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이야기 - 2
세기世紀의 사냥꾼
<사냥꾼이야기 2권> 50화 – 104화
A. Gorgy 기記, 김왕석 역譯
아이즈 다니산(회진곡삼會津谷三) 기記, 김왕석 역譯
홍학봉洪學奉 기記, 김왕석 역譯
<목차> 암야제暗夜祭 외 53편
50. 트라스족族/ 51. 사냥의 명수名手/ 52. 원시原始의 성性생활/
53. 기묘奇妙한 동물들/ 54. 가라파로족族/ 55. 어두운 인간들/
56. 암야제暗夜祭/ 57. 기마족騎馬族/ 58. 물물교환物物交換/
59. 신비神秘의 나라/ 60. 브라질 요리料理/ 61. 참변慘變/
62. 천염산의 불곰/ 63. 구사일생九死一生/ 64. 곰과 개/
65. 네무로평야平野/ 66. 산천어山川魚/ 67. 학술탐험/ 68. 폭설暴雪/
69. 아이누족族/ 70. 원시의 광야廣野/ 71. 흰곰/ 72. 괴어怪魚 이도우/
73. 그리운 원시생활/ 74. 봄/ 75. 사슴 사로잡이/ 76. 살인곰/ 77. 늑대/ 78. 지리산/ 79. 선불맞은 산돼지/ 80. 사냥의 재미/ 81. 젊은곰의 순대/
82. 웅담熊膽과 녹용鹿茸/ 83. 암살자暗殺者 표범/ 84. 맹수猛獸사냥개들
85. 사냥꾼의 참극慘劇/ 86. 범새끼 소동騷動/ 87. 산양山羊 이야기/
88. 만주滿洲개와 곰/ 89. 지리산의 대호大虎/
90. 나무의 바다(슈하이 樹海)/ 91. 동물들의 싸움/ 92. 포수 세르게이/
93. 곰과 개의 사투死鬪/ 94. 추적追跡/ 95. 대호大虎사냥/ 96. 도깨비사냥97. 산막山幕의 손님/ 98. 산새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새 사로잡이/ 99. 윤원술포수/ 100. 아이누개/ 101. 살인자殺人者/ 102. 신神들린 맷돼지
103. 뱀 할아버지/ 104. 첫사냥
50. 트라스족族
트라스족은 얌전한 종족이 아니다. 침략족이다. 다만 라우니족이나 히바로족처럼 흉악한 공격을 하지 않았고 완비사족처럼 유격전遊擊戰을 하지 않을 뿐이다. 트라스는 다른 종족을 쳐들어가지 않고 그들이 쳐들어오게 유인誘引하여 섬멸殲滅시키는 고도高度의 전술戰術을 썼다. 신무기新武器도 개발했다. 트라스가 함정陷穽을 파면 파놓은 자기들이 빠질 정도다. 덫에 걸리면 발목이 날아가고, 나뭇가지를 잘못 건드리면 공중 5m 높이에 매달린다. 경보장치도 있다. 옛날, 이웃에 샤반디라는 용맹한 종족이 살았는데 트라스에 의해 전멸했다. 트라스의 유인작전에 걸려 600여 명이 전멸했다. 샤반디와 트라스는 늘 분쟁에 휩싸였다. 샤반디가 쫓던 짐승이 트라스의 함정에 빠져 소유권다툼이 일어났다. 샤반디가 트라스에게 짐승을 몰아준배와 다름없었다. 그럴 경우 샤반디는 약간의 보상을 요구했는데 거절당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양쪽 경계에 흐르는 엑스포강의 고기들이 모조리 트라스가 살고있는 강 하류에 몰리는 것도 분규紛糾의 빌미였다. 고기들이 자연적으로 하류에 몰린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고기들은 트라스가 뿌리는 떡밥 때문에 하류에 몰렸다. 이래서 여러차례의 협상이 결렬決裂되자 600여 명의 샤반디가 트라스에 쳐들어왔다. 그러나 트라스는 용의주도用意周到한 사전 정찰偵察로 샤반디의 침공을 사전事前에 감지感知했다. 샤반디의 600여 명의 전사들이 경계를 넘어 노도怒濤처럼 쳐들어왔는데 트라스가 한 명도 없었다. 무려 4Km나 진격을 했으나 아무도 없었고 도중의 마을들은 텅텅 비었다. 샤반디가 당황하여 진격을 멈추자 언덕 위에 트라스의 여자들 20여 명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샤반디에게 <비겁卑怯한 놈들>이라고 욕을 하며 엉덩이를 흔들고 돌맹이를 던졌다. 원래 브라질의 원주민들은 여자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트라스는 여인부대女人部隊가 있었고 그녀들은 적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성미 급한 샤반디는 노기가 충천했다. 여인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샤반디가 언덕으로 달려가자 여인부대가 기겁을 하고 도망갔다.
‘잡아라, 저 년들을 모조리 잡아라!’
대장이 명령했으나 그 지시는 잘못된 것이었다. 샤반디가 진격하는 내리막에는 양쪽이 절벽이었는데 절벽에서 바위가 떨어졌다. 졸지猝地에 많은 사상자를 낸 샤반디가 퇴각退却했다. 그런데 진격할 때는 멀쩡했던 언덕의 땅이 무너져 퇴각하던 샤반디가 함정에 빠졌다. 결국 샤반디의 용사 600명은 단 한 사람도 살아돌아가지 못 했다. 길은 모두 함정이었고 운수좋게 함정을 벗어나도 덫을 피하지 못 했다. 샤반디가 전멸당한 뒤 어떤 종족도 트라스를 침략하는 종족은 없었다. 감히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 했다. 마치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전법을 연상시키는 트라스의 전략이었다. 브라운박사 일행은 상류로 올라갔는데 트라스가 독을 풀어 물고기를 잡은 증거들이 들어았다. 강에 죽은 물고기들이 둥둥 떠다녔다. 배가 10Km 쯤 올라가자 마을이 나타났다. 트라스는 백인들이 오는 걸 미리 알고있었던 듯 당황하지 않았으며 표면상으로는 예의 바르게 마을장로들이 마중나왔다. 마을 마당에 많은 물고기를 널어 말리고있었다. 브라운박사가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독을 풀어 물고기를 잡는 건 나쁜짓이라고 지적하고 <그 진상眞相을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마을장로가
‘우리는 트라스의 작은 분파分派에 불과하므로 조사할 것이 있으면 본부本部에 물어라.’
고 답변했다. 본부의 추장이 있는 마을은 남쪽으로 20km 쯤 있으므로 내일 본부로 안내할테니 오늘은 쉬라고 했다. 대접이 융숭隆崇했다. 머리가 영리한 종족이라 백인들에게 반항하면 어떤 결과가 온다는 걸 알고있었다. 백인들을 넓고 시원한 대나무집으로 안내하고 옥수수, 감자, 우유, 과일, 마른고기를 대접했다. 독약으로 잡았을 마른고기를 제외하고는 맛있게 먹었다. 백인들은 오랜만에 싱싱한 과일과 몇 잔의 위스키로 편안하게 잠들었는데 아침에 깨어나서는 기겁을 했다. 약 60여 명의 주민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밤새 마을이 텅텅 비어버렸다. 밤새 살림기구와 그 많은 마른고기를 가지고 도망을 가벼렸다. 쓴 웃음이 나왔다.
‘어쩌지?’
‘돌아가야지요. 트라스의 영토를 돌아다니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겁니다. 함정과 덫을 피할 수 없어요. 트라스들은 우리가 그 함정에 빠져죽어도 자기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우길 것입니다.’
센티가 주장했으나 브라운박사는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어. 체면도 체면이지만 독약을 풀어 물고기를 몰살시킨 트라스를 혼내주어야 해.’
케렌박사도 브라운박사의 주장에 동의했으므로 본부를 찾아나섰는데 200m도 못 가서 함정이 발견되었다. 둘레 3m, 깊이 4m나 되는 함정이었다. 가느다람 대나무를 함정 위에 걸쳐놓고 넓은 나뭇잎을 덮고 흙과 풀로 캄프라지를 했다. 매우 정교精巧했으므로 살아있는 풀 같았다.
‘여기 빠지면 죽습니다.’
센티가 가리키는 함정 밑바닥에는 끝을 뾰쪽하게 깎은 대나무가 박혀있고 대나무 끝에는 독이 발라져있었다.
‘표범도 이 함정에 빠지면 하루를 버티지 못 합니다.’
그러나 브라운박사는 단호한 어조語調로 전진을 명령했다. 전진은 지지부진遲遲不進했다. 센티는 함정이나 덫을 조사하지 않고는 단 한 발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처자妻子가 세 명이나 있다는 걸 강조하면서 거북이걸음을 걸었다. 그래서 4Km를 가지도 못 해 날이 어두워졌다.
‘박사님, 나는 내 처자를 위해 여기서 정지를 해야겠습니다.’
‘좋아, 조금만 더 가서 야영을 하자. 저 언덕까지만 가자.’
센티가 박사의 조언助言대로 한 걸음 나갔는데 킥! 소리와 함께 핑! 튕기는 소리가 났다.
‘뭐야?’
죠지가 소리나는 쪽으로 총구를 대면서 소리쳤다.
‘표범 같아.’
표범이 계속 독살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소리나는 곳으로 가까이 가니 표범이 공중 약 5 - 6m에 매달려 바둥거리고있었다. 죠지가 연사連射를 했다. 한 발은 표범의 대가리에 또 한 발은 표범을 매달고있는 대나무에 발사했는데 두 발 모두 명중했다. 브라운박사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 표범은 우리를 먹으려고 접근했는데 대나무덫이 우리를 살렸구만.’
‘아니지. 대나무덫이 우리를 노리고있었는데 표범이 우리 대신 죽은거야.’
어쨌든 위기를 모면하고 언덕에 닿아 캠프를 쳤다. 2인용 천막이었으므로 세 사람은 천막에서 자고 센티와 죠지가 보초를 섰다. 죠지가 보초를 교대한 것은 새벽 3시 경이었다. 밀림은 캄캄하고 죽은 듯 조용했다. 적도 아래였지만 추위가 스며들어 마른 풀을 긁어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 옆에 앉아있으니까 노곤해서 자꾸 눈이 감겼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모닥불이 꺼져 추워지자 눈을 떴다. 그 때 죠지는 10여 미터 앞 나무그늘에 움직이는 걸 봤다. 사람의 그림자 같았다. 일어나 걸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잘못 보았나?)
되돌아서려다가 멈칫 섰다. 나무뿌리 부근에 발자국이 있었다. 주위를 살폈다. 누가 숨어있는 게 분명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 죠지가 고함을 쳤다.
‘누구야, 나와! 나오지 않으면 쏜다!’
자고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뛰어나왔다.
‘뭐야, 뭐? 죠지.’
사정을 들은 센티가 놀랐다.
‘트라스야!.’
그들은 밤새 백인들의 주위를 돌면서 감시하고 있었다. 트라스를 무시하기로 했다. 본부로 들어가기로 했다. 본부는 계곡을 끼고있었는데 침략자가 계곡에 들어서면 몰살될 것 같았다. 일행도 그 계곡에 들어가지 않았다. 계곡 양쪽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절벽에서 바위를 굴리면 몰살하게 된다. 계곡입구에서 정지하고 총을 쏘았다. 절벽 위 사람들이 도망치는 게 보였다. 약 20여 분 후 10여 명의 사람들이 왔다. 센티를 알아본 사람이 인사를 했다. 센티가 항의했다.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장로 같은 노인이 친구인지 몰랐다고 사과했다. 어젯밤 총소리가 나서 정찰을 보냈는데 표범이 죽었고 수상한 사람들이 천막을 쳤다기에 경계를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트라스는 헝겊으로 아랫도리를 가리고 허리에 칼을 찼다. 용모容貌가 단정端正했다. 체구도 당당했다. 원주민들 중에서는 가장 개화開化 된 것 같았다. 백인의 내방來訪을 반가와하지 않은 눈치였으나 환영인사를 하고 마을로 안내했다. 마을이 텅 비어있었으나 장로가 소리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왔다. 밤중에 도망쳤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들은 백인을 보고 계면誡勉쩍어 웃었다. 안내된 추장의 집에는 경사慶事가 있었다. 추장의 13세 된 딸이 월경月經을 했다. 첫 월경은 성인成人이 되었다는 증거고 소녀는 가슴 사이에 악어문신을 새겼는데 청혼을 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추장집 성인잔치에 7 - 8명의 청년들이 왔다. 청년들은 짓궂게 소녀의 유방을 만져보고, 하체下體를 가린 헝겊을 들춰보기도 했는데 소녀는 수집어하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트라스는 집의 구조상 칸막이가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부부관계를 가족들이 보는데서 했다.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나쁜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노인들은 젊은이의 성관계를 보며 즐거워하고 때로는 이렇게 저렇게 조언助言하며 성의 기교技巧를 코치하기도 한다. 가난한 스야족에 비해 트라스는 부유富裕했다. 집집마다 식량, 건어乾魚, 건육乾肉, 감자가루가 넉넉하게 저장되어있었다. 소금도 많았다. 브라운박사가 건어를 손가락질하며 <어떻게 잡았냐?>고 물었다. 투망投網으로 잡았다고 대답했으나 거짓말이었다. 고기를 잡은 투망을 보여달라고 했다. 추장이 안내한 곳은 각종 생활도구를 만드는 작업장이었다. 철을 녹여 칼, 도끼나 괭이 등 연장을 만들고, 덫을 만들고, 여자들은 나무껍질로 만든 실로 그물을 짰다. 추장이 그물을 가리키며 저 걸로 잡았다고 했다. 그물을 조사했는데 그물눈으로 주먹이 빠져나갈 정도다. 박사가 탄식歎息했다. 원래 원주민은 가짓말을 몰랐는데 백인문명이 들어오면서 거짓말이 따라들어왔다. 박사는 작업장구석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느꼈다. 각종 화학약품을 아는 박사는 그 냄새가 독약냄새라는 걸 알았다. 박사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보고 추장이 당황하며 따라왔다. 독약제조공장이었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옹기甕器들이 있고 옹기에는 울긋불긋한 액체가 담겨져있었으며 독약의 원료인 나무뿌리와 잎들이 쌓여있었다. 추장에게 약품의 용도用道를 물었다. 열병을 치료하는 약, 화살에 발라 짐승을 잡는 약이었다. 약품들 중에는 죽은 물고기에게서 나는 냄새의 노란액체가 있었다. 박사가 어디에 사용하는 거냐고 물었는데 추장은 당황하며 자기도 모른다고 하면서 전문가에게 물어 대답하겠다고 했다.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아랫마을사람들이 강물을 마시고 식중독에 걸렸다고 설명했다. 약품을 뿌려서 고기를 잡으면 고기의 씨가 마르고, 이웃에도 피해가 크니 독약을 뿌려 고기를 잡으면 안 되고,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브라질정부의 처벌을 받게 된다고 엄포嚴暴를 놨다. 추장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일부 주민이 저지른 일이고 앞으로는 철저히 단속하겠으니 이번만은 용서해주라고 호소했다. 약품을 분석해보니 극약極藥이었다. 해열제로 쓰는 약은 키니네 비슷했고, 화살촉에 바르는 약은 부식제腐蝕劑였다. 일행은 사흘 간 트라스마을에서 머물렀으며 분석한 독약은 학계에 발표했다.
51. 사냥의 명수名手
브라질에서 사냥을 잘 하는 종족은 말보로족이다. 안데스산맥이 고향이며 표범처럼 안데스를 누볐다. 지금은 페루국경 구라사강 지류에서 산다. 말보로에는 브라질에서 유명한 사냥꾼으로 이름을 떨치는 마르시가 있다. 백인사냥꾼이나 동물학자들도 그를 찾았다. 그에게 부탁하면 브라질에 서식하는 어떤 동물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시는 그 게 귀찮아 피했다. 마르시는 주로 거미먹이를 잡았다. 몸무게가 200Kg이 되는 거미먹이를 잡아 마을에 식량으로 공급했다. 브라운박사 일행이 발보로마을을 찾은 건 거미먹이의 생태연구를 위해서다. 브라운박사는 말보로에 많은 양의 소금을 기증했다. 양 50 마리 값이었으므로 대 환영을 받았다. 마르시는 몇 명의 사냥대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가고 없었다. 거의 마을에 돌아오지 않고 잡은 사냥감은 사냥대를 시켜 운반했다. 다행히 이튿날 사냥대가 도착했다. 추장이 사냥대에게 박사일행을 소개하고 마르시에게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사냥대는 백인들이 가기에는 너무 험하다고 난처한 표정이었다. 박사가 무시했다. 그러나 곧 사냥대의 충고가 옳았다는 걸 알았다. 원시림이었다. 대낮인데도 전등을 켜야 앞이 보였다. 나무뿌리, 가시덤불 그리고 사람키의 두 배나 되는 잡초가 밀생하여 걸어가기 힘들었다. 안내인들이 고함을 치며 걸었는데 표범과 뱀에게 경고를 하는 뜻이었다. 그래도 뱀들이 우글거렸는데 사람을 겁내지 않았다. 길이가 10m나 되는 놈들도 있었고 작은 뱀은 10Cm 내외였으나 모두 위험한 독사들이었다. 특히 사리라는 뱀은 길이 1m 정도였으나 손가락 보다 가늘었으며 투명透明했다. 유리처럼 투명하여 발견하기 어려웠고 케렌박사가 하마터면 밟을 뻔 했다. 만약 뱀을 밟았다면 뱀이 뛰어올라 박사를 물었을 것이고 물린 후 30분이면 죽는다고 했다. 케렌박사를 놀라게 한 그 뱀은 나무뿌리 쪽으로 도망을 가다가 독수리의 습격을 받았다. 쓰가노라는 독수리는 밀림을 돌아다니다가 뱀을 발견하면 번개처럼 덮쳤다. 뱀도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맞섰으나 쓰가노가 날개로 뱀을 후려치면 뱀은 뒹굴었고 일어날 틈을 주지 않고 발톱으로 눌러 머리를 쪼아 물고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쓰가노가 무적無敵은 아니었다. 뱀을 사냥한 쓰가노가 뱀을 물고 날아오르면 하늘에서 울브라는 거대한 콘도르가 기다리고 있다가 쓰가노의 뱀을 노렸다. 울브는 쓰가노가 잡은 뱀을 빼앗아 먹고 살았다. 울부는 썩은 고기를 먹지만 때로는 사슴이나 영양을 습격하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마루시가 개미핥기를 잡은 곳을 발견했다. 마루시가 나무에 한 표식表式을 따라가는데 날이 어두워져 야영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 일대가 표범의 소굴巢窟이며 피에 굶주린 표범은 덮어놓고 덤벼든다. 일행은 1Km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동굴洞窟숙소다. 통나무문이 달려있고, 마른 풀이 깔렸으며, 냄비도 있었다. 마르시가 만들어놓은 숲속 호텔이다. 마르시는 밀림 도처到處에 호텔을 만들었고 나무나 바위에는 암호가暗號 표시되어 있었다. 동굴에도 암호가 있었는데 다음 동굴의 위치가 표시되어있었다. 암호는 마르시와 사냥대만 알 수 있었으므로 사실 밀림에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마르시와 사냥대 뿐이었다. 밀림의 밤은 무서웠다. 온갖 짐승들이 울부짖고, 표범은 동굴 앞에 와서 문을 두드렸다. 물론 일행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 날이 새자 밀림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해졌다. 안내인들이 마르시의 발자국을 찾았다. 계곡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계곡에 마르시와 사냥대가 식사를 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일류호텔 보다 더 호화로운 식사였다. 박사들이 놀랐다. 마르시란 사람은 이 밀림에서도 자기가 먹고싶은 음식을 맘대로 조달調達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마르시는 산중의 어느 곳에서도 물줄기 찾을 수 있고, 숲에 무슨 동물이 있는가를 정확히 알아낸다고 했다. 그는 동물의 울음소리를 듣고 동물들의 대화對話를 알아들었으며, 자신도 동물과 똑같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마르시가 영양의 울음소리를 내면 영양들이 모여들었다. 마르시는 또 다른 개미핥기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행의 추적은 중단되었다. 늪지대가 나왔는데 안내사냥꾼들이 늪지대통과를 거부했다. 발이 빠지고, 허리까지 빠지며 때로는 몸이 늪으로 빨려들어간다고 했다. 브라운박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위험해도 좋으니 가자고 명령했다. 마르시가 지나간 길이므로 우리가 못 지나가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하는 수 없이 전진했다. 몇 발 안 가서 수난이 시작되었다. 발이 빠지더니 무릎까지 빠졌는데 보통 진흙이 아니라 끈적거렸으며 빠진 발을 빼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브라운박사는 고집을 부려 전진하였는데 그만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져서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러자 화를 내며 안내인을 독촉했는데 끝내 사고가 터졌다. 무릎까지 빠졌던 것이 허리까지 빠지더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케렌박사가 후퇴後退를 명령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몸을 움직일수록 점점 더 몸이 잠겼다. 위험했다. 백인들이 비로소 사태를 파악했고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하지?’
‘할 수 없지요. 마르시의 도움을 받아야겠어요.’
안내인이 양손을 나팔처럼 만들어서 불었다.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였다. 높게 또는 낮게 계속 불더니 반응을 기다리는 듯 귀를 기울였다. 반응이 없었다. 안내인들이 뜌엣으로 나팔을 불었다. 가늘고 긴 소리와 굵고 힘찬소리가 아울려 퍼져나갔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안내인들이 웃었다. 안내인들이 다시 나팔을 불었는데 이번에는 백인들의 귀에도 아른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시가 옵니다.’
그들은 마르시가 오면 어떤 난관도 해소된다고 믿는 것 같았다. 마르시의 휘파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바람을 타고 오는 것처럼 빨랐다. 약 10분 후에는 말소리가 들렸고 안내인과 대화를 했다. <그런, 멍청이 같은 백인을 뭐 하러 데리고왔느냐?>는 꾸지람이었다. 백인들은 그런 모욕侮辱을 감수甘受했다. 정말 멍청한 짓을 했으니까. 마르시는 40대 초반初盤이었다. 2m 가까운 키였으나 깡마른 체구였고 날카로운 눈빛이었는데 크게 화를 냈다. 거기서 10여 미터만 더 나갔으면 몰살沒殺했을 거라고 했다. 마르시는 계속 욕을 퍼부으며 걸어왔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늪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나무줄기로 만든 넓은 짚신을 신었는데 그가 빠지지 않은 것은 짚신이 아니라 그 걸음걸이 때문이었다. 그는 땅을 디딜 때 몇 번 땅을 다지고 딛었으며 빠른 동작으로 옮겨딛었다. 마르시가 멍석을 두 장 가지고 사람을 멍석 위에 옮기고 다른 멍석을 번갈아가며 이동하여 사람을 옮겼다. 이렇게 약 30m 이동을 하더니 멍석을 던져버렸다. 브라운박사가 감사의 인사를 하고 여기까지온 취지를 설명했으나 마르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러나 그는 일행을 나무밑에서 쉬게해놓고 밀림으로 들어가더니 10여 분 뒤에 사슴 한 마리와 산포도를 가지고 왔다. 모닥불을 활활 피워놓고 사슴바베큐를 만들었다. 브라운박사가 위스키를 권하여 몇 잔 술이 들어가자 굳어있던 마르시가 미소를 지었다. 추적하던 개미핥기를 놓쳐버렸는데 표범이 뒤따르고 있으므로 잡혀먹혔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일행은 개미핥기를 추적했는데 마르시의 말대로 개미핥기와 표범이 싸우고있었다. 개미핥기는 표범의 세 배나 되고 꼬리에 침針이 있어 표범에게도 만만치 않은 적수敵手였으나 결국 잡아먹힌다. 표범은 개미핥기 보다 높은 가지로 올라가 위에서 아래를 보고 싸운다. 개미핥기는 표범의 기세에 눌려 점점 아래로 내려가다가 땅으로 내려가는데 그건 표범의 작전이다. 땅에 내려오면 개미핥기는 무력하다. 표범이 빙빙 돌면서 정신을 뺏아 개미핥기의 품으로 뛰어들어 목줄을 뜯어버린다. 일행이 도착했을 때가 마침 그런 때였다. 죠지가 총을 들어올렸는데 마르시가 제지했다. 총은 신속하고 정확했으나 소리가 나 밀림의 짐승을 쫓아버려서 다음사냥을 방해했다. 마르시가 죠지의 팔을 쳤을 때 표범이 머리를 들고 사람들을 봤다. 개미핥기와 싸우느라고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걸 보지 못한 표범이 사람을 보자 증오에 이글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우으으! 으르렁거렸다. 먹이사냥을 방해당한, 빼앗기지 않으려는 분노였다. 그러나 마르시는 표범의 경고를 무시하고 빠르게 다가갔다. 표범이 개미핥기의 목줄을 놓고 일어서자마자 도약했다. 정말 빨랐다. 마르시가 창을 날렸다. 4m의 근거리였다. 파르르 떨며 날아간 창은 표범의 심장을 뚫고들어가 땅에 꽂혔다. 무서운 힘이었다. 표범은 발광을 했으나 창이 땅에 깊숙이 박혀 입만 벌렸다. 마르시가 뒤에 서있는 사냥대에게 눈짓을 했다. 사냥꾼이 칼로 표범의 목을 쳤다. 그리고 돌아서서 표범에게 물려 비슬거리는 개미핥기에게도 칼질을 했다. 마르시가 두 명의 대원에게 표범과 개미핥기를 마을로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백인들에게는 <시원한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하며 앞장섰다. 브라운박사는 그 신비스러운 사내에게 무한한 호기심을 나타냈다. 일행을 계곡으로 안내했다. 일행이 밑으로 내려감에 따라 소나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이 큰 바위로 내려갔을 때 소리는 벼락같았다. 바위평야라고 부를 수 밖에 다른 표현이 불가능한 너럭바위인데 구석에 20m 높이의 거대한 폭포가 있어 천둥소리를 내며 물이 쏟아졌다. 마르시는 바위틈을 이용하여 내부가 사방 10m 정도의 호텔방을 만들었다. 침대가 있고 냄비도 있었다. 마르시가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특식을 준비하겠다며 하류로 갔다. 무릎깊이의 물속 바위틈에 손을 넣고 30Cm가 되는 물고기를 잡았다.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7마리를 잡았다. 다음에는 물가의 수초水草에 들어가 발로 더듬거리며 손바닥 두 배 쯤 되는 자라를 잡았다. 숲에서는 계란만한 새알을 찾아냈고, 산딸기와 이름 모를 산나물을 뜯었다. 마르시는 마치 양어장에서 물고기를 잡아내고 논밭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는 농부 같았다. 또한 마르시는 훌륭한 요리사였다. 나뭇잎에 말라 구은 물고기에 소금을 뿌리면서 먹는 맛은 별미였고, 푹 익은 자라고기는 연했으며 노랗게 우러난 국물도 구수했다. 식후에 먹은 산딸기는 신선했다. 모두 평온하고 행복했다. 아마존의 대자연에 안겨 편안하게 잠잤다. 아침에 일어난 마르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잠자리 옆에 칼이 한 자루 놓여있었다. 크고 튼튼한 제크나이프였는데 칼자루를 상아로 만들었고 면도칼처럼 예리한 칼날에는 파도波濤무늬가 새겨졌다. 마르시가 이제껏 보지 못 한 고급칼아었는데 그 게 왜 자기 옆에 있는지? 브라운박사의 선물이었다. 센티를 통해 그 게 자기에게 준 선물임을 알고 대단히 기뻤다. 마르시는 하얀 이빨을 들어내며 어린아이처럼 웃고 칼로 나무가지를 잘라보고 손바닥에 날을 세우면서 기뻐서 어쩔줄 몰랐다. 브라운박사도 기뻤다. 도시백화점에서 7달러를 주고 산 칼이 비로소 임자를 만났다. 마르시는 그 다음부터는 브라운박사의 청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다. 동물사사진첩을 보여주며 동물이 사는 곳과 생태를 물었다. 마르시는 모르는 게 없었다. <아, 그 건 간간바라입니다. 족제비의 일종인데 얄미운 놈이지요. 아주 빠르고 똑똑한 놈입니다. 밤에만 활동하는데 무엇이든 먹어요. 언젠가는 내가 잡은 물고기를 훔쳐먹었어요. 나는 그 놈을 싫어하지만 나 보다 더 뱀들이 더 싫어합니다. 그 놈은 뱀만 보면 달려들어요. 길이가 2m나 되는 독사를 먹는 것도 봤습니다. 독사의 독에 면역력이 있습니다. 또 냄새가 지독합니다. 추격을 하면 스컹크처럼 방귀를 내뿜는데 표범도 추격을 포기합니다.>
<동물사진의 벌새를 가리키며, 여기에서 서쪽으로 4Km 쯤 가면 꽃밭이 있는데 그 꽃밭에서 삽니다. 큰 벌 정도 크기이며 얼핏 보면 벌인지 새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작은 것은 손가락 보다 작아요. 작지만 새인지라 곤충은 덤벼들지 못 합니다. 아주 예쁜 새인데 그곳으로 안내하지요.>
마르시는 브라운박사에게 귀중한 학술자료를 제공하였다. 개미핥기 새끼를 잡아주고 독사 중에 가장 아름다운 울쓰를 잡아주었다. 울쓰는 갈색몸통에 사각무늬가 있으며 대가리에는 십자형 무늬가 있었다. 그 뱀을 잡아서 브라질의 모든 뱀의 독액표본을 채취할 수 있었다. 마르시는 광대한 밀림을 자기집마당처럼 꿰뚫고 있었다. 밀림을 돌아다니다가 오후 6시 경이면 밀림에 만들어놓은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가 단 한 번 실수를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숙소를 찾아갔는데 숙소가 없어져버렸다. 벼락이 떨어져 바위가 글러내려 호텔이 사라져버렸다. 마르시가 당황했다. 자기 혼자라면 나무 위에서도 잘 수 있었지만 귀한 백인손님을 나무 위에 모실 수는 없는 법. 밤이라 나무에 표시한 안내판도 별무소용이었고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방향을 잡았다. 브라질의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전갈자리는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밝았다. 휘파람을 불어 뱀들을 쫓았으나 표범은 으르렁거리며 계속 따라왔다. 표범이 으르렁거리는 건 위협을 하여 사람들이 흩어지게 하려는 수작이다. 따라서 으르렁거릴 때는 안전했으나 침묵을 하면 위험했다. 아무리 위협을 해도 사람들이 동요動搖하지 않자 표범은 약 20m까지 접근했다. 죠지와 센티가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 때 마르시가 절대로 총을 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표범을 자극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두 사람도 인정했다. 표범이 더 가까이 접근하더니 울음소리가 딱! 끊어졌다. 앞서가던 마르시가 사람들을 한군데로 모았다. 두 박사를 안에 두고 원형진圓形陣을 쳤다. 표범이 계속 침묵했으나 도망간 게 아니라는 건 주변에 어린 살기殺氣로 가늠할 수 있었다. 그 침묵을 마르시가 깼다. 목을 굴려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표범의 소리와 똑같았다. 조용하고 은근한 소리에 유도誘導된 듯 한 소리에 으르르르! 표범이 응답應答했다. 표범은 초조한 듯 몇 번 으르렁거리더니 조용해졌다.
‘됐어! 그는 갔어.’
신기한 일이었다. 마르시는 어떻게 했을까? <이 사람들은 우리 친구니 자네 단념하고 가게나.>라고 했을까? <까불면 죽인다.>고 위협을 했을까? 새벼구 2시께 동굴에 닿았다. 피로해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르시가 제지했다.
‘침입자가 있어.’
‘이 놈을 쫓아내려면 불을 피워야 해.’
‘침입자?’
표범에 놀란 일행들이 긴장했으나 마르시가 웃었다.
‘여우인 것 같아. 냄새가 고약해.’
연기를 피우자 안에서 비명소리가 나더니 여우 두 마리가 쏜살같이 뛰어나와 도망했다. 여우는 자기집을 손수 짓지 않고 남의 집을 빌려서 산다. 그날도 마르시의 동굴을 빌려 밀회密會를 즐기다가 봉변逢變을 당했다. 원주민사회에서는 남의 집을 사용하면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는 것은 물론 불을 피울 나무도 해놓고 떠난다. 그런데 백인들은 그런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침대로 사용하는 마른 풀을 불태우고 더러는 용변을 했다. 며칠을 지낸 브러운박사가 마르시에게 미국에 가면 대학의 연구원을시켜 주겠다고 했다. 마르시가 가겠다고 하면 처와 아이들도 데리고 가자고 열심히 설득했다. 그의 처는 은근히 가고싶어했다. 마르시는 거절했는데 자기가 마을을 떠나면 마을사람들의 식량사정이 곤란해지고 자기는 밀림을 떠나서는 한 시도 살 수 없다고 거절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얼마나 살겠습니까?’
52. 원시原始의 성性생활
인간 본연의 행복을 생각할 때 생활에서 문명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개화가 안 된 원주민의 행복 - 특히 성생활 행복지수는 어느 정도일까? 문명인과 원주민의 성생활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인류학자 케렌박사의 연구과제다.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케렌박사는 브라징에서 가장 성생활이 다양한 파렌족을 방문하기로 했다. 파렌족은 브라질 원주민의 대표적인 종족인 쓰피어계系에 속하는 종족이다. 멀리 안데스산 중턱에서 발원發源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아마존 하구河口 베렌에서 케렌박사는 출발했다. 1000Km를 달려 아마존의 지류支流 마디라강의 분기점分岐點이 파렌족의 주거지다. 파렌족은 브라질 인디언의 제왕帝王족이라고 자처한다. 대략 30호戶의 오가(초가집)가 있었다. 마을 중앙에 광장이 있고 주변에 오가가 둘러섰는데 오가에는 형제자매 등 10여 개의 독립가족으로 구성된 대가족이 산다. 사촌四寸과 이종姨從사촌이 모여산다. 30 - 50여 명의 대가족은 대나무로 칸을 막은 오가에서 공동생활을 하는데 대나무벽은 방음防音이 안 되므로 부부생활은 곤란할 것 같았다. 그러나 파렌족은 성생활이 터부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밝은 대낮에도 성행위를 했고,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이 봐도 성행위를 중단하지 않는다. 다 같이 웃는다. 따라서 그들의 노래에도, 문명사회라면 풍기문란風紀紊亂이나 음란淫亂행위로 지탄指彈을 받을 일들이 태연히 자행恣行되었다.
<봐라! 우리 자식놈의 것을/ 우리 애비의 것은 밑만을 보면서 축 쳐져있고/ 내 것도 이젠 길기만 길고 힘이 없어졌지만/ 내 자식놈의 것을 좀 봐주어!/ 독사뱀처럼 고개를 쳐들고 기름에 번들거리지 않느냐!/ 우리 자식놈의 것을 봐주어/ 이웃집 못 난 딸이 줄줄 따라다니지만 어림도 없어 어림도/ 이웃집 딸은 아직 엉덩이가 벌어지지 않았고 젖통도 작어/ 아무리 그 집에서 간청을 해도 어림도 없어 어림도>
아주 유머러스한 노래다.
<네 엉덩이는 매우 크구나/ 틀림없이 아기집도 클거야/ 아기집이 크면 아기를 많이 낳는다니 나의 청請을 들어주어/ 네 젖통은 아주 크구나/ 틀림없이 젖도 많이 나올거야/ 젖이 많으면 아이도 많다니 나의 청을 들어주어/ 나는 너를 좋아해>
이런 노래는 순진純眞한 편이다.
<나의 새끼는 어느 놈의 것이지?/ 내가 사냥 나간 뒤에 여편네가 장난했어/ 그래서 이 새끼가 생겼는데 아주 못 난 놈/ 처먹기만 처먹고 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지/ 그러나 어찌 한담/ 이 새끼라도 길러야지>
케렌박사 일행은 도착한 다음 날 어느 부잣집 아침식사에 초청되었다. 길이 80m가 넘는 오가에 50여 명의 가족이 모였다. 오가는 창문이 없었으나 햇살이 대나무벽으로 스며들어 밝았다. 방 중앙에 큰 냄비가 걸려있어 산돼지고기가 끓고, 불 주위에는 꼬챙이에 뀐 염소고기가 익고있었다. 나무열매 밥그릇에 먼저 옥수수와 고구마죽을 먹고, 다음에는 삶은 산돼지고기와 구운 염소고기를 선택해서 먹고, 콩과 산채山菜 삶은 걸 먹었다. 후식後食으로 벌꿀과 산딸기를 먹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 아마 2시간 쯤 걸려 말없이 식사를 했다. 이빨이 빠진 장로가 입을 오물거리며 먹는 식사템포에 맞추는 것 같았다. 식사 중에 몇몇 남자들과 손님에게 술이 배급되었다. 옥수수술이 매우 향기로왔다. 식사 중에 케렌박사는 엉뚱한 관찰을 했다. 젊은 부부들의 하복부下腹部를 보고있었다. 그들은 허리에 줄을 매고는 나체裸體였으므로 부인과적婦人科的 관찰을 할 수 있었다. 젊은 부부들에게는 대부분 하얀 얼룩이 있었다. 젊은 남녀들에게도 있었는데 그들은 식사 중에도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장로 옆에 앉아 식사를 한 딸이 맞은편의 청년과 눈짓을 주고받더니 청년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 나갔다. 청년의 몸이 탱탱하게 팽창한 걸 보았다. 청년이 나가자 딸은 안절부절,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장로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있었다. 케렌박사가 밖으로 나왔다. 청년이 숲의 입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렌박사가 헛기침을 하며 청년쪽으로 갔는데 그 때 처녀가 나와 두리번거리더니 청년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두 남녀는 손을 잡고 밀림으로 사라져버렸다. 케렌박사는 염치廉恥없이 따라들어갔다. 얼마 안 가서 나무 밑에 두 남녀가 꼭 껴안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 건 나무 빠른 걸.)
케렌박사가 웃었으나 의외로 장로집에서 나온 남녀가 아니었다. 그 숲에는 또 한 쌍이 있었으나 장로집 남녀가 아니었다. 케렌박사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밀회를 방해하지 않고싶어 돌아왔다. 케렌박사의 목격담目擊談을 듣고 센티가 웃었다.
‘파렌족은 자유연애이며, 혼전연애도 인정됩니다. 그러나 혼전연애는 공공장소에서는 금기禁忌이므로 숲으로 갑니다.’
케렌박사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발상發想을 했다. 카렌족의 성행위를 직접 관찰해서 문명인과 비교하는 것이다. 문명인은 성행위를 종족보전의 원리原理에서 벗어나 쾌락快樂으로 발전했다. 오히려 임신姙娠을 피하려고 한다. 원주민은 어떤가? 박사의 상담相談을 받은 센티가 장담壯談했다.
‘박사님, 오늘 밤 밀림에 들어가보시지요. 오늘 밤은 달이 밝으니 소리뿐만 아니라 모습도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브라운박사가 케렌박사를 놀렸다.
‘아, 이 사람아! 박사학위까진 자네가 점잖지 못 하게 젊은이들의 성행위를 보겠다고 숲을 기어다닐 작정이야?’
밤 10시가 넘자 케렌박사가 잡목림雜木林으로 잠입潛入했다. 달밤이었지만 나뭇가지가 시야視野를 가렸다. 아무도 아무 소리도 없었다.
(없나?)
박사는 나무둥치에 걸터앉았다. 그 때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얼핏 땅에 엎드렸다. 벌거벗은 남자다. 10여 미터 전방前方에서 남자가 멈췄다. 몇 분 후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여자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밀림속으로 들어갔다. 박사가 그 뒤를 따랐다. 두 남녀는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박사가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잡초가 무성한 풀밭에서 바람도 없는데 풀이 흔들렸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아베크족은 일어나 되돌아가버렸다. 불과 1 - 2분만이었다. 되돌아가려고 일어서는데 또 다른 한 쌍이 왔다. 이어 또 다른 한 쌍도 왔다. 세 번째 온 남녀는 박사가 엎드려있는 7 - 8m 떨어진 곳에 누웠다. 남자의 숨소리가 들렸다. 원주민은 원래 옷을 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옷을 벗는 절차도 없었고, 사랑을 속삭이며 키스를 하고 애무愛撫를 하는 등 절차가 없었다. 이 번의 남녀도 2분을 넘지 않고 일어나 가버렸다. 실망했으나 또 다른 남녀가 바로 그 자리에 왔는데 이번에는 중년들이었다. 젊은이들과 다르게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다. 박사는 좋은 기회를 놓칠새라 바짝 기어 다가갔는데 그만 실수를 했다.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지는 통에 자기 자신이 놀라 제풀에 고함을 질러버렸다. 뱀이 아닌가 착각했다. 박사의 고함소리에 아베크족이 더 놀랐다. 남자가 후닥닥 일어나 고함을 지르며 도망가고 여자도 덩달아 고함을 지르며 도망갔다. 공교롭게 여자가 달려가던 곳이 박사가 엎드려 있었던 곳이어서 여자는 박사에게 거려 넘어지고 일어서려던 박사도 같이 넘어졌다. 박사가 다시 고함을 질렀는데 그 고함소리를 듣고 여자는 상대를 알아챘다.
‘희바치치어!’
너 백인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큰일났구만!> 박사가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는데 여자가 놓아주지 않았다. 여자는 무서운 힘으로 박사를 깔아눕혔다. 그 때 쯤 정신이 든 박사는 여자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여자는 육중한 몸으로 박사를 짓누르고 옷을 벗기려고 했고 박사는 대항을 하려다가 힘이 부치자 고함을 질렀다.
‘사람 살려!’
숲속 여기 저기에서 아베크족이 모여들었다.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사태를 눈치채자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살려줄 생각은 않고 구경만 했다. 입으로는 여자를 응원하면서 …. 여자는 더 신이났다. 그러나 힘이 부치고 여자에게서 나는 냄새에 질려 늘어져버렸다.
(이젠 당했구나!)
체념했을 때 죠지와 센티가 달려왔다. 센티가 모여있는 사람들을 헤쳐버리고 박사를 타고앉은 여자의 엉덩이를 힘껏 쳤다. 케렌박사가 산발散髮에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 모습으로 돌아오자 브라운박사가 비꼬았다.
‘이 보게. 기왕 원주민의 성생활을 연구 할 바에는 관찰로만 하지 말고 직접 경험해보는 게 좋을텐데 ….’
케렌박사가 발끈했으나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지말고 날 좀 도와주게.’
‘어떻게?’
이튿날부터 공동연구가 시작되었다. 출생율과 사망율을 조사했다. 320명의 호구조사를 했다. 출생율 보다 사망률이 더 높았다. 평균수명은 40세도 되지 않았다. 최고령자가 57세였다. 보건의료가 열악한 환경에서 자연유산이 많았는데 임신이 단 한 번의 성교로 되지 않는다고 알고 부인이 임신했더라도 계속 성교를 해야 아기가 무사하게 태어난다고 알았다. 부인이 임신을 하면 매일 밤 봉사를 했고, 정력精力이 부족한 남편은 친구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출산이 가까워지면 더욱 더 봉사를 했으므로 부인도 지쳤다. 사산死産이 많았다. 박사들이 장로를 설득했으나 쉽게 설득되지 않았으며 마을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다. 늙은이들은 경험을 비추어 박사의 말이 옳다고 했으나 특히 젊은 부인들이 공격을 했다. <늙은이는 힘이 없어 봉사를 못 하니까 거짓말을 한다.> <늙은이는 평소에 봉사를 못 하므로 아이를 낳지 못 한다.>고 주장했다. 언제 누구는 만삭滿朔의 부인을 내버려두고 돌아다녀서 사산을 했고, 또 누구는 사흘에 한 번 봉사를 했기 때문에 손가락 네 개 아이가 태어났다고 했다. 봉사폐기론은 부결되었다. 브라운박사가 웃었다. 파렌족의 성행위는 남자 일방적이서 부인들은 늘 불만족이었다. 욕구불만에서 만들어낸 봉사제라고 풀이했다. 사산율이 50%를 넘는 것도 봉사제가 원인이었다. 임신을 하지도 않았는데 부인들은 봉사를 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거짓임신으로 봉사를 받아 임신을 하면 다행이고 못 하면 봉사가 나빴다고 남편에게 책임전가轉嫁를 했다.
53. 기묘奇妙한 동물들
마르시가 생포하여 기증한 개미핥기 새끼는 일행을 웃겼다. 생후 반 년 정도였는데 100Kg이 넘었다. 생김새부터 몸은 곰을 닮았다. 힘도 장사였다. 얼굴은 포유哺乳동물이 아니라 새를 닮았다. 까마귀와 같다. 꼬리는 여우 같았다. 곰과 까마귀와 여우를 합쳐놓은 동물이다. 아래 위 입술이 퇴화하여 입이 구멍이 되었고 긴 혀가 개미를 핥아 빨아들인다. 브라운박사는 개미핥기의 목에 줄을 달아 끌고다녔는데 어느 날 개가 덤벼들었다. 개미핥기는 도망쳤다. 그게 재미있어서 도 덤벼들었는데 개가 그만 실수를 했다. 개가 턱밑에까지 덤벼들자 당황한 개미핥기가 개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힘껏 개의 허리를 졸랐다. 개미핥기의 힘은 곰과 필적匹敵한다. 개가 비며을 질렀으며 말리지 않았다면 목숨이 위험했다. 그 후 개는 개미핥기를 보면 슬금슬금 달아났다. 여우꼬리 같은 꼬리는 개미핥기의 우산이다. 꼬리를 납작하게 펴서 머리 위에 펼쳐 햇볕도 가리고 비도 피했다. 브라운박사가 먹이를 주었기 때문에 잘 따랐다. 우유도 빨아먹었다. 쇠고기도 얻어먹었다. 배가 고프면 뮤뮤 하고 울고 위험하면 킥킥거렸다. 야행성동물이기 때문에 밤에는 줄을 길게 늘여주었는데 어느 날 밤 박사가 자는 천막 밖에서 킥킥거렸다. 심상찮은 일이 생겼다고 판단한 박사가 권총을 빼들고 나왔다. 겁에 질린 개미핥기가 <날 살려주시오.>라는 듯 박사에게 달려들었으나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개미핥기는 계속 한군데를 보면서 킥킥거렸다. 거기에는 굵은 나무토막이 있었으나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나무토막이 움직였다. 길이 7 - 8m나 되는 뱀이었다. 박사의 고함에 죠지가 나와 사살했다. 맥도 이상한 동물이다. 옛 중국에서는 맥이 인간의 꿈을 먹고산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코끼리와 말을 반반씩 닮았고 정말 꿈을 꾸는 것처럼 눈이 게슴츠레했다. 말 보다 크고 맘모스가 살았던 시대에는 하마 보다 더 컸다. 지금 세계에는 다섯 종류가 사는데 한 종류는 말레이반도에 나머지 네 종류는 중남미에 서식한다. 박사일행은 맥을 찾기 위해 이틀 동안 돌아다녔다. 드디어 발자국을 발견하여 추적했는데 연못이 나왔다. 맥은 물가에서 낮잠을 즐기다가 사람을 보고 연못으로 도망쳤다. 물속에 도망친 맥이 불안한 듯 오히려 사람들 쪽으로 왔다. 아나콘다였다. 10m나 되는 뱀은 빠르게 맥에게 덮쳤다. 아나콘다는 사람을 무시했다. 박사가 죠지에게 지시했다.
‘맥을 살려줘!’
죠지가 꼿꼿하게 든 뱀대가리에 발사했다. 몸뚱이에 5연발을 연사했다. 원주민으로부터 표범이 물려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하네강으로 달려갔다. 센티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현장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이었다. 커다란 표범이 무참하게 죽었다. 약초를 캐던 원주민들이 표범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표범이 다른 동물을 습격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용해지자 현장에 가보니 의외로 표범이 죽어있었다. 표범은 한쪽 눈이 찌그러지고, 앞발이 부러졌으며 목줄이 끊겨 죽었다. 표범을 죽인 맹수는 무엇일까? 퓨마였다. 퓨마가 표범을 공격했다. 사람들이 다가오자 퓨마가 먹이를 잡아놓고 도망쳤다. 퓨마는 절대로 사람과 싸우지 않는다. 퓨마는 주로 북미에 사는데 몸길이가 약 2m 정도고, 들소, 야생마, 때로는 곰이나 표범에게도 덤벼든다.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에 데리고다니는 개에게도 덤비지 않는다. 북미에서 나그네가 자가(미국표범)가 덤벼들었는데 퓨마가 나타나 사람을 지켜주었다. 박사일행이 퓨마의 발자국을 추적했으나 퓨마는 강을 건너 도망가버렸다.
‘됐어. 나는 그 놈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
개미핥기처럼 야행성동물에 나무늘보가 있다. 어떤 철학자가 <사람이나 ed동물이 산다는 것은 그가 움직이고 일한다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定意를 내렸으므로 이 정의에 따르면 나무늘보는 살아있는 동물이 아니다. 갈고리 같은 발톱으로 나무에 매달려 하루종일 잠을 잔다. 나뭇잎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곰팡이가 피는 경우도 있다. 나무늘보가 움직이는 경우는 나뭇잎을 다 먹었을 때 다른 나무로 옮겨가는데 하루 종일 걸린다. 그가 땅에 내려와서 움직일 때는 더 느리다. 거북이 속도의 1/ 10이라고나 할까? 장난으로 그를 쓰러뜨리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허우적거리면서 매에! 매에! 운다. 그러나 물에서는 꽤 빠르다. 1시간에 1Km를 헤엄친다. 그래서 나무늘보는 물가의 나무에서 산다. 자가, 독수리 또는 뱀의 습격을 받으면 나무 위에서 뚝 떨어져 몸을 공처럼 말아 데굴데굴 굴러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데굴데굴 구르다가 나무나 돌에 걸려 스톱이 되면 끝장이다.
아마존에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짓는원숭이>다. 브라질의 밀림에 들어서면 누구나 다 원숭이 짓는 소리에 놀란다. 그 소리는 사자의 포효소리 보다 더 크고 위엄이 있다. 그 놈들이 세 마리만 모여 울면 밀림이 쩡쩡 울리며 사방에서 울어재끼면 백인사냥꾼들은 갈팡질팡한다. 다른 원숭이와 다른 점은 턱과 목에 긴 털이 있다. 성악가聲樂家다운 멋으로 기른 것일까?
또 브라질에는 위리망키(양모털원숭이)가 있는데 이 녀석은 사람을 잘 따른다. 털이 양모처럼 길고 부드러워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동작도 매우 민첩하다. 그는 원숭이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스타다. 긴 꼬리로 써커스의 곡예사曲藝師처럼 재주를 부린다. 그런 그가 표범에게 쫓겼다. 원숭이들은 표범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만 그가 올라가있는 나무가 공터에 고립된 나무였다. 도망갈 데가 없어서 비명을 질렀는데 표범은 능청맞게 접근했다. 원숭이가 나무 끝에 몰렸다. 표범과 거리는 1m. 한 번 도약으로 끝날 수 있었다. 원숭이가 가여워서 죠지가 권총을 뽑았다. 센티가 말렸다. 산책 중이라 라이플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권총을 쏜다는 건 위험했다. 설 맞히면 표범의 역습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표범은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도약준비를 했는데 원숭이가 일순一瞬 빨랐다. 표범이 덤벼들 순간 원숭이가 뛰어내렸다. 몸이 유연한 표범도 도약자세를 바꿔 뛰어내렸다. 땅에 뛰어냈는데 원숭이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인가? 표범이 어리둥절하며 원숭이를 찾았다. 원숭이는 뛰어내리는 척 하며 2m 정도 아래 나뭇가지에 꼬리를 말았다. 그리고 매달린 반동反動을 이용하여 다른 나뭇가지로 날아가버렸다. 격노한 표범이 다시 나무로 올라가려다가 사람들을 보았다. 한 사람이 아니라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을 보고 표범은 숲속으로 달아났다. 박수를 쳐주고싶은 묘기妙技였다. 브라운박사가 비스켓을 던져주자 덥석 받았다. 일행이 마을로 돌아가는데 위리망키가 따라왔다. 위리망키는 브라운박사와 함께 기거하다가 박사가 돌아갈 때 미국에 따라갔다.
54. 가라파로족族
가라파로는 유쾌한 종족이다. 날마다 술, 춤과 노래로 살았다. 우선 그들의 노래를 보자.
<우리네 할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네. 사냥하고 고기 잡고 아기 만드는 일 외에는 술만 마셨다네. 에라 에라 엉터리 할아버지야.>
<우리네 아버지도 술 주정뱅이였지. 고기 잡고 아기 만드는 일 외에는 술만 마셨다네. 에라 에라 엉터리 아버지야.>
<아기 만드는 일 외에는 술만 마시고 있지. 에라 에라 엉터리 인간이야. 우리네 아들도 술주정뱅이야. 그 놈은 아기 만드는 일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지. 에라 에라 엉터리 아들이야.>
정말 엉터리 노래다. 알콜중독中毒 가족의 노래지만 과장誇張된 건 아니다. 브라운박사 일행이 마을에 찾아갔을 때도 축하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추장이 초대면 손님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술부터 권했다. 옥수수술이냐 감자술이냐를 물어보고 노란 옥수수술로 술잔을 채웠다. 주먹만한 사발에 넘실거리게 한 잔을 마시니 대낮의 햇빛이 노랗게 보였다. 또 한 잔을 마시니까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고 비슬거렸다. 파티가 한창이라 마을관장에는 100여 명 정도 모였는데 모두 비슬거리는 것 같았다. 브라운박사가 센티에게 물었다.
‘여보게, 내 눈에는 저 사람들이 모두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비슬거리는데 내가 술에 취해 잘못 본 것인가? 아니면 저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비슬거리는 건가?’
잠시 생각한 센티가 대답했다.
‘박사님, 제가 보기에는 박사님도 취했고 저 사람들도 다 취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잘 먹고 잘 놀고 잘 웃었다. 자라요리가 나왔다. 온돌장 같은 바위를 벌겋게 불에 달아 그 위에 자라를 뒤집어놓는다. 자라는 뜨거운 열에 바둥거렸으나 잠시 후 노랗게 익었다. 좀 잔인殘忍했지만 그렇게 익힌 자라는 정말 맛있었다. 껍질을 벗기고 먹었는데 속에 알도 있었다. 팔뚝만한 물고기구이는 비린내가 없고 연하고 고소해서 케렌박사는 큰 놈 한 마리를 혼자 다 먹었다. 술 취한 가라파로는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 트로트박자였는데 남자는 깡충깡충 뛰어올랐고 여자는 허리와 엉덩이를 흔들었다. 허리에 줄 한 줄을 걸친 나체裸體였는데 우루군나무에서 짠 기름을 온 몸에 바르고 얼굴에는 도료塗料를 발랐다. 천연향수도 뿌렸다. 그런데 특이한 건 몸에 털이 없었다. 머리칼을 제외하고는 겨드랑이나 치부恥部의 털까지더 모두 뽑아버리는 게 이들의 풍습이었다. 여자들은 털이 없는 치부를 노출시키고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춤을 추었으므로 백인들은 민망憫惘하여 눈 둘 곳이 없었다. 해가 뜰 때 시작한 축제는 달이 기울자 끝났다. 박사일행도 만취되어 침실로 들어갔다.
‘재미나는 파티야. 정말 재미있어.’
케렌박사가 잠들기 전까지 중얼거렸다. 이튿날, 브라운박사는 늦게 일어났다.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창밖을 보니 아침햇살이 눈부셨다. 10시가 넘은 모양이다. 그런데 노래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어제와 같이 마을 중앙에 100여 명이 모여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케렌박사도 죠지도 센티도 끼어있었다.
‘이 건 또 뭐야?’
‘축제지요.’
‘아니, 어제 축제가 끝났는데 또 축제야?’
‘어제는 마을 장로의 생일이었고, 오늘은 사냥대장의 생일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점장이생일이고.’
‘그것참, 생일이 연달아있군.’
센티가 웃었다.
‘이 마을에는 1년에 300일 이상의 생일이 있어요.’
‘아니, 마을사람이 200이 안 되는데 생일이 300일이라니 … ?’
‘생일이 1년에 두세번씩 있는 친구도 있지요. 이 사람들은 축제를 하기 위해 생일을 만듭니다.’
숫자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 생일을 기억할 리 없으니 놀고싶으면 누구 생일로 하자고 의논하여 술판을 벌인다. 그렇게 놀기만 하면 어떻게 살아가나? 염려없다. 마을 옆에 위대한 아마존강이 흐른다. 낚시 같은 건 없어도 고기를 묶어 던지기만 하면 피라니어가 물고올라온다. 여기 피라니어는 유난히 크다. 30Cm가 넘는데 잘못하다가는 손가락이 잘린다. 가장 맛있는 고기는 피라루구다. 뱀장어 일종인데 아이의 팔뚝만큼 굵고 1m 정도다. 강에는 자라나 새우도 많다. 자라는 50Cm가 넘고 새우는 30Cm나 된다. 튀겨먹으면 일품逸品요리다. 가라파로를 게으름뱅이로 만든 건 아마존이다. 강에는 고기가 지천至賤이고, 들에다 옥수수를 뿌려만 넣으면 자라고, 밀림에는 갖가지 과일이 열리니 일 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다 발가숭이라 옷 걱정도 없고, 언제나 여름이니 난방도 필요 없다. 남녀가 다 벌거숭이고 자유연애라서 성에 대한 갈구渴求도 없다. 유토피아가 따로 없다. 그러나 다른 부족이 침입하면 어떻게 될까? 가라파로는 싸움은 질색窒塞이고 싸울 능력도 없다. 그래서 도망간다. 무작정 도망치는 게 아니라 유사시를 대비하여 피난처避難處가 준비되어있다. 마을 앞 강 가운데 섬이 있는데 상비된 대형보트를 이용하여 피난한다. 침략자는 섬까지 침입하지 못 한다. 우선 배가 없고, 설사 다가간다고 해도 화살의 집중공격을 받는다. 섬에는 방책을 세우고 화살을 준비해두었다. 섬에서 농성籠城을 한 가라파로는 물고기, 자라, 새우를 잡아 자급자족自給自足하며 몇 달을 버틸 수가 있으나 침략자는 1주일도 못 버틴다. 피난을 가서도 파티도 멈추지 않는다. 또 그런 사태를 예견하여 인근 부족과 동맹을 맺었으므로 원군援軍이 달려오기도 한다. 박사일행이 섬에 가보았는데 100여 명이 기거할 수 있는 넓은 집, 튼튼한 방벽, 충분한 화살과 창이 쌓여있었다. 추장이 이 시설은 이제 별 쓸모가 없고 신혼여행 휴양지로 쓰인다고 했다. 신혼부부가 사나흘 정도 허니문을 지낸다. 그들은 여자가 월경月經이 있으면 머리칼을 눈썹 위에서 자른다. 이젠 여자가 되었다는 표시다. 자유롭게 교제를 한다. 매일 파티가 있으니 교제는 아주 쉽고 빠르다. 처녀임신도 수치羞恥가 아니다. 결혼은 총각이 처녀의 모친에게 신청한다. 신청을 받으면 며칠 동안 조사한다. 품행조사도 하지만 주로 신체조건을 조사한다. 소시장에서 소를 검사하듯 이빨을 보고 어깨와 키도 잰다. 가장 종요한 조사는 중요부분이다. 성형과의사 보다도 더 권위있는 표정으로 들어올리기도 하고 주물러보기도 한다. 오랜 결혼생활을 한 모친은 그 가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불합격판정은 그 부분에서 가장 많다. 합격하면 추장과 점장이의 허가를 받아 결혼식을 올리는 파티가 열린다. 비용은 마을에서 마련한다. 파티가 끝나면 섬으로 가는데 그 때 신부는 자기 어머니의 판단이 옳았는가를 안다. 연애는 자유로웠으나 혈족血族끼리의 결혼은 불가不可다. 브라질 원주민은 성姓이 없었으나 가라파로족은 성이 있다. 표범, 독수리, 사슴, 맥, 산돼지, 악어와 물고기라는 7가지 성이다. 대가족제도라서 위험했으나 동성혼同姓婚은 금지다. 따라서 장신박약아나 불구아가 없었다. 그래도 7개의 성이 혈족은 아니더라도 혈족에 가까워서 가라파로도 이웃여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전쟁은 질색이라 묘안妙案을 창출創出했다. 동맹同盟족과 서로 약탈掠奪하는 싸움이다. 교대로 상대방의 마을을 습격해서 여자를 약탈하는데 절대로 폭력금지였다. 활, 칼, 창은 물론 주먹도 안 된다. 습격도 아니고 싸움도 아니었다. 싸움의 형식을 빌린 파티였다. 처음에는 와! 와! 함성을 지르면서 쳐들어오는 시늉을 했으나 서로 웃으면서 술을 마시도 춤을 추었다. 박사이행이 구경을 했는데 쳐들어온 사람은 약 60여 명이었다. 선두에선 5 - 6명은 창과 칼을 가졌으나 나머지는 항아리를 갖고왔다. 술이나 안주按酒가 든 항아리였다. 마중나간측도 앞 몇은 무기를 가졌으나 모두 빈 손이었다. 싸움은커녕 인사를 하고 마주 앉았다. 침략군의 대장은 50대의 노인이었는데 브라운박사와 인사를 하면서 윙크를 했다. 그리고 고함을 쳤다. <이 백인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라!>라고 했다. 서너 명이 와서 백인들의 팔을 잡고 끌고가 여자들에게 잘 감시하라고 넘겼다. 여자들이 좋아라고 몰려들어 한 사람씩 시중을 들었다.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향긋한 과일술과 신선한 과일을 대접했다. 브라운박사를 시중드는 여자는 30대의 글레머였는데 박사의 어깨를 주므르고 팔다리도 주물렀다. 여자들은 글들의 포로를 폭력을 쓰지 않고 함락시키려고 갖가지 애교를 부려렸다. 터키탕의 아가씨들 이상으로 능숙한 솜씨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날이 어두어져가는데 백인들은 숲속으로 가자는 말이 없었다. 실망한 여자들이 하나씩 둘씩 떠나 다른 남자들을 유혹했다. 날이 아주 어두어지자 넓은 광장에는 백인들만 남았다.
‘이 게 뭐야?’
브라운박사가 웃었다. 침략군과 방위군은 지금 쯤 숲속에서 사랑의 격전激戰을 벌이고 있을 터. 격전을 벌이는 대상은 처녀 총각이었지만 과부나 홀아비도 금지되지 않았다. 서로 상대와 눈이 맞아 상대를 따라가는 수도 있었다. 정식결혼도 허락했다. 그 날의 전투에서 세 명의 여자가 가라파로에 남았다. 이 전쟁은 근친결혼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 외 소득도 있었다. 마을에 남은 여자들은 다음 날부터 가라파로에게 과일주 담그는 법을 시범示範했고, 자라요리를 더 맛있게 만드는 방법도 전수傳受했다. 특히 진흙으로 인형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는데 그들이 만든 인형은 정교하고 아름다워 백인들이 소금과 바꿨다. 소금과 바꾼다는 말에 가라파로가 놀랐는데 실제로 박사일행이 샀다. 박사일행은 가라파로마을에서 1주일을 머물렀는데 마음이 편했고 재미가 있었으며 음식도 프랑스의 고급요리 보다 더 맛있었다. 마을에 온지 나흘만에 백인들이 파티를 열었다. 브라운박사의 생일파티였다. 죠지와 센티가 마을 몰이꾼을 데리고 갔는데 몰이를 할 필요가 없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사냥감이 있었다. 파티의 찌꺼기를 먹으려고 여러 가지 짐승들이 모여들었다. 인근 숲에 가서 꿩과 닭을 합쳐놓은 것 같은 새를 열 마리 잡았고, 사슴 두 마리도 잡았다. 죠지가 총을 쏘는 걸 보고 가라파로는 기겁을 했으나 총의 위력威力을 보고는 자꾸 총을 쏘라고 했다. 총의 메카니즘을 모르는 그들은 탄환이 짐승을 맞춰 짐승을 잡는 게 아니라 소리가 짐승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탄환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나면 짐승이 쓰러졌으니까 소리가 잡는다고 생각한 건 당연하다. 그래서 바위 밑에 뚫린 구멍을 가리키며 총을 쏘라고 성화였다. 센티가 웃으면서 불을 피워 연기를 굴로 보냈다. 한참 뒤 시커먼 짐승이 튀어나왔다. 작은 곰이었다. 죠지가 발사해서 잡았다. 브라운박사의 생일파티는 성대했다. 새가 열 마리, 사슴 두 마리, 곰 한 마리였는데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몰려왔다. 생일파티가 만족스러웠던 브라운박사는 향기로운 과일주에 취하고, 맛있는 사슴고기를 먹으면서 근엄한 학자로써 처음으로 춤을 추었다.
55. 어두운 인간들
사물事物에는 밝은 면이 있고 따라서 어두운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가라파로는 언제나 밝고 즐겁게 살았으나 쓰루마이족은 어두운 그늘속에 숨어서 산다. 가라파로가 양지陽地의 부족이라면 쓰루마이는 음지陰地의 부족이다. 쓰루마이는 마또그루소지방의 싱구강 지류 구르에네강 유역流域에서 산다. 그들은 백인은 물론 타 부족을 신뢰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자기 떨어져사는 자기 종족도 믿지 않는다. 쓰루마이족을 찾아가면서 박사일행은 아마존과 싱구강의 다른 점을 발견했다. 아마존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물빛이 탁濁하지만 수량이 풍부하며 햇볕 아래서 흐른다. 싱구강은 밀림의 저습지대를 흐르며 물이 땅밑에서 솟아오른다. 얼음같이 차고 수정水晶처럼 맑다. 아마존은 양지의 강이고 싱구강은 음지陰地의 강이다. 아마존에는 악어가 살고 싱구강에는 뱀이 산다. 아마존에는 피라니아가 살고 싱구강에는 살인 미꾸라지 간제로가 우굴거린다. 아마존의 고기는 유선형이지만 싱구강의 고기는 길쭉하다. 또한 강 유역에서도 아마존은 앵무새들이 노래하지만 싱구강에는 독수리들이 날아다닌다. 초록색 물이 기분나빴다. 피라니어도 무섭지만 간제로는 단 3분이면 사람의 몸을 뚫고 들어와 내장을 파괴한다. 브라운박사가 닭은 산채로 줄에 매달아 물속에 던진 뒤 3분 후에 끌어올렸다. 닭은 퍼득거리며 10분 후에 죽었다. 닭의 털을 뽑아보니 여섯 군데 구멍이 있고 배를 갈라보니 열서너 마리의 간제로가 있었다. 닭의 내장은 벌집이 되어있었다. 30분 후 간제로는 배가 터질 듯 피를 빨아먹고 움직이지 못 했다. 추악醜惡한 물고기였다. 쓰루마이족이 살고있는 데서 배를 내려 고지대로 올라가 살폈으나 인가人家가 보이지 않았다.
‘없는데 ….’
케렌박사의 말에 센티가 웃었다.
‘쓰루마이는 집을 짓지 않고 동굴속에서 삽니다.’
박사일행이 만나려는 종족은 석기시대石器時代의 인간이었다. 쓰루마이는 존재부터 의심스러웠다. 흔적이 없었다. 소리는 물론 발자국도 없었다.
‘종족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닌가?’
‘아니요. 그들은 아직 존재합니다. 사람과 접촉을 꺼려서 숨어있을 것입니다. 분명이 부근에 숨어 우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가라파로가 가르쳐준 곳을 몇 시간이나 돌아다녔으나 인기척도 없었다. 날이 어두워져 천막을 쳤다. 죠지와 센티가 보초교대를 한 게 새벽 2시께였는데 날씨가 몹시 추웠다. 죠지가 꺼진 불을 다시 피우려고 전지를 들고 마른 나뭇가지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6 - 7m 전방에 있는 고목枯木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린자가 스친 것을 보았다.
‘누구야!’
총을 바로잡고 전지를 비췄는데 도망가는 사람이 보였다. 민첩한 동작이었다. 다음 날 발자국을 찾아보았으나 발자국이 없었다. 센티가 나무 위에 올라가 나무를 타고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무를 타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한 걸로 추측컨데 이 부근에 마을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일행은 두 패로 나뉘어 부근을 수색했다. 케렌박사가 잡초 사이에서 뾰쪽하게 나온 굵은 대나무를 발견했다. 대나무통에서 따뜻한 공기가 올라왔다. 공기통이었다. 동굴은 입구가 교묘히 은폐되어 찾기 어려웠다. 입구에서 센티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만나기를 청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일행은 동굴속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기어들어갈 정도였으나 들어갈수록 넓고 컸다. 동굴속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아침식사 준비가 되어있었다. 토막낸 뱀, 야생열매, 매기종류의 물고기, 야자떡을 먹다가 백인의 침입을 알고 도망쳤다. 100m 쯤 가니 동굴에 햇빛이 비추고 강이 나왔다. 동굴생활에 흥미가 깊은 케렌박사가 조사했는데 동굴바닥에서는 물이 나왔으나 통나무를 깔아 마루를 만들고 그 위에 풀로 짠 자리를 깔았다. 밖은 40도가 넘은 더위였으나 동굴 안은 20도 내외였다. 동굴은 냉방장치가 잘 된 호텔처럼 시원했다. 동굴에서 나올 때 브라운박사는 선물을 두고나왔다. 소금 한 포대. 동굴에서 나온 박사일행은 어제 야영했던 곳에 다시 텐트를 치고 일부러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잔치를 벌였다. 죠지가 잡은 들돼지를 굽고 술을 마셨다. 잔치가 한창일 때 뜻밖의 진객珍客이 왔다. 쓰루마이 아이 두 명이 나무 뒤에 숨어 잔치판을 엿보다가 들켰다. 놀라지 않게 조심하며 구은고기를 주었다. 브라운박사가 아이들과 친해져 놀고있을 때 아이의 아버지가 나타나 <아이를 돌려달라>고 항의했다. 백인이 아이를 납치한 것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박사가 담배와 술을 권했으나 거부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들려준 소금은 거절하지 않았다. 센티가 그에게 <내일 아침 마을을 방문할테니 피하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이튿날 박사일행이 동굴을 방문했는데 노인들만 남아있었다. 과자, 소금, 담배를 받고도 노인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주름 사이로 가늘게 뜬 눈에 불신과 증오가 비쳤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인들이 마을을 방문한 이유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손짓발짓으로 하는 외교는 한계에 막혔는데 그 자리에 아이들이 나타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전날 만난 아이들이 다른 아이 서너 명과 같이 온 것이다. 과자를 받고 웃고 백인들에게 스스럼없이 행동했다. 그런데 센티의 총을 만지는 걸 보고는 노인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브라운박사가 아이들에게 총을 보여주며 짐승을 잡는 방법도 설명했는데 아이들은 납득이 안 되는 것 같아 센티가 나섰다. 마침 동굴 앞에 독수가 한 마리 앉아있었다. 센티는 아이들에게 귀를 막으라고 하고 발사했다.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고 독수리가 떨어지는 걸 보고 또 놀랐다. 노인들은 동굴 속으로 도망쳤으나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듯 남았다. 그리고 죠지에게 어디로 가자고 졸랐다. 사냥하러가자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들돼지나 토끼가 있는 곳을 알고있었고 원숭이가 있는 곳도 찾았다. 죠지는 불과 한 시간만에 들돼지 한 마리, 토끼 두 마리, 원숭이 두 마리를 잡았다. 동굴 앞에서 잔치가 벌어져 들돼지 굽는 냄새가 나자 노인들이 슬금슬금 나왔다. 고기가 다 구워졌을 때 쯤 젊은 남자들도 나타났다. 케렌박사가 그들에게 고기를 주고 술도 대접했는데 고기를 주는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도 얼굴을 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술이 취하자 노래를 불렀다. 노래소리는 억지로 목을 쥐어짜는 쇳소리였고 듣기 거북했으며 슬픔이 녹아있었다.
<오늘은 달도 없네. 그 많은 별도 없네. 캄캄한 어둠인데 비까지 오려나. 동굴 속에 불을 켜라. 친구들의 얼굴이나 좀 보자꾸나. 우리는 박쥐도 아니고 부엉이도 아니니까 불을 좀 켜라.>
동굴이 좋거나 편해서 그 속에서 사는 게 아니라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동굴울 주거지로 선택했다. 마을장로의 노래소리가 들리자 여자들이 나타났다. 쓰루마이족의 고통을 모두 여자들이 안고있는 것 같았다. 몸이 마르고 연약했으며 얼굴도 창백했다. 햇볕을 보지 못 하므로 가냘펐다. 박사일행은 이틀 동안 동굴 밖에 천막을 치고 쓰루마이를 관찰했는데 쓰루마이는 일부일처제였다. 브라질의 여러 부족이 일부다처제인데 쓰루마이가 일부일처제인 것은 그들의 도덕성이 아니라 여자가 부족했다. 동굴에서만 사는 여자들은 몸이 허약했다. 그래서 홀아비가 많았고 과부는 없었다. 쓰루마이는 애처가愛妻家였다. 건강이 나쁘고 불행한 여자를 정중하게 대우했다. 유리그릇 다루 듯 조심했다. 성생활은 비밀이었다. 그들은 브라질 원주민들 중에서 치부恥部를 가리는 유일한 종족이다. 여자들은 입마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용도는 비밀이다. 출산과 성교 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것 같았다. 가엾은 여자들이다. 백인들의 선물도 받지 않았다. 잔치판에서도 구경만 하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장로가 음식을 주면 받았으나 동굴로 들아가버렸다. 백인들이 머물고 있을 때 소녀가 성인이 되었는데 장로가 총각 다섯 명 중에서 제비뽑기로 신랑이 결정되었다. 선택된 신랑이 웃었다. 브라운박사가 3일 동안 머물면서 본 딱 한 번의 웃음이었다.
56. 암야제暗夜祭
브라질 아마존의 본류本流 유역에 사는 위이드르족은, 여자를 아이출산도구로 알고있는 브라질 원주민들 사이에서 유일한 여성우대優待 나라다. 쓰루마이처럼 여성은 어두운 동굴에서 밖에 나가지도 못 하고 살다가 죽어야 하고, 여자는 약탈掠奪의 대상이며, 때로는 선물이 된다. 또 어느 종족은 여자가 13세가 되면 어떤 남자가 구애를 해도 받아주어야 하고, 여자가 생식生殖능력이 없어지면 죽이거나 유기遺棄를 한다. 브라운박사는 유일하게 여자를 우대하는 위이드르족에 관심을 가졌다. 위이드르마을 방문 제안자는 인류학자인 케렌박사였지만. 늙은 추장酋長은 남자지만 추장을 보좌補佐하는 5명의 참모參謀들 중 3명이 여자였다. 여자참모는 마을을 방문한 백인들에게 미국여자들이 남편을 다그치는 것처럼 물었다.
‘어느 곳에 사는 누구며 뭘 하러 왔느냐?’
센티의 설명도 믿지 않고 까다로운 조건을 붙였다. 며칠 동안이지만 여기서 살기 위해서는 마을의 풍속과 규율을 지켜야 하고, 우선 마을사람들처럼 옷을 벗어야 한다고 했다. 벌거숭이로 생활하는 누드마을에서 옷을 입는다는 게 비정상이었지만 브라운박사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 조건은 거부했다. <옷을 벗지 못 하는 건 나쁜 병이 있는 증거>라고 했다. 몇 년 전에 이웃마을에 소금장수가 왔었는데 마을여자에게 나쁜 병을 전염시켰다고 했다. 브라운박사가 타협을 했다. 추장의 신체검사를 받기로 한 것이다. 신체검사에서는 전원 합격을 했으나 입회를 하겠다고 하는 여자참모들 때문에 소란騷亂이 일어났다. 추장의 결단으로 입주가 허락되었으나 여자참모들의 적의敵意에 찬 눈초리는 날카롭게 주시注視하고 있었다. 여자우위의 마을에 백인들이 들어와 그 관례慣例가 깨질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마을에는 남자들이 없었다. 사냥이나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것이다. 남아있는 몇몇 남자들도 부지런히 일을 했다. 요리도 남자들이 했다. 여자들은 뭘 할까? 아이들 하고 놀거나 마을일을 했다. 가사家事재판제도가 있는데 판사나 서기가 모두 여자였다. 게으른 남편, 사내구실을 못 하는 남편, 마누리를 박해迫害하는 남편을 심판한다. 마침 재판이 있어 방청傍聽했다. 원고는 여자고 피고는 남편이었다. 재판장은 추장이었으나 실질적인 판결은 여자참모들이 맡았다. 고소내용은 <남편이 일주일 동안 자기를 내버려두었다고 진술했다. 남편은 술만 마시고 만취가 되어 잠만 잤으며 술에 취하지 않은 날도 모른 체 했다>고 주장했다. 남편이 <서로 모른 체 한 것은 피차彼此일반이었다>거 항변했으나, 부인이 <자기는 몇 번이나 요구를 했으나 남편이 거절했다>고 답변했다. 여자판사가 남편을 꾸짖었다, <거짓말을 하면 혀를 묶어버리겠다>. 남편이 놀라 추장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으나 추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남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두 번 쯤 마누라에게 요구를 받았으나 몸이 불편해서 응應하지 못 했다>고 자백自白했다. 재판은 계속되었는데 여판사와 피고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몸이 나빴다고 했는데 어떻게 나빴느냐?’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고 ….’
‘머리가 아픈 것 하고 부인을 내버려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머리뿐만 아니라 힘이 없어 남자구실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거짓말 말아! 그렇다면 검사를 해보자.’
‘아니, 지금은 모두 나았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마누라를 무시하지 않겠느냐?’
‘예!’
‘앞으로 다시 마누리가 제소하면 넌 처벌을 받을테니 조심하라!’
‘예!’
남편은 집행유예執行猶豫로 풀려났으나 이 재판은 사형死刑부터 벌금형까지 있었고 사형이 언도되면 즉시 집행했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 물건을 훔치면 5배 배상賠償과 손가락 절단切斷, 윗사람이나 동료, 부부간에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거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벌금형인데 짐승껍질 몇 장, 물고기 몇 마리, 염소나 돼지 몇 마리를 마을에 바친다. 무서운 재판이었으며 실권實權을 여자들이 가지고 있으므로 남자들은 꼼짝을 못 했다. 가끔은 추장이 조정을 해서 완화緩和시키는 절충折衷도 했다.
위이드로는 고구마가 주식主食이었다. 잡초지를 불태워 고구마를 심고 지력地力이 소진消盡되면 마을을 옮긴다. 부식副食으로는 강에서 메기나 피후루다라는 잉어의 일종을 잡는다. 피후루다는 1m에서 큰 것은 2m 정도인데 비늘 한 개가 구두주걱으로 쓸 정도다. 피후루다는 소금을 쳐서 말렸는데 고기를 잡는 것부터 말려서 보관하는 것까지 모두 남자들의 몫이었고 여자들은 그저 깆다준 밥상을 받았다. 여자들이 하는 유일한 일은 가끔 약초藥草를 캐는 일이었는데, 한치라는 약초는 강장제强壯劑였다. 스테미너가 부족한 남자들에게 달여먹인다. 여자가 임신을 하면 남자들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임신기의 여자는 신경질이 되고 봉사에 소홀했다가는 바로 재판에 걸린다. 그래서 마을에서 부인이 임신한 남편은 공동작업에서 제외하여 부인의 시중에 전념하도록 했다. 그런 위이드로에서도 남자들에게 숨통이 트이는 일은 있다. 한 달에 한 번 암야제暗夜祭가 있다. 암야제는 캄캄한 그믐밤에 열린다. 어둠속에서 살인과 도둑질 외에 어떤 일을 해도 된다. 가장 자유로운 일은 성행위性行爲다. 그날밤에는 처녀든 유부녀든 맘대로 놀아나는 난교亂攪파티다. 여자들이 이 암야제가 남자들을 위한 풍습이라고 했으나 남녀에게 다 좋은 축제다. 백인들이 암야제에 참여했다. 암야제는 대낮부터 시작되었다. 낮 동안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마당 중앙에 무대를 세워 춤을 추었다. 여자들은 늘 벌거숭이였으나 그 날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 야자잎섬유纖維로 짠 치마 같은 걸 걸치고, 진주眞珠 귀걸이를 하고, 조개껍질 목걸이로 치장治粧했다. 여자들이 앞다투어 무대로 올라가 춤을 추었다. 프랑스 캉캉춤 같았으므로 노 브레지어 노 팬티였으므로 여자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릴 때 백인들은 모두 외면外面을 했다. 춤추는 여자나 박수를 치는 남자들의 눈빛이 번들거렸으며 그 건 강한 유혹이었다. 어둠속 암야제에서 자기가 선택받으려는 유혹이었다. 브라운박사는 무대에 여자판사가 끼어있는 걸 보고 놀랐다. 그 근엄했던 여자가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춤을 추고있었다. 30대 중반의 여판사는 노골적露骨的으로 젊은 청년을 노리고 있었다. 그 젊은 청년은 박사가 보기에도 준수俊秀한 모습이었다. 마치 그리스의 조각彫刻 같았다. 여판사는 일부러 청년의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고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 청년에게는 모여드는 여자들이 많았다. 특히 키가 큰 처녀가 여판사에게 적대敵對의 눈길을 보이며 청년 주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응, 저 건 심상치 않은데 ….)
케렌박사가 걱정했다.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 백인들도 천막으로 들어갔고 케렌박사도 잠시 눈을 붙였는데 밖이 노래소리에 눈을 떴다. 남녀합창이다.
<자, 이젠 밤이다. 어둠이다. 모든 것이 안 보인다. 없어졌다. 죄罪도 안 보이고 없어졌다. 이젠 우리들의 나라다. 다같이 놀아보자. 이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대로 놀아보자. 그러나 조심해라. 악마가 있어. 어둠속엔 언제나 악마가 있어. 우린 악마하고는 놀 수가 없어. 악마만 조심하고 재미나게 놀자.>
150여 명의 코러스가 끝나면 마을의 모든 불이 꺼지고 암흑천지 자유로운 나라가 된다. 별빛조차 없는 암흑의 밤이었으나 광장은 야릇한 열기에 휩싸여있었다.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였다. 몸들이 부딪혔다. 케렌박사의 손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서로 손을 잡아 누구인가를 확인했다. 휘파람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남은 사람들이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케렌박사를 보호하는 센티의 손목이 잡혔다. 여자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있는 것 같았다. 강한 힘에 끌려 센티는 숲속으로 끌려갔다. 센티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는데 여자가 몇 마디 말을 하자 다른 여자들이 가세하여 센티를 공격했다. 센티가 끌려가자 케렌박사는 불안하여 천막으로 돌아가는데 여자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여판사의 목소리다. 청년을 두고 다투는 것 같았다. 죠지와 브라운박사가 케렌박사의 말을 듣고 웃었다. 그들도 숲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했다. 숲속은 수십 쌍의 난행亂行 장소라 서너 발도 내딛기가 어려웠다. 브라운박사는 강력한 남자의 품에 안겨 비명을 질렀다. 그 놈은 동성애자였으며 난폭했다. 죠지가 턱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 구해냈다. 한참 후에 돌아온 센티는 세 명의 여자들에게 집중공격을 당했다. 중년 여자들은 파트너를 구하지 못 해 센티에게 집단적으로 달라붙었다. 밤 새 암야제가 계속되었다. 아침에 여기저기서 나타난 사람들은 약간 피로 한 것 같았다. 여판사도 시치미를 떼고 천막에서 나왔고 뒤에 청년이 따라나왔다. 노련한 여판사가 처녀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모계사회母系社會였다. 부부 사이에 남자아기가 태어나도 모계에 속한다. 남자가 성인이 되면 집을 떠나 집단합숙소에 들어가 결혼할 때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못 한다. 남자가 결혼하면 여자의 집에 사위로 들어간다. 그래서 아가씨들에게 고분고분해야 한다. 아가씨를 얻지 못 하면 평생 집단합숙소에서 홀애비로 살아야 한다. 다행히 총각이 아가씨에게 선택되었을 때도 허다許多한 난관難關이 있었다. 아가씨 어머니의 승락을 받아야 한다. 선물을 갖고 처가를 방문한다. 집단합숙소에서 땀 흘려 준비한 마른고기, 감자가루 등을 선물하는데 선물이 마땅치 않으면 거부를 당했다.
<선물은 적지만 집에 들어와 부지런히 일 해 보충을 하겠습니다. 따님뿐만 아니라 어머님께도 봉사를 하겠으니 나의 청請을 들어주십시오.>
이런 방법의 청혼은 평생 남자들이 머리를 들지 못 하는 이유다, 암야제에서는 예외고. 결혼 후에도 남자들의 수난은 계속된다. 사위라는 지위와 머슴의 지위를 같이 얻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낮에는 처갓집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하고 밤에는 마누라에게 봉사를 한다. 낮의 일이 고되어서 밤에 봉사를 소홀히했다가는 가정재판소가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불행한가? 대부분의 남자들은 처가에서 환영받고 특히 장모丈母의 사위사랑은 극진했다. 센티는 그 원인을 암야제에서 사위가 장모를 선택한데서 찾았다. 장모도 여자라 암야제에서 사위와 눈이 맞는 것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이 마을의 중년부인에게는 성적 불만이 전혀 없다. 과부寡婦에게도 그렇다. 늙은 남편이 있는 부인도 성적 불만은 없다. 그 증거로 딸과 사위 사이에 벌어지는 부부싸움에 장모는 언제나 사위편을 든다. 가정재판소에서도 사위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다.
‘여성상위도 이 쯤 되면 나쁜 것은 아니구만. 나쁜 것은 미국과 같은 여성상위란 말야.’
공처가恐妻家 케렌박사의 결론이다.
57. 기마족騎馬族
브라질 남부에는 넓은 초원지대가 있다. 리오그란데 드슬지방과 마트그로소지방 일대인데 풀이 무성하고 강물이 흐른다. 이 일대에는 야생소와 말이 뛰어다니고 라마도 많다. 이 넓은 초원을 지배하는 종족이 사라스족이다. 말을 타는 브라질의 카우보이다. 그러나 그들은 몽골의 기병처럼 타 민족을 침략하는 종족은 아니다. 그들은 평화애호족이며 침략을 받지 않으면 침략하지 않는다. 사라스는 50여 년 전에 이웃의 사이거족과 전쟁을 했는데 사이거는 전형적인 침략자였다. 사이거는 창과 활을 잘 쓰며 산악山岳지대를 장악掌握하고 초원으로 진출하여 사라스를 침략했다. 사이거는 능란한 수렵족이었으나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나 소는 잡을 수 없었다. 전망이 탁 트인 초원에서는 말이나 소에게 접근을 할 수 없었고 접근을 해도 소나 말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사냥은 늘 허사虛事였다. 그래서 사이거는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사라스를 공격하여 말과 소를 빼앗기로 했다. 어느 날 밤 그들은 기습奇襲을 했다. 어둠을 틈타 300여 명의 사이거가 사라스마을을 덥쳤다. 그러나 사라스마을은 사이거가 예상한 구조가 아니었다. 브라질의 우너주민은 대부분 한 곳에 밀집하여 살았으나 사라스는 광대한 초원에 분산分散되었다. 그래서 사이거는 한 집에 쳐들어와 6 - 7명의 남자를 죽이고
5 - 6명의 여자를 포로로 잡았으나 다음 집을 습격했을 때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습被襲소식을 듣고 모두 피신避身해버렸다. 결국 사이거의 전리품戰利品은 고작 몇 명의 여자들과 말과 가축 몇 마리였다. 사이거는 실망했으나 다음 날 사라스를 소탕掃蕩하기로 하고 전승戰承파티를 열었다. 약탈掠奪한 가축을 구워 포식飽食을 했고 포로여자를 유린蹂躪하며 기세氣勢를 올렸다. 유린당한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으며 그 울음소리가 초원일대에 퍼져나갔다. 어둠이 가고 날이 밝아지자 사이거는 자기들의 처지를 알아챘다. 그들은 넓고 넓은 초원의 한가운데 있었으며 초원의 여기저기 사라스의 집들이 있었다. 사이거는 그 집을 하나하나 점령하기로 하고 일어섰는데 그 때 초원의 지평선地平線에 콩알만한 점點들을 보았다. 그 점들이 순식간에 커졌다.
‘앗, 사라스들이다!’
약 100명의 사라스가 마을 타고 질풍疾風처럼 달려왔다. 바람같은 속도였다. 말발굽소리가 진동振動했다. 백전백승百戰百勝, 이제껏 패전敗戰이라는 걸 몰랐던 용맹勇猛한 사이거가 불안해졌다. 말을 탄 자者들과 대전對戰한 경험이 없었다. 사이거의 불안은 말을 달려오는 사라스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공포恐怖로 변했다. 분위기를 눈치챈 사이거의 대장은 퇴각退却의 길이 있었다면 퇴각명령을 내렸을 것이나 사이거를 에워싼 사라스의 진형에 달아날 틈새가 없었다. 사이거의 대장이 결심했다.
‘자, 저 놈들을 쳐부셔라!’
‘활을 쏘아 흐트러뜨리고 돌진하여 몰살시켜라!’
사라스는 말의 등에 찰싹 붙어서 화살을 피했다. 첫 번째 공격을 실패한 사이거에게 두 번째 공격기회가 없었다. 사라스가 사이거의 양쪽 측면을 돌파하고 있었다. 창이 닿지 못 할 거리에서 사라스가 기묘한 무기를 사용했다. 긴 줄에 쇠뭉치 두 개를 달아 빙빙 돌렸다. 거리가 적당해지면 쇠뭉치가 날아와 사이거의 머리를 박살搏殺냈다. 사라스 돌격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수많은 사이거가 쓰러졌다. 그리고 전열戰列을 가다듬을 여유도 없이 다시 공격을 받았다. 더 많은 희생자가 났다. 세 번째 공격을 받았을 때 사이거는 100여 명의 희생자가 생겼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사이거가 도망을 치는데도 사라스는 말에서 내려 휴식하며 담배를 피웠다.
(제깟 것들이 도망가면 얼마나 가랴.)
광대한 초원에서 두 발로 도망을 친들 얼마나 가겠는가? 사실 다음에 벌어진 사태는 전쟁이 아니라 사람사냥이었다. 사라스는 야생마野生馬를 몰 듯 사이거를 하나하나 잡았다. 단 한 사람도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벗어난 사이거는 없었다. 초원의 하늘에 독수리가 수 천 마리 모여들었다. 그 이후 사라스를 침공하는 적들은 없었다.
브라운박사 일행은 트로리(사냥용 지프)를 몰고 사라스마을을 방문했다. 덜컥거리리는 차를 밀면서 기다싶이 언덕을 올랐다. 언덕을 넘자 케렌박사가 탄성을 질렀다. 걸어간다면 며칠이 걸릴 광대한 초원이 펼쳐져있었다. 초원 가운데 개울이 흘렀다. 망원경으로 보니 초원 여기저기 집들이 있었고 가축들이 흩어져있었다. 트로리가 20여 분 달리자 언덕에서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났다. 말을 탄 사내가 나타났고 곧 7 - 8명의 말 탄 사내들이 나타났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말 탄 사내들은 정말 늠름한 모습이었다. 말들이 일렬로 서서 트로리의 진로를 막았다.
‘안녕하시오, 용사들. 우리는 여러분의 마을을 방문하려는 백인이요.’
두목으로 보이는 사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오. 우리는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안내를 할테니 따라오시오.’
말들은 트로리가 따라오기 위해 천천히 달렸으나 트로리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알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운전을 하고있던 센티가 웃었다. 트로리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말과 트로리가 경쟁을 했다. 사라스는 안장鞍裝없이 말을 탔으나 무서운 질주疾走를 했다. 사라스는 말등에 밀착하여 바람처럼 달렸다. 길이 험해 트로리가 콜록거렸다. 사방 20여 미터 쯤 되는 큰 집 앞에 멈췄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나왔다. 벌거벗었으나 짧은 가죽치마를 입었다. 그들은 백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백발이 성성한 추장이 야생마를 잡으로 가니 좀 쉬고있으라고 했다. 좋은 기회였다. 센티가 브라운박사의 선물을 전해주며 야생마사냥을 구경하고싶다고 했으나 방해가 된다면서 거절했다. 그러나 거듭된 간청에 승낙했다. 그들이 야생마를 잡는 무기는 싸움에서 사용한 쇠뭉치가 달린 줄이었다. 단, 싸울 때는 쇠뭉치를 그대로 사용하지만 사냥에서는 쇠뭉치에 가죽을 씌워 말이 다치지 않게 했다. 줄을 빙빙 돌리다가 야생마의 다리에 걸었다. 마치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가 말의 목에 줄을 거는 것과 같았다. 출동준비를 하고있을 때 선발대가 야생마 여섯 마리를 포위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말은 일렬로 달리다가 어떤 지점에서 부채꼴이 되었다. 언덕 위에서도 부채꼴을 한 말들이 달려나왔다. 야생마는 한가하게 풀을 뜯고있었으나 리더는 주변을 살폈다. 야생마는 일부다처제였고 숫컷이 리더였다. 초원에서는 말과 사람들이 공존했으므로 말은 사람을 겁내지 않았다. 그러나 포위망이 압축되자 리더가 눈치를 챘다. 날카로운 경고음을 냈다. 그리고는 앞발을 번쩍 쳐들어 시위示威를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고함을 치며 달렸다. 야생마가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했으나 이미 포위되어서 포위망 안에서 빙빙 돌았다. 사냥대의 리더가 돌진하여 리더와 말을 분리分離시켰다. 리더는 고군분투孤軍奮鬪했다. 그러나 사냥대의 줄이 살아있는 것처럼 날아가 말의 앞다리에 감겼다. 리더가 길길이 뛰었으나 또 줄이 날아가 목에 감기고 또 다른 줄이 뒷다리에 감겼다. 끝내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리더를 잃은 말들은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다. 우왕좌왕右往左往하다가 포위망의 일부가 비어있는 걸 보고 그곳으로 돌진했는데 그 끝에 우리가 쳐져있어 제발로 우리속에 갇혀버렸다. 사육飼育말과 섞여 조용해졌다. 야전축제가 벌어졌다. 모닥불에 송아지 생바베큐를 했다. 송아지를 통째로 불 위에 놓고 털을 태워 칼로 털을 밀어내고 다시 빙빙 돌려 구운 다음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고, 내장에 피를 넣고 나뭇잎으로 싸서 잔불에 던졌다. 요리준비를 끝내고 술을 마셨다. 알콜과 우유가 섞인 혼성주混成酒였는데 감칠맛이 있었다. 몇 잔 마시는 동안에 고기가 익었다. 요리사가 듬썩듬썩 큼직막하게 썰었는데 연분홍 피가 베어있었으나 연하고 고소했다. 나뭇잎을 싸서 구은 쏘세지도 구수했다. 한 방울의 물도 없이 한 요리였으나 훌륭한 요리였다. 그날 오후 스페인사람들이 찾아왔다. 트럭에 야생마와 바꿀 물건을 싣고왔다. 소금, 농기구, 장식품들이었는데 기묘奇妙한 거래였다. 20Kg 소금 세 포대와 말 한 마리, 유리조각 목걸이 서너 개와 말 한 마리였다. 케렌박사가 화를 냈다.
‘여보시오, 그 따위 소금이 얼마나 한다고 말과 바꾼단 말이요?’
스페인상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미국인학자들을 보고 놀랐다.
‘아닙니다, 박사님. 이 말들은 쏘세지 통조림공장에 팔 말입니다. 소금은 운반비용이 많이들고 ….’
‘듣기 싫소. 유리조각과 말을 바꾸는 건 사기야.’
상인들이 소금 한 포대와 유리조각목걸이 서너 개를 더 내놨다.
‘이 사람아, 왜 남의 장사를 방해하나?’
그들은 왜힘도 없어보이는 박사들에게 스페인친구들이 쩔쩔매는지 몰랐으나 케렌박사의 호통에 덤이 생긴 건 기뻤다. 상인들이 가고나자 센티에게 물었다. 백인사회에서는 힘 보다 똑똑한 머리가 더 강하며 자기들이 받은 반짝이는 유리목걸이가 백인사회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걸 알았다.
58. 물물교환物物交換
브라질 원주민마을에는 박사일행 뿐만 아니라 많은 백인들이 들어왔다. 사냥꾼, 상인, 종교인, 학술조사단과 여행자들이다. 백인들이 원주민마을을 방문하려면 시장이 필요하다. 문명에 조금씩 눈을 떠가는 원주민들은 자급자족自給自足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각 마을의 중심지에 시장을 마련했다. 어느 마을에서는 가축을 팔아 곡물穀物을 사고, 다른 부락에서는 사냥한 짐승을 팔아 활을 사갔으며 한 달에 한 번 열리던 시장이 매일 열렸다. 그래서 시장에는 여러 부족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는데 백인들은 만나고싶은 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브라운박사도 방문하고싶은 부족을 만나려고 선물을 내놨다. 선물을 받으면 방문이 허락된다. 시장구경은 재미있었다. 일반상품은 관례대로 거래가 되지만 새끼를 밴 돼지, 산 악어, 표범새끼, 공예품은 기준이 없어 거래가 까다롭다. 그런 물건은 흥정이 잘 되지 않는데 그런 물건을 전문으로 사는 부족 - 구이구로족이 있다. 장사전문부족이다. 그들은 용모容貌부터 단정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사치품으로 몸을 단장丹粧했다. 그들은 성급하게 흥정을 하지 않는다. 시장을 돌아보고 거래상황을 파악한다. 어떤 물건이 잘 팔리고 가장 값싼 물건은 무엇인가? 그들은 여러 시장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시장 비교를 해서 싼 것과 비싼 물건을 구분한다. 선발대先發隊의 시장조사가 끝날 때 쯤 정보를 받은 다른 팀이 달구지에 그 날 팔 물건을 싣고온다. 수량數量도 팔 수 있을만큼이다.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다. 원주민들은 그들이 필요한 물건이 왔기 때문에 구이구로에게 몰려든다. 그러나 구이구로는 쉽게 흥정하지 않는다. 성미가 급한 사람이 화를 내고 가버려도 개의介意치 않는다. 필요한 사람은 다시 오기 때문이다. 구이구로는 생필품을 구하는 게 아니라 거래를 위한 거래를 한다. 브라운박사와 케렌박사는 구이구로에게 흥미를 가졌다. 브라운박사가 그들에게 줄 선물을 내놓았다. 질이 좋은 냄비, 솥과 소금이다. 구이구로는 그 선물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선물을 받지 않았다. 브라운박사가 선물을 늘렸으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들의 장사에만 열중했다. 그런 다음 날, 배에 돌아갔을 때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이구로였다. 장사군이 아니라 장로급 5 - 6명이었다. 파티에 초청을 했다. 소달구지에 박사일행을 태웠다. 2시간 쯤 가니 20여 명이 기거할 수 있는 큰 천막이 있었다. 호화로운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술은 스카치고 포크, 나이프, 스푼과 컵이 놓인 서양식 테이블이었다. 추장이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브라운박사와 케렌박사를 상좌上座에 모셨다.
(무슨 일일까?)
성급하게 용건을 꺼내지 않고 음식만 권했다. 술이 몇 잔 돌고야 자기들은 평화롭게 사는데 일부 백인들이 나쁜 짓을 한다고 말했다. 구이구로가 사는 인근에 다이아몬드광산이 있고, 가스다니어라는 고급과자의 원료인 과일나무가 있는데 거기에 나쁜 백인들이 드나들면서 나쁜 짓을 한다고 말했다. 총으로 무장武裝을 하고 마을을 약탈掠奪하고 원주민 부녀도 겁탈劫奪도 한다. 살인도 하고 방화放火도 서슴치 않는다는 말이었다. 구이구로가 말하는 백인들은 소위 가린페로 또는 가스다네로 부르는 한 무리의 백인 약탈자였다. 이들은 도노(두목)의 지휘 아래 다이어몬드를 착취하는 장물臟物아비였다. 이들은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다가 다음에는 원주민이 채굴한 다이아몬드를 약탈했다. 차차 다이아몬드뿐만 아니라 재물을 약탈했고 부녀자들까지 겁탈했다. 그래서 원주민들과 혈전血戰이 벌어졌는데 싸울 능력이 없는 구이구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약탈을 당했다. 추장이 본부에 초청을 했다.
‘여보게, 죠지군과 센티군은 탄약을 많이 준비하고 우리 늙은이에게도 총을 주게.’
브라운박사가 단호하게 지시했다. 이튿날 박사일행은 구이구로의 카누의 안내를 받으며 10시간이 걸려 날이 어두워졌을 때 강가에 도착했다. 소달구지가 마중나왔다. 구이구로의 마을은 문명사회 같았다. 대나무침대에는 표범껍질이 깔려있고 따뜻한 우유와 신선한 과일이 준비되어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목욕탕이었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목욕을 했다. 이튿날 새벽에 슬픈 일이 있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밀림에서 반죽음당한 여자가 발견되었다. 여섯 명의 가린페로가 번갈아가며 겁탈을 해서 여자는 반죽음 상태였다.
‘더러운 놈들 같으니!’
온화溫和한 브라운박사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가린페로는 아홉 명으로 4Km 쯤 떨어진 곳에 천막을 치고 술을 마시면 행패를 한다고 했다. 구이구로는 술과 음식을 주고 행패를 막으려고 했으나 그들은 더 많은 술과 음식 그리고 여자를 달라고 했다. 케렌박사가 곧장 가서 혼을 내자고 했으나 브라운박사는 신중했다. 우선 가까운 도시의 보안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밖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무법자의 체포는 보안관과 같이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보안관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보안관보다도 무법자들이 먼저 왔다. 정오께 거치른 웃음소리와 야비野卑한 잡담이 들렸다. 술 취한 소리였다. 마을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두 안심하시오!’
죠지가 안전장치를 풀며 말했다.
‘이것봐! 추장놈 없어? 추장 나오지 못해! 나오지 않으면 모조리 쏴 죽일테다!’
박사일행과 추장이 있는 방의 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두 명의 백인과 두 명의 흑백혼혈아였으며 몸을 가누지 못 할 정도로 취했다. 선두先頭에 선 털보가 추장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있는 추장의 딸에게 다짜고짜 덤벼들었다. 그는 추장의 딸의 손목을 와락 잡아끌었는데 그 때 죠지가 앞으로 나섰다. 술 취한 털보는 자기 앞에 서있는 거인巨人을 발견했다. 2m가 넘는 체구를 보고 당황했다.
‘뭐야? 뭐! 넌 누구야?’
죠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녀석의 턱을 후려쳤다. 털보는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일어나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더 강한 주먹이 그의 배를 치고 턱을 강타했다. 털보가 여덟팔자로 뻗었다. 나머지 세 명이 총을 빼려고 했는데 그 때 핑! 하며 총탄이 날아와 그들의 발밑에 박혔다.
‘꼼짝말아! 죽기 싫으면.’
센티가 말했다. 무법자들이 센티가 가진 총을 봤다. 윈체스터 6연발. 최신형이며 기관총처럼 연사連射를 한다. 무법자들이 그들의 구식舊式총을 떨어뜨렸다.
‘보안관이 올 때까지 그 놈들을 묶어두게.’
브라운박사가 차갑게 지시했다. 구이구로가 줄을 가지고 와 한 놈씩 묶었다. 그 중 한 놈이 원주민 앞에서 당한 챙피에 반항을 하려고 일어서다가 센티의 개머리판에 맞아 피거품을 뿜으며 나가떨어졌다.
‘이거 너무한데. 백인들 끼리 너무하잖아.’
술이 깬 듯 중얼거렸던 놈도 죠지에게 얻어맞았다.
‘이 짐승만도 못 한 놈들아! 너희가 백인이라고? 어느 놈이 여자를 겁탈했지?’
‘우리는 술에 좀 취했지만 여자를 겁탈하지 않았어.’
그러나 피해자인 여자가 그들을 보더니 고함을 쳤다. 악당들은 발악을 했다.
‘그거봐, 새끼들아! 그 때 죽여버렸으면 이런 일은 없지.’
한 놈이 동료들애개 욕설을 퍼부었는데 또 죠지의 주먹이 날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만, 그만. 죠지군, 그만해둬. 보안관에게 맡겨.’
‘흥, 보안관? 보안관이 오기 전에 우리 패들이 먼저 올 걸.’
그들의 말대로였다. 멀리서 총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렸다.
‘우리 동료를 석방해! 석방 안 하면 몰살시킬테다. 알았어?’
서너 발 위협 발사가 벽에 꽂혔다. 죠지와 센티가 뒷창문으로 나갔다. 30m 즘 떨어진 잡목림에서 총소리가 났다. 서너 명이 나무 뒤에 숨어서 총을 쏘았다. 집과 집 사이를 지그재그로 빠져나가며 접근을 했다.
‘가까이 오면 죽인다! 총을 던지고 항복하라! 우린 네 명이고 너희는 두 명 아니냐?’
죠지가 총으로 대답했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놈이 은폐물이 불안했던지 달아났다. 죠지가 연사를 했다. 쓰러지더니 기어갔다. 다리에 맞은 것 같았다. 그 놈은 죠지의 총이 6연발인지 몰랐다. 두 발이 발사되자 안심하고 가다가 맞았다. 무법자들도 응사를 했으나 센티가 6연발을 계속 발사하자 침묵했다. 기관총 같은 6연발 총에 겁을 먹어 도망간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보안관은 오지 않았다. 마을의 불안은 공포로 변했다. 무법자들이 야음夜陰을 틈타 기습해올 가능성이 있었다. 무법자들이 다시 잡목림으로 돌아온 듯 가끔 총소리가 났다. 죠지와 센티도 총을 응사했다. 밤 12시께 바람도 없는데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러웠으나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무법자들이 10m 이내로 접근했다. 더 이상 접근하면 위험하다. 총과 총의 싸움에서 10m는 둘 다 죽는다는 걸 의미했다. 죠지가 돌맹이를 바위쪽으로 던졌다. 무법자들이 소리에 대고 발사했다. 무법자들의 위치가 들어났다. 죠지와 센티가 일제사격을 했다. 비명이 나고 응사는 없었다.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으나 아무 소리가 없었다.
‘살려주시오.’
묵 쉰 듯한 소리였다.
‘총을 버리고 마을쪽으로 내려와!’
죠지와 센티가 마을로 돌아와 램프를 마당 한가운데 놓았다. 팔을 움켜쥔 사내가 말했다.
‘살려주시오.’
‘다른 놈들은 어떻게 되었나?’
‘둘은 부상을 당해 도망갔고 두목은 죽었을 것이다.’
‘죽어?’
죠지가 되물었다.
‘누워서 꼼짝 못 해. 아마 죽었을거야.’
나쁜 놈이라도 죽어가는 놈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두목이 풀속에 누워있었다. 어깨와 양 다리에 총을 맞았다.
‘출혈이 심해 위험한데.’
두목을 진찰한 브라운박사가 말했다. 붕대로 묶고 지혈주사를 놓아 응급처치를 했다. 새벽 5시께 보안관이 나타났다. 마을로 오는 도중에 부상을 입고 도망가는 무법자 둘을 발견하여 생포해서 연행해왔다. 보안관이 포로를 보고 이 지방에서 가장 악질적인 범죄자라고 했다. 약탈, 강간은 물론이고 방화, 살인을 한 놈들이라고 했다. 일망타진一網打盡한 범죄자는 달구지에 실려 연행되었다. 구이구로마을에 평화가 왔다. 백인일행은 구세주救世主 대접을 받았다. 양주, 시가렛, 초코릿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뜨거운 목욕탕이 좋았다. 구이구로는 부자마을이었다. 여섯 개의 창고에 물건이 가득하고 하루에 마차 한 대의 물건이 나가고 들어왔다. 구이구로는 운주민들에게 토산품土産品을 싼 값에 구입하여 백인들과 교역交易을 했다. 주로 철鐵로 만든 농기구農器具, 요리용식기, 칼 등을 받고 동물가죽, 과일, 애완용愛玩用동물을 바꿨다. 백인들에게 받은 농기구 등을 마차와 카누에 싣고 여러 시장에 보내 비싸게 팔았다. 서쪽 원주민 특산물을 동쪽 원주민 특산물과 교역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59. 신비神秘의 나라
지구상의 원주민은 줄어들고 있으나 아직도 브라질에는 470여 종족이 살고 있다. 대부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순수성도 사라져간다. 그러나 아직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종족이 있다. 마트구로소 삼림은 <초록색의 마경魔境>이라고 불리우는 곳이며 백인들이 들어가지 못 한 유일한 지역이다. 특히 그 삼림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에 사는 가이아포족은 백인은 물론 다른 부족의 원주민도 들어가지 못 한다. 자기 부족 외 사람은 무조건 활과 창으로 쫓아버린다. 단, 그들이 다른 부족과 접촉할 때는 한 달에 딱! 한 번 보름달밤 뿐이다. 그 날은 다이아포족대표들이 나와 타 부족대표와 교역을 한다. 다이아포는 교역에서 모든 생필품을 구하지만 그들이 내놓는 건 단 하나 소금이다. 가이아포의 거주지 고지대에서는 소금이 나온다. 소금바위가 있다. 브라질 원주민들에게 소금은 필수적인 상품이고 고가高價다. 열대의 기후에서 사는 그들에게 염분鹽分은 생명과 같다. 그런데 소금은 특정지역에서만 생산된다. 소금을 쟁취하기 위해 전쟁이 많았으나 가이아포는 200년 동안 침략을 받지 않았다. 높이 50m의 거목巨木들이 밀생密生하고, 잡초가 무성하고, 나무뿌리가 엉켜 침략군이 근접을 못 했다. 어렵게 근접을 해도 또 높이 30m나 되는 암벽岩壁이 병풍屛風처럼 둘러싼 지형 위에 가이아포의 마을이 있었다. 천연天然의 요새要塞다. 그래서 200년 동안 소금을 독점할 수 있었다. 브라운박사가 가이아포의 소금을 봤다. 바다에서 나오는 소금과 달랐다. 색깔이 누르스름하고 짠맛이 덜했으며 구수하고 달콤한 맛이 섞여있었다. 그러나 원주민은 백인의 하얀 소금 보다 가이아포의 소금을 더 선호하고 비싸게 샀다. 가이아포의 소금은 조미료調味料가 아니라 강장제强壯劑고 신비의 만능약萬能藥이었다. 그래서 주먹만한 소금 한 덩어리에 큰 돼지 한 마리를 맞바꿨는데 요즘에는 소금값이 더 올라 돼지 두 마리와 바꿨다. 브라운박사가 가이아포지역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관리들이 말렸다. 그러나 두 박사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무기武器와 천막은 물론 모기약, 음료수까지 가지고갔다. 밤에는 보초를 세우고 천막 주변에 줄을 쳐서 깡통을 달아 경보警報장치를 만들었다. 산돼지, 토끼, 다람쥐가 경보장치를 세 번이나 건드려 잠을 설쳤다. 그러나 첫날은 약과藥果였다. 고생은 이튿날부터 시작됐다. 울창한 나무들로 밀림은 한증막汗蒸幕이었다. 고생은 더위뿐이 아니었다. 길이 없어 2m나 되는 잡초를 칼로 치며 길을 내면서 걸었다. 총을 쏘면 가이아포를 자극해서 습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사냥을 못 해 건빵과 과일로 연명延命했다. 사흘째는 폭우가 내렸다. 천둥과 함께 시작된 폭우는 말리 들리지 않을 정도고 폭포수 같았다. 어둠속에서 지옥과 같은 밤을 지새고 날이 밝았는데 주위가 온통 물바다였다. 다행히 센티가 높은 곳에 천막을 쳤기 때문에 천막자리는 섬이 되었다.
‘밤 새 물귀신이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구만.’
케렌박사가 쓴 웃음을 지으며 파이프에 불을 붙이려고 했는데 불이 붙지 않았다. 표본標本을 만들려고 준비한 알콜로 커피를 끓였다. 죠지와 센티가 뗏목을 만들었다. 어젯밤 같은 비가 한 번 더 내리면 섬도 잠겨버릴 것이기 때문에 물귀신이 되지 않기 위해 떠내려온 나무를 주워 뗏목을 만들었다. 그런데 케렌박사가 물에 거품이 이는 걸 발견하고 맛을 보니 소금기가 있었다. 상류에서 30Cm나 되는 민물가재가 떠내려와 아침식사거리가 저절로 생겼다. 삽시간에 불어난 물은 또 삽시간에 빠졌다. 오후 3시께 물이 거의 다 빠졌다. 발이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탕을 걸어 해질녁에는 가이아포 거주지가 보이는 곳에서 야영을 했다. 가이아포들이 모를 리 없는데도 아무 일도 없엇다. 그러나 아침에 죠지가 물을 길러오다가 천막에 꽂힌 화살을 발견했다. 센티가 경고이며 선전포고宣戰布告라고 했다.
‘어떻게 할까?’
담대한 브라운박사도 망서렸다. 회의를 한 결과 더 이상 가이아포를 자극하지 않기로 하고 야영을 계속하면서 기회를 기다려보자고 했다. 부근의 지형을 조사한 결과 가이아포가 다른 부족과 물물교환을 하는 장터가 있었으므로 장날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시장은 사흘 후에 열렸다. 50여 명이 모여 가이아포를 기다렸다. 산더미처럼 교환할 물건을 쌓아놓고 있었는데 가이아포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늦게 5 - 6명의 대표들이 나타났는데 얼굴에 알록달록한 화장을 하고 손에는 창, 허리에는 칼을 찬 중무장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숲이 겹겹으로 포위되었다. 죠지와 센티가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교역이 시작되었으나 쌍방의 거래가 아니라 일방적인 거래였다. 그들은 다른 부족들이 가져온 물건을 보고 마음에 들면 그 물건을 손가락질하며 자기들 맘대로 소금을 주었다. 상대가 소금을 받으면 거래가 성립되고 받지 않으묜 거래가 깨졌는데 가이아포는 한 번 깨진 거래는 다시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부족들은 가이아포의 일방적인 횡포에 반항하지 못 했다. 물건을 돌아보던 추장이 멈췄다. 처음에는 놀란 표정이더니 곧 의심스러운 얼굴로 바뀌고 욕심을 내는 표정이 스쳤다. 그가 보고있는 건 길이 30Cm 정도의 칼인데 칼자루가 상아象牙고 보석寶石이 박혔다. 추장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는데 헛기침을 하고는 지나치려다가 번쩍이는 칼의 유혹에 칼을 만져보았다. 한숨을 쉬고는 칼로 나무토막을 잘랐다. 나무토막이 감자나 무처럼 잘렸다. 추장이 고함을 질렀다.
‘이 물건의 주인이 누구냐?’
센티는 그 물건에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미국에서 만든 보물이라고 설명하고 그 칼은 절대로 부러지거나 오그라들지 않고 또 녹이 슬지 않으며 100년 동안 쓸 수 있다고 했다. 추장이 아홉 자루의 칼을 모두 잡았다. 추장은 성큼 자기들의 소금 절반을 내놓았다. 보고있던 다른부족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러나 센티는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거절을 당하자 추장의 얼굴에 노기怒氣가 충천衝天했다. 그렇게 많은 소금을 주었는데 거절한 것은 자기를 모욕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40대 중반의 추장은 날카로운 눈과 험상궂은 얼굴이었는데 그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분연히 자리를 차고 일어서 두서너 발 되돌아섰으나 부하들이 따라오지 않았다. 각자 칼 한 자루씩을 들고. 추장이 다시 돌아와 나머지 소금을 왈칵 밀었다.
(다 먹어라!)
센티가 브라운박사를 봤다. 브라운박사가 파이프를 태우며 얻은 소금을 다른 부족들과 거래를 시작했다. 아까부터 거래를 관찰하고 있었으므로 시세를 가늠해서 적절하게 교환을 하고 소금을 다 나눠준 다음 받은 물건을 모두 가이아포의 추장 앞으로 내밀었다. 브라운박사가 하는 걸 놀라운 눈으로 보고있던 추장이 다시 놀랐다. 그는 자기 발밑에 있는 물건들을 멍! 하게 보았다.
(뭘 하자는 거야?)
‘ 모두 가지시오.’
센티가 말했다.
‘이 칼도?’
‘물론이지요.’
부하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으나 추장은 여전히 시무룩했다.
(이 백인들이 도대체 뭘 노리고 있는 것일까?)
추장이 쑥스러운 듯 어깨를 추겨세웠다. 그 때 케렌박사가 추장에게 담배를 권했다. 추장은 또 다시 야릇한 표정으로 코 앞의 담배를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받았다. 얼핏 죠지가 불을 붙여주었다. 추장은 한 모금 빨아보더니 <싫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부하들도 안심하고 담배를 받았다.
‘우리는 백인이지만 용맹한 여러분을 존경한다. 백인들은 키가 크고 힘이 세지만 여러분은 더 강하다. 특히 가이아포의 용맹함은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친구가 되고싶다.’
브라운박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들은 당신네들의 용감한 마을을 방문하고 싶은데 어떠냐?’
그 말에 추장의 표정이 경직硬直되고 머리를 흔들었다. 가이아포는 철저히 비밀레 싸여있으며 공개를 거부했으나 브라운박사의 끈질긴 회유懷柔에 마을에 들어오는 건 안 되지만 지금 야영지에 있으면 자기들이 방문할테니 친구가 되자고 했다. 천막으로 돌아와 물물교환으로 얻은 토끼를 구웠는데 불쑥 가이아포가 나타났다. 순찰대장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등 뒤를 보고 손짓을 하자 부하들이 들돼지 한 마리를 들고 나왔다. 브라운박사가 크게 웃었다. 박사는 대장에게 톱 한 자루를 주고 부하들에게는 제크나이프를 줬다. 톱을 받은 대장이 무엇인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죠지가 시범을 보였는데 굵은 나무토막이 쉽게 잘려나가는 걸 보고 경탄敬歎했다. 대장과 부하들은 술에 취해 돌아갔다. 이튿날에는 천막 밖에 감자, 고구마와 과일이 있었다. 브라운박사가 또 웃었다.
‘내버려두어도 초청장이 오겠는 걸.’
박사의 예언은 옳았다. 그 날 오후 늦게 초청장이 왔다. 그것도 아주 급한초청장이었다. 브라운박사 일행을 모시러온 부락장部落長들은 긴징하고 초조한 태도였다. 천막 철거를 돕고 뒤처리가 끝나기도 전에 출발을 재촉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출발했다. 가파른 길을 걸어야 했다. 센티가 너무 빠르다고 화를 내면 3 - 4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보초들이 있었다. 휘파람으로 경고를 했으나 부락장들이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지르면 주눅이 든 듯 잠잠해졌다. 서너 시간 걸려 마을에 도착했다. 추장이 마중나왔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추장이 고함을 쳤다. 추장이 브라운박사를 안내했는데 침대에 아이가 누어있었다.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절망적인 표저을 하고 침대 옆에 있었고 점장이도 있었다. 아이는 추장의 외아들인데 어제 낮부터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몸이 불덩어리 같았다. 몇 번이나 죽었던 것을 점장이가 기도를 해서 깨어나게 했으나 다시 열이 올라 죽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그래서 점장이에게 더 좋은 치료를 하라니까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을 옆에 있으며 피부가 하얗다>고 했다는 것이다. 당황한 점장이가 백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아이가 죽으면 백인들이 일부러 아이를 죽이려고 치료를 하지 않았다고 뒤집어씌울 셈이었다. 아이를 살리지 못 하면 백인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이거, 큰일인데 …. 브라운박사, 무슨 병이요.’
‘급성急性소화불량이야. 관장灌腸 준비를 해주게나.’
케렌박사가 비누를 풀어 관장준비를 하는 사이에 브라운박사가 추장에게 물었다.
‘어제 아침에 이 아이는 뭘 그리 많이 먹었지?’
아이의 부푼 배를 보면 당연한 질문인데 추장을 놀랐다.
‘그렇소. 아이 생일이라 감자떡과 고기를 많이 먹었소.’
‘그 음식에 악마가 들어있었소.’
추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아이는 죽느냐?’
‘내가 악마를 쫓아버리지 않으면 아이는 죽지.’
‘당신이 악마를 쫓아낼 수 있는가?’
브라운박사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악마를 쫓아낼 준비가 되었다. 동물마취용 주사기에 하얀 비눗물이 가득 담겼다. 추장과 부락장들은 흰거품을 내는 물을 신비스런 표정으로 보고있다가 그 물이 대롱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감탄했다. 마술魔術 의 트릭이 아주 근사했다. 아이의 항문에 주입하는 것도 그럴 듯 했다. 입으로 들어간 악마가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마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해설을 했다.
‘이 물이 아이의 뱃속에 들어가면 악마하고 싸운다. 그러면 아이가 배가 아프기 시작하는데 놀라지 마라. 곧 악마는 똥과 같이 빠져나오게 될테니까.’
비눗물이 주입되었다. 고열로 고생하던 아이가 신음소리를 냈다. 관장액이 작용하여 혈액이 복부로 집중되기 때문에 순식간에 열이 내리고 복통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배가 아프다고 고함을 쳤다. 아이의 어머니가 희망을 되찾은 듯 아이를 와락! 품에 안았다. 브라운박사가 아이를 빼앗아 들고 악마를 받을 그릇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커다란 그릇이 준비되었다. 아이의 항문에서 왈칵 똥이 쏟아졌다. 많은 양이 줄줄 흘러나왔다.
‘됐어! 이제 악마는 사라졌다.’
브라운박사의 선언에 추장이 웃었다. 부락장들도 웃었다. 그 험상궂은 사람들이 웃는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설사泄瀉를 하고난 아이는 열이 내렸으며 아이는 거짓말처럼 일어나 어머니에게 안겼다. 그 걸 본 점장이놈이 앞으로 튀어나와 손에 든 먼지털이를 흔들며 주문呪文을 외우기 시작했다. 박사들이 그 꼴을 보고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자, 이제 잠을 좀 잘까.’
박사가 눈을 떴을 때 태양이 머리 위에 있었으며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추장아들의 완쾌와 손님 환영잔치였다. 가이아포는 옛날 전ㅌ통을 그대로 지켰다. 외부와 굳게 닫혀있고, 소금으로 생활이 풍요로와 개혁이나 발전이 필요 없었다. 몸에 붉은 황토를 칠하고 검정색과 흰색으로 무늬와 점을 그려 마치 도깨비 같았다. 양고기구이는 온통 소금으로 범벅이 돼 짜기만 했으나 소금이 많이 발라진 건 그들에게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옥수수술은 매우 독했다. 소금채취는 극비였으나 특별히 박사들에게만 허락되었다. 경비대, 채취꾼, 운반책과 가공반으로 구분되어 출발했다. 소금이 운반되어오면 노인들로 구성된 가공반이 가공을 했다. 가이아포는 한 달에 딱 한 번만 소금작업을 한다. 원료보전과 값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다. 사흘 동안의 제엽작업이 끝나면 축제를 열었다. 제염작업기간의 금욕생활도 풀린다. 그래서 축제는 더 즐거웠다. 케렌박사가 보고했다.
‘어젯밤에 일곱 번이나 마누라와 함께 집에 들락거리는 친구가 있었어.’
60. 브라질 요리料理
그 나라의 요리는 그 나라의 여자를 상징象徵한다. 스페인이나 멕시코요리는 짜고 맵다. 기승氣勝한 여자들과 닮았다. 프랑스요리는 분위기고, 이탈리아요리는 깔끔하다. 미국은 철저한 영양 본위本位. 러시아는 질質 보다 양量이고, 일본은 화려華麗하며, 중국은 다양하고 코리아(대한민국)는 멋과 맛이다. 브라질은 어떤가? 케렌박사는 식도락가食道樂家다. 브라질요리를 탐색했다. 브라질요리는 원시밀림에서의 요리와 비슷했다. 사슴바비큐나 들돼지통구이처럼 기름지다. 브라질의 대표적인 요리는 슈라스코와 폐져어다다. 슈라스코는 한국의 갈비불고기와 비슷하다. 송아지 살을 뼈까지 잘라 쇠젓가락에 꿰어 굽는다. 마늘, 고춧가루, 옥파를 다진 양념속에 몇 시간 담궈놓았다가 직불구이를 한다. 한국의 직불구이 보다 담백하고 맛있다. 슈라스코는 어느 나라 사람도 잘 먹는 대중요리다. 그러나 폐져어다는 브라질만의 요리다. 돼지의 귀, 발과 꼬리를 마구 잘라 폐저언이라는 검은 콩에 넣어 삶는다. 오래토록 삶아 후추가루, 마늘과 파를 넣고 치즈도 들어간다. 기름진 맛이 더 없이 구수하다. 돼지 발톱이나 털이 있고 검푸른색이 끔찍하여 보통사람들은 기피하지만 박사일행은 좋아했다. 원주민들이 들돼지를 잡으면 맛있고 연한 부분은 추장과 부락장들이 먹고 젊은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대가리, 꼬리와 다리였다. 그것마져도 양이 적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그 걸 함께 섞어 삶았고 양을 불리기 위해 흔한 콩을 넣었다. 브라운박사가 페져어다요리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어느 부락장이 초창을 했다. 브라질에서 가장 맛있는 페져어다요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정말 그 집 식탁에는 구수한 냄새가 났다. 요리가 나왔는데 보기에도 맛있게보였다. 검은색이고 연뿌리도 있었다. 식도락가인 케렌박사가 연뿌리를 먹었는데 연뿌리가 아니었다. 돼지주둥이였다. 돼지주둥이에는 수염도 달려있었다. 케렌박사는 내색을 하지 않고 먹었으나 그 후부터는 페져어다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브라질 여자들은 즐겨먹었다. 몇 그릇씩 연거푸 먹고 그 국물에 빵을 발라 먹었다. 가끔 우물우물 돼지의 발톱이나 잔뼈를 발라내면서 한없이 먹었다. 스테미너 요리였다. 남녀에게 다같이 통하는 강장제였는데 그 때문인지 브라질 여자들은 정력이 왕성했다. 브라질에서는 여자들이 남편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이 많은데 그 이유 중에 <피고 남편은 2주일 동안이나 남편구실을 못 했으니까 원고 처에게 사과하고 배상을 하라>는 판결이 흔했다. 2주 동안 침실에서 무시당했다고 고소를 한다면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고소당하지 않은 남편이 없을 것이다. 하기야 브라질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기는 하다. 브라질의 점심시간은 2 - 4시간이다. 따라서 셀러리맨들은 집으로 돌아와 기름기있는 고기요리를 먹고 침실에서 잔다. 너무 더워 체력소모를 막기 위한 방편인데 남편들에게는 오히려 체력소모를 하게 된다. 침실에서 혼자 자는 게 아니라 기름진 요리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마누라도 같이 먹고 같이 잔다. 정력이 왕성한 여자들이 남편을 자라고 놔둘 리 없다. 여자의 기대를 어겼다가는 재판소에 가야되기 때문에 남편들은 고단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여자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비문화적이다라는 여론與論을 퍼뜨렸는데 일부 상류사회 여성들은 돼지고기요리를 삼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돼지고기를 삼가는 대신 이번에는 병아리를 먹었다. 500g 정도의 병아리를 우유를 뿌려 쪄냈는데 아주 dsu하고 맛이있다. 브라질 여성들은 병아리에 양념을 치면서 보통 두세 마리씩 먹는다. 병아리 세 마리를 먹고, 사라다를 먹고, 스프와 빵을 먹은 다음 맥주를 마신다. 그런 다음 남편을 침실로 끌어드리니 남편들이 비명을 지른다. 브라운박사는 숮비한 연구물을 정리하기 위해 브라질의 대학에 위촉委囑했다. 그리고 연구실조수라는 명목으로 요리사를 채용했다. 30대 과부로 1급요리사였다. 그녀가 만든 돼지고기나 닭요리는 일류식당의 요리 보다도 더 맛있었다. 그런데 며칠 지내고나자 태도가 좀 이상했다. 큰 접시의 요리를 작은 개인접시에 나눠주는데 유난히 케렌박사의 차례에서는 시간이 걸렸다. 맛있는 부분도 많이 담겼다. 케렌박사는 농담을 잘 하고 특히 여성들에게 친절했는데 좀 오해한 것 같았다. 매일 스테미너요리를 먹은 박사의 얼굴에는 기름끼가 돌고 체중이 늘었다.
‘여부게 박사, 자네 기름끼를 좀 빼야겠는데. 운동을 하든지 연애를 해서라고 말이야.’
근엄한 브라운박사가 농담을 할 정도라서 케렌박사는 좀 곤란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요리사를 피했는데 이미 늦었다. 요리사는 박사가 쌀쌀맞게 할수록 더 다정하게 굴었다. 자기의 서비스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박사님, 저 과부의 소원을 풀어주시지요. 자칫하면 사고납니다.’
보다 못한 센티가 충고를 했는데 어느 날 사고가 생겼다. 요리사가 자기 생일이라면서 박사일행을 자기집으로 초대했다. 요리사의 집은 호화스러웠다. 정원이 500평이나 되었다. 건물도 넓었다. 일행은 저녁도 먹지 않고 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직 요리가 준비되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것이 두 시간이 넘었으며 밤중이 지났다.
‘목수가 자기집 못 짓는다더니 요리사도 그렇군.’
브러운박사가 불평을 했다. 그 때 요리사가 나타났다. 앞가슴을 들어낸 화려한 정장正裝을 하고 화장도 짙었다. 그렇게 차려 입고보니 상당한 미인이었다. 큰 눈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모두 배가 너무 고팠다. 요리사의 인사말도 듣는둥 마는둥 요리만 기다렸다. 불이 꺼지고 촛불이 켜졌다.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다. 그리고 요리가 나왔으나 의외의 요리였다. 고기도 아니고 과자도 아니었다. 나뭇잎을 말려 튀긴 요리였다. 바삭바삭한데 강렬한 향기가 났다. 요리는 그것뿐이었고 붉은 술이 나왔다. 원샷 건배乾杯를 해야 주인공이 장수長壽한다면서 술을 권했다. 눈을 딱 감고 마셨는데 혓바닥이 짜릿하고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다. 불덩어리를 집어넣는 것 같았다.
‘아차, 지독한 술이군.’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눈앞이 빙빙 돌았다. 덮쳐드는 취기로 정신이 몽롱朦朧해져가는데 요리사는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여러분, 이제 마음껏 술을 마시고 음식을 들어주십시오,’
그러나 음식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그 흔한 브라질의 고기들은 다 어디 갔는지 마른 풀과 나뭇잎뿐이었다. 식물성음식들은 공복空腹을 채우지 못 했을뿐 아니라 도리어 요사妖邪스러운 향기로 술기운을 북돋았다. 과일즙도 비슷했다. 술만 더 마셨다. 두 시간 후 요리사의 생일축하파티는 기가막히는 장면이 되었다. 모두 술에 취해 떨어져버렸다. 요리사는 술에 취해 횡설수설橫說竪說하고 있는 죠지와 센티를 사람을 시켜 숙소로 데려다주고 브라운박사와 케렌박사는 자기집 2충으로 안내했다. 케렌박사는 꿈속에서 자기가 누군가에게 안겨 공중을 날아가는 걸 어렴풋이 의식했으며 요염妖艶한 요리사가 웃는 얼굴도 본 것 같았다. 요리사는 원색原色잠옷을 입었으며 강렬한 향수냄새가 났다. 케렌박사는 어지러운 꿈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 허사였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붙잡으려다 실패,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요리사의 두터운 가슴에 몸을 맡겨버린 걸 마지막으로 의식했다. 이튿날 새벽에 눈을 뜨자 몸은 나른했으나 머리가 상쾌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요리사가 좀 부끄러운 듯 신선한 과일즙을 내밀었다. 케렌박사는 당황했다. 자기가 누워있는 침대가 커다란 더블베드이며 자기는 한쪽 구석에서 잤으며 다른 한쪽은 비었으나 사람의 체온이 남아있는 걸 느꼈다. 요리사의 향수냄새가 남아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단편적인 기억밖에 없었고 토막이 난 기억에는 언제나 요리사가 등장했다. 요리사의 눈치를 봤으나 요리사는 시치미를 떼고있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듯 한 표정으로 한층 다정하게 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사하세요. 브라운박사가 기다리고계십니다.’
식탁에 브라운박사가 앉아있었다.
‘굿모닝, 닥터 케렌!’
‘굿모닝!’
두 사람은 묵묵히 식사를 했다. 담백한 양고기스프가 나왔다.
‘여보게, 엊저녁에는 어떻게 된 것인가?’
‘그 걸 어떻게 알아. 나도 만취된 걸.’
‘자네도 의식불명인가? 우리 실수를 한 것 아닐까?’
‘별로, 실수는 없었는데 ….’
브라운박사가 안심하고 감자와 쇠고기 다진 요리를 먹었다.
‘맛있어, 마담. 아침요리는 맛잇는데 ….’
‘어제 요리는 별로 드시지 않았지요?’
‘엊저녁요리?’
‘그래요. 처음에 나온 요리는 유카리리의 잎을 말려서 튀긴요리였습니다.’
유카리리는 오스트렐리아에만 있는 나무고 코알라가 먹는 나뭇잎인데 그 잎이 요리재료가 되는 것인줄 몰랐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잎은 강장제였다. 코알라는 그 잎만 먹는데 물개처럼 일부다처제였다. 케렌박사는 그 귀중한 요리를 박대薄待한 게 미안하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하긴 엊저녁요리도 맛있었어. 술 마실 때 나온 그 노란스프말이요. 구수하고 맛있었지.’
‘녜, 그 건 내 자랑거리 스프지요. 사람들이 만드는 비법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난 그것만은 거절합니다.’
‘재료가 뭐지요? 소꼬리 같은 게 보이던데 ….’
‘뱀입니다. 하넨이라는 독사인데 약 30Cm이고 한 사람당 한 마리가 들어갑니다.’
뱀! 케렌박사의 의자가 삐꺽거렸고 브라운박사는 포크를 떨어뜨렸다. 뱀요리도 강장제였다. 뱀독은 흥분제였고. 특히 술과 함께 뱀요리를 먹으면 환갑이 넘은 노인도 여자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했다. 감자 말린 것 같은 튀김요리는 암내를 내기 시작한 오리의 자궁子宮을 말린 것이고, 기다란 쏘시지는 염소의 생식기生殖器였다. 그러나 아침에 나온 요리는 보약補藥이었다. 염소고기와 우유로 만든 스프, 감자와 쇠고기를 다진 함박요리, 나뭇잎에 싸서 구운 돼지고기. 아침식사를 하면서 과부요리사가 신세타령을 했다. 누가 들어라고 일부러 하는 얘기였다. 과부요리사는 언래 자우나족 추장 딸이었다. 자우나족은 아마조나주州에 있는 아파포리스강 유역에 사는 원주민인데 사냥, 목축 그리고 농경도 했다. 그래서 음식의 종류가 풍부했고 요리기술이 매우 발달했다. 찾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괴상한 풍습이 있었다. 방문객은 단 하룻밤을 묵어도 마을사람과 피를 나누어야 하는 풍습이었다. 피는 남녀교합交合을 뜻하는데 자우나족도 근친결혼 때문에 발생하는 폐해의 종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다른 부족들처럼 전쟁을 하여 포로를 잡아오거나 침공을 해서 납치를 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 게 맛있는 음식을 개발하여 방문객을 유치誘致하고 피를 나누는 인구人口정책이었다. 덤으로 수입도 만만찮았다. 그러므로 자우나마을에는 객사客舍 - 모텔이 있었다. 어느 해, 마을에 포르트칼의 귀족부처貴族夫妻가 방문했다. 50대의 노老귀족과 30대의 아름다운 부인이 관광을 왔다. 그 귀족은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았는데 타락墮落한 생활을 하였다. 의식주 걱정이 없는 그들은 도박賭博과 술로 살았고 그것에도 지쳐 여행을 했다. 귀족은 크게 환영받았다. 소금과 금속제품을 많이 선물했다. 20명이 넘는 일행도 많은 수입을 남길것이었다. 밤에 벌어진 산해진미山海珍味와 술에 취해 각자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주인공 귀족부부도 방에 안내되었는데 각방이었다. 귀족의 침실에는 젊고 예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추장의 딸이었다. 추장의 딸은 20세였다. 결혼을 했으나 임신을 못 했다. 그래서 추장은 백인두목頭目과 딸을 교접交接시킬 속셈이었다. 노귀족은 얼큰한 술과 방에 피워놓은 향수와 젊은 여자를 보자 오랜만에 몸이 불타올랐다. 귀족은 딸에게 백인사회의 비법을 전수하며 향유享有했다. 단조로운 교접 밖에 몰랐던 딸은 밤새 시달렸으나 유용한 비법을 전수받아 생활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귀족은 날이 밝아오자 그제야 혼자 버려둔 부인이 생가났다. 히스테리를 감당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기우杞憂였다. 피를 나누는 풍습은 부인에게도 적용되었다. 아직 30대의 부인은 새털이 깔린 침대가 있는 독실獨室에 안내되었고, 신선한 과일과 우유를 대접받았다. 포근항 침대에서 잠이 들려는 때 누군가 소리없이 들어왔다. 그녀는 남편인줄 알고 항의의 표시로 돌아누웠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흥, 미안하니까 수작이군.)
손길이 유난히 다정스러웠다. 그래서 돌아누었는데 깜짝 놀랐다. 달빛이 어슴프레한 방에 젊은 남자가 있었다. 옷을 걸치지 않은 남자의 하복부下腹部를 보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안내인이 말했던 피를 나누는 풍습을 상기했다. 그렇다면 남편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분명해졌다. 어둠속에서 아무 것도 못 본 것처럼 하품을 하고는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마을 풍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젊은 원주민은 강렬했다. 늙은 남편에게서는 얻지 못 한 힘찬 행동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아무리 모른 척 하려고 해도 몸이 무섭게 반응하고 있었다. 새벽에 남자가 돌아갈 때 누군지 알았다. 추장의 사위였다. 아침식사 때, 눈이 부석부석한 귀족은 부인의 눈치를 보고 안심했다. 의외로 기분이 좋았으며 귀족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여보, 여기가 맘에 들어요?’
‘녜, 정말 기분좋은 곳이네요.’
귀족이 좀 더 대담해졌다.
‘난 어젯밤 술을 마셨으나 피곤하지 않은데 … 어떻소, 하루 더 머물까?’
‘그래요. 너무 긴 여행을 해서 나도 피곤하니 여기서 좀 쉬었다 갑시다.’
그래서 하루를 더 묵었고 서로 암묵暗黙의 양해諒解가 이뤄졌다. 사흘을 더 묵었다. 마을을 떠날 때 추장 가족을 도시에 초청했다. 추장의 부처夫妻도 암묵의 규정에 따라 귀족의 저택이 있는 포르트칼의 도시都市 메레히에 갔다. 그 게 추장의 딸 - 과부요리사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으리으리한 백인귀족의 집에 도착한 추장가족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침실에서의 권태倦怠가 오자 딸은 요리사가 되고 사위는 정원사庭園師가 되었다. 문명의 화려한 맛을 본 그들은 밀림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추장의 사위는 도시에 온지 3년만에 죽었다. 산야山野 뛰어다녔던 그가 매일 집안에서 갇히고 포식飽食을 했으며 귀족부인에게 밤낮으로 시달리다가 안주인의 침대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에 비해 딸은 잘 적응했다. 요리솜씨를 발휘하여 소문이 났다. 특히 돼지고기와 산초요리는 고급식당에까지 소문이 나 초빙招聘되었다. 보수報酬도 많아 재산을 모아 집도 구입했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귀족부부에 대한 여러 가지 상념想念이 있어 울지도 않았으나 10여 년이 지난 요즘에는 생각도 나고 꿈에도 보인다고 했다. 신세한탄을 마치며 요리사는 <마을을 떠난 게 잘 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모르겠다>며 쓸쓸히 웃었다. 케렌박사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그래, 고향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소?’
몇 년에 한 번씩은 간다고 했다. 부친은 오래 전에 죽었고 동생이 추장이 되었다. 그녀는 고향에서 요리재료를 구입하고 마을에 필요한 물건을 제공했다.
‘고향도 내가 안주할 곳이 아니예요. 문명에 물든 내가 어떻게 원시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어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어려웠다. 브라운박사 일행은 1년 가까이 원시생활을 했다. 배고프면 먹고, 놀고싶으면 놀고, 잠이 오면 언제든 눈을 감는 생활이었다. 시간과 규칙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면 어떤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침 7시에 일어나면 그 때부터 생활은 판에 박은 듯 돌아간다. 세수하고 잠옷을 갈아입고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로 목을 조르는 일상이 반복된다. 차를 타고 학교에 나와 동료나 학생들에게 인사를 해야되고, 강의를 하며, 연구실에서 시험관과 씨름을 하고, 논문을 쓰는 일상이 매일 똑같이 반복된다. 브라운박사와 케렌박사는 우울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브라질을 떠돌면서 원주민들과 같이 살 수만 있다면, 인간의 행복에 문명이 얼마나 기여하는 것일까?
<인류의 진보가 과학의 발달에 의한다고 하지만 진보란 뭐야? 스모그에 뒤덮힌 하늘 밑에서 빌딩이 임립林立 하고, 매일 수많은 교통사고로 죽는 사회. 화학약품이 첨가된 음식, 까딱하면 병원에 가고 주사를 맞아야 하는 세상>
브라운박사와 케렌박사는 브라질이 좋았다. 푸른 하늘 밑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자연속에서 사슴바베큐를 먹고, 과일주를 마시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벌거벗고 사는 - 새들과 살아가는 원주민들이 부러웠다.
61. 참변慘變
1925년 일본 북해도 천염산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천염산은 원시림이었다. 그 원시림을 개척하기 위해 15호의 개척자들의 집이 들어섰다. 산기슭에 200 - 300m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 개간開墾을 했다. 12월 초에 천염산 일대에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자 마을사람들이 안심했다. 곰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곰은 겨울철에는 깊은 동굴에 들어가 동면冬眠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곰이 인가人家를 습격하는 일이 없어진다. 적어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마을에서는 가을에도 소와 말이 곰에게 잡혀죽었고, 돼지 세 마리가 희생됐다. 마을사람들은 곰이 소를 습격하는 걸 봤는데, 소는 벌채伐採한 나무를 산 중턱에서 마을로 운반하는 황소였다. 그 소가 갑자기 미친 듯 날뛰기시작했다. 머리를 땅에 대고 흔들면서 뒷다리로 달구지를 마구 찼다. 소를 끌고가던 사람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소의 핏기 어린 시선이 머문 곳이 삼림이었기 때문이다.
‘곰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그 건 곰이라기보다도 지옥에서 나타난 염라대왕閻羅大王 같았다. 3m나 되는 붉은곰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때 재치才致있게, 마차의 주인이 소를 달구지에서 풀어주고 사람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한 사람은 마을쪽으로 달아났고 두 사람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소는 달아나지 않았다라기 보다는 달아날 수가 없었다. 곰의 목표가 사람이 아니라 소였기 때문이다. 갈색곰은 황소의 저항을 무시했다. 네 다리를 벌려 버티면서 머리를 깊숙이 숙여 여차하면 돌진하여 적을 떠받으려는 황소였으나 곰은 앞가슴을 내밀며 덮쳐들었다. 앞뒤를 분간 못 하는 미친 곰 같았으며 검은색이 거의 없고 흰색뿐인 눈에도 광기狂氣가 어렸다.
(덤벼라! 덤벼! 돌격해서 받아버려!)
나무 위의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성원聲援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황소는 한 발 두 발 뒷걸음질쳤다. 야수野獸의 살기殺氣에 눌린 것 같았다. 소는 입에 거품을 물고 신음하는 듯한 경고 - 라기 보다는 비명悲鳴이 새어나왔다. 곰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황소에게 와락 덮쳐들었다. 그 순간 황소도 돌진했다. 황소가 비통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곰의 앞발의 일격을 받아 앞다리가 꼬부라지더니 벌렁 뒤집어졌다. 곰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소 위레 덮쳤다. 400Kg이 넘는 황소였으나 그 위에 올라탄 곰에 비해서 강아지처럼 작았다. 그 건 싸움이 아니었다. 도살屠殺이었다. 곰이 황소의 목줄을 물고 흔들자 목줄이 끊어져 피가 분수噴水처럼 쏟아졌다. 곰이 악귀惡鬼처럼 피를 빨아먹었다. 곰은 황소를 끌고 삼림속으로 들어갔다. 불과 3분 남짓이었다. 그 후 개척마을에서는 북해도청에 <곰의 피해를 막아달라>고 여러번 탄원歎願을 넣었으나 북해도에서 곰의 피해를 입은 지역이 그 곳 뿐만이 아니라 처리가 늦어졌고 며칠 전에 겨우 도착한 회신回信에는 <이제 겨울이니 곰사냥은 내년 봄에 하자>라는 내용이었다. 개척마을 사람들도 겨울이 되자 일단 안심했다. 곰은 뱀이나 개구리와 같이 굴속에서 동면을 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참사가 일어났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유례由來가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피해자는 다이다라는 개척자의 집이었고, 사건은 대낮에 일어났다. 다이다의 젊은 처와 아홉 살 난 아이가 곰에게 물려죽었다.
아이는 머리를 맞아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지고 여자는 없었다. 방은 피바다고 벽이 허물어졌다. 곰이 벽을 쳐서 무너뜨리고 침입을 했다. 아이를 때려눕히고 여자를 물고갔다. 마을사람들은 어쩔줄 몰랐다. 구시총이 두 자루 있었으나 그 따위 총으로 곰을 상대할 수 없었다. 이튿날, 마을사람들은 아랫마을 세 명의 총잡이수렵대와 같이 곰을 추적했다. 곰은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 곰이 먼저 사람을 발견했다. 약 500m 떨어진 뒷산에 있다가 사람들이 몰려오는 걸 발견하고 돌진했다. 산 위에서 밑으로 돌진하는 곰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당황한 수렵대가 총을 마구 발사했다. 대여섯 발이 발사되었으나 흩날리는 눈가루 때문에 한 발도 맞지 않은 것 같았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곰이 눈앞에 다가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총이나 칼, 도끼 등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는데 다행히 곰은 배가 불렀던지 쫓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개척마을에 모인 사람들이 곰이 나왔던 곳에 가봤다.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 굵은 뼈와 머리카락이 남아있었다. 아이들과 노인들은 산 아래 마을로 피신시켰다. 젊은이들이 여자의 뼈와 아이의 시체를 놓고 밤을 새우고 있을 때 곰이 나타났다. 담벼락이 무너지는 소리와 짓밟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석유통을 두들기며 고함을 쳤다. 덮어넣고 총을 쐈다. 요란스러운 소리에 곰이 돌아갔다.
(살았구나!)
책상과 장롱으로 방문을 막았다. 그 따위로 곰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부질없는 짓이라도 해야 했다. 곰은 다시 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 나타났다. 노인과 아이들이 피신한 곳에 나타났다. 산 아래며 멀리 큰 동네의 불빛이 보이는 곳이라 안심했는데 그 게 잘못이었다. 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빨리 북해도관청에서 포수를 파견하여 살인곰을 잡아야 한다고 말 하는 사이에 곰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방에 들어온 곰이 웃고있었다고 목격자는 말했다. 마치 밖에서 자기 험담險談을 엿들은 것처럼 웃는 몰골로 3 - 4초 동안 장승처럼 서있었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멍 하니 서로 보고만 있었는데 한 노인이 석유램프를 곰에게 던졌다. 곰이 램프를 앞발로 쳐내자 방안이 깜깜해졌는데, 노인이 다시 화로를 던졌다. 화로가 곰의 가슴에 맞아 숯불이 곰의 털을 태웠다. 그 건 곰에게 상처를 주지 못했으며 도리어 곰을 미치게 만들었다. 털과 살갗이 불에 데인 곰은 노호를 지르며 살육을 했다. 처참한 일이 벌어졌다. 아이를 업고 도망가는 부인을 잡아 목줄을 빼버렸다. 그 사이에 창문으로 도망가려고 했으나 곰은 창문 앞에 버티고 서서 차근차근 죽였다. 앞발로 치고, 입으로 물고, 발로 밟고 그리고 찢어죽였다. 열한 명이 죽고, 두 명이 중상이었으며 도망한 사람은 너댓 명뿐이었다. 밖으로 도망한 사람들은 <사람 살려라!>고 고함을 지르는 일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초상집 젊은이들도 방안에 발포를 할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방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소리가 들리지 않자 곰이 밖으로 나왔다. 곰은 그 소동騷動석에서도 바깥에 자기를 노리는 포수들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방문으로 나오지 않고 벽을 부수고 부엌으로 나왔다. 총잡이들의 등 뒤에서 나온 것이다. 총이 발사되었으나 한 발도 맞지 않았다. 곰이 도망간 뒤에 방으로 들어갔는데 방안은 피바다였다. 특히 만삭滿朔이 된 부인의 시체는 참혹慘酷했다.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 반 쯤 먹고 반은 버렸다. 곰은 시체 위에 이불을 덮어놓았다. 인정을 베풀었을까? 아니다! 다시 와서 먹으려는 습성習性이다. 이 참변이 곧 북해도청에 보고되었다. 당황한 북해도청에서 포수를 소집하여 파견했다. 나도 소집된 포수였다. 당시 북해도대학의 의뢰로 물개를 포획하러 갔다가 막 돌아온 참이었는데 불문곡직不問曲直 도청에 불려간 나는 평소에 잘 아는 경찰국장과 산림국장의 설명을 들었다.
‘큰일났는데, 곰에게 10여 명이 죽었다는 보고인데, 과장된 게 아닐까? 도대체 벌써 구멍에 들어가 있어야 할 곰이 마을을 습격했다는 보고가 믿어지지 않는 걸 ….’
‘아이즈씨의 의견은 어떻소?’
‘곰은 겨울에 동면冬眠을 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동면을 안 하거나 못 하는 곰도 있지요.’
내 해명에 산림국장의 얼굴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그럼, 사실이구만 ….’
보통 곰은 11월 중순 경이면 동면을 한다. 가을에 충분히 먹어 영양을 확보하면 동굴에 들어가 그 지방분脂肪分을 태우며 겨울을 지낸다. 그러나 충분히 영양을 확보하지 못 하면 동면을 하지 못 한다. 이를 집 없는 곰이라고 하는데 이 곰은 닥치는대로 먹어치운다. 특히 동물성이면 무엇이든 먹는 가장 무서운 야수野獸로 변한다. 나는 두 명의 포수와 함께 천염산마을로 달려갔다. 내가 마을에 도착한 것은 살인사건 이틀 후였으며 도착했을 때 살인곰은 이미 죽었다. 아랫마을의 청년단, 경찰, 소방대원 그리고 각지에서 모여든 포수들 등 600여 명이 잡았다. 잡았다기 보다 오히려 제발로 걸어들어와 죽었다. 지방질을 축적하려고 집단살인을 한 곰은 다시 마을에 와서 텅 빈 마을을 이 집 저 집 돌아다녔다. 사람이 없는 걸 보고 부엌에 들어가 청어조림을 먹어치우고 돼지나 닭을 마구 잡아먹었다. 개척자마을의 사람들은 피신했으나 개척자마을에는 무려 6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로 들끓는 마을에 또 곰이 나타났다. 10여 명을 죽였던 곰은 전혀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다. 일선에 배치했던 포수들은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난 걸 보고 사람인줄 착각했다.
‘누구야! 거기 오는 사람은?’
검문檢問에 대답없이 검은 그림자는 가까이 다가왔다.
‘곰이다!’
총잡이들이 당황했으나 다행히 곰을 잡아본 경험이 있었던 제대군인이 지휘를 했다.
‘더 가까이 오면 쏘시오!’
곰이 20여 미터 접근했을 때 제대군인이 발포명령을 내렸다. 10명의 포수가 일제히 발사했다. 곰이 털썩 쓰러졌다가 일어나 숲으로 도망갔다. 흘린 피로 보아 중상重傷 - 아마도 치명상致命傷이었다. 횃불을 들고 추적했다. 얼마 가지 않아 나무둥치에 기대고 서있는 곰을 발견했다.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제대군인이 곰의 심장에 발포했다. 곰은 불사조不死鳥(피닉스) 같이 다시 덤비다가 일제사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튿날 새벽에 도착한 나는 곰을 검시檢屍했다. 3m가 좀 넘는 황금색 털을 가진 불곰이었고 곰 중에서 가장 횡포橫暴한 놈이었다. 온 몸에 총탄이 박혀있었다. 일본 곰은 두 종류인데 흑곰과 불곰이다. 흑곰은 가슴에 반달형 하얀무늬가 있는 즈끼노와곰이며 일본본토와 구주에 서식하고 온순하다. 그러나 북해도의 불곰은 사람을 보면 덮어놓고 달려든다. 잡아먹겠다고 덤벼든다. 일본의 불곰은 미국의 회색곰과 같이 가장 흉악한 맹수다. 미국의 회색곰은 헌터들이 30m 이내 접근하지 않는다. 사자나 호랑이도 접근제한이 20m인데 곰이 30m라는데는 곰은 총을 한두 발 맞고도 끄떡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나 심장을 뚫지 못 하면 곰의 공격을 받아 죽는다. 집단사냥을 하는 무법자 늑대무리 조차 회색곰에는 먹이를 내준다. 이런 사례事例를 들려주고 곰이 나타나면 피하는 게 일단 상책上策이라고 경고했다.
62. 천염산의 불곰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재미로 죽이려고 했을까? 피에 굶주린 곰 보다더 더 무서운 맹수는 없다. 북해도의 불곰은 몸무게 400Kg, 발자국이 50Cm다. 아마튜어 헌터는 이 발자국만 보고도 사냥을 포기한다. 불곰은 동면 중인 동굴에서 새끼를 낳는다. 비탈진 남향 그리고 나무뿌리가 엉켜있어 동굴이 무너지거나 발견될 염려도 없다. 1월 말 2월 초에 새끼를 낳는다. 눈이 쌓이면 동굴입구에 숨구멍을 뚫고 눈이 녹는 3월까지 동굴속에서 새끼들과 지낸다. 새끼는 대개 두 마리다. 동면에서 나오면 개미다. 그리고 디저트로 연한 새싹을 먹는다. 그러나 곰이 가장 좋아하는 건 연어나 숭어다. 여름에 연어나 숭어가 알을 낳으려고 강을 거슬러올라오면 곰들은 강으로 몰려든다. 몇 년 전에 주루이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상류에서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강물이 바위에 부딛혀 나는 소리로 알았으나 너무 소란하여 낚시를 중지하고 발자국소리를 죽여 소리나는 데로 갔다. 불곰이었다. 무릎 정도 깊이의 강 한가운데서 불곰이 숭어알을 먹고있었다. 숭어는 강의 모래속에 알을 낳는데 불곰이 그 걸 발견하였다. 알을 먹던 불곰이 숭어를 잡아 내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숭어가 내 머리 위를 날아 떨어졌는데 기겁을 하고 돌아다보니 불곰새끼 두 마리가 바로 등 뒤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찬 모습이었다. 낚시대를 가지고 불곰과 대적할 수 없는 법, 내가 전속력으로 도망친 것은 결코 부끄러운 짓이 아니었다. 이튿날 총을 갖고 가봤다. 까마귀들이 새카맣게 몰렸다. 불곰이 먹고버린 숭어대가리와 꽁지가 흩어져서 까마귀의 먹이가 되었다. 그 해 가을 북해도에는 가뭄이 들어 농민들은 절량絶糧을 겪었고, 숲에는 과일도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과 짐승들이 다 흉년을 겪었다. 그래서 먹이가 부족한 맹수들이 마을에 내려와 가축피해가 늘어났다. 충루천 하류의 마을은 젖소를 키우는 마을이었는데 예년의 절반 밖에 안 되는 가을수확을 끝내고 휴식에 들어갔다. 마을토박이 구와노가 막 잠이 들려는데 소의 비명이 들렸다.
‘무슨 일이야?’
고함을 치면서 전지를 비췄다. 전지불에 그림자가 비췄다. 소 보다 훨씬 컸다.
(아! 곰이다.)
구와노는 전지를 곰에게 던지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곰이 앞발로 구와노를 쳤다. 구와노는 정신을 잃었다. 집안에 있던 가족들이 구와노가 나간지 5분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아 모두 램프를 들고 찾아나섰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구와노를 발견했다. 중상이었다. 배가 찢어져 창자가 삐어나오고 팔이 부러졌다. 구와노 옆에 젖소가 있었는데 양쪽 다리가 없고 내장도 사라졌다. 구와노는 가족들에 의해 4Km나 떨어진 병원으로 실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 놈은 내가 갔을 때 이미 소를 죽이고 내장을 꺼내 먹고 있었어. 소의 비명을 들은지 2분도 안 되었는데 소를 죽였단 말야. 곰은 나를 보자 한 대 때렸어. 그 후 일은 기억나지 않아. 그 놈의 곰을 잡아. 비용은 내가 대겠어.’
포수들이 동원되었다. 허나 모두 아마튜어였다. 토끼나 꿩을 쏘기는 해도 곰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런 포수들에게 집힐 곰이 아니다. 사람들이 검은 막대기를 들고 나타나면 막대기의 위력威力을 아는 곰은 하루 수십킬로나 도망을 친다. 사람이 쫓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다. 곰이 다시 나타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 포수들은 곰을 2 - 3일 추적하다가, 추적하는 체 하다가 돌아왔다.
‘그 놈의 곰이 추적을 눈치채고 멀리 도망을 쳐버려 쫓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마을에 나타나지 않을거야.’
마을 사람들은 곰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에 만족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던 곰이 이틀 후에 다시 나타났다. 목장의 우유를 배달하는 트럭운전수가 목장 앞길을 달리고 있는데 숲에서 불쑥 불곰이 나타나 트럭 앞을 가로막았다. 곰은 트럭을 습격하려고 나왔다가 속도와 덩치에 놀라 숲속으로 사라졌다. 소가 한 마리 쓰러져있었다. 배가 갈라지고 임신을 했는데 새끼를 먹으려다가 트럭이 오는 걸 보고 도망갔다. 목장은 120정도고 그 주위에 개척자들이 빙 둘러 살고있었다. 마을 한가운데 목장이 있는 셈이었는데 목장에 곰이 나왔다는 말에 개척자들이 벌벌 떨었다. 자기집 옆으로 곰이 지나갔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곰을 쫓아버렸다는 아마튜어포수들은 면목이 없어졌다. 그들은 다시 출동하기 전에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급히 현지로 가서 지휘를 맡았다. 곰은 소를 잡았으나 고기를 먹지 못 했다. 얼마나 화가 났을까? 죽은 소를 그대로 놔두라고 했다. 나와 포수 세 사람이 잠복하기로 했다. 석양이 광대한 북해도의 평야를 붉게 물들이며 지고있었다. 검은 색으로 변해가는 산봉우리와 황금색 하늘이 장엄莊嚴한 광경이었다. 날씨가 꽤 추웠으나 우리는 침묵하며 잠복하고 있었는데 목장쪽에서 사람들 소리가 나고 담뱃불이 반짝거렸다.
‘누구야? 담배를 끄지 못 해!’
마을 촌장과 유지들이었으며 그들은 우리를 격려하려고 새참을 가지고왔다.
‘곰의 코는 우리들 보다 몇 천 배나 더 예민叡敏합니다. 더구나 담배냄새는 가장 고약한 냄새로 몇 시간이나 남아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곰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해주는 것과 같다. 촌장은 미안핟가ㅗ 하며 돌아갔다. 밤새 기다렸으나 곰은 나타나지 않았다. 담배냄새 때문이었다. 동쪽 하늘이 희무끄레 밝아올 무렵 또 촌장이 나타났다. 뜨거운 음식을 갖고 여러 사람들이 왔다. 우리는 사냥을 단념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우리가 마을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었는데 곰이 나타났다는 급보가 왔다. 달려갔는데 소의 시체가 사라졌다. 곰은 밤 새 인근에 숨어있다가 우리가 내려가는 것을 보고 소를 물고간 것이다. 발자국을 따라갔더니 소가 나무 사이에 숨겨져있었다. 곰의 발자국에 피가 묻어있었다. 발자국을 추적하기로 하고 포수들에게는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위험한 추적이었다. 나무뿌리와 잡초가 우거져 1m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수 세끼구찌는 기어이 따라왔다. 아직 서른이 안 되었으나 사격대회에서 준우승을 할 정도였다. 구식舊式 무라다총으로 준우승을 했으니 대단한 실력이다. 추적은 매우 어려웠다. 아카시덤불을 해치고 나가야 했다. 사방을 살피면서 소리나지 않게 조심해서 걸어갔는데 세끼구찌는 어느 새 한 발 앞서 보이지 않았다. 곰의 발자국을 충실하게 따라가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덮어놓고 맹수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것은 능사能事가 아니다. 때로는 발자국을 무시하고 대략 눈어림으로 추적해서 목표물을 발견하는 것도 좋은 책략策略이다. 아카시숲은 분지盆地라 전망이 나빴고 덤불 때문에 전진이 어려웠다. 그래서 50여 미터 떨어진 언덕배기에 올라가 주위를 살피려고 했다. 높은 곳은 곰을 살기도 좋지만 반대로 곰에게 발각되기도 쉽다. 그러나 구식 무라다 단 방 총으로 곰을 쫓는 세끼구찌를 보호해야 했다. 총소리가 났다. 시커먼 연기와 화염火焰이 한꺼번에 나오는 무라다총소리였다. 총소리 직후 꽥꽥거리는 곰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실패했구나.)
소나무 밑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약 50m 전방에 서있는 곰과 눈이 마주쳤다. 거대한 불곰이 주저없이 덮쳤다. 대포알처럼 달려오는 발자국에 땅이 울렸다. 30m, 20m …. 곰은 털이 곤두서서 마치 악마같았다. 윈체스터 최신형 2연발이 15m 앞까지 달려드는 곰의 머리를 겨냥해서 발사했다. 술통만한 곰의 머리가 흔들리고 잠시 비틀거리더니 이내 중심을 잡고 달려왔다. 도망칠 여유는 없다. 제 2탄을 심장에 보냈다. 2탄을 발사하고는 뒤로돌아 뛰었다. 뛰면서 재장탄을 했다. 등 뒤에서 노여움과 고통에 미친 곰의 고함과 뜨거운 입김이 등에 느껴졌다. 되돌아서 다시 3탄을 발사했다. 거대한 대가리의 윗부분을 겨냥했다. 곰은 크게 헤엄치 듯 비틀거렸으나 다시 중심을 잡았다. 여유롭게 제 4탄을 심장에 겨누었다. 그러나 4탄을 발사하지 않았다. 곰의 입에서 선지피가 콸콸 쏟아져나왔고 눈은 초점焦點을 잃고있었다. 곰은 그래도 적을 죽이겠다고 양발을 허우적거리며 다가오다가 발밑에 쓰러졌다. 단말마斷末魔였다. 발밑에 쓰러진 곰이 어깨로 서너 번 숨을 쉬더니 더 이상 못 싸우겠다는 듯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옆으로 누워버렸다. 그 때 세끼구찌가 나타났다. 아직도 제 정신이 아닌 듯 얼굴이 창백하고 멍! 한 표정이었다.
‘곰은 완전히 죽었지요?’
‘물론이지.’
세끼구찌는 곰이 달아나는줄 알고 빠르게 추적을 했다. 1m 앞도 안 보이는 잡초지에서 퍽 위험한 짓이었다. 곰이 잡초속에 누워있었다. 처음에는 그 게 잡초더미인줄 알았다. 세끼구찌는 구멍으로 피신했다. 머리와 총구만 내밀고 나무뿌리가 뽑힌 구멍에 숨었다. 곰이 냄새를 맡고 일어났다. 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구멍으로 다가왔다.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무라다총은 단발총이었는데 겨냥도 하지 못 하고 쏘아버렸다. 세끼구찌는 그 총으로 30m 앞의 사과를 맞출 수 있는 명사수였으나 그 때는 7 - 8 m 앞의 집채만한 곰을 맞추지 못 했다. 세끼구찌는 죽음을 각오했다. 재장탄을 할 여유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곰이 우웍! 하며 고함을 지르더니 달려왔다. 세끼구찌는 머리를 감싸고 하느님을 불렀다. 그것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곰이 구멍을 타넘고 다른 곳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세끼구찌는 하느님께 감사했으나 곰은 몇 미터 앞에 있었던 나를 발견하고 내가 총을 쏜 걸로 알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총소리를 듣고 아마튜어포수들과 마을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죽은 곰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나를 보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곰은 500Kg이 넘고, 15세였으며 숫놈이었다. 황소도 일격에 때려눕히는 힘이 있었다. 내가 쏜 총탄이 머리에 두 발, 가슴에 한 발 모두 명중했는데도 곰은 되살아났다. 곰은 심장에 총탄을 맞아도 수십 미터를 달릴 수 있으며 자기를 쏜 포수와 같이 지옥地獄길을 동행한다. 세끼구찌는 이후 사냥을 포기했고 아마튜어포수들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곰과는 싸우지 않겠다고 서약誓約했다.
63. 구사일생九死一生
북해도에 있는 니시다케산은 높이 700m인데 아래로 니지베즈강이 흐른다. 40여 년 전에는 원시림이 울창鬱蒼했고 원시림을 개발하기 위해 30여 명의 나무꾼들이 일을 했다. 3월 초였지만 추웠다. 나무꾼들은 여기 저기 불을 피워놓고 가끔 몸을 녹이면서 톱질 도끼질을 했다. 톱질 도끼질소리를 빼면 원시림은 태고의 정적靜寂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 살려라!’
별안간 비명소리가 터졌다. 이어 등골이 오싹해지는 맹수의 노호怒號가 들렸다. 나무꾼들이 도끼를 들고 달려갔다. 거대한 불곰이 숲으로 도망했다. 다가기는 높이 30여 미터의 나무를 자르고있었다. 나무밑둥을 톱질하고 나무를 밀었다. 나무가 덜 잘려졌는지 뿌리채 뽑혔는데 뿌리 밑에서 불곰이 나왔다. 동면冬眠을 방해받은 불곰이 대노大怒했다. 다가기의 어깨를 물었다. 다가기는 곰의 무게 때문에 넘어져 데굴데굴 굴렀는데 그 게 다가기를 살렸다. 동면에서 깨어난 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 했고 더 이상 다가기를 추적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나무꾼들이 작업을 중단했다. 목숨을 걸고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초여름까지 벌목伐木을 마쳐야 하는 개발회사는 간부幹部회의를 연 결과 나를 찾아왔다. 곰 한 마리에 곰값과 같은 액수額數의 현상금懸賞金을 걸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제의에 화가났다. 내가 곰을 잡지 못 하면 어떻게 되나? 몇날 며칠 헛수고를 하고 회사측은 아무 손해도 없다. 다시, 조건을 바꿔 일당日當을 별도로 주고 잡은 곰도 내몫으로 했다. 현장에 가서 조사를 했다. 큰 곰이 나무뿌리 밑에서 동면을 하는 것은 믿기 어려웠으나 사실이다. 나는 그런 경험을 했고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뻔 했다. 높이 1500m의 경사가 가파른 우나베즈산에서 스키사냥을 했다. 꼭대기에서 단숨에 내려오면서 사냥을 했다. 눈 때문에 굶주린 여우, 토끼사냥을 했으나 목적이 스키지 사냥은 아니었다. 스키를 타고 내려오다 산비탈의 거대한 나무를 피했는데 뿌리부근에서 다갈색을 발견했다. 잡초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스쳤으나 휴게실에서 다시 생각하니 이상스러웠다.
(이상한데, 혹시 ….)
나는 다시 올라가 스키를 타고 내려오다가 나무에서 정지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아이디얼 12번 2연총의 토끼탄을 곰탄으로 바꾸고 안전장치도 풀었다. 수상한 건 다갈색털만이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살폈다.
(뭘까?)
물체의 정체가 들어나자 기겁을 했다. 그 건 곰의 발이었다. 쟁반만한 발이 두 개 나란히 나와있었다. 나는 스키를 벗어던졌다. 그러나 곰은 두 다리만 보였고 몸통이 보이지 않았다. 급소인 머리는 안 보이더라도 가슴은 보여야 할 거 아닌가? 반대편에서는 몸통이 보일 것 같아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곰은 위에서 밑으로 이동할 때는 엄청난 속도를 낸다. 엉덩이를 이용하여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므로 그 속도는 총알 보다 빠르다. 그래서 곰사냥에서 밑에서 위로 곰을 몰아올리는 것은 금기禁忌다. 그러나 그 때는 곰이 동면을 하고 있었으므로 위험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예상대로 위치를 바꾸었고 몸의 복부腹部가 보였다. 사격준비를 하려고 눈을 밟아다졌다. 그런데 그만 눈이 푹 꺼져내렸다. 그 바람에 몸이 눈속에 파묻혀 버둥거렸는데 하반신下半身이 모두 빠졌다. 그 북새통에 소리가 났다. 눈을 들어봤더니 곰이 덮쳐들고 있었다. 검은 곰과 흰 눈사태가 일어난 것 같았다. 배꼽까지 눈에 빠져 두 손과 머리만 내밀고 있었으나 다급했으므로 겨냥도 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의 반동反動으로 나는 머리까지 눈속에 묻혔는데 그 순간 머리 위를 지나가는 기관차소리를 들었다. 간신히 머리를 추스려 다시 발사를 하려고 했는데 발사가 되지 않았다. 2연발이니까 한 발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 게 없었다. 재장탄을 하려고 해도 토끼탄 밖에 없었고. 다행히 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 어디에도 곰이 없었다. 곰은 달려내려왔던 기세를 멈추지 못 하고 10여 미터 아래 절벽으로 떨어졌다. 총을 조사했더니 연발장치가 고장 나 한꺼번에 두 발이 다 나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게 내 목숨을 구했다. 한꺼번에 두 발을 머리에 맞은 곰은 운동신경이 마비되었으며 계속 달려 절벽에서 추락했다. 절벽 밑에는 물이 흐르고 물은 벌건 핏빛이었다. 그 건 우연한 경험이었는데 그런대로 소문이 나서 유명해졌고 현장에 도착한 나를 곰사냥의 명포수라고 나무꾼들이 환영했다. 커다란 솥을 걸어놓고 곰을 잡으면 삶아먹겠다고 벼르고있었다. 이튿날 새벽에 잠을 잔 바라크를 나섰더니 10여 명의 나무꾼들이 도끼, 칼과 몽둥이를 들고 곰사냥을 돕겠다고 설쳤다. 설사 도움은 안 되더라도 응원은 되지 않겠느냐고 했으나 오히려 방해가 된다. 곰사냥에 도끼, 칼과 몽둥이는 아무 소용이 없고, 여럿이 다니는 것은 곰에게 발각되어 습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 곰은 뛰어난 후각嗅覺으로 100m 내외의 냄새는 놓치지 않는다. 냄새를 맡은 곰은 덤벼들거나 도망간다. 덤벼들면 목숨이 위태롭고, 도망가버리면 며칠을 허비하며 추적해야 한다. 응원단을 거절하고 스키를 신고 혼자 출발했다. 가끔 목탄木炭재를 날려 바람의 방향을 확인하여 바람을 정면에서 받으며 추적했다. 곰사냥은 인내심忍耐心이 있어야 한다. 언제든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므로 승부勝負는 그 때 한다. 동면을 하다가 느닷없이 일어난 놈이니까 멀리 가지 않는다. 그러나 내 예상은 틀렸다. 새벽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30Km를 달렸으나 곰은 여전히 도주하고있었다. 먹지도 쉬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달렸다. 그 놈도 나처럼 주먹밥을 먹는 것일까? 멀리 사마르게누프리산이 보였다. 잔솔이 무성하여 곰이 좋아하는 환경이다. 잔솔밭 앞에서 멈췄다. 잔솔밭으로 들어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 멈춰 쉴 것인가? 잔솔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어둠속에서 곰과 대결할 수는 없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추적을 하루이틀 늦춘다는 것인데, 나는 하늘과 바람을 살핀 끝에 야영野營을 하기로 했다. 큰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얼어죽을 정도의 추위도 아니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몸을 좀 녹여놓고 눈집을 만들었다. 눈벽돌을 만들어 쌓아올려 한 사람이 누을만한 이글루를 만들었다. 곰에게 역습을 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총을 꼭 쥐고 잤으나 아무 일도 없이 새벽에 일어났다. 곰은 밤잠도 자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날 오후, 나는 솔밭을 지나갔는데 냄새가 났다. 사냥꾼의 코는 예민하다. 여우의 냄새다. 30m 쯤 떨어진 바위에 여우가 있었다. 아주 큰 놈이고 은색이었다. 껍질이 탐났다. 벗겨서 팔면 한 달 생활비가 되는 값 비싼 은색여우였다. 총을 들었으나 곧 내렸다. 곰을 놓칠 수 있었다. 곰은 산을 한바퀴 크게 돌아 다시 사마스케누프리산으로 되돌아왔다. 산 가운데는 소나무가 밀생한 단지림短枝林이어서 스키를 신고 들어갈 수 없었다. 곰의 발자국이 그 숲으로 들어가 없어져버렸다. 단지림을 한바퀴 돌았다. 나간 발자국은 없었다. 작전을 세웠다. 털옷을 벗어 뒤집어 입었다. 속이 흰색이었으므로 곰의 눈에 띌 염려가 적었다. 바람의 방향을 정하고 바람을 맞받으며 눈 위로 기어갔다. 곰의 눈은 사람의 눈 보다 못 하지만 코와 귀가 무섭다. 30m 쯤 기어갔는데 50m 전방에 고목이 한 그루 넘어져있었는데 그 뒤가 수상했다. 포수에게는 직감이라는 게 있다. 사람에게서 사라져버린 6감感이다. 30m 지점에서 정지했다.
(나와! 덤벼!)
불곰이 나를 발견하고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살폈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겨냥을 했다. 곰도 동시에 일어났다. 웍! 위협을 했다. 탕! 사람의 위협소리였다. 곰은 첫탄을 맞은 충격으로 멈칫! 했으나 그대로 돌진했다. 아가리를 딱 벌린 대가리가 술통처럼 크게 보였다. 이번에는 대가리를 겨냥하여 제 2탄을 발사했다. 2탄은 곰이 움지이는 바람에 대가리에 맞지 않고 아가리로 들어갔다.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곰은 이미 10m 이내로 다가왔고 재장탄할 여유는 없다. 그 때 펀뜻! 아이누의 추장 고오다로의 충고가 떠올랐다. 고오다로는 곰사냥의 명수였으며 그에게 많은 경험을 배웠다. 언젠가 그가 <곰은 분노했을 때나 상대를 위협하려고 할 때는 목청껏 고함을 지르는 버릇이 있는데 그와 동시에 상대편이 고함을 지르면 주춤하는 버릇도 있다>고 말하면서 <곰사냥 때 위험해지면 소리를 지르라>고 말했다. 온몸의 힘을 다해
‘야아!’
하고 고함을 질렀다. 정말, 곰이 놀라 멈칫했다. 그리고 두 다리로 일어서더니 그 소리에지지 않겠다는 듯 윅! 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불과 10초 정도의 시간이었으나 그 사이에 장탄을 하고 제 3탄을 쏘았다. 그리고 옆으로 뛰었다. 곰은 내 뒤에 있는 고목枯木을 잡았다. 노여움과 고통 때문에 이성을 잃은 곰은 마치 그 고목이 자기를 쏜 적인 양 무서운 힘으로 흔들면서 물었다. 나는 계속 뒷걸음질치면서 제 4탄을 발사했다. 곰은 고목을 껴안은채 움직이지 않았다. 숫놈이었고 9년생이며 체중은 400Kg 정도. 털이 황금색이었으며 백계白系 러시아인에게 보통 곰의 두 배 값을 받았다. 그 건 차치하고, 만약 끄 때 연발총을 갖고 갔으면 어쨌을까? 6연발이라면 총탄 여섯 발을 연달아 쏠 수 있으니까 사냥에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연발총은 연결장치에 고장이 잤다. 그래서 유능한 포수 - 특히 맹수포수는 연발총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실례로, 예비역 대좌大佐 기다니는 6연발의 고장으로 큰 부상을 입었다. 기다니는 네델란드제製 6연발을 갖고 곰사냥을 했다. 몰이꾼을 시켜 곰을 몰고 자기는 목을 잡아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곰을 기다니쪽으로 몰아넣었는데 곰이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능숙한 사냥꾼이라면 위치를 옮겨 사격을 해야 했는데 기다니는 무모하게 위에서 덮쳐드는 곰을 아래서 사격했다. 자기가 가진 6연발을 믿었다. 기다니가 첫탄을 발사하고 2탄을 쏘려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고장이었다. 위에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덮쳐드는 곰에게 겁을 먹었다. 그 상황에서는 총을 던져버리고 피신을 해야 한다. 그는 고장난 총을 만지며 몇 초를 허비했다. 그 때 나는 산봉우리에 있다가 곰이 기다니쪽으로 가는 걸 보고 곰의 뒤를 따라갔는데 기다니가 위급한 상황에 있다고 판단하자 발사했다. 50m가 넘었으나 라이플이었으므로 유효有效사거리였다. 곰과 사람이 너무 가까워 좀 위험했으나 총탄은 곰의 등에 맞아 곰이 나뒹굴었다. 그런데 바보같은 기다니는 고장난 총을 쥐고 멍! 하니 서있었다. 곰은 치명상致命傷을 입었는데도 일어나 기다니에게 덤볐다. 기다니를 안고 어깨를 물었다. 그는 <사람 살려라!>라고 외치며 곰을 뿌리치고 도망갔다. 기다니가 곰에게서 떨어지자 다시 제 2탄을 발사했다. 하여튼 곰은 죽고 기다니는 병원치료를 받았는데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했다.
‘그냥 두었으면 그 놈은 내손에 죽었을텐데 ….’
그러고보니 그가 전쟁에서 세웠다는 무공武功도 허풍虛風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64. 곰과 개
불곰은 발자국을 보고 암수를 식별할 수 있다. 새끼를 데리고다니는 것은 물론 암컷이지만, 새끼가 없더라도 첫발에 오른발을 내밀면 암컷이고 숫컷은 왼발을 먼저 나온다. 곰은 말이나 개처럼 수평으로 질주疾走하지 않고 독특하게 앞발을 들어올리고 뒷발로 서서 도약을 한 뒤에 네 다리로 땅을 짚고 다시 뒷발로만 일어나 도약을 한다. 깡충깡충 뛰어가는데 그 걸 멀리서 보면 도르르 굴러가는 것 같다.
북해도에는 11월부터 12월 사이에 눈이 내리고 눈 위에 곰의 발자국이 찍히면 포수들은 기뻐한다. 짐승 중에서 가장 추적이 쉬운 동물이 곰이다. 몸이 크고 무겁기 때문에 그 쟁반만한 발자국이 도장을 찍은 듯 눈 위에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험이 적은 풋내기 포수들은 발자국을 발견하면 곰을 잡은 걸로 아는데 그건 쉽지 않다. 아무리 발자국을 따라가도 곰을 만나지 못 한다. 곰이 예민한 코로 사람냄새를 맡고 멀리 도망가버리기 때문이다. 허사다. 때로는 역습을 당하고 얼어죽기도 한다. 그래서 숙련된 사냥꾼은 개를 이용한다. 특히 곰사냥 전문專門 아이누개가 최고다. 어느 해, 나는 아이누추장으로부터 시로라는 아이누개를 입수入手했다. 최신형엽총과 교환했다. 시로는 하연 털 뿐만 아니라 매우 영리하고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시로를 쓸모없는 개라 비웃었다. 시로는 동체胴體도 크지 않고 힘도 강하지 않았다. 다른 개들이 덤벼들면 대항하지 않고 내 등 뒤로 슬그머니 숨었다. 그러나 시로를 곰사냥에 데려가면 그 진가眞價가 나타난다. 시로는 본능적으로 곰을 싫어하고 곰의 냄새는 어김없이 맡았으며 정확하게 추적했다. 한 번은 시로가 곰을 추적하다가 돌연 되돌아온 일이있었다. 웬일인가? 조사를 했더니 도망가던 곰이 되돌아왔던 것이다. 시로는 오래된 냄새를 포기하고 새로운 냄새를 추적했던 것이다. 또 시로의 추적으로 한 달에 곰을 일곱 마리나 잡은 적도 있었다. 어느 해 겨울, 곰이 동면하는 굴을 발견했다는 나무꾼의 정보를 듣고 서축산의 중턱으로 출동했다. 나무꾼의 안내로 큰 바위 밑 동굴까지 갔으나 데리고 간 시로가 시쿤등했다. 나무꾼은 <개가 겁쟁이라 무서워서 동굴에 접근을 못 한다.>고 했으나 내 의견은 달랐다. 그래도 나무꾼이 하도 귀찮게해서 시로에게 동굴에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시로가 귀찮다는 듯 성큼성큼 동굴로 들어가 서너 번 짖었다. 동굴에서 너구리가 뛰어나가 도망쳤다. 웃고 돌아오다가 벌채한 나무둥치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그런데 시로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코를 땅에 대고 나무뿌리 주의를 뱅뱅 돌더니 갑자기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눈에 새파란 불이 일고 긴장했다. 그리고 앞발로 나무뿌리를 파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는 굴속에 토끼라도 있는 것인가 하고 웃으면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로는 눈을 다 헤치고도 땅을 계속 파며 꼬리를 세우고 미친 듯 날뛰었다.
(이 건 좀 이상한데 ….)
나는 시로가 파놓은 구멍을 들여다봤다. 1m 이상이나 됐다. 겨울에 언 땅을 시로가 그렇게 쉽게 1m 이상이나 팔 수 있을까? 좀 더 파헤치니까 굴이 더 넓어졌다. 그리고 속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시로가 굴속에 머리를 넣고 맹렬하게 짖더니 갑자기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구멍 속에서 웍! 하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안전장치를 풀었으나 곰은 소리만 질러놓고 나오지 않았다. 시로와 곰은 서로 짖기시합을 벌인 양 서로 맞대고 짖었다. 구망을 들여다 보았다. 굴은 안에서 구부러져서 총을 쏠 수도 없었다. 일단 굵은 통나무를 굴 입구에 걸쳤다. 곰이 갑자기 뛰어나오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시로가 일부러 곰을 자극했다. 곰이 화가나서 땅이 들썩거릴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시로가 헐떡거리며 모닥불 옆에 누웠다. 포기한 것일까? 아니다. 한 참을 쉬고 일어나더니 구멍 주위를 팠다. 부지런히 앞발로 흙을 파서 뒷발로 해처버리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와서 보라는 뜻이다. 새로 판 구멍을 보고 나는 긴장했다. 시로가 새로 판 구멍은 곰이 누어있는 바로 위여서 곰의 몸 전체가 들어났다. 구멍에 총구를 밀어넣고 발사했다. 땅이 덜썩거리고 노호와 비명이 섞인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곰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긴 장대를 넣어 쿡쿡 찔렀다. 한참 찔렀는데 보드라운 물체에 닿는가 했더니 강한 힘으로 장대가 끌려들어가버렸다.
(이 놈 봐라!)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데 곰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불에 탄 숯덩이를 굴속에 던졌다. 굴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또 노호가 터져나왔다. 그러더니 곰의 대가리가 쑥! 나왔다. 순간적으로 발사를 했는데 동시에 대가리가 들어가버렸다. 맞았을까 안 맞았을까? 구멍속에서는 여전히 곰의 노호소리가 났다. 나도 초조해졌다. 모닥불에 탄 벌건 숯을 모조리 쓸어 굴속에 던졌다. 그리고 구멍에 총을 들이밀고 마구 난사亂射를 했다. 뜨거워서 곰이 나오다가 맞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구멍속에서는 곰의 비명이 계속되었고 땅이 울렁거렸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마을로 돌아왔는데 시로는 한사코 구멍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산림마을에서 자고 새벽 일찍 현장에 갔는데 시로가 꼬리를 쳤다. 나는 그 제스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있었다. 승리의 기쁨표시였다. 구멍을 들여다보니 곰의 다리 두 개가 축 늘어져있었다. 곰사냥에는 반드시 개를 데리고 가야 한다. 그러나 꿩이나 토끼사냥을 하는 포인터나 세퍼트는 곰 소리만 들어도 오금을 펴지 못 한다. 아이누개는 조상 때부터 곰사냥을 했으므로 능수능란能手能爛하다. 나는 노총각신세인 그를 위해 같은 혈통血統의 아이누개 암컷을 구입했다. 시로와 같이 하얀털의 개로 에스라고 했다. 어느 해 3월, 나는 두 사냥친구와 함께 일본과 러시아국경 북해도 동북방으로나갔다. 효즈산 일대는 소나무밀림이다. 도끼자국을 모르는 처녀림이었다. 시로와 에스는 밀림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달렸다. 두 시간을 갔으나 개들은 여전히 달리고있었다. 사냥개인 시로는 긴장하였으나 아직 신혼기분인 에스는 시로에게 장난을 걸었다. 시로가 멈추더니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한군데를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곰의 발자국이었다. 시로는 내가 발자국을 확인하자 앞장서서 추적을 시작했다. 오후 늦게 야영을 했다. 나뭇가지를 60Cm 쯤 쌓아 지붕을 만들고 그 안에서 개들과 같이 잤다. 사람과 개는 꼭 껴안고 잤는데 천고千古의 원시림에서 개들과 그렇게 같이 지낸다는 것은 개와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 동물인가를 증명했다. 새벽 일찍 추적을 시작하여 정오께 바위산을 향하고 있었다. 화강암花崗巖지대인데 곰들이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사냥하기 좋지 않은 지형이었고 때마침 안개가 흐르고 있어서 위험했다. 지형과 날씨의 사정을 말하고 사냥을 연기하자고 했는데, 인쇄업을 하는 요시다는 최근에 입수한 브로닝 5연총을 쏘아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으므로 당장 5연총을 시험하자고 했다. 그래서 3방면으로 산을 올라갔으며 사냥에 처음 나온 에스가 실수를 할까봐 내가 데리고갔다. 사냥은 곤경에 빠졌다. 안개가 짙어 10m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위와 돌뿐인 산이라 스키가 걸렸다. 그런데 갑자기 에스가 히스테리에 걸린 것처럼 짖었다. 동시에 웍! 하는 소리가 났다.
‘곰이다! 조심해!’
곰은 개 짖는 소리에 놀라 요시다에게 덮쳤다. 불과 7 - 8m 거리였으므로 당황한 요시다는 5연발을 무턱대고 발사했다. 그래서 총탄이 곰에게 맞지도 않았고 오히려 총의 반동으로 요시다가 넘어지고 총도 떨어뜨렸다. 마침 두 손으로 바위를 잡고 있었으므로 요시다를 위해 총을 발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요시다가 곰에게 맞아 머리가 터져 죽는 걸 예감했다. 그런데 요시다는 죽지 않았다. 에스가 그를 살렸다. 에스는 요시다가 위급한 걸 보고 곰의 등 뒤에서 덤벼 물었다. 곰이 대노하여 등을 돌려 에스를 잡으려고 했는데 그 때 시로가 덤벼 곰의 뒷발을 물었다. 그 사이에 내가 곰의 갈비뼈 사이에 한 발 그리고 곰의 양 눈 사이에 연사를 했다. 한 발은 심장을 뚫었고 또 한 발은 머리에 명중했다. 곰이 웍! 하며 굴러떨어졌다. 위기를 모면했는데 에스가 보이지 않았다. 곰은 계곡까지 굴러갔으며 그 옆에 에스가 곰 주위를 뱅뱅돌고 있었는데 뒷발 하나를 들고 깡총거렸다. 뒷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에스는 요시다를 구하려고 자기 발을 희생했다. 가슴이 뭉클했으며 요시다는 와락 에스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참, 시로는? 산 넘어서 시로의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곰이 세 마리였지?)
시로는 우리가 계곡으로 내려온 걸 보고 곰새끼를 쫓았다. 요시다가 에스를 배낭에 넣어 매고 곰새끼를 잡으려고 시로에게 갔다. 시로는 곰새끼들이 도망가지 못 하게 잡아놓고 있었다. 요시다가 새끼라고 얕보고 쉽게 잡으려다가 손등을 할켰다. 생후 2개월도 안 된 곰새끼를 잡으려고 장정 셋이 10여 분이나 애를 먹었다. 옷을 뒤집어씌워 가까스로 생포해서 륙색에 넣었다. 또 한 마리는? 어미곰이 죽어있는 계곡에서 시로가 짖고있었다. 우리는 계곡으로 내려갔는데 서로 얼굴울 돌렸다. 피투성이가 된 어미곰 옆에서 어미를 지키려고 했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면 웍웍거리며 위협을 했다. 우리가 산에서 내려가자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셋 모두가 륙색에 동물을 매고있었는데 동물들은 서로 적대적감정으로 시끄럽게 짖었다. 다리가 부러진 에스와 사로잡힌 곰새끼 두 마리가 륙색에서 대가리만 내놓고 왈왈거렸다. 곰새끼는 두 달 동안 사육했다. 염소젖과 물고기 주먹밥을 잘 먹었다. 밤에는 내 이불속에 들어와 장난을 치면서 이불을 찢었고 옆방 사람들의 안면安眠방해를 했으므로 외양간으로 축출逐出했는데 거기에서도 장난이 심해 밤새 소들이 울었다. 우리 옆집에 늙은 고양이가 살았는데 그 놈이 종종 곰들에게 덤볐다. 무섭게 위협을 해서 곰의 먹이를 가로챘다. 그런데 그만 하루는 참변이 일어났다. 고양이가 늘 하던 버릇으로 곰들을 위협하고 먹이를 빼앗으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곰들이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고양이가 곰에게 덤벼 곰의 코를 할켰는데 대노한 곰이 워어억! 고함을 지르며 고양이의 대가리를 쳤다. 이미 1m나 자란 놈이었으므로 그 일격에 고양이가 데구르르 굴렀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곰이 쓰러진 고양이에게 달려들어 입에 앞발을 넣고 입을 찢어버렸다. 화가나서 곰을 떼리려고 했으나 곰이 흥분한 걸 보고 참았다. 마침 동물원에서 곰을 구한다고 해서 주어버렸다.
65. 네무로평야平野
50년 전의 네무로평야는 미개未開의 비경秘境이었다. 오오츠크해海에 인접한 네무로에는 소수少數의 아이누족族 외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일대가 년중 바다안개에 잠겨 20m 앞이 보이지 않았으며 햇빛도 뿌옇고 아이누의 낮빛도 창백했다. 아이누는 평야의 중니이었으며 무진장無盡藏의 자연보고寶庫를 소유했다. 네무로평야와 바다를 연결하는 대소大小 하천에는 숭어, 연어가 우굴거렸고, 백조들이 날아다녔으며 산에는 곰과 여우들이 득시글거렸다. 아이누는 연어를 잡아 훈제燻製를 해서 저장하고 백조는 그물을 던져잡았다. 곰과 여우의 털을 벗겨 일본인들과 물물교환을 했다. 당시 일본본토에서 네무로에 들어가는 길이 세 갈래 있었다. 인근隣近 구시로까지는 철도를 이용하여 구시로강을 따라 걸어서 들어가는 길이 첫 번째고, 두번째는 구시로항港에서 배를 타고 네무로항까지 가서 걸어들어가는 것인데 내가 택한 세 번째는 철도로 아미바시리역驛까지 가 걸어서 사리를 거쳐 네무로로 들어가는 길이다. 산길을 한도없이 걸어가야 했지만 등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길을 택했다. 산길에 접어들자 개척자들을 만났다. 불경기에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노인들을 이끌고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발바닥에 생긴 물집을 따면서 걸어가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아이를 업고 짐을 이고 진 그들을 보고 혼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한두 사람을 돌봐주다가 40여 명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나는 총을 갖고 있었고 산길에 밝으므로 그들을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냥감이 많았다. 토끼, 들돼지와 백조들이 사람 무서운줄 모르고 도망가지 않았으므로 총으로 쏘아 밥 반찬으로 제공했다. 어느 날에는 계곡에서 노는 백조떼를 발견하여 계곡 위에서 난사를 해서 아홉 마리를 잡았다. 백조의 하얀 날개에 붉은 피가 번지는 건 마음이 아팠으나 40여 명의 대식구를 먹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노랗게 구은 백조다리를 맛있게 뜯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소나마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개척자들은 네무로 입구에서부터 한둘씩 남아 정착을 했으며 사리산을 넘어 원시림에 들어갈 때는 한 가족도 없었다. 찬하의 험산 사리산에는 인가가 딱 한 채 있었다. 어두워져서 불빛을 보고 찾아갔는데 통나무와 가랑잎으로 덮은 바라크에 노파老婆가 살았다. 노파는 내 신분을 꼼꼼히 따지고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이로리(일본식 난방 취사도구)가 걸리고 국이 끓고 있었다.
‘이런 산중에서 혼자 살면 무섭지 않아요? 곰이 습격하지 않나요?’
‘곰? 그런 건 무섭지 않아. 사람을 덮치는 일은 별로 없어. 가끔 집 주위를 돌아다니지만 이쪽에서 점잖게 대우하면 그대로 돌아가. 무서운 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야. 가끔 난폭한 사람들이 약탈을 해.’
산사람들인데 경찰을 피해 쫓겨다니는 범죄자들이다. 밤중에 웍웍! 하는 곰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저 건 곰 아닙니까?’
‘그렇지. 허나 염려마오. 새끼를 불러들이는 어미곰의 소리야.’
노파의 말대로 곰의 발자국이 많았으며 바위 뒤에서 나를 보고 도망치는 놈도 있었다. 산길을 40Km 쯤 걸어 무지시라는 개척마을에 당도當到했다. 제일 큰 집의 문을 두드렸는데 오히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불이 꺼지고 인기척이 없었다. 고한을 질러도 아무도 대답이 없엇다. 초가을이지만 노숙露宿할 수 없었다. 한참 헤매고 있는데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니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사냥꾼이요. 하룻밤 지낼 곳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냥꾼? 총은 뭐야?’
‘12번 2연連의 아이데날이요.’
정확한 대답이 남자의 경계심을 약간 풀었다.
‘총을 보여줄 수 있소?’
총을 어둠속의 사내에게 넘겨주었다.
‘난 이 집의 주인인데 우리집에서 쉬다가시오.’
집에는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으며 부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은데 대해 사과했다.
‘5일 전에 부근에서 살인사건이 났습니다. 여행자를 죽이고 금품을 강탈했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주변을 포위했으므로 범인은 멀리 가지 못 하고 이 부근을 떠돌거라는 소문이 있어 오해한 것입니다.’
토끼털을 입고 무라다총을 갖고있었으며 산새 몇 마리가 허리에 매달려있었다.
‘며칠 전에 말이 두 마리 곰에 물려죽었어요. 곰이 또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갔다오는 길입니다.’
‘곰은 잡았습니까?’
‘아니요.’
그 때 곰의 부르짖음소리가 들렸다. 웍웍하는 소리가 온 산을 진동시켰으며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저 놈이요. 저 놈이 범인인데 도무지 잡을 수가 없소. 워낙 큰 놈이라 포수들이 겁을 먹어 추적을 하지 않아요.’
내일 곰몰이에 참가하겠다고 제의했다. 오가다는 아직 앳된 포수라고 짐작하는 나에게 곰잡이경험을 물었다. 곰을 두 마리 잡았다는 대답을 듣고 찬성했다. 그런데 그 게 만용蠻勇이었다. 내가 잡은 곰은 일본본토에 사는 온순한 흑곰이었고 네무로의 곰은 사납기로 이름난 불곰이었다. 이튿날 우리는 사리산쪽으로 뻗어나가는 산줄기에서 곰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세 살 정도의 어린 곰이었기에 무작정 추격을 했는데 곰은 잡힐 듯 말 듯 보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집으로 되돌아오기로 하고 돌아섰는데 너무 급하게 추적했으므로 길을 잃어버렸다.
(어쩌지?)
망설였는데 불빛이 보였다. 모닥불에 세 명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골격이 크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아이누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수상하다는 듯 노려보다가 서툰 일본말로 물었다.
‘누구야?’
신분을 밝히고 사정을 말했다. 두목이 웃었다.
‘당신들이 곰을 잡겠다고? 위험해! 곰은 위험해.’
그이 말에는 이상한 위엄威嚴이 서려있었다. 2m가 넘는 40대 중반의 두목은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는 자기를 다찌바라고 소개했는데 그 말을 듣자 오가다의 태도가 달라졌다. 다찌바는 아이누의 추장이고 곰잡이명수로 알려진 사내였으며 그는 곰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어저께 여기에 도착했다. 추장은 우리에게 구은 연어를 주고 술도 몇 잔 권했다. 이튿날 다찌바와 작별을 하고 우리는 다시 곰의 발자국을 쫓았다. 그런데 오후에 곰의 발자국이 두 개로 늘었다. 새 발자국은 두 배나 컸다.
‘이 놈이야. 이 놈이 말을 죽인 범인이고 작은 놈은 그 부하일거야.’
상의 끝에 큰 놈의 뒤를 쫓기로 했다. 무모한 짓이었다. 성미가 급한 오가다와 만용蠻勇에 찬 내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우리는 사리천 상류와 주루이천과 분수령分水嶺을 따라 사리산정으로 추적을 계속했으나 발자국이 갑자기 주루이천계곡으로 내려가버렸다. 급경사急傾斜라 기진맥진氣盡脈盡이 되었다. 겨우 계곡을 내려가니 곰은 물을 마시고 다시 산정으로 올라갔다.
‘이런 죽일 놈 같으니….’
우리는 악담惡談을 하면서 다시 절벽을 기어올랐다. 겨우 능선稜線 바로 밑에 다달아 한숨 돌리려는데 위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곰이 포효했다. 양팔로 바위모서리를 잡고 올라가는 터라 총을 꺼낼 엄두도 못 내고 용기도 없었다. 능선 바위틈에서 머리를 내밀고 핏발선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있는 곰은 머리칼이 곤두서고 살기가 가득차 있었으며 딱! 벌린 아가리에는 우리들의 머리가 두 개는 들어갈 것 같았다.
‘도망가자!’
오가다가 고함을 지르면서 언덕 밑으로 구르듯 도망갔다. 나도 창피 같은 건 잊고 뒤를 따라 도망쳤다. 우리는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간신히 주루이천계곡에 와서 멈췄다.
(살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되돌아섰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또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곡에서 산 능선을 따라 되돌아가던 우리는 또 머리 위서 소름끼치는 고리를 들었다. 곰이 능선을 따라 우리를 추격한 것이다. 오가다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고 나도 제 정신이 아니었다.
‘총을 쏘아볼까?’
‘죽고싶어!’
오가다가 머리를 흔들며 대꾸했다. 잡으러갔던 곰에게 쫓겨 포수들이 총도 쏘지 못 할 정도로 거대한 곰이었다.
‘그럼, 달아나자!’
우리는 또 필사적으로 달아났으나 곰도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왔다. 이젠 곰이 사람을 사냥했다. 허둥지둥 달아나던 우리에게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정지하시오. 조용히 해요.’
서투른 일본말이었으나 분명히 사람의 말이었다. 어젯밤에 만났던 아이누였다. 구식 무라다총을 쥐고 바위 뒤에 숨어있었다. 우리는 창피도 잊고 물었다.
‘거기서 뭘 하는 거요?’
‘곰을 기다리고 있소.’
‘그만 둬요. 그 놈은 괴물이니까.’
아이누가 하얀 이를 들어내고 웃었다.
‘우리 아이누는 곰이 크면 클수록 환영해요. 조그만 놈은 달아나기만 해서 잡기 힘들지만 큰 놈은 덤벼들기 때문에 한결 잡기 쉽지.’
‘당신네 두목은 어디 갔소?’
‘저기, 저기서 곰을 몰아오고 있소.’
손가락질 한 곳은 능선이었으며 곰이 우리를 따라오던 길이었다. 그렇다면 곰이 우리를 따라온 게 아니라 아이누가 곰을 몰았다는 게 아닌가? 아이누가 듬직한 구원자처럼 보였다. 오가다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우리가 도울까?‘
‘필요 없어요. 방해가 될테니 여기서 구경이나 하세요.’
아이누가 표범처럼 날쎄게 능선을 기어올랐다. 아이누의 젊은이는 능선을 타고 올라가 나무 뒤에 숨어서 곰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구未久에 곰의 노호가 들렸다.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도 들렸다. 휘파람소리가 나는 곳에 추장 다찌바가 능선에 우뚝 서서 곰을 기다리고 잇엇다. 세 사람의 아이누는 한 사람은 곰을 추격하고, 하나는 곰의 앞길을 막고, 하나는 곰이 오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었다. 곰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나타났다. 어마어마하게 큰 놈이었으며 마치 거대한 바위 같았다. 4m 가까운 놈이 가끔 뒤를 돌아다보며 아가리를 벌려 시위하듯 고함을 지르며 능선을 따라 걸어오고있었다. 추장이 대담하게 앞으로 나서서 곰의 진로를 막아섰다. 곰이 웍! 하고 소리를 치며 돌진했다. 추장은 곰이 달려드는데도 꼼짝도 않고, 20m, 15m, 10m …. 곰이 7 - 8m로 다가왔을 때 추장이 도리혀 곰쪽으로 돌진하며 고함을 쳤다.
‘아이웃!’
곰의 노호를 덮어버리는 고함이었고 돌진하던 곰이 벌떡 일어섰다. 추장이 일어선 곰의 심장을 겨누어 발사했다. 곰이 비슬거렸으나 다시 일어나 덤벼들었다. 추장은 단발총을 들고 재빠르게 내리막 언덕으로 피신했다. 곰이 추장을 뒤에서 굴러가 듯 따라왔으나 추장은 한 발 앞서 젊은 아이누가 숨어있는 나무 뒤로 피했다. 젊은 아이누는 소나무 뒤에 있었기 때문에 곰은 소나무 곁을 스쳐 옆으로 미끄러졌으며 4 - 5m 아래서 급정지를 하여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 멈칫거렸던 동작이 젊은 아이누에게 좋은 표적이 되었다. 젊은 아이누가 침착한 자세로 발사했다. 곰은 소나무를 거머쥐고 몸을 가누고 있엇다. 재장탄을 끝낸 추장이 총을 들어올렸으나 발사하지 않았다. 곰은 치명상을 입었다. 소나무를 움켜쥐고 있었던 앞발에 힘이 없어지고 그 거구巨軀가 돌돌구르면서 굴러떨어졌다. 추장과 아이누 젊은이들이 승리의 개가凱歌를 불렀다. 일본본토에서 어린이 소꿉장난 같던 사냥을 했던 나는 비로소 사냥다운 사냥을 구경했다.
‘당신은 이런 곰을 몇 마리나 잡았소?’
‘100여 마리 정도지. 새끼는 빼고 ….’
옛날에는 도끼와 창으로 곰을 잡았으며 그 때 입은 상처가 등과 배에 남아있었다.
66. 산천어山川魚
주루이천川의 하구河口에서 24Km 정도 상류로 올라가면 긴산이라는 곳이있다. 나는 어느 말 곰을 쫓아가다가 우연히 그곳을 발견하고 곰 쫓는 걸 포기하고 몇 시간동안 거기에 머물렀다. 이 세상에서 선경仙境이란 곳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다. 하천에는 주먹만한 것으로부터 도토리만한 것까지 하얀 옥석玉石 같은 돌이 널려있었다. 하천은 폭 200m 정도였고 어찌나 맑은 물인지 흐르는 소리가 없다면 물이 있는 것도 분산 못 할 지경이었다. 물이 투명하여 무릎 정도로 보였으나 깊은 곳은 키가 넘었으며 수많은 물고기들이 마치 어항속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산천어들이었다. 나는 곰을 쫓다가 수백년 된 소나무숲에서 강을 발견했는데 이내 총을 던져버리고 물에 뛰어들었다. 산천어들과 시간 가는줄 모르고 놀다가 그만 날이 어두워져 당황했다.
(여기서 자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잠자리 준비를 하려는데 강 아래쪽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왔다. 내려가보니 통나무로 엮은 바라크가 한 채 있었다. 겨우 비나 바람을 피할 정도였으나 인기척이 있었다. 의외로 여섯 살 정도의 아이와 젊은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깜짝 놀라 경계를 했으나 사정을 얘기하자 마음을 놓았다. 여자는 남편과 매년 이맘때 여기 와서 산천어를 잡는다고 했다. 그 가족은 비밀의 장소에서 산천어를 잡아 생활비를 버는 것 같았고 남편은 백 리 쯤 떨어진 도시에 산천어를 팔러나갔다고 했다. 집안에는 말린 산천어가 수백 마리 주렁주렁 매달려있었고 또 수백 마리를 불에 굽고있었다. 방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워놓고 꼬리를 가는 철사로 묶은 산천어를 2단 3단으로 둥그렇게 모닥불 주위에 널려놓고 말렸다. 불로 굽는 게 아니라 불로 말리는 것이다. 나는 산천어를 얻어먹었다. 쫄깃쫄깃하고 향기로웠다.
‘우리는 이 걸 열두 마리씩 엮어 중간상인들에게 헐값으로 넘겨주는데 그 상인들은 동경이나 대판의 귀족, 고급요리점에 은어銀魚 보다 비싸게 판답니다.’
구래도 이 가족은 비밀의 부업副業으로 파산破産한 빚을 거의 다 갚았다고 여자가 쓸쓸히 웃었다. 그들은 본래 대판에서 꽤 크게 장사를 했으나 물건을 싣고오던 배가 침몰하여 파산하고 빚만 남았다. 그래서 낚시광狂이었던 남편이 취미를 직업으로 바꾸어 이 사업을 시작했다. 1년 중 3 - 4개월 인적人跡이 없는 산중에서 사는 쓸쓸한 생활이었으나 몇 년 계속하니 별 고통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오히려 그 일가가 부러웠다. 내가 그만 가려고 했을 때 남편이 돌아와 ㅈ비에서 나가는 남자를 보고 크게 놀랐으나 자기 처의 설명을 듣고 안심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지요?’
‘우연입니다. 곰을 쫓다가 이곳을 발견했습니다. 산천어가 무척 많은가봐요.’
그는 시무룩했다. 마치 황금항아리를 숨겨놓았다가 들킨 구두쇠영감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낚시얘기를 하니까 당장에 태도가 달라졌다. 낚시광이 분명했다. 우리는 밤낚시얘기와 사냥얘기로 날을 세우다싶이 하고 거기에서 잤다. 이튿날 나는 그와 함께 낚시를 했다. 대나무바구니를 목에 걸고, 지렁이깡통을 옆구리에 찬고 낚시대를 들고 무릎 정도의 물에 들어가 산천어를 낚았다. 물속이 환히 보이기 때문에 고기가 물면 끌어올렸고, 손의 감각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낚았다. 산천어는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미끼에 덤벼들었다. 산천어는 공자孔子의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실행하는 학동學童들처럼 낚시를 던지면 무조건 큰 놈이 먼저 물었다. 새치기를 하면 고기가 쪼아 쫓아냈다. 큰 놈 다음에는 다음 큰 놈이 질서를 지켜 순서대로 물었는데 확실히 서당書堂의 훈장訓長 보다 더 학습이 잘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 사내는 지렁이 한 마리로 열 마리 이상 고기를 낚았는데 미끼를 빼앗기지 않고 고기만 낚았다. 지렁이가 잡히지 않으면 신경질을 부리며 산천어의 눈알을 빼서 미끼로 썼다. 사내는 한 시간 동안 100여 마리를 잡고 상류로 이동했다. 큰 놈을 다 잡고 나머지 고기가 작은 고기만 남아서 상류로 갔다. 산천어는 상류로 갈수록 더 크고 많았다. 한참 사내가 낚시를 할 때는 마치 은색줄이 바구니와 낚시대로 연결된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잡아도 산천어씨가 마르지 않은 게 이상합니다.’
‘아니지요. 산천어는 이동을 하니까 여기 고기씨가 마르면 다른 곳에서 이동을 해 옵니다. 여기는 산천어가 살기 매우 적합한 환경이라 여기 살던 고기가 없어지면 다른 데 살던 고기들이 좋아라고 밀고들어오지요.’
떠돌이 산천어들이 밀려와 살다가 다 잡히면 또 다른 산천어들이 밀려들어오므로 언제나 산천어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 후 곰사냥에 지치면 맑은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며 낚시를 하고 틈틈이 사냥도 하며 1주일 동안 여가餘暇를 즐길 수 있었다. 산천어는 30Cm 이상을 자라지 않고, 묘妙하게도 송어松魚와 교배交配를 한다. 수천 수만 마리의 송어가 강을 따라 올라오는데 산천어의 영역 안에 들어오면 대기하고 있었던 산천어들이 덮친다. 몸집이 큰 송어에 밀려 강을 올라가면서 산천어는 기회를 엿본다. 겁劫奪탈을 하려는 것이다. 송어가 고향집을 찾아 모래를 파고 엎드려 산란産卵을 하면 산천어가 잽싸게 들어가 송어알 위에 제 정자를 뿌린다. 송어알에 산천어의 정자를 교배하면 산천어가 나온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도 알려져 있다. 산란을 마친 산천어는 이내 죽는다. 또 하나 산란기 전후의 송어들이 폭포를 뛰어오르는 광경은 기막힌 연출이다. 붉은 배를 뒤집으며 폭포를 향해 치닫는 모습은 무지개를 연상시킨다. 폭포를 오르다 지친 송어들은 손으로도 잡을 수 있다. 자연은 송어들이 폭포를 오를 수 있게 비를 내린다. 폭포수의 양이 많아지면 송어들은 폭포를 오르는데 한 번 뛰어 올라 물줄기에 기대 쉬고 다시 뛰어 또 잠깐 쉬면서 폭포를 오른다.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폭포를 넘는다. 그러나 몸이 작고 힘이 강한 산천어는 송어보다 더 쉽게 폭포를 넘어갈 수 있다. 폭포 밑 연못에서는 고기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고기를 잡아도 운반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이누의 방법으로 연기를 피워 말렸다. 송어알을 뽑아 말렸는데 술안주로 일품逸品이다. 알을 뽑아 잠시 소금물에 담궜다가 알이 터지지 않도록 껍질에 기름을 발라 말리면 납짝해진다. 그걸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술안주로 하는데 나에게 그걸 ㄷ나골로 사간 상인은 부자가 되었다. 상인을 말린알을 도시의 고급요리집에 팔았는데 부르는 게 값이었다. 얼마나 벌었는지 상인은 5년만에 회사를 차렸으며 나에게는 최고급 엽총을 선물했다. 상인은 엽총을 선물한 다음부터는 자기 사람을 데리고 왔다. 조수에게 송어를 잡게할 작정이었다. 안내도 없이 산에 들어갔는데 이틀만에 소식이 끊겼다. 나흘만에 상인은 찾았으나 조수는 찾지 못 했다. 상인은 다리가 부러져 반죽음 상태였다. 상인과 조수는 숭어를 찾아다니다가 역시 숭어를 찾는 곰을 만나 달아났는데 상인은 언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상인은 내 등에 업혀 마을에 내려와 치료를 받고 살아났으나 조수는 영영 행방불명되었다. 곰이 나타났다는 현장에 가봤는데 곰과 다툰 흔적만 있었다. 실종된지 5일이 넘었고 비가 한 차례 왔으므로 발자국도 사라졌다. 그 후 상인은 거래를 끊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67. 학술탐험
북해도 네무로지방 지쇼반도半島는 40년 전만 해도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비경秘境으로 알려져있었다. 바위와 돌 그리고 급류急流가 넘치는 그 곳은 사람들이 감히 접근을 못 했다. 산의 높이는 1700m 정도였으나 병풍屛風같은 암벽으로 둘러져 전문등산가들도 기피忌避했다. 1947년 가을에 세 사람의 학자들이 예고없이 도꾜에서 네무로에 들이닥쳤다. 나가즈라는 유명한 지질地質학자와 그의 조수 두 명이었으며 그들은 산악지대에서 광석鑛石을 채집하고 지질을 연구한다고 했다. 놀란 네무로의 관리가 도꾜에 조회照會한 결과 나가즈박사는 국보적國寶的 대학자이며 그를 잘 보호하고 도와주라는 명령이 시달示達되었다. 그래서 나가즈박사의 안내인으로 내가 선정되었는데 나는 완강頑剛하게 거부했다. 우선 그 산에는 올라갈 수가 없다. 로프를 타고 올라갈 등산코스가 있으나 노老박사에게 로프를 타라고 할 수도 없고 로프를 태울 수도 없다. 두 번째로는 로프등산을 한다고 해도 휴대품携帶品을 가져갈 수가 없다. 나 혼자라면 총 한 자루와 낚시대, 담요와 소금 약간이면 된다. 산에 사는 나는 현지조달로 식사를 해결하고 이슬을 맞고 잘 수도 있는데 연약軟弱한 학자들이 어떻게 그 걸 견디겠는가? 그들이 가지고 갈 연구기구들과 천막, 침구들을 어떻게 운반하라는 말인가? 세 번째는 위험성이다. 그 곳은 가끔 화산火山이 폭발을 하고 소나기가 내리면 온 산이 물벼락이 일어난다. 불곰도 우굴거리고. 관리들도 내 의견을 경청하고 안내 거절을 수용했다.
‘하는 수 없소. 미안한 일이지만 나가즈박사님에게는 돌아가도록 권유하겠습니다. 그런 유명한 학자님의 신변身邊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니까.’
집으로 돌아와 막 저녁을 먹으려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현관에 나가니 노신사와 중년 그리고 젊은이가 있었다.
‘들어가도 좋겠습니가? 나는 도꾜에서 온 나가즈라는 훈장訓長입니다.’
크게 당황하고 일행을 안으로 모셨다. 특별비행기로 도꾜에서 날아오고 관리들이 쩔쩔매는 대학다님이 판자집 같은 곳을 찾아오다니 …. 환갑이 넘었다고 들었지만 쉰이 될까말까 한 얼굴이었으며 건강하게 보였다. 박사는 내 밥상을 보고 눈이 동그레졌다.
‘이 건 송어알을 말린 거 아니요?’
‘녜, 그렇습니다만 ….’
‘이거 참, 내가 운수가 좋구만. 다나까군, 갖고온 술을 이리 내놔! 우선 한 잔 해야지.’
어린애처럼 순진하고 재미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내 상상처럼 수염을 달고 안경이 번쩍거리는 신경질적인 학자가 아니었다. 박사는 찬 정종을 달게 마시고 눈을 지그시 감고 송어알을 입안에서 녹였다.
‘맛있어, 송어알은 정말 일품이야. 이 송어는 직접 잡은거요?’
‘그럼요. 그까짓건 얼마든지 있습니다. 팔뚝만한 게 산중 폭포 밑에서 펄떡거리지요.’
아차! 싶었는데 이미 늦었다.
‘그런 곳에 날 좀 데리고가주어. 나도 낚시를 좋아하네.’
노박사는 술을 들면서 차근차근 설득했다.
‘나는 그저 가볍게 산 구경을 하자는 거야. 연구기구도 천막도 필요없어. 이 수첩 한 권과 확대경擴大鏡 한 개면 돼. 아무데서나 자고 무어든 먹을거야.’
노박사의 얘기는 설득력이 있었고, 조수인 다나까박사 또한 열심히 사정을 했다. 이튿날 우리 네 명은 산으로 출발했다. 박사는 네무로지방 일대가 그려진 지도를 갖고있었으나 거의 백지였다. 박사들과 의논하여 가장 쉬운 진입로를 선택했다. 계곡의 물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므로 따라 올라가다보면 산 위에 닿을 것이고 평소에 그 계곡에서 낚시질을 했으므로 지형도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거은 단 한 가지, 비가 내려 홍수가 지면 몰살당할 위험이 있었다. 계곡의 양쪽이 병풍과 같은 절벽이므로 오를 수 없으며 물을 피할 데가 없다. 다행히 날씨는 좋앗으나 변덕스러운 가을날씨는 믿을 게 못 된다.
‘그렇다면, 비가 오면 우리가 살아남을 방법은 있나?’
다나까박사가 참견參見했다.
‘계곡에도 피난처는 있습니다. 계곡이 넓어진 곳에 피난처가 있는데 홍수가 덮치기 전에 우리가 당도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좋소. 그런 피난처를 미리 알아두었다가 비가 내리면 그리로 달려가기로 합시다.’
나가즈박사는 원기왕성元氣旺盛했다. 우리에게 뒤질세라 우리 뒤에 꼭 붙어 자갈길을 걸었다. 그리고 가끔 우리를 멈추게 하고 자그마한 망치로 암벽을 두들겨보고 그 파편破片을 채집하기도 했다. 돌이 많으니 금은金銀이 잇을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따위 금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후 늦게 절벽에서 동굴을 발견했다. 지상地上 3m 정도로 벼락에 뚫린 것 같았다. 야영에 안성맞춤이었다. 계단을 만들어 박사님을 모셨다. 다나까박사와 학생이 모닥불을 피웠고, 나는 30분만에 30여 마리의 싱싱한 산천어를 잡아왔다. 산천어 대가리를 잘라버리고 모닥불에 구워 박사님을 대접했다. 나가즈박시가 물었다.
‘이 사람아! 이 고기는 만주滿洲전쟁에 갔다왔나? 대가리가 없는 이유가 뭐야? 산천어는 대가리가 맛있단 말야.’
나가즈박사는 대가리가 있는 산천어를 맛있게 먹었다. 수통水桶에 넣어간 양주를 몇 모금 마시면서 산천어 열서너 마리를 먹었다. 학술조사 보다는 야영분위기가 더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이튿날, 우리는 더 상류로 올라갔는데 예상했던 일이 터졌다. 돌풍突風이 불어닥치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좁은 계곡이 짙은 안개에 싸여 앞이 보이지 않더니 내가 <후퇴합시다!>라고 외치는 것과 동시에 우박雨雹같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얼핏 돌아서 하류로 내달렸다. 양쪽의 병풍절벽으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덮어놓고 하류로 달아나는 길 뿐이었다. 허둥지둥 달아나는 우리의 머리 위에서 천둥이 울렸고 번개가 번쩍번쩍했다. 번개가 터질 때는 계곡이 은백색으로 밝아졌으나 번개가 사라지면 계곡은 암흑처럼 어두웠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세차게 내렸다. 갑자기 물이 불어났다. 물이 발목까지 올랐다. 달아나는 속도가 느려지고 다나까박사는 넘어지기도 했다.
‘침착해야 합니다! 물가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십시오. 아직은 여유가 있으니 어제 야영했던 곳까지만 가면 됩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걸었다. 그러나 수량이 점점 늘어나 이제 무릎이 잠겼다. 발밑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틀거렸다. 더구나 위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려왔다. 돌들이 굴러떨어지는 소리였다. 급경사와 급류急流이기 때문에 한아름되는 바위들이 구르기 시작했다.
‘물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물살을 이용하여 헤엄치듯 내려가십시오. 그게 빠릅니다.’
가슴까지 찬 물속에 들어가면 떠내려오는 물살로 몸이 저절로 물살에 밀려 떠내려갔다. 그 방법이 훨씬 빨랐다. 나는 맨 뒤에 따라가면서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세우며 독려督勵했다. 이제 계곡은 완전히 탁류濁流에 잠기고 박사님들은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당황했다.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어깨에 매고다니던 굵은 줄을 풀어 일행이 꼭 쥐도록 하고 내가 선두先頭에 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다행히 나는 번개불 속에서 어제 야영했던 동굴을 찾아냈다. 얼핏 동굴 위에 뻗은 소나무가지에 줄을 던져 걸고 동굴로 기어올랐다. 높이 3m 쯤 되었으나 일행을 하나하나 모두 끌어올렸다. 모두 물에 젖어 벌벌 떨었다. 동굴 안에까지는 물이 들어오지 않았고 어제 피웠던 모닥불에 불을 붙이려고 했으나 성냥이 젖어 불을 피울 수 없었다. 그 때 나가즈박사가 호주머니 속에서 광석鑛石을 끄집어냈다.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박사는 주머니의 돌을 버리지 않았다. 박사가 가진 돌 중에는 아주 단단한 돌이 있어 그 돌을 때려 불꽃을 내서 간신히 불을 붙였다. 원시인들처럼 동굴에서 돌을 때려 불을 일으켜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았다. 모닥불이 훨훨 타고 몸이 좀 따뜻해지니까 우리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이게 구사일생이라는 거지?’
나가즈박사가 깔깔거렸으며 우리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아직 사태는 위험했다. 비가 계속 쏟아지고 계곡의 물은 점점 더 불어났다. 일행은 모두 지쳤으며 모닥불에 옷이 마르니까 노곤해졌다. 나는 박사님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젊은 대학생과 나는 불침번不寢番을 섰다. 잠시 후 비가 좀 뜸해졌으나 가랑비는 계속 내렸으며 동굴 바로 밑을 흐르는 물살은 더 거세지는 것 같았다. 제발 밤새 비가 그쳐야 하는데 새벽 3시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3시 반이 되자 비가 그쳤다. 마음이 놓여 방심해서 깜빡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나는 사람들의 외침에 잠이 깼다. 그리고 기겁을 했다. 날이 환하게 밝았는데 우리가 피신한 동굴입구에까지 물이 넘실거렸다. 비가 한 시간만 더 왔으면 동굴이 물에 잠길뻔했다. 두 박사와 대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의논을 하는 것 같았다. 밤새 연기에 그을려 눈만 내놓고 얼굴이 깜둥이였다.
‘이 보게, 자네 말을 듣지 않고 억지를 썼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지?’
‘별 수 없습니다. 이제 비가 그쳤으니까 여기서 물이 빠지는 걸 기다려야 합니다.’
‘이 많은 물이 언제 빠질까? 그 때까지 우린 뭘 먹고 … ?’
‘염려마세요. 계곡의 물은 불어나는 것도 빠르지만 빠지는 건 더 빠릅니다. 내일이면 여기서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잡수실 것은 제가 마련해보겠습니다.’
나가즈박사는 내 말에 안심했다.
‘그렇다면 우선 세수라도 할까? 이 거 세숫물이 코앞에 있어 편리하군!’
니는 동굴속에 기어다니던 지네를 잡아 미끼로 낚시줄을 던졌다. 물이 만히 불었는데 설마 했으나 곧 입질이 왔다. 상반신이 끌려갈 정도의 강한 입질이었다. 하마터면 물에 끌려들어갈뻔한 나는 몸을 뒤로 버티면서 힘껏 낚시줄을 잡아당겼다.
‘암, 저것 봐. 연어다!’
나가즈박사가 외쳤다. 내가 힘차게 당기는 바람에 물 위로 튀어나온 연어는 1m 가까운 큰 놈이었다. 연어의 산란기産卵期가 이미 지났는데 이상한 일이다. 하여튼 나는 그 거물급연어와 씨름을 했다. 줄을 당겼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약 10분 싱갱이 끝에 연어가 기진맥진하여 끌려왔다.
‘아침밥이 저절로 운반되었어.’
나가즈박사가 껄껄거리며 연어요리를 맡았다. 연어가 모닥불에 구수하게 익을 무렵 30Cm가 넘는 산천어가 걸렸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급요리로 아침을 해결했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우리가 식사를 끝낼 무렵 완전히 개었고 황금빛 햇살이 계곡을 찬란하게 비췄다. 동굴입구까지 차올랐던 물이 시시각각時時刻刻 줄어들었고 미쳐 물을 따라내려가지 못한 가재들이 기어다녔다. 20Cm나 되는 놈들이었기에 그걸 잡아 점심을 때웠다. 저녁밥도 제절로 날아왔다. 백조가 날아왔다. 백조는 동굴에 사람이 숨어있는 걸 모르고 가제사냥에 여념이 없었는데 산탄총으로 두 마리를 쏘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동굴생활에 만족스러운 여가餘暇를 즐기고 있을 때 마을에서는 큰 소동騷動이 벌어졌다. 나가즈박사 일행이 조난遭難을 당한 걸로 판단하고 긴급구조대를 편성하여 구조에 나섰으나 불어난 물로 구조대가 조난을 당했다. 우리는 마을에서 그런 소동이 벌어진 것도 모르고 물이 빠지는 걸 보고 이튿날 다시 상류로 올라갔다. 나가즈박사는 목숨이 위험한 일을 겪고도 오히려 모험을 즐기는 것 같았다. 동굴에서 원시인처럼 생활했던 걸 좋아하고 내가 잡은 물고기구이를 극구極口 찬양讚揚했다. 대학연구실에 갇혀 따분하고 지루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생활을 아이처럼 좋아하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박사는 즐기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돌을 줍거나 바위를 때리면서 전진했다. 박사는 계곡 양쪽절벽에서 금, 은, 동, 아연 등의 광맥鑛脈을 발견했으며 계곡 전체가 광산鑛山지대라고 했다. 또 부근에 분화산噴火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온천溫泉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은 옳았다. 계곡 상류에서 바위틈으로 증기蒸氣가 나오는 걸 발견했다. 온천이 있을 거라면서 박사가 산 위로 가보자고 했다. 20m의 암벽岩壁을 기어올라가는 건 모험이었으나 로프를 매고 절벽을 기어올랐다. 나가즈박사는 광산을 드나든 경험으로 절벽타기에도 익숙했으나 오히려 젊은 다나까박사가 뒤에 쳐졌다. 맨처음 정상에 오른 나가즈박사가 탄성歎聲을 질렀다. 해발海拔 1500m 정도였는데 정말 웅장雄壯했다. 정상은 난장이 소나무가 드문드문 있고 산 전체가 하얀 바위였으며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과 계곡이 펼쳐졌다. 박사의 에상대로 온천이 잇었다. 40도 정도의 온천이 흐르고있었다. 유황硫黃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리는 유황온천에서 목욕을 했다. 태고太古의 온천목욕탕을 이용한 첫 인류였을 것이다. 우리가 목욕을 즐기고 있을 때 커다란ㅁ 여우가 나타나 우리의 알몸을 구경했다. 사람을 보고도 겁을 내지 않았으며 10여 미터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았다. 값이 좋은 은색여우였기에 욕심이 났다. 발사를 하려고 장탄을 했는데 도망가버렸다. 얼핏 쫓아갔더니 소나무 위에서 까마귀가 날았다. 까마귀가 있다는 것은 그 아래 짐승의 시체가 있다는 걸 암시暗示한다. 여우와 새끼들이 있었다. 발사를 해서 어미를 잡았는데 내가 잡은 건 여우만이 아니라 여우가 먹고있었던 토끼도 얻었다. 토끼는 저녁거리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겪으며 나가즈박사를 무사히 안내했는데 이후 박사가 가끔 찾아왔다. 총과 낚시대를 들고.
68. 폭설暴雪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북해도 네무로지방에 폭설이 내렸다. 나는 그 때 곰을 잡으려고 산속에 있었는데 본국本國에서 친척인 예비역 소좌少佐(소령少領)이 와서 곰사냥에 데려가달라고 해서 집을 나섰다. 기시소좌와 나는 마을사람들에게 곰이 동면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곰의 동면동굴을 찾아갔다. 커다란 고목 밑에서 동면을 하던 곰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빠져나가버렸다.
(이상하다! 어찌된 일일까?)
곰은 한 번 동면을 하면 이동하지 않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상황의 불안감에 돌아서려고 했으니 기시소자의 성화聲華에 졌다. 곰의 발자국은 눈 위에 선명하게 찍혀있었으므로, 제깐 놈이 도망가면 얼마나 가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추적을 하다가 밤이 되자 내가 사냥을 위해 지어놓은 바라크에서 잤다. 이튿날도 바람 한 점 없었다. 다소 어두웠으나 바람이 없었으므로 다시 추적을 했는데 그게 큰 오산誤算이었다. 이틀간의 고요함은 다음에 불어닥칠 폭설暴雪의 전조前兆였다.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싸락눈이 내렸는데 별거 아니라고 추적을 계속했는데 함박눈으로 변했다. 그래서 다시 중지하자고 했는데 기시소좌가 그깟 눈이 별거냐면서 추적을 강행했다. 이래서 우리가 입씨름을 했는데 그 사이에 바람도 불기 시작하더니 곧 푹풍으로 변했다. 바람이 눈을 불러일으켜 대지와 하늘이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제야 되돌아섰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바람 때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고, 눈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호흡 조차 힘들었다. 나는 기시소좌의 손을 붙들고 역풍逆風을 받으며 한 발 한 발 옮겼으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역전歷戰의 용사기질을 발휘한 기시소좌는 기를 쓰며 따라왔다. 어젯밤 잤던 바라크까지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곧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눈 때문에 바라크가 보이지 않았고 설사 발견한다고 해도 강한 눈바람에 피난처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마을쪽으로 향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눈은 이미 1m나 쌓여 무릎이 빠졌고 시야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며 몸이 얼음처럼 차가와져갔다. 내 손에 잡힌 기시소좌의 힘이 빠져가는 걸 느꼈다. 그는 자꾸 쓰러지려고 했고 나무에 걸려 넘어지면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정신 차리시오! 힘을 내야 돼! 여기서 쓰러지면 죽어!’
그러나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가? 경험으로 마을이라고 짐작되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 때는 이미 내 정신도 마비痲痺되어갔다. 잠이 오기 시작했다. 위험신호다. 이를 악물고 머리를 흔들면서 잠을 쫓았다. 몽유병자夢遊病者처럼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는데 손목을 쥐고 끌고가는 기시소좌가 천근千斤같이 무거웠다.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 눈 앞 아주 먼 전방에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마을이다! 마을이 보인다!)
나는 미친 듯 고함을 치며 잡은 손목을 당겼으나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기시소좌의 손목을 쥐고있는 걸로 생각했으나 기시소좌는 이미 오래 전에 탈락脫落했다. 얼마전 내 손을 뿌리치는 강한 충격을 느꼈는데 그 때 탈락한 것 같았다.
‘기시소좌! 기시! 기시!’
나는 절규絶叫했으나 눈보라소리에 묻혀버렸다. 왔던 길을 몇 십 미터 되돌아갔으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눈보라 어둠속에서 무위無爲였다. 나 자신도 피로가 겹쳐 잠이 덮쳐들었다.
(일단 마을에 가서 구조대를 보내자.)
마지막 기력을 쏟아 마을로 갔다. 걸어간 게 아니라 기어서 마을까지 갔다. 마을에서도 야단법석野壇法席이었다. 눈이 처마까지 쌓였고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버려 구조를 하고있었다. 사냥나간 사람의 안부를 염려할 게재가 아니었다. 따뜻한 난로 옆에 누어 중얼거렸다.
‘기시소좌, 기시가 행방불명이야. 마을 앞 산 200m 지점. 빨리빨리!’
마을사람들이 즉시 구조대를 편성했다. 구조대가 마을 앞산으로 향했으나 100m도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눈보라 때문에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비슬거리며 산으로 걸어갔다. 마을사람들 몇이 뒤를 따랐다.
‘기시소좌! 기시소좌!’
바람과 눈과 어둠을 헤치며 고함을 쳤다. 한참 걸어가다가 전방에 움직이는 걸 봤다. 기시가 살아있다고 판단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검은 그림자가 10여 미터 앞에 있었다.
‘기시소좌! 구조대가 왔소. 힘을 내서 이리 오시오!’
고함을 치면서 다가갔는데 검은 그림자가 오히려 한두 발 물러섰다.
‘나요 나! 기시소좌.’
검은 그림자는 나를 피하려고 하지 않고 다가왔다. 그 때 등 뒤에서 구조대원이 나를 껴안았다.
‘저 건 사람이 아니고 곰입니다.’
‘곰?’
정말 곰이었다. 곰은 우리를 노려보더니 웍! 하고 고함을 치며 덤벼들었다. 마침 그 때 강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곰도 사람도 눈을 가렸다. 구조대원들이 나를 뒤로 끌고 후퇴했다. 곰은 쫓아오지 않았다. 그 곰은 우리거 쫓던 곰이었다. 나무뿌리에 굴을 파고 동면을 했는데 선천적인 본능으로 폭설이 내릴 것을 알고 피신처를 찾아다니다가 마을로 내려갔다. 제 6감인데 인간은 잃어버렸지만 동물에게는 있다. 곰의 기습을 피하고도 약 2시간 여 기시소좌를 찾아다녔으나 헛탕을 치고 다시 실신하여 구조대원의 등에 업혀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튿날 아침이었다. 폭풍은 여전했다. 눈이 지붕을 덮었으며 눈의 압력을 못 이겨 벽에 금이갔다. 마을사람들은 집과 집 사이에 굴을 파 길을 만들었다. 아흔집 남짓한 마을이었는데 여섯 집이 무너졌다. 폭설에 사람들은 무력했으며 어두운 표정이었다.
‘기시소좌는?’
‘두 번 수색대를 보냈으나 찾지 못 했어요. 이젠 수색대를 보내지도 못 합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꼼짝도 못 합니다.’
다시 수색대를 보내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을사람들이 죽음 일보一步 전 상황이었다. 부녀자들은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드렸다. 눈보라는 그 이튿날 아침에 그쳤다. 눈이 그쳤으나 밖으로 나가지 못 했다. 눈이 4m나 쌓였다.
(기시소좌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비장悲壯한 결심을 하고 일어나 지붕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스키를 타고 산으로 갔다. 스키를 타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내가 조난遭難당했던 곳으로 갔다. 산정으로 올라가 빙빙 돌면서 내려왔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 했다. 그런데 커다란 고목 뒤에 시커먼 물체를 발견했다.
‘곰이다!’
기겁을 하고 도망치려고 하다가 이상하게 느껴 뒤돌아봤다. 곰은 죽었다. 곰은 나무에 기대선체 뻣뻣하게 죽어있었다. 곰을 버려두고 기시소좌를 찾았으나 실패했다. 마을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마을이 고립되었는데 식량이 문제였다. 폭설로 고립되었는데 식량보급로가 끊겼고 남아있는 식량이 거의 없었다.
‘식량은 얼마나 있소?’
‘오늘 저녁거리 정도요.’
‘큰 곰 한 마리면 도움이 되겠소?’
‘그야, 곰 한 마리는 2 - 3일 분 식량이 됩니다. 허나, 이런 눈속에서 어떻게 …?’
곰을 잡을 수 있냐는 말이었다.
‘좋소, 세 사람만 나를 따라오시오. 눈짚신을 신고.’
눈짚신은 눈고장에서 사용하는, 나무가지로 30Cm 크기의 동그란 나무테를 만들고 칡줄기로 얽어서 눈에 발이 빠지지 않게 눈 위를 걸어다닐 때 신는 커다란 신발이었다. 마을사람들과 협력하여 곰의 시체를 끌고왔다. 인근 학교강당에 마을사람들을 모여놓고 곰요리파티를 열었다. 곰사냥꾼만 먹을 수 있는 천하진미天下珍味, 곰의 순대요리다. 불을 피워 칼을 새빨갛게 불에 달군 다음 그 칼로 곰의 배를 갈랐다. 곰이 꽁꽁 얼었으므로 그냥 칼로는 곰의 배를 가를 수 없다. 배를 갈라 조심스럽게 곰의 쓸개를 빼냈다. 웅담이다. 산삼山蔘, 녹용鹿茸 보다 더 값나가는 동양의 3대영약靈藥이다. 곰 전체 값 보다 더 나간다. 쓸개를 빼내고 곰의 내장內臟을 들어냈다. 그리고 심장心臟에 어려있는 선지피와 곰의 허벅지살을 잘게 썰어 내장속에 넣었다. 기다란 내장을 굵은 나뭇가지에 둘둘 말아 모닥불에 빙빙 돌려가며 구웠다. 물 한 방울 사용하지 않은 즉석요리였다. 곰은 동면중이었으므로 내장은 비어있고 노란 기름기만 조르르 흘렀으며 아주 깨끗했다. 불 위에서 순대는 노릿노릿 익어가고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몇 잔의 소주를 마시며 먹는 곰의 순대는 천하별미다. 마을사람들은 이런 맛있는 고기를 처음 먹는다고 즐거워했다. 마을사람들은 그 후 3일 동안 감자와 곰고기를 먹고 버텼으며 사흘 후에는 눈이 녹아 길이 터졌으므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기쁨을 함께 하지 못 하고 영원히 잠자는 사람이 있었다. 기시소좌였다. 그는 곰이 발견된 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무를 하러갔던 사람이 눈 위에서 총구를 발견하여 나에게 알려주었다. 기시소좌는 군인답게 총을 꼭 쥐고 숨졌다. 10분만 참았으면 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는데 10분을 견디지 못 했다. 전쟁에는 용감했으나 폭설에 약한 군인이었다.
69. 아이누족族
북해도에 사는 나는 그런 폭설을 수없이 겪었다. 폭설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내가 서른 쯤이었을 때 아이누의 추잘 고다로 일행 4명과 곰사냥을 했다. 12월 초였으며 눈이 쌓여있었다. 아이누는 그 때 곰사냥을 한다. 눈에 동면을 준비하는 곰의 발자국을 추적하여 곰을 잡는다. 여우껍질을 거래하려고 아이누마을을 방문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이누의 곰잡이 출정出征날이었다. 마을에 있는 곰제단祭壇에서 곰사냥대의 환송식이 벌어졌다. 자기들이 죽인 곰 400여 마리의 두개골을 보관하고 위령제慰靈祭를 올렸다. 곰이 좋아하는 연어와 돼지고기를 올리고 여자들이 장만한 옥수수술과 요리로 잔치를 벌였다. 출전할 용사는 3명이었다. 대장과 부하 두 명인데 모두 체구體軀가 늠름했다. 그런데 사냥대가 출발하려고 할 때 하늘을 쳐다본 추장이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추장 고다로는 마을의 절대자다. 강철 같은 의지와 풍부한 경험을 지닌 52세의 노장老壯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천막 등 폭설장비를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공연한 짓 ….> 사냥대는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절대자의 명령에 복종했다. 내가 간청을 하여 동행허락을 받았다. 곰잡이로써의 명성이 조금은 있어 인정한 것이다. 오후 눈 위에 난 커다란 곰발자국을 발견했다. 이전에도 몇 마리의 발자국을 보았으나 곰이 너무 작아 포기했다. 아이누는 작은 곰을 잡지 않았는데 작은 곰은 도망만 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으나, 구식 무라다 단발총 두 자루, 창 두 개, 도끼칼을 가지고는 도망가는 곰을 잡기는 힘들다. 그 무기는 곰이 덤벼들어야 사냥이 된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 큰 곰과 마주 서서 혈전을 벌이는 게 아이누의 곰사냥이었다. 첫날밤에는 곰사냥용 판자집에서 말린연어와 주먹밥을 먹었는데 추장이 아무래도 날씨가 이상하다고 했다. 너무 포근하고 바람이 없어 느낌이 좋지 않다고 했다. 다음 날에도 날씨는 좋았다. 태양이 엷은 구름에 가려 좀 어두웠으나 대수롭지 않았다. 추장이 몇 번이나 하늘을 쳐다보고 사냥을 주저했으나 빈 손으로 돌아가는 걸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젊은이 사냥대에게 졌다. 우리가 추적하는 곰은 이미 늦어버린 동면장소를 찾는 듯 일직선으로 북쪽을 향해 달렸다. 초조焦燥하고 급한 걸음이었다.
‘저 산 넘어 잡목림에 있을거야.’
추장도 초조한 듯 서둘렀다. 날이 어둡기 전에 곰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곧 눈이 내릴 것이니 폭설이 내리기 전에 잡아야 한다고 했다.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솜을 찢어 던지는 것처럼 내려 쌓이더니 점점 많이 내렸다.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 맨 앞에서 추적을 하던 젊은이가 머리를 흔들며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발자국을 따라가지 말고 잡목림으로 곧장 가자고 추장이 말했다. 그 때 눈은 폭설로 변했다. 젊은이들은 좀 불안한 표정이었으나 오히려 추장은 더 태연하였으며 단호하게 추적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우리가 잡목림에 들어섰을 때 곰의 울음소리가 났다. 10여 미터 전방이었다. 폭설을 만난 곰이 울분을 터뜨렸다. 폭설 속의 사냥은 서로 빨리 끝내려는 싸움이 되었다. 아이누는 총을 가진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반원형진을 치고 곰을 기다렸다. 내리는 눈 때문에 시야가 가렸고, 곰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았으며.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이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총을 쏠 수 없었다. 그래서 곰이 5m 앞에 나타났을 때 아이누가 발사했다. 곰이 아이누를 덮쳤다. 추장이 총신을 쑥 내밀어 총구를 곰의 몸에 대고 발사했다. 급소에 맞아 곰이 멈칫하는 사이에 총잡이가 물러서고 양쪽의 창잡이가 돌진했다. 곰은 왼쪽 창잡이의 창은 앞발로 받아쳤으나 오른쪽 창잡이의 창을 피할 수 없어 창이 곰의 옆구리 깊숙이 박혔다. 곰이 분노와 고통으로 무섭게 고함을 지르며 창을 뽑았다. 곰의 그런 동작이 발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나에게 좋은 기회였다. 나는 5m 지근至近거리에서 연달아 두 발을 쏘았다, 심장과 두개골을 겨냥하여. 곰이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칼을 뽑아들고 곰에게 달려드는 젊은이를 만류挽留했다. 추장이 곰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이제부터 눈과 싸워야 한다>고 했다. 눈과 바람이 천지를 뒤덮었다. 아이누가 굵은 나무를 2m 정도로 잘라 추장이 지정한 작은 언덕 위로 날랐다. 눈사태가 일어나도 눈에 묻힐 염려가 없었고 앞에 높은 산봉우리가 있었으므로 강풍에 직접 노출되지 않았으며 해가 뜨면 직사광을 받을 곳이었다. 야영을 할 작정이었는데 내 상식으로는 그건 죽음을 의미하는 무모한 짓이었으나 확고한 자신을 갖고 명령을 하는 추장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추장은 2m 길이의 나무로 정사각형 상자같은 틀을 만들었다. 위에는 통나무를 가지런히 놓고 옆은 비웠다. 틀이 완성되자 추장을 가지고온 보따리를 풀어 물개껍질 천막을 통나무상자에 덮었다. 우리는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모진 바람과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주위는 캄캄하고 눈보라는 더욱 심해졌으나 추장은 태연했다. 천막 안에서 물개 지방질덩어리에 심지를 꽂이 불을 켰다. 천막상자는 아늑했고 편안했으며 훈훈했다. 추장은 낚시대같은 대나무를 꺼내 이어 천정을 뚫고 밖으로 내보냈다. 공기통이었다. 추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됐어! 됐어. 이젠 굶어죽지만 않으면 돼!’
곰의 배를 갈라 간을 꺼냈다. 간을 엷게 썰어 호롱불에 구웠다. 우리는 구은 간을 안주按酒로 독한 술을 마셨다. 추장이 옛 얘기를 꺼냈다. 이상한 분위기였다. 천지가 눈에 덮인 죽음의 산속에서 술을 마시며 옛 얘기를 하고있는 것이다. 추장 고다로는 눈을 겁내지 않았다. 오랜 경험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런 상태를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바람은 더욱 횡폭해지고 눈은 계속내렸으나 추장은 편안하게 누워 코를 골며 잤다. 추장은 자도 나는 잘 수가 없었다. 불안 때문에 눈이 감겨지지 않았다. 눈은 더 많이 쌓이고 물개가죽이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나무기둥도 삐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내가 불안해하는 표정을 하는 걸 본 아이누가, 물개가죽은 잘 마름질되어 튼튼하고 방수조치가 되어있다고 안심시켰다. 아이누가 물개가죽 마름질의 명수라는 걸 나도 안다. 젊은 아이누는 공기통에 신경을 쓰며 대나무를 조금씩 밀어올렸으며 짧아지면 다른 대나무를 이어 밀어올렸다. 대나무길이는 4m며 그 이상 눈이 쌓이면 끝장이다. 새벽에 추장이 깼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접검했다.
‘이 정도면 이틀은 끄떡없어!’
아침식사는 쌀가루를 물개기름에 개어 볶은 떡이었다. 손바닥만한 떡 하나로 배가 불렀다. 추장이, 현재 적설은 2m 정도이며 눈은 계속 내리고 있으나 바람은 좀 잦아졌다고 했다. 콧구멍만한 대나무통으로 그는 바깥사정을 훤하게 알았다. 추장이 젊었을 때 아버지와 같이 곰사냥을 하다가 나흘 동안 눈속에 갇혀있었던 얘기를 했다. 그 때는 물개가죽도 나무기둥도 없이 눈으로 벽돌을 만들어 추위를 피했다. 먹을 것도 없이 나흘 동안이나 견뎠다.
‘그래도 사냥을 계속했지. 토끼 네 마리, 여우 두 마리, 작은 곰도 한 마리 잡았어. 그 시절 아이누는 용감하고 튼튼했어.’
추장은 또 애꾸 파리어의 예를 했다. 파리어는 짐승가죽으로 만든 카누를 타고 얼음조각을 피하면서 큰 얼음판에 올라갔다. 물범 두 마리가 큰 얼음판에 있었는데 파리어는 물범이 눈치채지 못 하게 기어서 다가갔다. 그리고 창을 던졌다. 창에 꽂힌 물범이 도망가려고 하자 칼을 뽑아들고 덤볐다. 그런데 피냄새를 맡은 흰곰이 달려왔다. 흰곰은 불곰 보다 더 사나운 맹수였다. 검은 곰은 위협을 느꼈을 때 덤벼들고, 불곰은 사람만 보면 덤벼드는데 그러나 흰곰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덤벼든다. 그런 흰곰이 달려드는 걸 본 파리어는 물범에게서 칼을 뽑아들고 흰곰이 달려드는 순간 고함을 질렀다. 아이누의 술법術法이었다. 곰은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 멈칫하며 일어선다. 흰곰이 웍! 하며 일어섰다. 두 다리로 일어서서 하는 일은 아무래도 사람이 더 강하다. 힘에 센 곰도 두 다리로 일어서면 동작이 둔鈍해진다. 그것이 아이누가 노리는 곰의 헛점이다. 파리어는 곰의 심장에 창을 힘껏 박아넣었다. 얼마나 힘을 썼던지 창끝이 곰의 등뒤로 나왔다. 곰이 비틀거렸다. 그 틈에 파리어가 칼로 곰의 앞발을 쳤다. 그 다음은 사람과 곰의 난투가 되었다. 곰에게 맞아 넘어지고 칼로 치고 또 맞아 나가떨어지고 또 일어나 칼로 쳤다. 곰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파리어도 피투성이었다. 파리어의 투지에 눌린 곰이 뒷걸음질 쳤으나 파리어는 끝까지 칼을 휘둘러 곰을 죽였다. 곰을 끌고 마을에 돌아오자 파리어는 실신했다. 여섯 군데 상처를 입었으며 그 하나가 애꾸를 만들었다. 파리어는 전 추장 - 추장의 아버지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였으며 추장은 파리어에게 사냥을 배웠다. 아이누에게도 총이 보급되었으나 파리어는 총을 싫어했다. 육탄전을 벌여 곰을 잡던 시절이 가고 탕! 하는 소리에 곰이 쓰러지는 걸 보며 파리어는 신경질이 되었다. 곰사냥은 용맹무쌍勇猛無雙한 사냥꾼만의 용기인데 아무나 총으로 곰을 잡는 게 마뜩치 않았다. 추장에게도 총이 생겼다. 아버지추장이 죽고 난 뒤에 어부에게 선물로 받았다. 총으로 사냥을 하면서 파리어는 할 일이 없어졌다. 고작 뒷처리가 파리어의 일이었는데 어느 날 파리어에게 기회가 왔다. 추장과 파리어는 큰 불곰을 절벽 끝으로 몰아넣었다. 절벽 끝으로 몰린 불곰이 노호를 지르며 돌진했다. 그 기회를 노린 추장이 발사했다. 그러나 무라다총이 고장이었다. 추장이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는데 파리어가 고함을 쳐 곰이 일어서자 창으로 곰의 심장을 찔렀다. 곰이 비슬거리며 뒷걸음질 치자 파리어는 추격을 해서 곰이 절벽 끝에 섰다. 추장이 물러서라고 고함을 질렀는데 파리어는 추장의 경고를 무시하고 칼로 곰의 대가리를 쳐서 곰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릴 작전이었다. 칼에 맞은 곰이 마지막 힘을 써 자기 대가리를 내려친 파리어의 칼 든 손목을 잡고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미쳐버렸어. 나도 파리어의 이름을 부르며 절벽 밑으로 굴렀어.’
파리어는 곰에게 손목을 잡힌체 쓰러져있었으며 입과 귀에서 피를 흘렸다. 파리어가 나를 보고 뭐라 중얼거리며 웃었다. 아마 곰과 같이 죽으니 만족하다는 말 같았다.
‘그는 내 대신 곰에게 희생된거야.’
‘파리어는 용감했으며 사냥의 영웅이야. 곰과 육탄전을 벌여 곰을 잡는 용사는 사라졌어. 아이누에게도 진정한 용사는 없어.’
그리고 총은 언젠가 사고를 낸다고 경고했다. 나는 추장의 말에 동의했다. 바로 지금 상황도 그렇지 않은가? 이런 폭설에 총잡이사냥꾼은 벌써 얼어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따뜻한 눈속집에서 추장의 옛날 얘기를 듣고 있다. 눈은 계속 내렸다. 추장은 대나무통을 조금씩 올리면서 바깥을 살폈다. 그날 밤에는 대나무통이 다 올라가 여유가 없었다. 내일 아침까지 눈이 계속되면 위험하다고 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 밤새 눈이 그칠 것이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잠을 설친 내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추장이 깨웠다. ‘일어나라!’
는 추장의 소리에 눈을 떴다.
(아! 죽지 않았구나!)
우선 떠오른 생각이었으나 뭔가 이상했다. 숨이 막혔다.
‘공기통이 막혔소?’
‘거의 막혔으나 눈이 그쳤소. 밖으로 나가야 하니 준비하시오.’
추장이 웃었다. 정오 경 무사히 밖으로 나왔다. 변덕스런 날씨는 맑게 개였고 찬란한 태양에 눈이 부셨다. 적설이 4m나 되었다. 설피(눈신)를 신고 천천히 마을로 내려왔다. 줄로 허리를 묶어 눈에 빠진 사람을 끌어올리며 하산下山했다. 마을 가까이 오자 추장이 사냥대를 멈추고 부하들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눈을 털고, 옷을 고쳐 입고, 허리를 펴고, 얼굴을 펴라고 했다. 역시 그는 수백 명을 거느리는 추장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추장일행을 개선장군처럼 환영했다. 마을광장에 불을 피우고 환영잔치를 준비했다. 마침 눈이 내린 다음에 떠난 다른 사냥대가 여우 일곱 마리와 토끼를 잡아왔다. 눈이 내리면 눈썰매를 이용하기 때문에 나들이가 좋아졌다. 아이누는 나쁜 자연현상을 역이용했다. 짐승은 껍질을 벗겨 말리고, 곰은 값비싼 쓸개를 빼내고, 고기는 덩어리로 만들어 불과 연기에 그슬려 보관했다. 곰의 뼈는 도끼로 쳐서 개들에게 분배되었다. 기름도 따로 떼어내 보관했다. 그날 밤, 추장집에서 잔치가 열렸다. 페치카에서 통나무가 타고 바닥에는 곰털이 깔려있었다. 아이누는 추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기름진 고기를 좋아했는데 나는 연어구이를 맛있게 먹었다. 아이누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 날은 독한 옥수수술이 나왔으며 나는 연거푸 몇 잔을 마셨다. 그 무서운 폭설에서 살아온 것이 꿈만 같았고 상좌에 앉아있는 추장이 믿음직스러웠다. 아이누는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술에 취한 나를 따뜻한 안방에 눕히고 하얀 곰털을 덮어주었다.
70. 원시의 광야廣野
1917년 11월 중순께, 나는 친척의 부고訃告를 받고 단신單身 네무로평야를 횡단하여 초상初喪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 때만해도 네무로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비경秘境이었고 위험지대였다. 나는 나가효즈라는 마을에서 말을 빌려타려고 했다. 역체관驛遞館이 있어 말을 빌려줘 여행을 하는데 굥교롭게도 내가 도착했을 때는 말이 없었다. 말을 타면 네무로평야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하루가 걸렸는데 산을 넘어 지름길로 달리면 역시 하룻길이었다. 내가 걸어간다는 말을 듣고 역체관의 관리들은 <미친소리 하지말라>고 만류挽留했다. 내가 걸어가려는 산악지대는 길도 없고 곰들이 날뛰고있어 사냥꾼들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12번 2연발총을 믿고 그날 아침에 출발했다. 총 한 자루와 나침판 한 개만으로 출발했기에 달리다싶이 나침판이 가리키는 곳으로 걸었다. 그러나 곧 걸음이 느려졌다. 우선 5m나 되는 잡초가 발목을 잡았다. 나무뿌리와 가시덩쿨에 걸려 넘어졌다. 그래도 젊은 혈기로 계속 헤치며 나갔는데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꽉! 꽉! 하는 소리는 곰의 소리인데 곰소리 뒤에 나는 프르륵! 소리가 이상했다.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소리나는 곳으로 갔는데 계곡이었다. 험악한 바위산이 면도칼로 자른 듯 갈라지고 맑은 물이 흘렀다. 백조였다. 높이 20m, 폭 10여 미터의 냇물에 3 - 400여 마리나 되는 백조들이 모여있었다. 백조고기는 연하고 맛있는데 한 마리가 10Kg 쯤이었다. 언젠가 나는 이런 백조에게 SSG탄으로 난사亂射를 하여 80여 마리를 잡았고 운반하느라 10명의 사람을 동원한 적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총을 쏘지 않았으며 잡아도 운반할 수도 없었는데 대신 불곰이 백조사냥을 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불곰 한 마리가 평화로운 백조들의 놀이터에 나타났다. 백조들이 기겁을 하고 날아오랐으나 좁은 계곡에서 한꺼번에 날았기 때문에 서로 부딪혀서 태반殆半이 떨어졌다. 수백 마리의 백조들이 비명을 지르며 퍼득거렸으나 계곡을 빠져나가지 못 했다. 불곰은 그런 백조를 앞발로 잡아 찢었다. 목이 빠지고 날개가 찢겼다. 죽은 백조를 던져버리고 다른 놈을 잡아 열서너 마리를 죽였다. 그리고 백조들이 모두 날아가버리자 먹기 시작했다. 날개를 떼어버리고 털을 뽑아가며 포식飽食했다. 곰이 대식가인 건 알지만 앉은 자리에서 10Kg이 넘는 백조 다섯 마리를 먹어치웠다. 밉살스러운 불곰에게 한 방 먹이고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참았다. 따지고 보면 강자생존의 자연섭리였다. 바위산이 점점 완만緩慢해지고 나중에는 바로 발밑으로 물이 흘렀다. 아주 맑은 물이었는데 바닥이 좀 이상했다. 바닥에 얼룩어룩한 무늬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고 놀랐다. 폭 20여 미터, 깊이 2 - 3m의 개울이 온통 연어천지였다. 5Kg이나 되는 연어들이 수천 마리가 떼지어 물을 거슬러올라가고 있었다. 손으로 잡아도 도망가지 않았다. 산천어도 섞여있었다. 연어는 값비싼 고기였으므로 거기 있는 연어만 잡아도 나는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연어만 서너 마리를 잡아 알만 뽑아 초상집에 드리려고 가져갔다. 산을 한 개 넘자 날이 어두워졌다. 큰 바위틈에서 야숙野宿을 했다. 온갖 야생동물들이 여기저기에서 울부짖었다. 곰의 포효가 들렸다. 움직이면 안 된다. 코가 예민한 곰은 움직임으로 냄새를 맡는다. 가만히 있으면 사람의 냄새는 공기속에 고루퍼져 흩어지지만 사람이 움직이면 냄새의 波長이 생겨 냄새가 짙어진다. 곰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두 마리가 다투는 것 같았다. 부부싸움을 벌이는 것일까? 곰은 부부의 애정이 없다. 교미交尾할 때뿐이다. 워낙 사나운 동물이라 암컷이 암내를 풍겨도 서로 조심한다. 교미기간은 함께 지내지만 임신을 하면 헤어진다. 새끼는 암컷이 키우고 숫컷은 오히려 새끼를 잡아먹기도 한다. 암컷은 동면 중에 새끼를 낳는데 그래서 동면을 할 때가 되면 암수가 헤어지는데 부부싸움을 한다. 암컷은 숫컷이 치근거리는데 신경질을 부리고 숫컷은 암컷의 신경질에 화를 낸다. 바위트믕로 접근하는 부부도 그런 상태 같았다. 그들은 바위 근처까지 왔다. 코를 굴리는 소리도 들렸다. 곰들에게 발견되면 살아날 방법은 전무全無, 곰이 두 마리면 사냥꾼은 사냥을 포기한다. 곰은 생명력이 질겨서 총 한두 방을 맞아도 끄떡없다. 사자나 호랑이는 심장이나 대가리에 총을 맞으면 단 한 방으로 쓰러지지만 곰은 치명상을 입어도 1 - 2분 날뛰는데 그 시간이 포수에게는 위험하다. 그런데 그런 곰이 두 마리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깜깜한 밤에 …. 또 곰은 야행성동물이다. 밤에도 사물事物이 보인다. 나는 장탄한 총을 꼭 쥐고있었지만 총을 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 산중에서 곰을 만나면 죽는시늉을 하면 살 수 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검은 곰이라면 혹 그럴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면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곰이나 흰곰을 아니다.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덤비는 놈들이다. 죽는시늉은 <날 잡아 잡수시오> 하고 도마에 들어눕는 꼴이다. 곰들이 10m 이내로 접근했다. 그 예민힌 코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았으며 으르렁거리던 놈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분명히 사람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이 삶과 죽음의 기로岐路인 걸 알았다. 곰을 잡으려고 다니던 포수가 곰에게 잡힐 운명에 처해 있었다. 나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없애려고 아예 숨을 멈추었다. 일종의 가사假死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곰들이 풍기는 살기만 떠돌았다. 1 - 2분이 지날 무렵 별안간 암콤이 앙칼진 노호소리를 질렀다. 보기싫은 남편에게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암콤이 숫콤을 떠밀었으며 숫콤이 대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또 부부싸움이 시작되었고 암콤이 내 머리 위 바위를 밟고 도망갔다. 화가 난 숫콤도 뒤를 따라갔다. 곰들의 소리가 멀리 사라자자 나는 가사상태에서 깨어나 긴 한숨을 쉬었다. 위기일발危機一髮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다. 긴장감이 풀어지자 깊은 잠에 빠졌다. 날이 밝자 이젠 내 세상이 되었다. 모닥불에 주먹밥과 연어알을 덥혀먹었다. 내리막길이라 빨리 가는데 하늘에 독수리가 뜨고 까마귀가 날았다. 독수리와 까마귀는 사냥꾼의 주목을 받는다. 그들이 떼를 지어 날 때는 그 밑에 먹이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놀랍게도 죽은 토끼를 두고 여우와 삵괭이가 결투를 하고있었다. 토끼를 잡은 건 삵괭이였는데 그는 토끼를 앞발로 누르고 토끼를 덮치려는 여우에게 앙칼진 소리를 냈으나 한 발이 토끼를 누르고 있었으므로 공격이 자유롭지 못 해서 고전苦戰을 하였다. 여우는 앞발로 삵괭이의 머리를 치면서 긴 입을 내밀어 삵괘이의 목줄을 노렸는데 약간 빗나가 귀를 물었다. 여우는 아웃복싱선수처럼 치고 빠지는 전술을 썼으며 삵괭이는 잡은 토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인파이터전술로 응대했다. 나는 그 싸움을 무료로 관람하기로 했다. 보통 때 같으면 10m 내외의 사람냄새를 쉽게 맡았았겠지만 지금은 싸움에 정신이 팔려 관람객을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두 짐승의 싸움은 처참했다. 전번전은 여우의 우세였으나 삵괭이가 여우의 앞발을 물고난 후부터는 전세戰勢가 바뀌었다. 앞발을 물린 여우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삵괭이의 전신全身을 마구 물고 할켰으나 삵괭이는 여우를 놓아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회를 노리다가 여우의 목을 깊이 물고 뒹굴었다. 둘 다 피투성이였는데 양측 다 동작이 둔해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 때까지 하늘에서 관찰을 하던 독수리들이 덮쳐들었다. 두 마리 다 절명絶命했다. 독수리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했다.
71. 흰곰
1928년, 본국의 동물원으로부터 흰곰을 사로잡아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흰곰 어미가 새끼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흰곰은 동물원에서 인기가 있었으나 사육하기 까다로웠다. 북극의 얼음판에서 살던 짐승이라 온도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또 신경이 예민했다. 좁은 우리에도 적응하지 못해 신경질이 되어 죽었다. 검은곰이나 불곰은 좁은 우리에 갇혀도 먹이만 주면 새끼도 낳고 잘 살았으나 흰곰은 새끼를 낳아도 결국 4 - 4일을 버티지 못 하고 죽었다. 폐렴균이었는데 북극에는 폐렴균이 없다. 새끼들은 폐렴균에 저항력이 없어 예외없이 죽었다. 흰곰 사로잡기란 무척 어려웠다. 동물원이 어마어마한 비용을 가불假拂했고 성공하면 거액巨額을 받기로 했다. 흰곰을 생포生捕하는 건 나로써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다. 나는 아이누추장 고다로를 찾아갔다. 흰곰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서 오직 한 사람 고다로뿐이다. 고다로는 오랜만에 만난 나를 반갑게 맞이했으나 내 제안을 듣고는 외면해버렸다. 흰곰이 사는 곳까지는 큰 배를 타고 이틀을 가야하고 또 작은 배를 갈아타고 얼음이 떠돌아다니는 빙하를 하루를 가야한다. 그런 모험을 하고 흰곰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사로잡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돈뭉치를 내놓았다. 아마 고다로가 생전 처음 보는 거액이었을 것이다. 고다로는 팔짱을 끼고 돈뭉치를 노려보았다. 3 - 4분이나 담배를 태우면서 심사숙고深思熟考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흰곰은 2 - 3월에 새끼를 낳으므로 지금 쯤 3개월 정도 자랐을 것이다. 새끼를 사로잡겠다는 말이었다. 추장은 즉시 사냥대를 조직했다. 40대 노련老鍊한 사냥꾼 3명을 선발했다. 화물선貨物船을 타고 북해도에서 동북쪽으로 올라가 이틀 후에 에스키모마을에 도착했다. 추장과 절친한 에스키모가 우리를 환영하였으며 청어와 게요리를 푸짐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그들4도 고다로의 청탁請託을 듣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고다로는 이미 결심이 서있었으므로 안내자 한 사람만 부탁했고 상당한 돈이 지불되었다. 안내인은 환갑이 넘은 노인이었으나 고다로는 환영했다. 가죽배 두 척을 빌려 출발했다. 눈만 내놓고 몸을 모두 곰털로 감쌌다. 작고 큰 얼음조각들이 널려있는 바다를 조심해서 지나갔다. 에스키모는 그곳 바다를 사레이라고 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연결되어 있는 섬이었다.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는 이곳은 러시아인들도 오지 않았다. 얼음뿐인 적막한 곳이었으나 그래도 집이 한 채 있었다. 고래뼈로 기둥을 세우고 짐승가죽으로 지붕을 덮었으나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있었다. 에스키모 사냥꾼이나 어부들이 드나드는 집이다. 집에는 에스키모 어부 3명이 있었고 우리 일행 6명이 들어서자 만원버스처럼 되어버렸다. 약 1주일 전에 러시아사냥꾼이 사냥을 하다가 물에 빠져죽었다고 했다. 흰곰에게 쫓겨 바다에 빠져죽었다. 여기서는 바다에 빠지면 죽는다. 심장마비가 되어 얼어죽는다. 왈타부근에는 청어들이 많았고 청어를 노린 물범들이 몰렸는데 흰곰을 물범을 노렸다. 이튿날 우리는 검은 빵과 청어스프로 아침식사를 하고 왈타섬으로 떠났다. 수십 마리의 물범들이 있었다. 물범은 고기도 맛없고 가죽도 쓸모가 없었으므로 에스키모나 아이누도 잡지 않았다. 고다로는 흰곰의 미끼로 쓰기 위해 물범사냥을 했다. 고다로가 혼자 배 밑바닥에 엎드려 큰 얼음장에 있는 물범에게 접근했다. 몸을 숨기고 팔로 배를 저어갔으므로 마치 빈 배 같았다. 물범은 배를 의심스럽게 보았으나 달아나지는 않았다. 배가 천천히 물범에게 다가갔으나 물범은 빈 배로 알고 도망가지 않았다. 배가 10m 쯤 다가갔을 때 고다로가 벌떡일어나 무라다총을 발사했다. 총탄이 물범의 심장에 명중했으므로 물범은 쓰러졌으나 곧 일어났다. 고다로가 재빨리 얼음섬에 올라 물범 앞을 가로막고 커다란 칼로 물범의 대가리를 내려쳤다. 고다로가 물범의 목에 줄을 걸어 피가 흐르는 물범을 얼음판에 끌고다녔다. 잔인한 짓이었으나 흰곰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곰은 코가 예민한 동물이며 수십미터 떨어진 곳에 숨어있는 사람냄새도 정확하게 알아채린다. 그런데 흰곰은 10배 정도 더 예민하다. 수백미터 밖의 냄새도 맡고 심지어는 바다속의 물고기 냄새도 맡는다. 그래서 고다로는 일부러 피냄새를 뿌리고 있다. 고다로는 물범을 끌고다니다 버려두고 30m 쯤 떨어진 곳에 이글루(얼음집)를 만들었다. 한 사람씩 교대로 이글루에서 보초步哨를 섰다. 흰곰은 이틀 후에 왔다. 늙은 곰이 나타나 얼어붙은 물범을 앞발로 쳐 깨뜨려 먹고있다는 전갈이었으나 고다로는 그냥 놔두라고 했다. 이튿날 현장에 가봤는데 물범은 없었다. 영하 40도나 되는 추위로 돌처럼 얼어붙은 물범시체를 어떻게 뜯어먹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고다로가 또 한 마리 물범을 잡아 같은 장소에 놔뒀다. 3시간 뒤에 흰곰 두 마리가 나와 주변을 돌아다닌다는 보고였다. 새로 나타난 두 마리가 다 성장한 놈이었다는 말에 실망했다. 새끼 곰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 >하며 기다린 게 1주일이 넘었다. 우리는 지쳐갔다. 특히 아이누처럼 추위에 면역免疫이 없는 나는 피로했다. 한 평 남짓한 방에서 성인 아홉명이 기거했으므로 잠자리가 불편해서 수면睡眠부족이었다. 다행히 동거했던 에스키모 세 명이 떠났는데 이번에는 콩알만한 이가 괴롭혔다. 에스키모에게서 전파된 이는 무섭게 번식했으며 온몸이 가려워 잠을 자지 못 했다. 모든 게 귀찮아서 눈을 녹여 하던 세수도 하지 않았으므로 석유등불에 그을린 얼굴이 시커멓게 되었으며 수염이 자라 털복숭이가 되었다. 1주일이 넘어가자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러시아인이 안내인 과 나타났다. 또 새우잠을 자게 되었다고 시무룩하게 맞았는데 러시아인들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독한 워트카를 권하며 손짓발짓으로 통화를 했고 그들은 흰곰의 털을 사려는 장사꾼이었는데 오는 도중에 새끼를 봤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약 1시간 거리의 얼음섬에 개만한 새끼 두 마리가 놀고 있더라고 했다. 러시아인들에게 큰 곰이 나오는 장소를 알려주고 새끼곰이 있는 곳을 상세히 알아냈다. 러시아인들의 정보대로 정확하게 서북쪽으로 갔으나 섬을 발견하지 못 했다. 북극의 바다는 얼어있으므로 섬인지 바다인지 또는 육지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를 안내한 에스키모는 바다와 육지를 구분했다. 표면의 기복起伏과 물과 접촉되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조언助言에 따라 빙판氷板에 올랐다. 해안선에서 약 300m 쯤 갔을 때 고다로가 정지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눈 위를 보고있었다. 곰발자국이었다. 평소에 20Cm - 30Cm의 불곰의 발자국만 보았던 나는 50Cm가 넘는 그 크기에 놀랐다.
‘어미곰이다!’
발자국 옆에 분홍색 피가 있었는데 그 건 어미곰이 먹이를 나르고 있다는 것이며 새끼가 있는 증거라고 풀이했다. 북해도를 떠난지 보름만의 일이었다. 고다로가 또 정지했다. 이번에는 새끼발자국이었다.
‘두 마리다!’
우리는 일렬횡대를 일렬종대로 바꿨다. 하얀 눈벌판 어디에서 흰곰이 튀어나올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빙원氷原이 끝나고 50m의 빙벽氷壁이 나타났다. 일렬종대의 맨앞에 섰던 나는 왼쪽언덕에서 피어나는 하얀연기를 발견했다.
(뭘까?)
연기가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앗! 눈사태다.’
정말 눈사태 같았는데 눈가루가 날리며 곰이 덮쳐들었다.
‘온다! 곰이다!’
겨냥을 했으나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곰의 주위에 눈가루가 연막煙幕처럼 피어나 곰의 형체形體를 볼 수 없었다. 20m 전방에서야 곰이 보였는데 까만 콧등뿐이었다. 발바닥까지도 하얀털에 싸여있는 곰에게 검은 것은 오직 콧등뿐이었다. 15m 거리에는 눈이 보였다. 불곰은 눈이 붉었는데 흰곰은 파란색이었다. 불곰은 눈에 광기狂氣가 있었으나 흰곰은 차디찬 살기殺氣가 보였다. 15m 거리에서 발사했다. 눈과 눈 사이를 겨냥했는데 곰이 머리를 흔드는 바람에 어깨에 맞았다. 상처를 입은 곰이 웍! 하고 아가리를 벌리며 돌진했다. 아가리를 벌릴 때 빨간 혀가 보였는데 머리를 겨냥하여 2탄을 발사했다. 곰이 일순一瞬 멈칫하였는데 치명상이 아닌 듯 계속 덮쳤다. 재장탄을 하면서 뒷걸음질을 치는 동안 고다로가 육탄전肉彈戰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곰과 마주보고 달려나갔다. 아이누가 곰을 잡는 방법이었다. 고다로와 곰은 불과 2 - 3m로 접근했으며 곰도 습관대로 벌떡! 일어서 앞발을 휘둘렀고 고다로는 총구를 곰의 심장에 대고 발사했다.
‘아! 고다로가 위험하다!’
나도 무르게 소리를 쳤는데 이미 고다로의 부하들이 곰에게 돌진했다. 세 개의 창이 아직도 고다로의 총끝을 잡고있는 곰의 심장에 집중되었다.
‘그만, 그만! 끝났어.’
고다로의 늠름한 목소리가 둘리자 부하들이 물러섰다. 그때까지도 곰은 서있었으나 거의 거동擧動불능상태였다.
‘쏘지말아!’
재장탄을 하는 나를 고다로가 말렸다.
‘구멍이 여러 개 나면 털값이 내려가요.’
어미가 목적이 아니었다.
‘새끼를 찾아!’
어미가 달려온 곳은 얼음절벽이었는데 깊이 약 2m의 얼음동굴이 있었다. 바닥에는 마른 해초海草가 두껍게 깔려있었다. 그 많은 해초를 멀리 바다에서 동굴까지 운반한 어미곰의 정성이 엿보이는 보금자리였다. 새끼곰 두 마리가 있었다. 새끼라지만 돼지 정도로 큰놈들이 우리를 보자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아이누 젊은이가 얏보고 뒷다리를 잡으려다가 새끼의 발톱에 할켜 가죽장갑이 찢어지고 손등에서 피가났다.
‘이 새끼가!’
격노激怒한 아이누가 칼을 뽑아 들었는데 고다로가 제지制止시켰다. 사방에서 줄을 던져 목과 앞발을 걸어 잡아당기면서 고다로가 외투外套를 벗어 새끼에게 덮어씌웠다. 외투속에서 꿈틀거리는 새끼의 앞발과 뒷다리를 묶었다. 그 사이에 또 한 마리는 바다쪽으로 달아났다. 어미곰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것 같았다. 피투성이가 된 어미 주위를 빙빙 돌았다. 우리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새끼가 어미의 앞발을 물고 일어나라는 듯 웍! 웍! 하고 소리치다가 어미가 일어나지 않자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새끼와 격투는 30분이나 걸렸다. 성인 여섯 명 - 그것도 곰사냥꾼과 30분을 싸운 것이다. 곰껍질을 벗기고 쓸개를 빼내 얼음집으로 돌아왔는데, 곰사냥을 한 러시아 사냥꾼이 중상을 입고 돌아와있었다. 두 명의 사냥꾼과 안내인이 얼음에 올라 발자국을 탐색하고 있을 때 바다속에 있었던 곰이 등 뒤로 올라와 습격을 했다. 첫 번째 곰에게 집중사격을 한 러시아인들은 두 번째 곰과는 육탄전을 벌였다. 2연발 총탄을 재장전할 시간이 없었다. 에스키모 안내인이 던진 창에 맞은 곰이 주춤하는 사이에 재장탄을 한 사냥꾼이 발사를 했으나 한 사람은 곰의 앞발치기에 걸려 중상을 입었다. 왼쪽 허벅다리가 찢어져 뼈가 하얗게 들어났다. 고다로가 워트카를 부어 소독을 하고 상처 윗부분을 줄로 묶어 지혈止血을 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북극에서는 영하零下 50도의 차가운 기후로 화농化膿을 하지 않는다. 동물원 사람들은 두 마리의 곰새끼를 잡아온 우리를 영웅대접했다.
72. 괴어怪魚 이도우
네무로평야를 흐르는 효즈강은 송어, 연어의 부화장孵化場으로 유명하지만 옛부터 전설이 있었다. 강에 괴어가 산다는 것이다. 크기 5m의 물고기이며 사람도 잡아먹는다. 크기가 5m라면 바다에서도 상어나 고래를 제외하고는 없다. 아프리카 아마존의 파라루크도 1m 남짓. 믿지 못 할 얘기였기에 일소一笑에 붙였다.
어느 날 나는 오리사냥을 하러나갔다가 강가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쉬고있었던 뗏목사공을 만났다. 뗏목사공은 산에서 나무를 잘라 뗏목으로 만들어 하류로 운반하는 용감한 사람들인데 그 날은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무서워서 강에 들어가지 못 하겠다고 했다.
‘무서워?’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그러나 그들은 웃지 않았다. 몇 시간 전에 괴어를 봤다고 했다. 뗏목을 조정하여 노래를 부르며 강 하류로 내려오고있었는데 갑자기 노래가 뚝! 끊겼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조금 전에 그들이 본 것이 환각幻覺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이 본 것은 10여미터 전방의 수면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그 소용돌이 속에서 커다란 고기대가리가 불쑥! 나오는 걸 봤다. 대가리의 크기가 쌀가마니 보다 더 컸다. 괴어를 목격한 사공들은 처음에는 모두 자기 눈을 의심했으나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같은 걸 보았으므로 사실이라는 걸 알고 놀랐다.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모래톱에 뗏목을 대고 땅으로 올라왔다. 그들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열서너 명이 한결같이 같은 말을 했기 때문에 거짓말이나 환영幻影이었겠는가? 효즈강에 정말 괴어가 있는 것인가? 나는 몇 년 전에 아이누의 집에서 30Cm 사방四方의 고기덩어리를 본 일이 있었다. 훈제燻製로 말린 고기였는데 고래고기냐고 물었다. 한 자 4각이나 되는 고기덩어리는 고래고기 아니고는 떠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누는 그 게 고래고기가 아니고 이도우라는 물고기라고 했다. 그 때는 나는 아이누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고래고기로 치부致賻했다. 요리해 먹었는데 맛있었으며 고래고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고래고기는 여러 부위部位로 나누고 어떤 부위들은 짐승고기와 비슷한 맛이났다. 그러나 뗏목사공들을 만나고는 이도우를 믿게 되었다. 이튿날 나는 고기를 받았던 아이누를 찾아갔다. 늙은 아이누는 서슴치않고 뗏목사공들이 본 게 이도우가 맞다고 했다. 아이누는 옛날 이도우를 많이 잡았으며 이도우는 120Kg에서 200Kg이 나간다고 했다. 손가락크기만한 줄에 굵은 못으로 만든 바늘을 달아 연어나 송어를 미끼로 꿰어 낚았다. 이도우는 미끼를 한 입에 삼켜버리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 당기려다가는 물에 끌려들어가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아이누는 고래잡이원리를 이용했다. 사방에서 창을 던져 이도우의 힘을 뺀 다음에 끌어올렸다. 나는 아이누의 말과 뗏목사공의 말을 종합하여 이도우가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도우를 잡기 위해 뗏목을 탔다. 이도우가 나오면 총으로 잡을 요량이었지만 이도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특제 낚시를 만들어 효즈강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산천어를 잡으려고 효즈강에 갔다. 강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며 낚시를 했는데 산천어가 잡히지 않았다. 그 많던 산천어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래서 나는 신경질이 되어 자꾸만 상류로 올라갔다. 효즈강 상류는 도끼가 닿지 않은 원시림이었고 지경 3 - 4m의 거목들이 밀생되어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 하는 곳이었으나 낚시를 못해 화가 난 나는 계속 상류로 올라갔다. 오후에는 깊은 산중에 들어갔다. 강은 깊은 소가 되었다. 폭이 100m가 넘고 깊이도 10여미터나 되는 깊은 소였다. 험준한 산속에 있는 소를 보고 나는 놀라는 한편 불안했다. 신비롭고 너무 조용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낚시줄을 던졌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그 큰 소에 피라미 한 마리도 걸리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낚시줄을 던져놓고 가다렸는데 한 10여분 지났을까 갑자기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5 - 6 m 거리였는데 순간 거대한 대가리가 불쑥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온몸이 짜릿해지고 등골이 오싹했다. 공포였다. 낚시대를 던져버리고 일어섰다. 대가리가 떠올랐던 자리에 큰 파문이 일어나고 굵은 줄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뒷걸음질쳤다. 내 앞에는 굵은 나무토막이 가로질러 있었는데 내가 물러선 순간 나무토막이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거대한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림자를 똑똑히 봤다. 길이 4m 정도의 괴어였으며 내가 순간적으로 물러서지 않았으면 큰일날뻔 했다. 아이누는 이도우가 물가에 있는 사슴이나 여우도 잡아먹는다고 했는데 …. 나는 그 사나운 불곰을 만나도 겁을 내지 않은 사냥꾼이었지만 그 때는 전신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래서 창피한 얘기지만 낚시대 따위는 던져버리고 도망쳤다. 우선 목숨을 건져야 했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 했다. 흥분을 했으나 부끄러웠다. 물고기를 보고 도망치다니 …. 부끄러움을 그대로 안고 있을 수 없었다. 사냥평생 오점汚點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튿날 총과 특제 낚싯대를 들고 나섰다. 사람들이 총과 낚싯대를 같이 가져가는 나에게 사냥이냐 낚시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놈을 총으로 쏘아 죽일 작정이었다. 연 사흘동안 소에서 이도우를 기다렸지만 이도우는 없었다. 피라미와 산청만 득실거렸다. 2년 후, 다시 이도우를 만났다. 전에 이도우를 만났던 소였다. 그날도 산천어가 잡히지 않았다.
(이상한데 ….)
나는 불현 듯 이도우를 떠올렸다. 특제낚시에 산천어미끼를 꿰어 던졌다. 2 - 3분 후 입질이 왔다. 와락 낚시줄을 끌어당겼다. 하마터면 내가 물속으로 끌려들어갈뻔 했다. 다행히 줄은 더 이상 끌려들어가지 않았으나 뭔가 낚시에 걸린 건 확실했다. 줄을 약간 당겨봤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둔한 반응이 있었다. 긴장했다. 무섭지는 않았다. 이도우를 보고 도망쳤던 치욕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줄을 슬슬 풀어주면서 뒷걸음질쳐 5 - 6m 뒤의 소나무에 줄을 묶었다.
(됐다! 이젠 이도우와 소나무의 싸움이 될거다.)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용기를 내서 줄을 당겼다. 꼼짝 않는다. 이번에는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몸을 뒤로 눕히며 잡아당겼더니 주르르 끌려왔다.
(옳지, 됐어!)
나는 계속 줄을 당겼다. 그러자 큰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내 몸이 옆으로 뒤틀리더니 와락! 끌려들어갔다. 몸의 중심을 잃어 물가까지 끌려갔으나 정신을 차려 줄을 놓아주었다. 줄을 놓아주자 줄을 묶은 소나무가 크게 흔들리며 휘어졌다. 무서운 힘이었다. 이도우는 1분 정도 날뛰었고 물에는 하얀 거품이 일었다. 이도우가 조용해지자 줄을 당겼다. 이도우는 또 한참 날뛰었고 다시 조용해지면 줄을 당겼다. 약 30분 후에는 이도우가 힘이 좀 빠진 것 같았다. 그래서 줄을 잡아당겨 소나무뿌리에 감았다. 얕은 곳으로 끌려오면서 이도우는 더욱 사나워졌다. 이도우는 생김새는 잉어였으며 가물치처럼 피부가 매끄러웠고 검은 무늬가 있었다. 길이 2m에 무게는 180Kg 정도였다. 물가로 끌려오자 필사적인 저항을 했다. 수초낫으로 이도우의 대가리를 쳤다. 이도우를 잡아 마을로 돌아오자 마을에 소동이 일어났다. 노인들은 이도우가 용으로 화신化神하려는 잉어라고 우기며 본인은 물론 마을에 큰 화禍가 미칠 것이라고 혀를 찼다. 그 후 또 이도우를 한 마리 더 잡았는데 가뭄이 오래 계속되던 해였다. 곰을 잡으려고 돌아다니다가 목이 말라 계곡으로 내려왔는데 심한 가뭄이었기에 효즈강도 물이 말라 10여 미터 수심이 1m 남짓이었다. 맑은 물을 찾아 상류로 올라가는데 상류쪽에서 풍덩거리는 소리가 났다. 곰이 목욕을 한다고 판단하여 총의 안잔장치를 풀고 살금살금 기어갔는데 물줄기가 끊어진 웅덩이가 온통 들끓고 있었다. 이도우가 웅덩이에 갇혀 팔딱거리고 있었다. 곰탄으로 이도우의 대가리를 겨냥하여 발사했다. 길이 120Cm, 무게는 50Kg 정도였는데 옮기느라 애를 먹었다. 이도우는 지금도 북해도에 있다. 옛날처럼 5m가 넘는 거물은 없어도 1m 전후의 이도우는 북해도의 강에 살고있으며 낚시꾼들의 선망羨望의 대상對象이다. 학자들은 이도우가 북해도에만 살며 강과 바다를 왕래한다고 한다. 지금은 북해도의 강들이 얕아져 이도우가 바다로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1928년 가을, 효즈강가의 개척자마을에서 일어난 아이 실종사건의 범인이 이도우라는 건 사실이다. 아이는 부모와 형과 같이 강가에서 놀고있었다. 어머니는 빨래를 하고 아버지는 나무그늘에서 낮잠을 잤는데 형과 함께 놀고있었던 네 살짜리 아이가 없어져버렸다. 아이는 물가의 바위에 앉아있었고 두 형들은 바로 옆에서 물장난을 하고있었는데 바위 위에 있던 아이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부모가 인근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아이가 실족하여 물에 빠진 게 아닌가 하여 물속을 뒤졌으나 없었다. 형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동생과 4 - 5m 떨어진 물에서 놀고있었는데 풍덩! 하는 소리에 돌아다보았더니 동생이 앉아있던 바위 밑에 파문이 일어나고 물거품이 생겼습니다. 깜짝 놀라 바위를 보니 동생이 없었어요. 물에 빠진 게 아닌가 하여 물속을 보았는데 없었어요.>
물은 3 - 4m 깊이였으나 맑아 잔 돌까지 다 보였지만 동생은 없었다.
<우리가 바위로 달려갔을 때 바위 밑에 시커먼 그림자가 아래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봤어요. 그림에서 본 용처럼 생겼는데 아주 빠르게 강 아래쪽으로 사라졌어요.>
용처럼 생겼다는 아이의 말은 과장되었으나 이도우가 틀림없다. 아이를 삼킨 이도우를 잡으려고 강을 뒤졌으나 이도우를 만나지 못 했다. 아이누도 이도우가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이도우의 뱃속에서 사람의 뼈가 나오기도 했으며 큰놈은 7 - 8m나 되는데 그런 놈이라면 어른도 한입에 삼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도우는 잡고나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이도우를 두 마리 잡은 뒤에는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73. 그리운 원시생활
네무로에는 나우스다게산山이 있다. 병풍같은 절벽 위에 앉은 산이며 산밑은 천고의 원시림이 밀생하고 계곡에는 사시루이강이 흐른다. 5여 년 전에 나는 그 밀림에서 길을 잃었다. 원래 길이란 없었으며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나는 몇 번 들어간 적이 있어, 온천이 있다는 나뭇꾼의 말을 듣고 안심하고 들어갔는데 소나기를 만나 옷이 흠뻑 젖어버렸고 소나기가 지나간 다음에 옷을 말리려고 불을 피워 불옆에 걸쳐놓고 마른 나무를 찾으려간 사이에 윗저고리가 불타버렸다. 호주머니 속의 지도와 나침판까지 타버려서 난처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생각해보니 안심이 되었다. 나침판이 없어도 길을 찾는 건 일 없고 아프리카의 밀림이 아닌 북해도의 산림인데 조난당할 것도 아니었다. 계곡에 흐르는 물을 따라가면 2 - 3일 안에 바다로 나갈 수 있을텐데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원시림에서 길을 잃었다는 게 내심內心 은근히 기뻤다. 때가 7월이니 산에는 자연식물이 지천至賤이고 짐승이나 고기도 잡을 수 있었다. 총과 낚싯대와 취사도구가 있으니 굶어죽을 일은 없다. 마음이 편해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슬렁거리며 지형을 알아보고 사냥터와 낚시터를 알아보자.>
그래서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걸 포기하고 눈대중으로 하산을 했다. 그러나 어둠이 내려앉자 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불을 피웠다. 여름철이었지만 산속은 추웠다. 불을 보는 정면은 따뜻했으나 등이 추웠다. 등에 불을 쬐면 가슴이 추웠다. 이렇게 몸을 번갈아가며 불을 쬐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온기와 냉기 속에서 낮의 피로가 겹쳐 나도 모르게 잠이들었는데 싸늘한 냉기에 잠을 깼다. 불이 꺼져가고 있었고 주위가 좀 이상했다. 나는 오랜 사냥생활로 냄새로 짐승을 분간할 수 있었다. 짐승을 쫓아다닌 터라 코도 짐승처럼 예민해져서 웬만한 거리에서는 짐승을 코로 느낄 수 있었다. 짐승은 나의 존재를 알면서도 앞을 지나갔다. 여우였다. 여우는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보려고 주위를 빙빙 돌고있었다.
(그까짓 것.)
여우 따위가 아무리 설쳐도 사람에게는 덤비지 못 한다. 그러나 멀리서 들려오는 곰의 소리는 두려웠다. 다행히 거리가 멀어 다소 안심이 되었지만 불을 다시 피웠다. 불이 일어나고 몸이 따뜻해지니까 배가 고팠다. 그러고보니 아침을 먹은 후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계곡으로 갔다. 계곡에서 불을 피워 수면을 비추었다. 바위틈에서 잠을 자던 모래무지 종류의 고기들이 불빛에 모여들었다. 30Cm나 되는 놈들이 모여들자 큰 돌을 들어 물속의 돌에 내리쳤다. 그 충격으로 물고기가 뇌진탕을 일으켜 물 위로 떠올랐다. 열 마리를 잡아 고기에 소금을 쳐서 모닥불에 구웠다. 모래무지 소금구이는 맛있었다. 배가 부르자 이내 졸렸다. 3면이 바위에 둘러싸인 계곡이었으므로 편안하게 잤다. 아침식사는 드룹으로 했다. 약간 썼으나 향기가 좋았다. 점심은 여우가 마련해주었다. 큰 바위 위에서 여우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꼬락서니가 얄미워 총을 들었는데 여우는 도망가버렸다. 여우가 있던 곳에 가보니 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여우가 잡은 것이며 내장만 먹고 그대로 있어서 토끼구이를 하고 후식으로 산딸기를 먹었다. 나는 배가 고프면 물고기나 버섯, 과일을 입맛대로 요리해서 먹으며 천천히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걷다가 피곤하면 나무그늘에서 낮잠도 자고 강에서 목욕도 했다. 두 번째의 야숙野宿은 아주 편했다. 동굴을 발견하여 나무로 숯을 만들어 숯을 피워놓고 잤다. 나는 그 동굴에서 영주永住하는 꿈을 꾸었다. 바닥에 곰털이나 여우털을 깔고, 짐승의 기름으로 등잔불을 밝히고, 동굴 앞 평지에 보리나 감자를 심어두면 천하의 낙원이 될 것 같았다.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 걱정이 없으며, 군대에 가거나 세금을 낼 필요도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 나는 평화롭고 자유로운생활을 꿈꾸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잠이 깼다. 고기 - 산천어들이 물 위로 튀어오르고 있었는데 맨손으로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침식사는 가재로 했다. 바위틈이나 바위 밑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놈들을 열서너 마리 잡아 빨갛게 구워먹었는데 아주 고소하고 맛있었다. 스프는 토끼뼈와 버섯으로 만들었다. 그 동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룻밤을 잤을 뿐인데 오후에 떠나려고 하니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듯 한 묘한 슬픔이 일어났다. 물가를 따라 걸어내려갔는데 갑자기 5 - 6m 전방의 바위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곰이 불쑥 나타났다.
(이 친구가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이런 막연한 생각이 스쳤는데 다음 순간 공포가 덮쳤다. 나는 총을 왼손으로 쥐고있었으나 안전장치도 풀 여유도 없었다. 곰과의 거리는 불과 5m인데 그런 ㄷ오작을 하다가는 곰의 앞발치기에 머리가 부서질 것이 분명했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무서움이었다. 곰도 이런데서 사람을 만나 놀란 것 같았다. 그도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곰은 꼼짝도 않했으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이럴 때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곰뿐만이 아니라 동물의 행동은 반사적反射的이다. 상대편의 움직임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공격을 한다. 나는 그걸 알기 때문에 막대기처럼 서있었다. 나와 곰은 그렇게 한참동안 서있었다. 나의 감각으로는 한 시간이라고 느꼈지만 실제로는 1 - 2분이었다. 그러자 곰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게 내 안경이라는 걸 알았다. 곰은 나의 안경을 빤히 보고있었다. 내 안경은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반사되어 유리알이 반짝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사이에 기적이 일어났다. 곰이 반짝거리는 안경빛에 놀라 도망가버린 것이다. 나는 도망가는 곰을 보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담은 순간 깔깔거리며 웃었다.
(바보 같은 놈!)
공포는 사라졌다. 그러나 곰을 따라가 총을 쏘는 것은 포기했다. 상호 친애감親愛感이었다. 나는 다시 냇물을 따라 걸었다. 강폭이 20m로 넓어졌다. 사시루강이 되었다. 오후 늦게 평야로 빠져나왔고 어두워질 무렵에는 멀리 불빛을 보았다. 통나무를 엮어 만든 집이었다. 밤중인데도 집주인은 별로 경계하지 않고 맞아주었다. 50세가 좀 넘은 주인은 원시인처럼 수염이 덥수룩했다. 두 평 쯤 되는 방은 한국식온돌溫突이었고 방구석에 화로火爐가 있고 화로에는 감자와 토끼고기가 끓고 있었으며 벽에는 말린 산천어들이 걸려있었다. 고도오라고 자기소개를 한 사내는 길을 잃었다는 내 얘기를 듣고 껄껄 웃었다. 그는 트럭운전사였는데 6년 전에 사고를 내고 도망쳤다. 산비탈에서 버스를 들이받아 버스가 굴렀는데 그는 도망을 쳤다. 경찰이 무서워서 북해도까지 도망쳤으나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밀림속으로 도망쳤다. 처음에는 경찰이 없는 곳에서 2 - 3일 살다가 죽을 각오였으나 원시림생활의 요령이 생겨 그냥 살았다. 그의 웃음속에서는 은거자隱居者의 비애悲哀 보다는 자유인의 밝은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집 주위를 개간하여 감자와 배추를 심고 밀림에 함정이나 덫을 만들었다. 밭에서는 혼자 먹고 남을만큼늬 수확이 있고, 함장이나 덫에는 들돼지, 토끼, 여우가 걸리고 때로는 곰도 잡혔다. 강에서 잡힌 영어, 송어, 가재들도 식탁에 올랐고.
‘작년 가을에 손님이 찾아왔어요. 때가 되어도 동면구멍을 못 찾은 떠돌이곰이었지요. 나는 곰을 겁내지 않습니다. 보시다싶이 이 집은 통나무로 만들어 튼튼하니까요. 집 주위를 빙빙 도는 곰이 불쌍해서 감자와 마른고기를 던져주었더니 먹고 사라졌다가 3일 후에 또 찾아왔어요. 곰은 한겨울 내내 찾아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원시림에서 사는 인간의 고독감이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고독한 사내는 밤 새 내가 잠들지 못 하게 했다. 자유와 고독은 하나의 낱말인가? 이튿날, 나는 밀림의 고독생활을 청산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74. 봄
네무로평야의 봄은 눈사태에서 시작된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봄의 햇볕에 조금씩 녹다가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진다. 그러면 연쇄작용連鎖作用이 되어 주변의 눈들이 쏟아져내리고 여기저기서 산울림이 일어난다. 그게 봄이 왔다는 신호다. 산사태로 흘러내린 눈은 계곡으로 밀려들고 얼었던 계곡의 얼음이 눈 녹은 물과 합쳐져 흘러내리면 계곡에서도 요란한 물소리가 시작되는데 이제 네무로의 봄이다. 산악지대에는 연초록 풀이 돋아나고 양지쪽에는 짐승들이 나타난다. 동면을 하던 곰, 뱀들이 지지개를 켜고 여우, 토끼, 다람쥐가 구멍에서 얼굴을 내민다. 해마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총을 들고 사냥을 했다. 사냥이라기 보다는 산책散策이었다. 따스한 햇볕, 싱싱한 풀 그리고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동물들이 좋았다. 도처에 생물이 약동하는 네무로평야가 좋았다. 봄의 동물은 옷을 갈아입는다. 여기저기 동물의 털이 널려있다. 곰과 사슴도 두꺼운 털옷을 벗고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는다. 여우와 토끼는 옷을 알록달록한 보호색으로 바꾼다. 새들도 마찬가지다. 봄이오면 털갈이를 하고 높은 음색音色으로 지저귄다. 사랑의 노래다. 꿩을 위시한 뭇새들이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춤을 춘다. 사랑의 유혹이다. 봄의 광야廣野는 생기로 가득차고 봄의 향기가 가득차 흐른다. 이 때 가장 많이 걸리는 게 꿩이다. 봄에, 사라에 취한 꿩은 눈부시게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랑놀이를 하다가 엽총의 표적이 된다. 산봉우리에 남은 하얀 눈을 배경으로 화사한 꿩이 날아오르면 정말 아름답다. 그래서 봄의 향연饗宴 펼쳐지는 광야를 돌아다닐 때는 언제나 꿩탄을 준비하고 햇볕이 잘 드는 양지陽地를 찾아다녔다. 그런 어느 날, 눈이 완전히 녹은 양지바른 산중턱을 넘어가다가 꿩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약 20m 전방이었기에 살금살금 접근했다. 꿩의 울음소리가 난 큰 바위 주변에 정신이 팔려 옆으로 스쳐 지나갔던 누르스름한 물체에 무관無關했다. 뭔가 다갈색 흙더미 같은 물체를 지나쳤는데 좀 이상했다. 지금 스쳐지나간 게 바위였나, 흙더미였나? 바위가 다갈색일 수 없고 흙더미라면 너무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되돌아봤다.
(이크!)
곰이었다. 바위만큼 큰 불곰이 따스한 양지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있었다. 아직 동면의 기분에서 깨어나지 못해 사람이 옆을 지나갔는데도 모르고있었다. 미련한 곰이었다. 그리고 미련한 사냥꾼이었다. 곰이나 사람이나 다 따스한 봄볕에 취해있었다. 곰과의 거리는 불과 2m. 곰이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내 총에는 꿩탄이 장진되어 곰에게는 아우런 타격을 주지 못 한다. 살 길은 하나뿐. 그대로 전진하는 수밖에. 살그머니 발을 빼는데 공교롭게도 발이 진흙에서 빠져서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주어 발을 빼면 소리가 날거고. 나는 악몽을 꾸고있는 것처럼 공포속에 있었다. 등뒤에서 악마가 쫓아오는데 발걸음이 띠어지지 않는 꿈, 몸부림 끝에 겨우 발이 빠졌다. 한 걸음, 두 걸음 …. 뒤를 돌아다보지도 못 하고 온 신경을 등뒤에 돌려 곰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계속 걸었다. 부스럭소리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돌아보지 못 했다. 돌아봐서 뭘 하랴? 동면에 깬 곰은 배가 고플 것이고 뭣이든 눈에 보이는 건 잡아먹으려들텐데 …. 신경이 마비되어 마치 허공에 떠있는 듯 감각도 없었다. 허깨비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느낌으로 걸었다. 곰과 거리가 10여미터. 나는 비로소 뒤를 돌아다보았다.
(앗!)
곰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있었다. 이상한 놈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고 주시注視하고있었다. 필경 아까 부스럭소리가 날 때부터 곰은 눈을 떠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있었던 것 같았다.
(이젠 다 틀렸구나!)
나는 절망에 아찔했으나 곰은 낮잠을 자던 그대로였으며 눈에는 살기가 없었다. 낮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 한 것 같았다. 나는 곰을 보면서 뒷걸음질쳤다. 곰이 덤벼들면 꿩탄으로 눈을 쏘아 시간을 벌고 곰탄을 재장탄한다는 계획이었으나 그 계획이 무모하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곰이 덤벼들지 않았다. 뿐더러 내가 자기를 해치지 않을거라고 생각한 듯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불곰을 많이 보았지만 사람을 보고 덤벼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잠을 자는 놈은 처음이었다. 봄탓이었을까? 노곤해서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진 모양이었다. 좌우간 나는 죽음을 비켰다. 20여미터를 뒷걸음질 친 나는 바위 뒤에서 곰탄을 장전했다. 그러나 다시 가서 곰에게 쏠 생각은 없었다. 봄탓이었을 것이다. 봄은 동물을 이상하게 만든다. 내 사냥조수 사또도 그런 일을 당했다. 그는 어느 해 초봄에 낚시를 하려고 계곡으로 갔다. 얼음 녹은 물에 산천어가 뛰놀았다. 사또는 낚시질을 하다가 노곤해서 잠시 눈을 붙였다. 바위 위에 열덟팔자로 누워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한 두어시간 자던 그는 누군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일어났다.
‘누구냐? 장난을 치는 놈은 ….’
고함을 지르며 일어났는데 장난을 친 장본인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곰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곰새끼였다. 암콤이 동면에서 깨어나 나올 때는 새끼를 데리고나온다. 동면을 하면서 출산한 새끼며 대개 암수 두 마리고 개만하다. 사또에게 장난을 친 새끼는 한 마리였으며 송아지만 했다. 곰새끼는 원래 장난을 좋아하는데 사또의 얼굴에 물을 뿌려놓고 사또가 놀라 깨는 걸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단잠에서 깬 사또는 정신이 얼떨떨했으며 곰새끼가 말만큼이나 크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려고 했는데 실수였다. 사또가 정상적으로 대응을 했으면 곰새끼는 달아났을텐데 곰새끼는 달아나려는 사람을 업수이봤다. 사또를 등뒤에서 꽉! 껴안았다. 새끼라고 하지만 굉장한 힘이었으므로 사또는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사또는 곰새끼와 뒹굴면서 서로 차고 때리고 할퀴었는데 사람만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얼굴에서는 피가 흘렀다. 사또는 기진맥진氣盡脈盡하여 계속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지르며 도망하다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수潛水를 해서 10여미터나 도망을 하고 나와보니 곰새끼는 장난상대가 달아나버려 재미없다는 듯 바라보고있었다. 피를 흘리며 돌아온 사또의 얘기를 듣고 웃었는데 이 역시 봄탓이었다. 곰새끼도 그렇지만 여우도 봄을 탄다. 여우는 곰처럼 완전동면을 하지 않고 동면 중에도 먹이를 찾아다닌다. 눈이 내리면 거의 반半 기아饑餓상태에서 지낸다. 굶주림에 못이겨 인가에 내려와 닭이나 돼지를 노리다가 개에게 물려죽기도 한다. 그러나 봄이 되면 여우는 되살아난다. 다람쥐나 땅쥐가 돌아다녔고 토끼도 봄풀을 뜯어먹으려고 나왔다가 굶주린 여우에게 먹힌다. 그 때 포수들은 그 여우를 노린다. 북해도의 여우는 동체胴體가 크고 털이 좋다. 특히 은색여우는 쌀 서너 가마니값으로 팔린다. 3월 초부터 중순까지가 여우사냥 적기다. 그 이후에는 여우가 털갈이를 하여 똥값이다. 나는 곰사냥을 하다가 여우를 만나는데 큰 사냥감을 쫓는 포수는 작은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미신迷信이 있다. 여우사냥은 개를 데리고 한다. 여우냄새를 맡고 포기한 개를 보지 못 했다. 개와 여우는 철천지원수가 아니면 전생前生의 원수 같다.
어느 해 초봄, 나는 아이누개를 데리고 곰사냥에 나섰다. 그런데 산중턱까지 곰을 추적하던 개가 갑자기 변심을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챘다. 여우였다. 여우의 강한 노린냄새가 짙게 풍겼다. 여우냄새는 몸에서 나는 게 아니라 분비물에서 나는데 겨우내 굴에서 칩거蟄居한 여우냄새는 지독했다. 예민한 코를 가진 개가 그 지독한 여우냄새를 그냥 둘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내가 제지할 여유도 없이 개가 돌진했다. 웡! 웡! 하는 개짖는 소리에 여우는 기겁을 하고 산 아래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나는 여우를 보고 개를 만류하는 걸 포기했다. 보기 드문 큰 은색여우였다. 땅에 딱 붙어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여우는 보기에는 개보다도 민첩하고 빠를 것 같지만 사실은 겅충겅충 뛰어가는 개가 여우보다 빠르다. 수십미터 단거리는 여우가 빠르지만 100m 이상 달리면 개가 빨라진다. 장거리선수와 단거리의 경쟁인데 승부는 장거리에 달려있다. 여우와 개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산중턱에서 넓은 광야로 내려와 양쪽 모두 풀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우가 빨랐다. 그러나 여우는 개짖는 소리에 쫓겨 달아났고 개는 여우가 달아나는 방향을 보고 지름길을 선택하여 쫓기 때문에 1 - 2분 후에는 거리가 바짝 단축되었다. 이에 겁을 먹은 여우는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것 같았으나 높은 곳에서 보니 여우는 한 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고 개는 그 원 안에서 여우를 쫓았다. 3 - 4분 후 여우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고 개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이미 개는 여우의 꼬리에 까지 다가갔으나 덮치지 않았다. 귓가에 대고 웡! 웡! 짖었을 뿐 직접공격을 하지 않았다. 속설에서 여우는 사람을 호린다고 했으나 오히려 개가 여우를 홀려버렸다. 그리고 5 - 6분 후 여우는 체력이 다 떨어졌다. 여우가 넘어졌다. 등을 땅에 대고 누워 네 다리를 들어 발톱을 세우고 아가리를 벌려 개를 위협했다. 그러나 개는 여우를 무시했다. 노리높여 한 번 짖더니 여우를 덮쳤다. 여우가 킥! 독기어린 소리를 지르며 앞발로 개의 머리를 쳤다.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는 개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한다. 고함만 질러도 꼬리를 말고 달아나는 개만 보았기 때문이지만 개는 무서운 맹수猛獸다. 그 몸무게, 용감성, 영리한 두뇌, 민첩한 동작 어느 것을 보아도 여우 따위가 덤빌 상대는 아니다. 그러나 그 때 여우는 최후의 발악을 했다. 앞발의 발톱을 세워 발길질을 한 다음 개의 목줄을 물었다. 아이누개는 그런 여우의 발악을 무시했다. 목을 문 여우의 상체를 끌어당겨 앞발로 그 대가리를 꽉! 눌렀다. 견디지 못 한 여우가 개의 목줄을 놓고 개 밑에 깔렸다. 그러자 개가 여우의 목줄을 물었다. 아주 깊게 물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피가 줄줄 흘렀다. 동맥이 끊겼다. 내가 산중턱에서 내려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개는 낮잠을 자고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훌륭한 은색여우였다. 냇가로 가 여우껍질을 벗겨 말리고 개와 나는 한잠 잤다. 일어났을 때는 오후 서너시가 되었으므로 그 사냥을 끝냈는데 나중에 보니 나는 횡재橫財를 했다. 곰쓸개를 사러왔던 상인이 뒤뜰에 널린 은색여우껍질을 보더니 이내 못 본 체하고는 곰쓸개 흥정이 끝나자 거벼운 투로 말했다.
‘저 뒷마당의 여우껍질을 저에게 주십시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마누라에게 선물하려고 합니다.’
나는 상인들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 여우껍질은 보통여우가 아닙니다.’
‘그래요? 정말 그렇군. 그럼 값을 더 얹어드리지요.’
상인은 결국 은색여우껍질을 보통여우의 다섯배나 주고 사갔다. 나는 아이누개 덕분으로 횡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진짜 횡재를 한 것은 상인이었다. 상인은 은색여우껍질을 전문적으로 손질하여 도꾜의 미쓰비시백화점에 팔았다. 내가 넘긴 금액의 12배가 넘었다. 당시에는 귀부인들이 여우껍질을 목도리로 애용하는 걸 신분으로 과시했기 때문에 은색여우껍질은 미쓰비시에서 두 번째 고가高價였다. 내가 - 아니 아이누개가 잡은 은색여우껍질은 어느 황족皇族부인이 소장所藏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사냥꾼이야기 - 7편> 홍학봉洪學奉 기記, 김왕석 역譯
<목차>
<한국의 사냥꾼>
75. 사슴 사로잡이/ 76. 살인곰/ 77. 늑대/ 78. 지리산/
79. 선불맞은 산돼지/ 80. 사냥의 재미/ 81. 젊은곰의 순대/
82. 웅담熊膽과 녹용鹿茸/ 83. 암살자暗殺者 표범/ 84. 맹수猛獸사냥개들
<한국의 사냥꾼>
홍학봉포수는 한국에서는 겨룰사람이 없는 명포수다. 그는 지리산, 설악산과 백두산은 물론이고 멀리 동부중국(만주)과 러시아령領 시베리아까지 돌아다니면서 46마리의 곰, 8마리의 호랑이를 잡았고 산돼지, 사슴, 노루 따위는 헤아릴 수 없다. 그는 한 때 소위 조선총독부의 촉탁엽사囑託獵師, 영국박물관 전속專屬 동물수집엽사로써 일을 했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은 자유스러운 포수로 살았다. 맹수를 잡는 프로헌터로써 그는 내키는대로 한국, 중국과 러시아국경을 넘나들며 맹수들과 싸웠다. 그래서 <학봉이가 노리는 짐승은 1주일 이상 사는 예가 없다>라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무쇠다리 사나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나와 같이 사냥을 한 친구들은 대부분 죽었지. 범에게 물리고, 곰에게 찢기고, 산돼지에게 받쳐서. 내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奇蹟이야.’
그는 몇 년 전에도 지리산에서 곰새끼를 생포하는 등 이제는 고향 경기도 의정부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제 그가 할 일이란 평생을 짐승들과 같이 살아온 그의 전기傳記를 기록하는 일이다. 한 사람의 포수의 전기가 아니라 한국, 중국 그리고 시베리아의 산야山野와 그곳에 서식히는 뭇짐승들의 생태 야사野史다.
75. 사슴 사로잡이
우리들은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 만주(동부중국)으로 넘어갔다. 포수이고 리더인 나(홍학봉)와 발자국꾼 박문천 그리고 몰이꾼 박원유 - 모두 서른 안팎의 장년壯年들이고 하루에 산길 10Km 쯤은 예사로 달렸다. 우리들은 함경북도 두산읍에서 두만강을 끼고 서쪽으로 백리상창을 거쳐 만주땅에 들어섰다. 만주땅 옥돌골을 지나 버들궁까지 사뭇 사슴의 발자국을 추적했다. 사슴사냥을 하기 위해서? 천만에. 총으로 쏘아 잡으려고 했으면 그 놈은 벌써 죽었다. 우리는 그 사슴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사로잡으려는 것이다. 늦봄 눈이 녹는 길을 달렸으므로 전신이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사슴을 사로잡기 위해 깽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면서 추격을 했다. 깽과리소리에 놀란 버들궁의 경찰서원들이 달려와서 대뜸 총뿌리를 들이댔다. 산적山賊으로 알았다.
‘도대체,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요?’
그런 질문이 나올만 했다. 우리는 줄을 카우보이처럼 어깨에 매고, 양손에는 깽과리와 나팔을 들었으며, 도끼와 통올가미를 등에 꽂았다. 볶은 쌀을 담은 자루를 배에 감고, 물통을 허리에 찼다. 얼핏 보면 광대廣大 같기도 하고 산적 같기도 했다.
‘포수? 무슨 놈의 포수가 그 모양이요! 뭐라고? 사슴을 사로잡는다고!’
일본인 보안주임의 눈이 동그레졌다. 그는 두꺼운 안경 넘어로 우리를 훑어봤다. 마치 미친놈 보듯이.
‘아! 사슴을 총으로 쏘아잡기도 어려운데 …. 당신들은 사로잡겠다는 말이요?’
그렇다. 우리는 이미 서너 마리의 사슴을 사로잡았으며 이번에도 기어히 잡을 것이다. 사슴은 1년에 한 번 뿔을 간다. 매년 늦봄 혹은 초여름에 묵은뿔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뿔이 솟아오른다. 붉으스레하게 솟는 그 뿔이 바로 녹용鹿茸이다. 그런데 사슴을 죽이지 않고 잡아 사육飼育을 하면 매년 그 값진 녹용을 얻을 수 있으며 잘 하면 새끼도 칠 수 있다. 북한과 만주에 서식하는 사슴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녹용이기 때문에 그 사슴을 사로잡겠다는 것은 포수들의 꿈이다. 나는 그 때 이미 서너 마리의 사슴을 사로잡았으며 그 사슴들의 자손들은 아직도 사슴목장에서 사육되고 있다.
‘사슴을 어떻게 사로잡겠다는 말이요?’
‘만주포수들은 몰라도 우리는 사슴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두고보시오. 며칠 후에는 사슴에게 수갑手匣을 채워 연행連行해 오리다.’
보안주임은 그 농담에 기분이 좀 풀렸다.
‘당신들 신분을 보장해줄 사람이 여기 있소?’
‘있지요. 왕소인대인입니다.’
‘왕소인대인?’
왕소인대인은 그 지방에서 유명한 한약상漢藥商이고 갑부甲富였다.
‘우리는 그에게 사슴대가리를 많이 팔았습니다.’
왕소인대인은 만주에서 으뜸가는 녹용제작 기술자였다.
‘좋소. 그렇다면 당신들을 연행하는 건 보류하고 왕대인에게 조회照會를 하는 동안 주막에서 머물도록 하시오.’
우리는 한만韓滿국경에서 그 사슴발자국을 발견했다. 눈이 녹은 땅에 선명鮮明하게 찍힌 발자국은 엄청나게 컸다. 사슴은 종류가 많은데 북한과 만주국경에 사는 사슴은 말만큼 크다. 물론 그에 걸맞게 큰 뿔을 지니고 있으며 뿔의 질質도 세계 최고다. 그 놈만 사로잡으면 지금 사육하고 있는 암컷들과 교배交配시켜 개량종改良種을 만들 수 있으므로 기어코 사로잡아야 하다. 우리가 사슴사로잡이의 마지막계획을 의논하고 있을 때 왕댕니이 경찰들과 함께 왔다. 그는 우리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저 사람들은 동양에서 으뜸가는 포수다>라고 말했다. 왕대인은 사슴을 사로잡겠다는 우리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사슴을 우리가 부르는 값으로 사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슴을 사로잡는 방법은 뭘까? 아주 간단한 원리다. 사슴을 신경쇠약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다. 추격하면서 일부러 깽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어 사슴을 극도의 공포속에 몰아넣어 그의 정신을 빼앗아버린다. 물론 처음에는 도망친다. 사람들의 추격을 알아채고 전속력으로 달아난다. 사슴은 한 번에 4 - 5m를 뛰며 사슴이 달리는 걸 먼데서 보면 마치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뛰는 사슴과 걸어서 추격하는 사람들의 거리는 멀어지며 얼핏 생각하면 사람이 사슴을 사로잡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보인다. 그러나 사슴은 경주에서 거북이에게 지는 토끼우화寓話처럼 나쁜 버릇을 갖고 있다. 사슴은 언제나 자기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회귀성回歸性본능을 가지고있고 일정한 시간을 달리면 휴식을 해야 한다. 사슴은 깽과리소리에 놀라 단숨에 2 - 3킬로를 달리지만 반드시 정지한다. 예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고싶어 한다. 사슴이 쉬고있는 사이에 사람은 쉬지 않고 추격을 한다. 빠르게 걷지만 잡담도 하고 볶은쌀을 먹기도 한다. 그래서 몇 시간 후에 사슴은 깽과리소리를 다시 듣게된다. 사슴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후다닥! 또 몇 킬로를 다시 달린다. 그리고 또 멈추고, 또 깽과리소리가 들리고, 또 뛰고. 이 술래잡기가 반복되면 사슴은 피로가 쌓이고, 제대로 먹지도 못 하여 굶주렸고, 공포가 심하여 신경쇠약에 걸린다. 몸도 몸이지만 그 마음이 노이로제에 걸려 끝내는 바보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추격하는 사슴에게도 그런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어쩌다 멀리서 보면 다리를 절고 있었으며 천천히 가다가도 깽과리소리에 놀라 방향도 없이 마구 달렸으며 어떤 때는 추격을 하는 우리를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 나는 사슴이 이제 바보상태가 되었으며 사로잡을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발자국꾼 박문천이는 귀신같은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발자국만 보고도 암수를 분별하고 짐승의 건강상태도 파악했다. 박문천이가 사슴이 심한 배앓이를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몰이꾼 박원유가 나설 차례였다.
‘이젠 몰아넣을까?’
‘좋지, 저 산마루로 쫓아야지.’
박원유가 가리키는 산봉우리는 산맥의 끝이었으며 그 너머는 만주의 끝도 없는 평야였다. 흙탕물 강도 흐르고.
‘놈이 어디 쯤 있지?’
‘바로 산마루 앞 잔솔밭에 숨어있어.’
우리는 세 방면으로 나뉘어 깽과리와 나팔을 불며 올라갔다. 잔솔밭에서 사슴이 튀어나왔다. 정면의 나와 서쪽의 문천이 소리를 중지했고 동쪽의 원유만 나팔을 불었다. 사슴이 서쪽으로 뛰었다. 서쪽의 문천이가 깽과리를 쳤다. 사슴은 소리가 없는 북쪽으로 돌아섰다. 서쪽과 동쪽을 문천이와 원유가 막고있었으므로 사슴은 북쪽으로 달아나 평야에 있었다. 사슴은 몹시 피로한 것 같았으며 이제는 깽과리소리나 나팔소리도 귀찮다는 태도였다. 우리는 3방면에서 천천히 사슴을 강가로 몰았다. 황토땅이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이었으므로 사람이나 사슴은 뛸 수도 없었다. 특히 발이 가느다란 사슴은 한 발 한 발이 고역이었다. 사슴이 강가에 닿았다. 우두커니 강물을 보고있었다. 만주의 강은 광대하다. 뚝도 없이 낮은지대로 흐르는 강은 폭이 몇 백미터나 되었으며 사슴은 감히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우리들은 삼각포위망을 조금씩 좁혔으며 사람과 사슴의 거리가 약 30m로 좁혀졌다. 자, 이제부터가 문제다. 발자국꾼과 몰이꾼의 일은 끝나고 포수 차례다. 마지막 고비에서 실수를 하면 만사 도루아미타불이다. 우리는 모두 석상石像처럼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겁쟁이 사슴은 위급한 상황이지만 그 위급한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랐다. 이럴 때 사슴을 자극하면 안 된다. 사람과 사슴은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1분, 2분 … 10분. 사슴이 좀 진정된 걸 보고 내가 손을 들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늘을 보면서 슬금슬금 움직였다. 사슴과 거리가 10여미터로 좁혀졌다. 사슴이 부르르 떨었다. 스톱! 또 멈췄다. 이번에는 사슴도 멍! 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서운 것은 보지 않으려는 심사였다. 긴 다리와 긴 목의 사슴은 매우 고독孤獨하게 보였으며 그의 눈동자에는 체념滯念이 서려있었다. 몇 분 후 간격을 10m로 줄이고 또 몇 분 후에는 5m가 되었다. 바보같은 사슴은 땅을 박차고나갈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용기를 냈다. 나는 슬그머니 사슴에게서 등을 돌려 올가미가 붙은 밧줄을 끄집어내 몸을 비틀면서 던졌다. 올가미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날아가 사슴의 목에 걸렸다. 일순 사슴이 슬프게 울면서 앞발을 번쩍! 들어올렸다. 굉장한 힘이었다.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몸을 재꼈으나 줄줄 딸려갔다. 그 때 문천이가 밧줄을 던져 사슴의 뿔에 걸었다. 머리를 움직이지 못 한 사슴은 힘을 쓰지 못 했다. 그 사이에 원유가 사슴의 앞발을 감아 잡아당겼으므로 사슴이 쓰러졌다. 문천이가 달려들어 사슴의 뿔을 잡았다. 사슴이 머리를 흔들면서 발악을 했다. 사슴의 뿔은 보기좋아라고 달린 게 아니다. 문천이가 실수를 한 듯 팔에서 피가 흘렀다.
‘이 새끼가 ….’
내가 덤벼들어 사슴의 목을 안아 눌렀다. 장골 세 명이 달려들었으므로 사슴도 반항을 그쳤다. 2 - 3분 후 우리는 사삼의 네 다리를 묶는데 성공했다.
‘이젠 됐어!’
되기는 됐는데 우리나 사슴이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진흙투성이였다. 검은 헝겊으로 사슴의 눈을 가렸다. 무서운 걸 보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놀라면 사슴이 죽는 수도 있다. 모닥불을 피웠다. 몸을 말려서 진흙을 털었다. 사슴의 몸도 깨끗이 닦았다. 드디어 사슴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뒤처리가 더 어려웠다. 사로잡힌 사슴이 미쳐날뛰거나 굶어죽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극진하게 돌봐주어야 하고 사고없이 운반해야 한다. 들것을 만들어 운반했다. 200Kg이 더 나가는 무게로 힘겨웠다.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날이 어두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사슴을 사로잡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쉬! 쉬!’
사슴을 놀라게 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 창고에 넣었다. 주막에서 털털한 막걸리를 마시고 있을 때 왕대인과 경찰이 와서 자연스럽게 잔치가 벌어졌다. 다음날 우리를 만들어 사슴을 화물차에 실려보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왕대인은 우리가 잡은 사슴이 느리와 토레기의 트기인 청靑토레기라고 감정鑑定했다. 느리는 만주북방의 대형大形사슴이며 말 보다 더 컸다. 토레기는 한국북방의 작은 사슴인데 녹용은 세계최고였다. 이틀동안 왕대인집에서 쉬고 다시 사슴 사로잡이에 나섰다. 청토레기를 쫓다가 옥돌골로 들어오는 산어귀에서 우리가 쫓던 사슴이 다른 두 마리와 어울렸던 걸 확인해두었던 것이다. 문천이가 발자국을 보고 암수 두 마리의 토레기라고 말했다. 옥돌골과 버들궁에서는 다시 요란한 깽과리와 나팔소리가 일어났다. 연 사흘 동안 쫓았으나 토레기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몰이를 잘못해서 토레기가 빠져나갔다.’
문천이와 원유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원유의 잘못이 아니라 토레기가 너무 약은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이꾼 세 명을 추가했다. 작전을 바꿨다. 사슴을 산 위로 몰아올리기로 했다. 산 위는 절벽이었고 높이 20m나 되는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못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문천이에게 핀찬을 먹은 원유가 분발하여 사슴을 절벽 위로 몰아올렸다. 높이 20m의 절벽 위에서 사슴과 격투를 벌인다는 것은 사람도 사슴도 다 위험했다. 사슴도 그 걸 아는 듯 절벽 밑을 내려다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영리한 토레기도 침착성을 잃고 절벽 위를 빙빙 돌았다. 사슴을 포위해놓고 그 자리에서 점심을 먹으라고 지시했다. 사슴들은 이때까지 자기들을 쫓아온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까지 와서는 생판 딴전을 부리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살피고있었으나 사람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사슴에게는 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보이지 않게 앉은채로 슬금슬금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갔다. 토레기는 그게 못마땅해서 발굽으로 바위를 찼다. 바위에서 불꽃이 튀었다. 거리가 5m로 단축되었을 때 몰이꾼이 그만 기침을 했다. 팽팽한 긴장속에서 기침소리에 놀란 사슴이 발굽을 굽혔다. 뛰어내릴 전조前兆였다. 올가미를 던졌다. 올가미가 사슴의 목에 걸렸다. 동시에 몰이꾼들이 사슴에게 덤벼들었다. 사슴이 꼼짝 못 하게 머리를 잡고 몸에 올라타서 눌렀다. 얼핏 발굽을 묶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토레기를 잡아놓고 암컷을 쫓았는데 앞서가던 문천이가 땅바닥을 가리켰다.
‘뭐야! 뭐.’
사슴발자국 옆에 또 하나의 발자국이 사슴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 표범이군.’
‘응, 표범이지.’
문천이는 표범을 싫어했다. 누구나 표범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나 문천이는 같이 사냥을 했던 친구가 표범에게 물려 병신病身이 된 뒤 유난히 표범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원유는 만용蠻勇을 부린다고 할만큼 모험을 좋아했다. 그래서 원유는 억지소리를 하며 우겼다.
‘표범 같으면 더욱 좋지. 꿩 먹고 알도 먹을 수 있잖은가 말야.’
‘이 사람아, 사슴은 이미 표범의 뱃속에 들어가있을텐데 그 게 무슨 망발妄發이야?’
일단 몰이꾼을 돌려보냈다. 표범이 나타났다면 그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천이는 마지못해 천천히 따라왔다. 벨기에제製 6연발 산탄총에 장전裝塡을 하고 표범을 쫓았다. 문천이의 말이 옳았다. 산중턱 큰 바위 뒤에 사슴의 시체가 있었다. 시체라고 해봐야 뿔, 발목 그리고 바위 위에 남은 시뻘건 피 뿐이었다. 내가 장탄된 총을 어깨에 메고 앞서 하산했다.
‘이젠 끝났어. 우리는 사슴을 잡으려고 했지 표범을 잡으려는 건 아니거든.’
76. 살인곰
함경남도와 평안남도의 접경을 이루는 언진산맥 기슭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오래토록 짐승고기 맛을 보지 못 했다. 1922년 소위 일제日帝 대정 말엽 이 지방에는 오래토록 눈이 내리지 않아 겨울가뭄이 계속되었다. 눈이 안 왔다는 것은 짐승발자국을 찾지 못 해 사냥을 못 했다는 걸 의미한다. 함경남도 영흥군 산성리 도토리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였으며 사람들은 돌투성이 밭에서 나는 옥수수나 감자보다는 오히려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해에는 흔한 산돼지, 노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기다렸던 눈은 음력陰曆 2월 초에 쏟아졌다. 함박눈이 쏟아져 온 산이 하얗게 옷을 갈아입자 마을사람들은 바빠졌다. 이튿날 눈이 그치자 젊은이 여덟사람이 마을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전을 했다. 총은 없었으나 창을 들고나갔다. 3 - 4m의 대나무 끝에 시퍼렇게 날이 선 무쇠날을 달아 던지기도 하고 찌르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은 그 창으로 산돼지나 노루를 잡았으며 때로는 호랑이나 곰하고도 싸웠다. 지형을 잘 알고있었으므로 산돼지가 많은 솔밭으로 갔다. 산돼지발자국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 아마 사냥꾼들이 오는 걸 보고 달아난 것 같았다. 사냥꾼들은 기민機敏하게 움직여 포위를 하고 산돼지를 몰았다. 포위망包圍網에 산돼지가 걸렸다. 의외로 400Kg이 넘는 거물이었다. 포위망을 뚫으려다가 산돼지는 어깨와 뒷다리에 창을 맞고 피를 흘리며 달아났다. 사냥대가 쫓았다. 커다란 암벽岩壁 밑으로 비슬거리며 달아나는 산돼지를 발견하고 고함을 지르며 추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창을 맞은 산돼지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곰의 영역이라는 걸 망각했다. 대체로 호랑이는 사방 400Km의 영토를 가지고 있고, 곰은 호랑이영토 안에 100Km 정도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호랑이도 자기 영역 안에 있는 곰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는다. 맨 선두에 선 황서방이 암벽을 돌아가는 산돼지를 발견하고 창을 던지려는 순간 암벽 한구석의 동굴에서 무서운 노호怒號가 터졌다. 웍! 웍! 소리와 함께 시커먼 괴물이 튀어나왔다. 황소보다도 더 큰 흑곰이었다. 흑곰이 황서방을 앞발로 쳤다. 황서방이 비명을 지르며 실신해버렸는데 흑곰은 실신한 황서방의 두 다리를 잡아 올려 쭉 찢어버렸다. 피를 본 흑곰은 두 다리가 찢긴 황서방의 목을 잡아늘여 빼고 몸을 산산조각냈다. 황서방을 뒤따르던 젊은이들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 누군가 창을 던졌으나 흑곰은 창을 지푸라기 털 듯 털어냈다. 곧 소문이 돌았거 인근에서 곰사냥을 하고 있었던 나도 그 소문을 듣고 도토리마을에 갔다. 내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황서방의 장례식이 끝났다. 장례식이라야 시체도 없는 장례식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에스키모처럼 괴상한 모자를 덮어쓴 나를 의아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와 동행했던 노진수포수는 안면顔面이 있어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이 양반은 장안長安에서 이름난 명포수요. 곰을 잡으려고 왔는데 나는 이 양반을 돕고있소.’
마을사람들은 젊은 내가 그 지방에서는 이름이 꽤 알려진 노포수를 조수로 데리고있다는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내가 갖고있는 총신 두 개의 최신 연발총이 노포수의 무라다총 보다 두 배는 더 위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납득이 된 그들이 돕겠다고 했으므로 젊은이 한 사람을 안내인으로 삼아 출발하여 정오께 흑곰이 나왔다는 현장에 도착했다. 창을 든 안내인은 뒤로 물러서게 하고 노포수와 함께 조심스럽게 암벽동굴로 접근했다. 황서방이 당한 곳에는 아직 피가 홍건했으며 시체는 없었다. 관솔에 불을 붙여 동굴 안으로 던졌으나 흑곰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동굴 주변을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서쪽에 흑곰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는데 흑곰은 평안남도쪽으로 달아났다. 험준한 산악지대였다. 오후 2시께 진눈깨비가 내렸다. 희미한 발자국도 사라져버렸다. 살인곰사냥을 포기하고 돌아서려던 때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는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총소리로 봐서 맹수용 총이였고 서너 사람이 연속적으로 쏜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누가 곰사냥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인근의 제일 높은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산봉우리 서쪽에 열서너 명이나 되는 사냥꾼들이 반월형으로 흩어져 산봉우리로 올라오고 있었다. 맹수를 포위하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완전히 포위가 되지 않았으며 맹수가 우리쪽으로 오고있었다. 나는 노포수에게 <곰이 이쪽으로 오고있으니 빨리 장전을 하라!>고 지시했다. 곰이 오는 길은 잡목림이라고 판단했다. 남향의 산은 중턱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잡목림이 길게 형성되었는데 곰은 그 잡목림에 숨어들거라고 판단하고 잡목림에 숨어 대기했다. 몰이꾼들이 양쪽에 배치되어 몰이를 하고 사냥꾼들은 총 끝에 빨간 헝겁을 매달아 표시를 했다. 진눈깨비가 계속 내려 시야가 트이지 않았다. 또 총소리가 들렸는데 어쩐지 자신이 없는 총소리였다. 원거리에서 덮어놓고 쏘는 총소리였다. 필경 경험이 없는 아마튜어 사냥꾼들 같았다. 그런 총에 곰이 맞을 리는 없었으나 곰을 우리에게 몰아주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었다. 나는 곰이 우리한테로 온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잡목림의 커다란 바위 뒤에서 기다렸다. 바람이 우리 반대쪽에서 불어오고 있으므로 곰이 우리냄새를 맡고 도망할 염려도 없었다. 문제는 소리만 내지 않으면 된다. 내리는 눈을 그대로 덮어 쓰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 때문에 시야가 흐렸으므로 나는 눈 보다 귀에 의존했다. 긴 시간이었다. 사실은 20여 분 정도였으나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멀리서 가물가물 들려오던 몰이꾼들의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나 잡목림은 조용했다. 곰이 나타나지 않았다.
(헛수고를 했나?)
잘못 짐작했는가 하며 막 일어서려는 순간, 쁑! 탄환이 날아왔다. 탄환이 가까운 돌에 맞아 불꽃이 튀었다. 총소리로 보아 노포수의 총탄이었다. 아주 위험한 사격이다. 이어 노포수의 고함이 들렸다.
‘그리로 간다! 곰이 거기로 가!’
(바보자식, 고함을 지르다니 ….)
총을 한 방 갈겨주고싶은 화를 누르며 바위 뒤에 계속 엎드려있었다. 마치 화석化石처럼 숨조차 죽이고 기다렸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내가 숨어있는 곳으로 오고있었다.
(오지 마라, 바보들아 제발 오지 마! 곰과 내가 일대일로 싸우게 좀 내버려둬!)
나는 속으로 절규絶叫를 하며 안타까왔다. 몸은 얼음처럼 차가왔으나 속에서는 피가 펄펄 끓었다. 극도의 긴장상태의 귀에 뭔가 들렸다. 우두둑! 우두둑!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소리가 뚝! 끊겼다.
(착각이었을까?)
아니다. 이번에는 쿵! 쿵! 땅이 울렸다. 땅에 밀착되어 엎드린 내게 땅이 울리는 게 느낌으로 감지되었다. 코에서도 냄새가 감지되었다. 곰 특유의 노린내가 났다. 나는 소리와 냄새가 나는 지점을 응시했다. 진눈깨비로 얼룩진 허얀 공간에 시커먼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잘 보려고 일어섰는데 불과 10여미터 앞에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곰도 나를 발견하고 노려봤다. 곰이 벌떡 일어섰다. 아가리를 떡 벌려 무서운 노호를 내뱉으며 덤벼들었다. 나는 그 순간 - 곰이 일어서는 순간을 기다렸었다.
‘불 받아라! 곰아.’
10여 미터 거리는 조준을 할 필요도 없었다. 머리통을 쏘았다. 픽! 밤톨만한 납덩어리가 곰의 머리통을 부수는 소리였다. <우 ….> 하고 곰이 신음하며 주춤했다.
(이 건 어쩌냐?)
제 2탄을 심장에 보냈다. 그러나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머리에 총탄을 맞고 빈사瀕死상태에 있던 곰이 심장에 제 2탄을 맞고는 마치 소생주사蘇生注射를 맞은 것처럼 일어나 덤볐다. 불과 7 - 8m 거리였으므로 재장탄할 여유가 없었다. 총대로 곰을 후려치려는데 곰이 앞발을 내밀었다. 총대로 앞발을 후려갈겼는데 그만 실수로 빗나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딱 감고 다음에 일어날 모든 걸 각오했다. 그러나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떴다. 곰이 내 옆으로 지나갔다. 땅에 넘어진 나를 두고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곰은 마치 몽유병자夢遊病者처럼 멍! 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살았다!)
나는 얼핏 일어나 바위 뒤에 숨으면서 재장탄을 했다. 탄창에 탄환이 꽉! 박히는 걸 보고 나는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곰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바위 옆으로 돌아갔는데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가까와졌다. 나는 초조해졌다. 주위를 살폈으나 곰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아차!)
그제서야 나는 곰이 있는 곳을 짐작했다. 내가 올라가 있는 바위 밑이 수상했다. 곰이 숨을 곳은 거기뿐이었다. 바위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바위 주변을 살폈다. 곰이 있었다. 상반신을 바위에 기대고 서있었으며 주변은 피바다였다. 곰이 눈을 뜨고 나를 봤으나 간신히 앞발을 내밀어 휘져었을 뿐. 총신을 쑥 내밀며 머리에 또 한 발 먹였다. 곰이 털석 쓰러졌다. 나도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학봉이! 학봉이.’
‘학봉이 어디 있어?’
나는 귀찮아서 대꾸를 했다.
‘여기야, 여기.’
노포수가 달려왔다. 거대한 곰을 보고 놀랐으나 이내 두 손을 펴들고 소리쳤다.
‘잡았다! 잡았어. 학봉이가 곰을 잡았어.’
몰이꾼들도 달려왔다. 그들은 곰을 보자 환성을 올리며 춤을 추었다. 극도의 흥분이 그런 우스운짓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염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10여 명이나 되는 사냥꾼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우리 보다 먼저 곰을 발견하고 쫓던 사냥꾼들이었다. 곰에 대한 기득권을 가진 사냥꾼들이고 우리는 남의 사냥감을 가로챈 사냥꾼이었다. 그들과 시비是非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살기등등殺氣騰騰한 기세였다. 그들은 죽은 곰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나를 보자 주춤했다. 나는 일부러 그런 자세를 했다. 죽은 곰은 내가 잡았고 내 것이니 잔소리 말라는 시위였다. 대뜸 시비쪼로 나왔다.
‘그 곰은 우리가 잡은 거야. 내놔!’
일본말이었다.
‘이 곰은 내가 잡은 거요. 내거요!’
나도 일본말로 대꾸했다.
‘뭣이! 건방지게….’
선두의 콧수염을 기른 일본인이 고함을 지르며 총으로 내 가슴을 겨누었다. 버릇없는 놈이었다. 나는 잠자코 가슴을 겨누고 있는 총신을 보면서 차디차게 반문反問했다.
‘쏠 작정이요?’
왼손에 쥔 내 총과 상대편의 총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그 때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홍포수 아니요? 나 미가와야 ….’
미가와는 당시 경성전기회사의 중역重役이었고 나와는 안면이 있었다.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에 앞서 죽은 곰의 시체를 검사했다. 곰의 몸에는 단 세 발의 총탄자국이 있었을 뿐. 내 총탄은 내가 손수 제작한 것이므로 아마튜어들이 쏜 총탄은 단 한 발도 곰에게 맞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었다. 빗맞았어도 한 발이라도 맞았으면 협상이 달라진다. 여덟 발을 쏘았으나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기氣가 죽었다. 말하자면 13명의 포수들이 연 사흘동안 곰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엉뚱하게 곰을 빼앗긴 결과였다. 사냥꾼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미가와는 <같이 온 사람들 중에는 일본 고관高官이 있다>며 사정을 설명했다. 웃기는 타협안이었다. 첫째, 곰은 일본인들이 잡았다. 둘째, 곰은 홍학봉이가 소유한다. 셋째, 홍학봉은 곰의 껍질을 일본인에게 판다. 넷째, 일본인들은 곰 앞에서 촬영을 한 다음 홍학봉에게 돌려준다. 그들은 아마튜어고 나는 프로다. 그들은 곰을 잡았다는 명성名聲이 필요하고 나는 웅담熊膽과 껍질이 필요하다. 타협이 성립되자 일본인들은 곰을 가운데 두고 기념촬영을 했다. 그 후 잡지에 일본인들의 사진이 게재되었다. 살인곰을 잡았다고 대서특필大書特筆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 경춘철도를 타고 춘천쪽으로 가자면 서울과 추천의 중간지점에 마석이라는 자그마한 역驛이 있었다. 마석역에서 내려 동쪽으로 20Km 쯤 가면 야산野山이 나온다. 동해안으로 뻗친 태백산맥이 퍼져 야산이 파도퍼럼 기복起伏을 이루고 있다. 잡목림에 소나무, 밤나무와 잣나무들이 있었으며, 화전민들이 개간한 밭이 있었고 꿩, 노루, 산돼지들이 나왔으므로 서울의 포수들이 즐겨 찾았다. 1930년 늦봄, 발자국꾼을 데리고 가 마석에서 몰이꾼 두 사람을 고용雇傭이 동쪽으로 갔다. 늘 하던 버릇으로 주막을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늦장을 부렸다. 하루 이틀 늦었다고 산돼지나 노루가 달아날 리도 없고 바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엽장獵場에서 돌아온 사냥꾼들이 하나같이 빈 손이었다. 산돼지는커녕 노루도 볼 수 없었다고 투덜거리며 <공연히 헛수고 말고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노루나 산돼지가 없는 게 아니라 발견을 못 했을 거라고 판단했으나 이틀 후에는 나도 자신을 잃었다. 노루나 산돼지가 증발蒸發해버린 것이다. 산돼지 서식지에 가봤는데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산돼지들이 사라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산돼지는 목욕을 좋아해서 이른바 진흙탕이라는 목욕탕이 있고, 몸을 비벼 기생충을 털어내는데 나무둥치에 비비는 흔적도 있으며, 발자국도 배설물도 없었다. 산돼지뿐만 아니라 노루도 없었다. 그래서 주막에 돌아와 홧술을 마셨다. 하는 수 없었다. 돌아가는 수밖에. 이튿날 늦잠을 잤다. 동료들을 깨워 돌아갈 채비를 해놓고 밖으로 나왔는데 마루에 마을사람들 몇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들이 불안하고 심상찮았다.
‘학봉형, 큰일났소!’
주막집주인이 말했다. 나는 엊저녁에 흔한 도토리묵이나 콩비지찌개 한 접시도 내놓지 않은 게 얄미워서 대답하지 않았다.
‘여보슈, 포수양반. 큰일났소! 어젯밤에 이웃마을에 호랑이가 나왔소.’
‘호랑이?’
나는 크게 놀라 반문했다. 나는 호랑이가 나왔다는 말을 믿지 않는 사냥꾼이다. 벽촌僻村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옛부터 전해 내려온 호랑이 전설傳說 때문에 호랑이 공포속에서 산다. 그래서 걸핏하면 호랑이가 나왔다고 떠들아댄다. 삵괭이가 나와도 호랑이고, 늑대가 나와도 호랑이요, 이상한 발자국 이상함 울음소리만 들려도 호랑이였다. 그래서 <호랑이가 나왔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호랑이라는 말을 듣자 온몸이 찌르르! 떨렸다. 한 마디로, 믿은 것이다. 사냥꾼의 직감이었다. 며칠동안 헛수고를 한 야산의 분위기가 심상찮아 호랑이의 출현出現을 믿게 만든 것이다. 산돼지 노루는 물론 그 많았던 토끼, 오소리도 없었고 온 산이 불안에 잡겨있었다.
(왜, 이럴까?)
나는 몇 번이고 그 원인을 곱씹었고 그 때마다 어렴풋한 해답이 머리에 스쳤으나 <그럴 리가 없다>며 머리를 흔들어버렸다. 그랬는데 호랑이 얘기가 나오자 내 예감과 겹쳐 믿게된 것이다.
‘호랑이가 소를 물고갔소. 큼직한 황소를 물어갔소.’
그 때 그 황소주인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박모라고 자기소개를 한 그는 네살베기 황소를 키웠다. 감자와 고구마를 팔아 작년에 구입한 황소는 박씨의 자랑거리였다. 그 소는 장터에서도 이름난 황소였으며 소싸움에서도 이겼다. 전 날 밤 외양간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깼다. 그의 아내도 일어났다. 박씨는 호롱불심지를 올리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박씨가 밖으로 나가려는 걸 불안해진 아내가 말렸다. 그래서 박씨는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는데 황소가 울었다. 공포에 떠는 울음소리였다. 황소가 발광을 한 듯 발을 굴리고 뿔로 벽을 받았다. 박씨가 벌떡 일어나 막 문을 열려는 순간 황소의 처절凄切한 비명悲鳴이 들렸다. 이어 황소가 마당으로 뛰어나오는 소리가 났다. 와라락! 싸립문이 부서지고 다투는 소리도 났다. 불과 5 - 6분이었는데 박씨는 문고리를 잡은채 떨고있었고, 그의 아내가 남편의 허리를 붙들고 있었다. 밖에서 나던 황소의 거친 숨소리가 비명으로 변했고, 이어 단말마斷末魔의 신음소리가 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박씨는 황소가 죽었다는 걸 알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그의 아내가 허리를 잡고늘어져 애원哀願을 했다. 날이 밝아오자 박씨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함을 쳤다. 마을사람들이 집안으로 뛰어드는 걸 보고 부부도 밖으로 나왔다. 외양감이 부서지고 황소는 없었다.
‘호랑이다!’
모두 불안한 눈을 마주봤다.
(호랑이였구나!)
사실은 산사일 전에 마을의 개 두 마리가 없어졌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냄새를 맡고 숲속으로 사라진 후 없어졌다. <혹 호랑이에게 물려간 거 아니냐>고 했으나 설마! 하며 웃어넘겼다. 주막집에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사냥꾼을 에워쌌다. 호랑이를 잡기 전에는 못 보낸다는 투였다.
‘안 돼요. 우리는 호랑이를 잡을 처지가 아니야요.’
사태를 알아차린 땅달이 이서방 - 몰이꾼이 마을사람들을 가로막았다.
‘첫째, 우리는 호랑이를 잡을 총이 없어요. 저 총은 노루나 잡는 총이고 산돼지도 쏘지 못 해요.’
내가 가진 총은 벨기에제 산탄총이다. 산탄총은 날짐승이나 노루를 잡을 때 사용한다. 산탄총으로 맹수를 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이다. 나는 맹수용 라이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서방이 그런 사정을 설명했으나 마을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입씨름이 벌어졌다. 사냥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설명이 먹혀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좋소. 좌우간 현장에 가봅시다.’
우리들은 박씨집으로 갔다. 현장을 면밀하게 조사했다. <호랑이 발자국을 찾아내라!>고 이서방에게 지시하고 나도 조사했다. 호랑이가 소를 끌고간 핏자국을 따라간 이서방이 바위 위를 손가락질했다.
‘범 발자국이다!’
이서방이 말했다. 나는 즉시 정정訂正했다.
‘표범 발자국이지.’
이서방이 분명히 거짓말을 한 것이다. 호랑이 발자국과 표범 발자국은 수박과 사과만큼 차이가 난다. 무게 80Kg의 호랑이와 20Kg의 표범이 같을 수 없다. 이서방은 단호한 내 말을 듣고 머리를 긁었다.
‘범이나 표범이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요. 아니, 오히려 펴ㅛ범이 더 위험하지.’
그 말은 옳다. 상황에 따라서 표범은 범 보다 더 위험하다. 사람 같은 허약한 동물은 상대가 범이든 표범이든 단 일격으로 치명상을 받는다. 그 건 죽은 황소가 증명한다. 그 큰 황소가 당했는데 사람쯤이야. 표범은 호랑이 보다도 더 무서운 능력이 있다. 은신술隱身術과 기습奇襲이다. 고양이과동물은 자기 몸을 숨기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고, 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가는 재주가 있다. 표범은 자기 몸의 절반도 안 되는 바위 뒤에 완전하게 숨는 다. 호랑이와 달리 나무 위에 올라가는 재주도 있다. 표범은 자기재주를 이용하여 기습을 한다. 표범은 상대의 등뒤나 머리 위에서 기습을 하여 순식간에 목줄을 끊는다. 몰이꾼 이서방은 표범의 습성習性을 잘 알고 있으므로 호랑이사냥을 기피한 것이다. 그러나 사냥대의 책임자는 나다. 그래서 나는 이서방에게 발자국을 추적하라고 명령했다. 이서방이 반발했다.
‘아, 아무 준비도 없이 덮어놓고 추적을 하란 말야?’
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이서방을 쳐다보았다.
(이 친구가 겁먹었군,)
‘이봐, 이서방. 이 건 범이 아니라 표범이야. 범 같으면 자네 말대로 이 산탄총으로는 잡지 못 해. 그러나 표범이라면 문제가 달라지지. 안 그래?’
산탄총은 관통력이 약해 호랑이 같은 맹수에게는 효력이 없다. 맹수는 탄환이 한 개만 들어가는 라이플로 승부를 한다. 그러나 상대가 표범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표범은 라이플 보다는 탄환이 여러 개 넓게 퍼지는 산탄총이 더 알맞다. 표범은 생각보다 피부가 약하고 동체胴體가 작으므로 노련老鍊한 포수는 산탄총을 이용한다. 사냥을 잘 아는 이서방이 그 정도의 이치를 모를 리가 없다.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건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서방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에게는 처자식이 있지 않아.’
‘염려말아. 자네를 위험한 처지에 몰아넣지 않을 것이니.’
황소가 죽은 곳에서 200m 떨어진 곳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반 쯤 흙속에 묻혀있었고 마른 풀로 덮어놓았다. 내장과 갈비는 없었고 대가리와 다리만 남았다. 표범과 황소의 싸움 - 싸움이 아니라 살육殺戮이었다. 황소는 400Kg이고 표범은 20Kg이다. 사람 같으면 싸움이 안 된다. 그런데 황소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목줄이 끊겨 죽었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표범이 밤 11시께 외양간에 접근했다. 부근에 잠복했다가 사람들이 잠든 것을 보고 담을 넘어 침입했다. 황소는 그 기미機微를 알아채고 불안해서 작은 소리로 울었다. 맹수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주인부부가 잠에서 깨어났는데 표범이 눈치를 채고 일단 물러났다. 주인부부가 잠드는 걸 보고 다시 침입하여 황소에게 덤벼들었다. 황소는 외양간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표범이 유도한 것이다. 좁은 외양간에서는 표범의 활동이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 황소의 뿔에 받칠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냄새를 피우고 으르렁거려 위협을 하여 황소를 밖으로 몰았다. 표범은 황소의 등에 올라탔다. 앞발로 황소의 눈을 할켜 눈을 못 쓰게 만들고 목줄을 물어뜯었다. 황소는 출혈과다로 죽었다. 표범은 자기 몸무게의 20배나 되는 황소를 끌고가 먹었다. 그러나 표범의 계산법은 다르다. 목줄을 물어뜯어 피를 빼면 몸무게는 1/ 3로 줄어든다. 그리고 현장에서 배를 갈라 내장을 먹어치운다. 내장은 부패되기 쉬어 빨리 먹지만 역시 몸무게를 줄이려는 계산이다. 피를 빼고 내장을 먹어치우면 400Kg짜리 황소는 200Kg 이하로 줄어든다. 황소주인 박씨는 처참하게 죽은 황소를 보자 통곡했다. 남아있는 고기라도 갖고가려고 했는데 만류했다. 표범이 황소를 풀과 흙으로 덮어놓은 것은 다음에 와서 먹겠다는 심산心算이다. 나는 그 심산을 이용하여 표범을 잡을 작전을 세웠다.
‘그 고기 갖고가서 뭐 하려오? 내버려두시오.’
의아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표범은 다시 와서 고기를 먹을 것입니다. 그 때 내가 표범을 잡겠습니다. 황소 위에 풀과 흙을 덮어 감춘 것은 먹이를 다른 동물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속셈이고 다시 와서 먹겠다는 표시입니다.’
‘그럼?’
이서방이 고함을 질렀다.
‘물론이지. 표범이 남은 고기를 먹으러올 때 잡아야지.’
‘표범은 캄캄한 밤중에 올것인데 어둠속에서 표범과 싸우겠다는 말이야?’
위험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발자국을 추적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건 시간이 걸리고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추적을 하다가 표범의 역습逆襲을 받을 수도 있다. 이서방은 나를 <미친사람>이라고 펄펄 뛰었으나 결정권은 나에게 있었다. 황소주인 박씨도 <표범을 잡기 위해서라면 쇠고기를 포기하겠다>고 했으며, 마을사람들도 나의 계획에 협조하겠다고 나섰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 건 표범과 포수의 대결입니다. 여러분이 나설 건 없습니다. 집에 가서 문단속을 잘 하고 개나 돼지를 보호하십시오.’
마을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몰이꾼을 시켜 남은 눈을 가져와 소의 시체 주위에 깔았다. 사람냄새를 없애고,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믐밤이지만 눈빛으로 다소간 시야를 확보할 수도 있다. 12m 쯤 떨어진 소나무숲에 참호塹壕를 팠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고 위에 나뭇가지를 걸쳐 지붕을 만들었다. 그건 이서방이 펄펄 뛰면서 반대할만한 모험이었다. 표범에게 발견되면 꼼짝없이 죽어야 할 무모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총이 있지 않은가?
(범 같으면 모르지만 표범 따위야!)
표범과 사울 때는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이 그대로 적용된다. 표범은 공격은 잘 하지만 방어에는 약한 동물이다. 그 날 밤, 총과 전지만 가지고 참호에 들어갔으나 표범은 나타나지 않았다. 표범이 황소를 끌고가기 위해 전날 너무 많이 먹었고, 사람들이 오가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라 여겨 실망하지 않았다. 표범은 고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을사람들에게 되도록 밖에 나오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주막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날이 어두어지자 다시 참호에 들어갔다. 전날 밤 경험을 되짚어 소주를 한 병 가지고 갔다. 술로 추위를 면하고 지루함도 달랠 생각이었다. 12시가 되어도 표범이 나타나지 않았다. 소주를 마시니 몸이 후끈거렸다. 그래서 또 마셨다. 그러지 이번에는 스르르 잠이 왔다. 그대로 잠이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이상한 기척에 잠이 깼다. 부드득! 부드득! 소리가 났다. 어둠속에서 눈의 초점을 맞추고 살폈다. 표범이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황소고기를 뜯고있었다. 심장이 고동쳤다.
(안 돼, 침착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조준을 맞추었다. 일반적으로 밤에는 총탄이 조준 보다 밑으로 나간다. 그래서 표범의 상부上部 - 머리를 겨냥했다. 머리가 맞지 않더라도 심장에 맞을 수 있었다. 표범이 두 발로 황소의 머리를 누르고 고기를 한 입 크게 뜯어올렸다.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산탄총에는 여섯 개의 납덩어리가 들어있었으므로 실수할 리가 없다. 캑! 하고 시계태엽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방 더, 소리나는 곳으로 발사했다. 표범의 공격에 대비했다. 총구를 위로 올리고 침호속에 납작 엎드렸다. 10분, 20분 ….
‘학봉형! 학봉형!’
멀리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횃불이 가까이 오고있었다. 내가 염려되어 이서방이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어떻게 돠었어?’
나도 모를 일이다. 핏자국만 남겨놓고 표범을 없었다. 핏자국으로 봐서 표범은 중상이거나 치명상이었다. 중상의 표범을 추격하는 일은 날이 밝으면 하기로 하고 불을 피웠다.
‘이서방, 돈을 걸고 내기를 해도 표범은 죽었네.’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해.’
‘나는 알 수 있어. 총탄이 표범의 머리를 뚫고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포수는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총탄이 허공을 날아갈 때는 흉! 소리가 나고, 보드라운 피부를 뚫고들어갈 때는 퍽! 소리가, 그리고 뼈나 머리에 맞았을 때는 피식! 하는 마찰음이 들린다. 날이 밝자 우리는 표범의 핏자국을 추적했다. 예상대로 표범은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도망가다가 30m 떨어진 감자밭에 죽어있었다. 머리에 한 발, 목에 한 발을 맞았다. 고통으로 뒹굴어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이 새끼!’
황소를 잃은 박씨가 그 흙투성이를 발로 찼다.
77. 늑대
사냥을 하러 산간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짐승얘기를 듣는다. 호랑이, 표범, 곰과 늑대들인데 그들 중 언제 들어도 기분이 나쁜 게 늑대다. 늑대는 한국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을 가장 잘 모르는 동물이다. 도시사람들은 늑대란 개의 일종이며 개와 비슷한 짐승으로 알고 있다. 생김새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는 개와 전혀 다른 짐승이며, 가축을 해치는 맹수猛獸다. 총으로도 잡기 어려운 정체불명正體不明의 괴물怪物이다. 우선, 늑대의 울음소리부터가 수수께끼다. 산중의 주막에서 늑대얘기를 하는 노인들에게 <늑대는 어떤 소리로 우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다 다르다. <우우웅! 우우웅!>이라고 하며 길게 꼬리가 뻗는 구슬픈 소리라고 한다. 그렇다. 겨울밤에 높은 산정에서의 늑대울음소리는 구슬프다. 홀로 산야를 돌아다니며 해매는 고독감이 묻어있고 호소하는 듯 한 슬픈가락이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된다. 그 때의 늑대울음은 교미기交尾期에 들어가 암컷을 부르는 소리다. 또 어떤 노인은 늑대울음소리를 아이들이 <꺄르르! 꺄르르!> 웃는 소리라고 한다. 그것도 맞다. 마을 인근 뒤산이나 숲속에서 별안간 까무러치는듯한 어린애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그게 한밤중이 아니었다면 누구든지 어린애울음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늑대는 또 교미기의 고양이처럼 <으앙! 으앙!> 갓난아이 울음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런 소리들이 모두 늑대의 본래 울음소리는 아니다. 그럼, 늑대는 어떻게 우느냐? 나도 모른다. 늑대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나는 여러번 늑대를 추적했는데 늑대가 우는 걸 들은 적이 없다. 늑대는 암컷을 찾거나 위장전술僞裝戰術을 쓸 때 외에는 울지 않는다. 1929년 평안북도 평창군 일대에 늑대가 출몰出沒한 일이있었다. 늑대는 밤에는 물론 낮에도 나타나 가축 - 닭, 돼지를 물고갔고 때로는 아이도 물고갔다. 늑대는 한여름 밖에서 노는 아이를 노렸으며 평창군에서만 한 달 동안 세 아이가 희생되었고 한 아이가 중상重傷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일곱 살 된 사내아이는 앞마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늑대의 습격을 받아 얼굴과 허벅다리를 물렸다. 때마침 아이의 아버지가 괭이를 가지러 집에 들렸다가 고함을 쳐서 아이는 목숨만은 건졌다. 그런데 사흘 후에 늑대가 다시 나타나 중풍中風에 걸려 누워있는 할머니를 물고갔다. 목을 잘라버리고 몸만 물고갔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자 마을사람들이 당국當局에 진정陳情을 했다. 평북도청道廳에서 진정을 받고 포수 4명을 파견派遣했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다. 포수에게 늑대란 아무 쓸모가 없다. 고기도 못 먹고, 가죽도 못 쓰는 짐승이다. 그래서 나 외의 포수는 호기심에서 수락受諾한 아마튜어였으며 내가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늑대를 몰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 해 떠나버렸다. 아마튜어포수에게 잡힐 늑대는 없다. 늑대는 눈, 코와 귀가 극도로 발달한 짐승이며 영리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몰이로 늑대를 잡으려는 것은 늑대를 모르는 무지無知다. 늑대의 코는 2Km 밖의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고, 눈은 산 위에서 50m나 떨어진 마을의 동정動靜을 환히 내려다볼 수도 있다. 그런 늑대를 토끼 몰이하듯 잡겠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포스들이 들락거렸기 때문에 내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늑대가 멀리 피신해버리고 없었으며 마을은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그 평화가 오래 갈 리 없다.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는 그 재미와 맛을 안다. 사실 사람처럼 잡기 쉬운 먹이는 없다. 두 다리로 어설프게 걸어다니는 사람은 늑대의 공격을 받으면 이렇다할 저항도 못 한다. 특히 아이나 노인들은 더 그렇다. 내 예상대로 늑대는 사흘 후에 마을에 나타나 참외밭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을 덮쳤다. 대담하게 옆논에서 일을 하고있는 어른을 무시하고 형제들 중에서 어린 네 살 된 동생을 물고갔다. 농부들이 괭이와 몽둥이를 들고 쫓았으나 늑대는 산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급보를 듣고 4Km를 단숨에 달려갔다. 그 때 쯤 마을사람들이 아이의 시체를 찾았는데 산속 바위틈에 있었다. 머리와 한쪽 손만 남았는데 멍! 하니 허공을 쳐다보는 눈이 애처로왔다. 격분한 마을사람들이 산을 포위하여 늑대를 잡겠다고 설쳤으나 만류挽留했다.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나의 늑대사냥계획에 방해가 되었다. 마을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혼자 추적을 했다. 개 보다 큰 놈이었고, 아이를 먹은 탓으로 만복滿腹이 되어 마을사람들의 흥분에 아랑곳없이 천천히 걸어가고있었다. 그런데 늑대의 발자국에 피가 있었다. 아이의 시체 일부를 물고간 것이다. 늑대의 발걸음은 산중턱을 향하고있었다. 산중턱을 넘으면 잡목림이있었는데 나는 발자국추적을 그만두고 멀리 산을 돌아 잡목림으로 들어갔다. 잡초와 가시덤불을 헤치며 잡목림을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 뒤에 숨었다. 사람냄새가 나지 않도록 맞바람을 맞았다. 잡목림을 살펴봤다. 끈질기게 풀 한 포기 한 포기를 샅샅히 뒤졌다. 바람도 없는데 풀이 흔들리는 곳이 포착捕捉되었다.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숲속을 기었다. 풀이 스치는 소리조차 죽이며 한 치 한 치 기어갔다. 약 30m 거리까지 접근했다. 상대가 늑대라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상반신을 일으키려는 순간 풀숲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튀어나갔다. 주저할 수 없었다. 양쪽으로 갈라진 풀숲을 행해 발사했다. 킥! 하는 소리와 함께 풀숲에서 늑대가 한 마리 걸어나왔다. 제 2탄을 발사했다.
(잡았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비슬거리며 나타난 늑대가 어쩐지 강아지 같았다. 쓰러진 늑대는 늑대새끼였다. 어미는 내가 접근하는 걸 알고 도망쳤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잡은 늑대새끼를 새끼줄로 목을 묶어 질질 끌고 마을로 돌아왔다. 면목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새끼를 잡은 게 반半 분憤이 풀리는 듯 우르르 몰려와 새끼를 치고밟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늑대는 혼자 사는 짐승이다. 1 - 2월에 교미를 하고나면 암수는 헤어지고, 암컷은 약 1년 동안 새끼를 키운 다음 모자母子도 헤어진다. 늑대는 선천적先天的으로 고독한 짐승이며 주거住居도 일정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대로 산야를 돌아다니며 닥치는대로 짐승을 잡아먹는다. 멧돼지, 토끼, 노루, 꿩도 노리고 몹시 굶주리면 나무뿌리나 풀도 먹고 그것도 안 되면 인가를 덥쳐 가축을 잡아먹는다. 그런 늑대를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다. 늑대가 마을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늑대는 총질을 당해 새끼를 잃었기 때문에 마을에 안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마을은 평화가 유지된다. 그러나 한 번 사람고기맛을 본 늑대가 쉽게 마을을 포기할까? 3 - 4일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수입도 되지 않는 늑대잡이를 포기하고 돌아가고싶었으나 늑대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 때문에 늑대사냥을 포기할 수 없었다. 댕그렁 목이 잘려 허공을 쳐다보단 아이의 눈망울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을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움막을 짓고 마을사람들이 교대로 감시하도록 했다.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정오부터 감시를 했던 정서방이 배가 고파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어귀 들판에서 개가 한 마리 어슬렁거렸으나 지나쳤다. 보통 개 보다 컸고 털이 지저분했으며 꼬리가 축 늘어져 며칠 굶은 놈처럼 보였다. 두 귀가 서있는 것으로 보아 세퍼드잡종雜種 같았는데 대가리가 우악스럽게 큰 것이 좀 이상했다. 정씨는 뭣인가 섬뜩했다.
(혹시 … ?)
정서방이 한 발 개에게 다가서며 살폈다. 그 때 개의 눈에서 이상한 광채光彩가 번쩍였다. 집에서 기르는 개의 눈빛이 아니다. 적의敵意와 살기에 찬 야수野獸의 냉혹冷酷한 눈빛이었다.
(아차! 이 놈은 … ?)
소름이 돋은 정서방이 몽둥이를 들었다. 그러나 늑대는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사람의 허세虛勢를 비웃듯 빤히 쳐다보았다. 덤벼려면 덤벼보아라는 태도였다. 정서방은 덤비지 못 했다. 몸이 얼어붙은 듯 발이 움직이지 않았고 몽둥이를 든 손도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과 늑대의 대치對峙는 3 - 4분 동안 계속되었다. 때마침 서너 명의 사람소리가 났다. 정서방이 소리나는 쪽을 흘끗! 봤다.
‘어, 거기 정서방 아냐? 정서방, 거기서 뭐 하나?’
정서방이 힘을 얻었다.
(이 놈이!)
정서방이 몽둥이를 휘둘렀으나 늑대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불과 1 - 2초도 못 되는 사이에 늑대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마을에는 소동騷動이 벌어졌다. 기별을 듣고 나간 내가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움막에서 기다렸으나 늑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밤새 모기밥이 되었을 뿐이다. 이튿날 조사해보니 늑대는 밤새 마을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경계가 삼엄森嚴하여 포기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늑대는 마을 칩입을 완전히 포기했을까? 늑대는 밤 보다 낮에 활동하는 짐승이다. 나는 뒷산으로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늑대가 마을로 들어오려면 어젯밤 정서방이 지키는 움막부근으로, 아니면 내가 서 있는 마을 뒷산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무뿌리와 잡초에 납작 엎드려 앞뒤를 살폈다. 그런데 나는 나의 등 뒤의 가시덤불 또는 그 너머의 잡목림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포수의 육감六感이라고 할까? 늑대의 코, 귀 그리고 눈에 비하면 사람의 그것은 퇴화退化되어 보잘 것 없으나 나처럼 짐승을 쫓는 프로헌터들은 꽤 민감敏感하다. 나는 내 등뒤에 늑대가 숨어 오히려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알아차렸다. 사람과 늑대의 신경전은 약 20여분이나 계속되었으나 일순 사라져버렸다. 늑대가 내 감시를 포기하고 가버린 것이다.
(도망쳤군.)
나는 마음이 놓여 마을을 살폈다. 그런데 또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마을의 지붕너머로 들판을 보았는데 도랑뚝 건너편에 노르스레한 빛깔이 보였다. 나는 처음에는 그 게 마른 풀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자세히 살폈더니 노린빛깔이 움직였다. 그런데 그것은 산위에 서있는 나는 보았으나 주변 논밭에서 일을 하는 마을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풀속을 기어 마을로 내려가며 늑대의 동정을 살폈다. 늑대는 방앗간에 매어있는 염소를 노리고있었다. 늑대는 도랑뚝을 타고 마을로 살살 기어가고 있었으나 마을로 들어가려면 들판을 거쳐야 한다. 은폐물이 없는 들판을 50m나 가야 방앗간에 도달할 수 있다. 늑대는 도랑뚝에 숨어 언제 들판으로 뛰어나갈 것인가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내 등 뒤에 숨어 나를 감시한 늑대와 도랑에 있는 늑대가 같은 놈인가를 판단해보려고 했다. 만약 같은 놈이라면 늑대는 산 위에 있는 나를 알고있을텐데 ….
(앗!)
늑대가 도랑에서 뛰어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 늑대의 주력走力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겅충겅충 공중을 나르듯 뛰는 사슴이나 노루, 땅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여우와 족재비를 보아온 나로써는 늑대의 달리기는 거북이처럼 보였다. 늑대가 달리는 것을 보자 나도 방앗간을 향해 뛰었다. 불쌍한 어린 염소는 덤벼드는 늑대를 보고 가느다랗게 매애! 매애! 하고 울었다. 그 때의 상황으로 늑대가 염소를 죽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만 어린 염소를 구하겠다는 동정심에서 늑대를 잡아야 한다는 목표가 어긋나버렸다. 산 위에서 곧장 달려오는 기세로 2 - 3M의 언덕을 뛰어내렸는데 총의 안전장치를 풀어놓은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포수로써 상식 밖의 일이었다. 나대로의 예상은 있었다. 언덕에서 뛰어내리면 늑대와 나는 10m 거리에서 대치하고 내가 오는 걸 본 늑대가 되돌아서 도망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 늑대는 은폐물이 없는 들판을 50m나 달리게 되고 나는 발사해서 늑대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늑대는 나를 보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려들었다. 그리고 으흐흑! 하며 위협했다. 그 때는 언덕에서 막 뛰어내린 참이라 몸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총을 쏘기는커녕 일어서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총을 든 사냥꾼에게 늑대가 덤벼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늑대가 덤벼든다고 해도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라 놀랐다.
‘이 새끼가!’
하며 총신을 내밀었다. 총신으로 늑대를 막으면서 발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또 예상치 못 하게 나에게 달려들었던 늑대가 갑자기 나를 뛰어넘고 언덕을 타넘어 달아났다. 내가 언덕 위로 올라갔을 때 늑대는 이미 30m 전방을 달리고있었다. 그래도 늑대가 작은 바위를 뛰어넘을 때 발사했다. 자신이 없었으나 킥! 하는 소리를 들었고 현장에 가보니 꽤 많은 피가 흘렀다. 늑대가 산중턱을 넘어갔는데 바위산이었다. 바위 위에는 늑대가 흘린 피가 선명하게 찍혀있었으며 세 발로 걷고있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담배를 태웠다. 네 다리 짐승은 앞발 부상에도 타격을 입는데 뒷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니 제깐놈이 도망을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네 다리에서 한 다리를 부상을 입으면 두 다리의 사람보다도 나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늑대는 계곡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고 다시 산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또 하나의 발자국이 나타나 함께 가고있었다.
(옳지, 암컷이구나!)
새로 나타난 놈이야말로 아이를 물어간 놈이었다. 늑대는 산허리를 돌아 골짜기를 세 개나 넘어 험준險峻한 곰산으로 들어갔다. 사람 같으면 벌써 쓰러졌을텐데 부상당한 늑대는 모질게 견디고있었다. 나는 산을 서쪽으로 넘기로하고 이동을 했는데 별안간 산정에서 거친소리가 일어났다. 늑대가 다투는 소리였다. 그 건 개들이 다투는 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독기毒氣가 서린 마찰음摩擦音이었으며 어느 한쪽의 죽음을 의미하는 절박한 소리였다. 개는 개를 잡아먹지 않지만 늑대는 다르다. 싸움은 암벽 밑 굴속에서 일어났다. 대등하게 다투는 게 아니라 승자勝者의 울부짖음과 패자敗者의 비명소리였다. 동굴 입구에서 안전장치를 풀었다. 다투는 소리가 뚝! 끊겼다. 동굴속으로 들어갔는데 늑대는 한 마리뿐이었다. 교활狡猾한 암컷은 어느새 도망쳐버렸다. 높은 바위에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먼데. 저쪽 산마루를 늑대가 걸어가고 있었다. 잿빛털의 암컷이었다. 늑대는 총의 사거리射距離를 벗어났다고 판단한 듯 천천히 걸었다. 그래도 얄미워서 겨냥을 했는데 늑대는 살그머니 숲으로 들어가버렸다. 마을사람들은 새끼줄에 묶어 끌고온 늑대가 아이를 죽인 늑대라고 알고 마구 짖밟았다. 나도 구태어 말하지 않았다. 암컷은 이제 마을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78. 지리산
1932년 늦가을, 멀리 경상남도에서 편지가 왔다. 내용은 전보電報처럼 간단했다.
<범새끼들이 있소. 황첨지.>
달필인데 대서代書였다. 그 간 돈푼께나 있는 양반을 안내하여 서울 근교近郊에서 하찮은 노루, 꿩사냥을 하고있었던 나에게 그 편지는 시원한 청량제淸涼劑 같았다. 지리산은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있으며 태고의 원시림이었다. 황첨지는 자칭 지리산 산지기다. 양반兩班의 후손後孫이요 선비라고 하지만 일자무식一字無識이다. 그러나 황첨지는 10여 년 동안 지리산의 첩첩산중疊疊山中에서 뭇짐승들과 살고있는 도인道人이다. 원래는 약초藥草꾼이었으나 지리산에 홀려 영주永住했다. 나는 몇 년에 한번씩 황첨지를 찾았다. 경남 거창에서 새벽밥을 먹고 떠나면 해거름에야 겨우 황첨지네 산막山幕에 도착했다. 황첨지의 산막을 찾아가는 사람은 단골 짐승털 매매상이 ㅇ1년에 한두 번 쌀, 소금, 석유 r,리고 성냥 등과 짐승털을 교환하러 찾아가는 것 외에는 나뿐이다. 작년에 표범새끼를 생포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창경원에서 표범새끼 한 마리에 100원을 내겠다고 제의가 들어왔다. 한국산 표범을 원하는 일본의 동물원이 많아 다른 짐승과 교환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표범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을까? 황첨지 외에는 엄두를 못 낸다. 나는 몇 번이아 소문을 듣고 전라도, 경상도와 평안도의 산골을 찾아갔으나 삵괭이, 오소리나 늑대였다. 그래서 일부러 알루미늄냄비와 재크나이프를 사들고 황첨지를 찾아갔었던 것이다.
황첨지의 편지를 받고 즉시 지리산으로 떠났다. 여비와 비용은 창경원에서 대주었고, 지닌 물건은 12번 쌍발산탄총과 거창에서 구입한 망태와 쌀 반 말 그리고 소주와 석유 한 되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큰일날 오산誤算을 했다. 11월 초를 늦가을이라고 생각하고 늘 걸치고 다녔던, 큼직한 포켓이 달린 헐렁헐렁한 골든지 윗저고리를 걸치고 나섰던 것이다. 전날의 날씨도 찌뿌듯했지만 그날은 좀 으스스했고 음산陰散했다. 지리산에 깊이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아차! 하고 실수를 자인自認했다. 산중의 공기는 냉랭冷冷했으며 그 건 겨울추위였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모닥불을 피워 점심을 먹으며 몸을 녹였다.
(에라 모르겠다, 갈데로 가보는거지.)
그건 만용蠻勇이었다. 그 산 허리를 넘어서면 골짜기가 나오고 그 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길이있었다. 사람이 만든 길이 아니라 뭇짐승들이 밟아 만든 길이다. 골짜기는 울창鬱蒼한 산림이었다. 아름드리 고목들이 하늘을 가려 대낮에도 햇볕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다구나 하늘이 흐렸으므로 산속은 어두웠다. 낙엽들이 한 자나 쌓이고 서리가 허옇게 내렸다. 나므뿌리나 넝쿨에 감겨 몇 번이나 넘어졌다. 이름 모를 새들이 갑자기 나타나 놀랬다. 날씨는 점점 더 음산해졌고 추위가 한결 더 해 몸이 으스스 한기寒氣가 들었다.
(비가 올려나?)
비가 아니었다. 눈이었다. 솜을 찢어던지는듯한 설편雪片이 나르기 시작했다. <비가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생각은 잠시뿐. 솜눈은 잠시 후에는 시야를 가려버렸다. 퍼붓는 눈 때문에 3 - 4m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눈벽을 뚫고 밀고나가야 했다. 지리산의 한 중앙이었다. 암만해도 되어가는 꼴이 심상찮았다. 허나 나는 사냥꾼이다. 사냥꾼은 원래 총을 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산을 타는 사람이다. 무쇠다리와 강인한 의지가 사냥꾼의 밑천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차렸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시계와 지남철指南鐵을 봤다. 오후 2시, 방향은 정서쪽 - 전라도 접경지대를 향해 정확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곧장가면 산이 하나 나오고 그 산 너머에는 …. 나는 황첨지와 그 부근에 곰을 잡으러 온 일이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눈 때문에 시야視野가 가려졌어도 지형은 어렴풋이 알고있었다. 나는 진로進路를 북서쪽으로 바꾸어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밀림속에는 난기류亂氣流가 흘러 설편雪片이 난무亂舞를 하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지만 높은 곳은 기류氣流가 일정하기 때문에 시야가 터진다. 나의 예상대로 높은 곳에 올라가니 시야가 터졌을 뿐만 아니라 큰 바위 밑에서 눈을 잠시 피할 수도 있었다. 바위밑에서 눈을 피하며 담배를 물고 있으니 한시름 놓인다.
(뭘 이까짓 걸 가지고 ….)
산마루를 탔다. 산골짜기에서 몰려오는 바람이 제법 윙윙거렸으나 시야는 막히지 않았다.
(저 산봉우리를 넘으면 골짜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잣나무숲이 있고 ….)
그러나 산을 넘기 전에 해가 떨어졌다. 눈은 좀 뜸해졌으나 바람은 송곳날처럼 예리하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옷과 어깨를 파고드는 망태, 왼손에 든 총마져 부담스러웠다. 기진맥진氣盡脈盡했다. 오한惡寒이 들어 열이났다. 그래도 나는 걸었다. 대충 방향을 잡고 마구 걸었다. 돌에 채여 비틀거리고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지만 오뚜기처럼 일어나 걸었다. 오후 8시께, 이젠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황첨지의 산막 가까이 온 것 같은데 ….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허공을 향해 발사했다. 어둠속에서 새파란 불꽃이 번쩍이고 요란한 굉음轟音이 산중에 메아리쳤다. 그 메아리가 사라질 무렵 나는 또 한 방을 쏘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젠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천명天命을 기다릴 수 밖에, 의식도 가물가물해졌다. 천명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총소리가 사라진 5 - 6분 후 희미해져가는 내 의식 한구석에 엷은 분홍빛이 반짝였다. 머리를 흔들고 다시 보았는데 어둠 저 편에 붉은 빛이 보였다. 아직도 내리는 눈 때문에 가물가물했으나 점점 크고 똑똑하게 보였다. 황첨지다. 역시, 산에 사는 황첨지는 내가 쏜 총소리의 뜻을 알아차려 불을 피워 나에게 방향을 알려준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불빛쪽으로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발에 감기는 나무뿌리나 돌도 상관없이 마구 산막쪽으로 불빛쪽으로 걸었다.
‘누구고? 누가 총 쏘았노!’
황첨지의 고함이 들렸고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황첨지의 산막 온돌방은 마치 한증막 같았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 황첨지에게 씩! 웃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이튿날 황첨지가 말했다. 쯧쯧! 담뱃대를 재떨이에 털며 혀를 찼다.
‘홍포수니까 살아남았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 아! 지리산이 어떤 산이라고 그 날씨에 걸어들어와. 자, 이거 마셔요.’
황첨지가 돌아보지도 않고 죽그릇을 내밀었다. 잣죽이었다. 잣을 껍질째 찧어서 한나절 삶은 다음 걸러낸 죽이다. 고소한 그 죽에 황첨지의 인정과 지리산의 맛이 스며있었다. 한기와 피로는 뜨거운 온돌방의 열기로 사라졌고 아무 상쾌한 기분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눈이 …. 아직 내리고 있소?’
황첨지가 잠자코 작은 방문을 열었다. 거기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졌다. 지리산의 설경雪景.
‘문 닫아! 이젠 겨울이야.’
나는 오래도록 문을 닫지 않았다.
황첨지는 내 그림감상이야 아랑곳없이 두터운 내의 위에 주섬주섬 바지 저고리를 입고 새끼줄로 바지가랑이를 묶었다. 벽에 거렸던 대나무창과 망태를 들고 일어섰다.
‘잡혔을까?’
‘밤 새 눈이 왔으니 몇 마리는 걸렸을거요.’
황첨지는 짐승들이 돌아다니는 길에 함정을 파고, 덫과 틀을 놓았다. 매일 한번씩 이들을 둘러보는 게 일과였다. 황첨지와 내가 방을 나서자 곳간 옆에서 누렁이가 따라나섰다. 풍산개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세퍼드와 토사견의 트기같은 늙은 개다.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은 올가미덫에 노루가 걸렸다. 함정에는 토끼 두 마리가 빠졌다. 돌아오는데 빈 터에 꿩 20여 마리가 놀고있었다. 마치 페르시아주단紬緞을 깔아놓은 듯 현란한 아름다움이었다. 나도 모르게 총을 들어올렸다가 내렸다. 황첨지는 자기집 주변에서 총질을 하는 걸 싫어했다. 총소리에 짐승들이 멀리 도망쳐버린다고 금기시禁忌視했다. 그래서 누렁이도 짖지 않고 하품만 했다.
‘소주를 가져왔지요? 토끼다리를 찢어구울까, 노루뼈를 두들겨 지질까?’
어느 것인들 나쁘랴. 소금과 산초가루를 뿌려 노르스름하게 구운토끼도 맛있고, 황첨지밭에서 캔 탱자만한 감자를 넣고 뼈따귀째 두들긴 노루고기 볶은 것도 별미別味였다. 아쉬운 것은 양념기가 모자라 김치가 좀 감칠맛을 내지 못 하는 것이지만 하는 수 없었다. 산막의 점심은, 토끼구이, 도토리묵, 말린버섯과 고사리무침 그리고 밤과 잣이었다. 토끼다리를 뜯으며 황첨지의 눈치를 살폈으나 영감이 끝내 시치미를 떼고 정말 해야 할 얘기는 침묵하고있었다. 흥정에는 급한 사람이 손해를 본다만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범새끼는 아직 있소?’
‘범새끼? 암, 있지.’
‘어딨소?’
‘사타구니산 바른쪽이지.’
‘잡을 수 있겠소?’
‘잡다니, 이미 잡아서 내가 가둬둔 것인데 ….’
황첨지는 대체로 마음이 넓고 대범大汎했으나 거래를 할 때는 사람이 달라진다. 장사꾼 보다 타산打算이 빠르다. 제안提案을 했다. 털모자, 털내의, 솜옷 각 한 벌씩, 메주와 누룩 각 열 덩이, 쌀과 소금 각 한 가마니, 석유와 참기름 각 한 말, 고추 상치씨가 각 한 봉지씩, 잘 드는 도끼, 톱, 칼 그리고 ….
‘아, 그걸 어떻게 여기까지 운반한단말요?’
‘염려마시오. 범새끼를 잡아놓으면 그 물건을 여기에 운반해놓고 범새끼를 갖고갈테니 ….’
황첨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이요?’
‘내가 언제 허툰말 했소?’
거래去來는 간단히 끝났다. 사실은 창경원당국과 상의相議하여 범을 잡으면 운반책임은 창경원에서 지기로 했으며 창경원이 인부 네 사람을 파견派遣하기로 이미 계약契約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올 때 물건을 갖다주면 된다. 황첨지가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벼넘기를 했다. 범새끼 사로잡이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듯 했다. 사타구니산 중턱의 동굴에 범새끼는 있으나 장담한대로 잡을 수 있을까? 노련한 황첨지도 밤새 잠 들지 못 했다. 문제는 표범의 어미였다. 표범은 그 잔인한 성품과는 달리 부부의 애정과 새끼에 대한 모정이 다른 어떤 짐승보다 강하다. 표범새끼에게 어미가 있으면 표범새기사냥은 위험하고, 어미 에비가 다 있으면 목숨을 걸어야 할 모험이 된다. 황첨지가 그 애비는 작년에 자기 함정에 빠져죽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뿐 황첨지 자신도 확신하지는 못 한다. 황첨지는 15년 간 지리산에서 살았으며 웬만한 짐승은 겁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사타구니산에는 겨우 뒷산을 타고올라가 감시를 했을 정도고 사타구니산에는 얼씬도 못 했다. 나와 황첨지는 중무장重武裝을 했다. 나는 12번 산탄총과 제크나이프를 품고, 황첨지는 대나무창, 도끼 그리고 올가미를 망태에 챙겼다. 우리는 최악의 경우 표범과 육탄전을 벌일 각오였다. 쌀자루를 찢어 덮어쓰고, 따라가겠다고 발악을 하는 누렁이를 묶어놓고 출발했다. 흰눈에 흰옷으로 위장을 하고 크게 우회迂廻하여 사타구니산에 접근했다. 바람과 은폐물을 감안하여 뛰기도 하고 기어가기도 하였다. 사타구니산은 정말 이름을 잘 지었다. 지리산은 토산土山이라 나무들이 밀생했는데 어떻게 된 자연의 조화造化인지 그 산만은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바위산이었으며 여인이 한쪽넓적다리를 내던지고 다른쪽다리는 무릎을 세워 비스듬히 누워있는 형상이었다. 은밀隱密한 부분은 계곡溪谷이었다. 우리는 건너편 산꼭대기에 납짝 엎드려 여인의 무릎부분의 한 지점을 보고있었다. 구부러진 무릎 밑에 동굴이 있었다. 태양이 올라감에 따라 햇빛이 동굴속을 비추었다. 정오가 되니 빛이 동굴속에 퍼졌다. 황첨지가 팔굽으로 나를 쳤다. 굴속에 노르스름한 물체가 꾸물거렸다. 성급하게 일어서려는 황첨지를 제지시키고 계속 동굴을 관찰했다. 해가 더 오르자 동굴입구가 환하게 들어났다. 양지쪽으로 노란 색깔이 기어나왔다. 밝은 햇빛에 어울리는 화사한 색깔이었다.
‘나왔다, 새끼들이야!’
새끼는 두 마리였고 햇빛속에서 장난을 했다. 계속 지켜봤으나 어미가 있는 기색은 없었다. 동굴로 기어갔다. 도중에 어미표범의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밖으로 나가는 발자국이었고 들어온 발자국은 없었다.
(기회다!)
빠른 걸음으로 동굴에 접근했다. 황첨지는 쉰이 넘었으나 나보다 민첩敏捷했다. 동굴에 들이닥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나는 동굴입구에 총을 들고 대기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사람들을 보고 새끼들은 으르렁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생후 5개월은 된 것 같았으며 이미 맹수였다. 이빨을 까내밀며 덤벼들 기세였다.
‘빨리 잡아요!’
온 신경을 주변에 쓰면서 독촉했다. 언제 어미가 나타날지 모른다. 새끼가 무서운 마찰음을 내며 저항했으나 황첨지는 무시했다. 올가미를 던져 목에 걸어 끌어당겼다. 안간힘을 쓰며 앞발을 뻗고 버티던 새끼가 끌려왔으며 발악을 하는 새끼를 그대로 망태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에 다른 한 마리 새끼가 동굴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걸 동굴입구를 가로막고 총대로 밀어넣었다. 동굴 밖은 폭 2m 정도의 외길이 있을뿐 높이 7 - 8m의 절벽이었고 밑은 계곡이었다. 황첨지가 나의 도움을 받아 또 한 마리를 망태에 잡아넣었다. 황첨지는 두꺼운 장갑을 끼었으나 장갑은 찢어지고 손등에 상처가 났으므로 소주를 부어 소독을 했다. 맹수의 발톱에는 짐승의 살과 피가 묻어 독균毒菌이 생기기 때문에 철저하게 소독을 해야 한다. 새끼는 잡았으나 더 어려운 일이 남아있다. 어미다. 어미를 그냥두고 새끼를 데리고가는 건 위험한 일이다. 어미표범이 새끼를 잡아가는 우리를 가만둘 리 없다. 특히 표범은 모정母情이 무척 강하다. 새끼냄새를 맡는 어미의 코는 상상 이상이며 새끼를 찾는 어미의 본능本能과 집념執念도 상상 이상이다. 동굴을 조사한 결과 새끼에게는 어미만 있다는 걸 알았다. 황첨지의 말대로 애비는 죽은 것 같았다. 새끼를 망태에 넣고 동굴 밖으로 나오자 우리는 내달렸다. 나무 뒤에서나 바위밑에서 어미표범이 덮칠 것 같은 불안감이 뒤를 따라왔다. 마치 귀신에게 쫓기는 것 같은 무서움이었다.
‘황첨지, 넓은 들판이 이 부근 어디 없소? 사방이 탁 트인 들판.’
‘건 또 왜?’
‘기다렸다가, 어미를 처치해야겠소.’
황첨지가 한참만에 머리를 끄덕였다. 사타구니산을 넘어 골짜기로 들어섰다.
‘옛날에 내가 밭을 일구려고 봐둔 곳이 있지. 거기 감으면 표범이 아무리 빨라도 두 발을 쏠 참은 있을거야.’
거기까지는 아직 4Km가 남았다. 문제는 거기까지 무사하게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동굴에 돌아온 표범이 우리를 따라오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공중을 날으듯 달리는 사슴이나 노루도 맥을 못 추는 표범의 속도는, 이 또한 상상 이상이다. 새끼를 맨 황첨지를 앞세우고 나는 서너 발자국 걸을 때마다 뒤를 돌아보며 달렸다. 4Km 길이 그렇게 먼 건 처음이었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공포恐怖를 한 시간이나 겪었다. 오후 3시께 들판에 도착했다. 온 몸이 땀투성이였다. 들판은 큰 물이 지나간 자국 같았으며 시골학교 운동장만 했다. 한가운데 쓰러진 나무들이 한두 그루 있을 뿐 흰 양탄자처럼 깨끗했다. 우리는 나무 뒤에 엎드렸다.
(이제 됐어.)
적어도 표범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됐다. 망태속의 새끼들은 망태끈을 물어뜯고 발을 내밀어 할키고 야단이었다. 표범이 근 한 시가능ㄹ 기다렸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초조했다.
‘황첨지, 여기서 산막까지 얼마나 되지요?’
‘8Km가 넘어. 저 하천자리를 따라가면 ….’
빨리 달려도 두 시간은 걸린다. 곧 날이 어두워질 것이다. 밤길을 표범의 배웅을 받으며 간다는 것은 바로 지옥행이다. 더구나 새끼를 탐貪하는 표범은 분별分別을 잃고 덤빌 것이다.
‘안 되겠는데 …, 일어나 갑시다.’
그 때 버둥거리던 새끼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새끼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눈을 가늘게 치뜨고 침묵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아차!)
어미가 부근에 와있는 게 아닐까? 짐승은 본능으로 어미의 소리를 안다. 숨을 죽이고 침묵했던 새끼들이 또 떠들기 시작했다. 전처럼 발악을 하는 게 아니라 목청을 돋우어 울기시작했다. <엄마, 살려줘!>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황첨지, 온 것 같아. 어미가 왔어!’
말을 입증하듯 등뒤에서 목을 굴려 밀어내는듯한 으르르! 소리가 들렸다. 무서운 살기와 분노를 담고있었다. 표범은 천천히 주위를 돌면서 악을 썼다. 나는 소리에 맞춰 총구를 움직이며 기다렸으나 표범은 나오지 않았다. 보통 때 사냥과 달랐다. 짜릿한 전율戰慄을 즐기며 하는 보통 때 사냥과 달랐다. 나는 짐승을 잡는 사람이며 짐승은 나의 표적標的이었다. 허나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다. 짐승이 나를 노리고 있으며 나는 내 자신의 목숨을 지켜야 할 입장이다. 불안했다. 더구나 표범이 주위를 돌면서 위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초조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날이 어두워진다. 어둠이 내리면 사람은 장님이 되어 도저히 표범을 당해낼 수 없다. 영리한 표범이 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저 녀석, 빨리 덤벼야 할텐데 ….)
혼잣말을 중얼거렸는데 황첨지가 흘끗 나를 쳐다봤다. 헛기침을 하고는 지팡이를 겸해 갖고다니던 대나무창으로 새끼를 쿡쿡! 찔렀다. 그렇지 않아도 악을 쓰고있던 새끼들이 고통과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망태속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황첨지의 기지機智였다. 과연, 새끼들의 비명이 터지자 어미의 으르렁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위험신호다. 다음 순간 조준照準 안에 표범이 뛰어들어왔다. 무서운 속도였다. 표범은 첫 도약跳躍부터 풀스피드를 내며 지상地上 60Cm 정도의 높이로 날아왔다. 황갈색 줄이 뻗쳐있을 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산탄총이었다. 라이플 같으면 단발이라 보이지 않은 대상을 명중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표범을 향해 발사했다. 꿩을 쏘는 방법으로 어림조준하여 발사했다. 표범의 어깨가 흔들리고 앞발이 꺾였다. 달려오는 기세로 뱅그르르 굴러 떨어졌다. 총탄이 턱과 어깨에 맞았으므로 치명상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아 일어난 표범이 다시 공세攻勢를 취했다. 허지남 나는 포수다. 표범이 자기 몸을 추스르는 시간은 1 - 2초였으나 나에게는 충분한 사격기회였다. 이번에는 나는 라이플을 쏘는 요령으로 표범의 머리를 겨냥하여 제 2탄을 발사했다. 일어서려던 표범이 맥없이 쓰러졌다.
‘잡았다! 잡았어.’
황첨지가 온 산이 쩡쩡! 울리도록 고함을 쳤다.
나는 재장탄을 하며 표범에게 다가갔다. 표범은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서운 동물은 아름다운 동물이었다. 비로드처럼 보드라운 털과 찬란한 무늬를 지닌 아름다운 짐승이었다.
‘꽤 큰 놈인데. 20Kg은 나가겠어. 털도 별로 상하지 않았고.’
나는 수통에 조금 남은 소주를 마시고 황첨지에게 건내며 말했다.
‘자, 갑시다. 또 다른 놈이 나오기 전에 ….’
황첨지는 망태를 매고 나는 표범을 끌면서 돌아왔다. 삼림의 왕자가 새끼줄에 묶여 끌려가는 걸 보고 새들은 울음을 멈추었으며 짐승들도 소리를 죽였다. 온 숲이 조용했다. 용감한 누렁이도 꼬리를 말았다. 우리를 만들어 새끼를 가두고 표범의 배를 갈랐는데 꿩대가리와 발이 나왔다.
‘꿩을 잡은 모양인데 어찌 대가리와 발만 있을까?’
‘너머지부분은 새끼들에게 주고 자기는 대가리만 먹은거야.’
‘어허, 그것 참.’
황첨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껍질을 벗긴 토끼를 표범새끼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러나 새끼들은 그까짓 토끼고기는 몬 체도 안 하고 옆에서 감시하는 개에게 악을 썼다. 개를 내보내고 안정을 시켰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토끼새끼들은 토끼고기를 뜯고있었다. 며칠 동안 배를 곯았는지 토끼 한 마리를 다 먹고 노루의 간도 먹었다. 표범새끼들은 부산에서 일본의 동물원으로 갔다. 창경원은 약속한 보수를 주었고 황첨지에게도 약속을 지켰다.
79. 선불맞은 산돼지
함경북도 장진군에 연화산이 있다. 험준한 태백산맥의 줄기였으며 봉우리들이 대체로 펑퍼짐했으며 바위와 나무가 널린 둔턱이 많아 노루가 모여들었다. 마흔이 넘어 포수로써 경험이 쌓여있는 내가 어쩌다 실수 - 크나큰 실수를 했다. 서울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는 박부성씨와 노루사냥을 하고있었는데 엽장獵場에 너무 늦개 도착하여 노루를 잡지 못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두어둑한 해질무렵이었는데 저쪽 산등성이를 타고가는 산돼지 두 마리를 발견했다. 200m 이상의 거리였는데 온 산을 붉게 물들이면서 해가 떨어지고 있었고 붉은 석양夕陽을 등에 지고가는 산돼지들이 뚜렷하게 부각浮刻되었다. 바위더미 같은 놈들이 유유히 걸어가는 모습은 웅장雄壯하달까 처연悽然하다고 할까? 박씨는 최근 영국에서 수입한 값비싼 신형엽총을 시사試射하려고 안달이나있었다.
‘여보게, 홍포수! 저걸 그만 보고만 있을 건가?’
주저했다. 맞춘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맞춰도 날이 어두워 추적을 할 수 없었다. 포수사회에서는 <부상의 한 맹수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 라는 엄격한 불문률不文律이 있었다. 섣불리 상처만 입은 맹수는 위험하다. 나도 그런 규율을 지키며 살았다. 그런데 최신형 총의 유혹이 너무 강했다. 시험발사하는 셈 치고 한 번 해볼까? 신형 총에 대한 호기심과 매력이 너무 강했다. 박씨의 총은 총신銃身이 삼각형으로 겹쳐져 있는데 가장 위에는 산탄총이고 아래 두 개는 맹수용 라이플이었다. 신기神奇한 총이었는데 나는 그만 그 총의 위력을 잘못 판단했다. 총은 구조가 복잡하면 고장이 잘 나고 관통력貫通力이 약하다는 선입견先入見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붉은 빛속에 뚜렷하게 부각된 표적을 겨냥하여 발사했다. 방아쇠를 당긴 순간 어깨에 오는 반동충격反動衝擊으로 그 총이 굉장한 위력을 갖고있다는 걸 알았다. 첫탄에 앞서가던 놈이 굴러떨어졌고, 두 번째 탄으로 또 한 놈이 쓰러져 산 너머로 굴렀다. 두 마리 다 죽었거나 중상重傷을 입었다고 판단하고 다음 날 추적하기로 하고 하산下山했다. 박씨는 나의 총솜씨를 칭찬하고, 나는 총의 성능性能을 칭찬하면서 …. 따라서 산돼지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막에 도착할 무렵, 산 너머 마을에서는 기가막히는 참극慘劇이 벌어졌다. 날이 어두워졌을 무렵, 산기슭에 있는 동네우물가에서 아낙네가 물을 긷고있다가 저쪽 산기슭 보리밭에서 황소가 한 마리 달려오는 걸 보았다. 황소는 파릇파릇한 보리이랑을 마구 짖밟으며 달려오다가 쓰러졌고 곧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그래서 아낙네가 소가 이상하다고 보고있었는데 가까이 오는 걸 보니 황소가 아니라 산돼지였다.
‘에구머니나!’
아낙네는 물동이를 내팽개치고 고함을 지르며 마을로 달아났다.
‘사람 살려라! 산돼지가 온다. 산돼지가 ….’
찢어질 듯한 고함과 동작이 산돼지를 자극했다. 산돼지는 총탄이 내장을 뚫고 들어가 고통과 분노로 미친 상태였다. 아낙네는 산돼지 보다 먼저 마을에 들어서면서 <산돼지가 따라오니 도망가라!>고 외쳤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의 반응이 엉뚱하게 나타났다. 도망은커녕 산돼지를 잡겠다고 설친 것이다. 흉년凶年이 계속되어 오랫동안 고기맛을 보지 못 했는데, 감자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들이 산돼지를 잡겠다고 괭이, 삽, 몽둥이, 식칼과 도끼를 들고나왔다. 제발로 굴러들어온 고기를 놓칠세라 사립문을 박차고 나왔으며 덩달아 개들도 흥분하여 설쳤다. 산돼지는 마을어귀에서 정지하여 신음했다. 미친상태였지만 사람들이 많은 동네로는 들어가지 못 했다. 그런데 20여 명의 마을장정들이 산돼지가 도망가지 못 하도록 퇴로를 막았다. 산돼지가 부상을 입었다는 걸 알고 퇴로를 막아 잡으려고 했으므로 산돼지는 마을골목으로 돌진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의 수가 불어났고 솜뭉치에 불을 붙여 골목이 환하게 들어났다. 산돼지를 포위했다고 판단한 용감한 청년들이 와아! 하면서 산돼지에게 덤벼들었다. 산돼지가 웅크리고 있었으므로 이미 죽었거나 항거抗拒불능상태로 보고 청년이 괭이를 들고 달려들었다. 산돼지는 주둥이를 하늘로 쳐들고 벌러덩 누워있으면 항거불능이다. 그러나 주둥이를 앞발 사이에 쳐박고있으면 위험하다. 산돼지의 무기武器는 입밖으로 튀어나온 어금니다. 그걸 그 청년은 몰랐다. 청년이 무턱대고 쳐들어갔을 때 열서너 발을 남겨놓고 산돼지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질풍疾風처럼 돌진하여 청년을 들이받았다. 청년이 공중에 떠올라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곤두박질했다. 그제서야 모여있었던 사람들이 선불맞은 산돼지의 살기를 느끼고 비명을 지르면서 사방으로 달아났다. 산돼지가 전속력으로 내달린 길을 흙담이 가로막았다. 흙담 옆으로 작은 골목길이 있었으나 속력을 내서 달리던 산돼지는 골목길을 살짝 돌아갈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정면으로 흙담에 부딪혔다. 흙담이 와르르! 무너지고 산돼지의 전신이 흙에 묻혔다. 마을장정이 <됐다!>고 소리치며 몽둥이로 후려갈겼다. 그런데 그런 매질은 개 잡을 때는 유효하지만 산돼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몽둥이가 바위에 닿은 것처럼 퉁겨나왔다. 산돼지가 온 몸에 흙을 뒤집어쓰고 일어섰다. 서른 평이나 되는 마당이 좁아 겨우 몸을 돌린 산돼지가 짖는 개를 하늘로 쳐올리고 있을 때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박가라는 머슴이 산돼지의 이빨에 걸렸다. 머슴은 산돼지의 이빨에 꿰인 채 밀려가 담벼락에 부딪쳐 내장이 흘러내렸다. 온 동네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산돼지는 두 사람을 죽이고 집 한 채를 부수고는 기지맥진하여 마을 앞 시궁창에 빠졌다. 이가라는 동네 이발사가 도끼로 산돼지의 머리를 내려쳤다. 장작을 패는 것처럼 후려쳤는데 머리가 장작처럼 갈라졌다. 간 밤에 산 너머 마을에서 그런 참사가 일어난줄도 모르고 박씨와 나는 새벽에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핏자국이 있었다. 한 놈은 마을로 한 놈은 계곡으로 가고있었다. 계곡으로 간 놈을 추격했다. 계곡으로 간 놈은 동맥이 끊어진 듯 검붉은 핏자국이 이어졌다. 놈은 물을 마시고 바위 뒤를 돌았는데 핏자국이 뚝! 끊겼다. 두리번거리다가 의아하여 바위를 빙 둘러 돌았는데 놈은 바위를 돌아 왔던 길로 돌아가고있었다.
(아차!)
나는 얼핏 계곡 위로 뛰어올라갔다. 7 - 8m 간격을 두고 뒤따라오던 박씨가 고함을 쳤다. 듣기에 따라서는 비명이었다. 박씨가 멍! 하니 서있는 옆 7 - 8m 덜어진 잔솔밭에서 산돼지가 박씨를 향해 돌진했다. 엄청나게 큰 놈이었으며 마치 탱크처럼 소나무를 짖밟아 눕히면서 박씨에게 덮쳐들었다. 사격위치가 고약했다. 산돼지의 어깨와 대가리 일부만 보였다. 그러나 박씨가 위험했다. 나는 겨냥할 겨를도 없이 총신을 쑥! 내밀면서 발사했다. 산돼지가 박씨의 서너 발 앞에서 주춤했으나 그대로 박씨의 옆구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박씨가 스러졌다. 정신이 아찔했으나 무의식적으로 제 2탄을 쏘았다. 선돼지가 무릎을 꿇고 나가떨어졌다. 치명타였다. 지근至近거리에서 심장을 겨누었으므로 명중했다. 나는 총을 던져버리고 박씨에게 달려갔다.
‘박선생! 박선생!’
산돼지의 이빨은 박씨의 윗옷 호주머니를 면도날로 자른 것처럼 찢었으나 상처는 없었다.
‘산돼지는 죽었소! 내가 죽였소.’
‘헛, 참 그거 ….’
말은 그렇게 했으나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박씨의 얼굴에 핏기가 살아났다. 마을로 내려간 산돼지를 쫓자고 했더니 박씨는 머리를 흔들고 손사래를 쳤다. 하는 수 없이 박씨를 데리고 주막으로 내려왔는데 이웃마을의 어젯밤 참사를 들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포수생활 10여 년에 처음 한 실수였다. 박씨를 서울로 보내고 이웃마을을 찾았다. 마을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다행히 마을사람들은 꾸지지지 않고 산돼지 무서운줄 모르고 설친 자기들의 잘못이라고 변명했다. 초상初喪에 보태라고 나머지 산돼지도 마을에 기부寄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선불맞은 산돼지는 무섭다. 뇌나 심장에 직격탄을 맞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배에 총을 맞아 창자가 터져도 창자를 끌며 몇 십 리를 간다. 앞발 두 개가 몽땅 부러지면 주둥이를 땅에 대고 기어간다. 척추에 앵두만한 탄환 두 개를 넣고도 살아가며, 아래턱이 없어도 곧잘 먹는다. 산돼지는 원시동물처럼 생명력이 끈질기다.
나는 어느 때 다나까라는 일본인과 경북 문경군에서 노루사냥을 한 적이 있었다. 마침 싸락눈이 내렸으므로 발자국을 따라 몰이를 했다. 나는 산마루에 목을 잡고 다나까는 산중턱에 세웠다. 둘 다 노루철鐵을 장탄했다. 노루사냥이 한창일 때 난데없이 산돼지가 나타났다. 200Kg이 넘는 거물巨物이었다. 산돼지는 내가 있던 산마루로 올라오다가 인기척을 알고 다나까가 목을 잡은 산중턱으로 방향을 바꿨다. 다나까는 아래쪽의 노루에 정신이 팔렸는데 옆에서 우지직! 나무 부러지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불과 10여 미터의 거리에 산돼지가 나타났다. 다나까는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노루탄을 발사했다. 죽이지는 못 해도 부상이라도 입혀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산돼지는 끄떡도 하지 않고 달려왔다. 벨기에제 6연발이었으므로 제 2탄을 쏘았다. 분명히 맞았을텐데 산돼지는 그대로 돌진했다. 노루탄은 산돼지에게는 탱크에 소총이었다. 도함都合 5연발 - 서른 개 이상의 탄환이 산돼지에게 맞았을텐데 산돼지는 다나까를 덮쳤다. 마지막 순간 다나까가 몸을 옆으로 날렸으나 산돼지의 주둥이가 다나까의 허벅지를 스쳤다. 다나까는 크게 크게 뒤벼넘기를 하며 공중에 떠올라 아래 잔솔 위로 떨어졌다. 나는 그 때 산돼지가 나타난 걸 알고 얼핏 노루철을 산돼지철로 바꿔 산마루에서 주르륵! 미끌어져 내렸는데 그게 바로 산돼지 앞이었다. 산돼지는 미련스럽지만 몸을 쉽게 돌린다. 다나까가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방향을 바꾸려는 순간이었다.
‘다나까, 엎드려! 엎드려!’
내가 위에서 총을 소면 산돼지 바로 밑에 잇는 다나까가 맞을 염려가 있었다. 산돼지에게 맞지 않으면 사람에게 맞을 게 뻔했다. 만약 그 때 철이 여러 개 들어간 산탄총이었다면 쏘지 못 했을 것이다. 허나 단발인 산돼지탄이었으므로 발사했다. 나를 노려보는 산돼지의 두 눈 사이에 퍽! 산돼지철이 꽂히는 소리를 들었다. 산돼지는 윽! 하면서 뒹굴었다. 어찌나 큰 놈이었던지 옆에 있는 한아름이나 되는 바위를 안고 같이 굴렀다. 간담이 서늘했으나 다행히 산돼지와 바위는 다나까의 옆으로 스치고 5 - 6m 아래 골짜기에 떨어졌다. 다나까의 허벅지에 응급처치를 하고 골짜기로 내려갔다. 산돼지의 몸을 조사했더니 몸은 노루철로 벌집이 되어있었으나 두꺼운 산돼지의 껍질을 뚫지 못 했다. 후배들에게 노루탄으로 산돼지를 쏘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충고한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뒤 또 한 번 선불맞은 산돼지에게 봉변을 당했다. 말로는 봉변이라고 하지만 아찔한 위기였으며 내가 죽거나 병신이 되지 않은 건 기적이었다.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 검둥산에 단신으로 산돼지를 잡으러갔다. 포수들의 정보로 산돼지기 우굴거린다고 했다. 검둥산에는 눈이 30Cm 정도 쌓였으므로 발자국꾼이나 몰이꾼도 소용없었다. 몇 분 전에 찍힌 큼지막한 산돼지를 발견하여 추적을 했다. 산중턱에서 200Kg 쯤 되는 놈을 발견했다. 라이플이었으므로 갸녕을 했다. 머리통을 쏘고싶었으나 원거리사격이기 때문에 가슴팍을 겨냥했다. 심장에 맞지 않아도 어깨, 복부나 다리에 맞을 가능성이 컸다. 능선을 타던 산돼지가 굉음과 동시에 쓰러졌다.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멀리 가지는 못 했으리라고 판단했다. 왼손에는 총을 들고있었으므로 바른손으로 나무뿌리나 바위모서리를 잡고 간신히 올라가는데 별안간 머리 위에서 눈사태처럼 와르르르! 소리가 나면서 하얀 눈가루가 퍼졌다. 눈가루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다만 무엇인가 거대한 물체가 덮쳐들고 있다는 걸 느끼고 눈앞의 바위밑에 납짝 엎드렸다. 그 순간 머리 위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거대한 물체가 지나갔으며 왼손에 들고있던 총이 멀리 날아가버렸다. 선불맞은 산돼지가 산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덮친 것이다. 한숨을 쉴 여유도 없었다. 머리를 타고넘어 아래로 굴러떨어졌으리라고 생각했던 산돼지는 불과 6 - 7m 거리에서 급정지를 했다. 그 우둔한 놈이 그런 재주가 있는지 미쳐 몰랐다. 산돼지가 밑에서 위로 쳐들어왔다. 핏발이 선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총이 없는 포수란 무력無力하다. 맨손으로 탱크같은 놈을 당해낼 재주가 없다. 산돼지의 콧김소리를 들으며 몸을 데구르르 옆으로 굴렸다. 그대로 산밑으로 굴러떨어질 심산이었다. 골짜기로 떨어지면 달아날아볼 생각이었으나 그렇게 해서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5 - 6m도 못 가서 공교롭게 잔솔에 걸려 넘어져버렸다. 그 사이에 몸을 돌린 산돼지는 위에서 밑으로 덮쳐들 준비를 했다. 선불맞은 맹수의 집념이었으며 기어히 적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본능이었다. 이 때 기적이 일어났다. 잔솔에 걸려 일어서려고 하던 손에 차디찬 쇠붙이감각이 느껴졌다. 소나무뿌리에 걸린 총이였다.
<아! 살았다.> 할 틈도 없이 총을 잡자말자 돌진해오는 산돼지의 두 눈 사이에 커다란 납덩이를 박아넣었다. 이번에는 선불이 아니라 진짜 불이었다. 산돼지는 맞은 충격으로 칵! 소리를 내며 몸의 중심을 잃고 벌렁! 나가떨어졌다. 이마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코와 아가리에서 허연 연기같은 수증기가 나오더니 붉은 피가 쏟아졌다. 하도 끈질긴 놈이라 심장에 마지막 한 방을 더 먹였다. 초식동물이고 사람을 보면 도망을 친다고 산돼지를 얏보는데 산돼지는 생사生死가 걸리면 호랑이도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80. 사냥의 재미
1928년 초겨울, 경춘선 마석역에서 기묘한 소달구지 두 대가 동북쪽으로 덜커덩거리며 굴러가고 있었다. 달구지에는 모두 열네 명이 타고있었는데 노인, 중년으로부터 아이들까지 멍석 위에 펑퍼짐하게 앉아있었다. 젊은이들은 소주를 마시고, 노인들은 화로火爐를 끼고 잡담을 했으며 아이들은 소꿉장난을 했다. 초겨울이었으나 달구지를 끄는 소의 입김이 하얗게 서렸는데 달구지를 안내하는 나는 씁쓰레한 기분이었다. 그게 모두 내 옆에 시치미를 떼고있는 총포상銃砲商 정씨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이다. 정씨는 서울 인사동에서 꽤 큰 총포상을 차리고있었는데 사냥보급 겸 장사선전으로 실없는 소리를 시부렁거고다녔다. 사냥은 고급스포츠이며, 사냥터에서 얻을 수 있는 사슴의 뿔 녹용, 곰의 쓸개 웅담, 노루와 산돼지의 신선한 피가 세상에 다시 없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영약靈藥이며 회춘回春의 비결秘訣이라는 등등. 좀 과장誇張되었을망정 허튼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한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 여덟팔자걸음으로 대문 밖에도 잘 나가지 않는 서울의 양반노인네나 밤낮 기생집안방이 아니면 주막 아랫목에서 노름이나 일삼는 건달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고, 사냥은 아주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허풍虛風을쳤다. 그 결과 그들은 의논을 하여 <그렇게 쉽고, 재미있고, 또 몸에 좋은 것이라면 여럿이 함께 가볼 것이니 안내를 하라.>고 했다. 난처한 이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중을 몇 십리씩이나 뛰어다녀야 할 사냥터에 그들을 어떻게 데리고가겠는가? 정씨는 일을 저질러놓고 감당을 못 해 나에게 통사정을 하며 매달렸다. 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하며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는데 울쌍이 된 그는 최신 모젤라이플을 주겠다고 했다. 모젤 6연발 라이플은 보기에는 가느다란 총이었으나 조준망원경이 부착附着된 유효사거리有效射距離 800m가 넘는 최고급총이었으며, 당시 값으로 서울의 웬만한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나는 승낙했다. 그래서 궁리窮理 끝에 달구지가 등장登場하게 되었다. 달구지는 울퉁불퉁한 산길의 돌맹이를 타넘고 개울의 얼음을 찍찍! 부수면서 천천히 굴러갔다. 3박 4일의 여정旅程이니 서둘 건 없다. 햇볕이 머리 위에 있는 낮에는 콧노래도 흥얼거리고 창가唱歌도 불렀으나 달구지가 산모퉁이를 돌아들어가 그늘이 지고 땅거미가 기어오자 사태가 달라졌다. 우선 노인들이 화로를 꼭 껴안았고, 아이들이 입에서 노래가 끊겼으며, 젊은이들도 소주잔을 놓아버렸다.
‘어! 추워. 추워죽겠는 걸.’
정씨가 고객顧客들 입에서 되돌아가자는 말이 나올까봐 ㅈ너전긍긍戰戰兢兢하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염려할 건 없었다. 어둑어둑한 산모퉁이 저쪽에 주막집이 보였다. 돗자리를 깔고 장작불로 뜨근뜨근하게 덮힌 주막집방은 서울양반들을 즐겁게 했다. 메주를 띄운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추위에 덜덜 떨다가 따끈한 방바닥에 앉았으니 전신全身이 노곤하게 풀릴밖에. 그러나 또 문제가 있었다. 주막집에서 내온 자갈같이 오돌오돌한 콩자반, 멸치 몇 마리가 둥둥 뜬 시레기국 따위는 본 체도 않았으며 서울에서 가져온 통조림을 땄다. 다행히 그들의 입에서 돌아가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튿날은 날씨가 더 추웠고 하늘이 흐렸다. 햇살이 오를 때를 기다려 늦게 출발했다. 차츰 지대가 높아지자 바람에 세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갑자기 돌변突變했다. 아무래도 하늘이 수상殊祥하다. 노인들은 자라목이 됐고, 귀가 빨개진 아이들에게 호호 입김을 불어주고 있었다. 오후 2시에 달구지가 멈췄다. 길이 너무 가파르고 벼랑이었기 때문이다. 달구지를 돌려보내고 모닥불을 피웠다. 모두 옹기종기 불가로 모였다. 서울양반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자, 이제부터는 걸어야 합니다. 뭐 한 10리(4Km) 쯤 될까요,’
10리라는 말에 그들은 속았다. 산길 10리는 대로大路 20리가 된다는 걸 몰랐다. 휘청다리들이 산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도 못 가서 힘이 빠져 터덕거렸는데 싸락눈까지 내렸다. 그 해 첫눈이었다. 사냥하기에는 안성맞춤이며 포수에게는 더 없는 선물이다. 그러나 서울양반들은 불평을 했다.
‘30리나 온 것 같은데 아직도 멀었느냐?’
‘발이 부르터 콩알이 생겼다.’
‘추워 한기寒氣가 든다.’
는 사람도 나왔다. 이미 산막山幕까지 4/ 5를 왔는데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무튼 깜깜해질 때 쯤 일행은 산막에 도착했다. 그 산막은 화전민火田民에게 노루 한 마리를 주고 샀다. 돌과 흙을 두툼하게 쌓은 튼튼한 집이다. 주변 세 개의 산줄기가 합쳐진 골짜기 둔덕에 지었고 북쪽에는 바람막이 담도 쳤다. 도착하자마자 온돌아궁이에 불을 피웠다. 방구들이 따뜻해지고 호롱불을 켜자 피로와 추위에 떨던 서울양반들의 얼굴에 화색和色이 돌았다. 흙바닥에 거적대기를 깔아 온돌이 달아오르자 구수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일행은 제멋대로 통조림을 따고 빵을 먹고는 이내 곯아떨어졌다. 평소에 불면증不眠症으로 고생하던 인사동영감이 제일 먼저 코를 곯았다.
이튿날 새벽
‘야아! 저것 봐.’
하는 아이의 고함소리에 모두 잠이 깼다.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천지가 하얗게 변했다. 산봉우리도 나무도 바위와 골짜기와 들판도 모두 하얀 눈으로 단장丹粧을 하고 아침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서울양반들은 넋을 놓고 그 아름다운 선경仙境에 취醉했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갔으며 젊은이들도 따라나갔다. 방에 남은 노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의 추억을 회상回想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일장 연설을 했다. <산막에서 생활은 각자 일을 분담分擔하여 스스로 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폐弊를 끼치면 안 된다> 일을 분담시켰다. 아이들은 주변 숲에서 땔감으로 마른나무를 주워오고, 젊은이들은 개울에서 물을 긷고 취사를 담당하고, 노인들은 방청소를 한다. 그리고 나는 총을 가진 두 젊은이와 아침찬거리를 장만하러 나갔다. 원래 곰, 산돼지와 노루 등 큰 사냥을 할 때는 작은 사냥을 안 한다. 총소리에 짐승들이 도망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 나는 꿩사냥을 했다. 꿩사냥은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산을 넘으면 화전민이 개간開墾한 밭이 있는데 양지바른 그곳에 꿩이 모여들었다. 젊은이들은 두서너 달 동안 정씨에게 사격술을 배웠다고 우쭐대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쏘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로 발포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산마루에 가까워지자 엎드려기었다. 산마루에서 내려다보니 20m 전방에 진홍색과 초록색이 아로새긴 꿩 서너 마리가 밭에서 놀고있었다. 그걸 보고 흥분하여 덮어놓고 총질을 하려는 젊은이를 눈짓으로 제지하여 각자 목표를 지정해주고 지시를 따르게 주의를 주고는 좀 더 가까이 기어갔다. 이젠 됐다. 마리를 끄덕여 발사신호를 했다. 동시에 발사하도록 했으나 1초 정도 간격이 생겼다. 1초 정도의 간격이면 상대의 목표가 움직이기 때문에 동시에 쏘라고 한 것이다. 첫탄은 총의 반동으로 엉뚱한 곳으로 발사되었고 두 번째는 꿩이 날아오른 뒷자리를 쏘았다.
(저런, 바보들 ….)
그러나 나는 이미 그걸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날개를 퍼득거리며 날아오른 꿩을 날치기기법技法으로 쏘았다. 그러나 두 번째 꿩은 반대방향으로 날아갔으므로 설맞아 개울로 도망가고있었다.
‘달려가서 저 놈부터 잡아요!’
달려가던 젊은이가 <이크!> 하며 주저앉았다. 고목밑에서 토끼가 튀어나와 놀랐다. 내가 토끼를 노렸다. 토끼는 내가 서있는 쪽으로 달려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내리막길로 달아났다. 그러나 토끼는 오르막에서는 빨라도 내리막에서는 사람보다 느리다. 내가 토끼를 잡아들고 개울로 내려가니 두 젊은이가 날개를 맞아 도망다니는 꿩과 술래잡기를 하고있었다. 풋내기포수들은 그곳에서만 다섯 발을 쏜 끝에 꿩을 잡고 산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쳤다.
‘잡았다! 우리가 꿩을 잡았어!’
꿩 두 마리에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한 젊은이들이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산막에 돌아오자 일행은 개선장군凱旋將軍처럼 마중했다. 아이들은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고. 나는 꿩과 토끼를 모두 젊은이들의 공功으로 하고 이번에는 요리사가 되었다. 꿩과 토끼의 털을 벗기고 도끼등으로 마구 쳐서 으깬 뒤 다시 칼로 난도질을 하여 냄비에 볶았다. 아랫마을 아낙네가 커다란 가마솥을 이고와서 뜸을 들인 구수한 보리밥에 즉석 볶음요리를 반찬으로 아침밥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아낙네가 병에 넣어온 탁주濁酒(막걸리)도 컬컬했고. 원래 꿩고기는 닭에 비해 잔뼈가 많고 단단하며 새큼한 냄새가 난다. 산토끼는 좀 배릿하지만 연하고 담백하며 꿩과 토끼를 넣고 푸성귀를 섞어 산초가루를 뿌리면 별미別味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개울로 갔다. 무릎깊이의 개울은 살얼음으로 덮였다. 커다란 바위를 들어올려 개울속의 바위를 냅다쳤다.
‘저 얼음속을 봐라! 뭐가 있지?’
아이들이 환성을 질렀다. 돌과 돌이 부딪힌 진동震動으로 바위밑에 숨어잇던 손가락크기의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고 그 보다 훨씬 큰 가재들이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아이들의 환성을 듣고 달려온 어른들도 합세合勢했다. 몇 시간 동안에 바가지 가득하나 고기를 채웠다. 그건 점심반찬이었다. 얼큰한 매운탕과 고소한 가재튀김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 날 오후, 내가 미리 배치한 몰이꾼이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새벽부터 나와 쌍두뱀바위 밑으로 몰아넣었던 노루가 난데없는 총소리 때문에 도망가버렸다는 것이다. 쓴웃음이 나왔다. 꿩과 토끼탓이다.
‘아, 그 따위 노루는 놔두고 돼지를 몰아!’
‘저쪽 용두산에 중돼지가 한 마리 돌아다니던데 그 놈이라도 몰아볼까?“
‘좋지. 그 놈을 이리로 몰고와.’
‘제기랄! 거기서 잡지 어떻게 여기까지 몰고오란말야. 집돼지인줄 아나?’
남의 속도 모르고 몰이꾼이 <제기랄!>을 연발했다. 나는 포수가 아니라 사냥안내인이었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 용두산에 가서 돼지를 산막쪽으로 몰아넣는 걸 지휘했다. 몰이꾼이 아무리 <제기랄!>이라고 해도 서울양반들이 갈 수 있는데까지 산돼지를 몰아와야 했다. 그건 산돼지를 잡는 것보다 어려웠다. 몰이에는 원칙이 없다. 너무 변화가 많아 경험과 지식만 통했다. 총은 누구라도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할 수 있고 명중될 수도 있지만 몰이와 추적은 프로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다. 또 짐승에 따라 몰이방법도 다르다. 토끼는 위에서 아래로 몰면 잡기 쉽고, 노루나 산돼지는 습성에 따라 몰아야 한다. 아무튼 우리는 산돼지를 산을 세 개 넘어 꿩을 잡았던 골짜기까지 몰고와야 한다. 산돼지를 참나무숲에서 소나무숲으로 몰아고, 산을 넘어가게 하고, 잔솔이 밀집한 산중턱으로 해서, 바위틈으로 빠져나가 골짜기로 내려가면 … 또 산을 넘고. 제기랄 …. 은폐물隱蔽物에 숨어다니기 때문에 산돼지 모습은 볼 수 없어도 그가 남긴 발자국으로 산돼지의 행로行路를 알 수 있었다. 산돼지는 서서히 조여드는 몰이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방향을 탔다. 너무 조이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므로 가끔 산돼지의 진로를 점검하여 몰이꾼을 멈췄다 풀었다 조종하면서 오후 늦게 산막이 있는 골짜기로 몰아넣었다. 이제 산돼지는 도가니속의 쥐였다. 그 골짜기는 세 개의 산에 둘러쌓였고 산에는 포수가 목을 잡아 숨어있으며 산 아래에서는 몰이꾼이 퇴로를 막았다. 손을 들어 신호를 했다. 아래쪽의 몰이꾼들이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간다. 드디어 산돼지가 튀어나왔다. 200Kg이 넘는 놈이었다. 산돼지가 내가 목을 잡고있는 곳으로 왔는데 나는 쏘지 않고 발을 굴러 위협을 했다. 산돼지가 진로를 바꾸었다. 바위틈으로 냅다뛰다가 그만 커다란 바위 위로 나가버렸다. 아무런 은폐물이 없는 바위 위에 우뚝 선 산돼지가 도망칠 방향을 정하려고 잠시 두리번거렸다. 사격 찬스다. 맞은편 산허리에서 첫탄을 발사했다. 바위에 맞아 튀었다. 두 번째 탄은 어림없이 빗나가 숲속으로 들어갔다. 놈이 골짜기로 뛰었다. 놓칠 염려가 있다. 그냥 둘 수 없어 목덜미를 쏘았다. 산돼지가 뒹굴었다가 일어났다. 맞은편에서 2탄이 날아와 허벅지에 맞았다.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산돼지가 벌집이 되었다.
‘그만! 그만 쏘라니까!’
고한을 치자 총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총소리보다 더 요란한 함성이 일어났다. 나는 몰이꾼으로부터 대통을 받아 산돼지의 염통에 쑤셔박았다. 먼저 영감님들에게 산돼지의 신선한 피를 빨게했다. 영감은 주저했으나 오래 살 욕심에 피를 빨았다. 산돼지피는 몸에 좋다고 한다. 사실 노루피나 산돼지피를 마신 사람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 산돼지피를 마시면 몸에 열이나고 온몸이 후끈거리는데 그게 약효藥效일거다. 비단 피뿐이랴? 먼지투성이 도시에 비하면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을 뛰어다녔으니 약효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산돼지 몸이 굳기 전에 산막으로 운반했다. 저녁은 산돼지 불고기다. 모닥불에 얇은 구들장을 걸쳐놓고 바위가 적당히 달아오르면 물이나 눈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지지소리를 내며 바위가 깨끗해지면 산돼지껍질의 기름을 바르고 넓적넓적하게 썬 고기를 던진다. 고기에 소금과 산초가루를 쳐서 긴 대젓가락으로 집어먹는다. 아직 벌건 피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연분홍색고기를 먹는 맛은 …. 이 요리를 산중에서 벌이면 10리 밖에 있는 불청객이 모여든다. 호랑이, 늑대다. 산돼지 불고기는 네 발 달린 짐승 중에서 최고다. 그건 집돼지와 달리 우선 잡내가 없고, 연하고, 기름기가 적고, 담백하며 노린내도 비린내도 없으며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서울양반들은 잘도 먹었다. 소주를 마시면서 대여섯근씩 먹었다. 일급 포수와 일급몰이꾼 다섯 명이 이틀간이나 공들여 몰아놓고도 이야기는 엉뚱하게 과장되었으나 나는 모른체 했다. 산돼지사냥의 금전적인 손익은 마이너스였다. 몰이꾼 품삯이 될까말까 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냥에서 손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최신식 라이플을 얻었고, 정씨는 돈을 벌었고, 서울양반들은 건강을 그리고 아이들은 재미를 맛보았다. 몇 젊은이와 아이들 중 몇몇은 나중에 좋은 포수가 되었다.
81. 젊은곰의 순대
음력 3월 - 두만강물이 녹기 시작할 무렵이면 함경북도 무산군과 만주국경선 일대의 험악한 산악에 살고있는 곰들이 굴속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온다. 해마다 동짓달 굴속에 기어들어가 발바닥만 핥고 있었던 곰들은 눈이 녹기 시작하면 어슬렁어슬렁 바깥나들이를 한다. 포수들이 곰사냥을 하는 시기다. 따라서 매년 이맘때가 되면 8도道의 내노라하는 포수들이 이 지방 산골 주막집에 모여든다. 주막에는 포수들뿐만 아니라 지방의 몰이꾼들도 모여든다. 포수와 몰이꾼은 흥정을 한다. 대상은 곰이다. 곰이 동면冬眠하는 동굴이며 안내하는 수고값이다. 곰이 동면하는 동굴을 발견하여 팔면 몰이꾼들에게는 한 밑천이 된다. 내가 처음 여기 온 건 22세 때였다. 산돼지 세 마리를 팔아 무작정 곰사냥터로 떠난 것이다. 검의 굴을 알고있는 몰이꾼을 만나려고 이 주막 저 주막을 찾아다녔으나 허사였다. 몰이꾼들은 이름도 낯도 모르는 그리고 애송이 나를 흥정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젓비린내나는 포수와 곰사냥을 하다가는 찢겨죽기 알맞다고 상대도 하지 않았다. 수렵허가기일은 며칠 남지 않았고 여비도 떨어져가고 …, 나는 몹시 초조했다. 이때 마치 구세주救世主같은 몰이꾼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곰보와 애꾸눈이었다. 그들이 좀 말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곰이 있는 굴을 알고있다기에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다 들어주고 흥정을 했다. 그날밤 주막에서 소주 몇 병과 도토리묵 몇 쟁반이 탕진蕩盡되었다. 곤드레가 된 나는 도라지타령을 흥얼거리면서 잠이 들었는데 이튿날 잠에서 깨어 생각해보니 좀 불안했다. 어젯밤 몰이꾼들이 실토한 얘기가 생각났다. 그들은 내가 비록 어리지만 산돼지를 몇 마리 잡았고, 마음만 먹으면 호랑이에게도 덤벼들 무모한 포수라는 걸 알고는 안심하고 실토를 했다. 내가 몰이꾼들에게 천대賤待받은 포수였다면 그들은 포수들에게 천대를 받은 몰이꾼이었다. 그들은 곰의 굴을 알고있었으나 그 곰굴은 흥정할 가치가 없는 굴이었다. 첫째, 그 굴은 첩첩산중疊疊山中 만주국경에 있고, 그 곰은 포수들이 꺼려하는 불곰이었고, 거기다가 젊은곰이었다. 그 자방의 불곰은 동체胴體가 적아 값이 없는데다 사납기로 이름났고 특히 젊은불곰은 겁이 없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을 곰보, 애꾸눈 몰이꾼과 사냥한다는 것은 전혀 타당성妥當性이 없었다. 엊저녁에 맺은 동업계약이 생각났으나 벌써 일어나 출발준비를 하고 있는 몰이꾼들에게 동업계약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엊저녁에 오갔던 소주잔의 정감情感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곰이 젊고 무모한 놈이라면 나도 젊고 무모하기는 마찬가지 아니냐?)
내가 믿는 건 영국제 최신 쌍총신 라이플뿐이었다. 나는 총과 망태를 매고, 애꾸는 누더기 이불을 돗자리에 둘둘말아 등에 지고, 곰보는 배에 쌀자루를 감고 허리에 물통과 냄비를 주렁주렁 달고 우리는 주막을 떠났다. 총만 없다면 고향을 떠난 유랑민流浪民 꼴이었으나 표정만은 노다지를 캐러가는 것처럼 싱글벙글이었다. 그날 우리는 산마루를 열서너 개나 넘었다. 험산險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해쳐나갔다. 그도그럴 것이 그들은 표면상으로는 품팔이였으나 법을 피해 살아가는 밀렵꾼이었다.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 하는 깊은 산중에 함정을 파거나 덫을 놓아 짐승을 잡는 것이 그들의 본업本業이었다. 요 한 달 전만해도 산돼지 두 마리, 너구리 한 마리를 잡았다고 실토했다. 지나가는 길에 함정에 들렀으니 토끼새끼 한 마리도 걸리지 않아 실망했으나 곧
‘괜찮아, 곧 곰을 잡을테니. 과부寡婦주막에 새로 온 계집 엉덩이쯤 두들길 수 있을테니 ….’
하고 껄껄 웃었다. 그들의 밀렵지를 돌아다니다가 어두워졌다. 그들은 마치 단골여관에 가는 것처럼 어느 동굴에 나를 안내했다. 두 칸 반 정도의 굴에는 낙엽과 마른 풀이 두껍게 깔려있고 한쪽 구석에는 숯도 있었다. 돗자리로 굴 입구를 막고 숯불을 피우니 안온安穩한 잠자리가 되었다. 그날밤, 그는 우리가 잡으려는 곰얘기를 했다. 곰은 생식기가 되면 암수가 만나 교미를 하고 임신을 하면 헤어진다. 암컷은 동면을 하면서 새끼를 낳아 봄이 되면 밖으로 데리고나온다. 새끼가 2 - 3년 자라면 어미와 헤어진다. 우리가 잡으려고 하는 곰은 어미와 헤어진지 얼마 안 되는 놈이다. 실상 그놈이 사는 구멍도 이들의 여관이었는데 곰이란 놈이 강탈强奪해버렸다.
‘아, 놈은 사람이나 범이거나 발견하면 미친 개처럼 덤벼들거든. 몰이를 하여 굴속에서 훌쳐낼 필요가 없어.’
그러니 사냥은 너 혼자서 하라는 말이렸다? 이튿날 11시 경에 동굴에 도착했다. 곰이 사람냄새를 맡지 못 하도록 바람을 안고 접근했다. 나무 뒤를 돌아 바위 위로 올라간 곰보가 손짓을 했다. 약 100m 거리에 굴이 있었는데 젊은곰이 굴앞에 나와있었다. 곰은 굴앞을 왔다갔다했다. 네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가기도 하고, 두 다리러 어슬렁어슬렁 걷기도 하고, 일본 스모선수처럼 두 다리를 교대로 땅을 차기도 했다. 동면을 하면서 곰은 발바닥을 핥고 살았다. 그래서 발바닥이 약해져 다지는 것이라고 곰보가 설명했다.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맹수용 최신형 2연발이었으므로 믿을 수 있었다. 굴의 정면으로 걸어갔다. 내가 굴에서 80m 정도 갔을 때 곰이 나를 발견하고는 굴속으로 달아났다. 80m, 70m …. 우욱! 우욱!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오지말라는 경고였으나 무시했다. 30m까지 다가가자 노호怒號가 터졌다. 그래도 계속 전진했다. 곰이 튀어나왔다. 몸을 동그랗게 공처럼 말아 굴러왔다. 순간 당황했다. 산돼지는 돌진해도 대가리를 들기 때문에 좋은 표적이된다. 그런데 곰은 대가리가 작을뿐만 아니라 밑으로 숙여 달려오기 때문에 몸이 동그란 유선형流線型이 되어 총알이 미끄러질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첫탄을 발사했다. 곰이 벌렁나가떨어졌다. 이거 뭐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어쩌다 실수로 형편없이 약한 선수에게 진 씨름선수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자세는 나에게 좋은 표적이 되었다. 흉장부에 2탄을 발사했다. 다시 장전을 하고 곰에게 다가갔다. 첫탄은 이마에 2탄은 심장을 꿰똟고있었다. 굿이나 보고 떡을 먹자는 태도로 보고있던 몰이꾼들이 달려왔다. 애꾸가 내 등을 두드리고 곰을 걷어찼다.
‘이 새끼, 집세도 안 내고 남의 집을 빼앗았지?’
곰보는 곰의 엉덩이를 마치 술집아가씨 다루는 것처럼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곰보가, 날이 이렇게 따뜻하니 곰의 내장을 꺼내고 운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애꾸가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순대를 먹어야지.’
‘순대?’
‘천하일품天下一品 곰의 순대야.’
나는 애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곰의 순대를 만들려면 장에 든 똥을 빼내고 몇 번이나 말끔하게 씼어야 하는데 물도 없응 여기서 어떻게 순대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곰보도 동의하며 말했다.
‘순대는 우리가 만들테니 마른나무가지나 주어오쇼.’
작년 가을에 곰이 도토리를 따먹느라고 꺾어버린 참나무가지가 얼마든지있었다. 곰보는 불을 피우고 애꾸는 배를 갈라 먼저 조심스럽게 쓸개를 꺼냈다. 그리고 곰의 장을 잘라 나에게 보여주었다. 곰은 겨우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발바닥만 핥고 지냈기 때문에 노란 기름이 잘잘 흐를 뿐 깨끗했다. 애꾸는 콧노래를 부르며 곰의 허벅다리살을 얇게 저며 장에 넣고 선지피도 넣었다.
‘산돼지나 노루피는 생피를 마시지만 곰의 피는 순대로 먹어야 해.’
굵은 나뭇가지에 장을 둘둘말았다. 애꾸와 곰보가 나뭇가지 양쪽끝을 잡고 모닥불에 빙빙 돌려가며 순대를 구웠다. 순대가 노랗게 익으면서 부풀어 오르고 노란기름이 불 위에 떨어져 파란 불꽃이 일어났다. 곰보가 수통에 담아온 소주를 따라 한 모금 마시고 칼로 순대를 잘라 먹었다. 고소한 냄새가 주변에 퍼져나갔다.
‘이렇게 순대를 구우면 주변의 불청객 - 호랑이나 늑대들이 냄새에 끌려 모여듭니다. 자, 젊은포수님도 한 잔.’
곰의 순대는 정말 천하일품이었다. 장속의 기름 때문에 튀긴 것처럼 바삭바삭하고 고소했다. 우리는 봄볕 아래서 한 잔 또 한 잔 하다가 노곤해져서 한숨 잤다. 내장을 뺀 곰이 우리가 하는 짓을 보고 웃고있는 것 같았다. 젊은곰에게는 봉변逢變이었지만 젊은포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낭만浪漫이었다.
82. 웅담熊膽과 녹용鹿茸
노련老鍊한 포수는 사슴을 쏠 때는 데가리를 피하고 곰을 겨냥할 때는 흉부胸部를 가려쏜다. 웅담과 녹용이 상傷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곰의 배를 가를 때도 무척 긴장한다. 웅담은 그 곰값 보다 더 비싸다. 쓸개없는 사람은 살지만 쓸개없는 곰은 곰 취급을 받지 못 한다. 곰의 쓸개가 좋은가 나쁘냐의 판별은 포수에게는 어렵지 않다. 곰의 배를 가르면 내장들이 주르르 쏟아진다. 이 때 붉은 간肝 옆에 푸르스레한 주머니 같은 것이 하나 발딱 삐어져나오는데 그 게 바로 쓸개다. 쓸개가 발딱 일어서면 좋고 크기와 색깔도 기준이 된다. 곰의 쓸개는 얼핏 보면 푸르스름하나 햇빛에 비추면서 자세히 보면 검고, 누렇고, 파랗고, 붉은색이 섞여있다. 고운 코발트색이다. 곰의 쓸개를 제조해서 환약으로 만들어 유리잔속 청수淸水에 넣으면 검은줄이 불빛으로 변하며 뻗는데 한약상韓藥商은 그 빛깔을 보고 가치를 결정한다. 나는 직접 웅단을 제조하기도 하는데 배를 갈랐을 때 발딱 일어서는 것은 제조製造하면 좋은 웅담이 되고, 배를 갈라도 쓸개가 어디 있는지 한참 찾을 정도면 제조해도 신통치 않다. 쓸개의 껍질을 뜯어내고 담긴 액체를 그릇에 담아 펄펄 끓는 물에 담가놓으면 굳어져 웅담이 된다. 웅담의 약효는 잘 모른다. 그러나 젊었을 때 곰사냥에서 부상負傷을 입어 웅담으로 고친 일이 있다.
한경도 무산에서 윤포수와 곰사냥을 했는데 나무 위에서 덮친 곰에게 어깨에 부상을 입어 어깨가 마비痲痺되었다. 그놈은 나를 덮치기 전에 총에 맞았으므로 다른 부상은 없었으나 400Kg이나 되는 무게에 깔려 어깨뿐만이 아니라 온몸에서 열이나고 꼼짝을 못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여관방에 누워있었는데 우리가 잡은 곰을 산 한약상이 찾아왔다. 당시에는 웅담을 구하기 위해 중국의 거상巨商들이 만주와 함경도에 드나들었는데 나를 찾아온 사람은 으뜸가는 거상으로 알려진 왕대인이었다. 머리가 히끗희끗한 왕대인이 나를 진맥診脈하고 돌아가 약을 보냈다. 그 약에는 내가 잡은 곰의 쓸개로 만든 웅담이 좁쌀만하게 세 개 들어있었는데 매우 썼다. 그러나 약효藥效는 신기했다. 약을 먹고 몇 시간 후 어깨의 통증이 사라졌고, 하루밤 땀을 빼고나니 열이 내렸으며, 손의 마비도 풀렸다. 처음에 나를 진찰했던 서양의사西洋醫師는 옥도정기(머큐롬)를 발라주면서 <심한 타박상打撲傷이니 한 1주일 정도 못 일어난다>고 했다. 열이 내려 왕대인을 찾아가 인사를 했더니 <이번의 웅담은 매우 훌륭했으며, 잡은 포수가 그 첫 혜택을 보았다>고 하며 웃었다. <그 곰이 병病 주고 약藥 준 격格>이었다. 왕대인은 곰의 쓸개가 신비의 영약靈藥이라고 했다. 원레 쓸개는 옆에 붙어있는 간에서 만드어내는 수백가지 생명의 요소들을 농축濃縮시켜 저장하는 보물단지이며 곰이 겨울 동면 중에 3 - 4개월을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끄떡없이 살 수 있는 것도 쓸개에 담긴 담즙膽汁이라고 했다. 따라서 곰뿐만 아니라 사람도 쓸개에 담긴 수백가지 생명의 요소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병이 나는데 그 때 웅담으로 보충을 해주면 병이 낫는다는 논리였다. 왕대인과 나는 그 때부터 친밀해졌으며 중일전쟁이 일어나 왕대인의 소식이 끊길 때까지 왕래했다. 그는 내가 잡은 곰의 쓸개를 가장 정확하게 평가했으며 좋은 물건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잡은 곰의 쓸개를 300원(2019년 가치 3억 이상)에 구입하기도 했다. 태백산맥 줄기 중 하나가 한경남도에서 강원도쪽으로 뻗어나가는 어느 야산에서 잡은 곰이었는데 털이 마치 옻칠이라도 한 것처럼 검었고 윤기潤氣가 번지르르 했다. 금렵기가 풀려 맷돼지를 잡으려고 갔다가 우연히 곰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전날 내린 눈 위에 뚜렷하게 찍힌 발자국을 보고 놀랐다. 곰은 10월말께에는 동면을 하는데 별난 놈이었다. 발자국을 추적하다가 이번에는 정말 기겁을 했다. 산마루를 넘어서니 바로 몇미터 앞에 새카만 곰이 우뚝 서 있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나도 놀랐지만 곰도 느닷없이 나타난 나를 보고 놀랐다. 그래서 곰과 사람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다가 동시에 그 상황에서 각자 할 일을 했다. 곰은 사람에게 한 걸음 덮쳐들었고, 사람은 총을 쏘았다. 그날은 내게 행운이 붙어다니는 날이었다. 총탄은 곰의 양 눈 사이에 있는 하얀 반점斑點을 뚫었으며 총탄으로 뇌신경이 마비되어 빙그르르 돌더니 털썩 나가떨어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승패가 났다. 숨진 곰의 배를 갈라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쓸개가 커다란 가지만 했다. 간과 같이 붙어있지 않았다면 쓸개로 믿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곰은 아주 건강항 놈이고 동면을 하기 위해 충분히 영양을 섭취했다. 그 산에는 밤, 도토리가 풍부했고, 개울에는 가재와 물고기가 지천이었다. 그런데 내 예상대로 말썽이 생겼다. 곰껍질을 흥정하던 모피상이 <털을 염색染色했다>고 우겼으며, 쓸개를 본 한약상도 <아무래도 곰의 쓸개 같지 않다>고 빈정댔다. 그까짓 껍질이야 팔리든 안 팔리든 관심 없었으나 쓸개가 가짜로 인정받은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침 청진에 와있는 왕대인에게 달려갔는데 왕대인은 그 쓸개를 보더니 선뜻 300원을 내주었다. 보통 쓸개의 두 배가 넘는 값이었고 서울장안에서 좋은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값이었다. 왕대인은 쓸개를 제련하면서 간을 잘라내며 <다음부터는 구차스럽게 간 따위는 붙여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왕대인에게 곰의 쓸개만이 아니라 70여 쌍의 녹용도 팔았다. 사슴뿔도 쓸개처럼 영약이었다. 5 - 6월에 묵은 뿔이 빠지고 새 뿔이 솟아난다. 나는 왕대인의 주선周旋으로 동부중국에서 사슴사냥을 했으며 사슴이 모여드는 곳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사슴 몰래 땅집을 파놓고 사슴을 관찰하면서 몇날며칠을 살게되며 사슴뿔이 덜 여문 걸 알면 땅집에서 일주일이나 보름을 기다리기도 한다. 사슴에는 늘이(만주), 토레기(한국북쪽), 청토레기(만주와 한국 국경선), 일본사슴 등 여러 종류가 있고 늘이는 당나귀만큼 큰 사슴이며 그놈이 2m가 넘는 뿔을 흔들며 달리는 건 장관壯觀이다. 녹각鹿角은 사슴의 나이가 많을수록 값이 나가고, 상각 - 뿔의 끝부분이 더 좋다. 나는 왜정倭政 소화 초년에 한 쌍의 사슴뿔을 580원을 받은 일이있다. 당시 서울장안의 날아갈 듯 한 기와집 한 채 값이다. 그 사슴은 함경북도 북쪽 만주땅 옥돌골에서 잡았다. 동네 감자밭을 망치는 산돼지를 잡아달라는 경찰서장의 청탁에 못이겨 산돼지를 잡으려다가 우연히 사슴을 잡았다. 산돼지는 몸에 기생寄生하는 기생충을 털어버리려고 나무에 비비거나 진흙탕물에서 뒹군다. 이른바 흙탕인데 산돼지사냥의 지표指標로 삼는다. 그런데 그날 몰이꾼이 나를 안내한 곳은 산돼지흙탕이 아니라 사슴흙탕이었다. 때는 마침 녹용의 계절 5월이라 산돼지 따위는 잊어버리고 사슴을 추적하여 1Km 쯤 떨어진 계곡에서 물을 마시고있는 사슴을 발견하여 단발로 쏘았는데 청토레기였다. 사슴의 목을 통째로 잘라 청진의 왕대인에게 가지고 갔다. 왕대인이 사슴뿔을 한참동안 보더니 긴 한숨을 쉬며 일단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왕대인이 청진의 가장 고급요정에 호화로운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그는 사슴뿔 애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호탕豪宕하게 술을 마시며 내 사냥얘기를 들었다. 술이 어지간해지자 기생妓生에게 주판珠板을 가지고 오래더니 주판알을 튀겼다. 580원이었다. 나중에 왕대인이 그 뿔은 자기가 취급한 8,000여 개의 뿔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는 뿔만 보고 사슴의 나이와 족보族譜를 알려주었다. 그 사슴은 몇 년 전에 자기가 취급한 사슴의 일가一家라고 하며 제발 그 사슴일족이 멸종되지 않기를 바랬다. 왕대인은 사슴뿔을 손수 다루었다. 특별히 마련한 방에서 단정하게 꿇어앉아 두꺼운 철솥에 맑은 물을 펄펄 끓여 냉수冷水를 홱! 뿌리고 사슴뿔을 물속에 살짝 집어넣는다. 잠시 후 뿔을 꺼내어 그늘에 말렸다가 다시 뜨거운 물에 넣고. 왕대인은 무려 일주일동안 그 일을 되풀이 한 끝에 약재藥材로 완성된 뿔을 보여주었다. 야들야들한 뿔이 단단하게 다듬어졌다. 왕대인은 그 뿔을 중국정부의 최고요인要人에게 선물하겠노라 말했는데 그 뿔을 복용한 사람이 얼마나 무병장수無病長壽했는지 ….
83. 암살자暗殺者 표범
사슴의 뒤를 쫒고있는 표범의 발자국은 희미했다. 사슴의 발자국이 꽉꽉 찍어누른 목도장木圖章이라면 사슴의 발자국은 종이에 살짝대다만 고무도장이었다. 얼핏 보면 무슨 발자국인지 분간이 잘 안 되었으나 바위 위에 찍힌 걸로 표범의 발자국을 구분할 수 있었다. 꽃무늬발자국이다. 육식동물의 습성으로 그놈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사슴을 뒤 따르면서 걷고있었다. 표범은 우리들처럼 발자국을 추적하지 않고 사슴의 향방을 보며 추적한다. 표범은 사람과 달리 날카로운 코와 귀 그리고 눈으로 추적한다. 몰이꾼이 표범의 발자국이 나타나자 사슴몰이를 포기하자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것은 반대였다. 나는 벨기에제 산탄총 5연발에 사슴용 납탄을 빼고 맹수용철탄을 장전했다. 그리고 사슴잡이 대신 표범을 잡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암살자표범이 이 지역에 출몰하는 한 사슴이 이 지대에 서식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사슴을 사로잡으려던 우리의 계획은 수포화水泡化 된다. 암살자를 잡는 방법은 암살자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등을 비수匕首로 찌르는 자에게는 등 뒤에서 습격해야 한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추격을 하다가 부근 인가人家로 내려왔다. 이튿날 새벽 다시 추적했다. 몰이꾼과 발자국꾼도 도끼, 대나무창으로 무장을 했다. 오후 서너 시 경 한국과 만주 국경지대까지 표범을 따라갔는데 발자국꾼의 눈짓으로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위헌신호였으며 언제 표범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사선死線이였다. 산마루가 ㄱ자로 구부러졌는데 표범이 달리고있었다.
(이놈이 여기에서 사슴을 앞지르려 하고있어.)
발자국꾼의 예상은 적중的中했다. ㄱ자로 구브러진 산마루에서 사슴과 표범의 발자국이 교차되었으며 핏자국이 있었다. 교활한 표범이 남쪽으로만 가는 사슴을 앞질러 대기하고 있다가 덮쳤다. 나무 위에서 사슴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사슴이 지나가자 뒤에서 덮쳐 사슴의 등에 올라탔다. 표범의 무게로 쓰러진 사슴의 동맥을 물어뜯어버렸다. 주변이 피바다가 되었다.
(오냐, 복수는 내가 해주마!)
어금니를 물었다. 발자국추적이 필요없었다. 표범은 약 300m 떨어진 계곡까지 사슴을 끌고가서 뜯어먹었다. 사슴고기를 포식한 표범은 그 자리에서 쉬다가 남은 사슴고기를 물고 옆의 잡목림으로 들어갔다. 잡목림에 들어가기 전에 경고했다. 앞서지 말고 멀리 떨어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표범은 은신술의 천재이며 언제 어디서 덮쳐들지 모른다.
‘앗!’
뒤를 따라오던 몰이꾼이 나무 위를 가리켰다. 3m 위의 나뭇가지에 사슴이 걸려있었다. 물론 사슴이 한 짓이었으나 자기 몸무게 보다 더 무거운 사슴을 나무 위로 끌어올린 재주는 놀라웠다. 나무에 걸린 사슴고기를 까마귀 서너 마리가 쪼아먹고있었다. 우리가 다가가도 욕심 많은 까마귀는 개의치 않았다. 몰이꾼이 돌맹이를 던지자 까악! 까악! 악담을 하며 날아갔다. 나는 표범이 남겨둔 사슴고기를 먹기 위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어둠속에서 표범과 대결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요. 장님이 눈 뜬 사람과 싸우는 격이지.’
발자국꾼이 단호하게 반대했으며 몰이꾼도 지극히 무모하고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총이 있지 않은가?)
어둠이라고 하지만 하늘에는 만월滿月에 가까운 달이 뜰 것이고.
‘괜찮아, 오늘은 달이 뜨는 날이야.’
‘우리는 달빛에 표범을 볼 수 있지만 우리가 숨어있으면 표범은 우리를 볼 수 없어.’
해는 이미 서산으로 떨어졌지만 산 위에 달이 걸려있었다. 몰이꾼이 나무 위로 올라가 주위를 살폈다. 나는 사슴이 걸려있는 나무에서 10m 쯤 떨어진 나무 위에 올라가 사슴고기에 조준을 맞추었다. 발자국꾼을 시켜 총부리와 사슴고기 사이의 나뭇가지를 잘라버렸다. 달빛이 사슴고기를 잘 비추도록 위의 가지도 쳐냈다. 나뭇가지를 엮어 세 사람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보마를 만들어 위장僞裝을 했다. 밤이 깊어가자 추위와 긴장속에서 자꾸 눈이 감겼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교대로 자기로 하고 떨어지지 않도록 나무에 몸을 묶었다. 몇 시간을 잤을까? 나는 부지중不知中 눈을 떴다. 뭣인가 이상한 예감이 신경을 건드렸다. 내가 눈을 뜨자 코를 골던 몰이꾼도 눈을 떴다. 그 때까지 자지 않고 보초를 섰던 발자국꾼이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뜻이다. 주위는 캄캄했으나 사슴이 매달린 부근은 달빛이 스며들어 사슴의 윤곽이 어슴프레 보였다. 나는 온 신경을 모아 사슴 주위를 살폈다. 이상한 기척이 있었다. 눈이나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코로 느끼는 기척이었다. 발자국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낙엽을 밟는 소리였다. 3 - 4초 후 다시 발자국소리가 났다. 비스락! 바스락! 이번에는 분명하게 들렸다. 달빛 아래 움직이는 물체가 들어났다. 방아쇠를 당기려다 일순 주저했다. 표범이 아닌 것 같았다.
(무엇일까?)
뭣인지, 두 마리가 사슴이 걸린 나무 주변을 빙빙 돌았다.
(옳지. 늑대구나!)
사슴고기 냄새를 맡고 왔으나 나무 위에 오를 재주가 없는 늑대는 주의를 빙빙! 돌다가 펄쩍! 뛰기도 했으나 사슴고기가 저절로 입에 들어올 리 없어서 안타깝게 빙빙! 돌기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늑대들이 행동을 멈췄다. 늑대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경계태세였다. 나도 총을 들어올렸다. 늑대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딱! 멈추더니 후다닥! 도망갔다. 늑대가 도망친 자리에 뭔가 나타났다. 소리없이 나타난 긴 그림자, 늑대가 놀라 달아날 짐승은 표범 밖에 없다. 밝은 빛을 싫어하는 표범은 어둠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의 죽음 같은 침묵. 나무 위의 우리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 했다. 만약 나무 위 우리를 발견한다면, 표범은 어둠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고 나무를 타는 재주가 있으므로 표범이 우리를 발견하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한참만에 떴다. 어둠을 익히기 위해서다. 사슴이 걸린 나무에 두 개의 푸른빛이 보였다. 나는 그 두 개의 빛 사이에 조준을 맞추었다. 두 개의 눈 사이에서 이마를 찾으려고 했는데, 그냥 두 개의 빛 사이를 겨냥해서 발사했어야 하는데, 총을 들어올리는 순간 발사했어야 하는데, 총을 들어 올리고 표범의 이마를 찾는 그 짧은 1초도 못 되는 순간 어둠속에서 반짝이던 빛이 사라졌다. 그 숨막히는 시간이 7 - 8분이나 계속되었다. 드디어 표범이 나무 위로 올라가 사슴고기를 뜯었다.
‘꽝!’
총구에서 파란 불빛이 터지는 순간 픽! 하고 총탄이 부드러운 물체를 파고드는 소리를 들었다. 털썩! 사슴고기가 표범과 함께 떨어졌다. 몸서리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부상을 당한 표범이 마치 수천 개의 시계태엽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소리를 내며 펄쩍! 펄쩍! 뛰었다. 표범은 자기를 기습한 적을 찾고있었으나 나무 위의 우리를 발견하지 못 했다. 나는 제 2탄을 쏘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조준이 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표범에게 우리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2 - 3분 후 표범의 발악하는 소리가 멀어졌다. 날이 희무끄레 밝아지자 나무에서 내려왔다. 발자국꾼이 표범은 왼쪽어깨에 철鐵을 맞았으나 중상이 아니라고 했다. 부상한 표범을 따라가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표범은 은신술隱身術의 천재天才이고 기습奇襲의 상습자常習者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덮쳐들지 모른다. 오히려 표범의 기습을 기다려야 한다. 숨어있는 표범을 찾기 어렵고 찾다가 기습을 당하는 것 보다 표범이 공격해오는 게 더 유리하다. 날아오는 표범을 날치기로 쏘는 것이다. 맷돼지탄을 빼내고 꿩탄을 장착했다. 표범이 한만韓滿국경의 울창한 삼림으로 들어갔다. 다섯시간을 추적했으나 불과 2Km를 갔다. 정오께 발자국꾼이 손짓을 했다. 일직선으로 달아나던 표범이 되돌아서서 서성거린 자국이 있었다. 표범이 추격을 눈치채고 따라오는 우리를 관찰한 것이다. 표범과 대결할 시간이 다가왔다. 부상당했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달아나기만 할 표범이 아니다. 발자국꾼이 나무토막에 흘린 피를 손가락에 묻혀 보여주었다. 피가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표범이 2 - 3분 전에 지나갔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앞장섰다. 발자국꾼이 필요없다. 나는 표범이 숨어있는 곳을 눈치챘다. 까마귀 서너 마리가 하늘을 빙빙 돌고있었다. 피냄새를 맡은 것이다. 2 - 300평의 잡목림에는 관목灌木, 넝쿨과 잡초가 무성해서 표범이 숨기 딱 알맞은 곳이다. 암살자에게는 알맞았으나 포수에게는 최악의 장소였다. 관목림 앞 20m 지점에서 멈췄다. 첫탄과 두 번째탄을 쏠 시간은 있어야 한다. 몰이꾼을 시켜 잡목림에 돌맹이를 마구 던졌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표범은 시야가 트인 곳에 나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돌맹이와 으르렁거리는 싸움이 10여 분이 지났다. 지쳤다. 돌맹이가 멈추자 으르렁소리도 멈췄다.
(도망갔나?)
좀 위험했지만 발자국꾼과 몰이꾼에게 대가하라 명령하고 바른쪽으로 돌아가봤다. 그 때 관목림에서 표범이 튀어나와 약 10m 쯤 떨어진 바위 뒤로 숨었다. 워낙 빨랐고, 한 손에 총을 쥐고 다른 손으로 나무뿌리를 잡고 기어서 올라가고 있었으므로 총을 쏘지 못 했다. 그러나 표범이 뛰어든 바위 주위에는 은폐물이 없었다. 좋은 기회다. 벌떡 일어나 바위로 달려갔다. 내가 바위에 20m 쯤 육박했을 때 바위그늘에서 표범이 뛰어나와 소리없이 덮쳐들었다. 표범과 나 사이에는 허벅지 정도의 잡초들이었는데 그 잡초들 사이로 미끌어지듯 달려왔으며 나는 두 갈래의 풀과 표범의 노란 등만 보았다. 표범의 머리 앞 약 10Cm 부분을 겨냥해서 쏘았다. 꿩 날치기기법이다. 꿩은 날아가는 속도가 있기 때문에 그 속도를 감안하여 머리 앞 10Cm를 쏜다. 꿩이 탄환에게 날아와서 스스로 맞는다는 사냥기법技法이다. 표범이 곤두박질했다. 탄환을 머리에 맞아 스스로 달려온 탄력으로 꼬꾸라진 것이다. 그런데 표범이 불사조不死鳥처럼 다시 일어섰다.
‘쏘아라! 쏘아.’
몰이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총을 들지 않았다. 표범은 다시 나에게 달려들려고 허우적거릴 뿐이다. 나는 벌써 그의 눈알이 허옇게 돌아가는 걸 보았으며, 그 화려한 껍질을 산탄총구멍으로 망가뜨리기 싫었다.
84. 맹수猛獸사냥개들
1939년, 황해도 봉산군 은주면에 있는 광동마을 뒷산에 이때껏 보지 못한 괴물怪物이 나타났다. 마을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리인줄 알았다. 생김새가 개나 늑대와 비슷했지만 등치가 우람했다. 송아지만한 몸집과 긴 털 그리고 험상궂은 상판이 이리와 비슷했다. 몰이꾼들이 그 괴물을 <이리 사냥개>라고 했다. 시베리아 혈통血統의 만주개였다. 제법 추운 날싸였으나 만주개들은 추위를 모르는 듯 산기슭에서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뛰어다녔다. 모두 세 마리, 선두先頭에 선 것은 두목 바둑이다. 강한 바람을 안고 달려오는 바둑이는 머리와 가슴의 긴 갈기털이 마치 사자 같았다. 세 마리의 개들은 단숨에 들판을 돌파, 산기슭으로 치닫고있었다. 산중턱에서 토끼를 발견했는데 두목의 일격에 눈속에 나뒹굴었다. 두목은 다른 개들을 불러 토끼를 즉결처분했다. 두 다리를 잡아 찢어 먹어치워버렸다. 내 승락도 받지 않았으나 나는 모른체했다. 사냥개가 그런 난폭한 짓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나는 그들에게만은 그걸 짓을 눈감아주었다. 그들은 꿩, 오리나 여우 따위를 잡는 사냥개가 아니라 목숨을 내걸고 범, 곰과 맷돼지들과 싸우는 맹수사냥개들이었다. 일반 사냥개 - 포인터, 세파트, 스파니엘은 만주나 한국에서는 맹수사냥을 못 한다. 그 연약軟弱한 몸으로는 영하 零下30도를 오르내리는 강풍속에서 덩굴에 감기고, 가시에 찔리고, 바위에 부딪히면서 맹수들과 싸울 수 없다. 그들은 범의 발자국만 봐도 오금을 펴지 못 한다. 그래서 맹수사냥을 하는 나는 언제나 시베리아견犬 계열系列의 만주개나 아이누견 등 대형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했는데 그 날 출동한 개들은 역전歷戰의 용사勇士들이었다. 개들이 흩어져 수색을 하는 걸 보고 천천히 산마루로 올라갔다. 주변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지점에서 개들의 활동을 지켜보는 것이다. 만주개들은 함부로 짖지 않는다. 난데없이 덮쳐든 개들을 피하기 위해 짐승들이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다. 한 시간 쯤, 마침내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나지막하게 그리고 차츰 높아지면서 온 산에 울려퍼졌다.
‘꽤 큰 맷돼지로구나!’
나는 담배쌈지를 호주머니에 챙겨넣으며 일어섰다. 개들의 짖는소리가 더 요란해졌으며 신경질적이었다. 뭔가 초조하고 다급했다.
(맷돼지가 아닌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달려갔다. 산마루를 두 개 넘어야 했는데 하나 넘을 때까지 짖고있었다. 개가 짖는다는 건 아직 공격을 하지 않고있다는 말이고 공격을 못 한다는 것은 상대가 섣뿔리 덤벼들 수 없는 거물이라는 뜻이다. 특히 두목이 저토록 다급하게 짖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범일까? 설마 이런 야산에 범이 ….)
소리가 난 곳은 산너머 관목림이었다. 나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단숨에 산마루를 넘었다. 개들의 짖는소리가 워낙 다급했으므로 생각할 겨를없이 덮어놓고 싸움판에 뛰어든 것인데 정말 위험한 짖이었다. 산마루를 넘어서 밑으로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누런보자기가 눈앞에 확! 펼쳐졌다.
(범이다!)
생각과 방아쇠가 동시에 작동했다. 단발 라이플로 날치기를 한 것이다. 방아쇠를 당기자 말자 엎드렸다. 표범은 앞발로 내 머리를 차면서 나를 타고넘어갔다. 머리가 뜨끔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타격으로 가죽모자가 찢어지고 머리를 네 바늘이나 꿰맸다. 나를 타고넘어간 표범은 산마루에서 몸을 돌렸으나 그도 내가 쏜 총탄에 어깨뼈가 부서지는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비틀거렸고 나를 덮치는 동작이 약간 늦어졌다. 그틈에 두목이 들이닥쳤다. 두목은 달려왔던 여세로 표범을 밀어붙여 목줄을 더듬었다. 워낙 큰 개라 표범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으며 표범은 두목의 힘에 밀려 벌러덩넘어졌다. 표범이 앞발로 두목의 대가리를 후려치면서 뒷발로 땅을 차고 두목과 뒹굴었다. 산마루였으므로 두목과 표범은 한 덩어리가 되어 산밑으로 굴러가고 개들이 요란하게 짖으며 뒤를 따랐다. 산마루를 넘어 아래 계곡을 보았을 때 두목과 표범의 싸움은 끝나가고 있었다. 표범은 잔솔에 걸려 배를 하늘로 누워있었고 두목은 표범의 목줄을 물고 위에서 누르고있었다. 나는 표범의 꼬리를 악착같이 물고늘어진 개들의 어깨넘어로 표범의 아랫배에 강철탄을 한 발 더 먹였다. 예기치 않았던 사냥이었는데 맷돼지를 따라 내려온 표범을 개들이 발견했다. 만주개들은 무모한 개였는데 학자들은 옛날 시베리아 광야를 누비던 야견野犬이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시베리아견이 됐고, 그 시베리아견이 동남아쪽으로 내려와 아이누견과 일본의 가라후토견이 되었고, 서남쪽으로 내려와 만주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만주개들과 아이누견이 용감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만주개는 더 크고 더 사납다. 만주개가 사나운 것은 이유가 있다. 중국은 워낙 나라가 크기 때문에 전란戰亂이 잦았고 특히 동북지방에서는 지방군벌軍閥, 파벌派閥의 사병私兵, 마적馬賊, 비적匪賊들이 날뛰었다. 그래서 지방의 권세가權勢家나 부자富者는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병私兵을 양성養成했는데 사병을 금지하자 개를 키웠다. 지방의 부호富豪집에는 의례 여나문 마리의 대형大形 개를 길렀고 일주일마다 소나 돼지를 잡아 먹이로 주었다. 어떤 ㅈ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던져주었다. 특히 겨울에는 땅이 1m 이상 얼어붙어 매장을 할 수 없었으므로 시체는 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그래서 만주개들은 크고 사나운 개가 되었다.
나는 1935년 늦은봄에 함북 무산너머 만주땅 유동마을에서 두목을 입수入手 했다. 그때 나는 산돼지를 몇 마리 잡아 주머니가 제법 두둑했는데 술이나 한 잔 하려고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에서는 살벌殺伐한 고함소리가 들렸고 개의 사나운 울부짖음도 들렸다. 서너 명의 중국인들과 한국사람들이 곡괭이, 몽둥이를 들고 개 한 마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그 개를 보고 놀랐다. 송아지만한 만주개였으며 첫눈에 맹수사냥개로 알아보았다. 사람들의 위협을 받은 개가 나지막하게 목을 굴리며 공격태세였다. 몽둥이나 곡괭이로 만주개를 상대하지 못 한다. 개의 주인이 개의 목덜미를 안고
‘이 개를 죽이려면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애원哀願했다. 한 눈에 봐 아편阿片장이였다. 아편장이는 이 마을의 부호였으며 인간관계가 좋았으나 아편으로 망해버렸다. 알거지가 된 사내는 개를 시켜 마을의 가축을 물어오게 하여 아편을 했다. 그래서 가축을 잃은 마을사람들이 개를 죽이려했다.
‘여러분, 저 개가 그렇게 밉다면 내가 처분해드리지요. 어설프게 덤비다가는 도리어 봉변을 당할 것이니 나에게 맡겨주시오,’
사람들이 논의한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인에게 10원(현재 가치 10만 원)을 주고 개를 입수했다. 산돼지 한 마리 값이었으나 그 개의 가치로는 공짜로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 주인은 손을 벌벌 떨면서 돈을 받아쥐고는
‘바둑아, 바둑아! 이젠 너까지 팔아먹는구나. 용서해다오.’
하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개를 안고 통곡痛哭을 하다가 갑자기 깔깔 웃었다.
‘잘 됐어, 아편장이 주인놈보다 새 주인이 좋을거야.’
두목을 집으로 데리고오자 이미 기르던 세 마리의 개들이 작당하여 박대薄待했다. 세 마리의 개들도 큼직한 만주개였으나 사흘 후에는 바둑이가 그들의 두목으로 굼림君臨했다. 예 주인 밑에서 굼주렸던 바둑이는 한 달 후에는 살이 오르기 시작하여 무시무시한 개로 변했다. 체중이 100Kg나 되었다. 바둑이라고 부르지 않고 두목이라고 개칭改稱하여 한 달만에 사냥터에 데리고 갔다. 만주개는 덩치가 큰 만큼 느렸으나 두목은 사자처럼 달렸다. 마치 사자처럼 갈기도 있었다. 몸무게를 이용하여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첫 사냥에서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산마루로 올라가 담배만 태우고 있었는데 담배 한 개피를 태울 무렵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앞산 계곡쪽이었고 한두 번 짖고는 조용해져버렸다. 그리고 대신 꽥꽥거리는 산돼지 울음소리가 났다. 산돼지는 욱욱하고 울부짖는데 꽥꽥하는 걸 보면 승패가 이미 끝난 것이다. 내가 달려갔을 때 산돼지는 두목에게 목줄이 물려 죽어있었다. 나는 아이가 없어 개들을 쳐다보았다. 두목은 좋은 사냥개가 아니다. 맹수사냥개는 짐승을 포수에게 몰아 포수가 잡게 하는 보조역할인데 두목은 직접 사냥을 해버린 것이다. 포수가 오히려 보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두목의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두목이 폐견廢犬이 되어버릴 염려가 있었다. <사람 버릇은 개도 못 준다>고 했는데 개 버릇은 누구에게 줄 것인가? 두목은 그 후 50여 마리의 산돼지를 물어죽였다. 두목이 산돼지를 사냥하는 방법은 한결같다. 어린놈이면 대뜸 목줄을 물어 죽이고, 좀 큰 놈 - 송곳이가 나와있는 놈은 정면에서 위장위협을 하다가 산돼지가 뒤로 물러서면 따라가면서 계속 위협을 한다. 견디다 못 한 산돼지가 덤벼들면 슬쩍 몸을 피해 산돼지 등에 올라타 목줄을 문다. 산돼지가 큰 놈 - 송곳이가 창날처럼 번쩍이는 놈이면 두목도 신중하다. 절대로 정면에서 싸우지 않는다. 정면에서 도발하는 척 하면서 산돼지가 돌격을 하면 역시 슬쩍 피하며 등에 올라탄다. 산돼지가 정지하면 뛰어내려 공격을 한다. 이렇게 거듭하면 산돼지가 지친다. 그 때가 되면 내가 달려와 산돼지의 숨통을 거둔다. 두목은 내가 산돼지와 대결하는 걸 언짢아하는 눈치다. 두목의 전투경력은 화려하다. 몇 개의 훈장勳章을 받아도 될만한 역전歷戰의 용사勇士다. 두목이 이끄는 사냥팀은 만주의 산야를 누볐다. 산돼지 50여 마리, 사슴 30여 마리, 곰 세 마리, 표범 두 마리 그리고 노루 삵괭이는 부지기수不知其數다. 두목은 결코 용기와 힘만으로 사냥을 하지 않았다. 경력이 늘어가면서 스스로 지능적인 기술을 터득했다. 그는 우둔愚鈍한 산돼지는 데리고 놀았으며, 약은 여우나 너구리에게도 결코 속지 않았다. 그가 부하들을 지휘하여 사슴이나 노루를 몰면서 사냥을 하는 걸 보면 손뼉을 치며 응원했다. 겁쟁이 노루는 개만 보면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망하기 때문에 개들의 속력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다. 두목은 부하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한다. 한 놈을 보내 사슴이 도망할 퇴로를 막고 자기는 목을 잡는다. 나머지 한 마리가 사슴을 쫓으면 놀라서 <걸음아 날 살려라>고 냅다 뛴다. 그러면 목을 지키던 개가 불쑥 튀어나와 사슴의 앞길을 막는다. 도망하는 사슴이 갈 길은 일부러 터놓은 길밖에 없다. 사슴은 기진맥진하여 두목이 숨어지키는 목으로 가는데 두목이 쏜살같이 달려나와 사슴이 방향을 바꾸기도 전에 덮친다. 그러나 개의 사냥이 언제나 성공하지는 않는다. 나는 모두 열네 마리의 만주개를 길렀으나 그 중 일곱 마리가 사냥터에서 죽었고 두목도 무수한 상처를 입고 사냥터에서 죽었다. 두목의 상처에서 가장 위험했던 것은 곰으로부터 얻어맞은 허리의 타박상打撲傷이었고, 가장 처참悽慘했던 것은 삵괭이에게 물린 목의 상처였으며 가장 보기싫은 상처는 투견에게 물려 찢겨 반쪽이 된 귀였다. 치명상致命傷은 맷돼지에게 받았다. 두목이 곰에게 반죽음을 당했던 건 따지고보면 포수의 잘못이었다. 그 때 나는 심한 독감에 걸려 청진의 여관에 누워있었다. 평소에 잘 아는 몰이꾼이 일본인 포수 나가구찌와 같이 찾아와서 한참 수선을 피우다가 개들만 빌어 데리고 갔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몸무게 300Kg이 넘는 곰과 싸우는 개들을 20여 분 동안이나 방치放置했다. 포수와 몰이꾼은 개들을 풀어놓고 늑장을 부렸으며 도중에 점심도 먹었다. 그래서 개들과 사이가 2Km나 벌어졌으며, 구나마 포수는 뒤쳐졌고 몰이꾼만 현장에 도착했다. 개와 곰이 모두 다 지쳤다. 개와 곰의 싸움은 본래 단조롭다. 곰은 털이 워낙 거세고 길어서 곰에게 개가 치명상을 입힐 수가 없다. 구래서 곰의 주의를 뱅뱅 돌면서 틈을 타 고작 털을 물고늘어지거나 발이나 코를 물고, 곰도 재빠른 개를 잡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거나 위협을 하는 거 뿐이다. 사람이 도착하자 곰은 힘을 내서 달아났고 개는 달아나는 곰의 앞길을 막아서며 지키려고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포수가 건너편 산마루에 나타나 개를 치우라고 고함을 쳤다. 70여 미터나 된 곳에서 총을 쏘겠다는 말인가? 개를 치우라지만 개가 물러서면 곰이 몰이꾼을 죽일텐데 …. 화가 난 몰이꾼이 <빨리 골짜기를 건너오라!>고 고함을 치니 그제야 허겁지겁 골짜기를 건너왔다. 그 사이에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의 고함소리에 당황한 곰은 앞길을 막아선 두목을 덮쳤는데 두목이 재빨리 물러섰으나 뒷발이 고목뿌리에 걸렸다. 발이 걸려 물러설 수 없다는 걸 간파看破한 두목이 땅을 박차고 올라 곰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곰의 콧등을 물었다. 곰의 콧등은 급소急所다. 화가 난 곰이 두목의 앞발을 잡아 휘둘러 내동댕이쳤다. 공교롭게 두목은 바위에 부딪혀 늘어져버렸다. 주둥이에 눈깔사탕만한 곰의 콧등을 물고 …. 느림보포수는 그제야 도착해서 발사를 했고 요행이 총탄이 심장을 뚫어 곰은 즉사卽死했다. 두목은 허리뼈가 뿌러져 병신이 될뻔했으나 수의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소생蘇生했다. 두목의 두 번째 상처는 봉변逢變이었다. 하찮은 삵괭이에게 당했으니 …. 초겨울, 삵괭이가 마른 풀 위에서 낮잠을 자다가 개들에게 발견됐다. 삵괭이가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미 개들에게 포위되어 탈출구가 막혔다. 두목이 다짜고짜 삵괭이에게 달려들어 목줄을 물려고 했는데, 보통 삵괭이들은, 목줄이 물려 두목에게 서너 마리가 잡혔는데 그 때 그 놈은 범이라고 오인할만큼 크고 늙은 놈이라 두목이 위에서 덮치자 아래에서 반격을 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두목의 대가리를 할키면서 밑으로 파고들어 두목의 목줄을 물었다. 급소를 물린 두목이 힘으로 밀어부쳤으나 삵괭이는 목줄을 놓지 않고 두목이 목을 땅에 비벼대자 깊이 물지 못 해 떨어져나갔다. 목줄의 껍질이 벗겨진 두목은 미친 듯이 삵괭이를 물어뜯었다. 삵괭이는 걸레가 되어 죽었으나 두목의 상처도 깊었다. 두목은 그 해 여름 세 번째 죽음의 고비를 넘었다. 사냥개는 여름에는 별로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두목도 더위에 축 늘어져 혀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 꼴이 측은惻隱해서 두목을 데리고 나갔다. 공교롭게 주인에게 이끌려 운동을 하러나온 개들이 몇 마리 있었다. 개들 중에 일본산 투견이 있었다. 가슴에 십자가형十字架形 가죽띠를 매고 쇠사슬줄을 주인이 잡고있었다. 보통개의 두 배 쯤 컸으므로 다른 개들은 눈치를 보며 슬슬 피했는데 주인은 그걸 즐기는 셈이었다. 그 개 주인과 투견이 두목을 봤다. 투견이 으르렁! 목을 굴렸다. 그러나 두목은 그 개를 겁내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으므로 무심코 지나갔다. 그 때 주인이 일부러 쇠사슬을 슬그머니 놓았으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투견이 두목을 덮쳤다. 기습을 당한 두목이 반격을 하려고 했으나 내가 목줄을 잡고있었으므로 움직이지 못 했다. 투견이 두목의 귀를 물고 두목을 쓰러뜨렸다. 주인은 말리려는 뜻이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빙그레 웃고있었다. 나도 화가났다. 줄을 놓아주었다. 두목은 평소에는 같은 개 끼리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싸울 상대도 없었다. 투견은 몸집은 두목 보다 작았으나 무게는 더 나가는 것 같아 두목을 밑에 깔고 움직이지 못 하게 했다. 두목은 고전苦戰했으며 귀에서 피가 흘렀다. 두목이 화가난 듯 우우! 하고 으르렁거렸다. 나는 두목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의 의미를 안다. 표범과 싸울 때, 맷돼지를 물어죽일 때 뱃속에서 밀어내는 무서운 분노의 소리였다. 나는 이때 두목이 다칠까 하는 염려 보다는 투견의 목숨을 염려했다. 투견의 주인은 두목 위에 올라타고 두목을 깔아뭉개는 모습을 보며 좋아라고 웃고 있었다. 그 바보 같은 주인은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자기 개가 투견대회에서 우승후보였다느니, 이때껏 싸워서 진 일이 없다고 지껄이고 있었다. 내가 염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투견에게 깔려있던 두목은 투견이 문 앞발을 내버려두고 투견의 목줄기를 더듬었다. 보통개들이 싸우는 방법이 아닌 맹수와 싸움의 필살기必殺氣다. 능글맞던 투견도 두목의 필살기를 느끼고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두목은 도망치려는 투견의 목을 놓지 않고 오히려 투견을 밑으로 깔아뭉갰다. 두목은 물고있던 투견의 목줄을 일단 놓았다가 다시 더 깊이 물었다. 그리고 맹수를 죽일 때처럼 대가리를 흔들었다. 목줄을 끊어버리려는 것이다. 투견이 피투성이가 되고 눈알이 허옇게 돌아가는 걸 보고 주인이 놀랐다.
‘치쿠쇼! 고이쓰기와 찌까이 이누다(이 새끼, 이 놈은 미친 개구나!)’
중니이 게다발로 두목을 차려고 했으나 내가 말렸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주인도 죽는다. 내가 고한을 쳤다.
‘두목! 그만둬, 두목!’
두목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제서야 상대가 산돼지나 표범이 아니라 같은 동족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 투견의 목줄을 놓았다. 투견은 아차! 잠깐 늦었으면 목줄이 끊겨 죽었을 것이나 중상만 입었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살았다. 주인이 미친 듯 날뛰었다.
‘기지까이다 기지까이(미친 개다, 미친 개)!’
나는 단호하게 내 개는 미친개가 아니고 사냥개라고 말했다. 표범, 산돼지를 수없이 잡았다고 덧붙였다. 일본인 주인은 그제서야 그 날 싸움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듯 비실거리며 달아나는 투견의 뒤를 쫓아갔다.
지루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나무밑 그늘에서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던 개들도 낙엽이 지고 날이 쌀쌀해지면 생기를 찾는다. 짖고 뛰어다니며 예비운동을 한다. 그러나 첫 사냥은 대개 실패한다. 충분히 준비를 하지 않은 탓이다. 두목을 데리고온지 4년째 되던 해 초 겨울, 우리는 첫눈이 내리는 걸 보고 경북 문경군 야산을 찾았으나 사냥은 실패했다. 진눈깨비가 내려 발자국이 모두 지워져버렸다. 하루 종일 헛수고를 하고 마을로 내려오다가 두목이 귀를 세우고 긴장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맷돼지 발자국이었다. 400Kg이 넘는 거물이었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 돌연 두목이 짖으며 20여 미터 떨어진 바위 밑으로 돌진했다. 바위 뒤에서 요란하게 짖었다. 나는 오랜 경험으로 바위를 옆으로 돌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시커먼 탱크같은 그림자가 스쳤다. 주저없이 발사했다. 멈칫! 했으나 그대로 달아났다. 쫓는 개는 두 마리였다. 두목이 보이지 않았다. 두목은 바위 밑에 누워있었다. 전지로 비추어보니 가슴과 배가 찢어져 창자가 흘러내렸다. 어둠속에서 맷돼지의 공격을 받아 어금니에 배가 갈라진 것이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쳐버렸다. 개들에게 몰려 어물거리는 맷돼지를 향해 마구 총탄을 퍼부었다. 6발을 모두 퍼부었다. 맷돼지는 벌집이 되었다. 그러나 두목은 죽었다. 만주땅 아편장이로부터 사들인 뒤 4년째였다. 그는 사냥개로써 한창 왕성하게 사냥을 할 수 있는 여덟살에 죽었다. 두목이 언제나 가지고 놀렸던 맷돼지 따위에 죽은 것은 연습 부족이었다. 예비연습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사냥꾼이야기 - 8편> 홍학봉洪學奉 기記, 김왕석 역譯
<목차>
85. 사냥꾼의 참극慘劇/ 86. 범새끼 소동騷動/ 87. 산양山羊 이야기/
88. 만주滿洲개와 곰/ 89. 지리산의 대호大虎/
90. 나무의 바다(슈하이 樹海)/ 91. 동물들의 싸움/ 92. 포수 세르게이/
93. 곰과 개의 사투死鬪/ 94. 추적追跡/ 95. 대호大虎사냥
85. 사냥꾼의 참극慘劇
내가 서른세 살 때, 황해도 금천군 수륭산에 대호大虎가 출몰出沒한다는 사냥정보가 들어왔다. 표범이 아니라 대호라는 말에 수렵계狩獵界가 술렁였다. 그 당시에는 한국범이 사라졌는데 다시 나타났다는 건 놀랄 일이었다. 서울의 포수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내가 가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포수김씨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김씨는 본디 사냥꾼을 안내하여 꿩이나 노루를 잡는 포수였고 맹수사냥 경험이 없는 포수였으므로 거절했는데 어찌나 사정을 해서 조수삼아 데리고갔다. 수륭산에 대호가 돌아다닌다는 건 지방포수, 마을사람들, 나무꾼들이나 화전민火田民들이 한결같이 증언했다. 특히 수륭산 산기슭에 사는 화전민 정씨는 며칠 전에 범이 산돼지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범에게 쫓긴 산돼지가 산골짜기에 내려와 범과 싸웠다고 했다. 이튿날 정씨가 현장에 가봤는데 개울의 얼음이 산산조각나고 핏자국이 널렸다고 했다. 정씨가 청년 두 사람과 핏자국을 따라가보니 산중턱 바위에 허벅다리만 남은 산돼지시체가 있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산돼지고기를 얻어먹었는데 나무꾼 박씨와 일본인 순사巡査도 범이 남긴 산돼지나 노루고기를 얻어먹었다. 그들도 뒷다리고기를 얻어먹었는데 왜 범이 뒷다리를 남겨놓는지는 이유를 몰랐다. 나는 도착 즉시 발자국을 조사했는데 범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범의 똥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범은 짐승을 잡아먹고 살기 때문에 다른 동물의 똥과 달리 비릿한 고약한 냄새가 난다. 발자국도 수륭산 남쪽의 하름산에서 발견했다. 허나 그 발자국이 대호인지 표범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표범의 것이라기에는 엄청나게 크고 대호의 발자국이라고 보기에는 어쩐지 좀 작았다. 이튿날 범사냥을 시작했는데 진눈깨비가 내려 발자국 추적이 어려워 범을 몰아서 잡기로 했다. 우리들 - 나와 김포수 그리고 맹수전문몰이꾼 박씨, 현지 몰이꾼 세 사람이 하름산에서 몰이를 시작했다. 범의 몰이는 산돼지나 노루몰이 하고는 다르다. 산돼지나 노루는 삼방면에서 포위하여 포수가 기다리는 목으로 짐승을 몰아오는데 범을 그렇게 몰면 큰일난다. 범은 삼방면에서 포위되어도 포수가 기다리는 목으로 올 가능성 보다는 몰이꾼을 덮칠 가능성이 더 크다. 범은 배가고프면 몰이꾼을 먹으려고 덤빌 것이다. 그래서 몰이꾼 사이에 박포수와 김포수를 배치했다. 날이 어두워지는 때 우리는 하름산과 수륭산 계곡에서 범몰이를 했다. 높은 나무들이 밀집하고 거대한 바위들이 산재散在하였으므로 범이 숨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나는 산중턱 바위 뒤에 숨어 기다렸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짐승의 기척을 느껴 긴장했다. 그때 갑자기 몰이꾼들이 범을 쫓는 고함소리가 뚝! 그쳤다.
‘범이다! 범.’
김포수가 외쳤다. 고함소리라기보다는 비명悲鳴이었다. 이어 총소리가 났다. 한 발 또 한 발. 그리고 조용했다. 나는 견디다 못해 바위 뒤에서 나와 아래를 살폈다. 약 150m 가량 떨어진 산중턱에 얼룩덜룩한 물체가 쏜살같이 달아나는 걸 봤다. 수륭산 동쪽이었다. 범이 바위 사이를 뛰어나가는 걸 보았으나 쏘지 못 했다. 범이 워낙 빨랐고, 거리가 멀었으며 위치도 나빴다. 내가 선 위치에서는 범의 배와 엉덩이만 보였다. 그래서 일순간의 주저함 때문에 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호인지 표범인지도 식별識別하지도 못 했다. 범이 달아났으며 날이 어두워져오고 있었으므로 그 날의 사냥은 중지했다. 주막酒幕에서 몰이꾼들이 은근히 김포수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범은 몰이꾼들의 전방 약 40m 지점에서 나타났는데 사람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쏘시오! 쏘아!’
몰이꾼이 다급하게 말했으나 김포수는 응응! 하고 헛대꾸를 할 뿐 자기를 보고있는 범에게 총을 겨누지도 못 했다. 범의 눈에서 발산하는 노란빛이 사람을 마비시켰다. 자기들을 보호해줄 포수의 꼬락서니를 보고 몰이꾼들이 당황하고 겁이났다. 그들은 자꾸만 다가오는 범을 보고 겁을 먹어 대나무창을 들고 발을 굴러 시위示威를 했다. 그제서야 범이 돌아서더니 북쪽 산마루로 뛰기 시작했는데 김포수가 또 실수를 했다. 범이 달아나는대로 내버려두었으면 내가 목을 잡고있는 곳으로 바로 갔을텐데 김포수는 범이 달아나는 걸 보자 비로소 용기를 내 범의 엉덩이를 보고 냅다 발사했다. 떨리는 손으로 발사한 총탄은 범에게 맞지도 않았거니와 범이 가고있는 앞 바위에 맞아 불꽃을 튕겼다. 놀란 범이 진로를 바꾸어 수륭산 동쪽으로 달아나버렸다. 내가 범을 본 것도 그때였다. 몰이꾼들은 김포수가 자기들을 보호는 물론이고 사냥의 방해가 되었다고 투덜거렸다. 그건 좋지 않았다. 아무리 포수가 무능해도 몰이꾼들이 포수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터부다. 나는 몰이꾼들의 불평을 억누르며 그게 범인가 표범인가를 물었다. 김포수는 생김새나 크기로 봐서 틀림없는 호랑이였다고 단정했으나 나이든 박씨는 큰 표범 같았다고 반박했다. 그 범은 호랑이 보다는 작고 표범 보다는 컸는데 무늬가 호랑이처럼 줄무늬가 아니라 반점이 이어진 무늬였다고 했다. 수수께끼 같은 짐승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륭산으로 갔다. 정오께부터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몰이를 하기 전에 수륭산 정상에 올라가 지형을 살폈다. 수륭산 동쪽에는 어저께 우리가 범을 몰았던 하름산이 있고 수륭산과 하름산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었는데 큰 바위와 거목들이 밀집했다. 수륭산 북쪽에는 울창한 밀림인데 새벽부터 경기도 사냥꾼들이 사냥을 했다. 우리는 남쪽에서 범을 쫓았고 그들은 북쪽에서 노루를 쫓아 수륭산을 끼고 서로 등을 지고 있었는데 범은 사람들이 있는 북쪽으로는 가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동남쪽에서 몰이를 시작했다. 오후 1시 경 몰이꾼이 전방 70여 미터에 있는 범을 발견했다. 범을 발견한 몰이꾼이 범이 부쪽으로 달아날 염려가 있으니 막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김포수는 밑의 몰이꾼 보다 더 뒤쳐져있었다. 범이 위로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는 더 뒤쳐졌다. 범에 놀란 포수, 그 때문에 그날의 참극이 벌어졌다. 산밑을 맡았던 몰이꾼은 범이 숨어있는 바위를 지나쳐버렸다. 그래서 김포수가 범과 마주쳤다. 범은 제대로 고함도 치지 못하는 김포수를 얕잡아본 것 같았다. 범은 바위 위에 올라앉아 김포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15m 거리에서 …. 김포수는 바로 눈앞의 범을 보고 말뚝처럼 섰다. 총을 쏘기는커녕 들어올리지도 못 했으며 달아나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못 했다. 마치 최면술催眠術에 걸린 곳처럼 멍 하니 서있었다. 다행히 범은 김포수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적의敵意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3 - 4분 후 범이 바위에서 내려와 어슬렁어슬렁 수륭산 산마루를 넘어 북쪽 - 노루사냥이 벌어지고 있는 사냥터로 내려갔다. 범이 내려가는 걸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그날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김포수는 또 실수를 했다. 범이 40m나 내려가는 걸 본 김포수가 범의 엉덩이를 보고 발사했다. 그리고 부근의 소나무 위로 올라가버렸다. 총탄이 범에게 맞을 리 없었지만 다리를 스치면서 범을 놀라게 했다. 놀란 범이 총을 쏜 사람은 찾지 못 하고 냅다 뛰었는데 노루사냥터였다. 노루사냥을 하던 경기도사냥꾼들은 3방면에 목을 잡고 최, 유, 이포수가 몰이꾼들이 몰아오는 노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는 노루 4마리를 잡았으므로 오늘도 노루를 몇 마리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목을 지키고 있었다. 느닺없는 총소리가 나고 유포수 앞에 범이 나타났다. 놀라고 당황했으나 유포수는 용감했다. 재빨리 노루탄을 산돼지탄으로 바꾸어 장탄을 하고 20m 앞에서 노려보는 범의 이마를 겨누어 발사했다. 그러나 시야를 가리는 진눈깨비 때문에 총탄이 범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포수의 총은 구식 무라다 단발총이었기에 재장전을 했다. 그러나 범은 그 여유를 주지 않고 유포수를 덮쳤다. 유포수는 본능적인 순발력으로 범의 앞발치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바위 밑에 엎드렸다. 범은 공격에 실패하자 떡갈나무숲에 숨어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총소리에 놀란 최포수가 달려왔다.
‘뭣이! 범? 어디 있어, 어디!’
초포수는 성미가 급하고 대담무쌍大膽無雙한 포수였다. 그는 총탄을 빗맞아 달려드는 산돼지를 총대로 후려쳐서 잡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범사냥이 처음이었으며 범은 산돼지와 다르다는 걸 몰랐다. 최포수눈 유포수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무모하게도 떡갈나무숲으로 들어갔다. 최포수는 범이 자기를 보면 달아날 것이라고 짐작하고 달아느는 범을 쏘아잡으려고 했다. 떡갈나무숲에 엎드려있던 범은 달아나려는 자세가 아니고 덮치려는 자세였다. 범은 이미 귀와 볼에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피를 본 범이 얼마나 사나와지는가를 노련한 포수 같으면 알아챘어야 했다. 범은 최포수가 숲에 들어오는 걸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교활한 범은 마른 풀 위에 납작 엎드려 초포수가 2 - 3m 앞까지 다가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초포수는 앞을 가리는 진눈깨비와 범의 은신술隱身術에 속았다. 범은 최포수가 2 - 3m 앞에 접근하자 소리없이 덮쳤다. 앞발로 최포수의 머리를 강타强打했다. 최포수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떡갈나무둥치를 안고 기댔다. 그 일격으로 앞니 서너 개가 부러지고 턱뼈 일부가 부서졌으며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 최포수가 안고있는 나무둥치 때문에 공격이 어렵게 되자 범이 어깨를 물었다. 어깨뼈가 허옇게 들어났다. 그래도 정신을 잃지 않은 최포수가 총대를 휘둘러 목줄은 보호했다. 범이 다시 왼발로 최포수의 얼굴을 쳤고 드디어 최포수는 쓰러졌다.
‘최포수! 어딨어?’
마침 끄 때 동료를 구하려고 유포수가 숲속에 뛰어들었다. 쓰러진 최포수의 목줄을 더듬고있던 범은 다른 적이 뛰어드는 것을 보고 옆으로 튀었다.
(어디로 도망갔나?)
범을 찾고있을 때 범이 유포수의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유포수는 총을 쏠 여유가 없어 총대로 범의 대가리를 쳤다. 총대에 맞은 범이 벌떡 일어서 앞발로 총신銃身을 잡았다. 유포수도 양손으로 총대를 잡고 버티고. 피차 총대를 마주잡은 범과 유포수는 죽음의 씨름을 했다. 유포수는 범의 힘에 눌려 진눈깨비로 질퍽한 눈위로 3 - 4m나 밀렸다. 범이 악착같이 유포수를 밀어 쓰러뜨리려고 했으나 유포수도 결사적이었다. 넘어지면 범에게 목줄을 물려 죽는다. 유포수가 범에게 밀려나가다가 범이 미는 힘을 역이용하여 범을 옆으로 홱! 낚아챘다. 그리고 총을 빼앗았다. 범이 옆으로 넘어지면서도 앞발로 유포수의 얼굴을 할켰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범의 앞말치기에 맞은 유포수는 코뼈가 들어나고 입술이 두 쪽으로 갈라져 피가 콸콸! 쏟아졌다. 유포수가 비틀거리자 범이 도약跳躍했다. 유포수가 무작정 발사했다. 총탄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지만 범이 벼락같은 굉음轟音을 낸 이상한 쇠붙이를 쳤다. 총이 날아가버렸다. 피냄새에 미친 범은 악착같았다. 맨손이 된 유포수에게 달려들었다. 2 - 3m 거리에서 덮쳐들며 유포수의 어깨를 쳤다. 유포수는 쇠뭉치에 맞은 것처럼 주저앉아버렸다. 유포수는 그래도 목줄을 물리지 않으려고 바른손으로 묵줄을 막고있었는데 범이 바른팔을 물고늘어지면서 유포수를 깔고 눌렀다. 아가리를 벌려 유포수가 목에 감았던 수건을 물었다. 유포수는 양팔이 다 마비되어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만약 그 때 이포수가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유포수는 목줄이 끊겨 즉사했을 것이다. 이포수는 맷돼지사냥을 전문으로 하고 전에 표범도 잡은 경험이 있는 유능한 포수였으며 그 때 노루사냥의 책임포수였다. 그는 최, 유포수와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목을 잡고있었는데 총소리를 듣고 좀 뭔가 심상찮은 느낌을 받아 유포수가 지키는 목에 와밨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선불맞은 노루를 쫓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 난 발자국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직감했다. 그래서 발자국을 더듬었는데 두 번째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사람과 범의 세 번째 싸움은 지형으로 사람이 유리했다. 아까 유포수와 범의 씨름에서 유포수가 밀려 숲속을 벗어났다. 범과 유포수가 하얀 눈이 깔린 맨땅에서 뒹굴고있었기 때문에 이포수는 쉽게 그들을 발견했다. 이포수가 10여 미터 거리에서 고함을 쳤다.
‘불 받아라! 범아!’
고함소리는 아주 적절한 조치였다. 쓰러진 유포수의 목줄을 물려던 범이 그 소리에 놀라 주춤했고, 모든 걸 단념하고 턱을 들어 목줄을 내주었던 유포수는 동료의 고함소리에 용기를 냈다. 고한소리에 놀란 범이 유포수의 목줄을 더듬다가 고개를 쳐들고 이포수를 봤다. 무턱대고 이포수에게 덮쳤다. 그러나 이포수는 이미 조준을 끝냈다. 범의 앞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전에 발사했다. 납덩이가 범의 아가리를 뚫었다. 킥! 하고 뒹굴었던 범이 일어섰으나 덤벼들지 못 하고 도망갔다. 사람 무서운 걸 안 것이다. 중상을 입은 범이 무작정 서북쪽으로 뛰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몰이꾼 7 - 8명이 오고있었다. 범은 뒤돌아서 이번에는 남쪽으로 뛰었다. 그러나 수륭산 봉우리에서 우리 일행이 내려오고 있었다. 겁쟁이 김포수가 범을 놓쳐버렸다는 말을 듣고 범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범은 우리를 보고는 또 되돌아섰다. 그때 <범을 놓치지 말라>고 외치는 이포수의 고함이 들렸다. 동서남북에서 포위된 범이 미친 듯 으르렁거렸으나 달아날 곳이 없었다. 아가리에 납덩이를 받은 범이 입을 벌릴 때마다 핏덩이가 쏟아졌다. 범은 다시 처음 싸움을 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빈사瀕死상태가 되어 쓰러진 최포수를 간호하던 이포수가 사람들의 고함소리를 듣고 범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걸 알고 총을 들고 일어섰다. 피를 본 범이 사나와졌다면 동료가 빈사상태가 된 포수도 악에 받쳤다. 이포수가 범이 뛰어오는 앞길에 우뚝 섰다. 범은 이포수가 있는 30m 지점에서 딱 멈췄다. 나는 이포수가 혼자 지키고있는 북쪽이 가장 취약하다고보고 범이 달아날 곳은 북쪽이라고 판단하여 이포수가 지키는 북쪽으로 달려가 이포수를 등뒤에서 원호援護고 했다. 이포수는 내 발자국소리를 듣지 못 했지만 범은 우뚝 서있는 이포수 등뒤에 또 한 사람이 달려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계속 북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되돌아갈 것인가 망서렸던 것이다. 자기를 포위하고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의 소리에 범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튼 범의 실수였다. 2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포수의 총구 앞에 오도가도 못 하고 멈춰선 범을 이포수가 놓칠 리 없었다. 그래도 범이 되돌아서려는 찰라 이포수가 범의 앞발 사이 흉장부를 겨냥하여 발사했다. 이미 표범사냥을 했던 이포수의 겨냥이 정확하게 범의 심장을 꿰뚫었다. 범은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공즈응로 2m나 뛰어올라 떨어져서 몸부림쳤는데 이포수가 2탄을 그의 대가리에 박아넣자 축 늘어져버렸다. 범은 그렇게 죽었으나 범에게 물린 두 사람은 빈사상태였다. 의식불명상태의 최포수는 숨이 끊어질락말락 했으며,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유포수도 정신은 놓지 않았으나 위독危篤했다. 비상용 약으로 출혈을 막고 들것을 만들어 두 포수를 병원으로 운반하여 치료를 했으나 최포수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 하고 사흘 후에 숨을 거뒀다. 치명상은 뇌진탕腦震蕩이었으며 범의 앞발치기 위력威力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케했다. 최포수를 구하려다 중상을 입은 유포수는 범의 발톱에 상한 상처가 심해 오래토록 고생했다. 그리고 범 때문에 고생한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범을 앞에 두고도 총 한 방 쏘지 못 했고, 범이 달아나자 함부로 총을 쏘아 그 어머어마한 참극을 불러온 김포수였다. 그는 그 사냥에서 범과 싸우지도 못 했고 범에게 물리지도 않았으나 정신에 이상이 생겨 오래토록 고생했다. 범에게서 받은 공포인지 자기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잠을 자지 못 했다. 잠이 들면 <범이다! 범. 쏘아라, 쏘아!>라고 헛소리를 했다고 한다. 무서운 짐승은 총으로 죽일 수 있지만 비겁하고 경망스러운 포수는 무엇으로 제지하겠는가? 죽은 범은 2m가 넘는 놈이었고, 무게도 120Kg이 넘었다. 보통 표범은 커도 80Kg 내외인데 그놈은 한 둘레가 더 컸다. 그리고 그놈의 무늬는 표범의 반점도 dskl고 범의 줄무늬도 아니었다. 다갈색바탕에 검은 반점이 줄무늬처럼 이어져있었다. 몸매도 날씬한 표범이 아니었고 우람한 대호의 몸매였다. 대호는 큰놈이면 300Kg, 보통은 200Kg, 아무리 작아도 150Kg은 나가고, 줄무늬는 선명하다. 다른 사냥꾼들은 대호와 표범의 트기라고도 했다. 글쎄, 같은 고양이과 동물이니 교미기에 짝을 찾지 못 한 대호가 표범을 덮쳐 새끼를 낳은 트기일거라는 말에도 일리는 있었으나 대호와 표범이 교미交尾를 하여 생식生殖이 되는건지 주장을 반박할만한 지식이 없다.
86. 범새끼 소동騷動
놀랍게도 16명의 몰이꾼들이 나를 따랐다. 환갑이 가까운 우환이네 할아버지가 긴 담뱃대를 허리에 차고 일어섰고, 앞으로 열흘 남은 설이 되어야만 열여섯이 된다는 우환이도 끼어들었다. 경기도 양평군 지전면 옹개봉 부근 마을사람들은 내 오랜 사냥벗들이기 때문에 말릴 수 없었다. 어젯밤 공짜술을 자꾸 권하면서, 포수서방놈이나 한 놈 있었으면 좋겠다고 눈짓을 하던 주막집 과부寡婦 아줌마마져 덩달아 소매를 걷어부치면서 따라나서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여기는 몰이꾼도 많았지만 노루도 많았다. 그 전 해 - 내가 설흔일곱되던 해 겨울 나는 여기서 하루 평균 열서너 마리의 노루를 잡았으니까 올해도 노루풍년이라고 믿고있었다. 산에 나무를 하러갔었던 애꾸 박서방이 열대여섯 마리의 노루를 보았다고 하자 우환이 할아버지가 애꾸눈이 열서너 마리를 보았다면 성한 사람이 보면 30마리라고 익살을 부렸다. 거기다 그 날은 사냥하기 딱 좋은 - 어제 밤 싸락눈이 서너 치 가량 쌓였고 바람도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사냥대는 마치 잔칫집 분위기로 떠들썩하게 지껄이며 옹개봉 뒷산 검등산에 도착했다. 애꾸가 말한 노루사냥터였다. 그런데 검등산에는 노루발자국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모두 설흔네 개의 눈이 눈을 씼고 찾아도. 그것뿐이랴. 깔아놓은 햇솜 같은 눈위에 노루발자국이 아닌 괴상한 발자국들이 무수히 찍혀 노루사냥터를 망쳐놓았다.
‘웬, 이게 도대체 무슨 발자국이야?’
‘삵괭이놈들이지.’
곰보 이서방이 단언했으나 그 발자국은 삵괭이나 승냥이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 발자국은 범이라고 알렸다.
‘뭐, 범? 표범말이요?’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엄숙한 침묵이 2 - 3초 간 지속되었는데 우환이네 할아버지가 서너 번 마른기침을 했다.
‘고약한 놈인데. 그놈이 노루를 쫓았구만.’
‘그놈을 잡아 죽여야지.’
그 범을 잡지 않고는 금년에 여기서는 노루고기맛을 보기 어렵다고 넌지시 부채질해봤다.
‘그럼, 그놈을 잡아야지.’
총을 가진 동장어른이 결단決斷을 내렸다. 케케묵은 일제 무라다총이었지만 총값을 하려는 심사心事였다. <그래, 그래. 범을 잡자!> 분위기가 군중심리群衆心理로 변했다. 모두들 주먹을 흔들며 떠들어댔는데 무리다도 무라다지만 내 총도 맹수용 라이플이 아니고 벨기에제製 5연발 산탄총이었으므로 은근히 염려가 될 수밖에. <범이 고양이의 친척인 것은 분명하지만 고양이와는 아주 딴판인 짐승>이라고 설명했다. 범의 앞발에 할키면 깊이 2 - 3Cm의 상처가 퍽퍽! 그어지고 아가리에 물어뜯기면 서너 근斤 되는 살덩어리가 뚝뚝! 떨어져나간다고 말했다. 범은 사람키만큼의 높이는 예사로 뛰어넘고 그 속도가 나는 새처럼 빠르다. 하지만 군중심리란 묘妙하다.
‘아, 그만 표범쯤이야 맞붙어 싸우기에 알맞은데 여기 장골壯骨이 몇이야?’
우환이네 할아버지가 자기도 장골축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기세를 올리자 모두 옳소! 라며 선동煽動을 했다. 하긴 나도 이 많은 사람들에게 표범이 덤벼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군중심리였다. 범의 발자국을 추적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범은 근처 잡목림으로 들어갔다. 높이 4 - 5m의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있어 몰이를 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와 동장은 산봉우리에 목을 잡았다. <호랑이 나와라!> 몰이꾼들이 목이 터져라고 소리를 쳤다. 예상대로 표범은 잡목림에 있었는데 아직 젓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놈이라 고함소리에 놀랐다. 표범은 은폐물에 숨어 기어가는 습성으로 도토리나무 뒤에 숨어있었다. 몰이꾼들이 100m 가까이 다가오자 표범은 많은 사람들에 놀라 잡목림을 튀어나왔다. 동장이 놀랐다. 크게 놀라 무라다총탄이 닿지도 않을 거리인데도 무작정 발사했다. 무라다의 유난히 큰 소리가 쾅! 하고 터지자 어린 표범이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 표범은 다시 잡목림으로 몸을 숨겼다. 이번에는 잡목림의 몰이꾼들이 혼비백산했다. 표범이 튀어나가자 꽝! 소리가나서 좋아했는데 웬걸 표범이 역습을 하는 것 아닌가?
‘에구머니나!’
큰 소동이 벌어졌다. 다수多數의 궁중심리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수가 많아 혼란이 더 컸다. 되돌아온 표범을 보고 제일 먼저 키다리 성서방이 도망을 쳤다. 그는 나중에 갑자기 배가 아파서 그랬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해명했으나 이유야 어떻든 대나무창을 팽개치고 달아난 것만은 사실이다. 성서방이 달아나자 다른 사람들도 다 아우성을 치며 뿔뿔이 달아났다. 그들 중에서 그래도 용감한 사람은 역시 우환이네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허리에 차고있던 담뱃대를 마치 총처럼 뽑아들고 범을 겨누면서
‘이놈아! 불 받아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고함을 치지 사람들을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었던 범이 도망을 갔다고 했다. 그런데 잡목림 동쪽으로 도망을 갔던 사람들은 또 서쪽에서 달려드는 범을 발견했다.
‘이크! 저기도 범이 있네.’
모두들 <이젠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람 살려라!>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범을 잡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잡목림으로 뛰어들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우환이네 할아버지도 나무 위로 올라갔다. 맨나중에 허겁지겁 나무에 오르던 할아버지의 바지가랭이가 나뭇가지에 걸려 벗겨졌다. 그래서 알몸으로 나무 위에 올랐다. 무기武器인 담뱃대도 어디론가 없어져버리고. 사람들이 모두 나무 위로 피해버리자 범은 어슬렁어슬렁 잡목림으로 사라졌다. 범은 본능적으로 그 삶들이 자기를 해칠 존재가 못 된다는 걸 알고있었다. 나무 위로 올라간 사람들은 범이 나무 위로 올라오리라고 생각하여 <사람 살려라!>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범 소동은 계속되었다. 노루피를 마시려고 나를 따라온 여덟 명의 서울 부자양반들이 또 말썽을 일으켰다. 주막집 따스한 아랫목에서 화투花鬪나 치고 있으면 산돼지나 노루를 잡아 대령하겠다고 했는데, 사냥구경도 할 겸 한 발자국이라도 더 신선한 피가 효과가 있으리라고 욕심을 부려 두루마기 바람으로 사냥터에 나왔다. 이 양반들이 조그만 산을 넘었을 때 <사람 살려라!>는 고함을 들었다. 고함을 들은 양반들은 그래도 사람을 구하겠다고 잡목림에 들어섰다.
‘사람 살려라! 범이다, 범.’
(뭐! 범?)
잡목림에서 또 다시 큰 소동이 벌어졌다. 8명의 서울양반들이 비명을 지르며 뺑뺑돌이를 하고, 나무 위에서는 15명의 몰이꾼들이 <포수! 어디 갔느냐?>고 고함을 치고.
나는 벌벌! 떨고있는 동장을 데리고 잡목림에 도착했다. 나무 위로 올라갔던 서울양반 한 명은 나무에서 떨어지자 범이 숨어있는 숲속으로 달려갔다. 큰일날일이었다. 숲속에 숨어있던 범이 큭! 하고 독살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범이 서울양반에게 덤벼들 염려가 있었다. 나는 잡목림으로 뛰어들면서 발사했다. <캬윽!> 하면서 범이 길길이 뛰어올랐다. 뛰어오른 범을 또 쏘았다. 설건드린 범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 때문에 아예 숨통을 거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숲속에 또 한 마리 표범이 있다는 걸 몰랐다. 내가 표범에게 집중포화集中砲火를 퍼붓는 사이에 다른 표범이 살살 기어 내 옆 15m까지 다가왔다. 그놈이 나를 공격하려는 걸 동장洞長이 발견했다. 동장이 <범이다!> 라고 소리치며 무라다총을 발사했다. 동장의 총알은 범에게 맞지 않았으나 나는 그 총소리로 또 한 마리의 범을 발견했다. 내가 범을 봤을 때 범은 공중에 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反射的으로 몸을 옆으로 비틀면서 총대를 밀어내며 갈겼다. 범은 쓰러진 나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범이 멍! 하니 서있는 동장 옆을 빠져나가 쏜살같이 달아났다. 누군가 나무 위에서 말했다.
‘학봉이가 죽었어!’
내가 범에게 맞아 쓰러진 걸로 알고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쳤다.
‘나무에서 내려와! 안 내려오면 쏠테야.’
모두들 나무에서 내려왔다. 우환이네 할아버지는 하반신下半身이 벗겨진 체로 내려오자말자 담뱃대부터 찾았다.
‘아, 내가 요놈만 떨어뜨리지 않았어도 …,’
숲속의 범은 배에 한 방, 대가리 그리고 앞다리를 맞아 절명했다. 개 보다 조금 큰 새끼였다.
‘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달아난 놈을 잡아야 해!’
모두들 말아 없었다. 나는 총에 재장탄을 하고 동장만 데리고 추적에 나섰다. 그러자 아까 나무에서 떨어진 서울양반이 내 소매를 잡고늘어졌다.
‘아, 이 사람아. 범이 우굴거리는데 우리만 남겨두고 어딜가?’
동장을 남겨두고 단신 범을 추격했다. 핏자국으로 봐서 큰 상처는 아니었다. 범은 바위가 많은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나는 발자국을 추적하지 않고 바위를 돌아가거나 높은 바위에서 주변을 살폈다. 1Km 쯤 추격했을까? 산봉우리를 막 넘어서려는데 약 30m 전방을 범이 지나갔다. 범이 나를 알아차린 것 보다 내가 총을 쏜 게 빨랐다. 범은 내게 덤비려고 했으나 10m도 못 오고 쓰러졌다. 두 번째 납덩이가 그의 이마를 꿰뚫었다. 범은 아까 잡은 놈과 비슷했다. 남매일 것이다. 그런데 총소리가 들렸다.
(범이 또 나타났나?)
허겁지겁 잡목림으로 달려갔다.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또 나무 위에 있었다.
‘뭐야, 뭐?’
‘범이야, 범. 또 한 마리가 있어!’
동장이 범이 나타난 걸 보고 쏘았는데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분명 새끼의 어미일 것이니 예삿일이 아니다. 동장을 데리고 20여 분이나 숲속을 살폈는데 범은 없었다. 살기殺氣가 없었다.
‘정말 범을 봤나?’
동장이 한참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누군가 범이야 하기에 보니 범 같은 것이 스쳐가기에 쏘았지. 어쩌면 범이 아닌지도 모르겠어.’
숲에는 범의 그림자도 없었다. 다만 자그마한 노루 한 마리가 쓰러져있었다. 노루새끼를 범으로 알고 무려 24명의 사람들이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나무 위에서 벌벌! 떨며 매달려있었던 것이다. 범새끼 두 마리와 노루 한 마리로 마을잔치가 벌어졌다. 술판에서는 범새끼가 큰 범으로 과장誇張되었고 서울양반들이 서울로 돌아가서는 대호로 둔갑遁甲했다.
87. 산양山羊 이야기
산양은 만주의 산야山野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짐승이며 한국에서도 강원도 황해도를 중심으로 38선 북쪽 산악지대에 서식棲息한다. 가파른 절벽 위 거대한 바위를 산양들은 맘대로 뛰어다녔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새처럼 날아다닌다. 멋진 뿔을 머리에 이고 절벽을 평지처럼 누비는 산양은 멋지다. 나는 그 멋진 산양을 잡으려다가 하마터면 죽을뻔했다. 강원도 속초에서 깊숙이 들어간 어느 돌산이었다. 산돼지를 쫓다가 우연히 바위에서 네 마리의 산양이 놀고있는 걸 발견했다. 새들도 꺼려할 높은 절벽바위였으나 산양에게 도전했다. 그 산꼭대기의 지형으로는 일단 산양이 있는 산꼭대기로 올라가기만 하면 산양떼는 다른 데로 피할 곳이 없었다. 산꼭대기 바위는 얼어있어 미끄러지면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墜落한다. 나는 포켓나이프로 손잡이와 발을 붙일 곳을 만들어가며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얼음바위를 오르기 시작하여 몇 분만에 나는 후회했다. 도저히 꼭대기까지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악발이라는 이름값을 하느라고 계속 올라갔다. 올라가면 오를수록 후회가 컸으나 이젠 내려갈수도 없다.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것 보다 더 위험했다. 손이 꽁꽁 얼었고 손톱에는 피가 베었다. 오후 3시부터 올라가기 시작하여 오후 5시 경에 겨우 올라가기는 갔으나 벌써 날이 어두워져갔다. 총의 안잔장치를 풀고 갈 데 없는 산양떼를 찾았다. 어렵쇼! 산양떼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 산꼭대기에서는 높이 50여 미터의 수직암벽을 뛰어내리지 않는 한 도망갈 데가 없는데 산양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여우에게 홀린 것처럼 정신이 멍! 해졌다. 자세히 조사해보니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 산봉우리에서 약간 서편으로 수영장의 다이빙대臺처럼 약간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었고 거기에서 5 - 6m 공간거리에 반대편 산봉우리가 있었다. 산양떼들은 다이빙대로 내려가 반대편 산봉우리로 뛰었던 것이다. 5 - 6m 쯤이야 산양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재주가 없었기 때문에 되돌아내려와야 했는데 죽음을 의미했다. 어둠속에서 어떻게 높이 50m나 되는 수직바위절벽을 내려올 수 있겠는가? 나는 절망하여 고함을 질렀다. <사람 살려라!> 포수생활 59여 년에 내가 비명을 지른 건 처음이었다. 첩첩산중疊疊山中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몸은 체온을 잃어가고 날은 어두워져갔다. 나는 아까 올라올 때 만들어놓은 발받침을 타고 내려가려고 했다. 그건 올라올 때보다 훨씬 위험했다. 발이 미끄러져 몇 번이나 위험했으나 두터운 얼음에 박은 포켓나이프를 움켜쥐고 매달려 목숨을 건졌다. 기진맥진氣盡脈盡, 높이 50여 미터의 절벽을 내려와 모닥불을 피우고는 그 옆에 쓰러졌다. 혼수상태昏睡狀態에서 몸을 녹이고는 새벽녘에 주막에 도착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산양잡이에 나섰다.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산양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포수 한 명을 데리고 갔다. 산양들은 여전히 산꼭대기에서 놀고있었다. 다시 절벽을 오르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포수를 대기시키고 나는 산양들이 뛰어넘었던 반대편 산으로 갔다. 나의 지시에 의해 대기하고있었던 포수가 산양을 향해 위협발사를 했다. 산양은 예상한대로 내가 숨어있는 산봉우리로 달아나려고 5 - 6m나 되는 다이빙대를 차고 공중에 도약했다. 별로 힘을 들인 것 같지도 않은데 산양의 몸이 가볍게 공중에 떠올랐다. 바위와 산양발굽의 탄력이었다. 꿩을 쏘는 날치기요령으로 공중에서 날아오는 산양을 조준했다. 날아가는 대가리의 30Cm 앞에 발사했다. 산양은 절벽 밑으로 낙하落下했다. 두 번째 산양이 도약했다. 산양은 중간에서 날아오른 자세로 낙하했다. 세 번째 산양을 뒤로 돌아서다가 위협발사에 놀라 도약을 했는데 내가 쏠 필요도 없이 실수로 낙하했다. 세 마리 중 한 놈은 망아지만큼 큰숫놈이었다. 12살인데 멋진 뿔을 가졌다. 뿔은 1년에 한 번씩 매듭을 만든다.
일제말기, 나는 그런 산양을 두 마리 생포生捕한 적이 있었다. 강원도 속초 부근 고산지대는 눈이 많았다. 우리가 사냥을 하려고 도착했을 때는 주막집마루까지 눈이 쌓였다. 눈 쓸어내기에 지쳐 사람들은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길이가 30Cm나 되는 설피를 만들어 신고 사냥을 나갔으나 산돼지, 노루도 모두 외출금지상태였다. 사냥을 포기하고 돌아서려고 했는데 몰이꾼이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산양몰이나 해봅시다.’
고 했다.
‘산양?’
몰이꾼이 따라오라고 했다. 산중 깊이 들어갈수록 발굽까지 빠지던 눈이 무릎까지 빠졌다. 설피가 아니었다면 가슴까지 빠졌을 것이다. 몰이꾼이 지형을 잘 알고있어서 위험지대를 피해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지형을 몰라 계곡에 빠지면 구제불능이다.
‘저기 보시오.’
몰이꾼이 가리키는 곳에 까만 점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산양이었다. 눈에 빠져 오도가도 못 하는 형편이었다. 가느다란 막대기 같은 산양의 다리는 눈속에 빠지면 걸어나오지 못 한다. 총을 들었더니 몰이꾼이 사로잡자고 했다. 우리를 보고 달아나려는 산양은 안깐힘을 썼으나 우리가 다섯 발 나가는 사이에 한 발을 띠기도 어려웠다. 뿔을 잡힌 산양이 체념한 듯 쳐다보았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두 마리를 잡았는데 서울로 보내려고 역에 나오니 여덟 마리가 잡혀왔다. 산양의 생피는 노루나 맷돼지처럼 보약이다. 산양의 고기는 노린내나 비릿한 냄새가 없고 연하고 담백하다. 만주 길림에서 맷돼지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산양떼를 발견하여 한꺼번에 여남은 마리를 잡은 일이 있었다. 겨우내 굶주렸던 산양이 비실비실 몰려다니다가 산탄총의 연사連射로 몰살을 당했다. 나는 잡은 산양을 모두 평소에 신세를 진 왕대인에게 보냈다. 이튿날 왕대인이 나를 초청했다. 왕대인의 집은 대지垈地가 천 평이 넘는 궁궐같은 집이었는데 큰 잔치판이 열렸다. 중국인,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까지 모두 아홉 명의 손님들이 초청돼 안방에서 저녁식사를 즐겼는데 그날의 메뉴가 징키스칸요리였다. 내가 잡은 산양으로 한 요리인데 나는 평생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징키스칸요리는 몽고군대가 양을 잡아 먹었던 진중陣中요리였다. 양고기 중에서도 산양을 최고로 쳤다. 장교將校는 철모鐵帽를 불에 달궈서 고기를 구워먹었고 사병士兵들은 큰 솥에 물을 펄펄 끓여놓고 긴 대젓가락으로 얇게 썬 고기편片을 끓는 물에 넣어 살짝 익혀먹었다. 내가 왕대인 집에서 맛 본 요리는 장교 - 아마도 장성將星들이 먹었던 양고기구이였다. 왕대인이 중국인요리사를 시켜 진짜 징키스칸요리를 했는데 철모모양의 구이판을 숯불에 달궈놓고 구웠다. 징키스칸요리의 재료는 까다로왔다. 양의 뒷다리, 새우기름, 개의 기름, 간장과 중국 셀러리, 마늘, 부추 그리고 소홍주다. 새우기름과 술과 간장으로 소스를 만드는데 그게 가장 중요한 비법秘法이었다. 왕대인은 그 특제 소스를 얇게 썬 양고기에 발라 구웠는데, 긴 대젓가락으로 기름덩어리를 냄비에 바른 다음 냄비가 달아오르는 것을 기다려 소스를 바른 산양고기를 구웠는데 고기를 1분 이상 굽지 않았다. 고기의 핏기가 남았을 때 얼핏 꺼내 손님에게 권했다. 특급 고량주 소홍주를 마시면서 징키스칸요리를 먹는 맛은 천하별미였다.
88. 만주滿洲개와 곰
살인곰을 잡았던 이듬해, 스물여덟이 되던 해 봄에 함경북도 무산군의 윤원술씨(39세)에게 초청을 받았다. 무산군 여하면 육소리 뒷산에 곰과 산돼지가 우굴거린다니 같이 사냥을 하자는 초청이다. 윤포수는 총솜씨도 솜씨거니와 그가 기르는 개들 때문에도 이름난 포수다. 몰이꾼 정춘섭씨(40세)와 동행하였다. 정씨는 발자국과 몰이에 전문가다. 윤포수가 사는 마을에 들어서 윤포수집을 물었더니 <집은 가르쳐주는데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면 찾아가지 말라>고 노인이 충고했다. 사나운 개 때문이다. 우편배달부도 그 집에는 안 간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윤포수집 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개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가 윙윙! 짖을 때는 주인에게 상황을 알리려는 것이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경고다. 내가 윤포수의 안내로 집에 들어서는 순간, 바른대로 말하자면 약간 겁이났다. 네 마리의 개가 굵은 쇠사슬에 묶여있었는데 모두 송아지만큼 큰놈들이었다. 개들이 쇠사슬을 끊고 금방 덤빌것 같아 공포를 느꼈으나 신기하게 개들이 나를 보더니 갑자기 적의敵意를 풀고 꽁지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사냥개인 그들은 총을 맨 사람 - 사냥꾼을 알아본 것이다. 윤포수는 그 개들을 북만주에서 구입했다. 그러나 족보族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개들은 뭇맹수의 습격이 빈번頻繁했던 북만주땅에서 침입자와 싸우며 주인을 지켰고, 옛날에는 침입자를 죽이고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내력뿐이었다. 내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는 맷돼지를 몰다가 표범과 싸웠다. 표범은 개하고 싸우지 않으려고 숨어있다가 윤포수에게 들켜 덤벼들었는데 용감한 개가 공중에 뜬 표범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표범이 중심을 잃고 나자빠지자 윤포수가 발사하여 잡았다. 이튿날, 나, 윤포수, 몰이꾼이 네 마리의 개를 데리고 사냥터로 갔다. 송아지만한 만주개들은 윤포수에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개들이 윤포수를 끌고갔는데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진흙탕으로 끌고갔기 때문에 개와 윤포수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산에 도착해서야 개들의 쇠사슬을 풀었다. 산봉우리 서너 개를 넘었을 무렵 몰이꾼이 맷돼지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불과 몇 분 전의 발자국이었다. 그런데 개들은 발자국을 무시하고 엉뚱한 곳으로 달려갔다. 몰이꾼이 개들을 불러모으려다가 지쳐서 머리를 흔들었다. <엉터리 사냥개들이군!> 혼잣말을 했다. 개들을 놔두고 발자국을 따라가자고 제의했는데 윤포수가 좀 더 살펴보자고 했다. 그 때 산마루 너머에서 개들이 짖었다. 큰 덩치에 어울리는 소리였으며 네 마리가 짖는 소리에 산이 쩡쩡 울렸다. 윤포수가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달려갔다. 앞선 윤포수가 당황하며 고함쳤다.
‘곰이다! 곰.’
윤포수가 바위틈으로 달아나는 곰을 쏘았다. 곰이 폭! 꼬꾸라지더니 다시 일어나 도망갔다. 나는 곰이 달아나는 지점을 겨냥하고 가로지르기 위해 달리다가 몰이꾼의 고함에 뒤를 돌아다 보았다. 다른 곰 한 마리가 내 등 뒤 7 - 8m 떨어진 곳을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곰쪽으로 총대를 쑥! 내밀면서 갈겼다. 곰이 훌떡 뒤로 뒤집어졌다. 곰이 치명상을 입었거나 적어도 달아나지는 못할거라고 짐작하고 개들이 요란하게 짖는 곳으로 달렸다. 개 네 마리는 참나무가 서너 그루 있는데서 요란스럽게 짖고있었다.
(곰이 또 한 마리 있는 게 아닐까?)
개들이 짖고있는 숲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 …? 앗!)
개들이 나무 위를 보고있다는 걸 깨달았다. 곰이 나무 위에 있었다. 아마도 129Kg은 나갈 것 같은 놈이 나무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곰이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겼다. 나뭇가지의 탄력을 이용해서 그 반동으로 뛰어내리려는 수작이다. 나는 총신을 거의 수직으로 올려 발사했다. 곰이 나무에서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나는 옆으로 몸을 뒹굴면서 피했으나 곰의 뒷다리가 내 어깨를 쳤다. 그 때 개가 총알처럼 내 머리 위를 타고넘어 곰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저앉은 자세였던 곰이 개의 발을 잡아 던졌다. 개가 3 - 4m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다른 개가 이어 돌격했다. 곰이 가슴으로 돌격을 막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개들은 무섭게 울부짖으며 공격했다. 나는 바른손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왼손으로 장탄을 했다. 곰은 방법을 바꿔 개들이 잡히면 엉덩이에 깔아뭉개려고 했다. 개들도 방법을 바꿔 코, 귀, 발등을 물었다. 코를 물린 곰은 펄쩍 뛰다가 엉덩이에 깔아놓은 개를 놓쳤다. 그러나 곰이 개에게 물려죽을 것 같지 않았고 개도 곰에게 잡힐만큼 우둔하지 않아 싸움이 지루한 소모전消耗戰이 되었다. 그 때 나는 가까스로 장탄을 하고 나무에 기대 곰을 조준했으나 개들이 설쳤고 왼손이라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윤포수는 어디 갔나?)
‘여보! 이리 좀 와주시오!’
내가 고함을 지르자 기적이 일어났다. 무차별 공격을 하고 있던 개들이 약속이나 한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갑자기 개들이 공격을 멈추고 흩어지자 곰이 멍!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기회였다. 왼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곰이 벌러덩 나자빠졌다. 개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산마루로 걸었다. 윤포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부상을 입은 곰을 쫓아 산을 두 개나 넘었다고 투덜댔다. 그런데 몰이꾼들은 어디로 갔을까? 몰이꾼은 산돼지를 발견한 그 지점에 쓰러져있었다. 윤포수가 안아 일으켰다. 의식을 회복하고는
‘아, 그 놈의 곰이 총에 맞아 힘이 없는줄 알았더니 ….’
몰이꾼은 내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진 곰이 죽은줄 알고 다가갔다가 곰의 일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총탄을 맞은 곰이 비실거리자 큰 돌맹이를 주워 곰을 내리쳤다. 돌을 맞자 곰이 쓰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을 차린 듯 몰이꾼의 가슴을 치고 도망가버렸다. 핏자국을 추적했더니 곰은 멀리 가지 못 하고 계곡에 쓰러져있었다. 윤포수가 숨통을 끊었다. 그래서 세 마리의 곰을 잡았다. 마을사람들은 날이 어두컴컴했을 때 우리가 달구지에 세 마리의 곰을 싣고오자 놀랬다. 윤포수네 뜨끈뜨끈한 방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졌다. 곰의 뒷발에 채인 어깨가 으스러질 듯 아팠으며 열이 올랐다. 곰의 앞발에 맞은 몰이꾼은 나 보다 더 열이 높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피해는 개들이었다. 모두 절룩거렸고 집에 들어서자 모두 길게 들어누오ᅟᅥᆻ다. 윤포수가 곰의 살을 베어 던져주어도 입을 대지 않았다. 특히 두목격인 놈은 고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쓰러졌을 때 내 머리를 타넘고 곰을 공격했던 놈이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일어서지도 못했으나 꼬리를 흔들었다.
89. 지리산의 대호大虎
지리산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가장 매력있는 사냥터다. 태백산맥을 타고 시베리아, 동부중국에서 드나드는 대형 맹수들이 머무르는 곳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밀림은 대낮에도 어둡다. 수십미터나 되는 거목들이 가지와 잎을 늘어뜨려 햇빛을 차단하여 푸르스름한 빛깔을 낸다. 바다속처럼 어둡고 조용하다. 나는 함경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주로 사냥을 했지만 지리산에도 가끔 갔다. 지리산에는 범, 표범과 곰이 있었다. 나는 서른두 살 때 지리산에서 대호大虎를 봤다. 맷돼지나 곰을 잡으려고 조수와 같이 늦은 가을 낙엽이 한 자나 쌓인 지리산의 밀림을 돌아다녔다. 한국사냥은 사냥정보를 듣고 현지 몰이꾼을 고용雇用하여 사냥을 했으나 지리산은 언제 어디서도 사냥을 할 수 있었다. 맷돼지, 삵괭이, 노루, 꿩, 토끼, 족제비들을 잡을 수 있었고 때로는 곰이나 표범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했다. 곰이나 표범 그리고 뱀도 위험했다. 날씨가 추운 북쪽 사냥터에는 뱀이 없었으나 지리산에는 뱀이 많았고 무서운 독사毒蛇들에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다행히 포수들이 활동하는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뱀이 동면을 하기 때문에 사냥꾼이 희생되는 일은 거의 없었으나 눈이 내리기 전에는 조심해야 한다. 그때도 일본인포수가 들것에 실려가는 걸 보았으므로 낙엽을 밟을 때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뱀들 중에는 눈이 내리기 전에는 낙엽에 숨어있는 놈들도 있었다. 뱀은 없었다. 그러나 짐승도 없었다. 반나절을 돌아다녀도 그 흔한 노루 한 마리도 보지 못 했다.
‘뭔가, 큰 놈이 돌아다니는 것 같아.’
노련한 몰이꾼 정서방이 중얼거렸다. 나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표범이겠지.’
우리는 산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왔으므로 산 중턱에 있는 목공소木工所로 돌아가려고 했다. 우리가 돌아섰을 때 70m 정도 앞 잡초에서 뭔가 누르스름한 물체가 어른거리는 걸 보았다. 누르스름한 물체는 잡초지에서 인근 바위 뒤로 스르르 빠져나갔다.
‘표범이다!’
순간적으로 총을 들어올렸으나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고 불과 1 - 2m 거리의 공간을 지나가는 걸 쏠 틈은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 날쌘 표범이 1 - 2m 거리를 지나가는 게 느렸다. 내가 총을 들어올려 조준을 하고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발포했다. 그러나 섬찟했다.
(표범이 왜 저렇게 느릴까?)
두 가지 중 하나다. 표범이 아주 천천히 지나갔을 경우와 표범이 아주 큰놈이었을 경우다. 그런데 표범의 몸이 커봤자 얼마나 길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대호다!)
표범이 아니고 대호였다. 나는 대호를 쏜 것이다.
‘홍포수, 그놈은 점무늬가 아니라 줄무늬였어.’
정서방도 같은 생각이었다. 내가 쏜 총탄은 맞은 것 같기도 안 맞은 것 같기도 했다. 1 - 2분 심사숙고深思熟考 하다가 현장을 보기로 했다. 정서방이 완강頑剛하게 반대했다. 나는 표범을 많이 잡았고 그다지 겁을 내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대호라는 걸 알고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머릿속이 윙! 하고 울렸고 피가 끓었다. 그건 무리가 아니다. 내가 겁쟁이여서도 아니다. 표범과 범은 같은 고양이과 동물이지만 위험도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다. 표범의 몸무게는 커야 고작 80Kg이지만 대호는 작아도 160Kg에서 크면 400Kg 이상이다. 황소무게다. 포범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는 한 일격으로 죽지 않는다. 설사 총에 맞지 않았을 경우에는 총대나 칼로 대항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호에게 일격을 받으면 즉사卽死다. 대호는 사자의 앞발치기처럼 무서운 앞발치기를 하는데 그 앞발치기에 맞고 살아날 동물은 이 세상에 없다. 솥뚜껑만한 발로 400Kg의 몸무게를 실어 때리면 그 가공可恐할 힘에 황소나 코끼리도 즉사하고 자동차도 날아간다. 대호와 포수가 지근거리에서 대결하여 첫탄으로 치명상을 입히지 못 하면 포수가 죽는다. 나는 대호가 스쳐간 바위로 한 발 한 발 접근했다. 젊은 포수의 무모한 행동이었다.
(설마, 대호가 거기 머무르랴?)
대호는 없었으나 털이 있었다. 총탄이 털을 스친 것 같았다. 만약 총탄이 대호의 엉덩이에 맞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서방이 창백한 낯으로 바위밑을 가리켰다. 쟁반만한 발자국이 있었다. 표범발자국만 보았던 나는 그 크기에 전율戰慄했다.
‘홍포수, 보시오. 다음 발자국은 저기 있소.’
첫발자국과 다음발자국의 간격이 5m였다. 총소리에 뛰었는데 처음부터 5m를 뛰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발자국이 표범이었다면 나는 사냥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표적標的짐승을 포기할 내가 아니다. 대호와 싸움은 반반半半이다. 어느쪽이든 하나는 죽는다. 목숨을 걸고 대호와 대결할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오늘은 되돌아가자.’
‘아니, 그럼 내일은 한 번 싸워보겠단 말야?’
‘그 건, 오늘밤 상의相議해보지.’
‘상의는 무슨 놈의 상의. 난 싫소!’
우리가 되돌아간 목공소는 지리산 중턱에 있었는데, 신도信徒 여인과 밀통密通 한 파계승破戒僧이 지었다. 목탁木鐸 등 불구佛具와 쟁반, 재떨이, 벼루집, 지팽이, 밥그릇을 만들어 팔았다. 목공소에는 늙은 주인과 중년 남자 세 삼이 있었는데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다섯평 남짓한 흙집이었으나 따뜻했다. 마침 저녁을 먹는 중이었으므로 우리도 도토리묵과 산채무침을 얻어먹었다. 목공소주인은 내가 대호를 쏘았다는 말에 기절할 듯 놀랐다.
‘안 돼, 안 돼지. 대호하고 싸우지 말아요, 그 범은 이 산의 산지기야.’
대호는 작년에 왔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표범은 나무꾼을 물어 한쪽 팔을 못 쓰게 만들었으나 대호가 쫓아버렸고, 대호는 사람을 보아도 모른 척 했다. 목공소 부근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호를 가까이서 만났다는 중년남자는, 나무뿌리를 캐다가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다 봤는데 바로 10m 거리에 대호가 있었다. 정신이 마비되어버린 남자가 꼼짝딸싹도 못 하고 서있었는데 대호가 한참동안 물끄러미 보고있다가 어슬렁어슬렁 가버렸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금년 여름 목공예품木工藝品을 사러 온 두 스님이 밤길에 내려갔는데 호랑이는 두 눈을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밝히고 스님을 지켜보았으나 위협이나 공격을 하지 않았다. 스님들은 나무아미타불을, 살려달라고 염불念佛을 했는데 호랑이는 헛기침을 하더니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범이 헛기침을 했다는 건 믿을 수 없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허긴 이 산에는> 다른 호랑이도 있다. 모두 대호의 부하다. 겨울에 호랑이가 울면 생식기에 짝을 찾는 것인데 호응이 있었다면 한 마리 이상의 호랑이가 있다는 말이다. 대호는 배가 고프지 않으면 짐승을 공격하지 않고 더구나 사람에게는 함부로 덤벼들지 않는다. 사람은 무서운 적이라는 걸 알고 다른 먹이가 풍부하므로 구태어 사람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는 걸 대호도 안다. 산지기라는 말도, 대호가 돌아다니면 표범, 늑대, 삵괭이와 족제비들이 사라진다. 목공소에서 기르는 닭, 토끼들이 안전하다. 목공소사람들의 소망대로 대호잡이를 포기하고 곰을 찾았다. 곰을 발견하지 못 하고 큼직한 산돼지를 만났다. 300Kg 가까운 놈이 참나무에 등을 비비고 있었다. 스페인제 5연발 산탄총을 연사連射했다. 산돼지는 한두 발로 죽지 않는다. 운반할 수가 없어 내장을 뽑아내고 다리를 묶어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밀림을 돌아다니다가 오소리를 만났다. 일본인들은 오소리를 아나구마(구멍곰)라고 한다. 꽤 큰놈이었는데 굴앞에서 햇볕을 쬐고있다가 총탄을 맞았다. 사향노루도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우리를 발견하고 재빨리 도망을 쳤는데 얼만큼 가서는 뒤를 돌아다보는 나쁜 습성 때문에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사향은 최음강장제催淫强壯劑다. 담비는 잔인무도殘忍無道하다. 민첩해서 꿩 등 날짐승도 잡는데 짐승만 보면 무조건 덤벼들었다. <호랑이 잡아먹는 담비>란 말이 있을 정도로 사나운 짐승이며, 마을에 침입하여 가축을 훔쳐가는데 그 수법이 잔인하다. 살육殺戮본능이다.우리에 있는 닭을 모두 죽인 다음 한 마리만 가져간다. 노란 담비들은 우리를 보고 도망치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민첩해서 총을 쏠 틈을 주지 않았다. 담비가죽은 표범가죽과 맞먹는 값이다. 오후에 산림에서 벗어나나오는 길에 숯을 굽는 산막을 발견했다. 산막주인과 함께 나무에 걸어놓은 산돼지를 운반하려고 했는데 나무를 찾지 못 했다. 날이 어두워져서 산막으로 돌아오는데 정서방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산돼지를 둔 곳이 이 부근이라고 했다. 우리는 깔깔거리며 산돼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는데 그만 웃음소리가 딱! 그쳤다. 내가 휘두른 전지빛에 누런빛깔이 스쳤다. 아주 짧은 순간 떠올랐다가 사라졌으나 우리는 감전感電된 것처럼 굳어졌다. 노란빛깔에서 줄무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호가 산돼지고기를 노리고 있었다. 전지빛을 끄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노란불빛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불과 10여미터였다. 나는 안전장치를 푼 총을 들어올리지 못 했다. 그 동작에 대호가 덤벼들 것 같았다. 눈 먼 사람과 눈 뜬 범의 대결은 뻔하다. 나는 반 쯤 들어올린 총을 오히려 내렸다.
‘모두 움직이면 안 돼! 움직이면 죽어. 조용히 그대로 있어!’
사람은 움직이지 못 했다. 범도 그대로 있었다. 2 - 3분이 몇 시간으로 느껴졌다. 범이 목을 굴렸다. 헛기침 같았다. 그런데 그 소리는 부드러웠으며 살기殺氣가 없었다. 두 개의 빛이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범이 우리에게 덤벼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조용해!’
2 - 3분이 지나도 기척이 없었다. 10여 분을 더 기다렸다. 비로소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범은 사라졌어!’
회중전지를 켜서 여기저기를 살폈으나 범은 없었다. 우리는 산막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뒷덜미를 누군가 잡힐 듯한 감각을 느끼며 뛰다싶이 돌아왔다. 이튿날 다시 현장에 가봤다. 산돼지는 그대로 있었다. 무수한 범의 발자국만 있었다. 나무에 올라가려고 애를 쓴 것 같았다. 그 때 지리산에서 본 대호가 한국의 마지막 대호였을 것이다. 본래 한국에도 범이 많았다. 조선시대 말엽末葉까지도 대호는 함경도, 강원도와 경상도에 출몰했고 가끔은 서울에도 보였으나 일본인들이 들어오고난 뒤에 사라졌다. 산의 나무가 남벌濫伐되어 초식草食동물이 줄어든 것이 호랑이가 사라진 원인이다. 한국범은 테벡산맥을 타고 동부중국으로 이동했다. 포수들이 만주에서 한국범이 시베리아범들과 돌아다니는 것을 증언했다. 하여튼 내가 본 지리산범은 마지막 한국범이었는데 그도 이듬해 사라졌다. 목공소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 해 겨울에도 대호가 짝을 찾아 우워엉! 우어웡! 하고 울었으나 그에 대답하는 소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리산의 마지막 한국범은 겨우내 헛되게 또한 슬프게 울다가 봄이 되자 짝을 찾아 만주로 가버렸다. 북으로 올라가던 대호가 두륜산 근방 마을에서 황소를 잡아먹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갔는데 발자국으로봐서 지리산의 대호였다. 그 후부터 한국의 산에는 대호가 사라졌다.
90. 나무의 바다(슈하이 樹海)
우리는 광대廣大한 만주(동부중국)의 밀림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것 같았다. 기다니에게 몇 번이나 돌아가자고 경고했으나 기다니는 범의 발자국에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나는 기다니를 따라온 걸 후회했다. 기다니는 직업포수가 아니었다. 그는 잡힌 범 옆에서 또는 곰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는 아마튜어 주제에 만주에서는 자기를 따라올 포수가 없다고 자랑했으나 아무래도 사냥솜씨는 의심이 갔다. 기다니는 만주에서는 꽤 세력이 강한 일본인이다. 예비역대위豫備役大尉였으며 관동군關東軍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 헌병이나 일본인관리는 그를 <기다니 대위님>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공손하게 대접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만주 길림성 어느 산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공비토벌작전共匪討伐作戰을 벌이던 일본군의 작전구역에 들어가 공비로 오인誤認되어 연행連行되었을 때다. 산중에서 홀로 다니는 나를 일본군은 공비의 간첩間諜으로 오해하여 아주 거칠게 다루었으며 <귀찮으니 즉결처분해버리자>고 의논을 했다. 그 때 기다니가 있었는데 내가 조선인 직업포수라고 하자 꼬치꼬치 캐물었다. 사냥에 관한 얘기였는데 사냥을 잘 알고 있는 듯 기다니는 일본장교에게 <포수가 틀림없으니 석방하라>고 말한 뒤 나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로부터 친해졌으며 만주에서 사냥을 할 때 많은 편의便宜를 봐주었다. 그래서 그의 범사냥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나도 대호를 한 마리 잡는 게 평생소원이었으므로 같이 대호사냥에 나섰다. 우리는 길림성 북쪽 삼림으로 들어갔다. 만주의 삼림은 광대하다. 도끼를 모르는 원시림이 한국의 도道(자치단체)처럼 넓다. 이를 만주사람들은 슈하이(수해水海) - 나무의 바다라고 부른다. 나는 그 슈하이를 보고 놀랐다. 한국의 산이야 손바닥 보는 것처럼 알고 설사 길을 잃는다고 해도 뻔한 것이기 때문에 방향만 잡고 나가면 하루 이틀만에 빠져나올 수 있으나 만주의 슈하이는 가볍게 볼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다니는 그 지역은 자기가 군장교로 근무할 때 관할이었으며 지리를 잘 안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일본군은 시베리아벌판에 던져놓아도 찾아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있다고 자랑했다. 기다니는 자신있게 밀림속으로 들어갔다. 10월 중순이라고 하지만 여름과 가을이 짧은 곳이라 늦가을과 겨울 사이였다. 나무들은 옷을 벗었고 낙엽이 한 자씩 쌓였다. 기다니는 사냥의 복장과 장비부터 실수를 했다. 우리는 둘 다 가을차림이었다. 메리야스 내의內衣 위에 엷은 털내의를 겹쳐입고 골덴지로 된 상의上衣를 걸쳤을 뿐이다. 그래서 영하零下로 내려간 삼림의 냉기冷氣가 으스스! 스며들었다. 그래도 오후에 웅덩이에서 대호의 발자국을 발견, 흥분하여 추위를 잊었다. 대호는 300Kg이 넘는 시베리아범이었다. 기다니는 이미 잡은 거나 다름없이 말하고 있었으나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발자국은 24시간이 지났으며 추적에 며칠이 걸릴 것이었다. 대호의 행동반경行動半徑은 하루에 30Km 쯤 되며 사람이 대호를 쫓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호를 쫓았다. 내 예상대로 대호는 북쪽 삼림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대호를 따라 자꾸 더 깊이 삼림으로 들어갔다. 기다니가 대호를 따라가면 포수산막이 있다고 했다. 대호는 정확하게 북쪽으로 갔는데 도중에 산돼지를 잡아먹고 쉰 흔적이 발견되었다. 나는 대호의 발자국을 보고 대호가 단순히 영역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북쪽으로 가고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추격하기가 힘들었으나 기다니는 내 의견을 무시했다. 시베리아범은 원래 행동반경이 넓으며 북쪽으로 가다가도 다시 남쪽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저러나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기다니가 말한 산막을 찾아야 했다. 여기저기를 배회徘徊햇으나 산막이 없었다.
‘이상한데 …. 분명히 이 근처에 있었는데 ….’
기다니가 당황하여 중얼거렸으나 이미 그의 사냥솜씨를 의심하고 있었던 나는 산막이 아니더라도 야숙野宿을 할 수 있는 동굴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서둘러서 동굴을 찾았다. 좀 좁기는 했으나 두 사람이 새우잠을 잘 수는 있었다. 동굴 앞에 모닥불을 피워 항고(일본군 야전냄비)에 밥을 지어먹고나니 한결 편안해졌다. 삼림속 야기夜氣는 차가왔다. 나무가지를 잘라 동굴입구를 막고 숯불을 피워 냉기를 쫓았다. 기다니는 이튿날 날도 밝기 전에 빨리 출발하자고 성화였다. 추적이란 마라톤경기와 같다. 어느쪽이 더 끈기가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판난다. 그래서 추격하는 포수는 체력의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충분한 휴식을 해야 한다. 기다니는 사냥의 기본상식도 몰랐다. 하여튼 추적을 계속했고 범의 발자국이 좀 더 선명해졌으나 아직도 우리 보다 반나절은 앞서갔다. 빨리 서두르는 쪽이 먼저 지친다는 상식에 따라 오후부터 기다니는 피로疲勞가 나타났다. 일본군장교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그는 피로한 기색을 감추려고 했으나 걸음걸이가 난조亂調를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들돼지를 쏘는 실수를 저질렀다. 저녁반찬으로 하겠다는 말이었으나 범을 추적하고 있는 포수가 반찬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총질을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었다. 총소리는 도망가는 범에게 <우리가 너를 쫓고있으니 빨라 도망쳐라!>고 알려주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날의 추적은 거기서 끝났다. 그는 들돼지껍질을 벗기고 통째로 바비큐를 했는데 그 냄새가 또 산중이 퍼져나갔다.
‘사냥이란 이런 맛으로 하는 거야!’
기다니는 수통水桶의 화주火酒를 마시면서 호탕豪宕스럽게 웃었지만 그 때 어둑어둑한 잣나무그늘에 뭣인가 불빛을 발견하고 불길한 생각을 느꼈다. 불빛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날이 어두워감에 따라 불빛이 늘었다. 승냥이였다. 만주에 사는 붉은승냥이였으며 죽음의 사신死神으로 불리운다. 체구는 늑대나 이리 보다 작으나 성질은 더 사납다. 떼를 지어 삼림을 돌아다니며 맷돼지, 사슴과 산양을 잡아먹는다. 배가 고프면 곰이나 대호에게도 덤비고 사람도 마다하지 않는다. 기다니가 냄새를 피우면 구은 바비큐가 야수를 불러들였다.
‘무슨 소리요? 홍포수답지 않게. 저 따위 개 보다 작은 놈들이 뭘 한다고. 내버려두시오!’
기다니는 내 충고를 일소一笑에 붙였으나 식사를 끝내고는 신경질을 부렸다. 붉은승냥이들 20여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와 15m에 이르자
‘이 새끼들이!’
하고 일어나 총질을 했다. 연사를 해서 두 마리를 죽였고 나머지는 도망쳤다. 붉은승냥이는 총소리에 놀라 도망쳤으나 다시 모여들었다. 피냄새를 맡은 그들의 눈은 새파란 독기를 품고있었으며 우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맥돼지고기를 구워먹고 동굴을 찾아 쉬려고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여기에서 밤을 세우기로 했다. 불을 떠난다는 건 위험했으며 승냥이의 마중을 받으면 밤길을 걸어갈 수는 없었다. 교대로 잠을 자기로 하고 기다니가 먼저 잤다. 사람은 잠을 잤으나 승냥이는 자지 않았다. 죽은 동료의 시체를 먹었다. 뼈를 깨무는 오도독! 오도독! 소리가 거슬렸는지 기다니가 또 총을 들었다.
‘그만두시오. 어둠속에서 총을 쏜들 몇 마리를 죽이겠소. 내버려두고 잠이나 주무시오.’
기다니가 잠이 안 오니 나부터 자라고 했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몸에 스미는 한기寒氣에 눈을 떴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새벽이었는데 불과 몇 미터 앞에 승냥이들이 다가와있었다. 기다니는 베낭에 기대 잠들었다. 황급히 총을 들자 승냥이들이 후다닥! 물러섰다. 기다니는 해가 나무 위로 오를 때까지 잤다. 하룻밤 사이에 꺼칠해졌다. 눈자위가 푹 꺼지고 얼글빛도 창백했다. 그러나 그 일본군장교의 威勢만은 죽지 않았다. 추적을 하겠다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내가 조용히 말렸다. 승냥이들이 우리를 사냥하려고 하는 판에 대호사냥이 문제가 아니었다. 승냥이는 날이 밝자 멀찌감치 물러섰으나 결코 먹이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기다니는 막무가네였다. 일본군의 악착같은 근성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우리는 대호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승냥이는 우리를 따라왔다. 굶주린 그놈들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기다니는 극도의 피로에 발걸음이 터덕거렸다. 오후에는 날이 흐려지더니 바람이 불었다. 아무말없이 기다니가 맨 배낭을 뺏어 맸다. 승냥이들은 사격권 밖에서 줄기차게 따라왔다. 그날 오후 대호의 추적은 포기했다. 바람 때문에 낙엽이 날렸고 싸락눈이 내려 발자국이 사라져버렸다. 10월 중순인데 벌써 첫눈이 내렸다. 고집불통의 기다니도 호랑이사냥 포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우리는 호랑이사냥을 포기했지만 승냥이는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승냥이에게 신경 쓰지말라고 했다. 그 삼림을 잘 알고있다고 큰소리쳤던 기다니는 현재 우리들이 서있는 위치를 파악하지 못 했다. 다만, 우리들은 그간 북쪽으로만 걸어왔으므로 북쪽으로 간다면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갈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때 쯤 기다니는 스스로 지휘권을 포기하고 내가 단독으로 모든 일을 결정했다. 바람과 눈이 점점 심해져서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기다니는 추위에 떨면서 거의 절망적인 표정이었으나 나는 그를 격려하며 걸었다. 우선 당장 필요한 것은 휴식처였다. 동굴이나 바위라도 발견해야 했다. 그러나 삼림은 가도가도 나무들뿐이었으며 바위 하나도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승냥이들은 끈질기게 따라왔다. 물이 없는 하상河床이 나왔다. 홍수가 지나간 자리인데 자갈과 바위, 모래가 깔렸다. 큰 바위 틈에 나뭇가지를 잘라 네모틀을 만들어 박고 담요로 벽을 쳐 겨우 바람과 눈만은 피할 수 있는 은신처隱身處를 만들었다. 불을 피워놓으니 제법 따수웠다. 기다니는 밥도 먹지 않고 쓰러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잘 수가 없엇다. 승냥이들이 코앞까지 왔으며 어떤 놈은 담요를 뜯기도 했다. 기다니는 밤새 헛소리를 하고 고열이 났다. 신경쇠약증세神經衰弱症勢였다. 날이 밝아지자 기다니는 눈을 떴으나 신경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농담을 했다.
‘어떻소, 이 집? 두 시간만에 만든 속성 집인데 ….’
기다니도 억지로 웃었다.
‘물론이지, 우선 집을 좀 수리해야 하지 않을까?’
담요를 들치니 밤새 놀랄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바람과 눈은 멎었으나 삼림이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두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방향도 알 수 없는 밀림에서 동장군冬將軍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붉은 승냥이도 여전히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놈들은 나를 보더니 슬슬 뒤로 물러나 나무 뒤에 숨었다. 나는 그놈들을 무시했다. 자갈과 진흙으로 흙벽을 쌓아올리고 나뭇가지와 잡초, 낙엽으로 지붕을 덮어 한 평 정도의 움막집을 만들었다. 방안에 화덕을 놓고 연통煙筒도 지붕 위로 뽑아냈다. 습기를 막기 위해 통나무로 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낙엽과 담요를 깔아 다시 혼수상태인 기다니를 눕혔다. 작업은 하루 종일 걸렸다. 고열高熱에 시달리는 기다니를 데리고 광야를 걸어갈 수가 없어 당분간 여기서 머물기로 한 것이다. 이제 얼어죽을 염려는 면免했다. 두껍게 친 흙벽으로 외풍外風을 막았고 활활 타는 화덕으로 방안은 한증막汗蒸幕처럼 더웠다. 건빵과 엽차로 저녁을 먹고 잠에 떨어졌다. 꽤 오래 잔 것 같았다. 잠결에 사람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깼다. 기다니가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총을 들고 뛰어나갔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승냥이들이 기다니를 습격하고 있었다. 기다니는 엎어져있었으며 한 놈은 기다니의 발목을 물고, 한 마리는 손목을 물었고, 다른 놈들은 등위에 올라가있었다. 권총이 떨어져있었고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우선 공포를 쏘아 승냥이들이 기다니에게서 떨어지게 만들고 흩어지는 틈에 세 발을 쏴 세 놈을 죽였다. 기다니는 피를 흘리고있었으나 급소急所를 물리지 않아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기다니는 목이 말라 새벽에 깨어 물을 구하려나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만약 구조가 1 - 2분만 늦었더라면 승냥이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발목의 상처는 가벼웠으나 팔목은 뼈가 들어날 정도로 깊었다. 상비약품常備藥品이 있었으므로 응급처치를 했으나 사태가 더 어려워졌다. 기다니는 적어도 3 - 4일 간은 움직이지 못 할 것이고, 식량은 다 떨어졌고, 날씨는 점점 더 추워져갔다. 게다가 승냥이들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직업포수다. 내게 총이 있고 탄환이 있는 한 굶어죽거나 얼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평생을 산림에서 살아온 프로가 아닌가? 프로는 짐승을 사냥하는 프로지만 자연속에서 살아가는데서도 프로다. 원시림의 주어진 모든 여건을 이용해야 한다. 맨처음 이용한 것은 역설적으로 승냥이였다. 승냥이는 고기와 껍질도 제공할 것이다. 승냥이는 동료의 시체도 먹는다. 그래서 아까 내가 쏜 동료의 시체를 먹으려고 시체 주위를 빙빙 돌고있었으나 내가 나가자 슬슬 뒤로 물러섰다. 시체를 흙집으로 끌어들여 껍질을 벗겨 말렸고 고기를 엷게 저며 불에 구웠다. 승냥이 보신탕補身湯인데 기다니는 한사코 거절하다가 내가 먹는 걸 보고는 먹었다. 죽지 않으려면 별 수 있겠는가?
‘이젠 염려할 거 없소. 승냥이들이 제발로 걸어와 고기와 껍질을 제공하고 있으니 ….’
하기야 승냥이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승냥이를 먹을 것이니 식량 걱정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눈벌판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이튿날에도 네 마리를 쏘아 껍질을 말렸는데 방안의 열기로 빨리 말랐다. 껍질을 칼로 자르고 바늘로 꿰매 외투를 두 벌 만들었다. 에스키모들이 입는 외투처럼 눈구멍만 뚫어놓은 외투인데 만주도시에 있는 거지 같았으나 아주 따스웠다. 사흘 후에는 기다니의 열이 내리고 발목의 상처가 아물어 걸을 수 있었으므로 나흘 동안 정들었던 흙집을 버리고 떠났다. 기다니는 팔을 다쳐 내가 지게를 만들어 짐을 모두 졌다. 또 승냥이들이 우리를 따라왔다. 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슬슬 따라왔다. 기회가 되면 덮칠 기세였으나 별 일은 없었다. 도중에 꿩 두 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잡았다. 오후 늦게 곰이 만들어놓은 굴을 발견하였다. 좀 더럽기는 했으나 태고의 밀림에서 해매는 우리에게는 도시의 고급호텔 보다 더 반가웠다. 만약 그 호텔을 발견하지 못 했다면 우리는 죽었을 것이다. 그날밤에 무서운 눈바람이 몰아쳤다. 눈발이 날리고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벼락이 치는 것처럼 사방이 요란했다. 우리는 꿩고기를 뜯으면서 곰에게 감사했다. 동굴에서 눈바람이 그칠 때까지 사흘을 지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동굴에서 편안하게 지내고있을 때 우리를 구조하려고 산림을 수색하고있던 구조대가 눈바람에 조난遭難을 당해 겨우 목숨을 건져 철수했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삼림에 들어간 우리가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안 일본군대와 경찰은 우리가 조난을 당했거나 산적山賊의 습격을 당했으리라 예상하고 수색했다. 구조대는 이틀만에 철수했고 우리가 죽은 것으로 간주했다. 비록 머리칼과 수염이 덥수룩히 자라 산적꼴이었으나 생존을 포기하지 않았다. 원시림의 대자연도 우리가 죽게 버리지 않았다. 눈에 갖혀 꼼짝 못 하고있었을 때 방문객이있었다. 사슴이 동굴입구의 나뭇가지를 발로 차고있었다. 붉은 승냥이의 습격을 받고 쫓기다가 승냥이들이 접근을 못 하는 장소를 발견하여 숨으려고 한 것이다. 모진 마음으로 사살했다. 사슴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역할을 했다. 나흘동안 버티다가 눈이 멈추자 출발했다. 설피를 만들어 신었으나 걸음은 더디었다. 붉은승냥이들도 우리를 따라왔다. 세찬 눈바람을 어떻게 견뎠을까? 계속 굶주리면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인가? 모진 짐승이다. 나는 그들의 거동을 주시하면서 걸었는데, 갑자기 그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한두 마리씩 흩어져 따라오던 그들이 한 군데로 집결集結하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300m 쯤 떨어진 잡목림에서 짧게 외치는 소리가 났다. 비적匪賊일까? 사냥꾼일까? 승냥이의 공격을 받고도 총소리가 나지 않은 걸 보면 무장武裝하지 않았다. 매우 지치고 피곤해서 움직이기조차 어려웠으나 동족이 위험에 처했는데 방관할 수 없었다. 현장 가까이에서 다급한 고함이 들려왔다. 중국말이었다. 지게를 벗어던지고 달려갔다. 십여 마리의 승냥이가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창을 든 중국노인이 쓰러져 있고 창에 찔린 승냥이가 죽어있었다. 연사를 해서 승냥이 세 마리가 쓰러지자 승냥이는 도망갔다. 쓰러진 노인이 의아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살았다는 안심이 아니라 의문의 눈이었다. 당시는 비적들이 횡행橫行하여 산림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맹수를 만나는 것 보다 더 위험했다. 더구나 우리 몰골은 비적과 다름없었다. 노인은 우리가 사냥꾼이라는 걸 확인하고야 <고맙다>라고 인사하고는 멀지 않은 곳의 자기집으로 초대했다. 노인은 산삼山蔘을 캐는 심마니였다. 산삼을 캐지 못 하는 계절에는 부업副業으로 덫을 놓아 짐승을 잡았다. 노인은 덫을 보러가다가 승냥이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왔는데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도 구원을 받았다. 리삼이라는 노인은 1Km 쯤 떨어진 계곡의 집으로 안내했다. 통나무와 흙으로 지은 집은 따뜻하고 안온安穩했다. 꿩고기만두와 향기높은 중국차茶를 대접받았다. 노인은 삼림에서 15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광대한 지역의 지리地理를 모른다고 했다. 노인이 지름길을 가르쳐주며 하루만 가면 철길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나무둥치에 그려진 기호記號를 보면서 길을 찾으라고 했다. 밀림에는 나무꾼, 심마니들이 표시한 기호가 있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동그라미 두 개로 표시한 철도, 계곡, 산막들이 간단한 기호로 나무둥치에 새겨져있다. 우리는 이튿날 그 기호를 보며 걸었다. 도끼로 찍은 그 기호는 정확했다. 서남쪽으로 걸었는데 어쩌다 방향이 바뀔 때는 앞길에 높은 절벽이나 개울이 있어 돌아가라는 표시가 되어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지남철에 의해 방향을 잡았던 우리가 그대로 갔더라면 습지濕地로 나가 곤경을 치룰뻔 했다. 승냥이는 1주일이나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가 버린 뼈나 우리가 쏜 동료의 시체를 먹고 1주일을 따라왔다. 지독하고 모진 짐승이다. 반면, 혹독酷毒한 자연환경에서 강한 생명력을 가진 짐승이다. 영리한 그들은 총이 무엇인지를 알고 낮에는 사격권 밖에 있다가 어두워지면 바짝 접근하여 기회를 노렸다. 노인의 말대로 우리는 삼림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무들이 성기고 도끼로 자른 흔적이 나타났다. 그날 오후 늦게 나무가 없는 광대한 벌판으로 나왔다. 그 벌판은 끝없는 밭이었으며 그 너머에는 마을이 있을 것이다.
‘됐어! 이젠 살았어!’
자신 과잉過剩의 신경상태와 자신 상실의 우울증으로 묵묵히 따라오던 기다니의 입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나도 살았다는 안도감安堵感이 겹치며 기뻤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중대한 실수를 했다. 만주의 광대廣大한 벌판을 과소평가過小評價한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데도 계속 걸어갔던 것이다. 나는 한두 시간이면 광야를 지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錯覺했으나 만주의 광야는 끝이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승냥이들이 설쳤다. 그들도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고 마지막 발악發惡을 했다. 달도 별도 없는 깜깜한 밤에 승냥이와 싸우게 됐다. 나는 기다니에게 서로 붙어 걸어야 한다고 경고하고 총탄을 사슴탄과 꿩탄으로 바꿨다. 어둠속에서는 철鐵이 많이 나가는 게 유리하다. 총을 쏘면 승냥이들이 도망가거나 마을에서 총소리를 듣고 구조대가 올 것을 기대했다. 승냥이는 암흑속에서 발사되는 총의 섬광閃光과 폭음爆音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의 맹렬猛烈한 사격에 몇 마리가 쓰러졌으나 게속 우리 주변을 돌면서 덮쳐들었다. 나는 지게를 벗어던지고, 기다니에게 빠른 걸음으로 마을쪽으로 걷게 하고 덮어놓고 어둠속으로 난사亂射를 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기다니도 권총을 뽑아 쏘았다. 어둠속에서는 장총長銃 보다 권총이 더 유효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덮쳐오는 순간 승냥이를 쏘기 때문에 기다니의 권총은 서너 마리를 쓰러뜨렸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등뒤에서 덮쳐든 놈에게 옷자락을 물려 비슬거렸고 그 사이에 다른 놈이 팔목을 물었으므로 총신으로 내리쳐서 피했다. 피를 본 승냥이들이 악귀惡鬼처럼 변해서 으르렁거리며 덤벼들었다. 승냥이는 민첩하게 우리의 어깨 위로 뛰어올라 목줄을 노렸다. 30분 동안이나 육탄전肉彈戰 방불하게 싸웠으나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마을의 불빛이 수백미터 앞에 있었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는데도 마을사람들이 모른 척 했다. 군벌軍閥과 비적이 날뛴 그 당시 만주사람들은 총소리가 나면 겁부터 먹고 자신을 비호庇護하기에만 급급했다. 우리는 지쳤다. 총탄도 몇 발 남지 않았다.
‘이젠 틀렸군!’
기다니가 비통하게 말했다. 나도 총탄이 없어 마지막을 각오했는데 승냥이들이 공격을 중지하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승냥이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우리가 지친만큼 그들도 지쳐서 죽은 동료를 먹고있는 것 같았다.
(살았구나!)
우리가 털털거리며 마을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마을은 문을 걸어잠그고 죽은 듯 조용했으며 열흘동안 사경死境을 해맨 우리를 아무도 마중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마을을 지나 1Km를 더 걸어 철도역에 도착했다. 역사驛舍 스토브 옆에서 졸고있던 일본인직원이 우리를 보고는 크게 놀라 고함을 지르면서 비상전화를 돌렸다. 그는 우리를 비적으로 오해했는데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 텁수룩하고 늑대껍질을 걸친 우리 몰골은 비적이었다. 비상전화를 받은 철도경비원들이 달려오면서 고함을 쳤다.
‘총을 버리고 항복하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기다니가 버럭 소리쳤다.
‘바가야로(바보자식)!’
잠시 후 우리는 안내된 역장관사에 쓰러졌다.
(이젠 정말 살았다!)
는 안도감에 깊은 잠이 들었다. 이튿날 깨어났을 때 의사가 진찰을 하고 치료했으며, 마을촌장과 파출소장 그리고 역장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옆방에는 지게를, 마당에는 승냥이 시체 일곱 마리가 널렸는데 동료들이 뜯어먹어 내장과 허벅다리가 없는 추악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위님!’
파출소장이 정중하게 물었다.
‘어떻게 됐느냐고?’
그 건 정말 악몽惡夢이었다. 바다처럼 광대한 만주의 수해樹海에 함부로 들어갔던 포수들이 겪은 수난기受難記였으며 대호를 잡는 포수가 승냥이에게 먹힐뻔한 처참悽慘한 사냥얘기다.
91. 동물들의 싸움
사냥을 오래 하다보면 동물의 생태를 알게된다. 동물을 잡기 위해서 동물의 습성과 행동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프로포수는 박사학위博士學位를 받아도 손색遜色이 없는, 아니 책상물림 학자보다도 더 생태계를 잘 아는 동물생태학자다. 나는 사냥을 하기 위해 동물의 생태를 살피다가 흥미를 갖게 되었고 특히 투쟁鬪爭 - 강자생존强者生存의 원리原理에 흥미가 있었다. 생물학계에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본질적 질서가 있었는데 사냥에서 겪은 바로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강자생존이었다. 뭇짐승들은 그들이 가진 온갖 지혜와 힘으로 처절한 싸움을 하며 살아갔다. 사냥을 하다가 짐승들의 싸움을 관찰했다. 듣기도 했다. 나의 오랜 사냥친구 백계白系 러시아인 세르게이는 소만蘇滿국경에 배치된 군인이었으며, 제대除隊 후 만주에 머물러 사냥을 했다.그는 아예 한만韓滿국경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가끔 세르게이 집을 방문하여 동물생태얘기를 들었다. 세르게이는 만년晩年에는 사냥꾼이 아니라 동물생태연구가였다. 그는 범, 표범의 껍질과 녹용으로 돈을 벌었으며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될만큼 부유富裕했는데도 산림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동물학자였고 대학교수보다도 더 동물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있었다. 더구나 그는 책상물림이 아니라 필드(Field, 현장現場)학자였다. 그는 동물을 사랑했으며 사냥 보다는 보호를 했다.
세르게이는 1939년 늦은 가을, 백두산 북쪽 란치오산에서 곰과 표범이 싸우는 걸 목격했다. 처음에 그는 매우 절박한 울음소리에 끌려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다가갔다. 거친 숨소리도 들렸다. 표범이 불곰과 싸우고있었다. 불곰은 150Kg 정도였는데 흑곰과 달리 성질이 포악暴惡하고 육식을 한다. 노루, 사슴과 맷돼지를 습격한다. 그런데 이번에 공격자는 표범이었다. 표범은 배를 땅에 깔고 표범 주위를 돌면서 공격기회를 엿보고있었다. 곰은 벌떡 일어서서 마치 레슬러처럼 앞발을 휘두르며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지형地形은 표범에게 불리했다. 빽빽한 밀림은 날쌔게 움직이는 표범에게는 방해가 되었다. 표범은 빙빙 돌면서 공격범위를 좁혀가고있었다. 표범이 1m 앞까지 다가왔으나 곰은
(덤비기만 해봐라!)
라는 태도였으며 당당했다. 빙빙 곰 주위를 돌던 표범이 공격거리에 닿자 곰에게 덮쳤다. 홱! 뛰어오르면서 앞발로 곰의 대가리를 치고 목덜미를 물려고했다. 곰은 대가리에 타박상을 입었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곰이 목을 물려고 품안으로 뛰어든 표범의 앞발을 잡아 휘둘러 뿌리쳤다. 표범이 2 - 3m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벌떡 일어선 표범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목줄을 물려고 했으나 곰이 앞발을 쑥! 내밀고있어서 실패했다. 표범은 초조해졌다. 더 빨리 곰의 주위를 돌다가 홱! 덮치기도 하고 시계태엽이 풀어지는 소리를 하며 팽이처럼 곰의 주위를 돌았다. 곰도 표범이 도는 쪽으로 돌고있었는데 당황한 것 같았다. 표범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표범은 왼쪽에서 덮쳐들것처럼 위장僞裝하고 바른쪽에서 덮쳤다. 표범은 왼쪽을 방어防禦 하는 곰의 앞발을 피하여 바른쪽으로 파고들었으므로 곰의 옆목덜미를 물었다. 그리고 잡아당기면서 늘어졌다. 곰이 비슬거렸다. 표범이 물고늘어져 곰이 중심을 잃어 주저앉았다. 표범이 땅을 박차면서 곰을 눕혔다. 그 틈에 곰이 표범의 앞발을 잡아 낙아챘다. 곰이 표범의 배 위에 올라타고 표범의 목을 졸랐다. <기 - 기칙!> 표범이 질겁을했다. 표범은 뒷발로 곰의 배를 차고 앞발로 곰의 대가리를 할키면서 곰에게서 빠져나왔다. 표범은 접근전을 피했다. 아웃복싱을 하는 권투선수처럼 곰의 주위를 빙빙 돌다가 휙 달려들어 곰의 대가리를 치거나 귀를 물고 얼핏 떨어졌다. 표범의 동작이 워낙 빨라 곰에게 잡히지 않았다. 표범과 곰의 사투死鬪는 10여 분 간이나 계속되었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표범은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고 곰은 미련스럽게 응수하고. 그런데 갑자기 곰이 달아났다. 곰을 따라가는 표범이 두 마리였다. 어느새 표범이 두 마리가 되었는데 뒤에 나타난 놈은 훨씬 컸다. 숫컷이다. 달아나는 건 자살행위다. 서 발도 가기 전에 잡혔다. 곰이 나무에 올라가려고 했으나 표범이 등뒤에서 덮쳤다. 숫컷이 곰의 목덜미를 물었다. 암컷은 뒷다리를 물었다.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뭉툭하게 떨어져나갔으나 곰은 저항도 못 하고 나무둥치를 붙들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보고있던 세르게이가 싸움 - 아니 살육을 중지시키려고 했다.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한 마리의 곰에게 두 마리가 덤비는 것은 불합리하다. 두 번째는 투지를 잃은 곰이 죽어가는 게 안타까왔다. 첫 번째 총탄이 숫놈을 겨냥하여 숫놈은 뒤벼넘기를 하며 곰에게서 떨어졌다. 놀란 암놈이 휙! 돌아보더니 으으으! 하며 세르게이에게 덤벼들었다. 네 다리를 오무려 도약 직전의 암컷도 축! 늘어졌다. 세르게이가 5연발 총에 천천히 장탄을 했다. 수놈은 흉장부에 암컷은 이마를 뚫었다. 세르게이가 아직도 나무둥치를 안고있는 곰에게 갔다. 곰은 꿈틀거렸으나 눈동자가 허옇게 돌아가버렸다. 측은해서 살릴 수 있으면 살리려고 했으나 늦었다. 그래서 고통을 줄이려고 세 번째 발사를 했다. 총탄 세 개로 표범 두 마리와 곰을 잡았다.
‘그 당시에 나는 싸움을 구경만 하려고 했어. 그러나 나 자신도 모르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 있는 것 같아. 처음에 표범과 곰이 일대일로 싸울 때는 싸움의 결과를 봐서 승자를 쏘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는 교활狡猾한 생각이 들었고, 나중에 표범 두 마리가 곰을 죽일 때도 나는 천천히 움직였는데 그것 역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으려는 심산心算이었겠지. 밀림속에서 살면서 생존투쟁이란 동물계의 룰(Rull)에 얽매어있었을 거야.’
세르게이의 말은 자기자신도 동물화 되었다는 말이다.
어느날, 세르게이와 나는 산돼지를 잡으려고 밀림 깊숙이 들어갔다. 산돼지의 발자국을 추적했다. 바다속처럼 조용한 밀림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다가 세르게이가 멈췄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퍼드득!> 날개치는 소리였다. 거대한 만주독수리였다. 독수리가 저공비행低空飛行을 하고있었는데 날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자세히 보니 독수리에게 알록달록한 것이 붙어있었다. 삵괭이가 독수리를 덮친 것 같았다. 삵괭이가 독수리다리를 물고늘어지고 독수리는 도망가려고 푸드득거렸다.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으므로 삵괭이도 부상을 입었으나 악착같은 밀림의 소악당小惡黨은 독수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마도 독수리가 들쥐나 토끼를 잡아채려고 했을 때 습격을 했거나 삵괭이가 잡은 노획물을 독수리가 가로채려다가 물린 것 같았다. 독수리는 하늘의 왕자다. 거대한 날개바람은 다른 새들의 움직임을 봉쇄했으며 굵은 발의 갈구리발톱에 찍히면 개도 꼼짝 못 했다. 독수리는 토끼 등 작은 동물뿐만 아니라 노루, 표범, 산돼지를 잡아먹는다. 독수리가 삵괭이를 선제공격先制攻擊 했다면 승패는 간단히 끝났을 것이다. 날카롭고 큰 발톱으로 찍어 공중 높이 올라가 바위에 떨어뜨리면 끝이다. 그러나 기습을 당한 독수리는 무력했다. 덮어놓고 날으려고 하다가 기진맥진했다. 다시 날다가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혀 떨어졌다. 잠시 정신을 잃었는데 삵괭이가 물고있었던 다리를 놓고 목덜미를 물었다. 그것으로 싸움이 끝났다.
그러면 총이 없는 사람과 표범의 싸움은 어떨까? 총도 없이 표범과 결투를 한 사람은 세르게이의 중국인 조수 평씨다. 평씨가 식탁을 만들 재료를 구하려고 밀림 깊이 들어갔다. 무기없이는 위험지대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으나 식탁을 만들려면 적어도 70Cm 되는 통판通版이 필요했기 때문에 위험지대에 들어갔다. 적당한 나무를 발견하여 도끼질을 하다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한 20m 떨어진 곳은 큰 숲이었는데 거기가 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바람도 없는데 풀이 움직였다. 평시가 확인을 하려고 숲으로 들어가려는데 뭔가 스쳐지나갔다. 눈빛이 번쩍거렸다.
(표범?)
평씨는 기겁을 했다. 급하게 나무로 올라갔다. 동시에 숲에서 표범이 튀어나왔다. 나무에 오르는 평씨를 물었는데 구두를 물었다. 6 - 7m 쯤 올라가 내려다보니 표범도 나무로 오르고있었다. 급한 나머지 나뭇가지를 휘어잡아 탁! 튕겼다. 튕긴 나뭇가지가 표범의 대가리를 쳤다. 표범이 그 충격으로 나무에서 덜어졌다. 표범이 다시 기어올라왔다. 나뭇가지를 튕겼으나 이번에는 표범이 피해버렸다. 평씨와 표범의 거리는 1m 정도. 평씨가 허리에 찬 도끼로 표범을 내리찍었다. 표범의 앞다리가 잘려나갔다. 표범이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 평씨도 내리치는 반동으로 중심을 잃어 나무에서 떨어졌다. 표범은 고통과 분노로 길길이 뛰어올랐다. 아무래도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도끼는 나무에 박혀 맨손이었다.
(에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표범이 평씨를 봤다. 다리를 절단해버린 적을 본 것이다. 큭! 독기서린 소리를 내면서 덮쳤다. 표범이 덮치는 순간 평씨도 표범을 향해 돌진했다. 한 발뿐인 표범이 남은 앞발로 평씨의 가슴을 쳤다.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나 돌진한 기세로 넘어지지 않았다. 사람과 표범은 씨름하는 자세로 마주 섰다. 평씨가 표범의 앞발을 잡아 옆으로 낚아챘다. 날카로운 이빨을 내밀고 평씨의 목줄을 노리던 표범이 맥없이 쓰러졌다. 평씨가 쓰러진 표범의 배 위에 걸터앉았다. 두 손으로 목을 조였다. 표범이 뒷발로 땅을 차며 일어서려고 했으나 허공을 쳤을뿐이다. 표범은 하나 남은 앞발로 평씨의 가슴을 할켰다. 두터운 상의가 찢기고 피가 흘렀다. 그러나 표범의 앞발은 사람의 팔 보다 짧았다. 짧은 앞발은 고작 가슴과 팔을 할켰을뿐 머리와 얼굴에는 닿지 못 했다. 평씨는 팔에서 피가 줄줄 흘렀으나 목을 쥔 손을 풀지 않았다. 목을 푸는 순간 표범의 아가리가 평씨의 목줄을 물어뜯을 것이다. 사람의 출혈도 심했지만 표범의 잘린 앞다리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뒷발로 차는 빈도頻度가 적어지고 차는 힘이 없어지는 걸 느꼈다. 앞발은 고작 허공에서 돌았다. 평씨도 젖먹던 힘을 다 쏟았다.
‘이 자식아! 죽어라! 죽어!’
큰 소리로 악을 쓰면서 목이 땅속을 파고들 정도로 눌렀다. 입이 점점 벌어지고 혓바닥이 나왔다. 후후거리던 숨소리도 잦아졌다. 곧 표범의 몸이 축! 늘어졌다. 눈알이 허옇게 둘아갔다.
92. 포수 세르게이
함경북도 무산 북면 만주땅 라우뚱에 머므르고 있을 때 백인과 중국인이 찾아왔다. 백인은 포수 세르게이이며 중국사람은 통역通譯이었다. 세르게이는 녹용제조법을 배우려고 했다. 마침 그때 산돼지사냥을 하려고 막 출발준비를 했는데 세르게이가 동반同伴하겠다고 나섰다. 세르게이는 나 보다 열 살 가량 연장 年長 - 마흔서넛 되어보이는 거인巨人이었다. 키가 2m가 넘었으며 늠름한 체구體軀에 백계白系 러시아인 특유特有의 귀족풍모貴族風貌였다. 세르게이는 다갈색 골덴상의上衣를 걸치고 구경口徑이 아주 넓은 영국제 쌍발 맹수용총을 갖고있었다. 그날은 몰이꾼을 일곱 명이나 동원하여 큰사냥을 준비했다. 나는 산마루에 목을 잡고 세루게이에게는 산중턱을 부탁했다. 몰이꾼들은 남서쪽에서 동북쪽으로 내가 목을 잡고있는 산마루로 몰아올것이나 혹 동쪽으로 빠져나가면 세르게이가 처치하기로 했다. 늦가을 산에는 짐승들이 몰려있어 여기저기에서 뛰어나왔다. 산이 커야 짐승도 크다는 말처럼 거물급이었다. 바위 뒤에 숨어있었던 나는 세 마리의 산돼지가 몰려오는 걸 봤는데 웬일인지 한 마리가 산중턱에서 방향을 바꿔 옆으로 달아났다. 세르게이가 있는 동쪽이 아니라 서남쪽이라 단념하고 두 마리만 잡기로 했는데 총소리가 울렸다. 서남쪽으로 달아나던 산돼지가 푹! 꼬꾸라졌다. 세르게이가 쏜 것이다. 150m 거리에서 쏘았는데 장거리용 총도 총이지남 솜씨가 비상非常했다. 나머지 두 마리는 예상했던대로 내가 숨어있는 곳으로 왔다. 산돼지가 30m 정도 접근했을 때 바위 뒤에서 나왔다. 정면에서 쏘는 것 보다 측면에서 쏘려고 살짝 진로를 돌렸다. 그러나 만주의 산돼지는 미련한 놈들이었다. 포수가 총을 들고 앞길에 서있는데도 진로를 바꾸지 않고 돌진했다. 첫탄을 쏘았다. 앞선 놈이 무릎을 꿇었다가 다시 돌진했다. 부득히 2탄을 쏘았다. 300Kg 가까운 그놈은 그제야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못 했다. 그 사이에 또 한 놈이 동쪽으로 달아났다. 한손으로 총을 쥐고 있는 세르게이가 바위 뒤에서 산돼지를 가만히 보고있었다. 아까는 150m 거리에서 쏘았는데 이번에는 30m 이내로 다가왔는데 총을 세우지도 않았다. 돌진하는 산돼지가 20m 이내로 다가왔을 때 비로소 세르게이가 바위 뒤에서 나왔다. 그리고 총을 올리자마자 발사했다. 겨냥을 한 것 같지도 아니었다. 산돼지는 순간적으로 공중에 폴짝 뜨는 것 같았다. 구경이 넓은 총을 이마에 맞은 위력이었다. 그러나 산돼지는 쓰러지지도 넘어지지도 않고 내달았다. 지형의 위치상 산돼지가 위고 세르게이가 아래였다. 산돼지는 바위가 구르 듯 세르게이를 덮쳤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세르게이의 빠른 솜씨로 봐서는 충분히 2탄을 발사할 수 있었는데 2탄을 소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산돼지의 진로에 우뚝서서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앗!’
산돼지의 거구가 세르게이에게 덮쳤을 때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사정거리가 짧은 내 총으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무슨 사고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산돼지는 그대로 세르게이에게 부딪쳤다. 아니, 부딪친 것으로 보였을뿐 세르게이의 발밑에 쓰러졌다. 세르게이가 총대로 선돼지의 머리를 두드려보고는 나에게로 걸어왔다. 세르게이는 사돼지가 첫탄에 치명상을 입어 자기가 있는 곳까지 오지 못 하리라고 판단하여 2탄을 낭비하지 않았다. 빅게임(Big Game, 맹수猛獸전문)을 전문으로 하는 포수가 보여준 놀랄만한 담력膽力이었다. 그날밤 마을주막에서 호화로운 잔치판이 벌어졌다. 내가 사냥의 댓가로 준 산돼지를 세르게이가 잔치용으로 기증寄贈했다. 세르게이는 손수 산돼지 바베큐를 해서 뒷다리 하나를 통째 뜯어먹었다. 독한 화주를 물 마시 듯 마시면서. 술이 얼큰해지자 세르게이는 원시原始 시베리아삼림의 사냥애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러시아와 만주 국경에는 많은 러시아포수들이 활약하고있었다. 세르게이는 군대에서 제대한 스물아홉 살 때부터 삼림으로 들어갔다. 부친의 유산遺産인 값비싼 장식용裝飾用총을 팔아 벨기에제 5연발을 구입했다. 동북만주일대를 유랑流浪하면서 사냥을 했다. 유명한 양코프스키나 바이코프 등 백계러시아포수들과 비슷한 활동을 했다. 양코프스키는 한국사람과 친해서 알려졌고 바이코프는 저서著書로 유명했는데 세르게이도 두 포수 못지 않았다. 당시 만주의 포수들은 양코프스키의 이름은 몰라도 세르게이의 이름은 알았다. 세르게이가 백호白虎를 잡은 일화逸話는 전설처럼 전해졌다.
세르게이는 동북만주 러시아국경지대 산속마을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살면서 꿩, 노루와 토끼 등을 잡아 교역交易으로 생활용품을 얻었다. 그러다가 마을의 집과 산속을 오르내리는 것이 귀찮아 아예 집을 산속으로 옮겼다. 실은 산속생활이 좋아서였다. 구수한 흙냄새, 싱싱한 풀잎과 나무, 뭇동물의 소리와 빛나는 밤하늘의 별이 좋았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원시자연이 그리웠다. 외롭지도 않았다. 서너 명의 중국인조수와 대여섯 마리 개들을 길렀다. 방문객도 있었다. 물물교환을 하려는 마을사람들과 도시의 상인들이 찾아왔다. 세르게이가 산림생활을 시작한지 꼭 1년이 되던 해 어느 날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첫눈이 내린 10월이었는데 날이 어두워질 무렵 노호怒號가 들려왔다. 우우웡! 우우웡! 하는 소리는 온 산에 울려퍼지고 등골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범의 울음소리를 처음 듣는 건 아니었기에 놀란 조수를 진정시켰으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범의 울음소리가 예전에는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왔으나 그날은 숨소리까지 들렸다. 밤 12시 쯤 일을 마치고 자리에 누우려는데 요란한 세 마리의 개가 한꺼번에 짓는 소리가 났다. 짖는다기 보다는 공포에 떠는 비명소리였다. 반작으로 총을 들고 나가려는데 조수가 바지가랭이를 잡고 늘어졌다. <그렇다. 이 밤중에 밖에 나간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멍! 하니 서있는데 우웍! 하는 폭발음이 들리고 깨깽! 소리가 났다. 비명이나 단말마斷末魔였다. 1 - 2분 뒤 밖에서 문을 할켰다. 총의 안전장치를 풀어 밖을 겨냥하며 문을 열어주라고 했다. 두 마리의 개들이 뛰어들어왔다. 오들오들 떨었다. 2 - 3분을 더 기다려도 개 한 마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개를 도살屠殺한 범도 들어오지 않았고. 날이 밝아지자 참극慘劇의 진상眞相이 밝혀졌다. 범도 범 나름이지 엄청난 대호大虎였다. 범은 일격으로 개를 죽여서 물고 숲으로 사라졌다. 세르게이가 격분했다. 가장 사랑하는, 새끼를 밴 암캐다. 만류挽留하는 조수를 뿌리치고 대호를 추적했다. 5연발 산탄총이라 사정거리가 100m도 못 되었으나 산돼지철을 장탄했다. 첫눈이 내렸으므로 범을 추적하기는 쉬웠으나 범이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몇 십 리를 걸었는데 오후에 범이 쉬었다 간 자리를 발견했다. 개를 먹은 자리였다. 새끼를 밴 개 한 마리를 먹은 범은 천천히 걸었다. 나무들이 점점 더 밀생하고 높아졌다. 빠져나가기도 힘들었다. 오후 범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거의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아마도 추적을 눈치챈 듯 하다. 산돼지도 추적을 하면 계속 달아나지만은 않는다. 달아나다가 추적자가 계속 쫓아오면 반드시 돌아서 추격자를 공격한다. 하물며 범이랴. 울창한 삼림을 빠져나와 바위투성이 산봉우리를 넘으려는데 약 20m 지점에 큰 바위가 있었다.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이때까지 직선으로 가던 범이 바위를 돌았다. 바위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프로포수만이 느끼는 제 6감感이다. 바위 너머도 눈이 내렸으나 발자국이 없었다.
(아!)
감전이 된 것처럼 정신이 아뜩해졌다. 너무 가깝게 접근한 것이다. 불과 20m, 범은 한두 발 도약으로 덮쳐올 것이다. 물러설 수도 물러서서도 안 된다. 기회는 딱 한 방. 그 한 방이 공중을 나는 범의 급소에 명중하지 않으면 포수가 죽는다. 전진할 수도 없다. 하얀 눈이 덮힌 넓고넓은 광야의 바위산 정상에서 바위 하나를 가운데 두고 세르게이와 대호가 대결했다. 세르게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대호가 나지막하게 목을 굴렸다. 골골골 하는 소리였다. 낮은 소리지만 살기殺氣를 품고있었다.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였지만 세르게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노호怒號였다. 뱃속까지 뒤집어내며 지르는 고함이었다. 온 산이 울리고 뭇짐승들이 침묵하는 굉음轟音이었다. 범은 오래 참지 못 한다. 광야가 진동하는 고함에도 반응이 없자 범이 뛰어나왔다. 예상대로 바위 뒤에서 뛰어나온 게 아니라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세르게이가 본 것은 범이 아니라 유령幽靈 이었다. 범은 백호白虎였다. 하얀눈 배경에 몇 줄의 검은 줄이 아롱거렸지만 범의 하얀 동체胴體가 보이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발사하지 못 했다. 총구를 겨냥했을 때 눈앞에 어른거린 검은줄이 공중을 날아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백호는 급행열차처럼 바람이 불며 세르게이를 덮쳤다. 본능적으로 엎드렸다. 그 순간 급행열차가 세찬 바람줄기처럼 머리 위로 지나갔다. 머리를 치고. 그 일격으로 세르게이는 몸이 빙글 돌았다. 머리를 타넘은 급행열차가 7 - 8m 거리에서 딱! 멈추었다.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홱! 되돌아서 도약했다. 불과 1 - 2초의 순간에 총대를 쑥 내밀면서 발사했다. 탈선한 급행열차가 구르는 것처럼 땅이 울렸다. 지진地震이 일어난 것 같은 땅울림을 느끼며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세르게이는 꿈에서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목이 타는 것 같더니 몸이 훈훈해졌다. 중국인조수가 눈앞에 서있었다. 그는 기절한 주인의 입에 화주火酒를 몇 모금 부었다. 세르게이가 혼자 떠난 뒤 중국인조수가 개를 데리고 세르게이를 따라왔던 것이다. 주인의 시체라도 찾으려고 …. 세르게이는 화주를 몇 모금 더 마셨다.
(됐다, 됐어! 이젠 살았다.)
세루게이는 범이 공중에 뛰어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친 앞발에 가슴을 맞아 기절했던 것이다.
(범은?)
바로 옆에 누워있었다. 길이가 120Cm가 넘고 무게는 400Kg이 넘는 대호였다. 온몸이 하얀 갈기털로 덮이고 검은 줄무늬가 있는 웅장雄壯한 백호였다. 밤새 들것에 백호를 들고 이튿날 새벽에야 산막에 도착했다. 산막에 불이 활활타고 있었다. 그들이 집을 비운 사이에 단골 모피상毛皮商 장대인이 와있었다. 장대인은 들것에 운반된 백호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호랑이게 손을 대지 말고 하루만 기다려려달라!’
거듭거듭 부탁을 해놓고 황황遑遑히 떠났다. 이튿날 새벽에 쿠리 두 사람에게 짐을 지워 다시 돌아왔다. 번쩍이는 최신식 영국제 쌍발총 한 자루, 미국제 맹수용 2연발 한 자루, 탄약 1년 분分, 가죽탄대, 안감으로 털이 달린 가죽점퍼 한 벌, 방한모防寒帽, 방한구두와 밀가루 등 식료품이 방안 한가득 쌓였다. 백호와 교환품이었다. 세르게이도 자기가 잡은 백호의 가치는 가늠했다. 본디 시베리아 호랑이는 인디아의 뱅골호랑이나 한국호랑이 보다 털색깔이 연하고 길이도 길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껍질을 남긴다는 속담俗談처럼 호랑이의 가치는 털에 달려있는데 추위에서 사는 시베리아 호랑이는 털이 하얗고 길고 풍부하여 최고다. 그러나 세르게이가 잡은 호랑이는 특이한 놈이었다. 표범은 눈표범이 있어 히밀라야산맥이나 서북부중국에는 가끔 출몰했으나 호랑이가 흰 것은 드문일이다. 게다가 그 호랑이에게는 마치 사자처럼 목덜미에 갈기가 있었다. 시베리아 호랑이에게는 갈기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백호는 길고 웅장한 갈기가 있었다. 백호의 가치를 알고있었으므로 교환품에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에 딱 한 가지 그의 눈길에 잡히는 게 있었다. 영국제 쌍발총. 총신에 화려한 조각이 되었고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영국황실 문양이 그려져있고, 런던의 젬스퍼디회사 제품이었다. 세계 최고의 총포회사고 가장 정교하고 값비싼 총이다. 영국왕실 전용제작회사다. 세르게이가 총을 살피는 걸 보며 장대인이, 그 총은 중국의 최고권력자가 영국왕실로부터 선물받은 총이라고 설명했다. 백호와 퍼디이 쌍발총 - 그 건 서로 교환에 알맞은 물건이다. 세르게이가 웃었다. 만족한 웃음이다. 그리고 승낙의 표시로 장대인과 술잔을 나누었다. 세르게이는 이때부터 빅헌터(Big Hunter, 맹수 전문 사냥꾼)가 되었다. 장대인이 가져간 백호는 모피장毛皮丈의 손으로 마름하여 최고품의 호피虎皮로 가공加工되었으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으며 따라서 세르게이의 이름도 명성名聲을 떨쳤다.
93. 곰과 개의 사투死鬪
사냥생활 60여 년 - 그 싸움은 잊지 못 한다. 세 마리의 개와 표범의 사투死鬪. 가을의 해질녁 풍경은 그림 같았다. 하늘의 구름은 찬란했다. 그러나 표범도 화사華奢했다. 표범과 개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개는 모두 잡견雜犬이었는데 두목 에루는 내가 가장 아꼈던 만주개 바둑이의 씨였으며 어미는 함경도 최포수의 시베리아개였다. 에루는 짙은 잿빛털의 여섯 살짜리 숫놈이며 몸통이 보통개의 두 배나 컸다. 젠은 세퍼드종種이어서 날씬했으며 일본 구마모토견인데 에루의 애인이었다. 표범은 전형적典型的인 한국 산産이었고 한 달 전부터 그 일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산을 누비고다녔다. 보통, 표범이 마을에 내려오는 것은 늙어서 맷돼지, 사슴과 노루사냥을 못 하기 때문이다. 짐승을 쫓지 못 하게된 표범이 마을 주위를 돌아다니며 가축을 해치다가 개들과 싸움이 벌어진다. 가끔 표범이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기사가 나는데 개에게 물려죽은 표범은 병신이거나, 총탄을 맞아 다리나 발에 문제가 있거나, 너무 늙어서 이빨이 다 빠져 싸움을 못 하거나, 오래 굶주려 영양실조가 된 표범이다. 개는 표범의 적수敵手가 아니다. 프로와 아마튜어의 차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개를 즐겨 먹는 표범이 개에게 잡힐 리 없다. 또 표범은 돼지를 물고가다가도 개가 짖으면 돼지를 버리고 개를 잡아간다. 그때 양동리에 나타난 표범은 건강한 수컷이었다. 여섯 마리의 개를 물어갔으며 그 개들 중에는 제법 덩치가 큰 개도 있었으나 끽! 소리 한 번 내지 못 하고 희생되었다. 표범은 예기치 않은 때 나타나 개의 목줄을 물었으며, 세 마리를 죽이고 한 마리를 물고갔다. 며칠 뒤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를 물고갔다. 표범은 대낮에 방앗간마당에서 놀고있는 개를 덮쳐 물고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사람들이 멍! 하니 보고있는 사이에 개를 죽이고 물고가버렸다. 표범은 개뿐만 아니라 닥치는대로 물어갔는데 돼지 두 마리, 송아지도 한 마리 희생되었다. 사람 희생이 안 난것만해도 다행이었다. 내가 세 마리의 개를 데리고 마을에 도착했을 떼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있었다. 그 전날 밤 송아지가 희생되었다. 사흘에 한번씩 주기적週期的으로 나타나 가축을 물어갔다. 쉽게 잡을 수 있는 가축에 입맛을 들였고 무력無力한 사람들을 깔봤다. 마을의 가축을 잘 차려놓은 밥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 표범을 잡는데는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놈은 사람의 습성을 잘 알고있어서 함부로 다루다가는 희생이 날거라고 보았다. 현지에서 몰이꾼을 모집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주재소의 순사들도 외면을 하고 피했다.
‘아, 그 놈은 몰이를 할 필요가 없어요. 제 발로 찾아오니까.’
나는 표범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튿날 세 마리의 개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늦가을 산에는 낙엽이 한 자尺(척)나 쌓여있어서 발자국꾼은 무용이고 몰이꾼은 표범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선도先導의 두목 에루가 얼마 안 가서 표범의 족적足跡과 냄새를 맡았다. 노루사냥을 할 때 개들은 흩어진다. 그런데 표범냄새를 맡은 개들이 붙어서 행동을 했다. 개들이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개들은 내가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속력으로 달렸다. 두 시간만에 희생물이 나무에 걸려있는 걸 찾았다. 어젯밤에 없어진 송아지다. 머리와 뒷다리만 남아 4m나 되는 나무가지에 걸렸있었다.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몇 점 잘라 개들에게 던져주었다. 아직 싱싱했으므로 나도 한 점 먹고. 표범이 도둑질한 송아지고기를 먹고 힘을내서 표범을 잡자는 계산이었다. 여기에서부터 개들이 눈빛이 달라졌다. 야수野獸의 눈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야수로 돌변한 개는 야수처럼 짖지 않는다. 추적을 알리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낙엽은 점점 두터워지고 나무는 밀생密生하여 전진하는 속도가 늦어졌다. 어느 지점에서 개들이 딱! 멈추며 우르르! 목을 굴렸다. 에루가 선 지점은 내리막길이다. 밑에 표범이 숨어있다는 표시다. 그러나 나는 달려갈 수도 총을 쏠 수도 없었다. 옆으로 돌아 측면側面에서 공격할 수밖에 없다. 15m 쯤 달려 막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개들과 표범의 싸움이 벌어졌다. 내리막 밑은 1m 정도의 잔솔과 오리나무숲이다. 표범은 그 잔솔숲에 숨어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15m를 달려왔을 때 표범은 숨어있었던 숲에서 나와 나를 덮치려고 했다. 날아오는 표범을 단 한 방으로 이마나 심장에 정확하게 맞추지 못 하면 죽거나 중상重傷이다. 내가 죽거나 표범이 죽을 위험은 반반半半이다. 그러나 한 방을 쏠 수도 없었고 죽을 위험도 사라졌다. 표범이 돌진했을 떼 두목 에루가 무서운 울부짖음을 치면서 언덕 위에서 표범에게 돌진했다. 에루는 뼈가 큰데다가 평소 고기만 먹었기 때문에 보통 개의 두 배나 컸다. 그래서 그는 사자獅子처럼 상대에게 돌진하여 그 무거운 체중體重을 상대에게 부딪혀 쓰러뜨리는 전법戰法을 쓴다. 에루가 공중을 날고있는 표범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표범은 에루보다 더 컸으나 위에서 내닫는 에루에게 받쳐 쓰러지고 에루와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굴었다. 위치는 표범이 불리했다. 들이받은 충격으로 표범은 누웠고 에루가 올라탔다. 그러나 표범은 놀라운 재주를 부렸다. 쓰러지면서도 탄력있는 몸을 고무공처럼 움추려 용수철처럼 튀기면서 반격反擊했다. 에루가 밑으로 깔렸다. 아무래도 표범의 탄력성과 투지鬪志는 보다 한 수手 위다. 평소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표범은 살생殺生의 명수名手다. 살생본능을 잃어버린 개와 차이는 프로와 아마튜어 정도다. 서로 아가리를 벌려 상대를 물려고 하자 이빨이 부딪혔다. 죽음의 키스다. 에루의 부하들이 표범에게 돌진했다. 한 마리는 표범을 들이받아 쓰러뜨렸고 또 한 마리는 표범의 뒷다리를 물었다. 나는 한 덩어리가 되어 싸우는 터라 총을 쏠 수 없었고 구경꾼이었다. 어느 한 쪽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다. 개와 곰의 싸움은 단조롭다. 개가 빙빙 돌면서 곰의 힘을 빼고 가끔 튀어올라 곰의 콧등을 물거나 어깨를 무는 것이 고작이고 개는 곰을 죽이지 못 한다. 곰도 개의 재빠른 동작에 어쩔줄 모른다. 고작 개를 양 앞발로 잡으려고 하는 게 고작. 개가 곰을 잡고있는 사이에 포수가 달려와 마무리를 한다. 그러나 지금은 포수가 개입介入할 수가 없다. 개와 표범이 한 덩어리가 되었고 잔솔과 오리나무가 밀집密集하여 조준을 할 수도 없다. 뒷다리를 물려 하반신이 자유롭지 못 하고 두 마리의 개에게 상반신을 공격당해 불리한 싸움에서도 표범은 역시 프로였다. 표범은 에루를 앞발로 누르고, 젠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했다. 몸을 움추렸다가 펴면서 그 반동으로 뒷발을 물고 늘어진 젠을 끌어당겨 젠의 목줄을 물었다. 치명적인 반격이다. 아찔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목줄을 물린 개가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으나 무위無爲였다. 더구나 표범이 개의 목줄을 물고 흔들었다. 목줄이 뜯겼다. 이 때 표범의 앞발에 눌렸던 에루가 간신히 빠져나와 아직도 개의 목을 물고있는 표범을 들이받아 쓰러뜨렸다. 표범이 벌러덩 쓰러지자 에루가 표범의 목줄을 물었다. 표범이 목줄에서 놓여나려고 빙빙 돌았으나 놓여난 젠이 표범의 뒷발을 물고 늘어졌다. 표범이 두 마리의 개를 떨쳐버리려고 펄쩍펄쩍! 뛰었다. 표범은 두 마리의 개를 끌고 1m나 뛰어올랐으나 개는 목줄을 놓지 않았다. 또 한 마리 - 표범에게 목줄을 뜯긴 개는 전열戰列에서 이탈離脫했는데 표범에게 물린 목이 뜯겨져 피가 분수噴水처럼 쏟아지고 심장도 멎어갔다. 그러나 표범도 약해졌다. 에루가 물어뜯은 목의 출혈도 문제지만 싸움에 지쳤다. 표범은 적을 공격할 때 온 힘을 한꺼번에 발산發散시키기 때문에 폭발력은 세지만 지속력이 없다. 표범은 피거품을 뿜어내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승패는 시간문제였다.그러나 개들도 부상을 입어 치료해야 한다. 나는 죽어가는 표범의 가슴을 총신으로 찍어누르며 발사했다. 심장을 맞은 표범이 펄쩍! 뛰었다가 보릿자루처럼 늘어졌다. 그때까지 에루와 젠은 표범을 물고있었다.
‘에루, 에루. 그만둬!’
내 고함에 에루가 표범에게서 떨어져 나와 표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웡! 웡! 웡!> 싸움이 끝난 걸 알고 개가凱歌를 올렸다. 젠은 물고있던 발을 놓고 증오憎惡에 차 표범의 머리를 깨물었다.
‘젠, 젠.’
나는 젠을 꼭 안아주었다. 상처를 입지 않은 건 젠뿐이었다. 에루는 앞이가 빠지고 귀가 반쯤 잘렸으며 한쪽 눈도 감고있었다. 존은 이미 숨졌다. 표범에게 목줄을 깊게 물려 혈관이 끊어졌다. 에루와 젠이 존을 핥고 끙끙대면서 자꾸 나를 쳐다보았다. 주인인 나를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나님으로 알고있기 때문에 존을 소생蘇生시켜달라는 것이다. 나는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나뭇가지를 다듬어 괭이를 만들어 존을 땅에 묻었다. 존이 땅에 묻히는 걸 보고야 존이 죽은 걸 알아채고는 존의 무덤을 빙빙 돌면서 구슬프게 짖었다. 에루와 존은 사이가 나빴다. 에루가 젠을 독차지했기 때문에 존은 불만이었고 반항을 했다. 며칠 전에도 젠을 두고 크게 싸웠다. 그러나 표범과 싸움에서 존은 위기에 빠진 에루를 구하고 희생되었다. 에루의 목줄을 더듬었던 표범에게 존이 뛰어들지 않았다면 에루가 죽었을 것이다. 얻은 건 걸레처럼 찢어진 표범값 20원(현재 20만 원)이고 잃은 건 컸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의 화호를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표범사냥에는 절대로 개를 데리고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며 결심을 실행했다. 에루는, 이듬해 산돼지사냥에서 다리가 부러져 폐견이 되었고 젠은 사냥개답지 않게 열두 살까지 살다가 병사病死했다.
94. 추적追跡
우리는 이미 사흘 동안이나 추적을 하고있었다. 하루에 30리씩을 걸었으니 100리를 추적한 것이다. 한국과 만주의 험준한 태백산맥을 타면서 악착같이 추적했다. 산돼지사냥을 하다가 곰의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우리는 기겁을 했다. 곰의 발자국이 아니라 괴물의 발자국이었다. 보통 곰의 세 배 크기였으며 아마 400Kg이 넘을 것 같았다. 황해도포수 김상기와 현지포수 임모 그리고 몰이꾼 다섯 명이 산돼지를 쫓고있었는데 느닺없이 나타난 발자국을 보고 의견이 엇갈렸다. 나는 그까짓 산돼지를 포기하고 곰을 쫓자고 했고, 한 사람은 산돼지사냥을 계속 하자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은 아예 산에서 내려가자고 했다.
‘이 엄청난 발자국을 봐. 난 며칠 전이 이놈을 본적이 있어.’
그는 함경남북도가 갈리는 산능선에서 그 괴물을 봤다. 꿩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벼락치는소리 같은 짐승의 노호怒號를 듣고 머리를 들어보니 커다란 바위 위에 괴물이 서있었다. 거리는 40m 쯤 되었으나 포수로써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임포수는 기뻐하기 보다는 등골이 오싹했다. 워낙 큰 불곰이었다. 주변의 산봉우리와 견줄 정도니 짐작할만 하다. 임포수는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망을 치다가 숨이 막혀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곰은 따라오지 않았다. <이젠 살았구나!> 하며 나무뿌리에 걸터앉았는데 그 무서운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펄쩍! 일어나 보니 자기가 가려는 앞길 - 40m 전방에 괴물곰이 서있었다. 임포수를 앞질러 왔던 것이다. 임포수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계곡으로 달렸는데 마침 열서너 명의 나무꾼을 만나 살았다. 그래서 임포수는 곰사냥은 말 할 것도 없고 산돼지사냥마져 포기했다. 각자 의견에 따라 한 사람은 산돼지사냥을 계속하고, 한 사람은 사냥을 포기하고 나는 용감한 몰이꾼 박서방을 데리고 불곰을 쫓았다. 처음에는 불곰이 동면冬眠을 할 동굴을 찾는줄 알았다. 그러나 그 곰은 북쪽으로 가고있었다. 추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뭇 빠른 걸음으로 북쪽으로 가고있었다. 병풍같은 절벽을 올라가면 천 길 벼랑을 타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급한 경사지傾斜地에서는 그 거구巨軀가 눈 위에 엉덩이를 깔고 미끄럼을 탔으나 사람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우리는 밧줄로 몸을 묶어 한 발 한 발 절벽을 내려갔다. 게다가 우리는 겨우 하루치 양식뿐이고 장거리추적 준비도 없었다. 그 날 밤 야영에서 박서방이 물었다.
‘어떻게 하지?’
‘곰이 죽든지 우리가 죽든지 둘 중 하나야!’
다행히 태백산맥 첩첩산중疊疊山中에는 포수들의 무료숙소가 많았다. 바위산이라서 동굴이 많았다. 동굴입구를 나뭇가지로 막고 안에 마른 낙엽을 깔면 퀴퀴한 냄새가 나는 주막집 이부자리보다도 깨끗하고 편했다. 문제는 식량이었는데 우리가 쫓는 곰이 마련해주었다. 추적 이튿날 곰이 계곡에서 얼음을 깨고 바위를 뒤집은 흔적을 발견했는데 가재들이 우굴거렸다. 20Cm나 되는 가재를 잡아 불에 구워 소금을 쳐서 먹으니 별미였다. 사흘째는 더 푸짐한 식량을 배급했다. 100Kg이나 되는 산돼지였다. 산돼지시체는 내장, 갈비 그리고 허벅다리고기가 없었다. 흔히 곰을 초식동물이라고 하지만 곰은 잡식성이다. 우리가 쫓는 불곰은 동물성이다. 육식을 못 하면 열매나 나무뿌리를 먹지만 그건 예외다. 우리는 곰이 남긴 산돼지고기를 싫컷 먹고 남은 고기는 포胞를 떴다. 나흘째 계곡에서 급한 경사를 올라가고 있을 때 앞서가던 박서방이 손짓을 했다.
‘저 것 보슈.’
곰이 산꼭대기 바위 위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제서야 임포수가 도망을 한 걸 인정했다. 400Kg이 훨씬 넘을 것 같았다. 사람은 본디 겁이 많아 상대가 강하면 싸우기 전에 투지를 잃는다. 그럴때는 아예 항복하든가 도망치는 게 상수上手다. 손자병법의 36계計 줄행랑이다. 나도 언젠가 지리산에서 대호大虎를 보고 겁에 질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겁을 먹지 않았다. 아무리 커도 곰은 곰이다. 곰의 약점弱點을 이용하면 잡을 수 있다. 다만 라이플이 아니라 산탄총이란 게 좀 걸렸다. 산탄총으로 100m가 넘는 곰을 쏠 수는 없고 쏘아봐야 효과도 없다.
‘어떻게 할거요?’
‘잡아야지, 돌아서 가자구.’
우리는 신중하게 작전을 세워 계곡으로 내려가 산마루로 올라가서 산등을 타고 내려오면서 곰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그대로 올라가다가 곰이 우리를 발견하고 미끄럼을 타고 내려닥치면 총을 쏠 기회도 없이 곰에게 깔려죽는다. 나는 흙으로 바람의 방향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바람은 산 위에서 아래로 불었다. 곰은 근시近視이기 때문에 바위나 나무 뒤로 기어가면 발견될 염려가 없으나 문제는 그 예민한 코였다. 나는 전방 50m를 접근하고, 10m 쯤에 있는 바위 뒤에까지 기어가 발사를 하려고 했다. 총은 벨기에제 5연발이었으므로 곰이 덮친다고 해도 네 발은 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고가 생겼다. 네 뒤를 바짝 따라오던 박서방이 눈에 미끄러져 벼랑 밑으로 굴렀다. 나뭇가지를 잡아 다치지는 않았으니 그 소리를 곰이 듣고 머리를 돌려 우리를 봤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살기를 띄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 판단하고 겨냥을 했는데 곰이 사라져버렸다. 바위 밑으로 숨은 것 같았다.
‘박서방, 곰이 숨었어. 그쪽으로 오는가 감시해!’
위치로는 우리가 유리했다. 그 걸 아는 걸까? 곰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과 곰은 50m 간격을 두고 대치代置했다. 약 20여 분을 기다렸으나 곰은 나타나지 않았다. 땅거미가 내리고 있어서 더 늦어지면 불리하다.
(엉뚱한 놈 같으니!)
혀를 찼다. 박서방에게 살살 뒤로 물러나라고 했다. 짐승을 눈앞에 두고 물러산다는 건 자존심 상했으나 죽음을 자초自招하는 건 어리석다. 무사히 현장을 빠져나와 500m 쯤 떨어진 산중턱에서 야영을 했다. 동굴 앞에 불을 피우고 교대로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동굴 주변이 온통 곰의 발자국이었다. 가까운 발자국은 동굴 10m까지 접근했다. 곰은 여전히 함경북도에서 만주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른 곰들이 동면을 하는 시기에 왜 북쪽으로 가는걸까? 추적 나흘째 또 곰을 봤다. 곰이 잡목림으로 들어갔다. 꽤 넓은 잡목림이었는데 산중턱에서 계곡까지 남향이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했다. 따라 들어가기에는 위험했다. 그래서 산 위에서 곰이 빠져나오는 걸 기다렸다. 근 한 시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낮잠이라도 자는걸까?’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또 야영을 했다. 전 날 밤의 경험을 되살려 동굴입구를 통나무와 바위로 막았다. 이튿날 새벽 밖으로 나온 나는 깜짝 놀랐다. 밤새 눈이 내려 온 산이 하얀 눈에 덮였다.
‘박서방, 이래도 곰 발자국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 녀석이 어젯밤에 도망가지 않았다면 ….’
곰이 밤새 도망가버렸다면 눈이 발자국을 덮어 추적이 어렵다. 박서바이 잡목림 주위를 돌면서 조사를 했다. 나온 흔적은 없었다.
‘이상한데 … 이 녀석이 밤새 둔갑遁甲을 했나? 없어져버렸어! 사라져버렸어!’
이 말을 듣고 곰이 연 사흘이나 달려온 목적지가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곰은 대부분 바위동굴에서 동면을 하지만 흙굴에서 하는 놈들도 있다. 썩은 고목 밑둥에 글어가거나 나무뿌리 밑으로 파고드는 놈도 있다. 그렇다면 잡목림은 곰이 동면하기 좋은 곳이다. 사방에 바람을 막아주는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향南向 양지陽地이므로 곰이 땅속으로 들어가버린 게 아닐까? 잡목림으로 들어갔다.
‘ … ?’
눈이 마주쳤다. 박서방은 실망失望과 안도감安堵感이 동시에 나타났다.
(어떻게 하지?)
나는 담배를 태우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나흘 동안이나 추적을 한 곰을 포기할 수 없었다.
‘박서방, 곰은 이 잡목림에 있어.’
‘아니, 그렇게 살폈는데도 …. 땅속에라도 있다는 거요 ?’
‘맞았어. 땅속이야!’
(땅속에?)
박서방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그건 죽음의 숨바꼭질이었다. 나무 하나 하나를 꼼꼼히 살폈다. 나는 막 박서방이 이상이 없다고 점검한 나무를 다시 살폈다. 비바람에 뿌리채 뽑힌 나무였다. 가만히 박서방을 불러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박서방이 손으로 눈을 쓸었다. 결정적인 흔적은 곰털이었다. 독 안에 든 쥐가 아니라 구멍속에 든 곰이었다. 동면할 구멍을 찾아 여기까지 와서 내린 눈을 이용하여 감쪽같이 숨었다. 다잡은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했으나 곰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총을 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땅을 팔 수도 없었다. 400Kg이 넘는 곰을 건드린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래서 나는 곰이 튀어나오지 못 하게 총구를 굴속에 대고 박서방에게 통나무로 굴입구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박서방이 손도끼로 쓰러진 통나무를 잘라 열십자형(十)을 만들어 굴입구를 막았다. 한 시간이 걸렸는데 굴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1m 쯤 되는 막대기끝을 뾰쪽하게 깎아 구멍을 쑤셨다. 구멍이 의외로 깊어 막대기가 닿지 않아서 더 긴 장대를 만들어 쑤셨더니 뭔가 보드라운 물체에 닿는 감촉이 왔다.
(옳지!)
더 힘껏 쑤셨다. 막대기가 쑥! 끌려들어갔다. 구멍이 수직이 아니라 총을 쏠 수가 없었다. 구멍은 다섯 자 쯤은 수직이고 왼쪽으로 꼬부라졌다. 그 왼쪽에 곰이 있었다. 불을 피웠다. 숯덩이를 구멍에 던져넣었다. 연기가 나고 노린내가 났는데도 기척이 없었으나 땅이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지진地震이 난 것처럼 땅이 울렁거리며 노호가 터져나왔다. 땅이 갈라지고 거대한 손이 통나무를 잡아 흔들었다. 시커먼 곰대가리가 불쑥! 솟았다.
‘이크! 사람 살려라!’
박서방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발사했다.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는데 곰대가리가 사라졌다. 총신을 구멍속에 겨누고 연사連射했다. 구멍을 들여다보았으나 곰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곰은 죽었든지 치명상을 입었다고 확신했다. 총탄이 곰의 살과 뼈를 뚫는 소리를 들었다. 신음소리가 났다. 허파가 새는 소리도 났다. 3 - 4분 후 조용해졌다. 곰이 죽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박서방은 어디 갔을까? 나무 위에서 소리가 났다.
‘이 사람아, 빨리 내려오지 못 해!’
그는 뒤통수를 긁으며 내려왔다.
‘사뭇 도망치려고 했다가 그래도 체면을 생각해서 나무 위로 올라간거야.’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통나무로 입구를 막아놓고 어젯밤 잤던 동굴로 돌아와 야영을 했다. 이튿날 곰이 도망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박서방을 마을로 보내 연장과 인부人夫를 불러왔다. 다시 긴 장대를 찔렀으나 반응이 없었다. 나무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구멍은 4m 쯤 되었으며 나무뿌리가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곰은 붉은 모래바닥에 낙엽과 마른 풀을 깔고 엎드려있었다. 습기가 없고 따수웠다. 겨우살이구멍으로는 과연 명당明堂이었다. 잡은 곰은 어찌나 큰지 죽었는지 알면서도 인부들이 가까이 가지 않았다.
‘왜들 이러나. 죽은 곰이 겁나나?’
곰이 얼마나 컸는지 네 사람이 들것에 곰을 실어 10리길을 내려오는데 10시간이 걸렸다. 소달구지에 실어 역에 운반했는데 소가 겁을 먹고 날뛰어 소동이 벌어졌다. 역에서 화차貨車에 실어 서울로 보냈는데 서울에서는 곰을 구경하려고 인산인해人山人海가 되었다.
95. 대호大虎사냥
강원도포수 추세영씨는 대호를 잡은 포수다. 추포수는 2m에 가깝고 소위 통뼈인 장사壯士다. 총이 고장나자 150Kg짜리 맷돼지를 총대로 때려잡은 겁을 모르는 사나이다.
그는 1922년 강원도 금화에 있는 오성산에서 대호를 잡았다. 오성산은 높지 않은 산이었으나 그 해에는 유난히 맷돼지, 노루들이 많았으며 그는 아예 산기슭마을에서 상주常住하며 사냥을 했다. 그해 서울의 맷돼지 전문음식점에 판 맷돼지만 열아홉 마리였으며 그 요리점에서는 아예 인부人夫를 마을에 상주시켜 유포수가 잡은 맷돼지를 서울로 운반했다. 맷돼지고기는 네 발 달린 짐승 중에서 가장 담백하고 연하고 맛이 있으며 쇠고기보다도 값이 비쌌다. 그래서 맷돼지사냥으로 재미를 보고있었는데 추위가 한창인 음력 정월에 들어서부터 웬일인지 우굴거리던 맷돼지가 일제히 사라져버렸다. 평균 이틀에 한 마리를 잡았던 맷돼지가 일주일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추위 때문에 잠시 피한 것이라고 말했으나 요리점직원들의 독촉이 성화였다. 그래서 야영野營을 할 각오를 하고 몰이꾼 세 사람을 데리고 원정遠征을 갔다. 오성산에서 큰 영嶺을 다섯 개나 넘고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갔으나 맷돼지가 없었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도 너무 오래된 것이어서 추적할 가치가 없었다. 몰이꾼들이 돌아가자고 했으나 추포수는 자기를 기다릴 요리점직원을 생각하고 좀 더 깊이 들어가자고 고집을 했다. 그들은 또 영을 두 개 더 넘어 황해도 접경까지 들어갔다. 눈구멍만 트인 방한모를 쓰고 솜바지저고리를 두 겹으로 껴입고도 추위가 스며들어 몰이꾼들이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몰이꾼들의 앞장을 서서 억지로 이끌던 추포수가 눈 위에 이상한 걸 발견했다. 한 자나 쌓인 눈속에 뻣뻣한 맷돼지털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맷돼지의 시체였다. 맷돼지의 굵은 뼈와 발목 그리고 껍질이었다. 표범의 짓이라고 여기고 맷돼지를 동굴로 끌고갔다. 워낙 큰 맷돼지였으므로 네 사람이 먹을만한 고기가 붙어있었다. 불을 활활 피우고 맷돼지 소금구이를 뜯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환담歡談을 하니 몰이꾼들의 불평이 사라졌다.
‘이게 다 표범 덕분이군.’
추포수가 몰이꾼을 달래 듯 농담을 했는데 김서방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표범이 아닌 것 가은데 ….’
김서방은 서울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노련老鍊한 몰이꾼이었다. 김서방이 굽고있던 맷돼지의 목뼈를 살폈다.
‘이봐요. 이 목뼈가 이렇게 부러져있는데 … 표범은 이런 짓을 못해. 표범 따위가 이 굵은 목뼈를 어떻게 부러뜨린단 말이요?’
그렇다면 맷돼지를 죽인 건 … ?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주 때문에 불콰하게 달아올랐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맷돼지의 목뼈를 부러뜨릴 수 있는 건 대호뿐이었다. 맷돼지의 목줄을 물고비틀어 단숨에 목뼈를 부러뜨릴 수 있는 힘은 활리이 밖에 없다. 몰이꾼들 사이에 동요動搖가 일어났다.
‘그렇기에 내가 뭐라고 했어. 이 사냥은 벌써 그만두었어야 했어.’
‘그러나 이제 와선 그런 소리도 소용없어. 날이 이미 어두워졌는데 오늘밤은 여기서 새고 내일 떠나자.’
김서방이 그들을 달래면서 추포수의 눈치를 봤다. 슬그머니 내일 돌아갈 걸 제의하면서 그 고집쟁이의 반응을 본 것이다.
‘뭐! 내일 돌아가? 그건 안 돼지. 맷돼지사냥은 틀렸지만 호랑이사냥이 남아있잖아?’
‘뭣! 호랑이사냥?’
모두들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미친사람 보듯 추포수를 봤다.
‘그렇지, 호랑이를 잡아야지. 그 한 마리만 잡으면 그깐 맷돼지 열 마리 값이 나올거야. 모두들 겁이 나는 모양인데 겁나는 사람은 돌아가도 좋아. 나 혼자만이라도 호랑이와 싸울테니.’
모두들 호랑이의 환각幻覺에 잡혀 안절부절하면서 또 소주를 마셨다. 그런데 새벽 두서너 시께였다. 동굴입구에 피워놓은 통나무불이 거진 타버려서 통나무를 더 태우려고 동굴 밖으로 나갔던 김서방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되돌아왔다.
‘추포수! 저 소리를 들어봐!’
추포수는 아까부터 그 소리를 듣고있었다. 꽤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으나 호랑이 울음소리였다. <우웡! 우웡!> 소리는 온 산을 짓누르는 힘이 있었으며 사람을 미칠 듯 공포에 밀어넣는 마력魔力이 있었다.
‘호랑이야. 호랑이가 이쪽으로 오고있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몰이꾼들이 일어났다.
‘호랑이가 온다! 이리로 온다!’
겁에 질린 그들은 통나무토막을 마구 불에 던지면서 추포수를 원망했다. 호랑이와의 거리는 1Km 이내였다. 날이 밝아오자 그 소리가 뚝! 끊어졌다. 사람들에게는 그게 더 무서웠다. 소리라도 들리면 호랑이가 어디 쯤 오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호랑이가 어디서 뭘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더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덮쳐들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혔다. 날이 밝은 다음에 <호랑이사냥에 동참하지 않을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으나 아무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호랑이가 돌아다니는 산중에서 산을 내려갈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총을 가진 추포수와 같이 있는 게 안전하다고 믿었다. 총이래야 구식 무라다 단 발 총이었는데도 믿을 건 추포수와 그 무라다총이었다. 그런 총으로 호랑이와 대결한다는 건 보통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좌우간, 날이 밝자 사람들은 어젯밤 호랑이 소리가 났던 곳으로 가봤다. 몰이꾼들은 마치 도살장屠殺場에 끌려가는 소처럼 추포수의 뒤를 따라갔는데 앞길에 나무나 바위가 있으면 추포수가 지나가고난 다음에야 따라갔다. 하긴 추포수도 긴장했다. 신중하게, 벙어리장갑을 벗어버리고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도록 무라다총을 겨누면서 전진했다. 나무 하나 바위 하나에도 신경을 쓰면서 나아갔다. 호랑이가 숨어있을만한 곳은 멀리 돌아서갔다. 호랑이발자국을 산마루에서 발견했다. 그 거대한 발자국이 새삼스럽게 사람들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표범들의 세 배가 넘는 발자국이 넓적하게 묵직하게 찍혀있었다. 추포수는 아무 말 없이 발자국을 따라갔다. 바람을 등에 지고 있으므로 더 신중했다. 그 예민한 코가 사람의 냄새를 맡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김서방이 <바로 따라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돌아서 추적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추포수는 경고를 무시했다. 뿐만 아니라 호랑이는 산마루에서 4Km나 떨어진 계곡에서 얼씬거리는 토끼를 발견하는 눈과 귀를 지녔으니 어차피 호랑이가 추적자追跡者를 알아채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주장이었다. 무모無謀한 추적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대호는 추적자를 알아챈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계속 같은 보조步調로 남쪽을 향하고 있엇다. 추적대는 화전민火田民마을에서 잤다. 몰이꾼 두 사람이 빠져나갔다. 한 사람은 집에 제사祭祀가 있다는 핑계고, 황서방은 배가 아프다고 했다. 황서방이 마을에 돌아오자 마을사람들은 불안에 떨고있었다. 난데없이 호랑이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들 불안해했다. 그 마을은 넓은 밭을 일구어 어려움없이 30여 가구가 살았는데 근래에는 호랑이는 커녕 여우나 늑대의 침입도 없어 안심했다. 마을사람들은 칼, 창과 도끼로 무장武裝을 하고 마을입구에는 크게 모닥불을 피웠다. 집집마다 불을 켜고 보초를 세웠다. 대호의 움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대호가 멀리 가버렸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날밤 개 짖는 소리에 황서방이 눈을 떴다. 개들이 미친 것처럼 짖어대더니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게 아니라 끙끙거렸다. 극도의 공포를 겪을 때 내는 소리였다. 이윽고 돼지들이 설치고 소가 울었다. 마을에 한 마리밖에 없는 황소는 이웃집 강부자富者가 소싸움에서 1등을 한 소이며 이 소가 있는 한 호랑이도 무서울 것 없다고 자랑하는 소였다. 호랑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황소라고도 주장했다. 그런데 바로 그 소가 울고있었다. 황서방이 창을 들고 나섰다. 황서방의 집은 높은 지대에 있었으므로 마을어귀에서 타는 모닥불이 보였고 길도 환하게 보였다. 황서방이 담장너머로 머리를 내밀고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황소가 발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소가 외양간 벽을 들이받고 문을 찼다. 강부자와 아들이 뛰어나왔다.
‘이 놈의 소기 미쳤나!’
강부자가 외양간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아이고!> 하는 외침이 들렸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아이고, 그 놈의 소가 나를 밀어붙이고 도망갔어.’
강부자는 다치지는 않은 듯 <저 놈 잡아라!> 하고 고함을 쳤다. 황소가 정말 미친 것 같았다. 외양간문을 들이받고 나온 황소는 싸립문을 짓밟고 바깥으로 달아났다. 황서방이 소를 제지하려고 싸립문을 열려고 하다가 움추려버렸다. 황소가 지난간 뒤에 황소를 쫓는 그림자를 본 것이다. 그 그림자는 마치 공중을 나는 것처럼 소리가 없었으나 도망가는 황소만큼이나 컸다. 황소가 마을입구에 피워놓은 모닥불을 짓밟고 지나갔고 모닥불 옆을 스쳐가는 거대한 얼룩무늬를 봤다. 대호였다. 그 때 대호를 본 것은 황서방만이 아니었고 강부자와 다른 마을사람들도 서너 명이 대호를 봤으나 소리도 지르지 못 했다. 소리를 지르면 대호가 되돌아와 덤벼들 것 같았다.
‘호랑이다, 호랑이. 호랑이가 우리 소를 쫓아간다!’
강부자의 고함에 황서방이 달려갔고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호랑이를 잡을만한 무기武器가 없는 사람들은 무기력無氣力했다. 호랑이에게 쫓겨 달아난 황소의 비명이 들렸다. <호랑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황소며 황소는 호랑이를 이긴다>는 강부자의 말은 터무니없는 말이었으며 호랑이가 좋아하는 먹이는 황소였다. 마을 북쪽 산에서 마을로 온 호랑이는 돼지우리를 그냥 지나고 황소를 노렸다. 호랑이는 외양간에서 20m 떨어진 소나무 밑에 엎드려 냄새를 황소에게 보냈다. 황소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작전이었다. 호랑이의 냄새를 맡은 황소는 겁에 질려 이성理性을 잃어버렸다. 미쳐버린 것이다. 밖으로 도망간 황소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이 황소를 찾아나서려고 햇으나 아무도 앞장을 서지 않아 망설이고 있을 때 구세주救世主가 나타났다. 호랑이를 쫓는 추포수와 김서방이 대호의 발자국을 쫓아 마을에 들어섰다. 추포수는 대호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추적을 했다. 마을장정壯丁들이 뒤를 따랐다. 황소와 대호는 마을을 지나 산중턱에서 대결對決했다. 대결이 아니라 일방적인 도살屠殺이었다. 맹목적盲目的으로 내닫는 황소를 쫓은 대호가 황소의 등에 올라타 그 무게로 황소를 넘어뜨리고 목줄을 한 입으로 물어뜯어버렸다. 대결은커녕 저항도 못 해보고 죽었다. 대호는 400Kg이나 되는 황소를 가볍게 물고 100m 떨어진 계곡으로 가서 뜯어먹었다. 소의 시체는 내장과 갈비가 없어졌고 대가리와 네 다리만 남았다. 대호는 거의 자기 몸무게만큼 포식飽食했다. 추포수가 황부자의 양해를 얻어 소의 시체를 그대로 놔두었다. 고기가 남아있는 이상 호랑이는 다시 올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맹수는 포식한 다음에는 의례히 잠을 잔다. 대호가 산 중턱의 소나무숲으로 들어갔다. 추포수는 숲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소나무숲 주위를 돌아봤다. 나온 발자국은 없었다. 소나무숲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마루로 올라갔다.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살펴보았다. 겨울이라 잡초가 없었으므로 호랑이가 발견될 것 같았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이상한데 ….)
(도망간 것일까?)
도망간 발자국은 없었다. 추포수는 산정山頂에서 내려와 숲에서 20m 쯤 떨어진 바위 위로 올라가 호랑이의 발자국을 더듬어갔다. 호랑이 발자국이 어느 지점에서 끊겼다.
(앗!)
대호의 발자국이 끊어진 지점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거의 붙어서있었는데 나무 사이에서 번쩍이는 불빛을 본 것이다. 호랑이의 눈이었다. 호랑이는 오래전부터 사람의 추적을 알아채고 주시하고있었다. 바로 위 바위에 납작 엎드리고 있었던 추포수는 총구를 한 치 한 치 표적으로 당기면서 총구를 호랑이의 눈을 겨냥했다. 그때 추포수의 뒤에 있던 김서방이 긴장하는 추포스를 보고 물었다.
‘왜 그래, 뭐가 보여?’
얼빠진 물음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아, 왜 그러냐니까?’
그 추위에도 추포수의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시끄러워! 이 바보야. 저 호랑이가 보이지 않냐?’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외쳤으나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김서방도 그제야 가느다랗게 떠는 추포수의 어깨를 보고 눈치를 채 입을 다물었다. 추포수는 나무 사이에 보이는 호랑이의 눈 사이에 겨냥을 했다. 그러나 발사를 망서렸다. 호랑이의 눈이 하나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총은 단발이었다. 한 방에 호랑이가 죽지 않으면 포수가 죽는다. 그래서 망서렸다. 그때 호랑이가 약간 움직였다. 나무에 가려졌던 한쪽 눈도 보였다. 두 눈이 다 보였다.
(됐다!)
추포수는 두 눈 사이를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무라다총의 굉음과 검은 연기가 피워올랐다. 연기 때문에 추포수는 호랑이를 볼 수 없었으나 바위 밑의 김서방이 외쳤다.
‘맞았다, 맞았어. 호랑이가 맞았어!’
그러나 추포수는 재장탄을 서둘렀다. 총신을 꺾고, 탄환껍질을 뽑아내고, 새 탄환을 집어넣는데는 아무리 빨라도 4 - 5초는 걸린다. 그런데 그 4 - 5초 동안 호랑이는 100m를 달린다. 추포수가 탄환을 재장전하고 있을 때
‘아이고, 사람 살려라! 저 놈이 덤벼든다.’
김서방이 고함을 치며 도망갔다. 호랑이의 돌진에 땅이 울렸다. 그리고 뒤이어 벼락같은 노호가 터졌다. 추포수가 머리를 들었다. 바른 손가락에 탄환이 장전裝塡되는 감촉感觸을 느끼며 머리를 들었다. 머리를 든 그의 시야에는 흰 눈가루가 날리며 거대한 얼룩보자기가 공중에 퍼져있는 걸 보았다. 호랑이가 3 - 4m 앞에 도약을 하고있었다. 그 순간 추포수의 뇌리腦裏에는 <늦었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빨리 재장탄을 했음에도 한 발 늦었던 것이다. 대호의 일격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머리를 움추렸다. 그때 기적奇蹟이 일어났다. 대호가 추포수가 있는 바위 위로 뛰어오른 게 아니라 바위 옆으로 돌아 김서방을 공격한 것이다. 대호는 자기를 쏜 사람이 김서방이라고 착각했다. 대호가 바위 위에 있는 추포수는 못 보고 고함을 지르며 달아나는 김서방을 본 것이다. 치명적인 순간을 피한 추포수가 바위 위에서 대호를 보고 제 2탄을 발사했다. 대호는 <사람 살려라!>고 고함을 치며 달아나는 김서방을 쫓고 있었는데 추포수가 호랑이의 뒤통수를 겨냥하여 발사했다. 대호의 속도가 느렸다. 느린 대호의 동작이 추포수에게 발사의 기회를 주었다. 추포수는 대호의 대가리를 위에서 밑으로 겨냥하여 발포했는데 대호는 달려가는 반동으로 대가리를 눈속에 쳐넣고 뒹굴었다. 치명타였다. 추포수가 세 번째 장탄을 했으나 발사하지 않았다.
‘잡았다! 잡았어!’
추포수가 고함을 쳤다. 달아나던 김서방이 뒤돌아보고 대호가 죽은 걸 확인하자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젖먹던 힘까지 내서 도망을 했으므로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오줌을 저렸다고 해도 부끄러울 일은 아니다.
96. 도깨비사냥
사냥꾼이 가장 싫어하는 건 밤과 어둠이다. 특히 맹수사냥을 하는 포수들은 어둠이 내리면 사냥을 접고 돌아온다. 계곡에 땅거미가 내리고 서쪽 산봉우리가 검붉게 물들면 아무 말없이 물러서야 하며 어둠의 나라는 짐승들의 나라다. 밤의 수호자守護者 올빼미가 울고 박쥐가 나래질을 하며 동굴에 숨어있던 짐승들이 지지개를 켠다. 그들은 밤에도 빛을 찾아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바람에 따라서는 4Km까지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냄새를 통해 냄새의 주인공主人公, 크기, 생태生態까지도 식별識別한다. 거기에 비해 사람은 무력하며 어둠에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다. 문명생활을 하며 5감感이 퇴화退化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엄연奄然한 순리順理를 어기는 사람이 있다. 황해도의 이백일포수가 그런 사례事例다.
1925년 12월 말, 사냥금지가 막 해제된 때. 이포수가 몰이꾼 세 사람을 데리고 황해도 동쪽 강원도 접경 무명산에서 산돼지사냥을 했다. 정오에 산돼지 네 마리의 발자국을 발견하여 흥분했다. 한 마리는 300Kg가 넘는 거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산돼지 발자국 옆에 찍힌 수상한 발자국을 보았는데도 산돼지를 잡을 욕심에 무시했다. 표범의 발자국이라는 걸 알면서도 산돼지 발자국이 뚜렸한 반면 표범의 발자국이 희미하다는 걸 애써 강조하며 무시했다. 계속해서 발자국을 추적했다. 표범이 곁에서 돌아다니는 걸 간파한 산돼지들은 사뭇 내달렸다. 추적하는 포수도 빨랐다. 오후에는 산돼지를 발견했다. 100m 쯤 산 아래 계곡에 있는 산돼지를 보았다. 예상대로 300Kg이 넘는 숫컷이 200Kg 정도의 암컷과 조무래기 두 마리를 거느리고 땅거미가 기어드는 계고의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이포수 일행은 흥분했다. 계곡으로 들어간 산돼지를 네 방향에서 포위하면 산돼지는 독 안에 든 쥐다. 다 잡으면 300Kg 정도의 살코기를 얻고 서울에서 산돼지고기는 쇠고기 보다 비싸다. 그러나 그때 이포수는 때가 하오 4시라는 걸 놓쳤다. 몰이꾼 중 한 사람이 너무 늦었다고 했다.
‘무슨 소리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진데. 지금 잡지 않으면 내일은 어려워. 저 놈들은 밤 새 몇 십 리나 도망가버릴거야.’
그래서 무리한 사냥이 계속되었다. 산돼지들은 추격자를 모르고 천천히 가고있었으므로 이포수가 전속력으로 산마루에 달려가 목을 잡으면 3방면에서 몰이꾼들이 산돼지를 이포수 앞으로 몰아오면 된다. 작전이 결정되자 이포수는 달렸다. 34세의 장년壯年이었던 그는 단숨에 산마루에 올라갔다. 그런데 이포수는 이때 생명을 잃을 모험을 했다. 이포수가 달려간 산마루에 표범이 있었다. 표범도 산돼지들이 산마루를 탈걸 예상하고 숨어있었다. 표범도 계곡에서 올라오는 산돼지들이 반드시 지나갈 목을 지키고 있었ㅇ므로 이포수가 오는 걸 봤을 것이다. 그러나 교활한 표범은 아직 석양이 남아있는 산마루에서 사람과 일대일싸움이 불리하다고 보고 일단 숨어버렸다. 물론 이포수는 표범을 보지 못 했다. 아까 본 표범의 발자국은 이미 3 - 4일이 지난 발자국이라고 판단하고 오직 산돼지에게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발사에 방해가 되는 잔솔가지를 쳐내고 겨냥을 해놓고 기다렸는데 올때가 되었는데도 산돼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초조해졌다. 날이 자꾸 더 어두워졌다. 계곡은 이미 깜깜해졌고 산마루도 10m 이상 볼 수 없었다.
(아이쿠, 때를 잘못 잡았구나!)
때 늦게 후회를 한 이포수는 꾸물거리는 몰이꾼을 원망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일어서려는데 뒤에 기척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는데 그 순간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포수는 대담한 포수였다. 엉거주춤 일어서다가 표범의 일격을 받았으나 총을 휘둘렀다. 총신이 표범의 어딘가를 때렸다. 이포수의 목줄을 노리던 표범이 멈칫했다. 그 사이 이포수는 덮어놓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표범에게 맞지 않았으나 엄청난 굉음轟音과 불빛에 표범이 일단 물러섰다. 이포수의 총은 총신이 나란히 두 개인 쌍발총이었다. 그래서 이포수는 남은 한 발을 쏠 표적標的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표범은 중상重傷을 입힌 이포수 주위를 돌면서 공격할 기회를 찾고있었다. 왼쪽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으므로 두 눈이 다 멀어버렸는지 아니면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은 것인지도 분간이 안 갔다. 당황하고 공포에 싸인 이포수가 고함을 질렀다.
‘사람 살려라! 사람 살려!’
계곡에서 몰이를 하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들도 어둠속에서 해매고 있었다. 어둠이 빨리 내린 계곡은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박서방은 산돼지들이 물을 먹는 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다가가다가 이포수의 고함을 들었다.
‘어디야? 어디!’
대꾸를 하며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어올라갔다. 달도 없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두 사람의 몰이꾼도 두 시간 정도 계곡에서 방황하다가 비명을 듣고 달려가다가 한 명이 바위에서 굴러떨어져 도리어 <사람 살려라!>고 고함을 쳤다. 먼저 도착한 박서방이 신음소리를 듣고 가보니 이포수가 쓰러져있었다. 몸을 일으켜보니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
‘웬일이요, 웬일!’
박서방이 흔들어서 정신이 가물가물 하던 이포수가 의식이 돌아왔다.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 불을 좀 … 불을 ….’
불빛에 보니 이포수는 머리, 어깨와 배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표범이 발톱으로 할키고 입으로 물어뜯은 것이다. 숨은 쉬고있었으나 빈사瀕死상태였다.
‘어이, 큰일났다. 이포수가 다쳤어. 빨리 와. 병원에 가야해!’
주막집머슴의 말이 들려왔다.
‘나도 바위에서 떨어져 꼼짝 못 해.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
‘김노인! 김노인! 어디 있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두워서 혼자서도 길을 찾기 어려운데 중상을 입은 이포수를 데리고 산을 내려갈 벙법이 없었다. 도 부상당한 사람을 버려두고 가면 표범이 가만 놔둘 리 없다. 사라져버린 김노인도 문제였다. 다행히 다리가 부러진 머슴은 혼자서 기어올라왔다. 박서방이 날이 충분히 밝아지자 박노인을 찾아나섰다. 물을 피워놓고 야영을 한 곳에서 200m 쯤 떨어진 곳에 박노인의 모자가 떨어져있었다. 모자 옆에 핏자국이 있었다. 핏자국에는 살인자의 증거 표범의 발자국도 있었다. 사람들의 고함을 듣고 동쪽으로 도망가던 표범이 어둠속에서 더듬거리며 올라오는 박노인을 발견하여 덮친 것이다. 핏자국을 따라갔는데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 바위 위에 박노인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묵사발이 된 머리는 겨우 목에 매달려있고,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져나왔으며, 허벅다리와 팔은 뼈만 남았다. 박서방은 미친 듯이 고함을 쳤다.
‘사람 살려라! 사람 살려라!’
내가 박서방의 고함소리를 들은 건 한 시간 쯤 뒤였다. 나는 그 산에 표범이 돌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그 날 새벽 일본인 다무라포수와 그의 통역通譯이며 사냥조수인 전봉진과 함께 출동했다가 박서방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이포수를 등에 업고 한 발을 절룩거리는 머슴의 손을 끌면서 산을 내려오는 박서방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 마을에 안내하고 산으로 갔으나 박노인의 시체를 거두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눈이 내려 표범의 발자국을 찾을 수 없었다. 밤사냥을 하다가 참변을 당한 이포수는 생명을 건졌으나 한 쪽 눈이 멀고 왼손이 마비되어 다시는 사냥을 하지못하는 병신이 되었다. <밤에는 사냥을 하지 말아라!> 그러나 예외가 있다.
중일中日전쟁이 일어난 해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촉탁囑託이었던 나는 내무부로부터 덮어놓고 경남 거창으로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거창에 도착하니 마중나온 군청직원이 도깨비를 잡아달라는 괴상한 주문을 했다.
‘도깨비를 … ?’
군청직원이 농담을 하는 게 아니고 진지眞摯했다. 그는 면사무소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주었다. 거창군의 박하마을 뒷산에 공동묘지共同墓地가 있는데 최근에 공동묘지에 도깨비가 나와 거기에 묘를 쓰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군민들이 공동묘지 사용을 꺼렸다. 놀란 면사무소에서 진상을 조사했는데 도깨비를 목격한 사람이 네 사람이 나왔다. 그 중 김진도라는 사람과 그의 여동생이 본 도깨비는, 김진도는 대구에서 장사를 했는데 고향에 남아있었던 아내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와서는 부모와 여동생이 아내를 박해迫害해서 자살을 했다고 주장했다. 술에 취해서 중언부언重言復言하다가 밤중인데도 사죄謝罪를 시킨다면서 여동생을 끌고 아내가 묻힌 공동묘지로 갔다.
‘무슨 놈의 묘들이 이렇게나 많아. 빨리 언니 묘를 찾지 못 해!’
겁에 질린 여동생이 묘지입구에서 서성거리자 호통을 쳤다.
‘아, 빨리 가지 못 해!’
사내가 큰소리를 쳤으나 목소리가 모기소리 같았다. 그때 그들은 묘지에서 달가닥! 달가닥! 하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나는 곳에는 푸른빛이 명멸明滅했다. 그리고 키득! 키득! 여자 웃음소리도 났다. 남매는 비명을 지르면사 마을로 달아났는데 그 소리가 뒤를 따라왔다. 이튿날 마을사람들이 묘지에 가봤는데 아내의 묘에서 손과 발이 삐져나와있었다. 도깨비를 본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고 밤늦게 일을 하고 오던 농부도 같은 얘기를 했다. 윗마을 잔치집에서 돌아오던 술꾼도 묘지에 푸른빛이 떠돌고 웃는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했다. 면사무소에서 직원을 현장에 파견했다. 공동묘지의 묘가 대부분 파괴되거나 구멍이 뚫려있었다. 묘지 여기저기에 인골人骨이 나뒹굴고 인근 산에서도 인골이 발견되었다. 면사무소는 인근 산에 사는 짐승들의 소행所行이라고 보고 웃음소리도 짐승들의 울음이며 푸른 빛은 인골의 인隣이 달빛에 반사反射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추정推定했다. 그 보고서의 내용으로 봐서 내가 할 일은 도깨비처럼 밤에 나타나서 묘지를 훼손毁損하는 밤짐승을 잡아달라는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 짐승을 퇴치해달라는 것이죠. 한 가지 더 도깨비 따위를 믿는 농부들의 미신迷信을 일깨우기 위해 공동묘지 현장에서 몇 마리 짐승을 잡아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이 것이 도깨비의 정체正體라고 해명할 수 있을테니까요.’
밤사냥을 금기시禁忌視하는 내가 밤사냥을 하게된 연유緣由다. 면사무소에서 붙여준 시골포수를 데리고 현장의 지형地形을 살펴보았다. 공동묘지는 세 개의 산줄기가 합쳐진 산기슭이며 마을과는 4Km 쯤 떨어져있어 짐승들이 나타나기 좋은 곳이었다. 나는 주로 함경도 동북쪽에서 사냥을 했기 때문에 경남의 산은 서툴렀으나 시골포수는 산돼지, 노루, 여우, 너구리, 오소리와 족제비들이 많이 서식棲息한다고 알려주었다. 새로 세운 묘들이 있는 산기슭에 움(구덩이)을 두 개 팠다. 움 속에 들어가 밤이 되기를 기다렸는데 열사흘이라 달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날이 흐려 일기日氣가 음산陰散했다. 밤은 뒷산 동굴에서 시작되었다. 어둠이 내리자 동굴에서 자고있던 수천 마리의 박쥐들이 나래짓을 했다. 박쥐들이 먹이를 찾아 날아간 다음에는 짙은 어둠이 깔렸다. 불과 40여 미터에 있는 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유령幽靈이나 도깨비 따위는 믿지 않지만 기분이 언짢았다. 수백 기基의 묘가 있는 곳에 역시 구멍을 파고 들어가 있었으므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시골포수가 건네준 소주를 병째 들이켰다. 안주按酒 없는 깡소주를 반 병을 마시고나니 기분이 좀 풀렸다. 그리고 노곤해져서 잠이 들었다. 시골포수와 <어차피 초저녁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 12시께 일어나자>고 약속했다. 초겨울이지만 공기가 차가웠다. 약속대로 12시께 일어났다.
(자, 이젠 도깨비들이 나타날 시간인데 ….)
아닌게 아니라 <달가닥! 달가닥!> 소리가 묘지에서 들려왔다. 며칠 전에 새로 세운 묘였다. 나는 노루탄을 장전裝塡한 벨기에제製 5연발총을 들고 살그머니 움을 빠져나왔다. 심야深夜의 묘지는 무섭도록 고적孤寂했다. 사람 허리높이로 자란 잡초가 술렁이고 그 사이에 올망졸망한 묘들이 사재散在해 있었다. 황량荒凉하고 음산陰散한 분위기였으며 정말로 도깨비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포수는 미신迷信 보다도 강한 신앙信仰이 있다. 가지고있는 총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信賴다. <총을 겨냥해서 쏘면 죽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믿음이다. 비록 그 대상對象이 도깨비나 귀신이더라도 총으로 쏘면 죽는다는 신념이 있다. 그날도 왼쪽 팔에 쥐고있는 묵직하고 차가운 총의 감촉의 믿음으로 도깨비에 대한 공포恐怖는 없었다. 그런 공포 보다는 사자死者들과 한 장소 즉 묘지에 있다는 불쾌감이 더 강했고 코에 스미는 고약한 냄새가 싫었다. 나는 오랜 경험으로 그 냄새가 여우나 너구리에서 나는 냄새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기어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들렸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군데서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에 접근하자 달그락소리가 딱! 그쳤다.
(우리의 기척을 알아챈 걸까?)
그러나 곧 다시 들려왔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어보니 달그락소리만이 아니라 흙을 파헤치는 소리와 헝겊을 북북 찢는 소리도 들렸다. 바로 뒤에 따라오는 시골포수에게 발사준비 신호를 했다. 총신銃身에 매달아둔 전지電池의 스위치를 켜자 몸서리치는 광경이 나타났다. 어둠을 뚫고나간 전지불빛에 악구惡鬼가 있었다. 며칠 전에 쓴 묘에서 시체를 꺼내 시체를 감싼 헝겊을 찢고 허벅다리를 뜯어먹는 여우의 모습이 들어났다. 가난하 ㅈ비에서는 시체를 관管에 넣지 못 하고 거적으로 둘둘 말아 매장埋葬했으므로 여우가 쉽게 시체를 끄집어내서 먹고있었다. 시체는 여자였으며 허벅다리를 물고 갑자기 켜진 불빛에 놀라 전지불빛에 들어났다. 전지불빛이 비치자 여우가 댜가리를 쳐들고 으르렁거렸다. 먹이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본능이다. 벌겋게 피로 물든 아가리에서 킥!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까내미는 모습은 악마 보다 더 징그러웠다. 웬만한 맹수의 위협쯤에는 놀라지 않는 셈이었지만 그 자그마한 악마의 모습에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새끼가!’
고함을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여우가 킥! 하는 비명을 지르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내 등 뒤에서 시골포수가 회중전등을 묘지 여기저기로 비췄다. 풀속에서 달아나는 여우들이 보였고 우리는 연속발사를 했다. 여우의 시체를 두고 마을로 돌아왔다. 이튿날 마을사람들과 함께 묘지에 가봤는데 네 마리의 여우시체가 있었다.
‘자, 이게 도깨비입니다.’
도깨비의 정체正體는 밝혀졌으나 소탕掃蕩하는 게 문제였다. 여우사냥은 어렵다. 여우는 밤의 짐승이며 낮에는 깊은 동굴이나 구멍에 숨어 나오지 않는다. 구멍에 있는 여우를 낮에 어떻게 사냥할 수 있을까? 사냥개다. 여우가 숨어있는 굴을 발견하고 몰아내는 재주는 개들에게만 있다. 영국이나 유럽에서도 여우를 잡을 때는 개를 이용한다. 개들이 여우를 발견하고 몰면 말을 탄 신사紳士들이 쏘아 잡는다. 내가 개가 있어야 여우를 잡을 수 있다고 하며 개를 데리고 오겠다고 제안을 하자 관리들은 내가 여우잡이를 기피忌避하는 것으로 간주看做하고 시골포수 세 명을 동원하여 여우사냥을 했다. 여우굴에 연기를 피워 잡으려고 했으나 헛탕이었고, 덫을 놔도 잡히지 않았다. 교활狡猾하고 의심疑心 많은 여우는 시골포수들의 잔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세 사람의 포수가 이틀 동안 사냥을 했으나 겨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것도 전날 내가 쏘아 부상을 입은 놈이었다. 관리들은 그제서야 내 말을 믿고 비용을 들여도 좋으니 사냥개를 데리고와서 여우를 소탕掃蕩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괘씸한 소이所以로 보면 거절해야 하는데 주민들의 피해를 방관傍觀할 수 없어 승락했다. 나는 여우잡이 사냥개를 알고있었다. 경성京城에서 자전거점店을 하는 일본인 후루가와가 기르는 개들인데, 유럽에서 여우사냥 전문專門 폭스테리아종種이다. 언젠가 나는 후루가와와 같이 꿩사냥을 했는데 개들이 꿩사냥을 하다가 여우가 나타나자 꿩을 버리고 여우를 쫓아 후루가와가 노발대발怒發大發했던 일이 있었다. 후루가와에게 개를 데리고 어라고 전보電報를 쳤다. 별로 잘 하지는 못 하지만 사냥을 좋아하는 후루가와는 이틀만에 사냥개를 데리고 왔다. 사이드카가 붙은 오토바이를 몰고왔는데 사이드카에는 두 마리의 사냥개들이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테리어는 사냥개라기보다는 애완용愛玩用으로 기르고싶은 개다. 관리들과 시골포수들은 매우 실망한 표정이었다. 서울에서 대려온 사냥개는 사납고 큰 개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장난감같은 개를 데리고 왔으므로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니, 이 개들이 여우를 잡아? 여우에게 잡혀먹히지나 않았으면 ….’
그 말을 듣고 발칵! 화를 내는 후루가와를 말리며 내가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
성미 급한 후루가와는 도착 즉시 산에 올랐다. 테리어는 공동묘지 뒷산에 가자말자 귀를 쫑긋 세우더니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러고는 목청이 터지게 짖으면서 산허리로 달려갔다. 포수와 관리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테리어가 나무밑둥에 난 구멍을 들여다보며 짖었다. 서양西洋의 귀부인貴婦人처럼 품위品位있는 개가 털을 곤두세우고 야수野獸처럼 눈빛이 변했다.
‘겨우 구멍이야? 이 구멍은 우리가 이미 불을 놓았던 구멍인데 ….’
‘누가 아나, 구멍에서 들쥐라도 나올지 ….’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엉뚱한 곳에서 개가 짖었다. 테리어 한 마리는 구멍을 보고 짖고 다른 한 마리는 구멍 주위를 빙빙 돌고있었는데 구멍 주위를 돌고있던 테리어가 갑자기 숲으로 돌진했다. 여우 한 마리가 후다닦! 튀어나와 도망갔다.
‘… ?’
‘… !’
난데없이 나타난 여우를 보고 모두 놀랐는데 여우가 숨어있던 굴에는 출구가 여러 개 있었다. 여우굴이 입구와 출구가 다르고 출구가 여러 개라는 걸 모르는 바보는 테리어가 아니라 시골포수들이었다. 그들이 열심히 불을 피웠으나 이미 여우는 출구로 도망쳐버린 뒤였던 것이다. 숲속에서 뛰어나온 여우는 힘껏 도망치고 있었으나 테리어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여우와 테리어의 경주競走는 2 - 3분 후에는 판가름이 날 것 같았다. 여우는 할딱거리면서 속도가 느려지는데 비해 테리어는 원기元氣가 왕성旺盛했다. 여우는 단거리선수였으나 테리어는 장거리선수다. 또한 테리어는 침착沈着했다. 금방 목덜미를 물 수 있었으나 덤비지 않았다. 한 마리는 여우를 뒤에서 쫓고 다른 한 마리가 여우의 앞길을 막아 포수가 있는 곳으로 몰았다. 여우는 테리어에게 몰려 할 수 없이 포수 앞으로 왔다. 우리들이 있는 곳에서 5 - 6m 쯤 와서는 숨을 할딱거리며 벌러덩 누워버렸다. 여우가 쓰려졌으나 테리어는 덤비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포수를 쳐다보았다.
‘자, 이젠 쏘시오.’
나와 후루가와가 거의 동시에 발사했다. 불과 5 - 6m 거리에 벌러덩 누워있는 여우는 끽! 소리도 내지 못 하고 죽었다. 정말 훌륭한 사냥개였다. 손뼉이라도 쳐주고싶은 재주였다. 테리어가 몰아낸 여우는 열세 마리다. 여우는 냄새가 고약한데 독특하며 몸에서 나는 게 아니라 배설물에서 난다. 테리어는 여우의 독특힌 배설물냄새를 놓지지 않았다. 여우 중 한 마리는 테리어를 피해 새끼들을 데리고 인가창고에 숨었는데 테리어는 그놈들도 찾아냈다. 방앗간 볏짚속에 숨은 늙은 여우와 새끼도 테리어의 코를 속이지 못 했다. 늙은 여우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새끼를 볏짚속에 숨겨두고 혼자 뛰어나왔으나 어미여우를 쫓는 건 한 마리고 또 한 마리는 볏짚속 새끼를 감시하고 있었다. 테리어는 그만큼 영리하다. 공동묘지 여우 소탕 공적으로 총독부로부터 상을 받았는데 그 상은 테리어가 받은 거였다.
표범, 여우 외에도 삵괭이, 너구리, 오소리와 족제비가 밤의 짐승인데 체구가 가장 작은 놈이 족제비다. 족제비는 꼬리길이까지 합해도 60Cm 정도다. 그러나 족제비는 무서운 짐승이다. 산간마을에서 가축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히는 게 족제비인데 그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살육은 하룻밤 사이에 가축을 전멸시킨다. 먹지도 않으면서 그냥 죽인다. 살육본능殺戮本能이다. 그냥 죽이기 위해서 죽인다. 토끼장에 들어가면 토끼를 모두 다 죽이고, 닭장에서도 여덟 마리를 다 죽여놓고 한 마리만 물고간다. 범이나 늑대는 배가 고파야 사냥을 하고 먹을만큼만 잡는다. 족제비는 재미로 죽인다. 총알처럼 뛰어들어 대뜸 목줄을 물어뜯는다. 닥치는대로 모두 다 죽이고는 한 마리만 물고간다. 자기 보다 채구가 큰 토끼, 장탉 심지어는 양이나 돼지도 물어죽인다. 족제비는 자기 몸의 두 배가 넘는 뱀과도 싸운다. 뱀은 족제비가 즐겨먹는 먹이다. 족제비는 두려움을 모른다. 무조건 달려들어 목줄을 물고늘어진다. 목을 물린 뱀이 꼬리로 족제비의 몸을 감으려고 했으나 족제비가 몸을 땅에 붙여버렸으므로 결국 뱀은 묵이 뜯겨 죽었다.
경기도 평택 부근 야산에서 꿩사냥을 했는데 친지親知에게 빌린 포인터가 싫증을 냈다. 쫓아서 날릴 꿩이 없자 포인터는 다른 짐승을 쫓았다. 토끼를 쫓아다니고 다람쥐굴을 들여다보던 포인터가 갑자기 숲속으로 달려갔다. 숲이 두 갈래로 쫙! 갈라지며 누런 짐승이 달려나왔다. 족제비였다. 포인터는 장난삼아 족제비를 쫓았는데 족제비는 필사적이었다. 쫓기다가 몰린 족제비가 휙! 돌아섰다. 자기 몸무게의 다섯 배가 넘는 개와 일전을 벌이려는 당돌한 태세였으나 개는 무시했다. 포인터는 버릇대로 코를 족제비 앞에 내밀었다. 당돌한 상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는 태도였다. 그런데 족제비가 총알처럼 뛰어오르며 개의 목줄을 물었다. 개의 비명을 듣고 숲속으로 달려갔을 때 포인터가 펄쩍펄쩍 뛰고있었다. 포인터의 목에 족제비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총대로 족제비를 내리쳤다. 족제비는 3 - 4m를 날아가 바위에 떨어졌으나 달아났다. 홧김에 발사를 했다. 총탄을 대여섯 개나 맞았으나 서너 발 기어가다가 아가릴 벌리고 죽었다. 독종毒種이다. 포인터를 인근 병원에서 치료했다. 조물주造物主가 족제비의 체구를 작게 만든 게 천만다행이다. 만약 족제비의 채구가 표범만큼 크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밤에 어둠을 타고 스며들어 대뜸 목줄을 물어뜯는 족제비를 당할 동물은 없다. 가축도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표범만큼 큰 족제비는 없었으나 여우만큼 큰 족제비가 있다는 건 밝혀졌다. 지리산에 살고 있다. 담비다. 산간山間사람들은 담비를 표범 보다 더 무서워한다. <담비는 호랑이에게도 덤벼든다>고 말한다. 양, 돼지는 물론이고 황고에게도 덤벼든다. 답의 습격을 받은 짐승은 살아남기 어렵다.
일본인포수 오자기는 지리산에서 담비의 습격을 받았다. 오자기는 개를 데리고 꿩사냥을 하다가 큼직한 산돼지를 발견하여 잡았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져 동굴에서 야영을 했다. 개가 산돼지를 지켰다. 밤 12시께 개 짖는 소리에 잠을 깼다. 개의 비명이 들렸다. 개와 싸워서 개가 지는 짐승? 범이 아니면 표범뿐이다. 오자기의 발이 얼어붙었다. 오자기가 연달아 두 발의 공포空砲를 쏘았다. 굉음에도 불구하고 싸음이 계속되더니 개의 신음소리가 약해지고 이윽고 끊어졌다. 오자기가 용기를 내서 전지를 비추었다. 산돼지의 시체 옆에 개가 쓰러져있었다.
‘마루! 마루!’
개를 부르며 주변을 비췄다. 노르스름한 물체가 스쳐갔다. 오자기는 그게 범이라고 생각하고 동굴로 들어와 밤새 불을 피웠다. 그러나 이튿날 조사해보니 담비였고, 개는 단 한 군데 목이 뜯겨 절명絶命했다. 담비는 산돼지고기 한 점을 물고갔을뿐이다.
97. 산막山幕의 손님
잘 훈련된 등산가나 노련한 포수같으면 한국의 산에서는 길을 잃어 죽지는 않는다. 한국의 산은 험준하지만 길을 찾지 못 할만큼 넓지 않다. 나도 짐승을 쫓아다니다가 길을 잃어 좀 해맸으나 대개 산에서 빠져나왔다. 오랜 사냥경험으로 평지나 마을로 나가는 길을 찾아냈고 그게 어려우면 높은 산봉우리로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면 나갈 길이 보인다. 그러나 만주의 삼림森林은 다르다. 만주의 삼림은 너무 광대하다. 산에 올라봐야 보이는 것은 하늘과 산과 나무들뿐이다. 수백리를 뻗어나간 산과 삼림은 일단 그속에서 길을 잃으면 빠져나올 도리가 없다. 그래서 만주의 삼림에는 산막이 있다. 만주의 삼림속에서 사는 여러 주민들이 지어놓은 대피소待避所고 무료여관無料旅館이다. 짐승을 사냥하는 포수, 산삼山蔘을 채취採取하는 심마니, 금이나 사금砂金, 진주眞珠를 캐는 광부鑛夫, 마적馬賊과 나뭇꾼들이 지었다. 산막은 누가 지었든지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공주택이다. 만주의 삼림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지혜다. 영하零下 40도度의 추위와 눈과 얼음, 범과 늑대들에게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협동정신이다. 나는 사슴을 쫓아 빈번頻繁하게 삼림을 드나들었는데 때마다 산막의 신세를 졌다. 나무꾼이 지은 산막은 통나무로 지었고, 마적은 총탄이 뚫지 못하게 돌로 지었으며, 사냥꾼이나 심마니는 흙과 돌로 지었다. 온돌溫突로 되었고 창문은 없으며 공기통이 있는 구조다. 한 평짜리에서 열 평짜리까지 다양하다. 맹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 튼튼한 통나무문이 달려있으며 몽둥이나 창칼도 준비되어있다. 화덕과 돌솥도 있다. 그리고 다음 방문객을 위해 땔감과 약간의 응급용應急用 식량 - 옥수수나 콩, 등유燈油가 마련된 곳도 있다. 산막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그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불문율不文律의 규칙이 있다. 이용한 사람은 원상복구를 해놓고 가야 한다. 그런 규칙은 아무도 감시하거나 지시하는 사람도 없으나 틀림없이 지켜지고 있었다.
1932년 길림성 동쪽 사오린호산 깊숙이 들어간 일이 있었다. 백인포수 알렉세이와 그의 조수 중국인과 같이 범을 잡기 위해 철도에서 내려 이틀이나 걸쳐 걸어들어갔다. 12월 초였으나 사오린호산은 온통 눈으로 덮혀있었으며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피부에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영하 40도 내외였으며 입김이 수염과 방한모에 하얗게 얼어붙고 오줌은 얼어붙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 눈이 내렸다. 강풍에 섞여 내리는 눈바람에 사람들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날 오후 추위와 피로에 지쳐 쓰러졌다. 악발이라는 별명別名을 가진 나도 별 수가 없었다. 앞서가던 알렉세이가 내 귀에 속삭였다. 일본말, 중국말과 한국말을 섞어 말했다.
‘여기서 10리 쯤 가면 산막이 있어. 어둡기 전에 도착할 수 있으니 힘을 내!’
그 한 마디가 나를 일어세웠다. 한증막汗蒸幕처럼 뜨거운 열기가 화끈거리고 흙냄새가 뭉클한 산막을 그리며 몽유병자夢遊病者처럼 비슬거리며 걸었다.
‘이제 거진 다 왔어. 고개너머에 산막이 있어.’
정말 고개를 넘으니 산막이 있었다. 통나무와 흙벽으로 만든 제법 큰 산막이었다. 한 발 앞서 도착한 중국인조수가 불을 피워놓았다. 나는 거적을 깔아놓은 온돌溫突 위에 들어누워 점점 따뜻해지는 등의 감각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꼬박 반나절을 잤다. 잔 게 아니라 기절氣絶했다. 목이 말라 눈을 뜨니 알렉세이는 총을 손지하고 중국인조수는 화덕에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냥 누워있어요. 아직도 열이 대단하니까.’
감기와 몸살을 같이 앓고 있어서 전신全身의 뼈마디가 쑤셨다. 뜨거운 중국차 한 잔을 마시고 또 기절했다. 눈은 연 이틀간이나 계속되었다. 사냥하기에 딱! 알맞은 날씨였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열은 좀 내렸으나 힘이 없어 거동擧動할 수가 없었다. 상의한 결과 나는 산막에서 푹 쉬기로 하고 알렉세이와 중국인조수가 범사냥을 나가기로 했다. 이틀 아니면 사흘 후에 돌아오겠다고 하고 떠났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5일 후에야 돌아왔고 나는 산막에서 귀중한 경험을 했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사람을 만났다. 알렉세이가 떠난 뒤 곧 산막에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일본인과 두 명의 중궁인 사냥꾼이었다. 일본인을 안내한 중국인포수가 선객先客을 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사냥꾼의 예의禮儀다. 따끈한 중국차를 권했다. 피차 ㅇ니사를 한 다음 차를 마시면서 일본인포수가 벽에 걸린 내 총을 힐끗 보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영국제구만요. 좋은 총입니다.’
그이 총도 고급총이었으나 그보다도 진소우라는 중국인포수의 총이 더 귀한 총이었다. 러시아군대에서 사용하는 단발총을 개조한 것인데 총자루에 큼직한 호랑이발톱이 세 개 박혀있었다. 자기가 잡은 세 마리 호랑이발톱이다. 만주에서 포수의 품격品格은 포수가 잡은 호랑이 수에 비례한다. 호랑이를 한 마리 잡으면 프로포수로 대우待遇를 받는다. 또 한 마리를 잡으면 권위자權威者로 존경받고, 세 마리 이상 잡으면 포수세계에서 영웅英雄이 된다. 나는 그에게서 포수로써의 품격을 봤다. 그도 내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알렉세이와 같이 왔다고 하자 머리를 끄덕이며 일본인포수에게 말했다.
‘알렉세이가 먼저 왔으니 우리가 방향을 바꿉시다.’
진포수가 첫 호랑이를 잡은 건 밤이었다. 6년 전에 사오린호 산기슭 북쪽에서 산돼지를 잡았는데 날이 어두워져 인근 중국사당祠堂에서 잤다. 산신山神이나 토지신土地神을 섬기는 중국인들이 작은 집을 지어놓고 제사祭祀를 지낸다. 포도씨 한 사람이 오그리고 누울만한 공간이었으나 추운 바깥날씨에 비하면 궁궐이었다. 등에 지고다닌 담요를 뒤집어쓰고 눈을 붙이려는데 뭔가 끌려가는 소리가 났다. 진포수는 그 소리를 직감하고 문틈으로 내다보았는데 대호가 산돼지를 끌고가고있었다. 대담한 진포수는 총의 장전을 풀고 어둠속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포수의 총은 단발총이다. 아무데나 무턱대고 쏠 수 없다. 만주의 대호는 사람 따위야 우습게 본다. 그러나 진포수는 대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깜깜한 삼림이었으나 고목이 쓰러진 공간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지면地面에 1m 정도의 밝은 곳이 있었다. 밝다고 하지만 달빛에 눈이 반사되어 희무끄레하게 보이는 정도였으나 대호가 거기를 통과한다면 총을 쏠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으나 중국인답게 끈기로 버텼다. 마침내 동그란 빛속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산돼지를 끌고가는 대호의 꼬리가, 배가 그리고 산돼지의 목덜미를 물고있는 머리가 나타났다. 발사했다. 빛을 겨누어 총신을 고정시켜놓은 상태로 머리를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단 한 발로 승패가 가름되었다. 정확하게 머리에 맞은 탄환이 뇌수腦髓를 뚫고들어간 소리가 났다.
‘첫번째 호랑이는 요행僥倖으로 잡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정열과 노력으로 잡았지요. 호랑이사냥에서는 죽을 고비는 넘겼으나 상처를 입지 ㅇ낳았는데 … 그 요사妖邪한 표범 - 계집년에게는 당했어요.’
진포수의 배에는 30Cm의 수술자국이 있었으며 그 건 내장內臟 일부가 보일 정도의 상처였다. 그 때 진포수는 표범의 발자국을 새끼범이라고 오인誤認하여 추적했다. 새끼범이 산중턱에서 바위 뒤로 숨는 걸 보고 경솔輕率하게 추적했다. 새끼범을 간단히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큰 바위 위로 올라갔다. 바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새끼범을 찾아 두리번거렸는데 옆에 있는 다른 바위에서 새끼범이 튀어나와 달려들었다. 밑에서 위로 거의 수직垂直으로 뛰어오른 범이 진포수의 배에 발톱을 박아넣고 뒹굴었다. 만약 그것이 대호라면 대호가 사람에게 밀착되는 순간 승패는 끝나버린다. 400Kg이 넘는 대호에게 밀려 넘어지면 목줄이 끊겨 죽는다. 그러나 다행히 표범이었다. 진포수는 바위 위에 우뚝 선 자세로 버텼다. 두 손으로 표범의 목을 움켜쥐고 힘껏 휘둘러 표범을 뿌리쳤다. 표범이 5 - 6m 날아갔다. 그리고 도망가버렸다. 그러나 진포수는 중상이었다.
‘사실 표범은 대호 보다 더 무서운 맹수지요. 그런데 형은 한국에서 표범을 여덟 마리나 잡았다니 놀랄 일이요.’
진포수가 거듭 표범의 간악奸惡함을 설명했다. 진포수, 일본인포수 그리고 중국인 몰이꾼은 이튿날 떠났다. 진포수일행이 떠나고나서 또 다른 손님이 찾아들었다.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한꺼번에 들어오지 않고 차례로 들어왔다. 첫눈에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무장武裝을 하고 있었는데 엽총獵銃이 아니라 일본군대에서 쓰는 구구식장총을 매고 누비이불을 둘둘 말아 엇갈려 맸고 허리에 탄띠를 찼다. 큰 키에 근육질筋肉質이고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푸른 눈에서는 늑대처럼 냉혹冷酷함이 비쳤다. 그래도 선객에 대한 예의는 지켰으며 인사를 하고는 방 한구석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들이 도착한 10여 분 뒤 또 두 사람이 들어와 나직히 말을 주고받더니 한 사람은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마적馬賊이었다. 나간 사람이 두 사람을 더 데리고 들어왔다. 방에 들어온 마적은 벽에 기대고 누웠으나 말이 없었다. 뜨거운 중국차를 권했는데 두목頭目은 받았으나 다른 마적은 사양辭讓했다. 약간 미소짓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나를 보는 눈매는 날카로웠다. 내가 미리 한국인포수라고 말했더니 두목이 부하에게 지시했다. 한국말이 나왔다.
‘한국 어디요?’
‘고향은 경기도지만 서울에서 삽니다.’
‘혼자 왔소?’
‘러시아포수 알렉세이라는 사람과 같이 왔습니다.’
강한 함경도 어투語套다.
‘선생님은 어디지요?’
부하는 내 말을 무시하고 두목에게 보고했다. 두목이 알렉세이라는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더니 누워버렸다. 몇 시간을 자고는 식사를 했다. 화덕에서 구은 돼지고기 한 접시를 줬다. 긴장 대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제일 염려되는 건 벽에 걸린 엽총이다. 그러다 새벽에 깜빡 잠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먼저 벽에 걸린 엽총을 살폈다. 새벽에 소리도 없이 떠난 마적들은 산막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화덕 옆에 장작이 수북히 쌓였고, 방을 말끔하게 청소도 하고, 화덕에 걸린 냄비에는 돼지고기찌개가 끓고있었다. <만나서 반가웠소, 함경도친구!> 문짝에 쪽지가 붙어있었다. 만주의 마적은 강도가 아니다. 지방군벌地方軍閥이나 재벌財閥의 병사兵士였고, 반란叛亂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도망자들인데 노략질을 해도 군대, 경찰 등 권력자에게 하고 양민良民 들은 오히려 보호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나 중국의 공산당원도 있었다. 맥이 풀렸으나 바깥으로 나갔다. 바람은 차고 추위는 여전했다. 꽁꽁 얼었다. 하늘, 땅이 모두 얼었다. 하늘이 쳐다보기만 해도 쨍! 하고 깨질 것 같았다. 바깥 추위를 모르고 지낸 산막이 고마웠다. 굵은 통나무로 얼개를 만들고, 나무줄기로 엮은 지붕을 잡초로 덮고, 벽을 돌과 흙으로 이중으로 만들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고, 온돌溫突로 난방煖房을 한 지혜가 고마웠다. 온돌은 한국인들의 고대古代 조상祖上 북옥저인들이 발명품이다. 흙벽과 돌벽 사이에는 페치카 같은 구조로 공간이 있어 화덕에서 나온 연기와 열이 방안을 한 바퀴 돌아 굴뚝으로 나가게 되어 이중난방이다.
(알렉세이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
알렉세이는 이튿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문객이 들었다. 무척 강건하게 보이는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다. 그는 산막에 총을 가지고있는 선객을 보고 조금 놀랐으나 이내 부드러운 미소媚笑를 띠우며 인사를 했다. 중국인이어서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그는 모피상毛皮商 - 주로 족제비가죽을 수집했다. 노인의 배낭에는 노란 족제비가죽이 삐쭉히 삐져나와있었다. 내가 그걸 주시하자 노인은 얼른 쑤셔넣었다. 족제비가죽은 꽤 비싼 물건이었고 노인은 그걸 강탈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손짓발짓을 섞어 중국말로 내 신분을 밝혔는데 그 의지가 통한 듯 노인이 미소지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안 노인이 대뜸 인삼人蔘이라고 글짜를 써 보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인삼은 약효藥效가 없고 산삼山蔘만이 영약靈藥이라고 했으며, 삼삼은 한국에고 있으나 여기 만주에 많다고 했다. 올해도 세 뿌리를 캤으며 봄에는 심마니를 한다고 했다. 가죽장사가 부업副業인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꿈에 계시啓示를 받아 캐는데 만주에서는 기도祈禱를 드린다. 몇 날 며칠 기도를 하는데 먼저 산삼을 잉태孕胎시키는 하늘의 벼락에게 드리고, 다음에는 그 씨를 받아 산삼을 키워주는 자비로운 땅의 신에게 드린다. 그리고 산삼을 캐러다니는 동안 자기를 보호해줄 범의 신에게도 드린다. 심마니들은 몸에 쇠붙이를 지니지 않고 그 무서운 밀림속을 돌아다닌다. 지닌 것은 기다란 지팡이뿐인데 그래도 심마니가 범에게 물려죽은 일은 별로 없다. 간혹 희생자가 생기는데 그건 부정不淨한 행위를 하여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부정행위란 살육, 간음 과 무기를 지니는 것이다. 노인은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으면 범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있었다. 올여름에도 호랑이를 만났으나 무사했다. 노인은 대낮에 불과 10여 미터 거리를 두고 범과 만났다. 그해에는 며칠 동안 기도를 해서 수신修身을 했고, 또 범의 신에게도 며칠 전에 양의 대가리를 바쳐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범을 만났을 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노인은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범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목덜미에 갈기가 무성한 시베리아 대호였는데 그도 한참동안 노인을 바라보고있다가 가벼운 헛기침을 하더니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노인의 표정으로 봐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고, 범이 사람을 보고도 공격하지 않은 사례는 많다. 특히 상대가 도전적이지 않거나 배가 고프지 않으면 죽이지 않는다. 노인의 말은 거짓말은 아니나 범의 행동에 대한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범이 자기를 공격하지 않은 게 자신의 기도 때문이라는 말을 구태어 반박할 필요는 없다. 며칠 전에 호랑이사냥꾼들이 떠났다는 말을 듣자 노인은 얼핏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공손히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렸다.
‘불손不遜하고 경망輕妄스러운 죄인罪人을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노인은, 이 산에는 호랑이 중에서도 왕王 호랑이 왕대王大가 살고있으며 왕대에게 덤벼드는 건 스스로 화禍를 자초自招하는 것이라고 단언斷言했다. 노인은 밤새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드렸으며, 자신분만 아니라 포수들의 안녕을 위해서도 기도를 했다. 그리고 <내가 기도를 드리기는 했지만 그 뜻이 범의 신에게 통할지는 의문>이라고 말하면서 산막을 떠났다. 나는 노인의 말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노인이 떠나고 채 한 시간이 못 되었을 때 바깥에서 고함소리가 났다. 일본말이었다.
‘사고가 났으니 도와달라!’
사흘 전에 산막에서 자고간 일본인일행이었다. 들것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실려있었다.
(누굴까?)
중국인 진포수가 안 보였다.
‘표범에게 당했어! 기습을 받았어!’
중상이었다. 얼굴은 표범이 할켜 두 눈을 감고, 콧등이 없어졌고, 왼팔도 물려 상처가 깊었다. 피가 엉켜 눈코 분간도 어려웠다. 뜨거운 물로 씼어냈는데 왼눈을 실명失明되었고, 오른쪽 눈도 퉁퉁부어 어찌될지 몰랐다. 상처에 옥도정기沃度丁幾(머큐롬)를 부었으나 생명이 위험했다.
‘표범은 참말 교활했소.’
새벽에 산막을 떠나 알렉세이와 반대방향 - 서북방으로 들어갔다. 눈이 소복히 쌓여 토끼, 꿩의 발자국들이 선명했다. 그날 오후 시베리아 대호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몇 시간 전이었다. 추적했다. 무서울 것이 없는 제왕帝王은 산마루길 - 호도虎道를 탔다. 호랑이가 산마루를 유유悠悠히 걸어가고있었다. 너무 흥분했다. 일본인포수가 총을 들었으나 사정거리射程距離 밖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발자국추적을 버리고 지름길추적을 결정했다. 계곡을 올라가 범의 앞을 막아 범과 정면대결을 하겠다는 것이다. 진포수가 앞장서서 달렸다. 천천히 걷는 것 같아도 대호의 걸음은 빨랐으며 범의 앞길을 막겠다는 작전은 어긋나버렸다. 진포수는 초조해서 뒤따라오는 일본인포수에게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고 대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진포수의 뒤를 따르던 일본인포수와 몰이꾼은 무서운 광경을 목격했다. 난데없는 표범발자국이 발견됐다. 표범은 대호를 피해 바위틈에 숨어있다가 대호를 추격하는 진포수를 발견하고 슬슬 뒤로 물러났다. 표범의 발자국과 진포수의 발자국이 평행이 되어 산중턱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진포수가 표범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표범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대호의 추적에 온 정신을 쏟는 진포수는 표범의 출현出現을 몰랐다. 표범은 진포수가 계속 따라오자 뒤돌아섰다. 더 이상 올라가다가는 대호와 부딛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바위 뒤에 숨어 추적자를 기다렸다. 진포수가 헐레벌떡거리며 바위밑을 지나가는데 공교롭게 눈에 미끄러져 총을 든 왼손으로 땅을 짚었다. 표범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위에서 뛰어나오며 얼굴을 할켰다. 맹수의 공격본능이다. 상대의 눈을 먼저 무력화시키는 전법이다. 진포수가 그 충격으로 엉덩방아를 찧자 총을 든 팔을 물어뜯었다. 역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전법이다. 총이 무기라 걸 아는 전법이다. 진포수는 용감한 포수였으나 표범의 첫 번째 공격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비명을 지르며 일행이 올라오는 비탈로 굴렀다. 비명을 들은 일본인포수가 달려가면서 공포空砲를 쏘았는데 표범은 공포를 듣고 마지막공격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빨리 병원으로 가야하는데 밤새 들것을 들고 온 일행이 지쳐 움직이지 못 했다. 눈과 바람도 다시 시작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렉세이가 곧 돌아올 것이니 기다리자고 했다. 러시아군장교 알렉세이는 의술醫術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있었으며 그의 응급구호상자에는 외과용기구가 있다. 알렉세이 일행은 밤에 돌아왔다. 눈사람이 되어 돌아온 일행은 시무룩했다. 범사냥이 실패한 것이다. 알렉세이는 산막에 부상자가 있다는 걸 알고있었다.
‘우리는 모두 왕대놈에게 조롱을 당했어. 우리가 쫓은 왕대를 이 사람들이 가로막아 쫓다가 표범에게 당한 거야.’
알렉세이 일행은 오후 늦게 왕대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왕대가 동북방으로 서서히 갔으므로 바짝 쫓았다. 추적 이틀만에 왕대가 계곡으로 내려가는 걸 보고 계곡으로 따라갔으나 왕대가 사라져버렸다. 왕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왕대를 발견했다. 산양을 잡아먹고 자고있었다. 좋은 기회다. 배가 부르면 경계를 늦춘다. 살살 기어 다가갔다. 약 40m 거리에서 발사했다. 그런데 총이 고장이었다. 애용하는 윈체스터에 눈이 묻어 물이 흘러 들어가 얼어버렸다. 총을 닦고 있는데 잠에서 깨어난 왕대가 도망가버렸다. 이후 알렉세이는 두 번째 실수를 했다. 이튿날 대호가 산봉우리 바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있는 걸 발견했다. 멀었으나 사정거리 밖은 아니었다. 마치 나를 쏘아보아라는 듯 우뚝 서있는 대호에게 발사했다. 그러나 연달아 두 발을 발사했는데도 대호는 그대로 서있었다. 총소리 나는 곳을 힐끔 보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알렉세이는 비상非常한 총솜씨를 가진 포수였는데 두 발이 다 빗나가버렸다.
‘ 그 왕대놈에게는 무슨 귀신이 붙어있는 것 같았어. 사람의 손에는 죽지 않는 놈이야.’
왕대에게 기도를 드린 중국노인이 생각났다. 두 번 실패에도 추적을 계속했다. 왕대는 발자국이 발견된 지점으로 되돌아와 서북방으로 갔다. 이제 진포수 일행의 발자국도 발견되었다. 진포수가 알렉세이의 사냥을 가로막아 방해를 한 셈이었다. 그러나 고집불통의 알렉세이는 추적을 계속했다. 대호와 진포수의 발자국을 뒤따라갔다. 그리고 총소리를 들었고 핏자국을 발견했다. 총소리에도 왕대는 자극을 받지 않고 여전히 천천히 걸어가고있었다. 그 따위 총소리에 놀랄 왕대가 아니다. 아무리 고집쟁이라고 해도 다시 눈이 내려 발자국이 사라져버리자 추적을 단념했다. 닷새동안 왕대에게 조롱嘲弄만 당했다.
알렉세이가 진포수의 상처 - 얼굴에 열두 바늘, 팔에 여덟 바늘을 꿰맸다. 수술이 잘 되고 피가 멈췄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나 한쪽 눈은 실명되었다. 눈이 계속 내려 사흘이나 산막에 갇혔다. 식량 걱정은 없었다. 눈에 갖힌 건 우리들뿐만이 아니었다. 눈보리 속에서 사슴, 산양과 토끼가 산막 주변을 우왕좌왕右往左往했다. 산막에서 지낸 6명의 8일은 평생의 추억이었다.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과 일본인들이 국경을 초월한 공동생활을 했고, 마적들도 참여했다. 영하 40도의 추위와 눈보라속에서 원시생활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사흘 후에 눈이 그쳐 산막을 떠나면서 산막의 주인들은 이별의 아쉬움을 산막에 남겼다.
98. 산새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새 사로잡이
두륜산은 함남과 함북에 걸쳐있는 높이 2,500m에 면적도 넓다. 산중에 마을이 많은데 사냥을 업業으로 산다. 1930년대, 나는 몰이꾼 박서방과 첩첩산중 마을을 찾아갔다. 마을은 산에 둘러쌓였는데 만주와 한국을 드나드는 짐승들의 통로였다. 사슴이나 산돼지들은 추위를 타는데 겨울이 오면 남쪽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두륜산이다. 먹이감 짐승들이 이동하면 범과 표범도 따라서 이동을 한다. 두륜산 산마루에서 천천히 내려갔는데 박서방이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마을사람들이 곳곳에 함정陷穽이나 덫, 올가미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박서방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함정을 모르고 지나갈뻔 했다. 함정은 산돼지가 다니는 길목에 깊이 3m, 넓이 1m의 함정을 파고 그 위에 풀로 짠 거적을 덮어 흙을 뿌려 감쪽같이 위장僞裝했으며, 그 위에 낙엽이 쌓이고 눈이 덮히면 만든 사람도 빠진다고 했다. 함정은 사람이 빠져도 위험이 크지 않으나 나뭇가지를 휘어잡아 끝에 달아놓은 올가미는 위험했다. 올가미에 산돼지나 사슴이 걸리면 목줄이 죄이며 휘어넣은 나뭇가지가 튀어오르는 탄력으로 목이 부러져 대롱대롱 매달린다. 작년에 산골에 세금을 매기겠다고 들어왔던 관리가 올가미에 걸려 목숨을 잃을뻔 했다. 다행히 목이 걸리면서 팔이 함께 걸려 질식을 면했으며 <사람 살려라!>는 외침을 들은 나무꾼이 살렸다. 우리는 박서방 덕분에 무사히 마을에 들어갔으며 마을 출신 박서방이 데리고 온 우리들도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아직도 상투를 틀고 댕기머리를 했다. 시골에서 흔히 보는 영양실조가 없고 건강한 몰골이다. 모두 아홉집인데 인구는 50여 명이고 박씨가 다섯집인 걸로 보아 박씨촌으로 짐작되었다. 원시공동체생활을 했다. 수확물을 공평하게 나누고 제사祭祀나 초상初喪도 함께한다. 서울에서 온 포수양반으로 소개된 나는 촌장집으로 안내되어 사랑방에 들었는데 방바닥에는 커다란 곰가죽이 깔렸고 벽에는 여우, 너구리가죽이 매달렸다. 초장 박순달영감은 작년이 환갑環甲이었다는데 나이 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박영감은 평생 사냥을 했으며 대호 한 마리와 표범 세 마리가 있으며 산돼지 따위는 몇 백마리도 넘을거라고 웃었다.
‘범을 어떻게 잡았냐고?’
1914년 늦가을, 마을사람들이 산마루에 올가미를 설치했다. 세 장정이 나뭇가지를 휘어잡아 올가미를 걸었으므로 엄청난 탄력이 있었으며 올가미를 산마루에 설치한 것은 큰 짐승을 잡기 위해서다. 그런데 설마 범이 걸리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올가미를 걸어놓은 날 밤 벼락치는 것 같은 노호가 터졌다. 호랑이가 펄쩍펄쩍 뛰는 소리와 나무가 통째로 흔들리는 소리가 지축地軸을 흔들었다. 10분 후에는 조용해졌다. 호랑이가 도망간 것 같았다. 이튿날 마을사람들이 특공대를 조직했다. 모두 긴 창을 들었으나 박촌장村長도 총을 들고 합세했다. 총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화약통이었다. 기다란 철통에 화약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폭발하여 탄환이 날아가는 장치였다. 방아쇠가 없어 간편했으나 심지에 붙은 불이 화약에 닿을 때까지 기다리는 단점短點이 있었다. 따라서 대상 짐승에게 소리를 쳐 짐승이 멈칫 서는 사이에 발사되어야 성공이다. 만약 화약이 폭발하기 전에 달려들면 낭패狼狽다. 만약 화약이 폭발하기 전에 대상짐승이 달려들면 창을 든 조수들이 사냥꾼을 보호해야 한다. 그날 아침의 조수는 모두 다섯 명이었고 마을에서는 내노라하는 장정壯丁들이었다. 올가미 주변이 쑥대밭이었다. 올가미를 걸어놓은 나뭇가지는 어른 팔뚝보다 큰 가지인데 생체로 찢어져 없어지고 올가미도 없었다. 올가미에 걸린 호랑이가 펄쩍펄쩍 뛰면서 발악을 했다. 올가미는 명주실을 꼬아 만들었으므로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호랑이는 1m나 되는 올가미와 팔뚝만한 나뭇가지를 목에 달고 갔다. 나무토막이 끌려간 자리는 비로 쓴 것처럼 명확하게 자국이 뚜렷했다. 나무토막이 풀에 걸리면 풀이 통째로 뽑혔다. 잔솔에 걸리면 한바탕 지랄을 쳤다. 한 시간 쯤 후 김이 나는 호랑이똥을 발견했다. 호랑이가 추격대를 발견하고 솔밭으로 숨었다. 솔밭이 어두워 호랑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젠 독안의 쥐야.’
박촌장이 중얼거렸으나 호랑이와 쥐가 다르다는 것은 그가 더 잘 알고있었다. 박촌장이 화약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어슬렁 어슬렁 솔밭으로 들어갔다. 그의 좌우에는 긴 창을 든 장정들이 박촌장을 보호했다.
(어디로 갔을까?)
비린내가 났다. 가까운데 있다는 증거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앗! 저기다.’
불과 10여 미터 거리에 커다란 고목枯木이 있었는데 그 뒤에 호랑이꼬리가 보였다.
‘이 놈! 썩 나오지 못 할까?’
옆 사람이 기절을 할 정도로 고함을 쳤다. 호랑이가 으르렁거렸다. 나직하지만 등골이 오싹해지는 소리다. 나무 뒤에서 일어선 호랑이가 상반신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쏘아봤다. 황소만한 놈이었고 파란 눈빛이 사람들을 마비시켰다. 대담무쌍한 박촌장도 팔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촌장이라는 책임과 어른이라는 명예가 있었다. 어른이 호랑이에게 벌벌 떨었다면 자손대대子孫代代로 치욕恥辱이 될 게 아닌가? 박촌장은 떨리는 손으로 화약심지에 불을 붙이려고 더듬거렸다. 철통에는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에 불이 붙은 심지를 집어넣어야 화약이 폭발한다. 그런데 호랑이와 마주보고있는 눈을 돌리면 호랑이가 덮쳐들 것 같아 눈을 돌리지 못 해 심지구멍을 찾지 못 했다. 당황한 박촌장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불 받아라! 호랑아.’
고함을 치며 얼핏 심지를 구멍에 쑤셔넣었다. 철통을 호랑이 가슴으로 쑥 내밀며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천만다행千萬多幸이었다. 사실 호랑이는 그 이전에 벌써 몸을 날렸다. 그런데 나무토막이 나무뿌리에 걸려 상반신만 우뚝 서고 뛰어나가지 못 했다. 총성이 울렸다.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철통이 불과 연기와 납덩이를 한꺼번에 토했다. 유연油煙화약에서 나오는 시커먼 연기가 연막煙幕처럼 주변을 뒤덮었다. 박촌장은 총의 반동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으나 이내 일어서며
‘이 놈! 불맛 봤느냐?’
고 외쳤다. 박촌장의 탄환이 엉거주춤 일어선 범의 심장에 명중했다. 그러나 호랑이는 집요執拗했다. 연가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또 무서운 광경을 보았다. 호랑이가 길길이 뛰어올랐다. 그러나 나무토막이 나무뿌리나 잔솔에 걸렸다.
‘모두들 물러서! 뒤로 물러나!’
박촌장이 소리치기도 전에 사람들은 이미 물러섰다. 아니 도망을 쳤다. 그러나 호랑이는 뛰다가 자그마한 나무밑둥에 줄이 감겨 꼼짝도 못 했다. 그때 물러섰던 장정이 창으로 호랑이의 심장을 찔렀다. 대호는 무게 300Kg의 숫컷이었으며 140원(현재가치 1400만 원)에 팔렸다.
‘그건 내 총이 잡은 게 아니라 올가미와 총이 합작해서 잡았어. 그러니 총을 나는 숱한 맷돼지를 잡았어.’
진돗개를 시켜 맷돼지를 꼼짝 못 하게 몰아놓고 쏘았다. 유연화약을 한 주먹이나 넣는 거라 관통력貫通力이 대단했다. 앵두만한 납덩이가 맷돼지의 뼈를 부수고 몸을 뚫고나올 때도 있었다. 총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철통에 금이 갔다. 그래서 굵은 철사로 철통을 감아서 사용했는데 손에 화상火傷을 입었으므로 그 총은 헐값으로 팔고 마을 공동기금으로 최신식 총을 구입했다. 곰 한 마리를 판 값에 5원을 더 얹어주고 일본인 자전거상에게서 산 총은, 내가 보기에는 일본군대가 사용하는 구식舊式 무라다 단발총이었다. 얼마나 사용했던지 네모 노리쇠가 동그랗게 닳았다.
‘이것뿐인줄 아슈? 또 한 자루 있어요. 그건 비밀이요.’
또 한 자루의 총은 일본군대에서 사용하는 구식장총을 개조한 것이다. 총신을 짧게 잘라내고 개머리판도 깎았다. 일본군대가 알면 압수당하기 때문에 감춰두었다가 산돼지사냥에만 사용했다. 며칠 ㅈ나에는 나무꾼의 정보를 듣고 뼈다귀산 동굴에서 그 총으로 곰사냥을 했다. 마을의 장정 다섯이 나섰다. 박촌장은 뼈다귀산 중턱 참나무숲에서 곰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곰이 동면을 하기 위해 좋아하는 도토리은 따먹은 흔적도 있었다. 나무꾼의 정보는 정확하지 않고 과장誇張된 정보도 많았다. 호랑이가 삵괭이가 되고, 곰이 오소리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동굴은 남향이고 동굴 주변이 깨끗이 청소가 되어있었다. 곰은 남향을 좋아하고 동면하기 전에 발자국을 지우려고 주변을 청소하는 버릇이 있었다. 세심하게 동굴을 조사한 박촌장이 빙그레 웃었다. 동굴에서 3 - 4m 떨어진 곳에 낭떠러지가 있었는데 쓰레기 하치장荷置場처럼 지저분했다. 낙엽과 마른 풀, 짐승의 똥과 곰털이있었다. 마을사람들의 곰사냥은 예부터 전승傳承되어온 방법이다. 동굴 앞 10m 지점에 창꾼 둘을 배치하고 그 가운데 박촌장이 총을 가지고 대기待機한다. 동굴에서 나온 곰에게 발포하고 다음에는 창꾼들이 처치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잡목림에서 마른 나무가지를 가지고와서 굴입구에 쌓아놓고 그 위에 청솔가지를 덮어 불을 피우면 엄청나게 연기가나오고 그 연기가 바람의 방향에 따라 굴로 들어가면 곰이 견디지 못 하고 뛰어나온다. 바람의 방향에 맞춰 불을 놓아야 한다. 불이 붙고 바람의 방향이 맞으면 긴 장대로 불더미를 굴에 밀어넣는다. 그러나 일단 굴속에 숨어있는 곰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청솔가지가 동원된다. 청솔가지에는 관솔이라는 송진이 있어 불이 붙으면 새카만 연기煙氣가 난다. 그 연기는 단 1분만 쏘여도 숨이 막힌다. 곰은 인내심이 무척 강하다. 그러나 그 인내심도 한계가 있다. 격노한 곰이 웍웍거렸다.
‘됐어! 나무꾼들은 비켜!’
창꾼들이 한 발 앞으로 나선다. 강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연기가 통째로 굴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동굴의 고함소리가 딱! 멈췄다. 위험신호다. 검은 연기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대포알처럼 퉁겨나왔다. 불붙은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박촌장이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발사를 했다. 그 자세는 정확하게 사격을 하는데는 유효하나 맹수사냥에서는 매우 위험한 자세다. 맹수가 돌격을 하면 피할 수가 없다. 박촌장이 쏜 총탄은 곰의 어깨를 뚫고 아랫배로 들어갔다. 그 타격으로 곰이 굴렀다. 창꾼들이 곰에게 덮쳤다. 첫 번째 창은 빗나가 곰의 팔을 찔렀으나 두 번째 창은 정확하게 곰의 심장을 찔렀다. 곰이 발악을 했다. 노호를 하며 뛰어올랐다. 그 바람에 창꾼이 나가떨어졌다. 창군 한 사람은 스스로 굴러 낭떠러지 밑으로 굴렀으나 또 한사람은 나무뿌리에 걸려 벌러덩 넘어졌다. 위험했다. 두 개의 창을 몸에 꽂은 곰이 일어섰다. 그대로 두면 창꾼은 걸레처럼 찢어진다. 절대절명의 순간, 박촌장의 제 2탄이 발사되었다. 곰이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래도 요즘에는 총 덕분에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옛날에는 죽은 사람도 있었어.’
곰사냥을 하다가 한 사람이 죽고, 세 사람이 병신이 되었으며, 가벼운 상처를 입은 사람은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대나무창으로 곰을 잡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으나 사람들은 곰의 버릇을 이용했다. 본디 곰이 싸움을 할 때 고약한 버릇이 있다. 상대를 끌어당겨 죽이는 방법이다. 자기 힘을 믿고 상대를 제압制壓하려고 한다. 또 동작이 느려 떨어져 싸우면 불리하다. 곰의 앞발에 끌려들면 호랑이도 허리가 꺾인다. 늑대 같은 짐승은 양 다리를 잡아 쭉! 찢어버린다. 허리를 껴안고 물면 뼈까지 잘려나간다. 그래서 옛사냥꾼들은 곰의 힘을 역이용했다. 창으로 곰을 찌르면 곰은 창을 빼지 않고 오히려 자기 앞으로 잡아당긴다. 배에 찔린 창을 잡아당기면 창끝이 배를 뚫고 등으로 튀어나온다. 곰굴에 연기를 피워넣으면 견디지 못 한 곰이 나온다. 창꾼들이 창을 던진다. 곰은 몸에 박힌 창을 모두 다 잡아당겨 스스로 죽는다. 박촌장의 밤새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박촌장이 삼촌을 따라 첫사냥을 나갔다가 표범을 잡은 얘기를 해주었다. 표범이 마을을 침입하여 닭장을 털어갔다. 다음날에는 돼지를 물고가고 그 다음날에는 양을 잡아갔다. 그래서 사냥대를 조직하여 표범을 쫓았는데 표범이 나무 위에 숨어있는 걸 사냥대의 지휘자였던 박촌장의 삼촌이 발견하여 창을 날렸으나 창이 표범의 양 다리 사이에 끼었다. 표범은 사람들을 보고 달아나려다가 창에 다리가 걸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삼촌 옆에 있었던 박촌장이 주저없이 창을 날렸다. 그 때 쯤 달리는 토끼를 쫓아 창으로 명중시키는 솜씨였다. 박촌장의 창이 표범의 옆구리를 뚫었다. 표범이 삼촌과 박촌장이 코앞에 떨어져 덮쳐왔다. 삼촌이 박촌장을 뒤로 밀어냈고 사냥대가 들이닥쳐 표범을 난자亂刺 했다.
‘아, 이 사람들아, 그만들둬!’
표범은 가죽도 못 쓰게 난자당했는데 가축을 죽인 마을사람들의 분노였다. 그 일로 박촌장은 열다섯 어린 나이에 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맹수사냥에서는 박촌장이 으뜸이지만 꿩이나 날짐승을 잡는데는 황노인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황노인은 까투리울음소리를 흉내내서 장끼를 불러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숲속에 숨어 새울음소리를 내서 새들을 불러들여 그물을 던져 새를 잡았다. 명주로 짠 그물은 납덩이를 달았는데 황노인이 던지면 그물은 화살속도로 10m나 날아가 공중에서 낙하산落下傘처럼 퍼졌다.메추리 같은 새는 한 번에 대여섯 마리가 잡혔다. 황노인은 새들의 습성習性을 연구하여 꿩이나 메추리는 물론이고 오리나 기러기도 잡았다. 또 긴 장대 두 개에 그물을 묶어 세워 새들이 날아다니는 길목에 세워두고 새를 잡고, 멀리 호수나 강에 가서 물새를 잡기도 했다. 물새는 총은 물론 그물도 없이 손으로도 잡았다.
‘정말이냐?’
고 물었더니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허나 듣고보면 아무 것도 아냐.’
새들은 봄 또는 여름에 털갈이를 한다. 야생동물처럼 옷을 바꿔입어야 된다. 물새들 중에는 옷을 바꿔 입다가 날개털이 너무 많이 빠져 날지 못 하는 바보들이 있지. 새 털이 나오기까지 날지 못 하는 새를 잡는거야. 황노인은 꿩알을 마치 닭장에서 달걀을 가져오는 것처럼 줍는다. 꿩은 초여름에 산란産卵을 하는데 황노인은 산란장소를 꿩 보다 더 잘 안다. 해마다 때가 되면 마을사람들은 꿩알을 먹는다.
‘그까짓 꿩알쯤이야 얼마든지 주워올 수 있지만 너무 주워버리면 씨가 마르지. 또 부화孵化된 꿩알은 손대지 않아.’
황농니의 재주 중에서 가장 신기한 건 채찍으로 토끼를 잡는 방법이다. 토끼는 겁이 많은 짐승이며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매나 독수리다. 그들이 덮쳐들면 토끼는 오금을 못 펴고 앞발로 머리를 감싸며 눈을 감아버린다. 황노인은 그런 토끼의 습성習性을 이용하여 토끼를 잡았다. 휙휙소리가 나는 회초리소리가 마치 매가 달려들면서 내는 소리와 같아 회초리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면 토끼는 매가 덮쳐드는 걸로 알고 머리를 감싸고 오금을 못 펴고 주저앉아 있는 토끼를 아들이 달려가서 사로잡는다. 사로잡은 토끼를 토끼농장을 만들어 길렀다. 늑대, 너구리 등 야수野獸 토끼농장을 침입해서 실패했지만 한 때는 토끼농장이 번성繁盛했다. 황노인은 최근에 새로운 새잡이방법을 개발했다. 잠자고 있는 새들을 찾아 갑자기 전등불빛을 들이대면 새들은 일순간 눈이 멀어 땅에 떨어진다. 떨어진 새들을 주워온다. 맹수사냥의 박촌장, 새잡이 황노인 그리고 또 하나 덫이나 틀을 만드는 곰보 박영감은 얼굴이 많이 얽은 곰보이며 오른손 손가락이 두 개 없었으나, 목수 아버지 밑에서 사냥연장鍊匠 - 활, 창과 칼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마을의 무기武器 책임자가 되었는데 마을의 생게生計 태반太半을 책임지고있었다. 그가 함정이나 틀 설치한 곳에는 반드시 X자字 기호가 표시되어있다. 가까이 가지말라는 위험신호이며 그 기호를 무시했다가는 봉변을 당한다. 그가 만든 함정이나 덫을 사람들도 식별할 수 없다. 그가 덫을 설치할 때는 아들들 이외 아무도 데리고가지 않는다. 곰보영감은 짐승들이 물을 마시러 다니는 길,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려놓고 세심하게 지형을 살펴보고 집에 돌아가 덫을 만든다. 한나절에 걸쳐 덫이 완성되면 덫을 놓을 짐승길목을 찾아 적당한 나무를 골라 세 사람이 휘어잡는다. 휘지 않으면 관솔불로 지지고 깍아내서 휘어잡아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에 철사올가미를 걸어 나무 끝에 설치한다. 그리고 말뚝을 박아 올가미를 걸고, 올가미를 건드리기만 하면 낚시바늘이 자동으로 튕겨나가 올가미가 작동을 한다. 올가미에 걸린 짐승은 나무가 퉁겨져오르는 탄력으로 올가미에 목이 조여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몇 번이나 실험을 하며 완성되어야 설치를 한다. 설치 후에는 짐승들이 올가미가 있는 길로 가도록 주변의 나무가지를 쳐내기도 하고 돌로 옆길을 막는다. 그래서 짐승들은 자연스럽게 그 길로 가고 때로는 세금을 걷으러온 면직원이 걸리기도 했다. 지나가던 나무꾼이 발견을 못 했으면 면직원을 잡을뻔 했다. 곰보영감은 여우, 족제비나 너구리를 잡는 틀도 만들었다. 짐승들은 원래 네모반듯한 걸 싫어하고 회피한다고 절대로 네모틀은 만들지 않았다. 동그란 원형元型틀에 짐승들이 걸렸다. 틀에 먹이를 놓고 강력한 용수철로 먹이를 연결해서 주둥이가 먹이에 닿는 순간 용수철이 퉁겨져서 자동으로 문이 닫힌다. 곰보영감은 마을 주위에 함정 여섯 개, 덫 여덟 개 그리고 틀 서른 개를 설치했다. 그는 매일 날이 밝으면 아들들을 데리고 함정 순례巡禮를 하는데 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어젯밤 꿈에 맷돼지가 보였는데 ….)
(며칠 전에 본 은색여우가 혹 ….)
평균 한 달에 맷돼지 네 마리, 노루 다섯 마리 그리고 토끼가 마흔 마리 정도였다. 재수 좋은 날은 곰보영감만 행복한 게 아니다. 곰보영감의 아들들이 맷돼지를 들것에 매고 돌아오면 마을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마을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 맹수사냥꾼 박촌장, 새잡이 황노인 그리고 틀잡이 곰보영감은 마을의 중추中樞였으나 문제는 세 어른들이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다. 특히 박촌장과 곰보영감은 친척인데도 입씨름이 잦았다. 사사건건事事件件 의견 충돌이었다. 정학히 말하자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심했다. 싸움의 원인은 총질이었다. 마을 주변에 함정을 만들어놓은 곰보영감은 총질을 싫어했다. 총소리에 짐승들이 달아나버리는 게 이유였다. 박촌장도 인정하고 되도록 마을 주면에서는 총질을 삼갔으나, 바로 눈앞에 집채만한 맷돼지가 지나가는데 총을 든 포수가 보고만 있으라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총을 쏘고는 걱정이 앞선다.
(그 신경질영감이 또 삿대질을 하고 덤비겠지 ….)
나는 그 영감들의 인심을 얻으려고 담배, 설탕과 화약을 선물로 주고 술을 마시면서 그들의 환심歡心을 샀다. 내가 그 마을을 찾아간 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당시 나는 영국 왕실박물관의 지정엽사指定獵師였는데 박물관에서 필요한 동물수집이 내 임무였다. 도꾜에 있는 영국대사관직원이 나를 찾아와 아주 어려운 청탁을 했다. 한국에서 서식하는 여러 들짐승, 날짐승되도록 많이 생포生捕해달라는 청탁이었다. 그러나 나는 짐승을 총으로 쏘아 잡는 포수이지 생포를 할 수 있는 틀잡이가 아니다. 박물관에서는 내가 사슴을 사로잡았다는 얘기를 듣고 나에게 부탁하면 어떤 짐승이라도 사로잡아주리라고 판단한 모양인데 그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수소문搜所聞한 결과 두륜산을 찾아간 것이다.
‘산새를 사로잡아달라고?’
그물 던지기명수 황노인이 내 말을 여러번 되풀이 하더니 담배를 한 모금 빨며 생각에 잠겼다. 무리한 부탁임에 틀림없다. 산새는 꿩 비슷한 새다. 크기, 생김새와 습성도 같다. 뚜렷이 다른 게 꼬리다. 꿩 보다 훨씬 길고 아름답다. 그리고 산새는 인가人家 부근에서 사는 꿩과 달리 깊은 산속의 산림에서 살며 동작이 훨씬 민첩하다. 나래를 펴고 나는 모습이 화살처럼 빠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미터를 날아간다. 따라서 산새는 총으로 잡기도 매우 어려운 새인데 하물며 그 산새를 사로잡아달라고 했으니 황노인이 선뜻 답을 못 한 것이 무리가 아니다.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겨있던 황노인의 대답은 내가 예상한 바와 달랐다.
‘산새를 잡으려면 하루 종일 걸려야 될 걸 …. 왼종일 그 놈만 따라다녀야 된단말야.’
황노인이 선뜻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 <왼종일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잡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왼종일> 품이 든다는 문제였다. 시간과 허비虛費하는 그 하루가 문제였다. 나는 웃었다. 산새를 잡으면 십 원을 내겠다고 했다.
‘십 원?’
황노인의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당시 십 원이면 쌀 두 가마니값이었다.
이튿날 황노인은 울긋불긋한 채색彩色 단장丹粧을 하고, 어깨에 그물을 매고 허리에 자루를 차고 나타났다. 채색 옷이 가을 낙엽과 어울려 뒤를 따라가는 내가 황노인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꿩은 막되먹은 쌍놈이야. 산새가 고고孤高한 선비라치면 ….’
꿩은 마을 가까운 들산에 살면서 낮에는 산중턱의 모래밭에서 놀다가 아침 저녁이면 마을에 나타나 콩이나 옥수수를 훔쳐먹고 지렁이 개미 등 곤충昆蟲을 잡아먹는다. 장끼는 여러 마리의 까투리를 거느리고 4, 5월의 생식기生殖期가 되면 까투리 쟁탈전爭奪戰도 벌어진다. 장끼는 영토를 넓히려고 영토 위를 날아다니며 운다. 그 때 쯤이면 황노인은 장끼울음소리를 흉내내면 미련한 장끼가 자기 영토를 침범한줄 알고 노발대발怒發大發하여 덤벼든다고 하며 웃었다.
‘꿩은 미련해. 그저 많이 쳐먹고 덮어놓고 계집질이나 하는 잡놈이지. 그러나 산새는 꿩과는 사촌지간四寸之間이라도 처신이 깔끔해.’
산새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고고하게 산다. 바위이끼, 열매나 씨를 먹는다. 물을 좋아한다. 하루 한 번씩은 계곡에 내려와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고 모래찜질도 한다. 일부일처一夫一妻다. 여러 마리가 데를 지어사는 꿩과 달리 산새는 깊은 산중에 홀로 산다. 그 아름다움은 꿩과는 비교될 수 없다. 황노인은 산새의 습성을 잘 안다. 산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때문에 푸른 산림 위에서 나는 그 화려한 모습은 선명하다. 그래서 포수는 산새가 사는 곳을 알게되고 깔끔한 성미 때문에 사는 곳이 일정하다. 하루 한 번은 반드시 물을 마시러 계곡을 찾는데 그 장소도 일정하다. 특히 그물로 산새를 잡으려면 그런 계곡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정오께 산새가 사는 산림에 도착했다. 심산유곡이었으며 아름들이 고목이 울창한 숲이다.
‘지금 쯤 산새들이 계곡에서 물을 마실 때야.’
아주 좁은 계곡이었다. 도끼로 바위를 찍어 갈라놓은 듯 계곡의 사이가 10m도 못 된다. 내가 계곡으로 내려가 산새를 몰면 바위 위에서 기다리는 황노인이 그물을 던져서 잡는다. 황노인은 네 발로 기더니 나중에는 납작 엎드려 뱀처럼 기었다. 황노인이 벼랑 가까이 기어가 벼랑 밑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흔들었다. 따라오라고 신호를 보내고 30m 쯤 가서 다시 목을 내밀고 계곡을 보았다. 이번에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더니 신호를 보냈다. 내려가서 산새를 몰아라는 신호였다. 황노인처럼 기어서 맑은 물이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기어갔다. <산새다!> 숨이 확! 막혔다. 아름다웠다. 노랑 파랑 빨강 그리고 초록색이 치장한 산새는 꿩이라고 보기 보다는 공작孔雀에 가까웠다. 산새 - 털은 열대지방의 새들 같은 원색原色이 아니고 색깔이 융화되었으며 그 찬란한 꼬리는 30Cm가 넘었다. 감각이 예민한 산새가 느낌만으로 긴장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이내 나를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총알처럼 빨랐다. 논 깜박할 사이에 10m나 되는 계곡을 단숨에 돌파突破하여 공중에 높이 솟아올랐다. 바로 그때, 산새가 계곡을 벗어나려던 찰라 황노인의 그물이 하늘에 뜬 구름처럼 펼쳐졌다. 산새가 빨랐지만 황노인의 그물이 더 빨랐다. 산새가 날아가는 바로 머리 위에 그물이 펼쳐졌다. 낙하산처럼 펴진 그물에 산새가 뛰어들었다.
‘잡았어! 잡아!’
황노인이 고함을 쳤다. 아이들처럼 흥분한 고함소리였다. 새를 총으로 쏘아 잡는 기분과 사로잡는 기분은 전혀 달랐다. 황노인은 계속 내가 사로잡아달라는 새들을 조달調達했다. 들꿩, 맷돼지, 맷비둘기, 도요새와 까마귀 등 모두 열세 마리를 사로잡아주었다. 틀잡이 곰보영감도 내 요구에 맞추어 틀과 덫을 만들어 다람쥐 두 마리, 토끼, 너구리, 오소리, 족제비와 여우를 잡았다. 노루와 맷돼지새끼도 두 마리 잡았다. 노루와 맷돼지새끼는 런던의 왕실박물관에 보냈는데 런던의 유명한 리젠파크동물원의 간청懇請으로 인계됐다. 그 공로로 왕실국립박물관에서 감사장을 받았다. 내가 약 한 달만에 두륜산을 떠나려고 한 날 눈이 내렸다. 마을사람들이 하루만 더 있어달라고 간청했다. 송별잔치를 한다고 했다. 마침 눈이 내렸기 때문에 훑치기사냥을 해서 잔치에 쓸 짐승을 잡을 계획이었다. 눈이 내리면 의례히 훑치기시냥을 했는데, 마을사람들이 남녀노소 총동원되어 작은 산을 포위해서 몰이를 하여 포위된 짐승을 모두 잡는다. 나는 잔치보다도 그 사냥에 흥미가 있었다. 마을사람 50여 명이 총동원되었다. 이미 새벽에 박촌장은 사냥터로 떠나 짐승들이 많이 모인 사냥터를 물색했다. 산을 네 개나 넘었을 때 박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도 풍년이야. 맷돼지, 노루들이 꽤 많아. 여름장마를 염려했는데 가을날씨가 좋아 짐승풍년이 되었어.’
사람들은 긴 장대나 대나무창, 나팔이나 꽹가리를 들었다. 박촌장의 지휘로 짐승을 골짜기로 몰아넣고 북쪽 산으로 몰아올릴 계획으로 작전을 짰다. 북쪽 산마루에는 길이 20m의 그물이 짐승길목에 펼쳐졌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곧 토끼들이 먼저 튀어나오고 산돼지 모습도 보였다. 노루도 있었다. 산돼지 두 마리, 노루 한 마리 그리고 토끼는 20마리 정도였는데, 산돼지 한 마리는 200Kg이 넘는 거물이었다. 산돼지는 몇 번이나 포위망을 뚫으려고 돌진하다가 쫓겼다. 사냥이 고비에 이르자 몰이꾼들은 바다의 어망漁網을 좁히듯 몰이를 했고 토끼는 산마루에 친 그물에 메뚜기처럼 뛰어들었다. 그런데 거물급 산돼지가 발악을 했다. 그물에 돌진했다가 코가 그물에 걸렸다. 미련한 산돼지는 뒤로 빠져나갈 생각을 못 하고 계속 그물을 밀어부쳤다. 그물이 위험했다. 박촌장이 발사했다. 맷돼지의 어깨에 맞았다. 내가 네델란드제 5연발로 연거푸 세 발을 쏘았다. 산돼지가 무릎을 꿇었다. 마을사람들은 연발총의 발사를 처음 보았다. 산돼지가 거꾸러지자 환성을 질렀다. 그 사이에 박촌장이 재장탄을 하고 노루에게 발사했다. 산돼지 두 마리, 노루 한 마리, 토끼 열여덟 마리와 오소리도 잡혔다. 마을사람들은 정말 훌륭한 사냥꾼들이었고 송별잔치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내년에 꼭 다시 오라고 간청을 했다. 약속은 지키지 못 했으나 추억은 오래토록 남았다.
99. 윤원술포수
사냥 - 특히 맹수사냥을 할 때 같이 하기싫은 포수가 있다. 경험이 없는 포수, 경망輕妄스러운 포수와 허풍이 심한 포수와 사냥은 위험하다. 총을 함부로 다루는 포수를 등 뒤에 두고 사냥을 하는 것은 맹수사냥 보다 더 위험하다. 반대로 경험이 많고, 침착하거나 노련한 포수와 같이 사냥을 하면 위험성이 반감半減된다. 윤원술포수는 포수의 귀감龜鑑이다. 윤포수는 나 보다 여덟 살 많고 함경북도 무산 출신이다. 무릇 포수의 자격은 그의 총을 보면 아는데 윤포수는 고급 총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늘 잘 손질을 했다. 서양에서 수입한 총은 한국인의 체구에는 맞지 않았다. 윤포수는 총대를 깎고, 증기蒸氣로 찌기도 해서 자기 몸에 딱 맞게 개조했다. 총포상銃砲商도 가치를 인정했다. 총뿐만 아니라 데리고있는 개들도 혈통血統을 자랑하는 고급개가 아니었으나 훈련이 잘 되어 민첩하고 용감했다. 내가 윤포수와 처음 만난 건 무산에서 산돼지사냥을 할 때다. 초超거물급 산돼지를 추적하고있었는데 400Kg이 넘는 그 산돼지는 가슴팍에 총탄을 맞고도 필사적으로 도망치고있었다. 나는 산돼지가 흘린 피를 보고 어차피 죽을 거라고 판단하여 천천히 추적을 했다. 산돼지는 고통과 분노로 사나워져 덮어넣고 뛰었으며 산을 하나 넘고 계곡으로 도망갔다. 산봉우리에서 보니 산돼지가 잔솔이 밀생한 산중턱을 내려가고있었다. 허나 거리가 너무 멀어 발사를 주저하였는데 그때 계곡에서 윤포수가 나왔다. 윤포수의 위치에서는 충분히 쏠 수 있었는데 윤포수는 겨냥만 하고 쏘지 않았다. 산돼지가 더 접근해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침착한 포수였다. 산돼지는 10m 거리에서 윤포수를 발견했다. 윤포수에게 돌진했다. 발사했다. 정확한 솜씨다. 산돼지가 폭 꼬꾸라졌다. 윤포수는 제 2탄을 쏘지 않고 산돼지를 살피고있었다. 산돼지는 한 발의 총탄으로 죽지 않는다. 앞발을 내밀고 엎드려있다가도 돌진하여 포수를 들이받는다. 윤포수는 산돼지가 죽었는지 아직 살아있는지를 살폈다. 죽은 산돼지를 놓고 윤포수와 나는 미묘微妙한 관계에 놓였다. 첫탄을 쏘아 중상을 입힌 건 내 총탄이고 윤포수의 2탄은 산돼지를 절명시켰으므로 누구의 소유인가? 윤포수가 죽은 산돼지의 가슴에 박힌 총탄을 확인하더니 웃었다.
‘공연한 헛수고를 했군.’
산돼지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사냥꾼다운 깨끗한 태도였다.
‘아닙니다, 이 건 반반으로 합시다.’
당황해서 내가 말했다. 그러나 윤포수는 머리를 저었다. 그래서 서로 주장을 되풀이하다가 날이 어두워졌으니 일단 산돼지를 운반해놓고 보자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산돼지를 윤포수집으로 운반했다. 윤포수의 ㅈ비에 들어서자 그가 평범한 시골포수가 아닌 걸 알았다. 마당이 넓은 기와집이었는데 서너 마리 사냥개들이 주인을 환영했다. 사랑방에는 표범과 곰털이 깔렸고 총이 다섯 자루 걸려있었다. 윤포수는 부유한 지주地主였으나 농사는 집사執事에게 맡기고 사냥을 직업으로 하는 프로포수였다. 그때부터 사냥친구가 되었는데 다음 해 가을 사람을 서울로 보내 초청을 했다. 무산 북방 아미산 부근에 곰들이 설치고있으니 같이 사냥을 하자는 초청장이다. 나는 유명한 몰이꾼 정춘섭씨를 데리고 갔다. 윤포수의 사랑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지서순사支署巡査, 면직원, 일본인 목재회사 이와다상회 간부幹部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이와다상회는 아미산에서 춘양목(한국 소나무)을 벌채하여 함흥으로 운반할 계획이었는데 곰 때문에 나무꾼들이 산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함경북도 도청道廳에 진정陳情을 했고 그 진정서 때문에 현지의 순사와 면직원이 상부上部로부터 호된 질책叱責을 받았다. 그래서 그 날도 순사가 화풀이를 했다.
‘도대체, 나무꾼들이 겁쟁이요. 그깐 곰 때문에 산에 들어가지 못 한단 게 말이 돼나?’
‘그깐 곰이라니요. 사람을 잡아먹겠다고 덤비는데 어쩌란 말이요?’
‘아, 사람이 셋이나 있었는데 곰 한 마리를 보고 도망을 쳐?’
‘나무꾼들은 마쓰무라순사처럼 용감하지 못 하니까요.’
마쓰무라순사는 그 말을 못 들은 채 하고 나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서울에서 포수양반이 왔으니까 문제없어. 그렇지요?’
그때 아무 말 없이 총에 기름칠을 하고 있던 주인 윤포수가 참견을 했다.
‘서울양반은 몸에 철판이라도 두른줄 아시오?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곳은 지형地形이 아주 고약해서 이번 사냥은 위험합니다. 우린 물론 최산을 다 하겠지만 너무 큰 기대는 마시오.’
윤포수의 말은 옳았다. 이튿날 새벽에 현장에 도착한 나는 울창한 삼림을 보고 위험을 직감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나무가 밀생하고 낙엽은 발목이 빠질 정도였기 때문에 곰사냥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개를 풀었다. 개들이 신중하게 추적을 했다. 4 - 500m 쯤 나가더니 맹렬히 짖었다. 정서방이 곰이 방금 지나간 자국을 가리켰다. 잡목이 부러지고 낙엽 위에 발자국들이 있었다.
‘역시, 한 마리가 아니군.’
윤포수가 말했다. 곰은 세 마리였는데 어미곰과 새끼곰 두 마리다. 두 마리의 새끼도 다 자란 놈들이다. 잘못 걸렸다. 새끼를 데리고있는 곰이 가장 위험하다. 본디 검은곰은 함부로 사람에게 덤비지 않는다. 그러나 새끼를 데리고있으면 예외다. 곰들은 도토리를 따먹다가 개들이 오는 걸 알고 부근 가시덤불로 피했다. 가시덤불은 가시나무와 나무뿌리들이 철조망鐵條網처럼 얽혀 접근할 수 없다. 개들도 감히 들어가지 못 하고 주위를 빙빙 돌면서 짖기만 했다. 몇 백 평이나 되는 넓은 곳이기 때문에 곰들이 보이지도 않았다. 유포수가 정서방에게 높은 나무로 올라가 돌팔매질을 하라고 지시하고는 사냥개들에게도 숲속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개들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고 곧 곰과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곰과 개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온 산에 울려퍼졌다. 개들이 불리해진 듯 개의 비명이 들렸다. 개의 비명소리에 초조해진 내가 가시덤불속으로 들어려고 하자
‘기다려요. 곰은 결국 쫓겨나올거요.’
라며 옷깃을 잡았다. 곰들이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한 마리는 산봉우리로 또 한 마리는 산마루로 도망갔다. 윤포수가 산마루를 맡고 나는 산봉우리로 달려갔다. 산봉우리에는 나무나 바위같은 장애물이 없었고 또 내 총은 맹수용 라이플이었기 때문에 장거리사격이 가능했다. 단숨에 산봉우리까지 달려간 나는 곰을 찾다가 깜짝놀랐다. 산봉우리를 넘어 산비탈로 도망갈줄 알았던 곰이 바로 내 코앞 바위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서면서 겨냥을 했으나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곰이 먼저 내 총신을 후려쳤다. 다행히 총을 꼭 쥐고있었으므로 총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곰이 후려치는 힘으로 쓰러졌다. 그때 나는 <쁑!> 하는 탄환소리를 들었고 또 정서방의 외침도 들었다.
‘조심해! 큰곰이 거기로 간다!’
무의식중無意識中에 몸을 돌렸는데 곰이 바로 내 등뒤에 서있었다. 어마어마하게 큰놈이었다. 나는 쓰러진 자세로 두 마리의 곰에게 협공挾攻을 당한 처지였다.
(이젠 죽었구나!)
그때 또 <쁑!>하는 소리와 동시에 내 총신을 쳤던 곰이 비틀거렸다. 곰이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그 사이에 나는 일어섰다. 웬일인지 멍! 하니 서있는 곰에게 연속 두 발을 쏘았다. 그러나 도망가다가 역습을 당했던 곰이 또 뒤에서 덮쳐들었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뒹굴었다. 개들의 짖는소리, 총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고함치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면서 의식을 잃었다. 곰의 앞발치기에 뒤통수를 맞아 뒹굴면서 바위에 머리를 부딛쳐 의식을 잃었다.
‘학봉이! 학봉이!’
정서방이 부등켜 안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들었소!’
(살았구나!)
‘윤형, 어떻게 된거요?’
‘어떻게 된거라니! 곰 두 마리 다 잡았소.’
두 마리의 곰이 내 옆에 누워있었다. 가시덤불에서 개들에게 몰리자 어미가 개들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 새끼 두 마리가 달아났다. 윤포수와 내가 쫓은 곰들이다. 윤포수는 새끼곰을 쫓다가 개들이 숲에서 계속 짖는소리에 어미곰이 숲에 남아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새끼를 쫓는 내 뒤를 어미가 쫓아가는 걸 보았다. 그래서 쫓던 새끼를 놔두고 어미를 추격했다. 나는 등뒤에서 추격하는 어미를 모르고있었으나 새끼는 그걸 알고 갑자기 돌아서서 나에게 반격反擊을 했다. 내가 앞뒤에서 곰의 협공을 당하게 되자 윤포수는 40m의 원거리에서 어미곰을 쏘아 이마에 명중시켰다. 어미곰이 나를 덮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도 멍! 하니 서있었던 것은 윤포수의 총탄에 맞아 방향감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윤포수는 어미곰을 쏜 다음 새끼곰이 내 뒤통수를 쳐 내가 쓰러지는 걸 보고 또 발사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윤포수가 피가 흐르는 내 뒤통수에 옥도정기를 부어 치료를 하고는
‘정서방, 이 친구를 돌봐주시오.’
하면서 또 한 마리 새끼곰을 잡으러 갔다. 윤포수가 떠난지 약 1시간 후 총소리가 들렸다. 두 발이 연달아 울리고 잠시 후 또 한 발이 울렸다.
‘잡은 것 같은데 ….’
윤포수가 개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잡았어. 계곡으로 도망가는 놈을 산 위에서 쏘았어.’
어미곰은 무려 400Kg이 넘는 거물巨物이었고 새끼들도 200Kg이었다. 우리가 세 마리의 곰을 소달구지에 싣고 돌아오자 마을은 온통 축제 기분이였다. 목재회사의 현장감독이 술도가의 술을 통째로 사 잔치를 벌였고 지서 순경도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윤포수는 담담한 표정이었고 곰을 잡은 경위도 간단하게 설명했다.
‘어떻게 잡았냐고? 그야 총을 쏘아 잡았지. 아무리 큰 곰도 총에 맞으면 죽어.’
자기 자랑도 싫어하고, 허풍虛風도 잡담雜談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나에게만은 실토實吐를 했다.
<자네가 어미곰을 쓰러뜨린 후 새끼곰의 공격을 받고 뒹굴었을 때 난 20년 포수생활의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겼어. 내가 서있었던 곳에서 새끼곰까지의 거리는 30m 정도였는데 나는 자네의 어깨 너머로 곰의 머리 일부만을 볼 수 있었어. 사람과 곰이 거의 한 덩어리가 되어있었던거야. 그래서 곰을 볼 수 있는 위치를 찾아 옆으로 돌고있었으나 아무래도 그런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어. 동료포수가 죽어가는데 총을 쏠 수 없는 심정을 알 수 있겠나? 목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어. 초조했지. 그런데 그 때 자네가 곰에게 얻어맞고 뒹굴었고 곰의 상반신이 겨냥에 들어왔어. 방아쇠를 당겼지. 사람이 맞을 확률確率 보다 곰에게 맞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고 당겨버렸는데 그게 맞았어. 앗! 하하하 ….>
윤포수가 내 생명을 구해준 것은 그때뿐만이 아니다. 그로부터 3년 후 나와 윤포수, 일본인포수 니시무라가 합동이 돼 무산 남쪽에 있는 험준險峻한 산에서 맷돼지사냥을 했다. 여섯 마리 산돼지떼를 추격했다. 산돼지들이 우리위 추격을 눈치채고 험준한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윤포수는 산돼지들이 달아나는 곳을 짐작하고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었다. 그 골짜기는 막다른 곳으로 절벽이 가로막아 산돼지들이 절벽을 기어오르지 않는 한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형으로 봐서 산돼지는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여유있게 천천히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 해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와서 산기슭마을들은 지붕까지 눈에 묻혔다. 그래서 우리는 설피를 신고있었으나 그래도 발목까지 눈에 빠졌다. 더구나 산골짜기로 들어서자 무릎까지 눈에 파묻혔다. 그러나 여섯 마리의 산돼지를 골짜기로 몰아넣은 포수들에게 그런 것 쯤은 장애가 되지 않았다. 선두는 니시무라포수였다. 신이 난 니시무라는 눈가루를 날리면서 의기양양意氣揚揚하여 전진했으며 4 - 5m 뒤에 나와 윤포수가 따랐다. 골짜기 깊숙이 들어갔다. 산골짜기는 조용했다. 3면은 병풍 같은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절벽에는 눈이 두껍게 쌓였다. 나는 그 절벽을 보고 뭣인가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서 윤포수를 보니 윤포수도 정지를 하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그때 앞서가던 니시무라가 고함을 질렀다.
‘온다, 와! 산돼지들이 되돌아오고 있어!’
산돼지들이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전속력으로 되돌아 달려오고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보고도 피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돌진했다.
‘요시, 이젠 몰살이다!’
니시무라고 총을 들었다. 그 때 윤포수가 나지막하나 단호한 말로 명령했다.
‘안 돼! 총을 쏘면 안 돼!’
니시무라는 말의 뜻을 못 알아먹겠다는 듯 내렸던 총을 다시 들어올렸다.
‘안된다니까, 이 바보야! 총을 쏘면 눈사태가 일어나 절벽 위의 눈이 쏟아진단 말야!’
<눈사태?>
그제야 말 뜻을 알아챘다. 총을 쏘면 3면이 절벽인 골짜기에 총소리가 울려퍼져 눈사태를 유발한다는 말이었다. 윤포수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대다무쌍한 그가 그토록 겁을 먹은 표정은 처음 봤다. 그래서 나와 니시무라는 경악驚愕했다.
‘그럼, 산돼지는 어떻게 ….’
그 따위 산돼지는 내버려두고 빠르게 가능한 한 빠르게 골짜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마음이 급해서 넘어지고 쓰러지며 달렸다. 곧 산돼지들이 우리 옆으로 지나갔다. 산돼지는 야수野獸의 본능으로 눈사태의 위험을 알고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혀서 도망하고 있었다. 윤포수는 눈이 많은 지방에서 살았으므로 우리 보다 7 - 8m 앞서 달려가며 가끔 뒤를 돌아다보고 <빨리! 빨리!> 숨가쁘게 독촉을 했다. 눈속에서 허둥거리는 니시무라에게 배낭에서 줄을 꺼내 허리를 묶어 끌었다. 그렇게 우리가 골짜기입구에 도착했을 때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골짜기 위에서 수백 개의 벼락이 한꺼번에 터지는 굉음이 일어나더니 갑자기 지진이 나서 땅이 울렁거렸다. 뒤돌아보니 절벽의 눈이 바위덩어리와 섞여 산더미처럼 밀려왔다. 한 곳이 무너져내리자 연쇄반응連鎖反應을 일으켜 엄청난 눈사태가 밀려왔다.
‘앗! 눈덩이가 이리 온다!’
놀란 니시무라가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산덩이같은 눈더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뭣들 하는거야! 죽고싶어?’
윤포수가 고함을 질렀다. 그는 우리의 허리를 묶은 줄을 잡아당기며 계곡 옆 언덕으로 기어올라갔다. 언덕 위에 높이 3 - 4m 되는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위로 우리를 끌어올렸다. 우리가 바위 위에 올라가자마자 눈덩이가 우리들의 발밑으로 지나갔다. 눈가루가 날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다들 괜찮아?’
시야를 가렸던 눈가루가 사라지자 우리는 또 한 번 놀랐다. 계곡의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우리가 올라가있는 바위밑까지 눈바다가 되었다.
‘이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눈사태는 또 일어날거야. 한 번 쏟아지면 게속 되는 거야.’
‘그럼, 빨리 도망가야지?’
‘어디로, 어떻게? ’
단 한 가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눈바다를 피해 높은 곳으로, 암벽을 기어올라 대피待避하는 것이었다. 등산가들처럼 10m나 되는 암벽을 기어올랐다. 암벽을 올라가다가 동굴을 발견하여 대피했다. 눈사태는 두 번이나 더 일어났다. 바닥이 차고 눈을 뜰 수 없었으나 눈사태가 멎을 때까지 다섯 시간을 견디어냈다. 밤이 이슥했을 때 동굴을 나왔다. 달빛에 눈밭은 대낮처럼 밝았으나 죽음의 나라처럼 조용했다. 나뭇가지로 만든 들판 - 3m 정도되는 들판을 교대로 던지면서 들판 위로 걸었다. 한 개를 던져 셋이 올라가고 또 다른 들판을 앞으로 던져 타고 교대로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이튿날 새벽에 우리가 마을로 돌아오자 마을에는 구조대가 조직되어있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으며 윤포수가 없었다면, 그의 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시체도 찾지 못 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봄이 되자 등산객들이 골짜기에서 산양과 들돼지를 발견했다. 눈에 묻혀 자동냉장되어 싱싱했다. 산양과 들돼지의 시체 사이에 우리들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어느 겨울, 윤포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부상당한 산돼지를 쫓다가 심한 눈보라에 갇힌 적이 있었다. 퍼붓는 눈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날은 어두워져가고 추위는 맹렬해져 위험했다.
‘아, 이 장골壯骨들이 넷이나 있는데 이까짓 눈 때문에 죽기야 하겠나? 눈이 내리면 눈을 피할 집을 지으면 돼.’
그의 배낭에서 자그마한 손도끼, 큰 제크나이프와 긴 줄이 나왔다. 자연생 나무 네 그루를 기둥삼아 집을 지었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지붕을 잇고 눈벽돌로 벽을 치고 방안에 화덕도 만들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나뭇가지를 쳐낸 나뭇가지에서 관솔을 찍어내 불을 피웠다. 모닥불이 활활 타자 추위를 녹였다. 그래놓고 눈벽돌을 만들어 벽을 쳤다. 처음에는 엉성한 것 같았으나 보완작업을 마친 뒤에는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집에서 들짐승고기를 구워 소주잔을 기울였다. 노래도 불렀다. 소주 두 병이 동이났다. 그때 별안간 밖에서
‘다스께데(살려달라)!’
라는 일본말을 듣고 놀랐다. 문을 여니 눈사람처럼 눈을 뒤집어쓴 일본인들이 들어왔다. 다섯 명이었는데 거의 죽음 일보전一步前이었다. 우선 기운을 내도록 소주를 먹였다. 그들이 소생蘇生했다. 눈은 윤포수의 예상대로 사흘 동안 내렸다. 우리는 협력해서 지붕을 위로 올렸고 바닥에는 통나무로 마루를 깔았다. 식량이 바닥나기 전에 눈이 멈췄으며 출발하려는 대 스키를 탄 구조대가 들이닥쳤다. 우리가 구조한 일행에 일본육군소좌가 있었고 일본 대판에서 큰 사업을 하는 장사꾼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대사관과 함흥 사이에 무선전선이 야단이 나고 경찰은 우리가 모두 죽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50여 년 동안 포수생활에서 살아남은 것은 한마디로 윤포수의 가르침 때문이다.
100. 아이누개
함경북도와 만주의 국경선을 이루고있는 사악지대에서는 12월 초 눈이 내리면 포수들이 일제히 움직인다. 지방포수들은 물론 외지外地의 포수들도 나타나며 총이 없는 몰이꾼들도 단독으로 사냥터를 돌아다닌다. 눈 위에 찍힌 곰발자국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왼발이 먼저 나온 놈은 숫컷이고 오른쪽 발이 먼저 나와있는 놈은 암컷이다. 곰의 발자국을 발견하면 그게 돈이 된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동면하는 곰의 굴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정보를 포수가 산다.
1924년 12월 초, 무산 동북방 만주와 국경지대 무명無名의 산에 사건이 생겼다. 나는 지방포수 임재만과 같이 곰발자국을 찾아다니다 나무꾼들이 지어놓은 집에서 자고 아침밥을 먹고있었다. 느닷없이 나무꾼이 들이닥쳐 포수냐고 물었고, 곰발자국을 알려주면 돈을 주겠느냐고 했다. 잠시 생각한 나무꾼은 발자국을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있어도 돈을 주겠느냐고 물었으므로 그건 안 된다고 했다.
‘나 보다 먼저 발견한 사람은 아마도 곰을 잡지 못 했을거요.’
나무꾼이 우물거렸다. 그에 의하면, 사흘 전에 그와 친구 박모는 자른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기 위해 산에 들어왔다가 눈 위에 찍힌 거대한 곰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친구는 발자국을 추적해서 곰의 굴을 알아내 포수를 데리고와서 곰을 잡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제의를 거절했더니 박모 혼자 곰을 추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모는 사흘이 된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무꾼의 말을 들은 우리도 불안했다.
‘그 친구 혹 다른 데 간 게 아니요?’
‘갈 데 없어요, 여기 밖에는 ….’
곰의 발자국을 발견한 곳을 알려줄테니 박모를 찾아달라고 했고 곰값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멀지 않은 곳에 곰발자국이 있었는데 나는 그 발자국을 보고 사고를 직감했다. 길이 45Cm, 폭이 30Cm나 되는 거대한 발자국이었고 수컷이었다.
‘불곰이지요?’
임포수가 놀라 그 거대한 발자국을 보고있었다. 곰의 발자국 옆에 자그마한 사람의 발자국이 따라갔다. 박모의 발자국이다. 곰은 천천히 걷고있었는데 곰의 굴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은 종종걸음이었다. 경망한 짓이다. 곰과 사람의 간격이 좁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총을 가진 포수도 그런 짓은 안 한다. 곰은 근시近視다. 그러나 눈 보다 날카로운 - 사람 보다 몇 배나 예민한 코와 귀가 있다. 30 - 40m 이내면 어떤 물체든 쉽게 가려낸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서는 100m까지도 알아낸다. 노련한 포수가 지키는 규칙이 있다. 곰이 가는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 쪽에 서지 않는다. 추적자는 바람을 안고 따라가야 한다. 옆바람도 조심해야 하는데 언제 어느 때 바람의 방향이 바뀔지 모른다. 하물며 바람을 등에 업고 곰을 따라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우리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곰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더니 좀 빠른 걸음이 되었다. 막연이 걸어가던 곰이 바위나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면서 걸었다. 추적자를 눈치 챈 것이다. 곰은 추적자를 눈치챘으나 추적자는 그걸 모르고 여전히 빠르게 총총걸음으로 곰을 따라가고있었다. 안타까운일이다. 추적자는 바람의 방향을 무시했을뿐만 아니라 지형도 무시했다. 비단 곰뿐만 아니라 맹수를 추적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곳은 능선을 넘어설 때다. 눈으로 발자국을 추적하는 사람은 능선을 넘어설 때는 발자국을 볼 수 없다. 귀도 코도 시웢ㄴ찮은 사람이 발자국마져 안 보인다면 의지할 감각이 없다는 것이고 무방비사태라는 걸 의미한다. 맹수들은 그런 사람의 약점을 알고 능선너머에 숨어있을 때가 많다. 그도 능선을 넘어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코의 냄새로 귀의 소리로 사람의 동태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 수 있다. 몇 번이나 곰이 능선에 숨으려다가 포기한 걸 알고는 우리는 초조해졌다. 추저한지 서너 시간 쯤 되었을 때 곰과 사람이 30m 이내로 접근된 것을 알았다. 멀지 않은 곳에 능선이 있었는데 그 능선으로 곰과 사람이 가고있었다. 나와 임포수가 서로 마주 보았다. 목이 타는 듯 임포수가 눈을 한 줌 먹었다. 능선에 올라서자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한 발 앞선 임포수가 우뚝 서더니 비실비실 뒤로 물러났다.
‘홍형, 홍형! 저것봐!’
‘알고있소. 사고지요?’
처참한 광경이었다. 하얀 눈이 새빨갛게 변색되었다. 사람의 머리가 뒹굴고,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머리는 목에서 잡아 뽑혀 심줄이 길게 달렸다. 굵은 뼈와 발목도 남았다. 너무 처참한 광경이라 넋을 놓아버린 나무꾼이 중얼거렸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 그랬어, 이 사람아! 위험하다고 그만 두라고 했잖아. 기어이 고집을 부리더니만 ….’
살인곰은 잔인했다. 대개 맹수는 먹이를 잡으면 끌고가서 먹는데 이 곰은 즉결처분했다. 한 사람을 다 먹었다. 머리와 발목만 남은 시체를 묻었다. 나무꾼이 그제야 통곡痛哭을 했다. 마을에 가서 마을사람들을 총동원해서 원수를 갚겠다고 했으나 그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 돕고싶다면 무산에 가서 윤포수에게 전해달라고 편지를 써주었다. 곰사냥을 하려면 연락을 하기로 했으므로 살인곰을 잡는데 윤포수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윤포수에게는 북해도에서 구입한 아이누 개 두 마리가 있었다. 아이누 개는 곰사냥 전문 개다. 윤포수는 그 개들을 곰사냥에 부려보고싶어 금렵禁獵이 풀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곰은 추적자를 처치하고는 천천히 걸었다. 동면굴을 찾고있었다. 바위동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고목뿌리밑을 헤쳐보기도 했다. 이틀을 따라다녔으나 곰은 마땅한 곳을 차지 못 하고 여전히 돌아다녔다. 잡목림에서는 나무뿌리밑을 1m나 파고는 포기했고, 바위동굴에서는 낙엽을 수북히 모아 잠을 잤으나 포기했다. 우리는 곰이 잤던 동굴에서 잤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깜짝 놀랐다. 밤새 눈이 내렸다. 많은 눈은 아니었으나 곰의 발자국을 지워버리기에는 충분하였다.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되었다. 눈을 쓸어내며 추적을 했으나 한 시간에 겨우 20m를 전진했다. 조금 더 가자 명당明堂자리가 나왔다.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산 아래는 아름들이 거목이 울창한 밀림이었다. 흙도 곰이 좋아하는 붉은 황토였으며 낙엽이 두텁게 쌓여있었다. 그래서 곰이 반나절 동안이나 여기서 머물렀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추적을 할 수 없었다. 되돌아섰다. 살인곰을 눈앞에 두고 되돌아서는 심정은 비참했으며 마치 패잔병敗殘兵처럼 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그날 오후 우리는 멀리서 개짖는 소리를 들었다.
‘윤포수가 왔다. 개를 데리고 왔구나!’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는데 저 쪽 능선에서 하얀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개가 우리를 보더니 짖는 걸 멈추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포수를 알아본 사냥개다.
‘아이누 개다!’
정말 예뿐 개였다. 진돗개 보다는 작았으나 하얗고 긴 털이 애완용 개처럼 아름다웠다. 표정도 진돗개처럼 사납지 않고 부드러웠다. 개가 한참 재롱을 떨고있을 때 개 주인과 나무꾼이 나타났다.
‘어떻게 됐소? 눈으로 발자국이 없어져버렸을텐데 ….’
‘다 틀렸습니다. 되돌아갑시다.’
‘되돌아가다니 ….’
‘아. 발자국이 사라져버렸는데 어쩌겠소?’
윤포수가 웃었다.
‘여보. 개가 있잖소. 우리도 곰과 여러분의 발자국을 따라오다가 눈이 내려 잃어버렸으나 개가 추적을 했소.’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눈은 발자국을 지워버렸지만 발자국에 남은 곰의 냄새까지 지워버리지 못 했다. 아이누 개는 코를 땅에 대고 킁킁거리면서 추적을 했다.
‘됐어, 됐어!’
내가 안내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누 개가 우리가 따라갔던 길로 정확하게 따라갔다. 그날 저녁에는 우리가 잤던 동굴로도 안내를 했다. 동굴속에 불을 피우고 잤는데 아이누 개는 동굴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하 15도의 바깥에서 잤다. 추운 곳 태생胎生이라 더운 걸 싫어한다고 했다. 이튿날 개의 독촉을 받고 출발했다. 개는 예상대로 산중턱 잡목림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곰이 굴을 찾아 돌아다녔던 코스였다. 개는 보이지 않았으나 가끔 짖어 소재를 알렸다. 20여 분 쯤 지났을까? 요란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간헐적間歇的으로 소재를 알리기 위해 짖는 소리가 아니었다. 달려갔더니 커다란 참나무 뿌리를 보며 짖고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기괴한 광경을 보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더니 무수한 틈이 생기고 그 속에서 붉은 괴물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분노한 곰이 몸을 흔들며 땅위로 솟구쳤다. 곰이 아가리를 벌리며 개에게 덮칠 자세로 일어섰다. 구경만 하고 있을 포수가 어디 있겠는가? 세 개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불과 10m의 거리였으므로 빗나갈 이유가 없었다. 충격으로 비틀거렸으나 넘어지지 않으려고 나무가지를 잡고 나무둥치에 기댔다. 그러나 곧 주저앉았다. 일어서려고 애를 썼으나 팔다리가 마비되어 말을 듣지 않았다.
‘관두시오. 죽을테니까.’
2탄을 장전하는 포수들을 윤포수가 제지했다. 개들이 곰을 둘러싸고 짖었으나 곧 소리가 약해졌다. 곰의 숨소리에 따라 짖는 소리가 작아졌다. 그러다가 곰의 숨이 끊어지자 개들도 짖는 소리를 딱! 끊었다. 정말 영리한 개들이었다. 그 곰은 400Kg이 넘었다. 아이누 개가 곰을 ㅈ바았다는 소문이 퍼져 새로운 일꺼리가 들어왔다. 조모라는 몰이꾼이 큰 곰 세 마리가 한 구멍에서 동면하는 굴이 있다고 했다. 그건 드문 일이었으나 예외는 아니다. 어미곰은 대개 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2 - 3년 동안 공동생활을 한다. 그래서 더 상세히 물었는데 우물쭈물했다. 확실히 알고있는 게 아니라 어림짐작을 했다. 막연한 얘기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이누 개가 있다. 밤새 생각을 한 윤포수가 헛일 삼아 가보자고 했다. 우리를 안내한 몰이꾼이 무산 북쪽 4, 50리 떨어진 돌산에 도착해서는, 여기까지 추적을 했으나 눈이 내려 발자국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벌써 5일이 지났으므로 발자국은 물론 냄새도 지워져버렸다. 포기하고 돌아서려고 했는데 돌산의 지형에 발걸음이 잡혔다. 돌산이라고 하지만 잡목이 무성했다. 반나절이나 걸어온 수고도 아까워서 일단 지형을 조사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아이누 개들은 사냥을 온 것이 아니라 놀러 온 것처럼 눈밭에서 뒹굴며 장난을 했다. 우리는 동굴을 하나하나 조사했으나 곰은 없었다. 돌아갈 것인가 야영을 하고 사냥을 계속 할 것인가 논의하고 있는데 아이누 개의 태도가 달라졌다. 두 귀를 쫑긋 세워 긴장을 했다. 개가 계곡으로 달려갔다. 잡목림에서 개가 우리를 기다렸는데 곰의 흔적이 있었다. 도토리 나뭇가지가 수북하게 부러져 쌓여있었다. 곰이 도토리를 따먹은 흔적이다. 우리는 발자국을 조사하고 4 - 5일 전의 흔적이라고 판단했다. 우리의 조사가 끝나자 아이누 개가 앞장을 섰다. 발자국을 보고 가는 게 아니라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곰이 이 부근에 있을 것이다 모두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개들의 행동반경이 좁아졌다. 확실한 방향을 잡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고 저녁노을이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개를 불러들이고 동굴에서 야영을 했다. 우리는 추위에 꽁꽁 언 주먹밥을 모닥불에 녹여 먹었다. 고추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핥으며, 그러나 개들에게는 기름진 돼지고기를 줬다. 사냥의 주인공은 개들이고 우리는 보조자였으나 할 수 없다. 총의 손질을 끝내고 잠자리에 눕자 개들이 으르렁거리더니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웬일일까? 추워서 그런 건 아닐텐데 ….’
개가 뒷발로 들어와 입구를 보며 짖었다. 그대 짐승을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곰이다.
‘싸우는 소리인데?’
두 마리의 곰이 싸우는 것 같았다. 나는 총을 잡아당겼다.
‘그만 둬, 어둠속에서 뭘 어쩌겠다는거야? 저건 암수가 정사情事를 벌이는 소리야.’
‘정사?’
‘그렇지, 곰은 생후生後 3년까지는 어미가 돌보는데, 그 3년이면 새끼들도 생식生殖능력이 생겨. 성년成年이 된단말이지.’
3년이면 새끼곰은 200Kg 쯤 된다. 곰의 새끼는 반드시 암수 두 마리다. 이 남매는 한 어미 밑에서 자라고 한 동굴 안에서 컸지만 성숙成熟하면 교미交尾를 하기도 한다. 곰의 세계에 근친상간近親相姦 같은 법률은 없다. 싸움은 오라비가 누이를 겁탈劫奪하는 소리였다. 정욕情慾이 발동한 오라비가 암내를 풍기며 저항하는 누이를 위협하여 겁탈했던 것이다. 암컷의 저항은 점점 약해졌고 끝에는 서로 호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매는 사이좋게 어울려 떠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남매와 다른 또 하나의 노호怒號가 들려왔다. 엄청나게 큰 ㅗ리가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저 건 어미의 소리 같은데 ….’
‘맞아, 어미소리야.’
‘어미가 새끼들의 불륜不倫을 꾸짖는 건가?’
‘아니지, 저건 질투嫉妬야.’
놀랄일이다. 어미밑에서 성장한 새끼는 어미와도 밀통密通을 한다. 새끼를 잉태孕胎한 때부터 과부寡婦가 된 어미는 새끼가 성장하면 새끼와 교미를 해서 다시 잉태를 하는 수가 많다. 윤포수는 몇 년 전에 한 동굴에서 세 마리의 곰을 잡은 적이 있었는데 두 마리의 암컷이 새끼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새벽 서너 시까지도 잠을 자지 못 했다. 질투에 미친 어미곰이 밤새 노호하고, 비탄悲嘆에 젖어 울부짖었기 때문이다. 세 마리의 곰도 각각 흩어졌다. 어미곰부터 잡기로 하고 동굴에 가서 아이누 개를 풀어주었다. 개가 짖자 분노가 풀리지 않은 어미곰이 분풀이를 하려는 듯 튀어나왔다. 개를 우악優渥스럽게 때려잡으려는 태세態勢다. 농구공과 테니스공 만큼 차이가 났으므로 전열戰列을 정비할 필요도 작전도 필요 없다. 그러나 영리한 아이누 개는 우리들 뒤로 피신해버렸다.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 이제 포수들이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을 본 곰이 동굴로 들어거버렸다. 다시 개가 짖으며 날뛰었으나 곰은 꿈쩍도 안 했다. 개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서운 것이다. 개와 곰의 줄다리기가 반복되었다. 귀찮게 짖는 개를 쫓아나온 곰은 굴 입구를 벗어나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길 찬스를 잃었다. 아이누 개는 우리를 돌아다보고 <왜, 쏘지 않았느냐?>는 표정이다. 얄미울 정도로 영리한 개다. 윤포수가 휘파람을 불었다. 다시 동굴로 들어가라는 명령이다. 개가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 곰 가까이에서 짖는다. 이래도 안 나오고 배기겠느냐는 투鬪다. 세 번째 곰이 동굴입구에 모숩울 들어냈으나 이내 돌아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개가 곰의 엉덩이를 물었다. 곰의 다음 동작을 예견하고 행동을 한 것이다. 그 아픔과 모옥에 곰이 이성을 잃었다. 곰이 동굴 밖으로 달아나는 개를 덮쳤다. 개는 우리들 앞으로 뛰어오며 옆을 살짝 비켜서 우리들에게 발포의 공간을 만들었다. 개가 옆으로 비켜서는 순간 내 조준에 곰의 대가리가 들어오고 분노에 찬 새빨간 눈이 보였다. 눈과 눈 사이에 납덩이가 파고들었다. 곰이 헤엄을 치 듯 휘청거렸다. 그리고 일어서려는 순간 윤포수의 총이 불울 뿜었다. 단 두 발, 우리는 더 이상 총을 쏘지 않았다. 껍질에 구멍이 나는 게 싫었고 자칫 웅담이 상할 염려가 있었다. 300Kg이 넘는 붉은곰이다. 눈을 파서 곰을 묻었다. 하룻밤 사랑으로 어미에게 쫓겨난 암컷은 서북쪽으로 향했다. 영하 30도의 추위에 곰은 동면할 동굴을 찾아야 한다. 암콤은 적당한 동굴을 물색하며 고개를 서너 개를 넘었을 때 아이누 개에게 쫓겼다. 그러나 개를 모르는 곰이 개를 잡아먹으려고 덮쳤다. 개와 곰의 술래잡기가 펼쳐졌다. 쫓고 쫓기고. 그러나 곰이 모르는 게 있었다. 아이누 개는 의도적으로 곰이 모르는 사이에 곰을 사람쪽으로 한 발씩 유도했다. 그래서 미련한 곰은 영리한 개의 의도대로 포수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걸음이 빨랐으므로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아이누 개는 내가 도착한 걸 알고 더 힘차게 짖었다. 곰의 정신을 빼놓을 작정이었다. 거리, 20m에서 정지했다. 윤포수에게서 배운대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개가 곰의 콧등을 한 번 할키고는 옆으로 피했다. <자, 이젠 쏘시오.> 하는 표정이다. 첫탄은 실수했다. 곰의 목을 뚫었다. 발사하는 순간 곰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곰이 달아났다. 개가 막는 것도 무시하고 달아났다. 두 번째는 어깨에 맞았다. 그때 곰이 달아나는 방향에서 윤포수가 소리쳤다.
‘내버려둬! 내가 쏠테니.’
새끼곰은 200Kg의 성체成體였다. 잡은 새끼곰을 눈속에 묻고 마지막 곰을 추적하려고 했으나 날이 어두워졌다. 나머지 새끼의 추적은 내일로 미뤘고 어미곰을 처리했다. 웅담을 빼내고 고기를 잘라 불고기파티를 했다. 물론 제일 맛있는 부위部位의 고기는 아이누 개의 몫이었다.
다음날 새끼곰의 추적은 어려웠다. 그놈은 동면할 생각은 안 하고 무턱대고 북쪽으로 달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작년에 동면했던 동굴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60리나 되는 옛집을 찾아갔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나 하룻밤 더 야영할 여유가 없었다. 곰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동굴에서 나와 개와 술래잡기를 하였다. 잔솔이 깔린 산중턱은 총쏘기가 어려웠고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위험한 사냥이었다. 개 짖는 소리를 찾아 곰에게 접근했다. 곰이 사람을 보고 개를 버리고 잔솔밭을 기어 다가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개 짖는 소리로 짐작을 하였는데 개 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10여 미터가 되자 곰이 재빨리 덮쳤다, 아니 곰은 나를 덮치려고 했다. 곰의 발걸음으로는 불과 서너 발 거리였다. 나는 곰이 덮쳐든다는 건 알았으나 어두워 보이지 않았는데 7 - 8m 앞에서 하얀 개가 도약하는 것과 웍! 하는 개의 노호를 들었다. 개가 곰의 발뒤꿈치를 문 것 같았다.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개가 도약했던 곳을 짐작하여 발포했다. 총탄이 부드러운 물체를 뚫는 소리를 들었고 쾍! 하는 비명도 들렸다. 그리고 우지직! 잔솔을 짓밟으면서 도망가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다시 소리나는 곳을 향해 발포했다.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곰이 부상을 입고 도망갔다. 휘파람소리를 듣고 잠시 비켜서있던 개가 요란하게 짖으며 곰을 따라갔다. 개가 멀리 가지 않고 정지하여 짖는 것은 곰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개 짖는 소리가 멈춘 건 곰이 죽었다는 말이었다. 몇 분 후에 윤포수와 같이 곰의 주검을 확인했다. 내 생명을 구해준 아이누 개를 꼭 껴안아주었다.
101. 살인자殺人者
나는 벌써부터 나의 뒤를 미행尾行하는 인기척을 느끼고있었다. 오랜 사냥경험에서 얻은 6감感으로 나의 감각은 아주 예민하다. 나라고 눈이 뒤통수에 달린 건 아니지만 네 귀는 발자국소리를 분명하게 듣고있었다. 처음에는 나무꾼인가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내 그게 예사 미행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나무꾼이 발자국소리를 죽여가며 포수 뒤를 따라올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 발자국소리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긴장했다. 때가 때였다.
1947년 초겨울이었으니까 산에는 산사람들 - 공비共匪들이 출몰하던 때였다. 38선 근접은 물론 경기도, 겅원도 일대의 산에는 감히 포수들이 들어가지 못 했다. 그래서 나는 경북 청도 부근까지 내려가서 사냥을 했다. 단신으로 너무 깊이 산에 들어간 것 같았다. 작은 들돼지의 뒷다리를 쏘아 쫓는 게 그만 고개를 두 개나 넘었다. 나는 등 뒤에서 겨누고있을 총구를 피하기 위해 몸을 숨기기로 했다. 바위, 나무 뒤로 가거나 은폐물이 없으면 몸을 굽히고 빠르게 지나갔다. 동물들이 사용하는 은신술隱身術이다. 더구나 미행하는 자들이 내가 그들의 미행을 눈치챈 걸 깨닫지 못 하게,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긴장했다. 약 1시간이 지나고도 미행은 계속되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도대체 어떤 자들인가 알아야 했다. 고개를 하나 더 넘어서자 멈추었다. 100m 쯤 떨어진 곳에 앉아 태연히 담배를 피웠다. 큰 소나무둥치에 몸을 옆으로 기대고 쉬고있는 모양새였다. 나는 미행자들이 고개를 넘는 걸 옆눈으로 볼 수 있었으나 그들은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설사 미행자들이 나를 발견하더라도 쉬고있다고 알 것이다. 7 - 8분 후 고개를 넘는 사람그림자가 보였다. 모두 네 명이었으며 모두 총을 가지고있었으나 군인이나 경찰은 아니었다. 산사람들이었다. 나는 불과 몇 초 안에 그들의 정체正體를 파악하고 몸을 돌려 모른 체 했다. 미행자들은 고개를 넘고 10여 미터를 전진하다가 비로소 나를 발견하고 놀라 되돌아갔다. 나는 계속 모른 체 하고 담배를 태우고나서 일어섰다. 물론 미행자들의 총구銃口를 의식하고 나무둥치 뒤에서 움직였다. 나는 그때부터 맷돼지는 포기했다. 맷돼지를 잡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잡히지 않아야 한다. 미행자들과 싸움은 결정적으로 내가 불리했다. 상대는 네 명이고 모두 총을 가졌다. 그들이 가진 총은 군대용 라이플 - 사람사냥 전용專用이고 내 총 벨기에 5연발 산탄총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내 총이 유효사거리가 고작 50m인데 비해 그들의 총은 최소 400 - 500m이며 700 - 800m가 될 수도 있다. 사람도 다르다. 총을 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저쪽은 사람사냥을 전문으로 하고 나는 짐승사냥 전문가다. 저들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사람을 쏘지만 나는 사람을 쏘지 못 한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잇는 것은 저들과 맞서는 게 아니라 피하는 거다. 나는 미행자들이 나를 발견하고 얼핏 인근의 바위 뒤로 숨는 걸 보면서 빠른 걸음으로 고개를 넘었다. 100m 거리에서는 나를 죽일 수 있는데도 그들은 총을 쏘지 않았다. 내가 은폐물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도 이유였지만 더 접근해서 쏠 작정인 듯 했다. 거리를 주면 안 된다. 그래서 다음 고개를 넘자마자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나는 내 다리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무쇠다리라는 별명을 받고있었지만 산길을 달리는데는 어느 누구 보다도 빨랐다. 그런 내가 목숨을 걸고 달렸으니 그 속력은 짐작할만 하다. 그래서 미행자들이 고개를 넘었을 때 나와는 500 - 600m나 멀어졌다. 그들이 고개를 넘어섰을 때는 나는 이미 고개 하나를 더 넘어서 남쪽으로 달렸다. 고개를 넘은 미행자들이 나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렸다. 사방으로 흩어져 나를 찾다가 그 중 하나가 고개를 넘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동료들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됐다, 이젠 살았다!)
안심을 했을 때 그들이 총을 쏘았다. 어리석은 짓이다. 600m도 넘는 거리에서 쏘았으니 맞을 리가 없다. 세 발을 쏘았으나 그 총탄은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얼마든지 쏴봐라!)
그런 배짱이었는데 얼마 안 가서 그 배짱이 얼마나 무모했던 가를 뼈아프게 실감했다. 그 때 엉뚱한 곳에서 쁑! 하고 총탄이 날아와 귓전을 스쳤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인근 바위 뒤로 뒹굴었다. 2탄이 내가 막 뛰어든 바위에 맞아 불꽃을 튀겼다. 새로운 총탄은 추격자들의 반대편에서 날아왔으며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총성과 총탄이 날아온 시간을 계산하면 50m 이내였다. 그러고보니 추격들이 아까 쏜 총탄은 나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신호탄이었다. 추격자들은 내가 도망가는 길 앞에 있는 동료들에게 <그리로 도망가고 있으니 잡아라!> 라고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앞뒤에 적을 두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나는 죽음을 각오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한 번 정세情勢 판단을 했다.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모든 것이 적에게는 유리했고 나에게는 불리했으나 딱! 한 가지 나에게 유리한 것이 있었다. 날씨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옳지, 날만 어두워지면 ….)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면 지금의 내 위치는 좋지 않았다. 그 장소는 새로 나타난 적에게는 바위로 가려졌으나 추적해오는 적에게는 무방비無防備로 노출露出된 상태였다. 앞뒤의 적들에게 안 보이는 은신처隱身處가 필요했다. 기어서 이동했다. 바위밑 비탈에 잔솔이 밀집했는데 거기로 이동했다. 잔솔은 사람 무릎 정도였으나 엎드리면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60 여 미터를 기어가서 잔솔밭 움푹 패인 구덩이를 발견하여 숨었다. 제크나이프로 솔가지를 잘라 위장을 하고 적들의 동정을 살폈다. 주위는 조용했으나 사방에서 포위를 좁혀오는 적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은 마치 맷돼지를 잡는 것처럼 나를 죽이려고 했다.
(어디 잡으려면 잡아봐라!)
까닭없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는 그들에게 증오를 느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계곡에는 땅거미가 깔렸다. 나는 어둠을 싫어했다. 포수에게 어둠은 사냥을 방해하는 계기였다. 그러나 그때는 어둠이 구세주救世主였다. 어둠은 약자弱者 편이었다. 나를 포위한 산사람들도 초조한 것 같았다. 무작정 총을 쏘았다. 덮어놓고 난사亂射를 하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졸렬拙劣한 전법戰法이었다. 나는 총탄이 바로 옆에 떨어졌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산사람들은 총을 쏘아도 반응이 없어 초조해져서 대담하게 모습을 들어냈다. 세 명이었다. 추적해오는 네 명을 합해 일곱 명이었다. 쏘고싶었다. 세 명은 죽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망설이는 건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내 목숨을 노리는 적이었으나 차마 쏠 수가 없었다.
‘김동지, 박동지 어디요?’
‘여기요.’
두 번째 소리는 거리가 30m 이내였다.
‘그놈이 보이나?’
‘안 보이지만 산중턱 솔밭에 숨었소.’
그들은 내가 숨어있는 솔밭을 포위했다. 사람사냥대들이 솔밭에 난사를 했다.
‘저기야, 저기! 달아나려고 해!’
사냥꾼의 술책術策이다. 나는 그런 계략計略에 속지 않았다. 포수생활 30년의 포수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도망갔나?’
회중전등을 비췄다. 전등 빛이 어둠의 여기저기를 훑었다.
(틀렸구나!)
전등을 든 사람이 잔솔밭 구석구석을 이잡듯이 비췄다. 나는 모든 걸 단념하고 전등을 든 사람에게 조준을 맞췄다. 그놈을 죽이면 다른 사람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나도 벌집이 될 것이지만 나는 죽더라도 몇 놈은 죽이려고 했다. 전등빛이 가까워졌다. 10m, 8m, 5m ….
‘누구야! 전등을 켠 놈이?’
두목인 듯한 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정찰비행기에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빨리 불 꺼!’
불빛이 꺼졌다, 바로 내 코앞에서.
‘여기엔 없어. 다들 돌아가서 원위치를 지키시오!’
두목이 퉁명스럽게 명령했다. 구사일생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위험이 없어진 건 아니다. 공비들이 지배한 산에서 빠져나가는 게 문제였다. 공비는 경찰이나 토벌대를 막기 위해 산중 도처에 보초를 세워놓고 경계를 하고있을텐데 그 경계를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가는가가 과제다. 공비들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약 한 시간 동안 그대로 엎드려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표범처럼 소리없이 산을 내려갔다. 300m 쯤 내려가니 동굴이 나타났다. 공비들의 본거지다. 나는 그곳을 피하여 계곡쪽으로 내려갔다. 계곡에도 보초가 있었다. 오래토록 짐승들과 싸워온 나는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귀와 코가 작동을 했다. 나는 공비들이 새 우는 소리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꾀꼬리 울음소리를 냈는데 울음소리가 서툴렀을뿐만 아니라 초겨울에 그렇게 우는 꾀꼬리는 없다. 계곡에서는 물을 떠오는 공비와 하마터면 부딛칠뻔 했다. 석유깡통을 덜렁거리며 내려온 그는 내가 엎드려있는 바로 옆을 지나갔다. 어둠속에서 사람의 감각은 무력하다. 만약 그게 범이나 곰이었다면 어림없는 일이다. 나는 사람의 약점 때문에 공비의 소굴巢窟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산에는 40여 명의 공비들이 있었으며 2중 3중으로 경계를 폈으나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 했고 이튿날 새벽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
102. 신神들린 맷돼지
해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아직 빛은 남아있었다. 우리가 쉬고있는 산마루에서는 아래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허연 굴뚝연기가 한가閑暇로왔다. 하루종일 헛수고만 한 우리는 고단했다. 산길을 몇 십 리나 쫓아다녔기 때문에 다리가 막대기처럼 마비痲痺되었다.
경북 문경, 1927년 늦가을에는 맷돼지들이 우글거렸다. 농가의 피해가 컸으므로 형상금懸賞金도 걸렸다. 재수가 없는 날은 어쩔 수가 없다. 그날은 맷돼지 단 한 마리도 구경 못 했다. 우리는 잠시 쉬고 주막집 저녁밥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일어섰는데 소피를 보러 바위 뒤로 가던 몰이꾼 추서방이 별안간 웍! 비명을 질렀다. 그쪽을 돌아봤을 때 거대한 흙더미 같은 것이 휙! 스쳤다. 그러나 무슨 흙더미가 움직이겠는가? 맷돼지였다. 총을 들어 안전장치를 풀었지만 맷돼지는 이미 계곡으로 달아났다. 그놈은 우리가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 바위 뒤에 웅크리고 있다가 추서방에게 발견되자 냅다 뛰어달아났다. 내가 앉아있던 바위에서 불과 5 - 6m, 포수가 맷돼지와 사이좋게 동석同席을 한 셈이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주막에서 막걸리를 한 사발하면서 추서방이
‘어 참 ….’
기가막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거기 맷돼지가 누워있을줄 누가 알았겠나? 귀신이 곡哭할 노릇이지.’
‘눈깔은 원족遠足보냈나? 그렇게 큰 맷돼지를 못 봤단말야!’
동료 몰이꾼이 야유揶揄를 했다.
‘아냐, 너무 커서 … 산더미만한 놈이었거든.’
산더미만한 놈이라는 말에 막거리주전자를 들고 들어오던 주막주인이 참견했다.
‘아, 그 맷돼지 …. 그놈은 신들린 맷돼집니다.’
‘신들린 맷돼지?’
주막주인이 신들린 맷돼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맷돼지를 처음 만난 건 땅꾼이었다. 땅군은 뱀을 잡아 대구 약전藥廛골목에 팔았는데, 3년 전 문경 부근의 야시(여우)골이라는 야산野山 계곡에서 백사白蛇를 발견했다. 백사는 심마니의 산삼과 같았으며 값도 산삼과 비슷했다. 백사는 크기가 너댓 자(150Cm)나 되었으며 바위틈을 빠져 산중턱으로 도망갔다. 땅꾼에게 몰린 백사가 되돌아섰다. 대가리가 삼각형인 걸로 보아 맹독성인데 백사를 겁낼 땅꾼이 아니었다. Y자형 막대기로 백사의 대가리를 눌러 잡으려는데 앞에서 거치른 숨소리가 들려 머리를 들고는 땅꾼이 주저얹았다. 바로 눈앞에 거대한 맷돼지가 덮쳐드는 게 아닌가? 맷돼지는 땅꾼 따위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대가리를 치껴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백사를 주둥이로 밀어부쳐 앞발로 누르고는 주둥이를 감는 백사를 물고 가버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땅꾼이 일어설 새도 없었다. 백사를 잡아먹은 산돼지는 황소 보다 더 큰 놈이고, 털이 못을 거꾸로 박은 것처럼 억새며, 맷돼지가 위에서 바위를 굴려 죽을뻔 한 나무꾼도 있었다. 소문이 나돌자 재작년 늦가을, 경남의 포수가 몰이꾼 두 명을 데리고 왔다. 쉽게 맷돼지를 발견하여 몰았다. <맷돼지가 그리로 간다!> 몰이꾼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목을 잡고 기다리는 포수가 긴장했다. 그런데 몰이꾼들의 외침이 끊겼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기척도 없었다. 몇 시간을 기다린 것 같았다. 사냥터에서 기다림이란 혹독한 고문拷問과 같다. 몇 시간이라는 시간은 불과 7 - 8분이었다. 포수가 긴장을 풀고 일어서는 순간 맷돼지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산의 능선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가시덤불의 붉은 흙더미가 크게 부풀어오르는 것 같더니 7 - 8m 앞에 집채만한 맷돼지의 대가리가 나타났다. 마치 <안녕하시오!> 라고 인사를 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앗! 맷돼지다.)
포수가 정신을 차리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맷돼지가 사라졌다.
(아뿔사, 뒤로 물러났구나.)
능선으로 달렸다. 능선 밑 10여 미터에 아른거리는 물체가 있었다. 포수가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총탄은 명중했다. 그런데 상대가 아악! 하며 소리쳤다. 맷돼지가 아니라 몰이꾼이었다. 몰이꾼은 맷돼지를 포수가 기다리는 능선으로 몰아넣고 총소리를 기다렸으나 총소리가 나지 않았으므로 웬일인가 확인하려고 오다가 총을 맞았다. 총탄이 이마를 뚫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격앙激昻된 몰이꾼이 아직도 바보처럼 멍! 하니 서있는 포수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고 흔들었으나 포수는 그저 머리만 설레설레 흔들었다. 포수는 과실치사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 맷돼지는 마물魔物>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보통 맷돼지는 몰이에 쫓기면 씩씩거리며 달려오는데 그놈은 조용히 왔다가 소리없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그놈을 쫓아간 건 불과 10여 초인데 맷돼지는 사라지고 맷돼지가 있어야 할 곳에 몰이꾼이 있었습니다. 10여 미터도 되지 않은 거리에서 사람과 맷돼지를 분간 못 한 것도 그놈의 마력에 홀린 탓입니다.>
신들린 맷돼지 얘기는 더 있다. 작년 늦가을, 일본인 포수 3명과 몰이꾼 다섯 명으로 구성된 사냥대가 문경 서쪽 야산에 나타났다. 장소를 고정하고 하는 사냥이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짐승을 잡았는데 야산에서 신들린 맷돼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게 맷돼지인줄 몰랐다. 맷돼지가 좋아하는 흙탕의 물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저게 뭐야? 온천溫泉인가?’
그들은 설마 그런 곳에 맷돼지가 목욕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이상한데 … ?)
선두에 선 다지가와가 흙탕의 3 - 4m 지점에 접근했다. 별안간 흙탕이 부풀어오르더니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다. 마치 공룡恐龍시대의 괴물 같았다. 앞장섰던 다지가와는 벌러덩 누워버렸고 다른 사람들은 도망을 쳤다. 괴물은 그런 포수들의 꼬락서니를 곁눈질하면서 유유히 사라졌다. 포수들은 그 괴물이 황소라고 생각했다. 크기도 그렇고 사람을 보고도 겁내지 않았으며 또 해치지 않고 사라진 것도, 황소가 흙탕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낙엽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는 맷돼지란 걸 알았다.
‘맷돼지, 그럴 수가 ….’
일본인포수들은 그때 사냥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왔어야 한다. 겁을 먹은 상대에게는 덤비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가 맷돼지라는 걸 알자 겁을 털어버렸다. 한 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저걸 보슈. 그 괴물은 육식肉食만 해요.’
맷돼지똥을 발견한 몰이꾼이 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놈은 보통 맷돼지가 아닙니다. 사람도 잡아먹으려고 덤빌지도 몰라요.’
‘요컨대, 무서워서 몰이를 못 하겠다는 거요? 그럼 우리가 추적을 할테니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려요.’
몰이꾼 없이 사냥이 시작되었다. 맷돼지가 계곡으로 내려가 물에 발을 씼어버렸으므로 추적이 어려워졌다. 비교적 경험이 많은 다지가와포수가 세 사람이 세 방면으로 흩어져 맷돼지를 산마루로 몰자고 했다. 산마루에는 나무가 없고 바위들만 산재散在했다. 그래서 맷돼지를 산마루로 몰아 집중사격을 할 심산心算이었다. 다지가와포수는 가운데를 맡아 동료들과 신호를 하며 잡목림을 통과하고있었다. 잡목림은 나무들이 키가 작아 맷돼지가 숨을만한 곳이 없었다. 중간에 솔가리가 있어 옆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동료들의 신호가 들려왔다. 동료들의 소리로 봐서 자기가 좀 뒤쳐졌다고 판ㄷ나하여 바른 걸으믕로 솔가리를 지나치는데 솔가리가 와라락! 무너져내리며 괴물이 덮쳤다. 다지가와가 발사했다. 맞지 않았다. 2탄을 쏠 여유가 없었다. 솔가리를 뒤집어쓴 맷돼지가 덮쳤으므로 다지가와는 쓰러졌다. 괴물은 쓰러진 다지가와를 다시 들이받았다. 이번에는 치명사이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포수의 옆구리를 깊숙이 찔렀다. 다지가와의 비명을 듣고 달려간 곳에 맷돼지는 없고 다지가와가 옆구리를 잡고 기어다녔다. 배가 찢어지고 내장이 밀려나왔다. 동료가 마을로 업어왔으나 의사가 보기도 전에 이미 절명絶命했다. 그놈은 체구나 옷차림으로 사람을 분간했다. 포수가 아닌 나무꾼이나 농부는 본체만체 했고 나무꾼이 가까이 오면 위협을 해서 쫓았다. 포수가 오면 달아났다. 경성의 일본인포수가 개를 두 마리 데리고와서 추적을 했으나 헛수고였다. 개들의 이빨로는 자기를 해칠 수 없다는 걸 알고 개가 앞길을 막으면 코를 밀고 나갔다. 오히려 개들이 맷돼지를 따라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마을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몇 가지 판단을 하고 얘기를 했으나 모두 시큰둥했다. 내가 맷돼지를 잡겠다고 하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총탄을 맷돼지탄으로 바꾸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몰이꾼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 새벽에 모두 달아나버렸다고 주막주인이 일러주었다. 사냥꾼은 새벽에 방정맞은 계집을 보면 사냥을 중지한다. 거울이나 유리가 깨져도 사냥을 망설인다. 부적符籍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산신령山神靈에게 기도를 드린다. 몰이꾼 없이 혼자 맷돼지사냥을 할 수는 없다. 장말 그 맷돼지는 신들린 맷돼지일까?
103. 뱀 할아버지
포수는 짐승을 잡는 사람이며 그래서 짐승을 좋아한다. 그러나 딱 하나 포수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동물이 있다. 뱀이다. 특히 독사毒蛇다. 범이나 표범이 무섭다고 하나 그래도 그들은 체내體內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온혈溫血동물이다. 허나 뱀은 차디찬 피가 흐르는 냉혈冷血동물이다. 그들은 팔도 다리도, 소리도 없이 풀숲을 기어다니다가 예고없이 사람을 문다. 살무사 같은 독사에 물리면 약도 없다. 포수는 뱀이 사는 풀이나 낙엽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뱀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무서워한다. 그래도 좀 다행한 것은 포수가 한참 일을 할 때는 한겨울이기 때문에 뱀이 없다. 가을과 봄이 문제다. 특히 가을이 문제다. 봄에는 뱀이 동면을 하고 막 나온 참이라 비실비실하고 독액毒液도 약하다. 그러나 가을 뱀독은 강렬하다. 동면을 하려고 싫컷 먹고 독액을 축적한다. 나도 뱀이 싫고 무섭다. 그래서 경남, 전남 등 남쪽지방은 피했다.
1937년 가을, 전속엽사로 일하는 영국국립박물관에서 주선한 포수가 꿩사냥터에 안내를 부탁했다. 수소문 한 결과 서울에서 멀지 않은 경북 김천을 선택했다. 마침 그곳을 잘 아는 몰이꾼이 있어 김천의 단지봉으로 갔는데 도착해보니 좋은 사냥터였다. 울창한 삼림과 단풍丹楓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영국인은 경치를 보고 <원더풀!>을 연발했다. 그러나 나는 주막집에서 기르는 돼지우리의 먹이통을 보고 기겁을 했다. 주막주인은 돼지의 먹이통에 쌀겨, 호박 등 사료飼料를 섞어 길다란 줄 같은 걸 사료통에 한 개씩 던져넣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뱀이었다.
‘아니, 그 뱀들은 어디서 잡았소?’
‘뱀 말이요? 마을 애들에게 몇 푼씩 주면 얼마든지 잡아옵니다. 들에도, 강에도, 특히 산에는 뱀들이 우굴거립니다. 돼지에게 먹이면 잔병이 없고 잘 큽니다.’
알고보니 단지봉은 뱀들이 우굴거리며 여름이면 전국 각지各地 땅꾼들이 모여든다고 했다. 나는 저녁에 반찬으로 내놓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사냥터를 옮기려고 했는데 영국인이 단지봉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기어코 꿩사냥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다음날 아침 단지봉에 올랐다. 일부러 꿩이 없는 곳을 골라 영국인을 실망시켜서 옮기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영국인이 데리고 온 테리아종種 사냥개가 꿩을 잘 몰았다. 꿩이 있어도 가만히 기다렸다가 사냥꾼이 가까이 오면 일어선다. 그리고 앞발을 쳐들고 천천히 걷는다. 개가 그런 묘妙한 동작을 할 때는 어김없이 꿩이 날아올랐다. 한꺼번에 여러 마리를 날리지도 않았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날렸다. 영국인은 서너 시간 동안 열세 마리를 잡았고 나도 그만큼 잡았다. 몇 마리의 뱀을 보았으나 산중턱에 오르니 뱀도 보이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낙엽속에 있는 뱀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뱀은 잊어버리고 방금 날아올라간 꿩을 겨냥하고 있다가 좀 더 좋은 위치를 확보하려고 앞으로 2 - 3m 쫓아가며 발사했다. 발사와 동시에 꿩이 수직으로 떨어졌는데 동시에 한쪽 발목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면도칼로 잘린 듯한 아픔이었다. 앗! 하고 보니 발밑에 뱀이 기어갔다. 살무사였다. 회색바탕에 동전 같은 검은 무늬가 있는 살무사는 내 발목을 물고 3 - 4m 쯤 가더니 되돌아봤다. 1m 쯤 되는 놈이 삼각형의 대가리를 쳐들고 차디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문 상대에게 효과가 있었는가를 확인하려는 투였다. 나는 평생 그 살무사의 냉혹冷酷 한 눈을 잊지 못 한다.
‘저 새끼가 ….’
뱀을 쏘았다.
‘웬 일이요? 형님!’
몰이꾼이 달려왔고 살무사에게 물렸다는 말에 영국인도 기겁을 했다. 영국인이 업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는데 몰이꾼이 말렸다. 우선 응급조치를 했다. 오래 사냥을 한 그는 뱀에게 물린 응급조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끈으로 발목과 허벅지를 감아 졸라매고 뱀에게 물린 자국을 찾아 입으로 피를 빨아냈다. 그러나 나는 벌써 마비가 오고 정신이 흐릿해졌다.
‘형님, 자면 안 돼! 정신을 차려요. 얼마 안 가면 뱀할아버지가 있어요. 거기만 가면 이까짓 뱀독은 고칠 수 있어요!’
‘뱀 할아버지?’
‘예, 뱀독을 뺄 수 있는 노인인데 그는 어떤 독도 말끔히 빼낼 수 있어요.’
나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붙잡고 몰이꾼의 등에 업혀 뱀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했다. 환갑 전후의 노인이었으며 새카맣게 탄 얼굴에 눈이 매우 날카로웠다. 노인은 내 발목에 소주를 붓고는 혈관을 칼로 따버렸다. 검푸른 피가 쏟아졌다. 피가 나올만큼 나온 뒤 허벅지와 발목의 끈을 풀었다. 피가 돌았다. 상처에는 고약膏藥을 발랐다.
‘됐어, 2 - 3일은 고생하겠지만 목숨은 건졌어.’
뱀할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전신이 퉁퉁 부었다. 노인은 열이 심해지면 찬물로 식히고 약초물을 먹였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아직도 부었으나 정신은 맑았다. 노인은 움막에 살고있었으나 집은 겉과 안이 달랐다. 겉은 화전민의 움막이었으나 안에는 서너 칸의 방, 응접실 마루, 부엌과 작은 방들이 있었다. 먼 친척소녀와 살고있었는데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었고 그 수입은 뱀이다. 매일 서너 사람들이 뱀을 구하려고 방문했고, 직접 먹는 환자患者도 끊이지 않았다. 노인은 환자의 상태를 자세히 듣고 뱀을 고아서 먹이거나 날것으로도 먹였다. 환자나 고객顧客들에게 동전銅錢이나 은전銀錢이 아닌 지폐紙幣를 한두 장씩 받았다. 땅꾼들은 뱀할아버지의 재산이 수천 원이 넘을 거라고 귀띰해주었으나 그 말은 틀렸다. 내가 보기에 노인의 재산은 수천이 아니라 수만이었다. 뱀을 잡아 도소매都小賣를 하는 재고在庫상품만도 만 원이 넘었다. 재고상품은 움막집 뒤 땅속에도 있었다. 반경半徑 1m 깊이 1m 정도의 땅굴이 여나무 개 있었는데 한 구멍에 약 200여 마리씩, 종류별 크기별 갖가지 뱀들을 수천 마리 기르고 있었다. 도소매상이나 환자들이 방문하면 뱀들을 꺼내 흥정을 하는데 20 - 30전錢을 받기도 하고 어떤 뱀은 5 - 6원을 받았다. 뱀굴에는 두꺼비도 같이 두었다. 독사는 두꺼비를 본체만체 한다. 일주일이 가는 때도 있고 한 달이 지나는 때도 있으나 결국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고 두꺼비의 독 때문에 뱀도 죽는다. 이른바 두꺼비뱀소주燒酒인데 소주항아리에 넣어두었다가 비싼값으로 판다. 노인의 재고상품은 소주항아리에도 있었다. 양조장에서 사용하는 열 말 들이 소주항아리에는 독사들이 둥둥 떠있고 샛노란 빛깔이었는데 강력한 강장제라고 했다. 뱀술은 포도주처럼 묵은 술일수록 값이 나간다는데 노인만 마시는 50년 산産 특제는 한 되에 50원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았다.
‘포수양반, 당신들은 웅담熊膽이나 녹용鹿茸이 영약靈藥이라고 하지만 독사주만은 못 할거요. 뱀고기를 먹고 독사주毒蛇酒를 마시며 살아온 나를 보시오. 내가 몇 살이나 되었을 것 같소? 환갑이 가깝다고? 허허! 나는 올해 일흔아홉이요.’
놀라운 일이다. 팔순八旬의 노인이 산을 타고 뱀을 잡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노인이 뱀을 잡는 걸 보면 더 놀랍다.
‘포수양반. 뱀은 추위를 싫어하오. 습기濕氣가 없는 건조乾燥한 곳도 싫어하지. 그래서 놈들은 지금 저 낙엽속에 모여들고 있소. 햇볕이 스며들어 따뜻하고 적당하게 습기가 있으니까. 이걸 보시오.’
노인이 끝에 쇠갈구리가 달린 막대기로 낙엽을 쿡쿡! 찌르면서 더듬거리다가 응! 소리를 지르며 막대기로 누른다.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낙엽속에 가만히 손을 집어넣더니 손을 뺐는데 노인의 손에 살무사가 한 마리 따라 올라왔다.
‘위험하지 않느냐고? 세상에서 뱀같은 바보도 없지. 이 놈들은 날개도 없고 발도 없어 이렇게 잡기가 쉬워.’
뱀은 눈이 밝은 것도 아니고 코나 귀가 발달된 것도 아니다. 재주란 고작 독을 뿜는 것과 긴 몸으로 상대를 감는 것뿐이다. 그리고 징그럽다는 혐오감 정도. 따라서 뱀은 이빨에 물리지만 않으면 잡기가 쉽다. 사실 노인이 뱀을 잡는 걸 보면 마치 풀속에 떨어져있는 새끼토막을 줍는 것 같았다. 뱀은 노인을 보면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도망치지도 못 하고 그렇다고 덤벼들지도 못 했다. 노인이 손에 쥔 막대기로 뱀의 대가리를 가볍게 때리고 막대기로 누른 다음 가볍게 목을 쥐고 잡아올렸다. 가끔 몸뚱아리로 노인의 팔을 감는 놈들이 있었는데 귀찮은 듯 뱀을 몇 번 흔들면 축 늘어져 조용해져 저항력을 잃어버렸다.
‘보시오. 뱀은 이렇게 바보요. 또 기르기도 쉽지. 뱀은 먹이를 주지 않아도 몇 날 며칠을 살 수 있어요. 때로는 몇 달도. 그러면서도 자꾸 자라고.’
그러나 노인의 작업에 장애障碍가 있었다. 어느날 새벽 노인이 허둥지둥 내 방에 뛰어들었다.
‘여보슈, 포수양반. 총을 좀 빌려주시오! 도둑놈을 집이야겠소.’
‘도둑놈이 어디 있습니까? 뭘 훔쳐갔나요?’
‘뱀이요. 뱀을 몽땅 훔쳐갔소!’
노인이 벽에 걸린 총을 쥐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장탄裝彈도 안 된 총으로 뭘 하겠다는 말인가? 나도 따라나갔다. 노인이 움막 뒤 뱀굴로 달려갔는데 뒤따라가던 나는 움칫! 멈췄다. 땅위에 수십 마리의 뱀들이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모두 죽어있었다.
‘이걸 보슈! 이걸.’
농니이 죽어있는 뱀들을 가리키며 통탄痛嘆했다. 하기는 뱀을 미워하는 나에게도 처참한 광경이었다.
‘훔쳐가려면 곱게 훔쳐갈 것이지. 뱀을 몰살시킬 게 뭐야?’
노인이 뱀굴을 조사해보더니 피해액이 수백 원이나 된다고 한탄恨歎했다.
‘그래, 그 도둑놈은 어디 있습니까?’
‘아! 그게 확실하면 내가 이러고 있겠소? 당장 이 총으로 ….’
노인이 범인은 산너머 땅굴에 사는 애꾸가 틀림없을 거라고 했다. 그도 뱀을 잡아 파는 놈인데 노인의 텃세에 눌려 장사가 안 되니까 그 앙갚음을 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좀 이상했다. 애꾸가 그랬다면 뱀을 훔쳐갈 일이지 몇 십 마리만 죽여놓고 간 이유가 뭘까? 그리고 죽어있는 뱀들의 상처도 이상했다. 칼이나 낫으로 자른 것도 아니고 돌이나 몽둥이로 친 것도 아니다. 상처를 자세히 살핀 결과 이빨로 물어뜯은 상처였다. 따라서 범인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인데 …, 현장에는 범인의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아주 작은 발자국인데 발톱이 길고 나란히 찍힌 발자국으로 봐서 족제비 같았다.
‘족제비라고?’
‘응, 족제비 소행所行이군. 족제비가 아니고는 이런 짓을 할 짐승이 없어.’
족제비는 꼬리까지 합쳐 60Cm도 못 되는데 뱀을 보면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는다. 2m가 넘는 능구렁이나 살모사에게도 달려든다. 날카로운 이빨로 뱀을 난도亂刀질해 죽인다. 노인은 피해액이 무려 300 원이라고 했다.
‘아, 제가 먹을만큼만 물고갈 일이지 몰살을 시키다니 ….’
족제비는 잔인한 동물이다. 대개 짐승은 먹고살기 위해 죽인다. 맹수도 배가 부르면 덤비지 않는다. 족제비는 살육본능이 있어 재미로 죽인다. 족제비의 살육대상은 토끼ㅡ 다람쥐, 뱀, 가재, 꿩, 닭, 까치와 물고기 등 다양한 소小동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미워하는 것이 뱀이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젯밤 침입을 한 족제비는 서너 마리였고 모두 굴속에 뛰어들어 마음껏 살육을 했다. 수백 마리가 우굴거리는 굴속에서 작은 족제비에게 당한 뱀들은 정말 바보다. 노인이 족제비를 소탕하지 못 하면 망한다면서 애원을 했다. 노인은 뱀은 잘 잡았으나 족제비 잡는 법에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노인은 내게 생명의 은인恩人이다. 족제비가 번성하면 뱀은 멸종된다. 노인뿐만이 아니라 뱀은 가축사료였고, 마을사람들의 부수입원副收入源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뱀으로 매년 6만 원(2019년 현재가치 1,000만 원) 정도의 수익收益을 올렸다. 우선 피해를 막기 위해 사육장에 관솔불을 밝혔다. 노인을 마을로 보내 목수를 데려다 구멍에 틀을 씌워 족제비 침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래놓고 움막을 지어놓고 족제비를 기다렸다. 밤 11시 경에 족제비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너무 작고 민첩했으므로 겨냥이 어려워서 움막에서 뛰어나와 족제비들이 들어간 구멍으로 다가갔다. 뱀을 물고나오던 족제비가 나를 발견하자 어이없는 짓을 했다. 깡총 뛰어올라 나에게 덤벼든 것이다. 총대로 후려치고 달아나는 놈을 쏘았다. 7 - 8m 쯤 달아나다가 안전권이라고 판단했는지 뒤를 돌아다본 놈에게 발사했다. 총성에 놀란 놈들이 달아났으나 조용해지자 다시 왔다. 그날밤에 다섯 번을 발사해서 네 마리를 잡았다. 뱀도 또 열서너 마리가 죽었다. 노인은 또 뱀이 희생된 걸 보고 마음 아파했으나 족제비를 네 마리나 잡은 걸 보고 좋아했다. 거적으로 덮은 뱀굴에 목수들이 만든 나무뚜껑을 덮었다. 족제비를 잡을 함정과 덫을 만들었다. 족제비는 영리하고 용감했으나 그게 오히려 약점이기도 하다. 몇 개의 뱀구멍을 깊게 파서 그 중간에 거적을 걸쳐놓았다. 목에 줄을 묶은 뱀을 두서너 마리 거적 위에 놓아두었다. 족제비는 거적 위의 뱀을 보고 거적에 뛰어들었다가 그 무게로 거적이 내려앉았다. 족제비의 재주로도 깊이 2m의 구멍에서 나올 수 없었다. 대나무로 상자를 수십 개 만들어 그 속에 뱀이나 쥐를 넣어두고 족제비가 물면 문이 자동으로 닫히게 하여 잡았다. 첫날 세 마리, 다음날에는 다섯 마리 그리고 다음날에는 여섯 마리가 잡혔다. 노인은 족제비가 걸려들자 매우 기뻐했으며 그 귀한 독사주를 아끼지 않고 내놨으나 실살 나는 그 때 큰 수입을 올리고있었다. 번들거리는 갈색 족제비털은 1급품이었으며 3 - 7원을 받았다. 그 사이 집에서는 내가 독사에 물려 죽은 걸로 알고 초상대初喪隊를 보냈다. 그날 따라 족제비가 무려 열 마리가 걸려 마을사람들과 축하주를 들고 있는 판에 초상대가 아이고! 아이고! 곡哭소리를 하며 들이닥쳤다. 초상대는 오두막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치판이 초상판이라고 오인誤認하여 곡소리를 냈던 것이나 그건 희극喜劇이었다. 죽은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 말이다. 초상대는 일면 울고 일면 웃으며 내 해명을 듣고는 족제비잡이에 참여했다. 나흘 동안에 살무사 스무 마리와 족제비 서른여섯 마리를 잡았다. 약 200원의 수입인데 서울 장안에서 기와집 한 채 값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때 잡은 족제비와 뱀들을 산 채로 가져와 영국영사관에 기증했는데 서너 달 뒤에 영사관직원이 선물을 가져왔다. 영국 런던 리젠트동물원에서 보낸 선물은 기가막히는, 숨이 딱! 멎는 물건 - 영국 황실문장皇室紋章이 찍힌 보스사社의 엽총이었다. 연발 산탄총이었으며 포수들이 꿈에도 그리는 최고급총이다. 알고보니 영국영사관은 내가 기증한 족제비가 너무 아름다워 살무사와 같이 런던의 리젠트동물원에 보냈는데, 세계 최고의 동물원인 리젠트에서는 그까짓 한국의 동물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어 살무사를 뱀사육장에 던져버렸는데 그 건 실수였으며 사고가 생겼다. 이튿날 우연히 사육장을 지나던 잡지사 사진기자는 커다란 인디어산 킹 스네이크가 뭘 먹고있는 걸 보았다. 자세히 보고는 기겁을 했다. 다른 뱀을 먹고있었다. 킹 스네이크는 다른 뱀을 먹는 뱀이다. 직원이 모르고 저지른 실수다. 그때도 킹 스네이크는 다른 뱀을 삼키고있었으며 불쌍한 희생자는 2/ 3가 킹 스네이크의 뱃속에 들어갔고 겨우 꼬리 부분만 남아있었다. 사진기자는 그 징그러운 광경을 촬영하고 동물원직원에게 알렸다. 놀란 직원은 인디아산 킹 스네이크가 먹고있는 뱀이 멀리 한국에서 온 살무사라는 걸 보고는 다른 직원들과 여럿이 덤벼들어 아가리에서 살무사를 빼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2/ 3가 아가리에 들어간 살무사는 건재했다. 그러나 살무사를 심키려던 인디아 킹 스네이크는 몇 시간 후에 죽었다. 사진기자가 산 살무사와 죽은 킹 스네이크를 찍어 보도했는데 리젠트 동물원은 독종毒種 한국산 살무사를 보러 밀려든 관람객으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관람객들로부터 엄청난 수입을 올린 동물원이 감사의 표시로 최고급총을 선물한 것이다. 살무사에게 물린 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 뱀할아버지는 그 후 20년을 더 살고 근 100세까지 장수長壽했다. 마을은 독사주를 일본과 만주에까지 수출輸出하여 부촌富村이 되었다.
104. 첫사냥
첫사랑은 평생 잊지 못 한다. 사냥을 하는 사람도 첫사냥은 잊지 못 한다. 내 사냥은 어린시절 - 겨우 아홉 살 때 시작되었다. 고무줄총사냥이다. 큰 형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참새잡이를 구경하다가 그만 사냥병病에 걸렸다. 고무줄총을 가지고 열심히 참새 뒤를 쫓았으나 고사리손에 잡힐 참새는 없었다. 그래도 실패 후 고무줄총솜씨는 발전했다. 열 살 때였다. 추석이 지나고 황금벌이 물결치던 날 오후, 고무줄총을 당기면서 논두렁길을 가던 나는 불과 5 - 6m 눈앞에서 참새 두 마리가 나래를 파닥거리며 벼이삭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걸 보았다. 참새들은 벼이삭을 먹느라고 고무줄총 사수射手가 오는 걸 몰랐다. 오동포동 살이 쪘고 예뻤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잡을 수 있다.)
오랜 경험으로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맞겠지 하는 지레짐작으로 쏘는 건 실패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놈을 겨냥했다. 천천히 당기다가 마지막 순간에 힘껏 당기면서 탁! 손을 놓았다. 내가 겨냥한 참새는 벼이삭에서 떨어져 공중에서 나래짓을 하고있었는데 가슴팍에서 하얀 털이 흩날리며 낙하落下했다.
‘잡았다, 잡았어!’
엄청난 환희歡喜였다. 단걸음으로 달려가 참새를 주웠다. 이미 눈을 감고있었으나 몸을 가느다랗게 떨고 아직 체온이 남아있었다. 그때 비로소 고무줄총으로 참새를 잡는 요령要領을 터득했으며 그 후부터는 어렵지 않게 참새를 잡았다. 그건 엄밀한 의미에서 장난이었고 사냥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듬해 봄, 아버지를 따라 시골장터 자전거수리점에 걸려있는 헌 공기총을 봤다. 가게주인은 <그 총은 좀 낡은 총이지만 잘 수리를 했으므로 아주 좋은 총이 됐다>고 하면서 2원에 팔겠다고 했다.
‘저 총으로 꿩을 잡을 수 있을까요?’
잠시 망설이던 가게주인이 자신있게 말했다.
‘물론이지, 잘만 쏘면 꿩이나 토끼를 잡을 수 있지.’
나는 그만 그 총에 홀렸다. 기름칠이 잘 되어 번드레레한 총이 꿈에서도 어른거렸다. 용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의 2원은 농촌아이에게는 벅찬 거액이다. 총에 미친 나는 집안어른들의 심부름도 하고 고철古鐵이나 유리병을 모아 팔기도 했으나 한 달 동안 고작 40전錢을 모았을뿐이었다. 초조했다. 거의 매일 가게에 가서 총을 보고 주인에게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라고 애원했다. 가게주인이 내 성의에 감동感動먹은 것 같았다. 내가 큰할아버지를 졸라 그 가게에서 4원짜리 자전거를 팔아주었더니 그 때까지 내가 모았던 1원 30전을 받고 공기총을 내주었다, 총알 한 상자도 끼워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란 이런 때를 말하는 것이다. 공기총사냥이 시작되었다. 참새잡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어깨에 참새를 주렁주렁 달고다니며 장날이면 음식점에 팔았다. 특히 늦가을에는 참새가 잘 팔렸으며 가계家計에 도움이 되었다. 공기총 세 발에 평균 두 마리의 참새를 잡았다. 명중률 70%였으며 어른들이 놀랐다. 휴일이면 서울에서 오는 대학생들도 내 솜씨를 따라오지 못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만이 있었다. 꿩이었다. 수없이 꿩을 쫓았으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 했다. 꿩은 내가 그를 발견하는 것 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여 퍼드득거리며 날아가버렸다, 날으는 꿩에게 발사를 했으나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열세 살이 되던 겨울, 첫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으며 눈발 속에서 참새잡이를 했다.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면 서울에서는 참새구이가 잘 팔렸다. 참새 열서너 마리를 어깨에 매달고 마을로 들어서던 나는 마을마당에 뭔가 선명한 색깔이 움직이는 걸 발견했다. 꿩이었다. 눈이 내려 먹이를 찾지 못 한 꿩이 마을까지 내려온 것이다. 하얀 눈 위에 선명한 색깔의 꿩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어깨에 맨 참새꾸러미를 던져버리고 살살 기었다. 버드나무를 지나고 퇴비더미 옆으로 한 발 한 발 기었다. 공기총의 유효사거리는 10m 이내다.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눈사람 뒤에까지 접근했다. 9m다. 꿩의 자그마한 머리를 겨냥했다. 꼿꼿하게 머리를 치껴들고 수시로 두리번거리는 호두알만한 머리를 겨냥하기는 매우 어려웠으나 공기총의 한계였다. 몸통에는 맞아봐야 잡지 못 한다. 오랜 참새사냥의 숙련된 경험으로 정확하게 머리가 맞았다. 꿩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비틀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꿩이 나래질을 해서 날아올랐다.
(또 놓쳤구나!)
그런데 기적奇蹟이 알어났다. 공기총탄이 꿩에게 치명상은 주지 못 했으나 상당한 충격을 준 듯 꿩은 방향감각을 잃고 덮어놓고 나래짓을 하다가 연료로 쓰기 위해 타작마당 한구석에 쌓아놓은 솔깽이다발 속으로 돌진했다. 솔깽이다발에 머리를 박은 꿩은 날개와 발로 퍼득거렸으나 빠져나오지 못 했다. 나도 솔깽이다발로 돌진해서 두 손으로 꿩을 움켜쥐었다. 궝을 사로잡았다. 꿩의 뭇중한 중량감이 느껴지자 고함을 쳤다.
‘잡았다, 잡았어! 꿩을 잡았어!’
어깨에 참새를 주렁주렁 매달고 두 손으로 꿩을 붙들고 마을에 들어서자 먼저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구경꾼들이 모였다.
‘저 녀석! 기어코 꿩을 잡았구만.’
어른들이 격려했다. 공기총으로 꿩을 잡은 후부터 꽤 유명해졌다. 전문적으로 참새를 잡았으며 기회를 내서 산에 올라가 산비둘기나 메추라기를 잡았다. 열다섯 살 때 단골 참새구이집에 참새를 갖다주고 오는 길에 사냥꾼이 수레에 맷돼지 두 마리를 잡아오는 걸 봤다. 얼마나 컸으면 소달구지 하나에 한 마리씩 실었을까? 내가 잡은 참새 따위야 수천 마리를 모아도 맷돼지 한 마리만도 못 하다. 맷돼지를 잡은 포수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매고있는 길고 뭇줄한 총이 한없이 부러웠다. 화약을 넣고 쏘는 총, 방아쇠를 당기면 콩알만한 납덩이가 굉음을 내며 날아가 범이나 곰의 두개골을 똟어 쓰러뜨리는 총은 나에게 꿈이었다. 허나 열다섯 살 나이로 무리였다. 비싼 총값도 문제지만 연령제한에 걸렸다. 미성년자未成年者에게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꿈을 버리지 못 했다. 마침 내가 참새를 파는 요릿집 옆에 총포상銃砲商이 있었는데 공기총탄환을 구입하면서 엽총을 구경했다. 점원店員과 친해졌으며 엽총에 대한 지식도 얻었다. 점원이 엽총을 분해하거나 수리하는 것을 보고 화약탄환을 만드는 것도 보았다. 얼마 뒤에는 점원을 도와줄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분해, 수리에 기술자인 점원을 능가凌駕했다. 총포상주인도 인정했다. 그래도 총을 만지작거리기는 했으나 쏘아보지는 못 했는데 기회가 왔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총을 구입하려고 와서 <시사試射를 해볼 수 없냐?>고 했다. 그들은 값비싼 영국제 산탄총으로 가벼운사냥을 해보고 구입하겠다고 해서 주인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옆에 있던 내가 서울에서 버스로 한 시간 가량 걸리는 의정부 부근 야산에 꿩이 있으니 안내하겠다고 제의했다. 그곳은 내가 공기총으로 꿩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던 곳이라 꿩들의 생태를 훤하게 알고있었다. 꿩은 아침나절에는 마을 부근 밭에서 먹이를 주워먹고 오후에는 산중턱 양지바른 곳에서 모래뜸질을 했다. 꿩들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야산 뒤에 있는 잡목림을 돌아서 접근했다. 짐작대로였다. 잡목림에서 빠져나와 바위에 몸을 숨기고 내려다보니 바로 10여 미터 앞에 서너 마리의 꿩들이 모래찜질을 하고 놀고있었다. 대학생들은 꿩들이 날아오르기도 전에 발사를 해서 손쉽게 두 마리를 잡았다. 첫 사냥에 꿩을 잡았으니 대학생들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었으며 그 자리에서 총이 매매되었다. 동행한 점원 또한 기뻐하면서 내일 가게로 나오면 사례를 하겠다고 귀띰했다. 이튿날 총포상에 들렸다. 점원이 눈을 끔벅거리더니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사례금이야. 넣어둬.’
나는 사례금을 받지 않고 부탁을 했다. 몇 달 전에 어느 포수가 윗전을 얹어 총을 교환한 걸 알고있었다. 총포상은 구식舊式 일제日製총과 벨기에제 산탄총을 교환했는데 가격의 차액差額을 얹어주고 교환했다. 그래서 차액 12원을 가지고가서 구식총을 사들인 값에 나에게 팔라고 간청했다. 점원이 <그 건 안 돼는 일이다.>라고 잡아땠는데 내가 실망하자
‘이봐, 저 총이 그렇게 갖고싶어. 그럼 우리 주인 몰래 비밀거래를 하자.’
점원은 그 총을 여기서 샀다는 건 비밀이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 총을 넘겨주었다, 흑연화약黑鉛火藥 한 통과 탄피彈皮까지. 성실하게 분해, 수리를 도와준 댓가였다. 엽총 불법소지所持로 검문檢問을 당하지 않기 위해 총을 완전히 분해하여 갖고왔다. 밤새 손질을 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노루탄을 장탄하고 노루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그날따라 노루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주먹밥을 모닥불에 데워먹고 막 일어서려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혹시 … ?)
가만히 귀를 기울였는데 이번에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뿌드득! 뿌드득! 눈을 밟는 소리도 들렸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으려고 몸을 기대고있는 바위 뒤 잡목림에서 났다.
(나무꾼일까?)
나무꾼이 이런 깊은 선중에까지 들어올 이유가 없다. 바위 위로 올라가 밑을 살펴보니 바로 10여 미터 앞에서 빤히 쳐다보는 눈이 있었다. 맑은 갈색 커다란 눈이었으며 두 귀가 쫑긋 선 노루였다. 노루도 바위 뒤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 지켜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쳤다. 노루가 놀라 화다닥! 도망쳤다. 그러나 노루 보다 내가 더 놀랐다. 설마 그런 곳에 노루가 있으리라고 생각 못 한 나는 노루가 도망치자 <총을 쏘아야 한다>고 깨달았으므로 바위에 총신을 받치고 노루의 엉덩이를 겨냥하여 냅다 발사했다. 천지가 뒤집어질 듯 한 굉음轟音에 나는 바위밑으로 나가떨어졌다. 떨어지면서 무릎을 바위에 부딛쳐 일어나지 못 했다. 발을 질질 끌면서 일어나 노루가 서있던 참나무숲으로 갔으나 노루는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노루는 어느새 잡목림을 빠져나가 10m 전방을 달리고있었다. 마치 <날 잡아보슈> 하는 듯 엉덩이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달리다가 정지를 하고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약이 오른 나는 무턱대고 발사했다. 노루는 건재健在했으며 숲으로 달아나버렸다. 이상한 일이다. 10m 거리면 공기총으로 참새를 잡는 내가 같은 거리에서 산탄을 쏘았는데 노루를 맞히지 못 하다니 …. 산탄총에서 발사되는 그 많은 총탄은 어디로 흩어져버렸을까? 노루를 놓치고 눈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울고싶었으나 악발이 별명이 부끄러워 울지는 않았다. 나는 노루가 달아난 산마루지형을 잘 알고 있다. 지름길로 노루를 추격했다.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정신없이 달렸다. 내 계산대로라면 산마루에서 노루와 만나게 돼있었다. 노루는 없었다. 또 한 번 실망이었다. 노루에게 총싸움에서 지고 술래잡기에서도 졌다. 지쳤다. 아무리 원기 왕성한 소녕이지만 하루 종일 산을 뛰어다녔으므로 다리가 막대기처럼 뻣뻣했다. 이미 해도 기울고 있었으므로 체념을 하고 하산下山을 했다. 그런데 기적奇蹟이 일어났다. 아까 노루를 놓쳤던 잡목림에 왔을 때 노루가 툭! 튀어나왔다. 그놈은 이제는 나를 전혀 업신여기는 듯 옆모습을 보이며 달렸다. 나는 놀라고 흥분했으나 세 번째의 경험이 축적되어 자세를 가다듬을 여유가 있었다. 앉은자세를 취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무릎 위에 총을 든 팔굽을 받쳐 겨냥을 하여 발사했다. 총성과 동시에 노루가 껑충 뛰어올라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일어서려고 바둥거렸으나 이미 다리가 마비되어 일어서지 못 하고 눈만 멀뚱거렸다.
(내가 졌다, 이젠 그만 하자.)
애원하는 듯한 눈망울이었다. 노루를 잡았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잡았다! 잡았어.’
평생 잊지 못할 첫사냥이었다.
<사냥꾼이야기 2권> 50화 - 104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