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평화 사회체제개혁 자서전/이천만의 시詩 - 봄, 봄꽃씨 외

이천만의 詩

북새 2014. 7. 2. 18:21

 

초조焦燥

 

 

한 초, 한 초 또 한 초

그 사이는 너무나 길다

 

숨막힌 공간이 그 사이에 깃들고

너무나 지루한 일과를 품고 있다

 

 

그 사이에는

뜨거운 뜨거운 눈물이 있다

 

 

그 사이에는

여위고 애처러운 꿈도 있다

 

그 사이에는

새로운 힘의 빛이 있다

 

 

새싹의 생명이 깃들며

초록의 굳건한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이는

너무나 길다

 

 

허무한 막막한

빈 사막이다

 

 

꿈 같은 세월이 그 사이를 흐르고

그 사이는 너무나 고되다

 

 

아쉬운 그리움도

거기에는 한 조각의 낡은 꿈도

 

 

그러나

그 사이는 너무나 길다

 

(1962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고향 구름다리 사랑방에서, 妖折한 동생 정섭이와 같이 생활하며 탈출하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결국 동생만 두고 소낙비가 내리는 날 유둔(동강)까지 비를 맞고 걸어나와 양장점 하는 동네 동갑 김상순에게 여비를 빌려 몰래 광주로 도망나옴, 모기를 퇴치하겠다고 동생이 인피레스-모기약을 몸에 발라 호흡 곤란 증세, 校誌 등재)

 

 

 

 

봄꽃씨

 

 

꽃씨알 속에

하늘

 

 

한꺼플 밑에

초록 봄

 

 

꽃씨 안에

나비의 입김

 

 

한꺼플 벗기고나면

뜨고있는 눈

 

 

꽃씨 안에

여울

 

 

꽃씨 안, 그 안에

도란거리는 소리

 

(1973년 웅치곰재熊峙, 유사장티프스 고열高熱에 시달리며, 죽게되어 광주 병원으로 택시 대절해서 입원, 어머니가 간호했는데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꿈 얘기를 함, 어머니가 내 옷을 마당에 내놓고 태우려고 하는 걸 할머니가 말렸다고 함,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였는데, 할머니가 날 살렸다고 생각함, 전남일보 신춘문예 入選, 윤석중선생 심사, 봄맛 없는 봄꽃씨 평)

 

 

 

 

부인 소고婦人小考

 

 

긴 머리로 어둠을 감싸고

은밀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며

 

때론 나비가 되어

내 딱딱한 머리 위로

유머러스하게 날아다니는 …

 

 

파란 봄보리빛 이마를

가까이

언제나 조용히 기대어 오는 사람

 

 

소박한 잇새에

가득찬

흰빛 분말粉末의 잠과

 

 

검은 동공洞空에 침실을 쌓고

작은 문으로 드나드는

오랜 전통傳統의 요람搖籃

 

(1976년 겨울, 栗於, 아내를 생각하며)

 

 

 

 

 

 

생애生涯의 한 곳을 응시하며

잔에 따룬 한 잔의 소주를 응시하며

눈 내리는 겨울밤을

술을 마신다

 

목구멍에 차오르는 의식을 느끼며

앙금처럼 번져가는 슬픔을 보며

웃고싶다

 

아무도 웃지 않는 밤에

소주 한 잔을 마실 사람도 없는 밤에

혼자 잔에 술을 따루며

독한 술에 떨려오는 내장內臟을 길들이려고

나그네길을 나서고싶다

 

아무라도 붙잡고 볼을 비비고

가슴을 비벼대고

살을 섞고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나누고싶다

 

(1976년 겨울, 율어, 오후 5시 경부터 새벽 5시까지, 술집의 담근술, 맥주, 소주, 막걸리가 다 떨어져야 끝남,  주당 이용준-과수원, 임민규-깡패 놈팽이, 율어파츨소 수석경찰 최성규)

 

 

 

 

내 슬픔은

 

 

내 슬픔은 배냇짓이다

비 오고 눅눅한 밤

청개구리 우는 소리처럼

늘 울고싶다

한스러워서

고독해서도 아닌데

비구니처럼

늘 슬프다

 

(1978년, 첫 창작집 '바다를 가슴으로 뜨는 별' 後記, 복내초등학교 시절, 책 표지 사진은 LHK이 학교 앞 보리밭에서 찍음)

 

 

 

 

안산安山의 봄

 

 

가슴을 열고

창가에 앉으면

 

 

먼데서

우뚝

앞에 와 선다

 

 

가슴엔

진달래

붉은 꽃다발

 

 

그리고

무엇인가 더 하고싶은 말

 

(1979년, 율어, 고향집 운교의 안산, 안산 머리에 해가 오르면 늦었다고, 안산과 햇발이 시계 역할, 책보자기를 어깨에 대각선으로 두르고 집 뒤 천방산을 뛰어 오르고, 산 서너 개를 달려서 등교함, 천방산은 동쪽, 옥녀봉은 남쪽, 밑에 저수지 그리고 안산은 서쪽인데 집 앞)

 

 

 

 

바느질

 

 

뜸을 들여

꿰매는 한밤

어머니는 가슴을 열었습니다

 

 

올올이 마음 풀어

감쳐가다가

 

귀 기울여

헤진 마음도 깁고

 

 

꽃다이 앞섭에

박음질도 합니다

 

 

은빛 띠를 두른 바람은

청대 끝에 머물고

 

 

활을 긋는 손끝에서

피어나는 불꽃

 

 

어머니는

또 하나

다른 생명입니다

 

(1981년, 어린시절 촛고지불 아래서 바느질 하던 어머니와 할머니를 생각하며)

 

 

 

 

박꽃

 

 

지금은

잃어버린 기억

 

언제나

열매되어

동그랗게 채울까

 

 

그 기억의 실마리를

흥부처럼 심으면

 

다시 박꽃은 필 수 있을까

 

(1981년 충북 청주 교육연수중 HK에게 葉書에 그림 곁들여, 고향집 문간채 지붕에 올려 자란 박꽃을 추억하며)

 

 

 

 

슬픈 사연事緣(1)

 

 

마음을 놓아보내면

나래 편 새가 되어

투명透明한 하늘과 땅 사이에서

화석化石이 되고

 

 

우는 소리는

한 마디 가락으로

가슴을 부수고 들어옵니다

 

 

가슴이 열리면

새는 날아가고

 

마음은 다시 화석이 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화석이 되어

 

 

나래 편 한 마리 새 되어

가슴을 부수지 못하는

울지 못하는 새 되어 있습니다

 

(1981년, 율어, LHK와 사랑)

 

 

 

 

슬픈 사연事緣(2)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하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본래

마음은

없었던 것을

 

 

우리는

괴롭고, 외롭고, 슬프게 만들어놓고

울고

 

 

슬픈 일은

슬픔 속에서만 자라고

 

 

외로운 마음은

외로움으로 이겨가야 합니다

 

(1981년, 율어)

 

 

 

 

슬픈 사연事緣(3)

 

 

가눌길 없는

가슴 하나 있어서

 

밖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초록빛 사이로 찾아갑니다

 

 

물길과

숲속과

작은 다리를 건너서

 

 

마음 닿을 듯 하여

마음 간 데 가보면

 

마음은 또 멀리 갑니다

 

(1981년, 율어)

 

 

 

 

슬픈 사연事緣(4)

- 밤의 노래

 

 

밤이 좋아라

 

어둠이 내리면

어둠의 너울을 쓰고

 

 

얼굴도 감추고

웃음도

의식도 감추고

나는 슬픔을 감출 수 있어

 

 

밤은

가면假面 쓰지 않아도 되고

 

밤은

한자락씩 너울거리고

 

밤은

어둠 내리며 가슴 틔우고

밤은 밀착密着되어

 

 

사람도

도 없는

 

밤이 좋아라

 

불을 켜지 않아도 되는

그런 밤이 좋아라

 

(1981년, 율어)

 

 

 

 

슬픈 사연事緣(5)

- 가면假面

 

 

숨겨져 있는

얼굴이었다

 

 

숨어야 하는

마음이 있었다

 

(1981년, 율어,LHK)

 

 

 

 

진주眞珠

- 진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파랗게

숨결을 토하다가

 

 

안으로 안으로

접어들어

거품이 되었다

 

 

끓는 가슴을

들어내지 못하고

 

 

고운 눈매로

마음을 채워

 

 

바다를 가슴으로

뜨는

별이 되었다

 

(1981년, 율어, LHK에게, 진주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진주반지를 선물하며)

 

 

 

 

비 오는 날의 조망眺望

 

 

비 오는 날이 내겐 좋다.

 

비 내리는 걸 보고 있으면

울어도 시원찮은

내 가슴의 고동鼓動을 듣는다.

 

하늘도 내려 앉아

손 잡힐 듯 가깝고

 

들과 산이 시야視野

한눈에 들어와 선다.

 

나는 비 오는 날의 조망 속에

자신을 묻어보고

또 묻는다

 

차분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에게 기대고

‘무엇이 이토록 비 내리는 날

종일토록 날 놓지 않는가요?’

 

누군가의 대답을 듣고

그리고 이 비 쯤 맞으며

마음을 적셔

뜨거운 가슴을 식히고싶다.

 

잘 마른 수건으로 닦아

물기를 닦아내주는

손도 그립다.

 

(1981년, 창작집 後記)

 

 

 

 

불연佛緣

 

 

손가락 들어

하늘을 기리키며

 

 

입을 열어

말없이 웃음으로써

 

 

세상 진리를

모두 다 품었으니

 

 

무상無常으로부터

불안佛眼이 눈을 뜨다

 

 

와 무와 공을 알면

삶이 명백해지는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1995년, 화순 운주사, 장문식, 손동연, 황일현, 김재창 문우들과 나들이에서)

 

 

 

 

 

 

‘새싹’을 읽어봐

- 봄

 

 

‘꽃’을 큰 소리로 읽어봐

- 봄

 

 

‘나비’를 읽어보라니까

- 봄

 

(1995년, 순천교육청에서 발간한 '순천교육'을 맡아 제작 시 표지 시)

 

 

 

허수아비 명상瞑想

 

    

 빈 들을 지키는 나에게

새삼스러이

지난 날을 회고回顧해보라면

내 생명生命

참새들의 조잘거림의 언어言語 그것이었다

 

미명未明의 들에서

한 무리의 참새들은

내 머리 내부를

가로지르며

혹은 세로로 날으며

때로는 교차交叉되는 새 언어를 마구 생성生成했었는데

 

빛나는 하루 속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은

참새 부리 끝에서 햇살처럼 퍼져나가는

빛나는 언어였다

그 빛나는 하루 속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그 참새 부리 끝에 이슬방울처럼 맺힌

영롱한 언어 그것이었다

 

언어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모두 말씀이었는데

세월歲月이 가면 갈수록

황폐荒廢해져가는 내 모습과는 달리

언어만은 생명을 얻어 살져가고 있었다

 

그 말씀은 내게 명령命令이었다

그 말씀이 내게 웃어라 하였다

그 말씀이 내게 일어서라 하였다

나는 말씀에 순치馴致된 한 마리의 참새였었다

 

본래 빈 들은 허공虛空이었으므로

참새떼들이 그 거친 들에

말씀의 종자種子를 뿌린 뒤에는

말씀의 종자가 깨어나서

온 들이 파랗게 일어서고 있었다

 

말씀을 거두어간 내 들은 지금 황량荒凉하다

그러나 나는

푸른 물결 출렁이었던

지난 여름을 기억記憶하면서

5월 그 때를

오래 기다려야 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 기념시)

 

* 쓴 시들 중에서 마음에 든 시만 골라 실었으며,

'광주야경'을 수록하려고 찾고 있음

(2015. 10. 15 목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