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열국시대列國時代 : 6화 고구려제국
2부 열국시대列國時代
6화 고구려제국
고구려제국 강역도 광개토대왕상 무용총 수렵도 만주 집안현
* Daum Blog 인용 광개토대왕비
# 만주 길림성 반석현, 대흑산大黑山을 북으로 돌아 길림성의 서쪽을 지나 이륵문하伊勒門河로 흘러드는 분릉수坌陵水. 동부여東夫餘 시조始祖 해부루解夫婁 임술壬戌 28년 한기桓紀 7138년(BC. 59년) 늦 가을, 네 마리의 말들이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강가에 선다. 추격군이 턱밑까지 바짝 다가오고 있다.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와 함께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숨가쁘게 조여온다. 시퍼런 강물이 막아섰다. 쫓기는 주몽 일행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다.
마리 : (먼지가 일어나는 북쪽 하늘을 보며 조바심 가득한 표정으로) 추격군이 바짝 다가왔 어! (강물로 말을 몰아 말발굽으로 얼음을 가늠하며) 얼음이 어중간해. 살얼음이라 말을 타고 달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헤엄을 칠 수도 없겠는 걸.
협보 : 진퇴양난進退兩難인데 어쩐다?
오이 : 그럼 가자! 살 길은 이 길 뿐. (말고삐를 낙아채며 강물로 뛰어들 태세다.)
주몽 : 잠깐! (강물로 뛰어드는 오이를 제지함과 동시에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을 우럴어 소리친다.)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목숨이 위 태로와 도주함에 추격병은 다가오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말이 끝나자말자 강물이 부글부글 끓더니 물속에서 방석만한 물고기와 집채만한 자라들이 떠올라 길게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었다. 고주몽이 서슴없이 물고기 다리 위로 말을 몰아 달려나가자 돌변한 상황에 눈이 휘둥글해져 엉거주춤 말고삐를 잡고 있던 친구들이 뒤를 따랐다. 단숨에 넓고 깊은 강물을 건넌 네 사람이 반대편 언덕에 닿은 것과 동시에 추격병들이 강변에 닿았다.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말고삐를 채어 멈춰섰다. 그리고 눈 앞에서 벌어진 기적 같은 상황을 이해하려고 눈을 껌벅였다. 주몽 일행이 타고 넘은 물고기 다리는 주몽 일행의 꽁무니에 선 오이의 말발굽이 스쳐 지나가는 동시에 물속으로 사라졌다. 얼떨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마져 닫혀버린 네 사람은 단숨에 물고기 다리 위를 타고 넘어 건너편 강 언덕에 오르자 말머리를 돌려 자기들이 건너온 강물과 추격병들을 번갈아 보고 있다. 강물이 부글부글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으나 까맣게 줄을 섰던 물고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어이없어 망연자실한 추격병들은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듯 역시 넋이 나가버렸다. 기세좋게 추격해왔던 추격병들은 이제 도망자들이 손바닥 안에 들었다고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우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걸 어이없는 표정으로 멀거니 보고 있다가 허탈하게 말을 돌려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 상황을 보고받은 해부루는 추격병들이 추적자를 놓치고서 하는 변명이라고 판단하여 추격병을 모두 처형했다.
# 그로부터 사흘 뒤 백두산 동쪽 능선의 계곡. 그 동안 모습이 초췌해진 주몽을 비롯한 네 사람의 무사들이 햇살에 밤 새 언 몸을 녹이며 말고삐를 잡고 터벅터벅 걷고 있다. 추격군을 용케 따돌렸지만 풍찬노숙風餐露宿이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험한 산길을 걷고 계곡을 넘어 길이 어둑어둑해진 다음에야 그들은 오늘 밤을 샐 동굴에 찾아들었다. 동굴에는 두터운 낙엽과 마른 나뭇가지들이 쌓여 있었다. 심마니들이나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동굴이었으므로 주변 정리가 되어 있고 낡았지만 돌냄비까지 걸려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모닥불을 피우고는 몸을 낙엽 속에 파묻었다.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뱃속이 꾸르릉거렸으나 눕자마자 눈이 먼저 감겼다. 늦가을이라지만 북녘 백두산 근방은 겨울 추위가 이미 시작되고 있어서 바람은 매섭고 추위는 뼈 속까지 파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동료들 보다 한 발 빠르게 눈을 뜬 주몽은 아직도 깊은 잠에 들어있는 동료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소리나지 않게 동굴 밖으로 나섰다. 하얀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동굴 앞 계곡과 주변의 산등성이는 새하얀 눈발에 반사된 아침 햇살로 눈부시게 밝았다. 기지개를 켜고 개울물의 얼음을 걷어내려고 허리를 굽히려던 순간, 주몽은 등 뒤에 수상한 기운을 느꼈다. 민감한 그의 코는 바람이 휙 스치는 찰나에 냄새로 상대를 분별했다. 상대는 사람이고 한 명인 것 같았다. 상대는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고 숨소리조차 제어하는 운신법을 이용하여 다가왔다.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내공행법이었다. 그러나 주몽 또한 고도의 무술을 연마한 무사였다. 산짐승 같은 속임수로 위장을 한다더라도 무술을 연마한 고주몽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5감(시각視覺 - 눈 보임, 촉각觸覺 - 손 만짐, 미각味覺 - 혀 맛, 후각嗅覺 - 코 냄새, 청각聽覺 - 귀 들림)을 총동원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는 6감(예지력叡智力, 느낌)에 의지해야 했다. 엎드렸다가 허리를 펴는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몸의 탄력을 이용하여 튀어오르려는 속샘이었다. 이럴 때는 서로 상대방에게 먼저 들키지 않으려고 움직임을 죽였으므로 귀 보다는 코에 의존했다. 계곡의 바람결은 불규칙했으므로 냄새를 속일 수는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감지할 수 없는 냄새에 고주몽은 온 신경을 귀와 코에 의지하며 몸을 반사적으로 낮추고 눈을 감았다. 거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없는 정도로 숙련된 움직임이었다. 예상대로 코에 감지되는 움직임은 하나뿐이었다. 추격군이라면 사방에서 포위를 했을 것이다. 일단 추격군은 아니다 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다. 상대방은 이미 이 쪽의 상황을 알고 있어 자신을 감추려고 한 것이다. 주몽은 커다란 바위를 감고 돌면서 품속에서 표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소리나는 반대쪽으로 몸을 솟구쳤다. 뜻밖에도 노인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기어오던 노인도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주몽을 보고 기겁을 했다. 그러나 한 순간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노인이 긴장된 표정을 풀고 허탈하게 웃었다. 머리를 박박 깎고 검은 옷을 입은 스님 같은 모습의 노인은 주몽의 모습을 보자 긴장을 풀어진 듯 표정이 풀어졌다.
노인 : (땀을 훔치듯 이마를 쓸며) 산적뗀 줄 알았지.
주몽 : 산적이라뇨 노인장, 하마터면 표창을 날릴 뻔 하잖았습니까?
노인 : 근래 산적들이란 놈들이 어슬렁거렸기에 그만 청년들을 산적떼로 착각했구료. 그래 청년은 호랑이굴에서 잔거요?
주몽 : 호랑이굴이라뇨?
노인 :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란 녀석 마실을 나갔군. 그렇지 않고서야 청년들에게 굴을 내 줄리 없지. 방값도 내지 않았을테니까.
# 일행이 있었군. 여럿이라, 사람이 많아 호랑이란 놈이 피해버렸나보구만. 이 굴을 애초에는 내 잠자리였소. 그런데 호랑이에게 빼앗겼지. 계약도 맺지 않고 제 맘대로 강탈한 거요. 노인은 동굴에 들어서자 마치 안방에 들어온 것처럼 행동했다. 주변의 흐트러진 낙엽을 치우고 나뭇가지를 챙겨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탁발을 다녀오는 중인데 간밤에 느닷없이 눈이 내려서 잠시 내 이 동굴 별장에 들러 몸을 좀 녹이려고 했을 뿐이요 라며, 만약 호랑이가 양보해준다면 말이요. 그리고 유쾌하게 핫! 핫! 웃었다. 그 새 동료들이 모두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나 갑자기 나타난 노인과 주몽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머리는 박박 깎았으나 수염과 눈썹이 허옇게 세었으나 풍채가 단아하고 얼굴 표정이 온화했으나 눈에는 정기가 서려있었다. 예삿 노인이 아닌 것 같았다. 노인은 잠시 주몽 일행을 살피더니 혼잣말처럼 사냥꾼들은 아닌 것 같고 라고 했다. 주몽은 대강 둘러대려다가 노인의 눈빛에 걸려 그만 말문이 막혔다. 답답한 듯 협보가 우린 떠돌이 장사꾼입니다 라고 했다. 노인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마리가 사냥도 하고 장사도 하며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하며 살아가는 유랑인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노인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노인이 몸을 움츠리며 일어서서 나가면서 또 혼잣말로 생판 도둑놈들이로고 라고 했다. 협보가 발끈하며 일어서려는 걸 주몽이 말렸다. 노인은 낌새를 알아챘는지 나가려다 돌아서며 말했다. 내 집이 요 부근이니 따라올텐가 라며 동굴을 나섰다. 네 사람은 잠시 주춤했다. 노인이 손사래를 쳤다. 주몽이 동료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자리를 털고 혼자만 노인을 따라나섰다. 요 부근에 있다던 노인의 거처는 계곡을 치껴 올라 가파른 산비탈을 서너 개 넘어 이르른 동굴이었다. 아침에 호랑이굴을 나섰으니 근 한나절 길인 셈이다. 동굴의 입구는 가시나무로 위장되어 있어서 아무도 그 곳에 동굴이 있다는 걸 알 수 없게 위장되어 있었다. 노인이 가시덤풀을 헤치고 먼저 들어갔다. 입구가 사람 한 사람이 허리를 구부리고 간신히 기어들어갈만큼 낮고 좁았으나 들어갈수록 커지더니 막상 외눈박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동굴 내부는 족히 서너 평이 될 정도로 넓고 천정도 훌쩍 높았다. 통나무로 바닥을 갈고 통나무 위에 곰털을 깔았다. 노인은 짊어진 바랑을 벗어놓고 세 발 솥에 불을 지폈다.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어 활활 타자 방안이 금새 더워졌다. 멀긋하게 앉아있는 고주몽 일행에게 노인이 끓인 차를 권하며 말했다.
노인 : 사냥꾼인 척 해도 금방 들통이나지. 왜냐고? (얼굴에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냥 군들이 그런 매무새로 사냥을 하나? 그리고 사흘은 굶주린 것 같은 몰골들인 걸 보면 아마, 내 짐작으로는 ….
주몽 : (노인 말이 끝나기 전에) 그렇습니다, 노인장. 우리는 떠돌이들입니다. 동부여 금와 왕의 궁성에서 쫓겨나 방랑하는 길입니다.
노인 : (놀라며) 금와왕의 궁성이라? 그렇다면 왕자님이란 말인데 ….
주몽 : 금와왕은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머니가 금와왕에게 의탁하였기 때문에 금와왕의 궁성에서 자랐을 뿐입니다. (허리를 굽혀 절하며) 고주몽입니다.
노인 : 그랬었군. 고주몽이라면 부여의 혈통을 이어받았는데 ….
# 다음 날 아침, 주몽이 잠에서 깨자 모닥불 곁에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며 주몽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동굴 밖은 꽁꽁 얼어있었다. 어제 내렸던 싸락눈 위에 서리가 엉켜 동굴 입구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빙판이었다. 미끄러운 빙판 비탈길을 노인은 마치 평지를 걷듯 걸어갔다. 털가죽신을 신은 발이 빙판에 착 달라붙은 것 같았다. 더디게 걷는 주몽을 노인이 한참씩 기다려 보조를 맞추었다. 얼만큼 걸었을까, 계곡을 따라 산등성이를 두세 개 넘었을 때 빙벽이 나타났다. 폭포였다. 어림잡아 폭이 여나문 발이고 높이는 아득했는데 아무래도 열 길은 넘을 것 같았다. 얼음이 풀리면 장대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릴 거대한 빙벽 앞에서 잠시 숨을 돌리던 노인이 빙벽의 정면으로 곧장 걸어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주몽이 주변의 풍광에 잠시 머뭇거리는 새 빙벽 앞으로 걸어가던 노인이 빙벽 속으로 사라졌다. 노인이 사라진 빙벽 앞으로 다가가자 빙벽의 갈라진 틈새가 보였다. 한 발 빙벽의 틈새로 발을 들이밀었던 주몽은 갑자기 눈을 찌르는 듯한 강한 빛에 온 몸이 휩싸였다. 그리고 순간 눈을 감았다. 한참만에 눈을 뜨니 한 발 앞서 들어간 노인은 빙벽 안의 얼음동굴 바닥에 단정하게 좌정을 하고 있었다. 주몽이 들어서는 걸 보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주몽은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나오는 광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노인이 시키는대로 노인 왼편에 마주 앉았다.
노인 : (감고있었던 눈을 뜨며) 짐작하고 있었으나 … 출생 내력을 알고 있나? 알면 말해보 게.
주몽 : (주몽이 해부루궁을 떠나기 전 날 밤 유화부인에게서 들은 탄생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한다.) 동부여를 떠날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노인 : 동부여의 해부루왕에게서는 왜 도망쳤지?
주몽 : 금와태자와 알력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제 안위를 염려하여 떠나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노인 : 어머니가, 유화부인께서 아들을 거친 황야로 쫓아냈다 이 말이랬다? 그래 해부루궁 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주몽 : 왕자 금와태자는 해부루의 소생이 아닙니다. 금와태자는 해부루왕이 곤연에서 얻은 아들입니다.
노인 : 나도 알고 있네. 온 천하가 알고있는 사실 아닌가. 해부루왕이 아들이 없어 두루 산 천을 돌아다니며 천신에게 제사를 올린다는 말이 퍼져있었지. 곤연의 바위 밑에서 개 구리왕자(금와金蛙)를 얻은 일도 알고 있네.
주몽 : 금와태자가 저를 경계한 것이지요.
노인 : 그야 당연한 일 아닌가. 자네 어머니가 해부루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 태자 자리가 흔들릴 수밖에. 금와태자가 해부루왕과 핏줄이 엮인 것도 아니고. 자네 말고도 왕위 를 엿보는 호족들은 많아. 금와와 호족들의 일차 제거 대상은 자네야. 그 다음에는 또 자기들 끼리 세력 다툼을 벌일지언정 일단 자네부터 제거하는 건 대다수 북부여 세력들의 합의였을테지. 그 틈새에서 살어남기 어렵지. 자네는 떠돌이라 세력이 없지 않나. 금와태자가 호족들은 제쳐두고 먼저 자네를 없애려고 했군. 어차피 양립할 수 없는 숙명이야.
고조선시대부터 이어내려오는 전통의식, 차례로 솟대(소두, 소도蘇塗), 신목神木
베는 의식, 신목행렬과 마을의 웅상雄常(당산나무) * Daum Blog 인용
* 선기옥형의 기원은 한배검께서 주재주主宰主로 천부경天符經의 진리를 밝혀주신 개천開天의 시대로 본다. 그 뒤 천부의 이치가 원방각圓方角으로 표현되던 천부인天符印시대 즉 복희伏羲임금시대를 거쳐 지금과 같은 선기옥형의 모양이 정착되었다. 그 뒤 단군시대로 전승되었고 요순堯舜(동이족東夷族)을 통하여 중국에 전파되었다. 선기옥형은 우리 조상들이 우주에 대한 고도의 통찰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며 현실생활에 실용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창조한 위대한 민족문화유산이었다.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재승)
* 우리 한국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 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이를 한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이라고 불렀다. 천제한님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 할 곳이로다 하시며, 한웅천왕 폐하께 천부인 세 가지를 내려주시고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하셨으며,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 이르셨느니라. (한단고기桓檀古記 3성기聖記 전全 상편上篇, 임승국)
* 뒤에 한웅씨桓雄氏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이 모이는 곳을 천평天坪(백두산 정상 기슭의 땅)에 마련하고 그 곳을 청구靑邱(중국 산동반도의 동래지방)로 정했다. ‘천부天符의 징표徵表’(한단고기에서 임승국은 천부인 세 개에 대하여 3한관경본기韓管境本記 - 풍백風伯은 천부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雨師는 북을 치면서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雲師는 백검伯劍으로 호위하였으니 …, 한단고기 임승국 3한관경본기 제 4를 인용하여 풍백의 거울, 우사의 북, 운사의 칼로 해석하였음)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5사事, 곡식, 운명, 치병, 형벌, 윤리)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神市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밝은 땅)이라 불렀다. 3 ․ 7(21)일을 택하여 천신天神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功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8괘卦를 그으사 올 것을 알며 상象을 잡으사 신神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스러운 이들과 뭇 철인哲人들이 보필하도록 하시더니, 웅씨熊氏(곰 - 검은 땅, 땅의 신神)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를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가죽으로써 패물佩物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朝貢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한단고기桓檀古記 3성기聖記 전全 상편上篇, 임승국)
* 북부여는‘왕검王儉(선군왕검) 이후 그 자손들이 서로 그 간수해온 보물’을 지켜서 태평함과 많은 인구와 부유함을 자랑하여(진서晋書 부여전에 그 나라는 백성들의 수가 많고 부유하여 선대先代 이래 나라가 파괴된 적이 없었다.) 볼만한 사료가 많았으나 모용외慕容廆의 전란에 그 나라 이름과 함께 망실亡失하였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노인 : (선기옥형에 대한 역사를 설명하고) 나는 조선 이래로 천왕가에 전승된 선기옥형 을 물려받온 사람이네. 7000여년 역사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조선이 멸망하였고 선기옥형을 지키는 수천 명의 천지화랑들은 모두 깊은 산속으로 은둔하여버렸네. 선 기옥형을 모시고 숨어 살면서 새 세상을 꿈꾸었지. 오늘 자네를 만남으로써 이제 내 사 명은 끝났어. 선기옥형을 전승하는 내 사명이 완수되는 날이야.
주몽 : 어찌 천왕가의 신기를 제가 물려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노인 : 하늘의 뜻이라니까. 선기옥형은 선기옥형 자체만으로는 뜻을 펴지 못해. 운용하는 사 람들이 있어야 하는 거야. 곧, 자네가 뜻을 이루게 되면 선기옥형을 모시게. 사람들이 모여들거야.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 선기옥형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거니까 이를 활용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근간으로 삼게. 사악한 일에 선기옥형을 사용하게 되면 선기 옥형은 빛을 잃고 스스로 사라질 것이니 그 점 특히 유념하게. 북부여의 해모수가 그렇 게도 애타게 신기를 찾아 해맸으나 결국은 찾지 못하고 그 아들들도 …그밖에도, 고조 선이 멸망하고 생겨난 수많은 열국의 왕들이 저 마다 왕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이 신기를 탐냈으나 모두 다 실패했어. 내 말을 명심해!
주몽 : (새삼스럽게 노인을 바라보며) 하면, 이 신기를 제게 몰려주신 노인장은 누구신지요?
노인 : 인연이 있으니 또 만날 거야.
◎ 고주몽의 탄생
*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시작된다. ‘조대기朝代記’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 임술 원년 한기 6958년(BC. 239년) 4월 초 여드렛날, 진시황 정의 8년에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서 추대되었고 곧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북부여의 시조다. 태양새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5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500여명이었는데 아침에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에 올랐다.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하고 도적이 없었다.
* 고리국槀離國의 왕(고구려후候) 고진高辰은 해모수(고高와 해解는 같은 성씨姓氏임, 3국사기國史記와 3국유사國遺事에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 있음)의 둘째 아들이며 그 손자는 옥저후沃沮候 고모수高慕漱(일명一名 불리지弗離支)다. 모두 도적 위만衛滿의 토벌에 공을 세워 봉작封爵을 받았다. 고모수가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만주 송화강)을 지나다가 나들이 나온 하백녀(河伯女, 물의 신神) 유화柳花부인을 만나 유혹하더니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강제로 자기 멋대로 하여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꾸짖고 구석방에 가두었다. 해부루(동부여 시조, 북부여 5세 선제 고두막의 동생,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동명왕의 강요에 못 이겨 가섭원으로 쫓겨가 한기 7111년 BC. 86년 동부여 세움)께서 이를 듣고 이상하게 여겨 수레에 태우고 궁전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었다. 유화부인은 한기 6998년(BC. 199년, 한 나라 왕 소제의 원봉 2년) 5월 5일에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발백중百發百中이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불렀으므로 고주몽이라고 했다. 동부여 3세 금와왕에게는 아들 7명이 있었는데 태자 대소가 고주몽이 인물이 출중하고 금와왕이 사랑함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유화부인이 이를 눈치 채어 일러주었으므로 고주몽은 덕德으로 사귄 친구 마리摩離, 오이烏伊, 협보陜父와 함께 도망쳤다. 분릉수坌陵水에 이르러 깊은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손자인데 추격병이 쫓으니 어찌하란 말인가?’ 라고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무사히 건너고 곧 흩어지니 추격병을 모면했다. 이후 천하天下를 주유周遊하다가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의 관직官職인 말지기를 얻었다. 왕이 아들이 없었음으로 주몽의 범상치 않음을 보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아 대통大統을 잇게 하여 즉위하였는데 그 때 나이 23세였다. 고구려의 시조로 1대 동명성왕이다. 연호年號는 다물多勿, 한기 7100년(BC. 97년) 등극하여 한기 7178년(BC. 19년)까지 78년 간 재위在位했다.
* 한단고기(임승국)의 고주몽 기록은 ‘북부여기 하편’ 5세 단제 고두막한(동명왕, 조선족 장수 4명과 의병을 일으켜 위만의 우거성을 회복함, 고리국에서 일어나 북부여를 승계함, 한汗은 칸으로 왕) 임인 30년, 한기 7118년(BC. 79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릉에서 태어났다, 해설에서 고주몽은 고구려의 시조, 한기 7139년(BC. 58년)에 고구려를 세웠다, 고진(고구려후)의 손자인 옥저후 고모수(불리지)의 아들이다, 3국사기와 3국유사에는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 있다. 어머니는 하백(부족)녀 유화다, 본부인은 예씨芮氏(고구려 2대 유리왕의 어머니)고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북부여로 남하하여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의 사위가 되었으며 북부여를 승계承繼하였다. 고구려 건국에 공로가 큰 계루부족桂婁部族 군장群長 연타발延佗渤의 공주 소서노召西努를 부인으로 삼아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형제(소서노가 우태와 사이에 낳은 아들)를 두었다. 소서노는 고구려 2대 왕이 된 고주몽의 태자 유리왕자와 정권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해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건국 초기에는 십제拾濟)를 건국하고 고주몽으로부터 어하라於瑕羅(돌궐突闕의 천자天子 칭호稱號)의 책봉冊封을 받는다.
지린성 산성 옛무덤 홀본성 지린성 국내성 유적 라오닝 연주산성
(소서노와 고주몽) * Daum Blog 인용
* 노인을 따라나갔던 주몽은 한나절 뒤에 동료들이 있는 동굴로 돌아왔으나 어디를 다녀왔는지 동행한 노인의 행적은 어떤지 일체의 입을 다물었다. 동료들이 은근히 궁금하다는 눈치를 보였으나 주몽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동료들도 더 캐묻지 않았다. 열흘 뒤 북부여 남쪽 국경. 말을 달리던 네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모두 귀를 기우렸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에 섞여 고함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싸움판이 벌어진 것 같았다. 네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산등성이로 치달았다. 그들이 가로지르는 길목의 산자락에서 칼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산적의 무리가 장사치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산적들이 행인을 약탈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산적들이 아닌데 ….’ 내려다보던 마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몽이 말을 달려나갔다. ‘그렇다면, 가자!’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려있었던 장사치들은 느닷없이 불쑥 나타난 네 사람의 무사들이 가세하자 형세가 바뀌었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상황에 당황한 약탈자들이 기세좋게 제압하였던 싸움판이 반전되자 금방이라도 내려칠 듯 쳐들었던 칼을 내리고 슬금슬금 물러섰다. 주몽은 싸움판의 한복판에서 말을 세우고 ‘네 이 놈들, 보아하니 뙈놈의 군졸들인데 무모한 약탈을 일삼는단 말이냐!’고 호통을 쳤다. 그 기세에 눌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약탈자들이 꽁무니를 뺐다. 동료들이 그들을 추적하려는 걸 주몽이 말렸다. 동료들도 모두 높이 쳐들었던 칼을 칼집에 꽂아버렸다. 약탈을 면한 장사치들 가운데서 한 사내가 나와 머리를 숙였다.
사내 :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면서) 곤경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나라 국경수비대인데 행패가 자심합니다. 오늘도 통행세를 과도하게 요구해서 실랑이가 붙었습니다.
마리 : 화를 면해서 다행입니다.
# 장사치들은 북부여의 계루부족이었다. 주몽도 계루부족을 알고 있었다. 장사를 생업으로 삼는 부족이었다. 그들은 국경까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사례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한나라 국경수비대가 노략질을 일삼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명색이 국경수비대지만 화적떼에 다름이 없었다. 그들도 어쩔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 요새까지 병참이 제대로 수송될 리가 없어서 그들은 굶주리고 헐벗었다. 이런 방법으로라도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국경 수비의 임무만이 아니라 비밀스런 임무가 주어졌다. 동굴과 산막을 점검하는 임무였다. 성과가 없어서 예전처럼 성화가 없었지만 몇 년 만에 나오는 감독관은 반드시 동굴 수색에 대한 점검을 했다. 그들도 국가 차원에서 선기옥형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주몽 일행은 장사치 대열을 따라 계루부에 들어왔다. 계루부족장 연타발은 미리 보낸 전령 편에 사연을 듣고 주몽 일행을 성채 밖에서 나와 맞으며 환대했다. 연타발이 안내한 연회장은 크고 화려했다. 국가 간 무역을 해서 살아가는 부족답게 호사스러웠다. 연타발 군장의 옆자리에 여자 무사 세 사람이 동석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이 아까 싸움판에서 보았던 사내와 매우 닮은 여자였다. 그 낌새를 눈치 챈 연타발이 주몽에게 술을 권하며 동석한 사람들을 소개했다. 주몽이 주목한 여자 무사는 연타발의 공주 소서노였다. 장사 대열을 이끌고 극동지방을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장삿길에 여자 무사가 남장을 하는 것은 필수였다. 공주 소서노가 일어서서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인사를 했다. 주몽은 자신들의 처지를 감추지 않고 들어내서 말했다. 그러자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연타발이 주몽을 금와왕의 궁성에서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오갈 데가 여의치 않으면 잠시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주몽 일행은 연타발에게 감사하고 방랑을 멈추고 잠시 의탁하기로 했다.
며칠 뒤, 마리가 밖에서 돌아오더니 사냥대회 소식을 전했다. 국중國中 사냥대회가 시작되었다는 말이었다. 북부여는 해마다 1년에 봄 ․ 가을 두 차례 사냥대회를 열었다. 신분이 높고 낮음을 구별하지 않고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다. 사흘 동안 사냥을 하여 수확물이 가장 우수한 사냥꾼은 관직에 등용했다. 신분사회에서는 평민은 관직에 오르기가 어려웠으므로 출세의 길이기도 했다. 사냥대회에 나가기로 했다. 신분이 노출되면 좀 곤란할 것 같았으나 위험 부담도 그들의 젊은 혈기를 꺾지 못했다. 연타발 군장도 동의했다. 공주 소서노가 날랜 일꾼들을 30여 명 가려 뽑아 주몽의 사냥을 도왔다.
* 연타발延佗渤(계루부족장, 소서노의 아버지)은 졸본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 중국 길림성)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巨萬金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功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 남만주 남쪽 요하遼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 성제聖帝가 북부여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自納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勸하여 공功을 세웠으니 좌원坐原(벼슬)의 봉작封爵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多勿, 고주몽의 연호年號) 34년 병인丙寅 3월이다. (임승국의 한단고기)
# 북부여 북쪽 국경. 북부여 6세 선군 고무서 재위 2년, 계해癸亥 2년 한기 7139년(BC. 58년). 고무서천왕이 배석한 자리에서 사냥물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몽과 동료들이 거둔 수확물은 다른 사냥꾼들의 수확물 보다 월등했다. 고작 노루 두세 마리, 산토끼 여나문 마리에다 꿩 몇 마리를 내놓은 사냥꾼들은 주몽이 사람들을 시켜 메고 지고 온 수확물에 놀랐다. 호랑이가 한 마리에 곰 두 마리, 노루와 사슴이 다섯 마리 그리고 토끼와 꿩은 세어볼 필요도 없었다. 호랑이를 잡은 것만으로도 그들을 능가할 사냥꾼들은 없었다. 고무서천왕은 주몽을 궁성의 말지기로 삼았다. 아주 낮은 관직이었다. 그러나 주몽은 관직을 받았다. 말지기를 맡은지 석 달이 채 못 되어 주몽이 관리하는 말들은 비루먹은 말들이 사라졌다. 주몽은 활을 잘 쏘는 것만큼이나 말을 잘 다스렸다.
주몽이 일곱 살 나던 해, 한참 활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즈음. 해부루의 궁성. 주몽은 활로 높은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겨냥하고 있었다. 조준을 맞추고 마악 화살을 날리려던 참에 궁녀 한 사람이 물동이를 이고 지나갔다. 나뭇가지에서 두리번거리던 새는 궁녀의 등장으로 날아가버렸다. 쳇! 혀를 찬 주몽은 물동이를 이고 가는 궁녀를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더니 미처 재지 못한 화살 두 개를 시위에 걸더니 궁녀를 조준했다. 화살은 피융! 소리를 내며 날아가 궁녀가 이고 가는 물동이에 맞았다. 그러나 물동이에서는 물이 세어나오지 않았다. 물이 새어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물은 새어나올 수가 없었다. 주몽이 두 번째 화살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주몽의 두 번째 화살에는 화살촉에 솜뭉치가 감겨져있었고 첫 번째 화살이 물동이에 구멍을 뚫자마자 두 번째 화살이 날아가 물이 쏟아지기 전에 그 구멍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궁녀조차도 물동이에 구멍이 뚫린 걸 몰랐다. 주몽은 활을 쓰는 것만큼 말도 잘 다뤘다. 고무서천왕은 그런 주몽을 남몰래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고 사람을 동원하여 주몽의 행적을 탐문하였다. 고무서천왕은 주몽이 시조 해모수천왕가의 혈맥을 이어받은 왕가의 사람이란 걸 파악하고는 결심을 굳혔다. 고무서천왕에게는 후사(後嗣, 대를 이을 아들)가 없었다. 고무서천왕은 주몽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북부여 대신들과 관리들은 천왕의 결정에 합의하지 않았다. 이 때 소서노가 나타났다. 소서노는 아버지 연타발의 뒤를 이어 계루부 족장을 맡고 있었다. 소서노가 맨 처음 한 일은 졸본성의 북쪽 언덕에 제단을 쌓는 일이었다. 제단은 옛날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에 건축된 제단의 예를 따랐다.
고구려 유적지도 홀한성(5녀산성) 몽골알타이 서낭당 북한 동명성왕
* Daum Blog 인용 (고구려 건국 발원지) (고주몽)릉
* 도성 아사달에서 70리(35Km) 떨어진 완만한 구릉에 제단 터를 잡아 9한의 제후국 군사와 성 안 백성들을 동원하였는데 날마다 3만여 명씩 동원하여 연 인원은 1백 만 명이요 능묘 축성 기일은 석 달이 걸렸다. 거대한 돌을 다듬어 쌓은 제단의 기단은 정방형으로 각 방의 길이가 3000자尺(1Km)요 위로는 높이 또한 1000자(300m)로 일곱 단을 쌓아 올렸는데 흐린 날이면 그 꼭대기에 운무가 걸렸다. 첫째 단은 기단으로써 300자, 둘째 단 240자, 셋째 단 210자, 넷째 단 120자, 다섯째 단 90자, 여섯째 단 30자고 마지막 일곱째 단은 높이가 10자며 끝이 평편하고 안에 붉은 황토를 깔았다. 네 방면에 계단이 있어 왕래하였다. 그리고 북쪽을 향하여 제단을 놓았는데 능히 수 백인이 모여 제사를 지낼 정도였다.
# 제단을 완성하고는 새로 터를 닦아 새 궁궐을 지었다. 또 한편으로는 막대한 부를 풀어 북부여 대신들을 회유하고 관리들을 끌어들였다. 궁성이 완성되자 주몽은 소서노와 오이, 협보, 마리를 비롯한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올라 노인(주몽은 뒷날 노인을 백두선인白頭仙人이라고 불렀는데 노인은 천지화랑의 후예거나 아니면 왕위를 5가加에게 인계하고 입산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고조선의 마지막 천왕 47세 선군 고열가천왕라고 짐작함)에게 물려받아 감춰두었던 선기옥형을 모셔다가 제단에 안치하고 천제天祭를 지낸 뒤, 나라 이름을 가우리(구려)라 하고 왕위에 올랐다. 한기 7160년(BC. 37년) 이른 봄이었다. 이후 선기옥형을 안치한 제단은 소도蘇塗로 지정하여 웅상雄常(신목神木)을 심고 주변에는 천지화(무궁화)를 둘러 심어 신녀神女를 거느린 소서노가 관리하였으며, 선기옥형을 따라 몰려든 천지화랑은 소도 밖에 따로 집을 지어 국가 대소사의 신탁神託을 관장케 하였다. 신탁의 임무는 신神의 계시啓示, 천지天地 조화造化 즉 자연 이치理致와 변화 예측豫測, 현대의 기상예보 시스템과 같으나 기상변화와 천제지변의 관리 뿐만아니라 우주 운행의 원리로써 자연의 이치와 변화를 탐색하였다. 천제天祭가 으뜸가는 임무였고 농사와 치산치수治山治水를 비롯하여 전쟁의 길흉을 판단하고 국가 대소사의 성패成敗를 예측하는 현대의 기상 연구 보다 훨씬 방대하고 정교한 자연조화 예측 시스템이었다.
◎ 고주몽의 기록(한단고기 임승국)
* 고구려의 선조先祖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 곳이다. ‘조대기朝代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에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推戴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始祖라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冠(모자)을 쓰고 용광龍光의 검劍(칼)을 차고 5룡龍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侍從이 500여 명이었는데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에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觀境, 다스리는 영토)이 교화敎化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었다.’단제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壬戌(한기 6958년, BC. 239년) 4월 초 여드레로써 곧 진시황 정政 8년이다.
*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함에 있어 공功을 세워 봉封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만주 송화강)을 지나다가 하백녀河伯女 유화를 만나 즐겨 그 녀를 맞아들여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壬寅(한기 6998년, BC. 199년) 5월 5일이라. 곧 한漢 나라 왕 불능弗陵(소제昭帝)의 원봉元封 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舒蘭(만주 길림성 영길현 나목하 지류 잡분하 동쪽)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4방을 주유周遊하다 가섭원(동부여)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官家(관청)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 마리와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북부여 수도)으로 왔다. 때마침 (북)부여왕은 후사後嗣(아들)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 대통大統(임금)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始祖라 한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이병도 선군신화 태양새 3족오 초기 3국시대 4국 위치도
3국사기천문현상 추적 특별기고(조선일보) (고구려, 백제, 신라, 당)
중국 안의 3국 추정도 * Daum Blog 인용
# 왕위에 오른 주몽은 고조선의 영화를 복원하기 위해 조선이 멸망하고 분열된 100여개 열강제국 통합에 착수했다. 32년 갑오甲午 한기 7050년(BC. 147년) 10월 북옥저를 통합했다. 북옥저는 땅이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고 국경 또한 천험의 요새로 둘러쌓여 외적의 침입이 어려운 나라였으나 고주몽은 북옥저를 통합의 제 1 목표로 삼았다. 북옥저 병합의 목적을 세우자 고주몽은 전략을 세웠는데 가장 먼저 한 일은 선기옥형의 신탁을 받는 일이었다. 주몽이 친정계획을 세우자 북옥저의 강대함과 천험의 지세를 들어 쉽게 공략할 수 없음을 근거로 협보 등 중신들과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고주몽은 일의 중차대함을 설파하며 구지 친정을 계획했다. 아직 국기가 굳건하지 못함은 고주몽이 더욱 잘 간파하고 있었다. 한기 7151년(을미乙未년 BC. 146년)에 수도를 졸본으로부터 눌현訥見으로 옮긴 것도 왕권을 굳건히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졸본은 북부여의 옛 토반土班들이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정치적 기반이 열악한 고주몽으로서는 정치적 여건을 쇄신할 필요가 있었다. 고주몽은 북옥저를, 주변 국가에서 가장 병합이 어려운 북옥저를 선택한 것도 어려움을 선택하여 복속시킴으로써 토박이 정치세력을 제압하려는 전략이었다. 북옥저가 병합되면 군소 국가의 통합에 파급효과도 클 것이었다. 이런 모험을 강행하려는 고주몽의 의지는 알고 있었으나 협보 등 중신들이 누구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아직 국가의 기틀이 잡히기도 전에 잘 못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고주몽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인솔한 병력도 최소화했다. 왕이 친정하면서 전쟁에 임하는 병력을 고작 기병 3000으로 하는 일도 극심한 반대를 불러왔으나 이 역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고주몽은 출병하기 전에 선기옥형을 관장하는 천지화랑의 신탁을 들었다. 주몽제는 천문을 관찰하고 일기를 예측하고 별자리를 탐색하였던 신녀로부터 3족오가 나타났다는 확실한 예언을 들었다. ‘검은 태양새가 동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녀의 신탁이었다. 선기옥형의 신탁은 확실한 승리의 그리고 명분을 주지 못한 전쟁에서 민심을 통합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출병 반대세력의 의기를 신탁으로 꺾는 극적효과를 노렸다.
*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 * 유사 이래 첫 노래
유리왕은 첫째 왕비가 죽자 부여족 치희와 한족漢族 화희를 왕비로 두었는데 서로 다툼이 심했다. 어느 해 유리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며칠만에 돌아와보니 한족 화희가 돌아가버렸다. 황조가는 화희에 대한 사랑을 꾀꼬리에 비유한 노래다.
편편황조翩扁黃鳥/ 자웅상의雌雄相依/ 염아지독念我之獨/ 수기여귀誰其輿歸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의지하네/ 외로와라 이내 몸/ 뉘와 함께 더불을꼬
고구려제국 캐릭터 멸망한 고구려 출신 고구려 전성기
* Daum Blog 인용 고선지 장군 서역 정벌도 강역 확장도
◎ 천지화랑 기록
* 3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국선國仙은 진흥대왕 때부터 문무대왕 때까지 전성기로써 사다함斯多含 같은 이는 겨우 15, 6세의 소년으로 그 제자의 수가 중국의 대성大聖인 공구孔丘(공자)와 겨룰 정도가 되었으며 이 밖에 현상賢相, 양장良將, 충신忠臣, 용사勇士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났다. (3국사기 김대문의 설說. 신채호 조선상고사)
* 많은 고기古記에서 (선군)왕검王儉이 국선의 시조始祖됨을 찾고 고구려사에서 조의선인皁衣仙人(천지화랑) 등이 국선과 하나임을 찾으며 이로부터 국선의 내원來源을 알게 되고 고려사에서 이지백李知白이‘화랑을 중흥中興시키자’고 한 논쟁과 예종睿宗의‘4선仙의 유적을 더욱 영예롭게 하라’고 한 조서詔書와 의종毅宗의‘국선들이 관리로 등용될 길을 더욱 넓게 열어라’고 한 조서 등을 보면 고려 때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전통이 남아있었음을 볼 수 있으니 ….
# 백두선인이 예언한대로 주몽이 왕위에 오른 뒤 천지화랑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조선이 멸망하자 산속으로 흩어졌던 그들이 선기옥형의 이름 아래 주몽제에게로 모여들었다. 그 수효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 주몽제가 출병을 하기 직전에는 이미 수백 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선기옥형을 지키면서 주몽제에게 천지조화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천지화랑의 용병체제로 전쟁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용병傭兵으로써 정규부대와는 합류하지 않았다. 주몽제의 근위부대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머리를 깎고 조의皁衣(검은 옷)을 입고 활을 사용했다. 활은 창이나 칼보다도 응용성이 높았다. 먼저 활로 적을 제압하고 백병전에서는 창이나 칼을 사용했다. 그러나 늘 왕의 주위에서 왕을 옹위하고 대기하였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천지화랑이 투입되었는데 싸움에 나가 패하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화랑이 선기옥형을 통해 읽는 일기예보와 천문현상은 자연의 조화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오차가 없었다. 그래서 천지화랑의 기상 예측은 농사나 국가 대소사는 물론이고 전쟁에서도 중요한 정보였다. 천지화랑들의 신탁을 통해 전쟁기간의 일기를 예측할 수 있는 주몽제는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협보 등 근신들과 조정대신들은 신탁을 예언으로 믿지 않았다. 한낱 주술로 인식했다. 북옥저 국경에 다다른 주몽제가 3000 기병을 멈추게 하고 북옥저의 수도가 바라다보이는 낮은 구릉에 진을 쳤다. 장군들은 진지가 적진에 너무 가깝고 늦가을 일기가 불순하기 때문에 평지 보다 낮은 곳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상례라고 건의했으나 주몽제는 이를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묵살했다. 이 또한 천지화랑의 기상변화 예측 건의를 기반으로 한 결단이었다. 휘하 장졸들은 주몽제의 이런 저의를 간파하지 못해 주몽제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다. 돌풍이 불어오거나 역풍이 진지를 급습하는 때에는 적이 아니라 바람의 피해가 크다는 것을 아는 장군들의 건의를 묵살한 것이다. 장군들은 모두 불만에 찬 표정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신녀의 신탁을 발설할 수는 없엇다. 주몽제는 신녀의 신탁을 들었다.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싸움이 어렵다고 본 주몽제가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병사는 목을 벤다.’ 그리고 주몽제는 사흘 동안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다. 장졸들이 조바심을 냈으나 엄명 때문에 아무도 들어내놓고 말하지 못했다. 사흘 동안 쉬면서 주몽제는 장졸들이 충분히 쉬면서 출병 이후 먼 길을 행군한 병졸과 말이 피로를 풀게 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초저녁에 주몽제가 장군들을 소집했다. ‘오늘 밤 자정에 성을 함락한다.’ 주몽제는 3000 기병을 다섯 대로 나누었다. 중군은 휘하에 두고 몸소 지휘했다. 주몽제가 명령했다. ‘오늘 술시戌時경부터 돌풍이 심하게 불고 큰 비가 내릴 것이다.’ 장군들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티 하나 없이 별빛이 총총한 늦가을 날씨였다. ‘비는 무슨, 더구나 큰 비가 내린다고, 돌풍까지?’ ‘가을 장마 얘기는 들어보았지만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치면 모를까?’ 가당치 않는 일이었다. 장군들이 불신하는 눈치를 알았으나 주몽제는 모른 체 하고 명령을 계속했다. 사흘 동안 싸움이 소강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북옥저는 방심하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큰 비가 내리면 비를 피하기에 급급하여 대치하고 있는 전쟁상황을 망각하고 전세가 흐트러질 것이니 그 때 네 방면으로 성문을 집중 공격하면 필승한다. 장군들은 옳은 작전이다 라고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문제는 돌풍과 함께 내릴 거라는 큰 비였다. ‘돌풍과 비는 고구려 대황제인 짐朕이 부른다!’ 주몽제는 작전명령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돌아가는 장군들의 얼굴들이 어두웠다.
그러나 장군들의 불신과 관계없이 유시酉時가 되면서부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돌풍突風이었다. ‘아니? 정말 돌풍이 아닌가?’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장졸들의 보고를 듣고 장막을 뛰쳐나온 장군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거칠어졌다. 술시가 가까워지자 바람은 흙먼지를 날리고 진지의 장막을 날려버렸으며 깃대가 땅바닥을 칠 정도로 세차게 불어쳤다. 늦가을 광풍狂風이었다. ‘대왕은 귀신인가 사람인가?’ 출병 준비를 하는 장군들이 몸을 떨었다. 느닷없이 밤중에, 그것도 광풍이 몰아치는 밤에 고구려군을 맞은 북옥저는 우왕좌왕하다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하고 성문을 점령당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전법이다!’ 주몽제는 북옥저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살려두고 왕의 칭호를 허용했으며 정사를 보전하도록 했다. ‘정복은 쉽다, 다스리기가 어렵다. 예로부터 창업 보다는 수성이 어렵다지 않았는가.’ 정복으로 영토를 넓혀 국세를 일으키고 복속으로 속국을 삼았다. 정복한 나라들은 풀 한 포기도 다치지 않도록 엄격하게 병졸을 단속했다. 정복된 쪽에서 보면 달라진 것이 없었다. 속국이 되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고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았음으로 문제삼지 않았다. 오히려 힘있는 강국의 비호가 정통성의 길이었다. 그래서 예와 맥이 순순히 나라를 들어 바치고 주변의 30여 개 국가가 스스로 복속을 바래서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주몽제의 고구려는 동쪽으로 동옥저와 읍루, 서쪽은 북부여(내몽고자치국), 남쪽으로 낙랑군 그리고 북쪽의 흑룡강 주변을 복속하여 옛 고조선의 강역의 1/3을 되찾았다.
# 동부여 2세 금와왕 정유丁酉 24년 한기 7173년(BC. 24년) 유화부인이 돌아셨다는 칙사가 동부여에서 도착했다. 주몽제가 울면서 칙사를 맞으니 장군들과 대소 신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 명으로 장례 행렬을 조직하여 유화부인을 졸본으로 모셔와 산 같은 능을 조성하고 황태후의 예로 장사지냈으며 능 곁에 묘사廟社를 지어 제관과 신녀들을 상주시키며 4철 제사를 지낼 때는 왕이 몸소 참석하였다.
# 주몽제 다물 17년 한기 7177년(BC.20년) 봄 주몽제의 아들 유리가 찾아왔다. 유리는 주몽제가 방랑시절 예씨부인을 만나 낳은 아들이다. 주몽제는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천하天下를 주유周遊하던 시절이라 훗날 대업大業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알면 유리에게 주어 찾아오라고 지니고 있었던 구리거울을 꺾어 예씨부인芮氏婦人에게 주고 헤어졌다. 그 거울을 들고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제는 곧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다. 이는 아주 어려운 정치 상황을 만들었다. 중신들은, 비록 의붓자식이었지만 소서노가 우태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 온조나 비류가 제위를 물려받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유리에게 태자 책봉이 되자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주몽제는 태자 책봉의 국사가 논의 될 때마다 언제나 국사를 늦추며 유리가 나타난다면 유리가 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신들은 유리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지 않았으며 설사 나타나더라도 주몽제의 말처럼 그가 태자로 책봉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몽제의 고구려 건설에 소서노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중신들이나 국가의 중추세력들이 대부분 계루부 세력이었기에 중신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으나 유리는 태자로 책봉되었고 조정은 뒤숭숭했다. 소서노의 계루부족의 세력이 막강했으므로 조정의 분위기가 혼란스러웠다. 한편에서는 반란의 조짐을 거론하고 있었다. 이 때 소서노가 주몽제를 만났다. 그리고 소서노는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고구려를 떠났다. 소서노가 떠나는 날 주몽제는 졸본 10리 밖까지 소서노를 배웅했다. 그리고 소서노를 위해 천부인 - 선기옥형을 전했다. 제단에 안치된 선기옥형을 본떠서 만든 선기옥형이었다. 이후 주몽제는 선기옥형을 100여 개 모사했다. 그 선기옥형은 주몽제가 다스리는 변방 나라들에게 전달되어 치세治世에 이용되었다.
무용총 수렵도 민족성산 백두산천지의 봄 무용총 춤과 노래 그림
* Daum Blog 인용
* 소서노와 추모(고주몽) 그리고 비류, 온조
(임승국의 한단고기, 차배옥덕 한국여성문화연구원장 Daum Blog 논문 인용)
한단고기(임승국)의 고주몽 기록은 북부여기 하편 5세 선제 고두막(동명왕, 조선족 장수 4명과 의병을 일으켜 위만의 우거성을 회복함, 의병활동 뒤 북부여 5세 선제 등극, 고리국에서 일어나 북부여를 승계함) 임인 30년, 한기 7118년(BC. 79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릉에서 태어났다. 한단고기 해설에서, 고주몽은 고구려의 시조, 한기 7139년(BC. 58년)에 고구려를 세웠다. 3국사기와 3국유사에는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 있다. 한단고기에서는 고주몽의 가계를,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동생이었으며 장군이었고 위만의 잔당을 평정한 공로로 고구려후가 되었던 고진의 손자 옥저후 고모수(일명 불리지)와 하백(부족)녀 유화부인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한다. 옥저후 고모수의 아들이며 고구려후 고진의 증손자다.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유랑하던 시절 혼인한 부인은 예씨(고구려 2대 유리왕의 어머니)며, 북부여로 남하하여 북부여 6세 선제 고무서의 사위가 됨으로써 북부여를 승계하였다.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 형제를 두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를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고구려 건국과 우태백제와 온조백제 건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여걸로 표현했으며 여성의 행적기록에 인색한 3국사기에도 등장한다. 소서노는 계루부부족 군장 연타발의 공주로써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일으킨 여걸이었으며,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국모다. 소서노는 백제를 건국하고 고구려의 주몽에게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는데 주몽은 소서노에게 어라하於羅瑕(북방민족 돌궐의 천자天子 칭호)라는 책호冊號를 주었다. 고구려 홀한성은 소서노와 주몽의 활동근거지로써 고구려 건국의 발원지다. 근래 충북 음성의 조각공원에 소서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 고주몽과 의리로 맺은 형제 오이, 협보, 마리는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였는데 협보는 뒤에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협보陜父는 (소서노의 아들 온조를 고구려 2대 왕으로 추대하였으므로 왕위 계승이 내부적으로 확정된 때 뒤늦게 나타난 태자 유리와 왕권 승계 불화로) 남한南韓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 그를 따라온 자도 수백 가家였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 큰 흉년에 시달려 유리遊離하고 방황했다. 협보는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와 해포海浦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 바로 구야한국拘邪韓國(일본의 가장 큰 나라)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일본 구주 남쪽 바다)의 북안北岸이다. 여기서 수 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의 시조라 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고 연정聯政을 이뤄 이를 통치케했다. (임승국의 한단고기)
◎ 자명고自鳴鼓와 낙랑공주
# 호동왕자는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왕자인데 사냥을 나갔다가 최씨 낙랑국왕(왜곡歪曲된 한漢 4군郡의 낙랑군郡이 아니고 고조선 멸망 뒤 열국시대의 낙랑국國)을 사냥터에서 만났다. 낙랑국왕은 호동왕자가 고구려 왕자라는 것을 알고 왕성에 초대하였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를 본 순간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낙랑왕은 은밀하게 두 사람을 혼인시켰다. 며칠을 낙랑궁에서 보내고 돌아가며 호동왕자는 철석같은 맹세를 하였다. 돌아가서 부왕께 말씀드려 정식으로 혼인을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왕자는 부왕께 낙랑공주와 혼인을 허락받으려고 벼르었으나 호동왕자를 질투하는 대무신왕의 두 번째 왕후의 간계奸計로 허송세월虛送歲月을 보내고 있었다. 왕후는 호동왕자의 의지가 너무도 굳건하다는 것을 알고 대무신왕께 모략謀略을 제시하였다. 낙랑에는 신비한 북이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는 기미가 있으면 스스로 울렸기 때문에 ‘자명고自鳴鼓’ 라고 했다.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파괴하면 결혼을 허락하라는 계략이었다. 호동왕자는 망서렸으나 사랑 때문에 공주에게 자명고를 파괴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공주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하고 고민을 했으나 역시 사랑하는 왕자와 함께 살기 위해 아버지를 배반하고 자명고를 칼로 찢어버렸다. 자명고가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고구려는 낙랑국에 쳐들어갔다. 고구려군이 성 밖에 몰려와서야 허둥지둥한 낙랑국은 자명고를 점검하고 자명고를 공주가 파괴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주의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렸음을 간파한 호동왕자가 공주를 구하려고 온 힘을 기우려 낙랑성을 공격하였으나 낙랑성의 항복을 받았을 때 공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호동왕자는 참소讒訴한 왕비를 고발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며 ‘의붓어머니라지만 어찌 어머니를 고발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는 불효를 저지르랴’ 하며 끝내 시름시름 앓다 공주를 따라 세상을 떴다.
고구려제국 강역도 광개토대왕상 무용총 수렵도 만주 집안현
* Daum Blog 인용 광개토대왕비
◎ 광개토경호태열제廣開土境好太列帝 (영락대왕永樂大王,
묘호廟號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剛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이름은 담덕, 소수림왕의 손자며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한기 7583년(AD. 386년) 13세에 태자가 되었고, 한기 7588년 신묘년(AD. 391년) 18세로 고구려 제 19대왕에 즉위하였다. 연호는 영락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불교를 받아들여 실시한 안정의 기반에서 고조선 이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국토를 정복한 왕으로 평가한다. 살아서는 영락대왕이었고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4해 안에서는 모두 열제라 불렀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군진에 나아갈 때 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의 노래(어아가於阿歌, 고조선시대 가사歌辭)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수巡狩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3신神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천악天樂을 사용하였다.
<어아가>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말세
어아 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 맘으로 똑 같아라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약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고구려 유적지도 홀한성(5녀산성) 몽골알타이 서낭당 북한 동명성왕릉
* Daum Blog 인용 (소서노 고구려 건국 발원지) (고주몽)
# 담덕이 태자가 되었을 무렵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 신라와 대치하였고, 서쪽으로는 후연, 북쪽으로는 동부여 그리고 동쪽에는 읍루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어 고립무원의 형세였다. 반면 고구려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구태백제는 한기 7401년(AD. 204년) 10월 대방고지(황해도)에서 개국하여 한기 7402년(AD. 205년)에 온조백제와 마한연맹을 정복하였고 한기 7402년 - 7405년(AD. 205 - 208년)에 대마도, 일본열도, 가야국 대부분을 복속하였으며 한기 7510년 - 7511년(AD. 313 - 314년)에 모용씨(중국 연燕 나라 왕王)와 동맹을 맺고 요서에 진출하여 유성(조양)과 북평(정주)에 백제군을 개설하고, 서진이 망한 한기 7513년(AD. 316년)에는 중국 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두었으며 한기 7568년(AD. 371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 광개토왕이 등극하기 전 태자 담덕시절에 우태(비류)백제를 침공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구태백제는 이웃한 온조백제와 한 뿌리임을 내세워 유대깊은 동맹관계를 맺고 있어 침공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이에 담덕은 원대한 전략을 세웠다. 먼저 북쪽의 위협인 후연에 조공을 하여 후연을 포섭한 뒤 후연 국경에 배치한 군사를 빼내서 백제 침략에 동원하였다. 다음에는 온조백제를 침공하는 양 하면서 못 이긴 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온조백제가 고구려를 물리쳤다는 자만심을 갖게하였고 이로 인해 우태백제까지 없신여겨 강화도의 우태백제 수군을 몰아냄으로써 서해안 방면이 무방비 상황이 되었다. 또한 보기병 위주였던 군제를 개편하여 수군을 대폭 강화하였다. 그 당시 우태백제는 물론 중국, 왜까지도 소함(20 - 30명 승선) 위주였던 전함을 대형화(70 - 100명 승선)하였다. 이렇게 철저한 전략을 세워 즉위하자말자 우태백제, 온조백제 그리고 신라까지 차례로 복속시킴으로써 먼저 남쪽을 평정하였다. 다음에는 고구려에 조공하는 신라를 노략질하였다는 명분을 세워 임나가야(대마도)와 일본열도 왜까지 동쪽을 모두 복속시켰다. 이어서 서쪽의 후연을 치기 위하여 먼저 북쪽의 거란을 귀속시켜 배후를 평정한 뒤 후연을 공략하였다. 이윽고 4해海를 평정하고나서 중국 중앙부에 있는 북위를 공략함으로써 동북아 통일의 원대한 계획을 눈앞에 두었는데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39세로 붕어하였다. 광개토왕의 권역은 남으로 백제와 신라 그리고 제주도, 동으로는 대마도와 일본열도, 북으로는 거란 그리고 서로는 후연까지 방대한 통치권을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기상으로 보면 왕의 이상대로 북위를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고 고구려는 세계 역사상 동북아 통일의 대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 한기 7588년(AD. 391년) 영락 원년 등극한 해에 평양에 9개 사찰 창건 내치 안정. 성동격서작전으로 신라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백제 북변 석현 등 10개 성 획득. 겨울 10월, 왕의 반간계에 속아 자만한 온조백제가 구태백제 수군을 몰아내버려 텅빈 강화도를 아무 저항없이 경유, 한강을 통하여 온조백제 수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관문 지킴이 관미성을 병사 수만 명으로 일곱 방향에서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 수도 보급로 차단에 온조백제 자멸 항복. 온조백제의 수도는 점령 하지 않고 항복만 받고 체제 유지시키고 돌아감. 곧 북쪽의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포로 500명을 잡아왔는데 이는 후연을 치기 위한 정지작업인 셈. (일본서기 응신천황기 3년 조에 온조백제 진사왕이 우태백제를 배신하여 10월에 온조백제가 고구려에 항복하였으므로 왜가 11월에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장군을 보내 진사왕의 책임을 묻자 신하들이 왕을 죽여 사죄했으므로 아신왕 세우고 돌아왔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왜의 국력과 외교활동을 살펴 조작으로 추정함)
고조선시대부터 이어내려오는 전통의식, 차례로 솟대(소두, 소도蘇塗), 신목神木
베는 의식, 신목행렬과 마을의 웅상雄常(당산나무) * Daum Blog 인용
* 영락 3년 한기 7590년 - 7592년(AD. 393 - AD. 395년) 백제가 다시 배신하여 한강 유역 을 침략하자 백제 정벌. 거란, 비려 토벌 3부족 700부락 함락. 북풍 등 요동 일원 정복.
* 영락 6년 한기 7593년(AD. 396년) 우태백제가 왜와 밀통하여 국경을 침범하자 수군 수만 명으로 금강 하류에 상륙하여 백제 대산한성과 아단성을 치고, 보기병은 아리수(한강)를 건너 도성(충청도지방)을 공격하여 수도를 점령하였는데 한강 유역 58성 700촌이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졌다. 백제왕은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으며‘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왕은 제주도까지 점령함으로써 백제와 왜의 해상통로 차단하고 왕의 동생과 대신 10여명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개선하였다. 이 때 우태(구태)백제의 지배층들이 대부분 왜로 피신
* 영락 8년 무술년 한기 7595년(AD. 398년) 신라 복속, 영락 9년 기해년 백잔(백제의 비하)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남쪽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왜인들이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를 파괴하니’라고 구원을 청했다. 왕이 보기병 5만을 보내어 왜를 물리치고 추격하니 적병 몰살. 내친김에 임나가라(대마도)를 정복하고 일본열도로부터 왜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백제, 신라, 가야, 왜, 임나가 조공했다. 북부여는 전쟁 없이 귀복하였고 백신(연해주 숙신), 토욕(선비족 모용외 일파로 현재 감숙성 청해성 토욕혼에 위치)을 쳐서 300명을 포로로 잡아옴
* 영락 10년 한기 7597년(AD. 400년) 신라를 침범한 왜구 격퇴, 임나가야(대마도) 등 일본열도의 왜를 모두 복속함, 안라 등 가야 여러 나라 복속함, 중국 동해안 요서 백제 분국 복속함, 후연의 유주자사 13군 태수(평남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기슭 고분벽화, 13군은 범양, 어양, 연군, 상곡, 대군, 광녕, 북평, 요서, 창려, 요동, 현도, 낙랑, 대방군)를 복속하였는데 귀복시 유주자사 진의 역할 컸으므로 13군 75현을 유주자사 진이 다스림, 이 때문에 후연과 동맹 파탄
* 영락 12년 한기 7599년(AD. 402년) 후연과 전쟁 대비하기 위하여 백제 요서분국과 후연의 유주 등 13개 군을 먼저 회유하여 복속함으로써 후연은 동쪽으로 고구려, 서쪽은 유주 등 13개군, 남쪽에는 백제의 요서분국에 포위됨. 그런 다음 비로소 대준하 유역 후연의 숙군성을 공략하니 평주자사 모용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함으로써 포위망을 압축하여 쉽게 점령
* 영락 14년 한기 7601년(AD. 404년) 후연의 연군 정벌, 황해도 연안 대방군에서 왜와 백제 연합군 격파
* 영락 15년 한기 7602년(AD. 405 - AD. 406년) 후연군 격퇴, 영락 16년 2월에 궁궐 중축 수리
* 영락 19년 한기 7606년(AD. 409년) 보기병 5만을 보내니 마침내 후연이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여 조선족 고운을 왕으로 세워 북연이라 하고 복속함, 백제 사구성 등 6성 획득, 평양 동쪽에 독산 등 6개 성을 건축하여 평양 주민 이주
* 영락 20년 한기 7607년(AD. 410년) 동부여 연해주 일원 정복, 길림 등 북부여 수사 파견 통치, 동부여 추모왕 속민이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아 정벌
* 영락 22년 한기 7609년(AD. 412년) 중국 중원이 혼란하여 정벌의 적기였으므로 북위를 정벌하여 사해를 평정하고자 군세를 일으켜 준비하던 중 39세 붕어, 한기 7611년(AD. 414년) 아들 장수왕 3년에 대왕비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