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새 2006. 10. 22. 10:45

 

*  논술자율학습 구성

  1. (40여년 학교 글쓰기지도 노하우) 논술자율학습 프로그램 

  2. 논술칼럼자료 (1)(2) 100여편 (20여년 간 한겨레신문, 광주일보, 순천신문, 광양신문, 광주교사신문, 미래교육신문 연재)

 

*  인터넷 논술개인교수 연락처  : 2chman@hanmail.net

 

*  교학대한사는 한국통사 4장으로 구성 (오른쪽, 카테고리 전체보기 참조)

 

 

 

                 * 광양신문연재 칼럼, 교단 40년 회상

 

                 아리랑고개의 추억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님의 귀천(歸天) 마지막 구절. 회고록 연재를 두고 단안을 내리지 못하다가 막상 회고록을 쓰겠다고 안두(案頭)에 서니 상념이 무상, 옛 선인들은 이를 두고 주마등(走馬燈)이라 했을 것이다. 유년시절의 고향과 동무들, 삶의 진로가 바뀐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교단 40여년의 풍상과 애환들.

 아리랑고개는 광주교육대학 구내 풍향동산의 낮은 언덕이다. 맑은 솔내음이 가득한 가운데 벚꽃잎이 눈처럼 날리고 5월이면 아카시아 짙은 향기 그리고 늘 푸른 빛을 지닌 숲은 청운의 뜻을 품은 대학생들을 낭만과 패기로 유혹했었지. 강의를 빼먹고(대리 대답이 들통이나서 부탁을 받은 친구가 곤욕을 치룬 일도) 탐독했던 헤르만 햇새들과 단팟죽 내기 정구로 세월을 보내다가 풍금 F학점(권총 찬다고 했다)을 내리 세 번 받고. 결국 졸업을 못하리라는 조바심에 새벽잠을 설치며 풍금실에서 악보와 씨름하던 일들. 떠꺼머리 선머슴아들을 잡아다가 온전한 교사로 만들어 보겠다는 음악 교수님은 손톱만큼의 실수도 용서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이하랴. 졸업 시즌이면 정례 행사 치루듯 교수님댁 장독대만 애꿎은 수난을 겪고 사모님은 와장창 공포증에 시달려 홧병을 얻었다나. 후속타로 풍금실 오르간이 박살나는 건 기본이고 피아노마져 격전을 치른 상이용사 몰골이 되기 일쑤.

 수재(24대 1)들만 가려뽑은 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하늘을 찌를듯한 기개로 유학시절을 보냈으나 졸업 무렵 느닷없이 어려워진 가계 때문에 희망했던 법관의 꿈이 무산되자 자포자기 상태로 교대를 지망했다. 졸업을 하면 곧바로 선생님으로 발령을 내주는 월급(초봉 쌀 3가마, 1만원 남짓)이 급했다. 그래서 단짝이었던 친구와 나는 동병상련의 실의를 안고 교대를 지망했고 입시 준비를 초등학교 6학년 전과지도서로 하기로 했다. 시험과목의 음악과 미술의 기초 지식이 없었던 우리는 색상과 음표 앞에서 무기력하고 무지했기때문. 그러나 신통하게도 도래미파 한 번 목청껏 외고 오리무중(五里霧中) 같은 주먹 댓상을 마친 우리는 둘 다 무난히 합격을 했고, 친구와 나는 분풀이 삼아 도서관의 3천권 장서나 독파해버리자는 위대한 계획을 음모처럼 꾸몄다. 그래서 강의는 면학의 의미가 없었고 하루하루 독파한 책이 늘어가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다. 잠 자는 시간을 빼고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교직 천직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은 건 발령받고나서 한참 뒤의 일이다.


                    할머니의 작수발


 할머니는 지성으로 치성을 드렸다. <삼시랑네 삼시랑네, 우리 손자들 무병장수 입신양명>을 빌고 또 빌었다. 평생을 하루 같이 두 손을 모아 축수를 했다. 미신이라고 치부하여 사탄 보듯 금기시했던 할머니의 중얼거림을 이해한 건 훨씬 머리가 크고 뒤의 일이었다. 얼어붙은 겨울 어느 날, 새벽에 눈을 뜬 나는 할머니가 촛고지 등잔불 앞에서 얼음물로 감은 머리를 빗는 모습을 보았다. 찬 물방울이 서리처럼 얼굴에 내려앉아서 섬뜩한 기운에 눈이 뜨였던거다. 할머니는 평생을 하루 같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치잣거리 옹달샘 정화수를 길어 장꼬방(장독대) 작수발에 모시고 아침 해가 안산 마루에 오를 때까지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히며 삼시랑네를 외었다.

 어린시절 우리 집은 동네 부자였다. 말 타고 종 재비한 증조부의 선비연(然) 가난에서 할아버지의 자수성가로 일제시대 말 대흉년에 남들이 모싯잎에 송쿠(소나무 어린 가지 속살)로 연명을 하던 때도 우리 집에서는 이팝을 먹었노라 할머니의 자랑을 듣고 자랐다. 다만 증조부, 조부, 아버지 3대가 무녀독남의 내림이었으므로 할아버지의 나머지 소원은 자손의 번창. 그래서 좋은 혼처 다 물리치고 벌족한 집안의 장녀를 며느리(동갑나기 18세)로 맞아들여 이듬해에 떡두꺼비 같은 손주를 안았으니, 하여 두 살 터울로 머시마를 내리 낳고 6남 4녀 십 남매를 두었으니 가난과 자손이라는 간절한 소원 두 개가 모두 이루어진 셈이다. 무엇이 부려우랴. 할아버지는 교회터를 희사하고 동각을 지었다. 명절이면 동네 가난한 집에 쌀 말을 돌리고 노인네가 있는 집에는 그 시절 귀한 돼지 고기나 해우(김)를 선물해서 느자구있는 집안의 터전을 일구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잖을 손주들을 위해서는 텃밭 한 마지기에 몽땅 단(설탕)수수를 심어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을 샀으나 개의치 않았고 여름철에는 아예 국화빵틀을 사서 집에서 빵을 구웠다. 집 앞 선산 밑 과수원에는 배와 감이 지천이고 감나무 아래는 딸기를 심었다. 과일나무들이 숲을 이룬, 동네에서 용마름이 가장 긴 우리 집은 별장 같았다. 텃밭에는 모란과 작약이 흐드러지고 천여평이나 되는 집터에는 온갖 기화요초와 과일나무들. 여름 밤 십리 밖에서도 향기를 맡는다는 우리 집 백합. 할머니는 새벽 이슬 머금은 수백 송이 꽃중에서 꽃봉오리가 가장 탐스러운 백합을 내가 교회 강단에 바치도록 배려하였다. 삼시랑, 점쟁이, 무당 그리고 교회의 예수님과 부처님, 할머니에게는 왜 그렇게 많은 신이 필요했을까?


                    모교, 첫 부임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성경 말씀. 출생 신분과 깨복쟁이 목마 타고 자란 과정을 낱낱이 알고 있는 지역 사람들이 훈장연(然)하는 사람의 시각 지평을 과거에다 둔다는 말이렸다. 우여곡절 끝에 초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얻어 발령받은 첫 부임지는 고향의 모교. 성경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고향 선배와 멀고 가까운 인연을 지닌 분들과 해후는 반드시 바람직하지만은 않았다. 교장선생님은 초등학교 시절의 은사여서 더욱 어려웠고, 만나서 인사를 나누다 보면 뉘 집 장손이니 뉘 아들이라느니 신분이 벌거니 벗겨지는 일도 반드시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모교 2년은 보람도 있었지만 질곡도 컸고, 그래서 2년만에 유랑처럼 고향을 떠났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야(有朋自遠方來 不易樂乎也 - 논어 학이편)>. 교장선생님이 교문 앞 상점 노인장께 심부름시킨, 나를 당혹케한 쪽지 편지. 뜨광한 표정을 읽고 한바탕 호탕하게 웃으며 들려준 노인장의 해설은 <화투칠 친구들이 다 모였느냐>는 전갈. 또 하나 고향을 뜨게 한 사건, 그 건 관상과 관계가 있는데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나 나는 그 때의 일로 관상을 원시적인 논리로 대접하지 못한다.

 중년에 좋아했던 선배가 승진하여 교장 부임을 하면서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이 선생, 어떤 교장이 좋은 교장일까?> 갑자기 받은 질문이라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꽃이나 많이 심으세요>라고 대답하였다. 다소 엉뚱하게 들렸던지 선배는 놀란 표정이었으나 나는 더 설명을 하지 않았다. 꽃이나 많이 심어야지라는 속셈을 짚어 올해 우리 학교의 학교운영계획을 입안하면서 나는 두 가지 기본 입장을 세웠다.

 첫째, <선생님을 해방시켜야 교육이 바로 선다>. 해방은 무슨, 지금이 일제시대냐? 허나 (중등 교원, 대학교수 대비)초등학교 교사의 위상은 열악하다못해 황폐화라고 해야 할 상황이다. 연간 2천여건(우리 학교 교사 개인당 250건, 평균 하루 1건. 중등 교원 대부분 없음)의 공문 수발과 연중 7십여회(대략 주 1회)의 교육행사에서, 그리고 10개 교과(중등 교원 1개 과목)에 주당 30시간(중등 교원 1과목, 14시간)이 넘는 수업에서 해방이다. 선생님의 학교생활이 즐거워야 교실이 살아나고 교실이 안정되어야 교육이 바로 선다.

 둘째, <꽃과 노래와 사랑이 가득한 학교>. 부임하고 내 첫 교육사업은 화단 정리, 파격적 거금을 들여 한국 자생화 3천여 그루를 심었다.


                 괴짜 교장


 꽃을 심는 일이 교장 역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장을 어느 지역의 3대 악당이니 4대 악당이니 하는 일에는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나는 악당이라면 서부극의 등 뒤에서 권총을 들이대는 비겁자나 막가파, 또는 조직 깡패를 연상한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 <실력 전남> 교장 직무연수 토론회에서 튀어나온 교장선생님들의 말이 그랬다. 충격적이다.

 악당은 아니라지만 나도 괴짜 교장, 감초 교장으로 불리운다고 듣고 있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군 지정 연구학교를 자원하여 <교원의 사무 근절(경감이 아니라)과 교육(적)행사 축소>를 연구한 보상이다. 자율근무시간제 공문이 오니까 얼씨구나 받아들여 관리과의 빈축을 사고, 방학중 교사 근무(조)를 교육청의 사전 내락 없이 덜컥 없애버린데 대한 또라이급 별명. 사사건건 하는 일마다 교육청 눈에 나고 교장들의 비위를 거슬리니 그래도 싸지. 정년이 이마에 차서야 눈이 트이고 6십이 다 되어서야 늦부지럼 철이 나서 내깐에는 초심으로 돌아가 뭘 좀 한다는 게 이 모양이다. 정암(趙光祖) 보다 백년 늦게 태어난 율곡(李珥)은 37세에 대사헌이 되고 38세 기묘사화에 사약을 받은 그의 학식과 덕망을 안타까와하며 <기진유계(其進有階) 기변유점(其變有漸) - 앞으로 나가는 일은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서둘지말고 변화를 구하는 일은 차근차근> 이라고 탄식했다는데, 글쎄? 차치하고.

 우리 교단의 첫 번째 문제는 교장과 교사의 상호 불신이다. 교장은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권위만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워 교사를 압박하고 교사는 교장의 전횡에서 벗어나려고 안깐힘을 쓴다. 요새 정치권에서 주적 논쟁이 일고 있는데 어찌보면 교단의 상황도 상대를 가상 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학교의 위계 질서가 무너저버렸다. 교장이 교직원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니도 나도 한 주먹씩이니 학교가 난장판일 수 밖에. 3월초 교사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진단평가를 시행한 나는 간 큰 교장이란다. 도대체 교단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정부에서는 교원(원로? 특히 교장)을 퇴출시켜버렸고, 전교조와 교장이 갈라선 건 오래 전 일이며, 학부모는 학원으로 학원으로 자녀를 내몰다가 급기야 교육 이민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인기 연속극 상도는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 재물은 평등하기를 물과 같고 사람은 곧기가 저울과 같아야 한다)이라고 마지막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정년을 눈 앞에 둔 이 사람은 3백년 전 거상 임상옥의 발치에도 머무르지 못한 게 아닐른지.


             명(名)교장 - 지도자론


 다산(정약용)은 목민심서 율기편(律紀)에서 위엄과 신의 그리고 청렴결백(廉潔)과 공평무사(公正)를 이도(吏道)정신의 본으로 삼는데 관리자가 되기 전에 먼저 수신(修身)을 으뜸이라 일렀다. 그리고 공자는 아랫사람이 보는 윗사람을 태상 하지유지(太上 下知有之-요순시대 격양가처럼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친지예지(其次 親之譽之-다음은 존경하는), 외지(其次 畏之-두려워하는), 마지막으로 모지(其次 侮之-부하들이 멸시하는)라 했다. 한편 서양에서는 LEADER를 L-Listen(경청), E-Explain(설명), A-Assist(도움), D-Discuss(토론), E-Evaluate(평가), R-Respond(책임)로 정의하기도 하는 모양. 참고삼아 미 공군 장교훈 소개. ①상관은 공포를 심어주고 지도자는 신념을 심어준다. ②상관은 원망을 낳게 하고 지도자는 신바람을 낳게 한다. ③상관은 부리려하고 지도자는 잘못을 고쳐준다. ④상관은 일을 고역스럽게 만들고 지도자는 일을 재미있게 만든다. ⑤상관은 <내가>라고 말하고 지도자는 <우리들이>라고 말한다. ⑥상관은 방법을 알고만 있고 지도자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⑦상관은 권위에 의존하고 지도자는 협동에 의존한다. 또 경영자에게는 인격과 학문과 경륜이 요구되는데 인격만 빼어나고 학문과 경륜이 부족하면 <고루固陋>하고, 학문이 빼어나고 인품과 경륜이 낮으면 <경망輕妄>하며, 경륜은 대단한데 학문과 인격이 뒤지면 <황태荒怠>하다고 한다. 노자의 가르침은 어떤가. 양가심장약허(良賈深藏若虛-훌륭한 장사꾼은 좋은 물건을 깊이 감추고 함부로 내놓지 않기때문에 빈약한듯이 보이고) 군자성덕약우(君子盛德若愚-군자는 덕이 넘쳐서 얼핏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인다). 노자가 공자에게 한 말이다. 공자는 지도자의 자질을 4무정신으로 말했다. 첫째 무고(毋固-고집을 갖지말고), 둘째 무필(毋必-기필코 이루겠다는 탐욕심을 갖지말며), 셋째 무의(毋意-윗자리에 있지만 매사를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무아(毋我-아집에 빠져서 나를 앞세우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는다). 서양 격언의 노블레스(Noblesse) 오블리지(Oblige)는 누리는 만큼 책임을 저라는 뜻으로 귀족들이 스스로를 규제하였고, 지금도 전쟁터의 소대장은 <나를 따르라>며 총알받이가 되어 앞장을 서는데 회전의자에 앉아 계시는 교장선생님께서도 의자에서 일어나 앉은 자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봄직 하지 않는가?


                      요철凹凸교실 사건


 백야(김좌진)장군은 열악한 무장(武裝)과 굶주리고 헐벗은 군대였지만 대한민국 자주독립의 깃발 아래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합지졸일지라도 좋을, 박수라도 쳐주는 우군(友軍)이 없다. 더구나 넘어야 할 벽은 너무 높아 혼자 깨부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인데. 구렁이 제 몸 추는 것 같지만 내 40년 교육평생은 투쟁의 생애였다. 돌이켜 보면 회한으로만 점철된 형극(荊棘)의 길, 나는 그 길을 자초했었다. 라만차의 동키호테처럼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처럼 오늘까지도 메아리 없는 부르짓음을 계속하고 있다. 선생님을 해방시켜야 교육이 바로 선다, 교사의 공문 수발을 근절시켜라, 교육 행사를 줄여야 한다, 10개 교과 주당 30시간을 혹사 당하고 있는 판에 지도안을 써라 자료 있는 수업을 하란 말이 당키나 하냐, 선생님이 즐거워야 교실이 안정된다, 학년초 모든 잡무(학교운영계획 작성, 학년교육과정계획 수립, 학급교육운영부 작성, 담당 사무분장계획 수립, 환경정리 주간, 가정방문 주간, 교육장 초도순시 대비, 계획장학지도 등 학년초 교단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관행들)를 없애라. 그러다가 청와대와 안기부(국정원)의 내사를 받았고 도군교육청에서는 회유와 협박. 유신시대, 무서운 시절 이야기다. 헌데 엊그제 중앙 일간지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간난과 질곡의 시대에 전국에서 유이(有二)하게, 그것도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사표(師表)를 주창하다가 끝내 그들의 회유와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교단을 떠났던 선생님이 경남 거창의 샛별초등학교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학교 소개 기사. 나는 그 때 그 10월 유신 폭정의 시대에 <월간 교육자료>에 <요철교실(부제 어두운 교실)>을 연재하였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에 신랄한 교육 비판의 글을 연재하였으니 무모함은 차라리 무지함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돈봉투나 챙겨 휭 하니 다녀가는 것이 다반사인 장학지도, 학교 예산을 쌈짓돈처럼 쓰는 교장 등등을 쾌도난마(快刀亂麻)타가 교장학에서 일이 터졌다. 회유와 협박이 먹혀들지 않으니까 경상도의 누구는 축출이 문제가 아니라 자살 직전이라느니, 까짓 선생 하나쯤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을거라느니라며 관내 교장단을 동원하여 공식적으로 교단에서 축출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래도 무슨 뱃장이었던지 버텼고 <교육자료사>의 몇몇 간부가 해임되고 나는 연재 중단만으로 목숨은 이었다. 그리고 상반된 인간적 평가 속에서 교장 승진의 막차를 탔다.


             3월의 학교 풍속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낱말은 뭐냐? 수수께끼 아닌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당혹해 한다. 나는 퀴즈 진행자처럼 당당하게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눈부시다>라고 한 수 가르쳐준다. 다음 질문은 더 어렵다. 그 눈부심의 실체를 대봐라. 나는 또 우쭐대며 문제를 던지고 청중은 아까 보다 더 심각하게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른 봄 막 돋은 새 잎이 역광을 받았을 때>의 모습이다라면 고개를 갸우뚱. 상상력이 미치기 어려운가 보다.

 나는 3월을 좋아한다. 3월의 학교 분위기를 좋아한다. 한 학년을 마치고 자랑스럽게 진급한 아이들의 활달한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들이 지닌 새 학년에 대한 기대와 소망들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내게도 전염되어 오는데 그 생기가 다른 때와는 판이하다. 더구나 새 해 새 학기 초, 그 3월에는 이제 막 어미닭의 품에서 깨어나온 병아리 같은 1학년 아이들이 학교를 기웃거린다. 두려움과 호기심과 자랑스러움이 겹친듯한 그들의 눈망울을 보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들로 인하여 학교에는 생기가 더해지고 활력은 배가된다. 그런데 호사다마는 교실에도 인용되는지 즐거운 상상의 배경에는 그늘이 있다. 이 즐거움의 뒤란에 내가 원치 않은 어둠의 모습을 지닌 다른 모습의 학교가 있다. 교육계의 원죄 같은 거. 3월 초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교사들에게 교육 외적인 굴레들이 교육의 파행을 부추기고 있다. 오랜 연륜을 지닌 묵은 관습이요 타성인데 이로 인해 3월의 교단은 아수라장처럼 어수선하다. 교장으로 부임하자말자 나는 <선생님을 해방시켜야 교육이 바로 선다>는 기치를 걸고 학년초 8대악이라 규정한 폐습을 고쳐놓으려고 했다. ① 학교교육계획의 수립 - 겨울방학에 팀을 구성하여 작성. ② 학년교육과정 편성 - 2월 중 현 담임이 수정 보완하여 새 담임에게 인계. ③ 학급교육운영계획 수립 - 장부는 전산화하며 주 교육계획안과 결석부로 제한. 학급운영을 <경영>이 아닌 <교육과정 지도>로 정의. ④ 담당 사무 년간계획 - 학교운영계획에 의거 기안 없이 시행. ⑤ 환경 정리 - 인테리어 수준. 한국적 여백(飛白)의 미 강조. 학년초에 손대지말 것. ⑥ 가정 방문 - 필요에 의해 수시. ⑦ 교육장 초도 순시와 계획장학지도 -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 이를 헝크러놓으니 3월의 교실 풍경은 보지 않아도 뻔할 뻔자. 3월, 학급운영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교사는 계획서에 매달려 컴퓨터를 두드리랴 뺑끼칠하랴 마치 추수철 농부처럼 부지깽이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할 지경인데 교사가 이러고 있을 때 아이들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초등 교사 해방론


 <대~한민국, 따단따딴딴> 하는 가락이 들리면 덩달아 가슴이 설렌다. <붉은 악마>, 생태적 리듬 때문이리라. 영고, 동맹, 무천, 연등회, 세시풍속들, <축제를 잃어버린 민족>. 월드컵을 계기로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시키고자  의도적으로 없앤 민족 축제를 되살려서 <가무를 즐기고 놀기 잘 하는> 옛 정취를 되찾았으면 참 좋겠다. 이를 퇴폐적이라고 오도한 일제도 이제는 ?겨가버린지 50년이 지났는데 우리는 쓰잘데기 없는 일제 잔재는 아직도 없애지 못하면서 정말 복원해야 할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퍽도 헛지서리를 하다 보니 그렇다. 하지만 어만 일에 매달려 주객이 전도된 일이 어디 그뿐이랴.

 부임하고 한 해 남짓, 어느 날 퇴근 무렵. 창 너머로 <요새는 학교 오기가 참 재밌어야>라는 여선생님의 말을 엿들었다. 이 원리가 <교사를 해방시켜야 교육이 바로 선다>로 학교경영에 반영되었다. 이야기 하나 더. 엊그제 스승의 날, 우리 학교에 한 분뿐인 원로교사 선생님 가라사데 <교직 평생 이렇게 편한 학교가 없었다>.

 선생님은 오직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만 정성을 쏟을 수 있게 학교행정이 도와주어야 한다. 헌데 교육계의 현실은 엉뚱하다. 수업 보다는 공문 수발이 우선이고 교육 보다는 행사(실적)가 먼저다. 교육 여건을 이렇게 관리행정 위주로 만들어놓고 교육이 어쩌니 학교가 이러니 하는 일은 자가당착이다. 교육이 황폐화 되어가고 있는 원인은 교육계의 권위주의나 보수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행정의 반교육체제에 원천적인 원인이 있다. 교육행정 관료가 교사를 아직도 관리행정의 사무원쯤으로 보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 학교 어느 선생님의 일과를 보자. 오전 8시 30분 출근해서 수업 준비를 하면 9시에 1교시 수업이다. 쉬는 시간 10여분을 쉴 틈도 없이, 정말 화장실 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정신없이 (교재 특성이 다른) 10개 교과(중등 1개 교과) 주당 30시간(중등 14시간)을 뛴다(실상은 뛴다는 표현으만으로는 적절치 않다). 6교시가 끝나면 오후 3시 30분, 특기적성 1시간을 보태면 오후 4시 30분, 퇴근시간이다. 언제 교재연구하고, 연수하고, 어느 시간에 지도안 쓰며, 어느 틈에 학습자료를 만들 수 있겠는가, 또 그 많은 공문(하루 1건 접수, 이틀에 1건 보고)은 언제 하고. 이의 개선없이는 이 땅에 (초등)교육은 없다. 아무리 민족성이 우수하다고 해도 선생님이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교육환경을 만들어놓고 교육백년지대계 운운 하는 일은 넌센스다, 적어도 초등학교에서만은.


                 고무신 공장      


 60년대 고무신 공장이 호황을 누리던 때 우리, 특히 전라도의 누이들이 대거 대도시로 몰렸다. 서울과 부산의 호남 인구가 그 시대에 기하급수적으로증가했는데 그 입(口)들이 지역감정이란 도깨비와 어울려서 우리 정치판을 떡주므르듯 선거 변수로 작용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 정치 이야기는 내 관심사가 아니니 관두고, 타이어 자국이 선명한 검정 고무신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미래였다. 적어도, 손등이 쩍쩍 갈라진 누이의 돈으로 학교 납부금을 챙겨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일이다. 돈, 돈이 문제였다.

 작년말 교단 화두도 단연 성과급이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D등급이라는데.> <뉘네 서방님은 A급이다더라.> 언젠가는 촌지로 낚시질을 하더니만 이번에는 돈으로 사표(師表)를 저울질하는 능률 성과급제도가 교단에 상륙을 했다. 선생님들이 구제불능의 천덕꾸러기인줄 알았더니 꼬셔야할 뭐가 더 있기는 있는 모양. 그런데도 공돈을 준다는데 고민이라니. 개그맨이 들으면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랄거다, <호강에 초쳤다거나>. 하여튼 교원 성과급을 놓고 교단에서는 고민이 거듭되었으나 뾰쪽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고작 머리 짜낸다는 게 선생님들에게 일임하자는 편법. 대부분의 학교가 성과급 판정을 교직원에게 위임하였고 결론은 나눠먹기로 귀착되었다. 업무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차등 보수체계를 연구하는 일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할 데 가서 해야지 아무데나 무작정 들이미는 치졸함이라니. 학교를 고무신 공장쯤으로 알고 있는 관료행정의 또 하나의 무지의 발로다. 도대체 교육행정을 하는 사람들은 교육원리를 한 구절만이라도 읽었는지가 의심스럽다. 그런 사람이라면 <참스승상> 같은 모자란 발상을 하지는 않을테니까. 하기야 우리 속담에 <찬물도 상이라면> 또는 <상이라면 양잿물도 큰 놈>이라는 말이 있기는 한다마는.

 우리 학교에서는 시상과 표창을 가급적 없애려고 한다. 그래서 원인 제공의 가장 큰 요소인 교육적(?)행사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학교운영계획을 개선하고, 시상을 할 경우 등위없이 참여 학생 모두 수상을 하는 <참가상> 방향으로 전환을 시켰다. 교육적 행위는 우열의 기준을 세우기도 어려울 뿐만아니라 시행은 더 어렵고, 순기능(격려) 보다는 역기능(좌절)이 더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눠먹기, 돌려먹기, 때로는 퍼주기 표창이 일반화 되어 있는 교단 풍토에서 어차피 상은 그 역할을 상실한지 오래기 때문이다.


                얼룩 송아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지용의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는 <향수>를 흥얼거릴 때마다 시인이 살았던 30년대에 웬놈의 서양 얼룩배기 젓소가 있었으며 또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였던 이가 하필 서양 젓소를 소재로 그 유명한 시를 썼을까라는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다. 헌데 불과 몇 달 전 TV에서 얼룩배기가 서양 젓소의 검정 바탕에 하양 얼룩이 아니라 누런 바탕에 검정 얼룩의 토종이란 걸 알고는 쓴웃음. 허나 닮아야 좋을 일이 있고 닮지 않아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인데 우물 안의 개구리를 놀라게한 방송 PD의 얘기 소개로 이야기를 풀어가자.

 <다 똑 같다>. 교사 시절, 전통문화 발현과 민족정기교육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지고 문화공보부에서 교육비를 지원받고 도청 문화예술과에 경비를 후원받아 <어린이 전통문화교실>을 운영했다. 겨울방학에 교사 연수를 하고 여름방학에는 어린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교육과정 운영중, 회원 선생님들이 전통놀이를 가르친 다음 KBS 광주방송국에서 달마다 한 번 방영을 하였는데 프로그램을 맡았던 담당 PD가 한 말이다. 학교가 건물 모양, 정원 구조, 운동장 형태 심지어는 복도나 교실 그리고 교무실, 교장실, 현관 게시물들까지 판에 박은 것 같다는 것. 닮은 것이 어디 그뿐만이겠는가만 교장이 되어 부임해서 ① 연구학교 연구 형식 개선, ② 학교 울타리 철거, ③ 한국 자생화 3천 그루 식재, ④ 학급교육운영부 폐지(출석부→결석부), ⑤ 아침 감상곡 방송, ⑥ 주번, 아침 봉사활동, 중간체조 폐지, ⑦ 교육과정 핵심차시 편성, ⑧ 방학중 교사 근무(조) 폐지, ⑨ 학년초 8대악(환경정리 등) 근절, ⑩ 자율시정 운영, ⑪ 교원 복지 우선, ⑫ 스쿨뱅킹 신설, ⑫ 생활축구, 생활악기연주, ⑬ 학급회→자유토론회, ⑭ 시상표창 개선, ⑮ 교무실, 교장실, 현관게시판의 감상화 게시판 전환, ① 담임의 공문 수발 근절과 교육행사 최소화 대략 이런 일들, 좀 남다른 짓을 했다고 또라이가 되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고 독불장군 소리를 들어도 그것들이 꼭 싫지만은 않다. 선생님들이 좋아하고 학생들이 좋아하고 학부모들이 잘 한다고 손뼉을 쳐주니까. 그렇다, 대한민국의 초등학교는 거대한 완구공장이다. 교육행정 당국이 진정으로 교육의 변화를 바란다면 교장에게 자율권을 확실하게 부여하고 교장은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학교를 운영해야할 일이다. 그래야 이 땅에서 <무엇이 무엇이 똑 같은가/ 대한민국 학교(교육)가 똑 같아요>라는 희화(戱畵)가 사라질테니까.


               무유호추(無有好醜)


 

 한국민화(民畵)에 반해서 민예지(民藝誌)에 <불사의(不<可>思意)한 조선민화>라는 논문을 쓴 일본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무유호추(無有好醜)>라는 말을 남겼다. <아름답고 추함, 좋고 나쁘고를 가리는 의식이 개재되기 이전의 무심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아름다움>. 이 얼마만한 찬탄인가. 이 말 외에도 한국민화에 대한 격찬은 많다. 이 <잘 그리지도 잘 그리려고 하지도 않은 그림>은 인격의 그림, 품격의 표현이라고도 하며 <전신(傳神)의 효과>라는 찬사에 이르면 그야말로 해탈의 경지를 넘나든다. 그러나 우리 회화사는 한국화란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동양화란 두리뭉실한 명패를 달고 있었다. 그 상흔을 총독부청사처럼 헐어서 없애버릴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만 교육에서도 그 잔인했던 세월의 흔적은 골이 깊다.

 우리 근대교육은 개인 경쟁과 올백으로 대표된다. 엊그저께부터서야 올백의 시대는 우화가 되었고 특기적성이 도입되고서 뭐 한 줄로 세우기가 여러 줄로 세우기로 바뀌어야 한다나 어쩌나 해쌌지만. 그렇다. 우리는 지긋지긋한 획일주의시대를 살았다. 일제시대를 거쳐 군사독재문화로 그리고 국수주의의 너울을 쓴 한국적 민주주의 유신시대까지. 뒤질세라 교육행정에서도 목표관리기법(MBO SYSTEM : PERT SYSTEM-인관관리기법)이라는 생산공장 관리기법을 적용하여 실적 만능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오직 1등만의 시대. 이제 좀 살만해졌다고 지구촌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다양화 세계화 어쩌고 하는데 하느님이 왜 언어를, 피부 색깔을, 인종을 나눠놨는지 알고나계신가?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를 고지곧대로 믿는 바보는 없을텐데 오늘도 교육부평가는 수치로 보이는 것만을 체크하고 그래서 일선 시군교육청이 학교에까지 그 눈금의 잣대를 들이대려고하니 실적주의가 아직도 시퍼렇게 판을친다. 눈에 보이는 것 밖에 보지 못하는 시력 나쁜 사람들이 무슨 수로 장학을 할 수 있겠는가, 눈이 나쁘면 안경이라도 쓸 일이지. 그래야 하다못해 행간(行間)만이라도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거두절미하고 우리 학교는 시정을 단위시간제에서 통합시간제로 고쳤다. 방과후의 <자율시간>을 늘려 간섭없는, 그야말로 자율활동 조장. 추호라도 선생님이 개입하지않도록 해놓고 아이들이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켜보기로 했다. 창의력은 자유로움 속에서 스스로 터득하게 배려하는 것이지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지식의 저장고인 50억 낱 뇌세포의 통합적 연결, 이것이 창의력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노인성 치매 초기 증상, 선생님들이 날 놀리며 그런다. 맞다. 요즘에는 기억이 아물아물할 때가 있다. 기억이 옳다면, 고교시절 현대어 교과서에 실린 푸르스트의 시던가 페이터의 산문 제목일게다. 우스게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자는 실연당한 여자가 아니라 잊혀진 여자>라던데 학교에서 시간 찾기라면 잊었다할까 잃어버렸다는 말이 맞을까? 학교에서 모임을 없애버린지 오랜데도 어쩌다 아이들에게 한 마디 할 기회가 있으면 나는 늘 훈화의 시작을 이렇게 한다. <많이 놀고 적게 공부해라>. 놀 시간 좋아하네, 눈 씻고 찾아 약에 쓰려해도 한 땀도 없는 판에. 각설하고 다시 <시간찾기>의 각론으로 들어가 어딘가 남아있을 황금 같은 자투리를 찾아 보자. 앞 장에서 잠깐 얘기한 바와 같이 학교시정을 조정해서 자투리시간을 모아놓으니 2시간 20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벌었다(종전에는 8시 30분 출근, 9시 1교시부터 40분 수업 10분 휴식을 반복하는데 이렇게 되면 6교시가 3시 30분에 끝나고 특기적성 1시간을 보태면 수업이 4시 30분에 종료되므로 수업 종료와 동시에 퇴근시간이 됨. 이 단위시간제를 통합시간제로 바꿔서 8시 30분 출근, 8시 50분 1교시 수업 5교시까지 점심 전에 마치고 휴식시간은 20분을 언제든 자유롭게 운용하도록 조정하여 6교시가 끝나면 2시 10분이 됨). <뭘 하든지 카만 놔둬라. 절대로 간섭하지도 간여할 생각도 마라. 물어도 도움을 청해도 대답하지마라>. 1년 365일 공부해라 공부해라 지겹게도 볶인 우리 아이들. 학교만 오면 선생님들이 네모(수업모형)를 그려놓고 지식이라는 걸 쑤셔넣고, 교육이라는 동그라미 안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하지마라>가 상식.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얼씨구나 이젠 내 차지가 됐다고 어머니가 인계받아서는 학원으로 내몰고, 밤늦게 숙제하고 일기 쓰고 잠자는 시간조차 쪼개 써야하는 우리 아이들. 이렇게 길들여져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나마 1시간 20분(통근 버스 하교시간 조정으로 저,고학년 같음)의 자유시간을 준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좀 보자. 이게 내 학교경영철학이다. 선생님들의 2시간 30분은, 실내에 체육실을 만들어놓고 탁구라도 좀 치라면 <시간이 없어요, 오전에 공문이라도 한 건 떨어지면 오전 내내 정신이 없어요>라 투정하는 걸 보며 쉬느니 한숨. 며칠동안 눈 먼 여행(2박 3일, 교장 선진지 시찰)을 다녀와서 잘 계셨느냐니까 교장선생님 안 계시는 동안 행사 2건(발명교실, 화상노래 경연) 치루느라 아무 것도 못했다며 눈을 흘긴다.


               교장이 군청으로 간 까닭은


 

 월드컵은 4강 신화를 이루었다고 세계적으로 야단법석, 어떻든 거족적 축제였다라는 데는 동의한다. 덧붙여서 외신이 전하는 역동적(dynamic Korea)인 한국인이라는 말 또한 기분좋은 적절한 표현이며 이를 계기로 토인비가 말했다는 문화 동진설의 근거를 되새겨본다. 고대 로마에서 비롯되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로 유전되었고, 영국으로 건너간 다음 미국, 일본을 거쳐 대한민국에 당도한 지정적 운세, 우리 다음에는 중국이라던데 그 운명 같은 운세가 우리를 그냥 스치고만 지나버리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던 터에 월드컵 축제, 붉은 악마의 민족적 결집.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건 축제랄 수가 없다. 브라질의 삼바축제, 유럽의 사육제, 가까운 나라 일본의 고장 축제들을 살펴보면 알 일이다. 축제는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것이다.

 교장 초임으로 작은 시골학교에 부임해서 처음 맞는 거교적 행사인 가을 운동회를 치뤘다. 헌데 장이 서야 굿판이 어우러질텐데 장이 되지 않는다. 참석한 학부형수 보다 기관단체장수가 더 많은 건 할 수 없다 치더라도 크나큰 운동장에 학생 여나문이 나가 뭘 한다고 꼬무락거리는데 남은 학생도 여나문명. 스탠드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학부형조차 너무 초라하다. 보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모두 힘이 없었다. 운동회를 마치자 군청(군수)을 찾았다. 우리 학교와 그만그만한 3개 인근 학교를 한 군데로 모아 한바탕 지역축제를 시도할테다, 경비 5백만원을 내놓아라고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그 때 열변을 토한 밑천이 석사학위 논문으로 연구한 <축제를 빼앗겨버린 민족>과 실험적으로 실시하여 성공한 민속놀이 운동회. 우리 민족은 남달리 축제를 즐겼다. 魏誌위지 東夷傳동이전을 들먹이지 않아도 동맹, 영고, 무천, 연등회, 팔관회의 축제들과 정월 설로부터 시작해서 2월 보름과 동지 섣달까지 어우러지던 세시풍속들. 이렇게 축제를 좋아하던 우리가 해방된지 5십여년이 지나도록 잃어버린 민족(민속)축제를 찾지 못하고 일제의 허수아비 흉내나 내고 있다면 어디 그게 될 일인가. 일제가 일본에는 없는, 오직 식민지 교육정책의 방편으로 만들어놓은 전쟁식 운동회가 아무 비판없이 오늘까지 버젓이 대한민국 학교 현장에 살아있다면 이처럼 부끄러운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다행히 곡성군청의 협조로 곡성 북부 3개 초등학교는 연합운동회를 민속놀이 잔치로 이어가고 있다. 향후 이 운동회가 지역축제로 승화 발전되기를 기대하면서.


            밑그림 다시 그리기, 운동회 풍속도

 먼저, <민속놀이 한마당 잔치>라고 이름을 붙인다. 내용은 민속놀이를 우선 선정한다. 단, 개인놀이를 배제하고 가급적이면 가족, 단체, 동네, 패(동아리)별로 구상한다. 연습이 없으므로 참여자 전원에게 놀이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여 행사가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한다. 민속놀이 코너를 계획하는 것도 좋다. 이를테면 줄넘기, 투호, 널뛰기, 제기차기, 굴렁쇠 굴리기, 팽이치기, 윷놀이 코너들을 설정해놓고 빙 돌아가면서 개인 득점화하여 시상한다든지 단체놀이는 패를 나누어 패별로 선의의 경쟁을 한다. 패의 이름은 4신四神(청룡-좌, 백호-우, 주작-남, 현무-북) 또는 호랑이, 보라매, 반달곰 하는 식으로 매겨도 좋다. 선수 명단이나 참가 명단은 미리 받아두고 진행한다. 경쟁 원리가 아니라 대동단결 원리이기 때문에 승패에 치중하지 않고 참여하는데 목적을 둔다. 전통 축제의 앞풀이, 본 행사, 뒷풀이를 밟아가면 더 좋고. 연습이 없을뿐더러 줄서기도 모이는 일도 없다. 운동장 가득 패별 또는 마을별로 차일을 친다, 모인 사람 모두를 수용할만큼. 차일 밑에는 멍석을 깔아 가족, 동네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마련해온 음식을 먹으며 차례가 되면 놀이를 하고 한바탕 놀이가 끝나면 또 즐겁게 구경한다. 진행은 자모회나 청년회에서 맡아하고 선생님들은 보조역할을 한다. 우리 전통놀이는 치열한 경쟁이나 등위에 집착하지 않지만 다소의 경쟁을 도모하는 일은 놀이의 활성화를 위해서 필요하며 끝날 때는 모두 승자가 되도록 마무리한다. 하늘에는 만국기와 함께 백호 청룡 상징 깃발이 펄럭이고 우리 고유의 태극 3색기도 찬란하다. 한바탕 어울림이 없어서 될소냐. 운동장 가운데서는 황소를 걸어놓고 천하장사 씨름판이 벌어지고 잔디밭에는 하늘 닿을듯 매어놓은 그네에서 선녀무가 한창. 이 어우름판에 농악놀이가 빠저서는 안되지. 거나하게 취한 어른들이 장단을 맞추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자모들의 강강술래도 한마당. 3일간 고을축제를 가정하고 가운뎃날 하루를 지역 휴일로 지정하는 일도 고려해볼만. 고싸움, 차전놀이, 줄다리기에는 깽과리 징소리가 어울리니 한바탕 지신밟기를 겸하라. 이를 통해 일제 식민지정책의 잔재도 씻고 전통민속문화도 발현하여 우리 민족의 내면에서 움추리고 있을 잠재적 역동성도 끌어내자. 더엉더꿍 덩더꿍, 아니면 대-한민국 짜자작 짝짝도 좋다. 흥겹고 신나면 된다. 토인비는 문화 동진설을 주창하고 타고르는 동방의 빛을 예견했다. 밝고 하얀 빛, 상서로운 기운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다. 이 기회를 놓지지마시라, 한국인이여 배달의 겨레여.

 

            아버지, 어디 계셨습니까?

 천하의 백락천이 도림선사에게 물었다. 불법佛法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답 왈 착하게 사는 것이다. 백락천이 껄껄 웃으며 그거야 삼척동자도 아는 일입니다. 삼척동자가 알기는 쉬어도 8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

 서슬 퍼렇던 유신시대 우리는 어둠의 자식처럼 그늘을 골라 딛고 다녔던 <교사협의회>시절을 겪었다. 지금이야 픽 웃고 말 일이었지만 그 때는 생존 여부가 걸린 질곡과 형극의 시대. 개명천지 좋은 시절을 만나 전설처럼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을 때, 아들이 <아버지, 교사들이 교육개혁을 외치다 교단에서 ?겨나고 거리로 내몰리고 학부모들에게 두드려맞는 행패를 당할 때 아버지는 어디 계셨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칼럼을 쓴 일이 있다. 절박한 시간을 보내며 교직원노동조합으로 발족을 앞두고 우리는 모두 교단에서 축출당하리라 예견했다. 최후의 만찬 같은 비장한 결단의 모임에서 당신은 빠져라 그리고 우리가 ?겨나더라도 현장에서 교육개혁을 몸으로 계속하라. 최후의 진술처럼 울먹이던 동료들의 말이 그 분위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교단에 박쥐 형상으로 살아 남았다. 전교조가 발족을 하자 정부에서는 탄압, 아니 탄압이 아니라 학살을 시작했다.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를 교묘한 수단으로 골라내서 교단에서 ?아내고, 조회대에서 학부모가 여선생님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 내동댕이치는가 하면, 공권력이라는 경찰이 교문을 보초서서 출근하는 선생님을 가로막고, 학생과 선생님은 교문 창살을 사이에 두고 울부짓는 처참함. 우리는 그 그림에서는 사양인斜陽人이었다. 불과 20여년 전 우리 학교의 모습이다. 이 땅의 정의가 타락하였던 시대, 그 시대를 몸으로 때운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악어처럼 눈물만 흘렸다. 배 불리 먹고 등 땃땃한 아랫목에서 거대한 공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정의를 TV로 감상하면서. 호도糊塗에는 깨춤으로 장단을 맞추며 잘 한다 잘못한다 좋다 나쁘다 입만 살아 있었다. 개혁과 보수의 싸움은 이렇게 표면화되었고 학교(교육) 황폐화의 첫 번째 요인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래샴의 법칙이라던가 역논리가 현실을 지배하는데는 아직도 문제는 없다. 엊그제 6?29를 끌어낸 박종철의 죽음을 보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본 마지막 화두話頭 <종철아, 잘 가그래이>. 죽음 앞에서는 시야비야是也非也가 차라리 한가롭다. 황희 정승의 삼(양)시三是론과 등소평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도 너무 어렵다. 아직도 눈이 트이지 못한걸까?


                여난의 상


 <여난女難의 상이야, 쯧쯧>. 백발이 허연 할아버지가 혼잣말처럼 혀를 찼는데 그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2월 봄방학 때 형설의 교대졸업장을 받아들고 금의환향하는 남행열차 안. 마주 앉은 할아버지가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랬다. 별무 관심, 관상 따위 알게 뭐야. 그런데 초임 발령 2년 후 기찻칸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모교를 떠나야 했다. <여자라면 오직 셋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각시다>. 더러 패미니스트로 자처하는 내가 여성 편력이라면 좀 뭐 하지만 여자에 대한 내 덕담은 늘 그렇다. 그리고 즐겨 인용하는 싯귀 하나.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여위열기자용女爲悅己者容>,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단장을 한다는 말인데 공자님 말씀이라나.

 내게 여자라면 맨처음 떠오르는 사람은 할머니다. 여든여덟에 돌아가셨을 때 나는 우리 시대 최후의 여인상도 함께 잃었다고 했다. 우리 집은 느슨한 할아버지 보다 칼날 같은 할머니의 나라였다. 어머니는 싱싱한 횟감을 좋아하는 할머니의 식성을 맞추기 위해 시오리 5일장을 새벽 같이 갔다가 바람처럼 돌아왔다. 내 횟감 식성 유전은 할머니 식성 고대로다. 또 할머니는 여름 한나절 풋고추에 무싯잎 쌈을 즐겼다. 집 앞 텃밭에서 까칠까칠한 가시돋은 무잎을 뜯고 동네 샘에서 찬물 한 주전자를 길어 대령하는 것이 여름철 내 일과이자 특권. 그 거친 무잎은 훗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를 매료시킨 쌈 재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부처님, 예수님, 하나님, 삼시랑과 씻김굿과 점쟁이까지 그 다양했던 할머니의 신앙. 어쩌면 3대 무녀독남의 장손을 할머니는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명쾌하지 못하다. 한편 이성이랄 것도 없지만 풋풋한 첫 번째 여자 얘기는 동갑나기 이종사촌 동생 꽃예인데 섬과 동백꽃과 연두빛 같은 사랑이 거기 있다. 다음으로는 미인에 대한 내 패미니스트적 명찰 두번째. <어린이 민학당>을 운영할 때 표본조사를 했는데 <누가 예쁘냐>에서는 선녀 보다는 천사가 단연코 압도적이었으며, 콩쥐 보다는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고 춘향이 보다는 줄리엣이 으뜸이었다. 한국적 미인의 기준인 6등신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유구무언有口無言 속수무책. 자칭 패미니스트에게는 여난의 상마져도 이제는 한낱 그리움일뿐.


                   쿼바디스 도미네


 장군 사울이 사도 바울로 거듭난 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로마 밖으로 도망치다가 에미안 국도에서 밝은 빛을 만나는 장면은 신에 관한 영상의 백미白眉. 또 공자님은 4십에 불혹不惑이요 5십에 천명天命을 알았으며 나이 6십에 이르러서는 이순耳順이라 했다는데 나는 나이 6십이 다 되어서도 신에 관한한 기초적인 지식조차도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일에 관해 무지로 죽어야 한다는데 나는 인간적인 회의가 짙다. 득도한 고승이 아닌 바에야 다 알려고도 하지도 않고 다 알 수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주변의 사상事象을 알만큼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생각만 모아도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는데 살아갈수록 미궁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나는 말하자면 모태신앙인이나 다름없다. 온 집안이 교회를 다녔고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교회와 하나님 말씀 안에 있었으니까. 우리 고향 마을의 교회 상량上樑에는 소화召和 몇 년이라 일본 왕의 연호가 씌여져 있다. 인근에서는 유일한 교회, 어린시절의 추억은 거의 교회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을 외우고 연보돈을 내고 기도를 하면서 교회는 어느덧 일상이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느닷없이 심화心火가 찾아왔다. 내게도 다른 눈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신이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원초적인 의문. 그 건 다른 눈이 트이면서 비롯되었다. 교과서의 원시인들은 신을 외경에 대상에 놓고 태양, 바위, 불, 호랑이나 곰, 노거수목 심지어는 뱀까지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데 그렇다면 성경에서처럼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은 아닌가. 아무도 누구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설교를 들어도 기도를 해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 해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나는 교회를 찾아 혼자 알아내려고 했다. 얼음짱 보다 더 차가운 청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했다. 두세 시간 엎드려 있으면 몸이 꽁꽁 얼어붙어 오금이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간절히 기도했다. <신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면 사람이 신을 만들었습니까 신이 사람을 만들었습니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계시도 없었다. 그래서 천방산을 올랐다. 산마루에서 동이 틀 때까지 살을 에이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그러기를 한 달 남짓 신의 곁을 떠났다. 의지할 곳 없는 탕자로써의 첫걸음이었다.


             스승, 썸머힐과 해후

 <문제아의 뒤에는 반드시 문제의 부모가 있다>. 교사 초년에 모교에서 도서관을 맡았는데 거기서 A. S. Neil을 만났다. 교대시절에는 교수님들이 어찌나 룻소 룻소하든지 에밀만을 유일한 필독서로 알고 탐독에 탐독을 하였는데 니일의 Summer Hill은 에밀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 사물의 인식에 관한 다른 눈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고 정규교육과정으로는 배울 수 없는 어떤, 이단적 교육철학으로써 교육신념을 뒤흔들어놓은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내 교육신념의 밑바탕에는 교수님들이 그렇게도 심으려하였던 룻소가 아니라 니일이 서 있다. 니일은 문제아로 낙인 찍힌 아이들만 모아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순정품으로 재생시키는 마술사다.

 마술 얘기라면 또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누구든가, 거 데이빗 커퍼필드의 초월적인 마술의 세계. 만리장성의 벽을 통과하고 자유의 여신상을 감쪽같이 사라지게 하는 묘기. 마술은 눈 속임이라 하자. 최면술은 어쩔텐가 차력은 또 뭐고. 우주의 자연법칙, 섭리에는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순리라는 질서가 있고 <어떤>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 모르겠지만 신이라 하기에는 내 너무 타락하여 입에 올리는 일 조차 불경스럽고 초월적이라 하기에는 마뜩잖은 어떤 현상.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것들. 거대한 우주의 모습, 과학자들이 그려놓은 그 모양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소용돌이를 보고 있노라면 하염없는 허무함과 망연자실, 초라함이 밀려든다.

 교육은 이러한 우주적 본질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삶을 가르치고 원초적인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일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읽기를 가르친다면서 문장의 의미나 분석하고, 셈하기를 가르치며 숫자를 기계적으로 더하고 빼는 일에 몰두하게 한다. 도대체 그걸 해서 어떻다는 것인지. 어디에서도 아무도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일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적어도 교사들에게는 없다. 아무리 봐야 우리 교육은 일반공통이네 보편이네 하면서 쓰잘데기 없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성싶다. 초등학교에서만도 10개 과목 30여책을 가르친다. 평균적 문화를 공유하기 위해서 도덕규범을 나열하고 모나리자의 웃음이 미적 만고의 귀감이라나 어쩐다나. 사회적으로 비만아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비단 인스턴트 식품회사만이 아니다.


 

 

                  월하빙인月下氷人

 


 <즈그들 끼리 만나 야합野合했으므로 딸을 줄 수 없다>. 스스로 월하빙인이 되어 어렵게 만난 장인 영감은 두 말 붙여볼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근엄하게 파경 선고를 내렸다. 내가 결혼했던 7십년대만 해도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그 시절에는 이런 문제에 밀려서 파혼이 되는 일이 더러 있었는데 결혼은 당사자 둘만의 문제가 아니고 가족 또는 가문의 대사였으며 또 우리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 용인容認이 필요한 때였다. 방법이 없었다, 묘안(딱 한 가지 무지막지안이 있긴 있으나)이란 택도 없는 일이었고. 에라 모르겠다, 탁 저질러버리면 어쩔텐가. 궁즉통窮卽通 도재이道在邇라 하잖턴가. 스스로 혼사날을 잡고 주례를 물색하고 식장을 예약하기로 작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인륜지대사 그 첫 번째 일은 알림장 인쇄요 두 번째는  예식장 구방이었는데 그래도 모태신앙이라고 교회 생각이나서 목사님을 찾았다. 목사님은 사연을 듣고 처지를 안타까워하였으나 장로회의의 승인이 필요한데 둘 다 불신자라서 어려울 것이라는 여운. 처연한 심정으로 천주를 찾아서 읍내로 갔다. 비탈길 언덕배기를 올라 찾은 천주님께서도 반가와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신부님의 장기 출장 핑게를 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성당 문을 나서는 그 때 그 참담한 심정이라니. 그 날사말고 웬 놈의 눈은 그리 흐벅지게 내리던지. 하는 수 없었다. 읍내 사진관예식장에서 계약을 했다. 그래도 일이 볼쌍스럽게는 되지 않으려고 장인 영감은 주위의 설득에 소매를 잡혀 나왔고 고향에서도 가까운 친척들이 몇 참석은 하였다.

 나는 우리 아이들의 결혼식을 가족끼리만 할 작정이다, 여건이 되면 넓고 시원한 교외 박물관이나 미술관 뜰에서. 그 동안 오해도 있었겠지만 이래서 나는 청첩을 받아도 관혼상제를 벗어놓고 산다. 누군가 멈춰야 한다. 본전을 밑지고 멈추지 않으면 결코 가정의례준칙은 없다.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고 법률로 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청첩장만 보내지 않아도 절반은 성공한다. 구두선口頭禪 백년하청百年河淸을 언제까지 외우고만 있으려는가.

 오늘도 점심시간에 이웃 학교 교장의 정년퇴임식이 화제가 되었는데 조용히 가족 끼리 마름하는 일이 아름답지 않을까? 구경꾼이 들어도 이런 저런 유쾌하지 못한 말들이 회자되는데 설마 열 돈 황금열쇠와 교육생애를 맞바꾸는 건 아니겠지. 나는 부부 둘이서 지나온 세월을 ?아 임지 순례를 하는 일로 퇴임을 하고싶다. 미상불 뜨는 해는 찬란하다, 그러나 지는 노을빛 또한 그 누가 아름답다 하지 않으랴.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뿐이다.

 

                        토요 당구撞球


 해마다 매화철이 되면 솜털이 보송보송한 청매실을 부탁하여 마른 수건으로 닦아 도가니 가득 매화주를 담근다. 해마다 독을 채우므로 묵은 술이 독에 가득 차 있어도 습관처럼 햇술을 담근다. <여수동좌與誰同坐>라 했다. 스님의 글에서 읽었는데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랴>라는 뜻이다. 역시 그 글에 옛글 하씨어림何氏語林 얘기를 소개하였는데 사언혜謝言惠라는 사람이 <내 방을 드나드는 것은 오로지 맑은 바람 뿐이요, 나와 마주 앉아 대작하는 이는 밝은 달 뿐이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서 이태백의 달을 찾거나 두보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운운 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지만 가을이라선가 유난히 스산하다. 이 햇솜 같은 가을날 문득 누군가 날 부르는 것만 같아 먼 하늘 한 자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혹여 낙엽 때문일건가 억새 때문일까, 것도 아니라면?

 친구가 없다. 동창회, 계모임, 친목회와 시세워서 가입했던 몇 개의 문학단체와 심지어는 주도해서 만들었던 동호인 모임마져도 모두 시심사심 그만두어버렸다. 만나면 분명 동심의 세계로 돌아온 것 같아 유쾌하다던 토요 당구 모임까지도 끊어버렸다. 올해도 관습마냥 추석이 다가오는데 고향 역시 죽마고우竹馬故友 조차 한 명도 없다. 간담상조肝膽相照, 송무백열松茂栢悅, 관포지교管鮑之交, 문경지교刎頸之交, 백아파금伯牙破琴의 듣기 좋은 고사성어古事成語들이 싫다. 한산과 습득은 당나라 국청사의 부목負木(머슴)이었다. 한산불어습득소寒山不語拾得笑는 부처님의 이심전심以心傳心 같은 이야기다. 지난 해 중국에 갔을 때 우연히 그들을 모신 사당을 보고 감회가 남달랐던 일이 새삼스럽다. 칼라일과 에머슨은 동시대를 산 사상가요 학자였는데 편지로만 사귀다가 마침내 에머슨이 영국의 칼라일을 찾았다. 그들은 30여분 동안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앉았다가 <훌륭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하고 헤어졌다 한다. 또한 조선조 유학자 송귀봉은 벗 율곡을 기리며 상견역무사 불래홀억군<相見亦無事 不來忽憶君 - 만나면 아무 일 없이 그저그렇고, 안 오면 홀연히 생각나는 그대>이라 했고, 고승 서산대사도 속가의 벗 양사언을 그리며 미인하처재 망지천일방<美人何處在 望之天一方 - 그리운 벗 그대는 지금쯤 어디에 있나요, 하늘 끝 한 자락만 바라보네>이라 했다지 않은가.

 정녕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이렇게 가을을 타니 말이다. 술과 친구는 오래 묵을수록 좋다는데 향기높은 매화주가 항아리 가득 찼으나 더불어 마실 사람 없어 이 가을이 더 을씨년스럽다. 바람과 하늘과 함께 흉내나 낼 밖에.


                 학교(교육)연구


 <본인의 연구가 본인의 연구의 표절이므로---> 이에 상응한 행정조치를 하겠다는 해괴망칙한 통보를 한국교총으로부터 받았다. 한국(민)화의 교육적 재발현을 현장연구 주제로 설정한 내 딴에는 한국화가 뒷전으로 밀려 감상이나 하고 서양화 일변도로 짜여진 거꾸로 된 교육과정을 고쳐야 한다고 의기양양하던 때였다. 그리고 교육연구를 한 사람 치고 <푸른기장> 한 번 받지 못해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다라는 자존심을 걸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이 왠 날벼락이란 말인가. 시간이 지나니 허탈함이 분노로 바뀌었다. 분기탱천하여 교총 사무실을 찾았다. <내 연구가 내 연구의 표절?> 제백사 호통을 쳤지만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찜찜한 기분은 남아 있다. 개인연구를 한다고 했고 학교연구도 할만큼 한 나에게도 교육연구에 대한 불신은 깊다.

 작년에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군 지정 연구학교를 자청하여 <교사의 공문서 수발 근절과 학교행사 축소>를 주제로 일선 현장에 나름대로 문제 제기를 하려고 하였는데 교육청(장)과 의견 충돌로 보고회가 무산되고말았다. 교육장은 공문서 <경감>을 나는 <근절>을 주장하다가 보고회 이틀 전에 보고회 자체가 무산된 것이다. 무참한 횡포였으나 더 시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그냥 묻었지만 입맛이 쓰다. 다음 내용은 보고회가 무산된 다음 기왕 찍어낸 보고서를 돌리며 자의적으로 덧붙인 사발통문의 요지다.

 첫째, 교육연구는 개인연구든 학교연구든 한결 같이 범전국적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떡판에 찍어낸듯 똑 같다. 보고서의 체제는 연구의 개요(필요성과 목적), 이론적 배경(논문 인용과 선행연구 분석), 연구의 실행(문제 1. 교육과정 영역, 문제 2. 교수 학습지도 영역, 문제 3. 자료 제작 영역), 검증(자체 제작 설문 분석), 결론과 제언

 둘째, 발표회의 형식이 통일되어 있다. 동해물과로 시작하여 연구개요 발표(요즘은 파워포인트 유행), 지정수업, 분과협의, 참관소감 발표, 지도조언 순이다. 심지어는 도교육청에서 좌석도면까지 만들어주는 친절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네들 사고방식으로는 아직도 통일되어야 할 게 더 있는 모양.

 그러나 교육연구의 심각성은 이러한 형식적인 문제 외에 교사가 교육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과 학교연구가 교육의 기여도 보다는 폐해가 생각 보다 크다는 일이다. 더구나 교육연구가 연구적 성과 보다는 승진 점수로 인식되는 현실에서 학교연구가 교육 일선에 미치는 역기능은 심각한 수준이다. 현장연구제도는 필요악을 넘어 교육공해 상황이다.


              선생님을 왕으로


 백화점 광고를 보면 <고객은 왕>이라는 문구가 식상할만큼 많다. 요즘에는 관공서까지 서비스 행정이라 하고 여기저기서 왕 돌림을 외친다. 왕자 공주병, 왕언니를 비롯하여 학교에서도 왕따, 독서왕, 발명왕 등 왕이 좋긴 좋은 모양. 전제국가를 경원한다면서도 왕의 칭호는 무분별하달만큼 잘 사용한다. 사회는 그렇다치고 학교에서 왕은 누군인가? 이구동성 교장이랄테지. 아무리 참교육 민주화 어쩌고는 해도 학교 풍토가 워낙 보수적이고 고형된 체제기 때문에, 아무튼 교장의 영광과 권위에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전설처럼 회자膾炙되는 <교장의 강아지>는 아직도 유효하고 시사하는 바 크다.

 <출근 표정과 기분>.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지만 출근 기분이 하루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반드시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나는 <마음 편하게 또는 즐겁게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학교경영의 근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선생님이 즐거워야 교육이 바로 선다>는 우리 학교운(경)영계획의 기조다. 선생님 제일주의, 더러 행정실에서 불평이 비칠 때도 있지만 우리 - 교장, 교감, 행정실(장)은 선생님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달랜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일과는 교무보조의 커피 한 잔과 방담으로 시작된다. 아울러 교감이나 교무부장 등 선생님과 접촉이 많은 분들에게도 특히 <아침 표정>을 강조하여 선생님들이 기분좋게 수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당부도 한다. <교장의 강아지>가 더 이상 교단의 전설이 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되풀이되는 일상과 벅찬 업무, 다소 왜곡된 교육 현장의 갈등상황에서 극히 개인적인 일로 상사의 눈치까지 보아가면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 선생님들이 너무 피곤하지 않은가. 교육이 천직이네 스승이네 하기 전에 선생님도 생활인인 이상 학교가 천직의 터전이 되려면 마땅히 <지성적인 기본 여건>을 갖추어야 한다. (초등)학교는 즐거워야 하고 생기발랄해야 한다. 더 이상 학교는 중세의 수도원도 아니고 소공녀적 기숙사가 아니다. 선생님들에게 교육이 노동이냐 천직이냐의 가름은 교장의 경영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설상가상, 애지중지 키운 강아지가 간밤에 쥐약을 먹고 죽었다고 아침부터 벌레 씹은 꼴을 하고 있다면 그 교무실 분위기가 어쩌겠는가. 그래서 나는 성인군자는 못되지만 속은 썩어도 늘 웃으려고 애쓴다. 워낙 낙천적인 덕도 있지만 표정만은 의도적으로 관리를 한다. 누군가 4십대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하지 않았던가. 일소일소一笑一少는 건강에도 좋을 일이고.


 

 

            독서초등학교와 화분초등학교

 


 우리 학교 선생님 한 분이 영어 어학 연수를 하는데 강사가 흑인이란다. 몇번의 외국 여행에서 나는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생각을 스스로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 흑인은 옆에 오기만 해도 뭔가 소름이 끼치는듯한 느낌이었고 그 정도는 덜하지만 중국인도 일본인도 태국인도 마찬가지였으며 백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정보분야를 전공한 그 흑인의 피아노 연주 솜씨가 프로에 가깝다는 자랑이다. 세상 참 많이 좋아져서 우리도 과학고, 예술고, 민족사관고들이 고집불통의 교육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더니 요즘에는 자율학교들이 거론되고 있다. 획일적인 단일체제에서만 살아왔던 우리 의식으로는 당혹감이 있지만 개인의 소질과 특성의 계발이란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일제시대 세대는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개인은 전사가 되어야 했고, 해방세대는 국가 재건과 경제 부흥을 위한 또 다른 전사였다. 오로지 민족과 국가를 위한 희생과 봉사가 삶의 제 1 덕목이었다. 도무지 개인의 행복이나 사람답게 사는 일에 대한 배려는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방 2세대인 나는 부모 공양과 형제들의 교육 그리고 자식 교육으로 일관된 가족의 시대를 살았다. 나는 <나>를 돌볼 틈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 년전 이태리를 여행하다가 연주하기도 쉽고 휴대하기가 편한 이소카 볼리비아나(오카리나)라는 악기를 샀는데 연주는 마음뿐 수삼년이 지난 지금도 서랍에서 잠자고 있다. 나에게는 나를 위한 삶의 부스러기 하나도 허용되지 않을 모양이다.

 초등학교에 학교특색사업이란 시책이 있다. 좋게 말해서 학교 고유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라는 뜻이었을텐데 없었던 학교 전통이나 고장의 특성을 억지로 만들려다 보니 학교(교육기관)와 학생(사람)을 혼동해서 웃지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또한 실적주의가 낳은 폐해일진데 도대체 (초등)학교가 무슨 특색을 가졌을 것이며 가질 수 있겠는가? 교육청의 권장사업을 맹목적으로 ?다보니 교장이 붓글씨개나 쓴다는 학교는 붓글씨를 줏어들고 난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교장은 두리뭉실 넘어갈 독서를 특색사업이라고 추겨들며 효행교육이라거나 인성교육 심지어는 화분 가꾸기 특색학교까지 출현한다. 한 술 더 떠서 우리 학교는 무슨무슨 특색학교며 이런이런 상을 탔노라고 목에 힘을 주면 교육청은 성과급 1등급으로 보상을 하고 뭣도 모르는 학부모들은 그 장단에 깨춤을 춘다. 아예 학교 이름을 독서초등학교, 서예초등학교, 화훼초등학교, 심청이초등학교로 개명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을른지.

 우리 학교에서는 운동으로 축구와 민속놀이를, 음악분야에서는 자기 악기(휴대용) 연주 기능 연마를 계획하고 있다. 프랑스인의 자존심은 중산층인데 중산층으로 대접받는 요건 중에 유창한 외국어, 가정 특별 요리, 자기 운동과 악기 연주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는 6개월 짜리 교육부장관에만 책임을 전가시킬 일이 아닌 것 같다.


                   오호 애재哀哉라, 가갸날이여


 오늘이 몇번째 한글날이던가. 국경일에서 제외되고서부터는 한글까지 잊혀져가고 있지 않은지 만감이 교차된다. 우리 말과 글에서 한글이 사라지고 있고 그 자리에는 한자와 일본어와 영어가 안방마님처럼 버티고 앉아있다.

 한글의 최초의 수난은 세종 당대 최만리가 효시嚆矢다. 그는 대표적 양반주의자며 사대주의자로써 훈민정음을 제정하여 반포하려고 공론에 부쳤을 때,  고아高雅하고 학문적인 한문을 두고 언문諺文을 만들어 반포한다면 백성들의 의식이 개화되어 통치하기가 어려워지고, 두 번째로는 종주국 중국의 노여움을 삼으로써 외교적 문제가 야기되리라는 주장을 펼쳤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분기탱천憤氣?天할 일이다. 그 이후에도 한글 수난의 역사는 민족사와 함께 숙명처럼 계속된다. 오늘, 경제 논리로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지워버린 일까지. <오호 애재哀哉>라 해야 할 것인지 <시일야是日也 방성대곡放聲大哭>을 할 일인지 마음을 추스르기 어렵고 참으로 착잡하기 그지없다. 모국어, 말과 글의 중요성을 재론해서 뭐 하랴.

 언제부턴가 우리 나라 전역에 영어 어학 연수 열풍이 불어닥쳤다. 외국어가 기승을 부린 일이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었지만 우리 민족은 알다가도 모를 백성이다. 어떤 때는 넋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일에서는 간도 쓸개도 없는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굴러는 가고 선진국 문턱에 섰다니 이 불가사의는 점쟁이나 해결할 수 있을른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한 편에서는 한자문화권에서 한자 사용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만신창이 신세다. 아무리 그렇다치더라도 한글이 한자와 일본어 그리고 영어에 밀려 포도씨 토씨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게 옳다는 말인가 좋다는 말인가?

 UN에 UNESCO라는 기구가 있다. 1990년을 문명퇴치 원년으로 정하고 범세계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면서 문맹퇴치 공로자를 표창하는데 놀라지마시라, 그 상 이름이 <세종대왕상>이고 시상식 날짜가 <10월 9일>이다. 문자는 언어생활과 함께 민족 正體性의 두 축이며 한글은 <세종어제世宗御製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하는 문자다. 세계 2백여 나라 가운데 고유의 문자를 가진 민족이 몇이나 되는가. 그리고 문자와 언어를 잃은 민족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한글은 세계에 자랑할만한 배달민족의 국보적 가치요 아울러 민족정기를 고양시킬 수 있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쎄랭게티 초원의 사자  


   <동물의 왕국>이나 <동물의 세계> 그리고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는 내 단골 애청 프로그램이다. 세랭게티 초원이 나오면 나는 마치 아프리카 사파리를 꿈꾸는 양 가슴이 설레인다. 거대하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코끼리와 아나콘다, 아카시아 그늘에 누워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사자들 하며 깡총껑충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스프링 벅의 질주 그리고 또 언제 봐도 미련스럽게 그 큰 아가리를 쩍쩍 벌리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하마. 머리맡의 상비 도서 몇 권 중에서도 <사냥꾼의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독서 메뉴다. 야성의 세계, 무지의 세계, 어둠의 나라와 원시적인 생활 모습. 세기 최고의 문명을 향유하면서 지성인이고 문화인이라고 말 조차 고상하게 가려 쓰는 사람이 거기 그 아프리카 불모의 땅에 뭐가 있다고 빠져드는 것일까?

 문명의 삶에서 탈출하고싶은 것일까? 원시시대의 인간 생활은 단순한 일차원적인 삶이었다. 미분微分 적분積分도 없었고 대위법對位法도 없었으며 아무도 라틴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려고 끙끙대지 않아도 잘만 살았다. 그저 천둥이라도 치느라치면 두려워 동굴에 숨고 날 개이면 강에 나가 고기를 잡아 모닥불에 구어 배를 채우면 그 뿐. 세익스피어 한 구절을 읊조리지 못한다고 밥을 굶는 것도 아니고 <죽느냐 사느냐>는 물음을 스스로 던져놓고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물며 10개 교과 30여책을 배울 필요도 없고, 사람은 왼쪽 길로 다녀야 한다거나 파란불에는 정지를 해야 한다 등등 수 백 가지 도덕 규범을 지킨답시고 옴도 뛰도 못하는 꼴은 더욱 아니었을거고. 그렇다면 문화문명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영혼도 윤회한다지 않은가.

 IMF 덕분에 선생님들에게는 버거운 짐 하나가 더 늘었다. 그래서 중등학교에서는 보충수업으로 명목을 바꿔 운영비를 나눠 먹고 초등학교에서는 학원 선생님을 모셔다 과외를 한다. 특기적성교육은 사회교육기관에서 해야 한다. 예를들면 순천시(지자체)에서 운영하고 학생을 포함 시민 모두가 자율적으로 자기 개발활동과 평생교육 차원에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운영해야 한다. (초등학교) 특기적성교육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아 실현을 할 수 있는 자기 계발의 동기를 부여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경험의 장을 마련해주면 그뿐, 어린 전문가나 꼬마 기능인을 양성하는 것에 교육력을 낭비한다면 특기적성교육은 또 하나의 절름발이 교육일뿐.


          전국의 이발사는 몇명이냐


 공대 재료공학부. <현미경의 대물렌즈에 파리가 앉으면 어떻게 보이겠는가?> 사범대 지구과학교육과. <인디언은 땅을 후손으로부터 빌린 것으로 여긴다는데 환경문제와 관련지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문대. 객관식 평가에 대한 찬반 논쟁이 첨예하게 대두되었을 때 서울대 면접시험 문제다. 그 시대를 겪고나서 기껏해야 수삼년 전 우리는 고등정신 기능이네 EQ네 해서 교육 행태를 한 단계 변화시켰는데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만감교차. 지난 6,7십년대의 흑백 영상 한 컷을 회상 삼아 꺼내 보자.

 교장실에는 육성회비 징수 막대그래프와 함께 학급별 월말고사 현황판이 있었다. 월말이 다가오면 제백사, 선생님은 일제고사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다.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하여 옆 반을 이기고 보자는 전쟁 아닌 전쟁. 전과지도서를 달달 외우는 일은 기본이고 학교 앞 문방구의 수련장은 납품 즉시 품절이 되며 적어도 일제고사 1 주일 전부터 학교는 마치 절간처럼 조용하다. 성적의 고하에는 이유도 변명도 없다. 1등 반 학급명찰에는 한 달 내내 금종이 꽃이 빛날 것이고 학부모들은 자기 반(선생님) 자랑. 올백 짜리가 수두룩하고 이런 사회 분위기를 교육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들도 만발. 시험을 공정하게 치루기 위해 학급 분반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고 담임 교체만으로도 부정행위를 근절할 수 없다고 담임들이 더 극성이었기 때문에 전교생을 운동장에 즐비하게 앉혀놓고 시험을 치루기도 했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시험지가 날아가는 일은 다반사고 한 겨울 추위에 아이들은 콧물 눈물까지 흘려가며 오그리고 앉아 개발새발 글씨. 부진아의 상습적 결석은 애교고 질세라 이 와중에서도 컨닝은 더 교묘해졌으니, <3번 문제의 1번 답지가 잘 안보입니다>는 약과고 책받침 두드리는 소리를 모르스 부호화해서 암호로도 사용했으며 아주 어려운 문제로 대부분 학급 아이들이 쩔쩔맬 때는 감독을 하는 담임이 <거기, 넷째 줄 두 번째 학생 태도 바르게!> 이렇게 해결하기도 했다.

 엊그제 3학년 기초학력평가가 전국적으로 문제가 되더니만 애초의 기세는 어디로 물러났는지 조용하고 다시 <실력전남>의 종합평가가 도마 위에 올랐다. 투입과 산출은 교육행정의 기본정책이다. 투자를 했으니 효과를 알아야겠다는 교육행정과 7차 교육과정 정신으로 고등정신 함양 교육을 하였으므로 측정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교사들 간의 괴리는 해결할 방법이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식의 축적이 창의성의 기본임은 만고의 진리다.


               전국 욕쟁이대회  


 뭐 이런 대회가 다 있었다냐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바로 이태 전 광주민학회가 <정감 있는 욕을 살려 세상과 삶을 윤택하게 만들자>며 연 대회의 으뜸상은 <날강도 찜쪄서 안주 삼고, 화냥년 경수 받아 술 빚어 먹고, 피똥 싸고 죽을 남원 사또 변학도와 사돈해서 천하 잡놈 변강쇠 같은 손주 볼 놈>이었다. 욕이 욕다우려면 육두문자肉頭文字 말고 해학이나 유모어, 위트가 담겨 있어야 한다. 사투리가 아름다운 것처럼 욕도 욕다운 정서를 담고 있다면 대회의 슬로건처럼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른지도 모른다.

 한 때 원로 문필가 모씨는 문학지에 부정적인 이미지의 <지방 특색고特色考>를 썼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었고,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다>는 발언을 한 국회의원은 지명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더치 페이는 네델란드인을 분노하게 하며 양키는 미국인의 비칭卑稱, 왜놈은 일본인을 야만인으로 지칭한 우리 선조들의 자존심이었고 조센징은 그 복수復讐어다.

 언어를 살아있는 유기체라 한다. 늘쌍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 말의 표준화 정책은 현대, 서울 지방, 중류층 언어를 기준으로 한다. 국민보통교육이 시작되면서 표준어 정책이 일반화되어 표준말 보다 더 훨씬 정감있는 사투리가 사라지고 있다. 언어의 국가 또는 세계적 통일이 반드시 바람직한지는 모르겠고 성경에서는 이를 바벨탑의 상징적 표현으로 비유하고 있다. 인류학자는 아니지만 나는 교육자적 입장에서 우리가 고유의 사투리를 잃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허전하고 아쉽다. 내 고향은 전라도의 꼴랑지(꼬리) 고흥반도 <구름다리>인데 왜정시대에 <운교雲橋>로 바뀌었다. 이 또한 일본의 간악한 민족 말살정책의 하나였으니 새터를 의도적으로 신기나 신촌으로 개명하면서 화순 너릿재 부근의 <밖에서는 안 보이는 골짜기→ 숨은 곡→ 은곡>의 <숨은>이 <스물 즉 2십>으로 발전되어 <이십곡리>라는 웃지못할 지명도 탄생했다. 다시 내 고향 구름다리로 돌아가자. 이웃에는 숯개(炭浦), 자문더(다)리沈橋, 배더리舟橋, 쇠섬牛島들이 내 어릴적만 해도 스스럼없이 불리워지고 있었는데 표준말을 배운 우리 세대에서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다일랍딩겨, 거시기가 뭐시기 한당께, 참말로 아짐찮그만이라, 내 새끼, 내 강아지, 가쟁이골 말 서 되 윗배미 다랑치>가 사라지면서 고향도 함께 잃고 회색의 숲(늪)에 서서 오늘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뿔도깨비 환상          


 엊그제 3박 4일 여정으로 금강산을 다녀왔다. 애초에 9월 초 예정이었는데 일이 까탈스러워질려고 태풍 <루사>가 전국을 뒤흔든 통에 여행 바로 전 날 오후 느닷없이 금강산 입산금지가 통보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포도씨 끼었다. 가 보고싶었다. 북한이 보고싶었다. 누군가는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들어가 다녀오자말자 감방 신세를 지고, 누구는 김일성과 사진을 찍었다가 곤욕을 치뤘으며, 또 다른 사람은 몰래 들어갔다가 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하는 사이에 이만큼이라도 3?8선이 열렸다니 가봐야지. 지구에 태어났으니 지구만은 한 바퀴 돌아봐야잖겠는가. 외국 여행의 명분이었다면 내 나라 내 동포들이 살고 있는 북한 여행은 그 목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는 지구촌 모든 나라를 규제없이 갈 수 있는 세상인데 한 겨레 한 핏줄이라는 배달의 나라를 못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둘째는 전쟁과 이념이라는 사상적 갈등 속에서 지도자연 한 사람들이 왜곡한 역사와 실상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싶었다. 나도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북한 사람들, 적어도 북한의 지도자들은 도깨비처럼 뿔이 난줄 알고 있었다. 간첩은 때려 죽여야 하고 공산당은 찢어 죽여야 하는 걸로 배웠다. 헌데 커가면서 이 또한 회의의 대상이 되었으니 진실을 알고싶었다. 해방의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의 참상이야 부정할 수 없지만 도대체 사상과 이념이란 무엇이관데 생때같은 목숨을, 하나뿐인 일 회생의 삶을 사상 때문에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희생해야 하는가, 그 절대절명의 가치를 확신할 수 있는 건가. 정말 그것이 옳다면 전쟁을 획책한 사람들이 살아남아 한 일은 무엇이며 또 자기네들이 살아 있는 명분은 뭔가? 지극히 단편적이지만 느낌은 뭐랄까, 한 마디로  <이 건 아닌데 …>란 말로 대신하자. 비로봉 바리바위에 몇 년 전에 새겼다는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의 글자는 가로 세로가 38미터고 파들어간 자획의 깊이만 3미터라 하다. 금강 빌리지(말만 빌리지고 컨테이너 건물)에서 관광지까지 가는 길은 양편을 모조리 철조망으로 막았고 어디를 가든지 감시자가 분명할 북한 남녀 2명씩이 군데군데 서 있다. 카메라는 통제고 휴대폰은 압수되었으며 고작 오가는 버스에서 먼발치로라도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페인트칠이 다 벗겨져 축사만도 못한 같은 모양의 집들과 트럭 몇 대와 사람들 십수명, 그 외에는 영양 실조에 걸린 듯 빼빼 마른 소 두 마리 염소 한 마리가 고작이었다. 가난끼가 덕지덕지 끼고 참말로 못사는 암울한 암흑 세계와 폐쇄된 사회의 전형이랄까. 무엇을 보려고 왔나, 작으나마 가졌었던 환상이 망가진 걸 보았다면 근시와 난시가 겹친 시력 때문이랄텐가.


                 4소식 건강비결


 (입)맛에 관하여 나는 일가견을 자랑한다. 자칭 식도락가 쯤. 할머니의 입맛을 닮았기에 그것을 터득한 이 어린(愚)후손은 그래도 입만은 살아 <입맛은 어린 시절의 맛이 여든 간다>는 가설을 세워서 날 생선을 집착하는 편식과  <밥은 적다할만큼 먹어야>라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소식 습관을 길들였다.  그래 날 더러 채식주의자 또는 소식주의자라 한다. 할머니의 유별난 식성 대문에 우리 어머니 장 모실은 반나절이었다. 쌀 되박을 이고 들고 새벽 같이 시오리 길을 왕복하는데 싱싱한 생선이 팔딱거릴 때 득달같이 돌아와야 했으니까 모실은 엄두를 내지 못했지. 다 커서 얘기지만 무잎 맛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한여름 할머니의 점심은 거친 무 몇 잎과 매콤한 풋고추 몇 개 그리고 한 주전자의 샘물이었는데 그 까칠까칠한 무잎맛의 진미를 알게 되기까지는 언 40여년이 걸렸다. 식도락이랄 건 없지만 제사상에만 오르는 쌀독의 겨울 홍시, 봉창문 밖에서 얼린 식혜, 화롯불 적사에 구운 찰떡과 조청, 말린 호박을 박아 시루에 쪄낸 호박떡의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나이 보다 젊어보인다는 말을 고지곧대로 듣는 바보는 없을테지만 4소식 건강법은 건강비결이래도 좋을 그리고 여러분들께도 권장할만한 건강법이라 자부한다. 사족을 붙인다면 눈 뜨자마자 자리에 누워 하는 기氣운동(호흡 조절과 괄약근 수축), 공복의 물 한 잔, 아침 식사 대용의 과일 쥬스 그리고 일 주일에 3, 4회 땀 흘리는 운동이 내 건강의 보조운동이다. 비결이라면 사삭스럽지만 적少게 먹고, 검소素하게 먹고, 채소蔬 과일을 먹고 그리고 늘 웃笑고 사는 4소식 생활. 술로 따지자면 젊은 시절에는 겁도 없이 마셔댔는데도 아직 쌩쌩하다면 첫째는 조상 덕이며 아울러 스스로 터득한 이 따위들의 도움이 아닐른지. <돈을 잃으면 적게 잃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서양 속담은 건강에 관한 한 천하의 명감이다.


              지성知性과 이성理性의 장場, 학교


 (초등학교)선생님이 지성인의 반열班列에 설 수 있는가? 지성인의 조건은 무엇인가? 학교가 지성의 장이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느닷없이 감사를 하겠다는 공문을 받고 나 보다 선생님들이 더 흥분했다. 작년에 3년마다 치르는 종합감사를 끝냈고 학교평가까지 받은 터에 다시 감사라니 어안이벙벙했겠지. <아마, 모범 사례를 발굴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고 분위기를 갈아앉혔으나 하도 모진 세상이라 교육청과 불편한 관계 때문이 아닐까라는 찜찜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다. 설사 보복성 감사라 해도 개의치 않지만 자존과 자긍의 문제가 생각을 깊게 한다. 교장 부임을 하여 교사 때 교감 때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교장만은 할 수 있다고 덤볐는데 웬 걸. 참 사람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좀 잘 해 보겠다는데, 제도적 모순을 고쳐서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해 보겠다는데 사방에서 손목을 비틀고 숨통을 조르며(소시쩍 유도를 좀 했는데 유능제강柔能制剛은 유도의 잠언箴言이고 업어치고 되치고 조르고 꺽고는 유도의 기술이다) 승부를 건다. <선생님 세상, 아이들 세상>, 이 단순한 논리가 내 학교상像이다. 말만 학교장 중심체제 어쩌고 하지말고 의욕적으로 경영을 하도록 좀 두고 불합리하고 부정적인 일들을 교장 재량껏 개선할 수 있도록 좀 카만 놔두면 안되는 건가. 학교가 좀 더 지성적인 여건을 갖출 수는 없는 것일까? 교사를 지성인의 대열에 합류시킬 수 있다면 당연히 그들이 꾸미고 있는 세상은 지성의 마당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덜지성적인 요인들이 학교를 못지성적으로 이끌고 있다. 감사를 두려워할 건 없다. 그러나 감사라면 달가와할 사람도 없다. 교사 공문서 근절 군 지정 연구학교 불화, 자율 출퇴근 학교 운영 취소 회유 거부, 도교육위원 군 종합감사(장) 불참, 공휴일과 방학 교사 일직 근무 폐지를 용감하게 건사한 일과 3천만원 조경공사의 말 못할 마찰의 학교(장) 단독 발주 그리고 아직도 반공공연히 관례처럼 성행하고 있는 봉투의 과감한 철폐에 따른 괘씸죄와 <교단회상>의 비판 등등 교육청과 불편한 관계 때문에 보복성 감사를 자행한다면 나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의연히 감사 거부 등 행정의 횡포와 맞설 것이다. 비판과 부정은 뿌리는 하나지만 배가 다른 형제다. 보다 성숙된 사회나 보다 지성적인 사회를 위하여 비판은 수용되어야 한다. 왕이 군림하고 양반이 통치한 조선시대에도 사간원제도가 활성화 되지 않았던가. 학교(교육)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라>.

 

                오프 더 레코드


 에피소드나 가십을 전제로, 존경이라는 말에 대한 내 편향은 좀 고집스럽다. 그런데 어쩌면 이 사소하고 엉뚱하달 문제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괴이하다. 년 전 청소년을 상대로 한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는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이런 현상이 우리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는 일에 자위하자. 각설하고, 나는 유난히 그 쪽에 민감하다. 그래서 그런지 교육계에서 내가 존경한다할 분은 딱 한 분, 전남교육계의 대부가 될만한 분인데 큰 뜻을 펴지는 못했다. 출신 학교가 순천사범이었기 때문이다. 그 분이 순천교육장으로 재직할 때 나는 그 분의 강권에 못이겨 측근에서 보필(이랄 건 없고 그냥 졸개처럼 따라다니는)하였는데 교육장 재직 2년여 동안 감사원 감사를 비롯 13번의 감사를 받았다. 내 알기로, 감사의 숨은 이유는 지역 교육위원과 갈등이었는데 마지막 열세번째 감사 때는 교육위원 전원이 몰려왔다. 더구나 그들이 의도적으로 부른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까지 합세하여 누구 잡는 꼴, 이를테면 공개재판을 벌이는 거였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감사가 시작되고 교육위원과 교육장의 일문일답이 계속되다가 문제의 핵심이 터졌다. <거, 교육장과 지역 교육위원과 불화가 심각하다던데 그래 가지고야 어떻게 순천교육이 활성화 되겠는가?> 딴은 준엄한 질타였다. 곤혹스럽다는듯 잠시 망설이던 교육장의 입에서 <그 불화의 원인이 뭔지 아는가. 청탁때문이다. 저기 앉아있는 저 교육위원이 사돈되는 X 교장을 시내 중심학교에 넣어달라는 걸 인사 질서가 어지렵혀진다고 거절했고, 저기 모씨는 사업권을 달라고 생때를 쓰다가 안 돼자 이 따위 치졸한 보복을 하는 거 아닌가>. 결국 감사장은 난장판이 되고 감사는 흐지부지 되었으며 오프 더 레코드로 화해를 했는데 모 방송사의 9시 뉴스를 타고 말아 오랫동안 저잣거리의 안주감이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교육위원의 교육청 행정감사가 있었다. 교장은 열 일 제치고 참석하라는 지시였는데 사정상 불참하고 교감을 대리 참석시켰더니 회의 시작 전부터 다급한 전화가 몇 차례. 끝내 <불참 사유서 징구 어쩌고 하는 공문>이 날아왔다. 교육청 감사에 노老 교장들을 하루 종일 (불)구경시키는 의도는 뭐며 감사상 확인할 일이 있으면 학교 현장으로 오실 일이지 어쩌자고 교장을 X놈 부르듯 한단 말인가. 학교장 중심 운영, 학교장 재량 확대, 사도 확립 등 입걸이(란 말도 있나?)는 언제쯤 도금鍍金 신세를 면할지, 원.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


 승진하기 전 나는 선배들에게 <초심을 그렇게 헌 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가>라고 힐난했다. 승진하기 전 선배들은 나와 똑같이 학교경영을 비판했고 비분강개했으며 교장 교감의 실책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셨는데 승진만 하고나면 한결같이 백팔십도 언행이 달라지고말아 <고것 참 요상타며>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하나로 남았었다. 한 술 더 떠서 선배들은 <니 승진하면 두고 보자>고 으르렁거리며 협박까지 했다. 변해도 저렇게 변할 수 있는가, 세상에 승진이란 것이 사람을 타락하게 만든다면 나는 승진 따위는 잊어버리고 살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벽지 점수와 전혀 상관없이) 섬에 가고 섬 선생님들의 분위기에 젖어 이러트면 타락의 길에 스스로 들어섰다. 점수에 맛을 들이다 보니 중 고기 맛을 보면 절간 이가 남지 않는다는 비유처럼 반 편법을 자행하며 일 년에 두세 편의 연구 논문도 쓰고 로비를 해서 장관상도 탔다. 그리고 상륙하자 본격적인 승진 대열에 끼게되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민족정기 발현을 주창하며 동분서주하던 <한국화 연구>가 점수로 보인 것도 그 즈음의 일이며 <한국민화 연구>가 푸른기장으로 눈을 가렸던 것도 그 때의 일이다. 정말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는 우리 교육과정이 거꾸로 되었노라고, 이 잘못된 교육과정을 바르게 잡지 않고는 교육과정에서 말하는 <한국인 육성>은 터무니 없는 공나발이라고 외고 다녔다. 발령 첫 해 1학년을 맡아 1학년의 국어 문자 해득 백 퍼센트를 목표로 무지막지한 만용을 부렸는데 향후 십년 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자 해득 백 퍼센트를 달성하지 못하자 교육과정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선생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자부하고 문자 미해득의 원인을 교육과정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교육과정은 말만 그럴싸하게 <민족정기>니 <한국인 육성>이니 해놓고는 서양화와 서양음악 일변도가 아닌가. 그래서 한국화, 한국민화 교육 연구를 시작했다. <교육과정을 바꿔야 한다>, <교육과정이 거꾸로다>, <서양음악과 서양 춤만으로 구성된 교육과정으로 어떻게 한국인을 기를 수 있단 말인가>, <서양화로 한국인의 정감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서슬퍼렇던 유신시대, 비판은 곧 부정이라 정권 자체를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하여 고문을 자행하고 감옥에 가두며 때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때 나는 거대한 독재정권 아래서 무모한 연구를 했고 겁 없이 떠들었다. 한국화가 미술교육과정에서 감상으로만 편성되었던 시절이었다. 하여튼 나는 한국화 덕으로 승진을 한 셈인데 승진에 관한 그 수수께끼는 아직도 미궁으로 남아 있다.


                 교장단 모임을 떠나며


 가까운 학교에 가까이 지내는 노老교장선생님이 계셨다. 저지난 해 어느 날, 이 양반 점심 약주가 좀 과하였던가 보다. 학교 부근의 압록 강변에서 곡성군청 주최 <심청 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얼큰한 상태로 학교에 들렸겠다. 축제 때마다 학교 운동장은 의례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날 따라 주차장은 차 한 대 댈 틈바구가 없었다. 술김이라 그랬겠지, 객기를 부렸다. <내 학굔데 내 차 주차할 곳도 없단 말이냐?> 교통 정리를 하던 경찰이 보아하니 반주 한 잔 했음직한터라 그만 고정하시라고 말씀드렸는데도 끝까지 시비. 보다 못한 구경꾼이 신고를 해버렸고 패트롤카를 타고온 경찰은 괘씸죄를 적용해서 음주운전으로 고발해버렸다. 교문에서 불과 십여 미터 운전을 트집잡은 것이다. 어쩔 수 있나, 힘 없는 백성이. 정년 2년여를 두고 좌천되어 멀리 바닷가로 발령받드니 결국 (불)명예퇴직을 하고말았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을 두둔하려고 한 게 아니다. 그 상황에서 좌시하고만 있었던  교장단 이름의 교장들의 태도를 거론코자 함이다. 교장을 교육계의 원로라 한다. 연륜과 연령 기준일거다. 그렇다. 십 미터든 5 미터든 음주운전은 교통 위반이니 감수하기로하고, 떳떳하진 못하나 동료애란 간판으로 교장단이  선처를 부탁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선생의 X은 개도 안 먹는다거나 애도 쓸개도 없다는둥 사회에서는 선생님을 백면서생 취급한다. 부정적이라거나 긍정적인 면을 떠나서 교장이란 분들도 평생 학교 안에서 아이들만 데리고 살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사는 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조금만 거들었다면 경징계 정도로 끝낼 수 있었고 적어도 사표까지는 쓰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말이다. 사소한 예를 들었으나 하여튼 교장 또는 교장단의 행태를 보면 나는 원로라는 말이 부끄럽다. 교육이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나 국론이 교육을 맹타할 때 또는 아이들이 울부짓고 아파할 때 우리 교장들은 무엇을 했는가? 4?19나 유신시대는 아니더라도 젊은 선생님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교장은 어디에 있었는가? 물고기처럼 살고싶다는 초등학생의 자살에도 유구무언이요 속수무책으로 팔짱만 끼고는 먼 산만 보고있지 않았나 말이다. 유명무실이 오늘 학교를 지키는 교장의 화두란 말인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다. 적어도 대학 교수들은 제자들이 거리로 나가려고 하면 양 팔로 막거나 때로는 제자들의 대열 앞 줄에 서서 몸으로 제자들을 보호했다. 도대체 교장의 교육계 원로 역할이 뭔가? 1년에 한두 번씩 거창한 대회를 열어 메아리 없는 구호나 외치고 거마비나 축내는 일인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한다. <물고기처럼 살고싶다>며 죽은 초등학생과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라며 죽은 여중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아니다 아니다, 보람찬 새 해를 맞기 위해 향일암을 찾는 정성이 충일한 새 해에 괜히 심각하고 쓸데없는 말 늘어놓지말자. 처녀 시집가기 싫다, 장사 밑지고 판다와 같이 노인 죽고싶다라는 말은 세상 3대 거짓말이라 한다. 우리 같이 살 날 보다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은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 나는 세 번 병원 신세를 진 일이 있는데 년 전 허벅지 혈관 수술을 했을 때 4시간의 어려운 수술을 하면서 다시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급박한 수술이라 가족이 오기도 전에 혼자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고 마취가 끝나고 혼자 쓸쓸히 수술대 누워 있자니 만감이 오갔다. 평소에 기호흡이나 단전호흡에 관심이 있었고 말로는 <태어난 일은 맘대로 못했으나 죽음은 맘대로 해 보겠다고, 그 비결이 분명 있다>고 믿고 <죽음 연구>를 주창했던터라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애착은 남달났다. 하여튼 태어났으니 부대끼고 사는 일은 태생적이고 동물로 태어나 운신이 자유로우니 이 또한 축복 중의 축복이며 삶 자체가 생태적이니 주어진 인생 향유하는 일이 옳은 것은 불문가지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죽네 사네 하는 것은 살다 보면 간난과 질곡이 없을 수 없어 절로 흘러나오는 말이고 세상 누구 아무에게나 물어 보라, 인생 8십 사시사철 날 마다 시간 마다 행복하냐 물으시면 고개 위아래로 흔들 사람 하나도 없으리라. 여기에는 왕도 거지도 다 똑 같다. 그렇다면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뭘까? 수부귀강녕의 오복? 아니면 삼국지의 조조처럼 동작대를 높이 짓고 2교(오나라 교국공의 두 미인 딸, 오왕 손권과 도독 주유 부인)를 취해 사는 일? 옛말이지만 군자君子 3락樂에 해답이 있는 걸까? 성경에서는 <범사凡事에 감사하라>고 했다. 범사라, 범사는 일상인데. 또 벗어나 보자. 나는 유난히 모란木丹을 좋아한다. 설총의 화왕계와 영랑의 모란이 아니더라도 모란의 진홍색과 노란 꽃술의 대비적 화사함이 뿜어내는 요염한 자태는 마치 경국지색 방불하여 신의 질투를 유발할만 하다. 그러나 내가 특히 모란의 유혹에 탐익한 이유는 어린 시절 시골집 뒤란의 추억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미적 감각이 평생을 가는 셈이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학교 주위에 야생화 3천여 그루를 심어놓고 출근 때나 퇴근 때 또는 잠시 머리를 식히고싶을 때 돌아보는 이 즐거움을 그 누가 알랴.

  

                    猛母東遷맹모동천

 

 우리 학교 선생님이 초등학생 아들을 미국에 어학 연수를 보낸다기에 말렸는데 요즘 추세가 어디 말린다고 될 일이던가. 헌데 마침 북 핵 문제가 터져 연수를 포기한다기에 초등학생의 어학연수가 불필요한 이유를 몇 가지 들었다. 첫째, 외국어는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게 되므로 필요할 때 배워야 한다. 둘째, 외국어 습득이 나이 어릴수록 좋은 건 사실이지만 모국어를 습득한 뒤에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셋째, 그 나 어린 아이를 먼 이국에 혼자 보냈을 때 한창 감수성이 강한 아이가 느끼는 이국적인 것들이 아이 성격과 정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하여튼 세 살백이 유아로부터 여든 할아버지까지 영어 단어를 외우는 평생교육(?) 열풍을 일으킨 죄는 교육정책 당국자들이 져야할 일이지만 또 그 죄값은 어김없이 백성들이 톡톡히 치뤄야할 일이니. 세상에서는 흔히 생애 3번의 기회를 이야기 하는데 나는 <교단회상>을 쓰면서 내 (교육) 인생에서 몇 번의 기회를 깨닫지 못하고 상실한 후회를 아픔으로 회상한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대물림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중의 하나가 좋은 선배를 만날 수 있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첫 임지가 시골이었는데 막걸리 선배들을 만나 술과 윷판과 화투로 교직 입문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임시에도 방향 갈등의 기회가 있었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 결정해야 했다. 지금 내 위치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생에서는 어떤 계기들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삶의 방향이 크게 회전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임 초 유치원 선생님이 박사과정을 하고싶다고 했다. 선생님이 공부를 한다면 <개인적으로도 발전이지만 결국 그 공부가 아이들에게 되돌아온다>는 신념으로 허락을 하고 교육청에 자문을 했더니 불가, 그러나 학교장 재량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강행. 그런데 허락하고 보니 근무 중 출석수업이라 불법 조퇴는 물론이고 학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태가 걱정될 수 밖에. 좌불안석 1년만에 엄연한 법적 조항이 있음을 알았다. 문화동진설(영국 → 미국 → 일본 → 한국 → 중국으로 국가 발전의 축이 움직이고 있다는 학설,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영향인지 孟母 3遷 교훈인지 우리는 지금 서방 열풍에 휩싸여 있다. 유치원 아니 두세 살 난 유아들까지 학습지 선생님이나 학원에서 영어교육을 받고 있다니 이 건 정말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우리 아이들을 엄마품에서 떼어내 영어학원으로 캐나다로 호주로 미국으로 더러는 필립핀과 태국까지 내몰고 있는가? 우리 어문교육은 그 방황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남아수독5거서男兒須讀 5車書


 

 공자孔子님께서는 사람 노릇 하려면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섯 수레의 책이 도대체 몇 권이나 되는건가가 늘 궁금했는데 기회가 왔다. 村 교직생활 중 무던히도 이사를 다녔는데 마침 리어카 이사를 하게 되어 다섯 수레의 책을 검증할 수 있었다. 중국 노魯나라 시대 수레가 지금의 리어커와 견줄 수 있으랴만 의도적으로 셈을 하면서 실어본 결과 한 수레는 대략 전문서적 분량(국판, 양면, 3백 페이지) 3백여 권으로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5거서는 천5백여 권. 인생을 6십여 년으로 보고 2십대부터 5십대까지 독서를 한다고 가정할 때 4십년 독서면 1년에 4십권을 독파해야 하고, 1주당 1권 꼴이며, 전제로 한 전문서적일 경우 3백페이지를 기준하여 매일 5십페이지(일요일 하루는 쉼)를 일생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읽어야 할 독서량이다. 이만하면 엄청나지 않은가? 보통 사람은 엄두를 내지 못할 일, 밥만 먹고 책만 읽는 兩班 書生이나 가능할 일이다. 책벌레라는 말을 들었던 나도 도저히 미치지 못할 경지다. 요즘은 독서를 취미라 했다가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는바 초등학생의 독서(력)는 상상을 초월한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인가, 올해 교육청에서 독서를 중점시책화하여 독서교육을 진흥한다는데 독서 활성화는 바람직한 시책이지만 이 일이 또 일선 교사에게 雪上加霜으로 업무를 가중시키는 시책이 되지 않기를 기대하나 벌써 어머니 도우미 어쩌고 하는게 좀 수상하다. 책 이야기가 나온 김에, 때는 (겨울)방학이고 책을 들기 좋은 여건이라 여겨 권장하고싶은 책을 소개한다. 2회에 걸쳐 두 가지 도서목록을 소개할텐데 이 도서 목록은 내가 家寶처럼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1968, 69년 동아일보사 刊 新東亞 1, 2월호의 별책부록이며 머리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세계를 움직인 백권의 책>의 기본은 ① 인생관 또는 세계관의 바탕이 되었거나 그것의 변혁을 초래한, ② 認知의 개발과 학문의 발달에 이바지한, ③ 사회의 변동과 정치적 발전에 직접 자극이 된 책으로 한정하여 1백명의 전문가들에게 추천을 받았다. 또한 <그레이트 북스> - 조지 아스킨을 始祖로 M. R. 핫친스, 모티마 아들러 등이 촉진시킨 미국의 독서 써클, 9개년 계획으로 1백44권을 읽는다. <세계의 결정적 책 십5권> - 스탠포드 대학원 <문학과 문명 세미나>. <세계를 변혁한 책 십6권> - 로버트. B. 다운즈. <세계 십대 소설 - 서머?트 모옴>. <일생의 독서 계획 - 클리프트 파디만>. <세계의 名著 - 중앙공론사(일본)>. <한국 名士들의 推薦書目>들을 자료로 斯界 전문가들이 가려 뽑은 책이다.        


                  세계를 움직인 백권의 책

          - 신동아 1968년 1월호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펴냄 -


 * 제 所藏本은 백권의 책을 斯界 권위자들이 3~4 페이지로 다이제스트한 요약본(326쪽)인 바 소장하고싶은 분은 연락하시면 확대 복사 가격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思想編> 베다, 大藏經, 孔子 論語, 플라톤 對話錄, 莊周 莊子, 聖書, 아우구스티누스 告白, 코란, 朱熹 四書集註, 아퀴나스 神學大全, 칼빈 그리스도敎綱要, 몽테뉴 隨想錄, 데카르트 方法敍說, 파스칼 팡세, 칸트 純粹理性批判, 헤겔 精神現象學, 키에르케고르 哲學的斷片後書,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베르그송 시간과 자유, 프로이트 꿈의 해석, 훗설 純粹現象學과 現象學的哲學試論, 비트겐슈타인 論理哲學論巧, 캇시러 象徵形式의 철학, 화이트헤드 과학과 근대세계, 하이데커 존재와 시간. <역사 지리> 헤로도토스 역사, 司馬遷 史記, 玄? 大唐西域記,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 여행기, 이븐 할둔 세계사, 기본 로마帝國衰亡史,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프레이저 金葉枝, 토인비 역사의 연구. <사회> 마키아벨리 君主論,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홉스 리바이어던, 존 록크 統治論, 몽테스큐 법의 정신, 장자크 룻소 社會契約論, 아담 스미스 國富論, 말사스 人口論, 마르크스와 엥겔스 공산당 선언, 제이 에스 밀 자유론, 마르크스 資本論, 레닌 帝國主義論, 막스 웨버 경제와 사회, 孫文 三民主義, 히틀러 나의 투쟁, 만하임 이데올러기와 유토피아, 케인즈 雇傭?利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자연과학> 코페르니크스 天體의 회전에 대하여, 하비 혈액 순환의 원리, 뉴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찰스 다윈 種의 起源, 앙리 파브르 곤충기, 아인슈타인 相對性原理, 파블로프 條件反射, 하이젠버그 量子論의 물리적 기초. <문학과 예술> 호메로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이솝 寓話, 라마야나, 소포클레스 오이디프스王, 아리스토텔레스 詩學, 플르타크 영웅전, 아라비안 나이트, 杜甫 杜工部集, 李白 李太白文集, 단테 神曲, 羅貫中 三國志演義, 세익스피어 햄리트,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밀튼 失樂園, 괴테 파우스트, 에드가 앨런 포우 怪奇譚, 스탕달 赤과 黑, 발자크 人間劇, 워즈워스와 콜리지 抒情民謠集, 멜빌 白鯨, 휘트먼 풀잎, 토스토예프스키 罪와 罰, 보들레느 惡의 꽃, 빅토르 유고 레미제라블,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아놀드 교양과 무질서, 헨릭 입센 인형의 집,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핀의 모험, 앙드레 지드 背德者, 조이스 율리시즈, 엘리어트 荒蕪地,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悲歌, 토마스 만 魔의 山, 카프카 城,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사랑, 말르로 인간 조건, 사르트르 嘔吐, 까뮤 異邦人, 어네스트 헤밍웨이 老人과 바다, 파스테르나크 醫師 지바고.    


          구중생형극口中生荊棘 - 한국의 고전古典 100선百選

          - 신동아 1969년 1월호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펴냄


 * 요약 다이제스트본(335 페이지)을 확대 복사 가격으로 드리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獄中 글씨에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란 글이 있다. <하루라도 책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말이 거칠어진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 <한국의 고전 백선>을 소개한다. 머리말을 요약하면 ① 병자수호조약을 編年의 하한선으로, ② 각계 전문가 백명의 추천을 받아, ③ 국내외에 큰 영향을 주고 한국문화의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저서에 중점을 두었다. 《사상편》 <儒學> 徐敬德 花潭集, 李滉 論四端七情書, 李珥 栗谷全書, 朴世堂 四書思辨錄, 鄭齋斗 霞谷集, 韓元震 南堂集, 任聖周 鹿門集, 奇正鎭 蘆沙集, 李恒老 華西集, 崔漢綺 氣測體義, 李震相 寒洲集. <불교> 圓測 解深密經疎, 元曉 金剛三昧經論, 義湘 華嚴一乘法界圖, 義天 新編諸宗敎藏總錄, 知訥 修心訣, 慧諶 禪門염頌, 休靜 禪家龜鑑, 白坡 白坡集. <기타> 鄭鑑錄, 李晩采 闢衛編, 崔濟愚 東經大全. 《역사편》 慧超 往五天竺國傳, 金富軾 三國史記, 一然 三國遺事, 覺訓 海東高僧傳, 金宗瑞 鄭麟趾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柳成龍 懲毖錄, 李舜臣 李忠武公全書, 大東野乘, 李肯翊 燃藜室記述, 安鼎福 東史綱目, 柳得恭 渤海考, 韓致淵 海東繹史, 金正喜 金石過眼錄. 《사회편》 <정치, 법률, 경제, 외교> 鄭道傳 朝鮮經國典, 趙斗淳 大典會通, 李珥 聖學輯要, 柳馨遠 磻溪隨錄, 金桔南 金慶門 通文館志, 洪大容 ?軒書, 朴一源 秋官志, 具允明 具宅奎 增補無逸錄, 朴齊家 度支志와 北學議, 沈象圭 徐榮輔 萬機要覽, 鄭若鏞 經世遺表와 牧民心書. <儀典, 民俗> 李縡 四禮便覽, 成宗命編 國朝五禮儀. <지리, 지도> 中宗命撰 東國輿地勝覽, 鄭尙驥 東國地圖, 李重煥 擇理志, 金正浩 靑丘圖 大東地志 大東輿地圖. <언어> 世宗御製 訓民正音, 世宗命撰 東國正韻, 申景濬 訓民正音韻解, 저자 미상 老乞大, 柳僖 諺文志. <兵學> 金宗瑞 制勝方略, 正祖命撰 武藝圖譜通志. 《자연편》 世宗命撰 鄕藥集成方, 世宗命撰 醫方類聚, 許浚 東醫寶鑑, 李濟馬 東醫壽世保元, 申?(비 올 속) 農家集成, 洪萬選 山林經濟, 鄭若銓 자山魚譜, 成周眞 書雲觀志, 徐有구 林園十六志. 《문학 예술편》<漢문학> 崔致遠 桂苑筆耕, 李齊賢 益齊集, 金宗直 ?畢齊集, 朴祥 訥齊集, 李廷龜 月沙集, 張維 谿谷集, 李植 澤堂集, 金昌協 農巖集, 朴趾源 熱河日記, 洪奭周 淵泉集, 申緯 紫霞詩集, 徐居正 東文選. <국문학> 鄭麟趾 등 龍飛御天歌, 首陽大君 月印釋譜, 金時習 金鰲新話, 鄭澈 松江歌辭, 尹善道 孤山遺稿, 許筠 洪吉童傳, 春香傳, 興夫傳, 金天澤 靑丘永言, 金萬重 九雲夢, 惠慶宮洪氏 閑中錄. <음악> 成俔 樂學軌範, 徐命膺 大樂前後譜. 《類書類》權文海 大東韻府群玉, 李?光 芝峯類說, 李瀷 星湖새說, 李萬運 增補文獻備考,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초등학교의 틀(형식)


 어제 금강산 육로관광 개통 기념식을 보았는데 눈 덮인 북녁 산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숨이 콱 막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해방 5십년 반세기 동안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고 대치했었던, 그래서 산짐승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DMZ를 통과하는 현대 금강산 관광 버스가 줄을 지어 통과하는 광경에 그만 숨이 막히고 눈시울이 시큰해진 것이다. 그러면서 오만 가지 상념이 새삼스럽게 스쳤다. 해방 반 세기, 선열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생떼 같은 목숨을 이름 모를 산하에 묻고 사랑하는 가족을 잊었으며 통일의 염원 하나를 위해 일신을 초개 같이 버렸건만 살아 남은 우리는 뭘 했는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피와 생명을 담보로 해서 되찾은 땅에서 이제는 사상이 다르네 이념이 틀리네 하며 동족상잔을 벌였으니 지하의 애국선열들이 무덤에서 통곡을 할 일이잖는가. 설상가상, 피의 제전 위에서 우리는 자유당 정권, 4. 19, 5. 16, 5. 18을 거치며 업보처럼 동족 살상을 거듭해오다 민족 이산의 휴전선은 염두에도 두지못하고 문민정부네 국민의 정부들만 닭 ?던 뭐처럼 쳐다보고만 살았다. 오늘 또한 그렇다. 실로 해방 반세기만에 DMZ가 뚫리는 이 역사적인 일은 대북 송금이라는 도깨비 놀음에 밀려 비관심사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曰可曰否 是是非非, 두루뭉실 눙치고 엎어치고 뒤치고 이 원 뒤숭숭해서 정작 본질을 잃어버리는 우매함이라니. 방법이 잘못되었으면 고치면 될 일이고 그렇다고 목적을 호도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우리는 그 질곡의 시대를 살아왔으면서도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판만 벌이고 있으니 붕쟁의 역사적 숙명을 벗어날 길은 전혀 없는 것인가. 其進有階 其變有漸(율곡이 조광조의 요절을 안타까와하며 한 말), 나 역시 이상 실현의 행위가 너무 가벼웠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보수적 기득권층을 믿지 않으면서도 앞이 보이지 않아서 그 방법을 택했는데 실패하고말았다. 그 이후 내 변신을 시쳇말로 뭐 온정주의 학교경영이라나.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이성주의 학교경영은 어떤 모습인가? 온정주의가 형체가 없는 환상이라면 이성주의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 공룡이 아닐까? <선생님이 즐거운 학교>. 공자님은 <형식이 실질에 우선>한다고 했다. 공자님의 뜻이 날로 발전하여(?) <유세차 감소고>로 그리고 통장 부의금화 하였다고 공자님의 논어를 훼손하지는 말자. 요즘에 담양에서 키우는 네모 육모 대나무나 함평의 비닐하우스에서 개발한 캡슐 오이처럼 초등학교교육의 형식이 필요하다. 교장의 경영관이니 학교교육목표니 하는 그런 형식적인 구호말고 학교교육의 본질로써 형식말이다.


               복받아야할 나라, 일본


 구성은 괜찮은데 배치가 잘못되었다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나무랄 데 없는데 어울림이 시원찮아 볼품 없게 되었다는 말인데 익살이 대단하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일본만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일본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일본의 (초등)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학교 도서관을 맡으면서 읽게된 일본교육 문고들로서다. 그 이전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라야 기껏 조선시대 우리가 한문을 전하였다거나 천황가의 혈통이 백제인이라거나 남녀가 한 목욕탕을 사용하는 미개인, 그리고 대동아전쟁으로 일컫어지는 학도병과 징용과 더 참혹하게 각인된 정신대, 또 3?1 만세운동과 유관순, 윤봉길 안중근 의사, 상해 임시정부 등. 그래서 왜놈이라 비하되는 의식으로 우리 보다 좀 떨어진 민족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에 더불어 일제 식민지시대 감정적 원한까지 가세하였고 그래서 일본은 나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학교 도서관에서 일본의 교육도서들을 읽고  <뭔가 이상하다> <이 건 아닌데…>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때가 6십년대 초. 이미 경도된 일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갈등이었다. 일본이 잘 사는 건 경제동물로 비하했고 일본이 세계 무대를 누비는 건 섬X 기질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그 게 아니었다. <에밀>을 성서처럼 입에 달고 다녔던 나는 적어도 <문제의 학교>에 필적하는 <꾸짓지 않는 교육>을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로 만들만한 나라라면 <스승> 같은 늘어진 교육만 가지고 있는 우리와 게임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뿔사, 명치유신 백년 간 일본이 국민성 개조운동을 벌여 <정직, 질서, 청결>을 국민성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호언장담에서는 나는 그만 허탈해지고말았다.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여행에서 위 세 가지 일본인들의 행동규범이 가시적이고 실천적이며 세계 어느 민족도 감히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것뿐인가, 전통과 현대의 조화, 검소함과 철저한 책임감. 마쓰오까의 노벨 화학상은 우연이 아니다. 일본 가정교육의 기본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기>라 한다. 기초기본교육에 관한 일본의 교육방식은 미국은 말 할 것도 없고 불란서나 영국 등 선진제국 아무도 족탈불급. 우리도 차제에 학교(교육)의 틀을 재정립하여 민족중흥의 과업을 교육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와우 아파트 붕괴, 성수대교 와해, 그리고 이 번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면서 더욱 착잡해지는 심사가 비단 나만일 것인가. <일본은 없다>? 천만에, 대한민국을 걱정하라. 내 코가 석자다.


            초등학교운영(계획)의 일반적 형식


 전남교육에서 학교운영의 틀은 일반적으로 학교교육과정계획이라 불리우는 학교운영(MBO적 어감 때문에 경영이란 어휘 바꿈)계획을 말한다. 서구식 근대교육을 도입하여 여러 차례 교육(과정) 개혁을 하고나서 MBO System을 교육에 접목함으로써 행정적으로 괄목할만한 교육실적(?)을 거두었는데 불과 수삼년 전 시책(행정)주의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 PERT System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도교육청은 학교운영을 종전의 MBO적 학교경영 체제에서 교육과정중심 체제로 전환하고자 학교운영 우수모델을 제시하기도 하고 일선 학교의 운영계획서를 가려뽑아 상찬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수 모델로 선정된 학교운영계획서가 MBO적 경영 형식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혀 귀감이나 참고할만한 가치가 없는 모델들을 추천하고 있어서 장학과의 개혁적 노력과는 무관하게 발전적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는 틀 즉 형식의 문제인데 개선이나 개혁의 필요성은 감지하고 있으나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를 모르는, 즉 목적과 방법의 연계 그리고 그 가설을 세우지 못하는 시각(머리)이 문제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선 학교는 학교운영의 일반적 모델이 없으므로써 자유로우며 독창적인 교육계획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어디 어느 곳, 경상도나 전라도 강원도까지 (초등)학교는 건물, 내부 구조로부터 시작해서 교장실 교무실의 모습은 물론이고 현관 복도, 심지어는 운동장과 정원의 모습까지 한결같이 닮은꼴들이다. 실상이 이러하건데 독창적이고 발전지향적인 학교운영(계획)을 바라는 것 자체가 연목구어緣木求魚는 아닐런지. 똑같은 교실, 교육과정, 획일화된 수업방식(KEDI가 공헌한)으로 교육받고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서 창의력이니 탐구력이니 노벨상 운운 하는 일 자체가 우습지 않은가? 차라리 MBO 시대는 운영의 틀이라도 고형화되어 있어서 적어도 운영계획을 수립하는데만은 어려움이 없었다. 해마다 경쟁적으로 첨가되는 사업을 제외하면 설사 ① 태극기 그리기대회, 전교생, 1백%. ② 애국가 4절까지 외어부르기, 전교생, 1백%. ③ 무궁화 심기, 전교생, 3그루씩 가정 식수 권장, 3백%. 그래서 <애국심 고취> 시책이 합계 5백% 달성되었다고 시비할 일은 없었으니까. 재론하지만 공자님의 형식은 매우 중요하고 형식은 제도나 체제를 통괄하는 원리다. 교육입국의 백년대계가 KEDI를 세워 고작 교수학습 하위모형 개발에 그쳤으므로 학교운영 모델은 교육 현장으로 넘겨졌고 학교는 속수무책이라서 운영계획에 관한한 오늘도 학교(운영)는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다.


                 가정교육이 없다     


 

 따라서 사회의 교육적 역할은 이미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된지 오래며 우리 나라 교육은 (반편이)학교교육만 남아 있는 셈이다. 8십년대 일본 교육 견학 때 유치원 참관, 한겨울이라 세계 각국에서 모인 어린이들이 대부분 반바지 차림에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는데 두툼한 털세터로 중무장한 아이들이 몇 명 눈에 띄었겠다. <저 아이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뇨, 한국 아이들입니다.> 자화자찬이랄테지만 나는 일찌기 이 상황을 예견하고 <훈사정음訓師正音>에서 머지않아 겪어야할 사회문화적 혼란과 갈등을 한국적 교육으로 예방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그리고 <한국화 연구>나 <한국민화 연구>로 방법적 제안을 했다. <어린이 민학당>을 개설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무등전통문화교육연구 교사 모임>을 결성하여 연수회를 열고 광주 KBS와 제휴하여 전통민속놀이 개발과 보급을 하였다. 어른을 따라 식당에 온 아이들은 식탁 주변을 놀이터로 삼고 한 발 거리에 나서면 운전은 전쟁 방불이다. 아파트와 백화점이 무너저 수백명이 묻히고 멀쩡한 다리가 뚝 끊어저 차와 사람들이 무더기로 수장되는가 하면 지하철에서 불이났는데도 사령실에서는 불구덩이 속으로 차를 운행하라는 지시를 하고 기관사는 자기 살기만 급급해서 승객을 가둔체 전동차 문을 잠그고 대피를 했다. 뇌물과 쓰레기가 사회 도처에 널려있고 부정과 일탈이 곰팡이처럼 번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도 책임있는 사람들은 환절기 감기 걱정이나 하고 있고 꼬인 교육 문제 따위야 대학 입시로 풀겠다고 호도한다.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학생이 생활 태도가 나빠서 (지식)교육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부모를 불러 사유를 설명하고 그 버릇이 고쳐질 때까지 등교를 중지시킨다. 아이들이 습득하는 생활규범은 대부분 가정에서 부모의 행동 즉 본을 받고 자란다. 그래서 니일은 <문제의 부모가 문제아를 만든다>고 했다. 또 교육심리학자들은 아이들의 성격이 3살 이전에 정착된다고 했다. <알만한 일은 유치원 때 모두 알았다>는 책이 있다. 우리 속담에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가정교육의 현실은 어떤가? 한 마디로 <가정교육은 없다.> 어쩌다 가훈 같은 것을 매달아놓은 가정에서도 가정윤리는 실종되어버렸다. 대가족제도가 핵가족화 하면서 가정의 교육적 역할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가정이 그렇고 그래서 사회는 더욱 그럴 수 밖에 없고 더불어 온 나라, 대한민국이 다 그렇다. 교육에서조차 기초도 기본도 원칙도 없어져버린 나라가 우리 나라 대한민국이다.


                     운전 전쟁


 오너가 된지 꽤 오래, 이제 좀 숙달이 되었거니 했다가도 한 발 집 밖으로만 나오면 전쟁 상황이 벌어지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엊그제는 신호 대기를 하면서 브레이크를 채웠다가 출발 신호에 브레이크를 풀고 있는데 뒤의 코란도 같이 생긴 차가 냅다 들이받고는 뺑소니를 쳐버렸다. 혹자는, 우리의 이 북새통을 도보문화에서 바로 자동차 문화로 건너뛴 우리의 교통문화적 질서 결핍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서양의 마차 문화가 우리에게는 없었다는 말인데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출퇴근길에서 날마다 한두번은 얼굴을 붉히거나 짜증스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문화적 결핍 현상으로만 치부하고 방관하기에는 너무 남세스럽지 않은가. 오너로써 이 나라에서 제 명대로 산다는 건 어려을 것 같아 나는 주변 사람들과 우리 선생님들에게 경적을 울리지말 것, 무조건 양보할 것을 주문한다. 방콕은 서울 보다 더 넓고 차는 많고 교통여건이 형편없었는데도 2박 3일 여행에서 경적을 듣지 못했다. 미국의 셔틀 버스 운전수가 유독 경적을 울려대길레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경적을 울리게된 요인을 한국 관광객에게 뒤집어씌웠다. 내 통근 길에 톨게이트를 지나 3거리를 통과하는 데가 있는데 그 3거리에서 윙카를 켜고 진입하는 차는 가물에 콩나듯하며 고속도로에서 가슴이 서늘하게 차선을 파고드는 것은 늘상 겪는 일이고 막무가네로 어깨를 들이미는 일에도 이제는 면역이 되었다. 카파라치들이 설칠 때는 그래도 뭔가 질서가 좀 잡히나 했더니 요즘에는 아예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시속 6십 지방도거나 1백의 고속도에서도 규정을 지키는 차는 아예 없고, 모르겠지만 곧이곧대로 규정을 지키는 차가 있다면 아마 초보운전자겠지. 초보운전 때 당한 고초는 또 얼만가. 지들은 엄마 뱃속에서 배워나온 것처럼 설쳐대니 원. 호주 여행에서 있었던 일. 밤 거리 구경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일행을 잃어버려 건널목 주변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웬걸 차들이 줄을 잇고 선다. 신호등도 없는 건널목인데 차 마다 오는쪽쪽 멈춰 서는 게 아닌가. 아뿔사, 나 때문이란 걸 깨득한 건 차가 여나문 대나 꼬리를 물었을 때. 하필 내가 선 자리가 횡단보도 옆이라서 오가던 차들이 내가 길을 건너리라 예상하고 멈춰섰던 것. <사람 사는 곳>들은 이러고들 사는데 우리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우리 사회를 재건하려면 아무래도 <국민성 재발현 국민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해야 하고 교육(학교)이 이를 선도해야 하며 학교(운영계획)는 국민운동의 가설과 실천모형을 제시해야할 것이다.


                   5각형 대나무 필통


 <뭔 놈의 대나무가 5각형이 다 있어야?> 5각형 대나무로 만든 붓통을 보았다는 말에 대한 내 첫 반응은 그랬다. 세계적 명성의 담양 대나무는 희한하게도 4각형 5각형들이 있는데 이것은 어린 죽순을 틀에 넣어 길러서 만든 것이라 한다. <형식이 실질에 우선한다>는 공자님 말씀의 증명이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는 학교운영의 어떤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그 형식이 우리가 육성하고자 하는 학생교육에 부합되는가? 학교운영계획의 목차를 살펴 보자. ① 학교장의 교육관 - 경영관이니 철학이니 신념이니 하여 권두에 실리는데 나는 솔직히 내 교육철학을 모른다. 더구나 남 앞에 내세울만한 이론도 없다. 그리고 왜 학교운영계획에 교장의 철학이 강조되어야 하는지 근거나 이유를 모르며 합당한지는 더욱. ② 기반(법률적 근거, 교육과정의 추구 인간상) - 법률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유도 알 수 없다. 설마 민주국가에서 파시스트를 기른다고 하지는 않을텐데. ③ 기저(현황, 작년도 교육실적, 설문, 실태 분석) - 연구보고서를 방불케 한다. 지레짐작으로는 학교운영계획을 학교에서 창의적으로 만들라니까 참고할만한 틀은 없고 일반화된 연구보고서 형식이 떠올라 옳타구나 인용하게 되지 않았는지. ④ 교육목표, 방침, 노력중점 - 교장이 바뀌거나 교육과정이 개정되면 의례히 바뀌는데 일단 수립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범 전국적으로 엇비슷하고 교육목표를 알고 있는 교직원이나 학생은 없다. 또 말로는 교육과정에 용해하여 적용한다고 하는데 전혀 비논리적인 아웅일뿐. 어떤 학교에서는 서로 다른 학년의 5개 학급의 교육목표가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세워진 것도 보았다. 교육방침은 6하 원칙으로 계량화되어야 한다, 통계적 결과를 얻어야하므로. 노력중점은 교내행사로 용해되어 교육실적을 거양하는 첨병으로 실적경영의 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문서 수발과 함께 수업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 ⑤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 - 학교교육의 본질인데 학년교육과정의 기준 역할. ⑥ 지원활동 - (교육)장학과 (경영)행정의 절충이 요구되는데 대부분의 학교(교장)가 행정위주의 경향. ⑦ 운영평가 - 경영위주에서 장학위주로 전환. ⑧ 부록(업무분장 등). 특색사업, 중점사업 등은 실적주의(행정위주)의 산물이며 수업 저해의 요인이므로 없애야 한다. 학교운영의 본질은 수업 즉 지식교육이다. 덧붙여, 논리적으로는 타당치 않으나 현실적으로 생활규범교육의 활성화(생활화)를 위하여 초등교육에서 <가정교육과 유치원교육의 연계활동>을 선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민성 재발현운동과 함께 연계교육 프로그램 개발이 요청된다. (첨부. 교육개혁적 모델화 2003 겸면초등학교 학교운영계획 목차, 내용은 겸면초등학교 URL://www.gyoemmyeom.es.kr 참조)


             명치유신明治維新 백년, 일본


 춘원 이광수 선생이 국민성 개조론을 들고나왔다가 호되게 경을 친 적이 있었다. 선생이 안타까와한 심정은 이해가 가나 일본이 명치유신 백년 동안 <정직, 질서, 청결>로 국민성을 개조했다니까, 또 가서 실제로 보니 부러워서 대뜸 우리도 민족성을 개조하자 했으니 특히 일본에 관한한 편향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는 배달민족이 카만 있었겠는가. 개혁은 점진적이어야 하고 때가 있는 법, 율곡 선생이 조광조의 요절을 안타까와한 일을 또 되새겨 본다. <민족성 개조>라 하지 않고 <민족성 발현>이라 했다. 몰매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성 내부에 잠재되어 있을 내면의 세계를 다시 일깨우자는 뜻이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처럼, 마치 축제처럼 한바탕 국민적 발원을 일으키자는 말이다. 정신적 민족중흥을 이루자는 말이다. 더구나 경제가 잘 되어가고 있으니 (대승적)세계화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구현을 위해서 이 일을 초등교육에서 선도하고 언론이 거들고 정부가 돕는다면 못할 게 뭬 있는가. 아니, 반드시 해야 한다. 일본이 백년 동안에 개조했다면 우리는 일깨우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십년이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오는 21세기를 한국의 세기로 만들자면, 먼저 안으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그래서 배달겨레의 민족적 가치관을 재정리한 다음에 경제적 성공을 토대로 지구촌을 선도할 수 있고 인류 평화에 기여할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지 않았는가. 이쯤에서 <한국인은 누구인가>도 되짚어 보고 도대체 한국인은 중국인과는 어디가 다른가도 생각해 봐야지 않겠는가? 김구연은 한국민화(연구)에서 우리의 색감을 진채眞彩라 하였는데, 붉은색에서 중국 당채唐彩가 어둡고 검붉은데 비해 한국인의 색상은 밝고 환하다고 했다. <한?중?일 문화 코드를 푼다, 이어령 교수 책임 편집, 유한킴벌리와 생각의 나무 제작>의 야심찬 출판 2십년 계획에서는 한국의 <매화>는 성기고 대범하고 여백을 선호하며, 중국은 빽빽하고 크며, 일본의 매화 그림은 화려하고 집합적이라고 했다. 동양이 이럴진데 서양이나 중동, 아프리카와는 얼마만한 문화적 차이가 있겠는가. 다시 말하거니와 세계화는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다양함의 조화>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아 육성하는 것은 국수주의가 아니라 주체성 그리고 문화의식 즉 한국적 가치관을 정립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문화코드는 민족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그것이 바로 배달겨레의 국민성일테니까 그 걸 정립하여 재발현시키는 범 국민운동을 초등학교(교육)이 주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망향가

 

   

 우리 아이들은 고향이 없다. 농촌에서 태어나고 시골 학교에 다녔지만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불안감만 가중된 꼴. 우리 선생님 한 분은 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 내 어린 시절의 자랑을 듣는 때면 자기 어린 시절의 체험 빈곤을 호소한다. 내 유년시절은 풍요로웠다. 바다의 꼬막과 굴 그리고 바지락, 대롱, 비틀이고동, 장태고동, 각시고동, 꽃게, 반장게, 찔기미, 짱뚱이, 문저리, 쏙, 장어. 문저리는 낚시질하고 짱뚱이는 후리낚시 그리고 장어는 쇠섬 부근에 물이 나면 웅덩이를 파고 돌을 무어두면 장어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냥 건져내기만 하면 되었다. 바다뿐만이 아니라 산도 들도 모두가 내 어린 시절은 추억의 보고다. 우리 구름다리교회 상량에는 소화 몇 년이라는 건축 연대가 있는데 인근 면을 통털어 우리 교회가 맨 먼저 생겼다. 나는 모태신앙이고 교회에서 성장했다. 아버님은 성가대 지휘자 겸 오르간 반주자였고 여름방학이면 여는 여름성경학교 대장이었다. 나는 교대 2년의 본격적인 풍금 연수를 받았어도 아버님의 능란한 찬송가 4부 연주 기능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아버님은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여름 밤 청아한 퉁소 연주는 마을 전체가 숙연했고 화분을 그린 수채화가 방에 걸려 있었으며 <달하 높이곰 도다샤 머리곰 비춰오시라>는 큰 방 벽에 아버님의 붓글씨로 쓰여져 있었는데 머리가 한참 커서야 그게 정읍사인줄 알았다. 나는 면내 가장 높은 산 천방산을 넘어 시오릿길 등교를 하였는데 만 다섯에 입학을 해서 1, 2학년 때는 가래중의를 입고 친척 누나들이 번갈아 업어 다녔다. 실은 누나들이 업어 등하교를 한 것은 아니고 마을만 벗어나면 누나들의 명령을 받은 5, 6학년 선배들이 업고 다녔다. 천막 교실 중학교를 다니다가 대처로 간 것이 광주로 편입을 하여 촌놈 실력을 과시하였는데 <기억력은 뛰어나나 노력이 부족함>이란 5학년 담임 선생님의 예언대로 노력이 붙자 중학교는 석권, 고등학교는 2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4.19와 5.16을 겪었으나 어려서 뭐가 뭔지도 몰랐고 오직 공부벌레로 고등학교를 마쳤는데 체육선생님과 에피소드 하나. 체육 선생님은 반 깡패 같은 분이었는데 마침 장학생 반 시험 그것도 영어시험 감독을 용감하게 들어왔다. 짓궂은 친구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어 까막눈이 선생님을 놀리느라 2번 3번째 답지를 읽어달라거나 7번 문제가 안 보인다거나 야유에 가까운 질문에 곤경을 치르는 걸 내가 모르는 체 방패막이를 하였더니 체육 선생님은 졸업 때까지 내 충실한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파도야 저 달을, 갈매기야 마음을

          

 섬을 지원한 것은 섬이 좋아서도 남들처럼 승진 점수를 챙기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일상에서 탈출이었다. 도망 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정말 우연찮게 섬 생활 덕분에 승진을 할 수 있었다. 무던히도 앓던 시기였다. 뭐 특별히 감수성이 예민한 탓도 아닐텐데 방황이 좀 심해서 그랬다. 방황의 첫 번째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신과 종교에서 시작되었다. 도대체 기독교의 하나님은 있냐 없냐가 문제였다. 책을 보면 원시 종교는 해, 달, 별이나 거목, 거암들과 상상력으로 그리고 인간이 자신들이 무력함을 자인하면서 만들어냈는데(?) 성경에서는 거꾸로 신이 사람을 만들었다니 이게 웬 말씀이던가. 매서운 겨울 새벽 기도 한 달에서 얻은 결론은 <신은 없다>. 모태신앙이 탕자로 변절하는 계기였다. 다음은 마치 돌림병처럼 다시 찾아온 3십대 중반의 방황이었는데 방황의 끝은 구례 천은사에서 1주일과 장성 백양사의 4십일이 절정이었다. 그 해 겨울처럼 눈이 많았을까. 장성은 예로부터 눈 고장으로 유명하지만 그 해에사말고 뭔 눈이 그렇게 많이 왔던지 겨우내 한 4십일 설국 같은 눈 마을에 묻혀 살았다. 추워서 참나무 장작을 지펴놓으면 절 방은 절절 끓고 그 잿불에 앞마당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은행을 주워 세운이와 구워 먹었다. 세운이는 광명화보살이 업둥이로 키운 초등학교 5학년. 날마다 나는 세운이의 반야심경 독경 소리에 눈을 뜨고 천수경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낮에는 가끔 산등성이를 기어올라 학바위를 탔는데, 더러 속세의 향수로 마음을 가누기 어려울 적에는 해질녁 기어코 5리 산길을 내려 주막에서 혼자 고사리무침 안주로 동동주를 마시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눈밭을 굴러 돌아왔다. 산 속에서는 해가 산마루에서 뜨고 산마루로 진다. 아무도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문풍지 우는 소리에 문을 열기도 하고 방 앞 은행나무에서 까치라도 우는 날이면 하루 종일 광명교를 서성거렸다. <병 속의 새>를 꺼내려는 것도 아니고 계誡를 받는 일도 아니었는데 나는 무던히도 절간을 기웃거렸다. 산에서 내려오던 날도 빈 손이었다. 그리고 계절병이 또 다시 도진 건 4십대 중반, 그래서 나는 신안 섬을 택했다. 남들은 벽지점수를 얻어 승진을 꾀한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 내가 찾은 섬은 낭만의 바다가 아니었다. 목포 부두에서 승선하여 광진호로 내린 자은도의 생활은 바로 또 다른 고행이나 마찬가지였고 나는 밤이면 바닷가 방파제에 앉아 물에 비친 달빛의 편린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더러는 동료들과 술 마시고 깽과리를 두드려대도 배냇병 같은 갈증은 가시지 않고 목이 탔다. 섬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꽃 지도


 4월이 되자 꽃 지도를 만들어 돌렸다. 교내 어디 어디에 무슨 꽃이 있다는 지도다. 교장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한 일은 정원과 울타리에 꽃과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우리 학교 울타리를 선생님들은 울타리 전시장이라고 불렀다. 이를테면 북쪽은 미장된 블록 담장, 동쪽은 탱자나무와 철조망, 남쪽은 사철나무 생울타리고 서쪽은 잔디 언덕과 미장 안 된 블록 담장으로 둘러 쌓여 있었으니 말이다. 교장이 바뀌면 맨 먼저 정원수들이 경을 친다는데 나도 그 틈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정원수 같지 나무들 - 히말라야씨이타, 탱자나무, 사철나무, 전나무, 측백나무, 플라타나스들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벚나무, 은행나무, 산수유, 마로니에, 꽃사과, 이팝나무들로 바꿨다. 측백나무(군데군데 죽어 이가 빠진) 교문은 타원형 화단과 자연석으로 꾸미고 울타리 전시장 담장은 헐어 개나리(20미터)와 조팝나무(10미터)를 번갈아 심었다. 올해는 앞 정원의 시멘트를 걷어내고 석축을 하였으며 금잔디를 깔았고 뒤뜰은 역시 시멘트 포장을 걷어내고 꽃잔디와 맥문동을 심었다. 나는 인성교육은 인간화교육이고 (선효행)일기 쓰기나 학교에서 벌이는 생활지도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리학자들은 인성이 세 살 이전에 정착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본 인성은 가정에서 마무리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가정교육 프로그램 지침서를 만들어 초등교육과 연계를 하려고 한다. 핵가족화로 상실되어 가는 가정의 교육 기능을 되살려 도덕규범의 기초와 기본을 육성하고 유치원에서는 이를 정착시켜서 초등학교에 와서는 생활화하는 교육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꽃(밭)으로 돌아가자. 나는 인성교육은,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생명 존중교육이 좋다고 생각한다. 동식물 기르기를 권장하자는 말이다. 선효행 일기 쓰기는 아이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염려가 있다. 일기 쓰기가 글쓰기 기능을 북돋고 작문 실력을 향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은 안다. 그러나 매일 의무적으로 쓰는 일기는, 특히 선효행 일기는 거짓말을 조장할 염려가 있다. 더구나 담임 선생님이 날마다 검열을 하고 붉은 글씨로 주석을 달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아침이면 선생님들이 교무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잡담하기를 반강제로 유도한다. 그리고 통합 시간을 운영하여 약 두어 시간의 잃어버린 여유를 찾아줌으로써 선생님들에게는 잡무 처리와 연수 시간을 또는 여가를, 아이들에게는 자율시간을 준다.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우리 아이들에게 자율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꽃밭에서 놀기를 기대하며 한국 야생화 3십여종 3천 그루를 심었다. 부처꽃, 하늘매발톱, 할미꽃, 비비추, 원추리, 왜성술패랭이들을 심고 담쟁이넝쿨은 돌담에 둘렀다.

 

                 내가 꿈꾸는 학교


 등교하여 교무실 커피 타임 없이 교실로 간 선생님은 교장실로 와서 아침 문안 인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꽃과 음악과 사랑이 가득한 학교>가 경영 철학이다. 등교길에 잔잔히 귓가를 스쳐가는 감상곡과 학교 담장을 따라 빙 둘러 심은 한국 야생화 3천 그루 그리고 생활 축구부와 생활 악기 연주가 우리 학교 모습이다. 학년 초 선생님들은 시험의 폐해를 들어  정기적 평가를 거부했다. 그러나 나는 학교운영의 기초자료라며 설득했다. 부임하자말자 군수를 찾아가 인근 3개 학교가 연합하여 지역축제 운동회를 민속놀이로 재현할테니 돈 5백만 원을 내놓으라고 하여 올해 3회 째다. 장이 서야 굿판이 된다는 말로 <가무를 즐기는> 민족 전통을 되찾고싶었다. 근래 지방자치단체가 앞다투어 여는 지방 축제는 축제답지 않다. 우리 전통문화와 민족정기에 무지한 소치다. 3개 학교(면) 학생과 주민이 모이니 1천여명의 난장판이 벌어져 돼지 잡아 안주하고 막걸리 섬을 져다 동이에 바가지 띄워 맘대로 마시고 떡 쳐서 시장끼를 달래며 하루를 논다. <교사의 공문서 수발 근절> 군 지정 연구학교를 자원해서 교실 수업 저해 제 1요인을 타개하려다가 교육장(청)과 <경감이냐 근절이냐>를 놓고 의견 충돌이 일어나 결국 공개회 이틀 전에 발표회를 취소했다. 올 해 우리 학교 <학교운영계획(서)>은 별나다. 의례 서두를 장식하는 학교장의 경영관도 교육기저도 심지어는 학교교육목표나 방침, 노력중점도 없다. 그리고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정교육과 유치원교육의 연계 프로그램이 계획되어 있다. 교육청이 권장하고 교장들이 좋아하는 학교 특색발휘계획은 말 할 것도 없고 역시 교실 수업 제 2의 저해 요인인 학교(교육)행사는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오직 교육과정 위주다. 그래선가 교육청과 교장들이 쉬쉬하며 날 또라이 교장이란단다. 그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그런 또라이라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고 대꾸했다. 이제 이 학교운영계획에 가정교육 지침서가 첨가되면 내 교육철학이 학교운영 자료로 완성된다. 생활지도의 근간, 인성 형성의 바탕이 가정이기 때문에 핵가족화로 잃어버린 가정교육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10개 교과 30책의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주당 32 시간의 수업 부담을 줄여달라고 했더니 영어를 추가하고 특기적성교육을 끌어들여 더 늘려놓았다. 한심하다. 학교(교육)가 미래지향적 교육개혁을 이루려면 첫째, 체제적으로는 교원 승진제도를 다양화해야 한다. 현행 승진제도는 교단 부조리의 원천이다. 둘째, 내용적으로는 교육과정의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 이 두 가지 과제의 해결 없이 교육개혁은 연목구어緣木求魚리라.


                병엣술의 향기


 아마 병 외 술 즉 새 병을 따지 말고 마시다 남은 술의 와전 아닐까? 초임 시절 그러니까 6, 7십년대 목로집 술은 대부분 외상이었다. 술집 선반이나 마루에는 의례 새카맣게 손때가 묻은 단골들의 외상 장부가 있었고 한 달 내내 먹고 긋고 달아놨다가 봉급날 갚았다. 외상이 채여 작부가 교무실로 들이닥쳐 낭패를 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술집 주인을 피해 36계 줄행랑을 치고 또 고단수를 쳐서 경리 선생님과 짜고 봉급을 빼돌리기도 하지만 노련한 그들에게서 빠져나오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덜미를 잡혀 수모를 당하기 십상었지. 그렇다고 인정사정 없이 그리 가파르지만도 않않다. 사정이 딱하다면 슬쩍 눈감아주던 그 시절 나는 모교 발령을 받아 국민학교를 다녔던 옛 길, 면에서 제일 높은 천방산을 넘고 산을 두 개 더 넘어 시오리 산길을 걸어서 통근을 했다. 밟히는 건 모두 추억이요 걷히는 것도 모두 추억이 아닐 수 없었다. 천방산 마루에는 송씨네 묘가 서너 채 있고 매년 가을이면 시제를 모셨는데 만약 악동들의 대접사가 소홀했다가는 다음 해 곤욕을 치렀다. 부잡한 녀석들이 상석에다 실례를 해놓기 때문. 또 산허리 쌍묘에서는 안개 낀 날이면 어김없이 방아소리가 들려서 확인한답시고 몰려다니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전혀 잡기를 모르던 나는 초임에서 윷과 화투를 배웠다. 여름방학 일직을 하는데 점심 때 쯤 되니까 관사 선배들이 슬슬 출근을 하고 교장 교감이 나타나자 소사가 가운데뜰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다 익숙한 솜씨로 멍석부터 폈다. 그게 윷의 시초였고 화투는 역시 느티나무 평상에서 벌어진 육백 치기를 배웠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芳來 불역락호야不亦樂乎也는 고향 은사인 교장 선생님이 교문 앞 상점 노인에게 보낸 쪽지였는데 뒤늦게야 그 말이 화투 친구가 모였느냐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동학년 여선생님에게 천방산 들꽃을 매일 선물하였는데 그 일이 병이 되어  고향을 떴다. 여름방학 무렵, 숙직을 서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천방산 마루를 넘어 등교하려던 나는 도깨비불을 만나 머리칼이 곤두서는 경험도 했다. 이런 경험은 신비한 예언적 꿈으로 재현되었는데 전 날 꿈에 단청이 보이고 다음 날 등교해서 향교를 견학 가거나 삼베옷에 고리짝을 이고 버스에서 내리는 세 여인을 보았는데 실제로 출근길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겨울 온 산에 진달래가 만발한 꿈을 꾸고는 학교 앞산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시신이 나무 가지에 널렸다는 비보를 듣기도 했다. 폐일언하고 술과 친구는 묵을수록 향기가 더 한다던데 오늘은 누가 쪽지 기별도 없나.

 

 

 

                  운수납자雲水衲子                         


 <내가 죽었을 때 사방에 알려 번거롭게 하지말고 산중에서 조용하고 조촐하게 화장하여 흩어버려라. 49재 등 어떤 제사도 지내지 말라. 요즘 절 집의 다비가 너무 번거롭고 호화스러워 불조佛祖의 뜻을 저버리고 시주의 은혜를 망각한 짓이니 너희들이 내 상좌라면 내가 이야기 한 대로 반드시 지켜주기 바란다.> 87세로 입적한 조계종 원로의원 응담 스님의 유언이다. 스님은 입적한 날까지 제자와 신도들의 보살핌을 거절하고 청소 빨래를 손수하였다고 한다. 그동안 마지못해 받았던 시주도 모아두었다가 중생을 위해 쓰라고 모두 내놓았다. 운수납자의 본분을 여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운수납자란 납의(헤진 헌옷 조각으로 기워 만든 옷)를 입고 구름 가듯 물 흐르듯 떠도는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불가에서는 육신이나 일생 자체도 운납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죽으면 다비로 본디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 영혼은 생명의 누더기요 육신은 본능의 누더기다. 아무 것 없이 맨 몸으로 왔다가 다시 돌아가면서 무엇을 남기랴. 내 한 세상 살았으니 받은 것들 다 되돌려주고 가는 것이 옳지 않은가. 왔다갔다는 흔적마저도 남길 것 무엔가. 향기로운 술과 많을수록 좋다던 돈 그리고 한 평생을 다그쳤어도 읽어내지 못한 화두 여자(사랑)와 신, 세상의 그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주위의 좋은 것들. 이제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앗다고 생각하니 더러는 더럽다고 쳐다보지도 않던 것들까지도 아쉽고 안타까울 뿐. 노쇠하여 죽은 몸이 무슨 소용에 닿으랴만 장기가 누구에겐가 소용되면 좋겠고 혹 의학도들이 내 누추한 껍데기를 해부용으로라도 쓴다면 보람이고 사용한 다음에는 화장하여 깨끗이 산하에 뿌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슬프다. 한 평생 교직에 매달려 사람다운 삶 살아보지 못했으니 어이 안타깝지 않으랴. 그래도 마지막을 잘 구상하는 일로 위안을 삼아야지. 남들처럼 치열하게 살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한 평생 교직이 그닥 험하지만은 않으나 스님처럼 화두를 얻어 깨우치려는 번민이 없었고, 높은 공부를 하여 학자로서 연구 실적을 올리지도 못했으며, 교육에서도 근근히 제 앞길이나 메우는 소로를 걸었으니 어이 안타깝다 하지 않으랴. 여말麗末 나옹화상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 더러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버려 두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가 가라하네>라고 읊었다. 아, 인생은 반드시 초로草露였던가 한 무더기 아침 안개 같은 것이였던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불가의 화두며 수화 김환기 화백의 민전 대상 작품인데 검은 바탕에 빨강 파랑 노랑 갖가지 물감을 점으로 표현하여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지금이야 날 더러 타고난 강체라고들 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체질이 튼튼하지 못하고 체격도 작았다. 그래도 키가 1백 7십 남짓 큰 것은 고등학교 1, 2학년 때였는데 1년에 십 센티미터 이상 자란 덕에 이만큼이라도 되었다. 키는 그렇고, 느닷없이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신과 종교에 관한 심한 번민을 겪고는 모태신앙의 교회를 그만 두었지만 그래도 나는 서슴없이 교회 사람이라 말하고 내 문학적 소양도 성경이 탯줄이라고 곧잘 얘기한다. 그러나 그 때 시작된 종교적 회의가 청년시절을 거쳐 지금까지도 방황을 멈추지 못하는데 대개 이 산 저 산 절을 찾아나서는 게 고작이다. 어린 시절 높은 열에 시달린 기억이 아스름할뿐 크게 아픈 기억은 없고 4십이 다 되어서 유사 장티프스에 걸렸는데 시골 의사가 감기로 처방하는 바람에 다 죽게된 걸 광주 병원으로 실려와 살아난 게 병력의 전부.  한참 생사의 기로에서 의사도 장담을 못하는 판에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시골 우리 집 마당에다 내 옷가지를 꺼내놓고 막 불태우려던 참에 할머니가 나타나 호통을 치며 불에서 옷을 꺼내 날 살렸다고 한다. 꿈 같은 일을 겪고는 별 탈 없이 살다가 서른 후반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도 신기해서 자고 일어나면 꿈부터 기록하고 잠들 임시에는 하루 일과를 꿈을 중심으로 기록했는데 꿈과 현실이 점쟁이처럼 맞아떨어지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 겨울 산에 진달래가 만발한 꿈을 꾸고는 학교 앞산에 공군기가 추락해서 시신이 나뭇가지에 꽃처럼 널렸더라는 소문을 들었고, 무심히 출근했는데 학년 단체로 향교 견학을 갔다가 어젯밤 꿈에 보았던 단청을 상기하고는 놀라기도 했다. 이 예언적인 꿈이 계속되자 신비한 두려움에 자신을 가누기가 어려웠는데 이 일은 차츰 동료들의 꿈을 해몽하는 일로 발전되었다.  요즘은 신과 종교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어떤 결론을 지니고 <만행→ 전생여행→ 초인생활→ 티베트 죽음의 서>를 두 번 세 번 읽는다. <태어나는 일은 내 맘대로 못했지만 죽음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의지로 그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그 비법을 명상과 (단전)호흡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황혼, 죽음을 노을처럼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쓸만한 장기는 기증하고 시신은 의학도 해부용으로 주고 그래도 남는 육신은 깨끗하게 태워 산하에 뿌림으로써 자연의 혜택 속에서 살고 자연으로 흔적 없이 돌아가기를 소원한다.


                   NEIS와 BIG BRODER


 빅 부라더는 <조지 오웰>이 <1984년>이라는 소설에서 설정한 전체주의 사회의 전형인데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컴퓨터 감시망 대부代父 격이다. 모든 개인 자료가 수록된 신상 정보를 가지고 뛰어난 독재자가 인간을 관리하고 통제하며 조종하고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선견지명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유효하다. 참여정부는 인터넷 강국의 면모를 세계만방에 과시하고싶은 것일까, 왜? 세계적으로도 유래 없는 중앙제어 시스템을 강요하여 인권 침해 논란을 사서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NEIS 시행 여부를 놓고 힘 겨루기를 벌이고 있는 교육부와 전교조의 싸움은 교총을 끌어들여 대리전을 양상을 띠면서 점입가경이다. NEIS 갈등 역시 여늬 교육 현안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어 이름부터 신경전인데 네이스(전교조), 나이스(교육부), 엔이아이에스(방송)라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구지 이름쯤이야 탓할 필요조차도 없지만 교육부가 나이스(NEIS = NICE)를 고집하는 궁색한 변명이 민망하고 이는 공용어 정책에 위배된 비상식적 발상이며, 이름 따위로 본질을 호도하려고 하는 교육관료들의 작태는 한심함을 넘어 서글퍼진다. 도대체 우리가 지금 21세기를 살고는 있는 것인가? 따는 그렇고, NEIS 공방의 본질은 인권 침해 요인이 있나 없나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침해 요인 권고를 받아들여 본질을 바르게 세우고 다음으로 정보전산의 편리함을 추구하면 되는데 뭐가 이리 복잡하고 어렵게 얽혀가는지. 더구나 입으로만 교육을 해오던 요상한 교육관변단체들이 어떤 같지 않은 기회를 계기로 삼아 마치 살무사처럼 고개를 들더니 이제는 사사건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나서고 있다. 구태어 논의가 필요하다면 문제 제기는 이래야 한다. 첫째, 인권 침해 요인을 어떻게 수정 보완할 것인지. 둘째,  애초에 NEIS를 도입하면서 왜 교육부는 국책적인 정책 결정을 공청회나 교육관계자들의 의견 수렴 한 번 없이 자의적으로 했는지. 셋째, 1천 5백억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써서 CS로 전산화를 시도한지 불과 2년만에 다시 또 더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새로운 방식의 NEIS로 변경하려는 의도를 명백히 하고 교육적 효율성의 문제를 납득시켜야 하며. 넷째, 학교 현장에서는 공문서 수발이 교사의 수업 침해의 가장 큰 요인인데 NEIS가 교육환경의 쇄신을 위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NEIS를 만들어 교육 현장을 개선한답시고 주객이 전도된 관리행정 여건만 개선을 한다면 정작 절실한 수업 여건 개선은 학교 종합정보화의 허울좋은 또 다른 희생일뿐이다.


           민족교육 그 하나, 한글교육


 민족교육은 내 교육철학의 목적이며 민주교육은 방법이다. 이를 전제로 하고 교사 햇병아리 시절 우연하게 1학년을 맡아 운명적 조우를 하게된 한글과 인연을 풀어 보자. 60년대니까, 그 때만 해도 1학년 담임은 오로지 3Rs 교육에 해 뜨고 지는 줄 모르고 살았는데 1년 내내 문자해득과 씨름을 하고도 새 학기가 되면 미해득 진급이 한두 명. 오기가 발동했다. 다음 해 다시 1학년을 희망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무모하리만큼 혈기방장한 젊은 교사가 분기탱천하여 벌인 문자해득 1백%에 아이들은 묵사발이 되고 교사는 파김치가 되기 일쑤. 그 게 1년, 2년……. 교대를 갓나온 햇병아리 교사가 아동발달을 제대로 알겠는가 발문법을 알았겠는가. 무지막지한 세월이었겠지.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그 때는 그 걸 열정이라고 자신만만했으니. 하여튼 나는 내리 9년을 1학년의 문자해득에 미치다싶이 매달렸으나 결국 KO되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벼라별 방법을 다 동원했어도 문자해득 1백%는 물거품이 되었다. 벼랑 끝까지 밀리자 머리를 굴렸는데 미해득의 원인이 교사가 아니고 교육과정에 있지 않나 하는 쪽으로 생각이 미친 것이다. 세종어제 훈민정음에서는 한글을 만들어 반포할 당시 영리한 사람은 한 나절(半切)에 배우고 우둔한 사람일지라도 며칠만에 깨우칠 수 있다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한글 제정시대의 교육방법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어떻게 가르쳤길레 한 나절만에 깨우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와 왜 그 때는 쉽게 가르쳤는데 지금은 온갖 노력을 다 기우려도 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 한글 해득의 열쇠가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추리적 판단은 적중했다. 한글 자모표에 그 비결이 있었다. 한글 문자해득은 <ㄱ>에 <ㅏ>를 붙이면 <가>요 <가>에 또 <ㄱ> 덧붙이면 <각>이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문자를 익힌 뒤에 <각> + <시> = <각시>로 낱말을 구성하여 의미를 익히고 문장으로 발전 확대시키는 방법 말이다. 곧바로 <어머니>를 써놓고 어머니의 상징을 결부하여 문자와 병행시켜서 문자해득을 하는 영어식 교육과는 다른 방법이다. 한글은 뜻글자가 아니라 소리글자이므로 기계적 조작으로 가르쳐야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같은 소리글자면서도 서양의 알파벧과 다른 점이고 뜻글자인 한자 교육과 다른 점이다. 교육과정 편집자들이 한글의 학문(언어학)적 연구가 미흡하여 초등학교에서 문자미해득아를 양산시킨 것이다. 더우기 한자와 영어에 밀려 토씨만 남은 한글이 불쌍키도 하거니와 아울러 차제에 한 마디, UNESCO에서 세계적으로 문맹퇴치 공로상을 수여하는데 날짜가 10월 9일이고 상 이름이 세종대왕상이라는 것을 우리 정부 관료들이나 어문정책가들이 알고나 있는지 원.


              세상은 눈이 없다


 당달봉사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눈이 몇 개나 있느냐는 유치한 질문은 생략하자. 토인비는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새로운 가설로 풀이했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 사회의 현상은 어떤가? 엊그제<교육공동체시민연합>이 탄생했다. 공공연히 <안티 전교조> 표방이다. 나 역시 역사의 두 수레바퀴는 보수와 진보라고 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늘 보수의 바퀴가 크기 때문에 역사의 축 싸움은 진보가 열세다. 그러나 도전과 응전, 작은 바퀴가 언제까지나 실패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역사 발전의 아이러니다. 더구나 교육은 문화의 전수라는 생태적 한계를 스스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보수나 보수화가 숙명적이다. 그러나 사회가 필연적인 역사의 변혁기를 맞을 때마다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을 통해 그 돌파구를 찾았던 것처럼 전교조의 태동은 1900년대 한국 교육 역사의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대항 전교조를 구호로 하는 보수 수구 세력의 결집 또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적 사실로 보아야할지 나는 민망하다. 이제 그들이 돌리려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떤 바퀴인가를 전교조처럼 엄정하게 합의를 얻는 절차나마 지켰는지 아니면 자유당 시대 우후죽순처럼 번지던 사이비 반공단체를 답습하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노병은 사라질지언정 죽지 않는다>는 기치를 들고 다시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를 외치며 퇴직 원로들이 교육 일선에 나섰으니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다>라는 외침도 없을 것이며, <물고기처럼 자유스럽게 살고싶다>는 죽음도 사라지고, 차 한 잔 때문에 자살한 <어느 교장의 죽음>도, 교육계 현안인 도 원만하게 조정이 되겠지. 녹두장군까지는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조선 말 김옥균의 정권 개혁이 3일 천하로 물거품이 되어서 우리는 일본에 30년을 뒤져 있다. 그래도 우리 교육이 이만큼 해서 우리 나라가 OECD 국가 수준에 올라있다고 자위하는 교육자는 머저리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교육계의 승진 부조리는 그 상궤를 벗어났고 교육은 공룡처럼 신음하고 있다. 사업가나 장사치는 탈세를 필요악으로 치부하고 운전은 규정이 있으나마나다. 정치께나 한다는 사람들이나 이 땅의 지도자연 하는 사람들은 떡고물이라나 뭐라나 하여튼 정권이 바뀌면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것쯤은 식상한 일이다. 변호사나 의사가 교장인 나 보다 세금을 턱도 없이 적게 내는 나라가 우리 나라고 검사나 국정원은 스스로 힘이 없다고 강변하며 언론은 정론만 써댄다나 어쩐대나. 이런 틈새에서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는 말을 믿고 있는 나는 바보인가 순진한 건가.


          민족교육 그 둘, 한국인의 정체성교육


 어린이 민학당, 90년대 초에 태동한 광주민학회의 청소년교육 단체. 내 알기로 경상도 쪽 경주민학회는 조직 자체도 빨랐지만 활동 역량 또한 연구적이어서 웬만한 학자들도 자문을 구할 정도라 한다. 허나 전라도 쪽에서는 역사도 일천하고 연구적 분위기도 떨어져서 포도씨 걸음마 정도. 이 열악한 상황에서 내가 민학에 눈을 뜨고 교육적 사업을 벌인 건 순전히 현장교육연구 덕택이다. 아니지, 그 보다 앞서 초등학교 1학년의 문자해득과 9년 간의 씨름이 효시고 어쩌다가 그 와중에서 한국화교육이 들어나고 한국민화를 알게된 일이 시발이었겠지. 예를 들어, 7십 년대 우리 미술교육은 교육과정 10여개 단원을 대강 여나문 시간씩 배정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서양 미술 일색이었으며 한국화교육은 단원 말 한두 시간 감상교육에 그치고 있었다. 그래놓고 교육과정에서는 <한국인의 정체성교육>이니 <세계 속의 한국인 육성>이니 한국인의 주체성을 거론하는 모순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뒤바뀐 교육과정으로는 말처럼 한국인을 육성할 수 없다며 교육과정을 서양화위주에서 한국화위주로 개정해야 한다는 연구를 하고 그 실천 방안으로 <무등 교사 전통문화교육연구회>를 만들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문예진흥기금을 얻어다 겨울방학에는 교사 연수회를 하였는데 광주민학회 선생님을 초청하여 전통문화를 배우고, 여름방학에는 <어린이 전통문화교실>을 열었다. 한국화, 한국민화를 가르치고 씨름, 자치기, 고누를 재현하였으며 버스를 빌려 고장의 유적지를 탐방하고 향교를 찾아 한국인으로써 예의범절을 실습하였다. 간식은 식혜와 시루떡을 먹였다. 회원 선생님들이 사방치기, 널뛰기를 가르쳐서 KBS 광주방송에서 1년 간 민속놀이도 보급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서는 <학교 운동회의 민속놀이 고장 축제화>를 논문으로 쓰다가 미국에서 비교교육학을 공부했다는 젊은 교수와 학문적 충돌로 하마터면 학위를 받지 못할 뻔하기도 했다. 이미 70년대에 졸저 <훈사정음訓師正音>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가치 갈등 현상을 예견했으며 이의 발전적 지향을 위해 한국인의 정체성교육을 주창했다. 김치 젓갈들 발효식품이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예언을 했고 문화동진설(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밝고 환한 빛 같은 국운 중흥을 예지했으며, 이 민족적 활력을 역동적으로 발휘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이는 88 서울올림픽과 2002 한일월드컵으로 가시화되어 한민족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과시한 일로, 시작은 터졌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 이 시대 교육의 화두는 이렇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교육 패러다임, ① 미시적 변화 

 

 주객전도主客顚倒. 교육부 장학 파트는 관리 파트의 1/4 수준이다. 순진한 논리로 교육부라는 데는 교육정책을 추진하는 부처인데 교육보다는 관리 쪽이 훨씬 비대한 것이다. 참고로 전남도교육청 직제를 보자. 교육감, 부교육감(관리직), 교육국장, 기획관리국장(관리직) 밑에 장학이 초등, 중등, 과학실업, 정보화, 평생교육과 등 5과고 관리는 감사, 총무, 기획, 행정, 재무, 시설과 등 6개다. 시군은 교육장 아래 교육과장과 관리과장이 있고 장학 파트는 초등, 중등, 정보, 사체계며 관리는 총무, 관리, 경리, 시설계로 언뜻 보면 균형을 이룬 것 같으나 장학사를 돕는 사무원은 장학사 둘 앞에 하나 정도인데 관리 파트의 담당(계장) 아래는 대개 3-4명이다. 고지곧대로 말한다면 관리직이 교육행정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교육 목적을 추구할 수 있을런지가 문제인 것이다. 근래 모 시 교육청에서 교육장이 관리직은 교육 즉 교원을 보조하는 기관이니 교장을 성실하게 보필하는 것이 기본태도라는 강의를 했다가 관리직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좌천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학사의 사무요원화가 가속되고 있어 교육청에 장학은 없다. 거꾸로 선 나라, 물구나무를 선 나라라 하더라도 직분마저 물구나무를 설 수는 없지 않은가. 교육계의 관리직은 장학 보조 기능을 수행하는 기능적 기관이다.

 두 번째는 방만한 교육과정을 통폐합해야 한다. 초등학교(5, 6학년)에서 ①도덕(도덕, 생활의 길잡이), ②국어(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③사회(사회, 사회과 탐구, 사회과 부도), ④수학(수학, 수학 익힘책), ⑤과학(과학, 실험 관찰), ⑥실과, ⑦체육, ⑧음악, ⑨미술, ⑩영어 등 10개 교과 16책을 가르치는 나라는 지구상에는 없다. 거기에다 특기적성을 보태고 학원을 서너 개 더해 보라. 1학년이 6개 교과 10책, 2학년은 5교과 9책, 3-4학년은 9개 교과 15책이다. 못 고친단다. 왜? 각 교과마다 얽히고 설킨 단체와 이익 집단 때문이라는데 말이 되는 소린가. 초등학교 저학년은 한국인의 정체성교육(국어, 역사), 바른생활(생활예절 도덕규범, 환경교육, 성교육), 슬기로운생활(수학, 과학), 즐거운생활(예체능)로 축소하여 담임제로 운영하고, 고학년은 한국인의 정체성교육(국어, 역사), 수학+과학, 예체능, 외국어로 축소 통합하여 교과전담제가 바람직하다. 아울러 내용도 지나치게 지식 위주로 편성 운영되고 있는데 인간화로 개선해야 하며, 초등학교의 주당 평균 30여 시간의 시수를 획기적으로 줄여 교육과정은 오전만 실시하고 오후에는 특기적성과 소질 계발 또는 취미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개혁이 요망된다.


         교육 패러다임, ② 거시적 변화


 창의성은 자율에서 나온다, 지당한 말씀이다. 나는 넥타이 매는 일을 거의 병적으로 싫어한다. 버릇이 안 되어서 그렇겠지만, 실례가 되면 어쩌나 - 하여튼 내게는 넥타이가 예의가 아니라 마치 목줄을 매다는 것처럼 어설프다.  (학교행사에서는 한복을 입는다.) 그런 면에서 요즘의 회사들의 복장 파괴는 학교에서도 눈여겨볼만한 일이다. 교장으로 부임하여 <내 맘대로>를 표방하였는데 교사 시절에는 교장 교감에게 막혀서 늘 악만쓰는 싸움닭 신세였고, 교감이 되니까 위(교장) 아래(교사)가 다 막혀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헌데 교장이 되니까 가장 막힌 곳이 교육청이었다. 그래서 위에다 대고 한 말이 <내 맘대로>다. 고작 정년이 2년여 남짓인데 내 맘대로 교장 노릇 한 번 하지 못할 바에야, 감 놔라 배 놔라가 계속된다치면 교장 자격증 가져가고 당신들이 와서 학교 경영하라고 했다. 그런데 연이 맞으려고 마침 교육부에서 자율출퇴근시간제를 권장하였기에 불감청고소원不敢請告所願을 외치며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여 저학년에게는 약 1시간, 고학년은 약 1시간 40분의 자율시간을 편성했다. 선생님들에게는 절대로 학생들의 활동을 간섭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만 지켜 봐달라고 주문했다. 우리 아이들이 자율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나 두고 보자고 했다 (주제를 주고 → 주제를 자기가 선정하는 일로 발전 구상 중). 아침에 눈 비비자말자 숙제했냐, 가방 챙겼냐는 어머니의 말씀(꾸중)으로부터 시작해서 교문에만 들어서면 이 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이 끌어다가 아침자습부터 점심시간은 물론이고 쉬는 시간까지 꽉 짜인 스케듈로 옴짝딸싹 못하는 우리 아이들. 그 놈 웬수 같은 공부 땜에 파김치가 되어 문간에 들어서자 말자 다시 어머니가 바톤을 받아 두세 군데 학원을 가야하고 잠들기 전 일기 쓰기는 눈이 떠지질 않아 글씨조차 개발새발이 되는 이 땅의 교육 풍토. 말이 좋아 창의성, 탐구력, 문제해결력이지  고등정신 기능을 자시고말고 할 여유라곤 한 치도 없는 게 대한민국 학생의 생활고生活苦다. 교육백년대계는 이미 옛적 농경시대나 산업사회의 말씀이라나, 요즘은 43시간마다 기술 정보가 바뀐다는데 그래서라도 교육은 이제 5년 소계小計나 10년 중계中計로 바뀌어야 한다. 세상에 학교가 자립을 하겠다는데 사회가 반대하고, 대학교는 고등학교의 학력을 못 믿는 그리고 평등교육을 주창하면서 평균적 바보를 지향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우리 나라말고 또 있으면 좀 나와보라고 해 보라. 학교(교육)의 다양성, 자율성, 세계화가 우리가 이 시대에서 찾아야 하는 교육의 화두다.


              민족교육 그 셋, 역사교육


 <지금 우리는 단군을 역사 속에 세우기조차 어려운 실정에 있다. 그러나  「부도지符都誌(신라, 박제상 정심록正心錄의 일부)」는 단군시대 초엽을 끝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 그 기록에는 한민족 아니 인류가 잃어버린 창세(기)의 기록과 마고성麻姑城(현 파미르고원 추정)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만년이 넘어서는 배달겨레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의 진정한 뜻이 담겨져 있다>고 강창우는 <부도지 읽기>라는 글에서 설파하고 있다. 이 즈음에서 나는 학교교육의 무뢰한적 편견을 비분강개한다.  그러면서 그는 <부도지와 한단고기桓檀古記>를 겹쳐놓으면 서로 부족된 부분을 보완하여 실로 엄청난 세월 즉 만년이 넘는 역사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한단고기>에서는 환인桓因이 다스렸다는 12국을 중심으로 수밀이국須密爾國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서양사에서 말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역사인 슈메르문명이 확실하고, 여기에 부도지를 겹쳐놓으면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 인류와 지구를 한아름에 품으며 기독교의 구약에서 말하는 에덴동산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마고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내 역사 의식의 천박함이 이렇다. 곰이 신령한 쑥과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되어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고 이 이가 배달겨레의 시조라고 배운 게 다인데 불과 10여년 전에야 우연히 한단고기와 천부경天符經들을 읽고 곰과 호랑이의 상징성을 이해하고,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라 47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글픔이 앞섰다. 환웅천황은 18대 1565년이었고 환인천제는 7대 3301년(안함로安含老, 신라시대, 삼성기三聖紀)이며 이런 기록들이 검증받지는 못했으나 엄연히 우리 역사로 남아있다는 사실史實에도 분노한다. 반만년이라고 줄기차게 외쳤던 역사도 만년을 거스르며 강토 또한 한반도만이 아니라는 새 학설에는 눈이 번쩍 뜨인다. 세상에, 우리 역사가 만년이고 시조모始祖母 웅녀熊女님은 곰이 아니라 <ㄱ?ㅁ> 즉 <땅>을 상징하는 여자며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가 중국 땅에 있었다니 이 무슨 얼빠진(?) 소리란 말인가. 오늘 아침 신문에는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들의 변방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구체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의 방해로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지 못했다. 배달겨레의 역사를 축소 왜곡한 곡학아세曲學阿世와 사대주의를 맹종한 못난 선배 역사학자들의 소치야 어찌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가르치고 있는 제 2세 국민들에게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찬물도 상이라면


 기분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 엊그제 한 잔 쏠 일이 있어서 친지 몇 사람이 모였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가 늘어지다가 좌중의 한 분이 모범공무원상을 탔다며 소개를 했다. 헌데 좌중의 반응은 마치 만득이 시리즈처럼 썰렁해서 당사자는 말 할 것도 없고 말을 꺼낸 사람이 무안할 정도. 그래서 내가 청백리 어쩌고 눙을 쳤는데 교육계의 상이 이렇게 품위를 잃고 타락한 데는 승진 가산점 역할이 크다. 승진을 하려면 적어도 장관상 이상을 획득해야 하느니만큼 수상은 필수다. 사정이 그런대도 승진 예정자는 상을 고민하진 않는다. 왜? 장관상 정도야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글쓰기지도 조선대학교 총장상이 장관상과 맞먹는다고 탱하니 앉았다가 하마터면 승진 기회를 놓칠 뻔하였다(승진 점수에서 장관상은 0.5점인데 승진 예정자는 0.001에 한 명 꼴로 줄을 서 있다). 규정이 바뀌어 총장상이 무효가 되었다는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장관상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엊그제 교장회의에서 교육청 사람들은 어느 학교가 전국 규모의 서예대회에서 최고상을 비롯하여 전교생이 상을 싹쓸이를 했노라고 한참 생색을 내는데도 듣는 교장들의 표정은 별무 관심. 아무리 교육청이 학교 특수시책 운운 하며 입에 거품을 물어도 오늘 우리 사회에 난립한 대회와 상들은 평가 절하된지 오래다. 오죽했으면 서울대가 경시대회 상을 입시 가산점에서 제외한다고 하였을까. 나도 한 때는 상에 미쳐서 전국대회를 휩쓴 적(전국대회 수상 300여 회, 도대회 이하 200여 회)이 있었다. 글쓰기대회 광고를 보면 기어코 최고상을 욕심냈다. 지금은 무척 후회하고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지만 상은 마치 돈과 같아서 잘 사용하면 세상이 좋아지지만 잘못 사용하면 악화가 된다. 철없었던 시절의 일이라고 넘기기에는 후회막급. 신춘문예의 바늘구멍을 뚫고서 한다는 일이 기껏 그 지경이었으니. 교육계 주변에 뭔 대회들이 그리 많은지. 그에 따른 상들 또한 교육에, 더구나 초등 학생들에게는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일일시 분명하다. 공자가 노魯나라의 사구司寇직을 맡은지 1주일만에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전격 처형하였는데 제자들이 의아해 하며 이를 묻자 <사람에게는 5가지 죄악이 있는데, 영리하나 음험함, 고집불통, 거짓 달변, 천박한 박식, 그릇된 일의 호도>라 하였다. 이 5가지 죄악 가운데 하나만 해당되어도 주살誅殺을 면치 못하는데 소정묘는 이를 두루 겸했으니 어찌 주살을 면하랴 대답했다.

                   간푼 녀석들


 주영이는 우리 학교 4학년 담임 김 선생님의 아들이다. 지금은 어엿한 우리 학교 유치원생이지만 어쩌다 회식 자리에서 초대면을 했는데 어찌나 나둥대든지 선생님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주영이를 보면서 나는 우리 막내를 생각했다. 서툴고 무지했던 지난 날의 과오. 막내는 지금 대학원에서 에니메이션 석사과정을 전공하고 있는데 두세 살 때 어찌나 의문이 많았던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곤경을 치렀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밖에라도 데리고 나갈라치면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쉴 새 없이 물어대니 도무지 붓대질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모처럼 광주 나들이에 서면 이 녀석 이 때다 하는 것처럼 폭포수 같은 질문 공세에 감당할 재주가 없었다. 그런데  제 어미는 일찌감치 해탈을 해서 막내는 언제나 내 차지. 이리 되자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도저히 인내의 한계에 부딧쳤다. 그래서 막내의 수난시대가 왔다. 한두 마디 이상 질문 공세가 시작되면 짜증스러운 대꾸가 터지고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바로 꿀밤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도 질문을 그치지 않았는데 이 무식한 애비는 그것이 뇌가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해가는 과정이란 것을 어찌 알기나 했겠는가. 그리고 머리가 영리한 아이일수록 의문과 질문이 많다는 걸 안지 역시 그리 오래지 않으니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40년 교단에서 저지른 잘못 또한 얼마랴.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로 유명한 성철 스님은 입적하면서 사부대중에게 씰데없는 거짓말 한 죄의 용서를 빈다고 했다. 며칠 전에 듣건데 노 대통령이 일본을 다녀온 후 청와대 직원의 노타이 차림을 권장했다고 한다. 기업에서도 복장 파괴는 이미 오래전 일이다. 단지 공무원만 공무원법에 지정된 검은 양복에 넥타이 그리고 검정 승용차를 고집하고 있다. 이런 일은 법률용어의 문투와 의사의 처방전과도 무관치 않다. 또한 지금까지도 한자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각과 편견과도 일맥상통한다. 오늘 아침에 또 다른 아이 종무가 귀여운 짓을 해서 맨발 이야기가 나왔다. 두 맨발의 사나이(두 살짜리 종무와 교장)가 화제. 나는 이 기회에 맨발 건강을 설파했다. 누군가는 <여자의 맨발은 무죄인가>라고 물었다는데. 이것 역시 일본의 노벨상 수상과 우리 나라의 차이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수는 미국이 단연 270명으로 선두고 영국 100, 독일 76 그리고 쭉 내려와서 일본이 12명이며 중국은 2 그리고 우리는 평화상 달랑 하나. 하기야 세계 200여 나라에서 그나마 한 개라도 탄 나라는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고작 15개국뿐이니 이로 위안을 삼지만 평화상은 내가 하려는 말의 범주에는 들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꿈, 외국 여행


 호사스런 외국여행을 하면서 무슨 변명을 하랴. 헌데 이 여행이란 것도 공무원 신분에서는 제약을 받으므로 모처럼 설래는 외국여행을 모두들 쉬쉬하면서 떠난다. 젊은 시절에는 그랬다. 셋집을 살더라도 여행은 한다. 결혼 전 별을, 달이라도 따다 바치겠다는 미사여구가 세파에 찌들려 살다보면 헛말이 되듯 여행도 가슴 한 켠에서 희망 사항으로만 묻혀있다가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내밀었는데 태국여행으로 역사적인 외국 여행의 테이프를 끊었다. 방콕 도심의 혼란 그러나 경적 소리 없는 불가사의, 불국사 지식뿐이었던 무지를 부숴버린 호화찬란한 사원들, 흙탕물 퀴퀴한 메콩강 수상 생활, 현란한 원색의 꽃들과 달콤한 과일, 늘씬한 미녀들의 게이쇼 경이, 세계 유명 유적의 1/2 축소 공원 그리고 파타야 해변 풍경. 촌 사람을 되게 겁준 빠뜨릴 수 없는 기억 하나인 파타야 호텔의 옥외 수영장 홀라당 완전 나체 서양 여성들 일광욕 그리고 이어진 파타야 해변 여성 나체족들의 유유한 산책. 그로부터 살살 몰래 다닌 여행이 동남아시아를 다 돌고 재작년에는 호주와 유럽, 미국 캐나다까지 섭렵했다. 주마간산이었지만 이제 남은 곳은 인도, 아프리카, 중남미. 올해도 어김없이 살짝 중남미로 샐 판이다. 단지 <지구에서 태어났으니 지구촌은 한 바퀴 돌아봐야, 달에는 못 갈 망정>이 내 여행의 기치다. 다니다 보면 누구는 어느 나라 뭣이 부럽고 뭐가 어쩌고 하지만 나는 그저 구경삼아 다닐 뿐 그리고 여행지의 토산품을 기념품으로 사는 일 외에 사진 찍는 일 조차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꼬맹이들이 파는 조갑지 2개를 1달러에 샀고, 대만에서는 고궁박물관에서 파는 해태상 모조품을 샀다. 호주에서는 부메랑 한 개, 미국에서는 나이아가라에서 원주민의 토산품 토탬상 하나를 샀다. 여유가 있다면야 나라고 왜 5,490만원 짜리 식사를 부러워하지 않으랴. 중국 연변에서 <한 개 천원>을 외치는 북한 동포들의 6십년대 생활 참상을 목격하고 얼마나 안타까왔던지. 흥망성쇄, 특히 중국의 역사 유적에서는 영화롭던 나라 그 통치자들의 무상을 지나치면서 삶의 한 끄트머리를 본 양 숙연해지기도 했다. 못 살면서도 유유자적하는 태국에서는 불심에 의존한 사람들의 모습이 이채롭게만 보였고 일본인의 전통과 현대의 조화는 질투를 느낄 정도로 부러웠다. 유럽의 가도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 그 풍요함, 천혜적 자연의 혜택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사람들은 선택받은 민족의 은총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기갈이 들린 듯 여행 예찬자가 된다.


           관변단체, 그리고 아직도 구호사회


 여러분은 혹시 이런 구호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괴뢰정권 수괴 김일성을 찢어 죽이자>. 6십년대 난무하던 반공 구호인데 시골 우리 면사무소 커다란 벽면에 붉은 글씨로 씌여있었다. 찢어 죽이자 뿐만아니라 때려 죽이자도 있었고 날로 강도가 심해져 말로 할 수 없는 구호들이 시새워 게시되었다. 하기야 대명천지 21세기에도 우리는 구호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행정 관청은 물론이고 거리의 현수막과 가로수에까지 구호 투성이다. 구호 투성이 사회는 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첫 부임지 우리 학교에도 교사 전면에 <밝고 맑고 참되게>란 구호가 걸려 있는 걸 교표를 도안해서 바꿨다. 구호없는 학교가 있을성싶지 않다. 요즘 같으면 <21세기를 선도할 유능한 인재 육성> 뭐 운운이거나 <세계 속의 한국인> 어쩌고 또는 <기초기본예절> 인성교육 등의 구호는 애교다. 내 통근길에 비치는 광주 시내 변두리 어느 학교는 건물 정면에 <꿈과 희망을 지닌 광주인 육성>을 판박이하고 교문에는 <아이들아, 꽃처럼 예쁘게 나무처럼 튼튼하게 자라자>를 내걸었는데 유심히 보니 달마다 바꿔 거는 것 같다. 오래 전에 섬 학교에서 근무할 때 교장의 아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 선생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환경정리 1인자. 헌데 이 분 역시 구호주의자. 학교 벽면이란 벽면은, 담장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우물 벽면까지 개발 쇠발 형형색색의 구호를 써 붙였다. 그래서 내 반 농담 삼아 <제 예펜네 엉덩짝에도 글씨 써 붙일 작자>라 비꼰 적이 있었다. 각설하고 이 반공 구호와 더불어 공생하는 것이 있는데 이름하여 반공단체들. 반공연맹(자유총연맹)을 필두로 호국, 구국 등 다양한 이름을 걸고 수없이 많은 반공 관련 단체들이 설쳤다. 심지어는 상이군경회, 재향군인회, 경우회들이 가가호호 공공연히 물품을 강매하고 학교에까지 반공영화를 들이밀어 코 묻은 돈을 걷어갔다. 또 법조계에는 전관 예우라는 사생아가 있는 모양인데 그 삶이 기과하다. 법관에서 퇴직하면 소송 사건을 의도적으로 몰아줌으로써 변호사 1년에 평생 먹을 돈을 번다고 세상은 수근대고 있다. 교단은 어떤가. 방학 하자말자 교장협의회 연수회가 제주도에서 열렸다. 몇 군데에서 학교 예산으로 관광성 연수회를 하려고 한다고 시비를 걸고 나섰지만 교장들은 뉘 집 개가 짓냐는 둥 콧방귀도 뀌지 않고 제주도로 몰렸다. 주제야 거창하기 이를 데 없다. <시대 변화에 앞서가는 학교 경영>. 3락회는 퇴직 교직원(주로 교장) 모임이라선지 요즘에는 국회에까지 진출하여 관변단체 예산 끼워넣기로 왈가왈부하던데 걸맞은 위상을 보일지 원. 일본의 퇴직 교원은 정문 수위나 급식 도우미, 도서관 사서 또는 교수자료 무보수 도우미를 한다는데.


                난장판 축제


 올해도 어김없이 곡성 겸면초등학교에서는 <명장 목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가수를 열 명이나 부른 덕택에 3일 동안의 축제 기간 학교는 쑥대밭이 되어버린다. 공들여 가꿔놓은 야생화는 짓밟혀 꺽이고 운동장은 무논처럼 만신창이, 그래도 고장 전체가 들먹거리는 축제라서 어쩔 수가 없다. 애초에는 시군 지자체에서 홍보나 수익성 차원에서 기획한 것 같은데 여기저기서 하나 둘씩 생겨나더니 요즘에는 면 단위까지 합세해서 축제공화국이 되어버렸다. 격세지감, 불과 십여년 전만해도 북과 깽과리를 칠라치면 바로 공산당이나 빨갱이류로 몰아부쳤었는데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문화(사회) 풍토가 바뀌다니 이 또한 불가사의. 그건 그렇고 <흰 옷을 입고 가무를 즐겼던 백성>이었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축제를 잃어버렸다. 시시콜콜 따질 것 없이 농가월령가를 보라, 사시사철 농사를 놀이처럼 구사했던 겨레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또 세시 풍속은 어떤가. 정월 초하루는 설날이라 어른께 새배를 드리고, 십오일은 십오야 밝은 달 대보름이어서 쥐불놀이를 즐겼다. 3월에는 삼짇날이니 강남 갔던 제비를 맞았고, 4월에는 초파일 연등행사를 벌이고, 5월 단오날을 맞아서는 남정네는 씨름하고 여인들은 창포에 감은 까만 머리를 휘날리며 그네를 뛰었다. 그밖에도 6월 유두, 7월 칠석에는 오작교를 건너서 견우 직녀가 만나며, 8월이라 한가위는 풍년가를 부르고, 9월은 구일 쇠고, 시월은 상달이니 연중 사시사철 놀자판 아니었겠는가. 달마다 놀자판을 벌이고도 모자라서 꽃 피는 3월에는 화전놀이를 한답시고 안산에 오르고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는 의례 절을 찾았다. 허나 일제시대 그들이 폄하한 것처럼 놀다 망할 민족이었나 하면 우리 민족은 일을 놀이처럼 놀이를 일처럼 여겼을 뿐이다. 어찌 연작燕雀이 대붕大鵬의 뜻을 헤아리랴. 동맹, 영고, 무천으로부터 팔관회, 연등제를 거치며 이 땅의 축제를 이어왔던 겨레인데 하루 아침에 민족축제를 빼앗기고 오늘은 국적불명의 난장판을 축제라고 어거지를 쓰며 어설프기 짝이 없는 굿판을 벌이고 있는 건가. 더구나 이웃 나라들의 참한 축제를 보노라면 울화통이 터지다 못해 끝내는 서글퍼진다. 따는 그렇지, 전통문화 재발현 내 석사 논문을 지도한 새파란 교수 왈 이 첨단과학 세상에 고리타분한 전통문화를 들먹여서 어쩌겠다는 거요라 했겠다? 입에서 금방 조백?白을 아느냐 호통을 치고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졸업을 못할 판이라 참는 심정이 어련했으리.


                   문학 청년


 <신춘문예 입선을 축하합니다. 전남일보 문화부>. 등룡문이 무엇이던가. 바로 용이 등천하는 일 아닌가. 신춘문예 입상 소식은 이무기가 용이 되는 꿈을 실현하는 말로 표현키 어려운 환호작약 그 자체였다. <꽃씨알 속에/ 하늘// 한 꺼풀 밑에/ 초록 봄// 꽃씨 안에/ 나비의 입김// 한 꺼풀 벗기고 나면/ 뜨고있는 눈// 꽃씨 안에/ 여울// 꽃씨 안 그 안에/ 도란거리는 소리>. 입상작  <봄 꽃씨>의 전문이다. 윤석중은 내 역작(?)을 <봄 맛없는 봄 꽃씨>라 혹평을 하고도 입상작으로 올려주었다.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 겨울, 4십도를 넘나드는 고열로 열에 들떠서 머리 속에서는 하얀 알들이 구르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얻어낸 또 하나의 생명이었다는 걸 어찌 그가 알았겠는가. 액厄이 끼었던가, 그 해 나는 참으로 호되게 경을 쳤다. 발병의 원인이야 내가 일으켰지만 원셋(수)놈의 시골 생활이 하마터면 생떼 같은 목숨을 앗아갈 뻔한 것이다. 유사 장티프스였다. 그런데 시골 의사가 감기로 오진을 한 것이다. 한 2주일 잡쳐놓으니 죽은 사람 몰골일 밖에. 택시에 실려나가던 날 이웃집 여자들이 모두 눈물을 훔쳤다 한다, 살아서 돌아오기 어렵겠다고. 그래도 아주 명이 짧은 건 아니었던지 광주병원 1주일만에 건강하게 부활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신춘문예 당선작이 태어났다. 입원 중에 겪은 일 또 하나. 시골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간병을 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어머니가 내 옷가지를 마당에 내놓고 태우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크게 꾸짖는  꿈을 꾸고 내가 살아났다는 것. 믿거나말거나 각설하고 신춘문예는 내 삶의 커다란 변화였다. 한국문인협회에 가입을 필두로 전남아동문학가협회, 한국어린이문학가협회 등 사방군데서 같이 활동하자는 연락이 오고 한 마디로 <나는 떴다>. 생전 처음 문학 동호인 모임에도 문학가로서 참석하고 어디를 가도 문학가로서 대접을 받았다. 문학가로서 대접은 뭐랄까 최고 지성인으로써 자부심이었다. 기고만장, 숫째 보이는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들떠 살았던 기간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문학의 변두리랄까 나는 문학의 버려진 땅에 혼자 버려져 있었다. 문학이 뭔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득하게 된 것이겠지. 그러고 나서 나는 문학을 떠났다. 문학 동호인 모임도 다 떠났다. 그리고 지금은 문학적인 글을 쓰지 않는다. 모르겠다, 쓰지 못하는지도. 고등학교 2학년 때 겪었던 종교와 신에 대한 회의 이후로 또 한 차례 격심한 질곡을 겪은 것이다. 깊게 보면 문학도 인생도 한낱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하겠지만 글쎄 한 인생에서 문학은 무엇이었을지.


             느그들 끼리 다 해 쳐 먹어라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나의 교감 초임 시절 <이리 봐도 정승이요 저리 봐도 정승>이라는 성함을 가진 양반 교장 선생님이 직원들만의 조촐한 퇴임 송별연에서 한 말이다. 그 분은 깨끗하게 사신 분이라 교단에서 본 몇 분의 본받을만한 교장의 한 분인데 고생고생해서 승진하여 섬으로 발령을 받고 2년여만에 육지에 상륙을 하고 또 어찌어찌하여 2년여만에 고향인 순천 근교에 까진 왔는데 4학급 짜리 복식교육을 하는 승주군(현 순천시) 용림초등학교에서 만났다. 대쪽 같은 성미를 지닌 분이 정년퇴임식에서 이런 말을 내뱉었으니 그 수모랄까 원망이 얼마나 깊었으랴. 깊은 속내야 모르지만 짐작키에는 순천 시내 학교에서 정년을 맞고싶었는데 끝내 좌절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엊그제 실시한 전남도교육청 인사에 앞서 <곡성교육청 인사를 동결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해왔다. 곡성교육청이 <농촌적정규모학교 육성 시범 군>으로 지정되었으므로 교장 인사원칙 전보 유예 조항에 의하여 인사 동결 조치를 단행한다는 통보였다. 당연히 학교 만기 인사원칙에 따라 인사 내신을 했으므로 <행정소원>을 하겠다고 반발했으나 혼자 화를 삭일 뿐. 실은 정년 3년을 남기고서부터 옮겨야겠다고 내신을 한지 2년 여. 올해의 좌절은 교육 생애의 마무리라는 일에서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물론 대의를 위해서라면 나 개인의 소망은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명분이 옳지 않다. 개인 감정이라고 할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차제에 교장 인사의 문제를 제기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행정소원을 내려고 한다. 첫째, 학교 통폐합 인사 동결은 먼저 교직원의 신상(교육) 우선이어야 한다. 행정적으로 유예조치를 만들고 시행한다면 이는 인사원칙이 아니라 행정편의원칙이다. 둘째, 백 번 양보해서 6개월 더 남아 통폐합을 현 교장이 마무리지어야 교육적이지 않느냐 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책임이 더 큰 교육장은 왜 인사를 단행했는가? 한 마디로, 전남도교육청의 교장 인사는 교육감의 고유 권한을 인정한다고 해도 50여년 간 자의적으로 감행한 인사제도의 근간을 발본색원해야 한다. 개혁과 변화의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객관적 합리적으로 개선하지 않는 한 고질적인 인사 부조리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강제 순환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인사정책으로 교사들이 출퇴근 버스 5대를 나눠 타고 하루에 서너 시간의 원거리 출퇴근을 하는 실상을, 노 교장들이 인사철마다 힘있는 지인을 찾아 문전을 기웃거리는 행태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교장의 권위가 어떻고 인사 청탁 어떻고 하는 입 바른 소리만 언제까지 늘어놓고 있을 셈인가.


                  피터의 원리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읽은 때가 먼 고등학생 시절. 지각을 한 주인공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서는 장면, 그리고 그 불안정한 고요는 마치 내가 주인공인 듯 섬세하였다. 그러나 소설의 압권은 결말 부분에서 선생님이 칠판에 휘둘러 쓴 <프랑스 알사스 만세>였는데 그 장면에서 선생님의 연출은 단연 이 소설의 백미白眉로 가슴 뭉클한 감동을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하게 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쯤에서 마치고 이 소설의 삽화揷話로 시학관의 학교 시찰이 나오는데 시학관의 위세는 세기를 뛰어넘어서도 별반 다름이 없었나 보다. <장학사 세상>. 요즘에는 장학사를 공개 추천과 시험으로 선발한다. 때로는 몇 대 일의 경쟁이 되었으므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하고 또 이들을 교육계의 엘리트로 지칭하는데 주저할 일은 없다. 그러나 장학의 뒤란을 들여다보면 그 원시적인 체제가 한심함을 넘어 통탄할 지경이다. 그리고 이 체제는 근대교육 5십년을 꽤뚫은 우리 교육의 단면이기도 하다. 장학사는 한 마디로 사무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학사의 년 평균 <장학 출장>은 우리 학교의 경우 봄 계획단계와 가을의 평가단계 년 2회, 그 외 순수한 장학 출장은 없다. 이러므로써 학교에서 장학적 문제가 발생하여 장학사를 요청한 사례는 전무. 거기에다가 장학 경력이 승진의 도구화되어 우리 장학행정 체제는 심각성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본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장학사 패밀리가 교육행정을 좌지우지하면서 교육계에 마치 패권주의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항간에서는 장학사 패밀리를 <하나회 보다 더 무섭다>고 횡설수설이 난무한다. 새파란 도장학사들이 시군의 노란자위 교장(학교)을 독식한 것은 오랜 관습이고 시군 장학사 경력이라도 가져야 물 좋은 학교를 기웃거릴 수 있으며 장학사 경력이 없으면 교육장 추천에는 명함을 내밀지도 못한다. 로랜스 피터는 캐나다 출신의 교육학자로 조직사회에서 일어나는 조직 안의 무능화 현상을 형식적인 승진에 함정이 있다고 보고 <피터의 원리>를 발표했다. 조직에서 대과없이 임무 수행을 하면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렇게 시간이 가면 과거에는 유능했지만 현재 그리고 현직에서는 무능할 수 있는 사람들로 상위 직급에 채워져 비효율이 일상화되는데 조직이라는 특수성이 형성되어 개선되기 어려워진다. 예를들면 헌신적인 독립운동가가 유능한 정치인은 아니며 자질있는 장학사가 유능한 교육장이 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승진규정이 고형화되어 조직사회의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 된다는 논리다.


             장남 규의 결혼(식)  


 <뭔 놈의 청첩장을 이렇게 많이 찍어왔냐?> 녀석은 묵묵부답. 여러 번 논의(가장家長의 일방적 선언이었지만)해서 나름대로 설득이 되었다고 혼자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일이 그만 어만 간 데로 흘렀다.  <청첩은 없다>라고 선언하고 당부했는데 구지 청첩장 3백장을 찍어 온 것이다. 시쳇말로 가장의 말발이 서지 않았다는데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애초에 말을 꺼냈을 때도 가족들이 반드시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회 있을 적마다 거론했으므로 그저 애비 말씀 대접으로라도 따라줄줄 알았던 것이 이 지경이었으므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혼자 화를 내고 혼자 역정을 낸 셈이지만 아내나 결혼 당사자인 장남은 대꾸 한 마디도 없어서 그저 뉘 집 개가 짓느냐는 태도처럼 보여 더 화를 돋구었다. 끝까지 아이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혼자 화를 삭이다가 문득 <아차, 실수!>라 깨득한 건 큰소릴 친 며칠 뒤. <그랬었구나> 우리(?)는 청첩을 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차마 사돈댁에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대개 청첩은 양가가 한 인쇄소에서 인쇄를 하게 되고 당연히 인쇄소에서는 몇 장을 인쇄할 것인가고 주문을 받았을 터. 그렇다면 신부는 몇 백 장을 인쇄하는데 신랑은 얼마를 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으리라. 그 형편에서 아이는 난처한 상황을 얼버무려 우리도 3백장이라고 주문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우둔한 애비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왜 변명 한 마디 없느냐고 다그쳤으니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며칠 전, 3십 년 전통을 가진 계모임의 회원 정년퇴임식 초대장을 받았다. 계원 몇이서 가느냐 마느냐, 화환이라도 만들어야 하느냐 마느냐, 축의금을 내느냐 마느냐로 설왕설래가 있었다. 나는 총무로써 중의를 참작하여 참석 여부를 개인 자격으로 결론지어 통보했는데  막상 식장에 가서는 혼자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객은 성원이었고 애초부터 봉투는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선물이 마련되었고 식사는 멋진 뷔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 더. 월 여 전 기능직 정년퇴임식을 학교 주최로 한 적이 있었는데 음지에서 일 하다 정년을 맞은 분들은 본인이 좀 사양하더라도 우리가 서둘러서 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반 억지 추진을 했다. 퇴임 소감을 묻는 취재 기자(우연히 들렀던 지방 주간지)에게 <평생 학교에서 근무했는데 오늘 같은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며 울먹거리는 당사자의 말은 퇴임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의 가슴에 한 줄 감동주름을 새겼다. 아들아, 미안쿠나. 유별난 애비를 둔 네 박복薄福이겠거니.


               전생前生 여행


 막연히 천당과 지옥이라는 구도에만 머물러 있었던 내 내세관에 변화가 온 건 정신과 의사가 쓴 <전생 여행>을 읽고서다. 그리고 피안彼岸의 눈 파란 스님이 쓴 <만행萬行>을 읽었고 이어서 <초인超人생활>과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를 읽었다. 몇 권의 책으로 영혼과 죽음에 대하여 이런저런 확신이 선 건 아니지만 <믿으면 있고 믿지 않으면 없다>는 막연한 논리에서만은 벗어나고 싶은 게 현재 내 심정이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잘 다니던 교회, 모태의 신앙을 버리고 신과 종교에 관한 한 탕자처럼 방황한지 오래, 대게는 절寺을 기웃거렸다. TV에서도 <위험한 초대나 신비의 세계>류는 단골 메뉴인데 엊그제는 법사가 귀신을 내쫓고 불빛 같은 형체를 촬영해서 보여주었다. 내 이런 생각은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 더불어 실제로 겪었던 몇 가지 신비한 현상들에서도 나는 묶여 있다. 3십대와 4십대를 걸쳐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앞 날 예견의 현몽들과 어린 시절 해질 녘에 보았던 혼불과 여름철 어스름 황혼 속에 건너편 산자락에 희미하게 서 있던 사람 형상. 2십대 후반 초저녁 공동 묘지에서 본 푸르고 하얀 불덩어리. 옛 푸줏간 터였다는 하숙집에서 들었던 돌담 무너지는 가성假聲의 놀람. 초등학교 시절 안개 짙은 날 쿵더쿵 쿵더쿵 들리던 쌍묘의 방아찧는 소리와 총각 때 숙직을 서다 들었던 한밤중 학교 건물 2층에서 들리던 방아소리는 나 혼자 뿐만 아니라 동숙하던 서너명의 선생들이 같이 들었다. 올해는 차례를 지냈다. 아내와 아이들은 생전에 안 하던 일을 한다고 매우 짜증스러워 했으나 유난히 올해 느닷없이 일어난 내 주변의 일들이 나를 조상님의 음덕陰德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귀밑머리가 세어지니 철이 난 걸까?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나는 역사책을 읽다가 문득 <신은 없다>고 선언하고 한 겨울 내내 신과 종교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교회 주변을 맴돌았으나 결국 <신이 사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탕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연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삶이란 동식물이 같을진데 식물의 한살이로 삶의 윤회를 판단 내린 것이다. 그렇게 방황하기를 4십여 해, 이제 귀밑머리가 허옇게 세어서 또 신의 경계를 기웃거리고 있다. 찬송가에서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라는 가사가 사흘 동안 죽었다 깨어난 사람의 증언으로 확인되었을 때 나는 신은 없다는 확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혼과 신에 대한 방황은 다시 시작되고 있다.


                   숫자 3의 요술


 성철 스님은 입적하면서 일생 동안 4부 대중에게 했던 거짓말을 용서하라고 했다. 회고와 반성을 전제로 이 글의 마무리를 삼(3, 세, 셋, 석)으로 하려고 한다. 우리 할머니가 일생 동안 입에 달고 살았던 삼시랑(三神), 가위 바위 보 3 세 번, 천天 지地 인人,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신, 천부인天符印 3개, 중국인들이 완전한 수라고 알았던 9(3의 배수), 동학의 유儒 불佛 선仙, 삼위三危 태백太白, 삼재三才, 삼강오륜三綱五倫 그리고 일생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직업, 배우자, 가치관들도 한결같이 3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봉투 세 개를 준비하라> 마지막 3의 이야기. 개각이 있어 신임 장관이 전임 장관에게 인사를 갔다. 전임자가 후임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열어 보라며 봉투 3개를 주었다. 신임 장관이 업무를 시작했는데 오래지 않아 사건이 터졌다. 매스컴이 떠들어 궁지를 벗어나지 못하자 봉투를 열었다. 첫 번째 봉투에서 나온 내용은 <전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라> 기자 회견을 열어 전임 장관의 허물로 뒤집어씌우고 곤경에서 벗어났다. 한참 후에 또 다른 위기가 왔다. 두 번째 봉투를 열었다. <매스컴에 책임을 전가하라> 무슨 뜻인지를 간파한 장관은 <언론 보도는 와전된 것이다. 내부 기획 차원인데 언론이 침소봉대針小棒大했다. 정책 혼선이 아니라 언론 보도의 혼선이다> 매스컴에서 반격을 받았으나 여론은 나쁘지 않았다. <언론이 워낙 앞서나가다 보니 소설을 썼다. 오보다> 덕분에 일은 그런 대로 넘어갔다. 시간이 흘러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장관은 세 번째 봉투를 열었다. 잠깐, 한국판 봉투는 이렇다. 첫 번째는 매스컴을 장악하라, 여의치 않으면 탄압하라. 두 번째, 새벽닭이 울 때까지 그런 일 없다고 부인하라. 세 번째, 닭이 울면 해외로 도피하라. 횡설수설한 죄로 <네가 알렸다>를 면키 어려워 결론은 유머다. 링컨 시절 한 야당의원이 의회에서 링컨더러 <두 얼굴을 지닌 이중인격자>라고 모질게 비난을 했다. 이에 대해 링컨은 <내가 두 얼굴을 가졌다면 하필이면 이 못난 얼굴을 들고 여기 나왔겠습니까>라고 대꾸하여 이 한 마디로 경색 정국을 에둘러 갈 수 있었다. 명名 총리 처칠이 야당인 노동당의 정부사업 국유화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노동당 당수를 만난 처칠은 모른 체했다. 왜 아는 척도 하지 않느냐고 힐란하는 야당 당수에게 <당신은 큰 것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덤비니 내 걸 보면 또 국유화하자고 할탠데 어찌 아는 척 할 수 있겠소> 아참, 세 번째 봉투에서는 <봉투 세 개를 준비하라>라는 글이 나왔다.


           돈키호테 교장과 문디 대통령


 차라리 미친X이라며 삿대질을 당한 편이 더 낫겠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어느 나라에서 대통령 당선자 프로필을 문둥이상이라고 언론에다 쓰는가. 또라이 교장과 문둥이 대통령은 닮은 점이 많아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교단회상>을 연재하면서 목적을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두었고 다음에는 방법론으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중점을 두었다. 나 혼자만의 걱정이 아니라 우리 교육은 이제 도약의 변화와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오늘 아침의 모 신문 사설에서는 <교육부총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며 신랄하게 교육부의 무책임 행정을 질타하였는데 현안 난제들이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고 교육현장 파괴를 자행하고 있는데도 교육행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고 개탄하고 있었다. 경재부총리가 부동산값을 안정시킨다며 특목고와 자립고 설립을 발표하자 교육부는 합의한 바 없다며 자라목을 내밀더니 그 이후에는 아무런 언질조차도 없다. 속수무책이란 말이겠지. 건설부에서 강북에 학원도시를 만들어 아파트값을 제어하겠다 발표를 할 때도 우리는 모른다는 반론을 펴더니 역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사교육(비)의 폐해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며 교육이민이 시작된 건 비단 오늘 내일만의 문제가 아니고 기러기아빠는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요즘 거론되고 있는 원정출산도 십중팔구는 교육과 관련이 있으리라. 초등학교 5학년이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살고싶다>며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중학생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며 자살한 일은 이제 교육계의 신화가 되었다. 대학입시철은 다가오는데 NEIS 문제는 해결의 빌미가 보이지 않고, 공교육이 신뢰를 잃으면서 사(학원)교육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고교평준화는 하향평준화로 평균적 바보를 양산하고 있다. 오죽해서 대학입시와 부동산값을 해결하는 대통령이 나온다면 성군이라는 칭호를 얻을 거라 하겠는가. 그래서 경제부총리가 교육을 얘기하고 서울시장이 교육을 쥐고 흔든다. 서울대학교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필두로 각 지방에 서울대학교 분교장을 만들자고 애교를 떨기도 하고 서울대학교를 학부대학으로 전환하자고도 한다. 방법은 단 하나, 차마 해서는 안 될 문둥이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서슴치않는 한 쪽을 간과하면서도 참여정부가 대통령의 명운을 걸고 하려고 하는 변화와 개혁이 그 방안이다. 그것도 교육에 관한 한 획기적인 개혁만이 이 나라 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감사합니다.)