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훈민정음 고조선의 가림다와 BC. 1300년 경 나무에 새긴 가람다
<차례>
1. 광주일보의 한글교육과 한자병행교육 지상논쟁
2. 한겨레신문 연재 칼럼
3. 광주교사신문 연재 칼럼
4. 순천신문 연재 칼럼
<광주일보 지상논쟁>
한자교육 비판 - (1)
ㅂ씨의 광주일보 <시대에 역행하는 선량들>
(국회에서 한글전용 입법을 제안하였는데
이에 대한 한자병용교육을 주장한 글) 기고에 대한 반론
3회에 걸쳐 논쟁함, ㅂ씨의 글을 싣지 못하였으나
반론에서 짐작할 수 있음
중국에서조차 간자체簡字體 개발
<중국이 망하든지 한자가 망하든지...> 이 말은 중국의 대학자며 유명한 작가인 루쉰(노신)이 한자의 문맹률을 개탄하며 자조적으로 한 말이다. 그래서 중국은 20세기에 들어서는 모국어 한자를 버리고 간자체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한자병용주창자들은
첫째, 한자문화권과 옛 문헌의 한자화 문제를 들고나선다. 그러나 중국은 간자, 일본은 약자 그리고 한국은 정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동양 3국에서 한자는 상호 호환성이 없다. 그리고 역사적 옛 문헌은 학자나 전문가 몫이므로 전 국민이 한자를 배워야할 명분이 없다. 학생들에게 그 어려운 한자를 배우라지말고 필요하다면 번역을 해서 읽히면 된다.
둘째, 한자교육이 인성교육이나 인간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헛소리인데 사자소학이나 명심보감 몇 줄을 읽었다고 도덕사회가 이룩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한자, 한문을 사용하는 중국은 도덕적 유토피아인가?
셋째, 동음이의어나 갈래말들의 문제 그리고 한글의 7, 80%가 한자어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렇다더라도 우리 한글을 가꾸고 다듬어 발전시키는 노력을 기우려야 마땅할 일이지지 한글이 외래어에 밀려 토씨만 남아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한글이 토씨만 남게 된 데는 이 땅의 학자들과 전문가연하는 지식인들의 잘못이 크다. 어쩌자고 번역서께나 내면서 쉽고 고운 우리 말을 두고 비틀고 꼬아서 어려운 한자어로 <일훈문굽계청자(햇무리무늬청자)> 또는 <방어기제는 자아가 합리적 방법으로> 따위의 조어를 해야 권위가 서고, 판사들은 <처분금지가처분> 하는 판결문투로 일관하며, 의사는 꼬부랑 글씨 투성이로 진단을 하지 않으면 어디가 덧나는 것인가.
넷째, 경제단체장의 신입사원 한자시험 발상은 무엇을 바탕으로 발설한지 모르겠으나 한글교육 30년 이래 가장 비극적 현상이다. 외교부도 아닌 기업이 전 사원에게 한자교육을 시켜서 무엇을 얻겠다는 말인가. 설사 그렇다치더라도 상업적이라면 중국어야지 왜 한자인가. 아무래도 말과 글도 구별하지 못하는 경제단체들조차 지식인 버금가는 기업가연하는 소치가 아닌지.
다섯째, 신문과 잡지들이 한글로만 제작을 하고 한자병용소설은 눈 씻고 찾아도 없는 세상에 어쩌자고 교육부는 한자인증제를 도입한다는 발상을 하는지 교육부 탁상에 앉아있는 교육정책관료들이 한심스럽다. 한자교육이 당위성이 있고 타당하다면 명분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말하라. 더구나 사교육비가 국가사회의 교육적 난제가 되는 상황에서 어물쩡 눙치고 넘어가려는 수법으로 한자교육에 앞장서겠다니 항간에서는 1000억 시장을 탐내는 한자교습지와 한자보습학원의 농간이라고 하는데 그렇고 그런 유착을 의심하지 않겠는가.
다음에는 박진동씨의 글을 살펴보자. 우리 나라가 한글 전용정책을 편 뒤 관광객이 뚝 떨어졌다는 말은 소가 웃을 일이며, 동남아 무역 거래에 지장이 있다는 말은 무역상담을 말 한 모양인데 이 또한 글과 말을 구별하지 못하는 수준이고 설사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국민 전체가 한자 수업을 해서 무역업자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서울대학교는 천재성을 지닌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인 곳이라 입학 전 한 달 도 못되는 기간에 생판뜨기 대학생들에게 한자도 아닌 한문을 가르쳐 <공자 왈 맹자 왈>수준의 전문서적 독해를 해낼 수 있는 모양인데 비결이 있다면 나도 좀 알고 싶다. 국회의 한글 명패 문제는 아니,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한글 명패를 가져야지 한자나 영어, 일본어 이름패를 가져야겠는가. 또 국회의원 배지의 <혹>자 문제는 맘먹고 국회의원의 관행을 비판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 또한 비하가 너무 심하다. 한자 이름을 쓰면 교사가 학생 이름을 빨리 외울 수 있다는 말은 근거 자체의 논리도 희박하거니와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말은 상식 밖이지 않은가.
결론으로, 1980년대 유네스코에서 범세계적 문맹퇴치운동을 벌이면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을 표창하였는데 그 상 이름이 <세종대왕상>이고 시상일도 한글날이었다는 일을 알고 있는가. 또 한글은 유네스코 지정 문자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일한 문자며, 얼마 전에는 동티모르에서 국제어 영어가 아닌 한글을 국어로 수입하면서 그 이유로 티모르 말은 쌍받침이 많아 세계 어떤 민족의 글자로도 완벽한 표현이 불가능한데 오직 한글만 가능하다고 했다. 영어는 닭의 울음소리를 <코커아두들두>라고 쓰고 일본인은 <잇토 이스 낫토>라고 발음한다. 또 재미 수학자 ㄱ씨는 한글이 마치 컴퓨터시대를 예견한 것처럼 컴퓨터 기능과 일치하는 문자라고도 했다. 한글이라는 세계적인 문자 유산을 지닌 오늘의 한국인은 위대한 우리의 모국어 <한글>을 더욱 갈고 닦아 말글살이를 풍요롭게 함으로써 민족정체성을 더욱 더 북돋워야 하지 않겠는가.
한자교육 비판 - (2)
ㅂ씨의 광주일보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 기고에 대한 반론
한글이 토씨만 남아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말과 글이 민족정체성이나 민족정기에 연관되어 있는 일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일본이 제국주의 식민지시대 그토록 악랄하게 한글을 탄압했던 배경도 한글 말살을 통하여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압제하려던 수단이었다. 지난 국회에서는 몇몇 국회의원이 한자교육진흥법을 발의했으나 무산되었고 다행히 이 번 국회에서 한글날 국경일 복원을 청원한다 하니 기쁘기 한량없다. 아울러 문화광관부에서 추진하였던 국어기본법안이 지난 6월 초 국회에 상정되었다니 더욱 든든하기 그지없다.
몇 년 전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중국 음식의 기름기로 사흘 째 되는 날부터 고생을 했는데 연변지방에는 음식점에도 화장실이 없었다. 공중화장실을 찾느라고 두리번거리다가 딴에는 요령껏 중절모께나 얹은 사람을 붙들고 화장실, 변소, 측간 심지어는 해우소까지 동원했으나 아무도 나 몰라라였다. 한자께나 한다는 나 또한 거리의 간판조차 읽을 수 없었고 윗 상자와 아래 하 자를 위 아래로 붙여놓고 신용카드라고 하는 데는 아연실색하였을 뿐. 중국의 문맹률은 75%로 세계적이다. 한국 29%, 그리스 20%, 필립핀 28%, 미국은 2%다. 중국의 소학교에서 가르치는 3189자는 가르치는 글자일 뿐 기억하는 글자가 아니다. 배우는 과정에서 잊고, 1년이 지나면 1000자 정도를 잊고, 다음 1년이 지나면 또 1000자 정도를 잊으며 나머지 1000자도 전식자에서 반식자 과정을 거쳐 결국은 글장님이 되고 마는 게 중국 한자교육의 현실이다. 그래서 루쉰(노신)이?중국이 망하든지 한자가 망하든지?라고 개탄했고 중국은 드디어 모국어 한자를 버리고 간자체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한자병용교육 주창자들은 구지 한자를 초등학교부터 교육과정에 넣어서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우리 말과 글이 한자화되었으며 한자를 배우지 않고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불어 민족적으로 우수한 두뇌 개발에도 영향을 미치리라고 한다. 한글과 한자가 혼합되어 있는 국어의 현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자를 알고 한자어를 이해하면 이해의 폭과 깊이가 한층 더 확산되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왜? 우리 말과 글의 7, 80%가 한자어이므로 한자를 알면 이해가 쉬우리라는 일은 삼척동자도 부인하지 않는다. 소설이나 신문들의 읽을거리가 한글 전용으로도 문제가 없으나 학술서적이나 전문영역에 들어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래서 한자교육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를 거꾸로 생각해 보자. 지금부터라도 학술서적이나 전문용어를 쉬운 한글로 고쳐나가는 게 옳은가 계속 어렵게 만들면서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한글을 두고 영영세세토록 한자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자기들이 번역해서 팔아먹은 교재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입학 전 한자교습을 한다는 서울대학교의 발상은 그래서 코미디다. 중국은 한자로 인하여 문자교육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외래어는 철저하게 한자화한다. 텔레비전은 전시電視(글자로는 간자체)고 코카콜라는 가구가락可口可樂이다. 프랑스는 아카데미 프랑세스에서 외래어를 프랑스어화 하며 도이치는 도이치대로 국어순화운동기구가 있어 외래어를 외래어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가. 고작 우리 말과 글이 한자어가 많으니 한자를 초등학교에서부터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고향은 고흥의 머리에 자리잡은 운교雲橋다. 예전에는 <구름다리>로 불렸던 곳인데 일제시대 한자로 바뀌었다. 주변에는 쇠섬(牛島), 숯개(炭浦), 자문더리(沈橋), 배다리(舟橋)들이 있다. 이 얼마나 감칠맛나고 아름다운 우리 이름들인가. 일제시대 탓만 하지말자. 해방 후 우리는 뭘 했는가? 지금도 수십억을 들여 다리를 지어놓고
<제 1한강교>라 이름을 짓고 의도적으로 <갓길>은 <노견路肩>이라고 억지를 펴는 사람들이 우리 공무원이나 지식인들 아닌가. <흠>은 구지 <하자瑕疵>라고 해야 하며
<햇살무늬청자>라면 좋을 것을 꼭 <일훈급문청자>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우리네 학자들이다. 검사의 고발장 판사의 판결문이 그렇고 의사의 처방전은 꼬부랑글씨가 아니면 병이 안 낫는다는 듯 휘둘러 갈겨서 전혀 환자는 접근하지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자기네들끼리만 희희낙락이다. 강강술래를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로 만들고 흐뭇해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한글 말글살이를 주장하겠는가. 기왕에 있는 그리고 좋게 사용하고 있는 한글 용어도 기어코 한자어로 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 한글 말글살이는 강 건너 불구경이고 결국은 한글이 토씨만 남아 민족정체성까지 팔고서야 정신을 차릴 것인지.
한자교육 비판 - (3)
ㅂ씨의 광주일보 한자교육 반론
한글교육, 언어의 기능은 무엇인가
산수동 토백이로 자처하는 터라 먹자골목에서 오랫동안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데 작년 가을 무심코 골목길을 내려가다가 깜짝 놀랐다. 골목길 이름이 <느티나무길> <한마음길> <탑골 2길>로 바뀐 것이다. 예전의 멋대가리 없었던 산수 1동, 지산 2동들이 산뜻한 한글 이름을 달았던 것이다. 오래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고,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혼자 웃었다. 또, 엊그제 들은 이야기인데 KBS에서는 시청자의 의견과 언어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우리 말 정화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다. 민간단체의 국어정화운동이다. 그 동안 교과서에서 한자가 축출되고 공문서의 한글 전용으로부터 시작하여 방송 용어의 자정활동이 간간이 논란이 되었고 이제는 신문이나 잡지들은 한글 전용으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런데 오직 단 한 군데, 대학교재와 학술서적 그리고 전문서적이라는 뭐랄까 지식인들의 책만 한자를 근간으로 한자어로 가득 차 있다. 그래놓고는 새내기 대학생들이 교재조차 이해를 못한다며 한자교육을 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쉽게 한글로 풀어쓰면 될 일을 일부러 어려운 한자와 한자어로 조합하여 번역해놓고 한자를 배우라니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영어 공용화를 일찍이 실시한 필리핀은 모국어인 타갈로그어를 병용하고는 있지만 이제 타갈로그어는 지성과 학문용어에서 사라지고 있고 머지않아 모국어 자리마저 내주고 말 것이라고 한다. 저명한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2050년이 되면 세계 언어는 중국어, 힌디어,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 5개 정도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본디 우리 나라 이름은 <한>나라다. 한은 韓이나 桓이 아니고 순수한 우리 말의 <크다, 밝다>는 뜻이다. 한없이, 한아름의 <한>이다. 駻, 翰, 邯, 韓, 桓으로 빌려 썼을 뿐이다. 일본은 한자를 쓰되 새겨 읽기 때문에 일본말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반면 우리 국어사전에는 잘 쓰이지도 않은 한자어만 잔뜩 올라 있다. <푸른 하늘> 하면 될 것을 蒼空, 靑天, 穹蒼, 淸虛들이 무려 21개다. 갈래말이 발달하면 말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은 옳지만 한자어로써는 아니다. 따라서 국어정책을 확고하게 정립하지 못하면 한글의 미래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글자의 일차적 기능은 표현기능이다. 컴퓨터시대를 유추하면 자명하다. 글자는 아라비아 숫자처럼 단순한 기호와 표현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단지 그것이 인간의 삶과 유기적 관계를 맺어 정감과 감정이 개입됨으로써 2차, 3차적 기능을 창출한다고 보지만 글자는 근본적으로 기호일 뿐이다. 더구나 컴퓨터시대를 맞은 오늘 우리에게 글자는 기계화를 통한 표현기호체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 아직도 뜻글자가 창의력을 증진시키고 이해력 등 고등정신 기능을 발현한다는 인식은 생활언어의 기능과 언어학적 언어 기능을 간과한 소치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소리글자를 쓰는 서양의 문화적 업적을 살펴보면 된다. 그들은 소리글자를 가지고 과학문명의 발전을 주도했다. 더구나 컴퓨터시대에서 소리글자가 더 역동적 글자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다음은 한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왜 중국은 외래어를 한사코 한자어로 고쳐 쓰는가? 프랑스에 <언어경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이들은 국민의 언어생활을 감찰하는 사복경찰인데 프랑스어가 잘못 쓰인 현장을 찾아 법적 처벌을 한다. 왜 도이치인들이 <늘푸른소나무회>를 범국가적으로 만들어서 외래어를 철저하게 자국어화 하고 있는가 말이다. 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한글을 말살시키려고 하고 창씨 개명을 강요했으며 전국 지명을 한자화 하고 백두대간에 쇠못질을 하였는지 아는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보았는가? 한자어가 우리 말과 글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래서 한자를 배우자고 하지 말고 그 노력으로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한자어를 우리 글로 바꾸어가자고 하면 논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불과 반세기 전 외솔 최현배님은 민족정기와 민족정체성 차원에서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바꾸자 하지 않았던가. 한자어는 고등언어고 한글은 원시언어라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가. <흠>을 <하자瑕疵>라고 하면 더 유식해진다는 말인가.
마지막으로 사투리 사용을 권장한다. 이 또한 한자교육 주창자들에게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일 것이나 말의 기능에서 정서나 감정을 없애버린다면 그 말은 죽은 언어가 된다. 전라도에서는 <형>을 <성>이라고 부르고 <아버지>를 <아부지>라고 하며 <어머니>도 <엄니>다. 생태환경이 환경정화운동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을 보라. 언어도 유기체와 같아서 살아있어야 제구실을 한다. 다일랍딩겨(더 이를 말이 있느냐는 전라도 남쪽 지방 사투리).
<한겨레신문>
개별화 수준별교육과정, 현장 무시한 빛좋은 개살구
엊그제 연구학교 공개발표회에 다녀왔다. 수준별 개별화 학습자료 활용을 통한 기초 . 기본학력 정착을 주제로 연구과제 1. 수준별 개별화 학습자료 제작, 2. 학년책임제 운영, 3. 수준별 개별화 수업을 학교연구로 추진하고 그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였다. 교육부에서 개별화 수준별교육을 표방하며 제공한 7차 교육과정 활성화를 위한 현장연구인 셈인데 학교연구는 궁극적으로 연구성과의 일반화에 그 목적이 있는 바 이 연구결론을 학교에 도입한다면 우선 이런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초등학교 6학년의 경우 하루 6시간의 수업이 배정되어 있는데 그 6시간이 모두 교과가 다르고 매 시간의 교수학습내용이 다르므로 가르치는 수업의 형식은 물론이고 투여하는 학습자료도 달라야한다. 7차 교육과정 정신에 입각하여 수업의 개별화 수준별을 지향한다면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은 학급 인원을 30명으로 잡을 경우 30 × 6시간, 매일 180개의 수준별 학습안을 짜야 하고 180개의 개별화자료를 만들어 투입해야 한다. 설사 극소화해서 학급 인원을 상, 중, 하 3개의 능력별 그룹으로 편성하여 수업을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날마다 3 × 6 = 18개의 학습안과 18개의 자료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교수학습 여건이 충분히 형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학생의 개인차는 천차만별이어서 한 시간쯤 늦게 이해가 되는 아이도 있고 몇 번의 반복 연습으로 이해하는 아이들도 있으며 어떤 아이들은 1, 2년쯤 늦을 수도 있다. 나는 햇병아리 교사시절 우연하게 1학년을 맡아 문자해득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시골 학교에서 1학년의 문자해득은 1학년 담임의 지상과제였다. 1년을 애써 가르쳤으나 학년 말 문자미해득 학생이 다섯 명. 그 이후 나는 아무도 맡길 꺼려하는 1학년을 내리 9년을 자원했었다. 개별화네 수준별이네 하는 교육이론들을 모르던 시대였다. 아이들의 개인차를 인식하지 못하고 일률적으로 끌고 가려는 무지가 횡행하던 시대의 이야기다. 이와 같이 7차 교육과정은 편성 의도와 달리 실패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과정은 개정을 하고 현장에 투입되고 다시 개정을 거듭하는 순환과정을 거쳐왔는데 교단에서는?새 교육과정을 인식할만 하면 다시 더 새로운 교육과정이 투입되어 나름대로 적용은 고사하고 이제 조금 이해할만하면 다시 바뀌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한다. 개별화 수준별 교육과정 역시 이런 상황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학교 교육여건은?19세기 교사가 20세기 교실에서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개탄하는 현실인데 개별화 수준별 교수학습을 요구하고 있으니 일선 교단에 선 선생님들은 어찌 하란 말인가. 개별화 수준별 교육과정을 학교 현장에 투입하려면 여건이 확립되어야 한다. 먼저 교사가 지역사회 또는 학급 특성에 맞는 교육과정을 편성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학급 인원을 20 - 25명 선으로 줄이고 보조교사를 배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수학습에 투입할 수 있는 교수학습자료가 충분히 확보되어야 한다.
사교육비 연 14조 드는, 교육 선진국?
# 1. 사교육비 경감 중 . 고교생 간담회
‘학교에서는 내신에 초점을 맞추어 암기 위주로 가르치고 수능에서는 높은 사고력을 측정하므로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는 학원교육이 필수적이다.’ 그 외에도 경시대회와 면접시험 대처에 학교가 학원에 미치지 못한 점, 수능의 자격고시화, 학벌 구조사회의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7차 교육과정을 무늬만 개별화 수준별이라고도 했다. 7차 교육과정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교사, 재정, 시설을 갖춰놓고 라고 대안까지 제시했다. 교육부 학교정책실장은 학생들이 이렇게 사교육비 증가의 원인과 핵심을 꿰뚫고 있을지 짐작하지 못했다 라며 연말에 발표될 사교육비 경감 종합대책에 이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
# 2. 사교육비 경감 교사 . 학부모의 간담회
교육부는 년말까지 사교육비 경감 방안을 내놓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을 해놓았기에 조급하다. 교육부총리도 사교육비가 연간 14조원을 넘는다는데 정말 문제다. 기탄 없이 얘기해달라고 주문했다. 교사는 평생직이라 안일한 생각으로 안주하지 않느냐?고교 내신을 전국 모의고사 형태로 보게 해 학교와 교사들이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훌륭한 교사는 일부고 대부분은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채워주지 못한다. 학생이 수업을 선택하게 해달라. 직설적인 얘기들이 정말로 기탄없이 터져나왔다. 년 간 14조원이 넘는다는 사교육비와 1천만 학생의 83퍼센트가 과외를 받는 나라. 교육에 관한 한 우리는 오이디시국가나 선진국을 초월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에게는 노벨상이 없는가?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는 의대를 간다. 옳은가? 한국의 뉴튼은 고시공부를 한다. 맞는 말인가? 대학 입시, 한국교육은 이 도깨비와 30년 동안 씨름을 하고 있다.
# 3. 고교 평준화 명언 모음
전교조가 교육 평준화정책을 고집하며 교육부총리에게 압력을 넣고 있다. 문은 세계로 열려 있는데 우리끼리 평준화해서는 안 된다. 부실 교육의 핵심은 교육을 책임진 사람들이 모두 시골 출신이라는데 있다. 교육부총리는 대구 출신인데 시골 중학교 교사를 하다 …….후배들은 전교 10등을 해도 서울대를 못 간다고 한다. 이런 애들을 우리 학교 후배로 인정해야 하느냐?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고교 비평준화를 할 수는 없지만 비평준화가 부동산 가격 안정에 도움을 준다. (부동산 가격의 불안은) 저금리가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지만 천민적 교육제도가 가장 큰 문제. 공교육의 황폐화, 사교육비 급등, 교육의 질 저하, 교육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한 교육평준화가 서민들의 삶과 자녀교육에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이런 인식을 지닌 보수, 귀족, 기득권자들에게는 설득도 대화도 또 사족을 달 필요가 없다.
50교과 80책, 초등학생의 가방 속에 창의력은 없다
서편 2층 계단이 너무 더럽습니다. 실내화를 신고도 다니기가 싫어요. 운전기사 아저씨가 욕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통학버스 창문을 타고 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2층 난간을 미끄럼 타는 아이들도 있어요. 6학년 언니들이 막 때려요. (뭐, 때려?) 때린다는 말에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흥분을 가누느라 애를 쓰는데 2학년 성근이 녀석이 느닷없이 일어서더니 형기가 메~롱한대요. 라고 말해서 폭소가 일어났다. 자유토론은 활발한 토론과 토의를 기대하고 계획한 일인데 억지로 지명을 당해야 마지못해 한다는 말이 고작 건의사항이거나 요구사항이다. 저희들끼리 조잘대며 노는 걸 보면 무슨 할 말이 저리도 많노 라고 감탄을 하는데 회의만 열어놓으면 말문을 꽉 닫아버린다. (고형화)교육과 (자유로운)생활의 괴리 때문이다. 발표력을 길러 언어생활을 유창하게 하려는 교육과정 의도를 교실에서는 회의 순서와 회의 용어 가르치는 일로 착각하고 있다. 회의 용어에 동의란 어휘 두 가지가 나오는데, 이 동의는 처음 의견을 내는 동의고 저 동의는 뜻이 같다는 동의니 혼동하지 말라고 일년 내내 반복한다. 회의 용어와 회의 형식을 가르치느라고 정작 의도한 본질이 실종된 것이다. 더구나 우리 학교는 학급 당 학생 수가 10여명 내외인데도 여나문명 아이들 앉혀놓고 회의 순서가 어쩌고 회의 용어가 이렇다며 학급회를 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전교생 70여명을 식당에 모여놓고 섬머힐식 자유토론회를 열어 하고싶은 이야기 시간을 만들었더니 영 서툴다. 자율시간은 교과와 일과 시정을 통합하여 2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을 마련하였다. 학생들은 아무 지시도 누구에게도 명령받지 않고 하고싶은 일 하기를, 그리고 교직원은 교재 연구나 자료 준비, 여가 활용을 권장하여 바쁘고 꽉 찬 일정에서 숨통을 터주고 싶었다. 우습지만 우스운 일이 상식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50교과 80책은 1학년 6교과 10책, 2학년 5교과 9책, 3 - 4학년이 9교과 15책이며, 5 - 6학년은 10교과 16책을 배우는 우리 나라 교육과정 그러니까 한국 초등학생이 6년 동안 공부하는 지식의 총량인 셈이다. 그래놓고 하루에 6시간씩 주 당 32시간을 학생들의 머리 속에 틀어넣는다. 어디 그것뿐인가. 정과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한두 시간 특기적성을 하고, 교문을 나서자마자 이 번에는 엄마가 인계를 받아 학원으로 내몰린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학원 숙제와 학교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꾸벅꾸벅 졸면서 일기 쓰기까지 끝나야 초등학생의 하루가 끝난다. 적어도 초등학생들에게만은 오전에는 교육과정 즉 바른생활(도덕, 국어, 한국인의 정체성교육), 슬기로운생활(사회, 수학, 과학), 즐거운생활(음악, 미술, 체육)로 교과를 축소 통합하고 오후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한 사회교육기관이나 학원에서 특기적성 또는 소질 계발 프로그램을 필수 또는 선택으로 이수하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꿈꾸는, 꽃과 노래와 사랑이 가득한 학교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학교생활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무엇일까? 년 전 우리 학교에서는 남들이 다 하지 않으려는 군 지정 연구학교(군 지정은 승진 부가점수가 없다)를 자원해서 교사의 공문서 수발 근절과 학교행사 축소 방안을 연구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육장과 연구주제의 어휘 문제로 토닥거리다가 그만 연구공개회가 무산되고 말았는데 학교에서는 근절을 주장하고 교육청에서는 경감을 고집했다. 이어서 초등교사의 스트레스 순위는 사무(업무가 아님) 처리, 수업시간 수, 교육행사, 생활지도, 비민주적인 학교운영, 학교환경 열악 순이다. 이 걸 하나만 풀어보면, 우리 학교 규모 기준으로 교사 1인 당 공문서 수발은 하루 1건 접수 이틀에 1건 보고며, 학교행사는 학교 당 1주일에 1회 꼴인데 행사의 파장은 공문서 수발 못지 않아서 하나의 행사가 온 학교를 1주일 또는 한 달 가까이 뒤흔든다. 이 문제를 짚어 보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 행정체제를 살펴야 한다.학교가 교육의 장인가 행정의 하부조직인가? 교장은 교육자인가 경영자인가? 교장은 교장자격증을 받아 임명되는 날부터 교육이라는 옷을 벗어 던지고 경영자로 탈바꿈한다. 교장의 책상 위에는 도 . 시군교육청으로부터 하달된 경영시책들이 즐비하게 쌓여 있어서 교육과정과 교사 그리고 학생을 눈여겨볼 틈이 없다. 여기서부터 교장(경영)과 교사(교육)의 갈등이 시작되는데 이 현상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충돌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영자와 근로자라는 이름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내가 꿈꾸는 학교 - 꽃과 노래와 사랑이 가득한 학교에서는 작년에 생산된 문서를 컴퓨터 자료방에 보관하여 다음 해에 다시 사용하고, 시군교육청의 시책과 행사는 최소화하여 수업의 침해를 몸으로 막는다. 선생님이 즐거워야 교단이 바로 선다. 선생님은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계셔야 한다는 경영관을 앞세우고 오직 교육과정 이수에만 전념한다. 우리 학교 교육운영계획(서)은 교육목표, 교육방침, 노력중점, 학교특색발휘사업으로부터 기조, 기저, 실태조사 등 관행적인 내용들이 없다. 교무실, 교장실과 현관의 학교현황(판)도 없고 월중행사(판)도 없으며 주훈과 노력점 따위는 애초에 없는 것이다. 학급경영부도 없애고, 출석부는 결석부로 대신하고, 학급교육목표도 학급특색발휘계획도 없다. 그 대신 자유토론회, 자율시간, 생활체육과 생활음악, 자기수업모형, 가정교육 지침서와 한국인의 정체성교육은 있다. 더불어 학교 울타리를 빙 둘러 심은 하늘매발톱, 원추리, 할미꽃, 감국과 접시꽃들 한국야생화 3천여 그루와 3백여 그루의 낙엽수를 심었다. 시멘트 언덕을 헐어내고 금잔디를 옮겼으며 계단은 돌로 바꾸고, 뒤뜰은 아스팔트 포장을 뜯어내고 보랏빛 꽃이 아름다운 맥문동과 꽃잔디를 심었다. 간밤에 메밀꽃 뿌리듯 내린 하얀 눈밭 위로 귀에 익은 선율이 흐른다. 방송을 맡은 주실이가 오늘 아침에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골랐나 보다.
선비님, 책에서는 물꼬를 어떻게 막으랍디까?
임용고시 안 보나? 경기도는 안 갈래요. 광주는? 자신 없어요. 열녀 났네, 열녀 나. 엊그제 실시한 초등교사 임용시험에서 전남의 젊은 교사 400여명이 도시 학교 임용고시에 응모했다. 다른 시 . 도가 40세 전후를 하한 연령으로 모집한데 비해 전남은 응시자가 부족해서 58세까지 응시 연령을 늘렸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겸면초등학교는 300여명의 학생들이 북적대는 겸면의 문화적 상징이었다. 옛집처럼 덩치만 덩그런 폐교 직전의 학교였지만 가을 발령을 받아 마침 운동회철이라 나는 부임 첫 해의 첫 행사에 가슴이 잔뜩 부풀어있었다. 밤을 새워 원고를 다듬고 혼자서 예행 연습도 했다. 날씨도 축복하는 듯 쾌청한 오늘 여러분 기관장님과 유지 그리고 만장하신 학부모님을 모시고가 쑥스럽게 되어버린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학부모 보다 기관단체장이 더 많았다. 장이 서야 굿판이 되지 않겠는가. 정확히 말해서 재적 학생 56명과 교직원 14명이 5천여 평의 공간에서 생활한다. 다인수로 계획해야 하는 축구나 리듬합주 공부는 애초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거기다가 부모의 이혼(9명)이나 별거 또는 생계 곤란의 원인으로 친 조부모(8명)나 외조부모에게 위탁된 아이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이혼율이 50%에 육박하고 있는 사회 상황을 황폐화된 농촌이 떠맡고 있는 것이다. 교감 초임시절 4학급 복식학교에서 만난 3학년 구슬이는 부모의 이혼으로 외조부모에게 위탁되었는데 점심시간이면 영양사와 줄다리기를 벌였다. 밥을 먹고 또 먹고 또 달라고 졸라서 영양사가 애를 태웠다. 많이 먹고도 소화해낸다면 까짓 밥쯤 열 공기를 먹는대도 문제될 것이 없으나 그렇게 허기차게 먹으면 외조부모와 보건소 의사가 시달렸다. 구슬이가 허기진 건 밥이 아니라?부모의 사랑?이었다. 선생님과 외조부모가 대신해줄 수 없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부모의 정이었다.
곡성군은 전국 최초의 농촌적정규모학교사업 시범교육단지로 지정받아 내년부터 610억의 예산이 투입된다. 초등학교는 13개를 4개로 통폐합하고, 중학교는 9개를 4개로, 고등학교는 4개를 3개로 묶는다. 황폐화되어가는 농어촌교육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더불어 학교문화가 바뀌어야 하고, 교육과정이 개혁되어야 하며, 교육방법도 변화해야 한다. 이런 내부적인 일들은 학교에 맡겨도 된다. 교육 관련 단체들이 학교 바로 세우기 정책을 세워 학교를 살리면 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우리 교육의 현안 문제는 단 하나, 구조적 학벌사회가 문제의 발단이요 매듭이다. 지금, 바로 오늘부터 이를 개선하는 종합교육사회정책을 세워 5년지계나 10년지계를 시작하면 된다. 선비가 물꼬를 막고 있는데 터진 곳을 쫓아다니며 막는지라 막으면 터지고 또 막아봐야 또 터졌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웃 농부가 물었다. 선비님, 책에서는 물꼬를 어떻게 막으랍디까요? 거야 여부가 있나요, 근원을 막아야지요.
한자가 우리 글이다?
경제 5단체의 부회장들이 서울의 한 호텔에 모여 내년의 신입사원 모집에서부터 한자를 시험과목에 넣겠다고 했다 한다. 또 지난 9월 국회에서는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공동대표인 한나라당 박원홍의원이 한자교육진흥법안을 공청회 한 번 열지 않은 채 얼렁뚱땅 발의를 하고 한나라당 국회의원 85명의 이름으로 상정을 했대서 말썽이 일고 있다. 지난 1990년부터 2000년까지 UNESCO에서 세계문맹퇴치 원년 캠패인을 벌이면서 범 세계적으로 문맹 퇴치에 공헌한 사람을 표창하였는데 그 상 이름이 세종대왕상이었고, 시상일도 10월 9일이었다. 또 UNESCO는 한글을 문자로써는 유일하게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더구나 오늘 아침 신문에서는 포르투갈문자를 빌어쓰는 동티모르에서 한글을 국어로 하려는 연구를 하고 있어 한글 수출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사를 맞을 것 같다. 한글교육진흥법이 시행된지 20여년에 한글 세대가 성인으로 성장하였고 신문이 한글로 바뀐지도 오래되었다. 요즘에는 한글 이름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거리 이름이나 지명 또는 상품 이름을 한글로 짓는 사례도 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끊임없이 한자교육이 시도되고 있는가? 항간에서는 한자교습학원, 한자교습학습지, 한자교육주창론자들이 합세하여 1000억 한자교육 시장성과 야합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거기에다가 슬그머니 교육부가 끼어들어 한자를 대학수능시험 제 2외국어로 채택하고, 국가공인시험인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실시해서 국가공인자격증을 주며, 이를 입시와 승진 그리고 입사시험의 가산점으로 활용한다고 한자교육을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교육부의 입장과 딴판으로 문화관광부는 한자교육 부활이?현재의 한글 전용 원칙인 우리의 어문정책의 전환을 초래할 수 있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또 문화관광부는 한자교육은 정부의 어문정책 틀 안의 교육적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아울러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최고 문화 유산인 한글의 위상 저하 초래, 정보화사회에서 한자는 국어 정보화에 걸림돌, 국론 분열을 지적했다. 일본인들이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억지로 바꿔버린 지명과 거리 이름을 아직도 되찾지 못해 한심스러운 터에 한자교육진흥이라니 조선시대 최만리의 망령을 다시 보는 듯 하다. 한자교육주창론자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한자문화권, 국어의 한자화, 외교적 효과, 예절교육 등등의 하찮은 논리는 논리적으로 대꾸할 가치조차도 없다. 오직하면 중국의 대 학자 루쉰(노신)이 한자가 망하든지 중국이 망하든지 해야 한다면서 한자 망국론을 폈을까. 프랑스는 아카데미 프랑세스를 통해 외래어를 거르는데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정보통신 용어 e-메일 대신 courriel(쿠리엘)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한다. 외솔 최현배님처럼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부르지는 못하더라도 남녘 내 고향 운교(雲橋)가 구름다리라는 옛 이름을 다시 찾을 날을 기대한다. 아울러 감칠 맛 나는 사투리도 다시 부활했으면. 다일랍딩겨(다시 말해서 무얼하랴는 전라도 고흥 사투리)
선물과 봉투에 관한 기억
# 1
교장선생님, 홍시 잡수세요. 홍시는 무슨? 아무개 엄마의 뇌물이예요. 뇌물이라 …옥동이는 동갑내기 동각지기네 아이였다. 하루는 둘이서 뒤잽이 싸움이 붙었는데 내가 올라타고 옥동이가 밑에 깔렸다. 싸움 구경을 하던 아이들이 웃는 가운데 옥동이는 늬는 쌀밥만 먹고살아서 기운이 세다고 하면서 느닷없이 또 너네 할아버지가 선생님한테 씨암탉을 보내는 것도 다 안다고 했다. 옥동이네는 고구마 두어 개로 점심을 때우기도 힘든 살림이었다. 그 날 나는 할아버지에게 선생님댁에 보내는 선물을 그만두라고 떼를 썼지만 할아버지는 허허 웃고 말았다. 1940년대의 일이다.
# 2
오늘 하루 학부모님의 학교 출입을 엄금합니다. 1990년대 후반의 스승의 날, 내가 근무하는 학교 교문에는 이런 경고문이 붙었다. 그래도 교실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손수건이나 양말 그리고 화장품들이 작은 산만하게 쌓였다. 선생님은 좀 어색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자랑스럽고 감격한 모습으로 학생들의 스승의 날 노래 합창을 듣고 있다. 정부에서조차 선물의 한도액을 지정했고 까짓 선물들이야 정부의 권고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므로 선생님은 스승과 제자의 존경심의 발로이자 학부모와 교사의 정으로 자위한다. 그러나 반 아이들 가운데 싸디싼 양말 한 짝도 못 사와 눈을 내리깔며 얼굴을 들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 3
1970년대, 교사 햇병아리 시절 만난 선숙이는 루게릭병 환자였다. 담임을 맡은지 사나흘 뒤 선숙이 어머니가 찾아와 봉투를 내밀었고 나는 두어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그러나 이틀 뒤 나는 봉투를 되돌려주었고 선숙이 어머니는 이 전에도 다 했는데 …라며 한 해 동안 교실 청소를 도맡았다. 아울러 도서 보수, 자료 정리와 시험 채점 그리고 숙제 검사까지 보조 교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소풍 때면 손가방이 필수인 시절이었다.
요즘의 교단 풍경은 어떨까? 설 명절 떡값 생각이 나서다. 이 번 설에도 몇 선생님들이 택배를 보냈다. 교사가 교장, 그리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만 서는 관행이다. 우리 전통 관습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었던 아름다운 풍속의 하나였는데 거꾸로 되었노라고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다. 또한 정이란 말이 합리화되려면 오고 가야 되는데 이 건 일방적이면서도 정을 앞에 내세운다. 학부모와 교사, 교사와 교장, 학교와 행정청의 떡값 관례들이 깨끗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근무평정을 얻기 위해 적금 계획을 세우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서글픈 현실도 없어지고, 교육수장 임명과 억억하는 뇌물 소문도 이제는 전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육사회는 깨끗하고 정직하다는 눈 감고 아웅하는 자위적 방어는 소가 웃을 일이니 적어도 학교 내외에서는 돈봉투와 선물이라는 말이 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학교의 제자리는 어딘가?
조선시대 고급관리의 어머니가 사헌부를 찾았다. 우리 아들이 녹봉 보다 더 사치스럽게 살고 있는데 여러 번 충고를 하였으나 듣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아들을 잃는 것은 불문가지고 집안 망신을 시킬 게 뻔하니 사직을 시켜달라. 이 고사는 수분 즉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인용구로 쓰인다. 분수는 제자리다. 군군신신 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 공자님의 말씀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프랑스 격언이다. 외국에 나가있는 우리 석학들이 정부에 교육개혁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종합교육정책을 수립하여, 그것도 하루 빨리 수립해야 한다고 권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고교평준화냐 특목고, 자립고 또는 수능이냐 내신성적이냐, 공교육과 사교육을 놓고 다투고 있을 때 고작 소득 1천 달러의 중국이 동물을 실은 인공위성을 쏘아올려 성공하고 또 다른 이웃인 일본은 교육에 자율과 경쟁체제를 도입하여 교육혁명 중이라고 한다.
초등교육이 초등교육의 자리를 찾고, 중등교육은 중등교육의 자리에 서고, 대학교육이 대학교육으로써 자리 매김을 한다면 우리 교육 문제의 절반이 해결될텐데 교육이 오늘처럼 헝클어진 원인은 각급학교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예를들면 고등학교 교장이나 고등교육 전문가들이 모여 우리 고등학교교육은 이런 방향으로 교육하자고 결의하고 학교에서 그대로 가르친다. 그래놓고 대학 더러 우리가 학교에서 이리이리 가르쳤으니 그 범위에서 수능이든 대학입시든 평가를 해라. 이렇게 저렇게 가르쳤으니 그 교육과정 안에서 맘대로 시험을 쳐서 골라라. 그리고 낙방한 나마지는 1,2년 쯤 기회를 주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길 즉 기능공이나 전문직으로 유도한다. 이럴 때 사회는 한 쪽 길로 간 학생들만을 수용하는 한 가지 길이 아니라 두 가지, 세 가지 길을 만들어놓고 개인적인 적성과 소질을 다라 가게 한다. 물론 임금이나 장래에 대한 보장은 차이가 없다. 초등교육은 초등교육대로 우리는 창의성과 자율성을 기르는 데 독자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우리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창의력과 자율성에 관한 한 독보적이라고 자위한다. 교육과정이 너무 많고 복잡하니 교장의 재량에 의해 교과서를 축소하고 학교만의 창의적인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의 현실은 전국적으로 비슷한 모양의 콘크리트 건물과 전국적으로 닮은 학교교육 목표를 가지고 아직도 대외상 타기에 수업을 희생하는 걸 경쟁적으로 당연시한다. 학교 모습이 같고, 교육목표가 같고, 학교특색사업이 같으며 학교교육계획이 한결 같다. 정말이지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의 모습도 같다. 교무실이 같고 교실이나 복도 심지어는 화장실까지도 일란성 쌍둥이처럼 전국의 학교가 닮았다. 정지용의?향수?에 얼룩배기 송아지란 말이 나온다. 나는 한 때 향토시인이 왜 하필이면 서양 젓소를 소재로 시를 썼을까 의심을 하였다. 그러나 요즘 어느 날 얼룩배기 황소가 우리 재래종 소며 원래 검정과 황색털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황당함을 겪었다.
구조적 학벌사회가, 예를 들면 아무 학교의 인맥이 차관급 공무원의 40%에 육박하는 현실이 학벌사회를 가속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더라도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대학입시를 비롯한 부동산, 사교육 등등의 문제가 시작된다더라도 교육의 종합대책은 더 기다릴 수 없는 교육의 명제다.
3월 초 학교 풍경
교장 초임지 겸면초등학교에서 3년 6개월을 마치고 여수로 발령을 받았다. 인사만사라는데 내게 인사의 문턱은 무던히 높은 편, 아니 절벽이래야 옳다. 삼고초려, 삼세번만에 희망지?근처’로 옮긴 셈이다. 오죽 했으면 작년 인사에서는 교육감을 행정소송 걸겠다고 했었을까. 그러나 올해에는 행정 소송 말도 꺼내지 못하게 교묘한 인사를 해놓았으니, 어디 가선들 교장 노릇만 하면 되겠지. 자위하면서도 엊그제 장성을 찾았다. 여수로 가면 언제 올라올른지 기약이 없어 고봉(기대승)학술원을 지키는 강형에게 인사차 들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 마음을 꿰뚫은 듯 철학 산책로라 명명한 오솔길로 안내했다. 칸트의 산책로 보다 더 훌륭하다고 했다. 잘 생긴 적송과 편안하게 앉은 고택들이 어우러져 눌러앉고 싶었다. 오솔길을 걸으면서 그는 철학 테마 파크를 조성하고 싶다고 했다. 옳거니, 나도 장단을 맞추며 고봉의 높은 학문을 배경삼아 후학을 양성하는 종합교육계획 설립안에 맞장구를 쳤다. 내려오는 길에서는 올 처음 매화를 보았다. 가까이 섰더니 은은한 향이 코끝에 감긴다. 언제 적이었을까, 이 향기의 기억. 교장 초임으로 부임하자말자 꽃과 음악과 사랑이 가득한 학교를 표방하고 꽃부터 심었다. 할미꽃, 하늘매발톱, 원추리, 접시꽃, 감국, 범부채, 부처꽃과 옥잠화들 한국 야생화 30여 종 3천 그루와 꽃사과, 벚나무, 은행나무, 산수유, 백일홍, 목련들 꽃나무 3백 그루를 학교 울타리에 빙 둘렀다. 울타리는 없애버렸다. 거기에 솟대와 장승을 둘러 세우고 출근하면 꽃밭을 한 바퀴 도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꽃대조차 말라버린 눈에 덮인 겨울에도 꽃밭 산책은 버릇이었다. 아직 봄맞이가 이른데도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벚꽃망울을 쳐다보고 꽃달력을 상상하고 서릿발 풀려가는 흙을 만져도 본다. 우리 아이들이 온통 꽃밭 속에서 자라게 하고 싶었다. 꽃밭은 지식 공부 보다 더 중요하다고 애먼 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 좋은 일 뿐이랴. 우리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3월은?잔인한 달?이다. 3월이면 쏟아지는 학급경영부, 환경정리, 사무분장계획, 학급교육과정계획, 가정 방문과 유난히 학년초에 많이 밀려드는 보고공문 수발로 몸뚱이가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 틈바구니에서 아이들은 어디 가 있을까? 새 동무 새 선생님을 만나 1년 동안의 공부계획을 세우고 서로가 서로를 파악해야 하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우리 아이들은 자습을 강요받는다. 꾸중과 체벌도 집중되고 있다. 선생님이 바쁘시기 때문에 평소 보다 더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어서다. 3월이 빨리 지나가버리기를 염원하는 사람이 비단 선생님뿐이랴.
학교문화가 바뀌려면
교장의 의식이 바뀌거나 교장 직위의 승진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한국사회가 마치 용암의 분출 같은 일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데 작은 사회 학교는 전혀 미동의 움직임이 없다. 이러한 요인의 핵심에는 교장의 의식과 교장 직위의 문제로 귀결되는 현행 학교체제와 교원 승진제도라는 뿌리 깊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좀 더 깊이 살펴보면 학교는 교장의 수준을 능가할 수 없다라는 말이 정당화되고 있는 우리 교육계 현실의 문제다. 이러한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교육부에서 교원 정년 단축을 시도했으나 더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교장 임기제도를 도입하였지만 형식에 그치고 있다. 아울러 교육부에서는 교직원회의의 활성화, 학부모 단체의 학교 경영 참여, 학교인사위원회 구성, 학교예결산의 공개, 교장 위임전결규정 시행 등 시책을 내놓았으나 이 또한 상징적이거나 형식에 그쳤을 뿐이다.
며칠 전 새로 부임한 학교에서 직원친목회의를 했다. 회칙을 축조 심의하고 회장 선출 안건이 제기되자 사회는 관행으로 교장이 친목회장이 된다며 대강 동의를 얻어 넘어가려고 했다. 몰아부치려는 것을 완강하게 제지하여 최초의 교사 친목회장이 탄생했다. 교장 위임전결규정을 교육청에서 권장한 항목 보다 훨씬 강도 높게 위임했다. 교감과 행정실장, 부장교사체제를 강화한 것이다. 교장의 결재는 기획과 계획만으로 축소하고 대부분의 시책들은 교감이 전결 처리하도록 경영체제를 세웠다. 이렇게 결재과정을 축소하면 우선 번거롭지 않고 의사 전달과정의 동선이 짧아져서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조퇴를 하여야할 선생님은 학년부장으로부터 시작해서 교무부장, 행정실장, 교감, 교장에 이르는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축소된 과정으로는 교감의 결재와 외출 기록만으로 조퇴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태생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교원 승진제도의 문제다. 승진의 요건은 대강 경력, 연구, 근무평정, 가산점으로 나눠지는데 연구와 근무평정이 학교 또는 교육 불신의 바탕이 된다. 교육은 원천적으로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 관계에서 출발한다. 학생이 교사를 존경하지 않으면 교육은 형성되지 않고 교직원이 교장을 신뢰하지 못하면 학교의 교육은 없다. 그런데 우리 승진제도는 원칙적으로 부정, 비리와 부조리의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행정제도적 규정으로 승진한 교장은 태생적으로 원죄를 지고 있는 셈이다. 원죄를 지닌 교장이 어떻게 교사와 학생의 존경과 신뢰를 거둘 수 있으랴. 학교문화풍토의 개혁과 변화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이의 개선은 합의로 도출하는 일이 최선이겠지만 우리 여건으로는 교육단체들이 정책으로 개발하여 시행하는 일이 합리적일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인용한다. 낡은 학교제도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개혁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훌륭한 교육과정이 아니라 사람이며, 활동하고 있는 교사들이 지향하고 있는 사회의 총체적 성격이다.
한국의 학교장, 경영자인가 교육자인가?
독서초등학교, 서예초등학교
희화화되었지만 학교특색발휘는 전남도교육청의 주요시책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학교특색 찾기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학교특색이라는 호적에도 없는 시책을 구상한 교육행정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만 교장의 특기가 학교특색인 학교는 더 문제다. 전임지 곡성에서는 여나무 개 초등학교 중 서예를 학교특색발휘시책으로 하는 학교가 둘 있었는데 그런 학교는 대개 학생들이 등교하자말자 교실 바닥에 엎드려놓고 먹 가는 일로부터 일과를 시작한다. 속칭 미치는 것이다. 교장이 미치고 교사가 덩달아 미치고 학교 전체의 이상 기류 안에서 끝내는 학부모들까지 미친다. 모두가 미쳤던 성과로써 가상하게도 그 두 학교는 전국 규모 서예대회 전교생 전원 입상이라는 전무후무한 실적을 거양하였다. 이로 인해 교장은 재직 기간 내내 목에 힘을 실었고 덩달아 교육장까지 전교생 전국대회 전원 입상을 입에 달고 다녔다.
학교장의 유형은 대강 두 가지로 나눠진다. 미국은 교장을 관리자나 행정가로 본다. 장학사나 교육감이 교장 지원자를 면담해서 인성, 성격, 의사소통능력을 평가해서 채용한다. 이는 교장을 교육감의 교육철학과 행정방침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직책으로 보기 때문이다. 교장이 되는데 필요한 자질은 교육자의 안목이나 식견보다는 학교조직체를 경영할 능력, 행정적 수완, 교육감에 대한 충성심 등이다. 반면 도이치 교장은 교육자다. 대부분 학교에서 해당 학교의 교사 대표로 구성된 교장선출위원회가 교장 모집 공고부터 선발까지를 책임진다. 도이치의 교원조직은 완전한 수평구조다. 한마디로 도이치의 교장은 책임이 무거운 교사다. 우리는 어떤가. 여러 말 할 것 없이 두리뭉실이다. 선발과정을 보면 2급 정교사로부터 시작되는 교육자선상에 있으므로 교육자라고 할 수 있고 교장자격증을 주어 교육부의 행정체계를 철저하게 따르게 하는 걸로 보면 엄연한 경영자다. 우리 나라의 교장은 어정쩡한 교육자며 어쩔 수 없는 관리자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학교운영계획을 살펴보자. 2004학년도 전남도교육청의 교육시책들은 더불어 사는 인간교육 충실 등 5개의 큰 주요시책 밑에 자아 발견 체험학습 전개 등 254개다. 이를 수용하여 걸러낸 다음 여수시교육청이 펼치는 시책은 역시 더불어 사는 인간교육 충실의 큰 항목에서 명상의 시간 운영 등 353개로 불어났다. 이렇게 내려온 시책들은 허울좋게 학교장의 경영철학에 의해, 학교교육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지역사회 특성을 살리기 위해 학교운영계획에 반영되고 용해되어서 고스란히 교단으로 들어와 교사와 학생들에게로 돌아간다. 교장이 교장의 위상을 정립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학교경영을 하는 상황에서 교육행정기관이 권장하는 수백 개의 교육시책들은 공문서 수발에 이어 제 2의 수업침해요인으로써 교육 왜곡의 불씨가 되고 있다.
공문서 처리로 날세우는 장학(사)
한 달 전쯤, 화순 금호 리조트의 간담회에 초대받았다. 좋아하는 선생님들의 모임이라 교단의 이 일 저 일들을 토론하는 일이 즐거웠고 별 내세운 주제가 없었어도 마치 담소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스스럼없었다. 그런데 토론회 막판에 지나가는 말처럼?이런 선생님?얘기가 나왔다. 충격적이었다. 어렵게 시험을 거쳐 어렵게 얻은 장학직에 들어섰다가 손에 쥔 승진 기회를 마다하고 다시 학교로 되돌아간 화순의 아무개 선생님의 얘기는 신선하다기 보다는 처연한 충격이었다. 자연스럽게 화제가 장학(사)으로 옮아갔다.
햇병아리 시절, 그러니까 교단 2년 째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손님 한 분을 모시고 교실에 들어섰다. 학교는 모교였고 교장선생님은 초등학교 은사요 지역 선배였다. 한창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던 중이고 예고 없이 방문한 손님이라서 나도 좀 당황했던 때문이었을까 고개만 끄떡 목례를 하고 말았는데 교실 천장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 분이 교실 문을 나서려다말고 되돌아섰다. 그리고는 대뜸 내게 삿대질을 하면서 한다는 말이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고 했다. 자다가 홍두깨도 유분수라 했던가. 어안이 벙벙해서 말을 잃은 나를 두고 교장 선생님이 용서를 빌었다. 모두 내 잘못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나는 내가 저지른 잘못을 깨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육두문자 버금가는 비속어들이 튀어나온 뒤라 머리 속이 텅 빈 상태로 멍 하니 먼 산을 보고 있는데 새파랗게 질린 교감선생님이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그 분이 누군지 아느냐고 호통을 치며 빨리 가서 잘못을 빌라고 했다. 그러나 나도 속이 뒤집혀진 판이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교장실에 들어서자 말자 되려 호통을 쳤다. 예고도 없이 남의 교실을 방문했으면 당신이 먼저 예의를 갖추는 게 도리가 아니냐. 절로 터진 입이라고 하면 다 말이냐, 관리과장 자리가 그런 거냐? 라고 되받아 쳤다. 반드시 그 일이 빌미가 되었다고는 보지 않지만 순사에 대한 태생적인 두려움처럼 행정관리직에 대한 부정적 모습은 오늘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요즘에는 장학직에 대한 교육계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데도 오히려 자체 비하는 더 자심하다. 사무직화에 대한 자괴심 때문이다. 교사 공문서 근절 방안을 연구한 결론을 근거로 학교가 접수하는 공문이 년 간 약 1800여 건이므로 시군 장학사 한 사람이 처리하는 공문은 대강 년 200 - 300건이며 이는 수업일수를 감안할 때 하루 한 건인 셈이다. 이를 시군교육청 행정체제로 헤아려보면 관리과는 4계 담당 아래 계 당 3, 4명의 일반직과 한두 명의 보조 인력을 두고 있는 반면 교육과는 4계를 통털어 1명의 보조 인력을 배당하고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열악한 교육과 장학사의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런 형편에 무슨 장학지도 운운하며 장학활동이 어쩌네 저쩌네 운위할 수가 있겠는가.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장학사는 의무기간이 끝나자말자 득달 같이 승진 가도를 달리고 있다.
교육부총리 귀하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교원평가를 도입하겠다는 부총리의 취임일성은 위대하였습니다. 실상 교원평가는 교육계의 문제꺼리였거든요. 아시다싶이 교원평가가 필요하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는 일인데 그 운용이 골칫거리였지요. 교원평가가 근무평정이란 이름으로 승진에만 이용되면서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평가는 평가 자체의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국의 교원근무평정은 승진점수로만 활용되었기에 골칫거리였지요. 이런 판에 부총리께서 시원스럽게 해결하겠다니 누가 환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부총리께서 획기적인 발상을 기자들에게 발표하던 날 저는 환영의 박수를 치다가 문득 머뭇거렸습니다. 너무 황당한, 일선 학교 현장을 모르는 말씀 아닌가고 고개가 흔들렸지요. 그러나 그렇게들 좋아하는 학부모들의 환호작약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습니다. 헌데 이게 웬일입니까. 엊그제, 부총리께서는 외출을 하셨던지 교육개발원이 대타를 참칭하고 나와서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듯 미봉책을 제안했으니 그 허탈함이 오죽했겠습니까. 근무평정이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운용되는 지는 부총리께서도 알고 있겠지요? 접때, 공무원 상여금의 일이 기억나십니까? 상여금을 차등 지급한다니까 대부분 교원들이 한 목소리로 반대를 했습니다. 상여금을 차등 지급할 수 있는 묘안이 적어도 교장들의 머리에서는 구안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근무평정대로 지급할 수 있었으면 오죽 좋았으랴만 웬수놈의 근무평정이 공정하게 신뢰성있게 합리적으로 운용되지 못하였으므로, 만약 근무평정대로 성과급을 나눴다가는 교장은 치도곤을 맞기 딱 알맞은 판이었으니까. 이래저래 교장의 고민이 쌓이던 바 묘안이 떠올랐습지요. 뭐냐고요? 교육계가 모두 똑같이 나눠먹기로 타협을 봤습니다, 전교조 선생님들만 빼놓고. 그런데 그 지경에서도 교장들은 치외법권이었습니다. 꼴지를 받은 저도 신세 한탄 한 마디로 끝냈고요. 이런 상황 인식도 없이 교원평가를 들먹였다면 부총리의 말씀은 탁상공론만도 못하지요. 아무튼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교원평가는 물 건너 간 것입니까? 기껏 해야 그 정도 발상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속인들의 귀를 놀라게 하였단 말입니까. 초등학교 학생더러 통일 방안을 물었더니 지우개로 3․8선을 지웠다는 얘기는 들으셨나요? 제 보기에는 교원평가도 간단합니다. 승진점수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교원평가의 부작용이 모두 없어지니까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 주문이 부총리에게는 공념불이겠지요?
선생님의 연구가 선생님 연구의 표절이므로
‘1등급 상장을 반납하고 전남교육회 사무실에 출두하여 연구보고서 내용을 해명하여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공문을 전남교육회로부터 받았다. 마른 하늘에 벼락도 유분수지,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곧바로 항의를 했다. 담당자의 설명은 이렇다. 올해 사 말고 선정과정의 부정적인 여론이 비등하고 교육부 또한 등급 표창의 공정성 증빙자료를 요구하였다 한다. 그 점 저 점 등급 표창한 연구보고서를 재검토하였는데 내 보고서는 내가 작년에 응모한 보고서와 유사점이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아니지, 자꾸 보완해가며 완성해가는 과정이 현장연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여러 지방에서 1등급을 한 연구보고서를 수집하여 연구보고서회사를 차려놓고 반공개적으로 사고파는 장사가 성업을 이루고, 보고서꾼들이 돈을 받고 연구계획서부터 보고서 그리고 푸른기장 청탁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보고서중개사가 등장한 일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ㅊ도에서는 보고서 심사과정에서 비리와 부정이 나타났고 ㄱ시에서는 보고서 비율을 맞추기 위해 같은 사람이 서너 개의 보고서를 응모한 일도 불거졌다. 지방 1등급에 당선되면 맨 입으로 안 되는 심사위원의 추가 지도를 받아야 하고 중앙에 올라갈 때도 봉투가 딸려야 한다는 현상에 나는 푸른기장 꿈을 접었다. 그래서 우리 교육과정이 거꾸로 되었다며 교단에서 민족정체성을 발현하려는 한국화교육과 한국민화교육론은 걸음마도 못하고 세찬 세파에 묻히고 말았다.
햇병아리 교감 때, 순천부영에서?특기적성교육 도 지정 연구학교?를 운영했다. 이태 뒤 연구공개회를 앞두고 연구보고서를 꾸미는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천편일률적인 보고서(회) 행태를 바꾸려는 획기적인 계획을 교장이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면서. 올해 우리 학교는 문화관광부에서 의뢰한 ‘영화교육연구학교’다. 연구학교일람을 보면 교과와 영역별은 물론이고 안전교육, 정신건강, 연극교육, 재량활동연구학교들 벼라별 연구학교들이 즐비하다. 연구학교 운영 회의자료에는 보고서 번호 매기기부터 보고서 체제는 물론 보고회장의 좌석 배치까지 예를 들어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학교가 전남도내에만 142개 학교다. 전남 1500여 학교의 10%다. 그러나 정작 더 문제가 되는 일은 연구학교의 추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학교교육 저해의 비교육적 행태와 연구의 파급 효과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연구를 위한 연구 그리고 승진점수 도구화다.
일제 청산, 학교에서 사라져야할 학교문화
교직생활 털갈이를 할 즈음, 그러니까 1980년대 신안 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 학교는 낡은 건물을 들어내고 강당을 신축하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공사 중 문제가 생겼다. 초석이 문제였다. 일제시대 지은 목재 건물은 받침돌만 시멘트로 만들어 교실을 올렸는데 시멘트 초석이 얼마나 단단하든지 힘 센 장정들이 하루 종일 달라붙어 큰 쇠망치로 내려부숴도 도무지 깨지지 않았던 것이다. 끝내 받침돌을 부수지 못하고 흙을 쌓아올려 강당을 지었다. 금방 준공검사를 마친 건물의 유리창이 열리지 않아 대패로 깎고 문지르고 하는 우리네 현상과 비교할 때 감회가 남다르던 일이 기억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들이 학교에 들어와서 맨 처음 듣는 말이 무엇일까??앞으로나란히?다. 체제적으로 명령과 통솔을 주지로 하는 군대에서도 앞으로나란히가 없는데 왜, 누가 앞으로나란히를 만들어 학교에 보급시켰을까? 이제, 정년을 1년 남짓 앞둔 시기에야 앞으로나란히에 대한 교육적 반성을 하면서 우리 교육의 보수적인 문화풍토 속에서 자행되고 있는 개선해야할 교육관행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교육과정은 민족정체성교육을 제 1 목적으로 삼고 있는데 학교 현장에서는 믿지 못할 상황이 여과없이 횡행한다. 지난 5월 초 운동회를 했다.?운동회의 민속놀이 지역축제화?를 표방하는 교장의 교육관 때문에 담당선생님이 무척 어려워했다.?축제를 잃어버린 민족.?삼국사기에는 연등회, 팔관회가 있고 동맹, 영고, 무천의 축제와 정월 대보름 곳집 태우기를 시작으로 3월 삼짓날 강남 갔던 제비를 맞아들이는 일에서부터 동지섣달 그믐밤 귀신 쫓는 팥죽까지. 이처럼 세시풍속들이 즐비했던 놀이문화의 풍요를 우리는 잃어버렸다. 아니, 빼앗겨버렸다. 엊그제 티비에서 일본 남부지방의?마쯔리?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1천년을 이어 내려온다는 작은 도시의 축제를 보며, 그 축제 안에 스며있는 백제문화정신도 보았다. 일본인의 전통문화 계승은 저절로 감탄을 자아냈고 요즘 한창인 명패도 족보 없는 우리 지역축제의 현실에서는 서글퍼졌다. 하기야 저들은 국수집 5대 가업의 대를 잇기 위해 대학 교수를 훌쩍 벗어던지는 사람들이다. 올해 우리 학교 운동회는 지역사회 대동단결의 기치를 걸고 가족놀이, 동네놀이를 기준으로 흰호랑이패, 푸른용패, 검은거북패를 나누어 투호놀이, 윷놀이, 제기차기판을 벌였다. 차일을 치고 가족, 동네 사람들 끼리끼리 둘러앉아 먹으며 마시며 놀았다. 남정네들의 씨름판과 여인네들의 강강술래 한 판을 벌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민족정체성교육이라는 화두를 제쳐두고 대한민국 초등교육 교육과정 이념이 추구하는 제 1 목표가 한국인 육성인데 이 밝은 대명천지에도 학교에서는 애국조회를 한다. 애국조회는 애국심을 표방하지만 일제시대 동방요배의 다름 아니며, 반장은 명령 하달의 계통적 통치의 수단화고, 주번활동은 감시하고 적발해서 벌주는 통제의 방법이었는데 일본인 그들도 하지 않은 제국주의 식민화교육 행태가 우리에게는 교육적이라고 미화되어 바람직스럽게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주영이 이야기,
초등학교에서 영재가 문제아가 되는 이유
주영이는 다섯 살 백이 6학년 김 선생님의 아이인데 우리 학교 병설 유치원의 어엿한 학생이다. 어머니가 출근하면 맡겨둘 데가 마땅치 않아 연 이태 어머니와 함께 출퇴근을 한다. 또 하나 유치원 선생님의 아들 종무는 네 살인데 천진스런 유아성 행동으로 선생님들의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내던 관계가 고양이와 개처럼 바뀐 건 2학년 박 선생님의 한 마디 말 때문이었다. 등교하면 두 아이는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좀 난장판을 벌였는데 선생님의 아이라 직원과 학생들이 봐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이 아이들의 행동이 방자해지자 직원들 사이에서도 제 어머니가 듣지 않은 상황에서는 나무라기도 하고 더러는 쥐어박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날은 어쩌다 교내에서 꼬장꼬장하기로 이름난 박 선생님에게 두 녀석이 걸렸다. 그렇잖아도 못마땅해서 눈살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던 박 선생님이 자기 교실에 들어와서 학급을 온통 뒤흔든 두 아이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두 녀석은 혼쭐이 났다. 다시는 허락을 받지 않고 남의 교실에 들어가 분탕질을 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고서야 둘은 풀려났는데 그 때를 기점으로 주영이와 종무는 개와 고양이 사이가 되었다. 박 선생님이 두 아이를 세워놓고 나무라면서 잘못을 저지르고도 야무진 말로 대꾸를 하는 주영이를 더 호통을 쳤고 상대적으로 얌전한 종무를 두둔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주영이의 태도가 돌변했다. 속없는 종무는 주영이의 돌변한 속셈을 모르고 한결같이 따라다니려고 하는 데 주영이의 미움은 상식을 벗어났다. 발로 차는 건 예사고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는 침을 뱉으며 엎어놓고 쥐어 패기도 했다. 다행히 두 어머니 사이에 머리칼 쥐어뜯는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곁에서 보고 있는 나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조마조마하여 마음을 졸였다. 얼마 간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가만히 주영이를 불러내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종무가 그렇게 밉냐고 운을 뗐다. 뜻밖에도 죽이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섯 살 백이 어린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죽이고 싶다는 말에 나는 경악했다. 죽인다는 말의 의미도 모를 아이가 사용하는 말투가 너무 끔찍스러웠다. 아무리 구슬려도 이유는 끝내 말 하지 않았다.
주영이는 남다른 데가 있는 아이였다. 그 일이 있기 전 언젠가는 아름다움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을 해서 선생님들이 놀라고, 콩쥐 팥쥐의 인물을 반대로 해석해서 선생님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기도 했다. 심증적이지만 주영이는 영재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가정이나 유치원에서 그 영재성을 수용을 못한다. 초등학교에서 영재는 영재교육과정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둔재가 되거나 더러는 문제아로 낙인 찍혀서 졸업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교장선생님의 이름을 얻기까지
지난 3월, 새 학교에 와서 갓 심은 야생화를 돌아보고 있었는데 인사를 건네는 녀석이 있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1학년 또래인데 교장을 못 알아보다니, 서운해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얼만큼 지나서 또 인사를 하는 6학년쯤으로 짐작되는 큰 아이를 만났다. 이 녀석의 인사는 더 들을만 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5월 들어 어린이날맞이 글쓰기대회가 열리는데 우리 학교 아이들이 꽤 많이 참가한다고 해서 글쓰기 특별수업을 시작했다. 학교 교사들은 대개 겪어보았겠지만 글쓰기를 가르치다 보면 유별나게 동시 쓰기에서 아이들이 꽉 막힌다. 이는 국어교과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야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대개 아이들이 동시를 아는 눈높이는 생활문투를 줄만 바꿔 몇 개씩 묶어놓고는 동시를 썼노라고 들이미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실정에서 선생님도 뾰쪽한 수가 없어 자신있게 가르치지 못하니 동시 쓰기 수업은 선생님 누구나 제멋대로다. 더구나 선생님들이 유일하게 참고하는 교사용지도서에서조차 동시 쓰기는?이것이다?라고 동시지도의 형식을 제시하지 못하다 보니 동시지도가 교단의 애물단지일 수밖에. 이런 상황에서 비교적 일찍 이 일에 관한 고민을 시작한 나는 손수 개발한 동시지도의?어떤 틀?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교단에서 아이들과 부딪히면서 터득하여 개발한 이른바?배우기 쉽고 가르치기 즐거운 동시 쓰기?가 그것이다.?교장선생님께서 글쓰기부를 지도한다니까 학부모님들이 시새워 자기 아이들을 글쓰기부에 넣으려고 야단법석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우리 연화가 뽑혀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연화는 나름대로 책도 많이 읽었고 글쓰기도 제법 잘 해서 가끔 상도 탔습니다. 그러나 동시를 쓰라면 꽉 막혀서 쩔쩔매고 더러는 울기도 했지요. 이를 지켜보던 에미도 도와줄 수 없어서 같이 울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 연화가 이젠 완전히 달라져버렸습니다. 동시 쓰기를 그렇게 두려워하던 아이가 며칠 배우지도 않았는데 동시 쓰기가 즐겁답니다. 교장선생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연화 어머니는 얼린 식혜와 함께 편지를 들려 보냈었다. 동시 쓰기 지도가 잘 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 다음 나는 아이들을 끌어들이는 더 강력한 수단을 생각했다. 수업 마무리 5분 쯤 짬을 내서 옛날옛날 먼 옛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라며 이야기보따리를 푼 것이다. 전설 따라 삼천리 닮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고 선생님들이 놀랐다. 어린이날, 아이들이 글쓰기대회에 나가서 큰 상을 몇 개 받아왔다. 본래 나는 학교 밖에서 타온 상을 달가워하지 않은 편인데 이 번에는 아이들을 교무실로 불러 시상을 했다. 고급 자전거를 두 대나 타온 아이들이 대견스러워서다. 그러나 정작 더 기분 좋은 일은 글쓰기 수업을 한 뒤 할아버지나 아저씨 호칭이 교장선생님으로 바뀐 일이다.
윤돌이와 꽃품평회
윤돌이와 사귄지 이제 한 달 남짓인데도 녀석은 교문에 들어서며 부르는 내 휘파람 소리를 잘도 알아듣고 득달같이 달려온다.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발 모둠으로 뛰어오는 윤돌이는 정말 귀엽다. 언제 적이었을까, 개에 대한 기억을 잊은 지 오랜데 윤돌이를 통하여 동물성과 사람의 만남이 되살아나고 있다. 윤돌이는 혼자 사는 교감선생님이 관사에서 기르는 개다. 어느 날 우연히 학교 안 관사로 찾아들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개꼴이 아니라 누군가 기를 수 없어 몰래 버린, 그래서 비쩍 마르고 털이 부수수한 개꼴이었다. 더구나 학대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어서 사람을 따르지도 않았다. 요즘에도 운동장에 아이들이 있으면 살살 눈치를 보며 피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적대감도 지나칠 정도다. 그러나 저를 건사해주는 교감선생님과 보건선생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한다. 나는 녀석과 친해지기 위해 과자를 동원했다. 윤돌이란 이름은 보건선생님이 교감선생님의 이름에서 윤자를 따고 수놈일 거라는 짐작으로 윤돌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암캐여서 윤순이라고 고치려 했으나 이미 입에 올라서 그냥 부른다.
지난 화요일,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가꾼 꽃품평회를 열었는데 4학년 지혜가 붕숭아 화분을 가져왔다. 얼핏 보니 지혜 손톱에 노르스름한 봉숭아꽃물을 들였길레 어디 손톱 좀 보자며 물었다. 지혜야, 왜 붕숭아를 심었지? 할머니가 심어주셨어요. 나에게도 지혜 할머니 같은 봉숭아꽃의 추억이 있다. 돌아보니 출품된 100여개의 화분은 아이들의 정성이 스며있어서 우열을 가리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 모두 상을 주자고 했다. 꽃 가꾸기는
동식물 기르기, 생명 사랑을 통한 인성교육의 하나로 펴는 학교시책이다. 四字小學을 가르쳐서, 강요된 효행일기나 선행일기 쓰기를 통하여, 마지못해 하는 이웃봉사나 돕기활동을 통하여 하는 인성교육 보다는 동식물 기르기가 인성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정성을 들여 가꾸고 돌보며 생명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깨우치고 이를 바탕으로 생명존중사상을 일깨우는 체험적 인성교육이 한결 더 교육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어린시절 개, 소, 염소와 닭과 오리 그리고 돼지들 가축이 공존했던 삶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 시절의 추억을 우리 아이들에게 되살려주고 싶다. 검둥이가 이웃집에서 잘못 놓아둔 쥐약을 먹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던 심정으로, 비 오는 날 토끼 먹이를 구하려고 들판을 쏘다니던 마음으로, 장독대에 봉숭아와 맨드라미와 꽈리를 심고 날마다 들여다보던 정성으로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이 사랑이 생명존중사상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바로 체험적 인성교육의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돌이 녀석, 오늘 아침에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가 먼저 현관 앞에 와서 꼬리를 친다.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 학교는 700여 화학공업 생산업체가 들어서 있는 여천국가산업공단 안에 있어 3년 전부터 주민 이주가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교육청 지원이 뚝 끊겼다 한다. 화장실은 배수관이 녹슬어 물이 빠지지 않아 한강이 되기 일쑤고 천정에서는 맑은 날에도 비가 오다가 가끔은 느닷없이 폭포수가 쏟아지기도 한다. 3층 쇠난간은 풍전등화며 시멘트 받침대조차 푸석푸석 문드러진다. 철봉과 그네는 삐걱거려서 모두 베어버렸다. 실어낸 쓰레기만 8톤 트럭 15대. 대강 청소와 정리정돈을 하고서는 이 궁리 저 궁리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여수시교육청의 특별예산을 배정받아 화장실 천정의 폭포수만은 잡았다. 흥국사역장에게 부탁을 해서 철도 폐침목을 얻어다 모래장을 만들고 공사장 감독인 자모회장 남편이 포크레인과 흙을 도와주어서 폐허가 되어있는 정원을 보수했다. 폐교 직전 학교의 자구책은 교장의 동냥 시주 몫이 된 셈인데 학교뿐만이 아니라 지역사회까지 2005년에 이주가 끝나는 걸로 되어 있다. 하지만 계획과 실제에는 괴리가 있어 아무래도 가깝게 5년에서 멀게는 10년이 걸리리라 예상된다.
그런데 정작, 학교의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의 안전과 건강의 일이다. 이 지역에 들어서 있는 700여 업체와 공장이 대부분 화학제품공장이고 공장들은 40년 낡은 시설인데 개조나 보수를 하지 않고 있다. 생산하는 화학공업제품이 사양산업이고 그나마도 공장 가동 여건이 좋은 중국으로 동남아로 공장을 옮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주민 이주라는 정부의 결정이 내려진 배경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는 뜻을 전제한다. 이런 판에 이주조차 순조롭지 않아 학교가 10여년이 더 존속된다면 학생의 안전과 건강은 어찌 할 것인가. 복도 사물함에는 지난 5년 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방독면이 있었다. 방독면은 오는 8월이면 5년 사용기한을 넘기는데 이 또한 이주계획상 대책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작년 겨울에 대폭발 사고가 있었는데 난리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내가 부임해서 한 달 남짓했을 때도 폭발사고가 있었다. 폭발음이 들렸다며 학부모가 전화를 해서야 뒤늦게 알고 시청, 경찰서에 연락을 해봤으나 모두 모르쇠였다. 소방서에서만 현장 출동을 했으니 기다려보라는 대꾸였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마침 바람은 학교 쪽으로 불고 나는 학교장으로써 350여명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으니 기가 막히지 않았겠는가. 부임 4개월 만에 나도 호흡장애를 겪고 있다. 자업자득이다. 작년 말에 있었던?교장 승진 비리 고해성사?의 괘씸죄에 대한 댓가다. 비공식적이지만 이 지역의 대기 오염은 정상치를 넘고 한 대학의 역학조사에서 우리 아이들은 호흡기질환 가능성이 80%에 닿아 있다. 이런 일들이 주민이주대책만으로 다 해결되는 일이 아닐 것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둠벙,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한 생각
시내버스와 공중목욕탕을 잊고 산 지 얼마쯤일까. 얼추 한 20년 된 것 같다. 방학을 하고는 자가용 동승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시내버스를 탔다가 망신을 샀다. 중흥동까지 얼마지요? 했더니 운전기사 아저씨는 같잖타는 듯이?다 같아요.?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동네 챙피다. 그래서 무조건 1천원 지폐를 들이밀었더니 백 원짜리 동전 두 개가 땡그랑 떨어졌다. 헌데 나중에 탄 사람들을 보니 2백원은 땡그랑에서 줍고 또 십원을 바구니에서 내왔다. 아하, 7백 9십원이군 하고 알았으나 십원을 가지러갈 용기가 없어 포기했다.
마침 방학이라 요 며칠 나는 학교 안에 둠벙을 파고 있다. 작은 연못인데 거창하게 말하면 수생생물원이다. 연못 만들기에 좋은 빈 터가 있어서 학부모들의 도움을 받아 며칠째 공사를 하고 있다. 시골 논밭 주변에 있는 자연 생태의 둠벙 모습 그대로 만든다. 돌로 가장자리를 쌓지도 않고 바닥을 시멘트로 둘러치지도 않는다. 실개천이 논밭을 감아 돌아 나가다가 형성된 자연 습지를 닮게 만든다. 연못은 두 개인데 한 개는 대여섯 평 쯤 되고 다른 하나는 서너 평, 둘 사이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싶었으나 역시 예산이 없어 두 연못 사이는 플라스틱관으로 연결했다, 물이 환류되고 생물들도 드나들게. 참말로 욕심을 부리자면 흥국사 옆을 흐르는 냇물을 끌어다 운동장 주변으로 흐르게 하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연못도 파고 자연스럽게 습지를 만들어서 아이들의 놀이터와 관찰원으로 하고 싶은데 이 역시 욕심일 뿐. 연못 가운데에는 아이들이 앉아서 관찰하기 좋게 굵은 돌로 징검다리를 만들겠다. 겨울이면 고기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연못의 남향받이 언덕에 항아리를 사다 묻고 연꽃과 수련은 연못 가운데 심을 것이다. 연못 둘레에는 노란꽃과 보라색꽃 창포를 빽빽이 둘러치려고 한다. 창포 사이에는 부들도 몇 포기 심을 작정이이다. 부레옥잠은 물 가운데 띄우고 물거미, 미꾸리, 붕어와 가재 그리고 물방개와 소금쟁이도 키우려고 한다. 개구리밥도 심겠다. 피라미, 새우들을 잡아넣고 뱀장어나 메기도 몇 마리 넣겠다. 개구리, 물벼룩도 살게 될 거다. 물고기가 집 삼게 돌멩이 몇 덩이로 물고기집을 지어주고 콩자갈을 바닥에 깔아놓으면 생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되리라, 아이들처럼 마음이 먼저 앞선다. 연못이 완성되면 올 봄에 심은 한국야생화 2천 그루와 함께 학교가 공원처럼 되어서 지역사람들도 놀러왔으면 좋겠다. 물이 생명의 원천이듯 사람의 마음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꽃과 물은 아이들 정서적 성장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40년만의 무더위도 구슬땀도 어렵지 않다.
동북공정, 누가 민족정체성을 말하는가?
천사와 선녀는 누가 더 예쁘지? 심청이와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더 마음에 남니? 1980년대니까 강산이 변해도 서너 번 더 변했을 지난 날, 자제되지 않은 정열과 저돌적인 패기만으로 살아가던 젊은 시절 나는 한국인의 정체성교육과 민족정기라는 절대 교육목표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정체성교육이라는 화두는 초등학교 1학년 한글 미해득에서 비롯한 한국화교육 연구 그리고 한국민화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잘 그리지도 잘 그리려고 하지도 않은, 무심한 경지에서 그린 그림 한국민화교육 연구가 무등 전통문화예술교육 연구 교사회를 탄생시켰고 나아가 어린이민학당이 태동되었다. 남도 땅 끝 바닷가 보성의 시골 농촌교사가 청소년 문화교육을 펼치겠다며 몇 번이나 서울을 출입했다. 한국문예진흥원은 그 때만해도 민족정기니 민족정체성교육이니 하는 말 같지도 않은 일에 매달려 예산을 달라는 시골 교사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청소년문화 캠프나 청소년수련회들에 예산을 배정하고 있던 그들이 민속놀이를 가르치겠다는 데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전통민속놀이는 이미 사라져 박물관에 사장되어 있는 문화였으니까. 더구나 깽과리를 두드리는 학생들을 용공 반민족행위자로 몰아 남산으로 격리시키던 시대 아니었던가. 무지막지한 나는 어린이민학당을 열어 어린이들에게 전통문화예술을 가르치는 한편 교육생애 내내 한국화교육과 한국민화교육 연구를 했다. 그리고?학교 운동회의 민속놀이 지역축제화?를 대학원 연구 논문으로 쓰고 학교에서 실험적으로 실행했다.축제를 잃어버린 민족을 가설로 하고서다. 학교 정원에 한국 야생화를 고집하고 미술, 음악, 체육교육에서 한국무용, 국악을 일깨우려고 안깐힘을 썼다. 요즘에 중국의 동북공정을 필두로 친일반민족행위 청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송두율 교수 사건에다가 이만한 땅덩어리와 2천만 인구의 조선을 1천5백만엔은 싸다는 매국노 송병준의 말 녹취록이 공개되어 항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대통령과 당대표가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적 입씨름을 벌이고 또 다른 당 의장은 선친의 경력을 거짓말 했다가 곤욕을 치루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친일반민족 행위를 규명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국론 분열을 조장할 뿐 이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 될 것이 없다고 그냥 덮고 넘어가자고 한다. 혼란스럽다. 역사 인식이 이렇게 엇갈리는데 이는 수구와 개혁 또는 보수와 진보의, 그래서 역사적 전환기의 갈등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서툰 역사 인식이지만 도전과 응전의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본다면 발전과 변화의 조짐이 분명하거든 이제 우리는 역사적으로 확실한 한 매듭을 지어야할, 너무 늦은 그러나 그래서 더 늦지 않은 시대에 와 있다. 특히 학교에서는 사회의 주 5일제 근무에 맞춰 주 5일 수업을 계획하는데 교과를 통합하되 국어교육과 국사교육을 강화하고 특기적성교육의 사회화를 기본 틀로 제시한다.
주 5일 근무제에 주 5일 수업이 없다
교육제도를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 사회 전반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 도대체 얼마나 큰 태풍이 와야 방학 때는 학교를 안 가도 되는 정상적인 나라에서 살 수 있는가? 태풍 메기가 다가오자 광주시교육청에서는 휴교령을 내렸다. 한 참 방학 중인데도 말이다. 한 고등학생이 어이없다며 신문에 쓴 글을 인용한다. 그런데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 왜 나는 선생님이면서도 이 고등학생 같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고등학생의 글을 조금 더 인용해 보자.?물론 이는 교육청의 잘못도 학교의 잘못도 아닌 우리 사회의 태생적인 문제다. (우리 나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 해야 한다. 그런데 고등학생들은 거의 공부를 안 한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강압적으로 획일적 공부를 시키고 자율학습을 강요해야 한다. 이를 이 학생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며 인권 침해라고 비판한다. 절대악이라고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감수성과 창의력은 삶의 풍요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치도 있다고 설파한다.
정부에서는 올 7월 1일부터 대기업을 필두로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했다. 아직은 여건이 뒷받침 되지 못하여 다소 혼란이 예상되나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우리 상황에서 오히려 늦은 복지정책이므로 발전적으로 사회적 합의가 정착되리라고 기대한다. 정부 정책에 따라 교육부는 주 5일제 수업 시범학교를 운영했고 나름대로 대비를 했을 법한데 막상 정부에서 주 5일제를 시행하자 교육부는 2006년에나 교육과정을 개편하여 주 5일 수업을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주 5일 근무제의 한 요인은 가정의 복지 증진이고 토일요일 여가생활을 기대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등교를 하는 상황에서 부모가 무엇을 계획할 수 있을지 민망하다. 우리 교육과정은 몇 년을 주기로 계획적인 개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주 5일 근무제에 맞춰 시범학교까지 운영한 교육부가 실제 주 5일 근무에 주 5일 수업제 학교교육을 맞추지 못한다면 교육부는 탁상공론만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각설하고, 때맞추어 교육과정의 개편이 요청된다. 50교과 80책의 초등학교 교육과정의 통합과 축소다. 이익집단이나 관련 학계가 반발할 소지가 있다고는 생각되나 초등학생에게 50교과 80책이 다 뭐란 말인가. 초등학교 저학년은 민족정체성교육(도덕, 국어, 사회, 국사), 슬기로운생활(수학, 과학, 체험학습), 즐거운생활(체육, 음악, 미술)로 통합 축소하고 고학년은 민족정체성교육(도덕, 사회), 국어와 국사, 슬기로운생활(수학, 과학, 실과, 외국어, 체험봉사), 즐거운생활(체육, 음악, 미술, 수련활동)로 통합 축소 개편하여야 한다. 더불어 시행 방법도 오전에는 학교에서 교과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사회교육기관에서 특기적성교육을 전문강사가 지도하는, 그래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지역사회인 모두가 참여하는 여가생활과 적성교육을 연계하는 교육 방안을 제시한다.
허리에 손, 발꿈치 들고 꼿발로
학원에서 지갑을 잃어버리자 학생들의 지문을 채취해서 수사를 의뢰하였다고 말썽이다.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때 쯤, 선생님께서 솔잎을 한 묶음 가지고 와서 자, 여기에 솔잎이 있다. 한 사람에게 하나씩 나눠줄테니 눈을 감고 가만히 이로 물어라. 너희들 가운데 도둑이 있다면 반드시 솔잎이 길어난다. 솔잎을 물고 눈을 감고 있자니 가슴이 떨렸다. 그래서 나는 도둑이 아닌데도 솔잎을 자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입 안 들어있는 솔잎이 길어지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솔잎 방편으로 도둑을 잡았는지 못 잡았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그 때 그 상황은 나이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 두려움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 햇병아리 교사시절 책상 속 가방에 넣어두었다는 돈이 없어지자 하도 답답해서 나도 같은 실험을 했는데 어린4시절의 내 떨림은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를 어찌 하오리까? 옆 반 선생님이 너무 기승해서 남의 반 생활지도까지 챙기는데 그게 자기 생각과 맞지 않아 고민을 하는 선생님이 하소연을 했다. 이 건 뭐 막무가내로 시도 때도 없이 여러분, 양 손을 허리에 그리고 발꿈치를 들고 꼿발로?를 입에 달고 다닌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라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그 정도만이라면 참고 견디겠으나 한 예를 들면, 아이들과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식당으로 가는데도 대뜸 쫓아와서 호통을 치며 또 허리에 손을 강요한다. 이러니 아이들이 주눅이 들어 붓대질을 못한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시시콜콜 아이들을 잡아 족치는 걸 교육적이라거나 사랑의 매라고 강변한다. 지금은 전설이 되었겠지만 운동장 열 바퀴 돌기는 뭔가 시작된다는 신호에 불과했다. 원산폭격, 엎드려뻗쳐, 끄덕하면 두 손 들고 복도에 꿇어앉히기, 한 술 더 떠서 물 채운 양동이 머리에 얹고 서 있기, 둘이 마주 보고 서서 상대의 뺨 때리기 등등 벼라 별 벌이 다 있었다. 타이어표 슬리퍼를 벗어 뺨을 치거나 주먹뺨을 맞은 일도 다반사였다. 공부를 마치고 하는 화장실 청소는 덤이라고나 할까. 나라고 별 수 있었나, 물려받은 전통을 답습하다가?섬머힐?을 읽고는?사랑의 매?를 부러뜨렸고?꾸짓지않는 교육?을 읽고서야 대오각성한 셈이다. 체벌이 비교육적 반인륜적인 것은 정당한 체벌이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성적인 체벌이 있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체벌로 인한 피해가 체벌을 가해야 한다는 조건 보다 더 가혹할 수도 있다. 참고로 세계 각국의 교육적 체벌에 대한 사례는 미국은 뉴욕과 캘리포니아 등 27개 주에서는 법적 금지, 택사스 외 13개주는 제한적 허용, 일본은 학교교육법에 금지 명문화, 영국은 제한적 체벌 인정이며 그밖에 오스트랠리아, 도이치,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리아는 금지고 말레시아, 스리랑카, 룩셈부르크, 태국은 인정하나 제한적이다. 우리 나라는 아직 50%가 넘는 학교에서 체벌을 묵인하고 있다는 데 생활지도는 가정과 부모의 몫이라는 개념 재정립을 기대한다.
(초등)학교의 무엇이 햇병아리 선생님을 절망케 하는가
ㄱ선생님은 교대를 갓 졸업하고 올 9월에 학교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한 달도 못되어 사표를 쓴 게 벌써 4번째다. 만나기 전에 나는 그를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듣고 보니 학교의 모든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만투성이였다. 예를 들어, 영어 교과담임을 맡았는데 아이들과 공부를 하다 보면 왕따를 당하는 아이나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잠시 영어책을 접어두고 상담활동을 했는데 영어 시간 이수를 하지 않고 웬 생활지도냐는 핀찬이 날아왔다.?담임선생님은 왕따에 관심도 없고 또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학교생활 대부분이 시답잖았는데 교직원들이 말 한 마디 없이 가지런히 일상을 이어가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대개 자네 말이 옳다고 하는데 그런 일로 논쟁이 시작되면 아무도 거들어주지 않고 혼자만 붕 떠있는 꼴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까는 왜 묵묵부답이었느냐?고 선배들을 다그쳤더니 말 안하고 있는 것이 돕는 것이라고 웃더라나. 웃기는 일이 어디 그 뿐이었으랴. 수업을 팽개치고 작성해야 하는 보고공문, 학생지도 보다 우선하는 교육행사, 매주 관행적으로 벌어지는 월요조회와 토요반성주회, 습관적으로 자행되는 학생 애국주회와 중간놀이, 무의식적인 체벌, 일방적인 지시 명령에 의한 무기력한 복종 그리고 반세기 동안 형성된 가부장적 초등학교문화들. 이 햇병아리 교사에게 파행적인 학교경영과 고형적인 학교 관행들을 낱낱이 다 들어내면서도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 초등학교.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무엇 하나 자유롭지 않고, 겉으로는 민주적인 것 같으면서도 안에서는 독선이 횡행하며, 말로는 교육적이라면서 한결같이 교육적이지 않은 사회, 학교가 막 교대를 졸업하고 첫 발을 내민 새내기에게는 숨이 막혔으리라. 그나마 고민하는 후배를 또라이라고 치부하고 품어 앉지 조차 못한 현실이 청주교대를 졸업한 전북 태생 선생님이 청운의 뜻을 품고 전남으로 온 데 대한 보상이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대안학교나 불우청소년학교로 가고 싶다고 했다. 철없이, 칼럼을 읽고 찾아왔다는 그를 경남의 존경하는 ㅈ교장선생님께 부탁했다. 선생님을 보내며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른다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선형 교육과정의 함정, 부진아
혁진아, 연못이 그렇게 좋아? 으흠, 그렇다면 윗 연못은 혁진이가 돌보고 아랫 연못은 교장선생님이 맡으마. 둠벙 관리를 4학년 혁진이에게 맡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연못가를 맴돌다 보니 유난히 연못을 끼고 도는 아이가 있었다. 그 게 4학년 혁진이다. 혁진이는 학교만 끝나면 흥국사 앞개울에서 피라미나 다슬기 그리고 참게까지 잡아다 넣는다. 슬며시 담임선생님에게 호구조사를 했더니 고개를 흔든다. 혁진이는 말썽꾸러기였다. 우선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아버지가 고주망태다. 교실에서도 언뜻 눈만 떼면 시야에서 벗어나 해찰을 부린다. 그래도 혁진이가 잘 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고 했다. 만들기다. 또래 이상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진이고 구제불능이다. 문제는 부진이 원인이다.
상대성 이론도 수준에 알맞게 풀어쓰면 유치원 아이도 배울 수 있다. 완전학습을 주창한 J. S. Bluner의 가설이다. 부르너는 이 가설을 과학교육에 나선형 교육과정으로 적용하였다. 나도 교사 초창기에는 이 가설에 심취해서 하면 된다고 나섰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엊그제 학력평가 결과를 보았다. 수학과 과학 과목이 다른 교과에 비해 점수가 낮은 건 당연지사였는데 그날따라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부진아 때문이었다. 다른 교과의 부진아 수는 점수와 비례하는데 수학은 점수 비례의 대강 3 ~ 10배 정도. 담당 선생님은 수학 교육과정이 계단처럼 단계화 되어 있어서 자칫 한 시간의 부진이 영원한 부진으로 이어지는 모순이 있다고 했다. 이른 바 나선형 교육과정이다. 7차 교육과정에서 수준별 학습을 주장하지만 우리 교육 여건이 실현 불가능하고 부진을 치유할 방안이 없으므로 수학에 관한 한 우리는 학교에서 부진아를 제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타개하려는 궁여지책으로 학부모 학습도우미제도를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이 또한 이런 저런 이유로 시행이 어렵다. 2006년에는 주 5일제에 맞춰 교육과정을 개편한다는데 과학과 수학의 나선형 교육과정을 다른 교과처럼 단원 종결로 처리하여 점차 수준을 높여가는 형식을 채택하였으면 어떨지?
한국산 신토불이 영양 두부
영상 체험학습 기회 제공을 통한 자기표현력 신장이라는 주제로 지난 10월에 우리 학교에서 전남도교육청 지정 연구학교 공개회를 열었다. 학교 연구가 교육 발전에 뜻이 있는 게 아니라 행사를 위한 행사 또는 승진 점수 따기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추진 과정 내내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부임하기 전에 받아놓은 주제고 또 왜곡된 현실 아래서라 할지라도 선생님들이 원하니 입장이 어정쩡해도 할 수 없었다. 이런 판에 공개회 날짜가 다가와 의례적이라지만 교장이 인사말을 해야 한다니 난감할 수밖에. 고민하던 중 옳거니, 김기덕 감독과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데이비드 풀리쳐 교수를 비교한 칼럼이 떠올랐다. 김기덕 감독은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사마리아로,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빈 집으로 감독상을 휩쓸어 우리 영화계의 자존심을 높였다. 수상 뒤 항간에서는 그가 학부를 나왔다면 수상을 했을까라는 반 교육 어법이 떠돌았다. 김 감독의 학력은 중학교 중퇴다. 반면에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풀리쳐 교수는 내가 받은 미국교육에 감사한다고 우리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상반되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우리 학교의 연구는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촬영하고, 에니메이션을 구상하고, 캐릭터를 만들며, 영화 대본을 써서 촬영도 했다. 시답잖은 영화연구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와 본질적인 갈등에서 무관심했던 나는 공개회를 돌아보며 아이들의 참여와 역동적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교장선생님, 액션 한 컷 부탁드려요. 아냐 아냐, 너희들 영화니까 너희들 끼리 해. 영화를 찍는 날 아이들이 교장실에 몰려와서 손을 잡아끄는 걸 매몰차게 거절했던 게 부끄러웠다. 연구 결론에서는 학교연구의 변화 모델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개회 다음 날 교직원회의 때, 이런 연구학교라면 몇 번이라도 해야 한다고 속 보이는 주장을 했다. 태어나면서 깨, 보리, 수수, 조, 옥수수, 콩과 팥 같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국민보통교육이라는 학교교육의 틀에 넣어 맛도 모양도 빛깔까지 똑같은 한국산 신토불이 영양 두부를 생산하고 있다면서 학교교육 변화를 설파했던 나로써도 흐뭇한 날이었다.
<광주교사신문>
잃어버린 역사, 한단고기
어제 이른 저녁에 소쩍새 울음을 들었는데 아스름한 어린 시절과 유년의 추억이 새삼스러웠다. 우리 집이 무등산 자락 끄트머리라서 가끔 도시환경 같잖은 덤도 있다. 헌데 민족정체성 이야기를 하려면서 웬 소쩍새 타령? 글쎄, 아직도 귓가에서 맴도는 울음소리가 하도 애절해서였을까.
출퇴근 차에서 6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지금도 웅녀와 환웅이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가르치는가>라고 물었더니 예상대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과서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으며 일개 교사로써는 교과서 이외의 정제되지 않은 학설을 교단에 도입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김부식의 시대에는 사대주의 때문에 우리의 만년 역사를 3천여년으로 절하하고 해방 후에는 일제 교육을 받은 사학자들이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서더니 개량된 역사를 읽거나 가르치는 일이 교단에서는 불가능하단다. 독일의 철학자 딜타이는 <역사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역사가의 시대와 그의 문화적 위치와 개인적 세계관의 관심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라>고 주장하여 이후 역사가들의 의식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아놀드 토인비 역시 <신화적 방법이 결코 경험주의적 방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했다. 트로이가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로부터 발굴되고 이집트 왕가의 무덤들은 구전으로 찾아냈다. 단군 탄생 설화가 곰이 신령한 쑥과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된 것이 아니라 곰은 <ㄱ․ㅁ>으로써 땅의 신이며 하늘의 신인 환인(하느님)의 아들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고 단군은 당골레라는 어원의 보통명사며 조선이라는 나라의 47세 2096년의 천황들의 명칭이었다. 더불어 환인천황의 시대는 7세 단인까지 3301년이며, 환웅천황은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단고기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의 4종 사서를 1911년에 계연수라는 분이 하나로 묶은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이들 사서들 이름조차 들은 일이 없다. 우리 나라 역사계의 대부들이 사대주의와 제국주의적 바탕에서 구축한 역사를 <태정태세 문단세>로 외우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에나마 민족사관을 정립하여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신진 사학자들의 노고 덕택으로 이만큼 발전한 셈이다. 그런데 요즘 중국이 심상찮다. 며칠 전 신문에서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고구려를 중국 변방의 역사로 중국사에 포함시키려는 <동북공정>을 기획하여 그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한다. 지난 해에는 고구려 고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일도 중국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곰 타령만 하다가 광개토대왕비 뿐만이 아니라 고조선 역사를 송두리째 잃어버릴른지도 모른다.
벌겋게 서녘을 물들이고싶다더니
누군가가 그랬다, 지는 석양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전통 혼례식은 온 동네 축제였다. 집집마다 사람마다 장롱 깊이 간수했던 농지기를 마치 자기가 신랑 신부인 양 채려 입는다. 차일 식장에서는 신랑이 읍, 신부는 흥 하는 알아먹지 못할 소리조차 흥겨웠는데 내 눈은 언제나 원앙이에게 머물었다. 붉고 푸른 원앙은 환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각직이 송 노인이 원앙이를 들여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래서 나는 실컷 원앙이를 안아볼 수 있었다. 원앙이는 암수가 다 외 날개라 한다. 외짝 날개이기 때문에 두 몸이 한 몸이 되지 않으면 날 수가 없다.
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많은 사건을 남겼다. 노란 개나리꽃이 특정 정당을 표시하기 때문에 전국의 개나리꽃밭을 모조리 뽑아버려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나왔다. 유치원생들이 노란 옷을 단체로 입었으므로 모두 입건 조치해야 한다는 익살도 터졌다. 선관위 들으라는 소리다. 더러는 물(사람)갈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판(제도)갈이라고도 했다. 특정 정당이 개헌선을 넘는 의석을 확보하리라는 예상이 횡행하더니 노인 폄하 발언에 전세가 역전되었다고 울쌍이다. 탄풍과 노풍이 소용돌이를 쳤다. 3김은 스러졌으나 국군묘지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삼보일배가 가세하고 빨갱이가 환생을 했다. 그러나 깨끗했다. 법정 비용을 절반도 쓰지 못한 선량이 태반이다. 축제화되지는 못했지만 절반은 건진 셈이다. 오늘 아침 방송에는 장애자 국회의원이 클로즈업되었는데 그 분 한 사람으로 국회문화가 크게 바뀔 것이라고 한다. 절반의 성공. 아니다, 99% 보다 더 큰 1%의 성공이다. 17대 국회는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입은 마치 독립문을 들어서는 백야장군을 맞은 양 가슴이 떨린다. 언제 쩍 외상이었던가. 이제야 해방 50년 밀렸던 외상을 받은 것 같다. 정수동이 주막에 들러 주모에게 또 외상 술을 청했겄다. 밀린 외상이 얼만데, 주모 눈치가 고울 턱이 있나. 정수동이는 속절없이 평상에 걸터앉아 술 익은 냄새에 침만 흘릴밖에.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돼지 한 마리가 오더니 널어놓은 술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게 아닌가. 정수동은 돼지 쫓을 생각은 안 하고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겄다. 외출에서 돌아온 주모가 눈을 부라리며 왜 돼지를 쫓지 않았느냐고 힐란했다. 정수동 왈, 그 녀석은 맞돈 내고 먹는 줄 알았지. 그래 맞돈이다. 이제 외상은 사절이다. 외짝 수구의 수레에 당당히 맞서는 진보의 바퀴가 싹을 틔웠다. 수구의 바퀴가 크고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세상을 구르게 하는 것은 작은 진보의 바퀴라는 사실을 역사는 알고 있다.
일제 청산, 학교에서 사라져야할 학교문화
교직생활 털갈이를 할 즈음, 그러니까 1980년대 신안 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 학교는 낡은 건물을 들어내고 강당을 신축하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공사 중 문제가 생겼다. 초석이 문제였다. 일제시대 지은 목재 건물에 받침돌만 시멘트로 만들어 학교를 지었는데 시멘트 초석이 얼마나 단단하든지 힘 센 장정들이 하루 종일 달라붙어 큰 쇠망치로 내려부숴도 도무지 깨지지 않았던 것이다. 끝내 받침돌을 부수지 못하고 흙을 쌓아올려 강당을 지었다. 금방 준공검사를 마친 건물의 유리창이 열리지 않아 대패로 깎고 문지르고 하는 우리네 현상과 비교할 때 감회가 남다르던 일이 기억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들이 학교에 들어와서 맨 처음 듣는 말이 무엇일까??앞으로나란히?다. 체제적으로 명령과 통솔을 주지로 하는 군대에서도 앞으로나란히가 없는데 왜, 누가 앞으로나란히를 만들어 학교에 보급시켰을까? 이제, 정년을 1년 남짓 앞둔 시기에야 앞으로나란히에 대한 교육적 반성을 하면서 우리 교육의 보수적인 문화풍토 속에서 자행되고 있는 개선해야할 교육관행이 이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교육과정은 민족정체성교육을 제 1 목적으로 삼고 있는데 학교 현장에서는 믿지 못할 상황이 여과없이 횡행한다. 지난 5월 초 운동회를 했는데?운동회의 민속놀이 지역축제화?를 표방하는 교장의 교육관 때문에 담당선생님이 무척 어려워했다. 축제를 잃어버린 민족. 삼국사기에는 연등회, 팔관회가 있고 동맹, 영고, 무천의 축제와 정월 대보름 곳집 태우기를 시작으로 3월 삼짓날 강남 갔던 제비를 맞아들이는 일에서부터 동지섣달 그믐밤 귀신 쫓는 팥죽까지. 이처럼 세시풍속들이 즐비했던 놀이문화의 풍요를 우리는 잃어버렸다. 아니, 빼앗겨버렸다. 엊그제 티비에서 일본 남부지방의 마쯔리를 소개한 적이 있다. 1천년을 이어 내려온다는 작은 도시의 축제를 보며 일본인의 전통문화 계승과 요즘 한창인 명패도 족보 없는 우리 지역축제의 현실을 비교하며 서글픔을 느꼈다. 하기야 저들은 국수집 5대 가업의 대를 잇기 위해 대학 교수를 훌쩍 벗어던지는 사람들이다. 올해 우리 학교 운동회는 지역사회 대동단결의 기치를 걸고 가족놀이, 동네놀이를 기준으로 흰호랑이패, 푸른용패, 검은거북패를 나누어 투호놀이, 윷놀이, 제기차기판을 벌였다. 차일을 치고 가족, 동네 사람들 끼리끼리 둘러앉아 먹으며 마시며 놀았다. 남정네들의 씨름판과 여인네들의 강강술래 한 판을 벌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민족정체성교육이라는 화두를 제쳐두고 대한민국 초등교육 교육과정 이념이 추구하는 제 1 목표가 한국인 육성인데 이 밝은 대명천지에도 학교에서는 애국조회를 한다. 애국조회는 애국심을 표방하지만 일제시대 동방요배의 다름 아니며, 반장은 명령 하달의 계통적 통치의 수단화고, 주번활동은 감시하고 적발해서 벌주는 통제의 방법이었는데 일본인 그들도 하지 않은 제국주의 식민화교육 행태가 우리에게는 교육적이라고 미화되어 바람직스럽게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머슴 이야기, 학급교육계획 설명회
지난 1950년대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국제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제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거제도에 수용하고 있었던 남북한 포로들을 밤중에 몰래 석방시켜버린 일이다. 남북한 포로를 한 울타리 안에 수용하자 적대적 관계에 있던 포로들이 수용소 안에서 암투를 벌이고 상대를 테러하며 심지어 암살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들을 전격적으로 석방시켜버렸다. 뒤이어 국제적인 물의가 일어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미국도 소련도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고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곤경을 치렀으나 한편으로는 구국적 결단이었고 인도적 행위라는 찬탄을 샀다. 그 때 우리 마을에도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너댓명 배정되었는데 이들은 오늘은 이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내일은 저 집에서 잠을 자는 동가식서가숙 신세였다. 마침 우리 집은 상머슴을 둘 씩 들이는 시골 부자여서 널따란 사랑방이 있어 그들을 모두 수용했고 이듬해 할아버지는 그들 중 둘을 골라 머슴으로 앉혔다. 올 데 갈 데가 없는 그들은 잔꾀를 부리는 일 없이 황소처럼 일을 했고 할아버지의 선견지명을 동네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그렇게 한 5년 머슴살이를 했던 그들은 할아버지의 중매로 한 사람은 이웃 동네 과붓집 데릴사위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혈혈단신 이북 처녀와 결혼을 하여 우리 뒷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할아버지는 머슴에게 최고 대우를 했다. 할아버지는 3대 독자 귀한 손자들보다도 더 머슴들의 밥상을 챙겼다. 할아버지 밥상보다도 머슴의 밥상이 더 걸었다. 생선도 고기도 머슴을 위해 사들였고 5일장은 머슴을 위한 반찬을 장만하는 날이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어저께부터 2학년을 필두로 학급교육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학교의 3주체를 얘기하고 주인의식으로 학교경영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했다. 교직원은 학부모에게 고용된 머슴임을 설명했다. 충실한 봉사자로써 교육과정교육으로부터 재량활동과 특별활동의 개요 그리고 평가연간계획과 홈페이지 또는 이메일을 통한 학부모와 의사소통 방법을 설명했다. 학습도우미와 급식도우미 역할도 부탁했다. 가정교육, 특히 도덕규범교육의 원천이 가정임을 일깨우고 가정의 생활규범에 의한 철저한 규범교육을 당부했다. 학년말에는 학급교육계획의 실행을 평가하는 모임을 갖기로 하였는데 처음에는 생뚱한 회의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학부모들이 어깨를 추스르며 돌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무유호추無有好醜
잘 그리지도 않은, 잘 그리려고 하지도 않은, 아름답고 추함이 개재되기 이전의 아름다움, 좋고 나쁘고를 가리는 의식이 개재되기 이전의 무심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아름다움은 불사의不思意한 조선민화로 집약된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柳宗悅, 일본인 민속학자)의 한국민화 예찬론이다. 이 외에도 한국민화는 생명의 그림, 품성의 그림, 신비의 그림, 전신傳神의 효과效果로도 표현된다. 그림을 접신接神의 경지로 극찬한 것이다.
한국민화와 만남을 나는 교육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로 삼고 있다. 특히 미술적 문외한이었던 내가 민화라는 생소한 분야와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우연이랄 수 없는 숙명적인 연고가 있다. 교대를 갓 졸업한 나는 고향의 모교로 발령을 받았다. 어찌된 셈이었는지는 모르나 햇병아리에게 1학년이 맡겨졌다. 지금 생각하면 학년 배정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때야 철모르는 시기라 주는대로 맡았을 뿐. 그러나 웬 걸, 이 건 참혹한 시련이었다. 60년대 초등교육에서 한글 문자해득은 절대절명의 과제였다. 1학년 담임은 이 지상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투구를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과 또한 역시나였다. 학년말에 추정한 문자미해득아는 대략 서너명. 1학년 담임으로서 몇 명의 문자미해득아를 2학년으로 올려보내는 착잡한 심정이 결국 오기로 변했다. 오냐, 문자해득!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붙어 보자. 다음 해에는 1학년을 자청했다. 그러나 역시 KO패. 그렇게 내리 9년을 덤볐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아니 실패가 당연한 거였는데 무지막지한 그 시절에는 막고 품기 밖에 몰랐으니, 무지의 소치였다. 하여튼 1학년 한글 문자해득 완전학습에 실패하고는 교과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우리 교육과정이?세계 속의 한국인 육성??민족정기?등 민족정체성을 제 1의로 하면서도 서양교육 체제와 체계 그리고 형식까지 서양 일변도라는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거꾸로 된 교육과정 바로잡기 연구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화, 한국민화를 알게 되었다. 1980년대의 미술교과서를 예로 들면 한 단원의 10시간 교육과정에서 8시간은 서양화 위주로 가르치고 단 2시간을 한국화나 한국적 미감을 감상하는데 할애하고 있었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슨 민족정체성을 거론하며 한국인 육성을 의도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그 시절은 유신독재시대라서 비판을 용서치 않는 시대였는데 나는 겁도 없이 교육과정이 거꾸로 되었노라고 떠들어댔으니 목숨을 연명한 것만도 조상의 음덕일리라.
한글 살이, 지식인 시늉하는 사람들의 쓸개
최근 열린우리당 신기남의원을 비롯한 여야의원 67명이 한글날의 국경일 지정을 위한?국경일에 관한 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니 반갑고 기쁘다.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하는 한글은 한국인의 정체성이나 민족정기 차원이 아니라 문자로써는 유일한 UNESCO 세계문자문화유산이다. 작년에 역시 국회에서 발의되었던 김원웅의원을 비롯한 여야의원들의 한자교육진흥법, 서울대학교의 입학 전 한자교육, 경제 5단체장들이 합창했던 입사시험 한자 평가들은 한글 폄하가 아니라 민족주체성을 망각한 서글픈 해프닝이었다. 중국의 대학자요 명문장가인 루쉰(노신)조차 한자의 문맹률 때문에 한자가 망하든지 중국이 망하든지라며 한탄하다가 드디어 중국은 1960년대에 간자체를 개발하였다. 아울러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은 같은 한자문화권이라 하더라도 중국은 간자체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고 일본은 약자체를 쓰며 한국은 정자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전혀 문자의 상호 유통이 되지 않는다는 일이다. 이런데도 한자주창론자들의 논지를 보면 마치 한글 반포 때 최만리를 위시한 사대주의자들의 망령을 보는 것처럼 섬찟하기만 하다. 사대주의자들이 주장한 한글 반포 불가론은 첫째, 일반 백성들이 한글을 깨우쳐 문명화되면 통치하기가 어려워지고, 둘째는 종주국 중국의 노여움을 어찌 달랠 것인가 였다. 하기야 오늘 같은 대명천지에도 정신 못 차린 학자님들은 햇무리무늬청자라면 좋을 것을 일훈굽문청자라고 고집하고 검사님들의 고발장은 전혀 난해한 그들만의 문장으로 일관되어 있다. 병원의 처방전이나 진단서를 보라. 그들이 행사하는 꼬부랑글씨는 그들을 그들답게 하는 가치관으로 치부해줘도 좋을 일인가. 1970년대부터 UNESCO에서는 범세계적인 문맹퇴치운동을 벌이면서 세계적으로 문맹퇴치에 기여한 개인과 단체에 공적 시상을 하는데 상 이름이 세종대왕상이고 시상일도 한글날이다. 한글은 국제어 영어를 제치고 동티모르에 국어로도 수출되었다. 그러나 한글은 역사적 수난을 거쳤다. 이승만대통령은 한글전용법을 통과시켰고, 박정희대통령은 공문서의 한글화를 정립했다. 그러나 노태우대통령은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켰으며, 김영삼대통령은 영종도국제공항 이름을 공모 1위인 세종공항을 묵살하고 8위인 인천공항을 선택했으며, 김대중대통령은 아랫사람에게 한글날 복원 탄원서를 넘겨주며 잘 해주라는 정도 뿐 관심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한다. 한글은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민족정체성의 으뜸이요 한국인답게 살아가는 민족정기의 알파와 오메가다.
동북공정, 누가 민족정체성을 말 하는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의견은 대개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남북통일 뒤 몽골과 연변의 중국 동북방 영토 논란을 미리 차단하려는 속셈이라는 시각과 한국에 영향력이 있는 미국이나 일본의 북진을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저지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이라는 인식이다. 또 더러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먹고 살만해지니까 영토 패권주의를 들어내는 중화론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동북 3성은 조선족 자치구다. 일제의 만주협정으로 중국에 귀속된 땅이다. 영토 분쟁은 조선시대부터 치열했다. 토문정계비가 이를 입증한다. 조선시대 영토 문제로 협상을 하던 이중화는 중국 협상대표에게 내 목을 내줄지언정 영토는 한 조각도 자를 수 없다라고 하여 국토를 획정했다 한다. 이에 반해 이만한 땅덩이와 2천만 인구는 1억5천만엔이면 싸다고 했다는 송병준의 매국 협상 녹취록은 모골이 다 송연해진다. 사대주의 학맥과 식민사상 학파에 묶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폄하하며 말로는 배달겨레니 단군의 자손이니 하면서 아직도 대한민국의 강역과 역사를 정립하지 못한 탓을 누구에게 돌리랴. 이웃 중국이 또는 일본이 우리 역사를 훼절하고 강역을 넘보는 일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거늘 호떡집 불난 마당을 연상시키는 작태를 연출하고 있는 우리네 정부와 학자님들 이번 일로 정신 좀 바짝 차리고 제발 각성하기를 촉구한다. 이에 비하면 신진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민족정신은 가상한데 학맥이니 학파니 하는 사학계의 완고한 카테고리에 묶여 그들만의 연구로 맴돌고 있어 차제에 이의 개선과 발현을 촉구한다.
곰과 호랑이 토탬 신앙을 가진 부족의 여자와 환웅이 혼인해서 단군을 낳았다고 가르치기가 어렵다. 곰은 ㄱ․ㅁ이니 땅을 뜻하고 하늘의 아들 환웅과 땅의 여자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을 기웃거리는 아이들에게 단군조선을 신화를 신화로만 가르치기에는 아무래도 역사 인식이 역부족이다. 덧붙여 말하거니와 아무리 민족정기가 뒤죽박죽이라더라도 입이 열 개라도 말 못할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민족적으로써 도리다. 달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게 다 말은 아니니까. 지역 정서를 담보로 씨알도 먹히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아무개씨는 조용히 근신하기를 충고하고 수구로 자처하는 분들도 역사는 결코 거꾸로 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터득했으리니 역시 자성하고 근신하기를 촉구한다.
학교에서는 마침 주 5일 근무제에 맞춰 주 5일 수업을 하기 위한 교육과정 개편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50교과 80책의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4 ~ 5교과로 통합 축소하되 국어교육과 국사교과는 정책적으로 편성하고 이에 맞추어 오전에는 학교에서 교과를 공부하고 오후에는 사회에서 특기적성교육을 하는 일대 교육시스템을 제안한다.
빨강색 알러지와 검정색 컴프렉스
지난 90년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을 운동회를 하려고 무용을 구상하는 선생님이 붉은 머리띠를 주문했다. 그 걸 본 교장이 깜짝 놀라 노발대발 왜 하필이면 붉은 머리띠냐고 호통을 쳤다. 붉은 색 알러지 현상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 그렇게 의식화되어 살아왔다. 실상은 붉은 색이 왜 알러지가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정부가 반공단체가 붉은 색 컴프렉스를 바이러스처럼 전파하여 우리는 모두 붉은 색 염증에 감염되어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에 붉은 색이 많이 들어가면 선생님이 먼저 오금이 저리고 운동회에서는 청홍패가 청백패로 바뀌는 넌센스가 합리화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인들의 붉은 색 선호 감정을 공산화에 이용했다. 그리고 붉은 색은 북한에서도 이용했다. 북한에서 붉은 색을 이용한 일이 남한 전체에 붉은 색 알러지를 유발시켰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으로 붉은 색 알러지 금단현상을 겪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친일반민족행위 규명 청산, 의문사 진상 규명 그리고 경제 난국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이라는 시국선언에 한국사회의 원로를 비롯한 1500명이 연서명을 했다며 신문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 오늘 시국선언에 동참한 그리고 동참하리라는 많은 분들께 묻고 싶다. 당신들이 걱정하는 그 애국심의 바탕이 무엇인지 먼저 자문을 하라.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느 시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뒤돌아보시라. 모 일간지의?학생의 눈으로 본 친일진상규명법?기사에서 전주고등학교 2학년 신은비 학생은 이렇게 묻고 있다. 첫째, 친일진상규명법이 왜 야당 죽이기이며 여당의 재집권 전략인가,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모두가 친일파의 후손인가? 둘째, 어째서 과거사 청산이 우리 경제를 어렵게 한다는 것인가, 과거사 청산과 경제의 함수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 아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론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기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엊그제 전남초등교장 연찬회가 있었다. 교육청 관계자는 전국 꼴찌 학력이 어쩌고 변명에 급급했고 질서교육과 경영전략 강의도 시큰둥하던 차 내 시선이 교장들의 옷차림에 쏠렸다. 강당을 가득 메운 450여명의 교장들이 모두 하나같이 검정색 양복에 하얀 셔츠 그리고 넥타이 차림이었다. 캐주얼 차림으로 검정색 군중 속에 혼자 앉아있는 내가 두려움을 느낀 건 단순한 기우며, 검정색 양복에서 오늘 우리의 학교문화를 보았다면 너무 발칙한 상상이었을까?
여론 조사와 원로의 말씀 그리고 도깨비 방망이
서울 천도는 관습헌법에 의해 불가하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온 나라를 토론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렇잖아도 친일규명법, 언론개혁법, 보안법, 사학법 등 개혁 입법이 나라를 양분하여 갑론을박이 요란하던 터라 헌재의 위헌 판정은 기름에 불을 붙인 꼴이다. 역시, 혁명은 총칼로만 가능한 것인가? 오만가지 잡념들, 민주주의란 참 인내가 필요한 것이구나라는 결론과 우리는 아직도 역사적 시련을 벗어날 수 없는 민족적 숙명을 타고났구나라는 자책 뿐. 그래서 또 다시 주마등처럼 스치는 역사연대표 - 조선시대를 간과하더라도 대한제국 망년의 풍운, 일제식민시대, 해방과 분단 그리고 남북전쟁, 군사구테타, 10월 유신, 광주항쟁.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로부터 오늘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이르는 우리 역사의 노정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누가 뭐라 그래도 나는 노무현 정부를 기대하였다. 질곡과 간난의 길을 걸었지만 우리 민족사를 발전 과정으로 보았다.
총칼 없는 혁명은 불가능한 것인가?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부러워하는 사람으로서 실패한 혁명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이 원통하고 불쌍하다. 이시애의 난, 홍경래의 난으로부터 만적의 난, 조광조의 개혁 그리고 한말 김옥균의 3일 천하까지. 아니다. 하나 더, 정말로 안타깝고 서글픈 역사가 있다. 동학혁명. 녹두장군 전봉준은 천하의 역적이다. 동학란이 성공할 수 있었기에 한 말이다. 정권의 진원지 한양의 호응이 부족하고 보리가 익지 않아 군량의 조달을 염려했다지만 한양에서는 수 천 명의 백정과 노비들이 동학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원도와 함경도에서는 이미 진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봉준이 꾸무럭거리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진격했다면 일본이 조총을 투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동학란의 실패에는 내부적인 자체 모순이 있었다. 왕정을 국가 체제로 존속시키려한 것부터가 실패의 시작이었다. 서민 상놈들이 세상을 바꿔보자고 봉기를 하면서 왕정에 의존했으므로 그 실패는 정치적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이 게 우리 역사의 교훈이다. 관습헌법과 여론 조사가, 원로의 말씀도 만능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엊그제 평가장학을 받는 자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거론되었다. Nobless는 귀족이라는 뜻으로 관용어로는 귀족적 권력을 누릴 자격이 없다로 해석하고 Oblige는 의무라는 뜻으로써 종합하면 귀족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하면 귀족으로써 권한도 누리지 말라는 뜻이다. 중세 서양의 영주나 일본의 다이묘제도 아래서 평화로울 때 영(성)주나 기(무)사는 마음껏 권력을 누렸으나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영주를 중심으로 기사들이 앞장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농민이나 하인들은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대학 수능시험의 조직적인 부정 문제로 나라 안이 온통 냄비 끓듯 한다. 광주에서 시작된 입시 부정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휴대폰뿐만 아니라 대리시험도 등장했다. 그리고 올해만이 아니고 대물림을 해왔다는 증거도 나타나고 있다. 커닝은 어느 시대 어느 시험에서도 필요악처럼 이어져 왔다. 시험을 많이 치루는 학생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커닝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까만 페인트칠한 책상 위에, 책상다리에, 수험표에, 필통에도 우리는 연필 자국 댈만한 모든 공간을 커닝 도구화했다. 한 술 더 떠서 대담하게 커닝 페이퍼를 개발하여 전문화한 친구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전 교실과 모든 도구의 커닝화인 셈이다. 책상 위에 깨알 보다 작은 글씨로 예상 답안을 써놓았는데 느닷없이 감독 교사가 자리를 바꾸어버렸을 때의 낭패감이란. 중․고등학교는 말 할 것도 없고 대학의 책상이나 교실 벽을 살펴보라. 시험의 애환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 따위는 애교다.
오늘의 대학입시 부정은 지능적이고 조직적인 범죄 행위로 전락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모습과 그렇게도 닮았는지. 가증스럽다 못해 슬퍼진다. 이를 어찌 해야 할 것인가? 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될 위기인데 나서야 할 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제자를 잘못 가르친?통한痛恨의 념念?으로 쥐구멍이라도 찾으셨는지 교육이 통째로 흔들리는 이런 상황에서 교육계 원로이신 교장 선생님들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책임질 사람도 없다. 월여 전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투쟁에는 피켓을 들고 계시던데.
한국산 신토불이 영양 두부
영상 체험학습 기회 제공을 통한 자기표현력 신장이라는 주제로 지난 10월에 우리 학교에서 전남도교육청 지정 연구학교 공개회를 열었다. 학교 연구가 교육 발전에 뜻이 있는 게 아니라 행사를 위한 행사 또는 승진 점수 따기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추진 과정 내내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부임하기 전에 받아놓은 주제고 또 왜곡된 현실 아래서라 할지라도 선생님들이 바라니 입장이 어정쩡해도 할 수 없었다. 이런 판에 공개회 날짜가 다가와 의례적이라지만 교장이 인사말을 해야 한다니 난감할 수밖에. 고민하던 중 옳거니, 김기덕 감독과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데이비드 풀리쳐 교수를 비교한 칼럼이 생각났다. 김기덕 감독은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사마리아로,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빈 집으로 감독상을 휩쓸어 우리 영화계의 자존심을 높였다. 수상 뒤 항간에서는 그가 학부를 나왔다면 수상을 했을까라는 반 교육 어법이 떠돌았다. 김 감독의 학력은 중학교 중퇴다. 반면에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풀리쳐 교수는 내가 받은 미국교육에 감사한다고 우리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상반되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우리 학교의 연구는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촬영하고, 에니메이션을 구상하고, 캐릭터를 만들며, 영화 대본을 써서 촬영도 했다. 시답잖은 영화연구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와 본질적인 갈등에서 무관심했던 나는 공개회를 돌아보며 아이들의 참여와 역동적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교장선생님, 액션 한 컷 부탁드려요. 아냐 아냐, 너희들 영화니까 너희들 끼리 해. 영화를 찍는 날 아이들이 교장실에 몰려와서 손을 잡아끄는 걸 매몰차게 거절했던 게 부끄러웠다. 연구 결론에서는 학교연구의 변화 모델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개회 다음 날 교직원회의 때, 이런 연구학교라면 몇 번이라도 해야 한다고 속 보이는 주장을 했다. 태어나면서 깨, 보리, 수수, 조, 옥수수, 콩과 팥 같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국민보통교육이라는 학교교육의 틀에 넣어 맛도 모양도 빛깔까지 똑같은 한국산 신토불이 영양 두부를 생산하고 있다면서 학교교육 변화를 설파했던 나로써도 흐뭇한 날이었다.
꼭두각시와 배나무와 풍비박산의 12월
# 1. 꼭두각시 교장
04년 12월 ㅇㅇ교육청 대회의실. 단설유치원 유치를 둘러싸고 두 지역이 각축을 벌인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협의회에 나갔다. 대회의실은 만원이었다. 교육장과 교육청 직원들, 교육위원, 시민단체 회원들, 언론사 기자들과 공문으로 참석을 시달한 관련 학교 병설유치원 교사와 교장. 보다 더 많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유치 경쟁 두 지역의 주민.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설유치원장과 어린이집원장들이었다. 회의조차 열지 못할 아수라장에서 누군가 그랬다.
교장 선생님들, 뭐 하러 나오셨습니까? 교육청 꼭두각시 노릇 집어치우고 돌아가십시오.
# 2. 배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매지 말고
외밭에서는 신발끈을 손대지 말라 했다. 어제 아침 공영방송을 듣다가 참담한 꼴을 보았다. ㅇㅇ광역시의 4십여개 학교가 구정 하루 또는 이틀 전에 겨울방학 등교를 계획하였는데 그 저의가 설날 촌지라는 것이다. 방송대로 의도적이라면 속이 보이는 애들 장난 같은 짓이고 설사 그렇지 않다더라도 입살에 오르게 됐다. 지난 10월 영화연구학교 공개회를 앞두고 직원회의에서 아이들에게 속 보이는 일이 있어서는 교육이 안 된다는 당부를 한 적이 있다. 연구학교 공개를 핑계로 환경정리니 대청소니 해서 학교를 온통 들쑤시는 일들이 관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그랬다, 우리 선생님이 요즘 부쩍 신경질이라고. 왜냐? 고 물었더니 연구발표 탓 아니겠느냔다.
# 3. 12월 학교 풍경
12월은 학교 경영자로써 교장에게는 괴로운 달이다. 적어도 나 같은 교장에게 12월은 없었으면 좋을 달이다. 근무평정이 승진에 결정적 요소가 되기 때문에 잘 어우르던 학교가 년말만 되면 풍비박산이 된다. 교원평가인가 뭔가 좀 어떻게 결판이 나든지 아니면 미봉책을 거론하지들 말고 근본적으로 승진제도를 고쳐 일대 혁신을 도모하든지 해야지 이래가지고서야 원.
<순천신문>
마니풀리테, 이판사판 정치판
올해도 연말이 코앞에 다가왔다. 언제나 되풀이되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이 올해라고 빠지랴. 통일과 북핵 그리고 이라크 파병, 대학 입시와 수능 그리고 강남의 부동산, 공교육과 사교육(비), 대선자금과 내년의 총선 그리고 정치 개혁, IMF 때 보다 더 심한 불경기와 실업 그리고 취업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우리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와중에서 한나라당 대표가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고, 정치권은 특검의 국회 재결의로 또 한 번 출렁일 기세다. 그런데 개인적인, 극히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당대표의 석고대죄 같은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머리에 감도는 것은 입가에 번지는 냉소다. 정치가 권모술수라는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또는 저 모습에서 우리 초등학생들이 지닌 동심 같은 진심은 얼마일까라는 지극히 불경스러운 잡념이 오락가락했다.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은 대선자금 검찰 수사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다. 나 같은 사람은 평생을 교단에서 초등학생들과 살아온 사람이라 애초에 정치의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짐작은 있고 희고 검은 것은 구분할 줄 알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쪼끔은 안다. 이제는 마무리되었겠지만 년 전 이탈리아의 <마니풀리테(깨끗한 손)>가 해외 뉴스를 격동시킨 적이 있었다. 일개 검사가 이탈리아의 부정 부패의 뿌리를 <돈 정치>로 선포하고 이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함으로써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노라며 테러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멀리 피신시켜놓은 체 권력과 행정의 회유와 협박에도 굽히지 않고 쾌도난마快刀亂麻의 칼을 빼들었다. 고위직 행정관료들이 투옥되고 이름난 정치가들이 구속되었다. 세계적인 암흑가의 대부 마피아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정치)는 부정과 부패의 사슬을 벗고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어찌 이와 흡사한가. 대선자금이 터져나와 몇 백 단위의 <억>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이 뉴스를 들은 서민들은 억장이 무너져 단지 외마디 <커> 소리를 내지를 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전직 대통령들이 몇 천억 단위 부정으로 감옥을 살았고, 그 친인척들이 쇠고랑을 차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현직 대통령의 측근 비리를 검찰이 조사하고 있다. 이승만 독재정권과 이은 군부독재의 평생 야당, 그 모질고 원한맺힌 질곡에서 칠전팔기로 이룬 문민정부 그리고 국민의 정부도 다 똑 같았다. 돈에 관한 한 모두 도루묵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발 깨끗한 대통령 한 사람 뽑아서, 해방 이후 독립투사로부터 비롯하여 4․19와 5․16 그리고 가깝게는 광주민주 항쟁까지 선열들이 피를 흘리며 지켜낸 민주주의와 평등사회를 이룩해낼 수는 없는 것인가? 듣는 바로 대만정부 초기에 장개석 총통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수 백 명의 범법자들을 태평양에 수장시켰다는 전설적인 말이 있다. 그리고 최측근 친인척(제수인지 처제인지)이 부정부패와 연루되자 공개 처형을 단행하여 부정부패의 사슬을 철저하게 끊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검찰이 수사 중이니 두고 봐서 미흡하다면 그 때 특검을 해야지 민주주의 3권 분립 원칙에 맞지 않느냐 하고 한나라당은 대통령의 측근 비리인만큼 이 때까지의 검찰 행태로 봐서 검찰 수사가 제대로 되겠느냐고 한다. 이제 좀 뭔가 정신을 차렸구나고 기대를 했던 책임총리제니 선거공영제 그리고 지구당 폐쇄와 중대선거구제는 이미 물 건너 간 건가. 차라리 고양이더러 생선가게를 지켜달라는 편이 낫지. 도대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업보가 이리도 무서운 건가, 한심스러워서 내 원 참.
정치(꾼) 희망이 없다, 정치의 국민혁명을
우리가 주인인데 누구를 원망하는 거냐? 내가 뽑은 선량인데 누구를 비난하랴. 갑신 새 해, 잔나비의 지혜라도 빌려야겠다. 손오공은 여의봉 한 자루로 천상과 지상을 시끄럽게 굴지만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역 만리 불경을 가지러 가는 길잡이 공덕으로 보살이 된다. 허나 이내 몸은 띠는 잔나비지만 보살 욕심이야 너무 과분하고, 또 정년이 낼모렌 처지라 이 나이쯤 되면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무디어서 묵은 해나 새 해가 그저 그게 그거. 하기야 누구는 지는 해도 아름답다고 했다지만 글쎄 호사로운 분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일거고 우리 같은 범인이야 주위에 폐나 끼치지 않았으면 소망할 뿐.
올해는 우리 나라의, 한민족의 21세기 밀레니엄적 명운이 시작되는 해다. 세계화고 지구촌이고라들 해쌌는데 우선 제 앞가리기가 급한 판에 꿈 같은 소릴랑 집어치우고 정신들 바짝 차려야겠다. 아시다싶이 오는 4월 우리는 총선(국회의원 선거)을 한다. 헌데 늘쌍 이 놈의 정치가 문제. 이 번에도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여의도 인구나 늘릴 요량이면 차라리 국회를 해산하는 게 어떨지, 청소미화원들의 수고나 덜게. 우리 기술자들은 달러 몇 푼 벌어오겠다고 불타는 사막에서 불철주야 대수로를 건설하고 있고, 안에서는 IMF 때 보다 더 어렵다는 오늘을 애면글면 살아가고 있는데 선량이라고 뽑아놓으니 지하주차장으로 숨어들어 차치기를 하지 않나 그것도 모자라서 차띠기 배추장사를 하고 있으니 도대체 국민을 뭘로 아는거냔 말이다. 한다는 짓거리가 조폭은 저리 가라며, 허구헌 날 싸움질에 날 새는지 모르고, 거기다 더 가관인 건 제 밥그릇 하난 잽싸게 챙기는 꼴이라니. 저 선량님네들 4년 내내 뭘 했는지 초등학생처럼 생활통지표를 매겨 보는 것이 어떨지. 입으로는 지역 감정이 어떻고 정치 개혁이 어쩌고 하다가 어물어물거리더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또 언젠가는 예결위원장 자리를 놓고 내 당 네 당을 다투더니만 금새 짝자꿍이 되어 200조나 되는 내년 예산을 이틀만에 얼렁뚱땅 해치우고, 국회의장 업무비는 수십 억을 증액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기초자료 예산 5억원은 삭감해버렸다. 더 들여다보자면 한심스럽다기 보다는 기가찰 노릇인데 총선을 앞두고 예결위 의원들이 자신들의 지역구를 챙기다가 자신들마저도 너무 했다싶었는지 동료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줬다나 어쨌다나. 선심성 지역구 예산은 8000억 적자 예산을 편성해놓고, 지역구 의원을 늘리는데는 한 목소리 코러스. 매양 이런 꼴을 보면서도 한탄만 하고 있을 셈인가. 자, 이제 우리가 주인의 자리를 찾아야겠다. 저들은 선거 때만 되면 180도 허리를 굽신거리다가 당선되고 보면 목에 힘을 주고, 한 표를 애걸할 때는 발품을 마다하지 않다가도 입성을 하면 대통령 만나기만큼 어려워지는 이 행태를 언제까지 비아냥거리고만 살 것인가. 뭐,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 서민의 등골이나 빼먹지 말라지. 이 지구상에 어느 천지에 기업들을 협박해서 50억을 강탈하며, 정권을 잡으면 손봐준다고 공갈쳐서 200억을 차떼기 하는 배추장사들이 있는지 좀 알면 알려주시라. 하는 짓마다 조폭이요 벌이는 짓거리마다 사기꾼 아니면 도둑이니 국민이 불쌍하다 못해 짠하다 짠해. 자업자득自業自得도 유분수지. 싹 바꾸자. 이제 칼자루는 우리에게 있다. 그들 탓을 하지말고 국민 모두가 내 탓이요를 외며 오는 4월에는 선거혁명을 이룩하자, 국민혁명을.
명리학命理學, 자연법칙
어젯밤 늦게 멀리서 오신 귀한 분을 뵈었다. 모 일간지에 <江湖命理學>을 연재 중이고 요즘에는 TV 강의까지 하는, 속칭 인기짱으로 뜨고있는 풍수지리학 교수님인데 마침 광주를 방문하신다기에 연통을 넣었다. 애초에는 무등산 등산을 작정하고 오셨는데 중간에 선 분이 얼마나 泣訴를 했던지 당초 목적을 미루고 만나주신다는 말만 믿고 부랴부랴 밤길을 달렸다. 가면서도 불안했던 건 신문에서 연재된 글을 읽고 덥썩 사주 좀 봐주십사 청을 넣었던 非禮가 맘에 걸렸다. 머무르고 계신 곳이 장성 고을 高峰 선생님의 고택이다. 고봉 기대승 선생님은 퇴계 이황 선생을 능가하는 호남학파의 거두였는데 선생의 학문적 업적이 상대적으로 묻히게 된 이유는 학문적 풍토 때문이었다고 알고 있다. 예로부터 문장은 호남이요 학문은 영남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신동아에서 1950년대에 펴낸 <한국고전백선>에서는 고봉의 학문을 퇴계가 오히려 묻고 논거의 정밀함에 압도되었다고 적고 있다. 두 분 사이에 오간 서간에는 퇴계는 <고봉으로 말미암아 자기 주장의 미비함을 깨달은 것이 하나 둘이 아니라면서> 고봉의 도움이 큼을 고백하고 있다. 이런 사연깊은 고봉 생가 터에서 현자를 뵙고 발치에서나마 고담준론을 경청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랴. 밤은 깊어갔으나 얘기는 멈추지 않았고 고택의 기운이 서린 방안에는 생기가 충만했다. 대강 그 분들의 말씀을 정리한다면 천지의 기운이 우리 나라에 약동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지구촌의 생기와 우주의 힘이 우리 나라에 모여 있어 엄청난 에너지가 용트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에도 가끔 얘기했지만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서 문화동진설이 예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미천한 사람이지만 나도 그 소용돌이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지난 80년대 쓴 <훈사정음>에서 하얗고 밝은 빛 같은 힘,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우리 나라로 모여들고 있다고 말 한 적이 있다. 뭐랄까 화산 분출 같은 힘이다. 용암 같은 기운이다. 지금 우리는 그 격동기를 겪고 있다. 서민 대통령의 당선에서부터 대선자금의 소용돌이가 모두 이러한 용출의 맥락인 셈이다. 개혁과 보수의 논쟁이 그렇고 붉은 악마의 출현이나 시민연대의 낙천 낙선운동이 이 범주다. 노동자 농민의 생존 투쟁 또한 한국에서 분출되는 힘의 한 가지 그 예외가 아니다. 정치판이 끓고 건설 현장 또한 요란하다. 교육은 교육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심지어는 군대조직까지도 폭풍에 휘말려간다. 어떤 거대한 힘에 말려가는 운명을 누가 피할 수 있으랴. 한국이라는 나라와 국민은 아무리 안 밀려가려고 안간힘을 써도 밀려가고 있다. 이 현상은 인간 한계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한다. 하늘이 주관하고 있는 것이다. 곁에 앉아서 관상과 찰색을 살피던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따님들에게 돈을 적게 벌어 남기지 말고 다 쓰란 단다. 그리고 직장은 돈을 적게 주는 직장을 선택하라고 이른다고 했다. 왜냐면, 돈을 많이 준다는 건 하늘이 징계를 하기 위해서란다. 많이 준 대신 다시 앗아간다는 논리다. 아등바등 모았다가 하늘이 인정사정 없이 앗아가 버리게 되면 사람이 미친다는 것이고 그럴 줄 뻔히 알면서 왜 멍청한 짓을 되풀이 하느냐고 했다. 구체적인 에로 쉽게 번 돈, 부정하게 번 돈은 당대나 또는 직후대에서 알거지로 바뀌는데 이는 필연이라 한다. 또 주었다가 앗아가는 그 상실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크다고 한다. 그래서 돈은 적게 벌어 다 쓰는 방식으로 살아야한다고 한다. 희망적인 한국인의 미래를 위해서.
촛불시위, 그 시민혁명의 현장에서
오, 필승 코리아의 감격에서 위대한 한국인의 혼을 보았다면 오늘 탄핵정국 촛불시위에서는 민주시민으로써 시민혁명을 주도하는 성숙된 국민성을 보고 있다. 무엇이 이를 이렇게 위대한 한국으로 이끄는 것인가? 누구는 뭐라 하고 더러는 애꿎은 백수꺼리를 만들었다지만 나는 감격없이 이 광경을 볼 수 없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함성은 해방 50년에도 정신 못차린 정치꾼들에게 하늘이 내린 청천벽력이다. 시민혁명을 떠올리면 우리는 흔히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예로 든다. 그러나 나는 이 번에 한국인의 의지와 저력을 새삼스럽게 다시 보았다.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는 민족으로 당하고 살아도 싸다고 더러는 자조 섞인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오늘의 인식은 확연히 다르다. 그러고서야 돌아보니 멀리 가지 않더라도 3 . 1 만세운동, 4 . 19 학생 의거, 5 . 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었고 지난 92년에는 붉은 악마를 보았는데도 나는 이를 자의적으로 폄하하여 일시적인 민족적 흥분 상태거니 간과하고 있었다. 우리의 선량들이 목에 힘을 주며 친일인명사전 제작 비용을 깍아버릴 때는 분노보다도 서글픔이 앞섰는데 이제 보니 나는 헤매도 한참 헤맨 꼴이다. 말이야 그랬다, 선량. 한 표 찍어달랠 때는 허리를 90도로 꺽다가도 당선만 되면 백성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선량들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초라했던가. IMF 시절에 회사가 구조 조정을 하고 가장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릴 때도 저들은 세비를 올리고 국회의원 수 늘리기를 획책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서 대통령과 청와대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극히 상식적인 상식을 세우려고 하자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핑게도 아닌 핑게로 헐뜯고 짓고 부셨다. 차 떼기가 나오자 10분의 1이 넘는다고 소가 웃을 짓을 하더니 급기야는 자충수를 두고 제 무덤을 판 꼴이라니 국민을 우습게 봤다가 큰 코 다칠 괘라. 이판사판 정국이라 더 잃을 게 없다는 계산으로 연환계를 썼는데 사흘을 기다려도 동남풍은 없고 오히려 역풍이라니. 붉은 악마를 한국인의 정열이라고 간과했는데 그게 의식이었을줄이야. 미순이의 촛불은 반미감정인줄 알았는데 그게 신념이었을줄이야. 역시 한국인은 위대하다. 이 땅에서 난 산물이 세계적이라면 이 땅의 산물을 먹고 자라고 호흡하는 사람이야말로 최고가 아니겠는가.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설립한 최명제 풀무원 회장은 이름없는 노벨상 수상탑을 교정에 세워두고 있다. 왜 우리에게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가? 강남의 유자가 강북에서는 탱자가 되고 소는 이슬을 마시고 우유를 만들고 뱀은 같은 이슬을 먹고 독을 만든다. 칼은 강도의 손에 들리면 목숨을 해치고 의사의 칼은 목숨을 구한다는 이치와 같다. 오늘 이 촛불로 한국인의 의식 여건을 바꾸자. 오, 필승 코리아의 정열로 촛불 집회의 의식으로 변화와 개혁의 세기를 시작하자. 가끔 거론했지만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갈파한 지정학적 문화동진설은 가설이 아니다. 프랑스로부터 영국, 미국, 일본으로 그리고 오늘 한국에 머무르는 천기가 우리를 건너 뛰어 중국으로 가기 전에 한민족의 세기를 만들어야 한다. 오는 총선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탈바꿈시켜 국민의 이름으로 여의도를 리모델링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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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자료, 칼럼 (2/2) (0) | 2006.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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