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씨
꽃씨알 속에
하늘
한 꺼풀 밑에
초록 봄
꽃씨 안에
나비의 입김
한 꺼풀 벗기고나면
뜨고있는 눈
꽃씨 안에
여울
꽃씨 안, 그 안에
도란거리는 소리
(전남일보 신춘문예, 1973)
봄
‘새싹’을 읽어봐
- 봄
‘나비’를 소리내서 읽어봐
- 봄
‘꽃’을 큰 소리로 읽어보라니까
- 봄
서시序詩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하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슬픔은
슬픔 속에서 자라고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이겨가야합니다
부인소고婦人小考
긴 머리로 어둠을 감싸고
은밀隱密한 목소리로 대화對話를 하며
때론 나비가 되어
내 딱딱한 머리 위로
유모러스하게 날아다니는 …
파란 봄 보리 빛 이마를
가까이
언제나 조용히 기대어오는 사람
소박한 잇새에
가득찬
흰빛 분말粉末의 잠과
검은 동공洞空에 침실寢室을 쌓고
작은 문으로 드나드는
오랜 전통傳統의 요람搖籃
잔盞
생애生涯의 한 곳을 응시凝視하며
잔에 따룬 한 잔의 소주를 응시하며
눈 내리는 겨울밤을
술을 먹는다
목구멍에 차오르는 의식을 느끼며
앙금처럼 번져가는 슬픔을 보며
웃고싶다
아무도 웃지 않는 밤에
소주燒酒 한 잔 마실 사람도 없는 밤에
혼자 잔에 술을 따루며
독毒한 술에 떨려오는 내장內臟을 길들이려고
나그네길을 나서고싶다
아무라도 붙잡고 볼을 비비고
가슴을 비벼대고
살을 섞고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나누고싶다
안산의 봄
가슴을 열고
창가에 앉으면
먼데서
우뚝
앞에 와 선다
가슴엔
진달래
붉은 꽃다발
그리고
무엇인가 더 하고싶은 말
(안산 - 고향 앞 산, 진산鎭山)
엽서葉書
풍란風蘭의
가을 볕
어깨춤 한 마당
하늘에서도
한 잎
바람 휘돌아치고
잎사귀
그래서
붉게 타지 않았을까
그리움 있어
바느질
뜸을 들여
꿰매는 한밤
어머니는 가슴을 열었습니다
올올이 마음 풀어
감쳐가다가
귀 기울여
헤진 마음도 깁고
꽃다이
앞 섭에 박음질도 합니다
은빛 띠를 두른 바람은
청대 끝에 머물고
활을 긋는 손 끝에서
피어나는 불꽃
어머니는
또 하나
다른 생명입니다
박꽃
지금은
잃어버린 기억記憶
언제나
열매되어
동그랗게 채울까
그 기억의 실마리를
흥부처럼 심으면
다시 박꽃은 필 수 있을까
슬픈 사연事緣
- 밤의 노래
밤이 좋아라
어둠이 내리면
어둠의 너울을 쓰고
얼굴도 감추고
울음도
의식意識도 감추고
나는 슬픔을 감출 수 있어
밤은
가면假面 쓰지 않아도 되고
밤은
한 자락씩 너울거리고
밤은
어둠을 내리며 가슴 틔우고
밤은
밀착密着되어
사람도
신神도 없는
밤이 좋아라
불을 켜지 않아도 되는
그런 밤이 좋아라
슬픈 사연
- 가면假面
숨겨져 있는
얼굴이었다
숨어야 하는
마음이 있었다
진주眞珠
- 진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파랗게
숨결을 토吐하다가
안으로 안으로
접어들어
거품이 되었다
끓는 가슴을
들어내지 못하고
고운 눈매로
마음을 채워
바다를 가슴으로
뜨는
별이 되었다
허수아비 명상瞑想
- 전교조 창립을 기념하여
빈 들을 지키는 나에게
새삼스러이
지난 날을 회고回顧해보라면
내 생명生命은
참새들의 조잘거림의 언어言語 그것이었다
미명未明의 들에서
한 무리의 참새들은
내 머리 내부를
가로지르며
혹은 세로로 날으며
때로는 교차交叉되는 새 언어를 마구 생성生成했었는데
빛나는 하루 속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은
참새 부리 끝에서 햇살처럼 퍼져나가는
빛나는 언어였다
그 빛나는 하루 속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그 참새 부리 끝에 이슬방울처럼 맺힌
영롱한 언어 그것이었다
언어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모두 말씀이었는데
세월歲月이 가면 갈수록
황폐荒廢해져가는 내 모습과는 달리
언어만은 생명을 얻어 살져가고 있었다
그 말씀은 내게 명령命令이었다
그 말씀이 내게 웃어라 하였다
그 말씀이 내게 일어서라 하였다
나는 말씀에 순치馴致된 한 마리의 참새였었다
본래 빈 들은 허공虛空이었으므로
참새떼들이 그 거친 들에
말씀의 종자種子를 뿌린 뒤에는
말씀의 종자가 깨어나서
온 들이 파랗게 일어서고 있었다
말씀을 거두어간 내 들은 지금 황량荒凉하다
그러나 나는
푸른 물결 출렁이었던
지난 여름을 기억記憶하면서
5월 그 때를
오래 기다려야 한다
불안佛眼
손가락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입을 열어 말없이 웃음으로써
세상 진리를 모두 다 품었으니
무상無常으로부터 불안佛眼이 눈을 뜨다.
허虛와 무無와 공空을 알면
삶이 명백해지는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화순 운주사를 다녀와서)
초조焦燥
한 초, 한 초 또 한 초
그 사이는 너무나 길다
숨막힌 공간이 그 사이에 깃들고
너무나 지루한 일과를 품고 있다
그 사이에는
뜨거운 뜨거운 눈물이 있다
그 사이에는
여위고 애처러운 꿈도 있다
그 사이에는
새로운 힘의 빛이 있다
새싹의 생명이 깃들며
초록의 굳건한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이는
너무나 길다
허무한 막막한
빈 사막이다
꿈 같은 세월이 그 사이를 흐르고
그 사이는 너무나 고되다
아쉬운 그리움도
거기에는 한 조각의 낡은 꿈도
그러나
그 사이는 너무나 길다
(1962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고향 구름다리 사랑방에서, 妖折한 동생 정섭이와 같이 생활하며 탈출하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결국 동생만 두고 소낙비가 내리는 날 유둔(동강)까지 비를 맞고 걸어나와 양장점 하는 동네 동갑 김상순에게 여비를 빌려 몰래 광주로 도망나옴, 모기를 퇴치하겠다고 동생이 인피레스-모기약을 몸에 발라 호흡 곤란 증세, 校誌 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