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만의 시詩 - 봄, 봄꽃씨 외

이천만의 시

북새 2018. 3. 15. 13:51



 봄꽃씨

 

꽃씨알 속에

하늘

 

한 꺼풀 밑에

초록 봄

 

꽃씨 안에

나비의 입김

 

한 꺼풀 벗기고나면

뜨고있는 눈

 

꽃씨 안에

여울

 

꽃씨 안, 그 안에

도란거리는 소리

(전남일보 신춘문예, 1973)


 봄

 

‘새싹’을 읽어봐

- 봄

 

‘나비’를 소리내서 읽어봐

- 봄

 

‘꽃’을 큰 소리로 읽어보라니까

- 봄


  서시序詩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하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슬픔은

슬픔 속에서 자라고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이겨가야합니다


 부인소고婦人小考

 

긴 머리로 어둠을 감싸고

은밀隱密한 목소리로 대화對話를 하며

 

때론 나비가 되어

내 딱딱한 머리 위로

유모러스하게 날아다니는 …

 

파란 봄 보리 빛 이마를

가까이

언제나 조용히 기대어오는 사람

 

소박한 잇새에

가득찬

흰빛 분말粉末의 잠과

 

검은 동공洞空에 침실寢室을 쌓고

작은 문으로 드나드는

오랜 전통傳統의 요람搖籃


 

생애生涯의 한 곳을 응시凝視하며

잔에 따룬 한 잔의 소주를 응시하며

눈 내리는 겨울밤을

술을 먹는다

목구멍에 차오르는 의식을 느끼며

앙금처럼 번져가는 슬픔을 보며

웃고싶다

 

아무도 웃지 않는 밤에

소주燒酒 한 잔 마실 사람도 없는 밤에

혼자 잔에 술을 따루며

한 술에 떨려오는 내장內臟을 길들이려고

나그네길을 나서고싶다

 

아무라도 붙잡고 볼을 비비고

가슴을 비벼대고

살을 섞고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나누고싶다


 안산의 봄

 

가슴을 열고

창가에 앉으면

 

먼데서

우뚝

앞에 와 선다

 

가슴엔

진달래

붉은 꽃다발

그리고

무엇인가 더 하고싶은 말

(안산 - 고향 앞 산, 진산鎭山)

 

엽서葉書

 

풍란風蘭

가을 볕

어깨춤 한 마당

 

하늘에서도

한 잎

바람 휘돌아치고

 

잎사귀

그래서

붉게 타지 않았을까

 

그리움 있어


 바느질

 

뜸을 들여

꿰매는 한밤

어머니는 가슴을 열었습니다

 

올올이 마음 풀어

감쳐가다가

귀 기울여

헤진 마음도 깁고

 

꽃다이

앞 섭에 박음질도 합니다

 

은빛 띠를 두른 바람은

청대 끝에 머물고

 

활을 긋는 손 끝에서

피어나는 불꽃

 

어머니는

또 하나

다른 생명입니다


 박꽃

 

지금은

잃어버린 기억記憶

 

언제나

열매되어

동그랗게 채울까

 

그 기억의 실마리를

흥부처럼 심으면

다시 박꽃은 필 수 있을까


슬픈 사연事緣

 - 밤의 노래

 

밤이 좋아라

어둠이 내리면

어둠의 너울을 쓰고

얼굴도 감추고

울음도

의식意識도 감추고

나는 슬픔을 감출 수 있어

 

밤은

가면假面 쓰지 않아도 되고

 

밤은

한 자락씩 너울거리고

 

밤은

어둠을 내리며 가슴 틔우고

 

밤은

밀착密着되어

사람도

도 없는

 

밤이 좋아라

불을 켜지 않아도 되는

그런 밤이 좋아라


슬픈 사연

- 가면假面

 

숨겨져 있는

얼굴이었다

 

숨어야 하는

마음이 있었다


진주眞珠

- 진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파랗게

숨결을 토하다가

 

안으로 안으로

접어들어

거품이 되었다

 

끓는 가슴을

들어내지 못하고

고운 눈매로

마음을 채워

 

바다를 가슴으로

뜨는

별이 되었다


  허수아비 명상瞑想

  - 전교조 창립을 기념하여

 

 빈 들을 지키는 나에게

새삼스러이

지난 날을 회고回顧해보라면

내 생명生命

참새들의 조잘거림의 언어言語 그것이었다

 

미명未明의 들에서

한 무리의 참새들은

내 머리 내부를

가로지르며

혹은 세로로 날으며

때로는 교차交叉되는 새 언어를 마구 생성生成했었는데

 

빛나는 하루 속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은

참새 부리 끝에서 햇살처럼 퍼져나가는

빛나는 언어였다

그 빛나는 하루 속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그 참새 부리 끝에 이슬방울처럼 맺힌

영롱한 언어 그것이었다

 

언어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모두 말씀이었는데

세월歲月이 가면 갈수록

황폐荒廢해져가는 내 모습과는 달리

언어만은 생명을 얻어 살져가고 있었다

 

그 말씀은 내게 명령命令이었다

그 말씀이 내게 웃어라 하였다

그 말씀이 내게 일어서라 하였다

나는 말씀에 순치馴致된 한 마리의 참새였었다

 

본래 빈 들은 허공虛空이었으므로

참새떼들이 그 거친 들에

말씀의 종자種子를 뿌린 뒤에는

말씀의 종자가 깨어나서

온 들이 파랗게 일어서고 있었다

 

말씀을 거두어간 내 들은 지금 황량荒凉하다

그러나 나는

푸른 물결 출렁이었던

지난 여름을 기억記憶하면서

5월 그 때를

오래 기다려야 한다


 불안佛眼

 

손가락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입을 열어 말없이 웃음으로써

세상 진리를 모두 다 품었으니

무상無常으로부터 불안佛眼이 눈을 뜨다.

와 무와 공을 알면

삶이 명백해지는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화순 운주사를 다녀와서)


초조焦燥

 

 한 초, 한 초 또 한 초

그 사이는 너무나 길다

 

숨막힌 공간이 그 사이에 깃들고

너무나 지루한 일과를 품고 있다

 

그 사이에는

뜨거운 뜨거운 눈물이 있다

 

그 사이에는

여위고 애처러운 꿈도 있다

 

그 사이에는

새로운 힘의 빛이 있다

 

새싹의 생명이 깃들며

초록의 굳건한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이는

너무나 길다

 

허무한 막막한

빈 사막이다

 

꿈 같은 세월이 그 사이를 흐르고

그 사이는 너무나 고되다

 

아쉬운 그리움도

거기에는 한 조각의 낡은 꿈도

 

그러나

그 사이는 너무나 길다

 

(1962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고향 구름다리 사랑방에서, 妖折한 동생 정섭이와 같이 생활하며 탈출하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결국 동생만 두고 소낙비가 내리는 날 유둔(동강)까지 비를 맞고 걸어나와 양장점 하는 동네 동갑 김상순에게 여비를 빌려 몰래 광주로 도망나옴, 모기를 퇴치하겠다고 동생이 인피레스-모기약을 몸에 발라 호흡 곤란 증세, 校誌 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