, 매우 크고 무거웠던 미농지 영한사전들이 생각난다. 이 책들은 모두 과수원 배 싸는데 사용되었고, 중년에 천정에 비가 새서 빗물에 젖어 훼손되어버렸다. 한적은 증조할아버지의 장서였다. 증조부는 2반 박씨네 부친을 말잡이로 고흥 관아에 드나들었던 선비로써 검정 콩과 흰 콩으로 주역을 했다고 부친이 기억하고 있었다. 쌍안경이 있어서 앞 산 과수원에 감나무용 왕겨에 내려온 꿩틀을 놓고 쌍안경으로 사냥을 했다. 과수원에는 감나무, 배나무, 매화, 딸기 등이 있었다. 집 둘레에는 감나무가 여남 그루 그리고 대문 오른 편으로부터 호두나무, 살구나무, 가죽나무, 석류, 자두, 돌배, 팽나무 거목 (조부가 中年에 집을 중수하려고 판자를 내었으나 못함), 쥐똥나무, 참대밭, 시누대밭, 모란밭, 작약밭, 배나무 그리고 무화과는 지천이었다. 또한 꽃은 모란과 작약은 뒷밭에, 장독대의 꽈리, 봉숭아, 덩굴장미, 상사초, 밥풀꽃, 맨드라미가 피었으며 특히 백합은 온 집 안 언덕에 만개하였다. 10리 밖에서도 향기가 퍼질만큼 많았다. 일요일이면 조모가 가장 실한 이슬 머금은 백합을 가위로 잘라 교회 설교대의 꽃병에 꽂는 일이 장손인 내 일과였다. 부친의 방에는 붓글씨 습자가 항상 붙어있었는데 궁체글씨로 매우 아름다웠다. 또한 화병과 꽃을 그린 그림 한 점도 있었다. 큰 방에다가는 <정읍사>를 써놓고 가끔 읊조렸다. 퉁소와 키타 연주는 전문가 수준이고, 교회에서 어린이학교 교장을 했으며, 성가대도 맡았다. 특히 오르간연주는 찬송가 4부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수준이었다. 부친의 별명은 놀센 (한량), 배센 (배가 나왔다고)이었다. 할머니는 키는 작으나 몸이 유덕하고 특히 유방이 엄청나게 컸다. 양반가 조선 여인의 표상이라고 기억한다. 무척 깔끔하고 단아했다. 부친이 여순반란으로 정신 이상이 되자 할머니는 기독교, 불교, 민속신앙을 두루 섭렵하고 특히 매일 꼭두새벽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치자샘에서 정화수를 길러 장독대 작수발에 빌었다. 그 추운 겨울에도 새벽에 머리를 감고 기원하던 모습은 생생하다. 어느 해 겨울, 잠을 자다가 선뜻한 느낌에 눈을 떴는데 할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머리를 빚고 있었다. 그 머리칼에서 찬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 때 처음으로 할머니의 축수를 보았는데 할머니의 축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았다.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꼭두새벽에 정화수를 긷고 허리를 굽혀 절하고 두 손을 모아 빌었다. 怨念呪文은 모른다. ‘삼시랑네 삼시랑네. 우리 집안 번성케 하시고 가족들 무탈 무병케 하소서라고만 기억한다. 일요일 교회 강단 꽃병에 꽂을 백합은 제일 좋고 실한 걸로 이슬을 털어 잘라 내게 주고, 연보돈은 빳빳한 새 돈이었다. 빨간 1원 짜리나 5원 짜리 새 돈을 허리에 찬 복주머니에서 꺼내주었다.

할아버지는 巨人이고 말술을 마셨으며, 눈썹이 세어 一見 무서운 호랑이이었다. 武人 내림의 表象이다.

 

畵譜             * 사진 추후 보완

<광주교대>  <보성유도관>  <제주도 KAL호텔 신혼여행>  <알림장(청첩장, 청첩을
        하지 않고 결혼 뒤 결혼했음을 알림, 가족 친지만 모시고 혼례식 함)>

 
위 왼편부터 <부친(아래 왼편 2번째)><조모와 경섭, 서울 창경원, 조모와 경섭> <광주학동시절(뒷줄 왼쪽 죽은 동생 정섭, 김영재, 김영창. 아래 왼쪽 천만, 누나, 황우현)> <갑예> <경섭, 귀예, 만섭 서울시절> 


<교직여행, 낙산해변> <중국여행 두만강변> <만리장성> <보연회 부부 중국여행, 직원 동행>


        <중국여행 - 천안문, 백두산 입구, 용정, 만리장성>

          <중국 백두산 천지>


           <장손 한이 돌, 어린 한이>


     <순천부영 교감시절 쓴 題字石 揮毫> <중국여행 용경협> <중국여행 이화원>


          <김문자> <신혼여행> <언니와 장모> <친구들> <고등학생시절>

       <동남아여행>             <김문자>         <결혼, 주례 조보라 교장>

                       <김문자 추억>

 

                     <김문자 추억>

        <유럽여행 -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에펠탑>

                     <유럽여행 - 프랑스 XX산 정상 겨울 눈>


         <물뿌리개 아동문학회, 현수막 글씨 본인> <출판기념회>
                 <보연회 제주도 마라도, 정방폭포>


       <書齋>    <보성복내교>
<보성복내교,‘바다를 가슴으로 뜨는 별’표지 사진, 학교 앞, RHK 촬영 >

      <전남대 석사학위>                <제주도>

  <서재, 응접실, 침실, 家訓 正心康體 - 마음은 바르게 몸도 튼튼히>


     <오류동 외가 처와 규>  <응접실>  <家訓, 正心康體>


          <중국여행, 천안문>  <금강산 배바위>


                 <보연회 만리장성>   <캐나다 쪽 나이아가라폭포>


                    <이천만 초등 4학년 통신표>

                       <이천만 초등 3학년, 남양중 1학년 통신표>

 

畫譜, 어머님 회갑연, 구순잔치 기록

 

        <부모님 회갑연, 규와 유 그리고 만섭 우섭 가족 없음, 총 33명>


                 <부모님 회갑연, 형제자매 * 만섭, 우섭 없음>


            <결혼, 주례 조보라교장, 신부 입장, 양가 부모>


                      <결혼, 웅치교직원>


     <이천만(남자 앞 줄 왼쪽 7번째) 초등학교 졸업,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
       (위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5번째) 졸업>

<결혼-양가 부모 친척> <웅치교직원-김문자(뒷줄 왼쪽 5번째), 이천만(뒷줄 오른쪽 2번째)>


<이천만 중 ․ 고등학교, 부여 수학여행 백마강 뱃놀이, 무등산 등반(황우현 형 계백), 부여 낙화암 백마강 앞 모래밭, 제 2수원지 소풍, 무등산 등반(하얀 모자 하얀 점퍼)>


  <중학생 증명사진, 고등학교 친구, 남매, 남양중 소풍, 고등 소풍 - 경주호(포리호)
   납북사건, 주모자 박석운(왼쪽, 死刑) 영어교사와 담임, 동창생 연루, 장학생시절>


              <김문자 고등학생시절>

            
    <봄소풍 - 문덕초등학교 처와 규와 유>  <말誌 表紙人物, 2003년 6월호>

 

<11> 원적原籍에 보완해야 할 자료
* 원적原籍 : 전남全南 고흥군高興郡 남양면南陽面 중산리中山里 운교 雲橋 3반 156번지
* 본적本籍 : 전남 고흥군 남양면 중산리 운교 3반 732번지, 고흥 자추에 할아버지 以前의 原籍


□ 원적 확인(집안 어른들에게서 들은 말)
◎ 고흥 자추 오재순 (신흥, 개밭굴), 호행마을 황이명
◎ 서울 이대석(서울에서 초등교장, 부 이재삼) - 뒷집에 어머니, 장녀(딸 장애신이 천만의 여수중흥 교장 때 여수여고 교장), 영심(둘째 딸, 구례 목사와 결혼, 할아버지가 결혼 때 상객, 트럭에 편승 구례에 감), 아들(대석), 셋째 딸(군자) 살았고 아버지는 일본에서 첩을 얻어 산다고 들었음.
◎ 함경도에 증조모 外孫 김운서(父), 김을곤(子)
◎ 조부祖父 진기鎭基 (고흥 자추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운교 5반 마을 입구로 이사 옴, 酒幕했음)
◎ 조모祖母 김점순金占順 (고흥 점암, 팔영산 밑 고령김씨 一村)
◎ 김천수 (할머니 동생, 고흥읍 생선장사)
◎ 정학수 (할머니 여동생 남편, 과역 거주, 그 아들 정학수가 광주 초등교장 역임, 족재비 털목도리 장사)
◎ 김종근 (여수, 교사)
◎ 정일택 (고흥 월악, 0666-33-5216)

 (전가세보 끝)

 

 어머님 배일엽 구순잔치

1) 일시 : 2013년 10월 2일 - 3일
2) 장소 : 경기도 양평 한화리조트
3) 행사내용


* 행사경비 : 이천만 100만원, 이경섭 100만원, 이규섭 80만원, 자매들 음식 준비, 선물 현금 60만원, (2013. 11/ 10 일요) 정진이가 50만원 희사 동네잔치 예정

 

  배일엽집사 구순감사예배

                감•사•예•배
              

가족 축복문

하나님의 무궁한 섭리와 특별한 은혜있어, 바다향기 그윽한 구름다리 내리운 운교땅에 이씨가문의 씨를 심으시어 복 주시더니, 그 나무 창성하여 하늘로 치솟을때, 가지잎 억만을 헤아리는 비젼을 품고 창성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노라. 너의 미래 거친파도와 세찬풍랑 몰아쳐도, 믿음의 힘으로 헤쳐나갈지니 지존자의 손길과 능력이 더할지로다. 이제 일어나 높으신 분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명가로 우뚝 서기를 원하노라, 스톨로게의 우애와 아가페의 사랑과 필리아의 섬김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가문으로 돋는해의 아침빛같으며 구름없는 아침같고 비내린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풀과 같을진대, 이제 오직 여호와신앙하나로 찬란한 희망 미래를 일구는 시대의 빛된 가문이 될찌어다 

장소 / 한화 양평리조트
 일시 / 2013년 10월 2일-3일 

? 오전10:00      사회  이경섭장로

   - 묵도/ 다함께      
   - 찬송/ 559장 “사철에 봄바람”     
   - 성경/ 여호수아24:15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 설교/ 신앙명가를 이룹시다  -이규섭목사-  
   - 찬송/ 57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 인사/ 장형 이천만 (전가세보 약보 해설)
   - 축도/ 설교자

 

 (윗줄 왼쪽에서부터) 김상진(갑례 큰아들), 김나연(갑례의 딸), 정은영(갑례의 며느리, 김상진의 처), 나xx(천만 큰며누리, 규 처), 안태식(규숙 안기선 큰아들), 규(천만의 큰아들), 김문자(천만의 처), 갑례(큰 딸), 규숙(셋째 딸), 안솔(규숙 안기선의 딸), 안기선(규숙의 남편),
(둘째줄 왼쪽에서부터) 아나율(천만의 손자, 규의 아들), 유(천만 김문자의 둘째 아들), 아라한(천만의 장손 규의 아들), 규섭(넷째 아들), 만섭(둘째 아들), 배일엽(어머니), 천만(이종구 배일엽의 큰아들), 경섭(셋째 아들), 김유순(경섭의 처), 하민(경섭의 손자)
(셋째줄 왼쪽에서부터) 귀예(둘째 딸), 심규정(귀예의 아들), 홍세은(규섭의 자부, 사랑의 처), 사랑(규섭의 아들), 박지영(규섭의 자부, 사야의 처), 사야(규섭의 아들), 안나(경섭의 딸), 김민욱(경섭의 사위, 안나의 남편), 안규(경섭의 아들)
(없는 가족) 우섭가족(미국), 갑례 가족, 만섭가족, 사위들, 정진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